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 말고 가서 자라.”
“이익…… 본녀가 친히 널 걱정해주는 것인데……!”
“네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잖아.”
“보, 본녀가 왜 무서워한다는 거냐? 본녀가 흑룡공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다. 구, 굳이 무서운 것을 꼽자면…… 그…… 흑룡공이 널 한입에 잡아먹는 것이 무섭구나.”
악몽에 대한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산 채로 무언가에게 삼켜지는 악몽. 라이미르아는 떨리는 몸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음…… 만약…… 만약에 말이니라. 흑룡공이 널 꿀꺽 삼키려 한다면, 본녀가 용기를 내서…… 음…… 흑룡공에게 널 삼키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겠노라.”
“이상한 말 하네 또.”
“계속 들어라……! 그러니까, 음, 흑룡공을 죽이려 드는 네가 죽지 않게끔, 이 용공녀가 직접 간청하겠단 말이니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너를 본녀의 시종으로나마 목숨을 부지하게끔 해줄 것이니라.”
평소라면 라이미르아의 헛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고 홍옥을 한 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과,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만약에 말이니라. 보, 본녀가…… 무언가에게 삼켜지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널 그 무언가의 아가리에서 끄집어 내주마.”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로서는 그 무언가가 대체 무언지를 모르겠지만.”
“보…… 본녀도 그런 것은 모른다.”
“네가 와작와작 씹혀서 죽으면 어떡하고?”
“끔찍한 말은 하지 말거라!”
라이미르아가 빽 고함을 질렀다.
“어쨌든, 이건 너와 본녀의 약속이니라. 알겠느냐?”
“그래, 그래.”
별것 아닌 대답이지만 라이미르아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라이미르아가 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자, 유진의 망토 틈 사이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메르와 눈이 마주쳤다.
“흠. 저렇게 부르니 거절할 수가 없느니라.”
라이미르아는 총총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망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악!”
들어간 즉시 망토 사이에서 라이미르아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 건방진 애새끼. 네가 뭔데 유진 님보고 가지 말라는 헛바람을 들이미나요?”
“악! 아프다! 아프단 말이니라!”
메르가 가하는 응징이 망토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라이자키아
세계수가 있는 엘프의 영지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근처까지 온 것만으로도 ‘문’은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아예 세계수도 보고 세냐 님도 한번 만나뵙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멜키스는 세계수와 엘프의 영지를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것에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유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만날 만한 상태도 아니거니와, 세냐 님도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가슴에 뚫린 구멍에 대해서 설명할 말도 난감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괜히 세냐를 봤다가 저번처럼 눈물이 멋대로 흘러 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환생한 몸뚱이는 얼굴 잘생기고 몸 건강하고 다 좋은데, 가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줄줄 흐르는 기괴한 장애가 있었다.
[그건 장애가 아니라, 유진 님이 원래 눈물이 많은 것이 아닐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내가 눈물이 많다고? 나는 전생에도 울어본 적이 손에 꼽히는 사람이야.’
[정말로 손에 꼽히는 것이 맞나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손가락에 발가락까지는 더해야 하지 않을까요.]
‘네가 뭘 알아?’
[이상하네요, 저번에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저는 유진 님에 대해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죠. 유진 님이 겉으로는 사납고 재수 없게 구시지만, 사실은 의외로 마음이 참 여리고 착하시다는 점을 알아요.]
“닥쳐.”
자신도 모르게 내뱉어 버린 말. 여기까지 왔으니 세계수는 한번 눈으로 봐두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려던 멜키스가 입술을 헤 벌리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 유진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 한참 누나인데, 닥치라는 말은 너무하지 않니?”
“멜키스 님한테 한 말 아닙니다.”
유진은 그렇게 대꾸했지만 멜키스는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진에게 바짝 몸을 들이밀었다.
“정말 그래? 동생, 정말로 이 누나한테 닥치라는 말을 한 적 없어? 상상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상상이야 많이 했죠. 그리고 지금 그 상상이 막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하네요.”
“그렇지! 사실상 동생은 나한테 닥치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으니, 이 누나가 우울해해도 되는 거지? 그리고 이 누나의 우울함을 풀기 위해 세계수를 한번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
“자꾸 헛소리하지 마세요. 계속 그러시면 다음에 안 데려올 겁니다.”
유진이 눈을 흘기며 말하자, 멜키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는 유진의 어깨를 잡더니 제자리에서 폴짝거리며 뛰었다.
“동생! 그 말은, 다음에 나를 무조건 세계수에 데려와 준다는 말이지?!”
“아 예…… 뭐, 그 정도야……. 멜키스 님이 이번에 절 도와주신 것도 있고…….”
“그치! 그렇지?! 그게 당연한 거지. 3명의 정령왕과 계약한 시대의 총아, 이 멜키스 엘하이어 님의 조력을 무상으로 즐길 수는 없는 거지. 책임 없는 쾌락이 말이 되니?”
“근데 멜키스 님도 따지고 보면 저 덕분에 이프리트와 계약한 것 아닙니까. 화정석도 내가 줬고, 여기도 나 아니었으면 오지도 않았을 텐데.”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해준 게 있고…… 으응…… 너 잘되라고 마나도 엄청 썼는데…….”
“예, 예. 잘 알겠고, 다음에 데려와 줄 테니 주책 좀 그만 떠세요.”
“얘는, 내가 무슨 주책을 부렸다구.”
멜키스는 히히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유진은 혀를 쯧쯧 차며 멜키스를 흘겨보았다.
사실 이 먼 사마르까지 멜키스를 위해 다시 오는 것도 번잡한 일이니, 이번 일이 끝난 뒤에 세계수의 나뭇잎이라도 하나 줄 생각이긴 했다.
‘그것만 있으면 엘프의 영지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
당장 품 안에서 세계수의 나뭇잎이 진동하고 있다. 엘프의 영지에 가까이 왔다는 뜻이었다.
……품 안에서 떨리는 것은 세계수의 나뭇잎뿐만은 아니었다. 라이미르아. 지금 그녀는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망토 안에서 메르의 품에 안겨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유진 님.”
마지막 조정이 끝났다. 로베리안은 피로감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는 양손으로 쥐고 있던 아카샤를 유진에게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했습니다.”
며칠에 걸쳐서 로베리안과 멜키스의 마나를 아카샤에 깃들게 했다. 단순히 들이부은 것도 아니고, 유진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정제까지 해주었다. 유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아카샤를 건네받았다.
손에 쥐자마자 알 수 있었다. 무겁다고 느껴질 만큼 거대하고 강력한 마나가 아카샤에 깃들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롯의 마탑주, 8서클에 오른 대마법사 2명이, 가진 마나가 고갈되기 직전까지 마나를 부어댄 것이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든 유진에게 크리스티나가 다가왔다. 며칠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은 탓인지,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조금 야위어 있었다.
“괜찮아?”
크리스티나의 걸음이 힘없이 비틀거렸다. 유진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크리스티나를 부축해 주었다.
‘저게 무슨 성녀야? 여우가 따로 없네…….’
멜키스는 그 모습을 힐긋거리며 생각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것은, 크리스티나의 허리와 허벅지에 매달린 묵직한 플레일이 참으로 흉악했기 때문이었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고, 신성력을 너무 쏟아낸 탓에 몸에 힘도 잘 들어가지 않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크리스티나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유진에게 성검을 전해주었다.
“저도 제가 담을 수 있는 만큼 힘을 담았습니다.”
성검은 유진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유진이 성검을 받은 뒤, 크리스티나는 조심스레 양손을 목 뒤로 넘겨 로사리오를 풀어냈다.
“그리고…… 이것에는, 저희들의 염원과 기도를 따로 담아냈습니다. ……감히 부탁드리건대, 제가 직접 유진 님의 목에 걸어드려도 될는지요.”
“응.”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크리스티나가 로사리오를 목에 걸기 쉽게끔 무릎을 낮추었다.
크리스티나는 숙인 유진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순간이나마 음습한 충동을 느꼈다. 저 풍성한 잿빛 머리카락의 감촉을 한 손 가득 느끼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
“……뭐 하니?”
“으흠.”
충동을 억제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새 육체의 주도권을 일부 빼앗은 아니스가, 멋대로 크리스티나의 손을 움직여 유진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빛의 보살핌이 함께하기를…….”
크리스티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상황에 대처했다.
아, 나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구나. 유진도 더 묻지 않고, 얌전히 눈을 감고서 크리스티나의 기도를 받아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에 갑자기 경건함과 엄숙함이 생겨났다.
크리스티나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유진의 목에 로사리오를 걸어주려 몸을 앞으로 숙였다.
[크리스티나. 솔직히 이건 제가 해야 합니다.]
‘예? 어째서 그래야만 합니까?’
[그야, 저 로사리오는 하멜이 제 생일선물이라고 직접 걸어준 것이니까요. 그러니 하멜에게 걸어주는 것도 제 손으로 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시스터. 유진 님이 시스터에게 로사리오를 걸어주었다는 것은, 시스터가 이미 그러한 즐거움을 맛보셨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번 일은 제게 양보하셔야 합니다.’
[하멜이 구하러 가는 세냐는 제 오랜 동료이자 벗입니다. 그녀를 구하는 일에 제가 축복을 내리는 것인데, 도저히 당신에게는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몸을 숙이는 그 짧은 순간.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크리스티나. 지금은 제가 하멜의 목에 로사리오를 걸도록 할 테니, 다음에 하멜에게 로사리오를 돌려받을 때. 그때는 당신이 직접 그 순간을 즐기는 겁니다.]
‘맙소사……! 시스터, 당신은 혹시 천재이십니까?’
대립하던 의견이 극적인 타협을 맞이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에게 직접 목걸이가 걸리는 순간을 상상하며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이런 것에 하나하나 놀라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 제가 정말로 천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곧 보여드리겠습니다.]
육체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아니스는 음흉한 미소를 감추고서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무릎은 살짝 낮추면서 몸을 조금 더 앞으로 과감히 내밀었다. 그렇게 상체를 숙이니, 커다란 가슴이 유진의 머리에 올라갔다.
‘디테일.’
[맙소사!]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다.
[파, 파렴치한! 어떻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는 겁니까?]
‘잘 기억하십시오, 크리스티나. 세냐는 이런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아니스는 자신의 천재적이고 악마적인 발상에 뿌듯함을 느끼며 유진의 목에 로사리오를 걸어주었다.
……유진은 지금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는, 말랑하고 폭신하면서 무거운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저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에 유진은 일부러 의식을 반쯤 놓아버렸다. 머릿속에서 꽥꽥거리는 메르의 비명이 지금 이 순간에는 오히려 고맙고 필요했다.
“다 되었습니다.”
머리를 누르는 무게가 멀어진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잘 알고 있는 미소. 아니스가 유진을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하멜.’
‘세냐를 부탁합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직접 내뱉을 수 없는 말. 아니스는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전해주었고, 유진은 그 뜻을 이해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하지.”
아카샤와 성검을 넘겨받고, 로사리오도 목에 걸었다. 유진은 완전히 몸을 일으키고서 숨을 골랐다.
“이제 갑니다.”
“어…… 음, 으응.”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방금 크리스티나의 행동은 성녀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돌발적이고 파격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멜키스조차도 경악해서 입을 벌리고 있을 정도였다.
특히 놀람이 큰 것은 시안이었다. 내가 방금 대체 뭘 본 거지? 시안은 떡 벌리고 있던 입을 일단 닫고, 어흠 헛기침을 하고서 유진에게 다가갔다.
“……조심해라.”
시안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힘을 어딘가에 담아서 유진에게 줄 수는 없었다. 대신, 쭉 가지고 있던 게돈의 방패를 꺼내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애당초 유진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 바로 저 게돈의 방패였다.
“당연히 조심하지. 너나 여기서 잘 기다리고 있어. 어른들 잘 지키면서 말이야.”
“마탑주님들이 아무리 힘이 없어도 내가 지켜야 할 정도는 아닐 것 아냐?”
“그래도 네가 칼은 빼 들고 있어야지, 지친 사람들 사이에서 뭐 할래?”
유진은 씩 웃으며 게돈의 방패를 왼팔에 장착했다. 그 뒤에는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어, 라이미르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히익…….”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던 라이미르아는 반사적으로 유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라이미르아를 망토 밖으로 끌어냈다.
“시…… 싫다. 가고 싶지 않느니라. 보, 본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모두 되지 않았느니라……. 오, 오, 오늘 말고 내일 가면 아니 되겠느냐……?”
“여기까지 와서 뭔 내일이야. 이미 가겠다고 분위기 다 잡아놨으니까 얌전히 있어.”
“싫다……. 본녀는 아직…… 힉…… 부, 분위기가 다 무어냐. 이 분위기가 어쨌다는 말이느냐. 보, 본녀가 너희 미천한 것들 앞에서 춤을 춰준다면, 내일 가도 되는 것이니냐?”
얼마나 가기 싫은 것인지, 라이미르아는 울먹거리면서 어깨를 들썩거리고 허리까지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건 도저히 춤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유진은 끔찍하단 얼굴로 라이미르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 마라……. 그리고 너는 잠깐만 나와 있으면 돼. 들어가고 나서는 앞에 나오지 말고 망토 안에 숨어 있으라고.”
“하지만…… 하지마안…… 딸 된 자로서 흑룡공에게 인사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느냐…….”
“무섭다고 난리 치는 주제에 딸은 무슨 딸? 별일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약속도 했잖아.”
“정말…… 정말 괜찮은 것이느냐?”
라이미르아가 울먹거리며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유진은 그 널따란 이마 한가운데에 박힌 홍옥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라이미르아는 조금 진정된 것인지 호흡을 고르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유진은 그런 라이미르아를 향해 천천히 아카샤를 들어 올렸다.
이전에 몇 번이나 했던 용언마법. 라이미르아는 숨을 삼키며 두 눈을 감았고, 아카샤가 붉은빛을 내뿜었다.
우우우…….
아카샤가 일으킨 용언마법이 라이미르아와 연결되었다. 라이미르아를 촉매로 삼아, 공간을 뛰어넘은 차원의 저편. 그 어딘가의 틈새에 있는 라이자키아의 문을 열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뒤틀렸다. 유진은 천천히 라이미르아에게 다가가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 즉시, 유진과 라이미르아가 일그러진 공간에 삼켜졌다.
ㅡ머리가 찌잉 울리고 어지러웠다. 내가 지금 두 발로 땅에 서 있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등부터 땅에 누워 있는 것인지 파악이 잘되지 않았다.
아주 옛날, 술을 처음 마셨을 때 같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취해버렸을 때처럼, 지금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린 것인지가 곧장 파악이 되지 않았다.
“히에에엑…….”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었다. 라이미르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서 유진의 손을 양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라이미르아를 일으켰다.
“들어와 있어라.”
“흑…….”
정신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마 한가운데의 홍옥이, 누가 망치로 꽝꽝 두드리는 것처럼 쑤셔왔다. 라이미르아는 토할 것 같은 입을 틀어막고서, 유진이 열어준 망토의 틈새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유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먼…… 어둠이 떠돌고 있다. 수십 수백 개의 다른 밤하늘을 뒤섞어놓은 것처럼, 떠도는 어둠은 각각 구분되고 짙음이 달랐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성공했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ㅡ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눈앞을 떠돌던 어둠이 싸악 걷혔다.
지금 유진의 서 있는 곳은 땅이 아닌 어둠이었는데, 조금 앞은 마치 낭떠러지처럼 한참 아래까지 푹 꺼져 있었다. 유진은 긴장을 풀지 않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정말 거대한, 블랙드래곤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자키아. 놈은 유진이 처음 엿보았을 때처럼, 결계를 두르고서 그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시커멓고 날카로운 비늘에 덮인 꼬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자고 있는 건가?’
기왕이면 그러길 바랐다. 유진은 저 아래에 있는 라이자키아를 향해 천천히 월광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꼬리에 가려져 있던 라이자키아의 머리가 위로 들렸다.
라이자키아
그 과정은 굉장히 느리게 보였다.
날카롭고 거친 비늘에 빼곡하게 덮여 있던 꼬리가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떠오른 머리가 뒤로 조금 젖혀지며 위를 쳐다보았다.
눈은 아직 뜨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새하얀 순막이 열리면서, 뒤집혀 있던 눈동자가 데룩 굴렀다.
동공이 세로로 쭉 그어진, 거대한 뱀의 눈. 사납고 두려운 눈이 유진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 커다란 눈이 일방적으로 유진을 담아냈다.
드래곤피어.
망토 안에서 메르가 정신을 잃었다. 똑같은 드래곤인 라이미르아도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유진도 그러고 싶었다. 정신을 잃거나, 아니면 속 편히 비명이라도 지르거나. 하지만 유진은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마주치자마자 겁에 질려서 꼴사납게 비명을 질러댄다니. 유진은 이를 악물면서 백염식을 운용했다. 전신의 뼈를 으스러트리고 내장까지 뭉개 버릴 만큼 강한, 무형의 압박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레드드래곤인 아리아르텔. 그녀가 내뿜는 드래곤피어도 겪어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청승맞은 애새끼인 라이미르아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성숙하긴 하다만, 아리아르텔의 나이는 많아봐야 300이다.
반면에 저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는 어떤가?
천 년은 넘는 시간을 살아온 고룡(古龍).
타락하기 전부터도 드래곤 중에서 최강을 논할 수 있었으며, 로드를 배신하고 드래곤하트를 빼앗아 씹어 삼켰다. 놈을 제외한 고룡이 전부 죽어버린 탓에 최고(最古)이자 최강(最强)이며 최악(最惡)의 드래곤이 되어버린 마룡이다.
전생에도 라이자키아와 몇 번 맞닥트린 적은 있다. 그때마다 죽음이 바로 목젖까지 다가오는 사선을 넘어왔다.
라이자키아의 드래곤피어…… 낯설지는 않다. 이미 몇 번이나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유진은 경험해 본 것에 대한 익숙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라이자키아의 드래곤피어는 오히려 전생보다 강렬해진 것만 같았다.
드래곤 피어는 드래곤이 내뿜는 살의다. 300년 전에도 라이자키아는 뒤틀린 성격만큼이나 피어가 강렬했는데, 어딘지 알 수 없는 차원의 틈새. 이곳에서 수백 년 동안 처박혀 있으면서 광기마저 덩치를 키웠다.
그렇게 되어버린 라이자키아의 드래곤피어는 유진의 몸을 얼음처럼 굳게 만들었다. 백염식을 운용하는데도 좀처럼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화아아악!
목에 건 로사리오가 빛을 발했다. 찬란하고 따스한 빛이 유진의 몸을 감쌌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불어넣은 신성력. 그것이 기적으로 발현되었다.
착각이겠지만, 유진은 지금 자신의 등 뒤에서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느꼈다. 둘이 뻗은 팔과 날개로 유진의 몸을 감싸고, 유진이 물러서고 쓰러지지 않도록 등을 받쳐주는 것만 같았다.
몸의 떨림이 멎었다. 차갑게 얼어붙어 가던 정신도 따스한 빛에 녹았다. 유진은 몇 번 심호흡을 하고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라이자키아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베르무트?”
직접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라이자키아의 목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아니군. 베르무트와 닮았지만, 베르무트는 아니야. 놈의 후손인가?”
“하멜이다.”
유진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한 대답은 라이자키아도 상상하지 못했는지, 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크흐흐! 그런가, 환생인가. 드래곤조차 범하지 않는 금기를 누군가가 범한 것이구나. 대체 누구지? 세냐 메르데인, 그 계집인가? 아니면 베르무트 본인인가.”
“아가리 닥쳐.”
“네가 정말로 하멜이라면,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내 말에 왜 분노하는지를 알겠군. 세냐 메르데인. 내가 그 건방진 계집을 산송장으로 만든 것 때문이겠지.”
쿠르르르! 어둠이 진동했다. 라이자키아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접혔던 날개가 느릿하게 펼쳐졌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하찮고 건방진 인간들. 특히 그중에서도, 내게 잡아먹히지 않은. 날 이 비참한 곳에 처박은, 세냐 메르데인. 그 계집을 씹어 삼키고 싶구나.”
살의가, 피어가 강해진다. 라이자키아의 눈동자에서 시커먼 악의와 광기가 끓었다.
그 모습에ㅡ 유진은, 새삼 자신이 운이 참 좋았다고 생각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리고 유폐의 칼인 가비드 린드먼.
둘의 전력은 라이자키아에 비해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유진은 그 둘과 몇 번이나 맞닥트렸음에도 살아남았다. 누아르의 경우에는 유진에게 저런 식으로 살의를 내뿜은 적이 없다. 가비드도 유폐의 마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유진을 죽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라이자키아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저 미쳐버린 마룡이 지금 이 자리에서 유진을 죽이지 않을 이유가, 유진에게 살의를 자제할 이유가 없단 말이다.
‘비교가 안 되는군.’
용마성에서 죽였던 야곤. 라비스타의 마수라 불리던 놈은 젊은 마족들 중에서 최강으로 여겨졌다. 야곤이 내뿜던 살기도 유진을 긴장하게 할 만큼 강했지만, 라이자키아의 드래곤 피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 딸은 어디에 숨겼느냐.”
미쳐 날뛰는 바람에 유진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유진은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너덜너덜한 날개를 활짝 펼친 라이자키아가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이곳에 오는 것에 내 딸을 열쇠로 삼았음을 안다. 그 망토…… 공간마법이 걸린 아티펙트로군. 그 안에 내 딸을 숨긴 모양이지.”
망토 안에서 라이미르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딸, 이라고 불렸다. 여태까지 셀 수 없게 많이 상상했던 부름이었다. 언젠가 돌아올 흑룡공에게 딸이라 불리게 된다면, 커다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말을 들은 것도 아니고, ‘딸’이라는 말을 들은 것인데도 몸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저 싸늘한 뱀의 눈은 라이미르아를 직접 보지 않았으나, 라이미르아는 저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하멜. 널 죽이고 딸을 되찾도록 하마.”
라이자키아의 입이 살짝 열렸다. 그 앞에서 시커먼 마력이 회오리치며 모여들었다.
유진은 지금부터 벌어질 일을 직감했다. 브레스. 하지만 지금 라이자키아의 입 앞에서 모이는 마력은 그 위력이 가늠조차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약해진 거 맞아?’
수백 년 동안 틈새에 처박혀 있었다. 당연히 약해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본 라이자키아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것만 같았다.
유진이 손에 쥐고 있던 아카샤가 위로 떠올랐다.
화아아악! 아카샤의 드래곤하트에 저장되었던 마나가 모조리 쏟아져 나왔다. 그것과 동시에 유진은 프로미넌스를 펼쳤다. 자색의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날개가 되었다. 프로미넌스는 아카샤에서 쏟아져 나온 마나를 모조리 삼키며 수많은 깃털을 형성했다.
“하하! 아카샤, 그 저주스러운 지팡이도 오랜만에 보니 무척 반갑구나. 세냐가 네게 아카샤를 넘긴 것인가? 나는, 수백 년 전부터 그 지팡이가 갖고 싶었지.”
라이자키아가 음산히 웃었다. 아직 쏘아지지 않은 브레스가 점점 덩치를 불렸다. 유진은 부릅뜬 눈으로 라이자키아를 노려보면서, 놈에게 깃든 마력을 재보았다.
“개새끼. 뭔 짓을 한 거야?”
곧 유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라이자키아에게는 놈의 것이 아닌 다른 마력이 섞여 있었다.
대지신의 발자국에서 느껴보았던 에드몬드의 마력.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놈이 의식을 위해 여기저기서 끌어모으고, 수천이 훌쩍 넘는 제물까지 바쳐가며 증폭시킨 마력이 라이자키아에게 깃들어 있었다.
“하하하!”
라이자키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건방진 인간 흑마법사놈. 주제도 모르고 제 욕심에 내 마력을 탐하였지! 고작 인간 따위가 나,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의 마력을 빼앗으려고 하였어!”
마력이 점점 부푼다. 프로미넌스가 먼저 이그니션을 펼쳤다. 유진은 아카샤를 등 뒤에 띄워놓고서 왼손으로는 성검을 쥐었다.
“꽤나 재미난 농간이기는 했다. 성공하였다면 말이지! 실패하고 흩어지는 마력을 거두는 것이 내게 어려울 줄 알았더냐? 그 흑마법사는, 너는, 이 라이자키아를 너무 우습게 보았구나. 이 끔찍한 곳에 수백 년 처박혀 있으며 내가 썩어 문드러진 줄 알았더냐?”
입 앞에 보인 마력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대신에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공간을 진동시켰다.
“넌 여기서 죽는다, 하멜. 이 라이자키아가 널 죽이고 잡아먹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숨긴 딸을 되찾을 것이다. 그 뒤에 내가 이곳을 떠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지!”
라이자키아의 목소리가 점점 들끓었다. 드래곤은 긴 시간을 산다. 이 위대하고 고등한 종족은 얼마나 긴 시간을 살건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자키아는 다르다. 이 블랙드래곤은 이미 300년 전에 미쳐 버렸다.
차원의 틈. 이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어디서 흘러들어 온 것인지 모를 여러 종류의 어둠만은 가득 존재하나, 그 어둠에는 마나도 마력도 정령도 없다. 시간의 흐름조차 느낄 수 없다.
이 미쳐 버린 마룡은 200년 동안 이 틈새에 처박혀 있었다. 아무것도 없기에 오직 자신의 광기만을 의식했다.
왜 실패했지? 아카샤의 주인은 고립되었다. 만전의 상태여도 큰 문제는 없었겠지만, 심지어 그 인간 마법사는 죽기 직전이었다.
실패할 이유가 없었단 말이다. 엘프들 따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세냐를 죽이고, 엘프들을 죽이고, 아카샤를 빼앗고, 그래, 기분 삼아 세계수도 불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지 못했다. 실패했다.
기적, 그래, 그때 일어난 것은 정말로 기적이었다. 세계수가 직접 나서서 엘프와 세냐를 보호했다. 죽기 직전의 인간 마법사의 손으로 의지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백 년 동안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마룡은 언제나 죽어야 할 곳에서 살아남았다. 멸망의 마왕과 유폐의 마왕이 드래곤의 절반을 학살한 전장에서도, 모든 고룡이 죽었던 그 전장에서도 스스로 로드를 배신하고 심장을 씹어 삼키고 타락해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몰라도 라이자키아는 살아남았으며, 그렇게 살아남았기에 다시금 기회를 얻었다.
“죽어라.”
라이자키아는 희열과 열망과 광기에 차서 내뱉었다. ㅡ번쩍! 둥글게 모여 있던 마력이 폭발했다. 시커먼 브레스가 유진을 향해 쏟아졌다.
용격창 카르보스. 이 창은 드래곤의 브레스를 포격으로 재현한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지, 유진은 새삼 자각했다. 용격창 수십 개가 있어도 라이자키아의 브레스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빠지지직! 성검이 내뿜던 빛에 공검이 덮였다. 4중첩의 공검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유진은 손아귀에 느껴지는 거대한 무게의 힘을 휘둘렀다.
4중첩의 공검이 가진 힘은 주변에 존재하는 다른 힘을 느리게 만들 만큼 압도적이다. 하지만 라이자키아의 브레스에는 공검의 장악력이 미치지 못했다.
충돌하는 마력과 불꽃이 유진의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성검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서 오른손을 망토 안에 쑤셔 넣었다.
월광검. 칙칙한 달빛이 뽑혀 나왔다. 4중첩의 공검에 월광검의 참격까지 더하자, 공검을 가로막던 브레스가 완전히 소멸했다.
하지만 유진의 얼굴은 오히려 더욱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어둠 속에 떠오른 라이자키아의 앞에ㅡ 방금 전의 브레스와 같아 보이는 마력의 구체가 10개나 떠올라 있기 때문이었다.
“월광검?”
마룡은 월광검을 알아보았다. 그는 커다란 날개를 펄럭거리며 낄낄 웃어댔다.
“대단한 모순이구나, 하멜. 인간 같지 않던 베르무트는 몰라도, 너는 누가 봐도 인간이었지. 그리고 네 동료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마족과 마왕을 증오했어.”
라이자키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유진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그가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은 라이자키아를 죽일 수 있느냐에 대한 승산이었다.
그것이 굉장히 희박할지라도 지금 유진은 주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성검을 놓고서 왼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랬던 네가. 마왕의, 그것도 멸망의 검을 쓰는구나. 인간이 다룰 수 없고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을 쓰는 네가 정말로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유진은 놀라서 묻고 싶었지만, 뜻대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과 코어에 닿은 순간. 그렇게 시작된 ‘폭주’가 여태까지 비할 데 없을 만큼 격렬했다.
프로미넌스로 펼친 이그니션에, 심장과 코어를 폭주시키는 이그니션을 동시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론상 가능하다고 보아 프로미넌스를 만들었지만, 유진도 몸으로 직접 펼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은 벌리지도 못하고, 어금니가 박살 날 만큼 강하게 깨물었다. 입을 벌렸다가는 몸 안 깊은 곳에서부터 충전되어 차오르는 힘에 전신이 박살 날 것만 같았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멸망의 검만으로도 인간답지 않은데, 지금 네 힘은 정말로 인간이란 종의 규격을 한참이나 넘었구나!”
라이자키아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멸망의 검…… 월광검이? 멸망의 마왕의 힘이라고? 충격적인 이야기일 테지만, 오히려 그럴듯하다고 받아들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월광검의 ‘힘’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생에. 유진은 월광검을 쥐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손에 쥐었을 때 그런 식의 저항을 주었던 것은 월광검뿐만이 아니었다. 살육의 마왕을 죽이고 얻은 분쇄추도, 참혹의 마왕을 죽이고 얻은 마창도.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오직 베르무트만이 그 무구들을 다룰 수 있었다. 강건한 모론조차도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지르던 마왕의 무구를, 베르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다뤄냈다. 살육의 마왕을 죽이고, 마왕성 근처에서 발견했던 정체를 알 수 없던 유적. 그 중심에 꽂혀 있던 월광검도ㅡ 베르무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다뤄냈다.
그때.
정체 모를 유적에서 월광검을 발견했을 때. 베르무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유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ㅡ그 순간에 베르무트는 언제나 그렇듯이 평온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다른 표정이었다면, ‘너도 그런 표정을 짓나?’ 하고 생각했을 테니까.
“잿빛 머리, 금색 눈동자, 불꽃처럼 타오르는 힘……! 하멜, 너는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하였구나. 베르무트의 ‘피’가 네 몸에도 흐르는 것이었어. 과연, 그러니 월광검을 다뤄내겠지. 인간 같지 않던 인간이 월광검을 다뤄냈으니, 그 피가 흐르는 너도 월광검을 다룰 수 있는가.”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시조의 피는 엷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라이언하트의 성을 가진, 라이언하트의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흐르는 모든 이가 잿빛 머리에 금색 눈동자를 갖고서 태어난다. 그리고 베르무트 이후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후손들은 마왕의 무구를 조금이나마 다뤄냈다.
모론도, 하멜도 다뤄내지 못한 무구를. 그 도미닉과 도이네스는 다뤄냈단 말이다.
라이언하트의, 베르무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놀랍구나. 참으로 놀라워.”
라이자키아의 앞에 나타난 구체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유진의 몸은, 떨림이 멎었다. 전신을 박살 낼 것처럼 차오르던 힘, 충만해진 순간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몸 안에는 지옥불보다 뜨겁고 격렬한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이 유진의 전신에서 타올랐다. 사자의 갈기가 맹렬히 휘날렸다.
“나는 그 피가 욕심이 난다.”
라이자키아가 웃으며 속삭였다. 10개의 브레스가 일제히 쏘아졌다. 유진은 가슴과 머리를 꽉 채우는 격정을 쏟아 고함을 질렀다.
꽈아앙! 중첩된 이그니션이 유진의 몸을 떠밀었다.
뇌광이 시커먼 번개자국을 그렸다.
라이자키아
질주하는 뇌광이 연달아 쏘아진 브레스의 사이를 꿰뚫었다. 스치는, 아니, 스치지 않아도 휘말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힘 속에서 뇌광의 검은 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은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브레스의 파장을 게돈의 방패로 받아냈다.
이 방패는 막아내는 모든 것을 허무 공간으로 돌려 버리는데, 아무리 게돈의 방패라도 브레스를 정면에서 막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설령 막아내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그 순간에 마나의 소모가 감당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직격을 피했다. 최대한 피하면서, 끌어당기는 힘만을 게돈의 방패로 막았다.
지금 순간에 필요 없는 생각은 모두 덜어냈다.
베르무트, 월광검, 멸망의 마왕. 그 모두가 지금은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유진이 생각하고, 갈망하고, 간절해야 할 것은 저 마룡을 죽이는 것이었다.
브레스의 폭격을 돌파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 떠 있는 라이자키아가 보였다. 놈은 유진이 상처 하나 없이 브레스를 돌파한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라이자키아는 거대한 드래곤의 눈을 휘면서 웃었다.
ㅡ화아악! 라이자키아가 날갯짓을 했다. 누더기나 다름없이 너덜너덜한 날개였으나, 한 번 펄럭거린 것만으로 시커먼 마력의 폭풍이 쏟아져 내렸다.
템페스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염려했던 대로, 정령왕은 이 공간에서 간섭할 수 없는 모양이다. 사실 템페스트의 도움을 빌릴 수 있었어도 저 폭풍에 폭풍으로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면에서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돈의 방패로 막을 수는 있겠지만, 굳이 할 필요없는 짓을 하면서 마나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공간도약, 가능한가? 짧은 순간. 각성되어 활짝 열린 사고가 가능성을 계산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좌표는 지정했다. 작은 오류만 있어도 아득한 차원의 바깥까지 던져지겠지만, 지금의 유진에게 오류를 범한다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빛을 발했다. 연쇄적으로 이뤄진 도약에이 마력의 폭풍을 뛰어넘었다. 라이자키아의 머리가 바로 옆에 있었다. 라이자키아의 커다란 눈동자는 굳이 움직이지 않고서도 유진을 보고 있었다.
유진은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라이자키아의 눈을 향해 월광검을 찔러 넣었다.
꽈지지직! 월광검의 빛과 라이자키아의 마력이 충돌했다. 불길한 달빛이 마력을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유진은 지체하지 않고 4중첩 공검의 성검의 힘을 더해넣었다.
라이자키아는 그것을 순순히 지켜보지 않았다. ㅡ꽈앙! 거대한 힘이 유진을 뒤로 밀어냈다. 단순히 마력을 휘두른 것이 아닌, 마법이었다.
‘용언.’
육체의 데미지는 없다. 이그니션을 중첩시켜서 얻은 힘은 드래곤의 마법에서도 유진의 몸을 보호해 주었고, 그 외에도 성검과 로사리오에 어린 빛의 가호가 마력을 일부 상쇄했다.
“같잖은 재주를 부리는구나.”
라이자키아가 웃으며 말했다.
우우우우우! 라이자키아를 중심으로 어둠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 마룡은 소리 없이 용언마법을 일으켜 이 공간에 간섭한 것이다.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앞에서, 인간이 쥐어짜 내 만든 마법이 통할 것이라 생각했나? 네 마법, 본 적이 없던 것이나 한번 보았으니 파악했다. 깃털을 좌표로 대신하는군.”
변화하는 공간 속에서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함께 진동했다.
“자, 어디 한 번 더 잔재주를 부려보아라.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개새끼.”
유진은 한참 밀려난 몸을 바로 세우며 내뱉었다. 라이자키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했다.
놈은 이 공간을 통째로 일그러트려서 프로미넌스의 좌표에 혼선을 주었다. 방금처럼 깃털의 공간도약을 쓴다면 즉시 라이자키아의 트랩에 걸려들어, 어딘지 모를 차원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모양이지? 응?”
“하하하! 내가? 너 따위를? 하멜, 나를 도발하는 것이구나. 착각하지 말거라. 널 도망 다니게 두고 싶지 않을 뿐이다.”
라이자키아는 낄낄 웃으면서 숨결을 내쉬었다. 아까처럼 마력이 거창하게 부풀고 뭉치지는 않았다. 작은 숨결이 즉시 브레스가 되어 공간을 꿰뚫어왔다.
도약은 쓸 수 없다. 유진은 뇌광으로 가속하면서, 처음에 그랬듯이 브레스를 피해냈다. 그러자 라이자키아는 연달아 브레스를 내뱉었다. 난무하는 브레스, 방향을 제한하고 움직임을 의도하고 있다. 뻔한 수작이다.
유진은 브레스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거슬러 오르면 공검에 마력을 충전했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모두 피하지 않았다. 빠르게 내뱉은 브레스에는 처음과 같은 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브레스를 가르며 전진했다.
하지만 드래곤에게 있어, 브레스는 기본적이고 간단한 무기일 뿐이다. 특히 저 라이자키아는 전투에 익숙하며, 존재하지 않는 마법을 실현시키는 용언을 구사한다.
유진을 휘감은 어둠에 갑자기 무게가 더해졌다. 세상 전체가 유진을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덜컥 가해진 제동, 유진은 즉시 몸을 비틀며 월광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에 라이자키아의 공격이 유진을 침범했다. 푸확! 예고 없이 쏘아진 빛이 유진의 사각을 노렸다.
유진은 숨을 삼키며 팔을 휘둘렀다. 똑같은 공격으로 걷어내는 대신에 게돈의 방패로 빛을 가로막았다. 닿는 순간 빛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수백, 아니, 수천은 될 법한 자그마한 점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 점들은 공간 전체에 흩어지며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건 피할 테냐, 막을 테냐.”
라이자키아가 비웃었다. 점들에서 소리 없이 빛이 쏘아졌다.
고밀도로 응축된 마력의 빛. 눈으로 모두 파악할 수 없는 공격이지만,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유진의 감각과 연결되었다. 깃털이 보는 모든 것이 유진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사고를 가속했다. 동작에 필요한 모든 연산에 마법을 대체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메르가 숨을 헐떡이며 유진의 연산에 중추를 맡아주었다.
뇌광이 난잡하게 움직였다. 번개가 흐트러지는 궤적을 그리며 이리저리 얽혔다. 유진은 자신을 집요하게 노리는 빛들 사이를 누비면서 마나를 일으켰다.
이클립스. 라이자키아가 만들어낸 점에 비할 숫자는 아니지만, 프로미넌스가 흩뿌리는 깃털이 많은 흑점을 만들었다. 일부의 흑점은 쏘아진 빛을 가로막고, 남은 흑점들은 점들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꽈과광! 서로 다른 힘을 가진 점들이 충돌했다.
한참 부족했다. 유진은 핏발 선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월광검과 성검을 들었다.
쌍검의 난무가 시작되었다. 공검의 시커먼 불꽃과 달빛의 참격. 수라광살이 빛을 부수고 베어냈다.
멀다. 저 거대한 라이자키아와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좁힌들 답이 있나? 만전의 월광검으로도 라이자키아를 죽이지 못했었는데. 지금 반쪽도 되지 않는 월광검으로, 그리고, 베르무트도 아닌 내가.
지워냈다. 이딴 생각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세계수에 봉인된 세냐를 떠올렸다. 밖에서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 돌아가지 못했을 때 둘이 느낄 절망이 얼마나 클지를. 시안. 돌아가겠다고, 괜찮다고, 그렇게 폼을 잡았는데. 로베리안. 제자의 죽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을 저주하겠지. 멜키스도 깍깍 비명을 지를 것이다.
시엘. 그 앙큼한 꼬마는, 만약 유진이 죽는다면 어울리지 않게 엉엉 울어댈 것이다. 길레이드. 이미 아들을 잃은 그 아저씨에게 다시금 상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하드.
나의 아버지.
“아아아아!”
유진은 토하듯이 외치며 월광검을 들었다.
반절도 되지 않은 월광검이다. 이 개 같은 검은 공검으로 힘을 증폭시킬 수도 없다. 월광검 자체가 마나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마나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저 달빛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마나가 들어간다. 예전에는 마나의 소모가 감당이 되지 않아 휘두르기 버거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중첩된 이그니션. 폭주한 코어가 쏟아내는 마나를 월광검에 쏟아부었다.
화아악!
달빛이 부풀었다. 여느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불길한 빛이 길게 뻗어 나갔다. 유진은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며 월광검을 휘둘렀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참격이 어둠을 갈랐다. 전면에서 덮쳐오던 모든 빛들이 월광검에 삼켜져 소멸했다. 그토록 멀리 있었던 라이자키아에게도 달빛이 닿았다. 쭉 여유로웠던 라이자키아의 눈동자가 부릅 뜨였다.
라이자키아를 보호하던 마력이 달빛에 베였다. 그것으로 기세가 줄기는 했지만, 달빛은 기어코 라이자키아에게까지 닿았다.
콰드드득! 라이자키아의 긴 목을 덮고 있던 비늘이 달빛에 뭉개져 소멸했다.
“크아아!”
라이자키아는 비명을 지르며 목을 뒤로 당겼다. 두껍고 강한 비늘 덕에 목은 거의 베이지 않았다. 달빛이 베어낸 것은 비늘의 표면뿐이었다. 그럼에도 라이자키아는 비명을 질렀다.
분노 때문이었다. 미천하고 하등한 인간 따위에게 비늘이 베였다. 저 월광검은 라이자키아로 하여금 굴욕스럽고 공포스러운 기억을 상기시킨다.
300년 전, 구할 필요 따위 없는 하찮은 종족들을 구하고자 했던 적이 있다. 인간 따위가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위대하고 존엄한 드래곤이 직접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뜻이 일치했다. 싸울 수 있는 모든 드래곤이 궐기했고, 하늘을 날아 마왕의 땅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드래곤이 죽었다. 저, 불길하고 파멸스러운 빛이 번쩍일 때마다 위대하고 존엄해야 할 드래곤의 목숨이 허무히 스러졌다.
“감히, 감히, 감히!”
저 빛이 두려웠다. 이딴 곳에서 하찮은 것들을 위해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로드의 심장을 뽑고 씹어서 삼키며 타락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라이자키아는, 그때 자신의 행동이 굴욕도 타락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위대하고 존엄한 드래곤이 인간이나 그 외 하찮은 종족들을 위해 죽는 것이야말로 굴욕이고 타락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간 따위가 그 공포스러운 마왕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도, 그 힘으로 자신의 비늘을 깎아냈다는 것도. 모두가 라이자키아에게는 굴욕이자 타락이었으며, 그래서 라이자키아는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쿠르르르ㅡ! 어둠이 뒤흔들렸다. 하늘에 떠 있던 라이자키아의 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개를 펄럭이고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어둠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유진은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며, 월광검을 쥔 손을 힐긋 보았다. 휘두른 것뿐인데 팔에 감각이 더뎠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고 있다.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 부담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계속해서 싸워야만 했다. 라이자키아의 앞에서 또다시 마력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간 마력이, 라이자키아의 뜻과 용언에 따라 유진을 죽이려는 폭력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건.
지옥을 형상화한 것만 같았다. 유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무기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것들은 누구의 손에도 쥐어지지 않았음에도 멋대로 떠올라 움직였다. 라이자키아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수백 수천 자리의 무기가 어둠 속에서 유진을 겨누었다.
“하.”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둠 속을 떠도는 무기의 움직임. 단순히 무기를 휘두르거나 찌르고 때리는 식의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저것들은 착실하게 연계되는, 유진을 죽이기 위한 군세였다.
무기들이 유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서 팽이처럼 돌며 성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 4중첩 공검이 만들어낸 시커먼 불꽃이 무기들을 소멸시켰다.
‘놈의 마력을 깎아내는 것. 의미가 있는 일인가?’
이만한 규모의 마법을 쓴다면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건 인간의 기준이니, 고룡인 라이자키아에게는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덤비는 공격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유진은 쉬지 않고 덤벼오는 공격들을 분쇄하면서 마나를 배분했다. 6성이 되면서 변화한 환염식은 마나의 효율이 굉장히 뛰어나다. 완전히 소멸하지만 않는다면 공격에 쓰인 마나를 곧바로 순환시킬 수 있다.
그것은 이그니션에도 똑같이 통용된다. 특히 프로미넌스와 연계하여 중첩한 이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유진의 육체가 버틸 수 있는 한에서 계속해서 타오른다.
‘몸은…… 괜찮아.’
전생의 육체는 이그니션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은 괜찮다. 유진은 숨을 크게 삼키며 불꽃을 크게 일으켰다.
꽈지지직! 불꽃과 함께 일어난 번개. 높이 치솟은 프로미넌스가 그 자체로 무기가 되어 유진의 등 뒤를 덮치던 무기들을 휩쓸었다.
높은 곳에서 지켜보던 라이자키아가 포효를 내질렀다. 폭사한 브레스는 아까와는 성질이 달랐다. 처음부터 써오던 브레스가 단순히 마력을 소사한 것이라면, 지금의 브레스는 마치 시커먼 어둠을 쏟아내는 것만 같았다.
저 브레스가 무엇인지 안다. 세냐를 죽이려 했던, 블랙드래곤의 포이즌 브레스. 체내에서 만들어낸 마력의 독.
유진은 대응하기 위해 월광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성검이 먼저 빛을 발했다. 아름다운 검신에서 발해진 빛은 공검의 검은 불꽃을 뚫고서 유진의 몸을 뒤덮었다.
‘신성력?’
빛의 샘과 가비드 린드먼을 공격했을 때와 똑같았다. 유진이 의식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는데, 성검이 스스로 빛을 일으켰다. 마치 유진을 보호하고, 힘을 보태기 위해서인 것처럼.
실제로 성검의 빛은 그렇게 작용했다. 쏟아진 독액이 유진을 덮치려 했지만, 성검의 빛이 먼저 그것을 가로막았다. 목에 건 로사리오가 호응하듯이 빛을 발했다. 유진을 죽이려는 독기가 신성력에 정화되어 갔다.
하지만. 신성력이 독기를 정화한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됐다. 빛이 불꽃을 뚫었다지만 공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성력이 공검에 얽히며 불꽃을 증폭시켰다.
콰아아아! 허공을 향해 그은 불꽃이 브레스를 집어삼켰다. 그 광경은 라이자키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마법과 마력의 공격. 몇 번이고 브레스를 쏘고 마법을 펼쳤는데, 성검과 월광검에 상쇄되고 있다.
“이런 짓은 품위가 없어서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만.”
라이자키아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쩔 수 없지.”
꽝!
크고, 무겁고, 단순한 소리가 났다. 마력이나 마법이 주가 된 공격은 아니었다. 라이자키아는 단지 자신의 꼬리를 한 번 휘둘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속도가 유진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거대한 드래곤의 몸뚱이. 커다란 표적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있던 꼬리는 프로미넌스에 동기화된 감각으로도 한순간 놓쳐버릴 만큼 빨랐다. 꼬리의 움직임에 용언을 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순간에 유진의 의식은 아주 잠깐 끊어졌다. 신성력의 가호와 백염식의 불꽃이 유진을 몸을 보호하기는 했다. 하지만 무식한 질량의 공격은, 유진의 몸에는 모론에게 패대기쳐졌을 때보다 더,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커헉!”
실제로 박살 난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박살 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꼬리에 얻어맞은 유진의 몸이 어둠 저편으로 날아갔다.
[유진 님!]
메르가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유진은 쿨럭쿨럭 피를 토하면서 대답했다.
“할 만해.”
유진은 피범벅인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대답했다.
“맞을 만도 하고.”
솔직히 거짓말이었다.
라이자키아
뼈. 금은 간 것 같은데,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다. 꼬리에 처맞은 충격에 내장이 조금 상했다. 피를 토했다. 그것뿐이었다. 전생에 입었던 상처들과 비교하자면 경상 축에도 못 든다.
하지만 더 맞으면 안 된다. 방금 일격으로, 유진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단순히 꼬리에 처맞은 것뿐인데도 몸이 이만큼이나 날아갔다. 신성력과 마나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얻어맞은 순간 충격에 몸이 뻥 터져 버렸을 거다.
유진은 날아가던 몸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당연하게도 라이자키아는 유진을 그냥 날아가게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쾅, 쾅, 쾅! 폭음이 연달아 터지면서 마력의 구체가 날아왔다. 브레스를 길게 쏘지 않고, 구체로 집중시켜서 통째로 쏴댄 공격이었다.
유진은 뻐근한 팔을 움직였다. 푸확! 교차해 휘두른 월광검과 성검이 구체의 앞을 가로막았다.
폭발의 아래를 낮게 파고들었다. 떠돌던 깃털들의 일부가 유진에게 모였다. 그리고 다른 깃털들은 라이자키아에게 쇄도했다. 다가가는 순간에 깃털이 뭉치며 수십 개의 이클립스를 만들었고, 유진 본인도 마나를 쏟아부어 이클립스를 만들었다.
라이자키아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먼저 날아드는 수십 개의 흑점. 제법 위력은 대단하다만 그래 봤자 인간의 공격. 굳이 방어마법을 펼칠 것도 없다. 몸에 두른 마력과 드래곤의 비늘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유진이 직접 만들어낸 흑점. 저것의 위력은 라이자키아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한참 남아 있던 무기들이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시간을 끌 뿐이었다.
유진이 몸에 두른 불꽃이 보다 짙게 타오른 순간, 사방으로 뻗어 나간 번개가 무기들을 휩쓸었다. 유진은 눈앞에서 터지는 불꽃과 마력의 폭발을 향해 게돈의 방패를 들었다.
촤아아아악! 시커먼 격류가 게돈의 방패와 닿는 즉시 갈라졌다. 유진은 그렇게 길을 열어내고서 라이자키아의 바로 아래까지 도달했다. 연달아 쇄도하는 흑점을 모조리 걷어 낸 라이자키아가 유진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콰르르르르! 시커먼 격류가 라이자키아의 입에서 쏟아졌다. 아까와 같은 포이즌 브레스지만, 독기뿐만 아니라 가공할 마력까지 섞여 있었다. 이런 공간이었기에 망정이지, 바깥에서 저만한 위력의 포이즌 브레스를 쏴 갈겼다가는 대수림 전체가 죽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는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유진이 지켜야 할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성검과 로사리오가 빛을 발했다. 프로미넌스와 함께 등 뒤에 떠 있던 아카샤도, 유진이 바라는 대로 마나를 쏟아냈다.
눈앞에는 이미 이클립스가 형성되어 있다. 이 기술에는 유진이 백염식을 변형시켜 만든 환염식과, 드라고닉 가의 비기인 공검이 결합되어 있다.
극한까지 압축하고 순환시키는 마나의 태양. 환염식과 마찬가지로, 이클립스 안에는 마나로 만들어낸 유사 코어가 회전하고, 폭발하고,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코어가 생성된다.
그런 태양의 표면을 공검으로 뒤덮는 것이 바로 이클립스다. 유진은ㅡ 이클립스에 공검의 중첩을 더 해 넣었다. 공검이 중첩될수록, 태양을 구성하는 초고밀도의 마나가 융합과 폭발을 반복했다.
1, 2, 3. 본래 이클립스의 한계는 3중첩이 끝이었지만, 공검이 4중첩에 도달했듯이 이클립스도 보다 진화를 이루었다.
화악.
눈앞에 있던 이클립스가 4중첩이 되었다. 이클립스는 직접 휘두르는 공검보다 위력이 강하다. 대신 형성하는 것이 아무래도 공검보다는 늦다.
그래서 아슬아슬했다. 라이자키아의 포이즌 브레스가 유진이 발하는 신성력의 빛을 뚫고서 침범해 오는 순간에야 이클립스가 완성되었다.
4중첩의 이클립스가 앞으로 나아갔다. 쏟아지던 포이즌 브레스와 이클립스가 만났다.
유진의 눈앞에서 마나와 마력이 뒤섞였다. 그것은 처음에는 자그마한 회오리가 되었으나, 이윽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격류가 회오리를 따랐다. 콰르르르르! 브레스가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휘말린다?’
라이자키아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마룡이 직접 쏘아낸, 마력과 독기의 브레스다. 인간은 물론이고 마족조차도 저 브레스에 닿는 순간 녹아버린다. 아니, 그렇게 녹기도 전에 소멸해 버린다.
브레스가, 저 주먹만 한…… 일식(日蝕)을 이뤄낸 것만 같은 마나의 태양에 휘말리고 있다.
아니. 휘말리는 정도가 아니다. 브레스가 역으로 분해되면서, 흩어져야 할 힘이 저 태양에 되감기고 있다.
점점 태양이 커진다. 라이자키아는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아 더욱 브레스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브레스가 강해지는 만큼, 그를 거스르며 힘을 되감아 내는 이클립스의 크기도 부풀어갔다.
‘그런가.’
유진은 바로 앞에서 그것을 보았다. 4중첩의 이클립스가 브레스를 가르면서, 흩어지는 마력의 일부를 제힘으로 삼는 것. 유진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4중첩의 공검은 주변의 힘을 장악한다. 이클립스는 성검이나 다른 무기에 덮는 검강과 공검보다 순수하며 강한 마나의 결정이다. 4중첩의 공검은 라이자키아의 마력을 느리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같은 4중첩의 이클립스라면 라이자키아의 마력조차도 침범하여 제 힘으로 삼았다.
결국 브레스가 완전히 둘로 찢어졌다. 라이자키아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고, 마력을 집중하고 용언을 동원하여 강력한 방어결계를 구축했다.
꽈지지직! 이클립스가 그 결계에 부딪쳤다. 브레스라고 해봐야 사실은 마력과 독기를 호흡으로 쏟아내는 것. 하지만 용언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마법을 행한다. 그렇게 결정된 마법은 이클립스에도 쉽사리 관통되지 않았다.
“감히!”
라이자키아가 포효했다. 멸망의 검도 아닌, 인간의 공격 따위에 용언을 사용한 방어를 쓰다니. 심지어 상대는 고작해야 한 명인데!
“감히, 감히, 감히!”
용언의 결계가 점점 돌파되고 있다. 브레스처럼 힘을 되감아 커지지는 않았으나, 절대 깨지지 말아야 할 용언의 결계가 돌파되고 있단 말이다. 라이자키아는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다시금 용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라이자키아가 용언을 펼치기 전에 유진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순식간에 용언의 결계를 돌파하는 이클립스까지 도약했다.
‘뭘 하려는 거지?’
라이자키아는 유진이 무엇을 하려는 지를 잠깐 이해하지 못했다. 유진이 양 손에서 검을 놓았기 때문이다. 시커먼 불꽃과 빛을 함께 휘감은 성검도. 불길한 달빛에 먹힌 월광검도. 모두를 손에서 놓았다.
망토가 펄럭거렸다. 길쭉하게 뻗은, 꿈틀거리는 혈관 같은 것이 얽힌. 손잡이가 망토의 틈새에서 튀어나왔다. 라이자키아는 저 손잡이가 눈에 익었다.
‘분쇄추?’
살육의 마왕의 무구. 분쇄추 지골라스.
꽈아아앙! 무식하게 휘두른 분쇄추가 이클립스를 강타했다. 분쇄추의 권능은 단순하다. 망치로 때린 것을 부순다. 망치로 때린 것을 폭발시킨다.
오히려 분쇄추가 박살나는 것만 같았다. 착각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힘이 유진의 손아귀를 찢어발겼다.
유진은 분쇄추를 놓지 않았다. 미끈거리고 뜨거운 피를 악력으로 붙들었다. 손잡이의 혈관이 꿈틀거리며 유진의 피를 받아마셨다. 분쇄추가 조금 더 전진했다.
ㅡ꽈지직! 나아간 분쇄추가 고밀도로 응축된 이클립스를 박살 냈다. 분쇄추의 권능이 더해진 ‘폭발’이 라이자키아의 용언결계를 뒤덮었다.
깨졌다. 라이자키아는 부릅뜬 눈으로 용언결계가 박살 나는 것을 쳐다보았다.
“아아아아!”
유진은 고함을 지르며 라이자키아에게 뛰어들었다. 놓았던 성검과 월광검은 어느새 다시 유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라이자키아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토록 오랜 삶을 살아온 라이자키아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찮고 작으며 약한 존재였다. 수백 수천이 모여도 똑같다. 호흡 한 번이면 몰살할 수 있다. ……300년 전에. 그런 인간들 중에서, 특별했던 5명이 있다.
중심에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는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없었다면 나머지 넷은, 그래, 인간의 극한이기는 할지언정, 드래곤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냐 메르데인.
그 인간 계집에게 크나큰 굴욕과 망신을 당했다. 그 상황 자체가 비정상적이었던 것이다. 드래곤이, 인간 마법사 나부랭이에게 패배할 리가 없다. 세계수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이런 꼴은 되지 않았을 거다.
하멜 다이너스?
300년 전에 유일하게 죽은 놈.
세냐 같은 마법도 쓰지 못하고, 베르무트만큼 강하지도 않으며, 아니스처럼 신성력도 쓸 수 없고, 모론보다 작던 그 인간?
놈이, 브레스를 가르고, 용언결계를 박살 내고, 그 멸망의 검과 성검을 함께 들고서.
‘내 목을 벤다고?’
현실감이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처박히며 이성이 흐려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블랙드래곤은 그만큼이나 인간을 멸시했다.
함께 휘두른 성검과 월광검이, 라이자키아의 목, 제일 아래의 뿌리를 파고들었다.
간신히 도달한 ‘목’이다. 얕아서는 안 된다. 실제로 드래곤을 죽여본 적은 없다만, 마경에서 죽어가던 드래곤을 만난 적은 있다.
드래곤하트. 드래곤의 심장. 그 위치는 그때 봐두었다. 가슴과 목이 이어지는 곳. 그 중심에 드래곤하트가 있다. 라이자키아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 드래곤하트를 부숴야 한다.
“아아아아!”
비늘이 찢어진다. 피부가 썰린다. 똑같은 방향으로 휘두른 월광검과 성검. 그 힘은 서로 섞이질 않으나, 유진이 바라는 곳을 ‘베어냈다’. 라이자키아의 그 거대한 목이ㅡ 2개의 검에 끊어졌다.
[유진 님!]
라이자키아의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절단면에서 시커먼 피가 뿜어졌다.
유진은 덜덜 떨면서 라이자키아의 머리를 보았다. 몸과 끊어진 머리가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높이 치솟았던 피가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놈이 쏘아내던 브레스와 마찬가지로, 저 시커먼 피도 닿는 것을 모조리 녹여 버리는 독이었다.
[해냈어요! 라, 라이자키아를. 마룡을 죽였어요!]
메르의 환호성이 멀게 들렸다. 유진은…… 양손에 쥐고 있는 성검과 월광검을 쳐다보았다.
드래곤의 목을 베는 것은 처음이지만, 깔끔하게 베어냈다. 정확히 노렸다. 중심의 드래곤하트를 노린 참격은 아주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유진…… 님?]
떨어지던 검은 피가 유진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피가 되돌아간다. 유진은 즉시 성검과 월광검을 휘둘렀다. 아직 남아 있는 라이자키아의 몸뚱이를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서였다.
푸슉.
유진의 몸이 움찔 굳었다. 라이자키아의 배에서 쏘아진 얇은 빛이, 유진의 배를 꿰뚫었다. 뒤따라 쏘아진 빛이 유진의 양쪽 어깨를 관통했다.
“커흡.”
유진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그 격렬하던 마나의 불꽃이 사그라졌다. 방금 빛. 은밀하고 강했다. ‘드래곤’답지 않은 암습이었다.
“난!”
푹, 푸욱! 무언가가 라이자키아의 배를 찢고서 나왔다. 그건 한 쌍의 ‘손’이었다. 드래곤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
“이 의태를 놀이라 생각했다……!”
촤라라락! 라이자키아의 몸을 뒤덮고 있던 검은 비늘이 벗겨지고, 배를 찢고 나왔던 양손은 반대로 비늘로 덮여갔다.
“드래곤은! 드래곤다운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하찮은 벌레의 몸, 작아서 편리하지……! 나도 아주 싫어하지는 않아, 의태니까! 놀이니까 말이다! 벌레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내가 벌레인 것은 아니니까!”
찌지직! 비늘에 뒤덮인 손이 ‘드래곤’의 배를 완전히 찢어버렸다.
“하지만! 놀이가 아닐 때에는, 의태를 해서는 안 돼. 나는 드래곤이니까! 벌레가 아니니까! 드래곤의 싸움에, 벌레로 의태하다니……! 이 무슨 굴욕이란 말이냐!”
배를 찢고, 그 안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시커먼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매끄러운 장발과 새빨간 눈동자. 유진은ㅡ 그 모습을 알고 있었다. 저 마룡 라이자키아가 인간으로 폴리모프했을 때에 취하는 모습이었다.
“네가! 나에게 그런 굴욕을 주었다.”
비틀거리며 선 라이자키아가 드래곤의 몸에서 걸어 나왔다.
촤라라락! 라이자키아가 걸을 때마다, 거대한 드래곤의 몸을 덮고 있던 비늘들이 라이자키아에게 달라붙었다. 되돌아간 시커먼 피도 라이자키아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드래곤의 몸은 점점 작게 쪼그라들더니,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네가, 이, 라이자키아를……! 내가! 살기 위해서! 존엄과 긍지를 버리게 만들었다. 죽지 않기 위해…… 벌레로 의태하게 만들었단 말이다!”
죽음이 바로 곁에 있었다. 라이자키아가 드래곤의 모습을 고집했다면, 유진의 검은 라이자키아의 드래곤하트를 두 동강 냈을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라이자키아는 드래곤을 포기했다. 아슬아슬하게 폴리모프를 펼쳐서, 드래곤의 몸 안에서 인간의 육체를 만들어냈다. 베였어야 할 드래곤하트를 인간의 몸에 옮겼다.
죽고 싶지 않아 펼친 기지(奇智). 하지만 라이자키아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굴욕이었다. 위대하고 존엄한 드래곤이, 죽고 싶지 않아서! 벌레로 의태해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쉽게 죽을 생각은 마라……!”
라이자키아가 팔을 들어 올렸다.
폴리모프했다지만, 정말로 라이자키아가 인간이 된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은 시커먼 비늘이 겹겹이 덮였다. 드래곤하트의 마력이 인간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보다 수십 수백 배는 큰 분노와 살의가 라이자키아의 눈동자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네게 백 번의 죽음보다 더한 절망과 고통을 주겠다.”
꽈지직!
휘두른 팔이 순식간에 변했다. 부분적으로 폴리모프를 변형하여, 팔을 드래곤의 꼬리로 바꾸었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꼬리가 유진에게 날아갔다.
“……씨X.”
너무 쉽다고는 생각했어.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팔을 들었다. 배에는 깔끔하게 구멍이 뚫렸다. 양쪽 어깨도 관통되었다. 쉽게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 백 번의 죽음보다 더한 절망과 고통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배의 구멍은 목숨을 앗아가지 않았고, 양팔도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싸울 수 있다. 유진은 늦지 않게 움직인 검들로 꼬리를 가로막았다. ㅡ꽈앙! 유진의 몸이 어둠 속에 처박혔다.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온몸이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유진 님, 유진 님, 유진 님……!”
메르가 울음으로 헐떡거리며 망토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유진의 얼굴을 보았고,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대신에 망토 안에 구비해 두었던 포션들을 유진의 상처에 붓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만들어준 성수. 라이언하트에서 가져온 엘릭서가 콸콸 부어졌다.
“잘했어.”
상처가 나아간다.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조금 움직이기 편해진 손으로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쪽에서 성큼거리며 다가오는 라이자키아의 모습이 보였다. 유진은 그쪽을 노려보면서 메르의 머리를 꾹 눌렀다.
“……들어가.”
“하지만…… 유진 님……!”
“죽는다.”
유진은 고개를 낮추어 속삭였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죽어. 그건…… 안 돼. 안에 있어.”
“제가, 차라리 제가 죽는 것이 나아요. 유진 님은……!”
“네가 죽으면 내가 죽어.”
그 말에 메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리고 말이야. 나는 안 죽어. 너만 안 죽으면.”
“대체……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어, 엉망이에요. 지금 유진 님이 하시는 말은 모두가 엉망이라구요…….”
“세냐를 구하겠다고 했잖아.”
꾸욱. 유진은 조금 더 힘을 주어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안에 들어가 있어. 세냐도 널 보고 싶어 할 테니.”
메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메르를 라이미르아의 손이 붙잡았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메르를 안으로 끌어당기더니, 반대로 자신이 나오려고 했다.
“보…… 본, 본녀가 말을 해보겠…… 본녀가, 흑룡공께 간청을…….”
“들어가.”
유진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라이미르아의 이마를 밀어냈다.
“방해된다.”
상처가 낫는 속도가 느리다.
……유진은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아가로트의 반지를 쳐다보았다. 이 반지는 육체의 재생력을 강제로 활성시키고 증폭한다. 수명을 깎으면서 싸우게 해준다.
이그니션을 쓰는 중에 아가로트의 반지를 쓰는 것은 위험하다.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심장의 폭주만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부담이 큰데, 아가로트의 반지로 강제로 활성화시킨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라이자키아에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아가로트의 반지를 의식했다.
콰드드득! 왼손이 뒤틀리고 혈관이 돋아났다. 뚜둑, 뚜두둑, 뚜둑! 왼손부터 시작된 혈류가 유진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장의 폭주가 더해졌다. 입안에서는 강렬한 피와 죽음의 맛이 감돌았다.
익숙했다. 한번 죽어본 경험이 지금은 참 고맙게 느껴졌다. 아직,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유진은 덜덜 떠는 왼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라이자키아
죽일 수 있었다.
라이자키아가 드래곤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유진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자키아는 자존심과 긍지를 버리면서까지 살고자 했고,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유진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그니션은 이미 사용했다. 라이자키아와의 전투에서, 유진은 말 그대로 당장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썼다. 프로미넌스도 썼고, 이그니션도 중첩시켰으며, 월광검과 성검, 공검, 이클립스 등.
마나의 불꽃은 약해지지 않았다. 프로미넌스와 중첩한 이 불꽃은 유진의 육체가 버틸 수 있는 한 계속해서 타오른다.
하지만 부족하다. 라이자키아는 드래곤의 거대한 몸뚱이를 버렸다. 폴리모프로 인간의 모습을 취하면서, 거체를 뒤덮었던 비늘은 저 작은 몸에 집중되었다.
저것을 으깨 버리려면, 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혈관이 울룩불룩 올라온 손. 바들바들 떨리며 구부린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ㅡ두근. 손끝에서 전해진 고동이 머릿속에서 강렬한 울림을 만들었다. 유진은 헐떡거리던 숨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저항감이 들었다. 정말 해도 괜찮은 건가? 이성으로 내린 명령에 본능이 저항했다.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차피 죽는다.’
