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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6

 


어쩌면 그건 헤모리아가 스스로를 미식가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빈민굴에서 거지의 피를 빠는 생활에는 큰 불만은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숨어지낼 수밖에 없게 된 현실. 그리고, 잦게 느껴지는 가슴의 욱신거림은 헤모리아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년은 날 무조건 죽일 거야.’


헤모리아는 아멜리아를 배신했다. 조금 억울한 감이 있기는 하다. 완전히 배신하지는 않았고, 배신을 꾀했다.


세냐 메르데인을 감시하는 중에 접촉을 시도했고, 아멜리아의 정보를 빼돌렸다. 언젠가 기회를 보아, 세냐로 하여금 아멜리아를 죽이게 만드는 것이 헤모리아의 노림수였다.


모략이 가능했던 것은 아멜리아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결은 가늘어졌고, 통제도 이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거기에 알피에로에게 피를 받은 것으로 헤모리아의 힘이 커진 것도 한몫했다.


처음에는 아멜리아를 속여, 그녀의 의식을 이용해 마왕이 되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여러 소식을 전해 듣고 포기했다. 마왕이 된들, 빌어먹을 유진 라이언하트와 성녀, 현명한 세냐에게 토벌당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멜리아를 팔아넘기고, 완전한 자유를 얻어 잠적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세상이 끔찍해졌으면 좋겠다.


헤모리아는 여전히 그것을 바라지만, 그에 앞서 아멜리아의 죽음을 바랐다. 우선 아멜리아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싶다. 그 죽음이 나의 배신으로 시작된다면ㅡ


“까득.”


아멜리아는 갑자기 나하마에 나타났다. 연락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죽어가는 모습도 아니었다.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아멜리아는, 헤모리아와 대면한 즉시 애완동물의 목줄이 느슨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목줄이 채워지기 전에 도망쳤다. 마음이 읽히고, 꿈꿨던 배신이 들통난다면. 이전처럼 폭력의 징벌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헤모리아는 죽고 싶지 않았기에 어둠을 전전했고, 빈민굴까지 흘러들어 왔다.


‘날 찾고 있어.’


헤모리아는 체내의 피를 조작해 심장을 억지로 뛰게 만들었다.


아멜리아는 죽음에서 벗어나고 힘을 회복했지만, 다행히 구속은 여전히 느슨해진 상태다. 그러지 않고서는 심장이 진즉에 터지거나, 몸이 멋대로 움직여 아멜리아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숨어서 기회를……’


생각을 더 이을 수 없었다.


헤모리아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높다란 건물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좁았다. 괜히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헤모리아는 기겁하며 건물 옥상까지 뛰어올랐다.


“저게…… 뭐야……?”


하우리아의 성벽 저편에서 거대한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거리는 멀지만, 헤모리아는 구름 속에 떠다니는 것들을 보고 경악했다.


지하도시 라비스타의 하늘에 녹아 있던 지네 산맥. 그 외에, 그곳에 봉인되었던 수많은 마물이 구름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빌어먹을 환생 457화


유폐의 마왕에게 요구한 것은, 라비스타에 처박아놓은 마물들을 내놓으란 것이었다.


마물에게 마족다운 이성은 없다. 근원부터 마력이 흐르는 놈들은 몬스터보다 흉포하며 인간을 잡아먹는다.


특히 라비스타에 봉인된 마물들은,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흉포하면서 거대했던 마물들이다. 이성이 없다뿐이지, 라비스타에 봉인된 마물들은 고위마족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강하다.


망령이 이끄는 어둠은 라비스타의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 하늘에 녹아서 오로라처럼 비치던 초대형 마물들이, 지금은 나하마의 수도 하우리아로 진군하고 있다.


전쟁시대 때 수많은 인간을 잡아먹었던 놈들이지만, 지금은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이성 없는 마물일지라도 ‘마왕’이란 존재에게는 절대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지금 시대에서 마물이 인간을 해치는 일이 없는 것은, 전쟁이 끝나면서 유폐의 마왕이 모든 마물의 통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통제는 초대형 마물이라도 거스를 수 없으며, 지금 통제권은 유폐의 마왕이 아닌 망령이 쥐고 있다.


ㅡ끼이이이이이!


구름 속을 떠다니던 지네산맥이 망령의 명령에 호응했다.


촤르르르륵! 300년 전에 유폐의 마왕의 영지에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은, 지네 산맥이 영지 전체의 외곽을 제 몸뚱이로 빙 둘러쌓기 때문이다. 만약 유폐의 마왕이 도중에 지네산맥을 열지 않았다면, 결사대가 붉은 평원에 진입하는 데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즉, 놈의 몸은 영지 하나를 충분히 휘감을 만큼 길다. 놈은 이름대로 산맥처럼 거대한 마물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다리가 모래를 파고들며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반대쪽 다리는 하늘을 향해 우뚝 세우는데 그 모습은 마치 장벽 위에 세운 창칼처럼 보였다.


대마법사의 공격으로도 부수기 힘든 갑각을 벽으로 세운 지네. 그 광경은 비현실적이고 끔찍하지만, 틀림없는 현실이다.


“꺄아아아악!”


나하마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수도 하이리아.


시민들은 똑같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도시 전체를 덮을 만큼 커다란 먹구름 떼가 몰려오더니, 그곳에서 성벽만큼 높고 산맥만큼이나 기다란 지네가 내려와 수도를 통째로 휘감은 것이다.


안쪽에서 보이는 것은 지네산맥의 허연 배와 위로 솟은 다리뿐. 대수롭지 않게 벌레를 잡아대는 사람들도 저 광경에는 눈을 까뒤집고 졸도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가 봉쇄된 것을 확인한 망령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침묵하는 망령의 곁에 있는 것은 마물뿐만이 아니었다. 알피에로를 필두로 한 라비스타의 마족들. 멸망의 마왕을 섬기는 권속들 전원이, 망령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화신……’


알피에로는 홀린 눈으로 망령의 등을 보았다. 라비스타에서 당했던 굴욕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300년. 장장 300년을 멸망의 마왕이 깨어나는 것을 기다렸다. 지금에 이르러, 멸망의 마왕은 제 화신을 세상에 내려보내신 것이다.


“아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알피에로 뿐만이 아니었다. 라비스타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마족들은 모두가 멸망의 마왕이 재림하는 것을 기다리고, 전쟁에서 날뛰는 것을 고대해 온 미치광이들이다.


대뜸 나타난 망령이 따라오면서 마력을 일으켰을 때. 저번에 패배와 굴욕을 당했단 마족들이 가장 먼저 망령을 따랐다.


본질이란 것이 다르게 느껴지는 마력. 수백 년 동안 기다렸던 멸망의 마왕과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화신. 그가 전쟁을 벌이겠다며 따라오라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망령은 마족들의 숭배를 느꼈다.


“화신이시여.”


역겹다는 감정을 억지로 무시하는데, 알피에로가 고개를 조아리며 다가왔다.


“저 아래에…….”


끝까지 듣고 싶지 않아 손을 들어 말을 가로막았다. 힐긋 아래를 보니, 지붕 위에서 경악하고 있는 헤모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저 계집아이는 아멜리아를 배신하고 재앙의 세냐와 내통하였습니다.”


헤모리아에게 피를 준 것이 바로 알피에로다. 그는 헤모리아의 배신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전쟁이 벌어진 뒤, 아멜리아가 무시하던 애완동물에게 배신당해 죽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직접 저 계집을 벌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멸망의 화신이 직접 나선 이상, 이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알피에로와 다른 권속들에게 있어 성전(聖戰)이 되었다. 이 성전에서 헤모리아가 내통을 계속하게 둘 수는 없다.


알피에로는 시뻘건 눈을 빛내며 헤모리아를 노려보았다.


“벌할 필요 없다.”


“예?”


“데리고 와.”


오싹한 살의가 알피에로로 하여금 반문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알피에로는 즉시 아래로 내려가 헤모리아를 붙들었다.


“뭐, 뭐야?!”


붙잡힐 때만 해도 비명을 질렀지만, 먹구름에 들어오고서 헤모리아는 입을 닥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분위기가 살벌하고 삼엄했다.


발아래에 왕궁이 보였다.


흑마법사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처박았다. 할렘에서 주지육림을 즐기던 마족들도 모두 밖에 나와 하늘을 우러렀다.


블러드메리를 쥐고 벌벌 떠는 아멜리아가 보였다. 망령은 홀로 아래로 내려갔다.


“어…… 어어…….”


아멜리아가 입술을 떨며 말을 더듬었다.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 텐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아멜리아는 깨달았다. 그녀는, 망령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멜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다르게 불러야 하나?


여태까지 아멜리아는 상대를 ‘너’라고 칭해왔다. 그것은 아멜리아가 의식해서 만들어낸 오만이었다.


나는 대단하고 존귀하다. 상대는, 하찮다. 설령 하찮지 않을지라도. 나보다 대단한 강자일지라도. 그래도, 아멜리아는 고집해서 상대를 ‘너’라고 칭했다.


약한 개가 크게 짖는 것처럼. 화려한 무늬로 먼저 엄포를 놓는 것처럼. 시궁창과 같은, 추잡하고 비참한 과거를 넘어온 아멜리아에게 있어서 상대를 ‘너’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것이 자신을 포장하는 허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허세를 의식할 수가 없다.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잘못 혀를 놀렸다간 그대로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 있었다. 술탄이나 입을 화려한 장포를 몸에 걸치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있었다.


……한계다. 아멜리아는 덜덜 떨면서 몸을 숙였다. 그녀는 다른 흑마법사들이 그런 것처럼, 제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블러드메리는 옆에 내려놓았다. 머리에 얹고 있던 금관도 벗었다.


아멜리아는, 양손으로 땅을 짚고 고개를 조아렸다.


* * *


유라스의 성직자들이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부상자들의 치료가 끝났다. 마력에 의한 상처. 치료는 쉽지 않지만, 성흔을 갖게 된 성녀의 기적은 포션 따위와 비교가 안 된다.


“대체…… 대체 무슨…….”


본가의 지원군과 함께 도착한 길레이드는 어지러운 머리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장담할 수 있다. 라이언하트 본가 역사상, 자신만큼이나 다사다난한 가주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길레이드는 제 처지를 비관하지는 않았다. 가문의 문제를 감당하기 버겁다고 한탄하지도 않았다.


선조들에 대한 죄스러움. 라이언하트의 명예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감히, 라이언하트를 공격한 적에 대한 분노. 길레이드는 격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뿌득 이를 갈았다.


이건, 다행이면서 굴욕이다. 흑사자 성이 침략당했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다. 정체 모를 적은, 모두를 죽일 수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죽이지 않았다.


‘누구지?’


길레이드는 고개를 돌려 성의 안쪽을 보았다. 부상자들을 돌보면서 ‘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체는 알 수 없다. 가면을 쓰고, 수상쩍고 불길한 마력을 사용했단다.


“……비밀…… 인가…….”


유진은 적의 정체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성녀와 세냐 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정은 듣지 못했다.


비밀…… 숨기고 있다. 어째서? 양자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 점은 서운하고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몸은 괜찮으냐?”


길레이드는 유진에 관한 생각을 무시했다. 당장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유진은 지금 성안에서 외부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예.”


시안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성녀에게 먼저 치료받았고, 뒤이어 도착한 유라스의 신관들에게 한 번 더 치료받았다. 지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게돈의 방패를 쓰면서 마나가 왈칵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것이 무어가 있느냐.”


“예비 가주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되었다.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그렇지만 시안, 너는 도망치지 않았지. 오히려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고, 동생을 지켰어.”


이 모든 사태가 씁쓸하고 괴롭지만, 시안을 보니 뿌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장점보다 흠이 많은 아이였는데…… 길레이드는 빙그레 웃으며 시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시엘은…… 괜찮은 겁니까?”


“음. 상처는 없었다. 정신도 차렸고. 하지만 그 아이의 눈은…… 특별하니, 세냐 님과 성녀님이 조금 더 관찰하신다고 했다.”


특별하다, 는 말에 시안은 납득했다. 마안. 마족의 것과는 다르다곤 해도, 시엘의 마안이 마족ㅡ 그것도 광란의 마왕에게서 이어진 것. 여태까지 이상은 없었지만, 발동되던 권능이 마력에 의해 파괴되었으니 경과를 지켜볼 필요는 있다.


“아무렇지 않아요.”


정작 성안의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투덜거렸다. 권능이 발동되고, 파괴된 것은 맞다. 그 과정에서 마나가 역류하고 코어에 타격을 입은 것도 맞다.


하지만 호들갑을 떨어야 할 만큼의 이상은 생기지 않았다. 코어가 뻐근하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마력이 침투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라니까요.”


“진짜 외눈박이가 되고 싶은 겁니까?”


아니스가 눈을 흘기며 쏘아붙이자, 시엘은 더 이상 반론하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시엘에게 달라붙은 것은 아니스뿐만이 아니었다. 세냐도 시엘의 뒤편에 앉아,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코어와 혈맥을 확인하고 있었다.


“마안 하나 더 생기는 것 아냐?”


“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


“그럴 수도 있잖아. 네 마안이 그, 월광검의 마력이 스며들면서 생겨난 거고…… 그 개자식의 마력도 결국은 월광검이랑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제 눈은 시조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마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구요.”


잠자코 있으려 했는데, 시엘은 다시 발끈해 버렸다. 그 매선 대답에 이제는 세냐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 시조님이 멸망의 마왕과 관련되어 있으니 내가 걱정하는 거지!”


“제발! 이상한 말 하지 마시라구요. 그리고 목소리 낮추세요, 여기는 흑사자 성이에요! 시조님이 멸망의 마왕과 관련 있다는 말을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하면…….”


“야, 네 목소리가 나보다 더 크거든?”


돌아온 핀잔에 시엘은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세냐는 그 모습이 풋풋하고 귀여워서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내가 이런 말 하는데 주변에 결계도 안 쳤을 것 같아?”


“……결계를 쳤어도 새어나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거야말로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지.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마법의 여…….”


신, 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시엘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놀림을 받을 것만 같았다.


세냐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도중에 말이 끊기기는 했지만, 시엘은 뒷내용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진 않았다. 보나 마나 주책 맞은 헛소리에 자기과시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보다, 시엘은 유진 쪽이 신경 쓰였다. 지금 유진은 성안 쪽의 방에서 외국과 교신 중이다.


“……저, 사정을 잘 모르는데. 무슨 일인 거예요?”


“모론입니다.”


시엘의 왼쪽 눈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던 아니스가 대답했다.


“……이 성에 쳐들어온 놈이, 몇 시간 전에 모론을 먼저 찾아갔던 모양입니다.”


“네?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모론 님이 계신 레헤인야르는 워프 게이트도 없는데, 어떻게 몇 시간 만에 여기까지 와요?”


“그 이상한 방식으로 이동한 거겠지.”


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워프게이트를 통하지 않은 장거리 이동 마법은 텔레포트다.


워프게이트는 서로 고정한 공간좌표를 연결하여 초장거리 이동을 가능하게 만든다. 텔레포트나 블링크는 게이트를 쓰지 않고, 이정표를 만들어놓고 육체와 영혼을 이정표를 향해 도약시키는 것이다. 유진의 시그니처,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저 공간마법의 응용이다.


대마법사라도 텔레포트를 쓰는 데는 저런 조건이 따른다.


그건 세냐도,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도 마찬가지다. 그들조차도 이정표는 필수로 준비해야 하며, 그마저도 이동거리는 워프게이트와 비교할 수 없이 짧다. 거리의 제약을 무시하는 텔레포트는 세계수의 잎사귀를 쓰거나ㅡ


‘마왕.’


유폐의 마왕은 자유롭게 세상 어디든 나타나고 사라진다.


……멸망의 마왕도 그랬다. 이정표를 정하지 않고,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건 출현하고 사라지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마왕에게만 가능한 권능이다.


[레헤인야르 전역을 뒤졌다.]


유진은 잠자코 모론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력을 감추고 숨은 것이 아닐까 싶어 몇 번이나 다시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 데스나이트. 아니, 이제는 데스나이트라고도 할 수 없는…… 그렇다고 마왕인 것 같지도 않은 놈은, 모론에게 찾아가서 싸움을 걸었단다.


[내가…… 실수했구나.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즉시 네게 연락했다면…….]


“됐어 새끼야.”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이쪽도 피해가 크지는 않아. 너는, 괜찮냐?”


[음. 조금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괜찮다.]


“당연히 괜찮아야지. 제대로 되먹지 않은 새끼한테 처맞고 골골대면 너한테 실망했을 거야.”


유진은 퉁명스레 말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산은 어때? 라구르야란에서 변화는 없고?”


놈은 멸망의 마력을 사용한다. 그런 놈이 레헤인야르에서 날뛰었다는 것에 유진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멸망의 마왕이 자극받아 깨어난다면? 누르가 대거 나타난다면?


[주시하고 있지만 아직 문제는 없다.]


현재 모론은 나이트마치가 열렸던 훈련기지에 내려와 있다.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고, 유진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다. 대망치협곡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모론의 밝은 눈은 훈련기지에서도 산맥과 라구르야란을 볼 수 있다.


[하멜.]


모론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놈은…… 나를 죽이기 위해. 나와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


[놈이 계속 싸웠다면 나는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은 계속 싸우지 않고 먼저 물러섰다.]


“여기서도 그래. 아무도 안 죽이고, 성질만 잔뜩 긁고 물러섰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


내뱉으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었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지만, 유진이 긁는 대로 바닥에 흉터가 생겼다.


“그게 X같아. 더 X같은 게 뭔지 알아? 그 새끼, 가면을 썼단다. 내, 전생 얼굴을 가렸다고.”


[…….]


“이런 생각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 그, 개새끼가. 설마…… 나를 알고 있나?”


끼긱, 끼기긱. 유진은 계속해서 바닥을 긁으며 말했다.


“내가 하멜의 환생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하멜의, 나의…… 명예. 뭐 그런 것을 지키고 싶어서, 나를 배려하려고 가면을 처쓴 건가?”


[하멜.]


“널 찾아가고. 여기 와서, 개지랄을 했으면서.”


끼기기긱. 유진은 바닥을 긁던 손가락으로 주먹을 쥐었다.


“씨X 그게 뭐 하자는 거야?”


[하멜…… 그 존재는…… 자기가 가짜인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놈과 싸우면서…… 널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론. 만약 지금 네가 내 앞에 있었으면, 나는 네 턱을 박살 냈을 거야. 너도 그런 각오를 하고 지껄인 거라고 믿는다.”


[물론, 하멜, 나는 네게 몇 대 맞을 각오를 하고 이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느꼈다.]


“개새끼.”


[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길 바란다. 가짜라는 것을 깨쳤으면서도 너와 닮은 그 존재가, 가면을…… 쓰고,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존재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야.”


유진은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그는 손바닥에 잔뜩 뭉친 대리석가루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생각해서 뭐 해. 그 개새끼 찾아서 죽이기 전에 물어보면 될 것을.”


[그것도 답이긴 하군. ……하지만 놈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제발 나 좀 죽여달랍시고, 가면까지 쓰고 여기 와서 설친 놈이야. 내가 눈 뒤집고 찾아다닐 필요 없이, 조만간 어딨는지 알게 될 거다. 그 전에.”


유진은 아직 가루가 묻은 손바닥을 벽에 벅벅 문질렀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문지르던 유진은, 다시 주먹을 쥐고서 답답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겠어.”


[음? 무어라 말했나? 잘 듣지 못했…….]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누구인지 알려야겠어.”


유진은 까득 이를 갈며 내뱉었다.


빌어먹을 환생 458화


하멜


“진짜…… 진짜 괜찮겠습니까?”


아니스는 평소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면서 유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한순간의 기분에 욱해서, 충동뿐으로 저지르는 것 아닙니까? 하멜. 만약 그런 것이라면 부디 재고하십시오. 나중에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겁니다.”


나름 진지한 표정까지 지으며 우려하는 아니스의 옆. 세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를 망설였다.


세냐가 생각하기에도 저 말은 일리가 있었다. 유진이 그간 해온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유진은 주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어린 시절에는 나이답게 행동하려 노력했단다. 갓난아기 시절에 똥오줌을 가리지 못했을 정도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어린 시절에 어린애처럼 살았던 것은 분명했다.


어릴 때뿐만이 아니었다. 애처럼 굴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고서도 켕기는 일들은 제법, 아니, 아주 많았다. 아니스의 말마따나 충동적으로 저질러 버리면, 나중에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으흠. 유진이 직접 정한 것이잖아?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야.”


하지만 저 후회란 것은 온전히 유진이 감당할 일 아닌가? 가볍게 내리 결정으로 나중에 후회하고 민망해하고 죽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가 유진이 감당할 일인 것이다.


세냐는 저 결정에 감당해야 할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오히려 얻는 것이 더 많았다.


“욱해서 이러는 것도 맞고, 충동뿐으로 저지르는 것도 맞아.”


유진은 표정을 구기면서 내뱉었다.


“아니스. 네 말처럼, 나는 무조건 후회할 거야. 나중까지 갈 것도 없이 몇 시간 뒤에 후회하고 있을걸.”


“그렇다면…….”


“그래도 마음은 안 바꾼다.”


데스나이트는 자신이 하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굳이 얼굴을 가리고, 흑사자 성에 쳐들어와서 난동을 부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만약 사망자가 많았다면, 습격의 배후에 아멜리아 머윈이 있는 것이라 추측했을 것이다. 본인이 바라지 않아도, 아멜리아가 명령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망자는 없다. 놈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아멜리아 머윈이 그런 명령을 내릴 리가 없다.


“놈은 내 성질을 긁으면서도 나를 배려했어.”


그게 열받는다.


“놈이 여기 와서 지랄한 건, 결국 나 때문이란 말이야. 아주, 아주 지랄맞은 상황이잖아. 안 그래? 가주님이나 카르멘 님, 그 외 다른 사람들. 괜히 훈련해 주러 온 이바타와 전사들은 억울하고 답답할걸? 대뜸 찾아와서 두들겨 패고 가버린 놈이, 왜 그랬는지. 대체 누구인지도 모르는 거잖아.”


“…….”


“카르멘 님이나 가주님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다들 사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잖아. 까놓고 이게 왜 내 잘못이 아니야? 그 새끼가 여기 쳐들어온 건 나 때문이야.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 책임이 줄어들지는 않아.”


유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니스의 표정은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유진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설득할 이유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욱해서, 감정적으로, 그건 맞다. 하지만 유진을 움직인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개새끼가 멸망의 마력을 줄줄 흘려댔잖아. ……이제는 월광검에 대해 둘러댈 수도 없게 됐다고.”


광란의 마왕과의 싸움에서 월광검을 휘둘렀다. 전투에 함께 했던 카르멘이나 다른 사람들은 월광검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저 검은 대체 뭔데 불길한 빛을 뿜어대며 마왕의 마력마저 베어내는가? 그 질문에 여행 중에 우연히 발견한 아티펙트라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됐다.


……나중을 생각하더라도 진실을 밝혀둘 필요가 있기도 했다. 앞으로 전투할 때마다 월광검에 대해 둘러대는 것도 피곤한 일이고.


라이언하트의 피.


베르무트에 관해서도, 확실히 얘기해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유진은 자신의 가장 큰 비밀을 라이언하트의 어른들에게 밝히기로 했다.


‘내가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


라이언하트 내에서 유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둘뿐이다.


하멜식을 계승한 흑사자, 제노스 라이언하트. 그리고 시엘 라이언하트. 그 외에 라이언하트에서는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오늘로 몇 명 더 늘어날 것이다. 가문 전체에 대놓고 밝힐 생각은 없다. 원로원주인 클라인과, 본가의 어른들에게만 밝히면 될 것 같다.


“……으흠…….”


세냐는 곁눈질로 유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진지한 표정…… 방금 한 말도 진지하게 무거웠다. 그런 유진을 보고 있으니, 세냐는 스스로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부끄러움을 느껴 버렸다.


유진이 비밀을 밝히는 것? 말릴 이유가 없다. 아까도 생각했듯, 유진이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세냐는 감수할 것도,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오히려 얻는 것이 많았다.


라이언하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라이언하트 저택에 있을 적에 세냐는 주변의 눈치를 항상 신경 썼다.


수백 년 살아온 마법사가, 갓 20살이 넘은 파릇한 청년을 제자로 맞이해 연인이 되고, 부적절……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주변의 눈총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화제잖은가. 하필 유진은 가문의 총아이며, 전 대륙의 주목을 받는 용사. 거기에 라이언하트 가문은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문 가문이다.


수치를 감수하고 애니실라에게 협력을 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밝힌다면? 당장은 라이언하트의 중심인물 몇 명에게만 밝히려는 모양이지만, 세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봤다. 아무튼, 언젠가 유진과 정식으로 교제를 허락받고 혼인식을 올릴 때 가주와 친부의 눈치는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정식으로 교제? 잠깐, 그건 이미 하고 있는 것 아냐?’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 세냐는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에게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


시엘은 진즉부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입술은 닫혀 있지만, 입꼬리는 간헐적으로 씰룩거렸다. 분위기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것은 시엘도 세냐와 똑같았다.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이 알려진다면…….’


시엘은 꼴깍 침을 삼켰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할 노력도 크게 줄 것이다……. 물론 유진에게 그럴 생각이 없을지라도, 그건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천천히 노력하면 될 일 아닌가? 시엘은 당장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끼익.


유진은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몇 년 전에 와보았던 흑사자성의 원탁. 이곳에서는 8명이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라인과 카르멘, 길레이드, 애니실라, 기온, 시안, 제하드, 제노스.


“대체 무슨 일로……?”


길레이드는 어리둥절하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묻기는 했지만, 길레이드는 대강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흑사자 성의 습격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겠지. 길레이드뿐만 아니라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습격자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다들 바쁜 와중에도 즉시 원탁에 모인 것이다.


‘나까지 알아둘 이유가 있나……?’


하지만, 제하드는 왜 자신까지 불려온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느꼈다. 본가 병력들과 부랴부랴 넘어오기는 했지만, 제하드는 전투원이 아니다. 적이 특정된다고 해서 제하드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 일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제하드가 흑사자 성에 넘어와서 할 일 없이 지낸 것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하드는 손수 부상자를 돌보고 격려하는 애니실라를 따라다니며 가모의 시중을 들었다.


‘알아야 해.’


애니실라는 명문 라이언하트의 안주인다운 확실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유진을 응시했다.


그럴 리까지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유진이 요구한다면. 애니실라는 친가인 카이네스 후작 관할의 제국군뿐만 아니라, 제국 사교회의 모든 인맥까지 동원할 생각이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엘과 세냐가 방에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크리스티나가 문을 닫았다.


크리스티나도 아니스와 비슷한 입장이지만, 동시에 지금 유진의 고백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기도 했다. 크리스티나는 가슴 앞에 양손을 모으고서 신앙 가득한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적에 관한 이야기인가.”


카르멘이 중얼거렸다. 치료는 끝났지만,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카르멘을 손을 쥐었다 펴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적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유진은 크게 숨을 한 번 삼켰다.


“제게는 비밀이 있습니다.”


“흡.”


비밀, 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제노스였다.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유진을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여기서? 유진은 제노스의 경악한 시선에 살짝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저는…….”


문득.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해버리면……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니까. 아버지와 아들. 양부모와 양자. 형제. 그런 관계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그럴지라도.


이런 일이 벌어져 버렸다. 앞으로 이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닌, 하멜 다이너스의 환생이란 것으로 엮이는 일들.


가족이다.


다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를 일이나, 유진의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유진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나 똑같다.


전쟁신 아가로트의 환생이건, 하멜의 환생이건, 지금 여기 있는 것은ㅡ 그냥, ‘나’다.


적은,


나의 시체로 만들어진 데스나이트다. 나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자아다. 몇 번이고 죽일 기회는 있었다. 죽였다고 생각했다.


죽이지 못했다. 놈은, 지긋지긋하게 살아남아서, 이런 짓을 벌이고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 다시 나타나서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놈의 존재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인 이상. 놈의 탄생에 내가 아무 짓을 하지 않았을지언정.


‘그럴지라도.’


유진의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았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모두가 잠자코 유진의 말을 기다렸다.


“하멜의 환생입니다.”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서 유진을 바라보고 있다.


농담이나 장난? 아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도 안 되고 뜬금없는 농담을 할 리가 없지 않나.


“…….”


제하드는 입을 반쯤 벌리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하멜의 환생’. 저, 하멜이 누구인지. 제하드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


우둔한 하멜.


“……아…….”


아들의 말을 듣고서 짚이는 일은 한둘이 아니다.


제하드는, 아들이 갓난아기 때부터 울음이 적던 것을 떠올렸다. 가끔 울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평범한 갓난아기의 울음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그럴 리는 없지만, 마치 일부러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말문이 트이는 것도, 걸음마를 떼는 것도, 말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그 당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금세 납득할 수 있었다.


걸음마를 떼고 얼마 되지도 않아, 자그마한 막대기를 쥐고서 검처럼 휘두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천재.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만으로 어린 아들에 대한 대부분의 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실제로 천재가 맞지 않았나. 아들은 방계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혈계식에서 우승하고, 본가의 양자가 되었다. 백염식의 계승을 허락받고, 마법을 익히고, 성검의 인정까지 받았다…….


그냥 천재인 줄 알았던 아들인데.


300년 전 영웅의 환생이란다. 믿을 수 없는,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말. 제하드는 벌렸던 입을 간신히 닫았다. 그는 울렁대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경악과 혼란을 느끼는 것은 제하드뿐만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던 제노스를 제외한 모두가 경악하고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유진에게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아주 조금 생각한 것만으로도 유진의 말이 진실이란 것을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길레이드와 애니실라, 기온, 시안. 본가의 가족들은 유진이 13살일 때부터 모습을 보아왔다. 특히 기온은, 유진이 처음 라이언하트의 영맥에 들어가고서 즉시 마나를 느끼고 다뤄낸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한 천재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천재 소리를 듣던 것은 기온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진의 자질을 단순히 천재성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은…….”


길레이드가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말. 길레이드는 뒤죽박죽인 머리와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고, 유진에게 질문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하드가 대뜸 손을 들어 길레이드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주님.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제하드는 드물게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레이드는 움찔하고서 뒤로 물러섰다.


“알겠네.”


이 자리에서 가장 먼저 유진과 대화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제하드여야 한다. 제하드 라이언하트. 그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그럴 자격이 있다.


제하드는 몇 번 더 심호흡을 하고,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지금 와서 비밀을 밝히는 겁니까.”


목소리에는 어쩔 도리 없는 떨림이 가득했다. 말투까지 바뀌었다.


“설마 갑자기 떠올렸다……. 그런 말씀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태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진은 씁쓸히 웃으며 제하드를 응시했다.


“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제가 누구의 환생이건, 아버지는 아버지니까요.”


제하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솔직히 옛날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여기기 힘들었습니다. 어릴 때 말입니다. 그때는, 환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생각하건, 아버지는 아버지였고, 저를 아들로 대해주셨죠.”


“…….”


“여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아버지가 나를 더 이상 아들로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생각합니다.”


제하드는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는 휘청거리며 다가가더니, 양팔을 활짝 열고서 유진을 끌어안았다.


“나는…… 나는, 영웅의 아버지구나.”


등을 몇 번 다독이고, 제하드는 아들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다시 휘청거리며 돌아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가주님도, 애니실라 님도, 기온 님도, 제게는 똑같습니다.”


“……우리라 해서 다를 리가 있느냐.”


생각이 복잡하기는 했다.


하멜. 우둔한 하멜.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 루하르의 건국왕, 용감한 모론의 벗…… 나이트마치 때를 떠올리면 모론님도 진실을 알고 계셨으리라.


“……맙소사…….”


애니실라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세냐와 유진을 번갈아 보았고, 도중에 세냐와 눈이 마주쳤다. 애니실라는…… 왜 세냐가 열심히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 나는?”


시안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하드 님이 아버지고. 가, 가주님과 어머님이 그…… 똑같다면. 나는? 아니, 저는…… 요?”


설마 이제 와서 형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시안은 불안한 기분을 느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뒤편에 선 시엘의 표정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이미 알고 있던 건가?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알고 있던 것 같은데.


‘왜 시엘한테만 알려준 거야?’


시안은 쌍둥이 동생이 자신보다 먼저 알았다는 것에 질투를 느꼈다.


“너도 똑같지.”


“허억…….”


시안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삼켰다.


“똑같다……. 뭐…… 뭐가?”


“내 형제라고.”


“허억…….”


시안은 숨을 헐떡거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


클라인은 유진과 별로 친분은 없었다. 그럼에도 여기 불려왔다는 것은…….


“으흠…… 다른 원로들에게는 함구하마.”


원로원주의 체면을 살려준 것이겠지. 클라인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제노스를 의식했다.


“제노스. 자네도 반드시…….”


“저는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에 클라인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환생…….”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낸 순간, 모두의 시선은 카르멘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라이언하트 제일가는 괴짜이면서도 공과 사에 대한 구분이 확실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카르멘이 유진을 예전과 똑같이 대하지 못하겠다고 말해 버리면 분위기가 난감해질 것이다.


“하멜의…….”


“예. 카르멘 님께 거짓말을 하려던 것은 아닙…….”


“우둔한 흑사자…….”


카르멘이 중얼거렸다.


유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빌어먹을 환생 459화


어느 정도 감정들이 진정된 뒤.


흑사자 성을 습격한 적에 대해서 말했다. 사마르 대수림에서 만났던 시안은, ‘데스나이트’라는 말에 질겁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 죽인 것 아니었어…… 요?”


“말투가 왜 그 모양이세요.”


“크흠…… 자꾸 신경이 쓰여서…….”


“정 그렇게 신경 쓰이면 앞으로 형제 하지 말든가.”


“그 새끼 그때 조진 것 아니었냐?”


시안은 나름 형제 사이에 할 법한 말을 내뱉고 나서 흠칫 놀랐다. 이곳에 애니실라와 길레이드가 있단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길레이드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애니실라는 시안의 입에서 저렴한 말이 나온 순간에 두 눈을 칼날처럼 얇게 뜨고서 시선을 쏘았다. 한때 그 누구보다 표독스럽던 어머니의 강렬한 눈빛에 시안은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데스나이트…….”


대수림에 함께 갔던 시안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데스나이트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 당시에 자세한 이야기는 비밀로 해달라며 유진에게 언질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내용물이 본인 아닌 가짜일지라도, 그 몸뚱이는 우둔한 하멜 본인의 것. 본가에 알렸다면 혼란이 커졌을 테니, 일단은 비밀로 하자는 것은 시안으로서도 이해할 사정이기는 했다.


대영웅의 시체가 도굴되어 데스나이트가 되었다고?


죽여도 죽지 않고, 오히려 마왕에 근접한 존재가 되어 흑사자 성을 습격했다고?


경악할 수밖에 없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기는 하다. 애당초 전쟁 시대라면 모를까, 인간의 시체로 만드는 ‘언데드’ 같은 것은 지금 시대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으흠…….”


길레이드는 헛기침을 뱉으며 앞을 보았다.


습격자의 정체는 유진의 정체에 비하자면 하찮은 것이다. 혈계식에서 보았을 때부터 비범하다고, 말도 안 된다고,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생각했던 아이……. 그야 그럴 수밖에. 설마 유진이 우둔한 하멜의 환생일 것이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어…… 음, 유진?”


형의 표정을 살피던 기온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는 평소와 같은 쾌활한 미소를 의식하면서 말을 건넸다.


“네가…… 하멜, 님의 환생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겠는데 말이야. 내가…… 음, 아니, 우리가, 너를 여태까지와 똑같이 대하는 것은 괜찮은 거지?”


“제가 환생한 것과 상관없이, 전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했잖습니까.”


“하하하…… 그렇지. 환생을 떠나, 너는 유진이니까……. 음…… 그래.”


굳이 기온이 한 번 더 물어본 것은, 애니실라와 클라인이 난감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인 길레이드는 대쪽 같은 사람이다.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떠나, 유진이 유진인 이상 길레이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기온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유진의 수행을 돌봐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수행을 ‘돌봐줬다’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어쨌건 기온은 유진과의 추억과 유대를 가지고 있다. 형인 길레이드가 그러하듯, 기온도 유진이 환생자라는 것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


카르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의외의 면에서 엄격하고 상식적이지만, 유진을 여전히 유진이라 받아들였다. 하지만 원로원주, 클라인은 솔직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불퉁한 표정. 뚱한 목소리…… 유진을 힐긋거리는 클라인의 등골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영웅의 환생. 심지어 그 성격 더럽다던 하멜의 환생이다. 여태까지 유진의 모습이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그’ 하멜이라면, 모든 것을 밝히고 나서 그간의 인간관계를 손바닥 뒤집듯 가벼이 다룰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만큼, 클라인이 어릴 때 보았던 동화책의 하멜은 심보가 고약한 놈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냐와 아니스가 동화책을 출간한 지 200년이 훨씬 지났다. 욕설이 그득하던 초판은 아크리온 같은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고, 수백 년 동안 시대상에 맞게 몇 번 개간되었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타깃으로 잡은 버전 중에서는, 나중에 하멜 같은 어른이 되지 말라는 교훈을 넣기 위해 하멜을 성격 나쁜 멍청이로 묘사한 버전이 많았다…….


“복잡하군.”


카르멘이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우둔한 흑사자…….”


“저는 말입니다, 걸음마를 떼고 제 손으로 직접 책을 꺼내 읽은 순간부터.”


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서 세냐를 노려보았다.


살인적인 시선. 세냐는 슬쩍 고개를 돌려 모르는 척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우둔한, 하멜이라는 말이 싫었습니다.”


“평가는 후대의 권리라 할 수 있지 않은가?”


“후대가 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세냐를 가리키려 했다. 당연히 세냐는 그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냐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고, 순식간에 펼쳐진 절대률의 마법이 유진의 입을 막고 행동을 억제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멜이…… 유진이 우둔한지 아닌지가 아니야.”


몇십 번의 개간을 거쳤지만 동화책의 결말은 똑같다. 하멜은 죽으면서 세냐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그 동화책의 저자가 세냐란 것이 밝혀진다면? 세냐는 도저히 그것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음…… 그렇지요.”


카르멘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우둔한 흑사자라는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진, 네가 싫다면 너를 우둔하다 부르지 않겠다. 내가 아는 너는 우둔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니.”


이 마법은 뭐야? 유진은 몸을 억제한 마법에 당황하고 감탄했다.


마법의 여신을 노린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드디어 세냐가 300년의 세월에 돌아버린 것인가 싶었는데…… 말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환생의 흑사자…… 라고도 할 수 없군. 돌아온 흑사자도 안 되겠지. 너는 자신이 환생이란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


“그렇다면, 아쉽지만 유진, 너를 그냥 흑사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겠구나.”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흑사자 기사단과 겹치기는 하지만, 솔직히 ‘흑사자’라는 별명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은 넘어가도, 언젠가 충분히 논의하여 네게 어울리는 이명(異名)을 새로이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세냐 님의 말처럼, 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지.”


“예…….”


“데스나이트.”


카르멘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데스나이트와의 전투를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가짜일지라도 기억에 따른 전투기술은 하멜의 것. 나도 제노스 경과 여러 번 대련하여 그 기술들은 잘 알지만…….”


“놈은 단 한 번도 기술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스가 말을 받았다. 그는 굴욕감에 입술을 씹으며 내뱉었다.


“놈이 하멜식을 썼다면, 제가 반드시 알아봤을 겁니다.”


“쓸 필요가 없었다……. 일부러 쓰지 않았다. 둘 다겠지, 그 개새끼는 감히 나를 신경 써주는 모양이라.”


유진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이딴 짓을 저질렀으면서 말이야.”


“음.”


카르멘은 유진과 제노스를 번갈아 보았다. 제노스는 환생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제노스의 가문은 하멜식의 정통한 계승자. 카르멘은 둘의 인연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개인적으로 궁금하였지만, 당장 붙잡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중에 차근차근 물어보면 될 것이다.


“……놈의 마력은 꺼림칙하고 불길했다.”


지금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놈에게 섞인 것이 멸망의 마력이라면, 그…… 꺼림칙하고 불길한 힘이 바로 그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나는 그 마력을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다.”


카르멘은 그 의문을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었다. 광란의 마왕과 싸울 때, 유진이 휘두르던 검. 여행 중 우연히 얻은 아티펙트.


사실 그때도 완전히 납득은 하지 못했었다. 그만큼 월광검이 내뿜는 빛은 불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빛이 광란의 마왕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또한 그 빛을 다루는 자는, 카르멘이 전장에서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친족이었다.


그래서 납득하지 못했어도 더 캐묻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진이라면 어련히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카르멘 님이 무엇을 경계하는지 압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 말에 카르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유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카르멘 님…….”


“뭐요.”


“한 번만 더 불러다오.”


카르멘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유진은 그 시선과 표정이 껄끄러웠지만, 별로 어렵지도 않은 부탁이니 바라는 대로 말해주었다.


“카르멘 님.”


“아아…….”


그 대영웅, 우둔한 하멜에게 이름이 불리고 있다……. 카르멘은 묘한 희열을 느끼며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유진은 왜 카르멘이 저리도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하고서 자리에 앉은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는 것도 귀찮고.”


유진은 헛기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냐와 크리스티나의 우려 섞인 시선이 느껴졌다. 유진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린 뒤, 망토 안에서 월광검을 뽑았다.


“이건 베르무트의…….”


마음속에 사소한 거슬림이 있었다. 방금 전, 모두에게 자신이 여전히 유진 라이언하트이며, 변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즉, 지금 앞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가문의 어른이며, 유진도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저들을 어른으로 존중할 것이다.


그렇다면 베르무트는? 여태까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베르무트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해야 하나?


“음…… 혹시 제가 베르무트를 베르무트라고 부르는 게 거슬리시는 분……?”


저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다들 대답이 마땅치 않아 입을 다물었고, 자연스럽게 모든 시선이 가주인 길레이드에게 향했다. 길레이드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에 작은 원망을 느끼면서 어색히 웃었다.


“유진. 너는…… 하멜 님이기도 하니까, 시조님을 편히 불러도 상관없다.”


“그야 그렇긴 하죠.”


거슬리거나 안 된다고 할지라도 베르무트는 베르무트라고 부를 생각이기는 했다. 유진은 뽑아낸 월광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이 검은, 300년 전에 베르무트가 쓰던 검입니다.”


ㅡ화아아악! 불길하며 창백한 월광이 검신을 감쌌다.


“……조금…… 달라졌군.”


카르멘은 놀란 눈으로 월광검을 보며 말했다.


광란의 마왕을 토벌할 때 보았던 빛과, 지금의 빛은 완전히 똑같지 않았다. 비교를 하자면 예전에 보았던 빛이 데스나이트의 마력과 더 가까웠다.


“제힘이 좀 많이 섞인지라.”


유진은 그렇게 대답해주고서 월광검의 빛을 꺼트렸다. 뚫어져라 월광검을 보고 있던 길레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그런 검은 없었…….”


문득 옛날 생각이 들었다. 유진이 보물고에 처음 들어갔던 날. 길레이드는 지금도 유진이 차고 있는 목걸이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네 목걸이처럼……?”


“이 목걸이는 베르무트가 숨겨놓은 것이 맞습니다만, 월광검은 보물고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추측에서 벗어났지만 오히려 길레이드는 개운하다는 표정이었다. 벌써 10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렸지만, 가주인 자신도 알 수 없는 물건의 출처를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월광검…… 들어본 적은 없다.”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클라인이 중얼거렸다. 시조 베르무트가 쓰던 무기들 중 이름을 떨쳤던 것은 모두 다 보물고에 있다. 그런데 월광검이라니, 그런 이름의 무기는 그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베르무트는 의도적으로 이 검의 존재를 감췄습니다.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않았고, 검은 저의…… 음, 하멜의 무덤에 숨겨놓았죠.”


월광검의 존재를 감춘 것은 베르무트뿐만이 아니다. 마족들 사이에서도 월광검의 이름이 퍼지지 않은 것을 보면, 유폐의 마왕도 협력한 것 같다.


마왕이 용사에게 협력하다니. 몇 년 전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치부했겠지만, 지금의 유지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유진은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며 월광검을 망토 안에 넣었다.


“월광검은 멸망의 마왕의 무구입니다.”


분쇄추나 마창과 같은 마왕의 무구. 하지만 ‘멸망의 마왕’의 무구라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중에 유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베르무트가 어떻게 월광검을 쓸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행적과…… 월광검의 특수함. 그리고 밝힐 수 없는 여러 사실들로 추측하건대, 베르무트는 멸망의 마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존재다.


어쩌면, 베르무트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말을……!”


기온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 시조님이…… 위대한 베르무트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앉아라, 기온.”


얼굴이 창백해진 것은 길레이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기온처럼 고함을 지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그 차가운 목소리에 기온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밝힐 수 없는 비밀이라 함은?”


하멜의 무덤에서 베르무트가 세냐를 공격한 것.


베르무트에게 누르에 대해 경고한 것.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희 시조한테 가슴이 뻥 뚫려서 죽을 뻔했다니까?’


‘아니 그렇다고 베르무트가 나쁜 놈이라는 게 아니라, 왠지 약간 맛이 간 상태였달까…….’


저렇게 심각한 후손들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잖은가. 세냐와 유진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밝힐 수 없는 비밀이라는 건 말 그대로 밝힐 수 없다는 거야.”


세냐의 말에 다들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베르무트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일단 저희…… 어…… 라이언하트의 피가 특별하다, 뭐 이런 겁니다.”


“……설마…… 시엘의 마안도?”


애니실라가 머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유진은 재빨리 애니실라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예, 뭐, 그런 것 같더라고요. 라이언하트가 마왕의 무구를 다뤄내는 것도…… 이 월광검도 그렇습니다.”


“멸망의 검…….”


카르멘이 중얼거렸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내 몸에는 특별한 피가 흐른다는 것이구나. 마왕의 피. 하지만 사악하지는 않은…….”


“예, 바로 그렇습니다.”


설명에 난항을 겪던 중이다. 유진은 냉큼 카르멘의 말을 받았다.


“베르무트의 정체는 알 수 없고, 월광검이 멸망의 검이기는 하지만,녀석은 사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영웅다웠죠. 제가 우둔하지 않았던 것처럼.”


유진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을 맺어 평화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자신이 죽었다 속이고, 직접 멸망의 마왕을 봉인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봉인……!”


카르멘의 눈이 번뜩였다.


“봉인이라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인가?”


길레이드도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멸망의 마왕이 은둔하고 있는 라비스타. 그 심부에 위치한 신전에서, 베르무트는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 그 자체가 유폐의 마왕과 맺은 약속이겠죠.”


“그렇다는 건 시조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는 겁니까!”


제노스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위대한 베르무트가 살아서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다! 그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희생을 듣는 모두의 눈동자에 불이 켜졌다.


“그래.”


유진도 힘을 주어 말했다.


“아아아!”


카르멘이 양손을 번쩍 들며 탄성을 질렀다.


위대한 베르무트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라이언하트의 피에는 사악한 마(魔)가 섞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ㅡ상관 없다! 카르멘은 단 한 번도 사악한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저 멸망의 검을 보고 느껴지는 것은 구역질나는 불길함뿐이다. 카르멘은 제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라이언하트와 세상을 위해 언제든 제 몸을 바칠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시조님이 살아 계신다면, 살아서 멸망의 마왕을 홀로 봉인하고 계신다면. 이 시대의 평화가 시조님의 희생에 의한 것이라면……! 나는, 본가의 가주이기 전에 한 명의 라이언하트로서 시조님을 구하고 싶다.”


길레이드도 단호히 내뱉었다.


혼란스러운 얘기다. 무엇 하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하지만 시조께서 세상을 위해 몸을 바치고 계신다면. 그분의 신화와 영광을 아는 후손이라면 마땅히 시조님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나는 베르무트가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유진이 입을 열었다.


“베르무트는 나를 환생시켰습니다. 내가, 처음 동화책을 읽고. 지금 세상에 대해 알고. 그 후로 매일 했던 생각이 있습니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유진의 목적은, 하멜로 죽기 전부터 변한 적이 없었다.


“나는 모든 마왕을 죽일 겁니다.”


하멜이 그랬듯이, 유진도 똑같은 것을 바란다.


세냐도, 아니스도, 모론도 똑같은 것을 바란다.


“그리고 베르무트를 구할 겁니다.”


빌어먹을 환생 460화


부모는 다르다지만, 10년 동안 형제로 지냈다. 유진이 양자로 막 들어왔을 때는 여러 가지로 불만이 많았다.


애니실라는 시안에게 몇 번씩이나 유진과 사이좋게, 정말로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내라고 가르쳤다. 가주인 아버지와 삼촌도, 유진 같은 재능의 총아가 본가의 양자로 들어온 것에 기뻐했다. 쌍둥이 동생인 시엘은 처음부터 은근히, 아니, 대놓고 유진을 마음에 들어 했다.


당시 13살이던 시안은 갑자기 생긴 가족을, 형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특히 시안은 어릴 때부터 첩실인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본가의 가주가 되겠다고 결심했었기에, 누가 보아도 뛰어난 천재인 유진이란 존재에 거북함과 질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시엘이야 진즉부터 가주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었지만, 시안의 입장에서 유진은 박힌 돌에 부딪히는 굴러들어온 돌. 아니, 바위였다.


하지만. 처음 유진이 양자로 들어왔을 때 가졌던 불만은 한 달을 이어가지 못했다. 당시 시엘이 그러했듯, 시안에게도 또래의 친구는 없었다.


엄격한 가정교육. 첩실의 자식이라는 꼬리표. 표독한 정실 테오니스. 그런 환경에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유진은 시안에게 있어서는 싫어도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시비를 걸었고, 그럴 때마다 흠씬 두들겨 맞았다. 오히려 그런 것이 시안의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


“…….”


13살은 어린 나이다. 아무리 명문 귀족가에서 태어나 어울리는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어린 나이에서 우러나는 유치한 언동은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이다…….


유진은.


지금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조숙하기는 했다. 시안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특히 사춘기를 겪을 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부끄러워 죽고 싶어진다. 동갑인 유진도 똑같은 시기에 사춘기를 겪었을 텐데, 그 시절의 유진에게는 사춘기를 맞이한 새롭고도 풋풋한 느낌은 없었다.


그냥, 원래부터 조숙했으니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크흡…….”


옛날 생각을 떠올릴수록 시안의 입꼬리는 씰룩쌜룩 올라갔다.


그 조숙한 유진이, 평소답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우겨댈 때가 있었다. 300년 전 영웅들의 이야기를 할 때. 라이언하트라면 대부분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아닌데? 나는 하멜 님을 존경하는데?


-내가 모론 님을 존경한다는 사람은 봤어도, 하멜을 존경한다는 놈은 처음 본다.


실제로 그랬다. 마법사라면 현명한 세냐를, 성직자라면 신실한 아니스를 존경하는 것이 당연한바. 그리고 기사라면, 대부분은 위대한 베르무트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간혹 괴짜나 무식하게 힘만 센 놈들은 용감한 모론을 존경하기도 한다.


우둔한 하멜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절대 없지는 않겠지만, 굉장히 드물다. 그야, 동화책에 나오는 하멜은 정말로 우둔하고 존경할 구석이 많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물론…… 모자라면서 성격 나쁘고 재수가 없을지라도, 싸움은 아주 잘했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동료들을 위해 희생하기도 했다. 두 눈 크게 뜨고 찾아보면 존경할 구석이 조금은 있는 영웅이기는 했다.


하지만, 우둔한 하멜의 저러한 매력은 어린아이가 받아들이고 느끼기에는 어렵다. 동화책만을 읽고 하멜을 좋아한다는 것은, 나중에 충분히 나이를 먹고서 옛 추억에 젖어 동화책을 다시 읽은 뒤에, 아, 그래, 하멜도 제법 괜찮은 놈이었구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닌데? 가주님은 하멜 님을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거짓말하지 마.


-내가 가주님을 가지고 왜 거짓말을 하냐? 그리고 야, 하멜 님을 좋아하는 것이 뭐가 어때서? 하멜 님이 얼마나 멋진 분이신데. 네가 하멜 님의 뭘 알아?


-나…… 나도 동화책을 봤으니까…….


-동화책에 적힌 것과 실제 역사는 달라. 시안 너는 멍청해서 동화책밖에 안 본 모양이지만, 나는 동화책에 나온 것과 다른 하멜 님의 영웅담을 봤거든?


-그럼 나도 보여줘.


-정말로 보여주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보여줄 수 없어. 그 책은 기돌의 본가에 두고 왔거든. 제목? 제목도 기억이 안 나. 워낙 낡은 책이라서 제목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도 유진에게 몇 번 물어보았지만, 기돌 본가에 있다는 책을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뿐만이 아니다. 사마르 대수림에서 데스나이트를 처음 봤을 때. 루하르 왕국에서 하멜 님의 동상을 봤을 때. 그 외에도 여러 번. 유진은 기회만 있다 하면 하멜 님이 어쩌고 하면서 떠받들곤 했다.


“풉…….”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던 것이란 말이지? 아무도 모르게, 열심히 자기 칭찬을 하던 것이란 말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시안은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푸흐흐…….”


표정으로만 웃으려 했는데, 씰룩대는 입술 사이로 웃는 소리까지 튀어나왔다.


유진도 당연히 그 소리를 들었다. 참았다. 모든 사정이 알려진 이상, 시안이 웃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웃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에 웃지 말라는 것도 잔인한 일이니까.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풋풋 거리며 웃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잔인해져도 상관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떠오른 생각대로 행동했다. 즉시 몸을 돌려서, 시안에게 다가갔다. 시안은 기겁하며 표정을 바꾸고 도망치려 했지만, 시안이 전력을 다한들 유진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시안은 몇 걸음 움직이지도 못하고 유진에게 붙들리고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왜 웃냐? 어? 왜 웃냐고.”


“그,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옛날 생각, 그래, 뭔 생각이 나서 그렇게 웃는데? 어? 나도 같이 좀 웃자.”


시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유진이 묻는 대로, ‘옛날에 네가 하멜 님에 대해 떠들던 것이 웃겨서 웃었다.’라고 대답해 버린다면. 저 성격 나쁜 놈은 형제라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원탁에서의 대화는 끝났다. 다들 혼란스럽지만, 그럴지라도 성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몰두해야 한다.


“…….”


애니실라는 왜 세냐가 자신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것인지. 그리고 왜 세냐의 뒤에 시엘이 착 달라붙어서 따라오는 것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엄격한 라이언하트에서 첩실로 들어와 정실을 넘어선 철혈과 야망의 여인. 쌍둥이를 낳기 전부터 눈치만으로 본가에서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애니실라는 세냐와 시엘의 눈동자에 어린 강렬한 ‘기대’를 느꼈다.


‘설마…….’


세냐는 제자인 유진에게 마음이 있다. 예전에 저택에도 들었었다. 그때 분명 차만 마셨는데, 도중부터 세냐는 마치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주접을 떨어댔다. 애니실라는 그 순간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허나 떠올리기가 두려웠다.


아무튼, 세냐가 유진에게 마음이 있고, 애니실라에게 허락을 구하기도 했었다. 미리 허락을 구했던 것은, 세냐가 주변의 시선을 생각보다 많이 신경 쓰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진이 라이언하트의 극소수가 아닌 모두에게 정체를 밝혔다면. 아니, 라이언하트를 넘어 세상 전체에 정체를 밝혔다면. 세냐가 더 이상 주변의 시선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진이 하멜의 환생인 이상, 세냐 님과의 관계는 문제가 없지. 적어도 나와 남편이 판단하기에는.’


이전부터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수백 년의 나이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현명한 세냐’가 라이언하트의 일원이 된다는 영광 앞에서 수백 년의 나이 차이는 사소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그래서 더 확실한 답을 받고 싶으시다는 건가?’


억지로 이해했다. 도저히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애니실라가 보았던 세냐는 300년을 살았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솔직히 애니실라는 손주를 보고 싶었다. 유진을……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가까운 친척 정도로는 생각하고 있다. 유진이나 시안이 자식을 낳고, 손주들을 돌보는 모습은 가끔 상상하면 행복한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애니실라는 왼손에 쥐고 있는 메르의 손을 꼭 쥐었다.


“헤헤…….”


메르도 오랜만에 애니실라를 만나서 반갑고 좋았다. 메르에게 있어서 애니실라는 세냐나 성녀들과는 다른, 보다 원숙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반대편 손을 쥔 라이미르아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라고 생각하느니라.’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일전에 메르에게 지적을 들었기 때문이다.


-애니실라 님은 할머니라는 소리에 화를 내실지도 몰라. 그러니까 애니실라 님은 애니실라 님이라 불러야 해.


정답이기는 했다. 손주를 보고 싶지만, 벌써부터 할머니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 지금의 애니실라는 복잡한 갈림길 도중에 서 있었다.


‘시엘…… 시엘은…….’


딸이 유진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던 것은 안다. 그 마음을 존중하고 지지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처음 유진을 양자로 들였을 때부터, 애니실라는 언젠가 시엘이 유진과 맺어지는 미래를 설계했었다. 문제는 유진이 시엘과는 절대로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 상대방이 싫다는데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남매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 유진은 하멜의 환생.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시엘, 너도 주장할 말이 생기지. 애당초 친남매도 아니지만, 유진이 환생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보다 강하게 네 감정을 주장할 수 있겠지.’


그래서, 지금 둘이 사이좋게 뒤를 따라오는 이유는? 유진은 애니실라를 존중하고 있다. 애니실라가 자리를 마련한다면 싫어도 일단은 참석할 것이다.


설마, 그걸 바라는 건가? 내가 직접 나서서 약혼이라도 맺어주기를 바라는 건가? 설마. 세냐는 몰라도 시엘이 그런 철없는 짓을 할까.


……확신할 수 있나? 애니실라도 과거, 남편에게 불타는 사랑을 느꼈었다. 라이언하트라는 이름도 욕심이 났었지만, 모두의 반대를 무시하고, 가장 아름답던 젊은 시절에 남편의 첩실로 들어가는 것은 불타는 사랑에 말미암은 철없는 짓이었다.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다. 격렬한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바보가 되어버린다.


애니실라의 생각대로였다. 세냐는 애니실라의 입에서 ‘약혼’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시엘은 거기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세냐가 선수를 치는 것은 견제하고 싶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어머니가 친딸의 편을 들어주기를 기대했다. 둘은 실제로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냐 님, 전투에 휩쓸린 숲의 수습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으, 응?”


“저도 아까 가보았는데, 숲이 숲이 아니게 되었더군요. 나무는 잘게 쪼개지고, 땅은 뒤집어지고.”


세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마 그 절반은 세냐의 마법에 의한 것이리라.


“그 폐허를 당장 숲으로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땅이 무너지거나 나무가 더 쓰러지는 등의 다른 피해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명한 세냐 님의 마법이라면 금세 수습할 수 있겠죠.”


“으, 응, 알았어…….”


“시엘, 너도 함께 가서 세냐 님을 도와드리렴.”


“네, 어머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싸늘하다. 시엘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혼란스러운 마당에 사욕을 채우다니…….’


애니실라는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양손을 나눠 잡은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들었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식당에 가자. 그곳에는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많을 거야.”


부상자들의 치료는 이미 끝났고, 시간은 어느덧 아침이 가깝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참사가 있었으니, 상처가 나았다 해도 속 편히 잠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쯤 식당에서는 기사들의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한 식사 준비가 한창이리라.


“유진 님.”


시안을 갈구는 중에 크리스티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멀찍이 서 있는 유라스의 신관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속삭였다.


“교황청 측에서 새로이 연락이 왔습니다. 성전의 준비를 묻던데, 무어라 답하면 좋을는지요.”


신성제국은 유진을 빛의 사도이며 용사라고 공표했고, 절대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흑사자 성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교황청에도 전해졌으니, 그 광신도들의 입에서 성전이 오르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신군을 징집할 필요는 없고, 일단 혈십자기사단과 광명사제단만 대기시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혈십자기사단은 유라스 성기사들의 최고정예. 그리고 광명사제단은 전투신관들의 최정예다.


그들은 광기에 가까운 신앙과 정신으로 무장하여 순교를 부르짖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기에 교황이 신을 운운하며 성전을 선언한다면, 유라스의 신도 대부분이 농기구라도 들고서 신군에 합류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정말로 끝장나기 직전이라면 모를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그렇게까지 신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왜 데스나이트가 흑사자 성을 습격한 것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이 습격은 아멜리아의 명령이 아니다. 그 가짜 놈이 스스로 생각해서 내린 답이다.


‘개 같은 일이지만, 이 습격은…… 나를 배려하고 있다. 나를, 끌어내고 있다.’


생각했다.


데스나이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했는지. 그 생각을 주관하는 인격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놈은 하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을지라도, 놈의 인격은ㅡ 하멜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즉, 그 가짜 놈은 하멜처럼 생각해서, 하멜다운 답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나를 위해서 이 성을 습격한 이유.’


놈이 정말로 하멜에 가깝다면.


그간 드러낸 유진의 행적을 통해, 유진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 것이다. 아니, 그건 굳이 하멜일 필요도 없다.


그만큼 유진은 노골적으로 바라왔다. 멜키스에게 부탁해서 나하마 흑마법사들을 공격했다. 쥐새끼처럼 숨은 아멜리아를 끌어내려 했다. 나하마에 마족들이 넘어오게 만들었다.


‘내게 명분을 준 거야.’


유진이 의도했던 것은, 궁지에 몰린 아멜리아가 전쟁을 준비하게 만드는 것.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가짜 놈이 흑사자 성을 습격했으니, 이쪽에서 군을 일으켜 나하마로 쳐들어갈 명분이 생겼다. 저번처럼 멜키스를 이용해 살살 긁을 필요 없이, 전력을 모아 정면에서 짓밟아버리면 모두 다 끝난다.


“개자식.”


명분뿐만 아니라 감정마저 기폭 해 주었다. 굴욕, 분노. 유진은 고개를 돌려 성벽 아래를 보았다.


저 아래에 모여 있는 조란의 전사들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이바타의 등. 녀석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다른 동맹국들이 주저할지라도, 이바타는 사마르의 모든 전사들을 동원해서라도 유진과 나하마에 쳐들어갈 것이다.


“가서 좀 달래야겠어.”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난간에 발을 올렸다.


“유진!”


하지만, 유진이 뛰어내리기도 전에 성탑에서 버럭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키옐 황궁에 상황을 보고하겠다던 길레이드가, 체면도 져버리고서 창밖에 몸을 내밀고 있었다. 유진은 놀라서 그쪽을 올려보다가, 표정을 굳히고서 높이 뛰어올랐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싶었다.


뭔가 엿 같은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빌어먹을 환생 461화


나하마의 수도, 하우리아가 거대한 지네에 둘러싸여 봉쇄됐다.


키옐 황궁에서 전해진 소식대로, 저건 거대한 지네였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저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 정체를 모르지만, 유진과 세냐, 아니스는 저것의 정체를 안다.


