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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3

 오르투스의 위치를 특정했다. 거기서부터는 모든 것이 간단했다. 일행은 관측병과 경계병의 눈을 속이고서 오르투스가 있는 방의 문 앞에 도착했다.


셋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문을 열었다.


오르투스 하이만. 그는 집무용 책상 너머에 앉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손에 쥔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적고 있던 모양이다.


“음?”


예고 없이 문이 열린 것이다. 오르투스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3명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3명. 누구인지는 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다른 배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이곳에? 아니, 무언가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예고는커녕 노크조차 하지 않고 들어온 이유는 대체?


문을 닫는 남자…… 도 알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 잠깐, 유진 라이언하트? 키옐에 있다던 그가 왜 이곳에, 카르멘과 함께 있는 것인가?


사흘 전에 승선한 라이언하트는 3명뿐.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 그 외에 3명의 몸종이 더 있기는 했지만 그중에 남자는 없었다.


그리고…… 저 여자는 누구지? 평범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보라색 머리카락. 방긋방긋 웃고 있는 녹색 눈동자. 손에 든 마법지팡이…… 마법사?


현명한 세냐?


“대체 무슨……?”


여전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키옐에 있을 유진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가 이곳에 있는 것. 그리고 카르멘이 저들을 데리고서, 이 늦은 밤에 말도 없이 찾아온 것.


ㅡ잠깐. 말도 없이 찾아왔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이 배, 라베르시아는 마법결계가 씌워져 있다. 결계에 누군가가 접촉한다면, 무조건 오르투스와 마이스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다.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결계가 돌파되었다. 그로도 모자라서, 방문 앞에 올 때까지. 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저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었다 한들, 저만한 존재감을 가진 자들이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르투스는 강렬한 위기감을 직감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화악!


세냐의 마법이 방을 봉인했다. 유진과 카르멘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사전에 미리 정해두었다. 오르투스와 대화는 하지 않는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오르투스를 제압하는 것이다.


“이런 미친!”


말도 하지 않고 덤빌 줄이야! 대체 왜? 엑시드를 입지 않고 있는 것과, 검을 멀리 둔 것이 후회되었다. 오르투스는 경악하면서도 즉시 태세를 갖추었다.


집무용 책상을 뛰어넘었다. 만전의 상태도 아닌 지금, 저 둘과 정면에서 맞붙는 것에 승산은 없었다. 하물며 저 뒤에는 현명한 세냐까지 있지 않은가!


저들이 왜 공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목적도 모르는 이들에게 순순히 당해서는 안 된다. 소란이 커진다면 바깥에도 알려질 것이고, 궁정마법사 마이스와 지원병력이 도착할 것이다. 오르투스는 그것을 노리기로 했다.


푸확! 거대한 마나를 몸에 두른 오르투스가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카르멘보다는 유진이 약하다 판단한 것이다.


‘어쭈.’


유진은 거리를 좁혀오는 오르투스를 보고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환생 358화


카르멘 라이언하트. 전대 원로원주인 도미닉 라이언하트가 죽은 이상, 라이언하트 가문의 최강자는 그녀다.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오르투스의 선택은 이성적이고 옳았다. 아무리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하다지만, 현실을 보았을 때 유진은 오르투스의 아들보다 나이가 어렸다.


물론ㅡ 나이트마치에서 보았던 실력이 놀랍기는 했다.


하지만 헬무드의 공작, 가비드 린드먼이 작정하고 응전에 나섰다면? 과연 유진의 검이 가비드를 압박할 수 있었을까? 오르투스는 그 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며, 그러한 생각은 지금부터 흐를 찰나에서 작은 망설임을 만들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야 하나?


제압해야 하나? 아니면 죽여야 하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건 습격이다.


이유는 모른다. 당해줄 수는 없다. 갑자기 덤벼온 상대의 사정을 굳이 헤아려 줄 만큼, 오르투스는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뻗어가는 손이 마나에 휘감겼다. 닿는 것을 모조리 으깨고 부술 강맹한 마나가 파직거리며 빛을 뿜었다.


유진은 오르투스의 망설임을 알아차리고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건방진 새끼.’


감히 나를 상대로 망설여?


‘고맙다.’


얕잡아 보인 것은 불쾌하다. 하지만 나름 타당한 평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는 시무인의 대공, 퍼스트란 별명을 가진 오르투스.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를 꼽을 때에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오만해도 된다. 그리고 지금 유진에게는 저런 오만한 시선이 좋았다. 상대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오르투스의 손이 가까이 다가온다. 유진은 서두르지 않았다. 활짝 펼친 손이 얼굴을 덮으려는 순간, 유진의 움직임이 가속했다.


치직!


번개와 불꽃이 잔영을 그렸다. 상대의 모습을 시야에 모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가까웠던 거리에서, 유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르투스는ㅡ 유진의 움직임을 쫓지 못했다. 사라졌다, 쫓아야 한다. 전투에 최적화된 사고가 그렇게 흘렀으나, 오르투스는 ‘그렇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야에서 벗어났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오르투스를 정면에서 지나쳤고, 오르투스가 뻗었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확 꺾어서 부러트릴까 싶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르투스에게 덤빈 것은 유진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는군.’


오르투스뿐만이 아니다. 카르멘도 유진의 움직임을 쫓지 못했다.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늦었다. 6성을 넘어 7성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라이언하트 최강자라는 호칭은 반납해야겠어.’


신기하게도 허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르멘은 유진의 성취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유진의 힘은 곧 라이언하트의 힘이 때문이다. 카르멘은 그만큼 라이언하트를, 자신의 가문을 사랑했다.


만족감에 당장 심취할 수는 없었다. 유진의 움직임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늦었지만. 카르멘도 해야 할 일을 위해 움직였다.


짧게 꺾어 친 주먹이 오르투스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오르투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하거나, 꽂힐 충격을 줄이려 했다. 하지만 반대편 팔이 붙잡힌 탓에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응이라고는, 오러실드를 부풀리면서 반대편 팔로 몸을 감싸는 것이 고작이었다.


방어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방어태세일지라도, 대부분의 기사는 오르투스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다. 하지만 상대는 ‘대부분’이라는 범주에 들지 않는 인물이다.


콰직!


오러실드가 관통되었다. 몸통을 팔로 감쌌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카르멘의 타격은 마치 예리한 송곳과 같아서, 방어를 꿰뚫고 오르투스의 내장에 충격을 주었다.


오르투스의 몸이 옆으로 붕 떠올랐다. 이빨을 꽉 물고서 신음을 삼켰다. 즉시 마나를 폭발시키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뜻처럼 되지는 않았다. 옆에서 붙잡은 유진의 손에서 자주색 불꽃이 일어났다.


콰르르르! 오르투스의 팔이 불꽃에 뒤덮였다. 마나를 다른 성질의 마나로 억누른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출력에서부터 우위를 점해야 한다.


오르투스는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지만 불꽃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50년 넘게 수행해 온 마나가 밀리다니? 오르투스는 믿을 수가 없어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이 정도면 되겠군.”


휘둘렀던 주먹을 툭툭 털면서 카르멘이 다가왔다. 그녀는 오르투스의 반대편 팔을 잡아들더니, 유진이 하는 것처럼 백염식을 일으켰다. 서로 다른 색의 두 불꽃이 어우러지며 오르투스의 몸을 짓눌렀다.


“크르륵……!”


호흡이 버거울 정도의 압력. 필사적으로 버티던 오르투스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엑시드만…… 입었어도……!”


이런 굴욕은 처음이다. 오르투스는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 내뱉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엑시드를 입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면 이토록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쯧,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할망정 장비 핑계를 대다니…….”


유진은 들으란 듯이 이죽거렸다. 그 말에 망토 안의 메르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은 도저히 유진이 할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진도 여태까지의 많은 전투에서 항상 장비의 덕을 보지 않았던가? 심지어 장비를 쓰지 않고 싸웠다가 처참하게 패배했던 모론에게는, 무기를 쥐고 싸웠다면 결과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장황한 변명을 하기도 했었다…….


유진은 망토 속에서 들리는 혀 차는 소리를 무시했다. 오르투스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유진을 노려보았다.


“대체…… 뭐가 목적인 거냐……!”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뭐? 묻고 싶은 것? 그런 이유라면 평범하게 찾아와서 물으면 되지 않나?! 왜 이 새벽에 몰래 찾아와 나를 습격한 것이냔 말이다!”


“때로는 평화로운 대화보다 위협이 필요한 법이죠.”


그렇게 대답한 것은 세냐였다. 그녀는 쓰고 있던 모자를 뒤로 기울이면서 오르투스에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르투스 경. 하지만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


“당신은 어떤가요?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아마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당신은 제 얼굴을 보고서 경악했잖아요?”


세냐는 훗 웃으면서 보라색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겼다. 오르투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현명한…… 세냐…….”


“맞아요, 제가 바로 현명한 세냐예요.”


“대체…… 제게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왜 제게 이런 짓을…….”


“저는 300년 전부터 똑같은 것을 바라고 있답니다, 오르투스 경. 바로 아이리스, 그 다크엘프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죠.”


방긋거리던 웃음이 사라졌다. ‘아이리스’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 세냐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그녀는 얼음처럼 싸늘한 살기를 내뿜으며 오르투스를 내려다보았다.


이건ㅡ 정말로 격이 다르다. 오르투스는 진심으로 그런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심플하게 격이 다를 뿐. 대륙 최강의 기사를 말할 때에 항상 거론되는 이름이 오르투스 하이만이지만, 지금 그의 앞에서 살의를 쏟아내는 것은 300년 전부터 ‘대륙 최강의 마법사’라 누구나 인정하는 전설적인 괴물이었다.


“당신께서 바라는 것이 여제의, 아이리스의 죽음이라면……!”


격이 다르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오르투스의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지금 받고 있는 부당한 억압에 대한 분노가 오르투스의 목소리를 끓게 만들었다.


“저는, 더더욱, 습격받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국왕전하의 명을 받아 토벌대의 총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아무 문제 없이 토벌대를 이끌었습니다! 애당초 당신들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먼 키옐 제국의 라이언하트에 계셔야 할 세냐 님과 유진 라이언하트가, 왜 이곳에 있냔 말입니다.”


“당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대답한 것은 유진이었다. 그는 오르투스의 손목을 꽉 붙잡고서 으르렁댔다.


“오르투스 경. 나는 당신이 의심스럽단 말입니다.”


“의심? 의심이라고? 그거야말로 당황스러운 말이군. 유진 라이언하트. 우리 사이가, 서로에 대한 의심이 피어날 수 있을 만큼 친밀했던가?”


“의심을 꼭 친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대체 무엇이 의심스럽다는 건가!”


“오르투스 경. 당신은 아이리스와 결탁하지 않았습니까?”


대놓고 묻는 질문에 오르투스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결탁? 결탁이라고! 내가, 내가 여제와 결탁을 했냐고 묻는 것인가!”


“왜 역정을 내십니까. 그러니까 괜히 더 수상하네.”


“말을…… 조심하게……! 아무리 자네가 라이언하트의 후예일지라도, 그리고 용사일지라도! 나의 기사도르 모욕할 수는 없어!”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겁니다. 오르투스 경. 제가 은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신의 친척이 운영하는 상단이 아이리스의 덕을 보아 큰 이득을 취했다던데요?”


정보의 출처가 아이빅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이빅은 오르투스가 자신의 배후를 노리는 것이 아닐까 경계하고 있다. 여기서 아이빅의 이름을 말했다간, 오르투스가 정말로 아이빅에게 살의를 가질지도 모른다.


“거짓말은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굉장히 간단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세냐 님.”


“응, 그렇지. 나는 현명한 세냐니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에 마법을 쓸 필요도 없어. 하지만 마법을 쓴다면 완벽하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지.”


“그렇다고 하네요, 오르투스 경. 게다가 마법 말고도 쓸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저도 고문은 조금 할 줄 알고…….”


“고문? 나를, 나를 고문하겠다고?”


“오르투스 경이 진실을 말한다면 고문은 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해야 한다면, 제가 하는 것보다는 카르멘 님이 하는 편이 오르투스 경에게도 나을 겁니다.”


오르투스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서 입술을 씰룩거렸다.


흑사자는 라이언하트의 심문관이기도 하다. 해야만 한다면, 카르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오르투스를 고문하여 듣고 싶은 대답을 끌어낼 것이다.


“정말…… 억울해 미칠 것 같군……! 그래, 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아이리스를 이용해서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아이리스와 결탁하지는 않았다! 그 망할 해적년을 이용해 배를 채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란 말이다. 당장 왕가부터가 아이리스에게 뇌물을 받았고, 고위 귀족들 중 대부분도 뇌물을 받아먹었다!”


“그러고도 기사도를 모욕하지 말라 떠든 겁니까?”


“왕가가 묵인한, 돈을 받았단 말이다! 나는 아이리스를 이용했을 뿐이다!”


“어쨌든 아이리스와 거래를 한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그러니 제가 당신을 의심하는 겁니다.”


“달라! 내가 아이리스와 거래를 했던 것은, 당시만 해도 아이리스가 왕국의 통제가 가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이리스는 통제 불능이 되었고, 왕국에 칼을 겨누었다!”


오르투스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서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는 시무인의 기사며, 내가 섬기는 주군이 바로 국왕 전하시다! 나의 주군이 아이리스의 죽음을 명하셨다. 나에게 토벌대의 지휘권을 주셨다! 그것뿐이다! 그것뿐인 이야기란 말이다!”


“충성스러운 기사인 척하지 마시오, 오르투스 경.”


잠자코 듣고 있던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뚜둑! 그녀의 손가락이 오르투스의 팔을 파고들었다.


“그대는 방금 왕가도 아이리스에게 뇌물을 받았다며 자신을 정당화하였소. 그대가 섬기며 충성을 맹세했다는 주군을 가벼운 변명거리로 삼았단 말이오.”


“카르멘 라이언하트……!”


“나는 그대를 훌륭한 기사라 여겼소만, 그대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훌륭한 기사는 아니로군. 오히려 소인배에 가까운 위인이오.”


카르멘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소인배? 소인배라고? 오르투스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카르멘을 노려보더니, 대뜸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내가…… 실언을…… 하였군.”


오르투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의식해 방어를 하지 않은 덕에,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이 상황이 너무나 억울하여, 나도 모르게…… 상황을 모면코자 부끄러운 짓을 해버렸어.”


“내게는 그 변명조차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처럼 들리는군.”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면서 오르투스의 팔을 놓아주었다. 오르투스는 말없이 카르멘을 노려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이리스에게서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거래는 일절 하지 않았소. 나는, 전하께 받은 명령과…… 내 자신의 의지로 토벌대를 이끌고 있소.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토벌의 성공뿐이오.”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오르투스를 응시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믿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문제는 더 이상 오르투스에게 들이밀 의혹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빅을 통해 들은 것은, 오르투스가 아이리스를 통해 재산을 불렸다는 것이 전부다.


저 얄팍한 연결고리의 무엇을 비약해야 오르투스의 속내를 간파할 수 있을까?


간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저는 당신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틀렸다.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유진에게는 오르투스를 믿을 필요가 없었다.


“오르투스 경. 당신이 정말로, 순수하게 토벌의 성공을 바란다면. 아이리스의 죽음을 바란다면.”


아이리스가 부리는 수많은 해적들을 쉽게 상대하려면 토벌대의 전력이 필요하다. 유진은 세냐에게 힐긋 시선을 보냈다.


“이 단검을 받아주십시오.”


세냐의 손 위에서 마법의 단검이 나타났다. 사마르 대수림에서 발자크의 가슴에 꽂았던 마법의 단검. 그것이 ‘마법’으로 만든 것이라면 당연히 세냐도 만들 수 있다.


“단검……?”


“별것 아니에요.”


세냐는 웃으면서 단검을 휘둘렀다.


“이 단검에는 두 가지 규칙이 부여되어 있어요. 하나, 당신은 우리에 대해서는 우리가 허락할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다. 둘, 당신은 절대로 아이리스에게 협력하지 않는다.”


“그것…… 뿐입니까?”


“맞아, 겨우 이것뿐이에요. 간단하죠? 당신이 정말로 아이리스를 죽이는 것을 바란다면, 이 단검을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 생각해요.”


“…….”


“일단 경고는 해줄게요. 만약 이 단검을 받아들였는데 규칙을 어긴다면? 당신이 우리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예를 들어서. 아이리스에게 발설한다면? 흠, 그래 버리면 ‘아이리스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라는 규칙마저 어기게 되는 것이지만.”


“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든 것뿐이에요. 어쨌든, 네가 규칙을 어긴다면…… 이 단검은 네 심장을 찢어발길 거예요.”


심장을 찢어발긴다. 그 살벌한 이야기에 오르투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걱정할 것은 없어요. 오르투스 하이만. 당신이 진실 되고 떳떳하다면, 심장이 찢어발겨질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당신이 걱정하는, 두려워하는, 주저하는, 그런 모습들이 제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군요.”


세냐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오르투스 경, 당신은, 너는, 아이리스와 협력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단검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일 거야. 심장을 찢어발기는 가벼운 죽음은 주지 않을 거야. 나는 아이리스를 증오하고, 그년에게 협력하는 모두를 증오하니까. 오르투스 하이만. 너는 내가 그 다크엘프를 왜 증오하는지 알아?”


“…….”


“그 다크엘프는 내 가족을 죽였어. 내게 소중한 엘프들을 잔뜩 죽였어. 오르투스, 네가 아이리스에게 협력하고 있다면. 나는 널 죽이기 전에 우선 네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릴 거야. 네게 소중한 것을 모두 죽여 버린 뒤에 널 죽일 거야.”


이건 협박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다. 심증만으로 대뜸 찾아와서, 심장에 단검을 꽂으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냐가 내뱉는 말은 모두가 진실이었다. 오르투스가 정말로 떳떳하다면. 의혹이 그저 의혹일 뿐이라면. 단검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유진과 세냐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는 것? 아이리스에게 협력하지 않는 것? 고작 그것뿐인 규칙이 부여된 단검이다.


오르투스가 명령받은 대로 토벌대를 이끈다면. 내뱉던 의지대로 아이리스의 죽음을 바란다면. 단검이 오르투스의 심장을 찢어발길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오르투스는 뿌득 이를 갈면서 말했다.


공포. 오르투스는 세냐에 대해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설적인 대마법사가 쏟아낸 증오와 살의가 오르투스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잘했어요.”


세냐는 활짝 웃으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 마법의 단검은 저주에 가까울 만큼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가슴에 박아 넣을 수 있다면, 조건이 갖춰진 순간에 바로 상대의 심장을 찢어발길 수 있다. 처음부터 두 개를 만들어 동조시킨다면, 꼭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원하는 때에 상대의 심장을 찢을 수 있다.


강력한 만큼, 심장에 박아 넣을 때에는 상대의 ‘허락’이 필요하다. 상대가 허락하지 않는 한 이 단검은 심장에 자리 잡지 못한다. 비록 협박이 더해졌다 한들, 오르투스는 단검을 꽂는 것을 허락했다.


오르투스는 일그러트린 얼굴로 단검이 심장에 꽂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되었습니까?”


오르투스는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에 오르투스의 팔을 놓아주었다. 제압에서 벗어난 오르투스는 똑바른 자세로 앉으며 내뱉었다.


“단검은 내 심장을 찢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제 결백은 증명된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다면 단검을…….”


“아이리스를 죽인 뒤에 뽑을 거예요. 우리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세냐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전면에 나설 생각이 없어요. 아이리스가 우리를 알아차리면 도망치거나 숨을 수도 있으니까요.”


“신중하시군요.”


여전히 빈정거리는 말투. 세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살짝 사라졌다.


“크흠…… 세냐 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오르투스는 더 이상 빈정거릴 수가 없었다.


라베르시아


단검을 박아 넣은 것으로 찾아온 목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르투스는 진즉부터 저 무례하고 험악한 방문객들을 내쫓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만 그렇게 할 뿐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오르투스는 말없이 방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짧은 교전 중에 깊이 파였던 바닥의 잔해를 옆으로 치웠고, 넘어졌던 책상도 일으켰다. 불쾌감을 드러내는 노골적인 모습이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네. 유진. 자네는 ‘손님’이니까. 그냥 얌전히 앉아 있게.”


유진이 슬쩍 다가왔지만, 오르투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감정이 억눌려 잔잔했지만, 함께 움직인 눈동자가 칙칙하게 가라앉은 것이 아직 감정이 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긴, 당연히 그러겠지.’


무턱대고 찾아와서 몇 대 때리고, 땅에 엎어트려 제압하고, 심장에 마법의 단검까지 꽂아 넣었다.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이 불과 방금 전인데 그사이에 기분이 다 풀렸다?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그 사람에 성녀라는 별명을 넘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르투스 경.”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방구석에 널브러진 종이를 힐긋 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들어왔을 때. 그대는 굉장히 집중하여 무언가를 적고 있었는데…… 대체 무엇을 적고 있던 것이오?”


“예?”


“저기 저 종이 말이오.”


별 생각 없이 한 질문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오르투스가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르투스가 모두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는 반사적으로 종이를 손으로 덮어, 내용을 가리려 했다.


어쩌면 아이리스에게 서신을 적던 것이 아닐까? 마법의 단검을 박아 넣은 지금 와서 저러한 의심은 할 필요가 없겠지만ㅡ 카르멘은 작은 의심거리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아이리스와는 관계가 없소. 그것을 내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니오?”


“음, 관계가 있다면 그대의 심장이 찢어졌겠지. 하지만 내용은 확인해 두고 싶소.”


“빌어먹을!”


오르투스는 벌개진 얼굴로 큰 소리를 질렀다.


“일기요! 일기란 말이오! 이 빌어먹을! 내가 내 방에서 일기를 적는 것조차도 당신들에게 확인을 받아야 하는 거요?!”


“아니…… 흥분하지 마시오, 오르투스 경. 나는 단지, 그대에게 무언가 다른 비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


“비리! 비리라고?! 이보시오, 카르멘 라이언하트! 나는, 나는 당신을 무인으로서 존경하지만, 나는 라이언하트의 소속이 아니오! 당신이 나를 검열할 자격 따위는 없단 말이오!”


오르투스는 진심을 담아 외쳤지만, 카르멘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였다. 오르투스는 답답함에 숨을 씩씩 내뱉으며 방구석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내용을 펼쳐 보였다.


“내가 비리에 관련된 장부라도 적고 있는 줄 알았던 거요? 아니면 토벌대의 전력을 적에게 유출할 줄 알았소? 대체,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요!”


억울할 만도 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정말로 일기였다.


누구한테 말할 수 없는 민망한 내용이 적힌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 날씨가 어떻고, 하루 동안 무엇을 하였는지. 그리고 해적여제, 나찰공주라는 거창한 별명을 가진 수백 년 살아온 다크엘프- 아이리스와의 전투를 앞두어 느끼는 긴장과 포부 따위가 적혀 있었다.


차라리 카르멘처럼 누군가에게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해괴한 정신머리가 담긴 내용이라면 모를까…….


저 평범한 내용이 더욱 오르투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뜬금없이 오르투스의 일기를 보게 된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민망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큰 실수를 하였군. 미안하오.”


“사과하지 마시오.”


카르멘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고, 오르투스는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 그는 펼쳤던 종이를 구기듯 접어서 품안에 쑤셔 넣었다.


“이제야 온 모양이군.”


오르투스는 닫힌 문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시무인의 궁정마법사장이자 토벌대의 핵심마법사, 마이스 브리오르. 그가 호출을 받고 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똑똑.


당연히 마이스는 대뜸 문을 열지 않고 노크부터 했다. 오르투스는 유진 일행을 대놓고 흘겨보며 말했다.


“들어오게.”


마이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른 대마법사가 그러하듯, 마이스 역시 마법을 통해서 본래의 나이보다 훨씬 젊은 중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르투스 경. 이 늦은 시간에 대체 무슨 일로…….”


이야기를 끝까지 하지도 못했다.


“…….”


대뜸 소파에 앉혀진 마이스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로 현명한 세냐 님이십니까?”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마이스는 우선 그것을 물어보았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었군요. 이 강대한 마나…… 제 마법을 손짓 한 번으로 억누르고, 제게 마법의 자유를 박탈하는 실력…… 그 아름다운 보라색 머리카락과 영롱한 녹색 눈동자…….”


마이스는 홀린 눈으로 세냐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유진은 그것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대의 용병왕이란 새끼는 선배에 대한 존경심은 쥐뿔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왜 대륙의 대마법사들, 자존심이 누구보다 높아야 할 작자들은 세냐만 보면 저렇게 일관된 존경을 보이냔 말이다.


“부디 그 단검을 제 가슴에 꽂아주십시오.”


단검에 부여된 조건은 오르투스의 가슴에 꽂은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마이스는 오르투스처럼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제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열더니 가슴을 활짝 펴 보였다.


“존경해 마다치 않는 현명한 세냐 님이…… 제게 직접 마법을 써주신다니! 이것은 제 평생 자랑거리이자 술안주가 될 것입니다.”


“다 좋은데, 떠들고 싶으면 단검이 뽑히고 나서 해야 돼. 알지?”


“예, 물론입니다. 아…… 세냐 님, 부디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토벌이 끝나고 단검을 뽑아야 할 때, 뽑지 말고 조건만 바꾸어 남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른 누군가에게 발설하지 않는다. 아이리스에게 협력하지 않는다. 이 조건이 사라지고서 단검만 남아 있다면? 그렇다면 앞으로 평생 이렇게 말할 수 있잖은가.


‘이봐, 그거 아나? 지금 내 가슴에는 말이야, 그 현명한 세냐 님이 직접 만드신 마법의 단검이 꽂혀 있다네. 뭐?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하, 어디 한번 직접 봐보게나.’


그렇게 말한다면 왕궁의 모든 마법사들이 부러워할 것이 틀림없었다.


“좋아.”


세냐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을 존경하는 후배가 기념품을 하나 갖고 싶다는데, 그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이니셜도 새겨줄까?”


“오오오……!”


마이스의 눈동자에 감격의 눈물이 차올랐다. 뚱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던 유진은 일부러 헛기침을 크게 뱉으며 말했다.


“거 스승님. 시간도 늦었는데 후딱 하고 갑시다.”


“우후후, 나의 귀여운 제자가 질투를 하는구나?”


“쓰읍…… 질투는 무슨…….”


세냐는 킥킥 웃으면서 마이스의 가슴에 단검을 밀어 넣었다. 아무 발작 없이 들어간 단검이 마이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함대 전체를 마법으로 끌고 가시겠다는 말입니까?”


“응.”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합니까?”


마이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100척에 달하는 함선을, 기상조건과 바다물결을 무시하고서 마법으로 가속한다고? 마이스도 8서클을 이룩한 대마법사다. 하려면, 할 수는 있다.


지속할 자신은 없었다. 탈진할 때까지 마나를 쏟아봐야 반나절은 버틸까?


“가능하지.”


300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함선을 움직이는 동력은 인력이었다. 선원들이 노를 저으면, 마법사는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를 조정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 거의 모든 최신 함선들이 마법 동력을 사용하고 있다. 출항 전에 저장해 놓은 마나. 그리고 충전식으로 개량한 마나스톤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배를 움직이고 있다.


“동력의 마법적인 개선도 생각해 봤는데, 그 방법은 너무 오래 걸려. 그렇다면 무식하고 쉬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


함대 전체에 가속 마법을 건다. 근방의 해류를 모조리 뒤튼다. 바람을 일으켜 뒤에서 떠민다. ‘빠르게’ 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다.


세냐의 이터널홀은 예전처럼 완전하지 않다. 이 정도 규모의 대마법을 지속하는 것은 이터널홀을 더욱 손상시킬 수도 있다. 당연히 세냐도 그쪽을 경계했고, 대비책을 마련했다.


드래곤하트.


아카샤와 프로스트. 그 2개의 마법지팡이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마나의 총량은 가히 무한이라 할 수 있다.


이터널홀로 마나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에서 공급받는 마나를 통제하는 정도라면 무리랄 것도 없다. 거기에 유진과 메르, 라이미르아, 마이스의 보조도 받을 수 있다.


“영광입니다……!”


나찰공주 아이리스의 토벌. 그것만으로도 전설적인 위업이라 할 수 있을 텐데, 현명한 세냐와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까지 더해졌다. 그리고 시작부터 그들과 협력하여, 토벌대를 앞으로 전진시킬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이스는 전율했지만, 오르투스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그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마법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만…… 지금 세냐 님이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대마법사도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터무니없는 것이지요?”


“그렇죠.”


“세냐 님과 유진은 아이리스와 만날 때까지 정체를 숨긴다고 하셨지요?”


“그렇죠.”


“음…… 그렇다면…… 저걸 어떻게 납득시켜야 합니까?”


오르투스는 그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의 일정이야 총대장인 그가 조율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저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 많은 사람들한테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드래곤하트라고 둘러대면 되잖습니까.”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당장 오르투스 경의 엑시드에 드래곤하트의 파편이 박혀 있고, 왕가에도 그런 엑시드가 2개는 더 있던 것으로 아는데.”


시무인의 국보. 드래곤하트를 사용한 3개의 엑시드. 그중 하나는 오르투스가 사용하고 있고, 남은 2개는 왕가 보물고에 남아 있다.


“왕가가 정말로 아이리스 토벌에 진심이라면, 국보로 아껴뒀던 2개의 엑시드도 오르투스 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맡겼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스칼리아 공주라든가.”


“그렇…… 기는 하지. 유진. 자네의 말처럼, 국왕전하는 이번 토벌에 한하여 스칼리아 공주님께 엑시드를 하사하셨네. 그리고…… 다른 엑시드도 일단은 내가 관리하고 있지.”


“관리?”


“누구에게 건넬지 아직 정하지 못했거든. 내 아들…… 디오르를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건 너무 정에 치부한 일이라 생각했네. 그래서 토벌대 중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실력자에게 건네려 했네.”


당연히 아들을 위해 쟁여둔 것이라 생각했는데. 유진은 저 대답을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으흠…… 아이빅 경은 어떻습니까? 실력은 뛰어난 것으로 아는데.”


“그는 용병이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닐세.”


슬쩍 떠볼 생각으로 물어봤는데, 오르투스는 즉시 정색하고서 대답했다.


“그렇다면 카르멘 님은 어떻습니까?”


떠보기는 했다만, 유진에게 아이빅을 챙겨 줄 의리 따위는 없었다. 여유로운 자세로 시가를 물고 있던 카르멘은 갑작스러운 지목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예. 카르멘 님이라면 실력도 확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 말은 유진, 네가 나를 믿는다는 말인가.”


“아니…… 왜 당연한 말을…… 그럼 제가 카르멘 님을 안 믿는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나도 널 믿는다.”


카르멘은 방긋 웃으며 시가를 내려놓았다. 뭐…… 어쩌라는 거지? 유진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카르멘 경이라면…… 믿을 수 있지.”


오르투스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서 대답을 냈다.


아들인 디오르는 실력이 부족하다. 용병인 아이빅은 믿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믿고 말고를 떠나서 아이빅에게 엑시드를 빌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카르멘 라이언하트라면 믿을 수 있다.


받고서 도망칠 가능성? 애당초 국보인 엑시드에는 도난방지의 마법이 철저한 데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카르멘에게는 저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카르멘 경에게 빌려주는 것으로…… 아니, 지금 그것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잖나?”


“변명거리로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궁정마법사장이자 대마법사이신 마이스 님의 마법에, 엑시드 2개분의 드래곤하트의 힘을 보탰다. 토벌대에 참가한 마법사라고 해봐야 슬라드 용병단의 전투마법사들뿐이고, 제가 알기로 그들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6서클인 것으로 아는데. 그 정도 수준이면 의구심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내 결백은 증명되었지만, 나도 이런 염려가 드네. 만약 토벌대의 누군가가 아이리스와 결탁하고 있다면? 그리고 토벌대의 동향을 어떤 방법으로건 아이리스에게 전달한다면?”


오르투스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질문했다.


토벌대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진 것. 그 과정에서 정체 모를 대마법이 관여했다는 것. 일단 유진이 말한 대로 변명거리는 준비했지만, 있을지 없을지 모를 배신자가 의혹을 느끼고서 아이리스에게 정보를 보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에 대한 방책은 마련해 놨어.”


세냐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함대 전체를 마법으로 감싼다는 것은, 그 전체가 내 시야 안에 들어온다는 말이야. 즉, 아이리스와 내통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내 눈을 속여야 한다는 말이지.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세냐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마법 중에는 마나의 기억을 탐색하는 마법도 있다.


아가로트의 반지 같은 너무 오래된 유물은 기억을 읽는 것이 불가능하다. 애당초 세냐가 저 마법을 개발한 것은 물건 따위의 기억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법’의 기억을 읽기 위해서다.


습격이 잦았던 전장에서 은밀히 펼쳐진 마법들. 다양한 종류의 저주. 그러한 마법들에 실린 마나의 기억을 더듬어, 숨어 있는 흑마법사를 색적하여 죽이기 위한 마법이다.


만약 함대에서 누군가가 마법을 써서 외부로 소통하려 한다면. 그것은 즉시 세냐에게 포착될 것이다. 거기서부터는 간단하다. 마법을 거슬러서 상대를 찾아내고ㅡ 죽여야 한다면 죽이거나, 죽일 필요까지 없다면 입을 막거나.


‘아이리스의 권능은 말도 안 되게 편리하지만, 이런 일에는 써먹을 수 없어.’


부하의 품 안에 숨길 만한 자그마한 어둠을 만들어서, 그것을 몇 달 동안이나 유지시키고, 어둠에 서신을 넣는 식으로 소통한다? 아무리 아이리스의 능력이 300년 동안 진화했어도, 그건 불가능하다.


“새벽에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나눠야 할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유진은 세냐와 카르멘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도 사과하는군…….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는 건가?”


“어디로 돌아가기는요. 저희 배로 돌아가죠.”


“배……? 라이언하트의?”


“예.”


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오르투스는 저 대답에 여러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배…… 라이언하트의 배. 시엘과 카르멘, 디자이라. 저 3명과 함께 탔던 사람은…….


“맙소사!”


오르투스는 도달한 진실에 두 눈을 부릅떴다. 3명의 몸종. 3명의 여자.


“유진! 자네가 그 몸종들 중에 있던 것인가!”


“…….”


“맙소사, 맙소사! 자네가! 용사인 자네가! 그 유진 라이언하트가! 여장을 하고서 몰래 배에 탔다고?!”


“닥치십시오.”


유진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마경


“잘 맞는군.”


곤도르는 뻑뻑 피워대던 담뱃대를 내려놓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출항하고서 어느덧 열흘. 예정보다 항해 시간이 단축된 만큼 망치질도 서둘러야 했으나, 작업시간이 줄었다고 하여 완성도에 타협할 수는 없었다.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간 결과, 유진에게 의뢰받았던 갑옷 2개를 완성했다.


“되게 가볍네요.”


“그치? 몸 움직이는 것에도 걸리는 부분이 없어서, 입은 것 같지도 않아.”


시엘과 디자이라는 서로의 갑옷을 살펴보면서 감상을 늘어놓았다. 가슴과 배를 통째로 감싸는 형태인데도 몸을 숙이는 것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시엘은 상체를 이리저리 꺾다가, 손끝에서 검강을 일으키더니 슬쩍 갑옷 표면에 가져다 대보았다.


마나는 흩어지지 않았다. 검강은 그대로 형태를 유지하며 갑옷 표면에 부딪쳤지만, 정작 갑옷에는 자그마한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시엘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검강을 조금 더 강하게 일으켰으나, 아무리 출력을 올려도 갑옷 표면에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드래곤 중에서도 손꼽히게 오래 살아온 고룡의 비늘이야. 그 정도의 검강으로는 흠 하나 나지 않을 거다.”


“어디서 칼 맞아 죽을 일은 없겠네요.”


“멍청한 디자이라, 좋은 갑옷을 입었다고 해서 오만해져서는 안 돼. 이 갑옷이 보호해주는 것은 몸통뿐이잖아.”


시엘은 쯧쯧 혀를 차면서 검강을 흩트렸다. 그 말에 곤도르도 담뱃대를 들고서 껄껄 웃었다.


“암, 그렇고말고. 시간만 충분하다면 몸통뿐만 아니라 전신을 보호하는 갑옷을 만들 텐데, 큼, 그건 지금은 무리야.”


솔가르타 해역까지의 항해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한 달. 하지만 세냐의 마법이 더해지면서 시간이 족히 절반 가까이 줄었다.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앞으로 닷새 안에는 솔가르타 해역에 진입할 것이다.


그 시간 안에 다른 부위의 갑옷을 만드는 것은ㅡ 할 수야 있지만, 지금 곤도르에게는 달리해야 할 작업이 있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가 왼손에 낄 장갑을 의뢰했기 때문에, 당장 오늘부터 작업에 착수해야지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건에 관해서인데, 카르멘 님이 손등에 라이언하트의 문양을 새겨 달라 하셨어요.”


“문양…… 문양이라…… 끄응, 드래곤의 비늘에 문양을 새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런 섬세한 작업은 나중에, 토벌이 끝나고 나서 하겠다고 전해주게.”


드래곤의 가죽과 비늘을 써서 손가락 관절에 맞춰 움직이는 장갑을 만드는 것부터가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게다가 단순한 장갑도 아니고, 카르멘이 요구하는 것은 상대를 때리거나 붙잡아 꺾고, 할퀼 수 있는 ‘무기’였다.


여태까지 카르멘은 오른손의 헤븐 제노사이드만으로 전투를 치러왔는데, 이번 토벌에는 그것만으로는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다.


“유진 공은 잘 지내나? 얼굴 보기가 쉽지 않구먼.”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방 한쪽의 소파에서 널브러져 있던 라이미르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검댕을 벅벅 문질러 닦고선 소리쳤다.


“본녀는 은자를 위해 열흘 매일 브레스를 뿜었느니라. 본녀가 이토록 열심히 하는데, 왜 은자는 본녀에게 칭찬을 해주러 오지 않는 것인가?!”


“유진은 엄청 바빠.”


“본녀도 바쁘다! 하지만…… 하지만, 은자가 정말로 바쁘다면, 본녀는 은자의 시간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니라…….”


라이미르아는 풀이 죽어서 다시 소파에 널브러졌다.


그녀는 출항한 열흘 내내, 곤도르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른 선원들에게는 당연히 모습을 내비칠 수가 없었고, 곤도르가 작업할 때마다 항상 브레스를 뿜고 용언마법으로 도움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씩, 그나마 한가하다고 할 수 있는 메르와 크리스티나가 찾아와 주기는 했다. 하지만 유진은 단 한 번도 이 작업실에 찾아오지 않았다.


바쁘기 때문…… 인 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유진이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을 질색했기 때문이다.


“메르와 의모(義母)가 말하기를, 은자는 최근 며칠 동안 반지를 노려보고 있다고 했다.”


“의모……?”


시엘은 기묘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라이미르아를 쳐다보았다. 지금 말하는 ‘의모’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짧은 고민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의모…… 시엘은 연달아 얻어맞았던 따귀와, 밤새 훌쩍거리던 자신의 곁을 말없이 지켜주던 크리스티나의 침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는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을 만한 여인이기는 했다.


“으흠…… 그 반지에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용을 쓰는 모양이야.”


“내가 연마했을 때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만…….”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


거짓말이다. 사정은 알고 있다.


고대에 살았던 전쟁신, 아가로트의 성유물. 그 반지가 유진에게 계시를 보여주었다. 아마, 머나먼 옛날의 기억.


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들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었다. 그 고대의 전쟁신, 아가로트가 유진을 선택한 것이다.


‘이 시대에서.’


왜 아가로트가 유진을 선택했을까.


‘너만큼 전쟁에 가까운 사람은 없을 거야.’


하멜로 살았던 전생은 물론이고, 환생한 지금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의 곁에는 항상 전쟁이 있었다. 유진이 있는 곳에서 항상 전쟁이 벌어졌다.


전투가 아니다. 전쟁이다. 자칫하다가는 이 시대를 격변시킬 수 있는 전쟁. 그러한 전쟁이 격변의 ‘가능성’에서 끝났던 것은, 언제나 유진이 전장에 있어서.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만약 흑사자 성에서 이오드가 날뛰었을 때, 유진이 그곳에 없었다면?


사마르 대수림에서 에드몬드가 마왕이 되고자 했을 때, 유진이 그곳에 없었다면?


당장 시엘이 떠올릴 수 있는 것들만 해도 2가지나 되었다.


흑사자 성 때 유진이 없었다면, 라이언하트는 몰락하고 이오드는 마왕이 되었을 것이다. 사마르 대수림에서도 유진이 없었다면, 에드몬드는 바라던 대로 마왕이 되었을 것이다.


유진은 벌써 2번이나 새로운 마왕의 탄생을 저지한 것이다.


마왕에 관련된 일 외에도, 유진은 여러 번의 전쟁에 얽혔다. 그것들이 마왕과는 관련되지 않았을지언정, 그 하나하나가 지금 시대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시킬 만큼 굵직한 사건이었다.


‘멀다…….’


유진에 관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아득한 거리감을 느꼈다. 유진과, 그 곁에 있는 사람들에 비하자면 시엘은 스스로가 너무나도 초라하다고 느꼈다.


검은 갑옷을 망토로 덮었다. 이것을 입게 된 이상은 더 이상 백장미니 하는 별명은 쓸 수가 없으리라. 시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디자이라와 함께 작업실에서 나왔다.


멀다고 해서 쳐다만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그렇게 마음은 먹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면서, 저쪽에서 다가와 주거나 마음을 바꿔주기를 바라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시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힐긋 돌렸다.


“왕자만 아니었어도 확.”


“그쵸. 저도 가서 눈깔을 뽑아버리고 싶어요.”


시엘이 투덜거렸고, 디자이라도 한껏 죽인 목소리로 화답했다.


멀리서부터 오는 노골적이고 질척한 시선. 선두의 기함 라베르시아, 그곳에 타고 있는 자페르 왕자의 시선이다. 시엘이 가끔 갑판에 나올 때마다, 자페르 왕자는 마법 망원경을 쳐들고서 시엘을 대놓고 쳐다보았다.


“저렇게 대놓고 쳐다볼 거면 와서 말이나 걸든가 하면 되는 것 아냐?”


“말을 걸면 들어주실 건가요?”


“내가 미쳤어? 어쩌면 꺼지라고 말할지도 몰라.”


시엘은 투덜거리면서 갑판을 걸었다.


안쪽의 선실. 들어갈까 싶었지만, 마음을 바꾸었다. 안에서 집중하고 있을 유진과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카르멘 님한테 가자.”


“또요? 훈련은 아침에도 했잖아요……!”


뒤에서 디자이라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시엘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무시해 버렸다.


* * *


마이스를 내세워서 펼친 대마법은 함대의 속도를 몇 배나 올렸다. 그에 대한 의혹은 오르투스가 알아서 상대할 일이고, 세냐가 해야 할 것은 토벌대의 정보가 밖으로 나도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다.


내통자는 없다.


세냐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요 며칠 동안, 정보가 ‘밖’으로 나가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의외로 전투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는 슬라드 용병단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없었는데, 시무인의 해군과 토벌에 참가한 여러 투사들 사이에서 정보유출의 시도가 몇 번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장거리 통신장치. 왕궁 쪽에 토벌대의 정황을 보고하기 위한 것인데, 세냐는 과감하게도 그러한 통신까지 차단해 버렸다. 왕궁에 가버린 정보가 아이리스에게도 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투사들 쪽은 말할 것도 없었다.


놈들의 이유는 다양했다. 돈벌이 겸 정보길드에 넘기거나, 혹은 자기네 나라 정보국에 넘기거나. 그만큼 아이리스 토벌이 대륙 전체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인데, 세냐는 그런 사정 따위는 헤아려 줄 생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죄다 바다에 던져 버리고 싶은데.”


세냐는 마법진 중앙에 앉아서 혀를 찼다. 그렇게 처리했다가는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아서 통신만 차단했는데,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은 헬무드 쪽과 내통하는 놈이 없다는 것인데…… 사실 그것도 속단하기는 일렀다. 다른 곳을 거쳐서 헬무드에 흘러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스칼리아 공주는 어때?”


“마기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면증은 그대로인 모양이군요.”


세냐의 맞은편에는 크리스티나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얇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스칼리아 아니머스. 그녀는 과거 몽마의 여왕에게 습격당한 적이 있다. 그때 스칼리아의 의식을 침식했던 인큐버스는 유진과 크리스티나 앞에서 죽었다.


하지만 ‘전례’가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몽마는 인간의 나약한 정신을 파고드는 것에 능란하며, 한 번 접점이 생겨버리면ㅡ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서의 꿈에 다시금 간섭할 가능성이 있었다.


“누아르 제벨라가 개입할 수도 있다 생각하십니까?”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하지만 그 갈보가 뭔가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야.”


그 의견에 관해서는 아니스와 유진도 동의했다. 누아르 제벨라가 아이리스의 편을 들 리는 없다. 그렇다고 아이리스를 죽이는 것을 도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 갈보는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관음하는 것과 관심받는 것에 환장하지. 특히 지금은 유진이 하멜이라는 것도 알잖아? 나도 있고. 크리스티나, 너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아마 모를 겁니다. 아니, 확신은 못 하겠군요. 어쩌면 추측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는 어쭙잖게 숨기는 것보다는 호되게 한 방 처먹이는 것이 낫지.”


잠자코 듣고 있던 유진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어쩌면, 누아르 제벨라가 이번 전투에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필시 스칼리아 공주의 몸뚱이를 그릇으로 삼아서 올 것이다.


“꼭 왔으면 좋겠군요.”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여태까지 하던 대로 빛을 끌어냈다. 세냐도 그 빛과 호응하여 마나를 운용했다.


유진은 왼손을 앞으로 들었다. 아카샤가 아가로트의 반지와 다시 공명을 시작했다.


아카샤에는 아리아르텔에게 받은 용언마법이 새겨져 있다. 라이자키아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한 용언마법. 그 라이자키아는 진즉에 찾아서 죽였지만, 목적을 달성한 용언마법은 소멸하지 않고 아직 아카샤에 새겨져 있다.


여태까지 유진은 이 용언마법을 요긴하게 사용해 왔다. 어딘지 모를 빛의 샘을 찾아낼 때도 용언마법의 덕을 보았으며, 월광검을 대상으로 사용했을 때는ㅡ 유폐의 마왕과 베르무트 사이의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가로트의 반지.


이것을 대상으로도 육지에서 이미 몇 번이나 사용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조금씩 보이고 있어.’


이 용언마법은 물건과의 인연을 거스른다. 라이미르아에게 썼을 때는, 그녀와 혈연으로 맺어진 라이자키아의 위치를 추격했다. 트레치아 대성당의 성유물…… 예전 성녀의 턱뼈를 대상으로 썼을 때는, 그 성녀의 피가 고인 빛의 샘을 추격했다.


아가로트의 반지.


지금 이 반지는 유진과 얽혀 있다. 그 전에는 아리아르텔이, 그전에는 이름 모를 드래곤의 보물고에 처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반지의 주인인 것은 아니다. 이 반지의 이름이 ‘아가로트의 반지’이듯, 반지의 주인은 아가로트다.


‘점점…….’


유진은 용언마법에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가까워지는 것 같아.’


섬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에 나오고서도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극한까지 집중할 때면 ‘소리’가 들렸다.


보글거리는 물거품 소리. 쏴아, 쏴아 하는 파도 소리. 깊은 곳에서 맴돌다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


그리고 어제부터는 비명이 들리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비명은…… 굉장히 잔잔했다.


상상하지 못할 만큼 먼 곳에서, 혹은 깊은 곳에서, 바람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여 버린 소리. 잔잔(孱孱)하고 잔잔(潺潺)한, 발악조차 하지 못하는 죽은 소리.


아아아아아아!


유진은 두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씹었다. 배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점점 솔가르타 해역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마, 그곳의 어딘가에 아가로트의 성역이 있을 것이다.


가까워지기 때문일까. 처음에는 듣지 못했던 다른 소리들이 섞이고 있다. 죽은 소리의 뒤에는, 잔잔하지 않고 발악 가득한 비명이 섞였다.


비명뿐만이 아니다. 흐느끼는 소리도 있다. 여러 명의 소리가 아니다. 비명으로 울부짖는 것은 단 한 명이었다.


기나긴 오열의 끝에.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철걱, 하는 소리가 났다.


문을 닫는 소리처럼 들렸다.


* * *


꿈을 꾸었다.


몇 번째인지 세는 것은 진즉에 포기한 꿈이다. 언제나 똑같던 꿈이다. 점점 주기가 짧아지더니, 이제는 매일 꾸는 꿈이다. 악몽이 아니다. 달콤하고 그리우며, 매일 꾸어도 질리지 않는 꿈이다.


커다란 등. 상냥하게 감싸는 손. 뿌옇게 덮여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이에서도 선명하던 자상한 미소. 먼저 길을 나서는 걸음을 따라 함께 나아가는 꿈.


형제들 모두가 함께 나아가는 꿈. 몇 걸음 앞을 걷던 거대한 등이 멀어지고,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그림자에 모두가 뒤덮여 버리는 꿈. 형제들 모두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다치 않는 아버지의 등을 보던 꿈.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광경. 그렇기에 운명적인 계시라 느끼던 꿈. 하지만 마지막까지 함께하지는 못하는 꿈.


이 꿈의 마지막에서 아버지는 무릎을 꿇는다. 아이리스와 형제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다가가지만, 그 순간에 꿈속 세상이 물에 잠겨 버린다. 모든 것이 물속에 파묻혀 사라져 버린다.


아버지도, 아이리스도, 다른 형제들도, 전부 다.


‘다르다.’


언제나 같던 꿈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모든 것이 파묻혀 사라질 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때.


뿌연 안개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처절하고 서러운 오열은 언어가 와해되어 있었으나, 마지막에, 정말로 마지막에. 아이리스는 한마디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미안하다.”


이번 꿈은 그립고 슬펐으며, 괴로웠다.


그래서 악몽처럼 느껴졌다.


아이리스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공주님!”


비명을 듣고 놀란 부관이 찾아왔다.


아이리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욱신거리는 눈자위를 양손으로 덮었다.


손에 덮여 새카만 시야에서 다른 것이 보이고 있었다.


“찾았구나.”


아이리스는 헐떡거리며 내뱉었다.


“찾은 거야, 그렇지?”


어둠 속에서 문이 보이고 있다.


마경


부관은 당황하여 아직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아이리스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확신했다.


그녀는 눈동자의 욱신거림을 느끼면서 비틀비틀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관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아이리스에게 다가가서 코트를 걸쳐주었다.


“꿈에서 보신 겁니까?”


“지금, 지금도 보고 있어.”


아이리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보일 리 없는 광경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빛조차 스미지 못하는 심해의 어둠. 그 어딘가에 있는 커다란 문. 아니ㅡ 그것을 문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리스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 내뱉었다.


“말해, 세피아. 찾은 거지? 그렇지? 찾지 못했을 리가 없어, 어제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내 꿈이 바뀔 리가 없잖아……!”


격정적으로 쏘아붙이는 말에 세피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서 아이리스를 부축했다.


“하지만 부디, 공주님, 우선 진정해 주십시오. 눈을…….”


“아냐, 눈은 뜨지 않아.”


아이리스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아.”


눈을 뜬 순간,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아이리스는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세피아는 그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그녀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아이리스가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찾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세피아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파들파들 떨리는 주군의 어깨를 감싸주며 말을 이었다.


“63번 구역.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쪽을 탐색하던 잠수요원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드워프들을 닦달하여 잠수복을 양산한 후. 해적들을 시켜 솔가르타 해역의 심해를 뒤지게 만들었다.


특수한 소재로 만들고, 아이리스와 다크엘프들의 마력까지 담아낸 잠수복. 하지만 인간의 몸은 너무나 약하다. 체력이 좋고 마나까지 능숙하게 다루는 해적들을 심해로 밀어 넣었지만, 심해로의 잦은 잠수는 인간의 몸을 빠르게 망가트렸다.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해적은 몇 명이나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해의 공포에 돌아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스스로 산소파이프를 끊고서 뒈진 놈도 있었다. 해적들 중 몇 명은 유령을 보았다는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여태까지와는 다릅니다. 63번 구역에서 잠수한 5명 모두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산소파이프와 연결은 그대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겨도 당겨지지 않습니다.”


“찾았어, 찾은 거야.”


아이리스는 흥분으로 목소리를 떨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서 걷기 시작했다.


“공주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세피아가 당황하여 아이리스에게 다가왔다. 아이리스는 부축하려는 손을 뿌리치며 내뱉었다.


“어디에 가느냐고? 왜 그런 것을 묻는 거야? 내가 갈 곳이야 뻔하잖아.”


“제발, 공주님, 부디 진정해 주십시오. 눈도 뜨지 않고서 어떻게 마안을 쓰겠다는 겁니까?”


64번 구역은 이곳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배를 타고 간다면 이틀은 넘게 걸린다.


암전의 마안을 쓴다면 한 걸음으로 갈 수 있겠지만ㅡ 세피아는 아이리스를 너무 오랫동안 모셨다. 마안의 발동 조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먼 거리를 편하게 도약하게 해주는 저 마안은, 권능을 쓰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눈을 뜨고 있어야만 했다.


“괜찮아.”


아이리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서 말했다.


“아무…… 아무 문제 없어.”


내뱉은 말의 근거는 아이리스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어도ㅡ 아무 문제가 없을 것만 같았다. 시도해 본 적 없는 미지에 대한 위험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리스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지만, 암전의 마안은 눈꺼풀 뒤에서 아이리스가 바라는 곳을 직시했다.


파지직!


아이리스의 앞에서 공간이 갈라졌다. 쩍 벌어진 균열에서 어둠이 흘러넘쳤다.


그 광경에 세피아는 경악했다. 그녀가 아이리스를 섬긴 수백 년 동안, 마안의 권능이 발동할 때에 저런 현상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주님!”


아이리스는 세피아의 부축을 뿌리쳤다. 아이리스는 비틀거리면서 어둠을 향해 나아갔다. 세피아는 기겁하며 아이리스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그 순간 시커먼 어둠의 벽이 세피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지 마.”


“공주님! 하지만…….”


“이 앞은 내가 가야 해.”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세피아는 장막 저편에 선 아이리스의 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세피아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서 보일 수 없는 곳을 보고 있었다.


한 걸음.


아이리스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찌직, 찌지직! 어둠이 점점 번지면서 갈라졌다.


그렇게 아이리스가 들어갈 ‘문’이 나타났다. 아이리스는 머뭇거림 없이 문의 안쪽을 향해 발을 들이밀었다.


ㅡ콰르르르!


눈동자로 보지 못한 어둠이지만, 마치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리스를 감싸주었다. 아이리스는 담요를 몸에 두르는 것만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하지만 걸음을 이어갈수록 포근함은 사라졌다. 전신을 으깨어 부숴 버릴 것만 같은 압력이 아이리스를 사방에서 짓눌렀다.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코로 호흡할 때마다 기관지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짠 바다의 맛이 났다. 아득한 심해의 압력은 수백 년 살아오며 단련한 몸뚱이마저 부술 기세였다. 아이리스는 시커먼 마력을 전신에 휘감아 압력에 저항했다.


눈앞은 검었다.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애당초 이곳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심해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둡다고 해서, 두 눈을 감고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바다의 밑바닥.


거대한 문이 있다. 아니, 저것을 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애당초 문은 열리고 닫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 번 닫고서 영영 열리지 않는 것을 과연 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가.


그래, 저것은 문이 아니었다. 한 번 닫히고서 다시는 열리지 않는, 영원토록 가둬놓는, 결코 열려서는 안 될 무저갱의 봉인이었다.


‘이건…… 뭐지?’


아이리스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똑바로 봉인을 쳐다보았다.


꿈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 꿈에서 깨어난 후에야 눈에 새겨진 것. 이 아득한 심해의 밑바닥에서,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


아이리스는 저 봉인 뒤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심해의 밑바닥이 어떤 심연으로 이어져 있는지를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왜? 라고 생각한 순간. 아이리스는 등골을 달리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며,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이유. 외면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립고 따스하며 포근하다고 느꼈던 꿈의 내막. 항상 똑같았으나, 오늘 더해졌던 꿈의 마지막. 갑자기 악몽이 되어버린 꿈. 뿌연 안개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 처절하고 서러운 오열. 마지막에, 정말로 마지막에야 알아들을 수 있던 한마디.


‘미안하다.’


그 목소리는ㅡ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의, 광란의 마왕의 목소리였다.


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저 한마디는 아이리스로 하여금 꿈의 내막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꿈의 마지막에서 아버지는 무릎을 꿇는다. 아이리스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지만, 그 순간에 꿈속 세상이 물에 잠겨버린다. 모든 것이 물속에 파묻혀 사라져 버린다.


결국 아이리스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물에 잠겨 사라져 버리고, 멀리서, 아주 멀리서 아버지는 오열한다.


아버지는 형제들을 구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라는 사과는 형제들을ㅡ 자식들을 구하지 못하여 말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구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식들을 버려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처절하고 서러운 오열. 그 속의 감정. 멋대로 느낄 뿐이지만, 이상하게도 점점 확실하다고 느껴졌다.


버림받았다.


그것을 알아버리면 꿈은 처음부터 악몽이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결말에서 그리움과 포근함을 느꼈다니,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아냐.’


아이리스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꿈에서 느꼈던 그리움과 포근함은 비참한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기억에서 존재하지 않던 광경이고 감정이지만, 아이리스는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면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머나먼 언젠가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버렸을지도 모르나, 300년 전의 아버지ㅡ 광란의 마왕은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셨다. 이곳까지 와버렸는데 두려움에 주저하며 발이 묶이는 것도 우스운 노릇.


지금 느끼고 있는 충동과 감정의 근거는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다. 솔가르타 해역에 온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런 이유가 없었을지라도 아이리스는 이 바다에 왔을 것이다.


“아버지.”


깊은 바다에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아버지를 불렀다.


여태껏 꾸었던 꿈과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보여준 것.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인도라면ㅡ 아이리스는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짐한 순간. 아이리스는 이곳에서 느껴질 리 없는 것을 느꼈다. 전신을 으스러트릴 것 같은 압력, 그것을 버티기 위해 둘렀던 마력에서 ‘온기’를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등에서 끌어안는 것만 같은 포근함도 느꼈다.


‘아.’


아이리스는 깨닫고서 전율했다. 그녀가 가진 마안과 마찬가지로, 마력 역시 광란의 마안에게 받은 것이다. 광란의 마왕은, 아버지는 300년 전에 죽었지만 언제나 아이리스와 함께 있던 것이다.


감고 있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났다. 그렇게 눈을 뜨고 나서야, 저 밑바닥의 봉인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을 때 보았던 것과는 모습이 다르다. 기나긴…… 너무나 기나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리라. 지면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황폐해진 봉인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는 이상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아이리스는 거스르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 순간, 아이리스의 몸이 화악 하고 떨어졌다. 기묘하고도 불길한,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아이리스의 몸을 끌어당긴 것이다.


‘그렇군.’


아이리스는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봉인 근처에 ‘정지’한 해적들이 보였다. 아이리스의 명령을 받고 이곳, 64번 구역을 잠수했던 해적들이다. 깊은 물 속인데도 떠다니지 않고, 심해의 압력에 으스러지지도 않았다. 그냥 저 상태로 ‘정지’한 기묘한 모습. 더욱 이상한 것은, 저들이 달고 있는 산소파이프는 조금 떨어진 위에 있는 어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 어둠은 마안의 권능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어둠에 간섭할 수가 없었다. 저 어둠도, 그곳에 연결된 해적들도, 아니, 이 공간 자체가 다른 절대적 권능에 붙잡혀 있었다.


‘나는…… 움직일 수 있어.’


본래라면 이 구역은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가까이 온 순간 모든 것이 사로잡히고 정지해 버릴 것이다.


아이리스는 두 눈을 얇게 뜨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안이 욱신거렸다. 포근히 몸을 감싸던 마력이 아이리스의 눈동자를 어루만졌다.


머릿속이 찌릿한 순간, 아이리스의 눈에 희미한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슬.


눈으로 보이지 않고, 느낄 수조차 없는 사슬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슬의 움직임이 물결에 녹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아이리스가 있는 곳에도 사슬이 가득했다.


아이리스는 꿀꺽 침을 삼키며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이 사슬은…….’


헬무드의 마왕들 중 사슬을 권능으로 사용하는 존재는 한 명뿐이다.


유폐의 마왕. 아이리스도 오래전 유폐의 마왕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그 마왕의 등 뒤에 이어진 수백 수천의 사슬은 하나로 얽혀 마치 망토처럼 보이곤 했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이 뻗는 사슬은 공간을 장악하고 그 안의 존재를 붙잡아 버린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아이리스는 굳게 닫힌 봉인을 노려보면서 꿀꺽 침을 삼켰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가득 둘린 봉인. 그 저편에 무엇이 있을지, 아이리스는 아무런 확신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봉인이 무언가를 유폐하기 위한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결코 열려서는 안 될, 열릴 수가 없는 봉인. 하지만 지금 아이리스는 무척이나 자유로웠다. 사슬은 그녀의 존재를 붙잡지 못했고, 굳게 닫힌 봉인도 아이리스가 다가오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으며, 포옹하듯 감싼 마력도 스멀스멀 퍼져 나가 사슬을 밀어냈다.


ㅡ쿠우우웅…….


아이리스의 몸이 봉인에 도착했다.


어떻게 해야 열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 봉인은 이미 아득한 옛날부터 유일한 열쇠자리가 남아 있었다. 아이리스는 본능적으로, 운명적으로 그 사실을 느꼈다.


우우우우! 완전히 검게 물든 마안에서 어둠이 흘러넘쳤다. 아이리스는 봉인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화아악!


봉인이 열렸다. 아이리스의 몸이 시커먼 심연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몸은 아래로 추락했으나, 바닷물은 함께 쏟아지지 않았다.


아이리스는 그 현상에 위화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빼곡히 모인 사슬이 바닷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가로막고 있었다.


“아하…… 아하하, 아하하하하!”


이제는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이리스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양팔을 활짝 펼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 심해 밑바닥의 심연, 저 진정한 밑바닥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이것만큼은 확신했다.


저 밑바닥을 본 순간에 자신의 존재는 변할 것이다.


이 시대의 광란(狂亂)이 될 것이다.


마경


몇 번이나 용언마법을 더 사용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누군지 모를 이의 비명과 흐느낌. 마지막의 ‘쿵’하고 닫히는 소리.


솔가르타 해역에, 아가로트의 성지에 더 가까워지면 무언가가 달라질까.


유진은 그것을 마냥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가로트에게서 받은 계시와, 반지를 통해 본 기억은 머나먼 옛날의 일이다. 유진이, 하멜이 존재하지도 않던 신화시대의 일이란 말이다.


그 진상이 궁금하기는 하다. 하지만 호기심과 더불어 어쩔 수 없는 두려움도 느끼고 있었다. 계시와 기억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의 산과, 그 모든 것을 뒤덮는 파도와, 해무에 먼저 삼켜져 뿌옇게 변해 버린 세상.


유진이 느끼기에, 그 광경은 무언가의 종말이었다. 도시의, 어쩌면 나라 하나의, 아니, 어쩌면 시대의 종말. 솔직히 그런 이야기는 유진의 이해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300년 전. 베르무트와 동료들은 마왕과 싸웠다. 만약 그때 마왕과 싸우지 않았다면?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했다면? 지금 시대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마왕들이 대체 어떤 생각으로, 대체 무엇을 바라고서 대륙을 침략하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ㅡ 유진은 이렇게 생각했다.