냉정히 생각했다. 지금 이 몸으로 싸워본들, 라이자키아에게 죽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아슬아슬할 때까지 생명을 불태운다. 사선에 한 발자국 들이밀지라도, 죽지만 않으면. 라이자키아를 죽일 수 있다면.
콰드득.
힘을 준 손가락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ㅡ두근! 심장의 박동이 더욱 강해졌다. 폭발할 것처럼 뛴 심장이, 쓰러져 있던 몸을 크게 들썩이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막무가내로 미친 짓을 일삼던 전생에서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프로미넌스에 이그니션을 중첩시킨 것도 육체에 부담이 큰데, 상처를 빠르게 치유하기 위해 아가로트의 반지까지 사용했다. 그것만으로 이미 유진의 몸은 죽음에 근접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유진은 다시 한번 심장과 코어를 폭주시켰다. 이미 활활 타고 있는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성큼거리며 다가오던 라이자키아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뭐지?’
이 오만한 존재는 자신이 걸음을 멈춰버린 이유를 깨닫고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있을 수 없는, 느껴서는 안 될 감정. 몇 번을 느껴도 익숙해지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
두려움.
“네가!”
라이자키아는 악을 쓰면서 손을 휘둘렀다. 콰드드드득! 또다시 거대한 꼬리가 어둠을 갈랐다. 아직 유진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어둠들이 한순간에 정지했다. 그 한복판에 떨어지던 꼬리도 함께 정지했다.
ㅡ화르르륵! 치솟은 불꽃이 어둠을 집어삼켰다. 라이자키아의 꼬리도 그 불꽃에 휘말려 재가 되었다.
“크악!”
라이자키아는 비명을 지르며 꼬리를 뒤로 당겼다.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유진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선명하고 검은 불꽃 속에서도 유진의 모습은 가려지지 않고 뚜렷이 보였다. 잿빛의 머리카락은 불꽃과 함께 치솟아 불꽃처럼 휘날렸다.
중심에서 금색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빛을 발했다. 그 모습.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일어선 유진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고, 내딛는 걸음도 비틀거렸다. 한 걸음씩 걷는 모습이 휘청휘청 기울고 있다.
하지만 라이자키아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긴 세월을 살아온 이 마룡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간신히 인정해 버렸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선 인간은 결코 하찮은 벌레 따위가 아니었다.
몸의 휘청거림이 멈췄다. 걸음도 더 이상 비틀거리지 않았다. 쓰러질 것처럼 기울지도 않았다. 몸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격렬했던 힘이 안정되었다.
하늘에 닿을 듯이 타오르던 불꽃이 푹 꺼졌다. 그 거대한 힘이 모조리 유진에게 압축된 것이다.
유진은 왼손을 앞으로 들었다. 터억! 떨어져 있던 성검이 유진의 손에 날아가 쥐어졌다.
그 순간, 성검과 로사리오가 찬란한 빛을 발했다. 심장이, 아니, 온몸이 아프다. 박살 나려는 몸을 아가로트의 반지와 신성력으로 추슬렀다.
오래는 못 싸운다. 유진의 발은 이미 사선에 올라서 있다. 균형을 잡지 못하면, 몸이 전부 사선으로 넘어가서 죽게 된다.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유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라이자키아는 머뭇거리지 않고서 양팔을 들었다. 콰드드득! 비늘에 뒤덮인 체로 거대하게 변형된 드래곤의 팔이 어둠을 휩쓸었다.
비늘이 튀어 올랐다. 갈기갈기 찢겼다. 시커먼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라이자키아의 참격이 선점했던 공간. 유진은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베어내고 으깨며 돌파했다.
“하멜……!”
라이자키아는 그 이름을 포효하며 직접 발을 움직였다. 이런 모습을 취했는데 더 이상 지킬 품위 따위는 없었다. 즐겨 사용하던 용언을 모조리 바꾸었다.
마법을 앞세운 공격은 저 존재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라이자키아는 자신이 가진 드래곤의 다른 이점을 활용하기로 했다.
견고한 비늘. 강인한 육체. 무한에 가까운 마력.
내뱉은 용언이 수십 개의 강화마법이 되어 라이자키아의 몸을 각성시켰다.
콰득, 콰드득! 전신을 덮은 비늘 하나하나에도 방어마법이 깃들었다. 사고의 가속. 간파. 헤아릴 수 없는 용언마법들이 라이자키아의 시야를 넓혔다.
그제야 유진의 움직임을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코앞이었다. 라이자키아는 기겁하며 땅을 박찼다. 성검이 휘두른 궤적대로 어둠이 쩍 갈라졌다. 직후에 공검의 불꽃이 갈라진 어둠을 메우며 라이자키아를 덮쳤다.
“크악!”
라이자키아는 괴성을 지르며 그 불꽃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부분적으로 변형시킨 드래곤의 팔. 비늘의 표면 일부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지만, 불꽃을 베어내기는 했다. 곧이어 월광검의 참격이 덮쳤다.
물러서지 않았다. 라이자키아는 왼팔을 크게 변형시켜서 월광검을 붙잡았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터무니없는 힘이 월광검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라이자키아의 왼팔을 통째로 베어냈다.
하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월광검이 베어낸 것은 속이 텅 빈 비늘 뭉치였을 뿐이었다. 라이자키아는 월광검이 지나간 틈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번쩍! 브레스가 가느다란 선이 되어 쏘아졌다. 유진은 스치듯이 브레스를 피해내며 손을 뻗었다. 성검이나 월광검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유진은 칼자루를 쥔 손으로, 주먹으로 라이자키아의 턱을 때려 갈겼다.
꽈득! 브레스를 내뿜던 입이 닫혔다. 라이자키아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함께 뒤로 날아갔다. 죽지 않았다. 새로운 머리가 나타났다. 라이자키아는 뭐라 외치는 대신에 바로 유진에게 뛰어들었다.
거리를 벌려서는 안 된다. 저만한 ‘힘’으로 아까의 흑점을 날리는 것이 두려웠다. 근접전? 드래곤답지 않은 일.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용언으로 강화한 몸. 드래곤의 비늘. 재생력. 반면에 저 인간은 어떤가?
몸을 가득 채운 힘이 놀랍다. 하지만 저 힘이 영원한 것은 결코 아니다. 놈은 생명을 불태우고 있다. 가만히 두어 시간을 끌면, 저 거대한 불꽃은 생명을 모조리 태우고서 사멸할 것이다.
그때까지 도망 다니는 것? 싫다. 라이자키아는 그것만큼은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죽인다. 불꽃이 꺼져 타들어 가는 재가 되기 전에, 산 채로 씹어 잡아먹을 것이다.
불꽃과 마력이 충돌했다. 서로 달라붙어 뒤엉켰다. 누구 하나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성검과 월광검이 난무를 일으켰다. 라이자키아는 비늘로 전신을 보호하면서 양손을 휘둘렀다.
비늘과 피가 튀었다. 즉시 재생했다. 휘두른 다리, 아까처럼 거대한 꼬리가 되지는 않았다. 이번의 변형은 영악하고 교활했다.
뱀처럼 가느다란 ‘꼬리들’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물론 정말로 뱀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저 모두가 드래곤의 비늘에 뒤덮이고 사악한 마력을 발하고 있다.
뱀들이 허리를 휘감으려 할 때. 유진의 몸에서 시커먼 불꽃이 치솟았다. 비늘에 뒤덮인 뱀들이 모조리 불타 버렸다.
푸화악! 뱀들은 마나의 불꽃에 타오르면서도 검은 피를 토했다. 라이자키아의 피. 독혈. 독안개가 유진을 침범했다.
성검이 진동을 발했다. 신성력의 가호가 독안개에 저항했다.
촤아악! 등 뒤의 프로미넌스에서 새하얀 태양이 떠올랐다. 이클립스. 그것을 본 라이자키아의 눈이 부릅뜨였다. 아까 전 보았던 공격은 완성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검게 변한 이클립스가 라이자키아에게 쏘아졌다. 라이자키아는 방어결계를 구축하고서 펄쩍 뒤로 뛰어올랐다.
꽈지직! 오래 버티지도 못했다. 결계를 뚫고 날아온 이클립스가 라이자키아의 왼팔을 집어삼켰다.
“크아아아!”
불꽃이 팔을 먹어치웠다. 라이자키아는 비명과 함께 왼팔을 끊어냈다. 비록 팔이 잘려 나갔다지만, 이클립스는 꺼지지 않고 왼팔을 모조리 불태운 뒤에 폭발했다.
간신히 폭발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섬뜩한 안광이 따라붙었다. 유진이었다. 그는 텅 빈 라이자키아의 허리에 성검을 휘두르고, 월광검을 가슴팍으로 찔렀다.
라이자키아는 허리를 베는 성검보다 가슴을 찌르는 월광검을 경계했다. 촤라락! 몸을 뒤덮고 있던 비늘이 가슴에 집중되었다. 성검은 라이자키아의 몸을 두 동강 냈지만, 월광검은 집중된 비늘을 완전히 꿰뚫지 못했다. 하반신을 잃은 몸이 땅을 뒹굴었다.
몇 번 구르기도 전에 몸은 멀쩡히 재생했다. 라이자키아는 양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연달아 브레스를 쏘아냈다. 콰콰쾅! 2번째 이클립스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브레스가 유진을 덮쳤다.
유진은 완전히 결정되지도 않은 이클립스를 앞으로 던졌다. 폭발한 마나와 불꽃이 두꺼운 장벽이 되어 브레스를 가로막았다. 즉시 유진은 불꽃에 뛰어들었다.
성검이 불꽃을 베었다. 아니, 불꽃이 성검에 달라붙었다. 칼날을 휘감은 공검. 그것에 불꽃이 더해졌다. 그 광경을 본 라이자키아의 두 눈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처박힌 200년. 힘이 약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시건방진 흑마법사가 끌어모았던 마력의 일부를 취하기는 했지만, 지금의 라이자키아는 전성기만큼 강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드래곤의 모습을 버려가면서까지 싸움에 임했는데, 압도하지도 못한다고?
오히려ㅡ
“크아아앙!”
인정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라이자키아는 악을 쓰며 성검에 손을 뻗었다.
거대하게 변형된 드래곤의 팔이 성검의 앞을 가로막았다. 통째로 뭉개졌다. 베인 것이 아니다. 압도적인 힘에 뭉개져 버린 것이다. 라이자키아는 제 팔이 눈앞에서 터지는 것을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등 뒤에 만들어낸 꼬리가 아래를 파고들어 유진을 노렸다.
당연히 유진은 그 공격을 놓치지 않았다. 활짝 펼친 프로미넌스가 불꽃을 일으켰다. 두꺼운 불꽃의 장벽이 먼저 꼬리를 가로막았고, 유진은 폭발을 등에 업고서 라이자키아에게 가속했다.
눈앞은 굉장히 잘 보였다. 하지만 시야 끄트머리부터 스멀거리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몸에 어떠한 예감이 계속해서 떠돌았다.
죽음의 예감이었다. 내가 죽던가, 아니면 라이자키아가 죽던가. 유진은 죽음의 선 위에서 춤을 추었다. 가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무언가가 계속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전에 먼저 몸이 움직였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고, 으깨고, 부수고 나서 알아차렸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비늘이 뭉친 덩어리. 라이자키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하지만 방어란 공격을 가로막아야만 의미 있는 것. 그런 의미에서 라이자키아의 방어는 무의미했다. 어떤 방어를 세워도, 모조리 유진에게 박살 났기 때문이다.
도망쳐서 시간을 끈다.
불과 몇 분 전에 떠올렸던 생각. 차마 그런 굴욕까지는 감당하고 싶지 않아서 앞으로 전진했다. 이 손으로 직접 죽인다. 씹어 삼킨다. 그렇게 갈망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라이자키아는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방금의 난전에서 유진이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라이자키아가 압도적으로 많이 죽기는 했다만, 유진도 상처를 입었다.
저 모습을 보라.
만신창이다.
찢어진 옆구리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다. 장기도 조금 튀어나와 있다. 미친 듯이 휘둘러대던 양팔. 근육과 피부는 이미 찢어졌고 부러진 뼈가 가시처럼 돋아나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다리는 정상적이라면 제대로 설 수조차 없을 만큼 부서졌다.
그런데도 유진은 멈추지 않는다. 라이자키아가 공격하면 공격을 벤다. 방어결계를 펼치면 통째로 부순다. 라이자키아가 물러서는 것만큼 계속해서 다가온다.
브레스. 몇 번을 쏴도 결과는 똑같다. 저만큼이나 다치게 만들었는데, 정작 죽일 수는 없다.
불꽃처럼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광인처럼 번득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라이자키아는 그 모습에 공포를 느꼈다. 이건, 두려움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 앞선 공포였다. 라이자키아는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 정말…… 인간이냐?”
라이자키아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개체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할 가치도 없는 하찮은 존재다. 인간은 작고, 약하며, 벌레처럼 수가 많아 득실거린다. 벌레처럼? 아니, 인간은 그냥 벌레다.
하지만 저 인간은, 하멜은, 저것은, 도저히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라이자키아는 저 존재를 도저히 작고 약하며 하찮다고 여길 수가 없었다.
유진이 숨을 내뱉을 때마다 피와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괴물은 죽어가고 있다…….
대체 언제? 언제 죽는 거지? 저 많은 상처들. 치유되지는 않고 있다. 저 인간에게 재생력은 없다.
뿌득. 옆구리를 가른 상처. 흘러나온 내장이 거슬렸다. 유진은 손에 쥔 검을 놓지 않고, 내장을 상처 안으로 쑤셔 넣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는 손으로 한 번 쥐어뜯고 뭉개면서 피부를 지져 버렸다.
너덜너덜해 질질 끌리던 다리. 걸을 때마다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유진은 다리에 의존해 걷지 않고 몸을 살짝 띄웠다. 뼈가 부러져서 튀어나온 양팔도, 뼈를 서로 부딪쳐 억지로 집어넣고 대충 끼워 맞췄다.
그 모든 것이 라이자키아에게는 두렵게 보였다. 라이자키아의 몸은 여전히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와라.”
유진은 쉬어버리고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도망치지 마.”
도망……? 굴욕스러운 말인데. 라이자키아는 노성을 터트리지 못했다.
쿵, 쿵, 쿵! 유진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저렇게 망가지는 몸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라이자키아에게는 그 울림이 마치, 죽음이 다가오는 발걸음처럼 느껴졌다.
라이자키아
죽음이 굉장히 가깝다고 느꼈지만, 아직은 괜찮다. 더 움직이고 싸울 수 있다. 유진은 어지러운 정신과, 붉고 검은색에 좀먹히는 시야를 무시하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 ……. ……!]
가뜩이나 머리가 어지러운데,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과 애걸이 자꾸만 정신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유진은 들으란 듯이 소리 내어 투덜거렸다.
사실 괜찮지는 않다. 누가 봐도 그럴 것이다. 뼈가 부러진 팔다리. 다리는 부유 마법으로 대신 움직일 수 있다. 팔도, 일단 검은 쥐고 있다. 튀어나온 뼈도 대충 끼워 맞추기는 했다.
응급처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겠다만, 당장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는 판국에 ‘나중’의 후유증이 대수인가. 그 후유증조차도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에게 등짝이라도 몇 대 얻어맞으면 말끔하게 사라질 것이다.
옆구리의 상처. 꽤 깊게 갈라졌다. 내장을 쑤셔 넣고 환부를 지지기는 했다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역시 대수롭지 않았다. 고통이 느껴지는 곳이 옆구리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몸은 아직 잘 움직인다.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힘이 넘친다. 검을 휘두를 수 있다. 격렬히 타오르는 마나는 유진이 바라지 않아도 멋대로 튀어나와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이 아니라면. 흐르는 시간 1분 1초가 아깝다. 유진은 라이자키아의 얼굴에 어린 공포를 보았다. 저 오만하고 정신 나간 블랙드래곤도 두려울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가.
월광검 때문에? 멸망의 검이라서? 아니면, 그냥 내가 두려운 건가?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진은 라이자키아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 난감했다.
쭉 오만하고 미쳐 있고, 인간을 하찮다 업신여겨 주기를 바랐다. 전생부터 유진은 그런 마족, 강자를 셀 수 없이 많이 죽여왔다.
제 존재를 특별하고 우월하다 여기는 놈. 그런 놈일수록 자기 힘을 믿고 앞으로 나와준다. 자기 자신이 상대보다 무조건 강하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기에 오만한 빈틈을 보인다.
그런 놈은 사냥하기 쉽다.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업신여긴 상대에게 자신이 궁지에 몰리게 되어도. 그 모든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 치부하거나, 혹은 긍지가 박살 난 것에 대한 분노로 눈이 뒤집혀 단순하게 덤벼오기 때문이다.
아까의 라이자키아는 고맙게도 그래 주었다. 하지만 지금, 라이자키아의 얼굴에는 공포가 어려 있다.
저런 놈은 사냥하기 힘들고 귀찮다. 강자다운 오만함을 버리고, 약자의 비열함을 갖추기 때문이다.
지금만 해도 보라. 아까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면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악을 쓰며 덤볐는데. 지금은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뒤로 물러서고 있다……. 도망치려 하고 있다.
“도망치지 마.”
유진은 다시 한번 내뱉었다. 라이자키아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놈이 방금 전처럼 굴욕감에 악을 쓰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덤비기를 바랐다.
목소리가 작았나? 라이자키아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고 있다……. 아니, 작았을 리가 없지. 설령 듣지 못할 만큼 작았을지라도, 드래곤인 라이자키아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내가 무서운 거냐.”
유진은 피범벅이 된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그 말에 라이자키아의 눈동자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1,000년을 살아온 고룡. 최강이라 불리던 블랙드래곤. 드래곤 중에서 최초로 타락한 마룡. 마경 헬무드의 삼공(三公)이라 불리던 너, 라이자키아가. 하찮은 벌레라 여기던 인간인 내게, 겁을 먹은 거냐.”
라이자키아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비웃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라이자키아는 뒤로 물러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섭다면 계속 도망쳐라.”
피범벅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크아아아!”
라이자키아가 괴성을 질렀다. 시커먼 마력이 일어났다. 애초에 어울리지 않았던 짓이다. 라이자키아는 저 모든 말을 부정하고자 했다. 물러서려는 발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콰드득! 팔을 뒤덮은 비늘이 먼저 변화했다. 라이자키아는 날카로운 끝을 곤두세운 팔을 휘둘러 유진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유진은 그러한 방해에 굳이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빠직, 빠지직! 유진의 몸을 덮은 불꽃에 번개가 섞였다.
시커먼 번개가 가로막는 방해를 뛰어넘었다.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 속도였다. 라이자키아는 기겁하며 방어결계를 세웠지만, 성검과 월광검이 방어를 통째로 베어냈다. 검이 닿으려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라이자키아가 펄쩍 위로 뛰어올랐다.
뭐든지 마법으로 바꾸는 용언마법.
-드래곤인 당신에게 마법의 깊이를 논하는 것은 우습다 생각하지만요, 라이자키아. 뭐랄까, 당신의 용언은 조금…… 빈약하달까? 응, 상상력이 말이야. 결국 용언이고 뭐고, 마법이란 틀에 갇힌 거잖아.
방탕하고 저속한 몽마의 비웃음이 머리를 떠돌았다.
그 잘나고 대단한 눈깔 외에는 별 볼 일 없는. 실제로 서로 죽이기 위해 싸운다면, 그깟 몽마 따위에게 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뭐? 현실에 간섭할 수도 없는, 최면 따위나 쓰는 네깟 것이.
대부분의 공격을 무력화하고, 부서져도 부서져도 새로이 돋아나는 비늘. 불사성. 호흡 한 번으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는 독과 브레스. 그 어떤 생물과 존재보다 우월한 힘.
-결국 그대는 겁에 질려 동족을 배반하였지. 타락해서 얻은 것이라고는 생명의 유예와…… 로드의 드래곤하트를 삼켰다고 한들, 애당초 그대들 드래곤은 마나가 넘치는 종족이잖소? 나머지는 마나가 마력으로 바뀌었다는 정도인가? 안타깝게도 라이자키아. 그대가 타락해서 얻은 힘은 드래곤이던 시절과 비교해 엄청나게 대단한 것은 아니오. 오히려 그대는 고결함을 잃었어. 그런 주제에 삼공의 으뜸이 되겠다니…… 그대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희비 하나 없이 내려다보던 시선을 떠올렸다.
한참이나 작은 놈이. ‘칼’이라 불린다고 정말로 칼이나 되는 줄 아는가. 위대한 존재도 아닌, 마족으로 태어난, 마왕에게 기생하는 벌레 따위가. 결국은 배반자라고? 네깟 것이 내 힘을 무시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그리고.
옥좌에서 항상 내려다보던 ‘마왕’.
수많은 드래곤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죽인 마왕. 그 드래곤 중 하나가 스스로 타락하고 머리를 조아렸음에도, 유열 한 번 드러내지 않고 무관심하던 유폐의 마왕.
본질을 알 수 없는 불길함의 덩어리. 직접 싸워보았음에도 모습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던. 불가해 자체를 현실에 빚어놓은 것만 같은 멸망의 마왕.
라이자키아에게 있어서 자신과 동등하고, 자신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는 저들뿐이어야만 했다. 만약 자신이 어느 존재에게 공포를 느끼게 된다면, 그 존재는…….
“허억……!”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길이가 확실한 검. 하지만 내뿜는 불꽃과 달빛이 간극을 잴 수 없게 한다. 두껍게 겹친 비늘이 모조리 베어나갔지만 목은 날아가지 않았다.
목 따위 베인들 의미가 없는데. 목이 날아가도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는데. 베이고 싶지 않았다.
죽지 않아도 목이 베이는 순간의 기억은 쌓인다. 두려움이, 쌓인다. 목이 베인 찰나, 사고가 끊어졌을 때. 다시는 눈을 뜰 수 없게 될까 두려웠다.
마력과 불꽃이 충돌했다. 뒤섞이는 두 힘을 달빛이 양단했다. 라이자키아는 자신을 덮치려는 모든 공격들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유진을 공격했다. 게돈의 방패가 닿는 공격들을 모조리 허무공간으로 돌렸다. 미처 막지 못한 공격에는 과감히 간섭하여 비틀어 버렸다. 얕은 상처들이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충돌은 호각이 되지 못했다. 몇 번 얽히고 나서 항상 물러서게 되는 것은 라이자키아였다.
지금도 그랬다.
아니, 조금은 달랐다. 이번에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난무하는 참격이 행동을 제한했다. 뻗고, 휘두르는 팔이 난도질당했다.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해야 할 드래곤의 비늘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조금만 더.
라이자키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라이자키아는 부서져 흩날리는 비늘과 시커먼 독혈 너머에서 유진을 보았다.
피범벅의 입술. 지금 이 순간에도 울컥울컥 피를 토하고 있다. 너무 휘둘러 댄 양팔엔 기껏 집어넣었던 뼈가 다시 튀어나와 있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공격하면 저 양팔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저 몸이 더는 싸우지 못하고 죽어버리든가.
조금만 더.
유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비늘은 계속해서 깎아내고 있다. 팔, 다리, 꼬리, 마력, 가로막는 것들은 죄다 베어냈다.
몸이 처참하게 망가진 것이 보인다. 너덜거리는 팔, 제힘을 이기지 못하고 뜯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고통은 없다. 어느 순간부터 유진은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너무 혹사시킨 정신이 망가진 것인지, 아니면 망가지지 않기 위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지.
‘조금만 더.’
다시, 생각했다. 그 마룡 라이자키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라이자키아를 죽인다. 아까 같은 변수는 없다. 실수하지도 않는다. 저 몸 어딘가에 있을 드래곤하트. 저 몸을, 전부, 다, 베어버리면. 부숴 버리면. 아무리 드래곤하트라 해도 소멸해 버리겠지.
그러면 전부 다 끝난다.
“커헉!”
라이자키아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상처가 깊다. 가슴을 너무 깊이 베였다.
라이자키아는 급히 만들어낸 꼬리로 가슴을 감쌌다. 소용없었다. 연달아 몰아치는 참격이 꼬리를 난도질했다. 일렁거리는 불꽃이 점점 가까이 온다.
월광과 불꽃. 푸확! 막기 위해 들었던 라이자키아의 양손이 뒤로 날아갔다. ㅡ팔의 재생이 늦다! 라이자키아는 이미 갈라진 가슴을 덮쳐 오는 참격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쥐어짜듯 쏘아낸 브레스. 하지만 방패막이는 되었다. 가슴을 양단하려던 참격이 잠시 브레스에 가로막혔고, 라이자키아는 질겁하면서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자신의 브레스가 저 참격을 완전히 상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라.
아주 잠깐 가로막혔던 참격이, 브레스를 통째로 갈라 버렸다. 아니, 브레스를 가른 것은 참격뿐만이 아니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구체가 갈라진 브레스 사이에 붕 떠올랐다.
ㅡ콰르르르! 흩어져야 할 마력이 구체에 되감겼다. 이클립스. 라이자키아는 그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저 구체의 끔찍함은 이미 몇 번이나 겪어보아 잘 알고 있었다.
용언을 외었다. 마력을 확실하고 강력한 의지로 결속시켰다. 마구잡이의 마력이 아닌, 통제되고 결속된 마법은 이클립스라도 휘감을 수 없다. 막혀라, 찢어져라, 부서져라, 터져라, 사라져라. 거듭 왼 용언이 마력을 일으켰다.
꽈지지직! 마법이 이클립스의 폭발을 가로막았다. 지칠 대로 지친 라이자키아는 잔류한 폭발에 휩쓸려 뒤로 날아가 버렸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라이자키아는 나뒹군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노성을 터트릴 시간도 없었다. 저 괴물 같은 놈이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
하지만. 당연히 덮쳐 와야 할 공격이 오지 않았다. 불길한 멸망의 빛도, 시커멓게 타오르는 불꽃도, 위선적이며 찬란한 빛도.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았다.
“……뭐냐?”
라이자키아는 비틀비틀 일어서서 앞을 보았다. 브레스를 쏘았던 곳. 이클립스가 날아왔던 곳.
유진은 그곳에 쓰러져 있었다.
……대체…… 뭐지? 라이자키아는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을 곧바로 이해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악귀같이 덤벼오던 인간이. 300년 전에 죽어 사라졌어야 할 망령이. 왜 저런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건가?
설마, 하찮은 잔꾀를 부리는 것인가? 저렇게 쓰러져서, 이쪽이 방심하게끔 만들고…… 다가온 순간에 덮치려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라이자키아는 꿀꺽 침을 삼키며, 쓰러진 유진을 노려보았다.
……소리.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죽음이 다가오는 발소리. 그 선명하고 커다란 소리가…… 지금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이 소리가 작았다…….
“……하…….”
라이자키아의 입술이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하, 하하하! 크하핫! 하하하하!”
힘이 다한 것이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하던 그 힘이 결국은 꺼져 버린 것이다. 그래, 진즉에 저랬어야 했다. 저토록 처참히 망가진 몸은, 진즉에 저렇게 쓰러져야 했단 말이다. 라이자키아는 머리를 흔들면서 미친 듯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도.
망토 안에서의 비명도.
지금 유진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더. 조금만 더. 셀 수 없이 되뇌던 말만이 머릿속에 강하게 맴돌았다.
[유진 님, 유진 님……! 이, 일어나세요. 일어나셔야 해요……!]
메르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리 시끄러운지 참. 이럴 줄 알았으면 데려오지 말 걸 그랬어. ……라이자키아는 어디에 있지? 죽였나? 죽일 뻔했던 것 같은데. 정말 죽이고…… 끝난 건가?
‘……세냐.’
피범벅의 양손이 땅을 짚었다.
대체 언제 쓰러졌던 것인지.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에 피가 잘 돌지 않는…… 아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팔다리가 걸레짝이 되어서? 코어가 망가져서?
유진이 일어서려 하자, 미친 듯이 웃어대던 라이자키아도 움찔 굳어버렸다. 하지만 유진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땅에 주저앉아 버렸다.
라이자키아는 다시 입가를 씰룩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지켜야 해.’
아직 유진과 연결되어 있다. 많은 것을 사용할 수 있던 아크리온에서라면 모를까. 지금 이 연결로 메르가 쓸 수 있는 전투마법은 많지 않았다.
라이자키아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메르는 헐떡거리며 망토의 틈을 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지라도, 라이자키아가 계속 다가오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정말…… 정말, 조금만 더. 그랬으면 되었는데. 아니,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조금만 버티면, 유진 님이 다시 일어서 줄 것이다. 메르는 그렇게 믿었다.
끔찍하고 두려운.
드래곤피어가 메르의 몸을 덮쳤다. 마법으로 만든 사역마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메르는 의식을 놓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망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무언가가 메르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멋대로 메르를 뒤로 당겨 버렸다.
라이미르아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너무 울어댄 눈시울이 새빨갰지만. 라이미르아는 메르를 향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뭐, 뭐하는 거야? 날 막지 마!”
“아…… 안 된다. 네네, 네가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그 말에 메르는 화를 내려 했지만, 메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라이미르아가 망토의 틈새 밖으로 기어나갔다.
“히이익…… 힉…….”
망토 밖으로 나온 라이미르아가 가장 먼저 맡은 것은 강렬한 피 냄새였다. 피범벅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유진의 모습을 보았다.
라이미르아는 입을 틀어막는 것으로 비명을 삼켰다. 그리고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처를 확인하고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라이미르아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공포의 근원에 고개를 돌렸다.
“오오…… 오, 오, 오랜만…… 입니다, 아…… 아버님, 아니, 아니지……. 흑룡공…….”
라이미르아는 어떻게든 웃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생각처럼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를 쥐어짜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ㅡ머리가 아프다. 이마 한복판에 박힌 홍옥이, 머리에 든 뇌를 찌부러트리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다. 라이미르아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눈은 감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거나 돌리지도 않았다.
라이미르아는 고통과 두려움에 눈물을 쏟으면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라이자키아를 보았다.
“제발…… 제, 제발, 흑룡공이시여. 이…… 이 인간을 살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인간은 더 이상 흑룡공을 위협할 수 없사옵니다…….”
“라이미르아.”
라이자키아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 미소가 라이미르아를 안심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몸은 더, 더 강하게 떨렸다.
“예…… 예에, 저 라이미르아입니다……. 흐, 흑룡공의 유일한 혈육…… 저, 저는 흑룡공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최…… 최최, 최선을 다해 용마성을 지켰사옵니다……. 그리고…… 그리고, 흑룡공, 다다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사옵니다. 이이…… 이 인간은…… 부, 부부, 부디, 저를 보아 목숨을 살려주시옵소서……. 제제, 제가 낙인을 직접, 찍고, 노예로 부리게 해주소서…….”
“이리 오거라.”
라이자키아는 큭큭 웃으며 손을 들었다.
“나의 딸아. 네 목소리가 너무 작아, 내게는 들리지 않는구나.”
“히이익…….”
심술궂고 두려운 말. 라이미르아는 주저앉은 몸을 도저히 일으킬 수가 없어서, 양손으로 땅을 밀고 무릎발로 조금씩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제발…… 제발, 흑룡공이시여……. 부디 저 인간을…….”
라이자키아는 씩 웃으며 라이미르아에게 손을 뻗었다. ㅡ화아악! 뻗었던 손이 모습을 바꾸었다. 팔이 거대하고 기다란 목이 되었다. 손이 거대한 머리가 되었다. 드래곤이 입을 쩍 벌리고 라이미르아를 덮쳤다.
비명을 지를 수도, 도망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드래곤의 머리가 라이미르아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네 존재는 날 위한 것이지.”
라이자키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치켜들었다. ㅡ꿀꺽. 목이 꿀렁거린 뒤, 드래곤의 머리가 다시 손이 되고 목은 팔이 되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딸아, 너는 이곳에서 소화하지 않을 것이니. 네게는…… 태어나기 전부터 기대했던 것이 있지.”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한 뒤. 딸은 아비를 위한 군대를 낳게 될 것이다. 가능한 만큼 많은 알을 낳고, 더는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잡아먹을 것이다.
라이자키아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서 다시 유진을 돌아보았다.
라이자키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유진의 앞에 서 있는, 정말로 하찮기 짝이 없는 존재 때문이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사역마. 하지만 저 모습, 저 얼굴이 라이자키아에게는 끔찍한 불쾌감을 주었다.
세냐 메르데인을 쏙 빼닮은 사역마.
“내…… 내놔.”
메르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바로 등 뒤. 아직 유진은 일어서지 못했다.
“네가…… 삼킨…… 그, 멍청한 꼬마 말이야……! 당장, 당장 뱉어……!”
지금 저 하찮은 사역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뱉으라고? 내게 명령하는 건가? 라이자키아는 어이가 없어서 걸음을 멈춰 버렸다.
“그리고…… 그리고, 더 이상 다가오지 마. 다가오면…… 다가오면…….”
“네가.”
라이자키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메르를 가리켰다.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냐.”
콰르르르! 마력의 돌풍이 메르를 덮쳤다. 메르는 비명을 지르면서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준비해 두었던 방어결계는 마력의 돌풍은 잠시도 막아내지 못했다. 결계가 산산조각이 나고, 메르의 몸이 뒤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네 주인을 본뜬 무능한 사역마 따위가. 인간보다 하찮은 진짜 벌레가. 내 앞을 가로막고, 내게 명령한다? 과연 그렇군. 진정 우스울 때에는 웃음도 잘 나오지 않는가.”
라이자키아는 시뻘건 눈동자를 빛내며 메르를 노려보았다.
죽이지는 않았다. 저 사역마의 팔다리를 뜯어내고 망가트려 세냐 메르데인의 앞에 던져주는 것이 재미난 여흥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멜은 죽인다. 그래, 환생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모두 다 씹어 삼키고서 머리 하나는 남겨놔도 되겠지.
“가까이…… 가지 마……!”
메르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했다. 뜻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다리가 완전히 뜯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고통은 없다. 사역마인 메르에게 고통이란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메르는 땅을 기면서 울음을 삼켰다.
라이자키아는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유진에게 다가갔다.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곧 죽을 것이다. 심장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서둘러 줘야지. 완전히 의식이 끊어지기 전에, 죽어버리기 전에 입안에 넣고 씹어 삼켜줘야지.
라이자키아는 큭큭 웃으며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어딘지 모를 차원의 틈새. 이 시커먼 어둠에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그 빛은 어둠을 가르고, 이 공간을 둘로 나누었다. 라이자키아는 그 빛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건……?”
라이자키아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뜨였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연달아 겪었지만, 지금만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어둠을 꿰뚫은 빛.
그 사이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내려왔다. 땅에 닿은 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유진은 손가락을 따스히 적시는 빛을 느꼈다. 도저히 움직이지 않던 몸에 조금의 활력이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날 구하러 오겠다고 한 주제에. 꼴이 그게 뭐야?”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타악.
땅에 내려선 대마법사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서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널 구하러 왔어, 하멜.”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눈물로 촉촉이 젖은 눈으로 방긋 웃었다.
라이자키아
잘 보이지 않던 눈. 검고 붉은 색에 잠식되었던 시야가 빛에 의해 밝혀졌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세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꿈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냐는, 세계수에 봉인되어 있다. 차원과 차원의 틈인 이곳에 절대로 올 수가 없다.
라이자키아. 죽음까지 몰아붙이기는 했어도, 죽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유진이 먼저 힘이 다해버렸다.
그런데 왜 세냐가 여기에 있는 것인지. 상처 하나 없는 모습……. 유진이 잘 알고 있는 얼굴로,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헷갈리는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 이곳에 와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인지.
“놀랐지?”
세냐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뻗은 손이 유진을 가리키자, 세냐를 감싸고 있던 빛이 유진에게 인도되었다. 화아악……! 빛이 유진을 감쌌다.
따스하고 포근한 빛이었다. 뒤틀리고 망가진, 상처투성이로 죽어가는 몸에 빛이 스며들었다. 유진은 빛이 혈관에 스며들어 피가 되고, 뼈의 파편 하나하나에 깃들어 연결하고, 찢어진 근섬유를 다시금 엮어내는 것을 세세히 느꼈다.
꺄하하하ㅡ
머릿속에서, 아니, 유진이란 존재에 맑은 웃음소리들이 깃들었다. 밝아져 가는 시야가 ‘빛’을 뚜렷이 보았다.
지금 유진에게 스며드는 빛은 신성력에 의한 빛은 아니었다. 순수하고 맑은 정령의 빛. 세냐의 죽음을 막고, 그녀와 엘프들을 수백 년 동안 지켜왔던 세계수의 빛이었다.
육체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외상뿐만이 아니었다. 찢어지고 터졌던 내장. 특히 이그니션을 2번이나 쓴 대가로 완전히 망가져 버렸던 심장과 코어도, 세계수의 빛에 의해 수복되었다.
더 이상 유진은 입안에서 죽음의 맛을 느끼지 않았다. 유진은 더 이상 사선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떨쳐낼 수 없는 절망은 이미 사라졌고, 암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도 완전히 밝아졌다.
“……이건……?”
유진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몸은 치유되었지만, 아직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냐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쓱 닦더니,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유진을 지나쳤다.
“보면 몰라?”
빛에 가로막힌 라이자키아가 보였다. 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빛을 돌파해 오려고 했지만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결속된 세계수의 정령들. 그리고 세냐의 마법 때문이었다.
“나야, 하멜. 세냐 메르데인.”
유진을 지나친 세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걸음은 망가진 모습으로 쓰러진 메르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라이자키아가 발한 살벌한 드래곤피어. 그리고 유린하기 위해 쏘았던 마법이 메르의 작은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세냐는 직접 몸을 낮추어 메르의 몸을 부축해 끌어안았다.
“……다행히 늦지 않았어.”
세냐는 작게 중얼거리며 훼손된 술식을 복원했다. 힘없이 쓰러진 메르에게 마나를 불어넣었다.
“……세냐…… 님……?”
메르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목소리 하나 낼 수 없게 되었지만, 메르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모든 ‘기적’을 보았다. 세냐는 방긋 웃으며 메르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열심히 했구나.”
“세냐 님…… 세냐 님……!”
“그래, 그래.”
메르는 세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쏟았다. 세냐는 우는 메르를 품에 꼭 안아주며 몸을 일으켜, 유진에게 돌아왔다.
완전히 회복된 시야가 세냐의 모습을 똑바로, 그리고 정확히 보게 해 주었다. ……기적. 세냐가 말했듯이, 지금 그녀의 존재는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세냐는 육체를 갖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세냐는 영혼과 세계수의 빛이 빚어낸 영적인 존재였다.
“조건이 만들어낸 필연이지.”
세냐가 입을 열었다.
“라이자키아는 이 공간을 세계수가 있는 대수림과 이어놓았어. 그렇게 ‘길’을 연결했지. 그리고 이 공간에 하멜, 너와ㅡ 아카샤가 있어.”
전생의 유품인 이 목걸이에는 세냐의 마법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아카샤는 유진 이전에 세냐가 주인이었으며, 본래부터 아카샤는 세냐를 위해 만들어진 마법지팡이다.
“이번에도 내가 너를 찾은 거야, 하멜. 네가…… 날 위해주어서. 네가, 바보에, 멍청이에, 등신인 네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날뛰어줘서. 저 엿 같은 라이자키아를 몰아붙여 줘서. 그리고, 네가 또다시 죽으려고 해서.”
천천히 뻗은 손이 유진을 잡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선 유진은, 바로 앞에 선 세냐를 내려다보았다. 세냐는 크게 숨을 한 번 삼키는가 싶더니, 주먹을 들어 유진의 가슴을 가볍게 톡 두드렸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이 세냐 님이 늦지 않게 널 구하러 와준 거지.”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유진을 구한 ‘빛’은 세냐의 힘이 아닌 세계수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인가? 이 시커먼 어둠 속까지 세계수의 빛을 끌고 온 것은 세냐의 영혼이었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세냐가 유진을 구하고자 갈망했기 때문이다.
세냐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려 앞을 보았다.
라이자키아. 수백 년 동안 악연으로 얽힌 마룡. 핏발 선 눈으로 이쪽을 보며 뭐라 악을 쓰고 있었다. 놈이 내뿜는 브레스와 마력이, 이쪽과 저쪽을 격리시킨 빛을 뒤흔들고 있다.
“해후의 회포를 풀기에 이곳은 너무 어두워.”
세냐는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며, 아직까지 품에 파묻혀있던 메르를 번쩍 들었다.
“메르. 지금의 나는 널 안고 싸울 만큼 완전하지 않단다. 그러니까…….”
쪽. 세냐는 메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하멜에게 가 있으렴.”
“네, 네엣.”
메르는 크게 벌어진 입을 가까스로 닫고, 유진의 망토 안으로 꼬물꼬물 들어왔다. 세냐는 조금 기울어진 모자를 바로 쓰고서 홱 몸을 돌려 라이자키아 쪽으로 섰다.
“……음.”
세냐는 작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선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뭐냐?”
“지팡이!”
지금 세냐는 존재 자체가 불완전한 상태다. 그녀의 육체는 아직 세계수에 봉인된 상태며, 가진 마나의 대부분도 육체에 남아 있다. 기적이라 할 힘에 의해 이곳에 영체로 현현하기는 했다만, 그 힘도 라이자키아의 전진을 가로막고 유진을 회복시키는 것에 잔뜩 소모해 버렸다.
하지만. 아카샤를 손에 쥔다면, 이 불완전한 존재로도 싸울 수 있다. 유진도 그 뜻을 이해하고 세냐에게 아카샤를 건네주었다.
“오랜만이야.”
세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수백 년 만에 손에 쥐게 된 아카샤에 대한 말이었고ㅡ 마찬가지로 수백 년 만에, 함께 전장에 서게 된 벗에 대한 말이기도 했다.
“몸은? 움직일 수 있지?”
“방금보다는 훨씬 낫기는 한데, 솔직히 잘 움직이지는 않네.”
죽지 않게 되었다. 심장도 낫고, 부러진 팔다리도, 상했던 내장도 회복되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회복 된 몸뚱이가 생각처럼 잘 움직이지는 않았다.
“일단은 움직이지? 그거면 충분하잖아. 아, 미리 말해두는데 이그니션은 쓰지 마. 쓰면 내가 먼저 널 패버릴 거야.”
“누가 쓰고 싶어서 쓰는 줄 알아? 쓸 수밖에 없으니까 쓰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쓰지 말라는 거야.”
아카샤가 앞으로 들렸다.
ㅡ콰르릉! 라이자키아가 쏴댄 브레스가, 공간을 격리하고 있던 빛을 관통했다. 흩어지는 빛이 세냐의 의지에 따라 아카샤의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의 방패가 브레스를 가로막았다.
“내가 네 곁에 있잖아, 하멜.”
혼자가 아니다. 지금 유진의 곁에는 드래곤이나 마왕과 마법으로 전투가 가능한 유일한 마법사, 세냐 메르데인이 있다.
세냐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유진은 그 맑은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멀쩡한 몸도 아니면서.”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깟 떨림, 조금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꽉 쥘 수 있었다. 유진은 아까와 같이 월광검과 성검을 양손에 쥐었다.
의식이 맑아진 덕인지, 흐렸던 기억들이 다시 연결되었다.
용공녀, 라이미르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을 테데, 직접 망토 밖으로 걸어 나와서.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라이자키아의 앞을 가로막았지.
-만약 본녀가 무언가에게 삼켜지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널 그 무언가의 아가리에서 끄집어 내주마.
바로 며칠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다. 라이미르아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을 꿀꺽 삼키는 ‘무언가’가 라이자키아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사실은 라이미르아도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꾸는 모든 악몽은 반드시 일어날 필연이며, 그 악몽의 중추가 무엇인지.
이마 한복판의 홍옥이 라이자키아의 사념을 보여주었다. 라이미르아의 존재 자체가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라이미르아에게 새겨 넣었다.
그런데도 라이미르아는 유진의 망토에서 나와,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 분명한 아버지를 가로막았다. 유진과 메르가 죽게끔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직…… 아직 살아 있어요, 유진 님.]
“알아.”
라이자키아가 라이미르아를 낳은 것은 씨받이로 쓰기 위해서다. 어느 정도 성장을 시키고 계속해서 알을 낳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자키아는 라이미르아를 씹어 먹지 않고 통째로 삼키기만 했다. 라이미르아는 라이자키아의 배 속에 살아 있다.
“그것도 약속이었지.”
유진은 라이자키아를 노려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전부 다 끝날 일이었다.
하멜의 두렵던 불꽃은 사그라졌고, 육체는 하찮은 인간의 말로에 걸맞게 널브러졌다.
한 걸음.
앞으로 겨우 한 걸음만 더 나아갔다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었다. 그 한 걸음을 걷지 못했다.
앞을 가로막은, 온정 한 줌 느끼지 않는 혈육을 삼키는 것을 우선했다.
앞을 가로막은, 인간 이상으로 하찮은 사역마를 내치는 것을 우선했다.
“세냐 메르데인!”
라이자키아가 광분해서 외쳤다. 지체된 한 걸음. 그 한 걸음을 걷지 못하여 세냐가 현현할 수 있었다.
“그,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드래곤의 앞에 마법을 펼치려는 것이냐!”
세냐의 존재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았다. 영혼을 이 공간에 현현할 수 있는 것은 세계수의 힘. 만전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힘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만 한다.
라이자키아는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 손을 치켜들었다.
“너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 불완전한 존재를 내게 보여서는 아니 되었어. 지금 네 존재가 나를 막을 수 있다 생각하는가? 막지 못한다. 절대 막을 수 없어!”
그 또한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하멜의 상처가 회복되기는 했다만 아까처럼 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라이자키아는 하멜의 마나가 흐르는 것이 불편한 것을 보았다. 저런 상태라면 아까처럼 심장과 코어를 폭주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
도달하지 못한 한 걸음에 의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걸음만큼 늦어졌을 뿐이다. 아직 라이자키아는 힘이 다하지 않았다.
300년 전에 씹어 삼켰던 로드의 드래곤하트. 그만큼 늘어난 마력이 라이자키아에게 여력을 주었다. 필요하다면 통째로 삼킨 혈육에게도 힘을 빼앗을 수 있다.
“두려운 모양이지?”
세냐가 속삭여왔다.
“네게 있어서 내 존재는 악몽 그 자체일 거야.”
“건방 떨지 마라, 인간……!”
“나는 네 앞에서 건방을 떨 자격이 있지. 안 그래? 오만함에 심취한 너를 이 칠흑 같은 어둠에 처박은 것이 바로 나니까. 라이자키아, 너는 드래곤도 아닌 비겁한 개자식이야. 내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를 노리고, 날 죽여 아카샤의 소유권을 강탈하려 했지.”
유진도 세냐에게 소유권을 양도받기 전에는 아카샤를 사용할 수 없었다. 소유권을 양도했음에도 세냐가 아카샤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카샤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지팡이기 때문이다.
라이자키아는 그런 아카샤를 탐했다. 세냐를 죽이고 아카샤를 온전히 갖기를 바랐다.
“너는 내 존재를 용납하지 못했어.”
세냐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집착한 것은 아카샤뿐만이 아니야. 바로 나. 인간이지만, 너보다 뛰어났던 마법사. 내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기에, 내가 약해진 순간에 직접 죽이러 왔던 거지?”
대수림에 왔을 때.
세냐는 아카샤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시점에 아카샤는 아크리온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라이자키아는 세냐를 찾아냈고, 그녀를 죽이기 위해 엘프의 영지에 왔다.
세냐는 만면에 비웃음을 짓고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라이자키아. 내가 네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너는 겁쟁이야. 죽고 싶지 않아서, 마왕이 무서워서 드래곤을 배신한 겁쟁이. 위대한 존재에서 타락했으면서도 마왕의 자리에 도전하기는커녕, 공작에 안주하고 만 겁쟁이.”
흔드는 손가락에서 빛이 피어올랐다. 실재하지 않는 영체. 그 한복판에서 마나가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이터널 홀. 세냐가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서클마법식의 극의. 아카샤가 쏟아내는 마나가 세냐의 이터널 홀에서 무한의 궤적을 그렸다.
“나는 인정할게, 라이자키아. 너는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어. 그만큼의 힘이 있지. 하지만 너는 나를 마법으로 넘지는 못해. 너도 그 사실을 알아서 내게 오지 않았던 거잖아? 그래서 너를 겁쟁이라고 하는 거야.”
반박할 가치도 없는 말. 그런데도 어쩜 이리 가슴을 깊이 파고드는 것일까……?
라이자키아는 분노와 치욕으로 덜덜 떨었다. 그는, 세냐의 가슴에서 회오리치는 무한의 궤적을 노려보았다.
이터널 홀.
들은 적은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저 인간 마법사는 아롯에 자리 잡았다. 서클 마법식을 창안하여 인간의 마법을 크게 발전시켰다. 고작…… 고작 수십 년을 연구하여, 만들어냈다는, 마법의 극의가 바로 저것이다.
인정할 수가 없다. 라이자키아는 이터널 홀을 이해하고 파악하려 했으나, 드래곤인 그로서도 저 무한한 궤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아아아!”
라이자키아는 괴성을 지르며 땅을 박찼다.
이해할 수 없다면 부숴 버리면 된다. 흔적도 남지 않게 부숴버리면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정곡을 찔러서 화가 났나 봐.”
세냐는 킥킥 웃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마주 웃으며 성검과 월광검을 들었다.
“가자, 하멜.”
세냐에게서 마법의 바람이 일어났다.
라이자키아
세냐의 바람이 유진을 감쌌다.
그리운 감각. 300년 전, 유진이 하멜이었을 적에. 전투가 벌어질 때면 세냐의 바람은 이런 식으로 하멜을 감싸곤 했었다. 적들이 퍼붓는 마법에서 하멜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하멜이 보다 자유롭게 싸우도록 돕기 위해.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 번 죽었고, 환생해 몸이 바뀌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환생한 자신은 유진 라이언하트이자 하멜 다이너스였고, 지금ㅡ 자신의 곁에는 그 세냐 메르데인이 있었다.
“그래.”
월광검과 성검. 2자루의 검을 앞으로 들었다.
“가자.”
라이자키아를 몰아붙였던 힘은 이미 사라졌다. 다시 이그니션을 쓸 수도 없다. 프로미넌스의 폭주마저도 조심스레 사용해야 한다. 마나의 출력과 흐름이 불안정한 것을 보니 공검이나 이클립스도 잘 만들지는 못할 것 같다.
라이자키아는 상태가 나아 보인다. 비늘을 마구잡이로 뭉개고 베어버렸지만, 놈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피해의 대부분을 수습했다. 마력을 펑펑 써댄 만큼 아까보다는 약하겠지만, 유진이 약해진 것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을 것이다.
특별히 유리하다 말할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머릿속에 패배에 대한 예감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노골적인 기색은 라이자키아도 느꼈다. 아까만 하더라도 하멜의 얼굴과 눈동자에는 절망이 어려 있었다.
연속되는 전투 속에서, 자신이 우위에 설 때에도 하멜에게는 절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우위가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는 것을 경계하고, 필연적인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까의 절망이 잔재조차 남지 않았다.
‘변하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라이자키아는 몇 번이나 반복했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우우우우! 라이자키아를 감싼 마력이 들끓으며 포효했다. 떠도는 마력 속에서 번쩍거리는 빛이 나타났다.
“마법은 신경 쓰지 마.”
세냐가 아카샤를 앞으로 들어 올리며 내뱉었다.
이터널 홀. 무한을 엮어 만든 고리에 셀 수 없이 많은 서클이 나타났다. 서클이 분열하고, 서로 얽히고, 흩어지고, 분열하고를 반복했다.
서클에 최적화된 마나의 운용방식.
그로 일으키는 마법 위력의 증폭.
술식의 효율적인 단순화.
영창의 생략.
분리시킨 의식으로 마법의 다중구현.
무의식에 마법을 입력하고 저장.
과거 아크리온에서, 메르는 이터널 홀이 가진 장점에 대해 저렇게 설명했었다. 유진은 이터널 홀에 착안하여 환염식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이터널 홀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보니 더더욱 이해가 불가능했다. 불완전한 영체 상태인 세냐에게서 느껴지는 마나는 굉장히 미약했다. 하지만, 막상 발현된 마법은 결코 미약하지 않았다.
ㅡ화르륵!
아카샤의 앞에 불꽃의 구체가 나타났다. 마법이라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대표적인 1서클의 공격마법, 파이어볼.
하지만 세냐가 만들어낸 파이어볼은 1서클의 공격마법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열기를 품었다.
수십 개의 파이어볼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마치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거대한 원을 그리며 불꽃의 차륜이 되었다.
불꽃의 선이 회전을 시작했다. 발해지는 열풍은 바깥으로 퍼지지 않고 차륜의 안에 가득 쌓였다.
꽈과광! 라이자키아가 두른 어둠에서 마력의 빛이 쏘아졌다. 셀 수 없이 많은 공격마법이 공간을 휩쓸며 유진과 세냐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 순간, 회전하던 불꽃의 차륜에 얽매여있던 열풍이 발산되었다. 콰아아! 열풍이 마법을 가로막았다. 회전하는 차륜이 질주를 시작했다.
지금.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찼다. 차륜이 마력을 찢는 틈. 그 한복판에 뛰어든 유진은 허리를 비틀며 2개의 검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느리다. 피할 수 있다. 라이자키아는 쌍검의 궤적에서 벗어나 손을 치켜들었다. 비대하게 변화한 드래곤의 팔. 그 거대한 둔기가 유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도중에 붙잡혔다. 은밀히 완성된 마법의 구속구가 팔을 뒤덮은 비늘을 붙잡았다. 덜컥거리며 가해진 제동을 떨쳐내기도 전에 성검이 팔을 절단했고, 월광검이 라이자키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크악!”
라이자키아는 마력을 사용해 몸을 강제로 뒤틀었고, 급히 펼친 폴리모프로 몸체를 거대하게 바꾸었다. 콰드득! 유진의 힘이 줄어든 만큼 월광검의 빛도 엷어졌다.
월광검으로 말끔히 꿰뚫지 못했다. 유진은 미련을 두어 더 검을 쑤셔 박지 않고, 월광검을 뽑아냈다.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면 미련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유진의 등 뒤에서 수십 색채의 빛이 반짝였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반딧불처럼 유진을 지나쳐서 라이자키아에게 도달했다.
반딧불? 벌레. 하지만 라이자키아의 가슴을 파고드는 빛은 그깟 하찮은 반딧불이 아니었다. ㅡ꽈르릉! 내려앉은 빛이 폭발을 일으키며 라이자키아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커헉……!”
드래곤의 비늘은 대부분의 마법에 면역을 갖는다. 하지만 이미 찢어진 틈 사이로 파고든 마법의 탄환은 비늘이 돋은 뿌리를 타격했다.
세냐 본인의 마법이 라이자키아보다 우월할지라도, 저 드래곤이란 종족이 타고난 모든 것들은 마법에 의한 공격에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세냐는 라이자키아를 죽일 수 없다.
세냐 혼자라면 그것이 당연하다.
지금은 그러한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300년 전의 5명이 강했던 것은, 그들이 개개인의 무력을 미뤄두고서 조화롭고 완벽했기 때문이다. 마법으로 죽일 수 없다면 칼로 베어 죽인다. 베어 죽일 수 없다면 주먹이나 다른 것으로 때려죽인다. 때려죽일 수 없다면 빛으로 정화해 죽인다. 정화해 죽일 수 없다면 다른 아무 방법으로 죽인다.
그런 점에 있어서 지금 유진과 세냐, 둘은 300년 전에 5명이서 하던 것들을 대부분 다 할 수가 있었다. 신성마법을 쓰지 못하는 대신에 빛을 뿜는 성검이 있으며, 성검으로 부족한 파멸은 월광검으로 할 수 있다. 드래곤조차도 오시할 수 있는 대마법사도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라이자키아는 몸으로 직접 절감하고 있었다. 싸우기 힘들다. 싸움이 뜻대로 성립되지 않는다. 아까의 유진이 압도적인 힘으로 대부분의 것을 찢어버리고 몰아붙여 왔다면, 지금 저 둘은 라이자키아를 말 그대로 분해하고 있었다.
마법은 비늘을 뚫기 힘들다. 그렇다면 성검과 월광검으로 먼저 비늘을 베어버린다. 파고든 마법이 비늘을 뿌리부터 터트리면서 살을 찢고 피를 쏟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성검과 월광검이 파고들어 온다.
라이자키아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방어마법. 연속된 공격마법이 약화시켰다. 공격. 마법이 붙잡았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참격에 섬뜩함을 느꼈다. 근접거리에서 쏴 갈긴 브레스는 제대로 터지기도 전에 성검과 월광검에 가로막혔다. 냉철하게 휘둘러야 할 양팔은 이런저런 방해에 치이며 추하게 허우적댔다.
모든 행동에 제약이 따르고 있다. 뒤로 물러서서 거리를 두기는커녕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대답을 쥐어짜기도 전에, 라이자키아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왼팔이 허전했다. 찰나라 할 짧은 순간에 10개는 넘는 마법이 라이자키아의 몸을 강타했고, 기어코 왼팔까지 앗아가 버렸다.
이럴 수가 없는데. 라이자키아의 눈동자가 뒤흔들렸다. 팔이 재생하는데에 걸리는 시간.
ㅡ늦다. 팔이 새로 돋아나는 것보다 저 멸망의 검이 베어오는 것이 빠르다. 라이자키아는 비명을 지르며 오른팔을 휘둘렀다. 카가가각! 비늘이 월광에 양단되었다.
세냐는 월광검의 달빛이 마법을 거부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마법을 월광검의 바로 뒤에 배치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마법은 철저하게 보조를 맡으며 유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웠어.”
세냐가 속삭였다.
퍼버벅! 유진의 주변을 맴돌던 마법들이 일제히 라이자키아에게 작렬했다. 뼈와 살과 비늘이 새로 돋아나던 왼팔이 다시 파괴되었다. 마법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짓이겨진 왼팔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피에 불순물이 섞였다. 세냐의 마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생충처럼 작은 크기로 화해, 라이자키아의 혈관에 머리를 쑤셔 박았다.
감히, 감히, 감히. 라이자키아는 이빨을 뿌득뿌득 갈며 마력을 일으켰다.
이깟 마법으로 드래곤의 피를 망가트릴 수 있으리라 보는가. 마력에 반응한 피가 뒤섞인 불순물을 태웠다.
꽈앙!
라이자키아의 왼쪽 어깨부터 폭발이 시작되었다. 연속된 폭발이 내부부터 몸을 터트리며 비늘을 흩뿌리게 만들었다. 마력이 일어난 순간, 세냐의 마법이 주어진 본질대로 마력과 달라붙어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위력 자체는 대단하지 않다. 몸 안에서 터진 것이라도, 피며 뼈며 살이며 비늘이며 모든 것이 마법에 대한 내성을 갖는 것이 드래곤이다.
죽이지 못해도 상관없다. 세냐가 바란 확실한 틈은 이미 만들어졌다. 그건 라이자키아도 알았다. 내부의 충격에 몸이 경직되었다. 사고의 반사가 아주 잠깐 동안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극한까지 단련해 낸 전사에게는 수십 번 검을 휘두를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시간이다. 이 순간에 검을 휘두를 것에 미리 언질은 듣지 않았다. 시선을 나누지도 않았다.
수십 수백 수천 번 해왔던 일이다. 유진은 라이자키아의 몸을 향해 월광검과 성검을 내질렀다.
피할 수 없다. 죽는다. 진짜 죽는다. 몸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마법에 의한 방어ㅡ 이것도 늦다.
당장 해야 할 것. 오랜 마룡은 이 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최선의 선택을 찾아냈다.
콰드드득! 월광검과 성검이 가슴을 관통해오는 순간. 라이자키아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콰가각! 관통한 검이 가슴을 완전히 꿰뚫었지만, 라이자키아의 몸이 순식간에 커지면서 결과적으로 검이 얕게 되었다.
인간의 모습을 버렸다. 폴리모프를 해제하고서 다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다. 얕기는 했지만 월광검과 성검의 빛은 라이자키아를 꿰뚫었고, 드래곤하트에 타격을 입혔다.
“크아아아악!”
라이자키아가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누더기나 다름없지만 거대한 날개를 퍼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다. 유진은 가슴에 쑤셔 박은 검을 뽑아냈다.
“그거 맞냐?”
유진은 코웃음을 치면서 라이자키아의 가슴을 걷어찼다.
화아악! 날개에서 마력의 폭풍이 쏟아졌다. 유진이 방어할 필요는 없었다. 세냐의 마법이 거센 폭풍 속에서 유진을 보호했다.
“그러게.”
뒤편의 세냐도 똑같이 웃었다. 성검과 월광검에 관통당했던 라이자키아의 가슴. 회복이 늦다. 몰아치는 마력도 아까보다 훨씬 약했다.
드래곤하트의 부상 때문이다. 폴리모프를 해제하면서 죽음을 피하기는 했다만, 이 부상은 치명적이다. 게다가 이 거대한, 드래곤의 몸뚱이가, 저 자그마한 인간 둘에게 이점의 거의 갖지 못한다는 것은 라이자키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라이자키아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크게 입을 벌렸다. 콰아아아! 시커먼 독기의 브레스가 유진과 세냐를 향해 쏟아졌다.
“가, 하멜.”
세냐가 속삭였다.
ㅡ파직! 유진의 등 뒤에서 프로미넌스가 치솟았다. 흩날리는 깃털에 세냐의 마법이 더해졌다. 유진은,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라이자키아의 마법이 세냐에 의해 파훼되는 것을 느꼈다.
파아앗! 깃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유진의 모습도 사라졌다. 흩날리는 깃털 수십 개가 유진을 위한 길이 되었다. 시커먼 번개 자국이 브레스의 궤적을 벗어나 하늘로 역류했다.
홀로 남은 세냐는 추락하는 브레스를 향해 아카샤를 뻗었다. 200년 전에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 바로 저 시커먼 브레스다. 하지만 세냐는 그 브레스에 두려움 따위의 감상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쏟아지는 어둠을 보지 않았다. 그 어둠의 바깥을 가르며 나아가는 빛을 보았다.
‘그래, 빛.’
세냐 메르데인.
전쟁이 끝나서 지옥을 떠났지만, 그녀의 삶은 계속해서 지옥이었다. 밝혀줄 빛이 없으니 어디에 있건 항상 어둡기만 할 뿐이었다. 한참 전에 지나 버린,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추억을 잔불로 삼았다.
새냐가 지옥 같던 마경에서 돌아오고서 수십 년 동안 갈구하며 그려왔던 빛. 저 빛이야말로 세냐에게는 한낮의 태양이자 어두운 밤의 달이자 별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만의 빛이었다.
“삼켜지지 않아.”
라이자키아의 독기와 어둠과 마력은, 세냐가 갈구했던 빛을 삼키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다. 세냐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아카샤를 들었다.
화아악! 거대한 마법진이 세냐의 앞에 나타났다. 삼켜지지 않는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자키아가 발악처럼 쏘아낸 브레스가 세냐의 방어마법에 가로막혔다.
라이자키아는 머리를 비틀어 브레스의 궤적을 바꾸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브레스의 방향을 아무리 바꾸어대도 죽음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력을 쥐어짰다. 물러서지 않는다면, 더 이상 다가올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허무한 시도였다. 시커먼 불꽃이 방어를 부수고 들어왔다. 폴리모프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의외로 따뜻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목을 파고드는 멸망의 빛은…… 그토록 불길한 색이면서도, 이전에 베였을 때와는 달리 따뜻했다. 온기가 스치고서, 모든 것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뿜어지는 뜨거운 피는 사무치는 냉기를 덥히지 못했다.
시야가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를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흩어지는 마력은 한 줌조차도 라이자키아에게 쥐어지지 않았다.
“커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마룡이 되면서까지 갈구했던 것. 이루고 싶던 것.
……애초부터 그런 것이 있기는 하였나.
라이자키아가 타락하면서까지 바라던 것은 오직 삶뿐이었다. 명예, 영광, 그런 것은 타락하면서부터 모두 잃었다.
잃었기에 집착했다. 잃은 모든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오만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타락에 상관없이 자신은 여전히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고결하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두가 하찮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처음부터 그랬나.”
들끓는 분노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의문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완전히 결정되어 버린 것. 타락하며 한 번 거슬렀으나, 지금 라이자키아에게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룡은 목이 베이고 드래곤하트가 파괴되는 순간에야 간신히 드래곤다운 사고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찮지 않군.”
인정했다.
“오히려 내가 하찮은 존재였다.”
삶을 영위했다면, 계속해서 오만한 존재로 있어도 되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죽어버리게 되었으니 더는 오만한 존재로 있을 수가 없었다. 라이자키아의 손에 죽였던 로드도, 마왕에게 죽었던 동포들도. 모두가 드래곤으로 죽었다. 세상을 위해 죽었다.
하지만 라이자키아는, 지금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다. 타락한 마룡이 늦게나마 죗값을 치를 뿐. 라이자키아는 자신의 처량하고 비참한 죽음에 연민 없이 조소했다.
“추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구나…….”
라이자키아는 긴 탄식을 흘리면서 눈동자를 움직였다. 어둠이 드리우는 시야에서 유진이 보였다. 그의 손에 쥐어진, 멸망의 검을 보았다.
차라리 300년 전에 저 빛에 죽었다면.
라이자키아는 마지막 후회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라이자키아
“씨X놈의 새끼, 지 뒈진다고 감성팔이하고 있네.”
카악, 퉤. 유진은 목 끝에 걸린 피를 아래로 뱉으면서 투덜거렸다.
죽였다. 라이프배슬을 따로 두고 있는 리치나 데스나이트 따위의 언데드도 아니고, 멀쩡히 살아 있는 마룡의 드래곤하트를 양단했다. 아무리 마룡이라도 이건 절대 못 살아난다.
이만큼이나 오래 묵은 고룡의 드래곤하트를 취하지 못한 것? 아쉬워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수백 년 전에 타락하고 마력에 물든 드래곤하트. 흑마법사나 다른 마족에게는 죽음을 감수하고서도 얻고 싶은 보물이겠지만, 인간인 유진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독물일 뿐이었다.
