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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

 프롤로그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쪽팔려 미칠 것 같은 일이지만. 나는 정말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그렇게 착각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남들보다 실력이 느는 것도 빨랐다.


하지만 쉬운 것은 처음까지. 처음에는 남들보다 빠르게 늘었어도, 도중부터는 남들처럼 늘어져 버린다.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럴 수도 있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잖아. 


나는 할 수 있어.


천재니까.


결국에는 알고 싶지 않던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철부지의 우스운 착각을 깨부숴준 것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천재와 만난 덕분이었다.


자기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던 우물 안 개구리. 내가 나의 작은 우물 안에서 우월감에 취했을 때. 진짜 천재는 이미 넓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천재가 싫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남도 당연히 할 수 있단 듯이 지껄이는 얘기를 듣다보면 살의가 치솟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건, 지보다 못난 놈을 무시하려 뻗대는 것이건. 


여하튼, 들으면 좆같은 기분이 든다.


‘질투하는 건가?’


질투는 씨발아. 네가 말을 좆같이 했잖아. 그래서 나도 좆같이 굴었는데 뭔 놈의 질투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냥... 네가 안타까워서.’


안타까워? 뭐가? 


‘조금 더 노력하면...’


네가 뭘 안다고 노력 운운하는 거냐.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야, 나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네 기준이 존나게 높은 거야. 어떻게 모든 사람이 너처럼 할 수 있겠냐? 네가 천재라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너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알겠냐? 


난 너처럼은 못해.


*


“꺼져.”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가슴에 뚫린 구멍. 그 귀한 엘릭서를 들이 붓고 마법을 쓰는 것 같기는 한데, 소용없는 일이다.  


“제발.”


울기는. 설마 저 계집애가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해 봤는데. 평소에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얄미운 표정을 지었던 주제에, 그래도 미운 정이 들기는 했나 봐. 


“그래서... 그래서 말했잖아. 그냥 돌아가라고. 왜 고집을 부리고 따라와서...”


“세냐. 일단 그거 집어넣어.”


목소리가 생각대로 나오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치솟은 핏물 때문이다. 


“엘릭서. 몇 개 있지도 않은 귀한 걸 왜 여기 쓰려고 해. 헛짓거리하지 마.”


“하지만...!”


“됐어.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아. 난 못 살아. 이제 곧 죽는다고.”


나는 죽는다. 


그에 대한 체념은 가슴에 구멍이 뚫리기 전부터 해두었다. 몸은 진즉부터 망가져 병신 꼴이었다. 돌아가라, 기다려라. 걱정과 힐난을 무시하고 여기까지 따라왔다.


“...피할 수 있었어.”


무뚝뚝한 목소리. 개새끼. 마지막까지 재수 없게 구네.


“네가 이럴 필요가 없었다고.”


“꺼지라니까.”


목소리 짜내기도 힘든데 왜 자꾸 말 걸고 지랄이야. 


“너도 알았을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그럴 수 있어. 남들이 보기에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어도, 사실 네게는 별로 대단하지 않았을 거야. 


그걸 내가 몰랐을까? 잘 알았지. 이래저래 오랫동안 함께 다녔잖아. 네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괴물인지. 널 두고 괴물이라 떠들어대는 수많은 사람들보다, 내가 훨씬 잘 알아. 


“...네가 이렇게 죽을 필요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죽었어야 했는데. 너도 알잖아. 내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어. 네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다.


“...이 정도면 명예로운 죽음이야.”


목소리 짜내기도 힘든데. 이것만큼은 말해야겠다. 


“같이 가봤자 짐짝만 될 게 뻔했고. 돌아가기도 싫었어.”


평생을 병신이 된 몸으로 살고 싶지도 않았다.


“넌 존나 잘났으니까, 내가 감쌀 필요는 없었겠지.”


알면서도 몸을 날렸다. 잘 움직이지도 않던 몸이 그 순간만큼은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다. 덕분에 저 얄미운 놈을 밀쳐냈고, 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졸리니까 이제 좀 가라.”


슬슬 목소리 짜내기도 힘들다. 내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고,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그보다 더 멀리 들린다. 손가락도 까딱 안 하고, 몸이 무겁다. 눈앞은 시커멓게 물들어 간다.


“고맙다.”


마지막에.


놈의 목소리를 들었다. 새끼, 기왕 말할 거면 좀 빨리 말하던가. 그래도 기분은 좋네. 평생 너한테 고맙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응애.”


뭐야 씨발.


우둔한 하멜


마왕살해자. 무신. 올마스터.  


위대한 베르무트에게 붙는 칭호는 여럿이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칭호는 이것이다.


용사.


[용사. 위대한 베르무트는 300년 전,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떠났습니다.]


네발로 아장아장 기어 다닐 적부터 들어 온 옛날이야기. 


위대한 베르무트.


현명한 세냐.


신실한 아니스.


용감한 모론. 


우둔한 하멜.


‘다른 놈들은 위대하고 현명하고 신실하고 용감한데, 왜 나만 우둔하냐?’


유모가 동화책을 읽어줄 때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가슴속에는 불꽃이 타올랐다. 옹알이 외에 제대로 된 말만 할 수 있었어도! 하다못해 몸만 제대로 움직였어도! 


‘모론 그 등신도 용감하다고 포장 받았는데. 왜 나는 우둔해? 둘이 바뀐 거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용감한 모론이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감은 개뿔. 등신 같은 모론이겠지.’


[우둔한 하멜은 항상 베르무트를 시기했습니다. 하멜은 자신보다 대단한 베르무트를 라이벌이라 말했지요.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요.]


“이거 쓴 새끼, 삼백 년 전에 나한테 처맞은 새끼였나 봐.”


유진은 빠득빠득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 사실 이해가 아주 안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이런 동화책은 어린아이를 타겟으로 하는 만큼 읽기 쉬워야하고 재미와 교훈도 있어야 한다. 


[하멜은 항상 베르무트보다 앞장섰습니다. 마왕성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도 그랬습니다. 베르무트는 오른쪽으로 가자고 말했지만, 하멜은 왼쪽으로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지랄.”


[결국 베르무트는 하멜의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마왕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죠... 우둔한 하멜! 그는 마왕이 자신을 두려워 함정을 판 것이라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바보 같은 하멜!] 


열 살의 유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수백 번은 족히 읽은 동화책이지만, 이 대목에서는 항상 분노가 치솟는다. 


[하멜은 사고뭉치였습니다. 성격이 불같아서 매번 동료들과 다툼을 벌였죠.]


“...이건 맞아.”


[많은 모험을 거쳐, 베르무트와 동료들은 마왕성에 들어갔습니다. 우둔한 하멜은 마왕성에서도 베르무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항상 앞장 선 하멜은 함정을 피하지 못했고, 그 덕분에 베르무트와 동료들은 많은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유진은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 그 지옥 같던 마왕성. 그곳의 함정들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파해야 했단 말이다.


[...매번 동료들과 다툼을 벌이던 하멜. 우둔한 하멜. 난폭한 하멜. 하지만 하멜은 동료들을 사랑했어요. 상처투성이가 된 하멜은 도망치기는커녕 동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


[최후의 순간. 하멜은 사랑하는 동료들의 품안에서 솔직하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했습니다. 세냐, 난 너를 좋아했어.]


“안 좋아했어.”


[아니스, 날 위해 기도해줘.]


“그런 말 안 했어.”


[모론. 넌 누구보다 용감한 전사야.]


“그 새끼는 등신이야.”


[베르무트. 반드시 마왕을 물리쳐줘. 베르무트는 하멜의 눈물에 맹세했습니다. 반드시 마왕을 물리칠게. 하멜은 그 말에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 뒤는 볼 것도 없다. 유진은 왈칵 구긴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애새끼들을 위한 동화에 희생되었군.’


어린이 여러분. 그 우둔한 하멜도 가슴 속에는 정의로운 마음을 품었어요. 동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어요. 솔직하지 못한 과거를 후회했어요... 


“씨발, 이딴 싸구려 교훈에 내 이름을 팔아?”  


몇 번을 읽어도 똑같이 화가 난다. 유진은 동화책을 집어 던지며 울분을 토했다. 마음 같아서는 동화책을 쓴 놈을 찾아가서 피떡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삼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 동화책의 저자는 익명이었다.


“베르무트, 세냐, 아니스, 모론. 그 네 명도 개새끼야. 이딴 동화책을 왜 내버려 둔 거야? 빌어먹을 세냐. 나 뒈질 때 그렇게 울었으면서...! 동료의 명예를 지켜주겠다는 생각은 안 한 거냐?”


그럴 수도 있기는 해.


울분을 쏟아낸 후.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설마 죽은 하멜이 과거를 멀쩡히 기억하고서 환생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환생!


유진은 요람에서 응애응애 울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가 느끼기에는 그 유아시절이 마왕성만큼이나 끔찍했다. 정신은 말똥말똥한데 몸은 제대로 안 움직이고, 말도 잘 안 나오고. 하루 대부분을 공갈젖꼭지나 씹어대며 천장의 장난감만 노려보던, 끔찍하고 지루한 시절.


열 살 어린애치고 눈매가 더럽게 자라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어린나이부터 눈을 부릅뜨고 시간을 죽여 댔으니...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눈썹 사이를 어루만졌다. 


‘...환생은 좋은데. 왜 하필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태어난 거야?’


라이언하트는 베르무트의 성씨다. 


‘아니 기왕 환생할 거면 다른 곳도 많잖아. 왜 하필 베르무트야?’


누군가는 환호성을 지를 배경이겠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유진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평생 베르무트를 넘고자 했다. 


동화책에서처럼 대놓고 라이벌이란 소리를 떠들지는 않았지만, 베르무트와 함께 여행하는 내내 놈을 의식한 것은 사실이었다.


끝내 넘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하고 수행한들 베르무트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위대한 베르무트.’


유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벽에 매달려있는 커다란 초상화. 그 속의 베르무트는 전생의 기억과 똑같았다.


‘우둔한 하멜.’


품속의 거울을 꺼내 얼굴을 본다. 열 살 어린아이의 얼굴. 베르무트와 닮지 않은 얼굴. 하지만 그의 성씨는 라이언하트였으며, 용사 베르무트의 후손이었다.


처음에는... 죽음 뒤의 기나긴 환몽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현실을 자각했다.


우둔한 하멜은 위대한 베르모트의 후손으로 환생했다.


*


생전의 베르무트는 정실 외에도 여러 첩을 두었다.


‘여자를 밝히는 놈도 아니었는데. 나이 먹고 생각이 바뀌었나.’


유진이 기억하는 베르무트는 인간미가 적은 수준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놈이었다. 그런 베르무트가 열 명에 달하는 첩실을 두고서 후손을 낳았다니.


‘놈도 사람일 테니까 이해는 가.’


직계로 인정받는 본가는 정실의 후손 뿐. 똑같이 라이언하트라는 성을 갖고 있지만, 유진의 가문은 방계다. 


그렇다고 처지가 곤궁한 것은 아니다. 수도의 본가에는 비교되지 않겠지만, 유진이 살고 있는 저택은 이 시골 촌구석에서는 으스대도 될 만큼 호화롭긴 했다. 방계여도 나름의 대접은 받는다는 뜻이다.


이 넓은 저택에서 특히나 위용을 과시하는 것이 거대한 연무장이다. 용사, 무신, 올마스터. 위대한 베르무트. 그 피를 이어받은 후손은 단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은 말이다. 


“또...”


제하드 라이언하트는 열 살의 아들을 질렸다는 눈으로 보았다. 그 또한 어린나이부터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그의 과거는 타고난 피에 대한 죄책감으로 점칠 되어 있었다. 


선조는 위대한 베르무트. 하지만 제하드는 무에 별 재능이 없었다.


“...망가트렸구나.”


아들을 볼 적마다 여러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아이답지 않은 언행. 순진무구함이라곤 없이 매서운 눈동자.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아들은 단 한 번도 죽은 어머니를 찾아 칭얼거린 적이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들의 재능은... 혈육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괴물.’


하나 뿐인 아들에게 품기에는 고약한 생각이었으나, 제하드는 가끔씩 두려움을 느꼈다. 열 살. 아직 마나에 입문하지도 않은 어린아이다. 그런 어린아이가 목검을 휘둘러 봐야 얼마나 잘 휘두르겠는가. 


“하다 보니 망가지더라고요.”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목검을 내려놓았다. 철심을 박아 넣은 목검은 어린아이의 근력으로 다룰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럼에도 유진은 일곱 살부터 저런 목검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다운 고집이라 생각했다. 낑낑거리면서 목검을 휘두르는 꼴이 귀엽기도 했다. 


그게 벌써 삼 년 전이다. 이제 유진은 저 무거운 목검을 자유로이 다루고, 그로도 부족해 모래주머니까지 찬다. 


제하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바닥을 보았다. 부러진 목검. 완전히 박살 난 연습용 허수아비. 새로 바꾼 지 얼마나 되었지? 사흘은 됐던가? 놀랄 일은 아니다. 진즉부터 연무장의 허수아비는 죄다 박살나 새로 갈아치웠었다. 


“마을 대장장이 솜씨가 쓰레기에요.”


유진이 내뱉었다. 어린아이의 말치고는 험악하지만, 제하드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저건 천성(天性)이다. 어릴 적부터 교정하러 애를 썼지만, 아들의 천성은 바뀌지 않았다.


“저딴 조악한 것을 돈까지 받고 팔다니. 불러다가 매타작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너무 자비로우셔요.”


“그... 어흠... 내 주의를 주도록 하마. 다음에는 조금 더 튼튼한...”


“허수아비 말고, 그냥 순도 높은 쇳덩이를 통짜로 가져다주세요. 어차피 목검만 휘두르는데 괜히 모양 잡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제하드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 아들을 응시했다. 열 살 어린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련된 몸뚱이. 까놓고 말해서 맨몸으로 싸우면 질 것 같다...


‘무골(武骨)을 타고났어...’


제하드는 아들의 재능에 순수하게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아들이 괴물처럼 느껴져서? 그런 이유가 아니다. 제하드가 아들에게 느끼는 여러 감정 중에는 뿌듯함도 있었다. 아비와는 달리 찬란한 재능을 타고난 아들 아닌가.


하지만. 뿌듯함과 더불어 죄책감도 든다. 그건 모자란 아비로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라이언하트라고 해서 다 똑같은 라이언하트는 아닐지니. 이미 수백 년 전에 본가에서 밀려난 데다, 방계들 사이에서도 무시 받는 것이 제라드의 가문이다. 


아들이 그런 현실을 알까. 모를 것이다. 어린아이가 이해하기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 아닌가. 


“진검을 쓰면 안 되나요?”


지금만 해도 그렇다. 제하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안 된다.”


“혈계식(血繼式) 때문에?”


“그래. 앞으로 삼 년 후, 네가 혈계식을 치른다면 진검을 쥘 수 있을 거야.”


“그냥 저랑 아버지, 둘 만의 비밀로 하면 되잖아요.”


“그럴 수는... 없다. 나도 라이언하트니까, 가문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어.”


혈계식. 그것은 십 년마다 한 번 있는 라이언하트 가문의 전통이다. 혈계식에는 직계와 방계를 포함한, 라이언하트의 성을 가진 열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의 어린아이 전원이 본가에 모인다. 


모여서 하는 의식은 간단했다. 누가 라이언하트의 성에 가장 합당한가? 용사의 후손을 주장하기에 부끄럽지 않은가. 날을 세운 ‘진짜’ 무기는 혈계식이 끝난 뒤에야 지닐 수 있다.


‘병신 같은 전통이야.’


유진은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하지만 혈계식이니 전통이니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이가 없고 배알이 꼴린다.


혈계식이 억압하는 것은 방계뿐이다. 


방계의 아이들은 혈계식을 치르기 전에는 진짜 무기를 쥐어선 안 된다. 마나를 수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수도 본가의 직계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원하는 무기를 마음껏 다루며, 걸음마를 땐 순간부터 마나에 입문한다. 


‘결국 그거잖아. 방계가 직계를 넘어설 수 없도록 어릴 때부터 두들겨 패는 거.’


어린아이도 이해할 만큼 노골적인 견제. 하물며 유진은 몸뚱이만 어렸지 정신은 어리지 않았다.


제하드는 아들의 마음을 훤히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뚱한 얼굴을 보고서 여러 감정을 느꼈다. 


꽁해진 아들이 귀엽다는 생각도 있었으나, 죄책감이 훨씬 컸다. 


‘본가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들의 재능은 찬란하다. 하지만 라이언하트의 방계는 뚜렷한 한계를 갖는다. 삼 년 뒤의 혈계식... 어린 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아들이지만, 본가에서 자란 진짜배기들과 경쟁이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그러한 현실이 제하드를 괴롭게 만들었다. 차라리 아비를 닮아 재능이 없었다면... 타고난 재능과 현실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터인데.


“아버지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다.”


‘아니기는. 또 자기가 못났다며 자학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면서 제하드를 응시했다. 전생의 기억이 뚜렷한 탓에 제하드를 아버지라고 여기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제하드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사실 아닌가. 


“아버지. 오랜만에 칼싸움 놀이나 하죠.”


“으... 응?”


“칼싸움 놀이 말입니다.”


유진은 대련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열 살짜리 아들에게 대련을 요구받는 아버지가 어떤 기분일지를 나름 배려해준 것이다. 그래서 굳이 ‘놀이’라는 말을 썼지만, 제하드의 표정은 떨떠름하니 굳어버렸다.


제하드는 두툼해진 뱃살의 무게를 느꼈다.


철심 박은 목검을 장난감처럼 휘두르는 아들의 팔을 보았다.


“다... 다음에 하자꾸나.”


열 살 아들과 놀이에서마저 힘이 밀린다면... 


제하드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유진은 멀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라이언하트


동화책의 그림이나 전승에서는 베르무트와 ‘성검’이 항상 부각되지만, 유진의 기억에서는 성검은 이야기에서 과장되는 만큼 대단한 무기는 아니었다. 


‘빛이 번쩍번쩍 나기는 했지.’


시커먼 마왕성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애당초 성검은 생김새만 멋들어진 예식용 검이라, 베르무트도 성검을 그리 즐겨 사용하지는 않았다. 가끔 질긴 마족을 죽일 때나 꺼냈을 정도다.


무신, 올마스터.


그리 불린 만큼 베르무트는 다룰 줄 아는 무기가 많았다. 놈은 필요할 때마다 아공간에서 다른 무기를 꺼내며 사용했다. 


‘게다가 마법도 잘 썼지.’


유진. 


생전의 하멜은 마법은 익히지 않았다. 


‘작정하고 팠더라면 남들만큼은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마 그랬을 테지만, 그 당시에는 마법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던 어린 시절이라면... 마법을 익히려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베르무트와 만나지만 않았어도.’


놈과의 만남은 하멜의 많은 것을 바꾸었다. 


세상에는 뭐든지 잘하는 천재라는 놈이 있다. 어린 하멜은 자신도 그런 천재라고 믿었으나, 진짜 천재와의 만남으로 어린 아이의 착각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지금은?’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기울였다. 


‘전생의 기억이 있어. 그대로만 해도 옛날만큼 강해지기는 할 거야.’


그건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수준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환생까지 했는데... 전생과 비슷한 수준에 그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물며 그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했는데.


‘베르무트.’


유진은 단단한 팔을 주무르면서 생각했다.


‘네 피가 좋기는 한가 봐.’


어린 아이의 몸에 근육이 붙어봐야 얼마나 붙겠는가. 하지만 근육의 크기와는 별개로, 이 몸뚱이는 이상적이었다. 유진은 그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락부락하게 커다랗지는 않아도 유연해 탄력이 넘친다. 근육의 밀도가 어린 아이의 몸이라 생각할 수가 없다. 뼈도 마찬가지다. 혹독히 굴려도 골병드는 일이 없고, 어지간한 상처는 금세 아물어 버린다.


‘전생의 몸도 천재라 착각할 만큼은 됐는데. 이건... 비교가 안 돼. 네가 어떻게 그만큼 강했는지 이해될 정도야.’


몸뚱이의 성능부터가 다르다. 그 사실은 유진에게 희열과 더불어 씁쓸함을 전해주었다. 만약 전생에 이런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구질구질한 생각이군.’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망념을 떨쳐냈다. 전생은 어디까지나 전생. 이렇게 환생까지 했는데 전생의 후회에 사무칠 이유가 어디 있나.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감정을 털었다. 하지만 후회를 모조리 털어낼 수는 없었다. 작금에 이르러 하멜에게 남은 것이라곤 ‘우둔한 하멜’이란 엿 같은 별명뿐이잖은가.


다른 녀석들은 어떤가? 


위대한 베르무트. 녀석은 고향인 키옐 제국에서 공작을 지내다가 작위를 반납했다. 놈은 최후까지 용사라 칭송받았다. 키옐 제국은 베르무트의 죽음을 국장(國葬)으로 치렀고, 아직까지도 베르무트의 기일을 추모하고 있다. 


현명한 세냐. 그 얄미운 계집애는 마도왕국 아롯에 초청되어 최연소로 마탑주에 올랐다. 아롯에는 다섯 개의 마탑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마탑주 두 명이 세냐의 제자 출신이란다.


신실한 아니스. 그 속 구린 여자도 신성제국 유라스에서는 성녀라고 불린다. 그녀의 가르침을 받아 적은 경전까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용감한 모론. 유진은 놈의 행적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등신 같은 모론이 왕국을 세웠다니! 마왕군이 휩쓸었던 지역의 난민들을 규합시켜 자신의 성을 딴 왕국을 세웠다고?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이거야.’


유진은 표정을 구겼다.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항상 똑같은 곳에서 분노가 치솟는다.


‘죽기 전까지 다들 잘 지냈다는 거잖아. 그런데 왜 아직 세상에 마왕이 있는 거냐?’


마경 헬무드.


전생의 하멜은 동료들과 헬무드를 떠돌았다. 각 국에서 보내 온 토벌군을 이끌며, 다섯 명이나 되는 마왕 중 세 명을 죽였다. 


네 번째 마왕성.


우둔한 하멜은 그곳에서 죽었다. 


죽는 순간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베르무트와 동료들이 남은 마왕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물론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마왕은 더 이상 세상을 정복하려 들지 않는단다. 그 모든 것이 위대한 베르무트가 마왕과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란다. 


‘왜 그딴 약속을 한 건데? 전부 다 죽이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유는 모른다. 어쨌든 마왕들과의 전쟁은 끝났고,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그 평화는 삼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너무 긴장하신 것 아닙니까?”


들리는 목소리에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호화스런 마차 안. 그의 맞은편에는 꼬장꼬장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앉아있었다.


“...수도에 온 것은 처음이라.”


유진은 창밖을 힐긋 보며 중얼거렸다. 시골 촌구석의 저택을 떠났다. 하루 내내 마차를 타고서 도시에 도착했다. 그 뒤에는 워프게이트를 몇 개나 걸친 후에야 수도의 땅을 밟았다.


“이해합니다.”


남자의 이름은 고든이다. 그는 라이언하트 본가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으며, 유진을 데리러 온 호위였다.


“유진님.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예.”


“벌써부터 긴장을 느끼신다면 본가에서의 매일이 아주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고든의 표정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조언이랍시고 말을 건넨 주제에 염려의 감정도 묻어나오지 않는다. 유진은 그를 느끼면서 빙긋 웃었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든 경.”


유진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본가의 핏줄도 아닌, 서임 받은 기사에게도 감히 하대할 수는 없는 것이 방계의 현실이다. 하물며 유진의 가문은 방계 중에서도 무시 받는 곳 아닌가.  


‘그래도 일단은 라이언하트인데. 날 데리러 온 것이 고작 기사 한 명... 아버지는 함께 오지도 못했어.’


유진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창밖을 노려보았다.


‘아주 노골적이다 못해 싸구려 견제란 말이야. 시작부터 애새끼들의 기부터 죽이시겠다? 쪼다 새끼들. 베르무트, 이게 다 네가 여기저기 싸지르고 다녀서 그런 거야.’


유진은 앞으로 펼쳐질 일을  상상했다. 벌써부터 기를 죽이는 것을 보니, 본가에 도착한 순간부터 더욱 노골적인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다. 


‘환영이랍시고 기사들을 죄다 모아놓고서, 커다란 소리로 지금 들어오는 누구누구가 얼마나 허접한 출신인지 외쳐대지 않을까.’


아니, 그런 것도 대우할 만한 상대에게나 해주는 것이지. 달랑 기사 한 명만 호위로 보낸 것을 보니 환영식 따위는 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번 혈계식에는 몇 명이나 참가하나요?”


“유진님을 포함하면 방계에서 여섯 명. 본가에서는 세 명이 참가합니다.”


“본가에서 세 명씩이나?”


유진은 놀란 척 목소리를 냈지만, 혈계식에 누가 참석하는지 정도는 미리 알고 있었다. 제하드가 각별히 주의한 덕분이었다.


본가의 세 명. 한 명은 정실의 아들이고, 남은 두 명은 서출의 쌍둥이.


방계의 다섯 명.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방계이면서도 위세가 높은 가문 출신의 둘.


‘나이가 제일 많은 놈이 열다섯이라고 했지. 나보다 어린 놈도 있고...’


유진의 나이는 열셋이다. 새삼 나이를 자각하니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열 살배기 애새끼들과 실력경쟁을 하라는 것 아닌가.


‘유진아. 절대로 본가의 아이들과는 경쟁하지 말거라. 네가 아무리 뛰어난들 본가의 아이들과는 상대가 안 될 게다. 그러니까...’


유진은 제하드의 울적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본가 아이들과 맞닥트리고서 절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숨기지 못했었다. 


‘...그래도. 베르무트의 후손이 얼마나 잘났는지 볼 수 있다는 건 기대되네.’


유진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수도의 화려한 풍경은 이미 진즉에 스쳐지나갔고, 이제 마차는 도시를 벗어나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곳부터는 라이언하트의 사유지입니다.”


높다란 벽에 둘러싸인 숲. 


“아, 벌써부터 내릴 준비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에서부터 한참은 더 가야하거든요.”


내릴 준비 따위는 안 했는데. 고든은 빙긋 웃으면서 놀리듯 말했다.


‘땅덩이 넓어서 좋겠다, 새끼야. 네 땅도 아닌데 왜 네가 으쓱대는 거니?’


“우와. 이 넓은 숲이 본가의 사유지라고요?”


“예.”


“이렇게 넓으면 불편하지 않은가요?”


“곳곳에 워프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나는 지금 마차를 타고 있는 거니? 그건 유진님에게 워프게이트의 사용허가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진은 머릿속에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창밖을 응시했다. 


고든이 말한 대로. 한참을 더 달린 끝에야 마차가 멈췄다. 반대편 문을 열고 내린 고든이 유진이 앉은 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라이언하트의 본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든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활짝 열린 정문. 그 너머에 보이는 대저택. 생각했던 대로 환영하러 나온 인파는 한 명도 없었다. 


‘라이언하트.’


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정문의 입구부터 쫙 늘어선 백색 깃발. 그 중앙에 그려진 용맹한 사자. 


‘베르무트의 라이언하트.’


유진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 보았다. 그의 옷에는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다. 왼쪽가슴에 사자의 문양을 새길 수 있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직계뿐이다. 


‘나도 후손이나 남길 걸 그랬나.’


전생의 하멜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낳지 않았다. 


‘아니. 낳지 않기는 잘했지. 그랬다가는 괜히 미련이 남았을 것 아냐.’ 


그래도. 저렇게 늘어 선 가문의 깃발을 보니 전생이 아쉽기는 했다. 


“다른 친척들은 아직 오지 않은 건가요?”


“유진님이 처음이십니다.”


‘얼씨구.’


유진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유진이 안내받은 곳은 저택 본채에서 떨어져있는 별채였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왼쪽 가슴에 사자를 새긴 본가의 친척들은 구경도 못했다. 뭐 그리 비싸게 구는지. 열세 살의 어린 친척이 왔으면 궁금해서라도 보러 올 법 하지 않은가?


“니나라고 합니다.”


그래도 대접이 아주 각박하지는 않았다. 별채에 도착한 즉시 개인시종이 한 명 붙었다. 그래봐야 유진과 나이차이도 얼마 나지 않아 보이는 어린 소녀였는데, 유진은 그에 큰 불만은 느끼지 않았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종을 울려주세요.”


많아봐야 십대 후반쯤 될까. 니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유진에게 자그마한 종을 건넸다.


“말 편히 해도 되지?”


“예, 물론 그러셔야죠.”


“이 별채는 내가 전부 쓰는 건가?”


유진은 널따란 별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확인을 위해 말한 것뿐. 유진은 설마 그러지 않을 것이라 알고 있었다. 별채 하나를 총감독하기에는 니나는 너무 어리다.


“그건 아닙니다만, 지내시는데 불편한 일은 없으실 겁니다.”


“다른 친척들과 같이 지내야 한단 말이지.”


“네.”


“언제쯤 오는지 알아?”


“늦어도 나흘 안에는 모두 도착하실 겁니다.”


그 대답에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나흘 동안 이곳에서 박혀 지내란 말이지.


“연무장은 뒤에 있나?”


“...네? 네...”


“목검 휘두르는 일도 본가의 허락이 필요해?”


“그건... 어어...”


“설마 그럴라고.”


유진은 웃으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니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유진의 뒤를 따라갔다.


라이언하트


“제하드가 누구더라?”


“그 왜. 기돌 지방 구석에 사는 친척 있어.”


“기돌 지방은 어딘데?”


“제국 서쪽 끝에... 에이, 알아서 뭐하냐? 평생 갈 일도 없는 촌구석인데.”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에 비웃음이 깔린다. 


시안과 시엘. 둘은 성별이 다른 이란성 쌍둥이다. 


서출이기는 하지만, 본가의 가주가 정실인 첫째 부인보다 둘째 부인을 총애한다는 것은 비밀이랄 것도 없는 사실. 그러한 현실은 열세 살 먹은 두 꼬마의 콧대를 하늘에 닿을 만큼 높게 만들어주었다.  


“그 새끼 이름이...”


“유진이래. 우리랑 동갑이야.”


“에이, 나이만 같다고 친구는 아니잖아.”


실실 웃으면서 건들거리는 것은 시안이다. 그는 멀리 있는 별채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듣자니 수도에 온 것도 처음인 촌놈이래. 아까 고든한테 들었는데, 마차를 타는 내내 창밖에서 눈을 못땠다드라.”


“그럴 만도 하지. 어디 처박힌 지도 모르는 기돌 지방에서 왔다며? 거기 숲이랑 들판 밖에 없는 곳 아냐?”


“나도 가본 적 없어서 모르는데, 시골이니까 그렇겠지 뭐. 워프게이트 타면서 멀미는 안했대?”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는 했어.”


“토는 안 한 모양이네. 에이, 그건 좀 아쉽다. 만약 토라도 했으면 마차 청소나 시키는 건데.”


시엘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작 몇 초 차이나는 여동생의 대답에 시안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이며 혀를 찼다. 


“이 바보야. 꼭 토를 해야 청소를 시킬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무슨 말이야?”


“그 새끼. 촌구석에서 왔다니까 몸에서 소똥냄새가 폴폴 날 것 아냐. 내 생각에 평생 목검보다 쇠스랑을 더 많이 들었을 걸.”


“아하!”


“며칠 동안 마차를 탔다니까, 그 촌놈 몸에 배인 소똥 냄새가 마차에도 배였을 거야.”


“으엑, 더러워.”


시엘은 혀를 쏙 내밀며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표정만 그랬지 눈은 짓궂은 장난기로 가득 차있었다.


“놈이 타고 온 마차는 본가의 재산이야.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자기 때문에 마차를 더럽혔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치?”


“응, 맞아.”


“아까 들었는데 말이야. 그 새끼, 별채에 오자마자 연무장에 가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대.”


“꼴값 떠네.”


시엘은 깔깔대며 웃었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는 어려서부터 죽이 잘 맞았다. 


“수도에 온 것도 처음이고, 본가에 온 것도 처음이래잖아. 그래서 유난 떠는 거지 뭐.”


“유난이래, 오빠. 그냥 꼴값이라고 말해.”


시엘은 오빠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시안은 나름대로 근엄한 표정까지 지으며 뒷짐을 졌다. 


“우리 멍청한 친척은 말이야. 혈계식에 큰 기대를 하고 왔나 봐. 자기 아버지한테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았다는 거지.”


“응, 응.”


“어른들한테 보여주려고 수련하는 척은 하면서 말이야. 자기가 냄새나게 만든 마차는 내버려두는게 아주 얄밉단 말이지.”


“혼내줘야 해.”


“에이, 혼내는 것 까지는 좀 그렇고. 너 그러면 안 돼, 라고 주의는 해줘야지. 그치? 나중에 어른들한테 혼나지 않도록 말이야.”


“오빠는 너무 착해.”


시엘은 오빠의 속내를 알면서도 히죽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 어린 쌍둥이는 대놓고 하는 못된 짓보다는 은근히 하는 짓이 더 재미있다는 것을 진즉부터 학습했다.  


“가자!”


시안은 힘있게 외치며 앞장섰다.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던 시엘은 멀리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어릴 적부터 마나를 수행해 온 두 쌍둥이는 실체 없는 시선까지 느낄 수 있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대저택. 그 3층의 창가에 한 소년이 서있었다. 그는 시엘과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며 커튼을 쳐버렸다. 그 모습에 시엘은 베시시 웃으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


방계의 아이는 혈계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날을 세운 무기를 쥐어선 안 된다. 


유진은 그 웃기지도 않은 전통을 도저히 존중해주고 싶지 않았으나, 아버지 제하드는 라이언하트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부자간의 비밀로 남기기에는 저택에 보는 눈이 워낙 많았던 탓이다. 


‘가벼워.’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목검을 내려 보았다. 그는 일곱 살부터 철심 박은 목검을 휘둘렀고, 열두 살이 되고서는 더 이상 수련용 목검이라고 할 수 없는 쇳덩이를 휘둘러왔다. 겉에 나무만 대충 둘렀다 뿐이지, 유진이 일 년 넘도록 휘두른 목검은 대충 휘둘러도 뼈를 아작 낼 만큼 무거운 흉기였다.


하지만 날을 세운 무기는 아니잖은가. 무게를 늘리기 위해 쇠의 양을 늘리고, 근육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기를 키워도. 일단은 목검이었다.


유진은 제 몸을 온전히 가눌 수 있게 된 후부터 매일 수행해왔다. 단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껏 환생까지 했으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 라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본래부터 유진은 이런 성격이었다. 베르무트 일행과 여행을 다닐 적에도, 피치 못한 경우가 아닐 때에는 수행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씨발놈은 나한테 노력이 어쩌고 했었지.’


베르무트, 밥맛없는 새끼. 유진은 놈의 삭막한 눈동자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전생보다는 과하게 몸뚱이를 혹사시킨다는 자각은 있었다. 문제는, 그만큼 혹사당하는 몸뚱이의 성능이 상상이상으로 뛰어나단 것. 베르무트. 놈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 몸뚱이가 베르무트 본인보다 뛰어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둔한 하멜’의 몸뚱이보다는 훨씬 뛰어나다는 것은 분명했다. 설마 마나에 입문하지도 않은 맨몸으로... 다 자라지도 않은 열세 살의 몸으로 그 무거운 쇳덩이를 휘두를 수 있다니. 


“이거보다 더 무거운 목검은 없어? 좀 커도 좋은데.”


벌써 수백 번은 휘두른 것 같은데 땀도 거의 안 난다.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기 그늘에 있으라고 했잖아. 왜 땡볕 아래에 서있는 거야?”


“저, 저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땀을 그렇게 흘러대면서.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그늘 가서 앉아있어. 아니, 아니다. 다른 목검 없냐니까?”


니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려대면서도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방계 출신의 열세 살 꼬마. 본가의 어린 시종까지 무시해도 될 만한 상대가 아니다. 임시라고는 하나 전속 시종으로 붙었는데, 주인이 수행하는 중에 그늘가에서 휴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목검은... 연무장의 창고에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목검은 본가 쪽 연무장에 있을 거예요...”


“가서 가져오면 안 돼?”


“그건... 저어... 제가 판단할 수 없어요. 원하신다면 가서 여쭤는 보겠지만...”


“됐어 그럼.”


유진은 미련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듣기를, 니나의 나이는 고작 열여섯이었다. 이제 막 견습 딱지를 때었다는데, 무리한 요구를 해서 난감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주 노골적이셔.’


유진은 비웃음을 삼키며 목검을 내려놓았다. 갓 견습을 벗어난 시녀를 전속으로 붙여 준 이유? 뻔하지 않은가. 어설픈 시종이 결례나 실수를 범했을 때. 그를 두고서 핍박이라도 한다면 역으로 트집을 잡아댈 심산인 것이다.


‘어떤 새끼 대가리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참 저열하단 말이야.’


목검을 더 휘둘러봤자 준비운동도 안 될 것이다. 유진은 휘적휘적 걸어 창고로 향했다. 그러자 니나가 부랴부랴 유진의 뒤를 쫒았다.


“유진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다른 건 몰라도 수련에 쓸 건 내가 골라야지. 괜히 너 시켜서 들고 온 것이 마음에 안 들면? 귀찮게 뭐하러 일을 두세 번 걸쳐 하냐? 내가 고르면 한 번이면 뚝딱인데.”


평소에 쓰이지 않는 창고는 먼지가 수북했다. 폴폴 날리는 먼지에 니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사실은 며칠 전부터 청소를 해두려 했는데, 별채를 총괄하는 시종장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면박을 준 탓에 이 꼴로 남아버린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유진은 등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인 니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먼지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으면서 필요한 것들을 찾았다. 몸에 매다는 모래주머니. 선반에서도 제법 쓸만한 것을 찾았다. 


기름칠도 제대로 하지 않은데다 먼지 낀 사슬갑옷. 유진의 체격보다는 훨씬 컸지만, 조끼만 대충 걸쳐보니 묵직한 무게가 마음에 들었다. 그 뒤에 유진은 자기보다 큰 창까지 꺼내들었다. 


“...저어... 제가 도와드릴 일은...”


“이거 밟고 있어 봐.”


창고를 나온 뒤. 유진은 바닥에 내려놓은 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니나는 시키는 대로 창을 밟았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뒤. 유진은 모래주머니를 창대에 매달기 시작했다.


니나는 그 모든 것을 질렸다는 눈으로 보았다. 지금 유진은 체격보다 큰 사슬조끼를 입었고, 양 팔에 모래주머니를 매달았다. 거기에 창에도 모래주머니를 몇 개나 매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눈대중으로 살핀 무게만 해도 자기 체중의 배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은 만족스럽단 표정을 지으면서 휘휘 손을 저었다.


“이제 비켜.”


“네... 네.”


유진은 무릎만 굽히고서 창을 양 손으로 잡아들었다. 아찔한 무게에 순간 이를 악물었지만, 근육이 쫙 당겨지고 뼈가 후들거리는 감각이 즐거웠다. 


“뒤로... 아니, 더 멀리. 저기 그늘까지 가라니까!”


“네... 네!”


니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유진은 니나가 물러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창을 크게 휘둘렀다. ㅡ화아악! 체중보다 무거운 창. 그래도 몸에 무게를 더한 덕에 덩달아 끌리지는 않는다. 조끼를 입고 모래주머니를 매단 목적은 따로 있다. 


유진은 무거운 걸음을 이어가면서 맹렬히 창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양팔은 빠질 것처럼 당겨지고, 회전을 더하는 허리가 비명을 지른다. 그 광경에 니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자칫하다가는 저 어린 몸뚱이로 감당할 수 없을 대참사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진은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휘청거릴 때마다 창의 움직임은 빨라진다. 회전이 더해진 움직임을 강제로 붙든다. 그리고 즉시 찌르기로 전환한다. 뿌득! 양 손바닥의 굳은살이 뜯어지는 느낌. 그 통증! 굳이 장갑을 끼지 않아 통증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진은 낄낄 웃으면서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피에 젖은 손이 창대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손아귀 힘만으로 붙들면서. 너무 힘을 준 탓에 두 눈은 벌겋게 충혈 됐고, 호흡은 가빠져 온다. 


“야.”


니나는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저 새끼 뭐하는 거냐?”


시안과 시엘. 수많은 견습 시녀들의 베갯잇을 눈물로 젖게 한 악동 쌍둥이. 그 둘이 바로 곁까지 와서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도... 도련님, 아가씨. 이곳에는 어쩐 일로...?”


“저 새끼 뭐하는 거냐고.”


시안은 눈썹을 왈칵 찡그리며 내뱉었다. 이름도 모를 시종 따위가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평소 같았으면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혼쭐을 냈을 텐데. 지금은 그런 것보다, 저 촌놈이 하고 있는 짓거리가 더 신경 쓰였다.


“보고도 모르냐?”


대답한 것은 니나가 아니었다. 유진은 멈추고 있던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창을 내려놓았다.


“이게 뭔 지 알아?”


유진은 내려놓은 창을 발로 툭 차면서 물었다. 저 새끼 뭐하자는 거야? 시안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눈을 찡그렸고, 그의 곁에 서있던 시엘은 히죽 웃었다. 


“창이잖아, 이 바보야. 너는 그거도 몰라?”


“그치, 창이지.”


“그런데 뭐?”


“이게 창인 건 알면서, 창 휘두르는 게 뭔지는 몰라?”


“알거든?”


“근데 뭐 하냐고는 왜 물어보냐?” 


“내가 안 물어봤어. 우리 오빠가 물어봤지.”


“그럼 네가 좀 전해줘라. 네 멍청한 오빠한테 말이야. 저 새끼는 창을 휘두르고 있어요, 하고 말이야.”


그 이죽거림에 시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반대로 시안의 눈은 얇아졌다.


“멍청해? 내가?”


“대놓고 봤는데도 모르는 걸 보니 똑똑하지는 않은 것 같애.”


“오빠. 저 촌놈이 오빠보고 멍청하대.”


시엘은 킥킥 웃으면서 시안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그녀는 오빠처럼 분노하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오빠의 화를 북돋는 것이 상황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감히!”


몇 초 어린 동생의 약 올림에 시안은 고함을 질렀다.


라이언하트


시안은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유진이 들고 있는 것이 창이라는 건 당연히 알았고, 창을 휘두르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저런 무식한 수행은 처음 본다. 제 몸보다 큰 사슬조끼를 입고, 양 팔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모래주머니를 매단 창을 휘두르고 찌르는 것. 그걸 수행이라고 할 수 있나? 


적어도 시안의 머릿속에 그런 수행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런 무식하고, 과격한. 창법의 묘리 따위는 없이, 막무가내로 휘두르고 찌르면서.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게 무슨 수행이란 말인가. 


‘촌놈 새끼가. 관심 좀 달라고 아주 발악을 하는구만.’


저 사슬조끼. 크기는 큰데, 상태가 엉망인 것을 보니 철의 순도가 싸구려일 것이 틀림없다. 그 말은 즉슨, 보는 것처럼 무겁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 모래주머니도. 얼핏 보기에는 두툼하지만, 몸에 매달고서 그만큼 움직인 것을 보니 거죽만 두껍지 내부는 거의 비어있을 것이 틀림없다. 


‘관심이 고파도 정도가 있지. 어디서 저딴 꼼수만 배워 와서...’


이해는 간다. 어디 처박혀 있는 지도 모를 시골 촌뜨기. 방계 중에서도 제일 낮은 서열. 아마 자기 부모에게 뭔가 언질을 듣고서 첫날부터 저딴 짓을 벌이는 것이겠지. 


비열한 꼼수라도 벌이지 않고서는 누구의 시선도 받을 수 없는 놈이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 아주 우습지만 말이다.


그러나.


감히 멍청하다는 말을 운운한 것은 우스움이 아닌 분노를 느껴야 할 일이다. 시안은 숨을 씨근대면서 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사과해라.”


“뭘.”


“감히, 날 두고서 멍청하다고 한 말을 사과하라고!”


“미안해.”


유진은 곧장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시안이 느끼기에 사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눈을 치켜뜨고서 턱끝을 세웠다.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너 나랑 동갑이지?”


유진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물었다.


“너도 13살. 나도 13살. 그럼 동갑내기 친구인데, 뭔 고개까지 숙이래?”


“너 따위가 나랑 친구일 리가 없잖아!”


“친구 아니야? 그런데 왜 초면부터 말투가 그 모양이니?”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람. 유진은 내심 한심함을 느끼며 혀를 찼다. 죽기 전의 나이까지 더하면 반백은 훌쩍 넘는다. 그만큼 나이를 먹고서 13살 애새끼와 말싸움하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하물며 상대는 그 베르무트의 후손 아닌가.


‘뭐 어때. 전생은 전생이고. 지금은 나도 13살인데.’


“말투가 왜 그 모양이냐니까. 창뿐만 아니라 예의범절도 뭔지 몰라?”


“이...”


끊이질 않고 이어지는 말대꾸에 시안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렸을 적부터 오냐오냐 자라 온 탓에 이런 식의 유치한 말싸움이 낯설었다. 


“이... 시건방진...”


어린아이의 가장 큰 장점은 감정대로 억지를 부려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따위 말싸움은 익숙하지 않지만, 감정을 분출하는 것은 시안에게도 익숙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유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주제도 모르는 놈...! 네 성이 라이언하트라고 해서 다 같은 라이언하트인 줄 아냐?”


“아니, 잘 알지. 나는 방계고 너는 직계.”


유진은 손가락을 들어 본가의 저택을 가리켰다.


“네 집은 저기. 우리 집은... 어느 쪽이더라. 어쨌든, 여기서 멀리 있어.”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깝죽대?”


“깝죽댄 적 없어. 그냥 네가 잘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지. 나보고 뭐하냐며? 그래서 알려줬지. 사과하라며? 사과도 했어.”


“너 아주 건방져.”


시안은 콧잔등을 부여잡으며 내뱉었다.


“그리고 몸에서 구린내가 나. 촌구석의 소똥냄새! 땀냄새! 아주, 아주 구려.”


“평생 소똥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데 뭔 놈의 소똥냄새래.”


“그럼 네 똥냄새겠지...! 어쨌든 아주 구리다고.”


“좀 이따 씻을 거야.”


“아니, 지금 씻어. 씻고! 네가 타고 온 마차도 청소해.”


“마차?”


“네 몸의 똥냄새가 시트에 배었을 테니까! 청소하라고!”


“그걸 왜 내가 하냐?”


“너 때문에 마차에서 냄새 나니까!”


시안은 빽 고함을 질렀다. 거리가 가까운 덕에 놈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침이 튄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냥 침 맞기 싫어서 물러선 것인데, 시안은 우월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내려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사과해. 난 아직 네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어. 날 멍청이라고 한 것. 내가 예의를 모른다고 한 것. 방계면서도 감히 나와 맞먹으려고 한 것. 전부 다...”


“니나.”


유진은 시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서 니나를 돌아보았다.


“네, 네.”


“넌 내 전속 시종이지?”


“네... 과분한 일이지만, 임시나마 유진님의 전속 시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럼 가서 내가 타고 온 마차 청소 좀 해. 땡볕 아래에서 멍 때리며 서있지 말고.”


“...네?”


물론 시안과 시엘이 물러간다면, 니나가 먼저 나서서 마차를 청소할 생각이기는 했다. 그러기 전에 유진이 먼저 명령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하지만 니나는 지금 상황에서 저런 명령을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악동 쌍둥이가 코앞에 있잖은가. 유진의 행동은 시안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너 지금 뭐하냐?”


“마차 청소 시키잖아.”


“네가 직접 하라고!”


“나 대신 해 줄 사람이 있는데 왜?”


“내가 너보고 하라고 했잖아!”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냐?”


“난... 난 시안 라이언하트야.”


“그래, 나는 유진 라이언하트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


유진은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시엘은 손으로 입을 감싸며 키득키득 웃었고, 시안의 멍청히 입을 벌렸다. 


“나는 시엘 라이언하트야.”


키득대던 시엘이 말했다. 시안은 얄미운 동생을 한 번 흘겨 본 뒤에야 크게 숨을 삼켰다.  


“너... 너 따위랑 잘 지낼 일 따위는 없어.”


“그거 참 아쉽네.”


“넌 내 명령을 무시했어.”


“네 명령 들을 입장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리고 넌 날 모욕했어.”


“얼씨구.”


유진은 추임새 넣듯 말을 받아주었다. 그럴수록 시안의 가슴에서는 분노가 꿈틀댔다. 


내가 왜 저 새끼랑 이러고 있는 거지? 


이런 짓이나 하자고 저 촌뜨기를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닌데. 


본가의 도련님인 내가 시켰으면 말대꾸하지 말고 따라야 하는 거잖아. 


시안의 머릿속에서 막돼먹은 고집이 가득 찼다. 오빠. 어떡할 거야? 시엘은 오빠의 곁에 찰싹 붙어서 기대 가득 담긴 눈을 깜빡였다. 


“결투.”


동생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저 촌놈에게 이만큼이나 무시 받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가는 동생이 며칠 동안 놀려댈 것이 뻔했다. 


“넌 날 무시하고 모욕했어. 그러니까 결투해야 돼.”


“대단한 논리로군.”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설마 13살 먹은 꼬마의 입에서 결투란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친구야. 결투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것 아니야.”


“누가 네 친구냐?”


“친구 아니면 말고. 어쨌든 괜한 말 하지 말고 그냥 가라. 나 귀찮게 하지도 말고.”


“겁먹은 거지?”


시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뻔한 도발이었지만 유진은 굳이 눈을 얇게 뜨고서 시안을 노려봐 주었다. 


“겁?”


“그래. 겁먹은 거잖아. 나랑 결투하기 무서우면 빨리 사과나 해.”


“겁도 안 먹었고 결투하기도 싫고 사과하기도 싫으면 어떡하냐?”


“넌 명예가 뭔지도 몰라?”


“너 따위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은 잘 알지.”


“또... 또 날 모욕해?”


어째 말할 때마다 모욕받는 기분이었다. 시안은 더 참지 않고 품에 손을 쑤셔넣었다. 


“하지마.”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결투는 함부로 하는 것 아냐.”


‘저 개새끼. 지가 뭐라고 나한테 자꾸 이래라 저래라야?’


시안은 부릅뜬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면서 손수건을 꺼냈다.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을 해! 자꾸 싫다, 싫다 반복하면서 도망치지 말란 말이다! 너는 네 부모에게 명예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한 거냐?!”


“허.”


버럭버럭 지르는 고함에 유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가 우두커니 자신을 노려보자, 시안은 도발이 먹혔다는 생각에 내심 기뻐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손수건을 활짝 펼쳐서 내밀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 내게 용서를 빌어. 그리고...”


“던져.”


유진은 모래주머니를 묶은 매듭을 풀며 말했다.


“결투하자며. 빨리 던져.”


“...응?”


“던지라고.”


쿵! 왼팔의 모래주머니가 땅에 떨어졌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시안의 표정이 멈칫 굳었다.


“...너...”


“손수건. 안 던지냐?”


쿵! 오른팔의 모래주머니도 떨어졌다. 유진은 사슬조끼마저 벗고서 뒤편에 던져놓았다. 멀찍이 날아간 조끼가 바닥에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가 난다. 시안은 그 광경에 입을 헤 벌렸다.


“우와.”


남 일처럼 즐기고 있던 시엘도 그 광경에 탄성을 뱉었다. 유진은 몸을 숙이고서 다리에 매단 모래주머니도 벗어버렸다.


“...너... 마나를 수련했구나...!”


방금 전까지는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던 주제에. 시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역정을 냈다. 방계의 아이는 혈계식 전까지 마나를 수련해선 안 된다. 그건 오랫동안 내려 온 라이언하트 가문의 전통이었다. 일찍이부터 마나를 수련하고 진짜 무기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본가의 아이들 뿐이다. 


눈앞에서 전통이 짓밟혔다. 이제는 단순한 심술과 화풀이로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련 안 했는데?”


유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마나 수련이야 아장아장 기어 다닐 적부터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괜히 아버지인 제하드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기왕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했으니 놈의 마나수련법을 써보고 싶단 욕심 때문이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마나수련도 안 했으면서 어떻게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는 거야?!”


“일곱 살부터 하니까 되더라.”


“거짓말하지 마!”


“네가 해본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거짓말이래. 정 의심되면 결투로 확인해 보던가.”


유진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창의 모래주머니를 풀었다. 그 광경을 부릅뜬 눈으로 보고 있던 시안은 동생의 기대어린 시선을 느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겁에 질린 니나의 시선도 느꼈다. 별채의 시종들도 연무장의 소란에 관심을 보이며 창가쪽을 서성이고 있었다. 


먼저 결투를 입에 담은 것은 시안이었다. 먼저 손수건을 꺼낸 것도 시안이었고, 싫다는 유진을 붙들고서 명예를 운운한 것도 시안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었거니와, 방계 주제에 혈계식 전에 마나를 수련했다는 죄까지 더해졌다.


그러니 징벌해야 한다. 여기서 입 닫고 물러섰다간, 동생은 며칠 정도가 아니라 평생을 놀려먹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시안은 주변에 떨어져 있던 목검을 주워들었다. 아까까지 유진이 휘두르던 목검이었다. 


“...결투다!”


시안은 고함을 지르며 유진에게 손수건을 던졌다. 날아간 손수건이 유진의 어깨에 떨어진다. 그 즈음에야 유진은 창대에 매달았던 모래주머니를 다 풀어 낼 수 있었다. 


“받아들인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시안은 생전 처음 벌이는 결투에 흥분했다. 손수건을 던지기 직전, 던진 후. 시안의 심장은 흥분으로 쿵쾅대며 뛰었다. 건방진데다, 가문의 전통을 무시한 죄인. 놈을 어찌 벌해야 할까? 어떻게 혼쭐을 내주어야 동생이 오빠의 훌륭함에 감탄할까. 


그런 생각이 뚝 끊어진다.


유진은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창을 찔렀다.


오른손에 쥔 목검을 의식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던 시안은 창의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뻐억! 시안의 복부에 창끝이 처박혔다. 


“꺼억!”


시안은 비명과 함께 땅을 뒹굴었다.


라이언하트


수련용 창. 창날도 달리지 않은 막대기다. 그래도 끝은 길쭉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제대로 찔리면... 관통되지는 않을 지라도 끔찍하게 아프다.


텅 빈 명치에 제대로 꽂힌다면?


“우웨엑!”


저렇게 된다. 시안은 데굴데굴 구르면서 이곳저곳에 토사물을 내뿜었다.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시엘은 비명을 지르며 시안에게 다가갔고, 니나는 경악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이겼다.”


유진은 심드렁하니 말하면서 창을 내려놓았다. 진짜 창이었다면 방금 공격으로 죽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진짜 창이 아니지만, 그래도 급소에 공격을 맞고 땅을 구르고 있으니 승패는 분명했다. 


“니나. 가서 저 새끼 데려갈 사람 좀 불러와.”


“네... 네...!”


“비겁해!”


눈물콧물을 질질 짜면서도 토악질은 멈추지 않는다. 걱정스레 다가갔던 시엘은 그 지저분한 모습에 더 이상 오빠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대신에 눈을 치켜뜨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뭐가 비겁해? 손수건 던진 순간부터 결투는 이미 시작된 거잖아.”


“그건... 네 말이 맞지만! 그래도 비겁한 건 비겁한 거야.”


“네 머릿속은 어디 아름답고 평화로운 꽃밭이라도 되냐? 이미 시작 된 결투에 비겁은 개뿔이. 네 멍청한 오빠가 먼저 손수건 던지고서 폼을 처 잡으니까 저 꼴 된 거 아냐?”


