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유진 일행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유폐의 마왕이 ‘다음’을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세상에 희망을 걸 때.
“……하하.”
드디어 뜻대로 웃음이 나왔다. 유폐의 마왕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에 대한 시험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유진과 동료들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비록 이렇게 된 것이 유폐의 마왕이 상정하지 못한 변수, 발자크 루드베스의 배신과…… 누아르 제벨라의 잔재의 도움이 있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변수를 사랑한다. 그가 보내온 억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변수를. 멸망으로 수렴할 뿐인 운명을 흔드는 변수를 사랑한다. 변수는 유폐의 마왕에게 치명적일수록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지금의 시대는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마왕에 맞서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충천해 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절망하지 않고, 반항 의지를 박탈할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꿋꿋이 나아갔다.
몇 번이나 권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힘을 보여주며 절망을 강요했다. 포기할 것을,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 영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도 말해주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죽음이 두려워 망설이거나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다.
바라던 절망을 줄 수 없다. 힘을 확인했다. 저들은 기어코 베르무트마저 구하고 말겠다는 욕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끝을 내도 좋지 않은가.
“폐하!”
엎드린 유폐의 마왕에게 마족들이 다가왔다. 판데모니엄에 잔류한 마군의 후발대다. 그 목소리와 발걸음에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유폐의 마왕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전쟁 승리 후 대륙을 무차별로 폭격하기 위해 개조한 전투 요새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유폐의 마왕을 추락시킨 공격이 판데모니엄을 휩쓸어버리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판데모니엄은 폐허가 된 상태였다. 유진의 말을 따라 판데모니엄에 홀로 난입했던 멜키스가 마구잡이로 날뛰어댄 탓이다.
“괘, 괜찮으십니까……?”
다가오는 마족들은- 상처가 적었다. 유폐의 마왕은 그 이유를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저들은 침입한 멜키스에게 대적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강단이 있는 마족은 이미 전장에 가 있다. 이곳에 남은 마족은, 승리 이후에 대륙을 침공하며 욕망을 채울 생각뿐인 저열한 놈들뿐이다. 그렇기에 후발대는 멜키스와 맞서지 않고 숨었다. 멜키스의 오메가 포스가 미사일 포대를 비롯한 병기들을 박살 내는 것을 숨어서 지켜보았다.
“…….”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족들을 응시했다.
마왕은 저들의 눈에서 불안과 공포를 읽었다. 그리고 스멀스멀 번지는 욕망도 읽었다.
저들은 이 전쟁이 당연히 헬무드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마왕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보라,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마왕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처참한 몰골로 추락했다.
패전에 대한 불안과 공포.
유폐의 마왕의 목에 대한 욕심.
그 저열한 욕심은 형태가 다양했다. 누군가는 마왕의 목을 베어서 바칠 것을 욕심냈다. 그렇게 한다면 패전 뒤에도 영광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또 다른 누군가는 마왕의 옥좌를 탐냈다. 헬무드의 패배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마왕이 되어 도망칠 것을 생각했다.
“하하.”
저러한 욕망에 유폐의 마왕은 조금의 실망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저들이 헬무드의 영광과 마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드는 것이 우스운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건국한 제국에 한 점의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헬무드 제국을 세운 것은, 유예로 준 300년 동안 최적의 효율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헬무드를 발전시키고 인간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 당연한 말이지만,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후회하거나 잘못이라 여긴 적이 없다. 인간 친화적인 정책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벌이지 않고서 인간의 혼을 수급하기 위해서다.
그러한 노림수는 훌륭하게 먹혔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인간이 헬무드로 이주하고서 죽었다. 사후 노동이란 계약으로 저당 잡은 혼은 결국 헬무드 내에서 순환하며 ‘다음’을 위한 재화가 되었다.
이번 전쟁에서 문명을 초월한 병기들을 준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륙 주요국가의 수도를 폭격한 뒤에 자발적으로 포로가 되어 찾아오는 생명을 갈아서 다음을 위한 재화로 사용하는 것이 유폐의 마왕의 목적이었다.
몇 번이나 다음으로 넘어오면서 결론을 내렸다. 결국 고독히 넘어갈 이상, 인정은 자신을 마모시킬 뿐이다.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항상 인연을 최소한으로 두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다음을 보았을 뿐이고 아래는 내려보지도, 손을 뻗지도 않았다.
최소한으로 두었던 인연은 지금 시대에서는 모두 죽었다. 이번 전쟁에 동원한 마군도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서는 백성이나 부하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지금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들에 아무런 실망도 느끼지 않았다.
“꺼져라.”
속삭이는 순간 마족들의 몸이 재가 되어서 무너졌다. 그들에게 부여했던 마력이 불꽃이 되어 몰살을 일으켰다. 유폐의 마왕은 마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아직 이런 방법을 쓸 수 있구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이 아직 남아 있구나.”
헬무드에 퍼트렸던 마력은 이미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장의 마군에 부여한 마력은 아직 거두지 않았다. 그 마력은 유폐의 마왕이 가졌던 마력에 비하자면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지만.
지금은 필요했다. 그마저 없다면 ‘더’ 싸울 수가 없다. 즉 유폐의 마왕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는, 아직 더 싸우기로 했다.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이미 오래전부터 절망해 있다. 그가 더 싸우겠다고 생각한 것은, 시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도 아니다. 이렇게 추락한 시점에서 시험은 이미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마력을 회수하면서까지 추하게 싸움을 계속하려는 것은.
“왜일까.”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절망은 충분할 텐데. 납득도 하였을 텐데.”
더는 어둡지 않은 하늘에 유진이 서 있다. 그 또한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이그니션으로 폭주시킨 신력도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다. 육체를 치료해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은 멀쩡한 몸을 완벽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럴지라도 유진의 처지는 유폐의 마왕보다 훨씬 낫다. 그의 손에는 아직 거대한 빛의 신검이 있다. 빛을 휘감은 템페스트도 유진의 뒤에서 눈을 번득이고 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모론도 세냐의 부축을 받고 있으며, 유폐의 마왕의 눈은 성녀들의 모습마저 보았다. 지칠 대로 지친 두 성녀는 서로를 부축하지 않고 오히려 유진의 등을 받치고 있다.
“나와는 다른 너를 질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알고 있다.
“그냥, 이 싸움을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설령 유진이 유폐의 마왕 앞에 무릎을 꿇고서, 더 싸우지 못하게 될지라도.
지금의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유진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에게 살해의 의지가 있을지라도, 유진과 함께 온 모두가 유폐의 마왕의 의지를 가로막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면 성녀들은 앞다투어 목숨을 바칠 것이고, 모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직접 몸을 내세워 유진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이다. 세냐의 마법이 유폐의 마왕이 의지가 실현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가로막을 것이다.
그들을 모조리 죽일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유진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유진을 따르는 신군은 절대로 유진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유진의 신좌를 탐내지 않을 것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마룡의 딸은, 제 아비를 죽인 유진을 위해 죽음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유라스의 모든 신도는 순교를 부르짖는 광신도가 될 것이다. 대륙의 영웅들은 여태껏 쌓아오고 앞으로 평생을 누릴 영광을 포기하고서 죽을 것이다. 먼 옛날 벗을 배신했던 라이언하트의 후예들은 그 누구도 선조의 죄를 답습하지 않고서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렇구나.”
유폐의 마왕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이 전투에서 마왕은 고독하며 유일한 악이 된다. 그리고 마왕에 맞서는 용사와 영웅들은 악에 맞서 목숨을 불사를 것이다. 먼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된다.
이 세상의 운명은 유폐의 마왕이 보아온 운명과 다르다.
아니, 이 세상뿐만이 아니다. 전의 세상도, 그 전의 세상도, 항상 그래 왔다. 침략을 시작한 유폐의 마왕과 필연적인 멸망에 맞서던 존재들은, 언제나 저러한 각오로 운명을 만들었다.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꺼트리지 않고. 유폐의 마왕이 정했던 다음이 아닌…… 계속되는 미래를 주장했다.
“보여다오.”
마왕이 손을 들었다.
ㅡ콰아아아! 판데모니엄 바깥의 전장이 뒤흔들렸다. 전투를 멈추었던 마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검은 안개가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서 허덕였고, 마물은 죽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다.
“절망 없이 찬란한 빛을.”
뽑아낸 마력은 하늘에 오르지 못했다. 너무 밝은 빛 아래에 그림자가 번지듯, 마력은 지상을 달리며 유폐의 마왕에게 흘러들어왔다.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다음을 닫는 패배를.”
신검이 높이 들렸다. 빛이 세상에 기둥을 세웠다. 유폐의 마왕은 그 광경에 전율하면서 속삭였다.
“미래를 여는 승리를.”
우뚝 세운 기둥을 이끌며 유진이 추락했다. 유폐의 마왕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철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 따위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진을 향해 유폐의 마왕이 달렸다.
ㅡ꽈아앙! 어둠과 빛이 부딪쳤다.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는 것은 어둠이었다. 유폐의 마왕이 이끄는 무수한 사슬도 함께 박살이 났다. 유폐의 마왕은 날아갈 듯이 뒤로 밀리며 휘청거렸지만 간신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는 웃음과 피를 함께 토하며 다시 주먹을 쥐었다.
다시 휘두른 주먹이 빛을 멈춰 세웠다. 하지만 저 빛은 지금의 유폐의 마왕이 가로막기에는 너무나도 환했다.
유진의 뒤에서 템페스트가 주먹을 들었다. 다시 폭풍이 왔다. 바람이 빛을 실어 섬광을 터트렸다. 유폐의 마왕은 사슬을 사용해 자신의 몸을 붙들었지만, 빛의 폭풍은 어둠을 모조리 삼키고 사슬을 부쉈다.
판데모니엄에서 퍼져나가는 힘이 성벽을 소멸시켰다. 폭풍 속을 날던 유폐의 마왕은, 소멸한 성벽 너머에서 신군이 진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힘을 잃고 주저앉은 마군의 숨통을 끊는 대신에 판데모니엄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 이름이 연호되고 있다. 전장의 모두가 직감했다. 헬무드는, 마족은, 유폐의 마왕의 패배가 가까운 것을. 신군과 유진 라이언하트의 승리가 가까운 것을.
‘승리.’
유진도 직감했다. 실감했다. 더 이상 유진은 자신의 신명을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의 기도. 전장을 울리는 이름.
지금,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확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쟁의 끝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음을 닫고, 미래를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지는 유폐의 마왕이 말했다.
그리고 유진도 그를 확신했다.
“아가로트.”
머나먼 바다의 빛이 속삭였다. 유진이 쥔 빛의 신검이 찬란히 빛났다.
“하멜.”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연호하는 이름은 지금의 것. 유진이 가진 모든 이름이 하나로 결속되었다.
화륵.
불꽃이 타올랐다. 존재에 품은 레반테인이 완전무결한 신성을 갖추었다. 유진은 양손으로 신검을 잡았다.
빛이 불꽃이 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유폐의 마왕의 어둠을 불살랐다. 유폐의 마왕은 그 불꽃에 맞서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어둠은 더 이상 검지 않았고 사슬은 불꽃을 묶지 못했다.
“…….”
불꽃 속에서 유폐의 마왕은 주먹을 내렸다. 그는 머리를 한 번 들어 하늘을 보았다가,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승리의 신이라.”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
“네게 어울리는구나.”
마왕이 무릎을 꿇었다.
빌어먹을 환생 594화
유폐의 마왕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유진은 섣불리 유폐의 마왕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무릎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굽히게 만들었다. 일어서지 못하도록 쓰러트린 적도 몇 번 있다.
그럴 때마다 유폐의 마왕은 다시 일어났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불사의 저주를 안은 대마왕은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서 앞을 가로막았다.
‘제발.’
헐떡이며 올라오는 숨을 삼키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제발 일어서지 마라.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계를 한참 넘어버린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전신이 삐걱거리고 눈앞은 어질어질한 데다 머리도 몽롱한 것이, 더 이상 싸우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물론, 힘들다고 생각만 할 뿐 유진은 검을 놓지는 않았다. 제발 그래 주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번에도 유폐의 마왕이 일어서 버린다면. 저, 회복도 하지 못하고 너덜거리는 주먹을 쥐어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면. 유진도 당연히 마주해 나아가 검을 휘두를 것이다.
“……후우…….”
무릎을 꿇은 유폐의 마왕에게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고서 앞으로 한 발자국 성큼 걸었다.
ㅡ화르륵……! ‘승리’라는 신명이 담긴 신검의 불꽃이 타올랐다.
“검을 내려도 된다.”
유폐의 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움찔 놀라서 자리에 멈췄다. 소멸한 성벽 저편에서 멈춘 신군이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다. 유진은 신군에게 힐긋 시선을 준 뒤에 입을 열었다.
“……네 부하들은 어떻게 된 거냐?”
“부하라.”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더니 자세를 바꾸어,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는 세운 무릎에 팔을 걸치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신뢰가 아닌 공포로 뽑아내고, 무지와 과실로 조련한 충성이다. 바벨이 무너지고…… 내게 패색이 짙어진 시점에서 나는 그들의 주군이 아니었다. 애당초 나는 처음부터 저들을 부하라고 여기지 않았지.”
“…….”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 마족 중 누군가는 진심으로 내게 충성하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유폐의 마왕은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유일한 예외였던 것이 가비드 린드먼이었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 패배해서 마군이 몰살하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두었다.”
“……거두었다고?”
“내가 주었던 마력과…… 그들이 지니고 있는 마력을 거두었지. 더 싸우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니.”
유진은 무어라 답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되었구나. 품위 없는 선택을 하고 발악했지만,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나다.”
“죽지는 않았지.”
돌아온 날 선 대답에 유폐의 마왕이 빙긋 웃었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만, 유진 라이언하트. 나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다. 내가 죽을 때는…… 내 안에 처박은 광기가 완전히 역류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혹은, 내 목숨과 바꾸어 멸망의 마왕을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나 자신이 홀려버렸을 때뿐이다.”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ㅡ철그럭. 피범벅의 가슴에서 거무튀튀한 사슬이 튀어나왔다. 그 사슬은, 여태껏 유폐의 마왕이 보였던 모든 사슬 중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낡았다’. 가장 오래된 사슬. 마왕에게 최초로 ‘유폐’라는 이름을 주었던, 최초의 사슬.
유진은 그것을 느끼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이 사슬은…… 멸망의 마왕과 연결되어 있다.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나는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죽는다고 해서 멸망의 마왕이 죽는 것은 아니지.”
“…….”
“하지만 이 사슬을 통해 멸망의 마왕의 근원에는 가까이 갈 수 있다. 나는…… 그럴 수 없지만, 유진 라이언하트.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이어지는 대답에 유진의 눈이 흔들렸다.
“그 말은……?”
“확실한 대답을 원하는가.”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사슬을 다시 가슴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 전투는 내 패배다.”
작은 목소리. 하지만 저 선언은 연호 중인 모든 목소리를 압도하고 전장에 울려 퍼졌다.
“이 전쟁은 헬무드의 패배다.”
유폐의 마왕이 다시 말했다. 그 말은 아직 살아 있는 모든 마군을 절망시켰다. 대부분의 힘을 상실한 그들은 땅에 머리를 처박고서 절규했다.
마군이 패배를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그것은 이 전장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에 마군이 발악할지라도, 대부분의 마력을 상실해 버린 마군의 발악은 절대로 결과를 바꿀 수 없다.
“나 유폐의 마왕은 모든 패배를 인정하겠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니 아직 목을 바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목적을 이루고자 할 때…… 나는 기꺼이 목을 바치고 내 피로 문을 열겠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유폐의 마왕을 응시했다. 승리의 기쁨 같은 것이 아직 체감이 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그때까지 나는 네 포로이자 노예로서 고개를 낮추겠다.”
“……헬무드의 영토와, 제국민들은?”
“승자가 패자에게 의견을 물을 필요가 있는가?”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되묻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패자의 모든 것을 갖는 것이 헬무드의 법이지. 네가 그것을 바라지 않을지라도, 패자인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에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헬무드를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무릎에 걸치고 있던 손이 뒤집혔다. 활짝 펼친 손바닥 위에 사슬 뭉치와 놓였다.
“이 사슬은 이곳에 오지 않은 모든 마족의 혼을 묶고 있다.”
계약은 상관없다. 헬무드는 유폐의 마왕의 영지이며, 그곳에 살거나 태어났던 모든 마족은 결국 유폐의 마왕의 권속이다. 유폐의 마왕이 300년 동안 제국에 베푼 마력은, 제국의 모든 마족에게 침식해 있다.
“네가 이 사슬을 쥔 이상, 너는 모든 마족을 지배할 수 있다. 죽음을 명령한다면 모두가 죽을 것이고, 노예가 되어라 명령한다면 모두가 노예가 될 것이다.”
유진은 잘근 입술을 씹었다. 그는 마족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다. 300년 동안 마족의 태도와 인식이 달라졌다고 해도, 유진에게 있어서 마족이란 ‘적’이다. 하지만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서 제국에 남은 모든 마족을 몰살시킬 만큼의 증오는 없었다.
“그래. 내 마음대로 하도록 하지.”
하지만 사슬은 거부하지 않았다. 오늘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족의 본성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으니.
그래서 유진은 손을 뻗어 사슬을 받았다. 죽일 생각도 노예로 삼을 생각도 없지만, 이 보험은 만약의 사태를 위한 통제권으로 받아두기로 했다.
“……승리라.”
받은 사슬을 품에 넣고, 유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조금씩- 실감이 찾아왔다. 전쟁에서 이겼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이겼다. 비록 당장 죽이지는 못했지만, 유폐의 마왕은 패배를 인정했다.
하멜일 적부터 간절히 바랐던 승리다. 아가로트조차 얻지 못했던 승리. 몇 번이나 끝나고 새로 시작했던 세계에서, 언제나 군림하며 다음으로 넘어가던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를 주었다.
“하…….”
피범벅의 입술에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큭큭 웃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유진을 크리스티나가 부축했다. 탈진 상태인 것은 성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육신을 움직이는 크리스티나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들고서 유진을 일으켜 세웠다.
[하멜.]
“유진 님.”
성녀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유진을 불렀다. ㅡ쿠웅! 뒤편에서 모론과 세냐가 떨어졌다.
“하멜!”
모론이 비틀비틀 걸으며 유진을 부둥켜안기도 전에 세냐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얼싸안았다.
“이…… 이겼어? 이긴 거야? 정말로?”
승리를 간절히 바란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다. 하멜의 죽음 이후로 얼마나 이 순간을 바라왔던가. 뒤늦게 가까이 온 모론이 양팔을 활짝 펼쳤다.
“으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너무 고함을 질러댄 탓에 목소리가 쉬었지만, 모론은 전투 중의 고함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동료들을 끌어안았다.
확실하게 번져가는 승리의 실감은 신군에게도 전해졌다. 곳곳에서 라이언하트의 깃발이 높이 치솟았다. 길레이드를 필두로 한 간부들이 소멸한 성벽의 자리를 넘어 유진에게 달려왔다.
“만세, 만세, 만세!”
잔해 속에 숨어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던 멜키스가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그녀는 머리 높이 든 양팔을 열심히 흔들면서 만세를 외쳤다.
[드디어…… 드디어……!]
강림한 템페스트도 빛과 폭풍의 거체를 떨며 전율했다. 그토록 바라던 북벌을 이루었다. 유폐의 마왕에게 일격을 가했다.
유진은 떨리는 손을 내렸다. 신검의 불꽃이 흩어져서 사라졌다. 사방에서 연호하는 이름. 승리. 유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알고 있다. 이 전쟁의 승리가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아직 멸망의 마왕이 남아 있다. 베르무트를, 구해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준비를 갖추고, 라비스타로 진군한다. 유폐의 마왕의 사슬을 쥐고서 멸망의 마왕의 앞에 설 것이다. 아가로트가 남긴 상처 위에 앉아서 멸망을 붙들고 있는 베르무트와 만날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모든 것을 보았다. 순수하게 승리를 즐기지 못하는 유진의 모습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유폐의 마왕은,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베르무트를 구하겠다는 바람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멸망을 죽인다는 것은 베르무트를 죽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 바람이 헛된 희망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만 하더라도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일까. 발악으로도 바꾸지 못한 완전한 패배에 마음이 꺾였나? 아니면, 저들이 말하는 억지스럽고 아집 가득한 이상에 감화되었나. 최후의 최후까지 배신하지 않은 결속 된 신뢰에, 추구하는 미래에, 희망에. 결국 홀려 버린 것일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바람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세상을 끝내 온 멸망의 마왕을- 이번에야말로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폐의 마왕이 도저히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기에 타협하던 것을, 저들은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모두가 놀랍고…… 훌륭하다.”
울려 퍼지기 시작한 승리의 축가 속에서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지금의 목소리는 신군에게 전해지지 않고, 바로 앞에 있는 유진과 동료들에게만 들려왔다.
“나는, 내가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내가 살아온 영겁은 너무나도 길었고, 그 영겁 동안…… 나는, 나 자신을 흔들고 미치게 할 만한 요인은 모조리 유폐해 왔다. 나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내가 흔들려서 절망하고 포기해서 죽음을 바라 버리면, 세상은 결코 다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읊는 말. 유진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유폐의 마왕을 응시했다.
“너희의 결속은…… 그리고, 너희가 말하는 미래는, 그를 위해 불태우는 희망은, 결국에는 나를 고꾸라트리고 말았구나.”
“후회라도 하는 거냐.”
유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손의 떨림을 무시하며 내뱉었다.
“진즉에 나를 죽여야 했다고. 내가, 오늘에 도달할 수 없게 해야 했다고. 후회하는 거냐.”
죽일 기회? 그런 것이야 유폐의 마왕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300년 전에도 그랬고,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유폐의 마왕은 유진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그러지 않았다. 마왕은 용사가 자신을 쓰러트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결국에는 무릎을 꿇었다.
“내 삶은 대부분이 후회로 가득하지.”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유진 라이언하트. 지금의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오늘이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유폐의 마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울려 퍼지는 승리의 축가에 잠시 귀를 기울이고서는 다시금 웃음소리를 냈다.
“비록 이렇게 패배했지만, 신기하게도…… 후련한 기분이 드는군.”
“네게 만족을 주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 나는 너를 절망시키고 싶었다.”
“하하, 절망이라…… 나에게 그런 감정을 주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 내 만족을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는 말아다오.”
유진은 저 말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에게 저딴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를 쓰러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의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결국…… 너를 위한 기도가. 너희가 말하는 희망이, 내가 반복하고자 한 다음에 대한 열망보다 짙었던 것이지. 그 모든 가치를 다음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다고 생각한다만…… 다음이 필요 없게 된다면,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지 않나.”
“……개자식.”
“이번 세상은 내가 반복하던 운명과 다르다. 그 다름이 결말마저 다르게 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나는…… 너희가 바라는 희망과 미래에 기울여 보겠다.”
“네게 많은 사연과 사정이 있다는 것은 안다.”
유진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그럴지라도 나는 너를 이해하지 않을 거다. 내게 있어서 너는, 몇 번이나 멸망과 함께 세상을 망쳐 온 마왕일 뿐이다. 네가…… 항상 세상을 처음부터 시작했을지라도, 나는 네게 감사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나는 너의 그 일관적인 증오에 감사한다. 만약 그 증오가 없었다면, 너는 오늘에 도달하지 못했을 테니.”
“더 이상 아가리를 놀리지 못하도록 지금 당장 죽이지 못하는 것이 짜증이 날 정도야.”
유진은 뿌득 이를 갈고서 시선을 거두었다. 더 이상 유폐의 마왕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시선이 거두어졌음에도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부디 멸망의 마왕에게도 똑같은 증오를 갖기를.”
“…….”
“유진 라이언하트.”
유폐의 마왕의 시선이 움직였다.
“세냐 메르데인. 모론 루하르. 아니스 슬리우드.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자신에게 패배를 준 모든 이의 이름을 말한 뒤, 유폐의 마왕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희의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마. 이 세상에 다음이 아닌 진정한 미래를 열기를.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을.”
승리한 신군의 함성이 멈췄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이 멈췄다. 패배한 마군의 절규가 멈췄다.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모두를 끌어안은 모론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세냐는 더 이상 흐느끼지 않고서 눈을 부릅떴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가로젓던 아니스의 표정이 굳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로사리오을 움켜쥐었던 크리스티나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유진은 외면했던 시선을 높이 들었다. 유폐의 마왕조차도 경악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색이 번지고 있다.
빌어먹을 환생 595화
강림
“어째서?”
그렇게 말한 것은 유폐의 마왕이었다. 그는 더 이상 미소 짓지 못하고 만면에 경악을 담았다.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끌어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어째서……?”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어지럽게 번지는 색. 이 세상에서 저러한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은 단 하나뿐이다.
대체 왜? 왜, 멸망의 마왕이 이곳에 나타나는가? 300년 동안 멸망의 마왕은 베르무트와 함께 라비스타에 봉인되어 있었다.
이곳은 라비스타가 아니다. 멸망의 마왕이 나타날 수 있는 이유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지금 하늘에서 번지는 어지러운 색의 향연이 멸망의 마왕의 전조임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유폐의 마왕과 연결된 사슬이- 저 색의 중심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더더욱 유폐의 마왕을 경악시켰다.
사슬에서의 ‘흔들림’은 언제나 느끼고 있다. 멸망의 마왕과 베르무트에게 어떠한 영향이 있을 때마다, 유폐의 마왕은 사슬을 통해서 항상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멸망의 마왕이 이곳에 강림하는 것은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투에 집중해서? 불완전하고 약해져서? 아니,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흔들림을 느끼기도 전에 이곳에 강림했다.’
멸망의 마왕은 세상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다. 저것은 마왕이라 불리지만 멸망을 가져오는 현상이자 재앙이다. 봉인이 없다면, 저것은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봉인이 풀렸다?’
그것이 유폐의 마왕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봉인에는 조금의 여유가 남아 있을 터다. 아무리 적어도 앞으로 몇 달은 버텨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징조도 없이 봉인이 풀려 버리다니. ……징조? 유폐의 마왕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만약 저 봉인이 순수하게 유폐의 마왕만이 묶은 것이라면, 이렇게 갑자기 맞닥트리고 경악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당황하지 않고 탄식을 흘렸다.
사슬에 묶인 옥좌에 앉은 것은 베르무트다. 사지를 족쇄로 묶어 놓기는 했다만, 봉인의 주체는 결국 베르무트란 말이다. 봉인이 풀리고 멸망의 마왕이 강림했다는 것은…… 베르무트가 결국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다.
“……뭐야.”
유진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멸망의 마왕이 이곳에 나타났는가? 그러한 사실은 차치하고서 다른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싸울 수 없다. 유진은 물론이고 세냐와 모론, 성녀들도 마찬가지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가 끝난 것이 바로 조금 전이다.
꿈에서의 폭주에 이어 현실에서 이그니션을 쓴 반동으로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만 같다. 어찌어찌 기절하지 않고 버티고는 있지만 전투는 불가능하다. 지금의 유진은 신력을 사용할 수도 없다.
환상의 마안은 닫혔다. 간신히 메리만 들고 있을 뿐, 세냐도 연달아 펼친 기적과 마법으로 인해 심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다. 그럴지라도 마법은 사용할 수 있다만, 세냐 혼자서 멸망의 마왕을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론. 그는 몇 번이나 전투에 몸을 갈아 넣었다. 그럴 때마다 목숨은 부지하고 상처를 치료했지만, 실상 지금 모론의 육체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사실 동료 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성녀들이다. 그녀들은 격렬한 전투 내내 동료들이 죽지 않도록 기적을 퍼부었고, 그와 동시에 유진에게 쏟아지는 막대한 부하를 함께 부담했다.
‘싸울 수 없다.’
찰나에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멸망의 마왕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싸우겠다고 나갔다가는 수초도 지나지 않아 몰살당할 것이다.
-전군, 나를 따르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진의 것이 아닌 아가로트의 기억. 갑작스레 강림한 멸망 앞에서 아가로트는 신군에게 진군을 명했다. 신군에게 죽음을 명령하고, 아가로트 자신도 죽음을 각오했다.
지금, 그렇게 해야 하나? 의미가 있나? 신군을 모조리 진군시킬지라도 멸망의 마왕은 막을 수 없다. 간부들은 강하지만 멸망 앞에서 그 힘은 미력할 것이다.
유진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오늘 멸망의 마왕과 만나게 될 것은 상상하지 못했기에, 이 절망적이고 끔찍한 조우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복잡하게 섞이고 번지던 색의 중심에 시커먼 어둠이 고인다. 어둠이 점점 크게 번진다. 그 어둠은 중심에서 세상 무엇보다 불길하고 사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ㅡ오오오오오…….
공기가 흔들린다. 지면이 들썩거린다. 마나가 모조리 빨려들어 가서 색의 일부가 된다. 세상이 비명을 지른다. 어지럽게 얽히는 색 속에서 어둠은 점점 크게 번져갔다. 눈으로 보아도 이해할 수 없고, 직시한 순간 정신을 오염시키는 광기.
신군은 더 이상 노래하지 못했다. 공포와 경악으로 침묵하고 있던 신군의 대부분은 이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거나 비명을 지르고 있다. 라이언하트를 필두로 한 간부들조차도 그 자리에서 얼어버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어……?”
목소리를 낸 것은 모론이었다. 모론의 밝은 눈은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존재를 보았다. 곧 유진과 세냐, 성녀들도 그 존재를 보았다. 하지만 유진은 모론처럼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할 만큼 경악했다.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일어서는 것은, 형태가 일그러져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300년 전에 아주 멀리서 멸망의 마왕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멸망의 마왕은 온갖 색이 뒤섞인 모습이었지. 인간이나 마족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아가로트의 기억 속에도 그랬다. 그 시절에도 멸망의 마왕은 저런 모습은 하고 있지 않았다. 아가로트가 간신히 도달했던 멸망의 중심에도 저런 모습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건 대체 뭔가?
ㅡ오오오오…….
스멀스멀 일어서던 그것이 더 움직였다. 휘청거리며 앞으로 움직인 그것은 마치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질 것처럼 불안정했지만, 쓰러지지는 않고 휘청휘청 움직였다.
색이 미쳐 날뛰었다. 뒤엉키고 번지는 색들이 세상을 침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색은 중심에 나타난 괴이한 존재에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거죽에 어지러운 색을 두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것이 ‘더’ 움직였다. 색이 너무 어지러워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것은 이쪽을 보고 있다. 손가락을 들어, 이쪽을 가리키고 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전투의 반동 때문에?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반동이 무겁고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유진이 움직이지 못한 것은.
‘저것’과 눈이 마주치고서, 사고가 정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멜.”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은 모론이었다. 도저히 빠르게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저 치명적인 살의, 움직이지 않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론은 망설이지 않았다. 모론은 지금 자신이 동료들을 끌어안고 있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론의 굵은 팔이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를 강하게 안았다. 그는 이를 뿌득 씹으며 빙글 몸을 돌렸다. 모론의 넓은 등은 품에 안은 것들을 지키기에 충분한 방패가 되었다.
꽈아아앙!
커다란 파괴의 소리. 동료들을 끌어안은 모론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울컥 뿜어진 피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진이 고개를 들어 모론을 보았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 까뒤집힌 눈동자가 모론이 느끼는 고통을 증명했다.
“모론……!”
세냐가 비명을 질렀다. 착란에서 벗어난 크리스티나는 비명 대신 기도를 읊으며 모론의 등을 끌어안았고, 아니스도 급히 기적을 더했다.
더듬으며 도달한 등. 살갗이나 피가 만져지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것은 울퉁불퉁한 뼈였고, 그마저도 점점 재가 되어 부스러지고 있었다.
“모론!”
유진도 고함을 질렀다. 푸확! 간신히 일으킨 불꽃이 모두를 감쌌다. 세냐도 마법을 펼쳐 공간을 연신 도약했다. 그렇게 모두가 ‘저것’과 거리를 벌렸다.
‘죽지 않았어.’
하지만 그 강인한 모론조차도 일격에 사경을 헤맬 만큼의 위력. 정신을 잃었는데도 모론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아서, 유진은 억지로 팔을 열고서 모론을 붙들었다.
“저거 뭐야……?!”
도약을 멈춘 세냐가 숨을 헐떡였다.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거리를 두었는데도 섬뜩한 불길함이 가시지 않는다. 어지러운 색을 휘감은 그것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섰다. 기어코 지상에 선 그것은, 바로 앞에 선 유폐의 마왕을 향해 움직였다.
“…….”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유폐의 마왕을 보지 않았다. 그것의 시선은 여전히 유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시선을 느낀 유폐의 마왕은 긴 탄식을 흘렸고, 그것은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서 유폐의 마왕을 지나쳤다.
“모론, 모론……!”
저 존재에게서 용납할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시선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도저히 저것과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모두를 감싸고 직격당한 모론의 상처부터 확인해야 했다.
……등이 날아갔다. 뼈는 간신히 달라붙어 있지만 점점 검게 부스러지고 있고, 내장도 마찬가지다.
모론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이 가느다란 호흡. 신력이 봉인 당한 유진은 모론을 치료할 수가 없었지만, 성녀들이 필사적으로 모론의 상처를 돌봤다.
“어…… 어떡해?”
세냐가 더듬더듬 물었다.
지금은 싸울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한 것은 세냐도 똑같다. 지금은 일단 물러서야 한다. 하지만 물러설 수 있을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멸망의 마왕은 강림했고, 지금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하늘에서 들리는 절규가 울려 퍼졌다. 하늘을 날고 있던 라이미르아가 돌진해 왔다.
쾅, 쾅, 쾅! 라이미르아가 휘감은 마이스의 시그니처, 배틀 쉽의 포대가 연신 불을 뿜었다. 그리고 라이미르아도 입을 벌렸다. 대량의 마나가 일점에 모이더니 브레스가 쏘아졌다.
그것이 브레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뒤엉키는 색들이 쭉 뻗어지더니 하늘을 뒤덮었다. 색이 마법과 브레스에게 닿는 순간 모든 것이 소멸했다.
[아아아아아악!]
더욱 전진한 색이 라이미르아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세냐가 급히 메리를 휘둘렀다. 마법이 공간을 뛰어넘어 라이미르아를 감쌌다.
하지만 라이미르아를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다. 날개의 끄트머리에 빛이 스쳤을 뿐인데, 순식간에 번진 색이 라이미르아의 날개를 완전히 뒤덮었다.
“안 돼!”
라이미르아의 위에 타고 있던 메르가 비명을 질렀다. 푸확! 메르가 휘두른 마법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라이미르아의 날개를 잘랐다.
[아파, 아파악!]
한쪽 날개를 잃은 라이미르아가 아래로 추락했다. 위에 함께 타고 있던 마이스의 마법이 간신히 라이미르아를 붙잡았다.
“잠깐…….”
유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템페스트는 유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멸망의 존재감에 굳었던 템페스트가 바람을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
[물러가라!]
괴성과 함께 템페스트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콰르르르르! 전진하는 것은 폭풍뿐만이 아니었다. 머리 높이 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외치던 멜키스도 악악 비명을 질렀다. 이미 모든 힘을 쏟은 것은 멜키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지금’ 먼저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막아악!”
코피와 피눈물을 흘리며 멜키스가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소환에 성공한 대지와 번개, 불꽃의 정령왕이 템페스트의 뒤를 따랐다. 대지가 뒤집히고 하늘에서 번개가 처박혔다. 뒤집힌 땅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것’이 다시 손을 들었다. 또다시 색이 번졌다. 내리꽂히던 번개가 다시 하늘로 되돌아갔다. 갈라진 대지가 재봉합되었다. 불길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푹 꺼졌다.
[아아아아!]
폭풍이 그쳤다. 정령왕들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저 끔찍하고 허무한 색은 모든 정령왕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하늘에서 정지했던 라이미르아는 더 이상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번 브레스를 쏴 갈겼다. 이러한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든 저것의 전진을 가로막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발악하는 것은 라이미르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등 위에서 전장에 기적을 내리던 신관들이 일제히 아래로 뛰어내렸다. 헬무드와의 전쟁을 목적으로 성유물을 이식받고 교련 받은 은광의 신관들이다. 높은 하늘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어내린 그들은 모두가 빛의 날개를 펼치고서 멸망의 마왕을 향해 날아갔다.
“잠깐…….”
유진은 다시 한번 더듬더듬 말했다.
유진은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다. 라이미르아에게도, 템페스트에게도, 멜키스에게도, 은광에게도 진군하거나, 멸망을 공격하란 명령은 하지 않았단 말이다.
“신이시여!”
일부의 은광이 유진이 있는 곳에 내려섰다. 그들은 간신히 서 있는 유진과 동료들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몇몇은 자기들의 손목을 베어서 모론의 상처에 피를 들이부으며 멸망의 마력을 정화했다.
“부디, 부디 물러서 주십시오……!”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던 은광의 성직자가 유진을 세우고서 울부짖었다. 유진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성직자가 홱 몸을 돌렸다. 멸망을 향해 돌격했던 동료 성직자들이 빛에 닿아 허무하게 소멸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교를!”
성직자가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날개를 펼쳐 날아갔다. 다른 성직자들도 연달아 순교를 외치며 멸망이 일으키는 색을 향해 돌격했다.
“야…….”
수백 명에 달하는 성직자들이 소멸하는 것에는 몇 분이란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몇 분 동안 저것은 그 자리에 멈췄다.
쾅, 쾅, 쾅! 브레스의 폭음은 멈추지 않았다. 라이미르아는 드래곤하트의 모든 마나를 뽑아낼 듯이 브레스를 쏴 갈겼고, 그 위의 마법사들도 피까지 토해가며 마나를 공급했다.
“왜 그러는 거야?”
라이미르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라파엘로가 대장이 되어 이끌던 비행병대의 전원이 멸망의 마왕을 향해 돌진했다. 순교, 순교, 순교! 라파엘로가 내지르는 광신의 고함이 브레스의 폭음 속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대지도 진동했다. 유진은 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라이언하트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승리의 축가를 부르다가, 강림한 멸망이 전하는 공포에 경직되었던 모든 신군이 이쪽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신군은 진형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고 악을 쓰며 달렸다. ‘저것’을 상대로 전술이나 전법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달리는지는 유진에게도 전해졌다.
신군의 목적은 멸망의 마왕과 싸워서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멸망을 잠시라도 붙들고, 그 사이에 유진과 동료들이 도망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상황에서의 승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왜?”
유진은, 그런 것을 명령하지 않았다. 아가로트처럼 신군에게 아직 죽음을 명령하지 않았단 말이다. 하지만 저들은 유진을 구하고, 멸망을 잠시 막기 위해서 스스로 판단하여 죽음을 결정했다.
“그런가.”
순식간에 증식하며 번지는 죽음 속에서 유폐의 마왕이 긴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너에게 이끌린 것이구나, 하멜.”
철그럭.
유폐의 마왕에게서 사슬의 소리가 울렸다.
빌어먹을 환생 596화
탄식과 함께 몸을 돌렸다. 어지러운 색을 휘감고서 전진하는 멸망과, 산화해 버린 은광이 남긴 빛과 재가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 앞. 페가수스에 탄 라파엘로와 비행병대가 있다. 지상에서는 신군이 공포를 잊기 위한 악을 쓰며 진군하고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유진의 모습을 보았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이 굳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했다. 유폐의 마왕의 힘은 끝내 유진을 절망시키지 못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유진이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것’은 유진에게 충분한 절망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구해 온 것이 허무하게 되었음에 절망하나.”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그는 다시금 탄식하고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널 우러르던 이들이 앞다투어 목숨을 바치고 허무해지는 것에 절망하나.”
철그럭. 유폐의 마왕이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타난 사슬들이 걸음을 따라 바닥에 끌렸다.
“절대 이길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멸망의 앞에는…… 결국 너도 절망해 버리는가.”
헬무드와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에서는 유진이 승리했다. 하지만 지금의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이 전투의 결말을 너무나도 쉽게 예지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유진과 동료들에게는 더 이상 싸울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
“아아…….”
그렇게 생각했다.
유폐의 마왕은 걸음을 멈췄다. 탄식이 아닌 탄성을 흘렸다. 지금 유진은 절망했을 것이다. 그와 동료들이 그토록 구하기를 바랐던 것이 허무해진 순간, 절망할 수밖에 없다.
먼 과거 유폐의 마왕도 그랬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싶었다.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그것을 정말로 목전에 두었지만, 최후의 순간에 쓰러져버렸다. 신뢰했던 동료가 마왕이 되었고, 구하고자 했던 세상은 멸망했다.
유폐의 마왕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지금이 아닌 다음에 집착한 것이 아니다. 몇 번이나 다음을 새로이 맞이하면서, ‘이번에야말로’라고 생각했었다.
이번에야말로 다른 결말을 맞이하기를 바랐다. 멸망에 순응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 지금으로 멸망을 끝내기를 갈망했다.
몇 번이나 실패했다. 많은 것을 잃고, 다시 많은 것을 채우고, 많은 것을 보고, 품으며, 다시 잃었다. 몇 번이나 혼자가 되었다. 절망하고 또 절망하면서 그러한 절망마저 자기 자신의 심연에 유폐했다.
추구하던 갈망이 허무하게 무너졌을 때의 절망감. 유폐의 마왕은 그러한 절망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것이 쉽사리 떨칠 수 없는 것이란 것도 잘 안다.
포기하고 여기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공포에 질려 도망가지 않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았지만, 고집을 부리고 악을 쓰며 불가능에 덤비는 것은 저 사내라면 할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라.
뿌득 씹은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절망으로 탁했던 눈동자는 다시금 빛이 일렁거리고 있다. 후들거리며 떨리던 손가락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렇지만 유진의 발은 앞으로 향하지 않았다. 핏발 선 눈을 돌리지 않고 앞을 노려보면서, 유진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히려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나가려는 세냐를 붙잡고, 크리스티나를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리고 쓰러진 모론을 일으켜서 부축했다.
“아아아…….”
유폐의 마왕은 다시금 탄성을 내질렀다. 눈동자에 더 이상 절망은 없다. 분노를 가까스로 통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그는 패배를 선택하지 않았다. 명령 없이 스스로 나아간, 자신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모두의 염원에 부응하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유진은 그것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것에 유폐의 마왕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절망을 딛고 일어섰다. 다음이 아닌 지금의 미래를 열겠다는 갈망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산화하는 수많은 목숨을 앞에 두고서, 그 죽음만큼은 절대로 허무해지지 않기를 다짐했다.
만약 유진이 절망을 떨쳐내지 못했다면. 증오와 결의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 공포에 질려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면.
어쩔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그렸던 형태와는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이번 세상도 폐기되었다고. 그렇게 판단하고서, 유폐의 마왕은 ‘다음’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의 세상은 폐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보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화하는 빛은 얼마나 눈부신가.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멸망과 죽음 앞에서도 저들은 결속되어 있다. 자신의 목숨조차 평등한 저울에 두지 않고, 보다 큰 가치와 영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불태우고 있다.
유폐의 마왕은 광신도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영겁에서 신이란 대부분이 무능했고, 세상의 처음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신이란 작자들보다 유폐의 마왕 본인이 신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유폐의 마왕은 저 선두의 광신도들에게조차도 여태껏 주목하지 않았던 집념과 빛을 느꼈다.
“훌륭하구나.”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진심으로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꽈직! 마왕이 땅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뛰어넘어, 라파엘로가 선두에서 이끄는 비행병대와 멸망의 마왕 사이로 떨어졌다.
“유폐의 마왕……?!”
목이 쉬어라 순교를 부르짖던 라파엘로가 놀라서 외쳤다. 유폐의 마왕은 그 외침의 다음을 듣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끼릭, 끼리리릭……! 유폐의 마왕의 팔에서 무수한 사슬이 튀어나왔다.
촤라라락! 하늘이 크게 갈라졌다. 유폐의 마왕이 흘려보낸 사슬이 공간의 문을 연 것이다. 그리 먼 곳까지의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머리가 핑 돌고 숨이 턱 막혔지만, 유폐의 마왕은 존재의 비명을 무시하고 다른 사슬을 휘둘렀다.
“무슨 짓을?!”
라파엘로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아폴로의 고삐를 당겼지만, 유폐의 마왕이 일으킨 폭풍에는 거스르지 못했다. 번져오는 멸망의 색과의 침식을 앞에 두었던 비행병대가 모조리 사슬이 연 문의 저편으로 빨려 들어갔다.
“과연.”
유폐의 마왕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코앞에서 먹잇감을 빼앗았는데도 ‘저것’은 유폐의 마왕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애초에 저것은 처음부터 유진 외에 다른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들을 지워왔을 뿐이다.
“나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구나.”
유폐의 마왕은 쓴웃음을 머금고서 아래로 떨어졌다.
후우우…… 길게 숨을 삼킨 유폐의 마왕이 몸을 웅크렸다. 뚜둑, 뚜두둑. 혹사당할 대로 당한 몸뚱이가 붕괴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유폐의 마왕은 멈추지 않았다. 지상으로 떨어지던 유폐의 마왕이 양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콰르르르! 유폐의 마왕의 양손이 지상에 닿았다. 그러자 대지에서 무수히 많은 사슬이 치솟았다. 사슬이 서로 얽히며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유폐의 마왕은 비틀비틀 일어서며 숨을 몰아쉬다가, 울컥 피를 뿜었다.
“너…….”
뒤로 물러서던 유진은 바로 앞에 떨어진 유폐의 마왕의 등을 보았다. 유폐의 마왕은 연거푸 피를 토해내고서, 긴 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너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겠지.”
들려온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숨을 헐떡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베르무트.”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세냐와 성녀들이 흠칫 놀라 유진을 보았다.
인간의 형상에 어지러운 색을 두른 모습. 사슬의 벽 앞에 선 멸망의 마왕은 그렇게 보이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저것에서 베르무트를 느꼈다. 저것이 베르무트라고 확신했다.
“그렇다.”
유폐의 마왕은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왜 나조차도 느낄 수 없는 새에 봉인이 풀려 버린 것인지.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끼릭, 끼리릭…… 멸망의 마왕이, 아니, 베르무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길한 색을 이끄는 베르무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유폐의 마왕이 일으켜 세운 사슬이 덜덜 떨렸다.
“베르무트의 자아가…… 결국은 잡아먹혀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저것’은 너에게 이끌려 온 것이다.”
“…….”
“네가 자책을 느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자부해야 할 일이지. 하멜. 너는 아가로트일 적에 멸망의 마왕의 안에 상처를 새겼다. 멸망의 중심에 너라는 존재가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끼릭, 끼리릭. 유폐의 마왕의 몸에서도 사슬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의 몸에서 울리는 소리를 의식하며 다시금 긴 호흡을 내쉬었다.
“그 각인을 통해서 멸망이 너를 느낀 것이다. 너라는 존재를 용납할 수 없기에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러니 자부해도 좋다는 것이다, 하멜. 멸망의 마왕은- 네 검이 자신에게 닿을 것이라고 직감한 것일 테니.”
신군의 진군이 멈췄다. 그들은 갑자기 난입한 유폐의 마왕이 비행병대를 날려버린 것과, 돌연 사슬의 벽을 세워 멸망의 마왕을 막아 세운 것을 경계했다. 그러한 적의에 유폐의 마왕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기에 나는.”
쏟아지는 적의의 한가운데에서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하멜, 너를 다시 인정하도록 하마. 네 검은 멸망의 마왕을 이곳으로 이끌 만큼 예리하다. 그리고 네 의지는 멸망의 불길한 광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네 동료들은 결코 너를 배신하지 않겠지.”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끼릭, 끼리릭. 새로이 나타난 사슬이 유폐의 마왕의 팔을 묶었다.
“너…… 뭐 하려는 거냐?”
여력이 없는 것은 유폐의 마왕도 같을 터. 그런데도 저만큼의 힘을 뽑아낸다는 것은- 유진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쥐어 짜내는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결사코 포기하지 않았던,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영혼을. 저주에 의해서 죽지 않는 자신의 영혼을 산화시켜 마력으로 바꾸고 있다.
“봉인이 풀렸다면 다시 하면 될 뿐이다.”
유폐의 마왕이 대답했다.
“물론 나는 베르무트가 아니기에 수백 년이나 멸망을 붙들 수는 없다. 나 자신을 바쳐서 하는 봉인이라고 해봤자 결국은 불안정한 임시방편일 뿐. 하지만 지금 너희를 살리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낮은 웃음소리와 사슬의 소리가 섞였다. 유폐의 마왕은 가슴을 한번 훑더니, 태초의 낡은 사슬의 일부를 뽑아 유진에게 건넸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내가 직접 인도할 수는 없게 되었구나. 하지만 이것으로 되었다. 그 사슬이, 너를 멸망의 심부로 인도해 줄 것이다.”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유폐의 마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유폐의 마왕이 ‘왜’ 저런 선택을 하고 앞을 막아선 것인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가- 유폐의 마왕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뿌득 입술을 씹은 뒤에 사슬을 움켜쥐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고, 널 죽이겠다는 생각도 바꾸지 않을 거다.”
“물론.”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야말로 바로 죽음이지. 안식이 아니어도 좋다. 소멸도 좋고…… 앞으로 영원히 죽지 못하고 고통을 받아도 좋다. 멸망이 끝나고, ‘다음’을 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안식이라 여긴다.”
유폐의 마왕은 가슴에서 흘러나온 사슬을 손에 감았다.
ㅡ끼리릭.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사슬의 벽 앞으로 다가오는 멸망의 중심에도 똑같은 사슬이 나타났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과 멸망의 마왕을 연결한 사슬을 몇 번이나 손에 감으면서 말을 이었다.
“가라.”
유진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널 위해 산화한 목숨을 허무히 두지 마라.”
“……그래.”
유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세냐의 등을 떠밀고, 모론의 거구를 어깨에 짊었다. 쿠우우웅! 하늘에 열렸던 사슬의 통로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유진은 손을 들어 사슬의 문을 가리켰다.
“지금은 퇴각한다.”
낮은 목소리가 신군에게 전해졌다. 신군을 이끌던 길레이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길레이드가 손을 치켜들자 웅성거리던 신군이 문을 향해 전진했다.
“얼마나 붙잡을 수 있지?”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덜덜 떨리는 사슬을 단단히 손에 감은 유폐의 마왕은 한 번 더 피를 토하고서 대답했다.
“네가 다시 올 때까지는 붙잡도록 하마.”
“그래.”
정확한 기한은 듣지 않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유폐의 마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멸망을 붙잡고 있다.
유폐의 마왕과 싸워보았기에, 저 존재가 얼마나 무겁고 질긴지는 알고 있다. 게다가 유진도 오랜 시간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심신이 회복되면 곧장 이곳에 돌아올 생각이다.
그러니 지금은 물러선다. 유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사슬의 문으로 도약했다. 유폐의 마왕은 그 모습을 확인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콰르르르! 전장에 남아 있던 모든 마족이 유폐의 마왕에게 끌려왔다.
“아아아아!”
“폐, 폐하!”
마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그들은 허리에 감긴 사슬을 떨쳐내지 못했다. 가까워질수록 마족들은 비명이 아닌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은 유폐의 마왕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
쏟아지는 욕설과 저주에 유폐의 마왕은 만족을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게는 이런 것이 어울리지.”
강제로 끌려온 마족들은 사슬의 벽을 넘어 멸망의 마왕에게 던져졌다.
퍽, 퍼억! 간신히 숨이 붙어 있던 마족들은 멸망의 마왕에게서 번지는 색에 닿아 곧장 소멸했다. 그렇게 죽어가는 영혼들이 유폐의 마왕에게 되돌아왔고, 사슬을 붙드는 힘으로 더해졌다.
ㅡ우우우우……!
멸망의 마왕을 중심으로 세상이 울부짖었다. 끼릭, 끼리릭…… 사슬의 벽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고, 사슬을 붙든 유폐의 마왕의 손에서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건…… 감정이구나.”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멸망의 마왕에게 다가갔다. 유폐의 마왕이 가까이 갈수록 사슬의 벽이 점점 멸망의 마왕에게 좁혀졌다. 멸망의 마왕은 손을 들어 사슬을 향해 펼쳤다.
쿠웅……! 묵직한 울림이 사슬과 유폐의 마왕을 흔들었지만, 유폐의 마왕은 멈추지 않았다.
“베르무트, 네 감정인가?”
유폐의 마왕은 사슬의 벽을 통과해서 멸망의 마왕 앞에 섰다. 뒤엉킨 색은 너무나도 짙어서 베르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저것에게서 틀림없는 시선과 감정을 느꼈다. 유진이 사슬의 문을 지나 이 공간을 떠났기에, 멸망의 마왕은 더 이상 유진을 볼 수가 없었다. 유폐의 마왕이 사슬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따라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가.”
유폐의 마왕은 양손으로 사슬을 움켜쥐며 속삭였다.
“너는 아직 그곳에 있구나.”
무너트린 사슬의 벽이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휘감았다.
빌어먹을 환생 597화
사슬의 문을 통과해서 도착한 곳은, 이번 전쟁에서 주둔한 네란이었다. 대부분의 힘을 소모한 유폐의 마왕이 문을 이을 수 있는 최선은 여기까지였고, 오히려 유진은 그것이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전장을 똑바로 볼 수 있다. 유진은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전장의 신군이 남김없이 사슬의 문을 통과하는 것을 보았다.
“…….”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거대한 사슬의 돔뿐이다. 유폐의 마왕이 자신을 바쳐서 만든 마지막 봉인.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봉인을 노려보았다.
희미하게나마 봉인의 안쪽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득실거리는 살덩어리들. 누르다. 봉인은 가비드와 결투했던 콜로세움과 엇비슷한 크기인데, 외곽부터 누르가 가득 차 있다.
“안 보여.”
유진은 욱신거리는 눈가를 어루만지며 내뱉었다. 아무리 집중해서 보아도 봉인의 중심은 보이지 않고, 바깥에서부터 들여다보고 싶어도 누르가 너무 많이 득실거린다. 결국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거두었다.
‘모론은?’
[상처는 계속해서 치료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완치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아니스의 대답에 유진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목숨을 건진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론만 다행인 것이 아니다. 모두가, 방금 죽을 뻔했다. 실제로 죽은 사람들도 많다.
보았던 광경은 아직도 눈동자에 새겨져 있다.
날개를 펼치고 멸망의 마왕에게 돌격하던 성직자들. 은광은 애초부터 결사대를 목적으로 조직했다. 만약 유폐의 마왕이 이곳까지 와주지 않았다면.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처음의 계획대로 간부들을 비롯한 소수 정예만으로 판데모니엄에 돌입했을 것이고, 그때 은광도 결사대로서 유진을 위한 빛으로 산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전투 중에서도 조금 죽기는 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모두가 멸망을 잠깐 가로막고서 죽었고, 그 광경에 신군 전원이 유진을 위해 진격했다.
“썩을.”
아가로트일 적이나 하멜일 적이나 전장은 질리도록 보았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죽는 이들을 보는 것도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유진을 위해 돌진한 이들을 죽인 것은- 유진이 반드시 구하겠다고 결심한 놈이었다. 놈은, 유진조차도 죽이려고 들었다.
‘그게 베르무트가 맞긴 한가?’
움직이는 꼬라지를 떠올려 보면 자아는 없던 것 같다. 애당초 자아가 남았다면 그딴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유진은 여전히 눈에 아른거리는 광경을 억지로 지워냈다. 결국 가장 먼저 희생한 자들이 있었기에 유진은 살아남았다.
사실은.
“병신 새끼.”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후려쳤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병신처럼 가만히 서 있지만 않았어도.”
반동으로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핑계다. 강림한 멸망의 앞에 굳었던 것은- 눈앞의 광경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떠올리는 것으로 속이 또 부글부글 끓어서, 유진은 다시 손을 들어 뺨을 한 대 더 갈겼다.
뻐억! 아무래도 따귀는 부족할 것 같아서 주먹으로 때렸는데, 너무 세게 때려버린 탓에 머리는 어지럽고 입안에서는 피의 맛이 가득 찼다.
“병신, 뭐 하냐?”
휘청거리다가 넘어지려는 유진을 누군가가 부축했다. 어지러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얼굴을 확인한 뒤, 입에 고인 피를 옆으로 퉤 뱉었다.
“뭐 하긴, 병신 짓 하지.”
“알면 됐고.”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유진을 부축하던 손을 놓았다. 그는 피가 눌어붙은 유진의 얼굴과 몸을 살피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좀 씻기라도 하지 그러냐?”
“지는.”
꼴이 말이 아닌 것은 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핏물이 배여서 그대로 굳어버린 시안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질하며 끌끌 혀를 찼다.
“가까이 오지 마라, 썩은 시체 냄새난다.”
“네 몸에서 나는 냄새겠지.”
투덜거리던 시안이 성벽의 난간에 털썩 앉았다.
텅 빈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슬의 봉인. 아까 전 보았던- 이해할 수 없고 불길한.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시안은 내색하지 않고 무릎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많이 죽었다.”
“알아.”
“하지만 산 사람이 훨씬 많아.”
“이겼으니까.”
“네가 이겼지.”
손이 가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도중부터는 이성보다는 본능에 몸을 맡겼던 것 같다. 몇 명이나 죽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전, 처음으로 전장을 겪었을 때가 새삼 떠올랐다. 그때도 꽤 많이 죽였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전장과 큰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 평생 이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네가 유폐의 마왕에게 항복을 받아내지 않았다면……. 음…… 나는 아직 저기서 싸우고 있을 거야. 그렇지?”
“맞는 말이군.”
“그리고…… 그리고, 네가 저기 하늘에 태양을 띄워주지 않았다면. 아군은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었겠지. 그러니까…….”
이 새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유진은 당장이라도 저렇게 말하며 재촉하고 싶었지만, 시안이 꾀죄죄한 몰골로 나름 진지하게 말을 잇는 꼴이 우스워서 잠자코 지켜보았다.
“네가…… 음…… 지금 무슨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는 조금은 짐작이 간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너는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나 경험이나…… 그래도, 일단은 내가 네 형이기도 하고.”
“누구 마음대로 형이래, 어린놈의 새끼가.”
“아무튼…….”
시안은 발끈하고서 고개를 들었다가 결국 봐버렸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 그것을 보니 오히려 시안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은 기분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꼈다.
꼭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나?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위로나 격려를 할 만한 상대가 아니잖나. 오히려 저런 것들을 간신히 살아남은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꺼져.”
“왜? 계속 말해봐. 형님답게 어디 아우를 격려해 보시라고.”
“격려는 무슨. 멘탈 알아서 잘 잡은 주제에.”
시안은 난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네 낯짝을 보니 멘탈은 내가 잡아야겠다. 어우, 아까 본 것.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쫙 돋네.”
“용케 안 기절했네.”
“전에 한 번 느낀 것이랑 비슷해서 그런가? 그, 왜. 흑사자 성에 쳐들어왔던…… 하우리아에서도 느꼈었고. ”
비교가 안 되기는 했지만, 저 불길한 색은 망령의 존재감과 비슷했다. 그때 미리 겪어보지 않았다면 저항도 못 하고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가 싸우기도 전에 기절해 버려서야 체면이 안 서잖아.”
“싸워?”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오히려 시안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럼 안 싸우게?”
“…….”
“마침 잘되기도 했잖아. 바로 앞이기도 하고…… 병력도 그대로 있으니. 너만 싸울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출전할 수 있겠네.”
“안 무섭냐?”
“당연히 무섭지. 그런데 무섭다고 도망칠 수는 없잖아. 유진, 너…… 설마 지금 나 떠보는 거냐? 내가 겁먹어서 덜덜 떠는 걸 보고 약 올리려 하는 거지?”
“날 뭐로 보는 거야?”
“쓰레기로 본다.”
시안은 떨리는 손을 슬쩍 뒤로 감추며 대답했다. 그러한 떨림은 유진도 진즉에 보았지만, 굳이 놀리지는 않았다.
“새끼, 잘 컸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시안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그러자 시안은 질색을 하며 유진의 손을 밀쳤다.
“누가 보면 지가 키운 줄 알겠네.”
“반은 내가 키웠지.”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씻고 잠이나 퍼 자. 저번처럼 반년 동안 퍼질러 자지는 말고.”
“아래 좀 살펴보고.”
시안을 성벽에 두고서 아래로 내려왔다. 물자를 점검하던 병사들은 유진을 보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고, 상당수는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유진은 손을 슬쩍 들어서 화답해 주고 병동으로 향했다.
“아으…… 아으으으…….”
병동에서 가장 커다란 환자는 라이미르아였다. 그녀는 폴리모프도 풀지 않고서 병동 외곽에 몸을 웅크리고 끙끙 앓고 있었다.
“으…… 은자여어…….”
기다란 목을 품에 말아 넣고 앓던 라이미르아는, 유진의 기척을 느끼고서 즉시 머리를 들었다. 머리만큼이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은자여어……. 보, 본녀의 날개가…… 날개가아…….”
“많이 아파?”
“아프다……. 너무 아프니라……. 나…… 날개가 잘린 것은 처음…….”
말을 잇던 라이미르아의 목소리가 뚝 멈추더니,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메르 이노옴!”