“지네산맥이잖아.”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과거 시무인에서 누아르가 보여주었던 꿈에 따르면, 지네산맥은 라비스타의 지하도시에 유폐되어 있었다. 저 먼 라비스타에 처박혀 있던 지네산맥이 왜 하우리아에 나타났단 말인가?


지금 시대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은 전쟁시대부터 유폐의 마왕의 영지였다. 유폐의 마왕은 판데모니엄과 붉은 평원 등, 모든 영지를 지네산맥으로 둘러쌌다.


즉, 지네산맥은 유폐의 마왕의 것이란 말이다. 설마 유폐의 마왕이 나하마에 본격적인 지원을 해주는 건가?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영상을 노려보았다.


저 징그럽고 거대한 마물은, 300년 전과 모습이 다르기는 했다. 전쟁시대에 지네산맥은 이름처럼 ‘산맥’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영지 전체를 둘러쌓고, 그 위에 흙과 나무 따위를 올려놓았단 말이다.


뭣도 모르고 유폐의 영지에 진군하던 수많은 결사대들이 산맥을 올랐다가 꾸물거리는 지네 다리에 동강나거나 중독되고, 혹은 새끼지네의 군세에 잡아먹혔다.


당시에 세상이 저것이 산맥이 아닌 거대한 마물이라고 인식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그야, 지네산맥의 덩치는 도저히 상식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영지를 마물 한 마리가 휘감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은 후에야 산맥 자체가 마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유폐의 마왕이 지네산맥을 열기 전까지 놈의 영지는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금지로 여겨졌다.


“뭘 하고 싶은 거지?”


세냐도 지네산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냥 수도의 장벽으로 쓰려는 것인지 알았다. 300년 전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소식들을 살피니, 단순히 그런 목적인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지네산맥은 하우리아를 봉쇄했다. 외부에서 더 이상 하우리아와 연락이 닿지 않게 되었다. 하우리아에 존재하는 모든 워프게이트가 파괴됐다. 게이트를 닫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괴되었단다.


워프게이트가 파괴되기 전에, 수도의 시민들 대부분이 근처의 도시들로 추방당했다. 하우리아에서 권세를 떨치던 귀족들도 추방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술탄이 죽었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하마의 술탄, 알라부르가 죽었다는 것이다.


봉쇄된 하우리아에서 가장 먼저 추방된 것이 알라부르의 가족들이었다. 젊은 후계자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술탄의 머리를 품에 안고 근처 도시의 워프게이트를 통과했단다.


저 거대한 사막왕국을 지배하던 군주가, 순식간에 살해당하고 머리만 옮겨진 것이다. 술탄의 머리를 끌어안고 다른 도시에 나타난 후계자는, 지금은 키옐 황궁에 망명을 청하고 답을 기다리고 있다…….


“악마.”


유진은 키옐 황궁에서 보내온 서신의 내용을 읽었다.


술탄의 후계자, 알바드크는 덜덜 떨면서 ‘악마’라는 말만 반복했단다. 갑자기 하늘에서 악마가 나타났고, 그 악마가 술탄의 머리를 뽑아버렸다. 그 머리를 아들이 품에 안게 하고 키옐로 도망치라고 속삭였다.


“놈인가?”


유진은 머리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중얼거렸다.


‘악마’라고 불릴 만한 놈. 흑사자 성을 습격한 가짜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놈이 나하마에 돌아가서 아멜리아 머윈과 뭔가를 할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왜 유폐의 마왕이 라비스타에 처박아뒀던 지네산맥이 놈의 수중에 있냔 말이다.


더욱이 문제인 것은, 가짜의 수중에 있는 것이 지네산맥뿐이 아니란 것이다. 영상 쪽에서는 지네산맥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저 안쪽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마물이 있다. 하우리아에서 탈출한 시민들 전원이 똑같은 말을 떠들었다.


하늘 저편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밤이 된 것처럼 하늘이 어두워졌다. 거대한 지네가 수도를 둘러싸고, 그 뒤에 시커먼 하늘에서 거대한 괴물들이 떨어져 내렸다.


다행히 그 광경은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소리. 시야를 그대로 옮겨놓아 엉망으로 흔들리지만, 비명만큼은 또렷하게 들린다. 높은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괴물들이 수십 채의 건물을 짓밟았다.


그것만으로 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다행히도 떨어진 괴물들은 날뛰며 움직이지는 않았다. 마치 경배라도 하듯이, 어둠이 몰리는 나하마 왕궁을 향해 고개를 숙여 웅크리기만 했다.


하우리아에 심어놓았던 정보국 소속 밀정들이 기록한 영상이다. 아직은 상황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아 영상의 개수가 적고 조악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다른 출처로 정보가 갱신될 것이다.


‘더 볼 필요는 없군.’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생각했다.


마물을 잘 모르는 지금 시대 사람들은 정보를 더 필요로 하겠지만, 유진은 그렇지 않았다. 그야 저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아르가 보여준 꿈에 나온, 라비스타에 처박아둔 마물들. 대충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놈은 라비스타의 모든 마물을 데리고 왔다.


거기에 마족들까지 데리고 온 모양이다. 알피에로를 필두로 한 멸망의 권속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멸망의 권속들이 가짜를 따른다는 것은…… 이 자체가 멸망의 마왕의 뜻인가? 아니면 유폐의 마왕이 부추겼나?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는 베르무트는 어떻게 된 거고?


“헬무드의 입장은 없답니까?”


“아직 침묵하고 있는 모양이다.”


길레이드가 울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만한 일이 벌어졌는데도 헬무드는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에 대해 생각했다. 놈은, 절대로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이 바벨을 오르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다.


“바뀌는 것이 있습니까?”


유진이 입을 열었다. 눈앞에서는 하우리아의 영상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다. 유진은 날벌레라도 치우듯이 손을 휘저어 영상을 꺼버렸다.


“내 전생 시체에서 태어난 새끼가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겁니다. 그 새끼는 이 성에 쳐들어왔고, 사라져서, 지금 하우리아에 있습니다.”


유진이 그렇게 내뱉자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아, 바뀌는 것이 없지는 않네요. 저 새끼 꼬라지를 보니 하우리아에서 농성하려는 모양입니다. 세력은 나하마 군대보다는 마물과 마족을 위주로 구성한 모양이고.”


그 점은.


하멜답다고 생각했다.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머릿수만 많은, 그렇다고 고기방패로 쓰자니 찝찝한.


아멜리아가 에미르들에게 요구했던 징집병들은 태반이 하우리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나마 남은 군대도 지네산맥 바깥으로 추방됐다. 휘말려 죽을 민간인도 추방했다.


집요하리만큼.


가짜는 하멜을 위해주고 있다. 전쟁의 구도 자체를 마족과 인간으로 잡았다.


“술탄은 뒈졌고 후계자는 키옐에 망명을 청했으니, 에미르들도 굳이 전쟁에 합류하지는 않을 겁니다. 애당초 전쟁에서 에미르들이 얻을 것은 없을 테니. 뭐, 전장이 하우리아에 집중된 것은 편한 일이네요.”


실제로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네산맥을 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끔찍했는지는 전쟁시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라비스타에서 온 마물들이 과연 지네산맥 안쪽에서만 기다릴까? 그럴 리가. 하우리아는 사막 한복판에 있다. 그 화려한 수도와 성벽 너머는 불모지의 사막이다.


하우리아를 치기 위해서는 그 사막을 넘어야 한다. 아마 마물들은 그곳에서부터 진을 치고 있을 거다.


‘모순이야.’


유진은 표정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가짜는 하멜을 위해주고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와서 죽어주거나, 전쟁 시늉만 하면 되는 일. 하지만 가짜는…….


모론을 찾아갔다.


흑사자 성을 공격했다.


나름 공들여 전쟁의 무대를 만들었다.


‘설마.’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너 따위가 나를 시험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돼서.


진짜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라도 품었나? 내가 바라는 대로 전쟁을 열어주면서, 그 무대에서 뭔가를 주장하고 싶은 건가. 가짜 나름의 주장을 하고 싶나? 가짜일지라도 진짜일 수 있다며 떠들고 싶나. 아니면 자신이란 존재가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나.


‘나라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놈에 대한 감정에서 분노 이외의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 대수림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변한 것은 없다. 가짜는 가짜 나름대로 진짜를 떠들고,


유진은 철저하게 놈을 짓밟을 뿐이다.


“세냐.”


유진은 고개를 돌려 세냐를 보았다.


“알아.”


세냐는 뺨에 묻은 흙먼지를 쓱 닦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숲의 정리가 다 끝나지 않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숲의 정리를 우선할 수도 없는 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냐는 애니실라의 표정을 살폈다.


“일단, 나는 바로 아롯에 가서 국왕의 멱살을 잡을게.”


“멱살은 왜 잡아?”


“싫다고 말할지도 모르잖아.”


유진은 말없이 세냐를 흘겨보았다. 세냐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아롯의 정예를 모으도록 하겠다 이 말이야. 당연히 대마법사들도 모을 거고.”


“흑탑주는 어떡해?”


“음…… 상대가 상대니까. 흑마법의 전문가도 한 명 있으면 좋지 않을까…….”


“흑탑주한테 너무 잘해주는 것 아냐?”


유진의 눈이 얇아졌다. 세냐는 그 시선에 혹시 모를 기대를 품었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건가? 내가 지금 다른 남자를 데리고 간다고 해서 질투하고 있는 건가?


“으흐흐…… 너무 걱정하지는 마. 발자크는 흑마법사지만, 음, 마법사로서 꽤 마음에 들거든.”


“그 새끼가 뒤통수치면 어떡해?”


당연히 유진은 질투라는 감정은 느끼고 있지 않다. 유폐의 마왕이 데스나이트에게 뭔가 수작을 부린 것 같으니, 자연스레 발자크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거야말로 괜한 걱정이지. 만에 하나 발자크가 헛짓거리를 할지라도 나는 당하지 않아.”


“얼씨구. 다른 사람은 어떡하고?”


“그 또한 괜한 걱정이야. 내가 발자크에게 시선을 뗄지라도 내 마법은 발자크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발자크한테 저번에 맹세도 받아놨고.”


세냐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세냐는 발자크에게 들은 맹세보다, 자신의 절대률을 믿었다.


“만약 발자크가 헛짓거리를 한다면…… 오히려 잘 됐지. 나중 갈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이면 될 일이니까.”


세냐가 저렇게 말하니, 유진도 더는 반발하지 않았다.


대규모 전투에서 발자크의 시그니처, 블라인드가 위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새로이 만든 시그니처라는 글러트니를 한번 확인해 두고 싶기도 했다.


유진도 아직 발자크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젠가…… 필연적으로 적이 될 사이라고는 해도. 아직은 그때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여태까지 여러 번 도움을 받았으니, 발자크를 죽이는 것에 충분한 유예를 두고 싶었다.


“나는 황궁에 가도록 하마.”


길레이드가 말했다.


“이쪽의 사정은 보고 했다만, 유진, 네 주장도 새로 전해야 할 테니.”


“예. 아, 황제는 제가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황제의 대응이 시원찮다면, 하멜에게 또 맞고 싶은 것이냐고 말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길레이드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전에 유진이 황궁에 다녀온 후로, 황제가 라이언하트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었다…….


‘그 이유였나…….’


하멜에게 또 맞고 싶은 것이냐니.


또, 라는 것은 저번에도 맞았다는 것 아닌가? 길레이드는 최대한 그쪽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흑사자 성의 수습은 클라인과 카르멘이 하기로 했다. 사실 수습이랄 것도 없이, 지금 당장에라도 무장하고 출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뜸 하우리아로 쳐들어갈 수도 없는 일.


“용사자들이 나설 때로군.”


카르멘이 중얼거렸다. 곤도르와 드워프들이 본가에서 제작한, 라이자키아 소재의 갑옷들은 아직 기사단에 보급이 되지 않았다.


카르멘은 제복 안의 엑시드를 어루만졌다. ‘변신’하지 않은 지금은 내의처럼 얇지만, 가슴 중심의 드래곤하트에서는 용암처럼 뜨겁고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가 가라앉아 있다…….


“음, 그러고 보니 유진. 네게는 나의 변신을 보여준 적이 없군.”


“변…… 뭐요?”


“변신. 뭔지 모르나?”


카르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였다.


“변신은 말 그대로 변신이다. 네가 칠흑의 불꽃을 몸에 휘감아 흑사자가 되듯이, 나는 마룡의 갑옷을 입고 변신하여 용사자가 된다.”


“예…… 예?”


“이해하기 어렵나. 과연, 나의 변신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로군. 네가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보여줄 수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데스티티브레이커와는 달리, 내 변신을 본다고 해서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죽을 필요는 없으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유진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변신은 전쟁을 위해 아껴두는 것으로 합시다.”


“물론 그래야겠지만, 이 변신은 가끔씩 조율해 줄 필요가 있다. 내게 더해진 마룡의 심장이 속삭이는구나…….”


카르멘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휘청 몸을 기울였다.


“……나는 가끔 사악한 속삭임을 듣곤 한다. 마룡 라이자키아, 놈의 원혼이 나를 유혹하는 것이지. 살육, 피, 끔찍한 충동…… 허나 나는 라이언하트의 은사자. 비록 내 몸에 흐르는 피가 마룡의 속삭임에 감응할지라도, 나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어…… 예.”


“하지만 언젠가, 내가 나약해졌을 때 사악한 의지가 나를 지배해 버릴지도 모르지. 은사자인 내가 흑화(黑化)할 수도 있는 것이야.”


“흑화가 뭡니까?”


“나의 의지가 어둠에 물들어 타락하는 것이지. 물론 나는 쉽게 타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내가 타락의 사자가 되어버린다면, 유진, 네가 나를 죽여다오.”


“뭔 말도 안 되는…….”


지적할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카르멘의 엑시드에 쓰인 드래곤하트는 라이자키아의 것이 아니다. 애당초 라이자키아의 드래곤하트는 유진이 완전히 박살 내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녀의 엑시드를 보강하는 데에 라이자키아의 소재가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놈의 마력을 정화하는 것에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반 년 가까이 매달렸다. 카르멘이 주장하는 것처럼 라이자키아의 원념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만약 카르멘 님이 타락…….”


“흑화.”


“예, 흑화하신다면…… 제가 직접 카르멘 님을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유진은 굳이 지적하지 않고 카르멘의 말에 맞춰주었다.


다년간 카르멘을 봐온바,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과연 카르멘은 유진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변신이 궁금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예…….”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유진은 카르멘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빌어먹을 환생 462화


원탁에서 다시 이야기를 끝내고 나온 사이에 이바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쪽을 알아보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조란의 전사들 중, 유진이 기억하는 얼굴도 몇몇 있었다. 코칠라 부족과의 전쟁에 참가했던 전사들. 유진은 대충 손을 흔들어 화답해 주고, 전투에 휩쓸린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바타의 거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숲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바타의 등이 보였다.


“아직도 기죽어 있냐?”


다가가면서 묻자, 이바타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얼굴을 왈칵 구기고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 그 새끼가 얼마나 강했고, 네가 얼마나 무력했는지?”


다 안다는 듯한 이죽거림.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가뜩이나 좋지 않은 기분이 더더욱 박살 나서 주먹을 던졌을 텐데, 이상하게 유진을 상대로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유진이 더 강해서? 아니, 그런 것과는 다르다. 설령 상대가 더 강할지라도, 모욕을 당한다면 이바타는 감내하지 않을 것이다.


저 말이…… 조롱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참 신기하게도, 유진에게는 정말로 ‘다 알아서’. 자신도 진즉에 겪어본 것이라는 듯한 태도가 느껴졌다.


“그렇지.”


결국 이바타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숲에서 태어났지만 세상을 안다.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적부터, 밖을,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바타는 첫 만남부터 묘하고 신기한 녀석이었다.


대수림 깊이 위치한 대부족의 후계자. 그런 것치고는 오만한 구석도 없었다. 외지인이라며 무턱대고 적대하던 다른 원주민들과는 달리, 이바타는 처음부터 호의를 보이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물론 그 첫 만남 자체가 이해관계를 따진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유진이 생각하기에, 대부족의 후계자인 이바타가 외지인과 그런 관계를 꾀하려 한 것부터가 제법 신기한 일이었다.


크리스티나와 둘이서 대수림을 떠돌며, 여러 원주민을 만났다. 대부분은 적이었다. 문명을 거부한 그 거대한 숲은 별개의 문화와 법칙이 존재하는 독립된 세계였다.


이바타를 따라 조란 부족에 갔을 때 보았던, 이바타의 친척과 원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굳이 바깥과 외교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외부 문명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바깥에 도움을 청하는 이바타를 꾸짖었다.


“나는 너와 만났고, 세상에 더 관심을 가졌다. 널 본 순간에, 나는 정말로 실감해 버린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숲은 넓지만 좁다. 숲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바깥을 모르는 얼간이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바타의 언어는 원주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유창했다. 유진은 처음 만났을 때의 이바타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때의 이바타의 공용어는 어눌하고 느려터져서 들어주지 못할 지경이었다.


“바다 건너 시무인에 갔을 때. 나는 그곳에서 세상의 대부분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내로라하는 기사들. 세상이 최강을 말할 때 당연하게 언급되는 사람들. 또한 헬무드의 두 공작도 봤다. 유폐의 칼. 그리고 몽마의 여왕.”


이바타는 말을 잠시 멈추고서 고개를 저었다.


“세상을 알았다. 내가 거대한 세상 앞에서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은 진즉부터 자각했다.”


“겸손이 과하구만. 어지간한 천재들이 보기에는 너도 부조리할 만큼 강한 놈이야.”


유진은 흐뭇하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바타가 말하는 것. 녀석을 짓누르는 감정은 유진에게도 그립고도 익숙한 감정이다. 300년 전에 하멜도 처음 베르무트를 보았을 때. 그리고 베르무트에 대해 점점 알아갈 때 저런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저 감정은 시안이 유진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것이며, 카르멘이 마왕에게 느낀 것과 같은 것이다.


하멜은 절망하지 않았다. 시안과 카르멘도 절망하지 않았다. 과연 어떠한 행동과 마음가짐이 정답일지는 모른다. 이런 문제에서 내놓는 답은 언제나 주관적인 법이다.


하지만, 결국 넘어서지 못하고, 발끈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것은. 유진이 생각하기에 결코 정답은 아니었다. 절망하고 포기해 버린다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네가 날 그리 말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바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성을 습격한 놈은…… ‘다르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뭐. 너무 강해서? 아니면 그 힘이 불길해서?”


“불길함이라. 그렇지, 놈의 힘은 불길하고 사악했다. 유진. 아까 말했듯, 나는 시무인에서 세상을 봤다. 마족. 유폐의 칼과 몽마의 여왕.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죽음’은 느끼지 못했다.”


이바타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해했다. 그만큼 혼란스럽고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바타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호가 무엇인지 안다. 숲의 가호. 사마르 전체가 이바타의 가호로 작용하고 있다.


가히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가호지만, 습격자의 마력은 이바타의 가호를 무력화시켰다. ……그래서인가? 허무하리만큼 무력화 당해서 움츠러든 것인가?


‘다르다.’


이바타는 잠시 고민하며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유진도 이바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결국 이바타는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내뱉었다.


“나는 그 존재에게 한 번 죽었던 것 같다.”


“뭐?”


“죽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받았다. 물론 지금 나는 살아 있지만, 언젠가 놈에게 한 번 죽었던 것 같은…….”


“대체 뭐라는…….”


하던 말을 뚝 멈췄다. 유진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이바타를 쳐다보았다. 머릿속에서 찌릿하고 퍼지는 전류. 유진에게 녹아든 신성이 어떠한 직관을 이뤘다.


‘설마.’


아가로트의 기억. 수많은 신도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유진에게 이어진 것은 두 명이다.


황혼의 마녀.


그리고 대전사.


황혼의 마녀는 지금 시대에 환생해서 누아르 제벨라가 되었다. 어쩌면 대전사도 환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굳이 찾으려 들지는 않았다. 환생했을 지라도 지금 시대에 살아 있다는 확신도 없거니와, 누군지도 모르는 놈을 전생의 인연이랍시고 찾는 것도 우스우니.


어쩌면.


전생의 인연이 지금 시대에도 얇게나마 이어진다면. 그렇게 인연이란 것이 시대를 넘어서 반복된다면.


굳이 찾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인연이고 운명이라면 어느새 옆에 있을 테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아가로트의 대전사는 이바타 자하부로 환생했다.


사마르의 대부족 조란의 후계자. 숲의 가호를 받고, 숲의 전사들 중 가장 뛰어난 자. 진즉부터 유진과 만났고, 친분을 유지했으며, 지금은 대족장이 되어 유진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이바타가ㅡ 대전사의 환생이라고?


“…….”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눈앞의 이바타가,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것만 같다는 생각. 유진은 여태까지 몇 번씩 절묘한 우연을 만나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ㅡ 볼레로 거리의 암시장. 가르기스를 따라 거인의 불알을 사러 간 경매장에서 월광검의 파편을 만난 것도 절묘한 우연이다. 아리아르텔과 만나고, 아가로트의 반지를 받은 것도 우연이다.


아니, 이건 운명이다. 우연이 이렇게 편리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대체 누가 운명의 실을 자아 내리는가.


‘베르무트는 내가 아가로트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베르무트의 안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정작 베르무트는 운명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굴던 유폐의 마왕인가? 놈에게 그럴 이유가 있나?


마왕이 아니라면.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벽이 지나 동이 텄다. 하늘은 여명의 색이 번지고 있다. 유진은 점점 선명해지는 태양을, ‘빛’을 보았다.


‘빛의 신?’


모르겠다.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친구지?”


“……?”


대뜸 던진 말에 이바타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복잡한 고민을 내려놓고, 이바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라구르야란에서 떠올렸던 아가로트의 기억. 대전사의 얼굴은 제법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바로 앞에 있는 이바타의 얼굴과 비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비슷한데, 얼굴은 안 닮았네.’


굳이 말하자면 지금이 더 잘생긴 것 같다. 그런 생각에 유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 생에서 대전사와 적은 아니다. 서로 싸워서 죽일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유진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누아르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이바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녀석의 어깨를 괜히 몇 번 두드렸다.


“뭐, 죽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라고 말을 해도 지금 너는 멀쩡히 잘 살아 있잖아. 그럼 된 거지.”


“음. 그렇기는 하지만…….”


“됐어, 괜한 생각은 하지 말자고.”


지금 시대에 태어나서 멀쩡히 잘살고 있는 이바타에게 괜히 전생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그런 얘기를 해봤자 혼란스럽기만 할 것 아닌가.


‘뭐, 내 쪽에서 거리를 둘 필요는 없지.’


유진이 생각하기에 이바타는 좋은 녀석이었다. 동갑이고, 싸움도 잘하고, 얘기를 듣자니 대수림을 통일해 대족장도 되었다는데.


오히려 가깝게 지내고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도 모자랄 판에 거리를 둘 이유가 어디에 있나?


‘당장은 무리여도, 나중에 슬쩍 다시 대전사로 삼을 수도 있겠어.’


지금의 유진은 신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단계다. 처음 신검을 뽑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력이 늘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은, 술이라도 진탕 퍼마셔 취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신이라 자처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그런 상태에서 대전사를 만드는 것도 우스운 일. 애당초 유진은 신의 대전사를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사마르 전역을 지배하게 될 이바타를 대족장으로 삼는다. 대수림에는 세계수나 다른 토착신앙이 대부분인데, 거기에 어찌 발만 잘 걸친다면 어마어마한 신앙을 수급할 수 있을 거다.


유진은 온갖 것에 ‘제벨라’라는 이름을 붙이고, 도시 전체에서 연호와 숭배를 받으며 힘을 끌어모은 누아르 제벨라를 떠올렸다. 누아르 자체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아 죽여 버리고 싶지만, 누아르가 정기와 마력을 수급한 방법들은 유진도 제법 마음이 끌렸다.


‘신상을 더 세우고…… 애들 읽으라는 동화책에 자서전도 좀 써야 하나…… 아니며 어디 강단에도 서고…… 유라스 순회도 한 번…….’


물론 저것들을 당장 할 수는 없다. 유진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이바타를 쳐다보았다. 이바타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진을 보고 있었다.


“근데 너 하멜 님은 어떻게 생각하냐?”


“갑자기 무슨 말인가?”


“하멜 님 말이야, 하멜 님. 사마르에도 동화책은 있을 것 아냐?”


“아…….”


두 번을 더 이름을 듣고 나서야 이바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둔한 하멜을 말하는 것인가?”


그 대답에서부터 유진의 머릿속에서는 이바타에 대한 평가에 감점이 매겨졌다.


“기록에 전해진 강함과는 별개로, 행적은 영웅이나 전사답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음, 하지만 최후만큼은 영웅다웠지.”


“…….”


“하지만, 그의 최후가 영웅다웠을지라도, 전사답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위대한 베르무트와 동료들이 숱한 위기를 겪었던 것에는 하멜의 지분이 크지 않았나? 하멜이 동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영리하게 행동했다면 몇 번의 위기를 쉽게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긴, 그런 점 때문에 우둔한 하멜이라 불리는 것이겠지.”


“네가 뭘 알아.”


유진은 결국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물론 이바타는 유진의 말에 동그랗게 뜬 눈을 끔벅거렸다.


“당연히 나는 잘 알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하멜에 관한 것은 동화책이나 전설로 들은 것이 전부이니. 하지만, 영웅으로 죽은 그의 최후가 모욕당한 것에는 분노를 느낀다.”


이바타는 대수림에서 보았던 하멜의 데스나이트를 떠올렸다.


사자를 모욕하다니. 이바타는 순수한 분노를 드러내며 내뱉었다.


하멜의 최후를 모욕하는 것은 지금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유진은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


라이언하트 사람들에게 하멜인 것을 밝혔으니 이바타에게 밝혀도 괜찮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넌 전생을 믿냐?”


“갑자기 무슨 말인가?”


“믿냐고.”


“대수림에는 죽음과 윤회에 대한 믿음이 있다. 모든 존재는 죽어서 세계수로 인도된다. 나무에서 열린 과일이 땅에 떨어지고, 그 씨앗에서 새로이 싹이 돋아나듯, 세계수는 인도받은 영혼을 순환시키고 세상에 다시 퍼트린다.”


대수림에 있어 세계수는 하나의 신앙이다. 세계수를 숭상하던 엘프족에게도 비슷한 신앙이 있다. 모든 엘프는 죽어 세계수로 돌아온다. 세계수에는 엘프 선조들의 영혼이 깃들며 종족을 수호한다…….


-세계수는 하나의 종족에게 신앙으로 여겨지는 만큼 영적이고 강력한 존재인 것이다.


-나는 바람의 정령왕이지만, 세계수의 바람은 지배할 수 없다. 나뿐만이 아니다. 그 어떤 정령왕도 세계수의 정령에게 간섭할 수 없을 것이다.


템페스트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세계수는 강력한 신앙이다. 대륙에서는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을 뿐. 유진이 느끼기에도 빛의 신과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 유진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세계수의 덕을 보기도 했었다.


세냐와 엘프들이 죽지 않은 것. 오히려 죽기 직전이던 세냐가 라이자키아를 차원의 틈새로 추방할 수 있던 것은 세계수가 세냐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유진이 번개불꽃을 통해 마나의 성질이 바뀐 것도 세계수의 정령 덕분이고, 라이자키아에게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부활할 수 있던 것도 세계수가 일으킨 기적이었다.


‘정말로 세계수에 영혼이 인도되고 윤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적이라 말해도 될 힘이 있는 것은 맞지.’


마족과 마왕은 혼을 대가로 받는다.


헬무드는 인간에게 영혼의 계약을 권한다. 셀 수 없이 많은, 헬무드 이민자 대부분이 마족과 마왕에게 혼이 묶여 있다.


그들은 죽어서 천국에 오르지도, 윤회하지도 못한다. 계약의 대가로 생전에 영화를 누리다가, 죽은 후에는 계약의 내용에 따라 지상에 묶여서 마족과 마왕을 위한 노동을 하게 된다.


‘세계수와는 정반대야.’


헬무드는 윤회를 박탈당한 망령들의 제국이다. 당장 유폐의 마왕에게 종속된 영혼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나라의 인구수보다 많을 것이다.


“그런데 유진. 전생에 대해서는 왜 묻는가?”


이바타가 물었고, 유진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하멜의 환생이다.”


빌어먹을 환생 463화


이바타를 납득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은 얼굴이었지만.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하멜의 환생이라고.”


유진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번 더 힘을 주어 말하자, 결국 이바타도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바타는 어떻게 환생할 수 있었는지, 그런 것은 묻지 않았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것이오……?”


조심스러운 질문에 오히려 유진의 말문이 막혔다. 왜…… 이바타에게 말했냐고?


처음에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바타를 원탁에 불렀을 것이다. 언젠가 더 많은 사람이 유진의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르나, 일단 이번에는 본가 사람들에게만 밝혀둘 생각이었다.


즉, 지금 유진이 이바타에게 정체를 밝힌 것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일이다.


아예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면 모를까. 불과 몇 시간 전에 본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환생자라는 것을 밝혔다. 그 자리가 무겁고 비장했다면 모를까…….


‘아니, 처음에는 무겁고 비장했지.’


나는 하멜의 환생이다.


내 친구 베르무트를 구하겠다.


여기까지는 무겁고 비장했다. 하지만 카르멘의 헛소리와, 시안의 비웃음을 상대하면서 무거움과 비장함이 사라져 버렸다.


즉, 유진의 감정이 ‘가볍게’ 움직인 것에 대한 책임은 카르멘과 시안에게 있다는 말이다.


물론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유진은 그 정도로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바타에게 정체를 밝힌 것은ㅡ 녀석이 대전사의 환생이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바타를 다시 대전사로 삼고, 그를 통해 대수림에서 다량의 신앙을 수급하기 위해서다.


사실 그건 굳이 환생을 밝히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이바타에게서 조금 더…… ‘존경’이라는 것을 얻으려면, 아무래도 환생을 밝히는 것이 낫지 않은가?


‘존경.’


그래, 이것은 존경의 문제다.


이바타는 하멜을 존경하지 않는다. 영웅으로 인정해도 전사로는 인정 못 하겠단다. 유진은 그 말이 굉장히 거슬렸다.


영웅이 곧 전사지 뭐가 다른가? 바벨에서 하멜 때문에 고생했으니 전사로서 무능하다고? 그거야말로 헛소리.


애당초 하멜은 바벨에서 멍청하게 함정을 밟아가며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린 적이 없었다.


“내가…… 내가 너한테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은.”


유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느끼는 감정, 머릿속의 생각,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도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유진은 스스로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진이 아니라 바로 이바타다. 네가 나를 존경하지 않으니 정체를 밝혔다. 그러니 나를 더 존경하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식으로 말해 버리면 이바타가 굉장히 난처할 것이다. 이바타와 제법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처음에 이바타에게 도움을 받은 데다, 서로 등을 맞댄 적은 없어도 같은 전장에서 아군으로 싸운 적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의 이바타는 조란의 대족장. 사마르 대수림 전체를 호령하는 군주다. 비교하자면 제국의 황제와 동등한 위치란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위치도 존중해 줘야 한다. 네가 나를 존경하지 않아서~ 라는 것을 이유로 붙였다가는 이바타를 300년 전의 권위로 찍어 누르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이바타를 위해서라도 여기서는 다른 이유를 말해야 한다…….


“네가 나 때문에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바타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반대로 유진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유를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탁에서 본가 사람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흑사자 성을 습격한 것은 하멜의 데스나이트다. 놈은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고, 진짜 하멜의 환생인 나를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습격했다. 놈은 일부러 내가 자리에 없는 틈을 노렸고, 애꿎은 흑사자 기사단과 조란 전사들이 피해를 본 것이다…….


“다행히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목숨을 건진 것과 굴욕감은 별개지. 안 그래? 이바타. 그 가짜 새끼는 너를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은 거야.”


“…….”


“놈의 목적은 너희가 아닌 나였다. 그러니 나는 조란의 대족장인 네게 내 비밀을 밝히는 거다. 이 사태를 책임지기 위해. 그리고 네게 사과하기 위해.”


“사과할 필요 없소.”


이바타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그 가짜의 폭주에 왜 그대가 사과를 해야 하오. 나는 그대에게 조금의 원망도 느끼지 않소. 나뿐만이 아니오. 조란의 전사들은 자신의 무능을 절대로 다른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거요.”


“이바타, 역시 너는 참으로 전사답다. 내가 너를 전사로 인정한다.”


유진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이바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말이었지만, 이바타는 저 말에 감춰진 노골적이고 쪼잔한 의도는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이바타는 감격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진의 손을 덥석 마주 잡았다.


“300년 전의 영웅이여. 나는 그대를 오해하고 있었소.”


“음.”


“나는 그대에 대해 많은 것은 알지 못하오. 내가 나고 자란 숲에 있던 것은 오래되어 낡은 동화책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나는 어린 시절부터 바깥을 알고 싶었고, 특히 대륙 전역에 위명을 떨치는 라이언하트를 바라보았소. 그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란 영웅을 존경하고 선망했소.”


“음.”


“지금의 평화를 만든 300년 전의 영웅들. 나는 그 모두를 존경했지만, 동화책에서 읽고 구전으로 전해 들은 ‘하멜’은 그리 뛰어나다 생각하지 않았소. 그 최후가 영웅다웠다고는 생각하나, 전사로서는 용감한 모론과 위대한 베르무트가 더 훌륭하고 존경할 만하다 생각했소.”


“음.”


꾸욱. 유진은 손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우둔한 것은 바로 나였소. 하멜이여. 부디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오. 나는 하멜인 그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나의 벗이던 유진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소. 유진은, 지금 세상에서 누구나 제일로 꼽는 전사이자 영웅이오. 당연히 하멜도 그렇겠지.”


“음.”


유진은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표정을 관리했다.


“위대하고 용감한 전사이자 영웅. 3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환생하고도, 또다시 고행의 길을 걸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그대를 전사와 영웅이라는 말로만 수식하는 것은 너무나 무례한 일. 그대는 모든 영혼을 받아들이고 윤회시키는 세계수의 기적 그 자체이며, 세상이 기다려 온 용사요.”


“음…….”


이쯤이면 되었다. 유진은 이바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하멜의 환생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어렵게 대할 필요는 없거든. 그냥 여태까지처럼 유진이라고 불러.”


“어찌 감히……!”


“아니, 괜찮다니까? 그렇다고 네가 갑자기 나를 유진 님, 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잖아. 나는 말이야, 내가 하멜의 환생이란 사실을 세상에 밝히고 싶지 않다고.”


이쯤 되면 대놓고 공개해도 되지 않을까? 이전에 기를 쓰고 하멜의 환생을 숨기려 했던 이유는, 과거의 적들을 맞이하기에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이 판단하기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힘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고, 만약 환생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유폐의 마왕- 특히 가비드 린드먼-이 즉시 공격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유진 본인도 충분히 강해졌고, 모론과 세냐가 살아 있다. 아니스는 죽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크리스티나와 함께 있다. 대륙의 여러 국가가 유진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은, 유진이 바벨에 오르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평화를 깨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정체를 밝혀도 위험할 일은 없다. 그냥 유진 본인이 부끄러움을 감당하면 될 뿐인데, 라이언하트 본가에 먼저 밝혀두는 것으로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물론 남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멜키스가 유진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끼악끼악 비명을 지를 것이 뻔했다. 그다음은 시안이 그랬던 것처럼 풋풋 웃으며 유진을 놀려댈 것이다…….


‘굳이…… 공개할 필요는 없지.’


너무 뜬금없기도 하다. 이미 유진은 그간의 행적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있다. 거기에 하멜의 환생을 굳이 얹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갑자기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하멜의 환생이란 사실을 밝히는 것도 웃기지 않나.


‘그래야 할 순간이라면 모를까.’


유진은 슬쩍 이바타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놀람과 감격을 가다듬고, 이제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300년 전에 죽은 하멜이 환생해서 앞에 있는 것이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아무튼, 나는 내가 환생자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 없어.”


“음…… 그렇다면, 나를 제외하고 누가 알고 있나?”


“모론과 세냐, 크리스티나. 라이언하트 본가 사람들과, 흑사자 중에서는 제노스가 알고 있지. 아…… 그리고…… 적색 마탑주님과 키옐의 황제.”


“황제가 알고 있다는 것은 의외로군. 황제를 제외하면 네 친지만이 알고 있는 건가.”


그 사실이 이바타를 웃게 만들었다.


“유진. 나에게 네 비밀을 알린 것은, 내가 조란의 대족장이기 때문이겠지.”


“글쎄. 네가 대족장이 아니라 그냥 전사였어도 알렸을 것 같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는걸. 내가 뭔 대답을 하건 결국 가정일 뿐이고, 너는 지금 대족장이잖아?”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네가 대족장이어도……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면, 굳이 내가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겠지. 널 위로하러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고, 네게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거다.”


이바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뭐 하러 하멜인 것을 밝히나. 뭐든 이유를 붙여서 두들겨 패면 그만이다.


“으하하!”


그런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이바타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환생한 하멜에게 전사로 인정받은 것도 기쁜 일이지만, 유진에게 저런 말을 들은 것이 더 기뻤다.


이바타는 한참을 웃다가 유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네 친구인가?”


“뭘 새삼스레 묻냐?”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가주가 되지 않는다 해도, 라이언하트가 네 존재와 힘을 무시할 수는 없을 거다.


-나는 그런 너와 친구가 되고 싶은 거다. 우리는 나이도 똑같고, 강하다. 너도 나와 친구가 되어 나쁜 일은 없을 거다.


이바타와 처음 만나고, 저런 대화를 나눴던 것이 4년 전이다. 유진의 대답은 시큰둥했지만 이바타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조란은 너의 영원한 우방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죽을지라도, 조란은 절대로 너를, 라이언하트의 적이 되지 않을 거다.”


“죽기는 뭘 죽어?”


툭. 유진은 이바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한 번 죽어봐서 아는데, 사람이 죽은 뒤에 뭔 일이 생길지는 살아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거야. 네가 뭔 말을 하건, 네가 죽으면 달라질 수도 있는 거라고.”


아가로트의 기억.


대전사가 죽던 모습은ㅡ 제대로 보지 못했다. 멸망의 마왕이 날뛰며 아가로트가 잠시 정신을 잃고, 황혼의 마녀의 품 안에서 눈을 떴을 때에 대전사는 이미 죽은 뒤였다.


지독한 기억이다.


“그러니까 죽은 뒤에 어쩌고 떠들지 말고, 안 죽을 생각이나 해라.”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등을 돌렸다.


* * *


세냐는 아롯으로, 크리스티나는 유라스에 갔다. 길레이드는 황궁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카르멘과 기온, 시엘은 일단 흑사자 성에 남았다.


유진은 다른 본가 사람들과 함께 라이언하트 본가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


하던 말이 뚝 멎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거의 1년 만에 돌아온 본가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마나와 정령이 가득 차서 넘치는 숲을 살피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들었다.


“저건 또 뭡니까?”


함께 본가에 돌아온 애니실라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아직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이 어색한지라, 차마 대놓고 노려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시선이 날카로웠다. 유진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손가락을 내렸다.


“음…… 솜씨 좋은 조경사를 고용하는 편이 좋을 것 같…….”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애니실라의 눈빛이 바뀌었다.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라이언하트 안주인이 되며 유해지기 전의 표독스러운 시선이 유진을 쑤셨다.


“제가 직접 다듬을까요……?”


“나한테 묻지 말고 시크나드 님한테 물어보렴. 과연 그 엄격한 엘프님이 가지치기 한 번 허락할지 의문이다만.”


쏘아붙이는 말에 유진은 일단 시선을 피했다. 과거 대수림에서 옮겨 온 세계수의 묘목. 겨우 세 그루밖에 안 되고, 처음 옮겨 왔을 때는 다른 나무와 비교해 크기도 작았다.


가끔 본가를 떠났다가 돌아올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기는 했는데…….


‘설마 저 정도로 클 줄이야.’


미적으로 잘 다듬어놓은 본가의 숲 안쪽.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높고 커다란 나무 세 그루가 우뚝 선 것이 보였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본가의 모든 숲이 저 나무를 호위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겨우 1년도 안 됐는데 뭔 놈의 나무가 저렇게 급성장을 한단 말인가?


“…….”


마음에 짚이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대수림에 잠들어 있던 세냐와 엘프들이 부활했다. 생기를 잃고 바스러질 것 같던 엘프 영지와 세계수의 본체가 활력을 되찾고 있다.


아무래도 그 영향이 묘목들에도 전해진 모양이다.


“더는 묘목이라고도 할 수 없겠군…….”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저 나무들 대체 어쩔 셈이니?”


“음…… 사실 내버려 둬도 좋지 않습니까? 저것들 덕분에 숲에 마나가 넘쳐서, 수행하는데 최적의 장소가 되었잖아요. 라이언하트의 미래에 무조건 좋은 일입니다.”


“그건 인정한다만, 나무가 계속 커지는 것은 곤란해. 유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세계수만 커지는 것이 아니란다.”


“숲이 더 울창해진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유서 깊은 라이언하트 본가가 숲에 삼켜질 거야. 그리고!”


애니실라가 손가락을 들어 숲의 저편을 가리켰다.


유진은…… 우뚝 솟은 굴뚝과, 그 아래의 철가마와 용광로 등을 보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보기 어떠니?”


“멋지네요.”


뿌득! 애니실라의 부채가 으스러졌다. 시안과 제하드, 시종들이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를 보았고, 유진도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저 가마에서 위대한 라이언하트를 위한 무기와 갑옷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잖습니까. 아니, 그런 것들뿐만이 아니라 드워프들은 뭐든지 만들 수 있으니, 애니실라 님을 위한 세공품들도…….”


“…….”


“이건……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 저택을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여기를 그냥 엘프들이 관리하게 만들고, 라이언하트를 위한 수련장 겸 대장간 겸 산책로 겸 숲…… 그렇게 두고서, 근처에 멋진 저택을 새로 짓는…….”


“이곳은 시조 베르무트 님이 정하신 자리야.”


“하지만 저택은 300년 전과 비교해서 여러 번 다시 지었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시조님은 후손들이 다른 곳에 이사를 가도 그리 서운해하지 않으실 겁니다.”


유진은 적절한 강조를 섞으며 말했다.


“…….”


애니실라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리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유진은 그 반응을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환생 464화


“안녕하세요!”


거의 1년 만에 돌아온 본가 저택.


여태까지 유진은 자신의 기억력이 나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환생하기 전인 300년 전의 일도 그럭저럭 잘 기억이 났고, 유진의 삶에서 겪었던 일들도 대부분 잘 기억하고 있다.


“…….”


그래서 잠깐 혼란을 느꼈다.


생전 처음 보는 아가씨가 쾌활히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상황. 유진은 말없이 눈동자만 끔벅거리며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누구지?’


웃으며 건넨 인사. 이름을 물어보기가 민망했다.


유진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더듬어도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저 얼굴조차도 본 기억이 없었다.


설마 요 1년 사이에 새로 고용된 시종인가? 그런 것치고는 거리감이 너무 가깝지 않은가. 게다가 저 아가씨는 메이드복도 입지 않았다…….


“아일라 루하르라고 합니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 맞으시죠?”


“커헉.”


유진은 놀라서 숨을 삼키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아일라 루하르. 당연히 그 이름은 알고 있다. 모론의 먼 후손. 현 루하르의 궁왕, 야수왕 아만의 친딸…… 기억에 따르면 현재 아일라의 나이는…….


‘이게 12살?’


평범한 12살이라면 메르나 라이미르아와 비슷할 텐데. 아일라는 오히려 시엘보다 키가 크다.


차근차근 뜯어보면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 있긴 하지만…… 누구나 아일라를 보고서 12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시안을 돌아보았다.


“너…… 이 새끼. 그새 살림을…….”


“아니야!”


시안은 진심으로 억울해서 외쳤다.


“아직 혼인은 안 했다고!”


“그런데 왜…….”


“아바마마께서 라이언하트의 가풍을 견학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아일라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정을 들었다.


루하르 왕가 쪽에서는 라이언하트와의 약혼을 파기할 생각이 없고, 아일라부터가 시안과의 혼인을 바라고 있다. 그렇기에 저 의욕 넘치는 소녀는 일주일 전부터 라이언하트에 와서 손님으로 지내고 있었다.


시안은 언젠가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될 몸. 상대가 일국의 공주일지라도, 시안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예정대로 5년 뒤에 혼인을 맺는다면 아일라는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다.


“가풍…… 가풍이라……. 이 가문에 미리 견학해서 배울 만한 가풍이랄 것이 있나…….”


유진은 나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근처에 있던 애니실라는 당연히 저 중얼거림을 들었다. 매선 시선에 유진은 냉큼 입을 다물었다.


“어흠,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버님한테 얘기를 잔뜩 들었어요!”


아일라는 방긋방긋 웃으며 유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왜 갑자기 손을 흔드는 것일까? 어린아이라서 그런 것이다. 저 나이의 어린아이는 이유 없는 행동을 하곤 한다. 다분히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가짜들과는 다르다…….


“누가 가짜라는 거에요?”


망토 안의 메르가 쏘아붙이는 말은 무시했다. 아일라와 인사를 나눈 뒤, 유진은 근처의 드워프 공방으로 향했다.


시무인 망치섬에서 넘어온 드워프들은 라이언하트 본가 부지에 공방을 차렸다.


그 공방은 처음에는 소소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확장되었다.


드워프들이 살아가던 망치섬. 그곳은 시무인 왕가가 드워프족에게 선물한 영토다. 드워프들은 대대로 그 섬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는 맥주나 식재료 등의 생필품을 받아 살아왔다.


길드에 수주된 다양한 의뢰들도 생필품과 함께 넘어온다. 적당히 취향에 맞는 의뢰를 가져가서 망치를 두드린다.


그 생활 자체에 큰 불만이 있던 것은 아니다. 그야, 드워프들에게는 그러한 삶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망치섬은 평화롭고 살기 좋았다. 바라는 것들은 요구만 하면 금세 얻을 수 있었다.


섬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애당초 드워프란 종족은 발 아프게 떠돌고 자유를 부르짖는 종족이 아니었다. 엘프들이 숲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듯, 술을 즐기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드워프란 종족에게 새겨진 본능이다.


라이언하트에 넘어온 드워프들은 종족에서 손에 꼽히는, 제 솜씨에 자부심이 가득한 장인들이다. 하지만 그런 장인들도 드래곤의 사체를 통째로 다뤄본 적은 없었다.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소소한 공방에 비해 드래곤의 사체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소재 중에서 단연 으뜸. 최고의 소재라면 당연히 최고의 환경에서 다뤄야 한다.


게다가 라이언하트는 드워프들이 하고 싶은 대로 소재를 다루게 해주었다. 망치섬과는 달리 깐깐한 의뢰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소재를 요구하면 즉시 최상의 소재를 마련해 주었다.


먼바다에 동떨어진 섬이 아니란 것. 제국 수도와 가까운 영지의 저택이란 것. 저택 부지에 워프게이트가 있다는 것…….


교역선을 통해 물건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답답하던 것인지, 드워프들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라이언하트에 온 이유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비늘과 가죽을 떼어 갑옷을 만들고, 손톱과 이빨을 깎아 무기를 만들었다.


뛰어난 무기는 뛰어난 실력자의 손에 쥐어져야 제값을 하는 법. 누군지도 모르는 의뢰인의 요구대로 만든 것이 아닌, 라이언하트 기사들을 불러놓고 한 명 한 명 맞춰서 갑옷과 무기를 만들었다.


공방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의뢰를 처리하느라 평소에 만들지 못했던, 순전히 그냥 만들고 싶었던 것들도 만들었다.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기 위해 용광로와 가마도 새로 만들었다.


휘몰아치는 열풍. 주변의 풀 색깔이 누렇다……. 슬쩍 밟아보니 푸석푸석하게 부서져 버렸다.


‘따귀를 안 맞은 것이 다행이군.’


새삼 애니실라가 참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했듯 이곳은 유서 깊은 라이언하트 본가다. 이 공방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저택과 제법 거리가 멀었겠지만,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고 드워프들의 숙소까지 새로이 증축되면서 너무 커져 버렸다.


유진은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저택을 힐긋 보았다. 당장 상황을 넘기기 위해 저택을 이전하자고 말했던 것인데, 가까이서 보니 진지하게 이전을 고민해도 될 것 같았다.


“엇.”


용광로에서 쇳물을 보고 있던 드워프가 유진을 알아보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얼굴에 그슬림이 잔뜩 묻어서 바로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곤도르였다. 그는 짧은 다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폴짝 뛰어서 유진의 앞에 떨어졌다.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되는데…… 세냐한테 옮았나…….’


짜리몽땅인 곤도르가 폴짝 뛰는 것이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잘 지냈습니까?”


“오랜만이구먼.”


곤도르는 벙긋 웃으며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굳은살이 가득 박인 거친 손을 마주 잡으면서, 유진은 용광로를 올려다보았다.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그냥, 안에 들어간 것이 잘 녹나 보고 있었지. 드래곤의 뼈와 오리하르콘을 섞어서…….”


곤도르는 하던 말을 멈추고 덥썩 유진의 양손을 잡았다.


“그건 한참 걸릴 것 같으니, 일단 급한 것부터 하자고.”


“급한 건 또 뭡니까?”


“자네도 갑옷 하나 있어야 할 것 아냐!”


“갑옷?”


다른 사람이라면 드워프가 갑옷을 만들어준다고 하면 좋다고 헤벌쭉 웃겠지만, 유진은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전생부터 좋고 훌륭한 갑옷 같은 것을 입어본 적이 없었고, 그건 모론이나 베르무트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매일 전투가 이어지던 마경. 제 몸과 무기조차 관리하기 힘든 환경에서 뭔 놈의 갑옷인가?


“저는 필요 없습니다.”


요즘 기사들은 하나같이 멋들어진 전용 갑옷에 좋은 무기를 쓰는데, 300년 전의 기사들은 그러지 않았다. 갑옷과 무기의 성능에 집착해버리면 정작 중요한 본인의 단련이 게을러지는 법이다.


[그렇게 말하는 유진 님도 좋은 무기는 잔뜩 쓰잖아요. 월광검이라든가.]


‘나는 내 단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다.’


[하지만 유진 님도 좋은 무기에 집착하시잖아요. 남들이 위험하니까 쓰지 말라 해도, 굳이 월광검을 쓰시고.]


‘메르 너 한 번만 더 월광검 얘기를 하면…….’


[월광검, 월광검, 월광검, 월광검.]


메르가 에베베 놀려댔고, 유진은 즉시 망토 안에 손을 넣어 징벌했다. 망토가 들썩거리는 것을 보던 곤도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애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아니…… 괜찮네. 그보다 정말 갑옷, 안 입을 건가? 다른 기사들의 갑옷은 다 만들었네. 가주님 것도 만들었고.”


“저는 평생 갑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안 입는 것이 더 편합니다.”


“입어도 안 입은 것처럼 편한 갑옷이면 되지 않나.”


“입었는데 안 입은 것이 말이 됩니까.”


“그냥 갑옷이 아니야. 엑시드란 말일세. 그것도 드래곤, 그것도 최강 최흉이라 불리던 마룡 라이자키아를…….”


“그 라이자키아를 죽인 게 바로 접니다. 그 자식 목에 칼 꽂고 죽인 게 바로 저라고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놈이 브레스를 쏘고 별 지랄을 다했는데, 절 죽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야, 죽을 뻔하셨으면서 말은 참 잘하시네요.]


유진의 손등을 오물오물 씹던 메르가 놀려댔다. 당연히 유진은 그 말을 무시했다.


“음…… 그래도 자네를 위해 미리 갑옷을 만들어놨는데. 약간의 조정만 하면 완성이란 말일세.”


“저 말고 다른 사람 입히면 되잖습니까? 가주님도 계시고.”


“가주님은 시무인의 국보 엑시드를 개량해 드렸네. 그리고 말하지 않았나! 자네를 제외한 라이언하트의 전원에게 이미 엑시드를…….”


“그럼 라이언하트 말고 다른 분한테 드리면 되겠네요.”


뇌리를 스친 이름이 있었다.


무턱대고 찾아가는 것도 실례이니, 일단 연락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직접 오실 필요는 없으셨는데.”


“호의를 베푸는 자네를 오고 가게 만드는 것이 나로서는 더욱 신경이 쓰이네.”


키옐 제국의 대공. 알체스터 드라고닉. 그는 황궁에 갔던 길레이드와 함께 본가에 돌아왔다.


알체스터는 쓴웃음을 웃으며 유진에게 손을 건넸다.


“시무인의 연회 이후로 처음인데, 마음 편히 안부를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로군.”


“괜찮습니다. 가주님께 들으셨지 않습니까?”


“다행히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연히 넘길 일은 아니지.”


알체스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선, 유진. 황제 폐하가 여기 계시지 않으니, 키옐의 대공인 내가 대신 뜻을 전하도록 하겠네. 무척이나 뻔한 이야기지만 말이야.”


“경청하겠습니다.”


“키옐은 이번 문제를 절대로 경시하지 않을 걸세. 하우리아의 밀정들은 모두 추방되어 현재 그쪽의 상황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하마의 다른 에미르들과 이미 접촉을 시도했네.”


말이 접촉이지,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라이언하트와 그 동맹군은 하우리아로 진군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너희들의 영지를 지날 것이다.


당장 우리는 하우리아만을 노리고 있지만, 만약 협조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영지조차도 짓밟고 갈 것이다.


“협박 아닙니까?”


“협박이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나?”


“에이, 그건 아니고요. 저라면 통보도 하지 않고 움직였을 겁니다. 거기서 방해하면 분풀이로 밟아버렸을 거고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함께 걸었다.


“그, 망명을 청했다는 술탄의 자식은 어떻게 됐습니까?”


“받아들였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그렇습니까?”


“만약 제국이 진군해서 하우리아를 공격한다면? 그 거대한 지네산맥을 무너트리고, 수도를 점령한 악마와 마족, 마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음…… 글쎄요.”


“나하마가 하나로 모여 전쟁을 시작했다면 모를까. 지금 나하마는 그렇지 않지. 궁정마법사이자 조언자인 아멜리아 머윈과 흑마법사들이 술탄을 배신하고, 마족들을 끌어들인 꼴이 되었어. 그리고 헬무드는 이 사태에 침묵하고 있고.”


알세트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하마는 대국일세. 술탄 아래에 수십 명의 에미르가 있는 나라야. 제국군이 하우리아를 점령할지라도, 에미르들은 쉽사리 키옐의 속국이 되려 하지 않을 걸세. 하지만 다행히 술탄의 후계자는 살아 있지. 그는 현재 친척 관계인 에미르의 보호를 받고 있네.”


“하우리아를 무너트리고, 후계자를 술탄으로 세운 뒤에 나하마를 속국으로 삼는 것이 폐하의 바람이군요.”


“그것이 가장 깔끔하지. 당연히 에미르들은 반발할 거야. 허나 거기서 사병을 일으키면 모반을 명분 삼아 쳐버릴 수 있지. 물론, 그 전투는 제국군이 맡을 걸세.”


나하마 전군을 상대했다면 아군은 물론이고 적군의 피해가 컸을 것이다. 에미르들에게서 징집한 15만 명에 기존의 정규군까지 최소 수십 만과 싸워야 했을 테니.


하지만 현재 수도에 남은 것은, 멸망의 권속과 라비스타의 마물들. 그리고 헬무드에서 넘어온 고위마족 수십 명. 흑마법사들. 그리고ㅡ 자의로 남은 하우리아의 정규군 일부가 전부다.


“그…… 악마에게 무언가 홀린 모양이더군.”


알체스터가 중얼거렸다.


“따로 정신 조작을 한 것은 아니야. 단지, 마물과 마족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모습. 그 자체에 감회 된 모양이더군.”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았다. 마족의 힘에 홀려 타락한 인간은 300년 전에 셀 수 없이 많았다.


“마룡의 비늘로 만든 갑옷이라.”


드라고닉 가문은 라이언하트와 마찬가지로 300년을 이어져 온 명문가이며, 그 시조는 반룡 오릭스 드라고닉이다. 하지만 드라고닉 가문에 드래곤과 관련된 보물 같은 것은 전해져 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알체스터는 크게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소재만 사용해서 만든 갑옷이라니! 가문의 모든 재산을 써서라도 구매하고 싶던 것을 그냥 주겠다는데, 대공의 작위가 중요할까.


“정말로 내게 바라는 것이 없나?”


알체스터에게 배운 공검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요긴하게 써먹을 것이다.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겨우 10살배기 꼬마를 한 달 가르친 대가로 받기에는 너무 큰 대가였다.


* * *


나하마의 수도 하우리아.


지네산맥에 둘러싸이고, 시민들 대부분이 추방된 지 이틀이 지났다.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시는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거의 텅 비어버린 도시는 대형 마물들에게 짓밟혔다. 추락 순간에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무너지는 건물 잔해에 뭉개진 사람들. 겁에 질려 도망치는 와중에 밟혀 죽은 사람들.


당연한 말이지만, 시체들은 매장되지도 화장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치되지도 않았다.


제각각의 시체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일어섰다. 텅 비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시체들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언데드.


아멜리아는 전율하며 그 광경을 보았다. 지금 시대에 흑마법사는 많지만, 사령술을 전문으로 익힌 네크로맨서는 희소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령술을 익혔을지라도 숨기는 흑마법사들이 많다.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익힌 흑마법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사령술이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아니,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흑마법사를 통틀어도 나만큼 정통한 네크로맨서는 없을 것이다.


아멜리아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멜리아도 이렇게나 많은 언데드를 거느린 적은 처음이었다.


군대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언데드. 유폐의 마왕과의 계약과 블러드메리의 힘은, 저 많은 언데드를 일으켰음에도 아멜리아에게 조금의 부담을 주지 않았다.


‘훨씬 더 많이 만들 수 있었는데.’


수도를 완전히 봉쇄하고, 시민들을 가둬놨다면. 에미르들에게 징집한 병사들을 예정대로 불러 모았다면…….


‘너무 많이 어긋났어.’


제물이 없으니 마왕 의식도 벌일 수 없다. 병력도 처음 예상과 비교할 수 없이 줄었다.


많은 것이 어긋났지만.


아멜리아는 이 전쟁에서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환생 465화


지금의 하우리아에서 입장이 가장 애매하게 된 것은, 아멜리아와 미리 협력하고서 헬무드를 떠난 고위마족들이다. 그들은 언젠가 유폐의 마왕이 평화의 약속을 끝낼 것을 기대했다.


나하마에서 먼저 벌어진 전쟁에서 다양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뒀다. 300년 만의 살육을 즐기고, 공포를 수급하고, 힘을 바라는 인간과 계약을 맺고, 혼을 거둬들이고.


아멜리아가 약속했던 대로, 전장에서 산 제물들을 바쳐 마왕이 된다.


대부분이 허무히 사라졌다. 살육은 즐길 수 있겠지만, 공포는 수급할 수 없게 됐다. 이 전쟁에서 가장 혐오와 두려움을 받는 대상은 단 한 명뿐일 것이다.


힘을 바라는 인간과 계약을 맺는 것도 불가능하다. 현재 이 도시에 사람이 꽤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족들의 힘으로는 결코 그 인간들을 홀리게 할 수 없었다. 계약을 맺을 수 없으니 혼을 거둬들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왕이 되는 것? 그 의식은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에미르들에서 징병한 수십만은 전쟁에 참전하지도 못했다. 악마에게 홀려 도시에 남은 미치광이들은 그 수가 1만 남짓이다.


적디적은 아군 대신, 적군으로 의식을 시도한다면. 혹은 이 도시를 떠나, 근처의 다른 도시를 의식의 무대로 삼는다면…….


“…….”


지금 와서 물어보는 것은 어리석음을 넘어 병신 같은 짓이다. 이미 첫날에 다른 마족이 물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을 내보낸다면, 약속했던 의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멜리아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그 마족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질문이 끝난 즉시, 회색의 덩어리가 마족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그건 소리 없이 진행된 처형이었다. 마족은 조금의 반항도, 놀라거나 괴로운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 불길한 회색의 덩어리ㅡ 멸망의 마력은, 서열 60위 권의 고위 마족을 삼킨 즉시 분해해 버렸다.


질문한 마족은 그렇게 죽어버려서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남은 마족들은 처형 자체를 대답이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놈은, 그,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운. 존재감만으로 이곳의 모두를 무릎 꿇게 만든 악마는, 마족들에게 마왕 의식을 베풀 마음이 없는 것이다.


‘……몰살의 하멜…….’


하우리아의 마족들 중 최상위 3명은 서열 26위, 33위, 40위다. 그들은 아멜리아 머윈의 유폐의 지팡이 임명식에 참석했고,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아멜리아 머윈이 몰살의 하멜을 데스나이트로 삼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그것에 대해서는 제벨라 공작과 가비드 공작에게 함구령을 받았지만, 그 ‘몰살의 하멜’이 데스나이트가 되어 흑마법사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놀랍고도 유쾌했다.


‘대체 어떻게 저런 힘을 얻은 거지?’


직접 보았기 때문에, 3명의 마족은 악마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곤 해도, 그 지독하던 하멜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화신이시여.”


라비스타에서 온 멸망의 권속들은 망령이 하멜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비록 최초의 모습이 하멜의 시체에서 태어난 데스나이트이며 깃든 혼조차 가짜일지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망령을 멸망의 화신이라고 숭배하고 있다.


멸망의 마력이 일으킨 기적의 산물. 저 육체도, 깃든 혼도, 모두가 멸망의 마왕의 권능에 의한 것. 그렇기에 권속들은 진심으로 망령에게 멸망의 마왕을 투영했다.


그 즐겁던 전쟁 시대에서 무차별적으로 날뛰던 진짜 마왕. 300년이란 시간 동안 잠들었던 멸망의 마왕이 화신을 내려보냈다. 저 화신의 존재야말로 마왕이 가진 이름, ‘멸망’에 대한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아멜리아 머윈의 언데드 군대가 완성되었습니다.”


망령은 왕궁의 옥좌에 앉지 않았다. 그는 왕궁에서 가장 높은 탑의 지붕에 앉아, 폐허가 된 도시를 노려보았다.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 앉아서 도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연히, 아멜리아가 군대를 완성한 것도 알고 있다.


알피에로가 그것을 모르고 보고한 것이 아니란 것도 안다.


저 늙고 욕망 가득한 뱀파이어는, 망령이 이 도시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수도를 휘감고 있는 지네 산맥을 열고, 저 거대한 마물을 앞세워 어디든 먼저 공격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시가 있습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아멜리아와 함께…….”


알피에로의 말이 도중에 뚝 끊어졌다. 직접 시선이 닿은 것은 아니지만, 망령에게서 흘러나온 마력이 알피에로의 혼을 더듬었다. 그것만으로 알피에로는 마치 사선에 발을 디딘 것만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주제넘은 발언을…… 부디 용서해 주시길.”