마왕들이 바라는 것은 종말은 아니었다. 아가로트의 계시에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을 죄다 죽이고 문명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것은 마왕의 뜻이 아니었단 말이다.


유진이 느끼기에, 300년 전의 마왕들은 철저하고 잔혹한 정복자였다. 그들은 학살자이긴 했지만, 무턱대고 모든 인간을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 타락한 인간들은 수하로 받아들였고, 포로들에게는 타락을 종용했다.


5명의 마왕 중에서 인간을 무조건 죽여댄 마왕은 한 놈뿐이었다.


ㅡ빠직!


“큭!”


유진은 신음과 함께 표정을 구겼다. 억지로라도 ‘뒤’를 보려고 용언마법을 반복했는데, 마법이 강제로 끊어져 버렸다. 유진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아가로트의 반지를 노려보았다.


“유진 님, 괜찮으세요?”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메르가 후다닥 다가왔다.


메르의 구성 술식은 아카샤에 담겨 있다. 때문에 메르는 반복된 용언마법이 아카샤와 유진에게 얼마나 부담을 주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세요. 정말로요.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진짜 화낼 거예요.”


저런 마법은 정신에 많은 피로를 준다. 도중에 억지로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피로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카샤와 유진이 특별하기 때문에 별 이상이 없는 것이지, 다른 마법사라면 마법이 도중에 끊어진 반동으로 실신해 버렸을 것이다.


“그래.”


억지로 반복해 봐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유진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변이 없다면 내일쯤 솔가르타 해역에 진입할 터. 아마 거기서부터는 다른 것을 보거나 듣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새로 계시가 올지도 모르지.’


주의해야 할 점은 솔가르타 해역의 특성이다. 그 해역에서는 마법을 쓸 수가 없다. 세냐는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며 자신만만하게 굴었지만, 그건 도착해 봐야 아는 일이다. 자칫하다가는 함대를 가속시키는 마법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에는 고전적인 인력에 의존하여, 선원들이 열심히 노를 저어 항해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정말 만약의 일이라면서 덧붙이기는 했지만. 세냐도 저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대비는 하고 있다. 지금만 해도 세냐는 함대의 마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러 마이스를 만나러 갔다.


“기분전환을 할 겸, 산책이나 가시는 것은 어때요? 저랑 같이 갑판을 걸으면서 바다를 보는 거예요.”


“내가 미쳤니?”


“흐흠, 유진 님의 마음은 이해하고 있어요. 이 방을 나가려면 유진 님은 유진 님이 아니라 유리가 되어야 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유진 님이 유리가 된 모습을 더 보고 싶지만, 유진 님이 너무 싫어해서 유리가 되는 것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네요.”


유진과 유리를 몇 번이나 말하는 거야?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메르를 쏘아보았다.


“메르메르메르데인, 쓸데없는 말로 나를 자극하지 마.”


“저는 메르메르가 아니에요, 유리 님.”


“혼날래?”


“아차, 헷갈렸어요, 유진 님은 유리 님이 아니라 유진 님이었죠.”


메르는 킥킥 웃으며 유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진은 꼬물꼬물 들어오는 메르를 위해 망토를 열어주었다.


“많이 심심한가 봐?”


“당연히 심심하죠. 유진 님은 밖에 나가질 않으려 드시고, 세냐 님도 바쁘고. 시엘 님도 훈련한다고 바쁘죠. 라이도 난쟁이를 돕느라 바쁘구요.”


“난쟁이? 너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랬지!”


“키 작은 드워프를 난쟁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나요? 흠, 아니, 제가 잘못했어요. 종족적인 결함을 웃음거리로 삼는 것은 못된 짓이니까요. 곤도르가 난쟁이인 것은 사실이지만, 드워프의 평균 신장을 생각한다면 장신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런 점은 세냐를 닮아서일까. 아니면 유진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다른 사람 앞에서 떠들 말은 아니었다.


유진은 혀를 쯧쯧 차며 메르의 뺨을 꼬집었다.


“그리고 음, 저쪽은 가까이 갈 수도 없으니까요.”


메르는 한쪽 뺨이 꼬집힌 상태로 웅얼거렸다. 저쪽. 유진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방 저편. 빛의 원 한가운데에 크리스티나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기도를 읊을 때마다 로사리오가 공명하듯이 빛을 뿜었고, 그 빛은 다시 한 점으로 모여서 송곳 같은 형태로 응집되었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가서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있…….”


뭐지?


내뱉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방에 앉아 있는 ‘나’가 멀게 느껴졌다.


의식이 감각과 육체에서 붕 떠버린 것만 같은 괴리감. ㅡ쿠우웅! 의식이, 혼이 어디론가 날아 가버리는 것만 같았다.


느낌만이 아니었다. 망토에 손을 넣고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빛의 원 중앙에 앉은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크리스티나와 살짝 겹쳐진 아니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한 광경이 멀어졌다. 유진의 의식은 보다 높은 곳으로 날아갔다.


갑판에 마련된 연무장. 훈련 중인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의 모습이 보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여러 선원들도 보였다. 거기서 더 높이. 유진의 의식은 하늘 높이 떠올라 함대 전체를 내려다보고, 항행 중인 바다의 저편을 관망했다.


시커먼 안개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유진 님?”


메르는 망토 밖으로 얼굴을 빼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르는 유진의 의식이 어떤 체험을 겪고 있는지는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의 눈빛이 멍해진 것과, 몸이 축 처진 것을 통해 무언가 이상이 벌어졌다는 것은 깨달았다.


메르는 급히 망토 밖으로 팔을 빼서 유진을 붙잡았다.


“윽……!”


의식이 비행을 끝내고 육체로 돌아왔다. 유진은 놀란 소리를 내면서 벌떡 일어섰다.


방금 대체 뭐지? 유체이탈? 갑자기? 아가로트의 계시인가?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릿속에ㅡ 방금 보았던 풍경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바다 저편에서 몰려오는 안개.


그것을 안개라고 해야 하나? 뿌옇지 않다. 검다. 아가로트의 기억에서 보았던 안개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 안개는 머나먼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 몰려오고 있다.


“쿨럭!”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빛의 원 한가운데에서 신성력을 단조하던 크리스티나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그녀는 검붉은 피를 왈칵 쏟아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크리스티나?!”


유진은 놀라서 크리스티나에게 다가갔다. 입을 틀어막은 손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피를 쏟으면서도 크리스티나의 두 눈에는 당황과 의문이 가득했다. 왜 자신이 갑자기 피를 쏟게 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스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영혼의 연결을 흩트릴 뿐만 아니라 성녀의 존재 자체에 들어온 타격. 아니, 이것은 침식이고 오염이다. 크리스티나는 이런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아니스는 이런 것에 익숙했다.


“아……!”


곧 크리스티나도 깨달았다. 나이트마치에서 유폐의 마왕이 강림했을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때에 피를 토하지는 않았는데…….


[의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니스가 강렬한 적의를 내비치며 말했다.


[그때 유폐의 마왕은 한 점의 살의없이 강림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ㅡ 이것은…… 살의와 광기로 무장한 마왕의 존재감입니다.]


크리스티나는 다가온 유진을 향해 급히 손을 뻗었다. 피를 토한 속이 쓰리고 아파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크리스티나는 간신히 입술만을 달싹거렸다.


밖으로.


유진도 저 뜻을 이해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몸을 돌렸다.


정체를 감춰야 한다. 여장을 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들켜서 평생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딴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지금 유진이 해야 할 것은 일 초라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콰당! 닫혔던 문이 날아갈 기세로 열렸다. 그만큼 강렬한 기세로 뛰쳐나와 버리니 유진을 쳐다보는 시선도 많았다.


대부분이 의문과 당황이었다. 라이언하트의 여자들만 머물던 선실에서 웬 남자가 뛰쳐나온 것이다. 출항한 지 보름이 넘은 지금, 이 배에서 저런 남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유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련된 연무장. 수행 중이던 시엘도 크게 당황하여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토록 나오기 싫어했던 주제에 왜 나온 거야?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있던 시엘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디자이라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유진과 라이언하트 본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여장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됐다. 치욕스러운 일을 덮으려면 더 큰 치욕이 필요할까? 여기서 모두가 보란 듯이 춤이라도 춰야 하나? 디자이라는 진심으로 그런 고민을 했다.


카르멘은 당황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유진 쪽을 돌아보고, 머릿속에서 사고가 전개되고, 입을 열어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순간. 카르멘이 갈고닦은 감각과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심장이 다르게 뛰었고, 본래부터 흰 얼굴이 핏기가 가셔 창백하게 변했다.


‘뭐지?’


적의를 느껴본 적은 많다. 살의를 느껴본 적도 없지는 않다. 광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러한 감정들은 카르멘 라이언하트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준 적이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무엇인지 모른다.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미지란 이런 식으로 사람을 휘둘러댄다. 호흡이 가빠지고 주먹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지금 카르멘의 불행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아득하게 경지가 높다는 것이었다. 아예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보이게 될 때 비로소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카르멘은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경지가 높았다.


‘안 돼.’


여기서 질려 버리면 안 된다. 카르멘은 흔들리는 심경을 억지로 붙들었다. 그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마스트로 도약하는 유진이 보였다.


“우왁!”


마스트 꼭대기의 관측병이 놀란 소리를 냈다. 무시했다. 이 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는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아예 하늘로 뛰어올랐다. 아까 전, 육체에서 멀어졌을 때와 비슷한 높이에 도달했다.


그제야 앞이 보였다. 저 멀리서 시커먼 안개가 몰려오고 있다. 안개의 색에 물드는 바다의 색이 점점 바뀌어갔다. 흔들리는 물결을 통해서 검붉은색이 번져왔다.


색이 바뀐 바다가 부글부글 끓었다. 바다에서 살아가는 생명이 하나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한순간에 떼죽음을 당해 해수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커다란 상어, 그보다 훨씬 큰 고래나 바다의 몬스터들. 함선만큼이나 커다란 생명체들이지만, 이 바다에서 살았다는 것만으로 도망도 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모든 죽음은 순식간에 일어나 항로를 가로막았다.


항행이 멈췄다. 앞을 가로막은 여러 시체. 밀려오는 안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기괴하고 불길한 현상은 이즈음부터 모두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함대를 가속시키던 마법이 멈췄다.


세냐 메르데인. 그녀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지금’은 멈추고, 추슬러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서 함대를 멈추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빠득 갈고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유진?”


먼저 하늘에 와있던 유진을 발견했다. 세냐는 유진에게 다가가려다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감각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검붉은 바다. 소금의 짠 냄새가 대신에 피비린내와 시체 썩은 냄새가 떠돈다. 어디선가 나타난 시커먼 먼지들이 날벌레처럼 허공을 날아다닌다. 스멀스멀 몰려온 안개가 위로 치솟더니, 태양을 가리고 하늘을 검게 바꾸었다.


부글거리며 끓는 바다는 오래된 핏물처럼 보였다. 악취가 모든 이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떠도는 먼지는 어느새 진짜 벌레로 바뀌어 있었다. 너무 많은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가 윙윙 윙윙 하고 울리는데, 그 소리가 정신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완전히 변해 버린 바다에서,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경(魔境).


마경


치직거리는 소리. 윙윙거리는 소리. 서로 뒤섞여서 듣기 싫은 소음이 되었다.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없었다. 저 소음은 귀가 아닌 정신을 흔들었다.


이건 강력한 정신공격이다. 토벌대 대부분은 이러한 소음에 내성이 없었다. 몇몇 심약한 이들은 강렬한 어지럼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거나 난간을 짚고 토악질을 해댔다.


갑자기 나타난 벌레 떼. 어디서 왔지? 유진은 이를 악물고서 아래를 노려보았다.


죽은 피처럼 검붉게 물든 바다. 해수면에 떠오른 바다생물들의 시체. 그것들이 벌린 입과 뒤집힌 눈자위, 아가미 따위에서 시커먼 먼지가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위로 떠오른 먼지는 즉시 날벌레가 되어 윙윙, 왱왱 날개를 떨어대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 기괴한 광경이 유진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토벌대의 대부분은 이 소음과 현상에 경험이 없겠지만, 유진에게는 아니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망토 사이에서 성검을 뽑았다. 하늘 높이 치켜 든 성검에서 눈부신 빛이 폭발했다.


화아아악! 유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빛이 검게 물든 하늘을 밝혔다. 어둠에 덮였던 함대에 빛이 스며들었다. 유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검을 휘둘렀다.


파아앗! 빛이 뻗어 나갔다. 벌레의 둥지가 되었던 바다생물 시체들이 빛에 덮였다.


성검 알테어가 뿜어내는 빛은 그 자체가 신성력이다. 강렬하고 짙은 신성력 속에서 바다생물 시체들이 정화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체들에게서 검은 먼지와 날벌레는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넓은 바다와 하늘에는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날벌레들이 떠돌고 있었다. 놈들은 성검이 내뿜는 빛 속에서도 소멸하지 않고 열심히 날개를 떨어댔다.


“모기 새끼들!”


세냐는 표정을 구기며 질색했다.


저 벌레들은 모기와는 전혀 다른 종이지만, 하는 짓은 모기와 다를 것이 없다. 아니, 모기보다 지독하다. 저 벌레들은 날갯짓으로 먹잇감의 정신을 무너트린 뒤에 다가와 피를 빨고 살을 파먹는다.


문 열린 선실에서 크리스티나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고서 몇 번 심호흡을 했다.


마력(魔力)과 신성력은 서로에게 상극이다. 이만큼 강렬한 마력에는 고위 성직자도 심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크리스티나는 성녀다. 심지어 그녀의 안에는 역사상 최고의 성녀인 아니스마저 깃들어 있다. 크리스티나의 안에서 아니스가 기도를 외웠다. 크리스티나도 로사리오를 기도하듯 쥐면서 가슴 앞으로 들었다.


아아아아!


부푸는 빛 속에서 성가(聖歌)가 울려 퍼졌다. 천사들이 나타나더니 나팔을 불었다. 크리스티나의 등 뒤에서 날개가 활짝 펴졌다. 신성마법으로 강림시킨 천사들은 한 쌍의 날개를 가졌으나, 그 중심의 크리스티나는 여덟 장의 날개를 펼쳤다.


크리스티나와 천사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성가와 함께 빛이 넓게 펼쳐졌다. 사람들이 듣는 벌레의 소음은 성가에 덮쳤고, 성가를 듣는 사람들의 곁에는 빛이 머물렀다.


눈이 마주쳤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뒤에서 아니스를 보았다. 머뭇거리지 않고 성검을 아래로 내렸다. 빛과 빛이 어우러지더니 빛의 기둥이 치솟았다.


검은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빛의 기둥은 어둠을 관통하고 나서 구름이 되고 비를 내렸다. 빛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 떠돌던 벌레들이 비를 맞아 소멸했다. 괴로워하던 사람들도 빛에서 구원을 얻었다.


세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프로스트를 앞으로 뻗은 순간에 이터널 홀이 열렸다. 먼바다에서부터 밀려온 안개는 하늘을 검게 물들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안개가 물결처럼 이곳을 향해 밀려오고 있다.


안개의 근원을 보고 싶었으나 볼 수는 없었다. 세냐는 빠득 이를 갈면서 프로스트를 휘둘렀다.


푸화악! 바다가 뒤집힌 것처럼 위로 솟구치더니, 안개를 가로막는 벽이 되었다.


하지만 안개는 멈추지 않았다. 이 넓은 바다 전체를 퍼 올려서 벽을 만드는 것은 세냐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어지간한 성벽만큼이나 길고 높은 벽이지만, 스멀스멀 밀려오던 안개는 벽을 뛰어넘거나 우회하는 식으로 함대를 덮치려 했다.


세냐도 바다의 벽만으로 가로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잠깐 시간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간의 것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마나가 함대를 감쌌다. 프로스트의 드래곤하트와 세냐 본인의 마법실력은 이터널 홀의 부상마저 무시했다.


마법의 결계가 함대를 감쌌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기도가 공명했다. 천사들의 성가와 나팔 소리가 드높게 울려 퍼졌다. 나부끼는 빛이 깃털이 되어 결계의 안을 떠돌았다. 유진이 성검을 통해 일으킨 빛과 성녀들의 기도가 마법결계를 신성력으로 보호했다.


콰르르르! 벽이 되었던 바다가 다시 아래로 쏟아졌다. 뛰어넘고 우회하던 안개가 다시 정면에서 덮쳐왔다. 안개와 충돌한 결계가 크게 출렁거렸다. 전해진 진동에 바다와 함대가 흔들렸다. 하지만 결계는 뚫리지 않았다.


‘정화가 안 돼.’


유진은 안개를 노려보면서 바다를 살폈다.


바다생물의 시체는 정화했다. 정신을 흔들고 피를 빨며 살을 갉아먹는 벌레들도 모조리 소멸시켰다. 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죽은 피처럼 검붉었고, 빛의 기둥에 꿰뚫렸던 하늘도 거무죽죽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 바다와 하늘은 마왕의 영지가 되었다. 이곳부터가 마경인 것이다.


대체 누가 이 바다와 하늘을 마경으로 만들었을까.


‘아이리스.’


300년 전. 광란의 마왕을 섬기던 마족들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광란의 군세와 싸우던 전장에서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던 벌레들.


광란의 자식 중에는 뱀파이어 로드 사인이 있었다. 저 벌레는 마왕의 권능으로 태어났으나, 전장에서 벌레를 자유자재로 부리던 것은 바로 사인이었다. 사인과 휘하 뱀파이어들은 벌레를 통해 피를 빨고 살을 갉아먹으며 힘을 키웠다.


ㅡ아이리스에게 벌레를 부리는 재주는 없다. 그래서 유진은 여러 가지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안 외의 재주가 없던 다크엘프가, 뒈진 아비가 가졌던 권능을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검붉은 바다. 새카만 하늘.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이리스에게 저만큼의 마력은 없다. 유진이 보았던 아이리스의 역량으로는, 지금 이 바다에서 벌어진 것 중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기에, 아이리스가 분수에 맞지도 않는 힘을 손에 넣은 걸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아이리스가 마왕이 된 것이다.


‘어떻게?’


꽉 다문 이빨에서 피의 맛이 났다.


아이리스가, 그 병신 같은 다크엘프가 마왕이 되었다고? 누아르 제벨라와의 영지전에서 패배해서, 자기 영지도 잃고 헬무드에서 도망친 그 병신이? 납치극조차 실패해서 남쪽 바다까지 기어들어 와, 몇 년 동안 해적질이나 하던 년이 마왕이 되었다고?


“불가능해.”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아이리스가 수백 년 동안 마왕이 되고 싶어서 발악하던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아이리스는 뒈진 광란의 마왕을 재림시키겠다며 300년 동안 나름 열심히 한 모양인데, 그건 아무 쓸모도 없는 짓거리였다. 다크엘프의 머릿수를 하나둘 늘려가며 광란의 마왕을 부르짖어 봤자 마왕이 재림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마왕이 되는 법? 잘은 모른다. 하지만 유진은 여태까지 두 번, 마왕이 아닌 존재가 마왕이 되려 한 것을 저지했다.


이오드 라이언하트. 놈이 마왕이 될 뻔한 것은, 놈에게 어둠의 정령ㅡ 마왕의 잔재가 깃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라이언하트에 마왕의 무구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들에 깃든 마왕의 잔재가 라이언하트의 ‘피’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라이언하트의 피 속에 마왕이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 존재는 하였으나, 이오드가 마왕이 되기 위해서는 본인의 피 외에 여러 제물이 필요했다.


이오드는 병신이었다. 놈은 주제도 모르고 시안과 시엘을 제물로 삼았다. 그로도 모자라 유진까지 제물로 바랐다. 그래서 실패했다.


에드몬드 코드렛. 놈은 이오드가 실패했던 의식을 제 방식대로 고쳤다. 이오드가 라이언하트의 소수를 제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에드몬드는 수만 명이 넘는 목숨과 사마르의 세계수, 거기에 라이자키아의 마력을 제물로 선택했다.


대수림에 세냐가 봉인되어 있지 않았다면. 유진이 대수림에 온 적이 없었다면. 조란 부족의 이바타와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 에드몬드는 바라던 대로 몰래 의식을 벌여서, 조용히 마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리스에게는 수천 명이 넘는 해적들이 있다.’


에드몬드가 바치려 했던 제물보다 숫자가 적다. 적은 만큼 제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도 아니다. 외부에서 끌어 올 마력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토지에…… 특별함이 있나?’


솔가르타 해역은 특수한 곳이다. 어쩌면 이 해역 어딘가에 아가로트의 성지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는 것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애당초 마법사도 아닌, 가진 재주라고는 눈깔 부라리는 것밖에 없는 병신 다크엘프가 뭔 수작을 부려서 마왕이 되었단 말인가?


우우우우…….


천사들의 성가가 다른 소리에 삼켜졌다. 결계 밖에서 넘실거리는 안개에서 곡성이 들려왔다.


크리스티나는 작게 신음하며 양팔을 끌어안았다. 아니스가 없었다면, 저 끔찍한 마력에 침식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삼켜 버릴 생각이었는데.”


곡성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개가 진동하고 바다가 날뛰었다. 하늘에서는 어둠이 회오리쳤다.


“막았구나? 감히 너희가, 하찮은 인간 따위가 내 의지를 가로막아?”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점점 더 검게 변한 안개는 더 이상 하늘의 색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치 시커먼 벽이 앞에 세워진 것만 같았다.


벽 중앙에 두 개의 실선이 가로로 그어졌다. 실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 두 개의 틈새에서 붉은 달 한 쌍이 뜨였다.


눈동자.


아이리스. 그녀는 한참이나 떨어진 심해의 심연에 서 있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토벌대의 앞에 나타난 눈동자는 곡선을 그리며 들썩였다.


“하찮은 인간은 아니로군.”


대체 얼마나 오랜 옛날일까. 그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리스는 그 아득한 시간을 감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멸망 이후로 시간이 멈춰 버린 폐허. 다시는 열리지 않도록 유폐된 세계. 아이리스는 시커먼 마력을 몸에 두른 것으로도 모자라, 양팔을 들어 제 어깨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야, 세냐 메르데인. 300년이나 흘렀는데도 변함없어 보이는군.”


아이리스는 이곳에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먼바다를 보았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를 죽이러 온 적들. 하찮은 존재들. 감히, 감히, 지저분한 발과 존재로 내 아버지의 영지를 짓밟고 더럽히려 한 놈들.


죽여 마땅한 놈들.


“변함없다는 것이 네게는 저주가 아닐까? 세냐 메르데인. 너를 제외한 동료들은 죄다 뒈졌지. 네가 가족이라 생각한 엘프 대부분도 마병에 걸려 뒈졌을 거고, 아직 숨이 붙었어도 뒈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이리스는 킬킬 웃으며 세냐를 보았다. 300년 전에, 아이리스는 세냐를 두려워했다. 인간이면서 자기 자신을 엘프처럼 생각하는 저 미치광이 마법사는, 돌아버린 정신머리와는 별개로 마법 실력 하나만큼은 재앙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도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는 뒈지지 못해 살아가는 망령이야, 세냐 메르데인. 나는 네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아. 나에게 복수하고 싶은 거지? 나를 죽여 버리고 싶은 거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나는, 나는…… 이제 너 따위에게 결코 죽을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거든.”


아이리스는 진심으로 세냐를 비웃었다.


이 폐허에서, 아이리스는 많은 것을 보았다. 많을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직감했던 대로, 아이리스가 이곳에 온 것은 운명적이라 할 일이었다.


그 운명은 머나먼 옛날, 신들이 실존했던 신화시대에서부터 정해진 약속이었다.


광란의 마왕. 아버지는 먼 옛날부터ㅡ 이 폐허를 닫아버린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었던 것이다.


-언젠가, 내 자식이 이 바다에 올 것이다.


아아, 아버지. 아이리스는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에 전율했다. 그러면서 모두를 비웃었다.


“세냐 메르데인. 내가 너를 이곳에서 죽여주지. 네 미련을 깔끔하게 끝내주겠다는 말이야.”


세냐는 대답하지 않고 아이리스를 노려보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 세냐가 아이리스와 하고 싶은 것은 대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법을 통해 아이리스의 위치를 탐지하려 했으나, 몇 번을 시도해도 아이리스의 위치는 탐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너는ㅡ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지금 시대의 성녀인가? 하하, 부족해, 부족하단 말이야. 네가 성녀인 것이 뭐 어쨌다는 거야? 빛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이리스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 눈부신 빛은 아이리스의 눈에 아무런 통증도 주지 않았다.


300년 전의 성녀, 지옥의 아니스는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아니스가 두렵게 느껴졌던 것은, 아니스의 곁에 걸출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포의 모론과 몰살의 하멜.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


용사, 절망의 베르무트.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네 손에 성검이 있구나. 그야 당연하겠지. 네가 지금 시대의 용사니까.”


아이리스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흘러넘친 어둠이, 마력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족해. 너는 베르무트가 아니야. 그런 네가, 너 따위가……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좋다고 떠드는군.”


유진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아이리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커다란 붉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휘어지는 것과, 비웃음을 토하는 목소리가 듣기 짜증 났다.


“분수에 맞지도 않는 힘을 손에 넣어서 신이 난 모양이지?”


“아하하하!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이라고? 틀렸어, 틀렸다고. 이 힘은 처음부터 나에게 약속된 것이야.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란 말이다!”


아이리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뻥 뚫린 구멍. 심해로 나가는 구멍이다. 아이리스는 어둠과 함께 서서히 떠올랐다.


“내가…… 이 아이리스가, 지금 시대의 광란이야. 내가 바로 광란의 마왕이다.”


약속으로 넘겨받은 유산.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증오와 슬픔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광기마저 품었다.


“너희는 이 바다에서 도망칠 수 없다.”


아이리스가 비웃었다.


“도망?”


유진도 비웃었다.


낄낄거리는 웃음 속에서 아이리스의 눈이 감겼다.


마경


하늘에 나타난 눈은 감겨서 사라졌지만, 어둠과 안개는 흩어지지 않았다.


눈이 감겼다는 것. 아이리스의 시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먼 어둠을 노려보았다.


앞에만 어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결계의 너머, 함대의 후미까지도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 바다와 하늘을 뒤덮은 어둠의 장막. 마치 세계를 구분해 놓는 것만 같았다.


아이리스가 마왕이 됨으로써 이곳은 마경이 되었다. 저 어둠이 뒤덮인 모든 바다와 하늘이 마경이란 말이다.


-너희는 이 바다에서 도망칠 수 없다.


아이리스가 사라지기 전에 내뱉던 비웃음. 마왕이 저렇게 선고해 버린 것이다.


이 마경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무사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도망?”


유진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도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오히려 악수(惡手)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아이리스는 마왕이 되었다. 아버지의 유산이니 뭐니 떠든 말들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궁금하기는 한데, 지금 그것을 궁리해 봤자 명쾌한 답을 낼 수는 없다. 답을 알기 위해서는 아이리스를 죽이기 직전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방금 전에.


더 서둘렀으면 막을 수 있었을까? 유진은 그딴 후회는 하지 않았다. 경계할 것을 경계하면서 최대한 서둘렀는데도 늦은 것이다. 그럼에도 늦었다면 아이리스가 마왕이 된 것은 오히려 필연이다.


‘아니, 늦은 것이 아니야. 오히려 빠르지.’


본래의 일정대로라면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고서 며칠이 지나서야 솔가르타 해역에 도착했을 터. 이건,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고서 며칠이나 지나서 도착했다면ㅡ 저 새로운 마왕은 며칠 분만큼 강해졌을 테니.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리스는 마왕으로서 강해지고 있다. 그러니 도망은 악수가 될 수밖에 없다.


도망쳐서 태세를 정비하고, 전력을 보충하고, 다시 보름 넘도록 항해하여 이 바다에 오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유진은 아이리스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아이리스는,


새로운 광란의 마왕은. 이번이 제일 약할 때다. 반드시 이번에 죽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세냐와 아니스. 둘은 마왕이란 존재가 얼마나 강하고 끈질기며 지독한지를 잘 알고 있다.


당장 아이리스에게는 권속이 많지 않다.


이 마경, 마왕의 영지가 된 바다. 아이리스가 일으킬 군세라고 해봐야 별것 없는 해적과 다크엘프들. 마왕의 권능이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ㅡ 아직은, 그 수가 많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질 것이다. 마왕은 공포를 힘으로 한다.


새로운 광란의 마왕이 된 아이리스. 그 사실이 대륙에 퍼진다면. 대륙 전체에 광란의 마왕에 대한 공포가 커져간다면. 혹시라도 헬무드에 있는 유폐의 마왕이, 아이리스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되어버리면, 오늘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될 것이다.


* * *


유진과 세냐, 아니스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지만 토벌대의 다른 사람들마저 결의를 다진 것은 아니었다.


“남고 싶으면 남으쇼.”


배의 함장들과 토벌대의 주요 전력. 유진은 그 수십 명의 앞에서 내뱉었다.


“당신네들은 해적나부랭이와 싸우러 온 것이지 마왕과 싸우러 온 것은 아닐 테니까. 뒈질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로서는 솔직히 여기 남아 주는 것이 편해. 도망치는 것도 쉽지는 않을 테니까.”


신랄하게 내뱉는 것은 고작해야 21살의, 앞으로 사흘 후면 22살이 되는 청년이다. 하지만 모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아들뻘 되는 젊은 청년에게 섣불리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용사라서?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라서?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유진에게서 뿜어지는 살의. 저 살의가 향하는 대상은 이곳에 없는 마왕이지만, 유진의 앞에 선 모든 사람들이 저 살의에 압도당했다.


“도망…… 이 아니오.”


유진의 살기를 견뎌내고서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르투스 하이만. 그는 손바닥에 고인 식은땀을 주먹을 쥐어서 감췄다. 머릿속에서 사소한 생각이 걸림돌이 되었다. 오르투스는 유진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다. 이전에 유진을 부를 때에는 별생각 없이 이름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감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유진 공. 그대의 말처럼 아이리스는 마왕이 되어버렸소. 우리는 다크엘프와, 해적과 싸우러 온 것이지 마왕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그래서? 내가 말했잖수, 남고 싶으면 남아도 된다고. 나도 싸우기 싫다는 사람들 억지로 끌고 갈 생각 없어요.”


“유진 공. 우리는 제대로 된 준비를 갖추지 못했소. 그러니 일단은 함께 퇴군해서, 마왕과 싸우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편이…….”


“준비?”


끝까지 들을 것도 없는 말이었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하!”


뒤편에서 마법진 위에 앉아 있던 세냐가 짧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차가운 웃음이었다.


“준비는 우리만 하나? 오르투스 경, 우리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아이리스에게, 마왕에게도 시간을 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아마 우리가 물러서 봤자 마왕과 ‘싸울’ 준비는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오르투스는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애석하게도 지금 시대에서 마왕은 무조건적인 악이 아니었다.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적이 아니란 말이다.


이 바다에서 퇴군하여 시무인으로 돌아가고, 왕궁에 마왕에 대한 사실을 보고한다면…… 과연 시무인의 국왕은, 전군을 동원하여 새로운 마왕을 토벌하려 들까?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국왕이 그런 결단을 내렸을 때. 그 뜻을 대륙의 다른 국가에 알렸을 때, 과연 얼마나 되는 국가가 힘을 보태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정들. 오르투스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국왕은 저런 결단을 내릴 만큼 과감하고 신념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무인뿐만 아니다. 대륙 대부분의 국가들은ㅡ 새로운 마왕을 적으로 규정하여 토벌하는 것보다는, 대화나 협상을 먼저 시도할 것이다.


“오르투스 경. 나는 말입니다, 높은 곳에 앉은 군주들의 공론(空論)에 휘둘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딴 쓸데없는 짓거리로 마왕에게 시간을 주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유진은 사나운 투로 내뱉으면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용사인 나는 당신네들 보다 마왕에 대해 잘 압니다. 우리가 대륙에 돌아가서,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었다고 알려 버리면. 대륙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마왕의 탄생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겠죠.”


마왕은 경외(敬畏)를 힘으로 삼는다. 숭배와 신앙이 신을 신답게 하듯이, 마왕에 대한 경외가 마왕을 마왕답게 만든다. 그것이 마왕과 마족을 가르는 절대적인 차이다.


“광란의 마왕, 아이리스. 그 이름을 사람들이 두려워할수록, 아이리스의 격은 높아집니다. 가뜩이나 강해진 힘이 더, 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해질 겁니다.”


공포는 마왕에게 있어서 달디 단 공양이다. 유진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리스는 마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죠. 그년이 마왕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휘하 해적과 다크엘프…… 그리고 우리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아이리스는, 광란의 마왕은 지금이 가장 약하단 말입니다.”


“나도 유진 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빅이 입을 열었다.


사실 아이빅은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세냐 메르데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배에 타지 않았던 저 3명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일까? 라이언하트에서 왔다는 3명의 몸종은 어디로 갔는가?


‘물어보면…… 죽는다.’


아이빅은 그 사실을 직감했다.


나중에,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 여기서 저런 의혹을 묻는다면 목이 날아갈 것이다. 유진이 내뿜는 살기는 삶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낸 아이빅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죽음을 연상시켰다.


“애당초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는 것이 힘들 겁니다. 여제…… 아니, 마왕이 말했잖습니까? 이 바다에서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아…… 아까의 빛이라면…….”


더듬거리며 입을 연 것은 시무인의 계승 서열 3위인 자페르 왕자였다. 왕자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눈동자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페르 왕자가 이 토벌대에 온 것은, 상대가 해적이기 때문이다.


나찰공주라고 불리던 수백 년 묵은 다크엘프. 솔직히 우습게 봤다. 수백 년 전에 이름을 날렸건 어쨌건, 지금 시대에서는 패배해서 도망쳐 해적질이나 하고 있잖은가.


휘하에는 백 명도 안 되는 다크엘프와 해적이 수천 명. 단순히 머릿수만 비교해도 토벌대의 숫자가 더 많으며, 이쪽에는 오르투스와 아이빅, 카르멘 같은 걸출한 강자까지 있다.


쉽지 않은 전투겠지만 토벌대가 질 리는 없었다. 오히려 쉽지 않기에 참가할 가치가 있었다.


참가하겠다는 용기. 승리로 얻을 명예. 자페르는 직접 나서서 싸울 생각은 없었다. 후방에서 안전히 있기만 하여도 바라는 명예는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마왕이라고? 자페르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도 마왕이란 존재가 얼마나 터무니없고 끔찍한지는 안다.


“유진…… 유진 라이언하트. 그대가 뿜었던 빛과, 크리스티나 성녀의 신성력이라면…… 그, 그리고 현명한 세냐 님의 마법이라면. 뒤편의 장막을 가르고 퇴로를 열 수 있지 않은가?”


“이 개새끼는 말을 똥구멍으로 쳐들었나?”


유진은 얼굴을 콱 구기고서 자페르를 노려보았다.


개새끼? 똥구멍? 자페르는 귀에 꽂힌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서열 3위의 왕자가 언제 저런 쌍욕을 들어봤겠나.


“나는 도망칠 생각이 없다니까? 나만 그래? 저기 세냐 님이랑 크리스티나 성녀도 도망칠 생각이 없다고.”


“아니…… 그…… 같이 도망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망…… 으흠, 도망이 아니라, 물러설 퇴로를 열어달라는…….”


“그래? 도망칠 길을 열어달라고? 이 개새끼야,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냐? 수십 척 함대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길을 여는 것이 쉬운 줄 알아?”


유진은 자페르를 노려보면 내뱉었다.


일국의 왕자에게 할 만한 언동이 아니다. 시선도 불경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자페르는 그것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금색으로 번뜩이는 저 눈동자가 두려워서, 오히려 자페르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우리가 왜 그딴 짓에 쓸데없이 힘을 빼야 하는 건데? 잘 들어, 나는 당신들이 잘 도망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도망치고 싶다면 알아서 도망치라고. 도망칠 자신도 없고, 마왕과 싸우러 가기도 무섭다면 그냥 여기 얌전히 있던가.”


그래도 왕자니까, 아롯의 호네인 같은 강단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자페르는 볼 가치가 없는 놈이었다. 하긴. 자페르가 여기서 왕자다운 위엄을 보이며, 우리 다 같이 광란의 마왕과 맞서 싸웁시다, 라는 말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마왕은 강하다. 지독하다. 끈질기다. 어떤 면에서는 바퀴벌레와 비슷하다. 보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든다. 날개를 퍼덕이며 가까이 오기라도 하면 비명을 지르게 된다. 죽이려 후려쳐도 잘 죽지도 않는다. 내버려 두면 바퀴벌레가 알을 까듯이 권속들을 불려댄다.


바퀴벌레와 비슷할 뿐, 똑같지는 않다. 마왕은 강하다. 그런 존재와 싸우는 것에 대한 각오는 스스로 내려야 한다.


300년 전에도 그랬다. 최후에 최후까지 마경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모두가 마경에서 죽겠다고 스스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유진은 함께 싸우러 가자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 도망치는 것보다는 여기 얌전히 남아 있는 것이 목숨 보전하기 쉬울 거야. 아이리스는 당신들보다는 나와 크리스티나 성녀, 세냐 님에게 관심이 있을 테니까.”


앞으로 나아간다면 아이리스도 성대한 마중을 준비할 것이다. 어쩌면 아이리스가 따로 수작을 부려 잔류자들을 습격할지도 모르겠다만…… 유진은 그것까지는 신경 써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도망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남아 있을 생각도 없는데……. 그럼 함께 가도 되는 건가?”


아이빅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상대가 대뜸 마왕으로 바뀌어버리긴 했는데, 그래도 뭐…… 이쪽은 용사와 성녀가 있잖아. 거기에 3명의 마왕을 쓰러트렸던 전설적인 마법사도 계시지.”


“죽으면서 후회할 생각이 없다면야.”


“후회? 하하하! 죽을 때는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후회할 것 같지는 않아. 해적여제 토벌보다는 마왕 토벌이 수십, 수백 배는 가치 있는 경력 아닌가?”


아이빅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내 부하들이 다들 나처럼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용병은 경력이 중요하단 말이야. 나는 과분하게도 용병왕이라 불리는 몸인데…… 흐흐, 이름에 걸맞은 경력을 한 줄 적을 수 있겠어.”


아이빅이 그렇게 말해 버리니, 잠자코 있던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이성과 공포 사이에서 갈등했다.


아까 보았던 마왕의 붉은 눈동자. 떼죽음 당한 바다생물들. 정신을 뒤흔들던 날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밀어닥친 오싹한 불길함…… 그것은 잊을 수도 항거할 수도 없는 공포였다. 떠올릴수록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도 빛은 있었다. 용사가 빛을 일으켰고, 성녀가 빛을 전파했다. 그 속에서 천사들은 성가를 외쳤으며, 대마법사는 바다를 뒤집었다.


상대가 마왕일지라도…….


저 3명과 함께 한다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조금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간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죽은 피처럼 검붉고 끈적거리는 바다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마왕이 되어버렸다면, 더더욱 가야지. 나는 라이언하트니까.”


노려보는 시선과는 달리 카르멘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하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마력이 덮쳐왔을 때. 카르멘은ㅡ 두려움을 느꼈다. 적의보다 공포가 앞섰다. 몸이 떨렸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카르멘은 그때 느꼈던 감정이 치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해도, 라이언하트의 후예가…… 그,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가. 마왕을 앞에 두고서 겁에 질리다니. 그를 설욕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 오르투스 경.”


아이빅에 이어 카르멘까지 저렇게 말해버리니 분위기는 이미 넘어갔다. 자페르는 바뀌어 버린 분위기에 질겁하며 오르투스를 쳐다보았다.


“겨, 경은 갈 생각이 없겠지? 경은 왕국 군을 이끄는 몸이니, 함부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돼.”


“…….”


오르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두 눈을 감았다.


자페르 왕자의 말이 옳기는 했다. 용병단이나 상위랭킹에 이름을 올린 투사들은 결국 사병이다. 하지만 오르투스는 왕국의 대공이고, 그가 이끄는 병력은 국왕에게 하사받은 국군이다. 또한 오르투스는 자페르 왕자를 보호해야 할 입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정녕 옳은가? 오르투스는 진지하게 그것에 대해 고민했다.


마왕과 싸우러 간다는데, 국왕의 뜻을 대행하고자 이곳에 있는 자신이…… 잔류를 결정하는 것이 정말로 옳은가?


이건 기사도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만약 저들이 마왕 토벌에 성공한다면? 오르투스가, 그 위업에 함께하지 못한다면?


우선 시무인의 위신은 곤두박질칠 것이고, 오르투스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나락에 처박힐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함께 가는 편이 낫지 않나? 국군에 커다란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르지만, 마왕을 토벌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러한 피해도 영광스러운 희생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갈 것이다.”


오르투스의 등을 떠민 것은 의외의 목소리였다.


스칼리아 아니머스. 그녀가 자페르를 제치고 나오더니 대뜸 그렇게 외쳐버린 것이다.


“스칼리아!”


자페르가 경악하여 고함을 질렀다.


평소 스칼리아는 오빠인 자페르의 말에 거역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스칼리아의 귀에는 자페르의 고함은 들리지 않았다.


피비린내.


바다에서 올라오는 피비린내가 스칼리아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조만간 벌어진 전투가 스칼리아를 홀렸다. 그녀는 광란을 기대하며 외쳤다.


“본 공주는 시무인 왕가를 대표하여 이곳에 왔노라! 본 공주가 가지 않는다는 것은 왕가가 마왕에게 굴복하는 것이니라. 그러니 본 공주는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가 마왕과 맞서겠노라!”


이 미친년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자페르의 두 눈이 뒤집혔다.


왕가를 대표해서 왔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만, 스칼리아에게 저런 선택을 내릴 자격은 없었다. 여기서 왕가의 뜻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서열상 자페르 본인이어야만 했다.


“다, 닥쳐! 닥쳐라! 스칼리아! 너 따위가…….”


“알겠네.”


오르투스도 자페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페르가 당장 반발하고는 있지만, 토벌이 성공하고 나면 자페르 본인도 만족할 것이 분명했다.


‘죽지만 않는다면.’


여기서는 스칼리아 공주를 따라서 명예를 좇는 편이 옳다. 오르투스는 저울질을 마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함께 마왕과 싸우도록 하지.”


“함께는 무슨.”


가만히 듣고 있던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오르투스가 왜 저런 결정을 내렸는지 얼추 짐작한 것이다.


“알아서들 싸웁시다.”


“뭐……?”


“알아서들 싸우잔 말입니다. 함께 가기는 하지만, 목숨은 각자 챙기자고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들고 있던 성검을 흔들었다.


“빛의 신께서 말씀하시길, 광란의 마왕과의 싸움에서는 자기 자신도 믿지 말랍니다.”


오랜만의 신의 이름도 팔았다.


마경


광란의 마왕.


놈은 그 이름처럼 광란을 만들었다. 마왕 본인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놀이에 심취하고, 최후마저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희생했지만ㅡ 조금 다르게 본다면, 그러한 행동마저도 정신이 돌아버렸기 때문 아닐까.


“당신들도 아까 겪어보지 않았습니까? 아이리스의, 광란의 마왕의 마력. 그것이 정신을 얼마나 뒤흔드는지 말입니다.”


몰아닥치는 어둠. 시체의 악취. 왱왱거리는 날벌레 소리. 핏물로 변해버린 바다에서는 아직도 비린내가 올라오고 있다.


“광란의 마력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피아를 구분하지 못해 아군의 등을 찌를 수도 있고, 제 목을 긋게도 만듭니다.”


그 말에 아이빅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아이빅은 슬쩍 오르투스 쪽을 쳐다보았는데, 그 순간에 오르투스도 아이빅을 쳐다보았다. 졸지에 시선이 마주친 둘은 서로를 한번 노려보고서 고개를 돌렸다.


“뭐…… 미리 알고서 정신을 꽉 잡는다면 저항은 가능합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성녀도 있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편에서 크리스티나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모아두고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리스의 토벌에 동원된 마법사는 많지 않다. 8서클의 궁정마법사장인 마이스 브리오르. 슬라드 용병단 소속의 전투마법사가 약 20명.


하지만 성직자는 꽤 많았다.


빛의 신을 섬기는 것은 신성제국 유라스뿐만이 아니다. 빛의 신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신이며, 시무인에도 빛의 신앙은 퍼져 있다. 시무인에 세워진 빛의 성당은 이번 토벌에 성직자와 성기사를 파견했다.


시무인에서 빛의 신만큼이나 지명도가 높은 것은 기사와 명예의 신이다.


투사랭킹 3위인 ‘팔라딘’ 아돌. 기사와 명예의 신의 대전사를 자처하는 아돌도 크리스티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돌의 주변에는 기사와 명예의 신을 섬기는 성직자 수십 명이 곁에 있었다.


섬기는 신이 다르다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중요치 않았다. 평소에는 서로를 이교도라 부르며 꺼리는 입장이지만, 토벌해야 할 적이 진짜 마왕인 이상 이교도라 해도 손을 잡아야만 했다.


아까 크리스티나가 만들어낸 빛. 인간이라 믿을 수 없는 커다란 신성력. 활짝 펼친 8장의 날개와 강림시킨 천사들. 그 성스러운 모습은 이교의 성직자들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도인데 빛의 신도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들은 뺨의 눈물 자국을 지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서 크리스티나의 말을 경청했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성직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 토벌에 파견된 성직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모두가 전투신관이라, 마(魔)에 관한 전투에 대한 지식이 있기는 했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대부분 실전 경험은 없었다.


마족은커녕 마물과도 싸운 적이 없다. 그나마 있는 경험이라곤 정신 나간 흑마법사를 사냥하는 것이 고작이다. 지금 시대에서 전투신관과 성기사의 주된 적은 인간이 만든 사교(邪敎)나 몬스터다.


그렇다 보니 마왕과의 전투에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어려운 질문이었다. 가진 지식이라고는 교본을 통해 배운 이론이 전부였다.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안에는 아니스가 있다. 지금 시대에서 유일하게 마왕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성녀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상대는 광란의 마왕. 300년 전과 똑같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마력을 휘두른다면, 성직자가 해야 할 것은 철저하게 아군의 정신을 보호하는 것. 정신을 정화하고 공포를 억제하는 가호를 내리는 것. 구할 수 있는 아군과 구할 수 없는 아군을 냉정하게 구분하는 것. 무조건적인 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


“전투가 끝난 뒤에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전투 중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니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가 끝나면 언제나 후회하곤 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시체의 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했다면, 저렇게 했다면, 그런 식의 후회.


하지만 아니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최선을 골랐다. 시체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전투에서 승리하려면ㅡ 약자를 보아서는 안 된다. 강자를 보아야 한다. 베르무트, 하멜, 모론, 세냐. 전투를 확실하게 주도하면서 마왕의 몸에 칼을 박아 넣을 수 있는 강자들.


그래서 아니스는 언제나 저 넷만을 보았다. 주변의 다른 사람이 쓰러지건 죽어가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싸워서 승리해 왔다. 승리하고 난 뒤에는, 언제나 성흔에서 피를 쏟으며 전장을 떠돌았다. 눈을 돌린 것과 구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다.


“광란의 마왕, 아이리스의 토벌. 이 전투에서 우리 모두가 보아야 할 등은 하나뿐입니다. 대부분의 아군이 죽을 상황에서도 우리는 단 한 명을 지키고 구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빛의 신을 섬기지 않는 성직자들도, 저 ‘한 명’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제 자신을 기사와 명예의 신의 대전사라 자처하는 아돌조차도 다른 의문을 갖거나 반발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대전사를 자처하는 아돌과는 달리, 저 남자는 ‘진짜’다.


빛의 대리자. 성검의 주인.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


용사.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함 라베르시아. 유진은 선수상을 향해 걸어가며 내뱉었다. 그 많던 사람들은 유진을 따라오지 않았다. 지금 함께 간들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300년 전에도 했던 일이잖아.”


세냐는 유진의 곁을 걸었다. 그녀의 양손에는 아카샤와 프로스트가 쥐어져 있었다. 세냐는 2개의 지팡이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오히려 나는 300년 전에, 광란의 마왕을 죽였을 때보다 상태가 좋아. 응, 이터널 홀이 조금 망가지긴 했어도…… 결함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


단기전을 노린다면 이터널 홀에도 무리는 가지 않는다. 장기전이 되어버릴지라도, 드래곤하트를 사용한 마법지팡이라면 어느 정도 보완은 할 수 있다.


“전투 중에 아카샤는 네가 써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 현명한 세냐 님에게 문제는 없단 말씀이야. 확실하게 말해줄게, 유진. 지금의 나는 300년 전, 광란의 마왕에게 도전할 때보다 강해.”


세냐의 말은 진심이었다. 300년 전의 세냐는 이터널 홀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서클마법식을 완성하기도 전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곁을 걷던 아니스도 입을 열었다.


“신성력 자체는 300년 전보다 강할 겁니다. 아무렴, 천사가 되었으니까요. 크리스티나 본인의 신성력도 굉장히 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 둘이 300년 전의 저보다 뛰어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크리스티나에게는 성흔(聖痕)이 없다. 빛의 샘에서 인위적으로 새기지도 않았다. 잘린 팔다리를 붙이고, 죽어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빛을 일으켜 어둠을 몰아냈었다. 그만큼 강한 기적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스의 등에 커다란 성흔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 성황과 성녀들을 사용해 만든 완벽에 가까운 모조화신. 억지로 새기지 않고, 처음부터 성흔을 가지고 태어난 성녀가 바로 아니스였다. 등에 나타난 성흔은 처음에는 작았지만, 아니스가 기적을 사용할 때마다 점점 커져가며 피를 쏟았다.


하지만, 아니스의 복제품인 크리스티나에게는 아직 성흔이 깃들지 않았다.


빛의 샘에서 의식을 마무리 지었다면 성흔이 깃들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크리스티나, 당신은 하멜에게 구원받지 못했겠죠.’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생각을 읽고서 씁쓸히 웃었다.


‘크리스티나. 성녀로서의 완성도를 생각한다면, 당신이 저보다 뛰어납니다. 당신에게는 아직 성흔이 깃들지 않았지만…… 언젠가 성흔이 깃들 겁니다. 제가 깃들었던 성흔은 제 존재가 불완전하여 피를 쏟았습니다만, 당신에게 깃들 성흔은 피를 쏟지 않을 겁니다.’


[시스터.]


크리스티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깃드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제게는 지금 성흔이 필요합니다. 이번 전투에서 사용할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수밖에 없군요.’


조급한 마음은 이해한다. 이전과는 다르게 상대는 진짜 마왕이다. 성흔이 없다면, 유진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때 구할 수가 없다.


“신께서 우리를 돌보시길. 빛이 우리를 감싸주길.”


아니스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 흥분의 기세 없이 굳게 닫힌 입술. 이를 악물어 꿈틀거리는 턱의 근육.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이었다. 하멜은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함께 싸우러 갈 적마다, 하멜의 얼굴에는 언제나 흥분이 맴돌곤 했었다.


하지만 마왕성에 오를 때는.


하멜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것인지, 죽지 않겠다는 각오를 한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모른다.


아니스는 하멜의 저런 얼굴을 좋아했다.


‘베르무트는 없어.’


유진은 느릿한 걸음으로 선수상을 올라갔다. 아니스와 세냐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유진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서 성검을 쥐었다.


‘모론도 없어.’


300년 전과는 다르다. 언제나 앞으로 달려나가서 막아주던 모론은 없다. 일행의 중심에서 성검과 월광검을 휘두르던 베르무트도 없다.


그 둘의 빈자리를 누가 대체할 수 있을까? 카르멘이? 오르투스가? 아이빅이? 손발을 제대로 맞춰본 적은 없다. 의존할 생각은 없다.


모론과 베르무트의 빈자리는 유진이 채워야 한다.


내가? 유진은 손에 쥔 성검을 의식했다. 천천히 성검을 위로 들었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무게가 느껴졌다.


등 뒤에서도 여러 가지를 느꼈다. 다양한 감정이 담긴 시선들. 용사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 베르무트의 후예에 대한 기대.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대한 두려움.


믿음.


“무겁군.”


유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300년 전에도 무게는 느꼈다. 세상 모두가 베르무트와 동료들에게 무거운 기대를 보냈다. 그때 세상은 베르무트와 동료들을 ‘희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희망의 중심은 언제나 베르무트였다. 당시 하멜이 느꼈던 중압감과, 베르무트가 느꼈던 중압감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의 잡념을 지워냈다. 검에 불필요한 부자유를 남기지 않았다.


세상은 아직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었음을 모른다. 이 먼바다에서, 300년 만에 용사와 마왕의 전투가 시작된 것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한 기대가 중압감이 된다.


성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조용하던 아가로트의 반지를 의식했다. 계시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가뜩이나 무겁던 성검에 ‘힘’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가로트ㅡ 고대의 전쟁신. 그 이름답게 전쟁을 바라는 것일까. 성검의 빛이 부풀어 올랐다.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건, 유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용사건 아니건 유진이 할 일은, 300년 전 하멜일 때와 다르지 않았다.


마왕을 죽인다.


-너여야만 한다.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암실에서 들었던 베르무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유진은 웃지 않는 입술을 벌렸다.


“마왕을 죽이는 건 나여야만 해.”


300년 전부터 그랬다.


하멜은 마왕을 죽이고 싶었다.


성검의 빛이 높이 치솟았다. 하늘까지 닿는 빛의 기둥이 유진의 양손에 들렸다. 그만큼 거대한 빛을 들고 있는데도 유진은 조금도 휘청거리지 않았다.


“야, 빛.”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빛을 뿜어대는 성검이 덜덜 떨렸다.


유진은 시커멓고 두꺼운 장막을 노려보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어둠.


그 너머의 바다에 마왕이 있다.


“난 마왕을 죽이러 갈 거다.”


목소리를 들어 본 적 없는 신. 그러면서도 언제나, 유진이 바랄 때에 신성력을 내려주는 신. 아마, 이렇게 직접 기도하는 것은 처음이 아닐까.


유진은 칼자루를 쥔 양손을 기도하듯이 겹치면서 내뱉었다.


“그러니까 힘을 내놔라.”


콰아아아아!


일방적인 선고에 호응이 왔다. 하늘과 이어진 빛의 기둥이 더욱 짙어졌다. 저 높은 하늘에서 빛이 더해진 것만 같았다. 마경의 어둠을 꿰뚫고서 내려온 커다란 빛이 유진을 집어삼켰다.


유진은 찬란한 빛 속에서 우뚝 섰다. 사방이 번쩍거렸지만 유진은 눈부심은 느끼지 않았다.


광채 속에서 유진은 앞을 보았다. 기도처럼 쥔 손과, 칼날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빛을 뿜어대는 성검. 지금 성검은 유진과 완벽하게 일체해 있었다.


“아아……!”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동시에 감탄했다. 넘실거리는 빛은 유진을 넘어서 라베르시아를 감싼 뒤에 바다로 흘러갔다. 검붉은 색의 바다가 빛에 덮였다. 함대 전체가 출렁거리는 빛 위에 떠올랐다.


아니스가 날개를 펼쳤다. 크리스티나는 양손을 뻗었다. 휘몰아치는 빛의 물결이 크리스티나의 손에 닿았다. 그 순간, 크리스티나는 왼손바닥 한가운데에서 욱신거림을 느꼈다. 피는 흐르지 않았으나, 얇은 선이 크리스티나의 왼손바닥에 새겨졌다.


유진은 성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 휘두른 것으로 충분했다.


콰르르르! 하늘과 이어졌던 빛의 기둥이 무너져 내리더니, 거대한 참격이 되어 어둠을 갈라버렸다. 그에 맞춰서 크리스티나는 성흔이 깃든 왼손을 번쩍 들었다.


화아악! 빛의 입자가 깃털이 되어 나부꼈다. 빛의 바다가 크게 출렁거리더니 함대를 부상시켰다.


“맙소사!”


모든 것을 보던 세냐는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만큼의 기적을 벌써부터 보게 될 줄이야. 세냐는 광채 속에서 아른거리는 유진의 등을 보며 가슴의 울렁거림을 느꼈다.


빛, 용사. 세냐에게 있어서 그러한 수식은, 아직은 유진보다는 베르무트에게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ㅡ 지금부터는, 그렇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양손에 쥔 아카샤와 프로스트를 들었다. 이터널 홀이 열리고, 두 개의 지팡이가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쏟아냈다.


거대한 바람이 일어났다. 함대를 감싸고 있던 결계 전체에 마법이 걸렸다. 뒤에서 떠미는 바람이 함대를 전진시켰다. 빛의 바다가 파도를 만들었다.


빛에 둘러싸인 함대가 어둠을 가르며 나아갔다.


마경


짙디짙은 마력이 밤을 만들었다.


태양이 결코 떠오르지 않는 밤. 별조차 존재하지 않는 밤. 불을 피워도 밝혀지지 않는 밤. 아이리스는 자신이 만든 밤과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온다.”


새빨간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아이리스는 킬킬 웃으며 턱을 괴었다. 두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보고자 한다면 볼 수 있겠지만, 아이리스는 굳이 보려고 들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이렇게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이리스에게 더욱 큰 설렘을 주었다. 아이리스는 기대감과 희열에 몸을 떨었다.


점점, 점점 다가오고 있다. 평범한 속도는 아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이 바다에서 이만큼이나 빨리,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간질거리는 불쾌감. 그래, 신성력이구나. 빛의 신? 성녀와 용사가 있으니까 당연하겠지.


‘내일 마중을 나가자.’


준비를 안 하지는 않았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득 퍼진 어둠 안에서도 다른 어둠은 있다. 아이리스가 직접 뭉쳐서 빚어낸 어둠. 그것은 요람이자 고치가 되어 동포들을 품고 있다.


광란의 독립군.


아이리스가 300년 전부터 결성했던 조직. 헬무드의 마족들에게 핍박과 멸시를 받던 때에도 아이리스를 떠나지 않던 충신들. 아이리스를 공주라 섬기며, 아이리스와 함께 광란의 재림을 꿈꾸던 동료들.


사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광란의 독립군을 이루는 백여 명의 다크엘프. 그중에서 아이리스와 함께 전쟁시대를 겪었던 것은 30명 정도뿐이다. 그 외의 다크엘프는 전쟁이 끝난 후. 마병에 걸려 죽어가는 엘프나, 노예로 팔려가던 엘프나, 혹은 일방적으로 납치해 온 엘프들을 타락시켜 만들었다.


하지만ㅡ 처음에는 아이리스를 지지하지 않았을지라도, 다크엘프가 되어버리면 아이리스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아이리스에게 있어서는 광란의 독립군, 정확히 세어 103명의 다크엘프는 ‘가족’이었다.


아이리스가 가장 바라던 것은 죽은 아버지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를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아이리스 본인이 마왕이 되었다. 다른 이름을 갖는 마왕이 된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유지를 잇고, 유산을 계승하여, 아이리스 본인이 광란의 마왕이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광란은 재림한 것이다.


아버지를 존경하며 사랑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상냥했던 아버지. 평범한 다크엘프일 뿐인 내게, 많은 힘을 주었던 아버지.


광란의 독립군은 300년간 힘든 일도, 즐거운 일도 함께 겪어온 가족이다.


그러니 힘을 주었다. 과거 아이리스가 아버지에게 힘을 받았듯, 아이리스도 가족인 다크엘프들에게 힘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크엘프들은 요람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 외의 부하들ㅡ 해적들에게는 애정이나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으로는 광란의 군세에 어울리지 않으니, 수고스럽지 않은 선에서 힘을 주었다.


무식하게 마력을 욱여넣은 탓인지, 인격이 붕괴되고 종이 바뀌어 버리기는 했다만…… 그건 아이리스가 알 바가 아니었다.


“이곳에서부터 시작할까.”


아이리스는 의자에 앉은 몸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흐느적거리는 어둠이 아이리스의 나신을 감쌌다. 아이리스는 새로 입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잠가 가며 쿡쿡 웃었다.


“아니면 당신이 내게 영지를 줄 건가?”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어둠이 밀려온다. ‘밀리는 것’은 아이리스의 어둠, 아이리스의 마력이었다. 똑같은 어둠이 아니다. 저쪽의 어둠이 더욱 짙고, 저쪽의 마력이 더욱 강하다.


아이리스는 그 사실을 절감하면서 주먹을 쥐었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이 감정은ㅡ 경계하는…… 경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공포.


마왕이 되었는데도 공포를 느끼는 건가?


‘아니야.’


마왕이 되었기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아이리스는 지금 다가오고 있는 어둠이, 마력이, 그것들을 이끄는 주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인지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인간이나 마족은 저 존재의 진면목을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마왕이 되었기에 더더욱, 저 존재의 ‘공포’를 알 수 있다.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가 마왕이라 불리고 있지만, 결코 똑같지는 않다.


격이 다르다. 심지어 아이리스는 아버지ㅡ 전대 광란의 마왕의 기억을 계승했기 때문에, 저 존재에 대해 더욱 확실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쇠사슬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쇠사슬이 서로 끌리는 소리.


쇠사슬 소리의 한가운데에서 눈동자가 떠졌다.


기묘하게 불길하며, 피폐하며, 음울해 보이는 눈동자.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인 것처럼 사슬은 제 몸에 얽은 자. 똑같은 마왕인데도 똑같은 마왕에게 경외 받는 자. 마왕조차도 두려워하는 자.


마왕 중의 마왕이기, 일컫기를 대마왕.


심해에 심연을 유폐(幽閉)해 버린 자.


“축하와.”


아이리스의 마력은 유폐의 마력을 침범하지 못했다. 이곳은 아이리스의 영지였으나, 유페의 마왕이 나타난 순간부터 영지의 주인은 바뀌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그 사실에 불쾌감을 느낄 수조차 없었다.


“위로를 전하도록 하지.”


유폐의 마왕은 아이리스가 보았던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빛 한 점 없이 칙칙하고 붉은 눈동자. 핏기없이 창백한 피부.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장발. 앙상하다 싶을 정도로 마른 몸. 어깨에 늘어트린 셀 수 없이 많은 사슬.


변함없이 똑같다. 헬무드에서 보았을 때도 유폐의 마왕은 저런 모습이었다.


300년 전에도 저런 모습이었다. 계승 받은 기억에서도ㅡ 유폐의 마왕은 저런 모습이었다. 지난 시대가 종말을 맞을 때. 파도와 안개 위에서도 유폐의 마왕은 저런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언젠가, 내 자식이 이 바다에 올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유폐의 마왕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유폐의 마왕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도 똑같았다. 축하를 말했음에도 유폐의 마왕에게는 아무런 기쁨이 없었고, 위로를 말했음에도 유폐의 마왕에게는 아무런 슬픔이 없었다.


“위로?”


아이리스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녀는 반발심을 담아 내뱉었다.


“내가 왜 위로를 받아야 하지?”


“알게 되었을 것 아닌가.”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유폐의 마왕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촤르륵! 망토처럼 끌리던 쇠사슬이 서로 얽히더니 의자가 되었다. 유폐의 마왕은 의자에 편히 앉으며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이 바다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었는지. 이 바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 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의 너는 알고 있을 거다.”


유폐의 마왕은 담담하게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나는 그렇게 되도록 남겼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네가 알지 못한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지. 나는 그런 문제를 싫어한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문제라면 더더욱.”


칙칙한 시선이 아이리스를 응시했다. 마치 아이리스의 모든 것을 간파하고 파헤치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아이리스는 꿀꺽 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화아악! 치솟은 마력이 아이리스의 몸을 감쌌다.