라이미르아가 머리를 치켜들며 꽥 비명을 질렀다. 약과 붕대 따위를 주변에 잔뜩 띄우고서 병동을 바쁘게 뛰어다니던 메르가 화들짝 놀라서 그 자리에 멈췄다.
“생각이 났다! 흑요석처럼 아름다운 본녀의 날개를 자른 것은 메르! 바로 너렷다!”
“생명의 은인한테 감히 목청을 높이다니!”
메르는 근처에 있던 붕대 뭉치를 들어 라이미르아를 향해 집어 던지며 빽 외쳤다.
“멍청한 도마뱀! 내가 네 날개를 자르지 않았다면, 그 고약한 빛이 네 몸을 모조리 삼켜버렸을 거예요! 그럼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 같아요?”
“모…… 모르겠느니라.”
“뭘 몰라요? 꽥 뒈져 버렸겠죠! 바보 도마뱀 같으니. 고작 날개 하나 맞았다고 꼴사나운 비명이나 질러대고 아무 짓도 하지 않기에, 영리하고 이성적인 내가 나서준 것이에요. 알겠어요?”
“나…… 날개 하나라니……. 본녀는 날개가 두 개이기에, 하나가 잘리면 반이나 사라지는 것이니라…….”
“엄살떨지 마요! 예전에 나는 말이에요, 둘씩밖에 없는 팔다리가 모두 떨어진 적도 있고 가슴부터 배까지 갈라진 적도 있어요. 그때도 나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의연했다고요.”
메르는 당당하게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옛날 아크리온에서 해체되었을 때의 경험담이지만, 메르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몸이다. 물론 라이미르아는 그러한 사실은 지적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목을 다시 웅크렸다.
“보…… 본녀도 사실은 아프지 않느니라. 그냥, 목이 간지러워서 소리를 냈을 뿐이니라…….”
“흥, 그렇다면 얌전히 닥치고 있도록 해요.”
뾰족한 목소리로 쏘아붙인 메르가 유진을 발견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띄우고 있던 붕대와 약들을 근처의 신관에게 떠넘겼다.
“유진 님!”
자유로워진 메르가 유진에게 후다닥 달려오더니 그대로 훌쩍 뛰어서 유진의 품에 안겼다.
평소라면 메르가 이렇게 안겨도 유진은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버티겠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유진의 허리가 뒤로 꺾이고 다리가 굽혀졌다. 유폐의 마왕도 쉽사리 굽히지 못했던 무릎이 너무나도 쉽사리 땅에 닿았다.
“윽…….”
유진이 무릎을 꿇었지만 메르는 그것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품에 얼굴을 묻었던 메르가 홱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불쾌감……! 메르는 질색을 하면서 얼굴을 부벼닦고 코를 틀어막았다.
“유진 님, 냄새나요.”
“뭔 냄새.”
“피 냄새랑, 땀 냄새랑, 이것저것 썩은 냄새.”
“피도 땀도 많이 흘리긴 했지. 시체 썩은 독 속에도 있었고.”
“자기 전에 꼭 씻으셔야 해요.”
“안 그래도 지금 씻고 잘 거야.”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메르를 옆에 내려놓았다.
“상황 파악부터 하고서.”
병동을 떠나 관사로 들어왔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기사들의 인사를 받아준 뒤, 유진은 가장 먼저 별실로 향했다.
“왔어?”
별실에는 동료들이 모여 있다.
중앙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세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유진을 힐긋 보았다.
“봉인은 어때?”
“아무리 봐도 중심부는 안 보여. 그러는 네 쪽은?”
“레헤인야르에 남긴 결계가 불안정해.”
세냐가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지금 레헤인야르에는 누르의 출현을 억제하는 결계가 있다.
“본래라면 앞으로 일주일은 너끈히 버텨야 할 텐데…… 심상치가 않아.”
“누르가 나온 건가?”
“아직 나오지는 않았어. 나오려는 것을 막고 있느라 불안정한 거야. 그렇게 둘 생각은 없지만…… 만약 결계가 부서지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누르가 쏟아져 나올지도 몰라.”
“평원도 마찬가지야.”
유진은 엎드려 누운 모론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 옆에는 아니스가 탈진하여 널브러져 있었다.
“사슬 안쪽에서 누르가 득실거려. 그것 때문에 터지지는 않겠지만…… 경계는 해둬야지.”
모론의 등에 상처는 없지만, 아직 정신은 차리지 못했다. 유진은 피범벅의 망토를 벗어서 옆으로 던져두었다.
“회복에 얼마나 걸릴 것 같냐?”
“그건…… 모론의 정신력에 달려 있지요.”
아니스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서 대답했다.
“아니, 모론 말고 너.”
“저…… 말입니까? 저는…… 음, 글쎄요. 아마 이삼일 정도 쉬면 회복될 것 같습니다.”
“세냐, 너는?”
“나도 그쯤 걸려. ……환상의 마안 쪽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멸망의 마왕 상대로는 환상의 마안은 못 쓸 거다.”
세냐의 곁에 놓인 보라색 보석을 힐긋 보았다. 깨지지는 않았지만, 보석의 빛은 퇴색되고 검은 얼룩이 끼어 있었다. 유폐의 마왕의 독기에 오염된 흔적이다.
“멸망의 마력은 유폐의 마력보다 훨씬 지독하고 불길해. 눈으로 본 것만으로 미쳐 버리게 할 정도야.”
누아르 본인도 라비스타에서 멸망의 마왕을 보고 압도되었을 정도다. 살아 있을 적에도 그 광기를 정면으로 거스르지 못했는데, 불안정한 영체로 환상의 마안을 썼다가는 역으로 잡아먹힐 것이다.
“……하멜,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 나야 뭐…… 이삼일은 택도 없을 것 같고…… 일주일 정도 쉬면 되지 않을까…….”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아니스의 눈동자가 얇아졌다.
“싸울 수 있습니까?”
“뭘 물어보나 했더니.”
“…….”
“질문이 틀렸잖아, 아니스. 싸울 수 있냐니? 당연히 싸울 수 있지.”
“하멜.”
“네가 물어봐야 할 것은, ‘이길 수 있냐’야.”
유진은 큭큭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나는 옛날부터 베르무트에게 이기고 싶었어.”
빌어먹을 환생 598화
첫 만남이 떠올랐다. 대뜸 베르무트에게 동료가 되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고 겨뤘고-
졌다. 뭐라고 변명을 덕지덕지 붙일 수도 없을 만큼 깔끔하게 졌다. 압도적이었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옷깃 하나 베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 대가로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나는.”
그때 한 번만 진 것도 아니다.
“단 한 번도 베르무트를 이긴 적이 없었지.”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고 나서. 초기에는 틈만 나면 베르무트에게 시비를 걸 대련을 청했다.
이길 수 있어서 대련을 청한 것이 아니다. 그냥 이기고 싶었다. 냉정히 생각하면 당연히 질 것은 알았다. 동료가 되고, 함께 싸우면서. 실감하고 싶지 않아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다.
절감할 수밖에 없을 만큼 베르무트는 강했다. 하멜도 평생 싸움 하나만큼은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베르무트는 격이 달랐다. 수련을 하고 경험을 쌓아도 베르무트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기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 베르무트 그 새끼, 뒷주머니에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잖아.”
“누가 보면 지는 안 숨긴 줄 알겠어.”
세냐가 손가락을 들며 투덜거렸다. 반짝하는 빛이 세냐의 몸을 한 번 감싸자, 누더기나 다름없던 로브가 말끔해지고 피와 땀에 흠뻑 젖은 몸이 깨끗해졌다.
“너도 뒷주머니에 엄청 많이 숨기고 있었잖아, 안 그래?”
빤히 흘겨보는 시선에 세냐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렇지요. 뒷주머니에 아무것도 두지 않고 당당했던 것은 저와 모론 둘뿐이었습니다.”
성직복와 몸이 깔끔해진 아니스가 개운하단 표정으로 이죽댔다.
“뭐? 나는 왜! 나도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없기는. 세계수의 현자가 말했잖습니까, 세냐. 당신은 마나와 마법의 총애를 받아 대수림에 인도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어떤 멍청이처럼 전생부터 한 끗발 날리던 것은 아니잖아!”
“예. 휘황찬란한 전생을 가지고 병신처럼 죽은 멍청이와는 다르지요. 하지만 당신도 뒷주머니가 빵빵했던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 그러는 너는? 너도 마찬가지잖아!”
“맙소사!”
누워있던 아니스가 기겁을 하며 양팔을 천장으로 치켜들었다.
“당신은 정말로 잔인하군요, 세냐! 제 출생이 끔찍한 비극이란 것을 아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제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은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맙소사, 맙소사…… 마법의 은혜로 태어난 당신과 달리, 제 탄생은 추악한 광신과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아니스는 천장을 향해 든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비통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한 외침이 이어질수록 세냐의 이마에서는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미…… 미안해…… 내가 실언을…….”
“목소리가 너무 작군요.”
결국 이번에도 세냐가 졌다. 세냐는 슬금슬금 다가가서 아니스의 어깨를 잡고 살살 흔들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까지 사죄하니 어쩔 수 없군요. 도량이 넓은 제가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니스는 화가 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냥 세냐를 곯려 먹었을 뿐이다. 아니스는 예전부터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곧잘 이용하고 팔아먹었는데, 그것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아무것도 없다.”
굵은 목소리. 엎드려 있던 모론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나야말로 태어나서부터 맨손이었다. 또한 나의 고향인 설원은 혹독한 대지라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대수림도 마찬가지거든?”
“다르다. 세냐, 넌 친절한 엘프들과 함께 자라지 않았나.”
“대수림에 엘프만 있는 줄 알아? 몬스터도 많고 원주민도 많다고. 300년 전에 식인종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래서 세냐, 네가 몬스터와 식인종과 같이 자랐나?”
죽다 살아난 주제에 모론의 질문은 굉장히 날카로웠다.
“그건…… 그건…… 아니지.”
“오지라고 해서 다 같은 오지인 것이 아니다, 세냐. 나는 매일 눈보라를 맞으며 몬스터를 사냥하며 자랐다.”
모론은 간신히 든 머리를 주억거리며 과거를 추억했다. 그러한 대화를 한심하게 보던 유진은 모론의 등 위에 털썩 앉으며 투덜거렸다.
“너희 뭔 쓸데없는 말싸움을 하는 거냐.”
“내륙 도시에서 자란 당신은 이해 못합니다.”
“너도 내륙이잖아.”
“저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수도원을 나가지 못했고, 부모도 없습니다.”
“누구는 있었냐? 그리고 뭔 도시야! 내 고향은 튜라스 깡촌이었다고. 바로 옆 숲에 몬스터가 얼마나 많았는데? 애들이 고블린이나 오크한테 잡아먹히는 것이 일상인 시골이었어.”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모론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너, 몸은 괜찮냐?”
“아프지만 버틸 만하다.”
“새끼,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네가 안 막았어도 알아서 피했어.”
“하멜. 네가 막지 않았어도 베르무트는 알아서 피했을 거다.”
돌아온 대답에 유진의 말문이 막혔다. 죽다 살아나서 머리가 좋아진 것인가?
“어…… 음…… 아무튼, 고맙다.”
괜히 성을 냈다가는 놀림만 더 받을 주제라, 유진은 일단 감사로 대화를 끝냈다.
“누워 있었지만 대화는 들었다.”
“구라 치네, 너 기절해 있었잖아. 대화를 어떻게 들어?”
“기절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쉬고 있었을 뿐이다.”
“아, 그러셔?”
“베르무트. 이길 수 있나?”
그 질문에 세냐와 아니스가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턱을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300년 전의 베르무트라면 손가락 하나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베르무트는 우리가 알던 베르무트가 아니다.”
“그렇지. 놈이 드러냈다는 본성에는 유폐의 마왕도 제법 애를 먹었던 것 같으니…….”
“애당초 지금 베르무트한테 이성이 있긴 해?”
세냐가 입을 열었다. 진즉에 나은 가슴의 상처에서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가 무덤에서 봤을 때보다 더 이상해 보였어. 적어도 그때의 베르무트는 ‘얼굴’은 보였단 말이야.”
“멸망의 마왕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모론의 등에 앉아 있던 유진은 바닥으로 내려왔다.
“베르무트에게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은 분명해. 그러니까, 우리를 공격한 것은 베르무트가 아니다.”
“하멜, 하지만…….”
“알아. 어쩌면 베르무트의 자아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걸지도 모르지.”
아까 보았던 베르무트의 모습. 불길한 색에 덮여 얼굴도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베르무트의 ‘몸’이었다.
시선을 느꼈다.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서 베르무트의 자아를 느낄 수는 없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잖아.”
유진은 손사래를 치며 투덜거렸다.
“그 어지러운 색을 치워버리면 베르무트도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지. 정신을 못 차리면, 그건…… 그때 생각하자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두들겨 패면 될 거다.”
모론도 툴툴 웃으며 대답했다.
“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싫어도 정신 차릴 걸.”
“그래도 정신을 안 차리면 제가 진혼의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장례식을 치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세냐와 아니스도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결국 모두가 베르무트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과한 욕심이라고 말했지만, 욕심이 과한 것이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구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구하는 것만 생각할 뿐. 꼭 베르무트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들은 동료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너희는 쉬고 있어라.”
유진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가주님 만나서 대충 상황을 얘기하고 올게.”
“가장 쉬어야 하는 것은 하멜, 당신 아닙니까?”
“제벨라 시티 때보다는 버틸 만해.”
모두가 휴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냐는 레헤인야르의 결계를 살피고 있어야 하고, 모론과 아니스는 아직 움직일 수 없다. 그나마 상태가 나은 것은 유진이었고, 직책일 뿐이더라도 유진은 신군 총대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다.
“그 꼴로 가면 오르려던 사기도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
세냐의 손가락이 유진에게 향했다. 꾀죄죄한 옷차림과 몸이 말끔히 씻기고, 떡 진 머리도 물에 한 번 푹 젖었다가 뽀송하게 말랐다. 한쪽에 구겨서 던져놓았던 망토도 붕 떠오르더니,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유진의 어깨를 덮었다.
“대충 이야기하고 돌아와. 빨리 쉬어야 일어나는 것도 빠를 테니.”
“우리가 늦게 가는 만큼 유폐의 마왕이 개고생하는 것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늦게 가고 싶어지네.”
“헛소리 말고 빨리 다녀오기나 해!”
등을 철썩철썩 때리는 재촉에 밀려 밖으로 나온 유진은, 복도를 얼마 걷지도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허억…… 흐으…… 으으으..”
복도에는 보란 듯이 앉은 멜키스가 있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다가, 힘겹게 유진을 돌아보고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멜키스의 코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유진은 그녀의 손 근처에 떨어진 휴지 뭉치를 힐긋 보았다. 아무래도 코를 틀어막고 있던 휴지를 방금 뽑아낸 것 같았다.
“유진…… 네가…… 네가 무사하다면, 희망은 미래로 이어져……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쿨럭.”
힘겹게 말을 잇던 멜키스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몇 번 기침을 했다. 바라던 만큼 입에서는 피가 나와주지 않았다. 확 입술이나 혀를 씹어버릴까? 멜키스는 순간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했지만, 아플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하아…… 하아…… 나, 나는…… 너를 위해 나선 것을 후회하지 않아…….”
숨을 헐떡거리며 죽어가는 목소리를 내는 멜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유진은 멜키스를 향해 걸어갔다.
“너는…… 세상의 빛…… 불꽃이야. 불꽃을 밝히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장작이 되어야 하기 마련.”
이 대사는 좋았다. 멜키스는 방금 자신이 내뱉은 대사에 스스로 전율을 느꼈다.
유진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그만큼 멜키스는 호흡에 감정을 섞으며,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늘어트렸다.
“아아, 눈부셔……. 나는…… 너를 위할 수 있어서…… 다행…….”
지나쳤다.
잠깐이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선도 더는 주지 않았다. 유진은 멜키스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야!”
그 매정한 태도에 멜키스도 연기를 집어치웠다. 그녀는 빽 고함을 지르며 유진의 발목을 잡았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프면 신관한테 가세요. 여기 눕지 말고 침대에 누우시고.”
“내 감동적인 유언에 아무런 감정도 못 느낀 거야?”
“안 죽었는데 뭔 유언입니까?”
“나는 너를 위해 죽으려고 했어!”
“그건 엄청 감동했는데, 여기서 이러고 계시니 감동이 박살 나네요.”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멜키스를 일으켜 세웠다.
“자, 코피 다시 막으시고.”
“진짜 감동했어?”
“물론이죠.”
“정말 감동했으면 나도 그거 해줘.”
본래의 목적은 이렇게 대놓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연기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뭘 해달라는 겁니까?”
“템페스트한테 했던 거 있잖아. 빛! 그거 템페스트 말고 다른 정령왕한테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네가 막! 은혜를 내리고, 세례하고! 그러면 되는 것 아냐? 빛의 정령왕……!”
“그거 정령 아닙니다. 신력이에요.”
“알아. 세상에 빛의 정령이란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 대정령사님이 그걸 가리켜서 빛의 정령이다, 라고 말하면, 빛의 정령이 되는 것 아닐까? 내가 그렇게 정했어.”
“아무래도 머리를 다치신 것 같은데?”
“난 멀쩡해.”
“예, 평소랑 똑같아 보이시네요. 아무튼 그건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뭐냐, 빛이 템페스트를 그릇으로 삼은 거라…….”
“그릇은 많을수록 좋은 거야.”
멜키스는 포기하지 않고 유진의 뒤를 따라가며 졸라댔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해주고 싶어도 못 해준다니까요? 정 하고 싶으시면 멜키스 님이 빛의 신교에 입문해서 열심히 기도해 보세요.”
“내게 있어 신으로 섬길 존재는 마법의 여신인 세냐 님뿐이야.”
“그럼 세냐한테 해달라고 하시던가.”
“세냐 님은 못하니까 너한테 해달라고 하는 거잖아……!”
“제가 고마워서 꼭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은데, 못하는 건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조르셔도 진짜 못 한다고요.”
“정말?”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몇 번이고 똑같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멜키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녀는 진한 아쉬움과 미련에 입술을 우물거렸다.
“템페스트와 다른 정령왕들은 어떻습니까?”
“회복 중이야.”
“다들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인가. 멜키스 님도 괜히 싸돌아다니지 말고 쉬고 계세요.”
“역시…….”
멜키스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 생각을 하고 움직인 것은 아니다. 그냥, 그 순간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뒷일을 따지지 않고서 멸망을 가로막았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자면…… 솔직히 두렵다.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까? 꼭 싸워야 하는 건가? 애당초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가능한가?
“싸우면 이길 수 있는 거야?”
조심스러운 질문에 유진은 먼저 헛웃음을 흘렸다.
“유폐의 마왕은 뭐,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싸웠습니까? 싸우다 보니 이긴 거지.”
“그럼? 이번에도 싸우다 보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싸워봐야 알죠.”
“나 도망가도 돼?”
“가고 싶으면 가셔도 됩니다.”
“안 붙잡고 가라고 하니까 오히려 가기가 싫네.”
멜키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환생 599화
멜키스와 함께 들어간 회의실에는 이미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던 간부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진을 보자마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들 피곤하실 텐데 뭐 하러들 일어나십니까?”
유진은 손을 내저으며 회의실을 가로질렀다. 회의실 안에는 피와 약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신군 내에서도 최상위 실력을 가진 간부들이지만, 그들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붕대에 칭칭 감긴 카르멘의 양손을 힐긋 보았다.
붕대에서 배어 나오는 피. 그냥 멋으로만 붕대를 두른 것이 아닌 모양이다.
“어째 살아서 보기는 했네요.”
회의실 중앙의 테이블에 올라가 털썩 앉고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각자 상처 한둘씩은 가지고 있지만 중상을 넘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가장 심각한 부상을 꼽으라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없는 데다 내상까지 입은 멜키스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들 표정이 죽상입니까?”
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간부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회의실의 문을 열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승리를 축하할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로베리안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헬무드……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지금쯤 우리는 웃으며 축배를 들었겠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 * *
붕대에 감긴 손가락을 쥐었다 펴던 카르멘이 유진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유폐의 마왕이 왜 그것을 가로막았고, 왜 우리를 도망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굴욕.”
뿌득. 라파엘로가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
“설마 유폐의 마왕에게 구해지다니……!”
“당신만 구해진 것이 아니니까 너무 발끈하지 말고.”
“하지만, 유진 님……!”
“거참, 발끈하지 말라니까. 따지고 보면 내가 더 굴욕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쨌든 전투에서 내가 이겼는데, 그 뒤에 유폐의 마왕 덕에 살아버렸잖아요.”
유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하자, 라파엘로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유진은 그런 라파엘로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튼, 저는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실은 적막이 감돌았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함께 들어온 멜키스조차도 분위기에 짓눌려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였다.
“그건…….”
침묵을 깬 것은 길레이드였다. 그는 마주 잡은 양손을 꾸욱 쥐면서 눈을 감았다.
“멸망의 마왕…… 이겠지?”
“예.”
“이런 말은…… 나 자신도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유진. 나는…… 그, 멸망의 마왕이 다가올 때 말이다. 이상하게도…… 내 안의 피가 이끌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말에 기온과 카르멘의 표정이 변했다. 그들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씹었고,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야, 아까 나타난 것은 베르무트였으니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내뱉은 말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베르무트……?”
“위대한 베르무트, 본인이란 말입니까?”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300년 전에 약속을 맺어 평화를 가져온 용사, 위대한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의 이야기가 바깥으로 퍼진다면 세상이 말 그대로 뒤집힐 것이다.
“베르무트가 그러고 싶어서 우리를 공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너무 오래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어서…… 머리가 조금 돌아버린 거죠. 아마 흠씬 두들겨 패면 정신을 차릴 겁니다.”
유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당연히 놈을 두들겨 패는 것은 제가 할 겁니다. 옛날부터 패고 싶던 놈이기도 했고. 지금 이 몸은 베르무트의 후손인 데다……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서.”
멸망의 마왕의 정체. 그리고 유폐의 마왕에 대해서 지금 말해야 하나?
유진은 잠시 고민하고, 결론을 내렸다. 피차 바라지 않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언제든지 밝힐 수 있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반복해 온 세상에서 단 한 번도 그것을 밝힌 적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가진 이름처럼- 그냥 마왕이 되기를 바랐다. 이제 와서 과거와 사연이 알려지는 것과, 그로 인해 역사에 이름이 남겨지거나, 인정을 받는 것 따위. 유폐의 마왕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바라지 않으니까 더 하고 싶기는 한데.’
문득 그런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으로 그쳤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진의 추측이다. 사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유폐의 마왕이 저 ‘안’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면 말이다.
“복잡하고, 엿 같고, 그런 사정들이 있어서……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말입니다. 정 축약해서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지금, 유폐의 마왕이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돌아올 때까지는 버티겠다고 했으니…….”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가슴을 몇 번 쓸었다.
몇 번이나 몸상태는 확인했다. 신력은 봉인당했고, 마나도 제대로 안 움직인다. 간신히 몸은 움직이지만 싸움은 불가능하다.
“일단…… 푹 쉬고, 몸이 멀쩡해지면. 저는 바로 멸망의 마왕에게 갈 겁니다. 상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다른 것은 똑같습니다. 제가 이기면 아무 문제 없이 축제라도 벌이면 되는 거고, 제가 패배하면…….”
“세상이 멸망하겠지.”
카르멘이 말을 받았다. 그녀는 피가 배어 나오는 주먹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 존재의 이름부터가 멸망의 마왕이니 말이다.”
“다를 것도 없네.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해도 세상은 끝나는 것이었으니.”
기온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히려 이번이 더 간절하고 의욕이 생기는걸. 이번이 진짜 마지막인 데다, 시조님까지 구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기온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결코 희망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기온이 앞장서서 쾌활하게 행동하니 몇몇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렇지만 강요는 안 하겠습니다. 참전하고 싶지 않으시면 제가 자는 동안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알체스터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패배하면 세상이 멸망한다. 그것을 바라는 자는 없을 테니, 다들 싸울 수밖에 없지. 그리고 승리하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며 평생 영예로울 것 아닌가?”
“뭐…… 그렇겠죠.”
“하하. 정말로 끔찍한 것은 죽는 것이 아닐세. 내가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는데, 남은 자들끼리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지. 정말이지, 상상뿐인데도 끔찍하군.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평생 겪을 수치심이 두려워 목숨을 끊을 걸세.”
“애당초 알체스터 경은 도망칠 생각도 없지 않소?”
오르투스가 툴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솔직히 조금 혹했소. 멸망의 마왕은 잠깐 본 것만으로도 싸우고 싶다는 생각을 지워 버린 존재였으니 말이오. 하지만 경의 이야기를 들으니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은 못 치겠소이다.”
“거참.”
유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망토를 들췄다.
“저는 분명 말했습니다. 싸우기 싫으면 안 싸워도 된다고. 그러니 이번에 죽거나 다쳐도 제 원망은 하지 마십시오.”
망토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술을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술?”
“요란한 연회는 못하지만, 그래도 축배는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병사들에게도 술은 넉넉히 주시고요.”
망토 안에서 잡힌 술병을 꺼내고서, 유진은 피식 웃어버렸다. 절반 정도 남은 술. 가비드에게 받았던 술이다. 유진은 술병을 찰랑 흔들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드실 분 계십니까?”
“우리는 그 술을 마실 자격이 없지.”
카르멘이 고개를 저었다.
“그 술은 네가 가비드 린드먼에게 승리하고서 얻은 것. 찬란한 승리의 사자여, 그때 네가 말하지 않았나?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그 술을 마시겠다고.”
찬란한 사자에서 찬란한 승리의 사자가 되었다.
“그러니 그 술은, 우리가 아닌 진짜 승리의 주역들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저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실에서 쫓겨났다. 망토에 쟁여놓았던 모든 술을 다 털리고, 손에 든 절반뿐인 술만 들고서 말이다.
유진은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술병을 몇 번 흔들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앗.”
돌아온 방에는 시엘이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잠든 세냐와 아니스, 모론에게 이불을 덮어주다가, 문을 열고 들어온 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어디 갔다 온 거야?”
“회의실. 그러는 너는 여기서 뭐 해?”
“보면 몰라? 이불 덮어주고 있잖아.”
시엘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허리에 끼고 있던 베개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왜 다들 자기 방을 내버려 두고 여기서 주무시는 거야? 심지어 침대도 아닌 바닥에서 말이야.”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라도 났나 보지. 원래 우리는 마왕 죽인 뒤에 그 자리에서 널브러져서 잤었어.”
“또 옛날 얘기한다.”
눈을 흘기며 쏘아붙이는 말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작지 않은 방이기는 하지만, 모론의 거구가 널브러져 있으니 바닥이 굉장히 좁아 보였다.
“깨우자.”
“……굳이? 다들 잘 주무시는데…….”
“내가 나가기 전까지는 다들 멀쩡히 깨 있었어. 잠이 든 지 길어야 5분쯤 됐을걸.”
“5분 전은 깨 있었어도 지금은 잘 주무시고 계시잖아.”
“그게 뭐?”
퍽! 걷어찬 발길질에 모론의 몸이 흔들렸다. 한 번 걷어찬 것으로 모론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0번쯤 걷어차니 모론의 무거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꼭 차서 깨워야 해?”
“손으로 흔드나 발로 흔드나 그게 그거잖아.”
“쓰레기 자식…….”
사람답게 생각하는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동안에도 유진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는 세냐와 크리스티나를 덮은 이불을 홱 빼앗고, 세냐의 뺨을 꼬집어서 당기며 반대편 손으로는 크리스티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으…….”
“꺄흑!”
상반된 신음과 함께 둘이 눈을 떴다. 젤리처럼 뺨이 당겨진 세냐가 졸린 눈을 끔벅이며 유진을 쳐다보았고, 크리스티나는 찔린 옆구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몸을 꼬았다.
“무…… 무슨,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일어나.”
“우리보고 쉬고 있으라며……!”
“쉬고 있으랬지 자라고 하지는 않았잖아.”
“하멜, 왜 쪼잔한 심술을 부리는가?”
얼얼한 어깨를 어루만지며 일어선 모론이 물었다.
“심술이라니.”
유진은 손에 든 술병을 흔들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술. 그 가비드 린드먼이 직접 제조했다는 술. 나 혼자 홀라당 마시려다가, 너희 생각이 나서 가지고 왔…….”
“내놓으십시오!”
순식간에 의식이 바뀌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아니스가 후다닥 유진에게 다가와 술병을 빼앗았다. 그녀는 코르크를 열기 전에 술병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내부를 타고 흐르는 술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못해도 300년 숙성에 거창한 의미까지 담았던 술이 아닙니까? 후후, 맛이 없을 수가 없지요.”
자다 깬 것에 화를 내려던 세냐와 모론도 슬금슬금 다가왔다. 결국 네 명은 술병을 가운데에 세우고, 이불을 두르고서 모여앉았다. 아니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모두의 앞에 잔을 하나씩 놓았다.
“자, 그럼…….”
술병을 열었다.
우우…….
우우우…….
나가지 못하는 바람이 맴돌며 음울한 소리를 냈다.
사슬에 감겨 텅 빈 중심. 그 바깥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괴물이 엉겨 붙어 있다. 놈들은 이중의 사슬 사이에서 서로 살이 달라붙고 뒤섞였는데, 하나하나 구분되지 않는 덩어리임에도 눈동자만큼은 희번덕였다.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벽에 수백 수천 개의 눈동자만 데굴거리는 모양새였다.
우우…….
저 끔찍한 괴물의 벽은 안쪽 사슬벽의 바깥. 바람이 맴돌며 울어대는 안쪽.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간신히 되찾은 의식이 다시 끊어질 것만 같다. 손이 덜덜 떨렸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뭘 한 거지?
‘내가 한 건가?’
의문을 더듬었다. 고뇌할 필요 없이 대답은 이미 알고 있다. 희미한 기억들이 연결됐다. 자신을 보던 시선들을 떠올렸다.
“하하…….”
베르무트는 허탈한 웃음을 뱉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뇌 안쪽이 손톱으로 긁히는 것만 같은 감각. 그렇게 긁어서 떨어진 자국에 시커먼 덩어리가 맺히고, 점점 번지는 것만 같다. 그것은 베르무트라는 자아를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도 다시, 베르무트의 자아를 찍어 누르고 육체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육체를 욕심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릇 따위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한 욕망이 없다. 그것이 육체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 육체가 자신에게 떨어져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
정말 그런가? 베르무트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것에, 멸망의 마왕에게 자아는 없다……. 처음에는 있었겠지만, 진즉에 붕괴했다. 이것은 단순히 멸망만을 바라는 재앙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300년 전에 세냐를 공격했나? 그때.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봉인하기 위해 갔다. 침입자를 알아차리고 찾아올 세냐와 대화를 나누어, 목걸이를 받을 생각이었다.
의식이 흐려졌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는 이미 세냐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난 다음이었다.
‘이번에도.’
봉인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에게 육체를 빼앗겼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모두를 공격하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러한 모든 것이 베르무트를 두렵게 만들었다.
멸망에게 자아가 없다면. 300년 전 세냐를 공격하고, 오늘 이곳에 와서 모두를 공격한 것은.
그것을 바란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니야.”
베르무트는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했다.
“내가 아니란 말이다.”
답해주는 이 하나 없는 사슬의 우리에서 베르무트는 조용히 오열했다.
빌어먹을 환생 600화
잠에서는 깨어났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너무 깊고, 달게 잠을 자서?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둘 다 맞기는 하다. 몸이 고될 대로 고되었으니, 어디 차가운 맨바닥에 나자빠졌어도 더할 나위 없이 단잠을 잘 수 있었을 것인데.
지금 유진이 누운 침대는 푹신하고 따스한 데다 은은하게 향기롭기까지 했다.
“…….”
잠에서 깨어났는데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은,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워서다.
“…….”
차근차근 기억을 거슬러 올랐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내가 왜, 이렇게 잠을 자고 있는가. 대체 어떤 순간에 잠들어 버렸는가.
잠들기 전. 모론과 세냐, 아니스, 크리스티나와 함께 술을 마셨다. 가비드가 직접 제조했다는 술. 놈과의 결투에서 승리하고 선물로 받은 술. 나중에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고서, 놈의 시체 위에서 마시겠다고 대답해 줬던 술.
애석하게도 유폐의 마왕의 시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니, 술은 마셔도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말고는 나중에 마실 만한 순간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료 중 누군가가 죽거나, 혹은 유진 자신이 죽거나…… 그런 생각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올라 버렸다. 갑자기 멸망의 마왕이 나타나 버린 탓에 승리의 기쁨이랄 것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고, 결의와 각오 같은 것은 다질 만큼 다졌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바라고 바랐던,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자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술을 마셨고, 맛은 굉장히 훌륭했다. 유진은 전생부터 술이란 것의 맛은 깊이 따져본 적이 없었기에 뭐라 총평은 내릴 수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술맛에 눈을 뜬 크리스티나와 본래부터 주당인 아니스가 서로 번갈아 가며 주접과 함께 홀짝이던 것을 보면 상당히 잘 만든 술이기는 하다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자신의 육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경지에 오른 전사와 마법사는 술에 취하기 힘들다. 아예 ‘취하겠다’고 의식하고서 마시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독한 술이라도 몸에 들어온 이상 즉시 해독되어 버린다.
축배를 위해 마시기 시작한 술. 심지어 죽은 가비드가 남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술. 그런 술을 취기도 없이 홀라당 털어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그래서 다들 처음부터 ‘취하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마셨다.
‘어차피 취해서 며칠 자고 일어날 거니까…….’
심신의 피로와 데미지도 상당했으니,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문제가 생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문제인데, 인간과 마족은 몸뚱이가 다르다. 어지간한 주당이라도 몇 잔 만에 취해 버릴 고도수의 독주라도 마족에게는 그럭저럭 마실 정도의 술이 되어버린다.
가비드의 술은 도수가 높았다.
그런 술을, 모두가 취기를 조절할 생각 없이 꼴딱꼴딱 마셔댔다. 그 술을 다 마실 즈음, 그곳에 남은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짐승들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상처 입은 짐승이 쓰러졌다. 모론. 예전에도 도통 취하지 않던 놈은, 술을 다 마실 즈음에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쓰러져 버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모론을 돌보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는 유진도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술이 한 병이라는 점. 심지어 절반뿐이고, 그마저도 전부 다 마셔가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반병을 다섯 명이서 나눠마신 것인데 이걸 누구 코에 붙입니까?
-더 가져와!
술병이 텅 비었을 때. 짐승들은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어 울부짖었다.
그녀들에게서는 인간다운 이해를 바랄 수 없었다. 유진은 망토 안의 술을 모두 간부들에게 주고 왔으니 그만 잠드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지만, 그러한 애걸은 쥐뿔도 먹히지 않았다. 술이 없다면 새로 가져오면 되는 것이 아니냐며 성녀가 일어섰고, 마법사는 괘씸하게도 승리의 신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상처 입어 쓰러진 전사는 방에 버려졌다…….
그 뒤에는.
다음 문제가 찾아왔다.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모두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다. 모론이 평소의 주량의 반의반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취기와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듯,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다들 이미 한계를 아득히 넘은 몸을 정신력만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세냐에게 멱살이 잡혀서 방 밖으로 끌려 나왔다. 어딘가로 들어갔다. 다른 누군가의 방. 아마 세냐나 아니스의…… 어쩌면 유진의 방. 아무튼 그곳에서 붙들려 있다가, 아니스인지 크리스티나인지가 술을 더 가지고 왔다.
술이 있으니, 더 술을 마셨다. 마시면서 점점…… 머리가, 이성이 녹았다. 뒤섞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앞뒤가 맞지 않는 헛소리와 농담을 지껄이다가…… 그리고…….
기절했다.
그 순간에 바닥이었는지 침대였는지는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데, 지금 누워있는 곳은…… 일단 침대다. 술에 잔뜩 취해서 기절했는데, 입에서는 그럴 때 특유의 찌든 술 냄새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옷…… 분명 옷을 마법으로 세탁하고, 몸도 씻었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옷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 알몸이란 말이다. 왜? 자던 중에 더워서 옷을 벗어 던졌나? 유진에게는 평소 그런 잠버릇은 없지만, 으레 사람이란 술에 취하면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을 하기 마련이다.
“…….”
그래, 술에 잔뜩 취해서…… 자던 중에 옷을 벗어 던지고 잤다. 어쩌면 잠들기 전에 벗었던가. 벗는 김에 입에 남을 술 냄새도 지웠고, 어쩌면 자던 중에…… 자던 중에 지웠거나. 유진은 자기 자신을 아주 청결한 편이라 자부하길래,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고는 생각했다.
“…….”
자기자신에 대한 것을 제쳐두고,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우선…… 이곳은 어디인가? 이 침대는 대체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왜 옆…… 옆에서, 다른 온기가 느껴지는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지옥이란 수렁에 빠지는 것만 같아, 유진은 모든 것이 두려웠다. 더욱이 두려운 것은.
온기가 하나가 아니란 것이다.
‘모…… 모론?’
어쩌면 모론일지도 모른다. 300년 전에도 모론이나 베르무트 옆에서 곧잘 자지 않았던가? 알몸으로 잔 적은 없지만…… 아무튼, 옆에 있는 것이 차라리 모론이라면…….
‘…….’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유진도 잘 알았다. 살짝 닿는 살결의 부드러움은 절대로 모론일 수가 없었다.
그래…… 유진은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것은 거역하고 싶어도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니.
“……으흠…….”
우선 눈을 뜨기 전에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양옆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보다 진해졌다. 왼쪽이 뒤척였고, 오른쪽은 움찔 몸을 떨었다.
“흠…… 흐흠…….”
헛기침을 더 끌었다. 왼쪽이 이불을 슬쩍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른쪽은 숨을 죽였다.
그것뿐. 누구도 그 이상의 액션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유진도 마찬가지 아닌가. 눈을 뜨고 일어서서 입을 열어 뭐라고 말을 하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두렵기에, 눈을 뜨지 않고 헛기침만 끙끙거리면서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언제까지?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눈도 뜨지 않고 누워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거리며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나?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바로 용기다. 눈을 뜨고, 저질러 버린 사건을 받아들일 용기. 현실을 직시하고 다음으로 나아갈 용기.
“?”
용기를 내어서 눈을 뜨고 일어서려는 순간. 유진은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언제까지, 라고?
아니, 언제부터? 넓은 침대의 양옆. 오른쪽과 왼쪽. 부드러운 살결. 술에 취해서 기절하듯 잠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각자가 누적된 피로와 데미지가 다르다. 한날한시에 쓰러져도 같은 순간에 눈을 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다른 누군가는 진즉에 눈을 떴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양옆에는 사람이 있다. 진즉에 눈을 뜨고서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며 자리를 떠났어야 할 텐데, 아직도 사람이 있단 말이다.
“……설마…….”
유진은 눈을 뜨고서 왼쪽을 보았다. 성흔 없이 새하얀 등, 살짝 갈린 이불과 풍성한 금발. 역시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다.
“너희, 나 일어날 때까지 계속 자는 척하고 있던 거냐?”
오른쪽을 보았다. 어깨까지 발갛게 물들이고서 몸을 웅크린 세냐가 보였다. 그녀는 유진의 말을 듣자마자 경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바…… 방금 일어났습니다.”
왼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가 유진 쪽으로 돌았다. 좀처럼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 아니스는 잘근잘근 씹던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그게 말입니다, 하멜, 저는 정말로 지금 눈을 떴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영혼만 남은 상태인지라, 전투의 여파를 떨치기 힘이 들어서…… 거기에 무리해서 술까지 마셔버렸죠. 그래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고, 이, 일단 이 몸도 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결국 원래의 주인인 크리스티나를 거스를 수 없는 처지. 제가, 제가 눈을 떴는데 크리스티나가 이곳에서…….”
제멋대로 움직인 손이 아니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 하나의 육체 안에서 두 개의 영혼이 격투를 벌였다. 이윽고 입술을 틀어막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거, 거짓말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이틀 전에 눈을 떴지만, 시스터께서 피곤하다고 더 누워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시스터께서는 하인을 불러다가 방에서 식사까지 하시고 침대에 다시 누우시며 생활하셨습니다……!”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괜히 천장을 보았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할 때는 얼굴을 보는 것이 예의겠지만, 지금 유진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선 지금 앞에 있는 것이 정말로 사람이기는 한지가 의심스러웠고, 그다음 이유로는- 단순히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나는.”
바로 옆에서 세냐가 입을 열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다시 천장을 보았다. 세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몸을 움츠리고 있지만, 발갛게 물든 어깨와 등의 곡선은 대놓고 보기에 민망했다.
“사흘 전쯤 눈을 떴지만 말이야, 일부러…… 일부러 누워 있었어.”
“…….”
“바로 움직일 수 있을 상태도 아니었고…… 조, 조금 더 휴식이 필요했거든. 그…… 그리고, 그리고 말이야. 네가 눈을 떴을 때, 아무래도 옆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
유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희미하게 기억이 떠오르고 있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고서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잠들기 전에 말인데…….”
“그만.”
뭐라고 더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등 돌려 웅크리고 있던 세냐가 홱 몸을 돌리더니 유진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우리는, 우리는 아무 일도 없던 거야. 알겠어?”
“으읍…….”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침대에서 잤던 거야. 이 침대는 엄청나게 넓으니까! 알겠어?”
입이 틀어막힌 유진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세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부끄러움을 참고서 본 세냐의 얼굴은 당연히도 터질 듯이 새빨갰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는 결코 져버릴 수 없는 단호한 의지가 있었다.
“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겁니까?”
저 의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세냐라면, 부끄럼을 무릅쓰고 간밤에 있던 모든 일에 집착할 것이다.
유진이 잘 기억하지 못한다면 귀싸대기를 갈기고서 억지로 떠올리도록 만들 것이고, 유치하고 뻔하고 지겹지만 ‘책임져’라는 식의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니?
“나는…….”
세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씰룩거리던 눈썹이 대각선으로 쳐졌다가 치솟고를 반복하더니, 결국 더는 버티지 못했는지 눈이 질끈 감겼다. 세냐는 좀처럼 열기가 식지 않는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이런 건…… 이런 건 싫어.”
“싫다니요?”
“잔뜩 지쳐서! 술까지 취해서! 기억도 잘 나지 않고! 로맨틱하지도 않고!”
“…….”
“혼자도…… 혼자도 아니었고……! 술 냄새도 났고! 모, 몸도 안 좋았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알았어?”
유진은 왜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녀들은 그렇지 않았다. 둘은 진심으로 세냐의 말에 공감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크리스티나는 감동까지 느끼며 양손을 하나로 모았고, 아니스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확실히, 저도 이딴 것을 처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냐와 아니스는 진지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둘 사이에 낀 유진은 여전히 입이 틀어막히고서 강제로 천장만 쳐다보았다.
이윽고 아니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한쪽에 잘 개어둔 속옷과 성직복을 빠르게 입었다. 곧이어 세냐도 유진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속옷과 의복이 세냐의 몸을 감쌌다.
“유진.”
깔끔한 로브를 걸치고서 메리까지 거머쥔 뒤, 세냐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내버려 두십시오, 세냐. 하멜은 평소에도 잠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오늘, 하멜을 깨우러 와서, 몇 번이나 흔들었는데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니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현실을 제멋대로 바꾸어서 떠들었다. 그런 둘을 잠시 동안 지켜보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군.”
“뭐?”
“아무 일도 없었…….”
후다닥 다가온 세냐가 유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바짝 다가온 얼굴, 가까이 있는 세냐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더니 눈물이 촉촉이 차올랐다.
“저…… 정말로?”
“네, 네가 그렇게 말했…….”
“내가 그렇게 생각해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뭔 개소리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꿈이라고 생각…… 아, 아니, 꿈은 안 돼. 아무튼, 그런 거야. 아무 일도 없었지만 정말로 없던 것은 아닌, 있기는 했는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세냐는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유진의 어깨를 놓았다. 멀찍이 떨어져 선 성녀들은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유진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일어났으면 게으름 부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십시오, 하멜.”
“맞아. 우리는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려야 해.”
“그 말을 들으니 참으로 복잡한 기분이 듭니다. 결전을 앞에 두고 이런 일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스, 우리는 아무 일도 안 했어. 그리고 우리가 결전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잖아, 멸망 그 새끼가 제멋대로 와버린 거지.”
“맙소사! 듣고 보니 그렇군요, 세냐.”
둘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후다닥 방을 나가 버렸다.
혼자 방에 덩그러니 남게 된 유진은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다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
주섬주섬 옷을 입을수록 희미해 잘 떠오르지 않던 기억이 또렷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죽고 싶군.”
이러고서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유진은 마음의 각오를 다지고서 방문을 열었다.
“…….”
복도에 나와 고개를 돌리고, 바로 모론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마침 이 방으로 오려던 모양이었다. 모론은 잠시 눈을 끔벅거리면서 유진을 빤히 보더니, 곧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두 주먹을 유진을 향해 뻗었다.
“하멜.”
두 개의 엄지손가락이 일어섰다.
“축하한다.”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하얀 이가 반짝였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축하를 건네는 모론을 보고서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축하한다는 거냐? 개소리하지 말고 꺼져. 너 뒤질래? 온갖 대답이 머릿속에 떠돌았지만, 유진은 일단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무슨 대답을 하건 모론의 함박웃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냐?”
“오늘로 정확히 일주일이다.”
“너는 언제 일어났고?”
“이틀 전에 일어났다.”
“난 왜 안 깨운 거냐?”
“하멜. 아무리 내가 너희의 벗이라도, 그 방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모론답지 않은 이성적인 대답에 유진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이번에도 유진은 더 대화를 잇지 않고서 입술을 닫았다.
반년을 잠들었던 때와 비교하면 일주일이면 양호하지 않은가? 썩어도 준치라는 말도 있는데, 대마왕인 유폐의 마왕이 설마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까.
“어디 가나?”
후다닥 걸음을 옮기는 유진의 등을 향해 모론이 물어왔다.
“저쪽 상황 보러 간다.”
“그럼 나도…….”
“나 퍼 자는 동안 너는 매일 봤을 것 아냐? 꼴 보니까 방금까지 보고 있던 것 같고.”
“변화는…… 있었다. 봉인이 더 커졌고, 안에는…….”
“누르가 득실거리나?”
“그래.”
모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터지면 쏟아져 나오겠…….”
투덜투덜 대답하던 목소리가 뚝 멎었다. 유진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복도 끝을 보았다.
저 멀리, 커다란 꽃다발이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앗.”
화려한 꽃 사이에서 멜키스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곁의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축하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옆의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빌어먹을 환생 601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도망칠 이유도 없지만, 그런데도 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제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서 함박웃음과 함께 걸어오던 멜키스의 모습은, 그것이 눈동자에 각인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아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끔찍한 힘이 있었다.
“어휴.”
붙들렸다가는 상상 속에서 멜키스를 백 번 죽여도 모자랄 살의를 느끼게 될 터.
유진은 성벽의 난간에 서서 뒤를 힐긋 보았다. 다행히도 멜키스는 쫓아오지 않아,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앞을 보았다.
모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그건 눈으로 본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유폐의 마왕이 만든 봉인은 일주일 전에 보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커져 있었다. 과장 없이 평원의 반을 가르고, 방치되었던 판데모니엄도 모조리 삼켰다.
‘몇이나 되는 거야?’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봉인의 안을 노려보았다. 땅은 물론이고 봉인의 천장까지 가득 채운 누르의 숫자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저게 전부도 아니다.
저 누르들은 어디까지나 멸망의 마왕에게 이끌려 나타난 것일 뿐. 본래 누르가 나타나던 레헤인야르를 떠올리며 유진은 눈썹을 구겼다.
‘별다른 말은 없었으니 그쪽의 문도 아직은 건재한 모양이지만…….’
그나마 건재한 것도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인이 열린다면 저 셀 수 없이 많은 누르가 쏟아져 나올 것이고, 멸망의 마왕의 강림에 공명하여 레헤인야르에서도 누르가 쏟아져 나올 것이며, 세냐의 봉인은 더 이상 그를 붙들 수 없을 것이다.
‘막을 수 있나?’
유진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전쟁을 생각해 보았다. 유진과 세냐, 모론, 성녀들의 역할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유폐의 마왕이 남긴 사슬을 따라, 멸망의 마왕의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가로트의 마지막에 그랬듯, 그 순간에는 멸망의 마왕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유진 일행이 멸망의 내부에서 붙드는 동안- 바깥에서는 신군이 저, 셀 수 없이 많은 누르를 막아야 한다. 만약 가능하다면 멸망의 안으로 들어가기 전 누르를 먼저 소탕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봉인이 건재한 이상 바깥에서 공격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저 봉인은 유진이 안으로 들어간 순간에 완전히 열리는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위를 쳐다보니, 날개를 퍼덕거리는 와이번 위에 탄 시엘이 보였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 웃음기 하나 없는 딱딱한 어조. 노려보는 것과 다름없는 시선에, 생기가 하나도 없어 마치 죽은 것처럼 느껴지는 눈동자. 그것만으로 유진은 시엘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후우…….”
“한숨? 지금 저를 보고 한숨을 쉬는 겁니까? 제 얼굴을 보니 한숨이 나와 버린 겁니까? 유진 님이 그렇게 한숨을 쉬시면, 제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질지…….”
“나 진짜 많은 사연이 있었거든.”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난간에 걸터앉았다.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구질구질해서 못 하겠는데, 억울하고 서럽고……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세상 이치 어쩔 수 없는 그런 거대한 흐름이란 것에 나도 모르게 휩쓸려 버린 것인데…….”
“구질구질하다 말한 주제에 뭐 그리 말이 깁니까?”
“딱히 비난당할 일은 아닐 텐데 비난까지 당하고…… 세상에서 둘 뿐인 형제한테도 갈굼받고…….”
“형제? 내가 너한테 제일 듣기 싫은 말이 형제인 거 알아, 몰라?!”
북받치는 감정이 어조를 되돌렸다. 와이번 용용이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려서 유진의 옆에 선 시엘은, 숨을 씨근거리며 유진의 몸을 발로 퍽퍽 걷어찼다.
“어렸을 때는 자기가 누나라는 둥 그랬으면서.”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였으니까! 가능하다면 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13살 때의 나한테 어쭙잖게 끼 부리지 말고 대놓고 들이대라고 충고하고 싶어. 겸사겸사 시무인 때로 돌아가서 질질 짜대지 말라고 싸대기도 갈기고.”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움에 시엘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 말에는 유진도 적극 공감할 수 있었다. 유진도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여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왜 여기 앉아서 궁상떨고 있어? 더 누워나 있지.”
“방금까지 누워있었잖아. 정신을 차렸으면 당연히 일어나야…….”
“아, 그래? 방금 정신을 차린 거구나. 난 또, 진즉에 정신은 차렸는데 침대가 좋아서 안 나오는 줄 알았네.”
“진짜 억울하고 서러워서 화나고 눈물이 날 거 같네.”
“나는 억울하지는 않은데 가슴 아프고 슬프고 서럽고 화나서 눈물 날 것 같아.”
“계속 그럴 거야?”
“마음 같아서는 계속 그러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네가 날 싫어할 것 같으니 안 할래.”
“난 너 안 싫어해. 이런 거로도 절대 안 싫어하고.”
“그럼 좋아해?”
불쑥 돌아온 질문에 유진은 눈을 끔벅거리며 시엘을 쳐다보았다. 곧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시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말을 말자. 대답도 하지 마.”
“갑자기 훅 들어오니 당황스럽네.”
“내가 언제는 안 그랬어? 아무튼, 여기 앉아서 뭐하냐니까?”
“보면 알잖아. 저거 보고 있었지.”
“왜 여기서 봐? 궁금하면 가까이서 보지.”
“여기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똑같아. 그러는 너는?”
아직까지 하늘에는 용용이라는 멍청한 이름을 가진 와이번이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다. 유진은 멋대로 정해진 이름을 앞으로 평생 바꿀 수 없을 불쌍한 와이번을 힐긋 보며 말했다.
“하늘 산책은 아닌 것 같고.”
“당연히 아니지! 정찰하고 온 거야!”
“정찰? 봉인을?”
“그쪽도 루트에 있기는 하지만, 중점으로 둔 것은 헬무드의 국경이지.”
시엘은 표정을 찡그리며 손가락을 들어서, 봉인 건너편의 국경선을 가리켰다.
“……유폐의 마왕이 패배를 인정하고, 헬무드는 패전국이 되었으니 말이야. 유폐의 마왕이 모든 마족의 생사여탈권을 네게 부여한 것도…… 당연히 헬무드에 전해졌지.”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유폐의 마왕이 ‘사슬’을 준 것은 유진이고, 유진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 생각도 아직은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양도할 생각도 없었다.
“언제 자기 목숨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입장이니, 내가 잠든 사이에 암살 시도가 있을 법도 하군.”
“있을 법도 한 게 아니라 몇 번이나 있었어, 몇 번이나!”
시엘이 빽 고함을 질렀지만,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턱을 괴었다.
“암살 시도야 교황청에서 자는 중에도 있었잖아?”
“그때랑은 절박함이 다르지!”
“거참, 뭐 하러들 그랬대? 나는 마족을 몰살시키거나 그럴 생각이 없는데.”
“……정말?”
돌아온 대답에 시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유진의 전생은 바로 그 우둔한 하멜. 동화책에조차도 틈만 나면 마족을 혐오하는 면모를 보였고, 당장 마족들에게는 몰살의 하멜이라고 불리던 위인이다.
“전쟁파 마족은 내가 손댈 것도 없이 유폐의 마왕이 알아서 죽였고, 지금 남은 것은 일단은 비전쟁파잖아. 남한테 피해 안 주고 평범하게 살겠다면 죽일 이유가 어딨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중에 제대로 성명을 내는 게 좋을 거야. 그래서.”
시엘이 은근슬쩍 유진에게 몸을 기울였다.
“앉아서 무슨 생각 했어?”
“저 안에 득실거리는 괴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어떡하긴,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니까…… 나오는 대로 죽이면 되는 것 아냐?”
“말은 쉽지, 쟤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은 너도 알잖아.”
“알지.”
누르와의 전투는 하우리아에서도 겪어보았다.
저 괴물들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신경을 어지럽히고, 제멋대로의 생김새답게 변칙적으로 싸우면서 피조차도 독성을 띤다. 저것들은 멸망이 휩쓸고 간 시체에 마력이 깃들어 태어났다. 여태까지 스러진 시대에서 몇 번이나 생명을 몰살시키는데 일조한, 진짜배기 멸망의 권속이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거잖아.”
시엘이 중얼거렸다.
“네가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시조님을 구하고 나왔는데 말이야. 저것들을 내버려 둔다면, 세상이 조금은 망해 있을지도 모르잖아.”
“조금보다는 많이 망했을지도 모르지. 누르는 계속 늘어날 테니.”
“조금이든 많이든, 망하게 두면 안 되는 거잖아. 설마 망했으면 좋겠어?”
“그러길 바랐다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유진은 툴툴 웃으며 대답했다. 그만두거나…… 편해질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멸망이라지만, 유진은 못해도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누아르와 함께 영원한 꿈에 갇히는 것. 다른 한 번은, 유폐의 마왕과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제안을 받았고, 선택했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더 이상 그런 기회는 없다. 패배하고 죽어서 멸망하거나, 승리하고 살아서 미래를 얻거나. 머릿속에서 떠오른 두 개의 길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죽어서라도 해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구만.”
“뭐?”
갑작스러운 중얼거림에 시엘은 제대로 듣지 못해서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유진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당연히 유진은 죽을 생각은 없었다. 필사적으로, 그런 식의 각오는 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멸망을 쓰러트리고 베르무트를 구하겠다……. 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진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죽는 한이 있어도’인 것이다.
‘몇 번이나 죽어서 환생하고, 이 개고생을 했는데. 나만 죽어버리면 억울해서 안 돼.’
세상 구하고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이다. 거창하고 숭고한 사명감이나 그와 비슷한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일단 유진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이 노력한 만큼 세상도 자신을 위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방에 연락부터 해야겠어.”
“왜?”
“저것들 숫자 살벌하잖아. 신군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까, 후방에 증원을…….”
“이미 올 만큼 와 있어.”
시엘이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말했지만, 유진은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렸다.
“아하. 나 자는 동안 가주님이 요청하셨나 봐?”
“요청하기도 전에 알아서들 도착하던데?”
“……왜?”
“저게 마지막 마왕이니까.”
시엘의 대답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렸고, 멸망의 마왕만 남았잖아. 저것만 죽이면 전부 다 끝나는 거고, 죽이지 못하면 세상이 끝나. 여력을 남길 이유가 어디에 있어?”
네란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을 높이까지 도약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네란의 성벽 바깥까지 임시 막사가 가득했다. 난잡하게 꽂힌 깃발들은 신군의 것뿐만 아니라 대륙 모든 국가와 용병단의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평생 이만큼 많은 군대를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대륙 전군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부 다 너 때문에. 그리고 너를 위해 모인 거야.”
시엘을 태운 용용이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네가 유폐의 마왕에게 이기고, 헬무드를 패전국으로 만들어서. 멸망의 마왕을 눈앞에 두어서.”
저 거대한 군대, 휘날리는 깃발이 유진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모든 별을 땅에 모아둔 것만 같은 반짝임. 빠르게 번지는 불길. 그렇게 뒤섞여서 타오르는 빛. 지금 저 앞에 있는 것은 멸망을 거스르는 불빛이다.
“여태까지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그 유폐의 마왕과, 헬무드를 쓰러트린다는 생각을 말이야. 그런데 유진, 너는 해냈잖아.”
시엘은 스스로 말하고도 신기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내가 아는 너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
“……옛날에는 많이 졌어.”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해. 너랑 싸우면…….”
시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일주일 전 보았던 광경. 구역질 나는 불길함. 시엘은 주먹을 꽉 쥐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멸망의 마왕에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야.”
유진도 ‘빛’에서 시선을 거두어 뒤를 보았다. 제법 멀리 있는 멸망의 봉인이 보였다.
ㅡ무언가가 등을 떠밀었다. 뒤를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유진은, 무엇이 등을 떠미는지 이해했다.
이건 승리에 대한 갈망이다. 염원이다. 전쟁과 죽음의 두려움을 잊기 위한 모든 감정과 의지다. 결국 모든 것이 추구하여 도달하는 끝은 승리이기에, 그 모든 것이 유진에 대한 신앙이 되었다.
‘아.’
유진의 정신은 순식간에 멸망의 봉인까지 도달했다. 육체를 초월한 정신은 견고한 봉인을 뛰어넘지는 못했으나,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보았다. 득실거리는 누르의 군세. 그를 한참이나 뛰어넘어서 도달하는 ‘멸망’의 중심.
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언가.
그건 적이다. 쓰러트려야 할 적. 패배시켜야 할 적. 그 적을 굴복시켜야만 승리할 수 있다. 이게 전쟁인 이상, 무조건 그렇다. 대륙 전체의 신앙이 눈에 깃들어, 승리를 위해 쓰러트려야 할 ‘적’을 보여주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남자의 모습을.
박살 내고 끊어낸 사슬의 잔해 중심에서, 양손으로 땅을 짚고서 웅크린 남자를.
‘멸망의 마왕.’
그리고.
“베르무트.”
불길함은 여전했지만,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은 차분한 눈으로 ‘적’을 보았다.
“…….”
유진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 날.
승리와 유진의 이름을 연호하는 군대가 멸망의 봉인을 향해 진군했다.
빌어먹을 환생 602화
멸망의 마왕
“어우.”
유진은 괜스레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입을 열었다. 노골적으로 엄살이 섞인 소리라, 몇 걸음 앞에 서 있던 모론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적잖은 긴장이 섞인 목소리. 그 모론조차도 긴장해서 언동이 굳을 수밖에 없는 상황.
대뜸 뱉은 엄살에 반응한 것은 모론만이 아니었다. 메리를 단단히 쥐고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세냐도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뭐야? 갑자기 왜?”
유진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열렬한 반응에 입을 열기가 민망했던 것이다. 유진이 뭐라고 말을 잇지 않자, 뒤를 돌아보고 있던 모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멜, 갑자기 왜…….”
“무시하십시오.”
뒤쪽에 서 있던 아니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들었다. 철썩! 호되게 내리친 손바닥이 유진의 등판에 작렬했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헛소리를 하려던 것입니다.”
“분위기 파악을 못 했다니, 그건 틀렸어. 나는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헛소리를 하려던 거야.”
변명도 거짓말도 아니다. 유진은 제법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중압감. 진짜 ‘끝’을 앞두고 있다는 긴장감이 모두의 숨을 틀어막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뒤에 시선도 그래. 대가리 뚫릴 것 같네.”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평원의 끝. 성벽의 앞에는 신군을 필두로 한 군대가 배치되어 있다. 저 어마어마한 대군은 도시의 성벽을 빙 두르고도 한참이 남아서 후방까지 한참을 채웠다.