맹렬히 쏴대는 말에 시엘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도 궁했지만, 머릿속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꽃밭이냐는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다.


“...나보고 예쁘다고 한 거야?”


“얘가 더위를 먹었나.”


“어쨌든... 비겁한 건 비겁한 거야. 네 결투는 명예롭지 못했어.”


“햐, 쌍둥이라더니 논리가 대단한 것을 아주 똑 닮았구나.”


“난 오빠랑 안 닮았어.”


“정신머리는 닮은 것 같은데? 그럼 네가 생각하는 명예로운 결투는 뭔데? 손수건 던지고. 하나, 둘, 셋, 야! 하고서 싸우는 거냐?”


“으음...”


시엘은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시안을 힐긋거렸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시안은 제 몸에 토사물을 잔뜩 묻힌 체 흐느끼고 있었다. 더러운 건 더러운 거고, 오빠의 비참한 모습이 안쓰럽기는 했다.


“...좀 살살 때리지.”


“미안한데 충분히 살살 때린 거야.”


“너 진짜 마나 수련 안 했어?”


시엘은 눈동자를 빛내면서 물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모래주머니를 정리하던 유진은 귀찮음을 역력히 드러내면서 시엘을 돌아보았다. 


“안 가냐?”


“진짜 마나 수련 안 했냐니까.”


“안 했다고 말했잖아!”


“거짓말. 마나도 수련 안 했으면서 어떻게 그 무거운 것들을 달고 다녀. 그리고, 네 공격. 오빠가 방심하지 않았어도 제대로 반응할 수 없을 만큼 빨랐어.”


호기심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얇아진다. 그 말에 유진은 모래주머니를 정리하다 말고 멈칫 굳었다.


“보긴 했나 봐?”


“아주 쪼끔.”


“그래도 눈이 아주 장식은 아닌가 봐.”


“너 말버릇이 아주 고약해.”


“옛날부터 많이 들었던 말이야.”


베르무트를 제외한 모두에게 한 마디씩은 들었었다. 유진이 모래주머니를 한 곳에 쌓아두는 동안, 시엘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유진의 등을 쳐다보았다. 옷에 가려진 근육의 움직임까지 세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근력만 사용하는 것 같기는 했다. 


그래서 시엘은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육체의 단련은 시엘과 시안도 어릴 적부터 해왔었다. 일곱 살부터? 시엘은 아까 전 유진이 한 말을 떠올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열세 살 애새끼치고는 제법 단단하긴 했어.’


창끝이 닿는 순간 저항감을 느꼈다. 그 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육체가 단련되었다는 증거. 거기에 역으로 밀어내는 힘은, 몸안에 이미 위기에 반응할 만큼의 마나를 쌓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냥 얻어맞은 것도 아니었다. 공격이 닿는 순간, 시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다. 실전 경험도 없을 꼬맹이가. 본능적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단 말이다. 


‘애새끼치고는 대단해. 하지만 베르무트의 후손치고는 쓰레기야.’


물론 유진은 열세 살의 베르무트가 얼마나 강했는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놈과 처음 만난 것은 유진이, 하멜이 스무 살이 되었을 적이었으니까. 그래도 얼추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시안 라이언하트. 어려서부터 본가의 가르침을 받은 저 꼬맹이는, 베르무트의 후손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허접했다.


‘그래도 싹수가 있긴 해.’


어디까지나 기준이 베르무트라서 그런 것이지. 앞으로의 가능성을 본다면 시안의 싹수는 괜찮았다. 그리고 시엘도. 직접 겨루지는 않았어도 눈썰미는 있는 것 같다. 


“너... 너 감히... 나를...!”


시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유진을 올려보았다. 머리가 핑핑 돈다. 몸 중앙이 관통된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아프고, 입 안에서는 비릿하고 썩은 맛이 감돈다.


“비겁... 비겁하게...!”


“쌍둥이라 그런지 하는 말이 똑같네.”


유진은 실실 웃으면서 시안을 쳐다보았다. 


“했던 말 또하고 싶지는 않은데. 내가 무슨 말 했는지는 네 동생한테 물어 봐.”


“이... 개자식...!”


“아니면 네 기억을 잘 더듬어보던가. 여기저기 토하면서 뒹구는 동안에도 귀는 열려있었을 것 아니냐?”


시안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확실히. 끔찍하게 아프고 억울해 미칠 것 같은 중에도 유진의 말은 들렸었다. 


하지만. 비겁하지 않았다곤 해도, 열세 살의 시안은 자신의 패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동생과 시종들 앞에서 이렇게... 이렇게나 추한 꼴이 되어버리다니!


“청소해야지.”


유진은 굴욕으로 일그러진 시안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약을 올렸다.


“다 네가 토한 거잖아. 네가 저거 다 청소하면 나도 마차 청소 할게. 그럼 공평하고 좋네. 그치?”


“감히... 감히...!”


“그리고 결투에서 졌으면, 겸허하게 ‘졌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명예롭고 예의바른 거야. 그렇게 명예, 명예 지껄였으면서... 설마 불명예스런 짓을 하려는 건 아니지?”


“으...!”


반박은 못하겠고, 화는 나고, 몸은 아프고, 입안은 역겨운 맛이 나고, 모든 것이 서럽다. 아픔만 덜했어도 일어나서 다시 싸우자고 할 텐데. 지금의 시안은 그럴 수도 없었다. 


북받친 설움과 울분이 눈물로 바뀐다. 시안은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유진은 그 광경에 연민은 느끼지 않았다. 먼저 태도를 좆같이 한 것은 저 꼬맹이 아닌가. 


다만... 열세 살 먹은 꼬맹이 상대로 뺀질거리는 자기자신에게 조금의 회의감을 느끼기는 했다.


‘그냥 참을 걸 그랬나. 괜히 좆같은 일 생기는거 아냐?’


앞날에 대한 걱정도 조금은 있었다. 시작부터 대놓고 구박과 무시를 받았는데 본가의 자식인 시안을 저 꼴로 만들어버렸으니... 사실 다른 것보다는 이 일을 트집 삼아 시골에 있는 아버지한테 불화살이 날아가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었다.


‘그러기만 해 봐. 콱 그냥.’


유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안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어린아이다운 고집이었다. 


“도련님!”


멀찍이서 들린 고함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훤칠한 키에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연무장에 도착했다. 멀찍이 뒤에서는 니나가 치맛자락을 양손에 잡고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중이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가슴에 사자가 그려지지 않은 것. 도련님이랑 호칭. 남자는 본가에 서임 받은 기사인 듯 했다. 


‘어쭈.’


유진은 남자의 몸놀림에 눈을 빛냈다. 정확한 나이는 몰라도, 이곳에 오는 내내 호위를 맡았던 고든보다는 실력이 월등해 보인다.


“헤... 헤자르.”


시안은 남자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 나 졌어. 저 새끼한테... 결투하자고 했는데... 져버렸어...”


“결투...”


헤자르는 굳은 표정으로 유진을 힐긋 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낮추어 시안을 일으켰다. 헤자르의 손과 제복에 토사물이 번진다. 그 광경에 시엘은 질색이라는 듯이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시안 도련님의 지도를 맡고 있는 헤자르라고 합니다.”


헤자르는 시안을 부축하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는 시종에게 들었으나, 워낙 급히 온지라 끝까지 듣지 못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는 기돌에서 온 유진 라이언하트입니다.”


유진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기돌이라면... 제하드님의 가문이 있는 곳이군요.”


“예. 제 아버지십니다. 상황은 뭐... 시안이 제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저는 대응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유진은 시안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시안이 제 아버지를 모욕했습니다.”


“내가 언제!”


“아버지에게 명예가 무엇인지 배우지 않은 것이냐며, 절 보고서 겁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시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 몸에서 소똥냄새가 난다고도 말했습니다.”


“...진짜야. 네 몸에서는 소똥냄새가 난다고...!”


“넌 아가리에서 토 냄새나니까 닥치고 있어.”


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시안을 노려보았다. 그 매선 시선에 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정통으로 맞았던 명치가 아직도 욱신거린다.


“...그래서 결투를?”


“시안은 저 뿐만 아니라 제 아버지를 모욕했습니다. 헤자르 경. 제가 결투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헤자르는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눈앞의 소년은 시안, 시엘과 비슷한 나이일 터. 그런데도 대화에 감정이 앞서지 않고 말투가 차분하다. 수 년 동안 쌍둥이의 칭얼거림에 시달려 온 헤자르는 눈앞의 소년이 비정상적인 것인지, 쌍둥이가 비정상적인 것인지를 감히 판단할 수 없었다.


“...이유는 타당하지만... 손속이 너무 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결투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 아닙니까.”


“...”


“헤자르 경. 제 솜씨가 어설프다면 감사히 조언을 받겠으나, 손속이 과했다는 이야기는 조언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주제넘은 말을 한 점, 사죄드립니다.”


헤자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부축을 받고 있던 시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헤자르! 저 새끼, 마나를 수련했어. 방계인데! 혈계식도 안 치렀으면서 마나를 수련했다고!”


“아가리 좀 닫아달라고 했잖니.”


유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시안을 노려보았다. 시안은 다시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도련님.”


헤자르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유진님은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습니다.”


“헤자르! 너까지 거짓말을 하는 거야?!”


“제가 시안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 마나도 수련하지 않았는데 날 이겼다고! 그리고... 그리고 저거! 저 모래주머니들! 저것들을 몸에 달고서...”


“유진님에게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헤자르는 뒤편에 있는 모래주머니들을 힐긋 보면서 말했다. 얼핏 보기에도 무게가 상당해 보인다. 저걸 전부 다 몸에 달고 움직였다고? 헤자르는 그 광경을 쉽사리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 번을 살펴봐도 유진에게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시안님. 우선... 부상부터 살피시죠.”


헤자르는 어르듯 말하면서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창으로 명치를 찔렀습니다.”


“...다른 곳은?”


“일격이었습니다.”


일격... 헤자르는 낮은 신음을 흘렸고, 시안은 부끄럼에 입술을 꽉 씹었다.


“...그럼... 유진님.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헤자르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부터 뛰어오던 니나는 그즈음에야 연무장에 도착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게 뭐있어?”


유진은 멀어지는 헤자르와, 아직까지 부축을 받고 있는 시안의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을 보며 히죽 웃었다. 애새끼 상대로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런 회의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지만, 고까운 애새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일은 즐거웠다.  


“다음에 봐.” 


헤자르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던 시엘이 유진을 돌아보며 웃었다. 


“잘 가.” 


유진도 마주 웃으며 시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시엘


“...그러니까...”


애니실라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너무 울어 눈자위가 퉁퉁 부어오른 아들을 앞에 두고 있으니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애니실라는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리다, 얼굴의 열기를 식히려 부채를 쥐었다.


“...내 아들이. 시안이. 방계 출신의 꼬마한테... 결투를 청했다가 패배했다고?”


“예.”


헤자르는 꾸벅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괜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가 저 성질 더러운 암호랑이에게 더한 구박을 얻어먹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 꼬마가. 마나도 수련하지 않았단 말이지?” 


“예...”


“말도 안 돼.” 


애니실라의 반응은 시안과 똑같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시안은 코를 훌쩍이며 시선을 내리 깔고 있었다. 


“이리 오렴.”


“...어머니...”


“이리 오라니까!”


애니실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빽 고함을 질렀다. 시안은 어깨를 움츠리면서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애니실라의 앞까지 다가갔다. 


애니실라는 씨근거리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홱 손을 뻗었다. 


“악!”


명치를 누르는 손길이 억세다. 아직 통증이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 헤자르는 안쓰럽다는 눈으로 시안을 힐긋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그것도 일격에?”


“어, 어머니. 아파요...!”


“가만히 있어!”


뒷걸음질 치던 시안의 몸이 우뚝 굳는다. 애니실라는 거침없는 손길로 아들의 명치를 꾹꾹 눌렀다. 그럴 때마다 시안은 이를 악물고서 비명을 참았다. 


뒤편에 앉은 시엘은 뾰로통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뭐라고 한마디 내뱉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지금 입을 열어 득 될 일 없다는 것은 어린 시엘도 잘 알고 있었다. 


“헤자르. 네 눈이 정확하다고 맹세할 수 있겠지?”


“...”


“맹세할 수 있느냐고 물었어. 그 꼬마. 정말로 마나를 수련하지 않은 거야?”


“맹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맹세란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침묵한다면 앞으로가 끔찍해질 것이 뻔했고, 헤자르는 자신의 판단을 확신했다.


“제하드님의 아들. 유진님은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몸에는 한 줌의 마나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제하드. 


애니실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곧장 떠오르지도 않는 이름.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이름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 기돌 지방의. 그 촌구석에 처박힌, 작위도 갖고 있지 않은 버러지의 이름이 제하드였던 것 같다. 수백 년 전에 본가에서 갈라져나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 없는 가문이란 말이다.


“내 아들이.”


애니실라는 시안의 옷을 위로 들췄다. 시안은 몸을 떨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나도 수련하지 않은 놈에게... 일격에 패배했단 거지.”


뱃가죽이 거무튀튀하게 변색되어있다. 그 진한 멍 자국에 애니실라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 또한 무가의 자식이었다. 군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카이네스 백작이 그녀의 아버지다. 


“일격. 틀림없네. 시엘, 네 오빠가 어떻게 패배했지?”


“어, 어머니. 그게...”


“네게 묻지 않았어.”


애니실라는 눈을 부릅뜨고서 아들을 노려보았다. 고작 13살의 아들을 보는 시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눈동자가 매섭다.


“...결투가 시작 된 순간. 유진이 창을 찔렀어요.”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말했다.


“오빠는 놀라서 뒤로 빠지려고 했는데, 그것보다 유진의 창이 더 빨랐어요.”


“거리는?”


“조금 멀었어요.”


“그 순간에 네 오빠는 뭘 하고 있었지?”


“검을 위로 들려고 했었죠.”


고작해야 한 시간 전의 일. 기억을 꺼내기 힘들만큼 오래되지도 않았다. 시엘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시안은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이...”


모든 것을 전해들은 애니실라가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멍청한 것!”


ㅡ철썩! 시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이리 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던 시안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마나도 수련하지 않은! 너랑 동갑의 꼬마의...! 선공을! 허용했다고?!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놈이 거리를 좁히는 것을 내버려 두고! 그렇게 얻어맞고, 사방에 토사물을 뿌리며 쓰러졌다고?!”


애니실라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연거푸 시안의 뺨을 갈겼다. 그럴 때마다 시안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간다. 작정하고 때리는 것은 아니다. 마나도 실리지 않은 따귀. 하지만 어린 아들에게 가하는 체벌치고는 과격하다.


“남들이... 천한 것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네가 먼저 결투를 청한 주제에 패배해?! 네 어미가 수치스러움에 목매달아 뒈지는 꼴을 보고 싶은 게야?!”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머니...”


비명은 참았지만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시안은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애니실라는 아들의 울음에 연민보다는 분노를 느꼈다. 


“네가 뭘 잘했다고 우는 것이냐?”


“흑...”


“왜 괜한 짓을 해서 네 어미의 처지를 곤란하게 하느냔 말이야! 곧 혈계식이라 네 아버지가 돌아올 텐데, 그때 내가 무슨 표정으로 맞이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테오니스, 그 계집은 또 어떤 얼굴로 봐야 하고?!”


라이언하트 본가의 가주. 길레이드 라이언하트는 수련을 이유로 삼 년 전부터 본가를 떠나있었다. 


그럴 경우, 본래라면 가문의 실권을 쥐는 것은 정실부인인 테오니스여야 할 터. 하지만 가주가 부재중인 지금, 본가의 실권을 쥔 것은 정실이 아닌 애니실라였다. 


간단한 이유였다. 테오니스는 자식인 이오드를 낳고서 더 이상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후사를 넉넉히 대비하고 싶었던 길레이드는 한 명의 아들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째 부인을 들였고, 애니실라는 쌍둥이를 낳았다. 


‘세 명이면 충분하다.’


길레이드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지만, 애니실라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카이네스 백작가의 영애. 여러 좋은 혼삿길을 마다하고 내세우지도 못할 첩실로 들어 온 것은,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의 값어치를 탐냈기 때문이었다. 


“날... 날 비웃을 거야. 틀림없어.”


애니실라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테오니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신경질적인 모습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던 시안이 더듬거리며 말을 뱉었다.


“다, 다시 결투할게요. 어머니가 수치를 겪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다시?”


애니실라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솟았다.


“이미 패배한 주제에 뭘 다시 결투하겠다는 거야?! 괜한 짓 하지말고, 혈계식이 시작될 때까지 얌전히 있어!” 


“하지만...”


“헤자르!”


애니실라는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헤자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예.”


“난 널 죽여 버리고 싶어.”


애니실라의 주먹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그래서도 안 될 일이고...! 너는... 남편이 총애하는 기사니까. 네 가르침이 잘못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


“...”


“네 가르침을 옳았지만, 내... 아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 촌놈 자식에게 패배한 거야.”


“...죄송합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황. 이럴 때에는 가만히 입을 닫고 있는 것보다 용서라도 비는 것이 낫다.


“...시안을 데리고 나가.”


“어머니...”


“가서, 훈련시켜. 다시는 내 얼굴에 먹칠하지 못하도록.”


헤자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시안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애니실라의 명령은 반발 없이 따랐다. 


“시엘. 너는 잠시 남거라.”


“...네.”


슬쩍 함께 나가려던 시엘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애니실라의 얼굴을 힐긋대며 보았다.


“...그 꼬마. 이름이 유진이라고 했지?”


“네.”


“너도 그 꼬마에게 결투를 청했니?”


“아뇨, 청하지 않았어요.”


“어째서?”


“오빠가 일격에 졌잖아요. 제가 싸워봤자 이길 수 없었을 거예요.”


시엘은 웅얼대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솔직히 대답하기는 했는데, 이 대답에 어머니가 더 화를 내는 것이 아닐까 내심 두려웠다.


“잘했다.”


하지만 애니실라는 아까처럼 노성을 터트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차분한 눈으로 딸을 응시했다. 


“너까지 패배하고 왔다면... 나는 정말, 수치심에 목을 매달았을 거야.”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어머니.”


시엘은 울상을 지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떠한 경우에도 제 목숨을 끊지 않을 사람임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 예쁘게 굴어야 어머니의 기분이 나아진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유진. 그 녀석, 어떻더냐?”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외모나 느낌 말이야.”


“얼굴은... 으음... 오빠보다 잘생겼어요. 느낌은 좀 이상했구...”


“이상해? 무엇이?”


“오빠랑 말싸움 할 때는 엄청 유치하고 얄미웠는데, 헤자르랑 말할 때에는 엄청 어른 같았어요.”


그 말에 애니실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열세 살이라고 했으니 유치하고 얄밉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헤자르를 대할 때에는 어른 같았다니? 


“막... 막 명예가 어쩌고 하면서. 결투에서 자비를 베푸는 건 상대에 대한 모욕이라고도 했어요. 유진이 그렇게 말하니까 헤자르가 사과했어요.”


“...사과?”


“네. 주제넘은 말을 했다면서요.”


시엘은 그 순간을 떠올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히죽 웃어버렸다. 곧 웃어선 안 될 상황임을 깨닫고 표정을 바꾸었지만, 애니실라는 시엘의 웃음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주제넘은 말...?’


이따가 헤자르를 다시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애니실라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유진이 네 오빠를 때려서 화나니?”


“...네.”


거짓말이다. 오빠가 싫은 건 아니지만, 잘난 척 하다가 엉엉 울던 모습은 웃겼다. 


“괜히 오빠의 복수를 하려 들지는 말려무나.”


애니실라는 딸의 속내를 알았다. 쌍둥이로 태어났으니 어려서부터도 쭉 함께 붙어 다녔고, 오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짓궂은 장난을 일삼던 아이. 오빠에 대한 애정보다는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우선하는 아이다.


“...당분간 네 오빠는 헤자르의 지도를 받느라 바쁠 거야.”


“저도 같이 할게요.”


“물론 그래야지. 하지만 너무 열중하지는 말고, 유진... 그 아이와 친해져 보렴.”


“왜요?”


“친구는 많을수록 좋단다.”


애니실라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들을 패배시키고, 자신에게 수치심을 준 꼬마. 하지만 마나도 수련하지 않은 주제에 아들을 패배시켰다는 이야기는 놀랍다. 


“...유진. 그 아이는 지금도 네 오빠를 이길 만큼 강하잖니.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는 편이 좋아.” 


“그런 거예요?”


“그래.”


애니실라는 끓는 감정을 식혔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몸을 움직이지 못할 병신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수백 년 전. 라이언하트 가주의 자리를 두고서 상잔이 벌어졌었다. 어찌 수습은 되었으나, 그 후로 가문 내에서 상잔은 금기로 여겨지고 있다. 애당초 현 가주인 길레이드가 ‘세 명이면 충분하다’라고 한 것이, 괜히 본가의 후계자를 늘렸다가 형제끼리 서로 죽이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애니실라 본인도 이깟 일로 수백 년에 걸쳐 내려 온 금기를 어기고 싶지 않았다. 


‘만약 놈을 해친다면 가장 의심받게 되는 건 나야.’


애당초 혈계식부터가 본가가 방계를 대놓고 핍박하는 전통이지만.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어설픈 시종을 전속으로 붙이고, 쓰지 않는 별채를 내주고, 별 것 아닌 일로 트집을 잡아서 괴롭히는 건 아무리 과한들 ‘선’을 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선을 넘어버리면.


가헌(家憲)의 수호자들이 개입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섬뜩함에 몸이 떨린다. 애니실라는 이따위 망신으로 가헌의 수호자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요, 어머니.”


잠시 고민하던 시엘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랑 친하게 지낼게요. 그럼 되는 거죠?”


싫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시엘은 그 알 수 없는 친척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시엘


아무 일도 없었다.


“...”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본가의 자식인 시안을 그 꼴로 만들었으니 어떠한 제재가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치 시안과의 결투가 없었던 것마냥 별채는 평화로웠다.


사실 일이랄 만한 것이 벌어지지 않았다 뿐이지, 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결투 이후로 별채 시종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그들은 유진의 행동거지를 경계하면서 섣불리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함께 불똥을 얻어맞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넌 괜찮냐?”


유진은 니나를 빤히 보면서 물었다. 별채에서의 첫날밤이 지난 아침. 일층 식당에 와있는 것은 유진과 니나 둘 뿐이었다. 그래도 커다란 식탁에는 여러 가지 요리들이 준비되어 있긴 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나 따라다니는 거.”


유진은 시큰둥하니 말하며 고기를 썰었다. 아침치고는 고깃덩이가 너무 크다. 이 많은 음식 중에서 유진이 유일하게 요구한 것이 바로 고기였다. 가뜩이나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데, 먹는 것이 변변찮았다간 체력은 물론이고 근력까지 빠져버린다.


“...으음...”


니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동안, 유진은 나이프로 썰은 고기를 입안 가득 우겨넣었다. 


“...눈치는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유진님이 본가에 계시는 동안, 저는 유진님의 전속 시종입니다.”


“길어야 한 달 있다가 떠날 내게 의리가질 필요 없어. 넌 나 떠나고서도 계속 본가에서 일할 것 아냐.”


“...꼭 의리 때문도 아니에요. 제게 유진님의 전속이 되라 명령하신 것은 본가의 시종장님이고, 시종장님께 명령하신 분은 아마 둘째마님이시겠죠.”


니나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눈치를 살피며 업무를 소홀히 한다면, 그건 즉 둘째마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에요. 그러기에 더더욱, 눈치를 보면서도 유진님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것이죠.” 


“좋은 마인드야.”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빈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자기 팔뚝만한 크기의 양다리를 맨손으로 잡아들었다.


“꼭 의리 때문이 아니라는 말. 나에 대한 의리가 아주 없지는 않다는 거지?”


“...임시나마 제 주인님이시니까요.”


“그럼 나도 주인답게 굴 수밖에. 만약 네가 나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괜히 속에 담고서 끙끙대지 말고 곧장 말해.”


“...네?”


“뭘 네야? 넌 재수가 없어서 내 전속 시종이 된 거고, 나도 뭐 우연찮게 널 전속 시종으로 배정받은 거잖아. 그러니까, 서로 불편한 감정 없이 지내자고.”


“하, 하지만...”


“됐고. 앞으로 내가 시키는 명령은 반문하지 말고 따라. 알았어?”


“...네.”


“그럼 가서 물수건 좀 가져 와.”


유진은 더 이상 말하는 대신, 크게 벌린 입으로 양다리를 뜯었다. 니나는 그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뒤로 물러섰다. 


“...물수건으론 부족할 것 같으니. 아예 대야에 담아서 가져 올 게요.”


“자발적인 의견이 아주 마음에 들어.”


유진은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히죽 웃었다.


“아, 그리고. 주방에 가는 김에 주방장한테 말해 놔. 점심은 아침보다 고기의 비중을 높이고, 괜히 거창한 요리 올리려 들지 말고 그냥 살코기 위주로 올리라고.”


“네.”


니나는 공손히 물러서면서 식탁을 곁눈질로 보았다. 저걸 혼자서 다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유진은 다 먹었다. 그는 전생부터 편식하는 것 없이 이것저것 잘 먹었다.


‘몬스터도 먹어봤고 마물도 먹어봤지.’


유진은 이빨에 낀 고기를 긁어낸 뒤 대야에 손을 씻었다. 그리고는 꽉 찬 배를 어루만지며 식탁을 떠났다. 니나는 종종걸음으로 유진의 뒤를 쫒았다. 


“오늘 누구 온단 소식 없었어?”


“따로 전해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럼 가서 알아 와. 나는 연무장에 가 있을 테니까.”


“네. 그런데, 저어... 방금 식사를 끝내셨잖아요. 바로 움직이면 배가 아프실 텐데...”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쓸데없어. 난 먹고 바로 뛰어도 배 안 아파.”


평범한 몸을 가진 니나는 저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더 묻지 않고 얌전히 물러섰다. 


거짓말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잔병치레 한 번 없었던 몸이다. 어제 창을 휘두르다가 찢어진 손바닥도, 지금은 상처 하나 없이 아물어 있었다. 


‘사기적인 몸뚱이라니까.’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도 베르무트는 치유마법이나 포션 같은 것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었다. 놈이 부상을 입는 경우가 드물기도 했지만, 아주 가끔 부상을 입을 적에도 몸뚱이가 알아서 회복되곤 했었다. 


덕분에 아니스와 세냐의 치유마법은 모론과 하멜 전용이다시피 했다. 


‘네가 무식하게 앞으로 튀어나가서 맨날 다치는 것 아냐!’


‘야, 모론 저 등신 새끼가 먼저 튀어나갔어!’


‘저 새끼는 등신이라서 그런 거고. 너는 왜 저 등신 새끼 따라가는데? 너도 등신이야?’


‘그럼 시발, 저 새끼 몬스터한테 처맞는거 내버려둬야 하냐? 왜 나한테 지랄이야!’


‘에휴, 말을 말자 그냥. 베르무트 좀 봐. 쟤처럼 안 다치고 깔끔하게 싸울 수는 없는 거야?’


‘말을 말자면서 왜 말을 더 좆같이 하세요?’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올 때마다 세냐는 하멜을 들들 볶았었다. 환생하고 13년이나 흘렀는데도... 전생의 기억은 무엇 하나 희미하지 않고 뚜렷했다.


‘...베르무트는 죽어서 장례식도 치렀다는데. 나머지 셋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네.’


현명한 세냐. 마도왕국 아롯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마탑주를 지낸 그녀는 이백 년 전쯤 돌연 은거해 버렸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신실한 아니스. 신성제국 유라스에서 성녀로 추앙받던 그녀도 말년에 이르러서는 중앙신전에서 물러나 한 명의 순례자가 되었다. 그녀가 어느 곳을 순례하기 위해 떠났는지는 당시 신성제국의 교황도 듣지 못했단다.


등신같은 모론. 북방 루하르 왕국의 초대국왕. 그나마 놈이 비교적 최근까지 살아있긴 했다. 그 최근이라 해봐야 백 년 전이기는 한데... 왕위에서 물러나고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백 년 전의 건국기념일에 모습을 드러냈다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걔들이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의미없는 생각이다.


가장 죽지 않을 것 같던 베르무트도 이백 년 전에 죽었다. 


유진은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 시안이 토사물을 뿌려놓았던 연무장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물론 그 청소는 니나가 했다.


“여기서 뭐하냐?”


“너 기다리고 있었어.”


연무장에는 시엘이 서있었다. 그녀는 유진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방긋 웃었다.


“너 밥 먹고 왔지? 고기 냄새 나.”


“양치했는데.”


“입만 닦으면 뭐해? 몸에서 냄새나는데.”


“소똥냄새는 안 나냐?”


“그건 오빠가 한 말이잖아. 나는 네 몸에서 소똥냄새 난다고 한 적 없어. 그리고 나, 소똥이 무슨 냄새인지 몰라.”


“소똥냄새가 똥냄새지 뭔. 정 모르겠거든 너 똥싸고 냄새 맡아 봐.”


“더러워.”


“난 왜 기다렸는데?”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설마 하루 텀을 두고서 지랄하러 온 건가?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 시엘을 쏘아보았다.


“너랑 같이 수련하려고.”


시엘은 킥킥 웃으면서 대답했다. 


“봐, 수련하려고 무복도 입었어.”


“멋지네.”


유진은 대충 답해주면서 시엘의 옷을 보았다. 왼쪽 가슴에 사자가 새겨진, 본가의 핏줄임을 주장하는 무복이었다.


‘나 입으라고 준 옷에는 사자 없던데.’


“네 오빠는 어디 두고 혼자 온 거야?”


“오빠는 헤자르랑 수련하고 있어. 그거 알아? 어제 너 때문에 어머니가 엄청 화를 내셨거든. 우리 오빠 싸대기 열 대 넘게 맞았어.”


“맞았다고?”


“응.”


그 말에 유진은 눈을 끔벅였다. 당연히 예쁨만 받고 오냐오냐 자란 줄 알았는데.


“근데 왜 나는 안 때린대?”


“어머니가 널 왜 때려?”


“나 때문에 화나서 네 오빠 팼다매.”


“으으음... 그건 맞지만. 어머니가 화를 낸 것은, 오빠가 너랑 결투해서 진 것 때문이야.”


“아니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화난 거잖아.”


“그건 그래.”


총명해봤자 애는 애인 법. 유진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너 여기 온거 너희 어머니도 아시니?”


“알아. 어머니가 너랑 친하게 지내라고 했어.”


나 때문에 아들 싸대기를 갈길 만큼 화를 냈다면서,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는 건 무슨 개소리야. 유진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외침을 간신히 삼켰다. 본가의 둘째 마님이 무슨 꿍꿍이인지 저 어린 꼬마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래.”


“어제 말했잖아. 우리 동갑이니까 친구라며.”


“네 오빠는 동갑이라고 친구 아니라던데.”


“그건 오빠가 한 말이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래서 나랑 친구 안 할 거야?”


“...하자. 친구야, 나 수련할 거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저기 가서 놀면 안 되겠니?”


“나랑 같이 놀거야?”


“아니 난 수련할 건데.”


“그럼 나도 수련할래.”


그냥 상대하지 말자. 진즉에 이랬어야 하는데, 유진은 혀를 끌끌 차면서 연무장 구석의 창고로 향했다. 


“어제는 창 휘둘렀잖아. 오늘도 창 휘둘러?”


“아니.”


“그럼? 칼?” 


“일단 땀좀 빼고.”


유진은 창고의 문을 벌컥 열었다. 어제만 해도 먼지가 그득 쌓였던 창고의 안은 하룻밤 사이에 깔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누군지는 뻔했다. 니나가 밤새도록 청소를 한 모양이다.


“마음에 들어.”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만 치운 것이 아니라 정리도 깔끔했다. 특히 모래주머니. 표면은 매끄럽고 어제보다 묵직하다. 가죽을 닦고 모래까지 새로 채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원체 있는 것이 적어서, 영 땡기는 것이 없네.’


오늘은 왠지 도끼질이 땡기는 날인데. 도끼는 있지도 않았다. 결국 유진은 모래주머니만 가득 들고서 창고를 나왔다. 


“무기는?”


“맨몸 운동 할 거야.”


유진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매달았다. 시엘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자기도 창고에서 모래주머니를 들고 나왔다.


“나도 같이 할래.”


“해서 뭐하게.”


“보기만 하는 건 재미없잖아.”


“마음대로 해.”


유진은 모래주머니를 매단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연무장을 뛰기 시작했다.


‘...무거워.’


시엘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체내에 쌓인 마나가 전신으로 퍼져가며 힘을 북돋는다. 시엘은 그렇게 하고서야 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쟤는 어떻게 맨몸으로 저렇게 뛰는 거야?’


시엘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유진을 쫒았다. 방금 뛰어나간 유진은 숨을 훅훅 몰아쉬며 연무장을 한 바퀴 째 돌고 있었다. 시엘은 잠시 동안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유진이 돌아오는 것에 보조를 맞추어 함께 뛰었다.


“너 진짜 마나 수련 안 했어?”


“안 했다니까. 말 걸지 마.”


“신기해... 마나도 수련 안 했으면서 어떻게 이걸 매달고 뛰는 거야?”


“말, 걸지, 말라고.”


유진은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였다. 그러자 시엘은 혀를 한 번 쏙 내밀고서 입을 닫았다. 


*


니나는 유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본가에 다녀왔다. 내심 쓴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 각오했는데, 의외로 본가의 시종들은 니나를 핍박하지 않았다. 


‘유진님이 시킨 일이지?’


‘네.’


‘알았어. 오늘 정오 넘어서...’


경계하는 기색은 있었지만 묻는 말들에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니나는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별채의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시엘님?”


니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안녕. 시종아.”


“쟤 이름은 니나야.”


“안녕, 니나.”


시엘은 휘청거리는 몸에 균형을 잡으면서 웃었다. 지금 그녀는 모래주머니를 한아름 들고서 유진의 등 위에 앉아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니나는 뒤늦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만 힐긋 들어서 유진을 보았다. 유진은 땀을 뚝뚝 흘리면서 팔굽혀펴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금 몇 번째야?”


“구십팔.”


“구십구.”


“백.”


“내려 와.”


ㅡ쿠웅! 시엘은 모래주머니를 옆으로 던지고서 유진의 등에서 내려왔다. 유진은 바닥에 널브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알아왔어?”


“네!”


니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무, 물부터 드릴까요?”


“아니. 말부터 해.”


“오늘 정오에 데콘님, 한센님, 쥬이스님이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니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리고 저녁쯤에 가르기스님과 디자이라님이 워프게이트를 통해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뭘 물어보나 했더니.”


시엘은 킥킥 웃으며 유진의 등을 찔렀다.


“그냥 나한테 물어보면 됐잖아. 왜 안 물어봤어?”


“니나한테 알아오라고 시켰는데, 너한테 먼저 들으면 니나가 헛고생한 게 되잖아.”


“무슨 상관이야?”


“수련 중이기도 했고.”


상대하기 귀찮기도 했다. 유진은 널브러진 몸을 일으켜서 자리에 앉았다. 


“세 명은 마차 타고 오고. 두 명은 워프게이트로 온다 이거지?”


“네.” 


대우부터가 다르다. 그 이유는 유진도 알았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방계 중에서도 위세가 높은 가문의 자제들이다. 


“너 가르기스랑 디자이라가 누군지 모르지?”


시엘이 입을 열었다. 


“이름은 알아. 만나 본 적은 없고.”


“걔네 둘은 방계 중에서도 힘이 세.”


“가문의 힘이 세다는 건 알아. 다른 셋은?”


“걔들은 어디서 오는지도 몰라. 너랑 비슷해. 아, 힘은 네가 훨씬 세겠지만.”


방계에서도 약소가문 출신이란 것이다. 


“...가르기스랑 디자이라. 만나본 적 있어?”


“나랑 오빠 열 살 생일파티 때 왔었어.”


“어떤 놈들이냐?”


“가르기스는 재미없는 놈이야.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구... 디자이라는 나보다 어린데, 걔도 재미없었어.”


재미의 기준은 놀려먹지 못했다는 뜻인가. 유진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본가에서 셋. 방계는 나 포함해서 여섯.’


늦어도 나흘 안에 모두 올 것이라고 했었는데. 들었던 것보다 모이는 날이 빠르다. 


“혈계식이 언제 하는지는 알아?”


“모두 모이면 한다고 했으니까... 오늘?”


“내일이겠지. 설마 오늘 바로 시작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이번 혈계식은 어떤 식으로 한다냐?”


“몰라.”


시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 몰라. 혈계식은 가주님이 정하는 것이 전통이란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아버님이 안 계시니까... 으으음... 어머님은 조만간 돌아오실 거라고 했어. 어쨌든, 난 진짜 몰라.”


유진은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본가의 핏줄이니 언질 정도는 들었을 것 아닌가. 


‘...아버지 때에는 열두 명이서 토너먼트를 벌였다고 했지. 저번 혈계식은 숲에서 열흘 넘게 떠돌게 했고.’


매번 형식은 바뀌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혈계식은 라이언하트의 성을 잇는 후대들의 자질을 판단하는 의식이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공평하지는 않다. 결국 혈계식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건, 어려서부터 마나를 수련한 본가의 자제들이다.


유진은 맨 처음 혈계식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아니꼬운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혈계식에서 본가에 엿을 먹여보겠노라 다짐했었다.


‘베르무트. 내가 네 후손들 엿 먹이는 걸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


유진은 뻐근한 몸을 일으키면서, 아마 천국에 가있을 베르무트에게 고했다. 


‘나라고 좋아서 네 후손으로 환생한 것도 아니잖냐.’


길레이드


유진은 다른 방계의 아이들과 특별히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동질감이랄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보니 관심을 줄 가치가 없는 놈들뿐이었다.


데콘, 11살.


한센, 14살.


쥬이스, 10살.


순차적으로 도착한 방계의 아이 세 명. 유진은 그들과 대충 인사를 나누면서, 머릿속으로는 세 명을 하나로 묶었다.


‘떨거지들.’


태도부터 잔뜩 주눅 들어서 요리조리 눈치를 본다. 특히 유진보다 한 살 많은 한센이란 놈. 볼살은 통통하고 몸도 살이 토실토실한데, 자기가 나이가 가장 많다며 대놓고 형 행세를 하려 구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도 유진이나 다른 방계의 아이들 앞에서만 그랬다. 형이랍시고 으스대던 한센은, 시엘의 왼쪽가슴에 새겨진 사자문양을 보고서 곧장 태도를 바꿔먹었다.  


사실 지적할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가세가 약한 방계의 아이들은 본가의 아이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쟤 대체 뭐야?”


그렇기에 세 명의 떨거지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유진을 힐긋거렸다. 


인사만 간단히 나눈 후. 유진은 멈췄던 수행을 재개했다. 오전부터 하던 체력단련의 연장이었다.


유진이 생각하길, 기술은 시간이 흘러 발전하기 마련이었다. 그건 무술도 마찬가지다. 유진이 삼백 년 전에 용사의 동료였다고는 해도, 그 ‘우둔한 하멜’의 무술이 현대의 무술보다 무조건 우월하다는 생각은 지나친 오만이다.


하지만. 무술이 아무리 발전한단들, 육체의 단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유진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어도. 육체의 단련은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오히려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으니까, 더 열중해야지.’


사실 무식하다 지적받아도 할 말 없는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혈계식, 그 빌어먹을 전통 때문에 마나를 수련하지 못하고 있는데. 


직계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혈계식. 거기서 본가에 엿을 먹이고 말겠다는 생각은, 그 전통을 묵과했을 베르무트에 대한 반발 심리기도 했다. 


“안 힘들어?”


“힘들어.”


도중부터 시엘은 유진의 곁에 앉아서 수련을 구경했다. 그녀는 유진에게 여러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본가에서 자란 시엘은 오빠와 함께 어려서부터 다양한 수련을 해왔다. 하지만 쌍둥이는 유진처럼 무식하고 고된 수련을 해본 적은 없었다.  


“누가 왔나 봐.”


유진은 땀에 흠뻑 젖은 머리를 털면서 일어섰다. 멀찍이 보이는 정문이 열리고 있었다. 슬슬 해가 저물 시간이기도 했으니, 저녁쯤에 도착한다는 방계의 두 자제가 도착한 모양이다. 


‘너무 부산스러운데?’


본가 쪽에서 시종들이 앞 다투며 뛰어나온다. 본가 뒤편에 머무르던 기사들도 오열을 맞추어 달린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두 꼬마의 가문이 방계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대가문이라는 것은 들었지만, 여태까지 맞이할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부랴부랴 뛰는 모습이 의아했다. 


“...앗.”


시엘도 똑같은 의문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정문을 보다가, 입구부터 쭉 늘어선 깃발이 높이 들리는 것을 보며 환히 웃었다.


“아버님이 오셨나 봐!”


시엘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유진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유, 유진님.”


니나도 화들짝 놀라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가주님이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마중하러 가셔야... 아, 아니.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고.”


“혼자 늦게 가는 것보단 땀범벅인 꼴로 가는 편이 좋게 보이겠지.”


유진은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대답했다. 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진의 팔다리를 닦아 주었다. 그래도 진득이 배인 땀 냄새는 가시지 않아서, 향수까지 꺼내 유진에게 뿌려주었다.


“이 정도면 됐어.”


흙과 땀이 뒤석여 떡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누른다.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데, 별채의 시종들과 방계 떨거지들은 죄다 정문 쪽으로 가버렸다. 결국 유진과 니나는 가장 늦게 별채를 나서 정문으로 향했다.


‘오...’


라이언하트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긴 깃발들이 죄다 하늘높이 치솟았다. 백 명은 족히 넘을 기사들이 깃발과 선을 맞춰선다. 본가와 별채의 시종들도 한 곳에 모여, 저택의 입구에서 줄을 맞춘다.  


본가의 친척들은 시종들의 앞에 섰다. 시엘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애니실라의 왼편에 섰고, 오른편에는 창백한 얼굴의 시안이 서있다.


애니실라보다 몇 걸음 앞. 


비록 가문의 실권은 빼앗겼다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정실부인인 테오니스가 애니실라보다 앞선 자리에 선다. 그녀는 수 년 만에 돌아 온 남편을 대하는 것치고는 표정이 담백했다. 


유진은 테오니스의 곁에 선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럭저럭 잘 생긴 얼굴인데, 눈빛이 나이답지 않게 칙칙하고 어깨가 축 처져있다. 이오드 라이언하트. 본가의 장남이자 승계서열 1위. 


테오니스가 뭐라 입술을 달싹인다. 그러자 이오드는 표정을 굳히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활짝 폈다. 


‘다들 예쁨만 받고 자란 건 아닌가 봐.’


그니까 성격이 개차반이 되지. 유진은 끌끌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본가의 집사 중 한 명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방계의 아이들이 서야 할 곳은 본가 친척들의 구석이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어 선 탓에 확실히 구분이 된다.


ㅡ채앵! 


도열한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일백이 넘는 검이 뽑혔는데도 쇳소리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기사들은 높이 세운 검을 왼쪽 가슴에 붙이며 정문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흑마를 탄 남자가 두 대의 마차를 이끌며 들어오고 있었다. 우렁찬 함성 같은 것은 없었다. 기사들은 하나 된 침묵으로 수 년 만에 돌아 온 가주를 맞이했다. 


‘길레이드 라이언하트.’


유진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베르무트와 닮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혁혁한 안광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뒤에 따라오는 놈이 동생인 기온일 테고.’


라이언하트의 가주. 길레이드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다. 둘째 동생인 길포드는 혼인까지 했으면서 아직 분가하지 않고 본가에 얹혀살고 있다. 셋째 동생인 기온은 혼인도 하지 않고 길레이드와 함께 본가를 떠났다.


“...오시기 전에 알려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가주인 내가 내 집에 돌아오는 것인데, 알릴 이유가 어디 있소?”


길레이드는 말에서 내리며 대답했다. 


“이오드. 키가 제법 자랐구나. 실력도 그만큼 늘었느냐?”


“...아버님의 기대에 부응코자 노력했습니다.”


이오드는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길레이드는 잠시 장남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시안과 시엘? 알아보지 못할 뻔 했어. 아이들은 정말 빨리 크는 군. 신기할 정도로 말이야.”


“보고 싶었어요, 아버님.”


시엘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제야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쌍둥이에게서 흙먼지와 땀 냄새를 느꼈다. 이오드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냄새였다. 


“길포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 축복해야 할 순간을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형님,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길포드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의 곁에는 부인인 네리아가 곤히 잠든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길레이드는 잠시 동안 아기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번뜩이는 시선이 방계의 아이들을 훑는다. 몇몇 아이들은 놀람을 삼키며 허리를 세웠다. 유진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냥 쳐다보는 것뿐인데 뭐 하러 몸을 떠나. 


“...거창히 준비할 것 없고. 그냥 밥이나 함께 먹지.”


길레이드의 입이 열렸다.


“혈계식에 대해서도 논할 겸.”


*


널따란 사각식탁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방계의 아이들은 식탁의 끄트머리부터 자리를 채웠다. 


길레이드와 함께 온 두 대의 마차에는 디자이라와 가르기스가 타고 있었다. 둘은 당연하다는 듯이 방계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앉았다. 


유진은 가르기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


가르기스는 의아하단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이런 자리는 가문의 서열대로 앉는 것이 불문율이다. 본래 가르기스의 옆에 앉아야 할 것은 저 뚱뚱한 한센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한센은 아무 불만도 내색하지 못하고 유진의 옆에 앉았다. 


정오쯤에 도착한 한센은 유진이 얼마나 무식하게 수련하는지를 보았다. 본가의 악명 높은 쌍둥이, 시엘이 유진에게 친근히 대하는 것도 보았다. 한센은 저 정체모를 친척과 괜한 투닥거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는 저번에도 보았고. 같이 오기도 했으니 얼굴을 아는데...”


방계 아이들의 맞은편 중앙. 가주인 길레이드의 자리다. 그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방계 아이들을 면면히 살펴보았다.


“나머지 네 명은 누군지 모르겠구나.”


“기돌에서 온 유진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제하드 라이언하트 되십니다.”


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방계의 아이들도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매끄럽게 말한 것은 유진 뿐. 다른 아이들은 목소리를 떨고 말을 더듬거렸다. 바로 맞은편에 본가의 가주가 앉아있다는 것이 아이들을 긴장시켰다. 


“...음.”


모든 소개를 들은 길레이드는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길레이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서 턱을 괴었다. 


침묵.


방계의 아이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디자이라. 그녀는 길레이드의 바로 앞자리였기에, 시선을 가만 두지 못하고 애꿎은 허벅지만 쥐어뜯었다.


‘배고픈데.’


식사 준비라도 끝나고 부르던가. 유진은 초라한 식탁을 노려보았다. 빵 몇 조각과 차가 나와 있기는 했지만 저걸 누구 코에 붙인단 말인가.


‘저 새끼는 또 누구야?’


이오드의 옆에는 금발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디자이라, 가르기스와 다른 마차를 타고 온 놈이다. 대충 보건데 라이언하트의 가계는 아닌 것 같다. 바로 옆에 앉은 이오드도 남자가 누군지 모른단 눈치였다.


“아버님.”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시엘이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길레이드를 빤히 보았다.


“3년 만에 돌아오신 거잖아요. 제 선물은 없나요?”


“미처 생각을 못했구나.”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러하듯, 길레이드 역시 딸을 아꼈다. 하물며 시엘은 장남과는 달리 애교도 많지 않은가. 


“에이... 전 매일 아버님이 보고 싶었는데. 아버님은 안 그러셨어요?”


“보고 싶었지.”


“거짓말. 선물도 안 가져 오셨잖아요.”


“하하, 혈계식을 치른 뒤에 따로 선물을 주면 되지 않느냐. 이 아비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다오.”


오가는 대화에 이오드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시안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시선을 내리 깔았다. 본래라면 그 또한 시엘과 함께 아양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안의 명치에는 아직 어제의 멍이 남아 있었다. 결투, 패배. 시안은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아버님. 저 손님은 누구신가요?”


시엘은 유진과 한 번 눈을 맞추고서, 이오드의 곁에 앉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유진이 저 남자를 계속 힐긋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누군지 모를 남자의 정체가 궁금한 것은 시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식탁에는 애니실라와 테오니스는 물론이고, 길레이드의 두 동생들도 합석하지 못했다. 


혈계식을 관장하는 라이언하트의 가주.


혈계식에 참석하는 아이들.


그 뿐이어야 할 자리에 정체모를 외인이 앉아있는 것이다. 


“...음. 조금 뒤에 소개하려 했는데...”


“전 상관없습니다.”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뭐 아직 요리도 나오지 않았잖습니까. 아이들이 침묵을 버거워하니, 이야기로 환기시키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확실히. 마음이 급해 일찍 불러 모은 것을 후회하던 차였소.”


“하하, 길레이드님의 잘못은 아니지요. 먼 친척들과의 첫 만남은 누구나 어색함을 느낄 겁니다.”


남자는 빙긋 웃으면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유진은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찻잔을 들었다. 배가 고프니 뭐라도 목구멍에 밀어넣고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린이 여러분. 아롯의 적색 탑에서 온 로베리안이라고 합니다.”


“...어?”


디자이라가 놀란 소리를 냈다. 로베리안? 몇몇 아이들은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적색 마탑주.”


이오드가 경악한 표정을 하고서 로베리안을 돌아보았다. 


“푸웁.”


유진의 입에서 차가 뿜어졌다.


길레이드


매일 아침 고기를 씹어도 탈난 적 없는 몸인데. 설마 찻물마시다가 사레들릴 줄이야. 목구멍이 쓰리다. 유진은 가슴을 두드리면서 기침을 콜록거렸다.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했다. 


마도왕국 아롯에는 다섯 개의 마탑이 있다. 


적색, 청색, 녹색, 백색, 흑색.


삼백 년 전만 해도 흑색 마탑이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뭔지 모를 용사와 마왕의 약속 이후로 수백 년이 흘렀잖은가. 


전생에 유진이 죽인 흑마법사만 해도 백 명은 우습게 넘을 터인데. 용사와 마왕의 약속 이후로 흑마법사도 나름의 대우를 받게 되어, 아롯에 마탑을 올릴 만큼의 세력을 이룬 것이다. 


어쨌든. 적색 마탑은 삼백 년 전에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로베리안은 놀란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아, 네. 괜찮... 네, 괜찮습니다.”


그냥 찻물 들이키다가 깜짝 놀라서 뱉은 것 뿐. 하지만 죄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으니 민망한 기분이 든다. 유진은 헛기침을 뱉으면서 물수건을 잡았다.


하지만 식탁을 닦기도 전에 로베리안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축축하게 젖었던 식탁보가 말끔해진다. 


마법.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넵...”


유진은 뻗었던 손을 내려놓으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이럴 때도 좋았다.


‘적색 마탑주라면... 세냐의 제자잖아.’


엄밀히 말하자면 제자 본인은 아니다. 유진이 기억하기를, 아마 로베리안의 스승의 스승이 세냐의 제자였다. 


항렬이 꽤 차이가 나지만, 적색 마탑주인 로베리안과 녹색 마탑주는 현명한 세냐를 대스승으로 섬긴다.


그럴 만도 했다. 삼백 년 전. 세냐는 아롯 역사상 최연소로 녹색 마탑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 


마왕과 드래곤조차 살해할 수 있다는 대마법사. 


수많은 마법사들이 세냐의 제자가 되고자 녹색 마탑을 찾아왔다. 


그 외에도 세냐는 이런저런 위업을 많이 세웠다. 그녀는 아롯의 공용 마법서들을 죄다 뜯어고쳐 개간하고, 다른 마탑의 제자들, 심지어는 같은 마탑주들에게도 마법학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말년에 이르러, 세냐에게 가르침을 받은 마법사들이 마탑의 상석에 앉았다. 그 가르침은 당대까지 이어져서, 현명한 세냐의 제자를 자처하는 두 대마법사가 적색과 녹색의 마탑주가 된 것이다.


‘스승의 스승의 스승...’


아무리 생각해 봐도 로베리안이 세냐를 직접 만나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설마 여기서 옛 동료와 연관 된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


‘적색 마탑이라면... 소환마법이 대표적인데.’


소환마법은 세냐의 장기기도 했다. 여행의 대부분을 숙식했던 집도 세냐의 소환물이었다. 


“...네 이름이 유진이라고 했었지?” 


길레이드가 입을 열었다. 대뜸 지목받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고 차를 마시고 있지도 않았다. 유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길레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쯤 부르나 했다.’


저택 앞에서 봤을 적부터 길레이드의 은근한 시선을 느꼈다.


“테오니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 시안은 입술을 꽉 씹었다. 하지만 길레이드는 느릿하게 든 손으로 시안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내 아들이... 너와 네 부모를 모욕했다지.”


“예. 하지만 감정은 남지 않았습니다.”


유진은 자세를 바로 세워 앉았다. 


“그에 관한 감정을 풀어내고자 결투를 벌인 것이니까요.”


“네가 승리했지.”


“설령 패배했을 지라도 감정을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약해 명예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모욕은 감내해야 할 일입니다.”


“내 아들보다 낫구나.”


길레이드는 빙긋 웃었다. 툭. 그는 시안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리면서 말을 이었다.


“시안.”


“...네.”


“나는 네 패배가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패배를 부끄러이 여기며 아비의 눈치를 보는 네 모습은 부끄럽구나.”


“...”


“네가 모욕하여 시작 된 결투라고 들었다. 헌데, 너는 결투에서 패배했으면서도 유진에게 사과하지 않았다지.”


“그... 그건...”


“시안. 네 성은 라이언하트. 위대한 베르무트가 네 선조 되는 분이시다. 네가 그 분의 피를 이었다면 너 뿐만 아니라 상대의 명예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베르무트 그 새끼는 내 명예를 존중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유진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시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쌍둥이의 성격이 막돼먹은 탓에 아버지도 성격이 개차반일 줄 알았는데. 길레이드는 생각보다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놈 같았다. 


‘삼 년 동안 본가를 떠나있었다고 했지.’


열 살 먹은 꼬마에게 삼 년이면 인생의 1/3은 되는 긴 시간이다. 


“...미안해.”


시안은 콧잔등을 씰룩거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미안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억울해서 우는 거다. 유진은 곧장 그 사실을 알았지만, 진심어린 사과따위는 애당초 기대한 적이 없었다. 


길레이드도 아들의 불만을 느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지적했다가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이다. 


“...말하기 조심스럽다만. 유진. 나는 네 아버지를 모른다.”


“그러실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제 가문은 촌구석에 있거든요.”


“네 실력은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냐?”


“기초는 가르쳐주셨지만, 대부분은 혼자서 수련했습니다.”


“어떤 수련을 했지?”


“목검이나 창... 혈계식에서 금(禁)하지 않는, 수련용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따로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구나.”


“저희 가문에도 기사는 몇 명 있었지만, 가르침을 청할 만큼 뛰어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길레이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안은 굴욕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고, 시엘은 재미 있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이오드는 멍한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시안과 결투를 벌여서 이겼다고?’


‘제하드가 누구야?’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는 경악어린 눈으로 유진을 힐긋거렸다. 그 외에 다른 방계의 아이들도 경악해서 유진을 보고 있었다. 


“...이번 혈계식은 즐거울 것 같소.”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길레이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흥미로워하며 이야기를 듣던 로베리안도 미소 띤 얼굴을 끄덕였다.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들 길레이드의 눈치를 보느라 요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요리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길레이드는 그렇게 운을 때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그제야 아이들도 식기를 잡았다.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큼직한 고깃덩이를 썰었다. 