알피에로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았다. 망령은 더 이상 위협하지 않고 마력을 거두었다. 이대로 알피에로를 죽여 버려도 괜찮겠지만, 저 정도로 강한 마족이라면 살려두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했다.


‘길어야 며칠.’


게다가 망령이 당장 손을 쓸 것도 없이, 알피에로의 삶은 앞으로 길어야 며칠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알피에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금 자신이 별 제재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다른 마족이라면 말 한마디 잘못한 것에 처형되었겠지만, 지금 나는 화신께 의견을 전하고도 살아 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헬무드의 고위마족들. 그중 50위 안에 이름을 올린 3명은 유폐의 마왕에게 마력을 받았다.


알피에로는 멸망의 권속 중 으뜸으로 꼽힌다. 헬무드의 고위마족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망령과 힘을 비교할 생각은 없지만ㅡ ‘저것’과는 비교해 버리게 된다. 알피에로는 꿀꺽 침을 삼키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설마 저런 것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이 도시는 아멜리아가 오랫동안 머무르던 곳. 그녀는 술탄의 조언자이자 흑마법사들의 그랜드마스터로 군림했다.


그렇게 대외적으로 활동하면서도 비원을 위해 암약했다.


하멜의 무덤을 발견하고, 당장 죽은 것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한 시체를 거두기 전에.


아멜리아가 전쟁을 위해 준비하던 비장의 수.


나하마에서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죽음의 사막’은, 아멜리아의 던전이 있는 아슈르 사막이다. 아멜리아가 그 사막에 누구도 발을 디디지 못하게 했던 것은, 수십 년에 걸쳐 저것의 건조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바쳐 조율에 조율을 거듭한 뒤, 최종적으로 사기(死氣)를 집중시키기 위해 수도의 지하 묘지의 더욱 밑바닥에 뉘어놓아 완성한 것.


‘카마쉬.’


망령은 도시 한가운데에 선 거인을 보았다.


하멜의 기억에 존재하는 모습과는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카마쉬는 300년 전에 죽었다. 하멜의 기억 속에 그 최후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마경 헬무드의 초입, 팔미르 평원. 대륙과 헬무드를 가로막던 거대한 장벽. 카마쉬는 그 장벽을 무너트려서, 양부인 광란의 마왕에게 충성심을 증명하려 했다.


카마쉬를 필두로 한 수백 명의 거인들. 반면에 놈들의 진군을 가로막기 위해 모인 군대는 수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 수백 명의 거인을 상대로 수천 명은 결코 수적인 이점을 가질 수가 없었다.


거인. 그것도 광란의 마왕에게 복종하고 마력을 받은 거인들. 평범한 거인이라도 기사 수십은 우습게 상대하는데, 마력까지 받아먹은 거인 수백이 상대라면 수만 명의 기사로도 부족하다.


카마쉬와 거인들은 팔미르 평원에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발걸음만으로 평원을 진동시켰다. 처음 거인들을 막기 위해 평원에 모인 군세는 수천보다 훨씬 많았지만, 대지를 진동시키는 거인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점점 군세의 수는 줄 수밖에 없었다.


카마쉬와 함께 온 수백 명의 거인을 가로막기에 수천 명의 인간은 그 수가 너무나 적다.


하지만, 카마쉬는 결국 팔미르 평원에서 목이 베여 죽었다. 놈을 따르던 거인 수백 명도 함께 죽었다.


거대한 평원이 거인들의 피로 시뻘겋게 젖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천 명의 인간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했기 때문에.


아니, 그것보다는.


그곳에 베르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나는군.”


망령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나 또렷한 기억. 그 전장에서 인간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에 베르무트와 동료들은 아직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하지만 함께 마경에 건너와 살육의 마왕성으로 진군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았다.


처음 마경에 넘어왔을 때는 모든 것이 어설펐지만, 팔미르 평원에 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들 도망치지 않았다. 우리라면 거인들의 진군을 막을 수 있다. 우리라면 할 수 있다.


-하멜.


-어. 왜.


-왼팔. 할 수 있나?


-난 오른팔이 좋은데. 카마쉬 저 새끼 오른손잡이 아냐?


-그렇다면 네가 오른팔을 맡아라.


-뭘 굳이 왼팔 오른팔 나눠? 그냥 알아서 할게.


그때 하멜과 베르무트는 함께 카마쉬를 가로막았다. 당시에 베르무트는 월광검도 없었지만, 카마쉬를 죽이는 데 월광검은 필요가 없었다.


기억난다.


도끼, 칼, 창,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써서 카마쉬를 막았다. 놈의 발목을 자르고, 무릎을 뚫고, 팔을 뜯었다. 그렇게 놈이 걷지도, 팔을 휘두를 수도 없게 만든 뒤에 목을 잘랐다.


카마쉬를 죽인 뒤에도 평원에서의 전투는 계속됐다. 카마쉬를 추종하는 거인들이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전투가 끝났다. 대부분의 거인들이 죽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놈들은 마경으로 후퇴했다.


죽은 카마쉬의 시체도 그때 사라졌다. 몇몇 거인이 카마쉬의 몸뚱이를 짊어 메고, 머리를 끌어안고서 도망쳤단다.


데려가서 무덤이라도 만들어주려는 건가. 아니면 양부라던 광란의 마왕에게 가져다주려는가. 지칠 대로 지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흠뻑 젖어서. 전장에 주저앉아 떠들던 기억이 난다.


‘혼은 똑같을까.’


머리와 몸뚱이가 붙어 있다. 팔미르 평원에 버려졌던 팔다리 대신 다른 팔다리를 붙여놨다.


카마쉬의 시체로 만든 언데드. 하지만 저것에 카마쉬인 부분이 얼마나 될까?


망령이 보기에, 저것은 아멜리아가 공들여 만든 키메라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우습게 여길 존재는 아니다. 저 괴물은 생전의 카마쉬보다 강하며, 이 도시에 있는 고위마족들보다 강할 것이다.


‘모론은 올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모론에게는 레헤인야르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세냐는 너와 함께 오겠지.’


과연 현시대의 성녀가 죽은 아니스를 대신할 수 있을까. 망령은 씁쓸히 웃었다.


ㅡ베르무트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망령은, 유진 라이언하트가 얼마나 강한지 안다.


몇 년 전에도 강했던 그가, 지금은 과연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베르무트가 없고, 모론이 없고, 하멜이 없을지라도.


“곧이다.”


하멜이 온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온다.”


망령은 자리에 일어서서 중얼거렸다.


하멜은, 유진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를 죽이러 올 것이다. 이 도시에 남은 모두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죽일 것이다.


놈이 전력으로 날뛸 전장을 만들었다. 죽어도 상관없는 놈들만 남겼다.


아마, 유진은 이 전장에서 과거를 겹쳐 볼 것이다. 마족과 언데드, 마물, 그리고 마에 혼을 팔아넘긴 인간들. 간절히 죽이고 싶어 했던 원수들.


‘그리고 나.’


유진을 위해. 유진이 바라는 대로 죽어줄 생각이었다.


유폐의 마왕을 만나지 않았다면, 죽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해주고 싶지 않다.


‘그럴 수 없어.’


망령은 칙칙한 빛에 물든 눈동자를 감았다.


하멜이 이곳에 오기 전에.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같다.


* * *


흑마법사 아멜리아 머윈이 반역을 일으켰다. 그녀를 추종하는 사막의 모든 흑마법사들. 그리고 헬무드 제국에서 아멜리아와 미리 결탁했던 마족들이 반역을 도왔다.


아멜리아의 고향은 멸망의 영지 라비스타. 나하마의 반역에는 라비스타의 마족들이 함께했다. 그 과정에서 라비스타에 봉인했던 마물들까지 풀려났다.


“……위의 사태에 관해,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깊은 유감’을 표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헬무드 제국은 나하마의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


“아멜리아 머윈의 배후에 있는 것은 멸망의 마왕. 그분은 유폐의 마왕님께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대마왕입니다. 또한 멸망의 영지, 라비스타는 사실상 헬무드의 영토가 아닌 곳이며…….”


지금 떠드는 말에 아무런 설득력도 없다는 것은, 유폐의 마왕을 대신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는 가비드 린드먼 본인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대륙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하마에 건너가 아멜리아와 결탁한 마족들은 앞으로 절대로 헬무드의 땅을 밟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외에 제재는 가하지 않는다.


“헬무드는 나하마의 문제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헬무드는 나하마를 돕지 않는다. 대륙의 연합군도 돕지 않는다. 헬무드는, 유폐의 마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의중을 헤아리기 어렵군.’


나하마가 전장이 될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직접 원조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나하마, 아니, 아멜리아 머윈을 도운 것이다.


알면서도 침묵한 것. 나하마에서의 전쟁으로 평화와 약속을 끝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 머윈이 몇 명의 마족을 마왕으로 만들면, 300년간 이어온 평화의 시대는 저물 수밖에 없으니.


‘배후에 유폐의 마왕님이 계신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라비스타에 봉인해 놓은 마물들이 풀려났다는 것이 유폐의 마왕이 개입했다는 증거다.


공식 발표로는 멸망의 권속들이 마물들을 풀어놨다고 말했지만, 가비드는 저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마물들은 유폐의 마왕의 권능으로 봉인한 것들. 멸망의 권속들이 단체로 자폭할지라도, 절대로 유폐의 권능을 깰 수 없을 것이다.


마물들이 풀려났다. 심지어 하우리아에 건너가 아멜리아를 돕고 있다…….


‘그런데도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참전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가비드가 재량껏 처리하기도 전에 유폐의 마왕에게 황명이 내려왔다.


헬무드는 움직이지 않는다.


본래 가비드는 나하마에 파병을 허락받으려 했다. 그를 위해 검은 안개와 마군을 준비시켰다.


‘헬무드는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유폐의 마왕님은 용사가 바벨에 도전하는 것을 기다리고 계신다.’


존경해 마다치 않는 유폐의 마왕님께 품기에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 가비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리도 집착하고 계시는 거지?’


심지어 이 집착은 비정상적이다. 광적이란 말이다. 300년 전의 그 위대한 베르무트에게도 이 정도로 집착하지는 않으셨다.


그런데 왜?


‘유진 라이언하트.’


가비드는 미리 준비한 입장문을 읽어내리며 눈을 얇게 떴다.


“……하우리아 해방군의 무운을 빕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가진 용사라는 이름에 끌려서, 혹은 유진 라이언하트 본인이 적극적으로 끌어모아 조직한 연합군. 가비드는 그 목록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버렸다.


‘처음 봤을 때 죽여야 했다.’


그때는 벌레 죽이듯 밟아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밟아 죽일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


빌어먹을 환생 466화


하우리아


망명한 후계자에게서 정식으로 위임받고, 나하마 에미르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불협화음은 없었다. 군수물자의 요구를 하기는 했지만, 합리적인 수준이었고, 병사를 비롯한 인력은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보다는 상대의 전력이 압도적인 탓이기도 했다. 나하마의 에미르들이 집결해 봐야 국가 하나의 전력. 반면에 이쪽의 전력은 몇 개의 국가와 제국이 더해진 연합이다.


수도 하우리아 해방군.


그런 이름이 붙었다.


사실 보기 좋은 감투기도 했다. 하우리아는 사악한 악마와 마족에게 함락당했다. 그리고 용사를 위시한 대륙의 영웅들이 한데 모여 함락당하고 봉쇄된 하우리아를 해방하기 위해 출정한다……. 그 노골적인 명분과 선의는 대륙 전역에 과시되어,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주목과 지지는 자연스럽게 많은 것들을 끌어 보았다.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먼저 나서 후원금을 보내왔다. 따로 성명을 내기도 전에 자유기사와 용병들도 모였다.


전력을 과잉으로 모을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중이떠중이는 고기방패도 되지 못한다. 심지어 상대는 데스나이트 따위의 언데드에 집착하는 변태 같은 흑마법사다.


지금 시대에서는 흑마법사, 특히 네크로맨서와의 전투를 겪어 본 사람이 흔하지는 않다. 사령술 자체가 흑마법사들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그럴지라도, 물밑에서 사령술의 연구에 집착하는 흑마법사들은 간혹 존재했다. 진리니 탐구니 운운하는 마법사들이 금기를 넘나들듯, 그러한 호기심과 탐구욕은 흑마법사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꼭 흑마법사뿐만 아니라, 일반 마법사 중에서도 심각한 광인들은 사령술에 손을 대곤 했다.


그런 배덕자들을 추격하고 심판하던 것이 바로 유라스의 이단심문국. 비록 몇 년 전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지만, 이단심문국에는 네크로맨서를 상대하는 나름의 노하우들이 있다.


“무리에 성직자를 반드시 대동할 것.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성직자에게 치유마법을 기대할 수 없다면, 포션 등의 치료제를 개인마다 준비할 것. 늪지나 흙 위에서 싸우지 말 것. 가급적이면 단단한 지면 위에서 싸울 것. 밤에 싸우지 말 것. 특히 보름달을 피할 것. 무기에 가호를 부여할 것. 은제의 단검을 소지할 것. 성수를 준비할 것…….”


다른 사람들은 집중해서 듣지만, 정작 읽어내리는 유진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진은 이미 300년 전에 네크로맨서나 언데드와 질리도록 싸워봤다.


“아군이 죽어 쓰러진다면 화골산을…… 화골산? 이건 뭐야?”


“시체를 녹이는 약입니다. 넉넉히 뿌려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가 녹아서 사라집니다.”


“세상에 그런 편리한 약이 어딨어?”


“성수에 여러 독과 마법을 가미해 만든 것입니다. 유라스 신성마법연구학부의 작품이죠.”


혈십자기사단의 단장. 크루세이더 라파엘로가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아롯에도 비슷한 포션이 있지. 성수를 베이스로 쓴 것은 아니지만, 흠흠, 때로는 깔끔하게 녹이는 것이 편할 때도 있으니.”


이상한 경쟁심리라도 붙은 것인지, 아롯의 궁정마법사단장 트렘펠이 떠들었다. 유진은 그 말을 호응하지 않고 무시했다.


“휙 뿌리면 시체를 녹여 버리는 약이라니. 아무리 봐도 언데드 대책 말고 다른 용도로 더 많이 쓰였을 것 같은데.”


“흠흠…….”


“뭐 그것까지는 제 알 바가 아니고…… 다음…… 화골산이 없다면 시체를 불태운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팔다리를 뭉갠다…….”


언데드의 성능은 영혼과 더불어 시체의 상태에 따라 갈린다. 특히 ‘어떻게’ 죽었느냐에 따라서 성능은 천차만별이다.


목이 베여 죽는다면 그만큼의 원한이 모태가 되어 듀라한이 되고, 죽은 지 오래돼서 썩었다면 흔해 빠진 구울이 되고, 그보다 오래되어 뼈만 남았다면 최약의 스켈레톤이 된다. 일단 죽은 뒤에 시체를 훼손하는 것은 300년 전에도 흔하게 쓰인 언데드 대책이다.


“나 때는 얼굴부터 갈아버렸는데 말이야.”


잠자코 듣고 있던 세냐가 중얼거렸다. 그 험한 말에 여러 사람들이 놀라서 세냐를 쳐다보았다.


“뭐…… 뭘 그렇게 봐?”


세냐는 몰리는 시선에 당황하여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네크로맨서도 많았고, 죽는 사람도 많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내 앞을 가로막은 언데드가 과거의 지인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얼굴을 갈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잔인할 수가! 언니도 그랬어요? 만약 내가 이번에 죽는다면, 언니가 내 얼굴을 갈아버리는 거예요?”


멜키스가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세냐는 입을 꾹 다물고 멜키스를 노려보았지만 멜키스의 1절은 끝나지 않았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내가 이번에 죽는다면 말이에요. 기왕이면 얼굴을 갈지 말고 잘 수습해 주면 안 되나요? 그래도 죽은 다음에는 고향 땅에 묻히고 싶은…….”


맞은편에 앉은 발자크가 즉시 멜키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대뜸 들어온 발길질에 멜키스가 꽥 비명을 질렀지만, 누구 하나 멜키스를 걱정해주지 않았다.


“흠흠…… 아멜리아의 사령술은 제가 대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전장에는 위명 높은 광명사제단과 말레피카룸, 그리고 혈십자기사단이 계시니…… 제가 나설 일도 없겠죠.”


“당연히 그래야지.”


라파엘로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흑색마탑주, 발자크 루드베스. 나는 당신이 우군에 합류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뜻대로 널 벨 수가 없군.”


“하하…… 너무 경계하지 마십시오. 저는 순수하게…….”


“흑마법사가 순수를 논하지 마라.”


라파엘로는 여전했다. 그는 제 말과 적의만 일방적으로 쏘아내고 발자크의 말은 듣지 않았다.


“자자, 싸우지들 말고.”


유진은 읽던 책자를 내려놓았다. 방금까지 읽은 것 외에도 다양한 정보들이 빼곡히 적혀 있지만, 정작 유진이 더 알아둘 것은 없었다.


“여기서 다 읽는 것도 입이 아픈 일이니까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꼭 숙지하고 하달하셔야 합니다.”


나하마의 도시, 살라르. 이곳은 수도 하우리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다. 현재 해방군의 주요 인사들은 살라르 에미르의 궁전을 빌려 회의 중이다.


키옐의 황제 대리, 알체스터 드라고닉 대공.


라이언하트의 가주, 길레이드 라이언하트.


흑사자 기사단 대표, 카르멘 라이언하트.


신성제국 교황 대리, 성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휘하 혈십자기사단 단장, 크루세이더 라파엘로 마르티네스.


아롯의 국왕 대리, 왕세자 호네인 아브람.


휘하 궁정마법사단장, 트렘펠 위자도르.


현명한 세냐와 마탑주들.


루하르 국왕, 야만왕 아만 루하르.


휘하 하얀 송곳니 단장, 조슈릭 라바.


시무인 국왕 대리, 오르투스 하이만.


휘하 궁정마법사장, 마이스 브리오르.


조란의 대족장, 이바타 자하부.


자유기사와 용병 대표, 아이빅 슬라드.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기사와 전사, 마법사들이 모두 모였다. 전장이 전장이다 보니 군주들은 오지 않았지만, 무투파로 유명한 루하르 국왕은 본인이 직접 오기도 했다. 휘하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더한다면, 이미 아군의 숫자는 수만 명을 훌쩍 넘는다.


저들 대부분은 시무인에서 이미 유진과 협력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도시에는, 용사를 필두로 한 대의와 명분 가득한 전장에 자발적으로 찾아온 자들도 여럿 있다.


유폐의 마왕이 직접 선언한 약속의 끝을 앞두고 이름을 드높이고 싶어 하는 자들. 앞으로의 세상에 제 한 몸 바치려는 자들.


“넌 어쩔래?”


그리고 드래곤.


“전장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


레드드래곤 아리아르텔.


유진은 그녀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다. 아리아르텔은 일신의 사정 때문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 유진은 그 입장을 존중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르텔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찾아왔다. 소문을 듣고 온 것인가 싶었는데, 많은 자리 중에서 알체스터의 옆에 앉은 것을 보면 의도가 훤히 보였다.


‘그래도 친척 비슷한 거라고 걱정되는 건가.’


드라고닉 가문의 시조인 오릭스는 아리아르텔의 아버지에게서 힘을 넘겨받아 반인반룡이 되었다. 그걸 친척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주 남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드래곤이 저런 관계를 신경 쓰는 것도 의외이니, 어쩌면 아리아르텔이 별종인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아리아르텔은 드라고닉 가문을 들여다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리우를 신경 쓰는 것일지도 모르지.’


리우를 교육했을 때 받았던 드래곤 피어. ……그렇게 생각하니 아리아르텔이 굉장히 수상쩍게 느껴졌다. 나이 수백 먹은 드래곤이, 이제 열 살이 조금 넘은 소년을 주시하고 있던 것 아닌가.


“나는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특히 유폐의 마왕에게는 더더욱.”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힘들다. 아리아르텔은 우둔한 하멜이 왜 자신을 저렇게 보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따로 이유는 물어보지 않고 제 할 말에 집중했다.


“이 전쟁에 유폐의 마왕과 헬무드가 개입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이미 전쟁 자체에 유폐의 마왕이 개입했으리란 의혹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모반을 일으킨 흑마법사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장본인. 그러나 유폐의 마왕은 그 흑마법사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지.”


아리아르텔이 폴리모프한 모습의 머리카락이 붉은색인 것은 그녀가 레드 드래곤이기 때문일까? 라이미르아과 라이자키아의 머리가 검은색인 것은 둘이 블랙 드래곤이기 때문인가? 그럼 블루 드래곤의 머리카락은 푸른색이고 골드 드래곤의 머리카락은 금색인가?


유진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아리아르텔의 말을 흘려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중하여 아리아르텔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지금 차분한 표정의 아리아르텔과, 유진이 데리고 다닌 헤츨링을 머릿속으로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밝힐 수 없는 사명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절대로 죽어서도, 부상을 입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드래곤이란 종족이 300년 전에 그러했듯, 시대의 혼란에 대응하고 질서의 수호에 힘을 보태고 싶다.”


전쟁 시대가 시작될 때. 모든 드래곤이 마경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대부분이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에게 죽었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드래곤들은 부상을 수습하고 죽음을 유보하기 위한 수면기에 들어갔다.


아리아르텔은 수면기에 들어간 드래곤들의 요람을 관리하고 있다. 만약 그녀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죽어버린다면, 수면기에 들어간 드래곤들에게도 치명적인 문제가 생겨버린다.


“어떻게 힘을 보태겠다는 건데? 비늘이라도 벗겨주나…….”


“끔찍하고 무식한 소리를 하는구나.”


아리아르텔은 유진을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저런 무식한 말을 하니 우둔한 하멜이라 불렸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 장소에는 저 남자가 환생자라는 것을 아는 이가 적을 테니, 아리아르텔은 의식하며 말을 조심했다.


“인간. 이미 내 도움을 꽤 받지 않았는가?”


“내가 도움을 받긴 했지.”


“이번에도 그렇다. 이 도시와 다른 나라들의 워프게이트를 확장…….”


“너 혼자 한 건 아니잖아.”


아리아르텔의 눈썹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현명한 세냐와 인간 마법사들과 함께하였지만, 내 용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맞아, 아리아르텔 님이 아니었다면 더 귀찮았을 거야.”


세냐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리아르텔은 두둔했다. 그 순간에도 유진과 세냐는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미리 말을 맞춘 당근과 채찍 전략이다. 유진이 채찍을 휘두르고, 세냐가 당근을 주며, 아리아르텔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역시 현명한 세냐는 나를 인정하는군.”


“드래곤이 왜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지 잘 알게 된 활약이었습니다.”


“하하…… 현명한 세냐. 그대의 마법은 드래곤조차 따를 수 없을 만큼 지고하였소.”


아리아르텔은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방긋 웃었다. 칭찬은 곰도 춤을 추게 한다는데, 드래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 아리아르텔은 알체스터만 챙겨줄 생각이었다. 갑옷은 이미 있으니 특별한 검을 쥐여 줄 생각이었는데, 세냐의 칭송 덕에 마음이 바뀌었다.


“드래곤의 보고를 개방하겠다.”


아리아르텔이 말했다. 수면기에 들어간 드래곤들의 보물. 그것이 가득 쌓인 보고는 현재 아리아르텔이 관리하고 있다.


“해방군 전원을 무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영웅들은 바라는 무기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계획대로 되었다. 유진과 세냐는 흡족한 시선을 나누었다.


“박수!”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짝짝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뒤따라 세냐가 박수를 쳤고, 곧 테이블에 모여앉은 전원이 박수를 쳤다.


갑작스러운 박수세례에 아리아르텔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는 세냐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 으흠…… 인간의 영웅들이여. 나 레드 드래곤 아리아르텔은, 이곳에 올 수 없는 모든 드래곤을 대표하여 그대들을 축복하겠다.”


“박수!”


유진은 다시 힘을 주어 박수를 쳤다.


짝짝짝. 방 안이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 * *


당연한 말이지만, 유진은 더 이상의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가진 무기만 해도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알체스터는 아리아르텔에게 직접 이끌려 검 한 자루를 받았다.


드래곤의 보검. 아카샤나 개량된 프로스트처럼 드래곤하트를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저 보검에는 다양한 가호 마법이 담겨 있다. 거기에 아리아르텔이 직접 용언을 부여하여, 그녀의 드래곤하트와 연결되어 있다.


드라고닉 가문의 비기, 공검은 마나의 절대량에 따라 위력이 어마어마하게 중첩된다.


알체스터도 대륙 제일에 거론되던 기사답게 마나의 총량은 부족하지 않지만, 드래곤의 순수한 마나가 더해진다면ㅡ 알체스터의 공검은 기존보다 몇 배나 증폭된다.


“보고를 열어준 것도 고맙지만, 기왕 돕기로 한 것 전투에도 참전하면 안 되나?”


“우둔한 하멜. 그대는 내 말을 그새 잊은 건가?”


보고의 개방이 끝난 뒤.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는 궁전 옥상에서 아리아르텔과 만났다.


“요람을 관리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사명이다.”


“관리랄 것이 있나?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 것 아냐?”


“그것이야말로 무식한 말이로군. 가만히 내버려 둔 상태로 수백 년을 잠드는 것이 가능할 것 같나?”


“드래곤이잖아.”


“정말…… 정말 무식하군. 드래곤의 수면기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나는 주기적으로 요람에 드나들어 공기를 정화하고, 상처를 돌보며, 마나를 공급하고 있다.”


똥오줌은 안 치우나? 유진은 순간 궁금증이 들어 슬며시 입술을 열었다.


[제가 장담하는데, 그거 물어보면 진짜 한 대 맞을지도 몰라요.]


유진의 마음을 읽은 메르가 냉큼 유진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쏘아붙였다.


‘왜. 너도 궁금하잖아.’


[전 별로 안 궁금해요. 왜냐면 답을 이미 알거든요. 유진 님은 모르시나요? 라이미르아 쟤는 화장실을…….]


[캬아아악!]


라이미르아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메르에게 달려들었다. 유진은 둘의 다툼에 울룩불룩 튀어나오고 흔들리는 망토를 붙잡았다.


“멀리서 브레스나 한 번 쏘고 가는 건 어때?”


“안 된다.”


아리아르텔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나 싫다니 어쩔 수 없구만.”


유진은 고개를 돌려 도시 바깥을 보았다.


동쪽 먼 곳에 보이는 시커먼 장벽.


먹구름 같은 것이 뒤덮은 하늘과, 장벽 주변을 떠도는 안개는 이 멀리서도 보이고 있다.


[걱정하지 마라, 은자여.]


메르와 서로 머리채를 나눠 잡고 있던 라이미르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 사악한 결계는, 위대한 종족이자 마법의 조종. 블랙 드래곤 라이미르아가 브레스를 쏴줄 것이니라.]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환생 467화


지네산맥만으로도 까다로운데, 도시 전체에 결계까지 쳐진 상황이다.


“외곽에는 지네산맥을 둘렀고, 하늘에는 흑마법의 결계와 멸망의 마력을 덮었어.”


세냐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결계 자체의 수준은, 흠,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살펴봐야 알겠지만…… 그럭저럭 괜찮네.”


“술식 자체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지요.”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맞아. 술식의 수준이 낮아도 마력을 어마어마하게 부은 상태라면 뚫는 것이 까다로워. 거기에 멸망의 마력까지 덮어놨지. 저 정도로 철저하다면 사실상 마법으로 뚫는 것은 불가능해.”


“우리 마법의 여신님도 불가능하나?”


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직 예비야.”


놀리려고 한 말인데, 세냐는 부끄럼이라곤 없는 것인지 가슴을 활짝 펴며 대답했다. 대답이 그렇게 돌아오니 유진도 뭐라고 더 놀릴 수가 없었다.


“그…… 래. 예비 마법의 여신님.”


“내가 완전한 마법의 여신이 되었다면 뭐, 가능할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무조건, 반드시 가능하다, 그런 확신은 힘들단 말이야.”


흑마법뿐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현재 하우리아 상공에는 멸망의 마력도 덮여 있다.


멸망의 마력은 마법과 마나를 거부한다. 아무리 절대률을 더할지라도, 저만큼이나 짙은 멸망의 마력을 뚫는 것은 힘들다. 세냐가 아직 완전한 마법의 여신이 아닌 것처럼, 그녀의 절대률도 아직 절대적이지 않다.


“나는 위에서 친다.”


유진은 발로 바닥을 비비며 내뱉었다. 그러자 망토에서 라이미르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오오, 은자여, 본녀를 믿는 것이니라! 본녀가 위엄 가득한 브레스로 하늘을 열겠느니라!”


“아니…… 너는 그냥 얌전히 망토 안에 있어.”


“본녀가 없으면 은자가 하늘을 날 수 없느니라.”


“내가 너 없이 하늘을 왜 못 날아? 나는 혼자서도 하늘 잘 날아.”


“함께 갑시다.”


아니스가 말했다. 그녀는 망토 밖으로 고개를 내민 라이미르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방긋 웃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하멜, 과보호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과보호가 아니라…… 마나 덩어리인 브레스를 저기 쏴 갈겨서 효과가 있겠냐고.”


“부모를 돕고 싶어 하는 착한 아이지 않습니까.”


부모? 유진은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작 라이미르아는 익숙하단 듯이 헤헤 웃기만 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니스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멜. 당신과 저, 그리고 은광의 신관들은 미르와 함께 하늘로 갑시다. 흑마법의 결계와 멸망의 마력이라도, 성검과 신성마법이라면 돌파할 수 있을 테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유진은 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냐와 마법사들은 화력을 집중시켜서 지네 산맥을 뚫는다. 기사와 용병, 병사들은 마족과 마물들을 요격한다.


“키옐은 그리핀 병대. 흑사자 기사단은 와이번. 루하르는 아이스 와이번. 시무인과 유라스는 페가수스…….”


살라르 외곽성벽 난간. 멜키스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아롯만 뭐가 없네.”


“아…… 아롯은 소환수나 사역마를 쓰지 않습니까?”


멜키스에게 끌려 나온 라이나인이 더듬더듬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멜키스는 눈동자에 힘을 빡 주고서 라이나인을 돌아보았다.


“너 사역마 있어?”


“있기는 합니다만…… 비행용으로 탈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 어쩌려고?”


“적탑주님이 소환수를 빌려주시기로 했습니다. 멜키스 님은…….”


“너 내가 언니라고 부르라 했지?”


“멜키스 언…… 니는…… 비행용 사역마가 있으십니까?”


“내가 소환술사니? 정령술사지. 나는 정령과 함께 날면 돼. 그게 나다운 거야.”


멜키스는 으스대면서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갑자기 허리를 왜 흔드는 것일까? 차마 물어볼 수 없으니, 라이나인은 스스로 추측해 보았다. 지금 멜키스는 나하마 무희들이나 입는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다……. 그러니 허리를 흔들어 춤 비슷한 것을 추는 것이리라.


“그러는 너는 명색이 대마법사인데, 적탑주한테 소환수를 빌리는 것은 좀 그렇지 않아?”


“저는 아무렇지도 않…….”


“그러면 안 되지, 은거만 하던 네가 대마법사답게 세상에 나서는 순간이잖아! 심지어 어디 학회에서 데뷔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에서 데뷔라니……!”


“저는 별로 주목받고 싶지 않습니다만…….”


“너 녹색마탑주 안 할 거야? 여기서 주목받고 활약해야지 녹색마탑주가 될 수 있는 거야.”


멜키스의 꼬드김을 듣는 라이나인의 눈동자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제네릭이 녹색 마탑주에서 퇴임한 후로 아직까지 녹색 마탑주 자리는 공석이다. 그 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 없으니 새로운 탑주를 선출해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현재 녹색마탑에는 8서클에 도달한 마법사가 없었다.


임시로나마 대마법사도 아닌 마법사를 탑주로 올려둘 수도 없는 노릇. 그런 와중에 라이나인이 세냐의 연구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롯에 왔다.


다른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대마법사. 아롯 왕궁과 의회는 라이나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는 마탑주 자리에 욕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녹색 마탑의 마법사들도, 그곳에서 수학하지 않은 제가 마탑주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욕심 없어도 일단 앉아나 봐.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이 바라지 않는 게 뭐 어때서? 이번에 네가 대마법사다운 증명해 낸다면, 걔들도 좋다고 받아들일걸.”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제가 하고 싶지 않다는…….”


“일단 해보고 말하자니까.”


멜키스가 이렇게 강요하는 것은 라이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심이 대부분이었다.


까마득한 막내가 마탑주로 들어온다? 그것도 다른 마탑주들에 비해 성격이 유순한 라이나인이 녹탑주가 된다면, 앞으로 잘 골려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성벽에는 멜키스와 라이나인 외에도 사람이 많았다. 유진은 길레이드와 함께 성벽 위를 걸으며 바깥을 살펴보았다.


“포대(砲隊)는 오랜만에 보네요.”


화약을 터트려 철포를 쏴 갈기는 대포가 아닌, 마법을 사용한 대포. 아무래도 마법이 사용된 것이니 아롯이 강세라고 생각했는데, 키옐의 포대도 제법 강해 보였다.


“옛날에는 저런 대포가 없었나?”


“뭐, 없지는 않았는데……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죠. 특히 마경 안쪽에서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지금에 비하자면 모든 것이 열악했던 전장이다. 유진은 백사자 기사단이 조율 중인 대포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뭡니까?”


“원래 라이언하트가 가지고 있던 대포들을 드워프들이 개조한 것이다.”


다른 나라의 대포에 비해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포신. 덕지덕지 무언가가 붙어 있는 모습에는 드워프들의 취향이 듬뿍 담겨 있었다.


“저걸 밀고 가는 것도 번거로울 텐데…….”


“포대의 운용은 로베리안 님과 적색마탑의 마법사들이 협력해 주기로 했다.”


소환마법으로 일제히 소환한 뒤에 발사하는 건가. 유진은 그 광경을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만큼의 화력이라면 그 무식하게 커다란 마물들에게도 유효할 것이다.


“긴장되지는 않으십니까?”


“없다면 거짓이겠지.”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친아들과 다르다 생각하지 않은 양자에게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는 것이 길레이드의 솔직한 심정이지만, 상대는 대영웅 하멜의 환생. 길레이드는 조금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약함을 인정했다.


“이 정도 규모의 실전은 라이언하트에게…… 후후. 아니, 모두에게 처음일 테니.”


“뭐 별것 없습니다. 제가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가 몇 살이었더라…… 열 몇 살이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전부 끝나 있었죠.”


유진은 피식 웃으며 성벽에 몸을 기댔다.


“가주님 성격에 이런 조언은 별로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음,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가솔들이나…… 다른 사람 위하는 것보다는, 일단 자기 목숨부터 챙깁시다.”


“하하. 받아들이기 힘든 조언이구나. 가주가 가솔을 챙기지 않고 제 목숨만 챙기라니.”


“가주님은 좋은 분이시니까, 괜히 무리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가주님이 어디 다쳐서 돌아가신다면, 제가 애니실라 님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유진, 네가 강한 것과……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것은 안다만. 그래도, 나는 네 양부다. 그리고 라이언하트의 가주기도 하지.”


길레이드의 손이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라이언하트의 모두가 내 가족이다. 내 자식들. 백사자와 흑사자. 그리고 너. 나는 내 가족들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아.”


“저도 그렇습니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저 아래에서 시안과 시엘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용용이의 등에 타고 있던 시엘은,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식들 결혼하는 건 보셔야 할 것 아닙니까.”


유진은 별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지만, 길레이드는……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순간 고민했다.


활짝 웃으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딸. 그 딸을 보면서 결혼에 대해 말하는 유진…….


“…….”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길레이드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침 저쪽에서 아는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주님. 그리고 주군.”


유진에게 거두어져, 제하드의 호위기사로 지내던 라만 슐호브. 라이언하트에서의 생활을 통해 조국에 대한 그리움은 진즉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고 자란 나라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라만은 자처해서 유진을 따라 이곳에 왔다.


“에미르들이 보낸 보급물자가 도착했습니다.”


“뭐 다른 게 더 왔나?”


“예. 살라르의 에미르가 정찰로 사용하라며 어쌔신 부대를 보내왔습니다만…… 어쩌시겠습니까?”


“난 어쌔신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너도 그렇지 않아?”


짓궂은 질문이다. 라만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살라르의 에미르가 출정 전에 연회를 열고 싶다는 의향을 전했습니다.”


“됐어. 내일 바로 출정인데 뭔 놈의 연회야? 다 끝나고 난 뒤의 연회나 준비하라 해.”


“예.”


나하마 출신인 라만은 이곳의 문화와 언어에 익숙하다. 대충 말해도 알아서 잘 전해줄 것이다.


‘내일.’


여기까지 온 이상 시간을 더 끌 생각은 없다. 괜히 늑장을 부렸다가는 저쪽에도 시간을 주는 꼴이니 말이다.


그러니 바로 내일. 하우리아 해방군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살라르에서 출정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유진은 슬쩍 길레이드를 쳐다보며 물었다.


“기수(旗手) 말이냐.”


“예.”


유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낯간지럽고 민망하다. 하지만 길레이드는 하하 웃으며 유진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렸다.


“네가 아니라면 누가 라이언하트의 깃발을 들겠느냐.”


“저 말고도 들 사람은 많지 않습니까? 가주님도 계시고. 차기 가주인 시안도 있고. 카르멘 님이나, 정 안 된다면 흑사자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가르기스가 들어도 그럴듯해 보일 겁니다.”


“이 많은 사람.”


길레이드의 손가락이 성벽 바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내일 아침의 출정을 준비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널따란 사막에 여러 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키옐의 깃발. 유라스의 깃발. 루하르의 깃발. 시무인의 깃발. 아롯의 깃발. 그 외에 용병단과 기사단의 깃발들.


“모두가 너에 의해 모인 것이 아니냐.”


“……제가 불러 모으지 않았어도, 이런 문제라면 자발적으로들 왔겠죠.”


“하하, 과연 그럴까. 유진, 너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길레이드가 웃으며 물었다.


솔직히 키옐은 오지 않았을 것 같다. 알체스터가 원정을 바랐을지라도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무인도, 조란도 마찬가지다. 세냐가 없었다면 아롯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유라스는 왔겠지. 꼴에 신성제국이라 불리고 있으니 말이야.’


모론의 의기를 따르는 루하르도 왔을 것이다. 자유기사들과 용병단은? 결국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길레이드의 말마따나, 하우리아 해방군이 이만큼 대규모로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유진이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유진 라이언하트의 23년의 삶이 끌어모은 인연이다.


결국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 어깨를 너무 무겁게 하시네요.”


“영웅이란 그런 것 아닌가?”


길레이드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영웅의 삶을 잘 모르지만, 너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크흠…….”


거들먹거릴 수도 없을 정도로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괜히 바닥을 발끝으로 문질렀다. 유진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자, 길레이드는 껄껄 웃으며 어깨에 얹은 손을 거두었다.


“그럼, 나는 내려가서 출정을 준비하도록 하마.”


“저도 돕겠…….”


“네가 돕지 않아도 된다. 이런 귀찮은 일은 가주인 내가 도맡아야지.”


이 전쟁에서 길레이드는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길레이드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가문 기사들의 무장을 정비하고 다른 부대와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다. 유진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갈 수 있도록 보좌하는 것이다.


‘네가 나아갈 길을 미리 열어줄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적어도, 유진이 열어 준 길을 내달릴 준비는 끝내야 한다.


유진은 성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길레이드의 등을 보았다. 돕지 않아도 된다는 말. 유진은 길레이드의 배려에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슬슬 해가 저물 시간이다.


괜히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인적 없는 장소를 찾았다. 출정을 대비해 일찍 들어가서 쉬느니, 장비를 한 번 더 조율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살라르에서 하우리아까지는 거리가 멀지만, 멜키스를 필두로 한 정령사들과 고위마법사들의 보조를 받는다면 며칠은커녕 하루도 되지 않아 하우리아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즉시 전투가 벌어지겠지.’


얌전히 틀어박혀 수성에만 몰두할 리도 없는 노릇. 이미 지네산맥 바깥에는 적들이 매복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 편히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 마지막이다.


성벽 아래로 내려오니, 많은 사람이 유진을 알아보았다. 인사를 하거나, 어디에 가는지 묻거나……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인사에는 인사로 화답하고, 질문에는 대충 대답해 주었다.


시선에 담긴 감정들은 대개 비슷했다. 존경과 선망, 경의, 그런 종류의 감정들.


‘예전에는 무거웠는데.’


유진이 기억하기에, 저런 종류의 시선을 처음 받았던 것은 사마르 대수림에서였다.


‘용사’를 보는 시선. 그때는 무겁기만 했다. 부담스러웠다. 300년 전에도 유진은 영웅이었지만, 용사는 아니었다. 저런 시선은 대부분 베르무트에게 향했지, 하멜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았었다.


-난 용사가 싫어.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모두에게 용사라 불리고, 모두에게 기대받고. 300년 전. 그때 베르무트는 어딜 가든 시선을 불러 모았고, 어디에서든 주인공이었다.


마왕을 물리쳐달라는 말. 세상을 구해달라는 말. 친지의 복수를 해달라는 말.


베르무트는 언제나 그런 말을 들어야만 했다. 존경과 선망, 경의, 그런 종류의 감정을 받아냈다.


지금의 유진처럼.


‘여전히 무겁나?’


그렇지는 않았다. 무겁다기보다는 민망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마저도 이제는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내가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가를 자문하느니, 해야 한다고 결의하는 것이 나으니까.


꽤 많이 걸었다. 그제야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에 왔다. 유진은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에 망토에 손을 넣었다.


월광검과 성검.


두 자루의 검을 꺼냈다. 성검은 여전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 검과 이어진 빛의 신은 의중도 정체도 알 수 없는 놈이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도 유진이 바라는 대로, 필요한 만큼 빛을 내려줄 것이다.


다른 종교인들이 말하길 빛의 신은 독선적이란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빛의 신을 섬기는 종교인들도 독선적이고 광신적인데, 빛의 신은 수백만은 우습게 넘기는 신도들 이상으로 독선적이다. 그 어찌나 독선적인지, 자기를 추종하는 신실한 교인들을 죽이는 데 힘을 보태줄 정도다.


그리고 월광검.


‘널 쓸 수 있을까.’


아이리스를 죽이고, 월광검을 새로이 보강했다. 유진의 마나와 신력이 더해지고, 레헤인야르의 불길함이 더해졌다. 월광검의 검신이 재생된 뒤에 실전에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이 월광검이, 멸망의 화신이 되어버린 가짜 놈을 벨 수 있을까. 유진은 그것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월광검은 멸망의 검. 이 검이 휘두르는 불길하던 달빛은 본질적으로는 멸망의 마력과 다를 바가 없다.


‘내 신력과 마나가 더해졌다고는 해도…….’


유진은 월광검의 검신을 노려보다가 혀를 찼다. 지금의 월광검이 멸망의 화신에게 먹힐지 아닐지는 직접 시험해 봐야 알 일. 사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신검으로 놈을 벨 수 있을까.’


화신인 놈조차 신검으로 벨 수 없다면, 멸망의 마왕 본인은 절대로 벨 수 없겠지.


아직 신검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신력이 부족하다고? 그런 것을 하나하나 따지며 핑계를 준비했다가는 수십 년도 부족할 것이다. 유진은 신검이 감춰진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돌렸다.


태양이 저물고 있다.


금색의 사막이 검붉게 물들어간다. 저편에서는 땅거미가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은 완전히 저물어 사라지고, 검붉은 사막은 시커먼 어둠에 뒤덮일 것이다.


그를 예고하며 젖어오는 땅거미의 위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가면을 쓴 놈.


유진의 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환생 468화


놈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그 외에 궁금하고, 물어봐야 할 것은 산더미만큼 있다. 하지만 유진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 유진에게는 저따위 것과 비할 수 없이 앞서고 중요한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여 버린다.


오직 그것만이 유진을 달리게 만들었다. 일방적이고 강렬한 살의가 가슴에 손을 얹게 했다.


핏줄이 꿈틀거리는 손등, 움켜쥐는 손가락이 신검의 칼자루를 쥐었다.


‘아냐.’


내달리는 살의 한가운데에서 이성이 일어났다.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열이 식었다.


유진은 내달리던 몸에 제동을 걸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신검의 칼자루를 쥐고 있지만, 칼날을 뽑지는 않았다.


“후.”


유진은 크게 숨을 삼키고, 내뱉었다. 들끓는 살의를 의식적으로 진정시켰다. 제동을 건 이성을 보다 강하게 의식했다.


생각해라. 생각. 죽여 버린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네가 나한테 죽으려고 온 것은 아닐 거고.”


신검 한 번 휘둘러서 죽일 수 있을 만큼 하찮은 상대가 아니다. 유진은, 일단 그것부터 인정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듣자 하니, 너는 갑자기 나타나고 사라지는 재주가 있다지. 목을 베고 몸을 박살 내도 죽지도 않고.”


아가로트의, 유진의 신검은 마왕도 죽인 적이 있다. 신화시대 때는 물론이고, 광란의 마왕이 된 아이리스도 신검으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만전의 상태였던 아이리스를 신검을 한 번 휘둘러서 죽이는 것이 가능했을까.


신검은 강하지만, 유진은 그 위력을 과신하지는 않았다. 하멜일 적부터 그랬다. 전투에서는 항상 최악을 상정해야 한다. 상정한 최악에 맞춰야만 보다 많은 것을 대비할 수 있다.


“너 뭐냐.”


지금 여기서 신검을 휘둘러서 놈을 죽일 수 있나? 타격은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타격에서 이어, 놈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느냐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다.


신검은 월광검이나 성검과는 다르다. 이건 휘두를 때마다 신력을 소모한다. 처음 신검을 뽑았을 때와 비교해서 신력이 어마어마하게 늘기는 했어도, 여전히 신검을 뽑는 것은 유진에게 많은 부담을 준다.


오늘 신검을 휘둘러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 신검의 전력을 다할 수 없다면.


‘그건 병신 짓이야.’


생각하고, 참았다. 전략적인 이유도 있다.


‘저 새끼는 신검을 모른다.’


지금 여기서 놈을 죽일 수 없다면, 신검은 보여주지 않은 것이 낫다.


“의외…….”


유진을 물끄러미 보던 망령이 입을 열었다.


그는 유진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 유진이라면 1초를 수백 번 쪼갠 찰나에 도달해 망령의 목을 벨 수 있는 거리다.


즉시 달려들어 목을 벨 것이다. 베여 줄 생각도 있었다.


하지 않았다.


왜 멈춘 것일까. 눈이 마주친 순간 덮쳐온 살기. 가비드 린드먼이나 모론 루하르, 세냐 메르데인의 살기도 대단했지만ㅡ 하멜의, 유진 라이언하트의 살기와는 결이 달랐다.


저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살기는 오직 유진만이, 진짜가 가짜에게 향할 수 있는 살기다.


“아니, 너답군.”


멈춘 것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것부터가 단순한 생각이다. 유진이라면, 하멜이라면 멈추는 것이 맞다. 망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씁쓸히 웃었다.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조금 더 생각해야 도달하고 공감했다.


그 자체가, 망령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어렵네.”


망령의 얼굴은 가면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은 저 가면 너머의 얼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고, 내리깐 목소리를 통해 표정마저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죽여 버리고 싶은 기분을 참는 것이 어려워.”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머릿속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착잡하던 모론의 목소리. 난장판이 된 흑사자 성. 휩쓸린 숲. 부상병들. 피의 냄새. 고통 때문이 아닌, 울분을 이기지 못해 내뱉던 신음들.


몇 번의 심호흡으로 감정을 진정시켰다. 살의와 분노로 일그러졌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유진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망령을 노려보았다.


“질문에 대답이나 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가 어려워.”


“그럼 내가 마음대로 정할게. 너는 병신이고, 개새끼에, 가짜다. 그거면 되지 않나?”


망령은 대답 대신에 큭큭 웃었다. 진짜가 저렇게 정의를 내려버리는데 무어라 반박할까? 망령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왜 남의 도시에서 지랄이야?”


“필요한 일이다.”


“너에게? 아니면, 나에게?”


유진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저 새끼가 꼴같잖게 나를 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지.”


“너 혼자서 정한 거지.”


유진의 고개가 삐딱하니 기울어졌다.


“네가 여러모로 복잡하다는 것은 알아. 네 상황이 X같고 혼란스럽다는 것은 안다고.”


하멜의 시체에 남은 기억으로 인격이 만들어졌다. 그것만으로는 써먹기 힘들다. 편하게 써먹기 위해 기억의 조작이 더해졌다.


그렇게 놈이 태어났다. 하멜의 기억을 갖고, 하멜의 인격을 가진. 그러면서 베르무트와 모론, 세냐, 아니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가진 ‘나’.


자기 자신이 가짜라는 자각이 없었다가, 갑자기 깨달아 버린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왜 가짜인 것인지, 그런 고뇌를 실컷 하다가ㅡ 결국은.


“나라면.”


만약 내가 가짜라면.


“진짜, 인 나를 위해 행동했을 거다. 내가 가짜라면, 그랬을 거야. 아무리 지랄 발광을 한들, 진짜가 될 수 없으니까. 심지어 진자가 뒈지지 않고 살아 있다면 더더욱.”


그래서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는 이 모든 짓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말했지만,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돼. 내가…… 너라면, 이런 짓은 안 해.”


모론을 찾아간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흑사자 성을 공격한 것. 라이언하트를, 가족을 공격한 것은 이해가 안 된다.


분노를 주러 왔다고? 그래, 그건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목적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거다. 내가 하지 않을 방법이 아닌, 내가 할 법한 방법.


“네가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는 네가 아닌 거다.”


망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널 동경하고 흉내 내며, 상상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진짜인 너는 그럴 필요가 없어. 안 그런가?”


“…….”


“너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안다. 나도 생각했거든, 너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너라면 이런 행동을 경멸할 거라고.”


하멜답지 않은 것에 대한 괴리를 망령이 모를 리가 없잖은가.


“그래서 한 거다.”


알면서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다운 것이니까.”


유진은 아무 말 없이 망령을 노려 보았다.


저 말에 반문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유진의 안에 퍼지는 감정은, 신력에 의한 직관과 비견될 정도로 확고했다.


저건 나와 닮았다.


똑같지 않다. 닮았다. 다르다.


그렇기에 죽일 수밖에 없다.


“왜 왔지?”


“널 죽이기 전에.”


망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한 번은 만나서…… 대화를 해보고 싶었거든. 대수림에서 만났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까.”


“그래, 많이 달라졌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오히려 그때의 네가 나와 더 비슷했어.”


라비스타에서 나를 처음 자각한 순간에 저런 말을 들었다면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모론에게 전사의 인정을 받기 전에. 세냐가, 옷과 반지를 고르며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기 전에. ……유폐의 마왕에게서 진실을 알게 되기 전에.


저 말을 들었다면.


‘품어선 안 될 욕심을 품었을까.’


망령은 손을 들어 먼 곳의 하우리아를 가리켰다.


“왕궁에서 기다리겠다.”


“…….”


“많은 것이 널 가로막을 거다. 네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저기서 움직이지 않을 거다. 왕궁에 도달하는 길은 험난할 거다. 설마 네가 도달하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망령의 눈은 하우리아가 아닌 다른 곳을 보았다. 유진의 뒤. 제법 거리가 멀지만, 설치된 진영마다 휘날리는 깃발들이 보였다.


“네 이름 아래에 모인 사람들은 많이 죽을 거다.”


“지금부터 너는 마왕이다.”


유진이 내뱉었다.


“이름은 없어도 돼. 사실 네가 마왕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나는 너를 마왕이라고 생각할 거다. 하는 짓도 비슷하니까, 오히려 마왕이 아닌 것이 이상하지.”


끔찍하게 강하고 잘 죽지 않는다. 휘하에 마족과 흑마법사와 마물을 거느리고 있다. 도시 하나를 점령해 영지로 삼고, 왕성에 처박혀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용사고.”


가슴을 움켜쥔 손을 놓았다. 대신에 유진은 성검을 쥐었다.


“내 뒤에 있는 것은, 너라는 마왕을 죽이기 위한 결사대다.”


괜한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물어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대답을 들었기에, 망령은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마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왕도 아닌데 마왕을 자칭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이 저렇게 말해 버린 이상 망령은 마왕이 되어야만 했다.


“마왕성에서 기다리지.”


망령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내일, 유진 라이언하트가 온다. 용사가 결사대를 이끌고 온다. 용사가 용사다운 일을 한다면, 마왕은 마왕다운 일을 해야 한다. 마왕은 전력을 다해 용사를 가로막을 것이고, 용사를 죽일 것이다.


‘네가 나를 죽일 수 없다면.’


나보다 약하다면.


‘이번 세계는 여기서 끝내는 것이 옳아.’


유진이 보는 앞에서 망령이 사라졌다.


유진은 놈이 사라진 곳을 잠시 동안 노려보았다. 멀리 보이는 하우리아. 수도를 둘러싼 시커먼 지네산맥과, 불길한 회색 하늘.


“괜찮아.”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앞다투어 유진의 손을 붙잡았다. 유진은 그 꼬물거리고 앙증맞은 손길에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새끼. 기왕 가면 쓸 거면 다른 가면도 많잖아. 뭐야 그게? 허여멀건 해서.”


누굴 처닮아서 센스가 그 모양인 것인지. 유진은 쯧 혀를 차며 진영을 향해 발을 떼었다.


* * *


해가 저물어 밤이 되었다.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밤이 지나고 달이 기울었다.


여명이 왔다. 하늘의 어둠에 빛이 녹아들며 별빛은 희미해져 녹아들었다.


성벽 밖의 진영은 새벽 중에 해체되었다. 출정의 준비도 끝났다. 두 종류의 와이번과 그리핀, 페가수스, 사역마와 소환수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상의 기사들도 말에 올라탔다.


말을 갖지 못한 보병들도 직접 걷지는 않았다. 적색마탑의 마법사들이 거대한 소환수를 불러냈고, 백색마탑의 정령술사들도 대지의 정령을 소환해 주었다.


여명이 밝아옴에도 하우리아의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 해방군이란 이름으로 모인 전원이 하우리아를 보며 각자의 결의를 다졌다.


유진은 묵묵히 성벽에 올랐다.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유진을 돌아보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이 향하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백 마리로 이뤄진 비행병대의 날갯짓 소리가 시끄럽지만, 유진을 우러르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는 불필요한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유진은 이 공간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민망하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부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 자그마한 중얼거림은 성벽 아래의 모두가 들었다. 유진을 잘 아는 사람들은, 유진과 마찬가지로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지금 이 장소에는 유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은 웃기는커녕 더더욱 진지한 표정을 하고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유진은 성벽의 난간 위로 올라갔다. 조금 높아졌을 뿐인데 시야가 확 트여 넓어졌다. 높은 난간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아래까지 훤히 다 보인다.


각 군의 대장을 맡은 사람들. 어제 짧은 회의를 통해 봤던 사람들. 그곳에는 세냐와 크리스티나도 보였다.


유진은 직접 말하는 대신에 둘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세냐가 픽 웃으며 지팡이를 꺼내 쥐었고, 크리스티나는 빛의 날개를 펼쳤다.


“지금 와서 말하는 것도 늦었다 싶지만.”


성벽 위로 날아오른 현자와 성녀가 유진의 옆에 내려섰다.


“죽기 싫거나, 죽는 것이 무섭거나. 부양할 가족이 걱정되거나…… 뭐 그런 사연이 있는 사람들은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웃었다. 그 정도의 반응이 전부였다. 동요 섞인 웅성거림 따위는 없었다.


“하긴, 가기 싫은 사람은 진즉에 도망쳤겠지.”


저런 얼굴. 저런 눈동자는 잘 알고 있다. 300년 전에 몇 번이고 봤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면서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나는.”


성검을 뽑았다.


“빛의 신에게 인정받은 용사고.”


성검을 난간에 꽂았다.


아아아! 거대한 페가수스, 아폴로에 타고 있던 라파엘로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의 주변에 있는 성기사들과 광명사제단과 은광의 성직자들은 감격에 눈물을 머금고 유진을 우러렀다.


성검을 놓은 손이 다시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


유진의 품 안에서 거대한 깃발이 뽑혀 나왔다. 우뚝 세운 깃발이 바람을 받아 크게 펄럭였다. 라이언하트의 깃발. 펄럭이는 깃발에 그려진 사자의 갈기가 요동쳤다.


“유진 라이언하트.”


여명이 밝다. 내리쬐는 빛이 유진과 라이언하트의 깃발을 적셨다. 위를 보는 모두가 눈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눈동자를 파고드는 빛 한가운데에 선 유진은, 그를 수식하는 여러 이름 중 하나를 모두의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


‘아니.’


길레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곳에는 저 깃발과 똑같은 라이언하트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가슴을, 라이언하트의 상징에 손을 얹은 것은 길레이드뿐만이 아니었다. 백사자와 흑사자. 라이언하트의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유진을 우러렀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 아니다.’


더 이상 유진을 그런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위대한,


현명한,


신실한,


용감한,


우둔한,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카르멘이 중얼거렸다.


“그럼, 마왕을 죽이러 갑시다.”


유진은 라이언하트의 깃발을 어깨에 걸쳤다.


망토 안에서 라이미르아가 사라졌다. 공간도약으로 높은 하늘로 이동한 라이미르아의 몸이 빛에 휘감겼다.


ㅡ화아아악! 거대한 블랙드래곤이 날개를 펼쳤다. 하늘을 날던 비행병들은 당황하지 않고 즉시 고삐를 당겨서 하늘을 열어주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온 드래곤이 유진을 향해 머리를 낮추었다.


“이건 좀 과한데.”


[은자의 위용에 질 수 없느니라.]


라이미르아가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진은 저 대답이 어이가 없었지만, 주변의 기대 어린 시선에 부응하여 라이미르아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아래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환생 469화


날개를 활짝 편 블랙 드래곤이 선두에 서고, 수백 마리의 와이번과 그리핀, 페가수스, 소환수가 뒤를 따랐다. 아래에는 전투마와 소환수, 땅의 정령, 전차 등의 탈것이 진군하고 있다.


백룡기사단의 선두. 알체스터는 마갑을 걸친 애마의 등에 타고서 시선을 위로 들었다.


전쟁 시대부터 악명을 떨친 마룡, 라이자키아의 딸. 알체스터는 라이미르아와 유진 사이에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 사정을 모르는 알체스터가 보기에는 지금 저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고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그, 마룡 라이자키아의 자식이. 용사에게 감화되어 세상을 위해 날개를 펼친 것이다.


전설 등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드래곤은 자존심이 강하고 오만하다. 그, 드래곤이…… 용사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인간을 등에 태웠다. 그런 드래곤의 뒤를 따르는 군세. 신비하며 장엄하기까지 한 광경은, 하우리아 해방군 전원을 전율시켰다.


이 전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이 모든 것은 전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신화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설과 신화에 함께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써내리는 자. 전설과 신화가 될 이야기의 주인공. 해방군 전원이 용사의 이름을 떠올렸다.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카르멘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성벽 위에서 깃발을 들었던 유진을 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이름이다. 그 이름은 아직 카르멘 혼자만의 중얼거림으로 남았지만ㅡ 이 전쟁이 끝난다면. 유진이, 하우리아 왕성을 점령한 이름 없는 마왕을 쓰러트린다면.


모두가 유진을 저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카르멘이 그렇게 만들고 말 것이다.


300년 전의 전설을 이어가는 자.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카르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말이지만, 그 목소리는 주변을 날고 있는 흑사자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봐요.”


디자이라는 예전과 달리 익숙한 모습으로 와이번의 등에 탔다. 슬쩍 몸을 기울이면서 속삭인 말에, 라이미르아의 등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시엘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찬란하기는 했잖아.”


여명의 빛을 등지며 우뚝 섰던 모습. 휘날리는 라이언하트의 깃발……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허억 하고 숨을 삼켰다. 멋대로 붉어진 얼굴이 뜨거웠다.


‘중증이구만.’


디자이라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도리도리 젓는 시엘을 보니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시무인에서 엉엉 울고, 눈이 탱탱 부었던 시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굵은 목소리가 불쑥 다가왔다. 우락부락한 근육의 가르기스였다. 워낙 덩치가 컸기 때문에, 타고 있는 와이번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정도였다.


“됐어.”


“하지만 시엘 아가씨는…….”


“됐다니까, 괜한 말은 하지 마.”


나는 아직 이쪽이 어울린다. 시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양손을 들어서 뺨을 찰싹 두드렸다. 열기로 달아올랐던 뺨에 얼얼한 아픔이 전해지고, 비행으로 부딪치는 바람이 금세 뺨을 식혔다.


‘아직은 안 돼.’


자신도 없고, 준비도 되지 않은 마당에 저곳에 가버렸다가는 더 큰 욕심이 생겨 버릴 것이다. 시엘은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었고, 유진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유진 님.”


2쌍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페가수스, 아폴로가 유진의 근처로 날아왔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먼저 날아가 정찰하고 오겠습니다.”


라파엘로는 소년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중갑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특유의 염세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차림새를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라파엘로의 애마, 아폴로가 가진 2쌍의 날개와 거대한 체구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아폴로는 이종교배와 마법생물학, 신성마법을 섞어 만들어낸 신성잡종이다. 지금 저 뒤에서 날고 있는 유라스의 성마기병대의 모든 페가수스 또한 신성잡종이다.


그렇기에 성마기병대의 페가수스들은 시무인의 천마기병대가 보유한 페가수스들보다 훨씬 강인하고 빠르다. 당장 하늘에서 따라오고 있는 비행대 중에서 성마기병대의 페가수스보다 빠른 비행생물은 없다.


하지만 세냐의 마법보다 빠르지는 않다.


“라파엘로 경께서 자처해 나서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미 저 앞은 세냐 님의 마법으로 탐색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라파엘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폴로의 고삐를 당겼다. 의욕에 앞서 고집을 부려야 할 일은 아니며, 라파엘로는 공치사에는 욕심이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빛에 몸을 바치는 것뿐이다.


‘너희도 그렇겠지.’


라파엘로는 유진의 뒤편에서 무릎 꿇고 있는 수십 명의 성직자들을 보았다.


성녀가 광명사제단에서 직접 엄선해 낸, 성유물이나 기적 등을 이식한 신성병기. 엄선한 뒤에는 신성마법을 새로이 전수하고, 라파엘로가 전투훈련을 시킨 은광. 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정예 수십 명이 지금 유진의 뒤를 지키고 있다.


‘만약 유진 님에게 위험이 찾아온다면.’


목숨을 빛에 바쳐가면서라도 지켜야 한다. 라파엘로가 지도를 맡은 1년 동안 가르친 것은 결사의 정신이다. 애당초 은광은 마왕과의 전투에서 순교를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대다.


“나는 이런 건 싫어.”


라파엘로가 물러난 뒤. 유진은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성녀를 보조하는 특수부대. 그런 목적으로 훈련받은 전투신관들…… 처음에는 그렇게 들었는데.”


“다르지 않습니다.”