저 모든 병사들이 멸망의 봉인을 향해 가는 유진 일행을 쳐다보고 있다. 꽤 거리가 있는데도 뒤를 돌아본 것을 알았는지, 곳곳에서 깃발이 번쩍 들리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렁찬 고함에 평원을 쩌렁쩌렁 울리고 고막이 진동했다.
“다들 하멜, 당신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는 것인데. 손이라도 흔들어주지 그럽니까?”
“민망하게스리.”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손은 흔들어주었다. ㅡ와아아! 또다시 들린 함성에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기는 가득 차 있다. 적어도 군대에는 결전에 대한 긴장이나 두려움은 적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 대부분이 ‘적’에 대한 실감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봉인은 건재하고, 누르는 쏟아져나오지 않았다. 유진은 군대에 시선을 거두어 하늘을 보았다.
유폐의 마왕과 싸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평원의 하늘에는 유진이 신력으로 만들어낸 태양이 떠 있다.
이곳에만 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 아침에 시엘의 도움을 받아 레헤인야르에 들러서 그곳에도 태양을 하나 띄워놓았다. 설원의 태양 아래에는 아만과 루하르군, 아이빅을 대표로 한 용병들이 있다.
“설원 쪽이 조금 불안하네.”
“아만은 나의 후손이다. 내 피를 이었다는 것은 용감하고 강한 전사란 뜻이며, 그를 따르는 전사들은 바야르의 적통이다.”
모론이 가슴을 활짝 펴며 자랑스레 말했다.
“비록 나는 그들과 함께 싸우지 못하지만, 나의 후손들은 누르가 산을 내려오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남 걱정보다는 우리 걱정을 해야 하는 것 아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 너도 여기에 마법들 깔아두고 있잖아.”
돌아온 대답에 세냐는 눈을 흘기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남겨진 이들을 걱정하는 것은 세냐나 유진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쪽에서 미리 안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함께 남아서 누르와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전투를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뿐이다. 유진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열었다.
유폐의 마왕에게 받았던 사슬이 보였다. 손바닥의 사슬이 바르르 떨리며 움직였다. 주먹에 쥐고 있을 때부터 사슬은 저렇게 진동했다. 마치 봉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공명하는 것 같았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고서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다.
거대한.
사슬의 벽이 보였다.
모론을 쳐다보았다. 조금 앞에 서 있던 모론은 시선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뒤에는 세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외우던 영창을 그만두고 곁에 섰다. 마지막으로 등 뒤의 아니스를 보았다. 아니스는 로사리오를 거머쥐며 조금 앞으로 걸었다.
베르무트를 제외한 네 명이 똑같이 사슬의 벽 앞에 섰다. 손바닥의 사슬이 점점 더 강하게 진동했다. 먼 뒤에서는 끊이질 않는 함성이 울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빛의 반짝임이 등을 살며시 밀었다.
사슬을 앞으로 뻗었다.
ㅡ촤라라락!
높다란 벽의 끝부터 사슬이 해체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로 엮였던 무수한 파편은 아래로 떨어지며 시커먼 재가 되어서 흩날렸다. 내부에 고인 불길함이 해방되었다. 하늘이 일렁거리더니 오염되듯이 색이 씌워졌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정면의 사슬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유진과 동료들이 자리에서 움직이기도 전에, 열린 문이 모두를 집어삼켰다.
사슬이 무너지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봉인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누르도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태양도 달도 없는 백색의 공간.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았다. 발은 무언가를 밟고 있지만, 땅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늘과 마찬가지로 땅 또한 새하얗다. 몇 번이나 보았던 허무. 아가로트가 마지막으로 도달해 죽은 세계.
이곳은 멸망의 마왕의 안이다. 온갖 색이 뒤섞여서 어지러운 형상이면서, 정작 그 안은 아무런 색도 없는 백색이다.
“빠르게 왔군.”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놀라지 않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았다. 홀로 서 있는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
“기약 있는 기다림이란 것은 제법 할 만하구나.”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
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유폐의 마왕을 응시했다. 가까이 가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폐의 마왕은 정말로 ‘간신히’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굳이 서 있는 것은- 주저앉았을 때,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일까.
“말하는 것과는 달리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무리해서 만든 봉인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리고…… 내가 상태가 좋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유폐의 마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본래부터 핏기가 적어 창백했던 얼굴이지만, 지금은 창백하단 수준을 넘어 파리했다.
“멸망을 쓰러트리는 데에, 지금 이상으로 내 도움이 필요한가?”
“아니.”
아무런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 싸움에서 네 역할은 끝이다.”
유진이 먼저 성큼 앞으로 걸었다.
ㅡ우우우우…… 그 걸음을 느낀 것인지 허무가 뒤흔들렸다.
“너는.”
유진의 몸이 유폐의 마왕의 곁을 지났다.
“여기 서서, 구경이나 하면 돼. 네가 몇 번이나 반복하고, 몇 번이나 다음을 바라는 것으로 타협했던 것의 결말을.”
아아아아…….
뒤흔들리는 허무에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유진은 주먹을 쥐었다. 모론은 뿌득 이를 갈았고, 세냐는 입술을 잘근 씹었고, 아니스는 탄식을 흘렸다.
“여전히.”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베르무트를 구하겠다고…… 생각하나?”
“대체 몇 번을 묻는 거냐. 우리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아.”
“그렇겠지.”
가능과 불가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붙드는 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저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감상과 의견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직접 보고, 느끼고, 판단하여, 답을 내리는 것은- 유폐의 마왕의 몫이 아니다. 유진의 말이 맞다. 유폐의 마왕이 할 것은, 결말을 보는 것이다.
“앞이다.”
유폐의 마왕이 손가락이 앞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멸망의 중심에서 가장 이질적인 장소.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 그곳에는 아득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 저 상처는 ‘그’가 멸망의 마왕이 되고서 처음으로 새겨진 유일한 상처이며, 앞으로 몇 번이나 세상이 반복되어도 저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멸망의 마왕이 되기 전에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는 용사가 되기를 바라였으나 용사가 되지 못한, 하지만 용사의 곁에 서는 것을 허락받은 남자였다.
모두가 바라던 대로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린 순간. 남자는 용사의 등에 칼을 꽂았다. 하찮은 질투심 때문이었다. 마왕을 쓰러트리면 용사는 영원히 용사로 추앙받을 것이고, 동료인 자신은 용사만큼의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마왕의 옥좌는 남자의 추악하고 세속적인 질투를 부추겼고, 그날.
새로운 마왕이 태어났다.
“베르무트.”
상처를 보았다.
베르무트가 보였다. 멸망의 마왕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놈이 마왕이 되기 전에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유폐의 마왕의 기억을 보아 알고 있다.
신경 쓸 필요도 가치도 없는 기억이다. 멸망이 어떻게 태어났는지가 무어가 중요한가? 유진에게 중요한 것은 멸망의 기원이 아닌, 멸망의 죽음이다.
멸망의 이름?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것에도 끔찍할 정도로 관심 없다. 유폐의 마왕이 알고 있는 ‘베르무트’와 유진이, 모론이, 세냐가, 아니스가 알고 있는 ‘베르무트’는 다르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용사다. 빛이 놈을 인정하지 않았고, 베르무트 본인이 자신을 용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다른 모두가 베르무트를 용사라고 인정하고서 용사라고 불렀다.
하찮은 질투심으로 동료를 배신해? 그것이야말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남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두가 알고 있다. 베르무트는 절대로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다. 아니. 300년 전에 함께 마경을 가로질렀던 5명 중 누구도,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동료의 영광을 질투하여 등에 칼 따위를 꽂지 않는다.
만약 베르무트를 비난해야 한다면.
“혼자서 입을 닥치고 있던 거야.”
유진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내뱉었다.
“내 꿈에 나타나서 100년이 넘도록 고생시키기도 했지.”
모론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죽지도 않았으면서 제게 추모사를 적게 한 죄도 있습니다.”
아니스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가슴이 뚫려서 진짜로 죽을 뻔했어.”
세냐가 눈썹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베르무트.”
유진의 손이 옆으로 들렸다. 화륵. 피어오른 불꽃이 유진의 몸을 덮었다.
“사과를 하든가, 변명이라도 해라.”
커다란 상처.
그 중심 부근에는 박살이 난 사슬들이 널브러져 있다. 몇 번이나 보았던 의자의 위에 베르무트가 앉아있다. 일주일 전에 강림했던 ‘모습’과는 다르다. 그때 그것이 베르무트의 모습에 씌워진 멸망의 마왕이었다면, 지금 앞에 있는 것은-
베르무트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은 열지 않았다. 칙칙한 금색의 눈동자가 모두를 보았다. 이 무채색의 세계에서 저들은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요를 잊은 심장이 멋대로 두근거렸다. 일렁이는 감정이 점점 번져갔다.
눈이 부셨다.
앞에 선 네 명에게 그리운 빛을 느꼈다. 이 허무에서 고독한 300년 동안 필사적으로 이성을 유지하게 해주었던 빛. 너무나도 그리워 다가가고 싶지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빛.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빛 중에서 오래전, 자신의 안에 처음으로 커다란 상처를 남겼던 존재에 대해 떠올렸다.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시선을 거두었다. 눈으로 본들 얻을 수 없으니. 지금까지 이성을 유지해 준 저 빛은,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감상 따위는 자아내지 못했다. 심연에서 울리는 절규는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바깥을 보았다. 쏟아져나오는 권속들을 방치하면서 본신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유는, 안다. ‘저것’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저것들을 죽이면 움직일 수 있다. 저것들을 죽이면, 심연에서 절규하는 ‘나’도 사라져서,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그 뒤에는? 그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음이 반복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멸망의 마왕에게 있어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이유 따위는 없다. 애당초 그는 진정한 의미로 세상을 멸망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멸망의 완성을 앞두고서 항상 세상은 다음으로 넘어가 처음부터 시작했기에, 멸망의 마왕은-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끝까지 해내지 못한 것을 반복했을 뿐이다.
이번에는 진정한 의미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을까?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세계를 반복해 멸망시켜 온 본능이 남자를 일으켰다.
“새끼.”
색이 뒤엉키며 베르무트의 몸을 휘감는다. 텅 비어서 탁한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살기도 마찬가지다. 놈은 살기 따위는 뿜지 않는다. 지독한, 정신이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그런 불길함만을 쏟아낼 뿐.
지금 저것은 베르무트가 아니다.
처음부터 저 몸은 멸망의 마왕에게서 갈라져 나온 분신이었다. 하지만 저 몸은 베르무트의 것이다. 저 안에는 베르무트가 있다.
“입을 열게 만들려면 정신부터 차리게 해야겠는데.”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검을 쥐었다.
멸망의 마왕이 다가왔다.
빌어먹을 환생 603화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베르무트에게 이지(理智)란 느껴지지 않았다. 초점 없고 칙칙한 눈동자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 선 모두가 느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것은 베르무트의 거죽을 뒤집어쓴 다른 존재란 것을. 저것이 베르무트의 본질이자 그를 낳은 원초라는 것을. 과거의 인연이나 정 따위를 아무리 호소해 본들, 저것은 절대 멈추지 않고 멸망이란 본성을 이뤄낼 것을.
“베르무트.”
나직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한 번의 부름으로 베르무트를 깨울 수 있으리란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다가오는 놈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 부름에 답을 하듯이 멸망이 팔을 들었다. 허무뿐인 공간이 뒤틀리더니 어지러운 색이 번졌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가 움직였다.
묵직한 소리. 모론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지금 모론의 손에 도끼는 없다. 그가 평생을 휘둘러 온 도끼는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모론은 마치 도끼를 쥐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들었다.
화륵. 유진과 모론 사이에서 불씨가 튀었다. 화신이며 대전사가 바라였기에 승리의 신이 직접 무기를 하사했다.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았던 손에는 어느새 도끼가 있었다. 모론은 새롭게 쥔 도끼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멸망의 머리 위에서 도끼를 내리찍었다.
도끼는 공중에 가로막혀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모론의 거력이 도끼를 짓눌렀지만, 색이 뒤엉켜 만들어낸 장벽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충돌했는데도 소리는 퍼지지 않았다.
후방에서 세냐가 메리를 들었다. 반발로 엉키는 불꽃과 색이 해석되었고, 영력은 저 틈을 관통할 마법을 만들었다. 소리 없이 발사된 창이 모론의 곁을 지나 멸망에게 도달했다.
코앞까지 도달한 창이 폭발했다. 이번에도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장벽을 관통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세냐의 마법은 멸망에게 아무런 피해도 전하지 못했다. 마법은 사라졌고, 멸망의 시선이 세냐에게 움직였다.
움직인 것은 시선뿐. 이곳은 다름 아닌 멸망의 배 속이다. 시선만으로 현상이 일어난다. 세냐는 자신을 덮치는 죽음을 직감했지만,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 이미 색과는 다른 빛이 반짝였기 때문이다. 불씨가 허무에 번졌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성녀를 날개로 삼고서 손을 들었고, 그것만으로 색을 꺼트렸다.
유진은 선명하게 타오르는 신검을 손에 쥐었다. 먼 옛날, 아가로트는 이곳에서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며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공을 넘어온 염원이 유진의 검이고, 멸망을 바라지 않는 현재의 모든 의지가 유진의 등을 밀었다.
빛이 선을 그었다.
꽈아앙! 처음으로 큰 소리가 났다. 색이 흩어지고 멸망이 뒤로 밀려났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유폐의 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멸망의 배 속에도 꺼지지 않는 빛. 유폐의 마왕은 저 빛이 무엇으로 밝은지를 느꼈다.
아가로트와는 다르다. 그가 가졌던 전쟁이란 신성은 결국에는 멸망의 안에서 오래 빛나지 못했으나,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성은 전쟁이 아니다.
‘하지만…….’
감탄은 흘렸으나 결말을 확신할 수는 없다. 유폐의 마왕은 끊어지려는 의식의 끈을 잡고서 멸망을 직시했다. 사력을 다한 발악으로도 걸음을 멈추는 것이 고작이던 아가로트와는 다르지만- 멸망은 살짝 물러섰을 뿐이다.
“쯧.”
유진도 느꼈다. 아가로트 때와는 다르고, 일주일 전과도 다르다. 지금 유진과 동료들은 언제나 ‘멸망의 마왕’에게 느꼈던 불길함과 불안, 광기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저 끔찍한 마력의 침식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압도하는 것은 꿈에도 꾸지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닿으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닿는 것만으로 신력이, 존재가 마모되는 것만 같다. 아니, 마모되고 있다.
“베르무트.”
유진은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초점 없는 눈동자를 들여보지만 베르무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건 미치기 싫어도 미칠 수밖에 없구만.”
물러섰던 멸망이 다시 앞으로 왔다. 움직인 손이 색을 이끌었다. 정면에서 덮쳐오는 색에 맞서 불꽃이 일어섰다. 타오르는 불꽃의 빛은 즉시 색에 덧칠되어 사라졌지만,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다시금 빛이 타올랐다.
뒤엉키는 색을 베었다. 베어도, 베어도 색이 번져 앞을 틀어막았다. 퍼붓는 참격, 마법이 공격의 사이를 채웠다. 도달하는 순간에 소멸해 버리지만 세냐의 마법은 끊이질 않았다.
“모론!”
유진이 고함을 질렀다. 직접 외치기도 전에 모론은 이미 유진의 뜻을 이해하고 도끼를 치켜들었다.
우우우우! 신력으로 빚어낸 도끼가 모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맞춰 크기를 바꾸었다. 오직 ‘힘’ 하나만으로 신성에 근접한 사내가 모론 루하르다. 그가 전력을 다해 뽑아내는 힘은 유진의 신력과 어울려 기적을 체현했다.
원래부터 커다랗던 도끼가 훨씬 더 거대해졌다. 하늘도 천장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도끼는 마치 하늘에라도 닿을 것처럼 높아졌다. 그 끝에 매달린 도끼날은 하늘과 대지를 가를 것처럼 커졌다. 그리고 모론의 양손은 거대해진 도끼를 잡고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후욱…….”
잔뜩 힘을 준 모론의 얼굴은 시뻘겋고 전신에서는 혈관이 울룩불룩 솟았다. 뒤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챈 멸망이 고개를 돌렸다. 지성과 이성이 없지만, 저것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본능이 판단했다.
시선이 움직이는 순간에 유진의 몸도 미끄러졌다. 그리고 멸망의 뒤에서 세냐가 마법을 퍼부었다. 덕분에 모론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꽉 다문 이빨이 으스러지고 잇몸에서 피가 튀고, 전신에서도 핏줄기가 솟았다. 힘을 견디지 못한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터졌지만, 도끼를 쥔 손은 풀리지 않았다. 육체가 무너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 힘이 도끼를 움직였다.
콰아아아-
도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느릿하고 무거운 움직임에 허무가 일그러지고, 깨지고, 찢어져 나갔다.
이곳은 ‘바깥’이 아니다. 세상 한복판이 아니란 말이다. 이곳은 멸망의 배 속. 저 도끼는 지금 멸망의 배 속을 가르고 있다.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멸망의 본능은 다시 한번 판단했다. 단순히 시선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막기는커녕 바로 앞의 방해마저 넘지 못한다. 그래서 멸망은 직접 움직였다. 동작과 소리도 없이 멸망은 도약하여 유진을 뛰어넘었다.
“유진!”
세냐가 고함을 질렀다. 빠지지직! 연달아 쏘아진 창이 멸망의 뒤를 쫓았다. 유진도 즉시 날개를 펼치고서 멸망의 뒤를 따랐다. 홱 뻗은 손이 마법의 창을 붙잡았다.
유진의 손에서 옮겨붙은 불꽃이 창을 휘감았다. 서로 다른 신력과 신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화르륵! 손에 쥔 커다란 불꽃의 창. 유진은 오히려 자신을 강하게 잡아끄는 창의 힘에 즉시 허리를 틀었다.
불꽃이 폭발하고 창이 쏘아졌다. 소용돌이치는 영력이 허무를 관통했다. 떨어지는 도끼를 막아서려던 멸망은 등 뒤의 섬뜩함에 고개를 돌렸다.
빠지지지직! 멸망이 정지했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마법들은 이번에도 또다시 멸망의 몸을 붙들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멸망은 초점 없는 눈을 들어 도끼를 쫓았다. 시선과 함께 색이 움직였지만, 이제는 도끼를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
떨어지는 도끼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고동쳤다. 느릿한 떨어짐이 점점 가속되었다. 높고 커다랗던 도끼가 가속에 맞춰서 점점 크기가 줄어들었다. 힘이 압축되는 것이다. 그만큼 도끼는 다루기 버거워지지만 모론은 멈추지 않았다.
유진은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가슴 속 우주에서 레반테인이 불꽃을 일으켰다. 머나먼 바다의 ‘빛’의 존재를 느꼈다. 유폐의 마왕과 전투했을 때 이상으로 빛과의 공명이 강했다.
그럴 수밖에. 저번 시대에서 거신과 고신들이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멸망의 끝이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는 바로 지금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 그렇기에 빛은 자신의 모든 신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다.
레반테인에서 뽑아낸 신력이 불꽃이 되어, 유진의 양손 사이에서 회오리쳤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력의 태양이 검게 물들었다.
이클립스. 유진은 직감했다. 그가 여태까지 해온 전투, 그때마다 사용했던 이클립스. 심지어 누아르 제벨라의 꿈에서 만들었던 이클립스보다, 지금의 이클립스가 강하다는 것을.
이클립스가 전진했다.
“부숴, 모론.”
모론은 피범벅의 입술을 비틀어 씩 웃었다. 하늘까지 닿을 만큼 거대했던 도끼가 이제는 모론이 평소 사용하던 것만큼 줄었다. 이클립스가 도끼의 궤적에 들어갔다.
도끼날이 이클립스를 터트렸다. 폭발한 검은 불꽃이 도끼를 휘감았다. 그리고 도끼가 불꽃을 이끌며 바닥에 꽂혔다.
쩌적.
아무런 색도 없던 지면에 균열이 번졌다. 지면을 찍고서도 모론은 더욱 도끼에 힘을 불어넣었다.
공허가 뒤흔들렸다.
끼이이이이!
찢어지는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은 멸망의 배 속에서도 가장 특별하고 불완전한 곳이다. 처음으로 멸망의 마왕이 가진 상처. 심지어 이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물지 않았고, 오히려 멸망의 일부가 상처를 통해 떨어져 나왔다.
그 불완전한 상처에 새로이 공격이 처박힌 것이다. 뱃속을 가르며 떨어진 도끼가 상처를 더욱 찢었다. 함께 추락한 이클립스가 상처를 파고들었다.
“아.”
모두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세냐의 집요한 마법에 붙잡혀 있던 멸망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아.”
멸망을 휘감은 색이 요동쳤다. 그 흔들림은 허무에도 번졌다. 점점 격렬해지는 흔들림은 바닥까지 번졌다.
[유진 님. 저곳을 보십시오.]
머릿속에서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허무에서 바깥의 풍경이 흐릿하게 비추어졌다. 동시에 레헤인야르의 풍경도 보였다. 가득 널브러진 시체를 짓밟으면서 쏟아져나오는 누르의 진군이 신군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
계속해서 쳐다볼 수는 없었다. 크게 균열이 번진 바닥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설마 바닥이 무너질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유진은 급히 모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덜거리는 팔을 늘어트리고서 주저앉았던 모론이 유진의 곁으로 옮겨졌다.
추락이 시작됐다. 활짝 펼친 날개가 모론을 보듬었다. 아니스의 손길이 스치면서 모론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모론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저 위에서 멸망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멜, 방금 그…… 목소리는…….”
“몰라.”
유진은 입술을 뿌득 씹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었을까, 탄식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멸망’이 낼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상처에 한 번 더 처박은 공격이 멸망에게 제법 치명적이었나? 어쩌면, 지금의 공격으로 베르무트의 의식이 깨어난 걸까?
“어디로 떨어지는 거야?”
곁으로 다가온 세냐가 내뱉었다. 그녀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마법을 준비하면서 아래를 힐긋 보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기에 추락의 거리가 가늠이 안 된다.
그렇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추락하기 전에 있던 곳과는 느낌이 다르다. 깊어진다. 공기가 역하다.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럽고 마나가 불안정하다.
“떨어져도 되는 거 맞아? 오히려…….”
“괜찮아.”
유진은 의심하지 않고 대답했다. 역한 공기, 불안정함, 광기, 그 모든 독은 유진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오히려 이래야 맞다고 생각했다. 이 마구잡이로 날뛰는 광기와 불길함이야말로 멸망의 마왕의 근원에 가깝다는 증거이리라.
추락이 멈췄다.
“……저건 뭐야?”
위에서 떨어지던 멸망은 보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안구가 쓰라릴 정도로 불쾌하고 오염된 기류를 넘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일그러진 지점.
그곳에는 기괴하고 역겨운 모습의 덩어리가 있었다. 썩고, 그리고 싱싱한 살점이 누더기처럼 엉겨 붙은. 마찬가지로 거죽과 뼈가 뒤섞인, 마치 사악한 흑마법사가 고약한 취미로 만든 조형물 같은 덩어리. 절대로 살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인데.
모두가 느꼈다. 저것은 살아 있다. 살아서, 고동하고 있다.
“심장이다.”
천천히 떨어진 유폐의 마왕이 바닥에 내려왔다. 그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멸망의 심장.”
유진은 망토 안에서 낡은 사슬을 꺼냈다. 사슬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유폐의 마왕이 최초에 멸망의 마왕에게 묶은 사슬.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유폐의 마왕을 돌아보았다.
“최초에 나는…… 멸망의 마왕이 앉았던 옥좌에 사슬을 묶었지.”
그렇게 최초의 용사는 유폐의 마왕이 되었다.
“그 옥좌가 심장이 되었나.”
이곳은 멸망의 배 속에서도 가장 깊은 장소. 최초에 사슬은 연결했지만, 유폐의 마왕조차도 심장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심장이란 급소이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고, 가까이 가려 해도 갈 수가 없었다.
“터트려라.”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끝난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가슴을 부여잡은 베르무트의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환생 604화
뱃속의 오랜 상처가 찢어지고 심장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심부에서 벌어진 파괴는 멸망의 마력을 격렬히 흔들었다.
그 과정에서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의식이 깨어났다. 베르무트는 숨을 헐떡거리며 아래를 보았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료들과……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
왜 유폐의 마왕이 이곳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이 가진 망집에 대해 안다. 저 남자가 용사로서 내린 결정은 세상을 이어가는 것이고, 마왕으로서 내린 결정은 멸망에 순응하는 것이다. 동료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결국 유폐의 마왕의 망집을 꺾었다는 뜻일 테니.
“터트려라.”
베르무트는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것은 멸망의 심장이다. 최초에 마왕을 탄생시킨 옥좌. 끝이 찾아올 때마다 멸망은 세상 모든 존재를 죽였다. 그것은 유폐의 마왕과 함께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끝이 나고 다음으로 넘어갈 때마다 유폐의 마왕에게는 끔찍한 독기와 악이 쌓였다. 유폐의 마왕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심연에 유폐하였지만, 멸망의 마왕은 그러지 못했다. 멸망의 마왕의 마력이 마주한 모든 것을 미치게 할 정도로 불길한 것은 그 때문이며, 저 심장은 멸망의 마왕이 몇 번이나 죽여온 세상의 독기와 정수다.
“그러면 끝난다.”
유페의 마왕은 베르무트에게서 심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300년 전이었다면. 멸망의 마왕이 완전히 강림하지 못하고서 통제가 가능한 수준이었다면…….
무의미한 가정이다. 애초에 300년이란 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졌던 것이 꼭 끔찍하고 부정적인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다. 300년의 시간이 흘렀기에 유진과 동료들은 유폐의 마왕을 넘을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그렇게 정면에서 패배했기에 유폐의 마왕은 진심으로 멸망의 끝을, 세상의 미래를 바라게 되었다.
심장을 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300년 전에 이곳에 도달했을지라도, 과연 심장을 터트리는 것이 가능했을까. 제 심장이 터지는 순간에도 멸망의 마왕은 과연 침묵했을까. 몇 번씩이나 세계를 멸망시킨 저것은, 과연 그 허무한 끝을 받아들였을까. 300년 전의 하멜과 동료들은 심장의 폭주를 견딜 수 있었을까. 그 순간에 유폐의 마왕은.
인간을 믿었을까.
‘아니.’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즉시 답을 내렸다. 그 순간에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인간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폭주가 ‘다음’을 망가트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더욱 치명적이 되기 전에 빠르게 오류를 수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럴 여력도 없거니와, 여력이 있더라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끝난다고?”
짧은 침묵 끝에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허공에 멈춘 베르무트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돌아온 대답에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하멜이 저러한 대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멜이라면, 아니, 하멜만이 아니라 모두가, 저렇게 되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라도 평생을 소중히 간직해 온 목걸이를 강제로 빼앗고서 직접 가슴을 뚫어 죽일 뻔했던 세냐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용사라고 생각하며 믿어주었다는 것을 알았어도, 그 어떤 진실도 전하지 않고서 장례를 맡겼던. 결국 죽어 영혼만 남은 천사가 되어, 하멜의 뒤에 선 아니스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진실을 전하지 않고 이해해 달라는 말도 하지 않으며, 100년이 넘도록 설산에서 정체 모를 괴물을 가로막게 시킨 모론도.
그들 모두가- 하멜과 똑같은 얼굴로 베르무트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만으로 베르무트는 오열하고 싶었다.
평생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이 순간에 도달하는 것만을 추구했다. 용사가 아닐지라도, 멸망의 마왕의 분신일지라도, 세상을 구하는 것에 값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맞이할 마지막에 멸망의 마왕과 함께 사라질 수 있다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삶과 이 존재에도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왜……?”
베르무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묻지 않아도 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앎에도 물어야 했다. 돌아온 대답을 직접 정면에서 부정해야 했다.
“왜 나를 구하겠다는 거냐. 나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너희가 나를 이해하지 않기를 바랐고, 내…… 내 행동을 납득시킬 생각도 없었다. 나는, 나는…… 너희가 차라리 나를 증오하기를 바랐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세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터진 웃음을 억누를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키득거리며 웃었다.
“……너희는…… 너희는 이제는 알고 있지 않나. 나는 용사는커녕 인간도 아닌 존재다. 300년 전과 다름없이, 너희가 그토록 죽이고 싶어 했던 멸망의 마왕의 분신이 바로 나다.”
이번에 웃음을 터트린 것은 아니스였다. 그녀는 묵묵히 곁에 서 있는 크리스티나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려가며 쿡쿡 웃었다. 나지막이 흐르는 웃음소리에 베르무트의 어깨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나는…… 너희에게 구해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애당초 내가 그것을 바랐다면, 진즉에 너희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 아닌가? 대체 몇 번이나 말하게 할 생각이냐……! 나는 멸망의 분신이고, 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멸망의 마왕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
“푸하하!”
이번 웃음소리는 세냐나 아니스의 것과는 달리 시끄러웠다. 모론은 고개까지 젖혀가며 커다란 웃음소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요란한 웃음소리에는 지금의 베르무트조차도 얼굴이 벌게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우스운 거냐……?!”
“그럼 안 웃기겠냐?”
발끈해서 외치는 질문에 유진이 피식 웃었다.
“이 병신아.”
욕설에 베르무트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는 베르무트에게 유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이해를 바라지도 않고, 납득시킬 생각도 없었고, 구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너를 구하는 거냐고? 그럼 씨X 너는 우리한테 왜 그랬냐? 베르무트 이 개새끼야, 네가 X대로 굴었으니까 우리도 똑같이 하는 거야.”
“…….”
“우리도 네 이해 따위 안 바라. 납득시킬 생각도 없어. 그냥 우리가 하고 싶으니까 널 구하는 거다. 증오? 그래. 만약 네가 증오하고 싶다면, 우리한테 구해지고 나서 마음껏 증오해라.”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신검을 쥐었다.
“정말로 뒈지고 싶다면, 일단 살아남아서 우리한테 업보 청산을 마치고 뒈지라고.”
“왜 알아먹지 않는 거냐……!”
베르무트는 동료들을 도저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하기에 저 말은 감정의 헛된 호소에 지나지 않았다.
“너희가 무엇을 바라건, 하멜, 네가 무슨 말을 하건……! 내가 멸망의 분신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멸망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이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나 하나를 구하고자 멸망을 죽이는 것을 망설이겠다는 거냐?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에서는 멸망의 권속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밖에는 내 후손들이 있다.”
모론이 대답했다.
“내 후손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고 괴물을 가로막을 것이다. 전사와 기사는 나와 하멜, 베르무트, 우리 셋을 동경하여 무기를 쥐었다. 마법사는 세냐를 동경하여 책을 들었다. 성직자는 아니스를 동경하여 기도를 외웠다.”
“…….”
“베르무트. 네가 만든 300년 동안 세상은 성장했다. 너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이제는 장성하여 멸망의 앞에 섰다.”
모론은 씩 웃으며 도끼를 쥐었다. 그 말에 베르무트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베르무트 님.”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건, 저는 300년 전에 당신께서 유라스를 행진하던 모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스스로 용사가 아니시라고, 멸망의 분신일 뿐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절망스러운 시대에서 당신은 틀림없는 희망이고, 빛이고, 용사셨습니다. 만약 그때 베르무트님을 보지 않았다면, 저는 세상에 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스……!”
“그러니 부디, 자신을 모멸하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당신이 자신을 부정하는 모든 말씀은 300년 전 당신을 희망이자 빛이자 용사라 보았던 모두에 대한 모독입니다.”
아니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크리스티나는 무어라 말을 하는 대신에 양손을 모으고 베르무트에게 기도를 올렸다.
모두가 신의 존재를 의심하던 때, 세상을 구원하고자 일어선 용사. 그것이 크리스티나가 배우고 자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
“옛날에. 기억해?”
세냐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경에서 말이야. 진짜 개같이 힘든 날에, 우리는 가끔 미래에 대해 떠들곤 했지. 모론은 언제나 왕이 되고 싶다고 했고…… 아니스는 별말을 하지 않고 술만 퍼마셨지만, 난 이제는 아니스가 어떤 미래를 바랐는지 알아. 베르무트, 넌 모르지?”
“…….”
“아니스는 말이야, 어디 한적한 시골에서 술집을 열고 싶대. 여관도 겸하는 그런 거. 하멜은 주제에 맞지 않게 뭔 아카데미를 세우고 싶다고 했고. 나는…… 결혼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 지금 와서 보면 꿈을 이룬 것은 모론 뿐이지만.”
“……세냐.”
“베르무트. 우리가 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너는 빙그레 웃기만 하고 대답을 피했었지. 그래서 우리는 네가 어떤 미래를, 어떤 꿈을 바랐는지 들은 적이 없어.”
세냐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300년 전. 그 절망스럽고 끔찍한 나날에서, 세냐는 매일 저렇게 생각했다.
“세상 누구보다 우리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우리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해. 당연히 그래야 하잖아. 우리는 300년 전에 세상을 구했고, 지금도 세상을 구하고 있어.”
“…….”
“그리고. 우리 중 누구보다, 베르무트, 네가 행복해져야 해.”
300년 전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3명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었을까?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지도 못했을 것이다.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300년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멸망은 끝낼 거다.”
느리지만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베르무트, 너도 구할 거다.”
“……불가능한…….”
“씨X 우리가 언제부터 가능한 일만 했냐? 너야 이것저것 숨기고 있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겠지만, 처음 살육의 마왕에게 덤빌 때! 너 빼고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베르무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니까 씨X, 네가 아무리 불가능하다고 해도 우리는 널 구하고, 멸망을 죽일 거야. 뭐? 네가 멸망의 분신? 멸망을 죽이면 너도 죽어? 그거야말로 개 X같은 소리지.”
“…….”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이 개새끼야. 우리한테 있어서 너는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고. 용사가 아니어도 돼. 멸망의 분신이어도 돼. 그런데.”
숨도 쉬지 않고 쏘아붙이던 유진은 크게 숨을 한 번 삼켰다. 북받치는 감정을 조금 억누르고, 떨리는 양손으로 신검을 강하게 쥐었다.
“네가, 우리가 알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마라. 멸망을 죽이고 나서. 우리는 너를 존나 팰 거다. 우리한테 처맞기 위해서라도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러니 멸망과 함께 죽겠다는 생각도 하지 마라.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생각만 해.”
“…….”
“300년 전이랑 똑같아.”
유진은 심장을 노려보았다.
“우리는 마왕을 죽인다. 마왕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베르무트 너는, 우리랑 같이…… 마왕을 죽이는 거다.”
그 말에 베르무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살아온 평생을 멸망의 분신이란 자각과 함께 살았다. 멸망의 마왕과 함께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았다. 바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말.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너’는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말. 그 말에 베르무트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멜, 모론, 세냐, 아니스.”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희는…… 바보에, 멍청이다. 아니. 병신이다.”
“푸하하.”
유진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네가 그런 욕을 하는 것은 처음 듣는다.”
“베르무트가 욕을 하다니!”
“거 보십시오, 세냐. 베르무트 님도 결국 사람이지 않습니까?
“병신 정도면 욕 중에서도 급이 좀 낮지.”
넷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베르무트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ㅡ두근.
느릿하게 뛰던 심장의 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유진과 동료들이 심장에 너무 다가갔기 때문이다. 심장은 가까이 온 위협을 느끼고서 저항을 준비했다.
“……나는…… 바라지 않아.”
베르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우우…… 다시 일어난 색이 베르무트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멸망은 심부에 침입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금 베르무트의 몸에 색을 씌워갔다.
“나는, 너희를…….”
“네가 우리를 공격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알아. 지금부터의 네가 베르무트가 아니란 것도 안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팰 것은 베르무트, 네가 아니다. 그러니까. 너는…… 살아서 더 맞을 생각이나 하면서, 그 안에서 싸워라. 얌전히 휘둘리지 말고 발악이나 하란 말이다.”
“하…….”
날뛰는 색이 베르무트의 몸을 집어삼켰다. 베르무트는 초점이 사라져가는 눈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병신 자식.”
멸망이 돌진했다.
빌어먹을 환생 605화
“너희는 심장으로 가라.”
유진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멸망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내뱉었다.
빠지직! 코앞에서 부딪친 마력이 불꽃과 함께 산화했다. 유진은 머리카락의 끄트머리가 재가 되는 것을 힐긋거리며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 새끼는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바로 앞에 있는 멸망에게 더 이상 베르무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놈의 눈은 아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초점 없이 탁했고, 전신을 휘감은 색과 마력이 불꽃을 대신해서 활활 타올랐다.
“너 혼자서?”
함께 나서려던 세냐가 움찔 멈춰서 물었다.
“혼자는 아니지. 아니스랑 크리스티나도 있으니까.”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신검을 밀어냈다. 저 발언을 증명하듯 유진의 날개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
콰르르르! 빛은 곧 불꽃의 세례가 되어 멸망을 덮쳤다. 하지만 멸망은 불꽃에 삼켜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마력과 색을 일으켜 불꽃을 밀어냈다.
“알았어.”
세냐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멸망의 화신이 되었던 망령과는 이전에 싸워서 승리했었지만- 저것은 화신의 격을 초월했다. 베르무트의 육체를 빼앗아서 지배하는 멸망의 분신, 아니, 멸망의 마왕 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존재를 유진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진이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의 신명이 ‘승리’라는 것은 지금 저리 나서는 것에는 관계가 없다. 유진이, 하멜이 저렇게 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베르무트에게 이긴 적이 없어서.’
세냐는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돌렸다. 잠시 멈추기라도 했던 세냐와는 달리, 모론은 멈추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우직하게 정면으로 돌진했다.
“크아아아-!”
괴성과 함께 모론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과연, 심장도 침묵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뿌득, 뿌드드득. 심장의 표면에서 부서져 갈라지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안쪽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뭉쳐서 모론에게 쇄도했다.
모론의 도끼가 떨어졌다. 큼직한 날이 마력의 덩어리를 끊어냈지만, 그 순간에 폭사한 색이 모론을 덮쳤다. 그 순간에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법을 펼쳤다. 둘 사이의 거리가 뭉텅 잘려 나가고,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모론이 세냐의 곁으로 옮겨졌다.
“무식한 새끼! 혼자 나가지 좀 마!”
“세냐, 널 믿은 거다.”
그렇게 대답해 버리니 세냐는 더 이상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모론의 성격상 입에 발린 말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론은 세냐가 자신을 보조해 줄 것을 진심으로 믿고서 우직하게 나아간 것이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먼저 가지 말고 있어 봐. 저걸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좀 봐야 할 것 아냐.”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눈을 얇게 떴다. 쩌저적…… 심장의 표면을 덮고 있던 뼈와 거죽 같은 것이 계속해서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서는 썩은 고기 같은 보라색과 검붉은 살덩어리가 뒤섞여서 꿈틀대는데, 피를 대신해서 가지각색의 마력이 흘러넘쳤다.
“역겨워라.”
오래전부터 썩은 시체는 헤아릴 수 없이 보았다. 어지간한 광경에도 토악질은커녕 풍경 삼아서 티 타임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단련된 비위지만, 저 심장을 보니 속이 울렁거리고 뒤집혔다.
그만큼 저것이 보기 역겹기도 했지만, 흘러나오는 마력과 색의 영향이기도 했다. 저 심장 안에 뭉치고 고인 것은 유폐의 마왕의 시독보다 훨씬 더 고약하고 끔찍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세냐는 구역질을 참으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일주일 전의 전투를 거쳐 신성은 훨씬 더 강해졌다. 그만큼 마력에 대한 저항력도 늘었지만 완전히 면역이 된 것은 아니다.
ㅡ꽈지직!
뒤에서 들리는 폭음이 세냐의 염려를 끊었다. 생각할 시간조차 아깝다.
“모론.”
짧은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은 300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뭔지 모를 적.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럴 때는 항상 모론을 먼저 보내곤 했다.
“일단 가봐.”
“그럴 줄 알았다.”
모론이 씩 웃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세냐는 모론이 심장의 저항에 어찌 응전하는지를 살피면서 뒤를 힐긋 보았지만, 힐긋 본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버거웠디.
빛과 색이 어지럽게 얽히는 것만이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진은 이런 식으로 베르무트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제대로 결투해서, 이제는 누가 더 강한지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오늘은 아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멸망이니 마왕이니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평화로운 일상 중에…… 대단한 결의나 신념 따위 갖지 않고, 당연히 승리한 뒤에는.
설마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베르무트가 풀이 죽어 있다면. 승자의 여유를 갖고 놈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면서. 너라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같은…… 승자가 할 법한 대사를 해주면서 술이나 마시러 가고 싶었다.
“오늘은 아니지.”
유진은 툴툴 웃으며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쓱 닦았다. 유진은 지금 자신과 싸우는 상대를 베르무트라고 여기지 않았다. 베르무트와 싸워서 이긴 적이 없으니까, 라던 말은- 결국에는 자신을 다잡기 위한 수단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다.
“애초에 이건 일대일도 아니잖아. 안 그래?”
[엄밀히 말하자면 하멜, 우리 쪽이 3명이죠.]
[하지만 시스터, 저는 유진 님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상대는 유폐의 마왕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마왕이며, 철저하게 쓰러트려야 할 악입니다.]
슬쩍 놀려대는 아니스와는 달리 크리스티나는 진지하게 유진을 옹호했다.
[맙소사, 크리스티나…… 지금의 당신이라면 하멜이 길바닥에 똥을 쌀지라도 그 이유를 모두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유진 님은 길바닥에 똥 따위 절대 싸지 않으십니다.]
“내가 똥을 왜 싸?”
꽈앙! 조금 떨어진 앞에서의 폭발에 유진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뻗었다. 가슴에서 흘러나온 빛이 즉시 이클립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3명이 아니야.”
이클립스는 폭발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퍼져나가던 힘은 모조리 이클립스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다시금 폭발했다. 그렇게 터진 폭발은 방금의 몇 배나 되는 위력으로 허무를 뒤흔들었다.
멸망은 바로 근처에서 검을 들었다. 놈은, 검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 그 검은 유진이 알던 검과 아주 비슷했다.
‘월광검.’
멸망의 분신으로 떨어져나온 베르무트가, 자신의 마력을 뽑아내어 만든 검. 멸망의 마왕이 월광검을 사용할 이유 따위는 없을 터. 하지만 아까부터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만들어서 휘두르며 싸웠다.
지성이 없을 텐데도 공격에 어색함이 없다. 아까의 멸망은 마력과 색을 움직이거나 팔을 움직이는 정도의 단순한 공격밖에 할 줄 몰랐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격돌이 이어질수록 놈의 움직임이 변하고 있다.
이클립스의 폭발을 양단해낸 멸망이 유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까는 하지 않았던, 아니, 하지 못했던 것. 하지만 몇 수 전부터 멸망은 저렇게 움직이는 법을 깨우치고, 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유진을 공격하고 있다.
이곳은 멸망의 뱃속이다. 그곳에서 태어난 베르무트는 원하는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신성이 깃든 직감에 몸이 움직였다. 유진의 머리가 있던 곳에 월광검의 참격이 그어졌다.
참격은 피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허공에 그어진 색이 꿈틀거리니 사방으로 폭사했다. 프로미넌스의 공간도약은 이곳에서는 쓸 수 없다. 유진은 번져오는 색을 피해 물러서며 신검을 뽑았다.
‘확실해.’
지금 공격은 그 전의 공격보다 예리하다. 직감이 없었다면 참격부터 피하는 것이 난항이었을 것이다. 저 방식의 이동에 익숙해지고, 공격을 가미하고 있다. 지성이 없을 텐데 어떻게?
‘성장하고 있어.’
달리 생각할 것이 없다. 놈은, 멸망의 마왕은- 그릇으로 삼은 베르무트의 오성을 사용해서 지금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원래 베르무트가 할 줄 알았던 전투법. 그를 바탕으로 해서 유진을 상대하며, ‘베르무트라면’ 할 법한 대응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내놓은 결론을 확신했다. 흐느적거리며 움직인 멸망이 유진을 보았다. 다시 한번 멸망이 유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개새끼가.”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망령의 때도 그랬지만, 베르무트도 아닌 새끼가 베르무트처럼 싸우는 것은 언제나 유진을 열받게 한다. 하멜일 적에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것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언젠가 ‘진짜’ 베르무트와 싸워서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기로 다짐했는데,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맞닥트릴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 그 언젠가에 베르무트에게 승리할 때 누릴 기쁨이 엷어질 것만 같았다.
“작작해라.”
직감이 경고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놀라서 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유진은 아까처럼 경고를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다.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네가 베르무트가 할 방법으로 성장해서 덤비면.”
손에 쥔 신검이 불꽃이 되어 무너졌다. 이 ‘거리’는 검을 휘두르기에는 간격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유진의 양손에 신화가 휘감겼다. 그리고 멸망이 나타났다. 놈은 아까보다 더욱 예리하고 치명적인 위치에서 월광검을 휘둘렀다.
“내가.”
신화을 휘감은 주먹이 움직였다. 목을 노리던 월광검의 참격이 유진의 왼팔에 가로막혔다. 불길한 마력은 신화를 소멸시키고서 유진의 팔뚝을 파고들었다.
월광검이 팔을 파고드는 순간. 주먹을 쥔 오른손이 멸망의 뺨에 처박혔다. 꽈앙!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과 함께 멸망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미리 알아버리잖아……!”
유진은 뻐근한 주먹을 털면서 내뱉었다. 왼팔. 뼈까지는 잘리지 않았지만 제법 깊이 베였고, 흐르는 피는 뜻대로 멎지 않았다. 멸망의 마력이니 바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
[팔이 잘렸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네가 붙여줬겠지.”
[바로 붙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도…….]
“그래서 잘리기 전에 때렸잖아.”
주먹이 처박히는 순간. 완벽하게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감촉이 덜했다. 몸을 덮은 저 색이 충격을 흩트린 모양이다.
유진은 쯧 혀를 차면서 손을 펼쳤다. 주먹으로 두들겨 패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들인 노고에 비해 결과가 영 좋지 않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 마력에 언제까지고 저항할 수 없는 노릇. 전투가 길어지면 이쪽이 먼저 마모되어 쓰러질 터. 유진은 뒤를 힐긋 보았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과 마력의 덩어리를 썰어대는 모론과, 그렇게 열린 길에 마법을 퍼붓는 세냐가 보였다. 하지만 고화력의 마법이 연거푸 처박히는데도 심장에는 이렇다 할 흠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저것은 수천, 아니, 그 몇 배는 족히 될 시간 동안 멸망의 심장으로 있던 것이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쌓인 마력은 고스란히 심장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너도 성장하고 있지.’
멸망이 바닥을 양손으로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표정 없는 얼굴. 주먹을 처박은 뺨에는 붓기도 없고 피도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공격이 다음, 다음, 다음으로 갈수록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상대할 수 있다. 놈은 베르무트의 오성과 경험만으로 싸우고 있다.
그렇다면 놈이 성장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몰아치면 된다.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서 공격하면 된다. 유진은 프로미넌스로 이그니션을 준비하면서 몸을 낮췄다.
“4명.”
아까 마저 하지 못했던 말. 지금 멸망과 싸우는 것은 유진과 성녀들뿐만이 아니다. 멸망의 공격 도중, 손끝의 미세한 떨림을 보았다. 전투에 영향을 주는 순간은 아니었지만, 멸망의 움직임에는 놈이 의도하지 않은 것만 같은 떨림이 있었다.
‘베르무트.’
그 병신 머저리 자식이 드디어 유진과 동료들의 말을 알아먹은 모양이다. 오늘 여기서 죽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멸망의 분신이니 떠들지 말고, 자신을 혐오하고 부정하지 말라고 했다. 함께 싸우자고 했다. 얌전히 휘둘리지 말고 발악하라고 했다.
멸망의 떨림은 베르무트가 발악하고 있다는 증거다. 저 안에는 베르무트가 있다.
‘보인다.’
이미 몇 번 보았던 것. 전처럼 직감에 의존하지 않았다. 유진은 즉시 자리를 떠나서 신화를 일으켰다. 두 자루의 신검이 양손에 나타났다.
폭발적인 성장 속도를 웃돌아야 한다. 오성과 경험만으로 대응이 버거울 정도의 난격을 퍼부어야 한다.
짧은 순간, 유진의 기억은 머나먼 과거를 보았다. 베르무트와 벌였던 몇 번의 결투. 그중에서도 베르무트가 가장 상대하기 버거워했던, 몇 번인가 승기에 근접했던 공격은-
“수라광살.”
두 자루의 신검이 참격의 난무를 일으켰다.
빌어먹을 환생 606화
초고속으로 휘두르는 검은 오히려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두 자루의 신검은 찰나에 수십, 수백 번 움직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참격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베고 그어서 만든 참격은 휘두른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신검이 뿜어낸 불꽃이 참격을 확실한 형상으로 남겼다. 그렇기에 마냥 피할 수는 없다. 직접 깨부수지 않는 이상 불꽃은 번지고 커지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월광검은 움직였다. 더해 넣은 마력이 창백하고 불길한 달빛을 내뿜었다. 직접 휘두른 검기(劍技)는 유진에게는 익숙했다. 그는 생애 꽤 많은 패배를 겪었고, 그 패배의 대부분은 베르무트에게 당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유진은, 하멜은, 자신이 ‘왜’ 졌는지에 대해 항상 복기했다.
베르무트가 어떻게 나를 패배시킨 것인지. 놈의 검기가 얼마나 예리하고 드높았는지. 어느 시점에서 흐름의 맥이 끊기고 패배로 치달았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리고서 전투를 그려왔다. 비교적 최근에는 실제로 겪어본 적도 있다. 하우리아에서 싸웠던 망령은, 베르무트의 기억을 받아 놈의 검기를 다뤘었다.
난무는 멈추지 않았다. 유진은 호흡까지 멈추고서 모든 힘을 검에 쏟아부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불꽃이 멸망을 압박했다. 놈은 물러서지 않고 월광검을 앞세워 정면 돌파에 나섰다. 오직 검만을 휘두르는 것을 고집하지 않았다. 검을 쥐지 않은 왼손에 두른 마력이 참격을 짓눌러 소멸시키고 있다.
‘개새끼.’
수라광살을 이어가는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기억하는 마지막 대련에서 베르무트가 저렇게 했다. 물론 그때 베르무트는 월광검이 아닌 다른 검을 쥐었고, 왼손에도 마력 대신에 백염식의 불꽃을 둘렀지만, 그 정도의 차이를 제외하면 지금 멸망의 대응은 베르무트와 똑같다.
‘짜증 나게 흉내 내고 앉았어.’
흉내.
결국 그 정도다. 단순 힘이나 속도 같은 것은 옛날의 베르무트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멸망이 베르무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힘이 강하고 속도가 빠를지라도, 그것을 어찌 조합하고 다루느냐가 중요한 법이다. 조건반사에 지나지 않을 대응만 해대는 것을 강하다고 할 수 있나?
이 단순하고 무식한 공세를 파훼하고 발라먹는 것이 무어가 어렵단 말인가?
그래서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베르무트의 육체를 그릇으로 삼고, 놈의 경험과 사고를 끌어다 쓴 것은 멸망의 실책이다. 저것은 결국 인간의 육체이기에 전투법이 제한된다. 심지어 그 제한된 전투법이 유진에게는 익숙하다.
그리고 유진은 이러한 대인전에 통달해있다. 베르무트 본인이 와서 직접 판단하고 싸워도 지금의 유진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터인데, 지금의 멸망은 베르무트 본인의 대응보다 열등하다. 성장? 받아먹어 성장할 수 있게끔 싸워준다면, 그래, 꽤 고생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성장할 시간 따위 주지 않는다. 후욱. 호흡을 내쉬고 삼켰다. 심장이 뻐근했다. 끓는 피가 가속했다. 시야가 활짝 열렸다. 두 자루의 신검의 불꽃이 격렬히 타올랐다.
벤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다. 강렬한 의지가 기적이 되어 검에 깃들었다.
그때부터 멸망은 참격을 쫓지 못했다. 월광검은 연달아 꽂힌 참격에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려났고, 왼손은 더 이상 불꽃을 억누르지 못했다.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던 것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조금씩, 조금씩. 멸망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밀려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면 깊이 베인다. 제자리에 있어도 깊이 베인다. 그렇다기에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러서면 베이지 않는가? 그것도 아니다. 참격은 집요하게 쫓는다. 최적의 대응을 선택해도 마력과 색이 깎여 나간다.
어느 순간부터 멸망은 월광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했다. 바짝 몸에 붙여서 방어 일변도로 돌렸다. 그렇지만 부족했다. 막고 싶었지만 전부 다 막을 수가 없었다.
푸확! 사방에서 스친 참격에 마력이 피처럼 터졌다. 그 직후 두 개의 신검이 동시에 정면에 꽂혔다. 방어로 세웠던 월광검은 그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검은 들지 마라.”
참격 사이로 속삭여주었다. 멸망은 그 말 자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것을 상대로 ‘검’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베르무트의 사고로 이해했다. 검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충분히 성장할지라도 검은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멸망은 급히 마력을 일으켰다.
“하지 마.”
다시 속삭여 주었다. 꽈직! 처박은 참격이 마력을 터트렸다. 어지럽게 얽히던 색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유진은 따로 움직이던 양손을 하나로 모았다. 두 자루의 신검이 하나의 대검이 되었다.
머리 위로 들어서, 아래로 그었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거미줄처럼 얽혀있던 불꽃들이 모조리 신검과 연결되었다. 빠져나갈 틈 없는 참격의 우리가 멸망을 옭았다.
화르륵! 마력과 색이 불꽃에 깎여 나간다. 그만큼 신력은 마모되어가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았다. 신력이 마모되는 것보다 마력과 색을 깎는 것이 더 빨랐다. 이 흉흉한 멸망의 뱃속에서도 승리를 바라는 세상의 기도를 들었다. 그렇기에 신력의 바닥은 한참이나 멀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수가 없다. 집요한 불꽃이 색을 붙들고 늘어져 놔주지 않고 있다. 아니,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단순하게 육체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있다. 근육이 멋대로 경직되고, 관절이 뻣뻣하다.
‘내놔.’
머릿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내 몸이다.’
그릇의 목소리. 오래전에 입은 상처에서 멋대로 떨어져 나간 분신.
‘나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
그 이름은 알고 있다. 최초에 멸망은 저런 이름을 가진 인간이었다. 이제 와서는 저 이름에 대한 자각도 감상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갖는다.’
뚜둑, 뚜두둑. 잘 움직이지 않던 팔이 이제는 다른 의지로 움직였다. 정면에서의 공격을 막기 위해 두었던 것이 멋대로 위로 들렸다. 그렇게 방어가 열려 버렸다. 빠직! 기다렸다는 듯이 처박힌 검에 멸망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베르무트.’
유진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방금 멸망의 움직임은 분명히 이상했다. 떨림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게 유진을 위해 움직였다.
ㅡ베르무트다. 놈의 저항과 발악이 멸망에게 확실한 영향을 준 것이다. 유진은 씩 웃으며 신검을 뒤로 끌었다.
공검의 중첩이 신검을 덮었다.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멸망은 본능적으로 저 검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미처 떨쳐내지 못한 불꽃이 아직 몸을 붙들고 있다. 이동을…… 멸망의 시선이 움직였다. 뒤늦게 깨달았다. 이동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불꽃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이동할 수 없다. 베르무트다. 그가 자신의 몸이 사라져서 나타나지 못하게끔 단단히 붙잡고 있다.
“하멜.”
억지로 열린 입술 사이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유진은 베르무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그래.”
공검이 멸망의 몸에 가까이 갔다. 콰르르르! 쏟아져나온 마력과 색이 불꽃과 함께 산화했다. 밀어내지는 못했다.
공검은 가로막는 색을 모조리 불사르면서 점점 멸망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공검의 불꽃이 멸망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콰르르르! 허무가 뒤흔들렸다. 격렬히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멸망이 허우적댔다. 불꽃 속에서 색과 마력은 계속해서 쏟아져나왔지만, 그 즉시 재가 되어 사라질 뿐이었다. 유진은 숨을 몰아쉬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주먹을 쥐자 불꽃이 크게 폭발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진은 계속해서 이클립스를 터트렸고, 그때마다 멸망이 크게 비틀거렸다.
뒤편에서 끊이지 않고 울리는 폭발음. 하지만 세냐에게 뒤를 돌아볼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좀처럼 거리를 허락하지 않는 심장을 공격하는 것만으로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몇 번이나 심장에 마법을 처박았지만, 간신히 내부로 파고든 마법은 원하는 만큼의 파괴를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반응이 오고 있다.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에 불규칙한 삐걱거림이 섞였고, 쏟아져 나오는 마력과 색도 처음만큼 반발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론도 심장에 근접했다. 괴성과 함께 휘두르는 도끼는 마치 나무를 베듯이 심장의 표면에 처박혔다.
쿵, 쿵, 쿵. 연이어 찍어대는 도끼질에 심장이 푸들거리며 떨리고 마력과 색이 피처럼 쏟아졌다.
[지금이다.]
등 뒤의 폭발음이 전보다 크게 울렸을 때. 메리를 통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지만 세냐는 당황하지 않았다.
세계수가 된 고대의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 세냐는 이곳에 없는 현자의 손이 자신과 닿는 것을 느꼈다.
무엇이 지금이란 말인가? 세냐의 눈동자에 환한 빛이 어렸다. 무한하게 확장된 의식이 눈으로 보지 않은 것들마저 이해하게 만들었다.
베르무트가 거세게 저항하고 있다. 멸망은 더 이상 자신에게서 떨어져나온 분신을 통제할 수 없다.
유진이 연이어 터트리는 신화는 베르무트에게 깃든 멸망을 소각하고 있고, 그 모든 것이 심장에 직접적인 부담이 되었다. 마력이, 색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세냐는 자신의 마법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길게 뻗은 메리가 심장을 겨누었다.
[이곳야말로 염원의 종착인가.]
메리를 통해 현자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멸망의 끝을 보겠노라는 염원이 드디어 오늘에 이르렀다.
머나먼 대수림에서 세계수의 힘이 메리로 흘러들어왔다. 화아악! 메리의 넝쿨이 마치 활처럼 펼쳐졌다.
세냐는 넝쿨 사이에 영력의 현을 걸었다. 파직! 메리를 통해 넘어온 세계수의 정령들이 하나로 모였고, 세냐의 영력은 그들을 감싸 화살을 만들었다.
모론은 등골이 찌릿할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세냐가 그랬듯, 모론도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크아아아!”
괴성과 함께 도끼가 높이 들렸다. 커다래지지는 않았지만, 심장까지 길을 열었을 때와 같은 힘이 도끼에 집중되었다.
콰르르르! 날카로운 마력과 색이 쏟아졌다. 하지만 모론은 도끼를 휘둘러서 공격을 치우지 않았다.
모론은 여전히 도끼를 높이 들고서,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아직 도끼를 휘두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위를 놓았다. 녹색의 빛이 허무를 관통하고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모론은 드디어 도끼를 내리찍었다.
반발하는 색과 마력은 우직하게 찍어누르는 도끼의 힘에 모조리 아래로 처박혔다. 꽈지직! 도끼는 심장의 외벽에 커다란 상처를 만들고 박살 났다.
그 상처에 화살이 처박혔다. 영력과 함께 해방된 세계수의 정령들이 심장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하하하! 현자의 웃음소리가 정령들을 이끌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두근거리는 소리가 찢어지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아아아아아!”
진짜 비명도 함께 터져 나왔다. 아직까지 이클립스의 폭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멸망이 머리를 붙잡고서 바닥을 굴렀다.
목소리는 베르무트의 것이지만,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은 베르무트가 아니었다. 저 육체를 차지한 멸망이 고통에 반응하는 것뿐이었다.
그럴지라도 베르무트의 목소리로, 놈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비명을 듣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진은 멸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놈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비명을 질러대는 주제에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희미하게나마 잡히는 초점. 탁하고 색이 바랬지만, 그럼에도 눈동자 깊은 곳에는 불꽃이 있었다.
“그래.”
유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을 불사르던 신화가 완전히 걷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멸망이 펄쩍 뛰어올랐다. 놈은 유진을 공격하지 않고, 여전히 터질 듯이 부풀어 있던 심장을 향해 이동했다.
세냐는 당연히 요격하려고 했지만, 움찔 놀라서 마법을 거두었다. 모론도 더 도끼를 휘두르지 않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유진에게서 보내라는 뜻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수라고 생각한다.”
멀찍이서 전투를 지켜보던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멸망의 본능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만큼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에게도 중하다는 것이지.”
“그러겠지.”
“네가 계속해서 공격했다면, 멸망의 마왕이라도 우습게 여길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베르무트를 죽였다면 말이지.”
돌아온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너는…… 베르무트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겠지. 하지만 그것은 결국 가능성일 뿐. 베르무트가 아무리 바라여도, 저렇게 삼켜진 이상 더는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의 손가락이 심장을 가리켰다. 그곳에 도달한 베르무트의 육체가, 심장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글쎄.”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심장을 노려보았다. 터질 듯 부풀었던 심장의 형태가 변모하고 있었다.