“알고 있어. 유폐의 마왕. 내 아버지는…… 이 바다에서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네게 넘겼다.”


“죽음이라…… 그래, 네게는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겠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광란의 마왕…… 네 아버지는 오래전 이 바다에서 죽었다. 죽어서, 내가 받았다.”


아이리스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너무나도 많았다.


심해의 심연에서 보았던 것. 심연을 닫고 있던 문. 세상을 집어삼킨 해무와 파도. 그 위에서 죽음을 택한 아버지와, 목숨을 넘겨받은 유폐의 마왕.


그렇다면 300년 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이리스’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300년 전에, 아니, 그 이전부터 광란의 마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겠지.”


유폐의 마왕이 말했다. 그는 무표정하지만 경직되지는 않은 얼굴을 천천히 옆으로 기울였다.


“이해한다. ‘약속’대로 아이리스, 네게 흘러가게 두기는 했다만…… 그건 오랜 기억이지. 네가 가진 기억과 완전히 이어지지는 않을 거다.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묻는다면…… 대답해 줄 건가?”


유폐의 마왕. 당신은 대체 뭐지? 내가 심연에서 보았던 것은 뭐지? 왜, 이 바다에서 죽었던 아버지가 헬무드에서는 살아 있던 거지?


“아니.”


유폐의 마왕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나는 네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건 광란과의 약속에 있던 내용이 아니다. 나에게는 네 의문에 답을 주어야 할 의무도 약속도 없다. 그리고, 네게는 나에게서 진실을 들을 자격이 없다.”


아이리스는 뿌득 이를 갈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마력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이리스의 분노에 공명한 마력이 더욱 어둡게 물들었다.


“사납군.”


적의, 살의, 그런 것은 유폐의 마왕이 가진 감정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지극히 평온한 눈으로 아이리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게서 답을 듣고 싶은가? 힘으로는 들을 수 없을 텐데.”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우습게 볼 수밖에.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은가? 네가 얼마나 약한지.”


철그럭…… 유폐의 마왕과 이어졌던 쇠사슬이 움직였다. 수많은 쇠사슬이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에 퍼져 나갔다. 사슬의 움직임에 따라 아이리스의 마력은 뒤로 밀려 나갔다.


“하지만. 네가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나는 너를 존중한다. 광란의 마왕.”


유폐의 마왕이 속삭였다.


‘광란의 마왕.’ 저 흉악하고 불길한 마왕이, 직접 아이리스를 그렇게 불러준 것이다. 그것이 아이리스를 전율시켰다. 그녀는 가늘게 몸을 떨면서 꿀꺽 침을 삼켰다.


“나를…… 광란의 마왕이라 인정하는 건가?”


“아이리스. 네가 그 이름을 잇는 것이 전대 광란의 유지였다. 나는 약속에 따라 광란의 유지를 네게 이었다. 그런 내가 너를 광란의 마왕이라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나.”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바닥을 힐긋 보았다. 스멀스멀 퍼져가던 쇠사슬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영지는 주지 않는다.”


사슬이 거둬졌다.


“영지란 마왕 자신이 정복한 땅이다. 광란의 마왕. 네가 헬무드에 영지를 갖고 싶다면, 나에게서 빼앗아야 한다. 그렇게 할 텐가?”


아이리스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저 터무니없는 마왕과 싸워서, 영지를 빼앗는다고? 지금의 아이리스에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지 않을 모양이군.”


유폐의 마왕은 아이리스의 침묵에도 조금의 실망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중얼거리는 말에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내게…… 조언을 주는 건가?”


아이리스는 방금 들은 것이 믿기지 않아 말을 더듬었다.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곳은…… 유서 깊은 땅이다. 많은 일이 일어났고, 그 모든 것이 묻힌 바다. 이곳이 바다가 되기 전에 어떤 풍경이었는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알고 있다. 아이리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바다는 오래전에 광란의 마왕의 영지였다. 아버지는 이 땅에서 군림했고, 아이리스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광란의 마왕. 네가 이 땅에서 일어선다면…… 진정한 의미로 광란의 유지를 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네 아버지, 전대 광란의 마왕은 이 바다에서 패배했고, 도망쳤고, 죽었으니 말이다.”


“…….”


“운명은 반복되곤 하지.”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돌려서 뒤를 보았다. 아직은 멀다. 하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너는 패배할까. 도망칠까. 죽을까. 이것 하나는 분명하게 말해 두마, 광란의 마왕. 네가 죽을 때, 나는 곁에 오지 않을 거다. 너와 내 사이에는 아무런 약속도 없을 것이다. 너는 네 아버지처럼 패배하고 도망치고 죽을지도 모르지만, 네 아버지처럼 유지를 남기지는 못할 것이다.”


“달라.”


아이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내뱉었다.


“내가 패배하고, 도망치고, 죽어? 그럴 리가 없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유폐의 마왕. 아, 그렇군, 당신은 나를 시험하고 싶은 건가?”


아이리스의 웃음소리가 강해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유폐의 마왕의 말을 비웃었다.


“미치광이처럼 날뛰던 하멜도 없고, 무식하게 들이박던 모론도 없어. 세냐, 세냐 메르데인! 그녀가 있다고 해서 무엇일 달라질까? 지금 이곳에 오는 용사는 베르무트가 아니야. 성녀도 아니스가 아니지!”


유폐의 마왕은 아이리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유폐의 마왕. 당신이 바벨에서 용사를 기다리겠다고 한 말은 들었어. 아하하…… 아하하하! 당신은 바벨에서 용사를 맞이할 수 없을 거야. 내가, 이 광란의 마왕이! 그 개자식을 이 바다에서 죽여 버릴 테니까!”


아이리스는 머리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촤라락…… 의자가 되었던 쇠사슬이 흩어졌다.


“이 바다에! 내 아버지의 첫 번째 무덤에! 용사와 성녀를 공양해 주지! 내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했던 세냐 메르데인, 그 계집은 제발 죽여 달라 애원할 때까지 망가트려 주겠어. 감히 나를, 이 광란의 마왕에게 덤비는 인간들을 모조리 바다에 처박아 주겠다고! 그렇게 해주면 세상 모두가 광란이 재림했음을 알겠지! 내가 선언할 것 없이, 세상 모두가 이 바다를 광란의 영지로 알며 두려워할 거야!”


“만약.”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네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유폐의 마왕은 용사의 이름을 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성녀의 이름을 안다.


“세냐 메르데인을.”


300년 전에 패배시켰던 마법사의 이름을 안다.


“그 셋을, 죽여서, 바다에 묻는다면.”


유폐의 마왕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는 이곳에 오고서 처음으로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빙그레 휘어지는 곡선. 유폐의 마왕은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리스에게 속삭였다.


감정이 없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유혹하듯, 부추기듯.


“네 의문에 답해주마.”


아이리스의 눈동자에 불이 켜졌다. 유폐의 마왕은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뒤로했다.


유폐의 마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운명은 반복되곤 한다.


유폐의 마왕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광란의 마왕


끼릭, 끼리릭.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관절에 걸리는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카르멘은 몇 번 손을 쥐었다 펴 본 뒤에, 그 자리에서 빠르게 주먹을 뻗었다.


화악!


몰아친 바람에 곤도르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대뜸 눈앞에 날아온 주먹. 너무 놀라서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했던 곤도르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멋지군.”


카르멘은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의 카르멘을 생각한다면 건조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평범한 장갑도 아니고 드래곤의 가죽과 비늘로 만든 장갑이다. 심지어 그 드래곤은 대륙 역사상 유일하게 ‘마룡’이라 불렸던 라이자키아. 심지어 장갑의 색깔은 혼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시커먼 색.


여러 가지 의미로 카르멘을 흥분시키는 요소가 가득한데, 정작 카르멘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만약, 평범한 때에 이 장갑을 받았다면…… 카르멘은 이 배에서 저 배로 뛰어다니면서 장갑을 과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굴 마음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카르멘은 제 자리에 서서 침묵하며 장갑의 성능을 점검했다.


“후회는 안 듭니까?”


카르멘의 왼손이 새하얀 불꽃에 덮였다. 갑자기 들려온 질문. 곤도르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정리하다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케헥.”


곤도르는 헛웃음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턱을 몇 번 긁적거리다가, 옆에 두었던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아예 후회가 없지는 않소. 크흠, 그 후회라는 것도…… 음…… 다들 그럴 것 아뇨? 우리는 다크엘프를 잡으러 온 것이지, 마왕을 잡으러 온 것은 아니니까. 다크엘프와 마왕……. 달라도 너무 다르지.”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말로 잘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무섭기 때문이다.


마왕과 싸운다는 것이 무섭다.


“당신네들이 싸우는 동안 말이오, 나는 아마 이 공방에 숨어 있겠지. 크흥, 아니면 이 늙은이도 나가서 도끼질이나 해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소. 세냐 님과 크리스티나 성녀가 비전투원과 부상자를 위한 피난소를 만들었으니, 노인장은 그곳에 숨어 있으면 될 거요.”


“사실 그게 더 무서운 거요.”


곤도르는 허허 웃으며 담뱃대를 내려놓았다.


“이번 전투에서 내 목숨은 온전히 내 손에 있지 않은 거잖소? 당신네들이 마왕을 죽인다면 나는 사는 거고, 당신네들이 마왕을 죽이지 못한다면 나는 죽는 거지. 나는 솔직히 그게 가장 두렵소.”


카르멘은 뭐라 답하지 않고 곤도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곤도르는 멋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크흠, 직접 싸워야 하는 당신들은 오죽하겠냐만…… 후회…… 후회라. 허허, 이제 와서 ‘오지 말 것을 그랬다’라고 후회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지. 뭐,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하오.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 아이리스에게 납치되었던 동포들에 대한 걱정.”


곤도르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었다면, 그 휘하에 있던 군단은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다크엘프는 여전히 다크엘프일까. 해적은 여전히 해적일까. 노예처럼 부려지던 드워프들은, 여전히 드워프로 남아 있을까.


“…….”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괜찮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카르멘은 침묵을 선택했다. 납치된 드워프들의 상황은 지금의 카르멘은 절대로 짐작할 수가 없었다.


“노인장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거요.”


카르멘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전투원들을 지키는 것. 마왕과 싸우는 것. 그것은 카르멘의 손에 쥐어진 영역이었다. 카르멘은 장갑 낀 손을 아래로 내리고서, 곤도르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켜야 할 것이 많다. 어린 제자들. 시엘과 디자이라.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맞닥트리기에는 너무 가혹한 전장이 아닌가.


만약 이번 전투에서 둘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카르멘은 그것을 상상하면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 * *


“싫어.”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피난소에 숨어 있으라니, 그건 너무하지 않아?”


시엘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내뱉었다.


“잘 생각해 봐, 유진. 지금 마왕과 싸우러 가는 수천 명을 실력순으로 나열한다면, 내가 어느 정도에 있을 것 같아?”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시엘을 물끄러미 보았다. 디자이라는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유진과 시엘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낮게 쳐도 20명 안에는 들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무인의 랭킹 7위. 그 말은 시엘이 시무인의 투사들 중에서 7번째로 강하단 말이다.


물론 토벌대에는 랭킹 이상의 실력자들도 있다. 랭킹 등록을 하지 않은 기사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변수를 감안해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시엘은 ‘강자’라 평가할 인간이었다.


인간 중에서는 말이다.


“상대는 마왕이야.”


침묵하던 유진의 입이 열렸다.


“토벌대 중에서 강하다, 는 것은 마왕과의 싸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마왕과의 전투에 설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경계를 넘은 사람이다. 유진이 판단하기에, 시엘은 저 경계를 넘기는커녕 경계에 서지도 못했다. 토벌대에서 인간의 경계에 서거나 넘은 카르멘이나 오르투스, 아이빅 같은 초인들뿐이다.


즉, 토벌대 대부분은 마왕과의 싸움에 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야, 유진.”


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싸우는 것은 마왕이 아니야. 마왕의 부하들이지.”


“…….”


“마왕과 싸울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부하들과는 싸울 수 있잖아.”


저 말에 유진은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300년 전에도 그랬다. 마왕과의 전쟁.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마왕과 싸울 자격이 없는 약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격 있는 사람들이 마왕과 대면할 수 있도록, 온전히 힘을 보존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역할을 맡았다. 마족과 싸우고, 마물과 싸우고, 흑마법사와 싸우고.


그렇게 길을 연 뒤에, 대부분이 죽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대한, 적게, 죽게 만들기 위해서. 퇴군하자는 말을 무시했다.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 오자는 말을 비웃었다.


시간을 줄수록 마왕은 더 강해질 것이고, 군세는 많아질 것이다. 가장 적은 희생을 내기 위해서는ㅡ 물러서지 않고 진군하는 것이 옳았다.


“내가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거구나.”


이런 것에 웃으면 안 되는데.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방긋 웃어버렸다.


뒤틀린 감정이란 자각은 있었다. 시엘은, 유진에게 걱정을 받고 있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약간의 비참함도 느꼈다. 이런 것이 아니라면ㅡ 유진에게 주목받기는 할까.


“정에 휘둘리지 마,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용사잖아.”


일그러진 감정을 느끼면서도 시엘은 확실하게 내뱉었다.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은 즐겁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죽을 사람 하나하나를 전부 신경 쓸 거야? 아니면…… 역시, 나라서 신경 쓰는 건가? 그건 고마운 일이지만, 이번은 그래서는 안 돼.”


“상대가 그냥 다크엘프 나부랭이라면.”


유진이 입을 열었다.


“어떤 상황에서건 널 지킬 수 있어. 아이리스가 뭔 수작을 부리건 널 건드리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


“하지만 마왕이라면 불가능해. 전투가 벌어진다면, 나는 모든 신경을 아이리스에게 집중할 거다. 세냐 님도 그럴 거고, 크리스티나도 그럴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무리하거나 위험한 싸움은 하지 않아. 위험하고, 너무 강하다 싶으면 도망칠 거야.”


“그게 말처럼 쉽나.”


“어려울까? 그렇다면 유진, 네가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주면 되는 거잖아.”


시엘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잠시 유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잿빛의 머리카락. 고요하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 성검을 들었을 때의 유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천 명이 보는 앞에서 라베르시아의 선수상으로 나아가던 등. 하늘에서 빛의 기둥을 떨어트리고, 앞을 가로막던 어둠을 일검에 갈라 버리던 모습.


그 순간의 유진은ㅡ 누구나 ‘용사’라고 인정할 것이다. 시엘도 마찬가지였다. 휘광에 싸인 유진의 모습이 머릿속에 잊히지 않았다.


“날 믿어, 유진.”


널 믿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유진에게 의지하고 있다.


예부터 용사란 그런 존재였다.


사람들이 믿는 존재. 믿어야 하는 존재. 믿게 만드는 존재. 유라스가 믿음과 희망과 신앙의 모조화신으로 성녀를 만든 것처럼, 용사란 것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을 거야.”


시엘은 배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그리고는 빙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디자이라가 후다닥 시엘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냥 피난소에 간다고 할 걸 그랬나?”


시엘은 따라 나온 디자이라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면 디자이라, 너라도 거기 가있어. 안전하기는 할 테니까.”


대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와 성녀의 결계를 배 하나에 집중시켰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 피난선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될 것이다.


“싫어요.”


디자이라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시엘 님이 가지 않는데 제가 왜 거기 들어가요? 아니, 아니다, 시엘 님이 부끄럽게 숨어버릴지라도, 저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왜?”


“저도 라이언하트니까요.”


설마 디자이라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시엘은 두눈을 깜빡거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방계 주제에 건방진 말은 하지 마.”


“어차피 시엘 님도 한 15년쯤 뒤에는 방계로 빠지게 되잖아요.”


정확한 반격이었다. 만약 시안이 아일라 공주와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다면, 시엘과 유진은 본가에서 방계로 옮겨지게 된다.


라이언하트 본가는 항상 그렇게 이어져 왔다. 한적한 시골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길레이드의 동생도 마찬가지고, 흑사자인 기온과 카르멘도 엄밀히 말하자면 본가가 아닌 방계다.


“그건…… 그렇지만, 너랑 나는 격이 다르지.”


시엘은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라이언하트, 라이언하트라. 시엘은 홱 고개를 돌려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환하다.


바다도 금빛 물결이 찰랑거린다.


하지만 환한 빛 너머에는 시커먼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금빛 물결의 저편의 바다도 죽은 피처럼 검붉다. 세냐의 마법과 유진, 크리스티나의 신성력이 함대를 보호하고 있을 뿐. 이 바다는 여전히 마경이었다.


유진은 선실에서 나왔다.


나온 순간에 모두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유진을 보고서 양손을 모으며 기도를 올렸다. 유진은 그 시선을 뒤로하고서 갑판을 걸었다.


허리에 매단 성검은 여전히 빛을 뿜고 있다. 예리하게 날 선 감각은 저 앞을 보고 있다.


“다들 잠이라도 자는 게 나을 텐데.”


유진은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렸다.


[잠이 올 리가 없잖은가.]


머릿속에서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냐에게 홀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유진도 템페스트의 힘을 빌려와 함대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마왕과의 전투를 모른다. 무지는 쉽게 공포로 바뀌어 버리지.]


“정작 너는 조금 기뻐하는 것 같은데.”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러자 템페스트가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반복?”


[흑사자성에서 네가 쓰러트린 마왕의 잔재들.]


이오드를 홀렸던 어둠의 정령.


[그건 살육과 참혹의 망령이었다. 너는 그 둘을 홀로 쓰러트렸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마왕이 아니었다지만, 하멜, 네가 살육과 참혹이었던 ‘것’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린 것이다.]


“…….”


[그리고 지금, 너는 광란의 마왕을 죽이러 가고 있다. 300년 전에 네가 베르무트와 함께 쓰러트린 마왕들을…… 환생한 네가 하나하나 거슬러 오르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복이라, 그렇군. 마왕이란 것들이 죽여도 죽지 않는 질긴 새끼들이라서 그렇지.”


유진은 선수상을 올랐다. 커다란 선수상 중앙에 앉은 크리스티나의 등이 보였다. 그녀는 8장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서, 왼손은 정면으로 뻗고 있었다.


성흔.


유진이 빛의 신에게 힘을 바랐을 때,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왼손바닥에는 성흔이 깃들었다. 아니스의 등에 새겨졌던 성흔과는 다르다. 문자도 아니고, 기적을 쓸 때에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


아니스와 대등한 기적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아직 시험해 볼 수가 없었다. 시험을 해보려면 팔다리를 직접 잘라봐야 하는데, 대체 누구 팔다리를 시험 삼아 잘라야 할까.


“모론이라도 있으면 팔이라도 잘라 볼 텐데.”


“손가락은 어떻습니까? 하멜. 만약에 붙지 않는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라면 그럭저럭 괜찮을 듯싶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니스. 칼 쥐는데 손가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어머, 그렇습니까? 못된 짓만 하는 가운뎃손가락 하나쯤은 잘라도 될 것 같은데요.”


아니스는 쿡쿡 웃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유진은 아니스의 옆에 서서 앞을 보았다.


“몸은 어때?”


“멀쩡합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아요. 그래도, 크리스티나는 잠시 쉬게 하고 있습니다.”


“성흔은?”


“얼마큼의 힘을 지녔는지. 어떤 기적을 쓸 수 있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기적이란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야 하는 것이라.”


아니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하멜. 만약 전투에서 당신의 팔이나…… 다리가 날아간다면. 제가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구할 테니까요.”


“괜한 짓은 하지 마.”


유진은 아니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말은 원래 제가 하던 것인데.”


아니스는 등 뒤로 넘겼던 로브의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웃었다.


ㅡ쿠웅! 로브 안쪽에 감췄던 플레일의 철구가 선수상 위로 떨어졌다.


“당신이야말로 괜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로브 안쪽에 감췄던 것은 플레일 뿐만이 아니었다. 아니스는 뜯지 않은 술병을 꺼내더니, 방긋 웃으며 유진에게 건넸다.


“오랜만이구만.”


유진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타앙! 술병의 코르크가 날아갔다.


[온다.]


세냐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유진과 아니스에게만 들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함대 전원이 세냐의 경고를 들었다.


유진은 천천히 성검을 뽑았다.


ㅡ콰아아아아아!


결계 바깥의 검붉은 바다가 갈라졌다.


광란의 마왕


우우우우ㅡ


갈라진 바다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대왕고래였다.


멀쩡히 살아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먹잇감을 찾아 온갖 바다를 떠돌고, 몬스터조차도 집어삼키던 저 거대한 바다짐승은 마왕의 마력에 오염되어 존재를 상실했다. 지금 덮쳐오는 것은 대왕고래의 거죽을 뒤집어쓴 썩은 고깃덩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덩치는 그대로다. 기함 라베르시아의 크기에 버금가는 함선 하나가 통째로 덮쳐오는 것만 같은 모습이다.


뒤쪽의 사람들은 놀란 소리를 냈다. 그러나 유진의 얼굴은 태연했다.


덩치 큰 괴물이라면 이미 여러 번 봐왔다. 저번에 싸웠던 라이자키아 본신의 덩치가 저것보다 컸다. 저 고래의 덩치는 300년 전 거인족 두령인 카마쉬의 다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함대를 보호하던 결계가 꺼지듯 사라졌다. 그 즉시 유진은 선수상을 박차고 하늘로 도약했다. 덮쳐오는 고래의 그림자에 비하자면 유진의 모습은 자그마한 점처럼 보였다.


성검에서 빛이 터져 나온 순간. 고래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휘광이 한순간 세상의 눈을 가렸다.


촤아악! 고래의 몸이 수십 개로 쪼개졌다. 오염된 피가 바다로 쏟아졌지만, 금색 물결은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다.


유진은 토막 낸 고래를 지나쳤다. 그는 하늘에서 멈추어 앞을 보았다.


진군하는 안개가 보였다. 안개의 안쪽…….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안개를 꿰뚫어 보았다.


“하!”


유진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흉물스러운 해적선이 한 대 보였다. 해적기로 달고 있는 것은 뒤집힌 산양의 머리. 구부러진 뿔이 한 쌍. 위로 삐죽이 솟은 뿔이 한 쌍. 두 쌍의 뿔을 가진, 뒤집힌 산양의 두개골. 저것은 300년 전부터 광란의 마왕의 상징이었다.


저런 깃발을 과시하듯이 걸어놓고 다니는 미친년은 하나뿐이다.


아이리스. 새로운 광란의 마왕.


유진이 해적선을 본 순간, 아이리스도 유진을 보았다. 검은 안갯속에서 시뻘건 눈동자가 뜨였다. 거대한 눈동자가 칙칙한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암전의 마안. 그 권능은 아이리스와 함께 마왕의 권능으로 탈바꿈했다.


안광이 빛난 순간 바다가 시커멓게 변했다. 바다 전체에 마안의 권능이 걸린 것이다. 콰르르르! 출렁거리는 어둠에서 10척의 함선이 치솟았다.


그 광경에 유진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갖다 붙일 말이 없어서 함선인 것이지, 어둠에서 치솟은 저것이 정말로 함선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크다. 커도 너무 크다. 어지간한 성만큼이나 커다란 함선보다 몇 배는 크다. 조금 과장을 보태어 산만큼 커다랗다.


수십 척의 함선을 마력으로 뭉개고 살덩어리와 뒤섞은 것이다. 함선 수십 척이 뼈대가 되고 바다동물과 인간을 살로 뒤덮었다. 거기에 마력까지 불어넣어 버리니, 더 이상 함선이라 할 수 없는 기괴한 마물이 되었다.


그 10척의 거대 마물 위에는, 마찬가지로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괴물들이 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린아이가 여러 명의 인간을 장난처럼 조물거려 만든 것처럼 보였다. 마력을 생명으로 대신하기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살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만큼 막 생겨먹은 놈들이었다.


아이리스 휘하에 있던 수천 명의 해적들의 말로였다.


“조형은 서툴러서 말이야.”


아이리스는 앉은 다리를 꼬면서 이죽댔다. 그녀는 하늘에 띄운 마안으로 하찮은 적들을 담았다.


100척에 달하는 함대. 그중에서도 아이리스가 주목하는 것은 선두의 기함 라베르시아뿐이었다.


“서툴면 연습을 하면 되지. 안 그래? 오늘부터 연습할 재료는 넘치도록 있을 테니.”


아이리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ㅡ쿠르르르르! 시커멓게 변해 버린 바다가 아이리스의 손과 함께 움직였다. 해역 전체가 통째로 아이리스의 손이 된 것만 같았다.


“이 무기는 손에 익지를 않는군요.”


퍼억! 죽은 고래의 고기조각이 플레일에 얻어맞고 날아갔다. 선수상으로 다시 내려온 유진은 아니스를 힐긋 쳐다보았다.


“일부러 던진 건 아냐.”


“당신은 언제나 세심함이 부족해요.”


아니스는 묵직한 철구를 선수상 위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아무래도 저는 메이스 쪽이 나은가 봅니다.”


[그렇다면 제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시스터.]


“예.”


아니스는 거절 대신에 쓴 웃음을 지었다. 이번 전투에서, 아니, 이번 시대의 성녀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역할을 빼앗거나 대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의식이 전환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염려와 애정을 느끼면서 플레일을 쥐었다. 벌써부터 자욱한 피비린내……. 썩은 고깃덩이 같은 함대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마군(魔軍)에 비해 아군은 작고 빈약하다. 함선의 숫자가 많다고는 해도 크기는 훨씬 작다. 그것을 신경 써선 안 된다. 크리스티나는 하늘에 떤 유진의 등을 응시했다.


유진의 등을 보는 것은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었다. 라베르시아 바로 뒤에 붙은 함선. 슬라드 용병단의 함선, 포르메리에 타고 있는 성직자와 성기사들 수십 명이 유진의 등을 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내뱉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목소리는 포르메리의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함대 전체에 전해졌다.


“우리는 뒤가 아닌 앞을 봐야 합니다.”


상대가 마왕이 아니라면. 마왕이 없는 전장이라면. 성직자의 시야는 좀 더 넓어진다.


하지만 이곳은 마왕의 전장이다. 그렇다면 성직자의 시야는 한없이 좁아진다. 이 전장에서 성녀와 성직자가 봐야 할 것은 용사와 마왕 둘뿐이다.


뒤는 볼 수 없다. 라베르시아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보좌를 맡은 포르메리도 라베르시아와 함께 갈 것이다.


그 외의 함대 수십 척은 뒤에 남아, 산처럼 거대한 마물과 인간이 아니게 된 해적들과 싸운다.


“그러니…… 유진 님도 앞을 봐주십시오.”


신성결계는 치웠다. 급박한 전투에서 함대 전체를 보호하는 것은 신성력의 낭비가 너무 크다. 그래도 최소한의 보호는 남겨두었다. 출렁거리는 빛의 바다가 점점 줄어들더니 함선이 뜬 범위에만 고였다.


“모두의 앞을 열어주십시오.”


그 광경은ㅡ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새카만 바다에 반짝이는 빛의 점이 수십 개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저 빛은 함선의 움직임을 빠르고 유연하게, 자유롭게 만든다. 함선에 부착된 마법엔진은 인력을 뛰어넘는 기동을 하게 해줄 것이고, 템페스트와 세냐가 만든 바람은 한층 더 가속을 보탤 것이다.


“영광입니다.”


마이스는 세냐의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전투에서 함대의 마법적인 컨트롤은 마이스가 맡았다.


“8서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라 할 수 있는 제가…… 세냐 님과 같은 전장에 설 수 있다니.”


마이스의 시그니처는 배틀쉽(Battleship). 함선 하나를 각종 마법으로 무장하는 마법이다.


본래 마이스의 시그니처는, 왕가의 재산이자 시무인 최강의 군함인 라베르시아와 조합해 사용한다. 궁정마법사장인 그가 이 토벌대에 직접 파견된 것도 저 조합이 강력하다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여정 중에 세냐는 마이스의 시그니처를 보완해 주었다. 그 결과 라베르시아에만 특화된 것이 아닌, 함대 전체가 마이스의 마법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 만큼 마나의 소모도 터무니없이 늘기는 했다. 슬라드 용병단의 전투마법사들 전원이 달라붙었기에 망정이지, 마이스 혼자서는 한 시간도 지속이 힘들다.


“흥분해서 앞으로 오지는 마.”


세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파직, 파지직! 활짝 열린 이터널 홀에서 겹쳐진 서클들이 회오리쳤다. 양손에 쥔 프로스트가 쏟아내는 서리에서 마나가 격렬히 회오리쳤다.


“앞으로 왔다가는 내 마법에 휩쓸려 버릴 거야.”


후방에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해주었다. 피난선의 결계는 견고하게 해주었고, 마이스의 시그니처를 보완해 주었으며, 다른 마법사들과 연합할 술식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저 앞은…….”


세냐는 눈을 얇게 뜨고서 내뱉었다. 오싹거리는 감각. 마법의 관측이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 이건ㅡ 익숙하다.


마법은 마법사 본인의 마나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마법사가 가진 마나와 서클이 마법을 일으키는 첫 단계. 이후부터는 대기 중의 순수한 마나와 맞물려서 마법이 발현된다.


저 ‘앞’은 이상하다. 마경에도 마나는 존재한다. 마왕의 마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이 세상에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예외라고 할 것은 세상이 ‘아닌 곳’. 모론이 드나든다는 레헤인야르의 이면. 라이자키아가 봉인되었던 차원의 경계.


그리고.


유폐의 마왕과 싸운, 바벨의 최정상. 놈의 권능인 사슬이 펼쳐진 곳에서는 마법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대기 중에 퍼진 마나가 모조리 사슬에 묶여 버리고, 세냐가 쏟아낸 마법도 사슬에 닿는 순간 소멸하고 마나가 붙잡혔다.


이터널 홀을 만든 것은 유폐의 마왕과 싸우기 위해서다. 대기 중의 마나를 쓸 수가 없다면 마법사 자신의 마나를 단련해야 한다. 세상에 바라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마법을 발현해야 한다.


“나 외에는 마법을 쓸 수가 없을 거야.”


그렇기에 세냐는 확신했다. 유폐의 마왕과 싸울 때만큼 ‘구속’이 강력하지는 않다. 하지만 세냐는 저 앞에서 유폐의 마왕과 싸울 때의 구속을 느꼈다.


이 전투에 유폐의 마왕이 개입해 있나? 아니, 솔가르타 해역에서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오래된 진실. 마법을 쓸 수 없는 이유 자체가 유폐의 마왕에 의한 것이라면,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바다에는 유폐의 마왕이 얽혀 있는 것이다.


세냐의 입술이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증오스러운 원수, 아이리스를 죽일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ㅡ 유폐의 권능을 상대로 이터널 홀을 시험해 볼 수 있다니.


쿠르르르!


“이곳에 있나?”


너무나도 강한 마나가 태풍처럼 세냐의 주변을 휘감았다. 서서히 나아가는 세냐를 향해 마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경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온다.”


아이리스는 킬킬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마물의 함대가 나아간다. 반대편에서 오는 것은 고작해야 두 척. 아이리스가 만들어낸 함대에 비하자면 너무나 작은, 함대를 부딪친다면 그대로 뭉개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아니. 오히려 이쪽이 뭉개지겠지. 아이리스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덩치를 불린 함대와 괴물들로는 ‘저것’들을 막을 수 없다. 이 전장에서 저것들을 가로막아 절망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왕뿐이다.


광란의 마왕이 갑판에 나왔다. 103명의 다크엘프들이 마왕의 행차에 무릎을 굽혔다. 모두가 아이리스의 마력으로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들은 아이리스에게, 공주에서 등극해낸 광란의 마왕을 경배했다.


천천히 다가온 세피아가 아이리스에게 재킷을 걸쳐주었다.


ㅡ마왕을 죽이러 간다.


속삭이던 그 말을 들었다. 카르멘은 하늘에 선 유진의 등을 쳐다보았다. 지금 시대에서, 대체 누가, 저런 말을 진심으로 내뱉을 수 있을까.


“만약, 오늘 이긴다면…….”


철컥. 카르멘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회중시계가 장갑이 되었다.


오른손의 헤븐제노사이드. 오른손에는 마룡의 장갑. 카르멘은 양손으로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라이언하트를 부르는 말이 달라지겠지. 베르무트의 라이언하트가 아닌, 유진의 라이언하트로 말이다.”


유진은 카르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후방에서 날아온 세냐가 라베르시아의 마스트에 도착했다.


콰르르르! 그녀와 함께 온 바람이 라베르시아를 더욱 빠르게 전진시켰다. 가속한 라베르시아가 마물의 함대 사이로 들어갔다. 그 썩은 고기의 함선들은 빛에 둘러싸인 라베르시아를 가로막지 않았다.


아이리스가 그를 바랐기 때문이다. 마물의 함대는 다른 사냥감을 찾아 전진시켰다.


지금, 겁 없이 전진하는 저것들은. 감히 마왕의 영지에서, 이 마경에서 보란 듯이 빛을 뿜어대는 저것들은, 아이리스가 직접 죽여야 할 사냥감이다. 아니, 광란의 재림에 바쳐야 할 산 제물이다.


“나머지는 너희가 갖도록 해.”


아버지는 자비로웠다. 가족을 사랑했다. 아이리스는 아버지의 자상함을 닮고 싶었다.


그렇기에 웃으며 말해주었다. 300년 동안 함께 해온 가족들. 103명의 다크엘프들은 앞으로 아이리스와 함께 영화를 누릴 자격이 있었으며, 이 축제에서 달고 살찐 사냥감을 맛볼 자격이 있었다.


다가오는 두 척의 배에 타고 있는 인간들. 몇몇 눈에 띄는 인물은 있다. 기함에 있는 것은 키옐에서 잠깐 부딪쳤던 카르멘 라이언하트. 뒤따르는 배에는 랭킹 2위의 용병왕 아이빅 슬라드.


‘오르투스는 아예 후방인가? 멍청하기는, 전력을 분산시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어차피 전부 다 죽을 텐데. 발악이라도 해보겠다는 거냐.


아이리스는 킥킥 웃으며 걸었다. 그녀의 몸은 자연스럽게 하늘로 떠올랐다. 아이리스는 하늘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번쩍, 빛이 터졌다. 아이리스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어둠을 가르고 날아온 빛, 피할 필요가 없었다. 시선이 향한 곳에 나타난 어둠이 빛을 삼켜버렸다.


“마왕이 되었지만 재주는 그대로인가?”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어느새 맞은편의 하늘에 있었다.


“키옐에서 봤을 때와 다를 것이 없잖아.”


거짓말이다.


마주 선 순간에 느낄 수 있었다. 의식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마력. 라이자키아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위압감과도 비교가 안 된다. 300년 전에 마왕들과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화르르륵!


유진의 등 뒤에서 프로미넌스가 치솟았다.


마법을 쓰기 열악한 환경. 하지만 레헤인야르의 이면이나 차원의 틈새보다는 훨씬 낫다. 이터널 홀을 기반으로 한 환염식은 이 공간에서도 프로미넌스를 뻗게 만들었다.


백염식의 7성.


유진의 불꽃은 이제는 빈말로라도 ‘하얗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이 되었다.


아이리스는 그런 유진을 보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용사답지 않은 모습이구나, 꼬마야.”


아이리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저 모습. 저 마나. 저 살의. 모든 것이 베르무트와 다르다. 베르무트는, 그 인간답지 않은 놈은ㅡ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용사’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리스의 앞에 선 것은, 싸워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느낄 만큼이나 선명했다.


휘광을 두르고 있음에도 귀화로 번뜩이는 안광에서 아이리스는 300년 전의 원수 중 한 명을 떠올렸다.


아가로트의 반지가 진동했다.


망토 사이에서 멸망이 뽑혀 나왔다.


광란의 마왕


희끄무레한 빛.


아이리스는 저 빛이 무엇인지 안다.


“월광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검. 월광검은 전쟁시대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마족들에게 있어서도 떠올리기 두려운 악몽이자, 감히 내뱉고 싶지 않은 금기였다.


특히 아이리스에게 있어서, 월광검은 더욱이 끔찍한 악몽과 같았다. 저 희끄무레한 빛이 번쩍일 때마다 그녀의 소중한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카마쉬와 사인, 그리고ㅡ 아버지까지.


그 원망스러운 빛과 마주 한 순간. 아이리스의 감정은 놀라울 만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찰나에 이뤄진 발검이 아이리스의 목젖까지 월광을 뿜었으나, 마왕에게 찰나란 마음먹기에 따라 영원처럼 길고 느긋하다. 아이리스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손을 뻗었다.


마왕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마경으로 바꾼다. 마왕이 되기 전에 얼마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존재가 마왕으로 거듭난 순간, 그 존재에게는 마왕에 걸맞은 격과 힘이 부여된다.


달빛이 가로막혔다. 죄어지는 어둠이 달빛을 역으로 찢어발겼다. 콰지직! 유진이 휘두른 참격은 아이리스에게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했다.


놀라지는 않았다. 완전하던 시절의 월광검도 마왕의 마력을 상대로 무조건적인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성검도 마찬가지다. 완전하지도 않은 지금의 월광검이 마왕에게 가로막히는 것도 당연한 일.


가로막혔다.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했다.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무용하지는 않다. 닿는 순간에 달빛이 아이리스의 마력을 일부나마 소멸시켰다.


마왕과의 전투는 지독히도 고되다. 베어도, 찢어도, 부숴도, 마왕은 좀처럼 죽지 않는다. 놈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집요하고 끈질기고 실수 없이 공격을 퍼부어야 한다.


무한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마력을 깎아내고 깎아내야 한다. 사지와 머리와 심장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르고 부수어, 더는 소생할 수 없을 때까지 죽여야 한다.


‘자주 했던 일이지.’


마왕을 상대로 처음부터 이그니션을 쓰는 것은 미친 짓이다. 이그니션은 폭발적인 힘을 주지만 지속에 한계가 명확하게 존재한다. 길게 써 봐야 10분. 그 이상은 몸이 버티지 못한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마왕과의 전투를 10분으로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그니션을 써야 할 순간은, 마왕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 때. 마력을 최대한 소멸시키고, 소생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다.


프로미넌스는 마왕과 싸우기 위해 만들었다.


함께 싸웠던 베르무트와 모론이 없기 때문에 만들었다.


이그니션을 처음부터 쓸 수 없기 때문에, 시그니처로 대체하자고 생각했다. 화력을 더욱 극대화해야 했다.


일곱 개의 별과 프로미넌스가 공명했다. 검보라색의 불꽃이 맹렬히 타올랐다. 흩날리는 불씨가 깃털이 되어 사방에 흩어졌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전달하는 정보로 육감(六感)을 구현했다.


백염식 7성으로 프로미넌스를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나의 출력은 6성일 적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유진은, 유진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전생의 경지는 한참 지나쳤다. 상대가 ‘나찰공주’인 아이리스라면ㅡ 전투가 성립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지금 유진의 상대는 나찰공주가 아닌 광란의 마왕이다.


아이리스가,


마왕이 손을 뻗었다. 그 움직임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평범한 속도.


그렇게 움직이는데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마왕은 자그마한 움직임만으로 감각을 지배하며 희롱했다. 마왕의 것이 되어버린 이 세상 자체가 유진을 압박했다.


꽈아앙! 마나와 마력, 불꽃과 어둠이 충돌했다.


날아갈 것 같은 의식을 붙잡았다. 충격으로 몸이 밀린다. 하지만 유진이 제동을 걸기 전에, 부드럽고 따스한 빛이 유진의 뒤를 감쌌다.


기적.


라베르시아의 선수상에서 크리스티나가 왼손을 뻗고 있다. 크리스티나의 뒤편에 수십 명의 성직자들이 무릎을 꿇고서 함께 기도했으며, 성기사들은 신성력을 보태면서도 다크엘프들의 공격을 대비했다.


충돌에 의한 경미한 내상. 유진이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완전히 치유되었다.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신에 활력이 퍼져갔다. 신체능력이 상승했다. 의식은 더욱이 또렷해지고 감각도 날이 섰다.


‘그립군.’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300년 전에 하멜이 훨씬 더 잘 싸울 수 있던 것은, 아니스의 기적과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섬광이 어둠을 꿰뚫었다. 마왕은 쇄도하는 섬광을 향해 안광을 번뜩였다. 새카만 어둠이 마법을 일소했다. 하지만 마력마저 진동시키는 존재감마저 지워 버리지는 못했다.


“반갑다.”


세냐가 유진의 곁에 섰다. 가시화된 마나가 세냐를 중심으로 사납게 몰아쳤다. 마왕은 둘을 향해 킬킬거리며 웃었다.


꽈앙!


시커먼 마력이 파도가 되었다. 사방에서 마력이 덮쳐왔다.


이 순간에 유진과 세냐는 서로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후방에서 지원하는 아니스를 믿었다. 유진은 세냐가 대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세냐도 똑같이 유진을 믿었다.


망토의 안. 라이미르아는 두 눈을 감고 유진과 공명했다. 헤츨링이라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 그 특유의 강맹한 마나가 유진의 불꽃에 더해졌다. 직관적인 용언이 유진의 눈앞을 열었다. 메르를 거쳐서 프로미넌스의 정보가 전해졌다.


열린 길로 나아갔다. 유진은 공간과 공간을 뛰어넘었다. 세냐도 연속적으로 블링크를 펼치며 마법을 준비했다.


난사하는 포격이 어둠을 갈랐다. 성검의 빛이 몇 번인가 부풀고 줄어들었다. 신성력과 마나가 결합했다. 공간의 흐름이 성검에 달라붙었다. 7성 백염식으로 빚어낸 4중첩의 공검.


그 빛은 도저히 성검 같지가 않았다. 혼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검은 빛이 세상을 갈랐다.


그 일검에 마왕의 마력이 소멸했다. 안광이 빛났다. 마안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마왕의 앞에서 심연과 같은 어둠이 피어났다.


갈라졌다.


유진의 검이 닿기도 전이었다. 권능이 발현된 즉시 세냐의 마법도 발현되었다.


300년 전부터 원수였던 아이리스. 아롯에서 마법을 연구하던 시절부터 세냐는 원수를 죽이기 위한 준비를 해왔다.


암전의 마안에 대한 대처도 준비했다.


저 권능이 만들어내는 것은 어둠이되 어둠이 아니다. 마나도 아니고 마력도 아니다. 저 끈적거리는 암흑물질은 서로 연결하여 문으로 쓸 수 있고, 단순한 힘의 덩어리로도 쓸 수 있다. 외적으로 암흑물질의 실체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직접 닿아야만 실체를 간파할 수 있다.


300년 전에는 그랬다. 지금의 세냐는 닿지 않아도 마안을 간파했으며, 암흑물질의 안에 새로이 마법적인 물질을 생성했다.


꽈지지직!


갈라져 열린 길에 공검이 도달했다. 마력이 공검의 화력에 소멸되었다. 드디어 마왕의 몸에 칼날이 도달했다.


베는 것이 아니다. 이 참격은 닿는 순간에 마왕의 몸을 말 그대로 지워 버렸다. 조각 하나 남기지 않았다. 공검의 참격이 지난 순간, 유진은 반대편 손에 쥔 월광검까지 휘둘렀다.


마왕이 사라졌다.


퍼어엉!


사라진 것과 폭음은 거의 동시에 들렸다. 근처에 있던 세냐가 바다로 추락했다. 마법결계로 몸은 보호하고 있지만, 내리꽂은 충격은 세냐의 입술 틈에서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아하하하하!”


시커먼 하늘에서 웃음소리가 퍼졌다. 꽈과광! 마력이 번개처럼 쏟아졌다. 유진은 성검과 월광검을 휘둘러 마력을 베어버렸다.


그 틈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다가온 손은 유진에게 직접 닿지 않았지만, 뒤따른 마력이 유진의 몸을 날려 버렸다.


아아아, 아아아아! 어둠 속에서 천사들의 성가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만큼 희미했다. 마왕의 마력이 기적을 밟아버렸다.


지워버렸던 마왕은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강림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양손을 치켜들었다.


“약해!”


마왕의 손이 하늘을 받쳤다. 굽히는 손가락이 하늘을 거머쥐었다.


꽈지지직! 마왕의 손짓에 의해 하늘이 움직였다. 그 거대한 충격이 유진을 날려 버렸다.


“약해! 약하단 말이야!”


마왕은 전능감에 고양되어 외쳤다.


지금 그녀는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조차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다. 저 아래의 넓고 깊은 바다마저도 마왕이 ‘갈라지라’고 말한다면 갈라질 것이다.


저항하는 존재들이 하찮게 보였다.


성녀? 용사? 대마법사? 고작 그딴 존재들. 이 힘 앞에서 저 모든 것들은 벌레나 다름없지 않은가.


마왕은 깔깔 웃어대며 양손을 휘둘렀다. 검붉은 색으로 뒤덮인 바다가 마왕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바다가 덮쳐왔다. 피비린내 나는 바다. 선명한 죽음의 색채. 그 모든 것이 세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옛날부터 바다는 싫어했다. 숲에서 자란 세냐에게 있어서 바다란 낯설기만 한 미지였다. 하지만, 햇볕 내리쬐는 바다의 반짝임은 꽤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경의 바다는 빛에 반짝거리지 않는다. 구역질 나는 악취가 떠돌고, 썩은 피의 색깔처럼 거무죽죽하다.


그러한 피를 볼 때면. 냄새를 맡을 때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광경들이 떠올라 버린다. 불타는 숲. 고문 끝에 죽은 엘프들. 산 채로 불태워진 엘프들. 죽어서, 먼지가 되어 사라지던 하멜.


“싫은 것투성이야.”


세냐는 바다를 등지고 누웠다.


화아아악! 다가온 신성력이 마력을 밀어내 주었다. 그 잠시 사이에 세냐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자그마한 빛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마경. 반짝임 없는 피의 바다에서 수백 수천의 빛이 반짝였다.


그 무수히 많은 빛이 세냐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수백 개의 회전이 세냐의 뒤에 겹쳐졌다. 그 광경은 마치 별들의 일주(一周)처럼 보였다.


바다의 요동침이 정지했다. 파도가 가라앉았다. 바다 전체가 고요히 침묵했다.


마왕이 지배하는 마경. 하지만 마왕조차도 세냐의 공간은 침범할 수 없었다.


“안 그래?”


마왕이 하늘을 끌어내렸다. 너무나도 짙은 마력 덕에 하늘에서는 마왕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냐는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유진.”


밤의 끄트머리부터 동이 트듯이 빛이 번져왔다. 멀찍이 날아갔던 유진이 빛을 끌고 왔다.


“그러게.”


유진은 피로 붉어진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아하하, 아하하하. 마왕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어 보였다. 세냐는 여전히 누운 상태에서 지팡이를 겨누었다. 유진의 성검에 다시금 공검이 중첩되었고, 월광검 또한 불길한 빛을 뿜었다.


“신이시여.”


크리스티나는 성흔이 새겨진 손으로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별들이 질주했다. 마왕이 몸을 틀었다. 휘갈긴 손이 세상을 꺾었다. 질주하던 별의 궤적이 엉망으로 틀어졌다. 세냐는 즉시 궤도를 수정했다. 별들이 어지러운 잔영을 남기며 움직였다.


반대편에서는 유진이 덮쳤다. 마왕의 눈동자가 유진을 보았다. 암흑물질이 앞을 가로막았다. 유진은 저 권능을 마법으로 대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월광검. 멸망의 빛이 권능을 지워버렸다. 몇 개나 나타난 마안의 권능은 월광에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졌다.


쉽게?


쉬울 리가 없잖은가.


유진도, 세냐도, 크리스티나도, 모두가 실감했다. 300년 전에 마왕과의 전투는 단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다. 가장 약했던 살육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에만 며칠이 걸렸으며, 그다음이었던 참혹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도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어야만 했다.


광란의 마왕. 놈은 마왕 중에서도 특수했다. 다른 마왕들과는 달리 가족놀이 따위에 집착했다. 휘하 권속들에게 과하다 싶을 만큼 힘을 주었다. 그렇게 다른 놈들에게 힘을 퍼주다 보니, 정작 광란의 마왕 본인은 하위서열인 살육이나 참혹보다 대단하지 않았다.


지금의 광란의 마왕은 어떤가.


103명의 다크엘프에게 힘을 주었다. 고작, 103명이다. 300년 전 광란의 군세와 비교하면 ‘고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적은 숫자다.


‘확실하군.’


저 마왕은 살육이나 참혹만큼이나 강하다. 대륙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면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이 바다에서 죽여야 해.’


가능할까.


시간이 멈췄다. 그렇게 느껴졌다. 바다에 넓게 퍼졌던 마력이 한곳에 모였다. 이 어린 마왕은 전능감에 심취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았다. 이겨야 할 이유는 마왕에게도 있었다.


쓸데없이 크기만 한 영지는 불필요하다. 지금의 마왕에게 필요한 것은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는 영지. 넓지 않아도, 절대적으로 군림할 수 있는 영지.


“그래…….”


마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차근차근 넓혀 가면 돼.”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손을 뻗었다.


마력이 움직였다.


고작 그것뿐. 2개의 과정일 뿐이나 위력은 끔찍했다. 공검과 월광검을 동시에 뻗었다. 마력을 정면에서 상쇄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반동이 양팔을 비튼다. 내장이 으깨진다. 그렇게 되어버린 순간, 멀쩡하게 되돌아간다.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만 같았다.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았다. 유진이 부상을 입는 즉시 크리싀나의 가호가 치료해버린 것뿐이다. 부서지려다 부서지지 않은 팔이 성검과 월광검을 전진시켰다.


[여전히 무식해.]


아니스가 중얼거렸다.


베었다.


다시 베었다. 계속 베었다. 그렇게 나아갔다. 몇 번인가 부상을 입었다.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은 피했다. 호흡을 이어가기 전에 부상은 치유됐다.


성검이 붙들렸다. 덩어리진 마력이 검을 무겁게 만들었다. 무리해서 성검을 휘두르지 않고 잠시 놓아버렸다. 펄럭거리는 망토의 틈에서 다른 무기를 꺼냈다.


마창 루인토스. 참혹의 마왕이 사용하던 무구. 유진과 완벽하게 동조된 창은 투창의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공간을 꿰뚫었다.


마왕의 눈앞에서 마창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창림(槍林). 불꽃에 뒤덮인 수백 개의 창이 마왕을 덮쳤다.


닿지 않았다. 손톱만큼 작게 만들어낸 어둠. 마안의 권능. 암흑물질. 그것이 창들의 궤적 하나하나에 대응하여 궤도를 비틀어버린 것이다.


“마왕이 되었지만 재주는 그대로냐 물었지?”


마왕의 붉은 눈동자가 유진을 보았다.


“이게 가장 강해.”


꽈앙!


“이게 가장 소중해.”


꽈앙!


“이게 가장 좋다고.”


꽈앙!


“너 따위가 알겠어?”


눈가를 손으로 더듬으며 웃었다. 눈동자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마왕은 검붉은 바다에 추락하는 용사를 비웃었다.


마왕은 검붉은 바다에 추락하는 용사를 비웃으며 눈앞에 멈춘 마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베르무트가 가졌던 마왕의 무구.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탓인지, 이 무기에는 마왕의 힘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멋지군.”


마왕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마창을 거머쥐었다. 그 순간 창대를 휘감은 울룩불룩한 혈관이 꿈틀거렸다.


마창은, 그 안에 담긴 유진 라이언하트의 피와 의지는, 마왕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이빨을 드러내며 마왕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병신.”


이번에는 유진이 비웃을 차례였다.


그는 피비린내는 웃음을 토하며 마왕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광란의 마왕


[유진 님, 괜찮으십니까?]


머릿속에서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이 가득 실린 목소리.


이런 식으로 걱정을 받는 것은 익숙했다. 당장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라, 망토 안에 있는 2명이 유진의 옆구리를 더듬으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유진 님, 은자여, 하면서 말이다.


걱정을 들을 만한 상태인 것은 맞다. 거듭해서 처맞은 마안의 권능. 극한까지 응축시킨 암흑물질을 터트려서 때릴 뿐이지만, 그것에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직격당했다. 그 공격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어서, 유진의 방어를 무시하고 충격을 주었다.


죽지는 않았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이긴 하다만, 유진은 살아 있다. 육체 바깥에 두른 방어가 부서질지라도, 유진의 방어수단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7성의 백염식. 그 강맹한 마나가 유진의 체내를 보호하고 있다. 피에 녹아든 번개불꽃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유진은, 아니, 그는 오래전부터 인간이되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죽겠다 싶어도 쉽사리 죽을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의심할 여지 없는 마왕.’


상처는 이미 치유되었지만, 입안에 고인 피가 비리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퉤 피를 뱉었다.


[하멜.]


크리스티나에서 아니스로 목소리가 바뀌었다.


[할 만합니까?]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와는 다른 것을 물었다. 괜찮냐는 식의 질문은 전투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이라면.”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스는 유진이, 하멜이 그렇게 대답할 것을 알았다. 이 전투는 갑작스럽다. 이곳 모두가 마왕과 싸울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겨야 한다. 마왕을 이 바다에서 죽여야 한단 말이다.


“세냐는?”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렸다.


마왕이 마력을 한데 모았을 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공격을 당한 유진이 아닌 세냐였다. 마력은 마나와 다른 성질의 힘이다. 마왕의 완벽한 지배를 받는 마력은, 이 공간에 마나를 별처럼 일주시키던 세냐에게 타격을 주었다.


“문제없어.”


세냐의 목소리는 꿈틀거리는 어둠의 덩어리 안에서 들렸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건재했다.


찌직, 찌지직! 덩어리에 균열이 가더니 여러 빛깔의 빛이 터져 나왔다. 빛과 함께 걸어 나온 세냐는 하늘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망할 년.”


마창의 권능을 몸 안에 직접 터트렸다. 하지만 겨우 그런 것으로 마왕은 죽지 않는다. 지금만 해도 마왕은 멀쩡한 모습으로 하늘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진은 떨어지는 마창을 향해 망토를 들췄다. 쉬익! 의지에 따라 날아온 마창이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마왕은 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용사답지 않은 마나를 내뿜으면서, 마왕의 무구까지 완벽하게 다뤄내는구나. 네가 정말 용사가 맞긴 한가?”


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유진은 다시 성검과 월광검을 쥐었다. 마왕은 두 눈을 얇게 좁혔다.


거대한 폭발에 바다가 뒤흔들렸다. 시커먼 바다가 갈라지고 파도가 퍼졌다. 나부끼는 물방울이 불꽃과 마나에 휩쓸려 사라졌다.


유진은 공간을 뛰어넘어 마왕에게 도달했다. 지근거리에서의 공격. 휘두른 것은 두 개의 검이었지만 참격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성검을 휘두를 적에는 공검의 검은 불꽃과 백색의 신성력이 얽혔다. 창백한 월광은 그 중심에서도 불길함을 내뿜었다.


멈추지 않는 참격의 연쇄. 살의뿐인 수라광살에서 마왕의 팔이 수백 수천 개로 쪼개졌다. 살점과 피는 비산하지 않았다. 참격이 지났을 때 이미 마왕의 팔은 재생했고, 거머쥔 주먹은 시커먼 마력을 담아서 수라광살을 꿰뚫었다.


쿠웅! 유진의 몸이 뒤로 밀었다. 쿠웅! 그 이상의 충격이 마왕의 몸을 때려 갈겼다. 몸에 두른 마력을 관통해 들어 온 것은 이해도 간파도 되지 않는 공격. 폭력만을 위해 빚어낸 마법의 섬광이 마왕의 몸을 꿰뚫었다.


섬광은 한 줄기로 끝나지 않았다. 몸을 관통한 빛이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흩어지더니 마왕의 주변을 떠돌았다.


꽈과광! 먼지들이 폭발했다. 육신의 죽음은 지금의 마왕에게는 조금의 위협도 주지 않았다. 죽음을 겪었다 하여 사고가 끊어지지도 않았다.


마왕의 몸이 다시 태어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 빛의 원이 나타났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성흔이 새겨진 왼손으로 마왕을 겨누었다.


기적을 펼치는 것에 필요한 것은 간절한 기도. 두 성녀의 기도가 마왕에게 닿았다.


화아아악! 눈부신 빛이 마왕의 어둠을 밀어냈다. 일직선으로 그어진 빛이 마경을 가로질렀다. 유진에게 그 빛은 내달릴 길이 되었다.


정신을 오싹거리게 만드는 살의. 마왕은 그 살의를 노려보았다.


살육의 마왕과 참혹의 마왕과 광란의 마왕과 싸웠을 때.


유폐의 마왕과 싸웠을 때.


베르무트의 백염식은 몇 성이었을까? 놈의 백염식은 그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나?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베르무트는 처음부터 인간 같지 않게 강했다. 그렇다 하여 놈의 힘이 처음부터 완성된 것은 아니다.


완성이란, 거기서 끝이지 않은가. 베르무트는 계속해서 강해졌다. 하멜이 아무리 서둘러도, 하멜이 따라붙는 것보다 베르무트가 멀어지는 것이 더욱 강했다. 베르무트는 전투를 겪을 때마다 강해졌으며, 마왕과의 전투에서도ㅡ 그 순간순간마다 강해졌다.


‘지금 나는.’


백염식의 7성. 성검이 있다. 월광검이 있다. 마창이 있고 분쇄추가 있으며, 그 외에 여러 무기가 있다. 전생의 경험이 있다. 모든 조건을 따졌을 때 베르무트보다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알던 베르무트보다 강해야 해.’


못해서는 안 된다. 비슷해서도 안 된다. 이곳에는 베르무트도, 모론도 없다. 지금 마왕을 죽이려면 당연히 300년 전의 베르무트보다 강해야 한다.


유진이ㅡ 하멜이 기억하는 베르무트의 모습. 그것을 떠올리는 것에 고민은 필요가 없었다. 베르무트가 어떻게 싸웠는지. 베르무트가 얼마나 강했는지. 그것은 누구보다 하멜이 잘 알고 있다. 베르무트와 가장 가까이 싸우던 것이 하멜이었다.


“나는.”


유진이 마왕에게 살의를 전했듯 마왕 또한 유진에게 살의를 주었다. 마왕의 살의는 몸을 위축시키고 정신을 미치게 만든다.


“너를 죽인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살의를 담았다. 유진의 눈이 불꽃처럼 빛났다. 간절한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면, 지금 유진의 안에서 일어난 것 역시 기적이라 할 수 있으리라.


유진이 간절한 것은 마왕에 대한 살의였다. 바라는 것은 이 이상의 빛이 제 자신의 극한을 넘는 것이었다.


백염식 7성. 가슴에 담은 일곱 개의 별이 일그러졌다. 그런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몸 안에서 움직이는 마나는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격렬하게 흐르며 불꽃을 일으켰다.


검보라색으로 타오르던 프로미넌스가 폭발과 함께 치솟았다. 마치 공검을 중첩시켰을 때처럼 마나의 불꽃에 흑점이 번지더니, 외날개가 완전한 검은색이 되었다.


퍼어어엉!


그 속도는, 마치 세상에 당연하게 작용되던 규칙에서 예외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진의 의지는 견고하고 예리했으며, 함께하는 살의는 마왕을 놓치지 않았다.


“커헉!”


마왕의 입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아닌 괴로운 신음이 나왔다.


이건ㅡ 죽음이 아니다. 하지만 죽음 이상으로 괴로웠다. 닿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산화되고 존재 자체에 흉터가 죽죽 그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게 뭐야?’


300년이란 시간을 살았다. 전투가 일상이던 전쟁시대의 기억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기사, 마법사, 성직자 같은 인간과 싸워보았다. 용사 베르무트와 싸워본 적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선 마족과도 싸워보았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마왕이 된 지금으로서도 승산이 희박한, 마왕 이상의 힘을 가진 마족과도 싸워봤다.


하지만 그 어느 전투에서도 지금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이 힘은 이질적이다. 인간과도 다르고 마족과도 다르다.


하지만ㅡ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 힘은 결코 ‘용사’나 ‘빛’ 같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 힘은 그런 단어보다는 더욱 폭력적이고 끔찍하고 불길했다.


“하! 하하하!”


마왕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컥컥 검은 피를 토하면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시뻘겋게 번득이는 눈동자가 바로 앞의 유진을 보았다.


“네가, 네가 용사라고?!”


이런 성질의 힘이 용사라고? 마왕은 미친 듯이 웃어대며 권능을 일으켰다. 함께 움직이던 유진과 마왕 사이에서 어둠이 폭발했다. 유진은 마냥 휩쓸리지 않았다. 어둠에 밀려나기 전에, 프로미넌스가 마왕을 마력 채로 아래에 처박았다.


시커먼 마경이 마왕과 함께 추락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검게 물들었던 바다가 마왕의 몸을 받아냈다. 콰아아! 처박힌 순간에 바다가 증발하며 커다란 구멍이 만들어졌다.


마왕은 그 한가운데에 서서 양팔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유진의 변화에 놀랐던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가 급히 보조를 맞췄다.


‘대체 뭐야?’


세냐는 바다로 하강하는 유진을 힐긋 보았다.


마왕이 왜 저런 말을 하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유진의 등에 치솟은 프로미넌스는 새카만 불꽃으로 타올랐고, 유진에게서 흩날리는 마나의 불꽃까지도 검었다.


이질적인 모습. 성스럽고 고결하며 새하얗던 베르무트의 불꽃과는 정반대의 색이다.


하지만, 하지만. 세냐는 저 불꽃에서 하멜을, 유진을 느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아니다. 하멜 다이너스의 환생, 유진 라이언하트인 것이다. 300년 전부터 그라는 남자는 성스럽거나 고결함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저 불꽃은 유진에게 어울렸다.


[아…….]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보았다. 아니스도 유진을 보았다. 크리스티나는 느끼지 못했으나, 아니스는, 천사인 그녀는 저 불꽃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ㅡ 그녀는 지금 자신이 생각한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납득이 잘되지 않았다.


지금 고민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다.


마왕은 아직 건재하다. 유진이 변화를 겪은 것. 크리스티나에게 성흔이 새겨진 것. 세냐 메르데인이 이곳에 있는 것. 아직은 그 무엇도 마왕에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죽음은 너무나 멀었다.


반면에 인간에겐 어떠한가? 신성력에 의한 기적이 죽음을 돌이키고 있지만, 그 신성력이 마왕의 불사성보다 강할 리가 없지 않은가.


또다시 용사 같지 않은 자가 다가왔다. 마법사가 뒤를 따랐다. 마나의 움직임을 읽은바, 마법사는 이미 수십 개의 마법을 준비했다. 하늘에서는 짜증 나는 빛이 계속해서 쏟아질 틈을 노리고 있다.


마력이 움직였다. 바다가 무너졌다. 검은 바닷물이 서로 얽히더니 예리한 송곳이 됐다. 그를 쏘아내는 것에는 아무런 동작도 필요하지 않다. 의지가 곧 마력이니, 그저 살의를 전하면 되었다.


역류해 온 송곳이 하늘을 찢었다. 찢은 하늘을 검은 불꽃이 불태웠다. 독립된 마법들이 불꽃을 가로질렀다. 먹구름 사이에 빛이 쏟아지듯이 내리쬔 광채가 세상을 덮었다.


모든 현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마왕이 찰나를 꿰뚫었다. 세냐의 트랩이 발동했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 숨겼던 수십 종류의 구속 마법이 마왕의 전신을 붙들었다. 마왕이 정지한 것은 잠깐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유진의 검이 마왕의 몸을 지웠다.


“죽어!”