유진은 뻐근한 목을 돌리면서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목이 깊이 베인 드래곤의 거대한 몸뚱이가 기울고 있다.
‘베어내는 것’에는 월광검보다 성검이 더 편하고 다루기가 쉬웠다. 유진은 대강 위치를 가늠하고서 성검을 높이 들었다.
카가각! 성검이 드래곤의 배를 갈랐다. 깊숙이 파고든 빛이 비늘과 살을 가르고, 덩치만큼 커다란 위장까지 베어냈다.
라이자키아가 수백 년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조금 전에 통째로 삼킨 라이미르아뿐.
위액이라도 함께 쏟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라이미르아는 깔끔한 모습이었다. 유진은 위장 안쪽에서 웅크리고 기절해 있는 라이미르아를 끌어냈다.
옷이 녹거나 그런 것도 없었고, 상처도 없었다. 뽀송뽀송하지는 않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울어댄 탓이었다. 유진은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있는 라이미르아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통째로 삼켜져 죽을 뻔했으니, 내가 지 애비를 죽인 것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
애비라 할 수도 없는 놈이기도 했고. 애당초 부성애도 효심도 없지 않았나. 유진은 라이미르아를 깨우고,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기절한 라이미르아를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메르가 알아서 상황을 설명해 줄 것이다.
메르는 라이미르아의 생환에 크게 기뻐했지만, 그렇다고 라이미르아를 바로 부둥켜안고서 깨우지는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는 라이미르아보다 세냐가 더 중요했다.
“세냐 님!”
메르가 망토 밖으로 뛰쳐나왔다. 라이자키아도 죽었으니, 아까 하지 못했던 세냐와의 해후를 마저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메르는 곧장 세냐에게 뛰어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세냐의 몸이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메르는 그 광경에 커다란 불안을 느끼며 울먹거렸다.
“왜 울고 그러니?”
세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메르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히끅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세냐는 그런 메르를 사랑스럽단 눈으로 보면서, 칫칫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이야. 내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것이 필연으로 이어진 기적이듯 말이지.”
“세냐 님…… 세냐 님은, 설마 사라지시는 건가요?”
“응? 지금은 사라지지.”
유진도 솔직히 그것이 불안하기는 했다. 이 개고생을 하여 라이자키아를 죽였다.
그런데…… 그런데 만약, 세냐가 이곳에 와서 유진을 구한 것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리를 해서 얻어낸 기적이라면?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유진을 구하기 위해 희생한 것이라면?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 이대로 죽는 거냐?”
“미쳤니?”
유진은 불안과 울적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슬프고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세냐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너, 설마 내가 이대로 죽어 사라지길 바라는 거야?”
“아니야.”
“그런데 왜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를 해? 내가 왜 죽어!”
“그냥…… 어…… 네가 날 구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이 아닐까 해서…….”
“다른 각오는 조금 했는데 죽을 각오는 안 했어.”
“무슨 각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든 네가 날 와락 끌어안고서 이이, 입술을 빼앗으려 할 때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입술을 빼앗길 각오다 개자식아.
세냐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지. 그녀는 사라져 가는 손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으흠, 내 각오에 대해서는 네가 알 필요는 없고. 뭐 다 잘됐잖아, 그렇지?”
“잘되기는 했지.”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멜. 조금 무리하기는 했지만, 뭐, 나는 다시 내 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세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유진을 빤히 보았다.
“미리 말해두는데. 너, 괜히 날 마중 나오겠답시고 세계수에 오기만 해. 나 진짜 화낼 거야.”
“왜?”
유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만나고, 도움도 받았다. 심지어 세계수의 영지는 유진에게서 멀리 있지도 않다. 하루, 아니, 반나절만 이동하면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기서 세냐와 만나는 편이 낫지 않나? 봉인에서 풀려나 부활한 세냐를 마중하는 것이 아름다운 그림이지 않나?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세냐의 태도는 단호했다.
“안 된다면 안 돼. 진짜 죽어 너.”
간단한 이유였다. 라이자키아가 죽으며 독기는 정회되었을 테니, 세계수의 비호에서 벗어나 육체를 수복해도 괜찮을 것이다. 세냐는 그 과정을 유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전에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그건 엄밀히 말하자면 불가항력이지 않았나. 가슴의 구멍도 메우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체도 재구성하고, 그 외에 뭐 이런저런 준비도 해야 하는데. 그런, 보여주지 않아도 될 것을 유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어쩌긴 뭘 어째? 그…… 야, 약속을 정하고 만나면 되지. 그래, 한 달 뒤는 어때?”
“어디서?”
유진이 눈썹을 찡그리며 묻자, 세냐는 크게 숨을 삼켰다.
……어디냐니. 지금 세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는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삶의 대부분을 보낸 곳. 고독에 사무치지 않기 위해, 행복하고 찬란하던 추억을 집필한 곳.
숲이 가깝고 공기가 좋은. 하늘이 높고 푸르른 곳. 밤이 되면 별이 잔뜩 뜨는 곳. 짠 바람 부는 바다가 아닌, 완만한 강줄기가 흐르는 곳.
“내 집. 아직 남아 있을 것 아냐?”
그 집은 세냐의 이상을 그대로 담아서 지었다. 별채 하나는 통째로 서재로 삼았다. 서재를 밝혀 줄 커다란 벽난로도 두었다. 나긋나긋 흔들리는 의자도 두었다.
“거기서 만나.”
치명적인 문제가 있기는 했다.
300년 전에 세냐의 저택은 저런 장소에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지가 개발되었단 말이다. 숲은 이미 지워져서 메르데인 광장이 되었고, 강줄기도 메워졌다. 다행히도 저택은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긴 했다만, 세냐가 이상을 담았던 저택은 이미 300년 전에 사라져 있었다.
물론 세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약속은 반만 지켜버렸네. 다음에 널 다시 만나면, 하멜이 아니라 지금의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했는데.”
세냐는 시큰한 눈시울을 손등으로 비비며 웃었다.
“기억나? 데리러 오지는 말라고도 했잖아. 내가 갈 테니까, 너는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랬었지.”
“……다행이야. 내가 늦지 않아서. 널 구할 수 있어서. 네게, 올 수 있어서.”
신경 써 닦았는데도 눈물은 흘러버렸다. 세냐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굳이 닦지 않으며 메르를 쳐다보았다.
“메르.”
“네, 네엣. 세냐 님.”
“이리 와. 나는 곧 여기서 사라져 버리겠지만, 아직 남아 있는 동안 널 안고 싶어.”
메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세냐에게 달려들었다. 세냐는 품에 안기는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내가 없는 동안 많이 힘들었다고는 들었어.”
“저는…… 괜찮아요.”
“네가 괜찮아도 내가 괜찮지 않아.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린 내가 지금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메르는 대답하지 않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네게는 정확한 이유를 남기고 떠났어야 하는데…….”
“저도…… 유진 님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세냐 님이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은 예기치 못한 사고 때문이잖아요. 저는, 세냐 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진심이었다. 메르는 세냐를 걱정했을 뿐, 그녀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냐는 메르의 진심을 느끼고서 그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날 대신에 하멜을 도와줘서 고마워.”
“흑…….”
“너는 자랑스러운 아이야, 메르 메르데인.”
메르는 그 말에 가슴을 충만히 만드는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 하나에만 열중할 수는 없었다……. 메르는 사라지는 세냐의 몸을 의식하면서,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진 님도 끌어안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응?”
“기왕이면 저를 중간에 두고, 유진 님과 세냐 님이 둘이서 꼬옥 끌어안았으면 좋겠어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세냐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메르는 그런 세냐의 얼굴을 실눈을 뜨고 올려다보았다.
‘에잉…….’
예상은 없지만 이렇게나 부끄러워할 줄이야! 메르는 어쩔 수 없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시면 큰일 나요, 세냐 님.”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뭘?”
“마음 독하게 먹으셔야 해요. 지금 유진 님의 주변에는 여우…… 아니, 굶주린 늑대가 배회하고 있다구요.”
늑대? 무슨 늑대? 세냐는 부끄럽고 혼란스러워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메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세냐에게서 물러났다.
“뭐, 제가 말하는 것보다 세냐 님이 직접 보시는 편이 이해가 빠르겠죠.”
“잠깐…… 메르, 잠깐, 너 여기 다시 와봐. 내가 알아듣게 말을 해!”
세냐는 물러서는 메르를 잡으려 했지만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몸은 반쯤 사라져 있었고, 영혼은 차원의 틈새를 떠나서 본래 있어야 할 세계수의 안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둘이 나누는 대화는 유진도 들었다.
여우가 아닌 굶주린 늑대…… 유진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머리를 짓눌렀던 폭신한 무게를 떠올렸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구애하던 ‘둘’을 떠올렸다. 확실히, 둘은 여우보다는 늑대가 어울리긴 했다.
“크흠…….”
유진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헛기침만 내뱉었다. 그 모든 것을 세냐에게 설명하기에는 지금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그러니까, 유진은 파국과 파란을 지금의 자신이 아닌 미래의 자신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그럼, 한 달 뒤 오늘. 아롯에 있는 네 저택에서 만나자.”
“……기왕 날짜를 잡는 거 정확하게 잡아. 나는 내가 기다리는 것도, 널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싫어. 30일 뒤의 정오. 알았어?”
“응.”
유진은 빙긋 웃으며 세냐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때 봐, 하멜. 아니.”
세냐는 혼을 떨리게 하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유진을 응시했다.
하멜과는 다른 잿빛 머리카락. 흉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보석처럼 빛나는 금색 눈동자.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세냐가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하멜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세냐는 하멜이 아닌 그 이름을 불렀다. 전생의 이름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완전히 바뀌어 버리고 달라진 육체에 깃든 혼이, 세냐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세냐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부끄럼을 느끼며 키득키득 웃었다.
“한 달 뒤에 만…….”
몸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세냐는 유진이 들어 올린 손을 보았다.
왼손. 약지. 왜? 반지? 왜? 대체 왜? 세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흔들리는 녹색 눈동자에 빛이 푹 꺼졌다. 늑대? 굶주린?
“야 이 개…….”
세냐의 처절한 외침은 끝까지 내뱉어지지도 않았다. 화아악! 그녀의 몸이 완전히 빛으로 변해 버렸다.
유진은 흩어지는 빛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냐는 사라져 버렸고, 아카샤만 덩그러니 허공에 떠 있었다. 유진은 아카샤를 손에 쥐면서 투덜거렸다.
“쟤 방금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야?”
“저야 모르죠.”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데…….”
“저는 너무 환하고 눈부셔서 잘 보지 못했어요. 유진 님과의 짧은 이별이 아쉬워서 그런 표정을 지으셨던 것 아닐까요?”
메르가 세냐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메르는 방금 전 세냐가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부끄러워하던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 사라지는 순간에 감정이 북받쳐 무어라 외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유진은 떨떠름한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납득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목을 깊이 베고 드래곤하트를 파괴되기는 했다만, 라이자키아의 시체는 아직 남아 있었다.
본래 드래곤은 스스로가 바라지 않는 한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드래곤은 세상에 자신의 시체를 남기지 않고, 가지고 누렸던 모든 것을 마나와 세상에 환원하여 재가 된다.
하지만 이곳은 세상이 아닌 차원의 틈새이며, 라이자키아는 타락한 마룡이다. 라이자키아가 바랄지라도 세상은 그의 시체를 돌려받지 않을 것이다.
“집에 가지고 돌아갈 선물은 생겼네.”
마룡의 시체다. 하지만 마력이 깃들었던 드래곤하트는 완전히 파괴했으니, 정화만 제대로 한다면 소재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뼈, 가죽, 비늘. 저만큼 커다란 사체라면 라이언하트의 모든 기사단을 무장시킬 수도 있다.
유진은 히죽 웃으며 라이자키아의 시체에 손을 얹었다.
아카샤가 차원의 문을 열었다.
라이자키아
유진이 차원의 틈새에 들어가고서 쭉, 크리스티나는 흙 위에 무릎을 꿇고서 기도를 올렸다. 부디 유진이 상처 없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빛의 신에게 기원했다.
그런 크리스티나의 곁에는 시안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빛의 신도가 아니기는 했어도, 형제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도쯤은 꼭 입교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앗.”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것은 로베리안이었다. 그는 불안과 걱정 가득한 얼굴로 괜히 서성거리다가, 맑은 하늘에 번져가는 일그러짐을 발견했다.
“뭐야?”
바위 위에 앉아서 정령과 교감을 나누던 멜키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크리스티나와 시안도 숙였던 고개를 들고서 하늘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일그러짐은 점점 커지면서 균열이 되었다.
소리 없이 균열이 갈라졌고, 그 한복판에서 유진이 떨어졌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가 놀란 소리를 냈다. 이렇게 빨리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유진이 차원의 틈새로 들어가고서 1시간이 조금 넘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라이자키아를 죽이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에 대한 의문은 곧 깔끔하게 사라졌다. 유진의 뒤를 따라 떨어지는 거대한 드래곤의 시체. 마룡 라이자키아. 깊이 베인 목은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만,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꺄아아악!”
높은 비명을 지른 것은 멜키스였다. 그녀는 두 눈을 까뒤집고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향해 양팔을 활짝 펼쳤다. 떨어지는 시체에 그대로 깔려 죽기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물론 멜키스는 뒈진 드래곤의 시체에 압사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 몸뚱이의 아름다운 곡선, 검고 매끄러운 비늘. 썩둑 베인 목의 단면에서 보이는 금속을 연상시키는 뼈!
멜키스의 백색마탑은 정령술뿐만 아니라 연금술도 다룬다. 때문에 멜키스도 연금술에 대한 조예는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ㅡ아니! 연금술사가 아닌 그냥 마법사일지라도, 저만큼이나 오래 묵은 고룡의 시체를 직접 보게 된다면 흥분으로 눈이 까뒤집히리라.
“안 비키고 뭐 합니까?”
먼저 내려온 유진은 멜키스를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 후다닥 다가온 로베리안이 멜키스의 몸을 잡아끌었지만, 멜키스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로베리안에게 붙들린 체로 버둥거렸다.
“나, 날 줄게. 내 모든 걸! 그러니까 저걸 나에게 줘!”
“개소리 말고 좀 가세요.”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쿠르르릉! 유진이 일으킨 마나가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허공에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유진은 그 거대한 시체를 아무도 없는 땅에 내려놓으며 긴 숨을 내뱉었다.
“더럽게 크네.”
차원의 틈은 아무것도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라이자키아의 덩치가 큰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 풍경과 대조할 수도 있어서 저 어마어마한 덩치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라이자키아의 시체는 어지간한 왕성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나도 미친놈이지.’
저 덩치를 상대로 육탄전을 시도했으니. 유진은 라이자키아의 거대한 꼬리를 보면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처음 꼬리에 얻어맞았을 때를 떠올린 것이다. 솔직히 그 한 방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력이긴 했다.
‘몸은…… 다 낫지는 않았군.’
유진은 표정을 구기면서 몸을 살폈다. 세계수와 정령의 빛으로 간신히 되살아났다. 조금만 늦었어도, 유진은 정말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기적. 세냐가 말했던 대로 유진에게 일어난 일은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망가진 심장과 코어가 회복되었고, 뼈와 살과 내장 등도 회복되었다.
하지만 완치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마나가 뜻대로 유연히 흐르지 않는 것을 보니 당분간은 얌전히 휴식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끝난 것도 기적이었다. 1번 써도 며칠은 앓아눕는 이그니션을 2번 연달아 썼는데, 이 정도면 반동이 거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유진 님!”
부상을 살피던 유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뒤에서 와락 끌어안은 크리스티나 때문이었다. 유진은 등에 느껴지는 폭신하고 말랑한 감촉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무사, 무사하신 겁니까? 아무 상처도 입지 않으신 겁니까?”
“일단은…… 음. 죽을 뻔하기는 했는데, 어떻게 무사히 끝났네.”
“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진은 몸을 이리저리 꼬물거리면서 크리스티나에게서 벗어났다. 돌아본 크리스티나는 벌써부터 눈물을 줄줄 쏟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 다 설명해 드릴 테니까.”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다. 시안도 유진에게 다가오고, 로베리안도 굉장히 궁금하단 얼굴이었다. 멜키스는? 그녀는 살금살금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거 비늘 한 조각이라도 받고 싶으시면 얌전히 있으쇼.”
“어째 점점 더 무례해지는 것 같다 얘.”
“멜키스 님이 점점 더 제가 존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아니지, 처음부터 저랬던가? 유진은 대마법사다운 품위라곤 하나 없는 멜키스를 흘겨보았다. 멜키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아하게 턴을 하더니 로베리안의 옆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월광검의 정체나…… 베르무트에 관한 의혹. 그런 것은 당연히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이야기는 아니스와 세냐와 나눠야 할 이야기다.
라이자키아와의 전투. 에드몬드가 술법을 위해 끌어모았던 마력을 라이자키아가 차지해 버린 것. 그리고 전투 중간에 세냐의 도움을 받은 것.
“세냐 님이 유진 님을 도우셨단 말입니까?”
로베리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세계수의 도움을 받으셨답니다. 솔직히 세냐 님이 돕지 않으셨다면 제가 죽었을걸요.”
라이자키아가 생각했던 것만큼 약해진 상태였다면 어찌어찌 고전했어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자크 그 자식이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투덜거렸다. 그 말에 로베리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애당초 마룡이 먼저 말했다 하셨잖습니까. 에드몬드가 먼저 마룡의 마력을 탐하였다고. 에드몬드가 죽으면서 그의 의식과 마법 모두가 붕괴되었으니, 라이자키아 정도의 마룡이라면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지기 전에 주인을 잃은 마력을 빼앗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죠.”
“로베리안 님은 은근히 발자크를 많이 챙겨주시네요.”
“근거가 희박한 비난과 의심은 옳지 않다 생각할 뿐입니다. 저도 솔직히 흑탑주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그의 비원은 꽤나 가슴을 울리더군요.”
로베리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진은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생각했다. 과거와 현생을 통틀어, 유진이 만나 본 마법사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마법사는 로베리안이었다.
[세냐 님의 인품이 뭐 어때서요.]
‘걔가 솔직히 인품이 뛰어나지는 않지.’
[세냐 님한테 이를 거예요.]
‘일러라 일름보야.’
유진은 그렇게 이죽대주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뭐 어쨌든. 잘 끝났습니다. 죽을 뻔했는데 죽지는 않았고, 오히려 라이자키아를 죽였고, 세냐 님도 구해냈죠. 당장 돌아오지는 못하시지만, 몸을 추스르고 난 뒤에 아롯에 온다고 하셨습니다.”
“아, 아롯에?”
로베리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예전, 유진이 아크리온에서 아카샤의 소유권을 드러냈을 때. 아롯의 왕정은 유진이 아카샤의 소유자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두고서 청문회를 열었었다.
-세냐 님이 제게 말하시길, 나중에 아롯에 돌아와서 이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 버리시겠답니다.
-세냐 님은 살아 계시고, 아롯에 분노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분노가 어떻게 이뤄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음…… 제가 알기로, 왕궁 아브람은 세냐 님이 선물하신 것으로 아는데……. 왕궁을 감싼 호수도 세냐 님이 만드신 거고, 왕궁의 봉마진도 세냐 님의 것 아닙니까? 그러니 아마 왕궁을 통째로 수장시키지 않을까…….
-아니면…… 유성우를 쏟아부을지도 모르죠. 제가 알 바는 아닙니다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로베리안에게 한쪽 눈을 찡긋였다.
“예전에 청문회 때도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로베리안 님과 적색마탑은 세냐 님의 분노에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을 겁니다.”
“그……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아롯은 세냐 님의 귀환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취해야…….”
“세냐 님은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그냥 얌전히 있는 것이 저희 모두가 화를 피하는 길이 아닐까요.”
“나는? 나는 어떡해. 유진아, 나 이번에 너 많이 도와줬다? 응? 적색마탑 말고 백색마탑도 좀 신경 써줘야 해.”
멜키스는 재빨리 태세를 바꾸고서 유진에게 아양을 떨었다. 유진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멜키스를 마나로 밀어내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세냐 님의 귀환 건에 대해서는 아롯에 알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뭐냐, 괜히 먼저 알렸다가 그 일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음, 확실히 그건 경계해야 할 문제…….”
정론을 말하니 로베리안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어떻게 할 건데?”
왕궁만큼이나 커다란 드래곤의 시체. 사실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저것이 다른 생물이나 몬스터가 아닌 ‘드래곤’이라는 것. 그것도 10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최고이자 최강이며 최악으로 여겨지는 마룡 라이자키아의 시체라는 것.
그 실물에 압도되어 있던 시안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여기에 묻고서 장례라도 치르려는 거냐?”
“미쳤냐? 이 아까운 걸 왜 묻고 가? 이건 전리품이야. 라이언하트에 가져가면 애니실라 님이 좋아죽으실걸.”
“뭐……?”
전리품? 마룡의 시체가? 시안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유진과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드래곤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데, 그건 평범한 드래곤의 얘기고…… 저건 좀 많이 버려야 할 거야. 특히 피는 절대 못 쓸 거고. 살…… 고기? 요리라도 하면 먹을 수 있을까, 괜히 먹어서 탈 나는 것이 아닐까 몰라.”
“드래곤의 고기를 먹으면 불로불사를 얻는다는 낭설이 있기는 해.”
멜키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물론 검증되지는 않았지. 드래곤의 고기를 먹었다가는 다른 드래곤이 귀신같이 알아차려서 죽이러 온다니까. 오히려 그게 검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이러 와서, 죽은 거잖아. 결국 말도 안 되는 미신이라는 말씀. 요즘 시대에 누가 그딴 미신을 믿겠어?”
“그러는 멜키스 님은 왜 미신에 그리 맹목적이십니까?”
“미신? 무슨 말이야? 나는 미신은 믿지 않아. 내가 하는 것들은 모두가 나 자신이 검증을 마친 진실 된 것들이지.”
이 문제에 있어서 멜키스는 굉장히 당당했다. 실제로 그녀는 3명이나 되는 정령왕과 계약을 맺지 않았나.
“고기는 먹을 수 없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도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서 입을 열었다.
“유진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 피와 마찬가지로, 마룡의 살은 인간에게 있어서 극독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뼈랑 비늘, 가죽, 이빨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정화한다면 쓸 수 있겠지만, 격도 격이고 덩치도 굉장히 크니,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당장 서두를 생각은 없어. 일단 봉인 정도만 해두고, 망토 안에 넣고 가져가지 뭐.”
말하고서 순간 아차 했다. 유진의 망토 안에는 메르뿐만 아니라 라이미르아도 있다.
지금 라이미르아는 막 정신을 차리고서 메르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라이미르아의 옆에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놓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나?
‘망토 안에서 나오라 하지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이거 돌려줄게.”
유진은 목에 건 로사리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말에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크리스티…….]
‘안 됩니다, 시스터. 이건 저희 사이에서 이미 약속되었던 일. 이 은총은 온전히 저만이 즐기고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 어찌나 잔인한지…… 당신은 죽은 제가 가엽지도 않으십니까?]
‘예.’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즉답. 평소 능청스레 굴던 아니스조차도 저 냉혈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크리스티나는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지고, 풍성한 금발을 양손으로 들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유진의 앞으로 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디.”
달콤하고 촉촉한 속삭임. 별것도 아닌데, 유진은 괜히 침을 꿀꺽 삼키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양손으로 들춰 앞으로 넘긴 금발. 드러난 크리스티나의 목은 상아처럼 매끈하면서 땀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어, 어어.”
유진은 몸을 낮추어 크리스티나의 목에 로사리오를 걸어주었다. 그 순간에 다가온 향긋한 체취에 유진의 입이 바짝 말랐다.
[그냥 죽어버리세요.]
라이미르아를 붙들고 있던 메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성을 또렷하게 해주는 고마운 외침이었다.
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서, 로사리오의 목걸이를 찰칵 연결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려 했는데, 크리스티나의 양손이 유진의 손을 붙잡았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는 유진과 자신의 손을 하나로 엮어 기도를 맺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올려다보는 얼굴. 손등에 전해지는 온기. 촉촉한 눈동자.
유진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꿀꺽 침을 삼켰다. 크리스티나는 그런 유진을 보며 방긋 웃더니 손을 풀어주었다.
‘반응이 옵니다, 시스터.’
[과연…… 그렇군요. 저번에 저희 둘이서 확실히 마음을 전한 것이 하멜에게 유효했던 모양입니다.]
‘예, 틀림없습니다.’
[저 우둔한 남자는 직접 말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아먹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저희는 세냐보다 유리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세냐 그 계집아이는 부끄럼이 굉장히 많아, 기껏 재회한 하멜에게도 쉬이 고백하지 못할 겁니다.]
십수 년을 함께 여행했던 아니스는 세냐의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공동집필했던 동화책의 마지막에 적은 글 한 줄이 세냐가 평생 했던 일탈 중에서 가장 대범한 일이었다.
-세냐, 난 널 좋아했어.
“그럼 이제 저걸 가지고서 라이언하트에 돌아가는 거지?”
시안은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힐긋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대수림에서의 일은 모두 끝이 났다. 이바타에게서 코칠라를 정복하고 난 뒤의 전리품 절반을 받는 일이 남아 있기는 했는데, 직접 받으러 가지 않아도 이바타가 알아서 라이언하트에 가져다줄 것이다.
“너 먼저 돌아가라.”
“왜?”
시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나는 아롯에 좀 들렀다 갈게.”
남은 시간은 30일. 이곳 대수림의 중추에서 곧장 돌아가는 것도 시간이 촉박한데, 중간에 라이언하트에 들렀다가 하루 이틀 늦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유진은 세냐가 화를 내는 모습을 떠올리며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세냐 메르데인
사마르의 무역도시를 지나 키옐의 국경선에 도달했다. 유진은 그곳에서 우선 시안과 헤어졌다.
“가주님이랑 애니실라 님에게 잘 말해놔.”
사마르의 전쟁에 관한 사실은 라이언하트에 알려두지 않았다. 하지만 규모가 규모이기도 하고, 라이언하트의 눈이 어두운 것도 아니니 지금쯤이면 대수림에서 있었던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을 수도 있었다.
애니실라가 차기 가주, 끔찍이도 아끼는 아들이 그런 위험한 전장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눈이 까뒤집힐지도 모르는 일. 그래서 유진은 시안을 먼저 라이언하트에 돌려보내고, ‘전리품’에 대한 사실을 미리 알리도록 부탁했다.
“어디 다쳐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전리품도 넉넉히 가지고 돌아가면 어머님과 가주님도 오히려 기뻐하시겠지.”
이오드가 아롯에 가고, 유진이 양자가 되면서부터 어머니 애니실라는 굉장히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 전에, 시안의 승계권이 위태롭던 시절의 애니실라는 테오니스만큼이나 극성맞은 어머니였다.
시안은 그때의 기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서, 성인이 된 지금도 애니실라가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몸이 굳곤 했었다. 지금도 솔직히 그랬다. 태연한 얼굴로 말은 했지만, 시안은 애니실라가 화를 내는 것이 아닐까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쫄지 말고 인마. 이바타한테 받을 전리품만 해도 라이언하트 몇 년 치 예산은 족히 넘을 거고, 고룡의 시체는 황제가 제국을 팔아도 못 산다고.”
“그건…… 그렇지.”
“또 뭐야, 어, 이런 물질적인 것 말고. 다른 전리품도 얻었잖아. 너 슬슬 백염식 5성 오를 것 같다며? 가주님과 애니실라 님은 다른 것보다 네 성취에 더 기뻐하실걸.”
“그…… 그렇지?”
유진의 띄워주기에 시안의 굳었던 얼굴이 살살 풀려갔다. 곧 시안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나만 믿고 있어. 네게 불똥 하나 튀지 않도록 잘 해결해 놓을 테니까.”
예부터 칭찬은 곰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었다. 유진은 경쾌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시안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뭐 거짓말은 하지 않았잖은가. 이번 전쟁에서 시안이 크게 성장한 것도 사실이니, 풍족한 전리품까지 들고서 돌아가면 애니실라도 화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시안을 떠나보낸 뒤. 일행은 워프게이트를 타고서 곧장 아롯으로 넘어왔다. 그 뒤에는 자연스럽게 로베리안과 멜키스와 헤어졌다.
세냐에 대한 이야기는 아롯의 왕정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미리 알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해뒀다. 유진은 각자의 마탑으로 복귀하는 둘을 배웅하고서, 크리스티나와 함께 아롯의 시내로 내려왔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겠습니다만, 하멜.”
입술을 연 것은 아니스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라이미르아에게 막대 사탕 하나를 쥐여주면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세냐와 만나러 가는데 그 모습 그대로 가려는 것입니까?”
여정을 서두른 덕에, 세냐와 약속했던 30일보다 하루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스는 유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어떤 모습을 하고 가건 세냐 그 계집애는 방긋방긋 웃어대며 좋아하겠지만, 저는 기왕이면 하멜 당신이 조금 더 멋지게 꾸미고 갔으면 합니다.”
“지금 내 꼴이 뭐 어때서 그래?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전생보다 얼굴이 잘생겨진 것은 자알 알겠습니다만, 하멜 당신은 자신을 너무 후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 그건 전생에도 그랬군요.”
아니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이죽댔다.
“사실 이런 대화에서 가장 난감한 것은, 당신의 그 오만무도한 말에 만족스러운 반박을 하지 못하는 저 자신입니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제 기분과 평가가 아닌 세냐의 기분과 평가입니다.”
아니스는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유진이 말한 대로이긴 했다. 근 한 달 동안 서둘러 이동하기는 했지만, 유진의 외모에는 조금의 흠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정리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덥수룩하다는 것?
하지만 저런 더벅머리도 얼굴이 잘생기면 지저분한 느낌 없는 야성적인 스타일이 되는 법. 마법으로 매일 관리한 옷도 조금 해지기는 했지만 추레한 느낌 없는 빈티지로 보였다…….
“……으흠.”
아니스는 낮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에 유진이 멋지게 보이듯 세냐의 눈에도 그렇겠지만, 아니스는 기왕이면…… 300년 만에 이뤄지는 재회에서 세냐에게 보다 많은 기쁨을 주고 싶었다.
[시스터.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이 첫 만남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전에 세냐와 하멜의 만남은 항상 우연에 기적에 갑작스러우며 평범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서로가 확실하게 약속까지 잡고서 만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씀은…… 그러니까…… 지금 유진 님과 세냐 님이, 데, 데데, 데이트를…….]
‘그래도 저희가 즐겼던 데이트보다 즐겁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알아본 결과, 내일 아롯에 불꽃놀이 축제 같은 것은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크리스티나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하멜. 당신의 난잡한 머리털부터 어떻게 잘 정리를 해봅시다. 지금도 꽤 괜찮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숱만 조금 쳐도 굉장히 나아질 겁니다.”
유진에게 거부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아니스는 계획적이고 철저했다. 그녀는 이 도시에 오기 전에 멜키스에게 접근하여, 수도 펜타곤의 솜씨 좋은 헤어살롱을 엄선해 두었다.
본래라면 예약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지만, 멜키스의 소개장은 복잡한 절차 없이 유진을 살롱의 의자에 앉게 만들었다.
평생 유진은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머리카락의 손질? 본가에 있을 적에는 니나가 알아서 해주었고, 아롯에 유학하던 중에는 혼자서 대충 썩둑썩둑 잘랐었다.
“거기, 거기를 자르고. 저기는 자르지 마십시오. 약간 거친 느낌은 살려야 합니다.”
헤어스타일에 문외한인 것은 아니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헤어디자이너의 옆에 찰싹 붙어서 계속해서 간섭을 해왔다.
프로는 프로였다. 헤어디자이너는 불쾌감 하나 드러내지 않고 아니스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
머리를 자른 뒤에 눈썹도 정리하고, 두피와 피부까지 관리받았다. 마법과 연금술로 만들어낸 에센스는 본래부터 깨끗했던 유진의 피부에 부드러운 광채까지 부여했다. 그 모습에 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고, 크리스티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헤어살롱을 나왔다. 1번에 한해 머리를 빗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스타일을 재현할 수 있는 마법의 빗도 하나 받았다.
그다음에 간 곳은 멜키스가 추천한 양장점이었다. 그곳에서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손톱까지 잘근잘근 씹으며 유진이 여러 옷을 입는 것을 관람했다.
여러 옷을 입어본 결과,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합심하여 고른 것은 딱 맞아떨어지는 핏의 깔끔한 턱시도였다.
“그 턱시도에…… 망토는 살짝 부피를 줄이고 모양을 바꿔서 코트처럼, 예, 예! 좋습니다. 그렇게 갑시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건가.
유진은 중간부터 자신이 대체 뭘 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아니스의 추천에 반발하지는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그냥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심신이 편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니 어느새 밤이었다.
“선물은 어떻게 할 겁니까?”
숙소로 잡은 호텔. 아니스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유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뭔 선물.”
“설마 하멜! 빈손으로 가려는 겁니까?”
“설마 유진 님! 빈손으로 가시려는 거예요? 아니스 님한테는 목걸이도 선물했으면서!”
“그건…… 아니스가 생일이었으니까…….”
“제가 그때 생일이었던 것은 맞지만, 내일 만남은 세냐에게도 생일만큼이나 중요하고 설레는 날일 겁니다.”
“예, 맞아요.”
이번만큼은 메르도 아니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는 라이미르아의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꽃다발은 어때?”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하멜. 당신이 제 목걸이를 스스로 생각하였듯 말입니다.”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스크림 선물은 어떻게 생각하느니냐?”
메르와 함께 유진의 방으로 돌아온 라이미르아가 말했다.
유진이 생각했던 대로, 그녀는 라이자키아의 죽음에 우울감이나 유진에 대한 원망은 갖지 않았다. 부성애랄 것도 없는 사이였고, 라이자키아에게 통째로 삼켜졌다는 것이 그녀에게도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고 시원하며 맛이 있잖느냐. 누구라도 아이스크림을 잔뜩 선물 받는다면 기뻐할 것이니라.”
“세냐 님이 너처럼 단순한 애새끼인 줄 아나요?”
“그리 말하는 메르 너도 본녀가 받은 아이스크림을 절반 넘게 뺏어 먹었느니라.”
“원래 남의 것 뺏어 먹는 게 더 맛있는 법이에요.”
둘의 대화는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없었다. 유진은 의자에 앉아서 곰곰이 세냐에 대한 선물을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꽃다발. 무난하게 좋은 선물이란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단순하지 않나? 그다음…… 세냐는 마법사니까…… 지팡이? 아카샤가 있는데?
“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 * *
일단 화가 났다.
아롯의 저택. 세냐가 직접 고른 자리에 세운, 세냐가 가졌던 이상적인 미래를 그대로 투영한 저택이다.
200년이나 흘렀으니 조금은 변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하지 않았나. 그 평화롭고 조용하던 숲은 시끌벅적한 광장이 되었고,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며 밤에는 별이 비치던 강도 메워져 버렸다.
저택은? 다행히 건물은 그대로 있었다.
‘저 동상은 또 뭐야?’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만든 메르데인 광장. 그 한복판에는 지팡이를 든 세냐의 동상이 서 있다. 세냐는 그 동상을 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완성도가 훌륭하기는 했다. 하지만 저 동상 앞에,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올린다는 것이 세냐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내 이름을 얼마나 팔아댄 거야?”
메르데인 광장과 세냐의 저택은 입장료가 굉장히 비싼 편이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관광객이며 마탑 공채시험 응시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으며 줄까지 서고 있다.
“내가 나 팔아서 국고 채우라고 이 나라에서 마법 연구를 한 줄 알아?”
세냐는 주먹을 꽉 쥐고서 고개를 돌렸다.
수도 펜타곤의 중심. 호수 중앙에 세워진 왕궁 아브람.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찾아가서 메르의 처우에 관했던 문제를 따질 생각이었는데, 아롯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말로만 따지는 것은 부족할 것 같았다.
……당장 따지러 갈 수는 없었다. 세냐는 크게 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곳에 세워진 시계탑. 시간은 어느덧 11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문제없어.’
분노로 빨라졌던 심장이 다른 이유로 빠르게 뛰었다. 세냐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뺨을 감싸며 몸을 돌렸다.
‘육체도 완벽하게 재구성했고. 옷도…… 옷도 새로 입었잖아.’
세계수에 봉인되기 전에 입었던 옷은 진즉에 해져 버렸다. 그래서 옷도 새로 만들어 입었다. 혹시 이상할까 싶어, 아침 일찍 아롯에 오자마자 시내를 둘러보며 행인들의 옷차림을 참고하기도 했다.
문제없다. 이 정도면 옛날 사람이란 느낌 하나 없이, 요즘 시대에도 잘 녹아든다. 이미 확신은 얻었지만, 왜 이리도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세냐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다시 하며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 내부에 득실거리는 사람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서 줄까지 선 사람들. 저택을 경비하고 관리하는 고용인들.
ㅡ사람이 너무 많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다 내쫓아 버리고 싶었지만……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날 존경하고, 나한테 기도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잖아. 심지어 비싼 돈까지 내고 말이야.’
그런 생각이 세냐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결국 세냐는 관광객들을 내쫓지 않고, 아무 소란 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입장료는 내지 않았다. 경비와 관광객들은 세냐가 바로 코앞을 지나가는데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직 약속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세냐는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겸 저택을 둘러보았다. ……저택 주변의 풍경들은 모두 다 바뀌었지만, 저택 내부의 구조와 가구 등도 200년 전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200년이나 흘렀는데도 변하지 않은 것들. 세냐는 홀을 한 바퀴 둘러본 뒤에 별채에 있는 서재로 가보았다.
이 저택에는 2개의 서재가 있다. 세냐가 미래로 그렸던 별채의 서재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다. 일부러 이 서재에는 마법 관련의 서적들은 배제했다.
덕분에 별채 서재에는 관광객이 드물었다. 그렇다 하여 조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냐는 이 정도의 소음은 얼마든지 허용해 줄 수 있었다.
벽난로 앞의 흔들의자 앞에서 세냐의 걸음이 멈추었다.
사용된 적이 드문 벽난로. 특히 세냐가 사라지고서 200년 동안은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벽난로는 잿자국 하나 없이 깔끔했다.
세냐는 그 광경을 보며 풋 웃었다. 벽난로 앞의 흔들의자도ㅡ 낡은 곳 하나 없이 깔끔한 것을 보니, 누구도 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존마법에 알람마법. 관광객이 앉지 말라는 거지.’
저택 곳곳에 그런 마법들이 빼곡했다. 세냐는 키득키득 웃으며 벽난로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ㅡ화악! 깔끔한 벽난로 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앗!”
“뭐, 뭐야?”
관광객들이 놀란 소리를 냈고, 경비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들은 벽난로의 불을 끄려 했지만, 세냐의 마법이 피워낸 불꽃을 끄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냐는 킥킥 웃으며 소란스러워진 별채를 떠났다.
이 저택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은 저택 지하의 마법서재. 세냐는 삶 대부분은 그 서재에서 마법연구를 하며 보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그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 정오가 아닌가?’
왜 이리도 시간은 늦게 흐르는 것인지. 세냐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홀의 계단을 올랐다. 저택에서 지하서재 다음으로 사람이 많은 곳은ㅡ 바로 이곳이다. 홀과 2층을 잇는 계단의 중간층.
홀 중앙 벽에 걸린, ‘현명한 세냐’의 초상화 바로 앞.
“지금은 조용해야 해.”
세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들었다. 아카샤도, 다른 지팡이도 없지만 세냐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일으킨 마법은 저택의 모든 방범마법을 무시하고서 발현되었다.
초상화 앞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조차 생각하지 않고, 1층 홀로 내려가거나 2층으로 올라갔다. 그제야 초상화 앞은 텅 비고 조용해졌다.
세냐는 그 앞에 서서,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200년 전의…… 초상화. 후대에 남길 기록으로 쓰여야 한다며, 아롯의 국왕이 직접 부탁을 해왔었다. 싫다고 거절하니 제자들까지 와서 부디 해달라며 빌어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았었다. 바라던 초상화도 아니었고, 당시의ㅡ 아니, 200년 전의 세냐는 어지간해서는 잘 웃지 않았다. 그녀가 그나마 웃을 수 있을 때는 아니스나 다른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리고 메르를 만들고 난 다음 정도였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제발 조금이라도 웃어달라고 머리를 박아댔다. 후대에 남길 그림인데, 지금처럼 차가운 얼굴로 남겨서는 아니 된다면서.
귀찮고 짜증 났다. 나는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으니, 날 정 웃는 얼굴로 남기고 싶거든 당신이 알아서 웃는 표정으로 그리라고 쏘아붙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초상화가 이것이다. 평소 표정과는 다른 부드러운 미소. 화가는 최선을 다해 세냐의 얼굴에 ‘자애로움’을 담아냈다.
살아 있는 전설. 신화가 될 대마법사. 마법의 여신. 그 시대에서 세냐에게 붙었던 수식어대로, 후대가 보고 우러르며 존경할 수 있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현명한 세냐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안 어울려.”
세냐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쿡쿡 웃었다. 200년 전에도 저 초상화를 보고서 지금 같은 생각을 했었다.
세냐는 초상화의 얼굴대로 웃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색하게 들었던 입술을 원래 위치에 내려놓으며, 초상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왔다.
열려 있는 창문은 없었다. 하지만 불어온 바람은 마치 숲에서 불어온 것처럼 싱그러웠다.
세냐는 갑작스러운 바람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바람이 조금 더 거세어지며 세냐를 지나쳤다.
모자가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세냐는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바람과 함께 날아가던 모자가, 누군가의 손에 붙잡히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멋을 부린 머리 모양과 옷차림. 세냐는 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떠버렸다.
“찾았다.”
유진은 손에 잡은 모자를 흔들며 씩 웃었다.
세냐 메르데인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가라앉는 동안, 세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재회하는 것은 아니다. 수년 전에, 세냐는 사념으로나마 아롯에 왔었다.
하멜의 유품. 낡은 목걸이가 이 저택에 나타난 것을 감지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세냐는 얼마 남지도 않은 마력을 긁어모아 사념체를 만들고, 아롯을 탐색했다.
뜻대로 잘 움직이지도, 무언가를 만질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사념체로 광장을 헤매었다.
목걸이에 새겼던 마법의 기운은 너무나 미약했다. 당시의 세냐는 넓고 사람이 득실거리는 광장에서 목걸이의 탐색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찾았다.’
그 목소리는 귀로 직접 듣지 못했다. 세냐 본인이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전할 수 없듯이, 그녀도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세냐는 ‘목소리’를 느꼈다.
300년 전에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떠올리고 상상했던 목소리.
입술의 움직임.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세냐는 유진에게서, 하멜에게서 ‘찾았다’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하하…….”
두 번째 재회는 세계수의 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겪었다. 봉인된 세냐의 의식이, 천사가 되어버린 아니스의 기적. 그리고 엘프족의 신앙이자 세냐가 어렸을 때부터 뛰놀던 세계수의 기적. ㅡ꿈속에서, 하멜과 재회했다.
울고.
웃고.
다음을 기약하며 이별했다.
하멜은 세냐를 구하겠다고 했다.
세냐는 하멜을 찾아가겠다고 했다.
3번째 재회에서 둘은 약속을 이루었다.
“……하하…….”
지금이 4번째 재회.
간절히 고대했던 재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라는 고민을 한 횟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토록 많이 고민했는데, 정작 지금 세냐의 머릿속에 대화의 물꼬를 틀 화두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릴 수가 없었다. 세냐는 멀찍이 선 유진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살아서, 서로가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이. 서로가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같은 것을 보고, 언제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서로를 만질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 꿈결 같은 순간이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이, 세냐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하…….”
울고 싶지 않다. 그래서 세냐는 일부러 웃는 소리를 냈다. 기쁨의 눈물이라니, 그런 뻔하고 촌스러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눈동자는 자꾸만 찡 울렸고, 코끝은 시큰거렸으며, 가슴 속의 심장은 무언가를 조르듯이 콩닥거렸다.
“그…….”
그래도 울고 싶지 않다. 세냐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열심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촉촉이 젖어서 흔들리는 눈동자에 힘을 주고 유진을 보았다.
“그…… 꼴은 또 뭐야?”
여태까지 재회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잖아.
그래서 더 가슴이 뛴다. 흉터 하나 없는 보드라운 뺨에서는 광채가 나는 것만 같고, 덥수룩하던 앞머리도 정리해서 눈동자가 잘 보였다. 구김 하나 없는 말끔한 턱시도 차림에 어깨에 걸친 코트……. 그런 옷차림은 세냐로 하여금 설마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 날 위해 꾸미고 온 것처럼 보이는데. 으흠, 너…… 너도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
“네가 할 말이냐?”
유진은 씩 웃으며 세냐에게 다가갔다. 가슴 설레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을 위해 차림에 공을 들인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저번에 보았던 옷차림도 충분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세냐도 옷차림이 바뀌어 있었다.
“나…… 나는 널 위해서 옷을 바꿔입은 것이 아니야.”
유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너무 빠르고 크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닐까. 세냐는 그런 걱정을 하며 가슴을 꾹 눌렀다.
“그냥…… 어…… 음, 내 옷은 말이야,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 다 삭아 없어지기도 했고…… 으응…… 그때랑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까, 요즘 시대에 맞는 옷을 입은…….”
“그래, 그래.”
유진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그는 가까이 있는 세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입술을 열었다.
“잘 어울리네.”
“……뭐?”
“잘 어울린다고. 왜.”
“너…… 너, 너너, 너 미쳤어?”
세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너무 뜨거워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방금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잘, 어울린다고?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그 바보 멍청이 병신 하멜이?
“반응이 왜 그래? 사람이 기껏 신경 써서 말을 해줬더니.”
“아…… 아아아, 아니, 그, 그 뭐야. 너…… 혹시 술 마시고 온 건 아냐?”
“내가 왜 술을 마시고 와?”
“너답지 않은, 안 어울리는 말을 하니까……!”
“거참. 내가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괜히 코트 안의 손을 꼼질거렸다.
답지 않고 안 어울리는 말. 당연히 유진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유진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도 내뱉지 않았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이 만남이 서로에게 얼마나 간절하던 것인지를 알며, 더 이상ㅡ 애달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 멘트를 친 것인데, 반응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이 민망했다.
“……크흠.”
유진은 세냐의 옷차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지금 주면 되나? 아니, 조금 이따가. 지금 줘버렸다가 한 소리 들으면 정말 민망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맞아. 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뭐, 뭔데.”
날 어떻게 생각해? 너 나 좋아하냐? 짧은 순간, 세냐의 머릿속에는 그런 질문들이 무더기로 떠올랐다.
“저번에 말이야, 라이자키아 죽이고 나서. 너 사라지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말하려 한 거냐?”
하지만 유진은 세냐가 떠올리는 질문 목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을 물어보았다.
섣부른 기대였지만 배신당한 것이 아프다……. 세냐는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서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악!”
곧, 세냐는 정신을 차리고서 외마디 비명을 꽥 질렀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유진에게 다가왔다.
유진은 갑자기 다가온 세냐의 기세에 움찔하여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세냐는 유진이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 그녀는 매섭게 뻗은 손을 유진의 코트 안쪽으로 쑤셔 넣더니, 꼼질거리던 왼손을 붙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너!”
세냐의 눈동자가 살벌한 빛을 발했다. 한 달 전. 사라지기 전에 보았던, 왼손 약지의 반지. 세계수에서 육체를 재구성하고 회복하는 동안, 세냐는 반지의 정체에 대해 긴 추론을 가졌었다.
일단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었다.
‘에이, 잘못 본 거겠지.’
사라지는 도중이기도 했으니 눈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억지스러운 결론이지만 세냐는 일단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달 뒤에 직접 봐서 다시 확인하면 된다.
‘현명한 세냐’라고 불리던 그녀가 저런 결론을 내린 것은, 당장 확인할 수도 없고 시간은 한 달이나 남은 상황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실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외면했다.
그리고 지금. 외면하던 것이 분명한 현실이 되어 세냐의 눈동자에 새겨졌다.
왼손 약지! 반지! 세냐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위로 치솟았다.
“너…… 너너, 너! 겨…… 결혼? 약혼? 뭐, 뭐야 이거. 누구야?!”
메르에게 들었던 경고가 떠올랐다.
-유진 님의 주변에는 여우, 아니, 굶주린 늑대가 배회하고 있다구요.
그 말도 열심히 외면했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지금 세냐의 앞에는 하멜이, 유진이 있으니 말이다.
“아…… 아니스야?!”
아니스 슬리우드. 뱀 같던 면모가 있던 그녀라면 굶주린 늑대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스가 하멜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는 세냐도 잘 알고 있다.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가엽던 운명.’
그 운명에서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아니스는 자신의 운명에서 탈출하지 않았다. 평생을 순결히 지냈으며, 신앙적 숭배의 대상인 성녀로서 살았다.
아니스가 받아들인 운명은 응당 누려야 할 행복을 배제하고, 죽음조차도 안식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스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운명을 받아들였다. 미래를 위해, 세상을 위해서는 후대에도 성녀가 필요하니까.
만약, 하멜이 죽지 않았다면.
5명 모두가 살아서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했다면. 아니스가 저런 운명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성녀? 교황과 교단 전체가 반발하더라도. 아니스 본인이 거절할지라도. 세냐는 그녀를 데리고서 하멜과 맺어지는 미래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하멜은 죽었고, 마왕은 죽이지 못했다. ‘우리’는 패배했다. 미래를 기약해야만 했다.
지금의 미래. 아니스는 자살하여 천사가 되었다. 신성제국 유라스의 부도덕하고 피비린내 나는 ‘기적’은 지금 시대에 아니스와 똑같이 닮은 ‘성녀’를 만들어냈으며, 천사가 된 아니스는 지금 시대의 성녀에게 깃들었다.
ㅡ세냐는 아니스의 구원을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니까, 아니스라면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그건 안 된다.
‘아니스랑 반지를 교환할 정도면 대…… 대체 어디까지 진도가 나간 거야?’
세냐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요동쳤다. 이런 문제에 순서를 매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기왕이면! 세냐는 자신이 아니스보다 먼저이기를 바랐다.
“……설마…….”
어쩌면. 세냐는 다른 경우의 만약을 떠올리며 어깨를 떨었다.
“아…… 아니스랑 닮은 그, 지금 시대의 성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가 된 아니스보다는 멀쩡히 살아 있는 지금 시대의 성녀가 의심스럽다. 그 성녀가 자신에게 깃든 아니스에게 영향을 받아 하멜에게 반지를 전했거나…… 어쩌면…… 성녀 본인이 하멜에게 반해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진정해.”
난 또 뭐라고. 유진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반응은 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어서 익숙했다.
당연히 세냐는 유진의 말에 곧바로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칙칙하게 죽어가는 눈으로 유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개새끼.”
“진정하라니까.”
“쌍놈.”
“야, 야. 욕하지 말고 좀 제대로 봐봐. 너도 이게 평범한 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 것 아냐?”
진정하라고? 제대로 봐? 세냐는 숨을 씨근거리며 유진의 반지를 노려보았다.
……왼손 약지의 반지라는 정보가 세냐의 이성을 흐리게 만들었는데, 과연, 똑바로 보니 평범한 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 으흠.”
세냐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아직 잡고 있던 유진의 왼손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서 약지의 반지를 쳐다보았다.
“……왼손 약지는…… 계약과 결합, 약속의 의미를 갖지. 각 손가락마다 부여되는 의미가 다르지만, 예, 예부터 왼손 약지는 그런 의미를 가졌어. 주술과 마법적인…… 어…….”
“그래, 그래.”
“으흠…… 사실 나도 잘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하멜, 아, 아니, 유진. 알고 있었다구. 모를 리가 없잖아? 대륙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마법사인 이 세냐 메르데인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지. 그냥, 그냥 네게 짓궂은 장난을 쳐버린 거야.”
칙칙하게 죽었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세냐는 자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이건…… 으흠…… 마법의 반지구나. 일반적인 마법이 아닌, 고대의 신성마법이 깃든…….”
세냐의 얼굴이 점점 더 유진의 왼손과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손등…… 도드라진 혈관. 손바닥 안쪽의 금속만큼이나 단단한 굳은살. 길쭉하면서도 울퉁불퉁한 손가락. 은은히 느껴지는 살결의 냄새. 그러한 다양한 요인들이 세냐의 얼굴을 더 뜨겁게 달구었다.
“자, 잘 봤어.”
거리가 너무 가깝다. 살짝만 기울이면 뺨에 손등이 비벼질 것 같다.
세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손부채로 얼굴을 식히며 뒤로 물러섰다.
“……뭘 봐?”
유진은 빙긋 웃는 얼굴로 세냐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냐는 그 시선과 웃음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보니까 신기해서.”
유진은 손가락을 들어 세냐의 등 뒤를 가리켰다.
화가가 그려낸 미소를 머금은 세냐의 초상화. 그 자애로운 얼굴과 진짜 세냐의 얼굴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흥. 너는 저런 표정이 취향인가 보지? 미안하지만 나는 저런 미소는 짓고 싶어도 잘 안 나와. 저 때도 나는 지금이랑 똑같은 얼굴이었다고. 초상화 그리는 놈이 멋대로…….”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기는 한데. 만질 수도 말을 걸 수도 없는 초상화보다는, 틱틱 투덜거리는 진짜 네가 좋지.”
또! 세냐는 입을 떡 벌리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너,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내가 뭘?”
“너답지 않게 느끼한 말을 하고 있잖아……!”
“거참, 좋다고 말해도 난리야.”
유진은 아직 들고 있던 세냐의 모자를 망토 안으로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모자는 왜 거기다가 넣어?”
“그냥.”
이 커다란 모자를 쓴 상태로는 세냐의 얼굴이 잘 안 보인다. 사실 얼굴이야 앞으로도 매일 보겠지만, 유진은 오늘 세냐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싶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유진 스스로도 저런 생각을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았다.
유진은 으흠 헛기침을 뱉으면서 창밖을 힐긋 쳐다보았다.
“……계속 여기 있을 거냐?”
“뭐, 뭐어…… 오랜만에 오는 집이라서 좀 보고 있었던 것뿐이야. 사실 더 있을 필요는 없지. 내부는 하나도 안 변했는데 더 볼 것이 어디 있겠어.”
“그럼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왜…… 왜 자꾸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어? 너는? 너는 없어?”
“크흠.”
유진은 헛기침을 반복하면서 세냐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일단 밖으로 나갈까.”
“그, 러든가.”
“야, 조금만 내 쪽으로 와봐.”
유진은 양손을 망토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세냐는 유진의 행동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빨개진 얼굴을 하고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밖에 좀 춥더라.”
나름 고심한 멘트였다. 이상한 말도 아니었다. 남쪽 대수림이야 언제나 더운 곳이지만, 지금 아롯은 초겨울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냐에게 놀림을 받지 않을. 센스보다는 배려를 겨냥한 멘트.
유진은 이른 아침부터 시내를 돌아다녀서 구매한 망토를 세냐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고풍스러운 자주색. 어깨의 케이프와 망토 끝자락에 금색 문양이 들어간 망토가 펄럭 내려오며 세냐의 허벅지를 덮었다. 세냐의 보라색 머리카락과 어울릴 것이라 생각해서 골랐는데, 생각했던 대로였다.
“…….”
뭐래?
미쳤어?
이 망토는 뭐야?
촌스러워.
유진은 세냐가 그렇게 이죽대는 것이 아닐까 긴장하여 그녀의 얼굴을 힐긋힐긋 보았다.
하지만 세냐는 무어라 말하기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있었다.
망토?
선물.
누구에게?
나에게.
세냐의 사고는 그 일련의 흐름을 거치고서 정지해 버렸다.
세냐 메르데인
펄럭.
어깨를 감싸고 아래로 내려온 망토 자락이 세냐의 종아리를 간질였다. 유진은 민망한 기분을 참고서 망토의 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망토의 깃. 별다른 장식은 달려 있지 않은데, 브로치라도 달아두면 꽤 예쁠 것 같았다.
……브로치를 따로 샀어야 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와서 후회한들 있지도 않은 브로치가 생기는 것도 아니잖은가.
……사실 없지는 않았다. 코트의 형태로 변형시키기는 했어도, 흑암의 망토는 본래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유진의 코트 안쪽에는 아주아주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는 여러 장신구도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블랙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오지에서 환전용으로 쓰기 위해 넣어 둔 물건들이다.
그중에는 망토의 깃에 달 만한 화려한 브로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유진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깃에다가 브로치를 달아준다는 것이 스스로 못 견딜 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꼈다.
브로치 말고, 따로 달 만한 물건이 있나? ㅡ생각한 순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즉, 유진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배지.
제복이나 망토에 착용하는 상징.
‘미쳤냐?’
스스로 바라는 답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최후의 이성 때문이었다. 세냐의 망토 깃에 라이언하트의 배지를 붙인다는 것은 아주아주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동이었다.
‘뭐라도 말이나 좀 하지.’
브로치와 배지에 대한 생각을 머리에서 간신히 지워냈다.
유진은 깃을 살짝 위로 세우고서 세냐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세운 깃이 뺨에 닿는데도 세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유진을 똑바로 보았으나, 반쯤 벌려진 입술에서는 어떤 목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거리가 가깝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에서 싱그러운 내음을 느꼈다. 세냐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오랜만이어서인지 심경의 변화 때문인지…… 새삼스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속눈썹이 길다거나, 눈동자가 맑다거나 하는 것. 달아오른 체온의 은근한 열기. 그리 짙지는 않은 분홍색 입술.
“……어흠.”
유진은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의식하고서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그리고는 방금 느꼈던 감정들을 내색하지 않으며 세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누가 골랐는지 몰라도, 잘 어울리네.”
몸이 살짝 흔들리고 나서야 세냐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크게 숨을 삼키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딱 부딪치며 마법을 일으켰다.
세냐는 바로 옆에 만들어낸 마법의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았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세냐의 움직임에 맞춰서 망토자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마도왕국이라 불리는 아롯의 수도에서 구매한 물건이라서인지, 이 망토에도 마법은 걸려 있었다. 세냐 기준에서 대단한 마법은 아니었다.
몸의 행동에 거슬리지 않게 망토자락이 움직이고, 청결유지와 형태보존, 체온유지의 마법이 걸려 있다. 물리적 공격에 대한 방어, 마법적 공격에 대한 저항, 술자에 대한 다양한 보조. 그런 종류의 마법은 하나도 걸려 있지 않다.
즉, 이 망토는 ‘무기’도 ‘방어구’도 아니라는 말이다. 청결유지와 형태보존, 체온유지의 마법도 아주 뛰어난 수준은 아니다. 여름에는 살짝 시원하고 겨울에는 살짝 따뜻한 정도. 고작 그런 종류의 편의성만 추구하는ㅡ 의미 그대로의 치장품.
오히려 그래서 세냐는 이 망토에 많은 감정을 느꼈다. 그 하멜이, 무기나 방어구로도 쓸 수 없는 망토를…… 선물해 준 이유.
“……예쁘다.”
세냐는 마법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부끄러움과 민망함. 그런 감정은 이미 진즉에 충만해서 세냐의 얼굴을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만들었다. 머리가 너무 달아오르고 가슴이 콩콩 뛰어대는 탓에 말도 잘 이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말은 더듬거리지도 끊이지도 않았다. 세냐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하멜이, 유진이 자신을 위해 골라서 선물한 망토. 세냐는 빙글 몸을 돌려 유진을 쳐다보았다.
“어때? 잘 어울려?”
“……잘 어울리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이 망토. 네가 직접 고른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이 골라준 건가? 메르나 아니스 같은.”
“내가 직접 골랐다, 왜.”
“흐흐흠, 네게 이런 센스가 있을 줄이야. 전생에는 그런 센스가 없었던 것 같은데?”
“네가 뭘 알아? 우리가 전생에 입었던 옷이라고는 갑옷이나 망토나 로브 정도였잖아.”
“그거 말고도 여러 옷을 입기는 했지. 베르무트 따라서 어디 파티 불려간 적도 몇 번 있었고, 잘나신 고위귀족이나 왕을 알현할 때에도 예복은 입었잖아.”
“우리가, 내가 고를 수 없는 옷들이었지. 어쨌든 나는 전생에도 옷 고르는 센스는 제법 뛰어났어. 그래서…… 음…… 네 옷도. 어.”
유진은 말꼬리를 흐리고서 흠흠 웃었다. 세냐는 킥킥 웃으며 마법의 거울을 치우고 창밖을 힐긋 쳐다보았다.
“네 말처럼 밖이 추워 보이기는 하네. 이 망토가 겨울용은 아닌 것 같지만.”
“아 그러면 벗든가.”
“싫어. 절대 안 벗을 거야.”
세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지나쳤다.
“새 옷도 입었고, 슬슬 밖으로 나가보실까. 아, 미리 말해두는데, 유진. 내가 아롯에서 꽤 오래 살기는 했지만 그건 200년도 전이거든? 이 나라는 내가 살았을 적과는 너무 많이 달라졌더라. 그래서 나는 이 나라를, 이 도시에 대해서는 잘 몰라.”
“나도 많이 알지는 않아. 예전에 2년 정도 살기는 했는데, 그때는 마탑과 아크리온에만 틀어박혀 지냈거든.”
“그래도 지금의 나보다는 많이 알겠지? 되게 신기한 기분이란 말이지.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만 같은…… 네게 할 말도 아니지만.”
“밥이나 먹으러 갈까.”
“뭐 추천할 만한 가게라도 있어?”
“게.”
유진은 몇 년 전에 로베리안과 갔던 식당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충 말을 둘러대다가 가게 된 식당이었는데, 그곳에서 먹었던 루하르 왕국의 명물, 아이스크랩이 꽤 맛있었다.
“게? 그 게? 집게발 달리고 껍질 단단한 바다의 벌레 비슷한 거?”
“게한테 말이 너무 심하지 않냐.”
“다를 것도 없잖아. 새우나 게는 바다의 벌레 비슷한 거야. 유진, 너 벌레가 맛있어?”
“아니 벌레가 아니라니까.”
“어쨌든 나는 먹기 싫어.”
세냐는 유진의 얼굴을 흘겨보며 말했다.
사실 세냐는 게나 새우 따위의 갑각류뿐만 아니라 해산물은 전반적으로 싫어하는 편이었다.
유년기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바다와 한참 떨어진 대수림의 중심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멜이 처음 동료로 합류하고 바다를 건너 헬무드에 건너가는 도중ㅡ 해양마물과 흑마법사들의 공격을 상대하다가 바다에 풍덩 빠진 기억 때문이었다.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세냐를 구한 것이 하멜이었다. 하멜은 정신을 잃은 세냐를 간신히 붙잡았고, 둘은 마법으로 미쳐 날뛰는 해류를 따라 표류했다.
서로가 미숙했던 시절이다. 둘은 배에서 한참 멀어진 작은 섬에 도착했다. 세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지만, 역류한 마나로 인한 부상 때문에 곧장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아항.”
유진은 그때를 떠올리고서 히죽 웃었다. 300년 전에 둘이 도착했던 섬은 무인도가 아니었다. 섬의 안쪽에는 마왕을 섬기는 흑마법사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해안가로 흘러들어 온 침입자를 죽이기 위해 마물을 보냈었다.
흉측하고 살벌하며 거대한 집게발을 가진 게 형상의 마물.
허공에서 펄떡 펄떡 몸을 비틀어대며 송곳처럼 날카로운 뿔을 가진 새우 형상의 마물.
당연한 말이지만, 하멜과 세냐는 아무 문제 없이 섬에서 살아남았다. 하멜은 일시적으로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세냐를 보호하며 마물을 몰살시키고, 섬의 중심에 모여 있던 흑마법사들까지 도륙 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섬에 찾아온 구조선을 타고 함선에 복귀했다.
“너. 옛날에 내 뒤에 숨어서 벌벌 떨던 기억 때문에 그러는 거구나?”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때 너, 나를 제대로 못 믿겠다면서 멋대로 섬을 탐색하려다가 마물한테 죽을 뻔했잖아.”
사실을 말하자면 하멜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너는 하늘도 못 나는구나? 그렇게 놀려대면서 바다 위를 슝슝 날아다니며 마법을 쏴대다가 역공을 맞아 추락한 것도 부끄러웠다.
그 하멜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굉장히 고마웠지만, 흠뻑 젖은 옷이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내는 비주얼도 부끄러웠다. 일단 옷을 급히 말리려고 움직였던 것인데, 쳐들어온 마물을 보고서 ‘꺄악!’ 하고 비명을 질러댄 것도 부끄러웠다…….
“……아니라니까.”
그런 것들을 제쳐두고, 세냐가 새우나 게를 싫어하는 것은 유진의 말이 맞기는 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맞닥트린 마물들. 기괴할 정도로 커다라며 눈동자를 굴려대고 피거품 같은 것을 부글대던 게와 새우. 그 상황에서의 무력감과 공포.
“……어쨌든 나는 너랑 게를 먹기는 싫어.”
생각해 보면, 세냐가 하멜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 것도 그 섬에서부터였다.
‘네게 도움을 받은 것. 네가 날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고, 마법을 쓸 수 없는 나를 지켜준 것.’
야 그만 좀 떨어. 괜찮다니까? 마법? 지금 마법을 못 쓰겠다고? 얼씨구, 가지가지 한다. 아니 괜찮다니까? 마법 당장 못 쓰는 게 뭐. 너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나랑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뭐? 날 못 믿겠어? 하 씨 어이가 없네. 야, 괜한 짓 하지 말고 내 뒤에 찰싹 붙어 있어. 알겠어?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무서우면 정신 사납게 비명 질러대지 말고, 내 옆구리나 꼬집어.
우린 괜찮아. 아무 문제도 없어.
내가 지켜주겠다고.
“……넌 여전히 바보에 멍청이에 병신이야.”
“갑자기 왜 욕을 하니?”
“야! 잘 생각해 봐. 게를 어떻게 먹어? 응? 다리 잡고 뜯어서 쪽쪽 빨아먹고 껍질 와작와작 씹고, 응? 내가 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것 같아?”
“거참, 뭔 말을 하나 했더니. 마경에서는 게는 아니어도 그 뭐냐, 벌레 마물 종류별로 다 먹었잖아. 맨손으로도 잘 먹었고.”
“그건 마경이고!”