쏟아져나오는 마력이 색을 두르고 바닥을 짚었다. 뚜둑, 뚜두둑. 심장에서 뽑혀 나온 살점과 뼈가 흉측한 손발이 되었다.
“봐라, 하멜.”
유폐의 마왕이 탄식했다.
“저 괴물을 죽일 자신이 있나?”
심장을 중심으로 삼은 괴물이 머리를 들었다.
빌어먹을 환생 607화
유진은 자연스럽게 저것과 닮은 짐승이나 몬스터를 떠올려보았다.
거대한 몸, 크게 벌어진 입에서 보이는 촘촘하고 날카로운 이빨. 불규칙하게 돋아나 바닥을 짚은 팔다리. 손톱과 발톱은 갈고리처럼 휜 것도 있고, 칼처럼 길게 튀어나온 것도 있다. 등에도 제멋대로 돋아난 날개와 팔다리가 붙어 있다.
없다. 하나하나 뜯어놓고 보면 닮은 것을 찾을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 연상할 만한 짐승이나 몬스터는 없었다. 저것은 제멋대로 생긴 괴물일 뿐이었지만, 키메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서로 다른 것을 억지로 연결한 것이 아니다. 저 자체가 하나의 생물이다. 불길하고 끔찍한 마력 그대로 형상화한 괴물. 유진은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여태까지 유진이 상대했던 마왕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들은 대부분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저것은 그런 모습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에 유진은 저것에서 진하게 ‘마왕’이라는 이름을 느꼈다.
‘낭비가 없는…… 효율적인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해 온 존재. 그에 마땅한 불길하고 사악한 마력이 저 괴물에게서 가득 느껴진다. 이곳은 멸망의 뱃속이지만, 저것이야말로 멸망의 본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진은 땀에 찬 손을 움켜쥐면서 확신했다.
저것을 완전히 죽인다는 것은 멸망의 마왕을 죽인다는 뜻.
“재 뿌리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도움이 될 생각은 없냐?”
“도움?”
유폐의 마왕은 너덜거리는 양손을 들어 보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가 올 때까지 목숨을 불사르며 멸망을 붙잡아주었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한가?”
“어차피 죽을 목숨을 태운 것뿐이잖아.”
“하하…… 죽음을 바라기는 한다만, 대놓고 그리 말하는 것은 참으로 뻔뻔하군.”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흔들며 헛웃음을 흘렸다.
“애석하게도 나는 저것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내 마력은 진즉에 고갈되어서, 더 이상 끌어낼 것도 남아 있지 않으니.”
“전투에 도움이 되라는 것이 아니야.”
물끄러미 향해 온 시선에 유폐의 마왕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하하!”
곧 유페의 마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아까처럼 허망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진심으로 놀람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웃음을 이었다.
“과연, 유진 라이언하트.”
유진은 더 이상 유폐의 마왕을 보지 않고서 고개를 돌렸다. 저 웃음에 섞인 감정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유폐의 마왕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기도 했다. 머리를 든 괴물의 거대한 입이 이쪽을 향해 쩍 벌어졌기 때문이다.
“너는 대단한 욕심쟁이로구나.”
등 뒤의 중얼거림. 웃음에 섞인 감정보다 확실한 대답. 유진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화륵! 거대한 신검이 나타났다.
유폐의 마왕은 잘 움직이지 않는 발을 천천히 뒤로 끌었다. 어차피 죽음을 바라는 몸. 가능하다면 이 전투의 마지막을 보고서 죽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지막을 보지 못할지라도, ‘미래’를 위해 최후를 바치는 것도 좋지 않은가 생각했다.
마력은 고갈되었다. 싸울 수 없다. 그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길고 긴 세월을 살아온 대마왕의 영혼은 완전히 저물기 전에 한순간이나마 멸망의 마력을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래야 한다면.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멸망에게 산화할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죽어버리면 훌륭한 자기만족은 가질 수 있겠지만, 유진의 욕심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기적을 만들고 싶은가.”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기적? 스스로 읊조린 말에 다시금 웃음이 나왔다. 기적이라니, 그 단어부터가 새삼스럽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가 유진 라이언하트가 만든 기적이다. 유폐의 마왕이 최후까지 관측해야 할 것은, 과연 이 모든 기적이 신화로 완성될 수 있느냐다.
‘느껴져.’
빠르게 뛰는 심장이 뻐근하다. 달아오른 피의 흐름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감각이 열렸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려 괴물을 노려보았다.
도시를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대한 아가리가 쩍 열려 있다. 하지만 저렇게 크게 벌리고 있는데도 입의 안쪽은 들여볼 수가 없었다. 저곳에 존재하는 것은 꿰뚫어 수 없는 시커먼 어둠뿐. 멸망의 마력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피가 알고 있어.’
끓는 마력이 넘실거리며 새어 나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빨이 마력에 덮였다. 곁으로 다가온 세냐와 모론에게서 긴장을 느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기도를 잊고서 괴물에게 압도되었다.
‘베르무트.’
300년이 지나도 엷어지지 않은 라이언하트의 피. 이 육체는 베르무트의 후예. 마력은 띄지 않지만, 라이언하트의 피는 멸망의 마왕에게서 비롯된 것. 그렇기에 유진은 지금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끓는 피로서 알 수 있었다.
괴물의 중심에 있는 심장. 그 안에 베르무트가 있다. 놈은 심장에 빨려 들어갔지만 의식은 잃지 않았다. 막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베르무트를 보내주었다. 베르무트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놈은 절망에서 벗어났다. 멸망과 함께 죽겠다며 생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유진과 동료들이 바랐던 것처럼, 멸망의 분신이 아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로서 함께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베르무트는, 저 끔찍하고 불길한 마력의 중심에서 자신을 깨우치고 저항하고 있다.
“진작 그랬어야지.”
쩍 벌어진 거대한 아가리 앞에서도 유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흘러넘친 마력이 일점으로 모이고 있지만, 유진의 눈은 똑바로 그 중심을 보았다. 들여다볼 수 없는 어둠. 하지만 지금은 그 중심에서 자그마한 불씨가 보였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작은 불씨를.
ㅡ꽈아아앙! 일점에 모인 마력이 쏘아졌다. 순식간에 날아드는 마력은 마치 드래곤 수천 마리가 동시에 브레스를 쏴 갈긴 것 같았다. 아니, 그조차도 우습게 여길 만큼의 힘이다. 더 이상 불씨를 응시할 수는 없었다. 유진은 숨을 삼키면서 신검을 움켜쥐었다.
“빛.”
나지막한 속삭임. 머나먼 바다에 앉은 빛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만을 바라며 쌓아 온 모든 신력이 유진에게 연결되었다. 그것은 유진의 정신마저 뒤흔들 정도로 거대했으나, 두 성녀의 기도는 이 끝없는 힘을 보다 유연히 다룰 수 있게 해주었다.
신검에 레바테인이 깃들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빛과 함께 거대하게 부풀었다.
콰르르르! 신검이 마력을 양단했지만, 베어낸 마력을 모조리 불사르지는 못했다. 타지 않고 남은 마력이 다시 괴물에게 환원되었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아. 알고 있지?”
세냐가 빠르게 내뱉었다. 유진은 쥐었던 신검을 모론에게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곳은 호흡만으로도 치명적이야.”
그렇다고 밖에 나간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내부에서 공격하기에 심장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못 견디겠다고 밖으로 나가 버린다면- 심장까지 도달하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마왕과의 싸움은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죽기 전에 먼저 죽이면 된다.”
모론은 손에 쥔 신검을 도끼로 바꾸면서 내뱉었다.
-쿠웅! 괴물이 무수히 많은 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이쪽을 향해 전진했다. 유진은 각자 움직이는 지네 같은 팔다리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모론, 너는 저 새끼 팔다리 잘라라. 가능하면 몸통도 썰어보고.”
“음.”
“세냐, 너는 저 새끼 등을 노려. 마력 돌려막지 못하게 방해하고.”
“말은 쉽지.”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론과는 달리 세냐는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말만 그렇게 할 뿐, 세냐는 즉시 높이 날아올랐다.
“하멜, 너는?”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몸을 낮추던 모론이 물었다. 유진은 양손에 신검을 하나씩 쥐면서 대답했다.
“저 아가리부터 찢어버리게.”
세냐가 말한 것처럼, 내뱉은 것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란 자각은 있다.
저 거대한 괴물에게서는 유폐의 마왕 이상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유폐의 마왕에게서 승리했기에 유진은 멸망의 마왕에게 압도되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압도되지 않았을 뿐. 저 힘마저 얕잡아 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런 사실은 유진만 아니라 모론도, 세냐도,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주저하지 않고 괴물에게 전진했다. 더는 물러설 곳은 없다. 저것만 쓰러트리면 된다. 그것은 멸망에 맞서는 이유로서 충분히도 차고 넘쳤다.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죽은 사람들에 버금갈 정도의 누르가 쓰러졌지만 전황에 큰 영향은 없었다. 놈들에게는 오직 인해전술만이 존재했고, 사기란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막아라!”
하늘에 뜬 거대한 문 앞에서 로베리안이 고함을 내질렀다. 활짝 열린 판테온은 이미 내장하고 있던 모든 소환수를 쏟아냈지만, 전선은 점점 밀리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정말로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누르가 기어코 신군의 전열을 침식해 버린다면. 이곳 전선에 최전선이니 후방이니 하는 것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해버린다면. 그때는 마구잡이의 학살이 시작될 것이다.
‘막는다……. 언제까지?’
로베리안은 숨을 몰아쉬며 전선을 노려보았다.
역사에 다시는 없을 만큼의 대군이 이곳에 모여 있다. 상대는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마지막 마왕이자, 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시켜 온 마왕이다. 이곳에 모인 군대는 역사에, 전설에, 신화에 이름을 남기고자 온 자들이다. 세상을 구한다는 찬란한 대의에 매료된 자들이다.
아직은- 그들의 눈에 믿음이 있다. 하늘에 뜬 신력의 태양이 찬란하고 밝기에, 신군은 공포를 느끼지 않고 있다. 바로 곁에서 아군이 죽어도, 정체 모를 괴물의 이빨과 발톱이 자신에게 꽂혀도. 모두가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진군을 외치고 있다.
애당초 물러서려 해도 물러설 수가 없다. 그 자세한 내막은 신군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멸망의 마왕’을 목도한 전원이 본능적으로 알았다.
멸망을 쓰러트리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파이어펀치!”
오메가 포스로 거인이 된 멜키스가 주먹을 휘저으며 날뛰었다.
현재하는 멸망에 맞서 세상을 구하는 대정령사! 멜키스는 그 영광에 흠뻑 빠졌다. 발자크 루드베스는 흑마법사이면서 마왕을 배신하고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으로 전설이 되었지만, 멜키스는 오늘 자신이 쌓을 위명이야말로 드높은 전설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이곳이야말로 신화의 중심. 오늘 살아남는다면 그녀는 영원불멸 전설의 대정령사가 될 것이다. 미래영겁 멜키스 엘하이어 이상의 정령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썬더볼트킥!”
누르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끝없이 쏟아져나와 멜키스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은 하우리아 때도 겪어보았다. 막강한 화력을 앞세우는 멜키스에게 있어서 누르는 불꽃에 뛰어드는 불나방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불나방도 이만큼 날아들면 결국은 불을 꺼트리기 마련.
멜키스는 초조함을 느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마력의 산화가 거슬려……!’
달라붙은 누르는 불태우거나, 지지거나, 으깨거나,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그 과정에서 흩어지는 마력이 멜키스의 마나를 불사르고 정령과의 공명을 어지럽혔다. 당장이야 버틸 수 있지만, 계속된다면 오메가 포스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독이야.’
죽은 누르가 쏟아내는 마력. 그것들이 독이 되어 퍼지고 있다. 시체가 늘어날수록 독기가 강해질 것이다. 멜키스는 하늘을 힐긋 올려보았다.
‘지상에서 멀어진다면 독기를 피할 수 있을까?’
ㅡ콰아아아! 태양 근처를 날고 있는 라이미르아와 배틀쉽이 브레스와 포격을 퍼붓는 것이 보였다. 라파엘로가 이끄는 비행병대는 누르를 상대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멜키스는 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가야 할 곳은 하늘이 아닌 앞이다. 이 흉측한 괴물들을 쏟아내는 모체. 멸망의 마왕. 움직이지 않고 멈춘, 저 뭔지 모를 색의 덩어리를 공격한다면…….
생각은 했지만 실현은 쉽지 않다. 세상을 위한다는 달콤한 명분으로 이곳에 왔지만, 진짜로 세상을 멸망시켜 온 마왕에게 직접 덤빈다는 것은 어지간한 각오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응?”
그런데도 불굴하여 나아가기 위한 각오를 다지려 할 때. 멜키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빼곡한 누르의 머리 위. 그곳에서 연달아 나타나는 어둠. 암전의 마안의 권능이다. 시엘이 마안을 연속으로 사용하여 멸망의 마왕에게 접근하고 있다.
“안 돼!”
어둠을 건너 이동하는 것은 시엘 뿐만이 아니다. 카르멘을 필두로 한 라이언하트의 정예가 멸망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
“나도 같이 가!”
멜키스는 비명과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누르를 밟으면서 달렸다.
“피.”
선두에 선 카르멘은 가슴을 움켜쥐며 멸망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사악에서 태어난 이 피가 정의를 원한다.”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멸망을 목전에 둔 모든 라이언하트가 카르멘과 똑같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저 안에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다.
그리고 라이언하트의 시조,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있다.
카르멘의 헤븐제노사이드에 불꽃이 휘감겼다. 이 일권은 멸망의 마왕에게 결코 치명상은 입힐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제대로 된 공격조차 안 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카르멘은 멸망에게 주먹을 던졌다.
뒤엉킨 색의 안까지 울리도록 멸망을 두드렸다.
빌어먹을 환생 608화
“갑자기?”
백룡기사단을 이끌던 알체스터가 당황하여 멸망의 마왕 쪽을 보았다. 카르멘이 내지른 일격은 멸망의 마왕에게 닿고 소멸했지만, 뒤엉킨 색에 아주 조그마한 파장을 만들어냈다.
‘닿았다?’
그 광경에 알체스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저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불길하며 흉악스럽게 강한지를 보았던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다. 갑작스레 강림한 멸망의 마왕은 멜키스 엘하이어의 오메가 포스를 즉시 소멸시켰고, 수백 명에 달하는 성직자의 산화에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었다.
하지만 보라. 지금 카르멘의 일격은 확실하게 멸망의 마왕에게 닿았다. 저 기괴한 색의 얽힘에 아주 작은 파장을 만들었다.
이 일주일 사이에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보다 더 강해진 것일 수도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성이 강해지면서, 그에게 서임 받은 성기사들에게도 힘이 전해진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지금’의 멸망의 마왕은 불완전하다. 적어도 일주일 전 강림했을 때보다는 말이다.
알체스터는 어찌하여 그런 것인지를 이해했다. 멸망의 마왕의 안으로 직접 들어간 영웅들. 그들이 분전하고 있기에 멸망의 마왕은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바깥의 공격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불완전해진 것이다.
“단장님!”
상황을 눈치챈 부관이 외쳤다.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꼽을 때 항상 이름을 올리는 백룡 기사단이지만, 끝없이 쏟아지는 데다가 죽여도 죽여도 주저하지 않는 괴물의 군세를 상대로는 전선을 유지하는 것조차 벅차다.
* * *
조금씩이나마 전선을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백룡 기사단의 선두에 알체스터가 있기 때문이다.
알체스터가 이곳을 이탈한다면 즉시 전황이 바뀔 것이다.
하지만 백룡 기사단 전원이 두려움을 모르는 눈으로 알체스터의 등을 떠밀었다. 알체스터가 제아무리 초인이라 할지라도 줄지 않는 군세에게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다 보면 지치기 마련. 그렇다면 아직 힘이 건재할 때 괴물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멸망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승리를 위한 일일 것이다.
비록 그사이에 자기 자신이, 많은 동료가 죽게 될지라도.
알체스터는 자신에게 향하는 부하들의 눈에서 결사의 각오를 느꼈다.
백룡 기사단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 전장의 모두가 결사의 각오를 품고 있다.
찬란히 빛나는 용사의 이름.
수백 년을 뛰어넘어 환생하고, 기어코 신좌에 오른 남자.
유진 라이언하트란 이름과, 300년 전의 영웅담을 듣고 자란 모든 이가 이곳에 있다.
그들은 먼 과거 자신들을 패배시켰던 유폐의 마왕을 기어코 쓰러트렸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도 맞서지 못한 멸망의 마왕에게 도전하고 있다.
이 전장의 모두가 그 신화에 매료되었다. 신화의 완성을 보고 싶고, 완성에 힘을 보태고 싶다.
“그래.”
알체스터도 마찬가지다.
키옐 황가를 섬기는 기사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기사로서의 삶을 황가를 위해 바치리라고 오래전 맹세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갈망했었다.
유진을 만나고, 유진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몇 번이나.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듣기 전부터 알체스터의 가슴에는 불꽃이 일렁였다.
저 젊은 용사에게 검을 바치고 싶다는 열망.
함께 마왕과 싸우고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열망.
기사가 아닌, 알체스터 드라고닉이란 남자는 언제나 그렇게 갈망했다.
지금이야말로 열망에 몸을 불사를 때다. 알체스터는 땅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다.
푸확! 거대하게 부푼 공검이 누르들의 목을 단번에 양단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검강 아래에서 수십 개의 목과 거무죽죽한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알체스터는 절단한 머리를 밟고서 다시금 앞으로 도약했다.
“알체스터 꼬마.”
카르멘이 힐긋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녀는 피범벅에 너덜거리는 손을 쥐었다 펴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라이언하트에 흐르는 피의 업을 청산하는 곳이다. 외인인 네가 굳이 도울 필요는 없다.”
“저는 유진 님에게 직접 검을 가르쳤습니다.”
알체스터는 똑같이 웃으며 화답했다.
“다른 것은 가르쳤다고 자신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가문의 비기인 공검만큼은 저에 의해 유진 님께 이어진 것입니다. 비록 제게 라이언하트의 피는 흐르지 않지만- 유진 님을 위해, 이곳에 서는 것에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네 아들이 아직 어릴 텐데.”
“꼬마라 불렸던 제가 아들을 둘 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자랑스러운 아비가 되지 못한다면, 제 아들은 어른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의 불길함을 느꼈다.
침묵하는 멸망의 마왕은 공격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카르멘의 팔이 너덜거리는 것은, 멸망을 때리면서 역류한 마력에 당한 것이다.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멸망의 마력은 건재하고, 반발력만으로도 몸을 상하게 한다.
“흠, 멋을 부릴 때가 아닌가.”
카르멘은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언제나처럼 불은 붙이지 않았지만, 흐르는 피에 젖은 시가는 피의 비린 맛과 젖은 담뱃잎의 퀴퀴한 맛이 났다.
“도와다오.”
고개를 돌려 멸망의 마왕을 보았다.
-콰르르릉! 길레이드와 길포드, 기온이 함께 휘두른 검이 멸망의 색을 깎아냈다. 하지만 일격만으로 둘의 불꽃은 흐트러지고 입에서는 피가 뿜어졌다.
“지금의 세상을 있게 한 영웅들이 저곳에 계신다.”
피범벅의 손을 쥐어 주먹을 만들었다.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님도 저곳에 계신다.”
입을 열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알체스터의 검에서 거대한 공검이 치솟았다. 카르멘은 말없이 자신을 지나쳐서 멸망의 마왕에게 돌진하는 알체스터의 뒷모습을 힐긋 보며 웃음을 흘렸다.
“꼬마가 많이 컸군.”
카르멘은 먼 과거, 코흘리개에 목검을 휘두르던 알체스터를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
그 꼬마가 일국의 기사단장이 되고, 아들을 둘 만큼의 시간. 그 시간을 준 영웅들이 저 안에 있다. 먼 과거 그랬듯, 세상에 미래를 주기 위해 싸우고 있다.
언제까지 그들에게만 기댈 수는 없다. 카르멘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열망과 결의는 모두가 같은가. 전장을 넘어 이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300년 전 과거의 영웅들이 아닌, 지금 시대를 살던 이들. 후대에 영웅이라 불리기에 충분할 초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 터.”
“그럴 것입니다.”
길레이드는 입가의 피를 닦으면서 카르멘의 곁으로 다가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검이 파고드는 순간에- 피가 끌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빛도.”
기온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여기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카르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조님과…… 동료들은 절대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 또한 그리 바랍니다.”
“평생을 고생만 하셨는데, 다들 살아서 행복해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온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며 피를 토해내는 길포드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둘째 형님은 행복이 너무 과하셨습니다. 검 한 번 휘두르고 그 모양이시라니…….”
“나는…… 나는 은퇴했단 말이다…….”
“아무리 방계로 나가셨다고 해도 한창일 나이에 은퇴라니. 행복에 겨워 검을 게을리하신 핑계 아닙니까?”
“그래도 가문을 위해 진즉에 놓은 검을 쥐고 사지에 온 내게 너무 각박하구나……!”
길포드는 억울하고 서러워서 토로했다. 카르멘은 휘청거리는 길포드의 등을 철썩 후려치고서 앞으로 나섰다.
“떠들 여유가 있다면 다시 백염식을 일으켜라.”
찢어지는 기합과 함께 불꽃과 번개와 폭풍과 지진을 동반한 공격이 멸망의 마왕을 덮쳤다. 카르멘은 거세게 흔들리는 색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대의를 위해 도움을 받지만, 저 안에 계시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시조님이시다. 그리고 라이언하트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후예 유진 라이언하트도 있다. 또, 그 유진과 사실혼이라 할 수 있는 세냐님과 크리스티나 성녀도 계시지.”
“사돈어른의 큰 조상님도 계십니다.”
“그렇다. 모두가 라이언하트의 혈족인 것이다.”
카르멘은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먹을 들었다.
이 전투는 세상을 위한 것도 맞지만, 라이언하트와 혈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카르멘은 300년 동안 고통받으신 시조님을 생각했다. 그분께서 최후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그 순간에 라이언하트가 아닌, 저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자의 우짖는 소리를 가장 가까이 들으신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죄스러웠다. 카르멘은 고통을 떨치고서 주먹을 휘둘렀다.
울림을 느꼈다. 땅을 뒤흔들 정도로 거세지는 않지만, 유진의 감각은 잔잔한 울림을 확실하게 느꼈다.
처음에는 베르무트인가 싶었다. 심장과 함께 저 괴물의 안에 있는 베르무트가 저항하며, 이곳을 가득 채운 허무가 흔들리는 것일까 생각했다.
조금 지나서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울림은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밖에서 전해져 온 것이다.
“썩을.”
유진은 자빠진 몸을 일으키며 욕설을 내뱉었다. 땅을 짚으면서 일어서려고 했는데- 선 순간에 몸이 휘청거렸다.
간단한 이유였다. 왼쪽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잘 피했다 싶었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잘 피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유진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통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다리를 살피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하멜!]
[유, 유진 님, 다리가……!]
“호들갑 떨지 마.”
유진은 하나 남은 다리로 껑충 뛰면서 말했다.
“팔이 잘렸다면 곤란하겠지만, 다리는 사실 괜찮잖아. 내가 발길질하는 것도 아니고, 이동이야 날아다니면 돼.”
냉정하게 판단해서 그렇게 답을 내렸다. 다리가 잘린 것은 지금 전투에서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잘린 다리는 당장 재생할 수 없지만, 전부 다 끝나고 요양하는 동안에 멀쩡히 재생할 것이다. 다행히 고통도 느껴지지 않고, 피도 흐르지 않는다. 상처를 통해서 마력이 역류하지도 않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다행히도 다리는 아주 깔끔하게 잘렸다.
방심은 안 했다.
그냥 제대로 피해지 못했을 뿐이다. 낮게 날아오른 유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괴물을 노려보았다.
모론의 도끼는 저 지네처럼 많은 팔다리를 몇 개나 썰었다. 등짝에서 휘둘러대는 손은 세냐의 마법이 폭격했다. 유진도 저 거대한 아가리의 이빨을 분쇄하고, 눈알을 터트리고, 얼굴을 난도질했다.
그렇게 공격을 퍼부어도 몰아붙이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공격할수록 저 색과 마력을 깎아냈지만, 그만큼 이쪽의 힘도 깎여 나갔다. 더 이상 재생력을 과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괴물은 그렇지 않았다. 썰어도, 썰어도 금세 멀쩡해졌다.
포기하지는 않았다. 공격이 얕기에 재생하는 것이라면 더, 더, 깊고 무겁게 공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 괴물의 공세가 바뀌었다. 나부끼던 색이 순간 정지했고, 마력은 잔잔하게 가라앉아서.
폭발했다. 그것뿐이다.
“괜찮냐?”
유진은 막 몸을 일으키는 모론을 향해 물었다.
“괜찮지는 않다.”
돌아온 대답은 모론치고는 의외의 것이었다. 왼쪽 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렸다. 난사되는 마력과 색을 막아내기 위해 왼팔을 내준 것이다.
“싸울 수는 있다.”
모론은 오른팔을 몇 바퀴 돌려 보이며 대답했다.
“봤어.”
멀리 날아갔던 세냐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돌아왔다. 그녀의 몸에 상처는 없었지만, 메리의 꽃잎 중 상당수는 재가 되어 무너졌다.
“마법을 새로 짤게. 방금 공격은 더 이상 안 통해.”
“몇 번이나 막을 수 있지?”
“몰라. 최대한 해볼게.”
[보조하겠습니다.]
아니스가 대답했다. 유진에게서 뻗어 나온 빛이 세냐에게 연결되었다. 세냐는 보태지는 신력을 받아들이면서 아니스를 느꼈다.
“쉴 시간을 안 주는구만.”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신검에 관통된 대가리를 처박고 있던 괴물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리가 잘리기 직전에 꽂아 넣은 신검이 솟구치는 색에 변색 되어서 소멸했다.
우우우…….
천천히 벌어지는 입에서 마력이 끓는다. 등 위에서 흔들리는 수백 개의 손이 일제히 하늘로 올랐다.
펑, 펑 펑…… 모든 손에서 응축된 마력의 덩어리가 나타났다. 이쪽을 향하는 수천, 수만 개의 공격에 세냐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저건 막을 수 있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세냐는 입을 반쯤 벌리고서 침묵했다. 아니스도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둘은 저 무자비한 공격을 어떻게 결계를 조합해서 막을지에 대해 잠시간 고민했다.
“최…… 최대한 피해보는 것으로.”
세냐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모론은 뿌득 이를 갈면서 앞을 가로막았다. 최악의 사태가 직면한다면 자기 하나로 끝내기 위해서였다.
“안 보이니까 꺼져.”
유진은 욕설을 뱉으며 모론의 옆에 섰다.
우우우우…… 음산한 울음과 함께 괴물의 아가리에서 마력과 색이 흘러넘쳤다. 유진은 양손에 신검을 쥐고서 괴물을 노려보았다. 벌써 움직여봤자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에 본능과 직감에 따라 활로를 열겠다고 판단했다.
이변은 갑자기 일어났다. 괴물의 거체가 돌연 휘청거리더니, 등판의 손들이 붙잡고 있던 마력의 덩어리가 흐트러졌다.
퍼버버버벙! 휘청대고 흐트러졌다고 해서 공격이 시작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수만 개의 공격은 유진 일행을 노리지 않고 엉뚱한 하늘과 다른 곳으로 쏘아졌다.
“뭐야?!”
당황한 세냐가 빽 고함을 질렀다. 무작위로 쏘아댄 것만 같은 공격이지만 워낙 숫자가 많았던지라 일부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그리고 아직 저 아가리에서는 강력한 마력이 들끓고 있다.
ㅡ꽈아앙!
벌어졌던 입이 닫혔다. 터지려던 마력이 역류하면서 오히려 괴물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그 광경에 유진도 놀라서 두눈을 휘둥그레 떴다.
머리가 날아갔지만 그 공격은 괴물 자신의 마력. 본래 머리가 있던 곳 바로 옆에 새로이 머리가 튀어나왔다. 카아아아아! 놈은 입을 쩍 벌리면서 처음으로 크게 포효했다.
그 포효에서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방금의 이변은 괴물의 의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끼.”
유진은 두 개의 신검으로 정면으로 오던 색의 방향을 틀어버리면서 씩 웃었다.
베르무트가 오고 있다.
빌어먹을 환생 609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는 이곳에서 ‘나’라는 존재를 깨치고 깨어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은 아득히 오랜 시간 동안 광기와 오물이 쌓인 쓰레기통과 다름없다.
절대로 무언가가 태어날 수 없는, 허무로 가득 찬 멸망의 뱃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태어난 것은- 정말로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
오래전. 베르무트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의 그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을 알지도 못했고, 인격이란 것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라는 존재는 멸망의 뱃속에서도 몹시 이질적이었으나, 이성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던 멸망의 마왕은 자신의 뱃속에서 태어난 존재를 자각하지 않았다.
자각할 수가 없었다. 온갖 것이 득실거리는 뱃속. 태어났지만 꿈틀거리지도 못하는 존재는 몸속의 세포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는 뱃속에서 웅크렸다. 이곳은 그가 태어난 장소였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이곳을 어머니의 자궁이나 요람 같은 안락한 장소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세포라 규정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는 멸망의 마력으로 이뤄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아가 뚜렷해질수록 이곳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나는 누구고, 왜 이곳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이곳은 대체 어디일까. 어느 순간 그는 저러한 의문들을 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답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곳에 남은 커다란 상처. 기나긴 시간이 흘러도 메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 이 뱃속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갈수록 괴롭기만 했으나, 이상하게도 저 상처만큼은-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곳에서는 안락하고 그립다는 기분마저 느꼈다.
상처에 대해 자각한 것이 그의 존재를 각성시켰다. 의문 외에 다른 것을 느끼지 않던 그에게 분명한 인격이 깃들었다. 그렇게 자아를 갖추니 하나씩 기억이 스며들었다.
누가 저 상처를 만들었는지.
‘아가로트.’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베르무트는 생각했다.
베르무트는 멸망의 상처에서 태어났다. 그라는 존재는 상처를 그은 신검이 일으킨 기적의 산물이지만, 베르무트는 도저히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가 없었다. 기적으로 태어났다고는 해도 베르무트가 멸망의 분신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아를 획득함으로써 깨우친 기억들. 멸망이 살아온 역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 베르무트와 멸망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이성의 유무였다. 본성만 남아 세상을 멸망시킬 뿐인 마왕과는 다르게, 베르무트는- 이 끔찍하게 역겨운 뱃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멸망의 분신답게 살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라는 존재의 시작이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거슬러 오른 기억의 첫 장에는 희미한 빛이 있었다. 꺼지기 직전에 잦아드는 불씨가 있었다. 간신히 상처를 긋고서 자리에 주저앉아, 절망 대신에 저주를 퍼붓는 남자가 있었다. 자신의 죽음과 결국은 멸망해 버릴 세상을 앞에 두고서 남자는 오직 살의만을 품고 죽었다.
욕망에 홀려 배신하고 최후에는 욕망에 잡아먹히며 가증스러운 후회를 남긴 남자가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텐데. 돌이킬 수 있다면. 그러한 후회와 함께 휩쓸리고 잡아먹힌 남자의 이름이 바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였다.
그래서 베르무트는 세상으로 나왔다. 그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한 기적을 잇기 위해. 추하고 가증스러운 후회를 남기고 죽은 옛 베르무트와 달라지기 위해.
저주를 남기고 살의를 품고 죽은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느꼈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베르무트는 아가로트가 이 세상에 환생한 것을 확신했다. 아가로트가 남긴 상처와 기적에서 태어난 베르무트는 운명적으로 아가로트를 느꼈다.
“나는…….”
칙칙하고 축축하고 끈적한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베르무트는 입을 열었다.
“멸망의 분신이다.”
기적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결국은 멸망의 분신이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고, 운명에 개입했기에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용사 흉내를 내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랬어야 모든 것이 원활히 되었을지도 모른다.
300년 동안 베르무트는 수백 수천 번 저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용사로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실은 하멜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설 수밖에 없던 이유를 계속, 계속 생각했다. 나는 강하다. 멸망의 마왕에 대해 알고 있다. 유폐의 마왕과 협상할 수 있다. 멸망의 마왕을 죽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다른 마왕들을 죽이는 것에는 크게 활약할 수 있다.
아직 하멜은 약하다. 신성을 각성하지 못했다. 용병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지금의 하멜은 고위마족과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용사가 필요하다. 억지로라도 성검을 쥐어서 용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이 희망을 갖게 해야 한다.
동료가 필요하다. 함께 마왕과 싸울 동료. 하멜을 도울 수 있는 동료.
그러니 내가,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이 핑계다. 베르무트는 줄곧 외면해온, 자신의 원초적인 욕망들이 무엇인지를 안다.
최초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용사의 동료가 아닌, 자신이 용사가 되고 싶었다.
기적에서 태어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하멜과 함께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멸망의 분신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베르무트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미약하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용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나를.”
심장의 고동이 점점 빨라졌다. 가슴 속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점점 번지며 별이 되었다.
“너희는 나를, 그냥 베르무트라고 말해주었어.”
새하얗게 타오른 불꽃이 어둠을 밝혔다. 탁했던 눈동자에 또렷한 빛이 번득였다. 이곳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금색으로 빛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쿵, 쿵, 쿵. 거대한 울림. 베르무트의 심장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 그가 동화된 멸망의 심장의 울림이다. 베르무트는 숨을 몰아쉬면서 손을 뻗었다.
쿵, 쿵, 쿵, 쿵…….
심장의 울림이 점점 더 강해졌다. 불꽃이 밝혀 희미해지는 어둠의 건너편에서 바깥이 보였다. 괴물을 앞에 둔 동료들. 피범벅에 상처투성이이지만 누구 하나 쓰러지지 않았다. 승산이 희박하단 것을 알 텐데도 절망의 기색은 없었다.
그 모두가, 베르무트가 아는 것이었다. 저 눈빛을 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저런 눈빛을 하고서 사선을 넘어왔다.
“내가…….”
베르무트는 숨을 헐떡거리며 조금 더 앞으로 손을 뻗었다.
쿵, 쿵, 쿵, 쿵…… 베르무트가 움직일수록 심장의 울림은 강해졌지만, 그와 함께 삐걱거리는 불협화음이 섞였다. 베르무트의 움직임이 괴물과 심장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다.
“있어야 할 곳은…….”
하멜이, 아니스가, 세냐가, 모론이 말했다. 함께 싸우자고 말이다.
베르무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 어린 성녀는 베르무트에게 직접 기도를 올렸다.
베르무트는…… 아니스를 빼닮은 어린 성녀의 눈빛이 무엇인지 알았다. 베르무트에게 있어서 그러한 눈빛은 한때 아주 익숙하고 일상적이었다.
용사를 보는 눈.
세상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 희망을 품은 눈.
“이곳이 아니야.”
베르무트는 뿌득 입술을 씹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심장에 그득한 마력이 베르무트의 불꽃과 반발했다. 불에 탄 마력이 재가 되어 소멸했지만, 불꽃의 희미해지지 않았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분명한 자각은 불꽃을 꺼트리지 않았다. 본래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니란 선언이 허무뿐이던 심장의 안에 파문을 일으켰다.
걸음과 함께 나아가던 손이 무언가를 잡았다.
그것은 오래된 사슬이었다. 머나먼 옛날에 묶인 사슬.
[여전히 멸망과 함께 죽기를 바라나?]
사슬을 통해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질문에 실린 의도는 간파했다. 연속되는 멸망과 운명에 절망해 버린 최초의 용사이자 마왕은 언제나 세상을 시험하고 다시 절망해 왔다. 하지만 지금 유폐의 마왕이 던지는 질문은 절망에 깔린 시험이 아니다. 절망뿐인 영원을 살았던 유폐의 마왕은- 지금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다.
“나는 모두와 함께 멸망을 죽이기를 바란다.”
[하하…….]
돌아온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사슬을 뽑아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베르무트의 손이 사슬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ㅡ빠드드드득!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혀있던 사슬이 베르무트의 손에 의해 뽑혔다. 길게 뽑혀 나온 사슬이 어둠 속에서 출렁거렸다.
완전히 뽑아낸 사슬이 꿈틀거리더니 베르무트의 팔을 휘감았다. 베르무트는 당황하지 않고 사슬에 팔을 내주었다. 뚜둑, 뚜두둑. 단단히 감긴 사슬이 팔을 파고들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이 필요한가?]
머릿속에서 유페의 마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검.”
베르무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대답과 동시에 베르무트의 손에서 검이 나타났다. 원초부터 심장을 묶었던 사슬이 베르무트를 위한 검이 되었다.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베르무트가 일으키는 불꽃은 마력과 반발했고, 사슬에서 태어난 검은 심장의 마력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하하…….”
베르무트는 손에 감기는 검의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반갑군.”
‘마왕’과 싸우기 위해, 죽이기 위해 검을 쥐었던 것이 얼마 만인가? 검을 쥔 것으로 베르무트는 보다 확실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했다.
멸망의 분신이란 자각은 괴롭고 끔찍했다. 하지만 지금, 마왕을 죽이기 위해 검을 쥔 자신은-
푸확!
검이 어둠을 갈랐다. 수백 년 전 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휘두를수록 불꽃이 번졌다. 심장은 이제는 고동보다는 삐걱거리는 비명과 같은 소리를 토했다.
열렸다.
콰르르르르! 작게 열린 상처에서 베르무트와 마력이 함께 쏟아졌다. 휩쓸린 격류는 베르무트의 정신을 흔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깊이 침식하려고 들었다. 300년 동안 몇 번이나 찾아온 충동과 광기가 베르무트의 이성을 두드렸다.
침식하게 두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금색의 눈동자로 어둠의 너머를 노려보았다. 멸망의 심장과는 달리 뛰는 자신의 심장 고동을 들었다. 그곳에서 뿜어지는 피의 뜨거움을 느꼈다.
-위대한 베르무트.
멀리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베르무트의 이성을 보다 또렷하게 붙잡았다. 집요하게 침식하려던 충동과 광기가 역으로 떠밀려서 사라졌다.
-위대한, 베르무트.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위대한 베르무트. 격류 속에서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평생.
위대한 베르무트란 이름을 좋아했던 적은 없다. 베르무트도 그 동화책은 읽어보았다. 당연히 누가 쓴 것인지도 눈치챘다. 세냐와 아니스. 그렇기에- 도저히, 그 동화책을, ‘위대한 베르무트’란 이름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일방적으로 약속을 맺었다. 이유를 알려달라 호소하던 동료들에게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키옐에 돌아와 공작위를 받고, 수많은 후보 중에서 가장 아이를 잘 낳을 것 같은 여인을 골라서 혼인했다.
전쟁이 끝나고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평생은 절대로 위대하지 않았다. 사랑 없는 혼인 뒤에는 ‘라이언하트 가문’을 완성하기 위해서만 살았고, 동료들과는 인연을 끊었다.
그런 자신에게 ‘위대한 베르무트’라니. 세냐와 아니스가 어떤 마음으로 동화책을 썼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내심 생각은 했다.
아마.
아니, 틀림없이. 위대한 베르무트라는 이름은 고약한 조롱일 것이다. 진짜 나는 결코 위대하다고 불릴 자가 아니다. 용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베르무트는 큭큭 웃으며 검을 들었다.
“너희가 결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위대한 베르무트.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한 점의 조롱도 없었다. 동료들이- 부르는 것은 아니다.
뱃속이 아닌 바깥에서. 많은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르고 있다.
“위대한 베르무트라.”
괴물의 가슴이 갈라졌다.
“솔직히 낯 뜨겁군.”
베르무트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환생 610화
간질이라도 온 것처럼 난동을 부리면서 사방을 향해 마력을 쏘아대던 괴물의 거구가 파르르 떨리더니 정지했다. 놈에게 커다란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날뛰어대던 놈이 전원이 뚝 끊어진 것처럼 멈춘 것에 유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숨을 몰아쉬던 모론이 홱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 정지한 괴물에게 공격을 퍼부을지를 묻는 것이다.
“잠깐.”
유진은 일단 그렇게 말했다. 괴물이 정지한 것은 기회. 하지만 상태가 이상하다. 괴물의 상태야 아까부터 이상했고, 지금 유진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심장의 두근거림.
“베르무트.”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말했다.
ㅡ푸확! 부른 이름에 호응하듯이 괴물의 배가 갈라졌다. 마력과 색이 피처럼 쏟아졌고, 셀 수 없이 많은 다리가 푸들거리더니 관절이 꺾였다.
우우우우……!
쩍 벌린 아가리에서는 비명과 같은 울림이 토해졌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마력과 색은 바닥에 고이거나 퍼지지 않고, 떨어지는 대로 소멸했다.
아니, 재가 되었다. 짙은 마력과 색의 안에는 전혀 다른 불꽃과 빛이 있었다. 내부에서부터 태우는 불꽃과 빛의 중심에 금색이 빛났다.
“베르무트!”
놀란 세냐가 이름을 외쳤다. 모론은 이번에는 유진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뛰쳐나갔고,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꽈르릉! 세냐가 쏘아낸 마법이 괴물의 아가리로 빨려 들어가서 폭발했다. 연달아 터진 녹색 불길에 괴물의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모론은 앞을 막은 다리들을 도끼로 쳐냈고, 그렇게 열린 길로 유진이 뛰어들었다.
격류 속에서 베르무트의 모습을 보았다.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여태까지 ‘유진’이 보았던 베르무트와는 확연히 달랐다. 환생하고 나서 보았던 베르무트의 눈동자는 언제나 색이 탁했다. 300년이란 시간 동안 광기에 마모되어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베르무트의 눈동자는, 마치 300년 전처럼. 함께 마왕들과 싸울 때처럼. 함께 마경을 가로질렀을 때처럼.
처음 만나서 동료가 되어달라고 말했을 때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런 베르무트에게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베르무트는 자신에게 향하는 손을 보았다. 300년 전에- 하멜과 처음 만났을 때. 하멜은 결투에 패배해 쓰러졌고, 베르무트는- 약속대로 동료가 되어달라며 손을 뻗었었다.
“이제는.”
베르무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나에게 몇 번이나 손을 뻗어주는구나.”
이제는 약속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베르무트의 손이 유진의 손을 잡았다. 화악! 강하게 당기는 힘에 베르무트의 몸이 격류를 빠져나왔다.
“이렇게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히죽 웃으며 던지는 질문에 베르무트는 보란 듯이 검을 들어 보였다. 형태는 전혀 달랐지만, 유진은 그 검에서 유폐의 마왕의 사슬을 느꼈다.
싸울 수 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유진은 손을 확 잡아당기며 베르무트의 몸을 뒤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괴물의 배 아래에 남았다.
쩍 갈라진 배의 상처가 보였다. 내부에 장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상처를 통해서 심장을 느꼈다. 그것은 아직 저 안에서 불규칙한 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유진은 호흡을 삼키며 신화를 일으켰다.
화아아악! 빛의 의지가 유진의 신화에 깃들었다. 유진은 손에 나타난 길쭉한 창을 괴물의 뱃속을 향해 집어 던졌다. 콰지직! 뱃속으로 빨려 들어간 창이 마력과 색을 가르면서 괴물의 몸을 꿰뚫었다.
“베르무트!”
이쪽으로 날아오는 베르무트는 맞이하기 위해 모론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방금까지 괴물의 안에 있었고, 그전부터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으니 일단 부축이라도 해주기 위해서였다.
공중에서 모론과 베르무트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으로 모론은 깨달았다. ‘지금’의 베르무트에게 부축 따위는 필요가 없다.
모론은 씩 웃으며 하나 남은 오른손을 끌어 도끼를 들었다. 날아오던 베르무트가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렸다. 베르무트의 양발이 모론의 도끼를 발판으로 삼았다. 후웅! 도끼가 허공을 갈랐고, 베르무트이 몸이 높이 치솟았다.
그렇게 베르무트는 단숨에 괴물의 머리 위까지 뛰어올랐다. 세냐의 마법에 젖혀지고, 신화의 창에까지 관통된 괴물은 아직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베르무트는 금색의 안광을 번득이며 오른손의 검을 휘둘렀다.
촤악! 허무를 가로 그은 참격이 괴물의 목을 잘랐다. 마력과 색이 분수처럼 솟구쳤지만, 그것이 아래로 떨어지기도 전에 베르무트의 검이 연속으로 움직였다. 퍼붓는 참격이 괴물의 머리를 산산조각냈다.
“뱃속이 꽤 편했나 봐? 아까보다 훨씬 낫잖아.”
세냐는 키득키득 웃으며 베르무트의 곁으로 날아왔다.
“함께 싸우자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 뒤에서 구경만 할 수는 없지.”
“흐흥, 의욕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무리하지는 마. 지금의 너는 우리보다 훨씬…….”
약하잖아. 세냐는 그렇게 말하려던 것을 꿀꺽 삼켰다.
불과 몇 초 전에 베르무트가 괴물의 머리를 썰어버리지 않았나? 아무리 지금 괴물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지만, 저 강인한 몸뚱이를 파괴하기 위해 세냐와 모론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너 왜 이리 세?”
“으레 자식의 폭력은 부모에게 치명적인 법이지.”
돌아온 대답은 세냐의 상상을 초월했다. 세냐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정신을 잡고서 다시 물었다.
“노, 농담으로 말하는 거야?”
“아니.”
베르무트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것을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일단은 내가 저것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 않나.”
유진과 모론, 세냐의 힘은 멸망의 마력에 상쇄된다.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이쪽의 힘도 빠르게 마모된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공격은 아무런 낭비 없이 멸망의 마력을 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격이 잘 들 뿐. 기교면에서는 너희를 따라가기 벅차다. 그리고- 내 손으로 멸망을 끝내는 것도 불가능할 거다.”
우우우…… 잘린 목의 단면이 부글거리며 끓었다. 몸을 관통했던 창도 소멸했다. 더 이상 괴물의 배에서는 마력과 색이 쏟아지지 않았다. 꺾였던 다리의 관절도 다시 펴졌다.
괴물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라면.’
모두가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괴물을 쓰러트릴 수 있다. 멸망의 심장을 파괴할 수 있다.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온 유진은 그것을 확신했다. 유진이 가진 ‘승리’의 신성이 괴물을 겨누었다. 승리까지 향하는 길은 쉽지 않겠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승리가 지금은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아아아아아!
부글부글 끓던 단면에서 수십 개의 머리가 치솟았다. 괴물은 마치 히드라처럼 수십 개의 머리를 갖고서 입을 쩍 벌렸다. 허무가 쩌렁쩌렁 울리며 마력이 들끓었다. 유진은 피부가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발악이다.”
강렬한 마력의 파장을 정면에서 버티던 유진이 내뱉었다.
해방된 마력이 괴물의 몸을 뒤덮었다. 저것은 더 이상 ‘괴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될, 확실한 멸망이 되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얽히는 색을 보던 유진의 곁으로 베르무트가 다가왔다.
“심장은 네가 부숴라.”
“너는?”
“함께 가주지. 지금의 네가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힘을 온존하라는 뜻이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쿵, 쿵, 쿵…… 바깥에서의 진동이 허무를 흔들었다. 저쪽에서도 멸망의 마왕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들리냐?”
유진이 물었다. 베르무트는 잠시 눈을 감고 진동을 느꼈다.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더군.”
위대한 베르무트.
“이번에는 함께 돌아간다.”
툭. 유진은 베르무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서 신검을 들었다. 베르무트는 짧게 어깨를 떨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십 개의 머리가 이쪽을 향해 입을 벌렸다. 즉시 쏘아진 마력과 색이 정면을 뒤덮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기도를 외웠다. 세냐가 메리를 뻗으며 마법을 펼쳤다. 콰르르릉! 기적이 더해진 결계가 멸망의 포격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전해지는 부담은 가볍지 않았다. 세냐는 울컥 치솟는 피를 입술을 씹으며 삼켜냈다.
[몇 번이나 막을 수는 없도다.]
메리에서 현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멸망의 마왕이란 이름처럼 저 힘은 세상을 손쉽게 멸망시킬 수 있다. 아무리 세냐가 마법의 신좌에 앉았어도, 저러한 공격을 몇 번이나 막을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막아야 해.’
마왕의 숨통을 끊는 것은 용사다. 세냐는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용사의 검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벼려낸 검이니.]
현자의 속삭임과 함께 메리가 빛을 발했다. 시들고 저물었던 넝쿨과 꽃잎이 다시금 펼쳐졌다. 세냐는 메리에게서 전해지는 힘을 느끼고서 움찔 놀랐다.
‘진즉에 넘기던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건네야만 의미가 있는 것. 약속이나 하거라, 후배여. 나는……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너와…… 아가로트가 멸망을 끝내는 것을 직접 볼 수 없다는 말이다.]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는 멸망에서 세상을 이어가고자 세계수가 되었다. 세계수로서 평생을 바랐던 것이 멸망의 끝이다.
[나는 아가로트를 믿는다. 마법의 총아인 너를 믿는다. 너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믿는다. 그러니…… 내가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 믿고서 잠들도록 하마.]
평생을 바라온 것을 직접 보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현자는 자신이 눈을 뜨지 못하는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았다.
“그때는.”
양손에 쥔 메리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세계수에서 전해진 생명력이 메리에 가득 담겼다.
“내 자식들이 당신을 맞이할 거야.”
ㅡ꽈아앙! 메리가 빛을 뿜었다. 결계를 열고서 쏘아낸 빛이 마력과 색을 소멸시키고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마력과 색을 뿜어대던 멸망의 머리 수십 개가 빛에 휩쓸려 소멸했다. 세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지만 억지로 발을 앞으로 뻗었다. 아직은 쓰러지기에 이르다.
[아가로트.]
뒤에서 뿜어진 빛. 하지만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세냐와 세계수가 열은 길이다. 유진은 먼저 그 길로 몸을 날렸다.
[아니, 그것은 옛 이름이지.]
사라지지 않은 빛의 길에서 숲을 느꼈다. 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세계수의 정령들이 유진의 등을 밀었고, 앞에서는 누군가가 유진의 손을 잡아 끌어주었다.
[안녕, 유진 라이언하트.]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현자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 유진을 보았을 때와 같은 쓸쓸한 미소는 짓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가로트라는 남자를 잊지 못했지만, 더 이상 아가로트에게 미련을 갖지 않았다. 과거에 이루지 못한 미련보다 미래에 바라는 것이 컸다. 그녀가 바라는 미래에 쓸쓸한 미소 따위는 어울리지 않았다.
“잘 자, 비슈르.”
그래서 유진도 똑같이 웃어주었다. 그 미소와 인사에 비슈르는 만족했다. 아하하하…… 멀어지는 미소에 심장이 울렸다.
멸망 앞에서 똑같은 것을 바라며 다른 선택을 하였던 빛은 먼저 잠든 오랜 벗의 이름을 불렀다. 추모는 하지 않았다. 긴 세월, 잠이 들었을 뿐이다. 과거의 신들이 보지 못했던 미래. 그런 미래가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
“알아.”
울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마, 아니, 반드시. 유진은 우주를 붙잡으며 생각했다.
이것이 마지막 이그니션일 것이다. 내가 죽던가, 멸망을 죽이던가.
수십 개의 머리를 잃은 멸망이 휘청거리면서 팔다리를 휘둘렀다. 모론이 괴성을 지르며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 숨을 헐떡이는 세냐와 유진 쪽으로 날아들던 공격이 모론의 도끼가 잘려 나갔다.
베르무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그니션의 발동. 폭주가 궤도에 오르고 폭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초. 그 시간 동안 공격을 쳐내 주는 것은 베르무트와 모론에게는 익숙했다.
ㅡ두근.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바깥에서 전해지는 울림과, 멸망의 심장에서 울리는 것과는 다른 울림. 어떤 형태로든 간의 끝을 결정하는 울림.
자신에게 막대한 부담을 주는 대신에 싸움을 끝내는 필살기.
하지만 결국 몸을 망가트리기에, 베르무트는- 저 이그니션이라는 기술을 도저히 좋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유진은, 하멜은, 이그니션을 쓰고서 패배한 적은 없다.
고위 마족이나 마왕과의 전투에서 항상 이그니션을 쓰고서 승리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격차가 있던 가비드를 물러서게 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뚱이로도 이그니션을 사용해 유폐의 방패를, 유폐의 지팡이를 죽였다.
비록 최후에는 하멜 자신마저 죽어버렸지만.
‘이번에는 안 죽어.’
당연히 유진은 죽을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환생 611화
‘멀다.’
바로 곁에 있는데도 그렇게 생각했다. 저 불꽃은 백염식에서 태어났지만 이젠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 선명하고 격렬하게 타오르는 저 불꽃이야말로 아가로트의, 하멜 다이너스의,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를 증명하는 신화다.
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끼며 베르무트는 유진을 쳐다보았다.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던 안광으로 멸망을 노려보던 유진은, 옆에서 향한 시선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왜, 새끼야.”
유진은 히죽 웃었다.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냐?”
돌아온 질문에 베르무트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베르무트는 오래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서 짧게 웃어버렸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 말이 네게 그리도 상처였나?”
“원래 때린 새끼는 잘 기억 못 해. 맞은 놈만 아파서 오래 기억하지.”
“나는 널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말이기는 했지만, 당시의 하멜은 그 이유에 대해서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이죽댔다.
“날 위해서는, 씨X. 대뜸 와서 뒤통수 뻑 때리고서, 잘 좀 하자 새끼야, 이런 건데.”
“네게는 그런 식의 조언이 옳다고 생각했지.”
이번에는 유진이 눈을 깜빡거릴 차례였다.
확실히. 당시에 저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몹시, 몹시 엿같았지만- 저 말을 들었기에 머리에 피가 올라서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온당 베르무트 덕분인가? 대뜸 뒤통수를 처맞았는데 주저앉기는커녕, 저 새끼 언젠가 조지고 만다, 라고 결심한 그때의 하멜이 잘한 것 아닌가?
“간다.”
물론 저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추해질 뿐이란 것을 유진은 잘 알았다. 그래서 유진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멸망을 노려보았다. 그 결의에 찬 옆얼굴을 보던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동료들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았기 때문이다.
“먼저 가지.”
베르무트는 모론의 어깨를 툭 치고서 앞으로 나갔다. 그는 유진을 힐긋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의 너는 내가 훨씬 먼저 가도 즉시 따라올 수 있을 테니.”
모론도 그 말에 껄껄 웃었다. 흉악스러운 마력을 내뿜는 멸망의 앞에서 셋은 함께 웃었다.
모론이 땅을 박찼다. 앞으로 달려나간 모론이 도끼를 옆으로 눕혔다. 멸망의 팔과 마력은 즉시 모론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도끼를 휘두를 필요는 없었다.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던 세냐가 마법을 쏘았기 때문이다. 굵은 빛줄기가 마력과 팔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덕분에 모론은 도끼를 휘두르지 않고서 멸망의 몸뚱이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꽈직! 그곳에서 휘두른 도끼는 마치 거목을 일격에 베어내는 것처럼 멸망의 굵은 다리를 잘랐다. 나부끼는 마력과 색 속에서 모론이 몸을 팽그르르 돌렸다. 연이어 휘두른 도끼는 연거푸 멸망의 다리를 잘랐다.
베르무트도 움직였다. 그는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서 멸망의 머리들까지 도달했다. 지금 베르무트의 검은 반발 없이 멸망의 목을 베어낼 수 있지만, 수십, 수백 번 베어낸들 멸망은 죽지 않을 것이다.
‘약해진 심장을.’
베르무트가 생각한 것은 유진도 똑같이 생각했다. 하지만 노린다고 해서 꿰뚫어 부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까도 그랬다. 신화를 벼려 만든 창은 멸망의 몸을 완벽하게 관통했지만, 심장에는 닿지 못했다. 베르무트가 찢고 나오면서 약해졌다고는 해도, 저 불길하며 흉맹한 마력은 포기하지 않고 심장을 보호하고 있다.
계속.
계속해서 베는 수뿐이다. 두꺼운 마력을 계속해서 베어가면서, 감춰진 심장에 신검을 처박아야 한다.
머지않았다. 유진이 간절히 바라는 ‘승리’가 직감했다. 베르무트가 나온 것으로 절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심장이 가까워졌다.
머지않은 것은 멸망의 마왕뿐만이 아니다.
이곳은 멸망의 뱃속. 장기전을 벌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단순히 붙잡아 버티는 것이라면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겠지만, ‘죽일 생각’으로 덤비는 이상 신력의 소모도 빠르다. 당장 등 뒤의 세냐는 이미 한계다. 쓰러지고 싶은 몸을 억지로 붙잡으며 마법을 쏘아대고 있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아직…… 이야.”
세냐는 숨을 헐떡거리며 내뱉었다. 눈앞이 어지럽고 입안에서는 피의 맛이 난다. 속은 텅 빈 것만 같다. 메리를 잡은 손에도 감각이 안 느껴진다.
그리고 메리가 무겁다. 마법사가 자신의 지팡이를 무겁다고 느끼는 것은 정말로 위험하다는 것. 하지만 세냐는 멈추지 않았다. 지팡이의 무게야 300년 전에도 몇 번이나 느꼈었다.
지금이 살아온 평생 중 최악인가? 아니다. 세냐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억지로 메리를 움직였다. 더 이상 현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세계수에서 전해지는 영력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고, 누아르에게 받은 마력도, 세냐 자신의 마나도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최악은 아니다. 세냐는 다시 생각했다. 지금은 결코 궁지가 아니다. 넘을 수 있는 시련이다. 보라, 힘은 고갈되고 육체는 더디고 무겁지만,
정신은 맑다. 사고가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어느새 머리의 어지러움도 없다.
꽈르르릉! 세냐가 쏘아낸 마법이 멸망보다 높은 곳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멸망의 등에서 수천 개의 팔이 치솟아 마법의 폭우에 저항했지만, 스며든 마법은 멸망의 몸에서 연거푸 폭발을 일으켰다.
쿨럭. 세냐는 피를 토하며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앞을 보았다. 눈이 조금 더 흐릿해졌다. 하지만 뭉개지고 흔들리는데도 여전히 불꽃은 선명하다.
“괜찮아.”
이곳에 가까이 오려는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를 느꼈기에, 세냐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치료하려 해도 할 수 있는 종류의 부상이 아니다.
게다가 여력이 없는 것은 성녀들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지금 유진이 폭주시킨 신력을 조율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더 보고, 돕고 싶은데.”
아직 쓰러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알아.”
세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앞을 보았다.
모든 것을 불태울 것만 같은 격렬한 불꽃이 보였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것을 밝힐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유진은 베르무트와 모론보다 늦게 움직였지만, 그는 이미 베르무트와 같은 곳에 서서 멸망의 머리를 베고 있었다.
“잘, 알아.”
불꽃과 불꽃이 어우러지는 것을 보았다. 베르무트가 먼저 베고, 유진이 그렇게 열린 길에 신화를 처박았다. 때로는 유진이 먼저 베고, 베르무트가 그 뒤를 덮었다.
세냐는- 저 모습들을 너무나도 잘 안다. 언제나, 그녀는 저 등을 보았었다.
알고 있다.
지금의 유진과 베르무트라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전부터 항상 그랬지 않나.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적. 설령 그것이 마왕일지라도, ‘하멜’과 ‘베르무트’가 함께 싸운다면 이길 수 있었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세냐의 신성은 승리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유진만큼이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니까 남은 마력을 모조리 긁어서 메리에 집중시켰다. 지금 전투에서 쓸 수 있는 마지막 마법. 세냐는 앞으로 들었던 메리를 위로 높이 들었다.
천천히 무릎을 꿇으면서 메리를 내렸다. 토옥. 메리가 허무로 가득 찬 지면에 똑바로 섰다. 지팡이를 휘감은 넝쿨들이 아래로 쏟아지고 꽃잎이 낙화했다.
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태어났다. 생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풀과 꽃, 나무가 세냐를 중심으로 치솟았다. 허무만 존재하는 멸망의 뱃속에 숲이 태어났다.
마법의 여신, 세냐 메르데인이라도 절대로 펼칠 수 없을 마법. 그렇지만 오직 그녀만이 가능한 ‘기적’이 멸망의 뱃속을, 불길한 색이 아닌 생명의 색으로 물들였다.
“피어라.”
희미하지만 분명한 의지가 목소리가 되어 마법을 시동했다.
화아아악! 셀 수 없이 많은 봉오리와 나무의 꽃이 만개했다. 가득 찬 향기를 느끼며 세냐는 흐릿한 눈을 감았다.
ㅡ쿠우웅!
가득한 생명 속에서 멸망의 모든 다리가 꺾였다. 주저앉는 멸망에게 물러서던 모론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이 마법은 세냐가 일으킨 기적이다. 모든 꽃과 풀과 나무가 멸망의 마력을 삼키고서 시들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 마법이다. 세냐는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고, 싸울 수가 없다.
“부족하군.”
모론은 툴툴 웃으며 중얼거렸다. 끝이 머지않은 것은 모론도 마찬가지다. 잘린 팔이 문제가 아니다. 맹독이나 다름없는 멸망의 마력에 최선두에서 노출된 것이 모론이다.
