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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2

 살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진이 17살이란 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숙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나이다운 어설픔은 있는 것 같다. 


“...유진님. 무도에 쓰이는 마나운용과 마법의 마나운용은 그 궤가 달라요. 저는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을 모르지만, 혹시 그 마나운용법에 영창과 술식이란 개념이 있나요?”


“없어요.”


“그렇다면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으로 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해요. 마법을 일으킬 마나는 끌어낼 수 있겠지만, 술식으로 마법의 형태를 잡고 영창으로 구동하지 않는다면 마법은 현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험해 보려고요.”


유진은 헤라의 조언을 달게 받았다.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말 될까? 할 수 있을까. 그를 파악하기 위해 도서관의 입문 마도서를 죄다 읽은 것이다. 


“별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으음... 일단은 해보세요. 다만, 마나의 흐름이 위험하다면 즉시 개입할 겁니다. 유진님이 부상이라도 입으시면 저는 물론이고 탑주님의 입장도 난처해질 거예요.”


“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문 앞에 섰다. 마탑의 깊은 지하에는 수많은 연구동들이 있다. 유진은 한 달 동안 사용해 온 연구동의 문을 열었다.


안은 제법 넓다. 지하에 이 정도 크기의 연구동이 수십 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고등한 공간왜곡 마법 덕분이다. 놀람은 첫날에 많이 느꼈으니, 유진은 태연히 연구동의 중앙에 섰다. 


“할게요.”


“네.”


헤라는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슬며시 자기 지팡이를 소환해 양손으로 쥐었다. 만약의 사태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유진은 평온했다. 


‘백염식과 비슷해.’


세냐의 마법이라기에 유진도 당연히 관심을 가졌다.


서클.


방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백염식은 심장의 별로 마나를 다스린다. 


서클은 고리로 마나를 다스린다. 


백염식은 경지가 오를 때마다 별이 분열한다.


서클은 경지에 오를 때마다 고리가 더해진다.


‘응용.’


이치는 꿰었다. 이해도 했다. 백염식에도 익숙하다. 마나를 다스리는 것? 전생부터 해왔다. 과연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 볼 만 했다.


‘서클을 별로 대체한다. 그것으로 마나는 증폭시킬 수 있어. 마나의 조율은 상황에 따라 즉석으로. 괜히 예측했다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다. 자칫하다가는 체내의 마나가 폭주할 지도 모른다. 


유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체내의 마나가 심장에 모인다. 별이 빛을 발한다. 세 개의 별이 공명하며 맞물린다. 


“...맙소사.”


지팡이를 들고 지켜보던 헤라가 놀란 소리를 낸다. 그녀는 유진이 끌어내는 마나가 얼마나 정순한지, 그리고 얼마나 강대한지를 느꼈다. 


무신, 올마스터.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이 훌륭하다는 것은 세상 모두가 안다. 하지만 저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17살의 소년이 저만큼이나 정순하고 방대한 마나를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천천히.’


ㅡ화악!


새하얀 불꽃이 전신을 휘감는다. 유진은 정신을 집중하며 마나를 조율했다. 너무 과하지 않게, 현재 다스릴 수 있는 마나의 한계를 의식한다. 이치 자체는 검기나 검강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요는, 마나를 어떻게 발현시키느냐. 유진은 머릿속에서 발현시킬 마법의 형태를 떠올렸다. 영창은 무조건 입으로 읊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발현을 격발시킬 분명한 의지뿐이다.


마나가 튀어 오른다. 억누른다. 말을 듣지 않고 얽히는 마나를 다시금 조율한다. 전생의 경험은 유진이 바라는 만큼 마나를 다스릴 수 있게 해주었다. 


‘저만한 마나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어... 흐트러질 것 같으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아. 마나의 최소입자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저 나이에 그게 가능해?’


다루는 마나가 많을수록 지배력은 떨어진다. 그게 당연한 상식이다. 마나를 다루는 것은 자질 뿐만 아니라 많은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방계인 유진 라이언하트가 마나에 입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그 4년 만에 저만한 마나를 쌓고, 그를 완벽하게 지배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장 유진의 마나는 5살에 마나에 입문한 이오드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대하고 정순했다.


‘...괴물이라더니.’


로베리안에게 유진에 대해 들었다. 


허나 소문의 출처는 로베리안 뿐만이 아니다. 라이언하트의 전통인 혈계식. 300년 동안 이어져 온 혈계식에서 방계가 본가를 넘어선 것은 한 번 뿐. 그렇게 본가의 양자가 된 장본인.


그 일이 알려지고서, 세상은 13살의 유진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ㅡ화륵!


불꽃의 구체가 나타났다. 유진은 그것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마법의 형태를 바꾸었다. 마나가 완전히 흩어져 사라지게 두지 않는다. 모든 의식이 마나를 붙든다. 


흩어진 불씨가 다시금 뭉친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턱 끝에 맺히고, 아래로 떨어질 때. 뭉친 불씨의 형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1서클의 기본마법인 파이어볼이 매직미사일로 바뀐다. 유진은 눈앞을 떠도는 매직미사일을 응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고생을 하느니 검기를 내뿜는 것이 더 편하고 강하다. 아니면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던가. 어느 쪽이든 어설픈 마법보다 강할 것이고, 지금의 유진에게 익숙하고 쉬웠다.


하지만 유진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처음 해본 것 치고는 꽤 그럴듯하지 않은가. 들인 고생만큼의 위력은 없을 마법이지만, 이렇게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유진을 즐겁게 만들었다.


‘마법은 전생에 배우지 않았으니까.’


사실 세냐가 몇 번 제안한 적이 있기는 했다.


‘네가 원한다면 마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어.’


‘필요 없는데.’


‘베르무트는 마법 잘 쓰잖아. 너 베르무트처럼 마법 써보고 싶지 않아?’


‘지금 할 줄 아는 것들도 베르무트보다 못한데, 괜히 마법 배우겠다고 깝치면 차이가 더 벌어질 것 아냐. 그리고 너, 나한테 베르무트 씹어 먹을 수 있는 마법을 가르쳐줄 자신 있냐?’


‘...으으음...’


‘까놓고 세냐, 네가 베르무트보다 마법 잘 쓰는 것은 아니잖아?’


‘너 뒤질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싸움도 잘 하고 마법도 잘하는 베르무트랑, 마법만 할 줄 아는 나랑 비교하는게 말이 돼?’


‘나는 마법 못쓰고 싸움 잘하는데 베르무트보단 싸움 못해.’


‘그건 네가 병신이라 그런 거고...! 나는... 나는 베르무트보다 마법 잘 써. 그냥... 자... 잘하는 분야가 다른 거야.’


그때 얌전히 배웠으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시발, 내가 환생할 줄 알았겠냐고.’


이렇게 환생할 줄 알았다면 세냐에게 열심히 마법을 배워뒀을 것이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매직미사일을 움직여 보았다. 어설프기는 해도, 순수한 백염식만으로 마나를 다룰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검기와도 다르고...’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흡을 골랐다.  


“후... 훌륭하세요.”


넋이 나간 눈으로 지켜보던 헤라가 입을 연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헤라는 땀에 흠뻑 젖은 유진과, 그 앞에 멈춰있는 매직미사일을 번갈아 보았다. 


‘한 달 동안 입문 마법서만 읽고... 마법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 그 전부터 마나를 다루었다고는 해도 마법과 무도에 쓰이는 마나는 다른데...’


더욱 놀라운 것은, 유진이 영창을 입으로 내뱉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창은 마법을 현상으로 바꾸는 선언이다. 고위마법사라면 영창 없이 마법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육성으로 내뱉어 마법을 선언해야 한다. 


‘암산만으로 입문단계에서 마법을 펼쳤어. 거기에 디스펠 없이 마법을 변화했고.’


“유진님.”


헤라는 꿀꺽 침을 삼켰다.


“몰래 마법에 입문하셨던 거죠?”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저 놀라게 하려고 이러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방에서 몰래 마법 연습 하셨던 거죠?”


“오늘 처음 쓴 거예요.”


“말도 안 돼...”


“제가 뭐하러 이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매직미사일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검기만큼 강하지는 않겠지만, 직접 휘두르지 않아도 움직인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


“몬스터 하나만 소환해 주세요.”


“네?”


“위력 좀 확인하려고요.”


“아... 음... 네. 어떤 몬스터면 될까요?”


“단단한 놈으로.”


“골렘이면 되겠죠? 마침 만들어 둔 골렘이 있어서, 촉매 없이 바로 소환할 수 있어요.”


“네.”


헤라는 소환령을 읊으며 지팡이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마법진이 만들어지고, 마나가 집중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골렘이 소환되었다. 


“카브륨으로 만든 골렘이에요. 어지간한 공격은 방어술식 없이 충돌과정에서 흩트려버리죠.”


“좋네요.”


유진은 히죽 웃었다. 헤라는 일어선 골렘을 유진의 앞에 세워두고 뒤로 물러섰다. 


“공격해보세요.”


“네.”


대답한 즉시 매직미사일이 쏘아졌다.


ㅡ꽈과광!


골렘이 뒤로 넘어갔다.


적색마탑


“...그러니까...”


로베리안은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을 닫았다.


“유진님이 백염식으로 서클을 만들어서, 마법을 펼쳤고.”


“네.”


“실패없이 곧장 파이어볼을 만들고, 디스펠을 거치지 않고 매직미사일로 변화...”


“네.”


“카브륨 골렘을 넘어트렸다고?”


“여기에요.”


헤라는 골렘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과연, 그곳에는 움푹 파인 상흔이 남아 있었다. 로베리안은 그것을 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정확히 일점을 노리셨구만.”


“초탄도 흩어지지 않았어요.”


“카브륨의 순도는?”


“외부는 통짜로 썼죠.”


“방어술식은 따로 안새겼고?”


“아직은요.”


“이게 가능한가?”


로베리안은 골렘의 상흔을 손으로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방어술식이 따로 없다지만, 카브륨은 어지간한 위력의 공격을 흩트릴 만큼 유연한 금속이다. 이제 갓 마법에 입문한 햇병아리 마법사의 공격마법이 카브륨을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나의 순도와 밀도가 터무니없었어요.”


헤라는 그때의 경악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도저히 초보 마법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요. 펼칠 수 있는 마법의 종류와는 별개로, 공격 마법의 위력은 3서클 마법사 이상이에요.”


“...음...”


로베리안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썹을 모았다. 


‘유진님의 백염식은 3성.’


17살에 3성에 오르는 것은 전례 없는 일. 만약 유진이 마법에 큰 자질을 보이지 않는다면, 부디 잘 설득하여 본가로 돌아가게끔 해달라며 길레이드가 당부했었다. 


‘백염식은 심장에 별을 만든다. 무도의 코어와 마법의 서클은 달라... 그런데 독자적으로 백염식을 서클로 대체했다?’


괴물같은 재능이다. 이쯤 되면 감탄이 아니라 섬뜩함을 느낀다. 17살의 아이가 아무 실수 없이 마나를 다스리고, 무도의 마나운용법을 서클로 대체했다니. 


코어로 마법을 쓸 수 있는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름을 떨치는 마검사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도 몇몇 있다. 하지만 코어로 서클을 대체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애당초 그럴 필요가 어디 있나? 서클은 서클이고 코어는 코어. 마나를 다스리는 것에 익숙하다면 서클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압도적으로 편하다.   


‘백염식이 특별해서?’


그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백염식의 창시자는 위대한 베르무트. 그는 마법에도 능했기에 올마스터라 불렸다. 그 베르무트가 서클로 마법을 사용했는지, 다른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베르무트 이후로 본가에서 대마법사라 불릴 마법사는 탄생한 적 없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백염식의 3성이 3서클에 준하다고 볼 수 있을까?’


현명한 세냐는 여러 마법을 서클의 개수에 맞게끔 구분했다. 1서클의 마법사는 3서클의 마법을 펼칠 수 없다. 1서클로 다스리는 마나가 3서클 마법을 펼치기에는 압도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가끔, 천재라는 인종은 제 서클로 펼칠 수 없는 고위 마법을 펼쳐내곤 한다. 로베리안도 그랬다. 그는 3서클일 적부터 5서클까지의 마법을 펼치는 것에 성공했었다. 


“...유진님은 외출하셨다 했나?”


“네. 약속이 있다며, 정오 전부터 밖에 나가셨습니다.”


“마침 잘 됐군.”


로베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골렘에서 물러섰다. 그는 책상에 털썩 걸터앉고서 헤라를 응시했다.


“헤라.”


“네, 탑주님.”


“유진님에게 아크리온의 추천서를 써주는 것이 부조리일까?”


“...네?”


헤라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아크리온. 아롯의 왕립 도서관의 이름이다.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과 지체 높은 귀족과 왕족들 뿐이다. 


그런 고명한 도서관이니만큼, 아크리온에는 마탑보다 훨씬 뛰어난 마도서들이 즐비하다. 당장 적색 마탑에도 아크리온에 출입할 수 있는 마법사는 열 명이 채 안 된다.


“그건...”


“난 아니라고 생각해.”


로베리안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든. 17살의 나이에 코어를 서클로 대체해 마법을 썼어. 마법에 입문한 즉시 말이야. 마법을 가르친 스승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헤라, 자네가 유진님에게 마법을 가르쳤나?”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 드린 적은 있습니다.”


“어떤 질문이었지?”


“술식의 기본 도해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외에 마법을 지도한 적은 없다는 말이지?”


“네.”


로베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유진님은 한 달 동안 입문마법서만 독파하여 마법을 썼단 말이로군. 코어를 서클로 대체해서. 다른 고위 마법사의 조언도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판단과 이해만으로. 그렇게 펼친 마법은 카브륨 골렘의 장갑에 구멍을 뚫었고 말이야.”


“...네, 그렇죠.”


“헤라.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을 뭐라 부르는지 아나?”


“천재.”


“아니, 괴물일세.”


로베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책상 서랍이 열리더니 한 장의 백지가 로베리안에게 날아왔다.


“그러니 나는 추천서를 쓸 거야. 이건 부조리가 아니야. 저런 자질을 지닌 괴물이라면 그에 맞는 대접을 받아야 해.”


“...다른 마법사들이 불만을 가질 지도 모릅니다.”


“넌?”


“저는 상관없습니다. 유진님이 무엇을 했는지 직접 보았으니까요.”


“그럼 됐어. 네가 불만을 느끼지 않는 것은 유진님의 자질을 봤기 때문이니까. 유진님이 해낸 것은 그만큼이나 놀라운 거야.”


로베리안은 펜을 쥐고서 백지에 추천서를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불만을 갖는다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질시에 눈이 먼 것이지.”


물론 추천서만으로 아크리온의 출입증이 발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필요하다면 다른 마탑주들과 논쟁이라도 벌일 것이고, 정 안 된다면 로베리안이 직접 마도서를 엄선해 유진에게 전해줄 것이다. 


‘아니면 제자로 들이던가.’


차라리 그게 나을까? 로베리안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작성한 추천서를 확인했다.


“...그런데 유진님은 무슨 약속으로 나가신 건가? 아롯에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친구를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친구?”


언제 아롯에 친구를 만든 거지? 로베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추천서에 인장을 찍었다. 


*


녹색마탑의 앞, 메르데인 광장.


세냐의 성씨를 딴 광장의 중심에는 높다란 동상이 서있다.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왼손에는 마도서를 든 세냐의 동상이다. 


‘실물보다 낫군.’


유진은 동상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초상화가 그랬듯, 동상의 얼굴도 기억 속의 세냐보다는 조금 더 아름다웠다. 아니, 실물이랑 똑같나? 유진은 동상의 얼굴을 살피며 고민했다.


기억 속의 세냐는 얼굴에 짜증을 드러낸 적이 많았다. 헬무드가 워낙에 지랄맞은 곳이기도 했고, 여정도 험난했다. 그곳은 짜증에 찌들 수밖에 없는 빌어먹을 곳이었다. 


‘제발.’


‘그래서... 그래서 말했잖아. 그냥 돌아가라고. 왜 고집을 부리고 따라와서...’


짜증스런 얼굴.


그보다 더 기억에 선명한 것은, 우는 얼굴이다. 벌개진 눈자위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제발, 죽지 마.’


‘안 돼... 안 돼, 제발, 하멜.’


죽던 순간의 기억은 조금 희미하다. 주변의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고... 어쨌든, 세냐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유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동상의 얼굴은 울상이 아니다. 자신감에 찬 미소. 저 얼굴은 안다. 짜증이 많았던 세냐는, 제 마법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낼 때마다 보란 듯이 저런 표정을 짓곤 했었다.


“...실물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나.”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세냐의 저택이 그랬듯, 메르데인 광장도 입장료가 터무니없이 비싸다. 그래서 사람이 미어터질 만큼 많지는 않았다. 비싼 입장료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 커다란 동상은 꼭 광장에 들어오지 않아도 멀리서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진은 벤치에 앉아 광장의 입구를 보았다. 멀리 보이는 시계탑. 정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약속시간은 정오였다. 설마 입장료가 없어서 못 들어올 리는 없고. 인파가 너무 많아 길이 막히는 건가? 


‘아니군.’


남들보다 훨씬 큰 거구가 보인다. 가로막는 사람들을 굳이 밀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거구에 압도되어 슬며시 길을 열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한이 광장에 들어선다. 


유진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거한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믿을 수가 없군.”


유진은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가르기스 라이언하트. 4년 전의 혈계식 이후로 만나는 것은 처음인데, 놈의 성장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유진?”


“너 가르기스 맞냐?”


유진은 가르기스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2미터는 넘을 것 같다. 예전에 봤을 때도 덩치는 컸지만, 지금 가르기스는 유진을 완전히 가릴 만큼 커졌다. 쩍 벌어져서 부푼 가슴 근육을 감싸는 단추가 애처로이 떨리고 있다. 


“맞다. 가르기스 라이언하트. 그새 내 이름을 잊은 건가?”


“아니... 잊지는 않았는데... 너... 정말 18살 맞아?”


덩치도 덩치지만, 저 덥수룩한 수염이 놀랍다. 18살에 저렇게 수염이 날 수 있는 건가. 유진은 아직 맨질맨질한 제 인중을 어루만져보았다.  


“겉늙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는다.”


“겉늙은 수준이 아닌데... 수염은 왜 그따구야? 좀 밀고 다녀, 더럽잖아.”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내다운 것이다.”


“넌 수염 안 길러도 충분히 사내다워 보여.”


“칭찬해 줘서 고맙군.”


가르기스가 벙긋 웃으며 말했다. 그는 큼직한 손을 유진에게 뻗어 악수를 청했다. 유진이 악수를 받자, 가르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너도 많이 컸구나.” 


“...네가 무식하게 큰 거지.”


“하지만 조금 실망스럽군...”


“뭐?”


“손을 잡으니 알겠다. 네가 4년 동안 얼마나 육체를 단련했는지...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해.”


“일단 손부터 놔.”


맞잡은 손을 휙휙 흔들다가 손을 놓는다. 하지만 가르기스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4년 전과 비교해서 체격은 훨씬 좋아졌지만, 충분하지 않아. 단련은 충분히 하고 있는 건가?”


“뭐가 어째?”


“나는 매일 4시간 잔다.”


이 새끼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유진이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눈을 찡그리자, 가르기스는 가슴을 활짝 펴며 말을 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단련에 사용한다. 내 전용 식기는 마법으로 중량을 늘렸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 심지어 옷까지 중량을 늘렸어.”


“어... 그래.”


“속옷도 마찬가지다.”


“멋지네.”


“이 육체는 단련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지. 물론, 무조건 중량을 늘린다 해서 근육을 크지 않아. 충분한 휴식, 알맞은 단련, 그리고 이것.”


가르기스가 외투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가문 비전의 근육성장제.”


그가 꺼낸 것은 자그마한 포션이었다. 가르기스는 뿌듯한 눈으로 포션을 보다가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널 위해 가져온 것이다.”


“필요 없어.”


“어째서? 제하드님의 체중감소와 근육의 성장은 우리 가문의 도움 덕분이다. 그건 너도 잘 알 텐데?”


“말이 나온 김에 하는 건데, 아버지 통해서 그 이상한 약 좀 그만 보내라.”


“그래서 내가 직접 주는 것이다. 식전에 마셔도 상관없으니, 지금 쭉 들이켜라.”


“안 마신다고.”


“이해할 수가 없군... 네가 백염식의 3성에 올랐다는 말은 들었다. 대단한 일이지만, 마나를 단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의 단련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유진은 끝까지 포션을 받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근육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가르기스를 지나쳤다. 


“그래서 왜 만나자고 한 거냐? 설마 그 약을 주려고 아롯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냐.”


며칠 전에 가르기스의 편지를 받았다. 아롯에 갈 일이 생겼으니,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내용이었다.


“따로 볼일도 있긴 하지.”


“뭔데.”


“예전에 말하지 않았나? 우리 가문 비전의 근육 성장제는 아롯의 고명한 연금술사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가르기스는 아쉬운 마음을 느끼며 포션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나도 몸이 자랐으니, 기존의 배합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서 말이야. 그를 말씀드리니, 배합을 내 몸에 알맞게 조율해 준다 하시더군.”


“그러니까, 연금술사를 만나러 왔다?”


“주된 볼일은 그것인데, 다른 볼일도 있다.”


“볼일이 참 많구나.”


“아롯은 머니까. 기왕 오게 되었으니 오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해야지.”


가르기스가 걸을 때마다 땅이 조금씩 울리는 것 같다. 유진을 곁에 다가서는 가르기스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왜 날 피하지?”


“암내 난다.”


“암내가 아니다. 사내의 체취다.”


“향수 좀 뿌려.”


“디자이라와 똑같은 말을 하는 군...”


“그래서 볼일이 뭔데.”


“음.”


가르기스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한 번 살폈다. 광장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제복은 입지 않았지만, 가르기스가 워낙 거구다 보니 주변 시선이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볼레로 거리에 대해서 아나?”


“알지.”


이오드. 그 망할 자식이 들락거리는 곳. 


“그곳의 경매장에 대해서도 아나?”


“대충은. 왜, 뭐 사고 싶은 것이라도 있나?”


“이번 경매에 거인족의 고환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 뭐?”


“거인족의 고환.”


“씨발 그걸 왜 사려고?”


“모르는 건가? 거인족의 고환은 마법적으로 가치가 굉장히 높다.”


“네가 시발 마법을 위해 고환을 사려는 건 아닐 것 아니냐.”


“물론. 그 고환을 연금술사에게 넘길 생각이다.”


거인족이라면 유진도 안다. 엘프만큼 드문 종족인데, 성향은 엘프와 정반대다. 놈들은 300년 전, 종족 전체가 멸망의 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 


멸망의 마왕성까지는 가지도 못했지만... 헬무드를 떠도는 동안 거인들과는 몇 번 충돌한 적이 있었다. 놈들은 어지간한 마법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고함을 지르는 것만으로 산을 무너트린다. 


“함께 가자.”


“뭘.”


“경매장 말이다. 돈은 충분히 가져왔지만, 혹시 부족할 지도 몰라.”


“돈 빌려달라고?”


“내 이름을 걸고 이자까지 쳐서 갚으마.”


“싫어.”


“무릎 꿇고 부탁한다.”


가르기스가 몸을 숙인다. 유진은 질색하며 놈의 어깨를 붙들었다.


“알았으니까 눈에 띄는 짓 좀 하지 마. 가뜩이나 덩치도 큰 새끼가.”


“고맙다.”


“뭐가 고맙다는 거냐? 돈 빌려주는 거?”


“덩치가 크다는 말. 칭찬 아닌가?”


아무리 봐도 모론의 후손 같은데.


“거인족의 고환 뿐만 아니라, 이번 경매장에는 진귀한 물품이 많이 나온다고 들었다.”


“어, 그래.”


“너는 관심 없나? 하긴, 위니드가 있으니 어지간한 무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군.”


“경매장 말고 볼레로 거리에는 관심이 있긴 해.”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가르기스를 지나쳤다. 


괜히 한 말이 아니라, 가르기스의 암내가 너무 독했다.


적색마탑


볼레로 거리가 열리는 것은 보름달이 뜨는 밤. 앞으로 일주일 뒤.


유진은 가르기스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미 과하다 싶을 정도로 덩치가 큰 놈인데, 그로도 부족해서 거인족의 불알을 사서 씹어 먹겠다니.


“씹어 먹는 것이 아니다.”


가르기스는 정색하고서 대답했다.


“그럼 쪄먹냐?”


“직접 조리해 먹는 것보다는 약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을 거다.”


“그럼 갈아먹는 거네.”


“네게도 조금 줄 거다.”


“필요 없어.”


“어째서? 내 듣기를, 거인족의 고환은 근육성장 뿐만 아니라 정력에도 굉장히 좋다고 들었다.”


가르기스의 눈은 진지했다. 그는 뻑뻑한 살코기를 썰면서 말을 이었다.


“또 마나도 듬뿍 담겨 있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보약이란 말이다.”


“너 많이 먹어라.”


몸에 좋은 보약이라는 것은 알겠다만, 유진은 도저히 거인족의 불알을 먹고 싶지 않았다. 일단 포션으로 만들면 본래의 구린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겠지만, 인식마저 바뀌는 것은 아니잖은가. 


“이해할 수가 없군. 흔히 쓰이는 회복포션도 트롤의 심장과 피를 원료로 삼는다. 마나포션도 마석과 몬스터의 소재를 원료로 삼지.”


“불알은 아니잖아.”


“짐승의 고환은 고급 식재료로 쓰이곤 한다.”


“너 많이 먹어라.”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안 해.”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차를 홀짝거렸다. 


“...그런데 왜 변장을 해야 하지?”


식사가 끝난 후. 가르기스는 계란흰자를 음료처럼 홀짝이다 입을 열었다. 


“...본가의 자제가 불법적인 거리를 보란 듯이 드나드는 것도 좀 눈치 보이잖아.”


“음, 확실히.”


“뭐 암묵적으로 허락받은 거리라고는 해도, 괜한 추문이 붙어 좋을 것은 없지.”


“네 말이 맞구나.”


가르기스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거리에서 부끄러운 짓을 할 생각은 없지만, 불필요한 추문을 떠돌게 할 필요는 없지. 가문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래, 위신.”


유진은 고개를 슬쩍 뒤로 빼며 말을 받았다. 유진도 식성이 좋기는 했지만, 가르기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놈은 퍽퍽한 고기를 몇 덩이나 먹어치우곤, 지금은 조미료 하나 치지 않은 계란 흰자를 마시고 있다. 덕분에 놈의 주둥이에서는 어쩔 수 없는 계란비린내가 풍겼다. 


“...먹고 양치해라.”


“내 위생관념을 무시하지 마라.”


“어쨌든 양치해. 향수도 좀 뿌리고.”


“난 내 체취가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 나도 변장해야 하나?”


“음...”


유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대충 로브라도 둘러쓰려고 했는데, 가르기스의 덩치는 그로서 해결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넌 변장할 필요 없겠다.”


“어째서?”


“그 덩치는 숨기려고 해 봐야 숨길 수 없을 테니까.”


“고맙다.”


가르기스가 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도 덩치가 크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차피 경매장에 처박혀 있을 놈이니 상관없겠지.’


변장이 필요한 것은 유진이다. 그는 이번 보름달 밤에 이오드가 볼레로 거리에 갈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서큐버스에게 중독되어 신경불안을 겪는데, 이오드의 의지로는 금단증상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애당초 그런 의지가 있는 놈이면 그 꼴이 되지도 않았겠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정기가 빨리는 것이 그만큼이나 노골적으로 비치고,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런 이오드의 행실을 로베리안이 몰랐을 리가 없다.   


방치했나? 아니, 그럴 이유는 없었다. 우선 로베리안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봐야겠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돌아간다.”


“벌써? 곧 몸을 단련할 건데, 같이 하는 것이 어떤가? 서로의 육체를 견주어 보면 너와 나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됐어.”


“잠깐.”


가르기스가 힘을 주어 말을 뱉었다. 그는 식기들을 옆으로 밀쳐둔 뒤 거구를 일으켰다. 그리곤 숨을 크게 삼키며 양손을 허리에 얹고, 가슴근육을 활짝 펴고서 부풀렸다. 


ㅡ투두둑! 애처로이 떨리던 단추들이 탄환처럼 쏘아진다. 그렇게 상의를 벗어낸 가르기스가 상반신의 근육을 꿈틀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팔씨름을 하자.”


“...왜?”


“4년 전부터 너와 팔씨름을 해보고 싶었다.”


가르기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는 거대한 팔을 식탁에 올려놓으며 자세를 잡았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육체의 힘만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가르기스의 앞에 앉았다. 


“그냥 하는 건 재미가 없으니 내기라고 걸고 하지.”


“어떤?”


“내가 이기면 앞으로 향수 뿌리고 다녀라. 나한테 근육성장제 권하지도 말고.”


“좋다. 대신 내가 이기면 군말하지 않고 내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해라.”


가르기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유진은 겉옷을 벗고 소매를 걷어올렸다. 가르기스는 유진의 팔뚝을 힐긋 보았다.


‘제법... 하지만 부족하군.’


가르기스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크기 차이가 압도적인 두 손이 마주잡는다. 


“하나, 둘, 셋, 하면 시작하는 거다.”


“어.”


“내가 말해도 되나?”


“상관없어.”


“하나, 둘.”


뿌드득.


가르기스의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유진은 섣불리 근육에 힘을 주지 않고 감각을 곤두세웠다.


“셋.”


ㅡ쿠웅! 


결과는 순식간에 났다. 가르기스는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자신의 손을 보았다. 한껏 부풀린 근육은 제대로 힘을 쏟아내기도 전에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렇게 반쯤 넘어간 순간부터는 힘은 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큰 팔 근육이 바닥에 빨리 닿아버렸다.


“내가 이겼어.”


유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걸쳤다.


“...어떻게 이긴 거지?”


“기술, 타이밍, 센스.”


유진은 가르기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지나쳤다.


“다음에는 향수 뿌리고 와.”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식당을 나갔다.


*


적색 마탑에 돌아오자마자 로베리안의 부름을 받았다. 이오드에 대해 한 번 물어볼까 했는데, 마침 잘 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탑주의 방에 오는 것은 처음이네.’


로베리안은 탑주라는 직위에 알맞게 마탑 최상층을 전부 사용하고 있다. 탑주의 초대가 없다면 엘리베이터에 아무리 마력을 들이부어도 최상층에는 올라올 수 없다.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가는데.’


헤라의 앞에서 펼친 마법 때문이리라. 그때 헤라는 자신하던 카브륨 골렘이 뒤로 넘어간 것에 기절할 듯 놀랐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유진도 놀라기는 했다. 전생에 카브륨이란 광석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 단단한 광석으로 만든 골렘을 처음 펼친 마법으로 넘어트린 것이다. 


마법의 위력은 유진이 상상했던 것보다 강했다. 솔직히 처음 쓴 것이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그 정도 위력이면 실전에서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마법을 쓰는 것에 보다 더 익숙해지고, 쓸 수 있는 마법이 늘어나면 여러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칭찬이나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테고.’


뭔가 선물을 줄 것 같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느꼈고, 그러한 예감은 히죽 웃음을 만들어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복도를 조금 걸었다. 활짝 열린 문들의 너머에서 로베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환영해 주었다.


“오셨습니까?”


“부르실 줄 알았다면 외출하지 않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갑작스레 부른 것은 저니까요. 일단 편한 자리에 앉으시죠.”


느낌 뿐이었던 것이 확신이 된다. 로베리안의 목소리에는 호의가 가득하다 못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이오드에 대해서는 일단 받고 난 다음에 묻자.’


그럴 생각은 아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추궁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라이언하트 본가의 식구라곤 하지만 까마득하게 어린 유진이 마탑주에게 이것저것 캐묻는 것은 불손한 일이다.


‘...쟤 나이가 몇이었지? 대충 100살 가까이라고 들었는데...’


전생까지 더해도 로베리안의 나이가 더 많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기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유진이 여태까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그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로베리안 뿐이다.


“저어...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유진은 일단 그것을 물어보았다. 괜히 신변잡기를 떠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마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로베리안에게 보고되고 있을 것이다.


“일단 이것을 확인해 보시죠.”


로베리안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서랍 속의 추천서가 붕 떠올라 유진에게 날아왔다. 


“...추천서?”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추천서를 읽어 내렸다.


‘아크리온? 맙소사.’


그 이름은 유진도 안다. 이 저명한 왕립도서관은 300년 전에도 유명했다. 아롯이 자랑하는 마법, 그 정수가 보관된 곳. 마탑이 보유한 마법서들이 아무리 방대한들, 질적인 면에서는 아크리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제게는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 뛰고 싶었지만, 유진은 일단 주저하면서 물어보았다. 아주 마음에 없는 말이 아니기는 했다. 아크리온은 300년 전에도 위상이 높았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베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유진님이 아크리온에 들어갈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유진님은 아직 마법에 깊이 입문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과분한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깊이 입문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계신 거죠. 코어로 서클을 대체한다는 것, 말은 쉽지만 유진님의 나이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유진님은 그를 해내셨죠.”


유진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자부심을 드러내며 웃어야 하나? 아니면 겸손히 굴어야 하나. 


“...감사합니다.”


둘 다 했다. 유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손가락을 꼼질거리고, 뿌듯한 미소를 감추는 것을 의식했다.


“아크리온에는 뛰어난 마법서들이 많습니다. 당장 입문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읽고 머리에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유진님의 지식은 넓어지겠죠. 그 지식들은 언젠가 유진님의 마법을 찬란하게 할 양분이 되어 줄 겁니다.”


뛰어난 마법서라고 말할 정도가 아니다. 아크리온에는 신화시대부터 내려온 고대의 마법들은 물론, 기나긴 역사 중 당대 제일이라 불리 현자들의 저서도 보관되어 있다. 


“...궁금한 것이 있어요.”


유진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크리온에 세냐님의 저서도 있나요?”


“물론이죠.”


로베리안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적색마탑과 녹색마탑에도 세냐님의 저서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 분이 말년에 집필하신 3권의 ‘위치 크래프트(Witch Craft)’의 원본은 아크리온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롯 역사상 최고라 꼽히는 마법서. 현명한 세냐가 자신의 모든 마법을 돌이키고, 그 정수를 세 권으로 나눠 집필한 책. 위치 크래프트는 아롯의 보물이며, 사본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개된 것은 상권(上卷)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다른 마법서를 보지 않아도 될 지식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하하. 처음 위치 크래프트의 상권을 읽었을 때, 제가 평생 익혀 온 마법이 어린아이 소꿉장난이었다고 자조했었죠.”


“...아...”


“이 추천서가 무조건 아크리온의 출입증으로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만, 일단은 유진님의 의사를 듣고 싶었습니다. 유진님, 제가 추천서를 써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괜찮죠. 다만, 부족한 저 때문에 탑주님이 곤란해지지 않으실까 걱정입니다.”


당연히 괜찮지 새끼야, 왜 뻔한 걸 물어보니? 유진은 그런 생각을 입밖에 내지 않으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곤란이라... 하하!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는 제게 곤란해 할 일도 되지 않습니다.”


로베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감정, 뱉지 않은 한숨. 유진은 슬쩍 고개를 들어 로베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로베리안님.”


“예, 말씀하십시오.”


“그게... 저어... 이오드 형님에 관해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추천서를 확인했다. 써주겠다는 말도 들었다. 설마 여기서 기분이 조금 상했다고 뱉은 말을 바꾸지는 않을 것 같다. 탑주 자리에 앉은 놈이 그 정도로 쪼잔하지는 않으리라.


“아롯에 온 첫날...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이오드 형님이 마법 수행에 몰두하지 않고, 불온한 거리에서 유흥을 즐긴다고...”


“아...”


역시.


로베리안은 이오드의 비행을 알고 있었다. 


“저는 이오드 형님과 진짜 형제는 아닙니다만, 같은 성씨를 가진 가족으로서 이오드 형님이 걱정됩니다. 본가에서도... 가주님과 가모님이 이오드 형님을 걱정하고 계시고요.”


“이걸...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로베리안은 곧장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유진님. 이오드님의 외도에 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볼레로 거리에서 서큐버스와 어울린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그건 사실입니다.”


로베리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를 알고 있고, 몇 번이나 주의를 드리기도 했죠. 하지만 이오드님의 외도를 막을 수는 없었어요.”


“...”


“서큐버스... 유명한 몽마죠. 과거, 헬무드가 개방되기 전에는 서큐버스에게 모든 정기를 빨려 죽는 사람들이 많았답니다.”


잘 안다.


“하지만 헬무드가 개방되면서, 마왕과 마족들의 태도는 아주 많이 바뀌었습니다. 서큐버스도 마찬가지죠. 물론 여전히 정기는 빨아먹지만, 예전처럼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헬무드에 있는 몽마의 여왕이 엄격히 금하고 있죠.”


“그렇다 해서 형님의 외도가 옳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죠.”


“예, 물론 그렇습니다.”


로베리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하고 유진을 응시했다. 


“이오드님을 조금 이해해 주십시오.”


“...예?”


“이오드님은 4년 전에 본가를 떠나 아롯에 왔습니다. 그 분은 아롯에 많은 기대를 하고 오셨습니다만... 이오드님의 자질은 자신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했습니다.”


“...”


“이오드님은 수많은 좌절을 겪었습니다. 저와 새뮤얼... 아, 새뮤얼은 이오드님을 가르치는 마법사입니다. 어쨌든, 저와 새뮤얼은 이오드님이 좌절을 극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애석히도 잘 되지 않았죠.”


자질도 부족한데 마탑에 머물 수 있게 만들었다. 마법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 직접 지도도 해보고 여러 마법서를 정리해 권하기도 했다.


“수양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독촉으로는 순수하게 몰두할 수 없어요. 하물며 이오드님은 기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신분이죠.”


“...”


“숨 돌릴 여유 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너무 과하지 않게끔 주의를 주면서. 그마저 없다면, 이오드님은 진즉에 무너져버렸을 겁니다.”


이해하지 못할 말은 아니다. 유진도 본가에서 4년을 살았다. 테오니스가 얼마나 신경질 적인지 알고 있고, 애니실라가 얼마나 영악한지를 안다. 자질과 더불어 욕망까지 타고난 시안과 시엘. 둘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또 자신들의 욕망을 이뤄내기 위해 가주가 되고 싶어 한다.


이오드는 어떤가? 놈은 어려서부터 소극적이었고, 무도의 수행보다는 마법에 흥미를 가졌다고 들었다. 시안과 시엘이 태어난 후부터 테오니스는 아들에게 항상 자신의 입장을 자각시켜왔다. 기대에 배신당한 이오드가 본가에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은, 숨막히는 본가보다 아롯에서 지내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서큐버스는 좀 아니지.’


놈의 처지가 안쓰럽다는 것은 이해한다만.


서큐버스는 도가 지나치다. 태도를 바꿔서 웃어댄들 마족은 마족이다. 놈들은 절대로 인간과 섞일 수 없다. 유진은, 하멜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알았습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직접 봐 보고.’


처지가 안쓰럽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오드가 어떻게 숨을 돌린다는 것인지는 봐두어야 겠다.


볼레로 거리


몽마는 인간의 꿈을 파고든다. 


꿈속에서는 현실과 달리 모든 것이 가능하다. 현실이 제 아무리 처참한들, 꿈에서는 바라는 모든 행복을 이룰 수 있다.


당장 먹을 식량이 없어도 꿈에서는 세상의 모든 진미를 맛볼 수 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어도 꿈에서는 금은보화 가득한 저택에서 살 수 있다. 죽은 가족, 친구, 연인. 현실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지만, 꿈에서는 추억을 쌓을 수 있다.


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꿈은 행복하고 즐겁다. 


그래서 꿈인 것이다. 


몽마는 마족 중에서도 질이 나쁘다. 놈들은 인간이라면 어쩔 도리 없는 마음의 약한 곳을 파고든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오직 꿈이기에 가능한 것들을 보여준다. 그렇게 거짓된 행복을 느끼게 만든다.


몽마의 여왕.


전생의 하멜이 가장 죽이고 싶어 했던 마족 중 하나다. 그 빌어먹을 마족은 헬무드에서 여러 번 하멜과 동료들을 공격했었다. 여왕에게 충성하는 몽마들은 틈만 나면 꿈속으로 파고들었고,


하멜의 후회를 되새겼다. 몬스터의 습격으로 잃은 가족.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나. 베르무트에 대한 경쟁심, 열등감. 그 모든 것들을 꿈속에서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꿈속의 하멜은 가족을 잃지 않았다. 어린 하멜은 타고난 자질을 화려히 꽃피워 몬스터들을 도륙냈다.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은 하멜을 용사라고 불렀다. 


꿈속의 하멜은 베르무트보다 위대했다. 베르무트는 아무리 노력해도 하멜을 이기지 못했다. 네가 병신이라 그래. 하멜은 베르무트를 비웃었다. 


꿈속의 하멜은 토벌대의 선두에 섰다. 헬무드를 가로지르는 과정에서 잃었던 수많은 이들. 용사와 동료들에 묶이지 못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들. 아무도 죽지 않았다. 하멜은 선두에서 모든 위협을 물리쳤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하멜에게 구원받았다.


모든 마왕을 죽였다.


꿈속에서.


‘현실이 아니야.’


하멜은.


유진은 그를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몽마가 보여주는 꿈은 아무리 달콤한들 결코 현실이 되지 않는다. 


꿈에서 깨어난 뒤, 미몽(迷夢) 속에 남은 달콤함은 현실과 맞물리며 지독한 자기혐오를 낳는다. 


꿈에서는 행복하지만 현실은 좆같다. 


그 좆같은 현실을 바꾸려면 다시 꿈을 파고들어서는 안 된다. 


꿈을 찢어버려야 한다. 


빌어먹을 꿈을 보여 주며 마음을 무너트리고, 환몽(幻夢)을 헤매게 만드는 몽마를 죽여야 한다.


300년이나 흘렀다. 


마왕도, 마족도. 몽마도 바뀌었다. 


로베리안의 말은 이해할 수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빌어먹을 현실에 짓눌리는 이오드는, 꿈에서라도 숨을 돌리고 싶을 것이다.


“낡았군.”


유진은 제 관자놀이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하지 않는다. 몽마의 끔찍함을 알고, 꿈의 허망함을 알기에. 유진은 이오드의 외도를 가벼운 일탈이라 여기지 않는다. 


꿈에 중독되었다면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 그렇게 병신이 된다.


이오드에게 형제애는 없다만, 길레이드에게는 많은 호의를 받았다. 


“낡다니,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


“네 옷차림이 낡아 빠졌다는 말이다.”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공중마차. 그 맞은편에는 가르기스가 앉아있었다. 마차의 안은 제법 넓지만, 덩치가 무식할 정도로 큰 가르기스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있었다.


“내 차림이 왜 낡다는 것이지?”


“그 병신같은 프릴은 왜 달고 있는 거냐. 대체 누가 네게 그딴 옷을 입힌 거야?”


“우리 어머니가 잘 어울린다며 골라준 옷이다.”


“다시 보니 굉장히 잘 어울리는 군. 네 야성미 넘치는 모습에 앙증맞은 프릴이 더해지니, 마치 송곳니를 감춘 맹수처럼 보여.”


급히 덧붙이는 말에 가르기스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필사적으로 뱉은 말을 주워 담기는 했다만, 가르기스의 몰골은 눈뜨고 보기 괴로울 정도였다. 놈은 옷소매와 가슴팍에 프릴이 달린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나마 향수를 뿌려 암내는 나지 않게 되었지만, 저 몰골에 향수냄새까지 진동하니 더욱 끔찍했다.


“...그냥 향수 뿌리지 마라.”


“어째서?”


“네 모습에는 향수 냄새보다 암내 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어울려.”


“내 생각도 그렇다.”


유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보름달이 뜬 밤. 볼레로 거리가 열리는 날이다. 


이오드는 오전부터 마탑을 나갔다. 헤라에게 전해 듣기를, 마법에 쓸 실험재료들을 사러 나갔단다. 그 말이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쭉 제 방에서 칩거하던 놈이 하필 오늘 외출했다니? 


‘등신.’


유진은 창문에 비치는 제 얼굴을 노려보았다.


얼굴과 머리색이 다르다. 상위 마법인 폴리모프는 쓰고 싶어도 못 쓴다. 하지만 이목구비와 머리색을 바꾸는 마법은 쓸 수 있다. 


2서클. 