세냐는 악을 쓰며 지팡이를 뻗었다. 이터널 홀이 가용한 최고출력의 마나가 지팡이 끝에 모였다. 일점으로 집중된 살의가 죽지 않는 마왕에게 향했다.


대단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출력의 마나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일점에 모은 빛일 뿐이잖은가. 마왕은 마안의 권능과 마력을 함께 일으켜서 앞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에 마나가 바뀌었다. 일점에 모아 쐈던 마나는 장벽에 부딪치기 전에 흩어졌다. 마왕이 선 공간. 마력이 가득한 마경에 마나가 공기처럼 가득 찼다.


얼어라. 세냐의 눈동자가 녹색으로 빛났다. ㅡ쩌저적! 세냐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공간도, 마력도, 그 한가운데의 마왕 본인까지. 심지어 그 공간의 시간마저 세냐의 마법에 붙들렸다.


시간과 존재가 얼어붙은 것. 마왕의 사고까지 얼어붙었다. 세냐의 마법은 멈추지 않았다. 꽈지지직! 마력에 의한 지배가 사라진 바다가 본래의 빛깔로 돌아왔다. 모든 바닷물이 마왕을 덮쳤다.


바다 중심에 동토가 만들어졌다. 세냐는 얼어붙은 바다의 밑바닥을 향해 마왕을 내리꽂았다. 얼어붙은 물결은 그 자체로도 흉기였고, 얼어붙은 마왕의 몸뚱이는 자그마한 충격에도 산산조각이 났다.


“세냐!”


예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직감이 유진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유진이 손을 뻗기 전, 세냐도 느끼고서 급히 마법을 일으켰다.


꽈지직! 얼어붙은 바다가 갈라졌다. 세상을 두 동강 낼 것만 같은 어둠의 칼날이 세냐에게 향했다.


화아아악! 사이에서 터진 빛이 칼날을 무디게 만들었다. 유진은 월광검과 성검을 휘둘러 어둠의 칼날을 밀어냈다.


“커흑!”


칼날은 막았다. 그러나 세냐는 입에서 피를 뿜었다. 마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마경이었고, 마왕이 바란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어둠이 마력을 따라 움직인다. 사방에서 옥죄는 마력이 세냐의 마법결계를 으스러트렸다.


“가!”


세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으스러지던 결계가 다시 수복됐다. 이터널홀의 마나가 마왕의 마력을 밀어냈다. 유진은 그 말에 주저하지 않고, 갈라진 바다로 몸을 날렸다.


그곳은 바닷속이지만 바닷속이 아니었다. 바닷물은 이미 시커먼 마력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진은 저 깊은 곳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붉은 눈을 찾았다.


서로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검은 불꽃이 따른 참격이 마력에 가로막혔다. 마왕의 손이 유진에게 직접 뻗어졌다. 유진은 잡혀줄 생각이 없었다. 새카만 번개가 번쩍였고, 유진과 마왕 사이를 월광이 가로질렀다.


“키옐에서도 느꼈지.”


마왕이 내뱉었다. 쩌엉! 월광을 으깨고 들어 온 손이 유진의 몸을 어둠 깊은 곳에 처박았다.


“너. 베르무트의 후손. 정작 너는 베르무트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


폭발한 광채가 어둠을 꿰뚫고 길을 열었다. 광채는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유진의 곁에 머물렀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이 깊은 어둠 속에서도 유진을 비추었으며, 오른손에 쥔 성검 역시 어둠을 밝혔다.


“용사라면서도 베르무트 같지가 않아. 유진 라이언하트. 네 기질은…….”


일그러진 백염식은 격렬한 불꽃을 피워냈다. 멸망의 빛은 유진의 손아귀에서 스멀스멀 빛을 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유진을 보면서 마왕은 오싹거림을 느꼈다.


“하멜을 닮았다.”


마왕이 되면서 얻은 것은 무한한 마력뿐만이 아니다. 아이리스. 그녀의 모든 것이 마왕의 격에 걸맞게 변모했다. 마왕의 직관(直觀)은 다가오는 존재의 기질을 간파했고, 300년 전 원수를 연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너는.”


마왕은 호흡이 가빠졌다. 간파한 것은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이 한 점에 모인다. 마왕의 의식은 300년보다 먼 옛날을 보았다.


“너는, 너는 하멜이구나.”


대답은 듣지 않았다. 마왕은 유진이 하멜이며 가장 증오스러운 원수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를 확신한 이상, 마왕이 할 일은 간단했다.


“아아아아아아아!”


마왕은 울부짖었다. 피눈물을 쏟으면서 오열했다. 가진 이름처럼 광란했다. 이곳을 가득 채웠던 마력이 마왕의 정신과 함께 미쳐 날뛰었다.


“죽어!”


마왕은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지금의 직관과 깨달음과 그로 인한 광란은 마왕에게 있어서 우화(羽化)와 다름없었다. 자기 자신을 광란의 마왕이라 정의 지었던 어린 마왕은 지금 이 순간에 진정으로 광란을 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마안이 빛났다. 악의가 살의와 함께 실현되었다. 이 우화는, 세상에 있어서는 크나큰 불행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그 불행을 맞닥트리기 전에 유진이 먼저 얻어맞았다.


꽈아앙!


‘이 새끼 왜 지랄이야?’


온몸이 박살 나는 것만 같은 충격. 내뱉지 않은 비명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속에서 유진은 분노와 의문을 느꼈다.


막아야 한다. 피해야 한다. 아니, 역으로 반격을 노릴까? 전투에 대한 관념이 의식의 끈을 붙잡았다. 유진은 할 수 있고 그럴듯한 것을 선택했다.


막혔다. 시도는 좋았지만 마왕의 힘이 유진의 위였다. 그는 한 번 더 얻어맞고서 어둠 속에 처박혔다.


처박힌 순간에 어둠은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옭아 죄어 죽일 셈인지 압박해 터트려 죽일 셈인지는 모르나, 당장 움직이는 것이 불편했다.


“너 때문에!”


마왕은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마력이 손톱처럼 할퀴어왔다. 끼기긱! 성검과 월광검으로 받아내긴 했지만 무겁다. 유진의 발이 뒤로 끌렸다.


“네가!”


유진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마력이 배를 꿰뚫었다. 거슬러 불꽃을 보냈다. 우화한 것은 마왕뿐만이 아니다. 유진의 불꽃은 여전히 마왕에게 이질적이고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말. 그래, 광란의 마왕을 죽이는 것에 유진이ㅡ 하멜이 큰 몫을 하기는 했다. 애비의 원수를 찾나? 그렇다면 유진도 해당은 된다.


“나를!”


하지만 저 말은 진짜 억울했다. 유진이 아이리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베르무트가 광란의 목을 따는 순간에 아이리스를 붙들고 있던 것?


“씨X년아.”


유진은 피를 토하면서 내뱉었다.


“뒈질 짓을 말든가!”


꽈아앙! 흘려보낸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며 마왕을 집어삼켰다.


광란의 마왕


“격이 다르구만.”


포르메리의 마스트에 선 아이빅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미 몇 번이나 내뱉은 말이고, 내뱉은 것보다 훨씬 많이 떠올린 생각이기도 했다.


슬라드 용병단의 함선인 포르메리는 라베르시아의 후방에 바짝 붙어 있다. 현재 갑판에는 성직자들이 원진을 치고서 신성력을 집중하고 있고, 팔라딘 아돌을 위시한 성기사들이 성직자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숫자가 부족하다. 마왕, 마족과의 전투에서 성직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는 어린아이도 아는 일이다. 저들을 지키기 위해 슬라드 용병단의 정예 수십 명이 남았고, 그 외의 모든 병력은 라베르시아에 집중시켰다.


단장인 아이빅은 포르메리에 남았다. 그는 용병왕이라 불리는 만큼 백병전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있는 것은 활을 이용한 원거리에서의 저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포지션이기 때문에 아이빅은 저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빠짐없이 지켜볼 수 있었다. 저 앞은ㅡ 저 바다는, 진짜 마경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정말로 격이 다르다.


아이빅도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는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대륙 제일의 ‘기사’를 꼽을 때에 아이빅 슬라드란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해 왔다.


으레 그런 법이잖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병을 기사보다 얕잡아 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저 마경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아이빅이 가지고 있던 여러 자신감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용병왕이란 별명에 걸맞은 경력을 적기 위해 이곳에 왔다. 도망칠 생각 따위는 지금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의 후회는 들었다.


‘이 나이에 질투심이나…… 주제 파악 같은 것은 속이 많이 쓰리단 말이야.’


하물며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상대에게는, 더더욱.


아이빅은 씁쓸히 웃으며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저 앞의 마경에서는 유진 라이언하트와 마왕이 싸우고 있다. 성녀와 성직자들의 가호가 집중되었다고는 해도, 저 어린 청년이 마왕과 정면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퍽이나. 진즉에 죽어서 바다에 수장되었으리라.


아이빅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현명한 세냐와 유진 라이언하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의 전력은 마왕을 상대로 압도는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대등하다 할 만큼의 균형은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사실이기는 했다.


‘하지만 마왕은 죽지 않아.’


벌써 마왕은 열 번이 넘게 죽었다. 그만큼 죽었으면 조금씩이라도 약해져야 할 텐데, 오히려…… 마왕은 죽음이 거듭될 때마다 강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익숙해지는 거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왕. 자기 자신이 가진 힘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직접 보고 있기 때문에 아이빅은 유진의 고집을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마왕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약하다. 가진 힘에 익숙해지고 있다지만 그것은 본연보다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오늘 반드시 죽여야 한다.


“쯧.”


아이빅은 혀를 차며 시위를 놓았다. 소리 없이 쏘아진 화살은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갈라졌다.


파바박! 수십 다발의 화살이 라베르시아의 갑판 위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마경뿐만이 아니다. 바로 앞에 붙은 라베르시아에서도 전투는 벌어지고 있다.


마왕을 섬기는 다크엘프들. 그들은 전신에 마력을 두르고서 라베르시아의 병력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오르투스는 후방 함대에 남아서 해적들을 상대하고 있다.


지금 라베르시아의 전투 흐름을 붙잡고 있는 것은 카르멘 라이언하트였다. 그녀의 양 주먹에 벌써 10명이 넘는 다크엘프가 죽었다. 카르멘 외에도 토벌대의 강자들 여럿이 다크엘프를 상대하고 있으며, 아이빅도 틈이 보일 때마다 저격하고 있다.


전장에 여유는 없다. 다크엘프들은 개개인의 무력도 뛰어났지만, 고통을 모르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덤벼들었다.


아니ㅡ 저것들을 과연 다크엘프라 해야 할까? 아이빅은 시위를 당기면서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새카만 피부. 길게 뻗은 귀. 새빨간 눈. 그러한 모습에는 다크엘프의 특징이 남아 있긴 했지만.


겨우 그것뿐이었다. 엘프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종족이다. 그런 엘프가 마력에 의해 타락해 버린 모습이 다크엘프. 비록 타락했을지언정, 다크엘프에게는 엘프였을 적과 같은 아름다움이 온존되어 있다.


지금 라베르시아에서 날뛰는 다크엘프들에게는 그러한 아름다움이 남아 있지 않았다.


뾰족하고 길쭉하게 튀어나온 송곳니. 기괴하리만큼 근육이 붙은 팔다리. 심한 개체는 털이 머리색과 같은 털이 수북하게 나기도 했고, 어떤 개체는 짐승처럼 주둥이가 튀어나왔으며, 어떤 개체는 거인처럼 덩치가 컸다.


아이빅이 보기에 저것들은 더 이상 다크엘프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길쭉한 귀와 붉은 눈, 검은 피부가 남아 있기는 하다만. 다크엘프 같지 않은 특징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저것은 엘프였고, 다크엘프였던 괴물들이었다.


‘괴물이군.’


하지만 아이빅은 저 다크엘프들보다, 선수상에 선 성녀야말로 진짜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세냐나 유진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왕과 싸우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 성녀의 위치는 전투가 시작한 후로 변하지 않았다.


라베르시아의 선수상. 성녀는 그 위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서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마왕의 배에서 백 명이 넘는 다크엘프들이 뛰어내리는데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크엘프들은 성녀를 해하기 위해 이빨을 부딪치고 손톱을 휘둘렀음에도 성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성녀의 눈은 오직 유진과 세냐와 마왕만을 담았다.


몸을 보호하는 결계는 있다. 가끔, 결계를 넘은 손발이 다가올 때면 플레일의 철구가 움직였다. 대부분은 그렇게 되기 전에 아이빅의 화살이 꿰뚫거나, 카르멘이나 다른 이들이 나섰다.


보호를 받고 있다지만 시선을 돌리지도, 위축도 되지 않는 성녀의 모습은 경배하기 마땅했다.


성녀뿐만이 아니다. 용사와 대마법사, 모두가 경배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수십 수백 번 화살을 쏘던 중에,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할 만하지 않은가.


전장에 여유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장에는 본래 여유가 없는 법이다.


전투는 고되다. 본래 전투란 고된 것이다. 다치고, 죽는 사람들이 있다. 이곳은 전장이니 당연한 것이다.


용병인 아이빅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장은 모습은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다.


‘마왕’과 싸우는 전장이라는…… 실감은, 잘 들지 않았다. 그것은 저 경배 받아 마땅할 영웅들이 마왕에 대한 두려움을 억제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저 영웅들이 마왕을 상대하고 쓰러트려 줄 것이란 믿음이, 이 전장에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승리에 대한 희망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보라. 시커멓던 하늘과 세상에는 어느덧 빛이 밝지 않은가.


무너졌다.


점점 선명해지던 희망은 또렷해지기도 전에 산산이 흩어졌다. 쩍 갈라진 바다에서 뿜어진 마력이 다시금 세상을 검게 물들었다.


까가가가가각!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우짖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그 거대한 소리가 전장을 바꾸었다. 성녀의 가호가 근본부터 뒤흔들렸고, 라베르시아와 포르메리에서 전투 중이던 사람들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저 커다란 소리는 후방의 함대에도 전해졌다.


열 척이 넘는 함선이 뒤집어졌다. 몇몇 함선은 포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괴물들도 전투를 멈췄다. 이 끔찍한 존재들은 홀린 눈동자를 돌려, 하늘로 치솟은 마력을 우러렀다. 콰르르르! 회오리치는 마력의 중심에 마왕이 있었다.


마왕은 검붉은 피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의 혼란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니, 마왕은 혼란을 진정시킬 생각이 없었다. 이 혼란이야말로 그녀의 본질이었으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광기였다.


“아, 아아아아아아!”


마왕은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래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죽은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가족’이라고 여겼던 다크엘프들. 대부분이 마왕과 300년이란 시간 동안 유대를 쌓은 이들이다.


“감히, 감히, 감히!”


그러한 가족들이 죽었다. 함께 영광을 누려야 할 가족들이 저렇게나 많이 죽었다. 그 광경은 마왕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피로 물든 도시. 시체의 산. 그 위에 서서 피비린내를 풍기던 남자.


‘아버지’는 이 땅에서 패주(敗走)했다. 자식들을 거두지 못했다. 자식들의 죽음에 복수하지도 못했다.


그건,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실수였다.


“나는, 나는 아냐.”


운명은 반복되곤 하지.


유폐의 마왕이 뇌까리던 말. 마왕은 그것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는 아버지가 한 약속의 증명이자 실패의 증명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득한 옛날에 이 땅에서 패배했고, 가족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는 때에 다시 돌아와,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었다.


만약 아버지가 패배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냐.”


다크엘프들의 죽음에 분노했다. 분노는 마왕의 정신을 무너트리지도, 나약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한 살의와 광기를 끌어냈다.


운명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유폐의 마왕에게서 모든 진실을 듣기 위해서라도, 마왕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 전장을 영지로 삼아야 했다. 그렇게 해야 죽은 가족들의 넋을 기릴 수 있을 것이다.


푸확!


회오리치는 바다에서 유진이 치솟았다. 잿빛 머리카락은 피로 흠뻑 젖었고, 왼팔은 부러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시뻘건 시야에서도 마왕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저 미친년이 내뱉던 말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유진 님.”


처참한 모습에 크리스티나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강렬한 마력에 가로막혔던 기적이 유진을 비추었다.


꽈앙!


기적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마력이 유진을 휘감았다.


시커멓게 타오르는 공검이 마력을 밀어냈다. 퍼버벙! 더해진 마법이 마력을 흩트렸다.


힐긋 본 세냐의 얼굴은 핏기가 없어 창백했다. 유진도 마찬가지였으며,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던 크리스티나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마왕과의 전투는 항상 이런 식이다.


검게 타오르는 프로미넌스가 펄럭였다. 아까와 같은 초가속. 마경을 찢는 번개를 향해 마왕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강렬한 죽음의 기척.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를, 아니스를, 세냐를 믿었다. 그녀들은 훌륭하게 유진의 믿음에 부응해 주었다.


빠져나갈 틈 없이 덮치는 죽음이 기적에 지워지고 마법에 부서졌다. 온존된 전력이 성검에 실렸다.


꽈지직! 마왕의 몸이 박살 났다. 성검을 휘둘렀던 팔도 마찬가지였다. 살과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조각났다.


시간이 되감긴다. 가속된 사고가 모든 것을 느리게 보았다. 부서지던 뼈가 다시 달라붙고, 혈관과 신경과 근육이 엮이고, 그 위에 살이 덮는다.


‘월광검’.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항상 절대적인 힘을 과시하던 월광검이 지금 이 순간에는 무력했다. 반절도 남지 않은 힘은, 유진의 마나와 어우러진 성검의 출력보다 뒤떨어졌다.


그래선 안 된다. 유진은 강렬하게 그것을 갈망했다.


이 빌어처먹을 검은 달빛을 뿜기 위해서 마나를 탐욕스레 처먹는 주제에, 정작 달빛은 마나와 섞이지 않는다. 월광검이 지금 성검보다 약한 것은 파편이 모두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유진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이다. 성검이 강한 것은 신성력뿐만이 아니라 유진의 힘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위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는 공검까지 펼쳐 버리면 성검은 지금의 월광검을 뛰어넘는다.


‘내 힘을 받아 처먹는 주제에 섞이지 않는다고?’


지랄하지 마. 충혈된 눈동자가 금색이 아닌 붉은색으로 빛났다. 부숴 버릴 것처럼 힘이 들어간 손가락이 월광검의 칼자루를 쥐었다.


빠드득! 혈관이 울룩불룩 돋은 손등이 들썩거렸다. 손가락의 마디가 조금 더 굽혀졌다. 유진의 왼손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월광검의 칼자루를 으스러트렸다.


한순간 달빛이 꺼졌다.


꺼졌던 달빛이 켜졌다.


으스러진 칼자루에 쏟아지는 마나가 월광검의 파편 하나하나에 깃들었다.


일그러진 백염식의 별. 그를 통해 쏟아내는 마나는 하얗기는커녕 빨려들어 갈 듯이 어둡다. 월광검에 부어지는 불꽃이 어두운 밤이라면 그 한복판에서 빛나는 회백색의 빛은 진정 달빛과 같았다.


불길하고 창백한 달빛이 난무했다. 유진의 마나와 월광이 양립했다. 그 순간에 유진의 의식은 아득해졌다.


오늘 유진은 그가 알고 있던 베르무트와 다르게 되었다. 백염식을 바꾸는 것으로 극한을 넘었는데도, 유진은 다시금 변화를 야기해 냈다.


이럴 때에.


항상 커다란 고양감을 느끼곤 했다. 드디어 해냈구나, 하는 충만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왼손에 쥔 이 힘이. 이 시커먼 세상에 그어지는 달빛이, 모두가 느끼기에 너무나도 불길했기 때문이다.


‘월광검?’


세냐도 월광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300년 전에 월광검의 덕을 보아 살아남았던 적은 양손을 다 써도 셀 수가 없을 것이다.


저 회백색의 빛은 익숙하다. 저 달빛은 마족에게는 끔찍한 악몽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아군에게 찬란한 희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불길했기 때문이다. 베르무트가 월광검을 휘둘렀을 때에, 저 달빛은 베르무트의 불꽃마저 퇴색시켰다. 그럴 때에는 아군, 세냐나 모론, 아니스, 하멜도 베르무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지금 유진이 쥔 월광검. 저 반쪽짜리 검신에서 뿜어지는 달빛은ㅡ


‘불길함’ 하나만을 본다면 베르무트의 월광검보다 더했다. 유진의 방어를 도맡고 길을 열어주던 마법이 달빛에 닿아 소멸했다. 유진을 가호하던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기적마저 달빛에 휩쓸려 사라졌다.


유진이 오른손에 쥔 성검도 예외는 아니었다. 월광검이 내뿜는 달빛은 빛의 신 이상으로 독선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될 만큼 강했다. 나부끼는 달빛은 유진의 손마저 집어삼키면서도 마왕의 마력을 손쉽게 지워냈다.


너무 휘황한 빛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월광이 폭주했다.


광란의 마왕


달빛은 모든 것을 부쉈다. 앞을 막는 마력이 달빛에 산산이 조각났다.


유진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활활 타는 마나의 불꽃이 달빛에 저항했지만, 달빛은 그 저항조차도 집어삼켜서 더욱 불길하게 빛났다.


손을 넘어서 팔뚝의 감각이 희미해졌다. 소멸하거나 잘린 것은 아니다. 팔은 멀쩡하게 달려 있다. 감각이 희미하기는 해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칼자루를 놓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월광검과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월광검을 휘둘러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폭주. 단어 그래도 월광검이 폭주했다. 뭔가 싶어서 마나를 거두려 해보아도, 월광검은 유진의 뜻을 거스르고 마나를 빨아먹었다. 찌릿. 두개골 안쪽을 손톱으로 긁는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이건 위험하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월광검이 이런 식으로 날뛰는 것은 300년 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유진의 마나가 바닥을 긁기 힘들 만큼 넘쳐날지라도, 월광검이 빨아먹는 속도를 생각하면 마나가 고갈될 위험이 컸다.


게다가 문제라 할 것은 마나뿐만이 아니다. 침식. 팔뚝에서부터 점점 올라오는 달빛이 심상치 않았다.


‘왜 지랄이지?’


월광검이 강해진 것은 좋다. 하지만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휘두르는 것은 뜻대로 하고 있다. 힘의 흐름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달빛을 거두는 것도 되지 않았다.


애당초 멈출 생각이 없기도 했다. 유진은 통증을 무시하고서 앞으로 나갔다. 멈출 수가 없다면 폭주에 따를 수밖에. 이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치직.


뇌를 긁는 것만 같은 통증. 귓가에 들리는 소음. 광란의 마력에 의한 것인가? 그 마력은 지금 월광검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는데?


의식의 혼탁. 유진은 입술을 씹으며 정신을 깨우려 했지만, 그 아픔마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소음은 점점 비명처럼 변했고, 근처에는 파도의 소리가 겉돌았다. 뭔지 모를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소리도 들렸다.


머릿속에.


무언가가.


‘나는…….’


나타난다. 번져간다. 그렇게 젖어간다.


‘뭘 보고 있는 거지?’


빛 한 점 없는 어둠. 저건…… 하늘인가?


‘저건…….’


모르겠다. 보이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너무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볼 수가 없다.


‘아.’


이건 처음이 아니다. 예전에, 아카샤에 처음으로 용언마법을 새겼을 때. 월광검의 파편이나 베르무트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용언마법을 사용했던 적이 있다.


그때와 지금은 똑같았다. 아니, 이제는 똑같지 않다. 그때 듣지 못했던 것, 보지 못했던 것,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어둠이 회색으로 바뀐다. 유진은 색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는 불길함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空虛). 지금 유진이 보고 있는 것은 철저한 공허였다. 이곳에는 살육도 참혹도 광란도 없다. 빛도 어둠도 없다.


라이자키아는 월광검을 두고서 멸망의 검이라고 했다. 마창이나 분쇄추와 같은 마왕의 무구란 말이다. 이 공허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멸망 그 자체였다.


공허한 멸망의 한 복판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 * *


저항이 불가능했다. 마왕이 펼치는 방어는 저 달빛 앞에서 허무하게 찢어졌다. 찢어지는 즉시 다시 방어를 구축해도 소용없었다.


마력이 아닌 마안의 권능도 마찬가지였다. 암흑물질을 수십 수백 개 소환해도, 달빛이 한번 그어지면 모든 것이 소멸했다.


‘월광검……!’


앞으로 뻗었던 손이 빛에 휩쓸려 사라졌다. 재생이 늦다. 마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달빛은 닿는 마력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린다. 처음의 유진이 쓰던 월광검은 이 정도로 강하지 않았으나, 검은 불꽃이 더해지고 난 뒤에는 마왕의 마력마저 정면으로 압도하게 되었다.


‘밀린다고? 마왕인 내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직접 당하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마왕은 뒤로 물러서며 마력을 일으켰다.


끼기기긱! 듣기 싫은 소음이 마왕의 앞에 집중되었다. 마왕이 손을 뻗으니 마경 자체가 전진했다.


사라졌다. 달빛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마경이 아닌 공허뿐이었다. 마왕은 짧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함께 휩쓸렸던 몸은 다리 두 짝만 남아버렸다.


“허억!”


멸망은 마왕의 사고마저 끊어놨다. 소생은 해냈으나 마왕의 눈동자는 덜덜 떨렸다.


저 존재는, 마왕에게 있어도 항거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그러면서 집요하고 냉혹한 사신이기도 했다.


일렁거리는 달빛 사이에서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라이언하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잿빛 머리카락. 그 색은 왼손에서 뿜어지는 달빛과 닮았다. 금색 눈동자도 빛나지 않고 공허했다.


“안 돼.”


지금 유진의 상태는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선수상에 서서 올려다보던 크리스티나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몸을 떨었다.


성검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압도적인 힘으로 마왕을 몰아붙이는 유진에게 용사다운 면모는 존재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몇 번이나 유진의 정신에 말을 걸고 기적을 더해주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닿지 않았다. 오히려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에게 반발에 의한 고통이 돌아왔다.


‘시스터, 조금 더 가까이…….’


아니스는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저러한 폭주는 아니스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달빛에 휩쓸려 버릴 것이다. 본래부터 월광검의 빛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베르무트가 월광검 위주의 전투를 벌일 때에, 동료들이 가장 신경 써야 했던 것은 베르무트를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베르무트의 공격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달빛이 주역인 전투에서 아슬아슬한 간극에서 합을 맞추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멜뿐이었다.


[예.]


그 하멜이 지금 달빛에 침식되고 있다. 빛도 가호도 목소리도 닿지 않는 곳에 들어서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무리 위험할지라도, 지금 하멜이 처한 상황보다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스는 제 존재가 잘못될지라도 하멜을 구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8장의 날개가 펄럭였다. 선수상에서 움직이지 않던 성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슷해.’


세냐는 이를 악물고 나아갔다.


이미 수십 번이 넘는 마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터널 홀도, 프로스트의 드래곤하트도, 저 달빛의 안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니, 비슷한 것이 아니라…… 똑같아.’


하멜의 무덤에서 보았던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그때의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의 유진처럼 불길하기 짝이 없는 달빛에 삼켜져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냐는, 지금의 유진에게서 그때의 베르무트를 느꼈다.


베르무트인데, 베르무트가 아닌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인상. 지금의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아직은 경계를 넘지 않은 것 같으나, 조금 더 가버리면ㅡ 저 달빛에 완전히 삼켜져 버리면.


유진이 유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것만 같았다. 세냐가 알고 있는 유진이, 하멜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막아야 하지?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이 이상 가까이 가는 것도 버겁다.


대체 무엇을 해야. 무엇을 각오해야, 무엇을 바쳐야 폭주하는 달빛을 저물게 할 수 있을까.


끼릭.


간절함에 움직여 준 것은 신이 아니었다.


마경의 시커먼 하늘에 작은 구멍이 뚫리더니 쇠사슬이 쏘아졌다. 그 광경에 세냐와 크리스티나의 얼굴에 경악이 어리고, 아니스는 비명을 질렀다. 300년 전부터 저 사슬이 상징하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다.


유폐의 마왕.


‘왜?’


누구도 그 이유를 명확하게 짐작할 수가 없었다.


광란의 마왕도 마찬가지였다. 재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뱃속은 꾸물거리는 구더기가 가득 차오른 것처럼 느글거리고 불쾌하며, 머릿속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만이 가득 떠올랐다.


이대로 패배할 것만 같았다. 죽음의 예감이 점점 강해졌다. 도망, 도망쳐야 하나?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유폐의 마왕?’


끔찍하고 불길한 달빛이 마왕을 삼키려는 순간. 사슬이 달빛을 꿰뚫었다. 마왕은 ‘왜’ 사슬이 나타난 것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철저한 방관자일 유폐의 마왕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전투에 간섭한다는 말인가?


‘나를.’


마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달빛을 꿰뚫은 사슬은 마왕을 물러서게 만들었고, 달빛에 침식되던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구하는…… 건가?’


마왕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만약 전투가 계속되었다면. 저 달빛에 완전히 삼켜져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마력의 소멸이 반복되었다면ㅡ 마왕의 불사력마저도 바닥을 보였을 것이다. 저 달빛에는 마왕이 죽음을 예감할 만큼의 힘이 있었다…….


하지만 유폐의 사슬이 나타남으로써 상황이 바뀌었다. 폭주하던 달빛은 사슬에 붙잡혀 잦아들었다. 마왕을 떨게 만든 죽음의 빛이 꺼져가고 있다. 이건 틀림없는 기회였다.


마왕은 사슬에 포박된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르르르! 집중된 마력이 포탄이 되었다.


“안 돼!”


세냐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에 대한 이해보다는 유진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고 급한 일이었다.


퍼어엉! 마법과 마력이 충돌했다. 폭발의 반경에서 아슬아슬하게 빗겨 난 유진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사슬에 묶인 유진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의식은 아직까지 멸망 뒤의 공허에 붙들려 있었다. 월광검도 더 이상 달빛을 내뿜지 않았다.


“비켜!”


마왕은 유진이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다. 저 월광검이 다시금 달빛을 뿜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에 대한 분노도 치솟았다.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사슬에 묶어놓았다면 옭아 죄어 죽여 버리든가 할 것이지. 왜 가만히 묶고만 있느냔 말이다.


‘용사를 죽이는 것은 내게 맡기겠다는 건가?’


쉽지 않다. 성녀의 신성력에 지속해서 마력이 갉혀나갔고, 세냐와 유진에 의해 직접적인 죽음도 여러 번 당했다. 결정적으로, 폭주한 월광검에 의해 마력이 너무 소모되었다.


사슬에 휘감긴 유진의 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세냐가 악을 쓰며 퍼붓는 마법들이 마왕의 행동을 억제했다.


‘부족해.’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힘이 부족하다. 마력이 부족하다. 공포가 부족하다. 이곳은 마경, 마왕이 군림하며 경외되어야 하는 전장인데ㅡ 경외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돌려받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순간, 마왕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권속들에게 부여했던 마력. 그것도 상당한 양이니, 다시 거두어가면 당장 부족한 힘은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권속들은 죽겠지만ㅡ


“미안해.”


마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 방법 외에 다른 것은 떠올리지 않았다. 마왕의 의지는 아직 죽지 않은 모든 다크엘프들에게 전해졌다.


그들 중 누구도 마왕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기쁨을 느끼며 심장을 뽑았다. 섬기는 마왕을 위해, 마왕의 승리를 위해, 광란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마왕의 직접적인 권속에게 있어 그 이상으로 숭고한 죽음은 존재치 않았다.


촤아아악!


수십 명이 넘는 다크엘프들이 심장을 뽑았다. 하나 된 의지가 마경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자살을 행한 것은 다크엘프들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이었을 적의 자아를 상실하고 마력의 덩어리가 되었을 뿐인 해적들. 맞서는 인간 수백 수천을 죽인 괴물들도 전투를 멈추고 자기 자신의 심장을 뽑았다.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두려운 광경이었다. 마의 권속이 일제히 심장을 바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식이 되어, 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불가해한 공포를 새겼다.


“영광입니다…….”


300년간 아이리스를 섬겼던 세피아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에 세피아는 시커먼 재가 되어 사라졌다.


파스스스!


검은 기류가 마왕에게 모였다. 마왕의 몸을 부수어가던 세냐의 마법이 정지했다.


곧 마법이 소멸했다. 침범하는 마력에 세냐의 입과 코에서 주룩 피가 흘렀다.


신성력을 사슬에 집중시키던 크리스티나도 아찔한 두통을 느꼈다. 성흔이 새겨진 왼손을 직접 뻗었으나 사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적을 바라며 기도를 외고 이름을 불러보아도 유진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것에만 집중할 수도 없었다. 광란의 마력이 세냐를 덮치고 있다.


8장의 날개가 펄럭였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세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냐도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기적의 빛이 번쩍였고, 꺼졌다. 세상이 잠시 어두워졌다.


찰나의 고요에서 사슬만이 끼릭 움직였다. 마치 불어 닥칠 폭풍에서 피신시키듯, 유진의 몸이 멀찍이 날아갔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스였다. 그녀는 혼절한 크리스티나를 대신해 날개를 펄럭거렸다. 사슬에 끌려 날아가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왜?’


세상이 잠시 어두워졌을 때. 아니스는 사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았다. 덮쳐오는 광란의 마력은 사슬을 침범하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유폐의 사슬은 유진을 보호해 주었다.


‘무엇을 바라는 거지?’


유폐의 사슬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폭주한 월광검에 의해 광란의 마왕을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ㅡ 유진의 존재도 달빛에 스러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폐의 사슬이 간섭함으로써, 광란의 마왕은 목숨을 건졌다. 마찬가지로 유진도 달빛에서 벗어났다.


‘동정? 흥미? 어느 쪽이든…… 마왕답지 않아.’


그렇지만 유폐의 마왕이 유진을 구한 것은 분명했다. 지금만 해도 저 사슬은 유진을 사지(死地)의 바깥으로 옮겨놓았다. 아니스는 사슬이 사라진 것과, 유진이 다른 배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유진은?”


“무사합니다.”


아니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세냐의 어깨를 잡았다. 스며든 신성력이 세냐의 부상을 모조리 회복시켰다. 둘은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서 라베르시아의 갑판 위에 내려섰다.


“끝이 보이는군요.”


그 말에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생각보다 빨라.”


“그렇기는 합니다. 최악의 경우, 며칠은 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방심하지는 마.”


“제가 말입니까?”


아니스는 쿡쿡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플레일의 자루를 쥐고서 앞을 보았다.


ㅡ쿠웅!


마력은 완전히 하나로 결속되었다. 광란의 마왕은 흐르는 피눈물을 손등으로 비벼 닦았다.


유진은, 하멜은, 용사는 어딨지? 마왕은 우선 용사를 찾았으나, 정면에서 날아든 철구가 마왕의 시야를 뒤덮었다.


“어딜 보는 겁니까?”


철구는 마왕의 머리를 부수지 못했다. 신성력이 가득 담겨 있기는 했으나, 마왕의 마력은 철구를 허공에서 붙잡아 버렸다.


아니스는 길게 늘어난 플레일의 사슬을 잡아끌면서 이죽댔다.


“광란의 마왕.”


전황이 바뀌었다. 광란의 마왕은 휘하 권속들을 모조기 자살시켜서 마력을 충전했다. 사람들에게 전염 된 공포가 마왕의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광란의 마왕이 처음 맞닥트렸을 때보다 강한 것은 아니었다.


저 어린 마왕은 처음부터가 전대의 광란만큼 강했고, 전투 도중에도 계속해서 강해졌다. 그것도 한계에 달했으며, 이제는 꺼져가고 있다. 죽이지 못한다면, 이 바다에서 살아간다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 죽인다면 무가치한 재가 될 뿐이다.


“당신의 적은 용사뿐만이 아닙니다.”


아니스는 조용히 선고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공포에 질겁하지 않은 사람들. 공포를 느끼되, 싸우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발을 내디뎠다.


“하.”


광란의 마왕은 웃음을 내뱉었다. 가족을 자살시켜 혼자가 된 그녀의 앞에 여러 인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찮다. 밉다.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싶다. 마왕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뱉었다.


“그…… 자식이 돌아올 시간을 벌고 싶은가 보지?”


마왕은 ‘하멜’이라는 이름을 내뱉지 않고 삼켰다. 그것을 말해 버리면 적들의 사기가 충전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혼자가 된 그녀는 보다 영리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마왕의 힘은 공포에 기인하니, 저들에게 공포가 사라질 빌미를 주어서는 아니 되었다.


“좋아.”


공포는 심는 것은 아주 쉽다.


“죽고 싶은 놈은 와라.”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사람이건 엘프건, 자신이 아는 사람ㅡ 심지어 누군지도 모르는 타인일지라도, 바로 옆에서 죽는 모습을 봐버리면 겁에 질린다.


마왕은 지금 자신이 불리하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상대가 수가 얼마나 많건 마왕의 힘 앞에서는 하찮은 인간일 뿐. 본보기로 한 놈을 잔인하게 죽여 버리면, 나름의 결의를 다진 얼굴들이 절망으로 바뀔 것이다.


“헤븐 제노사이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데스티니 폼.”


오늘 전투에서 카르멘은 단 한 번도 저것을 직접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런 의례를 치를 만큼 여유로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상황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여유는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카르멘은 ‘평소’와 다름없이 헤븐 제노사이드의 이름을 외웠고, 데스티니 폼을 선언했다.


라이언하트는 마왕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면 안 된다. 머뭇거리고 망설여서도 안 된다.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어야만 한다.


설마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나서면서, 저 병신 같은 이름을 내뱉을 줄이야. 카르멘의 행동은 마왕마저 순간 당황시켰다.


“미친년.”


마왕은 입술을 비틀며 카르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죽고 싶다면 죽여주지. 키옐에서 봤을 적에는 상대가 까다로웠지만, 마왕이 된 지금은…….


퍼억!


마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먼 곳에서 날아온 화살.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감히 저격을 시도했다는 점이 마왕을 분노케 했다. 화살을 쏜 것은 물론 아이빅이었다.


‘내가 미쳤지.’


상황이 좋지 않은데, 그냥 얌전히 있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를 하면서도 아이빅은 새로운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쏠ㅡ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젊은 용사가 그토록 분전했다. 가녀린 팔의 성녀가 흉측한 철구를 휘두르며 마왕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존경하는 카르멘이 마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아이빅은 그런 상황에서 조용히 숨만 죽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키이이잉!


심호흡과 함께 세냐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녀는 여러 개의 구체를 주변에 두르고서 마왕을 노려보았다.


ㅡ쿠웅! 마왕이 내딛는 한걸음이 라베르시아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침몰하지는 않았다. 세냐의 마법이 라베르시아를 단단히 붙잡았다.


“너 따위가 누구보고 오라 가라야?”


세냐는 핏발 선 눈으로 마왕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빌어먹을 환생 373화


헤븐 제노사이드, 데스티니 폼.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내뱉을 수 없을 이름이지만, 우스꽝스러운 이름과는 달리 이 형태는 상대를 무조건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팔꿈치 아래를 빈틈없이 감싼 은색의 장갑.


이 형태의 모든 부분이 흉기다. 예리하게 날이 선 팔뚝은 칼날만큼 날카롭다. 손가락 역시 날카롭지만, 주먹을 쥐어 때리면 살짝 손목을 회전시키는 것만으로 상대를 분쇄육으로 만들 수 있다.


카르멘의 백염식은 격투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녀의 백염식은 유진이나 다른 라이언하트의 백염식과는 달리 활활 타오르지는 않는다. 한계까지 응축시켜 표면에 살짝 흐르는 불꽃의 색은 다른 색의 침입을 허용치 않는 백색이다.


그 불꽃은 타격한 순간에 터지고, 상대를 꿰뚫어 버린다.


뻐어어억! 카르멘의 주먹이 암흑물질을 깨부쉈다.


아이리스의 암전의 마안과는 이전에 싸워보았다. 이 마안과 싸우기 위해서는 암흑물질의 성질부터 파악해야 한다. 긴박한 전투 중에는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세냐가 집중적으로 마안을 견제해 준 덕분이었다. 서로 길을 연결해 버리는 마안은 놓치지 않고 파괴했다. 때려 박아버리는 마안은 근접전을 펼치는 전사들에게 맡겼다.


그럴지라도 전투는 쉽지가 않다.


카르멘은 신성력도 없고 월광검도 없다. 마법도 쓸 수 없다. 다른 무기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무기는 헤븐 제노사이드와 라이자키아의 비늘로 만든 장갑. 평생을 단련해 온 무(武). 그리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라이언하트의 백염식뿐.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카르멘은 마왕에게 전력을 쏟아부었다. 그녀의 타격은 끊이지 않고 흘렀고, 타격점마다 꽂아 넣는 불꽃은 마안의 권능을 꿰뚫고 마력을 침범했다. 그 연속 된 타격에 마왕의 몸은 조금씩 밀려났다.


호흡이 다르다. 검이나 다른 무기를 쓰는 것과는 달리, 카르멘은 두 주먹뿐만 아니라 전신을 사용한다. 주먹을 걷어내면 즉시 다리가 날아오고 다리를 피하면 다시 주먹이 꽂힌다.


가볍지도 않았다. 카르멘이 신성력이 없다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카르멘의 후방에는 성녀가 있다. 수십 명의 성직자가 있다.


‘짜증 나.’


저쪽 배에서 쏘아대는 저격. 단순한 저격이라면 마력의 결계로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저격 중에 심각하게 위력적인 것들이 섞였다.


세냐 메르데인. 저 망할 마법사는 화살에 의한 저격에 마법을 섞어 위력을 증폭시키고, 저격 도중에 은밀히 마법을 펼쳐서 마왕의 사각을 노렸다.


‘짜증 나.’


주목할 가치도 없던 놈들이 겁도 없이 덤비고 있다. 마왕의 권속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으니 다들 행동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성기사들은 각각 모시는 신의 이름을 외치며 마왕을 에워쌌다. 몰살시키기 위해 터트린 방패는 집중된 신성력의 결계에 의해 가로막혔다.


‘짜증 나.’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가? 마왕은 진심으로 의문을 느꼈다.


그녀의 공격이 모두 가로막힌 것은 아니다. 전투가 시작된 후로 이미 수십 명이 마왕의 손에 죽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카르멘처럼 강하고 빠르지는 않다. 성녀와 성직자들의 신성력은 계속해서 발휘되고 있으나, 300년 전에도 그렇듯이 빛의 가호 아래에서도 사람은 죽는다. 아무리 상처를 치유해도, 사람인 이상 머리가 터지고 심장이 뚫리면 죽을 수밖에 없단 말이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지?’


마왕의 가장 큰 의문은 그것이었다. 신성마법으로 공포를 지우고 용기를 북돋는 것도 완벽하지는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을 비트는 것. 게다가 광란의 마력은 인간의 정신력을 무너트리는 것에 특히 능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전투에서 감정을 완전히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까도 그랬다. 광란의 마왕을 위해 모든 권속들이 심장을 뽑아냈을 때. 그 의식은 이곳의 인간 대부분의 머릿속에 공포를 새겨넣었다.


그, 수천 명의 공포가 얼마나 달콤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아까와 같은 달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왕에게 불쾌감을 주는 여러 감정들이 차오르고 있다.


빛, 용기, 믿음, 희망, 이딴 것들.


퍼억! 마왕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미간에 처박힌 화살에 뒤통수가 날아갔다. 마왕은 즉시 머리를 앞으로 당겼다. 화살은 마력에 의해 소멸했지만, 되돌아온 시야에 무수히 많은 마법의 점들이 보였다.


꽈과과광! 마왕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재생은 계속해서 늦어지고 있다. 무한을 생각했던 마력도 더는 무한하지 않다. 폭쇄하는 마법 사이를 카르멘을 비롯한 전사들이 파고들었다.


결사(決死). 그들 중에 몇몇은 이곳에서의 죽음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꽤 많은 이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왕과의 전투를 바라지 않았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토벌하러 왔던 다크엘프가 마왕이 되어버렸다. 얌전히 물러서서 상황을 관망하고 싶은데, 갑자기 나타난 용사와 성녀, 마법사가 이번에 반드시 죽여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러한 독선에 끌려 왔다. 도망치고 싶은데, 싸우고 싶지 않은데, 죽고 싶지 않은데. 그러한 바람을 체면과 위신 때문에. 또 대세에 거스를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와버린 사람들이다.


그럴지라도, 지금 마왕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영광을 바라지는 않았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승리를 갈망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냥…… 어쩔 수 없어도, 해야 한다는 생각.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주면 좋으련만, 달리 대신할 사람들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와버렸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많이 죽었으니까, 또, 이대로 두었다가는 마왕에 의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릴 테니까.


신념이나 정의는 얕았다. 그냥 어쩔 수 없다, 라는 것이 대부분의 근간이었다.


영웅심조차도 아니었다. 인간이란 본래 대부분은 영웅도 아니고 정의롭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으며, 지금 마왕과 싸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하찮지 않다.


‘하찮다.’


마왕은 뿌득 이를 갈았다.


지긋지긋했다. 벌레 같은 놈들, 하찮은 놈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놈들. 그럴 텐데ㅡ 무리를 이루고, 죽음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 마왕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저들은 용사가 아니다. 성녀도 아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마왕의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독에 대한 분노와 광기가 살의로 바뀌었고, 마안은 가득 찬 죽음을 실현했다.


꽈아아앙!


이런 상황에서 죽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약한 사람. 재수가 없는 사람. 너무 가까이 간 사람. 과신한 사람. 오만한 사람.


혹은 희생적인 사람.


마안이 빛을 뿜었을 때. 아니스가 빛을 터트렸다. 정신을 차린 크리스티나도 아니스와 함께 기도를 외웠다. 성녀를 따르는 수십 명의 성직자들도 같은 기적을 바랐다.


하지만 신성력도 무한하지는 않다. 마력을 억제하고, 사람들에게 가호를 부여하고, 상처를 초고속으로 재생하고, 몇 번의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내고, 틈이 보일 때마다 마왕을 공격했다.


그 모든 것이 결계를 조금 느리게 만들었다.


랭킹 3위, 팔라딘, 아돌. 그는 과묵한 남자다. 토벌대가 출발한 이래로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적여제 토벌이 마왕 토벌로 바뀐 후에도, 아돌은 다른 의견을 내지 않고 묵묵히 용사와 성녀의 뜻을 지지했다.


죽음이 다가올 때. 아돌은 움츠리지 않고 방패를 들었다. 물러서는 대신 방패를 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움직인 것은 아돌뿐만이 아니었다. 방패를 든 성기사들 전원이 아돌이 그런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아.’


가까이 있던 카르멘의 몸이 뒤로 던져졌다. 아돌은 카르멘이 위험하지 않도록 방패와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카르멘은 부릅뜬 눈으로 아돌과 성기사들의 등을 보았다.


시커먼 격류가 성기사들을 집어삼켰다. 그들은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꽈르르르! 아슬아슬하게 구축된 결계가 마력을 가로막았다. 결계 뒤에서 쏘아진 마법의 창이 마왕의 몸을 관통했고, 마력의 격류가 위아래로 갈라졌다.


라베르시아가 두 동강 났다. 검붉은 바다는 요동치면서 배를 집어삼켰다. 세냐와 크리스티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각자 해야 할 일을 했다. 침몰하는 라베르시아에 타고 있던 전원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하…… 하하하하!”


불쾌감을 주는 감정들이 일부 줄었다.


그래, 경외하지 않는다면 죽여서 알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왕에게 손쉬운 일이다. 지금 이곳에서 마왕의 권속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마왕은 고독을 느끼지 않았다.


요동치는 바다의 아래. 심해에 유폐된 심연. 전대 광란의 마왕. 그 유지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지금도 아이리스의 등을 받쳐주었다.


모두 다,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마왕은 침몰하는 배에서 날아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는 대신에 바다 가까이에 몸을 뉘었다. 기울어진 머리는 하늘이 아닌 다른 곳을 보았다.


마경에서 가장 환한 빛.


불경하고 불길하며 두려운 빛.


마안은 빛을 발하지 않았으나, 어둠은 빛이 있는 곳에 드리웠다.


* * *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가 유진을 찾으러 가지 않은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라베르시아에 내려온 광란의 마왕. 세냐와 성녀들 둘 중 하나가 자리를 비우면 이곳의 균형이 무너진다.


전투에 의해 마왕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력해진 것은 아니다. 본래 맹수는 상처를 입었을 때가 위험한 법이다. 죽음이 가까워진 이상 누구나 필사적으로 발악할 수밖에 없으며, 그건 마왕도 마찬가지다.


물론 유진이 정말로 위험한 상태가 되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바다에 처박힐 상황에 처했다면. 세냐와 성녀들은 한 명이라도 후방으로 빠져서 유진을 구하는 것을 우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유진은 그 정도로 위험하지 않았고, 바다에 떨어지지 않았다.


유폐의 사슬에 던져진 유진을 쫓는 눈동자는 세냐와 성녀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엘 라이언하트. 그녀는 라베르시아, 포르메리가 아닌 후방의 함선에 있었다. 선두에서의 전투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후방에서의 전투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후방에는 오르투스를 비롯해 강자가 여럿 있었으며, 시엘도 그중 하나였다. 당연히 시엘은 지금의 포지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라베르시아나 포르메리에서 다크엘프들과 전투를 벌여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포지션에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징글맞고 커다란 해적선들, 그곳에서 울부짖고 뛰어내리던 괴물들은 모두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지금 시엘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시엘은 새하얀 불꽃을 갈기처럼 휘날리며 함선과 함선을 뛰어넘었다. 그녀의 두 눈은 선두의 전투가 아닌, 떨어져 내리는 유진에게 고정되었다.


‘괜찮아.’


이 순간을 위해 가혹한 수행을 견뎌낸 것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뜻대로 움직이는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또한 자유로웠다. 시엘은 갑판에서 도약해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놓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시엘의 손이 유진을 붙잡았다. 시엘은 뻗은 손을 홱 당겨서 유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은ㅡ 시엘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고요하고 소중했다. 실제로 지금 시엘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부끄러운 생각이지만,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시간이 멈추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시엘은 유진을 끌어안은 상태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유진에게 아무런 충격이 전해지지 않도록 공중에서부터 속도를 줄여서 착지했다.


‘너무 조용해.’


뒤에 이어 우려가 들었다.


유진이 정신을 잃은 것이야 그렇다 쳐도, 망토 안에 있을 메르와 용공녀까지 조용한 것은 이상했다. 유진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그 둘부터가 망토 밖으로 나와서 유진을 챙겼을 텐데.


시엘은 표정을 굳히고서 흑암의 망토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끝없이 널찍한 공간.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 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무사하다면 메르나 용공녀가 손을 뻗어 잡았을 텐데…… 둘도 함께 기절해 버린 건가?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 시엘이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용사님…….”


전투에서 살아남은 선원들이 시엘과 유진 근처로 모여들었다.


의사는 최후방의 피난선에 있다……. 그쪽으로 가야 하나? 차라리 앞으로 가서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


아니, 그것보다는 당장 유진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먼저였다. 응급처치 정도라면 시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유진을 살피던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칼자루에 달라붙은 유진의 왼손 때문이었다.


유진은 월광검에 대한 사실을 항상 숨겨왔었다. 흑사자 성에서 이오드에게 사용할 때에도, 제물로 납치된 이들이 모두 기절했을 때 월광검을 뽑았다. ‘반드시’ 죽여야 할 때가 아니고서는 월광검은 꺼내지도 않았고, 사실 대부분의 전투에서는 월광검을 꺼낼 만큼 궁지에 몰린 적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시엘은 월광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는 여러 가지의 무구가 있지만, 저런 불길한 빛을 내뿜는 검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해에 의한 것이 아닌 직감이었다.


저 반 토막 난 검은 위험하다. 저 검이 내뿜는 불길한 빛이 마왕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사실이나, 그 불길하고 두려운 빛은 마왕뿐만 아니라 유진까지도 위협했다. 지금 유진이 정신을 잃은 것도 저 검에 의한 것이다.


시엘은 굳은 표정으로 월광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으스러트렸던 칼자루에 손가락이 파묻혀서, 손가락과 칼자루는 말 그대로 결합되어 있다.


힘을 주어서 하나씩 뜯어내야 하나? 아니면 과감하게 손목을 잘라 버릴까? 성흔이 깃든 성녀라면 잘린 팔다리마저도 붙이고 상처를 재생할 수 있다지만……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아직 모른다고 들었다.


‘정 안 되면 손목을 잘라야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사태일 때 선택한 수단이다. 시엘은 심호흡을 하고서 유진의 손과, 월광검을 함께 거머쥐었다.


300년 전부터 그랬다.


월광검은 아무나 쥘 수 없다. 하멜이나 모론 같은, 그 시대의 강자들조차도 월광검이 전하는 불길한 광기에 저항하지 못했다.


광기. 그것은 단어 그대로 광기다. 손에 쥔 순간 정신이 어떻게 변해버리는 것만 같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월광검의 광기에는 저항이 불가능하다.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쥐고, 휘둘렀다. 유진도 마찬가지다. 월광검을 쥐는 ‘자격’은 정신력의 강함이 아닌 ‘특별함’이다. 바로 피. 베르무트의 피. 라이언하트의 피.


그 피는 시엘에게도 흐르고 있다.


시엘의 몸이 덜덜 떨렸다. 특별한 피, 시엘의 정신은 월광검의 광기에 미쳐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월광검을 쥔 순간에 그녀의 정신은 현실이 아닌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지금 유진을 침식하고 있는 광기가 시엘을 끌고 갔다.


‘아, 안 돼.’


다행인 것은 시엘이 완전히 휩쓸리지는 않았다는 것. 천지가 사라지고 만상이 스러지는 허무 속에서 시엘의 의식이 겉돌았다.


이건 위험하다. 자칫하다가는 함께 휩쓸려서 자아가 소멸해 버릴지도 모른다.


거듭된 직감, 하지만 시엘은 월광검을 놓지 않았다. 이대로 쥐고 있어서 위험하다는 것보다, 당장 유진이 위험하다는 것이 더욱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깊게.


의식이 허무의 중심으로 가라앉았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분명 눈으로 보고 있는데, 의식은 이곳에 존재하는데, 그마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곳에서 시엘이 확신하는 것은, 칼자루를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ㅡ


“가야 해.”


희미하게 보이는 것. 이 공간에서 시엘이 가장 간절한 것.


그건 유진이었다. 그는 월광검이 보여주는 허무에 붙들려,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시엘의 의식이 유진에게 닿았다.


“이래서는 안 됐다.”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엘은 그 목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검은 내 안배가 아니야.”


화아아악!


허무가 멀어졌다.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헉!”


시엘은 막힌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월광검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다른 손은 유진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시엘은 숨을 헐떡거리며 눈동자를 움직였다. 하나로 엉겨 붙어 있던 유진의 손과 칼자루는, 다행히 떨어져 있었다.


“유진!”


시엘은 유진의 어깨를 잡고서 흔들었다. 몇 번 흔든 뒤에 유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


유진은 눈을 떴다. 머리가 멍하고 지끈거렸다. 몸에도 힘이 없었다.


월광검의 폭주에 너무 많은 마력을 써서? 아니면…… 방금 의식이 끌려가서 보았던 것 때문에?


“시엘……?”


유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시엘의 이름을 불렀다. 희미하던 기억이 점점 연결되고 차올랐다.


아무것도 없던 세계. 공허한 멸망의 한 복판에서 보았던 누군가의 모습. 마지막에 들었던…… 목소리.


“네가 나를…… 데리고 나온 거냐?”


유진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래, 라고 말하며 웃고 싶다.


하지만 시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들었…… 유진과 시엘을 밀어내고, 홀로 그곳에 남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깊이 내려가서 닿았다. 붙잡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진과 시엘을 밀어낸 것은 다른 힘이었다. 시엘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커다란 소리가 났다.


바다가 뒤흔들렸다.


찌릿, 하고 느낀 것은.


아까와 같은 직감일까. 혹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에 새겨진 경고일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선택한 것은 시엘이었다.


뻗은 손이 유진의 몸을 밀어냈다. 얕다. 대신해야 돼. 어쩔 수 없잖아. 목숨이 평등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장에서ㅡ 그리고 앞으로도.


‘네 목숨이 나보다 훨씬 가치 있어.’


시엘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왼쪽 시야가 붉어졌다가 어두워졌다.


퍽, 하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광란의 마왕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흐릿하던 유진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뒤로 밀쳐졌던 몸을 다시 앞으로 기울였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나타난 어둠. 그것은 예리한 송곳이 되어 시엘의 왼쪽 눈동자를 꿰뚫었다.


“시엘.”


저절로 열린 입으로 시엘의 이름을 불렀다. 유진은 급히 손을 뻗었다.


파스스! 눈동자를 꿰뚫었던 송곳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얕다.


유진은 급히 시엘의 몸을 끌어당겼다. 마안을 사용한 기습. 노렸던 것은 머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습은 마왕의 의도보다 훨씬 얕았다.


충분한 위력을 갖추지 못한 공격, 그나마 일점에 집중시켜 송곳으로 바꾸었다. 안구를 넘어 뇌까지 부숴 버릴 생각이었겠지만 그것마저도 마왕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른다.


왜 마왕의 공격이 얕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모른다. 그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유진은 서둘러 시엘의 상처를 살폈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시엘의 눈동자. 라이언하트의 상징인 금색눈동자.


그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유진의 몸이 덜덜 떨렸다. 망토를 뒤져서 여러 종류의 포션을 꺼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에게 받았던 성수. 라이언하트에서도 귀하게 취급하는 엘릭서.


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진은 입술을 뿌득 씹으면서, 텅 비어버린 왼쪽 눈에 성수와 엘릭서를 흘려 넣었다. 그러면서 시엘의 맥을 살폈다.


살아 있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시엘의 맥은 뛰고 있었다. 그 사실이 유진을 안도시켰다.


왜, 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시엘이 왜 이런 행동을 하였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뻔했다. 방금 유진은 제대로 반응할 만큼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도 똑같았다. 월광검의 폭주는 유진의 마나를 너무 많이 소모시켰다.


폭주는 망토 안의 메르와 라이미르아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유진이 마나를 무식하리만큼 막 쓸 수 있는 것은 전생부터 마나를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서.


발전시킨 백염식이 특별해서 뿐만이 아니다. 마나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게끔 메르가 보조해주기 때문이고, 아카샤와 라이미르아의 드래곤하트에서 마나를 끌어오기 때문이다.


그 둘은 월광검의 폭주에 정신을 잃었다. 유진도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월광검을 휘두르면서 마나 뿐만 아니라 코어에 데미지를 입었다.


“…….”


유진은 시엘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정신을 잃은 시엘에게 무슨 말을 하건 당장은 의미가 없을 테지만, 유진은 시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고맙다.”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유진은 시엘을 품에 안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우두커니 선 디자이라의 모습이 보였다.


“시…… 시엘 님.”


디자이라는 피범벅이었다. 그녀의 피가 아닌, 이전의 전투에서 튀었던 피였다. 디자이라는 뺨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고서 울먹거렸다. 유진은 말없이 디자이라에게 다가갔다.


“시, 시엘 님, 시엘 님은 괜찮은 거예요?”


더듬거리며 묻는 말에 유진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왼쪽 눈은…… 잃었다. 다행히 죽지 않았고, 눈동자의 상실 외에 다른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성수와 엘릭서를 써서 응급처치를 하기는 했지만, 마(魔)에 의한 상처를 깔끔하게 치료하려면 고위 성직자의 기적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이 전장에는 성녀가 있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크리스티나의 신성마법이 아직 아니스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당장…… 은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뿌득.


유진은 어금니를 꽉 씹었다. 디자이라는 시엘을 안아 들고서 어깨를 움츠렸다.


“괘…… 괜찮아, 요?”


디자이라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유진이 화를 내는 것은 몇 번인가 보았지만, 지금 저 얼굴은…… 아니, 저건 화를 내는 얼굴인 건가? 디자이라는 지금 유진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었으나, 저것이 단순한 분노나 살의는 아니라고 느꼈다.


“안 괜찮아.”


분노, 증오, 살의,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유진이 느끼는 것은 지독하고 무거운 자기혐오였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 마왕을 상대로 고전하는 것이야 당연히 각오했던 것이지만,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마왕이 강해서가 아니잖은가.


“나는 병신이야.”


월광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월광검의 폭주에 자아가 휩쓸렸고, 간신히 정신을 되찾았음에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병신 새끼.”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치밀었다. 유진은 뿌득 이를 씹으며 바닥에 떨어진 월광검을 노려보았다.


월광검이 위험하다는 것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위험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유진은 꽉 막힌 숨을 토하면서 월광검을 들어 올렸다.


손에 쥔 월광검은 아까처럼 빛을 내뿜지는 않았다. 마나를 불어넣는다면 빛을 뿜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태에서 다시 한번 월광검의 폭주에 휘말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유진은 꽈득 이를 갈면서 월광검을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뒤에 가 있어.”


유진은 그렇게 내뱉고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코어가 욱신거린다. 형태가 일그러진 백염식, 일곱 개의 별이 유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본신의 마나의 손해는 크지만, 아카샤에는 아직 끌어 올 마나가 남아 있다.


[윽…….]


라이미르아와 메르도 정신을 차렸다. 이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유진이 직접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둘은 유진이 느끼는 감정을 느꼈다. 라이미르아의 마나까지 더해지자, 백염식의 흐름이 더욱 격렬해졌다.


저 앞에서는 아직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요동치는 마력의 어둠 안쪽에서 신성력과 마법의 빛이 연달아 터졌다.


월광검에 의해 침묵했던 성검이 다시 빛을 발했다.


왼쪽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시커먼 불꽃이 치솟았다.


* * *


이 바다에 오기를 잘했다.


스칼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셰도르 섬에 있을 적에는 지금처럼 마음껏 날뛸 수가 없었다.


깊은 밤, 충동을 억누를 수 없을 적이면 로브를 뒤집어쓰고 몰래 거리로 나가곤 했다. 과감하게 마음을 먹기는 했어도, 아무나 죽일 수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스칼리아의 광기에는 아직 그 정도의 자제심이 남아 있었다.


타고난 천성과, 교육받은 도덕의 영향이기도 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죽여도 된다.


물론 아무나 죽일 수는 없다. 스칼리아는 충동과 취미활동 중에도 그것만큼은 구분했으며, 나름대로 악인을 엄선하고서 죽음이란 벌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이 바다에서는 그러한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 덤비는 놈을 죽이면 된다. 기쁘게도 스칼리아에게 덤비는 것은 마물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위치한 후방에는 신성력의 빛이 엷었고, 마경이 되어버린 하늘은 칙칙해 어두웠으며,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흉물스러운 괴물들과의 전투는 심약한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태어난 광인들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거나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비록 도중에 모든 마물들이 제 심장을 뽑고 죽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전투는 지속되었다. 그 광경에, 혹은 광란의 마력에 미쳐 버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 좋아.’


왕족에게 검을 겨누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죄. 그러니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스칼리아는 그 사실에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검을 휘두르는 것, 누군가의 피를 보는 것, 그 피에서 죽음이 이어지는 것, 나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것. 그 모든 것이 즐거웠다.


혼란 틈에 오빠를 죽여 버리자.


문득 스칼리아는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빠, 자페르 아니머스와 사이가 좋은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이복남매가 그러하듯이, 자페르 왕자는 서열 낮은 첩을 어미로 둔 스칼리아를 멸시했다.


어렸을 때뿐만이 아니다. 스칼리아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자페르 왕자는 귀족들의 파티 같은 곳에서 스칼리아에 대한 험담을 떠들곤 했다.