최선을 다했다.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큼 싸웠는가? 떠오르는 의문, 모론은 껄껄 웃었다.
상처를 가르고 심부까지의 길을 열었다. 그것뿐이다. 심장은 직접 파괴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멸망의 팔다리를 잘랐지만, 그것도 대단한 전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 위에서 하멜과 베르무트가 함께 싸우고 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틀렸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동료들과 함께 싸운 전투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렸다.
모론은 언제나 선두에 선다. 할 수 있다면 직접 공격을 해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모론이 맡은 역할은 공격을 ‘받는’ 것이다. 모론이 공격을 받아내기에 하멜과 베르무트는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다.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적’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 하멜과 베르무트가 편하게 벨 수 있게 돕는 것.
ㅡ이해했다. 모론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도끼를 들었다. 꽈지직! 주저앉은 멸망의 다리가 썩둑 잘렸다. 이전이라면 즉시 재생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재생조차 더뎠다.
그렇기에 모론은 하기로 한 일을 강행할 수 있었다. 남은 힘.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힘을 격발했다.
뿌득, 뿌드득. 가득 쏠려서 집중된 힘에 모론의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고 부들거리며 떨렸다. 빠직! 그 힘은 손에 쥔 도끼마저 으스러트렸다.
상관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부수고 끊어내는 도끼가 아니다. 그러한 의지에 도끼를 이룬 신화가 호응했다. 화신으로서 끌어낸 신력이 모론의 몸을 뒤덮었다.
쿠웅. 모론의 발이 땅을 찍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멸망의 머리를 자르는 유진과 베르무트와 눈이 마주쳤다. 모론은 둘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나는.”
모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당장은 하나뿐인 팔. 멀쩡히 둘이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이리된 이상 어쩔 수가 없다.
모론은 기울어진 멸망에게 다가가며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뚜두두둑…… 굽혀진 손가락이 멸망의 몸을 잡았다. 거대해도 너무 거대한 멸망의 몸뚱이에서 모론이 잡은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잡은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힘’은 멸망 전체를 붙잡았다.
뿌드드득……! 꽉 다문 이빨이 박살 났다. 모론의 눈과 코, 귀,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하지만 모론은 멈추지 않았다. 주저앉았던 수많은 다리는 억지로 끌어내리는 힘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ㅡ쿠우웅! 모론의 손이 멸망의 몸을 기어코 땅에 처박았다.
“모론 루하르다.”
가진 힘을 모조리 쏟았다. 아니, 쏟은 힘 이상의 ‘힘’을 일으켰다. 이 또한 기적인가. 모론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보아야 할 것은 위가 아니다. 모론은 그것을 느끼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기적은- 오직 유진의 신성만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가.”
모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투에서- 먼저 쓰러질 수는 없는 역할을 맡았다. 동료들을 위해서,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승리를 위해서, 모론은 항상 피범벅이 되어서라도 서 있어야만 했다.
-등신.
모론이 억지로 버틸 때마다 하멜이 다가와 ‘등신’이라고 불렀다. 억지로 선 모론을 뒤편에 던져버리고,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하멜처럼 험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베르무트가 그래 주었다.
하지만 마경에서 돌아온 뒤에는 절대로 쓰러질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본래부터 있는 것이 적었던 혹독한 설원은 전쟁의 여파로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모론은 족장이자 영웅으로서 부족을, 설원을 재건해야 했다.
그래서 왕이 되었다. 자신을 추앙하는 모든 백성을 위해서라도 힘들다고 하여 쓰러질 수가 없었고, 레헤인야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구나.”
모론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쓰러져도 괜찮을 것이다. 모론 혼자만 모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아…….]
세냐가 쓰러지고, 모론이 쓰러졌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두 성녀는 유진의 날개로서 저 모든 것을 보았다.
동료들이 쓰러지는 것. 성녀의 역할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막는 것이지만, 지금 이 전투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둘은 철저하게 유진의 힘을 보좌하고 있다.
[시스터, 유진 님, 저는…….]
크리스티나의 목소리는 헐떡이는 호흡이 가득했다. 동시에 울먹거리기도 했다. 그녀는 유진의 등을 밀어주면서 속삭였다.
[오늘 이 성전이, 모두의 승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예.]
아니스의 목소리도 똑같았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티나를 한 손으로 받쳐 안고, 다른 한 손은 베르무트에게 향했다.
[들리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읊조림. 하지만 기원하는 것마저 다르지 않다. 성녀들은 승리를 바라는 세상의 기도를 들었다. 경배 가득한 찬송을 들었다. 불꽃이 더욱 타올랐다. 그곳에 빛이 있었다. 유진의 시선이 베르무트에게 향했다. 베르무트도 똑같이 유진을 보았다.
다리가 부서진 멸망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지만, 등 위의 수많은 팔과 머리들이 일제히 유진과 베르무트를 공격했다.
들리고 있다.
등을 밀어주는 따스한 빛. 저토록 격렬하게 타오르는데도 따스하게 연결되었다. 과거 성검을 쥐었을 때에 억누르던 격통과는 전혀 다르다. 베르무트는, 충만한 신성을 느꼈다.
멀다고 느꼈던 힘. 도저히 쫓을 수 없던 움직임은 어느새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과거 수없이 합을 맞추었을 때처럼, 둘의 검은 막히는 일 없이 공격을 베었다.
[보이십니까?]
하나 된 성녀들의 목소리가 베르무트에게 속삭였다.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뱃속에서 보았던 빛. 휩쓰는 격류에서도 ‘나’를 잊지 않게 해주었던 목소리.
-찬란한 유진.
-위대한 베르무트.
만나본 적은 없다.
그런데도 ‘알고 있다’. 저들은 베르무트에게서 태어난 후손들이다. 오직 하멜만을 위해 만들었던 가문이, 라이언하트가, 유진과 베르무트의 이름을 함께 외치고 있다. 수백 년이 흘렀는데도 변질되지 않은 특성. 잿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 그리고, 그리고.
왼쪽 가슴의 사자 문양.
피범벅의 양팔을 휘두르는 여인이 보였다. 악을 쓰며 검을 휘두르는 남자와, 그 뒤를 따르는 기사들이 보였다. 마안을 심어준 후손은 충혈된 눈으로 피눈물을 흘렸고, 그 옆의 오라비는 누이를 부축하며 젊은 기사들을 이끌고 있다.
베르무트가 눈길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배제했던 방계.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방계조차도 지금은 시조의 이름을 외치고 있다.
[모두가…….]
라이언하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키옐의 문양을 새긴 남자가 거대한 검강을 휘둘렀다. 그 외에도 다른 왕국의 문양들, 용병단의 깃발도 보였다. 기사와 전사.
과거, 우클라스산에서 본보기 삼아 학살했던 대수림의 원주민들. 그들의 젊은 대족장은 수많은 시체를 뒤로하고서 멸망의 앞에 서 있다.
뒤에 있어야 할 마법사들마저 겁 없이 선두에서 싸우고 있다. 멸망의 색에 뒤덮이면서 비명을 지르지만, 대정령사는 계속해서 멸망을 향해 팔다리를 휘저었다. 붉은 로브의 대마법사는 더 이상 부릴 소환수가 남지 않았음에도 물러서기는커녕 다른 색의 마법사들을 이끈다. 하늘에서는 아직 장성하지 않은 어린 드래곤이 마법사와 성직자들을 태우고서 브레스를 뿜어대고 있다.
[저들, 모두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누르는 세상으로 진군하지 못하고 있다. 멸망을 막겠다는 대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모인 군대가 누르의 앞을 막고 있다.
“아…….”
베르무트는 조금 더 먼 곳을 보았다.
모론에게 홀로 맡겨두었던 세상의 끝. 그 새하얀 산은 지금 붉게 물들어 있다. 멸망의 마왕이 강림한 곳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군대. 그곳에서도 누르는 똑같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누르는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눈이 붉게 물들 만큼 수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모론의 후예는 절망하지 않고 군대를 이끈다. 눈 가득한 대지보다는 바다에 어울릴 법한 그을린 피부의 기사와 용병들도 똑같다.
[베르무트 님, 당신의 후예입니다.]
300년 전에 세상은 멸망해야 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죽었을 것이고, 유폐의 마왕은 다음으로 넘어가 텅 빈 세상에서 새로이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 세상이 멸망하지 않은 것은,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바쳐 멸망의 마왕을 다시 봉인했기 때문이다. 300년 전에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기에, 그때 유예를 얻었기에.
[아뇨, 베르무트 님.]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유예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베르무트는 고개를 들어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아니스와 닮은 젊은 성녀는, 300년이 지나고 태어난 후대의 대표로서 베르무트에게 기도를 올렸다.
[베르무트 님. 당신께서는, 세상의 미래를 여신 겁니다.]
지금 세상의 모든 것은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가.”
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를, 정말로.”
-위대한 베르무트.
“세상은…… 너희는, 나를, 정말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닦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용사로 여겨주었구나.”
쩍 벌어진 수십 개의 아가리가 보였다.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에게서 받은 사슬의 검을 먼저 휘둘렀다. 그 검으로 모든 머리를 베어낸 뒤에, 베르무트는 검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 검을 쥐었다. 새로이 쥔 검은 유폐의 마왕에게서 받은 검이 아니었다. 끊이질 않는 연호. 부드럽게 등을 밀어주는 빛과, 베르무트 자신의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온 빛, 그 모든 것이 검이 되었다.
“하멜.”
300년 전 세상을 구하고 미래를 연 용사의 검이 길을 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렇게 연 길의 끝에서, 베르무트의 손이 유진의 등을 밀어주었다.
“이제는 네 차례다.”
빌어먹을 환생 612화
등을 밀어주는 손을 느꼈다. 천천히 앞으로 밀려 나가던 유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지지 않게끔 날개가 되어서 받쳐주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보였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베르무트가 보였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멸망을 붙들고 쓰러진 모론은 저 아래에 있었지만, 유진은 등 뒤에 모론이 있음을 느꼈다. 멀리서 주저앉은 세냐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생각하며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재앙 그 자체인 멸망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느꼈다.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 의지를 느꼈다.
“이제는 네 차례다.”
베르무트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
의미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들은 순간에 이해했다. 300년 전에 베르무트가 세상을 구했다면, 이번에는 유진의 차례일 뿐이다.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차례를 넘겨주기 위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있었다.
아가로트는 멸망에게 상처를 내고 죽었다. 아가로트가 멸망을 붙들었기에 현자는 세계수가 되었고, 거신과 고신들은 빛이 되었다. 그렇게 여태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시작되었다. 상처에서 베르무트가 태어났고, 동료들을 모았다. 결국 패배했지만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300년이란 시간은 의미가 없지 않았다. 세상은 멸망을 막기 위해 하나로 모일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게 해서 ‘차례’가 유진에게 이어졌다.
“알아.”
유진은 더 이상 뒤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등을 미는 수많은 손을 느꼈다. 더 이상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기도는 이미 거대한 의지가 되어 유진의 안을 가득 채웠다.
머리를 든 멸망이 유진을 보았다. 그토록 베어냈음에도 놈에게는 아직 수십 개의 머리가 있었고, 등에는 수백 개의 팔이 있었다. 촤라라락! 수백 개의 팔이 유진을 향해 튀어나갔다.
유진의 눈동자가 금색의 빛을 발했다. 허우적거리는 수백 개의 팔에는 그 하나하나가 존재를 멸망시키기에 충분한 힘이 실려 있었다. 멸망이 세상의 의지를 이끄는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으며 신검을 잡았다.
“아니.”
먼 과거 아가로트는 멸망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300년 전의 하멜은 멀리서 본 멸망에게 절망을 느꼈다. 불과 일주일 전의 유진은 멸망에게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못 막아.”
모든 것이 과거일 뿐이다. 아가로트도, 하멜도, 유진도. 심지어 멸망조차도. 그때 사라지지 않고 지금에 도달했다. 몇 번이나 시대를 삼켜왔던 멸망은 지금만큼은 삼킬 수 없다. 유진은 그를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그러한 절대와 확신이 신화를 더욱 불살랐다.
푸확! 한 번의 참격이 팔의 절반을 불태웠다. 멸망은 비명과 같은 울음을 토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놈의 본능은 물러서기를 원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쓰러진 세냐가 남긴 마법이 멸망이 다리를 일으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쓰러진 모론이 뻗은 손이 아직 멸망을 붙들고 있다. 바깥, 멸망의 본신을 두드리는 울림이 심부를 쿵쿵 울렸다. 모든 기도가 일으킨 거대한 의지가 멸망을 멸망이 아니게 만들었다.
“넌.”
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신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이그니션으로 폭주시킨 우주는 유진 자신에게 막대한 부담을 준다.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폭주시킬 것이다. 유진에게는 그럴 각오와 의지가 있다.
“뭐가 있지?”
콰르르르! 아직 남은 멸망의 손이 다시금 유진을 향해 움직였지만, 다시 휘두른 신검의 불길에 모든 손이 불타서 재가 되었다. 그 순간에 수십 개의 머리가 입을 쩍 벌렸다. 유진의 다리를, 모론의 팔을 사라지게 한 그 공격.
공격을 막아줄 세냐는 쓰러졌다. 하지만 세냐의 의지는 확실하게 유진에게 깃들어 있다. 뿜어진 빛은 유진에게 가까이 도달하지도 못하고 결계에 가로막혔다.
“네게는 아무것도 없어.”
모두에게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러한 의지가 결속되어 신념이 된다. 거짓으로 점철된 존재로 태어났던 망령조차도 신념을 갖고 죽었다. 몇 번이나 세계를 넘어온 유폐의 마왕에게도 신념이 있었다.
멸망의 마왕에게 그러한 신념이 있는가?
없다. 태어나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괴물. 놈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에는 자기 나름의 신념조차 없다. 그냥 세상이 있으니까 멸망시킬 뿐이고, 멸망하지 못해서 계속 멸망을 반복할 뿐.
“그런 네가.”
멸망의 마왕에게 태어난 베르무트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다. 멸망의 마왕은 그런 베르무트를 완전히 삼켜내지도 못했다. 각오도, 의지도 없는. 배가 고프니 무언가를 집어먹는 것 정도의 단순하고 뻔한 본능만을 가졌을 뿐인 괴물.
그 순간에 유진은 놈의 본질을 이해했다. 저것은 ‘멸망의 마왕’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나를.”
저것은 추하기 짝이 없는 질투와 편협한 욕망에서 태어난 괴물이다. 최초에는 마왕이 되고자 했을지 몰라도,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힘에 잡아먹힌 괴물. 세계가 반복되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비대해진 우연한 재앙이 바로 저것이다.
“우리를.”
저것은 언제나 실패만 해왔다. 욕망대로 마왕이 되려고 했으나 마왕이 되지 못했다. 굶주림에 홀려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으나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갈라져 나온 베르무트를 되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지금. 놈은 바로 앞에 있는 유진을 죽이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할 것이다.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신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로 한정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있기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지금 유진이 쥔 신검은 오직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저것 앞에 스러진, 스러지지 않고 버틴, 지금 이 순간에 멸망을 부정하는 모든 의지가 검에 깃들었다.
수십 개의 머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발악하기 위해 모든 머리를 하나로 합쳤다. 세상을 한입에 삼켜 버릴 것만 같은 아가리는 시커먼 심연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유진에게는 저 시커먼 심연이 엷은 것을 넘어 투명하게 보였다. 저 거대한 아가리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 무엇도 삼킬 수 없는 허세로 느껴졌다. 끝없이 깊을 심연조차도 지금의 유진에게는 도랑보다 얕았다.
그에 비해 유진이 쥔 검은 신검은 어떤가. 이것은 세상 전부를 밝힐 만큼 환하고 태양만큼이나 크다. 저것은 절대로 이 신검을 막을 수 없다.
유진은 그렇게 확신했고, 그것을 결정하고자 신검을 내리 베었다.
거대한 머리가 허무하게 갈라졌다. 그렇게 베었지만 신검의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잘린 머리가 마력과 색이 되어 무너지고 사방에 흩날렸다. 유진은 신검과 함께 몸을 기울여 앞으로 나아갔다.
[구원을.]
아니스가 속삭였다. 화아악! 사라지는 날개 속에서 아니스가 유진의 등을 밀었다.
300년 전부터 언제나 버릇처럼 입에 달고 살았던 단어가 바로 구원이다. 한때 빛을 원망하고 자기 존재를 경멸하던 아니스는, 마경에 향함으로서 비로소 성녀가 되어 구원을 바라왔다.
지금이 아니스가 보았던 그 어느 순간보다 구원이 가까웠다. 아니스는 멀어지는 유진의 등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유진의 곁에 남은 것은, 순수하게 유진에 의해 존재의 구원을 얻은 크리스티나였다. 하지만 그녀도 더 이상 버티는 것은 힘들었다. 그것이 슬퍼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이후 어떤 일이 결정될지를 알았다.
[승리를.]
크리스티나는 성녀로서 그것을 기원했다.
언제나, 언제나…… 승리해 온 자신의 신에게. 성녀란 운명에 귀속되어야 할 그녀에게 미래를 주었듯, 용사는, 신은, 세상에게도 미래를 줄 것이다. 그것을 믿고서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등을 밀어주었다.
더 이상 날개는 없지만 추락하지는 않았다. 나부끼는 마력과 색의 사이에서 유진은 바람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것을 잃은 괴물은 더 이상 머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추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만이 움찔거리고 있을 뿐.
그 거대한 몸에서 어디를 베어야 하는지 알았다. 아직까지 멎지 않고 간헐적으로 두근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심장. 그토록 망가졌음에도 심장은 계속해서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하찮다. 신념도 목적도 없이 살아 있으려고만 하는 심장을 왜 그토록 두렵다고 여겼을까. 왜 저것을 볼 때마다 불길하다고 생각하며 광기에 몸서리쳤을까. 유진은 피식 웃으며 신검을 들었다.
아래로 내리그은 신검이 마력과 색을 양단했다. 움찔거리던 괴물의 육체는 조금도 신검에 저항하지 못했다.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신화가 먼저 심장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이 품고 있던 마력과 색을 모조리 내뿜었지만, 무엇 하나 불꽃을 뚫고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겹겹이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마력과 색이 소멸했다.
그리고 신검이 심장을 갈랐다.
화아아아악! 갈라진 순간에 불꽃이 크게 일어났다. 유진은 물러서지 않고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끝을 확실하게 보기 위해서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멸망의 마왕’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재앙이 소멸해갔다. 심장이 재가 되면서 거대한 몸뚱이도 함께 재가 되었다. 유진은 그 중심에서 모든 것을 관조했다.
두근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비명 같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쿵, 쿵, 쿵, 하는 소리. 바깥에서 이곳까지 전해지도록 두드리는 소리.
“…….”
우두커니 서서 멸망의 소멸을 지켜보던 유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볼 것은 없었다. 이것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단말마도 없고 유언도 없다. 허무뿐인 놈의 최후는 마찬가지로 허무했을 뿐이다.
그래야만 했다. 놈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허무’가 아니었던 부분은 더 이상 놈에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흩어지는 불꽃에서 나온 유진은, 근처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론을 먼저 부축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크리스티나도 일으켜 세워 어깨에 얹었다.
“살아들 있냐?”
물어볼 것도 없는 말이지만, 유진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론도, 크리스티나도, 그녀의 안에 깃든 아니스도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다들 기절해 버렸으니 나가고 나서 모양이 안 살겠구만.”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뻗었다. 멀찍이서 정신을 잃고 있던 세냐가 유진 쪽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모든 동료를 챙긴 뒤에.
“안 그래?”
정신을 잃지 않은 베르무트에게 물었다.
베르무트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멸망의 심장은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그것으로 멸망의 마왕은 ‘죽었다’. 아직 바깥의 본신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없이 쏟아져 나오던 누르와 함께 소멸할 것이다.
베르무트는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오래지 않아…… 똑같이 소멸할 것을 느꼈다. 불에 타서 재가 된 멸망의 심장은, 결국에는 베르무트의 심장이기도 했다.
“……하멜.”
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다.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머지않은 끝. 하지만 베르무트는 만족을 느꼈다.
평생,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 멸망의 마왕을 죽였다. 반복되는 멸망을 끝냈다.
“고맙다.”
베르무트는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죽는 것을 바랐다. 이것 이상으로 기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동료들과 함께 싸울 수 있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로 살았던 삶에 의미가 없지 않았다는 것을 세상이 알려주었다. 스스로 용사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정작 모두가 그를 용사로 여겨주었다.
“너와…… 모두가 있었기에, 나는…… 나는, 최후에 인간으로…… 용사로 죽을 수 있게 되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베르무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부축하고 있던 모론을 조심스레 눕히고, 연이어 세냐와 크리스티나도 눕혔다.
“그들과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내게는 더 이상 시간이 남지 않았…….”
“내가 말했을 텐데.”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
“우리는 너를 구하겠다고 말했어.”
“그것은 이뤄졌다. 나는, 모두에게 구원받았…….”
“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도 했지.”
“이 이상의 행복이 있을 수 있나?”
베르무트가 씁쓸히 웃으며 물었다.
“나는 바라는 모든 것을 이뤘다. 너희와 함께 싸울 수 있었고,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렸다. 세상에게도 내 존재를 인정받았다. 그런 나는…….”
“죽으면 무슨 소용이지?”
유진은 베르무트의 앞에 털썩 앉았다.
ㅡ쿠구구궁…… 허무가 뒤흔들리고 있다. 멸망의 마왕이 죽었기에 이 공간마저 사라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것은 무시하고 베르무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다 끝났다고 유언 따위는 지껄이지 마. 우리는,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는 언제나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지.”
고마운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불가능하다. 베르무트는 천천히 재가 되어가는 몸을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라……. 그래. 한 번 죽었고, 많은 미련을 두었던 네게는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
“정말로 그러냐?”
유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짓궂은 질문을 하는군.”
베르무트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너지는 허무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미련이 없을 수는…… 없지. 초연하고 싶어도 결국에는 미련이 남아.”
“어떤?”
“……나로 인해 존재했다는 세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해버리는 것만으로도 미련이 강해진다. 결국 동료들과 함께 가지 못한다는 것이 미련이 되어 사무친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들을 직접 듣고 싶다. 그리고…….”
“그리고, 뭐?”
읊조린 말들에 유진의 뺨이 씰룩거렸다.
슬픔을 떨치기 위해 억지로 짓는 미소일까. 저 짓궂은 재촉마저 하멜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마지막 순간까지 저럴 필요가 있나? 순간 베르무트는 진심으로 그런 의문을 느꼈다. 최소한 베르무트는, 하멜이 죽는 순간에 슬퍼해 주었으니.
“……과거, 우리가 마경에서 떠들던…… ‘나중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고 싶다. 평화로이 여행을 다니는 것도, 설원의 온천에 가보는 것도…….”
“죽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지.”
“그래.”
결국 말해 버렸다.
“죽고 싶지 않다.”
유진은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는 씩 웃더니 불쑥 손을 뻗어 베르무트의 오른손을 거머쥐었다.
“그렇단다.”
그 말은 베르무트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베르무트는 흠칫 놀라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 손에는 낡은 사슬이 쥐어져 있었다.
“계약이었지.”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네게 물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철그럭거리는 사슬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멸망과 함께 죽기를 바라느냐고.”
베르무트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유폐의 마왕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유진과 동료들에게 패배하고, 며칠 동안이나 멸망을 붙들었다.
그로 인해 유폐의 마왕은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지쳐 있었다. 하지만 지금 유폐의 마왕에게는 그런 기색이 덜했다.
그는 스스로 걸었다. 등 뒤에 사슬의 망토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유폐의 마왕이 손에는 하나의 사슬이 쥐어져 있었다.
“너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모두와 함께 멸망을 죽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유폐의 마왕이 웃었다.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유폐의 마왕이 사슬을 천천히 잡아끌었다. 그 사슬은 베르무트가 손에 쥔 사슬과 연결되어 있었다.
“너는 검, 이라고 대답했고, 나는 검을 주었다.”
베르무트의 육체에 심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육체는 멸망과 함께 죽었고, 소멸해 가고 있다.
“신이 그러하듯 마왕은 바람을 이뤄주지. 대가를 바친다면 말이다.”
마왕이 바라는 대가는 오직 하나. 영혼뿐이다.
“분신으로 태어난 네 육체는 멸망의 마왕과 함께 죽는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던 용사는. 네가 ‘다르다’고 결정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혼은- 계약의 대가로, 나, 유폐의 마왕이 갖는다.”
이 계약은 베르무트의 의지에 달렸던 것이다.
베르무트가 자신의 존재를 끝까지 멸망의 분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면. 멸망의 마왕과 함께 죽는 것을 바랐다면. 그랬더라면 베르무트의 혼은 완전하게 독립되지 못했을 것이고, 계약의 사슬은 결코 베르무트의 혼을 묶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계약의 사슬은.
멸망의 분신이 아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영혼과 묶여 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살아라.”
유진은 재가 되는 베르무트의 가슴을 툭 밀면서 웃었다.
“함께 돌아가기로 했잖냐.”
빌어먹을 환생 613화
영혼을 단단히 묶은 사슬을 느꼈다. 이윽고 베르무트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멸망의 분신으로 태어난 육체는 멸망의 마왕과 함께 소멸한다.
하지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다. 그 영혼은멸망의 분신이 아니게 되었다. 본래라면 육체와 함께 소멸을 맞이해야겠지만, ‘계약’으로 인해 영혼이 사슬에 묶여 버렸다.
“처음부터…….”
베르무트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처음부터, 이것을 노렸나?”
“아니.”
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널 죽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간절히 바라면 무언가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지.”
모든 것을 안배했던 것은 아니다. 유진은 베르무트가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고, 전투가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간절한 바람이라는 것이 방법을 만든 거다. 내가 바랐고, 네가 바랐고…… 모두가 바랐지.”
유진은 고개를 돌려 머나먼 저편을 보았다.
그가 말하는 ‘모두’는 멸망의 마왕에 맞서는 모두였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을 잊지 않는 이들. 그를 줄곧 용사라고 여기던 이들. 멍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기적이군.”
기적, 기적이라. 베르무트는 내뱉은 단어를 되뇌며 고개를 숙였다.
베르무트에게 있어서 ‘기적’이란 언제나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라는 존재를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듭된 실패와 300년의 고독은- 그 ‘기적’이라는 말에 염증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베르무트는 기적을 희망이나 구원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바란들, 정작 자신은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기에.
“유폐의 마왕.”
베르무트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은 가까운 곳에 서서 베르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네 권속으로 살게 되는 건가?”
당연히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왕과 계약을 맺고, 영혼을 건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베르무트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마왕이 해방할 때까지 영혼이 박제될 수도 있고, 마왕의 격에 따라서 권속으로 새로이 태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된 영혼에 자유는 없다.
“아니.”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나는 널 권속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럼?”
“줄곧.”
유폐의 마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너지는 허무의 하늘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줄곧, 무엇을 바랐는지. 그것은 베르무트, 네가 잘 알지 않나.”
“…….”
“오늘.”
유폐의 마왕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몇 번이나 절망하여 마모될 대로 마모된 유폐의 마왕조차도, 지금 이 순간 몰려오는 감정은 버겁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간절하게 바라왔기에. 그렇게 바라면서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잠시 침묵하며 눈을 감았다.
“……오늘…… 이 세상에서, 멸망의 마왕과 유폐의 마왕은 죽는다.”
언젠가.
언젠가 멸망의 마왕이 죽을 것을 기대하며 살았다. 그것을 바라며 세상을 몇 번이나 다음으로 넘겼다. 자신은 절대로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었기에. 그래서 멸망에 앞서 세상을 시험할 대마왕이 되었다.
“세상은 더 이상 다음으로 넘어갈 이유가 없다. 내가,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
중얼거림 뒤에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낮췄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베르무트와 시선을 마주하며 속삭였다.
“나는 평생 죽음을 바랐지. 그리고…… 이제야 죽을 수 있게 됐어. 베르무트, 너는 무엇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나는 네 혼을 권속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고, 너를 거느리며 앞으로 더 살 생각이 없으니까.”
“…….”
“오늘 나는 죽고, 계약을 맺은 네 혼은…… 내 육체에 깃든다.”
돌아온 대답에 베르무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것뿐이다. 베르무트, 네게 마왕의 좌를 남긴다는 뜻은 아니다. 한 줌의 마력도 남지 않은 내 육체가, 너의 혼이 깃들 그릇이 될 뿐이지.”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내 육체가 그릇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어쩔 수 없고 최선이라는 것은 너도 알겠지.”
멸망의 분신이 아니게 되었다고 해도 베르무트의 영혼은 특별하다.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그릇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베르무트에게 맞춰 그릇을 새로 만들어야 하나? 전례는 있다. 아멜리아 머윈이 만들었던 하멜의 데스나이트. 본래의 시체를 잃고서도 썩 잘 맞는 육체를 새로 만들었었다.
하지만 혼의 크기가 다르다. 아무리 특별한 그릇을 준비한들 베르무트의 혼에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육체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베르무트 본인부터가 다른 인간의 몸을 빼앗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예 죽어버리고, 나중에 환생하는 것은? 그것은 논의할 가치도 없다.
모두가 바라는 것은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충분한가?”
잠시 침묵하던 베르무트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안다. 마다할 처지도 아니다. 그런데도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유폐의 마왕. 당신이 지금을…… 얼마나 고대하였는지는 알고 있지만, 정말로 만족하고서 죽을 수 있는 건가?”
“미련 따위 있을 것 같나?”
유폐의 마왕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내게 있어 삶이란 지긋지긋한 것이었지. 이제 와서 가벼워진 처지로 새 삶을 즐기겠다는 생각은 없다. 어쩌면, 아니, 분명하게 세상은…… 내가 보았던 것과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런 세상을 내가 굳이 볼 필요가 있나?”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나와는 다른 신념을 가졌다. 나와는 다른 미래를 선택했다. 그것을 관철하여 나를 쓰러트리고, 멸망의 마왕을 죽였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승자인 너희가 누려야 할 것이며, 패자인 나는…….”
철그럭. 베르무트와 연결된 사슬이 유폐의 마왕 쪽으로 이끌렸다.
“이곳에서 죽도록 하마.”
베르무트는 더 이상 유폐의 마왕의 뜻을 묻지 않았다. 최초의 용사이자 세상을 위해 대마왕이 되었던 그는, 이 모든 것은 만족하고 안식을 바라고 있다. 그 의지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유폐의 마왕의 대답에는 어떠한 기만도 들어 있지 않다.
“알았다.”
베르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슬을 붙잡았다.
“유폐의 마왕. 나는 그 이름을 버리고, 네 육체에 깃들어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로 살겠다.”
그 대답에 흔들림은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의 환한 금색 눈동자를 보고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먼…….
아주 먼, 과거에, 알았던 얼굴을…… 대입하지는 않았다. 한때 유폐의 마왕이 친애하여 벗으로 두었던 남자는 우연한 재앙으로서 죽어 사라졌다. 지금 앞에 있는 것은 300년 전에 세상을 구하고, 오늘 동료들과 함께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린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
“베르무트.”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바라는 삶을 살기를 기원하지.”
설마 그 유폐의 마왕에게서 덕담을 듣게 될 줄이야. 베르무트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멸망과 함께 죽은 육체가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유폐의 마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유진을 응시했다. 그는 사슬을 통해 넘어오는 베르무트의 혼을 육체란 그릇의 안으로 인도하며 말을 이었다.
“멸망의 마왕을…… 죽여주어서.”
유진은 묵묵히 유페의 마왕을 응시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유폐의 마왕이 허튼짓을 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유폐의 마왕에게는 배신할 이유가 없다. 최후의 최후에 무언가 미련이라도 생겨서 삶에 집착한다면, 그 자체가 유폐의 마왕이 살아온 영겁과 추구한 신념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유진은, 그것을 확신했다.
“내가 죽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유폐의 마왕은 만족뿐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련도, 집착도 없는 대답이었다.
“안식을.”
유진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지옥에나 떨어져라.”
영겁을 살아온 대마왕. 세상을 구하기를 바랐다. 구할 수 없음에 절망하고 다음을 반복했다. 수많은, 정말로 수많은 목숨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멸망의 마왕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유폐의 마왕에 의해 죽은 존재도 세상을 가득 채울 만하다.
그래서 유진은 안식을 바라지 않았다. 마왕이 누울 곳은 오직 지옥뿐이다.
“그러기를 바라지.”
유폐의 마왕도 똑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ㅡ쿠구구궁…….
대답을 마지막으로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푹 숙인 유폐의 마왕에게 생기(生氣)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은 모론과 세냐, 성녀들을 가까이에 두고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멸망이 무너지고 있다. 머지않아 이곳은 완전히 사라지고, 유진과 동료들은 밖으로 나가게 된다.
“나 혼자 서 있으면 진짜 모양이 안 사는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다리를 힐긋 보았다. 다행인 것은, 멸망의 마왕이 죽은 덕에 다리가 재생되었다는 것.
아마 밖으로 나갔을 때의 모습이 신화이자 전설이 되어 길이길이 전해지게 될 텐데, 그 순간에 외다리로 엉거주춤 섰다가는 후대에 남을 조각상도 외다리로 만들어질 것이고, 나중에 천 년쯤 흐르면 우둔한 하멜이나 찬란한 유진이 아닌, 외다리 유진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른다.
“야, 좀 일어나 봐.”
유진은 가까이 누운 모론의 뺨을 철썩철썩 때렸다.
기절한 세 명을 부축하고 혼자 멀쩡히 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싫다. 그러고 싶지 않다. 유치한 고집이지만,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으윽…….”
몇 번 더 따귀를 후려치고 나니 모론이 입을 벌려 앓는 소리를 냈다. 유진은 환히 웃으며 모론을 억지로 앉힌 뒤에, 세냐의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 아파…….”
열 대쯤 때리고 나니 세냐도 정신을 차렸다. 멸망의 마왕이 마력과 함께 소멸한 덕에 다들 정신을 차리는 것도 빨랐다. 유진은 흐릿한 눈을 껌벅이는 세냐도 앉혀놓고, 마지막으로 크리스티나의 뺨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이, 일어나 있습니다.”
이번에는 따귀를 때릴 필요가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재빨리 눈을 뜨고서 유진의 손을 가로막았다.
“아…… 아니스 님도 제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유진 님, 제 뺨은 때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턱이 아프다…….”
우둑, 우두둑. 삐걱거리는 턱을 끼워 맞추며 모론이 중얼거렸다.
“……베르무트!”
퉁퉁 부은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던 세냐가 꽥 비명을 질렀다.
“베르무트, 어딨어?!”
“그거 말고 물어볼 것이 더 있지 않냐? 멸망의 마왕이 어떻게 됐는지…….”
“네가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어련히 잘 죽였겠지! 그래서 베르무트는?!”
“넌 열심히 싸워서 멸망을 쓰러트린 나보다 베르무트가 더 걱정되냐?”
“누가 들으면 지만 열심히 싸운 줄 알겠네.”
세냐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그냥 싸우면 진즉에 싸웠을 것을, 우리가 왜 개고생을 사서 더 했는데?! 베르무트 구하려고 한 것 아냐! 네가! 베르무트 구하고 싶다며! 그런데 그 베르무트 어딨냐고 묻는 것이 뭐 잘못됐어?”
“바로 앞에 있는 내 안부보다 베르무트를 먼저 찾으니까 그냥 막 짜증이 나네…….”
카악, 퉤. 유진은 고개를 돌려 침까지 뱉으면서 투덜거렸다.
“그거야 네가 멀쩡하게 내 앞에 있어서…… 아니, 너 설마…….”
세냐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너 설마 질투해?”
“친구끼리 질투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다.”
“질투하는 거 맞는 거 같은데?”
“내가 씨-발 질투를 왜 해? 너 베르무트 좋아하냐?”
“친구로서는 좋아하지.”
“좋아해? 좋아한다고? 이런 개…….”
“야! 그럼 친구로서 싫어해? 그럼 너는 베르무트 싫어?”
“싫지, 존나게 싫어, 개새끼. 여기 나가면 진짜 언제 한 번 날 잡고서 두들겨 패버릴…….”
유진은 하던 말을 뚝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머리를 푹 숙이고 침묵하고 있던 ‘유폐의 마왕’에게서 호흡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호흡을 느낀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유폐의 마왕이 저희 앞에서 이러고 앉아 있는 겁니까?”
“왜. 이쯤 되니 죽기 싫다고 친한 척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아니스와 세냐가 말을 주고받으며 이죽댔다.
-스르륵……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유폐의 마왕의 머리색이 바뀌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잿빛으로 바뀌는 모습에 세냐와 아니스가 기겁하여 뒤로 물러섰다.
“베…… 베르무트?”
모론이 더듬거리며 그 이름을 불렀다.
뚜두둑…… 유폐의 마왕의 육체가 새로이 깃든 영혼에 맞게 변형했다. 고개를 든 베르무트는 몇 번 눈을 깜빡인 뒤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하…….”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목소리조차도 모두가 아는 베르무트의 것이었다.
“베르무트!”
모론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베르무트를 끌어안았다.
“어디부터 들었냐?”
기뻐서 씩 웃기는 했지만, 유진은 일단 그것을 물어보았다.
“처음부터 들었다.”
“뭐, 내가 못 할 말은 안 했지.”
“대체 나를 얼마나 두들겨 패고 싶은 건가?”
베르무트는 웃으며 물었고, 유진은 대답 대신에 가운뎃손가락을 슥 들어 보였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베르무트 님이 유폐의 마왕이 되어버린 겁니까? 아, 아니,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 님이 된 것입니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세냐와 아니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유진은 대답 대신에 무릎을 짚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서봐.”
“왜?”
“주저앉은 상태로 밖에 나가 버리면 꼴사납잖아.”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당연히 중요하지.”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으름장을 놓으며 세냐와 아니스를 일으켰다.
“아니스, 일단 그 육체는 크리스티나한테 넘겨. 그리고 너는 천사로 뒤에 서 있어.”
“예?”
“설마 이 마지막까지 크리스티나 안에 숨어 있을 셈이냐?”
“그…… 그게 뭐가 나쁩니까? 저는 딱히 세상에 알려지고 싶은 마음은…….”
“내가 싫어.”
[저도 싫습니다.]
유진과 크리스티나가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가 고생한 것처럼 너도 고생했는데, 세상도 그걸 알아야 할 것 아냐?”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아니스 님 덕분입니다.]
“하…… 하지만…….”
아니스가 흔쾌히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태까지 크리스티나의 몸을 빌려 이래저래 추하다고 생각될 법한 짓을 했었는데, 이제 와서 사실은 크리스티나의 몸 안에 천사로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300년 동안 잘 구전되어 온 ‘신실한 아니스’라는 이름에 오점이 생기는 것 아닌가?
“억지로 끌어내기 전에 빨리!”
“왜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지금 이미 다 무너졌잖아!”
유진은 뻥 뚫린 천장을 가리키며 꽥 고함을 질렀다.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멸망의 마왕 본신이 소멸하면서, 바깥의 풍경이 흐릿하게 겹쳐지고 있다. 얼추 보아하니 이미 누르는 죄다 사라졌고, 모두가 이곳을 둘러싸고서 영웅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은 우리 때와는 달리 기술이 좋잖아. 나온 우리 모습들이 그대로 마법으로 추출되어서 세상에 알려질 거야. 사진이 되어서 신문이건 중계건 뭐건.”
“여기까지 와서 공명심을……!”
“야! 내가 나만 좋자고 이러냐? 우리 모두 다 같이! 돌아왔다는! 그걸 남기고 싶은 거잖아!”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하게 할 줄이야! 부끄럽고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즉에 말을 그렇게 할 것이지……!”
[아아, 유진 님, 어쩜 그리도 마음이 아름다우신지요……!]
크리스티나의 환희에는 아니스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스는 진심으로 하멜이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육체의 주도권을 크리스티나에게 넘긴 뒤, 천사의 모습이 되어 그 뒤를 날았다.
“……으흠…….”
세냐는 헛기침을 뱉으면서 은근슬쩍 유진의 옆에 달라붙었다. 자연히 그 반대편에 서려 했던 크리스티나는 짧은 웃음을 터트리곤 세냐의 옆에 섰다.
[베르무트 님.]
아니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무트의 이름을 불렀다.
[하멜의 곁에 서시지요.]
“왜 내 옆이야?”
[베르무트 님을 구하겠다고 이토록 고생했는데,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구했으며, 베르무트 님마저 구해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건 그래.”
유진은 아직까지 주저앉아 있는 베르무트의 몸을 일으켰다.
“도끼를 들어야 하나?”
베르무트의 옆에 선 모론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도끼가 없다.”
“도끼는 뭐 하러 들어? 누구 죽일 것도 아닌데.”
“그러는 하멜, 너도 누구 죽일 것도 아닌데 신검은 왜 꺼내 쥐고 있나?”
“내가 가운데잖아. 검이라도 높이 들고 있어야…….”
“하멜,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네가 시무인에 남긴 신상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로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뿌득. 유진의 이빨 사이에서 소리가 튀었다.
“그러는 너는 네가 왕국 수도에 남긴 석상은 안 촌스러운 줄 알아? 씨X 나는 왜 끼워 넣었는데?”
“네 희생을 기리고자 수도의 이름도 네 이름을 따서 지었다.”
“루하르에 있는 네 동상들! 도끼 높이 든 거! 그거도 존나 촌스러워!”
“그게 그거니까 조용히들 하지?”
“지는 아닌 줄 아네, 야! 세냐, 그 녹색 광장 말이야. 너도 거기서 지팡이 쳐들고 있잖아!”
“내가 모델로 선 적은 없어! 자기들이 알아서 만든 걸 왜 나한테 지랄…….”
“그만.”
듣다 못한 크리스티나가 내뱉었다. 그녀는 점점 짙게 보이는 바깥의 풍경을 응시하면서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어깨동무라도 하시죠.”
“……어깨동무?”
“예. 바라던 대로 함께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크리스티나가 몸소 시범을 보였다. 세냐의 어깨에 걸치며 넘어간 팔이 유진의 등허리를 부드러이 쓸었다. 유진은 부르르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일단 손을 들어 세냐의 어깨를 감쌌다.
[조금 더 붙어야 합니다.]
아니스는 슬쩍 몸을 기울여 세냐의 뒤에 섰다. 그녀는 어깨동무를 하는 대신 유진과 크리스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졸지에 세냐는 그 가운데에 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음…….”
베르무트도 유진의 목을 넘어 어깨를 감싸야 할지, 아니면 서 있는 왼쪽 어깨에만 살짝 손을 얹을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하며 유진의 반대편을 힐긋거리다가 크리스티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가.”
베르무트는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는 군말 없이 유진의 어깨에만 살짝 손을 얹었다. 모론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합니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완벽한 것 맞아?’
유진과 크리스티나의 사이에 껴서, 등 뒤에 아니스까지 둔 세냐만이 의문을 느꼈다.
‘이건 망했군.’
커다란 환호성. 완전히 밖으로 나와버렸다. 유진은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생각했다.
이 모습이 사진으로 남는다면.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용사와 동료들일 것이다.
빌어먹을 환생 614화
끝없이 쏟아져 나오던 누르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멎었고, 그 뒤에는 모두가 똑같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득한 시체들과 함께 평원을, 설산을 가득 메우던 모든 누르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전선을 유지하며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이들도, 전선이 밀려나지 않도록 뒤에서 받쳐주던 이들도, 단 한 마리도 벗어나지 않게끔 하늘을, 땅을, 설원을 장악하던 모두가 갑작스러운 누르의 소멸에 따른 이유를 이해하는 것에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끝?”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전장 여기저기서 똑같은 중얼거림이 나왔다. 이윽고 중얼거림은 커다란 함성이 되었다. 살아남은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끝났다.
정말로 끝났다. 이름처럼 세상을 멸망시킬 것처럼 나타난 마왕의 군세가 완전히 사라졌다.
환호성을 지르던 모두가 멸망의 마왕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더 이상 기괴하고 불길한 모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어지럽히는 색은 어느새 희미해져 있고, 공포를 느끼게 하는 마력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허억…… 헉…….”
카르멘은 끊어질 것만 같은 의식을 간신히 붙잡았다.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고 호흡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카르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헤븐 제노사이드는 진즉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에게 용사자라는 이명을 주었던 갑옷도 마찬가지다. 무기가 그 꼴이 되었으니 맨손도 무사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주먹이 쥐어지지도 않는 피범벅의 손을 축 늘어트리고서 멸망의 마왕을 보았다.
점점 희미해지는 색에서 흐릿한 인영들이 보였다. 다섯…… 아니, 여섯? 카르멘은 어지러운 눈에 힘을 주어 색을 꿰뚫어 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왜 여섯 명인 겁니까?”
부러진 검을 간신히 쥐고 있던 길레이드가 물었다. 웩웩거리며 피를 토하던 알체스터도 고개를 들어서 앞을 보았다.
“……유폐의 마왕이 저 안에 있었지요.”
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 들어간 영웅들은 유진을 포함해서 넷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세냐 메르데인, 모론 루하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바라던 대로 위대한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저 안에 서 있어야 할 것은 다섯 명과…….
도저히 영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주일 전에 스스로를 바쳐 멸망의 마왕을 일시적으로 봉인했던 유폐의 마왕까지. 그렇게 해서 여섯 명인 건가?
머릿속으로 셈을 하던 기온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자릿수의 이름조차 제대로 셈이 되지 않을 만큼 정신상태가 좋지 않았다.
“끄, 끝난 것은 맞겠죠?”
기온은 절실히 바랐고, 그것은 모두의 바람이기도 했다.
“……왜 유폐의 마왕이 저토록 가까이 붙어 있는 겁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로베리안이 의문을 표했다.
타당한 의문이었다. 계속해서 옅어지고는 있지만, 색 너머에서 영웅들의 모습은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그림자일지라도 저들이 ‘어떻게’ 서 있는지는 보였다.
“어깨동무?”
이미 주저앉았던 이바타가 중얼거렸다. 어깨동무? 그 말에 라파엘로가 아폴로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신께서 마왕을 복속시키셨도다!”
라파엘로는 벅차오르는 신앙심을 견디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복속이라니? 대뜸 튀어나온 외침에 모두가 두 눈을 얇게 뜨고 그림자를 응시했다.
한쪽이 무릎이라도 꿇고 있으면 모를까……. 당장 눈에 보이는 여섯 명의 그림자 중에서 누구 하나 무릎을 꿇은 사람은 없었다. 아마 라파엘로는 고통과 피로로 인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저 날개는 크리스티나 성녀일 테고…… 저 거구는 모론 님…….’
‘다른 한 명은 누구지?’
아니스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각자 추측에 들어갔다.
“어쩌면 안에서 유폐의 마왕과 친해질 걸 수도…….”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뭐가 말이 안 돼? 이 정도 싸웠으면 전우애가 싹이 틀 수도 있지…….”
히리두스가 핀잔을 주었지만 벌러덩 누워 있던 멜키스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보인다…….”
더 이상 추측할 필요가 사라졌다. 보이는 것들이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짝짝짝.”
그 소리를 낸 것은 카르멘이었다.
그녀는 너덜거리는 자신의 손으로는 도저히 원하는 만큼의 박수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직접 입을 벌려서 목소리를 냈다. 길레이드는 바로 옆에서 카르멘이 입으로 박수 소리를 내는 것에 흠칫 놀랐지만, 그것을 도저히 기행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카르멘 님……!”
오히려 길레이드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과 함께 감동해 버렸다. 이 순간에 가장 가슴 아픈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카르멘일 것이다. 세상이 울릴 만큼 큰소리로 박수를 치고 싶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길레이드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번쩍 양팔을 들었다.
짝, 짝, 짝!
양팔을 크게 벌리면서 치는 박수가 전장의 하늘을 울렸다. 뒤이어 기온과 길포드가, 그리고 라이언하트 전원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박수는 순식간에 전장 모두에게 전염되었다. 전장의 모두가 소멸하는 멸망의 마왕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박수를 쳤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함성에서 맴도는 이름은 통일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유진 라이언하트를, 누군가는 세냐 메르데인을, 누군가는 모론 루하르를, 누군가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외쳤다. 그렇게 외치는 이름 중에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이름도 있었다.
박수갈채와 환호성 속에서 영웅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와아아아…….
짝짝짝짝…….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점점 멎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나타난 영웅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어린아이도 지금 영웅들의 모습을 보고 생각할 것이다.
왜 저러고 있는 건가?
와아아……!
짝짝짝……!
하지만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물을 수는 없었다. 의문과 당혹보다 감격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서서히 멎어가던 박수갈채와 환호성에 다시 힘이 실렸다.
“……그…… 그만.”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든 것은 오히려 유진이었다. 그는 경직된 미소를 지우고, 양옆에 얹고 있던 팔을 내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베르무트가 옆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세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고집스레 유진의 어깨를 안았고, 세냐를 사이에 두고 있던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셋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니, 앞으로 천 년은 족히 전해질 사진에서 이 관계를 확실하게 선언해 두고 싶었다.
“야 좀.”
“지가 하자고 해놓고서 왜 빼고 지랄이야?”
“내가 언제 이렇게 하쟀냐?”
“우리가 부끄러운 겁니까?”
“아니, 뭔 개소리야? 쟤들 표정 안 보여?”
“저는 유진 님의 얼굴만 보입니다.”
크리스티나는 뺨을 살짝 붉히며 속삭였다.
분명 달콤한 말인데 왜 이리도 몸이 오싹한 것일까. 유진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슬쩍 옆으로 물러섰다.
“크흠…….”
‘그만’이라고 말한 덕에 환호성과 박수는 멎었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것 이상으로 무거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가까이 있는 간부들 중에서 몸이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상처를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유진과 동료들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사방을 빼곡하게 둘러싼 많은 사람도 간절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멸망의 마왕은 정말로 죽었는가?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그 외에 많은…… 유진은 슬쩍 시선을 움직였다.
라이언하트의 모두가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아니, 절반 넘게 이미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그들은 유진과 베르무트를 보면서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삼켰다.
“……야.”
유진은 슬쩍 옆을 보았다. 뭐라고 말이나 한마디 하라고 건넬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말 이상으로 베르무트의 표정이 진실했다. 금색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아른거렸고,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어떤 기분일까.
베르무트에게 있어서 ‘라이언하트 가문’이란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다. ‘용사’도, ‘위대한 베르무트’라는 이름을 즐겁게 느꼈던 적도 없다.
하지만 시커먼 멸망의 심장 안에서 베르무트가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과의 대화 때문만은 아니다. 저들 모두가 베르무트의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입니다.”
베르무트는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
300년 전.
약속을 맺어 전쟁을 끝낸 후, 키옐 제국으로 돌아온 ‘위대한 베르무트’는 다른 동료들이 그러하듯, 연회나 사교회 따위는 일절 즐기지 않았다.
빠른 결혼과 수많은 첩을 들였지만 ‘가문’을 벗어난 추문 따위는 일절 없었다. 마치 강박처럼 가문을 키우고, 우클라스 산에 흑사자 성을 세워서 국경을 노려보던 키옐의 대공. 위대한 베르무트가 아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남자가 어떠한 인간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철혈(鐵血)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남자.
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고, 라이언하트도 마찬가지다. 그-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먼 후손들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다.
“나를.”
베르무트는 힘겹게 말을 이으며 눈을 감았다. 아른거리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잊지 않아주어서…… 고맙습니다.”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감히 물을 수는 없었다.
카르멘은 눈물을 흘리며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베르무트에 의해 시작된 라이언하트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가슴에 문양에 손을 얹으며 베르무트에게 예를 표했다.
모두를 따라서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하나.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슴 대신 베르무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어디 보자…….”
무엇부터 말해야 하지? 유진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 유진이 가장 절실히 바라는 것은 깨끗이 씻고, 누가 들어오지 않게 문을 잠그고, 침대에서 푹 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자야 할 것 아닌가.
“보다시피, 멸망의 마왕은 죽였습니다.”
와아아아! 당연히 환호성이 터질 수밖에 없는 선언이었다. 유진은 몇 분 정도 진득하게 환호성을 들어주었다.
“유폐의 마왕도 죽었습니다.”
유폐의 마왕은 어디로 갔는가? 유진은 나중에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미리 선언했다.
“멸망의 마왕을 붙잡은 것으로 유폐의 마왕은 모든 힘이 다했고…… 우리가 안에 돌입했을 시점에서 놈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맙다고 말하고 죽었죠.”
긴 세월 대마왕으로, 그리고 헬무드 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해 온 유폐의 마왕의 죽음. 비록 그 전에 전쟁에서 패배해 황제의 직위를 반납하고, 승자에게 복종하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유폐의 마왕의 진짜 ‘죽음’은, 모두의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 어……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정체에 대해 추측할 수밖에 없게 만든 여섯 번째.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뒤에서 떠 있는 아니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얘는 아니스입니다. 아니스 슬리우드.”
“빛이 저를 보내주셨습니다.”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멎은 전장. 아니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녀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라파엘로와 성직자들을 의식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오래전부터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에야 세상에 내려와 기적과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아아……!”
“오래전 죽은 제가 천사가 되어 세상에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의 기도가 간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영혼의 자매라고 할 수 있을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의 믿음이 신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00년’ 만에 만나게 된 벗들이 기적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아니스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거짓말을 떠벌렸다.
그녀는 자신이 진즉부터 크리스티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절대로 세상에 알릴 생각이 없었다. 여태까지 크리스티나의 몸을 통해 벌였던, 가령, 나이트마치 때의 광신 행위와 유진과 관련된 추문 등. 그것들을 일절 끌어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니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미소를 유지하면서, 크리스티나에게 모든 추태를 떠넘겼다.
“아아, 역시……! 제 머릿속에 울리던 목소리는 아니스 님의 것이었군요!”
대놓고 오물을 독박으로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 이미 어엿한 뱀으로 자란 크리스티나는 혼자 죽을 생각이 없었다.
“저는 몇 번이나 아니스 님의 목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아아, 역시, 역시 그랬던 것이군요. 제가 저답지 않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가 아니스 님의 목소리에 홀렸기 때문이었군요……!”
“홀리다니……! 저는 당신을 홀리는 계시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아니스 님!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제 입술이 저도 모르게 열려 당신의 계시를 말하게 하지 마소서.”
“무슨 말을 하려는…….”
“아니스 님이 누구의 침대에 눕기를, 누구의 온기를 원하였는지를…… 아아, 아아아!”
크리스티나는 말을 하다 말고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고, 아니스는 비명을 지르며 크리스티나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게 끝입니다.”
더 이상 통제가 힘들 정도로 웅성거림이 번지고 있다. 유진은 필연적인 혼란을 느끼고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들 힘드시겠지만…… 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멸망에 맞서 싸운 모두가 힘든 것은 당연한바.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멸망의 마왕의 안에서, 놈의 숨통을 끊은 우리들 아닌가?
유진은 힐긋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까 만든 태양이 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차마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라이미르아가 있었다.
유진은 슬쩍 세냐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생각이 일치했다. 그 뒤에, 유진은 라이미르아와 시선을 맞대고서 속삭였다.
“떨어트려.”
등 뒤에 태운 마법사와 성직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라이미르아는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길게 머뭇거리지 않고 유진의 뜻을 따랐다.
놀란 비명과 함께 마법사와 성직자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물론 땅에 처박을 수는 없으니, 뒤따른 용언과 마법이 떨어지는 이들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것과 동시에 유진은 신력을 해방했다.
“뒷수습은 황제랑 교황이랑 다른 높은 분들이 알아서 하라 하고.”
태양을 통해서 쏟아지는 신력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 화악! 세냐가 펼친 마법이 유진과 동료들을 라이미르아의 위로 이동시켰다.
“자, 잠깐! 유진!”
길레이드가 기겁하며 손을 뻗었지만, 유진은 그 말을 무시했다.
“가자.”
“어, 어디로 가느냔 말이니라?”
“여기만 아니면 돼.”
한 달쯤 뒤에 슬쩍 돌아오면 수습은 끝났겠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벌러덩 누웠다.
빌어먹을 환생 615화
“……허어…….”
과연 드래곤은 빨랐다. 넓은 전장이 순식간에 멀어지기 시작했다. 베르무트는 이쪽을 향해 계속해서 들려오는 고함을 미처 떨치지 못하고 힐긋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저기 더 있고 싶었어?”
“아니…… 그것은 아니다만…….”
숨긴 것이 많고, 안고 있는 괴로움도 많았지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남자는 그리 사교성이 훌륭한 성격은 아니다.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눈물을 흘려버렸지만, ‘그다음’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는 베르무트에게도 굉장한 난제였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뜸 유진과 동료들에게 이끌려 드래곤의 등에 타버렸다.
드래곤…… 베르무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타고 있는 것이 ‘드래곤’이라 생각하니 더욱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멸망의 마왕이 드래곤을 거의 몰살시키지 않았던가? 물론 베르무트는 더 이상 자신을 멸망의 분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그 일에 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300년 전에도 그랬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베르무트의 관점일 뿐이잖은가. 몰살당해버린 드래곤 쪽에서는 원한을 가질 수 있는 일이지 않나?
그리고 드래곤뿐만이 아니다. 베르무트는 세냐와 유진 사이에 앉아서 헤헤 웃는 자그마한 소녀를 보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소녀는…… 세냐, 네가 만들었던 사역마였지?”
“저는 메르라고 해요.”
메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베르무트를 향해 눈을 빛냈다.
“이름은 메르고, 성은 일단 아직은 메르데인이에요. 메르 메르데인이죠.”
“아직……?”
“조만간 메르 라이언하트가 될 거예요.”
메르가 활짝 웃으며 유진과 세냐의 팔을 끌어안았다. 유진은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한 번 감았고, 세냐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궜다.
“그렇구나.”
세냐가 하멜에게 품었던 감정은 300년 전부터 모두가 알던 사실. 베르무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드래곤은…… 그…… 300년 전에 생존한 드래곤인가?”
“아니.”
베르무트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안배하고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진은 감았던 눈을 뜨고서 라이미르아의 비늘을 어루만져 주었다.
“라이자키아 기억나냐?”
“잊을 리가 있나.
마룡 라이자키아. 헬무드가 제국이 되고 난 뒤에도 인간을 배척하고, 공작위를 받은 뒤에는, ‘흑룡공’을 자처한…… 인간 혐오의 극에 달한 드래곤. 그 시절에 베르무트는 ‘나중’을 위해서 라이자키아를 미리 죽여놓을지 말지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
“얘는 라이자키아의 딸이야.”
[오오, 위대한 베르무트시여, 본녀는 라이미르아라고 하느니라!]
동화책에서 몇 번이나 읽었던 위대한 베르무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에 라이미르아가 밝은 목소리를 냈다. 유진과 라이미르아의 대답에 베르무트의 뺨이 씰룩거렸다. 그는 지금 몇 가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베르무트는 마족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불렸는지 알고 있다. ‘절망’의 베르무트. 흉흉한 별명이 붙을 만큼 마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자신을, 왜 라이자키아의 딸이 저토록 경애를 표하는 것일까.
그리고…….
“라이자키아는 죽지 않았나?”
“내가 죽였지.”
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흑룡공은 죽을 만했느니라.]
라이미르아도 태연히 대답했다. 애초에 혈육의 정이랄 것도 없었던데다, 라이미르아는 흑룡공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안다.
“그렇군…….”
베르무트는 억지로 이해했다. 당장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등에 태우고 있는데, 종족을 몰살시킨 대상의 분신을 등에 태우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음…… 하멜, 저들이 우리를 아직까지 부르고 있다만.”
“귀도 밝다, 이미 한참 멀어졌는데도 들리냐?”
“저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도 있다.”
베르무트가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베르무트의 말은 사실이었다. 멜키스를 필두로 한 몇몇이 저 멀리서 추격해 오고 있었다. 유진은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서 세냐에게 눈짓을 주었다.
“떨어트려.”
“응.”
추격자의 선봉이 멜키스라는 것은 세냐로 하여금 망설임을 버리게 해주었다. 세냐가 쏘아낸 빛이 멜키스에게 작렬했다. 끼아아악…… 기다란 비명과 함께 멜키스가 아래로 추락했다.
“저래도 되는 건가?”
베르무트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이 모든 것이 베르무트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돼.”
상식에 구애받는 것은 베르무트가 멜키스 엘하이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유진은 혀를 쯧쯧차며 베르무트의 등을 철썩 때렸다.
“내가 너 구해준 거야. 알아?”
“새삼스레 무슨…….”
“멸망의 마왕에게서 구해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수치심과…… 그런 것에서 구해줬단 말이다.”
옛날 아롯에서 멜키스와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300년 전의 영웅들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나? 마법사라면 당연히 ‘현명한 세냐’를 이야기하겠지만, 그때부터 멜키스는 별종이었다. 멜키스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영웅이 ‘위대한 베르무트’라고 대답했었다.
그 이유인즉슨, 베르무트가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란다.
세상은 위대한 베르무트를 전사와 기사라고 말하지만, 멜키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위대한 베르무트는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대정령술사다……. 멜키스가 템페스트에게 그토록 집착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무트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 온 베르무트를 실제로 만난다면? 유진은 멜키스가 어떤 광란을 일으킬지를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우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되어 있을 거야.”