그 이상의 마법은 익히지 않았다. 로베리안이 써 준 추천서에 아직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만, 조언은 달게 들었다. 정말로 아크리온의 출입증이 나올지는 모르겠다만, 답이 돌아올 때까지 다른 마법은 더 익히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머릿속의 마법을 체득했다. 유진이 독파한 입문마법서에는 1서클과 2서클의 마법들이 정리되어 있다. 서클을 코어로 대체하고, 마법을 쓰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 결과, 유진은 2서클의 마법까지는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펼친 마법도 2서클의 마법이다. 초보적인 변신마법. 하위 디스펠 주문에도 풀릴 마법이지만, 볼레로 거리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암묵적으로 유지되는 곳이라지만, 볼레로 거리의 대부분은 법에 저촉된다. 


볼레로 거리를 드나드는 이들 중 제 정체를 감추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다. 고위마법인 폴리모프는 쉬이 쓸 수 없으니, 초보적인 변신마법들이 즐겨 사용된다. 그렇다 보니 볼레로 거리에서 변신마법을 디스펠하는 것은 엄격히 금해지고 있다.


‘그래봤자 알아 볼 놈은 알아보겠지만.’


꼭 디스펠을 해야 본질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위마법사는 하위마법을 쉽사리 간파한다. 결국 눈가리고 아웅하는 꼴인 것이다.


아예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유진은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쓰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볼레로 거리에 도착했다. 


“...생각 이상이군.”


유진은 북적거리는 인파를 보며 중얼거렸다. 관광명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사람이 꽤 많다. 암묵적인 암시장이라더니, 이쯤 되면 그냥 관광명소로 개발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출입증은 이백만 셀이오.”


“뭐요?”


“이백만 셀.”


거리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덩치가 눈을 부라린다. 놈은 자신보다 큰 가르기스에게도 위압되지 않았다. 그 정도 배짱과 실력이 없다면 거리의 문지기를 할 수 없다. 


“두 명 해서 사백만 셀.”


유진이 지갑을 열었다. 그는 네 장의 수표를 건네주고서 팔을 내밀었다. 곧 문지기가 유진과 가르기스의 팔에 종이로 된 팔찌를 달아 주었다..


“입장료가 이백 만 셀이라니. 너무 비싸군.”


“안으로 들어가는 비용만 인당 이백 만 셀. 시설마다 입장료가 따로 있어.”


“미쳤군.”


아롯의 관광명소마다 비싼 입장료가 달려있지만, 볼레로 거리의 입장료는 상상 이상이었다.


“싸구려 주점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최하 백만 셀의 입장료가 붙는다는 군. 경매장은 입장하는데만 오백만 셀을 더 내야 해.”


“유진, 너도 처음 왔다 하지 않았나?”


“나는 미리 알아보고 왔어.”


유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목의 팔찌를 내려 보았다. 이백 만 셀의 종이 팔찌. 슬쩍 당겨보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이 팔찌가 볼레로 거리에서 신분을 증명한다. 합법적인 신분증은 이곳에서 쓰이지 않는다. 팔찌와, 돈. 필요한 것은 그 둘 뿐이다.


“가자.”


“따로 볼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알아서 할 거야. 일단 경매장에 가서 틀어박혀 있자고.”


유진은 품안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마법단말기가 있다. 넓고 음습한 볼레로 거리에서 일행과 소통하기 위해 판매되는 단말기다.


[들어오셨습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이 단말기는 볼레로 거리에서만 연결됩니다. 신호가 와서 알았죠.]


단말기에서 촐싹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롯에 온 첫날 만났던 가이드다. 유진은 어제 그를 찾아가, 돈을 두둑하게 쥐어주며 밀정을 부탁했다.


간단한 일이다. 서큐버스 거리를 맴돌다가. 이오드를 발견하면 신호를 달라고 했다. 어쩌면 이오드도 변신마법을 쓰고 올 수도 있겠지만... 


‘괜한 걱정이십니다. 이오드님은 변신 마법을 쓰지 않으셔요.’


‘네?’


‘그 분은... 어... 항상 똑같은 로브를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가문의 문양은 드러내지 않지만, 잿빛 머리카락을 살짝 보이게끔 후드를 쓰시고...’


‘미친놈이네.’


은근히 정체를 드러내며 시선을 받는 걸 즐기는 모양이다. 본가에 있을 적에는 항상 주눅든 모습이었고, 마탑에서도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시선을 내리깔고 다니던 놈이... 자랑스럽지도 않은 거리에서는 제 신분을 은근히 과시하며 뻗댄다고?


‘내 아들이었으면 두들겨 패서 버릇을 고치는 건데.’


아들을 낳아 본 적은 없지만,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경매장 입장료는 네가 내라.”


“그래.”


“거인... 족의 불알. 그거 말이야, 너무 비싸면 돈 안 내 줄 거야.”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나.”


“내 입장을 생각해 봐. 가주님한테 블랙카드를 받긴 했지만, 돈을 너무 많이 쓰면 가주님이 놀라실 거 아냐.”


“그렇겠지.”


“가주님이 나한테 뭐하느라 이렇게 큰 돈을 썼냐 물어보시면... 내가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냐? 거인 불알 샀습니다, 이렇게 말해? 그 말 하느니 난 그냥 뒤질란다.”


“돈은 갚을 거다.”


“...아니 누가 그거 걱정하냐고. 난 도저히 내 입으로 거인 불알 샀다는 말은 못하겠다니까...!”


“정 걱정되면 내가 대신 말해주지.”


대체 얼마나 거인 불알을 사고 싶은 거냐. 유진은 기대에 부푼 가르기스의 눈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자리를 침범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대화도 일행끼리만 나누셔야 합니다.”


볼레로 거리의 경매장은 한둘이 아니지만, 경매장의 규칙은 똑같다. 비공개 입찰. 일행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방에 안내되고, 입찰자는 확인할 수 없다. 


인당 오백 만 셀. 지하로 이어지는 경매장의 문지기가 설명을 덧붙인다. 


“안내받은 자리에는 세 개의 버튼이 있습니다. 입찰하고 싶으시면 중앙의 버튼을, 가격을 올리고 싶으시다면 오른쪽 버튼을 눌러주십시오. 그 외에 도움이 필요할 때 왼쪽 버튼을 눌러주십시오.”


유진과 기르가스는 널따란 방으로 안내받았다. 전면에 탁한 유리창이 있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일단 자리에 앉자 가면을 쓴 직원이 물을 가져다주었다. 


“술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가르기스가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액면가로는 믿을 수 없는 일이나, 가르기스는 아직 18살이었다. 물론 볼레로 거리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이곳은 돈만 있다면 열 살짜리 꼬마도 술을 퍼마실 수 있는 곳이다. 


“너는 경매에 별 관심이 없을 줄 알았다만.”


“시간 때울 거리도 필요하고, 뭐가 나올 지도 조금 궁금하기는 해.”


유진은 의자를 뒤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전면의 유리창의 흔들린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유리창에 남자의 모습이 담긴다. 멋들어진 연미복을 입고, 가면을 쓴 남자였다. 


“여전히 아름다운 보름달 밤, 우리 경매장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저희 경매장은 헬무드의 진귀한 마법소재들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거리에는 수많은 경매장들이 있지요. 하지만 감히 자신하건데, ‘헬무드’의 마법소재라면 저희 경매장의 품질이 독보적입니다.”


“...얼핏 듣기를, 이 거리에는 노예 경매장도 있다더군.”


“설마.”


노예제는 전생부터 폐지된 낡아빠진 악법이다. 


“연금술사가 알려주었다. 노예제는 엄격히 금해져 있지만... 불법 노예는 은밀히 거래되고 있다고 해. 주로 거래되는 노예는 마족이라 하더군.”


세상이 미쳤구나.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마족이 노예가 되어 사람에게 팔린다고? 유진은 도저히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론 전생에도 불법노예들은 제법 많았다. 마왕에게 터전을 잃은 엘프. 솜씨 좋은 드워프 장인들. 켄타우로스 따위의 수인들... 헬무드와 인접한 지역일수록 노예들은 자주 보였다.


그런데 헬무드도 아닌 아롯에서. 그것도 아인(亞人)이 아닌 마족이 노예로 팔린다고? 인간한테? 


“첫 번째 물품은 발라렉스의 외뿔입니다. 천만 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경매가 시작된다. 헬무드의 마법소재를 전문적으로 다룬다더니, 그리 자부할 정도는 되었다. 


‘발라렉스 고기가 엄청 질겼는데.’


별로 좋은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유진은 기울인 의자에서 균형을 잡으며 경매를 지켜보았다. 


“프로시아의 과실.”


“만드라고의 뿌리.”


“유즈락의 꽃망울.”


“오, 이건 살아있는 튜라스 거미로군요. 이 놈의 독은...”


“거인 불알 나오긴 하는 거냐?”


죄다 진귀한 마법소재기는 하지만, 유진이 관심을 가질 것은 아니었다. 옆을 돌아보니 가르기스는 반쯤 졸고 있었다.


“나올... 나올 거다. 나온다고 들었다.”


“확실해?”


“소문은 그랬다.”


“안 나왔으면 좋겠네, 괜히 돈 쓰기 싫으니까.”


유진은 투덜거리며 물을 들이켰다.


“이번 물품은...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금속물입니다. 꽤 오랫동안 팔리지 않은 골칫거리죠. 저희 경매장은 이 금속의 가치를 꿰뚫어보지 못했지만, 오늘 방문해주신 손님들 중에서는 이 금속의 가치를 꿰뚫어 보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이전과는 달리 말이 길다.


“이 금속은 헬무드의 카자드 구릉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달빛을 받으면 굉장히 아름다운 빛을 냅니다만... 솔직히 그 외의 가치는 없습니다. 가공이 불가능할 만큼 단단하지만, 마나를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은 물건이라고 했다. 그래서 설명이 긴 것이다. 다른 물품은 이름이 나온 순간 즉시 입찰가가 올라가니 저렇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침실을 창가에 두신 분이라면 장식품으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듯 합니다. 달빛 아래 발하는 빛이 아름답기는 하니까요...”


이곳에 온 손님들은 저딴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아니다. 마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가공도 불가능한 단단한 금속을 어디다 쓰겠는가.


하지만 유진은 그 금속을 홀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금속. 


파편.


“...시작은 백만 셀부터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나온 물건들은 기본이 천만 셀. 저 금속은 파격적으로 낮은 가격이었다.


유진은 즉시 버튼을 눌렀다.


“유진?”


가르기스가 놀란 눈으로 유진을 돌아본다.


[어... 입찰하시겠습니까?]


“백만 셀.”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저 금속이 뭔지 안다. 


탁색(濁色)의 칼날. 


검의 형상을 한 파멸.


성검에게 활약을 빼앗긴 검. 


역사에 남지 않은 검.  


월광검.


볼레로 거리


“왜 저런 쓸데없는 것을 구매한 것이냐?”


가르기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오랫동안 낙찰되지 않은 정체모를 금속. 마법에 문외한인 가르기스가 보기에도 저 금속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였다. 


고작해야 손가락 하나 정도의 작은 크기인데다, 가공은커녕 마나도 받아들이지 않는단다. 이 경매장에 나오는 물건들 중에서 가장 적은 값으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가르기스가 보기에 저 금속에 백만 셀이란 가치는 없어 보였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했다. 


베르무트는 수많은 무기를 다루었고, 놈이 다루는 무기들 중에서는 세상을 뒤집을 만한 강력한 보물이 많았다. 


당장 유진이 보유하고 있는 폭풍검 위니드. 포식검 아스펠. 용격창 카르보스. 뇌광궁 페르노아. 비환검 자벨. 게돈의 방패 등. 


가장 유명한 것은 성검. 그다지 애용되지는 않았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베르무트를 상징하는 무기다. 


그 외에. 


참혹의 마왕이 사용하던 마창 루인토스. 


살육의 마왕이 사용하던 분쇄추 지골라스. 


그 여러 무기들은 성검만큼은 아니어도 기록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월광검’에 관한 기록은 일절 남아있지 않았다.


유진이 기억하기를, 루인토스의 맹격을 정면에서 도륙내며 참혹의 마왕을 침몰시킨 것은 월광검이었다. 하지만 동화책이나 여러 기록에서는 성검이 참혹의 마왕을 쓰러트렸다고 나온다. 


참혹의 마왕 뿐만이 아니다. 300년 전의 헬무드는 마왕 외에도 여정을 괴롭게 만드는 강적들이 많았다. 마왕이 되지 못한 고위마족들. 뱀파이어 로드. 거인족의 두령 등. 그러한 강적과의 충돌에서 길을 연 것은 찬란한 성검의 빛이 아니었다. 


파괴로 선두를 찢어발긴 것은 끔찍한 달빛이었다.


‘그 월광검의 파편.’


멀쩡한 검이 아니다.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몰라도, 산산조각 나버린 파편이다. 어쩌면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전생의 기억이 아무리 뚜렷한들, 작은 파편 하나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조금 지난 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물건이 그리 큰 것도 아니라, 입찰하고서 바로 가져다 준 것이다. 유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맞네.’


유진은 건네받은 파편을 내려 보았다. 이 독특한 탁색은 기억 그대로였다. 이건 월광검의 파편이 틀림없다. 대체 어떻게 월광검의 파편이 경매장까지 흘러들어온 것일까. 


‘카자드 구릉지...’


확신을 더한 것은, 이 파편이 발견되었다는 장소. 카자드 구릉지는 살육의 마왕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다. 본래는 평원이었는데, 마왕성에서 벌어진 격전의 여파로 지면이 통째로 주저앉아 구릉지가 되었다.


살육의 마왕을 쓰러트린 후, 마왕성을 떠나던 중. 


깊은 지하에 숨겨진 던전을 발견했다. 마족들이 숨어있는 것인가 싶어 던전을 탐색했고, 그 최심부에서 월광검을 발견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베르무트가 헬무드를 떠나는 중에, 월광검을 있던 장소에 다시 가져가 봉인했다는 것.’


왜 월광검이 박살나 파편이 되어버렸는가. 만약 베르무트가 월광검을 다시 봉인한 것이라면, 파편이 되어버린 이유도 상상이 간다.


월광검은 너무 위험하다. 마왕이 애용하던 마창과 분쇄추도 위험하기는 했지만, 월광검은 그 도가 지나치다. 


그 불길한 검은 베르무트 외의 그 누구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칼집에서 뽑힐 때에는 항상 끔찍한 파괴를 일으켰다. 베르무트는 그 끔찍하고 위험한 검을 봉인하는 것만으로 안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잠잠하군.’


월광검의 파편은 침묵하고 있다. 아무런 불길함도 내뿜지 않는다. 하긴, 300년 전처럼 끔찍한 힘을 품고 있었다면 이따위 경매에 출품되지도, 낙찰받지 못해 방치되지도 않았겠지. 


유진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월광검의 파편을 목함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아무런 힘도 갖지 않은 파편.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어쩌면 힘의 편린이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평범한 쇳조각일 뿐이라도 크게 아쉽지는 않다. 이 껄끄러운 것을 수중에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놓인다. 


[유진님.]


단말기가 진동한다.


[이오드님이 오셨습니다.]


가이드의 목소리. 유진은 목함을 품에 넣고서 일어섰다.


“난 간다.”


“음? 더 보지 않을 건가?”


“안 봐. 일단 카드는 두고 갈 테니까, 입찰액은 이따가 준다고 말 해.”


블랙카드는 인증 없이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블랙카드는 워낙 고명한 것이라, 입찰액을 조금 뒤에 지불한다는 것쯤은 가능할 것이다.


안 된다고 하면?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불알 값으로 거금이 나가지 않게 될 테니 기쁜 일이다.


왼쪽 버튼을 눌러 사람을 부르고, 경매장 밖으로 나왔다. 그새 시간이 꽤 흐른 것인지 밤이 깊어 공기가 차다. 하지만 사방은 여전히 밝았다. 이 거리는 동이 틀 때까지 조명이 꺼지지 않는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 거리의 북쪽으로 오시다 보면 ‘라플레시아’라는 가게를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유진의 걸음이 떨어졌다.


[그런데 대체 어쩌실 셈입니까? 이런 종류의 가게는 손님의 보안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데...]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겠다, 그런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향하기로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일단 한 번 가서 이오드의 낯짝을 보고 싶었다. 본가의 장남이란 놈이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들켰을 때,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수치심에 화를 낼까. 아니면 화도 내지 않고 입을 닥치고 있을까. 변명할까? 잘 모르겠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을 잡고서 뺨을 갈기고 싶다. 


‘...나름 불쌍한 처지니까.’


뺨까지는 갈기지 않더라도, 무슨 생각인 것인지는 들어봐야겠다. 


북쪽으로 향할수록 가게의 분위기가 바뀐다. 어둠을 밝힐 뿐인 조명들이 붉게 바뀌어 가고, 호객꾼들의 복장도 선정적으로 바뀐다. 잘생긴 남자가 오가는 여인을 유혹하고, 아름다운 미녀가 남자들에게 미소를 던진다.


‘인큐버스, 서큐버스. 뱀파이어까지 있군. 수인도 있고.’


꼭 마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과 짐승이 섞인 수인들도 적잖게 보이고, 인간도 있었다. 유진은 그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가게의 이름만 살폈다. 


라플레시아.


거리를 제법 지난 끝에, 그 가게를 발견했다. 생각한 것보다 외관은 그럴 듯 했다.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가게의 입구로 다가갔다. 


“손님이십니까?”


가게 주변을 서성거리던 덩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 앞을 가로막는다. 다섯. 유진은 중앙에 선 남자를 응시했다. 창백한 피부에 시뻘건 눈. 뾰족한 귀... 자그마한 뿔.


마족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몽마도 마족의 한 종류고, 300년 전부터는 거인족도 마족에 포함되었다. 타락한 다크엘프나 뱀파이어들도 마족에 속한다. 마족은 어느 한 종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마왕의 지배를 받는 종족을 통트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뿔이 난 종족은, 마족 중에서도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데몬’의 상징이다. 사실 데몬이야말로 마족의 정통이라 할 수 있다. 300년 전에 존재하던 다섯 마왕 모두가 데몬이었다. 


“...안에 들어가고 싶은데.”


유진은 젊은 데몬을 노려보며 말했다. 환생한 후로 마족, 그것도 데몬과 이렇게 맞닥트리는 것은 처음이다. 전생이었으면 시선이 마주치기도 전에 죽여 버렸을 텐데, 유진은 살의를 일절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저희 가게는 처음이십니까?”


“왜. 처음이면 못 들어가나?”


“그건 아닙니다. 입장료만 내신다면 얼마든지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얼마지?”


“기본 입장료는 이백만 셀. 바라시는 꿈의 내용과 시간에 따라서 비용이 측정됩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데몬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지갑을 꺼내, 두 장의 수표를 건넸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데몬은 입장료를 받은 즉시 문에서 비켜주었다. 유진은 놈의 말을 무시하고 가게의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조명. 


당장 보이는 것은 왁자지껄한 술판이었다. 1층 전체가 주점으로 쓰이는 모양이다. 선정적인 옷을 입고서 술을 나르고, 교태를 부리는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도 보인다. 유진은 잠깐 멈춰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아름다운 서큐버스가 다가와 팔짱을 껴온다. 유진은 그녀를 무시하고서 시선을 들었다. 3층까지는 주점. 꿈을 즐길 침실은 보이지 않는다. 


‘지하로군.’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이 손님을 데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이오드는 어디에 있지? 술판을 벌이고 있나, 아니면 방에서 꿈을 꾸고 있나? 냄새. 곁에 찰싹 붙은 서큐버스에게서는 향수 냄새가 지독했다.


“...꿈은 여기서 꾸나?”


“급한가 봐?”


처음에는 말을 높인 주제에, 서큐버스는 자연스레 말을 놓으며 유진에게 눈웃음을 쳤다. 


“귀여운 손님. 우리 가게는 처음이지? 일단 술부터 마시는 것이 어때?”


서큐버스의 웃음이 짙어진다. 그녀는 은근히 유진의 팔에 몸을 기울이면서 소곤거렸다.


“술을 마시면 말이야, 몸이 노곤해져서 더 깊은 꿈을 꿀 수 있거든.”


“나는 침대 아니면 잠 못 자.”


“걱정하지 마, 적당히 마시면 내가 지하로 안내해 줄게. 그보다 손님, 어떤 꿈을 꾸고 싶어?”


서큐버스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녀는 익숙히 유진을 이끌며 빈 자리로 안내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알려줘. 정확하고 자세히 말해야 즐거운 꿈을 꾸게 해줄 수 있단 말이야.”


그 말로 유진은 가게 서큐버스들의 수준을 파악했다. 고위 몽마는 이쪽의 의사와 상관없이 쓰러져 잠들게 만들고, 무의식에서 바라는 꿈을 만들어낸다. 잠드는 것에 술기운을 필요로 하고, 꿈의 내용까지 설명해 달라 말하는 것은 저급한 몽마란 뜻이다.


“...아직은 말 못하겠는데.”


“그럼 술을 마셔야지. 걱정 마, 독하고 맛있게 말아 줄 테니까. 몇 잔 마시다보면 부끄럼 없이 욕망을 말할 수 있을 거야.”


함께 자리에 앉았던 서큐버스가 몸을 일으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큐버스가 두 개의 술잔을 들고 왔다. 


“이 누나도 마셔도 되지?”


누구 마음대로 누나야.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술잔을 들었다. 이 몸으로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인데, 술도 잘 마시려나? 잔병치레 없이 피로도 잘 느끼지 않는 잘난 몸뚱이가 술이 약할 리가 없지.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이거 약까지 탔잖아.’


술 냄새에 은근히 섞인 달짝한 냄새. 헬무드에서만 자생하는 환각초의 냄새다. 서큐버스의 질이 떨어지니, 이딴 환각초까지 동원하는 모양이다. 


‘하긴. 고위 서큐버스가 이딴 거리에서 꿈을 팔 리가 없지.’


냄새를 보건데 그리 강한 약은 아니다. 유진은 몸의 내성을 시험해 볼 겸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이 찌르르 울린다. 환생하고 처음 마신 술맛은 제법 괜찮았다. 다만, 장소가 좆같아서 뒷맛이 구렸다. 


“잘 마시네에.”


서큐버스가 히히덕거린다. 유진은 한 모금 마신 술을 일단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살폈다. 뱃속을 후끈 데운 열기가 머리로 밀려와 의식을 흔들려 든다. 


‘내성도 타고났군.’


남은 술을 마저 마셔본다. 그러면서 가게의 안을 살핀다.


‘내려가는 놈은 있는데 올라오는 놈은 없어.’


유진은 빈 술잔을 내려놓았다.


“내려가지.”


“응?”


“술이 맛없어.”


“아하... 여기서 말하기는 부끄럽구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단 침실로 갈까?”


서큐버스는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몇 잔 더 마시게 해서 술값을 더하려 했는데. 그래도 손님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 서큐버스는 유진과 함께 일어나서 지하로 향했다. 


“좀 무섭네.”


“뭐어?”


“나 이런 거 처음이거든.”


“걱정 안 해도 돼. 정기를 가져가기는 하지만, 그냥 다음 날 조금 피곤할 뿐이야.”


“정기를 가져가면서 돈도 받는 거냐?”


“그건...”


“정기를 받았으면 돈은 안 받아야 하는 것 아냐?”


“아니... 어... 대신 좋은 꿈을 꾸게 해주잖아.”


“생각해 보니 억울해서 안 되겠어. 꿈이야 나 혼자 잘 때도 꿀 수 있는 건데, 왜 정기에 돈까지 얹어 내야 돼?”


유진은 침실로 들어가지 않고 지하 복도의 형태만 확인했다. 그는 서큐버스의 손을 뿌리치며 지갑을 꺼냈다.


“잠은 그냥 내 침대에서 잘 테니까, 술값만 내고 간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럴 수도 있지. 무섭기도 하고 억울한데 어쩌겠어?”


지갑에서 백만 셀의 수표를 꺼내 서큐버스에게 건넸다. 서큐버스는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주는 돈은 받았다. 


“거스름돈은 안 줘도 돼.”


“어... 어어, 그래.”


병신인가? 아니면 호구인가? 어느 쪽이든 서큐버스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백만 셀이면 싸구려 술 두 잔보다 비싼 값이다. 


“잘 가... 다음에... 마음의 준비가 되면 다시 와. 그때도 내가 상대해 줄게. 내 이름은...”


“안 알려줘도 돼. 어디로 나가?”


“...안내해 줄게.”


복도의 끝에 있는 방. 내부는 창고처럼 보였지만, 위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유진은 서큐버스를 두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즐거운 꿈 꾸셨습니까?”


위는 식당이었다. 술도 마시고, 꿈에서 정기도 빨렸으니 식당에서 밥이나 먹고 가라는 뜻인 모양이다. 유진은 아직 들고 있던 지갑을 펼쳐, 남자에게 돈을 건넸다.


“요금은 이미 지불하셨...”


“조용한 구석자리.”


“아...”


“음식은 뭐가 맛있지?”


어린 놈의 새끼가 왜 반말이야.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남자는 벙긋 웃으면서 공손히 돈을 받았다.


“이 식당의 명물은 마그마 스튜입니다. 얼큰한 맛이 속을 뻥 뚫어주죠. 고기도 듬뿍 들어갔고요.”


“고기 추가해서.”


“예.”


이름 모를 식당은 라플레시아의 1층과 마찬가지로 시끌벅적했다. 꿈꾸고 나온 손님들 외에도 일반 손님도 받기 때문이다. 암시장이라고 해서 불법적인 가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도 식당은 있어야 한다. 


유진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런 행색을 한 손님은 한둘이 아니었다. 덕분에 유진은 다른 이의 눈에 띄는 일없이, 묵묵히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지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꽤 되었지만, 이오드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만큼 유진은 몇 개의 요리를 추가로 주문했다. 음식들은 꽤 먹을 만 했다.


‘새끼.’


네 번째 요리를 말끔히 비웠을 때. 


이오드가 계단에서 올라왔다. 후드를 뒤집어 써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유진은 이오드의 체격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맷자락 아래로 드러난 손. 굳은살 빠진 손은 틀림없이 이오드의 손이었다. 술을 얼마나 퍼마신 것인지 걸음도 비틀거린다. 그것만으로도 왈칵 짜증이 솟는데, 


이오드는 혼자 올라오지 않았다. 지하에서 따라 온 몇 놈이 이오드를 부축하고 있다. 서큐버스가 아닌, 머리에 뿔을 단 데몬이었다. 남자 둘, 여자 하나. 그 모습에 유진의 가슴속에 화끈 열이 올랐다. 


‘몽마랑 놀아났을 뿐만 아니라 데몬의 부축을 받아?’


이오드가 올라오자마자 식당에 앉아있던 두 놈이 몸을 일으킨다. 놈들은 자연스럽게 계산을 치르고서 식당 밖으로 나갔는데, 그러며 데몬들과 시선을 나누었다. 


후드에 덮인 머리가 까딱거린다. 이오드와 데몬들이 밖으로 나간다. 유진은 그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꽤 흐른 덕에 거리의 사람들이 줄었다. 유진은 이오드와 정체모를 일행들이 가는 방향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곧장 보이는 건물을 빙 둘러서 이오드의 뒤를 쫒았다.


‘어디 가는 거야?’


몇 블록을 지났다. 이오드는 여전히 부축을 받고서, 웬 건물의 안으로 들어갔다. 간판은 없다. 유진은 놈들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서 건물로 가까이 갔다. 


닫힌 문을 밀치려는 순간.


“어이 꼬마. 집을 잘못 찾아왔어.”


건물 옆의 골목에서 덩치 큰 남자 세 명이 걸어 나왔다. 놈들은 험악한 얼굴을 구기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여긴 가게 아니니까, 꺼져.”


“그럼 뭐하는 곳인데?”


“꺼지라니까?”


“우리 친구가 초면에 말이 참 짧네.”


“꺼지라고 씨발아.”


“여기서 얘기하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할까?”


“이 새끼가 미쳤나. 어른 말이 우습냐?”


성큼성큼 다가 온 놈이 유진의 멱살을 틀어쥔다.


“우습긴 해.”


“너 이리 와.” 


남자는 유진에게서 술 냄새를 맡았다. 그는 유진을 골목으로 끌고 가면서 내뱉었다. 


“술에 취했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처잘 것이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고 있어.”


적당히 두들겨 패고, 용돈도 좀 벌고서 쫒아내야겠다.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나누었다. 유진은 그 뻔한 속내를 짐작하며, 순순히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주었다. 


“일단 지갑부터 꺼내...”


주변 시선 없는 골목까지 들어왔으니,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멱살을 쥔 팔을 누르고, 살짝 기울어진 남자의 턱을 주먹으로 갈겼다. 뱉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의식이 끊어졌다.


“이 미친 새끼가!”


남은 두 명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유진에게 덤벼들었다. 


“친구들.”


두 명은 주먹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유진은 그들을 발로 툭툭 차며 말을 이었다. 


“이제 말 좀 해 봐. 여기 뭐하는 곳이야?”


“모... 몰라.”


“모르면 됐어.”


퍼억! 유진은 남자의 턱을 걷어 차주고서 몸을 돌렸다.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빠르고 편하니까.”


볼레로 거리


척 봐도 수상한 놈들과 함께 가서, 간판도 없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것만으로도 수상한데, 덩치 크고 험상궂은 놈들이 윽박을 질러댄다.


구린 장소다.


유진은 문고리를 잡았다. 몇 번 돌려보지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물리적인 잠금장치에 마법까지. 부술 수 있나? 유진은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았다.


심장의 별이 빛을 발한다. 유진은 문고리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을 확인했다.


마법에 입문한 것에 보람을 느꼈다. 예전이었다면 그냥 힘으로 밀어붙였을 텐데, 이제는 마법을 구성하는 마나의 형태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방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전만큼 많은 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뿐. 결과적으로는 힘으로 부수는 것이다. 유진의 마법 경지가 보다 높았다면 모를까, 지금의 유진으로서는 잠금마법을 마법으로 해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체화 된 마나가 유진의 손을 덮는다. 그 마나를 잠금마법에 처박는다. 마나의 형태를 봐둔 덕에 힘을 처박는 것도 간단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식으로 마법을 부수려면 마나를 손발 이상으로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어지간한 경지의 고수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유진은 그를 쉽사리 해냈다.


콰직.


방법은 덜 무식했지만, 결과는 무식했다. 힘으로 비튼 문고리가 완전히 박살난다. 유진은 잠금마법이 깨진 것을 확인하고 발을 들었다.


쾅.


발로 걷어차는 것으로 잠금장치를 부숴버린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경계가 없지는 않았다. 유진은 허리에 매단 위니드에 손을 얹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못해 과한 경계였다. 무기가 손에 닿은 이상, 어떤 상황에서도 뽑아 휘두를 수 있다. 유진은 그를 확신했다.


“...허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뿌연 연기가 가득하다. 목젖에 끈적거리며 달라붙고, 고소하면서 단 연기의 맛. 감각이 저리고, 시야가 어지럽다. 백염식의 마나가 전신에 퍼진다. 가벼운 어지럼증이 즉시 떨어져 나간다.


“너구리굴이었군.”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닫힌 방들에서 야릇한 소리들이 새어나온다. 이런 거리에서는 있을 법한 곳이다만, 서큐버스의 꿈을 꾸자마자 바로 이런 곳에 오다니. 유진의 두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숨 돌릴 곳은 필요하다지만, 이건 아니지.”


이런 곳에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이다. 서큐버스의 꿈만 하더라도 정신을 썩어문드러지게 하는데, 너구리굴에서 마약까지 빨아대면 의미 그대로 뇌에 구멍이 날 것이다. 유진은 가로막는 연기를 치워가며 앞으로 향했다.


“너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문 막아!”


구석 진 곳에서 마약을 빨아대던 남자들이 몸을 일으킨다. 인간에 수인, 마족. 이 너구리 굴은 종족 대화합의 장이었다. 유진은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놈들을 향해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너희가 300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세상이 사랑과 평화로 손에 손을 잡을 수 있었을 거다.”


“이 새끼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다고, 후레자식들아.”


유진은 위니드를 뽑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달려들지도 않았다. 심장의 별이 움직인다. ㅡ파바박! 순식간에 만들어진 매직미사일이 연기를 꿰뚫는다.


약에 취한 상태기는 했어도, 침입자를 물리치려 나선 이들은 본인들의 실력에 제법 자신이 있었다.


매직미사일은 1서클의 공격 마법이다.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다. 그 따위 마법은 코웃음을 치며 피할 수 있다.


그래야 하는데, 피하지 못했다. 곧장 반응해 피하려고 했는데, 어지럽게 움직이는 탄환의 궤적이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뻔하지.’


저딴 놈들의 회피동작을 읽어내지 못할 리가 없다. 솔직히 눈감고 쏴도 죄다 맞출 자신이 있었다.


“이오드 어딨냐?”


“끄으으...”


“말 안 해도 돼. 내가 찾으면 되니까.”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위니드를 쥐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은청색의 칼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널브러진 남자들이 그 모습에 숨을 삼킨다.


죽는다. 유진은 노골적인 살기를 내뿜지 않았으나, 약자의 본능은 거스를 수 없는 미래를 직감했다. 그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유진은 검을 휘두르지 않고, 천장을 향해 들어올렸다. ㅡ화아악! 맹렬한 바람이 위니드를 휘감는다.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 허나 유진이 불러들인 실프는 도저히 하급 정령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매서운 바람을 일으켰다.


백염식 3성. 지금의 마나로는 중급 정령까지 불러들일 수 있지만, 유진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중급 정령 하나 부르는 것으로 마나가 쭉 빨리느니, 마나를 적게 먹는 실프의 숫자를 늘리고 지배를 강하게 주는 편이 압도적으로 낫다고 판단했다. 정령의 힘에 무조건적으로 의존하기에는 유진이 가진 재주가 너무 뛰어났다.


“으아아아...”


널브러진 이들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그는 거대한 바람의 중심에서 위니드를 치켜들고 있었다. ㅡ콰르르르! 바람이 움직인다. 사방으로 뿜어진 바람이 연기를 흩트리고, 굳게 닫힌 방문과 벽을 박살났다.


“뭐, 뭐야?!”


닫힌 방 안의 약쟁이들이 비명을 지른다. 유진은 그들을 한 번 쓱 돌아보았다. 흐트러지고 난잡한, 보기 싫은 광경들. 이오드는 그곳에 없었다.


직접 찾으러 갈 필요는 없었다. 바람과 함께 흩어진 실프들이 건물 전체를 누빈다. 위층. 유진은 끓는 짜증대로 행동했다. 꽈앙! 하나로 뭉친 매직미사일이 천장을 부수고, 바람이 유진의 몸을 띄웠다.


3층.


유진은 연기와 먼지로 뿌연 복도에 도착했다. 뒤따른 실프들이 윙윙거리며 바람을 만든다. 그렇게 연기를 흩트리고, 유진은 성큼성큼 복도로 나아갔다.


이곳의 방은 끝에 하나 뿐. 이오드는 그곳에 있다. 닫힌 문을 똑바로 보고 나아가다가, 유진의 걸음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사악.


섬뜩한 소리가 머리 옆을 스친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바람을 움직였다. ㅡ뻐엉! 한곳에 뭉친 바람이 포탄처럼 터진다. 천장에서 떨어지며 기습해 온 놈이 벽에 처박혀 피를 토했다. 식당에서 이오드를 기다리던 두 놈 중 하나였다.


“노릴 거면 제대로 뒤를 노려야지, 건방진 새끼야.”


유진은 놈을 향해 혀를 차며 왼손을 품속에 넣었다.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시커먼 공격마법이 문을 관통하고서 유진을 덮친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품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대충 집어 던진 것은 경매장에서 고급스런 목함. 경매장에서 낙찰 받은 월광검의 파편.


콰아아아!


마법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벽면을 휩쓴다. 저 파편은 부서지지도, 마나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성능 확실하구만.”


유진은 바닥에 툭 떨어진 파편을 잡아들며 내뱉었다. 검의 모습은 전혀 남지 않았으나, 월광검의 특징은 이 자그마한 파편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방금 그거, 맞으면 죽을 위력이었어.”


유진은 앞을 힐긋 보며 말을 이었다. 박살난 문의 너머에 검은 로브를 입은 놈이 서있다. 옷차림도 노골적이지만, 놈이 쏴댄 마법은 틀림없는 흑마법이었다.


“넌 누구냐?”


마법을 쏘았던 흑마법사는 놀란 가슴을 추스렸다. 작정하고 쏘아낸 마법인데, 뭔지 모를 방법에 막혀 버렸다. 방금 그건 마법인가? 저런 방어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왜 이런 소란을 일으키는 거지?”


일방적으로 습격한 것은 유진이기는 했다. 문지기를 두들겨 패고, 문을 박살내고 들어와서, 1층부터 3층까지 천장을 박살내고 올라왔다. 저들로서는 억울해 할 법도 했다.


하지만 유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 사정을 설명하지도,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다. 서큐버스의 꿈을 통해 현실을 도피하는 것, 한심하지만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마약은 도가 지나쳤다. 게다가 흑마법을 쏴대는 빌어먹을 새끼들과 어울리고 있잖은가.


‘흑마법과는 관여하지 말거라.’


그에 관해서는 길레이드가 엄중히 경고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친아들이란 놈이. 베르무트의 적통이라는 놈이.


“비켜.”


유진은 월광검의 파편을 품에 넣으며 내뱉었다.


“지금 도망치면 안 잡을게.”


“건방진 꼬마 같으니...!”


“네가 지금 어디서, 누구의 앞에서 날뛰는 것인지 아느냐?”


“이오드 라이언하트 앞에서 날뛰고 있지.”


더더욱 한심하고 열이 받는 건.


이 소란이 나고 있는데 이오드는 목소리는커녕 고개조차 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놈은 술과 약에 취해서, 큼직한 침대에 파묻혀 실실 웃고 있었다.


“그 잘난 도련님은 상황파악도 못하고 있지만 말이야.”


“죽여!”


흑마법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오드의 근처에 있던 마족들이 움직인다. 식당에서부터 이오드를 부축해 온 놈들이다. 직접 몸을 날린 데몬은 셋.


‘다 있네.’


이오드와 함께 이 너구리굴에 온 다섯 명. 그 중 하나는 벽에 처박아놨고, 한 놈은 저 앞에서 주문을 읊어대고 있다.


화륵.


심장의 별이 공명한다. 새하얀 불꽃이 유진의 전신을 휘감는다.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에 맞춰 불꽃이 흩날린다. 유진은 상체를 낮추고 위니드를 뒤로 뺐다.


백색 갈기의 사자가 발톱을 감춘다. 먼저 달려들 필요는 없다. 데몬들이 간격에 들어왔을 때, 위니드가 움직였다. 푸확! 사자의 발톱이 전면을 찢는다.


“끄아아악!”


서둘러 덤볐던 데몬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진다. 그제야 유진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검신을 휘감은 바람이 폭사한다. 질겁하며 행동을 늦추던 데몬의 몸뚱이가 바람에 난자되었다.


“헉!”


바로 뒤에 있던 데몬이 그 광경에 기겁하고 물러선다. 하지만 물러서는 것보다 유진이 파고드는 것이 훨씬 빨랐다. 데몬은 손톱을 칼날로 바꾸어 급히 휘둘렀지만,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에 손목이 썩둑 잘려버렸다.


아픈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확하고 다가온 유진의 손이 데몬의 얼굴을 감쌌다. ㅡ꽈직! 유진은 그대로 데몬을 땅에 처박아버렸다.


“미, 미친.”


흑마법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유진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전신을 뒤덮은 백색의 불꽃이 흑마법사를 경악시켰다. 저 흩어지는 불씨, 사자의 갈기. 드넓은 세상에서 저만큼 독특한 현상을 일으키는 마나수련법은 하나 뿐이다.


라이언하트 본가의 백염식.


“유, 유진 라이언하트... 님이십니까?”


흑마법사는 더 이상 주문을 잇지 못했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뒷걸음질 치고, 지팡이마저 아래로 내려놓았다. 유진은 손에 묻은 피를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비켜.”


그 순간, 흑마법사는 저항해야 할지, 얌전히 당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어느 쪽이든 최악의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 차라리. 흑마법사의 눈이 살의를 담는다. 그는 내렸던 지팡이를 슬며시 움직였다.


“...자, 잠시만... 사정을 설명...”


그렇게 말을 뱉으며, 조금이라도 좋을 시간을 끌려 했다. 하지만 유진은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비키라고 했고, 비키지 않았다. 그것으로 유진이 할 일은 결정되었다.


유진은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서 흑마법사에게 손을 뻗었다. 제대로 된 마법을 펼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흑마법사는 막무가내로 마나를 터트렸다. 마법에 걸맞는 신비도 위력도 없지만, 무작정 터트린 마나는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방해라 느끼지 않았다. 검신이 바람에 뒤덮인다. 그것에 검기를 더했다. 빚어내지 못한 마나는 유진의 참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런 미친...!’


이렇게 쉽게 베어질 것이라고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제 겨우 17살의 애송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죽는...’


그렇게 직감했지만.


유진의 검은 흑마법사의 목젖 앞에서 멈추었다. 흑마법사는 혹여 목이 베일까 침도 삼키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가만히 있어.”


유진은 그렇게 내뱉고서 흑마법사를 지나쳤다. 이오드는 아직도 술과 약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이오드에게 다가가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대 옆을 보았다.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살덩어리.


“만약 저 안에 있는게.”


유진은 살덩이를 가리켰다.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니다. 저건 의식에 쓰이는 ‘잔’이다.


“사람의 심장이라면. 넌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발가락부터 잘려나갈 줄 알아.”


“아, 아닙니다.”


흑마법사는 즉시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저 안에 있는 건 사람의 심장이 아닙니다. 모, 몬스터의 심장입니다.”


“어떤 몬스터?”


“유니콘의...”


유진은 더 듣지 않고 직접 그릇의 안을 확인했다. 과연, 사람의 것치고는 너무 크고, 약간 푸른 빛이 감도는 심장이 보였다. 유니콘은 신수(神獸)라 불리는 만큼 강한 마나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


‘제물’로 쓴다면, 인간의 심장보다는 유니콘의 심장이 가치가 훨씬 높다.


“...마왕이냐?”


“어찌 감히... 저, 저따위가 마왕님들과의 계약을 주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누군데.”


“...헬무드의... 올페르 남작님이십니다...”


흑마법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모르는 이름이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흑마법사를 돌아보았다.


“그 새끼가 누군데?”


“제벨라 공작님 휘하의 인큐버스십니다.”


“제벨라 공작? 누아르 제벨라 말하는 거냐?”


“예...”


누아르 제벨라. 몽마의 여왕.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빌어먹을 서큐버스가 300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먼 옛날의 헬무드는 국가랄 것도 없이 다섯 마왕의 지배를 받는 지옥일 뿐이었지만, 지금의 헬무드는 유폐와 멸망이 함께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다.


마왕과 나란히 설 수는 아니지만, 몽마의 정점에 선 여왕이라면 공작이라 불릴 정도는 된다.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새끼가... 누아르 제벨라의 휘하, 남작 밖에 안 되는 인큐버스와 계약을 맺으려 했다... 이 말이지?”


“유, 유진님.”


“유니콘의 심장까지 바쳐가면서, 약과 술에 정신이 나간 채로, 고작 인큐버스 남작과.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이오드님의 바람이셨습니다...!”


흑마법사는 땅에 머리를 처박으며 급히 말했다.


“저는 이오드님의 부탁을 들어드린 것뿐입니다. 유니콘의 심장을 구매할 대금도 이오드님이 주신 겁니다. 저, 저는 이오드님의 부탁... 며,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거절 못하겠지. 얼마나 기뻤겠어? 저 등신, 라이언하트 본가의 장남이. 네게 돈까지 줘가며 네 주인과의 계약을 주선해달라고 한 것 아냐. 만약 성사되었다면 너는 그 시발 올페르란 새끼한테 힘을 듬뿍 받았을 거고.”


“...”


“아니, 힘만 줄 리가 없지. 만약 계약이 성사되었다면 누아르 그 빌어먹을 년이 너와 계약해줬을 거야.”


그 라이언하트의, 베르무트의 적통과 계약을 맺는 것이다.


“너도 욕심 부려 계약을 주선한 거잖아. 그러니까 남 탓하지 말고 입 닥치고 있어, 뒈지기 싫으면.”


흑마법사는 더 이상 변명하지 못했다. 섣불리 입을 열기에는 유진이 내뿜는 살기가 너무나 흉포하고 두려웠다. 유진은 흑마법사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이오드를 보았다. 게게 풀린 눈동자. 침을 질질 흘리는 아가리.


일단 진정하자.


유진은 크게 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이오드의 얼굴을 보았다. 


“이 개새끼야.”


진정할 수 없었다.


유진은 험악한 욕설을 뱉으며 이오드의 뺨을 후려쳤다.