“점심을 그렇게 먹었으면서 벌써 배고파?”


“점심 먹고도 계속 움직였으니 배고프지.”


식사가 시작되니 분위기가 조금은 풀린다. 시엘은 킥킥 웃으면서 피망이나 당근 같은 야채를 유진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그러면 내거도 먹어. 난 배 안 고프거든.”


“네가 야채 먹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아냐, 나 야채 좋아해.”


시엘은 길레이드의 표정을 살피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진짜로 배 안 고파서 그래.”


모두의 접시가 어느 정도 비워진 뒤. 길레이드는 마시던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도 짐작했겠지만. 이렇게 식사자리를 마련한 것은, 혈계식의 내용을 전해주기 위해서란다.”


그 말에 움직이던 식기들이 하나둘 멈춘다. 


“혈계식에 참가하는 친척 아이들을 제대로 봐두고 싶기도 했고.”


길레이드의 시선이 움직인다. 그의 눈동자는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유진에게 오랫동안 머물렀다. 유진이 ‘떨거지들’이라 정의한 세 명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불만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데콘, 한센, 쥬이스.


그 세 명은 자신들이 혈계식에서 별다른 두각을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십 년 주기로 벌이는 혈계식. 그 내용은 가주가 주관한단다. 저번 혈계식도 내가 주관했지. 너희도 본가에 오기 전에 들었겠지만, 저번 혈계식은 열두 명의 아이들을 숲 복판에서 떠돌게 했었어.”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머금고서 고개를 저었다. 


“저번 혈계식에는 방계의 아이들로만 치렀었다. 하지만 이번 혈계식에는... 내 자식들이 셋이나 참가하게 되었어. 내 입으로 하기는 우스운 말이지만, 나는 혈계식이란 전통 자체가 너무나 차별적이라 생각한다.”


길레이드의 세 자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혈계식은 본가를 위한 전통이다. 방계의 아이들은 혈계식 전까지 진짜 무기를 쥘 수도 없고, 마나를 수련할 수도 없어. 그런 상태에서 혈계식을 치른다면 결과가 뻔하지 않느냐. 방계의 아이는 절대로 본가의 아이를 이길 수 없다.”


“...”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어 온 전통을 단번에 없애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수백 년 동안이나 본가와 방계를 나눠온 간극이다. 


당장 길레이드의 동생인 길포드도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길포드도 본가를 떠나 방계에 속하게 된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


피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라이언하트의 본가.


오직 가주의 핏줄만이 본가로 인정받는다. 라이언하트의 본가는 그렇게 명맥을 이어왔다. 


“방계라고 한들, 아무리 피가 옅어졌다 한 들. 너희 모두 라이언하트를 성으로 삼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혈계식의 의의는 라이언하트의,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임을 주장할 만한 자질을 확인하는 것이다. 피의 진함은 중요치 않아.”


‘베르무트.’


유진은 고기를 씹으며 생각했다.


‘네 후손이 너보다 착한 것 같다.’


“결과가 뻔한 경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나는 내 자식들 뿐만이 아닌, 라이언하트의 성을 이은 너희 모두의 자질을 확인하고 싶다.”


길레이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이번 혈계식은 이전의 혈계식과는 달리 외부의 조력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어린이 여러분.”


로베리안이 활짝 웃었다. 


“가주님의 훈화가 너무 길었지요? 졸려 하는 것도 이해가지만, 지금은 정신 바짝 차리고 주목해 주세요.”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로베리안은 그를 신경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일단 착수해봐야 알겠지만, 늦어도 나흘 안에 혈계식이 시작될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식이냐면. 저는 숲에 미로를 소환할 거예요.”


로베리안이 양 손을 들었다. 손바닥 사이에 모인 마나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더니, 식탁 위에 커다란 미로를 만들었다. 


“여러분은 각자 다른 입구로 들어가, 미로를 탐험하게 될 겁니다. 미로 안에 이런저런 함정들이 준비되어 있는데... 아, 아. 너무 걱정할 건 없어요. 여러분은 미로에서 그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요?”


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야 그 안의 모든 것이 전부, 마법으로 일으킨 환상이니까요. 여러분이 미로 안에서 무슨 일을 겪든, 그건 현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감 넘치는 체험은 할 수 있을 거예요.”


로베리안의 미소가 진해졌다.


“미로 안에서 맞닥트린 몬스터가 여러분의 팔을 잘라버릴 수도 있어요. 진짜로 팔이 잘리는 건 아니지만, 미로 안에서는 진짜로 팔이 잘렸다고 착각해 버리는 거죠.”


“우와...”


“마법은 참 신기하죠? 관심이 있다면 아롯에 와보세요. 그 위대한 베르무트님도 대단한 마법사셨으니까.”


소환마법 외에도 고등한 정신계 마법까지 섞었다는 말이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마탑주 해먹지.’


유진은 잠자코 로베리안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미로에는 몬스터 외에도 여러 가지 함정을 준비해 놓을 예정이에요. 물론 실제로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네.”


로베리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키득대는 것은 시엘 뿐이었다. 떨거지들은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미로에 들어간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해요. 미로의 중앙까지 가서, 그곳에 있는 대장 몬스터를 쓰러트리세요.”


“어떻게 쓰러트려요?”


“그냥 쓰러트리면 됩니다. 여기서 몬스터 잡아 본 사람?”


“저요.”


본가의 세 명이 손을 들었다. 방계에서는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유진만 손을 들었다. 유진도 열 살 쯤 오크를 목검으로 두들겨 패서 잡은 적이 있었다. 


“그때랑 똑같아요. 여러분 아홉 명 중에서 누군가가 미로의 중앙에 도착하고, 나쁜 대장 몬스터를 쓰러트린 순간에 혈계식은 끝납니다.”


“미로를 빠져나가지 못해도 괜찮은 건가요?”


“물론이죠. 앞에 가는 것이 무섭다면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좋은 점수를 얻지는 못하겠죠...”


로베리안은 볼 살이 토실토실한 한센을 응시하면서 친절히 답해주었다.


“그 대장 몬스터를 잡으면.”


대장 몬스터가 뭐야. 아무리 상대가 열 살배기 애들이라지만 너무 유치한 이름 아니냐.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대장이건 보스건, 그 새끼 잡으면 뭐 주기는 하냐?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대놓고 묻고 싶은데... 


“...뭘 받을 수 있나요?”


그냥 대놓고 물어보았다. 


“본가의 지하보물고에서 원하는 것을 하나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해주마.”


대답한 것은 길레이드였다.


유진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어린애다운 탄성도 지르면서.


‘뭐 가져갈까. 검? 창? 활?’


혈계식은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유진은 자신이 미궁을 최초로 돌파할 것임을 확신했다.


혈계식


“진짜야?”


본가를 나와 별채에 도착한 순간.


쭉 입을 닫고 있던 가르기스가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디자이라도 유진을 본다. 


“뭐가?”


“너... 정말로 그 시안 라이언하트랑 결투해서 이겼어?”


“어.”


솔직한 대답에 가르기스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르기스 라이언하트. 그는 유진보다 한 살 많은 열네 살이다. 그의 가문은 전전대 가주에게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 비교적 최근에 갈라져 나온 가문이기에, 수많은 방계 중에서도 위세가 높다.


거기다가 가문 주변에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숲이 있었다. 때문에 가르기스는 어린 시절부터 그 숲을 쏘다니며 고블린 같은 소형 몬스터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것을 놀이로 삼았다. 


즉. 방계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무가(武家)라는 것이다. 그건 디자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가문도 이미 수 대 전에 본가에서 밀려나왔지만, 조부 때부터 군부에 진출해 온 명망 높은 무가였다. 


그렇다보니 둘은 어려서부터 이래저래 접점이 많았다. 같은 성씨라고는 해도 촌수는 아득한데다, 나이는 엇비슷하지 않은가. 때문에 양가는 장래에 혼사를 맺자는 이야기를 장난처럼 나눠 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당연히 양가는 이번 혈계식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을 교류했다.다른 방계는 볼 것도 없다. 결국은 본가의 아이들과 경쟁해야 하니, 괜히 서로 경쟁하려 들지 말고 힘을 합쳐 본가의 아이들을 견제하자. 


부모님의 당부를 안고서 본가에 왔다. 그런데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모를 방계의 촌뜨기가, 그 본가의 시안 라이언하트와 결투를 벌였단다. 심지어 일격에 시안을 패배시키고, 가주의 관심까지 독차지하고 있다. 


‘제하드가 누구야?’


둘은 유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라이언하트의 성을 가진 방계는 굉장히 많다. 그 중에서 이름을 떨치는 것은 본가의 핏줄과 방계의 극소수 뿐. 


‘삼 년 전의 생일파티에도 안 왔었어.’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는 서로 열심히 시선을 나누었다. 


“질문 다 했냐?”


“어... 어?”


“그럼 가도 되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둘은 곁을 지나치는 유진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어디를 가나 했더니, 그는 별채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오셨어요?”


별채의 시종들 중에서 가장 빨리 뛰쳐나온 것은 니나였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에게 두툼한 수건을 건넸다.


“뭐야?”


“수련하실 거잖아요.”


“마음에 들어.”


유진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니나는 유진에 대해 상당 부분 파악했다. 저 열세 살 도련님은 수련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들린 것인지, 밥 먹기 전에는 식욕을 돋우기 위해서라며 수련하고 밥 먹은 뒤에는 소화시켜야 한다며 수련을 한다. 


“목욕은 언제쯤 하실 건가요?”


“한 두어시간 뒤.”


“찬 물이면 되겠죠?”


“당연하지.” 


니나는 유진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이제 갓 견습을 벗어났다. 그러니 본래라면 별채의 잡일은 니나가 도맡아야 했지만, 별채의 시종들은 유진의 눈치를 보느라 니나에게 잔심부름 하나 시키지 않았다. 덕분에 니나는 온전히 유진의 행동거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쟤들 뭐하냐.’


체력단련은 아까 했고. 밤공기도 선선해서 목검이나 휘두를까 했는데... 가르기스와 디자이라가 멀찍이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르기스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


가르기스는 망설임 없이 웃옷을 벗어 던졌다. 열네 살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근육이 발달 된 몸. 그것 뿐만 아니라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르기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가르기스는 흐읍, 하고 숨을 삼키더니 가슴을 쫙 폈다. 쩍 벌어진 대흉근. 그 밑에서 꿈틀거리는 복근. 가르기스는 거들먹거리며 가슴근육을 두드렸다.


“만져볼래?”


저 새끼 뭐하는 짓이지. 그런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었을 뿐인데, 가르기스는 뭔가 병신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유진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가르기스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풀렸던 가슴 근육을 줄였다. 그리고는 유진을 지나쳐서, 연무장 구석의 창고로 향했다.


얼마 지난 뒤. 가르기스는 목검 한 자루를 들고 나왔다. 그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창고의 무구가 너무 빈약해. 우리 가문에 있는 창고의 반에 반도 안 될 것 같아.”


“그래.”


“난 말이야. 이런 평범한 목검은 여섯 살쯤에 졸업했다고. 우리 가문에는 내가 직접 주문한 엄청 큰 대검이 있어. 물론 수련용이라 날은 세우지 않았지만 말이야. 안에 철심을 통짜로 넣어서 엄청 무거워.”


“대단하군.”


“너도 꽤 수련해 온 모양인데...”


가르기스는 목검을 들고 있는 유진의 팔뚝을 살폈다. 자신의 두툼한 팔뚝과는 역시 비교가 안 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단련해 온 팔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어떤 수련을 하지?”


“그건 왜 물어 봐?”


“네가 시안을 이겼다며? 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그 시안 라이언하트를, 본가의 자제를 이길 수 있었던 거냐?”


“열심히.”


상대하기 귀찮다. 유진은 대충 답해주면서 다시 목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 찍는 기본동작. 유진이 묵묵히 동작을 반복하자, 멀뚱거리며 서있던 가르기스도 목검을 높이 들었다.


ㅡ부웅! 평범한 목검을 휘두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큰 소리가 난다. 마나의 도움 따위 없는, 순수한 근력만으로 낸 소리다. 


가르기스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유진을 힐긋 보았으나, 유진은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수련하지?”


“밥먹고 화장실가고 자는 시간 빼고 전부.”


“잠은 얼마나 자나?”


“최소 여섯 시간.”


“나는 다섯 시간 잔다.”


“대단하군.”


“사실 더 조금 자고 싶었는데. 아버님이 말씀하시기를, 잠이 보약이라고 하셨거든. 잠을 자야 근육이 커진다면서 말이야...”


“그래.”


“너와 내 근육의 크기는 수면시간의 차이 때문이 아니야. 우리 가문에는 비전의 근육성장제가 존재한다.”


“훌륭하군.”


“아롯의 유명한 연금술사의 도움을 받아 만든 약이지... 체내에 마나를 축적시키지 않으면서, 수련에 따라 근육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약이다. 관심 없나?”


“없어.”


“단순한 수련으로는 근육의 성장이 한계가 있어. 본래 이런 근육성장제는 용병들이 애용하는데, 그런 싸구려와 우리 가문 비전의 근육성장제는 질이 달라. 아무런 부작용도 없거든.”


“어.”


“날 봐라. 너보다 한시간 덜 자는 덕도 있긴 하겠지만, 내 근육은 너와 비교가 안 될 만큼 굵지. 키는 또 어떠냐?”


자랑스레 떠들 만도 했다. 가르기스와 유진의 나이는 고작해야 한 살 차이 날 뿐이지만, 가르기스의 키는 유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아직 앳된 기가 남은 얼굴을 감안하더라도 열네 살로는 보이지 않는다.


“부작용이 없기는. 어디서 거짓말이야?”


뾰족한 목소리를 낸 것은 옷을 갈아입고 온 디자이라였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고, 넉넉한 크기의 무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그 약. 먹으면 수염자라잖아.”


“그게 뭐 어때서? 남자는 수염이 자라는 게 당연한 거다. 나는 수염이 자라서 좋아. 어른이 된 것 같잖아.”


“여자도 자라잖아, 등신아!”


디자이라는 눈을 찡그리며 쏘아붙였다. 그녀의 나이는 12살인데,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덕인지 욕설도 과감하다. 


“너. 시안과 결투에서는 창을 썼다던데. 왜 지금은 목검이야?”


“난 창도 쓰고 검도 써.”


“어쭈... 이거저거 다 쓰신다? 그것도 독학으로?”


다른 사람이라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주었을 텐데. 디자이라는 감히 그러지 못하고 유진을 빤히 쳐다만 보았다. 그 시안을 일격에 패배시켰다고 했지 않은가. 


“...나는 창 전문이야.”


“어울리네.”


거짓말은 아니었다. 디자이라는 나이치고 키도 컸는데, 특히 팔다리가 길었다. 


“목검만 휘두르는 것도 재미없잖아. 나랑 대련이나 하자.”


“좋아.”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어쩌고 지껄이는 가르기스보다는 시원시원하게 대련을 요구하는 디자이라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방계 중에서도 서열이 높은 아이들의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다. 


“너도 창 써. 나도 창 쓰니까.”


“꼭 그럴 필요있나?”


“나는 네 검술보다는 창술을 보고 싶은 거야.”


디자이라는 대답도 듣지 않고 후다닥 창고로 뛰어갔다. 곧 그녀는 길쭉한 창 두 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받아.”


두 아이가 창을 들고 마주섰다. 여전히 웃옷을 벗고 있던 가르기스가 중앙에 섰다.


“너 뭐하냐?”


“심판을 봐주지.”


“대련에 뭔 놈의 심판.”


“대련도 공정해야 해.”


가르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팔을 높이 들었다. 유진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놈의 겨드랑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새끼. 하는 짓이 꼭 어떤 등신 떠올리게 하네.’


덩치도 그렇고. 성이 라이언하트만 아니었다면 모론의 후손이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했을 것이다.


“내가 시작이라고 하면 시작하는 거야.”


“빨리 시작하라고 해, 등신아.”


디자이라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가르기스는 찔끔 뒤로 물러서며 치켜든 팔을 내렸다.


“시작!”


시안과의 대결은 일격으로 끝냈지만,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디자이라의 솜씨를 봐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디자이라는 곧장 달려들지 않고, 몇 걸음씩 슬금슬금 움직이며 유진의 틈을 찾았다. 


유진은 창을 양 손에 쥔체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디자이라의 움직임에 맞춰 창두만 살짝씩 움직였다. 


‘...윽...’


디자이라의 눈동자가 움찔인다. 그녀는 창술에 꽤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손에 든 것이 정말 창이 맞는가 싶었다.


‘틈이 없어...’


이리저리 움직여 보지만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창이 이런 무기가 아닌데... 디자이라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렇게 틈만 보고 있다가는 아무 것도 못 한다. 디자이라는 그를 확신하고, 과감하게 발을 뻗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뻗은 발보다 아주 조금 늦게, 창이 쏘아졌다. ㅡ따악! 유진이 살짝 움직인 창두가 디자이라의 창을 후려쳤다. 


그 순간. 디자이라는 창과 함께 몸을 회전시켰다. 붕 돌아간 창끝이 다시 유진에게 몰아친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따악! 공격이 걷히자 디자이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익...!”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팔을 흔들었다. 찌르고, 빼고, 찌르고. 그 사이사이에 둔탁한 소리가 섞인다. 작정하고 찌르는 공격들이 죄다 유진에게 걷힌다. 


‘회전도 쓸 줄 알고. 반동과 탄력도 쓸 줄 알아.’


마나를 쓰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 훌륭하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니 앞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어디까지나 미래의 이야기. 유진의 상대는 아니었다. 디자이라의 손에서 창대가 미끄러진다. 그녀는 창의 아래쪽을 잡고서 단번에 창의 공격거리를 늘렸다. ㅡ화악!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은 공격. 유진은 히죽 웃으며 몸을 옆으로 꺾었다.


걷어내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피한 것이다. 그 사실에 디자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여기서 다시 거리를 바꾸어 공격을... 생각은 그러했지만, 현실은 디자이라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창이 바닥과 가까워진 순간. 유진의 발이 창을 짓밟았다. 그리곤 단숨에 디자이라에게 창을 찔렀다. 코앞까지 다가오는 창. 디자이라는 기겁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창은 디자이라의 코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창끝 너머에 있는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무거워...!’


디자이라는 짓밟힌 창을 빼려 용을 썼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창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작 발 하나로 밟고 있을 뿐인데... 디자이라는 울상을 지으며 창을 놓았다. 


창이 빠지지 않는 것보다, 이렇게나 힘을 주는데도 유진의 몸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패배를 절감시켰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이겼다.”


심판이랍시고 서있던 가르기스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뜩이나 설움을 느끼던 디자이라는 눈썹을 왈칵 구기며 가르기스를 노려보았다.


“닥쳐, 돼지새끼야!”


“나는 돼지가 아니야. 돼지는 한센 같은 놈을 말하는 거다.”


“닥치라니깐!”


“디자이라. 너는 아까 가주님의 멋진 말씀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구나. 패배를 부끄러워 여겨서는 안 돼. 상대의 명예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윽...”


디자이라는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씨근거리는 숨을 내쉬다가, 유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졌습니다.”


“그래.”


유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창을 잘 쓰는 구나.”


“놀리는 거냐?”


진심으로 한 말인데. 디자이라는 발끈하며 내뱉었다. 그제야 유진은 자기가 디자이라와 엇비슷한 나이의 꼬마란 것을 다시금 자각했다.


“내가 더 잘 쓰지만.”


“이 개새끼...!”


“그러니까 이겼지. 억울하면 이기던가.”


“닥쳐!”


“에게게게, 한 대도 못 때리고 졌대요.”


그래서 나이답게 행동해 주었다.


혈계식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해.”


그날 밤.


디자이라와 가르기스가 유진의 방을 찾아왔다. 


그때 유진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도 깔끔히 씻고, 뽀송뽀송한 잠옷으로도 갈아입고, 제법 만족스런 하루였다는 자축과 함께 잠들려던 차였다.


“그거 말하려고 자려는 사람 깨우는 거냐?”


유진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대답했다.


“네 대답을 듣고 싶다.”


가르기스가 고집스레 말했다. 그 곁에 선 디자이라는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유진의 실력은 확실히 알지만, 한 대도 맞추지 못했다며 놀려대는 소리가 아직까지 귓가에 맴돈다.  


“힘은 어떻게 합치자는 건데? 너도 아까 가주님한테 혈계식에 대해 들었잖아. 각자 다른 입구로 들어가 미궁을 돌파하는 것이 이번 혈계식이야.”


“하지만 목적지는 똑같지. 미궁의 중앙. 나쁜 대장 몬스터.”


저 덩치에 나쁜 대장 몬스터를 운운하다니.


“대장 몬스터는 아주 강할거야.”


“그럴 지도 모르지.”


“가주님과 적색 마탑주님은 미궁에 함정과 몬스터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셋이라면 혼자서도 중앙까지 돌파할 수 있을 거야.”


“그건 해봐야 아는 거고.”


“나는 몬스터에게 진 적이 없어.”


가르기스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활짝 폈다.


“미궁의 몬스터는 진짜가 아니라 마법으로 만든 환영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무서울 것이 없지.”


“그런데 왜 대장 몬스터는 힘을 합쳐 잡자고 하냐?”


“환영이라도 맞으면 아플 거라고 했잖아.”


“몬스터한테 진 적 없다매.”


“대장 몬스터는 강하니까 대장 몬스터인 거야.” 


가르기스가 당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해. 본가의 쌍둥이도 힘을 합치려 할 테니까, 우리도 힘을 합쳐야 하는 거야.”


“중앙에 모여서 함께 대장 몬스터를 잡자?”


“그래.”


“나는 혼자서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유진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재수 없어.”


디자이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가르기스도 그 말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해보고서 못 잡을 것 같으면, 우리랑 힘을 합치는 거야.”


“너희가 없으면?”


“도망쳐서 우리를 기다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 너희는 이미 둘이잖아. 나 빼고 너희들끼리 해.”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할 거야.”


디자이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두 명보다 세 명이 더 많잖아. 넌 재수 없지만... 나보다 강해. 네가 도와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대장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거야.”


“왜 그렇게까지 잡고 싶어 하는데?”


“본가를 이기고 싶지 않냐?”


디자이라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넌 이미 결투에서 시안을 이겼지만. 혈계식에서도 이기면 가주님이 선물도 주신다고 했잖아.”


“본가와 방계가 함께 참가한 혈계식에서 방계가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어.”


가르기스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나랑 디자이라도 있고. 시안을 이긴 너도 있으니까.”


“나 혼자 잡아도 방계가 이기는 거잖아. 그치?”


“너 혼자 덤벼서 이기면, 나는 엄청 기쁠 거야. 방계 세 명보다는 한 명이 잡는 것이 멋진 일이잖아.”


가르기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덩치가 산만한 것이 등신같은 모론을 연상시켰는데. 하는 말을 들어보니 나름 생각도 할 줄 알고 대범한 구석도 있었다.


“알았으니까 좀 가. 나 잘 거야.”


유진은 누운 체 손을 휘휘 저었다. 디자이라는 영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가르기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디자이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오늘도 다섯 시간 잘 거다.”


“난 여섯 시간 잘 거야.”


생각도 할 줄알고 대범한 구석도 있지만. 등신은 맞는 것 같았다.


“이 등신아. 쟤보다 잠 조금 자는 게 뭐 어쨌다는 거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어.”


“그래서 내일 아침 벌레 잡을 거야?”


“넌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려서 비유가 뭔지 모르는 구나.”


“나가라고!”


유진은 베개를 집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


애니실라는 밤새 고민에 잠겼다. 


혈계식 때문이었다. 흔히 해 온 아이들 간의 대련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뜬금없는 미궁이라니. 


‘그것도 아롯의 적색 마탑주를 직접 초빙해서?’


현명한 세냐는 아롯의 마법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인 라이언하트의 본가는 아롯의 대마법사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당대의 적색 마탑주인 로베리안은 현명한 세냐의 제자라 주장하는 인물이라, 본가의 행사에 몇 번이나 참석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내 아이들의 생일에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애니실라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물론 혈계식은 라이언하트의 전통 행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때문만으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정실부인. 테오니스가 웃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이오드를 제자로 삼기 위해 온 것일지도 몰라.’


그럴 듯한 생각이었다. 이오드는 어려서부터 몸 쓰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마법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서, 진즉부터 이런저런 마법을 수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스승을 둔 적은 없다. 위대한 베르무트에게 붙은 별명. ‘올마스터.’ 베르무트가 무술 뿐만 아니라 마법에도 능했기에 붙은 별명이다. 


하지만 베르무트 이후로 라이언하트의 본가에서 마법을 작정하고 파고드는 이는 많지 않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마법은 경지에 오르는 것이 어렵다. 


본가의 승계경쟁은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다. 그때부터 마법을 익힌들, 본격적인 승계경쟁에서 마법으로 가주에 오르는 것은 가능성이 높지 않다. 


‘이오드는 열다섯... 어려서부터 마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독학으로 익힌 것이야.’


이제 와서 마탑주의 제자가 된다 해서 이오드의 실력이 일취월장할까? 애니실라는 웃음으로 씰룩거리는 뺨을 눌렀다. 


‘사실상 가주 승계를 포기한 것이지. 만약 이오드가 적색 마탑주의 제자가 된다면 본가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어. 그 사이에 시안과 시엘은 무럭무럭 자랄 테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이오드가 아롯에 가버리면, 애니실라는 작정하고 본가를 장악할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시안과 시엘의 자질은 나쁜 편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뛰어나다.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걸맞을 만큼.


‘...문제는 혈계식...’


애니실라는 이번 혈계식의 내용에 불만을 느껴야 할지 기쁨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입구로 들어가서 미궁을 돌파한다? 그렇다는 건 시안과 시엘이 서로 돕지 못한다는 것인데...


‘단순한 대련이라면... 당연히 시안과 시엘 둘 중 하나가 이겼을...’


그를 확신할 수 없다. 방계의 유진이 시안과 결투에서 승리해 버렸다. 그 사실이 애니실라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변수가 많은 미궁... 결투의 결과가 무조건 반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를 기뻐해야 하나? 아니면 본가의 유리함을 거세시키고, 형평성부터 추구하는 독특한 혈계식에 불만을 느껴야 하나.


‘...혈계식에는 절대로 개입해선 안 돼.’


밤새워 고민하던 애니실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에게 은근히 말이라도 건네 볼까 생각했지만, 그녀가 아는 남편은 자식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괜히 운이라도 때었다가는 남편의 혐오서린 시선을 받게 될 것이 뻔했다. 


“...잘해주어야 할 텐데...”


애니실라는 창가를 향해 머리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혈계식까지 앞으로 길어봐야 며칠. 그 사이에 미궁에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학습해야 한다. 덕분에 시안과 시엘은 헤자르의 수련 대신, 수도에서 구해 온 미궁 관련 서적에 파묻혀 있다. 


발끈해서 시안의 뺨을 갈기기는 했지만, 애니실라는 자식을 사랑했다. 


서출이라는 꼬리표를 평생토록 달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모욕과 수치는 입지를 좁힐 뿐.’


시안과 시엘은 아직 어리다. 둘이 천방지축으로 본가를 헤집을 수 있는 것은, 애니실라가 수치를 내비치지 않고 당당히 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의 패배가 아프다. 본가의 피를 정통으로 이었으면서 방계에게 패배하다니... 


‘...차라리...’


애니실라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유진이라는 놈이 미궁을 가장 먼저 돌파한다면.’


감히 떠올려선 안 될 악수(惡手). 만약 그렇게 된다면 본가 전체가 망신을 입는다. 하지만 그 망신은 애니실라 혼자서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 가주인 길레이드도, 정실인 테오니스와 분담하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유진이 미궁을 돌파하는 것으로 시안의 패배가 가려질 수도 있다. 시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저 방계의 유진이 이상하리만치 뛰어나단 식으로.


‘...가장 좋은 것은 시안과 시엘이 미궁을 돌파하는 거지만.’


애니실라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오드나 다른 꼬마보다, 유진이 돌파하는 것이 나아.’


물론 생각만 그러했지, 애니실라는 유진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차선을 생각할 뿐이었다.


*


사흘 뒤.


별채의 아이들은 본가의 부름을 받았다. 숲에 소환한 미궁의 준비가 끝났으니, 오늘부터 혈계식이 시작된다는 부름이었다.


편한 복장. 사적인 준비물은 허용치 않는다. 그럼 무기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런 의문을 품었지만, 일단 시키는대로 기사들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무기는 제가 준비해 드릴 겁니다.”


숲의 안쪽에는 로베리안과 길레이드가 있었다. 둘의 뒤편에는 딱 봐도 수상쩍고 인위적으로 보이는 동굴의 입구가 우뚝 솟아 있었다.


“필요한 무기를 말해주세요. 날까지 세워드리진 않지만, 어차피 어린이여러분의 상대는 실체하지 않는 환영. 그냥 모양만 잡힌 무기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잖아요?”


로베리안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진은 다른 무엇보다 저 ‘어린이 여러분’이라는 말이 싫었다. 대놓고 애 취급하는 말 아닌가. 하지만 실제로 몸뚱이는 애인지라,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무기의 종류는 하나뿐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필요한 만큼 준비해 드릴 겁니다.”


“어떻게요?”


시엘은 방긋방긋 웃으며 물었다. 로베리안은 시엘의 큼직한 눈망울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양 손을 들었다.


“이렇게요.”


ㅡ화아악! 지면의 흙이 치솟더니 로베리안의 손바닥 사이에서 뭉친다. 길쭉한 검이 만들어졌다. 


“우와!”


시엘은 자신에게 날아 온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무게도 적당하고, 쥐는 감촉도 나쁘지 않다. 시엘은 신기하다는 듯이 검을 몇 번 휘둘러 보았다.


“이거 부러지면 어떡해요?”


“하하, 꼬마아가씨.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아저씨는 엄청난 마법사거든요. 저 미궁도 아저씨가 마법으로 불러낸 것이니까, 꼬마아가씨가 들고 있는 검은 미궁의 안에서는 절대로 부러지지 않아요.”


“검 말고 동물도 만들 수 있어요?”


“인형은 만들 수 있죠. 골렘도 가능하고... 살아있는 생명은 못 만들지만요.”


“그럼 아저씨가 만들어준 골렘 가지고 들어가도 되나요?”


“그것 참 앙큼한 생각이군요.”


로베리안은 웃음을 터트리며 길레이드를 돌아보았다. 딸의 꾀에 빙긋 웃고 있던 길레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단다. 골렘이 너 대신 싸워줄 것 아니냐.”


“그럼 다음에 인형 만들어주세요.”


시엘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오드는 두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로베리안의 손을 휘감은 빛을 보았다.


“왜 살아있는 생명은 못 만드는 건가요?”


이오드가 불쑥 물었다. 그 질문에 로베리안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오드를 돌아보았다. 


“마법의 금기니까요.”


“금기?”


“만들기도 힘든데다, 만들어봤자 좋을 것이 없어요. 살아있는 생명을 낳는 것은 존재가 가진 아름다운 권능이니까요.”


“아...”


이오드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저씨, 저는 이거 말고. 조금 더 길쭉하고 얇은 검으로 해주세요.”


“자, 자. 기다려 보세요. 제가 하나하나 만들어드리는 것도 가능은 하지만, 꼬마아가씨의 머릿속에 있는 검을 제가 똑같이 만들기는 힘들어요.”


로베리안은 시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에 휘감긴 빛이 시엘에게 건너왔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직접 만들어 보세요. 다른 어린이 여러분도. 어렵지 않아요. 어차피 마법은 제가 쓰고 있으니까, 여러분은 그냥 머릿속에 있는 것을 뚜렷하게 상상하며 빛을 주물러 보세요.”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 빛이 건너왔다. 이오드는 그 빛을 황홀감 젖은 눈으로 보면서 손끝을 떨었다. 길레이드는 그런 장남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오...!”


가르기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는 가문에 있을 적에 애용하던 대검을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상상한 그대로의, 익숙해진 무게까지 구현되었다. 그는 대검을 어깨에 걸치면서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디자이라도 평소 쓰던 대로의 창을 만들었다. 그녀는 양손에 감긴 창의 감촉을 음미하며, 허공에 대고 몇 번씩 창을 찔렀다. 그리곤 만족스럽단 얼굴로 창을 등에 걸쳤다.


시엘과 시안은 검을 만들었다. 시엘의 검은 길면서 날래보였고, 시안의 검은 길이는 엇비슷하지만 조금 더 무거워 보였다. 


이오드는 평범한 검을 만들었다. 황홀하단 눈으로 빛을 주물렀으나, 검을 쥔 순간 이오드의 눈은 평소처럼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다른 떨거지들도 무기를 만들었지만, 유진은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의욕이라곤 없던 놈들이다. 아마 몇몇은 미궁에 들어가자마자 탐색을 포기할 것이다.


유진은 자기 팔의 길이에 맞는 검과 팔뚝에 차는 소형방패를 만들었다. 


“왜 창은 안 만들어? 너 창 잘 쓰잖아.”


“난 검도 잘 써.” 


“방패는 뭐야?”


“방패도 잘 쓰거든.”


“뭔 다 잘 쓴대.”


디자이라가 투덜거렸다. 시엘은 대화를 나누는 둘을 빤히 보다가 유진에게 다가왔다.


“나랑 미궁에서 만나면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나랑 싸울 거야?”


“싸워도 되나요?”


유진은 길레이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될 것은 없지. 혈계식은 경쟁이 기본이니까.”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시엘은 뺨을 부풀렸다.


“하지만 꼭 싸울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이번 혈계식은 무조건적인 경쟁보다는, 상황에 따른 판단과 협동심도 살필 생각이란다. 결국 우리는 라이언하트란 성을 함께 가진 가족이지 않느냐.”


“가족이래.”


시엘은 유진을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너 생일 언제야?”


“9월.”


“나는 4월이야. 그러니까 내가 누나야.”


“아주 지...”


랄을 하는구나.


그렇게 말을 하려다가, 시엘의 아버지인 길레이드가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처럼 앙큼한 말을 하는 구나.”


“뭐?”


“아니야.”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혈계식


“이걸 하나씩 가지고 차고 들어가세요.”


모든 아이들이 무기를 만든 뒤. 로베리안은 푸른 보석이 매달린 목걸이를 건넸다. 


“그 목걸이는 여러분의 정신과 연결됩니다. 만약 미궁에서 과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 목걸이의 반응을 통해 제가 개입할 겁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안전장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도저히 미궁을 돌파할 수 없겠다 싶으면, 목걸이의 보석을 두드리면서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세요. 그럼 아무 일 없이 미궁을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것은 한센을 비롯한 떨거지들이었다. 어디까지나 전통을 거스를 수 없어 참가한 것 뿐. 그들은 혈계식에 아무런 야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 그럼. 사이좋게 다 같이 들어가도록 합시다.”


해야 할 이야기를 마친 뒤. 로베리안은 활짝 웃으며 동굴의 입구에서 비켜주었다.


“다 같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동굴에 들어간 순간부터 여러분은 다른 길로 인도될 겁니다. 너무 당황하지 말고, 처음에는 길이 하나뿐이니 똑바로 나아가도록 하세요. 거기서부터 못하겠다 싶으면 보석을 두드리시고.”


아이들이 걸어 나간다. 유진은 왼쪽 팔뚝에 찬 방패를 의식하면서 성큼성큼 걸었다. 


“힘내.”


동굴의 입구로 들어가기 전. 곁을 따라 걷던 시엘이 유진을 향해 활짝 웃었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는 말없이 유진을 향해 눈짓을 주었다. 유진은 그들의 시선에 비죽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힘내.”


“응!”


대충 던진 격려에 시엘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동굴에 들어간다. 하나 뿐인 입구를 지난 순간. 주변이 확하고 어두워졌다. 누군가가 놀란 소리를 낼 법도 한데, 그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유진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소환마법으로 불러들인 미로. 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와 보니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로베리안이 대마법사를 자부할 만큼 뛰어난 마법사여서기도 하겠지만, 아직 미숙한 육체가 마법 특유의 위화감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철저하게 육체의 감각에만 의존해야 한다. 다행히 그건 유진이 자신 있는 분야 중 하나였다.


유진은 호흡을 낮고 길게 내쉬었다. 애당초 흥분은 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심신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오감을 하나씩 의식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은? 미궁 탐색에 별 쓸모는 없는 기관이다. 하지만 유진은 혀끝을 살짝 씹는 것으로 입안에 피의 맛을 감돌게 만들었다.


그렇게.


의식 된 감각이 집중된다. 반복해서 내쉬는 호흡이 정신을 일깨운다. 그렇게 해서 열리는 직감은 가히 육감이라 할 만 했다. 


깨워낸 정신에서 불러들이는 것은 우둔한 하멜의 경험이다.


미궁 탐색? 전생에서 질릴 만큼 해보았다. 땅속으로 파고드는 몬스터들 대부분은 제 둥지를 미로처럼 만든다. 한낱 개미새끼도 그렇게 둥지를 만들고, 심지어 고블린조차도 그렇게 둥지를 꾸린다.


마물은 말할 것도 없다. 마경 헬무드. 현대에 이르러서는 비싼 돈을 치르며 관광여행까지 가는 곳이라는데. 하멜이 떠돌았던 헬무드는 이 세상에서 존재해선 안 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지옥이었다.


그곳에서 몇 번을 죽을 뻔 했는지. 자신하던 실력의 대부분이 헬무드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 등신같은 모론조차도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스스로를 대마법사라며 추켜세우던 세냐는 자신의 마법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언제나 신이 보살펴 주실 것이라던 아니스도 헬무드에서는 신보다는 동료의 이름을 더 많이 불렀다. 


유일하게 베르무트만이 동요하지 않았었다.


“...”


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용사 베르무트와 동료들... 맞는 말이다. 일행의 중심은 베르무트였다. 놈이 없었다면 다들 헬무드를 돌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멜도, 모론도, 세냐도, 아니스도. 처음 헬무드에 들어갔을 때에는 어리고 미숙했다.


그러나.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베르무트만큼은 아니어도, 동료들 전원은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놈이라는 착각을 한 번쯤은 했던 놈들이었다. 그러니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동료들은 헬무드에서의 매일을 일상처럼 여겼다. 모론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고, 세냐는 제 마법에 확신을 가졌으며, 아니스는 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다.


하멜은.


베르무트보다 나약한 자신이 싫었다.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것이 싫었다. 그는 도저히 베르무트처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제 자신에게 억지를 부렸다. 베르무트처럼 못하니까, 자기방식대로 성장하고자 했다. 


베르무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멜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니 두려움에 익숙해져 극복한다.


베르무트는 무엇이든 쉽게 해버린다.


하멜은 쉽게 할 수 없다. 처음에는 곧잘 해도 언젠가는 벽을 맞닥트린다. 


그러니 벽을 부수고 나간다. 


미궁.


이곳도 마찬가지다. 


베르무트는 처음 접하는 미궁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언제나 길을 찾으려 들었다. 놈도 사람은 사람이라 언제나 맞는 길을 고르지는 못했다.  


놈이 실패할 때마다. 또 맞는 길을 고를 때마다. 하멜은 베르무트가 어떤 근거로 옳은 길을 찾았고, 무엇이 잘못 되어 옳지 않은 길을 골랐는지를 살폈다. 하멜은 베르무트 같은 타고난 직감 따위는 없었기에,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메웠다. 


그 경험은 유진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애들보고 돌파하라고 만들어 놓은 미궁이야. 죽일 작정으로 만든 미궁도 아니라고. 그렇다면... 노골적이고 뻔하지.’


유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로베리안이 말한 것처럼 시작은 외길. 여전히 주변은 어둡다... 하지만. 일정 거리를 나아가니 천천히 어둠이 걷힌다. 


좌우의 벽.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 난감하지 않을 만큼 거리는 넉넉하다. 하지만 창을 마음껏 휘두르려면 제 위치를 여러모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유진은 창을 고르지 않았다. 검과 방패. 이 기본적인 조합은 거의 모든 상황에 대응이 가능한 만능의 조합이다.


‘천장은 막혀있군.’


벽을 기어 올라서 넘어가는 꾀는 쓸 수 없다. 유진은 예민하게 깨운 감각 중에 후각을 의식했다. 아직까지 입안에 감돌고 있는 피의 맛. 피의 냄새. 그것을 우선해서 배제하는 식으로 이질적인 냄새를 찾는다. 


엷게나마 기름 냄새가 난다. 마나를 다룰 수 있다면 보다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텐데. 유진은 작은 아쉬움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걷자 갈림길이 나왔다. 이어지는 길의 형태는 똑같다. 기름 냄새가 나는 것은 왼쪽. 마법으로 만들어놓은 함정인데도 기름의 냄새가 난다. 과연 노골적이고 뻔했다. 


하지만 유진은 왼쪽 길로 나아갔다. 제 판단이 옳은가 확신을 얻기 위해서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척 하면서, 발바닥에 전해지는 체중을 걸음 한 번 한 번에 집중해서 싣는다.


하나, 둘, 셋, 넷...


일곱.


닿는 발판이 아래로 조금 내려간다. 거기서 하나, 둘... 


‘셋.’


파악! 벽돌의 흠에서 화살이 쏘아진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방패를 들었다. 투웅! 화살은 방패를 꿰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유진은 더 나아가지 않고 몸을 돌렸다.


‘쉽네.’


역시 애들 수준을 맞췄다는 것이지. 유진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굳이 틀린 길까지 확인할 때마다 세냐가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과거의 회상은 경험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추억까지 함께 불러일으킨다.


“씁.”


유진은 속이 쓰려지는 것을 느끼며 오른쪽 길로 돌아갔다. 


*


“돌아가서 쉬거라.”


길레이드는 싸늘한 시선을 거두었다. 


한센은 가장 먼저 목걸이를 두드리며 포기를 선언했다. 어차피 경쟁이 안 될 것이라 생각했고, 괜한 고생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부모님도 아들이 무언가 이변을 일으키리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네... 네.”


쭈뼛거리며 서있던 한센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구조요청이 들려왔다. 10살의 쥬이스는 미궁을 나아가기는 했으니 한센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첫 번째 함정에서 화살을 맞고, 눈물을 질질 짜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조금 지난 후. 다시 구조요청이 돌아온다. 11살의 데콘이었다. 몸에 화살을 맞은 것은 꾹 참았지만, 그 뒤에 맞닥트린 슬라임에게 된통 당해버린 것이다. 슬라임은 날병기로 상대하기 곤란한 몬스터다. 데콘은 슬라임의 점액질 몸뚱이에 삼켜져서 살려달라며 비명을 질렀다.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홉 명은 여섯 명이 되었다. 한심하단 생각은 들지만, 예상했던 바이긴 했다. 그 누구도 저 세 떨거지가 무언가를 보여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가르기스... 어설프지만 멈추지 않는군.’ 


로베리안은 허공에 미궁의 영상을 띄워놓았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나눠진 화면에 비춰진다. 가르기스는 함정을 피해가는 것보다는 우직하게 돌파하는 것을 택했다. 몸에 화살이 맞아도, 몬스터를 맞닥트려도. 제 몸뚱이만큼 커다란 대검을 휘둘러 으깨고 나간다.


‘디자이라는 날렵해. 직감도 있고...’


함정에 당하면 즉시 길을 바꾼다. 몇 번인가 함정을 피하기도 했다. 몬스터와도 굳이 싸우려 들지 않는다. 다른 길이 있다면 돌아간다. 그녀가 창을 휘두르는 것은 물러설 수 없을 때 뿐이었다. 


‘시안은 너무 신중해. 하지만 나쁘지 않아.’


애니실라는 유명한 모험가들의 수기나 여러 미궁의 설계도를 구해 쌍둥이들에게 교육시켰다. 그렇게 쌍둥이는 미궁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와 공략법을 학습했다. 그건 이 노골적이며 뻔한, 쉬운 미궁을 돌파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가령. 저 미궁은 사방이 막혀있다. 하지만 마법으로 인해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간다면 길을 찾는 것에 도움이 된다. 잘 살핀다면 길에 인위적인 흔적을 찾아낼 수 있고, 그런 것이 없다면 함정이 발동 된 순간의 판단에 따라 회피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안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다만, 신중한 것에 비해 어설픈 구석은 있었다. 생각이 유연하지 않다. 떠올린 기억만 무조건 의존하려다보니 시야가 좁아진다. 그래서 쉬운 함정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시엘은 감각적이야. 사고도 유연하고. 하지만... 어린애다운 구석이 있어.’


시엘은 신발 따위의 물건을 던져보는 식으로 함정을 발동시켰다. 그렇게 몇 번을 하고서 굳이 함정이 있는 길로 나아간다. 길이 막힌다면 다시 돌아오고, 막혀있지 않다면 계속해서 간다. 몬스터와 만났을 때에는 바로 싸우지 않고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괴롭혀 본다.


이오드는.


“...어떻소?”


“마법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군요.”


이오드는 미궁을 돌파하는 것에만 열중하지 않았다. 그는 함정을 하나하나 살피고, 몬스터를 보면 감탄을 터트렸다. 환영으로 만들어진 몬스터인데 이만큼이나 생동적이라니. 어찌 몬스터를 쓰러트린 뒤에도 곧장 떠나지 않고, 꽤 오랫동안 몬스터의 사체를 살피며 눈을 빛내었다. 


검을 휘둘러 몬스터와 싸울 때에는 눈이 칙칙하게 죽어있었는데. 마법과 접할 때에는 웃는다.


“...어려서부터 그랬지. 육체와 기술을 단련하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어. 특히 마법에 관한 동화를 들려줄 때마다 즐거워했지. 그거 아시오? 이오드, 저 아이는 선조인 위대한 베르무트보다 현명한 세냐를 더 존경한다오.”


“세냐님은 모든 마법사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시지요.”


로베리안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용사 베르무트의 모험’에서 베르무트님보다는 세냐님의 이야기가 좋았지요. 일행이 곤궁해 처할 때마다, 세냐님의 마법은 놀라운 해답을 내놓곤 했잖습니까.”


“그 동화는 나도 어릴 적부터 읽었지. 나는... 하멜을 좋아했지만 말이오.”


“우둔한 하멜 말입니까?”


“그가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면 동화책은 아주 지루했을 거요. 그는 심술궂은 인물이었지만 정의로웠고... 선조 베르무트님에 대한 열등감을 스스로 노력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했소. 모두가 베르무트님의 의견을 따를 때에도 하멜 혼자만 다른 의견을 내었지.”


“전 어릴 때부터 하멜이 싫었는데 말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멜 덕에 일행은 몇 번이나 위기를 겪었으니까... 하지만 그 위기 때마다 하멜은 항상 자신이 책임을 지려 했소. 나는 도저히 하멜을 미워할 수가 없더군...”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영상을 보았다.


“...이오드. 저 아이는 어려서부터 마법을 배우고 싶어 했소. 실제로 배우기도 했지. 수도의 마법교사를 초빙하기도 했고... 그런데 도중부터는 마법을 더 익히려들지 않더군.”


“그 이유를 아십니까?”


“현실에 포기한 것이오. 어미를 위해서... 자신이 가주가 되어야 한다 결심한 것이지. 마법은 승계경쟁에서 유리하지 못하니까.”


승계경쟁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뭐 이해는 합니다. 마법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만큼, 가야 할 길이 험난하고 멀지요.” 


“솔직히 나는 이오드가 마도(魔道)의 길을 걸었으면 좋겠소.”


길레이드는 씁쓸히 웃으며 로베리안을 돌아보았다.


“방계 중에서도 마법을 전문적으로 익힌 가문은 하나뿐이오. 그래서 몇 번이나 이오드를 그쪽에 보내보려 했지만, 이오드가 거절하더군. 하지만... 적색마탑주의 제자라면 거절하지 못할 것이오. 이오드의 마음에는 아직 마법에 대한 열망이 있으니까.”


“확답은 못 드립니다.”


로베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나 제자로 들일 수 없으니까요. 길레이드님과의 인연도 있으니 데려가기는 하겠습니다만... 자질이 눈에 차지 않는다면 제자로 들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소. 나도 억지를 부릴 생각은 아니오. 다만, 저 아이가 꿈에 몰두하게 해주고 싶소.”


시안과 시엘의 계승권을 위해서가 아니다. 장남이 하고 싶지도 않은 일에 몰두하며 썩어드는 것이 괴로울 뿐이다. 


정실인 테오니스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리고 이오드의 등을 떠밀기 위해, 적색마탑주까지 직접 데려왔다.


“...뭐 이오드님의 자질은 찬찬히 살피도록 하죠. 이번 미궁에서 이오드님은 마법을 쓸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요.”


로베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화면을 보았다.


“...그런데... 유진. 저 아이는 대체 뭡니까?”


감탄은 이미 몇 번이나 터트렸다. 이제는 감탄보다 당혹스런 감정이 앞선다.


“...나도 모르겠소.”


길레이드는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화면 속의 유진은 트롤의 환영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혈계식


트롤이라니. 열 살배기 애들 상대로는 너무하지 않나?


맞닥트린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트롤도 아니고 마법으로 만들어낸 환영 아닌가. 실제로 공격당하는 것도 아니고. 아픔은 느낀다지만, 그것도 마법에 의한 착각이다.


공포만 극복할 수 있다면 상대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통증을 참고, 파고들어서, 일단 공격만 쑤셔 박으면 잡을 수 있다.


‘진짜 같기는 하네.’


유진은 트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감탄을 느꼈다. 환영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데도 진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움직임은 물론이고 트롤 특유의 역한 체취까지 구현하다니. 


‘그래도 양심은 있나 봐.’


덩치를 보면 장성한 트롤은 아니다. 사냥과 싸움에 능숙하지 않은, 아직 자립할 수 없는 어린 나이. 심지어 그 흔한 곤봉도 들고 있지 않다. 


그렇다곤 해도 13살의 유진보다는 훨씬 크다. 유진은 슬며시 방패를 들고서 트롤에게 다가갔다. 


‘오크나 고블린은 때려죽여 봤는데. 이 몸으로 중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네.’


실체없는 환영이라고 해서 대충 싸워 볼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거리던 차다. 미궁에 들어오고서 꽤 시간이 흘렀고, 상당히 많이 나아갔다고 생각하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별다른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몸을 좀 풀어야겠다. 유진은 서서히, 노골적으로 트롤과의 거리를 좁혔다. 저편에 있는 트롤은 커다란 눈만 끔벅거릴 뿐, 바로 유진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겪었던 일이다. 이 미궁의 몬스터들은 일정 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선공해오지 않는다. 참가한 아이들의 나이를 감안한 배려이리라.


‘슬슬.’


유진이 발을 앞으로 더 밀어냈을 때. 


트롤의 움직임이 바뀐다. 놈은 홱 몸을 틀어서 유진을 향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큼직한 이빨 사이에서 침이 뚝뚝 흐른다. 애들 겁주기에 충분한, 아니, 과할 정도로 험상궂은 얼굴. 


하지만 유진은 두려움 대신 즐거움을 느꼈다. 


‘모론이랑 닮았다니까.’


사실 모론과 닮은 몬스터는 한둘이 아니었다. 트롤이나 오우거, 사이클롭스, 그러니까... 두발로 걷는 인간형의 못생긴 몬스터들. 유진은 그런 몬스터들이 죄다 모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론도 그 사실을 완전히 부정한 적은 없었다. 놈은 자기가 못 생겼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유진은 옛 동료의 못생긴 얼굴을 떠올리며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트롤이 반응을 보였다. 어리숙하고 둔한.


그래서 쉽다.


카가각! 유진의 검이 트롤의 종아리를 가른다. 트롤의 다리사이로 파고 든 유진은 재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뒤를 점했다. 그리고는 머뭇거리지 않고 놈의 오금에 검을 휘둘렀다. 


트롤치고는 베는 맛이 가볍다. 역시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것이다. 게다가 유진이 쥐고 있는 검은 날을 세운 진검도 아니다. 


그럼에도 검광은 연거푸 번뜩인다. 몇 번에 걸쳐 베고 지나간 참격이 트롤의 오금을 끊었다. 


진녹색의 피가 뿜어진다. 유진은 굳이 몸으로 받지 않고 방패로 얼굴을 가렸다. 활짝 뜨인 감각은 트롤의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놈은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으며 괴성을 질렀다. 큼직한 손이 유진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방패가 위로 올라간다. ㅡ투두두둑! 베는 맛은 가벼운 주제에 공격은 꽤 무겁다. 13살의 몸뚱이. 단련은 과하다시피 해왔지만, 트롤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  


그래서 흘려낸다. 기울인 방패의 각도와 더불어 어깨와 팔을 통째로 사용한다. 내리찍은 주먹은 방패의 빗면을 긁으며 미끄러진다.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나도 팔 째로 짓뭉개졌겠지만, 유진은 자신이 실패할 것이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패링은 완벽했다. 가뜩이나 한쪽 다리의 오금이 끊어졌는데. 주먹까지 땅에 처박히니 트롤의 거구가 균형을 잃는다. 


트롤이 반대편 팔을 막무가내로 휘두른다. 유진은 한 손으로 잡은 검을 날렵하게 휘둘렀다. ㅡ파바박! 트롤의 팔 가죽이 난도질되어 피가 뿜어진다. 유진은 그 아래를 파고들면서 손아귀의 검을 빙글 돌렸다.


콰직! 무릎 꿇은 트롤의 발뒤꿈치에 검이 처박혔다. 환영이라고는 해도 통증에는 반응한다. 트롤이 입을 쩍 벌리며 비명을 지른다. 전신으로 퍼지는 고통이 트롤의 몸을 마비시켰다. 


‘입냄새까지 구현할 필요는 없잖아.’


유진은 그런 불만을 느끼며 방패를 휘둘렀다. 뻐억! 방패는 쩍 벌리고 있던 트롤의 아래턱을 갈겼다. 동시에 발뒤꿈치에 박힌 검을 뽑아서, 트롤의 갈빗대 사이에 쑤셔 넣었다.


“커르르륵!”


폐를 쑤셨다. 몸집이 워낙 커서인지 등까지 꿰뚫지는 못했다. 그럴 생각이 없기도 했다. 유진은 갈빗대의 방향대로 검을 전진시켰다. 그렇게 폐를 완전히 썰어버리고, 흉골과 닿는 순간 검을 뽑는다. 트롤은 더 이상 팔을 휘젓지도 못하고 컥컥이며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일반적인 몬스터라면 더 싸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트롤은 재생력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환영인 트롤도 그럴까 싶었지만, 유진은 괜한 빌미를 남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철저하게 트롤을 무력화시켰다. 더 저항하지도 못 할 만큼 몰아붙였지만, 굳이 수고를 더해가며 트롤의 몸을 찢어발겼다. 심장을 대여섯 번은 더 쑤시고, 목에도 검을 찔렀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지만, 칼날은 단 한 번도 뼈에 걸리지 않았다. 


“후.”


공 들여 트롤을 죽인 뒤. 


유진은 만족스럽단 표정을 지으며 트롤을 지나쳤다. 


로베리안과 길레이드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로베리안은 어떤 감상을 읊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환영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트롤인데. 본가의 아이도 아닌, 13살의 어린아이가... 트롤을 보고 놀란 소리를 내기는커녕, 압도적으로 찢어 발겨버렸다. 


“...거참... 잔인하군요.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로베리안은 일단 그렇게 중얼거렸다. 길레이드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똑같이 멍한 눈으로 화면을 보던 길레이드는, 곧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실전이라 생각될 만큼 잘 만들어진 환영이잖소.”