“그리고 지금은 시대가 많이 좋아져서, 게도 손으로 안 먹어도 돼. 마법으로 쏙쏙 잘 나오더라.”
“먹기 싫다면 먹기 싫은 줄 알아.”
“괜히 민망해서 고집부리는 것 다 알아.”
“먹기 싫다니까! 그냥, 나가서 좀 걷자. 너 뱃속에 거지 들었어? 그렇게 배고파? 나는 배 안 고파. 그냥 너랑 걷고 돌아다니고 뭐 구경하고 그러고 싶단…….”
발끈해서 내뱉던 세냐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그녀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유진을 지나쳐서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내가 미쳤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뭐 저런 말쯤이야 이제는 해도 될 것 같지만…….’
생각은 그렇게 해보았지만 실천은 잘되지 않았다.
세냐 메르데인, 그녀의 성격은 여전했다. 유진은 도망치듯 저택의 문을 빠져나가는 세냐의 등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여전히 지랄 맞구만.”
그래서 더욱 그립고, 반갑고, 좋았다. 유진은 빙긋 웃으며 세냐를 따라 저택의 밖으로 나왔다.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없을 만큼 촉박하지는 않잖아. 너나, 나나.”
유진은 등을 돌리고 선 세냐에게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그거랑은 달라. 나는 그냥, 너랑…… 이렇게 ‘살아서’ 만나는 것이 오랜만이니까…….”
“마음이 급하시다?”
“죽여 버릴 거야.”
“나랑 걷고, 돌아다니고, 뭐 구경하는 건……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지 않나…….”
유진은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말에 세냐는 움찔 놀라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내가 뭐 이상한 말 했냐?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쳐다봐.”
“……허어…….”
“아니면 뭐. 우리 만남은 오늘로 끝이냐? 각자 무사히 돌아오고 얼굴도 봤으니, 이제는 서로 갈 길 갑시다. 그런 거야?”
“그럴 리가!”
세냐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300년이야, 유진. 아주 길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어. 너에게도, 나에게도.”
얼굴이 뜨거워. 아까부터 계속. 이곳에 왔을 때는 괜찮았는데.
“……너는…… 환생했고, 나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지. 3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가 바뀌었어. 그중에서도 네 이름, 유진 라이언하트. 솔직히 나는 아직 ‘지금’의 네 이름을 말하는 것이 어색해. 나도 모르게 자꾸 하멜이라고 불러 버릴 것만 같아.”
“네가 날 어떻게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 이름이 어쨌고 세상이 많이 변했든, 나는 네가 아는 나야.”
“응, 그렇지. 그래도 나는 너를 지금의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 왜냐면, 지금의 네 이름은 그것이니까. 네가 내가 아는 너이기에 더더욱, 나는 지금의 너까지 확인하고 싶어.”
세냐는 몇 번 입술을 열고 닫았다.
유진과 만난 순간부터 쭉 붉었던 얼굴. 인정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오래전의 감정들은 300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대로였다. 흉터투성이의 얼굴이 바뀌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도. 세냐의 감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냐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호흡을 진정시켰다. 부정할 필요도 없는 감정.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잖아.’
여전히 세냐는 눈앞의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이 설레며 부끄러웠다.
“유진.”
세냐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담아 그 이름을 불렀다.
“유진 라이언하트.”
앞으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세냐는 그 이름을 입에 담을 것이다.
때로는 수백 년 전의 감정으로, 때로는 매 순간의 감정으로.
짜증을 담아, 화를 담아, 장난을 담아, 기쁨을 담아, 즐거움을 담아, 사랑을 담아.
어쩌면 웃으면서, 어쩌면 울면서, 어쩌면 끌어안으면서.
이 이름은 세냐에게 그 무엇보다 특별하면서도 다른 무엇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일상이 될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절대로 오늘이 마지막이어서는 안 돼. 우리는…… 수백 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앞으로 못해도 수백 년은 함께 있어야 해.”
여전히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 이상으로 간절하며 확고했다.
“오늘이 바로 그 첫날이야.”
세냐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는 빙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진정시킨 감정이 다시금 날뛰려 하고 있었다. 방금 나 자신의 입으로 직접 내뱉은 말들이 머리를 맴돌고 있다.
‘잘했어, 나.’
세냐는 감정을 언어로 내뱉은 자기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저만큼이나 말했으면, 저 우둔한 바보 멍청이도 세냐의 감정을 의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랬다. 애당초 유진은 전생에도 세냐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시대가 시대이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쩌지 못했을 뿐. 만약 마왕을 모두 죽이고, 세상이 평화로워졌다면ㅡ 유진도 세냐의 감정에 마땅한 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전생에 나라는 못 구했는데.”
마왕 3명을 죽이는 것에 한 몫 거들기는 했으니, 굳이 따지자면 나라 몇 개는 구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세냐의 뒤를 따라갔다.
“함께 있자고 한 주제에 왜 혼자 가는 거야?”
“조금만 있다가 따라와.”
“왜?”
왜기는, 얼굴이 너무 뜨거우니까지.
세냐는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삼키고, 대신에 자신의 양 뺨을 찰싹 두드렸다.
세냐 메르데인
“정신은 바로 차렸지.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말이야.”
라이자키아를 죽이고 난 뒤. 차원의 틈새를 떠난 영혼은 세계수의 안에 봉인되어 있는 육체로 돌아왔다.
200년 동안 세냐가 봉인되어야 했던 것은 라이자키아의 독 때문이다. 그 독은 세냐뿐만 아니라, 그때 라이자키아의 앞을 가로막았던 모든 엘프들을 중독시켰다.
세계수는 단순히 거대하고 오래 묵은 요정목이 아니다. 세계수는 이 세상에 엘프란 종족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 신령스러운 나무다. 그렇기에 엘프들은 세계수를 신앙심을 갖는다. 죽은 선조들, 앞으로 죽어갈 자신들. 모든 엘프의 혼이 세계수로 인도되어, 종족을 수호할 것이라 믿는다.
정말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계수가 빛의 신과 비슷한 기적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너도 겪어봤겠지만, 그 기적은 세계수에 깃든 정령들을 통해 펼쳐지지.”
정령술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성마법처럼 의도해서 펼칠 수도 없다.
“나와 엘프들이 200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세계수의 정령들이 우리 몸의 독기를 중화해 주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라이자키아가 죽으면서 그 짜증 나는 독기도 말끔히 사라졌지.”
덕분에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바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망가진 육체를 재구성하고, 하나둘 깨어난 엘프들과도 해후를 나누었다.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세계수의 힘도 크게 약해졌어. 내게 힘을 빌려주어 라이자키아를 쫓아내고, 나와 엘프들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소모했을 텐데. 내 영혼을 네 곁에 보내고, 죽어가는 너를 되살려내기도 했잖아.”
봉인에서 깨어난 엘프들은 당분간 세계수를 돌보는 것에 열중하기로 했다.
사마르 대수림. 그 어딘가에 있는 엘프의 영지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다른 사람의 발길을 거부할 것이다.
“라이언하트에도 엘프가 꽤 많아.”
3년 전. 유진은 약 100명 정도의 엘프들을 라이언하트의 숲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공표했다. 라이언하트가 엘프들의 최대 후원자이며 떠돌이나 탈주 엘프들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로 라이언하트의 엘프들은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늘어났다. 탈출할 엘프 노예들.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떠돌거나 숨어 살던 엘프들. 혹은 엘프 노예의 소유자나 노예상인마저도 라이언하트의 대문을 두드렸다.
라이언하트가 엘프들 데려온다면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조건을 덧붙인 때문이기도 했고, 혹은 이것을 기회 삼아 라이언하트와의 인연을 터놓기 위해서였다.
그것에 관한 문제는 유진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저런 종류의 문제는 가문을 책임지는 길레이드와 애니실라가 전담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라이언하트의 숲은 엘프들이 꽤 늘어나서 벌써 그 수가 150명에 육박했다.
“세계수의 묘목도 3그루나 있고.”
엘프들이 열심히 돌본 덕에 묘목들도 제법 많이 커졌다. 라이언하트의 숲도 묘목의 덕을 많이 보고 있었다.
지금 라이언하트의 숲은 영맥처럼 마나가 풍부하고 정령들도 많아졌다. 그것은 자연스레 라이언하트 기사단의 전력증강으로 이어졌다. 풍부한 마나는 기사들의 성취를 진전시켰고, 그들 중 특히 뛰어난 이들은 정령과 계약까지 맺는 것에 성공하기도 했다.
“잘됐네.”
세냐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다 같이 눈을 뜬 다음에, 엘프 장로들이 가장 먼저 걱정한 것이 영지에 없던 엘프들이었거든.”
“시크나드도 라이언하트에 있어.”
유진의 말에 세냐의 걸음이 멈췄다. 대수림에 버려졌던 세냐를 거두어 키운 것이 시크나드의 부모였다. 세냐와 시크나드는 종족이 다르지만, 서로를 남매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라버니는…… 건강해?”
“병에 걸리기는 했는데, 보기에는 건강해.”
엘프를 죽이는 마병. 세냐도 그 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300년 전. 헬무드의 마왕들이 대륙에 칼을 겨누었을 때부터 엘프들에게 발병하기 시작한 마병은 수많은 엘프들을 죽게 하고, 죽음을 피해 다크엘프로 타락하게 만들었다.
“다행이다.”
세냐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유진은 세냐의 두 눈이 눈물로 젖어가는 것을 보며 빠르게 덧붙였다.
“아니 진짜 건강하다니까. 매일 밥도 잘 먹고 산책도 하고. 메르가 너 닮았다며, 어디서 주워온 것인지도 모를 사탕이나 과자도 자꾸 쥐여주고. 내가 그런 거 몸에 안 좋으니 먹이지 말라니까 뭐 했는지 알아?”
“오라버니가 뭐 했는데?”
“몸에도 좋고 씹으면 단맛 난다며 뭔 나무인지 풀인지 모를 뿌리를 씹으라고 쥐여주더라.”
“메르가 그걸 먹어?”
“먹겠냐? 네 고맙습니다 하고 받았다가 나중에 버렸지.”
유진의 말에 세냐는 키득키득 웃었다.
200년은 엘프에게도 긴 시간이다.
라이자키아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직후. 세계수에 깃든 오랜 엘프들의 혼이 세냐에게 위기를 타개할 지식을 전달했다. 그래서 세냐는 세계수와 엘프들을 지키기 위해 영지를 감추고, 바깥에 있던 엘프들의 기억에 간섭했다.
“그때의 나는 죽어가고 있었어.”
어떻게 자신이 그런 마법을 펼칠 수 있었는지. 그것에 대한 기억은 희미했다. 라이자키아의 브레스를 막아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전의 상태일지라도 세냐가 단독으로 라이자키아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때 세냐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죽어가는 와중이었다.
그 순간의 세냐는 ‘절대로’ 라이자키아를 막을 수 없는 상태였다. 세계수와 엘프들이 세냐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라이자키아의 브레스는 세계수와 수백 명의 엘프들, 세냐를 녹여 버렸을 것이다.
“그냥…… 해야 한다.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 솔직히 지금의 나도 그때 같은 마법은 못 써.”
마법을 쓴 것은 세냐 본인이었지만, 그렇게 하게 만든 의지는 세냐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장생족인 엘프들 사이에서도 잊힌 고대의 마법. 아롯에서도 그와 비슷한 고대 마법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진행 중이나, 애당초 그 ‘고대’라는 시대부터가 모호한 점이 많았다. 제대로 된 유적이나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그나마 파악해 낸 것은, 아득한 고대는 말 그대로 신화의 시대였다는 것. 지금 대륙에서 가장 크게 숭배되며 규모가 큰 ‘빛의 신’이 실존했고, 그 외에도 여러 신들이 실존하던 신화의 시대.
당장 유진이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도, 고대에 전쟁 신으로 추앙되던 아가로트의 성유물이다.
“……베르무트는…….”
“당장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유진은 세냐가 꺼내려던 말을 가로막았다.
“나 혼자 들을 이야기도 아니잖아. ……너도 당장 말하기 괴로울 것 같고.”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마.
세계수의 안에서 세냐의 사념과 처음 만났을 때. 세냐는 저렇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니스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것이랑 비슷해.”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에 대해서는 말해두었다. 천사가 된 아니스가 현시대의 성녀에게 깃들고, 영혼으로나마 존재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런 말은 조금 웃기지만, 제법 잘 지내고 있어. 지금도 나와 널 위해 메르를 데리고 있지. 그러니까, 베르무트에 대한 이야기는…… 이따가 아니스를 만나고 나서 하자고.”
지금 메르는 아니스와 함께 있다. 메르가 먼저 제안한 일이기도 했다. 메르는 유진을 따라가지 않고, 라이미르아와 함께 아니스와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것은 메르의 교활한 계략이었다. 혹 유진이 망토 속에 메르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행동을 조심할까 봐. 그리고 간사한 성녀 자매가 유진과 세냐의 데이트에 간섭하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해서.
“……응, 알겠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세냐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이어나갔다. 베르무트에 대한 이야기는 저번에 나누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세냐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300년 전의 5명은 모두가 강한 유대로 엮여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짙은 유대를 꼽자면, 세냐는 베르무트와 하멜의 유대일 것이라 생각했다. 동료들 중에서 하멜이 가장 강하게 의식한 것은 베르무트였고, 여정 내내 하멜은 베르무트를 뛰어넘고자 했었다.
오직 하멜만이 베르무트를 그렇게 대했다.
그런 베르무트가, 누구보다 완전하던 용사가.
동료들의 목숨을 지키고 하멜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마왕과 단신으로 약속까지 맺은 그 베르무트가.
모두에게 자신의 죽음을 속이고서, 세냐에게 죽어 마땅한 치명상을 입혔다는 것. 그렇게까지 해서 이루려 했던 것이 하멜을 자신의 후손으로 환생시키려 한 것이라니.
ㅡ지금도 세냐는 납득이 되지가 않았다. 만약 베르무트가 하멜의 환생을 바라고, 그를 실행하려 했던 것이라면. 그것을 세냐에게 알려주었다면. 당연히 세냐는 베르무트에게 협력했을 것이다. 하멜이 돌아오는 것을 간절히 바란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베르무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 베르무트는 세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로 베르무트였을까.’
공격당하던 순간에 느꼈던 강렬한 위화감. 무기물을 쳐다보는 것만 같은 차가운 눈동자. 그것에 관한 모든 의혹을, 세냐는 유진에게는 털어놓지 않았다.
-야! 하멜, 잘 들어. 날 죽이려 한 건 베르무트였던 것 같긴 한데 베르무트가 아닌 것 같애. 알아들어?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내뱉었을 뿐. 그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살아만 있을 뿐 죽은 것과 다름없던 상황에서, 처량한 얼굴로 궁상을 떨었다가는ㅡ ‘혼자’가 된 하멜이 미치도록 괴로워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멜이 베르무트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날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넌 혼자가 아니니까.”
지금 유진의 곁에는 아니스가 있고, 세냐도 있다. 세냐는 다른 무엇보다 유진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세냐는 킥킥 웃으며 옆을 힐긋 보았다. 바로 옆을 걷는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저택을 나온 둘은 메르데인 광장을 지나, 시내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디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 가게 등을 구경하며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세냐는 행복하고 즐거웠다.
“참 많이 변했어.”
“그야 당연히 변했겠지. 죽고서 아예 다른 몸으로 환생한 거잖아.”
“너 말하는 거 아니야.”
“근데 왜 내 얼굴 보면서 말하냐?”
“……네 얼굴 보는 것 아니거든? 난 말이야, 네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 옆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본 거야.”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많이 변했다, 라는 것은 정말로 유진의 달라진 얼굴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그녀의 기억과 너무나도 달라진 아롯의 도시를 보고 한 말이다.
하지만 도시를 보면서, 유진의 얼굴을 쳐다본 것은 사실이긴 했다.
“그거 알아? 저기 하늘에 떠다니는 부유역, 전부 다 내가 만든 거야.”
“아롯에 처음 왔을 때 들었어.”
당시 고용했던 가이드가 자랑스레 떠들어댔다. 수도 펜타곤의 상공에 떠 있는 15개의 부유역은 현명한 세냐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말이다.
“저거 만드는 건 사실 거의 심심풀이였는데, 꽤 재미있는 작업이기는 했어. 당시 아롯 국왕이 제작에 필요하다는 것은 전부 다 구해주고 예산도 달라는 대로 줬거든.”
세냐는 두 눈을 얇게 뜨고 하늘의 부유역을 쳐다보았다. 300년이 흐른 지금도 세냐가 만든 부유역은 멀쩡하게 기능하고 있다.
“……사실 할 필요가 없던 일이지만. 아마, 그때의 나는 어떻게든 세상에 나만의…… 흔적 같은 것을 남기고 싶어 했던 것 같아. 모론처럼 왕국을 세울 마음은 없었지만. 이 나라에…… ‘현명한 세냐’라는 이름을 수백 년이 지난 후에까지 남기고 싶었던 거야.”
언젠가.
목걸이에 담아두었던 하멜의 영혼을 해방했을 때. 만약에, 하멜과 천국에서 재회하게 된다면. 자랑하듯이 말하고 싶었다. 한 명의 마법사가 하나의 나라를 얼마나 크게 발전시키고 바꾸어놓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완벽하게 만들어서 아직까지 잘 남아 있고, 지금…… 내가 너랑 저걸 볼 수 있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세냐는 즐겁고 설레는 상상을 떠올렸다. 그녀는 주변을 한번 휙 돌아보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유진이 잘 아는 미소였다. 심술궂은 장난을 할 때. 가령, 둘이서 작당하고 아니스의 성수를 몰래 훔쳐 먹었을 때. 세냐는 저런 미소를 지으며 소리죽여 웃곤 했다.
“걷는 것도 슬슬 질리는데, 어때?”
세냐는 하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과거에 자주 그랬듯이, 세냐는 유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까치발을 든 발이 천천히 공중에서 멀어졌다.
“수도에서 비행은 허락을 구해야 한다던데?”
“누가 그래?”
“이 나라 법이.”
“하! 아롯이 나한테 법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하늘로 천천히 떠올랐다. 그리고는 아직 땅에 선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늘을 날 자신이 없다면 내 손이라도 잡으시든가?”
유진도 하늘은 날 수 있다. 하지만 유진은 직접 날지 않고, 못 이기겠다는 듯이 웃으며 세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하자 오히려 세냐가 움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보 멍청이.”
부끄러워할 것이면 먼저 말이나 하지 말던가. 세냐는 살짝 시선을 돌리며 투덜거리더니, 유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유진과 세냐가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시내를 걷던 사람들은 유진과 세냐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세냐의 마법 때문이었다. 그녀는 유진과 단둘이 걷는 동안 귀찮은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 주변에 인식을 어긋나게 하는 마법을 펼쳐놓은 상태였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
세냐는 마주 잡은 손의 체온과 존재를 느꼈다. 그녀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즐기며 더, 더 높이 날아갔다. 손으로 잡아끌고 있는데도 유진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도 하늘은 날 줄 안다. 지금도 세냐의 손을 잡고만 있을 뿐이다. 당연히 세냐도 그 사실은 느꼈다. 앎에도 뭐라 투덜거리지 않았다.
그냥,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좋아서.
“흠.”
세냐는 더 이상 위로 상승하지 않고 멈췄다.
살짝 돌아본 도시와의 거리는 멀었다. 300년 전에 그녀가 직접 만든 호수와 중심에 우뚝 선 왕성 아브람이 보였다. 5개의 마탑도 보였다.
그리고 유진의 얼굴도 보였다.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아까보다 조금은 오른 것 같은데, 유진의 얼굴색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얼굴을 보니 왠지 자신이 진 것만 같아서, 세냐는 조금 더 힘을 주어 유진의 손을 잡았다.
“뭐 하려는 거야?”
“잠깐만.”
세냐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나뭇가지로 만든 지팡이가 나타났다. 아카샤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세냐가 세계수의 가지로 직접 만든 지팡이였다. 세냐는 지팡이를 천천히 움직였다.
마법사. 그중에서도 대마법사라면. 일시적으로 비를 내리거나 눈보라를 일으키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범위를 넓게 잡는 것은 힘들다. 마을 하나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것과 도시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아예 다른 일이다.
세냐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위를 보았다.
수도 펜타곤의 부유역은 워프게이트의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 도시의 모든 기후는 15개의 부유역이 연계하며 만들어낸 마법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그 마법은 여름을 너무 덥지 않게, 겨울은 너무 춥지 않게 통제할 뿐만 아니라 기상현상도 조작하고 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지 않도록. 눈이 너무 많이 내리지 않도록. 크게 간섭은 안 하지만, 수도의 시민의 평온한 일상과 매일 찾아오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쾌적한 여행을 위해 최소한의 간섭은 하고 있다.
그렇기에 수도의 일기예보는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오늘 수도의 날씨는 맑음. 겨울다운 추위. 바람은 많이 불지 않게 예보되어 있다.
“하늘을 봐.”
세냐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오늘 수도에 눈이 내릴 예정 따위는 없지만, 세냐는 눈을 내리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눈을 내리게 할 능력도 있었다.
부유역은 수십 수백의 보안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지만, 그 마법 술식의 골자를 구성한 것은 바로 현명한 세냐다. 그렇기에 세냐는 손쉽게 부유역의 기상통제 마법에 간섭했다.
15개의 부유역이 통제하는 것은 펜타곤의 상공 전체. 세냐의 마법이 그 범위에 작용했다.
부유역보다 높은 하늘에서 구름이 모이기 시작했다. 유진은 세냐가 하려는 일을 깨닫고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는 거야?”
“오늘의 기념이야.”
세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예전에 오랫동안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껴왔지만, ‘지금’의 너랑 나는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거야.”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진, 네가 올해 다른 눈을 본 것은 중요하지 않아. 나한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네가 보는 눈이…… 네가 환생하고서, 나와 함께 보는 첫눈이라는 거야.”
커다란 함박눈이 내려왔다. 펑펑 내리는 눈이 유진과 세냐를 지나치며 저 아래의 도시로 떨어졌다.
“오늘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정해진 저 도시가, 너와 나에 의해 새하얗게 변해가는 거야.”
세냐는 그렇게 말하며 유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유진의 옆에 서서 크게 숨을 삼켰다.
“……네가 지금 보는 것. 네가 지금 느끼는 감정. 그리고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느끼는 감정. 그 전부가 지금의 너와 나에게…… 처음인 거야. 지금 내리는 첫눈이 그런 것처럼.”
세냐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면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심장의 두근거림, 얼굴의 열기, 마주 잡은 손의 온도. 얽히는 손가락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 세냐는 하얀 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조금 로맨틱하지 않아?”
유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세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살짝 부는 바람이 세냐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귀와 뺨은 겨울의 추위 때문이 아닐 것이다.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시야와 도시를 하얗게 물들이지만, 세냐의 머리와 어깨에는 조금의 눈도 쌓이지 않았다. 하얗게 덮이는 세상에서 세냐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고 너무나도 잘 보였다.
“그러게.”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세냐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세냐는 유진이 이끄는 힘에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놀란 소리를 낼 새도 없이 유진에게 가까이 오게 되었다.
그 순간 둘의 시야에 더 이상 눈송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무엇도 새하얗지 않았다. 유진의 눈에는 세냐가 있었고, 세냐의 눈에는 유진이 있었다. 겨울답지 않은 부드러운 열기가 서로의 입술로 전해졌다.
‘아.’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세냐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유진을 보다가, 두 눈을 꼭 감았다.
어느새 놓아버린 손이 유진의 허리를 안았다. 유진도 세냐가 멀어지지 않도록, 혹여 놀라서 마법이 풀려 추락하지 않도록 그녀의 등을 안았다.
“……으윽…….”
입술이 맞닿는 순간은 시간이 멈추거나 쭈욱 길게 늘어나는 것만 같았는데. 막상 입술이 떨어지니 아쉽고 짧게 느껴졌다. 세냐는 빨개진 얼굴로 하얀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이…… 이것도 처처, 처음이야. 다…… 당연한 일이지만.”
함께 보는 첫눈. 그리고 첫키스.
완벽하다. 이 이상으로 완벽할 수가 없다. 자연스레 내린 것이 아닌 세냐가 내리게 만든 눈이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첫 키스를 먼저 해온 것이, 입술을 강도처럼 빼앗아 간 것이 바로 유진이라는 것이다.
“……흐, 흐흥, 네게 이런 배짱이 있을 줄이야. 그…… 그래서 어때? 유진, 첫 키스의 감상은?”
세냐는 부끄럼을 떨치기 위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 바로 앞에 있는 유진을 쳐다보았다.
“…….”
유진은 세냐를 보지 않고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응?”
세냐는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과,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보았다. 등을 안고 있는 손의 떨림을 느꼈다.
“어땠냐니까? 첫 키스.”
“…….”
“야.”
세냐의 눈동자가 천천히 커져갔다.
“야!”
“그게…… 그러니까…….”
이런 점에서 유진은 도저히 거짓말을 할 성격이 못되었다. 유진은 어떻게든 세냐를 진정시키고 납득시키려 입을 열었지만, 뜻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뭐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날아온 따귀가 유진을 날려 버렸다.
세냐 메르데인
수도의 호텔.
크리스티나는 호화로운 최상층에서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도시를 보고 있었다. 예고 없이 내린 눈에 시민들은 혼란스러워했지만, 지금은 다들 거리에 나와 갑작스러운 이벤트를 즐기고 있었다.
“눈싸움을 한번 해보고 싶었느니라.”
커다란 소파에 앉은 라이미르아가 웅얼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메르는 라이미르아가 앞에 펼쳐놓은 카드를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눈싸움이야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용마성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본녀는 태어나서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느니라.”
“정 보고 싶다면 지금 창문 앞에서 보면 되잖아요.”
“본녀는 눈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느니라. 눈싸움을 해보고 싶으니라.”
“아 글쎄, 하고 싶으면 혼자 내려가서 하라니까요.”
“눈싸움을 혼자서 하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느냐? 본녀는 메르, 너와 눈싸움을 해보고 싶으니라.”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어요. 언제 유진 님이랑 세냐 님이 돌아올지 모르잖아요.”
메르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라이미르아가 펼쳐놓은 카드를 향해 슬며시 손을 뻗었다.
“어느 쪽이 조커인지 말해 봐요.”
“본녀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느니라.”
“내가 조커를 뽑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둘은 아까부터 카드게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실 메르도 방에서 카드나 만지작거리는 것보다는, 라이미르아와 함께 나가서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도 말했듯이, 메르는 지금 당장은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슬슬 해도 저물어간다. 언제 유진과 세냐가 돌아올지 모른다.
메르는 이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가, 세냐와 유진이 돌아오는 것을 맞이해 주고 싶었다. 라이미르아와 눈싸움이나 눈사람을 만드는 것도 즐겁기는 하겠지만, 놀이에 심취했다가는 기껏 차려입은 옷이 눈에 흠뻑 젖어 버릴 것 아닌가.
“어쩌면 오늘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창밖을 보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아니스였다.
“음, 과연. 수백 년 만에 제대로 만난 것이니, 밤을 꼬박 보내도 모자랄 만큼의 나눌 이야기가 많겠죠.”
메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라이미르아의 카드를 한 장 뽑았다.
조커였다.
“이야기라, 흐음, 이야기라…… 과연 이야기만 나눌지.”
아니스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창문 앞 소파에 털썩 앉았다. 육체의 대화도 나름 이야기라 할 수 있겠지.
[시스터!]
‘뭘 기겁하고 그럽니까. 애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자면 세냐의 나이가 300살입니다.’
[파렴치한 상상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시스터의 발칙한 상상은 저를 너무 부끄럽게 만듭니다.]
‘크리스티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당신이 그 발칙한 상상을 꽤나 즐기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제발, 시스터.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저를 음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말은 거짓을 내뱉지만 몸은 솔직한 법이지요.’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의 뚜껑을 열었다. 꼴꼴꼴. 큼직한 잔에 위스키를 넘칠 듯이 가득 따르자 머릿속의 크리스티나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너무 뭐라 하지 말고 자비를 베푸십시오, 크리스티나. 오늘 같은 날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언제 마신단 말입니까?”
아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멎어가는 눈발을 향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이 상황이 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제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여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술잔을 입술로 물었다. 크리스티나도 짧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욕심, 욕심이라. 성녀, 성직자가 가져서는 안 될 욕망인데.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감정을 느끼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희도 결국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욕망과 감정이 없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하지만 욕망과 감정만으로 행동하다가는 인간에서 짐승이 되어버린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지금 방에서 얌전히, 나잇값 못하고 서로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꺅꺅대는 늙은 꼬맹이 2명의 보모 노릇을 하면서 궁상맞게 홀로 술이나 마시는 것도.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세냐가 아주 작정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도시에 불꽃놀이가 없어서 안심했는데, 설마 눈을 내리게 할 줄은.’
[눈이 그렇게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와 유진 님도 루하르에서 눈은 질리도록 보지 않았습니까?]
‘그때 저희가 보았던 눈과 지금 내리는 눈은 의미가 많이 다를 겁니다. 일단, 유진과 세냐는 단둘이서 눈을 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루하르에서 미치광이처럼 쏟아지던 폭설이 아니라, 예쁘게 내리는 함박눈을 말입니다.’
[그래 봤자 똑같은 눈…….]
‘아뇨, 똑같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의 인간은 이런 간단한 것도 알지 못하는 겁니까? 300년 만에 제대로 재회한 남녀가 단둘이서! 펑펑 내리는 흰 눈을 보는 겁니다!’
[하…… 하지만 그 눈은 세냐 님이 내리게 한…….]
‘예, 세냐는 제 상상 이상으로 치밀하고 간사한 흉계를 실행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크리스티나. 눈을 맞으면 어떻게 됩니까?’
크리스티나는 저 당연한 질문이 의도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눈을 맞으면…… 옷이 젖겠지요. 몸도 추워질 것이고…….]
‘그렇습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눈을 맞으면 옷이 젖습니다. 공기도 차갑고 바람도 불면 추위를 느끼지요. 옷이 젖은 상태로 추위를 느끼면 감기에 걸립니다.’
[저…… 저런. 감기는 우습게 볼 병이 아닙니다. 어, 어서 치료를…….]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도 아니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조금씩 눈치를 챈 것이다.
‘옷이 젖고 추우면! 사람이건 짐승이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따스함을, 더위를! 찾게 된단 말입니다. 바람 불지 않고 따스한 방에라도 들어가서 말입니다. 젖은 옷을 벗고! 몸을! 따뜻하게! 옷을 벗은 사람이 알몸으로 싸돌아다니는 짐승과 다를 게 무업니까?’
콰작! 아니스의 손이 들고 있던 술잔이 박살 났다.
[파렴치한, 파렴치한!]
크리스티나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스가 맨손으로 술잔을 박살 내고 어깨를 떨기 시작하자, 서로 머리채를 쥐어 잡으며 네가 카드를 바꿔먹는 사기를 친 것이라며 싸워대던 메르와 라이미르아도 서로를 얼싸안고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니스는 술에 젖은 손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문은 당연히 잠가놓았고, 이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스와 유진 둘뿐이었다.
“응?”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얼굴 반쪽이 퉁퉁 부은 유진이었다. 뺨만 부은 것이 아니었다. 눈두덩이도 부었고, 입술도 터져 있었다.
폭력이라면 아니스도 일가견이 있다. 그녀는 유진의 얼굴이 엉망이 된 이유가 어떠한 공격에 의해서인지를 쉽게 짐작했다.
왼뺨에 가해진 너무 강한 따귀. 주먹보다 면적이 넓은 손바닥이 얼굴 한쪽 면에 통째로 작렬한 것이다.
“은자(隱者)여!”
라이미르아가 비명을 질렀다. 라이자키아의 뱃속에서 꺼내준 이후로, 라이미르아는 유진을 은자라 부르고 있었다.
“유진 님!”
메르도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세냐 님!”
비명이 환희로 바뀌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유진의 뒤를 따라 들어 온 세냐 때문이었다. 메르는 소파에서 깡총 뛰어내려서 세냐에게 달려갔다.
“그래, 그래.”
세냐는 허리를 안아오는 메르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슬쩍 고개를 들어 방안을 보았다.
놀란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서는, 아니스와 너무나 닮은 여자. 다른 점이라고 해 봐야 눈매와 눈물점 정도. 크게 뜬 눈동자가 전해오는 시선이 낯설지가 않았다.
“아니스?”
“……세냐…….”
아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세냐의 이름을 불렀다. 커다란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갔다. 이름을 부른 목소리에도 강한 떨림이 실려 있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스와 담판을 낼 생각이었다. 사람이 반쯤 죽어서 봉인된 사이에 선수를 치다니, 간사한 뱀 같은 여자.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스의 행동은 비겁하고 부정하다 느꼈다.
하지만. 막상 아니스를 보고, 그녀가 저런 표정을 하고서 내는 목소리를 들으니 담판은커녕 세냐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갔다.
“아니스으으…….”
“세냐아아…….”
결국 둘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세냐는 허리에 매달린 메르를 번쩍 들고서 유진을 지나쳤다. 아니스도 손을 흠뻑 적신 술을 닦으며 앞으로 나왔다.
세냐와 아니스가 서로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메르는 세냐와 아니스의 사이에 파묻혔다.
메르는 양쪽에서 가해지는 압박에 괴로워하며 버둥거렸지만, 세냐와 아니스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엉엉 울며 서로를 어루만졌다.
“정말, 정말 아니스 맞아?”
“예, 맞습니다. 몸은 다르지만, 정말로 제가 맞습니다.”
“꿈만 같아……. 죽은 너와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꿈이 아닙니다, 세냐. 이건 틀림없는 현실입니다. 말하자면 신께서 베푸신 은혜로운 기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둘 사이에 낀 메르의 발버둥이 조금씩 멎어갔다. 아니스는 양손으로 세냐의 뺨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저뿐만이 아니잖습니까. 당신도 살아남아서, 이렇게 저와 만났습니다. 비록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났기는 합니다만…….”
정말로 별생각 없이 말했던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 세냐의 뺨이 움찔 굳었다.
“수백 년이 흐른 것은 맞지만 내 몸은 수백 년 전과 다를 것이 없어.”
“예?”
“마법으로 육체를 완벽하게 재구성해냈거든. 나의 전성기 시절. 네가 기억하는 젊은 모습 그대로. 비록 수백 년이 흘렀다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늙은 적이 없단 말이지.”
아니스는 세냐의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거렸다. 곧 아니스도 세냐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얇은 미소를 짓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죽어 육체가 사라진 저와는 달리, 세냐 당신은 온전히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있군요.”
“슬프지만 그렇지.”
“아뇨,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제가 깃들어 있는 이 육체는 생전의 제 몸과 거의 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마법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없는 23살의 젊은 몸이랍니다.”
“23살? 유진보다 나이가 많네.”
“그래 봤자 2살 차이입니다. 구분하자면 20대 초반.”
“육체의 나이가 크게 중요할까, 알맹이가 수백 살인 것은 똑같은데.”
“죽은 햇수를 나이로 치는 것은 계산법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알맹이뿐만 아니라 껍데기도 수백 살인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마법으로 재구성했다니까?”
“저런, 저는 딱히 세냐 당신을 의식해서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쿡 찔리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세냐와 아니스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둘은 날카롭게 뜬 눈으로 시선을 나누었다. 이윽고 부둥켜안고 있던 둘의 몸이 서로 떨어졌다. 철푸덕! 그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메르가 땅에 널브러졌다.
“이 못된 년!”
세냐가 빽 고함을 지르며 아니스의 머리채를 잡았다.
“늙어빠진 나무 계집!”
아니스도 질세라 세냐의 머리채를 잡았다.
“비겁하게 선수를 쳐?! 내가, 내가 다 들었어! 네가 유진의, 하멜의 입술을!”
“애새끼도 아니고 뽀뽀 먼저 했다고 친구 머리채를 잡는 겁니까?!”
“뽀…… 뽀뽀가 아니었잖아! 다, 다 들었다고! 심지어 네가 빼앗은 입술은 유진의 첫 키스였다며!”
“당신은 진짜 애새끼입니까? 하멜 저 자식이 용병 시절 할 짓 못 할 짓 다 한 남자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었잖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저, 전생 일이잖아! 그리고 용병들은 다 그랬어! 적어도 우리랑 만나고서는 그런 짓은 안 했잖아! 중요한 것은 현재야, 현재! 환생한 하멜의 첫 키스를 네가 가져갔다는 것이 중요한 거라고!”
“하멜의 첫 키스만 중요합니까?! 저도 첫 키스였습니다! 그리고 이 몸의 주인인 크리스티나도 첫 키스였단 말입니다!”
그 말에 세냐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그녀는 다른 한 손까지 마저 사용해 아니스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서로가 첫 키스를 교환했다는 거잖앗! 나, 나만 빼앗긴 거라고!”
“빼…… 앗겨? 빼앗겼다고! 하멜이 당신에게 직접 키스한 겁니까?!”
아니스도 눈을 부릅뜨고서 세냐의 머리채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래, 빼앗겼다! 부럽지? 응?!”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빼앗기기 전에 빼앗는 것이 낫지요, 그래서 저는 빼앗은 겁니다! 당신보다 먼저!”
“성불이나 해, 이 망령아!”
“입 닥치십시오, 썩은 나무뿌리 냄새가 나니까!”
서로의 머리채를 잡아 뜯는 둘을 향해 유진이 슬금슬금 다가갔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서로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
“뭐얏?”
“죽은 아니스한테 성불이나 하라니, 그건 좀…….”
“유진! 너 지금 내 앞에서 아니스 편을 드는 거야?!”
“잠깐, 제발, 끝까지 들어. 아니스 너도! 세냐한테 말이 너무 심하잖아, 세냐한테 나무뿌리 냄새 같은 건 안 나.”
애당초 나무뿌리 냄새가 대체 뭘까.
“먼저 욕을 한 것은 세냐입니다! 세냐가 먼저 제 머리카락을 잡았단 말입니다. 하멜, 잘 생각하십시오. 지금 세냐가 쥐어뜯는 머리카락은 제 것이 아닌 크리스티나의 것입니다. 크리스티나가 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시스터, 저 사악한 마녀를 대머리로 만들어 버립시다.]
크리스티나가 살벌한 외침으로 호응했다.
“그만, 그만!”
아니스와 세냐가 정말로 서로의 머리카락을 뽑아대기 시작하자,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둘의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차라리, 차라리 내 머리카락을 뜯어! 차라리 날 죽이라고!”
“그래, 이 개새끼야! 말 한번 잘했다.”
세냐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스의 머리카락을 놓고 유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하멜!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제가 못 할 것 같습니까?”
아니스도 즉시 유진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4개의 손이 동시다발적으로 유진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죽어, 이 미친놈!”
“개자식!”
쥐어뜯은 회색 머리카락이 천장에 뿌려졌다. 그 광경에 라이미르아는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서 몸을 덜덜 떨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메르도 덩달아 화가 난 것인지 유진의 다리를 꼬집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공격을 받으면서도 유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산책을 하듯이 평화로웠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뜯긴 머리카락은 새로 날 테니까.
유진은 두피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하고서 두 눈을 감았다.
세냐 메르데인
다소곳한 자세로 소파에 앉은 유진의 앞에 아니스와 세냐가 함께 앉았다. 둘은 서로를 의식하고 힐긋 노려보면서도 아예 멀리 떨어져 앉지는 않았는데, 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소파 주변 바닥에는 쥐어뜯긴 회색 머리카락들이 널브러져 있다.
지금 세냐와 아니스 사이에 조금 떨어진 거리. 저곳에 존재하는 평화와 희망과 우정은, 유진이 머리털을 내놓아 쟁취한 것이다.
“뭘 잘했다고 웃어?”
“반대쪽 뺨도 맞는 수가 있습니다.”
쏘아져 온 시선. 유진은 즉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말은 하였지만 세냐와 아니스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세냐는 자신이 있는 대로 쥐어뜯은 유진의 머리를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육체의 완벽함이 모근에도 영향을 주었나. 2명이서 쥐어뜯어 댄 것에 비해 유진의 머리카락은 엄청 많이 뽑히지는 않았다. 당시의 마음 같아서는 아예 대머리로 만들거나 땜빵 구멍을 몇 개 만들어놓을 생각이었는데, 워낙에 머리털이 풍성했던지라 뽑은 티도 잘 나지 않았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직 퉁퉁 부어 있는 유진의 뺨이 세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따귀를 때릴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했다만 너무 세게 때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리 와봐. 얼굴 치료해 줄…….”
세냐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니스가 벌떡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유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유진의 옆에 앉더니, 부어오른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야! 내가 치료한다고 했잖아!”
“생각해 보십시오, 세냐. 당신이 엘프족의 치료마법을 쓸 줄 아는 것이야 300년 전부터 그랬지만, 당신의 치료마법이 저보다 뛰어났던 적이 있기야 합니까?”
“팔다리 잘리고 날아간 것도 아니고, 꼴랑 얼굴 좀 부은 것에 치료마법의 수준이 무슨 소용…….”
“꼴랑이라고 할 만한 상처는 아닙니다. 하멜이 비인간적으로 튼튼하기에 이 정도 붓고 말았지, 보통 사람이 당신의 따귀를 맞았다면 머리가 물풍선처럼 펑 터져 버렸을 겁니다.”
반박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세냐는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아니스가 그랬던 것처럼 유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때려서 미안해.”
세냐는 용기를 내어 유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머리카락을 뜯어서 미안합니다.”
아니스는 자연스럽게 유진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그 과감하고도 발칙한 모습에 세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하지만 세냐는 도저히 아니스처럼 유진의 허벅지에 손을 얹을 수가 없었다. 세냐는 핏줄이 울퉁불퉁한 유진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꼴깍 침을 삼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 음. 나도 미안해.”
손등을 조물거리는 세냐. 개털을 쓰다듬듯이 허벅지를 쓱쓱 만지는 아니스. 그 사이에서 유진은 일단 사과했다.
“내가 그…… 이런 경험도 없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잠깐.”
세냐가 급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유진, 네가 아니스와 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 강요할 생각은 없거든?”
300년이 굉장히 긴 시간이기도 하지만, 세냐가 특히 두려운 것은 자신이 봉인된 동안 아니스와 유진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는지가 두려웠다.
300년 전에 쌓아온 감정은 세냐와 아니스 둘이 동등하다 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아니스가 세냐보다 먼저 유진과 만났다는 점이다.
저 간사한 뱀이 세냐가 없는 동안 유진을 어떻게 구워삶았을지 모르는 일. 사실 그런 생각을 제쳐두고서도 세냐는 300년 전부터 아니스의 감정을 존중해 줄 생각이기는 했다.
“둘이 아닙니다.”
아니스가 냉큼 입을 열었다. ……정말로 아니스가 맞나? 푸른 눈동자에서 전해지는 기척이 바뀌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현명한 세냐 님. 제 이름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아니스 님의 고귀한 희생으로 만들어진 이 육체의 주인이자, 지금 시대의 성녀이며, 부끄럽게도 유진 님을 사모하는 여자입니다.”
“뭐…… 뭐랏…….”
“평생을 신앙이란 사슬에 갇혀 있던 저는 유진 님에 의해 자유를 얻었습니다. 유진 님에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냐 님과 아니스 님이 유진 님을 가슴에 품으시듯, 저 역시 유진 님을 가슴에 품게 되었습니다.”
유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전생부터 싸움에 관한 칭찬이나 평가는 질리도록 들어보았어도, 이런 식의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유진은 자신에게 향하는 과분한 관심이 너무나도 민망하고 무거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진짜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도망쳐 버리면 아까처럼 머리털이 뽑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세냐 님의 말씀은 저와 아니스 님도 동감합니다.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과 상실이 따르는 법이고, 이러한 선택은 우리 모두에게 잔인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또한 생각해야 할 것은, 저희 당장 몰두해야 할 것은 이런 평화로운 고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진 님은 300년 전부터 이 세상을 구하고자 몸을 바친 영웅이시며, 환생한 지금 시대에서는 성검의 선택까지 받아 용사의 의무까지 수행하고 계십니다.”
스윽. 허벅지를 어루만지던 크리스티나의 손이 살짝 위로 들렸다. 그녀는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유진의 허벅지를 그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고결한 정의를 품으신 유진 님은 성검의 선택을 받지 않으셨어도 이 세상을 구하고 마왕을 멸하는 것에 제 운명을 바치셨겠지만 말입니다.”
“고…… 결한…… 정의……?”
그 하멜에게 저런 말이 가당키나 한가? 세냐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 부정할 수가 없는 말이기도 했다. 모든 마왕을 죽여 세상을 구하겠다는 신념은 300년 전 5명 모두가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저 단어의 선정에 강렬한 위화감을 느낄 뿐이었다. 욕을 입에 달고 살고 껄렁하던 하멜에게 고결한 정의라니! 꼭 저런 식으로 표현을 해야 하나? 세냐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
세냐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세냐는 자신과 수백 년은 차이 나는 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경쟁자가 결코 우습게 볼 애송이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다.
“으흠.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보다 내가 너를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편하신 대로 불러주십시오, 세냐 님. 제가 어찌 감히 세냐 님의 지칭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의도로 한 말일까……. 세냐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계속하자면, 지금의 시대와 저희가 처한 상황은 이런 한가로운 고민을 중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세냐 님.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말입니다. 유진 님이 세냐 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서 만약이라고 한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살포시 웃으며 세냐를 응시했다.
“그런 선택이 내려진 뒤에도 세냐 님은 유진 님의 곁에 있으실 겁니까? 마왕을 죽이겠다는 여정에 모든 힘을 바치실 겁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건, 당연한 거잖아. 마왕을 잡고 세상을 구하는 것에 사적인 가가, 감정을! 그런 감정을 끼워 넣어서는 안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냐의 목소리는 허둥지둥 떨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세냐를 응시하다가, 방긋 웃었다.
“과연. 세상을 구한 대영웅에 걸맞은 고귀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군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스 님의 생각은 다르실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유진 님이 저를 선택하지 않으신다면. 슬픔을 이기지 못해 평생 수도원에 틀어박힐 생각입니다.”
그 과격한 말은 세냐뿐만 아니라 유진의 입까지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애당초 꼭 선택할 필요가 있는가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저와 아니스 님은 이미 충분히 잘 지내고 있고, 서로를 배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냐 님과도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귀족이며 능력이 뛰어나고 감당할 수만 있다면. 한 명의 남자가 여러 부인을 두고, 한 명의 여자가 여러 남편을 두는 것이 부도덕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당장 위대한 베르무트 님도 십수 명의 부인을 둔 것으로 압니다만.”
“아, 어, 음, 그래, 그건 그런데, 어, 어어…… 나, 나는 여러 남편을 가질 생각이 없거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게 있어서 유진 님 이상의 남편은 없으니 말입니다.”
“제발…….”
유진은 더 이상 듣기가 괴로워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너희는 날 수치스러움에 자살하게 만들 생각이냐?”
“앉아주십시오, 유진 님. 이것은 꼭 나누고 가야 할 이야기였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유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다가 크리스티나는 잠깐 멈칫거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냐 님. 아니스 님께서 다음의 이야기는 오늘 밤에라도 술을 곁들이며 나누자고 하십니다. 유진 님 없이, 저희 셋이서.”
“그…… 그래.”
세냐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둘이서 술 약속을 잡아버리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유진만 어색한 처지가 되었다. 유진은 언제 일어섰냐는 냥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세냐.”
크리스티나가 아니스로 바뀌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세냐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저는 여전히 당신이 걱정이 됩니다. 라이자키아를 죽이고 봉인에서 벗어나기는 했다지만, 당신에게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유진도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을 입었던 것이 300년 전이다. 유진은 아직도 자신의 곁에 세냐가 있다는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아무 문제가 없지는 않지.”
세냐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죽을 뻔한 상처를 입었던 것도 사실이고, 200년 동안 목숨만 부지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야. 조금 약해지긴 했어.”
“얼마나?”
“평범한 마법이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겠지만, 이터널 홀을 오랫동안 쓸 수는 없어.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라이자키아의 독기는 깔끔하게 정화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베르무트에게 당한 상처였다. 그 상처는 200년 전에도 평범하지 않았다. 세계수의 잎사귀를 사용해서 간신히 엘프의 영지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도 상처의 치료가 잘되지 않았다.
“지금 내 육체에 그때의 상처는 없어. 죽어가는 몸을 완전히 재구성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상처는 내 영혼에 남아 있어.”
“영체로 보았을 때 구멍은 없던데?”
유진이 그렇게 말하자, 세냐가 끔찍하단 표정을 지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야 이 멍청아. 상처라고 해서 내 영혼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줄 아니? 그런 구멍이면 내가 진즉에 뒈졌지!”
“왜 화를 낸담…….”
“네가 멍청한 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제대로 마법도 배웠으면 그런 멍청한 소리는 자제하도록 해.”
세냐는 그렇게 지적하면서 유진의 뺨을 쿡 찔렀다.
“영혼의 상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래도 200년 전처럼 엄청 심각하지는 않아. 세계수가 메말라가면서까지 내 혼을 치유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상처가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몇 번 시험해 보았는데, 이터널 홀을 가동할 때마다 영혼의 상처가 의식돼. 너무 남발하거나 오랫동안 써버리면 기껏 나아가는 상처가 더욱 심각해질 거야.”
“아니스의 신성마법으로도 안 되나?”
“자세히 살펴보아야겠지만, 아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신성마법은 망가진 육체를 회복시키는 것은 가능해도 영혼의 상처는 치료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이터널 홀을 쓸 수 없다고 해도 세냐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다. 300년 전부터 그랬다.
하지만. 300년이라는 긴 시간은 유진의 적들을 너무나 강하게 만들었다. 그 과거에도 5명이 모두 덤벼야 승기를 잡을 수 있던 대마족. 유폐의 칼과 몽마의 여왕. 싸움이 성립하지도 않았다는 유폐의 마왕.
……모두를 절망시켰던 멸망의 마왕.
라이자키아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놈이 오만했기 때문이다.
라이자키아는 가비드나 누아르처럼 권속을 늘리지도, 인간에게서 정기를 거두지도 않았다. 라이자키아가 힘을 늘리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라이미르아를 씨받이로 쓰는 것이었고, 그것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차원의 틈새에 처박혔다. 가비드와 누아르가 힘을 키우고 능력을 단련하는 동안, 라이자키아의 힘은 오히려 점점 줄어들었다. 에드몬드의 마력을 빼앗아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하기는 했었다만, 라이자키아의 힘은 다른 공작들과 비교되지 않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더 문제인 것이다. 몇 번 기회가 있기는 했다만, 결과적으로 유진은 라이자키아를 단독으로 죽이는 것에 실패했다.
전생에 5명이 덤벼야만 승산이 있던 상대를 혼자서 죽일 뻔한 것도 뭐, 훌륭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앞으로의 적을 생각하면 저딴 식의 자기만족은 하등 중요치 않았다.
‘이그니션의 중첩. 이거는 미친 짓이야.’
그 순간에 유진이 도달했던 힘은 라이자키아를 압도했다. 그럼 뭐 하나. 1분, 아니, 몇 초만 더 있었어도 라이자키아의 목을 뽑아버렸겠지만ㅡ 패배는 패배다.
세냐가 오지 않았다면, 아가로트의 반지와 이그니션을 2번 중첩한 대가가 유진의 심장을 박살 냈을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세냐는 히죽 웃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엘프 영지의 세계수는 힘을 잃었고, 예전과 같은 위용을 되찾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유진, 네 가문에 세계수의 묘목이 있다며? 그곳에서 요양하다 보면, 상처를 조금씩 낫게 만들 수는 있을 거야. 못해도 더 심각해지지는 않겠지.”
‘집에서 같이 살겠다는 말이로군요.’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은 했다만. 아니스는 얇게 뜬 눈으로 세냐를 흘겨보았다.
“세냐. 당신의 말을 들으니 커다란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대체, 베르무트 님은…… 왜 당신에게 그런 상처를 입힌 것일까요.”
아니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꿰뚫은 공격.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지 않나. 베르무트는, 무조건 세냐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베르무트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지.”
세냐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을 들었다. 손가락이 세냐의 머리 옆에서 빙글 돌았다. 그러자 투명한 빛이 세냐의 머리에서 흘러나와 손가락에 엮였다.
“이건 200년 전의 기억이야.”
세냐가 손가락을 앞으로 뻗었다.
“베르무트가 날 공격했을 때의 기억.”
세냐 메르데인
마법으로 뽑아낸 기억이 영상이 되어서 눈앞에 펼쳐졌다.
200년 전.
세냐는 그녀는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서클 마법식을 창조했고, 그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끝’인 9서클을 초월하기 위해 이터널 홀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세냐는 은둔을 준비했다.
이터널 홀을 만들어낸 시점에서 세냐는 아카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냐는 아크리온에 이터널 홀의 원리를 담아 낸 마법장치와 아카샤를 기증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후대의 마법사가 이터널 홀을 이해하고 그것을 제 몸에 담아내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만큼의 재주가 있다면 아카샤에도 간섭해서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 모든 것이 세냐에게는, 속세와 인연을 끊는 준비였다. 이터널 홀과 아카샤를 기증하고서부터 세냐는 왕정과 마탑, 길드와의 연락도 단절했다. 그나마 제자들과는 어느 정도 교류를 이어갔지만, 오랫동안 앉아 있던 녹색마탑주의 자리도 제자 중 1명에게 물려주면서 많지 않던 교류조차 줄여갔다.
지금 시대에서 하멜의 무덤이 있는 카니지는 사막이 되어 나하마의 영토가 되었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카니지는 나하마가 아닌 튜라스의 영토였다.
튜라스의 변경. 하멜의 고향. 베르무트와 모론, 세냐, 아니스는 그 땅의 깊숙한 지하에 하멜의 무덤을 만들었다. 동상과 추모비를 세우고,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봉인한 방에 관을 두어 하멜의 시체를 안치했다.
그 깊은 지하 속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며, 우연으로라도 발견되지 않을 장소였다. 그것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세냐와 동료들은 무덤 자체를 통째로 봉인했다. 흐르는 시간에도 언제나 처음 같은 모습이 유지되도록 여러 마법을 걸었고, 여러 사역마들도 배치해 두었다.
하멜의 무덤에서 일어난 문제를 알게 된 것은, 세냐가 은둔을 준비하던 즈음이었다.
봉인이 부서졌다. 무덤을 관리하던 사역마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덤을 만들고서 수십 년. 키옐의 대공이자 라이언하트라는 신생 가문의 가주가 된 베르무트는 자식들의 교육 등의 이유로 바빠졌다. 모론도 루하르라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니스도 성인으로 추앙되며 유라스를 벗어나기 힘들어졌다.
세냐도 비슷했다. 녹탑주라는 지위. 유폐의 마왕을 겨냥한 마법의 연구. 덕분에 매년 가던 추모도 가지 못했으나, 그런 문제로 사역마와 봉인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냐가 걸어놓은 봉인과 마련해 놓은 사역마들은, 앞으로 수백 년은 굳이 보수를 하지 않아도 되었단 말이다.
그런 봉인과 사역마가 파괴되었다는 것. 생각할 만한 답은 하나뿐이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부순 것.
ㅡ대체 누가? 땅속 깊은 곳에 던전을 만들고 싶어 하는 괴짜 마법사? 잠들 장소를 찾는 드래곤? ……하멜에게 원한을 가졌던 마족?
누구든 상관없었다.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더러운 흙발로 무덤을 침입한 것. 그것뿐이라면 용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봉인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사역마까지 파괴한 것은 명백하게 적의를 드러낸 것이니까.
영상으로 투영된 기억의 시야는 어두컴컴했다. 이윽고 점점 빛으로 밝아졌다.
오래전 세냐의 눈으로 보았던 풍경. 유진이 직접 보았던 무덤은 폐허와 다름이 없었지만ㅡ 세냐의 기억에서 보는 무덤은 ‘아직’은 훼손되어 있지 않았다.
우뚝 선 동상은 먼지 한 톨 없다. 그 아래 놓인 추모석도 하얗게 반들거린다. 벽면 가득 새긴 기도문도 뚜렷하며, 금이 간 곳은 하나도 없다.
곧, 세냐의 눈이 파괴된 것들을 보았다. 무덤을 관리하고 지키는 사역마들.
“감히……!”
내뱉는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일그러지고, 흔들렸다. 통제를 놓고 발산하는 마나 때문이었다. 영상에서 세냐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가 얼마나 크게 분노하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는지는 얼굴을 직접 보지 않아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세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덤에서 가장 깊은 곳. 하멜의 시체가 안치된 방. 그곳에서 무언가 움직임을 감지했다.
침입자. 어떻게 방의 문을 열었지? 그러한 의문을 혼잣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 순간에 세냐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침입자, 도굴꾼, 누군지 모를 개새끼를 어떤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찢어 죽일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 그 풍경은 유진도 알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유진도 저 복도를 걸었었다. 굳게 닫힌 방문 앞에 앉은ㅡ 시커먼 갑옷을 입은, 자신의 시체를 보았었다.
세냐의 기억에서, 당연히 데스나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문도 닫히지 않고 활짝 열려 있었다.
복도를 걷던 세냐의 걸음이 멈췄다. 그 기억을 보던 유진도 숨을 삼켰다. 아니스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세냐는 더 보고 싶지 않아 두 눈을 감았다.
방 안에는 칙칙한 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관은 이미 열려 있다. 그 위에는 칼날 없는 칼자루만이 빛에 휘감겨 떠 있었다. 칼자루를 감싼 칙칙한 회색빛. 보름달 한복판에 칼자루가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베르무트?”
그 빛을, 세냐가 모를 리가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에 강한 의문이 실렸다.
베르무트는 이미 몇 년 전에 죽었다. 도저히 죽을 것 같지 않은 존재였는데. 그 누구보다 수명에 구애를 받지 않을 것만 같던 베르무트는 동료 중 누구보다 빨리 수명이 다해 죽었다.
“베르무트…… 베르무트 맞지?”
세냐는 더듬더듬 물으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관 위에 떠 있는 월광검을 응시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로브의 후드는 벗겨지지 않았지만, 그 아래에는 사자를 연상시키는 금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세냐의 눈은 베르무트의 시선 아래를 보았다.
축 늘어진 시체.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조금도 썩지 않은, 그렇게 마법적인 처리를 해둔 하멜의 시체. 베르무트는 하멜의 시체를 양팔로 들고 있었다.
“너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적의보다는 당황이 더 컸다. 세냐는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베르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양손이 살짝 들리더니 하멜의 시체가 공중에 떠올랐다. 세냐는 곧 벌어질 일을 예감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하멜의 시체가 세냐에게 던져졌다. 아니, 쏘아졌다. 그 순간에 세냐의 머릿속에는 ‘피한다’라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급히 마법을 펼쳐서 하멜의 시체를 상처 없이 멈추게 하려 했다.
하지만. 마경을 떠돌 적부터 기묘하다 느꼈던 베르무트의 마법은, 세냐의 생각처럼 하멜의 시체를 도중에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기어코 시체가 다가오자 세냐는 반사적으로 양팔을 펼쳐 하멜의 시체를 받아냈다.
“커흑!”
팔로 받아낸 순간. 시체를 날아오게 만든 ‘힘’이 세냐의 몸에 전달되었다. 시체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으나, 정작 세냐의 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뒤로 날아가 버렸다.
복도의 끝까지 날아가면서도 세냐의 눈은 하멜의 시체를 보았다. 바닥에 쓰러지는 시체. 그 시체를 넘어오는ㅡ 맹수의 금색 눈동자.
“베르무트!”
세냐는 거대한 분노를 느끼며 고함을 질렀다.
하멜의 시체를 무기처럼 던졌다. 그 베르무트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베르무트는 세냐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금색 눈으로 세냐를 노려볼 뿐이었다.
베르무트의 모습이 세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세냐는 주저하지 않고 이터널 홀을 가동했다. 가시화된 거대한 마나가 세냐의 시야에서 회오리쳤다.
이곳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 세냐는 그렇게 판단하고서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대로 무덤 밖까지 나가려 했지만, 베르무트는 세냐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시야에서 사라졌던 베르무트는 이미 동상과 추모석을 등지고 서 있었다.
“네가, 왜?!”
수십 년 전에 저 동상 앞에서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베르무트가 직접 추모석에 이름을 적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많지 않았던 베르무트다. 세냐가 기억하는 한, 십수 년의 여정에서 베르무트가 흘린 최초의 눈물은 하멜이 죽었을 때였다.
베르무트는 라이언하트 가문의 가주가 된 후로부터 동료들과의 연을 끊다시피 행동했다.
세냐는, 자신이 그것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멜의 유지. 모두의 바람. 마왕을 죽이는 것.
실패했다. 힘이 부족했다. ……그것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멜이 없는 세상 따위 살고 싶지 않았으니, 하멜이 그러했듯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는 것도 괜찮은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베르무트는ㅡ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마왕과 약속을 맺었다. 그렇게 동료들을 구했고, 하멜의 시체와 영혼을 돌려받았다. 세상에 평화를 되찾았다.
베르무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5명 중에서 오직 하멜만이 죽어버렸다. ……감정이 좀처럼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냐는 한때 베르무트를 원망했다. 단순히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각자의 삶이 바빴다. 이기적인 변명이다. 아무리 바빴어도 찾아가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었다.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슬프고 분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후회는.
몇 번이나 했다. 베르무트가 돌연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세냐는 그 소식을 들은 방에서, 베르무트의 가문에서, 베르무트의 관 앞에서, 흑사자 성의 무덤에서 엉엉 울었다.
우리는 얼마든지 시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란다면 얼마든지 수명을 늘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더 이상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었을 때. 예전처럼 마왕과 맞설 준비를 갖추었을 때.
그때, 다시 모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난 네 죽음에 울었어.”
사방에서 공격이 몰아쳤다. 세냐가 일으킨 수많은 마법들이 공격을 상쇄하고 베르무트를 추격했다. 무덤 전체가 흔들리고 벽면에 쩍쩍 금이 갔다.
“왜, 왜 네가. 왜 하필 여기서……!”
벽과 천장이 무너지고 있다. 세냐는 추모석과 동상이 휘말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공격들의 궤도를 틀었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법인지 참격인지 모를 공격들이 집요하게 세냐를 파고들었다.
진심이다.
베르무트는, 진심으로 공격하고 있다. 과거의 시야를 그대로 투영한 영상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세냐의 눈은 베르무트의 모습을 제대로 쫓지 못했다.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유진은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서 영상을 노려보았다.
세냐의 시야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커헉, 컥. 세냐는 땅을 보면서 끈적한 피를 토했다.
“……제발…….”
세냐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로브는 이미 찢겨 있었다. 젖혀진 후드에서 잿빛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렸다. 닿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제 색으로 물들일 것만 같은 새하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 아무 말이라도 해봐, 베르무트……!”
베르무트의 손이 세냐를 가리켰다.
그에게는 아무런 살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냐에게 집중되는 ‘힘’은 살의를 느낄 수 없을 지라도 무조건적인 죽음을 연상시켰다.
세냐는 핏물을 토하면서 양손을 앞으로 펼쳤다. 맹렬히 회전하는 이터널 홀이 세냐의 의지를 따라 마법을 일으켰다.
불꽃과 마법이 격돌했다.
세냐는 그 결과를 끝까지 보지 않았다. 그녀는 복도를 향해 날았다. 이터널 홀을 사용해도 베르무트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유도 모르고 베르무트에게 죽게 될 것이다.
“하멜.”
고향인 엘프의 영지에서 받아 온 세계수의 나뭇잎. 엘프의 가족인 세냐는, 세계수의 나뭇잎을 사용해 언제든지 세계수로 텔레포트가 가능했다.
하멜의 시체를 데리고서 일단은 고향으로 피신한다. 베르무트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세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세냐는 피를 토하면서 복도로 돌아왔다. ㅡ꽈과광! 등 돌린 바깥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렸지만, 세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시체의 앞에 섰다.
……망가진 곳은 없다. 세냐는 그것에 진심으로 안도하며 품 안에서 세계수의 잎사귀를 꺼내 쥐었다. 그리고 하멜의 시체를 일으키려 몸을 숙였다.
퍼억!
하멜의 시체를 손으로 잡은 순간.
세냐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덜덜 떠는 눈동자가, 피에 흠뻑 젖은 손을 보았다.
가슴을 꿰뚫은 것은ㅡ 베르무트의 손이었다.
“……베르…… 무…….”
시야가 위로 들렸다. 베르무트는 가슴에 팔을 박아 넣은 상태 그대로 세냐의 몸을 들어 올렸다. 세냐는, 등에서 가슴을 꿰뚫은 베르무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베르무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가 두려웠다.
작은 흔들림. 천천히 다가온 손이, 세냐의 목에 닿았다. 투둑! 세냐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가 끊어졌다.
“아…….”
세냐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을 내뱉기도 전에 다시 시야가 흔들렸다. 내던져진 몸뚱이는 열린 방의 안으로 날아와, 비틀려 열린 관뚜껑 위로 떨어졌다.
“커흡.”
세냐는 피를 토하면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피범벅인 손을 내려놓고서 우두커니 서 있는 베르무트가 보였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고개를 숙이고서, 세냐에게서 빼앗은 목걸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멜의 시체는 베르무트의 발 앞에 놓여 있었다. 제 손으로 가슴을 꿰뚫은, 죽어가는 동료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피범벅에 희미해지는 시야. 베르무트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보았다. 숙이고 있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일그러진 표정과,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았다.
“…….”
세냐가 본 베르무트의 모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화악.
허공에 띄워졌던 영상이 사라졌다.
“그다음은 다들 아는 대로야.”
이미 말끔히 나았지만, 과거의 기억을 다시 봐버리니 꿰뚫렸던 가슴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세계수로 텔레포트는 성공했지만, 상처가 바로 낫지 않았어. 그리고 라이자키아의 습격을 받았지.”
“……베르무트 님.”
아니스는 현기증을 느끼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세냐의 기억에서 보인 남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베르무트였다.
꽈득.
유진은 너무 강하게 쥐어 피가 흐르는 주먹을 펼쳤다. 꽈득꽈득 씹어 댄 어금니와 턱이 뻐근했다.
“……네 말대로네.”
유진이 입을 열었다.
“분명 베르무트인데. 베르무트가 아닌 것 같아.”