이오드 라이언하트(여기부터 유료화입니다)


ㅡ쩌억!


따귀를 갈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끔찍한 소리와 함께 침대가 요동친다. 감정을 듬뿍 실은 따귀는 술과 약에 찌든 정신을 퍼뜩 깨워주었다.


“어억!”


이오드가 비명을 지른다. 정신은 깨어났지만 상황파악은 되지 않았다. 일단 아픈 뺨을 감싸 쥐며 고개를 드는데, 유진은 이오드의 손을 옆으로 밀쳤다.


“정신이 좀 들어?”


그렇게 물어보면서 다시 따귀를 때렸다. 때린다기 보다는 처박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침대가 폭삭 주저앉고, 이오드의 다리가 위로 들썩였다.


“아악!”


“형님아.”


한 대 더 때리려고 손을 드는데, 이오드가 양팔을 휘젓는다. 고작 따귀 두 번 때린 것뿐인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뺨 안쪽은 찢어져 피범벅이 되었고, 이빨도 박살났으니 아픈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울어? 19살이나 먹은 놈이, 평범한 가정도 아니고 라이언하트 본가의 장남이, 그 베르무트의 후손이! 뺨 두 대 처맞았다고 울어? 이오드의 눈물은 유진의 분노를 식히지 못했다. 오히려 질질 짜대는 모습이 더 화를 북돋았다.


“뭘 잘했다고 우냐?”


“누... 누구십니까. 왜 저를... 여, 여기는?”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정말로 못 알아보는 거야? 그럴 수 있어, 술 퍼마시고 약까지 했잖아. 그 정도면 부모님도 못 알아 봐.”


유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손을 뻗었다. 이오드는 움찔 떨며 몸을 웅크렸다. 피투성이가 된 이불을 끌어다가 머리를 덮는 모습이 어이없고 한심했다.


“...그러니까 일단 정신부터 차리게 해줄게. 고개 돌려 봐.”


“누구... 누구십니까?”


“진짜 심각하네. 아직도 못 알아보는 거야? 어쩔 수 없지, 더 맞아야 돼. 덜 아파서 정신 못 차리는 거야. 몇 대 더 맞으면 싫어도 정신이 들걸.”


“그, 그만. 때리지 말...”


“일단 이불부터 치워 봐. 막지 말고. 괜히 막았다가 잘못 때리면 큰일 나.”


말만 그렇게 했다. 유진은 이오드가 알아서 손을 치우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직접 이불을 끌어내리고, 머리를 감싼 손을 걷어냈다.


따귀를 맞은 한쪽 뺨이 퉁퉁 부었고, 터진 입술에서는 피가 흐른다. 유진은 이오드의 코를 붙잡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유진은 반대쪽 뺨도 공평하게 두 대를 때려주었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이오드의 머리를 붙잡았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끄... 끄으으...”


“아, 미안. 내가 지금 모습이 좀 바뀌어서 못 알아볼 수도 있겠다.”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즉시 변신마법을 풀고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이오드의 눈동자가 부릅 떠진다. 그는 눈물 그득한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더듬더듬 내뱉었다.


“유, 유, 유진.”


“안녕, 형님.”


“네가... 어, 어떻게 여기에?”


“형님을 따라왔지.”


마음 같아서는 쌍욕을 더 하고 싶은데, 유진은 친히 이오드를 형님이라 불러주었다.


“무슨 생각이야?”


“...어... 어?”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형님아. 내가 말이지, 형님이 마음고생이 심하다기에 이해해 보려고 노력은 했거든? 형님의 현실이 엿 같으니까, 달콤한 꿈속을 노니는 것 정도는 이해해 보려 했다고.”


“나... 난...”


“한심하고 등신 같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까지는 아니었어. 서큐버스한테 빨리는건 형님 정기잖아, 그치? 현실도피를 하는 것도 형님이고, 꿈 속에서 자기만족만 하는 것도 형님이야. 그런데 이건 아니지.”


꽈악. 유진은 양손으로 이오드의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가해지는 압력에 이오드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다. 그는 유진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지만, 유진은 이오드를 놓아주지 않았다.


“흑마법은 안 돼.”


“끄... 끄으으...”


“라이언하트 본가의 적자라는 놈이. 차기 가주 후보라는 놈이... 마족이랑 계약하려고 해? 그것도 인큐버스 따위랑?”


“그, 그건, 어쩔 수 없...”


“뭐가 어쩔 수 없어, 미친 새끼야!”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제대로 된 방법으로 흑마법에 입문한 것도 아니고, 계약으로 입문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네 영혼이 마족의 소유물이 돼. 놈이 죽으라면 죽고, 죽이라면 죽여야 하는 노예가 된다고.”


흑마법에 입문하는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스스로 마기를 다스리는 것. 어지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자력으로 마기를 다스릴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흑마법사는 다른 방법을 쓴다. 마족과의 계약. 미천한 실력으로도 계약은 맺을 수 있고, 스스로 마기를 다스릴 것 없이 계약을 맺은 마족에게서 마기를 받아낸다.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은 마족에게 넘겨받은 마기로 제 힘을 키운다. 대단찮은 자질로도 빠르게 경지에 오를 수 있지만, 아무리 강해진들 마족의 권속이란 처지는 벗어날 수 없다.


“이게 온전히 너 하나만의 문제인 것 같냐? 네가 흑마법사가 되어버리면? 가문의 위신, 그래, 일단 그것도 시궁창에 처박히겠지. 그것 뿐만이 아니야. 만약 네가 계약한 마족이 네 어머니를 죽이라고 한다면? 네 아버지를, 형제를 죽이고. 라이언하트 본가의 백염식과 보물들을 들고 오라고 하면 어쩌려 했냐?”


“무,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오드는 억울하단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다...! 불가능한, 도리에 맞지 않은 명령은 하지 않겠다고... 그, 그렇게 약속했다.”


“누가? 그 씨발 인큐버스 새끼가? 야 이 등신아, 마족이 뭐 드래곤이나 엘프인 줄 아냐? 놈들에게 있어 약속은 손바닥 뒤집듯 가벼운 거야.”


“하... 하지만... 선조님은 마왕과...”


“그건 씨발 상대가 마왕이고! 인큐버스 나부랭이의 약속에 대단한 힘이 있을 것 같아?”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이오드의 머리를 놓는 대신 멱살을 쥐었다.


“무조건 따를 필요가 없다고? 그래, 없지. 네가 죽음을 각오한다면 명령을 거절할 수 있어. 그런데 너, 정말 그럴 수 있냐? 네가 죽는 대신에 불복할 수 있어?”


“...”


“퍽이나 할 수 있겠다. 제 앞가림도 못하고 술과 꿈으로 도망다닌 새끼가.”


“네... 네가...”


이오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네가... 대체 뭘 안다고, 나를 비난하는 것이냐?”


“오, 좋아.”


유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름 사정이 있다 이거지? 한 번 말해 봐, 형님.”


“너, 너는 모른다. 너는...! 4년 전부터, 모두의 주목을 받고... 본가의 양자가 되어서, 아, 아버, 가주님의 지원을 듬뿍 받은 너는...!”


“누가 들으면 형님이 차별받은 줄 알겠다. 형님도 지원 받았잖아. 영맥에 갔었지? 백염식도 계승받았지? 마법 배우고 싶다길래 아롯에도 보내줬고, 마탑주님의 제자가 될 기회도 받았잖아. 그치?”


“그건...”


“나도 형님이랑 똑같이 받았어. 내가 잘난 건 가주님이 날 차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잘나게 태어나서 그래.”


그 말에 이오드의 어깨가 파들거리며 떨린다.


“잘나게 태어난 만큼 노력도 많이 했지. 장담하는데 형님보다 훨씬 많이 했을 걸?”


“타고난... 재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흑마법에 입문하려고 했어? 인큐버스 따위랑 계약해서 가문의 이름을 똥통에 처박고, 네 모든 것을 홀랑 바치려 했냐고. 그래서 네가 뭐 얼마나 잘나질 수 있는데?”


유진은 이오드의 멱살을 놓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손가락을 들어, 바닥에 엎드려 있는 흑마법사를 가리켰다.


“저 새끼. 내가 눈 감고 싸워도 십 초 안에 썰어 죽여.”


“...”


“흑마법이라고 해 봐야 고작 그 정도야. 인큐버스 따위와 계약해서 얻게 될 힘이 대단할 것 같아? 아, 그래. 어쩌면 놈을 중간다리로 해서, 몽마의 여왕과 계약하게 될 지도 모르지. 형님도 내심 그걸 기대했겠지?”


이오드의 뺨이 움찔 떨린다. 역시.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누아르 제벨라와 직접 계약을 맺는다면 꽤 강해지기는 하겠다. 그런데 그거로 뭐하게. 흑마법의 힘으로 가주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나, 나는.”


이오드가 눈을 부릅뜨고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럼 뭐하려 했는데.”


“나는... 흐, 흑마법사가 되어서 헬무드로 갈 것이다. 그 자유로운 곳에서... 내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아 이 개새끼가.”


유진은 얼굴을 팍 일그러트리며 이오드의 머리를 때렸다.


“마족한테 인정받아서 뭐하려고? 네 가족한테 인정받는 것보다 마족한테 인정받는 게 더 좋냐? 걔들이 정말 널 인정할 것 같아? 뭔가 착각하는데, 형님. 본가의 적자라는 배경이 없으면 형님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그렇기에 더더욱, 필요가 없다! 나는 가주가 되고 싶지도, 본가의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배가 처 불렀네.”


“뭐?”


“가진 배경으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지원을 받으면서. 뭐가 어쩌고 어째?”


“그건... 어쩔 수 없는...”


“됐어, 더 들을 필요가 없네. 일단 이것만 알아 둬, 형님. 나는 형님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자기만 억울하고 힘든 줄 아는 새끼랑 무슨 이야기를 해? 남들은 갖고 싶어도 못 갖는 것들을 태어나서부터 가진 새끼가, 뭐 그리 징징대며 핑계가 많은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이오드에게서 물러섰다.


“형님이 아롯에서 술이랑 약을 빨고 꿈에 취해 있는 동안, 본가에 남은 시안과 시엘은 존나 열심히 하고 있었어. 나야 말할 것도 없고.”


“...”


“그냥 그렇다고.”


더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었다. 유진은 홱 몸을 돌려서, 얌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흑마법사의 등을 걷어찼다.


“억!”


“얌전히 있어, 개수작하지 말고.”


“저, 저는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알아. 그런데 마음속에서는 개수작을 떠올렸을 수도 있잖아, 그치?”


흑마법사의 몸이 흠칫 떨린다. 저 괴물 같은 꼬마는 타인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건가? 당연히 유진은 타인의 마음 따위는 읽을 수 없다. 그냥 짜증이 풀리지 않아 한 번 걷어찼을 뿐이다.


“너 진짜 개수작 떠올렸냐? 뒤질려고.”


유진은 흑마법사가 움찔 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흑마법의 몸을 걷어찼고, 그는 처량한 비명과 함께 땅을 뒹굴었다.


*


이 불온한 거리에도 법은 있다. 이 거리를 담당하는 경비병들은 유착과 불문율로 거리의 소란들에 눈을 감지만, 이번 소란은 너무 과했다.


거리 한 복판에서 건물이 뒤흔들리고, 벽이 무너지는 등의 소란. 거리를 즐기며 시간을 때우던 경비병들이 눈감아 줄 수 없는 소란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


벌건 얼굴로 출동한 경비대장이 머뭇거린다. 좆 됐다. 술기운이 싹 날아간 머릿속에는 그 세 글자만 맴돌았다. 볼레로 거리에서 사고가 벌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 정도의 거물이 관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당초 그런 거물들은 사고에 관여되어도 소란을 크게 벌이지 않는다.


“정당방위였습니다.”


유진은 보란 듯이 주변을 가리켰다.


“술 취한 형님이 부축을 받고서 여기로 끌려 오시길래, 납치라도 당하는 건가 싶어서 따라온 것뿐이고요. 들어가지 못하게 앞을 막기에 뭐하는 곳이냐고도 물어봤어요. 그런데 절 협박하고 돈을 뺏으려 들지 뭡니까?”


“...”


“그래서 저 자신과 지갑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이 안에서는...”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경비대장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필사적으로 웃었다.


“사후처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러니 유진님은 이만 돌아가셔도...”


“형님은 데려 갈 겁니다. 그리고 저 새끼도.”


유진은 흑마법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흑마법사는 간절한 표정을 하고서 경비대장을 바라보았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마약은 아롯에서도 불법이다. 말만 불법이지 알게 모르게 유통되며 사용되고는 있지만, 거리 한 복판에 마약굴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불문율이랍시고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흑마법사와 라이언하트 가문이 얽혀버렸다. 이대로 보냈다가는 경비대장의 모가지가 날아간다. 이 거리에 관여된 저명한 인사들은 셀 수 없이 많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은 거리와 상관없이 경비대장의 모가지를 잘라 무마하려 들 것이다.


“그건...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저 흑마법사는 저희가 따로 심문을...”


“닥치고 있게.”


싸늘한 목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고깝다는 눈으로 경비대장을 보던 유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높은 하늘에 로베리안이 서있었다.


“제 담당구획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눈을 감은 자네들을 어찌 믿고 심문을 맡기나?”


“저, 적탑주님.”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불만이 있다면 경비총장을 불러오도록 하고. 그가 이 일을 붙들고 나와 대립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로베리안이 아래로 내려온다. 경비대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것은 경비대장 뿐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빨리도 납셨군.’


흑마법사의 얼굴이 참혹히 구겨진다. 그 먼 적색 마탑에 벌써 소식이 전해졌을 리가 없는데? 마법 외의 다른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적탑주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바쁘신대 불러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로베리안은 끓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로베리안을 부른 것은 유진이었다. 단말기를 통해 가이드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팔아도 되겠지만, 타국에서 가문의 이름을 파는 것보다는 로베리안의 덕을 보는 것이 그림이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냐면...”


“사정은 얼추 알겠습니다.”


로베리안이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소홀하여 이런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겠죠.”


이오드의 몸이 덜덜 떨린다.


“...서큐버스와 놀아나는 것. 꿈으로 현실의 괴로움을 잊는 것. 필요한 안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제 생각이 잘못되었던 겁니다. 유진님, 죄송합니다.”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사과해야 합니다. 물론 길레이드님과 테오니스님에게도 사과를 드릴 것이지만, 유진님에게도 추한 광경을 보여 버렸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셨고요.”


흑마법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로베리안도 마찬가지다. 그가 대스승으로 섬기는 현명한 세냐가 흑마법사를 혐오했듯, 그녀의 제자들도 흑마법사를 혐오한다.


특히 로베리안은 길레이드의 오랜 벗으로서, 라이언하트가 흑마법과 관여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를 잘 안다.


“저, 적탑주님.”


이오드는 덜덜 떨며 목소리를 냈다.


“이건... 그러니까... 하,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흑마법에 입문하지 않았습니다.”


“하려고 했죠.”


로베리안은 차게 식은 눈으로 이오드를 응시했다.


“이오드님. 당신은...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저를 믿고 당신을 맡기신, 길레이드님을 모독했습니다. 또, 당신을 가르치는 새뮤얼을 모독했고, 당신의 모든 편의를 봐주었던 저를 모독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이상 변명하시면 저는... 모독의 대가를 집행할 겁니다. 그러고 싶군요.”


로베리안은 이오드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부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정 변명을 하고 싶거든, 제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가르친 새뮤얼과, 당신을 이곳에 보낸 길레이드님과, 테오니스님에게 하십시오.”


“으.... 으으...”


이오드는 머리를 붙들고 눈물을 쏟았다. 로베리안은 그 모습을 한심하단 눈으로 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도록 하죠.”


로베리안은 더 이상 이오드를 보지 않았고, 유진도 이오드를 보지 않았다. 모두의 외면 속에서 이오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쥐어 짜내는 눈물과 떨림. 이오드의 눈빛이 칙칙하게 가라앉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이오드 라이언하트


4년 전의 이오드는.


로베리안이 보여 준 마법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마법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흥미를 가졌다. 라이언하트의 본가, 그곳의 적자로 태어나서 과한 기대를 받아 온 이오드는 검과 몸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독서와 마법에 큰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재능까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에 많은 재능은 갖지 못한다.


그렇게 배신당해 버린다. 좋아하고 바랐던 만큼, 이상과는 다른 현실에 좌절한다.


이오드가 겪은 일은 특별히 잔인하지도,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냥 흔한 일인 것이다. 이오드는 마법에 열정과 흥미를 가졌고, 마법을 좋아했지만.


마법은 이오드를 좋아해 주지 않았다.


*


밤이 늦었지만, 길레이드는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자정이 지났을 무렵, 길레이드는 아롯의 수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즉시 적색마탑으로 향했다.


이 야심한 시간에 적색마탑에 찾아 온 것은 길레이드 뿐만이 아니었다.


적색마탑의 최상층. 그곳에는 로베리안과 유진 외에, 검은 안경을 쓴 사내가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수십 년 동안 흑탑주의 자리에 앉아있는 위대한 흑마법사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길레이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발자크 루드베스라고 합니다.”


“...길레이드 라이언하트라고 하오.”


길레이드는 발자크를 노려보면서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면서 유진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길레이드와 함께 온 테오니스는 도저히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유진과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무슨 낯으로 여기 앉아있는 거죠?”


테오니스는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하나 뿐인 아들. 본가의 가주가 되어야 할 아들. 무도보다는 마법에 흥미를 가지고, 소양이 있는 듯 해 4년 전에 품 밖으로 내보낸 아들이다.


그런 아들이 흑마법에 입문하려고 했단다. 테오니스는 이 끔찍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진정하십시오.”


로베리안이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탑주는 이 일에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테오니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오드가 흑마법에 입문하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흑색마탑과 상관이 없다니, 지금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흑색마탑이 아롯의 모든 흑마법사을 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발자크가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이 불상사를 주도한 흑마법사는... 게비드라고 합니다만, 흑색마탑의 소속이 아닙니다. 마법사 길드 소속이죠.”


마법사 길드는 세상에서 제일 큰 규모를 가진 마법사의 공동체다. 하지만 규모만큼의 위신은 갖고 있지 않다. 마법만 쓸 수 있다면 소속될 수 있는 길드와는 달리, 마탑은 정말 실력이 뛰어나지 않고서는 소속될 수 없다.


“저도 엄밀히 따지자면 길드 소속의 마법사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게비드와 한 식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발자크는 콧잔등에 걸친 안경을 올리며 로베리안을 힐긋 보았다.


“같은 마법사고, 길드 소속이라고 해서 저와 적탑주와 한 식구인 것은 아닙니다.”


로베리안은 침묵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테오니스는 발끈하여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 했으나, 길레이드가 손을 들어 테오니스를 저지했다.


“그런데 왜 여기 와계시는 거요.”


길레이드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흑색마탑은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여기 와있는 건가? 은근히 드러내는 분노가 방안의 공기를 싸늘하게 만든다.


“나름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발자크는 길레이드에게 위압되지 않았다. 길레이드는 그 라이언하트 본가의 가주이며,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다.


발자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십 년 전에는 청색마탑에서 차기 마탑주로 거론되던 인물이고, 지금은 그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을 맺은 전설적인 흑마법사 세 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게비드는 흑색마탑의 소속이 아닙니다만, 저는 흑탑주로서 게비드가 일으킨 문제에 책임을 지려 합니다.”


“책임?”


“흑마법에 입문하는 것, 계약을 주선하는 것. ‘죄’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수백 년 전에는 흑마법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되어 살해당하곤 했었다. 하지만 위대한 베르무트와 마왕의 약속 이후로, 흑마법을 익히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되었다.


“그렇지만... 저는 라이언하트의 입장을 존중해 드리고 싶습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오.”


길레이드가 내뱉었다.


“라이언하트의 위신을 위해 숙이지 않아도 될 고개를 숙이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이해한 것이 맞소?”


“예.”


발자크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꽈득. 길레이드의 주먹이 쥐어졌다. 한층 더 강해진 살기가 공간을 떨게 만든다. 유진은 그 살기를 가늠하며 팔뚝에 돋은 소름을 힐긋 보았다. 저만한 살기는 전생에도 수없이 느껴보았다. 허나 환생한 육체가 살기에 움찔거린다.


“굳이 제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부디 그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섬뜩한 살기가 발자크를 휘감는다. 그 한 가운데에서도 발자크의 얼굴은 평온했다.


“하지만 책임을 지려 합니다. 같은 흑마법사기도 하고, 이번 일을 통해 라이언하트 가문과 척을 지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정말 그렇다면 무릎이라도 꿇는 것이 어때요?”


테오니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발자크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원하신다면.”


“그만,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소.”


발자크가 무릎을 숙이려 하자, 길레이드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는 책임을 지시겠다는 말은 감사히 받겠소. 다만 내가 우려되는 것은, 책임을 지겠다는 명목으로 일을 은폐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오.”


“마약에 관한 죄는 아롯의 법으로 다스릴 겁니다. 제가 은폐할 것 없이, 마약굴에 있던 전원은 아롯의 감옥에 갇히게 될 겁니다.”


발자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길레이드를 응시했다.


“혹시 직접 목을 베고 싶으십니까?”


“...그 말은 내게 모욕으로 들리는 군. 나는 아롯의 법이 적법하게 적용되는 것을 바랄 뿐이오. 타국인인 내가 무슨 권리로 아롯의 법 위에 노닐려 하겠소?”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서큐버스들은 어찌 되는 거요?”


“그들의 장사는 불법이라 할 일은 아닙니다. 가게에서 사용하던 환각제도 마약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취급을 잘못한 것에는 제재가 가해질 겁니다.”


“그럼 당신은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거죠?”


테오니스가 내뱉었다. 발자크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게비드와 계약하고, 이오드님과 계약을 맺으려 한 인큐버스의 목을 베기로 했습니다.”


“...뭐라고요?”


“호인 올페르 남작. 제벨라 공작 휘하의 인큐버스죠. 제벨라 공작은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아 책임을 물 수 없습니다만... 직접 관여한 게비드의 목은 베어질 겁니다.”


발자크가 손을 들어올린다. 그 움직임에 길레이드는 테오니스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혹시 모를 사태에서 테오니스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노골적으로 발자크를 경계하고 불신하는 태도였으나, 발자크는 그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허공에 손가락을 내리그었다.


화륵. 시커먼 불꽃이 허공을 수놓는다.


“...유폐의 마왕님이 친히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려는 몸을 붙들었다. 분노를 다스렸다. 괜히 반응을 보여 좋을 것 없는 상황이다. 붙든 육체 대신에 정신이 날뛴다.


유폐의 마왕.


헬무드의 두 마왕 중 하나. 전생의 유진은 유폐의 마왕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유폐의 마왕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친애하는 베르무트의 가문에 불쾌를 안겨준 것에 크나 큰 낙담을 느끼신다 하십니다.”


친애하는 베르무트.


그 말이 유진의 속을 뒤집는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발자크의 멱살을 쥐고 싶었다. 네가 섬기는 유폐의 마왕에게, 개 같은 소리 지껄이지 말고 아가리 단속이나 잘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 말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유진 뿐만이 아니었다. 길레이드도 입술을 뿌득 씹으며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허나 발자크는 그 시선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직접 호인 올페르의 목을 베시고, 원한다면 그 목을 라이언하트의 가문에 직접 보내드리겠다고 하십니다.”


“필요 없소.”


길레이드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뱉었다.


“...그렇다면 목만 베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전하겠습니다.”


발자크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이 처사로 가주님의 노여움이 풀리지는 않겠지만, 부디, 흑색마탑과 유폐의 마왕님이 라이언하트 가문에 불쾌를 주지 않으려 한단 사실은 알아주십시오.”


“...”


“그럼... 다음에는 보다 즐거운 자리에서 만나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발자크가 자리를 떠난다. 그는 방을 나가기 전, 유진에게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유진은 그 시선을 느꼈으나, 굳이 발자크에게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짧은 침묵.


“...이오드는 본가로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겠소.”


길레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굳은 뺨을 어루만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리안님에게는... 너무 큰 결례를 범했구려. 이 모두가 내 불찰이오.”


“아닙니다. 제가 이오드님을 강하게 다스렸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로베리안도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테오니스에게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오드는... 그 아이는, 무얼 하고 있습니까?”


테오니스의 눈은 원독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이오드의 잘못을 로베리안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제자로 받았다면, 스승답게 열성적으로 가르쳤다면. 이오드가 저렇게 엇나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제자가 될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아들이, 이오드가 부족할 리가 없잖은가.


“방 안에서 쉬고 있으라 말했습니다.”


“길레이드.”


테오니스는 로베리안으로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꼭 본가로 데려갈 필요는 없잖아요? 이오드가... 흑마법에 입문해 버린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시도하려 했을 뿐이에요.”


“...”


“실수를 범했으니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이번 일을 교훈 삼아서, 더욱 열심히 할 수도 있을 거고요. 그러니까...”


테오니스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본가에는 시안과 시엘이 있다. 이오드가 아롯에 가있는 동안, 시안과 시엘은 본가 가솔들의 인정을 얻었다. 추문을 얻고 돌아 온 장남이 이제 와서 가솔들의 인정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롯에 보낸 것이다. 본가에 남아서 인정받을 수 없으니, 아롯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아들이 적탑주의 제자가 되고, 다른 뛰어난 마법사들과 교류하여 본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인연과 힘을 거머쥐기를 바랐다.


어떻게든 아롯에 남아야 한다. 로베리안의 제자가 된다면, 그렇게 대마법사의 발판을 갖고 성장한다면. 이 추문도 대단찮은 일로 넘어갈 것이다.


“여건만 갖춰진다면 이오드는 잘 할 수 있어요. 재능이 있다고요. 당신도 알잖아요? 이오드는 어려서부터 독서와 마법을 좋아했...”


“그만 하시오.”


길레이드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괴로웠다. 그는 이오드가 아롯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안다. 이오드의 4년은 허무하고 무가치했다. 여러 편의를 봐주며 지원을 받았지만, 이오드의 마법은 3서클에 지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마나를 다루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처참한 실력이었다. 말만 3서클이지, 마법의 이해와 실력만 따진다면 그보다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라이언하트의 역사 300년. 본가에서 흑마법사가 배출된 적은 한 번도 없었소.”


“어... 어려서 그런 것이에요.”


테오니스의 눈동자가 떨린다. 길레이드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유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미안하구나, 유진. 밖으로 나가 줄 수 있겠느냐?”


“예.”


듣는 것이 거북한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테오니스는 몸을 일으킨 유진을 노려보았다.


“...이오드와 잘 지내달라고. 형을 챙겨달라고 말했잖느냐...!”


“테오니스.”


길레이드는 두눈을 부릅뜨고 테오니스를 노려보았다.


“유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소. 헌데 당신은 어찌하여 유진을 핍박하는 것이오?”


“저 아이가 이오드를 막았다면...! 일을 그렇게 해결하지 않고, 조용히 무마하였다면...”


“더는 말하지 마시오!”


길레이드가 버럭 고함을 지른다. 잠자코 서있던 유진은 테오니스에게 무어라 한 마디라도 할까 고민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고 고개만 꾸벅 숙였다.


“나가 보겠습니다.”


이 이상 밉보이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유진이 나간 후, 테오니스는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제가 실언을 하였군요. 하지만 길레이드, 부디 다시 생각해 주세요.”


“내 뜻은 바뀌지 않소. 이오드가 내 아들이라고는 하나, 그 아이가 저지른 일은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소. 나는 도저히 그 아이를 아롯에 둘 수 없소.”


“본가에 그 아이가 머물 자리가 어디에 있다는 거죠?!”


테오니스는 애걸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휘감겨 내뱉었다.


“당신은 이오드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어요. 빌어먹을 애니실라와 그 자식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만 아끼고 들었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길레이드는 더는 분노하지 못했다. 그는 우울한 눈으로 테오니스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소. 마법을 배우고 싶다기에 아롯에 보냈고...”


“당신이 정말 이오드를 위했다면!”


테오니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는 숨을 씨근거리며 로베리안과 길레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오드가 로베리안님의 제자가 되게끔 만들었어야죠...! 이오드가 엇나가는 것이 걱정되었다면, 그 아이를 감시하고 통제할 만한 사람을 보내야 했어요...!”


“제발.”


길레이드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감시와 통제? 그것이 싫어서 본가를 떠나 아롯에 와있었던 것 아닌가. 길레이드는 장남을 믿었다. 평생을 감시와 기대를 받았으니, 아롯에서는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주었다.


서큐버스나 마족들과 어울린다는 이야기.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 그쳤다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흑마법은, 마약은 안 된다.


“라이언하트를... 나를 더 이상 수치스럽게 만들지 말아주오.”


“수치?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아요. 이대로 본가로 돌아가면 수치스러움을 못 견뎌 죽고 싶은 건 바로 저에요.”


“아롯에 남는 것은 이오드에게도 좋다 생각하지 않소. 아직까지 마법에 뜻이 남았다면, 본가에서...”


“정 이오드를 데리고 가시겠다면, 저는 이오드와 함께 친정으로 내려가겠어요.”


테오니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대로 본가에 돌아가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이오드는 쌍둥이에게, 테오니스는 애니실라에게 밀려 허수아비가 될 것이다.


“나는 절대로, 이오드를 본가에 두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친정에서, 그곳에서 억압받지 않고 마법을 익히게 하겠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테오니스는 애니실라의 비웃음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아직 가주경쟁까지는 시간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오드가 계승서열을 굳건히 할 만큼의 힘을 키워야 한다. 이대로 본가에 가봤자 판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 당신이 그를 바란다면.”


길레이드는 두 눈을 감았다. 그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이오드가 그를 바란다면. 뜻대로 하도록 하시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유진 라이언하트님.”


복도의 저편에는 발자크가 서있었다. 먼저 방을 나갔는데, 그대로 떠나가지 않고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편히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군요.”


“흑탑주님과 편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은데요.”


유진은 고개를 숙이는 대신, 노골적인 불쾌를 드러내며 삐딱하니 고개를 기울였다. 그 반응에 발자크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흑탑주님 뿐만이 아니라, 흑마법사들은 전부 싫어합니다.”


“그렇습니까? 이해는 합니다. 300년이나 흘렀지만, 세간에서 흑마법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좋지 않으니까요.”


발자크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흑마법사인 저로서는 억울한 일이죠. 제 입으로 하기에는 신뢰가 떨어질 지도 모르나, 저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거든요.”


“흑탑주님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도 세상에는 나쁜 흑마법사들이 많잖습니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직까지도 세상에는 인체실험 따위의 금기를 범하는 흑마법사들이 존재한다. 아롯과 흑색마탑의 법은 금기를 엄중히 처벌하나, 이 넓은 세상에는 지엄한 법을 피해 도리를 벗어나려 드는 흑마법사들이 존재한다.


“그건 흑마법사들 뿐만이 아니죠.”


발자크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법사란 족속은 제 호기심과 욕망을 위해 도리 따위는 쉽사리 져버립니다. 단순 비율로 따지자면 도리를 벗어난 흑마법사보다 도리를 벗어난 ‘마법사’가 몇 배는 될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이오드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은 흑마법사가 아닌 ‘마법사’이셨습니다. 제 욕망을 위해 흑마법을 수단으로 삼으려 했을 뿐이에요. 그조차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오드님의 외도는 흑마법에 의한 것이 아닌, 그 분의 욕망이었습니다.”


“제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겁니까?”


“흑마법을 미워해도 저를 미워하지는 말아달라는 겁니다.”


발자크는 큭큭 웃으며 유진에게 다가 와 손을 뻗었다.


“유진님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혈계식에서의 활약은 몇 년 전부터 유명했고... 최근에는 마법에도 큰 성취를 보이셨다죠.”


“큰 성취랄 것까지는 없는데요.”


“그 적탑주가 아크리온의 추천서를 써주셨잖습니까. 유진님의 성취는 인정받을 만큼 큰 것입니다.”


유진은 발자크가 건넨 손을 잡지 않았다. 발자크는 자연스레 손을 내리며 유진을 응시했다 .


“저 안에서는 말하지 못했지만, 제가 감당하기로 한 ‘책임’에는 유진님을 위한 것도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적탑주의 추천서만으로 아크리온의 입장자격을 얻기는 힘듭니다. 다른 마탑주들과 마법사들은 유진님의 자격이 부족하다며 거절할 테니까요.”


“그래서. 흑탑주님도 추천서를 써주시겠다는 겁니까?”


“저는 유진님의 재능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거든요. 뭐 그것 뿐만은 아닙니다만...”


발자크는 닫힌 문을 힐긋 보며 말을 이었다.


“가뜩이나 적탑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저는 그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는데, 적탑주는 제가 흑마법사라는 것만으로 싫어하죠. 게다가 이번 일로 라이언하트 본가의 미움을 받게 될 것 같고...”


“그래서 저한테 추천서를 써주시겠다는 겁니까.”


“예. 솔직히 말하자면요. 유진님에게 추천서를 써주어 적탑주의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면... 뭐 그것만으로 저를 좋아해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라이언하트 본가에게도 성의를 보일 수 있고요.”


“써주시면 받기는 할 겁니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흑마법사는 싫지만, 주는 것까지 싫다고 내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제가 발자크님과 친해질 수는 없겠지만.”


“이 이상 싫어해주지 않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발자크는 빙긋 웃으며 물러섰다.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붙잡아서 미안합니다.”


“정말 형님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은 겁니까?”


발자크를 지나치기 전, 유진은 그것을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 말에 발자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제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경알 너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무능한 흑마법사는 그 존재만으로 흑마법의 수치가 될 뿐. 라이언하트 본가의 적자라 한들, 빛나는 재능이 보이지 않는다면 기회를 주지 않을 겁니다. 이 정도면 대답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예.”


한심한 새끼.


유진은 눈물을 뚝뚝 쏟던 이오드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광장


“여기까지 왔는데 많은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가는구나.”


새벽.


길레이드는 직접 유진의 방을 찾아왔다. 아마 그럴 것이라 생각하여, 유진은 잠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엄청 오랜만도 아니고요.”


“두 달 정도 되었으니 오랜만이라 할 수는 있지.”


길레이드는 피곤해 보였다. 기분 탓인지, 아까 전에 보았을 때보다 몇 년은 늙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오드는... 테오니스와 함께 친정에 내려가기로 했다.”


“본가로 돌아가지 않는 겁니까?”


“잠깐 돌아가기는 하겠지만, 곧장 친정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더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 본가에 남으면 여러모로 힘들 테니 말이다.”


길레이드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널 탓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너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


“형님을 두들겨 팬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을 짓을 했다면 맞아도 싸지.”


길레이드는 농담처럼 말했으나, 생각했던 것처럼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테오니스의 친정은 키옐 제국의 보사르 영지다. 그곳을 다스리는 보사르 백작이 내 장인 되는 분이시지.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라... 테오니스와 이오드의 마음을 추스르기에는 좋은 곳이다.”


“원망을 들을까 걱정하시는 겁니까?”


“나도 사람이니까.”


길레이드는 씁쓸히 웃었다.


“가문을 위해 애니실라를 본가에 들였을 때에도 많은 원망을 들었지.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들 하나로 지키기에는 라이언하트의 이름이 너무 컸으니. 나는 형제간의 상잔은 바라지 않으나, 형제간의 경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러니 후회하지 않아. 이오드는 내 장남이지만... 가주의 그릇으로는 부족해. 그러니 형제가 필요했다. 경쟁하고, 자극을 받고, 그렇게 가주의 그릇이 되기를 바랐다만... 나는 결국 훌륭한 가주도, 훌륭한 아버지도 될 수 없는 모양이다.”


“가주님은 훌륭한 분이십니다.”


유진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길레이드는 저렇게 자책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유진이 보기에 길레이드는 훌륭한 가주였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구나.”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늦은 새벽에 네 방에 온 것은, 이 일로 네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해서였다.”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래야지. 너는 옳은 일을 했으니까. 이오드와 테오니스는... 신경 쓰지 말거라. 본가의 제하드도 걱정하지 말고.”


“예.”


그 말이 고맙게 느껴졌다. 테오니스의 원한은 유진이 두려워 할 것이 못 되었지만, 이를 빌미로 테오니스가 제하드를 핍박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있었다. 하지만 길레이드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염려할 필요는 없으리라.


‘오히려 애니실라가 좋아 죽으며 아버지를 보살펴 주겠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니실라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장 큰 경쟁자인 테오니스와 이오드를 밀어낸 것이다. 두 모자가 얼마 동안이나 친정에 내려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나, 그 시간 동안 애니실라는 본가의 안방마님으로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것이다.


“로베리안님에게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였는지 들었다.”


길레이드는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무도 뿐만 아니라 마법에도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지. 아롯에 와서 하루도 게을리 보내지 않았고. 네가 참 기특하고 대단하구나.”


“새로운 배움이 즐거웠을 뿐입니다.”


“기쁜 일이야.”


양자가 아니었다면.


길레이드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시안과 시엘이 널 많이 보고 싶어 하더구나.”


“둘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과할 만큼 열심히 하고 있지. 시안은 너보다 강해지겠다며 나와 기온을 닦달하고, 시엘도 방을 나와서 시안과 자주 대련하고 있다.”


“제가 있을 때에는 땀 냄새 풍기기 싫다며 안 나오더니.”


“부끄럼이 많을 나이잖느냐. 어릴 때는 내게도 참 많이 웃어주고 애교를 부렸는데... 이거 참, 시간이 참 빠르단 생각이 드는 구나.”


길레이드는 어린 시엘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럴 나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딸의 애교가 그리웠다.


“아, 그리고... 가주님.”


유진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에 돈을 좀 많이 쓰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돈?”


가르기스가 정말로 거인족의 불알을 샀는지는 모를 일이나, 나중에 놀랄 지도 모르니 미리 말을 해두어야겠다.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가르기스과 거인족의 불알에 대해 설명했다.


“거인족의 고환을 샀다고?”


길레이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도 유진과 마찬가지로, 거인족의 고환을 거금을 들여 구매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정말 몸에 좋단 말인가?’


정말 몸에 좋다고 해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 거대한 거인족이니 고환도 어마어마하게 클 텐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걸 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답니다.”


“...상관은... 없다. 필요한 것이라면... 으음... 스테로드 자작과의 친분도 있고...”


스테로드 자작은 가르기스의 부친이다. 길레이드는 근육이 울퉁불퉁한 친척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돈에 관한 염려는 하지 말거라.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네가 필요한 것이라면 구매해도 상관없다. 다만... 흑마법에 관련 된 것만 구매하지 말거라.”


“저건 괜찮은 겁니까?”


유진은 방 안 구석의 탁자를 가리켰다. 그 위에는 마약굴에서 들고 온 유니콘의 심장이 놓여 있었다.


“일단 로베리안님에게 확인은 받았습니다. 제물로 사용되려 했지만, 정말로 바쳐진 것도 아니라 흑마법의 흔적은 없다 하시더군요.”


“그렇다면 문제없지.”


“제가 정말 가져도 되는 겁니까?”


“네가 취한 것이다.”


“구매한 것은 이오드 형님입니다만...”


“신경 쓰지 말거라. 네가 이오드를 위해 수고하였으니, 그만한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길레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저것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구입해도 좋다. 일일이 내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고.”


“감사합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유진은 딱히 구입하고 싶은 물건이 없었다. 볼레로 거리의 경매장을 돌아다니면 진귀한 물건들을 꽤 찾아볼 수 있겠지만, 그 가치와는 별개로 유진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물론 유니콘의 심장 같은 마나덩어리나 마석은 마나를 늘리는 것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용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억지로 마나를 키우는 것보다는, 차근차근하게 마나를 키우는 것이 좋다.


‘드래곤하트면 모를까.’


몬스터의 심장은 아무리 좋다 한들 몬스터의 심장이다. 불순물도 많고, 마나의 질도 떨어진다. 마석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취한 마나는 몸에 잘 맞지도 않고, 정제하는 과정에서 잃는 것도 많다.


하지만 드래곤의 심장은. 그 순수한 마나의 덩어리는, 제대로 취한다면 잃는 것 없이 코어를 키울 수 있다. 다만 구하기 끔찍하게 힘들 뿐이다. 드래곤 사냥은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금기다.


전생에서는 운이 좋아 드래곤하트를 취할 수 있었다. 헬무드를 떠돌던 중에 죽어가는 드래곤을 만났고... 그 드래곤이 바랐기에, 동료들과 드래곤하트를 나눠서 취했었다.


“이만 가봐야겠구나.”


길레이드는 밤하늘을 힐긋 보며 말했다.


“배웅하러 나오지는 말거라. 테오니스가 널 보면 좋은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아버지와 시안, 시엘에게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애니실라님에게도요.”


“그래.”


앞으로도 열심히 하거라.


길레이드는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유진은 열심히 할 것이다. 또, 괜한 말로 유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부담이라 느낄 것 같지는 않지만.’


이오드는 주변의 부담을 견디지 못했다. 그것이 길레이드를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길레이드는 친애 가득한 눈으로 유진을 한 번 본 뒤, 방을 떠났다.


“가주도 힘들구만.”


역시 가주가 되고 싶지 않다. 유진은 새삼 그를 확실히 하며 유니콘의 심장에 다가갔다. 괜히 늑장 부릴 일도 아니니, 지금 당장 유니콘의 심장을 취할 생각이었다.


방법은 여러 가지 있다.


그대로 씹어 먹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만, 유진은 그런 무식한 방법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백염식을 운용하며 심장에 손을 뻗었다.


‘이게 깔끔하고 편하지.’


심장에서 마나만 뽑아내는 것. 가진 마나를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면 이렇게 하는 편이 깔끔하다. 유진은 정신을 집중하고 유니콘의 심장을 붙잡았다.


ㅡ우우우! 심장이 파들거리며 떨린다. 그 안에 담긴 마나가 통째로 뽑혀나와 유진에게 인도된다. 유진은 집중을 끊지 않고 마나의 순도를 살폈다.


‘좋네. 불순물도 많이 없고.’


거대한 마나가 코어로 인도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 코어를 마나에 감응시키고, 필요없는 것은 덜어낸다. 세 개로 분열된 별에 빛이 더해진다. 유진은 차분히 마나를 인도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면 20살 되기 전에 4성에 오를 것 같은데.’


본가의 사람들이 듣는다면 기절할 만큼 놀랄 일이었다. 300년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성인이 되기 전에 백염식 4성에 오른 선조는 한 명도 없었다.


‘무조건 마나가 크다고 해서 별이 늘지는 않겠지만.’


백염식을 익힌 4년 동안 자각했다. 별이 늘어나는 것은 마나의 양 뿐만 아니라, 얼마나 백염식을 깊이 이해하고, 몸으로 펼쳐내느냐에 달려있다.


그런 점에서 유진은 역대 선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이해의 깊이, 몸으로 펼치는 것. 유진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가주와 기온은 6성. 베르무트는 10성.’


6성만 되더라도 대륙에서 손에 꼽힐 강자로 인정받는다.


‘5성부터 본격적으로 섞어봐야겠어.’


유진은 백염식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기왕 배우는 것이니, 하멜의 모든 것을 녹여 볼 생각이었다.


‘아직은 일러.’


이제 고작 17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니콘의 심장에서 손을 때었다. 마나가 죄다 빨려나간 심장은 손가락 하나 크기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유진은 마나를 튕겨 심장을 바스러트렸다.


그리고 품안에서 월광검의 파편을 꺼내, 창가에 올려놓았다.


“...확실하군.”


창밖에서 내려오는 달빛이 파편에 깃든다. 그러자 파편이 창백하고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유진은 잠시 동안 그 빛을 감상했다.


*


“삼억 셀이었다.”


“씨발아.”


가르기스는 당당한 얼굴로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은 공용은행에서 입금하기로 했다. 오늘 정오 전에 입금하지 않는다면 다음 낙찰자에게 권한이 양도되니, 서둘러야 한다.”


“그냥 양도하면 안 되냐?”


“안 된다. 낙찰을 위해 불꽃 튀기는 입찰경쟁을 했단 말이다.”


“처음에 얼마로 나왔는데.”


“오천만 셀.”


“거인 불알이 오천만 셀... 거기에 삼억 셀까지 올랐다고? 세상에 미친 새끼들이 참 많구나.”


“그만큼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가르기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실물을 직접 보았다면 내 마음이 이해가 갈 것이다.”


“거인 불알이 실물로 봐봤자 불알이지 뭔.”


“아니, 다르다. 압도적이었다.”


“당연히 압도적으로 크겠지. 털은 없디?”


“손질이 끝나 말끔했다.”


“말하지 마,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 계좌 이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냐?”