“그야 그렇지만...”


“대단하군. 아주 대단해... 트롤을 상대한 적은 없을 텐데... 두려움에 굳기는커녕 과감하고 깔끔하게 트롤을 무력화시켰어...”


길레이드는 유진의 검술에서 흠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굳이 지적하자면, 저건 검술이라기보다는 도축과 해체에 가까운 형태긴 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찌 되었든, 유진의 검은 훌륭하게 트롤을 죽였다.


“미궁의 돌파도 군더더기 없었습니다.”


로베리안은 유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처음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함정에 걸리지 않았어요.”


“행동하는 것만 보면 미궁이 익숙한 것 같았소.”


“저 아이의 고향이 어딥니까?”“기돌이오.”


“그쪽은 미궁도 없을 텐데. 거참...”


대부분의 미궁은 마법사의 은신처로 쓰인다. 그러다가 가끔, 미궁의 주인인 마법사가 죽거나 떠난 후에 미궁이 모험가들에게 발견되곤 한다.


운이 좋다면 미궁에서 보물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렇게 챙길 것을 모두 챙긴 뒤. 보물이 없는 미궁은 그럴 듯한 관광지로 탈바꿈된다.


“...뭐 꼭 미궁을 자주 다니지 않았어도. 책 따위로 배운 것일 수도 있지.”


“보통 13살의 아이는 미궁과 관련 된 서적을 탐닉하지 않을 겁니다.”


“저 아이가 보통의 아이로 보이지는 않잖소. 그리고 지식이 아니라 감각에 의존하는 것일 수도 있고...”


“...흠... 아이들임을 감안해 만든 미궁이기는 하지만... 감각만으로... 저렇게 쉽게 돌파할 수 있게끔 쉽게 만들지는 않았는데...”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타고난 것이 대단하다면 저렇게 할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런 부류의 아이를 뭐라고 부르는지는 로베리안도 잘 알았다.


‘천재.’


이제 길레이드는 더 이상 시안과 시엘, 로이드를 보지 않았다. 


그는 즐거운 눈으로 유진이 미궁의 중앙을 향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


몬스터와 맞닥트릴 때. 무조건 싸워 쓰러트리고 지나가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이 미궁에서 트롤은 그런 몬스터였다. 작정하고 날뛰기에는 불편한, 거대한 체구. 느린 반응... 무조건적인 싸움보다는, 틈을 보아 지나치라고 놓은 ‘함정’이다.


굳이 트롤과 싸운 것은 가르기스와 유진 둘 뿐이었다. 


“우오오오!”


가르기스는 격앙된 포효를 내질렀다. 전신이 성한 곳 없었으나, 용감한 가르기스는 결국에는 못된 트롤을 쓰러트렸다. 가르기스는 트롤의 가슴에 처박힌 대검을 뽑아서,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게 포효로 승리를 자축하다가.


힘이 쭉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많이 맞았어...’


자랑스러운 근육이지만 트롤의 공격은 강력했다. 뼈가 몇 개나 부러졌는지 모르겠다. 


“아프다...!”


가르기스는 이를 악물고서 내뱉었다. 화살에 맞았을 때보다, 달려드는 쇠구슬과 충돌했을 때보다 아프다. 이 모든 통증이 마법의 장난이란 건 알지만, 아픈 건 아픈 것이다... 가르기스는 찔끔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트롤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벽을 짚으며 비틀비틀 나아갔다. 


‘내가 이만큼이나 당했으니... 다른 녀석들도...’


디자이라가 강하단 것은 안다. 유진은 그녀보다 강하다. 하지만 트롤보다 강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빈약한 몸뚱이가 거대한 트롤을 어찌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 걱정과는 달리 디자이라는 멀쩡했다. 그녀는 트롤과 정면에서 싸우지 않고, 틈을 노려 트롤을 지나치는 것에 성공했다. 그건 시안과 시엘도 마찬가지였다. 


시안과 시엘은 도중에 합류했다. 거기서부터 시엘은 앞장서지 않고, 은근히 시안을 구슬려 길을 열게 만들었다. 그건 시엘에게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오빠, 어느 길로 가야 돼?”


“넌 그것도 모르냐?”


“잘 모르겠어.”


“이 바보야. 같이 책 봤으면서 왜 몰라? 나 하는거 잘 봐봐.”


시안은 몇 초 늦게 태어난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동생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그를 동생 앞에서 과시하고 싶어 했다.


지금도 그랬다. 동생의 입에서 ‘모르겠어’란 말이 나온 순간부터. 시안은 동생 앞에서 우쭐거릴 기회라고 판단했다. 마침 며칠 전에 동생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으니, 지금이야말로 구겨진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처지지 말고 잘 따라와. 이 미궁은 적색 마탑주님이 만든 미궁이야.”


“근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거지. 갑자기 앞에서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어. 어쩌면 천장에서 이상한 게 떨어질 지도 모르고.”


“귀신같은 거?”


“바보야, 이럴 때에는 귀신이 아니라 언데드라고 말하는 거야. 언데드가 뭔지 알아?”


“좀비랑 구울 같은 거잖아.”


“그치. 우리가 본 책에 나왔잖아. 못된 흑마법사가 만든 미궁. 보물에 눈이 먼 멍청한 모험가의 무덤! 옛날의 흑마법사들은 미궁에서 죽은 모험가들로 언데드나 키메라를 만들었대.”


“하지만 적색 마탑주님은 흑마법사가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어쩌면 환영으로 나올 지도 모르는 거야.”


“나 귀신은 무서워서 싫어.”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


사실 시안도 귀신이 무섭기는 했다. 


아주 어렸을 적, 남매가 같은 방을 썼을 때. 둘은 밤마다 유모를 닦달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가끔 유모가 무서운 이야기라도 해줄 때면, 시안은 밤새 잠들지 못해 괜히 침대 밑과 장롱 안을 의식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 망신스런 두려움을 동생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쟤는 왜 뜬금없이 귀신 얘기를 하고 난리야?’


시안은 몸의 떨림을 다잡으며 천장을 힐긋힐긋 보았다. 그가 상상했던, 천장에서 떨어질 ‘이상한 것’은 고작해야 거미나 그런 종류의 몬스터였다. 귀신은 생각도 안 했다. 


당연히 시엘은 일부러 귀신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오빠가 어려서부터 귀신을 무서워했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지금 앞장서며 우쭐거리는 오빠를 골려주고 싶었다.


‘뭐라도 나와서 오빠가 놀랐으면 좋겠다.’


시엘은 짓궂은 생각을 하며 시안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어느 순간부터 갈림길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직진은 아니었고, 길이 이리저리 꺾인다. 그럴 때마다 시안은 저 옆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과하게 경계했다. 


오빠가 좀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 시엘은 슬슬 지루해졌다. 차라리 등을 콕 찔러볼까. 그럼 오빠가 깜짝 놀란 소리를 낼 것 같은데. 언제쯤? 지금은 오빠가 경계하고 있으니까, 적당히 마음이 풀렸을 때. 


“오빠. 유진도 아직 미궁에 있겠지?”


“...그 개자식은 날 이긴 놈이야. 몬스터와 함정에 당했을 리 없어.”


“어쩌면 함정에 빠졌을 수도 있잖아. 내가 봤던 함정 중에서는 엄청 깊은 구멍도 있었어. 거기 빠지면 밖으로 못 나오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 


시안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어머님 덕에 미궁에 대해 배우고 들어왔지만. 다른 녀석들은 그러지 못했잖아. 특히 유진, 걔는 시골 촌놈이니까 미궁이 뭔지도 모를 거야.”


“도중에 만나면 재밌었을 텐데.”


“야, 뭐가 재밌어? 놈은 우리 경쟁자야.”


“하지만 아버님은 무조건 싸우며 경쟁할 필요는 없다고 했잖아.”


그 말에 시안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야 그렇지만. 싸우면 안 된다는 말도 안 하셨어. 그러니까, 놈과 만나면 난 싸울 거야.”


“이길 수 있어?”


“그때 진건 방심해서 진거야. 다시 싸우면 당연히 이겨!”


“정말?”


“당... 연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안은 승기를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는 유진에게 얻어맞았을 때의 아픔과, 매섭게 치켜 뜬 유진의 눈을 떠올렸다. 그러자 몸이 멋대로 떨린다. 가뜩이나 귀신 얘기를 들어서인지 떨림이 더 신경 쓰였다. 


“괜히 말 걸지 마, 시엘.”


시안은 그렇게 내뱉으며 시엘을 돌아보았다. 시엘은 혀를 삐죽 내밀며 웃었다.


“나 집중해야아아아아악!”


시안은 동생을 한 번 흘겨본 뒤에 다시 앞을 보았다. ...골목 안쪽에서 피범벅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시안은 눈을 까뒤집고 꽥 비명을 질렀다. 


“끼야아악!”


골목 너머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안, 시엘! 혈계식은 경쟁이다. 방심하는 틈을 노려서 기습해 볼 생각이었는데... 시안의 커다란 비명에 디자이라도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악!”


둘의 비명이 섞인다. 시엘은 그 모습에 배를 잡고 웃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비명을 지르다가, 시안은 정신을 차리고서 검을 빼들었다.


“디자이라! 너 감히 날 놀래켜?!”


“제, 제가 더 놀랐어요!” 


디자이라는 시안보다 나이가 어리다. 거기에 방계라는 처지 덕에 감히 시안에게 말을 편히 하지 못했다. 그녀는 껑충 뛰어 뒤로 물러섰다. 기습은 실패다.


“네가 왜 놀라! 너, 너 꼴이 왜 그래? 나 놀래 키려고 그러고 나온 거잖아!”


“다친 거예요!”


“거짓말 마!”


디자이라는 억울해 죽을 것만 같았다. 온갖 함정과 몬스터, 거대한 트롤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아무리 디자이라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뛰어난들, 자잘한 상처들은 피할 수 없었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한 것은 이마가 까진 탓이다.


“용서치 못해...! 감히 날 놀래켜?! 네, 네 꿍꿍이를 모를 것 같아? 날 놀라게 한 뒤 기습하려 했던 거지!”


“아니에요!”


그건 사실이었지만. 시도조차 못했다. 디자이라는 억울해 외치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빠, 쟤 도망쳐!”


“감히!”


시안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동생 앞에서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게 만들다니! 귀신인 척 분장하고서 튀어나온 디자이라는 참으로 비열했다. 갑자기 공격한 유진보다 더 비열하다. 그러니 용서할 수 없다. 시안은 디자이라를 쫒아 달렸다. 


시엘도 깔깔 웃으며 시안의 뒤를 쫒아갔다. 아무리 디자이라가 팔다리가 길고 빠른들, 마나를 수련한 쌍둥이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진다. 


‘가르기스, 이 개새끼는 어디 간 거야?’


“가르기스!”


디자이라는 꽥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때 가르기스는 트롤의 위에서 포효하느라 디자이라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도망치지 마!”


“전 아무 잘못도 안 했어요!”


“그런데 왜 도망쳐?!”


“시안님이 절 괴롭힐 거잖아요!”


“맞아!”


시안이 외쳤다. 그 대답에 디자이라는 젖먹던 힘을 쥐어짰다. 차라리 맞서 싸워? 시안 혼자라면 모를까 시엘까지 있는데. 게다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는 절대 못 이긴다.


‘유진.’


이 새끼는 어디 있는 거야? 달리던 디자이라가 함정의 발판을 밟았다. ㅡ쿠우웅! 바닥이 푹 꺼진다. 디자이라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콰당! 간신히 구멍을 뛰어넘은 디자이라는 엉덩이로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아픈 엉덩이를 부여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도망치지 말라고 했잖아!”


시안은 갑작스런 함정에 일단 멈추고서 고함을 질렀다. 디자이라는 헥헥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앞으로 뛰었다.


“오빠!”


시안은 잠시 함정을 내려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다. 게다가 건너편과의 거리가 제법 멀다.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하나? 시안은 잠시 고민하며 주춤거렸다. 


그러다가 동생의 기대어린 눈을 보았다. 시안은 입술을 꽉 씹었다. 더 이상 망신을 당할 순 없다. 


“이야아아!”


시안은 고함을 지르며 함정을 뛰어넘었다. 전신에 퍼진 마나는 그 먼 거리를 도약하게 만들었다. 


“시엘! 너도 와! 내가 잡아줄게!”


“응!”


시안은 결의어린 눈으로 양팔을 활짝 펼쳤다. 하지만 시엘은 시안의 도움 없이 함정을 뛰어넘었다. 어려서부터 똑같은 것을 배운 쌍둥이다. 시안이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시엘도 할 수 있다.


“...역시 내 동생이야.”


시안은 펼친 팔을 어색히 내린 뒤, 도망친 디자이라의 추격을 재개했다. 


둘은 오래 가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그건 디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대장 몬스터다.”


맹렬히 달린 끝에, 셋은 미궁의 중앙에 도달했다. 길의 저편, 사방이 벽으로 막힌 거대한 공동이 있다. 그 중앙에는 트롤보다 훨씬 큰 몬스터가 앉아있었다. 


“왜 너희 셋이 함께 오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넌 여기서 뭐해?”


“뭐하긴. 앉아 있잖아.”


“왜?”


“누가 먼저 오나 궁금해서.”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히죽 웃었다.


빙글 휘어진 눈에는 심술궂은 장난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혈계식


“누가 먼저?” 


시안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유진의 말이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미궁을 가장 먼저 돌파하고, 중앙에 도착해 있던 것은 유진이다. 


“디자이라가 먼저 왔어.”


“쟤는 도망쳐 온 거야!”


“왜 도망쳐?”


“그건...”


도저히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피 칠갑을 한 모습이 귀신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그게 부끄럽고 화가 나서 혼쭐을 내주려고 했다... 그렇게 설명하려면, 시안 자신이 귀신이 무서워 비명을 질렀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디자이라가... 날... 모욕했어.”


“넌 모욕이란 말을 참 좋아하는 구나.”


“제가 언제 시안님을 모욕했어요?”


디자이라가 억울하단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생각했던 대로 기습에 성공했다면 이만큼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안님이 과민반응한 거예요. 저희 그냥 길에서 마주친 것 뿐이잖아요!”


“네가 날 일부러 놀라게 했잖아!”


“그런 적 없어요! 오히려 제가 시안님 비명에 놀랐다구요!”


“난... 난 비명을 지르지 않았어.”


시안은 귀를 빨갛게 물들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단지... 단지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른 거야. 네가 날... 그래! 디자이라, 네가 날 기습하려고 했잖아!”


“...안 그랬어요.”


“너 잠깐 망설였지! 네가 눈동자 굴리는 거 다 봤어. 너 진짜 기습하려고 했구나?! 감히, 감히 방계인 네가 날 공격하려고 해?!”


“아 진짜! 아니라고!”


억울하고 당황한 마음에 빽 고함을 질렀다. 성격대로 지른 외침에 시안이 눈을 부릅 뜬다. 


“너 왜 나한테 반말해! 난 본가의 자식이고 너보다 한 살 많아!”


“아니라는데 자꾸 우기잖아!”


“또 반말...”


“그만.”


유진은 저 유치한 말싸움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시안이 받은 모욕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별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디자이라가 가장 먼저 왔어.”


“가장 먼저 온 건 너잖아.”


시엘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내가 가장 먼저 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디자이라는 유진을 힐긋 보며 물었다. 같이 힘을 합쳐서 대장 몬스터와 싸우자. 가주님과의 저녁식사 후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유진 혼자서 대장 몬스터에게 도전해서 실패했다는 것일까? 


“양보해주겠다는 거야.”


유진은 웃으며 말했다.


“...양보?”


“나는 쟤랑 싸워서 이길 수 있거든. 근데 내가 먼저 후다닥 잡아버리면, 기껏 고생하며 여기까지 온 너희가 불쌍하잖아.”


“뭐가 어쩌고 어째?”


시안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건 분명한 모욕이었다. 그처럼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으나, 디자이라도 표정을 찌푸리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시엘은? 그녀는 분노나 모욕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이 너무나도 우습고 재미있어서, 과연 어떻게 될 지를 기대하며 눈을 반짝였다.


“공평하게, 온 순서대로 하자고.” 


“너... 제정신으로 말하는거 맞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몬스터한테 머리라도 몇 대 맞은 거 아냐?”


“안 맞았어. 난 아주 멀쩡해.”


유진은 앉은 자세에서 일어서지 않고 디자이라를 올려다보았다.


“못 이길 것 같으면 포기해도 돼. 그건 네 자유니까.”


포기라고? 디자이라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양보란 소리를 듣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포기라는 말이 더더욱 디자이라를 화나게 만들었다. 


“안 포기해!”


“혼자서는 힘들 텐데...”


유진은 놀리듯 웃었다. 디자이라는 어깨를 푸들푸들 떨며 중앙의 대장 몬스터를 돌아보았다.


이 거리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는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거구. 아까 간신히 지나쳤던 트롤보다 덩치가 크다. 가장 큰 특징은 ‘머리.’ 황소의 머리를 달고 있는 거인형 몬스터.


미노타우르스. 미궁을 소재로 한 여러 이야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몬스터다. 하지만 실제로 본 미노타우르스는 동화책에서 나오는 것만큼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디자이라는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뿔을 보면서 꿀꺽 침을 삼켰다.


‘...가르기스. 이 개새끼는 왜 안 오는 거야?’


애당초 계획은 가르기스와 둘이서 힘을 합쳐 대장 몬스터와 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르기스는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것인지 올 기미가 없었다. 디자이라는 혹시 몰라 유진을 한 번 쳐다보았다.


“난 너희 다 싸우고 나서 싸울 거야.”


“...너 진짜 미쳤구나?”


시안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못 참겠다. 


“네 차례가 올 것 같냐?”


“올 것 같은데.”


“개소리하지 마! 내가 저깟 소 새끼 하나 못 잡을 것 같아?!”


“만약 네가 잡으면 평생 널 형님이라고 부를게.”


그 말에 시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저 시건방진 놈에게 평생 형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린 시안은 저 제안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말 바꾸지 마.”


“안 바꿔.”


유진의 대답을 들은 뒤. 시안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체내의 마나를 운용했다. 이곳까지 오느라 제법 지쳤으니, 급한 대로 마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미노타우르스...’


실제로 본 것은 시안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에서 미노타우르스에 대한 이야기는 숱하게 들었다. 특별한 약점이랄 것이 없는 몬스터인데, 그렇다고 특별한 장점이 있는 몬스터도 아니다. 


괴력과 질긴 거죽. 그 정도는 저만한 크기의 중대형 몬스터라면 당연한 특징이다. 트롤처럼 재생력이 강한 것도 아니고, 오우거처럼 말도 안 되는 괴력과 호전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적당한 힘, 적당한 지성. 시안의 눈에 비치는 미노타우르스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디자이라가 느끼기에는 다르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춤주춤 중앙으로 나아갔다. 창을 쥔 손도 바들거리며 떨린다. 오크 따위의 몬스터는 숱하게 잡아보았지만, 아직 그녀는 저렇게까지 큰 몬스터를 사냥해 본 적이 없었다.


‘...미노타우르스가 트롤보다 상위포식자라고 했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일단 트롤과 엇비슷한 몬스터란 것은 사실이다. 트롤을 쓰러트리지 못하고 지나쳐 온 디자이라는 도저히 자신의 승리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야아아!”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디자이라는 두려움을 물리치려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창을 쥐고서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미노타우르스는 디자이라가 거리를 좁히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그 거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반응이 빠르다. 트롤도 저만큼 빠르지 않았다. 두 발로 선 모습이 트롤보다 크다. 미노타우르스가 고개를 돌린다. 디자이라가 알고 있는 소는 눈동자가 똘망 똘망해서 귀여웠는데, 미노타우르스의 눈은 섬뜩한 빛만 가득했다. 


미노타우르스가 손을 휘두른다. 디자이라는 악을 쓰며 창을 내질렀다. ㅡ빠악! 커다란 손은 그녀의 창을 너무나도 쉽게 부러트렸다.


‘안 부러진다고 했잖아!’


디자이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위로 번쩍 들린 손이 디자이라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거기까지는 디자이라도 반응했다. 그녀는 옆으로 펄쩍 뛰어 공격을 피했다. 그리곤 부러진 창을 미노타우르스의 옆구리를 향해 휘둘렀다.


따악! 때리긴 했는데, 불안정한 자세에서 휘두른 공격은 별로 위력적이지 않았다. 미노타우르스는 아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디자이라의 몸을 붙들었다. 


“꺄아아악!”


커다란 손가락들이 몸에 감긴다. 디자이라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비명을 꽥꽥 질렀다. 죽는다! 그런 직감을 느꼈다. 이게 정말 환영이라고? 말도 안 돼! 디자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미노타우르스는 디자이라가 상상한 끔찍한 일들을 벌이지 않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으깨지도 않았고, 땅에 처박지도 않았다. 대신에 중앙과 이어진 입구를 향해 훌쩍 던져버렸다. 


ㅡ콰당!


너무 겁에 질린 탓에 낙법도 펼치지 못했다. 디자이라는 바닥에 널브러져 아픈 신음을 흘렸다. 꽤 먼 거리를 날아와 떨어진 탓에 온몸이 쑤신다. 뼈가 몇 개는 부러진 것 같았다.


“넌 졌으니까 뒤로 빠져있어.”


“아파...!”


“당연히 아프겠지.”


“왜 던지고 끝낸 거야?”


시엘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잔인한 광경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방금 미노타우르스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몬스터답지가 않았다.


“저건 진짜 몬스터가 아니니까.”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조건 우리를 죽이려들 이유가 없잖아. 손에 잡힌 순간 이미 승패는 난 것이니까.”


어린 애들한테 괜한 트라우마를 심어 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시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흥. 처음부터 덤비지 말고 주제파악이나 할 것이지. 설마 네가 미노타우르스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디자이라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아픈 몸을 끌어안고서 끙끙거렸다. 시안은 비웃음을 흘리며 디자이라를 지나쳤다.


“멍청한 것! 여기 앉아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기나 해. 본가의 피는 너 같은 방계와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멋들어진 말이었다. 물론 그 말은 다분히 유진을 겨냥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진은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히죽이죽 웃고만 있었다.


‘...새끼. 정말로 내가 저런 소 새끼 하나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시안은 보란 듯이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검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체내에서 끓어오른 마나가 검신으로 흘러간다. 


“...검기...!”


디자이라는 커다란 경악을 느꼈다. 시안의 검을 휘감은 엷은 빛. 마나를 일정 수준까지 수련해야 발현할 수 있는 검기가 틀림없었다. 디자이라는 저 빛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닿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마나의 칼날. 그녀의 아버지는 가끔씩 창에 검기를 두르고서 커다란 쇳덩이를 두부처럼 꿰뚫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다. 


‘혈계식을 마치고 돌아와 열심히 수행한다면, 너도 이 검기를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검기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십 년은 마나를 수련해야 한다. 하지만 고작 한 살 차이 날 뿐인 시안은 벌써부터 검기를 발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디자이라를 절망시켰다. 


“...후후!”


시안은 디자이라의 경악을 즐겼다. 그가 지닌 마나로는 검기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저깟 둔한 소 새끼를 썰어죽이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시안은 당당한 걸음으로 미노타우르스에게 다가갔다. 


“...응?”


하지만 몇 걸음 다가가지 못하고 시안의 걸음이 멈췄다. 


검기를 구성하고 있던 마나가 흩어진다. 시안은 당황하여 검을 쳐다보았다. 다시 정신을 집중해 검기를 유지하려 했지만, 아무리 마나를 운용해도 검기가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유진은 그런 시안의 모습을 장난기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벌써부터 검기를 발현할 줄 안다는 것은 의외였으나, 오히려 검기를 발현할 줄 안다는 것이 유진을 즐겁게 만들었다.


중앙을 감싼 벽. 집중해 봐야 알 수 있을 만큼 희미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유진은 저 마법진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지만... 기본적인 골자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저건 일정범위의 마나를 차단하는 마법진이다. 삼백 년 전. 세냐는 저 마법진으로 마족의 마법사들을 여럿 무력화 시켰었다. 


‘설마 중앙에 저런 마법진까지 그려놨을 줄이야.’


방계의 아이들은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으니, 저 마법진은 오로지 본가의 아이들만 겨냥하고 있다. 


‘피의 진함이 아니라 자질을 판단하겠다고 했었지.’


길레이드가 했던 말이다. 방계의 아이들은 절대로 본가의 아이들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시안은 어쩔 줄 몰라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미노타우르스는 우두커니 서서 시안을 보고 있었다. 


‘대... 대체 뭐야? 왜 검기가 나오지 않는 거지? 마나는 아직 넉넉한데...’


“오빠?”


시엘이 시안을 부른다. 그 목소리에 시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검기를 쓰지 않고 미노타우르스를 쓰러트릴 수 있을까? 시안은 꿀꺽 침을 삼켰다. 체내의 마나까지 흩어지는 것은 아니다. 몸놀림은 유지할 수 있다. 


할 수 있나?


“질 것 같으면 그냥 돌아 와. 괜히 고집부리다가 처맞지 말고.”


유진은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그 목소리! 시안은 입술을 꽉 씹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여기서 못 하겠답시고 돌아갔다가는... 


“이야아아!”


시안은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미노타우르스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미노타우르스는 시안이 달려 든 뒤에야 움직였다. 검기는 펼치지 못했지만, 시안의 몸놀림은 디자이라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랐다.


미노타우르스가 손을 휘두른다. 시안은 어렵잖게 미노타우르스의 손을 피해내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ㅡ촤악! 시안의 검이 미노타우르스를 가른다. 하지만 거죽만 얕게 베었을 뿐이었다. 시안은 손목의 뻐근함을 참으며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시안은 꽤 분전했다.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검을 휘두르고, 찔렀다. 하지만 그의 검격은 미노타우르스를 제대로 베지 못했다. 놈은 이전까지 마주쳤던 몬스터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견고했다. 


‘다, 다리. 다리를 노려야 해.’


호흡이 턱턱 막힌다. 얕은 상처들만 내봐야 쓰러트리는 것은 멀다. 결정적인 공격이 필요하다. 일단 덩치가 너무 커. 그러니까 주저앉혀서...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손! 시안은 급히 자세를 낮추었다. 그렇게 전진하며 미노타우르스의 무릎으로 검을 찔렀다.


빠각!


찌르는 각도가 잘못되었다. 시안의 검은 바라던 대로 미노타우르스의 관절을 꿰뚫지 못하고, 단단한 무릎 뼈와 격돌해 부러져 버렸다. 그를 본 시안의 눈이 절망으로 젖었다.


‘안 부러진다고 했잖아!’


검이 부러진 순간. 시안도 디자이라와 똑같이 로베리안을 원망했다. 이어진 일도 디자이라와 똑같았다. 미노타우르스의 커다란 손이 시안을 붙잡고, 입구를 향해 던져버렸다.


“허억!”


그나마 시안은 낙법을 펼쳤다. 하지만 워낙 멀리 던져진대다 몸이 지쳐서, 제대로 펼치지는 못했다. 시안은 욱신거리는 등을 부여잡고서 몸을 비틀었다.


“끄으으...!”


“너도 졌다.”


유진은 낄낄 웃으며 시안을 놀렸다. 시안은 뭐라 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씹었다.


“난 안 싸울래.”


시엘은 즉시 내뱉었다.


“저거 때문이지?”


‘오...’


시엘의 손가락은 벽에 그려진 마법진을 가리켰다. 역시 오빠보다 눈썰미가 뛰어난 것 같다. 


“난 몰라.”


유진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시엘은 걱정 반 재미 반 섞인 눈으로 오빠를 보다가, 유진을 돌아보았다.


“넌 이길 수 있어?”


“해봐야 알지.”


유진은 그렇게 대답해주며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나아갔다.


말은 겸손하게 했지만, 유진은 질 자신이 없었다.


혈계식


나아가는 걸음에 망설임이나 긴장은 없었다. 그럴 필요를 느낄 상대가 아니잖은가. 어차피 유진은 아직 마나를 수행하지 않았다. 


저런 큼직한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마나를 쓸 수 없다는 것은 제법 불편한 문제긴 하지만, 그것이 유진이 주저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전생. 마나를 쓸 수 없던 시절부터 트롤이나 오우거 따위와 숱하게 싸워왔다. 


놈들에 비하자면 저 미노타우르스는 경계할 대상이 못 된다. 진짜 몬스터도 아닌데다, 움직임을 보면 진짜 미노타우르스보다 못한 것 같았다. 역시 상대가 애들이니만큼, 수준을 낮춰놓았다는 말이다. 


‘무기가 부러진다는 것은 신경 써야겠어.’


여태까지는 아무리 험하게 써도 부러지지 않았는데. 이곳에서는 다르다. 돌발 상황에 유동적으로 대응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쌓은 기교와 자질을 판단하기 위해서일까... 


어느 쪽이든 유진은 마음에 들었다. 생각했던 대로 본가에 엿을 먹였잖은가. 사실 진즉에 미노타우르스를 잡아 혈계식을 끝냈어도 엿을 먹이는 것에 성공했겠지만. 조금 기다린 덕에 시안이 망신을 당하는 꼴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가주는 꽤 제대로 된 사람이던데.’


하지만 아들의 성질머리가 개차반이다. 지금부터라도 두들겨 놔야 저 개같은 성질이 나아질 것이다. 유진은 그렇게 납득했다. 


가주, 길레이드는 괜찮은 사람이다. 


아들은 병신이다. 


벌써부터 병신이니 앞으로는 더 병신이 될 것이다.


그러니 길레이드를 위해서라도 성격을 고쳐줘야 한다. 


‘한두 번 두들기는 것으로는 부족하겠지만.’


그거야 뭐, 유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아마 길레이드가 알아서 할 것이다. 


“흠.”


미노타우르스가 반응하는 거리는 파악했다.


유진은 그 앞에 서서 미노타우르스를 응시했다. 시안이 몇 번 베기는 했지만, 미노타우르스는 건재했다.  


‘...그럼.’


유진은 피식 웃으며 발을 뻗었다. 그렇게 미노타우르스가 반응하는 거리로 들어갔다. 


‘어떻게 잡아볼까.’


미노타우르스가 즉각 반응한다. 놈은 커다란 덩치를 움직여 유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진은 디자이라와 시안과는 달리 앞으로 곧장 덤비지 않았다. 그는 미노타우르스의 거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주먹이 날아온다. 공격이 뻗기 전. 유진은 어떤 공격이 이어질지를 예측했다. 저 큰 덩치는 ‘보이는 것’이 많다. 손가락이 쥐어지고, 어깨와 팔꿈치가 움직이고, 근육이 꿈틀거린다. 그 모든 것이 예측과 이어진다. 


쿠웅!


미노타우르르스의 주먹이 땅을 찍는 것과, 유진의 검이 움직이는 것이 겹쳐진다. 유진은 베기 쉽도록 내려 온 팔을 베었다. 팔꿈치 안쪽. 거죽이 접히는 곳은 필연적으로 연약하다. 그곳의 힘줄은 팔뚝근육처럼 두껍지 않다. 


물론 쉽게 베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유진은 쉽사리 베어냈다. 그는 전생부터 이런 식으로 검을 쓰는 것에 익숙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유진의 몸뚱이는 하멜의 어린 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타고난 것이 다르다. 그것을 몇 년에 걸쳐 작정하고 개발해왔다. 마나를 쓸 수 없다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 어린 육체는 마나가 없어도 굉장히 잘 움직인다.


“쿠어어!”


미노타우르스가 고함을 지른다. 너무 두꺼워 완전히 절단하지는 못했지만, 힘줄은 신경이 밀집되어 있어 통증에도 예민하다. 꼭 잘라내지 않아도 죽을 만큼 아프게 만든다. 


거대한 팔 근육이 퍼덕인다. 저림 때문에 반응이 더뎌진다. 유진은 머뭇거리지 않고 미노타우르스의 팔 위에 발을 얹었다.


그리고 달렸다. 어린 아이의 작은 몸에 있어 미노타우르스의 거구는 올라타 달리기에 좋았다. 그는 단숨에 미노타우르스의 어깨까지 올라왔다. 


물론 미노타우르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놈은 즉시 몸을 뒤틀고 어깨를 휘둘렀다. 하지만 유진은 요동치는 발판을 달리는 것에도 능했다. 일단 이 사기적인 몸뚱이는 타고난 균형감각도 뛰어났다.


마구잡이로 휘젓는 몸뚱이. 머리가 가깝다. 거대한 뿔이 눈앞을 가른다. 유진은 타이밍을 맞춰 손을 뻗었다. 터억! 유진의 손이 미노타우르스의 뿔을 붙잡았다.


그 무거운 모래주머니들을 매달고서 수련해왔으니, 팔 하나로 체중을 지탱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유진은 뿔을 단단히 잡고서 몸을 끌어 올렸다. 그렇게 미노타우르스의 머리위로 올라갔다. 


“꾸어어어!”


미노타우르스가 손을 든다. 놈은 머리에 매달린 유진을 잡으려 들었지만, 그것보다 유진이 검을 찌르는 것이 빨랐다. 


콰직! 


길쭉한 검이 미노타우르스의 귓구멍을 파고든다. 충분히 깊이 찌른 검은 놈의 반고리관까지 닿았다. 그러자 미노타우르스의 몸이 크게 휘청인다. 막무가내로 휘젓는 손은 유진과 아득하게 먼 곳을 때렸다. 그러다가 더 서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다음. 


왼쪽 눈동자를 꿰뚫었다. 미노타우스가 끔찍한 비명을 지른다. 유진은 깊이 박은 검을 몇 번 뒤튼 뒤에 뽑아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른쪽 눈을 찔러버렸다. 미노타우르스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검은 눈꺼풀채로 눈동자를 꿰뚫었다. 


“꺼어어어!”


쾅! 


기어코 휘두른 손은 유진이 아니라 애꿎은 이마만 때려 갈겼다. 격분 탓에 너무 세게 휘둘렀다. 미노타우르스의 고개가 뒤로 넘어간다. 그 편이 유진에게는 좋았다. 그는 다시 미노타우르스의 어깨로 내려와서, 뒤로 젖혀진 덕에 경동맥이 꿀렁거리는 것이 아주 잘 보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유진은 한 곳에 집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두 번째에서 거죽을 깔끔하게 갈랐고, 세 번째는 혈관에 닿았다. 그리고 몇 번 더. ㅡ푸확! 피가 세차게 뿜어진다. 유진은 왼팔의 방패로 피를 막아내며, 벌어진 상처에 검을 쑤셔넣었다.


이제 미노타우르스는 더 울부짖지 못했다. 놈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쓰러져 버렸다. 그 전에 유진은 땅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휴.”


방패로 막기는 했지만, 피가 워낙 많이 뿜어져 나와 머리며 얼굴이 축축했다. 유진은 대충 피를 털어내고서 고개를 돌렸다. 


시안과 시엘, 디자이라가 입을 떡 벌리고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유진은 그 중 시안을 향해 히죽 웃어주며 미노타우르스의 시체를 가리켰다. 


“봤지?”


“...어...?”


“난 잡았어.”


시안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저 말이 자신을 약올리는 의도임은 알았지만, 도저히 발끈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저런 것을 봐버렸다. 시안은 도저히 유진처럼 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만약 검기를 두를 수 있었으면? 만약 그랬다면, 미노타우르스를 죽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처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안은 저 촌놈에 대해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두려움과 비슷했지만, 가슴에 전해지는 흥분은 두려움과는 결이 달랐다. 


열세 살의 시안은 아직 경외(敬畏)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


유진은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제 몸을 내려 보았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바로 곁에 있는 미노타우르스의 시체도, 사방을 가로 막은 벽과 천장도 사라진다. 푹 젖었던 머리카락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뽀송뽀송하게 마르고, 양손에 들린 검과 방패도 희미하게 변해 사라진다.


혈계식이 끝났다. 


*


길레이드와 로베리안.


둘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디자이라와 시안이 쓰러졌다. 그것까지는 생각했던 바였다. 


애당초 아이들이 미노타우르스를 쉽사리 잡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 말하지 않았나. 이번 혈계식은 무조건적인 경쟁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른 판단과 협동심도 살필 생각이라고.


몇 번이고 던져져도 다시 싸워줬으면 했다. 다른 아이들과 협력한다면 아주 못 잡을 몬스터도 아니다. 한 번 미노타우르스의 주의를 끈 뒤, 천천히 유도한다면 마법진의 범위 밖으로 끌어낼 수도 있다. 무턱대고 덤비지 말고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 해보면서, 그렇게... 쓰러트려 보라고 놓은 몬스터다.


“...허허!”


의도했던 것과 완전히 벗어났지만. 길레이드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하지 않소?”


길레이드는 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 마나도 수련하지 않은 방계의 아이가. 압도적인 기량으로 미노타우르스를 쓰러트려버렸소.”


“...그... 렇군요.”


로베리안은 벌리고 있던 입을 천천히 닫았다. 저 미궁의 모든 것은 로베리안이 만들었다. 함정도, 몬스터도. 너무 과하지 않고, 아이들의 수준에 맞게... 하지만 저 유진이란 아이는, 로베리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미궁을 돌파해 버렸다. 


“...저 아이... 대체 뭡니까?”


“나도 모르오.”


길레이드는 여전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의 부모는 기돌 지방의 제하드 라이언하트라고 하오. 이미 수백 년도 전에 본가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인데, 내 알기로 그 가문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소.”


“그런데 어떻게 저만큼 뛰어난 아이가...?”


“모르지. 아버지나 다른 기사들에게 배우지도 않았다던데...”


길레이드는 말을 하다 말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말이외다. 유진, 저 아이는 본가에 온 며칠 동안 매일 연무장에서 가혹한 수련을 반복했다더군. 내 기돌에도 사람을 보내 알아봤는데, 유진 저 아이의 독함은 그쪽 가문에서도 유명하였소.”


아들과 결투해 승리한 아이다.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돌의 라이언하트 가문에 기사를 보내 유진에 대해 물었다. 듣기를 다섯 살부터 매일 연무장에 나왔고, 일곱 살 부터는 철심 박은 목검을 휘두르며 꾸준히 무게를 늘려왔단다. 


“무골을 타고난 아이오. 그리고 육체에 걸맞는 천성까지 타고났소. 저런 보석 같은 아이를 발견한 것만으로... 이번 혈계식은 큰 의미를 거둔 것이지.”


“불쾌하지는 않으십니까?”


로베리안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감히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저 아이는... 길레이드님의 자녀들보다 뛰어납니다. 벌써부터 저렇게 차이가 나는데, 저 아이가 마나까지 수련한다면... 그리고 마나를 다루는 것에도 커다란 자질을 갖고 있다면...”


“그렇다면 기쁜 일이지.”


길레이드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저 아이의 성은 라이언하트잖소. 저 아이가 뛰어나다는 것은 즉 라이언하트의 이름이 환히 빛나게 될 것을 의미하오.”


“...저 아이가 본가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면 어찌 합니까?”


로베리안의 말은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길레이드는 그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오.”


그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라이언하트의 가주는 가장 뛰어난 라이언하트가 잇는 것이 옳소. 만약 내 자식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건 타고난 권리를 빼앗길 만큼 나약하단 뜻이지. 고작 그 정도라면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될 자격이 없소.”


“흠...”


“물론, 나는 가주이기 전에 아버지인 만큼 자식들이 가장 뛰어나도록 지도할 것이오. 그러고도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외인인 제가 감히 운운할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로베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미궁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레이드님. 저는 당신의 오랜 지인으로서 감히 조언 드립니다. 가능하다면 저 아이를 양자로 들이시지요.”


“...양자?”


“예. 방계의 아이가 혈계식에서 본가를 넘어버렸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수많은 라이언하트의 방계가 본가를 우습게 여길 겁니다. 어쩌면 불온한 자들이 뜻을 모을 지도 모릅니다.”


“...”


길레이드는 잠시 침묵했다. 삼백 년 동안 이어 온 라이언하트. 철저한 본가계승에 의해 수많은 방계가 태어났다. 


방계는 가주 경쟁에서 밀려난 본가의 피에서 태어난 가문이다. 당연히도 그들 중에는 본가에 대한 불만을 품은 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가문의 법도는 수호자가 지키는 것이지.”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혈족상잔을 철저하게 금하며, 불온한 자들을 색출하는 것이 라이언하트의 수호자들이다. 


“조언은 감사히 받겠소. 양자라...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구려.”


솔직히 탐이 날 만큼 뛰어난 아이기는 했다. 그리고 양자로 받는 편이 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기는 했다.


유진이 이대로 기돌로 돌아간다면... 본가에 반기를 든 불온한 가문들이 접촉하려 들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면. 찬란한 재능을 가진 저 어린 아이를 빼앗길 지도 모른다. 


‘...저 아이를 곁에 둔다면... 내 자식들도 큰 자극을 받겠지.’


생각할수록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또 모양새도 알맞지 않은가. 아직 머나먼 미래. 아이들의 가능성이 화려히 피어났을 때. 그때도 유진이 본가의 아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미리 양자로 받아두는 편이 본가를 위해서도, 라이언하트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리라.


“...그 전에 일단 축하부터 건네야겠지만.”


길레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미궁과 이어지는 동굴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허억!”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가르기스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트롤과의 사투 후에 중앙으로 향했고, 도중에 힘이 다해 쓰러져 잠들었었다. 하지만 마법이 사라지면서 부상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대장 몬스터는?”


“잡았어.”


디자이라는 가르기스를 한심하단 눈으로 보면서 내뱉었다. 


“누가?”


“내가.”


유진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보물고


길레이드는 유진에게 축하를 건네기 전에, 잠깐 자신의 아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오드는 미궁의 중간도 가지 못했다. 도중에 여러 마법의 함정과 몬스터들에게 시간을 너무 빼앗겼던 탓이다. 솔직히 길레이드는 그것이 마뜩찮았다. 


어려서부터 마법에 관심이 많았던 장남. 저만한 마법은 흔히 접할 수 없으니 호기심에 눈이 먼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중요한 혈계식에서, 자질을 증명하는 것보다 호기심에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은 가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시엘과 시안에게는 적게나마 만족감을 느꼈다. 남매는 함정이나 몬스터에 크게 막히는 일없이 중앙까지 나아갔다. 비록 미노타우르스를 쓰러트리지는 못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아이가 미숙했기 때문이다. 미숙함은 배움으로 채울 수 있다. 


“...모두 다 훌륭했다.”


길레이드는 자식들을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너희가 미궁에서 어찌 대처하는지는 이곳에서 모두 보았단다. 상당히 어려운 시련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아주 잘 해주었구나.”


“...감사합니다.”


놀란 눈으로 유진을 보던 가르기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실 조금 부끄럽기는 했다. 그는 트롤과 사투를 벌인 탓에 중앙까지 도달하지도 못했다. 


부끄럼을 느낀 것은 디자이라와 시안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이라는 미노타우르스와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시안은 검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하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만족스럽지 않은 싸움을 벌였다.


“유진.”


호명을 받은 유진은 히죽 웃었다. 시안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는 것이 유진을 즐겁게 만들었다. 조금의 의문도 있기는 했다. 


이오드.


본가의 장남과는 미궁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실력과 자신감이 떨어져 보이기는 했지만, 설마 중앙까지 오지도 못할 줄이야. 그래서인지 이오드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리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네가 이번 혈계식에 참가한 아홉 명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단다.”


“감사합니다.”


유진은 겸손하단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너무 당당하게 구는 것보다는 적당히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쁨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함정과 몬스터에 대한 대처도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어. 특히,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트롤과 정면에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맙소사.’


그 말이 가르기스의 어깨를 움찔 떨게 만들었다. 그 흉악한 트롤과 싸우면서 상처하나 입지 않았다고? 가르기스는 믿을 수 없어 유진을 힐긋거렸다.


‘나보다 키도 작고, 근육도 작은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대단하구나. 가르기스의 생각은 유진에 대한 감탄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가문 비전의 근육성장제만 더해진다면 저 빈약한 육체도 더할나위없이 훌륭해 질 텐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팔씨름은 내가 이긴다.’


가르기스는 이따가 유진과 팔씨름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이틀은 미궁을 헤매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로베리안은 민망함을 내색하지 않으며 웃었다. 아무리 뛰어난단들 열다섯 살도 안 되는 어린아이들 아닌가. 하물며 직접 미궁을 겪어 본 적도 없는 아이들. 이런저런 장해물에 가로막힌다면 하루 이상은 미궁을 떠돌지 않을까 예상했다.


‘과연 위대한 베르무트의 핏줄. 내가 너무 우습게 본 것이지.’


물론 그 사실은 민망한들 불쾌하지는 않았다. 빛나는 재능의 원석들은 보는 것 자체로도 즐거운 일이다. 


“유진을 제외하고, 각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거라. 마음 같아서는 저녁에 당장 성대한 연회를 벌이고 싶다만... 너희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라서, 연회를 미리 준비하지 못했단다.”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오늘은 푹 쉬고, 연회는 내일 하자꾸나. 유진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예.”


“지금 바로 선물을 주는 거예요?”


시엘이 호기심으로 두 눈을 반짝였다. 지하보물고는 본가의 혈통을 이은 자일지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오직 가주만이 출입이 자유로운 곳이다. 시엘도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졸라 몇 번이나 지하보물고를 구경하고 싶어 했지만, 그토록 딸을 귀여워하던 길레이드는 단 한 번도 시엘을 지하보물고에 데려가주지 않았다.


“미룰 이유도 없거니와, 빨리 주는 편이 서로가 즐겁잖느냐.”


길레이드는 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솔직히 길레이드도 유진이 보물고에서 무엇을 들고 나올지 궁금했다. 


다른 아이들은 로베리안이 직접 데리고 돌아갔고, 유진은 길레이드와 함께 본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가는 길이 제법 먼데, 그 동안 무슨 이야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여러 무기를 다루는 것에 능숙하더구나.”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길레이드였다. 그는 유진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실린 웃음기 덕에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렇지 않아. 미궁에서 네 활약을 보았는데, 검과 방패를 다루는 것에 아주 능숙해 보였다. 게다가 시안과 디자이라를 쓰러트릴 때에는 창을 썼지 않느냐.”


디자이라와 대련을 했다는 것도 전해들은 모양이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 대련은 별채의 시종들도 보았잖은가.


“네. 창은 재미있는 무기라서 좋아합니다.”


“검은?”


“검도 재밌어요.”


“그 외에 다른 무기는 어떤 걸 좋아하느냐.”


“으음... 활도 좋아해요. 멀리서 쏘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지만, 그 멀리서 표적을 맞추는 건 재미있어요.”


유진은 나이다운 말투를 쓰려 노력했다. 사실 옛날에는 굳이 이럴 필요없이,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지니고서 환생했다고 밝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볼수록 진실을 밝힐 경우 처지가 난감할 것 같았다. 내가 그 우둔한 하멜인데,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했다고. 이 터무니없는 말을 누가 곧장 믿어주겠는가? 그리고 제 입으로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했단 사실을 밝히고 인정하는 것도 꺼려졌다. 


‘쪽팔리잖아.’


처음부터 그랬다면 모를까. 이미 십삼 년 동안 어린애 행세를 해왔는데... 이제 와서 밝힌다면 안쓰러운 시선을 받게 될 것 같았다. 유진의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그 시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귀찮아 질 것 같기도 하고.’


삼백 년 전 용사 일행의 여정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돌연 마왕의 토벌을 그만두고 돌아 온 용사 일행은, 자세한 이유와 여행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밝히지 않았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 빌어먹을 동화책이 세상에 나도는 용사 전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그 우둔한 하멜이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세상이 뒤집어 질 것이다. 유진은 여기저기서 진실을 알려달려 달려드는 놈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유진은.


하멜은 마왕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증오서린 맹세는 삼백 년이 지났음에도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하멜의 환생으로 마경 헬무드의 두 마왕이 준동할 지도 모른다. 놈들은 수백 년 동안 평화를 노래했고, 헬무드의 문호를 활짝 열고서 다양한 관광 사업까지 벌이고 있다. 


그렇게 태도를 바꾼 마왕들이 옛시대의 산증인을 어떻게 대할까. 여러 번 생각해 보았지만, 호의적으로 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그럴지라도 유진은 그 호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작금에 이르러 우리 라이언하트 가문을 상징하는 무기는 검이 되었지만... 우리들의 선조. 위대한 베르무트님은 무신, 올마스터라고 불리셨지.”


그 이유는 베르무트의 여러 무기 중에서 유독 성검이 이야기거리로 각광받았기 때문이다. 


“다룰 줄 아는 무기가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란다. 특히 너 자신이 여러 무기에 재미를 느낀다면, 그건 타고난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지.”


“감사합니다.”


“물론 여러 무기에 능했던 것은 베르무트님뿐만이 아니지만 말이다.”


“...하멜님도 여러 무기를 다루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베르무트님이 무신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 동료인 하멜님도 베르무트님 다음 가는 고수였다지.”


“...크흠. 제가 읽은 동화책에서는 우둔한 하멜이라고만 많이 나왔어요.”


“하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나도 그 동화책은 어릴 적부터 보았지만... 하멜님의 말썽이 없었다면 동화책은 별로 재미가 없었을 거야. 너는 하멜님을 어찌 생각하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네 생각을 묻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하멜님을 좋아했거든.”


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나올 뻔 한 탄성을 삼켰다. 


“...왜요?”


대놓고 좋아할 수는 없었다. 


“완전무결한 베르무트님보다는 하멜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좋았거든. 동화책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느냐. 하멜님은 몇 번이고 베르무트님에 대한 열등감을 느꼈으나, 단 한 번도 그에 좌절하지 않았다.”


‘좌절은 많이 했는데.’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지. 그리고 최후에는 자신의 안위가 아닌, 동료들을 위해 희생하셨고. 지금도 나는 선조이신 베르무트님보다는 하멜님이 좋단다.”


하멜의 그런 모습은 동화책에서도 노골적으로 부각된다. 어린애들에게 뻔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린이 여러분, 주변에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너무 시기하지 말아요. 그런 것보다는 스스로를 가꾸도록 하세요. 


“...저도 하멜님이 좋아요.”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제가 여러 무기를 쓰는 것은 뭐... 하멜님이나 베르무트님처럼 되고 싶어서는 아니지만요.”


변명도 덧붙였다. 그를 어찌 받아들였는지는 모를 일이나, 길레이드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주가 아닌, 그것도 외인이 보물고에 들어오는 것은 네가 처음이구나.”


본가 시종들의 경악어린 시선을 받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저택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굉장히 깊었는데, 벽마다 발광하는 구체가 매달려 있어서 어둡지는 않았다.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원하는 것을 하나 가져갈 수 있게끔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이 일에 관해서는 원로원의 큰 어른님들과도 이미 이야기가 되었단다.”


길레이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앞장서 내려갔다. 원로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라이언하트의 늙은 사자들. 본가의 전대 가주들을 비롯해, 방계에서도 굵직한 명성을 지닌 거인들이 소속된 곳이다.


“보물고에는 무엇이 있나요?”


“수백 년 동안 쌓인 여러 유산들이 있지. 그 중에는 우리들의 선조, 위대한 베르무트님의 유산도 제법 있단다.”


“정말요? 그럼 성검도 있겠네요?”


“있기는 하다만... 성검은 가질 수 없을 게다.”


길레이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성검은 라이언하트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누군가가 소유할 수 없는 검이야. 가주 계승식 때와 같은 예식에서도 쓰이거든.”


“에이...”


“그 때문만은 아니란다. 위대한 베르무트님 이후로 그 누구도 성검의 인정을 받은 적이 없어.”


“인정이요?”


“음... 그에 관해서는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네가 직접 쥐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럼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계단의 끝. 화려하게 장식 된 거대한 문이 있었다. 길레이드는 문 앞에서 손을 들었다. 손톱으로 베어낸 손끝에 붉은 핏방울이 맺힌다. 


“잠시 기다리거라.”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이 문고리를 향해 뻗는다. 문고리는 입을 벌린 사자의 얼굴이었다. 흐르는 피를 받아 마신 사자가 입을 다물고, 문에 장식된 음각이 꿈틀거린다. 저 모든 것이 강력한 마법이 더해진 결계다. 유진은 몇 걸음 물러서서 문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가주님도 같이 들어가시나요?”


“그럴 필요는 없지.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원하는 것을 고르고 나오려무나.”


문이 열린다.


“이 문은 너 혼자 안에서 열 수 없단다. 그러니 선택이 끝난다면, 문을 크게 두드리거라. 그럼 내가 열어주도록 하마.”


“그럴 거면 같이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것도 꽤 즐거울 것 같지만... 만약 함께 들어가 버리면, 나도 모르게 네가 고르는 것에 훈수를 두게 될 지도 모르잖느냐.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하고 싶구나. 그리고, 내가 같이 들어가면 네가 눈치를 볼 것 같기도 하고.”


나름 배려해주는 것이다. 유진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렇게 말은 하였지만, 유진은 길레이드가 함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에 내심 기쁨을 느꼈다. 이것저것 구경하고 만져보고 싶은데. 솔직히 길레이드가 함께 들어가면 그런 행동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잖은가.


“그런데 가주님. 만약 제가 하나를 품에 숨기고, 여러 개를 들고 나오면 어떡해요?”


이 당돌하고 무례한 질문은 열세 살 어린 아이만이 가능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진은 악의 없이 순진한 눈동자만 끔뻑였다. 제 얼굴이 정말 그렇게 보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일단 그런 표정을 의식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길레이드는 불쾌감 없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만약 그런다면, 나는 너를 야단칠 수밖에 없단다. 그리고 저 안의 보물들은 마법으로 엄중히 보관되고 있어서, 뭘 가지고 나온들 들킬 수밖에 없단다.”


“아하.”


‘역시.’


유진은 실망 없이 탄성을 뱉었다. 


“그래도 하나 조언을 해주자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평생 사용할 무기를 고르거라. 네 경우에는 성능보다는... 마음과 시선이 가는 것을 고르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네.”


길레이드가 보물고의 문에서 비켜섰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보물고로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일단 공손한 자세로 감사를 표했다.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유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양자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당장 할 필요가 없었거니와, 서둘러 진행할 만한 문제도 아니었다.


보물고의 문이 닫힌다.


그제야 유진은 후련히 숨을 뱉으며 표정을 바꿀 수 있었다. 그는 너무 웃느라 저린 뺨을 두드리면서 보물고의 내부를 쓱 둘러보았다.


“...햐.”


그 직후, 일부러 짓지 않은 미소가 번진다. 유진은 히죽이죽 웃으며 보물고의 중앙을 향해 다가갔다. 


베르무트의 성검.


그 화려한 금색의 검은, 보물고의 중앙에 서있었다.


보물고


성검을 처음 보았던 삼백 년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과하게 아름다운 검이다. 도저히 무기, 무언가를 베기 위한 ‘검’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떤 금속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성검은 신성제국의 신화부터 존재 해 온, 신이 하사한 검이다. 


‘신성제국이 성검을 회수하지 않은 것도 의외인데.’


유진은 성검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아름다운 칼집. 양손으로 쥐기 편한 길쭉한 칼자루. 칼날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은 성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을 때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솔직히 탐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욕심이었다. 신이 직접 하사한 검. 기나긴 세월 중앙신전에 봉해져 있던 성검은 오직 베르무트만을 주인으로 인정했으며, 마경 헬무드를 떠도는 여정을 함께했다.