크리스티나 대신 아니스가 대답했다. 빛의 샘 이후로 처분할 수 있는 성유물과 신성병기들은 처분했다. 하지만 처분할 수 없는, 멀쩡히 살아 있는 생체병기들은 처분할 수 없었다.


유진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설마 결사대를 조직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은광의 존재 이유는 성녀인 저를 보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존재 이유는, 용사인 당신을 섬기며 지키는 것이지요.”


듣는 귀가 많다. 그러니 긴 이야기로 유진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300년 전에는 ‘결사대’라는 새삼스러운 이름이었다. 마경의 모두가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유진도 알고 있다. 마왕과 싸우는데 죽음의 각오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오직 죽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는 것은 의미가 전혀 다르지 않나.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죽는 게 목적인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쪽이든 죽음에 도망치지 않는 것이죠. 용사님, 당신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적이, 마왕이 얼마나 끔찍한지.”


아니스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허나 유진은 그 눈동자 안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회오리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느낄 필요도 없다. 유진은, 아니스 슬리우드라는 여자를 잘 알고 있다.


“알지.”


가장 괴로운 것은, 저들을 엄선한 아니스일 것이다. 그러니 유진은 아니스를 책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말이야. 기왕이면 덜 죽었으면 좋겠어.”


“용사님은 욕심쟁이시군요.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정작 자기 목숨은 가볍게 다루시는 것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아니스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뭐라 대꾸하든 혼쭐이 나버릴 거다. 그러니 유진은 괜히 헛기침을 뱉으며 시선을 피했다.


“포착했어.”


라이미르아의 머리 위. 두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던 세냐가 입을 열었다. 고밀도 마력의 방해가 거셌지만, 세냐의 절대률은 기어코 적진을 꿰뚫어 보았다.


“도시에 생명 반응은 거의 없어.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아주 많네. 무슨 뜻인지 알지?”


“언데드.”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아멜리아 머윈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흑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정통하고 강력한 네크로맨서입니다.”


세냐의 뒤편에는 대마법사들이 서 있다. 그중 발자크가 입을 열었다.


“하우리아의 시민들이 대부분 추방되었다고는 해도, 점령당하는 와중에 휘말린 시체만 해도 수백은 우습게 넘을 겁니다. 수도의 공동묘지의 시체까지 동원한다면…… 말 그대로 언데드의 대군을 꾸릴 수 있겠지요.”


“오래된 시체는 약해빠졌으니 경계할 것도 없어.”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는 구울이나 스켈레톤은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마법 한 번으로 휩쓸 수 있다. 진정으로 까다롭고 상대하기 귀찮은 것은, 역시 고위 언데드들이다.


“흑마법사의 생체반응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과격한 선택을 했군요.”


발자크가 안경을 올려 쓰며 눈을 빛냈다.


“흑마법사들이 유리한 진영을 버리고 도시 밖으로 나가 양동을 벌일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흑마법사의 생체반응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이겠죠.”


이제 와서 흑마법사들을 숙청해 봤자 아멜리아가 얻을 이득은 없다.


“리치.”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내뱉었다. 리치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흑마법사의 언데드. 리치가 되면 커다란 힘을 얻고, 라이프 베슬이 파괴되지 않는 한 소멸하지도 않는다.


물론 이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리치가 되어도 인간으로서의 욕구는 대부분 남기 때문에, 충족되지 않는 굶주림과 갈증 등에 허덕이게 된다. 거기에 라이프 베슬이 파괴된다면 윤회도 하지 못하고 평생을 지옥에 처박혀 고통받는다고 한다.


“마족들은?”


“왕성 쪽에 있는 것 같아. 마물들은…… 밖에 있…… 음?”


세냐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아멜리아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뭐 이런 미친년이 다 있어?”


하지만, 세냐는 진심을 담아서 그렇게 말해 버렸다.


지네산맥 바깥. 사막에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고 있다. 세냐는 그 거인이 누구인지 즉시 알아보았다.


“진짜 미친년이네.”


세냐가 보는 광경은 먼저 유진에게 전해졌다. 광란의 자식 중 하나. 거인족의 두령, 카마쉬. 유진도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마쉬가 사막에서 일어서자, 놈의 발을 중심으로 하여 사막이 시커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검게 변한 사막에서 마물들이 몸을 일으켰다.


지네산맥이나 카마쉬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인간을 우습게 여기는 대형 마물들이다. 거기에 도시를 배회하던 언데드의 대군까지 사막에서 진열을 갖추었다.


유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세냐의 곁에 섰다. 마법으로 전해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우리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저 멀리.


우두커니 선 카마쉬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미르아의 뒤를 따르는 비행대도 카마쉬의 모습을 포착했고, 지상부대에 전달했다. 갑자기 거인이 나타났다는 말에 모두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거인족은 엘프만큼이나 보기 드물다. 마왕의 편에 붙지 않았던 거인들은 죄의식이나 세간의 비난에 발끈해 날뛸 것을 염려해 잠적했고, 그 외에는 헬무드에서 내준 숲에서 무리 짓고 살고 있다.


“저건 300년 전에 베르무트와 하멜이 죽인 거인이야.”


동요하는 전원에게 세냐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 이야기만으로 모두가 저 거인의 이름을 떠올렸다.


카마쉬.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강했다는 거인.


“꺄악!”


거대한 카마쉬의 모습에 멜키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백색마탑의 정령사들이 기겁하며 만류했지만, 멜키스는 그 모든 손길을 떨쳐내고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언니! 제가 놈을 쓰러트릴게요!”


현명한 세냐를 제외한, 지금 시대의 마법사들 중 누가 가장 강한가?


그것을 증명하고 알리기에 저 거인 언데드가 최고의 상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증명한다면 백색마탑 아래에 다른 마탑들을 거느리고서 연구지원금을 독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백색마탑을 위한 욕심보다, 3명의 정령왕과 계약한 힘을 떠벌리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더 컸다.


“안 됩니다.”


대답한 것은 유진이었다. 그는 목을 좌우로 꺾고, 손목을 탈탈 털면서 말을 이었다.


“저걸 죽여야 하는 것은 저여야 합니다.”


“뭐어? 왜!”


“음…… 저희 가문의 시조님이,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저렇게 되살아난 것이잖습니까. 그러니 제가 마무리를 해야죠.”


300년 전에 카마쉬를 죽였다. 죽이기만 하고, 따로 처리는 하지 않았다. 설마 시체가 전장에서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300년이나 지난 지금 언데드가 되어 저렇게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언데드로 되살아난 카마쉬에게 동정심 따위는 갖지 않는다. 애당초 유진은 카마쉬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놈이 부하 거인을 이끌고 쳐들어왔길래ㅡ 베르무트와 앞을 가로막았다. 싸우고, 죽였다. 그 도중에 카마쉬와 나눴던 대화는…… 기합과…… 비명과…… 욕설 정도였다.


놈은 죽어 마땅한 새끼였다.


3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의와 상관없이 언데드로 되살아난 놈을 동정해서 안식을 주겠다는…… 그딴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300년 전에 놈을 죽였다.


베르무트와 함께 죽였다.


이곳에 베르무트는 없다.


“그럼 내가 죽여야지.”


유진은 심드렁히 중얼거리며 양팔을 아래로 내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굳이? 그냥 같이 날아가지그래?”


“아뇨.”


유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언짢은 표정의 아니스가 보였다. 그녀의 뒤에 앉은 은광의 사제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ㅡ화악! 유진의 등 뒤에서 새카만 불꽃의 날개가 치솟았다.


“벌써부터 너희 도움은 필요 없어.”


“유진 님.”


“거인 하나 잡는 데 뭘 벌써부터 돕겠다고 그래?”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지금 저 사막에 있는 것은 카마쉬뿐만이 아니다. 수십 마리의 대형마물과, 언데드의 대군이 있다. 어쩌면 다른 마족도 매복 중일지도 모른다.


‘너는 날 알아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백염식은 알아볼 것이다. 놈이 뇌까지 완전히 썩어서 이성이 없다면 모를 일이지만. 정신머리가 조금이라도 멀쩡히 박혀 있다면, 베르무트의 불꽃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자신을 죽인 불꽃.


그것을 기억하고, 알아본다면.


과연 가만히 서서 기다릴 수 있을까.


“도착하실 때면 끝났을 겁니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하늘로 날아 올랐다.


화르륵! 프로미넌스가 움직였고. 검은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이윽고 유진은 검은 혜성이 되어 하늘을 관통했다.


머리가 뿌옇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인가에 대한 자각은 있다.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죽었다…….’


벽을 무너트리기 위해 데리고 갔던 부하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형제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의문은 있다. 하지만 집착하지는 않았다. 할 수 없게 만들어진 것이다. 카마쉬에게 남은 것은, 죽는 순간의 기억. 무엇이, 누가, 나를 죽였는지에 대한 기억이다.


아멜리아는 그것 외에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멜의 데스나이트처럼 정교한 기억과 인격은 필요 없다. 아멜리아가 카마쉬를 언데드로 만들면서 부여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하고 압도적인 폭력뿐이었다. 그러니 폭력에 필요 없는 감정들은 절제했다.


머리가 뿌연 것은 감정에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에 감정이 감응하지 못하고 있다.


형제와 아버지에 대한 추억. 그리움. 걱정. 슬픔. 지금의 카마쉬에게 그런 종류의 감정은 없다. 죽는 순간에 보았던ㅡ 참격의 난무와, 멈추지 않고 퍼부어대는 공격, 다양한 무기, 그리고.


불꽃.


“…….”


기억이 강렬해진다. 기억에 감응했다. 뿌옇던 머리에 빛이 켜졌다. 빛은 번개가 되어 정신을 밝히고 육체를 반응시켰다.


쿠웅.


카마쉬가 앞으로 걸었다. 천천히, 천천히. 기억에 감응한 얼굴이 표정을 만들었다.


카마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베르무트.”


불꽃이 다가오고 있다.


“하멜.”


거인의 왕은 증오를 담아 원수의 이름을 말했다.


빌어먹을 환생 470화


저 불꽃.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순수한 마나의 불꽃.


얼룩 한 점 없이 하얗던 베르무트의 불꽃과는 다르게 새카맣다. 하지만 ‘색’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저 불꽃은, 베르무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만큼 순수하다.


그리고ㅡ 그리고, 신기하게도, 하멜도 떠올릴 수 있었다. 날뛰는 불꽃은 순수하며 격정적이다.


단호하고 절제된 참격을 기억한다. 그와 정반대로 미치광이처럼 몰아붙이던 참격을 기억한다.


뿌옇던 머리에 기억과 감정이 가득 찼다. 축 늘어졌던 몸뚱이가, 지펴진 감정에 충실히 움직였다.


달렸다.


“아아아아아아!”


포효하며 달렸다.


베르무트, 하멜, 그 둘이 나에게 날아오고 있다. 놈들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 불꽃을 두른 인간이 베르무트도, 하멜도 아니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카마쉬에게 중요한 것은, 저 인간이 원수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마쉬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네가!”


카마쉬의 상반신이 뒤로 기울어졌다. 마치 그대로 누워버릴 것처럼, 등이 지면과 가까워졌다.


콰가가각! 거대한 손이 사막을 긁으며 모래를 퍼 올렸다.


“나를!”


꽈지지직! 손가락이 모래를 움켜쥐었다. 터무니없는 힘이 모래를 압박하여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덩어리에 마력이 가득 담겼다.


“죽였다!”


무기는 필요 없다. 생전부터 카마쉬는 무기를 쓰는 것보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했다.


투석도 그랬다. 익숙하고 편하다. 땅을 쥐어서, 돌을 만들고, 던진다. 이 단순하고 원초적인 공격기만으로 카마쉬는 거인족의 왕이 되었다.


돌이 날아온다. 아니, 저게 돌이기는 한가? 모래를 쥐어서 만든 것이지만 모래 덩어리는 아니다. 사실 저것의 정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맞는 건 싫다. 죽지는 않겠지만 굉장히 아플 것이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군.’


저대로 날아갔다가는 머 뒤쪽에서 날아오는 라이미르아가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뒤의 비행대를 휩쓸거나, 지상에 떨어져 대참사를 만들겠지. 어느 쪽이든 유진은 바라지 않는다.


맞는 건 싫다. 피하면 안 된다.


‘익숙하군.’


그럼 부수면 된다.


망토가 열리고, 성검이 뽑혀 나왔다. 검은 불꽃이 성검의 검신을 휘감았다. 찬란한 빛이 불꽃과 뒤섞였다.


빠지지직! 유진을 휘감고 있던 불꽃이 크게 부풀었다. 혜성의 꼬리처럼 뒤처졌던 프로미넌스가 유진의 움직임에 부응했다.


꽈아앙! 한 번의 참격이 카마쉬가 던진 돌을 갈랐다. 돌에 실린 마력이 불꽃과 신성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소멸했다. 둘로 갈라진 돌은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못하고 소멸했다.


거기까지 흐른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은 찰나. 유진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참격을 만든 순간에 쏘아낸 깃털이 유진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파지직! 유진과 깃털 사이에 불꽃의 선이 이어졌다.


던진 돌이 소멸했다. 원수가 근처에 도달했다. 어떻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감히.”


오직 분노했다. 돌을 던졌던 손이 움직였다. 활짝 펼친 손이 날벌레라도 잡듯이 하늘을 때렸다.


꽈아앙! 하늘이 크게 요동쳤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려는 것만 같았다.


손이 더 나아가지 않는다. 도중에 막혀버렸다. 마치, 결코 부서지지 않는 벽을 때린 것만 같다. 카마쉬에게 이런 감각은 낯설었다. 곧, 카마쉬는 무엇이 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벌레와 다를 것 없이 자그마한 인간이 손바닥을 가로막고 있다. 카마쉬는 더욱 힘을 주어 팔을, 손을 밀었다.


몸뚱이에 연결된 팔은 생전에 잘린 것과 다른 팔이지만, 그런 것은 카마쉬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카마쉬는 새로운 팔다리에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현명하지 못했고, 새로운 팔다리는 문제가 되기는커녕 생전보다 성능이 훌륭했다.


‘흉측해라.’


거대한 손바닥에 성검을 대고 있는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거칠고 단단한 가죽은 성검에도 베이지 않는다. 지금 카마쉬에게 붙은 팔다리는, 팔다리처럼 생겨 먹은 전혀 다른 기관처럼 느껴졌다. 이 팔다리가 어느 놈에게 뜯어 온 것인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뒤섞어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살아 있을 적보다 강한가? 그런 것 같다. 300년 전에는 이만큼이나 힘이 세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얼마나 강한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뒈진 카마쉬가 언데드가 되었다. 생전보다 힘이 세졌다.


‘나만큼은 아니야.’


베르무트와 카마쉬를 가로막고, 놈을 죽였을 때. 그때의 하멜은 젊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젊다기보다는 여러모로 미숙했다.


마경에 건너온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마왕도 쓰러트리기 전이었다. 카마쉬를 죽이고 난 뒤에도 세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많은 치열한 전투를 겪었다. 살육의 마왕을 죽이고, 참혹의 마왕을 죽이고, 광란의 마왕을 죽였다.


죽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로 환생했다.


대기가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유진의 머리를 밝히는 신력이 예지와 다를 것이 없는 직관을 전달했다. 금색의 눈동자가 조금 더 밝은 빛을 담았다.


굵은 손가락이 유진의 위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카마쉬는 주먹을 쥐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반대쪽 손이 주먹을 감싸 쥐었다.


뭉개 버리거나, 땅에 패대기치거나. 할 수 있는 것은 많았지만, 그 무엇도 성공하지 못했다.


말아 쥔 손가락이 도중에 멈췄다. 더 힘을 주어 쥐려 한 순간. 카마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펼쳐버렸다.


촤라라락! 시커먼 불꽃이 수백 개의 참격이 되어 터졌다. 손바닥은 갈기갈기 찢겼다. 펼치는 것이 조금 늦은 탓에 손가락 두 개가 썩둑 잘려 버렸다. 이미 죽은 몸이라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과는 다른 섬뜩함이 찐득하게 남았다. 카마쉬는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포. 아멜리아가 거세해 버린 탓에 몸은 떨리지 않고, 주저함도 없다. 오히려 공포가 분노로 치환되었다. 카마쉬는 커다란 포효를 내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저런 주먹질. 공간도약을 쓸 것도 없었다. 유진의 몸이 앞으로 가속했고, 프로미넌스가 혜성처럼 꼬리를 흘렸다. 압도적으로 커다란 카마쉬가 보기에, 빛의 잔영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유진은 새카만 반딧불처럼 보였다.


‘반딧불?’


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이건 절대로 반딧불이 아니다. 카마쉬의 커다란 시야에는 유진의 모든 움직임이 잡힌다.


그럼에도 볼 수가 없었다. 시야 안에 있는데도 움직임을 쫓을 수가 없다. 빛이 점멸하듯 유진의 모습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곳에 나타나 버린다.


주먹을 휘둘러 잡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휘두른 주먹이 노렸던 타격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유진은 새카만 빛이 되어 카마쉬의 팔을 훑고 지나갔다.


빛에 스쳤다. 그것뿐인데도 팔이 너덜너덜해졌다. 끈적한 피가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굵은 팔뚝을 성검으로 깎아내며 어깨까지 도달했다. 성벽만큼 높고 두꺼운 목이 보였다. 일격에 벨 수 있을까. 유진은 양손으로 성검을 쥐었다.


검은 불꽃이 하늘을 양단했다. 하지만 카마쉬의 목은 참격에 걸리지 않았다. 카마쉬는 그 덩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몸을 젖혀 참격을 피해냈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그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상대는 시체다. 뼈와 근육, 신경, 그런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력으로 움직이는 놈이다.


‘그런가.’


카마쉬도 깨달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움직임을 해내는 이 죽은 몸뚱이가 생전과 얼마나 다른지. 기억과 감정을 일부 거세당했지만, 투쟁심이나 전투감각 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화르르르! 끝이 가늠되지 않는 마력이 카마쉬의 전신을 휘감았다. 너덜너덜해진 팔뚝이 즉시 마력으로 달라붙었다.


이 몸뚱이와 마력을 어떻게 다뤄서 싸워야 하는가. 카마쉬에게 그런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거인족의 두령이고 광란의 자식인 카마쉬는, 지금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즉시 이해했다.


이 사막에 있는 것은 카마쉬뿐만이 아니다. 뱀처럼 긴 목에 머리는 셋 달린 늑대가 카마쉬의 몸을 뛰어넘었다. 라비스타의 하늘에 봉인되어 있던 마물 중 한 놈이다. 놈은 목을 쭉 늘리며 유진을 집어삼키려 했다.


“크아아아!”


분노 섞인 괴성과 함께 카마쉬가 손을 뻗었다. 놈은 마물의 다리를 공중에서 낚아채더니, 그대로 땅에 패대기쳐 버렸다. 꽈아앙! 사막이 움푹 파이고 모래가 위로 치솟았다.


“이 전투는 내 것이다!”


한 번 패대기쳤지만 분이 식지 않았다. 카마쉬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면서 발을 들어 마물을 짓밟았다.


꽈지직! 대형 마물의 머리 세 개를 모두 짓밟고 나서야 카마쉬는 양팔을 번쩍 들었다.


“허.”


유진은 그 광경에 헛웃음을 흘렸다. 카마쉬의 눈동자와 표정을 보았다.


전사다운 행동, 명예, 전투에 대한 존중.


다르다. 카마쉬의 저 말은, 모론이나 이바타와는 다르다. 카마쉬가 지금 저렇게 말하며 마물을 밟아 죽인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하여, 유진도 이해하기가 편했다.


복수심이다. 날 죽인 놈이니 반드시 내가 죽여야 한다.


저런 감정은 유진도 상대하기가 편했다. 카마쉬가 저렇게 행동하고 외쳐준 덕에 지네산맥 쪽의 진군이 멈췄다.


“죽인다.”


쿠웅! 카마쉬의 발이 한 번 더 땅을 찍었다. 밟혀 죽은 마물에게 피가 치솟고, 자욱한 모래 먼지에 피비린내가 가득 담겼다.


카마쉬가 휘두른 팔이 불러일으킨 바람이 모래 먼지를 날려버렸다. 거대한 마력이 팔의 움직임에 맞춰 공간을 밀어붙였다. 유진의 시야에서 빠져나갈 곳 없는 어둠이 가득 찼다.


성검의 칼날을 덮은 빛과 불꽃이 길게 늘어났다. 두 개의 빛이 회오리치더니 하나가 되었다. 주먹과 마력이 가까이 온 순간. 유진은 성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공검.


이그니션을 쓰지 않았다. 최대 중첩까지 할 필요도 없다. 상체를 비틀어가며 양손으로 잡아 휘두른 공검은, 검을 휘두른다기보다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위력은 끔찍했다. 눈 앞을 가리며 전진하던 마력이 소멸했다. 카마쉬의 주먹은 팔과 함께 세로로 두 동강 났다.


잘린 팔이 마나의 불꽃에 뒤덮이는 순간에도 카마쉬는 제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큼 공검은 빠르고 저항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하나는 이해했다. 죽음이 다가온다. 한 번 죽어봤기 때문일까. 카마쉬는 죽음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잘 알았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콰드득! 필사적으로 몸을 뒤튼 덕에 목은 베이지 않았다. 대신 오른팔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크아아!”


오른팔이 잘려 나간 것에 대한 고통은 없다. 일격에 팔을 베고 목까지 베려 했던 검. 죽음을 느꼈지만 그에 대한 공포도 없다. 공포가 있어야 할 곳에 분노만 가득 찼다.


카마쉬는 멀쩡하게 남은 반대편 팔을 움직였다. 손가락으로 마력을 움켜쥐어 결정을 만들면서, 발은 땅을 걷어찼다.


모래가 뒤집혔다. 하늘과 땅이 반대가 된 것만 같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모래가 하늘로 치솟았다. 대군을 찢어버릴 정도의 힘이 담긴 모래폭풍이 유진을 집어삼켰다.


유진의 머리 위로 서 있던 프로미넌스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다시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프로미넌스를 구성하는 마나가 마법을 일으킨 것이다.


맑게 갠 시야에 카마쉬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커다랗게 뭉친 마력의 결정을 손에 쥐고, 유진에게 던지려 하고 있었다.


성검을 쥐고 있던 왼손을 놓았다. 앞으로 향한 손등이 천천히 나아갔다. 몸쪽을 향한 손바닥에서는 일렁거리는 불꽃이 맺혔다. 유진을 휘감은 불꽃이 손에 집중됐다.


검은 불꽃이 하나의 구체가 되었다. 더 이상 유진의 불꽃에 흑점은 발생하지 않지만, 이클립스를 구성하는 방법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나를 한곳에 집중시키고, 증폭시키고, 터트리고, 붙잡고, 뒤덮고.


이클립스가 완성되었다. 유진은 앞으로 향했던 손등을 뒤집고, 손바닥을 살짝 밀어냈다. 주먹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 이클립스가 앞으로 전진했다.


그 크기는 카마쉬가 쥐어짜서 만들어낸 마력의 결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다. 태양 앞의 반딧불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 전투를 지켜보는 자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지네산맥 밖으로 나와 있던 마족들은, 지금 유진이 던진 불꽃에 얼마나 끔찍한 힘이 담겨 있는지를 느꼈다.


마족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양팔을 앞으로 들었다. 곧이어 벌어질 폭발, 후폭풍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산맥 안쪽의 흑마법사들도 똑같이 판단했다. 리치들의 앞에 서 있던 아멜리아 머윈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안 돼.’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이 카마쉬에게 향했다. 맞서지 마라. 무조건 피해라. 뒤로 물러서서 태세를 정비해라.


명령에 따라 몸이 움직였다.


‘싫다.’


억지로 몸을 붙잡았다.


맞서지 말라고? 무조건 피하라고? 살아 있을 적에도 그렇게 행동한 적이 없다. 카마쉬가 그만큼 현명하고 이성적이었다면, 팔다리가 잘리고서도 베르무트와 하멜에게 덤비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카마쉬는 물러서지 않고, 이클립스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태양 앞의 반딧불. 보이기만 그럴 뿐이었다. 닿는 순간에 이클립스가 마력을 침식했다. 한계까지 응축했단 마력이 풍선처럼 터졌다. 계속해서 전진한 이클립스가 카마쉬의 손에 닿았다.


닿은 손끝부터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카마쉬는 계속해서 마력을 퍼부으며 이클립스의 전진을 가로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클립스는 막힘없이 나아갔고, 기어코 카마쉬의 왼팔을 모조리 소멸시켰다.


폭발. 마나의 폭풍이 사막을 휩쓸었다. 허나 그 폭풍은 카마쉬를 넘어트리기에는 부족했다. 순식간에 양팔을 잃었지만, 카마쉬의 두 다리는 건재했다.


그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앞으로 움직였다. 크게 벌린 입으로는 험악한 포효를 내질렀다.


유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툭.


가슴팍에 뭔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작은, 무언가가. 카마쉬는 즉시 눈동자를 내려 아래를 보았다. 가슴에 양발을 얹고 있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크네.”


유진은 카마쉬의 가슴을 발로 밀며 중얼거렸다.


화르르륵! 프로미넌스의 불길이 거세어지자, 카마쉬의 거구가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카마쉬는 급히 몸에 힘을 주어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저것은 단순히 힘으로 미는 것이 아니었다. 닿은 가슴에서부터 불꽃이 침범하고 있다.


“너.”


카마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유진이 양손으로 성검을 쥐고, 머리 위로 드는 것이 보였다.


저 검은 알고 있다. 베르무트가 쓰던 성검이다. 몸을 휘감은 불꽃. 목 근처에서 휘날리는 불꽃은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보인다. 저 불꽃도, 알고 있다.


“베르무트도, 하멜도 아니구나.”


뭘 당연한 말을 하는 거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공검을 일으켰다.


ㅡ꽈앙! 카마쉬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더 버티지 못한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넌 누구냐.”


쓰러지는 순간에 카마쉬가 물었다. 태양을 등진 유진은 성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모르는 이름이다. 앞으로도 알 길이 없는 이름이다.


검은 불꽃이 떨어졌다. 쓰러진 등이 사막에 닿는 순간, 공검은 카마쉬의 목을 파고들었다.


‘아…….’


300년 전에 위대한 베르무트가 카마쉬의 목을 베었다.


지금 시대에 베르무트는 없다. 카마쉬는, 목이 베이는 순간에 다시금 그를 실감했다. 지금, 내 목을 베는 것은 베르무트가 아니다. 하멜도 아니다…….


‘유진 라이언하트…….’


흐릿하던 시야가 완전히 꺼지는 순간. 의식하지 않던 생각이 카마쉬의 머리를 덮었다.


‘드디어 죽는구나.’


ㅡ쿠우웅.


쓰러진 카마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성검을 거두고 지나치려는 순간.


“아, 맞아.”


한 번 더 죽인 놈이 언데드로 부활할 수 있을까? 그 여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괜한 찝찝함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


유진은 즉시 깃털로 이클립스를 만들어, 카마쉬의 몸뚱이에 던져 버렸다.


검은 불꽃이 시체를 집어삼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유진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휴, 아슬아슬했네.”


도착할 때면 끝났을 거라고 말해놨는데. 끝내지 못했으면 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환생 471화


“조금만 더 빨리 날지 그랬어?”


도착할 때까지 카마쉬를 끝내지 못했다면, 트집을 잡아서 잔뜩 놀려먹을 수 있었을 텐데. 세냐는 그것에 대한 조금의 아쉬움을 느끼면서 말했다.


[본녀는 최선을 다해서 날았느니라.]


“거짓말하지 마. 네가 유진을 위해 속도를 조절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눈을 흘기며 쏘는 말에 근거는 없었다. 이 성격 나쁘고 주책맞은 대마법사는 평소에 그랬듯이 되는대로 트집을 잡아댔을 뿐이다.


[본녀는…… 본녀는 속도를 늦춘 적이 없느니라…….]


라이미르아는 억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유진이나 크리스티나, 아니스였다면 주눅 들지 않고 반격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라이미르아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은 잡지 말고 내려가십시오.”


옆에 다가온 아니스는 세냐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쏘아붙였다. 세냐 본인도 괜한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괜히 헛기침만 몇 번 내뱉었다.


“으흠…… 역시 내 제자야. 저렇게나 커다란 거인을 이렇게 빨리, 거기에 혼자서 쓰러트리다니!”


유진을 놀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유진의 무위는 칭송할 만했다. 멀리서 날아가는 중에 보기에도 카마쉬의 힘은 대단했기 때문이다. 저 덩치가 군을 가로막고 정면에서 날뛰었다면 귀찮고 난감했을 것이다.


[아아, 유진 님께서는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몸소 적진에 뛰어드신 것이로군요!]


크리스티나가 탄성을 내질렀다. 다분히 찬송 위주의 말이기는 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니스가 생각하기에도 유진이 굳이 먼저 날아간 것은, 카마쉬의 덩치에 따른 아군의 피해를 염려한 것 같았다.


“뭐…… 그냥 직접 죽이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세냐를 한 번 더 흘겨보았다. 제자의 선전에 뿌듯해하던 세냐는, 한 번 더 향한 시선에 헛기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슬슬 가보실까.”


아롯이 자랑하는 마법병단은 트렘펠이 이끌 것이고, 마탑주들은 각자의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이끌기로 했다. 마탑주 자리가 공석인 녹색마탑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제네릭이 맡기로 했다.


그리고 세냐는, 발자크와 라이나인과 함께 지네산맥을 돌파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네산맥만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날뛰기 좋은 곳이 있다면 그곳에도 개입할 것이다.


“가자.”


세냐는 자신과 함께하는 2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흑색마탑은 사실상 해체 수준이라, 흑색마탑 소속은 발자크는 혼자뿐이다. 사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 전장에 흑마법사를 데려오는 것도 우스운 일. 발자크가 이곳에 있는 것은, 세냐가 많은 사정을 봐주었기 때문이다.


“블라인드는 쓸 수 없겠습니다.”


발자크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대가 예정했던 대로 인간의 군대였다면, 발자크의 시그니처인 블라인드가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전장에 인간은 아군뿐이다. 적군을 구성하는 언데드와 마물, 마족은 블라인드를 써봤자 큰 재미는 볼 수 없다.


“괜히 수상한 짓 말고, 얌전히 내 보좌나 해. 잡아먹는 것은 적당히 하고.”


“알겠습니다.”


발자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 발자크가 의심스러운 짓을 한다면, 세냐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발자크를 죽여 버릴 것이다.


그간 발자크가 세냐에게 많은 호감을 쌓은 것은 사실이나, 고작 호감 정도로 세냐는 망설이지 않는다. 그녀는 발자크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으며, 언젠가 발자크가 무조건 적이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 사실은 발자크도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 설마 이런 형태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현명한 세냐와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변하는 것은 없다.’


만약 아멜리아가 에드몬드처럼 마왕 의식을 시도했다면, 그 과정에서 발자크도 여러 이득을 취할 수 있었겠지만…… 발자크가 그린 대국에 문제는 없다.


‘이번 전쟁을 통해 나는 한층 더 비원에 가까워질 수 있다.’


발자크는 경의를 담아 세냐를 보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마법사. 인간을 넘어 마법의 여신에 도전하고, 실제로 도달해 가는 마법사. 현명한 세냐는 프로스트를 손에 쥐고서 하늘을 걸었다.


화아악! 세냐의 등 뒤에 은하가 펼쳐졌다. 라이나인과 발자크는 감탄을 느끼며 세냐의 뒤를 따랐다.


“공검…….”


백룡기사단의 선두. 알체스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나이트마치 이후로 유진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유진의 힘과, 그가 도달한 공검의 완성도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공검은 드라고닉 가문이 몇 대에 걸쳐 완성한 비기.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자부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유진의 공검은, 드라고닉의 가주인 알체스터가 도달한 수준보다도 아득하게 높았다.


‘검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유진이 던진 검은 구체. 거인의 마력과 팔을 단번에 소멸시켰던 그 구체 또한 공검의 묘리로 완성한 것이리라. 그 사실에 알체스터는 한 번 더 전율했다.


가문의 비기가 멋대로 사용되었다? 그것이 불쾌할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알체스터가 느끼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감동이었다. 그, 유진 라이언하트가.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구할 용사가.


‘우리 가문의 비기를, 나에게 배운 공검을 절기로 삼은 것이다.’


다시 한번 그 사실을 음미하면서 벙긋 웃었다.


거기까지. 알체스터는 감상에서 벗어나 손을 번쩍 들었다. 곁을 따르는 기수가 즉시 백룡기사단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이윽고 다른 부대의 모든 깃발이 높이 들렸다. 적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검은 불꽃에 소멸된 거인의 시체 너머. 새카맣게 물든 사막의 위에서 언데들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앞서 마물들이 움직였다. 지네산맥은 물론이고 카마쉬와도 비교가 안 되지만, 달려오는 마물들은 모두가 대저택은 우습게 여길 정도로 덩치가 컸다.


초대형 마물. 덩치만 큰 것이 아니다. 마물은 몬스터와 달리 순수한 마력을 갖고 있다. 선두에 달리던 마물 중 몇 놈이 크게 입을 벌렸다.


우우우우! 벌린 입에서 마력이 집중되었다. 이어질 일은 뻔하다. 마력을 브레스처럼 쏴 갈기겠지.


마물들이 움직인 순간, 아군이 즉시 대응에 나섰다. 마법병단이 트렘펠의 지시에 따라 동시에 마법을 일으켰다.


화아아악! 두꺼운 마법의 장벽이 대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요격 마법들이 준비되었다. 최후방에서는 로베리안을 필두로 한 적색마탑의 마법사들이 소환진을 그렸다. 수백 문에 달하는 대포가 배치되었다.


꽈과과과광! 가장 먼저 대포가 동시에 포격을 시작했다. 여러 국가에서 차출한 대포. 화력에서 단연 으뜸이라 점쳤던 것은 역시 아롯의 마법대포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드워프들의 욕망이 그득 담긴 라이언하트의 대포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다란 굉음을 내며 마나의 포탄을 쏴댔다.


쾅, 쾅, 쾅! 결계를 통과하고 쇄도하는 포탄이 마물들에게 적중했다.


포격된 대형마물들이 휘청거렸다. 죽은 놈은 한 마리도 없지만, 진군은 멈췄다. 놈들도 얼빠지게 처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입 앞에서 응축된 마력들이 폭사했다. 마력이 브레스처럼 길게 뿜어졌다.


두꺼운 마법 장벽에 빛이 어렸다. 포대의 근처에 대기 중이던 광명사제단이 기다렸다는 듯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혈십자기사단을 제외한 지상 성기사들은 신관들의 호위를 맡았는데, 그들도 신성력을 일으켜 신관들에게 힘을 보탰다.


포격만으로는 저 커다란 마물들을 저지할 수는 있어도, 전멸시키는 것은 힘들다. 판단이 전달된 즉시 모든 대포가 높이 들렸다. 후미를 따르는 언데드 부대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돌격하라!”


군주 중에서 유일하게 참전한 야수왕이 포효했다.


아만과 루하르의 기사들은 전원이 늑대를 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아만이 탄 늑대가 가장 컸다. 예전에 설원에서 유진의 길잡이가 되어준 거대한 늑대, 에빌이다. 늑대를 탄 아만과 하얀 송곳니가 먼저 질주했다.


“시안.”


거대한 흑마의 위. 길레이드가 입을 열었다.


“예, 가주님.”


길레이드의 곁에서 말을 타고 있던 시안이 대답했다.


투구를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수림에서 전쟁은 이미 겪어보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은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시안은 굳은 뺨을 의식하면서 길레이드를 돌아보았다.


“긴장되는 모양이구나.”


길레이드는 시안을 힐긋 보며 말했다. 속내가 들켰다. 시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길레이드가 빙긋 웃었다.


“나도 긴장된단다.”


“예……?”


“나라고 해서 전쟁을 겪어보았겠느냐. 하하…… 전쟁은 무슨, 실전조차도 오랜만이지.”


그 말에 시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왜 생각하지 못했지? 당연한 일인데. 시안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여태까지 세상은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그 어떤 귀족도 라이언하트를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라이언하트에는 적이 없었다. 다른 귀족과 결투를 벌이거나 영지전을 벌인 적도 없다. 흑사자 기사단은 매번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한다.


실제로 그들은 실전과 가깝다. 하지만 본가는, 백사자 기사단은 어떤가? 훈련은 하지만, 전쟁은 그들에게도 처음인 것이다.


“가주님…….”


“긴장은 되지만.”


길레이드가 중얼거렸다. 그의 의지에 호응하여 엑시드가 움직였다. 끼긱. 투구가 살짝 열리고 길레이드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이상으로 흥분되는구나. 피가 끓는 기분이야.”


시안은, 아버지의 저런 얼굴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언제나 가주다운 위엄이 가득했던 아버지의 얼굴에 이질적인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시안.”


“예…… 예?”


“이 아비가 부끄러이 날뛰는 일이 없도록, 내 뒤에서 지켜봐 다오.”


“…….”


“아들인 네게 뒤를 맡기마.”


길레이드의 미소가 바뀌었다. 인자하고, 자식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가득한. 시안은 어깨를 바르르 떨다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설마 아들과 함께 전장에 서게 될 줄이야.


아니, 아들뿐만이 아니다. 저 높은 하늘에는 딸이 있다. 그리고ㅡ 다른 한 명의 아들은, 홀로 거인을 쓰러트리고서 돌아오고 있다.


“유진 혼자만 라이언하트인 것이 아니다.”


열린 투구가 닫혔다.


“저 아이의 부담을 덜어주러 가자.”


길레이드가 검을 높이 들었다.


ㅡ아아아아! 그의 뒤에 있던 백사자 기사단 전원이 입을 모아 함성을 내질렀다.


백사자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오르투스와 시무인의 기사들이 달렸고, 아이빅과 용병들이 달렸다. 이바타와 조란의 전사들도 포효하며 달렸다.


ㅡ끼아아악!


비행 마물 수십 마리가 날개를 퍼덕였다. 라이미르아가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는 새에, 뒤따르던 비행대가 앞으로 치고 나갔다.


“정리하고 올 것을 그랬나.”


툭.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위에 내려서며 중얼거렸다.


“혼자서 전부 다 할 거면 군대는 왜 조직합니까?”


“내가 아무리 강해도 저것들 다 혼자서 잡으면 힘 빠지잖아.”


“그걸 본인도 잘 알면서 왜 구시렁거리는 겁니까.”


아니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고작 그 새끼 하나 잡는데 다칠 리가.”


“생채기 하나라도 입고 왔으면 혼쭐을 내려 했는데.”


“혼자 열심히 싸우고 왔는데 취급이 너무 박하네. 칭찬은 안 해주나?”


“참 잘했습니다.”


아니스는 방긋 웃으며 유진의 손등을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유진은 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 아래에서 진군하는 깃발들이 보였다. 가장 앞에서 달리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깃발이다. 그 뒤를 이어 여러 개의 깃발들이 달리고 있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앞서 날아간 비행대가 마물들과 격돌하는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아폴로의 위에서 라파엘로가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는 모습이 먼저 보였다. 자연스레, 유진은 비행대 속에서 아는 얼굴을 찾았다.


와이번을 타고 있는 흑사자들. 카르멘은 와이번을 내버려 두고, 마물의 위에 올라타서 주먹을 내리찍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기온이 능숙하게 와이번을 몰며 검을 휘두르고 있다. 수라광살을 펼치는 제노스의 모습이 보였다. 디자이라와 가르기스도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엘. 길게 뻗은 자벨의 검신이 낭창이며 마물의 가죽을 베고 있다. 유진은,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는 시엘의 불꽃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혼자 올 걸 그랬나?”


“저희도 버리고서 말입니까?”


“뭐…… 너희는…… 내가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왔겠지.”


“저들도 그랬을 겁니다.”


아니스는 빙긋 웃으며 유진의 손을 감싸 쥐었다.


“당신이 저들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당신을 위해 온 것입니다.”


“내가 전쟁을 의도해서 온 거지.”


“그것부터 후회했다가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겁니다.”


“후회하지는 않아. 그냥, 갑자기 생각이 든 거야.”


“여기서 누군가가 죽을지라도, 그건 당신의 죄가 아닙니다.”


아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확실히 이 전쟁은 당신이 의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당신을 위해, 세상을 위해 이곳에 왔지요.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죄일지도 모릅니다.”


아니스의 손바닥이 유진의 손등을 꾸욱 눌렀다. 유진은 그 부드러운 손바닥에 새겨진 성흔을 느꼈다.


“그렇다면 성녀인 제가 당신의 죄를 사하겠습니다. 이곳에서 죽는 모두가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도록 기도하겠습니다.”


“허.”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천국, 천국이라.


“그 말도 오랜만에 듣네.”


“전장에서 누군가는 천국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 기도는 성녀인 제게 걸맞지요.”


아니스도 유진과 함께 웃었다. 그녀는 유진의 손을 놓고서 빙글 몸을 돌렸다. 무릎 꿇은 은광의 사제들이 아니스와 유진을 우러르고 있었다.


의식이 반전되었다.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을 합시다.]


아니스가 속삭였다. 육체의 주도권을 쥔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을 합시다.”


똑같은 말을 읊조리며, 크리스티나는 날개를 펼쳤다.


화아악! 8장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 광경에 은광의 사제들이 손을 모아 기도하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아아아! 라이미르아의 등 한가운데에서 빛의 원진이 그려졌다.


“부탁드립니다.”


라이미르아의 등 위에 남은 유일한 마법사. 신관들의 경건함에 잠시 넋을 잃었던 마이스는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마이스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시그니처가 펼쳐졌다.


배틀쉽. 함선을 마법으로 무장하던 그 마법이, 라이미르아를 휘감았다.


[오오오……!]


전에 미리 연습했던 것이지만, 실전이라는 것만으로 라이미르아는 커다란 흥분을 느꼈다. 배틀쉽의 마법이 라이미르아를 무장시켰다.


라이미르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드래곤을 두고 일컫는 말이 마법의 조종. 라이미르아는 배틀쉽의 술식에 호응하여 용언을 더해 넣었다.


[본녀는 지금 드래곤이자 전함이니라……!]


라이미르아가 흥분해 외치며 날개를 펄럭였다. 순식간에 고도가 상승했다. 앞에서 싸워대던 비행마물들보다 높아지니, 지네산맥에 휘감긴 하우리아가 보였다.


잘 보이지는 않았다. 시커먼 마력이 지붕처럼 도시 위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한 방 쏴봐.”


유진이 말했다.


[은자여! 본녀의 브레스를 보고 싶은 것인가!]


“쏘고 싶으면 쏴야지.”


이토록 흥분하고 기대하는데, 브레스도 못 쏘게 하면 풀이 죽을 것이 분명했다.


[본녀의 힘을 보아라!]


번쩍거리는 빛이 하늘을 관통했다.


빌어먹을 환생 472화


와이번에 타고서 실전을 겪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의외로 문제랄 것은 없었다.


본래 몬스터는 마물에게 지레 겁을 먹어 잘 덤비지 못하지만, 몬스터가 갖는 본능적인 공포조차도 신관들이 부여한 가호가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수가 갖는 생리적인 불쾌감 같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시엘을 포함해 수십 명의 기수가 상대하는 마물은, 거대한 곤충형 마물이었다.


차근차근 뜯어보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거대한 바퀴벌레의 몸뚱이에 잠자리의 날개와 사마귀의 다리를 달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네 장의 날개가 진동할 때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폭풍이 일어났고, 낫처럼 구부러진 앞발은 검강보다 예리한 참격을 휘두른다.


드래곤보다는 조금 작다. 하지만 와이번보다는 훨씬 크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덩치는 엇비슷한 마물 수십 마리가 하늘을 점령했다. 놈들이 아래에 공격을 퍼붓지 못하도록 막고, 가능하다면 빠르게 정리하고서 지상을 지원하는 것이 비행대의 역할이다.


공중전은 경험이 적지만, 시엘은 충분히 활약했다. 채찍처럼 낭창이는 자벨은 마물의 두꺼운 껍질을 파고들었고, 확실하게 틈이 보일 때에는 마안의 권능을 일으켰다. 부동의 권능은 상대가 강할수록 부담이 커진다. 하지만 암전의 권능, 특히 오직 공격에만 치중한 어둠은 지금의 시엘로도 여유 있게 사용이 가능했다.


맹렬하게 앞발을 휘두르며 날뛰던 마물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져 간다. 이쯤이면 되었다 싶어, 마물의 날개죽지에 마안의 어둠을 처박았다. 그러자 마물의 몸이 크게 기울었다.


한 번 더 공격을 시도하려는 순간, 콰르르르! 굵은 브레스가 머리 위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 요란한 소리와 고밀도의 마나에, 시엘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브레스?”


결국 한 번은 쏘는구나. 시엘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삐를 당겼다.


갑자기 터져 나온 브레스에는 하늘의 모두가 놀랐다. 마물을 혼자 때려잡고 있던 카르멘도 놀라서 라이미르아 쪽을 쳐다보았다.


“오오……!”


배틀 쉽으로 무장한 라이미르아가 보였다. 그 모습은 마법의 갑옷을 입은 드래곤처럼 보였는데, 카르멘은 그 모습에 어떠한 로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건 그야말로 ‘변신’ 그 자체가 아닌가. 카르멘은 두 주먹을 떨며 전율하더니, 양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변신.”


화아악! 엑시드가 가변했다. 용사자로 변신한 카르멘은, 드래곤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변한 양 주먹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드래곤 클로.”


속삭임은 작았지만, 위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꽈지지직! 몸뚱이에 처박은 발톱에서 백염식의 불꽃이 쏟아졌다. 투둑, 투두둑! 불꽃에 침식당한 마물의 몸이 울룩불룩 부풀었다. 카르멘은 늦지 않게 발톱을 뽑아내고서 마물의 등에서 뛰어올랐다.


ㅡ콰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을 등지고 도약한 카르멘은 공중에서 몇 바퀴 회전한 뒤에 와이번의 등 위에 내려섰다. 그녀의 애마, 아니, 애룡(愛龍) 크림슨 왈츠는 무리없이 카르멘의 몸을 받아내고서 날개를 활짝 펴며 포효했다.


“……?”


폭발 뒤의 도약, 화려한 착지. 내심 만족하고 있던 카르멘은,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에 고개를 돌렸다.


라이미르아가 결계를 향해 브레스를 쐈다.


하지만 그 뒤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 그럴 수가……! 본녀의 브레스가!]


“이럴 줄 알았다.”


라이미르아는 당황했지만, 유진은 눈썹만 찡그리고서 투덜거리고 말았다.


브레스는 틀림없이 날아가서, 결계에 충돌했다. 하지만 결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결계 표면에 브레스가 닿았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계를 살짝 출렁거리게 만든 것이 고작. 저것을 구성하는 멸망의 마력은, 닿는 순간에 브레스를 소멸시켜 버렸다.


“결계의 술식 수준을 하찮게 여길 만큼 마력을 둘러놨어.”


도시 상공을 빈틈없이, 저렇게나 두껍게 감쌀 정도의 마력.


-지금부터 너는 마왕이다.


그렇게 내뱉었던 것은 유진이지만, 새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면, 저건 이미 마왕이다.


“브레스로는 못 뚫어.”


드래곤의 브레스는 순수한 마나의 덩어리다. 마법도 마찬가지다. 저런 종류의 결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마력의 상극인 신성력이다.


혹은, 더 강한 힘.


‘신검은 아낀다.’


지금 유진이 전력의 신검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3번. 고작 결계 하나 부수는 것에 사용하기는 아깝다.


“가까이 간다.”


[하, 하지만, 은자여. 결계는 부수지 못했느니라.]


“그러니까 부수러 가야지.”


[히익…….]


방금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더니. 브레스가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소멸한 것에 내심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라이미르아는 곧 정신을 다잡고서 앞으로 가속했다. 혼자라면 무조건 도망쳤겠지만, 지금 그녀의 등 위에는 유진과 성녀들이 있다.


[은자여……. 보, 본녀는 느낄 수 있느니라. 저것은 단순한 방어결계가 아니다……. 결계 자체에 불길함이 느껴지느니라.]


“그렇겠지. 아마 가까이 다가가면 저 두꺼운 마력이 펑펑 포격을 쏴댈걸.”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지만, 듣는 라이미르아의 눈동자는 파들파들 떨릴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그 떨림을 느끼고서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우으…….]


저렇게까지 말하니 라이미르아도 더욱 용기를 냈다. 단순히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도 아니었다. 마이스의 배틀 쉽과, 성녀들을 필두로 한 은광의 신성마법.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라이미르아를 감싸고 있다.


ㅡ꽈아앙!


지네산맥과 가까워졌을 때. 아래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아래를 보니, 은하를 등진 세냐가 보였다. 그녀는 마치 우주에서 별이라도 끌어온 것처럼 거대한 구체를 연달아 쏴 갈기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발자크와 라이나인이 호위하듯 서 있다. 발자크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언데드들이 휩쓸렸다.


라이나인은 수인을 맺고서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녀를 중심으로 사막이 출렁거리며 부글부글 끓었다. 아마 저것이 그녀의 시그니처인 모양이다.


“역시 단단하구만.”


세냐가 작정하고 마법을 쏴 갈기는 데도 지네산맥은 무너지지 않는다. 놈의 갑각 자체가 단단한 탓도 있겠지만, 결계의 마력이 놈에게도 영향을 준 것이리라.


ㅡ꽈아앙! 세냐가 다시 한번 별을 쏘아냈다. 그래도 라이미르아의 브레스보다는 확실히 충격을 전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닿자마자 소멸한 브레스와는 달리, 세냐의 마법은 지네산맥과 결계에 부딪쳐 폭발하고 진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무너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네산맥과 결계. 둘 중 하나만 부수면 돌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둘 다 부숴야만 할 것 같았다.


“흠.”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 뒤쪽에서 웬 마족이 따라붙고 있다. 거구에 파충류처럼 몸에 비늘이 돋고, 구부러진 뿔을 달고 있는…… 어디서 봤더라?


‘아.’


서열 26위의 마족이다. 놈은 비슷하게 생긴 권속 수십 명을 이끌면서 라이미르아의 뒤를 맹추격하고 있었다.


의도야 뻔했다. 유진이 결계를 공격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


‘어쩌면 드래곤하트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지.’


마왕성 바벨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고, 살아남은 마족들은 유폐의 마력을 하사받았다.


그 이야기는 유진도 들어 알고 있다. 서열 26위라면 자신을 갖고 나설 법도 한가. 유진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유진 님?”


“금방이야.”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날아갔다. 크리스티나가 뭐라 붙잡을 틈도 없이, 유진은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마족들의 앞으로 도약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유진을 마주하고 놀란 것은 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뭐라 외치지는 않았다. 선두의 마족은 즉시 태세를 갖췄고, 뒤따르는 권속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흐트러짐 없이 한 점에 모인 살의가 유진을 노렸다.


저 마족은 300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이름까지는 모르지만, 그때도 실력은 인정할 만한 무투파 마족이었다. 하긴, 실력이 없었다면 300년이나 흐른 지금 시대까지 살아남지 못했겠지.


지금, 대치한 순간에 보인 움직임도 꽤 훌륭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애당초 서로를 죽이는 것만이 목적인데 뭐 하러 대화를 나누나.


그러니 유진도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라이미르아는 지네산맥과 가까워지고 있다. 이 귀찮은 추격자들을 처리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들여서는 안 된다.


망토 안에 넣은 손이 월광검을 쥐었다.


뽑았다. 즉시 휘둘렀다. 휘두르는 순간에 칼날은 창백한 월광을 내뿜었다. 시커먼 불꽃이 월광과 뒤섞였다.


신검합일은 완성했다. 월광검의 달빛에는 유진의 불꽃과, 레헤인야르를 뒤덮었던 누르의 독기가 녹아 있다.


달빛이 하늘을 베었다. 새카만 불꽃이 넘실거린다 싶더니, 회색의 월광이 불꽃마저 삼키면서 하늘을 잡아먹었다.


‘이건 뭐지?’


덮쳐오는 월광에 마족들이 기겁했다. 선두의 마족이 고함을 지르며 유폐의 마력을 쏟아냈다.


소용없었다. 유폐의 마왕 본인이라면 모를까, 빌려온 마력 따위로는 결코 월광을 저지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거나, 전투 비슷한 걸 하고 싶다면 절대로 정면에서 덤벼서는 안 된다. 최대한 피하면서 영리하게.


이미 늦었다. 유진은 그럴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마주하고, 다가오고, 검을 휘둘렀을 때. 이미 결과는 정해진 것이다. 전쟁신의 직관이 결결과를 결정해 버렸다.


서열 26위? 유폐의 마력? 고작 그런 것으로는 절대로 결과를 바꿀 수 없다.


유진은 결과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파지직! 라이미르아의 위에 남겨놓았던 깃털로 도약해서 다시 돌아왔다.


“…….”


유진을 대신해, 마이스가 입을 떡 벌리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을 잡아먹으며 퍼져 나가던 월광이 푹 꺼졌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흉흉한 살기를 내뿜던 마족 수십 명이, 저 참격 한 번에 전멸한 것이다.


“저…… 저게 무슨…….”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싶지만…… 저 검은 도저히 용사답다고 할 수 없었다. 바다에서 보았던 광란의 마왕보다. 그리고 저 사막 아래에 있는 마물과, 마족과, 언데드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검을 쥐고서, 피범벅이 되어가며 마왕을 쓰러트리던 용사는. 짓궂은 표정과 가벼운 말을 흘리면서, 누구보다 먼저 전장에 도달해 거인을 쓰러트리고, 뒤따르는 마족을 일격에 베고 온 용사는ㅡ


‘……스칼리아 공주님이 이해되는군.’


마이스는 헛웃음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시무인에서는 스칼리아 공주를 주축으로 하여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숭배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매달 왕족에게 강제된 예배식은 스칼리아 공주가 도맡고 있으며, 그때마다 셰도르의 성상 앞에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그 모습은 이미 ‘용사교’라는 이름의 종교로 치부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조금 더 위로.”


월광검은 다시 망토에 넣지 않았다. 대신에 편하게 아래로 내려놓았다. 오른손에는 성검을 쥐어, 앞으로 들었다.


어느새 라이미르아는 지네산맥의 위를 넘었다. 하지만 아래를 보아도 하우리아는 보이지 않는다. 시커먼 장막이 너무나 두껍기 때문이다.


“더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멈춘다.”


유진이 말한 즉시 라이미르아의 몸이 멈췄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날개만 활짝 펴서 고도를 유지했다.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등에서 내려와 프로미넌스를 펼쳤다.


아카샤를 쥐었다. 결계의 술식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더해지고 있어.’


세냐가 공격을 퍼부을 때마다 결계가 요동친다. 충격은 계속해서 쌓여, 마법을 이루는 술식을 무너트리고 있다.


결계를 부서지게 둘 수는 없으니, 술식이 무너질 때마다 안쪽의 술자는 계속해서 술식을 더해 넣는다.


“개 같은 년.”


유진의 입술이 뒤틀렸다. 그의 눈으로도 장막을 꿰뚫어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멜리아 머윈. 과거 유진이 약했을 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던 여자. 동료들이 만든 무덤을 도굴해, 내 시체로 데스나이트를 만든 여자. 그 후에 다시 만났을 때도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고 으스대던 여자.


그런 주제에 사실은 내가 무서워서, 세냐가 무서워서, 겁에 질려 쥐구멍에 숨은 여자.


저 아래에 그년이 있다.


필사적으로 결계를 만들고, 누가 부수고 들어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결계를 붙잡고 있겠지. 블러드메리를 양손에 쥐고서, 수십 명의 리치들을 뒤에 무릎 꿇려놓고, 가능한 모든 지원을 동원하여 결계를 보수하는 중이겠지.


“네 낯짝을 보고 싶어.”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검을 앞으로 뻗었다. 그에 호응하여 크리스티나도 양손을 뻗었다. ㅡ화아아악! 손바닥에 새겨진 성흔이 빛을 발했고, 은광의 성직자들이 양손을 모았다.


그들의 몸에는 성유물이 심어져 있다. 신성제국 유라스가 수백 년 동안 인공적으로 만든 성유물. 그것은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을 앗아가는 대신, 강력한 신성력을 갖게 만든다. 은광의 전투신관 한 명이 백 명의 성직자와 대등할 정도다.


거기에 ‘진짜’ 성흔을 가진 성녀. 지금 라이미르아의 등에는 수천 명의 성직자가 기도를 올리는 것과 다름없다. 기도가 공명하고, 신성력이 하나로 모였다. 그렇게 거대한 빛이 일어났다.


“맙소사…….”


마법사인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건가? 마이스는 떨림을 가다듬으며 꿀꺽 침을 삼켰다.


흔한 이야기다. 마법사는 신을 믿지 않는다. 마법사와 성직자는 사상적으로 양립하기가 힘들다. 세상에 확실히 존재하는 마나에 정교한 술식을 더해 일으키는 것이 마법이다. 반면에 성직자들이 쓰는 신성마법이란, 이 얼마나 어설프고 모호한가?


신성력은 신앙에 따른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이, 믿음에 부응하여 힘을 내려준단다.


신성마법? 술식은 존재하지만, 서클처럼 명확하게 구분된 것도 아니다. 그냥, 믿음이 부족하면 쓸 수 없단다. 똑같은 신성마법이라도 믿음에 따라 위력이 바뀐다.


심지어 술식조차 없는 ‘기적’이라는 것도 있다. 정말로 대단한 성직자. 그래, 마법사로 말한다면 ‘대마법사’라고 할 수 있을 ‘진짜’ 성직자들은 그런 기적을 사용하곤 한다.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마이스는,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렇게 생각하는 마법사는 마이스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마법사. 아니, 모든 대마법사가 그럴 것이다.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신’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착실하게 마법으로 ‘신’이 되고자 하는 현명한 세냐뿐이다.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이게…… 기적……?’


주변 가득한 빛. 마이스는 결국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읊조리는 기도. 하나 된 기도가 노래처럼 들렸다. 먼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주변 가득 차오르는 빛에서 혼을 적시는 것만 같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저 아래에는 시커먼 장막이 있다. 하늘은 마력의 영향을 받아 어둡다. 이곳은 전장의 한가운데이자 마왕이 점령한 도시의 상공이다. 불길하고 끔찍한, 그런 장소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마이스는 이곳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며 가장 밝고 따스한 장소라고 느꼈다.


날개를 펼친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빛을 인도하고 있다.


인도된 빛은,


용사의 검에 이어졌다.


“입교(入敎)하시겠습니까?”


나긋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마이스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성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는 마치 천사처럼 8장의 날개를 펼치고, 성흔이 새겨진 손으로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그녀는ㅡ 마이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를 모두 다 이해하고 있다는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빛께서는 언제나 믿음이 깃든 어린양을 환영하십니다.”


어린양이라. 설마 이 나이에 저렇게 불릴 줄이야. 마이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저는, 빛에는…… 입교할 마음이 없습니다.”


“빛에는, 이라 함은.”


크리스티나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얇게 휘어진 눈.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마이스는 속내가 꿰뚫어 보인 것에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용사님께 입교하렵니다.”


신의 존재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주변에 그득한 빛과, 모든 것에 이어진 용사의 모습은ㅡ 평생을 마법에 바친 이 대마법사에게, 마법과는 다른 감동을 전해주었다.


“환영합니다.”


크리스티나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와 이어진 빛이 성검에 이끌렸다.


빛의 검이 어둠을 갈랐다.


빌어먹을 환생 473화


“카학!”


아멜리아의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신경이 잘근잘근 씹히는 것만 같은 고통.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만 같다. 코어가 박살 나는 것만 같다. 허리와 함께 젖혀진 머리, 절로 벌어진 입에 시커먼 피거품이 물렸다.


타격을 입은 것은 아멜리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서 진을 치고 앉아있던 수십 명의 리치들. 리치가 될 수 없는, 수준 미달의 흑마법사들의 영혼을 통째로 빨아먹으며 격을 높인 리치들 전원이 몸을 뒤틀며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리치들은 더 이상 피를 토할 수 없는 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과 부상이 없지는 않았다. 방금의 충격은 리치의 생명 그 자체인 라이프 베슬에도 전달될 정도였다.


그만큼 결계를 내리찍은 공격은 강력했다. 현명한 세냐가 쏴대는 마법만으로도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방금 공격은ㅡ 영혼이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마법에 의한 공격이었다면 이만큼이나 치명적이지는 않았겠지만, 신성력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말도 안 돼.’


아멜리아는 피를 토하면서 머릿속으로 부정했다. 유폐의 마왕과의 계약으로 뽑아내는 마력과 블러드 메리. 그리고 멸망의 마력까지 사용해 만든 결계다. 저 현명한 세냐조차도 ‘마법’으로는 결계를 부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성력? 그래, 저 빛이 마력에게 상극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빛의 신 본인이 강림한 것도 아니잖은가.


아무리 상대가 용사와 성녀라고 해도, 이만큼의 공들인 마력 결계를…… 고작 일검에 파괴 직전까지 몰아붙인다고?


‘파괴되지는 않았어.’


아멜리아는 피를 삼키면서 다시 블러드 메리를 꽉 쥐었다. 양손으로 쥔 블러드 메리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사악한 마력이 꿈틀거리며 마법진을 에워쌌다. 리치들도 다시 수인을 맺고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유진이 휘두른 빛의 검은 결계를 갈랐다. 참격만큼의 틈새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를 통해서 결계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다.


빛이 일렁거리는 눈동자가 참격의 틈새를 노려보았다. 마력이 서로 달라붙으며 결계가 다시 수복되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다시 한번 성검을 치켜들었다.


화아아악! 라이미르아의 등 위에 나타난 빛의 원진이 더욱 커졌다. 마력의 영향을 받아 거무칙칙한 하늘이 빛의 원진에 의해 밝혀졌다.


아멜리아와 리치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결계 표면이 부글부글 끓는가 싶더니, 마력의 송곳이 라이미르아를 향해 쏘아졌다.


[히이익!]


“안 피해도 돼.”


당연히 라이미르아는 피하려고 했지만, 유진의 목소리가 라이미르아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라이미르아는 두려움을 꾹 참고서 제 자리를 지켰다.


직접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는다’라는 생각은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곳의 빛은 유진의 의지를 따르고 있다. 유진이 저렇게 생각한 즉시 빛이 움직여서 송곳을 가로막았다.


결계에서 쏘아지는 저항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거푸 송곳이 쏘아지고 칼날이 채찍처럼 몰아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라이미르아에게 도달하지는 못했다.


ㅡ꽈지지지직!


다시 한번 빛의 검이 결계를 내리찍었다. 아까의 충격을 염두에 두고서 결계의 강인도를 높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이번에도 빛의 검은 결계의 마력을 갈라버렸다.


쿠르르르릉! 유진이 한 번 더 성검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결계의 안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꺄아악!]


라이미르아가 놀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이해가 갔다. 흉측하고 징그러운 지네의 대가리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연이어 내리찍은 공격에 결국 지네산맥의 본체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씨구.”