세냐 메르데인
무턱대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확신하기에는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진은 영상 속의 베르무트에게서 ‘베르무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세냐를 몰아붙이던 모습. 베르무트의 공격. 움직임. 그 모든 것이 세냐를 압도하기는 했으나, 유진이 기억하던 베르무트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유진은 자신의 이러한 감상에 많은 신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300년 전에 베르무트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싸웠던 것이 바로 하멜이다. 동료들 중에서 유일하게 베르무트와 대련을 반복하던 것도 하멜이다.
“그렇지?”
세냐가 환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마지막은 베르무트 님…… 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스도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어.”
세냐를 불러내고, 복도에서 맞닥트리고서부터 베르무트의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놈은 하멜의 시체까지 집어 던져가며 세냐의 행동을 유도했고, 그 후로도 집요하게 세냐의 목을 노렸다.
시체를 가지고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 세냐가 복도로 돌아왔을 때. 그 등 뒤를 점했던 베르무트는, 하고자 했다면 아주 쉽게 세냐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머리를 부수거나, 목을 베거나.
하지만 베르무트는 그러지 않았다. 전투 중에는 집요하게 필살의 급소를 노린 주제에,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순간에는 세냐의 몸을 꿰뚫는 것에 그쳤다.
“음…… 사실 따지자면, 보통은 가슴이 뚫리면 죽지.”
“예. 심장이 터지면 죽죠.”
세냐가 중얼거렸고, 아니스가 동조했다.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렇기는 한데. 정말로 죽이려고 했다면 확실한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는 거지. 마지막만 해도 봐. 베르무트는 세냐, 네 목에 손을 뻗었지만…… 목을 부러트리거나 조르지 않고 목걸이만 뜯어갔잖아.”
그 뒤의 행동도 이상하다고 생각됐다. 베르무트는 굳이 세냐의 몸을 방 안에 집어 던졌다. 움직이지 못할 이유는 없었을 텐데, 세냐가 세계수의 잎사귀를 사용해 탈출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떨리던 어깨. 일그러진 표정. 흔들리는 눈동자.
그 표정을 지었을 때, 유진은 베르무트를 느꼈다. 왜 세냐가 베르무트인데 베르무트가 아닌 것 같다고 하였는지를 알 수 있던 표정이었다.
“늙어서 치매라도 걸렸나?”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투덜거렸다. 그 말에 아니스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더 산 사람도 치매에 걸리지 않았는데, 베르무트 님이 치매에 걸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야, 너 그거 나보고 하는 말이지?”
세냐가 즉시 고개를 돌리며 반응했다. 하지만 아니스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터무니없는 억측으로 저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지 말아주십시오, 세냐. 제가 왜 당신을 두고 저런 말을 합니까?”
“거짓말하지 마! 나보고 한 말이잖아!”
“아니랍니다. 왜, 찔리기라도 하십니까?”
“너희는 왜 또 싸워?”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어보았다.
“세냐가 자꾸 제게 시비를 걸기 때문입니다.”
“내가 언제!”
“대놓고 시비를 걸었으면서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유진은 어지러워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양옆에 앉은 세냐와 아니스가 서로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지 못하도록, 유진은 자기 자신의 몸을 우뚝 세워 장벽으로 삼았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베르무트가 뒈지지 않은 것은 확실해.”
유진은 세냐에게 모론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모론이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세냐는 크게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등신이 늙어 죽을 리가 없지.”
계속되는 이야기에 세냐의 표정은 점점 바뀌어갔다.
그 모론이, 정신이 미쳐 버릴 만큼 몰려서ㅡ 꿈에 나타난 베르무트의 부탁을 따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론은 차디찬 북쪽 끝에서. 누르라 불리는 정체 모를 괴물이 넘어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150년 동안 매일매일.
“……죽지도 않았다면서 왜 안 왔나 했더니.”
세냐는 코를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
세냐가 기억하는 모론은 등신 같은 놈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팔다리가 날아가도 앞으로 돌진하던 등신. 단순무식한 점에서는 하멜보다 훨씬 더했지만, 모론이 그렇게 앞으로 달려가 주었기에 모두가 모론이 만든 길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 모론이 끝나지 않는 고독과 업에 미쳐갔다니. 텅 비어버린 세상에서 머리를 박아대며 자신을 학대했다니.
“울 정도는 아니야. 좀 두들겨 패주니까 멀쩡해졌어.”
“반대겠지요. 흠씬 두들겨 맞은 것은 하멜 당신이잖습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나와 모론 둘이서 사이좋게 서로를 두들겨 팼지.”
“모론은 코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말했지만 내 손에 진짜 무기가 들렸으면 어땠을 거 같냐고. 내가 개똥 같은 철검 하나만 들고 있었어도, 모론은 코피가 아니라 팔이 썩둑 잘렸을걸?”
유진은 고집스레 말하면서 팔짱을 꼈다.
“차마 옛 동료를 팔 없는 병신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 그리고 그때는, 내가 모론에게 좀 맞아줄 필요가 있었어. 내가 모론과 주먹다짐을 해줘서, 모론이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광기도 좀 떨치고, 스트레스도 풀고 그랬던…….”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하멜.”
아니스는 한심하단 눈으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오가는 이야기를 듣던 세냐는 눈물을 닦으며 쿡쿡 웃었다.
“그래도 고독하지 않게 되었구나.”
“…….”
“모론의 심정도 이해는 가. 하멜, 네가 병신처럼 죽어버리고. 베르무트도 죽고. 아니스도 죽고. 그나마 살아 있던 나도 은둔해 버렸으니, 모론은 세상에서 혼자가 되어버린 거잖아.”
그런 모론을 지탱하던 것이 베르무트의 부탁. 세냐는 눈물을 모두 닦고서 두 눈을 감았다.
“……누르가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 북쪽의 민족전설? 알 리가 없지. 그러니 다음에 한번 보러 가야겠어. 모론과도 직접 만나 인사도 할 겸.”
“모론한테는 베르무트도 함께 데려오겠다고 했는데.”
유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새끼야 나중에 멱살 잡고 데려가면 될 문제고. 그 전에 세냐, 너랑도 같이 모론은 만나러 가야지. 꽤 먼 곳이기는 하다만.”
베르무트가 ‘왜’ 저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유진과 세냐, 아니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막연한 추측뿐이었다.
“우리도 베르무트가 어떤 약속을 맺었는지는 정확히 몰라.”
하멜의 죽음. 5명이 4명이 되었으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한번 들어온 이상 유폐의 마왕성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로막는 마물과 마족을 죽였다. 베르무트의 검은 그 어느 전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감정적이었다. 모론도 통곡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날뛰었다. 아니스도 등을 피로 흠뻑 적시며 기도문을 외었다. 세냐도 피를 토할 만큼 쉬어버린 목소리로 울며 지팡이를 들었다.
위로, 더 위로. 유폐의 마왕성, 바벨의 꼭대기까지.
어전의 앞을 가로막는 칼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문을 박살 내고서 어전에 들어갔을 때.
“아까처럼 기억을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세냐가 눈썹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이미 예전에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던 일이다. 유폐의 마왕이 어떤 식으로 전투를 지배하였는지.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전부 처음부터 다시 살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전투에 돌입하였을 때, 공간 전체에 펼쳐졌던 유폐의 마왕의 ‘쇠사슬.’ 마왕의 이명처럼 그 쇠사슬은 전투가 벌어진 공간을 통째로 유폐했고, 세냐의 마법과 아니스의 신성력을 방해했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보고 겪었던 것을 마법으로 영상화할 수 없게끔 세냐의 기억을 구속하고 있었다.
“……전투는 일방적이었지. 유폐의 마왕의 사슬 속에서, 나와 아니스는 제대로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어. 사슬에 격리되어 버린 공간은 마치 유폐의 마왕을 위한 세계 같았지. 나의 마법은 자유롭게 펼쳐지지 않았고, 아니스의 신성력도 바깥처럼 밝은 빛을 뿜지 못했어.”
아니스의 신성력이 약해졌다는 것은 전위인 모론을 평소처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덕분에 모론도 다른 마왕과의 전투처럼 무식하게 싸워댈 수가 없었다.
“본래라면 우리는 모두 바벨에서 죽어야만 했어.”
“베르무트 님이 약속을 맺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정확한 약속의 내용은 모르지만, 유폐의 마왕은 물러서 주었다. 그 덕에 세냐와 아니스, 모론은 바벨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하멜의 시체와 영혼도 돌려받았다.
그렇게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대륙을 침범하지 않았고, 대륙 곳곳에서 날뛰던 마족과 마물, 흑마법사들도 헬무드로 돌아갔다. 헬무드를 떠돌던 멸망의 마왕조차도 자신의 영지인 라비스타로 돌아가 수백 년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만 보면 유폐의 마왕은 손해만 봤지. 죽일 수 있는 놈들을 죽이지 않고, 자신의 손에 들어왔던 네 영혼과 육체도 돌려주었어. 수십 년 지속해 왔던 전쟁도 그만뒀지. 마경 헬무드를 제국으로 바꾼 것? 그냥 전쟁을 계속했다면, 대륙 전체가 유폐의 마왕의 영토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베르무트.”
유진은 작은 소리로 그 이름을 내뱉었다.
“베르무트가 약속의 대가로 자신을 바친 것일지도 몰라.”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지.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의 노예가 되었다면…… 모든 정황이 대충은 납득이 돼.”
“대충은, 말입니다.”
모두가 침묵했다. 만약 저것이 사실이라 해도 많은 의문이 남는다.
유폐의 마왕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안다. 크리스티나에게 아니스가 깃들었다는 것도 아는 눈치였고, 모론의 사정도 아는 듯했다. 놈이라면 세냐가 살아서 봉인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아는 주제에, 유폐의 마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평화주의자인 척하면서 뒤에서 개짓거리를 했다? 베르무트를 사용해서? 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나.
애당초 베르무트는 처음부터 하멜을 환생시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계획을 직접 실행하기 전에 ‘죽었다’.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 후에,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를 조종해 세냐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죽일 작정이었지만, 도중에 베르무트가 정신을 차려 죽이는 것에는 실패했다.
세냐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전에 베르무트는 하멜의 무덤에 월광검의 칼자루를 봉인했다.
세냐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나서, 하멜의 영혼이 봉인된 목걸이를 빼앗았다. 하멜의 환생을 안배하고서 목걸이를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숨겼다.
수십 년 뒤에는 모론의 꿈에 나타나 누르에 관한 경고를 전했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행적은 의문투성이다. 유폐의 마왕이 엮일지라도 그 행적은 이상하고 난잡했다.
“베르무트 그 새끼가 맛이 간 것은 틀림없어.”
유진은 고집스레 내뱉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일을 할 리가 없다. 아마, 아니, 반드시. 살아는 있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그것이 유폐의 마왕과의 약속 때문이건,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건.
분명한 것은 베르무트가 살아 있다는 것.
“두들겨 패면 될 겁니다.”
살아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죽었다면 어쩔 도리가 없겠지만, 살아 있다면 뭐라도 시도는 해볼 수 있다.
“가슴에 구멍 뚫으면 아파서라도 정신을 차리겠지.”
베르무트는 죽지 않았다. 제정신으로 저런 일을 벌였을 리가 없다.
유진과 세냐, 아니스는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3명이 기억하는 베르무트는 이유 없이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위대한 베르무트’라며 추앙하는 그 남자는, 이곳의 3명에게는 ‘그냥 베르무트’에 가까웠다.
“유폐의 마왕성. 바벨에 오르면 뭐라도 더 알게 되겠지.”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유페의 마왕의 어전에 서서, 놈의 본신을 만나도록 해라. 유폐의 마왕은 네가 편히 바벨을 오르게 두지 않을 거다. 놈은, 마왕은 그런 존재다.
-그 뒤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네가 직접 겪어야 해.
암실에서 베르무트가 했던 말.
-너여야만 한다.
‘여전히 그건 개소리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바벨에는 올라야 한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 베르무트에 대한 자세한 것들을 알기 위해서. 세냐도 암실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무트는 네게 집착했어.”
세냐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하멜 다이너스. 300년 전에…… 우리를 만나기 전의 너는, 그냥 좀 유명한 용병일 뿐이었지. 베르무트가 널 반드시 동료로 들이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어.”
“그렇겠지. 나도 이해가 안 됐으니까.”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베르무트가 옳았다고 생각해 버렸지. 가장 약했던 너는 몇 년 만에 베르무트의 곁에 설 수 있을 만큼 강해졌으니까. ……베르무트가 널 환생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이번에도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거야.”
“사실 나밖에 후보가 없기도 했지.”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세냐 너는 일단 살아 있고, 모론도 살아 있고, 아니스도 천사가 됐잖아. 그냥 얌전히 뒈져서 영혼이 봉인된 것은 나뿐…….”
“그걸 자랑이라고 지껄이는 겁니까?”
“맞아, 이 개자식아. 네가 병신처럼 뒈져 버린 게 자랑이야?”
“거 죽었을 때 얘기는 하지 맙시다, 예? 나도 환생하고서 잘 생각해 보니 내 죽음이 좀 많이 병신 같다는 생각은 했거든?”
“전생에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생각했으면 좀 좋아?”
“그래도 차암 다행입니다. 하멜의 영혼이 그대로 성불했다면 이렇게 환생하는 것도 힘들어졌을 텐데…….”
아니스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세냐를 힐긋 쳐다보았다.
“지금 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세냐, 당신이 하멜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지 않겠다며 목걸이에 봉인하겠다고 했을 때. 저는 솔직히 아무리 슬퍼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생각을…….”
“뭐, 뭐뭐, 내가 뭐! 어? 아니스 너도 동의했잖아! 나, 나만 그랬어? 어? 너희도 마왕이 있는 세상에서, 어? 하멜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잖아!”
“그렇기야 합니다만. 여러 번 생각하고 느낀 것인데, 영혼을 봉인한 목걸이를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것은 너무…… 좀…… 그렇지 않았나 싶은. 아무래도 제가 성직자라서 더더욱…….”
“뭐, 뭐! 그럼 목걸이를 목에 걸지, 뭐!”
“방법이야 여럿 있었겠지요. 어디 봉인해도 됐을 거고…….”
“내 목이 제일 안전했어.”
“정말 목에만 걸고 있었습니까?”
“목걸이를 그럼 목에 걸지, 뭘 어떻게 써?”
세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아니스는 얇게 뜬 눈으로 세냐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 얼굴에 문질러대면서 하멜, 하멜하고 이름을 외거나…….”
“뭐, 뭐라는 거야!”
“저기, 양쪽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면 내 귀가 좀 많이 아픈데…….”
유진은 더 이상 듣기 괴로워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희 아까 뭐 따로 술 마신다며. 슬슬 술 마시러 안 가니?”
“여기 제 방입니다.”
“아…… 그랬지. 그럼 재미있게들 놀아. 나는 방 가서 잘게.”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앉은 메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메르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이곳에서 세냐 님의 술 시중을 들 거예요.”
메르가 그렇게 말하자, 라이미르아가 냉큼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머리채를 쥐어뜯고 싸워대던 세냐가 조금 무서웠다.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본녀가 은자와…….”
“넌 어딜 가나요?”
“쟤가 그때 걔지? 라이자키아 딸. 내가 너희 아빠한테 쌓인 게 좀 있는데, 아, 겁먹지는 마. 그냥 그렇다구.”
세냐에게 지목당한 라이미르아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애처로운 눈으로 유진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유진은 이미 도망치듯이 방을 나가고 있었다.
‘저 사이에 있다가는 정말 대머리가 되어버릴 거야.’
머리털이야 뽑혀도 자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머리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세냐 메르데인
바로 옆방에서 벌어지는 술판의 소음은 유진의 방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비싸기 짝이 없는 이 고급 호텔의 방음은 그만큼이나 뛰어났고, 유진도 잠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따로 마법을 걸어두고 잠들었기 때문이다.
저 술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술이야 전생에도 물리도록 여러 번 함께 마셨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유진이 저 술자리에 끼어서는 그다지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푹신한 침대. 잠들었다가 눈이 뜨인 시간은 새벽 4시쯤.
잘 닫아두었던 방문 앞, 서성거리는 발걸음의 기척을 느꼈다. 유진은 가만히 눈을 뜨고서 침묵했다.
아롯의 수도, 펜타곤의 고급 호텔, 스위트룸. 지금 같은 늦은 시간에 방문 앞에서 서성거릴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유진은 치밀어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억지로 눈을 감고, 이불을 위로 끌어 올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문이 벌컥 열렸다. 그것으로 방음마법에는 구멍이 뚫렸다.
깔깔깔, 낄낄낄, 호호호. 경박한 주정뱅이들의 웃음소리가 유진의 평온하며 안락한 새벽을 산산조각냈다.
“하메에엘, 자는 겁니까아?”
“야, 야아! 너 안 자잖아!”
제발. 유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서 침묵을 고수했다. 하지만 주정뱅이들은 포기를 모르며 악랄했다. 둘은 딸꾹질로 술 냄새 섞인 숨결을 내뱉더니 서로를 마주 보며 낄낄 웃었다.
“살려…….”
“은자여…….”
이 늦은 시각까지 술 시중을 들며 시달렸을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아직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아 직접 볼 수 없었으나, 둘의 몰골은 처량하고 끔찍했다.
대체 뭔 일을 겪은 것인지, 둘의 얼굴에는 각각 낙서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둘이 앞으로 평생 하지 않을 해괴하고 기괴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메르는 마치 파인애플을 형상화한 것처럼 머리카락을 위로 통째로 묶어 올렸고, 라이미르아는 검은 머리카락을 수십 가닥으로 땋아 내린 모습이었다.
주정뱅이들이 언데드처럼 흐느적거리며 유진의 침대로 다가왔다.
“야아!”
세냐가 홱 손을 뻗어 유진의 이불을 붙잡았다.
이불 속의 유진은 이 최후의 방어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유진의 양손이 이불을 단단히 붙잡자, 퍼억! 아니스의 주먹이 깔끔하게 유진의 갈비를 파고들었다.
“컥.”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격이었다.
걸음마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단련해 온 몸뚱이. 백염식으로 수행한 마나. 어지간한 공격이라면 대비하지 않은 상태일지라도 무리 없이 받아내겠지만, 갈비를 파고들어 온 주먹은 주정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날카롭고 강했다.
이불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세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즉시 유진의 이불을 빼앗았다.
“나…… 나한테,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유진은 뻐근한 갈비를 손으로 감싸며 물어보았다. 대수림에서 죽였던 에드몬드의 심정에 공감이 갔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나를 괴롭히는 거냐……!”
세냐는 빼앗은 이불을 망토처럼 어깨에 두르며 실실 웃었다. 아니스도 양손으로 박수를 짝짝 치며 웃었다.
유진의 눈에는 둘의 모습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처럼 보였다. 술 취한 악마들의 뒤. 우스꽝스러운 치장을 한 라이미르아와 메르가 서로를 얼싸안고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내가 말이야아…….”
세냐가 딸꾹거리며 입을 열었다. 유진은 그 모습이 더욱 어이가 없어서 빽 고함을 질렀다.
“술은 왜 취한 거야?!”
평범한 사람이야 술에 마시면 취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술에 진탕 취해도 바람에 따라 취기를 떨쳐낼 수 있게 된다. 그러고자 한다면 말이다.
그러한 생각마저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술에 취해 버리는 것?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세냐와 아니스 정도의 실력자라면 무의식의 구석에 취기를 떨쳐내고 정신을 각성시킬 안전장치는 심어두게 마련.
하지만 지금 저 둘에게는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주정뱅이, 아니, 그냥 술에 떡이 된 2마리의 개일 뿐이었다.
“술을 취하려고 마시지.”
“수백 년 만에 만났으면 취할 때까지 마셔야 하는 것이 당연하잖습니까.”
세냐와 아니스는 그렇게 말하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다시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다가 세냐가 손사래를 치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잠깐, 잠까안! 내가, 내가 말이 아직, 어, 하고 있잖아. 내가 말이야, 응? 하멜…… 어…… 어어, 유진. 내가 말이야, 크리스…… 크리스티나랑 이야기를 해봤거든?”
세냐는 슬쩍 유진에게 몸을 기울이더니, 유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처음 얘기했을 때는, 뭐 이런…… 건방진 새끼가 다 있지? 생각했거든……. 근데, 응, 어, 얘기해 보니까…… 건방지긴 한데! 애가 나쁘지는 않아.”
“잠깐!”
아니스가 버럭 외쳤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찰싹, 찰싹 때리더니 자세를 바로 하고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아니스가 높은 목소리로 크리스티나의 이름을 외치자, 즉시 육체의 주도권이 크리스티나에게 넘어갔다.
“네!”
크리스티나는 손을 번쩍 들며 부름에 응답했다.
유진은 크리스티나가 이 난동을 끝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으나, 뒤바뀐 표정을 보니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어 버렸다.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아니스였을 때보다 오히려 더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응. 우리끼리 잘 이야기를 해봤는데 말이야, 어어…… 크리스티나, 쟤가 참 억울해하더라고!”
“뭐…… 뭐가.”
“아니스가 너한테 키…… 키스했다며. 으응? 그리고 너랑 나도 키스했고! 그런데 크리스티나는 너랑…… 너너, 너랑 키스하지 않았잖아. 그렇지?”
“네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답했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벌린 입술을 다물지 못하고서 눈동자만 껌뻑였다.
“그…… 다들, 너무 술에 취한 것이 아닌가…….”
“억울하고 서럽다잖아!”
“네!”
“그래서, 내가 많이 얘기를 해봤거든? 응? 너랑 쟤가 몰래 키스하고 오면 내가 막, 막 화가 날 것 같거든.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크리스티나가 양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세냐 언니가 보고 계시는 여기서, 하겠습니다!”
“꺄아아!”
세냐가 짝짝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유진은 벌리고 있던 입술을 간신히 다물고서 주춤거리며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그, 너희들 너무 많이 취한 것 같거든? 아침에 술 깨고서 대체 어쩌려고…….”
“도망치지 마!”
“마십시오!”
세냐가 으름장을 놓았다. 크리스티나도 번쩍 들고 있던 양손을 도끼처럼 내려찍으며 유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진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요동쳤다.
“어떻게 할 건지 우리끼리 다 정해놨어!”
“네!”
크리스티나가 파란 눈동자를 크게 뜨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 님! 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스 님이 유진 님의 입술을 빼앗았을 때! 저는 의식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 어쨌…….”
“물론! 깨어나고 나서, 시스터의 기억을 공유했지만! 그 순간의 감촉과 감정은! 제 것이 아닌 시스터의 것이었습니다!”
“너 아니스를 시스터라고 부르니?”
전에도 몇 번 실수로 말하기는 했다만, 맨정신일 때는 그래도 숨기려는 노력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티나에게 그런 정신머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억울하고 외롭다는 것입니다! 아니스 님도 쪽 하고, 세냐 님도 쪽 했는데! 저만 쪽 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쪽…….”
“예, 쪽! 쪽쪽!”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시스터는 빼앗았고, 세냐 언니는 빼앗겼다고 들었습니닷……! 그, 그러니 저는, 두두, 둘이서…… 함께 쪽을…… 하는 것이! 순리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키스해!”
세냐가 양손을 덩실덩실 흔들며 외쳤다.
술기운으로 몽롱하던 정신, 세냐의 외침이 용기를 북돋웠다. 크리스티나는 크게 숨을 삼키다가, 무언가를 깨닫고선 홱 고개를 돌렸다.
“……후, 후, 후우, 후…….”
그녀는 열심히 숨결을 내뱉었다.
몇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마셔댄 술. 그런 냄새가 유진에게 불쾌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지만, 이 기념비적인 순간에 어울리는 냄새는 아니었다.
“…….”
크리스티나는 즉시 품에서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냈다.
언제 어느 순간에도 해낼 수 있도록 품고 다녔던 구취제거제. 크리스티나는 살짝 벌린 입술의 안에 칙칙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러고 몇 번 입맛을 다신 뒤에, 다시 후, 후 하고서 냄새를 점검했다.
“너 취한 거 맞냐?”
“쪽!”
유진은 급히 물었지만, 세냐가 버럭 지른 외침이 유진의 말을 끊어버렸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아니스의 꺅꺅거리는 비명과, 세냐가 외치는 쪽, 쪽, 쪽 하는 외침과,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 소리의 삼중주로 가득 차 있었다.
크리스티나의 입술이 쭈욱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입술을 한껏 오므리고서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왔다. 유진은 입술을 내밀지 않고 덜덜 떨기만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유진이 생각하기에 이건 비상식적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호히 뿌리쳐야 하나? 그래도 되나? 그러고 나서 다음에 서로의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하고?
애정? 없지는 않다. 하지만 유진이 크리스티나에게 갖는 애정은 입술을 쪽 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에게는 아직 인간의 마음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유라스에서 아니스는 저렇게 말했다. 그때는 ‘우리’가 세냐를 말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유진도 크리스티나의 마음을 느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 둘은 내뱉은 말에 충실히 행동했다. 둘이 노력하는 방법이 똑같지는 않았다. 아니스는 능글맞게 유진을 공격했고, 크리스티나는 숭배를 동경으로, 동경을 갈망으로 바꾸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지금도. 크리스티나는 강한 갈망을 담아 유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이 끌렸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세냐가 없는 동안 최선을 다해 유진의 마음을 파고들었고, 결국에는 성공했다.
그래서 유진은 다가오는 크리스티나를 단호히 밀쳐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크리스티나가 하듯이 입술을 내밀지도 못했다.
크리스티나는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고서 유진을 보았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난감하단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예상이 틀렸다. 술기운과 응원에 간신히 용기를 냈다만, 크리스티나는 이 무모한 돌진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살짝 밀쳤을 때,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겠다는 결심도 했다. 급할 것 없으니까.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며 다가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밀치지 않았다.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은 지을지언정, 유진은 아직 크리스티나의 양손에 붙잡혀 있었다.
지금 더 나아가야 한다. 몽롱하던 정신이 각성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어깨를 놓았다. 자유로워진 양손이 스리슬쩍 위로 움직였다. 활짝 편 손바닥이 유진의 양 뺨을 짓눌렀다.
“읍.”
뺨에 가해진 압력. 자연스레 입술이 튀어나왔다. 바로 지금! 크리스티나는 먹이를 낚아채는 포식자처럼 공격을 감행했다.
쪽.
유진과 크리스티나의 입술이 맞닿았다. 부릅뜬 유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크리스티나는 닿은 입술을 꾸욱 눌렀다.
[혀!]
아니스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지시를 거부했다. 아직은 그런 입맞춤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차근차근 다가갔을 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허억…….”
양팔을 덩실덩실 흔들며 환호하던 세냐.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진 외도를 보고서 숨을 틀어막았다. 덜덜 떨리는 감정에 입을 틀어막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낯선 감정이 느껴졌다.
뭐 입맞춤 정도야. 그렇게 생각하고, 술도 취했으니 호기롭게 허락했다만…….
‘이건…… 뭐지……?’
분노? 짜증?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도저히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 감정. 배덕에 기울어진 희열.
어째서? 바로 눈앞에서, 하멜이, 유진이 다른 여자에게 입술이 빼앗기고 있는데? 상실에 대한 질투. 그것은 있으나, 불쾌하면서도 불쾌하지 않은…… 오히려 가슴을 두근두근 뛰게 하는 이 감정이란 대체?
이 복잡한 감정의 근간은, 저 입맞춤이 세냐의 ‘허락’ 하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냐는 저 광경에서 순수한 분노와 짜증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뭔가…… 중독되어 버릴 것만 같은 검은 불꽃의 열기를 느꼈다. 그 검은 불꽃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다가가면…… 이 이상 다가가 버리면, 저 불꽃과 함께 춤을 춰버릴 것만 같았다…….
“후읍…….”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크리스티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냐는 땀에 흠뻑 젖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꿀꺽 침을 삼켰다.
유진은 정신이 반쯤 나가 버렸다.
이게…… 이게 대체 뭐 하는 꼴인지. 존엄이란? 긍지란?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부끄러움이 유진의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후…… 후후…….”
크리스티나는 그런 유진의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꾸욱.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양 뺨을 손으로 한 번 눌러준 뒤,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돌아가서 자도록 하죠.”
“어…… 어?”
“저는…… 만족했습니다. 이대로 성불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크리스티나는 경건한 표정으로 성호를 한 번 긋더니,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세냐는 먼저 방을 나가는 크리스티나의 등을 멍한 눈으로 보다가, 꿀꺽 침을 삼키며 일어섰다.
“자…… 자, 잘 자!”
세냐는 아직까지 가슴 속에 일렁거리는 검은 불꽃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다음에 언젠가, 스스로 이 불꽃을 그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 불꽃은 어디까지나 세냐의 ‘허락’하에 피어올라야만 했고, 세냐 본인은 언제나 저 불꽃보다 앞선 곳에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세냐는 후다닥 크리스티나의 뒤를 따라갔다.
“……허…….”
유진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열려 있던 방문이 천천히 닫혔다.
[……크흠…….]
망토 속의 위니드가 웅웅거렸다. 템페스트는 지금의 유진에게 대체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몰라, 그냥 헛기침만 내뱉었다.
“유진 님…….”
“은자여…….”
엉망인 꼴로 버려진 라이미르아와 메르가 유진의 침대로 엉금엉금 올라왔다. 유진은 멍하니 눈동자를 끔벅거리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라이미르아와 메르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고생 많았다.”
앞으로 몇 시간 뒤에 해가 뜰 것이다.
유진은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아브람
아침.
유진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 크리스티나의 방문을 열었다.
세냐와 크리스티나는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둘은 새빨간, 스프인지 국인지 모를 것을 호록호록 먹다가 유진을 보고서 행동을 정지했다.
“……속은 좀 괜찮냐?”
“커읍.”
세냐는 스푼을 내려놓고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맨정신을 되찾고 싶지 않아 술에 취한 상태 그대로 잠들었다. 일어나고서 취기를 떨쳐냈으니 숙취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새벽에 했던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술이 웬수지. 세냐는 몇 번 헛기침을 하고서, 태연한 얼굴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기껏 가다듬은 호흡과 표정인데,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세냐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만만한 스푼이 보였다. 세냐는 스푼을 덥석 잡고, 애꿎은 스튜만 푹푹 쑤셨다.
세냐가 그러는 동안 크리스티나는 냅킨을 잡았다. 그녀는 우아한 손동작으로 냅킨을 톡, 톡 털더니 입가를 부드럽게 닦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크리스티나는 냅킨을 내려놓으며 유진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새벽의 기억은 그녀에게도 선명했다. 부끄러운 감정도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보다는 충만한 기쁨이 더 컸다.
‘무서운 아이…….’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세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힐긋 보곤, 옆에 놓인 의자를 살짝 빼주었다.
“……배고프면 와서 밥이나 같이 먹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세냐와 크리스티나의 사이였다. 크리스티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새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넉넉잡아 10년은 넘게 걸리지 않을까요?”
“뭐가.”
“마왕을 잡고 결혼식을 올리는 데 말입니다.”
커억.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씹어 삼키다가 목에 걸려 버렸다. 유진은 목을 부여잡고 켁켁 기침을 토했다. 옆에 앉은 세냐는 입을 떡 벌리고 스푼을 테이블에 떨어트렸다.
“겨겨, 겨, 결혼?”
“왜 놀라고 그러십니까. 연애의 끝은 결혼인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겨…… 결…….”
“당장 식을 치를 상황도 아니고, 다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으니까요. 유진 님과 세냐 님, 그리고 아니스 님이 수백 년 전부터 바라시던 마왕의 죽음. 세상을 완벽하게 구하는 것. 그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에, 그때 차근차근 생각하는 것이 늦지 않을 것입니다.”
짝짝짝.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는 박수 소리가 울렸다.
“어, 어어…… 어, 응.”
세냐도 허둥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백 년 전에 상상하던 미래이기는 했다. 모든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한 뒤에 올리는 결혼식. 어디 웅장한 왕성이라도 하나 통째로 빌리고서, 대륙에서 유명하단 놈들은 죄다 불러 모아 하객으로 앉히는.
세냐는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앞으로는 다시없을 그런 화려한 결혼식을 꿈꿨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아니스와 함게 웨딩드레스를 입을 용의도 있었다.
나중, 나중이라…….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가다듬었다. 당장이 아닌 것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당장 결혼식을 올리자고 졸라댔다면, 유진도 어쩔 수 없이 단호한 거절을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이라면. 그때라면 뭐 서로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까.”
유진은 생각을 정리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 평화로운 미래를 생각하기 전에, 당장 죽여야 할 놈들부터 생각했다.
나찰공주 아이리스. 남쪽에서 대해적이 된 아이리스는 시무인의 골칫거리다. 처음에 시무인은 아이리스를 은밀히 지원하며 남해의 교통을 통제하려 했지만, 전쟁시대부터 이름을 떨쳐온 수백 년 묵은 다크엘프를 일개 왕국이 통제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너무 거대해진 아이리스와 광란의 해적선단은 지금은 상단뿐만 아니라 군선까지 털어먹고 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도 말할 것 없는 괴물이다. 전성기보다 약해진 라이자키아를 잡는 것조차도 고생스러웠는데, 지금의 누아르는 라이자키아와 격이 다를 것이다.
마족은 인간의 정기와 영혼을 힘으로 삼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몽마는 인간의 정기를 빼앗는 것에 특화된 종족이다. 누아르는 헬무드 내에서도 굴지의 권위를 가진 공작이며, 그녀가 다스리는 2개의 영지, 제벨라 시티와 드리미아는 헬무드에서도 특히나 인간이 많이 살고 있다.
그뿐인가? 누아르는 휘하에 수백 수천의 몽마를 두고 있다. 그녀의 지배를 받는 몽마들은 2개의 영지뿐만 아니라 대륙에도 진출해 있다.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인간들이 바라는 꿈을 팔며 정기를 모은다. 그렇게 모은 정기는 당연히 누아르에게 전해진다.
즉, 누아르는 300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강해졌단 말이다.
마왕에 준하는 마족.
누아르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말했다. 한 치의 과장 없는 말이었다. 300년 동안 매일매일 전성기를 갱신해 온 몽마의 여왕은, 이제는 ‘마왕’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힘을 이룩했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놈의 힘에 대해서는 유진은 정확하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루하르에서 칼을 부딪쳐보기는 했다만, 그때 가비드는 스스로 공격을 제한하고 있었다.
가비드는 개인의 영지를 갖지 않았다. 검은 안개를 지휘하고 있기는 하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장’으로 지휘하는 것이지 검은 안개를 권속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가비드에게 권속은 없다. 마족으로서의 힘을 키우는 것에 권속의 유무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가비드는 그렇지 않다.
놈이 가진 마검 글로리. 그리고 위신의 마안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의 힘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데 마족으로서의 힘을 키울 이유가 어디에 있나. 유폐의 마왕이 수백 년 군림하면서 강해졌다면, 가비드도 그 힘을 똑같이 누릴 수 있다.
죽여야 할 적은 저 3명뿐만이 아니다. 지금 시대에도 무조건 죽여야 할 적이 있다.
“아멜리아 머윈이라 했지?”
세냐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 개만도 못한 년이, 네 무덤을 짓밟고, 네 시체를 데스나이트로 만들었다며.”
유폐의 삼마 중 하나. 사막의 던전 마스터.
지금 시대의 마법사라지만 우습게 볼 상대는 아니다. 발자크도 말하지 않았나. 유폐의 삼마 중에서 마법사로 가장 뛰어난 것은 에드몬드겠지만, 가장 강한 것은 아멜리아일 것이라고.
그리고 아멜리아는 아마 블러드 메리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수상쩍고 짜증 나는데, 블러드 메리까지 쥐고서 유폐의 지팡이가 되었단 말이다.
“요즘 시대의 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셀 것 같아?”
“너보다 마법은 부족하겠지. 하지만 바로 죽이러 가는 것도 쉽지 않아.”
아멜리아를 죽이려면 사막 왕국 나하마와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막 던전의 모든 마법사와 흑마법사들은 아멜리아의 종을 자처하고 있다.
“암살은 어때?”
“시도해 볼 수는 있겠는데, 그 망할 년을 암살하려면 사막의 던전에 기어들어 가야 하잖아.”
아멜리아가 자리 잡은 사막은 나하마에서도 유명하다. 관광객은 물론이고 사막의 주민들조차도 발을 들이지 않는 죽음의 사막, 아슈르. 그 사막 전체가 아멜리아의 영지인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아멜리아를 사막 밖으로 끌어내는 것인데……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사막에 메테오라도 처박아 버릴까.”
세냐가 중얼거렸다. 전쟁을 감수한다면 그것도 시도해 볼 만한 일이기는 했다.
“머리 위에 유성우가 떨어진다면 싫어도 기어 나올 수밖에 없겠지. 아무리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도 놓치지 않을 거야. 가득 쌓인 모래를 증발시키고 땅을 통째로 뒤집어엎어서 끄집어내면 돼.”
세냐는 살의를 강하게 드러내며 내뱉었다.
무덤과 시체. 베르무트에게서 지키지 못했던 것. 그, 베르무트도 아닌, 다른 누군가가. 심지어 흑마법사가ㅡ 하멜의 시체로 데스나이트를 만들었다고? 용서할 수 없었다.
“아이리스부터 잡는 것이 낫겠죠.”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에드몬드의 죽음에 유폐의 마왕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죽음에도 침묵할지는 확실하지 않은 일. 그리고 아멜리아를 죽이는 것에는 감수해야 할 문제가 아직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리스에게는 그런 문제가 없다. 영지를 잃고 헬무드를 떠난 놈. 심지어 아이리스는 유폐의 마왕과도 연관이 없다. 만약 유진이 아이리스를 죽이러 간다면, 시무인도 기꺼이 힘을 보태줄 것이다.
아이리스를 먼저 죽인다면 다른 쪽에서도 반응이 올 것이다.
아멜리아는 유진의 살의를 알고 있다. 아멜리아 본인도 유진에게 살의를 가지고 있다. 누아르는 유진을 죽이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유진이 자신을 죽이러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가비드는 바벨에 오기 전까지는 칼을 뽑지 않을 것이다.
“좋아.”
세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리스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반향을 불러올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나, 그것과 관계없이 세냐도 아이리스를 죽이고 싶었다. 전쟁시대에 수많은 엘프들을 죽이고 타락시킨 아이리스는 세냐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원수였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갈 수는 없었다.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닌 만큼, 이쪽도 여러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본가에 돌아가서 라이자키아의 시체도 처리해야 하고.’
라이자키아의 죽음을 바라고 있던 레드 드래곤, 아리아스텔에게도 얘기 정도는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럼 슬슬 갈까.”
세냐는 의자를 뒤로 당기면서 일어섰다.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세냐를 쳐다보았다.
“어딜?”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창밖을 가리켰다. 유진은 세냐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쭉 뻗은 손가락은 수도의 중심, 왕궁 아브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트렘펠 위자도르. 그는 8서클의 대마법사이며, 아롯에서도 제일이라 꼽히는 전투마법사다. 아롯에서 그의 지위는 궁정마법사단장이었지만, 전쟁이 없는 이 평화로운 시대에는 전투마법사다운 일보다는 왕가의 마법 자문에 관한 일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트렘펠은 표정을 잔뜩 구기고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제의 갑작스러운 기상이변. 부유역의 마법 시스템을 살펴보았지만, 어제의 하늘에는 눈이 내릴 예정은 없었다. 마법 시스템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도 아니다.
‘대체 누구지?’
어제 내린 눈은 어떤 마법사의 농간이다. 그 정체 모를 마법사는 부유역의 마법 시스템에 침입하여, 수도 상공 전체에 눈이 내리게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수도의 기상을 통제하고 워프게이트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부유역은, 그만큼 엄중한 보안과 통제를 받고 있다. 왕가에서도 트렘펠이나 최고위 궁정마법사 몇몇만이 간섭 술식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그리고 그 간섭 술식은 바로 이곳, 왕궁 아브람에서만 실행할 수 있으며 국왕의 승인이 없다면 발동조차 되지 않는다.
자연스레 떠올리는 후보는 아롯의 마탑주들. 8서클 대마법사라면 어떻게든 부유역에 간섭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대마법사가 아니라면 뭔 수를 써도 간섭이 불가능하다.
후보를 마탑주로 좁히면…… 트렘펠은 실눈을 뜨고서 고개를 돌렸다.
“이쯤 되면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어떤가?”
백색 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마탑주 중에서 의심할 마법사는 그녀뿐이었다. 다른 마탑주가 이런 짓을 벌일 이유가 어디에 있나?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면 멜키스가 이런 일을 벌일 이유도 없겠다만. 트렘펠은 백탑주가 평범한 상식으로 접근할 순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백탑주. 그대는 바로 어제 아롯에 돌아왔지.”
“아 글쎄 아니라니까.”
“그대 외에 이런 짓을 할 위인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대가 돌아온 당일에 사건이 벌어졌어!”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냐고!”
멜키스는 답답하여 빽 고함을 질렀다.
몇 달에 거친 외출에서 돌아온 것이 바로 어제다. 백색마탑에 돌아오고서, 정령사와 마법사들을 대거 모아놓고 이프리트와의 계약 축하 파티를 여는 중이었는데…… 돌연 쳐들어온 트렘펠과 궁정마법사단에 구속되어 여기까지 끌려왔다.
“나 이거 절대로 안 잊을 거야. 이 노망 난 늙은이. 내가 억울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사람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아?”
“부유역의 간섭은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네. 정교하고 뛰어난 실력을 가진 대마법사가 아니면 그럴 수가 없지.”
“내가 정교하고 뛰어난 실력의 대마법사이긴 하지.”
“그 말은 범행을 인정했다고 봐도 되겠지?”
트렘펠은 두 눈을 얇게 뜨고서 멜키스를 응시했다. 일단 잡아 오기는 했다만, 마탑주인데다 증거도 명확하지 않으니 강한 심문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니라고! 내가 왜 눈을 내리냔 말얏!”
“전례가 있네. 백탑주, 아니, 멜키스 엘하이어. 그대는 과거 번개의 정령왕과 계약하겠다고 뇌우를 만든 적이 있지.”
“그 죗값은 이미 치렀어! 그때 내 전재산을 아롯 왕가에 압류당했었잖아! 내가 그때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는지 알아? 돈 한 푼 없고 저택까지 처분해서 백색마탑에서 숙식했다고!”
게다가 그것은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멜키스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령왕들을 불러내 날뛰고 싶은데, 그녀가 잡혀 온 이곳 왕궁 아브람에서는 마탑주라도 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백색의 왕궁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왕족과,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궁정마법사단뿐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만든 뇌우는! 내 사유지인 저택 하늘에만 만들었던 것이잖아!”
“……나로서는 그대가 억울해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군. 물론 그때의 뇌우는 그대의 사유지에서만 발생하였지. 하지만 수십 줄기의 벼락이 사방으로 튀지 않았나?”
“……사상자는 없었잖아!”
“천운이었지. 만약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재산을 압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네를 교수대에 올렸을 거야!”
“흠…… 옛날이야기는 하지 말자구. 그때는 나도 철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가 번개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어서, 마도왕국 아롯의 위신이 크게 올랐잖아? 나는 아롯을 위해서 그런 거야!”
멜키스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서 외쳤다. 트렘펠은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호흡을 골랐다.
“……다행히 어제의 눈에 의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네. 사상자는 없어. 번개처럼 위험하지도 않았고. 만약 지금이라도 그대가 범행을 인정한다면, 전 재산의 압류가 아닌 벌금형으로 끝나도록 내가 손을 써주지.”
“아 글쎄 아니라니까, 사람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네. 내가 왜 눈을 내리냐고, 어?”
“눈의 정령왕과 계약하기 위해 눈을 내리게 한 것일 수도 있지.”
“그런 방법은…… 흠, 나중에 아롯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시도해 볼게. 어쨌든 난 정말 아니야.”
멜키스는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수상쩍다는 것은, 흠, 나도 인정할게. 하지만 난 정말 아니라니까? 그리고 어제 아롯에 돌아온 것은 나뿐만이 아니잖아. 적탑주! 로베리안 서피스! 이 새끼는 왜 안 잡아 왔어?”
“적탑주는 이런 일을 할 위인이 아닐세.”
“그게 바로 프레임이라는 거야! 왜 나는 할 것 같고, 적탑주는 안 할 것 같은데? 이런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고서 적탑주가 이미지를 쌓아온 것일 수도 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면 발자크 루드베스! 이 개새끼 아주 수상쩍은 새끼야. 걔 아롯에 아직 안 돌아왔지? 그거 다 쇼일 수도 있어. 몰래 숨어 들어와서 음모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다고.”
“발자크와 공범이라는 건가?”
“저기 트렘펠, 당신 말이야, 유도신문에는 아무 재능이 없는 것 같아.”
트렘펠은 표정을 한층 더 구기고서 부유역의 시스템을 점검했다.
“아니면…… 아롯에 침입한 타국의 간첩이 벌인 짓일지도 모르지. 어제의 눈은 더 큰 테러를 위한 점검이었던 거야……! 트렘펠! 지금 나를 붙잡고 개소리를 할 시간이 없다고. 누군가가, 누군가가 수도의 공격과 왕가의 전복을 위한 파멸적인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평소라면 개소리로 치부하겠지만, 지금의 트렘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멜키스를 일단 잡아 온 것은, 저와 같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유역의 마법시스템에 간섭한다는 것은. 바라는 대로 수도에 기상이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부유역에는 기상재해가 벌어지지 않을 리미트가 확실히 걸려 있지만, 만약 그 리미트를 자유롭게 해제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 워프게이트들에도 간섭한다면 그야말로 재앙적인 인명재해가 발생할 것이다…….
“……이미 조사는 진행 중일세. 그대가 용의자에 가장 가깝기에 내가 직접 심문하고 있을 뿐.”
“영상기록은 없어?”
“그런 것이 있다면 내가 그대를 붙들고 있지도 않겠지. 범인은 정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어. 모습조차 잡히지 않았다고.”
“좋아, 그렇다면 나도 협력하지. 나와 함께 범인을 잡는 거야. 시간이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아롯을 위협하는 파멸적인 계획이 가까이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바로 이곳, 왕궁 아브람이 직접 공격당할지도 모르…….”
쿠르르르릉!
멜키스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트렘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멜키스를 노려보았다.
“멜키스 엘하이어! 널 왕가에 대한 반역죄로 체포한다!”
“이, 이미 체포했으면서 뭔 소리야! 나 아니라니까?! 다, 당신 설마, 내 동료가 날 구하러 왔다는 그런 오해를 하는 것은 아니지?”
멜키스가 생각하기에도 타이밍이 절묘하기는 했다.
아브람
유진은 반쯤 넋을 놓은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진은 아롯의 왕궁, 아브람의 바로 위에 떠 있다. 저 거대한 왕성 전체에 심어진 봉마(封魔)의 마법진은, 왕족과 궁정마법사단을 제외한 모든 마법사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 효력은 왕성 내부뿐만 아니라 바깥까지 범위를 잡고 있다.
다른 마법사는 아브람의 위를 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모든 마법공격도 봉마진에 의해 무효화된다. 하지만 지금 유진은 멀쩡하게 아브람의 상공에 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브람에 봉마의 마법진을 새긴 것도, 아브람을 에워싼 호수를 만든 것도 세냐다.
세냐는 아카샤를 앞으로 뻗으며 두 눈을 감았다.
이터널 홀이 가동되었다. 아카샤가 가진, 끝을 모를 만큼 거대한 마나가 이터널 홀로 인도되었다. 세냐는 봉마 마법진을 무시하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아브람이란 땅덩어리를 마법으로 포착했다.
쿠구궁……! 왕성 전체가 ‘들썩’하고 움직였다. 잔잔하던 호수 표면에 거대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파문은 곧 파도가 되어 철썩였다.
“야, 야. 몸도 성치 않은데 무리하지는 말고…….”
“이 정도는 무리도 아냐.”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아카샤를 조금 더 높이 들었다.
아예 새로이 마법을 쓴다면 모를까. 수백 년 전의 마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아브람을 움직이는 것은 세냐에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봉마의 마법진도, 호수 위에 왕성이 떠 있게 한 것도. 모두가 세냐가 과거에 새겨넣은 마법이다.
수백 년 전에 새겨 넣은 술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당시 세냐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봉마의 마법진은 후대의 마법사들에게 어느 정도는 파악되고 개발되었겠지만, 저 커다란 왕성에 빼곡히 새겨진 술식에 따로 간섭하는 것은 대마법사들에게도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술식에 괜히 손을 대었다가 치명적인 오류라도 발생해 버리면? 그런 실수를 범했다가는 대마법사고 자시고 목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브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래서 무리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저만한 질량을 공중에 띄워 버리는 것은 지금의 세냐에게는 무리한 일이지만, 이미 떠 있게 만드는 마법을 살짝 바꾸어 호수에 가라앉게 만드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아브람이 천천히 가라앉아 갈수록 호수의 파도는 격렬해졌다. 넘쳐 오른 파도는 이미 새하얀 성벽을 때려대고, 열려 있던 성문은 강줄기와 연결되었다.
수장(水葬).
과거 청문회에서 농담 삼아 했던 말인데. 세냐는 정말로 아브람을 수장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유진은 그런 생각이 들어 세냐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만약 세냐가 감정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면 말로나마 제지시킬 텐데. 오히려 세냐의 얼굴은 굉장히 평온했다. 지금 자신이 조금도 대단하지 않은,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일을 하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얕은 흥분과 분노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세냐는 지극히 냉정하고 평온했다. 몇 년 전 유진에게 처음 이야기를 들었다. 한 달 전에 봉인에서 풀려나고 다시금 생각해 보았지만, 세냐가 내놓은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가 살았던 저택을 관광지로 바꾸어 버린 것? 그 작은 숲을 밀어버리고 강줄기를 메워 버린 것? 그건 짜증스러운 일이지만, 말없이 은둔하고 200년이나 흘렀으니 그 정도야 뭐,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그녀의 성씨를 딴 메르데인 광장과 동상? 그것도 뭐……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화를 낼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메르를 박해한 것은 화를 내야 할 일이었다. 용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냐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은, 현명한 세냐니 하면서 수백 년에 걸쳐 자신을 마법사의 우상으로 삼은 주제에. 세냐 본인이 직접 만든 사역마는 그만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문제에서 세냐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크리온에 놓은 위치 크래프트와 메르를 연결한 것은 세냐 본인이었다. 메르가 수백 년 동안 아크리온에 갇혀 지낸 것은 결국 세냐의 잘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해부를 해?’
그 빌어먹을 세냐의 전당인지 하는 것을 통째로 뜯어고쳐서 메르의 편의를 보장해도 모자랄 판에. 위치 크래프트의 비밀을 파헤치겠다고 저 자그마한 사역마를 해부하다니!
세냐는 그것만큼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아이구, 저는 괜찮은데…… 헤헤…….”
메르는 세냐의 곁에 서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메르의 해부작업에 앞장섰던 것은 전대의 녹탑주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기는 했다만, 굳이 떠올려도 크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 해부작업에서 메르는 육체적인 고통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타격은 제법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굴욕이나 분노, 그런 감정들. 벌써 백 년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고 의식이 유지되는 상태로 몸이 해부되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겪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내가 안 괜찮아.”
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해부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전대의 녹탑주? 그 개새끼는 자기가 이미 뒈진 것을 관 속에서 다행이라 여겨야 할 거야.”
과거 세냐는 아롯에서 3명의 제자를 두었다.
디아도르 토른.
바이스 오스먼.
프릴라 헬렌.
그중에서 디아도르는 적색마탑주가 되었고, 바이스와 프릴라는 혼인으로 맺어졌다. 세냐가 녹색마탑주에서 물러난 후에 바이스가 그 뒤를 이었다.
바이스와 프릴라가 낳은 자식의 이름이 로랜드 오스먼. 현 녹색탑주인 제네릭의 부친이자, 메르의 해부를 진행한 전대 녹색마탑주.
세냐는 그 이름을 알지도 못했다. 강한 분노는 있었다.
바이스와 프릴라. 제자라고 삼은 것들이 자식 교육을 대체 어떻게 했기에, 대스승의 사역마를 해부하겠다는 미치광이 같은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 죄는 아롯의 왕가도 자유롭지 않다. 상식적으로 왕가의 허락 없이 그런 짓을 벌였을 리가 없으니.
“당장 멈춰라!”
왕궁의 정원이 물바다가 되었을 즈음, 성벽 안쪽의 건물에서 누군가가 하늘로 치솟았다. 아롯의 궁정마법사단장, 트렘펠 위자도르. 그리고 포박된 멜키스 엘하이어였다.
“당장, 당장 멈추란 말이다!”
왕궁 아브람을 통째로 수장시키려 하다니? 이것은 아롯 역사상 전무후무한 테러공작이었다. 거대한 분노가 트렘펠의 머리털을 위로 치솟게 만들었다.
“감히!”
트렘펠은 두 눈을 부릅뜨고 테러리스트, 아니, 반역자들을 노려보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것도 아닌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높은 수준의 인식저해 마법. 트렘펠은 눈동자에 마나를 집중시키며 마법을 일으켰다.
“설마…… 내가 살아 있는 중에,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모반과 맞닥트리게 될 줄이야……!”
당장 보이는 것은 3명. 저게 전부일 리가 없었다. 아롯 내에서 벌어진 반역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의 공격? 트렘펠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너희가 첩자로 사용했던 멜키스 엘하이어는 이미 사로잡혀 있다. 당장…… 당장 공격을 멈추고…….”
“아 글쎄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뭔 첩자라는 거야? 난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멜키스는 공중에서 몸을 버둥거리며 꽥 비명을 질렀다.
유진은 그 광경에 일단 한숨부터 내쉬었다. 궁정마법사단장인 트렘펠의 분노와 오해야 타당한 것이지만, 대체 어떤 연유로 멜키스가 첩자랍시고 잡힌 것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트렘펠뿐만이 아니었다.
왕성을 수호하는 궁정마법사단. 그중에서도 트렘펠이 엄선한 전투마법사 정예 100명이 트렘펠과 함께 세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수몰되어 가는 지상에서는 다른 전투마법사들과 기사단이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얼씨구.”
앞과 지상만 채워진 것도 아니었다. 뒤편에도 하나둘 마법사들이 모이고 있다.
수도의 마법사들. 사로잡힌 멜키스와, 아직 복귀하지 않은 발자크를 제외한 3명의 마탑주. 그리고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 그들 수십 명은 아브람의 봉마 마법진을 경계하여 섵불리 다가오지는 않았으나, 확실한 의지를 갖고서 세냐의 퇴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왕은 안 나와?”
세냐가 기억하던 아롯의 국왕은 진즉에 죽었겠지만, 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일국의 왕을 뉘 집 개처럼 불러대다니……!
트렘펠은 격한 분노를 느끼며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빛과 함께 나타난 스태프가 트렘펠의 분노와 마나를 받아먹었다. 콰르르르! 트렘펠의 머리 위 하늘에서 격렬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생성되었다.
“왕 말고 왕세자는 나왔네…… 요.”
유진은 세냐에게 살짝 고개를 기울이면서 속삭였다.
왕세자 호네인 아브람. 트렘펠의 옆으로 다가오는 호네인의 얼굴은 당혹감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왜 갑자기 존대를…… 아, 응, 흠, 으흠, 그…… 렇구나.”
세냐는 유진을 힐긋 흘겨보면서 쏘아붙이려다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 그러니 이런 자리에서는 세냐도 유진을 하멜처럼 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것도 뭔가 비밀스러운 연애 같아서 좋을지도…….’
세냐는 소녀다운 생각을 떠올렸다가, 지금은 이런 감정에 취할 때가 아니란 것을 자각하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너희들.”
세냐의 목소리에 마나가 실렸다.
ㅡ쿠우웅! 단순히 목소리를 내뱉었을 뿐이지만, 아카샤와 이터널 홀로 증폭된 마나에 대기 중의 마나가 요동쳤다. 트렘펠은 자신의 마법에서 반발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뭐 이런…… 목소리만으로 마법의 근간을 뒤흔든다고?’
전설 속에 사라진 드래곤의 용언이라도 되는…….
“……설마…….”
트렘펠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드래곤.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지? 현명한 세냐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봉마의 마법진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 목소리만으로 대기의 마나를 요동치게 만들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가ㅡ 꼭 인간일 이유가 어디에 있나. 전쟁시대 이후로 종적을 감춘,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위대한 존재.
“……설마…… 당신은…… 드래곤이십니까……?”
트렘펠은 꿀꺽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말은 아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트렘펠을 필두로 한 궁정마법사단은 의혹에 동감하며 표정을 굳혔다. 왕세자 호네인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떡 벌렸다. 수몰되어 가는 지상의 병력들도 앓는 신음을 흘렸다.
“……음…….”
후방을 가로막은 마탑주들도 트렘펠의 말을 들었다. 녹탑주와 청탑주도 트렘펠과 마찬가지로 저 정체모를 존재가 드래곤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적탑주 로베리안의 얼굴은 다른 감정으로 굳어갔다.
“설마…….”
인식저해의 마법이 너무 강하다. 봉마의 마법진 때문에 직접 간섭하기도 힘들다.
로베리안은 두 눈을 얇게 뜨고서, 아브람을 수장시키고 있는 3명을 응시했다……. 지금 로베리안의 머릿속에서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떠돌았고, 점점 확신이 더해졌다. 하지만 로베리안은 그 두려운 진실을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드래곤은 무슨.”
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아카샤를 흔들었다. 인식저해의 마법이 사라졌다. 모두의 눈에 잘 보이지 않던 모습이 뚜렷하게 바뀌었다.
너무 놀라면 동요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신음이나 놀란 소리를 내기는커녕 입을 떡 벌리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게 된다.
지금 세냐를 보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은 떡 벌리고서 세냐를 쳐다보았다.
과거의 모습을 담아낸 초상화. 동상. 아크리온에 확실하게 남아 있는 300년 전의 모습. 차림새가 바뀌기는 했다. 옷차림도, 망토도 달라졌다.
하지만 저 연보라색 머리카락과, 한 손에 들고 있는 아카샤는 300년 전과 똑같았다.
“유…… 진 공……?”
인식저해의 마법이 사라진 덕에 유진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트렘펠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지금 트렘펠이 유진의 이름을 부른 것은, ‘세냐 메르데인’의 이름보다는 유진의 이름이 가깝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어…… 어어…….”
하지만 유진의 이름을 내뱉는다 해서 상황이 바뀌지도,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트렘펠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간신히 움직였다.
“……현명한 세냐 님…… 이십니까?”
“보면 몰라?”
세냐는 그렇게 쏘아붙이며 대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 작은 움직임을 마주한 궁정마법사단 100명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왕세자인 호네인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수몰되는 아브람과 세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 치워?”
“예……?”
“안 치우냐고 새끼야!”
세냐는 트렘펠이 만들어낸 마법의 소용돌이를 가리키며 버럭 외쳤다.
고민도 하지 않았다. 트렘펠은 즉시 마법을 지워 버리고 지팡이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아니,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조차도 무례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팡이를 지워 버리고, 양손을 공손히 배꼽 언저리에 모았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제 이름은 트렘펠 위자도르라고 합니다. 현 아롯의 궁정마법사단장을 맡고 있으며…….”
트렘펠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기가 힘들었다.
전쟁시대 이후의 모든 마법사들에게 ‘현명한 세냐’는 하나의 종교였다. 그녀 이후로 거의 모든 마법사들이 서클 마법식을 익혔다. 세냐가 정립한 서클 마법식은 지금 시대의 마법사들에게는 기초부터의 골자였고, 세냐가 남긴 어록은 종교의 경전이었으며, 세냐 본인은 신과 다름없는 우상이었다.
“유진아!”
멜키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여전히 포박된 몸을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꽥꽥 목소리를 내질렀다.
“나, 나 좀 구해줘! 세…… 세냐 님! 저는 멜키스 엘하이어라고 해요! 저도 세냐 님을 구하는 것에 큰 힘을 보탰다구요!”
멜키스도 현명한 세냐는 존경하고 있다. 하지만 트렘펠처럼 긴장하고 겁에 질리지는 않았다. 멜키스가 생각하기에 본인은 아주 당당했다.
세계수에 봉인된 세냐를 구한 것이 대체 누구인가? 유진 라이언하트?
아니다. 저 위대하고 전설적인 마법사를 구한 것은 당시 대수림에서 유진과 함께 싸운 모두였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멜키스가 마나를 가득 보태주지 않았다면 라이자키아와의 전투는 진즉에 유진의 죽음으로 끝났을 것이다.
세냐는 멜키스의 간절한 외침을 당장 신경 쓰지 않았다. 세냐는 찡그린 얼굴로 메르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세냐 님. 저 새끼예요. 저 수염 기르고 녹색 로브를 걸친 새끼.”
“응.”
“저 새끼가 당대의 녹탑주인 제네릭 오스먼이에요. 절 해부한 놈은 저 새끼의 아버지인데, 걔는 이미 수십 년 전쯤에 죽었어요.”
“응.”
“그런데 말이에요, 세냐 님.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저 제네릭이란 새끼도 저를 되게 괴롭혔어요. 세냐 님의 전당에 들락거리던 때는요, 저보고 쓸모가 없다며 구박을 했었다고요. 제가 쓸모가 없어서 위치 크래프트를 해석할 수 없는 거라면서요.”
“개소리를 짖어대는 놈이구나.”
“네, 정말로요. 자기가 멍청하고 무능해서 위치 크래프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데, 왜 저를 구박한 것일까요? 저는요 그게 아주 궁금해요.”
“나도 아주 궁금해.”
세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저 개자식의 몸에 직접 물어봐 줄게.”
“에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아냐, 내가 꼭 그렇게 하고 싶어.”
세냐는 그렇게 내뱉고서 트렘펠와 호네인을 쳐다보았다.
“거기서 가만히 있어.”
“예…… 예?”
“괜히 끼어들어 훼방 놓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세냐는 배시시 웃어대는 메르를 번쩍 안아 들고서는, 유진의 품에 맡겼다.
“으흠…… 유진, 너도 말이야. 가만히 서서 메르나 안고 있…… 있으…… 있으렴?”
별것 아닌 말인데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세냐는 몇 번 헛기침을 하고서 홱 몸을 돌렸다.
“야.”
살벌하게 치켜뜬 눈이 제네릭에게 향했다. 제네릭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정쩡한 자세로 공중에 떠 있었다.
“너 이리 와. 아니, 아니다. 오지 마. 그냥 거기 있어.”
“예…… 예?”
“거기 있으라고 개자식아.”
분노와 살의가 마법으로 바뀌었다
아브람
제네릭은 입술과 눈동자를 함께 뻐끔거렸다.
현명한 세냐. 전설 그 자체인 마법사가 명백한 살의를 드러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왜?’
대답은 뻔한 의문이지만, 제네릭은 몇 번이고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유…… 이유? 가장 큰 것은 부친의 잘못이다. 하지만 제네릭은 그것이 굉장히 억울했다.
전대 녹탑주인 아버지는 완고하고 급진적인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현명한 세냐의 유산인 위치 크래프트를 한시라도 빨리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상의 마도서라 불리는 위치 크래프트. 아크리온의 위치 크래프트는 사실 마도서라기보다는 하나의 개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아크리온의 위치 크래프트가 3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 1권은 아크리온에, 2권은 원본이 아닌 사본이기는 하여도 아롯 왕가에서 보관 중이다.
사실 위치 크래프트의 남은 2권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고, 아롯 왕가가 보유한 마도서는 세냐가 마도왕국의 체면이나 세워줄 겸 대충 만들어 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진실을 아는 것은 세냐뿐이었으니, 후대의 마법사로서는 위치 크래프트라는 환상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전대의 녹탑주는 명예욕이 강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아크리온의 위치 크래프트를 해석하고, 아롯 왕가에서 남은 위치 크래프트의 열람을 허가받아 8서클을 뛰어넘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메르의 해부를 주장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역마. 완전히 부숴버리는 것도 아니고, 몇 번 몸을 열었다가 닫는 것뿐이잖나.
사실 저런 생각을 이전에 했던 마법사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크리온에 출입하는 고위 마법사들. 마탑주들. 심지어 아롯의 왕족들도, 위치 크래프트에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그것을 관리하는 사역마부터 해부하는 것이 빠르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이터널 홀이라는 개념을 재현하는 위치 크래프트를 뜯어서 여는 것보다는 사역마를 뜯어서 여는 것이 압도적으로 편하니까.
하지만 생각만 했을 뿐, 정말로 실행하려 들지는 않았다. 위치 크래프트와 마찬가지로, 사역마 메르도 세냐가 남긴 유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었는데, 당대의 녹탑주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해부를 맡겨달라고 주장해 왔다.
명분? 차고 넘친다. 심지어 녹탑주는 현명한 세냐의 제자 2명이 낳은 자식이었고, 스스로도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라 주장하던 인물이다. 똑같이 세냐의 계파를 이은 적탑주 쪽은 무조건적으로 반대를 주장했지만, 백여 년 전 아롯의 왕가는 녹탑주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메르를 해부한 것이다. 별 소득은 없었다. 완전히 봉인된 기억은 감히 건들 수도 없었고, 사역마의 구성술식조차도 이해가 불가능했다.
애당초 메르에게는 처음부터 위치 크래프트에 관한 비밀 따위는 심어져 있지 않았으니, 아무리 해부를 반복해도 소득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세…… 세냐 님,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제네릭은 더듬거리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세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제네릭은 오히려 저 침묵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되는대로 내뱉기는 했는데, 스스로 생각해 보기에도 오해랄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세냐 님께서 분노하신 일을 벌인 것은 저희 아버지입니다. 저, 저는 그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말을 바꿔서, 제네릭은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물론 세냐는 그 말도 신경 쓰지 않았다. 파직! 세냐의 얼굴 옆에서 마법의 창이 나타났다.
경고 하나 없이 창이 쏘아졌다. 제네릭은 기겁하며 블링크를 펼쳤다. 피하지 않았다면, 창은 제네릭의 머리를 꿰뚫었을 것이다.
“내가.”
창은 본래 제네릭이 있던 자리 바로 앞에서 멈췄다. 세냐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내뱉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랬지?”
“예…… 예?”
“바로 방금 전에 그렇게 말했어. 내가 정말로 널 죽였겠어? 알아서 멈추려고 했는데, 네가 혼자 쫄아서 움직였잖아. 그렇지?”