유진과 가르기스는 펜타곤의 공용은행에 와있었다. 경매장의 비밀계좌로 불알 값을 입금하기 위해서였다. 유진은 태어나 처음 와 본 은행이 당황스러웠고, 계좌이체라는 신문물도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은행이 정말 처음인가?”


“어...”


“믿을 수가 없군... 기돌이 시골이라고는 들었지만, 그곳은 은행도 없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가르기스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유진을 훑어보았다. 유진은 저 수염 덥수룩하고, 암내나고,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프릴 달린 옷을 입고 다니고, 거인 불알을 삼억 셀에 구매하는 미친 등신에게 촌놈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기돌에도 은행은 있어.”


“그런데 왜 은행에 처음 왔다는 것이지?”


“갈 일이 없었으니까...”


“너는 촌놈이구나.”


“개소리하지 마.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봐라, 너랑 나 둘 중에서 누가 더 촌놈으로 보이는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런 개...”


쌍욕을 하고 싶은데, 가르기스의 말은 너무나도 옳은 말이었다...


“...은행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으로 촌놈이라 하는 것은 옳은 일이냐?”


“창구에 가서 이 계좌로 이체해달라고 말하면 된다.”


“대답 안 해?”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데, 이만한 거금을 이체하고 블랙카드까지 있으니 번호표는 필요 없을 거다. 이쪽으로 와라.”


“대답하라고 돼지새끼야.”


“나는 돼지가 아니다.”


가르기스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과연, 은행의 직원에게 가서 블랙카드를 보여주니 즉시 VIP 전용 방으로 안내받았다.


“우리 은행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행장이 직접 나와 고개를 숙이며 카드를 받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금이 끝났고, 은행장이 카드를 들고서 돌아왔다.


“개인 계좌는 따로 만들 생각없으십니까? 지금 만드시면...”


“없어요.”


유진은 카드를 냉큼 받고서 은행을 나섰다. 가르기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유진의 뒤를 따라왔다.


“내 숙소로 가자.”


“왜.”


“입금하고서 바로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나보고 거인 불알 보러 네 숙소까지 가라는 거냐? 미쳤어?”


“직접 보면 마음이 바뀔 거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바란다면 그 액기스를 나눠줄 것이다.”


“안 먹는다고.”


“이해할 수 없군...”


“...일단 가보자.”


“마음이 바뀐 건가?”


“거인 불알 말고 다른 거 볼 거야.”


그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가르기스가 익혔을 적염식에는 관심이 있었다. 제하드의 적염식을 보기는 했었다만, 거의 변형되지 않은 적염식보다는 가르기스의 가문이 변형시킨 적염식을 봐두고 싶었다.


‘그쪽이 뛰어날 테니까.’


백염식과 비교해 어떤 면이 다른지 보고 싶었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은행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유진의 몸이 우뚝 멈췄다.


“...어?”


은행 아래의 광장.


북적거리는 인파.


그 속에서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았다.


광장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뇌리에 박힌다. 그것을 본 순간,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따라오던 가르기스가 놀란 소리를 냈지만, 유진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유진은 개의치 않고 인파 속에 뛰어들었다. 가로막는 사람을 밀치고, 틈을 파고들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갔다.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 저 독특한 머리색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자연적이지 않은 연보랏빛 머리카락. 그 색은 세냐의 방대한 마나가 녹아든 색이다.


‘세냐.’


환각? 그럴 리가. 유진은 인파 속을 헤매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잘못 볼 리가 없잖은가.


“...”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앞을 보았다.


저 멀리 세냐가 걸어가고 있었다. 틀림없다. 300년 전과 비교해 체격은 변하지 않았다. 머리가 꽤 길었나. 300년이나 흘렀으니까 당연하지. 유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세냐에게 다가갔다.


바로 뒤까지 다가왔는데, 세냐는 유진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유진은 세냐를 알아보았지만, 세냐는 유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나 하멜인데,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했어.


아니 정말로. 구라가 아니라니까, 진짜 나 하멜이라고.


유진은 그런 대화를 상상하며 세냐에게 손을 뻗었다. 세냐 저 지랄맞은 계집애는 이 말을 순순히 믿지 않을 것이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욕을 해댈 지도 모른다.


부디 그래주기를 바랐다. 300년이나 흘렀어도, 기억하는 성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를. 여전히 성격도 지랄맞고, 입도 거칠기를.


“세냐.”


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손을 뻗어, 세냐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쥐지 못했다.


바로 코앞에 있는데, 세냐는 잡히지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맞은 편에서, 그리고 좌우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세냐의 모습이 겹쳐진다. 유진은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다가오면서도 보았다. 세냐는 마주오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그대로 통과해 버린다. 저만큼 튀는 머리색인데, 그 누구도 세냐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대신에 험악하게 길을 파고드는 유진을 언짢은 눈으로 힐긋거릴 뿐이다.


‘유령?’


바로 앞에 있는 세냐에게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몇 번이나 손을 뻗어보지만 잡을 수도 없다. 사람다운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환상이나 유령처럼, 틀림없이 눈앞에 있는데 실재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세냐의 걸음이 멈춘다. 유진도 걸음을 멈추었다. 세냐가 고개를 돌린다. 유진은 뻗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뻗어본 들 잡을 수 없으니, 더 뻗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세냐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 저택의 초상화와 마탑 앞의 동상이 실물보다 나았다.


초상화 속의 세냐는 불만스런 표정을 누그러트리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동상으로 만든 세냐는 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앞의 세냐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짜증과 피로가 녹아든 눈매. 허구한 날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던 입술. 적어도 그 얼굴은 유진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무슨 표정을 지을까 하다가.


유진은 일단 히죽 웃어주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웃어 본 들, 세냐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뒤에서 몇 번이나 불렀는데 반응이 없었으니, 아마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뒤를 돌아 본 것은.


눈으로는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자.”


유진은 즉시 세냐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었다.


그 광경에 세냐가 눈을 깜빡인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 또한 유진이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세냐가 입술을 달싹거린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세냐는 소리없이 뜻을 전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찾았다.


세냐의 입술은 세 번 움직였다.


그 뒤에, 유진이 보는 앞에서 세냐의 모습이 사라졌다. 연기가 흩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세냐의 모습이 사라진다. 유진은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서 세냐가 사라진 곳을 보았다.


“나도 찾았어.”


유진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세냐 메르데인.”


유진은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마음은 무겁지 않았다. 세냐는 죽지 않았다. 그것을 확신했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던 것은 죽어 남긴 유령도, 사념도 아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환영.


‘찾았다.’


세냐는 살아있다. 살아서, 유진을 찾으러 왔다. 어떻게 알았지? 초상화에 엿을 날려서? 꼬우면 직접 찾아 와, 그렇게 말을 했었지. 그 말을 듣고 찾아온 건가?


‘그럴 리가.’


수백 년 동안 보존된 저택이다. 매일매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저택을 드나들고, 그들은 시험의 합격이니 뭐니 온갖 미신에 눈이 멀어 세냐의 초상화에 중얼댄다. 세냐가 제 아무리 대단한들, 그 수많은 중얼거림을 모두 듣고서 유진을 찾아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템페스트처럼 내 혼을 기억하고 있던가. 아니면...’


유진은 시선을 내려, 목걸이를 보았다.


‘목걸이를 찾아왔던가.’


아마 목걸이 쪽에 무언가 마법을 걸어두었을 것 같다. 무엇이 옳은 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세냐는 내 환생을 알고 있었어.’


의도했을 지도 모른다.


‘죽지 않았어.’


하지만 직접 올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모양이다. 그러니 환영을 보내서 찾아 온 것이겟지.


“봉인이군.”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직접 한 건가? 마법으로도 300년이라는 시간을 버티는 것은 무리였나? 아니면 봉인 당한 건가? 누구에게? 흑마법사? 마왕? 어쨌든 직접 움직일 수 없다는 거지, 잘 알았어.”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이번은 네가 날 찾아왔으니까.”


흩어져 사라지기 직전.


세냐가 지었던 미소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밉살맞은 계집애가 그런 식으로도 웃을 수 있다니. 처음 알았다.


“다음에는 내가 찾아가지 뭐.”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된 거야.


유진은 피식 웃으며 광장을 떠났다.


떠나려고 했는데.


“대체 어딜 그리 급하게 뛰어갔던 건가?”


“몰라도 돼.”


“이곳은 기돌과는 다르다. 거리는 미로처럼 복잡한데다 고약하고 심술궂은 사람들도 많지. 너처럼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촌뜨기는 먹음직스런 사냥감이 될 것이다.”


“너 시발 내가 촌놈이라 하지 말랬다고 촌뜨기라 하는 거냐? 촌놈이나 촌뜨기나 뭔 차이인데?”


“촌놈은 상대를 비하하는 말이지만, 촌뜨기는 현실에 의거한 말이다.”


“빌어먹을 돼지새끼가.”


“그 말은 잘못되었다. 나는 돼지가 아니다. 돼지는 살이 포동포동 찐 사람을 말하는 것 아닌가?”


“넌 근육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 것 같은데, 그래봤자 크기만 하고 실속은 없잖아. 나한테 팔씨름 진 걸 그새 까먹었냐?”


“...방심했을 뿐이다.”


“방심은 지랄. 시작하기 전부터 힘 바짝 주고 있었으면서.”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가르기스의 등을 철썩 때렸다.


“내가 보기에는 네 잘난 근육이나 돼지 출렁 살이나 똑같아 보여.”


“우리 가문 비전의 근육성장제로 만들어낸 근육을 모욕하지 마라.”


“모욕한 적 없어. 잘 만든 근육이 아깝다고 생각할 뿐이지. 괜히 몸 키우는 것에만 열중하지 말고, 근육을 잘 쓰는 법이나 생각하란 말이야.”


“과연...”


되는대로 뱉는 말인데, 가르기스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네 말이 맞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근육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근육을 과시하는 것에만 몰두했던 것 같다...”


“헛소리는 나중에 너 혼자 있을 때 하고. 적염식이나 써 봐.”


유진은 가르기스의 숙소에 딸린 연무장에 와있었다. 은행에서 생각했던 대로, 가르기스의 적염식을 직접 봐두기 위해서였다.


“너는 백염식을 익혔을 텐데, 왜 적염식에 흥미를 갖는 거지?”


“궁금해서.”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만.”


가르기스는 큰 의문을 갖지 않고, 웃옷을 벗어 던졌다. 유진은 왜 굳이 옷까지 벗어대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괜히 지적하지는 않고 얌전히 가르기스를 지켜보았다. 놈은 울퉁불퉁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포즈를 취했다.


“...적염식을 쓰는데 왜 그런 징글맞은 자세를 취하는 거냐.”


“내 마음이다.”


“그래...”


가르기스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곧 가르기스의 전신이 불그스름한 마나에 휘감겼다. 라이언하트 방계의 적염식. 한 눈에 백염식과의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마나의 밀도가 비교가 안 된다. 불꽃처럼 흩날리는 것은 백염식과 닮았지만, 모습만 닮았을 뿐이지 지닌 위력에서 큰 차이가 날 것이다.


“적염식도 코어가 분열하냐?”“우리 가문의 적염식은 5개의 별을 갖는다.”


가르기스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본가가 가르치는 적염식의 원류는 코어가 분열하지 않는다. 그 적염식을 여러 방계가 발전시키는 것이지. 우리 가문은 뛰어난 선조님들의 노력으로 적염식의 별을 5개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 내가 알기로, 방계에서 파생된 적염식 중에 5개의 별을 갖는 가문은 한 손에 꼽힌다.”


‘...아버지의 가문은 2개가 고작이었지.’


그렇다 보니 적염식은 결코 백염식을 뛰어넘을 수 없다. 유진은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 별은 몇 개냐?”


“2개다.”


적염식의 2성. 유진이 지나쳐 온 백염식의 2성 때와 비교가 안 될 만큼 약하다.


‘수백 년에 걸쳐 발전시켰어도 적염식은 5개의 별이 한계인 거야. 베르무트 그 새끼가 천재는 천재였어.’


본가의 백염식.


방계의 적염식.


‘본가의 기사들이 익히는 적염식도 코어가 분열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해도, 적염식은 뛰어난 마나수련법이다. 본가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은 라이언하트를 섬긴다는 명예와 더불어 적염식을 익힌다는 것에도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베르무트가 이렇게 쪼잔한 새끼는 아니었는데...’


백염식을 본가의 비전으로만 남기고, 방계와 가솔들에게는 적염식을 가리킨다. 본가의 힘으로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적염식을 발전시키는 역할은 방계와 가솔들에게만 일임했다. 그렇게 본가와 방계의 간극은 좁혀지래야 좁혀질 수가 없다.


“...잘 봤다.”


베르무트의 행동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유진은 그것에 깊이 몰두하지 않았다. 일단 분명한 것은, 백염식이 적염식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충분하다면 적염식을 접목해 보려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어.’


방계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나다는 가르기스의 가문의 적염식. 욕심을 부려가며 익힐 만큼은 아니다.


‘적염식을 더할 필요는 없다.’


물론 유진이 본 것은 적염식의 5성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보이는 마나의 밀도나 움직임만으로도 적염식의 수준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유진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간다.”


“벌써 가는 건가? 거인의 고환이 곧 도착할 텐데.”


“너나 실컷 봐라.”


“옷까지 벗고 적염식도 운용했는데. 대련이나 한 판 하는 것이 어떤가?”


“무조건 내가 이길 텐데 뭐하러 대련을 하냐? 그런 생각하지 말고 그 뭐냐, 근육의 목소리에나 귀를 기울여 봐.”


“멋진 조언이군...”


가르기스는 깊은 감명을 받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즉시 몸을 눕히고 팔굽혀펴기를 시작했지만, 유진은 가르기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크리온이라.’


아직까지 유진의 머릿속에서는 세냐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곳에 세냐가 남긴 최후의 마도서가 있다고 했지.’


위치크래프트.


‘저택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었어. 동상도 마찬가지였고. 아니면 녹색마탑의 도서관에 뭔가가 있을까?’


세냐가 탑주로 머물던 곳.


‘괜히 녹색마탑에 기웃거리는 것도 꼴이 우습지. 일단은 로베리안의 추천서가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물고 오는 것을 기다려야 하나...’


발자크 루드베스.


흑색마탑주도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추천서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잖아.”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적색마탑으로 들어갔다.


“내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300년 동안 기다렸으니 조금은 더 기다려도 불만이 없겠지.


‘누가 환생시키래?’


유진은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연구동으로 내려갔다.


‘늦어도 10년 안에는 찾아낼 테니까. 기왕 기다린 거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


빈 연구동에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걸치고 있던 코트를 대충 벗어던지고, 월광검의 파편을 연구동의 한 가운데에 내려놓는다.


“일단 차근차근 살펴볼까.”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월광검의 파편을 노려보았다. 새벽 내내 파편이 달빛을 머금는 것을 보았다. 빛을 발하는 것 외에 특이할 점은 없지만, 저건 그 끔찍한 월광검의 파편이 틀림없다.


오직 베르무트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검.


“...흠.”


유진은 천천히 백염식은 운용했다. 심장의 별을 서클로 대체하고, 마법을 일으킨다.


ㅡ화르륵! 유진의 눈앞에 거대한 화염구가 나타났다. 1서클의 공격마법이지만, 백염식의 마나로 빚어 낸 화염구는 1서클의 마법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작정하고 쏘아낸 화염구는 월광검의 파편을 불태우지 못했다. 닿는 순간, 파편의 불가사의한 힘이 마나를 모조리 흩트려 버린다.


‘포식검과는 달라.’


포식검 아스펠은 마법의 구조를 베고, 마나를 삼킨다.


‘게돈의 방패와도 달라.’


게돈의 방패는 맞닿는 공격을 허무공간으로 보내버린다.


‘닿는 것만으로 구조를 무너트린다. 그렇게 마나를 흩트려 버려.’


베르무트가 즐겨 사용하던 공격법이 떠오른다. 아스펠을 쥐었을 때의 베르무트는 자신을 노리는 모든 마법을 베고, 제 힘으로 치환했다.


어지간한 마법은 베는 것만으로 충분했지만, 고위 마족이나 마왕의 마법은 아스펠로 베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서열 5위 살육의 마왕과의 전투는 몹시 고되었다.


하지만 월광검을 얻게 된 후.


마족과 마왕의 마법도 베르무트를 침범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마법이건 월광검과 닿는 순간 흩어져 버린다. 그 즉시 아스펠을 휘둘러 흩어진 힘을 아스펠로 삼켜버리고, 공격으로 연계 한다.


‘...저 조그만 파편으로는 고위마법을 흩트리는 건 불가능할 거야.’


하지만 수준 낮은 마법 정도는 즉시 흩트릴 수 있다.


‘그런 주제에 목함에 넣은 것만으로 힘이 차단되어 버려.’


월광검의 힘이 발동되는 조건은, 마나와 ‘직접’ 닿는 것이다. 실제로 유진은 목함을 품에 넣은 상태에서 자연스레 백염식을 운용했었다.


‘품에 넣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불시의 공격은 대처할 수 있어.’


무식한 방법이다. 하지만 저 파편 자체가 무식하지 않은가.


“그러니 무식하게 해보자고.”


유진은 즐겁게 웃으며 위니드를 뽑았다.


‘저 파편에 내 마나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백염식으로 끌어낸 마나가 위니드를 휘감는다.


‘내가 일으킨 마법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검기와 함께 마법까지 펼쳐낸다. 수십 개의 매직미사일이 유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가진 마나의 결속은 백염식의 경지 이상으로 강해진다.’


아크리온


마탑의 지하, 11번 연구동.


그곳에 관한 소문은 헤라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11번 연구동은 유진의 전용이다시피 한 곳인데, 며칠 전부터 그곳에서 폭발음과 진동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폭발음과 진동이 연구동 바깥까지 울린다고?’


적색마탑을 대표하는 마법은 소환마법이다. 그 마법은 소환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변수가 많은데다, 마법 자체가 어느 정도는 변수를 의도한다. 그렇다 보니 폭발과 진동은 흔해서, 연구동에는 그에 대한 방비가 철저하게 되어있다.


‘유진님의 마법으로는 바깥까지 폭발음이 나갈 리가 없는데...’


최근 헤라는 여러모로 바빴다. 기존의 연구에 성과를 내고 쉬는 중이었는데, 유진이 서클을 코어로 대체한 것에 큰 영감을 받아버렸다. 그래서 헤라는 도서관의 사서도 그만두고, 새로운 연구의 구상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렇다 보니 저번 이후로 유진의 연구동에 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문과 더불어, 적탑주의 심부름 덕에 헤라는 더 이상 자신의 연구동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처음 마법에 입문하고서, 과한 열정으로 무리를 반복하다가 재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부상을 입는 경우.


헤라는 그 넘치는 재능을 가진, 괴물 같은 소년이 무리한 마법 운용으로 괜한 부상을 입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유진님?”


소문이란 것은 본래 과장되기 마련. 지하연구동은 폭발음이나 진동 없이 평소처럼 조용했다. 헤라는 그 사실에 내심 안도하면서, 11번 연구동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 계시...”


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ㅡ쿠우웅! 커다란 소리와 함께 11번 연구동의 문이 뒤흔들린다. 헤라는 화들짝 놀라며 즉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문을 열어버렸다.


“유, 유진님! 괜찮...”


이번에도 묻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헤라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바닥은 멀쩡한 곳 하나 없이 실금이 번져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마나의 안개 속에서 유진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사고가 났다. 헤라는 식겁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ㅡ화악! 떠돌던 마나의 안개가 일제히 꺼진다.


“유진... 니이임...”


이번에도 말을 끝까지 못했다. 헤라는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며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길게 끌리는 목소리의 도중, 헤라는 꿀꺽 침을 삼켰다.


“어휴.”


유진은 몸을 흠뻑 적신 땀을 털며 고개를 돌렸다. 연구동 한 가운데의 유진은 편한 바지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땀에 반질반질 빛나는 유진의 상반신이 그대로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뭔... 17살의 몸이 저래?’


헤라는 꼴깍 침을 삼키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기 전, 자연스럽게 유진의 몸을 한 번 더 훑어 보았다. 모든 마법사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마법사의 몸매는 보잘 것 없다. 앉아서 연구하는 일도 많고, 땀 흘리며 운동하는 일도 많지 않다 보니 팔다리는 얇아지고 배는 볼록 나온다.


적어도 이 적색 마탑에서 유진처럼 탄탄한 몸을 가진 마법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로베리안이 꾸준히 관리를 하기는 해도, 유진처럼 근육이 쩍쩍 갈라져 있지는 않다.


‘하나 둘 셋... 여... 여섯.’


식스팩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헤라는 한 번 더 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자신의 실례를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다시 유진을 보았다.


그렇게 한 번 더 보고.


“죄, 죄송해요. 대답을 듣고 들어왔어야 하는데, 큰 소리가 나서...”


“괜찮아요.”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주변을 떠돌고 있는 실프를 불러, 몸을 타고 흐르는 땀을 날려버렸다.


“대답하려고 했는데, 일단 하던 건 마저 해야지 싶어서요.”


“하던 것... 뭐, 뭘 하시던 거예요?”


헤라는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고 물어보았다. 소환마법을 연습하는 것인가 싶었는데, 연구동을 둘러보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법진도 없고... 저건 뭐야?’


연구동의 중심.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의 파편이 놓여져 있다. 주변 바닥은 죄다 갈라지고 뒤집혔는데, 파편이 놓인 자리는 아무런 상처 없이 멀쩡했다.


“마나 수련을 하고 있었어요. 마법 수련이랑 겸해서요.”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볼레로 거리의 사건 이후로 일주일. 유진은 하루의 대부분을 연구동에서 보냈다. 월광석의 파편을 상대로 마법과 마나를 수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작정하고 뿜어낸 검기도 파편과 가까이 다가가면 흩어져 버린다. 마법도 마찬가지였고, 정령인 실프들도 월광검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명령을 해 봐도, 근처에 간 순간 정령계로 역소환 되어 버린다.


하지만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마법이 제대로 터지기도 전에 흩어졌는데, 이제는 흩어지는 마나를 억지로 붙들어서 근처에 폭발을 일으키는 정도까지는 가능했다.


마나의 결속이 강건해졌다는 뜻이다.


“마법 수련...?”


“이렇게요.”


유진은 차근차근 설명하는 대신, 즉시 마법을 일으켰다. 요 일주일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한 1서클의 매직미사일과 파이어볼. 그 속도에 헤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더 빨라졌어.’


저번에 처음 펼쳤을 때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빨라져다. 얼핏 보기에는 마법 스크롤이라도 쓴 것인가 싶을 속도였다.


‘스크롤이 아니야. 지금 바로 마나를 운용해서... 코어를 완전히 서클처럼 쓰고 있잖아?’


영창이 없다는 것은 이제는 놀랄 거리도 못 된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도 아니다. 헤라는 유진이 펼친 마법을 이루고 있는 마나의 배열에 주목했다.


유진의 마법경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배열이 빡빡하고 정교하다. 거기에 마나의 결속도 터무니없이 강해서, 디스펠로 무너트릴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누구도 저것을 1서클의 매직미사일과 파이어볼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對) 마법전이라도 연습하시는 건가요?”


헤라는 머뭇거리며 물어보았다. 무너트리기 힘들다는 것은 마법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위력까지 증폭되었으니, 지금의 유진은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마법사와 대결해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도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마나 자체의 수련에 목적을 두고 있어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마법을 흩트렸다. 그렇게 흩어지는 마나는 주변에 퍼지는 대신, 즉시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마법과 백염식의 연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성과는 얻으신 모양이네요.”


“네.”


유진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헤라는 놀라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유진을 응시했다. 전신에 휘감은 새하얀 불꽃은 뭐라 형용하기 힘든 위압감을 내뿜지만, 정작 유진의 얼굴은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서 순진해 보인다.


그런 얼굴에 몸은 근육이 쩍쩍 갈라져서... 헤라는 말을 듣지 않고 두근대는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헛기침을 했다.


“다, 다치지 않으셨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유진님,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만약 유진님이 다치기라도 하시면, 저 뿐만 아니라 적탑주님, 그리고 적색마탑의 입장이 곤란해 질 거예요.”


“네, 조심할게요.”


유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한 지적은 아니었다.


일주일 전. 이오드는 적색마탑을 떠나, 본가로 돌아갔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 얼간이 장남이 이번 일을 계기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건, 아니면 더욱 비뚤어져 병신이 되건. 더 이상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건 테오니스가 맡아야 할 일이다. 길레이드와 다툼까지 벌여가며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내려가 버렸으니, 아들의 교육을 스스로 집도하겠다는 뜻일 터.


어쨌든, 그 일 때문에 적색마탑과 로베리안의 입장이 난감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의 불만과 비웃음을 묵살해가며 이오드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 이오드가 벌인 추태가 펜타곤의 모든 시민들에게도 알려져 버렸다.


그 전부터 이오드에 관한 질 떨어지는 소문은 여럿 있었지만, 소문만으로 남는 것과 직접적으로 공표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오드 덕분에 볼레로 거리에는 대대적인 마약 단속이 시작되었고, 길드 소속의 흑마법사들은 물론 하급 마족들의 입지도 좁아졌다.


사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라이언하트의 본가였다. 선조 위대한 베르무트부터 이어 온 명예는, 장남인 이오드가 인큐버스 따위와 계약을 시도했다는 것으로 똥물이 튀어버렸다.


‘자식 안 낳기를 잘했어.’


처음 라이언하트의 본가에 갔을 때는, 전생에 후손이라도 남겨둘 것을 그랬다며 후회했었다.


이제는 그런 후회 따위는 들지 않았다. 자기 후손이란 놈이 이오드 같은 헛짓거리를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나였으면 뒈졌어도 관짝을 부수고 나왔을 거야.’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나를 갈무리했다.


“제 걱정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 온 거예요?”


“아, 아뇨, 아니, 네.”


“아니라는 거예요, 맞다는 거예요?”


“걱정도 있는데... 그것 말 고 다른 일도 있어요.”


“무슨 일?”


“일... 단... 옷부터 입으셔요.”


헤라는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제야 유진은 자신이 윗옷을 벗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죄송해요. 하다 보니 땀이 너무 나서.”


“괜... 괜찮아요.”


덕분에 좋은 구경도 했고. 헤라는 머릿속에 남은 기억을 의식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기억보존 마법. 나중에 이 기억을 추출해 영상으로 저장할 것을 생각하니, 헤라의 입가에 상쾌한 미소가 번졌다.


“탑주님이 유진님을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최상층까지?”


“아뇨, 탑주님은 지금 외출 중이세요.”


“그럼 어디로 갑니까?”


“아크리온입니다.”


헤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유진도 활짝 웃었다.


*


아롯의 수도 펜타곤.


다섯 개의 마탑이 그리는 오망성의 중심. 그곳에 아롯의 왕성, ‘아브람’이 있다. 거대한 호수의 중심에 세워진 아브람은 배를 타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다. 펜타곤의 하늘을 자유로이 나도는 공중마차도 아브람의 공역에는 가까이 갈 수 없고, 그 어떤 마법으로 호수를 가로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브람과 호수 전체를 휘감고 있는 봉마진(封魔陣) 때문이다.


300년 전, 현명한 세냐는 일정 범위의 마나를 차단하고 자신의 마법만 발현하게 만드는 봉마진을 장기로 삼았다.


아브람 전체에 작용하는 봉마진은 세냐가 아롯의 왕족에게 친애로서 선물한 것이고,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훌륭하게 작용하고 있다.


왕립도서관 아크리온. 그 위용은 멀리 보이는 아브람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유진은 높다란 시계탑과, 호수 너머의 아브람을 번갈아 보았다.


‘미쳤구만.’


최근 동안 마법서도 열심히 봐둔 덕에, 마법에 대해 얼추 이해하게 되었다. 유진의 ‘상식’으로는 저 거대한 호수와 왕성 전부를 봉마진으로 휘감았다는 것이 도저히 가능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300년 전의 왕성 주변에는 호수 같은 것은 없었다. 저 호수도 세냐가 선물한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도 안 되어 저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다른 곳에 있던 왕성을 통째로 호수의 중앙에 옮겨 놓았단다.


“멋지죠?”


헤라는 방긋방긋 웃으며 아브람을 가리켰다.


“마탑주님들도 아브람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으세요. 저곳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왕족들과, 왕가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궁정마법사단 뿐이죠.”


“그렇다는 건, 마탑주님들은 왕가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으음... 충성은 하고 있지만, 불합리한 명령까지 무조건 복종할 수는 없잖아요? 마탑은 아롯과 상호협력관계랄까... 명령과 복종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라서요.”


국왕은 아롯을 다스리는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는 않는다.


“마탑과 깊이 얽힌 것은 왕궁이 아닌 의회에요. 왕궁이 궁정마법사단을 가지고 있으니, 마탑의 마법사들은 의회의 전력이 되어주는 거죠. 그렇다고 마법사들끼리 대립하는 입장은 아니지만요.”


아롯은 평화롭다. 내전도 없고, 국외에 적국을 두고 있지도 않다.


300년 전의 전쟁 이후로, 대륙은 평화로웠다. 소국 간의 전쟁이나 내전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300년 전만큼 거대한 전쟁은 없었다.


“아브람에 가보고 싶으신가요?”


유진이 계속해서 아브람을 보고 있자, 헤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냥 신기해서 보고 있었어요. 가고 싶다고 가볼 수 있는 장소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죠. 아브람에 출입할 수 있는 건 대귀족이나 탑주님들 정도니까... 아, 그래도 유진님이라면 갈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제가 라이언하트라서?”


“그것도 있지만,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받는다면 한 번은 왕궁의 부름을 받게 되거든요. 저는 가본 적 없지만, 탑주님한테 이야기는 들었었어요.”


헤라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제가 말할 이야기는 아니죠. 아마 오늘 그에 관한 이야기도 들으실 거예요.”


유진은 헤라와 함께 아크리온에 들어왔다. 이만한 명소라면 관광객이 북적거릴 만도 한데, 아크리온의 주변은 관광객 한 명 없이 휑했다.


엄중한 경비 때문이다. 아크리온 일대는 미리 허락을 받지 않는다면 가까이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허락이란 것도 1층까지만 출입이 가능하게 할 뿐. 2층부터는 출입증 없이는 발도 디딜 수 없다.


“그럼, 저는 돌아가 볼게요.”


헤라는 출입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녀는 더 이상 앞장서지 않고, 유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진님. 너무 긴장하지는 마시고... 파이팅!”


“네, 파이팅.”


주먹을 불끈 쥐고 건네는 응원에 유진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왕립도서관, 아크리온.


적탑주와 흑탑주가 추천서를 써주기는 했다만, 다른 세 명의 탑주들은 유진이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갖는 것에 의문을 표했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라이언하트.


그 후손이 아무리 뛰어난들, 결국은 마법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년 아닌가?


고작 추천서만으로 입장할 수 있을 만큼 아크리온은 가벼운 곳이 아니다. 이곳은 아롯의 마법역사와, 현명한 세냐의 정수가 깃든 곳이다.


“유진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1층의 넓은 방. 유진은 그곳에 들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로베리안과 발자크를 포함한 5명의 마탑주들이 유진을 응시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왕궁의 궁정마법사장과, 마법사 길드의 길드장까지 와있다.


“고개를 드시오.”


아롯을 움직이는 거인들의 한 가운데.


유진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대의 이름은 몇 년 전부터 들어왔소. 언젠가 꼭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려.”


호네인 아브람.


아롯의 왕세자가 유진을 향해 빙긋 웃었다.


@아크리온


유진은 자신보다 4살 많은 왕세자를 응시했다. 호네인은 아롯의 왕세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하다.


‘5서클.’


아롯의 왕가는 대대로 우수한 마법사들을 배출해 왔다.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개량 된, 마법을 위한 혈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중에서도 호네인은 특별하고 우수했다. 아롯의 왕족은 어린 나이부터 마법에 입문하지만, 성인이 되기 전에 5서클에 도달한 것은 호네인이 최초였다.


천재.


호네인에 대한 이야기는 유진도 들어서 알고 있다. 왕위계승서열 1위의 왕세자. 헤라에게 미리 들어두기는 했지만, 그 잘난 왕자님과 직접 마주하게 되니 신기한 기분이 든다.


‘전생에서도 왕족은 몇 번 본 적이 없는데,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하니 17살에 왕족도 보는 군.’


전생에는 왕족과 별 인연이 없었다. 베르무트는 여기저기 불려가는 곳이 많았지만, 무연고의 하멜은 불러주는 곳도 많지 않았고, 하멜 본인이 부름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여기 온 이유는 알고 있겠지?”


대뜸 말을 뱉은 것은 꼬장꼬장해 보이는 마법사였다. 청색마탑주. 외견의 나이는 중년이었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는 불만과 짜증 가득한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대의 소문은 많이 들었다만. 여기 와계신... 적탑주와 흑탑주가, 과하다 싶을 만큼 그대를 밀어주더군.”


청탑주는 찡그린 눈으로 로베리안과 발자크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발자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고, 로베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아, 물론. 그대가 범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무기를 휘두르며 검기를 내뿜는 것과, 마법을 잘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지 않은가?”


청탑주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는 고작 17살의 꼬마. 게다가 마법에 입문한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햇병아리다.


그런 꼬마가 2명의 마탑주에게 추천서를 받고,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받으려하고 있다. 청탑주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하지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청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17살, 마법에 입문한지 몇 달밖에 안 된 꼬마가 잘나봤자 얼마나 잘나겠는가? 물론 재능은 있겠지만, 아크리온의 출입증까지 줄 정도는 아니다.


당장 아롯에는 어릴 적에 천재라 불렸던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다. 마탑에 들어 온 마법사라면 죄다 어릴 적에 천재 소리는 한두 번씩은 들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재능 넘치는 원석들이다.


그런 마법사들도 수십 년 동안이나 아크리온에 들어가보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데, 저 어린 꼬마가, 마법 경지만 치면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을 꼬마가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받는다고? 이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형평성에 어긋난다.


‘적탑주야 라이언하트 가주와 오래 전부터 벗이었고, 흑탑주는... 이번의 망신스런 일을 계기삼아 라이언하트와 친분을 트고 싶은 거겠지.’


시기도 절묘하지 않은가. 라이언하트 본가의 장남인 이오드가 별다른 성취를 보이지 못하던 중에 유진이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의 추천서가 써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청탑주 뿐만이 아니었다. 녹탑주와 백탑주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이 자리에 불려나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씀은 이해합니다만.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는 겁니까?”


유진은 주눅 들지 않고 그것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로베리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마법을 펼치시면 됩니다.”


“그것뿐인가요?”


“예.”


로베리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른 마탑주들을 둘러보았다.


“유진님이 마법을 펼치시면, 여기 와주신 고명한 마법사님들이 유진님의 마법을 살펴 볼 겁니다.”


“본래는 연구해 온 주제와 논문들도 살펴야 하는데. 그대는 논문은커녕 연구도 해본 적 없을 테니.”


청탑주의 이죽거림에 로베리안의 눈이 얇아진다. 언짢은 것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마련한 자리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조건 호의뿐인 대우는 받지 못하리란 각오는 했다. 유진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나를 끌어냈다.


심장의 별이 빛을 발한다. 방 안의 모든 마법사들이 차분한 눈으로 유진을 응시한다. 그들의 눈은 유진의 육체가 아닌, 몸속의 마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주목했다.


본신의 능력으로 그를 볼 수 없는 호네인은 얇은 안경을 콧등에 걸쳤다. 이윽고 호네인은 입술을 벌려 감탄을 터트렸다.


“...으음...”


청탑주의 표정이 바뀐다. 과연, 유진은 서클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전히 코어만 활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세 개의 별. 라이언하트 본가의 백염식. 별이 서로 공명하며 마나를 이끌고, 증폭시킨다. 새하얀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는다. 거기까지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백염식이 운용되는 순간에 코어의 움직임이 바뀐다. 공명하던 별들이 서로 맞물려 회전을 시작한다. 그렇게 세 개의 별은 하나의 원이 된다.


‘서클.’


‘코어와 서클을 분리하지 않았어. 복수의 코어를 공명시켜 하나의 서클로 만들었다...’


유진이 만들어낸 서클은 하나. 그러나 저것이 단순한 1서클이라고 생각하는 마법사들은 한 명도 없었다.


‘마나의 밀도가... 말도 안 되는 군.’


‘몇 년 동안 마나를 수련해 왔다지만... 아니, 그래서 더 말이 안 돼. 유진 라이언하트가 마나를 수련한 기간은 고작 4년.’


‘무도의 자질은 몰라도, 마나를 다루는 자질을 타고나기는 했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청탑주의 눈이 싸늘하게 식는다.


‘마나를 잘 다루는 것과 마법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


마나를 잘 다룬다고 해서 대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과, 올마스터라는 칭호가 붙는 것은 그가 무도뿐만 아니라 마법에도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코어와 서클을 병행하는 것은 마나의 낭비가 극심하다. 세상에는 마검사라며 이름을 떨치는 이들이 많지만, 그런 마검사의 무도와 마법을 따로 때어놓으면 경지가 애매한 것이 대부분이다.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로 300년. 라이언하트 본가 출신의 실력자는 여럿 있었으나, 그들 중에서 무도만큼 마법에 성취를 보인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코어의 마나로 검기와 강기를 만들고, 무기를 잘 다루는 자질은 무한한 깊이를 가진 마법 앞에서는 대단한 이점이 되지 못한다.


그건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역사상 이름을 떨친 대마법사들 중에서 직접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것에 능했던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마나를 다룬다는 것은 같을 지라도, 무도와 마법은 결코 같을 수 없다.


하나씩.


유진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마법들을 발현해냈다. 백염식의 불꽃이 바람의 칼날로 바뀌었다가 시뻘건 화염구가 된다. 화염구가 흩어지는가 싶더니 수십 개의 탄환이 되고, 탄환이 하나로 뭉쳐 길쭉한 칼날이 된다.


마법의 변환 과정에서 유진은 단 한 번도 영창을 읊지 않았다. 마법이 무너지는 과정에서도 마나의 낭비는 없었다. 처음에 마법을 일으키는 것에 사용된 마나가 모조리 다음 마법에 사용된다.


“...마법과 검기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습니까?”


잠자코 지켜보던 녹탑주가 입을 열었다. 유진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직접 보여주었다. 그는 마법의 변환을 멈추지 않고 오른 손을 앞으로 뻗었다.


검이나 다른 무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백염식의 불꽃이 한 손에 집중되더니, 순수한 마나의 칼날이 되었다. 그 모습은 마법사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서클이 무너지지 않는다. 코어가 서클을 대신하면서, 코어로서도 확실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쯤 되니 청탑주의 표정도 굳을 수밖에 없었다.


전혀 다른 규격의 부품들로 정밀한 기계장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겉모습만 그럴 듯한 것이 아닌, 기능까지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가?


설령 가능할지라도, 마법에 입문한지 몇 달도 되지 않은 소년이 그를 해낼 수 있는 건가?


‘무영창.’


암산만으로 술식을 연계하고, 의지만으로 시동하고 있다. 익힌 마법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탑주가 낮은 신음을 흘린다. 로베리안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으음...”


“저도 어린 시절에는 신동 소리를 숱하게 들었습니다만, 마법에 입문한지 두 달 남짓했을 때에 저만큼 마법을 ‘잘’ 쓰지는 못했습니다.”


로베리안 뿐만이 아니다. 모든 마탑주는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어왔고, 마법에 대해 넘치는 열정과 재능을 자부해 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유진의 나이와 경력에 저만큼 마법을 잘 다루지는 못했다.


“...논의가 필요할 것 같소.”


녹탑주가 중얼거렸다. 청탑주도 뭐라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야겠지요. 유진님, 잠시 밖에 나가 주시겠습니까?”


“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층에 가실 수는 없겠지만... 1층에도 여러 볼거리가 있으니, 잠시 그를 구경해 주십시오.”


유진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방을 나갔다.


그 즉시 청탑주가 로베리안을 돌아보았다.


“적탑주. 그대가 아무런 지도도 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소?”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유진님에게 아무런 지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진 라이언하트는 누구의 지도도 받지 않고 독학만으로 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잖소.”


“책은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오. 적색마탑이 보유하고 있는 마도서의 질을 폄하할 생각은 없소만, 유진 라이언하트가 읽은 마도서들이라고 해 봐야 입문용 마법서들 뿐이었다고 하지 않았소?”


청탑주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입문 마법서만 독파해서... 저만큼 마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가?”


“라이언하트잖소.”


입을 연 것은 아롯의 왕세자인 호네인이었다. 그는 두 눈을 빛내며 유진이 닫고 나간 문을 응시했다.


“키옐 제국의 라이언하트.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 그들의 ‘피’가 얼마나 우수한지는 대륙의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니오?”


“...으음...”


“허나 왕세자님. 유진 라이언하트는 본가의 피를 잇지 않은 양자입니다.”


“그렇다 하여 그의 성이 라이언하트가 아닌 것은 아니잖소. 방계 출신일지라도 유진 라이언하트의 천재성은 틀림없는 진짜요.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보였소.”


호네인은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소? 나는 유진 라이언하트에게서 감출 수 없는 천재성을 느꼈소. 그가 아크리온에 들어갈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너무 어립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마법사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천재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 천재성과는 별개로 나이도 어리고, 마법의 경지도 아직은 낮습니다.”


“아직은.”


흑탑주, 발자크가 말을 받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 생각합니다. 지금 유진님이 아크리온에 출입하게 된다면, 그 분의 마법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굳이 그런 편의를 봐줄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녹탑주가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어린만큼 서두를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아크리온의 위신도 있으니, 향후 몇 년 동안 적탑주가 직접 지도하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의 경지에 오른 뒤에 아크리온에 출입시켜도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미룰 필요는 없다 생각하오.”


호네인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늘 보여 준 자질이라면, 별다른 지도를 받지 않아도 유진 라이언하트는 뛰어난 마법사가 될 거요. 그의 마법식을 서클로 구분해야 하는가는 의문이오만... 굳이 구분한다면, 성인이 되기 전에 무리 없이 4서클의 마법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오.”


“적어도.”


이번에 입을 연 것은 유일한 여자인 백탑주였다. 그녀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라이언하트 꼬마가 펼친 마법은... 1서클 마법이기는 했어도 위력은 1서클을 아득히 웃돌고 있었어요. 다들 그건 느끼셨잖아요?”


“...으음...”


“마나의 순도, 배열의 정교함... 특히 놀라운 것은 마나의 결속력이었죠. 직접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4서클 수준의 디스펠은 꼬마의 마법을 해체하지 못할 거예요.”


“동감합니다.”


로베리안은 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투자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호네인과 시선을 나누던 궁정마법사가 운을 땠다.


“17살, 뛰어난 자질, 라이언하트 본가의 양자. 나이가 어리고, 실력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어차피 나이와 실력이 충분해진다면 아크리온에 들어갈 자격이 충족될 텐데, 미리 출입증을 발급해 준다면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럴 필요가 있소? 어차피 라이언하트와는 충분히 우호적인 관계인데.”


“라이언하트 가문이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직접적인 호의를 베푸는 것이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봤자 가주는 될 수 없을 텐데?”


녹탑주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중얼거린다. 그러자 발자크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그렇겠죠.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유진님은 양자니까요. 아마... 가주는 본가의 쌍둥이 중 한 명이 될 겁니다.”


“시안 라이언하트.”


“예. 계승서열로는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우위에 있지만, 이번의 불미스런 일도 있고... 실력도 한참 부족하니, 승계경쟁에서는 밀려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가주가 되지 못할 지라도, 그가 본가에서 가진 입지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라이언하트의 둘째 부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오히려 가주가 될 수 없기에, 유진 라이언하트에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궁정마법사장은 차분한 눈으로 마탑주와 길드장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유진 라이언하트는 본가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혼인을 맺고, 자식을 낳는다면 본가에서 독립하는 것이 라이언하트의 가법이죠.”


“그때 아롯에 초빙하고 싶다는 거요?”


“어차피 실력은 충분해 질 테니, 미리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꼭 독립하지 않아도 호의를 베풀 가치는 충분할 겁니다. 가주가 되지 않는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것이고, 아롯의 호의를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테니까.”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발급하는 건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던 것은 세 명이다. 청탑주, 녹탑주, 마법사 길드장.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그들은 조금씩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유진이 보여 준 천재성은 파격적이었다. 순수한 호기심도 든다. 마법에 입문한지 몇 달도 안 된 상태임에도 저만큼이나 뛰어난데, 아크리온의 위대한 마법을 접한다면... 대체 얼마나 발전할 것인가? 독학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스승의 밑에서 마법의 지도를 받는다면...


“...4년 전의 혈계식에서도 압도적인 기량을 보였다고 들었습니다.”