비록 베르무트 본인이 성검을 자주 사용하진 않았다지만. 그렇다 해서 성검의 상징성과 가치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저 과하게 아름다운 검은 수많은 마물을 베었으며, 헬무드의 다섯 마왕 중 첫 번째 마왕의 심장을 꿰뚫기도 했었다.


‘...그 후로는 거의 횃불로만 쓰였지만.’


첫 번째 마왕을 토벌할 때에는 다들 미숙했었다. 유진은 그때를 회상하며 성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꼭 성검을 가지고 나가겠다고 정해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쥐어보고는 싶었다.


유진의 오른손이 성검의 칼자루를 잡는다. 손에 감기는 느낌 자체는 훌륭했다. 도저히 실전에서 쓸 수 없을 것 같은 예식용 검이라도, 그를 떠나 성검의 만듦새는 훌륭했다. 


“...음.”


성검의 칼집은 보물고의 바닥에 깊숙이 박혀있다. 힘을 주어 검을 뽑아보려 했지만, 칼집은 물고 있는 검신을 놓지 않았다. 유진은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안 되네.”


성검은 요지부동이다. 아무리 힘을 줘본들 뽑히지 않는다. 


유진은 혹시 몰라 손끝을 물어뜯어 피를 내보았다. 그렇게 성검의 칼자루와 칼집에 피를 흘려보냈는데, 흘려보낸 피는 즉시 흩어져 사라져버린다. 다시 뽑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뽑히지 않는다. 


‘직접 쥐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더니.’


뽑을 수 없다는 뜻이었나. 유진은 더 힘을 주지 않고 미련을 거두었다. 어차피 뽑았어도 가질 수 없는 검이라고도 했잖은가. 


그리고는 다시 보물고를 돌아보았다. 과연 이런저런 보물들이 많았다. 무구 외에도 보석이나 장신구들도 많다. 유진은 눈을 빛내며 보물고를 떠돌았다.


‘이건... 아스펠이잖아.’


눈에 익는 무기가 몇 개 있었다. 칼날이 짐승의 이빨처럼 뾰족뾰족한 이형의 검이 벽에 걸려있다. ‘포식검’ 아스펠. 저 검은 베어낸 것을 포식해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 언뜻 듣기에는 알 수 없는 성능이지만, 유진은 저 검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성능을 지닌 검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을 베는 검. 마나를 포식하는 검.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라 해도 아스펠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베르무트라서 잘 쓸 수 있었던 검이야.’


아스펠이 일격에 마법을 양단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르무트 보인이 뛰어난 마법사였던 덕분이다. 성검보다 미련이 남긴 했지만, 유진은 일단 아스펠을 내려놓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눈에 익은 무기들이 있었다.


‘용격창 카르보스.’


과열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그것만 감수하면 찌르기 한 번으로 드래곤의 브레스에 버금가는 위력을 내뿜는 창.


‘폭풍검 위니드.’


바람의 정령왕의 가호가 깃든 검. 


‘뇌광궁 페르노아.’


거리를 무시하고 번개를 내리꽂는 활.


‘비환검 자벨.’


마력을 주입하면 수백 개의 칼날로 분해되어 늘어나는 검.


‘게돈의 방패까지 있네.’


맞닿는 공격을 허무공간으로 흘려버리는 사기적인 방패. 


어느 것이든 세상을 뒤집을 만한 무기들이다. 유진은 혀를 내두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저만한 보물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으로도 라이언하트 가문의 위상은 대단했다. 보물이라면 눈을 뒤집는 드래곤조차도 이곳만큼 많은 보물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다인가?’


하지만 유진은 의문을 품었다. 그가 아는 베르무트의 무기들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끔찍한 월광검도 보이지 않았고, 내심 탐냈던 마창도 안 보인다.  


‘여기 있는 무기들은 넉넉잡아봐야 반 정도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삼백 년이나 흐르지 않았나. 그 사이에 꽤 많은 무기들이 보물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새끼들. 좋은 건 알아가지고, 사기적인 무기만 쏙쏙 빼갔구만.’


유진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보물고에 남아있는 무기들도 훌륭하긴 했지만, 이곳에 없는 무기들이 아쉬웠다.


그렇다보니 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가져가서 후회할 만한 성능은 아닌데.’


확하고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다. 아직 몸이 어리니까 부족한 숙련도는 문제되지 않는다. 뭘 가져가든, 몇 년 동안 붙들고 있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만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만만한 것은 위니드인데...’


정령왕이 직접 가호를 내린 검이다.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바람의 정령을 사역할 수 있고, 당연히 정령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 한참 동안은 무리겠지만 마나를 충분히 쌓은 뒤에는 바람의 정령왕을 직접 불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점은, 정령마법은 일반적인 마법과는 달리 본인의 마나를 크게 먹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단 정령을 불러낸다면 필요한 마나는 정령이 알아서 해결해 준다. 


‘타고난 자질과도 큰 상관없고.’


정령마법은 입문이 까다롭다. 정령에 알맞은 자질을 타고나지 않는다면, 뛰어난 마법사일지라도 하급 정령 하나 부리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니드를 쥔다면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자벨은 다루기 까다로워. 아스펠은 마법을 익힌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이점을 살리기 힘들고. 페르노아는... 내 기억으론 한 발 쏠 때마다 어마어마한 마나를 잡아먹는 놈이었는데.’


용격창 카르보스는 유진의 취향이 아니었다. 게돈의 방패는? 저것도 사기적인 성능을 가졌지만, 뇌광궁 페르노아와 마찬가지로 마나를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다. 


‘역시 위니드가 제일 만만해.’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 바로 고르지는 않았다. 유진은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보물고 안을 둘러보았다. 베르무트가 사용하던 무기 외에도 여러 가지 보물들이 있었다. 


‘마법 지팡이... 성능을 모르겠네.’


지팡이들도 굉장히 많았다. 아직 몸이 어리니까 마법도 익혀 볼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뭔지도 모를 지팡이를 고르고 싶지는 않았다. 


‘...어?’


보물고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유진의 걸음이 멈춘다. 그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서 선반의 구석을 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유진은 급히 선반에 다가가 구석으로 손을 뻗었다. 


그건 자그마한 목걸이였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유진은 목걸이를 들고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별 것 없는 목걸이다. 엄청난 마법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상징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냥, 별 것 없는 추억이 깃든 목걸이다. 전생에 하멜이 차고 다닌 목걸이.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몬스터에게 잡아먹힌 부모님의 유품. 환생까지 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생의 슬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슬픔 따위는 오래 전에 증오와 바꿔먹었다. 제 손으로 직접 복수도 했었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목에 걸고 다녔다. 목걸이 하나 걸고 다닌다고 별 불편함도 없었고, 딱히 벗을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럴 텐데. 유진은 꽤 오랫동안 목걸이를 들고 서있었다. 이게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르무트가 내 시신을 수습했었나.’


이 보물고에 하멜이 다루던 무기는 남아있지 않다. 하멜과 관련된 것은 이 낡아빠진 목걸이 하나뿐이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그냥 버리고 가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입맛이 썼다. 다섯 마왕을 모두 죽여 버리자. 언젠가, 모두와 함께 그런 약속을 했었다. 그런 주제에... 베르무트와 모론, 세냐, 아니스. 넷은 마왕과 ‘약속’을 맺었다. 삼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헬무드와 두 명의 마왕은 건재했다. 


‘...대체 무슨 약속을 했던 거냐. 내 유품을 이곳에 가져다 놓으면서, 너희들은... 베르무트, 너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거냐.’


유진은 목걸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환생까지 했는데, 전생에 구애받고 싶지 않은데. 그럴 지라도 감정은 희미하게나마 남는다. 이 목걸이는 유진이 의식하고 싶지 않은 여러 감정을 일깨웠다. 


이건 여기 있어선 안 될 물건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유진은 베르무트와 동료들을 증오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마왕을 죽이지 못한 것일 테니. 


신실한 아니스. 


기억 속의 그녀는 성녀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뺀질거리고 재수 없었지만, 신앙심만은 진짜였다. 그런 아니스마저 동조하여 물러섰다면,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마왕들을 죽이지 못했던 것이리라.


‘...어쩌면 내가 죽어서 힘이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어.’


두 마왕은 끔찍하게도 강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민망했지만, 그럴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괜히 발견했네.”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다른 무기도 욕심은 난다. 하지만 이 목걸이. 하멜의 유품을,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건?”


보물고의 문을 열었던 길레이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진이 무엇을 고를지 다양한 예상을 했었는데, 정작 유진이 들고 나온 것이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마음에 들더라고요.”


유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목걸이를 들어보였다. 길레이드는 놀란 눈을 끔벅이며 유진과 목걸이를 번갈아 보았다.


“...진심인 것이냐?”


“예.”


“다른 훌륭한 보물들이 많았을 텐데...”


“제가 부족하여, 감당할 자신이 없었어요.”


유진은 준비했던 변명을 읊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길레이드는 더욱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저 안에 있는 보물들의 가치는 어린아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비범한 무기들이 많지 않은가. 그런 보물들을 마다하고 목걸이라니? 


‘...저게 뭐지?’


더욱이 길레이드를 당황하게 한 것은, 유진이 들고 나온 목걸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보물고에 저런 목걸이가 있었나? 물론 저 안에는 성 하나는 통째로 살 수 있는 값비싼 장신구들이 많다. 


만약 유진이 그런 장신구를 골랐다면 길레이드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장 마음이 가는 것이 없으니, 그냥 비싸고 귀한 것을 골라서 가져가면 나중에 어떻게든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잠시 확인해 봐도 되겠느냐?”


“예.”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길레이드는 즉시 목걸이를 받아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조악하고 낡은... 목걸이. 보석이 사용된 것도 아니고, 세공이 비범하지도 않다. 마나를 흘려보내도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건 평범한, 싸구려 목걸이다. 


‘...이런 목걸이가 왜 보물고 안에 있지?’


살펴볼수록 길레이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유진을 쳐다보았다.


“잠시 기다려다오.”


“예.”


유진은 대수롭지 않단 얼굴로 대답했다. 길레이드가 당황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유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저 목걸이를 고르는 것은 굉장히 미련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은가. 도저히 저 안에 내버려두고싶지 않으니, 들고 나와야만 했다. 


“...음...”


길레이드는 신음을 흘리며 목걸이를 보물고의 문에 가져다댔다. 라이언하트 본가의 보물고. 삼백 년 동안 축적된 영광. 저 안의 모든 물건은 보물고의 마법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거 참... 알 수 없는 일이로군.”


문고리의 사자에 목걸이를 가져다대고, 길레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목걸이. 보물고에 등록되지 않은 물건이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지. 이건 라이언하트의 보물이 아니다. 저 안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야.”


“...하지만 저 안에 있었는걸요.”


“그래서 알 수 없는 일이지. 나는... 이 목걸이를 안에 두지 않았다. 이걸 어디서 찾았느냐?”


“선반의 구석에 있었어요.”


“전대 가주님이 놔두신 물건인가...? 그렇다면 보물고의 마법에 등록되었을 텐데...”


“어쩌면 잊어버리신 것일지도 모르죠.”


“하하.”


길레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대 가주님. 내 아버님은 그렇게 허술한 분이 아니시다. 이런 이상한 장난을 치실 분도 아니고...”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유진은 그렇게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길레이드의 아버지. 전대 가주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고인이다.


“...어떻게든 이 목걸이를 갖고 싶으냐?”


“네.”


“왜?”


“별 이유는 없어요. 그냥... 마음에 들었거든요.”


“이 목걸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단다. 마법이 깃든 물건도 아니야. 팔아봤자 싸구려 장검 하나 살 수 없을 게다.”


그야 그렇겠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갖고 싶어요.”


“...넌 굉장히 특이하구나.”


“어려서부터 아버님께 많이 들었어요.”


“네가 정 이 목걸이를 갖고 싶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바로 줄 수는 없겠구나. 출처가 알 수 없는 물건이니까, 로베리안님께 감정을 부탁드려야겠어.”


“감정이요?”


“그래. 직접 확인해보기는 했지만, 나는 마법에는 별 재주가 없어서 말이다. 어쩌면 마법이 깃든 물건일 지도 모르니, 확인은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감정이 끝나면 제가 가질 수 있나요?”


“...그래. 약속하마.”


길레이드는 고개를 끄덕거린 뒤에 잠시 침묵했다.


“...이 목걸이. 마법이 깃든 것일 수도 있고, 아무런 신비도 없는 평범한 목걸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물고에 등록되지 않은 물건이며, 저 안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란 뜻이지.”


“...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만... 유진. 엄밀히 말해서, 네가 들고나온 것은 라이언하트의 보물이 아니란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안 될 것은 없지.’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안에서 다른 보물을 하나 가지고 나오거라.”


“...정말요?”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뱉을 뻔한 탄성을 간신히 삼켰다.


“그래. 애당초 그런 약속이었잖느냐. 보물고에서 원하는 보물을 하나 가지고 나오는 것. 유진 너는 보물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니, 가서 마음에 드는 보물을 하나 가지고 나오거라.”


“감사합니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라고 믿을 수가 없군.’


유진은 길레이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삼켰다. 설마 저렇게 융통성 있게 보물을 챙겨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너로 정했다.’


다시 보물고로 돌아 온 유진은 망설임 없이 위니드를 잡았다.


‘넌 내거야.’


은청색의 칼날이 유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빛을 발했다.


보물고


위니드를 가졌지만 곧장 정령을 불러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정령마법이 마나를 적게 먹는다고 해도, 최소한의 마나는 필요한 법이다. 마나를 따로 수련하지 않은 유진의 몸에는 티끌만한 마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관한 것은 유진으로서도 고심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혈계식은 끝났다. 이제 유진은 제한 없이 진검을 다룰 수 있고, 마나도 수련할 수 있다. 


위대한 베르무트를 선조로 둔 라이언하트 가문은 대륙의 다른 무가(武家)나 기사, 용병 등이 익히는 마나수련법보다 아득하게 우월한 마나수련법을 가지고 있다. 그건 삼백 년에 걸쳐 개발되고, 발전해 온 수련법이다.


라이언하트의 방계는 본가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들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방계에 내려오는 마나수련법은 본가의 마나수련법과 뿌리만 같을 뿐이다. 본가의 수련법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수준이 떨어진다. 


그 차이가 본가를 방계보다 우월하게 만든다.


‘우리 가문의 마나 수련법은... 익히지는 않았지만 별 볼 일 없을 거야.’


유진은 그 사실을 확신했다. 그의 가문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본가에서 갈라져 나왔고, 그 후로도 가문의 위상을 높일 만한 인물을 배출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경지도 별 볼 일 없었고.’


애들 장난 같은 대련은 열 살 이후로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유진은 제하드의 두툼한 뱃살과 둔한 움직임, 검을 조금 휘두른 것만으로도 숨을 헥헥 몰아쉬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재능이 없었단다.


혈계식이 가까워질 때마다, 아버지는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나 저런 말을 하곤 했었다.


‘...그래도 본가에서 갈라져 나온 수련법이니 아주 구리진 않겠지.’ 


도저히 만족하지 않을 만큼 구릴 지라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삼백 년 전이라고는 해도 용사의 동료였지 않은가. 전생에 익혔던 마나수련법도 현대에선 꽤 쓸 만 할 것이다.


‘정 부족하다면 우리 가문의 수련법과 섞어 보고.’


예전의 경험이 있으니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유진은 그 사실을 확신했다. 하물며 지금 몸뚱이의 자질은 전생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전생에도 검기는 진즉에 졸업하고 검강을 뿌리고 다녔는데. 지금 몸으로 불가능할 리가 없지.’


마나로 만들어낸 칼날이 검기. 검강은 그보다 수준이 높다. 전생에 몇 살부터 검강을 만들어냈더라? 스무 살은 넘어서였던 것 같은데...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생각에 잠겼다. 


전생의 하멜이 익혔던 마나수련법은, 용병들이 흔히 익히던 싸구려 수련법이었다. 12살에 몬스터의 습격에 고향을 잃고, 복수하겠답시고 용병이 되어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어쨌든, 그 싸구려 수련법을 열심히 익혀서 꽤 이름을 떨쳤었다. 물론 그대로 익히지는 않고 나름의 변형은 거쳤다.


베르무트와 만나고. 세냐와 아니스, 모론과 만났다. 그들에게서 이런저런 조언을 받기도 했었다. 특히 베르무트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고, 세냐는...


‘이딴 쓰레기를 돈 주고 샀다고? 너 병신이냐?’


‘말이 너무 심하지 않냐?’


‘멍청이! 여기 와서 앉아 봐.’


‘왜.’


‘앉으라면 앉아! 자, 네가 돈 주고 샀다는 그 쓰레기, 처음부터 해봐. 내가 뜯어 고쳐줄 테니까!’


...많은 도움을 받기는 했다. 


길레이드와는 본가에서 헤어졌다. 그는 곧장 로베리안을 찾아갔고, 유진은 별채로 돌아왔다. 별채의 연무장에는 디자이라와 가르기스, 니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여줘!”


디자이라는 유진을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껑충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유진의 허리에 매단 위니드를 빤히 보았다.


“...왜 창을 안 고른 거야?”


“내 마음이지.”


“너 창 잘 쓰잖아!”


“아까 대체 뭘 본 거냐? 난 창말고 검도 잘 써.”


그 대답에 디자이라는 꽁한 표정을 지었다. 얄밉고 재수없어서 뭐라고 반박이나 해주고 싶은데, 유진이 미노타우르스를 잡은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확실히 유진은 창 뿐만 아니라 검도 잘 썼다.


“너무 가벼워보이는군.”


턱을 어루만지던 가르기스가 입을 열었다. 


“네 힘이라면 더 무겁고 큰 검이 어울릴 텐데. 해머나 도끼 같은 병기도 좋았을 거고.”


“내 마음이야.”


“뭐, 가볍다고 나쁜 무기는 아닐 테지. 다른 곳도 아니고 본가의 보물고에 있던 무기니까... 그래서 어떠냐?”


“뜬금없이 뭐가 어때.”


“우리 가문의 근육 성장제 말이야. 혈계식도 끝났으니, 나와 함께 우리 가문으로 돌아가자. 내가 아버님께 잘 말씀드려서, 네게 필요한 만큼의 근육 성장제를 지원해 주마.”


“아니 필요없다니까.”


“성장기에 먹는 것이 효과가 좋아. 네 무식한 수련이 더해진다면 금세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아니, 차라리 나와 같이 수련하자.” 


무턱대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가르기스는 유진과 깊은 친분을 쌓고 싶었다. 방계가 본가를 이긴 혈계식은 라이언하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네가 말했잖아. 기돌에 있는 너희 가문에는 가르침을 청할 만한 기사가 없다고. 하지만 우리 가문에는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많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내 아버님이지. 나와 함께 간다면, 아버님도 네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실 거다.”


“됐다.”


“저 돼지새끼랑 말 섞지 말고, 검이나 뽑아 봐.”


“...니나.”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위니드의 칼자루를 쥐었다.


“주방장한테 밥이나 준비하라고 해.”


“이미 말씀드려놨어요.”


“목욕물은?”


“그것도요.” 


“훌륭해.”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위니드를 뽑았다. 칼집을 빠져나오는 매끄러운 금속음이 입가를 씰룩거리게 만든다. 유진은 길쭉하게 뻗은 은청색의 검신을 응시했다.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예리함. 마나를 밀어넣는다면 바람의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검. 유진은 이 검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굳이 검기나 검강을 두르지 않아도, 바람의 정령의 보조를 받는다면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게 휘두른 검은 어지간한 것을 종잇장처럼 베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먼 거리의 적에게 바람의 참격을 날릴 수도 있고, 어지간한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


물론 정령을 불러낼 수 없는 지금은 쓸 수 없는 기능이다.


“어떤 검이야?”


“위니드래.”


디자이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가주님이 말해주셨는데, 이 검은 바람의 정령왕의 가호가 깃들어 있대. 나중에 마나를 수련하면, 정령을 불러낼 수 있다나 봐.”


유진의 자신의 기억이 아닌, 길레이드에게 들은 설명대로 답해주었다. 디자이라는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유진을 보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멋진 검이지만... 그것보다 멋진 창도 많았을 거야. 나는 네가 창을 가져올 줄 알았어.”


“창이 많긴 하더라.”


“그거, 그거 봤어? 용격창 카르보스! 그거 막, 찌르기 한 번에 브레스를 내뿜는대. 막 산도 지워버릴 수 있다고 했어!”


“난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마창 루인토스는 없었어? 난 그 창이 제일 좋아. 위대한 베르무트님의 무기 중에서 가장 세잖아!”


디자이라의 눈빛이 몽롱해진다. 창을 주무기로 사용해서인지, 그녀는 베르무트의 창에 관심이 많았다.


“나도 루인토스는 알아. 참혹의 마왕이 사용하던 창이지?”


가르기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위니드를 칼집에 넣었다. 


‘...참혹의 마왕.’


헬무드의 두 번째 마왕. 놈이 얼마나 끔찍하고 강했는지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삼백 년 전. 마경 헬무드에는 다섯 명의 마왕이 있었다.  


서열 1위, 멸망의 마왕.


서열 2위, 유폐의 마왕. 


서열 3위, 광란의 마왕.


서열 4위, 참혹의 마왕.


서열 5위, 살육의 마왕.


베르무트와 동료들은 가장 약한 서열 5위의 마왕부터 토벌해 나갔다. 


하멜은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었다. 


마창 루인토스는 참혹의 마왕이 사용하던 창이다. 놈을 죽이고, 베르무트가 그 창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사실 하멜이 가지려 했는데, 마창은 그 이름만큼 끔찍한 마기를 지니고 있어서 베르무트를 제외하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창 루인토스가 위대한 베르무트님의 무기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가장 강한 것은 분쇄추 지골라드다.”


“참혹의 마왕이 살육의 마왕보다 강해.”


“마왕의 서열이 무기의 서열을 가르는 것은 아냐.”


‘그러고 보니 분쇄추도 없었군.’


베르무트의 무기 중에서 마왕의 애병이었던 것은 마창과 분쇄추 둘 뿐이다. 


‘하긴. 너무 불길한 무기니까, 보물고에 둘 만한 것은 아니지. 어쩌면 다른 곳에 봉인한 것일지도 몰라. 베르무트 말고 다른 놈이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기도 했고.’


전생에 탐냈던 무기라 미련이 없지는 않았다. 


“마창이 더 세.”


“분쇄추가 더 세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는 유치한 말싸움을 시작했다. 유진은 둘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연무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니나가 유진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식사 준비가 곧 끝날 거예요.”


“나도 곧 끝나.”


당장 정령을 불러낼 수는 없지만, 정령이 없어도 위니드는 좋은 검이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 쥐는 진검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애착이 든다. 유진은 칼집에서 뽑은 위니드의 검신을 훑어보았다. 슬쩍 손을 뻗어 만져보니, 금속의 시릿한 냉기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역시 진검은 손에 쥐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철심 박은 목검보다 훨씬 가볍지만, 베어 죽일 수 있다는 본질이 목검과는 다른 무게를 실감시킨다.


“마창이 더 세다고!”


“분쇄추다.”


둘은 아직도 저러고 있다. 유진은 그쪽을 한심하단 시선으로 보다가 다시 위니드에 집중했다. 마창과 분쇄추. 둘 중 무엇이 우월하다 고르는 것이 힘들 만큼 대단한 무기기는 하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무기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을 고르라면, 유진의 선택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월광검.’


마경에서도 봉인되어 있던, 검의 형상을 한 파멸. 유진은 그 끔찍한 검을 기억한다. 서열 5위였던 살육의 마왕을 죽일 때에는 성검을 사용했으나, 베르무트가 월광검을 손에 넣은 후로 성검은 전투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참혹의 마왕도, 광란의 마왕도 월광검에 죽었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가 떠들어대는 분쇄추와 마창은 월광검이 뿌리는 파멸의 빛을 이겨내지 못했다.


유진은 머릿속을 맴도는 월광검을 지워내고, 위니드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ㅡ사아악. 느릿하게 휘두른 검이 공기를 가른다. 검신이 은은한 빛을 내뿜는다. 유진은 발끝부터 밀려오는 전율에 희열을 느꼈다. 


“...와...”


느리게 흐르는 검무에 니나는 감탄을 터트렸다. 검을 보는 재주가 일천한 그녀가 보기에도 유진의 검무는 심상치 않았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의 유치한 말싸움도 뚝 멎는다. 둘은 홀린 눈으로 유진의 검무를 바라보았다. 


대단히 빠른 것도 아니고, 놀랄 만한 기교가 섞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위니드가 발하는 섬뜩한 검광은 유진의 검무 하나하나에 녹아들어서, 끊이는 일 없이 도도히 흐른다.


‘반드시 데려가야겠어.’


가르기스는 꿀꺽 침을 삼키며 그렇게 생각했다.


‘...뭐라고 말하고 데려가지? 우리 집 구경하자고 할까? 내 생일은 아직 멀었는데...’


디자이라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생일이라도 가깝다면, 생일파티를 명분으로 초대할 수 있을 텐데... 디자이라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


“...평범한 목걸이입니다.”


로베리안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손에 들린 목걸이를 길레이드에게 돌려주었다. 


“주의 깊게 확인해 보았지만, 이 목걸이에는 아무런 마법도 걸려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오히려 저 말이 길레이드에게 당혹감을 전해주었다. 아무 마법도 걸려있지 않은 평범한 목걸이. 사실 평범한 목걸이란 말도 우습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낡아빠진 목걸이 아닌가.


그런 목걸이가 대체 왜, 본가의 보물고에 있었단 말인가? 선반의 구석. 그 깊은 곳에 처박혀 있었다고 했다. 길레이드도 몇 번인가 보물고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무기를 찾아보곤 했었는데, 그는 단 한 번도 저런 목걸이를 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보물고의 마법에 등록된 목걸이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가져다 놓았다는 것인데. 대체 누가? 죽은 전대 가주는 그런 이유 없는 장난을 칠 분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다른 선조님들이? 그럴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정말 이 목걸이가 보물고에 있었던 겁니까?”


“예.”


“...유진 그 아이가 장난을 친 것은 아닐까요?”


“그럴 이유가 없잖습니까.”


“으흠... 미궁에서 보았을 때에는 영악하고 심술궂은 면이 있었지요. 어쩌면 자신의 소지품을 슬쩍 가져다놓고, 가주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의도였을 지도 모르잖습니까.”


로베리안은 헛기침을 섞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실제로 길레이드님은... 유진이 아무 가치없는 목걸이를 들고 나온 것에 적잖은 호감을 느끼셨을 겁니다.”


“...부정할 수 없군요.”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고작 13살 아이 아닙니까. 유진, 그 아이가 제 마음을 읽고서 이런 일을 꾸밀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확실히, 리스크가 큰일이죠. 길레이드님이 넉넉히 생각해주셨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다가는 가질 수 있었던 보물도 갖지 못했을 수도 있었어요.”


어디까지나 의혹을 제시할 뿐. 로베리안 본인도 유진이 그런 꾀를 내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길레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 번 더 확인해 보죠.”


“이미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목걸이에 마법이 심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신경이 쓰이니,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으음...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간단히 말하자면, 목걸이에 어린 기억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로베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나는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지요. 마나와 직접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제가 아는 마법 중에는 마나의 ‘기억’을 읽어내는 마법도 존재합니다. 저희 학파의 대스승이신 현명한 세냐님이 창안한 마법이죠.”


로베리안의 설명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깊게 깔려 있었다. 그럴 만큼 이 마법은 대단한 것이다. 마법의 역사상 마나와 이렇게까지 교류한 마법사는 현명한 세냐 뿐이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길레이드는 함께 감탄하는 대신, 목걸이를 로베리안에게 건네주었다. 로베리안은 내심 섭섭함을 느끼면서 목걸이를 받았다. 그리고 의식을 집중하며 마나와 공명을 시작했다.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는 마나. 대부분의 물건에도 마나가 깃들어 있다. 신비를 일으키기에는 미약할 지라도, 기억을 읽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음...”


땀방울까지 흘려가며 정신을 집중하던 로베리안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온다. 


“...별 것 없군요. 대략 백 년 쯤 된 물건 같습니다. 이건... 수도인가? 길거리... 그곳에서 구매되었어요. 그리고... 으음... 여기서부터는 읽히지 않는 군요. 아마 보물고의 마법이 마나의 기억을 멈춘 것 같습니다.”


“백 년 전이라...”


“대략.”


몇 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목걸이의 출처를 물어볼 사람도 남아있지 않다. 결국 몇 대 전의 가주의 이유모를 장난이란 애매모호한 추측밖에 할 수 없다. 


“이 목걸이. 어쩌실 겁니까?”


“아무런 마법도 깃들지 않았다니, 유진 그 아이에 주려고 합니다. 그 아이가 보물까지 포기하며 가지고 싶어 한 물건이니까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 그 아이가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로베리안은 마주 웃으면서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적색 마탑주 로베리안. 그는 이 목걸이가 삼백 년 전, 하멜이 지녔던 목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읽어낸 마나는 로베리안에게 거짓을 고했다.


제안


그날 밤.


유진은 길레이드의 부름을 받았다. 여느 때라면 저녁을 소화시키기에 수련하고 있을 시간. 하지만 이번은 부름이 빨랐던 탓에, 저번처럼 땀내 폴폴 풍기며 본가로 향하는 일은 없었다.


유진은 니나의 호들갑을 받으며 몸을 씻고, 예복을 입었다. 그렇게 별채를 나오니, 시종들이 죄다 밖에 나와 있었다.


“안녕!”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사내 때문이다. 기온 라이언하트. 가주인 길레이드 라이언하트의 막내 동생. 저 나이까지 혼인하지 않고, 길레이드의 여행에 동참한 괴짜.


“기, 기온님!”


니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인다. 유진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기온을 힐긋 보았다. 혼기에 맞춰 결혼했다면 유진과 엇비슷한 나이의 자식을 두었을 텐데. 기온은 그런 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젊어 보인다. 


다만, 라이언하트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잿빛 머리카락이 얼굴보다 분위기를 늙어보이게 만들기는 했다. 그 머리색은 얼핏 보면 흰머리가 수북한 것처럼 보인다. 


‘베르무트도 그랬지.’


놈은 얼굴도 삭막했었다. 방계라곤 해도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유진의 머리카락도 잿빛이 섞여있긴 했다. 


“유진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네 이름은 당연히 알지. 실은 저번에 봤을 때부터 널 보았었거든.”


“네?”


“땀 냄새가 진동해서 말이야. 아, 그게 언짢았다는 것은 아냐. 무릇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가진 자라면 언제나 땀 냄새가 나야지.”


기온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며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너에 관한 여러 얘기를 듣기도 했고... 아, 이렇게 서서 말하는 것도 우스우니, 일단 함께 가자.”


“절 데리러 오신 건가요?”


“당연하지. 형님께서는 다른 기사를 보내려 했는데, 내가 직접 가겠다고 했어. 널 직접 보고 싶었거든.”


기온은 하하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의 걸음은 웃음소리만큼이나 호쾌했다. 유진은 니나의 배웅을 뒤로하고서 기온의 뒤를 따라갔다.


“저를 직접 보고싶으셨다뇨?”


“말 그대로지. 넌 시안과 대결에서도 승리했고... 이번 혈계식에서도 우승했다며?” 


기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


“혈계식은 나도 직접 보고 싶었는데, 혈계식은 가주 외에는 볼 수 없는 것이 전통이거든. 뭐 이번에는 형님 말고 로베리안님도 참관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로베리안님이 혈계식에 도움을 주셔서고...”


“그런 전통도 있어요?”


“웃기지? 하지만 진짜야. 뭐 가주의 특권이라는 거지. 보물고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본가의 가주 뿐이고, 혈계식에서 재미를 볼 수 있는 것도 가주 뿐이야.”


기온은 투덜거리다가 아차 싶었는지 제 입술을 두드렸다.


“아. 그렇다고 내가 형님에게 불만을 품은 건 아니다? 그냥 전통이... 이렇게 말하면 가문의 규율에 불만을 품은 것처럼 들리나?”


“전 상관없어요.”


“내 형님도 상관없어 하실 거야.”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유진은 기온이 어떤 성격인지 대략 짐작했다. 태도부터 묻어나오는 자유분방함. 혼인을 치르지 않은 것도 저 성격 때문이리라. 


“위니드.”


기온은 더 이상 유진의 앞에서 걷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늦춰, 유진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나는 써본 적 없지만, 좋은 검이란 건 알아. 소중히 다루렴.”


“쓰지 않으신 이유가 있나요?”


“별 것 없어. 나는 지금의 검이 마음에 들거든.”


기온은 히죽 웃으며 제 허리에 찬 검을 가리켰다. 베르무트의 검은 아니었다.


“멋지지? 옛날에 세상을 떠돌다가 구한 검인데, 내가 고생해서 구한 검이라 그런지 애착이 가더라고.”


“그것도 마법검인가요?”


“별 것 없는 마법이야. 네가 가진 위니드와는 비교가 안 되지. 그냥 뭐, 마나를 조금 더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정도?”


별 것 아니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것이, 드워프가 만든 검일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미궁은 어땠어? 시안과 시엘에게 듣기는 했는데, 네가 느낀 것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신기했어요.”


“어렵지는 않았구나.”


기온은 푸핫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함정과 몬스터. 중간에는 트롤, 마지막은 미노타우르스? 애들 상대로는 과해. 그 시안과 시엘도 트롤과는 정면에서 싸우지 않았어. 미노타우르스는... 형님과 로베리안님이 좀 고약하셨지.”


“시안은 괜찮나요?”


“몸은 괜찮지. 머리는 복잡해 보였지만. 뭐 별 수 있나? 시안이 미숙했기 때문인데 뭘. 차라리 어린 나이에 좌절을 겪은 것이 나아. 조금 더 머리가 커지고서 좌절해버리면 극복이 힘들어.”


기온은 쩝 입맛을 다시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나로서는 네게 고마움을 느낄 정도야. 네 덕에 시안의 건방짐이 나아질 테니 말이지.”


“...시안이 제 욕을 하진 않던가요?”


“했지. 너보고 개새끼라더라.”


“뒤에서 욕하는 건 비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한 대 쥐어박았어.”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이가 희다. 


“내가 때려줬으니까, 괜히 나중에 시안과 싸우지는 마. 알았지?”


“시안이 저한테 안 까불면요.”


“그건 곤란한데. 좀 까불어서 혼나고 그래야 버릇도 고쳐지고 실력도 늘지.”


“싸우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음, 그럼 그냥 싸워. 너무 아프게 때리지는 말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본가에 도착했다. 기온은 시종들의 인사를 대충 물리고서 유진을 데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가주님이 왜 절 부르신 건가요?”


“칭찬?”


“그건 아까도 들었어요.”


“몇 번을 해도 부족한 것이 칭찬이지.”


“기온님도 이유는 모르시군요.”


“뭐 짐작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일이야. 너와 직접 관련 된 문제기도 하고.”


계단을 오른 뒤, 긴 복도를 함께 걸었다. 이렇게 본가를 누비는 것은 처음이라, 유진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기온의 걸음이 멈춘다. 둘의 앞에는 굳게 닫힌 큼직한 문이 있었다.


“너와는 자주 봤으면 좋겠다.”


기온은 유진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저도요.”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유진도 마주 웃어주었다. 기온은 표정을 가다듬고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거라.”


안쪽에서 길레이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온은 문을 열어준 뒤에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며 유진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성격은 좋은데, 좀 부담스럽네.’


유진은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방은 사무적인 분위기가 그득했다. 


“갑작스레 불러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유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일단 앉거라.”


다과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과자와 찻잔에 손을 대지 않고 길레이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무례한 일이기는 했지만, 어린애는 이래도 된다.


“이 목걸이.”


길레이드도 유진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당돌한 모습에 귀여움을 느꼈다. 사람의 인상이란 것은 첫단추를 어찌 끼우느냐에 따라 이후의 시선이 바뀌기 마련이다. 


“로베리안님께 부탁드려 감정해봤는데, 그냥 평범한 목걸이더구나.”


“그렇군요.”


“목걸이에 어린 마나의 기억까지 읽었다만. 아무런 특이한 점도 없었어.”


마나의 기억을 읽었다고? 유진은 순간 내비칠 뻔 한 동요를 감추었다. 


‘그래, 그런 마법도 있었지.’


세냐의 마법. 그런데 특이한 점이 없었다고? 그 말에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기억은 뭔가요?”


“으음...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쉽게 말하자면, 이 목걸이가 어디서 왔는지를 읽어내는 마법이었단다. 로베리안님은 대략 백 년 전에 수도의 거리에서 구매된 목걸이라고 하셨지.”


유진은 넘겨받은 목걸이를 확인해보았다. 아니, 틀림없다. 이 목걸이는 삼백 년 전에 하멜이 걸고 다닌 목걸이다. 부모님의 유품. 거기에 수십 년 동안 걸고 다닌 목걸이를 잘못 볼 리가 없잖은가. 


‘애당초 이따위로 낡은 목걸이를 미쳤다고 거리에서 팔겠어?’


파는 놈도 제정신이 아니고, 사는 놈은 더더욱 제정신이 아닐 목걸이다. 심지어 목줄의 변색까지 그대로 남아있고, 매달린 싸구려 수정의 흠집도 기억 속과 똑같다.


‘로베리안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 놈이 잘못 읽었나? 마탑주 자리에 앉은 대마법사가?’


그게 아니라면.


‘...마탑주를 속일 정도의 마법이 덧칠되었다... 마나에 기억을 새로이 씌운 것일지도. 대체 누가? 베르무트?’


놈이 그럴 이유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죽은 동료에 대한 추모로 유품을 보물고에 넣어두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삭막하기 짝이 없던 베르무트지만, 마경에서 귀환한 후로는 열 명이 넘는 부인을 뒀었다.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정말 추모하고 싶었으면 마왕을 죄다 죽였어야지.’


그러지 못했다면, 보물고에 제대로 등록이나 해주던가. 유진은 복잡한 불만과 의문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 목걸이. 제가 가져도 되는 건가요?”


“아무 가치도 없는 목걸이인데, 아직 가지고 싶으냐?”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요.”


“흠. 가끔 그런 물건이 있긴 하지.”


어린 아이는 이상한 것에 마음이 끌리곤 한다. 길레이드도 어릴 적에는 낡은 동전을 모으곤 했었다.


“평소에도 그런 골동품을 좋아했느냐?”


“싫어하지는 않았죠. 왠지 신기하잖아요.”


“네가 원한다면 가져도 좋단다.”


“감사합니다.”


유진은 방긋 웃고서 즉시 목걸이를 걸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길레이드는 낮게 헛기침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유진. 널 부른 것은, 목걸이를 주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이유가 하나 더 있단다.”


“무슨 이유요?”


길레이드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유진의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며 찻잔을 어루만졌다.


“...갑작스런 말이지만. 네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게다. 오히려 네 미래를 위한 제안일 거야.”


‘설마.’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에 유진의 눈썹이 움찔거린다. 미래를 위한 제안? 이 상황에서 저렇게 운을 때는 제안이라면 몇 가지 없지 않은가. 


“유진, 너를...”


“가주님.”


유진은 즉시 입을 열었다. 길레이드는 하던 말을 멈추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시엘은 착하고 귀엽지만, 저는 벌써부터 혼인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정략혼. 


유진은 그를 확신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오빠인 시안을 그 꼴로 만들었는데, 시엘은 다음날부터 생글생글 웃으며 유진을 찾아와, 곁에 찰싹 붙어서 귀찮게 굴었다. 


혈계식 때도 그랬다. 시엘은 이상하리만큼 유진에게 친한 척을 했고, 자신이 몇 달 빨리 태어났으니 누나라는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왜 지랄인가 했더니. 벌써부터 데릴사위의 서열을 잡으려 한 거야.’


틀림없었다. 미궁에서는 또 어땠는가? 오빠가 미노타우르스에게 처맞는 것을 보면서 깔깔 웃어댔다. 


‘내 옆에서.’


은근히 디자이라를 견제하는 모습도 있었던 것 같다. 유진이 보아 온 시엘의 모든 모습이 확신을 굳건히 만들었다. 쌍둥이가 시비를 걸어 온 첫날부터 계획되지는 않았겠지만, 점차 정략혼을 위해 설계당한 것이 틀림없다. 


‘어쩐지. 보물고의 무기도 흔쾌히 내주더니. 날 시엘과 혼인시켜서 본가에 묶어두려는 심산이었던 거야.’


사람 좋게 군 주제에 그런 흉계를 꾸리다니. 목적을 위해서라면 딸의 미래까지 팔아넘기는 것인가? 그 흉흉한 속내는 과연 베르무트의 후손이라 할 만 했다. 


‘아니, 베르무트도 이런 일은 안 할 거야.’


유진의 머릿속에서 길레이드의 이미지가 변질된다. 


“저는 벌써부터 혼인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기도 하고요. 아버님의 허락도 있어야 하고... 만약 아버님이 허락하신다고 해도, 저는 시엘과는 혼인하고 싶지 않...”


“잠깐.”


멍하니 유진의 말을 듣고 있던 길레이드가 급히 손사레를 쳤다. 


“유진. 뭔가 오해하고 있구나.”


“네?”


“나는 널 시엘과 혼인시킬 생각으로 부른 것이 아니란다. 그건... 으음... 시엘이 정할 일이지. 물론 네 의견도 중요하고.”


꽤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나, 길레이드는 정략혼을 강경히 밀어붙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럼요?”


헛다리를 제대로 짚어버렸다. 유진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의 열기를 느끼며 더듬더듬 물었다.


“널 양자로 들이고 싶어 부른 것이야.”


“...네?”


하지만 이어지는 말도 충격적이기는 했다. 


‘그 방법이 있었군.’


납득은 간다. 동시에 부끄러워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13살 꼬마와 결혼하기 싫다고 지껄인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다. 아니, 그것보다 13살 꼬마와 결혼이란 것을 떠올린 머리를 박살내고 싶었다.


‘내가 미쳤지.’


어린애처럼 굴다보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양자... 어...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략혼만큼 갑작스럽지는 않겠지.”


“제가 잘못했어요.”


“그런데 정말 시엘이 싫은 것이냐? 그를 떠올린 것을 보면 아주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싫어요.”


“음...”


길레이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정략혼의 이야기는 그만하고, 양자가 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지만... 기돌에 아버지가 계시는 걸요.”


“네가 바란다면 제하드도 본가에 부를 게다.” 


“그럼 전 아버지가 둘이 되잖아요.”


“하지만 네 친부는 제하드란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단다.”


길레이드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너희 가족이 본가의 품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뿐. 명목상으로는 내가 양부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네가 나를 아버지라 여길 필요는 없단다. 물론, 나는 널 양자로 대하겠지만 말이야.”


“저희 아버지가 곤란해 하실 것 같은데요.”


“그에 관해서는 제하드와도 여러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 하지만 유진. 나 역시 세 명이나 되는 자식을 가진 아버지란다. 나는 제하드에게서 아들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음...”


“나는 제하드와 아직 만난 적이 없지만, 그를 형제와 마찬가지로 존중해 줄 것이다.”


“제가 거절한다면, 가주님은 저희 아버지를 존중해주지 않으실 건가요?”


“설마.”


길레이드는 그 당돌한 질문에 웃음을 터트렸다.


“내 입으로 말하기도 민망하다만. 나는 그런 치졸한 인물이 아니란다. 네가 거절한다면... 그냥... 애석함을 느끼겠지. 그것이 전부야.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할 것이고, 네 미래를 축복해 줄 것이다. 다만... 네 미래가 본가의 품안에서 빛을 발했으면 싶구나.”


“...저 혼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유진은 일단 한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결국 저 제안에 결정을 내리는 것은 유진의 의지일 터이나, 그래도 아버지인 제하드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연회를 뒤로 미루도록 하지.”


길레이드가 말을 받았다. 본래는 내일 저녁에 혈계식이 끝난 것을 기념하는 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기돌에 사자를 보내서 네 아버지를 정중히 모셔오라 말해두마.”


“가주님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조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거라. 너는 이번 혈계식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였다. 아들이 축복과 찬사를 들어야 할 자리에 아버지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지.”


“감사합니다.”


유진은 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심 즐겁기도 했다. 솔직히 그는 양자로 들어오라는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제하드가 실력처럼 성격마저 개차반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길레이드의 양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하드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전생의 기억 탓에 도저히 아버지라고 여길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유진은 제하드를 좋아했다. 


“...아까 제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 하셨잖아요.”


유진은 홀짝이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본가에서 자란다면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게다.”


길레이드는 유진이 이 제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기뻤다.


“우선... 그래. 기돌에는 가르침을 청할 기사가 없었다고 했지? 하지만 본가에서는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다. 이곳은 뛰어난 기사들이 많거든.”


“기왕 배운다면 가장 뛰어난 분에게 배우고 싶어요.”


유진은 최대한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길레이드를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양자가 된다면, 가주님한테도 배울 수 있나요?”


유진은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얼마나 강한지 궁금했다.


제안


길레이드는 저 당돌하고 어린아이다운 질문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즐거움과 호감을 느꼈다. 무릇 무가의 자식이라면 저런 욕심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물론 가르쳐 줄 수 있지.”


길레이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배우고 싶다면 나 말고 다른 적임자가 있단다.”


“누구요?”


“기온.”


유진은 웃는 이가 유달리 하얗던 기온을 떠올렸다. 너와는 자주 봤으면 좋겠다. 문을 열어주던 기온은 그렇게 말했었다. 


“예전에는 내 실력이 더 뛰어났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


“그런가요?”


“내 실력을 깎아내리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유진의 눈이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거린다. 길레이드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에게 마나수련법은 전수 받았느냐?”


“아직 듣지 않았어요.”


“그건 꽤 특이하구나.”


보통 방계의 아이들은 혈계식 직전에 마나수련법을 전수받고, 혈계식이 끝난 당일부터 마나에 입문하려 든다. 본가에 비해 몇 년은 늦었으니, 며칠이라도 입문을 서두르려는 것이다. 


“제가 아직은 배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괜히 먼저 들어버리면, 저도 모르게 마나를 수련할 것 같아서요.”


“하긴. 너는 본가에 와서도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으니까...”


길레이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했다. 동시에 안쓰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기돌에 있는 제하드의 가문은 방계 중에서도 특히나 힘이 약한 가문이다. 


그래도 라이언하트란 이름이 있으니 지방 유지로서 풍족한 생활은 가능할 테지만, 그 이상은 꿈꿀 수 없다. 반면에 디자이라와 가르기스의 가문은 어떤가? 방계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 이미 두 가문은 아이들을 무럭무럭 성장시키기 위한 준비를 마쳐두었을 것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마나스톤을 매입했겠지.’


고등한 몬스터의 체내에서 발견되는 마나의 결정체. 혹은 미스릴처럼 마나를 품는 광석. 그런 마나의 덩어리가 마나스톤이다. 마나에 막 입문할 때에는 마나스톤의 도움이 클 수밖에 없다. 


‘제하드의 가문은 마나스톤을 매입할 만큼 여유롭지 않아...’


마나스톤은 높은 효용성만큼 구하기가 힘들고, 가격도 비싸다. 게다가 입문자가 마나스톤의 덕을 보려면 뛰어난 실력자의 인도가 필수적이다. 이오드도, 시안도, 시엘도. 처음 마나에 입문할 때에는 길레이드가 직접 인도해 주었다.


그래서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벌써부터 저만큼이나 뛰어난 아이인데. 시골 제하드의 가문은 유진의 재능을 피워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길레이드는 그 말을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순수한 걱정과 안타까움일 지라도, 괜한 말을 건네어 아들이 아버지와 태어난 가문을 원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유진이 아닌, 제하드와 나눠야 할 이야기다. 


하지만.


직접 듣지는 않았어도, 유진은 길레이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눈동자에 연민이 그득하니 짐작이 어렵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우리 가문이 허접한 건 사실이니까.’


그 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 필요한 것은 없는지, 연회의 주인공은 너일 테니 원하는 요리 같은 것은 없는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길레이드는 완전히 어두워진 창밖을 힐긋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널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구나.”


“재미있었어요.”


“곧 사람을 부를 터이니, 잠시 기다리거라.”


“괜찮아요. 별채가 여기서 먼 것도 아니고. 밤 산책하는 겸 혼자 돌아가겠습니다.”


유진은 길레이드의 배려를 마다하고 방을 나왔다. 그렇게 복도를 걷는데, 저 너머에서 누군가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애니실라였다. 그녀는 우연한 만남을 가장했지만, 유진은 놀라지 않았다. 애니실라가 저 너머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쯤은 향수 냄새 덕분에 눈치챌 수 있었다.


“...어머나.”


애니실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기다란 속눈썹을 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진?”


“안녕하세요.”


유진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하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돌에서 온 유진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네 이름은 당연히 알고 있지.”


애니실라는 유진이 싫다. 사랑스런 아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혈계식에서도 본가를 제치고 우승한 건방진 꼬마. 애니실라가 유진을 좋아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적의를 내비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실력은 확실한 꼬마 아닌가. 저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니, 도중에 급사라도 하지 않는다면 향후 십 년 안에 초라한 가문을 일으킬 만큼 성장할 것이다.


‘벌써부터 적으로 삼을 필요는 없어.’


그래서 시엘을 유진의 곁에 맴돌게 했다. 애니실라는 남편과는 달리, 유진을 시엘과 정략혼으로 묶어 버리는 미래도 썩 괜찮은 그림이라 생각했다.


“가주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는 들었는데, 꽤 오래 걸렸구나. 네가 아직 있는지 몰랐어.”


애니실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유진은 그 친절한 미소와 상냥한 말투에 부담을 느꼈다. 


“제게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일단 그렇게 말을 던져보았다. 길레이드는 그 당돌한 모습에도 호감을 느꼈지만, 애니실라는 그렇지 않았다. 


‘벌써부터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구나.’


그럴 만도 했다. 시골 촌뜨기가 본가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할 거리인데, 첫날부터 본가의 아이와 결투를 벌여 승리하고, 혈계식에서도 우승하지 않았나. 마음 같아서는 저 건방진 콧대를 짓뭉개주고 싶은데. 애니실라는 그러한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언젠가는 사위가 될 지도 모르는 아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가주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해서.”


“가주님과 단 둘이 나눈 이야기라 감히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응, 응. 물론 그렇겠지. 널 추궁하려는 것은 아니니 부담은 느끼지 말아주련. 그 외에도 이런저런 할 말이 있기도 하고...”


유진은 되묻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니실라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하고서 말을 덧붙였다.


“그 왜, 며칠 전에 시안이 네게 큰 무례를 범했잖니? 본래라면 시안의 어머니인 내가 직접 사과를 건넸어야 하는데, 혈계식이 코앞이기도 하고, 워낙 경황이 없어서 사과가 늦었구나.”


퍽이나 그러시겠다. 정말 사과하고 싶었다면 그 날 곧장 찾아왔겠지.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때의 문제는 이미 시안과 풀었는걸요.”


“...어쩜.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마음이 넓구나.”


애니실라는 뺨을 실룩거리며 웃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야. 네게 범한 결례에 관해서는 시안에게도 따끔히 주의를 주었으니, 앞으로도 부디 시안과 사이좋게 지내주렴.”


“당연히 그래야죠. 저희는 같은 성씨를 가진 가족이잖아요.”


유진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반면에 애니실라의 얼굴은 복잡하게 구겨졌다. 가족? 틀린 말은 아니다만, 저 껄끄러운 아이의 입에서 ‘가족’이라는 말이 나오니 왠지 모를 부담이 느껴졌다.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래.”


애니실라는 더 이상 유진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눈치도 보이고, 정실인 테오니스도 신경 쓰인다. 이렇게 복도에서 붙잡고 있는 것도 좋은 그림이 아니기도 했다.


“조심히 들어가렴.”


애니실라는 유진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활짝 웃었다. 얄미운 아이. 만남조차도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하지만 그런 것이야 앞으로 잘 무마하면 될 일이다. 


“네. 안녕히 주무세요.”


유진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애니실라가 정확히 어떤 성격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첫날부터 방계랍시고 노골적인 핍박을 준 것을 보면, 심술궂은 성격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니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다.


*


이틀 뒤. 머나 먼 기돌에서 제하드 라이언하트가 도착했다. 유진을 데리러 온 것은 일개 기사인 고든이었지만, 이번에는 가주의 동생인 기온이 직접 제하드를 데리고 왔다.


제하드는 그 사실에 굉장한 부담을 느꼈다. 그가 본가에 온 것은 수십 년도 전인 혈계식과 가주 승계식 때뿐이었고, 그 후로는 본가는커녕 수도에도 몇 번 온 적이 없었다.


‘...유진이 이번 혈계식에서 우승했다고?’


내 아들이? 정말로? 제하드는 지금 자신이 꿈이라도 꾸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농락하기 위한 거짓말이 아닐까. 


그럴 이유가 어디 있는가? 위대한 베르무트의 적통인 라이언하트의 본가가, 대체 무슨 이유로 촌구석에 처박힌 방계의 가주를 불러들여 이런 장난질을 치겠는가. 


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처음 기온이 찾아왔을 적에도 기절할 만큼 놀랐고, 용맹하기 짝이 없는 사자 깃발을 매단 호화로운 마차를 보았을 때도 놀랐다. 오는 내내 기온에게 유진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놀람은 가시지 않았다. 


몇 개나 되는 워프게이트를 거쳐 수도에 도착하고. 어지간한 일로는 사용되지 않는 본가의 직통 워프게이트에 들어갈 적에야 제하드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내 아들이... 본가의 아이들을 이겼다.’


실감은 제하드의 눈시울을 적셨다. 기대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아들. 친아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던 아들. 그래서 항상 죄책감을 느꼈다. 제하드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아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단 것을 잘 알았다.


혈계식에서 현실을 깨닫게 되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뛰어난들 방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본가와 방계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타고난 자질과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아버지!”


아들을 보았을 때.


제하드는 체면을 잊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죄책감이 맞물린다. 


웅장하고 화려한 본가의 건물, 그 앞에서 휘날리는 라이언하트의 깃발. 아들은 그 중심에 서서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대단한 지원을 해준 적은 없다. 뛰어난 기사를 스승으로 붙여준 적도 없고, 제하드 본인이 스승을 자처한 적도 없었다. 목검, 허수아비, 그따위 밖에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들은 혈계식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유진, 내 아들...!”


제하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유진은 그런 제하드의 모습에 움찔 놀랐지만, 곧 어린애다운 표정을 지으며 제하드의 품에 안겼다.


“네가... 네가 자랑스럽구나.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워.”


“기쁜 소식을 들려드릴 것이라고 말했잖아요. 설마 절 믿지 못하신 거예요?”


혈계식을 위해 기돌을 떠날 적에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당연히 제하드는 그 말을 무조건 믿지 않았다. 제하드는 그것에도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 그런 말을 했었지. 아, 아들아. 나는... 널 믿어주지 못했어.”


“에이, 또 그러신다. 제가 아버지였어도 안 믿었을 거예요.”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제하드의 뱃살을 꼬집었다. 그러자 제하드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두툼한 옆구리에서 밀려오는 찌릿한 아픔이 다시금 현실을 자각시킨다. 


정문에 나와있는 것은 아들 혼자가 아니었다. 바로 뒤에는 가주의 동생, 기온이 있다. 그리고 저 앞에는... 제하드는 꿀꺽 침을 삼키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길레이드 라이언하트. 오래 전의 승계식 때 보았던 라이언하트의 가주. 제하드는 그 얼굴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곤, 길레이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인사가 늦었습니다. 기돌에서 온 제하드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길레이드 라이언하트라고 하오. 급히 초대하게 된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길레이드는 직접 걸어와 제하드에게 악수를 권했다. 제하드는 화들짝 놀라서 제 손을 바짓단에 벅벅 문질러 닦고 악수를 받았다. 