“세, 세냐 님, 그게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는 네 애비가 저지른 죄를 네게 따질 생각이 없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널 좋게 볼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 네가 메르를 괴롭힌 것은 사실이잖아, 그렇지?”
“그건…….”
“또, 네가 감히, 내 후계자를 자처하고 다녔다며? 나는 네 이름도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너는 여태까지 몇 번이고 내 이름을 팔아댔다며.”
메르에 관한 분노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제네릭에게 따지는 것이 불합리한 것은 사실이니, 다른 이유가 더 필요했다.
다행히 저것 말고도 세냐가 제네릭을 패버릴 명분이 많았다.
“그것도 모자라, 유진에게 아카샤를 양도한다고 했을 때. 네가 앞장서서 반발했다며?”
“그, 그것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갑작스러워? 네가 뭐라고 그걸 판단해? 아, 그래. 반발이야 할 수 있어. 그런데! 넌 네 자신을 이 세냐 님의 적법한 후계자라 주장하며, 유진에게서 아카샤를 빼앗으려고 했잖아? 네가 직접 나서서 유진을 시험하려고 했잖아?”
제네릭은 꿀꺽 침을 삼켰다. 세냐는 보란 듯이 아카샤를 위로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널 시험해 볼게. 네가 과연 내 후계자를 자처해도 될 마법사인지 아닌지 말이야.”
“어……. 어찌 제가 세냐 님께 맞설 수 있겠습니까? 이건 제게 너무나 가혹한 일입니다…….”
“가혹해? 그렇다면 확실하게 조건을 걸어줄게. 네 마법이 내 옷깃 하나라도 스친다면! 내 모든 것을 걸고 널 후계자라 인정해 주지. 본 적도 없고 이미 죽어버린 네 아비가 내 이름을 팔아댄 것도. 내 사랑스러운 사역마를 괴롭힌 것도, 모두 용서해 주겠단 말씀이야. 그리고, 그래. 아카샤? 이것도 너 줄게.”
세냐는 입술을 비틀며 이죽댔다. 그런 조건들이 붙으니 제네릭의 표정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여전히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제네릭의 눈동자에는 탐욕이 스멀스멀 번져갔다.
옷깃만 스치면 된다고? 어려운 조건 같지는 않았다. 상대가 그 전설적인 마법사, 현명한 세냐일지라도 똑같은 인간 마법사 아닌가.
‘옷깃만…….’
그것만 해낸다면 제네릭은 아주 많은 것을 얻게 된다.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아카샤의 주인이 된다는 명예와 영광.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한 이상, 그 현명한 세냐일지라도 내뱉은 말을 물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제네릭은 마음을 가다듬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냐 님의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이 제네릭 오스먼. 당대의 녹색마탑주이자, 세냐 님의 계파를 이은 오스먼 마법가의 가주로서 시험에 임하겠습니다.”
“말이 참 길다.”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뭐 해? 마법 안 쓸 거야? 설마 네 주제에 나한테 선공을 양보하겠다 이거야?”
제네릭은 표정을 굳히고서 지팡이를 꺼냈다.
시험이라고는 해도 마법으로 한번 겨뤄보기로 마음을 먹어서일까. 톡톡 쏘아대는 세냐의 말투가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콧대를 눌러주마.’
제네릭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어떤 마법을 펼칠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제네릭이 펼칠 수 있는 모든 마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 대마법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시그니처.
위그드라실. 제네릭의 지팡이가 빛을 내뿜었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빛이 제네릭의 몸을 삼켰다. 세냐는 공중에 우두커니 서서 제네릭을 내려다보았다.
“병신 같은 마법이네.”
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냉정하게 평가했다.
시그니처의 개념은 수백 년 전에도 있었다. 지금이야 대마법사의 기준이 8서클로 고정되어 있지만, 서클 마법식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옛날에는 개나 소나 자신이 대마법사라 떠들곤 했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남들이 쓸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의 독자적인 마법은 옛날부터 집착의 대상이었다. 그 시대에 대마법사가 맞고 아니고를 따지기 위해서는 저런 독자적인 마법, 시그니처를 내세워야만 했다.
“시대가 참 좋아졌어. 저딴 시그니처로 대마법사를 주장할 수 있다니.”
세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클 마법식의 폐해라 할 수 있으리라. 8서클이라고 기준이 확실히 정해지니, 저깟 병신 같은 마법을 내세우면서도 대마법사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어디가 병신 같은가? 우선 발동이 너무 느리다. 빛 속에서 열심히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기는 한데, 속도도 느리고 빈틈이 많다. 저 빛 자체가 방어결계로 작용하고는 있지만, 세냐는 지금 당장에라도 저 결계를 박살 내고 제네릭을 찢어발길 수 있었다.
저토록 느린 시그니처를 고민 없이 사용한 판단력에도 감탄이 나왔다. 시험이라고 편하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방어가 뚫리기 전에 시그니처가 완성될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어느 쪽이든 간에 얕고 같잖았다.
‘쓸데없이 커다란 나무. 구성된 술식들은…… 흠, 꽤 재미있기는 하네.’
위그드라실을 구성하는 데 쓰인 마법들은 대부분이 제네릭과 오스먼 가의 오리지널 마법들이다. 세냐는 두 눈을 얇게 뜨고서 저 아래에서 퍼져가는 빛을 응시했다.
아카샤가 보여주는 마법의 술식. 그리고 아카샤의 권능으로 술식의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세냐는 스스로의 오성으로 위그드라실을 간파하고 완벽하게 이해했다.
‘마법의 고속과 다중영창. 이건 이터널 홀을 흉내 냈는데 처참한 수준.’
하찮다.
‘나무껍질 하나하나에 방어마법은 공들였네. 육체를 반쯤 나무와 동화시켜서 재생력도 신경 썼고. 다른 뿌리로 이동해서 도망칠 수도 있어.’
하찮다.
‘뿌리를 박아 넣은 대지에 대한 지배…… 범위가 쓸데없이 넓네. 그런 주제에 정밀계산의 보조는 턱없이 적어. 부족한 정밀도는 부풀린 덩치와 숫자로 때우겠다는 거지?’
하찮다.
‘가지마다 매달린 꽃망울. 대기 중의 마나를 모으고, 꽃잎을 터트리면서 포격을 터트리는 식. 포격을 꽃잎에 난반사시키는 광역마법.’
하찮다.
정말로 하찮았다. 이것저것 좋다는 것은 덕지덕지 붙여댔는데, 뭐 하나 완전하지 않다. 저것은 겁쟁이가 애매하게 용감한 척 구는 마법이다. 방어도 회피도 공격도 뭐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짓밟아줄까.
ㅡ촤아아악!
빛이 사라졌다. 위그드라실이 완성되었다. 성탑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마법의 나무가 호수에 우뚝 솟아났다. 나무의 깊숙한 곳에서 제네릭은 눈을 떴다.
이렇게 위그드라실을 제대로 펼치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제네릭은 즐거이 만능감을 만끽하며 세냐를 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볼 필요는 없었다. 거대하고 높은 위그드라실은 바로 앞에서 세냐를 포착할 수 있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뚫지 못했던 것이겠지. 제네릭은 끌끌 웃으면서 위그드라실을 움직였다.
콰르르르! 호수 아래에 펼쳐놓은, 셀 수 없이 많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가 위로 치솟았다. 위그드라실이 움직일 때마다 호수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출렁거렸다.
[제 주제에 감히 현명한 세냐 님께 선공을 양보해 드릴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제가 먼저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치겠네 정말.”
세냐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단치도 않은, 하찮기 짝이 없는 마법을 펼쳐놓고서 자신만만하게 으스대는 저 목소리가 너무나도 꼴같잖았다.
“그래. 와봐, 꼬마야.”
세냐는 진한 짜증을 담아서 내뱉었다.
위그드라실이 마법을 일으켰다. 고속으로 발현된 공격마법들이 무더기로 세냐를 덮쳤다. 세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피할 가치도, 그럴 필요도 없는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방식도 형태도 다른 공격마법이지만, 세냐의 근처에 도달한 순간에는 똑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소멸. 단어 그대로의 소멸이었다. 공격이, 마법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대체……?!]
광역 디스펠? 봉마의 마법. 현명한 세냐가 상대의 마법을 무효화하고 마법사로서의 능력을 박탈시켜 버리는 봉마 마법을 장기로 삼았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
“다음.”
세냐가 내뱉었다. 대체 어떤 마법이지? 제네릭은 혼란과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ㅡ콰르르르! 라이자키아의 꼬리와 비교해도 굵기에선 차이가 나지 않을, 수십 개의 나무뿌리가 일제히 세냐를 덮쳤다.
이터널 홀이 열렸다. 세냐는 손가락을 까득 굽히고서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세냐가 존재하는 공간이 뒤흔들리고 일그러졌다. 촤라라락! 세냐를 덮치던 나무뿌리의 궤적이 틀어졌다.
‘뭐지?’
궤적이 뒤틀린 것이 끝이 아니었다. 저 일그러진 공간에 진입한 나무뿌리들이 서로 뒤엉키더니 배배 꼬였다. 제네릭은 움찔 놀라서 뿌리를 거두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콰득, 콰드득……! 서로 뒤엉키던 뿌리가 얇게 압착되었다. 뚜두둑! 길게 꼬였던 뿌리가 결국은 부러져서 아래로 떨어졌다.
제네릭은 그 광경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봉마의 마법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위그드라실의 모든 것은 제네릭에게 통제되는데, 세냐의 공간에 도달한 순간에 통제권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
제네릭의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떠올랐다.
희미한 가능성.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현명한 세냐일지라도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넓게 펼쳐진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수백 개의 꽃망울이 세냐에게 머리를 돌렸다. 힘은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네릭은 지금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확인하고 싶었다.
여물지 않은 꽃망울이 터졌다. 그보다 많은 개수의 꽃잎이 허공을 수놓았다. 나부끼는 꽃잎 사이사이로 실낱같은 선이 그려졌다. 닿는 것을 모조리 꿰뚫을 레이저가 꽃잎과 꽃잎 사이에서 반사되었다. 궤도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일지라도 반복된 반사는 기어코 상대를 꿰뚫고 만다.
세냐는 코웃음을 치면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우우우! 일그러짐이 더욱 크게 번지면서 다른 공간을 침식했다. 반사를 거듭한 레이저가 그 공간에 도달한 순간. 레이저의 궤적이 바뀌었다.
퍼버버벙!
역류된 레이저가 다른 레이저와 부딪쳐 폭발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세냐는 제 공간에 들어와서 흩날리고 있는 꽃잎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손끝에서 쏘아진 빛이 꽃잎과 닿았다. 위그드라실이 그러했듯, 세냐가 만들어낸 빛도 꽃잎에 반사되었다. 아직 허공에 떠돌고 있던 수백 개의 꽃잎이 빛을 반사하는 길이 되었다. 꽃잎은 빛을 반사시킨 순간에 파괴되었다.
한 줄기의 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개의 꽃잎을 파괴했다. 그 시점에서 빛은 더 이상 가늘지 않았다. 위그드라실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버릴 만큼 커져 있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위력이 가늠되지 않았다. 제네릭은 기겁하며 몸을 옮겼다.
꽈아앙!
거대한 나무가 허물어졌다. 다른 뿌리로 이동했던 제네릭은, 새로이 나무를 일으켜 세우지 않고 일단 호수 속에서 숨을 죽였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금 나무를 꿰뚫은 빛. 그렇게 되도록 길을 만든 것은 위그드라실의 꽃잎이었다. 다른 마법사의 마법을 제 마음대로 이용했다고?
……겹겹이 중첩해 놓은 방어마법이 종잇장처럼 쉽게 관통되었다. 아니, 관통이라기보다는…… 뚫리기 쉽게, 알아서 얇아진 것처럼. 마치…… 마치 세냐에게 마법 전체가 지배되는 것만 같았다.
“네 시그니처는 허접해.”
세냐는 호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호수 밑바닥에 펼쳐진 많은 뿌리들 중에서 제네릭을 찾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가 않았다.
“이것 말고도 널 부수는 방법은 아주 많은데. 네 같잖은 자존심을 짓밟으려면 이게 제일 낫겠다 싶더라고.”
[대체…… 대체,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난 시그니처가 없는 줄 알아? 설마 이터널 홀이 내 시그니처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이터널 홀도 시그니처라 주장하기 차고 넘치지만, 세냐에게는 이터널 홀 외에도 다른 시그니처가 있다.
엠프레스 룰(Empress rule). 이 마법은 세냐가 정해 놓은 공간에 작용하고,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른 누군가의 마법을 장악해 버린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냐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빼앗기 쉬운 하찮은 마법이라면 마음껏 지배할 수 있다.
위그드라실? 시그니처? 저깟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마법. 심지어 아카샤로 술식까지 파악했는데 지배하지 못할 게 뭔가.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옆으로 쭉 그은 선에서 모래알갱이만큼이나 작은 마법의 탄환들이 나타났다.
그 후에 벌어진 것은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모래알만큼 작은 알갱이가 위그드라실을 결결로 찢어발겼다. 이리저리 도망치는 것을 내버려 두고 회복할 시간을 약간 준 뒤에 다시 반복했다.
발악의 여지는 계속해서 주었다. 다시 짓밟았다. 나중 가서는 호수의 물줄기로 뿌리를 휘감아 공중에 내던졌다. 그때는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퇴로를 끊어버리고, 껍질을 깨부수고, 그 안에서 악을 쓰는 제네릭을 바깥으로 끌어냈다.
“크아악!”
제네릭의 몸은 높이 떠올랐다.
호수로 다시 떨어졌다.
첨벙, 첨벙, 첨벙.
제네릭이 기절할 때까지 호수에서는 물보라가 끊이지 않았다.
아브람
물에 흠뻑 젖은 제네릭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 모습은 막 세탁줄에 걸린 빨랫감처럼 보였다.
8서클의 대마법사. 아롯에서도 마법의 명문가로 꼽히는, 3대째 녹색 마탑주 자리를 이어온 오스먼 가문의 가주.
그런 마법사가 어린아이 취급당했다. 말 그대로의 농락이었다. 아롯의 대마법사들 사이에서 제네릭에 대한 평가가 그리 높지는 않다만, 그렇다고 해서 세냐처럼 제네릭을 농락할 수 있다 자신하는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야.”
세냐의 모습은 처음과 비교해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네릭이 남발하던 마법과 발악은 세냐의 옷깃을 스치기는커녕 근처까지 다가오지도 못했다.
세냐는 시큰둥한 얼굴로 제네릭을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콩알처럼 작은 마법의 탄환이 제네릭의 몸을 파고들었다.
“우웩!”
정신을 차린 제네릭은 가장 먼저 물을 왕창 토해냈다. 호수에 빠졌다 들렸다를 반복하면서 물을 너무 많이 마셔 버린 탓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토악질이라니. 평소의 제네릭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한참이나 물을 토해낸 제네릭의 얼굴은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간신히 고개를 들어 세냐를 쳐다보았다.
“더 할래?”
싸늘한 질문. 제네릭은 딸꾹질까지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살아온 80여 년의 세월에서 오늘처럼 끔찍한 고통과 무력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열 번 넘도록 호수에 처박혔던 몸은 전신이 욱신거리며 쑤셨고, 뼈와 내장도 다친 것만 같았다. 물을 너무 마신 탓에 머리도 어지럽고, 특히 눈 안쪽이 당장 터질 것처럼 아팠다. 먹먹해진 귀도 이명이 맴돌았다.
그런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처음의 자신감은 티끌도 남지 않았다.
현명한 세냐…… 알고는 있었지만, 이만큼이나 격의 차이가 난단 말인가. 반백 년을 수행하고 자신감을 가졌던, 마법사로서의 모든 감정이 무너져 버렸다.
“그래.”
세냐는 얇게 뜬 눈으로 제네릭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너와 네 가문을 내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아. 앞으로 네가, 그리고 또 네 후손이. 세냐 메르데인의 후계자를 자처한다면, 그때는 내 손으로 네 가문을 멸족시키겠어.”
“……예…….”
“어쩌면 그 먼 미래에는 나도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죽으면 뭐, 내 후손이 네 가문을 쓸어주겠지?”
세냐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을 의식했다.
세냐 라이언하트. 혹은 유진 메르데인. 어느 쪽이든 가슴 설레는 울림을 가진 이름이라 생각했다…….
“……으흠. 뭐 그건 앞으로의 일이고. 일단 지금은…….”
세냐가 유진과 메르를 쳐다보았다. 직접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시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유진은 메르를 품에 안고서 세냐의 곁에 다가왔다.
“내 정식 후계자랑, 사랑스러운 사역마에게 사과를 해야 하지 않을까.”
제네릭의 주름이 덜덜 떨렸다.
메르에 관한 사과? 그것은 몇 년 전에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사과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주변을 가로막고 했었다. 새삼스럽지만 제네릭은 그때 유진이 얼마나 자신을 배려해 주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은 보는 사람들이 아주, 아주 많았다. 왕궁에서 나온 궁정마법사단, 기사단과 관료. 뒤에는 마탑주들을 비롯해 마탑과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 호수 저편에는 구경 나온 군중들도 가득했다.
하고 싶지 않다. 저 수많은 군중들. 경쟁자인 마탑주들. 그리고 녹색 마탑 소속 마법사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 사과하라고?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제네릭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무어라 반발하고 협상하기에는 세냐가 너무나 두려웠다.
“……죄송합니다. 세냐 님의 사역마를…… 괴롭힌, 죽은 아버지의 죄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너도 괴롭혔잖아.”
“예…… 그 일에 관해서도 사과드립니다.”
“사과를 왜 나한테 해? 얘한테 해야지.”
세냐는 유진에게서 메르를 넘겨받고 두 눈을 부릅떴다. 메르도 세냐의 표정을 따라 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미안하다…….”
“내 후계자한테도.”
곁에 서 있던 유진은 세냐의 집요하고 지독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힐긋 본 제네릭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과호흡이라도 온 것인지 제네릭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유진…… 유진 라이언하트. 자네를 인정하지 못하고, 감히 시험하려 했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예…… 알았습니다.”
유진인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과를 받아주자, 제네릭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물에 흠뻑 젖은 몸이 너무나도 추웠다. 가슴 속도 시리고 서글펐다. 제네릭은 세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이제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래. 오늘 일로 너와 나, 그리고 네 가문 사이에는 아무 불만도 문제도 없는 거야. 그렇지?”
“예…….”
“앞으로 잘하자. 아까도 말했지만, 한 번이라도 내 이름을 팔아대면서 후계자 어쩌고 하면 진짜 죽는 거야.”
제네릭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몸을 돌렸다. 슬쩍 시선을 들어 보니 너무 많은 눈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부분은 동정 어린 시선이었는데, 비웃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녹색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은 눈은 절망과 회의감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이 현실 자체가 부끄럽고 굴욕적인 것인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은퇴할까…….’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다. 앞으로 10년은 더 마탑주를 지내다가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며칠 뒤에 녹색 마탑에도 한 번 들를 거야. 옛날이지만 내가 지냈던 마탑이니까.”
어깨를 축 늘어트린 제네릭은 알 바가 아니었지만, 녹색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의 표정은 세냐의 마음을 조금 약하게 만들었다. 저 말을 들은 녹색 마탑의 마법사들의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마탑주가 개처럼 얻어맞기는 했어도, 그 존경해 마다치 않는 현명한 세냐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마법사로서 설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저기…… 세냐 님.”
유진은 슬쩍 세냐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저어…… 가 적탑주님한테 이런저런 도움을 참 많이 받았거든요. 마법도 저분한테 배웠고요. 그리고 저번 일에서 적탑주님의 도움이 아주 컸습니다.”
유진이 보건대, 지금이 로베리안의 기를 살려줄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세냐는 그 말을 듣고서 음,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색 마탑주. 이름이…….”
“예, 예. 로베리안 서피스라고 합니다.”
대뜸 지목당한 로베리안은 화들짝 놀라서 앞으로 나왔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유진과 세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유진이야 세냐와 30일 후에 만나기로 미리 약속했었지만, 로베리안은 그 시일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갑작스레 내린 눈은 둘째 치고, 왕궁 아브람을 통째로 수장시킬 수 있는 마법사는 현명한 세냐 외에 없을 테니.
“네가 디아도르의 계파라며?”
디아도르 토른. 세냐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수백 년 전에 적색마탑주를 지낸 마법사다. 로베리안에게 마법을 가르친 것이 디아도르의 제자였고, 결국 뿌리는 세냐에게 이어져 있어서 로베리안도 이전까지 세냐의 후계자를 자처했었다.
“예…… 그렇습니다.”
로베리안은 방금 전체 호수에 수십 번 패대기쳐진 제네릭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설마 자신에게도 그 잔혹하던 ‘시험’을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로베리안은 순간적으로 그런 걱정을 떠올렸지만, 세냐는 아까와는 달리 방긋 웃어 보였다.
“근본이 있네.”
사실을 따지자면 제네릭이 훨씬 근본이 있는 혈통이지만, 세냐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 후계자한테도 도움을 많이 주었다며? 족보가 복잡하기는 하네. 그러니까, 너는 내 정식 후계자의 스승이자 내 후계자라는 것이잖아?”
“제멋대로 떠든 말일 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세냐 님의 후계자라 자처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
“뭐 어때? 나는 상관없어. 이것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적색마탑에 갔을 때 진득하게 나눠보자구.”
로베리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깊이 고개를 숙였고, 등 뒤에서는 적색마탑의 마법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가자, 귀여운 후계자야.”
세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유진을 후계자라 부르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사실 얘가 그 우둔한 하멜이고, 나랑 이러쿵저러쿵하는 사이야. 그렇게 공표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이런 표면적인 관계도 비밀스럽고 설레었기 때문이다. 세냐는 히죽 웃으며 유진의 등짝을 팡 두드렸다.
“예, 세냐 님.”
유진은 군말 없이 세냐를 따라갔다. 세냐는 공중을 가로질러서, 아까 시켰던 대로 가만히 있는 궁정마법사단 쪽으로 다가갔다.
“어디, 얼마나 잠겼나 볼까?”
세냐는 트렘펠과 호네인을 무시하고서 아브람을 쳐다보았다. 제네릭을 발라먹는 중에도 아브람은 천천히 수몰되고 있었는데, 힐긋 본 궁내의 정원은 이미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세…… 세냐 님…….”
호네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점점 물이 차오르는 정원을 쳐다보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부디,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
“네 아버지는?”
이번에도 세냐는 아롯의 국왕을 편하게 불렀지만, 호네인과 트렘펠은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았다. 300년 전에도 아롯의 국왕은 세냐를 극진히 대했다.
아롯이 지금처럼 강성한 마도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세냐가 아롯에서 살았기 때문이며, 그런 것을 떠나서도 아롯은 세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아브람은 수장되는 중이고, 녹탑주 제네릭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다. 그 죄에서 아롯은 떳떳하지 않았다. 사역마의 해부를 허락한 것도, 세냐의 이름을 열심히 팔아댄 것도. 모두가 아롯의 왕정이었기 때문이다.
“전하는…… 어전에서 세냐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장 기어 나오지는 못할망정. 주제에 나보고 찾아와 알현하라 이거야?”
“세냐 님, 제발…….”
호네인은 체면을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세냐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땅에서 무릎 꿇는 것도 아니고. 여기 하늘에서 무릎 꿇어서 뭐 하니?”
“제발, 제발 노여움을 거두어주십시오. 아니, 당장 거두지 않으셔도 좋으니…… 우선 저와 함께 전하를 알현해 주십시오.”
호네인은 허공에서 무릎을 꿇은 것도 모자라 고개까지 깊이 처박았다. 아롯에서, 아롯의 왕세자가. 수많은 군중 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인 것이다.
세냐는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서 호네인을 쳐다보았다.
아롯의 국왕이 당장 나오지 않은 이유? 뻔하지 않나. 대놓고 구박과 욕을 들어먹을 텐데, 일국의 왕이 백성들 보는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냐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울 수도 없는 것이라, 직접 나오지 않고 일단은 왕세자 먼저 내보낸 뒤에 어전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터.
“왕세자님이 저렇게까지 하시는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죠?”
유진은 호네인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호네인은 유진이 아롯에 있을 적부터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다. 유진이 아크리온의 출입증 문제에 얽혔을 때, 호네인이 직접 유진의 자격을 주장해주기도 했었다.
“내 자랑스러운 후계자의 부탁이라면야.”
세냐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대답에 호네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유진이 자신을 도운 것에 깊은 감사를 느꼈지만, 일단은 고개는 들지 않았다.
“왕세자. 고개 들어. 깜찍한 후계자의 부탁도 있으니, 왕세자와 아롯의 체면을 생각해 주지. 일단 잘난 국왕을 알현하러 가보자구.”
“예, 예. 감사합니다.”
호네인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나도!”
멜키스가 빽 고함을 질렀다. 아직까지 멜키스를 구속하고 있던 트렘펠은 경악하는 표정을 하고서 멜키스를 쳐다보았다.
이, 믿을 수 없이 경박하고 목소리 큰 여자는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도 자신을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풀어줘요! 세냐 님! 존경하고 사랑해요!”
“세냐 님. 백탑주도 그…… 많은 도움을…….”
“내 기특하고 마음씨 착한 후계자의 부탁이라면야.”
트렘펠은 즉시 멜키스의 구속을 풀어주었다. 그는 약간의 꺼림칙함을 느끼며 세냐와 유진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귀엽고, 자랑스럽고, 깜찍하고, 마음씨 착한 후계자라 이 말인가? 아무래도 주책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하긴…… 유진 라이언하트 정도라면.’
만약 트렘펠 본인도 유진 같은 제자를 들였다면 저렇게 애지중지하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자랑했을 것이다. 트렘펠은 호네인과 함께 아브람으로 향하는 세냐와 유진의 등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따라갔다.
어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른다.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아마, 좋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통째로 아브람을 수장시키려 한 장본인. 녹탑주가 일찍이 얻어맞기는 했지만, 저 위대한 마법사의 분노는 아직 풀리지 않았으리라.
‘만약…… 만약 전하를 공격이라도 한다면…….’
트렘펠도 세냐를 존경하고 동경해 왔지만, 국왕의 몸에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목숨을 던져서라도 막아설 것이다. 트렘펠은 조용히 자신의 죽음을 각오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트렘펠의 결의와는 달리, 세냐는 씰룩대는 표정을 최선을 다해 붙잡으며 성찰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귀엽고, 자랑스럽고, 깜찍하고, 마음씨 착한 후계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과시하고 싶다는 마음에 떠들어버렸는데, 생각해 보니 하나같이 부끄러운 발언들 아닌가.
[괜찮아요.]
메르는 세냐의 기분을 느끼고서 머릿속에 말을 걸어왔다.
[고작 저런 말들로 세냐 님이 부끄럽고 민망해하실 이유는 없어요.]
‘그렇지만!’
[정말로요.]
세냐 님이 없는 동안 아니스 님과 크리스티나 님이 어떤, 어떤 망측한 짓을 하였는지를 아신다면. 세냐 님은 저 정도 발언은 어린아이 소꿉장난이라고 생각하실걸요.
메르는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메르 본인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너무나 망측한 일이었다. 솔직히 메르는 그것을 말로서 잘 설명할 자신이 없거니와, 지금 자신이 그 말을 해버린다면 세냐가 크게 분노하여 이 왕성을 박살 내지 않을까 두려웠다.
‘가슴을…… 가슴을 머리에 얹고 승자의 미소를 지어댔었지.’
그걸 대체 말로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당대의 국왕 이름이 뭐야?”
“다인돌프 아브람입니다.”
유진이 대답했다.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롯의 왕은 25대째였어. 이름은 루카르드였고.”
“지금의 왕은 31대째입니다.”
“31대 왕? 햐, 오래도 됐네. 역사적으로 이쯤 되면 슬슬 멸망할 때가 되지 않았나? 아니면 왕가와 국호를 갈아 치우거나.”
호네인의 어깨가 두려움으로 경직되었다. 뒤따르던 트렘펠은 지금이라도 암살을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세냐 님. 너무 험하게 하지는 마시구요, 적당히 평화롭게 합시다.”
“유진…… 아! 나의 후계자야! 이 나라에 꽤 애착이 있는 모양이지? 걱정까지 다 하고 말이야.”
“에이, 저는 세냐 님을 걱정하는 거죠.”
유진의 너스레에 세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나? 나를 왜?”
“세냐 님이 너무 험악하게 행동해 버리시면, 후대의 역사에서 세냐 님의 이름이 나쁘게 적힐 수도 있잖아요. 현명한 세냐 말고 포악한 세냐라던지. 하멜 님을, 존경, 하는 저로서는! 뭘 해도 우둔한 하멜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세냐는 표정을 바꿔먹고 유진을 흘겨보았다.
“후계자야. 네가 옛날을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데, 하멜 그 자식은 우둔한 수준이 아니라 병신이었단다. 내가…… 동화책을! 봤는데? 우둔한 하멜 정도면 굉장히 센스 있고, 적당히 붙인 이름인 거야.”
“아, 예, 그렇군요. 하지만! 만약 하멜 님이 하늘에서 그 사실을 알면 통곡하지 않으실까요?”
“걔가 통곡을 왜 해?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란다.”
저, 저 얄미운 미소……! 유진은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갑작스레 바뀐 화제에 트렘펠과 호네인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300년 전의 전설과 영광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로운 질문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곳입니다…….”
물에 잠겨가는 복도를 날아서 왕궁 안으로 들어왔다. 호네인은 굳게 닫힌 어전의 문 앞에서 꿀꺽 침을 삼켰다.
“전하는 이 안에 계십니다…….”
“저 안에 날 족치기 위한 암살자나 친위대를 숨겨놓은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호네인은 기겁하며 외쳤다. 그러면서도 불안하여 문 너머의 기척을 살펴보았는데, 세냐가 말한 친위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호네인을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본래 어전에는 국왕의 친위대와 재상이 머물게 마련인데, 지금은 국왕 외에 다른 기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흥.”
세냐도 그를 눈치챘다. 호네인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세냐는 활짝 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간다.”
세냐는 호네인을 지나쳐 앞으로 나갔다.
아롯의 어전. 유진도 처음 와보는 곳이다. 하지만 감상할 틈이 없었다.
아롯의 31대 왕. 다인돌프 아브람. 그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옥좌 주변을 빙빙 돌다가, 문이 벌컥 열린 순간에 움직임을 멈췄다.
“현명한 세냐 님을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왜 어전에 친위대도, 재상도, 시종조차도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인돌프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브람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도왕국 아롯의 31대 국왕. 다인돌프 아브람. 처음부터 옥좌에 앉아 있지도 않던 왕이, 세냐의 얼굴을 보자 고민도 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아버렸다.
호네인은 경악하여 부왕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부친이 얼마나 권위적인 사람인지, 평소 얼마나 위엄에 신경 쓰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수년 전. 유진 라이언하트의 아크리온 출입에 관한 회의가 열렸을 때. 다인돌프는 그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왕세자인 호네인을 대신 보냈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키옐의 라이언하트. 제국의 황제조차도 쉬이 대할 수 없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들. 대륙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굴지의 무가.
다인돌프는 그 베르무트의 후예를, 특히 라이언하트 역사에서 유일하게 방계이면서도 본가의 양자가 된 ‘유진 라이언하트’와 마주하는 것을 꺼려 했다. 저만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17세의 소년에게 일국의 왕다운 권위와 위엄을 평소처럼 내세우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후에 있었던 아카샤와 관련된 청문회에서도, 다인돌프는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아크리온의 출입증과 비교도 안 될 커다란 안건이었음에도 왕세자 호네인을 대리로 보냈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아서. 국왕인 자신이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유진과 대립하는 대마법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아롯은 입헌군주제다. 왕가는 긴 세월 동안 존속하고 있지만, 왕가의 권력은 아롯의 의회보다 강하지 않다. 현 국왕인 다인돌프가 대외적인 이미지와 권위에 크게 신경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며, 왕세자인 호네인은 어린 시절부터 저런 부왕을 대신하여 여러 자리에 대리로 서야만 했다.
“저…… 전하……!”
친위대와 재상, 시종들을 미리 물려놓기는 했다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부왕이 예전부터 꺼려 하던 라이언하트의 후예와, 왕세자 호네인과, 궁정마법사단장인 트렘펠이 있다.
그럼에도 부왕이…… 허상과 같은 권위와 위엄에 집착하던 부왕이 젖은 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있다.
호네인은 그 광경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터진 충격과는 별개로, 호네인은 부왕을 따라서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국왕과 왕세자가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는데 트렘펠이 허리에 힘을 주고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트렘펠까지 무릎을 꿇고 나니 어전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유진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색했다.
1년 전쯤 유라스 교황청에 쳐들어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아니스가 직접 강림했다면 교황과 추기경들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릎을 꿇고 그래?”
세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 상황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세냐가 아롯에 살았던 수백 년 전에도 아롯의 왕가는 세냐를 극진히 대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아롯이 가진 마도왕국이란 이름은 세냐가 만들어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매년 수도에 관광객과 마법사 지망생이 몰려오는 것도 세냐의 이름과 업적 때문이다.
“제가 어찌 세냐 님을 내려다볼 수 있겠습니까!”
다인돌프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카샤와 관련된 청문회 이후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각오는 했었다. 하지만, 하지만 기왕이면 왕위계승이 끝난 뒤이기를 바랐었는데…….
“왜? 내려다볼 수도 있지.”
“부디 저를 시험하지 말아주십시오……. 차라리 죄를 엄하게 꾸짖어 주십시오.”
“뭘 잘못했는지 알기는 해?”
세냐가 두 눈을 얇게 뜨고 물었다.
“너무 많아 나열하기도 힘드오나, 세냐 님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감히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 봐.”
“아롯의 대모(代母)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세냐 님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남겼던 저택이 많이 변해 있더라.”
“선조들의 탐욕스러운 관광정책의 폐해에 저 스스로도 통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왜 그냥 두었어?”
“당장 저택 부지를 되돌린다면 세냐 님의 저택에 방문하고자 찾아오는 수많은 관광객과 마법사 지망생들이 실망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말은 변명이 될 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른 잘못은 없나?”
“세냐 님이 아끼시던 사역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도 큰 잘못입니다.”
쿵! 다인돌프가 머리를 땅에 소리 내어 박았다. 철벅하고 퍼지는 물결에서 붉은 핏방울이 섞였다.
“그것에 관해서는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생각합니다. 사역마의 해부는 세냐 님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죄스러운 일은 고작 몇 년 전에 있던, 세냐 님의 후계자에 관한 의심, 청문회, 시험이겠지요.”
쿵, 쿵! 다인돌프는 계속해서 머리를 박았다.
“이 늙은이가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세냐 님의 생환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디…… 모든 노여움은 이 늙은이에게 풀어주십시오. 제발 아롯 왕가는 살려주십시오.”
간절한 목소리였다. 함께 머리를 박고 있던 호네인은 부왕의 처절한 애걸과, 쿵쿵거리며 머리를 박는 소리와, 피가 번지는 수면을 보고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권위와 국왕의 이미지에 그토록 신경을 쓰면서, 의회와 직접 대립하지 않고 전제군주에 대한 욕망도 드러내지 않던 부왕. 허울에만 신경 쓰던 부왕을 원망하던 세월이 몇 년이던가. 그런 부왕이 자신의 명예를 버리고 왕가의 존속을 위해 애걸하는 모습이 호네인의 가슴을 울렸다.
“……흠.”
세냐는 두 눈을 찡그리면서 팔짱을 꼈다.
이대로 아브람을 호수 밑에 처박아 버리는 것은 세냐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다. 궁정마법사단장이라는 늙은이와 젊은 왕세자, 그리고 현 아롯 국왕을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심지어 유진도 곁에 있다.
당장 저들이 저항을 생각한다 해도, 이 공간에서의 생사여탈권은 이미 세냐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죽이고 난 뒤가 문제다. 국왕이 알아서 목을 내놓고 있다지만, 변방의 소국도 아닌 이 커다란 나라의 국왕을 시해한다면 뒷일이 너무 험난해질 것이다. 의회와 왕가가 서로 견제하고 있다지만 둘은 적대 관계가 아니다.
아무리 세냐의 이름이 아롯에서 커다랗다지만, 국왕을 죽여 버리면 아롯은 국위를 위해서라도 세냐를 법으로 심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문제는 바라지 않았다. 300년 전부터 그녀의 적은 마왕과 마족이었다.
지금 시대에도 살아 있고, 예전 시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권세를 쌓은 거대한 제국. 마경 헬무드가 세냐의 적이다. 가진 힘만으로는 모자라다. 300년 전이 그랬듯이 대륙 전체가 힘을 합쳐야만 마경을 도모할 수 있다.
세냐는 표정을 가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아롯의 31대 국왕이여. 고개를 드십시오.”
하지만 다인돌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세냐는 번지는 피를 내려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국왕인 당신은 왕가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순순히 무릎을 꿇고 죄를 사해 달라 빌었지요.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다인돌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냐는 피범벅이 된 늙은 왕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였는가? 그 이유에 대한 답은 국왕, 당신이 직접 입으로 말하였지요. 저는 제가 떠난 동안에 발생한 수많은 문제에 대해 분노를 느꼈습니다. 오늘 일로 아롯은, 세상은 이 현명한 세냐가 건재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을 겁니다. 저는 지금 당장에라도 아브람을 호수 밑바닥에 처박을 수 있고, 아롯 제일의 전투마법사라는 궁정마법사단장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으며, 수십 대를 이어온 아브람 왕가의 씨를 끊을 수 있습니다.”
세냐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카샤를 높이 들어 올렸다.
“당신이 말했듯, 저는 아롯의 대모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시대에 이 나라가 누리는 명예는 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언제든지 그 명예를 부수고 빼앗을 수 있습니다.”
쿠구구궁……! 왕성이 진동했다. 아주 천천히 수몰되어 가던 왕성이 다시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디 그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왕가와 이 나라가 저를 사랑한다면 저도 이 나라를 사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 이름을 팔며 이용하겠다면,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오오……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하나 더.”
세냐는 유진을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제 후계자입니다. 바깥에서 제가 몇 번이나 말하기는 했지만, 기왕이면 왕가가 공식적으로도 선언해 주기를 바랍니다.”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아직 더 할 말이 남았나? 모두의 시선이 세냐에게 향했다. 세냐는 그 시선에 흠흠, 헛기침을 뱉고서 말을 이었다.
“…….저는 속세를 떠나 수백 년 동안이나 은거하였습니다. 워낙 초탈한 삶을 살았고, 가진 재산 대부분을 아롯에 두고 은거했던지라…… 으흠…….”
이걸 어떤 식으로 말해야 그럴 듯 하고 근엄하게 들릴까. 아무리 세냐라도 이 순간에는 고민하며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아롯은 수백 년 동안 세냐 님의 이름으로 국고를 채워왔습니다.”
다행히 다인돌프는 저 노골적인 말이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며칠의 시간만 주신다면, 세냐 님이 아롯의 재산을 마음껏 쓰실 수 있을 방책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왕가의 보물고는 지금 당장 세냐 님에게 개방하도록 하겠습니다.”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는 했지만, 당장 돈이 없는 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왕가의 보물고? 그곳에 뭐 대단한 것이 있지는 않겠지만…… 수백 년 동안 쌓아놨을 보물이나 마법에는 관심이 있었다. 예부터 아롯에서 연구된 마법 재산들은 왕가 보물고에 들어가곤 했었다.
“보물고는 내일쯤 보러 오겠어요.”
세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카샤를 내려놓았다.
지팡이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당장 쓰는 지팡이는 세계수의 가지를 사용해 만든 임시 지팡이다. 충분히 훌륭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보물고에는 이것보다 훌륭한 지팡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카샤가 있긴 하지만, 세냐는 기왕이면 아카샤는 유진이 쓰게 하고 싶었다.
“부담스러우니 마중은 필요 없습니다.”
성질대로 화도 냈고, 요즘 시대의 건방진 대마법사도 혼쭐을 냈다. 아롯 국왕의 무릎을 꿇리고 이마도 깨지게 만들었다.
세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이만 돌아가자. 나의 후계자야!”
“네, 세냐 님.”
아무리 생각해도 세냐가 저 후계자란 호칭을 즐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어디에 즐길 거리가 있다는 걸까?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냐를 따라 어전을 나갔다.
둘이 어전을 떠나고 한참 동안이나 다인돌프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깨진 이마에서 흐른 피가 얼굴을 가득 덮었음에도 피를 닦지 않았다. 함께 무릎을 꿇은 호네인과 트렘펠은 머뭇거리며 왕의 용안을 살폈지만, 다인돌프의 표정은 여전히 안도감만이 가득했다.
“……후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인돌프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은 것에 대한 굴욕감? 그런 감정은 없었다. 다인돌프는 아주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옥좌에 돌아가 앉았다.
“전하……!”
호네인과 트렘펠은 일어서지 않고서 국왕을 불렀다. 다인돌프는 젖은 소매로 슥슥 이마의 상처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호네인.”
“예…….”
“이리 가까이 오거라.”
호네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옥좌에 가까이 다가갔다. 다인돌프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왕세자를 응시했다.
“한 명의 대마법사가 일국을 멸할 수 있는가?”
“…….”
“멸할 수는 없을지라도, 국왕의 무릎은 아주 쉽게 꿇릴 수 있다. 대마법사. 그중에서도 현명한 세냐는 그런 존재지.”
“…….예…….”
“너도 잘 알듯이, 아롯은 특수한 나라다.”
다인돌프는 피를 닦으며 씁쓸히 웃었다.
“수백 년 동안이나 그랬지. 이 마도왕국에는 마법사가 너무 많다. 특히 뛰어난 마법사들이 아주 많아.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마법사들 대부분이 아롯에 있고, 언젠가 대마법사가 될 가능성 넘치는 젊은이들도 아롯에 있다.”
“…….”
“이 나라에서 왕가는 절대로 많은 권력을 쥘 수가 없다. 구조 자체가 그리되어 있어. 방금만 해도 보아라. 한 명의 대마법사가 작정한다면 왕궁을 수몰시키고 국왕을 무릎 꿇리며 왕가의 씨를 끊겠다고 선언할 수 있단 말이다.”
“제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트렘펠이 머리를 박으며 오열했다. 다인돌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트렘펠 공. 그대가 부족한 것이 아니오. 현명한 세냐 앞에서는 아롯의 모든 마법사가 평등할 테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저런 마법사가 존재하는 한 절대왕정은 불가능하다는 거요.”
호네인은 아린 가슴을 움켜쥐었다. 무능하고 허울뿐이라 생각했던 부왕인데. 지금 부왕의 충고는 호네인이 오랫동안 품었던 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젊은 왕세자는 이름뿐인 왕가에 환멸을 느꼈다. 의회와 마탑주와 마법사 길드의 눈치를 보는 왕가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해 왔다. 여러 이익에 휘둘리는 의회를 무너트리고 왕가가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징뿐인 왕가를 바꾸고, 아롯을 개혁하고 싶었다.
“이 나라를 네 바람대로 개혁하고 싶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것이다. 호네인. 네가 현명한 세냐만큼 뛰어난 마법사가 되는 것.”
“……예…….”
“나는 네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아롯의 왕가는 대대로 우수한 마법사를 배출해 왔다.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개량된 마법을 위한 혈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당장 국왕인 다인돌프도 7서클의 마법사다.
25살의 호네인 아브람. 마법사로서의 성취는 6서클.
나이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성취지만……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사실. 성인이 되기 전에 5서클에 올랐는데도 아직까지 호네인은 6서클에 머무르고 있다. 국왕도 7서클에서 벌써 수십 년 동안 막혀 있다.
“오만해도 될 재능이라 생각했다만…… 더는 그럴 수는 없게 되었지. 그 이유는 너도 잘 알 것이다.”
호네인은 유진을 떠올렸다. 그가 시그니처를 창작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아카샤의 도움이 있었을지라도, 유진 라이언하트는ㅡ 21살의 나이에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현명한 세냐 님의 후계자가 네가 제법 우호적인 관계라는 것은 나도 안다. 넌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롯에 처음 왔을 적부터 그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고, 호의를 보여왔지.”
“예…….”
“네가 그를 아롯에 포섭하고 싶어 했던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청년은 너무나 뛰어나. 맹수인 사자를 우리 안에 둘 수 있을까……. 그 사자에 목줄을 채워 조련할 수 있을까?”
“저, 저는 유진 공에게 목줄을 채울 생각 따위는…….”
“오, 단지 곁에 두고서 이빨과 발톱만 빌릴 생각이었느냐? 너 자신부터가 사자의 이빨과 발톱을 감당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사자의 이빨과 발톱을 빌릴 수 있단 말이냐. 그 대가로 너는 무엇을 줄 생각이었느냐?”
다인돌프는 끌끌 웃으며 왕세자를 응시했다. 비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꾸짖는 시선도 아니었다. 왕은 진심으로 왕세자의 꿈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궁정마법사단장? 하하…… 그 젊은 사자가 고작 그런 자리에 만족할까. 바란다면 어느 나라에서건 제일의 권세를 얻을 텐데 말이다.”
“…….”
“호네인. 아롯은 그 사자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현명한 세냐 님이 곁에 있으니, 아롯의 모든 마법을 약속할지라도 사자의 고개를 돌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친애를 쌓는다면 대가 없이 이빨과 발톱을 빌릴 수도 있겠지. 사자가 자비롭다면 말이다.”
“아……!”
호네인은 그 말에 무언가를 깨닫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왜 여태까지 유진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을 때마다 왕세자인 자신을 대리로 보냈었는지. 부왕의 행적이 지금에야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호네인. 지금의 네가, 언젠가 현명한 세냐에 버금갈 대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마법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의 일각에나마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달하고 말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 네가 지금 해야 할 대답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아니야.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대답이라도 해야 해.”
호네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정말로 이 나라를 바꾸고 싶다면, 너 자신이 그럴 수 있는 대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사자의 자비에 기대하지 않고, 사자가 기꺼이 이빨과 발톱을 빌려줄 만큼 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다인돌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옥좌의 뒤에는 아롯의 국기가 걸려 있다. 그리고 국기 아래에는 왕가 아브람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팡이를 발톱에 쥐고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
“……내가 널 왕세자로 삼은 것은, 네게 날개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하……!”
“그래도 오늘 일로 의회에 골탕은 먹일 수 있겠구나.”
다인돌프는 옥좌에 몸을 깊이 묻으며 끌끌 웃었다.
“국가 예산의 관리는 의회의 몫이니 말이야. 기왕이면 세냐 님이 국고의 재산을 마음껏 탕진하였으면 좋겠어.”
의회의 늙은이들도 현명한 세냐의 분노를 감당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 국왕의 결정에 반발하지는 못할 것이다.
호네인은 부왕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6서클에 오른 후 마법사로서 수행에 예전만큼 열중하지는 않았다. 왕위계승의 준비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 생각했었다. 대마법사가 되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1명의 대마법사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를 보았다…….
‘마법, 마법이라…….’
호네인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열망을 느꼈다.
아브람
당연하단 듯이 왕궁 밖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많았다.
궁정마법사단과 기사단은 왕궁 안으로 돌아갔지만, 도시에서 구경을 나온 시민들과 마탑, 마법사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
많아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호수 저편에 모여 있었다.
“현명한 세냐!”
“세냐 메르데인!”
“세냐 님!”
사람들은 꽥꽥 소리를 질러대며 세냐의 이름을 연호했다. 특히나 열렬히 외치는 것은 마탑 등용을 꿈꾸는 마법사 수험생들이었다. 그들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응원봉을 휘둘렀고, 법규를 무시하고서 마법을 사용해 하늘에 축포까지 쏴 갈겼다.
펑, 펑, 펑! 쏘아 올린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유진은 힐긋 세냐의 표정을 확인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세냐는 수백 년 전부터 저런 환호에 익숙했다. 긴 은거를 깨고 돌아왔으니 저런 환영은 당연한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세냐 님의 후계자!”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
“성검의 용사!”
세냐를 외치는 연호 속에 유진의 이름도 섞였다. ……유진도 저런 연호가 익숙하기는 했다. 하지만 세냐처럼 즐길 수는 없었다.
유진은 표정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세냐는 유진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냐는 과감히 유진의 손을 덥석 낚아채더니, 유진을 옆자리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유진의 손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대체 이게 뭐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일까. 유진은 눈을 까뒤집고서 발광하는 군중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냐는 유진을 데리고서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아갈 것이면 그냥 휙 빠르게 날아가면 될 것을. 세냐는 마치 하늘로 승천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늘로 올라갔다.
고도는 점점 상승하는데 환호성은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냐와 유진이 높이 올라갈 때마다 환호성은 점점 커졌다.
“끼아아악!”
눈을 까뒤집고 소리 지르고 발광하는 군중 속에는 멜키스도 있었다. 그녀는 마탑주다운 품위는 어디 지나가는 개한테 주기라도 한 것처럼 양팔을 번쩍 들었다가 춤추듯이 허우적거리며 까마귀 우는 소리를 내질렀다.
“세냐…… 세냐, 세냐 언니! 저도, 저도 데려가 주세요!”
멜키스는 과호흡이 온 숨을 헐떡거리며 부르짖었다. 그 꼴 사나운 모습에 청탑주 히리두스와 적탑주 로베리안의 표정이 구겨졌다.
“제발, 백탑주. 후배들이 보고 있잖소……!”
“끼아악!”
멜키스는 질책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둥거리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백색마탑의 마법사들이 기겁하며 멜키스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들은 필사적인 얼굴로 멜키스의 다리를 끌어당겨 간신히 땅에 내려놓았다.
“탑주님, 진정하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놔, 날, 놔! 날 언니에게 보내줘! 붙잡지 마!”
멜키스는 사지가 붙잡히고서 허우적거렸다.
하늘 높은 곳까지 오른 유진은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현기증을 느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해두었지만, 벌써부터 저렇게 발광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앞으로가 두려웠다. 아롯뿐만이 아니라 어딜 가든 세냐한테 이목이 향할 것이고, 당장 며칠 뒤에 라이언하트로 돌아가도 큰 소란이 날 것이 뻔했다.
“봤어?”
세냐가 살짝 유진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히죽 웃었다.
“이게 나야.”
“좋냐?”
“안 좋을 건 또 뭐야?”
“이렇게 보니까 차암 억울하네. 나도 후대에 우둔한 새끼라고 이름만 안 남았어도…….”
“네가 억울하다는 것이 나는 더 어이가 없어. 우둔하다고 적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지.”
세냐는 그렇게 말하면서 훗 코웃음을 쳤다.
“으흠, 대체 누가 동화책을 적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너랑 아니스랑 같이 적었다고 진즉에 들켰는데, 왜 자꾸 아니라고 하는 거냐?”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지! 나는, 나는 적지 않았어. 아니스 걔가 죽고서 기억이 좀 이상해졌나 봐. 자기 혼자 적은 것도 아니고 왜 나랑 같이 적었다고 거짓말을…….”
“이미 다 들었다니까.”
“아무튼 나는 아니야. 내가…… 내가 왜 그런 동화책을 적어?”
이미 들켰다 해도, 스스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막에 슬쩍 적어 둔 희망사항도 그렇고…….
‘……아니. 희망사항이 아니었잖아. 저 멍청이가 날 좋아하던 것은 사실인데.’
그럴지라도 세냐는 동화책의 저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니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데, 인정해 버린 뒤에 받을 놀림에는 변명조차 할 수 없잖은가.
“……으흠. 그리고 말이야. 우둔하다고 남기는 했어도, 사람들 모아놓고서 네 정체가 사실은 하멜의 환생이다! 라고 선언해 버리면, 오늘 내가 들은 것 이상의 함성은 들을 수 있을걸?”
사람들 앞에서 후계자야, 후계자야 하면서 비밀스러운 관계를 과시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지만. 가능하다면 유진의 정체가 하멜이라는 것을 밝히고서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다.
“미쳤냐?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반응이 왜 이리 격해?”
“나는…… 나는 그럴 수 없어.”
유진은 정색하는 것도 모자라 식은땀까지 흘리며 대답했다.
이미 몇 명이 알고 있기는 하지만, 유진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을 더 이상 늘리고 싶지 않았다. 특히 라이언하트 가문에서는 더더욱.
해놓은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길레이드나 시안, 시엘 앞에서 하멜의 위대함을 찬양했던 것이 몇 번이던가? 그들뿐만 아니라 로베리안 앞에서도 하멜은 후대의 존경을 받아야 할 위대한 영웅이라고 여러 번 말했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제 얼굴에 금칠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된다면? 유진은 그 뒤에 자신에게 향하게 될 시선을 상상하기 두려웠다…….
‘차라리 자살하고 말지.’
유진은 몸서리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 사정을 알지 못하는 세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는 캐묻지 않고 유진과 함께 하늘을 날았다.
군중들 중에는 세냐와 유진의 뒤를 쫓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롯의 기자들. 해외의 첩보원들. 세냐를 동경하는 마법사들.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추격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비행 중에 세냐와 유진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놓쳤습니다.”
“애당초 우리 수준에서 추격이 가능할 리가 없지.”
깔끔히 차려입은 흑마법사들이 골목의 안쪽에서 회동을 가졌다.
“앞으로 어떡해야 합니까?”
“……먼 과거에도 현명한 세냐는 아롯에 흑마법사가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었다.”
300년 전에 아롯에는 4개의 마탑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헬무드의 흑마법사들은 마도왕국 아롯에 진출하기를 열망했었다. 하지만 현명한 세냐는 아롯에 흑마법사가 거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냐가 갑작스러운 은거에 들어가고 난 뒤. 헬무드는 파격적인 로비를 진행하여 아롯에 흑색 마탑을 세웠다.
“현명한 세냐…… 그녀는 존경할 수밖에 없는 대마법사지. 먼 과거, 전설 속에만 존재했다면 말이야. 전설이 현실에 나타난 것은 마법사로서 전율이 들어. 하지만…… 현명한 세냐가 지금 시대라 하여 흑마법사를 용납할 것 같지는 않군.”
흑마법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은 별 학파는 오늘부로 아롯을 떠난다. 최대한 빠르게 정리를 끝내고서 각자 이동하도록 하지.”
“예.”
“헬무드에서 만나자.”
그렇게 회동을 갖는 것도, 아롯을 떠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은 검은 별 학파뿐만이 아니었다.
흑색 마탑뿐만 아니라 마법사 길드에 존재하는 흑마법사의 집단 여럿. 어떤 마족과 계약을 맺었느냐에 따라 학파가 달라지고 우열이 갈리지만, 내린 결정은 학파의 우열과 상관없이 동일했다.
볼레로 거리의 마족들조차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누군가는 헬무드로. 다른 누군가는 헬무드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흑색 마탑주가 남아 있다면 조금이라도 상황을 볼 수 있을 텐데.’
검은 별 학파. 그들과 계약을 맺은 마족은 아멜리아 머윈과 은밀한 협력 관계다. 그들은 아롯에서 흑마법의 연구, 발전에 힘쓰면서도 당대 흑탑주인 발자크 루드베스를 감시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런 은밀한 목적을 가진 것은 검은 별 학파뿐만이 아니었다. 흑색 마탑이나 마법사 길드에 소속된 여러 흑마법 학파는 발자크를 감시하고 견제하거나, 혹은 포섭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십 년을 접촉했음에도 발자크 루드베스를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견제하고 감시하는 목적에서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발자크는 빈틈이 없고 철저했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것만 같은 흑마법사의 표본이군.’
속내를 알 수 없는 마법사. 뚜렷이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며, 음모의 중심에 있지도 않다. 하지만 발자크는 존재만으로도 수상했다.
그 알 수 없는 남자는 흑탑주가 된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취급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어떤 세력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다……. 유폐의 삼마 중 한 명이면서도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수십 년 동안이나 아롯 흑색 마탑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렇기에 헬무드의 마족들이나 아멜리아 머윈이 발자크의 동향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포섭하려는 것이다. 수상해도 너무 수상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의미를 잃었다. 발자크가 갑작스레 휴가랍시고 흑색 마탑을 떠난 후, 어떻게든 발자크를 행적을 찾아내려 했지만…… 그조차도 실패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났음에도 발자크는 흑색 마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감시 대상도 잃고, 신변의 위협마저 생긴 이상 더는 아롯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흑마법사와 마족들이 회동을 갖는 동안, 세냐를 놓친 첩보원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현명한 세냐가 수백 년의 은거를 깨고 돌아왔다.
이것이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앞서 생각해야 할 것은, 불과 몇 달 전에 대륙 최북단 레헤인에서 열렸던 나이트마치.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과 검은 안개가 참석했고,
루하르의 시조, 용감한 모론이 돌아왔다.
백 년 넘도록 헬무드 바깥에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유폐의 마왕이 직접 강림했다.
그 마왕이, 성검과 용사를 언급했다. 약속의 끝과 전쟁을 언급했다.
성검의 주인. 베르무트의 후예.
바벨을 오를 텐가?
그날 밤. 유폐의 마왕이 했던 모든 말들은 대륙을 격동시켰다. 평화가 끝나려 한다. 300년 전과 같은 무참한 전쟁이 다시 벌어질지도 모른다. 유폐의 마왕은 대륙이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그 날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만약 정말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개전을 선언하는 것은 대륙의 왕들이 아닐 것이다. 약속의 끝을 기다리는 마왕도 아닐 것이다. 평화를 깨고 약속을 직접 끝내는 것은, 마왕에게 직접 인정을 받고 마왕에게 주목을 받은 젊은 용사일 것이다.
전쟁 시대부터 살아온 대마법사, 현명한 세냐의 귀환. 그리고 바벨을 오르겠다고 선언한 유진 라이언하트. 용감한 모론의 생존이 확인되고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수백 년 동안 은거했던 대마법사가 아롯에 돌아온 것이다.
각국에 소식을 전하는 첩보원들의 얼굴은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그간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전쟁이 온다…….’
첩보원들이 두려운 미래를 상상하며 몸을 떨 때.
호텔로 돌아온 유진과 세냐는 아니스의 앞에 얌전히 앉아서 잔소리를 들었다.
“제정신입니까? 얌전히 숨죽여 지내도 모자랄 판에, 아롯 왕가에 싸움을 걸다니요!”
“……싸움을 건 것이 아니야. 나는 내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지.”
“왕성을 통째로 수장시키려 한 것이 싸움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건 너무 과장됐다. 수장시키지 않았어. 그냥 살짝 담갔을 뿐이야.”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겁니까?”
“변명이 아니야! 아니스, 너도 봤잖아! 이 나라는 내 저택을 관광지로 만들고 내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팔아댔다고. 심지어 기념품 가게에는 내 이니셜을 새긴 초상화와 만년필, 망토, 로브, 지팡이까지 팔아댄다니까?”
“후대의 사랑을 받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함께 야단을 맞던 유진이 작은 목소리로 아니스를 거들었다. 그러자 세냐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유진의 어깨를 철썩 때렸다.
“내 앞에서 아니스 편들지 마!”
“그럼 네 편을 들리?”
“기왕이면…… 그러면 좋지.”
“내가 네 편을 들면 아니스가 내 턱주가리를 날려 버릴 거야.”
“맙소사, 하멜. 저는 지금 감격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어느새 그렇게나 영리해진 겁니까?”
세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아니스를 쏘아보았다. 아니스도 질세라 눈에 힘을 주고 세냐를 쏘아보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너희 둘 누구의 편도 아니야. 세냐, 네가 욕먹을 짓을 한다면 나는 아니스와 함께 널 욕할 거다. 그리고 아니스나 크리스티나가 욕먹을 짓을 한다면 세냐 너와 함께 욕을…….”
“박쥐 같은 새끼!”
“지조 없는 자식.”
“그래, 너희 둘이 내 욕을 한다면 그것도 겸허히 듣도록 하지.”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가 치솟은 세냐가 유진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지만, 유진은 저번처럼 가만히 당하지 않고 즉시 머리를 뒤로 빼서 도망쳤다.
“하지 마라.”
“왜!”
“저번에 뽑힌 머리카락도 다 안 났어. 머리털이 풍성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여기 들춰보면 작은 구멍이 나 있다고. 너는 내가 대머리가 되기를 바라는 거냐?”
“……그건 아냐.”
세냐는 잠시 유진이 대머리가 된 것을 상상해 보고, 이건 아니다 싶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냐. 당신의 행동은 너무나도 몰상식하고 폭력적입니다. 하멜 혼자일 적에도 돌발적인 행동이 저를 괴롭고 힘들게 하였는데, 당신까지 그래 버리면 어떡합니까?”
“잘 끝났으니 문제없잖아.”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야 대외적으로 죽었다 알려졌으니 괜찮고, 모론도 함께 활동하지 않고 있지만! 세냐 당신은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다닐 것 아닙니까?”
“나를 하멜과 같은 취급 하는 것이 열받아. 내가 하멜처럼 생각 없이 저지른 줄 알아? 나는 내 존재에 대한 여파를 살피기 위해…….”
“그런 변명은 하멜도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여러 번 그런 행동을 해봤지.”
유진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함께 혼이 나고 있으니 전생이 생각나서 제법 즐거웠다. 아니스의 술을 훔쳐 마셨을 적에 항상 이렇게 혼이 나곤 했는데…….
세냐는 웃지 않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함께 혼나는 주제에 은근히, 아니, 대놓고 아니스의 편을 드는 유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세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스! 네가 날 꾸짖을 만큼 당당해?”
“여기서 왜 절 붙드는 겁니까?”
“유진이랑 메르한테 들었어. 너는 저번에 교황청 쳐들어가서 추기경 한 명을 죽이고, 교황 귀싸대기를 갈겼다매?”
“정확히 말하자면, 추기경을 죽인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교황의 귀싸대기를 갈긴 것은 제가 아니라 크리스티나입니다.”
[시스터!]
돌연 죄를 뒤집어쓰게 된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지만, 아니스는 그 비명을 태연한 얼굴로 무시했다.
“그 모든 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입니다. 저희는 은밀히 미친 짓을 벌였단 말입니다. 하지만 세냐, 당신은 세상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대놓고…….”
“아 몰라.”
세냐는 끝까지 듣지 않고 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아니스는 그 모습에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300년을 살았으면서 어찌 이리 애 같은지…….”
“정확히 말해줄래? 중간에 200년은 봉인되어 있었잖아.”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니 당신 나이가 300살인 것은 사실 아닙니까.”
아니스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세냐. 당신은 앞으로 행동을 조심해야 할 겁니다.”
“뭘 또 조심하래?”
“당신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멜을 후계자로 선언하였지요?”
아니스가 손가락을 들어 유진을 가리켰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세냐. 세상이 아는 당신은 현명한 세냐. 300년을 살아온 위대하고 늙은 마법사입니다.”
“늙은 마법사는 좀 빼!”
“노련한 마법사로 타협하지요. 어쨌든, 당신이 조심해야 할 것은 대외적인 시선입니다.”
“……무슨 말이야?”
“당신이 하멜을 순수하게 후계자로 대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마 세냐, 당신은 그러지 못하겠죠? 후계자라 말은 하면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제 딴에는 몰래랍시고 하겠지만 모두가 보기에는 아주아주 노골적인 주접으로 보일 겁니다.”
“주…… 접……!”
“예, 주접!”
아니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승리를 확신한 미소가 번졌다.
“300살 넘은 늙은 마법사가 갓 20살 넘은 청년을 붙들고 주접을 떠는 겁니다! 세상이 그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세냐의 머릿속에 꽈릉 하고 벼락이 쳤다.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냐.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하멜을 위해서. 당신은 행동을 아주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에 비웃음을 받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너…… 너, 너는?”
“저 말입니까? 저는 아무 문제가 없지요. 이 몸의 주인인 크리스티나는 23살이니까요.”
“성녀잖아……?”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성녀와 용사, 아, 참으로 낭만적이고 달콤한 울림이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크리스티나.”
“네, 시스터.”
순식간에 바뀐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양손을 모았다. 둘의 만담에 세냐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유진! 지금 당장 네 정체를 세상에 밝혀 버려! 네가 21살의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니라, 300년 전의 하멜이라고 밝히란 말이야!”
“내가 미쳤냐?”
유진은 기겁하면서 세냐에게서 도망쳤다. 세냐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머리를 움켜쥐었다.
“……세상의 이목이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메르는 이쯤에서 자신이 세냐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세냐 님이 주접스럽다 비웃는다면 제가 먼저 놈의 얼굴을 때리겠어요.”
“……그래! 메르, 네 말이 맞아. 목숨이 아깝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날 비웃겠어?”
세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메르를 향해 양팔을 펼쳤다. 메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에서 도약해 세냐의 품에 안겼다.
“세냐 님과 유진 님이 제 손을 잡고 함께 걷는다면 우리는 완벽한 가족처럼 보일 거예요.”
“그래, 그럴 거야! 내가 너를 나와 닮은 모습으로 만든 것도 그런…….”
세냐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굳었다. 오래전, 고독에 사무쳐서 메르를 만들었을 때 품었던 욕망. 그것은 지금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고 음험한 욕망이었다.
“아아!”
말을 끊는 것이 너무 늦었다. 메르는 두 눈을 반짝이며 세냐를 올려다보았다.
“그 말은, 세냐 님은 저를…… 저를, 단순한 사역마로 만든 것이 아니라! 딸이라 생각하고 만드신 거군요!”
“설마…… 그 나이를 먹고 가족놀이를 망상했다는 겁니까? 죽은 하멜과 당신 사이에서의 딸을, 스스로 망상하며 사역마로 만들었다는 겁니까?”
아니스도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유진은 조용한 충격에 빠져 메르와 세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으흠. 이상한 오해하지 마.”
“예에, 그렇겠지요, 오해겠지요. 그런 것 치고는 메르는 당신 얼굴만 닮았을 뿐, 하멜과는 닮은 구석이 없으니까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저는 유진 님의 옛날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크리온에서 봤던 하멜 님은 별로 잘생기지 않았단 말이에요. 세냐 님도 완벽해야 할 자신의 피조물에 유진 님이 아닌, 못생긴 하멜 님의 얼굴을 묻히고 싶지 않았을…….”
“그건 아냐.”
유진은 정색하고 메르의 말을 정정했다.
“전생 내 얼굴은 못생기지 않았어. 실제로 보면 꽤 매력 있게 잘생겼…….”
“네가 왜 정체를 밝히기 싫다는 건지 알겠다.”