발자크는 닫힌 문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자질은 라이언하트의 본가도 인정한 것이죠. 그 상태에서 아롯의 지원을 받는다면...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을 논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허허...”


그 말에 녹탑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그를 입에 담는 자가 흑색마탑주라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군. 발자크 루드베스, 그대의 주장은 온전히 그대의 것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와 계약을 맺은 유폐의 마왕. 그의 입김이 더해진 것 아닌가 의문이 들 뿐이외다.”


“하하하.”


발자크는 안경을 내려놓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유폐의 마왕님은 헬무드의 일만으로도 바쁘십니다. 게다가... 유폐의 마왕님의 뜻을 대리하고자 했다면, 이런 식으로 주장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다 강경하게, 힘으로 밀어붙였겠죠.”


“힘으로?”


녹탑주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녹탑주 뿐만이 아니었다. 발자크는 자신에게 꽂히는 적의를 흘려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표현이 과격하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만, 마왕님의 뜻은 제게는 그 무엇보다 절대적입니다.”


“논점을 벗어나지 말죠.”


백탑주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서로의 주장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차라리 다수결로 하는 것이 어때요? 논쟁이 길어질수록 바깥의 꼬마가 지루해 할 테니까요.”


“그게 낫겠군.”


호네인도 웃으며 동의했다.


“나는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발급하는 것에 찬성하오.”


아크리온


아크리온의 1층. 이 넓은 공간의 한쪽 벽면에는 아롯과 아크리온의 역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세냐와 관련 된 이야기도 제법 많았다.


이 왕립도서관은 지고의 가치를 가진 마법서를 여럿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법의 역사에 굵직하게 이름을 남긴 전설적인 대마법사들의 자취를 층별로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도서관이라더니 박물관이랑도 비슷하네.’


유진은 뒷짐을 지고 서서 벽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렸다. 유진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역시 세냐에 관한 것이었다. 세냐의 자취가 보관된 층은 12층부터 14층. 아크리온에 이름을 올린 마법사들 중, 세냐만이 유일하게 3개의 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만큼 아롯의, 아니, 마법의 역사에서 ‘세냐 메르데인’이라는 이름은 커다란 비중을 갖는다. 위대한 베르무트와 함께 마왕과 대적한 대마법사.


정작 베르무트는 마법의 발전에 별다른 이바지를 하지 않았으나, 세냐는 아롯에 정착하여 긴 시간 녹색마탑주를 지냈고, 서클 마법식을 정립하여 수많은 마법사들이 두루 익힐 수 있도록 전파했다.


‘열심히도 살았구만.’


유진은 세냐의 행적을 읽어 내리며 씁쓸히 웃었다.


‘안 어울리게 말이야.’


평범하게, 남들처럼 결혼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살다가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세냐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적색마탑에 있을 적에 세냐에 관한 서적도 여럿 찾아보았는데, 백 년 가까이 아롯에서 살았으면서 그 흔한 염문 하나 달고 다니지 않았다.


현명한 세냐.


아롯의 여러 서적들은 세냐에게 다른 수식어를 붙인다.


구도자(求道者).


평생을 혼자 살고, 술이나 사치스런 생활을 하지도 않았으며, 삶의 대부분을 녹색마탑과 저택에서만 지냈단다. 세 명의 제자들과도 마탑의 바깥에서는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고, 연회 같은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단다.


그러한 세냐의 일화는, 유진이 기억하는 세냐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하멜이 기억하는 세냐는 술을 좋아했다. 아니스만큼은 아니지만, 여행하는 내내 세냐는 아니스의 성수를 몰래 훔쳐 마시다 구박을 듣곤 했었다.


세냐는 노는 것도 좋아했다. 그녀는 싸구려 주점의 용병들과 술을 마시며 떠드는 것을 좋아했고,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 세냐가 백 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구도자라 불릴 만큼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다니. 유진은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꼬마야.”


찡그린 눈으로 세냐의 기록을 반복해 읽던 중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백탑주가 곱슬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웃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거야? 관심있는 마법사라도 있어?”


“이야기는 끝난 건가요?”


유진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백탑주 너머의 방에서는 다른 마법사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응, 끝났어. 너무 오래 걸린 건 아니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짧게 끝났네요.”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려면 오늘 하루로도 부족했을 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건데요?”


“다수결로 했지.”


백탑주가 히죽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게 출입증을 찬성하는 사람이 다섯. 반대하는 사람이 둘. 중립이 하나.”


“생각보다 많네요.”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하고 누가 중립인지는 안 궁금해?”


“찬성하는 사람이 더 많으면 됐죠. 그럼 저도 위층에 가볼 수 있는 건가요?”


“응, 갈 수 있어. 다수결로 결정했으니까 말이야. 아, 너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냥 말할래. 중립은 나야.”


그 말에 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호의적으로 말을 걸어 오길래 당연히 찬성한 줄 알았는데.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탑주는 그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어차피 결과는 찬성이 많은 분위기였고. 나 하나 중립에 선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으니까. 아, 그래도 신경 쓰지 마. 비록 중립에 섰다지만, 네가 아크리온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거든.”


“무조건 찬성하지도 않으신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사실 애매하다고 생각해. 자질은 넘치고, 가능성도 충분하고. 하지만 네 나이가 어린 것은 사실이잖아?”


백탑주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녀는 유진에게 살짝 몸을 기울이며 나직한 소리로 소곤댔다.


“그리고 말이야. 결정적인 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친 의견을 냈다가는 귀찮은 말싸움에 휩쓸려 버리거든. 쟤들 표정 보이지? 다들 꽁해 있잖아... 일단 다수결로 하게 되었고, 결론도 나왔지만. 쟤들은 자리를 옮겨서 다시 논쟁을 벌일 거야.”


“백탑주님은?”


“나는 중립이니까 상관없어. 뭔 소리를 들어도 중립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해뒀거든.”


백탑주는 기울였던 몸을 일으키더니, 다른 마법사들을 향해 보란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에 반응을 보인 것은 꼬장꼬장한 얼굴의 청탑주 뿐이었다. 그는 백탑주를 향해 질색이란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아크리온 밖으로 나가버렸다.


“청탑주는 찬성했어.”


“...네?”


“네 출입증 말이야.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나 봐.”


유진은 그 말을 의외라고 생각했다. 처음 방에 들어갔을 때부터 노골적으로 불만을 묘했던 것은 청탑주였는데, 마지막에는 의견을 바꿨다니.


“그럼, 짜자잔. 반대한 두 명은 누구일까요?”


“안 궁금하다니까요.”


“녹탑주와 마법사 길드장이야.”


“안 궁금하다니까 왜 말해주는 거예요?”


“너 정말 17살 맞아? 뭐이리 반응이 싱거워. 막 발끈하고 분하고, 그러지는 않아?”


“발끈하고 분할게 뭐 있어요?”


“감히 라이언하트 본가를 무시해? 막 이런 선민의식 같은 거 없어?”


“없어요.”


“결국 방계 출신이라서?”


“아, 그런 거 아니고. 뭔 놈의 선민의식이야? 타국까지 와서 그딴 헛지랄에 취하는 게 얼마나 쪽팔린데.”


“네 형 얘기지?”


백탑주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백탑주를 노려보았다.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에 대해서는 유진도 안다. 당대 제일의 정령사. 역사상 최초로 두 명의 정령왕과 동시에 계약을 맺은 장본인. 정령마법 뿐만 아니라 일반 마법으로도 대마법사라 불릴 만큼의 경지에 오른 위대한 마법사.


“자꾸 듣기 싫은 말만 하시네요. 저한테 뭐 악감정이라도 가지고 계신 거예요?”


“아냐.”


“그럼 다른 마법사들한테 불만이 있으신가?”


“설마. 너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이간질이라 생각하니? 에이, 그런 거 아니야. 너한테 이간질해서 뭐해?”


“그럼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흥미로워서.”


멜키스는 방긋 웃으며 유진의 허리춤, 폭풍검 위니드를 가리켰다.


“나 그 검이 뭔지 알아. 라이언하트의 보물. 폭풍검 위니드. 바람의 정령왕의 가호가 내려진 검이라며?”


“네. 그런데요?”


“네게도 흥미가 있지만, 나는 그 검에도 큰 흥미를 가지고 있거든. 예전부터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하고 싶었는데... 어찌나 잘난 분이신지, 아무리 불러도 나와 주지 않더라고.”


“제가 알기론 백탑주님은 두 명의 정령왕과 계약하신 것으로 아는데. 두 명으로도 부족하신 거예요?”


“당연히 부족하지.”


멜키스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눈으로 위니드를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빼앗으려 들 것 같았다.


“나도 열심히 해봤거든? 번개의 정령왕이랑 땅의 정령왕한테 부탁도 해 봤는데, 바람의 정령왕은 그 누구와도 계약하지 않는다더라. 그래서 라이언하트 본가에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냈었지. 무슨 답신이 돌아왔는지 알아?”


“저 올라가도 되나요?”


“본가의 보물은 절대로 외인에게 빌려줄 수가 없대. 치사한 자식들, 누가 보면 내가 위니드를 먹고 잠적이라도 할 줄 알겠어. 그냥 계약의 촉매로 써보겠다는데, 뭐 그리 철벽을 치나 몰라.”


“저기요. 아무리 말씀하셔도 저는 백탑주님한테 위니드를 빌려드릴 생각이 없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저도 위니드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주님의 허락 하에 빌리고 있을 뿐이라고요.”


“괜찮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야. 그냥 잠깐만 빌려주면 돼.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걸? 길어야 하루. 원한다면 네가 참관해도 좋고.”


사실 그것은 유진에게도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베르무트는 죽었다. 세냐는 살아있는 모양이지만, 대화가 가능한 상태도 아닌데다 세상 어느 곳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스? 순례자가 된 그녀의 행적은 200년 전부터 끊겨 있고, 모론 그 새끼도 행적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금 시대에서 300년 전, 유폐의 마왕성에서 있었던 진말을 아는 것은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 뿐이다. 물론 템페스트는 자신도 아무 것도 모른다며 잡아 땠지만, 유진은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개새끼, 엉덩이는 존나게 무거워서 불러도 나오질 않던데.’


4년 동안 몇 번이나 템페스트를 불러보았다. 백염식의 별이 늘 때마다, 보유한 마나가 늘어날 때마다. 계약할 실프들도 여러 번 닦달해 보았지만, 템페스트는 단 한 번도 부름에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지금 내가 가진 마나로는 템페스트를 불러낼 수 없어.’


하지만 멜키스는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자격도 충분하지 않은가. 대륙에 이름을 떨쳤던 정령사 중에서 두 명의 정령왕과 동시에 계약을 맺은 것은 멜키스가 유일했다. 여태까지는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지만, 위니드를 촉매로 삼는다면 템페스트가 반응을 보일 지도 모른다.


“꼬마야, 어디 가니?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들을 가치가 없는데 뭐하러 듣고 있습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유진은 멜키스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좋다고 덥석 받는 것보다는 이리저리 밀고 당기며 뭐라도 더 뜯어먹기 위해서였다.


“어디 가냐니까?”


“위로 갑니다. 출입 허가 떨어졌다면서요? 뭐 출입증의 실물이라도 있어야 하나요?”


“저기서 달라고 하면 줄 거야.”


의외로 멜키스는 곧바로 알려주었다. 유진은 그녀가 가리킨 문으로 향했다.


아크리온에도 도서관장은 있다. 말이 관장이지, 위층에 출입하지도 못하고 사역마만 관리하는 공무원이지만 말이다. 그 늙수그레한 마법사는 노크 소리에 곧장 문을 열어주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출입증의 발급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진이 가진 신분증의 뒷면에 아크리온의 인장이 찍혔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만약 출입증 없이 올라가면 어떻게 되나요?”


“죽습니다.”


관장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로 대답했다.


“우선 아크리온의 요격마법이 전신에 꽂힐 것이고, 그것으로 죽지 않는다면 아크리온의 모든 사역마가 즉살태세를 갖추고서 덤벼들 겁니다. 그 전에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갖는 마법사님들이 출동하시겠지만요.”


“그거 알아? 이곳의 사역마들은 아크리온에 이름을 올린 대마법사들이 남긴 거야.”


멜키스는 유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탐욕스런 눈으로 위니드를 힐긋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롯을 건국한 마법왕은 물론이고, 전투마법의 아버지라 불렸던 배틀메이지, 그리고 현명한 세냐의 사역마도 남아있지.”


“...”


“우리 꼬마가 반응이 참 싱겁네. 세냐님에게 엄청 관심있는 것 아니었어?”


멜키스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물었다.


“아까 다 봤단 말이야. 너 세냐님의 기록만 몇 번씩 반복해서 읽고 있었잖아. 아롯에 처음 온 날은 곧장 세냐님의 저택을 관람했고, 저번에는 메르데인 광장에서 방계 친구를 만났었잖아.”


“뭐 그리 잘 알고 계세요.”


“우리 꼬마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너 엄청 유명해.”


“당연히 유명하겠죠.”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너 성격이 좀, 보기와는 다르게 재수가 없구나.”


“보기와 다르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이에요?”


“얼굴은 잘 생겼잖아.”


“얼굴값 한다고 생각해 주세요.”


“얘가 좀이 아니라 많이 재수 없네.”


“그런데 왜 자꾸 저를 꼬마라고 부르는 거예요?”


“꼬마니까 꼬마라고 부르지. 너 17살이라며? 어휴, 젖비린내 난다 얘.”


“제가 지금 머릿속에서 무슨 말이 맴도는데, 이걸 내뱉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


“그냥 안 할게요. 초면에 너무 무례한 것 같으니까.”


할머니 냄새가 난다고 할 수는 없잖은가. 멜키스는 유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괜히 제 몸에 나는 냄새를 킁킁거렸다.


“아무 냄새 안 나.”


“저도 젖비린내는 안 나요.”


“그래서 위니드는 언제 빌려줄 거니?”


“안 빌려줘요.”


유진은 뒤따라오는 멜키스를 무시하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단이라도 올라가야 되는 건가 싶었는데, 저기 구석에 엘레베티어가 있었다.


“문 옆에 구멍 보이지? 거기에 신분증 꽂으면 문이 열릴 거야. 12층 갈 거지?”


“네.”


“거 봐, 세냐님 엄청 좋아하는 거 맞잖아.”


“안 좋아해요.”


“꼬마가 어려서 그런가, 이상한 것에 부끄럼이 많구나. 괜찮아, 괜찮아. 이 누나는 다 이해해. 애들은 원래 그렇잖니? 특히 남자애들.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 못하고, 귀엽다니깐.”


“누나는 좀 너무하지 않아요?”


“너 지금 내 나이 가지고 그러는 거야?”


“제가 알기론 멜키스님의 나이가 예순은 넘은 거로 아는데.”


전생의 나이를 더해도 멜키스가 더 많다. 물론 멜키스의 겉모습은 많아봐야 이십대 중반으로 보인다만, 그렇다고 해서 나이까지 어려지는 것은 아니잖은가.


“마음은 풋풋한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니?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누나라 불러도 좋아.”


유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에 신분증을 넣으며 시답잖은 생각에 빠졌다.


만약 세냐가 죽지 않고 쭉 살아있다면, 그녀의 나이는 300살이 넘는다.


‘만나면 할머니라고 불러야겠어.’


할머니인 정도가 아니라 언데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세냐는 쌍욕을 퍼부으며 유진을 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유진은 씁쓸히 웃으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멜키스는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지는 않았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바깥에서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 와.”


“설마 기다리고 계실 건 아니죠?”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란다. 사실 같이 가보고 싶은데, 으음... 내가 같이 있으면 집중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당연히 그러겠죠.”


“응, 그러니까 안 갈래. 진리의 편린과 마주할 때의 충격은... 후후, 처음에 가장 강렬한 법이니까.”


멜키스는 쿡쿡 웃으며 유진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기저귀라도 차고 가는 것이 좋을 걸?”


“왜요.”


“지릴 수도 있거든.”


괜히 물어봤다. 유진은 인상을 팍 쓰며 12층의 버튼을 누르고, 즉시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간다. 12층,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과장 좀 보태어서 눈 한 번 깜빡인 시간에 12층에 도착했다.


“세냐의 전당(殿堂)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을 때.


자그마한 소녀가 유진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


유진은 입술을 반쯤 벌리고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녀는, 유진이 기억하는 세냐를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세냐의 전당


유진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는 동안, 눈앞의 소녀는 커다란 모자를 벗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 어어.”


“저는 세냐의 전당을 관리하고 있는 사역마입니다.”


소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가 유진의 기억을 뒤흔들었다.


전생에는 서로가 다 큰 어른이 되었을 때 만났으니, 유진은 세냐의 어린 시절 따위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눈앞의 사역마에게서 세냐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연보라색 머리카락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얄미운 미소. 나이가 한참은 어리지만, 사역마는 세냐의 모습을 쏙 빼닮아 있었다.


“...사역마?”


“네!”


“...그... 어...”


너 세냐 아니냐?


유진은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 욕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은행 앞 광장에서 보았던 세냐의 환영. 그를 생각하면 눈앞의 사역마는 절대로 세냐 본인이 될 수 없었다.


“...내가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유진은 머뭇거리며 사역마를 살펴보았다. 저 쬐끄만 사역마의 키는 유진의 허리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덕분에 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사역마를 내려보아야 했다.


“세냐님은 저를 ‘메르’라고 부르셨어요.”


“설마 그 메르라는 이름이 메르데인의 메르냐?”


“네! 영광스럽고 멋진 이름이죠?”


메르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지만,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메르데인. 세냐의 성. 제 모습을 쏙 빼닮은 사역마를 만들고서, 자기 성씨에서 두 글자를 때어놓은 이름을 붙이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그,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사역마가.... 어... 너처럼 인간이랑 비슷한가?”


“저는 특별하죠.”


메르가 턱을 꼿꼿이 치켜들며 대답했다.


“절 만드신 분은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 현명한 세냐니까요. 다른 층의 사역마들은 저처럼 특별하지 않아요.”


“...그래?”


“네! 유진님은 다른 층에는 아직 가보지 않으신 거죠?”


“너 내 이름 어떻게 알아? 너 사역마 아니지?”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서 구라질이야. 유진은 눈을 부릅뜨고서 메르를 노려보았는데, 오히려 메르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님. 방금 1층에서 아크리온에 이름을 등록하셨잖아요.”


“...그랬지.”


“저 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든 사역마들은 아크리온의 마법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어요. 누가 아크리온에 들어오고 나가는지는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네가 사역마 중에서 특별하다고?”


“네!”


메르가 다시 턱을 꼿꼿이 세우며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층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그곳의 사역마들은 저처럼 회화에 능통하지 않아요. 처음 입력 된 시스템만 수행하다가, 외부의 명령에 반응할 뿐이죠.”


“...그럼 너는?”


“저는 주인님이신 세냐님의 인격을 베이스로 해서 만들어졌어요.”


“살아있는 생명을 만드는 건 마법의 금기 아닌가?”


유진은 몇 년 전의 혈계식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왜 살아있는 생명은 못 만드는 건가요?


그때의 이오드는 혈계식에 아무런 의욕을 보이지 않았지만, 로베리안의 마법에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었다. 그만큼 마법에 흥미를 가졌던 주제에, 4년이 흐른 지금은 쓰레기로 변해버렸지만 말이다.


“전 살아있는 생명이 아닌 걸요.”


메르가 거리낌 한 점 없는 투로 말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살아있는 존재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영혼은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제 육체는 세냐님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제 정신은...”


메르는 벗었던 모자를 다시 쓰고, 고개를 돌려 뒤를 뒤편을 보았다. 그제야 유진도 메르에게서 시선을 때어 저 앞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빛의 구체가 둥실 떠있었는데, 여러 개의 고리가 빛의 구체를 휘감고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저기에 있죠.”


메르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멍하니 그 구체를 보았다. 저런 조형물은 처음 본다.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운 인상을 전해주는데, 유진의 기감은 저 조형물에게서 터무니없이 거대하고 정교한 마나의 배열을 느꼈다.


“...저게 대체 뭐지?”


“좋은 질문이에요!”


메르가 가슴을 활짝 편다.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대며 고개를 뒤로 기울이는데, 얼굴보다 훨씬 큰 모자가 덩달아 함께 기울어졌다. 허나 떨어질 것 같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저런 동작에 익숙한 것 같았다.


“저게 바로 세냐님이 평생을 다뤄 오신 마법의 정수. ‘위치 크래프트’입니다!”


자부심 가득한 외침. 유진의 입은 다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위치크래프트. 세냐가 은거하기 직전에 집필을 끝냈다는, 상중하 세 권으로 나뉘어졌다는 마도서.


“저게 어딜 봐서 책이야?”


“책이 책처럼 생겼다는 것이야말로 낡아빠진 편견이죠.”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유진님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요. 마탑주들도 이해하지 못한 세냐님의 마법을 유진님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넘치는 자부심. 자신감 넘치는 얄미운 미소. 그러면서도 상대를 은근히 깔보는 태도. 세냐의 인격을 베이스로 삼았다더니... 과연, 메르는 재수없고 얄밉다는 점에서 세냐를 쏙 빼닮아 있었다.


“...넌 세냐... 님의 인격을 베이스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했지?”


“네!”


“그럼... 어... 세냐님은 마지막까지 너랑 성격이 비슷했나?”


유진은 초상화로 보았던 세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답지 않게 푸근하고 자애로웠던 미소. 유진이 기억하는 세냐는 좀처럼 그런 미소를 지었던 적이 없었다.


“달랐죠.”


메르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세냐님은 훨씬 고상하고, 품위가 넘치셨어요. 잘 웃지도 않으셨고, 마법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것에만 몰두하셨죠.”


“...그런데 네 성격은 왜 그 모양이야?”


“제 성격이 뭐 어때서요?”


“세냐님의 인격을 베이스로 삼았다고 한 주제에, 세냐님과 전혀 다르잖아.”


“당연하죠. 제 베이스가 된 인격은 세냐님의 유년기 시절의 인격이거든요.”


그 얄미운 계집애, 어릴 때에는 훨씬 더 얄미웠다는 것인가.


“...네 정신이 저기에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이야?”


“으으음... 난감한 질문이네요. 배움이 짧은 유진님을 어찌 이해시켜야 할지...”


“그럼 알기 쉽게 말해.”


“저는 세냐님이 만드신, 위치 크래프트의 인공지능 같은 거예요.”


확실히 그 말은 이해하기가 쉬웠다.


“제 정신은 위치 크래프트의 마법들로 이뤄져 있고, 제 존재 목적은 위치 크래프트를 수호하고 관리하는 것이에요. 200년 전부터는 세냐님의 명령을 따라, 이 전당을 관리하고 있고요.”


유진은 뭐라 말하지 않고 메르를 지나쳤다. 등 뒤에서 메르가 총총걸음으로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왜 세냐님은 유년기의 인격을 베이스로 삼은 것이지?”


“추억하기 위해서죠.”


“추억?”


“유진님은 아직 어려서 모르시겠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 힘들어 해요. 추억은 분명하게 남아 있지만, 그때의 자신이 어떤 ‘인격’으로 그 추억을 쌓았는지는 확실히 떠올릴 수 없죠.”


“...그건 그렇지.”


“세냐님은 자신의 유년기를 추억하기 위해 제 인격을 유년기의 것으로 제한하셨어요. 그 분의 마법은 머나먼 기억까지 불러낼 수 있을 만큼 위대하니까요.”


유진은 위치 크래프트의 앞에 섰다. 이렇게 가까이 와보니 그 위용이 대단했다. 여러 개의 고리 안쪽에서 빛나는 구체. 무려 수백 년 동안이나 보존되어 온 마법의 정수.


“...그렇다면 너는, 세냐님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나?”


“설마요.”


메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세냐님의 인격을 베이스로 삼았지만, 그 분의 기억까지는 공유하고 있지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제 존재 자체가 악용될 수도 있잖아요.”


“그야 그렇지.”


세냐는 마법의 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진 마법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메르가 세냐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아롯의 마법사들은 메르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해체해서 마법에 관한 기억을 모조리 뽑아내거나. 아니면 새로운 마법을 연구하도록 써먹었겠지. 마법사들이 세냐를 아무리 존중한들, 눈앞에 ‘저런 것’이 있다면 해체해 뜯어보고 연구하고 싶어 하는 것이 마법사란 인종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그럴 수 없거나.


그럴 필요가 없거나.


이미 했거나.


유진은 메르를 빤히 보았다. 위치 크래프트의 인공지능. 유진이 이해하기에, 메르는 그 존재 자체가 터무니없었다. 로베리안이 말한 대로다. 그는 위치 크래프트의 상권을 처음 읽었을 때, 자신이 평생 익혀 온 마법이 어린아이 소꿉장난이라 자조했었다고 말했다.


‘확실히, 일반적인 마법의 범주는 아득히 넘어섰어.’


지릴 지도 모르니 기저귀를 차고 가라 했던가? 유진은 멜키스의 짓궂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위치 크래프트의 원본은 오직 아크리온에만 보관되어 있다. 아크리온에 출입하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위치 크래프트를 읽을 수 있어.’


메르의 정신과 존재의 비결은 모조리 위치 크래프트의 안에 있으니, 굳이 해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너는 세냐님이 왜, 어디로 은거했는지 모르겠지?”


“당연히 모르죠. 세냐님의 은거는 갑작스럽고 은밀하셨어요. 그 분의 제자들, 저택의 시종들, 그리고 저도 세냐님의 은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요.”


“정말?”


“유진님. 200년 동안 제가 몇 번이나 그런 질문을 들었을 것 같아요?”


메르의 표정이 바뀐다. 그녀는 더 이상 가슴을 활짝 펴지도, 어깨를 으쓱거리지도, 자부심 가득한 얄미운 미소를 짓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빛 한 점 없이 칙칙한 눈동자. 찌푸린 눈썹과, 한쪽만 비틀린 입술.


그 미소도 소름이 끼칠 만큼 세냐와 닮아 있었다.


“정말 셀 수 없이 많이 들었어요. 저는 세냐님이 은거하기 훨씬 전부터 아크리온에 있었다고요. 그런데도 아롯의 국왕과, 당시의 마탑주들, 마법사 길드장, 그 외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절 붙들고 세냐님의 행방에 대해 물어봤어요.”


그런가.


“저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대답했었죠. 하지만 좀처럼 믿어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요. 주제도 모르고, 능력도 부족한 놈들이 위치 크래프트에 접속해서 제 기억을 헤집었죠.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수십 년에 한 번씩은 다시 찾아보겠다며 그 짓을 반복하고 있다고요.”


이미 했던 것이다. 세냐가 은거한 후부터, 아롯의 마법사들은 몇 번씩이나 위치 크래프트와 메르의 정신을 헤집었다.


“하지만 저는 세냐님의 은거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것도 몰라요. 제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세냐님은 은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으셨어요.”


“괜한 질문을 했어.”


“알면 됐어요.”


유진은 위치 크래프트에서 물러섰다. 저것에 담긴 세냐의 마법을 면밀히 살펴 보고 싶었지만, 솔직히 지금은 봐본 들 제대로 이해할 자신이 없었다.


“...아크리온에 공개된 것은 상권 뿐이라고 했지?”


“네.”


“다른 두 권도 여기 담겨 있나?”


“아뇨.”


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니, 저것은 위치 크래프트의 원본이 틀림없지만. 저 안에 담긴 것은 상권 뿐이에요. 다른 두 권은 세냐님이 가지고 가셨어요.”


“뭐?”


“으음... 저 원본에서 중권과 하권을 ‘추출’하고, 상권만 담긴 원본을 아크리온에 기증하신 거죠. 덕분에 제가 엄청 고생했던 거죠. 다들... 세냐님의 행방뿐만 아니라, 다른 두 권을 찾아내고 싶어 했으니까요.”


메르는 그렇게 말하며 유진의 곁에 다가왔다.


“유진님은 세냐님에 대해 관심이 참 많으시네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유진님은 정통파 마법사도 아니잖아요? 저는 수백 년 동안 아크리온을 나가지도, 나갈 수도 없는 몸이지만. 그래도 라이언하트 가문에 대해서는 알아요.”


메르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 보았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가문. 그 후손을 실제로 보는 것은 저도 처음이라, 조금 신기하네요.”


“신기할 것까지야.”


“아니, 정말로요. 제가 알기로, 세냐님은 아롯에 의탁하신 후로 단 한 번도 라이언하트 가문과 교류하지 않으셨거든요. 베르무트님과도 만난 적 없으시고.”


그건 유진도 알고 있다. 300년 역사를 가진 라이언하트 가문은, 이상하리만큼 세냐나 아니스와는 교류를 갖지 않았다.


모론도 마찬가지였다. 그 등신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베르무트가 라이언하트 가문을 세운 후부터는 단 한 번도 베르무트를 찾아오지 않았단다.


그나마 모론이 왕위에 물러선 후부터는 놈의 후손, 북방 루하르 왕국의 왕족들과 라이언하트 가문이 조금씩 교류를 시작했지만, 선조의 인연과 유대를 생각하면 루하르의 왕족과 라이언하트의 교류는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유진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베르무트가 사교성이 한참 떨어지는 새끼였기는 해도, 아니스는 베르무트를 세상을 구할 용사라며 추종했었다. 모론도 베르무트를 경외하며, 놈의 앞에서는 등신짓을 자제하곤 했었다.


그런데 헬무드에 돌아온 후부터는 교류하지 않고, 서로 있는 둥 마는 둥 지냈다니.


‘...라이언하트의 기록에 따르면, 가문을 세운 후로 교류가 없었어. 그러다가 다시 만난 것은... 베르무트의 장례식 때뿐이야.’


키옐 제국의 국장으로 치러진 베르무트의 장례식. 그때 아니스는 신성제국의 성녀로서 추모사를 읊었고, 북방 루하르 왕국의 국왕인 모론은 요란한 왕관을 벗고서 직접 베르무트의 관을 옮겼더랬다. 아롯의 녹색마탑주 세냐는...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마법으로 개어, 따스한 햇빛을 내리쬐게 만들어 베르무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단다.


결국 그 녀석들이 헬무드 이후로 베르무트와 재회한 것은, 놈의 장례식뿐이었단 말이다.


그건 유진으로 하여금 강렬한 괴리감과 복잡한 의문을 느끼게 만들었다.


“...네 기억에서 세냐님은 동료들의 얘기를 한 적 없었어?”


“모론님보고 등신이라고 한 적은 있었어요.”


“아니스는?”


“뱀 같은 여자라고 하셨죠.”


“...하멜은?”


“바보, 개새끼, 병신, 씨발놈.”


“너 아까 세냐님은 훨씬 고상하고, 품위가 넘쳤다고 하지 않았냐? 잘 웃지도 않았다며.”


“고상하고 품위 넘치는 분도 욕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세냐님은 동료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단 한 번도 웃으신 적 없어요. 오히려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셨죠.”


메르는 수백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특히 하멜의 이야기를 할 때, 굉장히 괴로워하셨어요.”


메르가 돌아본 곳에는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세냐의 저택에 걸린 것과 똑같은 초상화였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초상화.


“...저 초상화는 가짜에요.”


“가짜?”


“세냐님은 단 한 번도 저렇게 웃으신 적이 없어요.”


“널 만들기 전에 저렇게 웃었을 수도 있잖아.”


“아니에요, 저건 가짜에요. 물론 저 초상화는 저보다 먼저 만들어졌지만, 제가 인격을 확립하기 위해 세냐님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을 적에 직접 물어본 적이 있어요.”


“...뭐라고 물어봤는데?”


“세냐님은 왜 항상 슬퍼하시냐고 물어봤었죠.”


메르는 잠시 초상화를 보다가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초상화의 세냐와 똑같은 미소를 흉내 냈다.


“세냐님은 저처럼 웃지 않으셨지만, 왜 저런 얼굴의 초상화를 남겼는지는 대답해 주셨어요.”


기왕 후대에 전해질 거, 슬픈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이 보기 좋잖아.


“저 초상화는... 화가가 임의로 미소를 그린 거예요. 그래서인지 세냐님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의 저택은 초상화가 공개되어 있지만, 제가 있을 적만 하더라도 초상화에는 항상 천막이 쳐져 있었어요. 이 전당의 초상화도 그랬고요.”


“...”


“여기 있는 초상화의 천막은 제가 걷었어요. 웃는 얼굴이 보기 좋은 건 사실이니까.”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메르는 즉시 정색하고서 유진의 손을 밀쳐냈다.


“선 넘지 마세요.”


“어... 그래. 미안.”


“전 유진님보다 몸이 작지만, 200년 동안 존재해 왔다고요.”


“...세냐님은 베르무트님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했었지?”


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몸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머리를 쓰다듬은 것에 화가 난 걸까. 메르는 유진을 돌아보지 않고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칭찬도, 욕도, 평가도 하지 않으셨어요.”


세냐의 전당


“저 지팡이는 세냐님이 평생토록 애용하신 지팡이에요.”


세냐의 전당에 있는 것은 위치 크래프트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세냐가 생전에 사용한, 관광지로 개방 된 저택에는 도저히 둘 수 없는 여러 가지 마법 도구들이 보관되어 있다.


메르가 가리키는 지팡이. 유진의 기억에도 있는 물건이었다.


“...아카샤.”


“역시 알고 계시는 군요.”


메르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활짝 폈다.


“엘프의 고향, 사마르 대수림에만 자란다는 요정목(妖精木). 그 중앙의 수천 년 묵은 고목의 뿌리로 만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지팡이.”


신나서 떠드는 목소리에서 세냐를 느꼈다. 먼 옛날 세냐에게 직접 들은 설명이었고, 술에 취할 적마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자랑이기도 했다.


“엘프족은 그 고목에 선조들의 영혼이 깃들어있으며,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고 믿어요. 그 세계수는 엘프족의 신앙이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 긍지 높은 엘프들이, 세냐님을 위해 고목의 뿌리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선물한 거예요!”


세냐는 엘프도, 하프엘프도 아니다.


인간이지만, 세냐는 엘프와 자주 엮이곤 한다. 당장 그녀의 은거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엘프의 고향인 사마르 대수림에 은거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세냐는 자신의 부모를 모른다. 그녀는 갓난아기였을 적에 대륙 남단에 있는 거대한 정글, 사마르 대수림에 버려졌다. 본래라면 몬스터나 짐승에게 잡아먹혔겠지만, 세냐는 운이 좋았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엘프가 아기의 울음소리에 이끌려와, 세냐를 거두었다.


그렇게 세냐는 정글 어딘가에 있다는 엘프의 영지(靈地)로 인도되었다.


그곳의 엘프들은 세냐를 그리 탐탁치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냐에게 어마어마한 마법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 뒤로는 세냐를 인정하고, 엘프의 마법을 가르쳤다.


유진이 멍한 눈으로 아카샤를 보고 있자, 메르는 높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세계수의 뿌리로 만든 지팡이를 소유한 것은 세냐님이 최초에요. 엘프들 중에서도 전례가 없었다고요. 그 뿐만 아니죠. 저기 저거 보이세요? 지팡이 끝의 붉은 보석! 저게 뭐냐면...”


“드래곤하트.”


“예, 맞아요! 현존하는 마법 지팡이 중에서 드래곤하트를 소재로 삼은 지팡이는 단 둘 뿐이죠. 세냐님의 아카샤와...”


“블러드메리.”


유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끔찍한 지팡이는 300년 전에도 존재했다. 그때 블러드메리의 주인은 베리알이란 이름을 가진 리치였고, 유폐의 마왕의 수하였었다.


악연.


유진은 괜히 자신의 배를 내려 보았다. 전생. 하멜을 죽였던 리치가 바로 베리알이었다. 놈은 마왕성의 곳곳에 강력한 함정들을 설치했고, 휴식할 시간도 주지 않고서 몇 번씩이나 기습을 가했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 죽었다.


그 전부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었다. 유폐의 마왕성은 이전의 마왕성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험난했고, 그곳의 마물과 마족들은 그 하나하나가 다른 마왕들의 심복에 준할 만큼 강력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강력했던 마족이 셋 있었다. 유폐의 칼, 방패, 지팡이라 불리던 놈들.


방패와 싸우던 중에 지팡이인 베리알이 개입했었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펼치는 흑마법과 저주는 아니스의 신성마법으로 완전히 걷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누군가가 선두에서 길을 뚫어야 했다.


하멜은 그 역할을 자처했다. 평소라면 모론이 그 역할을 맡았겠지만, 하멜은 그를 거절하고 자신이 선두를 맡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길을 열었다.


유폐의 마왕성은 아무도 죽지 않고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내가 죽었어야 했어.’


하멜은 강했다.


베르무트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하멜은 강인했다.


모론보다 강인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선봉을 자처했다. 설령 죽게 될 지라도 모론이 남아서 버텨줄 것이다. 내가 싸우지 못하게 될 지라도 베르무트가 싸워줄 것이다.


유폐의 방패를 쓰러트렸을 때. 하멜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을 입었다. 신성력도, 마법도, 상처를 치유해 주지 못했다. 마왕성의 사악한 힘과 리치의 저주는 하멜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유폐의 지팡이. 베리알과의 싸움이 끝났을 때, 하멜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전생은 그렇게 끝났다.


베리알과 블러드메리가 하멜을 죽였다. 유진은 당연히 블러드메리가 파괴되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죽기 직전에 베리알의 라이프배슬이 박살나는 것과, 놈이 소멸하는 것을 보았었다.


하지만 블러드메리는 파괴되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현재 블러드메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헬무드의 에드몬드 코드베인 백작이다.


흑탑주인 발자크와 함께,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세 명의 흑마법사 중 한 명.


“잡아 봐도 괜찮나?”


유진은 아카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메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괜찮지만, 저 지팡이로 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할 거예요.”


“왜?”


“아카샤는 오직 세냐님만을 주인으로 인정하거든요. 세냐님이 은거하신 후로 여러 마법사들이 아카샤의 주인이 되고자 했지만, 그 누구도 아카샤의 인정을 받지 못했어요.”


“쓰지도 못할 걸 왜 그냥 두는 거야? 부숴서 드래곤하트라도 뽑아내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아카샤는 엘프족과 드래곤이 세냐님을 위해 선물한 보물이에요. 사용할 수는 없지만, 그 자체만으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요.”


메르가 혀를 차면서 지적하자, 유진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대답에서 그리움을 느꼈다. 오래 전에, 세냐에게도 저런 말을 들었었다.


“유진님도 아시죠? 드래곤하트는 드래곤의 심장이라고요. 죽은 동족의 심장을 세냐님을 위해 지팡이로 만든 것이니까... 만약 아카샤가 부서진다면, 엘프들은 몰라도 드래곤들이 모습을 드러내서 아롯에 브레스를 쏴 갈길 거예요.”


그 말도 세냐에게 들었었다. 농담삼아 그 지팡이를 부수고, 드래곤하트의 마나를 나눠갖자고 했었을 때. 세냐는 술병을 집어 던지며 빽 고함을 질렀었다.


‘이 무식한 새끼야. 저걸 부수자고? 너 우리 전부 뒈지게 하고 싶어?’


물론 메르는 세냐처럼 험악한 욕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세냐와 닮은 얼굴로, 세냐가 했던 말을 한다는 것만으로 유진은 전생의 기억들을 강하게 떠올렸다.


‘...이건...’


유진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좋지 않아.’


전생의 기억들이 너무 강하게 의식되고 있다. 유진은 고개를 세차게 젓고서 메르를 외면했다. 추억 따위에 몰입하고자 아크리온에 온 것이 아니잖은가.


“일단 잡아볼게.”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세냐의 키만큼 큰 지팡이. 직접 잡아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진은 메를 힐긋 한 번 보고서, 아카샤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이번에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카샤 자체가 마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냐의 환영도 보았으니, 어쩌면 아카샤의 인정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안배는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기왕 남길 거면 목걸이 말고 아카샤나 남겨주지.’


라이언하트 본가에 목걸이를 둔 것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진은 세냐가 두었을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유진은 문득 생각이 들어서 메르에게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꼬질꼬질한 목걸이네요.”


“어디서 본 기억 없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저는 수백 년 동안 아크리온의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니까요?”


“모르면 말고.”


유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목걸이를 옷깃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아카샤의 앞을 떠나, 세냐의 전당을 본격적으로 둘러보았다.


기억에 남은 것들이 꽤 많았다.


세냐가 즐겨 입던 로브와 모자. 저것도 마법적인 가치가 높은 아티펙트다. 전당의 1층은 그런 물건들이 가득했다. 중앙에는 위치크래프트가 있고, 그 주변에는 세냐가 직접 사용한 마법도구들이 있다.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건 안 돼요.”


“안 가져가.”


보존마법이 걸린 것인지,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말끔한 것은 아니었다. 로브는 군데군데 헤진 곳이 많았다. 유진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윗층으로 향했다.


“저 책들은 아크리온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성된 수기들이에요.”


13층은 책장이 가득했다. 저택에도 책들이 많았지만, 그곳에 전시된 책들과 이곳의 책은 그 가치가 비교가 안 된다. 정말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마도서들은, 저택이 아닌 아크리온에 있었다.


“서클마법식의 초안, 정립하기까지의 과정. 지금의 유진님은 읽어본들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초안이라고는 해도, 그것을 정립하기까지에 동원 된 술식과 연구는 굉장히 고등하거든요.”


메르는 유진을 따라다니며 으스댔다.


“아크리온의 연구서도 마찬가지죠. 이곳을 찾아 온 마법사들 중에서 세냐님의 연구서를 처음부터 이해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유진은 그 말을 흘려들으며 책장의 연구서를 한 권 꺼내보았다. 저택 서재의 책들은 전시는 허락되었어도 직접 펼쳐 읽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 세냐의 전당에 보관 중인 연구서들은 얼마든지 읽어볼 수 있다.


“...하.”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웃음이 나왔다.


“거 봐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죠?”


“그러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여전히 악필이야.’


책에는 세냐의 필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나와 서클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 자체로도 이해가 어려웠지만, 흘려 갈기는 세냐의 악필은 읽는 것만으로도 해석력을 요구했다.


유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세냐의 연구서를 읽어보았다.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아, 책을 접고 고개를 돌렸다. 백 권은 족히 될 것 같은 책들. 유진은 그를 뚫어져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세냐님의 수기는 없나? 마법에 관한 것 말고.”


“없어요. 세냐님은 은거하기 직전, 저택에 남은 개인적인 수기들을 모조리 말소하셨거든요.”


“철저하시군.”


“그만큼 은거에 관해 알리고 싶지 않으셨던 거겠죠.”


“네 의견은 어때?”


유진은 꺼냈던 연구서를 책장에 꽂으며 물었다.


“세냐님의 은거에 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잖아. 헬무드에 가셨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마르 대수림에 가셨다는 이야기도 있고. ...흑마법사들의 암살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전 사마르 대수림에 가셨다고 생각해요.”


메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헬무드에 가셨다는 이야기도 많지만, 제가 기억하는 세냐님은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실 분은 아니었어요. 물론... 세냐님은 은거하기 직전까지 아름답고, 강하셨죠. 하지만 혼자서 헬무드의 마왕에게 도전한다니, 세냐님은 그럴 분이 아니세요.”


“내 생각도 그래.”


“흑마법사들이 세냐님을 암살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죠. 지금이야 발자크 루드베스처럼 강력한 흑마법사가 아롯에 존재하고 있지만, 200년 전의 아롯에 존재한 흑마법사들은 죄다 하찮고 나약했어요.”


“세냐님을 암살하기 위해 헬무드의 흑마법사가 왔을 수도 있잖아.”


“하! 그건 더더욱 말이 안 되죠. 유진님, 생각해 보세요. 세냐님의 마법결계는 광란의 마왕이 직접 펼치는 흑마법도 막아냈었어요.”


메르가 발끈하여 외쳤다.


‘베리알의 흑마법은 막지 못했는데.’


마법의 수준만 따지자면 광란의 마왕보다 리치인 베리알의 수준이 더 높았었다. 그렇다 하여 베리알이 광란의 마왕보다 강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만약 정말로, 헬무드의 흑마법사들이 세냐님을 암살하려 했다면요. 세냐님이 호락호락하게 당하셨을 리가 없어요. 이 수도 펜타곤 전체를 뒤흔들 만큼 거대한 마나가 움직였을 거라고요. 하지만 세냐님이 은거하실 때에는 아무런 재해도 일어나지 않았었죠! 세냐님은 본인의 의지로 은거하신 거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신 건 아니에요.”


메르는 분을 식히지 않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창조주가 흑마법사 따위에게 살해당했다니. 메르는 그런 일은 절대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세냐님은 틀림없이 사마르 대수림에 계실 거예요. 그 드넓은 숲의 어디에 엘프의 영지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세냐님은 그곳에서... 그곳에서...”