유진은 더 이상 추격자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해결이라니?”
“전쟁이란 것이 이겼다! 하고 끝나냐? 수습해야 할 것 많잖아.”
“그건 당연한…….”
“뭐가 당연해! 나는 그런 거 하기 싫어. 내가 잘하는 것은 싸우는 거랑 마왕 죽이는 거지, 뒷정리나 정치…… 그런 건 질색이야.”
“저희가 현장에서 싸우는 동안 교황과 황제 등은 영토에 남아 있었지요. 이후의 고생은 그들이 맡아야 할 소임입니다.”
아니스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의 말에 동감했다. 모론과 세냐, 크리스티나도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도망친 것이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베르무트는 동료들의 얼굴을 돌아보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300년 전에는 위풍당당한 개선을 기대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나 뒈지고서 너희 하고 싶은 개선 했잖아. 안 그래?”
“어느 멍청이가 혼자 뒈져 버리는 바람에 기쁜 개선은 아니었지.”
세냐가 들으란 듯이 투덜거렸지만, 유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르무트, 너 없는 동안 나는 몇 번 비슷한 거 했거든. 질려서 하기 싫어.”
광란의 마왕을 죽였을 때도, 하우리아를 해방했을 때도. 닭살이 돋을 만큼 부끄러운 개선 행진을 했었다. 유진은 본가 구석에 처박혀 있을 플래티넘 라이온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왜? 우리 다 같이 하는 것은 처음이니까, 하고 싶고 그래?”
마왕과의 전쟁은 진짜 끝났다. 옛날부터 바랐던 대로, 모두가 함께 돌아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니.’
아쉬움은 금세 떨칠 수 있었다. 저곳에서 함께할 개선 행진은 역사적으로 가장 화려한 규모의 행진이 될 것이 틀림없었고, 행진의 선봉에는 플래티넘 라이온이 있을 것이다. 유진은 절대! 빌어먹을 플로트의 위에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하고 싶지는 않다.”
베르무트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떤 기분으로 임했느냐는 둘째치고서, 300년 전에 질리도록 참가했던 행사들은 베르무트도 질색이었다.
“저건 어떡하실 겁니까?”
아래를 살피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유폐의 마왕이 통째로 이동시킨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은 폐허가 된 채 지상에 방치되어 있다.
“밀어버리지 뭐.”
지금의 판데모니엄에 헬무드의 상징인 빌딩의 숲은 없다. 전쟁에 참전했던 마족은 유폐의 마왕이 모조리 죽여버렸기에, 저 아래에 있는 것은 생존자가 없는 을씨년스러운 유령도시일 뿐이다.
“그럼, 헬무드는?”
“영토 나누기는 좀 그런가?”
“도시 수준도 아니고 제국이다. 위치도 애매하고.”
덩치만으로 국왕이 된 것은 아니다. 모론은 턱의 수염을 어루만지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탁자에 올린다면 대륙의 왕들이 앞다투어 나이프를 들이밀겠지. 우리가 있으니 전쟁으로 발발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 틀림없다.”
“키옐 황제가 욕심이 많기는 해.”
은근히 향하는 시선들을 느낀 유진은 즉시 정색하고서 손을 고개를 저었다.
“나보고 왕 비슷한 거 하라는 말은 관둬라.”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표정이 말하고 있잖아. 난 절대 안 해. 정 필요하면 헬무드에 남은 마족들 있잖아, 걔들 중에서 한 명 뽑던가.”
“아는 마족은 있습니까?”
“있겠냐? 발자크가 죽은 게 아쉽네. 살아 있었으면 헬무드 왕이나 하라고 시켰을 텐데…….”
“나 발자크랑 약속했어.”
어느새 진지한 얼굴이 된 세냐가 입을 열었다.
“무슨 약속?”
“동화책 써주기로.”
“뭐, 전설의 발자크라는 이름 붙여주게?”
“너 어떻게 알았어?”
이죽거림을 들은 세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정말로 ‘전설의 발자크’라는 이름을 남길 생각인가. 우둔한 하멜보다는 낫지만…….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 멋진 이름이네. 죽었으니 따질 수도 없고.”
“음흉한 발자크, 이것보다는 낫잖아.”
“그냥 전설의 발자크 해라. 아무튼, 나는 헬무드 다스릴 생각 없어. 너희 중에 하고 싶은 사람 있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유진은 혹시나 싶어서 베르무트를 힐긋 보았다. 저 육체는 일단 유폐의 마왕의 것이니, 베르무트가 헬무드를 다스리는 것도 제법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싫다.”
“그럼 우리는 신경 끄도록 하자.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
마족을 통제하는 사슬은 유진이 지니고 있으니 폭동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 바벨은 조금 아쉽네.”
“바벨? 왜?”
“애니실라 님이랑 약속했거든. 바벨 선물해 드리기로.”
엘프와 드워프들에 의해 엉망이 된 라이언하트의 본가. 차마 뒤집어엎지 못하고 끙끙 앓는 애니실라에게 그런 약속을 했었다. 바벨이 통째로 붕괴해 버렸으니, 이제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게 되었다.
“새로 만들어드리지 뭐.”
“터는 봐둔 곳 있고?”
“숲이 있고 강이 흐르는…….”
근엄한 얼굴로 대답하는 유진의 옆구리에 세냐의 주먹이 꽂혔다.
“그래서 저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성직복의 안쪽에서 슬쩍 술을 꺼내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술이 꺼내진 것만으로 모두가 바짝 곁에 붙었다.
“일단 사람 없는 곳 가서 좀 쉬자.”
“술부터 꺼내 봐.”
“하멜, 당신이 전장에 나서기 전에 망토 안에 술을 챙겨놓았던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잠깐…….”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베르무트가 급히 입을 열었다.
“미리 챙겨놓았다고?”
“왜.”
“뭐 문제 있습니까?”
“나를…… 나를 구하기…… 아니, 멸망의 마왕과 싸우기 전에. 술병을 미리 챙겼다는 말 아닌가?”
“새끼, 수백 년 처박혀 있으면서 옛날 일 다 까먹었나.”
유진은 쯧쯧 혀를 찼다.
“우리는 옛날에 안 그랬냐? 마왕이랑 싸우기 전에 술은 항상 챙기고 갔잖아.”
“죽기 전에 마시든가, 죽이고 나서 마시든가.”
“그건 그렇지만…….”
베르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확실히, 옛날에는 그랬다. 하지만 세상의 존망과 동료를 구하는 마지막 싸움을 앞에 두고, 술부터 챙겨놓았다니…….
“그래서 안 마시게?”
“주면…… 마신다.”
“응, 지금은 안 줄 거야. 술판 벌일 거면 나중에 벌여. 지금은 간단하게 한 병만 나눠 먹고.”
저번의 술판은 유진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지금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술을 마셨다가는 역사가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럼…… 쉬고 나서, 어디로 갑니까?”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니스가 먼저 술병을 열었다. 아니스는 먼저 술을 한 모금 마셨고, 연이어 한 모금 더 마셨다.
“많지도 않은 술을 왜 너 혼자 두 번 먹어?”
“이 술은 크리스티나가 꺼낸 술입니다. 그리고 저는 두 모금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 한 번, 크리스티나 한 번. 알겠습니까?”
하나의 몸을 공유한다는 점은 이럴 때 좋았다.
“나는 세계수.”
세냐는 한 모금 마신 술병을 옆으로 넘겼다.
“인사는 했지만, 그래도 보고는 해야지. 그다음에는 라구르야란…… 머나먼 바다도 가고.”
깊은 잠에 든 비슈르를 떠올리며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먼 곳에서 빛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레헤인야르는 한번 살펴야 한다. 내 후손들이 그곳에 있지 않은가.”
유진에게서 넘겨받은 술병은 모론이 받았다. 그는 술을 들이켠 뒤에 베르무트에게 건네주었다.
“가능하다면 라비스타도 살피고 싶다.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눈으로 보고 싶군.”
베르무트는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라비스타. 베르무트가 200년이 넘도록 봉인되어 있던 곳. 그곳에 살며 멸망의 마왕과 계약한 마족들은 이미 소멸했고, 봉인된 마물들은 하우리아 전쟁에 동원되어서 죽었다. 이제 라비스타는 바다에 동떨어진 작은 섬일 뿐이다.
그것은 알지만 직접 봐두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베르무트, 뭐 더 하고 싶은 것 없냐?”
“하멜은 아카데미를 세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술집보다는 낫지.”
“제 꿈에 불만이 있는 겁니까?”
“멋진 꿈이라고 생각해.”
오가는 이야기들에 베르무트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은 이미 이뤘다. ‘다음’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이상 베르무트를 속박하던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멸망은 끝났다.
빌어먹을 환생 616화
후일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린 직후에 사라져 버린 영웅들의 목격담은 대륙 곳곳에서 들려왔다.
가장 먼저 레헤인야르.
“그분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왔지.”
아만 루하르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본래부터 험상궂었던 얼굴에 몇 개의 흉터가 더해져 있다. 누르의 진군을 최선봉에서 가로막으면서 입은 흉터다. 아만은 이 흉터가 영광스러운 승리의 훈장이라고 생각했기에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굉장히 힘들었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물을…… 허허, 하긴, 그건 우리만 그랬던 것이 아니지만.”
껄껄 웃으며 말하던 아만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고개를 저었다.
“마법으로 건너온 소식을 통해 멸망의 마왕이 죽었다는 것은 알았네. 그래서 기지로 돌아가던 길이었지. 위대한…… 베르무트가 돌아왔다는 것도, 그분들이 전장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음, 그래. 하지만 미리 들었어도 갑자기 앞에 내려오시니 나로서는 놀랍고 감격할 수밖에 없었지.”
아만이 막았던 곳은 대륙의 최북단. 멸망의 마왕이 강림했던 전선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그 정도 거리는 드래곤을 탈것으로 이용하고, 온갖 마법의 도움을 받는다면 몇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기는 하다.
“존경해 마다하지 않는 나의 시조께서, 내 어깨를 안으시며 말씀하시더군. 고생했다고.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이야.”
그때 아만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야. 나와 함께 선봉을 책임진 오르투스 경은 아예 눈물까지 뚝뚝 쏟았지. 아이빅은 주저앉지도 눈물도 흘리지 않았지만, 왜 그가 고집스레 하늘만 노려보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 허허, 아무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위대한 베르무트께서 말씀해 주셨지.”
고맙습니다.
“그…… 위대한 베르무트께서, 우리 모두에게 고개를 숙인 걸세. 허허, 허허허…… 음? 그다음?”
아만은 눈을 끔뻑거리며 앞을 보았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대륙에서 정보 길드 연합의 총수다. 전쟁이 끝난 지금. 정보 길드는 ‘전쟁’을 이야기로 엮어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다.
전면에서 움직이는 것은 정보 길드 연합이지만, 저 모든 것은 대륙 국가들의 동의와 협력이 있다. ‘동화책’이라는 애매한 역사만이 남은 300년 전과는 달리, 이번 전쟁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다.
그러한 약속이 있기에 루하르의 국왕인 아만이 직접 총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사실 그런 약속이 없더라도 아만은 취재에 응했을 것이다. 존경하는 영웅들에게 노고를 치하받았다. 아만은 그것을 자랑하고 싶었다.
“음…… 그…… 다음이라. 다음이랄 것은 없는데…… 우리를 치하하신 뒤, 그분들은 다시 날아가 버리셨거든. 레헤인야르의 봉우리를 넘어, 라구르야란까지 말일세. 어디로 가신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고…… 어흠, 그것보다 말일세. 나와 방어군이 얼마나 용맹하고 처절하게 설산을 지켰는지에 대해서 말해보지.”
비록 멸망의 마왕에게 직접 도끼를 처박지는 못했어도, 세상의 존망이 달린 전쟁에서 활약했다. -바로 저것 때문이다. 레헤인야르를 지키는 것은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멸망의 마왕과 직접 싸웠던 것은 아니니,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아무래도 활약상이 덜 적힐 수밖에 없는 노릇. 총수는 영웅들의 행방 외에 다른 이야기는 그리 듣고 싶지 않았지만, 흉터가 그득한 아만의 얼굴을 앞에 두고서 차마 ‘싫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남해의 시무인.
“예, 사실입니다.”
스칼리아 아니머스. 한때 그녀는 시무인을 대표하는 격랑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기사단의 꽃이자 공주 기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몇 년 전의 이야기다. 그녀는 이미 검을 내려놓고, 기사 작위도 반납했다. 그렇다고 공주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앙.
스칼리아 공주는 신앙에 빠졌다.
바로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신앙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곳 시무인은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이 최초로 ‘종교’가 된 곳이며, 수도의 광장에는 광란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돌아온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상이 세워져 있다. 스칼리아 공주는 매주, 아니, 매일 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릴 만큼 신앙적이어서, 시무인 왕족들은 언젠가 스칼리아가 진짜 ‘성녀’가 되는 것이 아닐까 기대까지 하고 있다.
“그날도 저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지요. 아, 저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전장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기사와 병사들의 가족…… 그리고 유진 님을 신앙하는 신도들과 함께였습니다.”
지금의 스칼리아는 공주 기사라고 떠받들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모아 쥐고서 말을 이었다.
“그때, 아아, 하늘에서 빛이 내려온 겁니다. 저의 신께서는 모두의 기도에 부응하고자 오셨지요.”
사실은 다를 것이다. 이미 그곳에 모인 다른 신도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유진 라이언하트는 노골적으로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고, 다른 동료들은 신상과 유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정보 길드 연합이 파악한 영웅들의 성격을 통해 추측하자면, 그들은 단순히 하늘을 지나다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놀리기 위해 내려온 것이리라.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머나먼 바다에 다녀오셨다고 말입니다. 이유……? 신의 행사에 제가 어찌 이유를 묻겠습니까?”
이후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겁니까? 조심스레 묻는 질문에 스칼리아의 얼굴이 엄격하게 바뀌었다.
“신께서는 어디에도 계시고 어디에도 없으십니다. 지금 저희가 이야기를 나누는 이곳에도 신은 계십니다. 그러한 믿음이 바로 신앙입니다.”
모른다는 말이다.
이후의 목격담은 일주일 뒤에 들려왔다.
사마르 대수림의 조란.
“정확한 일수는 듣지 못했지만, 그들은 며칠 동안 대수림에서 지냈던 모양이오. 세계수…… 엘프의 영지에서 말이지.”
대수림의 모든 부족을 일통한 조란은 이미 제국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영토를 지녔다. 하지만 저 젊은 대부족장 이바타 자하부는, 스스로 황제라 일컫지 않고 아직 ‘대부족장’이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아직 대수림 부족에 남은 ‘제국’과 ‘황제’라는 단어에 대한 반감 때문이리라.
“대륙의 왕들과의 약속으로 독대를 허락했지만…… 흐흐, 먼저 말해두지. 세계수의 위치를 묻는다면 나는 그대의 팔을 자를 것이오. 묻지 않고 그대의 쥐새끼들을 숲에 풀어놓아서, 세계수와 엘프 영지의 위치를 찾으려 든다면…… 그대들이 수군거리는 ‘야만인’의 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지.”
씩 짓는 미소와 함께 얼굴의 문신이 꿈틀거렸다.
이바타의 무력이 대륙의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란 것은 이미 전쟁에서 확인된바. 총수는 탐색을 위해 대동한 길드원들은 그대로 데리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아…… 너무 걱정은 마시오. 약속은 약속이니, 내가 만나서 들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숨기지 않을 것이오.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나의 ‘벗’, 유진에게 허락을 구했소.”
이바타는 ‘벗’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세계수에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소. 자세한 사정까지는 묻지 않았지만,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에 세계수의 큰 도움이 있었다더군.”
세계수는 대수림 원주민들과 엘프들이 숭배하는 신앙의 대상이다. 영웅들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세계수가 단순히 토속 신앙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것에 관해 내게도 당부를 남겼지. 뭐, 별것은 아니오. 숲을 아끼고 가꾸어 달라더군. 하하, 그거야 우리에게는 일상과 같은 것이지.”
일상이라? 총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보았던 광경들을 떠올랐다. 험상궂은 전사들이 묘목을 옮겨심고, 비료를 뿌리던 모습…….
“그대들이 궁금한 것은 유진과 영웅들이 어디로 갔느냐, 아니오? 하하, 나는 들어서 알고 있소. ‘벗’이니까.”
이바타는 다시 ‘벗’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들은 라비스타로 간다고 했소.”
전쟁이 끝나고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지만, 영웅들의 다음 행선지에 대해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총수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하하, 마음이 급할 테니 이해해 주지. 하지만 지금 간다고 해서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바타의 말대로였다.
부랴부랴 조란을 떠났다. 연속으로 워프 게이트를 타고서 헬무드로 넘어왔다.
문제가 많았다. 유폐의 마왕이 죽은 뒤. 헬무드는 대륙 국가들의 통제를 받고 있다. 그럴지라도 헬무드에 새로운 지도자는 필요하다. 전쟁을 거부한 온건파 마족 중에서 후보들이 나섰고, 익숙하지 않은 선거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헬무드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이전에 누리던 압도적인 기술들은 정지했고, 대부분 가게는 문을 닫았다. 각국에서 파견된 정예 기사들은 혹시 모를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거리에 서 있고, 마족 후보들은 소중한 한 표를 주십사 선거 활동을 벌이며, 그 너머에서는 인간 이민자들을 주축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마족이 아니다!
-이민자의 인권을 보장하라!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데, 더욱 총수의 머리를 아프게 한 것은- 라비스타가 헬무드에서도 으뜸가는 오지라는 것이다. 직행으로 이어진 워프 게이트도 없다. 가장 가까운 워프 게이트를 타고서도 지상을 며칠 더 이동하고, 배를 타고 바다에서 며칠을 더 이동해야만 라비스타에 도착한단다.
눈앞이 막막해질 정도지만 어쩔 수 없다. 마지막 워프 게이트를 지나고,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도시와 마을들을 지나서 바다에 도달했다.
“라비스타? 그 섬은 며칠 전에 사라졌소.”
배를 띄우려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실상의 파악은 의외의 장소에서 들을 수 있었다.
신성제국 유라스의 이단 교도소. 부정을 저지르고 부패한 신관이나 성직자, 유라스가 인정하지 않는 사교도 등을 가두는 곳이다.
“정보 길드 연합이라더니. 이름만 거창한 것은 아닌 모양이야. 눈과 귀가 꽤나 밝군.”
총수가 만난 것은 교도소장이 아니었다. 혈십자기사단의 단장, 크루세이더 라파엘로 마르티네스. 그는 소년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총수를 안내했다.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으니 오해는 하지 마. 그녀는 신앙을 배신한 죄인이다. 과거 세냐 님과 거래를 한 탓에 죽이지도, 사로잡지도 않고 풀어놓았지만…… 이번 일에 있어서는 유일한 목격자이니 말이야. 그래서 잡아두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뿐.”
마음 같아서는 반발하고 싶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영웅들의 목격 정보는 정보길드를 통해 모든 국가가 공유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하지만 총수는 실제로 반발할 수는 없었다. 크루세이더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광신도고, 이곳은 유라스의 이단 교도소다. 지금 크루세이더가 총수의 목을 자를지라도 바깥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다.
“헤모리아. 이름은 알고 있겠지?”
안다. 한때 ‘단두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유라스 이단심문국 말레피카룸의 에이스. 하지만 타락하여 아멜리아 머윈의 종이 되었고, 하우리아 해방전 이후로 종적을 감췄던…….
“내가 직접 그년을 풀어놨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파악할 수 있는 낙인을 찍어서 말이야. 쥐 죽은 듯이 숨만 쉬고 살라고 말했는데…… 괘씸한 것이 악의를 품었어.”
“아니야!”
쇠창살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감옥 안쪽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헤모리아가 악을 써대며 창살을 잡고 흔들었다.
“악의라니! 나는, 나는 그런 것이 아니야!”
“닥쳐라, 사악한 것. 세냐 님이 아니었다면 난 널 풀어놓지 않았을 거다.”
라파엘로가 눈을 번득이며 내뱉었다. 까득거리며 이빨을 갈던 헤모리아는, 창살에 머리를 들이박으면서 토로했다.
“나는 억울해!”
“뭐가 억울하다는 것이지? 라비스타가 어떤 곳인지는 너도 알지 않나. 그곳은 멸망의 마왕이 잠들었던 곳이다.”
꽈앙! 라파엘로는 창살을 걷어차며 말했다. 전해지는 충격에 얻어맞은 헤모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다.
“너는 아멜리아 머윈과 라비스타에서 숨어 지냈었지. 멸망의 마왕의 부활을 고대하며 사악한 의식이라도 벌였나? 아니면 그곳에 남았을지 모를 마력을 탐냈나? 작금의 헬무드 상황에 분노한 과격파들을 라비스타에 불러들여 폭동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닌가?”
“망상병자 같으니!”
헤모리아가 고함을 질렀다.
“이 개 같은 낙인이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었을 것 아냐?! 내가, 내가 라비스타에 간 것은 전쟁이 끝난 뒤야! 그 전의 나는…….”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골목길을 전전하며 지내던 부랑자의 삶.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헤모리아가 완전한 뱀파이어가 아니기에, 식사를 흡혈로만 할 필요가 없다는 것.
하지만 가끔 찾아오는 흡혈의 충동은 있었다. 인간의 피를 마실 수 없게 됐으니 시궁창의 쥐새끼나 같은 처지의 부랑자 마족의 피를 빨면서 살았다. 언제 어디서 유라스의 사냥꾼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숨죽여서 살았단 말이다.
전쟁이 시작됐고, 끝났다. 혹시 유폐의 마왕이나 멸망의 마왕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기대를 안고서 숨어 지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헬무드는 패배했다.
혼란스러운 헬무드에서 헤모리아가 지낼 곳은 줄어들었다. 각국에서 파견된 기사들. 그중에는 유라스의 성기사와 전투신관들도 있었다.
단순히 ‘힘’을 겨룬다면 대부분이 헤모리아보다 약하겠지만, 문제는 어깨에 찍힌 낙인이다. 그녀가 죄를 범한다면 반드시 추격대가 올 것이다. 낙인의 존재는 성기사들도 감지하고 있기에, 뒷골목의 어둠은 더 이상 헤모리아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때 떠올린 곳이 바로 라비스타다. 멸망의 마왕은 죽었다. 마족들도 없다. 마물도 없다. 그곳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다. 누군가 찾아올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숨어 지내기에는 좋지 않은가?
그래서 헤모리아는 라비스타로 건너갔다.
지칠 대로 지치고 몰릴 대로 몰렸다. 평생, 라비스타에서 살자. 죽은 땅이지만 밭을 일궈보자. 농사를 짓고, 나무를 심고, 과일을 키우고, 물고기를 잡고…… 가축 같은 것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흡혈의 충동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단심문관으로 살았을 적에는 피 따위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 참고 견딘다면 충동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태어나자. 새로운 삶을 살자.
“나는…… 나는 억울해…….”
헤모리아는 바닥을 긁으며 오열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저것을 바라여 라비스타로 넘어갔다.
멸망의 마왕이 죽은 덕일까. 라비스타의 땅은 마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면 언젠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황무지를 괭이로 갈면서, 낚시를 하고……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냈을 즈음.
하늘에서 악마들이 내려왔다.
헤모리아가 느끼기에 그들은 악마와 다름없었다. 즉시 알아보고서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려던 헤모리아는, 악마들에게 사로잡혔다.
-너 시발 여기서 뭐 하냐?
헤모리아의 인생을 망친 원수, 유진 라이언하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물어왔다. 겁에 질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있으니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
-왜 또 이빨 갈고 지랄이야?
그 말도 억울했다. 무서워서 이빨이 저절로 부딪칠 뿐인데.
“저 말은 믿을 가치가 없고.”
라파엘로는 심드렁한 얼굴로 총수를 돌아보았다.
“유진 님과 영웅들은 라비스타의 상황을 보기 위해 오셨던 거다. 멸망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신 거지. 걱정하시던 일은 없었지만…… 라비스타. 그 장소가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셨기에, 섬을 통째로 침몰시키셨다는군.”
그렇게 헤모리아가 꿈꾸던 안락한 보금자리는 바다 깊은 곳에 잠들었다.
“저 계집은 유진 님이 해안가에 던져두고 가셨다. 아, 물론 우리는 저것이 라비스타로 거처를 옮긴 것을 알고 있었어. 뭘 하는가 싶어 잠시 내버려 뒀지. 그런데 대뜸 해안가로 돌아와서 쓰러져 있으니, 어쩌겠나?”
사로잡아서 이곳 이단 수용소에 가뒀다.
“하지만 며칠 뒤에 내보낼 거야. 죽일 수는 없고…… 이곳에 가둬두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저것에게는 더 큰 형벌일 테니까. 아, 네가 궁금해할 것은 저것의 처지가 아니겠지?”
라파엘로는 피식 웃으며 총수를 응시했다.
“알고 있나? 하우리아 해방 전 때, 한 마리의 드래곤이 유진 님을 찾아왔었지.”
레드 드래곤 아리아르텔. 그 드래곤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가진 보물고를 열어 귀중한 무구들을 베풀었고, 인간 마법사들에게도 협력해 주었었다. 드래곤이 직접 유진 라이언하트를 찾아와 조력해주었다는 일화는 후대에 전해질 전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저것의 말에 따르면, 누군지 모를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유진 님과 함께 있었다는군.”
라파엘로는 턱짓으로 헤모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비스타를 침몰시킨 후 유진 님들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드래곤의 거처에 함께 가셨을지도 모르지. 아, 물론 드래곤의 거처는 나도 모르네.”
답답해하며 침묵하는 총수의 귀에 라파엘로의 이죽거림이 이어졌다.
“드래곤의 거처를 찾아보던가, 아니면…… 라이언하트 본가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던가. 하하, 후자가 더 힘들 것 같군. 자네도 들었겠지? 키옐 황제가 라이언하트를 방문하려고 하자, 가주 부인이 직접 앞을 가로막았다는 말.”
전쟁이 끝난 후. 위대한 베르무트와 유진 라이이언하트를 숭배하는 행렬이 라이언하트를 찾아갔고, 모두가 가모 애니실라에게 가로막혀 쫓겨났다. 치하를 위해 방문한 황제도 예외는 되지 못했다.
“특히나 지금 라이언하트 본가는 한창 이사 준비로 바쁠 테니…… 어디, 힘써서 드래곤의 둥지나 찾아보시게.”
큭큭 웃어대는 라파엘로의 웃음소리 너머로 헤모리아는 울면서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환생 617화
키옐 제국의 변경, 볼라뇨.
아리아르텔의 집은 이 한적한 시골에 있다. 물론 볼라뇨의 이웃들은 아리아르텔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이웃들은 아리아르텔을 낙향한 귀족으로 알고 있고, 그 외의 사실들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으레 시골 사람은 이웃, 그것도 일가족 한 명 없이 혼자 사는 젊은이에게 과할 정도의 호기심을 갖기 마련이지만, 그런 것은 아리아르텔에게 해당되지는 않았다.
마법 때문이다. 당연히 아리아르텔은 인간 이웃과 사교적인 활동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오래전부터 자신과 저택에 인식저해 마법을 걸어 두었고, 덕분에 그녀의 저택은 아주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한 달 가까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던 유진 일행에게 있어서, 편히 머무르기에 이곳 이상으로 완벽한 장소는 없었다. 예전에는 레헤인야르에 있는 모론의 동굴에서 머물렀었지만, 더 이상 누르가 출현하지 않게 된 이상 굳이 산속에 처박힐 이유는 없었다.
“…….”
아리아르텔은 말없이 거실 한복판에 섰다.
따스한 조명이 비추고, 아리아르텔이 좋아하는 향기가 언제나 맴돌며, 가끔 커피나 홍차와 함께 독서를 즐기던…… 또는 이제는 충분히 성장한 리우 드라고닉의 일상을 바라볼 수 있던, 아리아르텔의 취미를 위한 공간.
한때의 이야기다. 끔찍하고 무례한 손님들을 저택에 들인 후로, 아리아르텔이 사랑하던 거실은- 아니, 그녀가 살던 저택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 저택에서 온전히 아리아르텔만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는 그녀의 침실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
아리아르텔은 치미는 서러움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뭔가를 잡아 부수거나,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 대신에 주먹을 꽉 쥐었다.
서러움에 몰려 눈물이라도 쏟아버리면 드래곤답지 않은 추태이고, 무언가를 부수거나 집어 던진다면-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이 현명한 드래곤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거실은 난장판이다.
아리아르텔이 애용하던 소파에는 부스스한 금발의 여인이 널브러져 있다. 아끼던 러그 위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근육질의 거한이 자빠져 누워 있다. 커피와 함께 독서를 즐기던 안락의자에는 술병을 무릎에 올려둔 마법사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소파와 안락의자의 사이에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사내가 낑겨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거실에 잔뜩 굴러다니는 술병과 남은 안주들을 마법으로 정리하면서, 아리아르텔은 ‘후회’라는 감정에 매몰되었다.
한 달 전쯤 있었던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과의 전쟁.
아리아르텔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서…… 라는 대의에 몸을 바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드래곤은 약속을 어길 수 없고, 아리아르텔에게는 요람을 수호해야 한다는 약속이 있다.
만약, 최악의 사태가 온다면. 마왕이 승리한다면. 아리아르텔이 해야 할 일은, 그녀가 수호하는 드래곤의 유산들이 마왕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약속은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의 목적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만약 두 마왕의 목적이 세상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멸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드래곤들은 결코 그런 약속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아르텔도 대의를 위해 전장에 투신했을 것이다.
즉, 아리아르텔은 전쟁이 두려워 숨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저 비루한 모습으로 웅크려 잠든 침략자의 괴수는 아리아르텔의 사정은 헤아려 주지 않았다.
-어쨌든 너 안 왔잖아.
저들을 먼저 찾아간 것은 아리아르텔이었다.
마왕들은 패배했다. 이제 세상에 더 이상 마왕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헬무드에는 여전히 수많은 마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흉포성은 용사가 쥔 사슬에 묶여 있다.
완전무결한 승리. 축복해 마땅한 일.
아리아르텔은 드래곤의 대표로서 유진 일행을 찾아 떠났다. 전쟁이 끝난 후에 사라진 그들은 대륙을 떠돌고 있었지만,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하는 동족만 찾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찾아가서.
온갖 비아냥을 듣고.
방을 내달라기에 내주었다.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아리아르텔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정리를 계속했다. 한쪽으로 모은 술병은 그 숫자만 해도 수십 병이다. 저 모든 술병은 아리아르텔의 애장품이고, 하룻밤 만에 비워진 것들이다.
이제 와 후회한들 어쩌리. 청소를 마치고, 이불 한 장 덮지 않고 잠이 든 망나니 4명의 몸 위에 이불까지 덮어주었을 때.
“으흠…….”
등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르텔은 흠칫 놀라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빠르게 펼쳐진 마법이 아리아르텔의 얼굴에 엷은 화장을 덮었다. 그렇게 준비된 아리아르텔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의 절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일어나셨습니까?”
아리아르텔은 우아하게 몸을 돌리며 방긋 웃었다.
거실의 입구에는 말끔한 모습의 베르무트가 서 있었다. 망나니 같은 4명과는 달리, 베르무트는 자신의 방에서 잠든 것이다. 그는 애초에 이 거실에서 펼쳐진,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를 죽이기 위한 술자리를 도중에 탈출했었다.
“미안합니다.”
베르무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살아남은 자가 한 명도 없는 거실을 보니, 이른 새벽에 방으로 도망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아닙니다, 위대한 베르무트. 그대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아, 위대한 베르무트. 아리아르텔의 눈동자에 달콤한 꿀이 차올랐다. 그녀는 헤츨링일 적부터 동화책을 읽었고, 대부분의 이들이 그러하듯 위대한 베르무트에게 매료되었다.
실제로 만난 우둔한 하멜과 현명한 새냐, 용감한 모론, 신실한 아니스는…… 많건 적건 아리아르텔이 품었던 환상을 박살 냈지만, 위대한 베르무트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리아르텔이 상상하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남자였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아리아르텔. 저택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며칠째 이렇게 엉망으로 쓰고 있으니…….”
“저들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다. 베르무트는 몇 번이나 음주가무를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동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제지하려는 베르무트의 사지를 붙잡고 입에 술을 퍼붓는 것을 즐겼다.
“저들을 깨울 필요는 없을 듯한데…… 어떻습니까? 위대한 베르무트. 함께…… 외출이라도 하는 것은?”
아리아르텔은 용기를 내어 속삭였다.
마음 같아서는 정원의 화단에서 향긋한 홍차라도 마시면서 그가 이룩한 전설들에 대해 듣고 싶었지만…… 저 악마들이 언제 일어나 배를 긁으며 정원에 나올지 모르는 일.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아예 저택 밖으로 나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권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해야 할 준비들이 있기에…….”
아리아르텔은 분명한 호의를 품고 있다. 감사한 일이지만, 베르무트는 그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이유인즉슨, 아리아르텔이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멸망의 마왕에게 부모를 잃은 드래곤.
“준비……? 어떤 준비 말입니까? 필요한 것은 제가 모두 마련해 드렸을 텐데.”
“벌써 일주일이나 이곳에서 신세를 지고 있지 않습니까.”
베르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더 이상 머물렀다가는 아리아르텔, 당신이 아끼는 술들을 모조리 비우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저희는 오늘 저택을 떠나려 합니다.”
돌아온 대답에 아리아르텔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드디어 저 악마들을 내보낼 수 있다. 그렇게 아리아르텔은 그리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악마들이 떠난다는 것은 굉장히 절실하고 반가웠지만- 위대한 베르무트마저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아아…… 그렇군요, 위대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예.”
“아쉽군요……. 나는 그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았습니다. 저 시끄러운 자들의 목소리가 낮았다면, 그대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이 영원한 이별은 아니겠지요. 언제고 바라신다면, 제가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건넨 말에 아리아르텔은 가슴에서 찌르르 울리는 통증을 느꼈다.
이 감정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리아르텔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정의하기가 버거웠지만, 저 말을 들은 순간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바란 것은 하나 있었다.
“야…… 약속을.”
“약속……?”
“저, 저는 드래곤입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위대한 베르무트, 드래곤은 약속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지요.”
“아…… 예, 알고 있습니다.”
베르무트에게 있어서 ‘약속’이란 단어는 지긋지긋하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평생 약속이란 것을 맺고 싶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상대는 멸망의 마왕에게 부모를 잃은 드래곤. 그런 상대라면 결코 맺고 싶지 않은 약속이라도 맺어줄 수 있다.
“아리아르텔. 당신과 맺은 약속이 제 생애 마지막 약속이 될 겁니다.”
베르무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리아르텔은 머리를, 가슴을, 영혼을, 망치로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마지막 약속’. 그 말은 베르무트가 전한 의도와는 다르게 아리아르텔의 심신을 흔들었다. 마지막 약속이라니! 그 말은 즉…….
“어이구 머리야…….”
숨을 헐떡이던 아리아르텔이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유진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소파와 안락의자 사이에 낑긴 몸을 일으키면서, 뻐근한 허리와 목을 좌우로 돌리고 꺾었다.
“뭐야? 너희 왜 그러고 있어?”
“벌써 시간이 늦었다.”
왜 아리아르텔이 주저앉아 버린 것일까. 베르무트는 그것에 대해 의문을 느꼈지만, 술이 덜 깨서 미간을 꾹꾹 누르는 유진을 보니 더는 아리아르텔에 대해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오늘 각자 돌아가기로 했을 텐데. 설마 잊은 건가?”
“아니…… 안 잊었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몇 번 흔들자 쓰리고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고 두통이 사라져 정신이 말끔해졌다. 유진은 입을 쩝쩝 다시면서 중얼거렸다.
“잊지는 않았는데, 막상 돌아가려니 돌아가기가 싫네…….”
“라이언하트 본가에는 네 아버지도 있지 않나.”
“그렇지는 한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아서 말이야. 내가 앞으로 한 일 년 돌아가지 않아도 크게 서운해하지는 않으실걸…….”
유진은 자기 자신이 ‘효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집에서 지낸 시간보다 밖에서 지낸 시간이 많던 점? 그거야 ‘세상을 구한다’라는 대의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자식이 큰일을 하겠다는데 하나뿐인 진짜 혈육인 아버지가 저것 하나 이해해 주지 못하실까?
바깥을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주제에 연락은커녕 신변파악조차 제대로 안 되는 점?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버지도 별걱정은 하지 않으실 거다. 유진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자신이 어디 밖에 나가서 맞고 다닐 놈이 아니란 점을 아버지에 열렬하게 피력해 왔었다.
“하지만 ‘아버님’은 네가 돌아올 때마다 항상 눈물을 펑펑 흘리시잖아.”
엉망인 머리카락을 마법으로 정리하던 세냐가 유진을 힐긋 보면서 쏘아붙였다. ‘아버님’…… 유진은 그 단어에 실린 힘과 무게에 영혼이 움푹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제 와서 저런 것을 지적하거나 신경 쓰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우리 아버지가 나 어릴 적부터 눈물이 많으셨어.”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나이 탓도 있겠지. 원래 남자는 나이 먹으면 눈물이 좀 많아지고 그래. 저기 모론 봐라, 저 새끼도 툭하면 눈물 펑펑 흘리잖아.”
유진은 아직까지 바닥에 엎어져 있던 모론을 발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동료이자 친구들이 나만 남겨두고 전부 죽어버리고, 후손들과 떨어져서 100년 넘도록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괴물을 잡다 보면 누구나 눈물이 많아질 것이다.”
모론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서 말했다. 그 말에는 모두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베르무트는 침묵을 넘어 몸까지 파르르 떨었다.
“……미…… 미안하다.”
베르무트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무릎까지 꿇으려 할 때가 돼서야 모론은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다니, 베르무트,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사과는 필요 없다. 네가 당시에 의존할 수 있던 것은 나뿐이었고,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었지 않나?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원망한 적이 없다.”
모론은 껄껄 웃으며 베르무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말에 베르무트는 감동하여 모론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하멜, 우리는 언제 베르무트를 패는 것인가?”
불쑥 나온 질문에 베르무트의 얼굴에서 감동이 사라졌다.
“그러게. 언제 패지?”
모두가 베르무트르 두들겨 패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이견 없이 합의된 사항. 베르무트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한 달여 동안 유진과 동료들은 베르무트를 팬 적이 없었다. 그냥 함께 대륙을 떠돌며, 술을 먹고, 떠들고, 자고, 그런 한량 같은 생활을 보냈을 뿐.
“제 생각에, 여기서 패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베르무트 님을 패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닙니까?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베르무트 님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패고 싶습니다. 아주, 아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말입니다.”
“어째서……?”
“베르무트 님, 그걸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저희끼리 있을 때 패버린다면 그건 몰래 패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베르무트 님이 저희에게 처맞았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것이지?”
베르무트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자, 아니스는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베르무트 님을 팬다면, 그 모든 사람이 역사의 증인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 위대한 베르무트가! 옛날에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로 인해 저희가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설마 베르무트 너, 역사에 그냥 돌아온 용사, 돌아온 전설, 숭고한…… 뭐 이런 것만 적히길 바란 거냐?”
“그건 안 돼. 아, 물론 우리는 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그냥 너를 줘팰 거고, 그걸 본 사람들은 네가 처맞은 이유에 대해 많은 추측을 남기겠지. 그거면 충분해.”
아니스와 유진, 세냐가 완벽한 호흡으로 베르무트를 몰아붙였다.
베르무트는 무어라 항변조차 할 수도 없었다. 모론에게 도움을 바랄 수도 없다. 지금 모론은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베르무트를 주먹으로 때릴지 발로 때릴지 도끼로 때릴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조심스러운 질문에 유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안 죽이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왜 죽이냐?”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베르무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빌어먹을 환생 618화
키옐 제국의 라이언하트 본가는 전쟁이 끝난 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을 보냈다.
원로원주와 길레이드, 카르멘 등 가문의 어른들은 각국의 지배자들과 함께 전쟁의 수습에 매진하느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택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가문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가 바로 가모 애니실라다.
전쟁에서의 승리. 모든 마왕의 죽음. 그리고 위대한 베르무트의 귀환. 그 모든 것은 대륙에 있어서는 무궁한 영광이겠지만, 당장의 애니실라에게 있어서는 노이로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대륙 각지에서 찾아오는 정보 길드원과 기자들. 차마 황궁의 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모양인지, 그들은 라이언하트의 저택 앞에 진을 쳤다. 거기에 또 각지에서 찾아온 추종자들. 돌아온 베르무트를 추종하는 자들까지 합친 인파가 저택의 담벽 앞을 빼곡히 채웠을 때, 애니실라는 드레스가 아닌 갑옷을 입고 부채가 아닌 검을 들고서 저택의 문을 열었다.
꺼져라!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 자리에서 애니실라가 보여야 할 것은 무궁한 영광을 누리게 될 라이언하트의 가모다운 패기와, 그러면서도 가문을 안팎으로 보듬는 자애로운 귀부인의 모습이어야 했다. 그래서 애니실라는 검을 차되 검은 뽑지 않고, 기사들을 대동한 채로 조용히 연설했다.
연설의 내용을 축약하자면, 이곳은 라이언하트의 사유지이니 귀찮고 시끄럽게 굴지 말고 꺼져달라는 뜻이었다.
황제, 아니, 대륙 모든 지도자들을 더한 것보다 큰 위상을 갖게 될 라이언하트 가문. 그곳의 가모이자, 차기 가주의 친모가 바로 애니실라다.
그녀가 직접 갑옷을 입고 나와서 사유지에서 물러가 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데 어찌 물러가지 않고 배길 텐가? 그 순간에 애니실라가 뒤에 배치한 기사들과 엘프들, 그리고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뭔지 모를 물건들과 멀리서 매연을 뿜어대는 용광로 등은 애니실라의 발언에 아주 작은 힘을 실어주었고, 사유지를 무단으로 점거하던 인파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으로 애니실라는 부산스러울 수밖에 없는 방계의 분위기를 통제했다. 방계의 몇몇 힘 있는 가문들은, 위대한 베르무트도 귀환했으니 라이언하트가 아예 제국에서 독립하여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주장을 보내왔다. 혹은, 300년 전에 위대한 베르무트가 거절했던 공국이라도 이번에야말로 건국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저러한 주장들은 애니실라도 제법 구미가 당겼지만- 아무리 본가의 가모라도 저런 문제들에 결정권은 가질 수 없다. 애니실라는 하멜의, 아니, 유진의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하다는 것은 십수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무책임한 잠적 이후로 한 달. 탁상에서 나눌 수습은 얼추 끝났고, 이제는 진행할 것들만이 남았다. 전쟁이 벌어졌던 평원은 그 전역이 국가 중립의 호국원이 되어 거대한 추모비와 더불어서 여러 시설이 건립될 예정이다.
그리고 라이언하트 본가는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전쟁은 끝났다. 엘프 종족을 괴롭히는 마병도 사라졌다. 그 말은 즉, 더 이상 라이언하트 본가에 엘프들이 살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엘프 사냥꾼과 노예 매매상? 라이언하트의 이름이 신만큼, 아니, 신이 라이언하트에 있다. 누가 감히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가 비호하는 엘프를 건드리겠나?
엘프족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사마르 대수림에 돌아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바타가 대족장으로 있는 조란은 대수림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고 엘프를 예우한다. 지금 대륙에서 엘프를 소유하고 있거나 해를 끼치려 한다는 것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기가 되어 있다.
하지만 라이언하트 본가 숲의 엘프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라이언하트의 숲과 엘프들은 공생을 넘어 한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애니실라도 이해하고 있다. 일찍이 심어놓은 세계수의 묘목도 묘목이지만 엘프들이 정령과 조화를 이뤄, 지금 숲은 생명력과 마나가 가득하다. 이것은 미래에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을 키울 든든한 밑거름이다.
그런데 왜 드워프들은 떠나지 않는 것인가?
전쟁은 끝났다. 드워프들은 라이언하트 저택 근처의 공방을 철수하기는커녕, 매일같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며 용광로에 쇳물을 끓이고 있다. 그들은 이미 전쟁의 공적으로 키옐의 시민권을 요구했기에, 시무인에서의 송환령도 소용이 없다. 애당초 시무인의 국왕은 라이언하트의 눈치를 보느라 드워프를 불러들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애니실라가 앞장서서 드워프들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 이러니저러니 해도 드워프 명장 수십 명을 가문 부지에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특혜다. 스스로 나간다면 붙잡지는 않겠지만, 떠나라고 등을 떠밀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확장되는 숲과 공방. 그만큼 저택의 부지는 줄어든다……. 당장은 몰라도 지금 같은 현상이 수십 년 이어진다면, 라이언하트는 기사 가문이 아닌 숲지기나 대장장이 가문으로 바뀌어버릴 것이다.
애니실라는 결단을 내렸다.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도 돌아왔고, 전쟁도 끝났다. 그러니 300년 동안 굳건했던 본가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떠날 것을.
키옐의, 아니, 대륙 제일의 명문가. 라이언하트가 어디로 본가를 옮길 것인가?
이사를 결심했지만, 애니실라는 위치까지는 정하지 않았다.
위치를 결정할 사람은 모든 책임에서 도망친 시조님과 유진이어야만 한다.
“현명한 세냐 님이 아롯에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애니실라는 피톤치드가 가득한 정원에 앉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뿜어지는 매연을 응시하며 차를 마셨다.
이미 저택보다 거대해진 공방은 한시도 거르지 않고 열기와 매연을 뿜어댄다. 다행인 것은 마법사들이 공들인 정화 마법 덕에 매연이 대기 중에서 정화된다는 점이지만- 눈으로 보이는 연기는 선명하다.
공방에서 연기가 안 나오면 작업하는 맛이 나지 않는다는 드워프들의 고집 때문이다.
“아롯에 돌아오신 세냐 님은 다인돌프 아브람 국왕과 대마법사들과 면담을 가졌고, 녹색 광장에서 연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향후 일정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나?”
“그것까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아마 높은 확률로 라이언하트에 오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테이블의 옆에는 애니실라와 함께 가문의 내실을 담당하는 집사장이 서 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신실한 아니스 님과 신령한 크리스티나 님이 유라스에 돌아오셨습니다. 두…… 분 역시, 교황청에서 교황과 추기경들과 면담을 가진 뒤에 백색 광장에서 연설이 예정되어 있으십니다.”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 토벌의 한 축이었던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신령한 크리스티나’. 저 신실한 아니스가 몸에 깃들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의적인 별명이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 일찍이 라이언하트 저택에서 크리스티나를 보았던 가솔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언가 껄끄럽고…… ‘아!’ 하는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모론 님도 루하르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분도…….”
“사돈…… 으흠, 아만 루하르 전화와 면담 뒤에, 하멜른 광장에서 연설하시나?”
“예.”
집사장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게 언제지?”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니, 약 4시간 전입니다.”
“다들 비슷한 때에 돌아오셨다는 것이지?”
“예.”
“그런데 왜 시조님과 유진은 돌아오지 않는 거지?”
애니실라가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지금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들었지만, 갑옷을 입고 검을 차고서 불법침입자들 앞에 섰을 때 이상으로 예리한 기백을 내뿜었다.
“……설마 황궁에?”
잠자코 옆에 앉아 있던 길레이드가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수습이 얼추 마무리되고서 저택에 돌아온 지 사흘. 길레이드 역시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함께 고민하고 역할을 분담할 신군의 간부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길레이드는 가문에 홀로 남아 모든 것을 조율한 애니실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시조님이라면 몰라도, 유진 그 아이가 제 발로 황궁에 찾아갈 리는 없지요. 그럴 사람이었다면 길레이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도망치지도 않았을 겁니다.”
“부인, 도망이라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그게 도망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전장의 모두가 너무 흥분해 있었소. 그럴 수밖에 없었지. 수천 년 세상에 군림했던 ‘마왕’이란 존재들이 모두 죽었고, 마족은 더 이상 인류에 위협이 아니게 되었으며, 세상 모두가 듣고 자란 영웅들이 눈앞에 현신해 있으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길레이드는 그 순간의 감동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꾹 쥐고서 말을 이었다.
“오히려 그분들이 떠나지 않고 남았더라면, 과도하게 흥분한 수십, 수백만에 달하는 군중이 다른 문제를 벌였을 수도 있소.”
“다른 문제?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제가 듣기론 유진의 말 한마디로 모두가 침묵했다 들었습니다. 유진 그 아이의 능력이라면 수백만의 군중이라도 침착하게 말을 따랐을 겁니다.”
어떻게든 영웅들을 비호하고 싶었지만 총명한 아내를 속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분들은 많은 일을 해내셨소. 몹시 지쳐 계셨지. 반면에 우리는 그분들이 베푼 은총으로 부상과 피로를 떨칠 수 있었고. 그래서…….”
“아무리 지쳤어도 그 자리에서 도망쳐서 한 달이나 잠적한 것은 너무한 일입니다.”
“으음…… 부인. 유진 그 아이는 저번에 반년이나 잠들었잖소?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긴 시간 잠들지 않을까 싶어서…….”
“전장에서 사라지고 며칠 후에 대륙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었지요?”
“솔직히…… 솔직히 말하자면.”
길레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유진이 떠나지 않고 남았다고 해도 수습에 별 도움은 되지 않았을 거요.”
신군을 운영할 때만 해도 그랬다. 대부분의 업무는 간부들 선에서 마무리했고, 유진이 한 것은 결정을 내리는 것과 마왕과 직접 싸우는 것뿐이었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유진은…… 음……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리고 사실 영웅님들은 정무의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지……. 그렇지 않소?”
“그렇지요…….”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을 듣고 나서야 애니실라는 납득했다.
“아무튼, 저는 유진이 황궁에 갔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리고 황궁에 갔다면 진즉에 저희에게도 연락이 왔을 겁니다.”
“설마 환영이 거북해서……?”
“그를 감안해서 연회 준비는 하지 않았잖아요?”
아롯과 유라스, 루하르에서는 이미 귀환한 영웅들을 위해 대대적인 축제가 준비 중이다. 수도 광장에서의 연설이 끝난다면 즉시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키옐도 마땅히 그래야 할 테지만, 문제는 유진이 요란한 연회와 축제를 즐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기록에 따르면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도 연회는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애니실라는 황궁과 방계의 인사들도 부르지 않았고, 지금 라이언하트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혹시 모르죠.”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던 기온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몰래 저택에 들어와 있을 수도.”
“말도 안 되는 소…….”
기온의 농담에 웃으며 대꾸하려던 애니실라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쌍둥이 중 시안은 몇 시간 전, 약혼자인 아일라 공주와 함께 루하르로 떠났다. 아일라는 용감한 모론의 직계 후손이고, 몇 년 후에는 루하르 왕가와 혼약으로 맺어질 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엘과 제하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최근 시엘은 별채에 머무르면서 제하드에 곰살맞게 구는 등 점수를 따는 것에 열중하고 있다. 한 시간 전에 애니실라가 티타임의 의향을 물었을 때도 시엘은 제하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둘은 ‘준비를 마치고 나가겠다’라고 대답했었다.
준비라고 해봐야 별것 없을 텐데, 이건 너무 늦다.
“……니나는 어디 있지?”
시엘뿐만이 아니다. 시종장인 니나의 모습도, 그녀를 보좌하는 나리사와 레베라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셋의 공통점은 유진의 전속 시종이라는 점. 니나야 지금은 저택을 총괄하는 시종장이지만, 유진이 저택에 있을 때는 시종장보다는 전속 시종으로서 유진을 담당한다.
“설마.”
농담으로 말했던 기온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감은 적중했다.
본가 옆의 별채. 눈물을 훌쩍거리는 제하드의 앞에 유진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리사와 레베라는 제하드의 옆에서 계속 손수건을 넘기고 있었고, 니나는 의자에 앉은 베르무트에게 차를 따르고 있었으며, 시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눈으로 보고 있지만 이해하기 힘든 상황. 별채에 온 셋은 일단 베르무트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었다.
“시, 시조님.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그게…….”
베르무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유진을 힐긋 보았다.
뻔한 전말은 이러했다.
과도한 환영을 원치 않았다.
보초의 눈을 속이는 것이야 둘에게는 쉬운 일이었고, 베르무트는 왜 자신이 라이언하트 저택에 들어오는데 좀도둑처럼 담을 넘어야 하는 것인지 납득이 잘되지 않았지만- 어쨌건 둘은 몰래 담을 넘어, 라이언하트로 들어왔다.
길레이드와 애니실라를 찾아가기 전. 유진은 제하드의 얼굴이 아른거려 먼저 별채에 들렀다. 제하드와 시엘이 막 별채를 나가 정원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제하드는 유진을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니, 유진은 일단 자리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뭐 못된 짓 해서 감옥 갔다가 돌아온 것도 아니고. 마왕 죽이고 세상 구하고 왔는데 대체 왜 얼굴 보자마자 우시는 겁니까?”
“감격스럽고 대견해서 울었다.”
제하드는 벌겋게 부은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전장에 가지도 못한 내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그런 나한테 너 같은 아들이 태어난…… 음……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아무튼, 네가 자랑스럽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조심스레 움직인 시선이 베르무트에게 향했다.
베르무트는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일단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베르무트의 주변에는 까마득한 본가의 후손들이 서 있었다.
“우리 가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님을 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는데,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제하드의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시조…… 베르무트를 대하는 본가 식구들의 태도가 유진은 조금 불편했다. 족보로 따지자면 유진 라이언하트는 베르무트의 까마득한 후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진이 베르무트를 시조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나뿐인 아버지가 시조님 운운하며 눈물을 쏟는 것은, 유진의 입장에서는 집에 데려온 친구를 보고 가족들이 극존칭을 하며 눈물을 쏟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저 새끼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닙니다.”
“시조님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이거저거 다 따지면 아버지 아들인 제가 저 새끼보다 더 대단한 근본을 가지고 있다고요.”
“네가 전생에 무엇이건 지금은 내 아들이잖느냐.”
“누가 뭐랍니까?”
유진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예, 다녀왔습니다.”
“보면 안다.”
“먼 길 와서 피곤한데 일단 방에서 쉬겠…….”
“안 돼.”
은근슬쩍 방으로 도망치려던 유진을 가로막은 것은 애니실라였다. 그녀는 부채를 꽉 잡으면서 억지로 미소를 쥐어짰다.
“많은 일이 있었잖니? 네게 들어야 할 이야기도 많고, 식구끼리 나눠야 할 이야기도 많단다.”
“그건 뭐…… 저 말고 베르무트한테 들으면 되지 않을까요……?”
“안 된다.”
이번에 입을 연 것은 베르무트였다. 유진이 꼬이고 꼬인 족보에 어색함을 불편함을 느낀다면, 베르무트는 절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후손들과의 해후가 어색하고 민망했다.
유진이 혼자서 도망쳐 버린다면? 베르무트는 후손들에게 둘러싸여 끔찍하게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유진은 무조건 이 자리에 남아서 조율자가 되어야 한다.
“어이구…….”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일단 밥이나 먹죠. 본가 식구들끼리만.”
“카르멘 님은?”
“지금 안 계십니까?”
“하필 오늘 흑사자성에 가셨다.”
“아마 거기서 식사를 하셨을 것 같은데…….”
카르멘이 온다면 여러 가지로 피곤해질 것 같다. 안 부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유진은 순간 들었던 생각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다고 안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일단 권유라도 해보죠.”
말이 권유지, 카르멘이 거절할 리가 없다. 그녀는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고, 당장 흑사자성에서 워프게이트를 탈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 베르무트를 붙들고 자신이 누구인지, 라이언하트의 피가 어떤 광인을 낳았는지를 베르무트에게 각인시킬 것이다.
빌어먹을 환생 619화
본가의 넓은 식탁은 이런저런 요리가 가득 올라왔다. 대륙 각지의 특산물, 지역을 대표하는 진미,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 기본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향토 요리들까지. 식사의 흐름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좋을 대로 음식을 골라 먹는 뷔페.
애니실라 카이네스. 그녀는 라이언하트에 시집을 오기 전까지도 키옐에서 유서 깊은 명문 귀족가의 영애였다. 어린 나이부터 신분에 마땅한 교육을 받아온 애니실라는,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종류의 식사는 ‘품위’가 없다는 이유로 즐기지 않는다. 아니, 즐기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싫어한다.
하지만 유진은 이런 종류의 식사를 좋아한다.
커다란 접시에 음식이 몇 점 덩그러니 올려지고 주변에 소스만 점찍듯이 뿌리는 플레이팅도, 간에 기별도 안 가는 한입 크기의 음식이 순차적으로 나오는 것도 싫다. 그래서 본가에 갓 양자로 들어온 어린 시절, 유진은 본가에서 밥을 먹고 와도 꼭 별채에서 한 끼를 더 먹곤 했다.
옛날이야기다. 나이를 먹고 충분한 발언권을 갖게 된 뒤, 유진은 애니실라를 설득해서 본가의 식탁에 간섭했다. 어차피 매일 먹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밖에 나가 지내다가 가끔 돌아와서 집밥을 먹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면서.
애니실라가 성격이 죽지 않은 옛날이라면 애니실라도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
“이거도 먹으렴.”
지금의 애니실라는 옛날처럼 까탈스럽지도 독기에 차 있지도 않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본가의 안주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여유.
자식들은 모두 자랐고, 시안은 차기 가주로 확정된 데다 루하르 왕국의 금지옥엽과 약혼까지 맺었다.
마음이 쓰이는 쪽은 시엘이지만…… 세상에 오르지 못할 나무가 있을까. 애니실라는 딸의 가능성을 믿었다. 오르지 못한다면 열 번 백 번이라도 찍어서 넘어트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들이 애니실라의 성격을 부드럽게 바꾸었다. 특히 애니실라가 가장 자애로워질 때는, 지금처럼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챙겨줄 때다. 이 넓은 식탁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수십 가지의 디저트들은 사실상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먹이기 위해 애니실라가 준비한 것들이다.
“저런, 입술에 묻었잖니.”
지금만 해도 애니실라는 두 꼬맹이의 곁에 서서 챙기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라이미르아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수 닦아주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음…….”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다. 애니실라가 딸, 혹은 손녀처럼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듬는 저 두 꼬마가 사실은 애니실라보다 몇 배는 나이가 많아 최소 200살이 넘는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 방의 수십 명 중에서 누구도 저 불편한 진실을 지적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수십 명.
그렇다, 수십 명이다. 식탁에 앉은 것은 베르무트와 본가의 식구들뿐이지만, 이 방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있다. 음식과 식기를 나르고 음료를 채우는 시종들뿐만 아니라, 식탁 뒤의 벽에는 백사자 기사단과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들. 심지어 은퇴한 원로원의 노인들까지 있었다. 그들은 식탁에 앉는 것을 정중히 거부하고, 단지 벽 뒤에 서 있기만 했다.
이유야 뻔했다. 라이언하트 가문의 시조. 3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돌아온 전설. 위대한 베르무트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다. 사실 보는 것이야 한 달 전에도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짧은 만남에서 만족을 거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장들만 있는 이유? 아무리 라인이언하트의 만찬실이 넓다고 해도 백사자 기사단과 흑사자 기사단 수백 명이 들어오는 것은 분명하다. 위대한 베르무트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많고 많은 지원자들 중에서 계급순으로 자른 것이리라.
“…….”
베르무트는 자신에게 꽂히는 선망 가득한 시선과 더불어 식탁의 요리가 어색했다.
이상하게도 베르무트의 앞에는 길고 긴 전통을 자랑하는, 특히 북쪽 루하르 왕국과 키옐의 향토 요리, 거기에 보양식이 잔뜩 몰려 있었다.
“…….”
300년 만에 돌아왔으니 옛날 음식들을 그리워할 것이라 생각했나?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는 동안 음식도 못 먹고 기력이 쇠했을 테니 보양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이유는 어찌 납득이 되지만…….
‘이럴 필요는 없는데…….’
물론 베르무트는 그러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왜 그러고 나온 거야?”
베르무트가 평온한 얼굴로 식사하는 동안, 유진은 내심 각오했던 질문을 맞이했다.
“뭘.”
각오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질문을 들으니 숨이 턱 막히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유진이 정면을 보지 않고 접시의 음식을 노려보자, 맞은편에 앉은 시엘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거 말이야.”
시엘이 꺼낸 것은 잘 접힌 신문이었고, 그것을 힐긋 본 유진의 얼굴은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저 신문은 당연히 유진도 알고 있다……. 한 달 전에 대륙 전역에 호외로 나간 신문.
“하지 마.”
“내가 뭘 할 줄 알고?”
“그거 보여줄 거잖아.”
“당연히 보여줘야지.”
시엘은 배시시 웃으면서 신문을 활짝 펼쳤다.
신문의 1면은 단 하나의 사진만이 게시되어 있다. 누구나 인정할 올해의 사진. 향후 수십, 아니, 수백 년. ‘시대’를 증명하고 대표할 사진.
“세상을 구한 영웅들.”
멸망의 마왕을 쓰러뜨리고 나온 6명의 영웅들. 사진 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선 6명은- 다시 봐도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이처럼 보였다.