검으로 누군가를 죽여본 적도 없는 주제에. 지금만 해도 그렇다. 자페르 왕자는 잔뜩 겁에 질려서 처음부터 피난선에 숨어 있었다.


‘찾아가서 죽여 버리는 거야. 옛날부터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은 혼란스러운 전투 중이다. 목격자만 없으면 자페르의 죽음은 조용히 묻혀 버릴 것이다.


목격자, 목격자라……. 스칼리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서 뒤를 의식했다.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는 디오르. 스칼리아는 쯧 혀를 찼다.


‘귀찮게 하기는.’


디오르가 부관인 것은 맞다. 하지만 디오르에게, 이 급박한 전장에서 스칼리아를 챙길 만큼의 의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 디오르가 스칼리아의 뒤를 따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스칼리아를 감시하기 위해서다.


‘음침한 놈. 오르투스 경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감시만 하는 속내를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차라리 디오르도 죽여 버릴까? 스스로 떠올린 것이지만 명쾌했다. 유인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피난선에 가기 전에 디오르를 죽여서 바다에 던져버리고, 그 뒤에 피난선에 가버리면 된다.


그렇게 결심한 것도 잠시.


스칼리아의 몸이 우뚝 굳었다. 그녀는 홱 고개를 들더니 먼 하늘을 보았다.


“공주님?”


디오르는 수상쩍다는 표정을 하고서 스칼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미친년마냥 웃어대며 검을 휘두르다가 어딜 가나 싶었는데…… 대체 저기서 왜 우두커니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디오르가 천천히 스칼리아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스칼리아는 부름에 답을 해주지 않고, 여전히 하늘 저편만 쳐다보았다.


디오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칼리아가 보는 하늘을 보았다. 농밀한 어둠. 사슬…… 같은 것에 묶인 유진 라이언하트의 모습이 보였다.


“사슬……?”


디오르가 중얼거렸고.


“조용.”


스칼리아가 내뱉었다. 홱 움직인 눈동자가 디오르에게 향했다.


그 순간, 디오르의 의식이 사라졌다. 그는 멍한 눈으로 서 있다가 홱 몸을 돌렸다.


“공주님, 대체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디오르는 현실과 다른 환상을 좇았다. 스칼리아, 아니, 누아르 제벨라는 귀찮은 인간을 멀리 보내 버린 뒤에 다시 하늘을 보았다.


누아르는 레헤인에서 스칼리아의 몸에 의식을 강림시켰던 적이 있다. 그때 촉매로 썼던 인큐버스는 유진과 크리스티나가 보는 앞에서 죽었지만, 몽마(夢魔)는 세상 어디든 존재하고 있다.


스칼리아는 정신이 불완전하고 악몽에 시달린다. 또한 누아르는 스칼리아의 억압된 충동을 알아보았으며, 몽유(夢遊) 중에 분출시켜 충동을 사특한 유희로 개발할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접점을 심어놓았다. 일국의 공주…… 가지고 놀기에 훌륭한 신분이기도 했고, 도망친 아이리스의 행동거지를 감시하는 데도 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개입할 생각은 없었는데.’


누아르는 얇게 뜬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아이리스, 아니, 광란의 마왕의 토벌. 그따위 다크엘프가 마왕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아르는 이 전쟁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 그녀의 본신은 이 바다가 아닌 헬무드의 제벨라 파크에 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휘하 몽마를 촉매 삼아 의식만을 강림시킨 것이다.


새로이 태어난 광란의 마왕. 흥미는 있지만, 누아르가 직접 개입할 만한 상황도 아니거니와 힘도 부족하다. 만약 이 전쟁에서 광란의 마왕이 승리한다면…… 언젠가 부딪치게 되겠지만, 누아르가 판단하기에 지금은 부딪칠 때가 아니었다.


그와 별개로, 누아르는 하멜을 믿었다. 나의 하멜이라면 광란의 마왕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누아르에게도, 유폐의 마왕에게도 도전할 수 없으니 말이다.


‘유폐의 마왕……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전투의 흐름은 살폈다.


유폐의 마왕이 간섭하지 않았다면 광란의 마왕은 패배했을 것이다. 광란의 마왕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건가?


‘아니…… 아니야. 유폐의 마왕, 나의 하멜을 구하고 싶었던 거지? 이 전투 자체가 하멜을 위한 시험대인 건가?’


그렇게 생각해 봐도 유폐의 마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그럴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유폐의 마왕이 광란의 마왕과 힘을 합쳐 하멜을 죽이려 했다면…… 이 육체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누아르는 최선을 다해서 하멜을 도주시킬 생각이었다. 바벨에서 기다리겠다고 선언했던 유폐의 마왕이 개입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기껏 강림도 하였으니, 전투가 끝나면 인사라도 하고 돌아갈까?


물론 이 전투의 행방이 어떨지는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광란의 마왕이 이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래, 그 만약을 위해서라도.


‘만약 나의 하멜이 죽는다면, 눈물 정도는 흘려주어야지.’


광란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하멜이 패배해 죽어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약하면 죽는 것이 섭리 아닌가.


하지만, 만약에 이긴다면…… 누아르는 그때를 상상하며 방긋 웃었다. 다가가서 어떤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할까?


“어머.”


누아르의 고민이 끝났다.


마안의 권능이 시엘의 왼쪽 눈을 꿰뚫어 버렸다.


시엘 라이언하트. 설원에서 만났던 라이언하트의 처녀. 하멜에게 있어선 소중한 가족일 텐데? 누아르는 두 눈을 얇게 뜨고서 걷기 시작했다.


‘죽지는 않았군. 마안의 권능이 얕게 들어갔어. 행운이구나, 간섭이 조금만 늦었다면 머리째로 사라져 버렸을 텐데.’


저 앞에서 싸우는 세냐와 아니스가 뒤늦게 간섭한 덕분이다. 아무런 징조 없이 발현시키는 권능. 저 시커먼 공격은 누아르도 몇 번이나 받았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안타까워라, 왼쪽 눈을 잃었구나?’


성수와 엘릭서를 사용한 응급처치. 유진은 성검의 주인이지만 신성마법은 쓸 수 없다.


그러니 당장 할 수 있는 처치는 저것이 전부다. 마왕과 전투 중인 성녀를 후방으로 보낼 수도 없으니, 최대한 빨리 마왕을 쓰러트리고 싶을 것이다.


“이리 오너라.”


누아르는 능숙하게 표정을 바꾸며 디자이라에게 다가갔다.


공주인 스칼리아의 품 안에는 왕가의 비약이 한 병 숨겨져 있다.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시무인을 수호하던 해룡이 남긴 비약으로, 치료약으로서는 엘릭서나 성수보다도 뛰어나다. 성녀의 기적처럼 상실된 신체를 재생시킬 수는 없지만…….


‘내가 이만큼이나 했다는 것을 들려주면, 하멜에게 감사를 들을 수 있을까?’


누아르는 그것을 상상하며 웃음을 삼켰다.


별 효과는 없겠지만 보여주는 식으로는 훌륭하지 않은가. 왕가에도 몇 병 남지 않는 진귀한 비약이라 한들 누아르 본인의 것도 아니니, 사용하는 것이 아깝지도 않았다.


“본 공주에게는 왕가의 비약이 있노라.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본 공주는 라이언하트를 위해 비약을 사용하겠노라.”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디자이라에게서 시엘을 건네받았다.


엑시드의 안쪽에서 꺼낸 비약은 손톱만 한 쌈지에 담긴 가루약이다. 슬쩍 살펴보니 블루드래곤의 뿔에 여러 가지를 섞어 연단한 약이었다.


누아르는 공주다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시엘의 왼쪽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움푹 들어간 눈구멍. 앞으로는 의안이나 안대를 써야만 할 것이다.


‘가엾게도.’


은은한 푸른색의 가루가 아래로 쏟아졌다.


* * *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명을 지르지 못해 맴도는 감정은 모조리 주먹에 실었다.


카르멘은 몇 년 동안 시엘을 가르쳐 왔다. 전투에 관한 것은 모두 다 가르쳤다. 하지만, 한쪽 눈을 잃는다는 절망감에 대해서는 가르친 적이 없었다.


“네가……!”


감정이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분노나 슬픔으로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눈물이 고인 순간 시야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카르멘의 허리가 비틀렸다. 엑시드 가슴 중심의 드래곤하트에서 마나가 뿜어졌다.


“네가!”


허리를 반대로 틀어내며 주먹을 던졌다. 전신을 뒤덮고 있던 불꽃이 주먹으로 옮겨가고, 마왕의 눈앞에서 폭발했다.


콰르르르! 마력과 불꽃이 뒤섞였다. 연속된 폭발에서 마왕은 뒤로 훌쩍 뛰어올랐다.


“오르투스!”


카르메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평소의 카르멘은 오르투스를 부를 때 항상 ‘경’을 붙이며 존중했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오르투스도 저 부름에 불만은 갖지 않았다.


그가 마왕과의 전투에 합류한 것은 고작해야 몇 분 전. 후방에서의 전투가 끝나버렸기에 부랴부랴 합류하기는 했다만…… 솔직히 흐름을 따라가기 버거웠다.


“음……!”


검을 휘두르던 오르투스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다. 마왕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저 뒤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다. 뒤……? 아니, 더 이상 뒤가 아니다.


바로 앞.


ㅡ꽈앙!


그것은 꼬리를 길게 이으며 날아온 혜성과 같았다. 혜성은 모두가 이해하기 전에 전투의 중심에 도달했고, 그곳에 버티고 서있던 마왕의 몸을 날려버렸다.


“개자식.”


새카만 갈기 속에서 사자가 으르렁댔다.


광란의 마왕


7개의 별이 회전한다. 점점 더 격렬해지는 회전 중에 별들이 으스러지고, 별과 별의 구분이 희미해져 간다.


하지만 그 현상은 유진에게 아무런 통증을 주지 않았다. 마나는 유진의 바람대로 흘렀고, 그렇게 만들어진 격류는 유진의 의지에서 조금도 엇나가지 않았다.


이만큼 거센 힘을 담아내지만 육체의 부적응조차도 없었다. 왼손의 약지, 아가로트의 반지가 검붉은 빛을 뿜어댔다. 반지의 권능이 발동된 것이 아니다.


신력(神力). 아가로트의 반지에 잔재한 신력이 유진의 의지에 화답하고 있다.


꽈드득……!


마왕의 몸 깊숙한 곳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육체가 부서지는 것이 아니다. 마왕이란 존재를 구성하던 막대한 마력이 너무 많이 소실됐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처박히는 이 공격이 너무나도 무거웠기 때문이다.


꽈아앙!


커다란 폭음과는 달리 마왕은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고작해야 몇 걸음을 비틀비틀 물러섰을 뿐이고, 입은 상처도 크지 않았다.


성검을 휘두른 궤적.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해 왼쪽 허리에서 끝나는 대각선의 실선. 마왕의 몸에 생긴 상처는 그것이 고작이었다.


“쿨럭.”


하지만 마왕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에서 시커먼 피가 쏟아졌다. 이미 몇 걸음 물러났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마왕은 몸에 새겨진 실선에 손을 얹으며 한 걸음 더 물러섰다. ㅡ푸확! 그 순간 상처에서 피가 뿜어졌다.


무겁다. 이 참격은, 정말로 무겁다. 그리고 깊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참격은 육체를 넘어서 마왕의 존재까지 닿아 기어코 베어버렸다.


이 한 번으로도 충분히 무겁게 닿았는데, 유진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한 번, 앞으로 몇 번, 고작 그것으로 끝날 리가 없잖은가.


이그니션을 썼다. 이그니션을 써버린 이상 지금 무조건 마왕을 죽여야 한다. 코어의 폭주가 끝나 버리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커헉!”


다급히 들었던 팔이 칼날에 잘렸다. 참격에 실린 검은 불꽃이 상처를 휩쓸고 존재를 찢었다. 마왕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다르다.


모두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스는 깨질 것만 같은 두통을 억누르고 사고를 각성시켰다. 크리스티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움직이고 피범벅의 입술을 달싹거리며 기도를 외웠다.


파아앗! 기적과 가호가 유진의 몸에 힘을 실었고, 이미 빛을 발하던 성검에도 성녀의 빛이 더해졌다.


‘이그니션을 쓴 거야.’


세냐도 숨을 헐떡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세냐 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쪽 배에 있는 마이스의 목소리였다. 그는 세냐가 경고를 충실히 지키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세냐는 삐걱거리는 이터널 홀을 다시 가동하면서 내뱉었다.


“내놔.”


그 의지는 마이스에게도 전해졌다.


ㅡ쿠르르르! 마이스와 다른 마법사들의 마나가 세냐에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지팡이에 마나가 번개처럼 파직거리고, 새하얀 서리가 일점에 모여들었다.


‘이그니션을 써버린 이상 뒤는 없어.’


빠지지직! 수십 개의 빛이 유진의 움직임을 따랐다. 월광검 때와는 다르게, 지금 유진이 휘감은 빛은 세냐의 마법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등 뒤의 프로미넌스는 마법이 따라붙은 순간 더욱 맹렬히 타올랐다.


세냐는 유진의 움직임에 마법을 감췄다. 마법은 암기가 되어 유진의 공격과 함께 마력을 파괴하고 마왕을 꿰뚫고 부쉈다.


오르투스 하이만.


그는 자기 자신이 특별히 정의롭거나 도덕적이고,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만큼 청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신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무(武)에 관한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르투스 하이만이라는 인간의 천성을 말하는 것이다.


남들이 이득을 본다면 함께 이득을 보고 싶다. 특혜를 누리고 싶다. 그것이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 꼼수에 의한 것일지라도, 너무 심하지만 않다면 얼마든지 이용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한 일에 자신이 첫 번째가 되고 싶지는 않다. 적당히 눈치껏, 첫 번째가 아닌 세 번째나 네 번째 정도. 왜냐면 나중에 비난을 받을 때 책임을 지고 싶지 않으니까.


오르투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욕을 먹는 자리에서 꿋꿋하게 있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쩍 뒤로 물러서고 싶다. 비열하게 혼자 도망치는 것은 싫다. 그냥,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적당히 묻어가는 것이 오르투스가 나이를 먹어가며 얻은 인생의 지혜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르투스의 삶은 저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오르투스는 누구보다 주목을 받는 입장이었다. 그렇다 보니 가진 천성이나 분수 이상의 일에 휘말리기 일쑤였고, 이 토벌도 마찬가지였다.


오르투스는 자신이 영웅이라 생각하지도, 영웅이 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해적여제 토벌에서 마왕 토벌로 목적이 바뀌었을 때. 오르투스가 고민 끝에 전진을 택한 것은, 오르투스에게 무조건적인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후환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용사와 성녀, 대마법사가 있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들의 대의와 신념에 조용히 묻어간 뒤에, 모든 것이 잘 끝난 뒤에 거들먹거리고 싶어서.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군.’


굳이 앞으로 나갈 이유는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처음부터 전투의 주역이었다. 그가 전장을 이탈한 동안에는 오르투스가 죽음을 불사하고 마왕의 앞에 서야 했지만, 유진이 돌아온 이상 오르투스가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오르투스의 몸은 앞으로 움직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검을 휘두르며 마왕의 옆을 가로막았다.


반드시 이기기 위해서? 그래, 그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존재를 침범당했으나 마왕의 마력은 아직 살벌했다. 그녀의 마력은 성검에 가로막히고 마법은 육체를 파괴했으나, 마왕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살의가 번들거렸다.


‘이런 나도 할 수 있군.’


긴 세월 단련한 감각이 검을 뻗게 만들었다.


쩌엉! 묵직한 무게에 몸이 뒤로 쏠렸지만, 오르투스의 입술은 씰룩거리며 미소를 그렸다. 아무 징조 없이 나타난 마안의 권능이 노린 것은 성녀를 보조하는 성직자들이었다. 하지만 마왕의 마안은 바란 것처럼 성직자들을 죽이지 못했다.


분노한 마왕은 다시 한번 권능을 터트렸다. 뒤로 쏠린 몸을 아직 바로 세우지 못했던 오르투스에게 암흑물질이 퍼부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왕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유진의 검이 암흑물질을 갈라 버렸고, 그와 엇비슷하게 도달한 화살이 오르투스의 몸에 닿았다.


‘아이빅?’


몸에 닿은 화살에 날카로움은 없었다. 닿아서 밀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화살과 함께 몇 걸음 밀려난 오르투스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저 남자에게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오르투스가 저렇게 열심히 싸울 줄은 몰랐는데.’


설마 내가 오르투스를 구하게 될 줄이야. 아이빅도 그런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이빅은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걸고 마왕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허어…….”


시위를 놓아야 하는데, 놓을 수가 없었다. 아이빅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거리…… 저곳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리인데,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장면은 시야에 통째로 들어오지만, 그 안에서의 움직임을 쫒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 정도라고?”


아까도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하고 빨랐는데. 지금의 움직임은 아까와도 비교가 안 된다.


아이빅은 허무함과 우스움을 느꼈다. 줄 세우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대륙 제일의 기사를 말할 때 여러 사람을 거론하곤 하는데, 그것들은 모두가 허망한 이야기다.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의 이름은 필요가 없다. 유진 라이언하트. 오늘이 지나면 대륙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살아남는다면, 아이빅부터가 술집에서 사람들에게 떠들 것이다.


카르멘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생각뿐만 아니라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다. 카르멘이 전력을 다해도 무조건 유진보다 느리고 약했다. 백염식의 성취는 똑같은 7성. 그런데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아니, 애당초 저 불꽃이 백염식이 맞기는 한가?


‘이질적인…… 검은 불꽃.’


화악! 마왕의 마력이 머리카락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카르멘은 공중에서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다리를 휘둘렀다. 뻐억! 발차기는 결계에 가로막혔지만 마왕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컥!”


그 틈에 꽂아 넣은 성검이 마왕의 목을 꿰뚫었다. 관통한 순간 터져 나온 불꽃이 마왕의 몸을 뒤덮었다.


철컥! 카르멘의 헤븐 제노사이드가 활짝 펴졌다. 새하얀 불꽃이 손바닥 중앙에 모였다.


데스티니 브레이커. 카르멘의 기술 중 가장 강력한 오의가 마왕에게 처박혔다.


콰르르르르! 불꽃은 마왕을 집어삼키고서 격렬한 회오리가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카르멘의 새하얀 불꽃과 유진의 검은 불꽃이 서로 얽혔다.


프로미넌스가 위로 치솟았다. 흩날리던 깃털들이 서로 달라붙더니 흑점을 만들었다.


ㅡ콰지지직! 공중에서 떨어진 이클립스가 회오리치던 불꽃과 마왕을 함께 아래로 처박았다.


‘이건…….’


더 이상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내리꽂는 힘에 만족스러운 저항도 힘들었다. 마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어마어마한 힘에 몇 번이나 죽고 재생을 반복하면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진짜…… 진짜로…… 죽을…….’


푸확! 마왕의 몸이 바다에 처박혔다. 마왕은 바닷속에 들어오고서야 이클립스의 힘에서 벗어났다.


죽을지도 모른다.


인지하고 싶지 않던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죽음’이란 단어가 갖는 무게가 마왕을 더욱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죽는다고? 내가? 마왕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도망치면…….’


-운명은 반복되곤 하지.


유폐의 마왕이 남겼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두려워하지 마, 아이리스.


마왕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내뱉었다.


‘저건 이그니션이야.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어.’


냉정히 생각해 봤다.


발동된 이그니션의 지속은 길어야 10분.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내 마력은, 목숨은, 불사력은 얼마나 남았지? 이그니션이 끝날 때까지만 죽지 않으면ㅡ


‘내가 이긴다.’


정말로 그럴까.


촤아아악! 바다가 쩍하고 갈라졌다. 마왕이 있던 곳은 더 이상 바다가 아니게 되었다.


마왕은 두 눈을 부릅뜨고 위를 보았다. 시커먼 불꽃이 넘실거리는 성검. 참격이 바다를 갈라 버린 것이다.


‘이그니션이 끝날 때까지…….’


앞으로 몇 분, 버티는 것이 가능할까. 마왕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버티고 나면? 그 뒤에, 정말로 이길 수 있을까?


하멜이 멈춰도 다른 놈들이 있다. 현명한 세냐와 성녀. 아까라면 모를까, 사선에 가까워진 지금의 마왕은 저 둘을 상대로 무조건 이긴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카르멘과 오르투스, 아이빅이 있다. 지금 상태로는 그들조차도 위협적이다.


도망…….


다시 한번 마왕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아냐.’


마왕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부정했다. 생각이 잘못됐다. 도망은 치지 않는다.


승리? 살아남는 것? 그것도 틀렸다. 마왕은 가슴 깊은 곳에 응어리진 감정의 본질을 직시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승리와 군림. 허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복수다.


복수. 누구에게? 저, 하멜에게.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하멜은 죽여야 한다.


설령, 설령 마왕으로 군림하지 못하게 된다 해도. 오늘 이곳에서 죽게 된다고 해도. 세상에 광란을 재림시키지 못한다 해도. 마왕에게, 아이리스에게 있어서는 하멜을 죽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이리스가 바라는 것은 생존도 군림도 승리도 아니다.


이 바다에서 하멜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를 위해서.’


마왕의 감정에서 공포가 사라졌다. 부재를 복수심이 가득 채웠다. 지금 마왕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생존이나 도망이 아닌, 싸워서 하멜을 죽이는 것이었다.


마왕답게 말이다.


검붉은 바다가 역류했다. 위로 튀어 오른 마왕은 다른 것들은 모조리 무시하고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가진 마력에 모조리 살의를 담았다. 방어와 결계보다는 내지르는 손발과 공격에 힘을 실었다.


꽈앙! 부딪친 유진의 몸이 뒤로 끌렸다.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으로 덤벼올 줄이야. 그건 유진이 바라는 바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유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바다와 함대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마왕은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양손을 휘둘렀다. 백염식의 불꽃이 집중됐다. 유진은 양손으로 성검을 쥐었다. 콰가가각! 마력과 불꽃이 부딪치고 부서졌다.


프로미넌스가 빛을 뿜었다. 흩어진 깃털은 멀리 가지 않고 즉시 흑점으로 바뀌었다. 난사되는 흑점이 마안에 가로막혔다. 폭발을 잠재 운 마왕은 다시금 주먹을 뻗었다.


뻐엉! 성검이 뒤흔들렸다. 성검을 쥔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유진은 목구멍에 치솟는 피를 삼키며 다시 성검을 휘둘렀다.


빛은 이 이상 밝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마왕의 마력을 완전히 뒤덮지는 못했다. 광란의 마왕은 제 목숨마저 마력으로 바꿔가며 날뛰었다.


쐐애액! 마법의 창이 하늘을 관통했다. 세냐가 쏘아낸 마법이었다. 마왕은 그 궤적을 벗어났지만, 세냐를 요격하지는 않았다. 무조건 하멜을, 유진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의가 유진의 감정을 긁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300년 전에 너를 죽였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바다에서 지랄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엘이, 나를 구하겠다고 몸을 던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꽈드득! 유진의 양손이 성검을 보다 강하게 쥐었다. 아가로트의 신력이 왼손을 감쌌다.


그 빛이 마왕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마왕은 저 빛이 무엇인지 안다.


“죽어!”


마왕은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쿠웅! 힘과 힘이 부딪칠 때마다 유진의 심장이 격동했다. 이그니션으로 폭주하는 별들. 지금까지 이어진 폭주는 일곱 개의 별을 완전히 으스러트렸다.


그럼에도 별의 공명과 회전은 멈추지 않는다. 백염식의 별은 마나를 다루는 코어다. 별이 박살 났다는 것은 코어가 박살 났다는 것이다.


코어가 부서지면 보통은 죽는다. 운이 좋아도 평생 병신으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유진은 죽기는커녕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이그니션. 점화된 불꽃은 별을 부수고 새로이 만들었다. 수십 수백 개로 박살 난 별들은 이미 유진의 안에서 하나의 은하가 되었다.


백염식의 7성.


아니다. 유진의 백염식은 7성이란 경계마저 허물어트렸다. 내가 알던 베르무트보다 강해야 한다. 이 전투에서 베르무트를 넘어서야 한다.


그 갈망은 지금에 이르기 전부터 백염식을 바꾸었다. 갈망에 의해 극한을 넘어섰고, 기어코 유진의 안에는 완전한 기적이 발현되었다.


‘부족해.’


의식이 아득해진다. 유진은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그는 하멜 다이너스였고, 유진 라이언하트다. 유진은 성검을 쥔 손을 힐긋 보았다.


왼손. 아가로트의 반지는 당장에라도 산산조각 날 것처럼 금이 가 있었다.


갈망과 기적. 이 기적은 유진 본인의 의지이자, 아가로트의 의지이기도 했다. 빛의 신이 신자의 기도를 들어주어 기적을 일으키듯, 아가로트가 유진의 갈망에 기적을 주었다.


주었다고?


꽈앙! 성검이 뒤로 밀려났다. 유진이 자신을 불태우듯이 마왕도 마찬가지였다. 존재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덤비는 마왕의 어둠은 기어코 성검의 빛을 침범했다.


하지만 꺼지지 않는다. 일렁거리는 이 빛은 성검의 힘이며 성녀와 성직자들의 믿음이 실려 있다. 그들이 믿는 한, 성검의 빛은 꺼지지 않는다.


‘월광검.’


멸망의 검.


‘백염식.’


베르무트가 남긴 것.


‘성검.’


빛의 신이 세상에 남긴 것.


우습다. 지금 이곳에 있는 유진 라이언하트의 몸뚱이마저도 베르무트의 안배에 의한 것이다. 유진이 사용하는 무기도, 이 몸에 깃든 힘도, 모두가 베르무트나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다.


-너여야만 한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일까.


베르무트, 놈이 남긴 것을 가장 잘 사용할 것은 하멜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하멜에게는, 하멜 본인도 알지 못하는 특별함이 있나?


‘그렇군.’


이건,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멜은 이것을 가지고 있었다. 300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머나먼 옛날에도.


시체의 산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누구인지를 안다. 시체가 가득한 전장에서 절망해 걷던 남자를 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파도와 안개에서 오열하던 남자를 안다.


그는.


유진은, 심득(心得) 속에서 성검을 놓았다. 텅 빈 왼손이 움직였다. 계약, 결합, 약속을 의미하는 손가락에 끼우고 있던 반지가 산산조각 났다. 도달한 운명은 지금에야 유진이란 존재와 진정으로 계약하고 결합하며 약속을 이루었다.


아리아르텔과의 만남도, 아가로트의 반지를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반지는 어떤 식으로든 유진에게 도달했을 것이다.


사고를 밝히는 깨달음에 유진은 확신했고 움직였다. 유진의 왼손이 가슴으로 향했다.


‘뭐지?’


행동의 이유를 모르겠다. 왜 성검을 놓은 거지? 싸움을 포기했나? 마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되었다. 이그니션의 불꽃이 잦아들었다. 지금의 유진에게는 방금 전과 같은 격렬한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ㅡ


남은 것은…… 이질적인, 무언가.


‘내가 이겼어.’


광란의 마왕은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의, 모두의, 나의 복수를 이루기까지 한 발자국. 이곳에서 하멜을 죽이면, 그것으로 되었다.


복수를 이루면ㅡ 기쁜 마음으로 만족하며 물러설 수도 있겠지. 이 순간 마왕은 승리를 확신했고,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안도했다.


아주 잠깐.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어둠이 마왕의 앞을 가로막았고, 마왕의 몸이 잠시 굳었다.


‘마법?’


아니, 마법이 아니다. 이 어둠과 주박은ㅡ 마왕은 순간 당황하여 마안의 권능을 일으켰다. 앞을 가로막았던 어둠이 마왕이 일으킨 권능과 부딪쳐서 소멸했다.


늦고 빠르고의 차이였다.


마왕이 저 알 수 없는 어둠에 당황하지 않았어도. 알 수 없는 힘에 붙잡히지 않았어도ㅡ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런 방해 없이 한 발자국 나아갔을지라도, 마왕은 복수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가슴에 얹었던 왼손을 움켜쥐었다.


거머쥔 것은 유진에게, 하멜에게 심어져 있던 것. 다른 누구의 것도, 받은 것도 아닌 유진이란 존재 자신의 것.


신검(神劍).


심장부에서 시작된 발검, 유진이 가슴에 품은 우주가 열렸다. 아가로트의 신력이 붉은빛을 뿜었다. 무형(無形)의 신력은 유진이 바라는 대로 검이 되어 참격을 이었다.


“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빛이 마왕의 시야를 뒤덮었다.


세상이 갈라졌다.


광란의 마왕


범위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저항은 했다. 남은 모든 마력에 마안의 권능을 퍼부었다. 결국 양손을 직접 뻗어 가로막으려고 했다.


불가능했다. 저 피처럼 붉은 참격에 닿는 순간에 마왕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 ‘검’은 아득한 옛날에 그러했듯이 마왕에게 패배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줄 것이다.


아버지, 전대 광란의 마왕은 패배해 도망쳤지만ㅡ 당대 광란의 마왕, 아이리스는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하…….”


붉은빛이 흩어진다.


마왕은 천천히 물러서며 헛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돌리기 싫다. 지금 이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직감은 마왕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미 패배했고, 곧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이.


“하하, 하하하…… 하…….”


마왕은 허탈함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발악? 그런 것조차도 할 수 없다. 파고드는 참격을 향해 손을 뻗었던 것. 그것이 마왕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너도.”


마왕은 우두커니 서서 입을 열었다.


“봐버린 거냐? 아니면, 떠올린 거냐.”


대답할 필요가 있는 질문인가. 유진은 칙칙한 눈으로 마왕을 응시했다.


그녀의 몸에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검은 마왕을 베었다. 지금의 마왕은 그 상처에서 절대로 부활할 수가 없다.


즉, 지금 마왕이 내뱉는 말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인 것이다.


“꺼져.”


유언이라고 해서 무조건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유진에게 있어서 마왕은 결코 존중할 수도 존중해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아니, 그녀가 마왕이라는 것을 떠나, 아이리스라는 존재 자체를 존중할 수가 없었다.


유진의 관점에서 아이리스는 씨X년이었다.


최초의 다크엘프. 자신을 따르던 엘프 레인저들을 여럿 타락시키고, 저항하는 레인저들은 무참히 살해한 장본인. 그 후에도 광란의 군세를 지휘하며, 엘프를 상대로 엘프가 해서는 절대로 안 될 짓들을 하며 과거의 동족을 학살하고 유린했다. 그 후로도 광란의 척후로 맹활약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죽였다.


전쟁이 끝난 후, 에 아이리스가 뭘 하고 지냈는지. 헬무드에서 어떤 개짓거리를 했는지. 그건 솔직히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바다에서 한 일은 알고 있다. 이 바다에서 한 일에 대해서는 무언가를 느껴야만 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전쟁, 유진이 진군시킨 전쟁이다. 하지만 유진은 이보다 더한 전쟁도 겪어보았다.


전장에서의 죽음에 하나하나 책임감을 느끼고 죄스러운 감정을 느껴버리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다. 진군하지 않았다면 오늘 죽은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죄책감 같은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것은 괜찮다. 상대를 증오하는 것은 괜찮다. 유진은 그런 사람이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행동했다.


유진은 마왕의 유언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마왕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처음에는, 이번 사태에 대해 전반적으로 의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의문들에 대해 마왕에게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마왕이 물었듯이, 유진은 무언가를 보았다. 무언가를 떠올렸다. 애당초 그것들은 처음부터 유진의 안에 있었다.


그리고 마왕에게도 대화를 나눌 만큼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두커니 선 유진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흐르고 토해낸 피로 붉은 입술을 씹어대며 마왕을 노려보았다. 허탈하고 허망한 얼굴로 서 있던 마왕의 눈이 세냐를 보았다.


“하!”


마왕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마왕 역시ㅡ 지금에 대한 유언을 질척하고 구질구질하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마왕의, 아이리스의 관점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옳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아쉬움. 두려움. 그런 것을 저 증오스러운 원수들 앞에서 도저히 토로하고 싶지 않았다.


“너희는 실패할 거다.”


그래서 아이리스는 저주를 외었다. 남은 미련, 분노, 증오, 살의, 광기, 지금, 죽어가는 자신에게 맴도는 모든 감정을 저주로 내뱉었다.


“너희는, 인간은, 반드시 실패할 거다. 너희는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할 거다.”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아이리스의 몸이 흩어졌다. 그녀는 시뻘건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절대로, 절대로. 유폐의 마왕이란 괴물을 이해하지 못할 거다. 모든 것을 희생할지라도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을 거다.”


원독이 언령처럼 다가왔다. 아이리스가 내뱉는 저주는 공간을 떨게 하면서 유진의 심상을 들쑤셨다. 유진은 피 냄새와, 비명과, 웃음 소리와, 쇠사슬 소리를 들었다.


“너희의 미래에는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절망이 펼쳐져 있을 거다. 운명…… 하…… 하하하! 그래, 운명이 반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300년 전의 베르무트가 광란을 넘어서 유폐의 앞에 무릎 꿇은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을 거다. 언제나…… 언제나 그랬으니까.”


아이리스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저주를 쏟아낼수록 존재의 소멸도 가속되었다. 아이리스는 흩어져가는 손가락을 들어 유진과 세냐를 가리켰다.


“너희는…… 무조건…… 죽을 거다. 절대, 절대로 살아남을 수가 없…….”


“미친년.”


잠자코 듣던 세냐가 내뱉었다. 그녀는 싸늘히 가라앉은 눈동자를 얇게 뜨더니, 하늘을 날아서 아이리스에게 다가갔다.


“실패니 뭐니 모르겠고, 일단 내가 너보다는 늦게 죽잖아?”


짜악! 후려친 손바닥이 아이리스의 따귀를 갈겼다.


“네 저주는 결국 패배자의 지랄일 뿐이야, 아이리스. 결국 네게 무엇이 남았지? 너는 싸고돌던 다크엘프들을 죽게 만들었어. 그렇게까지 하고서도 너는 아무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거야.”


짜악! 세냐의 손이 다시 한번 아이리스의 따귀를 갈겼다.


“마왕이 돼서, 네가 대체 뭘 했지? 아이리스, 너는 마왕이 되었음에도 이 바다를 나가지 못했어. 세상에 네 이름도, 광란의 마왕의 이름도 알리지 못했다고. 아, 그건 아니로군. 내일이면 세상이 광란의 마왕을 알게 될 거야. 300년 전에도 죽고 이번 시대에서도 죽은 병신 머저리로 말이지.”


세냐는 더 이상 아이리스의 따귀를 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목을 툭툭 털며 아이리스를 비웃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어? 아이리스. 너는 네 가족을 버리고도 실패했어. 그리고 네가 그토록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부르짖던 ‘광란의 마왕’이란 이름까지 시궁창에 처박았다고. 모든 것을 실패한 네가, 네가…… 우리에게 실패를 말할 자격이 있는 것 같아?”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그녀는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세냐의 손이 아이리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네 삶과 네 존재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어. 하지만 우리는…… 나는, 아니야. 나는 네 죽음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거든.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서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


불타 죽은 엘프들의 시체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세냐는 아이리스의 눈동자를 노려보다가, 잡은 목을 놓았다.


“300년 전에 광란의 마왕이 뒈졌을 때. 그때는 광란의 죽음을 애도해 줄 놈들이 남아 있었지. 너와 오보론의 부하들.”


유진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너는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해. 오히려 조롱을 당하고 있지.”


아이리스의 몸은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머리도 코와 입가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릅뜬 눈동자가 덜덜 떨리는 것으로 아이리스의 감정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지금 뒈지는 네가, 우리가 실패할지 아닐지를 어떻게 알아?”


ㅡ아이리스는 더 이상 저주를 쏟아내지 못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마지막 남을 감정마저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절망을 저주했으나, 지금 아이리스가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절망이었다.


아아, 아아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으나, 아이리스는 오열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눈가가 일그러졌다.


이윽고 아이리스는, 광란의 마왕은 소멸했다. 검은 재는 잠시 떠돌다가 사라졌다. 어두웠던 하늘도 눈을 깜박거린 것처럼 순식간에 밝아졌으며, 그와 동시에 검붉던 바다도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유진은 왼손에 쥔 신검을 쳐다보았다.


반지는 부서졌다. 신검도, 점점 흩어져서 사라지고 있다. 유진은 씁쓸하고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신검을 응시했다.


“넌 왜 우냐?”


옆에서 세냐가 소리 없이 눈물만 또르르 흘리는 것이 보였다. 세냐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내면서 내뱉었다.


“좋아서.”


아이리스에 대한 연민은 하나도 없다. 지금 세냐가 흘리는 눈물은, 300년 동안 증오하던 원수의 죽음을 본 것에 대한 만족의 눈물이었다.


허탈함? 그런 것이 있을 리가. 복수는 해낸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검은 대체 뭐야?”


세냐는 조금 흐른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왼손의 검…… 실체는 없다. 마나로 이뤄진 것도 아니다. 당연히 마법도 아니다.


붉은빛…… 으로 이뤄진 검. 지금은 희미하고 꺼져가지만, ‘처음’ 유진이 검을 가슴에서 뽑아냈을 때는, 마경의 어둠이나 성검의 빛마저 퇴색시킬 만큼 강렬한 붉은빛을 발했었다.


“비밀이야.”


돌아온 대답에 세냐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녀는 유진 쪽으로 홱 몸을 기울이며 쏘아붙였다.


“비밀? 너랑 나 사이에 이제 와서 무슨 비밀?”


“조금 뒤에 말해줄게.”


신검이 사라졌다. 세냐는 바로 옆까지 바짝 붙었지만, 유진은 세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세냐는 그것을 두고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유진이 어디를 보는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 * *


바다가 갈라졌다.


스칼리아ㅡ 누아르 제벨라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바다를 가르는 것?


그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뿌리까지 갈라진 바다가 서로 달라붙지도 흘러내리지도 않는 기현상. 인간들의 눈에는 경이적으로 보이겠지만, 누아르에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굳이 하지는 않겠지만, 누아르도 바다는 수십 번 쪼개고 가를 수 있다.


마왕을 죽인 것?


그것 또한 누아르에게는 엄청나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하멜이라면 마왕을 죽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광란의 마왕을 죽이지 않고서는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잖은가.


바다를 가른 것보다, 마왕을 죽인 것보다, 하멜이 꺼낸 검과 힘이 놀랍다.


그리고 방금 시엘이 해낸 것이 놀랍다.


‘말도 안 돼.’


평소 누아르는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환상의 마안을 가진 그녀에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아르가 진심으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누아르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일은 직접 본 적이 없었으며,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번 일에 대해서 누아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젊고 아름다운 처녀의 한쪽 눈이 박살 나버린 것에 대해 연민을 품은 것. 그리고 하멜에게 마지못한 감사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시엘의 상처에 응급처치를 더해준 것뿐이다.


그 응급처치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 것도 아니다. 스칼리아가 가지고 있던 시무인 왕가의 비약을 시엘의 왼쪽 눈에 털어 넣었을 뿐.


‘블루 드래곤의 뿔 따위를 사용해서 만든 약에 이런 효능이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누아르는 그것의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정말로 만약에, 왕가의 비약이 박살 난 눈동자를 재생시킬 수 있다고 치자. 그렇게 재생된 눈동자에 무언가 특별함이 깃들 수 있다고도 치자.


하지만 마안은 깃들 수 없다. 누아르는 방금 전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비약을 떨어트린 순간. 아니, 비약이 닿기도 전에, 시엘의 눈동자가 재생되었다.


그것을…… 재생이라고 해야 할까. 탄생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누아르가 생각하기에, 저 ‘마안’은 방금 새로 탄생한 것이다. 애당초 마안은 마족이 타고나거나 받는 것이지, 인간은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다.


엘릭서와 성수로 치료되었던 눈구멍에서 피처럼 붉은 기류가 회오리치더니, 시무인의 비약을 알갱이 하나 흘리지 않고 모조리 삼켰다. 그 뒤에, 마치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처럼 눈동자가 뜨였다.


라이언하트의 금색 눈. 하지만 새로이 탄생한 눈동자는 본래 있던 오른쪽 눈과는 색이 조금 달랐다…….


“…….”


놀람을 가다듬지 못한 것은 시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왼쪽 눈. 퍽, 하고 터지는 소리. 붉었다가 검어지는 시야. 그 후로 끊어졌던 기억.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기에는 충분했다. 눈이 박살 난 것이다. 정신을 잃기 전만 해도 그랬다.


‘뭘 한 거지?’


기절했던 의식이 깨어난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동자에 갑자기 빛이 스며들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시엘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잔뜩 당황한 스칼리아의 얼굴이었다.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코앞에 스칼리아가 있기는 했으나, 시엘은 유진의 생각을 했다.


녀석을 밀치고, 대신 몸을 들이밀고…… 그 뒤의 기억은 없다. 나는, 나는 바랐던 대로 유진을 구했을까? 마왕과의 전투는?


스칼리아의 머리 너머.


아직 어두운 하늘에 선 유진이 보였다. 우두커니 선 유진에게 다가가는 마왕이 보였다. 다가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순간, 왼쪽 눈동자가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뜨겁고 욱신거렸다.


“마안.”


누아르는 시엘의 왼쪽 눈을 빤히 보면서 속삭였다.


찬란한 빛은 없다. 오히려 탁하다. 새카만 동공 주변의 홍채는 금색보다는 어둡고 탁한 황색으로 보인다. 누아르는 저 색채의 일렁거림을 보았다.


“방금 네가 쓴 것은 마안이야. 자각 없이 쓴 모양이지?”


“마…… 마안……?”


“이건…… 이건 정말 재미있네. 아이리스의 앞을 가로막았던 어둠. 그건 암전의 마안이야.”


누아르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는 양손으로 시엘의 뺨을 붙잡고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왜 네게, 베르무트의 후예인 네게, 라이언하트의 피가 흐르는 네게 마안이 깃든 거지? 그것도 아이리스의 암전의 마안이 말이야.”


아이리스가 마안을 주었나?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이리스가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면…… 암전의 마안. 그 권능에 눈동자를 잃는 순간에 권능이 깃들었나?


‘그것도 말이 안 되지. 고작 그딴 계기로 마안이 깃들 리가 없잖아.’


눈동자를 터트리는 것이 계기가 되어 마안이 깃든다면, 300년 전에 누아르는 수많은 인간과 마족에게 마안을 심었을 것이다.


“잠깐…… 아이리스를 붙잡았던 건 뭐지? 암전의 마안에 그런 권능은 없는데?”


누아르의 얼굴이 시엘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리스의 행동이 정지했던 것. 그것은 암전의 마안이 가진 권능이 아니다. 세냐의 마법이나 성녀의 기적도 아니었다. 이치에 어긋난 힘. 마안의 권능.


“설마…… 네 눈에 두 가지의 권능이 깃든 걸까?”


궁금해.


정말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엘의 눈동자를 뽑아서 살펴보고 싶다. 그것이 너무하다 싶다면 통째로 데려가고 싶다.


마음처럼 할 수가 없었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살의가 누아르로 하여금 몸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훌륭하도다!”


누아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쪽으로 내려오는 유진과 세냐가 보였다. 함대의 앞쪽에서도 성녀와 카르멘 등이 날아오고 있었다.


“용사여, 경애로운 유진 라이언하트여! 그대는 정말로 광란의 마왕을 토벌하였구나! 본 공주, 스칼리아 아니머스는 시무인 왕가를 대표하여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노라!”


여흥. 누아르에게 있어서 지금의 행동은 가벼운 농담이었다.


유진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는 스칼리아에게 깃든 존재가 누구인지 알았고, 그 존재의 바로 아래에서 시엘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시엘의 왼쪽 눈이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아차.’


이건 오해를 살 수도 있겠어. 누아르는 급히 상황을 깨치고서 뒤로 물러섰다.


“나의 유진.”


더 이상 스칼리아 공주를 연기하지도 않았다. 본심은 ‘나의 하멜’이라 부르고 싶었으나, 누아르는 둘만의 달콤한 비밀을 이곳의 떨거지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


유진은 저 말을 되묻지 않았다. 이그니션을 끝낸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유진은 그를 무시하고서 억지로 몸을 가속시켰다.


푸욱!


망토 사이에서 꺼낸 단검이 스칼리아의 가슴을 꿰뚫었다.


심연


주변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재림한 광란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내려온 용사. 앞으로의 역사에 이름을 새길 대영웅이, 찬사를 보내준 공주의 가슴에 대뜸 단검을 처박아 버린 것이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누아르 본인도 경악해버렸다.


설마, 설마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공격해 올 줄이야. 게다가 이 단검. 금속으로 제련한 것이 아닌, 신성력으로 제련해 낸 단검이다. 정확하게 심장을 꿰뚫기는 했으나 이 육체의 주인인 스칼리아 본인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고통도 없다.


누아르에게는 다르다. 그녀는 실제로 가슴이 꿰뚫린 것만 같은ㅡ 아니, 그 이상의 고통을 느꼈다.


스칼리아에게 빙의시킨 것은 누아르의 본신이 아닌 하위 몽마. 그 몽마의 격으로는 이 단검에 버티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로 인한 고통은 교감 중인 누아르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왔다.


‘멋져.’


감응되어 오는 죽음. 그것은 누아르에게 있어서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육체의 죽음은 겪어 보았다. 이러한 형태의 죽음은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ㅡ 상대가 하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평범하고 익숙하며 지루하기조차 한 ‘죽음’이, 상대가 하멜이라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즐거우며 달콤하게 느껴졌다.


일방적인 살의. 대화도 사연도 듣지 않는 결단. 지금 이 순간에도 하멜의 눈동자는 증오와 살의로 번뜩이고 있다. 그는 이렇게 행동하는 것에 일말의 주저도 고민도 하지 않았다.


특히나 누아르를 황홀하게 만든 것은ㅡ 지금 가슴에 꽂힌 단검이었다.


신성력으로 제련한 단검. 마왕을 위해 준비한 암기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진즉에 썼을 것이다. 하멜은, 마왕과의 전투 내내 이 암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를 위한 거야.’


당장 준비한 것이 아니다. 미리 준비하고 품 안에 숨기고 있던 것이다.


‘내가 올 줄 알았던 거야.’


궁합이 너무 잘 맞는 것 아냐?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유진은 누아르가 쓰러지지 않도록 허리를 받쳐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연인 간의 포옹처럼 보였다.


“우리, 서로를 너무 잘 아는 것 아니에요?”


누아르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단검을 비틀었다.


스칼리아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아 허리를 받치긴 했는데…… 누아르가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님!”


“유, 유진 공!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아이빅과 오르투스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왔다. 차마 다가오지 못하던 시무인의 병사들도 슬금슬금 유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세냐가 도착했다.


“기다리세요.”


세냐는 두 눈을 사납게 뜨고서 프로스트를 들었다. ㅡ쿠웅! 마법의 결계가 주변을 휘감아,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앞을 막아섰다.


“스칼리아 공주님의 몸 안에 마왕의 악의가 일부 남았습니다.”


“세냐 님, 대체 무슨 말을…….”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것 같습니까? 정화는 금방 끝날 테니, 다가오지 마십시오.”


세냐는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 세냐의 곁에, 똑같이 입가에 핏자국이 번진 크리스티나가 다가왔다. 세냐는 크리스티나와 눈을 한 번 마주친 뒤, 그녀와 함께 결계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하하…….”


누아르는 세냐를 바라보며 웃음소리를 냈다.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300년 만에 만났다면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꺼져, 갈보.”


세냐는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심한 모욕이었지만 누아르는 한 점의 불쾌감도 느끼지 않고서 키득키득 웃었다.


“이만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죠, 세냐 메르데인. 그리고 그쪽은…… 후후, 누구일까?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아니면 사실, 당신도 아니스 슬리우드의 환생이라거나?”


크리스티나는 대답 대신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괜한 정보를 주고 싶지 않다. 빙의에 대해서는 숨기는 편이 유리하다. 아니스도 그렇게 판단했다. 누아르는 어깨를 으쓱거리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기뻐요, 나의 하멜.”


빙의 한 몽마가 정화되어 소멸하고 있다. 그건 누아르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은 내가 올 것을 알고 선물을 준비했군요. 나는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이번에는 제 준비와 배려심이 부족했어요.”


“무슨 짓을 한 거냐.”


유진은 누아르를 노려보면서 으르렁댔다.


그의 뒤쪽에는 시엘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왼쪽 눈동자의 위화감에 어깨를 떨었다. 크리스티나와 세냐는 그런 시엘의 곁에 다가갔다.


“오해할 만한 상황이란 것은 알아요. 하지만 하멜,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 앗, 미안해요 하멜. 나도 모르게 그만.”


누아르는 말하던 입술을 찡그리며 시엘을 흘겨보았다.


“흠…… 아니, 괜찮은 모양이군요. 언제부터 당신의 정체를 알았던 거예요? 나보다 먼저는 아닐 것 같은데.”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물었어.”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마안에 관해서 누아르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요, 하멜. 제가 굉장히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마안을 심는 재주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인간은 마안을 가질 수 없어요.”


“…….”


“흑마법사도 마찬가지죠. 고위마족, 심지어 마왕과 직접 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인간이란 본질은 바뀌지 않아요. 그래서 에드몬드는 종(種)을 바꾸어 마왕으로 거듭나는 것에 집착했죠. 제아무리 흑마법사로 높은 경지에 이르러도, 본질이 인간인 이상 마(魔)의 권능을 누릴 수 없으니까.”


누아르가 하는 말은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마안은 절대로 인간에게 깃들지 않는다.


“물론, 유폐의 마왕이라면 인간에게도 마안을 심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게는 불가능해요. 저는 마왕이 아니니까.”


마안……? 시엘은 왼쪽 눈가를 더듬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박살 났던 왼쪽 눈은 오른쪽과 큰 차이가 없을 만큼 시야가 또렷했다.


하지만, 어느새 심어진 본능 같은 것이 시엘을 이해시켰다. 자신의 왼쪽 눈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으며, 꺼림칙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저는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그냥, 하멜, 당신을 위해서 저 아이의 상처를 봐주려 했을 뿐이라구요.”


시엘이 마안을 각성해 버린 탓에 감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누아르는 그것에 관해서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하멜에게 생각되고,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더욱 기쁘고 즐거웠다.


“하지만 이건 알아요, 하멜. 저 아이의 마안은…… 특별해요. 전혀 다른 능력이 두 개나 깃들어 있다구요. 하나는 아이리스의 암전의 마안. 다른 하나는…… 흠, 부동(不動)의 마안이라고 할까? 어때요?”


“꺼져.”


“정말, 조금은 상냥하게 말해주어도 좋을 텐데. 하멜, 당신이 재촉하지 않아도 저는 곧 떠날 거예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알려주면 안 될까요?”


누아르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그녀는 멀어지는 의식을 붙들고서 속삭였다.


“마왕을 죽인 그 검.”


“…….”


“대체 뭐죠? 저는 오랜 삶을 살았지만, 그런 검은 본 적이 없어요. 그 붉은빛…… 인간의 믿음에 화답해 내려주는 신성력과는 달라요.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몰라.”


유진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단검을 뽑았다.


“거짓말.”


누아르는 꺼져가는 시야 속에서 유진을 똑바로 보았다. 그것이 누아르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쉬이익…… 스칼리아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유진은 흩어지는 안개를 무시하며 스칼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정신을 침식한 몽마는 정화되었지만, 스칼리아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박복한 공주님이로군.’


2번이나 몽마에게, 그것도 누아르 제벨라에게 빙의 당하다니. 유진은 스칼리아를 조심스레 눕힌 뒤에 시엘을 돌아보았다.


“기분이…… 이상하거나, 그렇지는 않아?”


유진은 시엘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시엘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양손을 나눠 잡고 있는 크리스티나와 세냐를 번갈아 보았다.


“음…… 아무렇지도 않은데……?”


시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가 살펴보기에도 그랬다. 시엘의 몸에는 한 줌의 마력도 존재하지 않았고, 흑마법의 흔적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당초 마안은 마법도 흑마법도 아니다. 마력을 사용하는 기관(器官)일 뿐이다.


마안이 펼치는 권능은 마법보다는 신성마법의 기적과 닮아 있다. 술식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마안의 소유자는 의지와 마력으로 권능을 일으킨다.


그래서 더 이상한 것이다. 시엘의 몸에는 한 줌의 마력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마안이 유지되고 있는 것인가?


“써볼까?”


시엘은 조심스레 물었다.


“안 돼.”


유진은 즉시 대답했다. 마안의 권능을 펼친다면 다른 여러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확인해 보기에는 모두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시엘. 당신도 너무 지쳐 있습니다.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모두가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에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티나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살펴본바, 시엘의 마안은 마력을 동력으로 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심스레 신성력을 흘려보내 보았지만 아무런 거부반응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나를 동력으로 삼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가진 원기?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라면 저 마안은 굉장히 위험하다. 원기란 곧 생명력, 수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시엘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직 진정은 되지 않았다. 시엘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노력했다. 평생 애꾸눈으로 살 뻔했는데, 그런 신세는 면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봤지만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난 괜찮아.”


그래도 시엘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양손을 나눠 잡고서 주물거리는 세냐와 크리스티나를 힐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전부 다 끝난 거야?”


마왕이 소멸하는 것은 보았다. 더 이상 하늘은 어둡지 않았고, 바다도 붉지 않았다. 왱왱거리는 날벌레 소리나 피와 시체 썩은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아직.”


하지만 유진은 그렇게 대답했다.


마왕은 죽었고, 권속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누아르 제벨라도 떠났다. 유폐의 마왕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지라도 전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유진에게는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다녀와.”


말을 꺼낸 것은 세냐였다.


“저 아래에 볼일이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신검에 의해 갈라진 바다. 까마득한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세냐도 직접 보았다. 세냐는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유진에게 묻고 싶었다. 다녀오라는 말 대신에 ‘같이 가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유진이 짓고 있는 표정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볼일이 있기는 한데.”


유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떠도는 생각들을 정리하려 해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나열은커녕 고심할수록 더욱 꼬이는 것 같았다.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자는 새에 꾼 꿈에 대해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다른 생각을 해버리면 꿈에 대해 망각하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의 생각이 소실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의식에 녹아들고 숨어버릴까. 그것은 유진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일단 먼저 다녀올게.”


유진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발을 끌었다.


잘,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시엘에 대한 걱정도 있고,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에 대한 걱정도 있다. 그러면 같이 가면 되는 것 아닐까.


‘안 돼.’


유진은 조용히 흑암의 망토를 들췄다. 생각을 전해 받은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망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둘 역시 유진의 생각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었기에, 표정에는 복잡한 의문이 어려 있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의 생각도, 그리고 저 아래에서 보게 될 것도. 그것을 가장 먼저 보고, 느끼고, 판단해야 할 것은ㅡ


‘나여야만 해.’


유진은 마음을 굳게 먹고서 몸을 돌렸다.


오늘 전투에서는 많은 무리를 했다. 기적과 가호가 없었다면 대체 몇 번을 죽었을까. 이그니션까지 쓴 덕에 몸은 엉망이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몸이 원체 튼튼하기에 망정이지, 전생의 몸이었다면 걷지도 못하고 앓아누웠을 것이다.


몸이 튼튼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유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결계를 빠져나갔다. 많은 것을 묻고, 이야기하고 싶을 텐데. 유진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도움이 필요한가?”


카르멘은 다가오는 대신에 물어보았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엘과 함께 있어 주세요.”


부축받을 생각도 없었다. 유진은 카르멘을 지나치고서 난간을 향해 나아갔다.


바다는 여전히 갈라져 있다. 다른 함선의 사람들이 쩍 벌어진 바다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유진은 휘청휘청 난간 위에 서서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 아래로 내려가지 마십시오.”


대답은 듣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보고 내려가지 말라고 한 주제에, 유진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화아악!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유진의 몸을 받쳐주었다.


템페스트였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망토 안의 위니드를 쥐었다.


“서운하지는 않냐?”


[무엇이 말인가?]


“마왕을 죽이는데 위니드를 휘두르지 않았잖아.”


[하지만 내 도움을 아예 받지 않은 것도 아니지.]


템페스트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함대를 밀던 바람에는 세냐의 마법뿐만 아니라 템페스트의 의지도 실려 있었다. 하늘에서의 전투에서 유진이 휘청거릴 때마다 조용히 균형을 잡아주던 것도 템페스트였다.


[서운함은 없다. 하멜.]


몸을 받치고, 밀어내는 바람과 함께 유진은 바다 위를 날았다.


[내 미련은 광란의 마왕이 아닌 유폐의 마왕에게 있다. 이루지 못한 북벌. 나는 아직도 바벨 최정상의 풍경을 기억한다. 그곳의 바람이 어떠했고, 내가 얼마나 무력하였는지도.]


“…….”


[언젠가 네가 바벨에 올랐을 때. 그때의 네게는 위니드나 나의 도움은 그다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하멜, 네게는 위니드와 비교도 안 될 무구들이 있다. 정령계의 내가 이 세계에서 불러일으킬 수 있는 폭풍도, 너 스스로 일으킬 폭풍보다 거세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뭐, 유폐의 마왕과 싸울 때 위니드를 몇 번 꺼내서 휘두르긴 할 거야.”


[하하하! 그럴 필요는 없다. 언젠가…… 바벨에 오르게 되면, 유폐의 마왕과 싸우게 되면. 이번과 마찬가지로, 내 나름대로 널 도울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유진은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쩍 벌어진 바다. 여전히 물은 쏟아지지 않고 서로 달라붙지도 않고 있다. 유진은 바람과 함께 틈새의 밑바닥, 심해까지 하강했다.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 거지?]


“글쎄.”


[너는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네 심상은 읽히지 않는군.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건가?]


“복잡한 기분이야.”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보여주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솔직히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어째서?]


“두려워서.”


심해의 밑바닥.


유진은 땅에 내려섰다. 바다 밑바닥이니 축축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엇도 부술 수 없을 것처럼 단단했다.


[두렵다고?]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곳에 작용하고 있는 유폐의 권능 때문이리라. 유진은 단단한 바닥을 걸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워.”


유진의 몸이 아래로 푹 꺼졌다.


심연


추락이 시작된 순간부터 템페스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점점 멀어지고 있는 ‘문’이 보였다. 유진이 문을 연 것이 아니다. 제멋대로 열린 문이 유진을 안으로 초대한 것이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내렸다.


끝이 가늠되지 않을 만큼의 깊이. 시선을 집중해 보아도 저 아래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뿐만이 아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보였던 문도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고, 양옆을 둘러보아도 어둠이 그득했다.


그랬던 풍경이 한순간 바뀌었다.


폐허가 보였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서 더 먼 곳을 보았다.


무의미했다. 어디를 보아도 폐허였다.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 뿌옇다. 그렇게 보이기만 할 뿐이다. 지금 유진의 머리 위에 펼쳐진, 이 세상을 ‘덮고’ 있는 것은 하늘처럼 보이지만 하늘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너머에는 태양이나 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진즉부터 그랬을 것이다. 유진은 가슴 밑바닥에서 울렁거림을 느끼며 땅에 내려섰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 왠지 낯이 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유진은 무너진 벽을 툭 밀어보았다.


살짝 손을 댄 것만으로도 벽은 와르르 무너졌다. 이 적막한 세상에서 소리는 아주 커다랗게 울렸다. 유진은 귀를 기울여 반응을 기다려 보았다. 하지만 퍼져가는 소리에 대한 움직임이나 반응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유진은 씁쓸히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대체 뭘 기대한 건지. 이 황량하고 적막한 세상에 누군가가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건가. 그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끔찍하게 잔인한 일기도 했다.


가슴이 계속 울렁거린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그니션의 반동 때문이 아니다. 육체가 아닌, 영혼이 흔들리며 울리고 있다. 길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폐허지만, 유진은 어디가 길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뜻처럼 걸음이 나아가지 않았다. 애당초 ‘뜻’이라는 것부터가 흔들리고 있다.


템페스트에게 말했듯이, 유진은 이곳에서 보고 깨치게 될 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굳이 깨닫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안 돼.”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발을 억지로 내디뎠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무엇을?


‘진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다.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이 부서진 폐허뿐. 하지만, 조금 더 걸으면. 자각(自覺)할 수 있을 만큼, 확신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


유진은 이 폐허가 폐허가 아니던 시절을 알고 있다.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이 생명이 넘쳐흐르던 시절을 알고 있다.


아득한 옛날. 이 도시는 마왕의 지배를 받았다.


광란의 마왕에게는 4명의 자식이 있었다. 이름은ㅡ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4명의 이름은 ‘하멜’이 기억하는 이름과는 달랐다. 그렇다 해서 이 시대의 광란의 마왕의 자식과, 300년 전의 광란의 수양자식들이 다른 존재인 것은 아니다.


카마쉬도, 오보론도, 사인도, 아이리스도. 모두가 오래전에는 광란의 친자식이었다.


4명 모두 이 도시에서 죽었다.


격렬히 타오르는 전쟁의 불꽃은 이 도시를 향해왔고, 광란의 마왕은 응전하였으나 결국은 패배했다.


도시가 정복당하는 순간. 광란의 마왕은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사활의 순간에서 광란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제 몸을 던졌다.


광란의 마왕이 도망치는 것으로 전쟁은 끝났다. 마족들에게 노예로 부려지던 사람들도 해방되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절을 하며 전쟁을 끌고 온 구원자를 숭배했다.


이것은.


그 찬란하던 시대의 상징이다. 이 도시 사람들이 숭배하던 구원의 조형이다.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앞을 보았다.


한때 저것은 반짝반짝 빛을 내곤 했었다. 금이 가거나 부서지기는커녕 먼지 한 톨 묻는 일 없을 만큼 깨끗했다.


매일매일,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광장의 모든 사람들이 저것을 향해 기도를 올리기도 했었다. 머나먼 곳에서 저것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순례자도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시대를 밝히는 촛불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저것 앞에서 간절한 맹세를 외기도 했다.


“…….”


지금 유진의 앞에 있는 것은 오랜 옛날에 만들어진 조각상이다.


솔직히,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조각상은 전쟁이 끝나고 도시가 해방된 순간에 만들어졌다. 조각상을 만든 사람들은 마왕과 마족에게 노예로 부려지던 장인들이었고, 해방되었음에도 그들에게는 마왕과 마족에 대한 과격한 살의가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한 살의와 원한은 망치와 정을 통해 스며들었다. 울분과 증오를 담아낸 것이 저 조각상이다. 그렇기에 아름다울 수가 없다.


처음 조각상이 완성되었을 때. 원료에 피나 살점 따위는 조금도 섞지 않았음에도 조각상에서는 피비린내가 느껴질 정도였다.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다.


지금의 조각상은 찬란하던 시대와 함께 영락했다. 먼지가 수북하고, 이곳저곳 부서진 곳도 많으며, 광채도 없다.


유진은 마족의 시체로 쌓은 산을 보았다.


고통과 공포를 그대로 조각했던 표정들은 대부분이 세월에 의해 뭉개지고 부서졌다. 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올려 위를 보았다.


시체의 산, 그 위. 투박한 대검을 어깨에 걸치고 앉아 있는 남자.


전쟁의 신, 아가로트.


그렇게 불렸던 인간.


유진은 저 조각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장인들은 마족 시체의 산을 조각할 때는 분노와 증오와 살의 같은 감정을 담았다. 반면에 아가로트를 조각할 때에는 기쁨과 믿음과 희망 같은 감정을 담았다.