메르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200년은 긴 시간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죽을 시간. 그 베르무트조차 수명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겠죠. 어쩌면... 살아계실 지도 모르지만.”


“나는 살아계신다고 생각해.”


축 늘어트린 메르의 어깨가 신경 쓰인다. 다독여 줄까 싶었지만, 아까 메르가 정색한 것이 떠올라서 괜히 손을 뻗지는 않았다.


“그... 용감한 모론님도 100년 전까지는 정정하게 살아계셨었잖아. 그러니까 세냐님도 살아계시겠지. 마법으로 노화를 멈추거나 해서 말이야.”


“...유진님은 세냐님을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고.”


“거짓말. 유진님은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죠?”


메르는 축 늘어트렸던 어깨를 펴고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세냐님의 이야기를 할 때 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시고, 세냐님의 물건을 볼 때에도 엄청 몰입했잖아요.”


“난 원래 옛날이야기 좋아해.”


“그래요? 그럼 저 책도 좋아하시겠네요.”


메르는 히죽 웃더니 책장의 끄트머리로 향했다. 그녀가 꺼내 든 책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서 표지가 헤져 있었다.


“용사 베르무트의 대모험.”


그것을 본 유진의 뺨이 씰룩거렸다.


“유명한 동화책이죠? 세냐님과 다른 동료들은 헬무드에서의 일을 말하기 꺼려했으니, 사실상 이 동화책이 위대한 베르무트의 신화를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책이잖아요.”


“...빌어먹을 책이지.”


“네? 왜 빌어먹을 책이에요?”


“나는 말이야, 사실 하멜님을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고 동경하거든. 그런데 그 동화책에서 하멜님은 굉장히, 굉장히 병신처럼 나오잖아.”


“세냐님도 하멜은 바보, 개새끼, 병신, 씨발놈이라고 했어요.”


“그렇지 않아. 하멜님은 바보도, 개새끼도, 병신도, 씨발놈도 아니야. 오히려 멋지고 용감하고... 어... 음... 훌륭한 분이셨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해야 한다니. 유진은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진님은 성격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보통 이 동화책을 읽고 하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미안한데 나 말고 우리 가주님도 하멜님이 제일 좋다고 하셨어.”


“가주님도 성격이 조금 이상한 분이시네요.”


“너 지금 우리 양부님 욕하는 거니?”


“그냥 이상하다고 하는 건데 무슨 욕이에요? 어쨌든, 유진님. 옛날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이 책도 읽어보세요.”


“나 그거 어릴 때에 거짓말 안 치고 백 번은 읽었어.”


“그렇겠지만, 이 책은 초판본이라고요. 지금 세상에 나도는 개정판과는 달라요. 유진님은 모르시나 본데, 이 동화책은 300년 전에 아롯에서 처음 출간되었대요.”


“어떤 새끼가 출간했대냐?”


“전 모르죠. 이 책의 저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아마 오래 전의 음유시인 아닐까요?”


뭔 놈의 음유시인이야.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대륙을 떠돌 적에는 음유시인들을 몇 번 만나보았었지만, 헬무드에서 음유시인을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면 뭐, 헬무드의 소문을 탐문해서 엮어 낸 소설가일 지도 모르죠. 왜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메르는 동화책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 동화책은 세냐님도 좋아하셨어요. 평소에는 잘 웃지 않는 분이셨지만, 가끔 잠이 안 오는 밤에는... 혼자 침실에서 이 책을 읽으시며 짧게 웃곤 하셨죠. 저한테도 읽어주셨고요.”


“...초판본은 내용이 좀 다르나?”


“으으음... 저도 개정판을 읽은 것이 꽤 예전이라, 유진님이 읽으신 개정판과 아주 똑같지는 않을 텐데... 일단, 초판본은... 조금 더... 뭐랄까... 원초적이죠.”


“...원초적?”


“욕이 많아요. 베르무트님과 동료들에 대한 일화도 조금씩은 다르고... 염세적이라고 해야 하나?”


“줘 봐.”


유진은 냉큼 다가가서 동화책을 넘겨받았다. 300년 전의 책이라서 그런지 종잇장이 죄다 헤졌다. 그만큼 많이, 반복해서 읽은 탓이리라.


‘하멜은 병신이었어요. 그 병신은 베르무트와의 첫만남에서 호기롭게 싸움을 걸었지만, 베르무트의 옷깃도 스치지 못하고 땅에 얼굴을 처박고 울었죠.’


“이 개새끼가.”


유진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원초적이고 욕이 많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유진이 읽었던 동화책은 하멜을 두고 바보라고는 했을지언정 병신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거 쓴 새끼 아니스 아니야?’


유진은 언제나 눈웃음을 흘리던 아니스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필체이라도 대조해 볼까 했지만, 동화책은 마법이나 인쇄판으로 쓴 것인지 필체가 죄다 반듯하고 일정했다.


‘땅에 얼굴을 처박은 건 맞는데 옷깃은 스쳤어. 피 한 방울은 흘리게 했었다고. 얼굴을 처박고 울어? 어디서 개구라 날조를 해?’


유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동화책을 책장에 꽂아넣었다.


“...14층은 뭐가 있냐?”


“13층은 연구서. 14층은 연구를 정립하여 엮어낸 마도서들이 있어요. 그것들도 유진님이 읽기는 어렵겠지만, 연구서들보다는 상냥할 거예요. 풀이가 확실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위치 크래프트보다 못한 것들 아니야?”


“흐흥...”


메르가 뺨을 씰룩거리며 웃는다.


“훨씬 못 미치죠. 이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위치 크래프트를 직접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뭐 굳이 말하자면, 이런 차이에요. 위치 크래프트는 읽어봐도 이해하기 힘들고, 14층의 마도서들은... 읽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유진님은 무리겠지만.”


메르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일단 14층으로 가죠. 아마 유진님은 그곳을 좋아하실 거예요.”


“왜?”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면서요? 우둔한 하멜도 좋아하고.”


유진은 저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14층에 도착했을 때. 메르가 왜 저런 말을 하였는지 곧장 이해할 수 있었다.


“보세요.”


메르는 킥킥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저건 세냐님이 자신의 기억을 직접 추출해 남긴 거예요. 초상화 같은 것이 아니라, 세냐님의 기억하는 동료들의 실물이죠.”


14층의 벽에는 4명의 사람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비춰져 있었다.


“저기, 중앙에 서있는 잘생긴 남자가 위대한 베르무트.”


유진의 기억과 똑같은 베르무트.


“그 옆에, 눈웃음이 너무 진해서 눈동자가 안 보이는 금발 여자가 신실한 아니스.”


성수랍시고 술병을 들고다니던 성녀.


“트롤인지 사람인지 헷갈리는 떡대가 용감한 모론.”


가뜩이나 덩치가 큰데, 제 몸보다 큰 도끼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싸울 때 걸리적거리게 한 등신.


“그리고 저기, 성격 나빠 보이고 인상을 쓰고 있는 남자가 우둔한 하멜이에요. 하멜의 모습은 오직 이곳, 세냐님의 전당에만 남아있다고요.”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헬무드에서 죽은 하멜은, 그 흔한 초상화 하나 세상에 남기지 못했다.


“...푸하하.”


유진은 전생의 모습을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기왕 남길 거면 웃는 얼굴로 남겼으면 좋잖아.”


유진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세냐의 전당


언제 적 모습이었는지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아마 헬무드로 떠나기 직전의 모습인 것 같았다. 저곳에 보이는 베르무트에게 월광검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흉터가 적어.’


전생의 하멜은 많은 흉터를 가지고 있었다. 옷과 갑옷에 가려진 몸에도 흉터가 빼곡했고, 얼굴에도 잔상처가 많았었다. 그 중의 절반은 용병 생활을 하던 중에 얻은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헬무드에서 얻었다.


눈앞의 ‘하멜’은 드러난 곳에 흉터가 거의 없었다. 인상은 더러웠지만 눈빛이 아주 칙칙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몰골이 깔끔한 것이, 헬무드에서 온갖 개고생을 하기 전의 모습인 것이다.


“...잘 생겼네.”


“그쵸? 저도 셀 수 없이 많이 봤지만, 베르무트님이 잘 생기긴 했...”


“선조님 말고 하멜님이 잘 생겼다고.”


메르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녀는 입을 쩍 벌리고서 하멜과 베르무트를 번갈아 보았다.


“미쳤어요?”


“선조님은, 어, 잘 생긴 거 맞는데. 하멜님도... 어어... 매력 있잖아. 그... 길들여? 지지? 않은? 그런... 짐승 같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유진은 견딜 수 없는 자괴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스스로 느끼는 자괴감도 강렬했지만, 한심하고 어이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메르의 시선도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냥 그렇다고.”


“취향이 참 독특하시네요.”


“그럴 수도 있지.”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같은 매력? 그런 취향이시라면 하멜말고 모론은 어때요? 딱 봐도 사람이 아니라 곰 같잖아요.”


“저건 너무 과하지. 곰이 아니라 몬스터잖아.”


“그건 그래요.”


메르도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모론의 우락부락한 근육을 징글맞다는 눈으로 보다가, 결국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초상화 말고. 세냐님의 모습은 없어? 저런 식으로.”


“유진님은 거울없이 자기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있으세요?”


“저렇게 남겨둘 거면, 전신거울 앞에 한 번 서서라도 모습을 남길 법 하잖아.”


“세냐님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으셨나 보죠.”


메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초상화도 굳이 남기고 싶지 않은 눈치셨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


“저는 잘 모르지만, 17살인데다 마법의 경지도 그리 높지 않은 유진님이 여기 오셨다는 건... 콧대 높은 마법사들이 유진님에게 대단한 가능성을 보았다는 거잖아요.”


“아마 그렇겠지.”


“괜히 겸손 떠실 필요는 없어요. 유진님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곳에 보관 된 마법서들을 한 권만 읽어봐도 자기 재능이 참 초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요.”


메르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을 훑어보았다.


“그건 세냐님의 전당뿐만이 아니에요. 이 아크리온에는 세냐님을 포함해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마법사가 9명이나 된다고요.”


왕립 도서관 아크리온. 이곳에는 세냐처럼 층마다 이름을 걸고 있는 대마법사가 9명이나 된다.


최상층인 15층은 아롯을 건국한 마법왕의 전당이다. 세냐의 전당 아래인 11층은 전투마법의 아버지라 불렸던 배틀메이지의 전당이고, 10층은 인간 최초로 정령왕과 계약한 대정령사의 전당이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여러 마도서들이 보관되어 있고요. 그것들도 역대 마탑주들이 엄선해 낸 귀중하고 고등한 마도서들이에요. 물론 유진님도 천재라 불릴 자질을 가지셔서 이곳에 들어온 것이겠지만, 아크리온에 보관 된 마법들은 이미 완성 된 천재들의 마법이에요.”


“그렇겠지.”


유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메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유진의 마법 지식은 한참 얕았다. 어떻게 아크리온에 들어올 수는 있게 되었지만, 이곳의 마도서들은 적색마탑의 입문용 마도서들처럼 독학으로 익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너도 마법을 쓸 수 있어?”


“가르쳐 드릴 수는 없어요.”


메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제게 입력 된 시스템도 마법의 전수는 엄금하고 있어요. 수백 년 동안 많은 마법사들이 저와 위치 크래프트를 어찌 해보려 했지만, 그 누구도 바꾸지 못했었죠.”


메르는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복잡하단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제게 허락 된 마법은... 이 전당의 먼지를 없애거나, 자잘한 쓰레기를 치우는 정도죠. 제 마법을 보고 싶으신가요?”


“응.”


“그럼 출입증 없이 아크리온에 침입해 보세요. 만약 유진님이 그러신다면, 저는 다른 층의 사역마들보다 빨리 나타나서 유진님을 죽여드릴 게요.”


“꼭 그래야 돼?”


“그 방법이 싫으시다면, 저와 위치 크래프트를 공격하시면 돼요. 원하는 죽음이 따로 계신다면 최대한 맞춰드리죠.”


단순한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어쨌든 메르에게 직접 마법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배우지는 못해도, 마법에 관한 조언쯤은 해줄 수 있지 않아?”


“그것도 제한되어 있어요. 만약 제가 그렇게까지 상냥하게 마법을 지도할 수 있다면, 아롯의 모든 대마법사들이 위치 크래프트를 마스터 했겠죠?”


위치 크래프트는 위대한 만큼 악명도 높다. 아크리온에 입장하지 않고서는 들여다 볼 수도 없는데, 이곳에 출입하는 대마법사들 중에서도 위치 크래프트의 마법을 완전히 마스터 한 사람은 여태까지 한 명도 없었다.


“정 조언이 필요하시다면... 음... 유진님. 몇 서클이세요?”


“굳이 말하자면 3서클이지.”


“에게. 진짜로?”


“마법에 입문한지는 두 달 좀 넘었고.”


“흠. 익힌 시간을 생각하면 천재적이기는 하네요. 그를 감안해도 자격이 한참 부족하지만.”


방금 전까지는 이런 저런 농담도 하고 웃어댔지만, 마법에 관해서는 태도가 냉랭하고 조소적이다. 그런 모습도 왠지 세냐와 닮아서, 유진은 피식 웃었다.


“굳이 말하자면 3서클이란 것은 무슨 말이에요?”


“나는 서클을 따로 안 만들었어.”


“구라치지 마세요.”


“진짜로. 서클은 없고, 코어를 서클처럼 쓰고 있지.”


“...그건 라이언하트의 마법식인가요?”


“아닐 걸? 베르무... 선조님은 어떻게 마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라이언하트의 본가에는 마법식 같은 것은 없어. 방계 쪽은 모르지만.”


무수히 많은 라이언하트의 방계. 본가와는 그리 교류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지만, 방계 중에는 마법을 전문적으로 익히는 가문도 있다.


“흠... 그렇다면 지금 사용하는 마법식은 유진님이 독자적으로 만든 건가요? 아니면 다른 마법사들이 조언을 참고하셨나요?”


“나 혼자 만들었지.”


“흠, 흐으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메르는 12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내려가는 속도가 원체 빠른지라, 그녀의 생각도 빠르게 끝났다.


“뭐, 자격이 엄청 부족하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전 유진님이 아크리온에 들어 온 것에 가문의 이름값이 상당히 더해졌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없지는 않겠지.”


“그런 솔직한 태도 아주 좋아요. 이렇게 듣는 것보다는 유진님의 마법을 보는 것이 더 빠르겠지만, 일단... 유진님은 어떤 마법에 관심이 있으신 가요?”


“조언해 주게?”


“직접 마법은 가르쳐드릴 수 없지만, 방향성 정도는 잡아드릴 수 있죠.”


“싸움에 도움 되는 마법. 정령마법도 좋고.”


“무식한 바람이군요.”


메르는 혀를 쯧쯧 차며 유진의 뒤를 따라왔다.


“10층이 대정령사의 전당이에요. 그곳의 주인은 인간 중에서 최초로 물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었죠.”


“그곳에서 배운다고 해서 물의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래요. 정령과의 계약은 타고난 상성도 중요하니까. 10층에 보관 된 마법들은... 물의 정령의 힘을 응용하는 마법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렇다면 내게는 별 도움이 안 돼. 나는 물의 정령보다는 바람의 정령 쪽이 좋거든.”


“그건 유진님이 바란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뭐, 일단은 알았어요. 싸움에 도움이 되는 마법이라면 역시 11층이 제격이죠. 그곳의 주인은 전투마법의 아버지라 불린 대마법사였으니까.”


“따로 추천할 건?”


유진은 위치 크래프트의 앞에 서며 물었다.


“유진님이 말하는 싸움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유진님은 마법으로만 싸우실 건가요? 라이언하트 본가라면 무도의 명가인데?”


“마법도 쓰고 무기도 쓰고 다 할 거야.”


“참 오만하시네요.”


메르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어린 나이의 가능성을 감안해도, 마법과 무도를 함께 수행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10층보다는 그 아래층이 나을 거예요. 10층의 마법들은 전투마법의 응용과 상황에 따른 마법의 개변을 주로 다루거든요. 즉,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다는 말이죠. 이곳의 모든 마법들이 그렇지만.”


“아래층은 뭐가 있는데?”


“단순하면서 강력한 마법들이 있죠. 평생 라이벌로 경쟁한 화염 마법사와 빙결 마법사의 마법들. 그 증 빙결 마법은 물의 정령과 궁합이 좋은데... 유진님은 바람의 정령이 좋으시다니, 불꽃 마법을 익히는 편이 좋을 거예요.”


투덜투덜 이죽대면서도 조언은 확실히 해 준다.


“만약 유진님이 화염 마법에 꽤 능통해지신다면, 7층에도 가보세요. 그곳에는 난이도는 아득하게 높지만, 익히기만 하면 하나의 마법으로 군대와 국가를 쓸어버릴 만큼 강력한 마법들이 있거든요. 유진님도 메테오가 뭔지는 아시죠?”


“알지. 하늘에서 유성우를 떨어트리는 마법이잖아.”


“500년 쯤 전이던가? 국가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 8층의 주인인 ‘디재스터’는 장기인 메테오로 여러 군대를 궤멸시켰었죠. 대륙에서 메테오의 술식을 완전하게 보유한 곳은 아크리온 뿐이에요.”


메테오라. 익힐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만, 흥미가 가기는 했다.


“6층에는 공간마법이 있어요. 유진님이 마법 말고 무도로도 싸우고 싶다면, 공간마법도 추천해 드릴 게요. 블링크만 완벽하게 익혀도 마법전에서는 절대적인 우위를 갖는다고요.”


블링크. 단거리 도약 마법. 도약할 수 있는 거리는 마법사의 수준에 따라 갈리지만, 세냐는 한 번의 블링크로 수십 미터의 거리를 도약하곤 했었다.


메르의 조언을 듣고 있으니 슬슬 가닥이 잡힌다. 블링크로 여기저기 도약하면서 무기를 휘두르거나, 아니면 마법을 쓰거나. 그것만 제대로 할 수 있어도, 전생의 경지는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전생의 나는 블링크는커녕 불꽃 하나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전생에서 하지 못했던 것을 더하는 것. 유진은 그것에 설레는 즐거움을 느꼈다.


“...위치 크래프트는?”


“서클에 최적화 된 마나의 운용방식. 그로 일으키는 마법 위력의 증폭. 술식의 효율적인 단순화. 영창의 생략. 분리시킨 의식으로 마법의 다중구현. 무의식에 마법을 입력해 저장하고, 상황에 따라 즉시 발현하거나 외부 자극에 스스로 반응하게끔 의도하기도 해요.”


“...”


“그 중에 특히 대단한 것은 서클의 이상적인 구동이에요. 지금이야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서클을 사용하고 있지만, 위치 크래프트의 서클 마법식은 일반적인 서클보다 아득하게 우월하죠. 최소한의 마나로 극한의 위력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면 편하실 거예요.”


“미안한데, 들어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듣는 것만으로 이해할 정도면, 위치 크래프트가 마법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마도서라 불릴 리 없잖아요?”


메르는 히쭉 웃으며 가슴을 활짝 폈다.


“그래서. 어떻게 읽을 수 있는 건데?”


“눈을 감고 손을 뻗으세요. 그 뒤에는 유진님의 마나를 위치 크래프트에 주입하고... 그러면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손을 뻗으라고? 유진은 수십 개의 고리에 휘감긴 빛의 구체를 응시했다. 이렇게 보기만 한 들 이해할 수는 없으니, 유진은 메르가 시키는 대로 손을 뻗었다. 은은히 빛을 발하는 구체에 손을 가까이 해보지만, 열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어마어마한 마나는 느껴졌다. 유진은 오싹 돋는 소름을 무시하고서 백염식으로 마나를 끌어냈다. 그냥 마나만 들이부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마법을 쓸 때처럼 유사 서클로 운용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며 일단 마나를 붓는데.


전신의 감각이 푹 꺼진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놀라서 눈을 떠보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근처에 있던 메르가 보이지 않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허.”


그렇게 목소리를 내보지만, 그 소리는 유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몸속에서 울리지도 않는다. 유진은 그제야 상황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의식 속의 세계다. 이곳에 유진의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위치 크래프트와 접속해, 자신의 의식 깊은 곳으로 끌려온 것이다.


‘꿈과 비슷하지만... 달라.’


자각몽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몽마의 개지랄처럼 불쾌한 환각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압도적인 무력감만이 느껴진다. 육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몸을 움직일 수도 없다.


차단 된 감각들 중에서 유일히 깨어있는 건.


마나를 느끼는 기감. 이 의식의 세계는 충만한 마나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 자체는 유진의 의식 속이지만, 위치 크래프트의 마나가 그의 의식을 뒤덮어 무한한 마나의 바다를 만들어냈다.


이 바다에서 유진의 의지는 티끌만도 못하다. 마음대로 부유하고 떠돌 수도 없다. 그저 상황을 관조하고, 기다릴 뿐.


‘마나는... 조금 움직일 수 있어.’


조금?


‘그래. 이게 지금 내가 가진 마나로군.’


유진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마나를 의식했다. 이 바다에서 유진의 마나는 의지만큼이나 작고 빈약했다. 이걸 거두면 빠져나갈 수 있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만, 유진은 굳이 시험해 보지 않았다.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이윽고 마나가, 바다가 움직인다. 그 거대한 물결은 유진이 보는 앞에서 하나의 고리가 되었다.


서클이다. 하나의 서클이 천천히 회전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회전을 의식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가속되었다. 서클이 회전할 때마다 이 세계를 가득 채운 마나가 서클의 회전에 따른다. 그렇게 서클이 하나씩 분열한다.


서클로 구분하는 마법의 경지에서, 가장 높은 것은 9서클.


하지만 분열한 서클은 9개에 그치지 않았다. 10번째 서클이 생겨난 순간, 서클의 회전에 따르던 마나가 거대한 선을 만들었다. 10개의 서클이 흩어진다. 고리가 풀려가며 서로 엮인다. 그렇게 거대한 하나의 서클이 만들어졌고, 그 서클의 안에 무한한 마나가 담긴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지만, 현상은 끝나지 않았다. 거대한 서클의 안에 무수히 많은 서클들이 만들어진다. 하나, 둘, 셋, 넷... 유진은 세는 것을 포기했다. 무한한 마나를 이끌어낸 서클은, 그 안에 무한한 서클을 만들었다. 계속해서 분열하고, 얽히고, 흩어지고, 다시 분열하고, 얽히고...


단순히 보고 있을 뿐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유진의 의식은 뒤흔들렸다. 정신을 피로하고 멀미를 일으키는 착시. 아니, 저건 착시가 아니다. 실제로 저 서클 안에는 무한한 서클이 분열하고 얽히고 흩어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봐도 이해할 수 없다.’


평생 익혀 온 마법이 어린아이 소꿉장난이라 느꼈다.


로베리안은 그렇게 말했다.


진리의 편린.


멜키스는 그렇게 말했다.


모두가 맞는 말이었다. 의식이 흔들린다. 저 무한한 서클이 일으키는 변화, 내포한 가능성, 유진은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현명한 세냐. 그녀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강력한 마법사라는 것.


‘잠깐...’


의식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유진은 지금 자신에게 무엇이 일어나려 하는지를 직감했다. 버티지 못한 정신의 셔터가 내려지는 것이다.


‘기절하고 싶지는 않은... 잠깐, 안 돼.’


기저귀라도 차고 가는 것이 좋을 걸?


왜요.


지릴 수도 있거든.


멜키스의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화장실에 언제... 다녀왔... 유진은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았지만, 위치 크래프트와 연동 된 세계에서 유진의 의식은 나약하기 그지 없었다.


저항이 불가능하다.


‘제발, 내 잘난 몸아. 안 돼.’


지리지는 말아다오.


유진은 그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절했다.


세냐의 전당


눈을 뜨고서, 유진은 가장 먼저 자기 속옷을 확인했다. 멜키스가 경고했던 것처럼 뭐라도 지린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다행히 속옷은 뽀송뽀송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사실에 무조건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근처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메르의 시선이 왠지 심상찮게 느껴졌다.


“내가 무슨 추태를 부렸나?”


유진은 태연하려 노력하면서 물어보았다.


“대뜸 기절한 것도 추태기는 하죠.”


“그거 말고.”


“오줌이라도 지렸을까 걱정하시는 거죠?”


메르가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유진은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것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랬을 리가 없어.”


“진실은 대부분 잔혹한 법이에요.”


“제발, 개소리 하지 말고.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님은 오줌을 지리지는 않으셨어요. 거품은 물었지만.”


“...거품만?”


“코피도 쏟긴 하셨죠. 여하튼, 오줌은 안 지렸다니까요? 만약 유진님이 오줌을 지리셨다면, 저는 지금처럼 유진님 근처에 서있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지린 사람이 있기는 한가 보네.”


“꽤 많죠. 현 백탑주인 멜키스 엘하이어도 지렸었고... 청탑주인 히리두스 우즐렌도 지렸었어요.”


유진은 꼬장꼬장한 얼굴의 청탑주를 떠올렸다. 그 성격 날카로워 보이는 늙은 마법사가, 위치 크래프트를 접하고 오줌을 지렸다? 그리 상상하고 싶지는 않은 광경이었다...


“난 안 지렸다는 거지. 그거면 됐어.”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그런 생각을 하며 시계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메르가 입을 열었다.


“유진님은 두 시간 정도 기절해 계셨어요.”


“오래도 쓰러져 있었군.”


“그래서 어떠셨어요?”


메르는 감상을 기대하며 두 눈을 빛냈다. 하지만 유진은 자신이 보고, 느낀 감상을 도저히 문장으로 정리해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려워.”


일단, 유진은 그렇게 말했다.


“난해하고. 봐도 뭔지 잘 모르겠... 아니, 어렴풋이 알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을 지식이나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당연하죠.”


메르는 유진의 감상이 마음에 들었다. 자기 실력과 지식에 넘치는 자부심을 가진 대마법사들은 솔직한 감상을 말하는 것이 드물다.


“그래서 위치 크래프트가, 그를 만든 세냐님이 위대한 마법사인거예요.”


“그래.”


유진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심 세냐가 대단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다고, 마법사들이 저리 띄워주는 것인가 싶기도 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생각이었다.


유진은, 하멜은 세냐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 현명한 세냐가 아니라, 동료인 세냐 메르데인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그녀가 얼마나 칠칠맞고, 재수 없고, 입이 험하고, 지 잘난 맛에 심취해서 얼마나 사람 속을 긁어댔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잘난 건 맞지.’


유진은 고개를 돌려서 위치 크래프트를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평생 독학으로 끙끙거려 봐야 위치 크래프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서클의 구동이 신기했어.”


“호오.”


유진의 중얼거림에 메르가 눈을 빛낸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유진을 바라보면서 히죽 웃었다.


“과연. 익힌 마법의 수준에 비해서 보는 눈은 월등하네요. 이해력도 높은 것 같고.”


“그 서클, 대체 뭐지?”


유진은 인중에 남은 핏자국을 벅벅 문질러 털어냈다. 위치 크래프트에서 가장 놀랍고, 이해가 어려운 것. 그건 위치 크래프트에 사용되는 마법식의 본질, 서클이었다.


유진도 서클이 뭔지는 안다. 세냐가 서클 마법식을 정립하고서 300년. 아롯의 마법사들은 그 수백 년 동안 서클을 파헤치고, 개량하고, 발전시켜 왔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아롯 뿐만이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서클로 마법에 입문한다.


그 말은 즉, 이해하고 배우기 쉽도록 대중화가 되었다는 말이다. 유진이 보았던 입문 마도서들도 서클에 대해서는 자세하고 쉽게 풀이가 되어 있었다. 적색 마탑에서 읽었던 마도서는 수십 권이 훌쩍 넘었지만, 그 수많은 마도서에서 서클의 설명은 대부분이 비슷했다.


“뭘 보신 건데요?”


메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아무래도 유진의 평가, 정확히 말하자면 세냐에 대한 극찬을 더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릴 때도 저런 면은 그대로였나 봐.’


메르는 세냐의 유년기 인격을 베이스로 삼았다고 했다. 유진이 아는 세냐도, 저런 식으로 자기 잘난 맛에 흠뻑 취해 남들의 평가를 즐기곤 했었다.


“...서클이... 계속해서 분열했어.”


유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아는 서클은... 9개가 끝이야.”


9서클.


당대에 9서클에 오른 마법사는 전무하다. 마법의 최첨단을 달리는 아롯의 마탑주들도 8서클까지가 한계였고, 마왕과 직접 계약을 맺은 헬무드의 흑마법사들도 9서클의 벽은 넘지 못했다.


서클 마법식은 9서클이 마지막이다. 그것은 유진이 읽었던 수많은 마도서들에서도 선을 긋는 내용이었으며, 서클 마법식이 정립된 후로 9서클에 오른 것은 현명한 세냐 뿐이다.


“위치 크래프트는 세냐님이 마지막으로 만드신 마도서에요.”


메르는 허리에 양 손을 척, 얹고서 유진을 바라보았다.


“처음 서클 마법식을 만드셨을 때의 세냐님은 9개의 서클을 가지고 계셨죠. 하지만 세냐님은 그 후로도 마법의 연구와 수행에 매진하셨어요. 그렇게... 자신이 정해 놓은 한계를 뛰어넘으신 거예요.”


“9서클의 다음이면, 10서클인가?”


“유진님은 바보세요?”


단순한 산수에 의거해 말해본 것뿐인데 바보 소리를 듣다니. 유진은 보란 듯이 꽁한 표정을 지었지만, 메르는 한심하다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유진님도 위치 크래프트를 직접 보셨잖아요. 설마 서클이 10개가 된 시점에서 기절한 건 아니시겠죠?”


“그 다음도 봤어. 10개로 분열한 순간부터... 서클의 마나가 뒤섞이더니, 하나의 거대한 서클이 되었지.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서클이 분열하고, 섞이고...”


“그게 바로 위치 크래프트의 핵심이에요.”


메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터널 홀(Eternal Hole). 오직 세냐님만이 도달한, 서클 마법식의 궁극점. 위치 크래프트 이후로 수많은 마법사들이 이터널 홀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그 누구도 9서클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어요.”


“...”


“지닌 마나를 단 한 점의 낭비 없이 활용하며, 거대한 서클의 안에서 모든 마나를 통제하고 서클을 분열해 순환시키는 거죠. 그야말로 서클의 이상적인 구동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기존의 서클처럼 복잡하지도 않고요.”


“복잡하지 않다고? 그게?”


“이터널 홀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이지, 그를 통해 마법을 쓰는 것은 아주 쉽고 단순해요. 아까 말했잖아요?”


서클에 최적화 된 마나의 운용방식.


그로 일으키는 마법 위력의 증폭.


술식의 효율적인 단순화.


영창의 생략.


분리시킨 의식으로 마법의 다중구현.


무의식에 마법을 입력해서 저장.


“이터널 홀을 만든다면 그 모든 것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요. 이터널 홀로 펼쳐낸 파이어 볼은 9서클의 헬 파이어보다 강력하다고요. 그러면서 헬 파이어처럼 마나를 무식하게 처먹지도 않고, 술식이 복잡하지도 않아요.”


“이터널 홀을 만든다면 9서클의 마법도 영창없이 펼칠 수 있는 건가?”


“물론 그렇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거죠. 파이어 볼 만으로 헬파이어의 위력을 재현할 수 있는데 뭐하러 헬 파이어를 써요? 그냥 파이어 볼을 연속해서 날리는 편이 낫지. 아, 물론 그 이상의 위력이 필요하다면 헬 파이어를 쓰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세냐님이 이터널 홀을 만들었을 때... 그 분이 헬 파이어를 써야 할 상황은 한 번도 없었어요.”


마왕성을 오르는 것도 아니고, 마왕이나 고위 마족과 싸우던 시절도 아니었다. ‘약속’ 이후로 세상은 평화로웠고, 세냐는 헬무드를 떠돌던 때처럼 과격한 나날을 보내지도 않았다.


“이제 잘 아시겠죠?”


메르는 치켜든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세냐님이 흑마법사에게 암살 당했다니.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어요. 이터널 홀을 만들었을 때의 세냐님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고요.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으셨지만, 아마 단독으로 마왕을 죽일 수도 있었을 거에요.”


“그럴 지도.”


유진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헬무드를 함께 떠돌 적의 세냐는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마법사였지만, 마왕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더더욱 강해졌다.


유진의 상식으로는 위치 크래프트의 위대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위치 크래프트를 만들 적의 세냐가, 유진이 기억하는 현역 시절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세냐는 마냥 놀고 먹지 않았어.’


아마 다른 녀석들도 그랬을 것이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백염식의 10성에 올랐던 이는 녀석 뿐이다. 헬무드에서도 독보적으로 강했던 놈이고, 무슨 바람이 불어 자식을 그렇게 낳아댔는지는 몰라도... 유진이 기억하는 베르무트는 노력이 게으른 놈은 아니었다.


-조금 더 노력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말. 전생을 통틀어서 가슴에 가장 깊이 처박힌 말이 저것이었다. 베르무트, 그 개새끼는 천재인 주제에 노력도 꽤 열심히 했다.


다만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언제나 과한 성취를 얻었을 뿐.


‘아니스와 모론도 조금이라도 더 강해졌겠지.’


세냐처럼 그 성취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유진은 그 사실을 확신했다. 전생의 동료들은 모두가 그런 녀석들이었다. 어느 시대에 태어나건 천재라 불릴 만큼의 자질을 갖고서, 확실한 목적과 신념을 지닌 놈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왕을 죽여 버리겠노라고 맹세한 놈들.


“그래서 더 모르겠어.”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세냐 메르데인. 네가 저만큼이나 강해졌다면... 내가 아는 넌 말이야. 어떻게든 마왕에게 다시 도전했을 거야.’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 그 둘은 하위 서열의 마왕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강력하다.


그래서 패퇴했다 한 들, 유진이 아는 동료들은 절망할 성격은 아니었다. 다시 힘을 키워서, 확신을 가진 뒤에. 설령 확신이 없더라도,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제 신념에 몸을 던질 녀석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끝까지 마왕에게 다시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


세냐와 아니스가 엇비슷한 시기에 은거했다는 것.


...베르무트의 장례식 전에는 라이언하트와 교류하지 않았다는 것.


‘베르무트.’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


아크리온. 이 왕립 도서관은 명목상인 도서관장은 있지만, 운영의 대부분을 사역마에게 맡기고 있는 지라 폐관 시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은 즉, 먹고 자는 것만 줄인다면 원하는 만큼 아크리온에 머물러도 된다는 것이다.


‘그럴 거면 휴게실 같은 곳이 따로 있으면 좋잖아.’


적색 마탑의 도서관은 편리했다. 식당도 가깝고, 침실도 가깝다. 하지만 아크리온에 그런 공간은 없었다. 공기 중에 음식 냄새가 떠도는 것이 싫은 것인지, 아니면 왕립 도서관에 걸맞는 품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크리온 내부에서 숙식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나마 층별의 전당마다 마법을 연구하고 시험해 볼 연구동이 따로 있기는 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먹고 자면 되는 것 아닌가? 유진은 메르에게 그 사실을 물어보았지만.


“전 음식도 못 먹고 뭔가를 마시는 것도 불가능한데, 제 앞에서 그러시겠다고요? 절대 안 돼요. 정 배가 고프면 밖에서 먹고 오세요.”


그런 구박만 들었다.


“설마 그런 치졸한 이유 때문에 안 된다는 거야?”


“그건 아니죠. 나름의 이유는 있다고요. 유진님은 순수한 마법사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보통의 마법사... 아니, 대마법사라 불릴 만큼의 마법사들은 마법 중독자들이에요.”


메르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확실히 선을 그어놓지 않는다면, 이곳에 들어오는 마법사들은 자기 수명까지 깎아가며 마법에 몰두해 버린다고요. 그 왜, 이런 이야기들은 유명하잖아요? 가진 수명 이상으로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 리치가 된 마법사들. 자기 던전에서 연구에 몰두하다가 과로로 사망한 마법사들...”


“그건 좀 과장이 섞였다고 보는데.”


“전례가 없었다면 이런 법도 만들어 놓지 않았겠죠?”


메르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그녀는 음산한 분위기를 의도하면서 속삭였다.


“아크리온의 역사는 대략 팔백 년에 달하죠. 머나 먼 옛날... 어떤 마법사가 평생토록 염원하던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손에 넣었어요. 그는 마법이 너무 좋았고, 위대하고 존경스런 선배들의 진리에 매료되었죠. 그렇게... 먹고, 마시고, 자는 것도 잊고서 마법을 탐닉하다가 그만...”


“그래서, 밤에 귀신이라도 나오냐?”


“나올 수도 있어요. 저는 본 적 없지만요.”


“어이구 무서워라.”


유진의 건조한 반응에 메르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내일쯤 올게.”


“와서 뭐하시려고요. 이 전당의 마도서는 유진님에게 너무 어려울 텐데?”


“어려우면 배워야지.”


“전 안 가르쳐드릴 거예요.”


“괜찮아, 너 말고 가르쳐 줄 사람은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인데, 너무 시끄럽게 굴면 쫒아낼 거예요.”


메르가 엄포를 놓았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용하도록 노력할게.”


솔직히 말하자면 유진은 내적인 갈등을 겪고 있었다. 세냐와 닮아도 너무 닮은 메르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친해지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정을 주는 것도 옳지 않을 것 같다.


옳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메르는 사역마다. 세냐 본인이 아니다. 메르의 존재는 유진으로 하여금 전생을 너무 강하게 의식하게 만든다. 유진은 메르에게 필요 이상의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오늘 하루만 해도, 유진은 메르에게서 몇 번이나 세냐의 잔영을 보았다.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척 할 수도 없고.’


확실히 거리를 두려면 세냐의 전당에 오지 않는 것이 확실하고 간단하다. 하지만 유진은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는 않았다. 메르의 존재는 둘째 치고, 위치 크래프트와 마도서들도 탐닉하고 싶었다.


1층에 내려가기 전.


유진은 메르의 조언대로, 아래층들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도 사역마는 있었지만 인격이나 인공지능이랄 것도 없이, 간단한 질의응답과 전당의 관리만 수행할 수 있는 정도였다.


메르처럼 인간다운 사역마는 없었다.


‘어려운 것은 똑같군.’


사역마의 기계적인 안내에 따라 마도서들을 둘러보았다. 위치 크래프트만큼은 아니어도, 지금의 유진이 이해하기 불가능한 것은 다른 층의 마도서들도 마찬가지였다.


“늦게도 내려온다.”


아크리온의 1층.


멜키스는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로베리안도 있었다. 방금 전까지 표정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유진을 본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솔직히 뭔지 잘 모르겠어요.”


유진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제 머릿속의 마법 이론으로는 마도서 하나 제대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몇 년이 걸릴 것 같아요.”


“그야 당연하지. 이곳의 마도서들은 아롯의 마법 수백 년의 정수니까.”


멜키스가 으스대며 대답했다. 그녀는 유진의 허리에 걸린 위니드를 힐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꼬마, 네가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도, 제대로 된 스승 없이 마법을 익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야.”


“백탑주.”


“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는 저 꼬마를 제자로 삼을 생각이 없어. 그냥... 간단한 거래를 하고 싶은 거지.”


“위니드?”


유진은 뻔히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그러자 멜키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위니드를 잠깐만 빌려준다면, 네가 원하는 마도서들을 알기 쉽게 해석해 줄게. 괜찮은 거래 아니야?”


“그렇기는 한데.”


유진은 멜키스에게서 시선을 때어 로베리안을 돌아보았다.


“로베리안님. 절 제자로 삼을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 말에 둘의 표정이 갈라졌다. 로베리안은 환한 미소를 지었고, 멜키스의 얼굴은 팍 구겨졌다.


“유진님이 바라신다면, 제가 그를 거절할 리가 없잖습니까?”


“당신 바쁜 것 아니었어?”


“유진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꼬마 너도 그래. 아무리 간절해도 고개는 함부로 숙이는 것 아냐. 게다가 너 라이언하트잖아? 네 멋대로 사제지간을 맺어도 되는 거야?”


“안 될 건 또 뭐 있어요?”


“내가 안 돼.”


멜키스가 빠르게 말을 붙였다.


“사제지간은 함부로 맺는 것 아니야. 괜히 나중에 귀찮아질 수도 있다고. 만약 적탑주가, 스승이랍시고 네게 갑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제가 아는 로베리안님은 그럴 분이 아니세요.”


“이 답답한 꼬마야, 꼴랑 17살 먹은 네가, 나보다 적탑주를 잘 알아?”


“왜 자꾸 헛소리를 하는 거요?”


로베리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멜키스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까놓고 그래. 네가 적탑주의 제자가 된다면, 내가 위니드와 거래하는 건으로 마도서를 해석해 줄 필요가 없어지잖아. 이거 나도 자존심이 많이 깎이는 말인데, 적탑주가 나보다 마법 실력은 뛰어나거든?”


“꼭 마도서로 거래할 필요는 없잖아요.”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따로 거래할 만한 것 없으세요? 물건도 좋은데.”


그 당돌한 말에 멜키스의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잠시 유진을 보던 그녀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꼬마가 거래를 할 줄 아네.”


“싫으면 마시고요.”


“누가 싫대?”


멜키스는 즉시 말을 받으며 턱을 어루만졌다.


“잠깐 고민 좀 할게.”


흑사자


유진은 전생부터 공짜를 싫어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싫은 상대여도, 도움이 되는 것을 준다면 일단은 받아둔다. 하물며 유진은 멜키스에게 별다른 악감정도 없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위니드를 쓸 일도 없고.’


물론 위니드의 대여는 유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폭풍검은 라이언하트 본가에 귀속된 보물이고, 지금은 유진이 잠시 빌려쓰고 있을 뿐이다.


‘가주가 안 된다고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허락은 구해 볼 생각이었다만. 유진은 길레이드가 이 건을 거절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길레이드 라이언하트. 그는 전통을 중시하는 라이언하트 본가의 가주이면서도, 케케묵은 전통보다는 현실과 가문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위니드를 아예 멜키스에게 넘기는 것도 아니고. 며칠 빌려주는 것으로 그 이상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확실하게 약속된다면, 길레이드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하기도 하고.’


유진이 고민하듯, 멜키스도 고민했다. 그녀는 자신이 보유한 여러 아티펙트들과, 백색 마탑에서 엄중히 관리되는 마도서들을 떠올렸다.


‘...마도서는 무가치하지.’


아크리온에 입장할 수 있게 된 이상, 백색마탑의 마도서들은 대단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지팡이는 어때?”


멜키스가 입을 열었다.


“꼬마 너, 지팡이 없잖아. 지팡이 없어도 마법은 꽤 잘 쓰는 것 같기는 한데, 그거야 네가 쓰는 마법들이 간단해서 그런 거고.”


“그래요?”


“당연히 그렇지. 마법사가 지팡이를 폼으로 들고 다니는 줄 아니? 지팡이의 보조가 있어야 마나도 쉽게 조율하고, 마법의 술식을 간편화 할 수 있는 거야.”


“유진님. 지팡이는 제가 가진 것들 중에도 훌륭한 것들이 많습니다.”


로베리안이 냉큼 말을 받았다. 그는 솔직히 멜키스가 위니드를 빌려가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위니드를 촉매로 삼는다 하여 무조건 바람의 정령왕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만에 하나 멜키스가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에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는 지금도 마법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정령술사다. 그녀 이전에는 그 어떤 정령술사도 두 명의 정령왕과 계약한 적은 없었다. 거기에 바람의 정령왕까지 더해진다면... 백색 마탑의 힘이 너무 강해진다.


로베리안은 적색 마탑주로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가뜩이나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멜키스가 다른 마탑주보다 월등한 힘이라도 갖게 된다면?


‘그녀의 성격상 아롯의 정세에 관여하지는 않겠지만... 마탑주 한 명에게 힘이 너무 쏠리는 것은 좋지 않아.’


당장 예를 들 수 있는 것은 흑탑주인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아롯에서도 특별하게 취급되고 있다. 발자크와 계약하고, 배후에 서준 유폐의 마왕 때문이다. 발자크는 흑탑주임과 동시에 헬무드의 사절이기도 하다.


“당신 자꾸 초 칠 거야?”


“정령왕 둘과 계약한 주제에 뭐 그리 욕심이 많소?”


“이 늙은이가. 내가 당신 속내를 모를 줄 알아? 내가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하고서 깽판이라도 칠까 염려하는 거지?”


“잘 아는 군.”


“야! 넌 나랑 수십 년 알고 지냈으면서 아직도 날 모르냐? 난 아롯의 정세나 머리 아픈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거든?”