과거 진짜 ‘산맥’으로 여겨졌고, 저 거대한 도시를 모조리 둘러싸고 있는 마물. 지네산맥은 몸뚱이만큼이나 머리도 거대해서, 드래곤인 라이미르아를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냐.”


유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저 거대한 마물에 아무런 두려움이나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에 고마움을 느꼈다. 때려 부수기 귀찮은, 단단한 결계에서 직접 나와주다니.


나직한 목소리로 세냐의 이름을 부르며,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월광검을 앞으로 들었다.


세냐는 여전히 저 아래에서 결계에 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목소리는 절대로 들리지 않을 거리지만, 메르를 통해 전달된 뜻에 세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세냐가 등진 은하가 바뀌었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회전하며 수백 개의 서클을 만들었다. 세냐의 눈동자가 알록달록한 보석처럼 반짝였고, 프로스트가 세냐의 손을 떠나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


마이스가 빛의 한가운데에 선 유진에게 신을 느꼈듯, 세냐와 함께 있던 발자크와 라이나인도 신을 느꼈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가 세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윽고 절대적인 의지가 마법을 바랐다. 절대률. 세냐의 의지가 마법의 결과를 결정지었다.


동시에 유진도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 공격에서 라이미르아와 등에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휘말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으, 은자여, 본녀는 어찌해야…….]


“눈 감고 열까지만 세라.”


아이의 정서상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것이다. 물론, 라이미르아가 정말로 아이가 아니란 것은 유진도 알고 있지만…… 나이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잖은가?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아이고 어른이고 보고서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하나…….]


눈을 감고, 숫자를 세는 것은 망토 안의 메르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그 목소리에 피식 웃으며 성검을 뒤로 던졌다. 날아간 성검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빛 속에서 둥실 떠다녔다.


양손으로 월광검을 쥐었다. 백염식이 검은 불꽃을 일으켰다.


둘. 공검이 중첩되었다. 월광검의 칼날에 불꽃이라고는 할 수 없을 시커먼 덩어리가 매달렸다. 셋, 넷. 이글거리는 덩어리가 칼끝으로 이동했다.


다섯.


월광검을 휘둘렀다. 시커먼 덩어리가 칼끝을 떠났다. 활짝 열린 지네의 입안을 향해 덩어리가 떨어졌다.


마물에게 고등한 지성은 없다. 그렇지만 본능은 있다. 저 시커먼 덩어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절대로 삼켜서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몸을 뒤틀려는 순간,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마치 세상이 몸뚱이를 꽉 붙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지네산맥을 붙잡은 힘은 강력했다.


여섯. 기어코 검은 덩어리가 지네산맥의 입안으로 떨어졌다.


일곱. 꽈지지직! 거기서부터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중첩해 날린 공검은 유진이 바랐던 대로 지네산맥의 머리를 터트리고, 길고 긴 몸뚱이를 타고 내려갔다.


세냐도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저 공격으로 지네산맥은 죽었다. 몸뚱이를 통로 삼아 타고 내려오는 월광과 불꽃은 결계의 안쪽까지 떨어졌다. 그 순간 결계는 어쩔 수 없이 약해진다. 세냐가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키이이잉! 그녀의 손 앞에서 마나가 회오리쳤다. 다시 한번 절대률이 발동되었다. 세냐는 단순하며 확실한 파괴를 바랐고, 마법은 세냐의 바람을 결과로 이끌었다.


꽈아아앙! 세냐의 손에서 거대한 파도가 태어났다. 오직 파괴만을 목적으로 탄생시킨 마법은 지면을 휩쓸고 공간을 뭉개며 앞으로 전진했다.


세냐의 뒤에서 보던 라이나인과 발자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그들의 눈에는 세냐의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뒤틀렸다. 세상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이 아홉. 머리를 잃고, 길고 긴 몸뚱이가 박살 나고, 단단한 갑각과 살점, 체액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소멸하고, 유진은 다시 뒤로 도약해 라이미르아에게로 돌아왔다.


열.


라이미르아와 메르가 눈을 떴을 때. 유진은 다시 성검을 쥐었다. 둘이 놀라서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성검을 휘둘렀다. 성녀를 필두로 한 신관들의 찬가 속에서 빛은 검이 되었다.


그 일검은 이전처럼 결계를 한 번 가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결계는 더 이상 수복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났다. 하우리아 전체를 뒤덮고 있던 결계가 빛에 침범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


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지네산맥의 몸뚱이. 집어삼킨 공검의 파괴와 더불어, 세냐의 마법이 단단한 외벽에 닿았다.


그 즉시 마법이 지네산맥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세냐는 짧게 숨을 고르고서 양팔을 활짝 벌렸다.


콰지지직!


300년 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살아왔던 마물. 지네산맥은 단어 그대로 터져서 죽었다. 전신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기고, 펑 하고 터져서 죽어버렸다.


“꺄아아악!”


그 광경에 멜키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직 이르다 싶어서 인피니트 포스를 쓰지 않았는데, 저 광경을 보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멜키스는 기다란 비명과 함께 양손을 치켜들었다. 그녀를 따르던 백색마탑의 정령술사들은 탑주의 괴성에 즉시 호응해 주었다.


번쩍! 눈 부신 빛과 함께 인피니트 포스가 발동되었다. 불꽃과 땅, 번개. 아니,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백색마탑 정령술사들이 다루는 여러 정령들이 멜키스의 시그니처와 융합했다.


“합체!”


백색마탑 최고전력의 대마법. 유니온 포스.


이 힘은 멜키스조차도 다루기 버겁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다. 하지만, 멜키스는 강력한 정신력과 결의로 유니온 포스의 힘을 지배했다.


빠직, 빠지직! 정령 거인의 몸이 더욱 거대하게 부풀 때마다, 멜키스의 안에서는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건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다. 넓어지는 소리다.


[아, 안 돼.]


흑암의 망토 안에서 위니드가 진동했다. 템페스트는 거대한 절망감에 비명을 질렀다.


바로 지금. 템페스트가 직감한 것은 멜키스에게도 이어졌다. 아득하리만큼 확장된 정신. 끝이라 여겼던 극한을 넘어선 멜키스는 황홀한 전능감을 느끼며 부르짖었다.


“오라, 폭풍이여! 바람의 정령왕이여!”


[크아아악!]


템페스트는 필사적으로 절규했지만, 소환의 부름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우뚝 선 정령거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중심. 멜키스는 양팔을 활짝 벌리고서, 곧 찾아올 폭풍을 마중했다.


콰르르르르! 폭풍이 왔다. 거대한 폭풍이 정령거인을 덮쳤다. 폭풍의 중심. 멜키스는 펼쳤던 양팔을 모아, 모든 바람을 끌어안았다.


ㅡ번쩍! 눈 부신 빛과 함께 폭풍이 하나로 모였다. 바로 이 순간. 모든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정령술사가 탄생했다. 번개와 땅, 불꽃, 그리고 바람마저 정복한, 대정령술사.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아득한 황홀감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지금 그녀야말로 정령술사가 도달할 수 있는 완벽이자 끝.


“오메가 포스……!”


새로운 시그니처가 탄생했다. 멜키스는 주저하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그녀의 주먹은 폭풍을 일으키고 번개를 쏘았다. 한 걸음 뻗은 발은 지진을 일으키고 화염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언데드의 대군? 마족?


“하찮아!”


실제로 그러했다. 헬무드의 마족 서열 50위 안에 이름을 올린 고위마족들. 그들을 따르는 권속들마저도 지금의 멜키스에게는 개미와 다를 것이 없었다.


개미는 결국 아무리 많이 모인들 개미일 뿐. 멜키스는 개미를 짓밟으며 요란한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미친……!”


다른 마탑주들도 멜키스의 위용에 경악했다. 위그드라실을 펼쳐 거대한 나무가 되었던 제네릭은, 멜키스가 일으키는 지진을 피해 나무뿌리를 들췄다. 판테온에서 쏟아낸 마물들을 지배하던 로베리안도 기겁하며 마물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허어…….”


청색마탑주. 히리두스 우즐렌의 시그니처는 ‘커넥트’. 이 마법은 히리두스와 연결된 청색마탑의 마법사들을 강화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임시로나마 청색마탑 마법사들의 경지를 상승시키는 것이다. 히리두스가 커넥트를 사용하면, 휘하 마법사들은 평소에는 쓸 수 없던 고위 서클의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


본인을 강화하는 것이 아닌 마탑 마법사들을 강화하는 마법. 이 또한 터무니없이 강력한 마법이지만ㅡ 지금의 멜키스를 보면,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하늘은 왜 백탑주 같은 광인에게 저렇게나 거대한 힘을 허락한 것인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지만, 저 강력한 정령술사가 아군이라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멜키스가 적이 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원래부터 유리했던 전장이다. 하지만 세냐와 유진이 결계를 파괴하고, 지네산맥을 터트려 죽였다. 그리고 멜키스가 오메가포스를 완성했다.


그것으로 전황은 변수란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절대률이 작용된 것처럼, 이곳에서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가라!”


이바타가 울부짖었다.


마력에 의해 죽어버린 시커먼 대지. 세계수와, 숲과 아득하게 떨어진 곳.


하지만 지금, 이바타와 조란의 전사들은 이 황량한 사막에서 숲을 느꼈다. 멜키스와 정령술사들이 불러 온 정령들. 검게 죽은 사막에 정령이란 생명이 깃들었다.


그것으로 조란의 전사들은 강해졌다. 그들이 가진 여러 가호가 몸을 가볍게 하고 힘을 증폭시켰다. 이바타는 선두에서 두 자리의 도끼를 휘둘렀고, 전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가라!”


알체스터가 고함을 질렀다.


키옐의 깃발. 백룡기사단의 깃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알체스터가 보는 것은 오직 앞뿐.


터져 죽은 지네산맥이 감추고 있던 하우리아의 성벽. 알체스터의 말이 앞으로 달렸다. 백룡기사단이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알체스터의 뒤를 따랐다.


알체스터가 검을 높이 들었다.


레드드래곤, 아리아르텔에게 선물받은 검. 검에서 드래곤의 마나가 일어났다.


알체스터가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정말로 끝이란 것이 없는 것만 같은 거대한 마나. 드라고닉의 비기, 공검. 드래곤의 마나가 검강이 되고, 중첩되었다.


화아아악!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검에 거대한 검강이 생겨났다. 알체스터는 수십 미터의 검강을 휘두르며 성벽으로 전진했다.


“가라!”


시무인 격랑기사단. 엑시드로 무장한 기병의 선두, 오르투스도 고함을 질렀다.


이곳은 바다가 아니다. 파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르투스는, 이 황량한 사막에서 거대한 파도를 느꼈다. 이곳의 모두가 다음의 시대로 나아가는 파도인 것이다.


‘나도, 이곳에 있다.’


예전이라면 이런 것에 목매달지 않을 것이다. 본래 오르투스 하이만이라는 남자는, 가진 힘과 지위에 걸맞지 않는 소시민적인 사내였다.


지금은 아니다. 마왕과의 전투. 그 한가운데에서, 오르투스는 용사를 보았다. 영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찬란한 청년에게 매료되었다. 그가 일으키는 파도의 일부가 되고 싶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오르투스는 이곳에 있다.


“가라!”


설원늑대들이 달렸다. 야수왕 아만은 대검을 휘두르며 길을 열었다. 하얀 송곳니. 이 땅은 그들이 살던 설원과는 정반대의 환경이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용감한 모론의 후예. 위대한 전사의 핏줄. 피가 뜨겁게 끓고 있다. 아만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용감한 모론은 이곳에 오지 못했다. 그 용맹한 선왕께서, 얼마나 이 전쟁에 함께 하고 싶어 하셨던가.


그렇기에 더더욱. 이곳에 오지 못하신 선왕을 대신하여, 루하르 왕국의 모두가 증명해야 한다. 루하르가 어떤 나라인지. 그분이 직접 세우고, 300년을 이어온 북쪽 나라의 전사들이 얼마나 용감한지.


“가라!”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화살을 쏘고, 즉시 창을 찔렀다.


수십 개의 용병단. 이름을 전부 외울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인 자유기사들. 그 모두를 이끄는 아이빅은ㅡ 자신이 일류 용병이라 자부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빅 뿐만이 아니다. 그가 이끄는 용병들, 그리고 자유기사들. 모두가 높은 자존심을 가진 일류다.


일류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는다. 신뢰, 계약, 명예. 그들은 돈에 고용되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명예를 위해 이곳에 왔다.


명예를 위해 죽어도 좋은가? ㅡ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그들은 죽어 누울 묫자리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오직 승리. 살아서, 승리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 이곳에 왔다.


“가라!”


아폴로가 가속했다. 라파엘로의 신성력이 빛을 뿜었다. 공중의 마물들은 모두 정리되었다. 페가수스들이 라파엘로를 따라 앞으로 날았다.


시커먼 결계는 부서졌다. 마왕에게 점령당한 도시. 그 하늘에는 오직 빛이 존재하고 계시다.


그래, 빛. 신은 정말로 실재하시며, 용사와 성녀를 통해 세상을 비추신다. 저 모습을 보라.


라파엘로와 성기사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 찬란한 빛. 성검 알테어가 빛나고 있다.


“가라!”


앞으로 날아가는 것은 페가수스뿐만이 아니다. 흑사자 기사단의 와이번들. 카르멘이 큰소리로 외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 하늘에는 그녀가 때려죽일 마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카르멘은 주먹을 쥐어 하늘을 때렸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깨부숴야 한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 거울에 담긴 나. 정반대의 또 다른 현실. 거울 앞에서 주먹을 뻗으면, 거울에 주먹이 닿는다. 나와 나의 주먹이 만난다. 그렇게 깨부순다.


한때 카르멘은 그렇게 태어나기를 갈망했다. 그렇게, 새로이 태어났다. 거울을 깨부숨으로써 카르멘은 또 다른 세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하찮다. 나는 그렇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다. 나는, 새로이 태어난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은 알이 아니다. 눈앞에 거울은 없다.


허나, 이곳은 세계다. 낡고 초라한 세계. 하지만ㅡ 오늘이 지나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카르멘은 그렇게 확신했다.


“가라!”


시엘은 카르멘의 뒤를 따르며 외쳤다.


너무, 너무…… 눈이 부셔서. 저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자각했다. 그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그가 얼마나 빛이 나는지. 하지만,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비참한 생각 따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시엘이 해야 할 것은, 눈이 부셔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저 앞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다.


“가라!”


시안도 말을 이끌며 외쳤다. 바로 앞에서 달리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그 너머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성벽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높은 하늘. 태양이 가까이 내려온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눈 부신 빛.


나의 형제.


“가라!”


길레이드는 피범벅이 되었다.


상처는 없다. 이 피는 모두 적의 피다. 길레이드가 여태까지 살아오며 보았던 모든 피를 더해도, 오늘 전장에서 본 피보다 적을 것이다.


수백 수천 번 휘둘렀던 검은, 잠시 내려놓았다.


대신 길레이드는 깃발을 들었다. 라이언하트의 깃발. 출정 때, 유진이 기수로서 개시했던 깃발이다. 달리면서 부딪치는 바람에 깃발이 펄럭거렸다. 갈기가 휘날리고, 사자들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길레이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모두가 외치는 말.


그 외침은, 오직 한 명에게 향하는 것이다.


“그래.”


시커먼 불꽃의 날개가 펼쳐졌다.


하늘에서, 땅에서 전해지는 외침을 모두 들었다.


“가자.”


용사가 대답했다.


빌어먹을 환생 474화


화아아악!


성녀를 위시한 신관들이 일으킨 빛과 연결되었다. 도시로 떨어지던 유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저 높은 곳에 있는 라이미르아와 연결된 ‘실’. 그래, 빛은 마치 얇은 실처럼 유진과 이어져 있었다.


그 모습은, 굳이 비유하자면 하늘에서 내려온 실과 연결된 인형처럼 보였다. ……인형?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인형이 아니다. 확신하고 있다. 이 실은, 빛의 신이 유진을 꼭두각시처럼 다루기 위해 연결된 것이 아니다. 무조건 적이고 무한한 애호(愛護). 놓치지 않도록, 다치지 않도록, 죽지 않도록. 그렇게 보살피기 위한 실.


“부담스럽게.”


신이 신도를 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물며 유진은 평범한 신도가 아닌,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 무심하다 느꼈던 빛의 신이지만, 유진에게는 무한한 애호를 주는 것이 당연한 일.


여태까지 유진은 몇 번이나 빛의 신이 전하는 기적을 느꼈다. 하지만 빛의 신에게서 직접적인 계시를 들은 적은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진은 아무런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빛이 침묵하는 것.


유진은 그것을 묵인으로 이해했다.


유진이 무엇을 하건, 빛은 거절하지 않는다. 설령 유진이 신성제국에 쳐들어가서 교황을 살해하고, 수천수만의 신도를 상대로 학살을 벌일지라도. 빛의 신은 유진이 바라는 만큼 힘을 빌려줄 것이다.


[유진 님.]


머릿속에서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히 내려오지 말고, 그냥 거기에 있어.”


[하지만.]


“너희도 느끼고 있잖아. 굳이 내려와서, 내 뒤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하나의 빛으로 연결되어 있어. 안 그래?”


그 말에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만, 유진의 말대로였다.


지금 크리스티나와 은광의 성직자들의 신성력은 하나의 빛이 되어 유진과 연결되어 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의지는 빛에 실려 유진에게 전해지고 있으며, 두 성녀가 성직자들의 신성력과 함께 펼치는 모든 신성마법과 기적도 유진을 비출 것이다.


“그래도 이건 엄청 거슬리네.”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로 이어진 빛의 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실인 것도 아니어서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다.


하지만 거슬린다. 가령 유진이 프로미넌스로 공간도약을 할 때. 혹은 초고속으로 움직일 때. 빛의 실이 유진을 졸졸 따라다닌다면, 상대는 골머리 썩일 것도 없이 실이 향하는 대로 유진을 쫓을 수 있지 않은가.


“사라져라, 사라져라…….”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실을 휘휘 저었다.


하늘 위에 있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똑같이 바랐다. 그러자 빛의 실이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빛과 연결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단순히 연결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이 새끼 진짜 듣고 있는 것 아냐?”


[하멜, 아무리 그래도 신인데, 불경한 말은 하지 마십시오.]


말만 그렇게 할 뿐. 성녀이면서 누구보다 신에 대해 불경한 뜻을 가진 주제에.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아니스에게 직접 말하지는 못했다. 나중에 아니스에게 얻어맞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중이라.”


한 대 얻어맞고, 얼빠진 웃음을 흘리며 무마할 수 있는 상황이 나중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지. 유진은 씁쓸히 웃으며 아래를 보았다.


수도 하우리아. 나하마 왕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도시.


지금의 하우리아는 마왕에게 점령당하고, 망령들이 배회하는 폐허다. 유진은 하룻밤 사이에 멸망한 도시를 노려보았다.


사막에 배치한 언데드 군대도 많았지만, 도시를 배회 중인 언데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정도다.


언데드는 아무리 많아봤자 언데드다. 적을 죽여 증식시킨다는 것이 언데드가 가진 제일 큰 장점. 데스나이트나 리치, 카마쉬 같은 특수한 언데드는 위협적이지만, 지금 하우리아를 배회 중인 언데드들은 위협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해방군에 일반 병사는 없다. 모두가 실력이 보증된, 저런 언데드 따위에게 호락호락 당할 리 없는 기사들이다.


하지만 전장에 ‘절대’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지금 하우리아는 마왕이 지배하는 도시. 보기에는 평범하고 약해빠진 언데드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썩을 새끼.’


생각대로였다.


흐느적대며 걷는 구울과 스켈레톤 군단. 언데드 중에서도 최하급으로 취급되는 놈들. 그렇지만 그릇으로는 쓸 수 있다. 구울과 스켈레톤의 나약한 내구도로는 많은 마력을 담을 수 없지만, 저것들은 타고난 근본에 비해 훨씬 강화되었다.


득실거리는 숫자. 도시 전체가 마력의 영향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해방군이 입을 피해도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언데드뿐만이 아니야.’


도시에 더 이상 대형 마물은 남아 있지 않다. 헬무드에서 넘어온 고위마족과 그 권속들도 사막에서 죽었다.


멸망의 권속들은 남아 있다. 알피에로와 많은 마족들. 놈들이야말로 이 도시를 점령한 ‘마왕’의 정예인 것이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저 멀리, 왕궁이 보였다. 마왕은 그, 가짜 녀석은 저곳에서 유진을 기다리고 있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꽈아앙! 하우리아의 외곽 성벽이 무너지는 모습이 보였다. 크게 치솟는 먼지구름 너머, 보석처럼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먼저 가.”


세냐의 목소리가 공간을 넘어 유진에게 도달했다.


성벽을 무너트린 것은 세냐뿐만이 아니다. 결국 템페스트와의 계약을 성공시킨 멜키스가 성벽을 걷어차며 도시에 발을 디뎠다. 그녀가 연 길을 통해 마탑과 아롯의 마법병단이 들이닥쳤다.


또, 제법 떨어진 곳에는 조란의 전사들과 각국의 기사단이 길을 열었다. 하늘에서는 카르멘과 라파엘로가 이끄는 비행대가 내려오고 있다.


하우리아는 대도시다. 이 대도시를 떠도는 언데드의 대군과 멸망의 권속들을 유진 혼자서 상대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다.


-가라!


하나 된 외침들을 따돌렸다. 그 목소리에 실린 감정들. 저들이 유진에게 바란 것. 그리고 유진이 결의한 것. 유진이,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대신 앞을 보았다.


“세냐. 너까지 서둘러서 올 필요는 없어. 그 새끼가 기다리는 것은 나야.”


거리는 멀다. 하지만 세냐는 너무나 선명하게 유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유진의 말에 담긴 노골적인 의도에 피식 웃어버렸다.


“뻔한 수작은 부리지 마, 듣는 내가 서운하니까 말이야. 그러니 유진,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어때?”


역시 너무 잘 알아.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왕이면 도시의 전투를 돕고 오라고.”


“이 커다란 도시에? 쉽지 않은 말이네.”


“마법의 여신님에게도 무리인가?”


“사랑하는 제자의 부탁이라면, 이 예비 여신님이 최대한 노력해 봐야지.”


세냐가 히히 웃으며 대답했다. 유진은 그 대답을 들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크리스티나, 아니스. 너희는…… 아군이 최대한 덜 죽게 도와줘.”


[네, 알겠습니다, 유진 님.]


[‘덜 죽게’라니. 하멜, 쥐꼬리나마 양심은 있군요.]


이건 전쟁이다. 아군에 사상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녀와 성직자가 전장에서 맡는 역할은, 아군이 최대한 ‘덜’ 죽게 하는 것이다.


“난 언제나 양심적이지.”


[우둔한 것도 모자라 뻔뻔하기까지…… 그래서 하멜, 바로 왕궁으로 갈 겁니까?]


“그전에 할 일이 있잖아.”


우둔한, 이라는 놀림에 발끈할 뻔했다.


하지만 유진은 지금의 가소로운 분노를 억지로 눌러놓았다. 아니스의 놀리는 말 따위에 발끈하기는 분노가 아깝기 때문이다. 하우리아에 내려온 순간부터, 유진의 모든 분노는 쓰일 곳이 정해져 있었다.


프로미넌스가 타올랐다. 유진은 검은 혜성이 되어 하늘을 관통했다. 망자의 소굴이 되어버린 폐허 도시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우리아는 넓다. 하지만 도시의 크기와 상관없이, 유진의 비행 속도는 터무니없이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도시를 가로질렀다.


아니스에게 대답했듯, 유진은 바로 왕궁으로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혜성의 꼬리처럼 뒤로 흩날리던 날개가 위로 확 꺾였다. 그렇게 유진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가 튀어나와 유진을 가로막았다. 몸을 덕지덕지 기운 키메라들. 그 생김새만으로도 ‘누가’ 만든 것인지는 참 노골적이었다.


“아멜리아 머윈.”


유진은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 카마쉬조차도 유진을 붙잡지 못했다. 고위마족조차도 유진의 일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키메라? 언데드? 놈들이 무더기로 고기의 벽을 세워봤자, 유진을 저지할 수는 없다.


그것을 아멜리아가 모를 리가 없잖은가.


“추잡하게.”


뛰어드는 키메라들은, 싸워서 붙잡아…… 시간을 끄는 용도가 아니다.


지극히 짧은 순간, 유진은 저 키메라들이 어떤 용도인지를 간파했다. 저것들은 강력한 자폭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 그냥 마력을 펑 터트리는 간단한 자폭도 아니다.


흑마법에 의한 온갖 종류의 저주.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포괄한 존재 자체에 작용하는 맹독. 죽이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아도, 저주건 독이건 제발 하나라도 먹히기를 갈망한 것이리라.


추잡하다. 그리고 하찮다. 고작 이딴 것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나?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깟 것을 치우는 데에는 성검이나 월광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단순하게 불꽃이 번져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과했다. 수십 마리의 키메라들은 저주도, 독기도, 폭발도 하지 못하고 불에 타 재가 되어서 사라졌다.


그 광경은 아멜리아도 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진 라이언하트. 놈은, 저 괴물은, 정확히 알고서 이곳에 오고 있다.


‘도망쳐야 돼.’


가능하다면 왕궁에서 진을 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멸망의 화신. 더 이상 자신을 하멜이라 자처하지 않고, 이름 없는 망령이 되어버린 그 괴물이 내뿜는 힘은ㅡ 아멜리아와 리치들의 마법마저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도시 전체를 덮은 결계. 외부의 공격에서 술식을 끊임없이 보완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마법진이 필요한데, 망령이 똬리를 튼 왕궁에서는 마법진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왕궁을 떠났다. 표적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지하묘지를 더욱 파고 들어가 깊은 땅속에 진을 쳤다.


묘지라는 특성. 긴 세월 동안 고인 사기(邪氣). 이곳은 대규모 흑마법을 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대체 어떻게? 위장은 완벽하게 했다. 깊고 깊은 지하. 지상에서도 묘지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혹시 몰라 공들인 더미들도 준비했다.


쭉 속여넘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설마 탐색이라는 과정조차 없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곳을 찾아낼 줄이야.


“그, 그랜드마스터.”


아멜리아를 따르는 리치들 수십 명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뜻대로 움직일 수 없고, 아멜리아의 명령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였다.


당연하게도 아멜리아는 리치들을 챙길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선택하기까지 아무런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즉시 블러드메리를 들고서 마법진을 벗어났다.


카마쉬가 죽었다. 라비스타에서 데려온 마물들도 모두 죽었다. 언데드의 군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아멜리아는 도시의 언데드를 부릴 수 없다.


멸망의 권속들? 놈들도 마찬가지다. 아멜리아가 부릴 수 있던 패는 사막에 배치한 군단뿐. 도시에 남은 모든 것은 망령의 것이다.


우선 지하를 벗어난다. 왕궁까지의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키메라들이 그 약간의 시간을 벌어주기 바랐다만, 공들여 만든 저주와 독을 써먹기는커녕 자폭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너희, 날 위해 죽어버려요.”


아멜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뱉었다. 그 말에 리치들의 안광이 일그러졌다. 잔혹한 명령이지만 거절은 불가능했다. 리치들의 라이프 베슬은 모조리 아멜리아가 쥐고 있다.


더 효율 좋게, 강력하게 흑마법을 쓰기 위해. 흑마법사로서 존경하고, 평생 가르침을 구해 온 그랜드마스터. 설마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려질 것이라고 예상이나 했겠나.


리치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즉시 마법진의 형태가 변했다. 도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적을 철저하게 죽이기 위한 형태. 동시에 지하의 공기가 바뀌었다.


‘이걸로 조금의 시간은 벌…….’


생각을 끝까지 이어갈 수 없었다.


꽈아아앙! 거대한 충격이 지하의 천장을 무너트렸다. 수백 겹으로 중첩시킨 결계는, 무자비하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송곳 앞의 종잇장처럼 쉽게 관통당했다.


“당장!”


아멜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리치들이 즉시 마법을 일으켰다. 콰르르르! 하나 된 마력이 날뛰기 시작했다.


늦었고, 무의미했다. 리치들이 마법을 일으키는 것보다 불꽃이 번지는 것이 더 빨랐다. 검게 타오르는 불꽃은 수십 명의 리치가 일으키는 마력보다도, 긴 시간 동안 고이며 진해진 사기보다도 짙고 강렬했다.


불꽃은 어두운 지하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리치들의 눈에는, 태양을 한 걸음 앞에서 본 것처럼 눈이 부시고 뜨겁게 느껴졌다.


리치에게 피부나 살, 근육 같은 것은 없다. 스켈레톤과는 격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그들의 몸뚱이는 뼈로 이뤄지고 마력에 덮여 있다.


그 불완전한 육체가 모조리 불타 버리는 것 같다. 리치들이 땅을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들이닥친 불꽃이 마법진을 불태웠고, 발현되려던 흑마법은 소멸당했다.


아멜리아는.


머리채가 붙잡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놈은, 그 괴물은, 갑자기 옆에 나타났다. 아멜리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귀신의 손이 뻗어진 것과 똑같이 느껴졌다. 귀신은 빠르고 능숙하게 아멜리아의 머리카락을 잡고, 놓치지 않도록 손목을 돌려서 한 바퀴 감았다.


그리고 홱 잡아당겼다. 강한 힘으로 당겨졌는데도 머리카락은 뜯기지 않았다. 귀신은, 괴물은 머리채를 다루는 것에 굉장히 능숙했다.


아멜리아도, 이런 식으로 다뤄지는 것이 한때는 능숙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랜 옛날이었다. 지금의 아멜리아는 다른 누군가의 머리채를 잡아 휘두르고 폭력을 가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채가 잡혀 당겨지고, 오금이 짓밟히고, 강제로 땅에 무릎을 처박고, 허리가 눌리고, 반대로 머리채는 당겨져서 목이 뒤로 젖혀질 때.


아멜리아는 굴욕과 고통이 대부분이던 어린 시절을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제압당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도 떠올릴 수 있었다.


“야.”


목소리가 속삭여 왔을 때. 아멜리아는 그제야 괴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알았다.


“오랜만이다.”


아무리 울고 빌어도 괴물은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환생 475화


찾았다.


잡았다.


꽈드득! 아멜리아의 몸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오금을 짓밟은 발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힘을 실어, 아멜리아의 무릎 관절을 박살 내주었다.


손으로 누르는 등. 척추를 부수거나 뽑아버릴까 하다가, 벌써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 어깨뼈를 손으로 잡아 으스러트렸다.


손에 돌려 감은 머리. 힘을 주어 당겨서 머리카락을 뽑아버릴 생각까지는 없다. 잡은 머리카락은, 아멜리아 머윈이라는 ‘말’을 다루기 위한 고삐 같은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힘을 주어 잡았다. 머리카락이 뽑히지 않도록, 뜯기지 않도록, 너무 당겨서 목이 부러지지 않도록.


적당히.


그러나 확실하게 힘과 격의 차이를 알 수 있게끔, 지그시 눌러주었다.


“오랜만이다.”


유진은 몸을 낮춰서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에 아멜리아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동자. 유진과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맞닿았다.


자존심.


분노.


굴욕.


그리고 공포.


모든 감정을 확인한 순간, 유진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벼르고 또 벼렸던 원한. 어떤 의미에서 아멜리아는 유진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현재 유진에게 남은 원한과 복수 등은 대부분이 300년 전부터, 하멜일 적부터 이어온 것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다르다. 그녀에 대한 원한은 하멜일 적에 심어진 것이 아니다. 비록 그 내용이 아멜리아가 하멜의 무덤을 도굴한 것이라지만.


그것은 유진의 삶에서 일어난 것이다. 고작 몇 년 전의 일. 하지만 감정은 선명하다. 몇 번이나 아멜리아를 만나서,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했던가.


“왜 아무 말이 없어?”


-나는, 널 기억하고 있거든요. 너는 사막에서 내 펫을 죽였어. 잊지 않았겠죠? 그때…… 마왕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너는 나에게 죽었어.


나이트마치에서 재회했을 때. 아멜리아는 저렇게 말했다.


-빌어먹을 도굴꾼이.


면사 너머에서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으면서 분노를 드러냈다.


-너는, 내 소유의 무덤을 도굴했어요.


동료들이 만들어준 무덤이다. 모론이 직접 관을 옮겼다. 아니스가 벽면 가득 기도문을 적어주었다. 세냐는 석상을 세우며 울었다. 베르무트도, 비석의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건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역사. 나만이 알고 소유하던 것이었으니까요.


아멜리아는 주제도 모르고 그렇게 떠들었다.


-300년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고 돌보는 사람 없이 버려진 무덤이에요. 그곳을 찾아낸 것은, 바로 나예요. 그러니 그 무덤의 모든 것은 내 거야. 동상도, 비석도, 시체까지도!


그 외침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도 아멜리아는ㅡ 정말로 제 주제를 몰랐다. 당연하다는 듯이 여유를 부리며, 라이언하트는 너를 지켜줄 수 없으리라고 비웃었다.


-내가 널 죽이려고 한다면, 그 누구도 이곳에 간섭하지 못할 거예요. 내가 죽든가, 네가 죽든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라이언하트는, 우리 둘 중 하나의 시체만 보게 될 거예요.


유진은.


그곳에서 참았다. 발끈해서 아멜리아를 처죽이지 않았다. 나이트마치에서는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회는 언제고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기회는 왔다. 아멜리아 머윈은 이 사막에서 죽을 것이다. 그 누구도 아멜리아의 죽음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건방져. 그때도 그랬어요. 무덤에서, 너는, 죽음이 당연하던 순간에도 건방졌어.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면서도 즐거워요.


즐거워?


“언젠가 네가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


유진은 고개를 기울여 아멜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는……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면서 죽을지가 궁금했지. 네가 그랬듯,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널 어떻게 죽일지 많이 상상했거든.”


아멜리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저 말은, 그녀가 나이트마치에서 유진에게 한 말이었다.


“그 순간의 너는 예전처럼 건방질까? 내가 네 혼을 훑는 순간에도, 너는 내게 증오와 살의를 보일까?”


“…….”


“난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


아멜리아의 머리가 위로 들렸다.


콰직! 유진은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너처럼 언제나 여유 있는 척, 자신이 절대적으로 강자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누리던 것을 잃었을 때 추한 병신이 되게 마련이거든.”


붙잡은 머리채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처박은 머리를 뽑아내듯이 들어 올려, 아멜리아의 얼굴을 보았다.


코가 부러지거나, 입술이 터져 피범벅이 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아멜리아의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리 세게 처박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닌, 굴욕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유진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아멜리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상처가 없다고? 아니다. 아멜리아의 피부 아래에는 굴욕에 의한 상처가 곪아 썩어가고 있다. 유진은 아멜리아의 뺨이 씰룩거리는 것을 즐거운 기분으로 응시했다.


“너…… 너.”


아멜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 즉시, 유진은 한 번 더 아멜리아의 머리를 땅에 처박아주었다. 이번에도 고통은 크지 않고,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애당초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결정적인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아멜리아는, 유진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처음 만났을 적에는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애송이였다. 발자크 루드베스의 친서가 없었다면. 아니, 그 친서를 무시하고도 죽일 수 있었다. 죽일 생각이었다.


유폐의 마왕이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조건 죽였을 것이다. 그래, 그때 죽였어야 했다.


‘죽이지 못했어.’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된 것이다. 아멜리아는 그때 유진을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후회할 것이 어디 있나.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하나. 전투?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멜리아는 흑마법사다. 전사가 아니란 말이다. 만전의 상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했는데도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 땅에 처박은 머리를 드는 것조차도 아멜리아의 의지로는 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유진이 머리채를 들어 올리자, 아멜리아는 즉시 그렇게 내뱉었다.


저 말은 아멜리아가 판단하기에 가장 이성적이고 정답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절대로 유진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것은 가능한가? 그조차도 불가능하다. 당장 붙잡힌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도망쳐 봤자, 한 걸음도 멀어지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네가 무엇에 화를 내는지 잘 알아요. 이제 와서…… 사, 사죄만으로 내 죄를 씻을 수는 없겠죠.”


당연히 지금 아멜리아가 말하는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 아멜리아는 유진에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죄는 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는 없는 죄책감이라도 만들어서 빌어야 한다.


“나도…… 나도 잘 알아요. 너의 분노. 우리는…… 첫 만남부터 좋지 않았죠. 오해…… 오해, 네, 오해? 아니, 아니에요. 그건 오해가 아니죠. 죄를 범한 것은 나. 너…… 너의 가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가 직접 만든, 친구의 무덤을 도굴한 것은 바로 나니까요.”


억지로 쥐어 짜내는 사죄. 하지만 효과는 있다. 말을 잇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머리를 땅에 처박아대던 괴물이, 지금은 아무런 폭력도 쓰지 않고 잠자코 듣고 있지 않은가.


아멜리아는 눈동자를 굴려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싸늘한 얼굴. 눈동자에서는 칙칙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 정도라면 괜찮다. 살기를 흘리되 정말로 죽이지는 않고 있으니까.


“내가 이제 와서 죄를 빌건, 너는 나를 용서하기 힘들겠죠. 하…… 하지만 나에게도 사정이 있었…….”


꾸욱. 머리채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답이다. 아멜리아는 즉시 말을 바꾸었다.


“내 사정은 너에게 중요하지 않죠. 변명은 하지 않겠어요.”


슬슬 뭐라 대답이나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까는 잔뜩 비아냥대던 괴물이, 지금은 입술을 꾹 다물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아멜리아는 초조함을 느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나는, 너와의 관계란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있어요. 대등한 관계 따위는 바라지 않아요. 나는, 나는 네게 무조건 굴복하겠어요.”


죽고 싶지 않다. 죽는 것은 싫다. 아멜리아는 간절히도 삶을 갈망했다. 그녀는 아직 살아서 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세상에 혼란을 퍼트리고 싶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게 만들고 싶다. 그 모든 것을, 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그렇기에 아멜리아는 스스로 머리를 조아렸다. 더듬더듬 움직이는 양손이 유진의 발을 붙잡았다. 아멜리아는 이것을 굴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존심에 얽매였다가는 살기 위한 발버둥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나는 네게 쓸모가 있어요. 왕궁을 점령한 망령. 아, 알고 있나요? 그는 스스로 망령이라고 자처하고 있어요. 너도…… 너도 알겠지만, 그건 우둔한 하멜이 아니거든요. 내가 흉내 내서 만든 가짜예요. 이, 이것도 내 죄죠. 하지만, 내가…… 망령을 만들었다는 것에 주목해 줘요. 나는, 나는 놈의 약점을 알아요.”


거짓말이다. 지금의 망령에게 아멜리아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망령의 육체가 사라지고, 멸망의 마력과 뒤섞여 화신이 된 순간부터 그것은 아멜리아의 이해와 통제를 아득하게 넘어선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짓말이라도 팔아야 한다. 보라, 이쪽이 일방적으로 내뱉을 뿐이지만 대화는 계속되고 있다. 괴물은 아직도 아멜리아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


‘시간은 끌고 있어.’


거짓말로 점철된 대화가 잘 먹혀들어, 괴물이 손을 거두는 것? 그렇게까지 상황이 잘 풀리리란 기대는 안 한다. 아멜리아가 이 대화를 통해 바라는 것은, 시간을 끄는 것이다.


‘망령이 나를 구할지도 몰라.’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바라는 것과 망령이 바라는 것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둘은 똑같이 전쟁을 바란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켰다. 나하마에서 전쟁이 벌어질 수 있게 된 것은, 아멜리아가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곳에서 끝나선 안 된다. 효시가 되어 대륙 전체로 퍼져야 한다. 아멜리아가 그렇게 바라듯, 망령의 바람도 같을 것이다.


아멜리아는ㅡ 자신이 있었다. 무식하게 힘만 강한 괴물. 목줄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넘치는 힘을 어디로 써야 할지 정도는 가리킬 수 있다. 이유야 어쨌건, 망령을 만든 것은 아멜리아다. 즉 아멜리아는 망령의 어머니란 말이다.


‘너도 그런 자각은 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날 죽이지 않은 것이지.’


망령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모를 일이나, 아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네가…… 네가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고 해도.’


유진 라이언하트가 이곳에 있다면,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올 것이다. 아멜리아는 그 사실을 확신했다.


“약점이라.”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그게 뭔데?”


저런 질문을 해올 것이라고는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멜리아는 즉시 대답했다.


“내가 여기서 그걸 말한다면, 네가 나를 살려둘 이유가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이번에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머리를 다시 내리찍을까? 아멜리아는 이어질 폭력을 각오하며 이를 꽉 물었다.


머리카락이 놓였다.


“칵.”


기껏 힘을 주어 물었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간 학습했던 폭력이 아닌, 전혀 다른 폭력이 꽂혔다. 쭉 뻗은 발끝이 명치에 처박혔다.


일 점에 집중된 힘이 내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몸 안을 채우는 모든 것이 힘에 밀려 위로 치솟았다.


발차기. 고작 그것이다. 하지만 저 단순한 발차기는, 아멜리아가 라비스타에서 겪었던 모든 통증을 더한 것만큼 아팠다.


“카학……! 칵……!”


몸에 처박힌 충격은 흩어지지 않고 체내를 맴돌았다. 아멜리아는 날아가지 않고 자리에 주저앉아, 배를 감싸 쥐었다. 몸에, 영혼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아멜리아는 신음과 피를 토하면서 땅에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억지로 머리가 들렸다. 유진이 다시 머리카락을 붙잡은 것이다. 땅에 다시 내리찍지는 않았다. 짜악! 대신에 아멜리아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짜악! 반대로 갈긴 따귀는 머리만 돌리지 않았다. 회전 방향이 뒤집히면서 목이 완전히 부러졌다. 충격에 떠오른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잡고 있던 머리카락은 뽑혀 나가고 끊어졌다. 유진은 손가락 사이에 엉킨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일어나라.”


내장 대부분이 터졌다. 저 발길질은 단순한 타격이 아니다. 꽂힌 순간에, 놈의 마나가 스며들어 왔다.


그 순간에 아멜리아의 마력은 그녀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되었다. 그런, 감각이었다. 몸 안에 내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날뛰는 감각.


안면이 으스러졌다. 목이 부러졌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겠지만, 아멜리아는 죽지 않았다. 축 처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지만…… 아멜리아는 살아 있었다. 흑마법사라서? 아니. 아멜리아가 마족의 혼혈이기 때문이다.


아멜리아가 불완전한 존재와 키메라, 언데드 따위에 집착하는 것은, 마족과 인간의 혼혈인 자기 자신에 대한 복잡한 애증 때문이다.


지금은 약간의 애정조차도 남지 않았다. 애매하게 뒤섞여 만들어진 피가 지독하게 증오스러웠다. 이 꼴이 되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렇다고 마족처럼 재생력이 엄청나게 빠른 것도 아니다.


“사…….”


몸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멜리아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유진의 다리를 붙잡았다.


“사…… 살, 살려…….”


대화는 포기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목숨 구걸뿐. 점점 몸에 감각이 돌아오고 있다. 아멜리아는 피비린내 가득 찬 숨을 몰아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살려주…….”


뻐억! 의식이 끊어졌다. 유진의 발이 깔끔하게 아멜리아의 턱을 올려 찼기 때문이다. 아멜리아의 상반신이 위로 꺾이고 척추가 부러졌다. 상반신이 꺾인 아멜리아의 몸은 공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몇 바퀴 구르지도 못했다. 바닥에 널브러지고 나서야 의식이 다시 이어졌다. 뒤흔들리는 시야에서 유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꺼으…… 으…….”


턱과 이빨이 완전히 박살 났다. 목소리는 나오지만 언어는 되지 못했다.


다가오는 유진의 뒤에서 리치들이 보였다. 놈들은 처음 습격당했을 때의 피해를 수습한 주제에,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유진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짓을 당하고 있는데.’


나를 그랜드마스터라며 추앙하던 놈들이. 덜덜 떠는 눈동자에 원독이 담겼다.


여전히 아멜리아는 언어를 뱉을 수 없었지만, 명령을 내리는 데는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아멜리아의 의지가 리치들에게 전해졌다.


“꺼어어…….”


리치들이 몸을 떨며 신음했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리치들의 뼈가 하나로 엉겨 붙고, 마력이 융합하며 부풀고 있었다. 유진은 뼈로 이뤄진 공으로 빚어지는 리치들을 보며 이죽댔다.


“지랄을 해라.”


흑마법이 폭사했다. 마법이 되지 못한 마력까지도 유진을 노리고 쏟아졌다.


성검이 움직였다. 빛의 선이 어둠을 가로질렀다. 넘치는 빛은 흑마법과 마력을 소멸시키고, 하나의 덩어리가 된 리치들마저 양단했다. 라이프 배슬을 직접 파괴할 필요도 없었다. 성검이 내뿜는 빛은 뒤엉킨 모든 혼을 정화해버렸다.


“아아악!”


성검이 벤 것은 리치들뿐만이 아니었다.


놈들이 제발 시간을 끌어주기를 기대하며,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던 아멜리아 머윈. 간신히 몸의 감각과 마력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도망치지 못했다.


“내, 내 다리! 다리가아아악!”


다리 두 개가 허벅지에서 썩둑 잘렸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다리는 재생되지 않는다. 성검의 빛은, 아멜리아란 존재에서 다리를 절단했다.


아멜리아는 미칠 것만 같은 절망감에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다.


“사, 살려줘!”


아멜리아는 피를 토하며 외쳤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나…… 나를 죽이지 말아요! 뭐든지, 뭐든지 할게요. 제발……!”


“싫어.”


“무, 무덤을 파헤친 것. 데스나이트를 만든 것. 너를…… 너…… 유, 유진 님을 죽이려 했던 것…… 전부 다……!”


“그래.”


“내가……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잖아! 내가 전부, 잘못했다고……!”


아멜리아는 눈물을 쏟으며 오열했다. 그제야 유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꺄아아악!”


성검이 움직인 것. 아멜리아는 그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왼팔이 잘린 것은 알았다. 다리와 똑같다. 잘린 팔은 절대로 재생되지 않을 것이다. 절단면에서는 피조차도 뿜어지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벌레처럼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 마! 나를…… 나를 죽이지 마……!”


아멜리아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유진의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유진은 아멜리아가 죄를 뉘우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여태까지 저지른 모든 것을 후회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 결국 죽일 것인데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 무어가 중요한가?


유진은 아멜리아가 최대한 추하게 죽기를 바랐다. 기왕이면, 희망이란 것에 기대어 발버둥 치다가. 최후의 최후에 절망하고,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고통을 느끼다가, 그럼에도 ‘죽여줘’가 아닌 ‘살려줘’를 외치기를 바랐다.


지금 아멜리아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안다. 저 병신 같은 년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자신이 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유진이 조금씩 여지란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유진은, 아멜리아의 헛소리를 들어주었다. 아멜리아가 바란 대로 시간을 끌려주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유진은 방긋 웃으며 성검을 들었다.


찬란히 빛나는 칼끝이 아멜리아의 머리를 겨누었다.


아멜리아는 그 빛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환생 476화


어두운 지하. 찬란한 빛.


유진의 뒤편에서 붉은빛이 나타났다. 놀라지 않았다. 슬슬 올 것 같다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더 이상 아멜리아를 노리지 않고, 몸을 돌려 성검을 휘둘렀다.


파앗! 번져오던 붉은빛을 성검이 갈랐다. 성검을 휘두르기 전부터 알았다.


저것은 빛이 아니다. 베인 순간에 확 몰아치는 지독한 피비린내.


‘피의 안개’.


저 안개는 닿는 것만으로 피부에 스며든다. 내성이나 저항할 방도를 마련해 놓지 않는다면, 몸속의 피가 제멋대로 날뛰다가 전신 모공을 통해 뿜어져 죽는다. 피에 대해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고위 뱀파이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권능.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서, 피의 안개를 퍼트릴 고위 뱀파이어는 한 명뿐이다.


유진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횡으로 휘둘렀던 성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화아악! 우뚝 세운 성검이 성화처럼 어둠을 밝혔다. 한 번 베이고도 스멀스멀 퍼져 나가던 피의 안개가, 성검의 빛에 의해 완전히 소멸했다.


밝아진 지하. 환한 빛에 눈을 찡그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알피에로 라사트. 그는 빛을 치켜든 유진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밝군.”


어지간한 뱀파이어라면 저 빛을 맞은 것만으로 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피에로는 ‘어지간한’이란 축에 들지 않는 뱀파이어다. 그는 현존하는 뱀파이어 중에서 능히 최강을 자처할 수 있으며, 멸망의 권속 중에서도 최강에 속한다.


“모기 새끼.”


‘모기’는 300년 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진, 뱀파이어에 대한 멸칭이다. 당연히 뱀파이어는 ‘모기’라 불리는 것에 격노한다.


알피에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스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저년을 구하러 온 거냐? 그 정도로 친한 사이인 줄은 몰랐는데.”


“착각하지 마라.”


알피에로는 진심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화신께서 네 죽음을 바라신다. 그래서 내가, 너를 죽이러 온 것이다.”


“아마 그 새끼는 제 손으로 직접 나를 죽이고 싶어 할 것 같은데.”


“천한 입으로 그분을 쉽게 부르지 마라.”


알피에로의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았다. 그는 불쾌와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별로 친할 것 같지도 않은데 혼자서 발끈하는 꼴이 웃기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뒤를 힐긋 보았다. 두 다리가 잘리고, 왼팔마저 잘린 아멜리아가 엉금엉금 기는 것이 보였다.


몸을 굼벵이처럼 꿈틀대고, 하나 남은 오른팔로 최선을 다해 전진하는 모습. 가쁜 숨소리마저 내뱉지 않고 최대한 억누르는 것은, 혹시라도 유진에게 들킬까 봐 염려해서였다.


무의미한 노력이다. 유진은 이미 아멜리아를 돌아보고 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뒤에서 겁에 질린 냄새를 질질 흘려 싸며 도망치는 아멜리아는 느낄 수 있다.


벌레처럼 기고 있으니, 벌레처럼 짓밟아 죽여 버릴까. 아니면 도망치지 못하게만 잡아두고…… 모기 새끼를 쳐죽인 뒤에, 조금 더 공을 들여 죽여 버릴까.


잠시 고민하던 유진은 피식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더 이상 아멜리아를 신경 쓰지 않고 앞을 보았다.


그런 태도가 알피에로에게는 상당히 의외였다.


유진 라이언하트.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알피에로는 저 남자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멜리아 머윈과의 악연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알피에로가 소문을 통해 판단한 유진 라이언하트는, 적에 대해서는 자비가 없는 인물이었다. 지금의 유진에게 아멜리아를 살려둘 이유는 추호도 없을 것이다.


‘죽인 뒤에 모습을 드러낼 것을 그랬나.’


그럴 생각이었지만, 기습하기에 너무나 적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유진의 신경이 아멜리아에게 완전히 집중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패했다.


솔직히 알피에로는, 아멜리아가 죽건 말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 개인적인 감정을 더 하자면, 죽는 것이 낫다고도 생각한다.


전쟁은 이미 벌어졌다. 아멜리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더 이상 아멜리아에게 이용 가치는 없다. 그래서 지금도 유진이 아멜리아를 끝내려 한다면, 잠시 지켜보려고 했다.


하지만 유진은 아멜리아를 죽이지 않았다. 이제 저 금색의 눈동자는 오직 알피에로만을 보고 있다.


“내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성검을 내려 알피에로를 겨누었다.


“너. 진짜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 온 거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무슨 뜻이기는? 네가 이해한 것 맞아. 내가 어려운 말을 한 건 아니잖아?”


히죽거리던 미소가 바뀌었다. 웃음기 한 점 남지 않은 시선이 알피에로를 노려보았다. 섬뜩한 살기.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자신 있냐고 묻는 거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 300년 전의 거인왕 카마쉬가…… 유진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하고, 너무나 간단히 베여 죽는 것을 보았다.


헬무드 서열 26위의 고위 마족과 권속 수십 명이, 유진의 일검을 받아내지 못하고 죽었다.


하우리아의 하늘을 뒤덮은 결계. 드래곤의 브레스와, 현명한 세냐의 마법으로도 부서지지 않던 결계가ㅡ 유진의 일검에 갈라졌었다.


그 위용은 가히 신위라 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알피에로는 유진의 실력과 힘을 경시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인정하고 있다.


“자신 없다.”


알피에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강하다. 뱀파이어란 종족 중에서 가장 강하다. 멸망의 권속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 헬무드의 서열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상대가 공작만 아니라면 능히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


하지만 저 인간에게는 도저히 승리를 자신할 수가 없었다. 놈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심지어 놈은 ‘전력’을 다한 것 같지도 않았다. 카마쉬를 죽이고, 서열 26위의 마족을 죽이고, 결계를 부수고 지네산맥의 머리를 터트리는 순간조차도 놈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전력을 다하는 것만 같은 절박함이 없었다. 심지어 놈은, 저 모든 전투를 거치면서 단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저게…… 정말로 인간이란 말인가? 알피에로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었다. 왕성에서 기다리는 망령이 하멜의 탈을 쓴 화신인 것처럼, 저 유진 라이언하트란 인간도 똑같다. 저건 인간과 용사의 탈을 쓴 괴물이다.


“내가 백 명이 있어도 너를 죽일 수는 없겠지.”


알피에로는 덤덤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덤빌 것이다. 이 전쟁은 화신께, 그리고 멸망의 마왕님을 위한 것. 너란 존재는 전쟁에 방해된다. 성벽을 넘어 도시에 들어온 전원이 전쟁의 제물이다. 그중에서…… 네가 가장 가치 있지.”


지금 놈을 죽이지 않는다면, 놈은 주저 없이 왕궁에 향할 것이다. 알피에로는 화신의 패배는 상상할 수 없었다. 저 괴물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멸망의 화신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놈을 가로막지 않고 보내야 한단 말인가? 알피에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목숨은 이미 오래전부터 멸망의 마왕에게 바쳤다.


알피에로 라사트. 그가 바라는 것은 멸망의 마왕을 위해 죽는 것이다. 저 괴물이 화신께 향한다면, 알피에로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목숨을 바쳐서 놈을 막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놈을 죽여 화신께 바치는 것.


결의했다. 알피에로는 숨을 고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피처럼 붉은 마력이 알피에로를 집어삼켰다. 마력 속에서 눈동자는 사악한 빛을 발했다. 비릿한 피의 냄새가 지하를 가득 채웠다.


부족하다. 알피에로는 계속해서 마력을 끌어냈다. 멸망의 마력이 흘러넘쳤다.


그 마력은 계약한 마족마저 해친다. 감당할 수 없는 마력을 두른다면 육체와 영혼이 소멸하게 된다. 그 사실은 당연히 알피에로도 알고 있다.


한계는 진즉에 넘었다. 300년을 여유롭게 버텨 온 육체가, 마력의 무게에 짓눌려 부서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 알피에로는 숨을 몰아쉬며 양팔을 들었다.


뚜둑, 뚜두둑……! 기괴하게 뒤틀리는 손. 울룩불룩 변형된 손가락이 낫처럼 휘어지고, 손톱이 칼날처럼 길게 뻗어 나왔다.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저 모기 새끼는 죽음을 각오했다. 동시에 반드시 유진을 죽이겠다고 결의했다.


솔직히 놈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것인지를, 유진은 잘 알 수가 없었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놈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강해봤자 마족의 수준. 마왕의 격마저 뛰어넘은 공작들에 비하면 우습다.


유진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알피에로가 뽑아내는 멸망의 마력. 한계를 넘어서 강림시킨 마력이 집중되고 있다. 너무 강한 마력은 공간에까지 영향을 주어, 유진의 시야를 일그러트렸다.


“하.”


유진은 입술을 벌려 웃는 소리를 냈다. 그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성검을 내려놓았다. 지하를 밝히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어둠은 내려앉지 못했다. 알피에로가 내뿜는 붉은 마력이 지하를 지옥처럼 비추었다. 지독한 피 냄새. 신선하지 않은, 부글부글 끓는 것만 같은 피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검을 놓은 오른손이 위로 들리는 것을 보았다. 시커먼 불꽃이 그 손을 휘어감고 이글이글 타올랐다.


검을 놓았다. 저 거슬리는 성검을 쓰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지네산맥을 죽인, 베르무트의 월광검도 꺼내지 않았다.


‘오만하군.’


아니, 저건 오만함이 아니다. 몇 번이고 증명한 힘에 따른, 지극히 당연한 자신감.


그 자신감이 알피에로에게는 호재였다. 덕분에 모든 준비를 끝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극한. 한 방울만 더하면 존재마저 찰나에 으스러트릴 것이 분명한, 마력의 무게. 끓어오른 피, 터질 듯이 빠르게 뛰는 심장. 알피에로의 몸이 천천히 낮아졌다.


도달하는 것은 빛보다 빠르다. 시간이 시간이 되지 못하는 영역. 공간마저 관통할 것이다.


다가가서 손톱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동작은 하나로 끝이자 완성. 그래, 한 번. 그 이상 공격할 생각은 없다. 이 한 번의 공격이 알피에로 라사트의 평생과 모든 것을 담는다.


퍼억!


알피에로의 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한 번의 움직임. 한 번의 공격. 그렇게 움직였고,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제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피에로는 그 무엇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야, 알피에로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번의 공격에 완성을 두었듯,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알피에로가 모든 마력을 집중시켜 다가온 순간.


유진도 손을 휘둘렀다. 시커멓게 타오르면서 응축되었던 불꽃이, 자그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것뿐이었다. 나방이 불꽃에 몸을 던지듯. 날아드는 모기를 맨손으로 때려잡듯. 유진은 손을 휘둘렀다. 알피에로의 마력은 불꽃에 삼켜져 소멸했으며, 활짝 편 오른손은ㅡ 알피에로의 머리를 박살 냈다.


마족, 그중에서 고위마족은 강력한 불사력을 가지고 있다. 놈들은 머리를 한 번 부숴도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알피에로는 유진의 일격을 버티는 것이 불가능했다. 극한까지 뽑아낸 멸망의 마력이, 이 순간에 오히려 독이 되었다.


아슬아슬한 밸런스가 무너졌다. 버텨내지 못한 영혼이 마력에 박살 났다. 알피에로가 그토록 따르며 경애하던 멸망의 마왕은, 그 순간에도 알피에로에게 무심했다.


“흠.”


고작 일격에 알피에로를 쳐죽인 유진은, 휘두른 오른손을 툭툭 털었다. 대충 휘두른 것은 아니다. 휘두르는 순간에 프로미넌스가 이그니션을 사용했다. 그렇게 한순간 위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켰기에, 손 한 번 휘두른 것으로 알피에로와 멸망의 마력을 일소할 수 있던 것이다.


“소개라도 해주고 죽일 것을 그랬나.”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피에로는 하멜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놈을 죽이기 전에, ‘내가 하멜이다’라고 말해주었다면 꽤 재미있는 반응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들었다.


지하에서 아멜리아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리를 자르고 왼팔을 잘라주었다. 몸에 처박은 불꽃 덕에 마력도 뜻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슬아슬하게 마법 능력은 회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법을 써서 탈출했나.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냥 여기서 내 손에 죽는 편이 더 깔끔했을 텐데.”


아멜리아가 도망치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내버려 두었다. 이미 아멜리아에게 보고 싶은 것은 모두 보았다. 맛보고 싶었던 감정도 모두 즐겼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ㅡ 직접 죽이기 직전까지 해보니, 별로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이, 유진이 바라던 대로였다. 유진은 아멜리아가 최대한 추하게 죽기를 바라고 있다.


‘살 수 있다는 희망’.


발버둥 치다가, 최후의 최후에 절망하고, 죽는 것이 나을 고통을 느끼는 것.


아멜리아 머윈.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다.


* * *


간신히 지하를 빠져나왔다.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마법이 잘 써지지 않는다.


아멜리아는 숨을 헐떡거리며 가슴을 붙잡았다. 몸 안에, 그 빌어먹을 자식의 불꽃이 남아 있다. 잔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마력을 불태우며, 마법을 쓰려 할 때마다 마력의 흐름을 뚝뚝 끊어대고 있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이……!”


다리가 하나라도 남아 있었다면, 블러드메리를 목발 삼아서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아멜리아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다가 울컥 피를 토했다.


“커흐…… 흐으으…….”


어떡하지? 알피에로가 그 괴물을 죽일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놈이 할 수 있는 최대는 시간 끌기. 그마저도 긴 시간은 끌 수 없을 것이다. 길어야 10분?


‘그때까지 회복할 수 있나?’


잘린 팔다리는 재생하지 않는다. 그건, 그건 괜찮다. 재생하지 않는다면 다른 놈의 팔다리를 붙이면 된다.


여기서 죽지만 않는다면.


살아남는다면, 어떻게든 된다.


ㅡ꽈아앙!


“크륵…….”


요란한 폭음. 땅을 통해 전해지는 거대한 진동이 아멜리아의 몸까지 떨게 만들었다. 내장이 진동하면서 고통이 전해졌다. 아멜리아는 왈칵 피를 토하면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하늘을 날아가는 와이번과 페가수스가 보였다. 그 근처에는…… 뭔지 모를 빛의 거인이 날뛰고 있다.


‘저건…… 정령인가?’


저런 식으로 정령을 다루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나? 이런 순간이지만 아멜리아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날뛰는 것은 저것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엎드려, 기고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성벽을 넘어 하우리아에 들어 온 기사들이 마족과 언데드들을 베어가며 왕성으로 향하고 있으리라.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망령은 여전히 왕성의 옥좌에 앉아 있을까? 대체, 대체 왜? 놈이 직접 나선다면ㅡ 적군 따위 순식간에 몰살할 수 있을 텐데. 왜, 직접 움직이지 않고 유진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건가?


‘왕성…… 왕성으로 돌아가야…….’


저곳에 도망치는 것이 과연 옳을까.


끔찍하게 강하던 유진을 떠올렸다. 은하를 등진 현명한 세냐를 떠올렸다. 저 높은 하늘에서, 빛나는 드래곤의 등에 선 성녀를 떠올렸다.


아멜리아는 여전히 망령의 패배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왕성에서의 전투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과연 망령이 나를 지켜줄까? 지금의 내가, 필시 요란할 그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투에 참전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휘말려 죽어버린다면ㅡ 그 무슨 개죽음인가.


‘도망쳐야 돼. 이곳,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그래…… 며칠 동안 던전에 숨어 있으면…….’


며칠이 흐르면, 하우리아의 전쟁은 망령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숨어서 기다리다가, 몸을 추스르고 돌아오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비행마법은 쓸 수 없다. 블링크도 연달아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 몸조차 가누는 것이 힘들다……. 다른 누군가의 부축과 보호를 받지 않는다면, 하우리아를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


엉금엉금 기던 아멜리아의 앞을 웬 발이 가로막았다.


아멜리아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까득.”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환생 477화


까득, 하는.


이빨을 가는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쪽에서 아멜리아는 평범한 쪽이었다. 대부분 사람이 그러하듯이 저 소리를 싫어했다는 말이다.