“무례라니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초대해 주신 것에 큰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아들과의 시간을 길게 빼앗고 싶지는 않소만, 괜찮다면 안으로 드셔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소?”


길레이드는 이런 곳에서 제하드와 긴 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방계인 제하드로서는 본가의 가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굽신 거릴 수밖에 없는데, 그 모습을 아들인 유진이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괜찮습니다.”


유진은 알아서 뒤로 물러섰다. 제하드는 유진을 힐긋힐긋 보면서 길레이드의 따라 본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떠들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 같았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러나 제하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 초대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아들이 본가를 제치고 혈계식에서 우승한 것은... 본가에 있어 크나큰 모욕이었다. 그를 두고서 압박을 가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사자로 온 기온은 쾌활했고, 유진은 평소와 똑같았으며, 가주인 길레이드는 이쪽이 민망할 정도로 정중했다. 


가주의 방에는 이미 접대를 위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길레이드는 제하드가 긴장으로 마른 목을 축이는 것을 지켜본 뒤에 곧장 본론을 말했다. 


“...양자...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무턱대고 용건만 말하지는 않았다. 길레이드는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인지를 세세히 설명해 주었다. 


유진의 자질은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될 만큼 찬란하다. 그를 화려히 피어내기 위해서는 본가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방계의 아이가 혈계식에서 본가를 제치고 우승한 것. 그건 라이언하트 가문의 축복인 일이지만, 수많은 라이언하트의 방계들 중에서 불온한 뜻을 가진 자들을 준동시킬 수 있다. 


어쩌면 반란을 꾀하는 무리들이 접촉할 지도 모른다.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압박이 가해질 지도 모른다. 


“물론 본가는 가문을 대표하는 장으로서, 제하드님의 가문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호할 것이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본가가 해줄 수 있는 보호에는 한계가 있다. 


“만약 제하드님이 거절할 지라도 본가가 불만을 가질 일은 없을 것이오. 또 유진에게 가능한 선에서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리겠소.”


“...허허...”


제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이건... 역시 꿈인가? 아니, 현실이다. 제하드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았다. 


‘유진이... 본가의 양자로...’


“유진이 양자가 된다면... 제하드님도 본가의 식구로 받아들일 것이오. 갑작스런 제안임은 알지만...”


“결레를 무릅쓰고 말씀올립니다.”


제하드는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제 아들을 높이 봐주시는 점. 그리고 과분히 아껴주시는 점,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아들의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가주님의 뜻은 선하고 정직할 지라도, 본가의 다른 분들이 유진을 핍박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길레이드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굳은 어투로 의견을 말하는 제하드에게 호감을 느꼈다. 


“저는 라이언하트에서 태어났으나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사람입니다. 저는... 아들의 미래를 응원합니다만... 제 초라함이 아들의 미래를 밝혀주지 못할까 늘 죄책감을 가졌지요.”


제하드는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붙잡으며 긴장을 억눌렀다.


“가주님에겐 세 명이나 되는 자식이 있잖습니까. 제 아들이 양자로 들어가면... 이유가 어찌 되었든 굴러들어 온 돌이 되겠지요.”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인지 알겠소.”


길레이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가는 적통을 중시하오. 유진이 양자로 들어온들, 승계식을 거쳐 가주가 되는 일은... 힘들 것이오.”


“...”


“내 부인들과 자식들도 그 사실은 알고 있지. 이건... 내 대에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전통이니. 이것 하나는 분명하게 약속드리겠소. 나는 유진의 미래를 제한하고 싶지 않소. 하지만 내 뜻이 본가와 원로원에 계신 큰 어른님들의 뜻을 대표할 수는 없소.”


“...예.”


“유진. 그 아이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본가의 품 안에서 자질을 꽃피울 수 있을 것이오. 가주는... 되기 힘들겠지. 하지만... 제하드님. 부디 이 말에 불쾌를 느끼지 말아주시오.”


길레이드는 말을 마저 하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기돌에 있는 것보다, 본가의 식구가 되는 것이 유진의 미래를 가꾸어나가기 좋을 것이오. 가주가 되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유진은 본가의 양자로서 내 자식들의 형제가 되어 우애를 쌓게 될 것이오. 그 인연은 유진이 나아갈 미래에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심어 줄 것이오.”


길레이드는 이런 말을 하는 것에 적잖은 죄책감을 느꼈다. 유진의 자질은 월등하다. 이오드는 물론이고 시안과 시엘과도 비교가 안 된다. 벌써부터 이런 차이가 나는데, 앞으로 몇 년이면 더더욱 차이가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가주가 될 수 없다. 길레이드는 내심 유진이 가주가 되어 본가를 영광스럽게 하길 바라지만, 그것은 모순되는 바람이었다. 양자로 들어 온 방계의 아이가 가주가 된다는 것부터가 본가의 정통성과 명예를 실추시킨다. 


가주인 길레이드가 그를 신경 쓰지 않을 지라도, 세상은 라이언하트를 비웃을 것이다. 원로원도 그런 일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본가는 방계보다 우월해야 한다. 혈계식은 그를 위한 전통이다.


“...그렇겠지요.”


제하드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들의 미래.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 무슨 말인지 심장이 아플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제하드는 자신의 무력함과 초라함을 절감했다. 본가의 양자가 된다면 기돌의 제하드의 아들로 있는 것과 비교되지 않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제하드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제안


유진은 멀찍이 걸어오는 제하드의 얼굴을 보고서 검을 내려놓았다. 얼굴은 죽상에 힘없는 걸음. 길레이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제하드가 어떤 기분을 느꼈으며, 왜 이곳에 오는 것인지는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표정이 왜 그래요?”


그래도.


유진은 알아서 처신하는 대신, 제하드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그 말에 제하드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뭔 놈의 별채가 기돌의 저택보다도 컸다. 


그나마 연무장은 기돌보다 작았으나, 아들이 쥐고 있는 검이 제하드의 어깨를 축 늘어지게 만들었다. 폭풍검 위니드. 기온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아들이, 본가의 보물고에서 직접 고른 검. 


제하드의 가문 역사상 보유했던 모든 재산을 처분해도, 저런 검은 살 수 없다.


“...아들아.”


제하드는 더욱 큰 초라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본가의 가주님이 널 양자로 들이고 싶다 말하시더구나.”


“저도 알아요. 저번에 미리 들었거든요.”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아버지 표정은 왜 그러셔요? 저 혼자 양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도 같이 본가에 들어오는 거잖아요.”


“...그 이야기도 들었지.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네 미래를 위해서라면 널 본가의 양자로 들이는 것이 맞아. 하지만 그럴 경우...”


제하드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본가의 견제. 미래의 불안. 제하드는 그런 미래를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으나, 아직 13살인 아들이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만약... 네가 본가의 양자가 되면. 나중에 힘든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그렇겠죠.”


제하드는 세세히 말하지 않았으나, 유진은 그 의중을 확실히 알아먹었다.


“하지만 아버지. 그게 뭐 어때요?”


“...응?”


“나중에 힘든 일이 생길 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좋은 일도 생길 거잖아요.”


“...”


“아버지.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유진은 위니드를 칼집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제하드에게 다가가서 히죽 웃었다.


“아버지가 양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저는 그냥 기돌로 돌아갈 거예요.”


“...”


“정말로요. 아무래도 좋다니까요? 아버지. 저는 지금도 엄청 잘하고 있어요.”


잘 컸지.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했다.


“마나를 수련하지도 않았고, 뛰어난 스승께 배운 것도 아닌데. 본가의 아이들을 이겼다고요. 저는 아버지의 아들로 잘 해왔어요. 꼭 본가의 양자가 되지 않아도, 앞으로도 잘 할 거예요.”


제하드는 아들의 진심을 느꼈다. 그것이 제하드의 눈동자에 눈물을 그득 채웠다.


“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아요.”


크흡. 제하드는 울음을 삼켰다.


“전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아버지 덕분이라고요.”


그건 유진도 인정하는 바였다. 만약 제하드가 능력에 비례하지 않은 권위에만 찌든 사람이었다면, 어린 시절이 여러모로 귀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하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유진의 뜻을 존중하고, 어려서부터 유진이 해달라는 것들을 위해주었다. 


“그러니까 아버지. 괜히 자기 자신을 책망하지 말아주세요.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셔야죠. 아버지가 아들을 잘 키우고, 제가 워낙에 잘 자라서 이런 일이 생긴 거잖아요.”


“...유진...”


제하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나는... 나는... 네 뜻을 따르고 싶다. 내 처지의 영광보다는, 네 미래의 영광을 위하고 싶구나.”


“전 기돌에서도, 그리고 본가에서도 미래에 영광을 쥘 자신이 있어요.”


유진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에는 자신감 뿐만 아니라 확신도 있었다. 본가의 양자가 된다면 여러 이점을 얻는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다. 


‘몇 년 차이가 날 뿐이지.’


정령을 불러들일 최소한의 마나만 수련하면 된다. 그런 것은 기돌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제하드 가문의 마나수련법이 보잘 것 없다면 하멜의 마나수련법을 쓰면 된다. 이 터무니없는 육체는 용병들이 익히는 싸구려 마나수련법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것이다.


그 뒤에는? 최하급 정령이라도 사용하기 나름이다. 당장 검신에 바람의 칼날만 둘러도 검기는 대체된다. 그것만으로도 유진은 어지간한 기사는 발라먹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유진.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면 네게도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야.”


“그야 그렇겠죠.”


“다만, 네가 본가에서 미움을 받지 않을까 걱정되는 구나...”


“아버지. 어려서부터 절 보셨잖아요.”


유진은 피식 웃으며 제하드의 뱃살을 찔렀다.


“저는 어디서 맞고 다닐 성격은 아니에요. 못 들으셨어요? 저 여기 온 첫날에 본가의 시안을 울렸는데.”


“그 말을 듣고 기절할 뻔 했다...”


“뭘 새삼스레. 어쨌든,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오히려 아버지 걱정을 하셔야죠.”


“내 걱정...?”


“이 뱃살.”


유진은 찌르는 것을 그만두고, 양손으로 제하드의 뱃살을 들췄다.


“본가에서 주는 밥은 저희 집보다 훨씬 맛있더라고요. 아버지 가뜩이나 운동도 안하시는데, 본가에서 이런저런 음식 먹으면 금세 뱃살이 불어버릴 거예요.”


“허... 허허.”


“제 미래를 보고 싶으시다면 건강부터 챙기세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아들의 태연한 모습에 제하드는 그만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무력함과 초라함을 절감하던 고민이 우스워졌다.


“유진.”


제하드는 뒤늦게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이름은 유진 라이언하트다. 나, 제하드 라이언하트의 아들.”


“그렇죠.”


“네 이름은... 나와, 먼저 떠난 네 어머니가 함께 지은 것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거라.”


“제가 바보도 아니고 이름을 잊겠어요?”


유진은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가의 양자가 되어도, 절 낳아준 진짜 아버지는 제하드 라이언하트 뿐이에요.”


제하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엄한 표정과는 별개로 눈물은 뚝뚝 흘렀다. 그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유진을 끌어안았다.


‘결국 양자가 되는 군.’


유진은 제하드의 품에 안겨 생각했다.


‘이래저래 귀찮기는 해도, 뭐 받아먹을 것들은 많을 테니 감수할 만 해.’


유진은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되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다. 나중에도 그럴지는 모르겠으나, 벌써부터 괜히 가주 자리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다면 귀찮은 견제를 잔뜩 받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줄 지는 모르지만.’


정실 테오니스와 첩실 애니실라. 둘은 유진을 견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불만과 견제는... 아예 정면에서 으깨버리던가. 그냥 무시하던가.’


물론 유진은 전자가 취향이기는 했다.


*


이번 혈계식을 마무리하는 연회는 그날 밤에 벌어졌다. 


손님으로 초대된 것은 제하드 뿐만이 아니었다. 혈계식의 내용은 본가의 망신 뿐이었으나, 길레이드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듯이 혈계식에 참가한 모든 아이들의 가족을 연회에 초대했다.


이번 혈계식이 본가의 망신이 아닌, 방계의 우승을 축복하는 의의를 주기 위해서였다. 


애니실라는 남편의 결정이 마음에 들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우승. 


차선으로 생각한 것이고, 진심으로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유진이 본가를 제치고 우승해 버렸다. 그것이 연회까지 벌이며 과시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시안의 패배는 대단찮은 것이 되었다.  


“당당히 있으렴.”


애니실라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죽상을 하고서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던 시안은 움찔 놀라서 애니실라를 쳐다보았다. 


“이미 겪은 패배는 어쩔 수 없는 거야. 결투도, 혈계식도 말이지. 하지만 좌절을 내색하지는 마.”


“...어머니...”


“너는 내 아들이야. 나, 애니실라 카이네스의 아들. 네가 결투에서 패배하고, 혈계식에서 부끄런 모습을 보였어도 내 아들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시안은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것은 있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깨를 활짝 폈다.


“...시안.”


“...네.”


“넌 앞으로 쭉 저 아이와 비교될 거야. 널 보는 모든 사람들은 네가 유진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것부터 떠올리겠지. 본가 역사 최초로 혈계식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을 비웃을 거고.”


“...”


“어쩔 수, 없는 거야. 시안. 부끄럼을 느끼렴. 하지만 좌절하지는 마. 누가 비웃든 너는 내 아들이며, 라이언하트의 적통이니까.”


“네.”


“과거는 어쩔 수 없어. 그러니 시안, 앞으로가 중요한 거야.”


애니실라는 유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그러며 시안의 손을 꽉 쥐었다. 시안은 어머니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열심히 할게요.”


“...그래. 내 사랑스런 아들.”


유진은 본가의 양자가 되었다.


테오니스와 애니실라는 그 사실을 어제부터 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반발했다. 그러나 남편의 뜻을 바꿀 수는 없었다. 라이언하트의, 본가의 영광을 위해. 남편의 말은 라이언하트를 위한 대의로 가득 차 있었다.


애니실라는 대의보다는 자식의 영광을 위하고 싶다. 하지만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키우는 것에도 욕심은 났다. 그녀는 자신의 욕심과, 어머니로서의 바람과, 


피의 적통성을 중시하는, 본가의 현실을 보았다. 


“유진은 가주가 될 수 없어.”


애니실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시안. 그 사실에 안주하지 마렴. 미래는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너는 많은 불리함을 가지고 있으니, 가주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해.”


“네.”


시안은 활짝 핀 어깨를 늘어트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이 있는 쪽을 보았다. 


“...그렇다고 괜히 유진과 적이 되지는 마.”


“...이제부터 형제니까요?”


“그래.”


형제라니. 애니실라는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본심과는 달랐다. 


“형제다운 우애를 쌓도록 하렴. 저 아이가, 네 힘이 되어줄 수 있게끔 만들어. 네게는... 시간이 있어.” 


“...시간...”


“양자라고 업신여기지 마. 너와 동등하게 대해. 함께 놀고, 수련하며, 추억을 쌓아. 저 아이가 네게 원한을 갖게 하지 마. 그렇게... 언젠가 저 아이가, 네게 도움을 줄 수 있게끔 만들어.”


“...네.”


시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어린 꼬마는 유진에게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패배에 대한 굴욕. 짜증. 분노. 


혈계식에서 유진이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실력. 그에 대한 감탄. 선망. 경외... 


‘...친하게...’


불과 며칠 전이라면 그 말에 화부터 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안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한 부끄럼을 느꼈다.


“...어... 어머니.”


“말해.”


“어떻게... 친해져야 하나요? 어, 어머니가 말해주시면 안돼요? 저랑 친하게 지내라고...”


어린아이다운 말이었지만, 애니실라는 아들을 한심하단 눈으로 보았다.


“시엘에게 말하렴.”


보는 눈만 없었어도 따끔히 혼을 냈을 텐데.


애니실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시엘은 유진과 함께 있었다. 


제하드는 다른 방계의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 중에서 특히 가르기스와 디자이라의 부모가 극성이었다. 


“훌륭한 아들을 두셨구려.”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지요?”


“저 아이는 어떤 수련을 하였소?”


“제하드님도 본가의 식구가 되신다고 하던데.”


“내 아들에게 들으니 체구에 맞지 않게 힘이 대단하다더군.”


“자녀의 교육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 가문 비전의 근육성장제는 본가에도 없는 것이오. 관심 없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도 같은 방계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죠.”


“이 성장제는 어린아이에게도 효과적이지만, 어른에게도 효과가 있소. 물론 알맞은 투약과 운동이 병행되어야 하지만, 제하드님에게는 필요할 것 같소.”


“어머, 그럼 잘 됐네요. 다음 달에 남자들끼리 사냥을 가기로 했었죠? 그때 제하드님도 오시죠.”


“산을 달리며 땀을 쭉 빼다보면 제하드님도 그 맛에 중독될 거요.”


제하드는 사방에서 건네는 말에 네, 네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저 극성맞은 어른들에게 괜히 지목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진즉에 자리를 떠났는데, 시엘은 그런 유진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우리 이제부터 남매래.”


“넌 아무렇지도 않냐?”


“기분이 이상해.”


시엘은 배시시 웃으면서 유진의 옷깃을 잡았다. 


“시안 오빠랑 이오드 오빠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동생이 생긴거잖아.”


“뭔 개소리야. 동생?”


“너 나보다 생일 늦잖아.”


“그게 뭔 상관이야. 햇수가 차이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몇 달 차이로 뭔 놈의 오빠 동생이야?”


“나는 오빠보다 오초 늦게 태어난 거로 동생이 됐는 걸.”


유진의 말문이 막혔다. 


“...그거랑 이거랑은 좀 다르지.”


“왜 달라? 나는 몇 초 차이로 동생이 됐잖아. 너는 나보다 몇 달 늦으니까 동생이야.”


“아니 다르다니까.”


“왜 다른데?”


왜 다르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유진도 그 말에는 알맞은 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 나는 네 친남매가 아니잖아. 부모님도 다르고... 그러니까 네 동생은 될 수 없어.”


“하지만 남매잖아.”


“명목상은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남이야. 그러니 난 널 절대로 누나라고 안 불러.”


“누나라고 불러주면 안 돼?”


“죽어도 싫어.”


“에이.”


시엘의 입술이 삐죽 나온다. 그녀는 유진을 옷깃을 이리저리 당기면서 졸랐다.


“한 번만 불러 봐.”


“싫어.”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싫은 건 싫어.”


“자꾸 그러면 누나한테 혼나.”


“지랄 좀 하지 마.”


“너 말버릇이 너무 험해. 엄마한테 이를 거야.”


“일러라. 아니 근데 왜 자꾸 잡고 있는 거야?”


유진은 확 짜증을 내면서 시엘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시엘의 입술이 더욱 삐죽 튀어나왔다.


“왜 이리 못되게 굴어?”“못되게 구는 게 아니라, 네가 어이없는 짓을...”


“운다?”


“그만... 그만 좀 해.”


유진은 주먹을 덜덜 떨며 말했다. 시엘은 뚱하니 유진을 보다가 혀를 쏙 내밀었다.


“안 울어, 바보야.”


“그렇겠지...”


“너한테 누나 소리 들어보고 싶었는데, 한 번 불러주는게 그렇게 어려워?”


“난 굉장히 어려워.”


열세 살 꼬마애를 누나라고 부르라고?


‘차라리 죽지.’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나수련


“무조건 제자로 삼지는 않을 겁니다.”


이오드는 설레는 고동을 억누르며 로베리안을 쳐다보았다. 그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눈동자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간절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로베리안은 저 어린 욕망을 무조건 들어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제가 탑주로 있는 붉은 마탑은 여러 마법 중에서도 소환 마법을 장기로 삼지요. 그러니 도련님은 아롯에 가서, 가장 먼저 체계화 된 적성검사를 받게 될 겁니다.”


“만약... 제가 소환마법에 적성을 가지고 있으면요?”


“그렇다면 기쁜 일이지만, 어지간한 적성으로는 제 제자가 될 수 없을 겁니다.”


로베리안은 그렇게 선을 그었다. 이오드는 순간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로베리안의 곁에 앉은 길레이드와 테오니스를 의식하고 표정을 바꾸었다. 


이 답답한 가문을 떠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꼭 로베리안의 제자가 되지 않아도, 가문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이오드의 손끝을 떨게 만들었다.


“제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법사들은 아주 많습니다.”


로베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롯에서는 라이언하트의 적자란 신분이 도련님을 대표해주지 않을 겁니다. 다른 마법사들을 묵살할 만한 재능을 지닌 것이 아니라면, 저는 도련님을 제자로 삼을 수 없습니다.”


“...네.”


“...아롯은 라이언하트를 대우해주지 않겠지만, 저는 적색마탑주이기 전에 길레이드님의 오랜 벗이니... 도련님은 여러 기회를 갖게 될 겁니다. 차별을 비난하는 목소리에도 보호해 줄 것이고, 도련님의 적성에 맞는 마법을 수행할 환경도 마련해 줄 겁니다.”


그 모든 말이 이오드의 가슴을 두근두근 뛰게 만든다. 하지만 이오드는 섣불리 대답할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는 주눅 든 눈으로 테오니스와 길레이드의 눈치를 보았다. 


“...네가 선택하는 일이다.”


길레이드가 입을 열었다.


“내 눈치를 볼 것 없다. 네가 가고 싶다면, 가면 되는 것이다.”


“...아버님...”


“이오드.”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테오니스가 아들을 응시했다. 


“아버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감사히 받도록 하세요.”


“...”


“망설일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은 어려서부터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다루는 것보다 마법에 큰 관심을 보였어요.” 


이오드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 당신을 위해 수도의 마법사들을 여럿 불렀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당신의 스승이 되기에 어울리지 않았지요.”


그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이오드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수도에서 초빙한 마법사들은, 아롯에 남았다면 마탑에서도 상당한 지위에 올랐을 명성이 높은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이 이오드의 스승이 되지 못한 것은, 이오드 본인이 마법에 열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답답한 가문은 이오드의 욕망과 자유를 억압했다. 


“이오드.”


테오니스의 눈이 얇아졌다.


이오드는 어머니의 시선이 두려웠다. 가주인 아버지보다, 언제나 자신의 곁을 맴돌며 행동을 감시하는 어머니가 훨씬 더 두려웠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라이언하트의 적자. 저 테오니스의 아들이며, 본가의 가주가 될 몸입니다.”


저 말이 싫다. 두렵다. 무겁다. 이오드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 깔았다.


“부디 아롯에서도 그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테오니스.”


“어머니로서 아들을 독려하는 것뿐입니다.”


길레이드가 만류하려 나섰지만, 테오니스는 차게 식은 눈으로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의견에 찬동하지 않는다. 유진, 저 뭔지 모를 아이를 본가에 들이는 것이 싫다. 양자? 웃기지도 않다. 첩을 들여 쌍둥이까지 싸질렀으면서 아직도 부족한가?


이오드를 아롯에 보내고 싶지도 않다. 적자인 이오드가 아롯에 가버린다면, 그 빌어먹을 애니실라가 기쁨에 미쳐 날뛸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테오니스는 이오드를 아롯에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저 원망스런 아들은 본가의 적자이면서도 그 혈통에 알맞은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다. 심지어 천성조차도 유약하고 어수룩하다. 본가에 붙들고 있어봤자, 이오드의 실력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오드.”


테오니스는 아들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아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오드는 억지로 테오니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날 밤.


테오니스는 이오드의 방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 이오드는 로베리안과 아롯으로 떠난다. 테오니스는 이오드가 로베리안의 제자가 되기를 바랐다. 설령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아롯에서 여러 마법사들과 교류하여 자신의 힘을 키우기를 바랐다.


그렇게 본가에서 얻을 수 없는 힘을, 그를 뒷받침해 줄 인연을 만들기를 바랐다.


“당신은 라이언하트의 적자입니다.”


테오니스는 몇 번이나 그렇게 당부했고.


“네, 네, 어머니.”


이오드는 내리깐 시선을 들지 못하고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


연회의 다음날. 많은 이들이 본가를 떠났다. 로베리안은 이오드와 함께 아롯으로 향했고,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는 부모님들과 함께 자신들의 가문으로 돌아갔다. 


이름을 기억할 필요 없는 떨거지들도 떠나버려 별채는 텅 비어야 할 텐데, 시종들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이 별채는 앞으로 유진과 제하드가 쓰게 된다. 길레이드는 둘을 본가의 저택으로 들이려 했으나, 유진은 그를 바라지 않았다. 


아버지, 제하드를 위한 배려였다. 괜히 본가의 저택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면, 제하드가 본가 식구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차라리 별채에서 따로 생활하는 것이 서로에게 편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니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다. 유진의 요구대로 니나는 계속해서 전속 시종을 맡게 되었다. 


니나는 그것이 유진의 배려란 것을 알았다. 


“기돌에서 뭐 챙겨와야 할 건 없느냐?”


“전 없으니까 아버지 짐이나 챙기세요.”


제하드는 숙취의 뻐근한 두통을 느끼면서도 쉴 수 없었다. 그는 이제부터 본가의 일꾼들과 함께 기돌에 가야 했다. 앞으로 별채에서 살게 되었으니, 기돌의 저택에 남은 것들을 챙겨야 한다. 


오랫동안 제하드를 모셔 온 기사들. 시종과 일꾼들. 모두 다 데려올 수는 없지만, 희망하는 이들을 추려 본가에 데려올 것이다. 주인이 없는 저택을 관리할 이들도 남겨야 한다. 급여만 넉넉히 챙겨준다면 저택에 남겠다고 자처할 이들은 수두룩할 것이다.


“저희 저택에 있는 물건보다 별채에 있는 것이 훨씬 좋으니까, 괜히 필요 없는 것들까지 챙기지는 마시고요.”


“아직 실감이 잘 되지 않아... 정말... 앞으로 여기서 사는 것인가...?”


제하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별채를 돌아보았다. 몇 번이나 실감했을 텐데, 아직도 현실이 꿈처럼 느껴진다. 


‘...현실이지.’


제하드는 히죽 웃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들을 한 번 끌어안아 준 뒤, 일꾼들이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 


“가서 자랑도 확실히 하고 오세요.”


유진은 웃으며 제하드를 배웅했다. 


양자로 생활하게 된 첫 날의 오전은 그렇게 흘러갔다. 평소라면 수련을 시작할 텐데, 유진은 그러지 않고 연무장에 우두커니 섰다. 


오늘은 유진에게 있어서 여러모로 중요한 날이었다. 양자로 생활하게 된 첫 날일 뿐만 아니라, 환생하고서 처음으로 마나에 입문하게 될 날이다.


마나수련법은 마나를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마나는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아무리 의식한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감각과 마찬가지로 개발을 거친 뒤에야 마나를 인지할 수 있다. 


그러한 ‘개발’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호흡과 체련. 


호흡은 대기에 녹아든 마나를 호흡으로 쌓아 수련하는 것이고, 체련은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마나를 쌓는 것이다. 둘 모두 쉽지 않으나, 굳이 말하자면 호흡의 수련이 체련보다 우월하다. 호흡을 완전히 체화시킨다면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마나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체련은 그러기 힘들다.


전생의 하멜은 체련으로 마나를 수련했고, 훗날 세냐와 베르무트의 조언으로 체련을 호흡으로 변환시켰다.  


‘라이언하트의 마나수련법은 호흡.’


당연한 말이지만 무조건 숨만 쉰다고 마나를 수련할 수 없다. 마나를 수련하기 위한 호흡도 마법과 비슷한 요령이 필요하다. 


“일찍 나왔구나.”


기온 라이언하트. 그는 두 마리의 말을 끌고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유진은 놀라지 않고 기온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


연회가 끝난 뒤, 유진은 길레이드의 부름을 받았다. 본가의 양자가 되었고, 혈계식도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마나에 입문해야 하니 자세한 과정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영맥(靈脈).


마나가 모이는 땅. 


본가의 숲, 그 깊은 곳에는 오직 본가의 혈통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영맥이 있다. 자연발생한 곳이 아닌, 삼백 년 전에 위대한 베르무트가 직접 만든 영맥이다. 


영맥의 힘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본가의 아이들뿐이다. 시안이 벌써부터 검기를 뿜어낼 수 있는 것은, 시안 본인의 자질이 출중한 탓도 있겠지만 영맥의 도움도 컸다. 


‘인공적으로 영맥을 만들다니. 괴물은 괴물이야.’


유진의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까, 대지의 흐름을 억지로 뒤틀어서 영맥을 만들었다는 건가? 그것이 삼백 년 동안이나 유지되고 있고? 


‘미친놈.’


그 베르무트라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유진은 베르무트의 신위에 감탄하기보다는, 비뚤어진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말년에 정신머리가 어찌 되었길래, 영맥까지 만들어서 후손들의 영광을 보장하려 한 걸까. 


‘부인을 열 명 넘게 들이고, 수십 명의 자식을 낳고, 정통성을 운운하며 본가와 방계를 가르고, 혈계식을 만들고...’


유진이 기억하는 베르무트와 ‘라이언하트’의 시조인 베르무트는 괴리감이 너무 컸다.


“긴장되니?”


“기대 돼요.”


유진은 히죽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베르무트에 대한 의문과 고까운 감정은 제쳐둔다. 어쨌건 유진은 본가의 양자가 되었고, 길레이드의 배려로 영맥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나의 입문도 기온이 직접 보조해 주기로 했다. 


“쉽지는 않아.”


기온이 말했다.


“마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느낄 수 없는 것이니까. 내가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처음 입문하는 너로서는 제법 고생을 겪게 될 거야.”


“그런가요?”


“응. 마나는 어릴수록 느끼기 쉽거든. 나이를 먹을수록... 기감(氣感)은 둔해지게 돼. 마나를 느끼지 않는 것에 몸이 익숙해지는 거지.”


그건 유진도 안다. 사용하지 않는 감각이 둔해지듯, 마나를 느끼는 기감도 마찬가지다.


“시안과 시엘은 여섯 살부터 마나에 입문했어. 이오드는... 형수님이 워낙 극성이셔서 다섯 살부터 마나에 입문했지.”


기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입문했는데, 시안과 시엘은 마나를 느끼는데 사흘이 걸렸어. 이오드는... 음... 일주일이었나?”


“오래 걸린 건가요?”


“아니, 굉장히 빠른 편이지. 방계의 아이들은 보통 네 나이쯤 마나에 입문하는데, 마나를 ‘느끼는’ 것에만 한 달은 걸린다나 봐. 그렇게 느낀 마나를 몸에 조금씩 쌓고, 확실하게 의식하는 것만도 몇 달은 더 필요하고.”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온은 유진을 힐긋거리다가 급히 덧붙였다.


“아... 너는 그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빨리, 그리고 쉽게 마나를 느끼게 하기 위해 영맥이 있는 거니까. 나도 도와줄 거고.”


“저는 며칠 쯤 걸릴까요?”


“음... 열흘...?”


기온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다. 열흘이면 굉장히 빠르다고 생각한다. 열세살은 마나를 입문하기에 아주 늦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빠른 나이도 아니다. 


‘영맥이 무조건 마나를 느끼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기온이 온 것이다. 그는 당분간 유진의 곁에 붙어있어야 한다. 


“우선... 마나를 느끼는 것이 중요해. 영맥은 마나가 짙은 곳이지만, 그것 외에도 내가 네 몸에 직접 마나를 흘려 보낼 거야.”


“제가 잘 느낄 수 있게요?”


“그렇지.”


이 또한 어마어마한 특혜였다. 기온 정도의 고수가 마나의 입문단계부터 보조를 해준다니. 


‘확실히 잘 챙겨주네.’


마나스톤이나 몇 개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영맥에 들어가게 해주고 인도자까지 붙여주다니.


“열흘이라... 그럼, 열흘 동안 기온님이랑 영맥에서 지내야 하는 건가요?”


“숲속 한가운데에 있는 영맥이지만 있을 건 다 있어. 크진 않지만 집도 있고... 생필품과 음식은 시종들이 가져다 줄 거야.”


“와, 재밌겠다.”


유진은 어린애답게 웃으면서 말했다.


‘열흘은 무슨.’


순진한 미소 뒤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십 분도 안 걸려 임마.’


마나를 수련하여 몸에 쌓지 않았다 뿐이지,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뭐... 느끼는 것과 몸에 받아들이는 건 다른 일이지만.’


기대감은 있다. 


이 잘난 몸뚱이는 마나도 잘 받아먹을까? 


저택과 멀리 떨어진 숲의 안쪽. 고즈넉한 오두막이 있다. 베르무트가 영맥을 만든 것은 삼백 년 전이라지만, 오두막은 그 이후로 꾸준한 관리와 보수를 받은 것인지 깔끔해 보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 구경할 것도 없긴 하지만.”


“네.”


기온이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는 품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더니, 오두막의 자물쇠를 하나하나 풀어내려갔다. 단순한 자물쇠가 아니다. 가주의 허락이 없다면 맞는 열쇠로도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는 동안, 유진도 말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과 어제도 숲에 들어왔었지만,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유진은 울창한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동물과 벌레들도 보인다. 하지만 몬스터는 없다. 이 거대한 숲은 본가의 영지의 일부로 관리받고 있다.


‘분위기만 보면 엘프라도 나올 것 같군.’


삼백 년 전, 헬무드의 마왕들이 날뛰기 시작하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종족은 인간이 아닌 엘프와 드래곤이다. 헬무드의 불길한 힘이 강해질수록 엘프들은 죽어나갔고, 드래곤들은 마왕과 대적하여 떼죽음을 당했다.


...다섯의 마왕이 둘밖에 남지 않게 된 지금도. 두 종족은 과거의 재해를 수습하지 못했다. 


“들어 와.”


유진은 복잡한 감상에 젖어 있다가 몸을 돌렸다. 


“깨끗하네요.”


“이런저런 마법이 걸려 있거든.”


기온은 그렇게 대답해 주며 유진을 안내했다. 둘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바로 시작해도 되는 거죠?”


“...응?”


기온은 움찔 놀라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두 눈을 멀뚱거리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음대로 해.”


의욕적인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기온은 조금의 염려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저 아이는 굉장히 뛰어나다. 그 사실은 기온도 인정하고 있었다. 시안과의 결투와 혈계식에서의 활약을 직접 보지는 않았으나,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느낄 수는 있었다. 게다가 행동거지에 배인 몸놀림. 마나를 수련하지 않은 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볍다. 


‘...몸을 잘 쓰는 것과 마나를 잘 다루는 것은 다르지.’


기온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어릴 적부터 천재란 소리를 숱하게 듣던 인종이다. 하지만 무(武)에 대한 재능이 월등했어도, 마나와 친해지는 것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괜히 기대했다가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기온은 그런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을 자각하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클수록 좌절은 시리고 아프다. 


나는 분명 천재일 텐데. 왜 이걸 못하는 거지? 


어릴 적의 기온은 그에 대한 좌절을 극복하는 것에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었다. 결국에는 벽을 넘었으나, 처음 마나에 입문하고 그를 숙련하는 과정은 몹시 고되었다.


‘...한창 자신감이 넘칠 때인데.’


유진의 존재는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도 파격적이다. 방계의 아이가 혈계식에서 본가의 아이를 쓰러트린 것은 처음이고, 본가의 양자로 들어온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보물고에서 위니드를 받았고, 영맥에도 출입을 허락받았다. 


다 큰 어른들도 경악할 일인데. 고작 13살의 아이가 제 자신을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여길까.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기온의 표정은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섣부른 걱정임은 알지만, 기온은 유진이 현실을 맞닥트려 좌절하지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유진이 기온의 생각을 읽었더라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천재성에 대한 좌절? 그딴 것은 이미 삼백 년 전에 겪어 보았다. 


위대한 베르무트.


놈의 곁에서 몇 번이고 ‘천재’가 무엇인지를 절감했다. 놈과 비교한다면 이 세상에서 천재라 자부할 수 있는 놈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재라는 말은 베르무트만이 자처할 수 있다. 천재라는 말은 베르무트를 위해 존재한다.


유진은.


하멜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둔한 하멜.’


처음 동화책에 실린 그 이름을 보았을 때. 유진은 익명의 저자를 찢어죽이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기는 했다. 


하멜은 우둔했다. 세냐와 아니스, 모론은 베르무트를 경쟁상대라 여기지 않았다. 생사를 함께 넘어 온 동료. 친구. 그렇게 생각했다. 


하멜도 그러기는 했지만, 오직 그만이 베르무트를 넘어서고자 했다. 오직 그만이 베르무트의 의견에 반했다. 


“저 중앙에 앉아.”


지하는 아무 것도 없는 공동이었다. 기온은 그 중앙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선은 의식하지 말고 호흡해 봐. 주변의 마나를 의식하는 것이 시작이니까.”


“네.”


마나는 존재하되 느낄 수 없다. 그를 몸에 쌓으려면 먼저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본격적인 ‘수련’은 그 뒤에야 시작할 수 있다.


“본가에 내려오는 마나수련법은, 우리의 선조 위대한 베르무트님에게서 계승된 거야.”


‘오.’


그런 말을 기다렸다.


“방계의 것과는 시작은 똑같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르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방계는 원류를 계승할 수 없으니.”


위대한 베르무트는 본가와 방계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었다.


모든 방계는 본가를 뿌리로 둔다. 유진의 선조도 먼 옛날에는 본가의 식구였고, 가주가 되지 못해 본가에서 밀려났다. 


그렇게 밀려 난 방계의 선조들에게는 거스를 수 없는 금제가 걸린다. 


본가에서 익힌 마나수련법의 원류를 후손에게 계승시킬 수 없다. 방계가 후손에게 계승시킬 수 있는 것은, 본가의 원류와는 다른 아류뿐이다. 그 아류도 베르무트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당연히 원류보다는 효용성이 떨어진다. 


“백염식(白炎式).”


기온의 몸속에서 마나가 일어난다. 새하얀 빛의 마나가 기온의 몸을 휘감는다. 


마치 불꽃을 몸에 두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진은 백염식이라는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저 독특한 모습은 기억하고 있었다. 


베르무트.


놈이 다루는 고밀도의 마나는 언제나 저와 같이 새하얀 불꽃의 형태로 발현되었다.


그를 전신에 두르고 앞을 나아갈 때면, 흩날리는 마나의 불씨가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보이곤 했다.


마나수련


“방계의 마나수련법은 아류인 적염식(赤炎式)을 뿌리로 두고 있어.”


삼백 년.


그 긴 시간 동안, 방계가 계승받은 적염식은 방계의 가문마다 다양한 변형을 거쳤다. 작금에 이르러선 처음의 형태가 거의 남지 않았을 정도다. 


하지만 다양하게 변형 된 적염식들은 백염식의 힘에 도달하지 못했다. 긴 시간을 거쳤음에도 아류는 원류를 뛰어넘지 못했다. 방계 후손들의 지혜와 노력은 위대한 베르무트에게 닿지 못했다.


라이언하트의 본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원류인 백염식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완전한 것에 덧붙일 이유가 어디에 있나. 


“네가 익힐 것은 백염식이야.”


멍하니 기온의 불꽃을 보던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염식이라는 이름은 낯설어도 저 모습은 낯설지 않다. 전생에 몇 번이고 좌절하게 만들었던 모습. 


하멜은 끝까지 저 불꽃을 뛰어넘지 못했었다. 


‘...하.’


그러한 과거에는 씁쓸함을 느낀다. 하지만 가슴의 설렘은 식지 않는다. 


“물론 바로 익힐 수는 없고. 일단 마나를 느끼고서...”


“느끼고 있어요.”


설렘이 유진을 재촉했다. 유진은 기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뜸 말했다.


“...응?”


“마나를 느끼고 있다구요.”


기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눈을 끔벅거리며 유진을 바라보다가, 곧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착각이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과하게 몰입하다 보면 머리가 묘한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정말로요.”


“...음...”


그걸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기온은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마나를 움직였다. 무형의 마나가 기온의 뜻에 따라 움직여, 유진의 곁을 맴돌았다.


“봐. 아직 느끼지 못...”


“여기.”


유진은 제 왼쪽 허벅지를 가리켰다.


“이쪽에서 마나가 몰리고 있네요.”


“...”


기온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니, 그럴 리가. 기온은 다시 마나를 움직였다. 이번에는 한 곳에 집중시키지 않고 분산시킨다. 엷게 분산 된 마나가 유진의 몸을 휘감는다.


“여기서, 이렇게, 위로, 다시 아래로.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유진은 마나의 흐름대로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기온의 입은 계속해서 벌어졌다. 이윽고 기온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말도 안 돼.”


어쩌면 육체의 감각만 비상하게 발달한 것일 지도 모른다. 기온은 마나의 움직임을 바꾸었다. 유진의 몸을 직접 어루만지던 마나가 멀찍이 물러선다. 


“저쪽.”


이번에도 유진은 망설임없이 마나가 흐르는 방향을 가리켰다. 기온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게 가능한가? 여태까지 마나를 수련한 적도 없는 13살 꼬마가, 기감을 개발한 적도 없는 꼬마가 입문하자마자 마나를 느낀다고? 


“...”


체내에 직접 마나를 흘려보내지도 않았다. 그냥 혼자서 마나를 느낀 것이다. 직접 보조해 주었을 때 열흘 만에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굉장히 빠른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유진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하하.”


기온은 고개를 흔들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네가 본가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양자가 되었잖아요.”


“양자... 그래, 그렇지.”


기온은 씁쓸히 웃었다. 그는 유진의 앞에 마주 앉아 양손을 맞잡았다.


“...마나를 느끼고 있다면 바로 시작해도 되겠지. 지금부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네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도록 해.”


“네.”


백염식의 전승이 시작된다. 유진은 눈을 감고서 몸안을 의식했다. 곧 기온의 손에서 마나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마나는 유진의 몸에서 수많은 갈래로 흩어졌다. 


마나를 쌓은 적 없는 몸. 하지만 그리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진의 몸은 마나를 ‘잘’ 받아들였다. 그 사실이 기온을 다시금 놀라게 만들었다. 


‘천재... 아니, 이건...’


기온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그는 흘려보내는 마나의 흐름을 조금 더 강하게 조정했다. 체련이 아닌 마나의 호흡. 호흡으로 삼키는 마나를 확실히 의식하고, 그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체내에 흐르게 만드는 것이 마나의 호흡이다.


유진은 몸속에서 마나가 어떻게 흐르는지를 느꼈다. 


전신으로 퍼진 마나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심장이다. 


심장을 마나가 휘감는다. 거기서 심장과 이어진 혈관에 마나가 깃든다. 마나가 피와 함께 흐른다. 함께 흐르나 마나의 흐름은 피의 흐름을 완전히 따르지 않는다. 


‘...괴물이군.’


기온은 흘려보낸 마나의 흐름을 천천히 놓아보았다. 하지만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유진은 벌써부터 제 몸속의 마나를 조율하고 있었다. 서두르지는 않는다. 천천히, 몸이 받아들일 수 있게. 그것만으로도 기온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호흡을 멈추지 마.”


기온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영맥의 마나를 숨과 함께 삼킨다고 생각해. 그렇게... 삼킨 마나를, 백염식의 흐름에 따라 인도해 봐. 심장... 심장으로.”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집중해 마나의 흐름을 기억했다. 그리고 호흡으로 마나를 삼켜서, 심장으로 인도한다. 


기온은 더 이상 유진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는 반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 잘... 하고 있어.”


내뱉은 말이 우습게 여겨졌다. 잘하고 있다고? 그따위 말이 가당키나 한가? 그냥,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몰라 지껄인 것뿐이다. 


유진이 호흡을 할 때마다 영맥의 풍부한 마나가 움직인다. 이제 막 마나에 입문하였으니 육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마나는 한계가 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은 그 상식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었다. 


‘미쳤군.’


경악을 느끼는 것은 기온뿐만이 아니었다. 유진도 환생한 몸뚱이의 성능에 경악했다. 마나를 느끼는 것이야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마나를 호흡하는 요령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를 감안해도 이 육체는 마나를 너무 잘 받아먹는다. 호흡할 때마다 몸속의 마나가 불어나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물론 그것은 몸속에 마나가 아예 없었기에 실감이 큰 것이지만, 마나의 감응도가 좋아도 너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한계는 있어.’


이 어린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나에는 끝이 있었다. 한참 동안 집중하던 유진은 긴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서 찝찝했다.


“...하하.”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래봤자 기온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몇 시간 동안 유진이 벌인 짓은 기온의 상식을 붕괴시켰다.


영맥의 마나가 체감 될 정도로 줄어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차오르겠지만, 유진은 고작 몇 시간 만에 저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의 마나를 받아들였다.


시안과 시엘, 이오드는 마나를 느끼는 것에만 며칠이 걸렸다. 


마나를 몸속에 받아들여, 코어를 만드는 것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건 기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진은... 앉자마자 마나를 느꼈고, 즉시 마나를 호흡했으며, 그를 심장언저리에 모아 코어를 형성했다. 그 과정에 기온의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가 해준 것이라곤, 처음에 마나를 인도하여 백염식의 흐름을 알려준 것이 전부였다. 


‘...코어의 크기도 압도적이야.’


이제 갓 마나에 입문했다고 믿을 수 없을 크기. 사정을 알지 못한다면 최소 몇 년은 마나를 수련했다고 생각할 크기다. 


‘보통은 저것보다 훨씬 작은데...’


기온도 저보다 훨씬 작은 코어에서 시작해, 꾸준히 마나를 수련하며 코어의 크기를 키웠었다. 


“...넌 괴물이구나.”


기온은 결국 그렇게 말해버렸다. 유진은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벅벅 문질러 닦다가 태연한 얼굴로 웃었다.


“칭찬이죠?”


“칭찬... 이지.”


기온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유진을 일으켜주었다.


“...그... 음... 돌아가자.”


형님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맙다, 베르무트.’


유진은 전생의 동료를 떠올리며 씩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백염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백염식과 적염식의 가장 큰 차이는 코어의 분열이다. 적염식을 아무리 개발하고 수행해봤자, 몸속에 가질 수 있는 마나의 코어는 하나뿐이다.


하지만 백염식은 일정 경지를 넘어서면 코어가 분열한다. 그렇게 더 많은 마나를 효율적으로 몸에 담고, 분열한 코어를 공명시켜 코어의 힘을 증폭시킨다.  


그렇게 분열한 코어를 ‘별(星)’로 센다. 


라이언하트의 시조이자 백염식을 만들어낸 위대한 베르무트. 그는 몸속에 열 개의 별을 가졌다.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백염식의 10성에 도달한 것은 베르무트 뿐이다.


“나와 형님은 6성이야.”


위대한 베르무트와 비교도 안 될 경지. 하지만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백염식의 6성에 오른 자도 손에 꼽힌다. 


“시안과 시엘, 이오드는... 1성이지. 이오드는 몰라도, 쌍둥이는 1년 정도 뒤에는 2성이 될 수 있을 거야.”


“저는요?”


“...모르겠다.”


기온은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영맥에서 보았던 말도 안 되는 광경이 기온의 대답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내 경우에는... 1성에서 2성이 되기까지 8년이 걸렸어. 형님도 비슷했고. 시안과 시엘은 6살에 마나에 입문했으니까... 만약 내년에 2성이 된다면, 나와 형님처럼 8년이 걸린 거지.”


“그럼 저도 8년쯤 걸릴 까요?”


“아니.”


시간은 짐작할 수 없지만. 


“너는 그것보다 훨씬 빠를 거야.”


기온은 그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유진처럼 빨리 마나를 느끼고, 백염식에 입문한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유진의 코어만 해도 10살 때의 시안보다 클 것 같다.


“절대로 8년까지는 안 걸려. 네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말이지.”


“전 열심히 할 거예요.”


유진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게으름이라니, 머리가 박살나 뒈지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전생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몸으로 환생했는데, 게으름 따위로 이 몸을 썩히고 싶지 않다.


‘게다가 베르무트의 마나수련법까지 익혔잖아.’


그 빌어먹을 하얀 불꽃에, 찬란히 빛나는 사자의 갈기에 몇 번이나 좌절했던가. 우둔한 하멜은 끝까지 베르무트를 넘어서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베르무트처럼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베르무트처럼 할 수 있을까.


‘싫어.’


유진은 베르무트처럼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베르무트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에 자존심을 내세울 생각은 없었다. 거저 얻게 된 힘이라면 고맙게 사용해야지, 왜 도움도 안 될 똥고집을 부려서 가진 것을 썩히나.


‘일단 백염식을 익혀 보고... 10성...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물론 순순히 따라가진 않을 거다. 깊이 파고들어봐야 알겠지만, 거슬리는 점이 있다면 나름의 변형을 거칠 것이다.


‘익히면서 뜯어 봐야지.’


하멜의 능력은 베르무트보다 뛰어나진 않다. 유진은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래도 어지간한 놈들보다는 뛰어날 것이고, 어쩌면 역대 라이언하트의 가주들보다 뛰어날 지도 모른다.


‘해봐야 알겠지만.’


백염식을 근간으로 두고 이것저것 시도해볼 셈이다. 마나에 입문한 것으로 유진이 할 수 있는 것들은 굉장히 많아졌다. 


“가주님께는 내가 말해둘게. 너는... 피곤할 테니까, 푹 쉬어.”


기온과는 별채의 앞에서 헤어졌다. 유진은 환히 웃는 얼굴로 기온을 배웅했다. 


푹 쉬라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몸이 피곤하기는 했다. 아무리 굴려대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던 몸인데, 익숙하지 않은 마나를 그득히 받아먹었으니 피로를 느낄 만도 했다. 


하지만 유진은 쉬고 싶지 않았다. 만류할 사람도 없는데 뭐 하러 쉬나. 이런 피로는 어차피 밤에 푹 자면 멀쩡히 낫는다. 


‘일단 좀 볼까.’


유진은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던졌다. 별채에서 뛰어나오던 니나는 그 모습을 보고 멈칫 굳어버렸다. 그리곤 다시 몸을 돌려 별채로 돌아갔다. 새로 입을 무복과 수건, 물대야 등, 지금 유진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 나오기 위해서였다.


“아... 유진님! 식사는 어쩌실 거예요?!”


“고기!”


“네!”


그럴 줄 알았다. 니나는 후다닥 뛰어 별채로 돌아갔다.


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몸속의 코어를 의식했다. 별. 그렇게 불릴 만 했다. 백염식의 흐름대로 만들어진, 심장 언저리의 코어는 밤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동그란 형태로 반짝거린다. 


‘작아.’


전생의 코어와는 비교되지 않을만큼 작다.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13살 때의 하멜은 마나에 입문하지도 못했었다. 그때의 하멜은... 그냥...  


몬스터의 습격이 잦은 마을에서 살았다. 조그만 마을이었다. 본래부터 몬스터의 습격은 가끔 있었지만, 하멜이 열 살이 넘을 즈음부터는 습격이 더욱 과격하고 많아졌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몬스터와 싸울 줄 알아야 했다. 어른들은 검이며 도끼 같은 무기를 들었고, 아이들은 그보다 작은 무기를 들었다.


하멜도 그랬다. 대뜸 무기를 받아서, 이런저런 싸움법을 배웠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마을은 멸망했다. 몬스터가 과격해진 이유는 헬무드의 마왕들 때문이다. 돌연한 습격이 마을을 휩쓸었다. 살아남은 것은 어린 하멜 혼자였다.


‘...전생보다는 비교가 안 되는 군.’


마나에 입문한 것도 전생보다 빠르다. 베르무트의 백염식을 익혔다. 처음 만들어낸 코어의 크기도 전생과 비교가 안 된다.


유진은 씁쓸한 기분을 떨쳐냈다. 


심장의 별을 의식한다. 마나가 움직인다. 피와 함께, 피와 다르게. 백염식의 흐름을 유지하며 몸을 움직여 본다. 곧 유진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네.’


무작정 코어의 마나가 많다고 강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나를 어떻게 다루느냐다. 백염식은 그 원칙에 철저했다. 아직 얼마되지 않는 마나로도 체감될 만큼 몸놀림이 달라진다. 


거기서 유진은 전생의 경험을 더해 넣었다. 그는 마나를 다루는 요령에 빠삭했고, 어떻게 해야 힘을 극대화시키는지도 안다. 


ㅡ파앙! 


내지른 주먹이 공기를 터트린다. 주먹질 한 번 했을 뿐인데 근육과 뼈가 저리다. 육체의 단련은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몸이 마나가 더해진 것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다.


‘이거야 차차 익숙해지는 거고.’


아직 검기는 만들 수 없다. 유진은 몇 번 더 몸을 움직여 보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억지로 쥐어짠다면 절대 못 만들 것 같지는 않은데,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코어가 고갈되면 하루 쉬는 거로도 회복이 안 될 거야.’


몸을 너무 혹사시키면 골병이 드는 것처럼, 코어도 마찬가지다. 지닌 마나를 죄다 써버리면 코어가 고갈된다. 그 부담은 그대로 육체가 짊어져야 한다. 


“유진님.”


니나가 다가온다. 그녀는 묵직한 물대야를 바닥에 내려놓고, 숨도 돌리지 않고 마른 수건으로 유진의 몸을 닦아 주었다. 유진은 자리에 그대로 서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계약이 될지 모르겠네.’


온갖 일을 겪었던 전생이지만, 정령과 계약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유진은 지금 보유한 마나로 정령을 불러낼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했다. 


“뒤로 물러서 봐.”


“네.”


니나는 즉시 고개를 끄덕거리며 물러섰다. 유진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위니드를 뽑았다.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드러난 청은의 칼날. 니나는 움찔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유진은 몇 번 더 심호흡을 한 뒤에 코어에서 마나를 끌어냈다. 


‘한 번 해 보고.’


정령은커녕 마법도 익힌 적 없다. 그래서 필요한 마나의 양이 가늠이 안 된다. 그렇다면 무턱대고 해볼 수밖에. 


코어의 마나가 위니드로 흘러간다. 심장을 맴도는 별이 빛을 낸다. 신기하게도 유진은 몸속 깊은 곳, 보이지 않을 별을 느꼈다. 


위니드의 칼날이 떨린다. 이 마법검은 유진이 불어넣는 마나를 게걸스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기껏 닦아낸 몸에서 다시 땀이 흐른다. 칼날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산들거리는 바람이 유진을 맴돈다. 


“...아...”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니나가 목소리를 냈다. 점차 강해지는 바람이 유진의 머리카락을 들춘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서 계속해서 마나를 불어넣었다. 


ㅡ콰아아아!


어느 순간, 산들바람이 격렬한 폭풍이 되었다. 니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가장 놀란 것은 유진이었다. 뭐야? 바람이 너무 강해 눈도 제대로 못 뜨겠다. 위니드는 더 이상 마나를 받아먹지 않았다. 


유진은 제 몸 속에서 ‘문’이 생겨난 것을 느꼈다. 문이 천천히 열린다.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은 강해진다. 유진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바람이 회오리가 된다.


[...너는...]


유진은 회오리의 중심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세차게 부는 바람이 유진의 머릿속에 말을 걸어온다. 


[...설마... 하멜인가?]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인데. 유진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템페스트?”


폭풍검 위니드에 가호를 내린 바람의 정령왕. 전생에서 베르무트가 불러낸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어떻게 네가? 설마... 환생한 건가?]


‘너 씨발, 어떻게 날 아는 거냐?’


[베르무트의 동료. 네 혼을 잊을 리가 있나?]