“당장 말은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과한 힘을 갖게 된다면 뒤틀릴 수도 있지.”


로베리안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눈으로 멜키스를 응시했고, 멜키스는 뭐라 반론하지 못하고 까득 이를 갈았다.


“...대단한 애국자셔. 언제부터 아롯을 그렇게 위하셨다고?”


“분란거리를 방관하고 싶지 않을 뿐이오. 발자크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니까.”


“하! 누가 보면 발자크가 개짓거리라도 꾸미고 있는 줄 알겠어. 로베리안 서피스. 당신이 흑마법사를 혐오하는 것은 잘 알지만, 가끔 너무 과해. 선입견 때문에 사람 오해는 하지 말지?”


“선입견?”


로베리안이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난 흑마법사의 인체실험에 가족을 잃었소. 내 눈앞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여동생이 한 마리의 키메라가 되어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단 말이오. 만약 스승님이 구해주지 않으셨다면, 나도 똑같이 키메라가 되었겠지.”


“...윽...”


“그런 내가 흑마법사를 혐오하고, 선입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내가... 실언을 했어. 미안해. 당신은 흑마법사를 혐오해도 돼. 하지만... 발자크는 아무런 짓도 안 했잖아?”


“모르는 일이지.”


로베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추잡한 볼레로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배후에 발자크가 없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소? 당장 일 년에 몇 번씩이나 볼레로 거리에서 사람이 실종되오. 그러한 행방불명은 볼레로 거리 뿐만이 아니라, 아롯 곳곳에서 은밀히 벌어지고 있지.”


“...그게 흑마법사들의 소행이라는 증거는...”


“없지. 그래서 나도 발자크를 추궁하지 않는 것이고. 허나 심증은 무시할 수 없는 거요. 내가 알기론, 무연고의 사람을 납치하는 것을 즐기는 족속은 흑마법사들 뿐이오.”


“...당신이 흑마법사를 혐오하고, 발자크를 의심하는 건 내 알 바 아니야.”


멜키스가 내뱉었다.


“당신이 뭘 경계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나는, 마나에 맹세컨대 내 힘을 믿고 깽판을 칠 생각이 없어. 만약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하게 되어도, 나는 백탑주라는 위치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아.”


“그럼 됐소.”


“...뭐야?”


“마나에 맹세했다면 믿어야지, 별 수 없잖소?”


로베리안은 언제 태도가 냉랭했냐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본 멜키스는 입술을 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능구렁이 같은 놈...!”


“너무 질색하지는 마시오. 대놓고 맹세를 권했다간 그대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아니오?”


멜키스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불끈 쥔 두 주먹을 들어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로베리안의 멱살을 틀어쥐고서 아구창을 갈기고 싶었다.


“...아 물론. 선택은 유진님이 하셔야지요. 주제넘게 나선 점,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유진은 로베리안의 태도에 대해서는 별다른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가진 발자크에 대한 의혹에는 신경이 쓰였다. 흑마법사를 혐오하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다.


저번에 이오드의 문제로 발자크와 처음 만났을 때, 발자크는 자신은 아무런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었다. 유진은 그 말을 무조건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흑마법사는 모두가 개새끼들이었다.


“고민해 봤는데, 지팡이는 별로 갖고 싶지 않네요.”


“누가 보면 주는 줄 알겠네. 꼬마야, 나도 빌려주는 거야!”


“미리 말해두는데, 저는 위니드를 며칠 밖에 안 빌려드릴 거예요. 그 대가로 멜키스님이 가진 아티펙트를 며칠 빌려주는 것이라면, 그냥 하지 말죠.”


“이... 재수 없는 꼬마 같으니.”


멜키스는 어깨를 파들파들 떨며 로베리안과 유진을 둘러보았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자신을 등처먹고자 둘이 미리 말이라도 맞춰둔 것 같았다.


“...하루당 1년으로 하지.”


멜키스가 내뱉었다.


“엄청나게 좋은 조건이야. 네가 위니드를 하루 빌려준다면, 나는 내가 가진 아티펙트를 1년 빌려줄게.”


“일주일 빌려드리면 7년?”


“그래!”


“그렇게까지 해서 위니드를 빌려가고 싶으신 거예요?”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나는 어떻게든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하고 싶다고!”


멜키스가 빽하고 소리를 지른다. 기왕 욕망을 털어놓은 것, 멜키스는 더 이상 자제하지 않았다.


“난 말이야, 정령술사가 된 처음부터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하고 싶었어. 번개의 정령왕이나 땅의 정령왕도 훌륭하지만,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하고 싶었다고!”


“왜요?”


“왜기는! 그 위대한 베르무트가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했었잖아!”


멜키스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나 이전에 정령왕과 계약했다는 대정령사도 바람의 정령왕과는 계약하지 못했어. 넌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정령술사들에게서 바람의 정령왕은... 그... 로망 같은 거야. 넌 라이언하트 출생이라 잘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마법사는 현명한 세냐를 존경하고, 어지간한 정령술사는 위대한 베르무트를 존경해.”


“...하멜은요?”


“우둔한 하멜이 여기서 왜 나와?”


“아니 뭐... 존경 받을 만한 위인이지 않나 싶어서.”


“난 존경 안 해.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위대한 베르무트, 현명한 세냐, 우둔한 하멜. 이 셋 중에서 누구를 존경하냐고 물으면, 관심종자가 아닌 이상 하멜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놈은 없을 걸?”


“...크흠...”


멜키스가 퍼붓는 말에 로베리안은 낮게 헛기침을 했다. 우둔한 하멜을 가장 좋아한다는 길레이드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유진님. 지팡이가 내키지 않으신다면...”


“당신, 괜한 말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백탑주가 소유한 아티펙트 중에 아주 진귀하고 훌륭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조용히 하라니까!”


멜키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외침에 호응하듯,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으며 전류가 튀었다.


“아크리온에서 난폭한 일을 하는 것은 엄금되어 있소.”


“당신이 헛소리만 하지 않으면 내가 난폭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야...!”


“헛소리라니. 나는 어디까지나, 유진님의 선택에 조언을 드리고 싶을 뿐이오.”


“저도 참 궁금하네요.”


유진은 벙긋 웃으며 대답했다. 멜키스가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를 불러내는 것은 유진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그것에 진귀한 보물까지 얹을 수 있다면 좋아 죽을 일이다.


“그게... 흑암(黑暗)의 망토라는 것인데...”


“닥치라니까!”


“왜 그렇게 열을 내는 것이오? 그대는 최근 10년은 흑암의 망토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내... 내가 그걸 손에 넣으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쓰지도 않을 것을 관상용으로 처박아두는 것보다는,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소?”


멜키스의 말문이 다시 막혔다. 그녀는 치솟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누르며 복잡한 고민에 빠졌다.


“흑암의 망토가 뭐죠?”


“...겨울용 외투야. 털이 북슬북슬하게 달려서 따뜻한... 그것 뿐이야.”


“최상위 공간마법이 내장 된 망토입니다.”


멜키스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설명을 피했지만, 로베리안은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게돈의 방패가 있잖습니까? 그에 견줄 수는 없지만,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는 망토입니다. 정면의 공격을 망토의 안으로 흘려보낸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되돌려보낼 수 있죠.”


“그, 그렇게 만능은 아니야. 엄밀히 말하자면 리플렉션이 아니라 리바운드라고. 네가 공간좌표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마나로 길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되돌려 보낼 수 없어.”


“어느 쪽이든 최상위 공간마법입니다. 바로 익숙해질 수는 없겠지만, 유진님의 자질이라며 금세 사용할 수 있으실 겁니다.”


“다... 당신, 자꾸 헛바람 불어넣을 거야? 흑암의 망토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멜키스의 어깨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런 식으로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망토의 겉면에도 고위 방어마법이 인챈트되어 있거든요. 그냥 걸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5서클의 공격마법은 무난히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본인의 마나량에 달린 거야.”


“굉장히 편리한 아티펙트입니다. 유진님. 아직도 다양한 무기를 즐겨 사용하십니까?”


로베리안은 멜키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그는 몇 년 전의 혈계식을 떠올렸다. 지금의 유진은 위니드 하나만 소지하고 있지만, 혈계식에서의 유진은 방패와 검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그 뿐만 아니라, 길레이드에게 듣기를 유진은 창을 다루는 것에도 굉장히 능숙하다고 했었다.


“즐겨 사용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고. 있으면 쓰는 것이죠. 여러 무기를 들고 다니기는 불편해서 위니드만 가지고 있지만요.”


“하하! 그렇다면 흑암의 망토가 아주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 망토에는 최상위 아공간 마법도 더해져 있거든요. 어려울 것은 없고, 그냥 망토 안에 여러 물건을 넣어두었다가... 필요에 따라 꺼낼 수 있는 거죠.”


“이 개자식...!”


멜키스는 절망 가득한 눈을 치켜뜨며 로베리안을 노려보았다.


“좋네요.”


유진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팡이 말고 흑암의 망토로 하죠. 아, 지금 바로는 말고요. 저도 본가에 물어봐야 해서.”


“나... 나는 동의한 적 없어.”


멜키스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멜키스였지 유진이 아니었다. 적어도 멜키스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녀는 유진이 템페스트와 담론을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위층에서 머리를 너무 써서 배가 고픈데... 로베리안님.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나 하실까요? 제자 건에 대해 이야기도 나눌 겸요.”


“저야 좋죠. 이곳에서 가깝지는 않습니다만, 상공의 부유역에 멋진 레스토랑을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요리도 맛있지만, 창가에서 보이는 야경은 요리 이상으로 훌륭하죠.”


“와우. 그러고 보니, 저는 아직 아롯의 보물이라는 야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마침 잘 됐군요! 지금 당장 공중마차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유진과 로베리안은 멜키스를 내버려두고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광경을 노려보던 멜키스는,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알았어.”


“아직 계셨나요?”


얄미운 꼬마 같으니. 멜키스는 유진을 노려보며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흑암의 망토...! 네, 가 정 바란다면, 빌... 려 줄게.”


“서두르지 마세요. 저도 본가에 물어봐야 한다니까요.”


“끼애애액!”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멜키스는 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끼아아악! 까아악!”


“까마귀인 줄 알았네...”


유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


유진이 예상했던 대로, 길레이드는 위니드의 대여를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조건이 붙기는 했다. 절대로 위니드가 파괴되어선 안 될 것이고, 멜키스가 위니드를 대여하는 것에 라이언하트의 참관인이 붙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참관인?”


며칠 뒤의 이른 아침부터 찾아 온 멜키스의 얼굴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인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가주가 직접 오는 거야?”


“아뇨.”


“그럼 누가 오는데? 그, 가주의 동생? 기온 라이언하트?”


“어떻게 아셨어요?”


“라이언하트 본가의 가주가 이런저런 일에 불려갈 만큼 엉덩이가 가볍진 않을 것 아냐. 가뜩이나 최근에 망나니같은 아들 때문에 아롯에 왔었으니... 이런 일로 다시 오는 것도 채신머리없는 일이지.”


멜키스는 투덜거리면서 망토의 깃을 여몄다.


“그게 흑암의 망토에요?”


유진은 멜키스가 두른 망토를 가리키며 물었다. 털이 북슬북슬하고 따뜻하다더니, 과연 그래 보였다.


“...멋있지?”


“멜키스님이 두른 것보다는 제가 두르는 편이 더 멋있을 것 같네요.”


“재수 없는 꼬마 같으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기왕 거래하는 거, 서로 웃으면서 하면 좋지 않습니까?”


“닥쳐. 그래서, 가주의 동생은 언제 오는 건데?”


“오늘 정오쯤에 오신다고 했는데... 기온님만 오시는 건 아니에요.”


“그럼 또 누가 와?”


망토의 털을 소중히 쓸어내리던 멜키스가 눈을 찡그렸다.


“라이언하트의 흑사자들도 온대요.”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본가의 보물을 대여하는 것이 처음이기도 하고... 이오드... 형님의 문제도 살펴 볼 겸.”


“...흑사자?”


찡그렸던 눈매가 누그러진다. 멜키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라이언하트의 사냥개들 말이지?”


사냥개라.


흑사자들은 그 말을 좋아하지 않겠지만, 유진이 그들에 대해 느끼는 감상도 멜키스와 다르지는 않았다.


가헌(家憲)의 수호자.


라이언하트의 흑사자.


그렇게 불리지만, 수호자들이 하는 일은 사냥개와 다르지 않았다.


만약 방계에서 혈계식을 치르지 않은 아이에게 마나를 수련시키고, 진검을 쥐게 한다면.


본가만이 계승해야 할 백염식이 방계에 전승된다면.


흑사자들이 나타나 가헌을 집행한다.


‘흑마법.’


흑마법을 수행하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가헌에서 엄격히 금해지는 일이다. 비록 이오드가 흑마법을 수행하지는 않았으나, 흑마법에 발을 들이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흑사자들은 그 일을 면밀히 파헤치기 위해 아롯에 오기로 했다.


기온 라이언하트.


그는 작년부터 라이언하트의 흑사자 중 하나가 되었다.


흑사자


당대 라이언하트 본가의 가주인 길레이드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다.


형제간의 사이는 원만했고, 피 한 방울 흐르는 일 없이 장남인 길레이드가 가주에 올랐다. 단순한 서열의 우선순위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길레이드의 실력이 형제들 중에서 월등했었다.


길레이드의 두 동생은 가주의 자리에 큰 욕심을 갖지 않았다. 형과 동생에 비해 실력이 뒤떨어졌던 차남, 길포드 라이언하트는 진즉부터 가주 자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


유진이 기억하는 길포드 라이언하트는 제하드만큼은 아니어도 아랫배가 조금 튀어나온 중년이었다. 듣기를, 젊어서부터 꽤 방탕하게 놀았다는데... 많이 친해지지는 못했어도, 성격이 고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길포드는 올해 초부터 본가를 떠나,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 영지에 자신의 가문을 세웠다.


기온 라이언하트.


그는 길레이드나 길포드와는 달리 결혼하지도 않았고, 결혼을 바라지도 않았다. 유진은 그것에 대해 몇 년 전에 기온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었다.


‘결혼?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지. 하지만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버리면, 내 아이가 다섯 살이 되는 해에 본가를 떠나야 하잖아. 나는 그게 싫어. 내 성격에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기온은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본가 저택의 기사들과도 언제나 웃음을 나누었고, 시종들을 대하는 태도도 고압적이지 않았다. 시엘과 시안을 지도하는 것에도 열정을 보였고, 자기 여가시간을 깎아 가며 기사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특히, 기온은 유진에게 굉장히 친절했다. 유진이 본가에서 지낸 4년 동안, 기온은 길레이드와 함께 유진을 직접 지도해 주었다. 적어도 유진은 본가에 있는 동안, 방계에서 온 양자라고 차별을 받은 적은 없었다.


유진이 보기에, 기온은 독특한 사람이었다.


실력도 출중하다. 그 실력은 가주인 길레이드가 보증하기도 했었다. 가주가 되고서 수행에 몰두하지 못한 길레이드와는 달리, 기온은 대륙을 떠돌며 수행에 열중했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 기온의 실력은 길레이드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렇다 하여 기온이 길레이드에게 반기를 든 적은 없었다. 기온은 가주의 ‘동생’이라는 위치에 벗어나지 않았다.


1년 전.


기온이 몇 달 동안 본가를 떠난 적이 있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기온이 입은 제복의 왼쪽 가슴에 새겨져 있던 라이언하트 본가의 상징인 사자 문양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포악한 송곳니와 발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검은 사자 문양.


기온은 라이언하트의 가헌을 수호하는, 흑사자 기사단의 식구가 되었다.


사실 그것은 유별날 일은 아니었다. 실력이 출중하고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검증된다면, 라이언하트의 누구든 흑사자 기사단에 지원할 수 있다. 흑사자 기사단은 본가의 기사들로 구성 된 백사자 기사단보다 우월하고 날카롭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가.’


약속 시간인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다. 유진은 시간을 확인하며 조금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본가에서 4년을 살았지만, 유진은 단 한 번도 흑사자 기사단을 본 적이 없었다.


라이언하트 본가의 백사자 기사단은 오로지 본가에만 충성한다. 하지만 흑사자 기사단은 본가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닌,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충성한다.


흑사자 기사단의 배후에는 원로원이 있다. 본가와 방계의 구분 없이, ‘라이언하트’의 역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거인들. 당대의 가주인 길레이드도 원로원의 늙은이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있진 못하다.


‘아직은.’


흥미가 느껴질 수밖에.


4년 동안 본가에서 지냈다. 길레이드는 강했고, 기온도 강했다.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인정받을 수 있을 강자들이다.


본가의 백사자 기사단도 강했다. 대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사단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할 것이다. 당장 백사자 기사단은 키옐 제국의 기사단과 비교해 보아도, 숫적으론 부족해도 질적으로는 못하지 않는단 평가를 듣는다.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베르무트. 놈은 인간 중에서 가장 강했다. 그래서 용사라 불렸고, 모든 마왕을 죽이기 위한 토벌대의 선두에 섰다.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나,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도 마왕을 죽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세 명이나 되는 마왕을 죽였다. 유진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았다.


모론도, 아니스도, 세냐도... 하멜도, 강했다. 하지만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마왕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멜이 보았고, 함께했던 베르무트는.


유진이 기억하는 베르무트는 인간같지 않게 강했다.


‘그러니 부족하지.’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길레이드와 기온은 강하고, 백사자 기사단도 강하지만. 베르무트의 후손을 주장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흑사자 기사단을 어떨까. 본가와 방계를 구분하지 않고,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가진 놈들 중에서도 특히 우월하며 충성스런 놈들로 추려냈다는 기사단은 얼마나 강할까. 그 흑사자 기사단의 배후에 있다는 원로원은 또 얼마나 강하고?


‘뒷방에 물러난 늙은이들... 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


길레이드는 본가의 전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혈계식은 물론이고, 방계를 무조건 억압하는 것도 꺼려하고 있다.


하지만 3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은 가주의 힘만으로 바꿀 수 없다. 원로원과 흑사자 기사단. 가헌의 수호자들은 그 무엇보다 라이언하트의 법을 수호한다.


수호(守護)라는 것은 마땅한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법.


유진은 이렇게 되는 것을 의도치는 않았으나, 흑사자 기사단과 얽히게 된 것에는 설렘을 느꼈다.


*


적색마탑의 앞.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공중마차가 내려선다.


“있는 대로 폼을 잡고 오는 군.”


멜키스는 이 자리에 나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는 아롯의 고위인사도 아니잖은가. 위니드만 아니었어도 이런 식으로 마중이라도 나온 것 마냥 서있지는 않을 텐데.


“백탑주님은 라이언하트의 선조이신 베르무트님을 존경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꼬마야, 착각하지 마. 내가 존경하는 것은 위대한 베르무트지, 라이언하트 가문은 아니라고.”


“그게 그거지 뭘.”


“달라. 나는 라이언하트 가문은 별로 안 좋아 해. 본가가 방계를 억압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은밀하고 있어 보이는 척 하는 원로원이나 흑사자 기사단도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를 감춰야 할 거요.”


멜키스와는 달리 로베리안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는 내려서는 마차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정말로 위니드를 빌리고 싶다면, 저들을 언짢게 할 만한 일은 삼가는 것이 좋을 거요.”


“나보고 아양이라도 떨라는 거야?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 나는 대등한 거래를 하는 거야. 내가...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흑암의 망토와! 위니드를 거래하는 거라고.”


“거래는 아니죠. 서로 빌리는 거지. 하루에 일 년이라고 했죠?”


멜키스는 까득 이를 갈았다.


그런 표정을 보여주었지만, 사실 진짜로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 아크리온에서 까마귀처럼 깍깍 거릴 때는 진짜로 화가 났던 것이지만,


백색 마탑에 돌아와서. 흑암의 망토를 끌어안는 동안... 감정을 진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하루는 무슨. 아마 몇 시간, 길어야 반나절일 걸?’


멜키스는 자신의 정령친화력을 믿었다. 폭풍검 위니드라는 분명한 촉매도 있는데, 바람의 정령왕을 불러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길어야 몇 달 빌려주는 거야.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


어려서부터 동경해 온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하는 대신, 흑암의 망토를 몇 달 빌려주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거저먹는 일 아닌가. 물론 멜키스는 그러한 기쁨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다.


‘괜히 티냈다가는 꼬마가 조건을 바꿀 수도 있어.’


고작 하루 만났을 뿐이지만, 멜키스는 유진이 영악하고 고약하고 개같다는 것을 파악했다.


공중마차의 문이 열린다. 저 큼직한 공중마차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내린 것은...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시엘이었다.


“곧 있으면 어머님의 생신이셔.”


고작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것이라, 시엘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각이 딱딱 잡힌 제복을 입고, 잿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내린 모습은 본가에서도 본 적이 없어서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선물이나 골라 볼 겸 온 거야. 네가 잘 지내나 궁금하기도 했고.”


시엘은 웃음기 하나 없이 건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주제에 눈은 얇게 뜨고서 유진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유진은 시엘의 바람처럼 놀라거나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아, 그래?”


그게 전부였다. 시엘은 눈썹을 확 구겼지만, 길을 막아서지 않고 걸음을 옆으로 비켰다.


시엘의 다음으로 나온 것은 기온이었다. 이번에도 기온의 왼쪽 가슴에는 흑사자 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유진을 본 즉시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눌 만큼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뒤 따라 내린 중년인이 기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렇게 만나니 기쁜 것을 어떡합니까?”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 당장은 용건에 충실 합시다.”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대단한 실력자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검은 아니고. 창이네.’


남자는 무기를 패용하지 않았다. 다만 은연중에 묻어나오는 자세와 근육이 발달한 형태를 보건데, 창을 쓰는 것이 확실할 것이다. 유진은 뒤따라 내리는 남은 두 명을 확인했다.


‘저 놈은 마법사고...’


무가로 이름 높은 라이언하트에도 마법사는 있다. 위니드의 대여와 이오드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 온 것이니, 마법사가 대동되는 것도 당연했다.


‘뒤는... 어쭈.’


마지막에 마차에서 내린 것은 검정색 제복 자켓을 어깨에 걸친 여자였다. 다른 이들은 말끔하게 제복의 단추를 채웠는데, 혼자만 보란 듯이 단추를 풀고서 어깨에 걸친 모습을 보니 저들 중에서 가장 직위가 높아 보였다.


‘강하고.’


그것보다 유진이 주목한 것은, 여자의 손이었다. 가죽 장갑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긴 세월에 거쳐 단련 된 흉기는 윤곽만으로도 여자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검이나 창은 아니고. 주먹질이네.’


“20년 만인가?”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로베리안을 똑바로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23년 만이죠.”


“그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아, 이야기는 들었다. 지금은 네가 적색 마탑주라지?”


“마지막에 뵈었을 때도 곧 적색 마탑주가 될 것이라 말씀드렸었는데 말입니다.”


“그랬었나? 시간이 꽤 흘렀으니, 기억이 잘 안 나네. 별로 관심이 없었기도 했고.”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네가 유진 라이언하트로군.”


“예.”


유진은 일단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나는... 카르멘 라이언하트라고 한다. 배분상으로는 네 고모할머니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부르지는 마라.”


“...예?”


유진은 순간 카르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고모할머니? 그렇다는 것은, 저 여자가 길레이드의 고모라는 말인데...


‘겉모습이 다가 아니기는 해.’


당장 멜키스만 해도 나이가 예순은 넘었고, 로베리안의 나이도 비슷하다. 그럼에도 둘은 그 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젊은 용모를 유지하고 있으니, 카르멘이 젊어 보이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만한 인물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유진을 놀랍게 만들었다.


“바람이 찬데, 이야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시죠.”


로베리안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적색마탑의 최상층에 위치한 응접실. 그곳까지 가는 중에, 유진은 오늘 찾아 온 흑사자 기사단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는 전대 가주의 여동생으로, 기온과 마찬가지로 혼인을 하지 않고 본가에 남아 있다가 흑사자 기사단으로 소속을 옮겼다. 현재 그녀는 흑사자 기사단의 3번대 대장이다.


네이션 라이언하트. 기온의 어깨를 두드렸던 남자. 그는 카르멘이 이끄는 3번대의 부대장으로, 본가가 아닌 방계 출신이다.


팔라고 라이언하트. 마법사. 마찬가지로 3번대 소속이다. 그는 방계 중에서도 희소한 마법가문 출신인데, 오늘 멜키스와의 거래를 주선을 맡았다.


“내용은 미리 들어두었습니다만, 다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팔라고는 자신의 지팡이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라이언하트 본가의 폭풍검 위니드와, 백탑주님의 소유물인 흑암의 망토. 위니드를 하루 빌리는 동안 흑암의 망토를 일 년... 일단은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그 하루라는 것이 딱 맞아 떨어지는 단위는 아니잖습니까.”


“그럼?”


“1시간에 보름. 2시간에 1달. 24시간에 1년. 어떠십니까?”


“분으로는 안 나누고?”


“그것이 확실하겠지만, 너무 번거롭죠.”


“10분 빌리면 1시간으로 치겠다는 말이지?”


멜키스는 기가 차서 웃음을 뱉었다. 일단 저 조건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해해 주십시오. 폭풍검 위니드는 선조님이 직접 사용하신 검이고, 라이언하트의 보물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진귀한 것입니다.”


“조건은 그것 뿐?”


“계약서는 준비해 뒀습니다.”


팔라고는 엶은 미소를 지으면서 품속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 계약서는 멜키스 뿐만 아니라 유진도 확인해야만 했다.


굵은 글씨로 강조된 것은, 위니드의 파괴에 관한 것이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한다라. 이거야말로 애매한 말 아닌가?”


“그런 불상사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혹시 모르니 들어두고 싶은데. 만약 내가 위니드를 파괴한다면?”


“목숨으로 갚아야지.”


대답한 것은 카르멘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지 않고, 창틀에 걸터앉아서 창밖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 삐딱하고 불량한 모습은 도저히 길레이드의 고모라고 상상할 수가 없었다.


“폭풍검 위니드는 그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물이야. 그를 빌려가길 원한다면, 당연히 네 목숨을 걸어야지.”


“내 목숨도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아롯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라이언하트에게는 아니다.”


카르멘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돌돌 말린 시가를 꺼냈다. 유진은 창밖을 보며 시가를 무는 카르멘의 모습을 잠자코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춘기 애새끼도 아니고.’


저 꼬라지를 보니 몇 년 전의 시안이 떠오른다. 쌍둥이인 시엘은 올해부터 사춘기의 병증을 드러냈는데, 시안은 2년 전, 15살부터 사춘기의 병증을 드러냈다. 놈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시커먼 옷을 즐겨 입었고, 본가 일꾼들의 술과 담배를 몰래 빼돌려서 입문하려다가 애니실라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곤 했었다.


“내가 목숨을 내놓지 않겠다고 한다면?”


“자, 자. 꼭 목숨을 내놓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팔라고가 흔들리려는 미소를 유지하며 중재에 나섰다.


“저는 백탑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같은 마법사로서 존경하고도 있고요. 설마 백탑주님이, 정령과의 계약 과정에서 촉매를 파괴하는 어설픈 실수를 하시리라 생각지 않아요.”


“...흥.”


“만에 하나... 위니드가 파괴된다면. 그때의 문제는 그때에 다시 논하도록 하죠.”


“일단 통제권을 라이언하트 쪽에서 갖겠다, 이 말이지?”


“그게 싫으면 위니드를 대여하겠다는 마음을 접도록.”


카르멘은 창가를 보며 시가를 물었다. 그런 주제에 불은 붙이지 않았다.


“라이언하트 쪽에서는 간절할 것 없는 이야기야. 가주가 부탁하지 않았다면, 이런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


“흥, 누가 보면 나 때문만으로 여기까지 온 줄 알겠어.”


“이런 시답잖은 일 말고 정말 중요한 문제 때문에 온 것이지.”


카르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회중시계라니...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저 불편하고 무거운 시계를 굳이 품에 넣고 들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본다.


“회중시계를 들고 다닐 거면 손목시계는 왜 차고 있는 거야?”


지적을 참고 있는 유진과는 달리, 멜키스는 거리낌없이 그를 물어보았다.


“피지도 않을 시가는 왜 물고 있는 거고?”


“...앞으로 1시간 뒤에, 흑색마탑을 방문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카르멘은 지적에 대답하지 않았다...


“발자크 루드베스와 이오드의 건으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그 뒤에는 놈과 함께 아롯의 감옥에 가야 하고.”


“감옥은 왜?”


“감히 라이언하트의 적자에게 흑마법을 입문시키려 한 시건방진 흑마법사를 심문하기 위해서지.”


그 말은 길레이드가 했던 대답과 완전히 상반된 말이었다. 길레이드는 게비드의 문제에 관해서는 아롯의 법을 따른다고 말했었다.


“...그건 길레이드님의 뜻과는 다른 듯 합니다만.”


로베리안도 그 말을 듣고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길레이드와 오랜 벗이며 라이언하트 가문에도 호의적이다. 그럴 지라도 로베리안은 아롯의 적색 마탑주였다. 타국의 명문가가 아롯의 법을 무시하는 것은 보고 넘겨선 안 될 일이다.


“가주의 뜻은 그럴 테지만, 원로원의 뜻은 다르다. 저번 일로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오물이 튀었어. 오물을 튀게 한 놈에게는 마땅한 책임을 물어야지.”


카르멘은 피식 웃으며 로베리안을 응시했다.


“아롯의 왕가와 의회의 허락은 받아뒀다. 이깟 문제로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보다는, 우리 쪽에서 심문과 처벌을 하는 것이 피차 깔끔하지 않나?”


“깔끔하지는 않지요.”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이군. 원로원은 라이언하트의 이름만을 앞세울 생각은 없어. 이 소란에 라이언하트의 적자가 관련되었으니,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성의는 보이기로 협의했다.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죄인의 목숨 값도 더해서 말이야.”


그렇게까지 말하니 로베리안은 더 이상 반론할 수가 없었다. 마법의 연구에는 많은 돈이 든다. 수도 펜타곤의 관광지들에 어마어마한 관광료가 책정된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마법사란 족속은 자신이 연구한 마법을 공개하고 활용해 돈을 버는 것보다, 혼자서 싸매고 감추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명망높은 라이언하트가 죄인에 대한 심문권과 처벌권을 가져가는 대가로 얼마큼의 거금을 지불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의회가 거절할 수 없을 만큼의 거금을 쥐어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거지? 거래. 시간이 많지 않아.”


“할 거야.”


멜키스는 표정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하루가 아니라 1시간? 나야 좋지. 3시간쯤이면 충분할 테니.’


이 조건으로는 아무리 길어도 두 달 뒤에는 흑암의 망토를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멜키스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흑사자


멜키스가 결정을 내리고서 곧장 계약이 진행되었다. 단순히 종이로 된 계약서도 아니고, 마법으로 맺는 계약서는 멜키스 같은 대마법사도 어길 수가 없다.


“만약 저로 인해 망토가 파괴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만한 값은 지불해야지. 걱정하지 마, 목숨을 내놓으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그를 요구할 수도 없는 입장이긴 했다. 적자는 아니지만 상대는 라이언하트 본가의 양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면 라이언하트와 척을 지게 될 것이 뻔했고, 멜키스는 그런 일은 바라지 않았다.


“애당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흑암의 망토는 작정하고 만들어진, 최상위급의 방어 아티펙트라고. 네가 두른 상황에서 망토가 파괴당한다면... 너도 같이 죽을 걸? 꼬마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죽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라는 거겠죠.”


“잘 아네. 방어구 믿고 깝죽대지 말고, 얌전히 보관만 해. 멋진 파티에 입고 나가는 정도는 괜찮겠지만, 그거 입고서 싸우진 말라는 거야.”


그따위로 쓸 거면 이런 망토를 뭐하러 가지고 있나?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흑암의 망토를 어깨에 둘렀다.


“디자인이 멋지군.”


창가에 걸터앉아있던 카르멘이 입을 연다. 그녀는 아직도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특히 목 주변의 털이 풍성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어. 라이언하트의 상징,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는 군.”


“그렇군요.”


“하지만 털의 빛깔이 검은 색인 것이 흠이군. 백염식의 불꽃과 같은 흰색이나... 잿빛색이라면 훨씬 더 멋졌을 텐데. 지금의 털색은 흑사자 기사단에 훨씬 어울릴 것 같구나.”


“...”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카르멘을 멀뚱거리며 보았다. 카르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유진을 응시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가 시선을 나누고 있자, 곁에 앉아있던 시엘이 유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벗어드려.”


“왜?”


“입어보고 싶으시대잖아.”


“그런 말은 하지 않으셨는데?”


“꼭 말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유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카르멘의 시선에는 귀찮은 부담감을 느꼈다.


“...입어보시죠.”


그렇게 말하며 망토를 벗는데, 즉시 카르멘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노골적인 무관심을 표정으로 피력하면서, 유진이 건네는 망토를 확 휘두르다시피 몸에 둘렀다.


“나쁘지 않군.”


창가에 비치는 제 모습을 빤히 보면서 슬쩍슬쩍 포즈를 바꾼다. 유진은 그런 카르멘의 등을 물끄러미 보았다. 전생과 현생에서 나이가 많은 상대는 숱하게 보아왔지만, 카르멘처럼 독특하게 나잇값을 못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가슴에 사자를 본 딴 장신구를 달면 더욱 좋을 것 같아. 등에는 라이언하트의 문양을 새기고.”


“누가 보면 아예 주는 줄 알겠네. 착각하지 마, 빌려주는 거거든? 내 망토에 헛짓거리하기만 해.”


탐욕스런 눈으로 위니드를 살피던 멜키스가 고함을 지른다. 하지만 카르멘은 멜키스의 외침에 화답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동안 창문에 비치는 제 모습에 심취해 있다가, 네이션이 서너 번 헛기침을 하고서야 망토를 벗었다.


“슬슬 시간이로군. 가자.”


“예.”


네이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카르멘이 저 망토를 벗지 않고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카르멘은 그 정도로 염치없고 난감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시엘.”


응접실을 떠나기 전, 기온이 시엘의 이름을 불렀다.


“네, 유진이랑 기다리고 있을 게요.”


시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시엘의 미소와는 달리, 기온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이유를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카르멘이 사담을 나눌 기회를 주지 않고 응접실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간다.”


카르멘과 흑사자 기사단이 떠난 후. 멜키스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위니드를 양팔로 끌어안고, 양 뺨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네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길어야 반나절?”


“저도 같이 갈게요.”


“안 돼. 누구 마음대로? 꼬마야, 정령과의 계약은 말이야. 술사의 정령친화력도 중요하지만, 장소와 상황도 중요하다고.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맞선과 비슷해.”


“예?”


“생각해 봐. 네가 설레는 마음으로 맞선 장소에 도착했는데, 누군지도 모를 놈팽이가 네 상대와 같이 있는 거야. 그럼 네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냥 뭐, 맞선을 주선한 누군가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너 경험 없지?”


“예?”


“맞선 경험.”


“저 17살인데.”


“명문가는 그보다 훨씬 어린나이부터 맞선을 자주하지 않나? 로맨스소설에서 봤어.”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지 마세요.”


“진짜 안 해? 역시 현실은 소설만 못하네.”


멜키스는 투덜거림을 멈추고서 정색했다.


“어쨌든, 안 돼. 기껏 바람의 정령왕을 꼬실 수 있게 되었는데, 너랑 같이 있는 것을 보고 계약에 응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건 정령왕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저도 바람의 정령왕을 직접 보고 싶은데요.”


“걱정하지 마, 계약을 맺고 위니드를 돌려줄 때 보여줄 테니까.”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멜키스의 말처럼, 자신과 함께 있는 상황이면 템페스트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맞선이니 뭐니 하는 비유는 솔직히 알아먹기 힘들었지만, 템페스트는 유진이 하멜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개새끼. 분명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다니까.’


4년 전에 만났을 때에는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며 가버렸지만. 유진은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약속에 대해서는 모를 지라도, 유폐의 마왕과 싸우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것 아냐.’


그거라도 들어야겠다.


멜키스까지 나가버린 후. 응접실에는 유진과 로베리안, 시엘 셋만 남았다.


“...아. 인사가 늦었군요. 시엘 아가씨, 이렇게 뵙는 것은 4년 만이죠?”


“네.”


분명 몇 달 전에 봤을 때에는 사춘기가 미처 끝나지 않아 방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그새 사춘기를 극복한 것인지, 시엘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로베리안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로베리안은 17살의 시엘을 보며 세월의 빠름을 느꼈다. 유진과 재회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성장이 참 빠른 것 같았다. 재회한 시엘에게는 4년 전에 느꼈던 어린아이다운 면모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애니실라님의 생신 때문에 오셨다고 했죠?”


“네. 아, 로베리안님이 매해 보내주시는 선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제 방에 장식되어 있어요.”


“하하, 시엘 아가씨의 감사 편지는 항상 즐겁게 읽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올해는 보내주지 않으셔서 의아했습니다만... 혹시 제가 보낸 선물이 마음에 안 드셨던 겁니까?”


“아뇨,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난감할 법도 한 질문인데, 시엘은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올 초부터 여러 가지로 성격이 예민해 졌었거든요. 보내주신 선물은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이상하게도 펜을 쥐어 편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어요.”


“아아... 이해합니다. 아가씨의 나이라면 그런 시기가 갑자기 찾아오곤 하죠.”


로베리안은 불쾌감을 느끼지 않고 수긍했다. 로베리안은 자식을 낳아 본 적이 없어서 아버지의 고충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하나 뿐인 딸의 사춘기에 대해서는 길레이드도 몇 번씩이나 설움을 드러내곤 했었다.


“이제 와서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에는 로베리안님에게 죄송스럽고... 내년부터 선물을 보내주지 않으실 것 같아서.”


시엘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깔끔하게 포장 된 선물 상자였다.


“로베리안님에게 어울릴 것을 골라봤어요. 대단한 물건은 아니지만, 제가 용돈을 모아서 산거예요.”


“오오...”


“빨리 풀어보세요.”


시엘은 살며시 웃으며 채근했다. 로베리안은 가슴 깊은 곳에서 낯설고 푸근한 감정을 느꼈다. 이래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것인가. 길레이드가 슬하의 자식들을 자랑할 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선물을 받으니 왠지 모를 벅찬 감정이 차오른다.


“이건...”


선물상자를 풀어 내린 로베리안의 두 눈이 떨린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깔끔한 디자인의 넥타이 핀이었다. 시엘이 말한 것처럼 대단한 물건이 아니기는 했다. 세공이 잘 된 것이 가격은 상당해 보이지만, 이 정도 물건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로베리안의 선물 가격 이상의 감동을 느꼈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로베리안님이 마법사이시니, 마법에 관련 된 물건을 선물해드릴까 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런 물건이라면 이미 잔뜩 가지고 계실 것 같아서요.”


“...”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제가 기억하는 로베리안님은 언제나 로브를 입고 계셨더라고요. 하지만 로베리안님이라고 해서 언제나 마법사다운 로브를 입고 계시지는 않을 것 같고...”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로베리안이 벌떡 일어선다. 그러자 시엘은 킥킥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당장은 말고, 내년 제 생일에 보여주세요.”


“왜 하필 내년입니까?”


지금 바로 차보고 싶은데. 로베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시엘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드린 선물이니까요. 저희 어머님 생신파티에 오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말고 제 생일에 차고 와주세요. 그래야 제가 시안 오빠나 다른 손님들한테 자랑할 수 있잖아요.”


사춘기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요망하구나. 유진은 히죽거리며 웃는 시엘을 흘겨보며 생각했다. 유진도 어른을 상대하는 처세술에는 꽤 자신이 있었다만, 시엘과는 도저히 겨룰 자신이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시엘 아가씨. 혹시 내년에 바라는 선물이 있으십니까?”


“로베리안님이 주시는 거라면 뭐든지 좋죠. 아, 그래도 제게 너무 과분한 선물은 주지 말아주세요. 저희 오빠가 질투하거든요.”


질투라니. 로베리안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마음은 없었다.


혈계식 이후로 본가의 쌍둥이들에게 매해 선물을 보냈었고, 시안도 시엘처럼 감사의 답신을 보내기는 했었다. 하지만 시안의 편지는 언제나 형식적이기만 해서, 지금 와서는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다.


“...헛.”


넋이 나간 눈으로 넥타이핀을 응시하던 로베리안이 정신을 차린다. 그는 응접실 벽의 시계를 확인하고서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두 분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군요.”


“그런 말씀은 마셔요. 붙잡고 있다니... 오히려 제가 로베리안님의 귀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죠.”


어쩜 말을 저렇게 듣기 좋게 할 수 있는 걸까. 로베리안은 혀를 내두르며 몸을 일으켰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이야기를 즐기고 싶습니다만... 시엘 아가씨도 볼 일이 있으실 테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저는 괜찮은데...”


“아닙니다. 저도 볼 일이 있어서요.”


흑사자 기사단의 건을 확인할 겸, 의회에 얼굴을 한 번 비춰야 할 것 같다. 로베리안이 그렇게 말하니 시엘도 더 이상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럼 저도 이만...”


“어디 가? 나랑 같이 가야지.”


“내가 왜?”


“나는 아롯에 처음 왔단 말이야. 그러니 네가 안내해 줘야 할 것 아냐?”


“저도 부탁드립니다, 유진님.”


흑암의 망토도 받았으니, 연구동에 내려가서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로베리안이 시엘의 말에 힘을 더한다. 유진은 찡그린 눈썹을 씰룩거리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지 그러냐.”


적색마탑을 나온 즉시, 유진은 시엘을 돌아보며 이죽거렸다.


“너 로베리안님이 보내주신 선물들 죄다 방구석에 처박아놨잖아.”


“그게 뭐가 거짓말이야?”


“방에 잘 장식해놨다며?”


“네가 인테리어에 대한 미의식이 한참이나 부족해서 그래. 네 눈에는 처박아둔 것처럼 보일 지도 몰라도, 내 눈에는 모두 다 적절한 위치에 장식해 둔 거야.”


정말 그런가? 유진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시엘의 말에 무어라 반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대충 처박에 둔 것인데, 그게 장식해 둔 것이라고?


“...저번에 보았을 때에 먼지가 좀 쌓였던 것 같은데?”


“그건 네가 잘못 본 거겠지. 내 방에 먼지가 쌓여 있다고?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난 본가에 돌아간 즉시 내 담당시종을 불러다가 혼쭐을 낼 거야.”


“다시 생각해 보니 먼지는 없었던 것 같아.”


“어지간히 기억에 남았나 봐.”


시엘은 히죽 웃으면서 자연스레 유진의 곁에 붙었다.


“뭐가?”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말이야. 방안 풍경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할 정...”


“미안한데 나는 기억력이 좋아서, 시안의 방에 뭐가 있었는지도 다 기억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시안보고 침대 밑에 이상한 책 좀 치우라고 전해줘.”


“...뭐?”


“시안 딴에는 최선을 다해, 아무도 모르게 숨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놈이 15살 때부터 뭐 이상한 토끼 귀 머리띠를 달고 있는 춘화집을 수집했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니나도 알고 있을 정도야.”


“역겹네.”


“그렇지? 니나가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 언젠가 시안이 가주가 되면, 저택 시종들의 제복이 토끼 귀 머리띠에 색깔만 다른 스타킹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고.”


“어머님한테 전해줄게.”


“그건 좀.”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엄한 애니실라라면 시안의 귀를 잡아당기며 윽박을 지를 것이 분명했는데, 그렇게 되면 시안이 수치심이 자살할 지도 모르잖은가.


“그냥 네가 넌지시 말해 둬.”


“뭐라고 말을 해?”


“토끼 귀는 별로라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눈을 깜빡거리며 유진을 보던 시엘이 빠른 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럼 넌 무슨 귀를 좋아하는데?”


“말이 왜 그렇게 되냐?”


“토끼 귀는 별로라며. 그럼 다른 귀를 좋아하는 것 아냐?”


“미안한데 나는 그냥 귀가 좋아. 생각해보면 이상하고 징그럽지 않냐? 머리 위에 토끼 귀가 달려있으면, 원래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건데?”


“...그냥 메워져 있지 않을까?”


“실제로 보면 엄청 징그러울 것 같은데?”


“...그럼... 있어야 할 자리에도 그냥 귀가 있겠지.”


“그럼 사람 귀도 달고 토끼 귀까지 달고 있는 거야? 그것도 징그럽지 않냐?”


“...어... 어어.”


저런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시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괜한 소리 말고, 어머니 선물이나 고르러 가자.”


“나는 애니실라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


“내가 아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냥 따라 오기나 해.”


“따라가게만 할 거면 안내는 왜 해달라고 한 거냐?”