최선을 다해 교정해 주려 노력했다. 하도 이빨을 씹어대길래 재갈도 물려봤다. 기껏 물린 재갈까지 씹어대길래 두들겨 패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교정하는 것은 실패했다.


“…….”


저건 개다.


단어 그대로, 개처럼 다뤄왔다. 목줄을 걸어 마당에 묶어두고, 가끔씩 산책을 시켰다. 똥오줌을 가리는 법부터 새로이 교육시켰다.


말을 듣지 않으면 두들겨 팼다. 꼭 말을 듣지 않을 때만 두들겨 팬 것도 아니다. 아멜리아 본인의 기분이 나쁠 때면, 그냥 이유 없이 두들겨 팼다.


폭력만 쓴 것은 아니다. 아멜리아의 기분이 좋을 때는, 헤모리아를 억지로 뒤집어 눕혀 배를 긁어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귀여워해 주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아멜리아도 객관화가 잘 되어있다. 망령에게는 굉장히 잘 대해주었다. 그렇기에, 망령이 배신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하지만 헤모리아는 다르다. 아멜리아는, 만약 누군가가 자신을 배신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헤모리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모리아에게 강력한 족쇄를 걸어두었다. 헤모리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왔다. 만약, 그런 족쇄가 없다면. 저 똥개는 무조건 나를 배신할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헤모리아는 아멜리아를 배신했다. 현명한 세냐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감히, 저쪽을 기웃거리며 아멜리아의 정보를 팔아넘겼다.


주제도 모르고 배신한 개새끼. 죽여 마땅한 죄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망령이 헤모리아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놈이 왜 헤모리아를 거둔 것일까? 그래도 한때 똑같이 애완동물 취급을 받은 것에 대한 동질감인가? 아니면 멍청한 개새끼에 대한 동정심?


사실을 말하자면 망령은 헤모리아를 감싸주지는 않았다. 그냥, 하우리아의 뒷골목을 전전하던 헤모리아를 발견하고 왕궁에 데려온 것뿐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헤모리아를 죽일 수 없었다. 주워 왔다는 것부터가 헤모리아가 망령의 소유물이 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괜히 건드렸다가 처벌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헤모리아를 무시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헤모리아와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에, 구덩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던 헤모리아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성기사와 이단심문관의 시체가 득실거리던 구덩이. 사지가 잘린 헤모리아는 그 깊은 곳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동료였던 인간들의 피를 빨아 마시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입장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팔다리를 잃고, 땅을 기며 벌레처럼 기고 있는 것은 아멜리아다.


“까득.”


금속 마스크 너머에서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마스크. 마음에 안 든다. 벗기고 대신 재갈을 물려주었는데, 그때마다 헤모리아는 직접 쇠판을 구기면서까지 마스크 비슷한 것을 만들어 입을 가렸다.


집착의 이유는 안다. 평범하지 않은 이빨. 뱀파이어를 섞어 만든 키메라. 저 날카로운 이빨은 헤모리아에게 줄곧 콤플렉스였겠지.


“헤…… 모리아.”


아멜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기껏……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 괴물 같은 유진 라이언하트에게서 간신히 도망쳤는데.


저딴, 똥개한테 물려 죽는다고?


“내…… 내가 잘못, 잘못했어요.”


아멜리아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헤모리아의 발을 잡았다.


까득. 위에서 다시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헤모리아의 감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만 같은 소리. 아멜리아는 숨을 헐떡거리며 헤모리아의 몸을 앞으로 기었다.


“내가 전부, 전부 다 잘못했어요. 너를 괴롭힌 것. 너…… 너, 너도 나한테 그렇게 해야죠. 그러고 싶을 거예요. 아, 안 그래요?”


아멜리아의 얼굴이 헤모리아의 신발에 가까이 다가갔다. 지저분한 구두. 하지만 아멜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헤모리아의 구두에 얼굴을 부벼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 너도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야죠.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까득.”


헤모리아가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힐긋 시선을 들어 얼굴을 보았지만, 금속 마스크에 얼굴 절반이 가려진 탓에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다. 앞을 가로막은 후로 헤모리아가 내는 소리는 ‘까득’ 하는 이빨 가는 소리뿐이었다.


행동마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퍼억! 헤모리아의 구두가 아멜리아의 얼굴을 걷어찼다.


아멜리아는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두 다리에 팔 하나가 잘린 만큼 몸은 가벼워졌고, 그래서인지 무척이나 잘 굴렀다.


“카윽……!”


아멜리아는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그리고 다시 헤모리아를 향해 기어가려 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자신도 모르게 멈춰 버렸다.


헤모리아가 몸을 낮춰, 구두끈을 풀고 있었다. 얼굴 반을 덮은 금속 마스크. 빙글 휘어져서 웃고 있는 눈은 아주 잘 보였다. 단단한 매듭을 풀어 내리고, 엄지손가락을 발뒤꿈치 쪽에 끼워 넣어 구두를 벗었다. 툭. 벗은 양말을 땅에 던져두고, 헤모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구두 위에 올려놓은 맨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아멜리아의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반발할 수가 없었다.


까득, 까드득. 이빨을 가는 소리가 마치 헤모리아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엉금엉금 기어 다가온 아멜리아가, 하나 남은 손으로 헤모리아의 발목을 거머쥐었다. 천천히 다가간 입술이 발등에 닿았다.


“아멜리아.”


그제야 헤모리아가 말했다. 아멜리아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철컥. 헤모리아가 마스크를 벗었다. 그녀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날카로운 이빨들이 까득거렸다.


“핥아야지.”


환한 미소와 속삭임. 아멜리아는 즉시 입술을 열고, 혀를 내밀었다. 살 수 있다면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지독한 요구를 받아도 망설이지 않고 행동할 것이다.


그래, 살 수만 있다면. 죽지 않을 수 있다면.


“걱정하지 마.”


까득. 헤모리아가 이빨을 갈면서 말했다.


“나는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나도, 너를 잔뜩 귀여워해 주고 싶거든.”


정성 들여 발가락을 핥는 모습에 헤모리아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쯤이면 되었다. 헤모리아는 아멜리아의 얼굴을 발로 밀어내며, 하늘을 보았다.


성벽을 넘어온 해방군의 병력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압도적으로 많은 언데드의 군세가 앞을 가로막고는 있지만, 고기방패 정도의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서 암약하는 멸망의 권속들은, 해방군을 상대로 제법 유효한 타격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각 부대를 이끄는 대장들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 대부분이 대륙 제일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기사들이다.


“여기 있으면 적들이 널 죽일 거야. 나는 도망칠 자신이 있지만, 너는?”


“사…… 살려줘요.”


“그래, 살려줄게.”


헤모리아는 킬킬 웃으며 아멜리아를 들어서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는 고민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지붕을 뛰어다니지는 않았다. 하늘 위에는 드래곤이 있다. 와이번, 페가수스, 그리핀 같은 비행대도 가득하다.


건물 사이사이를 뛰었다. 넓은 길로 가지 않았다. 지금 하늘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빛에 휘감긴 드래곤이, 마력에 가려진 태양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그림자가 헤모리아가 움직이는 길이 되었다. 그림자를 뛰어넘는 것 역시 고위 뱀파이어의 권능. 헤모리아는 알피에로에게 피를 받아먹었기 때문에, 그 권능을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알피에로가 죽었다.’


피를 마셨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바로 지금. 헤모리아와 연결된, 거스를 수 없고 유일한 뱀파이어가 죽었다. 그 사실에ㅡ 헤모리아는 어깨를 떨며 전율했다.


알피에로의 죽음에 슬픔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뱀파이어는 위계가 확실하다. 피까지 받아마셨다면, 하위 뱀파이어가 상위 뱀파이어에게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알피에로가 헤모리아에게 자결을 명한다면,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자결해야 할 정도다.


그러나 지금 알피에로가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헤모리아는 완전한 자유를 손에 넣었다. 더 이상 그녀를 구속할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하…… 아하하하!”


나는 자유다. 헤모리아는 그 사실이 너무나 즐거워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에 짊어져 있던 아멜리아는, 왜 헤모리아가 저렇게 웃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아멜리아에게 저딴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기회를 봐서 죽인다.’


하나 남은 손이 블러드메리를 쥐고 있다. 아직은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우리아만 벗어나면…….’


그쯤이면 마력도 회복될 것이다. 팔다리가 잘린 것? 마력이 회복되고, 흑마법만 쓸 수 있게 되면 아무 문제 없다. 그때가 되면…… 아까의 굴욕을 몇 배로 갚아줄 것이다.


‘멍청한 년. 마법도 쓸 수 없는 무식한 똥개 새끼.’


헤모리아가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것이 아멜리아에게는 행운이었다.


마법을 쓸 수 없으니 구속을 걸 수도 없지. 다리와 팔이 잘렸다는 것에 방심한 걸까? 나를, 병신으로 본 건가? 아멜리아는 뿌득 입술을 씹었다.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뛰어넘는 헤모리아의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둘은 얼마 되지 않아 하우리아의 중심구역에서 벗어났다. 그럴수록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대의 숫자는 많아졌다. 진동과 함성, 폭음 따위의 소리도 가까워졌다.


거리를 가득 채운 언데드 대군의 후미도 지나쳤다. 무너진 성벽도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아멜리아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괴물 같은 유진 라이언하트도 쫓아오지 않았다. 알피에로가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추격을 포기하고 왕성으로 가버린 것일까.


‘조금만 더.’


하늘의 비행대를 경계했다.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다. 기사들, 마법사들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간다면, 이 도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력은 얼마나 회복되었지? 아직 몸속에 잔불이 남아서 마력을 끊어내고 있다. 하지만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잔불도 완전히 꺼질 것이다. 사실 지금도 무리한다면 억지로라도 마법을 더 쓸 수 있기는 했다.


‘안 돼.’


그렇게 해버리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 아멜리아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하던 헤모리아가 대뜸 위로 뛰어올랐다. 아멜리아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순식간에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온 헤모리아는, 조심스레 이동하던 여태까지와는 달리 건물 위를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콰악! 헤모리아의 손이 아멜리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해서 몸을 뒤트는 중에, 귓가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가만히 있어.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읍…….”


“걱정하지 마.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 멍청한 너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아래에서 달릴 수 없단 말이야. 저 거리에서 기사들의 감각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이죽거리는 목소리. 아멜리아는 간신히 눈동자를 움직여, 건물의 아래를 보았다.


넓은 거리에서 언데드 군단과 기사들이 격돌하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언하트의 깃발이 흔들리고 있다. 거대한 흑마에 탄 가주가 선두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검을 휘두르고, 그 뒤를 백사자 기사단이 따르고 있었다.


라이언하트뿐만이 아니다. 시무인의 격랑기사단. 루하르의 하얀송곳니. 유라스의 혈십자기사단. 그 외에 여러 개의 깃발이 진군하며 언데드의 대군을 관통하고 있다.


“오히려 여기가 안전해.”


헤모리아가 속삭였고, 아멜리아는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제로 진군하는 기사들은, 건물 위를 도약하는 헤모리아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성벽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가까워지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여전히 입은 막혀 있다. 아멜리아는 초조함에 헤모리아의 얼굴을 힐긋거리며 보았다.


“여기군.”


갑작스러운 중얼거림. 헤모리아의 걸음이 멈췄다.


헤모리아는 더 이상 아멜리아의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 대신, 갓난아기를 들어 올리듯 상냥히 아멜리아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뭐…… 뭐야?”


아멜리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헤모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방긋 웃기만 했다. 그리고.


빛이 반짝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떠도는 은하. 모든 별이 단 하나의 마법사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모습. 아멜리아의 사고가 정지했다.


직접, 눈앞에서 봐버린 위용은ㅡ 아멜리아 머윈이 가진 ‘마법사’다운 모든 면모를 보잘것없이 만들었다.


“잘했어.”


세냐 메르데인.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그 모든 반짝임이 얼음처럼 시리다. 세냐는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아멜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세냐를 상대로는 헤모리아도 고개를 빳빳이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즉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약속은…….”


세냐는 손가락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난 네게 아무 볼 일이 없어. 볼일이 있는 것은, 저 개 같은 흑마법사 년뿐이야.”


“…….”


“네가 저년을 내 앞에 데려와 준 것의 대가로, 후방의 모든 마법사들은 널 공격하지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아멜리아와 마주치고.


데리고 도망치면서, 사역마를 보냈다.


아롯에서 미리 접촉해둔 덕에, 박쥐는 세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요구한 바는 간단하다.


아멜리아 머윈을 당신의 앞으로 데려가겠다.


그러니 나를 죽이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가.”


세냐가 말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세냐는 헤모리아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왜 아멜리아를 배신한 것인지도, 심지어 헤모리아의 이름조차도 궁금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헤모리아는 다시 한번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땅에 널브러졌던 아멜리아가 덥썩 발목을 잡아 왔다.


“나, 나를! 나를…… 배신해? 네가!”


“병신.”


마스크를 쓰기 전.


헤모리아는, 아멜리아를 내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 같은 년에게 시달리면 누구나 배신할 거야.”


마스크가 헤모리아의 미소를 감추었다. 까득. 그녀는 즐거움에 이를 한 번 갈아주면서 땅을 박찼다.


헤모리아가 멀어진다. 도시를 탈출할 유일한 수단이 멀어진다. 아멜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블러드메리를 움켜쥐었다.


아니, 아니다. 아직 방법은 남아 있다. 어느 정도 회복된 마력. 흑마법은 쓸 수 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면…….


“너.”


세냐가 눈썹을 찡그렸다.


“내 앞에서 마법을 쓰려는 거야?”


필사적으로 구성하던 술식이 소멸했다.


“아아아악!”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아멜리아는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세냐는 그 비명을 들으며 지팡이를 뻗었다.


“내가 네게 지은 죄.”


“잘못, 잘못했어요! 제가 전부…… 전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하나하나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플 뿐이지. 그리고 나는 말이야, 지금 굉장히 바빠.”


“제발!”


“그러니까 너 스스로 깨닫고 뉘우치게 해줄게.”


유진이 바란 것은 세냐에게도 전해졌다.


최대한 추하게. 최대한 고통스럽게. 희망이란 것에 기대어 발버둥 치다가, 최후의 최후에 절망하고,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고통을 느끼면서도 살려달라 애걸하는 것.


천천히 다가간 세냐는, 프로스트를 아멜리아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발버둥 치던 아멜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세냐의 발목을 잡았다.


“살려…….”


ㅡ쿠웅.


프로스트가 빛을 뿜었다. 아멜리아의 머리가 쩍 갈라졌다. 아멜리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정신은 억겁의 죽음에 갇힐 것이다. 세상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죽음을 체험할 것이다.


그럼에도 육체는 살아 있고, 정신도 붕괴하지 않을 것이다. 저렇게 된 아멜리아에게 있어 일 초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질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싶을걸.”


열렸던 머리가 다시 닫혔다.


빌어먹을 환생 478화


망령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멜리아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우 그런 욕심 따위로 저 위험천만한 대마법사의 앞에 남을 수는 없었다. 죽이지 않겠다, 는 말은 들었지만. 그 말은 맹세도, 약속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고 나를 죽일지도 모르지.’


설마 그 현명한 세냐가 내뱉은 말을 가볍게 바꿀까 싶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헤모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알피에로는 죽었다. 아멜리아도 곧 죽을 것이다. 망령은 건재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헤모리아는, 망령이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헤모리아가 성벽을 넘어 도망칠지라도, 망령은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성벽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세냐의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인지, 후방의 마법사들 중 그 누구도 헤모리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곧이다. 철제 마스크의 안쪽. 헤모리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화아악!


갑자기 바람이 몰아쳤다. 헤모리아는 놀라서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빛에 휘감긴, 2쌍의 날개를 가진 페가수스. 한때 유라스의 이단심문관이었던 헤모리아는, 당연히 저 페가수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폴로.


혈십자기사단장. 크루세이더 라파엘로의 상징인 페가수스. 저 거대한 페가수스는 유라스뿐만이 아니라 전 대륙의 비행대 중에서 최속을 자랑한다.


“헤모리아.”


피에 흠뻑 젖은 갑옷이 움직였다. 라파엘로는 투구의 안면가리개를 위로 올리며 헤모리아를 응시했다. 소년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칙칙하고 살벌한 시선. 헤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현명한 세냐 님께서는 너를 보내주기로 하셨다지만,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이단심문국 말레피카룸 소속, 징벌자 아타락스의 제자이자 딸. 헤모리아. 그녀는 우수한 심문관이었다. 어려서부터 ‘단두대’라는 별명을 받을 만큼 여러 활약을 했다.


운이 없었다.


라파엘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유진과 만나지 않았다면. 빛의 샘에 있지 않았다면. 용사를, 가로막지 않았다면.


라파엘로의 크루세이더가 헤모리아를 겨누었다.


“라. 라파엘로 경.”


헤모리아가 더듬거리며 라파엘로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더 말을 하기도 전에, 크루세이더의 끝에서 빛이 번쩍였다.


“……?”


헤모리아는 놀라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빛이 번쩍이고, 몸이…… 관통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왼쪽 어깨에서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헤모리아는 놀라서 왼쪽 어깨를 덮은 옷을 찢어버렸다.


인두로 지진 것만 같은 낙인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세냐 님이 죽이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내가 감히 그 뜻을 거스를 수는 없지.”


라파엘로는 크루세이더를 거두며 중얼거렸다. 낙인을 어루만지던 헤모리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이 낙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유라스에서 이교도로 의심 가는 자들에게 새기는 낙인. 유라스의 이단심문관들은 낙인이 찍힌 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만약 도망친다면 대륙 끝까지 추격해서라도 살해한다.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라.”


아폴로가 날개를 펼쳤다.


“네가 만약 다른 인간의 피를 빨거나, ‘죄’라 할 수 있는 행동을 저지른다면.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빛의 대행자들은 너를 찾아 죄를 물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남긴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헤모리아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만약 세냐의 뜻이 없었다면, 낙인을 찍어 보내지 않고 여기서 직접 헤모리아를 죽였을 것이다.


피부를 뜯어버려도, 어깨부터 잘라버려도, 낙인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체가 마치 저주처럼 존재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아아악!”


헤모리아는 낙인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죽고 싶어 하지 않던 아멜리아는 죽음보다 못한 삶에 갇혔다. 자유를 바라던 헤모리아는 평생을 감시당하게 되었다.


망령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카마쉬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지네산맥을 비롯한 라비스타의 마물들이 사냥당하는 것을 보았다. 헬무드의 고위마족들이 죽는 것을 보았고, 언데드 대군이 꿰뚫리는 것도 보았다.


성벽을 무너트리고 넘어온 군대가 도시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 수도에 남겨놓은 언데드 대군이 시간을 끌고, 멸망의 권속들이 분전하고 있지만…… 전황은 좋지 않다. 혼자서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실력자들이 해방군에는 한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있지만, 망령의 군대에는 그런 실력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알피에로 라사트? 그는 전장에서 날뛰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은 충심은 알피에로로 하여금 유진의 앞을 가로막게 하였고, 그는 정말로 모기처럼 터져 죽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망령은 아멜리아나 헤모리아 등에게 아무런 의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망령이 아멜리아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 목숨의 결정권이 유진이나 세냐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모리아를 죽이지 않고 거둔 것은, 그녀가 아멜리아에게 품은 앙심이 유진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두, 망령이 바란 대로 되었다.


“오는군.”


지하무덤에서 유진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더는 유진을 막으려 들 마족은 존재치 않으니, 그는 곧장 왕궁으로 날아올 것이다.


망령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술탄의 옥좌. 저 아래에 부복하고 있는 전사들이 보였다.


자발적으로 남은 술탄의 친위대. 나하마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전사들이다.


저들뿐만이 아니나. 왕궁에는 꽤 많은 병사가 남아 있다.


전쟁시대에서 마족과 마왕이 선보이는 압도적인 힘에 감화되는 인간은 아주 많았다. 지금 왕궁에 남은 병사와 전사들도 똑같다. 저들은 수많은 마물과 마족을 끌고 날아와, 도시 전체를 손쉽게 봉쇄한 망령의 힘에 매료되었다.


망령은 그들에게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쓸 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거니와, 저들의 선택 자체가 병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이라도 저들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한다면. 붙잡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려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이 기대감과 흥분으로 눈을 빛내며 망령을 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들은 왕궁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저들이 보았던 것은 끝이 없을 것처럼 많던 언데드의 대군과, 거대한 마물들과, 존재만으로 공기를 바꿔 버리는 마족들이었다. 그런 강력한 군대가 이토록 빨리 돌파될 것이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겠나.


설령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도망치는 것을 선택하는 전사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망령이 있기 때문이다.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패배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망령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오고 있다.


“부디…….”


“저희에게도 힘을…….”


망령이 일어서자, 전사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마족과 계약해서 힘을 얻는 것은 흑마법사뿐만이 아니다. 마법을 전혀 쓸 수 없는 기사나 전사도, 마족과 계약하여 커다란 마력을 얻을 수 있다.


망령은 칙칙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래.”


몇 번이고 무시했는데도 힘을 달라 청하고 있다.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도 없어 보이니, 그렇다면ㅡ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밖에. 망령의 손이 전사들에게 향했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이곳에 오고 있다. 그와의 전투는…… 방해받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일대일로 싸우고 싶다. 라비스타에서 마물과 권속들을 끌고 온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전장은 계속해서 뒤로 밀리고 있다. 하우리아가 워낙 대도시인 탓에, 적군이 왕궁까지 도달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기왕이면 아예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게 하고 싶다.


그렇기에, 아군의 전력을 보강하고 증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색의 마력이 꿀렁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순수한 마력의 정수. 멸망의 화신이 된 망령만이 뽑아낼 수 있는 마력이다.


“허억……!”


밀려오는 마력에 전사들은 순간 기겁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에 닿아버리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릴 것 같다.


그런 종류의 감각을 대면해 버리니,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하며 도망치려고 들었다. 그들에게는 대단한 각오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령은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다면 진즉에 도망쳤어야 했다. 지금 와서 도망치고 싶어 한다면, 그 선택은 존중해 줄 수 없다.


“힘.”


망령이 중얼거렸다. 끈적한 마력이 전사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회색의 덩어리 안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보였다.


투둑, 투두둑. 인간의 형태가 분해되었다. 하나의 인체가 몇 개로 나누어지고, 마력이 달라붙으며 새로운 육체가 구성되었다. 그 광경은ㅡ 하나의 인체를 양분 삼아, 전혀 다른 복수의 존재가 태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살점이 부푼다. 몇 개의 뼈가 수십 개로 증식하며 달라붙었다. 각기 다른 생김새의 괴물들이 하나의 인체에서 태어났다.


마물과는 다르다. 마족도 아니다. 망령은, 저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누르.’


레헤인야르, 대망치의 협곡에서 보았던. 모론이 죽이고 있던 괴물. 참된 의미를 가진 멸망의 권속. 수십의 전사들이 수백 마리의 누르가 되었다.


ㅡ콰지직! 덩치 큰 누르들이 갑자기 증식하니, 왕궁의 벽과 지붕이 무너졌다.


망령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위로 뻗었다.


우우우우! 회오리치는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망령이 뽑아내어 확산시킨 마력은, 왕궁에 배치된 병사들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 수백 명의 병사들은 이유도 모르고 수천 마리의 괴물이 될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만큼 시간을 끌 수 있겠지. 준비를 마친 망령은, 다시 옥좌에 앉았다.


커어어어ㅡ! 사방에서 누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 망령의 앞에 선 누르들은, 그 거구를 조신하게 웅크리고서 고개를 조아렸다.


망령은 누르들에게 육성으로 명령하지는 않았다. 그냥, 손가락만 한 번 까딱거려 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웅크리고 있던 누르들이 괴성을 지르면 왕궁 밖으로 먼저 뛰쳐나갔다. 모든 누르가 성벽을 뛰어넘고 도시의 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본능대로 행동할 것이다.


“조용하군.”


설마 저렇게 덩치가 커질 줄은 몰랐다. 거기에 한 명의 인간이 여러 마리의 괴물이 될 줄도 몰랐다. 모든 것이 예상을 벗어났고, 대가로 왕궁이 무너져 버렸다.


천장도, 벽도, 전부 다. 그나마 남은 것은 망령이 앉은 옥좌뿐. 그는 큭큭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하늘.


태양처럼 빛을 발하고 있는 드래곤이 보였다. 마치 수천 명의 성직자라도 태우고 있는 것처럼 밝다. 하지만ㅡ 저토록 강렬한 빛이 가까운데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저 빛이 망령에게는 그리 밝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을 가르며 다가오는, 저 빛은 조금 눈이 부시다 느껴졌다. 정작 저 빛은 신성력의 빛이 아닌, 검게 타오르는 불꽃이었지만. 눈동자를 할퀴는 것만 같은 ‘빛’은 예리하고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왔나.”


중얼거림이 끝난 순간.


검은 혜성이 땅에 떨어졌다. 요란한 비행과는 달리, 착지에는 아무런 소리도 생기지 않았다. 유진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땅에 내려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유진은 잠시 그것을 고민했다.


‘뭘 한 거냐?’


그 질문이 가장 먼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날아오는 중에, 성에서 뛰쳐나오는 괴물들을 보았다. 각각 생김새가 다른 괴물들. 아가로트의 기억에서, 그리고 레헤인야르에서 보았던 누르들.


왜 누르가 여기 있나? 상상이 어렵지는 않았다. 누르는 멸망의 권속. 멸망의 화신이라면, 누르를 불러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러냈다고?


정말로 불러낸 건가? 아까만 해도 느껴졌던 인간의 기척들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전부 죽은 건가? 놈이 죽였나? 아니면…….


머릿속을 떠도는 의문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지금 놈과 해야 할 것은 문답이 아니다.


프로미넌스가 활활 타올랐다.


‘이그니션을 먼저 쓸까.’


전투에 관한 생각이 머릿속의 공백을 채워나갔다.


‘지금의 나라면 이그니션은 15분 정도 지속할 수 있다. 15분 안에 놈을 죽일 수 있나?’


이그니션이 끝나면 반동이 찾아온다. 그 전에 무조건 놈을 죽여야 한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그니션은, 놈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순간에 써야 한다.


‘신검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3번. 처음이건 마지막이건 위력에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놈이 생각하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발검의 적기.


이 일검으로 놈에게 얼마나 통하는지. 얼마나 베어낼 수 있을지를 본다.


유진의 오른손이 가슴으로 올라갔다.


‘이그니션?’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 점은 하멜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뜸 이그니션을 쓰는 것은 하멜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망령은 신검에 대해서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유진이 무엇을 하려는지를 예상할 수가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는 것. 코어를 폭주시키는 이그니션 외에 다른 무엇이 있나?


“……?”


망령이 의문을 느끼는 순간.


유진의 가슴에서 검붉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빌어먹을 환생 479화


하늘. 산소가 희박하고, 구름을 아래에 두며, 대륙과 바다마저 한눈에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위치. 생명이 존재하기 힘들 만큼 아득한 높이에, 제벨라 페이스가 둥실 날고 있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가 제벨라 파크를 떠나, 이만큼 높은 하늘에 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나하마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기 위해서다.


시무인의 바다, 아이리스를 토벌하던 때에는 스칼리아 공주의 몸을 빌려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 억지를 부린다면 전장 한복판에서 구경할 수 있겠지만ㅡ


“이제는 좀 부담스럽네.”


누아르는 와인잔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이리스 토벌대에 슬쩍 끼어들었을 때에는 별로 부담이랄 것이 없었다. 토벌대도 그렇고, 심지어 상대인 아이리스조차도 누아르에게는 대단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ㅡ 인간들이 강해졌다.


아이리스 토벌대에 참전했던 인간들. 카르멘 라이언하트나 오르투스 하이만, 아이빅 슬라드 같은 강자들은 1년 전과 비교해 실력이 월등히 올랐다. 게다가 저 아래의 전장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데스나이트.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마왕도 아닌 주제에 마왕이 된 것처럼 구는 놈. 누아르는 전장에서 격돌 중인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모두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누아르는 굳이 전장에 섞이지 않고, 이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 머물렀다.


이만큼 높은 곳에서는 도시도 구분하기 힘들지만, 누아르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제벨라 페이스의 고성능 렌즈. 거기에 누아르의 마력까지 더해진다면, 아무 위협 없이 쾌적한 관람이 가능했다.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소.”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면에 띄운 화면이 바뀌었다.


제벨라 페이스의 바깥. 시커먼 하늘을 등진 가비드 린드먼이 보였다. 누아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가비드를 보다가,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헬무드의 대공님께서 여기는 웬일이실까?”


“그러는 그대는, 왜 여기에 있는 거요?”


“저만큼 재미난 구경거리를 놓치기 아쉽잖아요. 당신도 그래서 온 것 아닌가요?”


누아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가비드는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대처럼 재미 삼아 보러 온 것이 아니오.”


“그럼?”


누아르의 눈동자가 예리한 빛을 발했다.


“당신의 적이 얼마나 강한지 보러 온 건가요?”


답은 궁리해 볼 것도 없이 노골적이었다.


“……적이라.”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정하거나, 허세를 떨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똑같은 공작이란 것을 떠나, 가비드는 그녀가 이룩한 터무니없는 힘을 존중하고 있다.


“어느새 그렇게 되었군.”


“진즉에 죽여야 했는데. 그런 종류의 후회가 드나 보죠?”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 내가 간과했던 것은, 인간이란 종의 성장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는 것이오.”


유진 라이언하트. 그 한 명만 강해진 것이 아니다. 나이트마치에서 보았던 인간들 모두가 강해졌다. 한 명의 인간이 종 전체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발 도움대가 된 것 같다.


“계기…… 인가.”


유진이 저들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가르친 것은 아니다. 단지, 유진을 알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유진이 얽힌 사건에 함께 한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유진에게 이끌린 것이리라.


유진 라이언하트는 혼자만 강한 것이 아니다. 저 해방군만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이다. 유진과 얽힌 사람들 대부분은 ‘다음’을 바라게 되며, 유진과 자신을 비교해 절망하기보다는 ‘다음’에도 함께 싸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위험하다.


가비드는 말없이 지상을 노려보았다. 나이트마치에서 보았을 적만 하더라도 대륙의 기사단들은 별 볼 일이 없었다. 대장들은 뛰어났지만, 그 뛰어남조차도 인간의 수준에 그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겪어 바뀌는 것은 마족이나 사람이나 똑같다.


기사들뿐만이 아니다. 마법사들. 저들을 감화시킨 것은 세냐 메르데인인가? 가비드는 혀를 차며 세냐를 응시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마나와, 의지에 태어나고 강제되는 법칙들.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가비드지만, 지금의 세냐가 도달한 경지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임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멜키스 엘하이어. 당장 헬무드의 마족들 중, 그녀의 전진을 단독으로 가로막을 수 있는 마족이 있기는 할까.


기사와 전사, 마법사뿐만이 아니다. 성직자들. 마족의 오랜 숙적. 그들도 큰 문제라고 생각됐다.


솔직한 감상을 늘어놓자면, 성직자와 성기사들의 힘은 300년 전 신실한 아니스가 있을 적보다 거대했다. 가히 지금 시대가 성직자들의 최고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대체 왜…… 라이자키아의 딸, 용공녀가 성직자들을 위한 탈 것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수십의 성직자와 성녀를 태우며 날고 있는 용공녀는, 거대한 인공태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빛을 발하고 있다.


“곤란하군.”


가비드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가비드의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의 고민이 뒤섞이고 있었다. 하나는, 지금 당장 전장에 섞여들어서…… 후환을 미리 없애두는 것이다.


멜키스 엘하이어와 다른 대마법사들. 각 기사단의 대장들. 그 정도만 해두어도, 저들의 전력은 절반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저것은 헬무드의 대공다운 고민이다. 저 아래에서 싸우는 인간들은 모두가 헬무드의 적이다. 가비드는 헬무드의 대공으로서, 적들이 헬무드의 확실한 위협이 되기 전에 처단해 두고 싶었다.


다른 고민은ㅡ 헬무드의 대공이 아닌, 유폐의 칼다운 고민이다. 보다 순수하게 말하자면 마족다운 고민이었다. 전쟁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가비드도 똑같다.


전장에서 만나고 싶다. 결코 우습게 볼 수 없게 된 인간의 군대와, 전장에서 격돌하고 싶다.


300년 전에는 그런 전면전을 겪어본 적이 드물었다. 그나마 꼽을 수 있는 것은ㅡ 절망의 베르무트를 필두로 한 결사대가, 지네산맥을 넘어 진군했을 때. 그때 가비드가 끄는 검은 안개와 마군은, 유폐의 마왕성의 코앞인 붉은 평원에서 결사대를 가로막았다.


그 전투는 치열하고 즐거웠다. 언젠가 다시, 그런 전투를 겪어 보고 싶다고 갈망했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냥 유폐의 마왕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때요?”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가비드에게 속삭였다.


이 상황에서 가비드가 할 고민은 결국에야 뻔한 것이다. 칼을 휘두를 것인가, 휘두르지 않을 것인가.


누아르는 기왕이면 후자를 바랐다. 그녀는 당연히 유진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랐고, 유진을 따르는 군대가 바벨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당신이 내게 오는 것은ㅡ 바벨을 오르기 전이겠지만.’


그 생각에 누아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서 더더욱, 유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바라는 것이다. 그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순간. 300년 전부터 품었던 미련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순간.


그 순간. 누아르는 사랑하는 하멜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멜에게 끔찍한 절망을 선사할 것이다.


하멜을 사랑하고 따르는 모두에게도 아득한 상실감과 절망감을 줄 것이다. 결국 최후의 최후에 하멜을 독점하는 것은 누아르가 될 것이고, 세상 모두는 하멜의 죽음에 망가지게 될 것이다.


그건, 정말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황홀한 희열을 주어서.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떨었다.


그래, 결정했다. 만약 가비드가, 당장 아래로 내려가서 남몰래 칼을 휘두르는 재미없는 짓을 벌인다면. 누아르는 전력을 다해 가비드를 가로막을 것이다.


“마왕님의 뜻이라…….”


누아르는 가비드의 속내를 간파했지만, 가비드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당장 고민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


결국 가비드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폐의 마왕은 용사가 마왕성을 오르는 것을 바라고 있다. 언젠가 헬무드의 위협이 될 것이라고? 그런 생각부터가 유폐의 마왕에 대한 불신. 가비드는 머릿속에 남는 미혹을 떨쳐냈다.


대륙이, 인간이 아무리 강해진들. 유폐의 마왕의 앞에서는 모두가 하찮을 뿐. 당대의 마족이 감당하기 버겁다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그 중심의 바벨에는 대마왕이 있다.


“……안에 들여보내 주지는 않을 건가?”


“어머, 무슨 망측한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내 방에, 나와 단둘이 있고 싶다는 거예요?”


누아르가 정색하고 대꾸하자, 가비드도 똑같이 정색했다. 아니, 그는 정색을 넘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저 미친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가비드는 다시 묻지 않고 즉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허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지상을 보던 중, 가비드는 낮은 탄식을 흘렸다.


망령이 점거한 왕성. 그곳에서 괴물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건, 긴 세월을 살아온 마족인 가비드에게도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인간은 결국 인간일 뿐이다. 마왕이나 마족과 계약해 마력을 얻을지라도,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에 전대 유폐의 지팡이였던 에드먼드 코드렛이, 인간을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비원으로 삼았던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저것은ㅡ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망령이 내뿜은 마력에 먹혀,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한 명의 인간에게서 여러 마리의 괴물이 태어났다. 저건 마족도 아니고, 마물도 아니다. 그럼 대체 저건 뭔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위험하다. 까마득한 거리지만, 가비드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가는 괴물들. 저것들은 인간에게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마족에게도 똑같이 위험하다. 이런 생각은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은ㅡ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 마력을 더해 증식이 가능한 건가?’


설마 저런 능력이 있을 줄이야. 가비드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직은 판단하기 이를지도 모르지만, 저 괴물을 양산하는 것에 큰 제약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인간에 마력을 들이붓는 것만으로 여러 마리의 괴물을 증식시킬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망령은 말 그대로 끝이 없는 괴물의 대군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것이 멸망의 마왕이 가진 권능인가? 모르겠다. 가비드는 긴 세월을 살았지만, 멸망의 마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누아르는.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을 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기분은 뭘까. 분명 처음 보는 광경. 처음 보는 괴물들인데…… 이상하게도 과거에 보았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강하다. 저딴 괴물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할 일은 없다. 지금 이렇게 내려다보는 순간에도, 저것들이 ‘위험하다’라는 생각은 있을지언정 목숨의 위기는 느끼지 않고 있다. 저깟 것들이 떼거지로 몰려온들, 코웃음을 치며 일소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왜, 저것들을 본 순간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일까.


……먹먹하다고? 이건 공포가 아니다. 그럼, 지금 느끼는 감정은 대체 뭔가?


치직.


머릿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알지 못하는, 본 적도 없는 무언가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괴물. 내가 알던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ㅡ 어느 순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몸을 던져서.


“……?”


이런 기억은 모른다.


누아르는 즉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후벼팠다.


콰드득! 길게 뻗은 손가락이 두개골을 꿰뚫고 뇌를 헤집었다.


누아르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기억 따위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 기억을 통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뇌를 뭉개서 뒤섞고 있는데도 떠오르는 기억은 멈추지 않았다.


제벨라 페이스의 바깥에 있던 가비드는, 누아르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에 주목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아래로 고정되어 잠시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바로 지금.


유진 라이언하트가 왕궁에 내려왔다. 옥좌에 앉은 망령과 대치했다.


날개처럼 위로 솟은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오른손이, 왼쪽 가슴에 얹혔다.


그 광경을 보았을 때.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심장 부위를 움켜쥐는 저 독특한 자세는, 가비드로 하여금 300년 전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몰살의…….’


하지만 그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유진의 왼쪽 가슴에서 검붉은 빛이 뽑혔다. 저 빛은 방금 가비드가 떠올렸던, 몰살의 하멜의 기술과는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가비드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허리춤의 글로리를 붙잡았다. 까마득한 거리. 하지만 눈동자에 새겨진 빛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가비드가 가진 본능을 끌어냈다.


누아르는 저 빛을 본 적이 있다. 광란의 마왕이 되어버린 아이리스의 목숨을 끊었던 빛이 바로 저것이다.


그때, 저 빛을 보면서…… 놀랍다는 생각을 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에서, 월광검의 달빛과, 백염식의 불꽃과, 성검의 빛과는 다른 힘을 느꼈다.


처음 보았을 때, 누아르는 저 빛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아르는 여전히 저 빛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억 어딘가에서 ‘알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싶지 않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스스로 머리를 후벼 파면서, 누아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의 부상(浮上)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저것을 알아.’


결국 누아르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 * *


가슴에서 뽑아낸 빛은 즉시 검이 되었다. 고대의 전쟁신, 아가로트의 신검. 그리고 용사로 숭배되는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검.


발검과 즉시 둘 사이에 거리가 소멸했다. 세냐의 절대률과 마찬가지로, 유진의 신검에는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법칙이 부여되었다.


빛의 검이 다가온다. 파고들어 온다. 이 거리에서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망령이 세상의 끝까지 도망칠지라도, 저 검붉은 검광(劍光)은 시공마저 뛰어넘어 망령을 베어내고 말 것이다. 망령이 가진 기억으로는 저 검이 가진 기적을 이해할 수 없으나, 멸망의 화신이 되어 얻은 직관은 신검의 터무니없는 힘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쪽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둘이다. 공격으로 대응하든가, 방어하든가.


‘막을 수 있나?’


떠오르는 생각에 긴 고민은 할 수 없었다. 망령은 즉시 검을 쥐어, 정면에서 베어오는 신검을 가로막았다.


부딪치는 순간.


아니, 그 직전에 깨달았다.


‘부러진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망령이 만든 검은 신검을 가로막지 못했다. 마력이 베이고 흩어졌다. 신검의 빛이 망령의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몸이 베이면서, 망령은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떠올렸다.


‘나는 이 검을 안다.’


빌어먹을 환생 480화


불꽃


뜬금없게도 베르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짜 기억 속에 존재하는 모습이 아닌, 직접 보았던 모습.


용사, 무신, 올마스터, 위대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 화려한 수식어들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초췌하고 마모되어, 셀 수 없이 많은 사슬에 묶여 홀로 앉아 있던 모습.


베르무트가 앉아 있던 장소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멸망의 화신이 된 망령조차도, 베르무트의 소재는 추측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멸망의 신전과 연결된 곳. 어쩌면 멸망의 마왕이 봉인된 곳.


거대한.


흉터나, 칼자국처럼 보이는…… 거대한 흔적이 있는 곳. 베르무트는 바로 그 흔적 위에 앉아 있었지만, 그런 흔적으로 장소를 특정하는 것은 힘들다.


그 흔적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문은 몇 번 가졌지만 긴 고민까지는 하지 않았다. 고민한들 답을 깨우칠 수 있는 내용도 아니거니와, 베르무트 본인은 절대로 만남을 원치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찾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다.’


하멜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생각했고, 의문은 억지로 잠재웠다.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고, 찾아 헤맸다.


설마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잠재운 의문의 답을 얻게 될 줄이야.


‘검.’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이 정답이었다. 그 흔적은 검에 의한 것이다. 검을 휘둘러서 베고 남은 상흔. 당연하단 듯이 깨달아 버렸다.


그 상흔을 남긴 검은, 바로 지금 유진이 휘두른 검이다. 금속으로 만든 검이 아닌, 신력으로 벼려내서 존재와 혼에서 뽑아내는.


‘신검(神劍).’


마력의 검은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뒤늦게 방어를 떠올려 마력을 부풀렸지만, 그것으로도 가로막지 못했다. 검붉은 선이 망령의 몸에 그어졌다. 선이 꾸물거리는가 싶더니 마구잡이로 날뛰고, 그렇게 모든 것이 파괴당했다.


육체가 소멸했다. 망령의 의지는 소멸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만큼 신검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허나 육체가 소멸했어도, 망령의 혼이라 할 부분은 소멸하지 않고 남았다.


콰르르르르! 부풀었던 신력이 다시 선이 되어 사라졌다. 유진은 숨을 내뱉으며 신검을 거두었다.


한 번 휘둘렀을 뿐. 그것으로 망령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하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유진 또한 그 사실을 직감했다.


‘남아 있어.’


신검은 아직 두 번은 더 휘두를 수 있다. 연속해 휘둘러서 남은 혼을 말소할 수 있나? 유진도 가능하다면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끝내고 싶었다. 왕성에서 뛰쳐 나간 누르의 무리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오싹거림이 올라왔다. 유진은 신검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두 번 더 휘둘러서 치명상을 줄 수는 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상대는 무한한 마력을 가진 마왕. 아니, 어쩌면 마왕보다 지독한 상대. 신검은 최후를 확실하게 결정짓기 위한 공격으로 남겨야 한다.


유진의 손이 신검을 놓았다. 즉시 신력이 흩어져 되돌아왔다.


푸확! 프로미넌스가 증폭되었다. 유사 코어를 통한 이그니션. 시커먼 불꽃에 잠기며 유진은 빠르게 생각했다.


‘이그니션을 쓸까? 아니, 아냐.’


아직은 이르다. 신검과 마찬가지로 이그니션은 승부를 결정지을 때 써야 한다. 어지간한 상대라면…… 프로미넌스의 이그니션만으로 충분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앞으로 유진이 죽이겠다고 결심한 상대들은, ‘어지간한’의 범주에 들지 않는 진짜배기 괴물들뿐이다.


망령도 마찬가지다. 유진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신검으로 베어 죽였는데. 놈은ㅡ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를 새로이 구성했다.


“…….”


나타난 망령은, 신검에 베이기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가면까지 똑같이 쓰고 있었다. 타격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신검의 위력은 틀림없이 망령을 파고들었다.


‘계속 베이면 나라도 죽는다.’


동시에 다른 생각을 했다.


저 검의 정체. 유진의 정체. 하멜의 정체. 모든 것을 연결하는 머나먼 과거. 그리고, 베르무트가 앉은 장소. 그곳에 남은 커다란 상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런가.”


망령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얼굴에 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베이는 순간에 깨달은 것들.


멸망의 마력이 쏟아져나왔다. 마력은 순식간에 검이 되었고, 망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시선으로는 쫓을 수 없다. 하지만 유진의 신성과 직관이 망령의 움직임을 읽었다.


발검해낸 빛살. 휘황한 빛이 마검을 가로막았다. 신성력을 집중시킨 성검은 마검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유진 님.]


[하멜.]


두 성녀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늘 높은 곳, 라이미르아의 몸체가 더욱 환한 빛을 발했다. 끝 모를만큼 거대한 신성력이 유진에게 흘러들어왔다.


[보조하겠습니다.]


성녀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었다. 성검은 그 어느 때보다 눈 부신 빛을 발했다. 단순히 환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지금 성검에 깃든 빛은, 월광검에도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베르무트가 쥐었을 때와 달라.’


300년 전. 베르무트도 성검을 쥐었었다. 놈은 초반에는 성검을 애용했고, 살육의 마왕을 죽이는데도 성검의 덕을 보았다. 하지만 월광검을 손에 넣은 후부터는, 성검은 거의 전투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성검도 충분히 활약할 만한 검이기는 했으나, 정체 모를 월광검의 힘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손에 쥐어진 성검은ㅡ 300년 전 베르무트의 손에 쥐었을 때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성녀와 성직자들의 신성력이 더해져서? 그 이유도 없지는 않겠지만, 유진은 다른 것을 느꼈다.


‘차별?’


의중을 알 수 없는 빛의 신은, 아무래도 베르무트보다 유진을 훨씬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꽈앙! 성검이 마검을 완전히 밀어냈다. 유진의 움직임이 빛을 이끌었다.


망령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뒤집어쓴 가면. 눈동자는 보이고 있다.


당황이나 놀람 없이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반대로 유진의 눈동자는 불꽃과 격정으로 타올랐다. 명확한 살의와 증오. 눈부신 성검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가득 담겼다.


그 순간. 유진과 망령은 기묘하게도 똑같이 움직였다. 마치 거울 앞에 선 것 같았다.


검을 쥔 자세. 유진의 입술이 비틀렸다. 당연하게도, 유진은 놈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망령도 유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서로의 검이 움직였다. 두 개의 수라광살이 시작됐다. 미치광이 같은 난무가 서로 다른 색의 검광을 내뿜었다. 신성한 빛과 불길한 마력이 서로 뒤엉켰다.


충돌에 공기가 터져나가고 튀어 나간 참격에 지면이 소멸했다. 둘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시작하고 몇 호흡, 그 순간까지 둘의 수라광살은 거울로 비춘 것처럼 똑같았다.


한순간에 달라졌다. 망령의 몸이 뒤로 밀렸다. 대등하게 충돌하던 마검이 크게 요동쳤다.


대등하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망령의 검은 바벨에서 죽은 하멜을 근본으로 두고 있다.


멸망의 마력과 섞이며, 시간 감각이 모호해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기술에 몰두했다. 멸망의 화신이 되면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직감과 직관이 강화되었다. 그 모든 것이 더해진 검기는 모론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나졌다.


반면에 유진은 어떤가. 그는 20년 넘는 시간을 유진 라이언하트로 살아왔다. 검을 쥘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아니, 검을 쥘 수 없던 갓난아기 시절조차도 머릿속에서는 검을 떠올렸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할 것인지를 몰두했다.


강적들을 넘어왔다. 쓰러트려야 할 강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유진은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며 필요한 준비를 해왔다. 수련을 게을리한 적은 없다. 검을 더 휘둘러서 얻을 것이 없는 수준이 되었음에도 굳이 검을 휘둘렀다.


암실에서, 이상적인 ‘나’를 보았다. 암실마저 극복했다. 당시에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지금 돌이켜보면 하찮게 느껴질 정도다.


그렇기에.


유진의 검은 절대로 망령의 검과 대등할 수가 없다. 대등해서는 안 된다. 그나마 놈이 받아칠 수 있던 것은 화신에 걸맞은 직감과 직관. 그리고 강대한 마력 때문이다.


그것은 빈틈없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놈에게 마왕의 직감과 직관이 있다면, 유진에게는 신성(神性)이 있다. 언제나 최선의 전투를 만들어내는 전쟁신의 성질. 유진의 눈이 더욱 찬란한 안광을 발했다.


꽈아앙! 망령의 수라광살이 무너졌다. 검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비집고 들어가 끊어버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신성력이 마검을 완전히 잘라버렸다.


검은 불꽃을 몸에 두르고, 찬란한 성검을 휘둘렀다. 빛이 긋고 나간 선에 검은 불꽃이 뒤따랐다.


꽈과광! 다시 형성된 마검이 가로막으려 했지만, 검과 검이 닿는 순간, 성검이 마검의 방향을 억지로 비틀었다.


‘패링.’


설마 이 순간에 끼어들 줄이야.


스치는 것만으로, 아니, 스칠 필요도 없이 여파만으로 산 하나는 날려버릴 힘이 담긴 공격들. 그것을 집중하고 집중하여 상대에게 꽂아 넣는 초월격의 전투.


한데, 힘이 폭사하기도 전에 정확하게 이쪽의 공격을 뒤틀었다.


‘나는 못 해.’


망령은 빠르게 인정했다.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고가 가속됐다. 직관과 직감이 동시에 답을 말했다.


패링 이후에 찾아올 공격.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는 동시에 찾아오는 뇌광.


‘라이트닝 카운터.’


그런 이름이었지. 알지만, 대응할 수는 없었다. 라이트닝 카운터는 알아도 대응할 수 없는 최속의 공격이다. 게다가 저 망토는ㅡ 유진의 기예에 최적화되어 있다.


월광검.


멸망의 빛이 번개가 되었다. 소리마저 아득히 따돌리며 쏘아진 일격이 망령의 몸을 꿰뚫었다.


똑같은 멸망의 마력, 일 텐데. 섞이지 않았다. 오히려 닿는 순간에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이유는 알고 있다. 저 검의 달빛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너무 많은 것이 섞여 있다. 저, 검은. 이제는 멸망의 검이 아니라 유진의 검이 되었다.


ㅡ콰르르르! 뒤늦게 찾아온 소리. 수백 줄기로 흩어진 월광이 회오리를 만들었다. 이 기술 역시 망령은 알고 있다. 사이클론에서 연계되는 무한연옥. 빨려 들어간 순간 수백 개의 참격이 전신을 도륙 낼 것이다.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는 와중, 마검이 마력을 내뿜었다. 똑같은 기술. 마력이 만들어내는 참격의 회오리가, 유진의 무한연옥을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려고 했다.


실패했다. 마력을 더 증폭시켜 보았지만, 결국 무한연옥이 완성되었다. 잡아먹히는 팔을 포기하고 뒤로 발을 끈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역수로 쥔 성검이 땅을 긁으며 위로 솟구쳤다.


‘드래곤버스트.’


빛이 번쩍하고 터졌다. 망령의 몸이 둘로 갈라졌다. 처음부터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해버리니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의 완성도에서 차이가 너무 커.’


망령도 나름대로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간극이 너무나도 넓다. 망령은 갈라진 곳에서부터 재가 되어 사라지는 몸을 수습하며 뒤로 뛰어올랐다.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면 무조건 내가 진다.’


이 조건에서 망령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지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멸망의 화신인 그의 마력은 끝이 없으며, 불사력은 마왕 이상이다.


하지만.


‘절대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성검은 마왕에게조차 닿는다. 유진의 것으로 변질된 월광검은 무한한 마왕의 마력마저 깎아낸다. 그리고, 전쟁신의, 용사의 신검은ㅡ 마왕의 불사력마저도 끊어낸다.


확실히 알았다.


전쟁신 아가로트. 우둔한 하멜. 그리고,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


몇 번의 전생을 거치며, 저물어버린 시대에서부터 전승된 것.


그 모든 것은,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를 마왕살해에 최적화시켰다. 지금의 유진은 전생의 그 누구보다도 마왕에 대한 살의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마왕살해에 특화시켰다.


지금의 유진이라면, 과거에 존재하고 죽었던 그 어떤 마왕조차도 능히 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존재하고 죽었던.


“부족하다.”


망령이 내뱉었다. 과거의 마왕을 몇 번이나 죽이건, 그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과거에 단 한 번도 살해된 적이 없는 마왕을 죽이는 것이다.


운명의 반복을 지켜보며 인과를 엮은, 간수이자 죄인이며 마왕인 자.


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시켜 온, 같은 마왕의 이해조차 아득히 벗어난 초상현상.


“과연, 넌 강하다.”


육체의 붕괴가 멈췄다.


“하지만 이 정도의 강함으로는 안 돼.”


유폐의 마왕을 통해 많은 진실을 알았다. 그 고약하기 짝이 없는 마왕은, 운명의 반복에 망령을 변수로 써보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너란 존재를 인정하마.


-네가 특별하고, 다음에는 존재하지 않을, 지금에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란 것을.


이해했다. 혼란스럽지만, 억지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망령은, ‘하멜’을 위한 답을 갈구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유폐의 마왕의 의지가 되기 전, 망령의 의지가 되기 전. 가장 먼저 의지로 바란 자가 있음을.


베르무트.


“부족해.”


망령의 답은 바뀌지 않는다.


나를 죽일 수 없다면.


나보다 약하다면.


이번 세계는 여기서 끝내는 것이 옳다.


망령의 기색이 바뀌었다. 마구잡이로 일렁거리던 멸망의 마력이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이 뭔 개소리를 하는 것인가 싶었던 유진은, 마력의 형상을 보고서 움직임을 멈췄다.


마력이 불꽃처럼 일렁거린다.


서서히 불길이 강해진다.


마력이, 회색의 불꽃이 되었다.


“……개새끼가.”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회색 불꽃이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렸다.


빌어먹을 환생 481화


휘날리는 사자의 갈기. 회색의 불꽃.


그 광경에 유진은 격렬하고 거대한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놈이 지껄이던 말까지 포함해서, 저 모든 것이 조롱과 기만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직전까지는 하멜의 기술을 제 나름껏 개량해서 쓰더니, 처발리고 나서는 백염식을 쓴다고?


“너 씨X 뭐 하는…….”


분이 치솟아 내뱉던 말. 끝까지 잇지 못했다. 불꽃이 일렁거리기 전에 느꼈듯, 망령의 기색은 바뀌었다. 당연히 망령은 조롱과 기만을 위해 백염식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망령이 판단하기에, 백염식이야말로 전력을 끌어내기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순식간에 가슴에 열 개의 별이 형성되었다. 나뉘어 열린 문을 통해서 멸망의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마력은 백염식의 방식으로 운용되었고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 광경에 유진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다. 단순히 형태만 흉내 낸 것이 아닌, 마력을 마나처럼 사용해서 완벽하게 재현해낸 백염식.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의문이 튀어나왔다. 망령의 가슴 안에 나타난 10개의 별은 유진도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다.


10성의 백염식. 라이언하트의 역사상 베르무트 외에 10성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경지를 떠나서 놈이 어떻게 백염식을 쓸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멜의 기술을 쓰는 것? 그거야 당연한 것이다. 차라리 놈이 사용한 것이 방계의 적염식이라면, 그래, 그것은 납득할 수 있다. 괴물로 되살아난 헥토르 라이언하트. 그 새끼한테 주워배울 수도 있었을 테니.


하지만 지금 망령이 사용한 것은 적염식이 아닌 백염식이다. 그것도 라이언하트 본가의 누구보다 완성된 백염식.


“누구냐.”


유진은 이를 악물고서 내뱉었다.


“누가, 너한테 그걸 알려준 거냐.”


“이걸 알려줬다고 해야 할지.”


망령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마검을 들었다. 올곧게 뻗은 마검이 유진에게 향했다. 이어지는 말은 없다. 망령은 저 질문에 지금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유진도 그 뜻을 알았다. 이곳은 전장이다. 용사와 마왕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검과 검이 서로에게 향하고 있다. 먼 뒤쪽에서는, 용사를 따르는 군세가 마왕의 괴물들과 맞서고 있다.


300년 전부터 이 상황에서 용사와 마왕이 하는 것은 똑같았다. 이미 멸망해 버린 신화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너무 강한 의문에 의해 잠시 잊었던 사실들을 다시금 자각했다.


“그래.”


지금 느껴야 할 감정은 의문 따위가 아니다. 망령이 백염식을 쓸 줄 아는 이유? 그건, 저 새끼를 죽이기 전에 다시 물어보면 된다.


두 개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백염식에서 시작해서 백염식이 아니게 된, 유진의 검은 불꽃. 그리고 멸망의 마력으로 빚어낸 회색 불꽃. 각자의 몸을 집어삼킨 불꽃은 높은 하늘까지 솟구치며 공간을 흔들었다.


유진이 먼저 움직였다. 시커먼 프로미넌스는 꼬리조차 만들지 못했다. 거듭해서 펼쳐진 도약. 눈동자로 쫓는 것은 불가능하고, 반복한 도약은 감각마저 기만한다.


그럴 텐데도 망령은 반응했다. 10성의 백염식은 망령에게 이전과는 다른 전능감을 주었다. 육체를 떠나 전신에 두른 불꽃 하나하나에 감각이 깃든 것만 같다.


육체가 즉시 반응했다. 쩌엉! 사각에서 찍어오는 성검을 먼저 받아냈다. 충돌 순간에 터지는 빛이 마력과 눈동자를 통째로 불태우려 했지만, 거세게 반발하는 마력의 불꽃은 성검의 빛마저 밀어냈다.


받아내야 할 것은 성검뿐만이 아니다. 월광검이 반대 방향에서 덮쳐오고 있다. 망령의 불꽃이 부풀었다.


검? 아니다. 부푼 불꽃에서 태어난 것은 이질적인 마법.


동시에 익숙한 마법.


‘베르무트의.’


불꽃이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였다. 갈퀴손처럼 만들어진 불꽃이 월광검을 받아냈다.


단순한 마력 덩어리나 마법이라면 월광검을 가로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저 마력은 백염식이고, 마법은 베르무트가 사용하던 이질적인 마법.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지만 유효하다 할 만큼의 상쇄는 가능했다.


망령은 비틀거림 없이 물러섰다. 머릿속에서, 하멜의 것이 아닌, 나의 것도 아닌 정보가 퍼지고 있다.


마력이 흘러오는 문. 그 너머의 누군가가…… 마력뿐만 아니라 정보를 흘려내고 있다.


‘너구나.’


베르무트는 망령을 죽이지 않았다. 그 진의까지는 알 수 없지만, 망령의 존재를 증오하면서도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망령의 존재를 용납하고 힘을 주었다.


신검이 베어낸 흔적 위에 앉아 있던 베르무트는, 처음 망령을 보았을 때ㅡ 강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마지막에는 적의 대신에 연민을 보였다.


‘이건 내 선택인가?’


아멜리아 머윈에 의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신이 하멜이라고 착각하고 몇 년을 살았다.


라비스타에 숨어들어서 멸망의 마력과 뒤섞였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니, 죽는 것이 당연한 처지였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베르무트가ㅡ 망령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그로 인해 망령은, 멸망의 화신이 되었다.


유폐의 마왕이 알고 있는 진실을 들었다.


“결정은 내가 했어.”


망령은 작게 중얼거렸다.


아멜리아 머윈의 주박에서 벗어났다. 내가 하멜이 아닌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박을 벗기는 것을 도운 것도, 힘을 준 것도 베르무트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그, 비참해진 영웅은 망령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다. 망령의 질문에 그 무엇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도 마찬가지다. 놈이 원했던 것은 망령이 무엇을 결정하는가. 무엇을 하는가였다.


다른 누군가가 이리 결정하도록 의도했을지라도.


망령은, 자신이 내린 결정이야말로 옳다고 믿었다.


ㅡ그렇다면 이 결정은 하멜다운 것인가?


눈동자를 들었다. 뒤로 조금 밀려났던 유진이 다시금 덮쳐오고 있다. 양손에 각자 쥔 성검과 월광검이 교차되는 것이 보였다.


금색 눈동자에 더 이상 살기는 보이지 않는다. 살의마저 아득히 초월한, 승리를 위한 집중은 오히려 감정의 공백을 낳았다. 잡스러운 감정에 판단이 흐려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가 하멜다우며 유진다운 것처럼.


‘나다운 것이지.’


질 생각은 없다. 망령은 간절하게 승리를 바랐다.


유진이 말했듯 마왕다운 승리를 바랐다.


참격이 덮쳐오는 순간에 망령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징조 없이 마법이 발현되었다. 공간이 뒤집히고 망령과 유진의 위치가 바뀌었다. 갑작스레 다른 곳에 서게 됐지만,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이어 휘둘렀다. 요동치며 흐른 참격이 망령이 선 곳으로 이어졌다.


거기서 다시 공간이 벌어졌다. 둘 사이에 있을 리가 없는 거리가 나타났다. 텅 비어있는 공허. 유진의 참격은 공허를 가득 채우고 지워 버렸지만, 망령에게는 닿지 않았다.


벌어졌던 거리가 소멸했다. 공간과 공간이 다시 달라붙었다. 가속과정 없이 유진과 망령이 앞에 섰다. 유진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월광검을 찔렀다. 급습하는 달빛, 망령의 불꽃이 출렁거렸다.


공간에 겹겹이 층이 쌓였다. 달빛은 폭사되기 전에 회색 장막들에 봉쇄되었다. 그 위에 망령의 검이 떨어졌다.


꽈직! 월광검이 허무히 아래로 처박혔다. 파묻혀야 할 땅은 함께 소멸해 버렸지만, 어마어마한 무게가 월광검을 붙들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무겁다.’


층층이 쌓이며 뭉개진 공간. 이런 마법은 알고 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놈의 별명은 무신이자 올마스터. 전사로서도 최강이었지만 마법사로도 최강이던 것이 놈이다. 마경을 떠돌던 시절 베르무트의 마법을 두고서 세냐를 꽤 많이 놀려먹을 때마다, 세냐는 전문 분야가 다른 것이라며 화를 내곤 했었다.


그 세냐마저 저렇게 말할 정도로 베르무트의 마법은 대단했다. 세냐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마법들에 통달했다면, 베르무트가 특화된 것은 바로 공간 마법이다.


흑사자성의 무덤. 라이언하트 본가의 지맥과 암실. 레헤인야르의 이면까지. 모두가 베르무트의 공간 마법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우두둑. 월광검을 잡은 손에 핏줄이 가득 돋았다. 수십 수백 개의 공간에 짓눌리면서도 월광검은 빛을 내뿜었다. 월광과 불꽃이 섞이며 중첩되고, 공검이 완성되었다.


짓누르는 것들을 일검에 양단했다. 신성에 의한 직관이 유진의 몸을 이끌었다. 인지할 수 없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그 모든 것의 대응이 유진의 몸을 이끌었다.


성검과 월광검. 두 자루의 검을 공검이 뒤덮었다. 한순간 유진에게 집중된 힘은 망령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붙잡으려고 했던 마법이 완성되기도 전에 소멸했다.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불꽃째로 잡아먹힌다. 망령은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놓치지 않았다. 유진은 망령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랐다.