그럴 수밖에. 이 도시에 있어서 아가로트는 구원자가 맞았다. 그가 전쟁을 몰고 오지 않았다면 이 도시는 쭉 광란의 마왕에게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아가로트는ㅡ


이 조각상을 좋아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을 멋지게 표현한 조각상을 대놓고 좋아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처음 조각상이 완성되었을 때. 해방된 시민들과 함께 조각상을 본 아가로트는, 대놓고 웃지도 못하고 근엄한 표정만 지었다.


“하…….”


가슴이 울렁거린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유진은 숨을 헐떡거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유진 혼자일 테지만, 지금 유진의 귀에는 너무 많은 소리들이 메아리쳤다. 창칼 따위의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베고, 찌르고, 부수는 소리. 비명 소리. 커다란 함성 소리.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 웃음 소리.


그 모든 것이 ‘전쟁’의 소리다.


유진은 꽈득 이를 씹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많은 것이 부서진 조각상. 아가로트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세밀하게 조각했던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부서진 곳이 많은 저 조각상으로 아가로트의 얼굴을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유진은 저 조각상이 말끔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그 조각상을 통해 아가로트의 얼굴을 상상할 필요도 없다.


시체의 산 위에 앉은 남자. 그 모습은 암실에서도 보았다. 아가로트의 반지. 계약을 통해 엿보았던 아가로트의 기억.


엿보았다고?


유진은 양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다르다. 똑같이 눈동자 두 개에 코 하나 입 하나가 달렸기는 해도, 아가로트와 유진 라이언하트의 얼굴은 닮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하멜 다이너스와도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 셋은 같다. 육체가 다를지언정, 영혼은 똑같단 말이다.


“나야.”


얼굴을 감싼 양손을 내려놓았다.


“내가 아가로트였어.”


지금 시대에 가장 번성한 종교. 빛의 신교의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최초로 신이라 불렸던 존재는 바로 빛의 신이다.


대륙에 인문이 태동조차 하지 않던 아득한 옛날. 마왕이란 존재도 없던 옛날. 마족과 마물, 몬스터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의 먼 옛날. 저러한 존재들을 뭉뚱그려 괴물이라고만 부르던 옛날.


그 시대에도 태양은 하늘을 밝혔지만,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둠 속에서 숨죽여 웅크리는 것뿐이었다. 그 먼 옛날에 ‘불꽃’이란 뜨겁고 무언가를 태울 수는 있어도 ‘빛’을 뿜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괴물들에 비하면 인간은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괴물은 어둠에서 태어났다. 해가 저문 밤은 괴물의 시간이었다. 나약한 인간들은 제들끼리 모여 괴물에게 맞섰으나 싸움이 되지 않았다.


괴물들이 인간을 잡아먹을수록, 인간들이 괴물을 두려워할수록, 낮은 짧아지고 밤은 길어졌다. 그만큼 많은 괴물은 많아졌고 인간은 줄어들었다.


모든 희망이 절망이 되려 할 때.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다. 신이 강림했다. 신은 어둠을 밝히고, 뜨겁기만 한 불꽃에 밝음을 주었다.


ㅡ그것은 지금 시대의 역사다.


아가로트가 살아 있던 신화시대가 멸망하고 난 뒤의 시대. 그것이 바로 지금이다.


유진은 지금 시대가 어떻게 피어났는지는 모른다. 지금 떠올리는 기억은 너무나도 먼 옛날. 그 시대는ㅡ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3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마왕과 마족들은, 대륙 저편에서 자기들끼리 살았다. 인간의 세계와 마족의 세계가 나름대로 구분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마왕과 마족들이 경계를 넘어왔다. 그들은 인간의 세상을 침략하고, 정복하고, 지배했다.


아가로트는 그런 시대에서 태어났다. 마왕의 침략과 지배에 대한 저항이 들끓던 시대. 젊은 아가로트는 검을 들고서 전장에 뛰어들었다.


대부분의 삶을 전쟁으로 보냈다. 패배한 적도 있었지만, 승리를 거둔 적이 훨씬 더 많았다. 전쟁에서의 적은 모두가 마족이었다. 아가로트의 칼끝은 각자 이름이 다른 여러 마왕들을 노렸으며, 많은 마왕이 아가로트에게 죽었다.


“네가 떠올렸을지는 모르지만.”


목소리가 다가왔다.


“너는 광란의 마왕은 죽이지 못했다. 싸웠다면 네가 이기고, 광란의 마왕이 죽었겠지만. 광란의 마왕은 너와 싸우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친 광란의 마왕은 내게 와서 빌었다. 마왕다운 오만함을 모두 버리고, 내게 복속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무엇인지 아나?”


“복수.”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의 등을 응시하던 시선을 위로 들었다.


오래되어 낡은 조각상…… 유폐의 마왕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사슬로 의자를 만들어, 그 위에 앉았다.


“그조차도 이루지 못했지.”


유폐의 마왕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가로트는 마경의 완전한 정복에 도전했다. 그것을 불가능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의 말마따나, 그 시대에서 아가로트는 전쟁의 신이라 숭배되었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세상의 총애를 받고 수많은 인간들의 경외를 받아, 정말로 신격(神格)이라는 것에 도달했다.


세상에 모든 마왕과 마족을 죽여 버리는 것. 마경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 아가로트를 추종하는 신자들은 성전(聖戰)을 노래하며 검을 들고 갑옷을 입었다.


“언제나 그래 왔지만, 끝은 갑작스레 찾아오지. 내게 굴복한 광란의 마왕이 네게 복수하러 가기 전에. 전쟁의 신이라 숭배되던 네가, 내게 칼끝을 겨누고 진군하기 전에. 모든 것의 끝이 찾아와 버렸다.”


기억하고 있다.


세상의 반대쪽에서 ‘괴물’이 나타났다.


놈들에게 이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왕들처럼 인간을 죽이고 공포를 주어 정복하려고도 들지 않았다. 그 괴물들에게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무조건적인 살의뿐이었다. 그것이 괴물들의 이성이자 본성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광란의 마왕을 패배시키고 다음 전쟁을 준비하던 아가로트는, 본래 생각했던 대로 유폐의 마왕에게 향하지 않고 저 정체 모를 괴물들과 전쟁을 시작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오히려 마왕보다 쉽다고 생각했다. 죽이고, 죽이고, 승리하고,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을 때.


암실에서의 기억이 겹쳤다.


수백, 수천, 아니ㅡ 그보다 훨씬 많은 시체가, 흔한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전장을 보았다.


기억하고 있다.


뒤엉킨 색채(色彩).


그것에게 뚜렷한 형상은 없었다. 아니, 단순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일까.


300년 전에 그랬듯이.


아가로트의 시대에서도, 멸망의 마왕은 나타난 순간에 모든 것을 절망시켰다.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되는 마왕. 마왕이되 마왕 같지 않은 마왕. 절망과 공포만으로 이뤄진 형상. 300년 전과 다른 것은- 아가로트는 멸망의 마왕을 상대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절망감과 공포에 미쳐 버릴 것 같으면서도 멸망에게 뛰어들었다. 아가로트를 따르는 모든 군대가, 공포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아가로트를 믿고 진군했다.


“네 전쟁은 길었지만, 결국은 패배로 끝이 났다.”


죽음.


“너는 결코 거스를 수 없는 멸망의 앞에 무릎 꿇었고, 멸망의 짐승들은 네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도륙 냈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유폐의 마왕을 보았다. 사슬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은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면서 말을 이었다.


“마왕은 그것에 익숙하지.”


“…….”


“광란의 마왕도 결국은 납득했다. 멸망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거스를 수 없는 법. 마왕이라도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곳에 남긴 거냐.”


“광란의 마왕과의 거래였다.”


“네가 그렇게 해줄 이유는 없을 텐데.”


“이유라…….”


그 말을 들은 순간, 유폐의 마왕은 드물게도 빙긋 웃었다.


“그것은 네가 재단할 것이 아니다. 광란의 마왕은 부탁했고, 나는 대가를 제시했으며, 그렇게 거래가 성립되어 약속을 맺었다. 그것뿐인 이야기다.”


광란의 마왕은 이 도시에 망집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패배하고, 도망쳤고, 자식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광란의 마왕이 가지고 있던 마력과 격을 이 도시와 함께 유폐(幽閉) 했다. 언젠가, 광란의 마왕의 바람대로…… 그의 ‘자식’이라 할 만한 존재가 이 바다에 왔을 때 계승받을 수 있도록.”


“그렇다면 300년 전의 광란의 마왕은 대체 뭐냐.”


“오늘 네 손에 죽은 광란의 마왕도 내게 똑같은 것을 물었지.”


그 질문에서 유폐의 마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계약이다.”


아이리스는 저 질문의 대답에 간절했다.


유폐의 마왕이 질문에 대답을 했더라면, 아이리스는 굳이 이 바다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 바다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 ‘진실’을 듣기 위해서였다.


“광란의 마왕은 나와 계약을 맺었다. 언젠가 다시 태어날 때,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갖고 태어나게 해달라더군.”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마왕의 격과 힘을 도시와 함께 봉인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부탁이지. 특히 내게는 말이다. 결국, 그는 바라던 대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마족으로 환생했다. 그리고 기억 속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힘을 긁어모으고 마왕이 되었지.”


“…….”


“대가는 ‘혼’으로 받았다.”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혼이란 존재 그 자체다. 그것을 거래하려면 확실한 동의와 굴복이 필요하다. 마왕이 마왕의 혼을 수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보통 마왕이란 존재들은 굴복하는 것보다는 완전한 소멸을 택하니까.”


“너냐?”


유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를 환생시킨 것은, 베르무트가 아닌 너였던 거냐?”


“베르무트를 의심하는 건가?”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면, 너의 영혼과 기억이 마왕인 내게 건드려진 것 같아 불쾌한가?”


심연


베르무트를, 의심하느냐고?


당연히 의심하고 있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베르무트 라인어하트. 그 새끼는, 300년 전에도 수상쩍었다. 사람이라면 누구한테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 한두 개쯤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만, 베르무트 그 새끼는 가진 비밀이 한두 개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베르무트의 모든 것이 비밀스럽고 수상했다. 사실 이제는 베르무트가 정말로 인간이긴 했는지도 의문스럽고, 놈의 이름이 진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맞기는 한가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의심하고, 개 같은 새끼라고 생각할지라도. 하멜은, 유진은 베르무트를 믿었다.


의심과 믿음이 양립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베르무트를 믿고 있다. 그 개새끼가 인간이 아닐지라도, 사실 본명이 베르무트가 아닌 다른 것일지라도.


유진은 베르무트를 믿는다.


유진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슴에 직접 구멍이 뚫린 세냐도 베르무트를 믿는다. 부탁 하나 때문에 100년이 넘도록 괴물을 쳐 죽이며 미쳐가고 있는 모론도 베르무트를 믿는다. 베르무트의 장례를 직접 주관하며 눈물을 흘렸던 아니스도 베르무트를 믿는다.


폐부를 후벼 파는 질문. 턱 막히는 숨이 답답했다. 유진은 곧 답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베르무트에 대한 신뢰를 떠나, 저 질문은 불쾌한 정곡이었다.


‘환생’에 관여한 것은 베르무트 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환생 자체에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의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


유폐의 마왕은 즐거워 보였다. 그는 아이리스의 앞에서와는 달리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너는 베르무트를 신뢰하고 의심하고 있다. 네가 신뢰하는 것은 300년 전의, 너나 동료들과 함께 마경을 떠돌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너는, 네가 죽은 뒤의 베르무트를 모른다.”


“…….”


“너뿐만이 아닐 테지. 세냐 메르데인도, 모론 루하르도, 아니스 슬리우드도 마경을 나온 뒤의 베르무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해. 죽은 너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베르무트와 거리가 멀어졌다.”


저 말은 반박할 여지 없이 옳은 말이다.


베르무트와 유폐의 마왕이 약속을 맺고, 전쟁은 끝났다. 모론은 왕국을 세우느라 북쪽 설원에 틀어박혔고, 세냐와 아니스도 베르무트에게 실망해 마탑과 성당에 틀어박혔다.


“그건 베르무트도 마찬가지지.”


유진은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파여 가는 감정의 골에 아무 대처도 하지 않은 것은 베르무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ㅡ 그 모든 것이 베르무트의 의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두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점이나 변명조차 하지 않고, 입을 닫고 등을 돌린 점이나…….


“네가 모르는 베르무트가 광인이 되었고, 마왕인 내가 그를 이용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나?”


세냐를 공격했을 때. 그건 베르무트지만 베르무트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세냐의 가슴에 바람구멍을 내고 난 뒤, 짧게나마 보였던 베르무트의 얼굴에는 후회와 경악이 어려 있었다.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에게 붙잡혀 있다. 어쩌면 유폐의 마왕에게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월광검.


가능성 정도가 아니다. 만약 베르무트가 미쳐 버렸다면, 그건 틀림없이 월광검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유진은 그렇게 확신했다. 아이리스와 싸우던 중에 유진도 직접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폭주하는 월광이 정신을 침식하는 것을. 회백색의 빛 속에서 자아가 부서져 내리는 것을.


유진은 광인이 된 베르무트가 어떤 존재일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유진이 기억하는 베르무트는 언제나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철저했기 때문이다.


환생. 베르무트가 의도한 것이라면, 빌어먹을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납득할 수는 있다. 실제로 베르무트는 유진을 위해 이런저런 안배를 많이도 준비해 놨으니.


하지만 베르무트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면. 이 환생이 베르무트의 의도가 아닌 마왕의 흉계라면.


ㅡ그렇다면, 환생 자체가 함정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유진이 여태까지 해온 일들이 사실은 마왕의 농간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실제로 유폐의 마왕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유진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었다.


“아니.”


유진은 마음속의 흔들림을 지웠다.


“단순히, 마왕인 네 손길이 내 존재에 닿은 것이 구역질이 난다.”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유진은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환생의 진실이 어쨌건, 유진의 천성은 그대로다. 300년 전에도, 그보다 먼 옛날에도, 똑같았단 말이다.


마족을 죽인다. 마왕을 죽인다. 이 단순하고 직선적인 살의는 여전히 유진의 본질이며 근원이다. 여태까지 해온 것들이 사실은 유폐의 마왕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었다고 해도, 유진이 앞으로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300년 전, 바벨의 최정상에서 베르무트와 약속을 맺었다. 세냐와 모론, 아니스를 돌려 보내줄 것. 그리고 네 육체와 영혼을 돌려줄 것.”


베르무트가 저런 약속을 맺었으리라는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에게 직접 확인을 받는 것은 처음이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영혼을 돌려주면서…… 베르무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영혼과 기억을 함께 다루는 것은 그 베르무트에게도 간단하지 않은 모양이더군.”


“…….”


“광란의 마왕에게 그랬던 것처럼, 네 영혼과 기억을 하나로 묶었다. 내가 관여한 것은 거기까지다.”


“대가로 베르무트에게 무엇을 받았지?”


마왕에게 목숨을 보전받았다. 죽은 동료의 육체와 영혼을 돌려받았다. 거기에 수백 년 동안의 평화까지 보장받았다…….


약속에 대해서 세상은 어떠한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의 눈동자가 곡선을 그렸다.


“그 질문, 대답이 네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지금 네게는 베르무트에 대한 것 말고도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


유폐의 마왕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끼릭, 끼리릭. 손가락 하나 움직였을 뿐이지만, 유폐의 마왕의 등을 받치고 있는 쇠사슬들이 쇳소리를 발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마른 체구의 남자.


죄인이 아닌데도 수십 수백 개의 쇠사슬을 제 몸에 얽은 자.


같은 마왕이면서도 다른 마왕들을 오시하던 자.


마왕조차도.


아니, 신조차도 두려워한 마왕이다.


“나는 너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길게 뻗은 손가락이 유진에게 향했다.


“고대의 전쟁신 아가로트? 우둔한 하멜? 아니면, 유진 라이언하트라고 불러야 하나?”


“셋 모두 나야.”


유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가로트의 조각상이 보였다.


사막 지하에서 보았던 하멜의 동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지금의 나는.”


상 속에 존재하던 과거의 나.


“유진 라이언하트.”


지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나.


애당초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 두려웠는데, 이제는 그런 두려움도 없었다.


아가로트건, 하멜이건, 유진이건, 누구건 앞으로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기억이 선명한 이상 유진의 자아는 바뀌지 않는다.


“아가로트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손가락을 거두었다.


“그 기억은 아가로트가 죽는 순간 사라졌다. 지금 네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네 영혼에 이끌려 찾아온 아가로트의 성물과…… 너를 숭배했던 이 도시가 네 혼에 감응했기 때문이다. 결국 너는 필연적으로 아가로트임을 자각해 냈으며, 네 혼에 깃들었던 신검을 꺼냈다.”


유진은 손을 들어 가슴을 어루만졌다.


아이리스에게 휘둘렀던 신검. 그것은 아가로트가 가졌던 신격(神格)이자 신앙의 형상이다. 신화시대에서 아가로트는 그 피처럼 붉은 신력을 대검으로 빚어 마왕들을 도륙 냈다.


“희미한 기억들은 네게 많은 혼란을 줄 테지. 베르무트에 대한 것보다는, 너 자신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 낫지 않나?”


“나는 나야.”


유진은 가슴을 움켜쥐며 대답했다.


“아가로트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은 것이 뭐? 수백 년 전도 아니고 머나먼 옛날의 기억. 간절하지도 않아.”


그 기억을 보다 확실하게 떠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아가로트의 기억을 정확히 떠올리는 것보다는 지금 베르무트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애당초 별 기대도 안 해. 너는 지금 답을 주지 않을 것 같거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유진과 시선을 마주했다. 꺼림칙한……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다.


저 붉은 눈동자. 계속 직시하고 있지만, 저 눈동자 밑바닥에 깔린 감정을 도무지 엿볼 수가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드물게도 많은 미소를 보였으나, 유진은 그 미소의 의미마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광란의 마왕은 신화시대부터 살았다.


그가 300년 전에도 광란의 마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폐의 마왕과 거래하여 전생의 기억을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마왕들은? 살육의 마왕과 참혹의 마왕도 옛 시대부터 살아온 마왕인가?


아니, 유폐의 마왕이 말하지 않았나. 멸망은 갑작스럽고 거스를 수가 없다고. 멸망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광란의 마왕도 굳이 죽어 환생할 필요도 없었을 터.


거스를 수 없다고?


“대체 뭐냐?”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신화시대를 지워버린 멸망을 거스른 자. 마왕의 권능은 마왕이 죽으면 소멸한다. 만약 유폐의 마왕이 멸망과 함께 죽고, 기억을 보존하여 환생하는 것을 선택했다면. 이 도시가 바다 밑에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유폐의 마왕은 시대를 끝내버린 멸망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유폐의 마왕만큼 긴 시간을 살아온 존재는 없을 것이며, 유폐의 마왕만큼 진실을 이해하고 있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유진은 유폐의 마왕이 대체 무엇인지와, 그가 하는 행동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그렇잖은가. 월광검이 폭주했을 때ㅡ 침식이 강제로 끊어진 것은, 유폐의 마왕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폐의 마왕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월광검은 광란의 마왕을 소멸시킬 뿐만 아니라 유진의 자아까지 삼켜 버렸으리라.


“멸망의 마왕은 대체 뭐고?”


신화시대에도 멸망의 마왕은 존재했다.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멸망의 마왕은 아무런 권속도 두지 않고 홀로 마경을 떠돌았다. 그것은 마왕이라기보다는 현상과 같아서, 추적과 감시는커녕 관측조차 하기 힘들었다.


아가로트가 죽던 전장은 마경의 정반대였다. 멸망의 마왕이 강림하는 지역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멸망의 마왕은 갑자기 나타나서, 아가로트를 집어삼켰다.


그런 것을 마왕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그건ㅡ 정말로 단순한, 멸망 그 자체이지 않은가.


시대의 종말. 때가 도래하면 세계의 저편에서 멸망의 짐승들이 나타난다. 그 짐승들은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죽인다.


만약, 모론이 가로막고 있지 않았다면.


라구르야란에서부터 넘어온 누르는 신화시대에 그랬듯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을 죽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냐.’


모론이 말하길, 라구르야란에서 누르가 넘어오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100년 전이라고 했다. 모론은 자기 자신이 미쳐가는 것읕 무시하면서 누르를 사냥했다. 단 한 마리의 누르도 레헤인야르를 넘지 못했다.


‘군세가 아니야.’


하루에 넘어오는 누르는 많아봐야 수십. 모론 혼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숫자다.


모론이 누르를 가로막고 있는 100년 동안, 그 상황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누르가 수백 수천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집요한 방해에 의해 멸망의 마왕이 나타났던 적도 없다.


‘신화시대와는 달라.’


그 시대의 종막에 나타났던 짐승들은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다. 어디서 튀어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그럼에도 죽여 나갔다. 누르에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독기가 있다면, 전장의 사람들에게는 아가로트에 대한 굳건한 신앙이 있었다. 끝없이 덤비는 누르도 선두에서 신검을 휘두르는 아가로트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곳에 멸망의 마왕이 강림하지 않았다면, 아가로트와 신도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정체 모를 괴물에 대한 의구심을 뒤로하고, 본래 계획했던 대로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을 벌였을 것이다.


“바벨을 올라라.”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


촤라락! 의자를 이루고 있던 쇠사슬이 흩어지고, 유폐의 마왕이 몸을 일으켰다.


“유진 라이언하트. 네 의문들에 대해서는 바벨의 정상에서 대답해 주겠다.”


이럴 줄 알았다. 유진은 눈썹을 왈칵 구기고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순순히 답해줄 리가 없다고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질문을 다 듣고서 대답 하나 없이 떠나려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지 않은가.


“왜 날 구한 거지?”


대답해 줄지 대답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유진은 일단 내뱉어보았다.


“그런 식으로 끝나서는 모두에게 허무하지 않은가.”


유폐의 마왕은 걸음을 뒤로 물리면서 대답해 주었다.


“아득한 세월을 넘어 자리를 계승받은 광란의 마왕에게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마왕의 몰살을 꿈꾸는 네게도. 약속을 맺은 베르무트에게도. 그리고, 바벨의 정상에서 널 기다리기로 한 나에게도.”


“…….”


“네가 힘이 부족해서 패배하고, 죽어서, 실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멸망의 검이 널 집어삼켜 버린 것은…… 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촤라라락! 유폐의 마왕의 등 뒤. 사슬 일제히 머리를 들더니 서로 연결되어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내게 도전할 만큼 힘이 충분치도 않구나.”


유폐의 마왕은 원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웃었다.


“잠깐.”


유진은 급히 입을 열어 유폐의 마왕을 붙잡았다.


“너 설마 베르무트냐?”


유폐의 마왕의 걸음이 멈췄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묻는 건가?”


유폐의 마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심연


유진은 유폐의 마왕의 얼굴을 본 적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아가로트일 적에는 본 적도 없었고, 하멜일 적에는 붉은 평원의 전투에서 아주 멀리서나마 봤을 뿐, 정작 마왕성 바벨에 들어오고 나서는 유폐의 마왕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지금 생에서는, 일찍부터 유폐의 마왕과 얽혔다.


최초로 만난 것은 사막 지하의 무덤. 데스나이트의 몸에 강림하는 형태기는 했지만, 그때 처음, 직접적으로 유폐의 마왕과 얽혔다. 나이트마치에서는 유폐의 마왕의 본신과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이 저렇게나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베르무트냐고?”


이전까지 유폐의 마왕이 보였던 표정은 대부분이 무심했고, 드물게 드러내는 표정은 얇은 미소가 고작이었다. 지금처럼 눈썹의 높낮이가 달라지고, 미간이 찡그려지고, 입술을 씰룩거린 적은 없었다.


“흠…… 그럴듯하지 않은가…….”


유진은 기죽어 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대뜸 뱉은 말이기는 한데, 아무런 의혹 없이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유폐의 마왕과 베르무트 사이에는 공통점이 꽤 있었다.


수상쩍다는 점.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다는 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점 등.


“진심으로 그렇게 물어보는 건가?”


유폐의 마왕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물어보았다.


저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황할 뿐만 아니라 조금 기분 나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네가 베르무트라면, 내가 가진 의문들이 여러 가지가 해소되거든. 왜 베르무트가 너와 약속했나. 왜 너는 손해뿐인 약속을 해주었나. 세냐와 아니스, 모론을 살려서 돌려보낸 점. 네가 내 환생에 관여한 점. 내가…… X 될 뻔할 때, 네가 개입해서 막아준 점 등.”


“흠.”


유폐의 마왕의 얼굴에서 다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까딱 기울이고서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확실히.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은가. 그래, 유진 라이언하트. 내가 만약 베르무트가 맞다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건가?”


유폐의 마왕이 역으로 질문을 해왔다. 그리 유쾌한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먼저 시작한 것은 유진이었기에, 대답하는 것에 긴 시간과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우선 얘기를 들어보고 죽일지 죽이지 않을지 생각할 거다. 아마 죽이겠지만.”


“죽인다고?”


“그래.”


무슨 사정이 있건, 유폐의 마왕은 마왕이다.


300년 전의 전쟁.


“전쟁을 시작한 것은 너였다.”


유진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5명 중의 마왕에서 가장 먼저 대륙을 침략했던 것은 유폐의 마왕이다. 유폐의 마왕이 보냈던 마물의 군대가, 마경과 인접해 있던 소국을 멸망시켰다.


그것을 시작으로 살육의 마왕, 참혹의 마왕, 광란의 마왕이 대륙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정작 유폐의 마왕은 그 뒤부터는 대륙을 침략하는 것에 그리 열중하지는 않았지만, 유폐의 마왕이 전쟁의 시발점을 찍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드래곤들이 한곳에 모여서 유폐의 마왕을 공격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멸망의 마왕까지 나타나서 드래곤들이 떼죽음을 당했지만.’


신화시대에는 어땠지? 그때도 유폐의 마왕이 먼저 시작했나?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건 너무 먼 전생이고, 아예 다른 시대지 않은가.


“그렇군.”


잠시 침묵했던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 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대답은 해주마. 나는 베르무트가 아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유진은 안심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날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망설임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유진은 웃지 않고 대답했다. 유폐의 마왕은 그런 유진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유폐의 마왕을 붙잡지 않았다. 유진이 보는 앞에서 유폐의 마왕은 사슬이 만든 원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냐와 아니스, 모론을 죽이지 않은 것. 베르무트와 약속을 맺은 것. 전생의 날 알고, 환생을 돕고, 이번 생에서 나를 주시한 것…….’


베르무트와 약속을 맺었다. 무조건 그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결국 유진과 세냐, 아니스, 모론은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서 적이다.


……너무 하찮은 존재라 살려뒀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유폐의 마왕의 ‘힘’은 저렇게 생각해도 될 만큼 압도적이다.


그렇지만…… 유폐의 마왕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네가 함께였다면, 마왕성의 정상에 오른 시점에서 유폐의 마왕과 싸울 필요가 없었을 거다.


-내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조건은 그것이었다. 유폐의 마왕성. 바벨의 정상에 오르는 것. 그곳에서 유폐의 마왕의 본신과 직접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어. 그를 해냈다면 약속의 내용도 크게 바뀌었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유폐의 마왕의 어전에 서서, 놈의 본신을 만나도록 해라. 유폐의 마왕은 네가 편히 바벨을 오르게 두지 않을 거다. 놈은, 마왕은 그런 존재다.


-그 뒤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네가 직접 겪어야 해.


베르무트의 말을 떠올렸다.


유폐의 마왕의 본신과는 이미 만났다. 하지만 이곳은 바벨의 정상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도 말했듯이, ‘진실’이란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바벨을 올라야 한다.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은 300년 전의 이야기. 지금 바벨을 올라도 똑같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이 그럴 생각이 없을지라도, 유진은 유폐의 마왕과 싸우고 죽여 버릴 생각이다.


-널 환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중, 네가 가장 용사답기 때문이다.


암실에서 베르무트에게 들었던 말.


그 말에 지금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


“너도 알았던 거냐?”


혼잣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물의 시체로 쌓은 산. 그 위에 앉은 아가로트의 조각상.


유진은 먼 과거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 * *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 빠르겠지만, 세냐와 크리스티나와 함께 다시 심연으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약속이 되어 있던 아이리스나, 운명적으로 연결 된 유진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심연의 문을 지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검으로 갈랐던 바다는 다시 달라붙었다. 유진은 고요히 가라앉은 바다를 응시하면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세냐가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지를 기대했다.


“네가 신이라고?”


“…….”


“전쟁의 신?”


세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너 미쳤니?”


“…….”


“아니…… 아니, 정말로, 정말로 유진. 네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어이가 없는 말이잖아. 네가 전쟁의 신이라고?”


“씁…….”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기는 했다. 유진도 대뜸 세냐가 ‘난 사실 마법의 신이야’라는 식으로 말해 오면, 세냐가 과연 제정신인 것인가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과연…….”


미심쩍어하는 세냐와는 달리,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양손을 모았다. 그녀는 진심 어린 존경과 숭배가 담긴 눈으로 유진을 보며 말했다.


“역시, 유진 님은 비범한 운명의 소유자셨군요.”


“믿어주는 거냐?”


“물론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아니스 님도 유진 님의 전생이 고대의 전쟁신이라는 것을 믿고 계십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을 빤히 보았다.


“……실제로 저희는 오늘, 유진 님의 ‘기적’을 보았으니 말입니다.”


“기적…….”


세냐가 중얼거렸다.


그, 무식하고 야만적인 하멜…… 이라는 인식을 다른 곳으로 치웠다. 그리고 아까 전, 아이리스를 몰아붙이던 유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기적이라. 보통 마법사들은 저런 불확실한 것은 맹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봐버렸는데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


한순간에 바뀌었던 마나의 기질. 백염식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새카맣게 타오르던 불꽃. 월광검의 폭주. 그리고ㅡ 최후의 순간, 아이리스와 바다를 양단해 버린 붉은빛.


“그건…… 마나가 아니었어. 마법도 아니었고, 월광검의 빛도 아니었지.”


이질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힘. 세냐는 그 빛이 어떤 성질의 힘을 담았는지를 느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니스는, 유진의 불꽃이 처음으로 변했을 때부터 그 힘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신력(神力).”


신에 대한 신앙심. 신성마법이나 그를 초월한 기적은 모두가 신앙심을 통해 발현된다. 그것이 바로 신성력이다. 신성력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지는 섬기는 신마다 다른데, 빛의 신을 섬기는 성직자의 신성력은 눈부신 빛으로 나타난다.


그 빛은 신이 내려주는 것. 달리 말하자면 신에게 빌려오는 것이다.


“하멜. 당신의 ‘빛’은, 빛의 신이 내려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 스스로 일으킨 빛. 신 본인이 가진 신력이었습니다.”


아니스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아니스는 300년 전에 죽었다. 지금의 아니스는 천사라는 영적인 존재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보다 훨씬 더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아니스는 유진의 불꽃이 변했을 때부터 ‘신력’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하멜, 당신이 마지막에 뽑았던…… 빛의 검.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검(神劍)이라 할 힘이었습니다.”


빛의 신이 만들었다는 성검 알테어. 이 검은 지상에 강림했던 빛의 신이, 화신(化身)으로 삼았던 육체의 피와 살점으로 만든 검이다.


그렇게 만든 알테어는 빛의 신이 하늘로 올라간 뒤에도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며, 빛의 신교에서는 알테어를 빛의 첫 번째 자식이자 세상을 위해 남긴 횃불이라는 등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 걸맞게, 성검 알테어에는 강력한 ‘빛’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성검은 신검과는 다르다. 성검은 어디까지나 신에게서 신성력을 빌려낼 뿐. 신검은 순수하게 신력으로 만들어낸 검이다.


유진은 신검을 뽑았던 가슴을 어루만지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주 뽑을 수는 없어.”


“그야 그렇겠죠.”


아니스는 당연하지 않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멜. 아가로트 본인인 당신이 가장 잘 알겠지만, ‘아가로트’라는 이름은 결국 수천 년…… 혹은 그보다 먼 옛날의 이름입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아가로트를 숭배하던 신도들은 신화시대의 종말과 함께 모두 죽어 사라졌지 않습니까? 지금 시대에서 아가로트란 이름을 아는 존재는 적게나마 있겠지만, 그들 중에서 아가로트를 ‘신’으로 숭배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뭐 그렇겠지.”


“누구에게도 숭배되지 않는 신. 고대와 함께 사라져버린 전쟁의 신. 하멜, 당신이 그 전쟁 신의 환생일지라도, 지금 당신에게 신위(神威)나 신격(神格)이란 것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자각에 따라…… 신력을 깨친 것이겠죠.”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일검(一劍). 지금 유진이 판단하기에는 그랬다. 잘 쪼개서 사용하면 몇 번 더 휘두를 수 있겠지만, 그 짓을 하느니 성검으로 공검을 쓰는 것이 더 편하고 나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 휘두를 뿐이라 해도, 전력을 다해 휘두른 신검은 마왕의 마력을 일소하고 바다를 갈랐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신검을 뽑을 수 있는 것은 하루에 한 번 정도일까.”


당장은 뽑을 수가 없다. 유진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조금씩…… 채워지는 느낌이야.”


“전쟁의 신, 아가로트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스가 한 걸음 유진에게 다가왔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혼은 똑같으니까요. 하멜, 당신은 오늘 ‘광란의 마왕’을 죽였습니다. 그 사실은 당장 토벌대의 사람들만 알고 있지만, 시무인에 돌아가면 대륙 전체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유진은 아니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이해했다.


신격은 신앙심에 따라 커진다. 빛의 신이 내리는 빛이 그토록 찬란한 이유는, 대륙의 종교들 중에서 빛의 신교가 가장 큰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마왕을 죽였다. 그것은 대륙 전체가 놀랄 만한 위업이다.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대륙의 여러 사람들이 유진의 이름을 연호할 것이다. 어쩌면 숭배까지 할지도 모른다…….


이미 신검을 가진 유진에게 있어, 그러한 숭배가 모여 신력이 될 것이다.


‘그렇군.’


유진은 별로 즐기고 싶지 않지만, 대륙에서 유진을 용사라 떠받들수록 신력은 강해진다. 한 번 휘두를 뿐인 신검도 신력이 강해질수록 몇 번 더 휘두를 수 있게 될 것이고, 신검 자체의 위력도 강해질 것이다.


그렇게 신력에 여유가 생긴다면, 신검 외에도 신력을 사용할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신…… 신이라…….”


세냐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흘겨보았다.


“등신이나 병신도 아니고…… 전쟁의 신……?”


“…….”


너무한 말일 텐데.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모욕적인 말에 담긴 언어적 유희가 유진의 입꼬리를 씰룩거리게 만들었다.


아니스는 그런 세냐를 흘겨보면서 중얼거렸다.


“방금 농담한 겁니까?”


“아…… 아닌데?”


“농담한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웃지 않기를 잘했다. 유진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유진 일행이 타고 있는 배는 바다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마왕은 죽었고, 다크엘프와 해적들도 죽었다. 하지만 그들의 근거지에 무언가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 토벌의 목적 중 하나는, 해적들에게 납치당한 망치섬 드워프 장인들을 구출하는 것이다.


‘괴물들 중에 난쟁이는 없었지.’


물론 이리저리 섞여 괴물이 되면서 드워프의 성질이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무인으로 회군할 수는 없었다.


“시엘은 어때?”


유진은 한숨을 푹 쉬면서 입을 열었다.


“몸상태는…… 괜찮습니다. 왼쪽 눈에 이상도 나타나지 않고 말입니다.”


“마법으로도 살펴봤지만, 똑같아. 그 눈…… 마안이 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눈으로는 똑바로 기능하고 있어.”


세냐와 아니스가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력이 크게 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억지로 잠은 재웠습니다만…….”


“지금은 카르멘과 디자이라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 일단…… 푹 자게 하고, ‘마안’의 확인은 그때 하면 될 것 같아.”


“그래.”


유진은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스는 그런 유진을 걱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물었다.


“하멜. 당신이 죄책감을 느낄 일은…….”


“느껴야 될 일이야.”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날 구하느라 그렇게 된 거잖아.”


“…….”


“그럴 필요가 없는데 몸을 들이밀었던, 300년 전의 나와는 달라.”


만약. 시엘이 밀치지 않았다면. 그녀가 대신해서 몸을 밀어 넣지 않았다면.


암전의 마안은 유진의 머리를 꿰뚫었을 것이다.


심연


반나절 정도 항행하고 나니 다닥다닥 달라붙은 크고 작은 섬들이 보였다.


그곳에는 조악하나마 마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아이리스를 따르던 해적들이 살던 마을인데, 생존자는 없었다. 이곳에 살던 해적 수천 명은 아이리스의 마력에 의해 서로 엉겨 붙은 괴물이 되었고, 최후에는 마력이 거둬져 재가 되어 죽었다.


몇 개의 섬을 지나고 나니, 광란의 마왕을 상징하는 문양이 커다랗게 걸린 섬이 보였다. 보자마자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아이리스와 다크엘프들이 머무르던 본거지. 유진과 세냐, 아니스는 정찰을 자청하여 앞으로 나왔다.


“마왕과 관련하여 뭔가 위험한 기운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희 셋이서만 다녀올 테니, 여러분은 배를 지켜주십시오.”


유진이 그렇게 말하니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특히 토벌대의 지휘관인 오르투스는 유진의 별것도 아닌 말을 신봉이라도 하듯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용사.’


본래 오르투스는 유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트마치에서 나눴던 대화에서 유진이 너무나도 무례했기 때문이다.


이후 재회했던 것은 라베르시아에서의 습격. 오르투스와 유진의 만남에서 호감이 쌓일 여지는 없었다. 오르투스는 일방적으로 유진에게 고난만을 겪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악감정은, 마왕과의 전투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오히려 지금 오르투스는 유진에 대한 경외를 느끼고 있었다.


아들뻘이라는 것은 중요치 않다. 똑같이 무의 길을 걸어온 오르투스는 마왕과의 전투에서 유진이 보였던 모든 움직임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보였던 무위(武威)는 가히 신위(神威)라 할 수 있었고, 그 신위는 오르투스의 안에 남아서 식어가던 무인으로서의 혼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진짜다. 세상이 떠드는 것 이상의, 진짜 용사야.’


오르투스의 시선에 담긴 열의는 유진도 느낄 만큼 노골적이었다.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ㅡ 시문인의 대공이자 퍼스트인 오르투스의 환심과 동경을 받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지.’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하는 것. 바벨에 오르는 것.


당장은 불가능하다. 최악의 경우 바벨의 정상에 오르기는커녕, 도중에 가비드 린드먼에게 토막이 나버릴 수도 있다. 이번에 광란의 마왕과의 전투와는 달리,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는 갑작스레 벌여서는 승산이 없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하고서 임해야 한다.


그 ‘준비’에는 백염식과 마법의 수행이야 당연한 것이고, 유진이 가진 신력을 키우는 것도 포함된다. 아니스가 말한 것도 있지만, 유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이 커지고, 숭배가 커질수록 신력도 함께 커질 것이다.


‘조각상이나 하나 세워달라고 해야겠어.’


유진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시무인의 골칫거리이던 해적여제. 거기서 몇 단계나 격을 높인 광란의 마왕을 토벌해 주었다. 이 정도 해주었으면 시무인 왕가는 절대로 유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으리라.


‘어디 광장이나…… 관광객 많은 콜로세움 앞에 내 모습 그대로의 조각상을 세워놓고. 몇 달에 한 번씩 오르투스가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신력이 늘어날 것 같은데.’


생각하면 할수록 괜찮은 것 같았다.


“얼굴에 금칠 정도가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처바르는구나.”


유진의 의견을 들은 세냐가 질색을 하고서 대답했다.


“네가 할 말이냐?”


유진은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되물었다.


금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냐는 저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솔직히 300년 전 동료들 중에서 자기과시를 제일 질척거리게 한 사람은 세냐 아닌가?


아니스는 유라스에서 자신을 성인으로 추모하는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쾌해한다.


모론도 루하르 왕국 수도에 자기 조각상을 세워두기는 했지만, 그것은 모론 혼자만의 조각상이 아닌 하멜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라이언하트 본가나 키옐의 수도에 있는 베르무트의 조각상. 그…… 베르무트가, 자기 조각상에 심취했을까?


하지만 세냐는 심취한다.


“오해야.”


세냐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나도 300년 전에는 말이야, 나를 조각상으로 세우는 것 따위는 바라지 않았어! 내 초상화를 그릴 때에도, 내가 통 웃질 않고 불쾌해하니까 화가 쪽에서 표정을 바꿔 그렸다고.”


“그런 것치고는 맨날 자기 입으로 ‘현명한 세냐’가 어쩌고저쩌고하던데.”


“그건…… 그건 다른 문제야. 300년 전이랑 지금의 내가 다르듯이 말이야. 그리고, 어, 내가 현명한 세냐인 것은 사실이잖아!”


“거참…… 그 ‘현명한’이라는 수식어를 자기 자신이 붙인 주제에…….”


“내가 적은 것 아니라니까!”


“이미 다 아는 사실을 왜 혼자 부정하고 있는 거냐?”


그 빌어먹을 동화책이 아니스와 세냐의 공동집필작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 하지만 세냐는 아직까지도 동화책의 저자임을 부정하고 있었다…….


“세냐의 멍청한 말은 들을 가치가 없으니 무시하십시오.”


타악. 섬에 내려선 아니스가 빛의 날개를 접으면서 말했다.


“저는 하멜, 당신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우상(偶像)은 숭배를 끌어내는 것에 있어 쉽고 편리한 방법이죠. 그것에 관하여서는 조금 더 과감한 방법도 쓸 수 있답니다.”


“과감한 방법?”


“교황청을 통해 당신을 빛의 신교의 성인으로 공인하고, 유라스 곳곳에 당신의 성상을 세우는 겁니다.”


유진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뭘 놀라는 겁니까? 공표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신은 이미 빛의 신교의 성인입니다.”


당연한 말이기는 했다. 애당초 유진이 가진 ‘용사’라는 이름은 빛의 신교에서 준 것이다.


300년 전부터 성검 알테어의 주인은 용사라 불렸다. 실제로 베르무트는 지금도 빛의 신교의 성인 중 하나이며, 유라스에는 베르무트의 조각상이 수십 개는 넘게 세워져 있었다.


“사실, 저희 쪽에서 말하지 않아도 교황청이 알아서 저지를 일이기는 합니다만.”


광란의 마왕 토벌 사실이 알려진다면, 광신도들의 국가인 유라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앞장서서 유진에게 빛의 신이 함께하였음을 떠들 것이며, 태양의 광장에 유진의 성상을 세워 버릴 것이다.


“조각상을 세우는 것만 방법은 아니잖아.”


세냐는 헛기침을 하며 유진과 아니스의 뒤를 따랐다.


“이번처럼 네 이름을 떨칠 만한 위업을 더 세워도 되는 거잖아? 다행히 유진, 네가 죽여 버릴 놈들은 아직 많이 남았기도 하고.”


죽여버릴 놈들.


“아멜리아 머윈, 누아르 제벨라, 가비드 린드먼.”


“가장 만만한 것은 그 아멜리아 머윈이라는 흑마법사 년이네.”


세냐의 두 눈이 얇아졌다.


“솔직히 말해서, 누아르 제벨라는 아직 도모하기 힘들어.”


유진도 표정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스칼리아에게 깃들었던 누아르에게 단검을 찔러주기는 했는데…… 그 단검은 어디까지나 누아르를 쫓아내기 위한 것. 누아르의 본신에 별 타격은 주지 못했을 것이다.


“가비드 린드먼이야 유폐의 마왕과 함께 강해진다지만, 누아르 제벨라는 달라. 그년의 탐욕은 마족들 중 제일일걸?”


유진도 그 말에는 동감했다.


누아르 제벨라는 탐욕스럽다. 300년 동안 누아르만큼 자기 자신의 격과 힘을 키워온 마족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누아르 제벨라의 격과 힘은 높아지고 있다. 그 등신 같은 제벨라 파크의 하루 방문객이 수만 명에 달한다는데, 그 수만 명이 바치는 정기가 누아르 제벨라에게 더해지고 있단 말이다.


“조각상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유진 님, 왜 아가로트의 조각상은 가져오지 않으신 겁니까?”


크리스티나가 앞서 걷던 걸음을 늦추어 유진의 곁에 섰다. 유진은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티나의 시선에 낮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거기 두는 것이 맞다 싶었어.”


“그렇…… 습니까?”


“전생이라고 해 봐야 기억도 잘 안 나. 떠올려 봤자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것 같고…… 그냥, 지나가 버린 것이니까.”


그래서 심연에 두고 왔다. 아가로트의 조각상을 보고 있으면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멜이야 겨우 300년 전. ‘똑같은 세상’의 기억이지만, 아가로트는…… 아득한 옛날이지 않은가.


‘물어보면 알려줬을까?’


유폐의 마왕에게 아가로트의 기억을 요구했다면. 떠올리게 해주었을까? 그것이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떠나, 호락호락하게 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뭔가 대가를 요구하거나…… 바벨에 오르고 나면 알려주겠다고 떠들었겠지.


‘보고 싶었는데.’


크리스티나는 그런 아쉬움을 느꼈다.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 300년 전의 하멜 다이너스. 그리고 고대의 전쟁신, 아가로트.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백염식은 어때? 그대로야?”


세냐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유진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대신에 백염식을 운용했다.


7성…… 아니, 이것을 더 이상 7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그니션의 반동이 남은 몸이 삐걱거렸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쉰 덕분에 자그마한 불꽃은 일으킬 수 있었다.


화륵.


새카만 불꽃이 유진의 손끝에서 타올랐다.


‘별이 없어.’


백염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별’. 몇 개의 별을 가졌느냐에 따라 백염식의 단계가 결정된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안에 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왕에 대한 살의, 아가로트의 신력, 유진의 의지. 그 여러 가지가 뒤섞여 일어났던 백염식의 변화는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별은 사라졌지만…… 코어가 사라진 것은 아니야.’


이터널 홀에서 착안한 환염식. 별의 회전 안에 새로이 별을 만든다. 지금 유진의 안에는 그러한 환염식에서 아득하게 발전하여 탄생한 우주가 있었다. 그 우주에서 일으키는 불꽃은, 별을 품은 밤하늘이 그러하듯 새카맣다.


“카르멘 님이 좋아하실 것 같군요.”


“…….”


“용사답지 않은 색…… 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여전히 유진 님은 고결하고 성스러우십니다.”


크리스티나는 양손을 모아 기도를 하며 속삭였다. 세냐는 탐색 마법을 펼치면서 유진의 불꽃을 힐긋거리며 쳐다보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네 마나는…… 너무…… 강해. 폭력적이고 이질적이야.”


대기 중의 마나 자체는 순수하다. 그 마나가 인간에게 깃들고, 의지로 발현되면서 기질이 섞이게 된다.


백염식은 6성부터 기질에 따라 변화한다. 지금 유진의 백염식은ㅡ 더 이상 라이언하트의 백염식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마나가 불꽃처럼 일어난다는 것뿐. 그 외의 나머지는 ‘유진’에 의해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폭력적이고 이질적으로.


“이게 낫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불꽃은 꺼트렸다. 몸이 완전히 멀쩡해지고 나서야 이것저것 시험하고 확인해 볼 수 있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월광검도 다시 봐야 하고.’


왜 폭주한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폭주의 위험이 있는지. 있다면…… 부숴 버려야 하나? 아니면 봉인을 해야 하나.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찾았다.”


세냐가 지팡이를 거두며 말했다.


해적들이 머물던 섬에는 생존자 한 명 남지 않았다. 해적들에게 납치당한 인질이나, 마을에서 수발을 들었을 일꾼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왕이 되어버린 아이리스는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을 주물러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이 섬에는 생존자가 남아 있었다. 세냐의 몸이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유진과 크리스티나도 세냐의 마법에 의해 위로 떠올랐다.


쿠구구궁! 지면이 진동하더니 들썩거렸다. 마왕과의 전투로 몸 상태가 멀쩡하지 않은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정도 범위의 지표면을 뒤집어 버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깊숙이도 숨겨놨네. 절대로 도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지?”


땅이 완전히 뒤집히자, 죽은 듯이 쓰러진 드워프들이 보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아이리스에게 납치된 드워프들은 전부 20명인데, 지하실의 드워프들은 14명밖에 되지 않았다.


“주…… 죽, 죽었소.”


신성마법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젊은 드워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1명은…… 심해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2명은 잠수복을 생산하는 중에 과로로 죽었소. 남은 3명은, 용광로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소.”


드워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여…… 여제, 아, 아아, 아니, 마왕은? 마왕님은 어디에 간 것이오?”


드워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저만큼 학대를 받았지만, 공포는 아이리스를 ‘마왕님’이라 부르게 만들었다.


“죽었습니다.”


유진이 대답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드워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주, 죽어? 죽었다고? 마왕…… 님이? 광란의 마왕이 죽었단 말이오?”


“죽었으니까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 아닙니까.”


“대체…… 대체 누가 광란의 마왕을 죽였단 말이오?”


“나요.”


이어지는 대답에 드워프는 입까지 쩍 벌렸다.


“당신이 대체 누구…… 길래?”


“유진 라이언하트.”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상은 드워프들 시켜서 만들게 하면 되겠군.’


지하에서 굶어죽거나 질식사 할 것을 구해주었으니, 조각상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몇 명은 아예 라이언하트에 데려가야겠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드래곤의 소재를 마음껏 사용해서 무기나 방어구를 만들 수 있다 속삭인다면 드워프들은 고민하지 않고 라이언하트에 따라가겠다고 외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시무인 왕가와도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겠지만, 마왕까지 잡아주었는데 왕가가 드워프 몇 명을 놓아주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라이언하트에…….’


본가를 떠올린 순간, 길레이드와 애니실라, 시안도 함께 떠올랐다.


‘…….’


유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바다에 멈춰 있는 함선들을 쳐다보았다. 지금쯤이면 시엘도 잠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따귀 몇 대는 맞을지도 모르겠어.’


길레이드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애니실라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애니실라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귀항


잠이 들 만큼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당장 눈앞이 잘 보이기는 하지만, 자고 일어나 눈을 떴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옛날처럼 눈앞이 잘 보일까. 그러한 두려움이 가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바란들 쉽게 잠들 수 없다는 것은 세냐와 크리스티나도 알았다. 억지로 자려 하면 오히려 생각이 많아져 심적으로 괴로워진다는 것도 알았다.


“…….”


마법으로 잠든 시엘의 곁에는 카르멘과 디자이라가 앉아 있었다. 디자이라는 완전히 멎지 않은 눈물을 훌쩍거리면서 시엘의 손을 주물렀다. 카르멘은 그런 디자이라의 곁에서 주먹을 쥐었다 펴며 시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나마 다행이랄 것은, 시엘의 얼굴에 흉터는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뀐 것은 눈동자뿐.


……다행이라니. 카르멘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내가 더 강했다면.’


마왕이 암수를 쓰기 전에 알아차렸다면. 마왕이 암수를 쓸 틈을 주지 않았다면. 마왕을 먼저 쓰러트렸다면. ㅡ그러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마왕과의 전투. 카르멘은 많은 활약을 했다. 가장 많은 다크엘프를 죽인 것은 카르멘이었다.


유진이 월광검의 폭주에 휘말려 전장을 이탈했을 때. 카르멘이 없었다면 마왕을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진이 돌아올 때까지 마왕은 미친 듯이 날뛰었을 것이다. 이미,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카르멘이 없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추하군.’


카르멘은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에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저러한 생각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후회하고 후회하다, 그 모든 것에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찾아냈을 뿐. 흔하디흔한 방어기제. 카르멘은 그래 버린 자신에게 오히려 더 구역질을 느꼈다.


‘부족했다.’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기회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파고들 만한 틈은 몇 번이나 보았다.


그러나ㅡ 파고들지 못했다. 틈이 보인 것과는 별개로, 카르멘의 몸은 알맞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또, 마왕에게 보았던 틈이 정말로 틈이었는지, 아니면 상대를 꾀어내기 위한 미끼였는지…… 전장의 찰나에서 카르멘은, 자신이 보았던 것에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전부 다, 내가 부족했던 탓이야.’


뭐가 라이언하트의 최고 실력자냐. 뭐가 라이언하트의 큰 어른이냐. 카르멘은 입술을 피가 흐를 만큼 강하게 씹었다.


저러한 이름들이ㅡ 무슨 의미가 있나. 라이언하트의 숙적이라 할 수 있을 마왕과의 전투에서, 무력한 모습밖에 보이지 못했는데. 조카 손주인 제자의 왼쪽 눈을 잃게 만들고, 마찬가지로 조카 손주인 유진보다도 못했는데.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약하구나.’


마치 그런 마음이 읽히기라도 한 듯, 누군가의 손이 카르멘의 손등에 얹어졌다. 카르멘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눈을 뜬 시엘이 카르멘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


저절로 열린 입술. 하지만 시엘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이쪽을 보고 있는 시엘의 두 눈. 색이 바랜 왼쪽 눈동자가 카르멘의 가슴에 찢어질 듯 아픔을 주어다.


“……엘…….”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는 카르멘답지 않게 떨렸다.


눈앞이 먹먹하고 흐려졌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얼마 만일까. 카르멘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엘의 손을 꽉 쥐여주었다.


“저는 아주 멀쩡한데.”


시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카르멘 님이 우시는 거예요? 저도 안 울고 있잖아요.”


“…….”


“음…… 제가…… 바보 같은 짓을…… 아니, 아니에요. 저는 올바른 일을 했어요.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거예요. 그리고 아마 카르멘 님도 그러실 테죠.”


“……그래.”


카르멘은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시엘이 왼쪽 눈을 잃게 되었던 상황은 들었다.


시엘이 말한 것처럼, 카르멘도 그 상황에서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진이었다. 수십 수백 명이 죽을지라도 유진은 죽어서는 안 되었다.


“……나도 똑같이 행동했겠지.”


카르멘은 시엘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시 동안 시엘의 손을 쥐고 있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닦고, 떨리던 호흡도 가라앉혔다. 덩달아 훌쩍거리는 디자이라도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시엘.”


카르멘은 침상에 누운 시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는 유진만큼이나 너도 소중하고 중요하다. 그 상황에, 유진이 아니라 네가 있었다면. 나는…… 널 위해서 몸을 던졌을 거다.”


“카르멘 님이 저를 위해 희생하셨다면, 아마…… 저는, 평생 제 자신을 원망했을 거예요.”


시엘의 미소가 살짝 짙어졌다. 카르멘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닫혀 있던 방문을 열자, 몇 걸음 바깥에서 서 있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세냐와 크리스티나는 보이지 않았다. 카르멘은 혹시라도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지 않을까 걱정이 들어, 자연스럽게 헛기침을 몇 번 뱉는 것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생존자는 있었나?”


“드워프 14명이 전부였습니다.”


“드워프뿐이었나?”


“네. 인간은 없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에 카르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디자이라와 함께 유진을 지나쳤다.


“자리를 비켜주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야.”


시엘은 문을 닫고 돌아온 유진을 향해 말했다. 유진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시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미리 말해둘게.”


그 시선. 시엘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에 자기혐오를 느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


“다른…… 깔끔하고,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때는 서로 경황이 없었잖아. 뭐랄까, 그래, 본능적으로. 내 몸이 움직여 버렸어.”


내가 널 구했어. 왼쪽 눈동자 하나로 끝났지만, 나는 널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어. 그러니까, 너는…… 나에게 은혜를 갚아야 해. 나는 널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으니까, 너도 나를…….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죄책감을 가지거나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거야. 내가, 너에게…… 여러 가지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음, 그때 이상으로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내가 널 위해 한 만큼 너도 나를 봐줘야 해.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을 거야. 그냥, 가끔, 나를 생각하거나…….


“나를 원망하지 않아?”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내가? 원망? 너를?”


시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원망할 이유가 어디 있어?”


“내가 병신처럼 가만히 있지 않았더라면, 네가 다치지 않았을 테니까.”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유진. 그딴 식으로 가정하고 싶거든 이것부터 먼저 가정해 봐. 내가, 네가 말했던 것처럼 토벌대에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내가 다칠 일도 없었겠지. 어쩌면 내가 없어서 네가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시엘은 코웃음을 치면서 손가락을 들어 유진의 이마를 쿡 찍었다.


“그런 멍청한 생각하지 말고, 차라리 고맙다고 말해. 날 구해줘서 고마워, 하고 말이야.”


“몇 번이고 말했잖아.”


“하지만 네게 듣는 감사는 몇 번을 들어도 새로운걸.”


시엘은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을 거두었다.


“그래서. 바다 밑에서 뭘 본 거야?”


“그게 원망스럽지는 않아?”


“또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거야? 설마…… 날 두고 후다닥 바닥 밑에 내려간 것에 대해, 내가 널 원망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나참. 시엘은 배를 잡고 웃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애새끼로 여겼던 거야?”


유진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시엘도 이해했다.


당시의 유진은…… 조금 이상했다. 유진인데 유진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지러운 눈동자, 머릿속의 혼란이 그대로 드러났었다.


“네게 중요했던 거잖아.”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시엘의 앞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유진 라이언하트였다.


“중요했지.”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너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더라.”


이어지는 말에 시엘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덮고 있던 이불을 확 끌어당겨 얼굴을 반쯤 가려 버렸다.


깊은 뜻은 없는 말일 것이다. 시엘이 파악한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인간은 그런 놈이었다. 듣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해버릴지, 어떤 오해를 해버릴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느끼는 것을 대뜸 입 밖에 내뱉어 버린다.


그렇게 튀어나온 말은, 듣는 입장에서는 갑자기 뒤통수를 맞거나…… 턱주가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처럼 폭력적이었다. 저런 말을 들어버리면 누구나 얼굴이 빨개질 것이다.


“바다에 있던 것은 내 전생이었어.”


“전…… 생? 네 전생은 하멜 님이잖아.”


“음…… 전생의 전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어쨌든, 바다 밑에 있던 것은 아가로트의 유적이었는데 말이야. 알고 보니 내가 아가로트더라고.”


지금 말도 똑같이 폭력적이었다. 중간에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되지 않았나? 시엘은 크게 뜬 눈을 끔벅거리면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아가로트?”


“어.”


“그, 전쟁신 아가로트가 너라고?”


“어.”


시엘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불을 슬며시 내리며 유진을 흘겨보았다.


“나는 시엘 라이언하트야.”


“알아.”


“너는…… 유진 라이언하트지. 맞아?”


“왜 당연한 것을 물어봐?”


“그럼 됐어.”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이불을 끌어내렸다.


“네가 하멜 님이건, 전쟁신이건, 나한테는…… 아무런 상관없어. 네가 유진 라이언하트면, 그거면 돼.”


“라이언하트…….”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시엘의 왼쪽 눈동자를 응시했다.


“네 눈동자.”


“인간에게 마안은 깃들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시엘이 중얼거렸다.


“조금은…… 느끼는 것이 있어. 마안이 깃들었다면, 그건 내가 특별하기 때문일까? 아니야. 내가 아니라, 내 몸에 흐르는 피가 특별한 거야.”


‘월광검’이라 불리던 꺼림칙한 검. 라이언하트의 기록은 물론이고 역사에도 존재하지 않던 검.


하지만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을 쥐었을 때. 어딘지 모를 허무에 잠겨 버린 유진에게 다가갈 때.


-이래서는 안 됐다.


-그 검은 내 안배가 아니야.


목소리를 들었다. 혼을 위축시키고, 피를 떨게 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서는 유진이나 다른 사람이 알려주지 않았지만, 시엘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이름만이 떠돌았다.


“위대한 베르무트.”


시엘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리……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는…… 인간이 아닌 거야? 설마, 마족인 거야?”


“아니야.”


유진은 굳은 표정으로 내뱉었다. 그렇게 내뱉고서, 다른 말을 이어 붙이려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 그 새끼가 마족인지, 사람이기는 한지.”


“아무리 그래도 시조님한테 새끼는 좀 그렇다.”


시엘은 굳었던 표정을 살짝 풀어 내리면서 웃었다.


“그…… 목소리 말이야. 너도 들었던 거지?”


“응.”


“역시, 그건 시조님의 목소리였던 거야?”


“나한테 대고서 안배가 어쩌고 할 놈은 그 새끼밖에 없어.”


유진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내뱉었다.


‘그 검은 내 안배가 아니다.’


베르무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이 월광검을 얻은 것은 사막의 지하 무덤이다. 관 위에 떠 있던 칼자루…… 검신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때문에 전성기만큼의 빛은 내뿜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산조각 난 월광검의 달빛은 유진이 검을 뽑을 때마다 불길하게 번뜩였다.


-월광검은 너무 위험해.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하지.


-나는 월광검을 부술 생각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없애 버릴 거다. 하지만, 아마 나는 실패하겠지. 이 검은 부수고 싶어도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만약 내가…… 이 검을 어떻게든 다루고, 널 위한 안배로 남길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하멜 네가 월광검에 미련이 있다면.


암실에서의 베르무트는 월광검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했다. 동시에, 월광검이 ‘안배’로 남겨질 여지를 두기도 했다.


-네가 무덤을 찾아가도, 월광검은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마라. 만약 월광검이 있다면…… 내가 월광검을 부수지 못했다는 것이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네가 통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을 테니, 나를 너무 비웃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저런 말을 들어버렸으니 당연히 베르무트가 성공한 줄 알았다.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남길 생각이 없었다.’


다루는 것에 실패했다. 하멜을 위한 안배로 남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막의 무덤에는 월광검이 남아 있었다.


애초에 월광검이 그곳에 남겨졌을 당시에 베르무트는 정상이 아니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뭔가에 홀려서, 미쳐서, 세냐를 공격하고, 그 뒤에 월광검을…….


“…….”


월광검의 폭주. 그것은 유진도 겪었다. 자아가 달빛에 휩쓸려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유폐의 마왕이 간섭하고, 시엘이 붙들지 않았다면…….


‘월광검에게 의지가 있나? 아니면…… 멸망의 마왕에게?’


월광검은 멸망의 검.


하지만ㅡ 그, 멸망의 마왕에게 자아란 것이 존재할까? 유진은 그것부터가 의문이었다.


아가로트가 죽던 순간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유진이 인지하는 ‘멸망의 마왕’은 다른 마왕들처럼 자아나 의지가 있는 존재 같지는 않았다.


“내 눈 말이야.”


시엘이 입을 열었다.


“껄끄럽기는 하지만, 난 마음에 들어.”


“왜?”


“의안을 끼거나, 안대를 써버리면 네가 더 괴로워할 것 아냐.”


“그렇지도 않아. 나는 네 눈이 마안이 되어버린 것이 더 괴로워.”


“마력을 쓰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건 모르는 거야.”


“아니, 알아.”


시엘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나도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해하고 있어.”


눈동자에 깃든 권능.


“그때 들었던 목소리가 시조님의 것이라면…… 이 눈은 시조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해.”


“선물?”


“너와 함께 시조님을 봤잖아.”


공허한 멸망의 한복판에 있던 남자. 유진과 시엘을 밀어내던, 혼을 위축시키고 피를 떨게 하던 목소리.


그 한순간의 체험이 피를 격발시켰다. 그러한 체험을 겪지 않았다면 눈동자가 마안으로 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물은 무슨.”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고서 투덜거렸다.


시엘은 삐죽 튀어나온 유진의 입술을 보면서 킥킥 웃었다.


귀향


수천 명 규모 해적단의 근거지답게 보물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는데, 그중에서는 아이리스가 생전부터 애착을 가졌을 광란의 상징들도 몇 개 섞여 있었다.


그런 것은 특히나 주의해야 했다.