삼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얼굴도 바뀌었다. 하지만 혼은 바뀌지 않았다. 


정령은 영적 존재다.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는 하멜의 혼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도 날 기억하는 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난 널 부르지 않았어.’


[위니드의 부름을 받은 것은 오랜만이다. 베르무트의 후손이 사용하는가 싶어 눈여겼는데, 기억하는... 혼을 느꼈다.]


바람이 점점 잦아든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울리는 템페스트의 목소리에도 노이즈가 섞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기억을 가지고 환생을... 그것도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그 하멜이?]


‘왜 베르무트는 마왕을 죽이지 않은 거냐?’


어떻게 환생했냐고? 모른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고, 정신을 차려보니 갓난아기가 되어 응애응애 울고 있었다.


‘말해, 템페스트. 너는 마경의 여정을 함께 했을 거 아냐. 왜 삼백 년이나 흘렀는데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이 살아있는 거냐?’


[나는 베르무트의 뜻을 모른다.]


템페스트가 대꾸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유폐의 마왕과의 결전에서... 베르무트는 검을 거두었다.]


‘뭐?'


[...나는 그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 그곳에서의 싸움은... 격렬했으나 마지막은 허무했다. 그 최후에 자리에 선 것은 베르무트와 유폐의 마왕 뿐이었다. 끝내 검을 거둔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을 죽이지도, 멸망의 마왕성으로 가지 않았다... 그들의 여정은 유폐의 마왕성에서 끝났다.]


‘...지랄하지마.’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여정이 거기서 끝났다고?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용사 베르무트와 동료들은 유폐의 마왕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죽지 않고 도망쳐, 멸망의 마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베르무트는 하멜의 죽음에 맹세했다. 모든 마왕을 죽여 버리겠다고. 물론 유진은 그런 맹세를 들은 적이 없었지만, 동화책의 내용은 그랬다. 


그렇게 용사 일행은 멸망의 마왕성으로 향한다. 하지만 힘을 합친 두 마왕을 죽이지 못하고, 대신에 ‘약속’을 맺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 


‘지랄하지 말라고.’


입안에서 피의 맛이 난다. 정신이 아찔해 진다.


‘약속이 대체 뭐냐. 왜 그딴 약속을, 왜? 검을 검두었다고? 유폐의 마왕을 죽이지 않았다고...?’


[나는 약속에 대해서도. 베르무트의 뜻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뭔 죄다 모른대, 개자식아.’


[그곳에서 나눈 약속을 아는 것은 그곳에 있었던 자들뿐이다. 베르무트가 검을 거둔 순간부터 나는 그 장소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곳에 있던 자들...? 베르무트와 유폐의 마왕을 빼고 서있는 사람이 없었다며? 다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 아냐...! 나보고 뒈진 베르무트의 시체에 따지란 거냐?’


[시간이 없다...]


템페스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부족한 마나로는 날 불러낼 수 없다... 내 억지로 문을 연 것, 이제는 문을 닫아야 한다.]


‘대답하고 가라고!’


[모른다 하였는데 왜 자꾸 묻는 것이냐... 나도 왜 베르무트가...]


바람이 잦아든다.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진다.


[...다음에는... 네 힘이 충분할 때...]


유진은 휘청거리는 몸을 붙들며 위니드를 노려보았다.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씨발아.”


유진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말을... 제대로 하고...”


바람이 사라진다.


유진은 코피를 쏟으며 기절했다.


마나수련


며칠 동안 써온 침대에서 눈을 떴다. 곁을 지키고 있던 니나가 꺅 놀란 소리를 냈지만, 유진은 즉시 손을 들어 니나를 제지했다. 


“조용히.”


“사, 사람을 불러올 게요.”


“아니, 됐어. 그냥 가만히 있어.”


“네?”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유진은 그렇게 내뱉고서 제 머리를 감싸쥐었다. 기억의 혼선은 없다.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템페스트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릿거리는 두통이 남아있다. 몸 안쪽이 뻐근하면서 텅 빈 느낌. 13살의 유진에게는 낯선 감각이나, 하멜에게는 낯설지 않다. 마나고갈. 얼마 되지도 않는 마나를 모두 쥐어 짜였다.


‘...템페스트가 직접 강림했으니.’


정령계와의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모조리 빨려버렸다. 거기에 템페스트가 직접 힘을 써가며 잠시나마 강림해 주었다. 


그건 템페스트 본인도 상당한 부담을 짊어지는 일이다. 정령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제 힘만으로는 정령계의 문을 열 수 없다. 정령왕쯤 되는 놈이니 부담을 짊어져가며 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놈도 당황하기는 했나 봐.’


스스로 부담을 짊어져가며 억지로 문을 열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강림했다. 그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가 그렇게 할 만큼 유진의ㅡ 하멜의 환생은 괴이한 일인 것이다.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환생한 것도 그렇지만, 내가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한 것도 놀랄 일일 테니.’


정령은 존재를 혼으로 기억한다. 템페스트는 위니드를 사용하는 유진을 하멜로 인식했다...


그 사실에 유진은 피식거리며 웃어버렸다. 


환생을 받아들인 후,


유진은 어렴풋이 남은, 불쾌한 우려를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정말 하멜인가? 전생의 기억과 똑같은, 삼백 년 전의 하멜이 맞나? 


어쩌면... 나는 환생한 것이 아니라, 하멜의 기억이 더해졌을 뿐인 존재이지 않을까. 


‘그럴 지라도 기억은 틀림없으니.’


뭐 상관없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위안해 왔다. 존재의 본질이란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템페스트는 나를 하멜이라고 불렀어.’


그 말은 불쾌한 우려를 완전히 지워주었다. 유진은 킬킬 웃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유진님, 괜찮으세요?”


“멀쩡해.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반나절쯤...”


“걱정 끼쳐버렸네.”


“가주님과 기온님이 별채에 와계세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유진은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보았다. 마나가 몸에 쌓인 덕에 육체의 감각도 민감해졌다. 그는 문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인기척을 느꼈다.


“문 열어드려. 내가 많이 걱정되시나 봐.”


그럴 만도 했다. 많은 편의를 봐주며 양자로 들이고, 위니드를 쥐어주었다. 거기에 본가의 적통만이 익힐 수 있는 백염식을 계승시키고, 영맥까지 열어주었다. 


그렇게 마나를 수련한 당일에 쓰러져버린 것이다. 길레이드와 기온이 놀라서 뛰어올 만한 일이었다.


니나가 문을 연 즉시 길레이드와 기온이 들어왔다. 길레이드는 침대에 앉은 유진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냐?”


“네.”


유진은 방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거울로 제 얼굴을 직접 확인해지는 못했는데, 유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길레이드와 기온은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잠시 시선을 나누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운을 땐 것은 기온이었다. 영맥을 나와 별채로 돌아오는 동안에 유진은 굉장히 멀쩡했었다. 그런데 별채에 돌아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이 쓰러졌단다.


덕분에 기온은 여러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진에게 백염식을 계승시키고, 마나를 인도한 것은 기온이었다. 만약 그 과정에 실수가 더해져, 유진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면? 기온은 자신의 실력을 믿었으나, 혹시 모를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야기는 미리 들었다.”


길레이드가 말을 이었다.


“네가 위니드를 쥐자, 큰... 바람이 불었다는 구나. 정령을 불러낸 것이냐?”


당연한 질문이었으나, 유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궁색한 거짓말이라도 읊어야 하나? 


“바람의 정령왕님이 강림했어요.”


완전히 털어놓을 셈은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말해야 한다. 템페스트가 강림한 것을 보았던 눈이 너무 많다. 일개 정령이 강림한 것만으로 그만한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뭐?”


“오랜만에 부름을 받았다면서, 제가 누군지 보고 싶었대요.”


“그게 무슨...!”


길레이드와 기온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 삼백 년. 폭풍검 위니드를 쥐었던 본가의 선조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위니드의 도움을 받아 바람의 정령들을 불러들였었다.


하지만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는 앉은 위치만큼이나 안목이 높았고, 베르무트 이후로 바람의 정령왕을 강림시켰던 선조는 한 명도 없었다.


“그게 정말이냐...?”


기온은 꿀꺽 침을 삼키며 물었다. 유진이 저런 거짓말을 늘어놓을 이유는 없으나, 워낙 경악스런 일이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바람의 정령왕님은... 으음...”


유진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피력하려 표정을 찡그렸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은 제 힘이 너무 부족하다면서. 다음에는... 제 힘이 충분할 때.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고 말하시곤, 정령계로 돌아가셨어요.”


“...허허...!”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길레이드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침대 곁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유진. 너는 정말... 놀라운 아이구나.”


유진은 뭐라 답하지 않고 헤헤 웃기만 했다. 길레이드는 그런 유진을 빤히 보다가 품안에 손을 넣었다.


“영맥에서 있었던 일은 기온에게 들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마나를 느끼고, 백염식으로 코어를 만들었다지.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바람의 정령왕의 주목을 받다니.”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유진의 모든 것이 전례가 없는 일 아닌가. 방계가 혈계식에서 우승한 것도, 양자가 된 것도, 위니드의 주인이 된 것도, 영맥에서 백염식을 계승받은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하루만에 마나를 느끼고 몸에 쌓았다. 이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지.’


길레이드는 그 사실에 순수한 즐거움을 느꼈다. 바람의 정령왕이 저 어린 아이를 눈여겨보고, 직접 강림까지 한 것이다. 그것은 라이언하트의 흥복이라 할 수 있었다.


“이걸 마시거라.”


품안에서 꺼낸 것은 자그마한 크기의 포션이었다. 


“고갈된 마나를 회복시켜 줄 것이다. 다만, 앞으로 며칠은 무리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겠다고 약속해 다오.”


“몸은 괜찮아요.”


“그래도 약속하거라. 괜히 무리해서 몸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후회할 거다.”


“네.”


유진은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나 회복  포션은 그 효용성만큼 가치가 높다. 유진은 길레이드와 기온이 보는 앞에서 포션 한병을 꼴깍꼴깍 마셨다. 


텅 비었던 몸속에 마나가 차오른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즉시 백염식을 운용해 코어에 마나를 채웠다. 고갈된 코어가 충만해지지는 않는다. 마나의 형질 상 포션에 담을 수 있는 양은 대단치 않다. 그래도 한 병을 죄다 비우니 두통과 뻐근함이 상당히 가시기는 했다.


“며칠 휴식한 뒤, 기온이 네 지도를 맡을 것이다.”


길레이드가 몸을 일으켰다.


“본래는 혈계식을 끝낸 뒤 다시 수련 여행을 떠나려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는 없겠구나.”


“저 때문인가요?”


“그렇지. 우리들의 수행보다는 네가 지닌 자질을 가꾸는 것을 우선해야 할 것 같아.”


“전 가주님과 기온님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내가 널 직접 가르치고 싶은 거니까.”


기온이 말을 받았다. 그는 유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히죽 웃었다.


“아, 물론 시안과 시엘도 함께 가르칠 거야. 가주님도 도와줄 거고.”


유진은 특별하다. 그렇다고 유진에게만 과도한 편애를 보여선 안 될 일이다. 장남인 이오드는 본가를 떠나 아롯으로 향했지만, 시안과 시엘은 본가에 남아있다. 그들에게도 공평히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좋은 자극으로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유진이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영맥에서 돌아온 것을 전해들은 시안과 시엘은 즉시 연무장에 나와 훈련을 시작했다. 길레이드는 시안과 시엘에게도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니나.”


길레이드와 기온이 돌아간 후. 


유진은 니나를 불렀다. 


“식사 준비를 할게요.”


“아니, 그 전에.” 


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와서 위니드를 쥐었다.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너랑 나의 비밀이야.”


“...네?”


“만약 내가 쓰러져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지금 꼭 하셔야 해요?”


“아마 쓰러지지는 않을 텐데, 확인해 볼 것이 있어.”


유진은 그렇게 당부하고서 위니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아까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유진은 자그마한 불만을 느끼며 눈을 찡그렸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정령이 주변을 맴돈다. 바람의 하급정령인 실프. 형상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바람의 덩어리. 유진이 가진 마나로는 실프만 불러들이는 것이 정상이다.


‘네 왕에게 뭐 들은 이야기 없냐?’


유진은 혹시 몰라 실프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급 정령이 가진 지성으로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위니드를 쭉 뻗었다.


‘칼날.’


우선 유진은 그걸 의식해 보았다. 그러자 무형의 바람이 검신을 휘감는다. 유진은 가늘게 떨리는 검신을 힐긋 보고서 위니드를 휘둘러보았다.


사악.


그 섬뜩한 소리에 니나가 몸을 떨었다. 유진은 몇 번 더 위니드를 휘둘러 본 뒤에 실프를 정령계로 돌려보냈다.


‘템페스트에게 전해. 구라치면 뒈진다고.’


여전히 실프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왕이 모욕당한 것은 아는지, 정령계로 돌아가기 전에 휙 바람을 보내 유진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템페스트가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만.’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을 뿐이다. 유진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괜한 감정은 더하지 말고.


삼백 년 전. 


하멜이 죽었다. 베르무트, 세냐, 아니스, 모론. 유폐의 마왕성을 올랐던 동료들. 


험난한 여정이었다. 서열 2위의 유폐의 마왕은 살육과 참혹, 광란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했다. 놈의 마왕성은 오르는 것만으로도 다른 마왕을 죽일 때만큼 힘들었다. 


‘...내가 죽었던 것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하멜은 강했다. 베르무트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다음은 되었다. 그런 하멜이 죽었으니, 남은 네 명으로서는 도저히 남은 마왕들을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성을 오르며 지칠 대로 지치고, 하멜까지 죽었다. 그 상태에서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도 가능할지 의문인 일. 그렇다면... 차라리 후퇴해서 다음을 기약하던가.  


‘...거기서 다 끝났다고?’


죽은 것은 하멜 뿐. 베르무트를 포함한 넷은 마경 헬무드에서 생환했다. 뭔지 모를 약속. 그를 나눈 것은 베르무트와 유폐의 마왕 뿐.


‘약속?’


그게 굉장히 거슬린다. 세상을 짓밟으려 날뛰던 마왕들이, 대체 왜 뜻을 바꾸어 약속을 맺었지? 대체 누가 먼저 약속을 제안했을까. 약속의 내용은 뭐고? 


‘...헬무드.’


홀로 생각해 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전생의 기억은 삼백 년 전,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은 후로 멈춰있다. 그 후의 기억은... 어린 유진이 접한 동화책의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언젠가 헬무드에 가봐야겠어.’


삼백 년 전의 헬무드는 끔찍한 곳이었다. 인간을 죽이고 잡아먹는 본성밖에 지니지 않은 마물들이 배회하고, 마족들은 헬무드 곳곳을 점령하고서 인간의 땅을 침략하러 진군했다. 타락한 마법사ㅡ 흑마법사들이 섬기는 마왕에게 아양 떨려 인간을 사냥했다. 놈들은 마족이 되기를 바랐고, 그로서 마도(魔道)의 진리를 보고자 했다.


그곳은 끔찍하고 추한 욕망이 얽힌 지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백 년 전부터 헬무드는 인간들을 받아들였고, 마왕과 마족들은 과거의 흉악함을 덧칠하듯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이제 사람들은 헬무드를 지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 겪을 수 없는, 독특하고 낭만적이고 퇴폐적인 유희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지로 생각한다.


침략에 앞장섰던 마족들은 전쟁의 배상이랍시고 주변 국가들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마왕에게 아양떨던 흑마법사들은 자신들도 피해자랍시며 감성팔이를 해대다 끝내 아롯에서 흑색마탑을 세웠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는 죄다 개지랄이었다. 


마족이 자원봉사를 한다고? 뒷구멍으로 영혼을 빼돌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흑색마탑? 그곳이야말로 비리의 온상일 것이다. 마법이라면 눈을 뒤집는 미치광이들이 흑마법사를 받아들였다면 이유야 뻔했다. 진실은 모를 일이나, 흑색마탑에서 온갖 추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헬무드, 아롯, 유라스, 루하르...’


유진은 전생의 동료들의 행적이 남은 장소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물론 당장 갈 수는 없었다. 이 어린 몸으로 머나 먼 타국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젠가.’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배를 어루만졌다.


굶주린 배가 꼬르륵 소리를 냈다. 


*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젯밤부터 시안은 그런 고민으로 밤을 지새웠다. 간신히 잠들기는 했지만, 빌어먹을 꿈을 꿔버렸다. 꿈속에서 시안은 유진과 결투했고, 또 패배해 버렸다. 


꿈속의 시안은 미노타우르스였다.


혈계식에서 보았던 광경을 꿈속에서 직접 체험했다. 그는 검기를 내뿜지 못한 미노타우르스가 되어서, 유진에게 해체되었다. 


해체.


연무장에 나온 시안은 몸서리를 치며 꿈의 잔영을 떨쳐냈다. 하지만 찌푸린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시안은 꿈속에서 몇 번이나 꿰였던 눈자위를 어루만지며 입술을 씹었다. 


“오빠 왜 그래?”


“내가 뭘.”


“표정이 죽상이잖아. 아침밥도 많이 안 먹었고.”


“내 표정은 원래 이래. 아침밥도 평소랑 똑같이 먹었어.”


“거짓말.”


시엘은 혀를 삐죽 내밀며 웃었다.


“나 다 알아. 유진 때문에 그러지?”


“걔랑 뭔 상관이야?”


“오늘부터 유진이랑 같이 배우기로 했잖아. 그것 때문에 막 신경 쓰고 그러는 거 다 알아.”


“아니라니까!”


“봐봐, 평소보다 화도 빨리 내잖아. 유진한테 화난 걸 왜 나한테 화풀이해?”


“...화 안 났어.”


“신경쓰이는 건?”


“그건...”


시안은 얄미운 동생을 흘겨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솔직히 신경 쓰이기는 해.”


“어머니가 친하게 지내라고 했잖아.”


“그게 말처럼 되냐?”


“난 되던 걸. 내가 유진한테 말해줄까?”


“...뭘.”


“오빠랑 친하게 지내달라고.”


그 말에 시안의 어깨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어머니라면 모를까, 자신보다 몇 초 어린 동생에게는 도저히 그 굴욕적인 부탁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시안은 그렇게 내뱉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멀찍이 있는 별채에서 유진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안은 눈을 부릅떴다. 유진의 허리에 걸린 위니드는 이 먼 거리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쟤 백염식 1성이래.”


“알아.”


“오빠랑 나는 백염식 1성 되는데 엄청 오래 걸렸잖아.”


“엄청 오래까지는 아니야. 한 달이면 본가의 선조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빠르댔어.”


“유진은 하루도 안 되어서 1성 됐잖아. 그럼 제일 빠른 거지?”


“조용히 해.”


“기온 삼촌한테 들었는데, 유진은 영맥에 들어가자마자 마나를 느꼈대. 우리는 나흘 넘게 걸렸지?”


“어쩌라고.”


시안은 뾰족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동생을 흘겨보았다. 시엘은 그런 오빠의 반응이 재미있어 킥킥 웃었다.


“안녕!”


시엘은 오빠를 더 놀리지 않고, 다가 온 유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너 왜 계속 별채에서 지내는 거야? 그냥 본가 저택에서 우리랑 같이 살면 좋잖아.”


“난 싫어.”


시안이 득달같이 말을 받았다. 유진은 그런 시안을 고깝다는 눈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싫어.”


“난 좋은데.”


시엘은 배시시 웃으며 위니드를 가리켰다.


“너 위니드에서 바람의 정령왕님을 불러냈다며?”


“거짓말이야.”


이번에도 시안이 말을 받았다. 마음은 슬금슬금 유진에게 다가가는데, 시안은 도저히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안은 여전히 경외란 감정에 낯설었고, 그로 말미암은 호감에는 더더욱 낯선 기분을 느꼈다. 


“위대한 베르무트님을 제외하고서 위니드에서 바람의 정령왕을 불러들인 선조는 한 명도 없어.”


유진은 그 말에 콧방귀를 뀌며 위니드를 뽑았다. 그러자 시안은 움찔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뭐... 뭐야?”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위니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바람이 뭉쳐 실프가 되었다. 그 모습에 시안은 내심 안도하고서 비웃음을 지었다.


“그게 바람의 정령왕이냐?”


“아니.”


유진은 보란 듯이 위니드를 들었다. 그러자 실프가 검신을 휘감는다. 시안은 바람으로 만들어진 칼날을 보고서 입을 반쯤 벌렸다.


“거... 검기?”


“네 눈에는 이게 검기로 보이냐?”


돌아 온 비웃음에 시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유진은 위니드를 몇 번 휘둘러 보이면서 시안을 쳐다보았다.


“대련이나 할래?”


“...으, 응?”


“너는 검기 써. 나는 이거 쓸 테니까.”


“...”


“그냥 놀이삼아 해 보자고. 아니면 내기라도 할까? 네가 이기면...”


“아, 안해.”


시안은 즉시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오늘... 기, 기온 삼촌에게 가르침을 받으려 나온 거야. 너랑 대련하려 나온 게 아니야.”


“쫄았니?”


“...안 쫄았어.”


시안은 그렇게 대답하며 시엘에게 열심히 눈짓을 보냈다. 동생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시켜주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시엘은 시안의 눈짓을 무시하고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나쁜 계집애.’


다행히 시안이 뭐라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유진이 물러서 주었다. 


“괜히 시비걸지 말고.”


“...”


“일단은 형제잖아. 잘 지내자고.”


유진은 활짝 웃으며 시안에게 손을 뻗어주었다. 시안은 잠시 그 손과 유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악수 몰라?”


“...응?”


“잘 지내자고. 형제끼리.”


“...어, 어어...”


결국 시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의 손을 잡았다.


“나랑도 악수 해.”


곁에서 보고 있던 시엘이 냉큼 끼어들었다. 덕분에 유진은 교차시킨 양손으로 시안과 시엘의 손을 맞잡게 되었다. 


“내가 너보다 빨리 태어났으니 누나야.”


“닥쳐 좀.”


그럼 나는 형인가?


시안은 순간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유진의 번뜩이는 눈을 보고서 찔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도저히 동생처럼 유진에게 넉살을 떨 수 없었다.


아롯


시간이 참 빠르구나.


이른 아침. 거울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유지는 덥수룩한 머리를 대충 넘기고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17살.


혈계식이 끝나고, 본가의 양자가 된 지도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얼굴은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있지만, 몸은 거의 다 자랐다. 유진은 떡 벌어진 가슴과 어깨를 살피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 


‘참 잘난 몸이란 말이야.’


이 몸으로 17년을 살면서 몇 번이나 실감한 것이지만, 도저히 질리질 않는다. 


우선 얼굴. 잘생겼다. 제 얼굴이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잘생긴 얼굴이다. 전생 하멜의 얼굴도 그렇게 못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환생한 유진의 얼굴 옆에 갖다 두면 엘프와 인간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오크까지는 아니야.’


그 정도로 전생의 얼굴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진은 매끈한 뺨을 툭 두드려보고선 이리저리 표정을 바꾸었다. 


성질 나빠 보이는 눈매는 어려서부터 변하지 않았다. 이 또한 나름의 천성이었다. 어려서부터 눈깔에 힘을 주고 다녔으니, 그나마 주름이 생기지 않은 것이 다행인가. 


‘전생은 이거보다 눈매가 나빴어.’


유진은 찌푸렸던 표정을 펴고서 활짝 웃었다. 


이게 정말 나? 


그런 꼴같잖은 생각은 진즉에 졸업했지만, 이 잘난 얼굴은 17년을 살았어도 볼 때마다 놀랍다. 


‘네 피가 좋기는 해.’


유진은 잿빛머리카락을 들추며 생각했다. 몸이 자라는 만큼 잿빛머리카락도 수북해진다. 유진은 이 머리색을 볼 때마다 베르무트를 떠올리곤 했다.


아침부터 이런 감상에 빠지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3살. 마나에 입문한 후, 유진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아침마다 마나를 수련했다. 


그리고 오늘.


유진은 백염식의 3성에 도달했다.


‘빨라.’


심장 언저리에서 분열한 코어를 느낀다. 세 개의 별. 백염식의 3성.


‘너무 빨라.’


마나를 수련한 후, 몇 번이나 실감했다.


백염식은 전생에 익힌 것과 비교되지 않는 성능을 가진 마나수련법이다. 적은 마나로도 최적의 효율을 뽑아내고, 마나가 쌓이는 속도도 빠르다. 그렇게 쌓은 마나를 전신에 퍼트려 힘으로 삼는 과정도 군더더기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성취를 올릴 수 있는 건... 백염식의 뛰어남 뿐만이 아니라, 유진의 몸이 마나를 ‘잘’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몸뚱이의 성능이 훌륭한 건 좋은데...’


가끔 오싹거리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벌써부터 이렇게 빠른데. 나중은... 어떻게 되는 거냐.’


은근하지 않고 노골적인.


즐거운 오싹거림이다. 유진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며 히죽 웃었다. 


‘전생의 힘으로는 부족할 거야.’


유진 라이언하트. 이 몸은 여러 기대를 갖게 만든다. 전생의 기억과 경험만으로는 이 몸을 충족시킬 수 없을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유진은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멜은 대단한 실력자였다. 베르무트만큼은 아니어도 온갖 무기를 다룰 줄 알았다.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하멜의 기술은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갈고 닦아 벼려낸 것이다. 철저한 실전으로 가다듬은 기술이란 말이다.


하멜은 그것만으로 이름을 떨쳤고, 제 자신을 천재라 착각했다. 그렇게 베르무트를 만나서...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깨달았다.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어, 많은 일을 겪었다. 기술은 더더욱 높은 곳으로 나아갔다. 그러며 많은 것을 더해 넣었다. 


‘부족해.’


전생의 힘을 체득하는 것만으론 안 된다. 이 잘나고 탐욕스런 몸뚱이를 활용하려면 전생의 기억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더해야 한다. 


‘대부분은 할 줄 알아.’


그것도 아주 잘 할 줄 안다.


검, 창, 도끼, 활 등. 대부분의 무기는 능숙하게 다룬다. 죽이기 위해, 살기 위해 배운 것들. 마경에서 확신을 얻은 기술들. 


부족하다. 늦고 빠르고의 차이일 뿐,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이 몸으로도 언젠가는 반드시 해낼 수 있는 것들이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이 확정된 것이라면,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써야 하지 않겠나.


*


“마법을 배워야겠어.”


“뭔 개소리야?”


시안은 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 괴물 같은 놈은 그렇게 몸을 움직였으면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다.


처음에는 열불이 치솟았지만... 벌써 4년이나 저 여유로운 낯짝을 올려다보았으니, 이제는 익숙했다.


“마법을 배워야겠다고.”


“그러니까 뭔 개소리냐고.”


시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4년 동안 몸이 큰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시안도 많이 컸다. 물론 시안은 그 사실을 실감하지는 못했다. 나이는 같았지만, 시안은 유진보다 키가 아주 조금 작았다.


그리고 실력에서는 아주 많은 차이가 났다. 


“오늘 아침에 말이야.”


유진은 시안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저 자존심 강한 꼬마는 졌어도 졌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 들고, 일으키려 뻗는 손을 감사히 받지 않는다. 처음처럼 모욕이니 뭐니 떠들며 날을 세우지는 않아도, 마음 구석탱이에 꽁한 감정을 쌓아둔다.


“평소처럼 백염식을 수련하는데.”


“너 설마.”


시안의 눈동자가 불안감에 떨린다. 그는 이를 악물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진은 그런 시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게 되더라고.”


몸 전체에 퍼진 마나가 한 곳에 모인다. 심장. 그곳에 응어리 진 세 개의 별이 공명한다. 서로 맞물려 회전하는 별이 마나를 폭발적으로 증폭시킨다. 


ㅡ파스스스! 새하얀 빛으로 형상을 갖춘 마나가 유진의 몸을 휘감는다. 시안은 부릅 뜬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전신을 휘감은 백색 불꽃. 흩날리는 사자의 갈기. 


“지랄... 하지 마...!”


시안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 또한 백염식을 수련했기에, 유진이 체현시킨 마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마나를 저렇게 몸에 휘감고, 백염식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하얀 불꽃을 만들어내는 것. 


백염식이 3성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돼?”


시안은 억울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유진보다 7년이나 빨리 마나에 입문하고, 백염식을 수련했다. 그렇게 3년 전에는 백염식의 2성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안의 성취는 2성이었다. 그의 심장에 어린 별은 늘어날 것 같으면서도 더 늘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 얄미운 개자식이, 7년이나 늦게 마나에 입문한 놈이, 벌써 백염식의 3성에 도달했단다.


“말은 되지.”


유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나를 흩트렸다.


“난 천재니까.”


제 입으로 선언하기에는 부끄러운 말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히 겸손을 떠는 것이 우습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몸은 천재로 태어났고, 전생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다.


전생의 하멜은 천재가 아니었지만, 유진은 천재가 맞다.


“죽여 버리고 싶네.”


“형제끼리 그러면 안 되지.”


“안 되기는, 넌 매일 아침마다 날 죽일 듯이 패잖아.”


“네가 아침마다 대련해 달라며? 싫으면 하지 마. 난 상관없어.”


시안은 이를 꽉 씹으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아침마다 대련하는 것은 시안 나름대로 좌절감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유진은 그런 시안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등신 같은 꼬마라고만 생각했는데. 양자가 되고 부대낀 덕인지, 시안의 등신 같은 면은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왜 하필 마법이냐?”


“마법은 배운 적 없으니까.”


“그래서 마법을 배우겠다고? 웃기는 새끼... 어떻게 배울 건데? 수도에서 교사라도 불러 달라 그럴 거냐?”


“그건 가주님과 얘기해 봐야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니, 왜 하필 지금 와서 마법을 배우겠다는 건데?”


시안은 유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도에 저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잘하는 것에 몰두하지 않고 마법에까지 손을 대는가? 심지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말이다.


“마법을 배우기에는 네 나이가 너무 많지 않냐?”


“17살은 충분히 어린 나이야.”


“개뿔이. 이오드 형님의 이야기는 그새 까먹은 거야?”


시안은 헛웃음을 흘리며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지금 너보다 2살이나 어린 15살에 마법 배우겠다고 깝치다가, 아롯에서 병신 취급을 받고 있잖아.”


“새끼가 형님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내가 틀린 말 했어?”


시안은 항변하면서도 유진의 시선에 찔끔 어깨를 움츠렸다.


“...괜히 마법 배우겠다고 깝치지 말고, 본가에 남아있어. ...네가 마법 배우겠다고 하면 아버지가 피눈물 흘릴 거다.”


그럴 것 같기는 했다. 


이오드 라이언하트. 본가의 장남은 4년 전, 혈계식이 끝난 직후에 적색 마탑주 로베리안과 함께 아롯에 갔다.


...로베리안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다. 자질이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아롯에는 남았으나, 기대했던 것처럼 큰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4년이나 흐른 지금, 이오드는 아직도 아롯에 있다.


대충 듣기론 적색 마탑 소속의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다는데... 큰 성취는 없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적색 마탑주의 입장은 물론이고 본가의 위신도 난감해졌다. 기껏 연줄을 쥐어주면서 장남을 적색 마탑에 보냈는데, 대단치도 않은 재능으로 마탑에 빌붙어 있는 꼴 아닌가.


“가주님은 피눈물 흘려도 애니실라님은 환호성을 지르실 걸.”


“...어머님은 그럴 지도 모르지.”


시안은 웅얼거리면서 괜히 본가의 저택을 힐긋 보았다.


“하, 하지만 어머님도 널 싫어하지는 않아.”


“가끔 나 마주칠 때마다 눈을 살벌하게 뜨시던데.”


“네가 날 개처럼 패니까 그래.”


“그렇다고 안 팰 수는 없잖아. 네가 패달라며?”


“개자식.”


대련할 때 제대로 싸워달라고 청했던 것은 시안이다. 어쭙잖게 봐주었다가는 제 실력이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시안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말한 것에 깊은 후회를 느끼고 있었다.


유진은 대련에서 자비가 없었다. 작은 틈만 보이면 곧장 쑤시고 들어와서 두들겨 패버린다. 그러면서 어디가 부족했다며 지적을 하는데, 알아듣기도 쉬운데다 틀린 구석이 없는 말이라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너, 아롯에 갈 거냐?”


“기왕 배울 거면 제대로 배워야지.”


마법을 제대로 배우려면 아롯에 가는 것이 제일이다. 


‘알아보고 싶은 일도 있고.’


아롯에서 세냐의 행적을 더듬어보고 싶다. 그런 욕구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세냐 뿐만이 아니다. 아니스도, 모론도. 300년 전의 동료들이 마경에서 돌아와 어떻게 살았는지, 최후에... 어땠는지를 제대로 알고 싶다.


‘본가에서도 놈들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었어.’


선조인 베르무트에 대한 기록도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4년 동안 이것저것 알아보았지만, 마경에서 돌아 온 용사와 동료들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 목걸이도.’


유진은 목에 건 목걸이를 의식했다. 4년 전, 보물고에서 꺼낸 후 쭉 걸고 있는 목걸이. 적색 마탑주가 직접 마나의 기억을 살폈으나, 이 목걸이가 하멜의 유품이라는 기억은 읽어내지 못했었다.


다른 누군가가 목걸이의 기억을 덧칠한 것이다.


유진이 생각하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세냐 아니면 베르무트뿐이었다. 대체 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굳이 생각하자면, 목걸이에 장난을 칠 것은 베르무트가 아닌 세냐일 것 같았다. 유진이 기억하는 베르무트는 이런 일을 할 놈이 아니었다.


“...그... 네가 아롯에 가면...”


시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헛기침을 뱉었다.


“...시엘이 서운해 할 거야.”


“얼씨구.”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나만 보면 질색하는 시엘이?”


“그건 본심이 아니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시안은 제 말에 확신을 느끼지 못했다.


시엘 라이언하트.


그 앙큼한 꼬마는 올해 초부터 사춘기를 겪고 있다. 예전처럼 유진에게 달라붙지도 않고, 먼저 말을 걸지도 않는다. 사춘기가 꽤나 중증인 것인지 제 방에서도 잘 나오지 않는다. 수련은 거르지 않지만, 예전처럼 유진과 시안과 함께 수련하지도 않았다.


‘땀 냄새 풍기는 게 싫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덕분에 기온과 길레이드만 바빠졌다. 둘은 사춘기의 병증을 겪는 시엘에게 맞춰, 하루의 반은 시엘을 가르치는 것에 몰두하고 남은 반은 시안과 유진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쨌든, 네가 아롯에 가면 시엘이 서운해 할 거야.”


“내가 시엘이 서운해 한다고 마음을 바꿀 것 같냐?”


“재수 없는 새끼.”


유진의 이죽거림에 시안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하드님 생각은 안 하냐?”


“우리 아버지는 나 없어도 잘 지내실 걸.”


시안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처음에는 본가의 생활을 거북해 하던 제하드는, 몇 년 동안 본가의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 졌다. 이제는 주기적으로 다른 방계의 가주들과 사냥을 다니고, 가끔씩 길레이드나 기온과 밤새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 애니실라조차도 제하드와 제법 잘 지내고 있었다.


물론 유진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애니실라는 유진에게 큰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주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사이를 원만히 지내는 것이 이득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테오니스는.


이오드의 어머니이자, 정실인 그녀는... 유진과 제하드를 대놓고 경계한다. 이오드가 로베리안의 제자가 되지 못한 후부터 테오니스의 신경질적인 성격은 계속해서 날을 세우고 있다.


‘테오니스는 조금 신경 써야겠어.’


유진이 아롯에 간다고 말한다면 테오니스가 더 예민하게 굴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유진 본인이 신경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가주, 길레이드에게 슬며시 전해둬야 할 일이다. 


“...어디 가냐?”


“가주님 만나러.”


“지금 바로 간다고?”


“허락은 빨리 구해놔야지.”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연무장을 나갔다. 시안은 멀어지는 유진의 등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마법을 배운다고 지랄이야.”


시안은 투덜거리면서 유진의 뒤를 쫒아갔다.


아롯


대뜸 찾아가기는 했지만, 곧장 길레이드의 방에 처들어가지는 않았다. 유진은 본가 시종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주며 용건을 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장이 직접 유진을 안내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거야.”


시안은 치미는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저 괴물같은 놈이 마법에 손을 대어 몰두하기 시작하면, 그만큼 무도에 관한 수행이 게을러질 것 아닌가. 


‘차라리 잘 됐어.’


당장은 유진의 경지가 앞서있지만, 향후 몇 년이면 시안도 백염식의 3성에 오를 것이다. 시안은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시안은 백염식의 3성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성인이 되기까지 어떻게든 4성에 오르고 싶었다. 


‘...될까?’


솔직히 안 될 것 같다. 라이언하트의 역사상 성인이 되기 전에 백염식의 4성에 오른 이들은 한 명도 없다. 천재라 이름을 떨친 선조들은 물론, 길레이드와 기온조차도 성인이 되기 전에 백염식의 3성에 머무는 것이 고작이었다. 


즉, 이 나이에 백염식의 3성에 오른 것만 해도 선대의 천재들과 비견될 자질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시안의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유진과 시안의 나이는 17살. 유진은 오늘 백염식의 3성에 올랐다. 


전례가 없을 빠른 속도... 저 괴물 자식이 본가의 역사를 갈아치우는 것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지만...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유진의 등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문 너머의 대답을 듣고서 방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시안은 다시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고서 몸을 돌렸다. 유진이 본가에 들어 온지 4년. 시안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저 터무니없는 형제에게 셀 수 없이 많은 패배를 겪었다. 


그 많은 패배는 어린 시안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었다. 좌절은 더한 좌절을 피어낼 양분이 될 뿐이다. 좌절감에 허덕이는 시간에 땀 한 방울 흘리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씁...”


그조차도 시안 본인이 깨달은 것은 아니다. 좌절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궁상을 떨던 어린 시절. 대뜸 방문을 열고서 들어 온 유진이 시안의 엉덩이를 걷어 찬 적이 있었다. 


‘네가 이 지랄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놀고 있을 것 같냐?’


시안이 좌절하는 동안에도 유진은 쉬는 날 없이 수행을 계속한다. 그러니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시안은 그를 되새기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길레이드는 방에 들어 온 유진을 환한 얼굴로 맞이해주었다. 유진은 대뜸 본론을 말하지 않고, 일단 고개부터 꾸벅 숙였다.


“문안인사를 겸해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눈은 호기심으로 빛난다. 길레이드는 양자가 이번에는 어떤 일로 자신을 놀라게해줄지를 기대했다. 


“오늘 아침, 백염식의 3성에 올랐습니다.”


유진은 소파에 앉으며 운을 땠다. 그 말에 길레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정말이냐?”


“네.”


길레이드가 서두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유진은 그에 맞춰 심장 언저리의 별을 공명시켰다. 백색의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고, 길레이드는 숨을 삼켰다.


“...허... 허허.”


유진을 양자로 들이고,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게 될 만큼 다양한 일을 겪었다. 하지만 길레이드는 이번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17살에 백염식의 3성이라? 선조들 중에서도 유진만큼 어린 나이에 3성에 오른 분은 없었다. 길레이드는 유진의 앞에 털썩 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널 본가의 양자로 들인 것은...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일 게다.”


“가주님의 지원 덕분입니다.”


유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양자가 되고서 4년이나 흘렀지만, 유진은 길레이드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 그가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친부인 제하드 뿐이었다. 


길레이드는 그것에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친부를 생각하는 유진의 효심이 갸륵하고 대견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작게나마 아쉬움은 느낀다. 저 대단한 아이가 친자식이었다면... 그 누구도 유진이 차대의 가주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텐데. 오히려 모두가 유진이 가주가 되어야 한다며 뜻을 모았을 텐데.


‘...안 될 생각.’


길레이드는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떨쳐냈다. 이러한 생각은 피비린내 물씬 풍길 상잔과 이어질 수도 있다. 가문을 위해서도 물론이나, 길레이드는 저 어린 아이들이 서로에게 칼을 꽂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원이라... 내가 대단한 것은 해주지 않았잖느냐. 그 성취는 온전히 네 노력으로 빚어낸 것이야.”


“그렇게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 가주님의 지원 덕분이죠.”


길레이드는 유진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전에는 길레이드를 대하며 어린아이다운 행동을 의식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진도 나이를 제법 먹은 데다, 길레이드도 4년에 걸쳐 유진의 당돌함에 익숙해졌다.


“...마법?”


하지만 저 말은 익숙한 일이라 넘길 수 없었다. 길레이드가 느끼는 당혹감은 시안과 똑같았다. 갑자기 마법이라니? 4년 동안 단 한 번도 마법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네.”


“어째서? 네 나이에 백염식의 3성에 오른 사람은 선대에도 없었다. 지금처럼 노력한다면, 어쩌면 성인이 되기 전에 4성에 오를 지도 모른다.”


“노력은 마법을 익히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유진은 애매하게 말하지 않았다. 오만하다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나, 유진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기 정도면 저렇게 말해도 되었다. 


“가주님. 저는 본가의 양자가 되고서 4년 동안, 단 한 번도 본가의 품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유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길레이드를 응시했다. 


“오늘 3성에 오르면서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듯 본가에 남아 수행한다면, 저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으음...”


“제게는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합니다.”


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길레이드는 어린 나이에 걸맞는 혈기를 느꼈다. 그 목소리에는 진정성과 열망이 가득했다. 


“저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마법. 제가 여태까지 배워보지 못한 것이나, 마나를 사용하는 학문이라는 것은 압니다. 제가 마법에도 큰 자질을 가지고 있을 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마법에 입문한다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마나를 볼 수 있을 겁니다.”


“...”


“설령 큰 진전이 없을 지라도, 새로운 학문을 배운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큰 경험이 될 테지요. 저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감히 청을 드리는 겁니다.”


유진은 거기서 말을 멈추고, 번뜩이는 눈으로 길레이드를 응시했다. 그는 양 손으로 무릎을 짚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허허.”


길레이드는 다시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거라. 네가 고개 숙여 부탁할 것도 없는 일이지 않느냐.”


“가주님.”


“내가 가주일지언정, 배움을 탐하는 열망에 어찌 찬물을 끼얹을 수 있겠느냐. 유진, 네 뜻은 알겠다. 네가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배워야지.”


유진은 고개를 숙인 체 히죽 웃었다. 물론 고개를 들어 올릴 때, 유진의 표정에 웃음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마법은 어떻게 배워 볼 셈이냐?”


“그건...”


“날 찾아 와서 청한 것이니 미리 생각해 두었을 것 아니냐.”


“아롯에 가고 싶습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마도왕국 아롯.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아롯에 가는 것이 제일이다. ...장남인 이오드만 아롯에 없었어도, 길레이드는 저 말에 별다른 동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아롯이라...”


“허락 외에 다른 것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유진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이오드는 길레이드의 아픈 손가락이다. 


장남이면서도 무도에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려서부터 마법에 관심을 가진 주제에 마법에도 큰 두각을 드러내지 않은 장남. 


4년 전부터 아롯에 가있지만, 라이언하트의 명성을 떨치기는커녕 온갖 연줄에 기댈 뿐이라는 비웃음만 들려오게 만든 아들.


유진은 이오드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롯에 가려는 건 어디까지나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 그리고 세냐의 흔적을 더듬어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본가에서 ‘아롯’을 말하면 다들 이오드를 떠올린다. 그러니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진은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네가 바란다면 보내줘야지. 로베리안님에게 말을 전해두마.”


“감사한 말씀이지만, 너무 많은 지원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유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길레이드의 표정을 살폈다.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로베리안님도 바쁘실 테고. 가능하다면 로베리안님의 도움 없이 혼자서 배워볼까 합니다.”


“그건 어려운 일이다.”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본가를 나갈 지라도 너는 라이언하트란다. 네가 아롯에 도착한다면, 아롯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널 주목하게 될 거야. 네가 바라지 않을 지라도, 라이언하트와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많은 자들이 네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먼저 손을 뻗지는 않을 겁니다.”


“...네 뜻이 기특하구나.”


장남이 저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길레이드는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떠올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유진,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해 다오.”


“무엇입니까?”


“흑마법과는 관여하지 말거라.”


아롯에는 흑마법사들이 모인 흑색 마탑이 있다. 그들의 본질에 알맞은 불온한 소문도 없고, 먼 과거와는 달리 인식도 아주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라이언하트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가문이다. 가문의 방계 중에서는 마법을 전문적으로 익히는 가문도 있으나, 흑마법은 불문율로 배제하고 있다. 


“저도 흑마법은 싫습니다.”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가 그것만 약속해 준다면, 원하는 때에 아롯으로 떠날 수 있도록 손을 써두마. 로베리안님께도 말은 해 두마. ...이오드 때처럼 직접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야. 따로 바라는 것은 없느냐?”


“용돈만 넉넉히 주시죠.”


“아롯에 얼마나 있을 생각이지?”


“가서 배워봐야 알겠지만, 성인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몇 년은 가있겠다는 말이로구나.”


“그래야 뭐라도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유진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음, 확실히. 마법은 네가 여태껏 익혔던 것과 판이한 학문이니... 어설프게 입문하는 것은 안 하니만 못할 것이야.”


전생에 마법을 익힌 적은 없다. 그러니 유진도 섣부른 자신은 갖지 않았다. 


길레이드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방을 나왔다. 그렇게 복도를 걷는데, 굳게 닫혀있던 방문 안쪽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저 방이 어딘지는 안다. 여러 개 있는 시엘의 방 중 하나. 지독한 사춘기를 겪는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연무장을 나가지 않고, 저택의 방 중 하나를 자신의 수련실로 사용하고 있다.


“너 정말 아롯에 갈 거야?”


시엘은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의 목소리가 문틈 너머로 들려왔다.


“시안이 말하디?”


“응. 너 백염식 3성에 올랐다고도 말해줬어.”


“다 들었네.”


“정말 아롯에 가는 거냐니까?”


“가주님도 허락해 주셨어.”


“왜 가는 거야?”


똑똑. 시엘이 다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문을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그렇다면 꼭 아롯에 갈 필요는 없잖아. 수도에서 마법사를 초빙해.”


“아롯의 마법사보단 못할 것 아냐?”


“아버님은 네가 조른다면 궁중마법사도 불러주실 거야.”


“그 궁중마법사가 아롯의 마탑에 있는 마법사보다 잘 가르쳐줄 것 같지는 않은데.”


“궁중마법사면 실력은 확실하지.”


“내가 바라는 건 실력이 좋은 마법사가 아니라 잘 가르쳐주는 마법사야.”


“꼭 마법을 배워야 해?”


시엘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진다. 그녀는 문을 살짝 열고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17살의 시엘은 과거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거의 남지 않았다. 외모만 그랬다. 유진은 저 계집애의 심성이 얼마나 앙큼한지 잘 알고 있었다.


“꼭 배울 필요 없는 거잖아.”


“배워서 나쁠 것도 없지.”


“마법이야 정령마법으로 하면 되는 것 아냐? 그리고 너 없는 동안, 나랑 오빠가 네 실력을 따라잡을 수도 있어.”


노골적인 도발. 하지만 유진은 낄낄 웃기만 했다.


“그러면 나야 좋지.”


“...뭐가 좋아?”


“본가의 힘이 커지는 거잖아. 너희랑 대련하는 것도 재밌어 질 거고. 아, 너랑은 대련 안한지 한참 됐지만.”


“내가 앞으로 대련 해 주면 아롯에 안 갈 거야?”


“아니, 갈 거야.”


“나쁜 놈.”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슬쩍 고개를 뒤로 뺐다. 방금 전까지 수행에 열중한 터라 머리도 부스스하고 몸도 땀에 젖어 찝찝하다. 시엘은 그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도, 자신의 체취를 풍기는 것도 싫었다.


“...얼마나 가있을 건데?”


“가봐야 알지.”


“대강은 알 것 아냐.”


“최소 일 년은 넘을 걸.”


“뭐 그리 오래 있어?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제하드님은 어쩔 거고?”


쌍둥이라 그런지 오빠랑 똑같은 얘기를 한다. 


“아버지는 나 없어도 잘 지내실 걸.”


“...기온 삼촌이 서운해 하실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


기온과 대련하는 것은 유진에게도 즐거운 일이었다. 


“나 없는 만큼 너희가 놀아드려.”


“우리 오빠는 어쩌고?”


“시안이 여기서 왜 나와.”


“오빠도 너랑 대련하는 거 좋아한단 말이야.”


“나한테 처맞는 걸 좋아하면 네 오빠가 좀 이상한 거야.”


“어쨌든, 오빠는 너 없으면 서운해 해. 아까도 나한테 말하면서 은근히 너 안 갔으면 좋겠다고 티냈어.”


“그래도 갈 건데?”


“나도 너 안 갔으면 좋겠어.”


“그래도 갈 거라니까.”


“개자식.”


시엘의 표정이 구겨진다. 본가에서 시엘의 말을 저렇게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것은 유진뿐이다. 그녀는 유진을 노려보다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언제 떠날 건데?”


“내일.”


“뭐 그리 빨리 가?”


“늦게 갈 이유가 있냐? 허락 받았으니 바로 가는 게 시간 안 아깝잖아.”


“정 없는 놈. 이별파티라도 해야 할 것 아냐?”


“뭔 놈의 이별파티야.”


유진은 문을 쿵쿵 두드려주고서 다시 복도를 걸었다. 유진이 멀찍이 가고서야 시엘은 문을 빼꼼 열었다.


“진짜 내일 갈 거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어주었다. 


길레이드의 허락을 구했으니 유진의 행동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는 별채로 돌아가, 제하드의 방문을 두드렸다.


“다녀 오거라.”


내일 아롯에 가겠다는 말은 갑작스러웠으나, 제하드는 긴 고민은 하지 않았다. 


아들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만큼 자란 아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서 못된 아이들과 어울리지는 말고.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아버지도 저 없다고 못된 짓 하지 마시고, 운동을 게을리 하지 마세요.”


돌아 온 대답에 제하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본가에서의 4년 동안 제하드는 신수가 훤해졌다. 살도 많이 빠졌고, 제법 근육도 붙었다. 방계의 가주들과 주기적으로 사냥도 다니고, 본가의 넓은 숲에서 산책을 즐긴 덕분이다.


“그리고 저 없다고 누가 무시하려 들면, 저한테 바로 편지를 보내세요. 괜히 혼자 앓지 마시고.”


“가주님이 신경 써 주실 게다.”


“그래도 가주님이 신경 써 주는 것보다는 하나 있는 아들이 신경 써 주는 것이 기분 좋을 것 아닙니까.”


제하드는 말없이 웃으며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잘난 아들은 제하드의 자랑이자 보물이었다. 아들이 없었다면... 제하드는 몇 년 전에 살았던 기돌의 풍경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네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단다.”


“방해는 무슨.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전 한 번도 아버지를 방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유진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제하드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어쨌든, 저는 내일 떠날 겁니다. 가서 건강히 잘 지낼 거니까, 아버지도 건강하게 지내주세요. 아셨어요?”


“그래, 그래.”


이제 유진은 제하드보다 키가 컸다. 제하드는 멋지게 큰 아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날 밤, 유진과 제하드를 포함한 본가의 식구들이 커다란 식탁에 모여 앉았다. 어지간해서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시엘도 깔끔히 차려 입은 모습으로 식탁에 앉았다.


이별파티라는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년을 떠나게 될 유진의 미래를 축복할 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덕담과 호화로운 요리가 식탁에 오른다. 


“아롯에서 마법을 배운다니, 어쩜... 너는 무도에도 대단한 자질을 가졌으니, 마법도 잘 배울 수 있을 거야.”


유진이 백염식의 3성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애니실라로 하여금 입술을 잘근잘근 씹게 만들었으나, 저 괴물 같은 아이가 당분간 본가를 떠난다는 것은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저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신 제하드님이 부러워요.”


“허허, 과찬이십니다.”


4년 동안 애니실라의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진은 물론이고 제하드와도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정면에서 웃으며 손을 뻗고, 유진과 제하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었다. 


그런 태도는 정실인 테오니스와 정반대였다.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과 얄팍한 뺨이 삭막한 인상을 만든다. 테오니스는 몇 년 전부터 본가의 저택을 거의 나서지도 않았고, 시종들의 작은 실수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날을 세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테오니스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오드는 그녀가 바란 대로 로베리안의 제자가 되지 못했고,  아롯의 고위마법사들과 인맥을 맺지도 못했다. 그나마 테오니스에게 우호적이던 길포드와 부인마저 몇 년 전 본가를 떠나버렸으니, 지금의 본가에 테오니스의 아군은 없었다.


‘자기가 지랄 맞게 군 탓이지.’


유진은 테오니스의 강렬한 시선을 흘려내며 고기를 썰었다. 길레이드는 테오니스를 차별하지 않는다. 이오드를 억지로 불러들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오드가 부족한 만큼 지원을 실어주고 있다. 


테오니스 본인이 날을 세우고서 주변을 할퀴어댈 뿐이다.


“유진.”


식사가 끝날 무렵.


테오니스가 대뜸 입을 열었다. 애니실라는 유진을 볼 때마다 살갑게 대해 오는데, 저 신경질적인 안주인이 유진의 이름을 직접 부른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그 전에도 대화를 자주 나누었던 것도 아니다.


“아롯에 가면, 네 형인 이오드를 챙겨주렴.”


“...”


대뜸 던져오는 말에 유진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렸다.


“몇 년 동안 아롯에 혼자 있었으니 외로웠을 거야. ...너와는 형제로 지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오드는 네 형이잖니.”


“...네.”


“양자인들 넌 이오드의 형제야. 그러니까, 동생답게.”


테오니스의 눈이 미끄러진다. 그녀는 조금 떨어져 앉은 시안과 시엘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형을 챙겨주렴. 그럴 수 있지?”


“...노력할게요.”


“어머, 언니도 참. 유진이 어련히 잘할 거에요.”


애니실라는 호호 웃으며 테오니스의 시선에서 시안과 시엘을 보호했다. 테오니스는 얇게 뜬 눈으로 애니실라를 노려본 뒤 의자를 뒤로 끌며 일어섰다.


“피곤하군요. 먼저 들어가 쉬겠어요.”


“...그러시오.”


길레이드는 착잡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주는 엿 같은 자리야.’


요 몇 년 동안 유진은 길레이드와 가까이 지냈다. 그 덕에 분명한 결심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유진은 가주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롯


길레이드는 호위를 붙여주겠다고 말했지만, 유진은 정색하고서 거절했다. 말이 호위지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귀찮기만 한 존재 아닌가.


“아롯의 치안이 나쁜 것도 아니고, 제 한 몸 지킬 실력은 있습니다.”


다섯 개의 마탑은 모두 다 수도에 있다. 변경 촌구석도 아니고, 사람이 북적거리는 수도에서 생활한 건데 호위까지 대동할 필요는 없다.


“유진의 실력이면 호위는 필요 없을 겁니다.”


기온까지 거들고 나서니 길레이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유진이 나이에 믿기지 않을 만큼의 노련함과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게다가 백염식이 3성에 올랐으니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대할 수도 없었다. 저 나이와 실력이라면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


‘...이오드와는 다르지.’


길레이드는 입안에 남은 씁쓸한 맛을 와인과 함께 삼켜버렸다. 


다음날. 유진은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숲 외곽의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전날은 흐뭇하게 웃던 제하드는, 막상 유진이 떠나는 모습을 보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밥은 거르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먹거라.”


“네.”“몸이 아프면 곧장 의사를 찾아가고.”


“네.”


“힘들고 외로우면... 혼자 앓지 말고 돌아와라. 알았지?”


“네, 알았어요.”