회색과 검은색. 두 개의 빛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몇 번인가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두 색의 비행은 잠깐 동안 이뤄졌지만, 정작 둘에게 있어서는 잠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늦거나, 놓치거나, 실수라고도 할 수 없을 과정이 섞인다면 당해 버린다.


뇌가 버티지 못할 정도의 긴장. 유진은 코안쪽에서 피의 냄새를 느꼈다. 인간이 마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육체의 피로, 나약함. 물론 지금의 유진은 같은 인간이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인하지만, 정신의 피로만큼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혼자 싸운다면 피로와 자잘한 부상이 누적되어 쓰러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높은 하늘에는 빛이 밝다. 성녀들과 성직자들이 오직 유진만을 위해 기도를 읊고 있다.


느껴지던 피의 냄새가 사라졌다. 지끈거리는 머리에서 통증이 사라졌다. 완전히 흘려내지 못한 충격, 너덜거리던 내장이 멀쩡해졌다.


공검이 맺힌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켰다. 공검과 공검이 부딪쳤다. 각 검의 공검은 5중첩. 이 이상의 중첩은 유진에게도 불가능하지만, 두 개의 공검을 합일시켰다.


그 힘은 순수한 인간의 정신만으로 감당하기 힘들다. 유진의 망토 안에서 아카샤가 빛을 발했다. 메르가 직접 아카샤를 쥐었다. 아카샤의 권능에 메르까지 붙은 보조연산. 유사 코어의 역할을 하는 프로미넌스마저 폭주하며 힘을 끌어냈다.


검들을 머리 위로 들었다. 프로미넌스도 검과 함께 위로 치솟았다. 검은 불꽃의 외날개가 성검, 월광검과 하나가 되었다. 이 힘은 유진도 오랫동안 붙들 수가 없다. 통제의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자칫하다가는 힘에 짓눌려 뭉개질 것이다.


뿌리치기 위해 날던 망령은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아래에 있는 것은 왕궁과 텅 비어버린 도시. 해방군이 진군해 온 곳은 먼 뒤쪽.


ㅡ의미가 있나? 저만한 힘이 내리 찍힌다면, 하우리아뿐만이 아니라 나하마 전체가 소멸해 버릴 텐데.


‘아니, 아니야.’


그러한 생각 자체가 어설프다. 망령은 직감적으로 저 ‘검’이 무엇을 일으킬지를 알았다. 저건 검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베는 것이 아니라 잡아먹어 버린다. 받아내어 상쇄하지 못한다면 즉시 잡아 먹히고 함께 소멸해 버린다.


힘은 결코 다르게 흐르지 않는다. 나하마 전체를 소멸시킨다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 거대한 나라를 소멸시킬 만한 힘은, 오직 망령에게만 집중된다.


터무니없을 만큼 정교한, 아니, 그런 영역을 떠나 기적이나 신위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저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전쟁신의 신성인가? 아니면 빛의 신의 애호인가?


‘전부 다.’


무엇 하나 부족했다면 이 정도의 힘은 다룰 수 없다. 아카샤와 메르마저도 이 힘을 통제하는 것에 전력을 보태고 있다. 유진은 빠득 이를 악물고서 검을 내리찍었다.


이건 결코 신검이 아니다. 하지만 신검과 다를지라도 비견하기 충분한 힘이 실렸다.


망령은 즉시 검을 향해 날아들었다. 저 검은 기적의 영역에 도달해 있다.


기적은 이치로 헤아릴 수 없는 힘. 신력으로 펼치는 것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빚어낸 기적. 필중(必中)의 기적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 해야 할 것은 필중의 기적에서 필살(必殺)을 부정하는 것.


마력으로 이뤄낸 백염식. 10개의 별이 회전하며 마력을 쏟아냈다. 단순 무한량의 마력이 아니다. 무한량을 정교하게 제련하여 불꽃으로 태웠다.


부족하다.


하멜에게, 유진에게 말했다. 그리고 망령 자신에게도 되뇌었다. 이것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하다. 시련이 되고 싶다면 보다 강해야 한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존재여야 한다.


멸망의 별이 빛났다. 그 순간에 망령은 진정한 의미에서 멸망의 화신에 걸맞았다. 10개의 별에서 쏟아져 나온 마력이 검을 만들었다. 그 검은 이전처럼 불길한 회색에 그치지 않았다. 온갖 색이 뒤섞인다. 형용할 수 없는 색의 덩어리가 검처럼 뻗어나갔다.


유진은.


오래전 보았던 멸망의 마왕을 떠올렸다. 보는 것만으로 정신을 미치게 할 것만 같던 존재.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색이 뒤섞인 것만 같은 존재. 하멜이, 아가로트가 보았던ㅡ


‘달라.’


저것에서 멸망의 마왕을 느꼈다. 아가로트도, 하멜도, 멸망의 마왕을 보고서 두려움을 느꼈다.


도망치고 싶다. 공포에서 아가로트가 도망치지 않은 것은, 지켜야 할 신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내가 도망쳐 버리면, 멸망의 마왕이 세상 전부를 집어삼키리란 직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가로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신군들을 향해 죽음을 명령하며 선두를 달려 나갔다.


도망치고 싶다. 하멜은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베르무트와, 모두와, 함께 도망쳤다.


그 선택은 옳았다. 그 순간에는 누구도 멸망의 마왕을 막을 수 없었으며, 굳이 막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선택 자체는 옳았을지라도 하멜은 굴욕감에 더욱 괴로워했다. 그 후로 멸망의 마왕은 하멜과 동료들에게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지금은.


도망치고 싶나? 아니다.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아가로트가 느꼈던 사명감은 없다. 하멜이 느꼈던 공포는 없다. 지금 유진 라이언하트가 느끼는 것은.


분노와 살의.


유진의 검과, 멸망의 검이 부딪쳤다. 충돌에 소리는 따르지 않았다. 대신에 하우리아 상공에서 빛이 수십 번 점멸했다. 마치 낮과 밤이 순식간에 교차되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에도 유진과 망령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성검과 월광검이 빛을 잃었다. 너무 많은 힘을 한 번에 쏟아냈기 때문이리라.


유진은 미련을 갖지 않고 즉시 검을 망토 안에 던져넣었다. 조금 떨어진 하늘. 아니, 이곳이 하늘이 맞기는 한가? 그딴 고민은 집어치웠다.


망령의 모습이 보였다. 놈이 휘두른 멸망의 검 역시 방금의 충돌로 소멸했다. 하지만, 놈이 끌어냈던 ‘멸망’은 백염식에 섞였다. 회색의 불꽃이 이제는 온갖 색이 뒤섞인 어지러운 불꽃이 되었다.


“이 개새끼.”


유진은 언제나처럼 용사답지 않은 욕설을 내뱉었다.


“너 이리 와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진이 먼저 망령에게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환생 482화


대로에서의 시가전. 아멜리아 머윈이 제압당하고 리치들은 몰살당했다. 그 말은 즉, 언데드의 증식을 경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언데드들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마력은 남아 있어 기동하고 있지만, 더는 강화되지도 않고 고등한 명령을 수행할 수도 없다. 그쯤 되면 단순한 고기방패에 지나지 않게 되어, 해방군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문제라고 할 것은 라비스타의 마족들. 그들은 대부분이 고위 마족이지만, 해방군에서도 맞상대할 강자는 충분히 많았다. 기사단의 단장들. 대마법사들. 전사들. 용병단장들.


특히 오메가 포스 상태로 날뛰는 멜키스는, 그 거대한 체구 때문에 적들의 이목을 대거 끌고 있었다. 게다가 휘두르는 힘도 독보적이라고 할 만큼 강한데다, 몇 번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언데드 군단을 휩쓸어 버리니, 고위 마족들 상당수가 멜키스에게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오메가 파이어 스톰!”


쉴 새 없이 적들이 몰려왔지만, 멜키스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더 많은 강적과 더 많은 격렬한 전투를 갈망했다. 그만큼 지금의 멜키스는 힘이 넘치는 상태였다.


바람! 불꽃! 번개! 땅!


정령왕 네 명의 힘이 멜키스에게 집중되어 있다. 거기에 백색 마탑 정령술사들 전원이 멜키스의 뒤를 따라붙으며 정령들의 힘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니온 포스를 넘어선 오메가 포스. 네 명의 정령왕의 힘에 온갖 정령들의 힘까지 더해지니, 지금 멜키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연재해 이상이다.


고위 마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리던 하르페우론이 멜키스의 일격에 빈사 상태가 되었었다. 지금 멜키스에게 덤벼드는 마족들 대부분이 하르페우론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인피니트 포스와 오메가 포스 사이에는 마족들 이상의 격차가 존재했다.


“약해! 약하다고!”


멜키스는 오만한 발길질과 주먹질을 뽐내며 외쳤다.


“북벌! 오직 북벌만이 내 가슴을 뛰게 할 것이야!”


정교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마추어의 몸짓. 그렇지만 실린 힘은 끔찍하게도 파괴적이라, 대부분의 마족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그래서 마족들은 필사적으로 멜키스의 공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폭풍이 나를 부른다!”


멜키스가 꽥 고함을 질렀다. 이 모든 외침은 오늘에서야 하나가 된 템페스트를 위한 외침이었다.


템페스트가 북진과 북벌을 바라는 것은 멜키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세한 연유는 모르지만, 템페스트가 북진과 북벌을 바란다면 얼마든지 어울려 줄 수 있다.


“사람이 개미처럼 보이는구나!”


그만큼 지금의 멜키스는 거대했다.


지금이라면, 그래, 지금의 나라면. 저 현명한 세냐보다도 강할…….


“…….”


멜키스는 엄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리 멀지 않은 하늘. 혼자만의 은하를 부유하는 세냐의 모습이 보였다. 오메가 포스를 손에 넣은 지금이 오히려 예전보다 세냐의 힘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우리 언니야.”


멜키스는 즉시 태세를 바꾸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세냐는 모든 전장에 간섭하고 있다. 사람 한 명 한 명을 확실하게 구분하고서 힘을 보태고 있다는 말이다. 세냐의 은하에서 흘러나오는 별들은 상황에 알맞은 마법으로 바뀌어 전장의 흐름을 유도하고 있다.


세상 어느 마법사가 저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대마법사가 전장을 폭격하고 승기를 가져오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모두를 신경 쓰며 마법으로 보조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돌아가면 진지하게 무술이나 배워야겠어.’


멜키스는 자신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남들은 엉성하다 뭐다 말을 하지만, 어찌 됐든 때려 맞추기면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 앞에서 날뛰어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왕 주먹과 발길질을 할 것,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적의 증원이 옵니다.]


[마물처럼 보이지만 마물이 아닌 괴물들입니다. 부디 조심히 상대해 주십시오.]


상공에서의 태양에서 신탁처럼 목소리가 내려왔다. 성녀의 목소리. 먼저 들은 후방의 신관들이 즉시 아군 전원에게 알렸다.


이윽고 비행대가 적의 증원을 포착했다. 그건ㅡ 말 그대로, 괴물처럼 보였다. 마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물은 아니다. 그 묘한 차이는 정확히 형언할 수 없는 본능적인 것이다.


흉측하고 불길한 괴물들. 덩치가 적은 것도 아니다. 제일 작은 무리의 괴물들도 어지간한 오우거보다 덩치가 클 정도다. 두 발로 뛰는 놈도 있고, 네 발로 뛰는 놈도 있고, 벌레처럼 기는 놈도 있다. 각자 다르게 생긴 날개를 펼치고서 하늘을 나는 놈들도 있다.


“저게 뭐야?”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 마족들을 향해 이리저리 손을 휘두르던 멜키스도 경악한 얼굴로 앞을 보았다. 빠르게 다가오는 괴물들은 그 숫자만 해도 1,000마리는 훌쩍 넘어 보였다.


“증원군이라며!”


멜키스는 기겁하며 외쳤다. 괴물들은 아군인 언데드의 후미부터 뭉개고 터트리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괴물들에게 적과 아군을 구분할 만한 이성은 없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증원에 당황한 것은, 필사적으로 멜키스를 붙들고 있던 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언데드를 뭉개며 다가오는 괴물들에게 경악하면서, 그와 동시에 이유 모를 그리운 기분을 느꼈다. 라비스타의 마족들은 누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저것들에 뒤섞인 마력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사도의 종인가?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는데…….’


비슷한 마력은 느껴진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저 괴물들이 절대로 아군은 아닐 것 같았다.


마족들이 억지로라도 아군이라 생각해 본들, 괴물들은 공격을 머뭇거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불길함이 느껴졌다.


[저거 누르잖아! 저것들이 왜 여기 있어?]


하늘에서 전장을 주시하고 있던 세냐도 놀라서 물었다.


[왕성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자식이 불러낸 거야?]


[왕궁에 있었을 인간의 기척이 동시에 소멸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제물로라도 바쳐서 소환했을지도 모르지요.]


아니스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그 말에 세냐의 얼굴도 똑같이 썩어들어 갔다. 그녀는 혀를 차며 아카샤를 들어 올렸다.


진짜 멸망의 권속. 멸망의 마왕의 선봉으로 세상에서 살아 있는 생명을 모조리 죽여대는 괴물들. 숫자도 상당하고, 내쉬는 호흡부터가 불길하기 짝이 없다. 세냐는 작정하고 마나를 일으켰다. 놈들이 도달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마법을 쏘려는 순간이었다.


꽈지지직! 수천 개의 천둥이 동시에 친 것만 같은 요란한 굉음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하늘이란 것이 아예 통째로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아니, 세상이 모조리 멸망하는 소리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예고 없이 터진 소리에 모두가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부분은 그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지러이 얽히는 색과 검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것이 충돌하는 광경.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뒤섞이면서 세상에서 빛이 점멸했다.


몇몇은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실제로 후폭풍 같은 것은 몰아치지 않았지만, 감정적인 폭풍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하늘에서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붙잡았다.


‘멸망의 마왕.’


저 색에서는 세냐도 똑같은 것을 느꼈다. 너무 커다란 소리에 시달린 귀에서 삐이- 하고 이명이 들렸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크리스티나? 아니스?]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방금 퍼진 충격에 의해 일시적으로 연결이 끊긴 모양이다. 세냐는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맙소사.”


점멸은 끝났지만, 하늘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거대하고 새카만 흉터 같은 것이 하늘에 그대로 남아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세냐는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체 뭔 짓을 벌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진, 그 미친 자식은 이 ‘세상’에 진짜로 상처를 남겨 버린 것이다. 세냐는 즉시 유진과, 함께 있을 메르를 탐색했다.


찾을 수 없었다. 유진도, 메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죽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ㅡ 세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하늘의 상처를 노려보았다.


* * *


“이 개새끼, 너 이리 와봐.”


대뜸 먹은 욕설이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망령을 당황하게 한 것은, 이곳이 대체 어디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하늘? 아니다.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시커먼 세계다. 마치…… 마치 바벨의, 유폐의 어전을 떠올리게 만드는 곳이다.


시커멓다. 빛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유진과 망령은, 마치 검은 바탕 위에 새로이 그린 것처럼 모습이 뚜렷하다.


‘하우리아는?’


발아래를 보아도 도시는 없다. 설마, 방금의 충돌로 인해 통째로 소멸해 버린 것인가?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하멜이, 유진이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지 않은가.


“여기는…….”


질문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유진이 막무가내로 덤벼왔기 때문이다.


콰아아! 새카만 세계지만 유진의 불꽃은 배경에 섞이지 않았다. 흑염의 외날개가 꼬리처럼 이어지고, 유진은 단숨에 망령의 앞까지 도달했다.


지금 유진에게 성검과 월광검은 없다. 일점에 모은 힘을 아낌없이 터트린 결과, 두 검은 일시적으로나마 빛을 잃었다.


망령도 비슷했다. 어지러운 색의 불꽃을 두르고 있지만, 아까처럼 요란히 마력을 쏟아낼 수는 없었다. 잠시 동안 이어지는 힘의 공백. 서로가 그것을 인지했다.


‘미친놈……!’


경악한 것은 망령이었다. 이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바로 유진이다. 성검과 월광검이 힘을 잃었다면, 당연히 뒤로 물러서 회복에 힘써야 할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무기 없이 맨몸으로 마왕에게 덤비는 것은 자살행위다.


ㅡ자살행위? 정말로 그런가? 꽉 쥔 유진의 주먹을 본 즉시, 망령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카마쉬와 지네 산맥을 일격에 침묵시킨 어둠. 망령은 저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사마르 대수림. 유진과 처음 만났던 코칠라의 전장에서, 데스나이트였던 망령을 끝장낸 것이 바로 저 기술이었다.


-이건…… 못 이기겠네.


하멜의 육체가 소멸하는 중에 그렇게 내뱉었었다. 구차하게 영혼만 덩그러니 남고, 어떻게…… 패배하였는지를 복기하면서, 저 불꽃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지금 유진의 주먹을 휘감은 불꽃은 사마르 때보다 훨씬 더 강하다. 얻어맞는다면 아픈 것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


뒤늦게 망령은 깨달았다. 자살행위? 아니다. 저 남자는 틀림없는 확신을 가지고, 망령을 죽이기 위해 덤비는 것이다.


꽈지직! 망령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가까스로 방어는 했지만, 충격이 없지는 않았다. 불꽃의 색이 요동치고 팔은 너덜거렸다. 쩌적!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에도 금이 갔다.


“크륵……!”


망령은 솟구치는 핏물을 삼키면서 몸을 비틀었다. 아직 마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검을 쥘 수 없으니 똑같이 주먹을 뻗을 수밖에.


실책. 주먹을 뻗는 순간에 깨달았다. 기억이, 경험이, 직감이, 모두가 ‘틀렸다’라고 판단했다. 이전에 절감하지 않았나.


‘기술의 격차는…….’


압도적이다. 마력의 출력과 위력, 마법 등의 권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그것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육탄전으로 가버린다면, 망령은 절대로 유진을 이길 수 없다.


그건 결코 뒤집히지 않는다. 뿌리치기 위해 뻗은 손.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생각했지만, 유진의 손은 당연하다는 듯이 망령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뱀처럼 감겨오는 손은 끔찍하고 집요했다. 망령의 팔은 순식간에 으스러졌다.


미련 없이 팔을 끊어냈다. 지금 이 순간에 확실한 우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마왕다운 불사력이다.


우우우우! 망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실책이라고 깨달았던 것이 불과 몇 초 전. 그 대가로 팔을 잃었으나, 끊어낸 팔은 이미 재생했다.


이대로 다시 대응해 봤자 결과는 다르지 않을 터. 그럴 텐데, 망령은 거리를 벌리지 않고 역으로 유진에게 다가갔다. 그 이유 따위는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이클립스가 유진의 양손에 형성되었다.


연타와 함께 처박을 생각이었다. 만약 놈이 주제 모르고 대응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흘려낼 자신이 있었다. 아니면 방어 채로 짓뭉개 버리든가.


그런데 놈이 하는 꼴이 참으로 묘했다. 오히려 이클립스가 옆으로 흘려졌다. 시커먼 세상에서 이클립스가 폭발했다.


유진과 망령, 누구 하나 휘말리지 않았다. 하나가 허무히 날아갔지만, 유진에게 별문제는 없었다. 당장 남은 왼손에는 이클립스가 하나 더 남아 있다. 그리고 등 뒤의 프로미넌스에서도 약식의 이클립스를 대기하고 있다.


직접 만들어낸 것과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위력이 약하지만ㅡ 연발로 쏘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금의 유진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불꽃 깃털을 이클립스로 변환시켜 난사할 수 있다.


‘주먹을 먼저 처박고, 그 뒤에…….’


머릿속에서 신성이 빛을 발했다.


실패. 모론의 도끼를 베었을 때와 비슷한 감각. 유진의 눈에 신기(神氣)가 깃들었다.


예측이나 예언과는 다른 계시. 찰나, 유진의 사고에서는 방금 생각한 공격을 유효하게 성공시키기 위한 방법이 무수히 떠올랐다.


떠올린 즉시 결론을 냈다. 모두가 실패. 지금 어떤 공격을 하건, 놈에게 닿지 않는다.


알고 있으면서도 유진은 이클립스를 던졌다. 전쟁신의 계시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믿기에,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일련의 과정이 느리게 보였다.


이클립스가 다가간다. 표면이 부글부글 끓는 태양이 폭발의 시동에 들어간다. 망령의 손이 이클립스를 받아낸다.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을 받아내듯 놈의 손은 조심스럽다. 손가락이 표면을 훑는 과정에서 태양의 폭주는 가라앉는다. 이윽고 놈의 마력이 얇디얇은 천처럼 이클립스를 감싸 버리고, 옆으로 던진다.


폭발. 휘말리는 것은 없다. 프로미넌스에서 깃털이 날린다. 불티가 서로 뭉치며 수백 개의 태양이 되었다. 흑점이 번지고, 이클립스가 난사된다.


포화를 앞둔 망령의 불꽃이 끓는다. 어지러이 섞인 색의 불꽃. 흩날리는 불씨가 사자의 갈기처럼 망령의 어깨에서 나부꼈다. 망령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가 일으킨 불꽃이 유진의 불꽃을 전소시켰다.


마나는 역류하지 않았다. 그냥,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유진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 과정을, 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베르무트와 처음 만났을 때. 동료가 되는 조건으로 놈과 결투했을 때.


이다음.


유진이 앞으로 나갔다. 공방, 불꽃이 계속해서 터졌다. 타점이 흔들린다. 놈의 움직임이 갑자기 바뀌었다. 마치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만 같다. 마법만 훔쳐 썼을 때와는 다르다.


이걸.


알고 있다. 유연한 움직임. 맞서 치는 것보다는 받아서 흘려내던 것에 능했다. 놈과 셀 수 없이 대결하면서, 놈의 움직임을 따라붙기 위해 패링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역겹다. 격정에 신성이 호응했다. 눈동자의 신기가 틈을 꿰뚫어 보았다. 유진은 한 점의 고민도 없이 그곳으로 움직였다.


쿠웅! 주먹이 망령의 가슴에 한 번 닿았다. 침투한 충격이 망령의 몸을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그대로, 공격을 이어서, 놈의 머리를 부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놈이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잡았다.


“나는.”


꽈드득. 유진의 손이 가면을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이게 가장 엿 같아.”


유진은 망령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놈이 베르무트일 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기면 베르무트의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딴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놈이 베르무트일 리가 없으니.


“너 씨X 표정이 왜 그러냐?”


가면을 벗긴 것은, 놈의 낯짝을 보고 싶어서였다.


“왜 씨X 존나 사연이 있다는 표정을 처하느냐고.”


가면을 부순 손이 다시 주먹이 되었다.


“가증스럽게.”


주먹이 망령의 얼굴 한복판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환생 483화


꽈드득.


내지른 주먹이 무언가를 부수고, 더 앞으로 나아가는 감각. 상대가 인간이라면 여기서 멈춰도 되었다. 굳이 더 내지를 것도 없이, 안면에 이만큼 주먹을 쑤셔박는다면 인간은 무조건 죽는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에 유진은 주먹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앞으로 밀어냈다.


뿌드득! 기어코 주먹이 막고 있던 것을 완전히 부수고 나아갔다.


ㅡ뻐엉! 망령의 목 위에서 검은 불꽃이 폭죽처럼 터졌다. 유진의 주먹은, 의미 그대로 망령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기우뚱 쓰러지려다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머리는 아직 재생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머리 없는 몸뚱이가 멋대로 유진에게 덤벼들었다. 그건 언뜻 보기에는 분을 이기지 못해 덤비는 것처럼 보였다.


분을 이기지 못해서, 이성을 잃어서 덤비는 것이 아니다. 움직임은 여전히 정교했고, 물이 흐르듯 연기가 흐르듯 유연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우습게 보고 닿는 순간에는 유순한 흐름이 거센 광풍이 되어 이쪽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거나 집어삼켜 버린다.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나. 유진은, 하멜은,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 맹세도 할 수 있었다. 하멜이 태어난 이후로 가장 많이 대결한 상대.


그건 베르무트다.


베르무트도 마찬가지다. 그야 그럴 수밖에. 하멜이 그러하듯, 베르무트와 싸웠던 놈들 대부분은 한 번의 전투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반면에 둘은 서로를 죽일 이유가 없고, 하멜이 틈만 나면 대결을 청했으니 과장 섞어 수백 번은 대결했었다.


그러니까, 확신할 수 있다. 베르무트에게 뭐 정해진 기술 따위는 없었지만, 저 기묘한 흘려내기와 받아치기는 틀림없이 베르무트의 것이다. 단순 체술 뿐만 아니라 장기인 공간 조작까지 가미한 기술.


위화감이 느껴질 수밖에. 놈이 공간 마법을 사용한 것? 그래, 그것까지는 뭐, 괜찮았다. 하지만 저 지랄을 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힌다. 엿 같은 기분이 든다.


하멜의 기억에서 태어나, 하멜의 낯짝을 하고, 하멜의 기술을 쓰더니.


이제는 베르무트의 백염식과 마법, 거기에 독자적인 체술까지 쓰고 있다.


“이 씨X.”


차라리 저 새끼가 뻔뻔하게 거들먹거렸다면 이 정도로 속이 뒤집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가짜지만, 너를 죽이고 진짜가 되겠다. 뭐 이딴 흔해 빠진 개소리라도 늘어놓았다면, 그래, 차라리 가슴이 홀가분했을 것이다.


아니면, 과대 망상가나 다름없던 아멜리아처럼…… 뭔 머저리 같은 비원을 앞세우거나. 모기처럼 터져 죽은 알피에로처럼, 멸망의 마왕이 어쩌고 하는 개 같은 충성심에 눈이 뒤집히거나. 마왕이 되고서 뭘 하지도 못하고 뒈져버린 아멜리아처럼 복수를 부르짖거나.


이유야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저 많은 이유 중 대충 하나만 골라서 내세웠어도, 유진은 지금의 이 엿 같은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저 새끼는 저런 이유를 내세우지 않고 있다. 대뜸 정신을 차리더니 모론을 만나고 오고, 날이 지나기도 전에 흑사자 성에 쳐들어갔다. 습격한 주제에 아무도 죽이지 않고, 분노를 주러 왔다느니 하는 개소리를 처늘어놓고서 떠나 버렸다. 하우리아를 점령한 것? 이것도 곱씹을수록 열이 뻗친다.


“너 씨X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유진과 망령의 팔이 교차되었다.


휩쓸리면 부러진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목소리는ㅡ 들리지 않는다. 즉, 여기서 팔이 부러진다면 치유마법으로 곧장 치료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뭐, 죄 없는 시민은 휘말리게 하지 않겠다~ 이딴 생각이라도 한 거냐?”


부딪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마냥 내뺀 것은 아니다. 깃털을 태양으로 바꿔 이클립스를 쏘아내는 한편, 흩어지는 불티 사이에 숨긴 깃털로 도약했다. 그렇게 유진은 단숨에 망령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도시 봉쇄하고, 전력 대부분을 죽어도 상관없을 마물과 마족으로 구성하고, 부족한 것은 언데드로 충당하고.”


“마왕이 마족을 부리는 것이 뭐가 잘못됐나?”


계속되는 빈정거림에 망령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애매하게 굴지 마, 개자식아.”


대답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물어봤지, 씨X 표정이 왜 그러냐고. 왜 존나 사연이 있다는 표정을 하느냐고. 아니, 표정뿐만이 아니지. 네 모든 것이 그래.”


저 욕설에는 망령도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홱 몸을 틀어 유진을 향해 손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완성된 공간마법이 유진을 압박해 왔다.


그 순간. 유진의 망토가 열렸다.


꽈지지직! 뇌광궁과 용격창. 두 종류의 포격이 망령을 덮쳤다. 유진이 펼치는 기술보다는 부족하지만, 마나를 충분히 담아낸 포격은 망령이 조작하는 공간을 어느 정도 상쇄시켰다.


“사실은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유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뭐 이런 거냐?”


유진은 비아냥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망토 사이로 쑥 들어간 손이 거대한 망치를 끌고 나왔다.


분쇄추 지골라드. 살육의 마왕이 사용하던 무기. 망령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잊고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쓰는 무기는 성검과 월광검뿐만이 아니다. 놈에게는 마왕의 무구도 있다.


“그럼 씨X 가진 사연이라도 털어놓든가!”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분쇄추를 휘둘렀다. 망령은 반사적으로 공간을 겹겹이 중첩시켜 결계를 만들었다. 곧, 이것이 실책이란 것을 깨달았다.


분쇄추의 권능. 그것은 굉장히 간단하다. 마왕의 무구 중에서 분쇄추만큼 간단한 권능을 가진 무구는 없을 것이다.


때리는 것을 부순다. 분쇄추가 부술 수 있는 것은 주인의 힘에 따른다. 유진의 힘이라면ㅡ 채워진 것 없이 허무뿐인 공간 따위. 분쇄추의 권능을 쓴다면 유리창과 별 차이 없다.


꽈지지직! 겹겹이 중첩시킨 결계가 산산조각이 났다. 단순 무식한 권능이 품 안으로 날아들었다. 망령은 즉시 양손을 뻗으며 불꽃을 일으켰다. 색이 뒤얽힌 불꽃이 분쇄추를 가로막았다.


“넌 대체 뭐냐? 나한테 뭘 하고 싶은 거냐? 그리고 베르무트, 그 개새끼가 왜 너한테 백염식과…….”


“나라고 해서……!”


망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 닥치고 있는 줄 아냐? 나도…….”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망령도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망령이 해야 할 일은, 하고 싶은 일은…….


“말을!”


유진의 목에 핏대가 섰다. 분쇄추가 다시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다음은 마창 루인토스인가? 망령은 자연스럽게 마창을 염두에 두었다. 마창의 권능은 창림(槍林). 공간 좌표에 무수히 많은 창날을 소환하는…….


화아악!


틀렸다. 망토에서 튀어나온 것은 월광검이었다. 창백하게 번지는 달빛이 초승달을 그렸다. 망령의 눈이 부릅 뜨였다.


월광검? 갑자기? 쓸 수 없게 된 것 아니었나?


“끝까지 해 새끼야!”


아까까지는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망령이 처음 백염식의 불꽃을 꺼냈을 때 말이다.


부족하다, 이 정도의 강함으로는 안 된다, 어쩌고저쩌고, 그, 사연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 난 말투부터.


엿 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용사와 마왕. 전장에서 마주치면 할 일은 하나뿐. 일단 싸운다. 죽인다. 질문은 죽이기 전에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저 개자식이 자꾸 마왕답지 않을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연이 있다는 티를 그득 내면서 아가리는 꾹 닫고 있다.


유진은 그게 가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꽈지지직! 초승달처럼 휘어진 참격이 망령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망령은 가까스로 월광검을 받아냈다. 마력은 제법 회복되었다. 그럴 텐데도 월광검을 받아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심적 문제 때문이다. 무겁다. 유진이 내뱉은 말들에 무게가 실려서, 월광검이 아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망령의 몸도 똑같다. 질척하고 끓는 감정들이, 망령의 머리뿐만 아니라 몸뚱이까지 무겁게 만들었다.


‘가증스럽다고?’


왜 이딴 표정을 짓느냐고? 시커먼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머리가 열로 꽉 차는 것 같았다.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망령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그래, 유진 라이언하트는 아무것도 모른다. 놈은 그냥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이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단 말이다.


망령은 알고 있다. 그가 아는 것만이 전부 다일지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나, 망령은, 유폐의 마왕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당장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선택에 도달하기는 충분했다.


“난 당연히 모르지, 이 개새끼야. 알려주질 않는데 시X 어떻게 알아? 알면 내가 신이지!”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내심 뜨끔했다.


굳이 따지자면 유진은 신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그거도 전전생의 이야기고,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은 신이 아니잖은가? 누가 따진 것도 아니지만 유진은 일단 스스로 납득했다.


“베르무트 그 새끼도! 유폐의 마왕도! 그리고 너도! 뭔가 존나 대단한 비밀을 알고 있는데 차마 지금 말은 못 하겠고, 그래, 나중에 알려줄게, 아 그렇다고 그냥은 못 알려주겠고…… 이런, 이런 개 같은.”


말을 하면 할수록 유진의 감정도 부글부글 끓었다.


베르무트 그 자식부터가 문제다. 대뜸 환생시킬 것이면 모든 사정을 적어놓은 편지라도 남기든가. 정보랄 것들은 죄다 찔끔찔끔 남겨놓은 이유가 대체 뭔가? 그마저도 확실한 것들은 거의 없어서, 지금까지도 유진은 베르무트의 정체는커녕 놈이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유폐의 마왕. 그 새끼도 똑같다. 놈이 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면, 마왕이란 것을 떠나서 그냥 패 죽이고 싶다. 이유는 답답하고 꼬와서다. 평생을 욕 한마디 안 하고 살아온 성자일지라도, 유폐의 마왕을 보면 쌍욕을 참지 못할 것이다.


그 씹어먹어도 모자랄 마왕 놈의 행적을 보라. 무덤에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 직접 말은 하지 않고, 우둔한 사자가 어쩌고…… 베르무트와의 친애가 어쩌고 하면서 수상한 냄새를 줄줄 흘려댔다.


그 이후는 또 어떤가? 노골적으로 유진을 보호해줬다. 유진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휘하 마족들도 단속시켰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나이트 마치에서는 아예 대놓고 바벨을 오를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선언까지 하지 않았나.


제일 가관인 것은 바로 마왕이 된 아멜리아와의 전투. 월광검의 폭주를 막아준 것? 유페의 마왕이다. 심해의 심연, 고대의 도시에서 유진에게 사정을 설명해 준 것? 유폐의 마왕이다.


“그렇게까지 했으면서! 그 개새끼는!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은 마왕성에 올라야 가르쳐 주겠다고!”


유진은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세상에서 제일 패고 싶은 놈은 말을 하던 중에 그만두는 놈이다.


“너도, 너도 이 새끼야! 이 가증스러운 새끼.”


감정 그득 실린 욕설을 쏟아내는 중에도 유진은 맹공을 이어갔다. 어느새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월광검과 성검을 양손에 쥐고 휘둘렀다.


그러는 와중에도 망토 안에서는 다른 공격들이 연계되었다. 망령이 방어 결계를 만든다면 분쇄추가 때려 부쉈고, 공간을 넓게 활용하려 들면 마창의 권능으로 행동을 제약했다. 그렇게 붙잡아 놓고서 이클립스를 처박았다.


몇 번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피하지 못했고, 막을 수 없었다. 여전히 몸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부글부글 끓어대는 감정에 바닥은 없었다.


“그래.”


치솟은 감정이 기어코 이성을 박살 냈다. 망령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서 고함을 질렀다.


“내게 힘을 준 것은 베르무트다.”


이런 대화는, 싸움이 끝나기 전에 할 생각이 없었다.


“죽어야 할 내게 멸망의 마력을 준 것도! 나를 화신으로 삼은 것도! 전부 다 베르무트 그 새끼다.”


망령이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외침을 토해낼 때마다, 가슴을 꽉 채워서 몸을 무겁게 하던 응어리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 새끼는……! 내가 너와 싸우는 순간조차도 내게 힘을 더해 넣었다. 백염식을 쓰는 법, 마법을, 아니, 권능을 쓰는 법……! 과거 자신이 어떻게 싸웠는지까지도!”


망령이 가진 감정의 대부분은 억울함과 분노다.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있을 적에는 증오와 복수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자기 정체를 알고 나서는, 더 이상 증오와 복수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냥 억울하고, 서러워서, 화가 났다.


왜 하필 나인가? 왜 굳이 사실을 알게 만든 건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나는 말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냥 너를 죽이고 싶었다. 너를 죽이고 나면, 내가 널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라.”


망령이 가진 자아의 근간은 하멜이다. 하멜은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보다, 강한…… 확신을 얻고 싶어서. 모론을 만나고, 멀리서 세냐를 지켜보았다. 그 결과 바람은 완전히 버릴 수 있었다.


“나는 결코 네가 될 수 없다. 가짜와 진짜,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나는 그냥 나고…… 네가 될 수 없어.”


꽈지지직! 어지러운 색의 마검에서 요란하게 불꽃이 터져 나왔다.


망령이 본격적으로 마검을 쓰기 시작하니, 유진도 더 이상 성검과 월광검을 따로 휘두를 수는 없었다. 아까처럼 빛을 하나로 섞지는 않았지만, 성검과 월광검의 궤적이 하나의 선을 그렸다.


“네가 나하마의 전쟁을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네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네 쪽에 보다 확실한 명분을 주기 위해 흑사자 성까지 침략했다.”


망령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전쟁을 연기할 생각이었다. 나는 이 전쟁에서 무언가를 얻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적당히 시늉을 하다가, 너를…… 너를, 주역으로 만들고. 네 발밑에 아멜리아 머윈, 그년을 던져주고!”


꽈앙! 부딪친 불꽃이 서로 뒤섞였다.


“나는! 너랑 싸워보고…… 적당히 죽을 생각이었다. 너랑 싸우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


“왜 굳이 나랑 싸우다 죽어야 하는 건데?”


유진이 먼저 검을 멈췄다. 갑자기 공격이 멈추자, 망령도 흠칫 놀라서 검을 멈췄다.


“일단 대충 사정 알겠고, 네가 꼴값 안 떤다면 나는 널 동료로 받아들일 용의도 있다.”


유진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말했다. 그 말에, 망령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물론 그냥은 안 돼. 모론한테 가서 잘못을 빌고, 흑사자 성에 가서도 무릎 꿇고 빌어라. 야, 그런데 왜 세냐한테는 안 간 거냐?”


“……몰래 가서 봤…….”


“몰래? 이 개새끼. 세냐를 훔쳐본 거냐!”


유진은 다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성검과 월광검이 다시 들리자, 망령은 움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이상한 것은…… 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용서해 주지. 일단 말을 계속해 보자고.”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망령의 얼굴을 응시했다.


“너랑 내가 굳이 싸울 이유가 있는 거냐? 나는 꽤 이성적인 사람이야,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너를 굳이 죽일 필요는 없겠다 싶은데.”


“그건 네 결정이지.”


망령은 동요한 감정을 진정시키며 입술을 비틀었다.


“내 결정은 바뀌지 않아. 나는 널 무조건 죽일 생각이다.”


“아까는 적당히 싸우다 죽을 생각이었다매 새끼야.”


“유폐의 마왕과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


“좋아. 그렇다면 이제 그 얘기를 해보지.”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나를 무조건 죽일 생각인데?”


“그건…….”


“여까지 와서, 날 쓰러트리면 대답해 주겠다, 이딴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망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다가 내가 힘조절을 못해서, 너한테 얘기 듣기 전에 죽여버리면 어쩔래?”


“왜 무조건 네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망령이 유진과 똑같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새끼, 성격하고는……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까짓거 네가 이길 수 있다고 쳐. 네가 나를 죽인다고 치자고. 그런데, 너도 힘 조절을 잘못해서…….”


“어차피 죽는 상대한테 괜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지.”


“네가 그래서 나랑 다른 거야, 새끼야, 나는 널 죽일 작정인데 이렇게 대화해 주고 있잖아. 안 그래?”


“…….”


“괜히 고집부리면서 사연 있는 척하지 말고 빨리 말해. 얘기 듣고 다시 하게.”


“뭘 다시 한다는 거냐?”


망령의 질문에, 유진은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다.


“싸움.”


“……?”


“표정이 왜 그따구야? 죽일지 말지는 얘기 듣고 결정하겠지만, 그거랑 싸움은 별개지.”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환생 484화


‘이 새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솔직히 유진의 언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듣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유진과 망령은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 ‘척’만 한 것도 아니다. 둘 다 전력을 다했다. 서로에게 쏟아내던 공격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타로 연계될 수 있을 만큼 예리하고 정교했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웠다는 것. 그만한 감정도 있었다.


……진심이었나? 망령 본인은 아닐지라도, 유진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 지독한 살의. 유진이 망령에게 살의를 품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나. 유진은 처음 왕궁에 도달했을 때부터. 아니, 이 도시에 내려오기 전부터 망령을 죽여 버리겠다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럴 텐데.


지금 유진에게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짜증 나고 속 터진다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방금처럼 망령에게 덤비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살기등등하게 휘두르던 성검과 월광검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고 있었다.


저런…… 감정의 변화가 잘 이해가 되지 않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하…….”


결국 망령은 납득 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는 일. 이해할 수 없는 일. 누군가는 저 행동을 뜬금없고 감정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유진은, 하멜은. 지금 상황에서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유진이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던 것은, 망령에게 연민을 품어서는 아니다.


놈의 신세가 불쌍하다는 생각? 억지로 쥐어짜면 그런 생각도 할 수야 있겠지만, 솔직히 지금 순간에 놈에 대한 연민은 없다.


망령이 유진을 죽이겠다고 나선 이상, 유진에게도 망령은 그냥 적일 뿐이다. 적을 연민할 정도로 유진은 쓸데없이 감성이 풍부하지는 않았다.


지금 보류하는 이유는, 결국 베르무트 때문이다. 망령의 존재가 베르무트가 의도한 것이라면, 당장 죽이지 않고 칼을 거두어 사정부터 파헤쳐야 한다. 그렇게 여지가 생기고 나면, 조금 더 놈에 대해 고찰하여 가벼운 연민 정도는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너다운 말이군.”


그런 사고의 흐름. 망령은 씁쓸히 웃으며 마검을 거두었다. 잠시간의 소강상태. 유진은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자키아가 처박힌 곳과 닮았네.’


공간의 틈새. 대충 짐작은 갔다. 아까 하늘에서, 검과 검이 부딪쳤을 때. 그 여파로 이곳에 날아와 버린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이 연결되니 슬금슬금 걱정이 들었다.


‘밖에 괜찮은 것 맞아? 괜히 휘말려서 대형사고 난 것 아냐?’


[별문제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진이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머릿속에서 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갑작스러운 속삭임에 유진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네가 어떻게 말을 걸어?’


[빛께서 유진 님을 애착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연결이 이어졌습니다만,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크리스티나가 대답했고, 아니스가 말을 덧붙였다. 연결? 유진은 손에 쥔 성검을 힐긋 보았다. 아무래도 성검에 다시 빛이 켜지면서 빛과 연결된 모양이다.


‘아까만큼 선명하지는 않아.’


[당신이 있는 공간이 특별하기 때문이겠죠. 어떤 느낌입니까?]


‘라이자키아가 있던 틈새랑도 닮았고…… 레헤인야르의 이면 같은 느낌도 들어. 아마, 저 새끼가 쓰던 공간 마법까지 휘말린 모양이야.’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대답했다. 그래도 밖과 연결이 단절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공간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의식하고 연결되어 있다면, 얼마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밖은 정말 괜찮아?’


[하늘 한복판에 시커먼 상처 자국 같은 것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


[굉음에 놀라 주저앉은 사람은 많지만, 후폭풍에 휘말려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멜,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르의 대군이 아주 매섭습니다.]


[세냐 님이 막고 계시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힘들다고?’


유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되물었다.


모론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르를 잡았다. 유진도 레헤인야르에서 머무르는 동안 여러 번 누르를 잡아봤는데, 별로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정 껄끄러운 것을 꼽으라면 불길한 마력과, 죽으면서 내뿜는 독기 정도였다.


[소수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곳의 누르는 천 마리가 넘습니다.]


[동족끼리 공명이라도 하는 것인지, 저희의 신성력도 놈들을 저지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세냐 님의 마법이 수를 줄이고 있기는 합니다만…….]


“씁.”


하긴. 마구잡이로 날뛰는 것 외에 재주가 없는 놈들이라면, 멸망의 참된 권속으로 앞장설 수 없겠지. 생각해 보면 신화시대의 신군도 아가로트가 직접 나서지 않고서는 누르의 대군을 상대할 때 꽤 고전했었다.


‘일단 버티고 있어봐.’


[……그와 대화할 생각입니까?]


‘다 듣고 있던 것 아니었어?’


[엿들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들리더군요.]


‘괜찮아. 어차피 너희도 알아야 할 이야기니까.’


유진은 그렇게 말해두고서 시선을 들었다.


조금 떨어진 앞. 망령이 눈빛을 칙칙하게 빛내고 있었다.


“생각 다 했냐?”


“네 대화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준 거다.”


“어, 그래, 대화 다 끝났으니까 이제 좀 말해봐.”


유진은 삐딱한 자세로 서서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거렸다.


“왜 나를 죽여야 한다는 건데?”


“……흑사자 성을 떠나 하우리아에 오기 전에. 유폐의 마왕과 만났다.”


사람이 기껏 중요한 말을 하려는데, 저렇게 건성으로 듣는 유진의 태도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남자를 상대로 그런 사소한 것들을 지적하다간 끝이 없을 테니, 망령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멸망의 화신이 되고,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나는…… 홀로 유폐의 마왕을 찾아갔다. 바벨을 올라서…….”


“뭐, 충성 맹세라도 하러 갔냐?”


유진은 턱을 까딱거리며 이죽댔다.


얌전히 말을 계속하려고 했는데…… 저런 말을 들으니 망령의 눈도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격은 결국 하멜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 불같은 성질머리는 어느 정도 하멜과 닮을 수밖에 없었다.


“개소리하지 마라. 내가 그 새끼한테 왜 충성을 맹세한다는 거냐?”


“네가 끌고 온 마물들, 죄다 유폐 새끼가 관리하던 거잖아. 누굴 호구 등신으로 아나…….”


“지금 그 사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데 왜 자꾸 시비를 거는 거냐?”


“시비? 지금 시비라고 했냐? 이 새끼야,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 한번 처음부터 따져볼까?”


유진이 삿대질하며 쏘아붙였다. 망령은 당장 마검을 휘둘러 저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실행은 하지 않고 주먹만 부르르 떨었다.


망령이 분을 삭이는 것을 확인한 유진은, 내심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손가락을 내렸다.


“그래서, 바벨에 올라가서 뭐 했는데?”


자연스럽게 화두를 처음으로 돌렸다. 사실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으나, 유진이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했다.”


“강하디?”


곧바로 물었다.


“싸움이라고도 할 수 없었지. 내 전력은 유폐의 마왕 앞에서 모두가 허무했다.”


망령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했을 당시, 망령은 지금처럼 베르무트의 마법이나 백염식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 멸망의 마력도 지금처럼 다루지 못했다. 당시의 망령은, 무식한 마력을 바탕으로 유진보다 열화된 기술을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 싸운다면…… 허무하게 패배하지는 않을지 모르지. 그러나 확신은 없다. 그만큼 유폐의 마왕은 압도적이다.”


비참한 일이지만 망령은 그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유폐의 마왕과 직접 싸워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지금 망령의 평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유진이 평가하기에, 망령은 강하다. 광란의 마왕이 되었던 아이리스와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하며, 300년 전의 마왕들보다도 강할 것이다.


그런 망령이, 유폐의 마왕에게는 허무하게 패배했다.


“그러냐.”


지금 싸운다면, 이라고 가정해 보아도 패배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상관없다. 패배한 것은 유진이 아닌 망령이다. 언젠가 유진은 바벨에 올라, 유폐의 마왕에 도전할 것이다. 그때의 유진은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강할 것이며, 마왕에 도전하는 순간에는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일 것이다.


“나는 차라리 유폐의 마왕에게 죽고 싶었지만, 놈은 나를 죽이지 않았다. 존재의 답은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는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바벨 밖으로 내쫓았다.”


망령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답이라는 것을 찾아 움직였다. 세상을 돌아다녔다. 도서관 등지를 오고 가며 최근 300년간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레헤인야르에 가서 모론을 보았고, 아롯에 가서 세냐를 보았…….”


“아니스는 왜 안 봤어?”


불쑥 들려 온 말. 망령은 눈썹을 찡그리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유라스의 광장에서 아니스의 성상에 대고 추모라도 해야 했다는 거냐?”


“크리스티나가 아니스야.”


일말의 주저 없이 파고들어 온 정보. 망령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는 너무 놀라서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아니스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설마…… 아니스도 환생했다는 거냐?”


“환생은 아니고, 영혼만 남아서 크리스티나에 빙의한 거지.”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해가 꼭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니스가 지금 시대에도 존재한다는 것. 유진을 도와서 세상을 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망령은 먹먹한 감정을 느꼈다. 바벨에서 홀로 죽은 하멜과, 그런 하멜을 앞에 둔 동료들을 생각해 보았다.


배신, 증오, 복수, 그딴 거짓이 아닌, 300년 전 하멜과 동료들이 품었던 진짜 감정.


그 감정들은 절대로 망령이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망령 본인도 저 추억을 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더더욱. 하멜이 환생했고, 모론과 세냐가 살아 있으며, 죽은 줄 알았던 아니스조차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더더욱.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하는 것.”


유진과의 대화는 망령의 가슴에 자그마한 흔들림을 만들었다.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면. 결국 궁극적인 목적이 일치한다면. 허락된 시간 동안은 평화를 즐겨도 되지 않나? 가능한 선에서 유진의 여정을 도울 수 있지 않나? 이런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더 있지 않나?


“놈에게 죽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흔들림에서 태어난 여러 욕심을 일축했다. 모두가 하찮은 욕심이다. 망령은 차분한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죽음이겠지.”


저 시선이 껄끄러웠다. 그래도 확실하게 ‘대화’가 된다는 것은 다행이다. 유폐의 마왕이라면 대답은커녕 선문답이나 하다가 사라졌을 테니.


“아니, 틀렸다.”


망령이 고개를 저었다.


“유폐의 마왕에게 죽으면, 놈의 권능에 의해 존재 자체가 붙잡혀 버린다.”


“…….”


“두 번의 전생을 기억하는 너라면, 이 세상이 멸망의 마왕에 의해 한 번 멸망 당했다는 것도 알겠지.”


알고 있다. 아가로트와 수많은 신들이 살았던 신화시대.


“멸망의 마왕이 세상 전부를 지우는 중에도 유폐의 마왕은 건재했다. 놈은 이전 시대의 멸망을 겪었다. 함께 지워지고, 다시 태어난 것도 아니다. 너처럼 전생을 깨우친 것도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그냥…… 그냥 살아남은 것이다.”


“…….”


“유폐의 마왕은 내게 직접 보여주었다.”


가볍게 닿았던 사슬. 밀려 들어온 정보. 유폐의 마왕의 기억. 몸이 꿰뚫리고 부서지는 것보다 거대한 충격. 이해하고 싶지 않아 붕괴한 머리.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허무한.


“한 번이 아니다. 정확한 횟수까지는 알 수 없지만, 유폐의 마왕은…… 이미 몇 번이나 세상의 멸망을 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멸망의 마왕은, 이미 이 세상을 몇 번이나 멸망시켰다는 말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시체. 텅 빈 폐허 도시. 어딘가에서 몰려오는 파도. 발 디딜 땅 하나 없이, 바다가 모든 것을 덮고 난 후.


바다 깊이 파묻힌 땅이 치솟아 대륙을 만든다. 다시 생명이 태어난다. 산이 치솟고 강줄기가 만들어진다. 나무가 자라나 숲을 만들고 풀이 자라나 들판을 만든다. 어딘가에서는 모래가 그득 쌓여 사막이 된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은 언제나 살아남았지.”


새로이 생명이 태어나는 세상. 최초로 마왕성이 세워진 땅이 마경이 된다.


“유폐의 마왕은 거느린 혼과 함께 다음 시대로 넘어간단 말이다. 놈과 계약하거나, 혹은 놈에게 죽거나. 그렇게 존재가 붙잡혀 버리면, 절대로 환생할 수 없다.”


그 말에 유진의 얼굴도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마족과 마왕의 계약에서 인간은 혼을 대가로 바친다. 즉, 헬무드의 시민들 대부분은 윤회가 불가능하다. 헬무드는 윤회를 박탈당한 망령들의 제국인 것이다.


하지만 그 ‘윤회’가 지금 시대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다음 시대까지 이어진다면. 멸망의 마왕이 세상을 멸망시키고 난 뒤에도, 유폐의 마왕에게 붙들린 혼이 해방되지 않는다면.


“……지금 시대는 특별하다.”


망령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유폐의 마왕도 지금 시대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 특별하다고 생각하나?”


“멸망이 유예되어서.”


“대답을 피하는군.”


망령은 씁쓸히 웃으며 유진을 가리켰다.


“지금 시대가 특별한 것은, 환생자인 네가 있기 때문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전생에 하멜이었고, 그 전의 전생에는 전쟁신이었지.”


“…….”


“너도 자신의 특별함은 알고 있을 거다.”


“썩을.”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내뱉었다.


“유폐의 마왕이 몇 번의 시대를 보아왔다는 것은 나도 알아. 내 어렴풋한 옛날 기억에도 유폐의 마왕은 존재한다고. 그래서 너는 왜 나를 죽이려 드는…….”


사고가 뚝 끊겼다. 불쑥 떠오른 생각 때문이다. 유진은 하던 말을 멈추고서 망령을 노려보았다.


“유폐의 마왕이 네 특별함에 주목하듯, 베르무트도 똑같다.”


망령이 입을 열었다.


“나는…… 베르무트가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가로트의 환생인 하멜을 찾아왔다. 동료로 삼았다. 함께 마경을 떠돌고, 마왕을 쓰러트렸다.


-만약 네가 함께였다면, 마왕성의 정상에 오른 시점에서 유폐의 마왕과 싸울 필요가 없었을 거다.


-내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조건은 그것이었다. 유폐의 마왕성, 바벨의 정상에 오르는 것. 그곳에서 유폐의 마왕의 본신과 직접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어.


실패했다. 베르무트는 자신의 비원을 동료들에게 철저하게 감추었다.


유진은, 하멜은, 베르무트의 사정을 짐작하지 못했다. 당시 하멜이 생각하던 것은, 동료들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는 것. 추하게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해온 일들에 그럭저럭 어울리는 죽음을 바랐다.


“300년 전 베르무트의 목적은 실패했다. 하지만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았지. 오히려 전력적으로 본다면, 300년 전에 실패한 것이 나았을지도 몰라.”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환생까지의 300년. 세냐와 모론은 강해졌고, 아니스의 영혼도 크리스티나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환생한 유진은ㅡ 하멜일 적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다. 아가로트의 기억도 깨우쳤다.


“지금의 너는 절대로 유폐의 마왕에게 죽어서는 안 돼.”


망령이 말했다.


“그러니 나는, 널 죽일 생각이다. 네가 나조차 넘지 못하고, 내 손에 죽을 정도라면. 너는 절대로 유폐의 마왕을 이길 수 없다.”


유폐의 마왕이 보여 준 진실을 받아들인 후, 망령은 저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베르무트는ㅡ 자신이 아닌 하멜을 세상의 희망으로 두었다. 300년 전의 하멜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에서 용사는, 희망은 바로 위대한 베르무트였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아니다.


“너라는 희망을 유폐의 마왕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 지금 시대에서 불가능하다면, 유폐의 마왕을 이길 자신이 없다면. 나조차 이길 수 없다면.”


망령은 유진을 노려보았다.


“이번 세계는 여기서 끝내는 것이 옳다.”


빌어먹을 환생 485화


망령의 눈을 보았다.


유진에게 있어서, 놈이 내린 결론이 옳고 그른 것은 지금에서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아니, 본심을 말하자면. 유진은 망령의 결론이 절대로 옳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놈은 틀렸다. 놈에게 저런 결론을 내릴 자격은 없다. 정말로 불가능할지라도, 그것을 겨루고 판단하는 것은 망령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진은, 다짜고짜 망령에게 욕을 쏘아붙이지 않았다. 거대한 짜증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주먹만 으스러지게 꽉 쥐는 것으로 참아냈다.


놈의 눈동자에서 분명한 결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놈은, 나름대로의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서 저러한 결정을 내렸다.


유진은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신념이다. 하지만 존중해 주었다. 관점을 달리하자면. 유진의 개인적인 감정 등을 배제한다면. 망령의 말도 아주 틀리지 않은 것이다.


유폐의 마왕에게 죽으면 존재 자체가 붙잡혀 버린다. 다음 시대가 되어도 절대로 윤회할 수 없다. 유폐의 마왕이 붙잡은 혼들을 어떻게 써먹는지는 모를 일이나, 윤회 자체가 박탈당한다는 것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유진은 자신이란 존재에 수많은 것이 얽히고 쌓여왔다는 것을 안다.


베르무트가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베르무트가 환생을 시키지 않았다면. 그렇기에 지금의 특별함은, 절대로 허무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3번의 환생. 그로 인해 유진은 거대한 가능성을 품게 되었다. 이 가능성을…… 이번 시대에서 피워 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다음 시대를 기대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ㅡ정말로 그런가? 유폐의 마왕에게 죽는 것만 피한다면, 다음 시대에서 가능성을 피워 내는 것이 가능키는 한가?


‘모른다.’


보통 사람은 전생을 깨닫지 못한다. 유진도 그랬다. 하멜로 살았을 적에, 아가로트의 기억을 떠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가능성이 완전히 박탈당하는 것과는 달리,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은가.


유폐의 마왕에게 죽으면 다음이 아예 없는 것이고, 다른 죽음을 맞이한다면 다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가능성을, 이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생각을 정리하고, 유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동요된 감정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유진은 몇 번 더 한숨을 쉬고, 괜스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침묵했다. 망령이 내린 답이 옳은가? 성녀들 역시 그것에 관해서는 유진과 생각이 비슷했다. 그러나 둘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이 문제에 세상의 명운이 걸려 있고, 만약 유진이 조언을 구한다면. 아니스는 아니스대로, 크리스티나는 크리스티나대로 유진을 위한 조언을 해줄 것이다. 그것은 성녀들뿐만이 아니라 세냐도, 모론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유진이 가진 여러 비밀을 공유하는 라이언하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조언만 건넬 뿐. 최종적인 결정은 유진이 내려야 한다.


그는 특별하니까.


기대받는 만큼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본래라면 너는 300년 전에 죽고, 그대로 끝나 버렸겠지.”


망령이 입을 열었다. 그는 침묵하는 유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 시선에 유진의 눈썹이 구겨졌다.


저 노골적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300년 전의 바벨. 유폐의 지팡이 베리알.


“유폐의 마왕이 네 혼을 놓아준 것은 두 번 다시 없을 특례다. 유폐의 마왕은 네게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지만…… 너 이상으로 베르무트에게도 관심이 많은 모양이더군.”


“…….”


“상대가 베르무트였기에 유폐의 마왕은 굳이 상대해 준 거다. 오직 베르무트만이……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을 수 있지.”


사막, 하멜의 무덤. 유폐의 마왕과 처음 만났던 순간.


-네 선조는 자유를 대가로 약속을 맺었고, 이제는 그 끝이 다가오고 있다. 멈추었던 수레바퀴가 다시 구를 때가 오게 된다.


-언젠가는 다시 약속을 맺어야겠지. 누가 베르무트를 대신해 약속을 맺고,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을까.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 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베르무트가 없는 지금. 만약 네가 바벨에서 죽는다면, 대체 누가 약속을 맺어 네 혼을 빼낼 수 있을 것 같나? 세냐? 모론? 아니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망령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누구도 약속을 맺을 수 없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가 아닌 누구와도 약속을 맺으려 들지 않을 테니까. 오직 베르무트만이 유폐의 마왕과 동등한 위치에서 약속을 나눌 수 있었단 말이다.”


“……그 베르무트가 널 화신으로 삼았지. 백염식, 마법, 기억, 그딴 것들을 전해주고.”


“베르무트가 왜 그런 짓을 한 것인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추측은 할 수 있지.”


망령은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머나먼 과거, 신화시대의 종말. 베르무트는, 전쟁신 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에게 생겼던 칼자국에 앉아 있었었다.


베르무트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감정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혐오를, 그리고 나중에는ㅡ 연민을.


“널 시험하고 싶은 것은 베르무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베르무트는 유폐의 사슬에 묶여, 멸망의 마왕과 함께 봉인되어 있다. 지금의 베르무트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다.


유진이 언젠가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멸망의 마왕에게 도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베르무트도 마찬가지일 터.


하지만 300년 전과는 달리, 지금 베르무트는 유진과 함께 싸울 수 없다. 유진의 자격이 충분한지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그래서 망령을 화신으로 삼았다.


“잘 알았다.”


침묵하던 입술이 열렸다.


“네가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 네가 왜 나를 죽이려 드는지, 잘 알았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네 의견에 공감 못 하겠다.”


시험하고 싶은 것은 베르무트도 마찬가지라고? 엿 같은 말이지만, 결국은 납득했다. 유진이 아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이런 짓을 벌일 만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히 너는 그렇겠지.”


망령이 이죽거렸다. 유진은 혀를 차면서 망령을 노려보았다.


“굳이 널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만, 의문이 남아서 하나 더 물어보마. 네가 생각하기에도 좀 극단적이라는 생각 안 드냐?”


유진이 바벨을 올라, 유폐의 마왕에 도전할 자격이 있나? 그걸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라면, 이렇게 다짜고짜 전쟁을 벌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네가 유폐의 마왕에게 쳐 발리고,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돼서 급발진한 것은 이해해 줄게. 하지만 이렇게 대화도 하고, 어? 사정도 좀 알고. 그럼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도 되지 않나?”


“……어떤?”


“이 시답잖은 전쟁놀이부터 일단 끝내는 거지.”


유진은 망령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지금도 바깥에서는 전투가 한창이다.


“네가 말했지. 유폐의 마왕을 만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원래는 적당히 전쟁놀이를 하다가, 나한테 죽을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거잖아.”


결국 망령의 목적은 유진을 시험하는 것이다. 유진이 유폐의 마왕과 싸워 이길 수 있는가? 그럴 목적으로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상태였다면, 유진도 망령의 살의에 호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을 알지 않나. 그렇다면 더 싸울 필요가 있나? 꼭 서로를 죽이려 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망령은 강하다. 저 힘이 순수하게 놈의 것이 아닐지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판데모니엄과 바벨로 진군할 때. 그리고 유페의 마왕과 싸울 때 망령이 힘을 보탠다면?


“불가능해.”


유진이 직접 말하기도 전에, 망령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유폐의 사슬은 멸망의 마왕을 묶고 있다. 그 마왕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내 힘은,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방해하거나 위험하게 만들겠지. 하지만 네 월광검이라면…… 통할지도 모르겠군.”


망령은 월광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검이 내뿜는 달빛은, 이제는 너무 많은 것들이 섞여 있다. 멸망의 화신인 망령조차도 저 검이 내뿜는 달빛을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다.


유진도 손에 쥔 월광검을 내려 보았다. 월광검을 쓸 때는 주변 사람이 휘말리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이 검이 내뿜는 달빛은 마법에 있어서는 치명적이다.


월광검 하나뿐이라면 큰 문제는 없다. 유진은 300년 전 베르무트 이상으로 월광검을 다뤄내고 있으며, 지금의 월광검은 예전과 성질 자체가 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망령이 더해진다면, 솔직히 세냐나 성녀들은 전력을 다하기 힘들 것이다.


“만약 내가 널 이기지 못하고, 여기서 죽는다면.”


유진은 표정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그 이후에 너는 어떻게 할 셈이냐. 다른 사람들도 직접 네 손으로 죽여버릴 거냐?”