마왕이 얼마나 끈질기고 지독한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분명히 죽이고 소멸시켰는데도, 살육의 마왕과 참혹의 마왕은 300년 동안 어둠의 정령이 되어 인간을 홀리고 재림을 시도했다. 광란의 마왕이 되어버린 아이리스도 그런 개수작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었다.


유진은 제 손으로 죽인 마왕과 나중에 재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광란의 상징은 모조리 부숴 버리고, 다른 보물들도 주의 깊게 살폈다.


“이렇게 보물을 산처럼 쌓아두고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질문에 대답해 줄 아이리스는 이미 뒈졌지만, 직접 묻지 않아도 이유는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거사를 위한 군자금, 뭐 그딴 식으로 쓰고 싶었던 모양이지.”


유진은 반짝반짝하고 화려한 왕관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투덜거렸다.


몇 년 동안 남해에서 노략질로 긁어모은 보물들. 기껏 마왕이 된 아이리스는 닷새도 살지 못하고 뒈져 버렸으니, 이 보물들이 군자금으로 쓰일 일도 없게 되었다.


“쟤는 왜 자꾸 저러고 있는 거야?”


뒤통수에 꽂히는 노골적인 시선.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벌써 몇 시간 동안 저렇게 보고 있으니 하지 않으려 해도 신경이 쓰였다.


유진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투덜거렸다.


“성은(聖恩)이랍디다.”


크리스티나가 대답해 주었다.


“실제로 상황이 그렇잖습니까? 유진 님은 스칼리아 공주에게 깃들었던 몽마의 여왕을 쫓아내셨지요.”


이곳에 오지도 않은 몽마의 여왕이 개입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상황이 골치 아파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정작 스칼리아 공주나 다른 사람들은 몽마의 여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세냐 네가 괜한 말을 해서 그래.”


“그게 왜 내 잘못이야? 네가 앞뒤 생각하지도 않고 공주의 몸에 단검을 처박았기 때문이잖아.”


세냐는 두 눈을 얇게 뜨고 유진을 흘겨보았다.


그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스칼리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스칼리아 본인도 엿들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멀찍이 선 자리를 고수하며 유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구했어…….’


그 순간이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마왕의 악의에 지배당했을 때의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을 읽기 전에, 불의를 저지르려 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부관인 디오르를 죽이고, 혈육인 자페르 왕자를 죽이려 했다.


사실 그것은 누아르 때문은 아니다. 광란의 마왕이 내뿜던 마기에 정신이 반쯤 미쳐서,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던 충동이 치솟았던 것이다.


스칼리아는 자신에게 그런 충동이 있다는 것부터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여러 번 살인을 저질렀지만, 무고한 사람을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 나름대로 죽여야 할 죄인을 구분해서 죽였단 말이다.


하지만 디오르와 제파르는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사악한 충동에 따라 그들을 죽여 버렸다면, 스칼리아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을 것이다…….


‘용사…….’


스칼리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전투가 끝나고 벌써 이틀이 흘렀다. 평소에 스칼리아는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고, 간신히 잠들어도 악몽을 꾸기 일쑤였다.


하지만 용사에게 성은을 입은 후로는 수면제가 없어도 잘 수 있게 되었다. 악몽도 꾸지 않고 푹 잠들었다. 머릿속에서 충동질하는 속삭임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악인을 죽여서 피를 쏟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살인에 대한 충동 대신에, 용사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스칼리아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기적의 체험은 스칼리아의 가슴에 신앙심을 만들었다.


비슷한 영향을 받은 것은 스칼리아뿐만이 아니었다. 토벌대 전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유진에 대한 인지가 달라졌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


대륙 제일의 무가, 라이언하트.


토벌대가 출정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이름 앞에는 저러한 인지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서 마왕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았잖은가.


“위대한 베르무트의 라이언하트가 아니다.”


임시로 쓰고 있는 거처에 돌아온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카르멘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당대의 용사, 유진의 라이언하트인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유진의 얼굴은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나쁜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헤벌쭉 웃기도 민망했다.


“크흠…… 기분은 좀 나아지셨나 봅니다?”


“내가 우울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퐁. 카르멘은 라이터의 뚜껑을 열면서 중얼거렸다.


“일련의 사태는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지. 그것을 인정한 이상, 나는 더 이상 우울해하거나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해.”


“예…….”


“네게는…… 감사하고 있다, 유진. 네가 오지 않았다면. 네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두를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이 시대는 새로이 탄생한 마왕에게 희롱당했겠지.”


퐁. 열렸던 뚜껑이 닫혔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해서 착각하고 있었을 거다.”


“착각……? 무슨 착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강하다는 착각.”


카르멘은 라이터를 어루만지며 씁쓸히 웃었다.


“유진. 개구리에 대해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냥 개구리가 아니다. 우물 안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우물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어리석은 개구리를 말하는 것이다. 알고 있나, 유진. 우물 안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얼마나 작은지.”


“어…… 우물에 빠져본 적은 없어서…….”


“우물 안의 개구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우물과, 그곳에서 올려 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는 알지 못해.”


“…….”


“나는 그런,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자기 자신이 사자인 줄 착각하던 개구리였어. 하지만…… 네 덕분에 나는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개구리였는지 알게 되었어.”


유진도 우물 안 개구리가 어떤 이야기인지는 안다.


“너무 자학하시는 것 아닙니까? 카르멘 님도 충분히 강하신데. 마왕과의 전투에서도 카르멘 님은 제 몫을 다하셨습니다.”


“내가 그럴 수 있던 것은, 유진 네가 마왕의 힘을 소모시켰기 때문이다. 세냐 님과 크리스티나 성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말해버리니 유진은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민망함에 헛기침을 내뱉자, 카르멘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어서 고맙다, 유진.”


유진은 카르멘의 눈동자 안쪽에서 타오르는 갈망을 보았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힘’에 대한 갈망이었다. 옛날부터 그랬다. 저렇게 일직선으로 힘을 갈망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강해진다. 개중에서는 갈망이 일그러지거나, 제 자신에게 먼저 절망해 버려서 사도(邪道)로 빠져 망가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카르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깨달음이라 할 만큼 대단한 일은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저도, 카르멘 님도…… 그냥, 해야 할 일은 했을 뿐인데.”


“너는 평소에는 굉장히 오만하면서, 이럴 때에는 겸손해지는군.”


“크흠…….”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라이언하트와 모두의 귀감이 될 것이다. 유진…… 아니, 흑사자(黑獅子)여.”


“예?”


“라이언하트를 대표하며, 성검의 빛마저 오시하는 흑사자…… 후후. 용사인 너를 상징하는 색이 칠흑과 붉음이라. 아이러니하군…….”


“흑…… 뭐요?”


“놀라울 따름이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역사 300년. 백염식은 언제나 순백의 불꽃을 만들었지……. 하지만 너는 달라.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네가 백염식에 새로이 색을 입혔듯, 앞으로의 라이언하트는 네 색에 물들리라…….”


더 이상은 맨정신으로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르멘의 앞에서 도망쳤다.


후후, 후후후. 스스로 내뱉은 말이 만족스러운 것일까. 등 뒤에서 카르멘의 웃음소리와, 퐁, 퐁 하는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러니라…….”


그 단어가 가슴에 꽂힌 모양이었다.


* * *


해적들에게 약탈당한 보물의 회수. 사망자의 수습. 부상자들의 치료 등. 모두가 시무인으로 귀항하기 전에 정리해야 할 문제들이었다. 그래서 토벌대는 섬들에 며칠 동안 정박하게 되었다.


저런 문제들은 유진이 아닌 오르투스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 공적의 배분에 관해서 제파르 왕자가 감히 나댔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것마저도 오르투스가 정색하며 일갈을 했단다.


“왕자님께서는 전투 내내 피난선에 숨어 계셨으면서 공적을 논하시는 겁니까?!”


시엘이 킬킬 웃으며 오르투스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때 제파르 왕자 표정이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그 얼간이는 오르투스 경이 무조건 제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나 봐. 뭐, 제파르 왕자도 필사적이기는 할 거야. 오르투스 경이 국왕한테 보고를 올릴 때, ‘제파르 왕자님이 토벌을 명하셨습니다’라고 말해주길 바랄 테지.”


만약 오르투스가 그렇게 보고를 올렸다면, 시무인의 왕위 계승 서열에 대격변이 일어났을 것이다.


“대신 스칼리아 공주나 챙기라고 해야겠어.”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도 저 공주님은 도망도 안 치고 열심히 싸웠잖아.”


“왜 챙겨주는 거야?”


“내게 은혜를 갚고 싶어 하는 공주가 왕국 내에서 입지가 높아지는 거잖아. 그럼 나도 이래저래 편하지.”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랄 것은 없고, 스칼리아 공주를 시켜서 시무인에 예배일 비슷한 거나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야.”


“예배일?”


상상도 못 한 대답에 시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한 달에 한 번쯤…… 정오? 그즈음에 나를 위한 기도를 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거지. 아예 작정하고 안식일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고, 소소하게 기도 잠깐 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아?”


“너 뭐 종교라도 만들려는 거야?”


“종교랄 것까지야……. 아니…… 종교 맞나?”


유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거창한 생각까지는 한 적이 없었다. 종교를 만들려면 이래저래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경전도 적고, 교리도 세우고, 건물도 몇 개 지어야 할 것 같고…….’


아니스나 크리스티나에게 부탁하면 알아서 잘해줄 것 같지만…… 유진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흠…… 왕가 공인의 예배일까지는 무리여도, 스칼리아 공주 한 명은 널 위해 매일 기도라도 올릴 것처럼 보이더라.”


시엘은 아까 전에 지나가며 보았던 스칼리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스칼리아의 얼굴은 불면에 의한 피로와 짜증이 그득했다. 눈동자의 빛은 탁하고 눈가에는 다크서클도 짙었다. 하지만, 요즘 스칼리아의 눈에는 점점 총기까지 깃들고 있었다.


“몸은 어때?”


“나야 괜찮지. 눈도 여전히 잘 보이고. 그러는 너는?”


“아직 여기저기가 뻐근하기는 해. 하지만 마나는 잘 움직여.”


유진은 왼쪽 가슴을 몇 번 두드리며 웃었다.


“다행이네. 신년 첫날을 침대에서 보내면 우울했을 거야.”


시엘도 유진과 함께 웃었다.


오늘부터 새해다. 13살에 처음 만났던 것이 별로 멀게도 느껴지지 않는데, 어느덧 시엘과 유진의 나이는 22살이 되었다. 사실 유진은 새해가 된 것이나, 나이를 1살 더 먹었다는 것에 별 감흥은 느낄 수가 없었다.


‘전생부터 기억하는데 나이가 대수인가…….’


전생의 나이를 더한다면 환갑이 넘는다……. 아니, 아가로트의 나이까지 더한다면? 아가로트가 몇 살에 죽었더라? 고대부터의 시간을…… 더해야 하나? 만약 그래야 한다면 유진의 나이는 수천 살이 넘어버린다…….


“크흠.”


억울함을 토로하던 세냐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유진은 괜히 세냐가 있는 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뭘 봐?”


“보면 안 돼?”


“안 되는 것은 아닌데…… 네 눈빛, 뭔가 모욕적이야.”


세냐는 투덜거리면서 지팡이를 들었다.


ㅡ파앗! 세냐를 중심으로 복잡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유진은 공간에 녹아드는 마법을 확인하면서 크리스티나 쪽을 쳐다보았다.


마법으로 구축한 결계에 신성력이 더해졌다. 유진은 그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막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나도 무리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기껏 생긴 눈동자가 다시 퍽…….”


퍽, 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유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마안의 권능이 시엘의 눈동자를 터트릴 때 났던 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터져 버리는 건 싫단 말이야.”


“퍽 소리 내지 마.”


“어이가 없네.”


시엘은 유진을 흘겨보며 눈을 찡그리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일단 써볼게.”


“쓸 줄은 알아?”


“감각이라 해야 할까……. 의식하면 될 것 같아.”


시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며칠에 걸쳐 마안을 살폈다. 문제랄 것은…… 찾지 못했다. 시엘의 몸 안 어디에도 마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 마안은 시엘의 코어와 동조하고 있다. 즉, 마력이 아닌 마나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세냐는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안은 마족들 중에서도 가진 이가 드문데, 하나도 아니고 두 개의 권능이 깃든 마안이라니. 심지어 그중 하나는 암전의 마안. 몽마의 여왕이 가진 환상의 마안, 유폐의 칼이 가진 위신의 마안과 대등한 격을 가진 마안이다.


‘눈동자를 통해 파고든 마왕의 마력이 영향을 주었다……. 아니, 아니야. 암전의 마안이나 위신의 마안에는 300년 전부터 몇 번이나 처맞았는걸.’


세냐도 얻어맞은 적이 있다. 마력이 몸 안에 스며들어 토악질을 한 적도 있었다. 당장 며칠 전의 전투에서도 그랬다.


‘베르무트의 피는 특별…… 하다지만, 유진에게 마안은 깃들지 않았어.’


아무리 고민해 본들 정답은 찾을 수 없다. 인간에게 마안이 깃들었다는 것부터가 이치를 벗어난 일.


지금 해야 할 것은, 마안이 깃든 이유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저 마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얼마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코어와 동조하고 있다면 더 조심해야지. 잘못 썼다가는 마나가 고갈되어 버릴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너도 알지?”


“네.”


시엘은 의식을 집중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나가 고갈되면 탈진해 쓰러지게 된다. 운이 나쁘다면 코어에 손상이 남아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한다.


“마안의 권능은 강하고 편리한 만큼 막대한 마력을 소모해.”


이 역시 몇 번이나 했던 말이지만, 경고는 몇 번을 해도 부족한 법이다. 세냐는 걱정 어린 눈으로 시엘을 보며 말했다.


“그 아이리스도 마왕이 되고 나서야 마안을 남발했지, 예전에는 그러지도 못했어.”


가비드 린드먼은 유폐의 마왕의 마력을 사용한다. 때문에 놈은 마안을 아무리 많이 써도 마력이 고갈되지 않았다. 누아르 제벨라의 경우에는 유폐의 마왕의 마력은 사용하지 않지만, 단순 마력량을 따지자면 진즉에 마왕급에 도달했다.


아이리스는 저 둘에 비해 마력이 빈궁했다. 예전 키옐에서 싸울 때만 하여도, 아이리스는 이번처럼 마안을 난사하지 못했다.


‘시엘의 백염식은 4성.’


유진이 괴물같이 빠른 것이지, 시엘의 백염식도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될 만큼 높은 경지다. 당장 토벌대에서도 시엘보다 마나의 양이 많은 것은 카르멘이나 오르투스, 아이빅 정도의 강자들뿐이다.


‘마나를 사용해 마안의 권능을 일으킨다……. 유례가 없는 일이야. 어느 정도나 재현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시엘의 마안이 얼마큼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저 마안이 정말로 베르무트의 선물이라면, 정말 부조리하다 싶을 정도의 권능이 깃들었을지도 모른다. 가령, 아무런 소모 없이 권능만 일으키거나…….


“간다.”


시엘은 눈앞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화아악! 왼쪽 눈동자가 금색 빛을 발했다. 시엘이 포착한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그 한복판에서 시커먼 어둠이 나타났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생성된 어둠을 본 순간 유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저 어둠. 아이리스가 만들어내던 암흑. 비록 크기는 주먹보다 조금 큰 정도지만, 스멀스멀 번져가는 어둠이 점점 크기를 키워가고 있…….


피슛!


시엘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코피가 뿜어졌다.


귀향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갈 만큼 코피가 터졌지만, 다행히도 시엘의 몸은 정상이었다.


한순간에 대량의 마나가 소모된 것에 대한 부담이 강하게 찾아온 것뿐. 신성마법이나 포션을 쓸 것도 없이, 휴지를 돌돌 말아 콧구멍을 틀어막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


머리가 조금 어지럽기도 했다. 입맛도 구리고, 속도 울렁거렸다. 콧구멍 두 개에 휴지가 꽂혀 있어서 숨을 쉬기가 불편했다.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피유, 피유 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게 맞지.”


유진은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그냥 마안도 아니고 암전의 마안이잖아. 그 아이리스도 마왕이 되기 전에는 남발하지 못한 마안이라니까?”


“…….”


“그런 대단한 마안을, 갖자마자 바로 쓰는 것이 이상한 거야.”


“며칠 전에는 잘 썼거든?”


“처음이니까 시험해 보라고 공짜로 쓰게 해줬나 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마안이 무슨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싸구려 장난감인 줄 알아?”


“언성 높이지 마, 감정 격해지지도 말고. 봐, 또 피 나잖아.”


에잉…… 유진은 혀를 끌끌 차며 휴지를 새로 꺼내 시엘에게 건네주었다. 시엘은 뚱한 표정으로 유진을 흘겨보면서 휴지를 받았다. 그리고는 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몸을 돌려 코를 새로운 휴지로 틀어막았다.


“쓰레기 줘.”


“미친 소리 하지 마. 내가 이걸 왜 줘?”


“너야말로 미친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이상한 사람 같잖아. 까놓고 네 콧구멍에 들어간 피 묻은 휴지를 내가 사적으로 갖고 싶어 할 것 같냐?”


“그렇기는 한데,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시엘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마나를 일으켰다. 돌돌 말린 휴지 두 개가 불꽃에 휘감겨 사라졌다.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일까요?”


반대편에서 시엘의 손바닥을 주물거리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저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시엘이 처음 마안을 썼던 것은 유진이 신검을 뽑던 순간이다. 그때 시엘은 자신의 눈에 마안이 깃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정신이 또렷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높은 하늘 한복판에서 마왕과 대치 중인 유진을 보았다. 그런 유진에게 다가가는 마왕을 보았다.


“확실히…… 그때 저는 무의식적으로 유진을 봤어요. 마왕을 가로막아야 한다. 유진을 도와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죠.”


새로이 휴지를 꽂은 시엘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이 눈동자가 마안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럴 수 있었던 거잖아요? 이미 의식하게 되어버린 이상 다시 무의식적으로 마안의 권능을 쓰는 것은…….”


“너희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잠자코 듣고 있던 세냐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듣자 듣자 하니까, 참나…… 그새 잊어버렸어? 그때 누아르 제벨라, 그 망할 갈X가 시엘의 눈에 약을 넣었다고 했잖아.”


“아.”


“시무인 왕가의 비약. 다친 눈동자를 치료하겠답시고 부은 것이지만, 그 순간에 터진 눈동자가 마안으로 수복되어 버렸지. 그럼 부어버린 비약은 어떻게 됐겠어?”


“음…… 글쎄요…….”


“어떻게 됐기는, 네 마안에 스며든 거지! 소실되거나 네게 더해졌어야 할 잉여 마나가 부스터 역할을 한 거야. 그래서 시엘, 네게 큰 부담이 없이 권능이 발현된 거야.”


어때? 직접 내뱉지는 않았지만, 세냐는 자신의 주장을 확신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논파할 수도, 굳이 논파할 필요도 없는 깔끔한 의견이었다.


“건방 떨지 마.”


그냥 저 으스대는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 유진은 그렇게 한 마디 쏘아붙였고,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그럼…… 당장은 제 마나가 부족해서 쓸 수 없다는 거네요?”


“그렇지!”


세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생각해서, 마나만 충분하다면 마안의 권능을 쓸 수 있다는 거야.”


시엘이 가진 마나가 부족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백염식의 성취를 올려서 마나에 여유가 생길지라도, 권능을 개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너나 내가 마나를 지원해주는 것은 어때?”


그 외에도 마나를 지원해 줄 방법은 여럿 있다. 유진이 하고 있는 것처럼 아카샤를 쓸 수도 있고, 라이미르아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괜찮아.”


세냐가 대답하기 전에 오히려 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런 지원을 받아 마안을 쓰는 것보다…… 너와 세냐 님이 싸우는 것이 훨씬 더 강할걸.”


“그건 그래.”


유진도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암전의 마안의 권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나, 급박한 실전 중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도 없는 마안에까지 마나를 지원하는 것은 솔직히 낭비였다.


하지만.


암전의 마안의 권능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생성한 암흑물질 사이를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마안 중에서도 가장 직관적이며 강력한 권능이다. 꼭 적을 공격하는 것에 쓰지 않아도, 활용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변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공격을 보태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지원의 전부는 아니다.


“모론.”


그 이름을 떠올린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세냐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크리스티나는 짧은 감탄성을 냈다. 아니스도 크리스티나의 안에서 기도문을 외었다.


모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레헤인야르에 있다. 어쩌면 누르를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죽인 누르의 시체를 라구르야란을 향해 집어 던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괴이한 공간. 베르무트에 의해 출입할 수 있게 된 레헤인야르의 이면.


‘…….’


그곳에 처음 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모론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저절로, 결계의 문이 열렸다. 월광검이…… 결계의 문을 여는 열쇠로 쓰였다. 당시에도 의문이었지만, 깊이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아마…… 아마, 베르무트의 안배겠지. 월광검은 베르무트의 애검이었으니, 그래서.


하지만 지금은 보다 깊이,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월광검은 멸망의 검이다. 누르는, 멸망의 짐승이다. 그런 누르가 나타나는 레헤인야르의 이면도, 세상의 끝이라 하는 라구르야란도. 모두가 멸망의 마왕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베르무트는…….


“모론은 레헤인야르를 떠나지 않을 거야.”


유진은, 베르무트에 대한 생각은 멈췄다. 아직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진실도 모르면서 베르무트에 대한 억측과 오해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베르무트에 대한 믿음을 흔들리게 만든다.


“그, 등신은…… 뭔지도 모를 일그러진 세상에서, 100년이 넘도록 괴물을 죽여 왔다. 죽고 싶은데도 죽지도 못하고, 계속 그래왔어. 베르무트 그 새끼와의 약속 때문에 말이야.”


누르를 죽이는 것. 라구르야란에서 끝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 모론은 그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누르는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몇 마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모론은 레헤인야르를 떠날 수 없다.


“하지만…… 바벨을 올라서, 유폐의 마왕과 싸운다고 하면…… 그 등신도 함께 싸우겠다고 말해줄 거야.”


세냐조차도 장거리 공간이동은 쓸 수 없다. 드래곤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서 거리를 무시하고 공간이동을 쓸 수 있는 존재는 마왕뿐이다. 비슷한 것으로 세계수의 나뭇잎이 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모든 나뭇잎이 가능한 것도 아니며, 세계수의 나뭇잎을 사용해 도착할 수 있는 곳은 엘프의 영지 하나뿐이다.


유폐의 마왕성은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의 중심에 있다. 그 도시에도 수십 개의 워프게이트가 있기는 하지만, 전쟁 중에 워프게이트가 가동할 리가 없다.


애당초 마왕을, 헬무드란 거대제국의 황제를 죽이러 가는 것인데 수도의 워프게이트를 쓴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만약, 시엘이 암전의 마안을 스스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마안의 권능을 자유로이 쓸 수 있게 된다면. 레헤인야르에 있는 모론을 바벨까지 불러오는 것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ㅡ 300년 전에 이루지 못했던 유폐의 마왕 토벌을, 다시 한번 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베르무트 없이.’


무겁다.


왼쪽 눈동자가 무겁다. 시엘은 꿀꺽 침을 삼키며 눈가를 어루만졌다.


지금 거론되는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엘이 반드시 마안의 권능을 다룰 수 있어야만 했다. 어수룩하게 다뤄서도 안 된다.


대륙 최북단인 레헤인야르. 비슷한 북쪽이기는 해도 한참은 떨어진, 말을 달려도 몇 달은 이동해야 할 판데모니엄.


그 아득한 거리에 마안으로 길을 이어야 한다.


“괜찮아.”


세냐는 시엘의 얼굴이 무거워진 것을 보며 입술을 열었다.


“암전의 마안. 그 개 같은 눈깔…….”


자연스레 내뱉은 뒤. 세냐는 아차 싶어서 입술을 두드렸다.


“으흠. 네…… 멋진 눈알…… 말이야. 그 마안에 대해서는 아이리스만큼이나 내가 잘 알아.”


아이리스의 마안을 공략하기 위한 연구는 이미 200년도 전에 끝냈다. 마안의 권능의 발현과정까지는 해석이 불가능했지만, 암흑물질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 지는 오래전에 파악했다.


“당장 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크리스티나도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시엘은 몇 번 헛기침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사이에 코피도 완전히 멎었다. 시엘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돌려서 휴지를 뽑고, 불태웠다.


“괜찮아졌어.”


“그럼 다음으로 가자.”


세냐가 벌떡 일어섰다.


“남은 하나도 시험해 봐야지. 네 마안. 권능이 두 개잖아? 암전의 마안이랑…….”


“부동의 마안이요.”


“꼭 그 이름으로 불러야 돼? 갈X의 여왕이 붙인 이름이잖아.”


“뭐 다른 이름으로 붙일까?”


“정지의 마안?”


“부동이나 정지나…….”


“이름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런데, 누아르가 붙인 이름을 그대로 써버리는 것도 기분 나쁘잖아.”


하지만 마땅히 붙일 이름도 없었다.


* * *


나흘 전.


누아르 제벨라는 조용히 눈을 떴다. 비명은커녕 짧거나 작은 신음조차도 내뱉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눈동자를 말똥거리며 천장을 보다가,


“아핫.”


하고 웃음을 흘렸다. 빙의가 강제로 해제되었다.


마왕을 오시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본신에 남겨두고, 오직 정신만이 거리를 초월해 권속인 몽마에게 깃든 상태. 그런 빙의 상태일 때에 누아르는 아주 약해진다.


그렇기에 유진의ㅡ 하멜의 단검은 누아르에게 아팠고, 즐거웠다.


“아쉬운걸.”


누아르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가슴 위로 올렸다.


흉터는 남지 않았다. 가슴에 꽂혔던 단검도 이곳에는 없다. 누아르는 그 모든 것이 아쉬웠다. 자그마한 흉터 하나라도 남았다면, 사랑하는 하멜이 남긴 선물이라 기뻐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떡해.”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누웠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더, 더,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


3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번 죽었고, 환생했다. 그렇게나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하멜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더 지독해졌다.


전생에 실패했기 때문일까? 그토록 증오하던 마족에게 죽었기 때문일까. 지금의 하멜은 300년 전의 하멜보다 훨씬 더 지독한 증오를 품고 있다.


누아르는 그런 하멜의 증오를 사랑한다. 마족에 대한 하멜의 일방적인 살의를 사랑한다.


만상을 창조하고 현실과 환상의 구분을 넘나드는 누아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죽음만큼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멜이라면. 마치…… 마족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그 남자라면…….


‘아이리스가 죽었어.’


뺨이 열기로 화끈거렸다. 이토록 순수한 사랑을 실감해 본 적이 있던가?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기껏 마왕이 되었는데 말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누아르는 아이리스에 대해서는 일말의 연민도 갖고 있지 않다. 아이리스를 불쌍하게 여기느니, 이곳 제벨라 파크에 전 재산을 탕진해 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자 버러지들을 동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의 하멜.”


마왕이 되어 얻은 힘과 격. 그 모두가 누아르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고작 아이리스 따위에게 고전한다면, 이번 생에서 하멜의 검은 절대로 누아르에게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베르무트도, 모론도 없는 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멜은 고전하지 않았다. 세냐와 성녀의 지원을 받으면서, 베르무트의 모론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리고 마지막ㅡ 하멜이 뽑았던 붉은 검. 빛이되 빛이 아닌 것만 같은, 이질적인 힘.


“그 힘은 마왕에게도 닿아.”


누아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꾸욱 눌렀다.


“하지만 내게는 닿지 못해.”


누아르는 붉은 입술을 열어 웃었다.


그녀는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창가에 다가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두꺼운 커튼이지만, 누아르의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벽 한 면을 통째로 사용한 유리벽에서 빛이 보였다.


햇빛이 아니다. 이 도시에 태양은 뜨지 않는다. 태양을 대신해 도시를 밝히고 있는 수천수만의 조명이 누아르의 가슴을 간질였다.


살랑살랑 움직이던 꼬리가 쭈욱 늘어나더니, 소파에 걸쳐져 있던 화려한 가운을 끌어왔다. 누아르는 새하얀 알몸 위에 가운을 걸치고서 창문 앞에 섰다.


“그야 나는 지금도 강해지고 있는걸.”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랄랄라~ 랄랄라~]


[해피해피해피 제벨라~]


[에브리데이~ 제벨라데이~]


[웰컴 투 더 제벨라 파크~]


[드림스 컴 트루~~]


[제, 제, 제~ 제제제~ 제벨라 파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단언컨대, 헬무드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헬무드에서 수도 판데모니엄 다음으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도시.


화려한 조명이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영원한 밤의 도시.


값만 지불한다면,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유흥의 도시.


이 도시, 제벨라 파크는 누아르만을 위한 지상 최대의 정기(精氣) 공장이다. 누아르는 자신이 이룩해 낸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우우우ㅡ!


누아르 제벨라의 공중 저택이자, 제벨라 파크의 마스코트. 하늘을 날아다니는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열렸다.


“서프라이즈~ 제벨라 쇼타임!”


정해진 일정 없이, 오직 누아르의 기분에 따라서 시작되는 제벨라 쇼타임.


“와아아아아아!”


도시 전체가 함성에 뒤흔들린다. 호텔 최상층에 투숙하는 신분 높은 관광객들마저 창문을 열어 몸을 내밀고, 환호성을 지으며 양팔을 허우적댔다.


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양팔을 활짝 펼쳤다. 위이이이잉ㅡ! 제벨라 페이스가 누아르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완전히 기울어 버린 제벨라 페이스가 도시와 시선을 마주쳤다.


“판타스틱.”


누아르가 속삭였다.


화아아악! 도시 전체에 환상의 마안이 작용했다.


제벨라 파크의 주인. 그 몽마의 여왕이 만드는 꿈은 일국의 왕조차도 살 수 없다. 꿈을 사고파는 것은 철저하게 누아르의 기분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 제벨라 쇼타임에서는ㅡ 짧게나마 누아르가 모두에게 ‘꿈’을 보여준다.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던 것들이 환상의 마안에 의해 짧은 꿈으로나마 실현되는 것이다.


꿈속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 꿈을 통해 빠져나가는 미량의 원기. 그 모든 것이 누아르의 힘으로 더해진다.


“하멜.”


누아르는 허공에 누우며 속삭였다.


“당신의 검은 과연 언제쯤 내게 닿을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누아르는 하멜의 눈동자와, 목소리와, 살짝 닿은 순간에 느낀 살결의 감촉과, 냄새와, 증오와, 살의를 떠올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귀향


또각또각하는 구두 굽 소리가 다가왔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가비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안경을 썼다.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은 곤란하오.”


가비드의 매일은 여유를 찾기 힘들 만큼 바쁘다. 이 거대한 헬무드 제국, 대부분의 행정은 최후에는 반드시 가비드를 거치고서 승인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비드는 수도 판데모니엄의 치안총감이자 마왕군의 군단장이며, 그 외에도 여러 직위를 가지고 있다. 바벨의 경비대이자 마왕의 친위대, 검은 안개의 기사단장 자리가 가비드가 맡은 직위 중에서 가장 한가한 것일 정도다.


지금만 해도 가비드는 판데모니엄 상공을 떠도는 수천 대의 에어피쉬가 관측한 자료들을 살피고 있었다.


수도 판데모니엄은 대륙 모든 국가를 통 틀어도 범죄율이 가장 낮은 도시다. 마왕이 다스리는 마족 국가, 전 대륙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도시가 치안이 좋다는 것도 우스운 일일 테지만, 판데모니엄의 치안이 훌륭한 것에는 가비드를 비롯해 바벨에 근무하는 마족 수천 명의 노고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업무도 산처럼 쌓여 있다.


본래부터 마족이란 족속은 힘을 과시하고 동족을 죽이며 제 힘을 키우는 향상심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었다.


헬무드는 제국이 되면서 마족의 저러한 본성을 여러 규율로 억제했으나, 저번 유폐의 지팡이 임명식 이후로, 헬무드에서 마족간의 서열전에 필요한 복잡한 절차들 대부분이 사라졌다.


그로 인해 마족간의 결투가 사소하고 흔해졌고, 가비드와 바벨 공직자들의 업무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결투가 흔해지면서 마족들의 서열이 시간 단위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안정될 때까지는 앞으로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물론 누아르 제벨라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방문한 것으로 바벨의 업무조직들 대부분이 마비되었지만, 그 또한 누아르가 알 바는 아닌 것이다.


지금 당장 업무를 할 수 없다면 나중에 못 한 만큼 더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 마왕성 바벨에서 근무하는 마족들은 헬무드의 최고 엘리트 화이트칼라. 살아서도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으며, 퇴임 후에도 영멸까지 복지가 보장된 공무원들이다.


누아르 제벨라가 매년 뜯기는 천문학적인 세금이 바벨 마족들의 월급으로 지급된다. 헬무드 최고모범납세자 랭킹의 1위를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누아르는,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을 그만큼이나 뜯어가는 공무원들을 상대로 갑작스런 방문 정도는 사소한 일이라 생각했다.


“곤란한 것은 내년에 내가 받게 될 세금폭탄이에요.”


누아르는 훗 웃으며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섞인 말이기도 했다.


앞으로 고작 이틀 후면 올해가 끝나 버린다. 올해의 누아르는 헬무드가 제국이 되고서 300년 역사 중에서도 기념비적이고 신화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아이리스에게 영지전으로 빼앗은 검은 나무숲. 그곳을 싸그리 밀어버리고 세운 제벨라 시티. 그 부지 대부분을 사용하는 제벨라 파크는, 오픈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누아르가 본래 가지고 있던 영지, 드리미아의 월 수익을 돌파했다.


도시의 화려한 성공은 누아르를 무척이나 기쁘게 했지만ㅡ 헬무드는 고위연봉자에 대한 세율이 살인적이다. 인간 이민자들에 대한 천국적인 복지가 가능한 것은, 누아르와 같은 제국 최상위계층들이 지불하는 천문학적인 세금 덕분이다.


“세율 협상이라도 하러 온 거요?”


가비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


엘리베이터에서 걸어오는 누아르의 모습은…… 헬무드에서 신화적인 성공을 거둔 굴지의 여성 CEO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슬아슬하리만큼 짧은 스커트에, 몸의 굴곡을 과시하듯 드러내는 타이트한 정장. 오직 겉멋만을 위해 쓰고 있는 안경…….


또각, 또각, 또각. 구두 굽의 소리가 왜 계속 들리나 했더니, 누아르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뭘 하러 온 거요?”


세율 협상을 위해 온 것은 아니다. 가비드는 당장에라도 내쫓아 버리고 싶었지만, ‘세금폭탄’이라는 말을 들어버렸으니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는 헬무드의 재정을 굴러가게 만드는 최고납세자. 가비드는 그것을 감안하여 목소리에서의 분노와 짜증을 살짝 덜어냈다.


“위.”


후욱.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던 누아르가 한순간에 가비드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서류 가득한 책상에 큼직한 엉덩이를 걸치고 앉더니, 가비드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올라가도 될까요?”


“미쳤소?”


뇌쇄적인 향기가 다가왔지만 가비드의 감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누아르가 엉덩이로 깔고 앉은 서류를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당신이 아무리 공작이고, 헬무드 최대 납세자라고 해도 유폐의 마왕님을 알현할 수는 없소. 그를 요구할 권리도 없고.”


“뭐 이리 각박하게 굴어요? 우리는 오랜 친구 사이잖아요.”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지?”


“글쎄요, 300년 전부터? 아니면 라이자키아 그 병신의 사망이 확정된 한 달 전부터?”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말했지만, 가비드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었다.


“병신이라. 틀린 말은 아니군.”


수백 년 동안 은둔했던 공작. 영지인 용마성이 추락해서 파괴당했는데도 모습 한 번 보이지 않던 마룡 라이자키아.


헬무드뿐만 아니라 대륙 모두가 마룡의 행방에 대해 의문을 가져왔는데, 한 달 전부터 해서 마룡에 대한 비보가 세상에 알려졌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 시건방진 애송이가…… 라이자키아를 죽였다고 한다. 수백 년 동안 사마르 대수림 쪽에서 은둔하던 라이자키아를 찾아내서, 죽여 버렸다고 한다.


그냥 죽여 버리고 끝난 것도 아니다.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가문에 들고 와서 과시하고, 라이언하트의 전력증강을 위한 소재로 삼는단다.


“최고이자 최흉이라며 거들먹거린 주제에, 인간에게 사냥당하다니…….”


심증은 있었다. 하지만 확신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라이자키아가 병신이라 해도, 고룡이자 마룡인 라이자키아가…… 군단도 아니고 인간 한 명에게 사냥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자키아는 정말로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사냥당했다.


“그는 훌륭해.”


가비드는 라이자키아의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가정을 덧붙였다.


수백 년 동안 은둔했다는 것은, 은둔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 라이자키아는 세냐 메르데인에 대해 과할 정도로 집착했고, 둘은 비슷한 시기에 은거했다. 그리고 세냐 메르데인은 은거에서 돌아왔지만, 라이자키아는 돌아오지 못했다…….


라이자키아는 치명상을 입어 약해졌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세냐 메르데인. 둘이 함께 라이자키아을 사냥했다.


“단언컨대, 유진 라이언하트는 그 나이 때의 베르무트보다 강할 거요.”


저런 가정이 있다고 해도, 유진 라이언하트의 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트마치와 라이자키아의 토벌. 둘 사이의 간극은 1년도 안 된다. 1년도 되지 않아 유진 라이언하트의 힘은 라이자키아를 넘어섰다…….


“그래서예요.”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오늘 바벨에 방문한 것은, 유폐의 마왕과 독대하기 위해서다.


유폐의 마왕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유폐의 마왕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왜 전장에 개입하여 하멜을 구한 것인지.


‘궁금해.’


유폐의 마왕뿐만이 아니다.


‘나의 하멜.’


월광검이 내뿜던 불길한 빛. 그리고, 광란의 마왕을 참살하던 순간에 보였던 빛. 둘은 다르다. 누아르가 생각하기에, 저런 힘들은 한 명의 인간에게서는 절대로 공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특별해.’


그 베르무트조차도 저런 힘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유폐의 마왕이 하멜을 구한 것일까? ……왜? 마왕에게 있어서 용사는 무조건 적대해야 할 존재가 아닌가?


“솔직하게 말할게요, 린드먼 공작. 나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탐이 나요.”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누아르는 진심을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령 유진의 정체가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이나. 어제 남쪽 바다에서, 광란의 마왕이 된 아이리스가 유진에게 죽었다는 것.


‘모두 다 늦고 빠르고의 차이일 뿐,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특히 마왕 토벌은 아무리 늦어도 한 달 뒤에는 세상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유진의 정체도…… 가비드와 유진이 진심으로 검을 맞댄 순간에 깨닫게 되리라.


“유폐의 마왕님은 유진 라이언하트…… 용사가 바벨에 오르기를 고대하고 계시죠. 유폐의 칼인 당신은, 용사가 바벨에 오르려는 순간에 참살할 생각일 테고.”


“그렇지.”


“하지만, 어떡하죠? 말했잖아요, 나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탐이 나요. 이건 정말로 욕심인데, 기왕이면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아르는 걸치고 있던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가비드를 응시했다.


“어떡할까요? 생각은 여러 가지 있기는 한데, 타락시켜 버릴까요? 쾌락의 노예로 만들어서 내가 없으면 살 수 없게 만들어 버릴까요? 내게 매달리고 의존하게 만드는 거야.”


“…….”


“흠…… 고결하고 강한 용사를 개처럼 타락시키는 것도 맛있지만, 고결하고 강한 채로 죽여 버리는 것도 구미가 당기네요.”


“유진 라이언하트가 바벨에 오르게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군.”


“그가 바벨에 오르기 전에, 나를 먼저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누아르는 방긋 웃었다.


“나를 죽이러 말이에요. 그럴 경우, 내가 얌전히 목을 내어주거나…… 전투를 피해 도망칠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유진이 나를 죽이러 온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살의에 부응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은가요?”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


가비드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지.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말이오.”


바벨을 올라, 내게 검을 겨누어라.


언젠가 네가 바벨에 올 날을 고대하마.


“나는 유폐의 마왕님을 위해 존재하는 칼이오. 그분이 이곳, 바벨에서 용사를 기다리겠다고 한 이상. 그분의 칼인 나 역시 바벨에서 용사를 기다려야 하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문제이지, 누아르 제벨라 공작, 그대의 문제는 아니오.”


누아르는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사정을 모르는 가비드는 저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누아르는 가비드가 아닌 유폐의 마왕의 뜻을 알고 싶었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에게 틀림없이 바라는 것이 있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진이, 하멜이 바벨을 올라야 한다.


그런데 만약 누아르가 그러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래 버렸을 때, 유폐의 마왕은 어떻게 행동할까?


허락을.


“린드먼 공작은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요?”


받으러 온 것은 아니다.


누아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바벨의 90층, 가비드 린드먼의 집무실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누아르 본인도 알지 못한 사이에, 그녀는 90층을 넘어 위층에 있었다.


쇠사슬에 엮인 옥좌.


“너에 비해서는.”


유폐의 마왕이 말했다.


누아르가 예상했던 대로, 유폐의 마왕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제가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불쾌하신가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누아르는 웃으며 물었다. 유폐의 마왕은 누아르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어머…… 그런가요?”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안다. 용마성을 추락시킨 장본인이라는 것도 안다. 광란의 마왕을 죽인 것을 안다. 그를 해내게 한 ‘힘’이 신력이라는 것을 안다. 월광검이 폭주하는 순간 비쳤던 빛이, 멸망의 마력과 흡사하다는 것을 안다.


“확실히.”


시엘 라이언하트의 눈에 마안이 깃든 것을 안다.


두 개의 권능을 가진 마안. 마왕의 무구를 다루던 절망의 베르무트. 300년 지난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는 진한 피.


라이언하트의 본질.


저 모든 것은 누아르가 직접 보았던 것. 하지만 확신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저 모든 진실을 아는 존재는 둘뿐일 것이다.


‘절망의 베르무트와, 유폐의 마왕.’


그중 유폐의 마왕은 바로 앞에 있다.


“진실에 대한 답을 들으려면, 저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나요?”


누아르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유폐의 마왕을 우러렀다.


끼릭. 유폐의 마왕에게 이어진 사슬들이 쇳소리를 냈다. 유폐의 마왕은 손등으로 턱을 괴고서 빙긋 웃었다.


“자유.”


“자유……?”


“단어 그대로. 네가 진실을 듣고 싶다면, 대가로 자유를 바쳐야 한다.”


“어머…… 저는 지금도 당신에게 충성하고, 자유를 바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게 더 바쳐야 할 자유가 남아 있나요?”


“지금 네가 이곳에 있는 것. 내 의중을 떠보려는 것. 모두가 네가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자 사실은 누아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누아르는 과격하리만큼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켰다. 전쟁에서 활약한 전쟁영웅들을 타락시켜 힘을 빼앗았다. 아래에서 두각을 보이는 신흥 마족들도 견제하고 유혹했다. 헬무드를 넘어 대륙의 국가들에도 몽마들을 파견해 막대한 정기를 수급했다.


그토록 집요하고 꾸준히 힘을 키워왔음에도, 유폐의 마왕은 단 한 번도 누아르를 견제한 적이 없었다. 매해 납세하는 세금폭탄이 견제라면 견제일까……?


누아르는 잠시 유폐의 마왕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의 제가 자유롭다면…… ‘하멜’에게 손을 대도 괜찮은 것이겠죠?”


“그는.”


유폐의 마왕은 말을 마저 잇지 않고 큭큭 웃었다.


“자기 자신을 유진 라이언하트라 하더군.”


“멋져.”


누아르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하멜이란 이름이 더욱 인연이 깊은 걸요. 그리고, 내가 그를 ‘하멜’이라 부르는 것이 보다 특별하잖아요? 누구나 그를 유진이라고 부를 테니.”


“그를 부르는 것 역시 네 자유다.”


“맞아요, 자유. 그렇다면……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죠?”


누아르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유폐의 마왕에게 확실한 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은 하멜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멜이 바벨을 올라야만 한다.


“네가 하고 싶다면.”


그러나 유폐의 마왕은 저렇게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저러한 웃음이 더욱 의외였다. 지금의 유폐의 마왕에게는 언제나 느껴지던 권태가 희미했다.


“나는 그가 바벨에 오르기를 고대하고 있다.”


유폐의 마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가 바벨에 도전한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용사에게 아무런 시련도 주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벨에 오르고자 한다면, 나는 여태까지 그러했듯이 마왕으로서 용사를 시험할 것이다.”


“…….”


“그 시험에는 너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공작. 너뿐만이 아니지. 이 빌딩은 수백 년 전에 그러했듯 마왕성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 도시는 마왕의 영지로 돌아갈 것이다.”


“멋지네요.”


누아르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300년 전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저뿐만 아니라, 그 시대부터 살아온 모든 마족들의 바람이죠. 유폐의 마왕.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양보해 주었지만, 나는…… 마족은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아요. 왜 평화를 양보해 주어야 하죠?”


“약속을 맺었으니까.”


“그 약속이라는 것을 마족들은 납득하지 못한 거예요. 뭐, 좋아요. 300년 전의 일을 지금 와서 따져 물어 봤자죠. 제가…… 당신의 뜻을 감히 헤아려 보자면, 유폐의 마왕. 당신이 바라는 것은 시련을 극복한 용사라는 건가요?”


“그러지 않고서는 내게 도전할 자격이 없지.”


“자격이 없다면, 필요가 없다는 것이군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자격을 갖춘 새로운 용사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요?”


“답을 듣고 싶나?”


“아뇨. 유폐의 마왕. 저는 제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거든요.”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유폐의 마왕. 당신은 하멜이 바벨에 도전할 때, 그를 시험할 것이라 말했죠. 그 시험에는 저도 함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 순간의 저는 자유로운가요?”


“마족은 전투를 사랑하고 전쟁을 바라지.”


유폐의 마왕이 대답했다.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나의 전쟁을 원해요.”


누아르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위해 하멜을 시험하는 것이 아닌, 나의 욕심과 의지대로 하멜과 싸우고 싶은 거예요. 하멜이, 나에 대한 순수한 살의를 갖고서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을 원해요.”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답을 주도록 하마.”


유폐의 마왕의 두 눈이 얇아졌다.


“누아르 제벨라. 네가 유진을 죽이는 것에 나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유진을 죽이러 가는 것에도, 유진이 너를 죽이러 오는 것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아하하.”


저 대답이 누아르를 진심으로 웃게 만들었다. 결국 그녀가 바라던 가장 간절하던 답은 저것이었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하멜을 부숴 버리거나, 혹은 자기 자신이 부서지거나 하는, 서로의 존재와 존재가 부딪쳐서 상대를 완벽하게 소유하는 그 순간에 유폐의 마왕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에서 하멜은 오직 나만의 것이야.’


세냐 메르데인과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같은, 하멜의 동료들도 그 순간을 방해할 수는 없다.


그들의 공격이 누아르에게 쏟아질지라도, 누아르는 오직 하멜만을 볼 것이다. 그리고 하멜은 당연히 누아르에게만 살의를 쏟을 것이다. 그 순간의 격정은 누아르가 살아온 기나긴 시간 중에서도 최상의 희열이 될 것이다.


“바라는 답은 들었어요.”


누아르는 우아하게 몸을 낮춰 인사한 뒤에 등을 돌렸다.


“왜 마왕이 되지 않는 건가?”


몇 걸음 걷지 않아 유폐의 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아르 제벨라. 네 힘과 격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마왕이 될 수 있을 텐데.”


“어머…… 저를 그렇게 평가해 주실 줄이야.”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유폐의 마왕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저는 어떻게 마왕이 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걸요?”


“마왕이라 불려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것.”


유폐의 마왕은 침묵 없이 대답했다.


“너는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지배하고 희롱하고 있으며, 마왕이라 불리기 마땅한 힘을 쌓았다. 당장 네 도시의 인간들이, 너를 ‘몽마의 여왕’이 아닌 ‘마왕’이라 부르기 시작한다면. 너는 당장에라도 마왕이 될 수 있다.”


“역시 그렇군요.”


누아르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마력은 300년 전에 죽은 살육과 참혹, 광란의 마왕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아르는 아직 마족이다. 애당초 누아르 본인이 자신을 마왕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고, 마왕이 되고 싶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지금은 더더욱. 마왕이란 자각을 하지 않고 있다. 완전히 자각한 순간에 누아르에게 현혹된 모든 존재들이 누아르를 마왕이라 부를 것이고, 누아르는 몽마의 여왕이 아닌 ‘마왕’이 될 것이다.


“마왕이 되어버리면 특별하지 않게 되잖아요.”


누아르는 아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왕에 대한 살의는 너무 흔해. 이미 3명, 아니, 4명이나 되는 마왕이 하멜에게 죽었어요. 그리고 내가 마왕이 되어도, 나는 하멜에게 있어서 가장 증오하고 죽이고 싶은 마왕이 될 수는 없잖아요.”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몽마의 여왕으로 남아 있으면, 나는 하멜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몽마가 될 수 있죠. 가장 특별하고, 가장 증오하고, 가장 죽이고 싶은 마족이 될 수 있어요. 나에게는 마왕이란 이름보다 그것이 더 특별하고 매력적인걸요.”


하멜의 환생을 알기 전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마왕이 되어버리면, 유폐의 마왕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폐의 마왕의 힘을 알고 있는 누아르에게 있어서, 마왕이 되어 유폐의 마왕과 싸우는 것은 아무런 매력도 없는 일이었다.


하멜의 환생을 알게 된 후. 마왕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뀌었다. 지금의 누아르는 절대로 마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마족이자 몽마의 여왕으로 남아, 하멜에게 특별한 증오와 살의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여전하군.”


누아르 제벨라가 방에서 사라진 후.


유폐의 마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향


돌아오는 배에서도 마안의 점검은 계속됐다.


시엘에게 깃든 마안은 두 개. 암전의 마안과 부동의 마안. 유진은 저 ‘부동의 마안’이라는 이름이 누아르가 붙인 것이라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진 본인이 다른 이름을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유진 님이 지은 이름이 다른 누군가의 비웃음을 당할까 봐 두려우신 거죠?”


놀려대는 메르의 머리를 한 번 쥐어박았고, 왜 애에게 꿀밤을 먹이는 것이냐며 세냐에게 등짝을 한 대 맞았다.


암전의 마안은 그 권능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지만, 부동의 마안의 경우에는 아직 권능에 대해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소유자인 시엘에게 본능적인 이해가 있기는 하여도, 결국 권능의 성능에 대해서는 무식한 방법으로 검토하는 것이 확실했다.


“생각보다 가성비가 좋네.”


수십 번의 점검 결과, 세냐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암전의 마안보다 마나도 덜 먹고, 권능도 굉장히 직관적이야.”


시엘은 뻐근한 눈자위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도 저 평가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부동의 마안은 암전의 마안처럼 암흑물질 같은 것은 생성할 수 없다. 환상의 마안처럼 정신을 현혹할 수도 없다. 위신의 마왕처럼 제 몸에 마왕과 동일한 힘을 부여할 수도 없다. 부동의 마안의 권능은, 단어 그대로 무언가를 멈춰 버리는 것뿐이다.


“마나만 받쳐준다면 잠재력은 크다고 봐.”


유진은 허공에 멈춘 불꽃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 마안은 마나의 흐름이나 신성력의 빛마저 정지시키고, 인간의 움직임에도 간섭한다. 세세하게 파고든다면 심장의 박동이나 호흡마저 정지시킬 수 있다.


절대적이지는 않다. 마나를 아예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라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농락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마나를 다룰 줄 안다면 즉시 마안의 권능에 저항이 가능해진다.


그런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권능을 보다 강하게 발휘해야 하며, 당연히 권능이 강해질수록 마나의 소모는 커진다.


“탈진 직전까지 마나를 쏟아부어도 너 한 명 못 멈추잖아.”


시엘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치익! 허공에 멈춰 있던 불꽃이 사그라졌다.


“얼씨구. 그럼 내가 네 마안에 멈추는 것이 말이 되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는 대륙 전체에서 나보다 강한 인간이 없을 텐데, 그런 내가 갓 마안을 각성한 네게 붙들리는 것이 말이나 돼?”


맞는 말이기는 한데…… 유진이 으스대는 투로 말하니 시엘은 실눈을 뜨고 유진을 흘겨볼 수밖에 없었다.


“대륙 전체에서 네가 제일 강한 것은 아니잖아.”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모론 님이 너보다 더 세잖아.”


그 말에 유진의 뺨이 씰룩거렸다. 유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즉시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저번에 모론과 싸웠을 적…… 그것을 싸움이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만, 어쨌든 유진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애당초 모론 그 등신과 무기도 쥐지 않고서 맨손으로 치고받는 것은 베르무트조차도 꺼려 할 것이다.


“지금 싸우면 내가 이겨.”


유진은 가슴을 쫙 펴고서 말했다. 사실 저번 싸움에서도 맨손이 아니라 무기를 쥐고 싸웠다면 제법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네 생각은 어때? 나야 유진이랑 모론이 싸우는 건 직접 못 봤는데, 너희는 직접 봤잖아.”


세냐가 크리스티나를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크리스티나는 세상을 가르던 붉은 신검을 떠올렸고,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아 잡았다.


“유진 님이 이기실 겁니다.”


“참…… 그래……. 대단하다…….”


눈동자를 밝히는 빛. 흔들림 없는 믿음. 광기 어린 신앙을 목도한 세냐는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대륙 제일인 내게는 별 소용이 없었지만…….”


“거들먹거리는 것 좀 봐.”


“내버려 두십시오. 저와 당신과는 다르게, 하멜은 생전에 ‘대륙 제일’이라고 불려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새 바뀐 아니스와 세냐가 쑥덕거렸다.


사실이기는 했다. 세냐는 대륙 제일의 마법사라고 불렸다. 아니스도 대륙 제일의 성직자라고 불렸다. 베르무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모론도 안 불렸잖아……!”


“당신이 죽고 난 후, 모론은 대륙 제일의 전사라고 불렸습니다.”


“나도 살아 있을 적에는 대륙 제일의 용병이라고 불렸어.”


“저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당대의 용병왕부터가 너를 용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잖아.”


오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유진에게는 비수로 작용했다.


[본녀는 은자를 대륙 제일의 은자라 생각하느니라.]


망토 안의 라이미르아가 위로랍시고 말을 건네 왔다.


대륙 제일의 은자는 대체 뭔가? 유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일 겸 라이미르아의 맨질맨질한 이마를 몇 번 쓰다듬었다.


“……어쨌든…… 네 마안이…… 충분한 가능성을 지녔다고는 생각해.”


유진은 숨을 씨근거리며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부동의 마안. 저평가할 마안은 아니다. 광란의 마왕- 아이리스가 굉장히 약해진 상태이긴 했지만, 부동의 마안에 의해 아주 잠깐 행동이 억제됐던 것은 사실이다.


즉, 저 직관적인 능력의 마안은 마왕의 격에도 먹힌다는 것이다. 당장의 시엘은 불가능하겠지만, 세냐가 마나를 공급하거나 아카샤의 드래곤하트를 활용한다면 어떨까?


어차피 함대가 시무인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며칠은 더 항해해야 한다. 세냐는 구상한 방법들이 실현 가능한지에 대해 몰두했다.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아.”


결론을 내는 것에는 하루가 꼬박 걸렸다. 세냐는 바닥과 허공에 빼곡하게 그려 넣은 술식들을 지팡이를 흔들어 지워버렸다.


“결국 마안이란 것은 이능기관(異能器官)이자 신체기관이야.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될 것이 몸 안에 새로이 더해진 것이라고. 그렇다 보니 주인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마안에 마나를 쏟아 부어봤자 원하는 만큼의 권능을 일으킬 수는 없다. 7서클의 마법사가 무한한 마나를 갖게 되어봤자 8서클, 9서클의 마법을 쓸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다.


“아카샤와 같은 외부마법기관을 쥐어도 마찬가지야. 아마 이 경우에는 시엘의 실력…… 음, 그러니까 백염식 성취에 따라서…… 얘, 너 표정이 왜 그러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엘이 세냐를 돌아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제가 너무 약해서 세냐 님의 지원조차 받지 못한다는 거잖아요?”


“어…… 음, 으음……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아니고…….”


“저를 위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다구요.”


“아니, 얘…… 어어, 음, 너는 충분히 강하지. 인간 중에서는 말이야……. 당장 지금 수준으로도 어지간한 인간은 시선 한 번으로 제압할 수 있을걸?”


“하지만 세냐 님은 제압할 수가 없잖아요.”


“그야 나는 어지간한 인간이 아니…… 잠깐, 나를 제압하고 싶은 거야?”


세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물었고, 시엘은 대답 대신에 슬쩍 시선만 돌렸다.


세냐만 제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시엘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제압하고 싶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유진의 품 안을 독차지하고 있는 메르와 라이미르아도 제압하고 싶었다. 새로이 얻은 마안의 힘으로 모두를 무릎 꿇린 뒤에, 마찬가지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유진을 희롱…….


“으흠…….”


시엘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망측한 생각을 후다닥 지워냈다. 왜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일까 잠시 고민해 보니, 모든 것이 쌍둥이 오빠인 시안 때문이었다.


그 파렴치한 오빠는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는지 어릴 적부터 외설스러운 책들을 탐했었다…….


“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것일 뿐. 너나 시안도 재능은 충분해. 실전경험이나 전투감각도 그만하면 되었고.”


“그럼 뭐가 부족하다는 거야?”


“자아성찰? 명상이나…… 원래 나중 가면 땀 뻘뻘 흘리고 몸 움직이는 수행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이 중요해 져. 정신의 수양, 뭐 그런 것 말이야. 그러니까 본가 돌아가면 호수 밑에서 백염식이나 수행해.”


베르무트가 남겨놓은 라이언하트의 영맥. 대륙 전역을 뒤져도 라이언하트의 영맥만큼 마나가 풍부한 곳은 드물 텐데, 유진이 대수림에서 옮겨 놓은 세계수는 영맥을 더욱 발전시켰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라이언하트 본가 숲 전역이 영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마나가 풍부하다.


인공호수의 밑바닥. 본래 라이언하트의 영맥과 맞닿은 곳의 해저동굴.


그곳은 세계수 묘목들의 뿌리까지 얽혀서, 말 그대로 숨만 쉬어도 마나가 늘어나는 진귀한 땅이 되었다. 마법사인 세냐가 생각하기에는 그 해저동굴이야말로 라이언하트의 진짜 보물이었다.


유진도 지금의 성취를 이루는 데에 있어 해저동굴의 덕을 많이 보았다. 그곳에 틀어박혀 백염식을 수행한 덕에 번개불꽃도 강화되었고, 마나도 몇 배나 늘어났다. 해저동굴에서의 수행이 없었다면 월광검을 꺼낼 때마다 마나가 고갈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을 것이다.


“씨X.”


“뭐야?”


“왜 갑자기 욕을 하는 겁니까?”


“딸꾹.”


월광검에 대해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대뜸 내뱉은 욕설에 세냐는 눈살을 찡그렸고, 아니스는 실눈을 떴다. 그리고 시엘은 흠칫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월광검, 어떡하지?”


“어쩌긴 뭘 어째. 그 엿 같은 검, 그냥 여기 바다에 버리고 가면 안 돼?”


“버리기는 아깝고…….”


“다음에 또 그 꼴이 나면 어떡합니까?”


아니스가 정색까지 하고서 유진에게 쏘아붙였다.


“다음에 또 그 꼴이 난다는 보장은 없잖아.”


“얼씨구, 말은 참 잘하십니다. 겁먹어서 월광검을 꺼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니…… 겁먹어서 못 꺼내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꺼냈다가 괜히 배가 침몰하기라도 하면…….”


“뭍에 가면 괜찮다 이겁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기서는 적어도 배가 침몰하지는 않겠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망토 안을 들춰보았다. 유진의 자아를 집어삼키며 폭주했던 월광검은, 지금은 칼집 안에 얌전히 봉인되어 잠들어 있다.


그 날 이후, 유진은 월광검을 칼집에서 뽑지 않았다. 이그니션의 반동은 이미 끝났지만…… 몸이 멀쩡해졌다고 해서 월광검을 감당할 수 있으리란 자신이 희미했다.


‘변했어. 그건 확실해.’


아이리스와의 전투에서 백염식이 변화했듯, 월광검도 변화했다. 본래 월광검은 유진의 마나를 받아먹고 달빛을 켜는 주제에, 유진의 불꽃과는 절대로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리스와의 전투에서ㅡ 유진은 마나를, 불꽃을, 달빛과 합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손이 월광검과 뒤엉켰고, 달빛은 폭주했으며, 유진의 의식은 허무에 휩쓸렸다.


‘월광검에…… 내가 더해졌다. 아니, ‘하나’에 근접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는 말이 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러한 자각이 든다.


‘나’와 ‘검’이 따로가 아니라, 내가 곧 검이고 검이 곧 나라는 자각. 그러한 자각이 들게 되면, 그 순간부터 검을 휘두르는 ‘법’이 바뀌어 버린다.


그 경지는 전생에서 베르무트를 만나기도 전부터 도달해 있었다. 당시 하멜은 신검합일 정도가 아니라 신병합일(身兵合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무기에 통달했었다.


‘이제 와서 신검합일이라니…….’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지만, 월광검이 폭주하던 순간…… 유진은 그 끔찍하고 불길한 검과 합일에 근접해 있었다. 달빛은 폭주했지만, 유진은 바라던 대로 달빛과 불꽃을 섞어내며 아이리스를 몰아붙였었다.


솔직히 그 힘을 버리기는 아깝다.


“유진, 네가 고민하는 것부터가 이해가 안 돼. 베르무트의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그 검은 내 안배가 아니야.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남길 생각이 없었던 거잖아. 그럼에도 네 무덤에는 월광검이 있었고…….”


세냐는 말을 잇다 말고 입술을 잘근 씹었다.


세냐는, 사막의 지하에서 마주쳤던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그때 세냐는 베르무트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세냐는 몇 번이고 베르무트에게 말을 걸었지만, 베르무트는 칙칙한 눈으로 세냐를 응시할 뿐, 단 한 번도 입술을 열어 대답해 주지 않았다.


유진이 월광검의 폭주에 휘말렸을 때. 세냐는ㅡ 저때의 베르무트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결국 세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녀가 알고 있는 하멜이, 유진이, 그녀가 모르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지금.”


침묵하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베르무트의 안배야.”


유진의 입술이 비틀리며 올라갔다.


“진짜 솔직히 말해서, 세냐, 나는 그게 X같아.”


“…….”


“그 개새끼는 나를 멋대로 환생시켰어. 아, 그래. 베르무트 그 새끼도 조금은 억울할 거야. 나도 멋대로 뒈져 버렸으니.”


유진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는 베르무트 그 새끼의 의도대로 환생했고, 그 새끼가 남긴 안배를 받아먹어 왔지. 그 새끼가 뻔질나게 말했던, ‘너여야만 한다’라는 말도 이제는 대충 이해가 가.”


하지만.


“부족해.”


유진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내가 아가로트의 환생이건, 하멜의 환생이건, 안 되는 것은 안 돼. 부족하다고.”


“유진.”


“멸망의 마왕. 놈을 죽이는 데에, 멸망의 검인 월광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 그렇지만 유폐의 마왕에게는 쓸 수 있잖아.”


유진은 망토 안의 월광검을 의식했다.


“가비드 린드먼에게도, 누아르 제벨라에게도 쓸 수 있고 말이야.”


월광검은 불길하다. 멸망의 검이다. 자칫하다가는 자아가 달빛에 휩쓸려버릴지도 모른다.