각자 엉거주춤 서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름대로는 환한 미소라고 지었겠지만 어딘가 인위적인…….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
“그럼 누가 하고 싶었던 건데?”
“벗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는 없으니 함구하도록 하지.”
“네가 하자고 한 거구나?”
“아니라니까. 베르무트가 하자고 한 거야.”
유진은 바로 옆에 있는 베르무트의 이름을 팔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무트가 하자고 했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라이언하트에서는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테니까.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개새야,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마고 겪은 고생이 얼만데, 내 말에 좀 맞춰주면 덧나냐?”
“아무리 그래도 우리 보는 앞에서 시조님한테 욕을 하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아?”
시엘이 핀잔을 주었다.
과연. 길레이드와 다른 식구들은 물론이고, 식사를 지켜보던 기사단 대장들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하멜, 네게 많은 빚을 졌다. 그렇지만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베르무트가 중얼거렸다. 뿌득. 유진의 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를 종이처럼 구겨졌다.
“그래, 내가 하자고 했다. 그런데 말이야, 하고 싶은 건 나였는데, 구도 정한 것은 내가 아니야. 크리스티나가 정했어.”
거짓말이 아니다. 사진이 찍힐 테니 다 같이 모이자고는 했지만, 어깨동무를 밀어붙인 것은 바로 크리스티나였다.
“너도 즐겼잖아.”
“내가 즐겼는지 안 즐겼는지 네가 어떻게 아냐?”
“어떻게 알기는? 사진에서 웃고 있으니 알지. 안 즐겼어?”
“때로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법이다.”
“그거 알아? 가주님이 이 사진을 커다랗게 새로 만들어서 거실에 장식하실 거래.”
“뭐라고?”
“본가뿐만이 아니라 흑사자 성이랑, 방계 가문들도 그럴 거야.”
“정말입니까?”
유진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길레이드를 쳐다보았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마시던 길레이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멋진 사진이잖느냐. 기념비적인 사진이기도 하지.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구했다는 증명이다. 앞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로 저 사진을 떠올릴 것이다. 대륙의 아이들이 배우는 모든 교과서에 저 사진이 실리겠지. 그리고 라이언하트의 모든 후손은, 저택에 장식된 영웅들의 모습을 보며 미래의 자신을 그릴 것이다.”
길레이드의 막힘없는 대답에는 한 치의 모욕이나 조롱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저 사진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진이 생각하기에, 가끔…… 길레이드는 미적인 부분에서 남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차마 그 감상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십여 년 전, 길레이드가 하멜이 멋지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장식할 사진을 원하신다면 다시 찍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 이미 생생한 순간을 기록하였는데.”
설득이 불가능하다. 유진은 눈을 감고서 한숨을 삼켰다.
어쩔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키지 않는 이상, 저 사진이 미래로 이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이럴 줄 알았다면 병신 같은 미소를 짓지 말고 근엄하게 입이라도 다물걸.’
후회조차 늦었다.
“…….”
유진이 세상의 거대한 의지에 순응하기로 결심한 순간에, 카르멘은 말없이 베르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로원과 흑사자 기사단을 대표하여 베르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실 카르멘 외에 누가 베르무트의 맞은편에 앉을 수 있겠는가? 한 달 전의 전쟁에서 그녀는 주먹이 부서질 때까지 멸망을 때렸다. 카르멘이 생각하기에 그곳에서 멸망에게 가장 많은 공격을 퍼부은 것은 자신이었으며, 만약 멸망의 안까지 ‘소리’가 울렸다면 그중 가장 큰 소리는 주먹이 부서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우리 가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님이시여.”
카르멘의 입이 열렸다. 드디어. 베르무트는 마음을 가다듬고서 시선을 들었다.
한 달 동안 대륙을 떠돌면서, 동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 중에서 ‘카르멘 라이언하트’라는 이름도 있었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유진이 의도적으로 카르멘의 성격에 대해서 감췄기 때문이지만, 베르무트는 그러한 사실은 알지 못했다.
성격 같은 것을 떠나서 베르무트가 카르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유진을 제외하면 라이언하트의 최강자라는 것. 베르무트가 의도하여 남긴 백염식의 한계를 간파하고 그러한 깨달음을 라이언하트에 전파했다는 것. 그리고 외모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녀가 가주인 길레이드의 고모이며 독신이고, 라이언하트 가문의 최고 연장자라는 것이다.
“예.”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아니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에 제 후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가 무슨 자격으로 300년이 흐른 지금 나타나서 시조랍시고 행세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은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자격이라니요? 시조님이 없으셨다면 라이언하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카르멘 님.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지금은 어떻게 전해졌을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저는 자상한 남편도, 훌륭한 아버지도 아니었습니다.”
베르무트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시의 저는 오직 필요를 위해 가문을 세웠습니다. 본가와 방계에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된 죽음으로 모두를 속였습니다.”
“하지만…….”
“카르멘 님과 다른 분들이 저를 라이언하트의 시조라며 존중해 주시는 것에는 큰 감사를 느낍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후손이라고 하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필요를 위해 만들었던 라이언하트를 지금까지 가꾼 것은 여러분이 있었기 때문이고, 멸망의 뱃속에서 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이 저를 불러주었기 때문입니다.”
미리 생각이라도 해둔 것인지 베르무트의 대답에는 막힘이란 것이 없었다.
식사는 어느새 멈췄다. 시종들조차 움직임을 멈추고서 베르무트를 응시했다. 벽 쪽에 선 원로들과 대장들은 감동한 얼굴이었고, 길레이드와 제노스, 제하드 등은 어느새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아…….”
카르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서 무릎 위에 양손을 올렸다.
“시조님은 저희의 목소리를 들으셨던 것이군요.”
“예. 시커먼 어둠이 끈적거리는 멸망의 뱃속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덕에 제 자신을 잊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멸망을 흔드는 울림이…….”
“울림?”
베르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르멘이 반응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울림…… 어떤 울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멸망의 마왕의 본신을 공격하는…….”
“공격이! 멸망의 마왕의 안까지 울렸던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시조님.”
무릎에 올라왔던 양손이 식탁 위로 올라왔다. 카르멘의 양손은 이미 치료가 되어 하얗고 매끈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
“제 주먹은 그때 부서졌습니다.”
베르무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한 달 전. 저…… 사진이 찍히고 난 뒤. 주변에 몰려온 라이언하트의 후손과 만났을 때. 가장 앞에 서 있던 것이 카르멘이었다. 확실히, 그때 그녀의 주먹은 부서져서 피범벅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 주먹으로 멸망의 마왕을 직접 쓰러트릴 수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는 주먹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드래곤클로가 부서져도, 헤븐 제노사이드가 부서져도, 제 뼈가 부서져도, 저는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드래곤 클로와 헤븐 제노사이드가 대체 무엇일까.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지만, 베르무트는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카르멘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기 때문이다.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구하는 것. 미래를 여는 것에 이 주먹을 더하고 싶었습니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서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시조님이 ‘울림’을 들으셨다면…… 그중에는 틀림없이 제 주먹이 부서지며 전한 울림도 있었을 것입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님.”
베르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르멘이 따라 일어서려고 했지만, 베르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직접 걸음을 옮겨서 카르멘의 옆으로 다가갔다.
“제가 들은 울림에는 필시 카르멘 님의 주먹이 전한 울림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르무트는 식탁을 빙 둘러서 카르멘의 옆까지 다가가며 말했다.
“지금 제가 라이언하트에 돌아와,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카르멘 님과 다른 모두가 피를 흘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시조님…….”
그 부름에 베르무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베르무트는 카르멘의 곁에 서서 그녀의 주먹에 손을 얹었다.
“제가 라이언하트의 시조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분에게 언제나 ‘시조’라고 불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저는 그렇게 불리고 싶습니다. 똑같은 라이언하트의 일원이자, 여러분의 가족으로 말입니다.”
“아아……!”
주먹에 손이 얹어지는 순간. 카르멘의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면서, 떨리는 눈으로 베르무트를 응시했다.
“가족…… 가족……!”
“예, 우리는 가족이지 않습니까? 똑같은 라이언하트의…….”
“아…… 아버지.”
더듬더듬 내뱉은 말에 베르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예?”
“가족…… 이지 않습니까? 시조…… 아니, 베르무트 님은, 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즉, 저의 머나먼 아버지십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제가 카르멘 님에게 아버지라고 불릴…….”
“저는 베르무트 님을 아버지라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베르무트 님은 모든 라이언하트의 아버지십니다. 아아, 그때 부서진 주먹이 이렇게 나은 것은…… 이렇게 아버지의 손을 마주 잡기 위해서겠지요.”
카르멘은 주먹에서 전해지는 혈육의 온기를 느끼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베르무트 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베르무트의 눈동자가 격렬히 흔들렸다. 방금까지의 대화에서 왜 이런 흐름이 된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저 간절한 눈길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모든 라이언하트의 아버지라는 말이 베르무트에게 은근한 설득력을 가졌다.
“그…… 그것을 바라신다면, 예.”
“아버지……!”
카르멘은 더 이상 주먹을 쥐지 않고, 베르무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친부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도 위대한 베르무트가 새로이 아버지가 된다면 천국에서 기뻐하실 것이리라.
“저는 아버지와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습니다.”
“예…….”
“딸인 제가 직접 술을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
베르무트는 머뭇거리다가 슬쩍 유진 쪽을 보았다. 이 난감한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건네달라는 무언의 요청이었지만, 히죽이며 웃어대는 유진의 얼굴을 보니 도움의 손길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에 다른 것이 다가왔다.
다가온 것은 도움의 손길이 아닌 새로운 술잔이었다. 베르무트는 식탁에서 미끄러져 온 술잔을 받으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딸도 생기고 좋겠다 야.”
복잡한 얼굴로 카르멘에게 술을 받는 베르무트를 보며 유진은 짝짝 박수를 쳤다.
빌어먹을 환생 620화
세냐가 아롯에 돌아오고 나흘. 그녀는 매일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첫날에는 국왕과 마탑주들을 만났고, 그 직후에는 녹색 광장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연설했다.
눈물과 환호 속에서 이어진 연설이 끝나고서 수도 펜타곤에서는 축제가 시작됐다. 이튿날, 세냐는 축제의 행렬에 참가하여 펜타곤의 곳곳을 행진했다.
다음 날. 네 개의 마탑과 마법사 길드에서 뽑힌, 다음 세대의 리더를 꿈꾼다는 젊은 마법사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가벼운 식사로 시작된 자리였지만, 참석한 젊은 마법사들은 음식보다 세냐의 잔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했다. 요즘 젊은것들은 이것이 문제다, 라는 말로 시작된 잔소리는 결국 개개인의 지도편달로 이어졌으니, 결국 모두가 만족한 자리였다.
나흘째인 오늘.
마지막으로 아롯 왕가와 의회의 회의에 참석했다. 저들은 이후의 일정을 조율하려 했지만, 세냐는 단호한 태도로 모든 일정을 거절했다. 나흘이나 시달려 주었으니 해줄 만큼은 해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곧 죽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아무리 못해도 백 년은 넘게 살 텐데. 왜 이리 난리를 떠는 거야? 그래, 내가 너희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대신 그거 다 한 뒤에는 앞으로 아롯 땅은 밟지도 않을 거야. 그래도 돼?”
아롯과 평생 척지겠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더 강요하겠는가? 그렇게 오전의 일정을 마무리한 후.
녹색마탑의 최상층. 본래 이곳은 새롭게 녹탑주가 된 라이나인 보어스의 집무실이지만, 요 나흘 동안은 세냐가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라이나인은 마탑 최상층보다는 자신의 저택을 통째로 내주겠다고 말했고, 세냐가 바란다면 아롯 왕궁조차도 통째로 쓸 수 있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냐는 이곳, 녹색마탑의 최상층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박물관이 되어버린 저택과 더불어, 이곳은 300년 전에 세냐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장소다.
“흠.”
세냐는 널찍한 의자에 앉아서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로 금이 갔던 환상의 마안. 그 후로 사용하지 않고, 꼬박꼬박 영력을 부어준 덕에 환상의 마안은 말끔히 회복되었다.
“흐으음…….”
후회는 없다.
환상의 마안을 거두고, 누아르 제벨라의 영혼을 마안에 봉인했다. 당시의 세냐는 그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누아르가 죽어서 사라진다면, 그녀는 영원한 악몽이 되어 유진의 마음에 눌어붙을 것이다.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누아르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물론, 환상의 마안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세냐는 자신이 아무리 용을 써도, 본래 주인이던 누아르 제벨라만큼 환상의 마안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것을 진즉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옳았잖아?”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바벨에서 유폐의 마왕과 싸웠을 때. 누아르를 사용해서 환상의 마안을 제어하지 않았다면 과연 승리할 수 있었을까?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그럴 가능성은 몹시 낮았다.
그 전투에서 모두의 전력은- 유폐의 마왕에게 미치지 못했다. 환상의 마안으로 꿈과 현실을 연결하지 않았다면 유폐의 마왕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몰아붙일 대로 몰아붙여서, 유폐의 마왕이 가진 힘을 모두 쏟아내게 만든 덕에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독이 발동할 수 있었다…….
“으으…….”
모든 마왕이 죽었으니, 앞으로 환상의 마안을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봉인하는 것이 깔끔한 결말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고작’ 전투로만 국한하기에는 환상의 마안이 가진 힘은 너무나도 크다. 마법사적인 욕망으로는, 환상의 마안의 권능을 완전하게 마법으로 재현하고 싶다…….
그런 욕망만으로 환상의 마안을 봉인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법’조차도 핑곗거리일 뿐.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대로 마안을 봉인한다면, 누아르는 유진의 악몽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세냐는 유진이, 하멜이 어떤 성격인지를 잘 알았다. 누아르를 죽이는 순간. 유진이 누아르 제벨라에게 품었던 감정은- 아가로트에게만 영향을 받은 감정은 아니었다.
결국 유진은 자신과 누아르의 전생을 ‘떠올렸다’. 그리고 둘은 악몽 속에서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건 호소했을 것이다.
유진에게 눌어붙은 ‘누아르 제벨라’라는 악몽은, 결국 서로가 이루지 못하고 진득하게 고여 버린 감정이다. 그러한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기는커녕 더, 더 진해질 것이다. 평소에는 떠올리지도 않을지라도, 언젠가…… 돌발적으로 떠올라서 유진을 괴롭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는데 환상의 마안을 봉인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정말로 그것뿐인가? 누아르가 죽는 순간. 세냐가 느꼈던 감정은-
“…….”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가 악몽에서 속삭였던 말. 세냐는 ‘절대로’ 누아르와 유진 사이의 교감에 도달할 수가 없다. 서로를 애증하여 죽일 수밖에 없고, 죽음으로서 서로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파괴적인 관계.
그런 관계 따위 세냐는 바라지 않지만, 둘의 마지막에서…… 세냐는 질투란 감정을 느꼈다.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대로 누아르는 죽고, 어쩌면…… 아니, 반드시, 언젠가 환생할 것이다. 이 ‘두려움’에 대해서는 누아르가 직접 세냐에게 이죽대기도 했다.
-나와 하멜 사이에는…… 아주 진한 운명의 끈이 존재하죠. 언젠가 환생한 나는, 반드시, 하멜을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그때는 부정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세냐는 그 순간에 느꼈던 부정조차 거짓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누아르가 죽는 순간에 느꼈던 질투. 언젠가의 두려움. 그리고.
“나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의할 것을 모두 정의하고 나니 하나의 감정이 남는다. 세냐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동정심이다.
황혼의 마녀의 환생. 몽마로 태어난 누아르 제벨라. 전생의 감정을 이루기는커녕, 유진과 무조건 죽고 죽일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누아르 제벨라를 동정했다. ‘죽이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에 도달했는데도 죽이는 것을 선택한 유진을 동정했다. 그래서, 누아르의 혼을 붙잡았다…….
“약속했는데 말이야.”
바벨에서 유진과 약속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누아르 제벨라의 혼을 해방하기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세냐의 마음이 편치 않다. 세냐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며 환상의 마안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어머나.]
자주색 안개 속에서 누아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세냐를 응시하다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조금…… 시간이 흐른 것 같고. 세냐 메르데인, 당신은 아주 멀쩡해 보이고. 이곳은…….]
환상의 마안에 봉인되어 있는 동안에는 바깥을 관측할 수가 없다. 누아르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의 방…….]
주변을 살피던 시선이 책상의 명패에 닿았다.
[녹색마탑주, 라이나인 보어스…… 아하하. 내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녹탑주 자리는 공석이었는데. 그녀가 새로 녹색마탑주가 된 모양이죠?]
“여전히 말이 많네.”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 상황을 설명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뭐예요?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죠? 당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 승리했다는 것일 테고…… 흐흥, 당연히 하멜도 죽지 않았겠죠? 하멜이 죽었다면 당신도 따라 죽었을 테고. 어쩔 수 없어 죽지 못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얼굴일 수는 없을 거야.]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세냐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환상의 마안이 세냐의 통제하에 있는 이상, 누아르는 절대로 환상의 마안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영혼일 뿐인데도 요염한 빛을 발하며 세냐의 눈동자를 들여 보았다.
[전부 다, 끝난 모양이죠?]
“…….”
[아하하, 그런 것 같은데요? 유폐의 마왕이 쓰러졌다고 해도 멸망의 마왕이 남아 있었는데. 흐흥, 내 도움 없이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린 거예요?]
“시건방 떨지 마. 네 도움은 필요하지도 않았어.”
[흐응, 그럴 것 같기는 해요. 내 능력은 멸망의 마왕과는 그리 상성이 좋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유폐의 마왕과 싸울 때는 내 도움이 필요했잖아요? 설마 그것마저 아니라고 하지 않겠죠?]
“이미 지난 이야기로 생색내지 마.”
[그럼 앞으로의 이야기를 할까요?]
누아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세냐에게서 물러선 뒤, 마치 자신의 방인 것처럼 근처의 소파에 편안히 앉았다.
[나를 어쩔 생각이죠?]
“…….”
[당신이 나에게 꽤나 복잡한 감정들을 가진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어요. 설마,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죠? 세냐 메르데인. 당신은 당신 생각 이상으로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서툴러.]
“네게 편안한 죽음은 사치스러워.”
세냐는 누아르의 얼굴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나는 죽은 네가 유진의 악몽이 되게 두지 않을 거야. 언젠가 네가 환생해서 찾아오게 두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요?]
“나는, 네 혼을 해방하지 않을 거야. 많은…… 생각을 했어. 이미 죽은 너를 어떻게 해야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네 ‘죽음’이 유진에게 악몽이 되지 않을까.”
누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누아르는 살아 있을 적과 똑같은 미소를 머금고서 세냐를 응시했다.
세냐는 그 시선에 꿰뚫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툭.
활짝 열린 공간에서 떨어진 것은, 인간과 똑같은 크기를 가진 구체관절인형이었다.
“네 혼을 여기 처박을 거야.”
[어느 사이에 네크로맨서가 된 거예요? 영혼을 다른 것에 처박는다니. 흐음, 내가 아는 흑마법사 중 그런 재주에 능통한 계집이 하나 있었죠. 아멜리아 머윈. 그러고 보니, 당신이 아멜리아 머윈을 가지고 있죠?]
아멜리아 머윈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박살 났고, 다시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세냐 메르데인. 당신은 아멜리아 머윈의 기억을 통해 흑마법을 이해했죠. 그녀에게서 마력도 뽑아내서 사용했고. 그러면서 흑마법에 홀라당 빠지기라도 한 거예요?]
“흑마법도 결국은 마법이야. 그리고 나는 마법의 여신이지.”
[참 편의주의적이군요. 뭐 좋아요, 당신이 그러겠다면야. 그래서? 나를 저 장난감에 처박고,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
“넌 모든 걸 보게 될 거야.”
이어진 말에 누아르의 뺨이 씰룩거렸다.
“세상은 평화로워졌어. 모든 마왕이 죽었고, 더 이상 위협은 남아 있지 않아. 이제 남은 것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뿐이지. 누아르 제벨라. 너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지켜보게 될 거야.”
[…….]
“말했지? 네게 죽음과 환생은 사치스럽다고. 나는, 네게 그 모든 것을 박탈하는 거야. 너는 죽을 수 없고, 환생할 수도 없어. 너는 계속해서 저 인형의 몸에 갇혀서…… 나와 유진이 행복한 것을 지켜보게 될 거야.”
누아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세냐를 응시했다. 세냐는 호흡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그것이 내가 너에게 내리는 벌이야.”
[벌이라.]
짧은 침묵 뒤에 누아르의 입이 열렸다.
[당신이 나에게 벌을 내리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하하…… 제쳐두도록 하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세냐 메르데인. 제가 아까 말했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서투르다고.]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
[과연. 이건…… 정말, 이기적이고, 지독하고, 모욕적인 자비로군요. 그리고 굉장히 효과적이에요. 확실히, ‘완벽한 끝’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있어서, 이것 이상의 형벌은 없을 거예요.]
“…….”
[당신의 생각은 어때요?]
누아르는 소파에 기댄 머리를 돌려 뒤를 보았다.
[나의, 하멜.]
세냐도 마음을 다잡고서 시선을 들었다.
문 앞에 유진이 서 있었다. 문밖에서부터 대화를 들었다. 도중에 참지 못하고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대화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듣고만 있었다.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혼은 해방하기로 약속했잖아.”
“그 대답은 설명했어.”
“내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내 고집에 어울려 줘.”
“네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이야.”
“두려움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건 너도 알잖아.”
세냐의 중얼거림에 유진은 눈을 감았다. 어두운 침묵이 흐르는 중에 누아르의 키득거림이 들렸다.
[꼴사납고 촌스러운 구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 텐데.]
“정말로 그래?”
쿵. 세냐의 손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녀는 소파에 앉은 누아르와, 눈을 감고 선 유진을 번갈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죽어서 그리워하는 것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서…… 살아서……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것과 비슷하게 남은 것이 훨씬 좋잖아. 안 그래?”
[경험담인가요?]
누아르가 이죽댔다.
[300년 전의 당신을 하멜에게 투영하고 있는 건가요?]
“어, 맞아!”
세냐는 빽 고함을 지르며 다시 한번 책상을 두드렸다.
“죽은 상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주 엿 같은 기분이거든……! 나는 유진이 그딴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그리워할 생각 없어.”
“물론 그래야지!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하지만…… 너도 알잖아. 가끔, 꿈을 꿀 수도 있다는 걸.”
바닥에 널브러졌던 인형이 둥실 떠올랐다. 세냐는 그 인형을 누아르의 옆에 던져놓고서 말을 이었다.
“알아.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너희에게는 이기적이고, 지독하고, 모욕적이고, 꼴사납고, 촌스럽다는 거. ……됐어, 싫으면 관둬. 당장 인형도 박살 내고, 저 갈X의 혼을 해방해 버릴…….”
“10년.”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떴다.
“10년은 네 고집대로 해. 그쯤 있으면 나도 미련 같은 거 남지 않을 것 같으니까.”
[제 의견은 상관없는 거예요?]
옆에 앉은 인형을 이리저리 관찰하던 누아르가 인형의 팔을 잡아 흔들며 물었다.
[10년이라, 시간이 애매한데. 기왕 할 거면 100년은 어때요? 어차피 당신들 100년은 살 거 아니에요?]
“닥쳐.”
[내가 살아 있을 때보다 태도가 더 차가운 것 같아. 아하, 혹시 그거예요? 정을 떼는 거? 하멜, 당신도 알잖아요? 미운 정도 정이라는 거. 차라리 만족해 버리는 것이 미련이 남지 않을 거예요.]
“……만족?”
[예를 들면, 나랑 같이 잔다든가.]
누아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파격적인 대답에 유진과 세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흠……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안 되겠어요. 나랑 자면 오히려 미련이 더 많아질 거야.]
“미친년.”
유진이 질색하고 중얼거렸다. 세냐도 똑같이 욕설을 쏘아붙이려 했지만, 진지한 얼굴로 인형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누아르의 모습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요, 제가 이 안으로 들어간다면. 이 밋밋한 인형의 모습이 되는 건가요?]
“……네 혼의 모습대로 투영될 거야.”
[그래요?]
누아르의 자주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세냐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 인형에는 생식기능도 있나요?]
그 질문에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그는 당연히 세냐가 험한 욕설을 내뱉을 것을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세냐의 표정은 굉장히 미묘했다.
“애는 못 낳아.”
잠깐의 머뭇거림 뒤에 돌아온 대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고, 누아르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애만 못 낳나 보네?]
“왜 그런 쓸데없는 기능을 처넣은 거냐?”
“그게…… 이것도 하나의 창조잖아……. 내 마법을 더 진보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아주 훌륭해요. 세냐 메르데인. 당신은 정말로 천재, 아니, 마법의 여신이에요.]
누아르는 인형의 팔을 들어 짝짝 박수까지 쳤다.
“누가 미쳤는지…….”
“그래서 갑자기 왜 찾아온 거야?”
유진의 중얼거림은 들었지만 무시했다. 세냐는 착잡해 하는 유진의 얼굴을 힐긋 보면서 말을 이었다.
“원래는 내가 오늘 찾아가려고 했는데. 혹시 무슨 일 있어?”
“일이야 있긴 한데, 너만큼 어이없는 일은 아니야.”
“그래서 무슨 일인데?”
“라이언하트의 본가를 옮길 거다.”
그 말에 세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키옐 라이언하트 본가가 이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몇 주일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곧 세냐의 눈동자가 샐쭉 휘어졌다.
“왜 날 찾아왔는지 알겠네. 이 세냐 님의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지? 하긴, 저택 부지를 통째로 옮기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돼? 숲을 통째로 뽑아서 옮겨 심으면 되나?”
“어.”
나흘 동안 본가 어른들과 이사를 두고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본가 식구들만 이사를 가고, 저택부지는 엘프들이 편하게 사용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러한 계획은 엘프들이 거절했다. 시크나드를 필두로 한 엘프들은 이미 바깥 생활에 적응해 버린 탓에 세계수가 있는 대수림에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기나긴 삶의 일부를 라이언하트에게 은혜를 갚는 것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다.
“드워프들은?”
“따라오겠대.”
“그렇다면 지금이랑 별다를 것 없잖아.”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영지로 가면 되지.”
세계수의 묘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숲과 엘프들. 계속해서 확장되는 드워프들의 공방. 그 모든 것을 옮기고서도 본가의 생활권을 침범하지 않을 만큼의 거대한 영지.
“설마.”
누구도 주인이 되지 않은 텅 빈 땅.
라이언하트 본가의 새로운 터전은 바로 판데모니엄이다.
빌어먹을 환생 621화
-밀어버리지 뭐.
판데모니엄을 내려다보면서 유진이 했던 말이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판데모니엄은 밀리지 않았다. 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 가치’ 때문이다.
지금의 헬무드는 더 이상 ‘제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판데모니엄은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에서 제일 강성했던 제국의 수도다. 제국은 몰락했고, 판데모니엄은 본래 위치한 자리에서 뽑혀 나와 유라스와 헬무드의 중립지역에 떨어졌다. 한때 판데모니엄을 상징했던 불야성과 콘크리트의 빌딩도 사라졌다.
“그냥 밀어버리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유진은 판데모니엄의 상공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너진 성벽. 대부분의 건물도 무너졌다. 그 파괴의 대부분은 멜키스가 벌인 일이고, 살아남은 것들은 멸망의 마왕의 강림과 이후의 전투에 휘말려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어때. 뭐 좀 알겠냐?”
툭 던진 질문에 곁에 서 있던 베르무트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잠시 판데모니엄을 내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면을 반전시켰군.”
“뭐?”
“본래의 도시는 이 공간의 이면에 있단 말이다.”
베르무트의 손가락이 허공을 긋자, 살짝 벌어진 공간의 틈을 통해 다른 풍경이 보였다.
높다란 콘크리트의 빌딩. 유진이 전에 보았던 판데모니엄의 풍경이었다.
“전부 밀어버리고 새로 만든 줄 알았더니.”
유진은 팔짱을 끼고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
몇 없는 후보지 끝에 판데모니엄을 라이언하트의 새로운 터전으로 정했다. 사소한 문제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가 키옐의 영토와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인데……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황제와 담판을 지었다.
욕심 많은 황제는 라이언하트의 가주에게 키옐의 대공 작위를 내리고, 현재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판데모니엄을 대공의 영토로 삼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 판데모니엄을 ‘라이언하트 공국’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게 되면 키옐 제국 입장에서는 여전히 라이언하트를 품 안에 둘 수 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이점을 얻는다.
현재 판데모니엄은 헬무드의 변경, 유라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판데모니엄이 라이언하트 공국이 된다면, 키옐은 황실은 아주 간단하게 유라스를 경계하면서 공화국으로 변모 중인 헬무드의 내정에까지 간섭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리 욕심이 많냐?
안타깝게도 황제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라이언하트는 대공 작위를 거절했고, 이 거대한 땅덩어리는 온전히 라이언하트의 땅이 되었다.
지금부터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무엇으로 채우느냐다.
“기존의 도시는 너무 과해.”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이 불야성이자 빌딩의 숲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유폐의 마왕의 막대한 마력 때문이다. 물론 유진의 힘이라면 헬무드 전역은 몰라도 판데모니엄 하나는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겠지만- 유진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판데모니엄은 기형적인 도시였다. 그 모든 지식은 유폐의 마왕이 몇 번이나 세계를 넘어오며 축적된 것. 유진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도시를 복원해서 유지해 봤자 머잖아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도시의 디자인은 내가 할 수 있어요.”
키득키득 웃음이 섞인 목소리에 유진은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팔짱을 끼고 선 누아르가 있었다. 세냐가 말했던 것처럼, 인형의 몸은 누아르의 영혼에 맞게 변화했다.
어쩌면…… 황혼의 마녀의, 아리아의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인형의 몸은 누아르가 살아 있을 적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황혼의 마녀 아리아가 아닌,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로 죽었다.
“환상의 마안이 있다면 순식간에 건물을 일으킬 수 있죠.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세냐 메르데인의 협력이 필요하겠지만.”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유진에게 몸을 기울였다.
“당신도 제벨라 시티를 기억하죠? 그거, 전부 다 내가 만든 거예요. 제벨라 시티를 만들 때는 아직 내 격과 마안이 부족해서, 직접 현장을 지휘하곤 했죠. 하지만 지금은…….”
“…….”
유진은 뚱한 얼굴로 누아르를 바라보았다.
아래의 폐허를 모조리 밀어버리면 황무지만 남는다. 새로 도시를 세우려 한다면, 어디서든 인력은 빌릴 수 있다. 뭔가를 새로 만들고 싶어서 몸이 잔뜩 달은 드워프들. 거기에 아롯 마법사들과, 대륙 각국에서 인력을 지원받는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솔직히 가늠도 되지 않았다. 유진은 ‘이런 일’에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영지의 크기를 생각해 볼 때,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년은 걸릴 것만 같았다.
“내가 이제 와서 나쁜 일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은 당신도 알잖아요? 애당초 나는 당신과 세냐 메르데인에게 반란을 일으킬 수도 없어요.”
유진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누아르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영혼은 당신들의 것이니까요. 나도 기왕 이렇게 된 것, 현재를 즐기고 싶다고요.”
“네가 허튼짓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네…… 감각이 신용이 안 가.”
“감각? 맙소사! 하멜, 다른 것은 몰라도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내가 뭘?”
“몰라서 물어요? 하멜! 당신은 항상 똑같은 옷만 입잖아요! 그 다홍색 셔츠. 그리고 망토! 혹은 라이언하트의 제복!”
“그게 뭐 어때서?”
“나는 누아르 제벨라예요. 거대 제벨라 기업의 총수! 헬무드를 넘어, 대륙의 유행을 선도하던 사람이라고요.”
생전에 누아르는 헬무드의 공작이면서 여러 기업을 운영했다. 그녀가 회장으로 있던 제벨라 기업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던 세 가지가 건설과 연예기획사, 패션이다. 누아르는 죽었지만, 그녀가 생전에 남긴 것들은 여전히 헬무드에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유진은 기억을 제벨라 시티를 떠올렸다. 그 도시는 오직 향락이 가득한 도시였다.
“이 영지는 앞으로 계속 라이언하트가 다스릴 텐데. 네 지랄 맞은 취향이 들어간 건물들이 있다면 영지민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참 흥이 넘치는구나 생각하겠죠.”
누아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말이에요, 제벨라 시티를 그렇게 만든 것을 애초에 도시의 목적이 테마파크였기 때문이에요. 나의 제벨라 건설은 그런 도시 말고 다른 평범한 도시도 잘 만든다구요. 내가 300년 동안 헬무드에서 공사한 도시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세냐한테 말은 해보지. 그래서, 만약 시공한다면 얼마나 걸리는 거냐?”
“어디 보자……. 영지의 크기랑…… 흠, 저쪽은 어떻게 할 건데요?”
누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성벽의 바깥. 신군과 헬무드의 마군이 격돌하고, 멸망의 마왕의 죽음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누르의 시체가 사라졌던 전장.
“저곳은 호국원으로 만든대. 중앙에 거대한 추모비를 세우고. 그리고 뭐…… 이거저거 많이 들어온다던데.”
“그래 봤자 전쟁 박물관 정도겠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저곳이랑 아예 연결해 버리죠?”
누아르가 눈을 빛내며 웃었다.
“세상을 구한 라이언하트의 도시와 연결되는 것이 보다 상징적이지 않아요? 영웅의 광장이나 용사의 광장, 뭐 그렇게 해서. 당신들 신상도 세우고.”
“…….”
“하멜, 당신이 만들고 싶다는 아카데미도 저쪽에 세우는 것이 어때요? 딱이네, 광장과 추모비를 아예 교정에 두는 거야.”
이야기를 들을수록 유진의 마음은 점점 누아르에게 도시 디자인을 맡기는 쪽으로 기울었다.
“강은 안 만들 건가요?”
유진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던 누아르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만약 이 자리에 세냐가 있었다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꽥 소리를 지를 발언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세냐는 없었다.
현재 세냐는 라이언하트의 본가에서 숲을 통째로 옮길 준비와, 사마르 대수림의 세계수를 이곳에 옮겨질 숲과 연결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앞으로 긴 시간 잠이 들 세계수를 빠르게 회복시키기 위해서다. 현재 라이언하트 본가의 숲에 심어진 세계수의 묘목은 세 그루. 대수림의 세계수와 비교하자면 한참이나 작지만, 성장 중인 묘목들을 마법을 통해 공간을 격하여 세계수와 접목시킨다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비슈르를 잠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은 과해.”
하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과하다. 그 대답에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과하죠. 바다와 거리도 멀기도 하고. 아무튼, 저쪽까지 작업한다면…… 흠…….”
누아르는 턱을 어루만지면서 판데모니엄과 평원 쪽을 번갈아 보았다.
“영지민은 얼마나 생각해요?”
“몰라…….”
“정말, 당신은 아무런 생각이 없군요. 괜찮아요, 내가 생각해 줄 테니까. 어디 보자……. 기존 판데모니엄의 인구수가…… 흠, 도시가 완성된다면 대륙 각지에서 이주하고 싶다는 사람이 넘칠 텐데. 미래를 생각하면 인구 밀도를 조정해서…… 영지민은 키옐 제국민으로만 채울 건가요?”
“어…… 음…… 아니.”
유진은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베르무트를 힐긋 보았다.
“나는 왜 보는 거지?”
“넌 뭐…… 계획 없냐?”
“이런 문제라면 나보다 모론이 더 도움이 될 거다.”
“하긴, 그렇겠죠.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당신은 키옐에 정착하고서 자식 낳는 것에만 열중했으니.”
누아르의 이죽거림에 베르무트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누아르를 응시했다.
솔직히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설마 그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다니…….
“키옐 제국민으로만 채우면 너무 키옐만 좋은 꼴이잖아.”
“좋아요. 하멜, 그럼 이것부터 들어보죠. 당신이 세우고 싶다는 아카데미는 대체 뭐 하는 곳이에요? 설마 수학이나 그런 것을 배우는 곳은 아닐 테고.”
“어…… 검도 가르치고…… 다른 무기나…… 싸우는 법? 마법도 배우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뭐, 다른 것들…….”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싶으시다? 거기에 도시는 국경 없이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이주할 수 있고? 아예 종족의 벽도 없애지 그래요?”
“세냐는 몰라도 나는 모든 종족에게 평등한 입장이야. 엘프나 드워프, 뭐, 거인도 좋고, 수인이나…….”
“마족은?”
누아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유진은 품 안의 사슬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사상검증만 확실하다면.”
“인구만 충족된다면 어떻게든 산업은 굴러가고, 초기 예산은? 라이언하트의 금고를 열 건가요?”
“다른 국가들에게 지원을…….”
확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구하면 당연히 줄 것이다. 유진의 대답에 누아르가 짝짝 박수를 쳤다.
“신도시를 굴리는데 필요한 초기 예산은 각국의 지원금으로 충당. 아마 산업이 안정되면 자금이 순환되고 돈이 불겠죠?”
“뭐…… 그렇지 않을까…….”
“정리하자면…… 라이언하트 신도시의 이주민들은 국경도 종족도 제한이 없어요. 필요한 절차만 밟는다면 누구든 이주해서 살 수 있죠. 그런 다문화 도시라면 관광산업만으로도 잔뜩 벌 수 있을 거예요. 거기에 다양한 학문을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까지!”
누아르의 박수 소리가 커졌다.
“당신의 인맥을 쓴다면 교사는 얼마든지 채울 수 있죠. 정 안되면 당신들이 직접 교단에 서도 되고. 흠, 그것만으로 아카데미의 입학생은 만원일 거야. 아니면 입학증을 팔아도 좋겠네요. 부르는 게 값일 테니까.”
“그건 좀…….”
“실전 무기술에 기사 수업, 마법, 신학, 정령술…… 아, 드워프도 있죠? 멋지네요, 아주 이상적이야. 아마 고금을 통틀어 이런 도시를 세울 수 있는 것은 당신뿐일 거예요.”
“비꼬는 거야 뭐야?”
“비꼬다뇨! 저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의 라이언하트 신도시는 내 제벨라 시티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가 될 거고, 그걸 만드는 것이 바로 나인 거잖아요?”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팔을 끌어안았다.
“아예 나도 교단에 서볼까요? 아카데미라고 꼭 어린 학생만 가르칠 필요는 없잖아요. 어른을 위한…… 흠, 어린 학생을 위한 성교육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개소리하지 마.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
노골적으로 가슴을 부벼대는 누아르를 떨치고서 물었다.
“일단 헬무드에서 제벨라 기업의 사원들부터 불러줘요. 그리고 세냐 메르데인도.”
“……환상의 마안은 어떻게 쓰겠다는 건데? 꿈과 현실을 연결해서, 뭐 그럴 셈은 아니겠지?”
“그걸 안 하면 시간이 엄청 걸린다구요. 걱정하지 말아요, 악몽으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바벨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냐 메르데인의 마법과 동조시켜서, 현실을 개변하고…… 그렇다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힘드니까…….”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을 돌리던 누아르가 베르무트를 홱 돌아보았다.
“판데모니엄의 이면에 있다는 도시의 자재를 쓰도록 하죠. 그래도 되겠죠?”
순식간에 이어지는 대화를 따라가기 버거워 한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베르무트는 이런 것에 조예가 없었기 때문에,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한 달.”
누아르가 방긋 웃었다.
“한 달 뒤에 이 폐허와 평원에 대륙에서 가장 멋진 도시를 만들어주죠. 모든 종족의 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진, 동시에 향락을…….”
“안 돼.”
“이만한 대도시에 유흥가가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하멜, 당신이 안 된다고 말해도 도시 사람들이 간절히 바랄 거에요.”
“……서큐버스 클럽은 안 돼.”
“대륙법에 따라 인도적인 선에서 조정하도록 하죠.”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공의 보수는, 하멜, 당신과의 하룻밤으로?”
“미친 소리 말고.”
“그럼 입맞춤으로?”
“꺼져.”
“매정한 사람 같으니.”
연달아 거절을 들었는데도 누아르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약속된 시간은 10년. 그 정도의 시간을, 서로를 죽이려 들지 않고, 증오가 희미해지고서 지낸다면……. 누아르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쿡쿡 웃었다.
“……이거나 가져가라.”
유진은 목걸이를 잡으며 말했다.
제벨라 시티가 붕괴하는 순간에 누아르에게 받았던 반지들. 하멜과 누아르의 이름이 각인된 한 쌍의 목걸이. 누아르가 저렇게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더 이상 목걸이를 걸 필요가 없지 않나.
“싫어요.”
유진이 목걸이의 반지를 빼려 하자, 누아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이도 못 낳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잖아.”
“나는 죽었다고 생각해요. 언데드 비슷한 것으로 남아 있을 뿐. 그러니까 그 반지는-”
누아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톡. 가까이 다가온 손가락이 목걸이의 반지 한 쌍을 두드렸다.
“당신이 가지고 있도록 해요. 정, 나에게 반지를 돌려주고 싶거든……. 후후, 반지를 줄 만한 관계가 되든가.”
“끔찍한 소리를 하는군.”
유진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목걸이의 반지는 빼지 않았다.
빌어먹을 환생 622화
신성제국 유라스, 트레치아 교구.
크리스티나는 이곳의 외딴 수도원에서 자랐다. 그녀는 갓난아기 적에 수도원 문 앞에 버려졌고, 성직자들에게 거두어졌고, 10살이 되었을 적에 세르지오 로게리스 추기경의 양녀가 되었다.
수도원에 버려지고, 성직자에게 거두어진 순간부터 크리스티나의 미래는 ‘성직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한 미래에서 커다란 변화점이 되었던 것이 세르지오 로게리스 추기경의 양녀가 된 것이다. 양부가 추기경의 자리에까지 오른 대단한 성직자인 만큼, 크리스티나도 ‘평범한’ 성직자여서는 안 되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성장할수록, 크리스티나의 외모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성녀인 ‘신실한 아니스’와 닮아갔다. 성당에 찾아오는 신도들은 어린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보며 ‘성녀의 재림’이라고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크리스티나는 ‘성녀’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크리스티나의 자의가 아니었지만, 어린 크리스티나는 주변의 기대와 기도를 거절할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세르지오 로게리스에게 직접 신학을 가르침 받았고, 역대 성녀와 후보들이 의식을 치렀다는 빛의 샘을 찾았으며, 어엿한 ‘성녀 후보’가 된 뒤에는- ‘빛’의 가르침을 알리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알카르트 교구에 부임했다.
이제는 알고 있다.
크리스티나가 세르지오의 양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크리스티나의 외모가 점점 신실한 아니스를 닮게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어린아이조차 알 수 있었던 노골적인 시선들. 신학을 가르칠 적에 양부가 보이던 강압적인 태도. 고문과 다르지 않던 빛의 샘에서의 기도. 피를 흘릴 때마다 기묘한 빛을 발하던 샘물과, 기도 중에 부유하던 의식이 느끼던 불쾌감, 희미하게 들리는 흐느낌들의 정체.
크리스티나는 묵묵히 앞을 보았다. 한때 ‘빛의 샘’이라고 불리던 유라스의 성지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거대한 공동묘지일 뿐이다.
몇 년 전. 유진은 이곳에서 수많은 성기사와 이단심문관을 죽였다. 그들이 용사를 시험하고 죽이려 들었고, 마땅한 대가를 치렀다. 깊고 깊은 구덩이에 수많은 시체가 던져졌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도 적지는 않았으나, 구덩이에 떨어지고 살아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빛의 샘은 붕괴했다. 이곳이 결코 ‘성지’라고 불릴 만한 장소가 아니었기에. 인조적으로 성녀를 양산한 것으로도 모자라, 성녀가 되지 못한 후보들을 시체를 샘의 원천으로 삼았기에.
유진의, 하멜의 동료였던- 신실한 아니스마저 샘에 공양되었다.
그래서다.
그날 유진이 참지 못했던 것은.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질렀던 것은. 빛을 섬긴다는 유라스의 성직자들의 폐단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고 싶다던, 천국의 존재를 바라던 아니스의 죽음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분노를 다스리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빛은, 자신을 섬기는 이들을 베어 죽이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안식하기를.”
묘지의 중앙. 새하얀 비석 앞에서 크리스티나는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이곳에서 죽은 성기사와 이단심문관 대부분은 시체의 일부라도 건져, 각자의 묘비를 가졌다. 하지만 이 비석에 적힌 이들은 시체의 일부조차 갖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샘에 가라앉았던 이들. 다음의 성녀 후보를 위해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전대의 성녀 후보들. 그중에는 ‘후보’조차 되지 못하고, 빛의 샘을 요람으로, 관으로 삼아 죽은 갓난아기들도 있다.
기적을 재현할 모조화신을 만들기 위해 스러진, 크리스티나의 언니들. 이 비석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천국.”
크리스티나는 기도의 끝에 중얼거렸다.
전쟁이 끝나고 떠돌았던 한 달.
머나먼 바다.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해역 어딘가에서, 새하얀 땅을 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직접 빛을 영접했다. 빛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크리스티나는 확실하게 ‘빛’을 느꼈다.
천국.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들은 흑마법이나 다른 이유로 영멸하지 않는 이상 머나먼 바다에 도달한다. 그곳을 거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하지만 그곳을 과연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빛의 ‘천국’에 대해서는 이전에 유진에게 이야기를 들었었다. 윤회하기 전에 잠시 거치는 장소. 이승에서 오염되거나 망가진 영혼은, 천국에서 빛에 의해 정화된 뒤에 윤회의 굴레에 오른다.
그러한 과정에서 빛은 영혼에게 최후의 신앙을 뽑아낸다. 그렇게 축적된 신앙이 유진에게 이어졌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일행은 빛의 성역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다.
그 시간 동안 유진은 빛의 앞에 앉아, 마치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침묵했다.
빛은 멸망을 끝내고 세상을 구하는 것을 바라며 거신에게 잡아먹힌 머나먼 과거의 신들. 그들이 세상을 위해 안배하고 환생시킨 것이 유진이었기에, 대화가 불가능한 빛에게 있어서 유일한 예외 역시 유진이었다.
‘끝났어.’
사흘 뒤. 자리에서 일어선 유진은 그렇게 말했다. 멸망이 끝났다는 것은 빛도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굳이 찾아와서 사흘 동안이나 빛와 교감한 것은- 기나긴 시간 동안 저런 형태가 되어 남은 옛 인연들에 대한 인사와 더불어, 빛과 새로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천국은 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확신을 가지고서 중얼거렸다. 성역을 떠나기 전, 크리스티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도달했을 때와 지금의 빛이 다르다는 것을.
유진은 과거에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
-나중 가면 거기도 뜯어고쳐야겠지.
-조금 더 그럴듯한 천국으로 말이야.
빛의 천국이 어떻게 달라지고 완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유진에게 묻지 않았다. 천국의 형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된다. 크리스티나는 천국에 대한 궁금증을 언젠가, 언젠가…… 죽은 뒤를 위한 기대로 남겨두었다.
[저는 당장이라도 확인하러 갈 수 있죠.]
묘비를 뒤로하고 걸었다.
[이미 진즉에 죽은 몸이니 말입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크리스티나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지금 아니스가 하는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란 것은 안다. 예전부터 했던 말 아닌가. 아니스가 천사가 되어 세상에 남은 것은 과거의 미련을 이루기 위해서다.
모든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 300년 전에 이루지 못했던 목표. 멸망의 끝으로 300년 전 아니스의 미련은 이뤄졌다.
“새로운 미련이 남아계시지 않습니까.”
[그것도 어느 정도는 이뤘습니다.]
“유진 님은, 시스터가 사라진다면…… 굉장히 슬퍼하실 겁니다. 세냐 님과 모론 님, 베르무트 님도. 그리고 당연히 저도.”
[하지만 제가 이렇게 당신의 몸을 공유해 버리면, 크리스티나,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누릴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계속해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추억은 온전히 당신만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세냐 님이 방법을 만들어주셨지 않습니까?”
공동묘지를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라파엘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게이트까지 모시겠습니다.”
이곳의 방문이 유라스 일정의 마지막이다. 오늘로 크리스티나는 유라스를 떠나, 라이언하트의 본가로 넘어간다. 교황청은 성대한 배웅식을 준비하려 했지만, 성녀들은 그런 배웅 따위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들이 갖게 된 ‘성녀’라는 이름은 앞으로 평생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유라스는 감히 성녀들을 감시할 수 없겠지만, 수많은 빛의 신도들이 성녀를 기억하고 바라는 것까지는 성녀들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방법이라.]
아폴로가 이끄는 마차에 올랐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눈을 통해, 맞은편 자리에 놓인 커다란 여행 가방을 응시했다.
[그 방법은…… 아주 훌륭해서, 제 안에 남은 미련을 키워 버렸지요.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말없이 손을 뻗어 여행가방을 무릎 위로 가져왔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가방의 내부는 공간마법에 의해 일그러져 있다. 크리스티나는 그 안에 손을 넣어, 큼지막한 인형을 꺼내 맞은편에 앉혀놓았다.
“그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조차도 인형의 몸으로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시스터가 그렇게 하지 않으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그것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듭니다.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저는 정말로 세냐가 노망이 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크리스티나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세냐와 달리, 성녀들은 누아르 제벨라의 소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누아르가 예전처럼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아닐지라도, 그녀에게 겪었던 과거의 위협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누아르 제벨라가 기구한 운명에 희롱당했다는 것은 동정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이 삶을 주는 것은 과한 친절이지 않습니까?]
“세냐 님은 그러한 삶이 누아르 제벨라에게 내리는 형벌이라고 말하셨지요.”
[그 계집애가 정말로 그런 이유만으로 삶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세냐 님은 무르신 분이죠. 하지만 순수한 동정심만으로 누아르 제벨라에게 자비를 베푸실 만큼 어리석은 분은 아니십니다. 게다가…….”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이곳에서 판데모니엄까지의 거리는 멀어 풍경은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현재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일 판데모니엄의 방향을 응시했다.
“누아르 제벨라는…… 유능하죠. 필요에 따라 여러 쪽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만큼 사용한 뒤에 성불시키면 될 텐데. 10년이나 되는 시간을 주다니…… 세냐의 성격을 보건대, 막상 10년이 지나면 못된 정이라도 들어서 성불을 유보시킬 겁니다.]
“그러지 못하도록 저희 ‘둘이서’ 견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리스티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인형의 손을 잡았다.
“저는 시스터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시스터에게는 결코 세상을 떠날 수 없는 많은 미련이 남아 계십니다.”
[예전에는 순진해서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아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승을 떠나 천국에 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던 생각은 크리스티나와의 대화를 통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저는 예전에도 마냥 순진하지는 않았습니다.”
[글쎄요. 독설을 떠나서 휘둘리기 좋은 성격이기는 했었던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군요. 언제부턴가는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그 모두가 시스터께 보고 들으며 배운 것입니다.”
돌아온 대답에 아니스는 쿡쿡 웃었다.
ㅡ화아악…… 크리스티나의 뒤편에서 아니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맞은편 인형의 옆에 살며시 앉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사람들이 비웃지 않을까요?]
“무엇을 말입니까?”
[300년 전에 죽은 제가, 성직자이고 성녀인 제가, 죽음이란 섭리를 거스르고 인형에 깃들어 살아가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스 님.”
크리스티나가 방긋 웃었다. ‘시스터’라고 부르지 않았다. 똑바로 불린 이름에 아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멸망의 마왕의 뱃속에서, 유진 님과 아니스 님, 세냐 님, 모론 님이 베르무트 님께 하신 말씀 중에서 말입니다. 제 가슴에 가장 깊게 스며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행복해질 자격이 있고, 그건 아니스 님도 마찬가지십니다.”
크리스티나의 손이 아니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하지만 마주 잡은 손에 감촉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아니스는 결국 영혼이자 천사일 뿐이며, 눈에 보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라도 피부의 온기는 느낄 수 없다. 음식을 먹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모두가 크리스티나의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니스 님. 당신은 30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육체는 성유물로 가공되셨고, 일부는 빛의 샘에 가라앉았으며, 다른 일부는 많은 후보를 거쳐…… 갓난아기일 적 제 몸에 이식되었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아니스 님은 시체마저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안식을 갖지 못하고, 천사가 되어 저와 함께하셨습니다.”
[……제가 바란 일입니다.]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하신 일이시죠.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쩔 수 없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다.”
[정말이지.]
아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의와 신앙이 아닌, 저라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호소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크리스티나. 알겠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아니스 님의 선택을 추한 몸부림이라 비웃는다면, 제가 직접 그들의 뺨을 때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저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이 왼뺨을, 제가 오른뺨을 때리면 되겠군요.]
마주 잡은 손이 놓였다. 아니스는 곁에 앉은 인형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이것에 대해서는 세냐의 설명이 있었지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다고. 하지만 아이는 낳을 수 없다고 했지요?]
“연구를 계속하면 그러한 점도 보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딱히 아이를 낳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당신과 하멜의 아이를 보는 것도 즐거울 테니까요.]
“아이라니…… 출산은 아무래도 세냐 님이 먼저 하셔야지 않겠습니까?”
[낳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요? 얼굴도 붉히지 않고.]
놀려보았지만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붉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나타났다.
웃음으로 휘어진 눈, 얇은 틈으로 푸른 눈동자가 번득였다. 아니스는 저 미소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광기에 자신도 모르게 영혼을 떨었다.
과연.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은 것이다.
빌어먹을 환생 623화
이른 새벽, 시엘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은 시간이지만, 시엘은 이 시각에 눈을 뜨는 것이 익숙했다.
침대에 앉아 목을 몇 바퀴 돌리고, 양 발바닥을 붙여 앉은 뒤에 상체를 앞으로 쭈욱 늘렸다. 그 뒤에 침대에서 내려와 관절을 풀면서 가볍게 몸을 풀어주고, 침대 옆에 놓인 물을 마신 뒤에, 세안과 양치를 마친 뒤에 옷을 갈아입었다.
방을 나오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대부분이 잠든 시간. 은은한 조명으로 밝혀진 복도를 소리 없이 걸었다. 지금 시간에 일어나서 방을 나서는 것이 시엘에게는 일상이다.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태어난 만큼 어린 시절 노력이란 것이 부족했던 적은 없다. 이제는 그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된 장남,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가주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는- 어머니의 만족과, 본가의 입지를 위해서. 그리고…….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었을지도.”
고요한 복도를 걸으며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꼭 그녀뿐만은 아니었다. 쌍둥이가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노력한 것은, 어머니의 만족과 본가에서의 입지뿐만은 아니다. 13살. 지금은 사라진 라이언하트의 전통인 혈계식에서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고, 파격적으로 본가의 양자까지 된 유진과 경쟁하기 위해. 아니, 경쟁이라기보다…….
13살. 어린 나이의 쌍둥이는 유진에게 복잡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본가보다 훨씬 뛰어난 방계. 그저 방계로만 남았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유진은 본가의 양자가 되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애니실라는 시류를 읽는 눈이 밝았기에, 유진을 적대하는 노선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린 쌍둥이를 앞에 앉혀놓고 했던 말은, 유진과 진짜 가족이 되라는 것이었다.
혈계식에서 유진의 실력을 직접 보았던 것도 쌍둥이에게는 호재가 되었다.
시안은 유진의 힘에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그 나이의 남자아이는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을 동경하며 친해지고 싶어 하는 법. 그러나 시안은 동경을 넘어 형제가 되기를 바랐고, 명문가 도련님의 자존심은 어떻게든 유진을 따라가기 위한 노력을 하게 만들었다.
시엘도 비슷하다. 다만, 시엘은 시안과 달리 여자였다. 피가 짙게 이어진 가족만으로 이뤄진 본가에서만 살았던 시엘에게 있어, 갑작스레 나타난 유진은- 어릴 적부터 ‘가족’이나 ‘남매’라는 인식이 희미할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의 감정이 덜했다면. 유진이 아롯으로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흑사자가 되는 대신, 유진을 따라갔다면. 일찍부터 이 감정을 인정하고 유진에게 호소했다면…… 그런 종류의 노력을 했다면.
“됐을 리가 없지.”
사정을 모르던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시엘은 유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시엘이 어떤 방향성의 노력을 했건, 유진에게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과거’란 절대로 떨칠 수 없는 것이었다. 동료들과의 인연. 그것에서 축적된 감정. 미처 이루지 못한 미련. 시엘이 아무리 호소한들, 시엘의 감정은 유진에게 도달할 수 없다.
아무리 예쁜 옷을 입어도. 매일 새벽마다 연무장에서 검을 휘둘러도. 그렇게 더 강해져도. 그러한 노력은 시엘이 간절히 바라는 답은 줄 수 없다.
이미 전부 끝나 버린 전쟁에서도…… 그랬다. 시엘이 그토록 강해지고 싶어 했던 이유는, 유진과 함께 싸우고 싶어서였다. 유폐의 마왕이건, 멸망의 마왕이건. 그 전투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내어 유진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너무나 멀었다. 도달하지 못했다. 전쟁에서 시엘의 활약은 암전의 마안을 사용하여 모론을 불러온 것 정도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에서 그녀는 많은 마족과 마물을 쓰러트렸다. 멸망의 마왕과의 전쟁에서도 많은 누르를 추락시켰다.
그게 전부다. 시엘은 유진과 같은 전장에 설 수 없었다. 두 번의 전쟁에서 시엘의 위치는 언제나 똑같았다. 마왕이 없는 전장. 유진이 마왕을 쓰러트리고 돌아오는 것을 바라며 기다릴 수밖에 없던.
“에휴.”
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앞으로 수백 년간은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대륙 어딘가에 전쟁이 벌어질지라도 유진이 나설 일은 없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시엘도 유진과 ‘함께’ 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것은…… 많은 미련 때문일까.
혹시 모를 기대? 그것과는 상관없이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아니면 단순한 습관? 정확한 이유는 시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이 시간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고, 다시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은 잘 오지 않고, 새벽 수련을 거르면 몸이 찌뿌둥한 것을 보면…… 결국 습관 때문이 아닐까?
시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계단으로 향했다.
“응?”
복도 근처의 서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약간의 집중으로 기척의 주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시엘은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우선 서재로 향했다.
작은 도서관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는 본가의 서재. 자리에 앉지 않고 책장 근처에 서서 책을 읽고 있던 베르무트는, 자그마한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십시오.”
조심스레 열린 문틈 사이로 시엘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베르무트를 응시하다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큰아버님.”
“하아…….”
장난기 가득한 부름에 베르무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 호칭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아니면, 할아버지라고 불러드릴까요?”
“이름으로 부르는 편이 좋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큰아버님은 라이언하트의 시조님이시니까요.”
“하지만 큰아버님이란 호칭은…….”
“가주님에게는 손위 형제가 없으시니, 제가 큰아버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다구요. 이렇게 부르는 것이 굉장히 가족답잖아요?”
시엘은 키득키득 웃으며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일주일 전 함께했던 식사 이후로 카르멘은 베르무트를 ‘아버님’으로, 시엘은 ‘큰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혹시 제가 방해를 한 건가요?”
“아닙니다.”
“잠이 오지 않으세요? 혹, 본가가 불편하시거나…….”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원래 잠이 많지 않고…….”
베르무트는 읽고 있던 책을 들어 보였다.
“이곳에는 재미난 책들이 많더군요.”
바깥에는 나돌지 않는, 라이언하트의 역사를 정리한 책. 시엘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본가의 자제인 시엘은 당연히 어릴 적부터 저 책을 몇 번이나 읽었었다.
“큰아버님이…… 음…… 돌아가신 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건가요?”
“제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베르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책상에 올려놓은 책을 응시하며 잠시 침묵했다.
300년 전의 베르무트는 절대로 좋은 남편도,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다. 베르무트는 십수 명의 아내를 두었고 수십 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그들 중에서 조금 더 사랑하거나, 마음을 쓰는 등의 ‘특별함’을 두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베르무트의 자식들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아버지의 휘광을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동시에 존경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애정과 관심을 갈구했다.
자식 중 누군가는 틀림없이 무정한 아버지를 원망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결정한 본가와 방계의 격차에 불만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베르무트에게 대놓고 따지지는 않았다. 그들의 아버지가, 위대한 베르무트였기 때문이다.
“……저에 대한 나쁜 글귀는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더군요.”
베르무트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원망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후대에 전해질 시조를 완전무결한 초인으로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과거를 후회하시는 건가요?”
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베르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베르무트는 덮은 책에 시선을 거두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저는 똑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라이언하트는 하멜을 환생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환생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하멜의 우군으로 사용하기 위해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라도 베르무트는 똑같이 가문을 만들 것이다.
“큰아버님 같은 분도 후회가 있으시군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건 적건 후회할 일을 가지고 있지요.”
베르무트는 책에서 시선을 거두어 앞을 보았다.
300년 뒤의 후손. 본가의 적통. 그런 것과는 별개로 시엘은 베르무트에게 특별한 인연을 가진 존재다. 베르무트는 오른쪽 눈에 비해 색이 조금 탁한 시엘의 왼쪽 눈을 응시했다.