“너 하나만 다음 시대를 기약하게 두는 것보다는, 모두의 가능성을 남기는 편이 낫지.”


“그다음은?”


유진은 더 이상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대신 유진의 얼굴에서 감정이란 감정이 모조리 사라졌다. 금색 눈동자가 싸늘한 빛을 발했다.


망령은 마른 웃음을 토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말이다. 당연하게도 저 말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죽음…… 과는 다르군. 소멸이지. 어찌 됐든, 나는 오래 살지 못하고 소멸할 거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소멸이지. 오히려 이게 타당하지 않나? 멸망의 마력은 계약한 마족조차 자멸시킨다. 심지어 나는…… 계약 정도가 아니라, 마력과 뒤섞여 있지.”


망령의 혼은, 아멜리아가 이런저런 영혼을 모으고 섞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영혼에 마력이 섞이고, 베르무트의 뜻이 개입하여 멸망의 화신으로 거듭났다.


안정성이랄 것이 보장될 리가 없지 않은가.


“너무 극단적이지 않으냐고? 당연히 극단적일 수밖에 없지. 나는 오래지 않아 소멸할 운명이다. 그건, 상관없어. 애당초 나는 존재해서는 안 될 몸이니. 하지만 내게는, 내 것이 아닐지라도 ‘기억’이 있다. 그에 따른 감정도 있어.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란 것을 자각한 뒤에, 새로이 쌓인 감정도 있다.”


납득했다.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너와 다르지 않다. 네가, 모든 마왕을 죽였으면 좋겠다. 300년 전에 해내지 못한 목적을 이뤘으면 좋겠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한 평화에 도달했으면 좋겠다. 네가, 마경에서, 동료들과 떠들던 시답잖은 미래를 이뤘으면 좋겠다. 그리고ㅡ 비밀이 너무 많은, 베르무트, 그 새끼를, 구해서, 두들겨 팼으면 좋겠다.”


망령이 내린 결정을 존중한다.


“지금 시대에서 이루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것들을 가지고서 다음 시대를 기약하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전력을 다해 널 죽일 거다. 나보다 약하다면 절대로 유폐의 마왕에게 이길 수 없을 테니.”


저 결정은 망령에게 있어서 최선이다. 결국 놈은, 이다음의 미래를 볼 수 없다. 유진이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해서, 이길지, 패배할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너는…… 굳이 더 싸울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지. 너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내게 있어서 이 세상은 지금이 마지막이다. 설령, 설령 내가 소멸을 앞에 둔 시한부가 아닐지라도.”


검을 쥐었다.


“앞으로 네가 임할 전투에 내가 필요해서는 안 돼. 너는, 전쟁신 아가로트였고, 하멜이었고, 유진 라이언하트이며, 용사니까. 나 같은 것의 도움이 있어서는 안 돼.”


성검이 빛을 발했다.


“그래.”


월광검이 달빛을 흘렸다.


“X까.”


대뜸 다가온 욕설에 망령의 표정이 굳었다.


“아가로트여서? 하멜이어서? 용사여서? 내게 있어 그런 것은 각오로 삼을 만큼 새삼스럽지도, 대단한 이유도 아니야.”


검은 불꽃이 다시 휘날렸다.


“내가 특별하다고? 어, 그래, 나는 특별하지. 하지만, 마족을 죽인다. 마왕을 죽인다. 세상을 구한다. 이런 생각은 전쟁신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고 용사도 아닌 사람도 할 수 있어.”


마음에 안 든다.


“이번 시대에 가망이 없다면 다음 시대를 기약하자고? 그럼 300년 전에 싸우다 뒈진 사람들은? 지금 시대에서 마왕을 쓰러트리겠다고 결의한 사람들은?”


그냥, 마음에 안 들 뿐이다.


“네가 필사적이란 것은 알겠다. 네 결정이 무조건 틀리진 않다는 것도 알겠어. 근데 나는 네 결정이 마음에 안 들고, 다음을 지껄이는 태도도 X같아. 그러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할게. 네가 네 마음대로 하듯이 말이야.”


휘날리는 불꽃이 사자의 갈기가 되었다. 등 뒤에서 치솟은 불꽃은 하나의 날개가 되었다.


“수 싸움은 그만두지.”


유진의 양손이 검을 놓았다. 하지만 성검과 월광검을 아래로 떨어지지도, 빛이 희미해지지도 않았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두 자루의 검이 내뿜는 빛이 검은 불꽃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여력을 남겨서, 확실하게. 그런 것도 그만두마.”


천천히 들린 왼손. 꽉 쥔 주먹이 앞으로 향했다. 주먹이 서서히 뒤집히고, 중지가 세워졌다.


“날 죽이고, 시험하고 싶은 것이라면. 당연히 내 전력은 넘어서야 할 것 아냐.”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 무조건 죽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패를 분배했다.


이그니션은 한번 발동하면 물릴 수 없다. 지속시간은 약 10분. 그 뒤에는 반동이 찾아와 전투가 불가능하다.


신검은 3번 발검할 수 있다. 처음에 한 번 뽑았으니, 앞으로 남은 것은 두 번.


월광검과 성검을 적극 활용하고, 이그니션은 프로미넌스로 대체한다. 그렇게 전투를 지속하면서 망령의 힘을 깎아낸다. 놈이 가시적으로 약화된다면 신검을 한 번 더 휘두른다. 성녀들의 보조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전장이 안정화 된다면 세냐의 지원사격을 받는다.


무조건 죽일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지 않고서는 이그니션은 안 쓴다.


애당초 이그니션은 상대를 무조건 죽이기 위한 필살기.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각오를 깔아야 한다. 성녀들과 세냐의 지원을 받고, 망령이 최후의 발악을 할 즈음에 이그니션을 발동하고 신검으로 죽이는 것.


유진이 생각한 승리 공식은 저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내려놓았다. 망령이 보고, 시험하고 싶은 것은 유진의 전력이다. 그걸 바란 것은 베르무트기도 하다.


망령은 죽어가고 있다.


“신검.”


오른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그니션은 그다음이니까, 알아서 받아봐.”


당당한 선언에 망령은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결국 달라지지 않았다.


망령은 그것이 좋았다.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유진이 망령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는 것이니.


그 존중에 감사를 표할 겨를은 없었다.


전쟁신과 용사.


신앙과 숭배를 기적으로 승화시킨 검광(劍光)이 어둠을 양단했다.


빌어먹을 환생 486화


번져오는 불빛. 이그니션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고 해서 저 검이 유진 라이언하트의 전력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애당초 코어를 폭주시켜 마나 출력의 한계를 돌파하는 이그니션과 신검은 사용되는 힘이 다르다. 이그니션을 쓴다고 해서, 신검의 위력이 증폭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즉, 저 붉은 검광은ㅡ 전쟁신 아가로트의 신앙과,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숭배 그 자체. 망령이 말한, 유진이 가진 특별함과 가능성의 정수.


신검의 위력은 전투가 시작된 순간에 겪어보았다. 월광검과 성검이 합일하며 일어난 기적과 마찬가지로, 한 번 발검 된 신검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또한 신검에는 참마(斬魔)와 필살(必殺)의 기적까지 깃들어 있다.


그것은 오만하고 난폭한, 전쟁신 아가로트의 신력이다. 신화시대의 전장, 아가로트의 상대는 거의 대부분이 마족과 마왕이었다. 그렇기에 아가로트가 휘두르는 검은 반드시 마(魔)를 베어내고자 하는 신의(神意)가 담겨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의 신검은, 아가로트의 전성기에 휘두르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불완전하다.


저 검붉은 검광은 시공마저 뛰어넘을 테지만, 진정한 의미로 참마와 필살은 재현할 수 없다.


그러나.


한번 베여보았기에, 망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체험하여 깨달은 것들뿐만 아니라, 멸망의 화신이 되어 얻은 직관과 직감이 신검을 새로이 판단하게 만들었다.


저 칼날은 거칠다.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갈아버리는 것만 같다. 칼날이 짐승의 이빨이나 톱처럼 뾰족뾰족하고 난잡한 것만 같다. 그렇기에 상처가 깊이 남는다. 마치 상처에 소금이나 깨진 유리 조각을 들이붓는 것처럼, 베인 것 이상의 고통이 남는다.


‘저주…….’


망령이 움직였다.


‘한(恨), 원독(怨毒)…….’


시대를 넘어서 이어진 분노와 증오, 살의. 그 모든 것이 신력을 독처럼 바꾸었다.


저것은, 아가로트의 신력이 아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력. 전쟁신의 신앙이 아닌, 이 시대에 새로이 숭배되는 용사로서 갖게 된 신앙이 신력으로 승화된 것이다.


‘용사답지 않군.’


덮쳐오는 검광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그 감상은, 유진의 불꽃이나 힘을 본 사람들 대부분이 감는 동일한 감상이었다.


어울리지 않을지언정, 저 검은 우직하게 마를 벤다. 아니, 갈아버린다. 찢어버린다. 아가로트의 신검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유진의 신검은 마를, 마왕을 죽이기 위한 검이다.


그렇다면 피해서는 안 된다. 엄밀히 말해서 망령은 마왕이 아니지만, 그는 지금 마왕답게 용사를 가로막고 있다. 또한 마왕답게 용사를 죽일 셈이다.


처음 신검을 보았을 때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아니, 대응이 불가능했다. 피할 수 없다. 공격으로 대응하거나, 방어하거나. 둘 중 하나를 고민하다가 어설프게 검을 뻗었지만, 검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지금은 둘 중 하나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망령은 즉시 검을 쥐었다. 여러 가지 색이 뒤섞여, 어지럽게 보이는 마력이 검의 형상이 되었다.


베르무트의 백염식. 마력이 불꽃의 형상이 되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마력이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렸다.


신검과 마검이 충돌했다. 아까처럼 허무하게 부서지지는 않았다. 무한하게 쏟아지는 마력이, 갈기갈기 찢기는 칼날을 계속해서 수복시켰다.


‘달라.’


마검 자체는 아까 겪은 것과 똑같다. 하지만 위력이 다르다. 정교함이 다르다. 마력의 조작 능력까지도 오른 것 같다. 그 순간, 망령과 유진은 똑같은 것을 느꼈다.


‘강해지고 있어.’


화신으로서의 힘에 익숙해지고 있나? 아니면 베르무트가 힘을 더 보내주고 있는 건가. 그렇게까지 할 만큼 시험하고 싶다는 건가?


‘네가 그것을 바란다면, 나는…….’


아직 소멸은 찾아오지 않았다. 더 싸울 수 있다. 망령의 뜻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전력을 다해 유진을 죽일 것이다.


‘해봐.’


유진의 입술이 비틀렸다. 베르무트, 이 개새끼.


‘어딘지 모를 곳에 처박힌 네가, 내가 얼마나 강한가 보고 싶은 거라면.’


신검과 마검 사이에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현상은 일어나고 있다.


차원의 틈새, 공간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이곳이 소멸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처럼 깔린 어둠이, 신력과 마력에 섞이며 여러 가지 다른 색깔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하멜……!]


아니스가 비명을 질렀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하지만 유진은 검을 내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ㅡ화아악! 기어코 어둠이 사라졌다. 유진과 망령이 존재하는 틈새에는 새하얀 공허만이 남았다.


쩌저적! 공허가 갈라졌다. 또다시 차원의 층이 부서졌다. 그 밖으로 나가 버리면, 정말로 어딘지 모를 차원으로 넘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식조차 불가능한 암흑에 빨려 들어갈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유진이 바라는 바는 아니다. 차원 층이 붕괴해 소멸하기 직전, 프로미넌스가 검게 타올랐다.


밖과 연결은 단절되지 않았다. ‘빛’은 연결되어 있다. 프로미넌스의 불꽃이, 성녀들의 빛과 연결되었다.


도약했다.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무너져 소멸하던 공간 한복판에 있던 유진은, 어느새 하우리아의 상공으로 되돌아왔다. 그 순간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ㅡ 하늘에 남겼던 상처 자국이, 울룩불룩 끓는가 싶더니 오그라들어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뒤쪽을 보았다.


폐허가 되어버린 하우리아. 아까까지는 그래도 도시의 흔적이랄 것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수천 마리의 누르는 도시의 건물을 모조리 짓밟고 부수어 평평하게 만들었다. 저 아래에는 건물과 거리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괴성을 질러대며 마구잡이로 날뛰는 괴물의 대군. 그 앞에, 유진과 함께 도시로 넘어온 해방군이 있었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멜키스다. 그녀는 마법사이면서도 후방에 있지 않고 최전방에서 길을 열었다.


멜키스의 바로 뒤, 로베리안의 판테온이 활짝 열려 있다. 로베리안은 그 위에서 소환수들을 쏟아내며 누르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길레이드는 더 이상 말을 타지 않았다. 그는 백사자들과 함께 앞장서서 소환수들 사이를 파고들어 누르의 틈을 파고들었다.


시안은 아버지의 바로 곁을 따랐다. 알체스터, 이바타, 아만, 오르투스, 아이빅. 단장들이 활약하고, 마법사와 성직자들도 쉬지 않고 술식과 기도를 외웠다.


지상뿐만이 아니다. 하늘. 제각각의 날개를 퍼덕이는 누르들의 앞. 와이번과 페가수스, 소환수 등을 타고서 격전을 벌이는 기사들이 보였다.


라이언하트의 깃발들을 보았다. 그 외에 여러 깃발도 보였다. 거대한 페가수스의 고삐를 쥔 라파엘로가 클레이모어를 휘둘러 누르의 목을 베고, 그 근처에서는 카르멘의 불꽃이 누르를 집어삼키고 있다. 기사들을 독려하는 기온의 모습이 보였다. 제노스도 붉은 불꽃을 두르고서 누르에게 돌진하고 있다.


시커먼 어둠이 깜빡였다. 암전의 마안. 눈동자가 벌겋게 충혈되었지만, 시엘은 계속해서 마안의 권능을 발동하고 있었다.


유진의 시선이 조금 더 뒤로 향했다.


하늘, 세냐의 뒤편에 우주가 열려 있다. 무너진 성벽과 건물 등의 잔해가 서로 뒤섞여서 우주를 채우고 있다.


저런 마법은 300년 전부터 세냐가 즐겨 사용하던 것이다.


실체에 마나를 섞어 무식하게 때려 박는 것. 그러한 마법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전쟁 마법의 꽃이라 할 수 있을 메테오.


하지만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단신으로 머나먼 하늘에서 유성을 떨구는 것은 힘들다. 즉석에서는 불가능에 가깝고, 다른 마법사들의 보조를 받거나 미리 마법진이라도 준비해야 한다.


다른 대마법사에 국한된 얘기. 세냐에게는 상관없다. 아니, 세냐 정도의 마법사라면 굳이 먼 하늘에서 적절한 유성을 끌어 올 필요도 없다. 유성이 필요하다면 지상에서 만들면 된다. 우주에서 낙하할 만큼의 충격은 마법으로 보강하면 된다.


“어디 갈 때는 말을 하고 가야 할 것 아냐.”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유진을 향해 손을 휙휙 흔들었다.


무슨 뜻인지는 뻔했다. 세냐가 그리는 궤적에 유진이 걸려 있으니, 알아서 피하란 뜻이다.


ㅡ콰르르! 마법으로 만든 거대한 유성이 우주를 떠났다. 날아가는 속도는 지상에서는 순식간에 그림자가 지나갈 정도로 빨랐다. 유진은 괜히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에, 유성이 그리는 포물선을 피해 한참 높은 하늘로 도약했다.


꽈아아앙! 누르의 대군, 그 중심에 유성이 처박혔다. 실제 우주에서 낙하시키는 것에 버금갈 힘은, 불필요하게 흩어지지 않고 오롯이 누르들에게 집중되었다.


대도시를 통째로 소멸시킬 만큼의 힘. 그만한 힘이 집중되었는데도 누르들은 전멸하지 않았다. 놈들이 내지르는 괴성은 불길한 마력이 되어, 머리부터 짓누르는 충격을 상쇄했다.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


300년 전에 보았던 마물들이나 아까 죽였던 마물들 이상으로 지독하다. 불쾌하고 징그러운 데다 잘 죽지도 않고 숫자도 득실거리기까지 하다.


“쟤들 좀 치우면 안 되냐?”


“똑같은 대화를 반복하기는 싫은데.”


망령은 당연하다는 듯이 반대편 하늘에 서 있었다. 마검은 빛을 잃어 사라지고 있었지만, 놈이 두른 불꽃은 오히려 더 격렬하고 불길하게 타올랐다.


“왜. 쟤들도 다 시험하겠다, 이거야?”


“너 혼자서 헬무드에 쳐들어가서 바벨에 오를 것도 아니잖나.”


“못할 건 없지. 지금의 나라면 고위마족 상대로 학살도 가능할 텐데.”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망령도 저 말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헬무드 마족 중에서, 유진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가비드 린드먼과 누아르 제벨라 둘뿐이다.


“용사인 네게 감화되어서 이곳에 온 자들의 결의를 무시하겠다는 거냐.”


“씹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웃음을 치던 유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 말은 아까 유진이 했던 말이다. 설마 이렇게 돌려받을 줄이야.


[믿으십시오.]


지금 말하는 것은 아니스일까, 크리스티나일까. 둘 중 누구라도 할 법한 말이다.


“신 믿기도 힘든 판국에 남 믿기가 쉽나.”


[불경한 말은 마시고.]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면서 오른손을 툭툭 털었다.


신검이 사라진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다. 아직 한 번은 더 꺼낼 수 있겠지만.


그전에.


유진은 보란 듯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가슴에 얹었다. 손등이 심장 부근을 덮었다. 그 노골적인 자세에 망령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예고했던 대로 하는 거냐.”


“어.”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더 이상 유진의 백염식은 별을 갖지 않는다. 대신, 별이 있던 자리에 우주가 깃들었다.


검은 불꽃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꽃의 색이 완전한 암흑처럼 짙어졌다.


별빛 같은 반짝임이 어둠 속에서 피어났다. 그렇게 불꽃은 은하수가 되어 유진을 휘감았다.


백염식이 변화하고, 신검을 깨쳤다. 그 후부터의 이그니션은 단순히 코어를 폭주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는- 아가로트와 하멜을 거쳐 도달한, 유진이 지닌 모든 가능성의 실체화.


기술도, 마법도 아니다. 이것은 신검과 마찬가지로, 유진이 구현하는 기적이다.


“너도 준비해.”


유진은 은하수에 잠겨서 내뱉었다.


“알고 있나?”


망령의 오른손이 심장 부근을 덮었다.


“이곳보다 아득히 높은 하늘. 누아르 제벨라와 가비드 린드먼이 우리 둘을 보고 있다.”


“설마 직접 보러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유진은 놀람 없이 중얼거렸다.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느낄 수 있다. 그 악취미적인 제벨라 페이스 안에 있는 누아르와,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서 있는 가비드.


“누아르는…… 네가 하멜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비드는 네가 하멜이란 것을 모르더군.”


“그 새끼 은근히 병신이라 눈치가 없어. 애당초 내가 그 새끼 앞에서 정체를 감추기도 했고.”


“더 이상 감출 생각이 없다는 거냐.”


“여기까지 와서?”


유진은 입술을 뒤틀며 말했다.


빠지직! 스멀스멀 넘치며 확장되던 우주가 멈췄다. 성간에 번개가 흐르며 우주가 유진에게 압축되었다.


“내가.”


굳이 위를 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저 높은 곳에서 가비드가 두 눈을 부릅뜨고서 보고 있을 테니. 크게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새끼가 알아서 귀를 열고 들을 테니.


“하멜이다.”


유진은 웃으며 내뱉었다.


콰아아아! 높이 치솟은 프로미넌스가 하늘을 관통하고, 누아르와 가비드가 있는 곳까지 닿았다.


도달한 순간은 찰나. 프로미넌스는 순식간에 줄어들며 형상을 바꾸었다. 더 이상 프로미넌스는 검은 불꽃의 날개가 아니었다. 검고 푸른빛과 주황빛이 섞인 성운(星雲)이 날개가 되었다.


터무니없는 힘. 300년 전의 마왕들조차도 지금의 유진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끼리라.


하지만 얄궂게도, 저 끔찍하리만치 압도적인 힘은 웅장하며 아름답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빛이 밝힌 밤하늘처럼, 그러한 별이 흐르며 만드는 은하수처럼, 극지에서 보이는 오로라처럼. 지금의 유진은ㅡ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미지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콰드득.


망령의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의 백염식은 베르무트에게 이어진 원전(原典). 300년 동안 라이언하트에 이어진 백염식은, 베르무트가 후손들을 위해 ‘익힐 수 있게’ 만들어낸 것.


본래의 백염식은ㅡ 평범한 인간은 익힐 수 없다. 베르무트의 존재가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망령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이 아니며, 평범하지 않다. 라이언하트에 계승되고 유진이 익힌 백염식이 찬란히 빛나는 별이라면.


베르무트가 품었던 별은 흉성(凶星)이다. 그 아름답던 백색의 불꽃은, 휘날리던 사자의 갈기는, 그 어느 존재도 허락지 않던 허무의 색이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을 때.


흉성이 폭주했다. 활짝 열린 문에서 멸망의 마력이 쏟아졌다. 아니, 쏟아지는 것이 아니다. 망령의 심부가 멸망의 마왕과 동화되었다. 폭주하는 흉성이 노심이 되었다.


유진이 미지의 아름다움을 가졌다면, 망령은 미지의 불길함을 가졌다. 온갖 색이 뒤섞이고 번졌다.


모든 색이 섞였을 때.


멸망의 색은 허무한 백색으로 바뀌었다.


“하.”


새하얀 불꽃에 잠긴 망령은, 여전히 가슴에 손을 얹고서 웃었다.


대수림에서, 마력을 무식하게 폭주시켰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능감.


“이런 기분이군.”


망령은 나직이 속삭이며 유진을 응시했다.


성운을 날개로 삼고, 은하를 두른 유진은ㅡ 망령과 마찬가지로 아직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웃어버린 망령과는 달리,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에 웃음기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유진과 망령은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무조건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빌어먹을 환생 487화


유진 라이언하트의 오른손이 가슴을 거머쥐었을 때.


아니, 사실은 그 전부터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과 망령의 전투. 한 호흡을 수백 수천 번 쪼개오며 압박하는 참격의 난무. 닿았다 싶은 순간에 흘려내며 이쪽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기.


유진이 사용하는, 망령보다 훨씬 더 정교하면서도 위력적인 기술. 그 모든 것을 가비드는 알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모습보다 훨씬 발전한 형태기는 했지만, 알아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믿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도달하는 결론은 똑같았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하멜의 기술을 쓰는 것? 그게 무어가 이상한가. 라이언하트에는 하멜의 기술이 전수되고 있다.


……하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망령보다 훨씬 더 기술을 잘 쓰는 것? 놈은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불릴 정도의 천재다. 전승된 기술을 원전보다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저것’을 본 순간, 믿기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던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것은 기술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다. 아까처럼 기묘한 빛을 검처럼 뽑아내는 것일까 싶었지만, 검붉은 빛 같은 것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불꽃이 격렬히 타올랐다. 마나가 폭주했다.


“……이그니션.”


가비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이그니션을 쓰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지금, 머릿속을 떠도는,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을 사실이라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멀고 먼 아래에서의 속삭임. 활짝 열고 있던 가비드의 귀가 유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멜이다.”


선언에 경악하는 순간.


콰아아아! 시커먼 불꽃의 날개가 가비드의 앞에 나타났다.


하늘을 꿰뚫고서 치솟은 날개. 가비드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바로 코앞에 있는 외날개는, 마치 시커멓게 타오르는 불꽃의 검처럼 보였다.


“맙소사…….”


방금의 선언만으로도 경악하기 충분했지만, 날개에 다긴 ‘힘’은 가비드로 하여금 또 다른 경악을 느끼게 만들었다.


설령 드래곤일지라도 이만큼이나 파괴적이고 거대한 마나는 가질 수 없을 텐데. 이것이 정말로 인간에게 허락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힘이란 말인가?


‘아니. 마니뿐만이 아니다. 다른 것도 섞여 있다.’


그 힘의 정체를 들여보기도 전. 치솟았던 날개가 줄어들었다. 그러게 눈앞에서 날개가 사라졌지만, 불꽃이 남긴 힘의 잔재는 가비드의 눈앞에 남아 일렁거렸다.


가비드는 꿀꺽 침을 삼키며 아래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 가비드의 눈앞에 있던 검은 불꽃의 날개는, 이제는 성운과 같은 형상이 되어 유진의 뒤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유진은 가비드를 보지 않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유진을 쳐다보며, 내려다보는 것은 가비드뿐이다.


‘……내려다본다고?’


정말로 그런가? 가비드는 오싹한 전율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지금 높이에서 유진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심적으로는 도저히 내려다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몰살의 하멜.”


가비드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300년 전. 인간에게는 위대한, 마족에게는 절망이라 불리던 용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와 함께 마경을 모든 마왕을 죽이고, 마경을 정복하겠다고 나선 미치광이 집단.


베르무트의 동료들 중에서, 가비드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남자가 바로 몰살의 하멜이다.


……강해서? 확실히, 하멜은 강했다. 하지만 베르무트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가비드보다 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가비드는 하멜에게 ‘공포’를 느꼈었다.


첫 만남. 지옥의 세냐와 함께 정찰을 나왔던 하멜과 마주쳤을 때. 가비드는 당연히 그 자리에서 하멜과 세냐를 죽이려 했다. 적의 전력을 손쉽게 줄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물러설 이유가 어디에 있나.


하지만, 죽이지 못했다. 힘이 부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힘’을 논한다면, 당시의 가비드는 하멜과 세냐보다 강했다. 하멜이 저 기묘한 기술을 쓰지 않았다면, 큰 어려움 없이 둘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그니션. 가슴에 손을 얹고, 코어를 폭주시키는 자멸기이자 필살기. 상대를 무조건 죽이겠다는 결의로 펼치는 기술. 상대를 죽이지 못한다면 무조건 자신이 죽게 되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기술.


300년 전의 가비드는, 죽음을 각오한 하멜에게 압도당했다. 가진 전력으로는 우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상대를 죽이겠다는 살의로 덤벼오는 하멜에게 위압감과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가비드는 하멜을 잊을 수가 없다. 유폐의 칼, 이라는 별명을 갖고, 마왕의 기사를 자처하던 가비드에게 있어서ㅡ 자신보다 약한 인간에게 공포와 위압감을 느껴, 스스로 물러선 것은 평생 다시 없을 굴욕이었기 때문이다.


바벨에서 그 굴욕을 갚아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하멜이 유폐의 어전에 도달하기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환생……? 생명이 윤회하는 것이야 특별할 것도 없는 일. 하지만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환생을, 그것도 베르무트의 후손이자 용사로 환생하는 것은…… 절대로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가비드는 방금의 선언을 곱씹으며 이를 악물었다.


유진이 이그니션을 사용한 것과 동시에, 망령도 이그니션을 사용했다. 놈에게는 마나를 품은 코어 같은 것은 없을 텐데. ‘폭주’ 자체는 가능한 모양이다.


망령이 쏟아내는 마력의 불꽃. 멸망의 마왕과 닮은 ‘색’이 공허한 백색 불꽃이 되는 것을 보며, 가비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경악 뒤에는 짜증과 분노가 찾아왔다.


“그대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는 이해가 간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가 왜 그토록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집착하며, 호의를 베풀었는지 말이다. 여태까지 쭉,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해서? 미남이어서? 유진에게 호의를 가질 만한 이유야 얼마든지 꼽아볼 수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여도 누아르의 집착과 호의는 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면,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가 하멜에게 집착하고 호의를 가졌던 것은 300년 전부터 노골적이었으니. 심지어 바벨에서 하멜이 죽었을 때, 누아르는 마족 중에서 유일하게 검은 드레스를 입고다니며 하멜을 추모했을 정도였다.


가비드는 뿌득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알고 있었겠…….”


짜증과 분노를 담아 내뱉던 말이 뚝 멈췄다. 가비드는 계속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만큼 누아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누아르가 가진 보라색 눈동자는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잘근잘근 씹어댄 입술을 엉망으로 터져서 피범벅이었고, 양 뺨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그토록 흘린 눈물은 아직도 멎지 않았다. 하지만 평범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피눈물. 누아르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언제나 베실베실 웃으며 상대를 기만하던 그녀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한 점의 웃음기도 없었다. 가비드는 벌써 수백 년이 넘도록 누아르와 알고 지냈으나,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대체 왜? 유진이 하멜임을 선언해서? 정황상 누아르는 진즉부터 유진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텐데. 저런 표정과 감정을 내비칠 이유가 있나?


‘감정?’


가비드는 놀람을 가다듬고서 누아르의 표정을 살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표정.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것은…….


‘절망?’


누아르는.


가비드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이. 가비드에게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란 것도 알았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지금의 누아르에게 있어, 가비드의 시선과 평가 따위 주목할 가치가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욱신거리며 쑤시는 것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다. 아니, 머리는 이미 몇 번이고 터졌다.


누아르는 숨을 헐떡거리며 손을 의식했다. 관자놀이를 관통하고 뇌를 곤죽으로 만들었던 손가락. 피와 뇌수 따위가 엉겨 붙은 손가락을 거머쥐었다.


‘알아.’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이 떠올랐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괴물들.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사람들. 그, 위에서. 전장을 지배하고 사기를 북돋는ㅡ


지끈거림이 강해졌다. 누아르는 다시 한번 입술을 씹었다. 터진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혀로 핥았다.


이건,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다. 누아르 제벨라가 아닌 다른 존재의 기억. 드문드문 떠오르는 장면들이 연결되고 있다.


누아르는 피범벅인 손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이따위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 * *


서로가 동시에 확신한 것은 필살(必殺).


떠올린 즉시 움직였다. 월광검과 성검이 서로 다른 빛을 내뿜었다.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이 성검을 휘감았고, 칙칙하고 창백한 달빛이 월광검을 휘감았다.


이그니션을 쓴다고 해서 신검의 위력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검과 월광검은 이그니션으로 증폭된 힘의 영향을 받는다. 두 검이 발하는 힘에 불꽃이 섞였기 때문이다.


‘베르무트의 검들과 다르다.’


베르무트의 손에서 성검은 저토록 찬란하지 않았다. 월광검도 저토록 강렬하지 않았다. 망령은, 성검과 월광검에 섞여 들어가는 빛에 주목했다. 저 두 개의 검은, 마치 유진의 수족처럼 확실히 영향을 받고 있다.


저러한 변화 또한, 베르무트가 주목한 ‘특별함’일까.


‘그럴지라도.’


망령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대화를 나눴음에도 망령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를 나누었기에 망설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멸망의 마왕과 연결된 노심에서 마력이 들끓었다. 망령 또한 두 자루의 검을 쥐었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마검. 망령이 검을 손에 쥔 순간.


유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프로미넌스의 공간도약? 아니, 단순히 초고속으로 움직인 것뿐이다. 지금 유진은 저런 종류의 공간도약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 거리라면 마법으로 도약하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더 빠르다.


그렇지만 망령은 반응했다. 화신인 그는 마력이 거세어질수록 뚜렷하게 강화된다. 폭주하는 마력은 망령이 판단하기도 전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에 대한 결론을 내놓았다. 그것은, 전쟁신의 신성과 직관에 버금갔다.


두 쌍의 검이 서로 어울렸다. 시작은 마치 검무라도 추는 것처럼 화려했으나, 한 번의 충돌로 기세가 돌변했다.


참격의 난무. 감각으로 쫓는 것은 한참이나 느리다. 참격을 느끼기 전에 미래를 엿보아야 한다. 상대가 어떻게 검을 휘두를지, 그것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 대응을 어떻게 흘려내야 할지, 흘려내기를 어떻게 꿰뚫고 돌이켜야 할지, 그것을 어떻게 압박해야 할지, 그것을…….


끝없이 이어지는 수 싸움은 서로의 사고 속에서 이어졌다. 사고를 가속시켜 실감을 아득히 늘어낼지라도 부족하다. 한 번의 충돌이 생겨나는 동안에 유진과 망령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십 번의 충돌이 연산되었다.


‘보인다.’


실제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보고 판단하는 것은 늦으니까. 하지만, 지금 유진은 ‘보인다’고 느꼈다. 유진의 눈동자가 신성에 의한 빛을 뿜었다.


전투라면 질릴 정도로 겪어 보았다. 이 영혼에 얽힌 인과를 되돌아본다면 전쟁조차도 질릴 만큼 겪어보았을 것이다. 유진이 가진 신성(神性)은 바로 거기서 태어났다.


전투에서의 불패. 전쟁에서의 승리.


그렇기에 지금, 유진은 직관은 전투에서의 승리로 도달하는 방법을 비춘다. 사고에서의 연산을 초월했다. 유진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검을 이끌었다.


망설임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잠깐의 주저로 길은 가로막혀 버린다. 지금 검을 찌르는 방향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일단 찌르고 보니, 마치 이끌리듯이 망령의 몸이 와있었다.


성검의 칼끝, 빛이 창처럼 쭉 늘어났다. 망령의 어깨가 빛에 꿰뚫려 소멸했다. 그 정도로 망령은 멈추지 않았다. 백색 불꽃이 성검의 빛을 밀어냈다.


콰르르르! 오히려 소멸한 어깨에서 마력이 피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불꽃을 보태었다.


도시 상공. 거의 절반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범위의 하늘이, 망령이 내뿜는 백색 불꽃에 뒤덮였다.


이윽고 그 불꽃은 거대한 검이 되었다. 도시를 일격에 양단할 수 있을 만큼의 대검. 단순 크기만 보았을 때 그렇게 생각될 뿐. 실제 위력은 도시가 아니라 나라조차 양단할 수 있으리라.


그, 거대한 검이 움직였다. 망령이 허리를 비틀고, 검이 하늘을 가로 베었다. 동시에 프로미넌스가 빛을 뿜었다. 성운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수백 발의 이클립스가 난사되었다.


그렇게나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마검의 전진은 가로막히지 않았다. 유진은 뿌득 이를 갈면서 월광검을 들었다.


콰르르르! 거센 달빛에 우주가 뒤섞였다. 그 순간 월광검의 검신은 더 이상 달빛이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유진이 두르고 있던 우주가 그대로 검이 되어 쭉 늘어났다.


공검까지 섞었다. 이그니션으로 증폭시킨 불꽃이 중첩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최고까지 증폭된 공검은 시커먼 덩어리가 되었다.


크기는, 망령이 휘두르는 마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다. 하지만 무식하게 크기만 키운다고 해서 무조건 강한 것이 아니다. 보다 정교하게 힘을 응축시키고, 그에 더불어.


기도.


‘더 강하게.’


유진의 기도가 기적으로 바뀌었다. 유진이 도달했던 공검은 5중첩이 한계다.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5중첩을 넘은 순간 마나의 형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기도에서 태어난 ‘기적’이 공검을 한 단계 더 중첩시켰다. 마나의 붕괴가 기적으로 유지되며, 불씨가 서로 응집되었다.


6중첩의 공검. 크기가 커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얇게 압축되어 칼날에 달라붙었다.


꽈지지지직!


검게 타오르는 월광검이 마검을 양단했다.


빌어먹을 환생 488화


지금 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평범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기사단. 혹은 내로라하는 용병단. 대수림 전사들의 정예. 마탑. 수도원.


기사 중에서, 용병 중에서, 전사 중에서, 마법사 중에서, 성직자 중에서, 최상위권에 들어가는 실력자들. 그들 중에서 둔재(鈍才)나 범재(凡才)가 없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 터이나, 이곳 전장의 모두가 범상찮은 인물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지금 하늘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재를 아득히 뛰어넘은 천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점멸하는 하늘. 요란한 소리.


무언가가 휙휙 지나간다. 밤하늘이 가깝게 내려온 것처럼 어둠 속에서 별이 피어난다. 그렇다가 모든 것이 백색으로 바뀌고, 기묘한 형태의 번개가 하늘을 가로지르다가 번진 자국을 남긴다.


그 모든 것이 초 단위로 일어나고 있다. 그건, 도저히 인간이 만들어내는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하늘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계속되니 말이다. 저, 높은 하늘보다 낮은 곳. 날개 가진 누르와 전투 중이던 비행대는,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소리 없는 천둥. 그 외에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종류의 힘이 머리 위를 휙휙 스쳐 지나가는 기분…….


페가수스와 와이번 등의 몬스터들은 신성마법과 마법을 사용해 아예 ‘두려움’이란 본능을 일시적으로 거세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 불길한 괴물들에게 덤비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누르보다도 높은 하늘에서의 전투가 몬스터들에게는 더 큰 공포를 줄 것이다.


‘용사……?’


대범함을 넘어 광기의 영역까지 도달한 라파엘로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두려움을 거세시킨 아폴로가 부러울 정도였다. 라파엘로는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어 고삐를 잡았다.


‘저분을 고작 용사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충돌이 멈추지 않는 거대한 힘. 힐긋 올려 본 하늘은, 마치 빛의 신이 직접 강림이라도 한 것처럼 눈이 부시다.


격이…… 다르다. 그런 것이야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 느끼는 ‘격’은 한층 더 다르다고 느껴진다.


유진 라이언하트. 빛이 선택한 용사. 신의 사도, 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똑같은 인간이어야 할 그가.


도저히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신?”


라파엘로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 그것을 칭할 말은 결국 ‘신’뿐이지 않은가? 아니, 설령 그럴지라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라파엘로 마르티네스. 그는 빛을 섬기는 성기사. 라파엘로는 자신이 광신도라는 것을 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자신의 광신을 부끄럽다 여긴 적도, 잘못됐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대륙에는 여러 신앙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절대적이고 유일하며 올바른 것. 그건 바로 빛에 대한 신앙이다.


그래야 하는데…… 지금, 라파엘로는 유진에게 ‘빛’에 대한 것과는 다른 신앙을 느끼고 있었다. 불경이다. 이 세상에서 빛 외의 다른 신은 모두가 이단이다.


평생을 그렇게 생각했는데…… 라파엘로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성호를 그었다.


지금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라파엘로뿐만이 아니었다. 빛을 맹신하는 성직자와 성기사들. 그들 모두가, 하늘에서 ‘마왕’에 맞서는 유진에게 용사에 대한 것과는 다른 신앙을 느꼈다.


‘내 눈이 멀어버린 건가?’


순간 떠오른 생각. 답을 내리는 것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힘을 주어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불경한, 이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생각을 품었음에도. 검을 휘감은 빛은 여전히 찬란했다. 빛께서 내려주는 신성력은 끊기지 않았다. 기분 탓일까. 오히려 전보다 더 밝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아……!”


라파엘로는 탄성을 내지르며 하늘을 보았다.


베어 넘긴 누르의 시체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정체 모를 괴물들이 내뿜는 불길한 마력은, 더 이상 빛을 막아서지 못하니. 라파엘로는 가슴 속에 기도문을 떠올리며, 눈부신 하늘에서 유진의 모습을 찾았다.


‘이단이 아니다.’


계시는 없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광신으로 확신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용사를 넘어 새로운 신성(神性)을 선언할지라도, 그는 결코 이단이 아니다. 세상 모두의 어버이인 빛이 그를 낳고 인정하였는데, 그를 어찌 이단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저 신성을 이단이라 부정하는 것이 빛에 대한 불경인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며, 라파엘로는 유진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결의했다. 빛에 검을 바쳤듯, 유진에게 검을 바치겠다고.


“하하…….”


검을 바친다고?


라파엘로는 불과 방금 전에 떠올린 결의에 스스로 우스움을 느꼈다.


“저분께 내 검이 필요나 할는지.”


새카만 빛.


아니, 검이 마검을 갈랐다. 쇠와 쇠가 부딪쳤을 때와 같은 불씨. 마력과 달빛이 그런 불씨가 되어 하늘에 얼룩을 남겼다. 이윽고 찬란한 빛이 그런 얼룩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빛의 성검,


알테어는 유진이 휘감은 우주의 그 어느 별들보다도 밝게 빛났다. 그 찬란한 빛을 뿜는 성검은, 달빛이 꺼진 월광검과 대비를 이루었다.


아름답고 경건한.


보이기는 그렇지만, 유진의 속사정은 그리 아름답고 경건하지는 않았다. 유진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무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쌍욕과 함께 퉤 피를 뱉었다.


바라서 이뤄낸 기적은 마검을 베었다. 허나 완전치 않은 기적은 유진에게도 마땅한 반동을 주었다.


배 속에서부터 올라와 입안을 가득 채우는 피의 맛. 월광검을 휘두른 손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저릿하고, 이그니션으로 폭주시킨 가슴의 우주에서는 일순이나마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만큼의 힘이다. 이그니션을 쓰고, 부족한 일부분을 기적으로 충당하였는데도 몸이 삐걱거리는 힘. 하지만 그 삐걱거림도 금세 맞춰졌다. 으스러진 것만 같던 통증에 빛이 깃든 덕분이다.


[어머니…….]


피의 맛을 느끼는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의 저편. 라이미르아는 안절부절못하여 성녀들을 불렀다. 라이미르아를 휘감고 있던 빛은 처음과 비교해 확연히 줄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피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를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유물을 몸에 이식한 은광의 성직자들. 한 명으로 백 명의 성직자에 준하는 빛을 지닌 그들이지만, 지금은ㅡ 더 이상 아까만치 빛을 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투가 지속된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을지라도, 단기간에 쏟아낸 ‘힘’이 터무니없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지만ㅡ 저들 중 몇몇은 앞으로의 성전에 함께 할 수 없으리라.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성흔의 욱신거림을 느끼는 중에 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녀인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의, 빛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죽어 천사가 되었을 때도 그랬지요.]


정신을 차려보니 천사가 되어 있었다. 천사가 되었다고 해서 천국에서 노닐게 된 것도 아니다. 아니스는, 그냥 천사가 되어 존재만 했다.


빛의 뜻을 느낀 적은 있다. 계시로 크리스티나에게 임했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신의 뜻이었나? 지금 와서는 확신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냥. ‘계시’라는 것이 명분이 되어 등 떠밀려진 것뿐이지 않을까. 크리스티나의 꿈에 나타나, 유진에게, 대수림에게 인도하고, 세냐와 만나게 하고, 빛의 샘에서…….


[…….]


그 모든 것이 정말로 빛의 뜻이었나? 엄밀히 말하자면, 저 모든 것은 아니스의 바람이 아니었나? 아니스는 스멀스멀 형태를 갖는 상상에 꿀꺽 침을 삼켰다.


분명히 말할 수 있다. 300년 전부터 그랬다. 아니스는, 빛을 모욕했을지언정 빛의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티나, 손을.]


아니스는 동요를 억지로 단절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심상을 읽으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에게 있어서 ‘빛’의 존재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의 샘에서 구원받고, 함께 불꽃놀이를 보고, 목걸이를 선물 받고, 그날부터 쭉.


부풀어오른 동경과 애정은, 유진을 그 어느 빛보다 찬란하게 만들었다.


‘네, 시스터.’


성흔이 새겨진 손이 앞으로 들렸다. 아니스의 령(靈)도 함께 손을 들었다.


ㅡ찌릿.


빛이 잠시 퇴색된 월광검을 망토 안에 넣었다. 대신에 유진은 성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지금의 성검은 베르무트가 쥐었을 때보다 찬란히 빛난다.


빛이 밀려 들어온다. ‘다른’ 곳에서 깃드는 빛. 라이미르아의 등 위에 있는, 성녀들과 은광.


“…….”


이건.


병신 같은 행동이다. 유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누구나 이런 행동을 알면 병신이라고 욕을 퍼부을 것이다.


“나도 알아.”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들었다.


치직.


성녀들과 유진을 잇고 있던 빛이 희미해져 갔다.


[유진 님?]


[하멜, 이 병신이……!]


크리스티나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불렀다. 하지만 하멜을 수십 년 겪은 아니스는, 지금 유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왜 저런 짓을 하겠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인지를 깨닫고 바로 욕을 쏟아냈다.


‘나 말고 다른 데다가.’


미리 말했다가는 또 무슨 쌍욕을 들어먹을지 몰랐기에, 연결이 끊어지기 직전, 유진은 재빨리 덧붙였다. 이윽고 성녀들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고, 라이미르아 쪽에서 보내지던 신성력도 더 이상 유진에게 깃들지 않았다.


“……너…….”


망령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성녀들과의 연결을 끊었다. 그것은 단순히 유진에게 ‘힘’이 더 이상 더해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진이 용사고 전쟁신의 환생이건 간에, 결국은 인간이다.


가진 힘조차도 감당하지 못해 반동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인간. 도시 하나를 가뿐히 날려 버릴 힘을 휘두르지만, 그런 공격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나 죽음에 도달하게 되는 인간. 그렇기에 성직자의 보조가 필수적인 것이다.


300년 전에도 그랬다. 베르무트와 하멜, 모론이 무식하게 정면에서 마왕과 싸울 수 있던 이유는, 아니스가 등에서 피를 콸콸 쏟아가며 전투를 보조했기 때문이다. 뼈가 부러지고, 팔이 날아가고, 내장이 터져도, 즉시 아니스가 치료해 주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빛의 인정을 받았다. 성검을 다룰 줄 알고, 신성력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진 본인은 ‘신성마법’이란 것에 능숙하지는 않았다. 정 하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쪽의 전문가인 성녀들보다는 훨씬 부족하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효율이 떨어진다. 유진 본인의 신성력은 모조리 공격으로 돌리고, 상처의 치료를 비롯한 보조는 성녀와 성직자들에게 일임하는 것이 전투에 몰두하기는 이상적이다.


지금. 유진은 그러한 보조를 모조리 끊어낸 것이다. 어째서? 망령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진이 강한 것은 안다. 이만큼 싸웠고, 밀렸다. 저 힘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성녀의 보조가 끊긴다면. 사선을 넘나드는 위태로운 싸움을 계속한다면. 유진의 집중이 살짝이라도 흐트러진다면. 그래서, 결국 한 번이라도 베인다면.


성녀의 보조가 없다면 무조건 망령이 이긴다. 이길 수밖에 없다.


“도움을 받아서 얻는 승리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승리는 그냥 승리다. 과정이 어쨌건 이기면 된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베르무트 그 새끼도 300년 전에는 우리랑 같이 마왕을 죽였지.”


놈은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냥 인간이 아닌 것이 맞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무어가 중요한가? 어쨌든 베르무트는 동료들과 함께 마왕을 죽였다.


“나도 앞으로도 그럴 거다.”


“…….”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자존심?


조금은 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유진이 굳이 성녀들과의 연결을 끊어낸 것. 여태까지 ‘마왕’과의 전투와는 달리, 세냐의 직접적인 보조를 받지 않는 것.


ㅡ놈이 혼자라서?


“다음은 필요 없다. 지금 시대에, 내가, 끝낼 수 있다.”


유폐의 마왕의 힘은 가늠이 안 된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대마왕과의 전투에서는 지금 같은 객기를 부릴 수가 없다. 유진이 가진 전력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것도 아닌 힘까지 빌려와도 부족할지 모른다.


망령을 이기지 못하는 정도의 힘으로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한다면, 결과가 너무 뻔하다. 아무런 변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전투는, ‘혼자서’ 끝내야 한다. 성녀들의 보조 없이. 세냐의 지원 없이. 모론을 부르지 않고, 혼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르무트가 없는 만큼.


‘내가 더 강해야 해.’


이그니션은 유지되고 있다.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솔직히 들지 않는다. 여전히 유진은 ‘필살’을 확신하고 있다.


“내가 그 확신을 실감하고, 뒈질 네가 미련을 갖지 않게 하려면…… 다른 도움 없이, 나 혼자서 하는 것이 확실하지.”


유진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성검을 들었다.


“난 그렇게 정했으니, 너도 그렇게 알아라.”


방금까지 성녀들의 보조로 치료를 받은 것? 그런 것이야 트집거리도 못 된다. 죽여도 잘 죽지 않는 불사력을 가진 존재와 싸우는 것인데, 성녀와의 연결을 끊어내는 것은 굳이 감당할 필요가 없는 핸디캡이다.


“미친놈.”


망령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느끼는 감정대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건 미친 짓이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병신 같은 행동이다.


“후회하게 될 거다.”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성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하늘을 향해 세운 성검이 환한 빛을 발했다. 성녀들과의 연결이 끊어졌음에도 성검의 빛은 여전히 찬란했다.


그 순간에.


유진과 망령, 서로가 직감했다.


전투의 끝이 머지않았다.


곧 누군가의 황혼이 올 것이다.


빌어먹을 환생 489화


마왕은 불사에 근접한 존재다. 완전한 불사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몇 번을 죽여도 잘 죽지 않는다.


물리적인 공격은 거의 타격도 안 된다. 모론이 그 무식한 힘만 써서 마왕의 머리를 몇 번이고 부숴봐야, 마왕이란 족속이 가진 무한한 마력과 드높은 격에 걸맞는 혼에는 직접적인 타격이 되지 않는다.


마왕을 죽이는 것을 넘어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영적인’ 공격을 해야 한다.


가장 적격인 것은 신성력으로 정화하는 것. 혹은, 그 이상으로 무식한 월광검으로 마력과 혼 자체를 베는 것. 조금 효율이 떨어지지만, 마력의 침범을 극복한 고위 마법으로 타격하는 것. 검강으로 깎아내는 것.


어느 쪽이든 꾸준히 하면 마왕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마왕은 인간과는 달라서, 실상은 죽어갈지라도 대체 언제 죽을지 뚜렷하게 확인하는 것은 힘들다.


마력의 흐름이 약해진 것. 적극적인 공세가 소극적으로 변하는 것. 감정이 과잉되거나, 아니면 오히려 지나치게 냉정해지거나. 그런 요인을 통해 마왕이 ‘언제’ 죽을지를 가늠해야 한다.


300년 전부터 유진은 그런 식으로 마왕과 싸워왔다.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신성이 깃든 눈은, 확실하게 마왕의, 망령의 ‘끝’을 보았다.


신검을 두 번 처박았다. 공간을 의미 그대로 찢은 위력의 참격. 월광검으로 사용한 6중첩의 공검. 그 전에도 월광검과 성검으로 몇 번이나 베었다.


그만큼 베었다면 어지간한 마왕이라면 진즉에 죽었을 거다. 물론, 망령은 유진이 알고 있는 ‘어지간한’에 속하진 않는다. 애당초 놈은 마왕도 아니잖나.


망령이 먼저 말했었다.


놈은 죽어가고 있다. 끝이 머지않았다. 불완전한 존재, 불완전한 그릇.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변질시킨 멸망의 마력은 자기 자신을 붕괴시킨다. 유진은 이미 그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마수’라 불릴 만큼 강하고, 언젠가는 가뿐히 마왕의 자리까지 노릴 수 있을 것만 같던 젊은 수인족. 야곤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는, 불러낸 마력을 감당하지 못해 자멸해 갔다. 라비스타의 권속 중 우두머리였던 알피에로도 마력의 폭주에 재생조차 하지 못하고 모기처럼 터져 죽었다.


존재의 역치를 한참 넘어선, 극한의 극한까지 뽑아낸 마력. 거기에 이그니션으로 마력의 노심을 폭주시킨데다, 족히 수십 번은 죽음에서 되살아났다.


그 결과, 예정된 ‘끝’은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그 끝은 지금 유진의 눈에도 보였다. 이그니션으로 폭주시킨 노심이 점점 붕괴하고 있다.


싸우지 않아도, 망령은 오늘 하루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남은 시간은…….’


넉넉하지는 않다. 몸이 강인해지고 백염식이 진화한들, 다루는 힘이 커질수록 폭주의 반발도 똑같이 커진다. 망령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어야 반나절 정도라면, 유진이 싸울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몇 분 남짓이다.


“충분해.”


이그니션이 지속되는 동안 끝낸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이그니션이 끝나면 싸우고 싶어도 더는 싸울 수 없게 될 거다.


월광검은? 남은 몇 분 사이에 다시 휘두를 수 있을까. 과한 욕심이다. 수백 번 휘두를 힘을 한 번에 때려 박았잖은가.


꼭 월광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유진의 성검은 베르무트 때와는 달리, 마왕의 목에 닿는다.


길게 이어지던 사고가 단축되었다. 그렇게 현실이 덮쳐온다. 필살을 각오한 것은 망령도 매한가지. 마력을 뽑아낼 때마다 노심의 붕괴가 가속되지만, 망령은 개의치 않았다.


죽인다.


이긴다.


끝낸다.


뒤섞이고 녹아서 하나 된 결의가 또다시 검을 만든다. 유진은, 성검을 올곧게 세운 자세로 망령을 맞이했다.


빛이 선을 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일직선으로 그어진 빛. 한 줄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얄팍하지만, 순식간에 퍼져나가 시야를 뒤덮어 버린다.


잡아먹히지 않았다. 망령의 손아귀에서 백색 불꽃이 춤을 추었다. 번져나간 허무가 빛을 가로막았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따위는 나지 않는다. 대신에, 유진과 망령, 둘은 영혼이 떨리는 소리를 들었다.


빛살이 흩어지고, 불꽃이 나부꼈다. 유진은 쏟아지는 참격의 찌꺼기를 피해 몸을 비틀었다. 부서져 남은 잔해. 그럴지라도 닿으면 치명적이다.


성녀들의 보조를 완전히 끊어냈다. ‘반지’도 없다. 상처를 즉시 치료할 수단? 스스로 의식해서 치료마법을 쓰는 것도 시도해 볼 법하지만.


‘안 돼.’


유진이 가지는 신성력의 원천은 성검 알테어. 검은, 베라고 있는 것이다. 상대를 무조건 베어 죽인다는 결사를 쏟아도 모자랄 마당에 치료를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렇다면.


‘보인다.’


너무 잘 보이고 있다. 잔해에 맞지 않는다. 닿지 않는다. 침범되지 않는다. 휩쓸리지 않는다. 쭉 뻗은 성검이 유연히 움직였다. 빛이 공간을 거울삼아 무수한 반사광을 만들어, 멸망의 파편을 지워냈다.


한 걸음.


의식은 그러했으나, 유진은 아득히 나아갔다.


ㅡ빠직. 다시 한번 ‘혼’에서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몇 번이나 부딪쳐서? 인간이 감당하기 버거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연거푸 사용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유진도 느끼고 있다. 망령과 사정이 아주 다르지도 않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폭주시켜 노심이 붕괴되는 것처럼. 감당할 수 없는 힘은 유진의 몸을 망가트리고 있다.


하멜이 이그니션의 부작용으로 몸이 망가져서 죽었듯, 유진도 점점 그렇게 기울고 있다.


“아니.”


다르다.


느낌을 부정했다. 사고에 깃든 신성이 완전한 답을 내놓았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아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다. 단어 하나 바뀔 뿐이지만 내용은 완전히 뒤집힌다. 유진의 몸은 붕괴하지 않는다.


극한을 넘는다.


사선을 넘는다.


무너지는 몸을 의지로 붙잡는다. 존재하지 않는 길을 강제로 비틀어 연다. 분쇄되는 마력을 빛으로 밝힌다. 죽음에 기울어 잡아먹히지 않도록 움직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강한 열기를 느꼈다. 몸이, 혼이 불에 타는 것 같지만, 재가 되지 않는다


삐걱거리는 몸. 혼이 부서지는 소리. 그렇게 만들어지는 균열. 빛을 부어라. 존재를 새로이 담금질해라.


소리가 들렸다.


여러 가지 소리. 부서지는 소리가 아닌, 다른 종류의 소리. 목소리. 너무 많은 기도 소리. 용사에 대한 연호.


“유진 라이언하트.”


나를 부르는 소리. 그 기분이 낯설 리가 없었다. 300년 전에도, 지금도, 부름은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들리는 ‘소리’에 어린 것은ㅡ


염원.


수천 명이 하늘 위의 유진을 보고 있다.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기사와 전사와 용병과 마법사와 성직자들이, 유진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다. 대륙 제일의 무가, 라이언하트의 일원이다. 어려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할 수밖에 없었다.


방계 출신. 잿빛 머리와 금색 눈동자. 라이언하트의 형질은 가졌지만, 유진의 가문은 정통성과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방계 중에서도 낙후된 가문이었다.


라이언하트 역사 300년에서 방계가 혈계식에서 우승한 것은 처음이다. 방계가 본가의 양자가 되어, 백염식을 전승받은 것도 처음이다. 유진은 어려서부터 파격을 이끌고 다녔고, 그에 대한 소문은 대륙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던, 모두의 주목을 받던 남자가 용사가 되었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언젠가 저 이름은 전설이나 신화가 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전쟁’을 시작하고 이끌며 끝내는 주역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모두가 똑같은 이름을 말할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유진의 이름을 품고, 외며, 연호하고, 마왕의 패배를, 전쟁의 끝을, 승리를 염원했다.


“가라.”


결계를 부수고, 성벽을 넘을 때 들었던 말.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진이 해야 할 일이 달라진 것도 아니다. 앞으로 나아간다. 염원을 이룬다.


기도에 부응한다.


파직.


성녀들의 보조는 끊었다. 부하되는 힘은 누군가와 나눠서 감당할 수 없다. 여전히 유진은 위태로우며, 상처를 치료할 수단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유진은, 감당하기 어렵던 힘에서 일순 자유를 느꼈다. 스쳐 지나간 자유감이지만 감각은 놓치지 않았다. 한 걸음. 아니, 그보다 아득히 멀리. 유진의 존재는 그렇게 나아갔다.


빛을 휘둘렀다.


허무히 타오르는 불꽃이 빛을 가로막았다. 마력은 그 순간 빛을 완전히 가로막지 못했다. 밀리거나 튀어 오르는 일 없이 빛이 전진했다.


빠직.


하지만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찬란한 빛을 흘리는 안광이 성검의 궤적을 좇았다.


흩날리는 파편. 그것은 빛이 아닌, 칼날의 조각이다. 휘두를수록 성검이 부서지고 있다.


표면뿐이다. 금속의 검신이 부서지고 있는데도 빛은 꺼지지 않는다. 오히려 줄기차게 내뿜는 빛은 강렬히 타오르고 있다. 유진은 큰 의문은 느끼지 않았다. 의문 따위를 느낄 필요가 없는 순간이었다.


단순하게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검신’이라는 물질에 갇힐 필요가 없게 되었을 뿐.


유라스의 시조를 제외하고, 성검의 주인이 되었던 것은 300년 전의 베르무트. 녀석이 사용할 때의 성검은 지금처럼 빛나지 않았다. 검신이 부서지는 일 따위도 없었다.


ㅡ빠직.


빛이 분광했다. 넓던 하늘이 수백 가닥의 빛줄기로 갈라졌다.


조금만 더.


망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력을 뽑아낼수록 노심의 붕괴는 가속된다. 점점, 소멸이 임박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직은 안 된다. 조금 더 싸우고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이기고 싶다’. 어차피 예정된 소멸은 결코 바꿀 수 없다. 망령은 숨을 삼키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노심이 한 번 더 폭주했다. 그렇게 마력을 더욱 증폭시키고 뒤섞었다. 백염식, 베르무트의 공간마법, 그 모든 것을 다른 것에 엮어 몰두했다.


바탕으로 둔 것은 하멜의 기술. 망령의 것이 아니지만, 망령이 가장 익숙한 것.


피하지 않았다. 정면에서 검과 검으로 맞대주었다. 아니, 이제는 서로의 손에 있는 것이 정말 ‘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진은 빛을 쥐고 있다. 망령은 새하얀 불꽃을 쥐고 있다.


격돌은 거센 폭풍이 되었다. 서로가 앞으로 나아갔다.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격이 낮은 이로서는 전투의 형상조차 볼 수 없다. 하지만 느낄 수는 있다. 문자 그대로의 신위.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경의.


거기에 다시 염원과 기도를 부었다.


유진과 망령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결국 크게 다르지 않다.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는 것. 베르무트와 세상을 구하는 것. 그 결과를 두고서 추구하는 과정이 다를 뿐.


부딪치는 것은 빛과 불꽃이 아니다. 서로의 신념과 결의다. 승자가 옳고 패자는 틀린가? 그따위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는 것이야말로 옳지 않다. 둘이 바라는 것은.


‘증명.’


다음 시대로 갈 필요가 없다. 지금 시대에서 끝낸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인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유진은 망령에게 빛을 휘둘렀다.


지금 시대에서는 안 된다. 나조차 이길 수 없다면 멸망의 마왕은커녕 유폐의 마왕조차 이길 수 없다. 유폐의 마왕에게 죽어 혼이 붙들린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러니, 그 가능성을 다음으로 넘긴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베르무트에 의해 화신이 되었다. 유폐의 마왕에게 진실을 알았다. 망령이란 존재는 여태까지의 시대에 존재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망령은, 지금 시대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증명해야 한다. 그에게는 정말로 ‘다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조금.’


망령은 유진에게 경이를 느꼈다. 유폐의 마왕과의 결전에서는ㅡ 어땠는지 모르겠다만. 성녀의 보조 없이 마왕과 싸우는 것은 베르무트조차 하지 않은 미친 짓이다.


지금의 유진은, 살짝만 닿아도 깨트릴 수 있을 정도로 연약하다. 하지만 그 ‘살짝’의 간극이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다. 화신이 되어 얻은 직감과 직관은 전투에서 이상적인 궤적을 만들고, 틀림없는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닿지 않는다. 지금의 유진은 마왕의, 화신의 전투감각보다 우월한 곳에 있다.


오히려 이쪽이 휘둘리고 있다. 망령이 노리는 모든 공격은 결국 유진의 의도대로 허무해 지고, 그렇게 열린 ‘길’에 빛이 침범했다.


‘조금만 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강하다. 너무나도 강하다. 심지어 그는 이 전투를 통해 훨씬 ‘더’ 강해졌다. 당장 몇 분 전의 유진보다 지금의 유진이 훨씬 강하다.


실력을 숨겼나? 그럴 리가. 전력을 배분했을 뿐, 유진은 처음부터 진심으로 싸웠다.


그런데도 아까 싸웠던 유진과 지금의 유진에서 이만큼 커다란 차이를 느끼고 있다. 그 사실이 허탈하지는 않았다. 유진이 강해지는 것은 결국 망령에게 기쁜 일이니까.


‘조금만…….’


닿을 것 같다. 닿을 수 있다. 마력을, 불꽃으로 바꾸었다. 내달리어서 쏟아낸다.


해도 되는 건가?


내가, 정말로, 그를 죽여도 되는 건가?


내 손으로 이 시대의 끝을 확정해도 되는 건가?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나?


ㅡ우스운 고민. 그딴 것에 대한 번뇌는 진즉에 끝냈다. 망령의 뜻은 여전히 똑같다. 그렇기에 망령에게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토록 닿고자 바랐기에.


결국에는 닿았다. 허무히 타오르는 불꽃이 빛을 넘어 유진을 집어삼켰다. 망령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불꽃이 빛을 넘은 것은.


성검이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성검의 빛은 ‘검신’에 갇히지 않고 자유를 얻었다. 껍질을 깨고 나온 빛이 유진의 몸을 따스히 감쌌다.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불꽃이지만, 빛의 요람은 침범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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