여전히 유진은 멸망의 마왕에게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회의적이었지만, 무덤에 월광검이 있던 것이 베르무트의 안배가 아니라면…… 그때의 베르무트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면.


월광검 자체가 멸망의 마왕의 함정일 수도 있다.


“독배(毒杯)라는 것을 알아도 마셔야 돼.”


변형된 백염식.


시그니처.


마왕의 무구.


라이언하트의 무구.


공검.


성검.


신검.


가진 모든 것을 써도 누아르 제벨라를, 가비드 린드먼을, 유폐의 마왕을 이길 수 있으리란 확신은 없다.


“독이라도 쓰지 않는 한, 유폐의 마왕은 넘을 수 없어.”


솔가르타 해역에서 출발해, 시무인으로 돌아오는 항행 내내 생각했다.


월광검은 위험하다. 그건 누구보다 유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유진뿐만 아니라, 유진의 적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베르무트가 안배하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나야. 그 새끼가 안배하지 않았건, 내가 써야 한다고 판단한 거야.”


“…….”


“세냐, 너는 내가 베르무트가 의도한 대로만 움직이는 것을 바라는 거냐?”


유진은 고개를 들어 세냐를 노려보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세냐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며 내뱉었다. 유진은 세냐에게 시선을 거두어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저희는 유진 님의 결정에 따를 겁니다.”


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


“다만, 유진 님의 결정이 당신의 파멸로 향한다면. 저희는 유진 님을 대신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유진 님이 저희를 소중히 여기신다면, 부디 자신의 안위를 더욱 신경 써 주십시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시엘을 쳐다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그래도 만약, 네가 또…… 그 이상한 검에 의식이 끌려가 버리면. 내가……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저번처럼 널 잡아볼게.”


“그래.”


모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유진은 표정을 살짝 풀었다.


“일단 화내서 미안하고.”


“너…… 너, 정신병자야? 왜 갑자기 정색하고 분위기를 개판 치는 거야?”


세냐가 숨을 씨근거리며 물었다.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다리를 꼬았다.


“아니, 생각하니까 화가 나는 걸 어떡해. 이 엿 같은 월광검. 개 같은 베르무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쨌든 월광검은 내가 알아서 해 볼게.”


“뭘 너 알아서 하겠다는 거얏!”


“자, 들어봐. 옛날 베르무트가 쓰던 월광검이랑 지금의 월광검은 많은 차이가 있어. 일단 검 자체가 반 토막 났고…….”


“그게 뭐?!”


“아이리스한테 휘두를 때 말이야. 나는 월광검의 부족한 부분만큼 내 힘을 더하려고 했거든. 그러니까, 내 마나와 불꽃으로 달빛을 증폭시키려 했단 말이지. 그 과정에서 나 자신과 월광검이 섞이기 시작했고…….”


유진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섞이다가 내가 잡아먹혀 버렸지.”


“……그래서?”


“왜 잡아먹혔는가 하니, 내 힘이 부족해서. 월광검의 달빛에 비해 내 불꽃이 딸려서. 그렇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지금은?”


유진은 엄지손가락을 세우더니, 자기 자신을 척 하고 가리켰다.


“내가 누구?”


“…….”


“전쟁신 아가로트.”


“…….”


“크흠…… 신력도 쓸 수 있게 됐고, 백염식도 변화했으니, 저번처럼 월광검에 잡아먹히지는 않을 것 같다고. 힘의 균형을 유지해서 신검합일을 이루면, 폭주하는 일 없이 월광검을 써먹을 수 있단 말이야.”


“에휴…….”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난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


“언제는 나 알아서 안 했나…….”


“애니실라 부인한테 변명할 때도 너 알아서 해.”


광란의 마왕 토벌.


솔가르타 해역을 벗어난 즉시, 토벌대는 저 소식을 장거리 통신장치를 통해 시무인에게 알렸다. 아무런 보고 없이 결과만을 알린 것에 시무인 왕정은 크게 당황했지만, 일단 마왕을 토벌했다고는 알렸으니 대대적인 개선식이 준비될 것이다.


마왕 토벌의 소식이 알려진다면.


당연히 라이언하트도 개선식에 참가할 것이다.


“어떡하지…….”


세냐의 말을 들은 유진과 시엘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개선


빛의 신교의 최고 지도자이자 신성제국 유라스의 교황, 에우리우스. 크루세이더 라파엘로와 혈십자 기사단. 그리고 은밀히 교련 된 전투신관들.


교황이 말 한마디 내뱉는다면 유라스 모든 신민들이 신군(神軍)을 자처하며 모이겠지만, 교황은 수백 명만을 데리고서 교황청을 떠났다.


키옐 제국에서도 황제가 움직였다. 스트라우트 2세는 똥 씹은 얼굴로 알체스터를 불렀고, 대담이 시작되고 10분도 되지 않아서 백룡 기사단 전원이 소집되었다. 그 순간 내내 여전히 똥 씹은 얼굴이던 황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황궁을 떠났다.


아롯도 마찬가지였다. 국왕 다인돌프와 왕세자 호네인. 궁정마법사단장인 트렘펠과 마법병단의 최정예 마법사들. 거기에 3명의 마탑주들까지 합류했다.


흑색마탑주인 발자크 루드베스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고, 녹색마탑주인 제네릭 오스먼은 세냐에게 개망신을 당한 이후로 마탑주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아직 새로이 마탑주가 선출되지 않아 녹색마탑주 자리는 공석이다. 그 말인즉슨, 아롯에 있는 마탑주 전원이 움직였다는 말이다.


북방 루하르. 야수왕 아만 루하르는 머나 먼 레헤인야르를 쳐다보았다.


왕국의 시조, 용왕(勇王)께서는 여전히 두문불출이시다. 하지만…… 만약 용왕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셨다면. 그리고 용왕께서 행동이 자유로우시다면, 일체의 망설임 없이 왕국을 떠나셨으리라. 아만은 그렇게 확신하고, 왕국이 자랑하는 하얀 송곳니들을 데리고서 설원을 떠났다.


국가만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문명에 잠식되지 않은 사마르에서도 대전사가 몸을 일으켰다.


코칠라 부족을 멸족시키고 대수림의 일통을 목전에 둔 대부족 조란. 젊은 족장인 이바타 자하부도 창을 들고 전사들을 모았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숲에는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바타에게 어린 숲의 가호는, 이바타의 강렬한 의지에 따라 숲을 활짝 열어 길을 만들어주었다.


대륙이 움직였다.


* * *


남해에서 해적함대를 이끌며 날뛰던, 300년 전부터 살아온 괴물. 나찰공주 아이리스의 토벌. 그것까지는 대륙이 주시할지언정 움직일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찰공주가, 남해의 끝에서 마왕이 되었단다. 그리고 토벌대에 참가하지 않았던 유진 라이언하트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세냐 메르데인이 주축이 되어 마왕을 토벌했단다.


전설이나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나찰공주가, 다크엘프가 도대체 어떻게 마왕이 되었단 말인가? 아니, 그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토벌당했다고?


‘이걸 어쩐다…….’


시무인의 국왕. 오세리스 아니머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한숨을 삼켰다.


‘해적을 토벌하라고 보냈더니 마왕을…… 토벌했다고?’


이번 토벌대가 급하게 꾸려진 것은, 아이리스가 드워프 장인들을 대거 납치했기 때문이다.


고작 20명밖에 안 되는 드워프들이지만, 그들은 드워프라는 종족의 역사를 잇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장인들. 너무 과격해진 아이리스를 쳐낼 필요는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결국 토벌대의 출범은 드워프들의 파업과 시위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다행이랄 것은 납치되었던 드워프 장인들을 구출했다는 것…… 이기는 한데…….


오세리스는 결국 참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헬무드.’


마왕 토벌. 오세리스는 그것에 대해서 가슴이 벅차오르거나 하는 기쁨은 느낄 수가 없었다.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었다’라는 것에 대해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세리스는 두려움을 느꼈다.


헬무드를 다스리는 유폐의 마왕…… 그가…… 새로이 태어난 마왕에게 특별함을 느낀다면? 마왕의 죽음 자체가 유폐의 마왕에게 자극을 주었다면? 이유야 어쨌건, 유폐의 마왕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면?


나이트마치에서 유폐의 마왕은 약속의 끝에 대해 말했다. 오세리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약속의 끝. 300년 동안 이어지던 평화의 끝…… 오세리스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몸을 떨었다.


개선(凱旋).


해적에서 마왕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토벌대는 목적을, 전설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그렇다면 화려한 마중을 준비해야 하나? 그러한 행사부터가 유폐의 마왕을 자극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셰도르 섬은 일 년에 수십 개가 넘는 축제가 열린다. 이 섬의 시민들은 시끌벅적한 화려함에 중독되어 있다. 그 열기는 국왕의 엄령으로도 다스릴 수 없다.


수십 척이 넘는 함대가 귀항하는 것도 이미 섬 전체에 소문이 났다. 오세리스가 명하지 않아도 시민들은 개선의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그들을 상대로, 유폐의 마왕이 언짢아할지도 모르니 잠자코 집에나 틀어박혀 있으라고 왕명을 내려야 하나?


“…….”


오세리스가 고민에 대한 답을 내리기도 전에 현실이 충돌해 왔다.


대륙에 있어 시무인은 결코 소국이라 할 수는 없는 나라다. 영토 대부분이 바다나 섬들이기는 하지만, 시무인의 국력은 제국에는 비할 수 없어도 상당한 편이다.


하지만 열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대륙을 이끄는 것은 2개의 제국과 마도왕국 아롯. 군사력을 따진다면, 시무인은 척박한 북쪽 왕국 루하르나 사막 왕국 나하마만도 못하다.


강대국일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쇄국을 선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턱대고 찾아온 여러 국가의 수장들을 상대로 오세리느는 도저히 배짱을 부릴 수가 없었다.


국가도 아닌 대수림의 야만인들을 상대로도 그랬다. 워프게이트가 전역에 도입되지 않은 시무인에게 있어, 해상무역의 주된 고객은 바깥 섬들과 대수림의 여러 부족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오세리스는 아무런 반발도 하지 못하고 왕궁의 문을 열었다. 각각 수백 명의 병력을 끌고 온 일국의 지도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시무인의 왕성에 입성했다.


“대수림의 야만인들까지 오다니.”


스트라우트 2세는 조란의 전사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키옐 제국과 사마르 대수림은 빈말로라도 좋은 사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키옐은 오랫동안 드넓은 대수림을 정복하기를 바랐다. 유폐의 마왕이 대수림 원주민들의 자유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대수림은 진즉에 키옐의 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뻔뻔하고 이기적인 것들.’


스트라우트 2세는 대수림의 원주민들을 경멸했다.


제국의 지배에 저항한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숲의 야만인들은 틈이 보인다 싶으면 국경을 넘어 밀입국을 시도한다. 뿐만 아니라 각 대륙의 범죄자들은 무법지대인 대수림으로 넘어간다. 잊을 만하다 싶으면 제국민이 대수림에서 실종되기도 하고, 거액의 몸값을 요구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바타 자하부. 사마르의 일통을 목전에 둔 사내입니다.”


알체스터가 낮춘 목소리를 건넸다. 그는 멀찍이 서 있는 이바타를 주시했다. 올해로 22살이라고 들었는데…….


‘강하다.’


이바타에서 대륙의 강자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힘이 느껴졌다.


이바타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데리고 온 전사들 하나하나가 백룡 기사단의 단원들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의 강자들이었다.


‘저 정도였나?’


대수림의 부족들에게 미지의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저 젊은 족장과 전사들은 알체스터의 생각 이상으로 뛰어났다. 만약 저대로 이바타와 조란 부족이 대수림을 일통한다면, 어지간한 국가를 우습게 여길 만큼의 거대부족이 되리라.


“흥…… 그것도 우리 키옐 제국의 도움으로 이뤄낸 성과 아닌가?”


“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알체스터 경. 저 야만인들의 적대 부족이던 코칠라. 그들과의 전쟁에서 우리 키옐의 제국민인 유진 라이언하트가 큰 활약을 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하며 스트라우트 2세는 가슴을 활짝 폈다.


“저 젊은 야만인이 정식으로 양해를 구하며 국경을 넘어와, 라이언하트를 방문해 애걸하였다지? 부디 코칠라와의 전쟁에 도움을 주십사 말이야.”


“…….”


“그렇게 생각하니 대단치도 않군. 자비로운 제국이 허가하지 않았다면 저 야만인은 국경도 넘지 못했을 테고, 라이언하트에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겠지…….”


대수림의 전쟁에 관여한 것은 유진 뿐만이 아니다. 아롯의 마탑주가 3명이나 가세했고, 신성제국의 성녀까지 가세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키옐의 제국민인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지 않았나?


스트라우트 2세는 언짢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마왕 토벌…… 생각만 해도 표정이 구겨진다. 스트라우트 2세는 무슨 수를 쓰건 헬무드와의 전쟁을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최대한 유폐의 마왕을 자극하지 않으며, 약속을 연장할 방법을 모색하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마왕을 적대하는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의 정신을 지배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위대한 베르무트가 키옐 황가에 선물했던 ‘방’의 권능은 유진에게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유진 라이언하트는 300년 전의 영웅,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었다…….


‘끙…….’


조금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엉망이 되었다. 스트라우트 2세의 얼굴은 똥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유진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찾아온 현명한 세냐에게 야단을 맞고, 최고등급의 스파이에게나 발급하던 백지 신분증까지 강탈당했던 기억이 스트라우트 2세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크흠…… 폐하. 저 젊은 족장의 능력을 폄하하시는 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앞으로의 정세를 생각하면 이바타 족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편이…….”


“그래 봤자 숲에서 나뭇가지나 문질러 불을 피우는 야만인들 아닌가. 헬무드의 비호만 없어도 진즉에 밟아버리고 숲을 개간했을 터인데…… 흠, 이제는 그렇게 해도 되지 않나? 헬무드의 보살핌을 받던 코칠라 부족이 멸족하였으니 말이야.”


“제발, 폐하,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알겠네, 알겠어. 알체스터 경. 그대가 저 야만인들과의 친교를 바란다면, 짐은 제국의 올해의 주요 안건으로 대수림과의 친교를 올려두도록 하겠네.”


스트라우트 2세는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했다. 코칠라가 멸족하였다지만, 유폐의 마왕이나 다른 국가들은 우리 키옐 제국이 더욱 강성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짓밟아 정복할 수 없다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되면 대수림의 오물이 국경을 넘는 것들에 대해 정식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겠지.’


조란 부족이 대수림을 일통하는데 성공한다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많이도 모였군.”


스트라우트 2세는 이바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중얼거렸다.


스트라우트 2세가 알기론, 교황 에우리우스는 즉위하고 수십 년 동안 성국 유라스를 떠난 적이 단 두 번밖에 되지 않았다.


하나는 저번 나이트마치.


그리고 바로 지금.


“엉덩이 무거운 늙은이. 짐이 즉위할 때나, 제국의 주요 행사들에도 친필 서신 하나로 끝내더니…….”


“대륙의 명운을 결정짓고 격동시킬 일이잖습니까. 폐하께서도 와 계시고 말입니다.”


“끙…….”


알체스터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스트라우트 2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진심을 말하자면, 스트라우트 2세는 이 자리에 별로 오고 싶지 않았다. 황제가 나름의 방법대로, 진심으로 제국의 안위를 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자 용사인 유진과의 만남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성국의 교황도 그를 생각한 것이겠지요. 이번…… 마왕 토벌에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도 참가했고 말입니다. 또한 성국은 ‘빛의 용사’를 무시할 수 없지요.”


그렇게 말하며, 알체스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본심을 말하자면, 알체스터는 이번 토벌에 자신이 참가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마왕 토벌. 그 단어는 뼛속까지 기사인 알체스터의 가슴에 불꽃을 일으켰다.


‘나도…… 함께하고 싶었다.’


만약 유진이 은밀히 도움을 청했더라면. 알체스터는 오직 검 한 자루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 유진에게 향했을 것이다.


나이트마치. 용감한 모론과, 유폐의 마왕과, 가비드 린드먼에게 검을 겨누던 유진을 보았을 때부터 알체스터의 가슴에는 저러한 열망이 깃들었다.


‘카르멘 경은 그렇다 치고…… 오르투스 경이 참가한 전투에 내가 함께하지 못하다니…….’


카르멘의 무위. 그리고 강철 같은 신념은 알체스터도 인정하고 있다.


카르멘과 한번 만나본 기사들은 그녀를 두고서 미치광이나 괴짜라고 말할 테지만, 몇 번을 더 만나본다면 하나같이 카르멘을 인정하고 존경하게 되어버린다. 코흘리개 시절에 카르멘에게 지도를 받았던 알체스터도 당연히 카르멘을 존경하고 있다.


하지만 오르투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존경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르투스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알체스터가 알고 있는 ‘오르투스 하이만’이라는 인간은 타고난 재능과 이뤄낸 실력에 비해 인격은 그리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성직자들…… 그렇군. 저들이 유라스가 은밀히 교련했다던 전투신관들인가.”


“그럴 겁니다. 어떤 목적으로 조직되었는지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정황상 생각해 보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를 위한 친위대일 겁니다.”


“아롯의 마탑주들도 집결했군…….”


스트라우트 2세는 눈썹을 찡그리며 아롯의 인사들을 흘겨보았다.


본래 마탑주들은 아롯의 궁정마법사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마탑주들은 아롯이 타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에 중립에 서기로 약속되어 있으며, 마탑주들이 전투에 나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마탑이 전장이 되었을 때다.


하지만 이곳에는 은둔한 흑탑주와 퇴위한 녹탑주를 제외한 3명의 마탑주가 와 있다. 아롯의 국왕은 저들의 소집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마탑주들은 자기들의 의지로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현명한 세냐. 그녀가 이번 토벌에 참가해서. 그리고 이 토벌이 쓰러트린 적이 마왕이기 때문이다.


‘야수왕 아만 루하르……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용감한 모론의 의지인가? 대영웅의 후손이라는 자각 때문인가…… 둘 모두 아니라면…….’


야수왕 또한 유진 라이언하트가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일까? 어쩌면 야수왕과 유진 라이언하트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1명의 사람이 대륙을 움직이는군.’


결국 이 모든 것은 유진 라이언하트, 1명이 일으킨 파장이다. 스트라우트 2세는 그를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롯이 세냐를 위해 왔건, 유라스가 성녀를 위해 왔건. 그 모든 인과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유진 라이언하트다. 당장 대수림의 야만족들은 유진을 위해 이곳에 와 있다.


“나하마는 오지 않았군. 항마연합도 오지 않았고.”


“그들은 헬무드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막왕국 나하마는 오랫동안 헬무드와 인연을 맺어왔다. 예부터 사막의 지하 던전에는 흑마법사들이 많이 살았다. 지금 시대에서도 헬무드와 아롯 다음으로 흑마법사들이 많이 살던 곳이 나하마다.


현명한 세냐가 귀환한 후. 아롯의 흑마법사들이 아롯을 떠났다. 그들은 헬무드로 돌아가거나, 나하마의 지하 던전에 들어갔다. 지금에 이르러서 나하마는 헬무드를 제외하고서 가장 많은 흑마법사들이 사는 도시이며, 당장 술탄의 측근이자 나하마의 최고전력이 아멜리아 머윈이다.


“나하마는 그렇다 치고, 항마연합까지 오지 않다니. 입만 산 것들…….”


북쪽 소국이 뭉친 국제연합, 항마연합. 그들은 헬무드의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군사훈련을 벌이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연합장의 위치에 선 신성제국이 여기 와 있는 것과는 달리 항마연합의 다른 국가들은 한 명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왕 토벌을 전해 들은 헬무드와 유폐의 마왕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나?”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알체스터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마왕 토벌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만이 이곳에 온 이유는 아니다. 자세한 정황을 듣기 위해서만 온 것이 아니다. 키옐 제국이 백룡 기사단 전원을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은.


만약, 유폐의 마왕이…… 다른 마왕을 토벌한 것을 두고, 유진에게 손을 대려 한다면. 이 섬에서 개선의 축제가 아닌, 마왕과 헬무드와 대륙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혼란 속에서 유진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나라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군.”


기념하고 축하하고 싶다면 병력을 데려올 필요가 없다. 하지만 유라스와 아롯, 루하르는 정예 병력을 데리고 왔다. 심지어 사마르의 대족장도 병력을 데리고 왔다.


만약의 사태에서 용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저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런 자리에 키옐 제국이 오지 않았다면 망신거리가 되었겠구나.”


스트라우트 2세는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유폐의 마왕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확신은 이르지만, 스트라우트 2세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태까지도 그러지 않았나. 유폐의 마왕이 진심으로 평화를 부수고, 전쟁을 일으키고 싶었다면 몇 번이나 기회와 명분이 있었다. ……기회? 명분? 유폐의 마왕에게 그런 것이 필요나 할까?


‘용사는 아직 마왕성에 향하지 않았다…….’


스트라우트 2세는 그것을 생각하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가능하다면 평생 오르지 못하게 하고 싶지만…… 이미 실패한 일. 저 말을 ‘약속’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유폐의 마왕이 저 때까지 침묵해 주기를 바랄 뿐.


“크흠…… 크흐흠…….”


열강의 지배자들이 서로를 살피고 있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오가고 있다. 오세리스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어떻게든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섰다.


“그…… 이곳에 계시지들 말고, 일단은 안으로…… 오시지요…….”


황제와 교황. 2명의 국왕. 대부족장. 그들이 데려온 정예병력. 모두가 시무인 왕궁의 정원에 서 있다…….


각국이 데려온 병력은 많아야 이삼백 명의 기사단 하나지만, 모두가 대륙 제일의 기사단을 논할 때마다 항상 이름을 올리는 명문 중의 명문. 소국 하나는 거뜬히 멸망시킬 전력들이다. 오세리스는 지금 이곳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위가 아팠다.


“허억…….”


헐레벌떡 뛰어들어 온 근위기사가 전한 소식이 오세리스의 눈을 부릅떠지게 만들었다.


“라이언하트가 왔습니다.”


귀항


라이언하트.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 대륙 제일의 무가. 기사를 꿈꾸어 기사가 된 자들이 가장 섬기고 싶어 하는 가문.


그런 만큼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은 강하다. 본가 직속의 백사자 기사단의 일개 가문의 사병이라기엔 과할 만큼의 실력자들이 모여 있고, 그 숫자도 어지간한 왕국 기사단에 준한다.


백사자 기사단과는 달리, 라이언하트만으로 구성된 흑사자 기사단.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흑사자 기사단은 100명도 되지 않는 소수 정예로 운용되었다. 하지만 흑사자 성에서 시도되었던 반란 이후, 대대적인 개편을 거쳐 병력이 증원되었다.


“맙소사.”


스트라우트 2세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정문으로 들어오는 라이언하트의 병력은 대충 세어보아도 키옐의 백룡 기사단보다 많았다.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겠지만, 만약 라이언하트가 이 자리에서 모반을 시도한다면 키옐 제국뿐만 아니라 신성제국까지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저 정도였나?”


“본가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다 데려 온 모양입니다. 100명 정도는 백사자의 문양을 새기지 않을 것을 보니, 아마 수습기사인 듯싶습니다.”


알체스터의 판단대로였다. 남해의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었고, 유진 라이언하트에 의해 토벌되었다…….


길레이드는 그 소식을 들은 즉시 본가의 전력을 소집했다. 흑사자 성의 경비 병력은 최소로 남겼다. 일선에서 은퇴한 원로들마저 무장을 갖추고서 흑사자 성을 떠나 본가의 소집령을 따랐다. 백사자 기사단에 입단하기 위해 훈련 중인 수습기사들뿐만 아니라, 아직 흑사자 기사단에 입단하지 않은 방계마저 불러 모았다.


길레이드 또한 만약의 사태를 경계한 것이다. 설마 유폐의 마왕이 난입할까 싶기는 했지만, 300년 만에 이뤄진 마왕 토벌이 헬무드에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는 알 수 없는 일.


“……국경 경비는 괜찮은 것인가?”


스트라우트 2세는 헛기침을 하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라이언하트는 키옐 제국에서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는데, 그 특혜를 보장하는 조건 중 하나가 최남단 국경인 우클라스 산맥의 경비다.


“예. 경비에 필요한 병력은 유지 중입니다.”


“그쪽은 걱정할 필요 없소.”


멀찍이 서 있던 이바타가 끼어들었다. 그는 성큼 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황제와 길레이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조란의 족장, 이바타 자하부라 하오.”


설마 숲의 야만인이 제대로 된 말을 내뱉을 줄이야. 스트라우트 2세는 조금 놀랐다는 표정을 하고서 이바타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이군.”


길레이드도 이바타를 알아봤다. 저번에 이바타가 라이언하트에 방문했을 때, 잠깐이기는 했으나 이바타도 길레이드와 인사를 나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이바타 쪽에서 라이언하트에 대량의 전리품을 전달하기도 했었다.


“아직 숲의 혼란을 모두 거머쥐지는 못했소만, 우리도 국경 쪽에 전사들을 파견했소. 앞으로 대수림 쪽에서 우클라스 산을 넘는 일은 거의 없을 거요.”


절대 없을 것이란 말은 아니었지만, 대수림 일통을 앞둔 대족장이 직접 하는 말에는 커다란 무게가 있었다.


스트라우트 2세는 이바타와 라이언하트 사이의 유착을 느끼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제국을 위해서는 사적인 감정을 내비쳐서는 안 되었다.


“협력해 주어 고맙군. 오늘 이렇게 만나기는 했지만, 피차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니니…… 이바타 대족장. 숲의 문제가 마무리된다면, 다음에 정식으로 회담을 갖도록 하세.”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이바타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어…… 어흠…… 먼 길을 오시느라 다들 피곤하실 터인데…… 여기 서 계시지들 말고 어서 안으로…….”


오세리스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모두에게 권했다.


나하마의 검은 전갈을 제외한, 대륙 제일을 논하는 기사단들이 모두 모여 있다. 시무인 왕가의 권위를 ‘따위’로 취급할 수 있는 열강의 지배자들이 왕궁 정원에 모여 있단 말이다.


모두 합해 일천이 넘는 군세. 고작 천 명이 아니다. 저들 중 일부만 나서도 왕국 수돌르 함락하고 왕궁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려 왔다……. 오세리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요청했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례를 무릅쓰고 감히 묻겠습니다.”


십자가 형태의 대검을 등에 세운 소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년 시기에 멈춰 버린 성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제국 최강의 기사 자리에 오른 혈십자 기사단의 단장. 크루세이더 라파엘로 마르티네스. 그는 소년다운 반짝임이 조금도 없는 눈으로 오세리스를 응시했다.


“시무인은 사악을 숭배합니까?”


“뭐…… 뭐요?”


“마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까?”


“갑자기 무슨…….”


“이 나라의 왕가. 그리고 국왕 전하께서 이단이냐 묻고 있는 겁니다.”


라파엘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대놓고 들이박았다. 그 뜬금없는 질문에 오세리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오세리스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타국의 인물이라지만 저 말을 한 것이 일개 기사라면 경을 쳤을 터인데. 혈십자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것이 오세리스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특히 라파엘로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오히려 이쪽을 빤히 보는 교황의 시선이 오세리스를 압박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명을 내려 출범한 토벌대가 마왕을 토벌한 것 아닙니까.”


“그렇…….”


“헌데 전하의 얼굴에는 어이하여 수심이 가득하십니까.”


“그건…….”


“저희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전하께서는 마왕 토벌의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 왕궁까지 이동하는 동안 거리를 살펴보았는데, 도시의 시민들은 이미 흥에 겨워 개선 행사를 준비하고 있더군요.”


“그…….”


“하지만 이곳 왕궁은 어떠합니까. 빛께서 점지하신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가 마왕을 토벌하였는데, 어째서 시무인 왕궁은 침묵하고 있던 겁니까.”


라파엘로는 숨도 쉬지 않고서 쏘아붙였다. 끊기질 않고 이어지는 말들. 오세리스는 대답하고 싶었지만, 라파엘로가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말을 계속하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제 질문이 무례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마왕 토벌에 대해 아무런 기쁨도 보이지 않으시는 전하의 모습은 저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전하께서는 설마 마왕의 죽음에 애도를 느끼고 계시는 겁니까? 헬무드에 군림하는 사악한 유폐의 마왕을 숭배하고 계십니까? 왕가 전체가 마(魔)에 홀린 이단인 겁니까?”


라파엘로가 한 걸음 더 나아가며 물었다. 얼굴과 체격은 소년의 것에서 멈췄으나, 라파엘로의 두 눈은 신앙에 의한 광기가 번들거렸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그렇다면.”


이번에 입을 연 것은 에우리우스 교황이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 앞에 성호를 그었다.


“돌아올 용사를 위한 마중을 함께 준비하도록 합시다.”


“…….”


“내가 이 나라에 온 이유는, 당신의 왕궁에 들어가서 한가한 대화나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정예 병력을 데리고 온 것은 혹시 모를 헬무드의 반발을 견제하기 위해. 그것만이 목적의 전부는 아니다.


마왕을 토벌한 것은 빛이 선택한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 그리고 ‘성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교황은 그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빛께서 실재하시며 은혜로우심을 세상에 선전할 생각이었다.


“축포는 아롯의 마법사들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롯의 국왕, 다인돌프가 냉큼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다인돌프도 왕궁에 들어가서 제국 황제와 교황과 대담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힘쓸 일이 필요하다면 말해주시오. 나도 그렇지만, 송곳니들 또한 힘쓰는 일 외에는 영 젬병이니까.”


아만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교황이 ‘마중’을 말한 순간부터 분위기가 바뀌어서, 다들 개선의 축제를 어떻게 꾸려 나갈지에 대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오세리스는 헬무드의 눈치를 보느라 축제를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ㅡ 라는 변명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라파엘로가 여전히 광기 어린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무드의 눈치, 라고 말한 순간에 저 십자가 대검이 목으로 날아올 것만 같았다…….


“피…… 필요한 경비는 저희 나라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오세리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그 말을 내뱉었다.


* * *


출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가속된 항행은 시간을 절반 넘게 단축시켰다.


“요란하구만.”


유진은 마스트 위에 서서 팔짱을 꼈다.


가까이 보이는 시무인의 본섬, 셰도르.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이 거리에서도 섬이 얼마나 요란한지는 보이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시무인의 군함과 무역선 등을 여러 척 만났다. 그들은 셰도르에서 화려한 축제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리며, 축포랍시고 대포를 하늘에 펑펑 쏴대었다. 특히 군함들은 갑판 위에 선원들을 집결시키고서 충성, 하며 경례까지 해댔다.


“옛날 생각난다. 그치?”


아래에서 날아온 세냐가 유진의 곁에 멈춰 서며 키득키득 웃었다.


300년 전. 처음으로 마왕을 죽이고, 휴식과 보급을 위해 잠시 마경을 떠나 대륙에 돌아왔던 적이 있다. 지금은 항마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제르핀 왕국은 성문을 활짝 열고서 용사와 동료들을 마중했었다.


“그때 기억나? 왕궁 무도회.”


세냐는 추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절망이 퍼져가던 시대. 그 당시에 세상은 베르무트와 동료들에게 그리 많은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인간에 비해 마족과 마왕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용사와 동료들이…… 최하위 서열이라고는 해도 마왕을 죽이고 돌아온 것이다.


“그 시대에서도 귀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리던 놈들. 우리랑 어떻게 인연을 만들겠다고, 집요하게 다가와서 춤 한번 추자고 매달려 댔잖아.”


“그때 나랑 춤추고 싶어 하는 귀족 아가씨가 줄을 섰는데 말이야.”


“나는 아닌 줄 알아?”


“그래서 너랑 나랑 춤췄잖아.”


-거…… 거절하기도 귀찮으니까, 그냥 너랑 나랑 춤추자.


-얘가 벌써 술에 취했나…….


그렇게 말하고, 세냐에게 따귀를 한 대 맞았었다. 유진은 그때를 떠올리며 큭큭 웃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너 춤 진짜 못 추더라.”


“춤을 춰본 적 있어야 잘 추지. 그러는 너는 잘 춘 줄 알아?”


300년 전의 하멜이야 평민 출신에 용병으로 굴러먹느라 춤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세냐도 숲에서 엘프들과 자란 탓에 춤을 배운 적은 없었다.


“난 지금은 춤 잘 춰.”


유진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라이언하트는 명문 중의 명문 귀족가다. 그렇기에 유진도 어린 나이부터 귀족의 예법은 배웠고, 그중에는 당연히 파티에서의 몸가짐과 춤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아직도 못 춰.”


세냐가 유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아롯에 살았을 적에, 세냐는 파티에 거의 참가한 적이 없었다. 정 어쩔 수 없이 참가할 적에도 춤을 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뭐 어때. 나만 잘하면 되지. 대충 내 손 잡고 따라만 와.”


유진은 별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고, 세냐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뻐끔거리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지금 나랑 춤추자고 한 말이지?’


직접 묻고 싶었지만, 세냐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시 물어봤다가는 유진이 허둥대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고 변명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는 안 돼.’


세냐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태연한 얼굴로 유진의 곁에 섰다. 이러는 와중에도 배는 섬에 가까워졌고, 갑판 위는 정박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퍼어엉!


도시에서 축포가 쏘아졌다. 환한 낮인데도 마법의 불꽃이 하늘에 화려하게 번졌다. 연달아 쏘아지는 축포가 하늘을 뒤덮었다. 동시에 날아오른 마법사들이 번지는 불꽃을 인도해 글자를 만들었다.


ㅡ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


넓은 하늘에 써지는 글자. 유진은 차마 보지 못하고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글자는 계속해서 적혔다…….


“교황도 왔군요.”


크리스티나는 얇게 뜬 눈으로 항구를 쳐다보았다.


화려하게 치장된 항구. 일렬로 서 있는 성기사들과 교황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이목을 끄는 것은 수십 명의 전투신관들. 광명사제단 중에서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직접 선출하고, 라파엘로가 훈련시킨 특수부대, 은광(恩光)이다.


[무슨 속셈인지 알겠군요. 이번 기회에 은광을 공개하면서, 유라스가 성녀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였는지를 과시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아니스가 머릿속에서 비웃었다.


은광은 광명사제단 중에서도 엄선해 낸, 용사와 성녀의 말이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광신도들이다. 아직은 시험부대에 가까워 숫자가 많지 않지만…… 전쟁 시점에서 은광은 몇 배나 숫자가 늘어날 것이다.


광란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는 동원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바벨에 쳐들어갈 때는 그 목숨을 연료처럼 사용해야 할 것이다.


“…….”


시엘은 꿀꺽 침을 삼키며 항구를 보았다. 라이언하트의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본가 가족들의 모습이 시엘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우리 아버지도 오셨네.”


유진은 시엘의 곁에 서서 투덜거렸다.


길레이드의 옆. 제하드도 제복을 갖춰 입고 칼까지 차고서 서 있었다. 유진은 큭큭 웃으며 시엘에게 속삭였다.


“우리 아버지. 칼 휘두르는 법도 잊으셨을 텐데 말이야.”


“…….”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툭. 유진은 시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안대라도 쓸 걸 그랬나?”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색이 달라진 왼쪽 눈동자가 굉장히 신경 쓰였다.


“멍청아, 그게 더 눈에 띄겠다.”


“마법으로 바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도는 여러 번 해봤지만, 마안이 깃들어버린 왼쪽 눈동자는 세냐의 마법으로도 색이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른쪽 눈동자의 색을 바꿔버리자니, 양쪽 눈 색이 너무 칙칙해져 더 이상해 보였다.


“당당히 서라.”


곁에 있던 카르멘이 시가를 꺼내 물며 중얼거렸다.


“마왕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황제와 교황까지도 그를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저곳에 서 있다.”


카르멘이 고개를 돌려 유진을 쳐다보았다.


“바로 너, 흑사자 유진 라이언하트를.”


“…….”


“하늘을 보아라.”


카르멘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활짝 펴고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유진도 시키는 대로 하늘을 보았다.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


마법의 빛으로 쓰인 글자의 위에, 라이언하트의 문양이 그려지고 있었다.


“위대한 라이언하트.”


카르멘은 가문에 대한 사랑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며 왼쪽 가슴의 문양에 주먹을 얹었다.


“위대한…… 유진 라이언하트.”


“…….”


“위대한 흑사자.”


“커흑.”


유진은 듣기가 괴로워 숨을 토했다.


여러 번 생각해 봤지만, 카르멘이 일부러 멕이는 것만 같았다.


귀항


정박한 함선들을 향해 다리가 이어졌다. 수정유리를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이는 화려한 다리들이 마법에 의해 둥둥 떠서 움직였다.


함선이 수십 척인 만큼 연결되는 다리도 수십 개였고, 마법에 의해 움직일 뿐 다리 자체는 실물이다.


‘돈지랄이로군.’


토벌 소식을 전한 것이 일주일 전.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만큼의 준비를 해낸 것이다.


촤라락! 수정다리 위에 융단이 깔렸다. 여전히 하늘에는 빛의 갈라쇼가 진행 중이었지만, 아까처럼 요란한 축포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짝짝짝…….


대신에 황제와 교황과 국왕들이 이쪽을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함께 온 기사들과 뒤편에 모인 시민들도 함께 박수를 쳤다. 순식간엔 항구 전체가 요란한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먼저 내리시오.”


토벌대의 총대장을 맡은 것은 오르투스다. 하지만 그는 먼저 내리지 않고, 오히려 유진의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마왕 토벌이 성공한 것은 전적으로 그대의 몫이지 않소. 유진 공.”


“어…… 아무리 그래도, 토벌대의 총대장은 오르투스 경이신데…….”


전적으로 자기 몫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군. 오르투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총대장을 맡은 것은 사실이나, 토벌에서 총대장다운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잖소. 내가 먼저 내린다면 토벌대뿐만 아니라, 저기 와계시는 손님들도 우습게 여길 거요.”


예전이라면 명예롭고 공치사를 할 수 있는 자리에 욕심이라도 갖겠지만, 지금의 오르투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광란의 마왕과의 전투는 오르투스란 인간을 정신적으로 한층 더 성장시킨 것이다.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 성녀 다음에 내리면 되겠군.’


물론 정신적으로 성장했을지라도 본질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 애당초 오르투스의 천성은 맨 처음이 되는 것보다는 적당히 묻어갈 수 있는 두세 번째를 선호한다.


“알겠습니다…….”


유진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지었다.


단편적으로 떠오른 아가로트일 적의 기억도 그렇고, 하멜일 적에도 그랬다. 유진은 주목받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에게, 기왕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는다. 칭송을 받으면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에이, 뭘 그렇게까지 해?’라고 투덜거린 뒤에, 가슴 속에서 몰래, 조용히, 남모르게 기뻐하는 것이 유진의 성격이다.


[거짓말.]


메르가 투덜거렸다.


[그런 주제에 유진 님은 남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하면 발끈하잖아요. 자기 얼굴에 금칠도 열심히 하고, 아닌 척 자기 칭찬도 엄청 하고.]


‘원래 사람은 무시를 받으면 발끈해야 하는 것이 맞아. 무시당하는 대로 듣고 있으면 그냥 호구새끼 되는 거야.’


[그런 것치고는 유진 님은 세냐 님이나 아니스 님한테 무시당해도 가만히 계시잖아요.]


‘그건…… 내가…… 양심적이고 착한 인간이기 때문이지. 내가 좀…… 아니, 많이 병신같이 죽어버린 탓에 걔들의 인생이 굉장히 서글퍼졌잖아.’


유진은 괜히 세냐와 아니스의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쟤들은 나를 무시하거나 갈궈도 돼. 사실 쟤들이 나를 진심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음…… 그건 그래요. 세냐 님도 그렇고 아니스 님도 그렇고, 평소 유진 님을 들들 볶다가도…… 유진 님이 진지해지거나 정색하거나 그러면 가장 먼저 유진 님 눈치를 보시잖아요. 어떠한 상황에서 선택을 앞둘 때도, 항상 유진 님의 결정을 따르시더라구요.]


‘그건 걔들보다 내가 몸으로 구르기 때문이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300년 전에도 그랬다.


아무래도 후방에서의 보조에 특화된 아니스와 세냐는, 전투에 있어서는 전방에서 직접 싸우는 베르무트와 하멜의 의견을 따랐다.


[왜 모론 님 의견은 무시하는 거예요.]


‘그 새끼는 뭔 의견을 내도 지 혼자 달려가 버리는 등신이기 때문이지.’


[자기 얼굴에 금칠은 열심히 하시면서 동료 얼굴에 금칠은 절대 안 하시네요.]


‘얘 말하는 것 좀 봐. 야, 짜샤. 내가 제일 잘나갔다 할 수 있을 전생의 전생은 지금 시대에는 이름만 살짝만 남아 있지, 어? 그리고 전생은 온갖 개고생을 하다 뒈졌는데도 우둔한 하멜이라고 역사적인 병신으로 기록되었잖아!’


유진은 머릿속으로 열변을 토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물론 내가 병신같이…… 어…… 우둔하게 뒈진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저건 너무하잖아.’


[음…… 세냐 님과 아니스 님이 설마 유진 님이 환생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심보가 못돼 처먹었다니까. 어쨌든 나는 병신으로 기록이 됐으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금칠을 해야 돼. 하지만 모론은? 그 등신은 등신인데도 용감한 모론이라고 기록됐잖아!’


울분 가득한 감정에 메르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끌끌 혀만 찼다.


저렇게 속 좁은 인간이 먼 옛날에는 전쟁의 신이라 존경을 받았다니…… 하긴, 싸움 잘하는 것과 속이 좁은 것은 별 상관없는 일 같기는 했다.


[본녀는 은자가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니라.]


[얼씨구. 속 보이는 짓 하지 마요. 네가 유진 님의 어여쁨을 받으려고 아부하는 것을 내가 모를 것 같나요?]


망토 안에서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즉시 둘과의 연결을 끊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힐긋 옆을 보니 크리스티나…… 가 아니라, 아니스가 눈을 얇게 뜨고서 유진을 흘겨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무슨 대화를 그리 길게 한 겁니까?”


“크흠…… 아무것도 아냐.”


설명하기에는 너무 구차한 감성이었다. 유진은 제복을 괜히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다리를 건넜다. 고급스럽고 폭신한 융단은 다리를 지나 항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사실 이곳은 더 이상 항구라 할 수가 없었다. 본래 정박 중이던 배들은 모조리 다른 곳에 가버렸고, 관련 시설들도 밀려 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광장에 하늘을 수놓던 빛들이 쏟아져 내리며 무수한 반짝임을 만들었다.


모든 함대에 다리가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다리를 지나지 않았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수천 명의 시선. 그리고 마중하러 나온 수십만 군중의 시선이 유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 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거 이런 상황에서 그럴싸한 웅변은 베르무트가 도맡았었다. 그렇다 보니 유진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되는대로 내뱉었다.


“와아아아아아!”


대충 말했는데도 열렬한 환호가 돌아왔다. 군주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야수왕 아만이 함성을 질렀다.


아만과 가까운 곳에 있던 이바타와 원주민들은 함성뿐만 아니라 발을 구르고 몸을 들썩거리며 리듬을 만들었다. 신앙심 가득한 눈으로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보던 교황이 양손을 치켜들었다.


촤아악!


도열해 있던 혈십자기사단 성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아롯 마법사들이 수놓던 하늘이 성스러운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나부끼는 빛의 입자가 서로 엉기더니 깃털이 되었고, 하늘 높은 곳에서는 천사들이 나타나 성가를 노래하고 나팔을 불었다.


“꺄아아악!”


시민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던 멜키스도 양손을 펼쳤다. 탁, 탁, 탁! 양발이 탭댄스를 추었고, 그녀와 계약한 대지의 정령왕이 멜키스의 뜻을 실현했다.


지면이 파도치듯 출렁거리더니,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오브제들이 광장 곳곳에 나타났다.


‘뭘 하고 싶은 거지…….’


유진은 멜키스 쪽을 흘겨보면서 수정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황이 움직였다.


유진은 화려한 지팡이를 짚고 백색의 망토를 끌고 오는 교황을 향해 대뜸 손을 뻗었다.


“나중에.”


“……?”


빛의 신교의 최고 지도자. 에우리우스 교황은 유진이 내뱉은 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저 무례한 제지를 두고서 불쾌한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진정으로 빛의 신인(神人)이시다.’


예전에는 유진이 용사라는 것에 여러 의심을 품었다.


성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황은 역대 존재했던 성인들 대부분이 가짜라는 사실을 안다. 교황 본인도 마찬가지도, 역대 교황과 추기경들의 몸에 새겨졌던 성흔부터가 모두 가짜이며, 역대 성녀들은 본질부터가 인조적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성녀는 다르다. 모조화신으로 만들어졌던 성녀에게는 진정으로 성령(聖靈)이 깃들었다.


교황청에서 성녀가 펼쳤던 8장의 날개야말로 빛이 보살피신다는 증거.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진정한 용사이자 빛의 신인이라는 것은, 마왕 토벌에 의해 증명되었다.


“알겠습니다.”


교황은 반문하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빛의 신교의 최고지도자가, 고개를 숙이며 경어로 대답하고 뒷걸음질을 치는 것은 모든 군중을 경악시켰다.


‘저 여우 같은 늙은이가 왜 저러는 거야?’


황제는 교황을 힐긋거렸다.


‘설마…… 저 늙은이도 유진 라이언하트가 우둔한 하멜의 환생인 것을 알고 있는 건가?’


아무리 상대가 용사라 해도, 교황이 저렇게 깍듯하게 행동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도 황제는, 예전에 유진과 크리스티나가 교황청에 쳐들어가서 교황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귀싸대기를 갈겼던 적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는 유진에게 다가가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제국민이 세운 공을 치하하며, 군중들 보는 앞에서 친한 척 악수라도 나눌 생각이었는데…… 교황이 먼저 행동해준 덕에 황제는 망신을 피할 수 있었다.


아롯의 다인돌프 국왕과 호네인도 눈치껏 얌전히 있었다. 당연하게도 멜키스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끼아악! 멜키스는 양팔을 치켜들고서 유진과 세냐에게 날아가려 했고, 옆에 있던 로베리안과 히리두스가 기겁하며 멜키스를 붙잡았다.


유진은 그쪽의 소란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한곳에 모여 있는 라이언하트를 보았다. 어느새 옆에는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가 와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라이언하트 쪽으로 다가갔다.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유진이 시무인에 온 것. 그리고 토벌대에 참가한 것. 그 모든 것은 본가에도 비밀로 했다. 본가 입장에서는, 평소 그랬듯이 저택을 떠났던 유진이…… 갑자기 남해에 나타나더니, 마왕을 죽였다고 알게 된 것이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본가를 놀라게 했었지만, 유진도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했다는 자각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보라. 흑사자 성의 원로들에 얼굴도 잘 모르겠는 방계의 친척들. 본가에서 항상 봐왔던 백사자 기사단 전원에 수습 기사들까지 와 있다.


“걱정 끼쳐 드려 죄송…….”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길레이드가 엄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말을 끊었다.


“유진. 너는 ‘죄송하다’고 말할 일을 하지 않았다.”


길레이드가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는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갑작스레 소식을 들어 당황하기는 했다만…… 라이언하트의 가주인 나는, 네가 너무나도 자랑스럽구나.”


라이언하트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이다.


“라이언하트의 피를 잇는 자라면, 용사가 아닐지라도 용사다운 일을 해야 한다.”


남해에서 각성한 마왕이 대화가 성립되지 않은 존재라면. 공존과 평화가 불가능한 존재라면. 토벌하는 것 이외에 답은 없다.


그 전투에는 반드시 라이언하트가 선봉에 서야 한다. 길레이드는 그렇게 생각했고, 만약 먼저 소식을 듣고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면 반드시 그리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길레이드는 유진이 자랑스러웠다. 제멋대로 무모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유진이 한 행동은 용사로서, 그리고 라이언하트로서 옳았다.


“네가 가문의 눈치를 볼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진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유진. 네가…… 유폐의 마왕에게 이름이 불려진 순간부터, 너 한 명이 라이언하트를 대표하게 되었다. 마왕이 널 용사라 인정한 순간부터, 라이언하트는 너를 위해 존재하는 가문이 된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겠지만, 지금은 더더욱. 만약 유진이 바란다면 길레이드는 즉시 가주에서 물러날 것이다.


유진은 바라는 순간에 언제고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유진이 바란다면 라이언하트 전원이 무장할 것이고, 유진의 뜻을 이행할 것이다. 유진이 필요하다 판단하여 전쟁을 일으킨다면, 라이언하트는 전장에 나설 것이다.


그 말은 가주만의 뜻이 아니다. 원로원주인 클라인도 고개를 끄덕거렸고, 백사자와 흑사자 전원이 유진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아득한 경의. 그리고 신뢰. 유진은 라이언하트 기사들에게서는 경의와 신뢰를 느꼈고, 유라스의 교황과 성기사들에게서는 신앙과 숭배를 느꼈다. 다른 나라의 기사들에게도 조금씩 감정이 번져가고, 경계선 바깥에 선 군중들에게서는 선망과 동경이 피어났다.


‘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백염식. 무수히 많은 별이 떠도는 우주. 그 깊은 곳에서 ‘빛’을 느꼈다. 자그마한 빛이 점점 커져가는 것만 같았다. 더디게 회복되던 신력(神力)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런 거였지.’


유진은 가슴에 얹은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아버지, 제하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에는 제하드의 호위를 맡은 라만이 감격한 눈으로 유진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진은 길레이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제하드에게 다가갔다.


아가로트였다는 자각이 생겼다. 하멜일 적의 기억은 모두 다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유진은 제하드를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갓난아기로 태어나 ‘응애’하고 울었을 때. 제하드가 어떤 눈으로 보았고, 어떤 떨림을 가진 손으로 갓난아기인 자신을 끌어안았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뜻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아기 시절에, 제하드의 품에 안겨 웃음소리를 듣던 기억이 선명했다. 병약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유진은 괴로움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당신들이 고대하던 자식을 빼앗은 것이 아닐까 하던 생각마저 했다. 그런 주제에 ‘어머니’란 말을 불러주지도 못했다는 것이 괴롭고 죄스러웠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 제하드는, 아직 요람을 벗어나지도 못한 유진의 작은 손을 잡고서 엉엉 울었다. 제하드는 새로이 부인을 들이지도 않고 갓난아기를 키워냈다. 어려서부터 자식이 바라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고, 유진도 그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는 왜 그리 눈물이 많으십니까?”


그래서 유진은 제하드를 아버지라 생각하고, 아버지라고 불렀다.


“거참. 왜 맨날 우시나 몰라. 아들이 어디서 맞고 온 것도 아니고, 가주님이 말씀하시길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데.”


“그래서 우는 거다.”


제하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내게 걸맞지 않은, 잘난 아들놈이 너무…… 너무 자랑스러워서.”


“허.”


유진은 짧은 웃음을 흘리며 제하드를 끌어안았다.


“아들이 잘났으면 아버지도 잘난 거지 뭘.”


진즉부터 유지는 제하드보다 키가 컸다. 유진은 아버지의 등을 몇 번 두드리다가, 앞을 보고서 흠칫 놀랐다.


애니실라와 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똑같이 놀란 표정을 하고서 시엘을 보고 있었다. 양 눈동자의 색이 다르단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


길레이드도 입을 살짝 벌리고서 시엘을 쳐다보았다. 가족들의 시선을 느낀 시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떼었다.


“제 탓입니다.”


유진은 아버지를 놓아주고서 말했다.


“저를 지키다가…….”


“아, 아니에요, 제가 멋대로 움직인 거예요.”


시엘이 허둥거리며 말했다. 가장 먼저 놀람을 추스른 것은 길레이드였다. 그는 유진과 시엘을 번갈아 보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엘…….”


작은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걸음이 순간 휘청거렸고, 시안이 놀라서 애니실라를 부축했다. 하지만 애니실라는 고개를 저으며 시안의 부축을 거절했다.


애니실라 카이네스. 그녀는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이다. 라이언하트가 지금 시대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바로 지금일 것이다. 애니실라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유진과 시엘에게 다가갔다.


“……따로 다친 곳은 없는 거니?”


“네, 어머니…….”


시엘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서로 다른 눈동자가 더욱 노골적으로 보였다. 애니실라는 손을 뻗어 시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시엘.”


애니실라 또한 무가 출생이다.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이어 온 군벌이며, 멀쩡하던 친척이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 모습은 흔하게 봐왔다.


익숙한 것을 맞닥트릴 각오는 라이언하트에 시집을 온 순간에 이미 해놓았다. 무가에 시집을 온 이상, 언젠가는 그럴 만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였다.


각오는 했지만, 실제로 맞닥트린 현실은 애니실라의 가슴을 괴롭게 만들었다.


유진은, 시엘이 자신을 지키려다 저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럴지라도 애니실라는 유진에 대해서 한 점의 원망도 느낄 수가 없었다.


시엘의 행동은 옳았다.


애니실라 본인이라도, 그 상황에서는 시엘처럼 움직였을 것이다. ……아니, 움직여야 한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정말로 시엘처럼 움직일 수 있었을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내 몸을 희생할 수 있었을까?


“정말…… 자랑스러워.”


애니실라는 한쪽 팔을 펼쳐 시엘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유진, 너도.”


반대쪽 팔이 유진을 끌어안았다. 유진은 화들짝 놀랐지만, 애니실라의 품에서 버둥거리지는 않았다.


유진은 시엘과 함께 얌전히 애니실라의 품에 안겼다.


귀항


솔직히 따귀라도 한 대 맞을 줄 알았다. 길레이드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애니실라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그럴 자격도 있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처음에 느꼈던 애니실라는ㅡ 전형적인 귀족가의 첩실이었다. 가문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야심이 그득하고,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친자식들을 강압적으로 키우는. 그런 표독적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니실라는 적과 아군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면 어떻게든 인연을 쌓아 친구가 되도록 노력했다. 유진이 양자가 된 후에는 그러한 지론을 자식들에게 가르쳤고, 애니실라 본인부터가 유진에게 적대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마저도 거의 10년 전의 이야기다. 지금의 애니실라는 그때와는 성격이 많이 유순해졌다.


10년 전의 표독스런 시절일 지라도, 애니실라는 이런 문제로 유진을 원망하여 따귀를 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각오가 부족했나 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애니실라의 품에서 벗어나 멀찍이 물러나 있었고, 시엘은 아직 저쪽에서 부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각오.”


곁에 서있던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유진은 길레이드에게서 다독거림을 받는 시엘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 때문에 시엘의 눈이! 하면서 따귀 몇 대는 맞을 줄 알았거든.”


“유진 너…… 우리 어머니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던 거냐?”


“내가 그런 오해를 갖고 있던 것도 다 너 때문이야. 너 어릴 적에 애니실라 님한테 따귀 맞고 오고 그랬잖아.”


“그런…… 시절도 있었지만. 그건 내가 못나서 그런 거고,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엘을 힐긋거렸다.


“별문제는 없는 거지?”


“쓸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써서 확인했는데, 문제는 없더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시안은 복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위는 들었다.


유진을 구하기 위해 시엘이 몸을 던졌고, 그로 인해 왼쪽 눈동자가 박살 났단다. 거기서 끝났다면 평생 의안을 끼우거나 안대를 쓰고 살았을 텐데……


“마안…… 마안이라. 그런 것에 있어서는 시엘이 라이언하트인 것이 다행이군.”


시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마안은 깃들지 않는다. 즉, ‘마안이 깃든 인간’은 대륙의 역사에서 시엘이 최초라는 말이다.


신성제국의 이단심문관들이 트집을 잡는다면 변명할 수도 없이 붙잡혀 심문당할 일. 혹은 마법이라면 눈을 까뒤집는 아롯의 마법사들에게 붙잡혀 연구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신성제국과 아롯도 라이언하트에게는 강압적으로 굴 수가 없다.


‘……아니. 라이언하트보다는…… 유진 때문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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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237 Lee Mer stood up calmly and brushed the dust off his clothes. kneeling down on one of his knees, he hit the ground with his fist and bowed his head. "Gwangpung Danju, I obey the lord's order." it is unimaginable that he was beaten while playing a prank.   The wave formed concentric circles and covered reality. There was a seriousness in the green eyes, were always playful, but Glenn and Do-goe were not at all surprised. As if he was originally such a person, he accepted it naturally,  "The mission hasn't been finalized yet." "Hey, you should have said that sooner! I don't want to strain my     eyes!"  Lee Mer sighed heavily and stood up he mumbled that it was a loss and scratched her head. "um......." Glenn frowned and flicked his fingers holding the armrest. He seemed to be wondering whether or not to strike a thunderbolt. 

Ch2

 살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진이 17살이란 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숙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나이다운 어설픔은 있는 것 같다.  “...유진님. 무도에 쓰이는 마나운용과 마법의 마나운용은 그 궤가 달라요. 저는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을 모르지만, 혹시 그 마나운용법에 영창과 술식이란 개념이 있나요?” “없어요.” “그렇다면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으로 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해요. 마법을 일으킬 마나는 끌어낼 수 있겠지만, 술식으로 마법의 형태를 잡고 영창으로 구동하지 않는다면 마법은 현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험해 보려고요.” 유진은 헤라의 조언을 달게 받았다.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말 될까? 할 수 있을까. 그를 파악하기 위해 도서관의 입문 마도서를 죄다 읽은 것이다.  “별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으음... 일단은 해보세요. 다만, 마나의 흐름이 위험하다면 즉시 개입할 겁니다. 유진님이 부상이라도 입으시면 저는 물론이고 탑주님의 입장도 난처해질 거예요.” “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문 앞에 섰다. 마탑의 깊은 지하에는 수많은 연구동들이 있다. 유진은 한 달 동안 사용해 온 연구동의 문을 열었다. 안은 제법 넓다. 지하에 이 정도 크기의 연구동이 수십 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고등한 공간왜곡 마법 덕분이다. 놀람은 첫날에 많이 느꼈으니, 유진은 태연히 연구동의 중앙에 섰다.  “할게요.” “네.” 헤라는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슬며시 자기 지팡이를 소환해 양손으로 쥐었다. 만약의 사태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유진은 평온했다.  ‘백염식과 비슷해.’ 세냐의 마법이라기에 유진도 당연히 관심을 가졌다. 서클. 방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백염식은 심장의 별로 마나를 다스린다.  서클은 고리로 마나를 다스린다.  백염식은 경지가 오를 때마다 별이 분열한다. 서클은 경지에 오를 때마다 고리가 더해진다. ‘응용.’ 이치는 꿰었다. 이해도 했다

Ch1

 프롤로그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쪽팔려 미칠 것 같은 일이지만. 나는 정말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그렇게 착각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남들보다 실력이 느는 것도 빨랐다. 하지만 쉬운 것은 처음까지. 처음에는 남들보다 빠르게 늘었어도, 도중부터는 남들처럼 늘어져 버린다.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럴 수도 있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잖아.  나는 할 수 있어. 천재니까. 결국에는 알고 싶지 않던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철부지의 우스운 착각을 깨부숴준 것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천재와 만난 덕분이었다. 자기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던 우물 안 개구리. 내가 나의 작은 우물 안에서 우월감에 취했을 때. 진짜 천재는 이미 넓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천재가 싫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남도 당연히 할 수 있단 듯이 지껄이는 얘기를 듣다보면 살의가 치솟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건, 지보다 못난 놈을 무시하려 뻗대는 것이건.  여하튼, 들으면 좆같은 기분이 든다. ‘질투하는 건가?’ 질투는 씨발아. 네가 말을 좆같이 했잖아. 그래서 나도 좆같이 굴었는데 뭔 놈의 질투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냥... 네가 안타까워서.’ 안타까워? 뭐가?  ‘조금 더 노력하면...’ 네가 뭘 안다고 노력 운운하는 거냐.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야, 나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네 기준이 존나게 높은 거야. 어떻게 모든 사람이 너처럼 할 수 있겠냐? 네가 천재라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너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알겠냐?  난 너처럼은 못해. * “꺼져.”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가슴에 뚫린 구멍. 그 귀한 엘릭서를 들이 붓고 마법을 쓰는 것 같기는 한데, 소용없는 일이다.   “제발.” 울기는. 설마 저 계집애가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해 봤는데

Ch11

 “헛소리 말고 가서 자라.” “이익…… 본녀가 친히 널 걱정해주는 것인데……!” “네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잖아.” “보, 본녀가 왜 무서워한다는 거냐? 본녀가 흑룡공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다. 구, 굳이 무서운 것을 꼽자면…… 그…… 흑룡공이 널 한입에 잡아먹는 것이 무섭구나.” 악몽에 대한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산 채로 무언가에게 삼켜지는 악몽. 라이미르아는 떨리는 몸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음…… 만약…… 만약에 말이니라. 흑룡공이 널 꿀꺽 삼키려 한다면, 본녀가 용기를 내서…… 음…… 흑룡공에게 널 삼키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겠노라.” “이상한 말 하네 또.” “계속 들어라……! 그러니까, 음, 흑룡공을 죽이려 드는 네가 죽지 않게끔, 이 용공녀가 직접 간청하겠단 말이니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너를 본녀의 시종으로나마 목숨을 부지하게끔 해줄 것이니라.” 평소라면 라이미르아의 헛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고 홍옥을 한 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과,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만약에 말이니라. 보, 본녀가…… 무언가에게 삼켜지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널 그 무언가의 아가리에서 끄집어 내주마.”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로서는 그 무언가가 대체 무언지를 모르겠지만.” “보…… 본녀도 그런 것은 모른다.” “네가 와작와작 씹혀서 죽으면 어떡하고?” “끔찍한 말은 하지 말거라!” 라이미르아가 빽 고함을 질렀다. “어쨌든, 이건 너와 본녀의 약속이니라. 알겠느냐?” “그래, 그래.” 별것 아닌 대답이지만 라이미르아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라이미르아가 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자, 유진의 망토 틈 사이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메르와 눈이 마주쳤다. “흠. 저렇게 부르니 거절할 수가 없느니라.” 라이미르아는 총총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망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악!” 들어간 즉시 망토 사이에서 라이미르아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 건방진 애새끼. 네가 뭔데

Ch20

  더는, 유진 일행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유폐의 마왕이 ‘다음’을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세상에 희망을 걸 때. “……하하.” 드디어 뜻대로 웃음이 나왔다. 유폐의 마왕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에 대한 시험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유진과 동료들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비록 이렇게 된 것이 유폐의 마왕이 상정하지 못한 변수, 발자크 루드베스의 배신과…… 누아르 제벨라의 잔재의 도움이 있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변수를 사랑한다. 그가 보내온 억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변수를. 멸망으로 수렴할 뿐인 운명을 흔드는 변수를 사랑한다. 변수는 유폐의 마왕에게 치명적일수록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지금의 시대는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마왕에 맞서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충천해 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절망하지 않고, 반항 의지를 박탈할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꿋꿋이 나아갔다. 몇 번이나 권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힘을 보여주며 절망을 강요했다. 포기할 것을,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 영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도 말해주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죽음이 두려워 망설이거나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다. 바라던 절망을 줄 수 없다. 힘을 확인했다. 저들은 기어코 베르무트마저 구하고 말겠다는 욕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끝을 내도 좋지 않은가. “폐하!” 엎드린 유폐의 마왕에게 마족들이 다가왔다. 판데모니엄에 잔류한 마군의 후발대다. 그 목소리와 발걸음에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유폐의 마왕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전쟁 승리 후 대륙을 무차별로 폭격하기 위해 개조한 전투 요새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유폐의 마왕을 추락시킨 공격이 판데모니엄을 휩쓸어버리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