유진은 꼬박꼬박 대답했다. 아들에 대한 애정과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제하드의 모습은 보기 괴롭다. 예전에는 아버지란 자각이 희미했는데, 신기하게도 환생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제하드가 진짜 아버지로 느껴진다.


‘...진짜 아버지도 맞고.’


“그만 좀 우세요. 제가 어디 죽으러 갑니까?”


“재수 없는 말 하지 말거라.”


“마법 배우러 가는 겁니다. 겸사겸사 아롯 관광도 할 거고.”


“넌 평생의 대부분을 기돌에서 살았고, 최근 4년은 본가에서만 살았잖느냐. 세상물정 모르는 네가 아롯에서 혼자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우시고, 시종들이 보잖아요.”


유진은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제하드의 뺨을 벅벅 문질렀다.


“하다못해 니나라도 데려가는 것이 어떠냐?”


“니나 쟤도 어려서부터 본가에 들어와서 세상물정 모르는 건 똑같아요. 그리고 쟤도 이번 기회에 고향 내려가서 좀 쉬다 오라고 했어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가주에게 직접 부탁해 니나가 휴가를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덕분에 니나는 묵직한 돈주머니와 호위까지 대동하고서 고향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슬슬 갈게요.”


유진은 눈물로 축축해진 손수건을 제하드에게 쥐어주었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 생각나면 편지 정도는 쓸게요. 그러니 아버지도 잘 지내세요.”


“크흑...”


“아 그만 좀 우시라니까. 아버지 운다고 제가 안 갈 것 같아요?”


“가겠지...”


“잘 아시네요. 그러니까 울지 말고, 기왕 가는 아들 웃으면서 보내주시면 안 됩니까?”


결국 제하드는 눈물을 멈추고서 웃어주었다. 괜히 웃으라고 했다. 저 얼굴을 보니 가슴에 대못 같은 것이 박히는 것 같다. 


그래도 유진은 뜻을 바꾸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물어린 웃음과, 본가 식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해버리는 것은 전생에서 변하지 않았다. 


*


마도왕국 아롯의 수도, 펜타곤. 다섯 개의 마탑은 왕궁을 중심으로 오망성을 그린다. 


유진은 그 광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전생에 아롯에 왔던 적은 있지만, 그때 보았던 풍경과 지금 내려 보는 풍경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허...”


웅장한 위용의 마탑. 저 다섯 개의 마탑이 왕궁보다도 눈에 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롯의 상징이자 국력이 바로 저 마탑이다. 대부분의 왕국과는 달리, 아롯에서 국왕은 통치권이 없다시피 하다. 아롯의 통치는 의장과 의회가 맡는다.


“허어...”


발달 된 도시가 아주 잘 보인다. 


펜타곤의 워프게이트는 하늘에 떠있다. 부유역(浮游驛). 많은 왕국 중에서도 아롯만이 유일하게 워프게이트를 하늘에 둔다. 온갖 마법으로 하늘에 띄워놓은 부유역은 마도왕국이라 일컬어지는 아롯의 자부심이다.


‘전생에는 이런 것이 없었는데.’


이만한 땅덩이를 공중에 띄워놓고, 워프게이트로 사용하기 위해 좌표를 고정시키고... 자기들의 마법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과시함과 더불어 편의성과 상품성도 갖추고 있다. 


저 널따란 수도를 한 눈에 내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펜타곤의 부유역에 오르고 싶어 한다. 


“멋지지 않습니까?”


촐싹거리는 목소리.


“이 풍경이야말로 아롯의 문화재라 할 수 있죠. 펜타곤에는 무려 열다섯 개의 부유역이 있는데, 그 모든 부유역은 현명한 세냐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우와.”


“지금 유진님이 계신 동문 역에서 왕궁까지 가려면 마차로도 한나절은 가야 합니다. 하지만 부유역에서 다른 부유역으로 워프하는 것만으로 이동거리를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죠...”


그건 눈깔만 제대로 달려 있으면, 아니, 생각이란 걸 할 줄 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각 부유역에 배치되어 있는 공중마차! 그걸 타면 워프멀미를 가진 분도 제 집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히 펜타곤의 정경을 감상하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답니다.”


“...저것도 그 계집... 아니, 세냐님이 만든 건가요?”


“물론이죠! 아,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수백 년 전의 마법 기술이지만 꾸준한 보완과 보수를 거쳐, 연간 사고율은 굉장히 적으니까요.”


제로는 아니란 말이군.


“...음...”


곁에서 촐싹거리며 설명을 늘어놓는 남자는 이곳 동문 부유역의 가이드다. 관광객이 많은 만큼 각 부유역에는 많은 가이드가 준비되어 있다.


그들 대부분은 마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가이드 일을 하는 젊고 재능 없는 마법사들이다. 


‘괜히 이 옷을 입고 왔어.’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가슴팍을 내려 보았다. 왼쪽 가슴에 사자의 문양이 새겨진 라이언하트의 제복. 별 생각 없이 입은 제복 덕분에 워프게이트를 지난 순간부터 가이드가 붙어 버렸다.


“펜타곤의 관광지로는...”


“잠시만.”


유진은 가이드의 말을 끊고서 안내책자를 펼쳤다. 잠시 동안 안내책자에 정리 된 관광명소를 확인한 후,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용은 오늘 하루만 할 거에요.”


“지금 계약하시면 일주일 가이드를 사흘치 가격으로 할인해 드립니다.”


“됐어요. 일단 계약서부터 쓰죠.”


일단 가보고 싶은 곳은 한 군데 뿐이다. 그곳을 본 뒤에는 곧장 적색 마탑으로 가서 로베리안을 찾아가기로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가이드가 계약서를 꺼낸다. 유진은 함께 받은 펜으로 계약서를 적은 뒤, 품에서 지갑에서 백만 셀의 수표를 꺼내 가이드에게 건네주었다.


“우효!”


“오늘 하루 고용비에 이런저런 비용 더한 거예요.”


“확실히 모시겠습니다.”


“일단... 현명한 세냐의 저택에 가보고 싶은데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가이드가 벙긋 웃었다. 


“펜타곤에 오셨다면 현명한 세냐의 저택과 마탑, 야경 세 개는 꼭 보셔야죠.”


“야경은 됐고요. 저택은 혼자 둘러보고 싶어요.”


“혼자 말씀이십니까?”


“네.” 


“알겠습니다.”


가이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유진 라이언하트.’


워프게이트로 향하며 계약서에 적힌 이름을 떠올린다. 유명한 이름이다. 라이언하트 본가에 양자로 들어간 방계.  


‘왜 아롯에 온 거지? 장남처럼 마법이라도 배우려는 건가? 아니면 그 머저리를 데리러 온 건가?’


이오드 라이언하트의 이름도 펜타곤에서 제법 유명하다. 특히 가이드 따위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는 가난하고 젊은 마법사들에게 있어, 이오드의 이름은 질시의 대상이었다.


‘...무가에서 태어났으면 무도나 배울 것이지. 왜 시발 주제 모르고 마법을 배운다고 깝치나 몰라.’ 


재능도 별로 없는 주제에, 인맥만으로 마탑에 들어간 놈. 적색마탑주의 제자는 되지 못했지만, 휘하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배우는 놈.


머저리, 등신, 개새끼. 


“저 아래에 있는 것이 현명한 세냐님의 저택입니다.”


저택은 펜타곤에서 유명한 관광지인 만큼, 그 이름을 딴 부유역이 따로 있었다. 


공중마차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가이드가 주절주절 떠들었다.


“300년 전, 마경에서 돌아 온 세냐님은 아롯에서 최연소로 마탑주에 오르셨죠. 세냐님이 맡으셨던 녹색마탑의 광장에는 그분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한 동상이 있습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이 저택은 세냐님이 마지막까지 머무셨던 곳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세냐님은 은거하겠다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저택을 떠나셨습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잠자코 듣던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 후에 세냐님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세냐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워버리셨거든요. 아롯의 많은 마법사들과 세냐님의 제자들이 행적을 추적했지만, 그 누구도 세냐님이 어디로 은거하셨는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추측이나 소문 같은 것도 없나요?”


“허황된 이야기들은 많았죠. 마왕을 죽이기 위해 마경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엘프의 고향인 사마르 대수림에 들어가셨다는 말도 있고...”


가이드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쩔 도리 없는 병을 얻으셔서, 조용한 임종을 맞이하기 위해 은거하셔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


“모두 다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죠. 분명한 것은, 세냐님은 200년 전부터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단 것입니다.”


가이드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내리 깔았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세냐님이 사라지신 날이 그분의 탄생일이라는 겁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셔서... 그 축복받은 탄생일에 은거를 결심하신 걸까요? 이건 제 사견입니다만, 저는 세냐님이 마경으로 향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요.”


“이백 년 전의 그 해는 세냐님이 마경에서 돌아오신지 백 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동료의, 우둔한 하멜의 시체를 뒤로 하고 돌아온 지 백 년... 탄생일의 전날, 세냐님은 오래 전 죽은 동료를 추억하신 겁니다...”


“...”


“하멜의 원수를 갚아주고 싶다... 그런 마음이 세냐님을 떠나게 한 겁니다. 유진님도 아시죠? 하멜은 세냐님을 짝사랑했다는군요. 심술궂은 어린남자애처럼 그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여행 내내 세냐님을 괴롭혔지만... 하멜은 죽기 직전 세냐님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씨발 개소리하지 마.”


“네?”


“아니... 어... 음...”


“아하...”


잠시 눈을 끔벅거리던 가이드가 활짝 웃었다.


“유진님은 세냐님과 하멜의 로맨스를 싫어하시나 보군요.”


“...아니 뭐...”


“저도 어렸을 때 친구와 자주 싸웠었죠. 저는 예전부터 세냐님과 하멜의 로맨스가 정사(正史)라고 주장했는데, 제 친구는 글쎄 세냐님과 위대한 베르무트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 거라고 주장하지 뭡니까?”


“...”


“뭐 그거도 꽤나 재미난 이야기이긴 합니다. 우둔한 하멜... 베르무트에게 좌절하고, 사랑마저 빼앗긴... 그러면서도 최후에는 베르무트를 위해 제 몸을 던지고, 죽어가며 사랑을 고백... 크으. 저도 비극은 꽤 좋아해요.”


백만 셀이나 주었으면 아가리를 한 대 후려도 되지 않을까? 유진은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어쨌든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겁니다. 세냐님은 하멜의 복수를 위해 홀로 아롯을 떠나 헬무드로 향하셨지만... 끝내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헬무드에서 눈을 감으신 겁니다...”


“...참 비극 좋아하시네요.”


“아롯에는 세냐님과 관련 된 소설도 많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제가 엄선해서 가져드릴게요.”


“됐어요... 그런데... 세냐님이 헬무드에 갔다는 거. 근거 없는 추측이죠?”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세냐님이 흑마법과 마족을 혐오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고, 은거하기 직전까지 흑색마탑이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셨거든요.”


아롯에 흑색마탑이 세워진 것은 이백 년. 


현명한 세냐가 은거한 다음이다.


“..,혹자는 흑색마탑의 건립을 추진하던 과격한 흑마법사들이 세냐님을 암살한 것이 아닌가 주장합니다만...”


“흑마법사 따위가 세냐님을 암살할 수 있을 리가 없죠.”


내뱉은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싸늘했다.


“광란의 마왕도 세냐님의 마법결계를 정면에서 뚫지 못했었어요. 마왕도 못 뚫은 마법을 흑마법사가 어떻게 뚫습니까?”


“잘 아시는 군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백 년 전의 흑색마탑도 암살설은 완강하게 부정했고요.”


하지만.


마음 한 귀퉁이가 검게 물든다. 


흑마법사는 세냐를 암살할 수 없다. 


하지만 마왕은? 헬무드의 두 마왕은 흑색마탑을 건립하는 것에 막대한 후원을 들이부었단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머나먼 곳에 있는 흑색마탑을 보았다. 그 높다란 탑은 다른 마탑보다 낮았으나, 호화로운 위용은 이 먼 거리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헬무드는 아직까지 흑색마탑을 통해 아롯을 후원하고 있다. 그만큼 공 들여 아롯에 수족인 흑마법사들을 심은 것이다. 마왕들의 입장에서 흑색마탑의 건립을 반대하는 세냐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죽이고 싶을 만큼.


‘...세냐.’


공중마차가 땅에 내려선다. 유진은 마차에서 내려, 세냐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너 정말 죽은 거냐?’


진득하니 감상에 젖을 수도 없었다.


저택은 관광객들이 너무 많았다.


아롯


당연한 일이었다. 현명한 세냐의 저택은 어린 마법 꿈나무들이 반드시 보고 싶어 하는 성지였고, 마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아롯에 오면 무조건 한 번은 들리는 정석 관광 코스였다.


“제발... 제발 이번 시험에 합격해 마탑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낙방만 열한 번째입니다. 제발 면접까지 만이라도 가게 해주십시오...”


반기마다 한 번 있는 마탑의 공채시험은 끔찍한 경쟁률을 자랑한다. 시험을 치루는 마법사는 다섯 개 마탑을 통틀어 수천 명이 훌쩍 넘는데, 합격하고 채용되는 마법사는 많아봐야 수십 명이다.


그 끔찍한 공채시험까지 앞으로 두 달. 세냐의 저택 앞에는 합격을 기원하는 수험생들이 득실거린다.


“쟤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진이 질렸다는 눈으로 그쪽을 보고 있자, 가이드가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쟤들은 어차피 돈 없어서 안에 들어가지도 못해요.”


“...그래요?”


“저택 입장료만 해도 수십만 셀이 듭니다. 그 돈 내고 들어가봐야 정원밖에 못 보고, 내부로 들어가려면 그 몇 배의 돈을 내야 하죠.”


“가격이 뭐 그리 비쌉니까?”


“그 가격을 내고서도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널렸으니까요. 저택의 중앙홀에 걸린 세냐님의 초상화에 대고 합격을 기도하면, 마탑 공채 시험에 무조건 합격할 수 있다는 미신이 있거든요.”


“그게 말이 됩니까?”


“말 안 되죠... 저도 몇 년 전에 열심히 돈 모아서 초상화에 기도했는데 떨어졌거든요.”


가이드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세냐님은 결혼도 하지 않으셨고, 양자도 두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이 저택의 관광료는 왕궁의 세금에 더해집니다.”


유진은 가이드와 함께 저택의 문으로 향했다. 그곳도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지만,


라이언하트의 이름은 강력했다. 


‘제복을 벗지 말라더니.’


공중마차에 타기 전. 시선이 부담스러워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하지만 가이드가 절대 안 된다며, 적어도 세냐의 저택에 가기 전까지는 이 옷을 입어야 한다며 고집했다.


덕분에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가이드가 저택의 경비병들에게 무어라 말을 전하니, 곧장 경비대장이 나와 유진을 맞이했다. 


“유진 라이언하트님. 확인했습니다.”


신분증은 피와 연동되어 위조도 불가능하다. 심지어 유진의 신분증은 본가의 양자가 되면서 뒷면에 라이언하트의 문양까지 새기게 되어 눈에 띄었다. 


‘나 때는 호패를 들고 다녔는데...’


들고 다니기는 했지만 위조도 쉬운 물건이라 신분증명용으로는 부적합하던 물건이다. 그 전란의 시대에서 제 신분을 증명하는 것은 호패 따위가 아닌 힘이었다.  


‘돈도 뭔 이상한 종이로 바뀌었고...’


셀이라는 단위는 변하지 않았지만, 삼백 년 전에는 구리와 은, 금으로 만든 동전을 들고 다녔다. 종이 화폐? 그딴 것에 무슨 가치가 있나.


‘세상 참 많이 변했어.’


가문에서만 지냈을 때에는 별로 체감이 안 되었는데. 세상으로 나오니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 현실감이 없다. 


“입장료는 어떻게 계산하시겠습니까?”


“저택 관광 풀코스로. 유진님, 현금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카드로 하시겠습니까?”


“...카... 카드로.”


유진은 더듬거리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이 지갑이라는 것도 영 어색하다. 돈을 왜 이런 얇은 가죽 주머니에서 꺼내는 거지? 전대(纏帶)는 요즘은 안 쓰나? 카드? 필요할 때 아낌없이 쓰라고 받기는 했다. 새까만 색에 라이언하트의 문양이 새겨진 카드. 


“브... 블랙카드.”


카드를 넘겨받은 가이드가 침을 꿀꺽 삼킨다. 공용은행에서도 최상위 자산가한테만 발급하는 것이 블랙카드다. 마음 같아서는 냅다 훔쳐버리고 싶은데, 카드는 훔친들 쓸 수가 없었다. 공용은행의 카드는 신분증과 마찬가지로 피와 연동되어 있다.


“허억...”


경비대장은 공손히 카드를 받았다. 계산이 끝난 후, 유진과 가이드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정문이 아닌 한적한 다른 문으로 안내되었다.


“편안한 관람되십시오.”


경비대장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해 주었다. 유진은 자신이 아는 상식과 너무 다른 현대의 상식에 괴리감을 느끼면서 지갑을 품에 넣었다.


‘써봤어야 알지.’


기돌에 있을 적에도 저택은 거의 나서지 않았다. 나가봤자 논밭뿐이었다. 본가의 양자가 된 후부터는 필요한 것은 죄다 니나가 가져다주었고, 마나와 무도를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얼마나 걸리실까요?”


“한두 시간?”


“그럼 시간 맞춰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가이드가 벙긋 웃으며 대답했다. 유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몸을 돌렸다. 처음에는 뭔 놈의 가이드까지 필요한가 싶었는데, 귀찮은 일을 대신해준다는 점에서는 편리했다.


“...그럼...”


유진은 숨을 크게 삼키며 발을 뻗었다.


“이 계집애가 뭐하고 살았는지 좀 볼까.”


세냐의 저택은 넓다.


백 년이나 살았다는 집. 베르무트는 열 명이 넘는 처를 두었고, 등신 같은 모론도 결혼하고 자식을 여럿 낳았다. 


하지만 세냐는 결혼하지 않았다. 세 명 두었던 직전제자들과도 함께 살지 않았다. 이 넓은 저택은 세냐와 시종들만 살았단다.


‘백 년이나 살았으면 결혼해서 손자까지 봐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니스는 신앙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다 쳐도. 세냐는 왜? 그렇게 오래 살 거면 베르무트나 모론처럼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것이 덜 외롭고 좋지 않은가.


‘야, 너 나중에 뭐하고 살 거야?’


언제였던가. 


아마... 서열 5위, 살육의 마왕을 죽인 후였을 거다. 폐허가 된 마왕성에서, 다들 지쳐 곯아 떨어졌을 때. 


순번대로 불침번을 섰었다. 모두가 피곤해 잠든 밤. 몸에 난 상처에 붕대를 감던 중에, 다음 순번인 세냐가 눈을 떴었다. 그리고는 대뜸 저런 질문을 했었다. 


‘뜬금없이 뭐래.’


‘그냥 궁금해서. 꽃다운 나이에 이 지랄 맞은 곳에서 개고생하고 있는데, 다 끝나면 행복 좀 누려야 할 것 아냐.’ 


‘몰라, 생각 안 해봤어.’


‘모론 저 등신은 자기가 왕이 되겠대. 웃기지 않아?’


‘미친 새끼, 지랄을 하네 아주. 왕이 뭐 되고 싶어서 되는 거냐?’


‘냅둬, 지가 하고 싶다는데... 꿈 정도는 꿔도 되잖아.’


‘너 술 먹었냐? 꿈 정도는 꿔도 되잖아... 이거 보여? 내 손 오그라든거.’


‘쓰레기자식. 기껏 사람이 진지하게 말 하는데...!’


‘그럼 넌 뭐하고 살 건데. 너도 모론처럼 왕 할래?’ 


‘미쳤어? 그런 귀찮은 걸 왜 해.’


‘할 수는 있고?’


‘당연히 할 수 있지. 마왕 전부 다 죽이고서 돌아가면, 하지 말라고 해도 왕이라 떠받들어 줄 걸? 모론 쟤도 그거 생각하고서 왕이 되겠다고 저러는 거야.’


‘그래서 왕 안 하면 뭐할 건데.’


‘나는...’


초상화.


그곳에는 하멜이 기억하는 세냐가 있었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도 한 눈에 찾아볼 수 있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연보라색 머리카락. 머리색만큼 튀는 녹색 눈동자.


‘...평범하게... 남들처럼... 결혼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살다가 할머니가 되고 싶어.’


세냐의 바람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세냐의 초상화에 손을 뻗었다. 


“만지시면 안 됩니다.”


‘이 씨발, 기껏 감상에 좀 젖으려니까.’


저택 곳곳에 배치 된 경비병이 주의를 준다. 저택의 모든 물건은 보존마법이 걸려있지만, 그렇다고 만져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세냐님은 굉장히 아름다우시죠... 물론 저 초상화는 세냐님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지만요.”


“실제로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아요.”


“으레 초상화는 실물보다 못한 법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유진은 고개를 들어 초상화를 노려보았다.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초상화가 실물보다 아름다운 것 같았다.


‘...거참.’


이렇게 초상화를 보고 있으니 더 모르겠다. 마왕도 죽이다 말고 돌아왔으면, 바란 대로 결혼하고 애 낳고 손자보고 평온하게 늙을 것이지. 왜 백 년이나 혼자 산거냐.


‘...초상화나 보려고 온 건 아니지.’


감회에 젖으려고 온 것도 아니다. 혹시 모를 세냐의 흔적을 찾아보려 온 거다. 유진이 생각하기에, 보물고에 목걸이를 가져다 둔 것은 세냐가 틀림없었다. 


‘...로베리안이 읽은 기억은 백 년 전쯤이랬지.’


그렇다면 세냐가 백 년 전까지는 살아있었다는 것 아닌가.


‘아니, 무조건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어. 전혀 다른 기억을 덧칠한 걸 수도 있고... 어쩌면... 베르무트가 가져다 둔 걸 수도 있잖아.’


생각이 꼬인다. 유진은 한숨을 푹푹 쉬며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이것만 눈에 띄지 않았어도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깜짝 선물도 아니고 대체 뭐하자는 거야. 왜 이걸 거기다 둔 건데?’


부글거리는 속을 삭이며 초상화를 떠난다. 이 넓은 저택은 볼거리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대단한 것이 지하 전체를 사용하는 서재였다.


유진은 책장을 빼곡하게 채운 마법서를 살폈다. 사본이야 이백 년 전에 따로 만들어서 보관 중이고, 강력한 보존마법도 걸려 있지만 이 책들도 손대서는 안 된다. 


‘뭔가 남아있을 법도 한데...’


이 환생이 우연일 리가 없다.


어렴풋하던 추측은 전생의 목걸이를 얻으며 확신이 되었다. 보물고의 마법에도 등록되지 않았고, 기억까지 덧칠해놓은 목걸이.


‘그 목걸이가 보물고에 처박혀 있다가, 내가 들어가니까 우연히 눈에 보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전생의 유품과도 우연히 만났다고?


‘뭔가 있어. 내 환생에 누군가가 수작을 부린 거야. 베르무트 너냐? 아니면 세냐? 아니스일 수도 있지. 모론 그 등신은 아닐 거고.’


누군가가 이렇게 환생하도록 의도한 것이라면.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환생했어도 혼은 바뀌지 않는다. 템페스트는 한 눈에 유진이 하멜임을 알아보았다. 보물고의 목걸이에도 그런 마법이 심어져 있었다면? 수백 년 동안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가, 하멜의 ‘혼’에 반응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면?


그렇게 의도한 것이 세냐라면.


‘뭔가 남겼을 거야. 뭔가...’


허점투성이의 생각이다. 왜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썼는가? 그냥 목걸이를 손에 넣은 즉시 상황을 깨닫게끔 해주면 좀 좋은가.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방법을 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게 대체 뭔데? 


“모르겠다 씨발...”


한참을 서재를 돌아다녔다. 미로처럼 얽힌 책장 사이를 누비며 빼곡히 박힌 책들의 제목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서재를 나와 윗층으로 올라가본다. 세냐의 침실과, 수많은 방들도 살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난 몰라, 모른다고.’


유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초상화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나 알아서 할 거야. 나한테 바라는 것이 있으면 뭐 제대로 알려주던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으면 뭐 어쩌라는 거야?’


이 뭔지 모를 수작에 어울리는 것도 답답하다. 정말 뭔가를 바라고,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유진은 주변을 슬쩍 보았다. 경비들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뒤,


유진은 세냐의 초상화에 엿을 날렸다. 


“엿먹은 게 꼬우면 직접 찾아오던지 해.”


애당초 환생은 내가 했잖아. 


“...살아있으면.”


유진은 긴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진즉에 해가 저물어 하늘이 어둡다. 집중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오래 기다렸어요?”


“괜찮습니다.”


한두 시간이면 나올 거라더니. 그 두 배나 되는 시간을 죽치고 서있던 가이드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관광이 즐거우셨나 봅니다.”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안이 워낙 넓기도 했고요.”


“세냐님의 초상화는 보셨죠?”


“네. 아름다우시던데요.”


“그 아리따운 외모에 마왕조차 모독하는 사상최대의 마법 실력까지... 세냐님은 가히 마법의 여신이라 할 수 있죠.”


“아니 뭐 여신까지야...”


마왕을 모독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디로 모실까요? 이곳은 유명한 관광명소인만큼 근처에 멋진 식당이 많습니다.”


유진은 슬며시 지갑을 꺼냈다. 그것을 본 가이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건 팁.”


“감사합니다!”


“식당은 됐고, 바로 적색 마탑으로 가죠. 거기서부터는 더 안내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아...”


유진의 말에 가이드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예, 알겠습니다.”


솟구치는 질시를 삼킨다. 그 머저리 같은 장남과는 달리, 저 양자는 몇 달 가이드를 해도 쥐지 못할 거금을 주었잖은가. 


‘...능력도 있고.’


그저 본가에서 태어났을 뿐인 장남과는 달리, 유진은 방계에서 태어났으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양자가 되었다. 가이드는 울적한 기분을 달래면서 앞장섰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대답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요.”


“이오드 라이언하트.”


적색마탑으로 향하는 공중마차. 유진은 슬쩍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제 형님이신데, 알고 계십니까?”


“...펜타곤의 젊은 마법사들 중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마법사가 드물 겁니다.”


가이드는 긴장한 눈으로 유진을 보며 대답해주었다. 유진은 그 표정을 살피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적색마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아... 예.”


“4년 전부터 형님이 와계시지 않습니까. 사정을 아시나 모르겠는데, 저는 본가의 적통이 아닌 양자입니다. 제가 양자로 들어갈 적에 이오드 형님은 곧장 본가를 떠나 아롯에 오셨죠.”


“그건... 예. 유명한 이야기죠.”


유명할 정도인가. 유진은 몇 년 동안 본가에서 지내느라 바깥의 소문에는 어두웠다. 


“덕분에 저는 양자가 되고서 단 한 번도 이오드 형님과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 형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을까요?”


“어어... 음...”


“당신은 그냥, 형님에 관한 소문만 알려주면 됩니다. ”


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근한 압박감에 가이드의 목젖이 꿀렁였다. 


“제게 전해지는 형님의 소문은 별 실속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리 좋은 소문이 아니란 것은 대강 들었습니다. 그러니 형님에 대해 뭐라도 알아야, 만났을 때 실수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야... 예...”


“물론 저는 당신의 말에 분노하지도 않을 거고, 트집을 잡아 벌하지도 않을 겁니다. 본가에 전하지도, 형님에게 이르지도 않을 거고요. 이 모든 것은 제 이름을 걸고 맹세드립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가이드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고 버티기에는 유진의 시선이 너무 살벌했다. 이제 17살이라고 들었는데 뭔 놈의 시선이 저리도 흉악한가. 시선만 때놓고 보면 수십 년 전장을 떠돈 용병도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것 같다. 


“...그... 저도 많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만...”


“말하세요.”


“이오드님이... 그... 밤마다 마탑을 나와 유흥을 즐기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흥?”


이오드가 몇 살이더라. 


‘나보다 2살 많았지.’


19살. 젊은 혈기에 밤을 쏘다닐 만한 나이기는 했다.


“유흥이라면 뭐. 술이나 여자? 그런 것이야 형님 나이면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아, 아뇨. 그 정도의 유흥이 아닙니다. 이건 정말 소문일 뿐입니다만...”


“소문이 나돌 정도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만 뜸 들이고 말하세요. 뭡니까?”


“...스...”


“뭐요?”


“서큐버스입니다.”


가이드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힌다.


“이런 미친.”


유진의 눈썹은 위로 치솟았다.


적색마탑


서큐버스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한 몽마(夢魔)다. 물론 유진도 서큐버스는 잘 안다. 전생에 헬무드를 떠돌 적에, 그 빌어먹을 몽마들은 심신이 지치고 피로할 때마다 꿈속을 파고들어 와 온갖 지랄을 떨곤 했었다.


“여기가 시발 헬무드도 아니고, 서큐버스가 왜 있습니까?”


“지, 진정하세요.”


발끈해서 내뱉으니 가이드가 크게 당황해 손을 들어올렸다.


“헬무드는 아니지만 흑색 마탑은 있잖습니까? 그곳에는 인간 흑마법사 말고 마족들도 꽤 있습니다.”


“그래서, 이오드 그 새끼... 아니, 형님이 흑색 마탑의 서큐버스와 놀아났다고요?”


제 입으로 내뱉기는 했지만 어이가 없었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란 놈이, 본가의 장남이란 놈이... 마족, 그것도 서큐버스와 놀아났다고?


“...그... 엄밀히 말하자면 놀아났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유흥으로서...”


“그게 뭔 차이인데요.”


“어느 도시에나 있겠지만, 아롯에도 적법하지 않은 무리와 그런 장사가 횡행하는 거리가 있습니다. 굳이 말하면 필요악으로 방치되는 곳인데...”


“그래서요.”


“그 거리는 암시장으로 유명한데, 서큐버스를 접대부로 두는 불순한 가게가 몇 곳 있습니다. 듣기론 이오드님이 주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하신다고...”


“미친 새끼.”


유진의 말이 험악해졌다. 흑색마탑을 운운하길래, 그곳 소속의 서큐버스 마법사와 교제라도 하나 싶었다만. 가이드의 이야기는 유진으로 하여금 이오드를 경멸하게 만들었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란 놈이 서큐버스의 치마폭에 휘감겨 정기를 갖다 바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경멸할 일인데, 그냥 서큐버스도 아니고 접대부란다. 


그 접대부란 말도 굉장히 정중하게 표현한 것이지, 그런 가게에 나와있는 서큐버스는 저열하기 짝이 없는 하급 서큐버스일 것이 분명했다. 인간으로 치면 싸구려 창녀와 다름없단 말이다.


“미친 또라이 새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뭐하는 짓이야?”


그 험악한 말에 가이드는 다시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하는 말은 꼭 어른이 망나니 꼬마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확실한 겁니까?”


“아니 그건 잘... 어디까지나 소문이라...”


“그 거리가 어딥니까? 알아요?”


“볼레로 거리라고 불립니다. 매일 열리는 곳은 아니고, 매달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타락한 거리로 바뀌죠.”


“알았어요.”


유진은 이를 빠득 갈며 대답했다. 아롯에 와서 이오드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무시하면서, 제 할 일에만 집중하려 했었다. 


그런데 저 이야기를 들으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다. 유진의 성씨가 라이언하트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란 놈이 싸구려 마족에게 정기를 바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후레자식 같으니.’


유진은 마왕은 물론이고 마족도 싫어한다. 그 중 제일 싫어하는 마족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일단 서큐버스는 최상위로 둘 것이다. 마경에서 처음 서큐버스의 공격을 받았을 때 개같은 망신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서큐버스랑 인큐버스, 여하튼 몽마란 놈들은 죄다 멸절시켜야 돼.’


민망한 기억을 굳이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유진은 전생에서 참 많은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를 찢어 죽였었다. 


“...유진님. 이 이야기는 꼭 비밀로...”


“아 걱정마요. 내 이름 걸고 맹세했잖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거고, 그 씨발 형님한테도 일단은 말 안 할 겁니다.”


적색마탑이 가까워진다. 유진은 뿌득뿌득 이를 갈고 있다가, 가이드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대충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대뜸 멱살 쥐고서 싸대기를 갈기고 싶은데.’


일단은 소문 뿐이잖은가. 그것도 신빙성 없는 소문. 괜한 소문으로 이오드의 싸대기를 갈겼다가는 이쪽이 곤란해 질 것이다. 명확한 증거라도 목격하지 않는 이상 싸대기는 참아야 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 볼레로 거리라고 했죠?”


“예...”


“알았어요.”


공중마차가 적색 마탑 앞에서 내려선다. 유진은 먼저 마차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 따라 내릴 필요없어요. 어차피 여기서 헤어질 건데. 잘 가시고, 다음에 뭐 우연히 거리에서 보기라도 하면 인사나 나누자고요.”


“제, 제 명함이라도 드릴까요? 이름은...”


“됐어요, 됐어. 나 기억력 좋아요. 다음에 보면 무조건 알아볼 테니까, 그때도 인사하고 각자 갈 길 가면 되는 거지.”


유진은 손사래를 치며 마차에서 내렸다. 가이드의 꿍꿍이는 뻔했다. 어떻게든 인연을 터두고 싶은 것이겠지. 잘만 하면 마탑주인 로베리안에게 이름이 전해질 수도 있으니까.


유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님?”


높다란 붉은 탑. 그 앞에는 왠 여인이 나와있었다. 자홍색의 로브에 커다란 모자까지 쓴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300년 전에도 저렇게 마법사처럼 입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는데...’


유행은 돌고 돈다는데. 저것도 나름 복고풍의 패션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유진은 뾰족한 모자를 힐긋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적색마탑의 헤라라고 합니다.”


헤라는 모자를 벗고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탑주님은 위에 계십니다. 본래는 직접 마중을 나오려 하셨는데, 작은 문제가 생기셔서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문제요?”


되묻는 말에 헤라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곧장 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며 탑을 힐긋힐긋 돌아보았다. 


ㅡ찌이잉! 


탑에서 밀려난 마나가 대기의 마나를 뒤흔든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헤라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유진도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탑을 바라보았다.


“...어... 무슨 사고라도 났나 보죠?”


“...흔한 일입니다.”


헤라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다시 모자를 썼다.


“적색 마탑은... 그게... 소환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이 많아서요. 여러 마법 중에서도 소환마법은... 으음...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대뜸 목소리가 끼어든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게 아니라, 일부러 실패하는 거야. 소환진의 마나를 폭주시켜 전혀 다른 소환물을 불러들이기 위해!”


신경질적인 목소리의 주인은 로베리안이었다. 그는 높다란 탑의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ㅡ화악! 창문을 연 즉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이건 과해. 너희는 정말 엄청난 천재들이구나. 대체, 대체 어떻게 해야 라바샤크의 소환진에서 섀도비스트를 소환할 수 있는 거지?”


창밖으로 나온 로베리안이 손을 휘젓는다. 밤하늘의 어둠에 녹아들던 섀도비스트가 로베리안이 뿜어낸 마나에 붙잡힌다. 


“너희의 그 창의적인 실험정신이 놀랍기 그지없구나. 감당하지도 못할 마물을 소환하면 어쩌자는 거지? 자칫 실수해서 섀도비스트를 놓치기라도 했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 같으냐? 모르긴 몰라도 백 명은 넘는 사람들이 죽었을 거다!”


“죄송... 죄송합니다...”


뒤따라 나온 젊은 마법사들이 연신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로베리안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미친놈들이군.’


유진도 어이가 없었다. 섀도비스트는 헬무드의 밤을 떠도는 마물이다. 대부분의 마물이 그러하듯, 섀도비스트는 제대로 된 지성을 갖고 있지 않다. 파괴적인 본능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만약 저 섀도비스트가 밤하늘에 풀려났다면, 놈은 곧장 수도의 사람들을 사냥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마물을 불러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그냥...”


“너희가 오늘부터 적색마탑주다.”


“예?”


“나도 라바샤크의 소환진에서 섀도비스트는 못 불러낸다. 절대, 절대 못 불러내. 그런데 너희는 나도 못하는 소환을 해냈다는 것 아니냐? 그러니 너희가 나보다 잘난 마법사니, 적색마탑주는 네가 해야지.”


“타, 탑주님...!”


“내 눈이 단춧구멍인 줄 아느냐? 네 소환진은 골자부터가 틀려먹었어! 변칙을 줄 거면 좀 제대로 주던가. 기본골자까지 뒤틀어놓으니 마물이 튀어나오지!”


로베리안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장 짐 싸서 나가!”


마법사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로베리안은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들을 노려보던 시선을 때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오.”


로베리안의 표정이 휙 바뀌었다. 4년 전의 혈계식, 싱글벙글 웃으면서 ‘어린이 여러분’을 운운하던 친절한 아저씨의 얼굴이다. 


“오랜만입니다, 유진님.”


그때와 웃는 얼굴은 똑같았지만, 말투까지 똑같지는 않았다. 유진의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4년 전의 유진은 흔하디흔한 방계의 아이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라이언하트 본가의 양자다. 


“많이 자라셨군요. 하하, 솔직히 못 알아 볼 뻔 했습니다.”


“로베리안님은 그대로시네요.”


“네, 뭐. 저는 마법으로 젊음을 붙들고 있으니까요. 나이다운 모습보다는 젊은 모습이 좋지 않습니까.”


로베리안은 땅에 내려오며 활짝 웃었다. 유진이 알기로 로베리안의 나이는 백 살이 가까웠다. 하지만 외모는 많아 봐야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인다. 


‘4년 전 보았을 때와 다르긴 하네.’


그때도 어렴풋이 느끼긴 했다. 마나를 수련하지 않았을 뿐,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니까 확실히 알겠다.


로베리안은 강하다.


그건 인정할 만 했다. 아롯에 다섯 명 뿐인 마탑주 중에서 한 명이라면 당연히 저만한 강함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강하다는 것 외에 다른 인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은 전생에 마주했던 강자들, 그 중에서도 강함 외에 독특한 인상을 전해주었던 이들을 떠올려보았다.


‘세냐보다 훨씬 못하군.’ 


로베리안도 유진을 살펴보았다. 


‘...터무니없군.’


로베리안은 유진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에 경악했다. 


유진을 양자로 들이라고 제안한 것은 로베리안이었다. 그는 혈계식에서부터 유진의 자질을 눈여겨보았고, 아롯에 돌아온 후로도 길레이드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유진에 대해 들었었다. 


영맥에 들어가고서 십 분도 되지 않아 마나를 느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비정상적인 마나감응력. 뿐만 아니라 느낀 마나를 곧장 다스릴 괴물같은 마나친화력까지. 


유진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적마다.


로베리안은 복잡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오드 때문이었다. 


“...길레이드님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마법에 관심이 있으시다죠?”


“네.”


“마법은 아주 매력적인 학문이죠. 그만큼 익히기 어렵지만... 아마 유진님이라면 잘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로베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탑의 1층 정문. 그 닫힌 문너머의 기척을 느낀다. 문을 열지도 않고 쭈뼛거리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로베리안은 쯧 혀를 차며 정문을 힐긋 보았다.


ㅡ화악! 


닫혀있던 문이 열린다.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뒤따른다. 갑작스레 열린 문에 놀라서 뒷걸음질 친 것은 빼빼 마른 사내였다.


이오드 라이언하트.


곧장 알아보지는 못했다. 아이들에게 있어 4년은 굉장히 긴 시간이다.  


이오드는 키가 훌쩍 자랐다. 하지만 체격이 키에 알맞게 커지지는 않았다. 유진은 근육이 적은 이오드의 팔다리를 보았다. 총기 없이 칙칙한 눈동자도 보았다. 문양과 함께 라이언하트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잿빛 머리카락은... 시든 풀잎처럼 푸석푸석하다.


‘저 씨발 새끼.’


이오드를 본 유진의 눈에 불빛이 담긴다.


‘서큐버스한테 정기 털렸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는 몰골을 하고 있잖아.’


“와서 동생에게 인사라도 하지 그러십니까?”


“...으흠.”


이오드는 헛기침을 하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반갑습니다, 형님.”


유진은 이오드를 노려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 그래.”


이오드는 유진의 눈을 피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로베리안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뭐하고 계신 겁니까. 더 볼 일이 없다면 올라가서 책이라도 읽으십시오.”


로베리안은 이오드에게서 시선을 때며 내뱉었다. 라이언하트 본가의 적자가 아니었다면. 오랜 벗인 길레이드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마탑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로베리안은 벌써 몇 년 동안 이오드를 내치고 싶다는 충동과 내적갈등을 빚고 있었다. 


“예...”


이오드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물러섰다. 로베리안은 그 비루한 뒷모습을 보지 않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이거 참. 오자마자 좋지 않은 모습들만 보여드렸군요.”


“괜찮습니다.”


“아까의 소란은... 뭐... 헤라가 말한 것처럼, 적색마탑에서는 제법 흔한 일입니다. 오늘처럼 과격한 소란은 드물지만요.”


로베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헤라를 힐긋 보았다. 


“길레이드님께 듣기를, 제게 직접 마법을 배우는 것은 원하지 않으셨다는데...”


“탑주님께 괜히 누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유진님이 제 기대에 부응만 해주신 다면요.”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4년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눈앞의 소년은 나이에 맞지 않게 사려가 깊다. 


‘사려라기보다는 계산적이라 해야 할까...’


쉬이 판단할 일은 아니다. 로베리안은 유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도 않았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가. 능력도 없는데 뻔뻔한 것보다는 사려가 깊은 편이 좋고, 멍청한데 욕심 많은 것보다는 계산적인 것이 좋다.


“그 기대에 무조건 부응하겠다는 자신이 없거든요.”


유진은 한 발 물러서며 대답했다. 


“검을 휘두르는 것, 창을 찌르는 것, 도끼를 찍는 것. 저는 그런 것은 굉장히 자신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제 재능을 확신하고 있었죠. 하지만 마법은, 제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학문이라... 감히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도 마음에 든다. 의욕도 부족하고 노력도 부족한 이오드보다 훨씬 좋다. 


“또한, 제가 로베리안님에게 직접 마법을 배우게 된다면 수많은 이들이 라이언하트에 불만어린 시선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저 스스로 마법이란 학문을 익혀보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죠.”


로베리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님이 바라지 않는 한, 저는 유진님에게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마법이란 학문은 초보자가 혼자 익히기 어려우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청해주십시오.”


“예.”


“숙소는 구하셨습니까?”


“아뇨, 아직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탑에서 묵으시죠. 본가의 저택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법 살만한 곳입니다.”


“지금 바로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것은 없죠.”


흔쾌한 대답에 유진도 활짝 웃었다. 마탑에서 숙식하는 것은 바라는 바였다. 그것을 노리고 숙소도 따로 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도서관에 먼저 가 봐도 되겠습니까?”


적색마탑


“오늘도야?”


“부잣집 도련님이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난들 알아? 왜 이 먼 아롯까지 와서 저러는 건지... 듣자니 본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며.”


“관심 받으려고 하는 것 아냐?”


“라이언하트의 도련님이라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들 관심을 주잖아. 뭐하러 저런 쇼까지 하겠어?”


“그럴 수도 있지. 적통도 아니고 방계잖아.”


도서관의 젊은 마법사들은 유진이 싫었다. 고생스런 수험생활을 거쳐 적색마탑에 들어 온 자신들과는 달리, 유진은 라이언하트라는 이름만으로 마탑에 들어왔다. 


그 불만을 대놓고 내색할 수는 없었다. 유진을 정면에서 비난한다는 것은 마탑주인 로베리안을 비난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래도 이오드 그 병신보다는 낫지 않나?”


“비교할 걸 비교해. 훨씬 낫지. 적어도 저 꼬마 도련님은 열심이라도 하잖아.”


싫은 것은 싫은 것이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마법사들도 많았다. 마법사들은 담배를 뻑뻑 피며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창가와 맞붙은 자리는 한 달 동안 유진만 사용하는, 전용석과 다름없는 자리였다. 물론 진짜 전용석인 것은 아니지만, 유진이 저 자리에 앉은 후부터 그 누구도 저곳에 앉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유진의 성씨인 ‘라이언하트’에 관심을 가졌다. 17살의 어린 꼬마를 잘 구슬려서 라이언하트와 인맥을 만들고 싶어했다.


물론 유진은 그런 놈들을 질색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초보자를 위한 마법 입문서! 이야, 저도 어렸을 때 그 책으로 마법에 입문했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마법에 대해 좀 가르쳐드릴까요?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으니 지루하지 않습니까? 


도련님.


날씨도 참 좋은데 같이 나가시죠. 제가 아주 괜찮은 식당을 알고 있는데...


“됐어요.”


그런 놈들이 다가 올 때마다 유진은 똑같이 대답해 주었다. 한 번도 바뀌지 않고 똑같은 대답을 해주니, 언젠가부터 마법사들은 유진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아무도 근처에 앉지 않아 주변은 휑하다. 넓은 책상 위에는 유진이 가져다 놓은 책들이 몇 개나 되는 탑을 이룬다. 이 공간에서 존재하는 소리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뿐이다. 바로 몇 층 아래가 흡연구역이기는 하지만, 층마다 가르는 마법 덕에 담배 연기는 올라오지 않는다. 덕분에 유진은 쾌적한 공기를 마시며 독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적색마탑에 온지 한 달.


유진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서관에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도서관에 와서, 늦은 밤에 방으로 돌아갔다. 


무조건 마법에만 몰두하는 것도 아니었다. 도서관으로 출발하기 몇 시간 전부터 일어나 마나를 수련하고, 잠들기 전에는 땀이 뻘뻘 쏟아질 만큼 몸을 단련했다.  


그만큼 수면시간은 줄었지만, 이 잘난 몸뚱이는 고작 몇 시간 잔 것만으로도 피로를 말끔히 털어낸다. 거기에 마나까지 더해졌으니, 며칠 잠을 걸러도 대단한 피로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흠.”


슬슬 해가 저문다. 


유진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노을빛을 힐긋 보았다. 유진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쌓아놓은 책을 품에 안고, 본래 꽂혀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헤매지는 않았다. 유진은 책의 위치를 모두 기억했다. 


위치뿐만 아니라, 읽은 책의 내용들도. 조금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 쉽사리 떠올린다. 마법에 무지하던 오성은 책을 읽어 이치가 더해질수록 마법이란 학문을 이해하게 되었다.


‘머리까지 타고났군.’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한 달 만에 적색마탑의 도서관에 비치된 입문용 마법서를 모조리 독파했다. 처음에는 책장을 넘기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치가 더해지니 나중 가서는 대강 눈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이론일 뿐이지만.’


한 달 동안 책만 읽었다. 지식만 채울 뿐, 마법에 제대로 입문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있었다. 마법이라 뭉뚱그려 말하지만, 마법은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도서관에서 읽는 책이 많아질수록, 어떤 방법이 이 몸에 알맞을까 하는 고민만 늘어났다.


그래서 무작정 책만 읽었다.


‘이제는 더 읽을 것도 없어.’


당연한 말이지만, 마탑에 소속 된 마법사라는 것은 세상에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말이다. 그런 마탑에 비치된 입문마법서는, 마탑 마법사들이 익히기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참고하고 연구하기 위해 준비된 마법서들이다.


즉, 공신성을 인정받은 훌륭한 마법서들이란 말이다. 세상에 입문마법서는 셀 수 없이 많겠지만, 마탑에 비치된 입문마법서를 모두 다 읽었다면 다른 입문마법서를 굳이 더 읽을 필요는 없다. 


‘이제 해볼까.’


“오늘 할 거예요.”


유진은 도서관의 창구로 다가가며 말했다. 창구에는 앉은 사서가 고개를 들며 유진을 본다.


“드디어군요.”


헤라. 마탑에 온 첫날 만난 마법사. 마탑의 마법사들은 각자 원하는 연구에 몰두하는데, 헤라는 얼마 전 연구를 끝내고 사서를 맡으며 여유롭게 지내고 있었다.


로베리안은 마법에 의문이 있으면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라 말했지만, 별 것도 아닌 의문들을 일일이 묻는 것은 귀찮고 부담스런 일이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헤라도 그걸 눈치 챈 것인지, 먼저 유진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유진은 마탑에서 지낸 한 달 동안 헤라의 도움을 몇 번 받았고, 그녀와 제법 친해질 수 있었다. 


“어디서 하실 건가요?”


“지하의 연구동에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다른 사서가 나올 거예요.”


헤라가 책상 주변을 정리하며 말했다. 유진은 사서가 올 때까지 머릿속을 떠도는 마법의 술식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마탑 밖에 집을 둔 마법사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젊은 마법사들은 집 없이 마탑에서 숙식하고 있다. 


유진도 그랬다. 돈이야 많지만, 굳이 집을 사는 것이나 빌리는 것보다는 그냥 마탑에서 사는 것이 압도적으로 편했다. 소환마법을 장기로 내세우는 곳이라서인지, 마탑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역마들이 잡일을 도맡고 있다. 


방은... 본가의 별채보다는 훨씬 작다. 그래도 혼자 살기에는 부족함 없이 넓은 방이었고, 마음에 들었다. 굳이 식당에 갈 필요 없이, 미리 말만 해두면 사역마가 원하는 요리를 방까지 가져다준다는 것도 좋다.  


굳이 마음에 안 드는 점을 꼽으라면 연무장이 없는 것. 그래도 연구동이 연무장을 대체하니 상관없기는 하다. 층마다 딸린 연구동은 고위마법사들의 전용이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까지 내려가야 된다는 것이 귀찮을 뿐이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오늘도 헤라는 커다란 모자를 썼다. 300년 새에 복고가 돌아온 것인가 했는데, 그냥 헤라의 취향이 유별난 것이었다. 이 마탑에서 저렇게 마법사다운 복장을 고집하는 것은 헤라 뿐이다. 


“오늘도 형님은 안 오셨네요.”


“뭐... 언제나 그렇죠.”


헤라는 커다란 모자를 눌러쓰며 쓴웃음을 지었다. 유진이 오고서 첫 일주일은 이오드도 도서관에 나왔다. 딱 일주일 뿐이었다. 그 후로 유진은 이오드를 도서관에서 보기는커녕, 복도에서 마주친 적도 드물었다.


듣자하니 몇 년 동안 그랬단다. 


아무리 로베리안이 길레이드와 친구 사이라지만, 실력이 떨어지는 이오드를 제자로 들일 수는 없었다. 그건 형평성은 물론이고 마탑주의 체면을 먹칠하는 일이다.  


그래서 로베리안은 마탑의 한가한 고위 마법사가 이오드의 스승이 되게끔 주선해 주었다. 마탑에서 생활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실력 좋은 스승과도 연결해 주었으니, 길레이드와의 의리는 차고 넘칠 만큼 지켜준 것이다. 


문제는 이오드였다. 놈은 마탑에 온 뒤 반 년 정도는 제법 열심히 지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도서관이나 연구동에도 잘 나오지 않고 방이나 마탑 밖을 돌아다녔단다.


‘한심한 새끼.’


그 이유는 안다. 3년 전, 이오드는 로베리안의 권유로 마탑의 공채시험에 응시했다.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론에서는 제법 괜찮은 점수를 얻었으나, 실기 쪽은 봐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점수를 얻었다. 덕분에 로베리안은 물론이고, 이오드를 가르친 마법사도 처지가 민망하고 난감하게 되었다. 


‘지가 못났으면 더 열심히 해야지. 몇 년 째 집안 돈을 축내며 처놀아? 거기에 서큐버스의 정기(精氣) 급식소가 되어서 말이야.’


그 현장을 목도했다면 본가의 적통이고 형님이고 뭐고 흠씬 두들겨 팼을 텐데. 이오드는 유진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저번 보름달 밤에는 얌전히 마탑에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 전, 마탑의 복도에서 이오드와 마주쳤었다.  


푸석한 피부와 머릿결에 생기가 돌아온 모습이었지만, 하도 물어뜯은 손톱이 바짝 달라붙고, 눈빛이 탁했다. 중독. 아마 다음 보름달이면 참지 않고 서큐버스에게 갈 것이 뻔했다. 


“입문은 역시 서클로 하실 거죠?”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헤라는 유진을 대신 해 엘리베이터를 움직일 마나를 주입하며 입을 열었다.


“네.”


현명한 세냐가 아롯에서 추앙받는 이유는, 그녀가 마법의 단계를 체계적으로 정립했기 때문이다. 


300년 전만 하더라도 마법의 단계는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강력하고 놀라운 마법들은 당연히 많은 마나를 요구한다. 그러니 뛰어난 마법사는 막대한 마나를 자유로이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를 바탕으로 발현시킬 마법은 어렵고 복잡해야 한다. 


즉, 뛰어난 마법사는 많은 마나를 다스리며 많은 마법을 펼칠 줄 알아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마법사라 불리려면 당연히 많은 마법을 펼칠 줄 알아야 하며, 다른 마법사들이 따라하지 못할 복잡한 마법에도 능해야 한다. 


세냐는 300년 전에 마법의 단계를 확실히 나누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세냐의 독자적인 법칙이었지만, 그녀가 녹색 마탑주가 된 후부터 아롯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그녀의 마법 법칙을 모방했다. 


서클.


체내의 마나로 고리를 엮어내고, 그를 순환시키면서 마법을 발현시킬 마나를 끌어낸다. 다스릴 수 있는 마나가 늘어나는 만큼 고리는 두껍고 강해진다. 


하나의 서클이 다스리는 마나의 최대치를 돌파할 때, 서클이 늘어난다. 그렇게 서클이 겹쳐진다. 서클이 늘어날 때마다 다스리는 마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간단한 마법일 지라도 서클의 개수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300년이 흐른 지금,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서클로 마법에 입문하게 되었다. 서클로 입문하지 않는 것은 마법체계가 판이한 정령마법이나 흑마법 정도다.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하죠. 서클 외에 다른 마법식도 있기는 하지만, 서클이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마법식이란 것은 300년 동안 증명되었어요.”


헤라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냐의 문하를 자처하는 것은 로베리안 뿐만이 아니다. 서클을 기본 마법식으로 삼는 모든 마법사들이 세냐의 문하임을 자처한다. 


특히 그 자부심이 강한 것이 적색마탑과 녹색마탑이다.


“...조금 변형을 줘볼 생각이에요.”


엘리베이터가 지하 연구동에 도착했다. 유진은 먼저 문 밖으로 나가며 입을 열었다.


“잘 될 지는 모르겠지만요.”


“변형을 주겠다고요?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아요.”


헤라는 걱정어린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뒤를 따랐다.


“서클의 변형은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한 번은 시도하는 연구주제이긴 해요. 하지만 유진님은 아직 마법에 입문하지도 않으셨으니... 일단은 정통적인 방법으로 입문부터 하고,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뒤에 변형을 연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어린아이가 건방지다. 그런 생각은 없었다. 헤라는 순수하게 유진을 걱정했다. 마법식은 난해한 만큼 변형을 만들기 까다롭다. 자칫하다가는 마나가 폭주해서 마법식이 무너질 지도 모른다. 


죽거나, 평생 마나를 다룰 수 없는 폐인이 되거나. 그만큼은 아니어도 최소 며칠을 앓게 될 지도 모른다. 


“뭐 처음부터 뜯어 고쳐서 다르게 하는 것은 아니고요. 별로 위험하지도 않을 거예요.”


“괜찮다면 어떻게 하실 건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을 응용해 보려고요.”


유진은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 말에 헤라가 잠시 눈을 깜박거린다.


‘...나이는 어쩔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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