세냐는 표정을 구기고서 유진을 흘겨보았다.
매력 있게 잘생겼다는 말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적색마탑
아침 일찍 왕가 보물고에 다녀오겠다며 나선 세냐는 정오가 지나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너희 이게 뭔지 알아?”
세냐는 가슴을 활짝 펴고 으스대면서 히죽 웃었다. 그녀는 망토 안주머니에서 백금색으로 빛나는 카드 한 장을 꺼내어 흔들었다.
“이건 바로 카드라는 거야.”
“……어.”
“예…….”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냐는 둘의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가,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수백 년 만에 돌아온 세냐는 요즘 시대에서 사용하는 카드라는 신문물이 낯설었다.
“으흠…… 요즘 애들은 현금을 담은 돈주머니는 따로 안 들고 다닌다 하더라고. 공간마법을 사용한 포켓은 여전히 애용한다는데, 현금은 이 작은 카드라는 것으로 쓴다더라.”
세냐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두 눈을 부릅뜨고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쏘아보았다.
“너희. 지금 나한테 세대차이나 그런 걸 느끼지는 않겠지?”
“음…… 나도 처음 그, 카드라는 것을 봤을 때 아주 놀라웠지. 세상이 참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도 하고 말이야.”
“그치? 너도 그랬지? 이야, 세상 참 좋아졌어. 대충 듣자니 요즘 애들은 글쎄, 돈주머니뿐만 아니라 장비도 수레에 안 싣고 다닌다지 뭐야? 개나 소나 공간마법 아티펙트를 들고 다닌대.”
“뭐 그만큼 마법이 대중화가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그렇고말고.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이 이 세냐 님의 업적의 연장선이란 말이야. 잘 생각해 봐. 옛날에는 마법 익히려면 어떻게 해야 했는지 알아? 오늘내일하는 늙은 마법사한테 알랑방귀 뀌어대며 도제로 들어가서, 이런저런 수발을 들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신적 수행만 하다가…….”
“너는 엘프한테 마법 배웠잖아.”
“지금 내 얘기 하는 건 아니잖아! 옛날 마법사들은 그랬단 말이야. 내가 아롯에 처음 왔을 때, 이 나라의 마법 교육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알아?”
그 시대에는 마법은 학문이되 학문이 아니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십수 년의 전쟁 중에서 뛰어난 마법사들 대부분이 죽어버린 탓이기도 했다.
“그걸 죄다 뜯어고친 것이 바로 이 세냐 님이란 말이야.”
“그래, 너 잘났다.”
“역시 세냐 님이십니다.”
“세냐 님 멋져요.”
“역시 세냐 님답도다.”
짝짝짝.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박수까지 쳐주었다. 세냐는 그 열렬한 반응에 부끄러움 없이 당당했다. 그녀는 소파에 털썩 앉아, 손가락 사이에 낀 카드를 휘릭 돌렸다.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나만을 위한 카드래. 무려 아롯의 국고와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다지 뭐야? 그, 어, 한도라는 것도 없대. 뭐든지 살 수 있단 말이지.”
“와아.”
“우리 노후대책으로 어디 성이나 하나 사둘까? 응?”
“벌써부터 노후대책을 마련하기에 저와 유진 님은 아직 너무 젊다 생각합니다.”
왜 꼭 한마디를 덧붙이는 걸까. 얄밉게.
세냐는 실눈을 뜨고서 크리스티나를 쏘아보았다. 직접 말을 쏘아붙이지는 않았다. 세냐는 이런 주제에서 무슨 말을 하건, 대화가 길어진다면 자신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물고에서 가져온 것은 없나요?”
메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세냐는 망토의 밑단을 손으로 잡았다.
유진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은 망토. 처음에는 그리 대단한 마법이 새겨져 있지는 않았지만, 세냐는 어젯밤을 꼬박 새우면서 망토에 여러 가지 마법을 새겨넣었다.
“이것 봐.”
세냐는 방긋 웃으며 망토의 안에서 길쭉한 지팡이를 꺼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호화로운 지팡이. 재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새하얀 지팡이가 엷은 빛을 발했다.
“아롯의 왕가에 내려온 전설적인 지팡이, 프로스트!”
세냐는 양손으로 잡은 지팡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자 지팡이의 이름처럼 하얀 눈 같은 것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시각효과는 아니었다. 프로스트가 흩뿌리는 입자는 하나하나가 독립된 마나의 결정이었다.
“여러 지팡이가 있기는 했는데, 이게 범용적이면서 내 마음에 쏙 들었어. 뭐 여기서 이것저것 손을 더 봐야 하겠지만 말이야.”
엘프의 영지에서 만들어 온 지팡이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물건이다. 하지만 아카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드래곤 하트라도 하나 숨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마도왕국이라 불리고 있으니, 보물고 깊은 곳에 드래곤을 사용한 아티펙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프로스트 이상의 지팡이는 없었다.
“……흠…….”
세냐는 두 눈을 얇게 뜨고서 라이미르아를 쳐다보았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시선이 워낙에 노골적이라 라이미르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마의 홍옥을 감싸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세…… 세냐 님이여, 왜 본녀를 그리 보는 것이느냐?”
“이마에 그거 어떻게 뺄 수 없나?”
“본녀가 죽어버릴 것이다…….”
라이자키아가 직접 박아 넣은 홍옥. 그 라이자키아는 이미 죽었지만, 홍옥은 사라지지 않았다.
라이미르아와 함께 수백 년을 성장하면서 홍옥은 완전히 그녀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잘하면 뽑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위험부담이 꽤 컸다.
“안 되면 말고.”
세냐는 당장의 미련을 버리고서 망토 안을 뒤적였다.
앞으로도 바란다면 언제든지 보물고에 출입할 수도 있겠지만, 기왕 다녀온 김에 탐나는 것들은 죄다 가지고 왔다. 세냐는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마법서들을 책상에 차곡차곡 올려놓았다.
“이건 고대의 마법서야. 나도 예전에 몇 번 보기는 했는데, 아카샤를 써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포기한 것들이지.”
이제 와서 고대의 마법서를 파고들기로 한 이유.
‘베르무트.’
그 자식 때문이다. 암실. 레헤인야르의 결계. 거기에 하멜의 환생까지. 게다가 베르무트는 300년 전부터 근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마법들을 자주 사용했다. 세냐는 몇 번이나 베르무트에게 마법의 정체에 대해 물었지만, 베르무트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은 적은 없었다.
베르무트의 마법이 고대의 마법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당장 추측할 정체가 그것뿐이었다.
‘……마왕…….’
라이자키아는 월광검을 두고 멸망의 검이라고 했다. 베르무트와, 그 후손인 라이언하트가 마왕의 무구를 다룰 수 있는 것은…… 베르무트의 피가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유? 모른다. 베르무트의 정체? 그건 300년 전에도 궁금했었다. 남들이 다 자기 신변을 떠들어댈 때. 그런 주제에서는 가뜩이나 말수가 적었던 베르무트는 더욱 말을 아끼곤 했었다.
‘아니스도 마찬가지였지.’
아니스가 ‘왜’ 그런 주제에서 말을 하지 않았는지는, 이제는 알고 있다.
……베르무트도 무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생각을 굴려보았다.
300년 전. 베르무트는 흑마법사와 마족에게 사로잡혔다. 그 시대에서 마족과 흑마법사에게 사로잡힌 포로가 당하는 일은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흔한 것이 흑마법의 실험체가 되는 것과, 혹은 흑마법이나 마족에게 바치는 산 제물이 되는 것이었다.
이송 중이던 베르무트는 감시자에게서 빼앗은 칼로 마족과 흑마법사들을 도륙 냈다. 고작 십 대 중후반의 나이로 말이다.
누구나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외치겠지만, 베르무트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가 납득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면 가능하다고 말이다.
‘……흑마법의 실험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지만, 베르무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의혹을 생각해 보면 그럴 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본래 베르무트는 흑마법의 실험체였고, 이송당하던 중에 힘에 눈을 떠서 마족과 흑마법사를 죽이고 탈출할 수 있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고대에 실재했던 빛의 신의 화신. 성황의 유골을 사용해 만든 모조화신이다. 둘 뿐만이 아니라 역대 유라스의 모든 성녀와 후보들이 그런 존재였다.
베르무트도 그럴지도 모른다. 마족…… 혹은 마왕의 피나, 살점이나, 그런 것들을 사용한…… 인공적인 존재. 그렇기에 마왕의 무구를 사용하고, 월광검마저 다뤄낼 수…….
‘썩을.’
어쩌면 이 몸에. 라이언하트의 피에 마(魔)가 섞인 것일지도 모른다. 유진 스스로는 느낀 적 없고, 아니스도 그런 것을 경고한 적이 없다. 애당초 베르무트는 마왕의 무구뿐만 아니라 빛의 신의 성검까지 사용했고, 지금 유진도 성검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결국 베르무트에 관한 것들은 섣부르고 비약 많은 추측밖에 하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방향으로 생각한다면 여러 가지가 납득되기는 했다.
가령, 그 병신 같고 나약하던 이오드에게 왜 마왕의 잔재가 가까이 다가갔는지. 왜 이오드가 라이언하트의, 그것도 피를 짙게 이어받은 본가의 적통을 산 제물로 삼는 것에 집착하였는지. 왜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베르무트의 피는 엷어지지 않았는지.
어젯밤, 세냐와 아니스에게 베르무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놀랍지도 않네.
-오히려 그런 비밀이 없고서는 베르무트 님의 존재가 납득되지 않습니다.
놀라기도 많이 놀랐지만, 결국 둘은 저렇게 말했다. 그 말에는 유진도 내심 동감했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깊게 나누지 않았다. 왜, 그리하였는지는 유진도 느낄 수 있었다.
세냐는 베르무트를 믿는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실은 정말로 그런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그런, 베르무트에게 가슴이 뚫렸으면서. 죽을 뻔했으면서. 영혼에 상처를 입었으면서. 그럼에도 베르무트를 믿는다.
아니스에게 있어서 베르무트는 자신의 인생을 뒤바꾼 장본인이자, 성녀의 운명을 경멸하던 자신에게 성녀의 운명을 쥐여준 용사다. 그래서 아니스는 베르무트를 경배하며, 지금까지도 베르무트를 베르무트 ‘님’이라 부르고 있다.
그게 다인가?
아니다. 세냐가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베르무트를 믿는 이유. 아니스가 숭배란 감정 이상으로 베르무트를 믿는 이유. 그리고 유진이, 베르무트에 대한 억측을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멈추는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서 베르무트는 그냥 베르무트이기 때문이다. 베르무트의 정체가 뭐건, 그 자식이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일이니까.
흑마법의 실험체? 마왕과 관련된 제물?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세냐와 아니스, 하멜, 모론은 베르무트와 함께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마경을 떠돌았다.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다. 죽을 뻔하거나, 무언가를 죽이거나, 그 외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고, 기쁨과 슬픔, 다른 여러 감정들을 함께 느꼈다.
그렇기에 베르무트를 믿는다. 베르무트의 행적. 놈이 했던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 뭔지 모를 정체. 그 모든 것들을 베르무트를 ‘위해’ 받아들이고 있다. 의심해야 할 일에 의심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일방적으로, 맹목적으로 베르무트를 위한 해석을 내놓는다.
유진은 이것이 이성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냐도, 아니스도 그럴 것이다. 베르무트와의 약속 때문에 150년 넘는 시간을 죽지도 못하고 미쳐가는 모론조차도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르무트니까.
함께 마왕을 죽인 동료니까.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구한 용사니까.
그런 베르무트를 생각하면, 당연히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 * *
아롯의 적색마탑.
적탑주 로베리안은 어제부터 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왕궁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 국왕을 알현하면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까. 그 주제에 관해서는 아롯의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
결국 어제 아브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함께 국왕을 알현했을 트렘펠 위자도르는 당연히 입을 다물었고, 왕세자 호네인 아브람도 입을 닫고서 어젯밤부터 아크리온에 틀어박혔다.
잘 마무리가 되기는 했을 것이다. 잘 마무리되지 않았다면 아브람이 다시 떠오르지도 않았을 테니.
로베리안을 몰두하게 만드는 것은, 아브람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돌아온 현명한 세냐.
그거야 뭐, 로베리안에게 있어서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유진과 함께 사마르 대수림에 갔고, 에드몬드의 흉계를 저지했으며, 세냐를 긴 시간 잠들게 한 마룡 라이자키아의 시체도 보았다.
언젠가 세냐가 아롯에 돌아온다. 그 사실은 로베리안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을 뿐.
‘……어쩌면…… 정말로…….’
로베리안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집중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논리정연하지는 않은, 심증이 대부분인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돌고 있었다.
현명한 세냐.
그녀가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의혹들.
사마르에서의 전쟁. 로베리안은 유진의 ‘힘’을 제대로 보았다.
유진은 그 우둔한 하멜의 시체를 사용한 데스나이트를 압도했다. 그 실력은 직접 보았는데도 믿기지 않았는데, 유폐의 지팡이인 에드몬드 코드렛조차도 제 손으로 직접 베어 죽이기까지 했다.
그뿐인가? 악명 높던 마룡 라이자키아까지도 유진에게 목이 베여 죽었다. 그 전투를 직접 보지는 못했고, 세냐의 도움이 있었다고도 들었지만…….
유진 라이언하트가 당대의 인간에서 최고수준을 논하기 충분한 실력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마법에 관한 재능도 뛰어나서, 대마법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시그니처까지 창작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사마르에서도 몇 번이나 생각했던 것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치부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럴 수도 있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어쩌면 유진 라이언하트는 300년 전 영웅의 환생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실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특히나 로베리안의 의심을 폭증시킨 것은, 유진이 하멜의 데스나이트를 보고서 ‘저건 하멜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것이었다.
그에 관한 이유야 다양하게 말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시 유진의 분노와 데스나이트의 정체성을 부정하던 말들은 후대의 인물이 쉽사리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마치, 마치 300년 전의 하멜을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언동.
그리고 어제. 현명한 세냐는 유진에게 많은 친애를 과시했다.
수백 살이나 어린 후계자라서? 귀엽게 보일 만도 하지. 하지만 그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은 시선은…… 대스승에게 품기는 불경한 일이나, 어리고 귀여운 후계자를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마치 한 명의 남자를 보는 것만 같은 눈…….
“설마…… 설마, 아니…… 어쩌면…….”
로베리안은 머릿속을 떠도는 의혹이, 그것이 진실이었을 경우에 맞닥트리게 될 어마어마한 파급이 두려웠다. 동시에 탐구자로서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전사의 재능과 마법의 재능. 역사적으로 그 두 개의 재능을 극한까지 타고난 사람은 단 한 명뿐…….’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하지만…… 유진 님의 인격은 도저히 위대한 베르무트를 연상시킬 수 없는데…….’
하멜의 데스나이트에 대한 강렬한 반감과 살의, 증오.
명문 라이언하트의 자제라 생각할 수 없는 저렴한 언동.
난폭해 보이면서도 섬세한 전투기술.
-세냐.
-난 너를 좋아했어.
로베리안의 머릿속에 번쩍 번개가 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머릿속을 스친 영감에 집중하여 사고의 흐름을 재구성했다.
위대한 베르무트는 열 명이 넘는 부인을 두어 라이언하트 가문을 크게 확장했다.
우둔한 하멜은 최후에 저런 유언을 남겼다.
현명한 세냐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맙소사!”
로베리안은 뚜렷이 윤곽이 잡힌 생각에 입을 틀어막았다.
똑똑.
“탑주님! 지금, 지금 세냐 님과 유진 님이 마탑에 들어오셨습니다!”
“뭣이?!”
다음에 적색마탑을 방문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그런데 오늘?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당장 이곳으로 모시, 아, 아니다, 내가 내려갈…….”
“이미 올라오고 계십니다!”
로베리안은 크게 당황하면서도 채비를 갖추었다.
그는 옷장을 활짝 열어서, 자신이 갖춘 로브 중에서 제일 고급스럽고 품위 있는 로브를 꺼내어 몸에 둘렀다. 부랴부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어지러운 책상도 지팡이를 휘둘러 깔끔하게 치웠다.
‘오히려 잘됐다.’
로베리안은 꿀꺽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방금에야 도달한 이 놀라운 진실. 그대로 가슴에 묻어둘 수는 없었다. 마법사란 진리를 탐구하는 자. 로베리안은 과감히 정면을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 로베리안은 마탑주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헤라의 모습이 보였다.
“내려가 있거라.”
“네, 네에.”
“그리고,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에게 전파하거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라고 말이야.”
“네!”
헤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복도를 달렸다. 그러다가 도중에서 우뚝 멈췄다. 복도 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가 이곳 최상층에 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나온 세냐와 유진과 마주칠 것이 뻔했다.
그건, 그건 마법사로서 굉장히 기쁘고 영광스러우며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헤라는 자신에게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이대로 세냐 님과 마주쳐 버리면 선 체로 졸도하거나 기쁨의 비명을 질러버릴 것 같았다. 헤라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세냐와 유진에게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헤라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복도의 창문을 활짝 열더니, 과감하게도 자신의 몸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 순간에도 헤라의 마무리는 철저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창밖으로 나온 순간에 지팡이를 휘둘러 창문을 조용히 닫았다.
딩동.
로베리안이 헤라의 결단에 입을 떡 벌린 순간에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다. 로베리안은 벌린 입을 닫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아니, 부족하다. 로베리안은 그 어느 순간보다 빠르게 마법을 펼쳐,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의 앞으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유진과 세냐는 문 앞에서 공손한 자세로 선 로베리안을 보고서 움찔 놀랐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베리안은 깊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유진과 세냐가 편히 나올 수 있도록 몇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마법사의 존경과 선망을 받으시는, 대륙 역사상 가장 위대하며 현명하신 대마법사. 세냐 메르데인 님.”
로베리안은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세냐 님의 오랜 벗이신 하멜 다이너스 님.”
적색마탑
그 말을 들은 순간.
유진의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것이지? 대체 어디서 정체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이지?
알 수 없었다.
흑사자 기사단의 제노스에게 정체가 들킨 것은, 제노스가 하멜의 기술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노스 앞에서 하멜 본인일 수밖에 없을 만큼 기술을 잘 이해하고 다루는 모습을 보였으니, 정체를 들키는 것도 어쩔 수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로베리안은 경우가 다르다. 로베리안은 제노스처럼 하멜의 기술을 알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유진은 로베리안 앞에서 항상 언동을 조심했었다.
아니, 로베리안뿐만이 아니다. 제노스가 예외였을 뿐. 유진 라이언하트로 환생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한 의혹이 심어질 법한 언동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망토 안의 메르가 중얼거렸지만, 유진은 자신의 생각에 한 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세냐는 멍하게 뜬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유진과 마찬가지로 세냐의 사고도 빠르게 회전했다.
어떻게 알았지? 사실 그것은 세냐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유진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 바로 저 적색마탑주. 먼 옛날 제자로 삼았던 디아도르 토른의 계보를 잇는,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마법 학파의 수장이자 적색마탑의 탑주이며, 유진의 마법 스승이라는 것이었다.
-300살 넘은 늙은 마법사가 갓 20살 넘은 청년을 붙들고 주접을 떠는 겁니다! 세상이 그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니스의 신랄한 말이 세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게 뭐 어쨌다고, 라고 되받아치기는 했다만…… 사실 사람 마음이 내뱉은 말대로 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세냐는 자신이 너무 유명하고 위대한 마법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후대의 마법사들에게는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현명한 세냐’라는 이름에 대한 품위를 위해서라도…… 남들 앞에서는 유진을 대하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피차 여러 관계가 얽혀 있는 적탑주 앞에서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계자 앞에서 부끄럽고 민망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적탑주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내가 조심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세냐는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로베리안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상황을 살폈다.
이것은 로베리안으로서도 굉장히 큰 모험이었다. 근거라고 할 것은 심증뿐. 그래도 확실하다 생각해 지르기는 했는데……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이제 와서 농담이라 할 수도 없고…….’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로베리안은 꿀꺽 침을 삼켰다.
솔직히 로베리안은 현명한 세냐, 저 위대한 마법사의 성격이 두려웠다. 바로 어제만 해도 세냐는 왕궁 아브람을 통째로 호수 아래에 처박으려 했고, 수많은 군중 앞에서 녹탑주를 엉망진창으로 농락했다. 녹탑주의 프라이드를 생각하면, 어제 일로 평생 마법계에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성격이 좀 뒤틀려 있다. 정말정말 좋게 말하자면 별난 것이고, 평범하게 말하자면 괴팍하며, 나쁘게 말하자면 또라이 기질이 있단 말이다.
3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의 성격. 만약 뒤틀려 있다면, 대체 얼마나 크게 뒤틀려 있을까?
‘세냐 님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뱉었다며 화를 낸다면?’
옛 동료의 이름을 농담으로 내뱉은 것에 대한 벌이라며 적색마탑을 무너트려 버릴지도 모르는 일.
로베리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뭐라 대답이라도 빠르게 하면 좋을 텐데…… 침묵이 너무 길었다. 그렇다고 대스승이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고개를 드는 것은 너무나 불경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으흠…….”
세냐가 먼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녀는 씰룩거리는 뺨과 곡선을 그려가는 입술을 숨기지 않았다.
유진은 여전히 사고를 회전시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로베리안의 발언에는 뚜렷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그의 입에서 왜 하멜 다이너스란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서 로베리안을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련하여 예리하게 세운 감각은, 로베리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
“무우우우우슨!”
세냐가 방긋 웃으며 말한 것과, 유진이 버럭 고함을 지른 것은 동시였다. 유진은 세냐가 더 말하지 못하도록 홱 끌어당겨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로베리안 님, 아니, 스승님!”
이 새끼 왜 이래? 세냐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유진을 흘겨보았다.
유진은 세냐의 시선을 무시하고 빠르게 내뱉었다.
“제가 하멜 님이라니요? 하하! 스승님도 참, 농담이 과하십니다. 제가 어떻게 하멜 님이라는 겁니까? 하멜 님은 이미 300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유진은 다른 손으로 세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전히 유진의 손에 입이 틀어막혀 있던 세냐는 간지러워 몸을 비틀었다.
“스승님이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인지는 저는, 어, 도저히 모르겠지만! 저는 하멜 님이 아닙니다. 그, 스승님은 제가 혈계식에 처음 참가했던 13살 때부터 저를 보셨잖습니까? 저는 기돌에서 온! 제하드 라이언하트의 아들, 유진 라이언하트입니다. 하멜 님이 아니에요!”
유진이 로베리안 앞에서 자신이 하멜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로베리안과 너무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13살 어린아이 시절에 로베리안을 처음 만났다. 그때 혈계식에 참가했던 다른 아이들과 섞여서, 괜히 의심쩍은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아, 똑같이 애처럼 굴었단 말이다.
13살의 시안과 시엘과 노닥거리고, 그때부터 멍청하던 가르기스와 디자이라와도 어울렸다. 13살 어린아이에 걸맞게, 행동했다.
혈계식 전날, 로베리안과 함께 식사를 할 때에도! 혈계식 당일에도!
로베리안의 이야기와 그가 보여주는 마법에, 다른 애새끼들과 마찬가지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 보였단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것. 300년 전의 영웅이, 일부러 어린아이인 척하면서…… 다른 꼬마들과 어울렸다는 것!
13살의 시안을 두들겨 패고, 혈계식에서는 다른 아이들 앞에서 보란 듯이 힘을 과시하며 잘난 척을 하고, 300년 전 영웅들 중 누구를 제일 존경하니? 따위의 질문에서는 언제나 ‘하멜 님이요!’ 라고 주저 없이 외쳐대던…….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하멜 님은 그 데스나이트처럼 병신이 아니야.
-하멜 님은 그깟 동화책의 내용 때문에 동료들을 저주할 만큼 얕은 사람이 아닙니다.
안 된다. 로베리안이나, 어린 나이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
유진의 목소리와 표정이 하도 필사적이어서, 세냐도 일단은 물러서기로 했다. 그녀는 유진의 손에서 벗어나, 으흠 헛기침을 뱉었다.
“음, 후계자의 말이 맞아. 하멜…… 어…… 걔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 아무 멍청하게 죽어버렸어.”
“영웅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안 죽어도 될 상황에 굳이 몸을 던져 죽은 것이 뭐가 영웅적인 죽음이니?”
“하멜 님은 동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 겁니다.”
“요즘 시대에서는 자살을 희생이라 부르는 모양이지?”
세냐의 이죽거림을 들은 유진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로베리안의 앞만 아니었어도 저 못된 말버릇을 뜯어 고쳐줄 텐데. 지금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어깨를 파르르 떨면서 세냐를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설령…… 설령 그 죽음이 자살이었다고 해도! 세냐 님이 그런 말을 하면 하멜 님이 저승에서 슬퍼하실 겁니다.”
“에이, 나는 그런 말 해도 돼. 나는 하멜의 친구였고, 응, 어흠, 하멜은 나를…… 나를 좋아했잖니? 그러니까 나는 해도 괜찮다구.”
놀리기 위해 한 말인데. 저렇게 말해 버린 세냐의 얼굴이 오히려 더 붉어졌다. 유진은 세냐의 얼굴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정말 하멜 님이 세냐 님을 좋아했을까요? 저도 동화책은 여러 번 읽어보기는 했는데, 그 동화책은 뭐라 해야 할까, 저자의 사심이 너무 들어간 것 같던데…….”
“야! 네가 뭘 알아? 그리고 너…… 너, 하멜이 날 좋아하지 않았다고? 진짜 그렇게 말한 거야?”
“아니 뭐…… 저는 하멜 님이 아니지만…… 그래도 하멜 님의 후계자이자 하멜 님을 존경하는 먼 후배로서, 예, 그 하멜 님이 죽어가면서 세냐 님을 좋아했다는 유언은 남기지 않았을 것 같다는…… 뭐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세냐와 유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로베리안은 그 순간에도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뒤늦게 그를 알아차린 세냐는, 어흠 헛기침을 하고서 로베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개 들어도 괜찮아, 적탑주.”
대스승의 허락이 떨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로베리안의 얼굴에는 아까와 같은 긴장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로베리안의 눈동자는 마치 진리에 도달하기라도 한 것처럼 현현했고, 표정은 평온하고 차분했다.
“감사합니다.”
심증을 확신으로 단단히 굳혔다. 유진은 아니라고 발작하듯이 외쳐댔지만, 로베리안은 그 후에 오간 일련의 대화에서 유진의 정체가 300년 전의 영웅, 하멜 다이너스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로베리안은 속이 뻥 뚫리는 후련함을 만끽하며 몸을 돌렸다. 유진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나아가는 로베리안의 뒤를 따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로베리안 님. 스승님? 제 말 이해하신 것 맞죠?”
“편하게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하멜 님…… 아니, 유진 님.”
“제 말 이해를 못 하신 것 같은데? 저는 하멜 님이 아니라니까요.”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하고 말았군요.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당장 로베리안은 그 이유를 여러 가지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헬무드의 마왕과 마족들을 경계하는 것이겠지. 수백 년이 흐른 시대에 환생하였음에도, 저 위대한 영웅은 전생에 이루지 못한 숙원을 여전히 추구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유진 님은 어려서부터 흑마법과 마족을 몹시나 혐오하셨지.’
요즘 시대의 아이들치고는 유별난 일이지만, 그 라이언하트의 후예라면 흑마법과 마족을 혐오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기에 당연히 지금 시대와 마의 족속들을 혐오할 수밖에 없던 것이겠지.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머릿속의 퍼즐이 맞춰졌다.
……우둔한 하멜에 대한 과도한 숭배기질은……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로베리안 본인도, 자신이 죽고서 한 300년 뒤에 ‘우둔한 로베리안’이라고 불린다면 발끈하여 어떻게든 자신을 변호할 것만 같았다. 물론 저만큼 대놓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갑작스레 방문해 주셔서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괜찮아, 나도 소란스러운 자리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
세냐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로베리안은 그 앞에 공손한 자세로 앉으면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후계자야, 뭐 하니? 내 옆에 앉지 않고.”
“예.”
유진은 시키는 대로 세냐의 옆에 앉았다. 그 광경은 로베리안으로 하여금 흐뭇한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수백 년이 지나 맺어진 연인들을 직접 보고 있으니, 연애라고는 단 한 번도 곁에 두지 않았던 로베리안의 삭막한 가슴에도 한 송이 꽃이 피는 것만 같았다.
“보기 무척 아름답습니다.”
“……사승관계 말씀이십니까?”
“예, 뭐, 그렇습니다.”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고서 시선을 돌렸다. 세냐는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아차리고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도 나름의 재미가 느껴졌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었지? 그래, 네가 디아도르 토른의 후계자라고?”
“제 스승님의 스승님이셨습니다.”
“시건방진 녹탑주…… 뭐시기 오스먼은 내가 도저히 후계자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옆에 앉은 귀여운 후계자한테 듣기를, 적탑주 너와 백탑주가 날 구하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더라구. 그뿐만 아니라 메르에게도 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네가 항상 메르를 신경 써주었다며?”
“그렇게 말해주실 만큼 대단한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롯의 마탑주는 항상 중립의 위치에 서야 하고, 위치크래프트에 얽매이신 메르 님을 아크리온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은 제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식은 해주었잖아. 네가 한창 아크리온에 드나들 때에도 메르에게 공손히 대했다던데, 그것만 해도 어디야?”
세냐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 위에서 양손을 모았다. 그녀는 장난기 없이 진지한 눈으로 로베리안을 응시했다.
“아롯에는 제대로 밝히지 못할 일이지만, 적탑주, 너는 내가 ‘왜’ 은거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알고 있지. 예정에 없던 은거는 메르를 불행하게 만들었어. 그런 메르에게 네가 조금이라도 친애를 주었다면, 마찬가지로 나도 네게 친애를 줄 거야.”
로베리안은 감격하여 몸을 떨었다.
설마 그 현명한 세냐에게서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뿐만 아니라, 너는 내 후계자ㅡ 유진 라이언하트에게도 무척이나 잘 대해주었지. 유진이 제대로 된 마법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네 가르침과 배려 때문이었고.”
“저는…… 유진 님에게 대단한 가르침을 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니라 다른 어떤 마법사라도, 유진 님과 만났더라면 제자로 삼고 싶다 욕심을 냈을 겁니다.”
“나는 그런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아. 적탑주. 내 후계자는 너를 스승이라 인정했고, 너는 후계자를 제자로 대했지. 마법을 가르치고, 의문에 조언을 해주고, 도움을 주었으며, 결국에는 후계자가 날 구하는 것에 도움을 요청할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었어. 내 후계자의 주변에는 여러 사람이 있어서 고독하지 않았겠지만, 적탑주 너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면서 강한 사람이 되어준 거야.”
세냐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ㅡ화아악! 새하얀 빛에 휘감긴 마법지팡이, 프로스트가 세냐의 손에 쥐어졌다.
“디아도르 토른의 후계자. 적색마탑의 탑주. 로베리안 서피스. 나 세냐 메르데인은 너를 후계자로 인정할게. 그리고 내 이름과 명예를 적색마탑의 뒤에 두어 정식적으로 후원하도록 하겠어.”
프로스트의 끝에서 빛이 뿜어졌다. 쉬리리릭! 새하얀 마법의 빛이 로베리안의 방 한쪽 구석에서 얽히더니 하나의 구체가 되었다. 로베리안은 그 구체를 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위치크래프트……!”
아크리온의 최상층, 현명한 세냐의 전당에 있는 위치크래프트의 상권. 그것이 로베리안의 방에 새로이 만들어졌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 위치크래프트는 아크리온에 있는 것보다는 조금 크기가 작았다.
“이터널 홀의 이치뿐만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마법들도 따로 담아두었어.”
아크리온의 위치크래프트와 마찬가지로, 저것은 몇 번을 보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간절하며 뛰어난 마법사가 수십 수백 번을 탐닉한다면, 틀림없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크리온의 위치크래프트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야. 애당초 3권으로 나뉘어 있지도 않고. 이터널 홀의 이치를 후대의 마법사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이 위치크래프트지. 하지만ㅡ 단언컨대, 위치크래프트를 처음 만들었을 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욱 뛰어나. 그러니 저 위치크래프트는 아크리온의 위치크래프트보다 우월하며 완벽해.”
세냐는 방긋 웃으며 프로스트를 내려놓았다.
“저 위치크래프트를 적색마탑에 기증하겠어. 저걸 순수하게 이해할지, 아니면 다른 관점에서 연구할지는…… 적탑주 너와, 후대의 다른 적탑주에게 맡기도록 할게.”
“감사…… 감사합니다……!”
로베리안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너를 후계자라 인정했지만, 나를 대스승이나 스승이라고 부르지는 마. 그냥 세냐 님이라고 부르도록.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나의 후계자 유진. 너는…… 나를 스승님이라 불러도 괜찮아. 대스승이라고는 부르지 말고.”
“둘이 뭔 차이입니까?”
“대스승이 스승보다 좀 늙어 보이잖아……!”
“그러니까. 저는 세냐 님을 스승이라 생각하면서 세냐 님을 스승이 아닌 세냐 님이라 부르는 로베리안 님을 스승이라 부르고, 세냐 님도 스승님이라 불러야 하는 겁니까?”
“너는 왜 굳이 말을 복잡하고 짜증 나게 하는 거야? 나도 스승님이고 적탑주도 스승님이니까…… 어…… 응, 그러면 된 거 아냐? 아니면 너도 나를…… 나를, 세냐 님이라 부르고 싶은 거니?”
그쪽 울림도 썩 괜찮게 들렸다. 세냐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그렇게 물었고, 유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세냐 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유진 님, 저를 스승님이라 부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여태까지 유진 님이 제게 뭔가 부탁하거나 켕기는 일이 있을 때를 빼고는 저를 스승님이라 부른 적이 거의 없기도 하고…… 그냥 편하게 부르십시오.”
“예, 로베리안, 님.”
유진은 로베리안이 바란 대로 말실수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탑주? 이름이…….”
“멜키스 엘하이어예요! 언니!”
창밖에서 멜키스가 울부짖었다. 그녀는 빈틈없이 닫힌 창문에 얼굴을 문질러대며 오열했다.
멜키스는 아까부터 창문 밖에 있었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로베리안의 마법 결계가 워낙 견고했던지라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금처럼 창문에 얼굴만 문지르고 있었다.
“……대마법사…… 마탑주다운 품위가 없네…….”
“제발, 세냐 님, 백탑주를 보고 지금 시대 마법사들의 품성을 판단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백탑주는 너무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대신에 품성에 적잖은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엿듣는 취미도 있고요.”
유진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받았다. 세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창문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창문이 벌컥 열렸고, 멜키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데굴 굴러서 들어왔다.
“세냐 님, 언니! 저도 언니를 구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어요. 언니가 아끼는 후계자, 유진한테도 여러 가지 잘해주었구요. 지금 쟤가 몸에 두른,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입고 다니는 망토도 사실 제 거라구요!”
“……네가 저 망토를 선물한 거니?”
세냐의 눈이 얇아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질투의 검은 불꽃이 일렁거렸다.
“선물 아닙니다. 내기를 했고, 제가 이겨서 받은 겁니다.”
“준 거 아니야. 빌려준 거야! 앞으로 몇 년 남았지? 네가 17살 때 9년 빌려주기로 했었으니, 앞으로 5년 남았어!”
“중간에 시간이 더 늘지 않았나요? 제가 멜키스 님한테 이런저런 도움을 드렸던 것으로 아는데.”
“몰라, 난 기억 안 나, 계약서, 계약서 가지고 와! 없잖아? 응? 구두계약은 믿으면 안 돼,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신도 몰라. 어쨌든 5년 남았어!”
멜키스는 그렇게 쏘아붙인 뒤에 무릎 발로 세냐의 옆까지 다가왔다.
“언니, 저도 언니를 엄청 존경해요. 세상에서 제일, 저는 언니가 아니었다면 마법사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세냐 님, 저거 거짓말입니다. 백탑주가 제게 말하길, 자신이 마법사가 된 것은 세냐 님이 아니라 베르무트…… 님을 존경해서라고 했습니다.”
“둘 다 존경해! 언니 사랑해요! 존경과 사랑은 다르잖아요, 네? 그러니까 저한테도 저, 저저, 저거, 위치크래프트, 저도 저거 주면 안 되나요? 네?”
세냐는 실눈을 뜨고서 유진과 멜키스를 번갈아 보았다.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유진에게 듣기를, 무려 3명의 정령왕과 계약한 터무니없는 정령사라고 했다.
‘왜 이리 친해 보이지?’
남자와 여자다운 감정은 없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세냐는 멜키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돼. 싫어.”
그래서 단호히 말해주었다.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네가 날 구하는 것에, 그리고 내 후계자에게 여러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위치크래프트는 네게 줄 수 없어. 너는 내 후계자가 아니잖아!”
“언니이!”
“언니라고 부르는 것 정도는 허락해 줄게. 그 이상은 안 돼.”
“제발요!”
멜키스는 세냐의 다리를 붙잡고서 애걸했다. 세냐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런 멜키스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정말로…… 이 시대의, 아니,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정령사라고……?”
전쟁시대였던 300년 전에도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는 흔하지 않았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도 복수의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는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게, 그런 유일무이한 정령사라고? 세냐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몸을 떨었다.
[봐라, 하멜.]
템페스트가 유진의 머릿속에서 외쳤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번개와 땅, 그리고 불꽃의 정령왕이 틀린 것이다. 세냐의 얼굴을 보아라! 마법사라면, 인간이라면, 지성을 가진 존재라면! 멜키스 엘하이어의 존재를 경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쩝…….’
유진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어서 더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심, 저렇게나 반발하는 템페스트가 언젠가 멜키스랑 계약을 맺는 모습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귀환
적색마탑에 다녀오고 나서 아롯에서는 나흘을 더 보냈다. 긴 은거를 깨고 아롯에 돌아온 만큼, 세냐는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그 나흘 동안 세냐는 적색마탑과 녹색마탑에서 마법에 대한 강의를 짧게나마 해주었고, 마탑주들과의 간담회를 가졌으며, 마법사 길드에도 방문해 강단에 섰다.
어제는 아롯 의회의 주요 인사들과 국왕, 왕세자와 함께 시내를 거닐며 시민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마지막은 그녀의 이름을 딴 메르데인 광장에서 가벼운 연설도 했다.
저것들만 해도 나흘 동안 소화하기에는 과중했지만, 세냐는 아무렇지 않게 저 모든 일정을 가볍게 소화했다. 사실 저것도 최대한 줄인 일정이었다.
수백 년 만에 돌아온 대마법사. 아롯의 캐치프레이즈 그 자체인 세냐를 부르는 자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대부호와 권력가들은 10분만이라도 세냐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고, 모든 마법사들이 세냐의 옷깃이라도 한 번 잡아보기를 갈망했다.
세냐는 그런 문제들에는 단호히 대처했다. 아롯이라는 나라에는 애착도 있고 미련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롯에 오랫동안 붙들려 있을 생각은 없었다.
“왕가랑 의회가 뭐라 안 하디?”
“뭐라 하기는 했지. 꼭 라이언하트 가문에 가셔야 하는 겁니까? 라고 말이야. 그런데, 걔들이 뭐라 하건 내가 무슨 상관이야?”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당연히 아롯은 세냐를 국외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세냐가 어떤 행사에 서지 않는다고 해도, ‘현명한 세냐’가 아롯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볼 수 있다. 당장 요 며칠 동안 아롯 시내에는 타국에서 온 관광객과 마법사들이 부쩍 늘어났다.
늘어난 만큼,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확. 저 시커먼 마탑을 붕괴시키고 싶은데.”
흑색마탑 소속의 흑마법사들이 대거 아롯을 떠났다. 로베리안과 멜키스에게 듣기를, 현재 흑색마탑에 남은 흑마법사는 본래의 1/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마르에서 일찍 헤어졌던 흑색마탑주ㅡ 발자크 루드베스도 아직까지 아롯에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엄청 흘렀다는 것이 저 시커먼 마탑을 보면 확 체감이 들어. 내가 은거하기 전에도 흑마법사의 마탑을 세우겠다는 이야기가 조금 들리긴 했는데, 그때는 나뿐만이 아니라 아롯 사람들 대부분이 반대하고 나섰다고.”
“흑색마탑을 세우기 위해 헬무드에서 기부를 엄청 했다더라.”
“……바벨에서 봤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유폐의 마왕…… 그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세냐는 짐을 가득 욱여넣은 캐리어를 끌면서 중얼거렸다. 사실 직접 캐리어를 끌 필요 없이, 모든 짐은 망토 안에 넣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세냐는 굳이 캐리어를 고집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이쪽이 뭔가 마음이 더 설레서. 오랫동안 살았던 아롯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는구나 하는 기분이 들어서.
“심지어 지금의 헬무드는…… 그…… 말도 안 되게 발전했다며? 나도 헬무드 관련 책과 영상을 따로 찾아보기는 했는데, 내 기억과는 아예 다른 곳이 되었더라.”
“직접 가보면 말도 안 나올걸.”
유진은 세냐의 말에 공감하며 대답해 주었다. 유진이 기억하던 헬무드는 사람이 사는 것이 불가능한 혹독한 대지였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날씨조차 제멋대로인, 그저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심신을 지치게 만들던 땅.
약속을 맺어 전쟁이 끝난 후. 유페의 마왕은 마경 헬무드를 ‘제국’으로 선언하며 스스로를 황제라 자처했다. 그 선언 이후, 유폐의 마왕은 마왕성 바벨의 창고를 열어 전쟁 피해국들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전했다.
그 시점까지 대륙은, 유폐의 마왕에 대한 공포 때문에 대놓고 반발은 하지 못했을 뿐 헬무드를 제국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헬무드에 이민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천천히라고는 결코 할 수 없을 빠른 속도로, 헬무드는 마경에서 제국으로 바뀌어갔다. 제대로 된 지성을 갖추지 못한 마물들이 가축처럼 사용되었다. 유폐의 마왕이 직접 토지를 주무르고 하늘을 바꾸었다. 수많은 마족들이 마왕의 명에 따라 일꾼이 되었다.
헬무드에 대한 세냐의 기억은 그쯤에서 멈춰 있다.
지금은 어떤가? 불과 200년 만에, 헬무드는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고 발전된 제국이 되었다. 대륙과는 전혀 다른, 대체 어떻게 이룩한 것인지 모를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제벨라 파크는 또 뭐야?”
세냐는 간판대의 신문을 힐긋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늘어선 신문의 1면에는 헬무드의 제벨라 파크에 관한 소식이 실려 있었다.
<놀이와 문화와 유행의 선두를 이끄는 아름다운 여공작, 누아르 제벨라. 그녀의 이름을 당당히 내건 사상 최대의 테마랜드, 제벨라 파크.>
“누아르 제벨라의 사육장이지.”
“딱 봐도 그래 보이네. 그 정신 나간 몽마는 옛날부터 미친 짓을 일삼았지.”
“저곳에 휴양이랍시고 방문하는 인간들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굳이 저딴 곳에 가서 돈도 쓰고 정기까지 바치는 것일까요?”
이 주제에 관해서는 유진과 세냐, 아니스, 크리스티나까지 똑같은 생각이었다.
망토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던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말없이 시선을 마주치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번 가보고 싶었느니라.’
‘몽마의 여왕을 죽이기 전에…… 아니, 죽이고 나서라도 놀이기구는 탈 수 있지 않을까…….’
누아르 제벨라에 대한 증오를 쏟아낸 후.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는 펜타곤 부유역의 워프게이트로 이동했다.
세냐는 소란스러운 송별과 배웅은 바라지 않아서, 어제 왕가와 의회, 마탑주들에게 절대로 배웅을 나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만약 배웅을 나온다면 그 자리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협박도 했다.
“언니이이!”
그 말은 멜키스도 들었을 텐데…… 그녀는 용감하게도 세냐의 경고를 무시하고서 워프게이트 앞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는 세냐를 포착하자마자 세상 서럽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저도, 저도 데려가 주세요!”
멜키스를 본 즉시 세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달려드는 멜키스를 마법으로 날려 버리고, 서둘러서 캐리어를 끌었다.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는 멜키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세냐를 따라서 워프게이트로 들어갔다.
미리 말은 해두었기에 이쪽 부유역의 워프게이트는 사람이 없고 조용했다. 도착지도 미리 설정해 두어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도착지는 키옐의 변경. 유진의 고향과 좋은 승부를 겨룰 수 있을 만큼의 시골인 볼라뇨.
현재 눈을 뜨고 있는, 자칭 유일한 드래곤. 레드드래곤 아리아르텔의 은둔지.
* * *
라이언하트 본가에 돌아가기 전에 아리아르텔을 만나러 온 이유는 간단했다. 라이자키아를 탐색하고 세냐를 구하는 모든 일은, 아리아르텔의 용언마법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리아르텔 본인도 종족의 배신자인 라이자키아에게 강한 원한을 품고 있으니, 라이자키아를 죽인 것 정도는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도리였다.
하나 더. 라이미르아의 관해서도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본녀는 흑룡공 외에 다른 드래곤을 만나 본 적이 없느니라.”
망토 안의 라이미르아가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라이미르아의 얼굴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설마…… 은자여. 본녀를 그, 만나본 적도 없다는 드래곤에게 떠맡길 셈이느냐?”
“그건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곁에 바짝 붙어서, 망토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라이미르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대로 멍청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
“뭐…… 뭣이라? 은자여! 아무리 은자가 은자일지라도, 위대한 종족인 본녀에게 멍청하다는 비난은 너무하지 않으악!”
따악! 라이미르아는 홍옥을 한 대 얻어맞고 망토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드래곤이면 드래곤다운 점이 있어야지. 얘는 그냥 멍청하고 약하잖아.”
아리아르텔과 라이미르아의 나이는 많이 차이가 나봐야 100년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아리아르텔과 라이미르아는…… 무게감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당장 라이미르아는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이라는 주제에 뭐 대단한 마법도 쓸 줄 몰랐고, 드래곤피어도 어중간했으며, 용언에도 대단한 위력이 없었다.
“그건 마빡의 홍옥 때문일 거야.”
세냐는 라이미르아의 이마에 박힌 홍옥에 여전히 욕심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든 뽑아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며칠 동안 조사하여 알게 된 사실.
라이자키아의 집념과 저주과 구속은 놈이 죽었음에도 아직 홍옥에 남아 있다.
라이자키아는 하나뿐인 혈육을 혈육으로 대하지 않았다. 저 홍옥은 라이미르아가 그 어떤 순간에도 라이자키아에게 거스를 수 없고 반항할 수 없게 만드는 안전장치이자, 라이미르아의 존재에 깊이 박힌 말뚝이었다.
용언의 위력이 대단찮은 것도. 마법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드래곤피어조차 어중간한 것도. 홍옥이 라이미르아의 드래곤다운 힘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런 종류의, 특히 용언의 마법은 나로서도 괜히 건들기 부담스럽고 귀찮지. 그…… 아리아르텔? 헤츨링을 갓 지난 성체 드래곤이라도 용언으로 간섭할 수 있을 거야. 라이자키아가 이미 죽기도 했고 말이야.”
라이미르아가 조금 더 드래곤다워진다면, 어떤 식으로든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봤자 아직 헤츨링이지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적이 인간이라면 모를까…… 전쟁시대부터 살아온 고위마족들 앞에서는, 드래곤의 헤츨링이라도 덩치 큰 도마뱀 수준일 테니.
“우우…… 은자여, 본녀를 버리면 안 되느니라. 본녀는 어머니…… 포근한 성모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느니라.”
……망토 안에서 훌쩍거리며 메르와 장난이나 쳐대는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토 속의 훌쩍거림을 무시했다.
볼라뇨의 한적한 시골거리를 지나, 아리아르텔이 은둔한 주택 근처까지 왔다. 세냐가 펼쳐놓은 인식저해의 마법 덕에 시골 사람들의 이목은 사지 않았지만, 주택의 울타리는 이미 열려 있었다.
창가에 서 있는 아리아르텔의 모습이 보였다. 이 갑작스러운 방문이 불쾌한 것인지, 아리아르텔은 새빨간 머리카락을 손으로 배배 꼬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진의 곁에 선 세냐와 아리아르텔의 눈이 마주쳤다. 그 즉시 아리아르텔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동자를 크게 뜨더니, 창가에서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널 알아봤나 봐.”
“나는 저 드래곤을 처음 보는데?”
“지금 시대에 보라색 머리카락을 하고 다니는 마법사가 너 말고 몇 명이나 있겠냐?”
“옛날에도 나 따라서 머리카락을 보라색으로 물들이는 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성직자들 중에서도 아니스 님을 숭배하며 금발을 길게 기르는 유행이 예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왜 나 따라 하는 놈은 없어?”
“널 따라 하려면 멀쩡한 얼굴에 흉터를 죽죽 그어야 하잖아.”
“한쪽 귓불도 날려 버려야지요.”
유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주택에 다가갔다. 직접 열 필요 없이 알아서 문이 열렸다.
“현명한 세냐?”
현관에 선 아리아르텔이 대뜸 물어왔다.
“이 시골구석에는 아롯의 소문도 들려오지 않은 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못 들었나 보네.”
세냐가 아롯에 귀환하고서 며칠이 지났으니 대륙 전역에 소문이 퍼졌을 텐데. 변경 끝자락의 볼라뇨에는 아직 세냐의 소문이 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기돌이 더 낫군.’
유진은 새삼스레 애향심을 느끼며 히죽 웃었다. 아리아르텔은 유진의 미소를 찡그린 눈으로 흘겨보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세냐를 쳐다보았다.
“……이 강대한 마력…… 현명한 세냐 본인이 틀림없어. 그쪽은…… 당대의 성녀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인가?”
“위대한 종족을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기도를 올리며 방긋 웃었다. 아리아르텔은 가벼운 전율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할 대마법사. 빛의 화신인 성녀. 그리고 300년 전에 죽은 영웅의 환생. 지금 그녀의 앞에 선 3명은 틀림없이 인간이겠지만, 아리아르텔은 도저히 그들을 인간이라 여길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아리아르텔은 꿀꺽 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 하나 아리아르텔은 그에 대한 불쾌함은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3명의 손님을 기꺼이 응접실로 안내하고, 스스로 차를 달여 각자의 앞에 놓아주었다.
“현명한 세냐. 그대가 처한 불행에 대해서는 저 우둔한 하멜에게 들었소. 그대가 세상에 나와 내 앞에 있다는 것은…… 우둔한 하멜이 저번에 예고했던 대로, 드래곤의 수치인 마룡 라이자키아를 토벌했다는 것이겠군.”
“우둔한 하멜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유진은 먼저 그것을 정정해 주었다.
용마성에서 죽였던 야곤. 마족인 그놈조차도 ‘몰살의 하멜’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불러주었는데, 왜 인간과 드래곤은 우둔한 하멜이라고 불러대는 것일까? 유진은 괜히 세냐와 아니스가 미웠다.
“당신의 이름은?”
“아리아르텔. 레드드래곤의 아리아르텔.”
“예, 아리아르텔. 절 구하는 것에 당신의 도움이 있다 들었습니다.”
상대가 드래곤이기에 세냐도 태도를 조심했다. 그녀는 천천히 아리아르텔을 향해 고개를 숙여주었다.
“만약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가 세상에 나오는 것에는 아득하고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사마르 대수림 엘프족과 세계수의 후예, 세냐 메르데인. 당신의 도움으로 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 위대한 마법사여.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마법의 총아여. 고개를 드시오. 나는 드래곤이되 미숙한 존재이고, 결코 그대보다 위대하지 않소. 그러니 내게 고개를 숙이지 말아주시오.”
아리아르텔은 난감하면서도 기쁜 얼굴이었다.
드래곤이기는 해도, 오래전부터 보았던 동화책의 인물과 직접 마주 앉아 있다는 것. 그 현명한 세냐에게 저런 말을 듣는다는 것이 아리아르텔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던 동심을 자극했다.
‘그래, 무릇 전설 속의…… 동화 속의 영웅이라면 저런 품격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아리아르텔은 그런 생각을 하며 유진을 힐긋 쳐다보았다.
우둔한 하멜의 환생…… 유진 라이언하트. 저 인간은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우둔하고 건방지며 예의가 없었다.
반면에 현명한 세냐는 어떤가? 저 나긋한 말씨와 현기 있는 눈동자를 보라!
그리고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당대의 성녀. 과연 그 신분과 이름처럼 자태 하나하나에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세상 모든 존재를 자비와 사랑으로 끌어안을 것만 같은, 저 자애로운 모습이란…….
‘드래곤이라면 보물을 산처럼 쌓아두고 사는 법인데…….’
세냐는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매와 같은 눈으로 방을 살펴보았다. 밖에서도 보고 느낀 것이지만, 이 집은 드래곤의 거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낡았다.
‘어디 보물 하나 받을 수 없나?’
이런 면에서 세냐와 유진은 닮았다.
세냐는 과연 어떻게 해야 아리아르텔에게서 보물을 뜯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귀환
마룡 라이자키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이야기를 듣는 아리아르텔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 마룡을, 고작 2명이서 토벌했단 말인가?”
아리아르텔은 그 이야기를 믿기 힘들었다.
아무리 약화되었다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 게다가 라이자키아가 평범한 드래곤도 아니잖은가? 그런 라이자키아를, 군대를 동원한 것도 아니고 2명이서 토벌했다니?
“운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나 혼자서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웃기고 있네. 설령 네가 라이자키아를 혼자서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그 뒤에는 너도 죽어버렸을걸?”
“그건 모르는 거야.”
“모르기는! 내가 널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너는 라이자키아가 손을 댈 것 없이 혼자 죽어버렸을 거야.”
유진은 반박할 말이 없어서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세냐의 말이 사실이기는 했다. 만약 몸이 조금만 더 버텨줘서, 라이자키아의 드래곤하트를 박살 냈다고 해도. 그 직후에 유진의 육체는 혹사시킨 대가로 붕괴해 버렸을 것이다.
둘이 옥신각신하는 것을 앞에서 보고 있으니 놀람도 가라앉았다. 아리아르텔은 표정을 가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으흠…… 긴 수면기에 들어간, 나를 제외한 모든 드래곤들이 마지막까지 바랐던 것이 라이자키아의 죽음이었소. 그만큼 마룡 라이자키아는 드래곤의 수치였지.”
아리아르텔 본인도 라이자키아의 토벌에 참가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면에 들어간 드래곤들의 요람의 관리자인 아리아르텔은 함부로 움직일 수도, 위험할지 모르는 전투에 참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유진에게, 우둔한 하멜에게 협력했다. 부탁받은 대로 아카샤에 용언마법을 새겨주었고, 아카샤 자체를 보완하였으며, 아가로트의 반지까지 빌려주었다.
“잠이 든 모든 드래곤을 대표하여, 나 레드드래곤 아리아르텔은 그대 영웅들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하겠소. 현명한 세냐, 그리고 우둔한 하멜. 마룡 라이자키아를 죽여주어 고맙소.”
“우둔한 하멜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유진은 눈썹을 콱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잠자코 듣던 세냐는 슬쩍 시선을 들어 아리아르텔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는지요?”
“현명한 세냐. 나 아리아르텔은 그대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생각하오. 그대는 나에게 얼마든지 부탁을 요구할 수 있소.”
세냐는 말뿐인 감사는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장황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라이자키아에 의해 크나큰 상처를 입고 봉인당한 지 어언 수백 년.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약해지고 불완전해졌는지. 기적처럼 토벌에 성공하여 봉인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상처가 온전히 치유되지 않았다다는 이야기. 그것과 더불어, 이 세상의 불완전한 평화와 유폐의 마왕이 언급했던 약속의 끝과, 전쟁시대에 수많은 드래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멸망의 마왕에 대한 이야기.
그 장황하고 엄숙하며 절박한 이야기에 아리아르텔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상황이, 아니, 이 시대의 미래는 암울하고 절망적이었다.
마룡 라이자키아를 쓰러트렸다고는 하지만, 마룡과 견주는 수준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더욱 강하고 위대해졌을 헬무드의 공작들.
드높은 바벨에서 세상을 오시하며 자비로이 평화를 베풀고 있는 유폐의 마왕.
자신의 영지 라비스타에서 수백 년 동안이나 침묵하고 있지만, 언제 다시 움직일지 알 수 없는 멸망의 마왕…….
그에 비해 대적자들의 힘은 아직 한참이나 약소했다. 드래곤들은 아리아르텔을 제외하고서 모두 다 잠들었다.
아리아르텔은 자기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에는 자부심을 가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드래곤의 힘을 과신하지는 않았다. 이 위대한 종족이 가졌던 자부심과 힘은, 이미 300년 전에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수십 마리가 모이건 마왕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특히 유폐의 마왕은 멸망의 마왕과 함께 드래곤을 학살한 장본인. 나이도 어리고 전투 경험도 없는 아리아르텔은, 자신이 이 시대에서 마왕의 대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부탁은.”
세냐는 아리아르텔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확인하고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세냐의 말은 무척이나 장황하였지만,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이것이었다.
남는 드래곤 하트 하나 없나요?
“……허어…… 으음…….”
아리아르텔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왜 드래곤 하트가 필요하고, 왜 드래곤 하트를 요구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들었다. 라이자키아에 입은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현명한 세냐의 혼에는 상처의 흉터가 남아 있다.
그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의 미래에서 마족, 마왕과 싸우기 위해서는ㅡ 드래곤 하트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 그 이야기는 아리아르텔도 이해했다. 그를 두고 따지고 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으음…….”
우둔한 하멜이 요구했다면 더욱 주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현명한 세냐가 직접 요구할 정도면, 그만큼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일 터. 아리아르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명한 세냐여. 그대가 정 바라고 절실하다면, 내가 드래곤 하트를 하나 줄 수는 있소.”
“아!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으음…… 아니, 내가 주저해서는 안 될 일. 이 모두가 세상을 위한 것이니…….”
아리아르텔은 고개를 몇 번 흔들고는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ㅡ화악! 일그러진 공간이 살짝 열리더니, 그 틈새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드래곤 하트가 떨어졌다.
“……이건…….”
아리아르텔은 자신의 머리보다 커다란 드래곤 하트를 손바닥에 올려놓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우우웅! 손바닥 위의 드래곤 하트가 진동하면서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커다랗던 드래곤하트가 주먹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내 어머니의 드래곤 하트라오. 멸망과 유폐와의 전투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셨었지만, 결국 그때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해 수백 년 전에 돌아가셨지. 이 드래곤 하트는…… 그때 내게 주어진 유품이오.”
“아…….”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현명한 세냐 그대가 정의로운 뜻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세상을 위한 일일 터. 그러니 나는 이 드래곤 하트를 그대에게 양도하도록 하겠소. 부디, 이 드래곤 하트를 사용하여 그대의 힘이 조금이나마 더 회복되기를. 동족의 배신자, 라이자키아가 입힌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오.”
라이자키아의 상처가 남았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이제 와서 그게 거짓말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래도 세냐는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 아리아르텔. 300년 전 완수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번에야말로 꼭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아니, 드래곤의 응원을 잊지 않겠습니다.”
세냐는 조심스레 드래곤 하트를 넘겨받았다. 당장 여기서 프로스트에 드래곤 하트를 이식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망토 안에 넣어두었다. 드래곤 하트를 넘겨 준 아리아르텔은 오히려 후련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 볼일은 끝나지 않았다. 유진은 아리아르텔의 표정을 살피면서 슬쩍 망토 자락을 잡았다.
“라이자키아의 헤츨링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건가?”
“당연히 죽었을 것 아닌가?”
아리아르텔은 의아하단 얼굴을 하고서 되물었다.
마룡의 헤츨링이라면 당연히 마룡일 것이고, 당연히 우둔한 하멜의 손에 죽었을 것 아닌가? 그러니 애초에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리 나와라.”
“시…… 싫으니라.”
“나오라니까 확.”
유진은 망토 안에 손을 쑤셔 넣어, 라이미르아의 뿔을 붙잡았다. 아리아르텔은 망토 안에서 끌려 나오는 라이미르아를 보고서 두 눈을 부릅떴다.
“마룡의 헤츨링!”
경악이 곧바로 적의가 되었다. 아리아르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살벌한 드래곤 피어를 쏟아냈다.
“그래, 그렇구나! 우둔한 하멜! 내 손으로 직접, 저 헤츨링을 벌하도록 배려해 준 것이구나. 좋다!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묻는 것도 잔혹한 일이겠다만, 언젠가 마룡이 될 씨앗을 드래곤인 내가 불태워…….”
“얘는 그냥 드래곤이야.”
“뭐라?”
“좀 멍청하고…… 그렇기는 한데…… 아니, 너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드래곤 피어 쏘지 말라고! 애가 무서워하잖아!”
유진은 망토 안에서 오들오들 몸을 떠는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윽박질렀다. 그 성난 외침에 아리아르텔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고, 라이미르아는 원망스럽단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은자여. 은자는 왜 메르와 본녀를 차별하는가?”
“뭔 차별이야…….”
“그렇지 않은가? 왜 메르가 두려워 몸을 떠는 것은 보살피고 걱정하면서 왜 본녀의 두려움은 무시하고 끌어내는가?”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라고.”
유진은 내심 가슴이 찔려 라이미르아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보고 있던 크리스티나는 머릿속의 아니스와 열렬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보십시오, 시스터. 역시 유진 님은 상냥하십니다.’
[실제 나이를 따진다면 라이미르아가 하멜보다 5배는 족히 될 텐데, 그게 중요하지는 않지요. 오히려 라이미르아가 애처럼 굴수록 저희가 모성애를 베풀기 쉬우며, 메르를 견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육아연습을 하는 것 같군요.’
[?]
크리스티나의 생각에 아니스도 순간 당황했다.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서, 라이미르아와 유진을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란한 가정이 만들어졌고, 언젠가 그녀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았을 때 라이미르아가 언니나 누나 행세를 하는 미래까지 도달했다.
“……마룡이 아니라고?”
아리아르텔은 뒤늦게 감정을 가다듬고 라이미르아를 살펴보았다. 라이미르아는 아리아르텔과 도저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쭈뼛쭈뼛 시선을 피했다.
“라이자키아의 자식은 맞는데, 놈처럼 타락은 안 했어. 그렇다고 멀쩡한 것도 아니고.”
“……저 머리의 붉은 보석. 드래곤 하트의 파편이군.”
아리아르텔은 두눈을 얇게 뜨고 라이미르아를 응시했다. 나사 빠진 면이 있기는 해도 아리아르텔은 정통한 드래곤이다. 그녀는 라이미르아의 홍옥이 용언에 의한 강력한 금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이 금제를 없애주기를 바라는가?”
“네게 가능하다면.”
“……흥…… 우둔한 하멜이여. 이 레드드래곤 아리아르텔을 시험하지 말라. 저 금제는 강력하지만, 라이자키아는 이미 죽었으니 내 용언으로도 충분히 간섭이 가능하다.”
아리아르텔은 그렇게 말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다만…… 나는 이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우둔한 하멜. 그대는 이 헤츨링의 금제를 치워놓고서 사역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이 풀어둘 것인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냐?”
“아비와 똑같이 타락한 것도 아니잖나. 이 헤츨링은 ‘드래곤’이다. 아비의 죄를 대신 갚아야 할 의무도 없지. 나는 같은 드래곤으로서, 이 헤츨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녀는 이미 충분히 자유롭도다.”
유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라이미르아가 재빨리 말했다. 이 짧은 순간에 라이미르아는 자신의 처지가 어찌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말하는 것을 보니, 저 까칠해 보이는 레드드래곤은 동족이랍시고 라이미르아를 위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유? 대체 어디서? 바로 여기서?
소똥 냄새나는 시골의 낡은 집에서, 저 레드드래곤과 단둘이 사는 것이 자유인가? 아니면 수많은 전설과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보호해 줄 사람 하나 없이, 주변에 동식물뿐인 산속 깊은 곳 동굴에라도 들어가서 사는 것이, 저 레드드래곤이 보장하라는 자유인가?
‘싫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200년 동안 용마성 별채에 갇혀 지냈다가 나왔거늘!
이러니저러니 해도, 라이미르아는 자신이 드래곤이란 자각은 확실히 있었다. 아직 어린 헤츨링이 탐욕스러운 인간이나 다른 종족들에게 얼마나 군침 도는 먹잇감인지에 대한 자각도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강하다.
라이미르아는 유진의 강함을 여태까지 아주 많이 보았다. 그 두려운 수인족의 괴물을 압살하고. 유폐의 지팡이를 희롱하고. 흑룡공마저 잠시나마 압도하지 않았나!
그것뿐만이 아니다. 라이미르아는 유진과 함께 다니는 것에서 안전성 외에 여러 가지를 만끽하고 있었다. 인격이 다른 성녀에게 보살핌을 받는 것도 좋았고, 메르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싸움을 하는 것도 좋았다.
유진의 망토 속에서 지내면 위험한 일과 맞닥트리지 않을 것이다. 헬무드의 공작이니 마왕이니 얘기는 자주 듣고 있지만, 거꾸로 생각한다면 공작 2명, 마왕 2명을 빼고서 유진 라이언하트를 위협할 상대는 없다는 것 아닌가?
라이미르아는 자신이 내놓은 결론에 스스로 감탄했다.
‘본녀가 혼자 세상을 떠돌면 수백 수천의 적을 경계해야 하느니라. 하지만 은자와 함께 있다면 공작과 마왕 외에 위협이라 할 존재는 없지 않은가?’
마왕의 군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라이미르아는 천재적인 결론에 스스로 감탄했다.
“본녀는…… 본녀는 이 금제가 사라질지라도, 본녀의 의지로 은자와 함께 다닐 것이니라.”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대답에 조금 감동해 버렸다. 설마 저런 기특한 말을 할 줄이야! 메르를 차별하는 것?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앞으로 라이미르아에게 조금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룡의…… 아니, 블랙드래곤의 후예여. 레드드래곤 아리아르텔은 그대의 뜻을 존중하겠다.”
아리아르텔은 그렇게 말하며 라이미르아에게 다가왔다. 라이미르아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여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아리아르텔이 먼저 손을 뻗어서 어깨를 붙잡았다.
“으으으…….”
라이미르아의 이마, 홍옥에 아리아르텔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그녀는 크게 뜬 눈으로 라이미르아의 홍옥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건 지독하군. 정말로 지독해. 라이자키아…… 그 미치광이는 드래곤을, 혈육을 대체 뭐라고 생각한 것이지?”