저 마안은 베르무트가 각성시킨 것이다.
신생 광란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유진의 의식이 월광검의 폭주에 휘말려 허무로 빨려 들어갔을 때. 유폐의 마왕의 사슬이 폭주를 진정시키고, 시엘이 유진과 접촉하여 의식을 허무에서 탈출시켰다. 그 과정에서 시엘이 가진 라이언하트의 피에 내재 된 마(魔)의 인자가 발현됐다.
베르무트가 그것을 바랐다. 유진의 피에서 발현을 도모했다가는 신성과의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까 경계해서. 함께 있던 시엘의 피를 사용했다.
“저는 당신에게도 죄를 지었습니다.”
베르무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때 바다에서. 저는…… 당신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심어진 마안의 반동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됐어요.”
시엘은 왼쪽 눈을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몰랐지만, 결과는 좋았잖아요? 저는 이 마안이 마음에 들어요.”
월광검의 폭주에 휘말렸다가 깨어난 유진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순간. 그 틈을 파고든 공격이 유진을 노렸었다. 시엘은 유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밀쳤고, 그로 인해 왼쪽 눈을 잃었다.
“그때 저는 이 마안을, 큰아버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덕분에 저는 힘이 한참 부족한데도 유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죠.”
“…….”
“제게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시엘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베르무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큰아버님께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어떤?”
“유진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시엘의 눈은 흥미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베르무트는 저 질문이 의외라고 생각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멜에 대한 이야기는 저 말고도 여러 번 듣지 않았습니까? 세냐나 아니스, 모론…….”
“인상이란 사람마다 다른 법이잖아요. 저는 큰아버님이 느낀 인상이 궁금해요. 유진과 큰아버님은 서로를 굉장히 의식하던 관계잖아요? 유진은 큰아버님을 라이벌이라고 여기고,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다던데.”
“인상이라…….”
베르무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멜의 전생을 떠나, 제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낀 인상은…… 흠…… 망나니였죠.”
“망나니?”
“당시 제 동료는 모론과 세냐, 아니스 셋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멜은 용병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었죠. 저는 그 지명도를 엉성한 명분으로 삼아, 하멜을 동료로 삼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래서요?”
“세냐와 아니스는 거부했죠. 근접전을 벌일 전사는 저와 모론으로 충분했고, 당시에는 용병이라는 직업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거든요. 거기에 하멜의 명성은…… 음…… 그리 좋은 방향은 아니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베르무트는 지금도 하멜과의 첫 만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하멜은 기사들을 패고 있었습니다.”
“……왜요?”
“하멜은 마경으로 넘어갈 배편을 구하고 있었죠. 그…… 협상의 과정에서, 기사들이 하멜을 비웃었기 때문입니다.”
시엘은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하멜은 기사들의 팔다리를 하나씩 부러트리고, 그들의 무기를 빼앗았죠. 그 뒤에…… 제가 하멜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요?”
“밥을 먹자고 말했죠. 구경꾼이 잔뜩 몰린 길 한복판에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함께 식당에 갔고, 밥을 먹으면서…… 동료가 되어달라고 말했습니다.”
“……뭐라고 대답했죠?”
“이걸 어떻게 순화해야 할지…….”
“순화하지 않으셔도 돼요.”
베르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기보다 X밥 새끼의 말은 들을 생각이 없다더군요.”
“아하하!”
그리고 시엘은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도 성격이 지랄 맞은 것은 똑같았네요?”
“지금은 굉장히 순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동료가 된 후에, 세냐와 아니스가 집요하게 하멜의 성격을 둥글게 빚었고…….”
베르무트는 빙긋 웃으며 시엘을 응시했다.
“환생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도 하멜의 성격을 변화했겠죠. 저는 설마 그 하멜이 ‘아버지’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음, 확실히. 제가 어릴 때 보았던 유진은, 지금보다 더 지랄 맞기는 했어요.”
“어땠습니까?”
“제 오빠가 조금 놀리니까, 바로 결투를 벌였었어요. 오빠는 한 방에 나가떨어졌고, 토하면서 울었었죠.”
베르무트와 마찬가지로 시엘도 유진과의 첫 만남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베르무트는 입가를 가리며 키득키득 웃는 시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멜을 좋아합니까?”
시엘의 웃음이 뚝 멎었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며 베르무트를 응시했다.
“네.”
침묵은 짧았다. 시엘의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과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은 안다. 베르무트의 말마따나 사람은 많건 적건 후회를 가지고 있고, 이미 지나버린 과거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보답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포기하면…… 포기하면, 나중에 더 크게 후회할 것 같아서.”
습관처럼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검을 휘두르고 있다.
“제가 아무리 검을 휘둘러 강해져도, 유진과 동등해질 수는 없겠죠. 저는 앞으로도 계속 유진의 등을 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아침이 밝을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있으면 잠에서 깬 유진이 나와서 말을 걸곤 한다.
시엘은 그 순간이 좋았다.
“등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물러서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멀어도 보이는 곳에 있고 싶어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가끔. 유진이 나를 돌아보아 주면.”
의식해서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의외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밖에 없게 만들 만큼 필사적으로 따라갈 거예요.”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서재에 오기 전에 떠돌던 울적한 기분이 사라졌다.
“큰아버님은 제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엘. 당신의 바람은 결코 비웃음을 당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포기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잖습니까.”
“예전에 따귀를 맞은 적이 있거든요.”
시엘은 배시시 웃으며 뺨을 어루만졌다. 책상 근처의 창문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흘러들어왔다. 힐긋 창밖을 보니 어느덧 새벽이 지나고 있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검을 휘두르러 가는 겁니까?”
“네.”
“괜찮다면 제가 조금 봐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괜찮죠.”
시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제 말을 듣고 검을 봐주겠다고 하신 것은, 큰아버님이 저를 응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죠?”
“가족이니까요.”
베르무트는 마주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먼저 연무장에 가 계십시오. 저도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가겠습니다.”
“네!”
시엘은 재빨리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갔다. 혼자 남은 베르무트는 책상에 놓았던 책을 책장에 돌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이것 참…….”
전생에 하멜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 성격은 난폭하고 입은 거친 데다, 얼굴은 흉터가 가득했기 때문에. 동료로서 긴 시간을 보냈던 세냐와 아니스는 하멜에게 연심을 느꼈었지만, 보편적인 관점에서 하멜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을 수 없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설마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환생할 줄이야.”
시엘이 유진에게 연심을 가진 것은 잘생긴 얼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외모적인 부분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매일 불태워지는 수백 통의 연서는, 유진의 활약과 더불어 잘생긴 얼굴 때문이다.
“너도 죄가 많구나, 하멜.”
베르무트는 고개를 저으며 서재를 나섰다.
빌어먹을 환생 624화
“너는 결혼 안 하냐.”
“커흡.”
불쑥 건네진 질문에 유진은 막 목구멍으로 넘기려던 술을 뿜어버렸다. 예고 없이 가해진 공격이었지만 그간의 경험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듯, 시안은 당황하지 않고 즉시 의자를 뒤로 기울여서 술을 피했다.
“케헥, 켁…….”
하지만 유진은 시안처럼 공격을 흘려내지 못했다. 목구멍 중간에서 역류한 독한 술 때문에 코와 눈까지 쓰렸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뜬금없는 질문도 아니잖냐.”
시안은 뒤로 기울였던 의자를 원위치로 돌려놓으면서 대답했다.
이곳은 시안의 방이다. 형제끼리 단둘이 술이나 마시자길래 앞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저런 질문을 하다니. 유진은 입가를 손등으로 벅벅 문지르고서 시안을 흘겨보았다.
“누가 시킨 거냐?”
“뭐…… 뭐?”
“누가 시켜서 물어보는 거냐고. 가주님이냐? 애니실라 님? 아니면 혹시 아버지인가……?”
“크흠.”
“아니…… 아니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꼴꼴꼴. 비었던 잔에 황갈색의 술을 새로 부으면서, ‘후보’들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본가의 어른들 외에도, ‘결혼’에 관해 시안에게 한번 떠보라고 권할 사람은 너무 많았다.
숲에서 지내는 시크나드. 종족도 부모도 다르지만, 시크나드와 세냐는 남매 사이다. 녀석은 세냐와 관련된 문제라면 팔불출 같은 면이 있고, 몇 번이나 숲의 엘프들과 단합하여 유진을 부추기는 분위기를 연출한 적도 있었다.
로베리안과 멜키스. 둘은 며칠 전에 ‘신도시’와 관련된 건으로 아롯을 대표하여 라이언하트 본가를 찾아왔었다. 유진도 함께했던 그 자리에서는 인사를 시작해서 가벼운 사담, 개설 중인 신도시와 아카데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알체스터와 라파엘로. 그들도 마법사들과 비슷한 이유로 라이언하트를 찾아왔었다. 부디 앞으로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달라는 황제와 교황의 청탁도 전달하는 것도 방문의 이유 중 하나였지만, 알체스터는 뜬금없이 아카데미의 입학 가능한 나이에 대해 질문했었다.
13살이 넘은 아들, 리우 드라고닉을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입학을 희망하는 것은 바로 알체스터 본인이었다……. 배움에는 신분도 나이도 없다지만, 제국의 기사단장인 알체스터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다행히 라파엘로는 자신이 직접 아카데미에 입학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에 그는 아카데미의 교과과목 후보로 논의 중인 신학에 관심을 가졌다.
라파엘로는 아카데미에 필요하다면 혈십자 기사단의 업무도 뒤로 하고서 신학을 강의할 수 있다고 말했고, 유진은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편증된 광신도인 라파엘로가 신학을 담당한다면 학생들도 똑같은 광신도가 되어버릴 것이다.
어쩌면 아만일지도 모른다. 당장 몇 주일 전에 시안은 아일라와 함께 루하르 왕국에 다녀오지 않았나?
그 외에 많은 사람. 과장을 조금 섞는다면 대륙 전부가 유진의 행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유명인의 ‘결혼’이란 동네 술집에서도 편하게 떠들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이야깃거리다.
“물어보고 싶으면 직접 물어보면 되지, 왜 나한테 물어봐 달라고 부탁하겠냐?”
“왜긴, 형제잖아. 형제 사이면 뭐, 남들한테 안 할 말도 할 수 있는 법이지.”
“형제……!”
시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는 적잖은 감동을 느끼며 유진에게 술잔을 들어 보였다.
“그래서 누군데? 혹시 세냐나 아니스, 크리스티나냐?”
“그분들이라면 널 직접 닦달하시겠지.”
“하긴, 그럴 것 같아. 그래서 누구냐니까?”
“…….”
시안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어물쩍한 태도가 유진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짠. 유진은 술잔을 부딪쳐 주고서 다시금 재촉했다.
“누구냐니까?”
“……아일라다.”
“뭐?”
“아일라라고.”
의외의 이름이 나왔다.
아일라 루하르. 모론의 후손, 아만의 딸, 루하르 왕국의 공주. 그리고 시안의 약혼녀. 유진은 눈을 끔뻑거리면서 아까 저택의 복도에서 보았던 아일라를 떠올렸다. 그녀는 모론과 아만을 닮아, 13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숙했다.
‘도련님.’
아일라는 유진을 볼 때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저렇게 불렀다.
‘메르 언니와 미르 언니는 어디에 있나요?’
조숙한 것은 겉모습뿐. 아일라의 정신연령은 나이와 똑같다. 그래서인지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아일라의 앞에서는 드물게도 ‘연장자’로 군다.
“……왜 아일라 아가씨가?”
“네 결혼에 관심이 많아.”
“어째서?”
“나와 식을 올리기 전에, 네가 먼저 결혼했으면 좋겠다는군. 참고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참고……?”
“결혼식이 어떤 것인지, 신부가 어때야 하는지. 그리고…… 그리고.”
시안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직 마시지 않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부케를…… 받고 싶다더군.”
“부케…….”
유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시안의 결혼은 아일라가 20살이 되었을 때로 예정되어 있다. 결혼식을 참고하고 부케를 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유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일라는 시안에게 진심인 모양이었다.
사실 둘은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외모만 보면 굉장히 잘 어울리기는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아직은 아일라의 키가 시안보다 작지만, 앞으로 몇 년이 더 흐르면서 모론과 아만이 가진 루하르의 피가 각성한다면? 유진은 예전 본가의 행사에서 보았던, 오빠처럼 근육이 우락부락한 가르기스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너 표정이 왜 그러냐?”
“크흠…….”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시안의 표정을 살폈다.
“근데 너는 정말로 결혼할 거냐?”
“하겠지.”
“네 약혼은 결국 가주님과 애니실라님이 정한 거잖아. 아일라 아가씨 말고…….”
“다른 후보는 스칼리아 공주였지.”
지금이야 스칼리아는 유진을 신으로 섬기며 독실한 신앙자가 되었지만, 처음 만났을 적에는 설원에서 용병들을 학살하고 스트레스와 악몽에 눈이 까뒤집혀 유진을 공격했었다. 당시 아일라와 스칼리아 중 약혼 상대를 정하지 못했던 시안은, 그때 설원에서 스칼리아를 겪고 난 뒤에 즉시 아일라를 약혼 상대로 선택했다.
“네가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나는 진심으로 아일라랑 결혼할 생각이다.”
술잔을 내려놓은 시안의 얼굴은 굉장히 진지했고, 그것을 본 유진은 더욱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 그…… 아니다.”
“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니까……! 누가 당장 결혼하겠대?”
“아일라 아가씨가 20살이면 네 나이가 30살이야.”
“아일라가 나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면 나도 거절할 거야. 지금은 물론이고, 7년 뒤에도 말이다. 그런데, 아직은 파혼 이야기만 해도 엉엉 울어버린단 말이다……!”
시안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내뱉었다.
“진짜 세상 끝날 것처럼 엉엉 우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냐? 달래야지! 미안하다고, 파혼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정말 7년이 지나면 아일라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10살 많은 아저씨랑 결혼하기 싫을 수도 있고.”
“30살이 아저씨면, 나는 뭐 할아버지냐? 아니, 언데드인가?”
“말 그만 돌리고. 너는 결혼 언제 할 거냐니까?”
날카로운 쏘아붙임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1년쯤 뒤?”
“애매하게 1년쯤은 뭐야? 하려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잖아.”
“결혼은 뭐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당장 하는 거냐? 나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준비는 무슨…….”
“아무튼 나는 1년쯤 뒤에 할 거다.”
“누구랑?”
이번 질문 역시 굉장히 날카로웠다. 유진이 말문이 턱 막혀서 눈을 끔벅거리자, 시안이 혀를 쯧쯧 차며 이죽댔다.
“세냐 님? 아니스 님? 크리스티나 님? 누구랑 할 건데?”
“……다…… 다 같이?”
간신히 답한 말에 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진은 저 씰룩대는 입술이 열리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셋 다 바라기도 하고, 나도…… 어……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리고, 1년 뒤에 세냐랑 결혼하고, 또 1년 뒤에 아니스랑 결혼하고, 또 1년 뒤에 크리스티나랑 결혼하는 것보다는 아예 한꺼번에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시안은 욕설을 뱉는 대신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냐 님은 허락하셨냐?”
“……허락 비슷한 건 했지.”
“왜 자꾸 대답이 애매해?”
“그래서 1년쯤 뒤라고 말한 거야. 정리할 거 정리하고, 허락도 확실히 받고…….”
“미친놈.”
시안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뭐…… 경사라고…… 할 수 있군. 아마 아일라는 좋아할 거다. 부케를 많이 받을 수 있어서.”
“3개 동시에 던질 테니까 잘 받으라고 해.”
“3개나 던질 거면 1개는 시엘에게 던져주지 그러냐?”
“케흑.”
이번에도 유진은 마시던 술을 뿜었고, 시안은 재빨리 의자를 기울여서 피했다.
“저…… 저번부터 베르무트가 시엘이랑 가깝게 지내던데. 뭔 일인지 아냐?”
또 말을 돌리는군. 시안은 유진을 한심하단 얼굴로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냐? 그리고 보면 알잖아. 매일 훈련을 봐주시던데.”
“갑자기 왜……?”
“시엘만 봐주시는 것도 아니잖아. 나도 잘 봐주셔.”
“나보다 잘 가르치디? 그 새끼, 옛날부터 누구 가르치는 건 잘 못 했는데.”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
“잘 가르치지는 못하는 모양이군.”
“적어도 옛날 너보다는 훨씬 친절하시다.”
시안은 쯧쯧 혀를 차면서 술잔을 내려놓았다.
“슬슬 그만 마시고 끝내자. 내일이 중요한 날인데, 밤새 술을 마실 수도 없잖냐.”
내일. 드디어 라이언하트 신도시가 완공되어서 이사를 간다.
신도시에 새로운 저택도 지었으니, 지금 지내는 본가 저택 자체는 이곳 부지에 남기기로 했다. 300년이란 역사가 있는 저택이기도 하니, 후대를 위한 박물관을 겸해 별장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준공식에 누가 온다고 했더라?”
“라이언하트에서는 원로원과 흑사자들, 방계 유력 가문들. 그리고 라이언하트 외에는 신군 시절 간부들과 각국의 군주들과 고위 귀족…….”
“그리고?”
“도시 성문 밖에는 이미 며칠 전부터 수십만이 모였다.”
라이언하트 신도시의 준공식은 대륙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내일 준공식에는 가장 먼저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입주한다. 그 뒤에는 따로 초대를 받은 손님들과 함께 저택과 도시의 랜드마크 등을 둘러본다.
일련의 식이 끝난 뒤, 도시의 성문을 개방한다. 이미 며칠 전부터 모였다는 수십만 군중은, 개방된 성문을 지나 도시를 관광할 것이다.
“입주민을 추첨으로 뽑는다니. 너무 파격적이지 않냐?”
“전부 뽑는 것도 아니잖아.”
신도시의 입주민은 전쟁에 참전했던 신군에게 우선권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 기존에 판데모니엄에 거주하던 마족과 이민자들, 따로 입주를 희망하는 대륙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추첨을 하기로 했다.
“내일 준공식에 찾아오는 군중들을 대상으로도 추첨하기로 했잖아. 자칫하다가는 대참사가 날 수도 있어.”
“그런 일 벌어지지 않도록 잘 통제할 거야.”
수십만의 군중이 한꺼번에 도시로 밀어닥치면 당연히 혼란이 생긴다. 거기에 즉석에서 추첨까지 진행하면, 흥분한 군중이 난동을 부릴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한 방지책은 이미 마련해 놓았다.
“드디어 내일이군.”
유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안의 말마따나 중요한 날이니, 더 술을 마시지 않고 이만 방으로 돌아갈 생가이었다.
“너도 아닌 척하면서 기대한 모양이지?”
시안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신도시에 지어진 라이언하트의 저택은 며칠 전에 본가 사람들끼리 먼저 봤었다. 시안은 사실 지금 살고 있는 저택에도 별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신도시에 세운 저택을 직접 보니 가슴의 설렘을 느껴버렸다.
“당연히 기대되지.”
유진은 똑같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유진의 기대는 새로운 저택과 신도시의 준공 때문이 아니다.
내일.
유진은 설렘을 감추고서 시안의 방을 나섰다.
“이제 자러 가는 겁니까?”
복도를 지나 방으로 돌아가는 중에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를 마주쳤다.
성공적으로 인형의 몸으로 옮겨간 아니스의 모습은 옆에 선 크리스티나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분위기 외에 차이점을 꼽자면 눈물점의 유무와 복장. 유진이야 문제없이 알아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헷갈릴 수밖에 없을 만큼 닮았다.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게끔 한 명이 머리카락이라도 묶는 것이 어떤가도 권해보았지만, 아니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의 고약한 성정을 보건대, 다른 사람이 헷갈리는 것을 오히려 의도하는 것이리라.
“세냐는?”
“아직 숲에 있습니다. 내일 펼칠 이동마법을 점검하겠다면서요.”
“실패하면 큰일이니까.”
저택을 두고 간다고 해도 본가의 이삿짐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거기에 숲과 드워프의 공방을 통째로 까마득하게 먼 신도시까지 워프시켜야만 한다.
도시가 준공되기까지의 한 달 동안 세냐는 이 대규모 워프 마법을 완성하고 점검하는 것에 몰두했다. 사람들이야 직접 워프 게이트로 이동하기로 했으니 인명사고의 걱정은 없지만, 이삿짐과 숲- 특히 세계수의 묘목이 워프의 실패로 소실되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대참사가 될 것이다.
“세냐 님의 마법이 설마 실패할 리는 없잖습니까?”
“그래도 가서 좀 도와야겠어.”
“저번에 돕겠다고 찾아갔을 때, 세냐가 당신을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괜히 가서 방해하지 말고 잠이나 자십시오.”
“그러는 너희는 안 자고 뭐 하는데?”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둘에게서 술 냄새가 폴폴 풍겼기 때문이다. 아니스가 인형에 깃든 후로, 둘은 매일 대작하고 있다. 가끔은 수련을 끝내고 돌아온 시엘까지 억지로 끌고 가곤 한다.
“조금만 더 마시고…….”
“저는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 시스터께서 술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셔서…….”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안주가 부족하다고 주방에 가자고 저를 꼬드긴 것은 크리스티나, 바로 당신이지 않습니까?”
둘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유진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더 남아 있다가는 둘에게 붙들려 술을 더 마시게 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유진 님도 함께 가시죠.”
“그것참 좋은 생각이군요, 크리스티나. 지금은 세냐도 없으니, 우리 둘이서 하멜을 독점할 수 있습니다.”
유진이 더 물러서기도 전에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유진의 양팔을 나눠서 잡았다. 둘이 한 몸이었을 때는 어떻게든 떨쳐낼 수 있었을 텐데…… 단단히 붙잡힌 양팔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유진은 숨을 삼켰다.
“안 자나?”
둘에게 연행되어 복도를 질질 끌려가던 중에 베르무트의 방문이 살짝 열렸다. 그는 하얗게 질린 채로 구겨진 유진의 얼굴과, 취기로 빨갛지만 욕망이 번들거리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보고서 혀를 찼다.
“야, 술 먹자.”
유진은 급히 베르무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양하지.”
베르무트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저 자리에 끌려간다면 아침까지 술을 마실 것은 물론이고, 언젠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에게 뜨거운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직감한 것이다. 베르무트의 대답에 두 성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베르무트 님.”
“좋은 꿈 꾸십시오, 베르무트 님.”
두 성녀는 인사를 남기고서 유진을 끌고 갔다.
“야.”
방문이 닫히기 전. 불쑥 다가온 말에 베르무트가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희번덕이는 눈으로 베르무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 기대해.”
“……?”
베르무트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환생 625화
“저희 제벨라 건설사에 시공을 맡겨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안전모를 쓰고서 정장을 입은 누아르의 뒤에 수십 명의 마족들이 도열해 있다.
족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모습은 아닌바, 그들의 모습은 모두가 제각각이었는데, 그중에는 누아르와 같은 서큐버스와 마족 중에서 가장 흔한 데몬, 덩치가 산만 한 거인족에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마족도 있었다.
제벨라 건설의 간부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누아르처럼 작업모를 쓰고, 정장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제벨라 건설’. 안전모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자아.”
간부들의 앞에 선 누아르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준공식에 참가한 모두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지금 누아르와 간부들의 등 뒤에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누아르는 장막에 꽂히는 시선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방긋 웃었다.
“라이언하트의 새로운 저택을 공개합니다!”
촤라락! 장막이 걷히면서 사라지며 거대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빰빠바밤, 빰빠바밤, 빰빰빰빰.
펑, 펑, 펑, 펑!
요란한 음악 속에서 폭죽이 하늘로 치솟았다. 푸르고 맑은 하늘에서 알록달록한 폭죽이 꽃을 피웠다. 유진을 비롯한 본가 사람들은 이미 몇 번이나 공사를 시찰하며 저택을 보았지만, 준공식에 참석한 모두가 저택을 미리 봤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름다우며 웅장한 저택의 위용에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 * *
기존 라이언하트 저택도 대륙 어느 귀족가의 저택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이 새로운 라이언하트의 저택은 단어 그대로 격이 달랐다. 몇 개나 되는 성을 거느린 키옐의 황제조차도 입을 벌릴 정도였다.
물론 저택은 황궁이나 성처럼 높고 커다랗지는 않다. 본가에서 지내는 가족이라고 해봐야 10명도 되지 않고, 집사나 시종 같은 사용인을 모두 포함해도 수십 명 안팎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기와 상관없이, 완공된 저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저택에 장식된 조형물들은 모두가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예술품들이다.
“자아, 어디서부터 소개를 해드려야 할까요? 제 애장품들의 예술적 가치와 기원을 설명하자면 과장 섞지 않고 일주일은 걸릴 텐데. 아니면 실용적인 부분이 궁금하시나요?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라는 세르니아 섬의 바다를 그대로 재현한 야외 수영장이나, 루하르의 명소인 리바르 온천에서 영감을 얻은 노천탕, 그리고…….”
누아르의 길고 긴 설명이 시작되었다. 준공식에 초대된 수십 명의 귀빈은 누아르의 설명을 들으면서 저택 부지를 관찰했다.
이곳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택의 모습만이 아니다. 감각적으로 배치된 숲. 저택을 뒤에서부터 수호하듯 우뚝 선 세계수의 묘목들과, 똑같은 무게의 미스릴보다 몇 배나 되는 값을 가진 요정목들. 귀빈들은 저택과 숲이란 경관의 완벽한 조화를 느꼈다.
“제가 엄청 고생했어요.”
우두커니 선 베르무트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가 다가온 순간에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몇 걸음 물러서서 멜키스와 거리를 두었다.
멜키스에 대한 ‘인상’은 처음부터 깊이 남아 있었다. 전장을 떠나던 때, 깍깍거리는 비명을 내지르며 쫓아오던 정령사. 세냐가 아무런 망설임과 손속의 자비 없이 마법을 펼쳐서 손수 추락시킨 장본인. 그 당시에는 왜 저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본가에서 돌아와 지내는 동안, 베르무트는 ‘멜키스 엘하이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카르멘과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더욱 광기에 절어 있다.
“후우…….”
멜키스가 입술을 모았다. 달콤한 숨결은 베르무트에게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멀었지만, 그녀의 의지에 따라 나타난 바람의 정령이 숨결을 옮겨주었다.
후우우…… 한층 더 짙어진 숨결이 베르무트의 귓가를 핥았다. 4명의 정령왕과 계약하며 하위 정령들을 지배하는 멜키스에게 있어서 숨결과 속삭임을 전하는 것에 거리는 의미가 없었다.
“오빠.”
끈적거리는 목소리와 미소. 귓가를 핥는 숨결과 속삭임에 베르무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포를 보는 것만 같은 눈으로 멜키스를 힐긋였다.
“저 많이 노력했어요. 오빠를 위해. 가족을 위해.”
가족? 어떤 가족? 베르무트는 저 단어의 앞에 명확한 주어가 없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오빠는 느낄 수 있죠? 오빠는 저 이전에 가장 위대한 정령사니까. 이 저택과 숲에는 어마어마한 정령술의 설계가 들어가 있어요.”
멜키스의 말은 사실이다. 저택과 숲, 아니, 도시가 성공적으로 준공할 수 있던 것에는 아롯 대마법사들의 다양한 협력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적색마탑과 백색마탑이 크게 활약했다. 로베리안을 필두로 한 적색마탑의 소환사들은 노동력을 제공했고, 백색마탑의 정령사들은 대지의 정령을 사용해 도로공사를 벌였다.
그리고 멜키스는 숲의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완벽하게 학습을 마친 대지의 정령들은 숲이 전소하지 않는 한 저 땅을 비옥하게 만들 것이고, 저 땅에서 새로이 자라나는 모든 것을 기존의 경관을 해치지 않게끔 배치할 것이다.
“그러니까, 오빠.”
멜키스의 목소리와 눈빛이 더욱 끈적해졌다. 그녀가 한걸음 다가왔고, 베르무트는 꿀꺽 침을 삼켰다.
“저를 칭찬해 주세요…….”
애절함까지 섞인 속삭임. 계속해서 귓가를 핥는 숨결. 현기증마저 느껴지는 아찔한 공포에서 베르무트를 구원한 것은, 단호하게 끼어든 카르멘이었다.
“아버지에게 다가오지 마라.”
카르멘은 혐오를 그득 담은 눈을 찡그리며 멜키스를 노려보았다.
“왜 오빠가 당신의 아버지라는 거야?”
“그러는 당신은 왜 아버지를 오빠라 부르는가?”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가는 대화에 베르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르멘과 멜키스는 사나운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왜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가문의 시조인 위대한 베르무르를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그리고 왜 멜키스 엘하이어는 위대한 베르무트를 ‘오빠’라고 부르는가?
준공식의 귀빈들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였지만, 그 누구도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묻기에는 둘의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하였고, 위대한 베르무트의 모습은 너무나도 우울했기 때문이다.
“외관만큼이나 예술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저택의 내부도 순회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저곳은 본가의 생활공간이라서요. 프라이버시의 문제도 있으니, 저택의 관람은 라이언하트 본가에 따로 문의해 주세요.”
길고 긴 설명의 끝에서 누아르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저택을 중심으로 하여 건설한 라이언하트 신도시를 순회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존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저택 부지에도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걸어서 밖으로 나가기에는 저택부지가 너무 넓기 때문이다.
유진은 안전모를 쓰고서 앞장선 누아르의 뒤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완벽하지.”
곁에 찰싹 붙어서 걷던 세냐가 대답했다. 이른 아침부터 숲을 통째로 이동시키느라 철야를 했지만, 세냐의 얼굴에는 조금의 피로도 보이지 않았다.
“이 세냐 님을 뭐로 보는 거야?”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
“걱정하지 마. ‘그걸’ 기대하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니까.”
세냐는 그렇게 대답하고서 모론과 아니스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아니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론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표정은 감추었지만, 그의 두 주먹은 흥분과 기대로 불끈 쥐어져 있었다.
“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했고, 유진도 강요는 하지 않았다.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보다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껴도 돼.”
유진은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도 베르무트는 카르멘과 멜키스의 사이에서 광기의 고문을 받고 있었다.
저택의 워프게이트를 통해 도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이동했다. 오오오. 도착한 장소에서 귀빈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곳은!”
저택과 달리 이곳은 장막은 있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도 누아르는 입구에서부터 양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라이언하트 신도시의 상징! 대륙 역사에 유일한! 미래로 이어지는 배움의 장!”
신도시에서 라이언하트 본가만큼이나 넓은 부지를 사용하는 곳. 왕궁처럼 웅장한 건물들이 세워진 곳.
누아르는 유진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귀빈들도 유진이 나서는 것을 기대했다. 그렇게 조성된 분위기에서 유진이 머뭇거리자, 세냐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떠밀었다.
“뭐 해? 나가서 설명해야지.”
떠밀려서 몇 걸음 앞으로 나와버린 유진은 세냐에게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기대에 부푼 많은 시선에 치미는 욕설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뒤를 힐긋 보았다. 연결된 건물들로 통하는 이 교정에는 여섯 개의 조각상이 있다.
유진과, 세냐와, 모론과,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와, 베르무트의 조각상. 본가에 머무르던 드워프 장인들이 오늘을 위해 직접 만든 조각상들이다.
“……다이너스 아카데미입니다.”
아카데미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생각 없이 ‘라이언하트 아카데미’로 하려고 했는데, 그 의견에는 길레이드가 반대했다. 라이언하트는 아카데미를 소유할 생각이 없고, 그 이름 자체가 아카데미의 취지와 상징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말이다.
라이언하트 아카데미가 기각되었으니, 기왕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뭔가 그럴싸하고 멋진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유진이 말한 이름들은 여러 사람들을 거치며 모두 기각되었다.
그 뒤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다이너스 아카데미’다. 하멜의 성을 따온 이름. 별생각 없이 말한 것이지만, 의외로 다들 좋다고 받아들였다.
베르무트는 라이언하트 가문을 남겼다. 모론은 루하르 왕국을 세웠다. 세냐는 서클마법식을 창안하며 모든 마법사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아니스는 성인으로서 유라스의 교전에 남아 있다. 유라스의 모든 신관은 교전으로 전해지는 아니스의 삶과 글귀로 신앙을 가꾼다.
하지만 하멜은 후대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제노스의 가문에 이어진 ‘하멜식’이 있겠지만, 그것은 하멜 본인이 아닌 베르무트가 남긴 것이다.
그렇게 이곳의 이름은 ‘다이너스 아카데미’로 결정되었다.
“이곳에서는…… 어…….”
미리 준비해 둔 말은 여럿 있었지만, 막상 말하려니 낯이 간지러웠다. 결국 이번에도 유진은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을 이어갔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검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무기들…… 다양한 종류의 마법과 정령술. 그리고 신학…… 아, 신학의 경우에는 꼭 ‘빛’의 교리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한다면, 예, 전쟁이나 승리의 신학에 입문해서…… 신관이나 성기사로…… 전직? 취업? 예, 그럴 수 있게 할 생각이고요…… 기사가 되고 싶다면 바라는 무기의 과목과 기사도 과목을 선택하면 되는 거고요.”
즉석에서 이어가는 말이지만 모두가 유진의 말을 경청했다. 유진은 그 진지한 침묵이 부담스러웠지만, 일단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아롯의 마탑 등과도 결연하여 유학을 가거나, 각 과목의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초빙하여 심화적인 배움을 실현할 생각입니다…… 일단…… 제가 목표로 하는 다이너스 아카데미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게끔 나아가게 해주는 곳입니다. 물론 그건 학생이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달린 일이지만, 저는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학장으로서 학생들이 귀중한 젊음을 낭비하지 않게끔, 바라는 미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줄 것입니다.”
“박수!”
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아르가 외쳤다.
빰빠바밤, 펑, 펑, 펑! 아까도 들었던 음악이 흐르고 하늘에서 폭죽이 수를 놓았다. 짝짝짝…… 귀빈들의 박수에 유진은 민망함을 느끼며 냉큼 동료들 곁으로 돌아왔다.
“왜 또 우시는 겁니까?”
유진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는 제하드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제하드는 눈물을 멈추지 않고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내 아들이…… 내 아들이, 이런 큰 뜻을 가졌을 줄이야.”
“큰 뜻은 무슨…….”
“세상을 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잖느냐.”
“그런 말은 안 했는데…….”
“뛰어난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좋아지는 법이다.”
주변을 보니 제하드의 반응이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길레이드도 크게 감동했다는 듯이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기사도 과목을 정식으로 개설하신다면, 제가 특별교수로 강의를 나가도 되는 겁니까?”
“백룡 기사단에서 연수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신다면요.”
“하하, 사상이 온전하고 실력이 확실하다면, 연수에 그치지 않고 정식 단원으로 등용할 용의도 있습니다.”
알체스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리우가 입학한다고 해서 편의는 봐주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제 아들이라고 생각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리우가 드라고닉 가문의 후광을 이용하려고 든다면, 즉시 퇴학시켜주십시오.”
그런 대화를 나누며 귀빈들과 함께 교정을 지나 본관으로 들어갔다. 아카데미의 건물이 워낙 크고 넓은지라 모든 곳을 둘러보고 설명하는 시간상 불가능했기에, 본관에 들어오고서부터는 각자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
“어디서 할래?”
“아까 지났던 교정이면 되겠죠.”
“교실 안에서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개방감이 없잖아, 개방감이.”
세냐의 대답에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개방감이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결국에는 아니스의 의견대로 장소는 교정으로 확정됐다.
“그럼 다음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30분 동안 아카데미를 둘러본 뒤에 다시 이동했다. 누아르는 능숙한 가이드처럼 행동하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지금 향하는 곳은 드워프 공업지대입니다. 이곳은 본래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지내던 드워프 장인들과 남쪽 섬에서 살던 드워프들이 독립한 곳이죠. 그곳에서 드워프들은 이전과 달리 자유로운 창작과 의뢰를 받으며 신도시의 경제에 힘을 보태줄 겁니다.”
드워프에 관한 이야기에 시무인 국왕의 얼굴이 구겨졌다.
본래 드워프들은 사실상 시무인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시무인의 섬에서 살던 모든 드워프들이 내륙으로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시무인의 국왕은 이 건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말할 수가 없었다…….
공업지대부터 본격적인 순회가 시작되었다.
도시민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시청과 길드 단지, 도서관, 공원, 번화가 등. 신도시는 대륙 모든 도시 중에서 가장 많은 워프게이트가 존재하고, 하늘에는 기상을 통제하며 경관을 즐기는 부유역과 공중마차, 지하에는 제벨라 시티와 마찬가지로 지하철까지 있다. 덕분에 많은 랜드마크를 돌아보았는데도 아직 밤이 되지 않았다.
“신도시는 밤이 더욱 아름답죠.”
누아르는 슬슬 해가 저물 것 같은 하늘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야경은 화려한 축제로 완성되는 법. 자아, 이제…… 성문으로 가볼까요?”
현재 성문에는 신도시를 구경하고자 찾아온 수십만 군중이 모여 있다. 성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도시의 모든 조명이 켜지고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아직 입주한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문제는 없었다. 제벨라 시티의 붕괴와 함께 직장을 잃은 누아르의 권속들이 오늘만 한하여 도시에 들어와 있다.
“이상한 짓 하면 죽는다.”
“전 이미 죽었어요.”
“한 번 더 죽을 줄 알아.”
“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더 구미가 당기는데?”
유진은 샐쭉 웃는 누아르를 쏘아보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환상도 꿈도 보여주지 않는다니까요? 정기도 안 뺏을게요. 애초에 난 이제 정기를 받아봤자 쓸모가 없는걸.”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성벽을 가리켰다.
“그럼, 가볼까요?”
아직 준공식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ㅡ와아아아…….
굳게 닫힌 성문 앞.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성문 위에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거 꼭 해야 되냐?”
유진은 표정을 잔뜩 구기고서 누아르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해야죠! 준공식은 사실 이걸 위해서 하는 거라고요.”
여전히 안전모를 벗지 않은 누아르는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
“자, 빨리 일렬로 서세요.”
“나는 하기 싫은데…….”
“새로운 영지의 개장을 의미하는 일이다.”
유진의 중얼거림과는 달리 길레이드는 굉장한 의욕을 보였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의 애니실라와 함께 앞으로 나왔다.
가주가 앞장서 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기온이 길레이드의 옆에 서서 눈길을 주자, 시안은 아일라의 손을 이끌며 옆에 섰고, 시엘도 애니실라의 곁에 섰다.
“아버지.”
“…….”
베르무트도 카르멘에게 끌려 나왔다. 다음은 제하드였다. 그는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품에 넣고서 앞으로 나왔다. 모두가 나가버리니 유진도 한숨을 푹 내쉬며 제하드의 옆에 섰다.
“세냐 메르데인.”
“나, 나는 왜?”
“라이언하트의 일원이 안 될 건가 보죠? 그런 것이라면 나올 필요가 없어요.”
누아르가 이죽댔다. 은근슬쩍 뒤로 빠져 있으려던 세냐는 저 이죽거림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냐는 냉큼 유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시스터.”
크리스티나도 아니스의 팔을 잡아 당겼다. 인형의 몸에 들어오고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크리스티나. 일단 당신의 몸으로 들어가서…… 아니, 아니지, 그냥 당신 혼자 서 있으면 제가 함께 있는 줄 알 겁…….”
“안 됩니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가 도망치거나 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와 함께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군중들이 자신을 비웃지 않을까 내심 염려했으나, 이미 흥분한 군중들은 죽어서 천사가 된 아니스가 왜 멀쩡히 살아서 크리스티나와 함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너희도 서야지, 뭐 해?”
“유진 님이 불러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에요.”
“은자여, 본녀를 부른다는 것은, 앞으로도 본녀는 은자와 살 수 있는 것인가?”
“그럼 나가서 살래? 빨리 끝내게 얼른 와.”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후다닥 다가와 유진의 앞에 섰다. 다른 사람들처럼 옆에 서기에는 둘의 키가 너무 작았다.
“자, 그럼…….”
일렬로 선 본가 사람들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보던 누아르가 짝 박수를 쳤다. 그러자 본가 사람들 앞에 알록달록한 리본이 나타났다. 누아르는 모두에게 백금색의 가위를 나눠주고서 활짝 웃었다.
“제 신호에 맞춰서 리본을 잘라주세요.”
가위를 전달한 뒤에 누아르는 냉큼 뒤편으로 이동했다.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올려다보는 수십만 앞에서, 중앙에 선 유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웃으세요.”
뒤에서 들리는 속삭임에 모두가 각가의 웃음을 띄웠다.
“지금부터, 라이언하트 신도시의 개장을 알리는 테이프를 커팅하겠습니다! 자, 하나, 둘, 셋!”
유진은 억지로 쥐어짠 미소를 지으며 테이프를 가위로 잘랐다.
ㅡ와아아아아아!
최고점에 달한 흥분, 커다란 함성, 하늘을 수놓는 불꽃! 수십 조각으로 잘린 테이프가 꽃잎이 되어 아름답게 휘날렸다.
ㅡ쿠구구궁!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누아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앞 사람이나 옆 사람을 밀치지 말고! 천천히 입장해 주세요! 도시에서 날뛰지 마세요! 질서를 지키면서 신도시를 관광하고 축제를 즐겨주세요!”
환상의 마안이 발동되었다.
누아르가 살아온 기나긴 시간에서 지금만큼 인도적으로 환상의 마안이 사용된 적은 없었다. 수십만의 정신에 작용한 강력한 최면은, 방금까지의 흥분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군중을 질서정연하게 도시의 안으로 인도했다.
“우리도 가자.”
유진은 몸에 붙은 꽃잎을 털어대며 말했다.
“베르무트 님.”
아니스가 다가오자 베르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느새 카르멘과 멜키스에게 붙들려 있던 팔을 빼내며 급히 대답했다.
“아니스.”
“저희는 따로 축제를 즐기도록 하죠.”
“아아……! 그, 그래야지. 카르멘 님, 멜키스 님. 저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르무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따로? 설마 도망치는 것은 아니지?”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기에, 시엘은 눈을 흘기며 물어보았다.
“아냐.”
유진은 옆에 온 베르무트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웃었다.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교정.
“왜 이곳에 온 거지?”
“다른 곳은 사람들이 많아질 거잖냐. 하지만 여기는 닫혀 있으니 못 들어와.”
신도시는 개장했지만 아카데미의 교문은 닫혀 있다. 베르무트는 유진의 대답에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여섯 개의 조각상 앞. 베르무트는 자신의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실력 좋은 드워프 장인이 만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정교한 조각상. 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신의 조각상에 잠시 감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조각상, 초상화. 그런 것들은 300년 전에 많이 보았지. 대부분이 진짜 나를 세워놓고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드워프 장인의 요구대로, 베르무트는 직접 그의 앞에 서서 모델을 해주었다. 300년 전과는 달리 거절할 이유도, 그런 기분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조각상이나 그림을 좋아했던 적이 없다. 깊게 바라본 적도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후후, 신기한 기분이군.”
베르무트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은 기분이 아니야. 가슴이…… 따뜻해지는구나.”
“그러냐.”
유진과 동료들을 베르무트의 뒤에 섰다.
“설마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날이 오게 될 줄도 몰랐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베르무트는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
신도시의 입주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아카데미의 학생과 교수진을 모집받을 것이고, 내년부터 입학이 시작될 것이다. 베르무트는 이곳에서 무언가를 배울 많은 학생들을 떠올리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다이너스 아카데미. 이곳을 상징하는 데에 그 이상의 이름은 없을 거다.”
“왜?”
“그야 하멜, 너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할 수 없던 것들을, 너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네가 하멜로 살았던 삶이 있었기 때문이지.”
세냐도, 모론도, 아니스도, 아가로트의 동료는 아니다. 그들은 하멜의 동료다. 베르무트도 그렇다. 그는 아가로트를 모른다. 베르무트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바로 하멜 다이너스다.
“네가 구한 세상이 미래로 이어지고, 그 미래를 가꾸는 것은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되겠지. 후후…… 네 이름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불멸성을 얻었구나.”
베르무트는 큭큭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유진과 세냐, 모론, 아니스가 일렬로 서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리스티나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베르무트는 동료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고 서 있나?”
“베르무트.”
유진이 방긋 웃었다. 모론과 세냐, 아니스도 똑같이 웃었다.
동료들의 웃음에 베르무트도 함께 웃었다.
그 미소를 보며 유진은 망토를 들췄다. 펄럭! 망토에서 나온 것은 짚을 꼬아 만든 깔개였다. 베르무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뭐지? 돗자리인가?”
“비슷해.”
유진은 둘둘 말린 깔개를 바닥에 활짝 펼치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내 고향 튜라스에서 쓰던 것인데, 이름은 ‘멍석’이라고 한다.”
“그렇군.”
“내 고향은 튜라스에서도 시골 중의 시골이라서 말이야. 도시 사람들은 모르는 관습이 있었지.”
“관습?”
베르무트는 하멜이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고향의 관습이라고 하니 순수한 호기심이 들어 되물었다.
“어떤 관습이었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빠른 것이 있지.”
멍석을 평평히 펼친 뒤에,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누워봐.”
“?”
“누워봐 빨리.”
여전히 베르무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료들 모두가 웃고 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멍석의 위로 올라갔다.
“누우라고……?”
올라가 본 멍석은 꽤 거칠었다. 돗자리처럼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는 것인 줄 알았는데, 누우라니?
베르무트는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멍석에 누워보았다.
“침상으로 쓸 만한 것은 아닌…….”
촤라락! 베르무트가 누운 순간에 세냐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일어난 멍석의 끝이 베르무트를 덮고서 둘둘 말렸다.
“무, 무슨?!”
베르무트는 기겁하며 멍석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300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베르무트가 세냐의 마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멍석에 말린 베르무트가 할 수 있는 것은 굼벵이처럼 멍석과 함께 몸을 꿈틀거리는 것뿐이었다.
유진은 즉시 망토에서 거무튀튀한 몽둥이들을 꺼내 동료들에게 나눠주었다.
“줘패!”
“아아아아아!”
모론이 고함을 지르며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죽여!”
세냐도 양손으로 몽둥이를 단단히 쥐고서 베르무트에게 달려들었다.
“재는 재로!”
아니스도 추모의 기도와 함께 몽둥이를 내리쳤다.
“신이시여……!”
몽둥이를 잡지 않은 크리스티나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뻐억!
퍽!
빠각!
[이 개새끼!]
[아악!]
[오오오!]
[크윽……!]
[가슴!]
[크아악!]
[뒈지십시오!]
[커헉…….]
즐거운 기분으로 와인을 마시던 길레이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모두가 볼 수 있는 하늘에서, 라이언하트 가문의 시조인 위대한 베르무트가 멍석에 말려서 동료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있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길레이드의 입에서 와인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 저게 무슨…….”
모두가 똑같은 경악을 느끼며 하늘의 영상을 보았다.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교정, 여섯 영웅의 조각상 앞에서 벌어지는 구타. 위대한 베르무트는 내리꽂히는 몽둥이들에 저항하지 못하고 신음과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 영상은 라이언하트 신도시에서만 중계되는 것이 아니다. 세냐의 마법에는 한 치의 실수도 없었다. 과거 유진의 결투가 중계되었듯, 베르무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세례는 대륙 전역에 중계되고 있다.
[그만…… 그만……!]
[뭘 그만이야, 새끼야!]
[아직 멀었다!]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 마.]
[저런, 뼈가 많이 부러지셨군요.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뼈가 으스러져도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빛에 뒤덮인 베르무트의 몸은 바로 치료가 되었고, 다시 몽둥이질이 시작됐다.
“끄아악…….”
아프다!
정신적인 고통은 익숙하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도 익숙하다. 어지간한 고통에서 베르무트는 신음 한 번 내지르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고통은 참을 수가 없었다. 방어도 할 수가 없다. 양팔이 멍석말이에 단단히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몽둥이질이라면 베르무트의 뼈는커녕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겠지만, 지금 베르무트를 두들기는 4명의 힘은 모두가 베르무트의 뼈 정도는 우습게 부술 만큼 강했으며, 둘둘 말린 멍석을 거쳐서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은 뼛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 몽둥이는 저만한 힘이 실리는데도 부러지지 않았고, 멍석도 찢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폭력은 기절하는 것으로 도망칠 수가 없다. 기절할 것 같으면 즉시 아니스의 기적이 정신을 깨웠고, 뼈가 부러져도 즉시 치료가 되었다.
“그만, 제발 그만……! 내가 잘못했다, 내가, 전부…….”
“누가 너 잘못한 거 몰라?”
“사과하지 마라!”
“그래, 그냥 처맞기나 해!”
“베르무트 님, 당신의 죄는 이미 사해졌습니다.”
퍼억, 퍽! 빠각! 콰직! 베르무트의 애걸에도 몽둥이질은 계속됐다. 자비롭게도 몽둥이질은 오직 멍석에 말린 몸뚱이에만 선사될 뿐, 머리는 누구도 노리지 않았다.
“크아아악…….”
결국 베르무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몽둥이질에 맞춰 신음과 비명만을 지르며, 이 끔찍한 시간이 어서 끝나도록 마음속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퍽, 퍽, 퍼억…… 크리스티나는 두 눈을 감고 몽둥이 꽂히는 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계속했다. 그녀는 차마 저 위대한 영웅을 멍석말이하는 것에 가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을 중재하려 들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가 생각하기에도 베르무트는 맞을 만했다.
“허억…… 헉…… 허억…….”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하늘에 붉은 노을이 졌다. 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이마에서는 송골송골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이만큼 지칠 정도로 몽둥이질을 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그니션을 발동하고서 패버리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진짜로 베르무트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크륵…… 크르륵…….”
멍석에 말린 베르무트는 반송장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말끔하던 머리카락은 난발이 되었고, 하얀 피부는 흙투성이에 입에는 피거품이 끓는다. 반쯤 뒤집힌 눈은 마치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을 적처럼 금빛이 탁하다.
“아하…… 아하하…….”
그 모습에 세냐는 오래전에 베르무트에게 정말로 가슴이 뚫렸을 때와는 다른, 속이 뻥 뚫리는 상쾌함을 느꼈다.
“하하하!”
모론도 몽둥이를 내려놓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100년이 넘도록 누르를 처죽이면서 한 번도 웃었던 적이 없다. 모론은 자신에게 기약 없는 삶을 살게 한 베르무트를 원망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원망과는 별개로 베르무트를 두들겨 패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기에, 지금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아하하핫!”
아니스는 품에서 꺼낸 술병을 흔들며 웃었다.
사실 그녀는 베르무트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당한 적은 없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베르무트가 죽음을 위장했을 때, 장례를 주관한 것뿐이다. 하지만 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베르무트를 패고 싶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없이 모든 것을 진행했던 베르무트 덕분에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이것으로 우리는 아무 감정 없는 거다.”
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는 베르무트를 향해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말을 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베르무트를 치료해 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손수건을 들고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땀에 흠뻑 절은 유진의 얼굴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군요.”
“끝…….”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끝.
크리스티나의 말대로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
유폐의 마왕은 죽었다.
멸망의 마왕도 죽었다.
마족은 남아 있지만, 그들은 옛날처럼 포악하게 날뛸 수 없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마족은 인간이나 다른 종족과 마찬가지로 살게 될 것이다. 아직 헬무드에서는 선거가 끝나지 않았지만, 누군지 확정되지 않은 당선인은 다른 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낼 수밖에 없으리라.
다이너스 아카데미를 완성했다. 유진은, 하멜일 적에 가졌던 꿈을 이루었다.
모론은 이미 나라를 세웠다. 그는 이미 후손들이 다스리는 루하르의 왕실에 돌아가는 대신, 라이언하트 대저택의 숲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세냐는 아직 호숫가의 저택을 짓지 못했지만- 호수는 없어도 숲과 저택은 생겼다. 그녀는 유진과 함께 저택에서 살면서, 아카데미와 아롯의 교단을 오가며 젊은 마법사들을 교육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새로운 마법의 개발과 마도서를 집필하기로 했다. 물론, 그녀가 가장 먼저 집필하는 것은 마도서가 아닌 ‘전설의 발자크’라는 이름의 동화책일 것이다.
아니스는 유라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가졌던 꿈. 여관을 겸한 술집. 건물은 세웠지만, 아직 내부는 꾸미지 못했다. 아니스는 한때의 꿈일 뿐이라며, 정말로 가게를 열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애니실라를 통해 여러 상인들을 만나보는 것을 보면 아주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스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티나도 유라스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 또한 라이언하트에 남는다. 아카데미의 교단에 서는 것에는 조금 주저하는 듯했지만, 아니스를 은근히 부추기던 것을 보면 ‘함께’라는 조건이면 교단에 설 생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이뤄간다. 미래로 이어지는, 끝이라고 할 수는 없는 끝에 도착했다. 300년 전에 바랐던 대로 행복해졌다.
정말 그런가?
이렇게 정말 끝인가?
행복해졌나?
“…….”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뺨을 닦아주는 손수건, 그를 거쳐 전해지는 손의 온기. 빤히 보는 시선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유진 님? 무슨 일이십니까?”
“…….”
이 정도였나? 가까운 곳에서 미소 짓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참 예쁘다고 생각됐다.
유진은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술을 마시는 아니스가 보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술병을 입술에서 뗀 아니스가 미소 지었다. 방금 흘린 땀으로 흐트러진 모습. 뺨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땀. 짙은 눈웃음.
이 정도였나? 아니스가 저렇게 예뻤던가? 크리스티나와 비슷한데 크리스티나와는 다르다.
유진은 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세냐가 모자를 벗고 있었다.
“뭘 봐?”
세냐의 뺨은 흥분으로 인해서인지 조금 붉었다. 아니, 어쩌면 노을에 물든 것일지도 모른다. 시원스러운 미소가 유진의 가슴을 흔들었다.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여섯 개의 조각상과,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건물과, 그 뒤에 펼쳐진 붉은 노을이 보였다.
유진은 자신의 조각상을 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조각상.
아가로트의 바람은 모든 마왕을 죽이는 것이었다.
하멜의 바람은 마왕을 죽이고 돌아가서 아카데미를 세우는 것이었다.
유진은 이루지 못한 과거의 미련을 바람으로 삼았다. 마왕을 죽이는 것은 이뤘다. 아카데미도 세웠다.
아카로트도, 하멜의 것도 아닌.
모든 것을 이루고 지금에 도달한 유진의 바람은.
“결혼하자.”
베르무트를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준공된 아카데미가 꽤 멋있었다.
노을이 아름다웠다.
두 번의 삶을 거쳐 도달한 현재.
유진은 커다란 만족감에서 이 이상 없을 평온함을 느꼈다.
세냐가, 아니스가, 크리스티나가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유진은 홀린 듯이 말해버렸다. 결혼하자. 넉넉히 1년을 잡고서 전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유진이 처한 모든 상황과 그로 인한 감정이 본심을 말하게 만들었다.
“…….”
갑작스러운 프러포즈. 세냐는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세냐를 쳐다보았다. 지금 셋이 느끼는 감정은 똑같았다.
“……누구랑 결혼하겠다는 건가?”
모론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질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모론은 지금 유진을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지만, 모론이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유진이 먼저 대답해 버렸다.
“세냐, 아니스, 크리스티나.”
“…….”
“나와 결혼해 줘.”
모론은 두 눈을 감았다.
아아…… 갑작스러운 프러포즈는 여전히 도시와 대륙에 중계되고 있다. 수많은 탄식과 수많은 탄성을 공존했다.
“…….”
세냐는 어깨를 바르르 떨며 유진을 보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빨갰다. 노을 때문도, 부끄러움 때문도, 기쁨 때문도 아니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야?”
세냐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하멜, 미쳤습니까?”
휘어진 눈웃음 사이에서 아니스의 눈동자가 뱀처럼 번득였다.
“유진 님의…… 방금 그 말은, 굉장히 기쁩니다만…….”
크리스티나는 비틀비틀 물러서며 탄식했다.
“이런 자리에서 듣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그거야!”
“동의합니다.”
세냐가 꽥 외쳤고, 아니스도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상황과 감정에 취해있던 유진은 셋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왜냐니! 몰라서 물어?!”
“결혼이란 중대사를 누가 이딴 자리에서, 몽둥이를 들고 말하는 겁니까?”
“반지는 없습니까?”
크리스티나는 참을성을 유지하며 물었지만 유진은 망토를 뒤지기 시작하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멜.”
스르륵…… 멍석이 풀리고서 베르무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피범벅의 입술을 문질러 닦지도 않고, 충혈된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누워라.”
“……왜?”
“다들 네가 눕기를 바랄 거다.”
유진은 세냐와 아니스,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이미 몽둥이를 들고 있던 세냐와 아니스는 양손으로 몽둥이를 쥐었다. 몇 걸음 물러섰던 크리스티나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유진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뺏었다.
“나는 모른다.”
모론은 들고 있던 몽둥이를 베르무트에게 건네주었다.
“…….”
유진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서 모두와 멍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해?”
세냐가 말했다.
“누우십시오.”
아니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누워라.”
베르무트가 말했다.
“음.”
도망칠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도망치면 앞으로 이곳에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진을 취하게 했던 기분은 이미 차갑게 식었기에, 그는 냉정하게 자신의 과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살살하자.”
유진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며 멍석의 끝에 누웠다. 그러고는 직접 몸을 움직여 멍석을 말았다.
“죽어!”
꽥 내지르는 세냐의 외침과 함께 몽둥이들이 떨어졌다.
完
#작가 후기
※후기에 작중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목마입니다.
2020년 8월 17일에 연재를 시작한 ‘빌어먹을 환생’이 드디어 완결이 났습니다. 햇수는 3년에 625편 완결. 제가 연재한 소설 중에서는 디자이어 다음의 분량이네요...
쓰면서 저 자신에게 아쉬운 점도 많았고 후회할 점도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것 이상으로 ‘하고 싶은 건’ 다했다, 라고 만족합니다. 물론 많은 독자님들은 하고 싶은 것 좀 덜하지 그랬냐, 고 생각하실 분도 많겠지만요.
아무튼, 625편의 긴 여정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8번째 완결인데 이것 참, 완결 후기를 쓸 때마다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고민되네요.
그냥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소설에서 적지 않은 것들을 몇 가지 얘기해 볼게요.
빌환을 쓰면서 느낀 것은, ‘해피엔딩’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중에서 자주 언급되는, ‘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라는 것을 제가 이뤄주고 싶었습니다. 세상 구하겠다고 고생 많이 했으면 당연히 행복해져야죠.
해피엔딩으로 가자, 고 결정하고서. 기존에 구상하던 비극 노선들은 대거 폐기했습니다. 본래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관련해서 조금 더 비극적이고 처참한 장면들을 구상했었는데, 죄다 날렸습니다. 성불시킬 생각이었던 아니스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리고 누아르도 남겼죠. 죽이는 편이 그림이 이쁘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그에 관한 결정은 세냐의 의견으로 기울어버렸어요.
그리고 주인공 주변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죠. 이만큼 길게 썼으면 주조연 중에서 누구 몇 명은 죽이는 게 제 취향이긴 한데, 이번에는 진짜 아무도 안 죽은 수준이네요.
시엘에 관해서는... 크흠, 제 설계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엘은 갓 성인이 된, 모두에게 사랑만 받던 철부지 아가씨였습니다. 그런 아가씨가 첫사랑에서 실연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조금 더 잘 살릴 수 있었나?? 제 능력 부족이겠죠. 아마 다시 돌아가서 그 장면을 쓴다면, 조금 더 잘 울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인공인 하멜과 유진을 쓸 때는, 어쩔 수 없는 과거의 망령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현재나 미래를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과거의 실패, 미련에 의한... 그렇게 캐릭터를 잡다 보니 전생의 전생까지 나왔네요. 625편 동안 유진을 통해서 쓰고 싶은 이야기나 장면은 다 한 것 같아서 후련하면서도 아쉽네요. 더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아서요.
저는 완벽에 가까운 작가가 아닌지라, 소설 하나를 완결 낼 때마다 항상 저 자신에게 아쉬운 것들이 많이 남습니다. 그래도 뭐, 처음 완결을 냈을 때보다는 아쉬운 것들이 줄어들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대로 쭉 완결을 내다보면, 언젠가는 아쉬운 것이 하나도 안 남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까지 연재를 한 저 자신에 대한 수고는 저 혼자 술 마실 때 할게요.
함께 따라와 주신 독자님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삽화로 글 대신 캐리를 해준 개그림.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매일 커뮤니티에 빌환 좋았다며 후기를 써준 독자님들, 매일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 팬아트를 그려주신 분들, 모두 사랑합니다.
차기작은 빙의물을 쓸 생각입니다. 회귀도 써봤고, 환생도 써봤는데, 빙의는 안 써봤으니까요. 아마 게임 빙의가 될 것 같고... 가능하다면 무공도 좀 넣고 싶네요. 겸사겸사 천마도 넣고요.
차기작을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성격상 오래 쉴 수가 없어서... 아무리 늦어도 2월이 가기 전에는 시작할 것 같습니다.
마침 오늘이 설날이네요.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도 새해 복 많이 받겠습니다.
그리고 차기작도 꼭 봐주세요. 이번엔 더 잘할게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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