제대로 자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억누르는 금제. 이대로 수백 년을 살아봤자, 이 헤츨링은 드래곤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라이자키아는 그것을 바랐다. 그가 라이미르아에게 바란 것은 훌륭한 딸도, 제대로 된 드래곤도 아니었다. 언제고 바라는 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가능할 때까지 알을 낳고서 최후에는 잡아먹을 뿐인 존재를 바랐다. 아리아르텔은 그 끔찍한 의도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라이미르아의 금제에는 순수하게 동정심을 느꼈다.
“……지금부터 시작하지.”
“얼마나 걸리나?”
“해봐야 알겠지만, 빨라도 사나흘은 걸릴 것이다.”
“그럼 다음에 데리러 올게.”
그 대답에 라이미르아는 경악하여 유진을 돌아보았다.
“은자여! 지금 본녀를 이곳에 혼자 두고 가겠다는 말인가?”
“우리가 여기 있어봤자 뭐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 나중에 데리러 올 테니까, 착하게 잘 지내고 있어.”
“내가 없다고 외로워 울지 말아요.”
망토 밖으로 머리를 쏙 내민 메르가 한마디 던져주었다.
라이미르아는 떨리는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저 시선에 마음이 조금 약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유진과 떨어져서 이곳에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세냐가 과감히 일선을 넘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크리스티나는, 아니스는 그런 일만큼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라이미르아는 이 집에 며칠 동안 남게 되었다. 닫히는 문 안쪽에서 은자여, 은자여 하는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ㅡ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야 돌아가는군.”
유진은 낡은 집을 등지고서 중얼거렸다.
키옐의 수도 세이리스. 그곳에 있는 라이언하트의 본가. 먼저 돌아간 시안이 대강의 상황은 전해두었겠지만…….
“…….”
유진은 옆에서 방긋방긋 웃는 세냐를 쳐다보았다.
그, 현명한 세냐를 데리고 돌아온 것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가주와 애니실라, 다른 가솔들이 납득해 줄까.
“그러고 보니 말이야. 유진. 그 몸의…… 피가 이어진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신 거지?”
“어.”
“그그, 그럼, 내가 이번에 가서, 너희 아버지한테 인사를 드리는 거네?”
세냐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면서 괜히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선물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하는…….”
“제하드 님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좋아하신답니다.”
크리스티나가 냉큼 끼어들었다.
“물론 저는 미리 만나보았지요. 함께 식사도 하였답니다.”
으스대는 목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 틀림없는 과시가 세냐의 눈동자를 떨리게 만들었다.
“……먼저 간다.”
유진은 둘 사이에 튀어 오르는 불꽃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도망치듯 발을 뗐다.
귀환
키옐 제국. 라이언하트의 본가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어제 아롯에서 온 연락 때문이었다.
몇 달이나 본가를 떠났던 양자, 유진 라이언하트가 오늘 본가에 돌아온다. 본래부터 방랑벽 기질이 있던 유진이 대뜸 본가를 떠나는 것도, 갑자기 돌아오는 것도 이제는 하나하나 신경 써줄 일이 아니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에 먼저 돌아온 시안은, 유진이 부탁한 대로 본가에 대강의 사정을 설명해 두었다.
사마르 대수림.
그 드넓은 숲에서, 원주민 부족간의 전쟁에 참가했다. 그 전쟁에서 유폐의 지팡이. 당대 제일의 흑마법사라 평가되는 에드몬드 코드렛이 유진에게 죽었다.
수백 년 전부터 모습을 감추고 있던 헬무드의 공작. 마룡 라이자키아도, 유진에게 죽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애니실라는 눈을 까뒤집고 혼절했고, 길레이드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쟁? 에드몬드 코드렛? 라이자키아? 그 모두가, 21살밖에 되지 않은 청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현명한 세냐가 아롯에 돌아왔다.
“역시 마중을 나갔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흑사자 기사단 5번대 대장. 기온은 초조함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옆을 보았다.
펄럭이는 라이언하트의 깃발 아래, 가주인 길레이드가 제복을 입고 서있었다. 그 곁에는 가모인 애니실라가 한껏 차려입고서 부채질로 식은땀을 식히고 있었다.
“오지 말고, 저택에서 기다려 달라고 미리 부탁을 들었으니 어쩔 수 없잖느냐.”
현명한 세냐가 아롯에 돌아오고, 함께 있던 유진을 후계자라 직접 공표한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이다. 그 소식은 하루, 아니, 반나절도 되지 않아 대륙 전체로 퍼졌다.
길레이드는 소문을 들은 즉시 아롯을 방문하려 했다. 그것이 도리적으로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이언하트 가문은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 시조와 전설을 함께 썼던 현명한 세냐가 오랜 은거에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길레이드가 직접 찾아가 인사를 올릴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가문을 떠나려는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편지가 도착했다. 아롯에서 유진이 보내온 편지였다. 내용은 구구절절했는데, 축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많이 놀라신 것은 알겠지만 당장 아롯에 찾아오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 내용.
[며칠 뒤에 함께 라이언하트로 돌아갈 것이니 그때 가문 내에서 행사를 갖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길레이드가 생각하기에도 그편이 좋을 것 같았다. 부랴부랴 채비를 갖추고서 아롯에 가서 인사를 올리는 것보다, 확실히 준비를 갖추고서 세냐 님을 맞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지금 라이언하트 본가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이 많았다. 우클라스 산맥을 경비하는 흑사자 기사단도 최소 부대만 성에 남기고, 올 수 있는 모든 흑사자들이 본가에 집결했다. 뿐만 아니라 방계 중에서도 위세가 강한 가문의 식솔들도 대거 본가에 찾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수백 명이 넘는데, 현재 라이언하트 본가에는 100명이 넘는 엘프들까지 살고 있다. 그들도 옷차림을 갖춰 입고 숲을 나왔다.
시조 이후의 역사 수백 년 동안, 라이언하트 본가에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모인 적은 없었다. 사실 규모를 더 키우자면 이보다 훨씬 더 키울 수 있기는 했다. 본가에 가문의 인력이 대거 모인다는 소식은 키옐의 황제까지도 눈을 돌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황제 스트라우트 2세는 이 행사에 자신이 직접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길레이드는 최대한 노력하여 공손한 거절의 뜻을 전했다. 가문의 행사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나, 만약 폐하께서 직접 자리하신다면 세냐 님께서 당황해하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아롯의 왕궁 아브람이 수장될 뻔했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황제는 길레이드의 거절에 크게 언짢아하지 않고 한발 물러서 주었다.
-그렇다면 며칠 뒤에라도 유진 라이언하트를 황궁에 보내주게.
-가능하다면 현명한 세냐 님도 함께.
ㅡ길레이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키옐의 황가는 대대로 라이언하트를 주목해 왔다. 당대의 황제인 스트라우트 2세도 마찬가지다.
이해는 간다. 라이언하트는 키옐 제국에 소속된 가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가는 라이언하트를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있다.
당장 라이언하트는 수백 년 동안 제국 정예기사단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기사단을 사설로 보유하고 있다. 키옐의 공신이자, 대륙을 구한 영웅의 후예인 라이언하트가 반란 따위를 꿈에 꿀 리는 없지만. 황가에게 있어서 라이언하트는 커도 너무 큰 군벌인 것이다.
그래서 라이언하트는 수백 년 동안 자체적으로 키옐의 국방에 힘을 보태고 있다. 남쪽 끝의 우클라스 산의 경비는 라이언하트의 오랜 의무이며, 그에 따른 모든 비용은 키옐의 군비(軍費)가 아니라 라이언하트의 재산에서 소모된다.
여태까지 황가와 라이언하트의 관계는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만…… 현 황제인 스트라우트 2세는 그 이상을 바란다. 그는 라이언하트를 완전히 황가의 소유물로 삼고 싶어 하며, 격동하는 대륙의 정세가 은연중에 황제의 욕망을 점점 수면 위로 내비치고 있다.
과거 흑사자 성의 동란 때, 길레이드는 황궁에서의 청문회에 며칠이나 붙들렸다. 가문의 덩치가 너무 커졌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는 노골적인 지적도 들었다.
황제는 라이언하트의 모든 기사단을 황궁 직속으로 편입시키기를 요구했고, 그에 대한 공손한 거절을 며칠이나 반복했다…….
‘……탐이 나겠지. 당연히 탐이 날 거야.’
유진 라이언하트.
길레이드는 양자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부터도 잘 알던 사실이지만, 양자는 뛰어나도 너무 뛰어났다. 그 뛰어난 아이를 도저히 놓아주고 싶지 않아, 본가 역사 처음으로 양자로 받아들였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였다. 타고나도 너무 많은 것을 타고 난 아이. 거기에 성검의 인정을 받았고,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가 되었다. 저 헬무드의 유폐의 마왕마저 유진을 주목하고 있다.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는 스스로 거부하고 있지만, 가주가 되지 않을지라도 유진의 이름은 지금의 라이언하트를 대표하고 있다.
‘탐을 낸다 하여 가질 수는 없겠지. 유진은…… 그 아이는 결코 누군가를 따를 성격이 아니니까.’
제국의 황제가 무엇을 약속하건 유진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길레이드는 유진이 걱정되었다. 길레이드야 어떻게든 황제의 비위를 맞춰줄 수 있었지만, 유진이 그럴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가는 황제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를 일. 길레이드는 라이언하트의 미래도 걱정되었지만, 유진의 미래에 황제가 장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되었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곁에 있던 시안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애니실라도 부채질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길레이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길레이드는 자신의 얼굴이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던 것을 깨닫고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너무 긴장한 모양이구나.”
“이럴 때에 시엘, 그 아이라도 있었다면 분위기가 풀어졌을 텐데요.”
애니실라는 지금 본가에 없는 딸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느꼈다.
카르멘은 제자인 시엘과 종자인 디자이라를 데리고서 벌써 반년이 넘도록 저택을 떠나 있었다. 1달마다 오는 편지로 소식은 듣고 있지만…… 이제 나이가 나이이기 때문인지, 애니실라는 곁에 없는 딸이 그리웠다.
“저번 편지에서는 시무인에 머무르고 있다 하였지. 그 나라는…… 나도 예전에도 가보았던 곳이지. 기사 수행을 하기 더할 나위 없는 것이오.”
아롯이 마도왕국으로 불리듯, 시무인은 기사왕국이라 불린다. 남쪽 바다 한가운데의 그 나라에서는 일 년, 아니, 몇 달마다 온갖 무투회가 열리는데, 그때마다 수많은 자유기사와 용병들이 모여서 실력을 겨룬다.
“가주님! 유진 라이언하트님이 오고 계십니다!”
정문 쪽의 기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길레이드는 아직까지 굳어 있는 얼굴을 어루만지고서 자세를 바로 했다. 애니실라도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우아하고 기품 있는 귀부인다운 모습을 취했다.
“허억…… 헉…… 수…… 숨이…….”
긴장과 어지러움으로 잠시 그늘에 서 있던 제하드는 라만의 부축을 받으며 길레이드의 옆에 왔다. 약도 몇 개나 먹었는데 도저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진정하게, 제하드.”
“잘난 아들 앞에서 추태를 보이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우선 심호흡부터 하세요.”
“몇 번이나 하고는 있는데…….”
제하드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에 저택의 정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길레이드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정문이 열리는 속도에 맞춰, 열을 맞춘 백사자단 기사들이 라이언하트의 깃발을 게양했다.
쿵, 쿵, 쿵. 기사들이 함께 발을 굴렀다. 가문 소속의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기사들의 발소리와 어우러졌다. 길레이드는 웅장히 차오르는 가슴이 떨리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기사들 사이를 걸었다.
활짝 열린 정문.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보였다. 길레이드는 곧장 다가가지 않고 중간에 멈춰서, 세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라이언하트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현명한 세냐 님.”
와아아! 라이언하트의 기사들과 방계의 가솔들, 본가의 시종들, 엘프들까지 목소리를 모아 함성을 질렀다.
“빛의 성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님.”
와아아! 크리스티나는 이미 전에도 라이언하트의 식솔로 와 있었지만, 그럼에도 똑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ㅡ 라이언하트의 혈사자.”
와아아아! 이번의 함성은 세냐에 대한 함성보다도 컸다.
“이 시대 유일한…… 드래곤 슬레이어.”
만약 카르멘이 오늘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대사는 그녀의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이 자리에 카르멘은 없었다. 그렇기에 길레이드는 민망한 기분을 느끼면서, 직접 저 대사를 읊어야만 했다.
해야 할 대사였기 때문이다. 현명한 세냐. 그녀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인 그녀도 모두의 칭송을 받아야 할 존재다.
하지만ㅡ 이곳은 라이언하트의 영지. 지금 이 자리에서, 현명한 세냐와 성녀보다 칭송을 받고 주목을 받아야 할 것은. 라이언하트의 미래, 아니, 현재를 이끌어 갈 젊은 영웅.
카르멘이 붙인 이명은 혈사자.
세상이 부르는 이름은 용사.
그리고 오늘부터 하나의 이름이 더 붙으리라.
‘드래곤 슬레이어’.
ㅡ오오오오오!
라이언하트의 성씨를 가진 모두가 감격에 차 함성을 질렀다.
드래곤 슬레이어! 이 얼마나 멋진 울림이란 말인가? 300년 전의 전쟁시대에도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린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의 역사에서 드래곤 슬레이어란, 전쟁시대 때 수많은 드래곤을 학살한 멸망의 마왕과 유폐의 마왕을 칭하는 이명이었다.
인간은 드래곤을 죽일 수 없다. 드래곤은 인간이 사냥할 수 없는 존재다. 세상에 있어서 그것은 절대적이라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인간이, 드래곤을 죽이는 것에 성공했다.
평범한 드래곤도 아니다. 유일하게 타락한 드래곤. 전쟁시대부터 악명을 떨쳐 온 마룡 라이자키아.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조차도 죽이지 못했던 그 사악하고 오래 묵은 괴물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라이언하트의 후예가 토벌한 것이다.
“드래곤…… 슬레이어……!”
유진은 어깨를 덜덜 떨며 내뱉었다.
라이자키아의 죽음은 라이언하트까지 와서 숨길 생각은 없었다.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전리품으로 써먹을 생각이기도 했으니, 결국은 라이자키아의 죽음은 라이언하트를 넘어 세상까지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라니. 뭐? 혈사자? 유진은 목소리를 들은 귀를, 그리고 앞을 보고 있는 눈을 의심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도 아니고, 가주 길레이드가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이 유진을 경악시켰다.
“혈사자!”
“드래곤 슬레이어!”
수백 명이 부르짖는 외침. 유진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혈사자도, 드래곤슬레이어도. 모두 다 유진은 듣고 싶지 않았다. 대체 왜 저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별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우둔한 하멜보다는 낫잖아요.]
망토 안의 메르가 킥킥 웃으며 놀려댔다. 유진은 당장에라도 메르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않은 것은…… 내심 메르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둔한 하멜.
혈사자 유진.
드래곤 슬레이어 유진.
곱씹어보니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름 위엄도 있지 않은가. 짝짝짝. 유진은 요란한 박수갈채 속에서 어깨를 활짝 펼쳤다.
본가에 도착하기 전. 세냐는 현재의 라이언하트에 대해서 유진과 메르에게 이야기를 들어두었다.
가주 길레이드 라이언하트. 유진의 양부. 저 뒤에 선 귀부인이 애니실라일 것이고…….
‘……저 아저씨가…… 유진의 친부인 제하드?’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중년의 남자. 유진과 닮은 것이라고는 잿빛 머리카락과 금색의 눈동자뿐. 주름진 얼굴에 패기라고는 보이지 않고, 그 베르무트의 후예일 텐데도, 저 육체에 무예의 소양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바로 앞에 선 가주는 얼굴만 봐도 근엄해 보인다. 반면에 저쪽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제하드는 어떤가? 술자리 한 번이면 친해질 수 있을 것처럼 쉬워 보였다.
“성대한 환영에 감사해요. 라이언하트의 가주.”
세냐는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백 명의 기사들. 과연, 저 기사들은 베르무트의 후예라 할 만했다. 드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라이언하트의 깃발…… 그것을 보고 있자니 세냐는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라이언하트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백 년 전. 베르무트가…… 죽었을 때. 세냐는 검은 예복을 입고서 라이언하트에 방문했다. 아니스가 보는 앞에서…… 모론과 함께 베르무트의 관 앞에 섰다. 살짝 연 관에서 죽은 베르무트의 얼굴을 보았고, 모론과 함께 울었다.
미사가 끝난 뒤. 모두와 함께 관을 가지고, 우클라스 산맥의 흑사자 성으로 이동했다. 베르무트가 먼저 만들어두었다는 무덤. 그곳의 신전에 베르무트의 관을 안치했었다.
“……이렇게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세냐는 먼 기억을 더듬으면서 씁쓸히 웃었다. 조금 더 멀리 보니, 정원 한복판에 선 베르무트의 동상이 보였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하멜의 동상이 있었다. 사막의 지하무덤에 있던 동상. 베르무트와 싸우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부서지지 않도록 신경 썼던 그 동상이, 베르무트의 옆에 서 있었다.
그 광경에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코가 시큰거리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울음을 참았는데.
“세냐.”
작은 목소리의 중얼거림.
기사들과 떨어진 곳. 엘프들 사이에 서 있는, 탁한 녹색 머리카락과 뺨에 흉터를 가진 엘프.
시크나드. 그를 보았을 때, 세냐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세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시크나드를 향해 다가갔다.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은 세냐의 앞을 가로막지 않고, 물러서서 길을 열어주었다. 시크나드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세냐에게 다가왔다.
“오라버니.”
세냐는 울면서 시크나드를 끌어안았다.
귀환
세냐와 시크나드가 눈물 어린 재회를 맞이하는 중에, 유진은 자신에게 꽂히는 많고도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다. 먼저 말해온 사람은 없었지만, 저 시선들이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는 유진도 잘 알았다.
“……으흠…….”
유진은 낮게 헛기침을 하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마주친 시선. 길레이드도 유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근엄함 얼굴이던 길레이드조차도 곧 보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꿀꺽 침을 삼켰다.
“자, 자.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잘 알겠으니까, 다들 뒤로 좀 물러서 주세요. 이게 좀 많이 크거든요.”
곧 충분할 만큼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유진은 대충 공간을 가늠해 본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망토를 아예 벗고서, 바닥을 향해 가볍게 툭툭 털었다.
ㅡ쿠우웅!
펄럭이는 망토의 안쪽에서 드래곤의 거대한 사체가 떨어졌다. 본가의 저택보다도 커다란 사체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비명 섞인 함성을 내질렀다.
“잠깐, 잠깐. 가까이 오지는 마세요. 이미 죽었으니 갑자기 살아날 일은 없는데, 다들 알다시피! 이건 마룡 라이자키아의 시체이잖습니까? 아직 정화가 제대로 끝나지 않아서, 괜히 건드렸다가 이상한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망토 안에서 탈이 나지 않도록 봉인만 해두었을 뿐. 라이자키아의 덩치가 커도 너무 큰 탓에, 사마르를 이동하는 동안에는 정화를 진행하지 못했다.
“드래곤!”
“진짜, 진짜 드래곤이다!”
라이언하트는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무가다. 본가가 아닌 방계일지라도, 라이언하트의 성씨를 달고 성장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기사나 군대의 장교가 된다.
그렇다 보니 라이언하트의 사람들은 어린 나이부터 몬스터를 접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중에서도 흑사자 기사단에 소속되면 기본적으로 와이번도 한 마리씩 지급받는다.
여태까지 보았던 몬스터들. 드래곤에 가장 가까운 몬스터라는 와이번.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드래곤이란 종 자체에게 얼마나 큰 실례인지. 지금 라이자키아의 사체를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실감했다. 이미 죽은 사체라지만, 저것에겐 절대로 몬스터라 할 수 없을 만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정화가 끝난다면.”
유진은 라이자키아의 머리 위에 털썩 앉아 입을 열었다.
“이 커다란 전리품은, 당연히 라이언하트 본가의 재산이 될 겁니다. 저 혼자서 독차지하기에는 너무 크니까요.”
드래곤하트는 박살 났고, 피도 쓸 수 없다. 그럴지라도 드래곤의 사체에서 소재로 쓸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았다.
비늘, 가죽, 뼈, 이빨 등. 라이자키아의 덩치를 생각한다면, 백사자 기사단과 흑사자 기사단 전원을 무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갑옷에 무기…… 아슬아슬하게 될 것 같은데. 뭐 부족하면 주요 부위에만 사용하면 되는 거니까.’
이 정도면 여태까지 벌였던 소란, 아니, 앞으로 벌일지도 모르는 소란들에 대한 면죄부로 충분하리라.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애니실라의 표정을 살폈다.
안주인다운 품위에 신경 쓰는 애니실라는, 표정관리가 힘들 때에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애니실라는 그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을 떡 벌리고서 라이자키아의 사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본가 숲에서 살고 있는 엘프들의 다양한 생활비. 정부에 잡히는 세금 등. 애니실라의 머릿속에 쌓여 있던 앙금이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실 마냥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당장 대륙을 뒤져본들, 드래곤을 소재로 다룰 수 있는 장인이 존재나 하겠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드워프 쪽에서 찾아봐야 할 텐데, 드워프일지라도 드래곤을 소재로 다뤄본 경험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문제는 당장 유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마땅한 장인을 섭외하는 것은 길레이드나 애니실라가 알아서 할 문제이니, 유진은 그냥 전리품을 보여주며 가문의 축복이니 뭐니 하는 찬사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혈사자!”
“드래곤 슬레이어!”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
“용사!”
……지금처럼 말이다.
아까만 해도 저 외침들이 듣기 민망하고 괴로웠는데, 계속 듣다 보니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칭찬은 곰도 춤을 추게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우선 유진은 곰처럼 미련하지도 않았다. 그는 벙긋 지어지려는 미소를 진정시키고서, 스스로 생각해도 썩 괜찮은 표정을 지었다.
주먹이라도 위로 번쩍 들어야 하나? 아니, 그런 제스처까지 했다가는 나중에 분명 이불을 걷어찰 것 같았다.
그래서 유진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함성을 듣고, 이쯤 되었다 싶을 때 라이자키아의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아…… 보십시오, 시스터. 지금 유진 님의 미소를 보셨습니까? 그야말로 세상을 구할 용사에 어울리는 미소였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서 생각했다. ……아니스는 이례적으로 크리스티나의 말에 침묵했다.
아니스는 자신이 하멜을 콩깍지가 씐 눈으로 보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씩이지만 크리스티나의 폭주가 강해지는 것만 같았다…….
살아온 환경 때문에, 크리스티나의 성격에는 본래 냉소적인 부분이 적잖아 있었다. 아니스도 같은 환경에서 자랐기에 크리스티나가 가진 냉소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진에게 구원을 받은 이후, 크리스티나는 유진에 관해서는 머릿속이 꽃밭이 되었다. 밝고 예쁘기만 한 꽃밭이 아니다. 몸을 공유하는 아니스의 영향을 받은…… 마냥 밝고 예쁘지 않은 음습하고 음험한 꽃밭.
아마 그것은 크리스티나가 타고난 천성 중 하나일 것이고, 아니스와 닮은 점이기도 했다.
문제는, 크리스티나의 음습하고 음험한 시선과 욕망이 점점 아니스의 상상을 뛰어넘기 시작한 점. 아니스는 자신이 괴물에게 욕망과 의지를 깨우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저 나이를 먹고…… 부끄러움도 모르는가.”
시크나드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유진이 300년 전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유진이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을 즐기며,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으로 구는 것이 조금은 한심하게 보였다.
“세냐. 네가 보기에도 하멜이 너무 흥에 취한 것 같…… 표정이 왜 그런 것이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오라버니.”
아롯에서 세냐는 지금이 유진보다 훨씬 더 흥에 취했었다. 수천수만의 군중 앞에서 환호성을 즐기며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했고, 마탑과 길드를 순회하며 지금 시대의 마법사들과 만날 때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과시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시크나드의 말에 가슴이 쿡쿡 찔렸다.
“마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몸은 정말로 괜찮아?”
유진에게 시크나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냐가 기억하는 시크나드와의 마지막 만남은, 전쟁이 끝난 후. 세계수 앞에서 벌인 엘프의 위령제 때였다.
본래부터 엘프는 번식력이 높지 않아 수가 잘 늘지 않는데, 300년 전의 전쟁에서 너무 많은 엘프들이 죽어버렸다.
광란의 마왕 휘하, 나찰공주 아이리스가 이끌던 다크엘프 병대가 벌인 살육.
아이리스 본인이 엘프 레인저 출신이기도 하고, 그녀가 이끌던 다크엘프들은 엘프의 습성을 너무 잘 알면서 엘프가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으로 엘프를 사냥했다. 숲을 통째로 불태우고, 엘프를 인질로 잡고, 고문하고, 잔혹하게 죽이고서 그 시체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왜 아이리스를 죽이지 않는 거냐.
왜 원수를 갚지 않는 거냐.
위령제에서 많은 엘프들이 세냐에게 그것을 물었다.
당연히 세냐도 아이리스를 죽이고 싶었다. 광란의 마왕은 죽였지만, 아이리스와 오보론은 놓쳐 버렸다. 수인족인 오보론이야 세냐가 알 바는 아니었지만, 아이리스는 세냐에게 있어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였다.
하지만 그 시대에서 세냐는 섣불리 아이리스를 죽이러 갈 수가 없었다.
유폐의 마왕이 자비를 베풀었고, 베르무트가 간신히 얻어낸 평화. 그렇게 전쟁이 끝났는데, 세냐가 헬무드에 쳐들어가서 아이리스를 죽여 버린다? 세냐는 도저히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참았다. 죽이고 싶지만, 다음에. 세냐 본인이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야말로 아이리스를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그 확고한 의지에 위령제의 엘프들도 납득해 주었다.
시크나드도 그 순간에는 납득했었다. 하지만 엘프는 너무 오래 산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시크나드는 여전히 젊었고, 전장의 꿈을 꾸었으며, 아이리스에게 죽은 친구들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래서 엘프의 숲을 나왔다. 아롯에 있는 세냐를 만나러 가지는 않았다. 복수심과 증오만을 가지고서 헬무드로 향했다. 가능의 여부는 따지지 않았다. 그냥, 아이리스를 죽이고 말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찼을 뿐이다.
숲을 나오지 않았다면. 시크나드가 마병에 걸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마병에 걸린 뒤에도, 시크나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수백 년 동안 사마르 대수림을 떠돌아야만 했다.
세냐가 대수림의 위치를 감춰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관해서 세냐는 시크나드에게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조금씩 나아질 병이 아니기는 하지만,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시크나드는 세냐를 갓난아기 시절부터 보아왔다. 피는커녕 종족조차 다르지만, 시크나드는 세냐를 여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냐가 죄책감을 갖는 것에 오히려 괴롭고 미안해서, 보란 듯이 빙긋 웃어주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틀림없이 나을 거야. 모든 마왕을 죽이고 난 뒤에도 그 병이 남아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리스. 그 배신자 엘프도 죽여 버릴 거고.”
세냐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크나드는 얇게 뜬 눈으로 세냐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폼이란 폼은 다 잡아대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면서도, 세냐의 얼굴에는 비웃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세냐. 너 설마, 아직도 하멜을?”
“오오, 라버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세냐는 화들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런 반응에 시크나드의 눈동자는 더더욱 차갑게 식었다.
세냐는 수백 년 전부터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노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관계라면 모를까. 세냐와 동료들과 얕지 않은 관계를 형성했다면, 제아무리 눈치가 없는 놈일지라도 세냐가 하멜을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정작 하멜 그 멍청이는 몰랐던 모양이지만…….’
시크나드는 얇게 뜬 눈으로 세냐를 응시했다.
300살의 나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어마어마한 나이겠지만, 엘프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시크나드는 자신의 여동생이 아직 한창때의 젊은 나이이며, 엘프와도 견줄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뿐인가? 세상이 말하기를 현명한 세냐. 이만한 조건의 여자가 또 있을까?
반면에 하멜은 어떤가. 300년 전에 죽은 놈. 다시 살아나기도 했고…… 죽기 전에도 장점이 가득하던 놈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환생하고서도 장점이 더욱 많아졌다. 가문의 위세, 본인의 실력, 거기에 외모적인 부분까지!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시크나드는 세냐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저 우둔한 멍청이는 300년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세냐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세냐도, 지금 모르는 척 일관하는 태도를 보니 유진에게 마음을 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짧은 순간. 시크나드는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개인적인 바람으론, 세냐는 하멜 말고 다른 좋은 사람과 맺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시크나드가 예전에 하멜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단지 어딜 내놔도 꿇리질 않을 여동생은 저깟 멍청한 망나니에게 넘기고 싶지 않을 뿐.
하지만 그것은 시크나드 개인의 바람일 뿐. 이 수백 년을 살아온 엘프는, 이런 문제에서는 오라버니인 자신의 바람보다 여동생의 바람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내가 도와주마.”
“으…… 응?”
“세냐. 네 성격이라면, 아직까지 하멜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했을 것 아니냐. 그러니 내가 도와주도록 하마.”
짧은 순간에 시크나드가 많은 생각을 하였듯, 세냐의 머릿속에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우선 오라버니가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고? 이미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입맞춤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어가 중요한가? 세냐는 시크나드의 ‘도와주겠다’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 말은 즉, 절대적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아군이 생긴다는 점 아닌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늑대다.
메르는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라이언하트에서 얼마나 교활한 짓을 하였는지 알려주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성녀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의 자잘한 부상을 매일 치료해 주면서 호감을 잔뜩 쌓았다지?’
라이언하트 본가. 현명한 세냐라는 이름은 이곳에서도 강력하겠지만…… 300년 살아온 대마법사와 21살 청년과의 관계가, 과연 어떤 눈으로 비칠까?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은 자기네 시조의 전우보다 20대의 파릇파릇한 성녀가 유진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특히 세냐 정도의 마법사에게 있어선, 정말로 나이는 숫자일 뿐이었다. 이렇게 의식한다는 점에서부터 단순히 숫자란 의미는 아닐 테지만, 세냐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으으…… 흠…… 오라버니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라버니가 절 도와준다는데, 동생인 제가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않나?”
“그렇다면 지금 당장 도와주마. 네가 하멜을, 아니, 그 이름은 모두 앞에서 밝힐 수 없지. 그러니까…… 네가 유진을 좋아한다고 말이다.”
엘프는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세냐는 그 사실을 절감했다.
“미친 거 아니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오라버니. 그냥, 그냥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다음에 부탁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마.”
세냐는 재빠르게 쏘아붙여 시크나드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 * *
커도 너무 큰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다시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뒤에 유진과 크리스티나, 세냐는 모두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본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은 또 왜 그러십니까?”
“내…… 내 얼굴이 뭐 어쨌다는 게야?”
“사흘은 똥을 참고 있는 얼굴 같아서 그럽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에게 꼭 그런 얼굴을 보이셔야 하겠습니까?”
가볍게 던진 농담에 제하드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는 얄미운 미소를 실실 지어대는 아들을 흘겨보면서도 세냐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였다면 어디서 아버지를 놀려먹는 것이냐며 한마디 쏘아붙이기라도 할 텐데, 지금 제하드가 그러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세냐의 존재 때문이었다.
“제하드 라이언하트 님.”
세냐는 제하드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슬쩍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세냐는 유진 쪽으로 어깨를 기대면서 제하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의 후계자. 유진 라이언하트를 훌륭히 키워낸 것은 전적으로 제하드 님의 노고였다고 들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아들을 키우는 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
“당신의 자식을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을 지원해 주셨잖습니까?”
“크흠…… 그거야…… 예…….”
칭찬에 제하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사실, 제하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그리 못난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내와 사별한 후, 제하드는 자신의 모든 생활과 눈높이를 갓난아기인 유진에게 맞추고서 키워왔다.
‘……내 아들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뛰어나기는 했지만…….’
직접 검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목검이나마 필요로 한다면 쥐여주었다. 도움 안 되는 검술 스승이라도, 유진이 구해달라고 한다면 곧장 구해다 주었다.
세냐는 제하드의 얼굴에 어린 긴장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아들 칭찬이 정답이었다.
귀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라이언하트에 와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본가의 응접실. 길레이드는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의 앞에 앉아서 우선 저렇게 대화를 열었다.
거기서부터는 일반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갔다. 유진을 후계자로 삼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너무 훌륭한 아이라서 후계자로 삼지 않을 수가 없더라니까요.
“부디 말씀을 편히 해주십시오.”
평소의 세냐라면 저 말에 거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길레이드가 권하기 전에 세냐가 알아서 말을 놓았을 것이다. 세냐 본인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세냐가 300년 전부터 살아온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길레이드와 파릇하고 청초한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냐. 겉모습이 어쨌건, 세냐에게 있어 길레이드는 베르무트의 까마득한 후손이다.
‘그치? 너희도 그게 좋겠지? 내가 너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조인 베르무트. 그 녀석이랑 야, 야 거리던 사이인데. 어휴, 체면 차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 얘.’
……마음 같아서는 저렇게 말하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라이언하트에서는 그래선 안 된다.
그 이유가 뭐고 하니, 순전히 옆에 앉은 유진 때문이었다.
“으흠…… 아니오, 괜찮습니다. 저는 제 벗인 베르무트를 존중하는 만큼, 후예인 라이언하트, 당신들을 존중합니다.”
세냐는 내숭을 떨었다. 유진의 양부, 양모, 친부한테 말을 놓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별로 좋은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세냐는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버님, 어머님, 이런 호칭에 적잖은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내숭을 떠는군요.]
‘저런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합니다.’
[나잇값을 못하는 것이 귀엽다는 겁니까?]
아니스가 되물었고,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와 심상적으로 연결된 아니스는, 지금 크리스티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를 알았다.
무서운 아이……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검은 속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길레이드는 세냐의 대답에 감탄했다.
곧 대화가 재개되었다. 길레이드는 세냐의 업적과 명예를, 애니실라는 세냐의 기품과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제하드는 아들인 유진을 어여삐 여기고 보살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라이언하트에 계시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네, 꼭 그래 주세요.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길레이드와 애니실라가 웃으며 말했다.
“계속 있을 건데요?”
세냐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예?”
“계속?”
“음? 하하, 계속이라니…… 응?”
길레이드와 애니실라, 제하드의 시선이 일제히 세냐에게 향했다. 세냐는 그 시선 속에서도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계속이요. 이야, 베르무트가 살아 있을 때 왔을 적에도 느낀 건데, 저택이 참 좋아요. 터를 잘 잡았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저택은 세냐가 항상 머릿속에 두었던, 이상적인 저택의 모습과 흡사했다. 아롯에 만든 세냐의 저택은 수백 년이 지나고 관광지로 개발되어 버렸지만, 이 저택은 30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저택 옆에는 넓은 숲이 있다. 강물은 흐르지 않지만 대신 호수는 있다.
“제가 후계자한테 들었는데요. 이 저택, 크기는 한데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면서요? 본가의 사람이라고 해봐야 앞에 계신 가주 부부님들. 그리고 제하드 님. 후계자와 남매사이인 쌍둥이. 그리고 나머지는 저택의 시종들.”
기사들의 숙소는 따로 있으니, 이 저택에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세냐는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저는 아무 방이라도 상관없어요. 아, 다시 생각해 보니 꼭 저택에 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네요. 제 가족과 엘프들이 숲에서 살고 있으니, 저도 숲에 오두막 하나 짓고 살아볼까 싶기도 해요. 그 왜, 마녀 하면 숲속 오두막에 사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세냐는 스스로 말하고서 호호 웃었다. 늦게나마 먼저 정신을 추스른 것은 애니실라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미소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세냐 님……? 아롯은 세냐 님이 돌아오시는 것을 200년 동안 기다려왔는데, 아롯에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으신 겁니까……?”
“당연히 괜찮죠. 그 이야기는 이미 아롯을 떠나기 전에 다 해결하고 왔답니다. 사실 제가 여기 있겠다는데 누가 저에게 뭐라고 말을 하겠어요?”
세냐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논리에 의거한 설득보다는 ‘힘’으로 찍어누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리 기가 센 애니실라라도, 세냐가 저렇게 대놓고 힘을 과시하는 것에는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 그렇다고 제가 멋대로 여기 있겠다는 것은 아니구요. 여러분이 안 된다고, 싫다고 하신다면 당연히 떠나야겠죠.”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원하시는 만큼 저택에 머물러 주십시오.”
“어머나…… 배려 감사해요, 길레이드 가주. 물론 저도 대가 없이 방을 차지할 생각은 없어요. 매달 충분한 방세를 지불할 것이고, 만약 라이언하트에서 마법을 익히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직접 마법을 가르치도록 하죠. 아니면 제가 직접, 라이언하트를 위한 아티펙트를 제작하거나…… 그 외에 마법적인 도움을 드릴 수도 있고요.”
그 말에 길레이드와 애니실라는 표정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세냐가 라이언하트 본가에 지내는 것을 껄끄럽게 여기는 것은, 세냐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시조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현명한 세냐. 그녀가 저택에 사는 것만으로도 본가의 모든 신경은 세냐 한 명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고, 세냐가 있는 이상 가주의 위엄도 예전만 못하게 되지 않나.
하지만. 저런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현명한 세냐가 식솔이 되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세냐가 지불하겠다는 방세는 받을 생각도 없지만ㅡ 세냐가 줄 수 있는 마법적인 도움. 그것은 일개 가문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제국의 황제조차도 공손히 부탁해 올 만큼 대단한 제안이었다.
라이언하트를 위한 아티펙트? 그것은 솔직히 상상도 잘되지 않았다. 다른 마법적인 도움이라는 것은, 가문의 영지에 이런저런 마법을 설치해 주겠다는 것인가? 그 현명한 세냐가 직접?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기사들이 지금 와서 마법에 입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라이언하트 방계에는 마법을 전문적으로 익히는 가문도 몇 개 있다. 그런 가문이 아닐지라도, 방계의 어린아이들 중에는 무기를 쥐는 것보다는 마도서와 지팡이를 쥐는 것을 꿈꾸는 아이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
길레이드는 몇 년 전에 죽은 장남을 떠올렸다.
라이언하트 역사의 수치. 앞으로도 ‘이오드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에는 경멸과 저주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길레이드는 마냥 장남을 경멸하고 저주할 수가 없었다.
15살의 혈계식. 그때 마법을 보고서 두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이오드의 얼굴이 아직까지도 길레이드의 머릿속에는 선명히 남아 있었다.
“감사합니다.”
만약 이오드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오드가 꿈꾸던 대로 마법사로 성장해 세냐를 만났다면ㅡ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길레이드는 머릿속에서 이오드의 모습을 지워내며, 세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 * *
“봐, 잘됐잖아.”
세냐는 실실 웃으며 유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당연히 잘되겠지. 네가 하겠다는데 누가 안 된다고 하냐?”
“정 싫으면 네가 안 된다고 하지 그랬어?”
“뭐 싫을 것까지야. 이 넓은 땅에 너 하나 들어와서 산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뒤를 힐긋 보았다. 해는 저물었지만 저택 쪽은 아주 밝았다. 각지에서 모인 방계의 손님들은 저택 정원의 파티를 즐기고 있지만, 정작 파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는 숲속 오솔길을 함께 걸었다.
“그래서. 어디서 지내겠다는 건데? 정말로 숲속에 오두막 하나 짓고 살 거야?”
“꽤 끌리기는 해. 그런데 꼭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저택에서도 살고 오두막에서도 살고, 그러면 안 돼?”
둘 중 하나를 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때문이었다. 세냐가 오두막에서 지내는 동안, 저 속 검은 늑대들이 저택에서 유진을 덮치기라도 한다면?
‘…….’
꿀꺽……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잠깐, 아주 살짝, 상상을 해보았다. 의외로 덜덜 떨리는 분노는 덜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앞장서서 유진을 늑대들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싶지는 않았다.
“……너…… 가끔 나를 되게 이상한…… 어…… 그런 눈으로 보는 거 알아?”
유진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가끔씩 세냐는 저런 표정이 되었다. 왠지 빙빙 회오리가 그려지는 것만 같은 눈동자로,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켜대면서 몸은 오싹오싹 떨고…… 저럴 때의 세냐의 시선을 느낄 때면, 뱀 앞에 선 개구리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이 뭐 어쨌다는 거야?”
“기분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그 말에 세냐는 얼굴을 왈칵 구기며 유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헛소리하지 말고. 내일 한가하지? 나랑 시내에나 좀 다녀오자.”
“시내는 왜?”
큰맘 먹고 먼저 권했는데. 가자면 그냥 갈 것이지 뭘 굳이 이유를 묻나 싶었다.
세냐는 유진의 얼굴을 흘려보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프로스트의 보강에 필요한 소재도 사야 하고. 이 잘난 키옐 제국의 수도도 구경해 보고 싶고. 메르가 꼭, 너랑 나랑 같이 수도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세냐는 그렇게 말하고서 크리스티나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표정으로 읽히는 감정이 너무나 희미했다.
세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셋이서만.”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리스티나가 살짝 고개를 돌려 세냐를 보았다.
두려워? 내가? 세냐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곧 세냐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크리스티나를 쏘아보았다.
“내가 뭘 두려워한다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말이 잘못 나왔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도 안 해!”
“예, 안심하십시오, 세냐 님. 저는 유진 님과 세냐 님의 평온하고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가슴 앞에 양손을 모으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 님이 부탁하신 일이 있으니 말입니다. 부디 제 몫까지 즐기고 와주십시오.”
그 커다란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정화하려면 한 달은 족히 기도를 올려야 할 것이다. 수고스러운 일이지만, 유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 크리스티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리 하겠다고 다짐했다.
부탁의 내용은 세냐도 안다. 내심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놀려먹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저 순종적이면서 배려심 가득한 대답에 오히려 세냐의 가슴 한구석에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죄책감은 죄책감이고, 세냐는 이 찬스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봉인된 동안 쟤들도 즐길 만큼 즐겼을 것 아냐?’
솔직히 말해서 뭐 대단한 것을 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내일 하루 도시를 구경하고, 한가할 때는 저택 부지의 숲이나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하지만 세냐에게는 평생 간절히 바랐던 일상이기도 했다.
물론 그 일상에 마냥 흠뻑 취할 수는 없었다. 아리아르텔에게 받은 드래곤하트를 프로스트에 결합하는 작업도 해야 하고, 이 저택의 식솔이 되었으니 토지에 마법 결계 정도는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뿐인가? 저 먼 북쪽, 루하르 왕국에서도 끝자락에 있다는 모론도 만나러 가야 한다.
그리고 남쪽 바다에서 해적질을 하고 있다는 아이리스. 하멜의 시체를 가지고 개 같은 장난질을 한 아멜리아라는 흑마법사. 헬무드의 마족과 마왕들. 그리고, 베르무트.
‘시간은 많지만 여유는 부릴 수가 없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과감한 승부수가 필요하다.
세냐는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메르를 보았다. 메르 역시 고개를 들어 세냐를 쳐다보았다.
같은 빛깔의 녹색 시선이 교차했다. 직접 목소리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둘은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일의 테마는 가족이다.
* * *
애니실라는 평소처럼 동트기 직전의 새벽부터 일어나, 명문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었다.
밤까지 이어진 연회는 깔끔하게 파하였고, 각지에서 찾아온 손님들도 모두 다 돌려보냈다. 오늘부터 라이언하트는 다시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냐 님이 손님으로 와 계시기는 하지만.’
그걸 크게 의식해서는 안 된다. 라이언하트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가주인 남편이며, 이 거대한 가문을 뒷바라지하는 것은 애니실라여야만 했다.
그렇기에 애니실라는 방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새로이 각오를 다졌다. 비록 그 현명한 세냐가 식솔로 와있다 한들, 애니실라는 결코 태도를 굽히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오히려 현명한 세냐라도 이 저택에서는 애니실라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아침의 첫 번째 치장에서 애니실라는 시종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정돈되지 않는 모습을 남편 외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애니실라가 아직까지 유지하는 고집 때문이다.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화장도 하였고, 옷도 갈아입었다. 어느덧 겨울이라 바람이 차가웠다. 방 안에 갖춰놓은 옷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가벼운 외투라도 하나 걸칠 생각으로 드레스 룸에 들어왔다.
저택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어지간한 창고보다 커다란 넓이의 드레스 룸이 몇 개나 된다. 그중에서도 이 드레스 룸에는 애니실라의 옷뿐만 아니라 언젠가 시엘이 입기를 바라여 사놓은 옷들과, 메르에게 선물해 준 옷이 가득했다.
“…….”
애니실라는 드레스 룸의 문을 닫을 생각조차 잊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 잘 정리해 놓은 옷들도 죄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저…… 정리하려 했습니다.”
세냐는 화려해도 너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서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 옆에서, 세냐와 비교해도 크게 꿇리지 않을 만큼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메르가 똑같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여…… 여기서 대체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애니실라는 어이없고 당황스러워서 그렇게 물었다.
왜 이 방에 세냐 님과 메르가? 방이 어질러진 것보다, 애니실라는 지금 상황 자체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으흠…….”
세냐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어서 메르에게 괜히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메르는 헤헤 웃으며 애니실라에게 다가왔다.
“그게요, 애니실라 님, 저랑 세냐 님이랑 유진 님이 오늘 같이 시내에 외출하기로 했거든요. 저는 오늘 애니실라 님이 선물해 주신 예쁜 옷을 입고 나가고 싶었어요.”
“저…… 저도, 으흠, 저는 말입니다. 애니실라 님. 속세를 떠난 시간이 워낙 길어서 요즘 시대의 옷이나…… 그런 것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스타일이 멋진 애니실라 님의 옷을 한 번 살펴보려 했는데…… 저…… 저도 모르게 너무 빠져버린 모양입니다.”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메르의 옷이나 골라 줄 생각이었는데, 이곳에 갖춰진 옷들에 자꾸 마음이 끌려버렸다.
“아…… 알겠습니다.”
그 현명한 세냐가 저렇게 말하는데 누가 화를 낼 수 있겠냐만, 애초에 애니실라는 화가 나지도 않았다. 세냐가 말한 스타일이 멋지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애니실라를 기쁘게 만들었다.
“저는 이만 나가볼 테니, 편하신 대로 둘러보시지요.”
“자, 잠깐! 기왕 보신 김에, 저랑 메르를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이 방은 옷이 너무 많았다. 마음에 드는 옷도 너무 많았다. 이것도 마음에 들고 저것도 마음에 들다 보니 뭘 입어야 할지 오히려 알 수가 없었다.
애니실라는 그 사정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것이라면…… 알겠습니다. 세냐 님과 메르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일을 도와달라, 이 말씀이시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냐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애니실라에게 속삭였다.
“엄마랑 딸.”
“……네?”
“엄마랑 딸 말입니다. 제가 엄마고, 메르가 딸.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보입니다만…….”
“얼굴뿐만이 아니라 옷까지 갖춰 입고 싶은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요구란 말인가?
애니실라는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가 아주 안 되지는 않았다. 수백 년 만에 만난 사이이고, 메르는 귀여우니까. 심지어 메르는 세냐의 어린 시절을 투영해 만든 사역마라 했으니, 정말로 딸을 대하는 애착이 있는 것이리라.
“유진 님 옷도 골라야 하지 않을까요?”
“쉿.”
“세냐 님이 엄마고, 제가 딸이고, 유진 님이 아빠면 완벽하잖아요. 그에 맞춘 옷을…….”
“쉿!”
세냐는 화들짝 놀라서 메르의 입을 틀어막았다.
애니실라는 옷을 고르다 말고 굳어버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들은 얘기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엄마? 딸? 아빠? 유진이? 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애니실라는 당황해서 세냐와 메르를 쳐다보았다.
세냐는 여전히 메르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가, 애니실라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냐 님은 용기가 부족해요. 어차피 나중에 들킬 거 먼저 선언해 두는 편이 도움을 받을 수 있잖아요.]
얼굴이 빨개진 세냐의 머릿속에서 메르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귀환
“…….”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끔벅거렸다.
“뭘 그렇게 봐?”
“유진 님이 보기에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요?”
이상한 점? 없다. 넋을 놓고 보게 된 것은, 세냐와 메르 둘의 옷차림이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어때요? 저랑 세냐 님이 엄마랑 딸 같나요?”
“어…… 굳이 말하자면 엄마랑 딸이라기보다는 자매 같아 보이기도 하고…….”
세냐의 외모는 메르 정도의 딸을 두었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젊다. 그래서 유진은 느낀 심정을 솔직히 말해주었는데, 메르와 세냐는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세냐는 양 뺨을 살짝 붉히며 부끄러워했는데, 그 이유야 당연히 유진에게 ‘어려 보인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진이 직접 저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세냐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백 년 전부터 유진, 하멜의 말이나 태도를 긍정적이고 제멋대로 해석하곤 했었다.
메르는 두 눈을 얇게 뜨고서 유진을 쏘아보았다. 메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엄마와 딸처럼 보인다는 말이었지, 자매처럼 보인다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매처럼 보인다는 말도 세냐와 닮았다는 뜻이기는 한데, 메르가 이번에 주목하기로 둔 포인트는 외모의 유사성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외출의 테마는 가족. 세냐는 반드시 엄마여야 했고, 유진은 반드시 아빠여야 했다…….
메르는 여전히 두 눈을 얇게 뜨고서 유진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질렸어요.”
“뭐?”
“유진 님의 옷차림 말이에요. 옷걸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유진 님은 왜 항상 똑같은 옷만 입어요?”
“뭐라고!”
유진은 진심으로 억울함을 느꼈다.
“똑같은 옷이 아니야. 다 조금씩 다르다고.”
“결국 라이언하트 제복이잖아요.”
“야! 내가 가문의 제복을 입는 것이 뭐 잘못된 일이야?”
가장 큰 이유를 말하자면 편의성 때문이다. 상 하의가 맞춰진 제복은 그것만으로도 불필요한 고민을 없애준다. 유진은 전생에도 오늘 옷을 뭐 입어야 할지를 고민해 본 적이 없었고, 마경은 그딴 고민을 해도 될 땅이 아니었다.
“나는…… 나는 저 옷도 마음에 들어.”
세냐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메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을 말죠.”
역시. 애니실라에게 부탁하여 유진의 옷까지 골라달라고 할 걸 그랬다. 그 순간에 세냐가 과감하게 부탁했다면 애니실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메르가 평소대로 혀 짧은 소리라도 내며 애교를 부려줬다면, 오히려 애니실라를 확실한 아군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세냐 님은 중요할 때에 망설이신다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본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메르는 찌푸렸던 눈가를 펴고서 유진과 세냐 사이에 섰다.
덥석.
양쪽으로 뻗은 손이 유진과 세냐의 손을 잡았다. 메르는 자신이 둘 사이를 연결한 것에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자, 가요.”
세냐는 유진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유진은 지금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메르와 손을 잡는 것?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이제 와서 다른 사람 눈치를 볼 것이 어디 있나? 메르의 반대편 손을 세냐가 잡고 있는 것?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 태연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냐는 유진의 얼굴을 흘겨보았지만, 뭐라 쏘아붙이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세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메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택의 뒤편. 그곳에는 거대한 라이자키아의 시체가 웅크린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이른 아침부터 시체의 정화작업에 착수했는데, 둘은 저택을 나오는 유진을 보고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았다.
‘세냐 님이 작정을 하셨군요.’
[예, 그런 모양입니다. 아주 도시 전체에, 아니, 이 제국 전체에 광고를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보세요, 키옐 제국민들, 내 모습 좀 보세요. 하고 말입니다.]
‘뭐, 그만큼 과시하고 싶으신 모양이지요. 그래도 이렇게 보니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메르 저 꼬맹이는 세냐가 자신의 이루지 못한 욕망을 그대로 실현한 것이니, 저렇게 셋이서 함께 선 것이 어울릴 수밖에 없지요.]
둘은 그런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유진 일행이 크리스티나에게 다가왔다. 정문으로 나가서 마차를 타는 것보다는, 숲 안쪽의 워프게이트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세냐는 긴장한 얼굴로 크리스티나의 반응을 살폈다. 이 젊은 연적의 입에서 주접이라는 평가라도 나와버리면 가슴에 크나큰 상처가 될 것만 같았다.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그렇게 말해주었다. 진심이기도 했고, 크리스티나는 세냐와 노골적인 적대관계가 될 생각이 없었다. 기왕이면 살살 어루만져서 확실한 아군이자 공생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 그래? 그렇지?”
크리스티나가 파악한바, 세냐는 칭찬에 약했다. 지금도 보라. 대단한 칭찬도 아니고 잘 어울린다는 말뿐인데, 세냐는 헤벌쭉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네. 누가 보아도 지금 세냐 님과 유진 님, 메르 님은 가족으로 보일 겁니다.”
“커흑.”
그 말을 듣고서야, 유진은 지금의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당황하고 부끄러워 메르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메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진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그 모습을 방긋 웃는 눈으로 보고선 까딱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어…….”
크리스티나를 두고 가는 것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냥 두고 가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티나에게 라이자키아의 정화를 맡겨놓은 상태 아닌가.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지금 계속 마음에 두고 뒤만 자꾸 돌아보면, 지금 같이 있는 세냐에 대한 예의도 아니잖은가.
유진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에 대한 미안함은 잠시 덜어냈다.
“너희 그거 아니?”
“응?”
“무엇을?”
“아이참. 이거 누구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뭔데, 뭔데.”
“빨리 말해봐 얘.”
“에잇, 그래, 말해줄게. 너희들, 현명한 세냐 님이 누구인지 알지?”
숲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머지않은 수풀 너머에서, 갑자기 나타난 3명의 엘프가 뜬금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뻣뻣이 굳은 목소리. 마치 대본을 읽는 것만 같은 대사. 본인들도 민망한지 웃음을 참는 얼굴…….
“현명한 세냐 님! 당연히 알고 있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
“엘프들 사이에서 자라 마법을 배우신, 엘프만큼이나 아름다우신 분!”
“그래, 맞아. 그 현명한 세냐 님이 글쎄, 유진 님을 좋아하신다지 뭐니?”
“꺄악꺄악 꺄아악!”
“유진 라이언하트 님이라면, 바로 그?”
“그래! 바로 그분이야, 이 라이언하트 가문의 귀공자! 문무겸비의 퍼펙트하신 분!”
“혈사자!”
“드래곤 슬레이어!”
“그런 유진 님과 현명한 세냐 님이라니, 정말 잘 어울리지 않니?”
그 시점에서 유진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저리 꺼지지 못해!”
엘프들은 꺅꺅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씨근거리는 유진의 뒤에서, 세냐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식은땀을 똑똑 흘렸다.
저 어처구니없는 촌극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시크나드. 그 빌어먹을 오라버니가, 제 딴에 동생을 위한다며 저런 짓을 벌인 것이리라.
‘주…… 죽일까?’
남매, 형제, 자매가 서로에게 일방적인 살의를 품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세냐가 시크나드에게 살의를 품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으흠…… 으흠! 음. 으흐흠!”
세냐는 유진의 표정을 보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메르의 손을 홱 잡아끌면서 성큼성큼 발을 뻗었다. 메르도 가슴 깊은 곳에서 한심함과 민망함을 느끼며, 세냐가 잡아끄는 대로 유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유진도 무슨 말을 하기는커녕, 제발 말을 걸지 말아달라 주장하는 것만 같은 세냐의 등을 보고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결국 셋은 침묵을 유지하며 워프게이트로 향했지만, 도중에도 몇 번이나, 엘프들의, 우연을 가장한 수다를 지나쳐야만 했다.
* * *
이번 외출의 일차적인 목적은 프로스트를 보강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구입하는 것이다.
사실 핑계일 뿐이었다. 필요한 소재 대부분은 이미 세냐의 망토 안에 들어 있었다. 물론 세냐는 그것을 유진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잘 찾아보면 없는 소재가 한두 개쯤은 있을 것 아닌가?
꼭 자신을 납득시켜야 할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생각해 두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차피 인식저해의 마법을 쓸 거면서 왜 옷을 차려입고 나온 거냐?”
유진은 한 손에 잡고 있는 메르의 손을 조물거리면서 물었다.
수도 거리를 함께 걷고 있기는 한데, 지금 3명의 주변에는 세냐에 의한 인식저해의 마법이 발동 중이다. 덕분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3명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멍청한 자식.”
“유진 님은 바보예요.”
세냐와 메르는 의미는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유진을 흘겨보았다.
오늘 둘이 엄마와 딸처럼 옷을 차려입고 나온 것은, 누군지도 모르고 앞으로도 엮일 일 없는 행인들이 아니라 바로 유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할지라도 유진은 볼 수 있잖은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저해의 마법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누군지도 모르고 앞으로도 엮일 일 없는 사람들이라지만, 그래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수도 세이리스에서도 최고급의 물건만을 취급하는 마법 상점. 세냐는 안으로 들어오면서 슬쩍 인식저해의 마법을 해제했다.
“어서 오십…… 허억!”
맞이하기 위해 다가온 마법사 직원이 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세냐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검지손가락을 입술 앞에 붙였다.
“쉿.”
“세…… 세…….”
“쉿!”
두 번이나 말해주니, 마법사는 입을 틀어막고서 도망치듯 물러섰다.
“얼씨구.”
유진은 히죽 웃어대는 세냐의 얼굴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세냐는 그 시선을 최선을 다해 무시하며, 오른손에 잡은 메르의 손을 앞뒤로 흔들며 걷기 시작했다. 세냐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니, 메르의 반대쪽 손을 잡고 있는 유진도 보폭을 맞춰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세냐는 유명해도 너무 유명했다. 외모가 평범한 것도 아니고, 눈에 확 띌 수밖에 없는 연보라색 머리카락. 거기에 똑같이 닮은 메르의 손까지 잡고 있으니, 상점 안의 모든 시선이 세냐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러 시선들에 세냐는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자신을 칭송하는 시선이라면 으스대며 받았겠지만, 지금 향하는 시선에는 당황과 의문이 섞여 있었다. 메르의 손을 나눠 잡고 있는 유진 때문이었다.
세냐는 자신의 얼굴이 너무 붉게 물든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바로 옆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메르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무슨 상관이야?’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메르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눈으로 쳐다보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메르가 아침에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과감함.
세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슬쩍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메르와 가까이, 그리고 유진과도 가깝게 말이다.
상점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은 품질이 뛰어났고 희소한 것들도 많았지만, 세냐가 살 만한 물건은 없었다. 그래도 가게가 넓은 덕에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고, 하나하나 둘러보고 나오니 1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물건 하나 사지 않고 빈손으로 나왔는데, 상점의 모든 직원들이 문 앞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밥 먹으러 가요, 밥!”
상점을 나온 즉시 메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마침 시간이 점심을 먹을 시간이기는 했다. 하지만 유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두 눈을 얇게 떴다.
“치울까?”
“일단은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고.”
오히려 세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 살짝 짜증이 난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롯에서 그런 것처럼 이 나라에서 날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룡 기사단.’
그 노골적인 시선들은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몰래 지켜본다는 행동 자체가 유진이나 세냐의 분노를 끌어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감시자들은 아예 모습을 드러내고, 충분한 거리를 두고서 유진과 세냐를 지켜보고 있었다.
백룡의 문양을 새긴 제복. 키옐을 대표하는 백룡 기사단의 단원들. 유진은 그들에게 한 번 시선을 주고선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 지켜보는 이유는 유진도 알고 있었다. 어젯밤, 길레이드에게 황제의 요구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한번 황궁에 방문하라더니…… 저 노골적인 감시를 보면, 오늘 당장에라도 초대랍시고 유진을 황가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치워두고 싶었지만, 세냐가 저렇게 말하기도 하니 일단은 유진도 참기로 했다. 당장 배가 고픈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여서, 셋은 근처의 식당 중 하나를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세냐는 메르와 같은 자리에 앉았고, 유진은 그 맞은편에 앉았다.
“메뉴는…….”
“패밀리세트.”
메뉴판을 펼치기도 전에 세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 그 망설임 없는 대답에 메르는 감격했다는 얼굴로 세냐를 쳐다보았다.
“못 들었어요? 패밀리세트.”
“저…… 죄송합니다만 저희 가게에서 패밀리세트는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가게이기는 했다. 세냐는 설마 패밀리세트가 없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인지, 당황하여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그, 패밀리세트는 없지만 가족끼리 와서 자주 시키는 메뉴는 있을 것 아니에요? 그거로 주세요.”
세냐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는 동안, 유진이 마저 주문을 마쳤다.
“네, 알겠습니다.”
주문을 접수한 점원이 물러났다. 세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서,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네. 없어도 만들어와야지.”
“너 같은 손님을 요즘 말로 진상이라고 한다더라.”
“그게 무슨 뜻인데?”
“예쁘고 착한 손님이란 뜻이야.”
누가 들어도 눈치챌 뻔한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유진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번만 봐준다.”
느긋하니 식사를 마치고서 식당을 나왔다. 아직 저택에 돌아가기에는 한참 이른 시간이었고, 들러볼 가게와 구경할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애초에 목적이었던 마법 상점보다, 커다란 옷가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유진은 세냐와 메르가 고르는 대로 이런저런 옷을 입어보았고, 입장을 바꾸어서 메르와 세냐의 옷을 골라주기도 했다.
“…….”
그렇게 한참 서로의 옷을 골라주며 낄낄대다가, 유진의 눈에 새하얀 자켓 하나가 들어왔다.
그 투명한 흰색을 본 순간, 저 자켓을 걸친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비슷한 느낌이지만 디자인이 다른 코트도 보였다. 저 코트는 크리스티나보다는 아니스에게 어울릴 것만 같았다.
“쯧.”
세냐는 유진의 시선을 쫓고서 혀를 찼다. 뭐라 쏘아붙이지는 않았다. 유진이 저 옷에서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떠올렸듯, 세냐고 똑같았다. 그리고 둘을 저택에 두고 온 것이 은근히 신경 쓰이는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보기만 하지 말고 사다 주면 되잖아.”
“화낼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내가 왜 화를 내? 지금 넌 나랑 같이 있잖아. 선물 정도야 뭐, 나도 함께 골라줄 만큼의 여유가 있지.”
세냐는 으스대면서 유진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메르도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에 들어갔고, 기왕 가까이 온 것 확 용기를 내서 팔짱이라도 껴볼까 했지만, 막상 그렇게 해보려니 가슴은 벌렁거리고 몸은 자유로이 움직이지 않았다…….
“뭘 눈치를 봐?”
“내, 내가 뭘?”
“참나.”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선 세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실 마음이 표정처럼 평온하지는 않았다. 세냐가 이런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듯, 유진도 이런 행동이 자신답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서 민망함을 느꼈다.
‘이겼다.’
본심이 어쨌건, 세냐는 유진이 먼저 자신의 손을 잡았다는 것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는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면서, 방금 눈여겨보았던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선물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래, 저 정도 선물쯤은 얼마든지 줄 수 있지.’
양손 가득 들게 된 쇼핑백을 망토 안에 쑤셔 넣고, 다시 거리의 순회를 시작했다. 그냥 발길 가는 대로 들어간 곳이 카페였기에 가볍게 차나 한잔하고 나왔고, 뭔가를 판매하는 가게라면 굳이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구경했다.
그렇게 한참을 쏘다니다 보니 높이 떴던 해도 저물기 시작했다. 쭉 서로의 손을 나눠 잡고 흔들던 메르도, 이쯤 되니 지친 것인지 유진의 망토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슬슬 돌아갈까.”
“얌전히 가게 해준다면 말이야.”
세냐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백룡 기사단의 감시자들은 지금까지도 멀찍이서 유진과 세냐를 감시하고 있었다. 유진은 워프게이트로 돌아갈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서 감시자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부터는 말이야. 살짝 변장이라도 하고 와야겠어.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내 보라색 머리카락은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아.”
“내 머리카락도 그래.”
유진도 괜히 주목을 받고 싶지 않을 때에는 머리색을 살짝 바꾸고 나오곤 했다.
“금발은 어때?”
“너무 흔하잖아.”
“흔하니까 선택한 거지.”
세냐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살짝 들추며 웃었다.
금발, 금발이라. 유진은 머리카락이 금발로 바뀐 세냐의 얼굴을 상상해보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괜찮을 것 같네.”
뭘 해도 어울리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세냐가 들어버리면 얄미울 만큼 으스댈 것이 뻔했기에, 유진은 그 생각은 입 밖으로 뱉지 않고 삼켜두었다.
유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백룡 기사단의 기사 3명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실력도 실력이지만, 성격이 지랄 맞고 난폭하다는 것도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백룡 기사단은 나이트마치에도 참가했었기에, 저 겁 없는 청년이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에게 시비를 걸고 검을 휘둘렀다는 것도 직접 보았었다.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대뜸 쌍욕을 갖다 박을 만큼 성격이 나쁘지는 않은가. 기사들은 유진의 웃는 얼굴을 보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저 미소에 긴장이 풀리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 이유는 유진의 뒤에 있는 세냐 때문이었다.
“……백룡 기사단 2번대의 폴른이라고 합니다. 유진 라이언하트 경, 그리고 현명한 세냐 님.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폴른뿐만이 아니라 3명 모두가 백룡 기사단 2번대의 소속이었다.
‘2번대라…….’
유진은 과거 백룡 기사단과의 친선전을 떠올렸다.
2번대. 그래, 기억에 있었다. 4번대 대장인 에볼트 마기우스를 쓰러트리고 나서. 유달리 노골적으로 유진을 노려보던 기사가 2명 있었다.
1번대 대장 카리안 디아크. 그리고 2번대 대장 데어리 디아크. 유진은 쌍둥이 중에서 그슬린 피부를 가진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저희를 감시하던 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설마 절 좋지 않게 여기시는 2번대 대장님의 명령이십니까?”
“예?”
“2번대 대장 데어리 디아크 경 말입니다. 그분이 저를 좋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 같던데?”
사실이기는 했다. 몇 년 전에 있던 친선전. 고작 20살 청년에게 백룡 기사단의 대장이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친선전에 참가했던 기사 절반이 패배해 버렸다.
유진이 버릇을 고쳐야 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기는 했지만, 친선전 이후로 백룡 기사단의 쌍둥이 대장은 언젠가 라이언하트의 젊은 사자의 버릇을 고쳐놓고야 말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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