“넌 여전히 재수가 없구나. 그럼 나 혼자 돌아다니게 할 거야? 생전 처음 와 본 타국의 수도에, 이곳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날 방치하겠다고?”


“방치는 무슨... 네가 어디 모자라 제 앞가림 하나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은 그렇게 해도 따라올 것 다 알아.”


“그럴 수밖에 없지. 괜히 네 심기 거슬렸다가는 한참 동안 이거로 꽁알댈 것이 뻔한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흑암의 망토를 여몄다. 이렇게 털이 북슬북슬하게 달린 망토를 걸치기에는 아직 이른 계절이었지만, 여러 편의 마법이 내장된 망토는 싸매고 있어도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너 저저번 달이 생일이었잖아.”


“그랬지.”


“생일에 뭐했어? 파티는?”


“안했어. 책만 읽었지.”


“책?”


“적색마탑 도서관에서.”


“진짜 파티 안 했어? 누구한테 선물은 안 받았고?”


“안 받았어. 로베리안님이랑 헤라님이 주려고 하긴 했는데, 내가 부담스러워서 제발 주지 말라고 했거든.”


“헤라가 누구야?”


“적색마탑의 마법사.”


“여자야?”


“그럼 이름이 헤라인데 남자겠니?”


“어떻게 생겼어?”


“마법사처럼.”


“...마법사처럼 생겼다는 건 또 뭐야?”


“말 그대로인데. 로브입고, 커다란 모자 쓰고, 지팡이 들고.”


“얼굴은?”


“저 분이야.”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이 귀찮았는데, 마침 저편의 거리에서 헤라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큼직한 빵봉투를 끌어안고 바게트의 냄새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어머, 유진님!”


유진을 발견한 헤라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 짧은 순간, 시엘은 헤라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긋 웃으며 헤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라이언하트 가문의 시엘이라고 합니다.”


“앗...! 저, 저는 적색마탑의 헤라 스틸리라고 해요.”


헤라는 상황을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유진을 힐긋거리며 보았다.


“...흑사자 기사단과 함께 왔더라고요.”


“앗... 흑암의 망토! 거래가 깔끔히 끝났나 보군요.”


“네. 원래는 연구동에 내려가려 했는데, 얘가 자꾸 같이 가자고 졸라서.”


“아아...”


헤라는 시엘의 은근한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시간 되세요.”


“네?”


헤라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유진을 지나쳤고, 시엘은 잠시 동안 헤라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분 같네.”


“어어... 좋은 분은 맞지.”


“빵 냄새를 맡아서 그런가. 나 배고파.”


“그럼 밥부터 먹던가.”


유진은 멈췄던 걸음을 옮기며 시엘을 힐긋 보았다.


“그런데 너. 정말 선물만 사려고 아롯까지 온 거냐?”


“너 볼 겸 오기도 했다니까?”


“그거 말고. 내가 너랑 4년을 알고 지냈는데, 네 태도도 못 읽을 것 같아? 뭐 대단한 비밀도 아닐 거 아냐. 카르멘님이랑 뭘 하고 싶은 건데?”


“넌 이상한데서 눈치가 빠르더라.”


“네가 뻔한 거겠지.”


“종자로 삼아달라고 조르는 중이야.”


시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가주는 오빠가 될 거고. 나도 가주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 어머니는 정략혼을 시키고 싶으신 모양인데...”


거기서 잠깐, 시엘은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난 정략혼은 싫어. 그렇다고 본가에 틀어박혀서 아가씨 노릇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가겠다고?”


“당장은 못 들어가지만, 카르멘님의 종자가 되어서 개인적으로 지도를 받고 싶어.”


“카르멘님은 그러겠다 하시고?”


“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같이 오지도 않으셨겠지. 넌 모르겠지만, 카르멘님은 내가 어렸을 적부터 날 귀여워 하셨어.”


시엘은 히죽 웃으며 으스댔다. 유진은 삭막해 보이는, 어쩌면 삭막해 보이는 척을 하려는 카르멘의 얼굴을 떠올렸다.


“...좋네.”


“뭐가?”


“본가 밥만 축내지 않고, 네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것 아냐. 시안은 잘 지내고?”


“네 얘기를 자주 해. 이번에 여기 오기 전에도 그랬어.”


“뭘?”


“오빠는 비밀로 하랬는데...”


“어차피 말할 거면서 뭔 비밀이야?”


“네 백염식이 몇 성인지 알아오랬어.”


“3성.”


“그대로네.”


“시안은?”


“2성이야.”


“걔도 그대로구만 뭘.”


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멍청한 이오드와는 달리, 쌍둥이들은 열심히 하고 있다. 유진은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시안의 열등감은 수행의 양분이 되었고, 시엘은 여전히 짓궂고 요망하지만 그렇다고 남을 등 처먹는 악랄한 성격은 되지 않았다.


개같이 자란 것은 이오드 뿐이다.


“...형님 소식은 들었어? 외가로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몰라, 관심 없어.”


시엘은 눈썹을 확 찡그리며 내뱉었다.


“어머님은 이오드의 모자란 짓에 기뻐하셨지만, 난 기분 나빠.오빠도 기분나빠하고.”


“그래도 대충 소식은 알 것 아냐?”


“...테오니스님이 가정교사로 들일 마법사를 수소문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가정교사?”


“웃기지? 그런 사고를 쳤으면서 아직도 마법을 익히게 할 건가 봐. 어차피 가주도 못 될 거, 그냥 알아서 살게 하면 될 것을.”


시엘은 투덜거리면서 유진의 팔에 매달렸다.


“기분 나쁜 이야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디 좋은 식당 없어?”


“식당이야 많은데, 본가의 요리보다는 맛없을 걸.”


“맛은 상관없어.”


시엘은 유진을 올려다보면서 히죽 눈을 휘었다.


“원래 요리는 맛 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중요한 거야.”


흑사자


부유역의 전망 좋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요리는 꽤 괜찮았지만, 고기의 양이 부족하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색 마탑에서야 몇 달 동안이나 큼직한 고깃덩이를 요구했으니 식사는 만족스러웠는데, 이런 분위기로 먹고 사는 식당에서는 유진이 원하는 큼직한 고기는 나오지 않는다.


“몸도 이미 다 컸으면서 꼭 그렇게 무식하게 먹어야 돼?”


“더 클 수도 있잖아.”


“그러다가 가르기스처럼 되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네가 그만큼 커지는 건 싫어.”


“나도 싫어. 누가 좋아하겠냐?”


유진은 인상을 확 쓰면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플레이팅 되어서 나오는 고기들은 죄다 쥐꼬리만 했고, 덕분에 유진의 식탁에는 빈 접시가 산처럼 쌓이게 되었다.


반면에 시엘의 앞은 깔끔했다. 유진은 피망이나 당근 따위의 야채만 걸러진 것을 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편식하니 몸이 안 크지.”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나는 이미 다 컸어.”


“편식 안 하면 더 클 수 있을 걸.”


“너무 큰 것도 징그럽잖아.”


시엘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유진은 호리호리한 시엘의 팔뚝을 힐긋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마나 수련도 좋아하지만, 육체의 단련도 만만찮게 중요해. 싸우다가 마나가 고갈되면 몸뚱이만으로 싸워야 하...”


“얼마 전에 가르기스랑 놀았다더니 하는 말도 닮아졌네.”


“그 말 취소해라.”


유진이 질색하자 시엘은 삐죽 혀를 내밀며 웃었다.


“아버님한테 들었어. 너 3억 셀 써서 가르기스 대신에 거인족의 고환을 구매했다며?”


“그게 뭐.”


“설마 너도 같이 먹은 거야? 헤자르한테 물어봤는데, 거인족 뿐만이 아니라 짐승의 고환은 그, 몸에 좋은 건 맞대. 그런데 아무리 몸에 좋아도 그런 걸 어떻게 먹어?”


“안 먹었어.”


“정말? 제하드님이 좋아하겠다.”


“우리 아버지가 왜 좋아해?”


“그 좋은 걸 너만 먹느냐고 침통해 하셨거든.”


아버지 제발.


“너 아롯에 온 지도 벌써 세 달 넘었잖아. 뭐하고 지냈어?”


“책 읽고, 마법 배우고.”


“그런 뻔한 것 말고. 재미있고 색다른 경험 같은 건 안 했어?”


“마법 배우는 것도 재미있고 색다른 경험이지.”


“아크리온은 어때?”


애니실라의 선물을 사러 왔다는 주제에, 시엘은 거리로 내려가지 않고 부유역의 외곽을 산책했다. 그녀는 멀리 보이는 호수와, 왕궁 아브람을 가리켰다.


“거기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곳이잖아. 네가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받았단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님이랑 제하드님이 얼마나 기뻐하신 줄 알아?”


“애니실라님은?”


“어머님도 겉으로는 기쁜 척 하셨지. 속은 복잡하시겠지만.”


“복잡해 하실 게 뭐 있어? 어차피 나는 가주도 될 수 없는 몸인데.”


“바로 그거야.”


시엘은 피식 웃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너는 가주가 될 수 없는 몸이지만, 아버님의 자식들 중 누구보다도 가주에 걸맞잖아.”


“그건 내가 잘나서 그런 거고.”


“너무 잘난 것도 흠이야. 적당히 모자란 구석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이해가 잘 안 돼서 그러는데, 시엘. 너 지금 나한테 경고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냐?”


유진은 시엘처럼 웃었다. 그 웃음에 시엘의 눈동자가 살짝 떨린다. 4년이나 함께 살았고, 유진이 웃는 것은 몇 번이나 보았었다.


시선이 다르다. 이쪽을 빤히 보는 유진의 눈에, 시엘은 4년 전 유진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결투를 받아들였을 때. 유진은 저런 눈을 하고서 시안을 노려봤었다.


“...경고라니, 설마.”


시엘은 가볍게 어깨를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나도 여러 가지로 복잡하단 말이야. 시안 오빠는 가주가 되고 싶어 해. 상황도 오빠에게 굉장히 좋게 되었지. 네 덕분에 이오드와 테오니스님이 본가를 떠나 버렸으니까.”


“그럼 내게 고마워해야지.”


“어머님은 네게 고맙다 생각하고 계셔. 시안 오빠는... 싫어하지만.”


“난 그래서 시안이 꽤 마음에 들어. 자존심 강한 게 누구 닮았거든.”


“누구?”


“있어, 능력에 비해 자존심이 과하게 셌던 놈.”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엘을 지나쳤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알아. 넌 오빠 갈구면서도 오빠 좋아하고, 애니실라님께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걱정하잖아.”


“...”


“나는 가주가 될 생각 없어. 되고 싶지도 않고. 누가 시켜도 안 해. 앞으로 평생 내가 가주 해먹겠다고 나설 일 없을 거다.”


“그런 말은 쉽게 하지 마.”


“네 생각은 어떤데?”


유진은 시엘을 돌아보며 물었다.


“만약 내가 마음을 바꿔먹고 가주 하겠다고 하면. 넌 어떻게 할 거냐?”


“...시안 오빠는 받아들이겠지.”


“넌.”


“아버님도... 널 인정할 거고. 기온 삼촌이나, 본가의 가솔들도. 네가 작정하고 하겠다고 하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시안 오빠와 넌 차이가 많이 나니까.”


“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어.”


“...나도 인정할 거야.”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마음이 아주 편하지는 않겠지. 어머님은 절대로 널 인정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그것 봐.”


유진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난간에 등을 기댔다.


“내가 가주하겠다고 하면 누군가는 불만을 가져.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난 본가의 적통이 아니니까.”


“...어머님을 위해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잖아?”


“포기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 가주님이나 너희 쌍둥이, 본가의 기사들이 인정해도 원로원은 날 인정하지 않을 거야. 일단 그게 굉장히 귀찮고 힘들겠지?”


“...”


“그것만 해도 짜증나는데, 나 자신이 가주가 되고 싶지 않아. 가주 해서 뭐 하냐? 라이언하트 본가의 가주. 그거 해서 할 수 있는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대단한 건 맞잖아?”


“난 가주 안 해도 세상 어딜 가든 대우 받을 자신 있어.”


“재수 없는 놈.”


“내가 틀린 말 했냐? 팩트만 두고 따져보자고.”


유진은 킬킬 웃으면서 시엘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자, 나는 방계 출신이야. 그런데 13살 혈계식에서 라이언하트 역사 최초로 우승했지. 거기에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본가의 양자가 되었고, 폭풍검 위니드의 주인이 되었어. 그 나이에 처음 마나에 입문하고, 백염식을 익혔지. 지금은? 나보다 몇 년은 일찍 익힌 시안보다 백염식의 경지가 높아. 라이언하트 역사에서 성인이 되기 전에 3성에 오른 분은 있어도, 나처럼 17살에 3성에 오른 사람은 없어.”


“재수 없다 너.”


“그것뿐만이 아니지. 독학으로 마법을 공부해서 1달만에 마법을 펼치게 되었고, 3달 흐른 지금은 왕립 도서관인 아크리온에 출입증을 받았어. 이렇게 잘났는데 가주 자리가 눈에 차겠냐?”


“잘났다, 재수 없는 놈아.”


저렇게 하나하나 나열에서 듣고 있으니 유진이 정말 괴물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시엘은 실실 웃는 유진의 얼굴을 보며 괜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서 가주 안 하면 뭐 할 건데?”


“뭐든 하겠지.”


“그거 알아? 어머님은 나랑 네가 혼인하기를 원하셔.”


“끔찍하군.”


곧장 돌아 온 대답에 시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끔찍할 건 또 뭐야?”


“너랑 난 가족이잖아. 남매.”


“누나라고 한 번도 부른 적 없잖아.”


“나이가 같은데 뭔 놈의 누나야? 너 설마, 13살 꼬마 때처럼 몇 달 먼저 태어났으니 누나라는 개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4년 동안 누나라 불러보라고 했는데. 이만큼 들었으면 못 이기는 척 한 번은 불러줄 수 있겠다.”


“내가 이기는데 왜 못 이기는 척을 해? 정 나한테 누나 소리 듣고 싶으면 한 판 붙던가. 너 방에 틀어박혔을 때도 기온님이나 가주님한테 열심히 배웠잖아.”


“그때 얘기는 하지 마.”


“누가 보면 엄청 오래 전 일인 줄 알겠네. 미안한데 너 사춘기라고 염병 떠는 거 마지막으로 본 게 3달 전이야.”


“원래 사춘기는 갑자기 시작 되서 갑자기 끝나는 거야. 시안 오빠도 그랬잖아.”


“난 안 그랬는데?”


“그건... 네가 이상한 거지.”


시엘은 삐죽 내민 입술을 집어넣지 않고서 투덜거렸다. 쌍둥이가 보기에는 유진이 이상한 것이 분명했다. 나이가 똑같은데 실력의 차이가 월등하고, 자기들이 겪은 사춘기도 겪지 않다니.


‘사춘기는 무슨. 내가 사춘기랍시고 지랄하면 그건 치매야.’


시엘은 고작 몇 달 전인 사춘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제 입으로 한 말처럼, 그녀의 사춘기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고, 기분은 괜히 싱숭생숭하고. 태어나 단 한 번도 불쾌하다 느낀 적 없던 체취가 거슬리고...


그러다가 갑자기 끝나버렸다. 유진이 아롯으로 떠난 후부터 신기하게 거슬리던 것들이 거슬리지 않다 느껴졌다.


“하나 물어봐도 돼?”


“뭐.”


“그, 왜. 나 사춘기였을 적에.”


“저번에 말이지?”


“...옛날에.”


“어쨌든, 그때 뭐?”


“나한테 이상한 냄새 안 났어?”


“안 났는데? 애초에 너 냄새 풍기기 싫다고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잖아.”


“...지금은?”


“향수 냄새는 조금 나네.”


“땀 냄새는?”


“바람이 이렇게 시원한데 땀이 왜 나? 야, 이상한거 신경쓰지 마. 사람이 땀 냄새가 날 수도 있지 뭘.”


“그래서 냄새 났냐니까?”


“안 났다고. 정 그게 신경쓰이면, 가르기스나 한 번 만나 봐.”


“내가 그 돼지를 왜 만나?”


“걔 만나면 네 몸에 나는 것이 땀 냄새가 아니라 꽃향기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유진은 그렇게 내뱉고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시 우두커니 서있던 시엘은, 씰룩거리며 번지는 웃음을 감추며 유진의 뒤를 따랐다.


“지금 나한테 꽃향기 난다는 거야?”


“몸은 컸는데 머리는 그대로인가.”


“장미향을 뿌리긴 했어.”


“난 꽃향기보다 비누향이 좋아.”


“아저씨 같애.”


시엘의 이죽거림이 내심 찔린다.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부유역 아래의 번화가를 가리켰다.


“...선물은 언제 사러 갈 거냐?”


“어디 더 구경하고 싶은데... 으음...”


시엘은 하던 말을 멈추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약속시간은 다섯 시야.”


“어디서 보는데?”


“워프 게이트 앞.”


“오늘 바로 돌아가는 거냐?”


“위니드에 관한 계약도 맺었고. 흑마법사에 대한 문제도 오기 전에 마쳐 두었으니까... 신병만 인수하고 바로 돌아가기로 했어.”


“본가로?”


“아니. 우클라스 산으로 가. 어딘지 알아?”


“키옐 남쪽에 있는 건 알아.”


“흑사자 기사단은 그곳에서 생활하거든.”


“넌 아직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가지도 못했잖아.”


“거기 가서 카르멘님에게 간단한 시험을 받기로 했어. 같이 갈래?”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는 것은 13살 때와 똑같았다.


“내가 거길 왜 가?”


“카르멘님은 나보다 너한테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시거든.”


“나? 한테? 왜?”


“아까 네 입으로 말했으면서 그걸 왜 물어보는 거야? 너 잘났잖아. 그렇게 잘났는데 가주는 될 수 없고. 그런 네게 흑사자 기사단이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지 않아?”


당연하기는 하다. 솔직히 시엘이 건넨 말은 흥미롭기는 했다. 흑사자 기사단은 라이언하트의 최고전력이다.


“지금 관심 갖지 말고 나중에 관심 가지라고 해.”


“왜?”


“지금은 마법 배우는 것이 훨씬 재밌거든.”


“흑사자 기사단에도 마법사들은 많아. 오늘 같이 온 팔라고님도 5서클이나 돼.”


“저기 왕궁에 있는 호네인 왕자님은 23살인데 5서클이라더라.”


“그건 아롯의 왕자니까 그런 거고.”


“어쨌든, 지금은 같이 안 가.”


“마법 배우는 시간에 백염식 수련하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마법 배우면서도 백염식은 수련하고 있어.”


사실이었다. 유진은 아롯에 오고서 단 하루도 백염식의 수련을 거르지 않았다.


“약속 시간이 5시면 몇 시간 안 남았잖아. 선물 안 골라도 되냐니까?”


“어머님은 내가 주는 거면 뭐든 좋아하시니까 괜찮아.”


“그럴 거면 왜 아롯까지 와서 선물을 사겠다고 한 거냐?”


“아까 들었으면서 왜 자꾸 물어보는 거야?”


시엘은 킥킥 웃으며 유진의 팔에 매달렸다.


“너 볼 겸 온 거라니까.”


“징그러우니까 떨어져.”


“어머니 선물은 고르는데 30분도 안 걸려. 그러니까 말이야, 시간은 효율적으로 써야 해. 어디 구경갈만한 곳 없어?”


“나 마법 수행하는 거 볼래?”


“봐도 재미없을 것 같아. 어디... 그래. 아롯은 야경이 유명하다고 했었는데. 오늘은 못 볼 것 같고... 현명한 세냐님의 저택이나 보러갈까?”


“난 첫날에 봤어.”


“나랑은 안 봤잖아.”


팔이 끌린다.


*


“모른다니 어쩔 수 없지.”


지하 감옥.


피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카르멘은 물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던졌다.


게비드. 마법사 길드 소속의 흑마법사. 볼레로 거리의 마약굴에 얽힌 수많은 이들 중, 죽여도 무탈한 이들은 죽고 죽여선 안 될 이들은 감옥에 갇혔다.


게비드는 죽여도 아무 탈이 없는 인물이었다. 흑색마탑의 소속이 아니다. 마법사 길드 내에서도 별다른 힘을 갖지 못한, 아롯의 밤거리를 떠도는 하찮은 흑마법사일 뿐이다.


그럼에도 게비드는 죽지 않고, 오늘까지 살아있었다.


그리고 방금 죽었다.


가장 먼저 고문을 했다. 카르멘이 나설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3번대 부대장인 네이션은 창도 잘 쓰지만 고문도 잘 한다. 라이언하트의 흑사자들은 대부분이 그랬다. 그들의 이빨과 발톱은 정면에서 적을 물고 찢는 것에만 능하지 않다.


이오드 라이언하트와의 계약을 주선한 것은 게비드였다. 듣기를, 볼레로 거리의 서큐버스 가게에서 친해졌단다. 그 친분은 올해 초부터 시작되었고, 매달 볼레로 거리가 열릴 적마다 게비드는 이오드와 함께 어울렸다고 했다.


“웃기는 일이야.”


카르멘은 새로운 시가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저따위 급 낮은 흑마법사가, 라이언하트 본가의 적자와 접촉해서 흑마법의 계약을 주선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거나, 미쳤거나.”


“간절했던 것이겠죠.”


대답은 감옥 밖에서 들려왔다.


“그는 수십 년 전에 흑마법에 입문했으나, 별다른 성취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대로 늙어 죽으면 혼은 마족의 소유물이 되고, 윤회도 할 수 없게 되죠.”


“...”


“그러니 뭐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을 겁니다. 설령 이 일이 문제되어 곤경에 처할 지라도, 라이언하트의 적자를 팔아 얻은 ‘힘’으로 그 곤경을 해쳐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죠.”


게비드도 그렇게 외쳤다. 그는 고문당하는 내내, 이 일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욕심으로 벌인 일이라고 비명을 질렀다.


“누아르 제벨라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벨라 공작은 휘하의 인큐버스가 라이언하트 적자를 물고 왔을 때 포상을 내리면 내렸지, 벌을 내리실 분은 아닙니다.”


“너는?”


“왜 화살이 제게 돌아오는지 모르겠군요.”


감옥 밖에 서있던 발자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는 이에 관한 모든 일에 협조했고, 충분한 사죄와 존중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저까짓 흑마법사가 일을 꾸민 것보다, 네가 일을 꾸몄다고 의심하는 편이 이치에 합당하지.”


“흠. 그리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만. 그럴 경우 제가 무엇을 얻습니까?”


발자크는 사지가 뜯어진 게비드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제가 이 일을 주도했다면... 저는 꼬리 따위는 밟히게 두지 않았을 겁니다. 철저하게, 그 누구도 저와의 연결고리를 알아차릴 수 없게끔 일을 진행시켰겠죠. 안 그렇습니까? 이번 일, 굉장히 어설퍼요. 볼레로 거리 한 복판의 마약굴. 17살 소년의 미행도 파악하지 못하고, 불상사를 막지도 못하는 약해빠진 호위. 하하... 저는 억지로라도 그렇게는 안 합니다.”


“들키고, 막히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제가 주도해서 말입니까? 그런 식으로 제 살을 깎을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발자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카르멘이 물고 있던 시가의 끝에 불이 켜졌다.


“카르멘 경. 저는 적이 굉장히 많습니다.”


“...”


“제가 섬기는 유폐의 마왕님. 감사하게도 제게 많은 믿음과 사랑을 베풀어주시죠. 그리고 헬무드에는 제가 받는 호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자들이 아주 많아요.”


“에드몬드 코드렛?”


“물론 그도 저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겠죠. 아멜리아 머윈도 저를 좋아하지 않을 거고.”


지금 시대에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한 흑마법사는 셋이다.


헬무드의 백작이자 블러드 베리의 주인. 에드몬드 코드렛.


아롯의 흑색 마탑주. 발자크 루드베스.


사막 나하마의 던전 마스터. 아멜리아 머윈.


“물론 그들 외에도 저를 싫어하는 ‘마족’은 많습니다만. 제 사견으론, 그런 이들 중 누군가가... 이 일을 빌미로 절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증거는 없지.”


“제가 이 일을 주도했다는 증거도 없죠. 이거 참, 요 며칠 동안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지...”


발자크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카르멘 경. 이 일로 난감해지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니잖습니까?”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네 자유다.”


카르멘은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야. 네 말을 수습하고, 책임 질 자신이 있나?”


“설마 없겠습니까?”


발자크는 안경을 올려 쓰며 웃었다.


“저는 유폐의 마왕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 분이 라이언하트를 친애하듯이 똑같이 친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 사죄했고, 협조했으며, 존중을 보였죠.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억울한 마음이 송곳처럼 삐져나오려는 것을 끝까지 억누를 수는 없겠습니다.”


“...”


“난 발자크 루드베스입니다. 아롯의 흑색 마탑주. 유폐의 마왕님의 종. 당신들이 나에게 아무런 존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하겠습니다만... 지나친 모욕은... 저 자신과, 유폐의 마왕님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감내하지는 못 하겠습니다.”


발자크의 눈동자가 칙칙하게 젖는다. 감옥 안에 있던 네이션과 팔라고가 굳은 얼굴로 철창 앞을 막아선다. 찌푸린 눈으로 감옥의 상황을 지켜보던 기온도 허리의 검에 손을 얹었다.


“...타국까지 와서 이 이상의 실례를 범하고 싶진 않은데.”


“원하신다면 그 누구도 실례라 느끼지 않게끔 수습해 드리죠.”


“그리 하려면 네 목이 멀쩡히 붙어있어야 할 텐데.”


발자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감옥 벽에 비춰지는 발자크의 그림자가 요동친다. 그를 싸늘히 보던 카르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볼 법한 일이기는 하다.”


“무엇이?”


“라이언하트의 누군가가 본가의 위신을 해치고 싶어 하는 것.”


라이언하트 가문은 많아도 너무 많다. 300년 동안 가주의 직계를 제외하곤 모조리 방계로 독립시켰고, 방계의 수를 제한하지도 않았다.


그 많은 방계 중에는 본가에 대해 불손한 마음을 품은 자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심증일 뿐이지. 고문으로도 알지 못했고, 정신마법으로 알아내지 못했어. 아주 깔끔해. 그래서 널 의심하는 거지.”


“이거 참. 괜한 말을 했었나.”


꼬리 따위 밟힐 일 없이, 철저하게.


“굳이 덧붙이자면, 제가 말하는 ‘깔끔함’은 이런 것과는 다릅니다. 이런 일을 벌일 이유도 없고.”


“믿지.”


“도움이 필요하다면 힘을 보태드릴 수는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래. 게비드의 영혼이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았는데... 불러드릴까요?”


“추잡한 마법은 보고 싶지 않아. 네 도움으로 심문하고 싶지도 않고. 그 과정에서 네가 무언가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


“하하...”


“올페르의 목은?”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텐데.”


“잔인하고 끔찍한 것은 많이 봤다. 당장 앞에도 있고.”


그리 말하는 카르멘의 눈은 게비드의 시체를 보지 않았다. 얇게 뜬 그녀의 눈은 발자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느끼기에, 이곳에서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것은 고문당해 죽은 시체가 아니라 저 흑마법사였다.


“그러시다면야.”


발자크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에게서 이어진 그림자가 꾸물거리며 위로 치솟았다. 시커먼 손이 들고 나온 것은 잘생긴 인큐버스의 머리였다.


“혼은 유폐의 마왕님이 거두셨습니다. 원하신다면 함께 드리도록 하죠.”


“필요 없다.”


발자크는 피식 웃으며 호인 올페르의 머리를 감옥 안에 내려놓았다. 그 즉시 카르멘이 호인 올페르의 머리를 걷어찼다.


콰직! 창살과 부딪친 머리가 산산조각난다. 그 너머에 있던 발자크의 얼굴과 옷에 피와 뇌수가 튀었지만, 발자크의 웃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돌아가지.”


카르멘은 어깨에 걸친 자켓을 털면서 감옥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싶어서 말해두는데. 적색 마탑에 남은 유진 라이언하트. 그와 접촉했다가는...”


“제 행동과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유폐의 마왕님 뿐입니다.”


발자크는 카르멘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안경에 튄 피를 손끝으로 훔치며 먼저 몸을 돌렸다.


“카르멘 경. 당신에겐 절 통제할 자격이 없습니다.”


동화


기온은 복잡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흑사자 기사단. 그들에 대해서는 어릴 적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마냥 이야기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몇 번 씩 접하기도 했었다. 가주 경쟁을 포기하고 세상을 떠돌던 젊은 시절. 그는 우클라스 산 깊은 곳의 흑사자 성에 머물렀던 적도 있었다.


‘필요한 건... 맞지.’


라이언하트는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명문가다. 뿐만 아니라 해괴한 전통을 고수하며 세력을 늘려왔다. 그 거대한 라이언하트의 중심에 선 것이 본가. 그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저분하고 거친 일을 전담해 줄 누군가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냥개’를 키우는 것은 라이언하트 뿐만이 아니다.


‘...시엘.’


기온 자신이 흑사자 기사단이 되는 것은 상관없었다. 스스로 바랐던 일이기도 하고, 가주인 형님을 암중에서라도 돕고 싶었다. 형님의 바람이 원로원이 고집하는 전통과 어긋나 있으니, 자신이 직접 흑사자가 되어 원로원과 본가의 중간다리가 되고 싶었다.


지저분하고, 잔인한 일들. 제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일. 기온은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라이언하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주인 형님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그런 역할을 맡는 것은 자기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시엘, 그 어린 조카가 이런 일에 발을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엘 본인은 바라지 않을지 몰라도, 기온은... 코흘리개시절부터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던 조카가, 피비린내 맡는 일 없이 평화롭게 살기를 바랐다.


시엘 뿐만이 아니다. 시안도, 유진도... 이오드도. 결혼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않은 기온에게 있어선 자식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오드. 대체 왜 흑마법을...’


“기온.”


씁쓸한 입맛을 느끼며 생각하던 도중. 앞서 걷던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흑사자 기사단에 온 것에 회의감을 느끼나?”


“...설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카르멘님.”


기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기온이 길레이드의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보아왔듯, 카르멘도 기온의 어린 시절을 보아왔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카르멘은 본가에서 살았고, 어린 기온은 카르멘을 고모라 부르며 따랐었다.


그의 방랑벽은 카르멘에게서 배운 것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지. 너도 잘 알겠지만.”


“예.”


대장이나 되는 인물이 직접 행차하는 일은 흔치 않다. 흑사자 기사단을 이끄는 강자들은 대부분 흑사자 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당대 가주의 적자가 흑마법에 입문하려 든 일은,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을 움직이게 할 만큼 중한 일인 것이다.


“넌 진상이 무어라 생각하나?”


“...흑탑주가 관여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가 말한 것처럼... 방계 중 누군가가 불온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닐까 싶군요.”


“아멜리아 머윈.”


카르멘이 불쑥 내뱉었다.


“나는 그녀가 의심돼. 발자크 루드베스를 견제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유폐의 마왕은 자신과 계약한 흑마법사들의 뜻을 억압하지 않고 있지. 아랫것들의 다툼 하나하나를 중재하지도 않고.”


“아멜리아가 이 일을 꾸몄다면, 그 배후에 나하마가 있다는 것이기도 하잖습니까?”


“마침 나하마의 움직임이 수상하기도 하지. 술탄 알라부르는 욕심이 많고 젊은 돼지야. 아마 몇 년 안에 전쟁이 벌어질 거다.”


전쟁. 그 말에 기온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사막왕국 나하마는 오래 전부터 제국이라 불리기를 갈망했었다.


“키옐과 말입니까?”


“튜라스를 먼저 치겠지.”


키옐 제국은 나하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두 국가의 관계는 적대적이지는 않으나, 나하마 서쪽의 튜라스 왕국과는 다툼이 잦다.


“명분도 없을 텐데요?”


“명분이야 만들려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다. 나하마가 튜라스를 친다면 키옐도 전쟁을 준비해야겠지. 그 ‘준비’에는 당연히 라이언하트도 불려갈 거다.”


“그를 대비해 아멜리아가 먼저 손을 썼다.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라이언하트를 분열시키기 위해?”


“분열이랄 것은 없으나 씨앗은 되겠지. 어쩌면 뒈진 게비드의 말처럼, 음모랄 것 없는 독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확신할 수 없지. 그래서 의심하는 거고.”


카르멘의 눈이 얇아졌다.


“이오드는 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더군. 어릴 적에 보았을 때는 제법 총명한 줄 알았는데. 가주가 자식교육에는 별 재주가 없었나.”


“...자식을 믿고 싶으셨던 겁니다.”


“머저리는 매를 들어 가르쳐야 돼. 이제 와서는 별 의미 없는 말이다만. 차기 가주는 적자인 이오드가 아니라, 시안이 될 거다.”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고서, 진즉에 나온 감옥 쪽을 돌아보았다.


“...기온. 만약, 저곳에서 발자크의 도발을 묵과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나?”


“큰 일이 났겠죠.”


“당연한 대답은 하지 마. 놈을 죽일 수 있었을 지를 묻는 거다.”


“...죽여야 할 정도의 모욕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흑탑주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한 일이기도 했고요. 만약... 그와 싸웠다면. 카르멘님 빼고 모두 다 그곳에서 죽었을 겁니다.”


“겸손이 과한데.”


“저는 마법사와의 싸움에 능하지 않습니다.”


기온은 멋쩍은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자신이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싸우지 않았지.”


카르멘은 혀를 차며 회중시계를 꺼냈다. 슬슬 약속했던 시간이다. 기온은 워프게이트 앞에서 만나기로 한 시엘을 떠올렸다.


“...정말 시엘을 흑사자 성에 데리고 가실 겁니까?”


“그 아이가 바라는 일 아닌가?”


“...”


“그만큼 자란 아이를 너무 품에 가두려 하지 마.”


짧은 침묵. 기온은 복잡한 기분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하지만 기온은 놀라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이야기는 들으셨을 텐데요.”


“들었지. 4년 전, 가주가 그 아이를 양자로 들이겠다고 했을 때. 본가의 보물고를 열겠다고 했을 때. 원로원이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는 아나?”


“그랬겠지요.”


“그때의 혈계식만 해도 원로원은 반발했었다.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기온이 보아 온 유진은 터무니없는 괴물이었다.


4년 동안 검술을 기본으로 두고서 다양한 전투기술을 가르치긴 했다만... 솔직히 말해서, 기온은 자신이 유진에게 정말 무언가를 가르친 것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미 다 할 줄 알았어.’


기온이 느끼기에, 유진이 정말 대단한 것은 마나의 감응력이나 백염식의 빠른 성취가 아니었다.


그 어떤 무기를 손에 쥐어주어도 유진은 능숙하게 다루어냈다. 그냥저냥 잘 다루는 수준도 아닌 달인의 경지. 명문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극한의 실전성만을 추구한 기술.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 아니다. 유진의 고향인 기돌에는 저만한 실력을 가진 고수가 없었다. 설마 제하드가 힘을 숨기고 있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유진의 모든 것은 그 자신이 갈고닦은 것이었다.


그 나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투감각. 기온도 유진과는 여러 번 대련을 해 보았다. 마나를 끌어내지 않고 순수하게 기술만을 겨루었을 때.


기온은 단 한 번도 유진을 압도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흐름이 주도되는 것 같다는 느낌만 몇 번이고 받았었다.


그것은... 순수하게 인정할 수 없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흐름이 주도된다니. 그렇다는 건... 기술적으로 압도하는 것이 기온이 아닌, 저 한참 어린 유진이란 것 아닌가.


“그 아이가 방계 출신이 아니었다면 모두의 지지를 업고서 가주가 되었을 텐데.”


카르멘의 말은 단순히 유진에 대한 평가는 아니었다. 기온은 그녀의 시선에 깔린 노골적인 탐색을 느꼈다.


“...그 아이는 가주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저와 카르멘님과 닮았죠.”


“닮았다? 그렇다면 흑사자 기사단에 오라 할까.”


“이미 결정하신 것 아닙니까.”


“그 아이의 의사는 존중할 생각이다. 당장 부르기는 이른 감이 있기도 하고. 한창 성장하는 도중 아닌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법은 익힐 필요가 없다 본다만...”


“마법을 배워두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기온은 이오드를 떠올렸다. 설마 그 아이가... 흑마법에 입문하려 했다니. 여전히 기온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카르멘은 기온이 착잡한 표정을 짓는 것을 힐긋 보았다.


“...이오드는 감시를 받게 될 거다.”


“...”


“이미 테오니스의 친가에 흑사자를 파견했다. 본가의 적자인 만큼 목을 베지는 않겠지만, 다음은 없어. 이오드는 평생 감시 속에서 살게 될 거다. 당연히 계승권도 박탈될 거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오드가 아무리 바란 들, 그는 평생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테오니스가 제 자식을 위해 마법을 가르칠 교사를 구하고 있다던데. 그건 내버려 둘 셈이다. 만약 이번 일에 배후가 있다면, 이오드와 다시 접촉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기온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


몇 달 만에 만난 기온과는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흑사자 기사단에게서 떠도는 피냄새를 맡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뻔했다. 흑마법사를 심문하기 위해 간다더니. 심문도 하고 고문도 하고 죽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안녕.”


기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고, 시엘이 손을 흔들었다. 유진은 기온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 볼까 하다가, 그냥 고개만 꾸벅 숙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흑사자 기사단에 올 생각은 없나?”


대뜸 말을 건넨 것은 카르멘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팔짱을 끼고 있는 카르멘의 모습이 보였다.


“예?”


“네 자질이 굉장하다던데. 가주 자리에 욕심이 없다면, 차라리 빠르게 흑사자 기사단에 오는 것이 좋을 거다.”


“제안은 감사...”


“마침 2번대 대장의 종자 자리가 비었어. 원한다면 즉시 추천해 줄 수 있다.”


“감사하...”


“대장의 종자가 된다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다. 견습기간은 보통 5년 정도인데, 너라면 3년 뒤에 성인이 될 때 흑사자가 될 수 있을 거다.”


“안녕히가십시오.”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뭐 저리 툭툭 끊어대는 거야? 유진은 넙죽 고개를 숙여서 카르멘을 배웅했다.


“아쉽군.”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워프게이트로 들어가기 전, 시엘은 한 번 더 유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백탑주님에게서는 아무 말도 없었나요?”


“예. 만약 계약에 성공했다면 곧바로 자랑하러 왔을 텐데. 아무 소식도 없는 것을 보니, 계약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개 같은 템페스트. 유진은 눈썹을 팍 구기면서 혀를 찼다.


“엿 같은 템페스트.”


백색마탑의 옥상. 그곳에서 거센 바람을 맞고 있던 멜키스도 템페스트에 대한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이 원초적인 모습으로 바람을 접하면서, 감각을 모조리 일깨우고 바람과 감응하기를 수 시간. 아무래도 바람이 부족한가 싶어 굳이 마법을 써가며 바람을 더 불러 모으기도 했다. 위니드에 어린 가호를 마법으로 일깨웠고, 템페스트에게 직접 의사까지 전했다.


하지만 템페스트에게는 아무런 호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정령계에 의사를 전했는데... 이렇게까지 대답이 없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 느껴졌다.


해가 저물어 밤이 된다. 감응력을 극한까지 끌어내고자 마법으로 몸을 데우지도 않았다. 매선 찬바람에 시달리는 살갗에는 이미 닭살이 가득했다. 멜키스는 흐르는 콧물을 훌쩍거리며 계속해서 위니드에 마나와 의지를 불어넣었다.


[계약자여...]


대뜸 들려온 목소리. 허나 멜키스는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레빈...!”


번개의 정령왕. 멜키스가 그 이름을 부르자, 윙윙 부는 바람에 파직거리는 번갯불이 섞였다.


“당신을 부른 적도 없는데 왜 튀어나오는 거야?”


[옷부터 입어라...]


흔들리는 번개가 중얼거린다. 하지만 멜키스는 옷을 걸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추위에 움츠려든 몸을 꼿꼿이 세우고서 외쳤다.


“위대한 바람의 정령왕, 폭풍의 주인이여! 나 멜키스 엘하이어가 당신과의 계약을 원합니다!”


[템페스트가 닥치라 전해달라 하였다...]


“직접 와서 말하라고 해!”


[템페스트는... 너와의 계약을 원하지 않는다...]


“와서 얘기나 좀 들어보라고 해!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계약자여. 그대는 템페스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


“템페스트가 원하는 게 뭔데!”


[그건...]


번개가 말을 멈춘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미망에 허덕이나...]


“뭐?”


[위니드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이건 내 거야! 내가 주인이라고!”


[거짓말하지 마라... 그대가 위니드의 주인에게 잠시 빌려왔을 뿐이라는 것은 템페스트도 알고 있다...]


“다 듣고 있구나! 템페스트! 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령술사야! 이 세상에서 당신과 계약할 수 있는 정령술사는 나밖에 없다고!”


멜키스는 지팡이를 집어던지고서 위니드를 붙잡았다. 그녀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이 높은 백색 마탑의 옥상에서 마구잡이로 위니드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 앞에 나타나란 말이야! 당신이 바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내가 다 해줄 수 있다니까?!”


[계약자여... 제발... 수치를 알라...]


“나오라고!”


[템페스트가 전하기를... 헛된 수고를 그만하고...]


“끼아악!”


폭발하는 스트레스가 멜키스의 입에서 까마귀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그녀는 머리털을 곤두세우고서 깍깍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번개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ㅡ빠직.


백색마탑의 상공에서 한줄기의 번개가 내리 꽂혔다. 무자비한 번개가 멜키스를 집어 삼킨다.


“까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멜키스의 두 눈이 뒤집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즉사할 번개였지만, 번개의 정령왕과 계약한 멜키스는 이런 번개로 죽지 않았다. 다만 근육에 힘이 쭉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폭풍은... 북상을 바란다.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북쪽의 마경을... 수백 년 동안 잊지 못한 미련을...]


멜키스는 이미 의식을 잃었지만, 번개는 한숨섞인 목소리로 그를 중얼거렸다.


*


멜키스가 찾아온 것은 열흘이 지난 후였다.


아크리온, 세냐의 전당에 머무르고 있던 유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멜키스의 모습에 입을 반쯤 벌릴 수밖에 없었다.


열흘 만에 사람이 저렇게 초췌해질 수 있는 건가.


“...계약은?”


“뻔히 알면서 물어보냐 씨발아?”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개같은 템페스트!”


멜키스가 버럭 질러대는 고함에 메르가 눈을 찡그린다. 그녀는 자기 키만큼 높은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서 멜키스를 노려보았다.


“오줌싸개님. 이곳은 정숙해야 할 공간이에요.”


“끼아아악!”


“아 진짜.”


메르는 한층 더 표정을 구기며 손가락을 들었다. 일단 입을 닥치게 하고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마법을 쓰기 전에 유진이 저지에 나섰다.


“진짜 계약 못한 거예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해?!”


“템페스트가 거짓말하라고 시킨 거 아니고?”


“끼이엑!”


저게 사람이 맞나. 유진은 혀를 끌끌 차면서, 어깨에 걸친 흑암의 망토를 두드렸다.


“오늘 하루 꽉 채우면 10년째인데.”


“끼이...”


“지금 위니드 돌려주시면, 9년으로 봐드릴 게요.”


멜키스는 어깨를 파르르 떨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곤 덜덜 떠는 손으로 위니드를 쥐었다.


“9... 9년...?”


“이거 따뜻하고 좋더라고요.”


“...여름에 입어도 안 더워.”


“세탁은 어떻게 하나요?”


“안 해도... 돼. 마법...”


“아이구 좋아라.”


진짜 좋았다. 멜키스는 코를 훌쩍거리며 유진에게 위니드를 돌려주었다.


“...잘... 입고 다녀.”


“안녕히 가세요.”


유진은 위니드부터 챙기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멜키스는 처절하고 서러운 눈으로 유진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불러도 싫다고 안 오는데 어떡해...”


멜키스는 들으란 듯이 넋두리를 흘리며 엘리베이터로 돌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신경쓰지 않았다.


[하멜은 병신이고 모론은 등신이었어요. 둘의 모자람은 우위를 가리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멜이 모론보다는 나았죠.]


읽기 괴롭다.


모론 그 등신보다 낫다는 말은 유진에게 아무 위안이 되지 못했다...


동화


[거인족의 두령 카마쉬는 말도 안 되게 컸어요. 그 커다란 모론이 아무리 허리를 세워봤자 카마쉬의 발꿈치 정도밖에 안 됐죠.]


[모론은 자랑스런 도끼를 휘두르며 덤볐지만, 그 등신은 카마쉬의 발길질 한 번에 나가 떨어졌어요. ‘세다!’ 모론이 외쳤죠. 그걸 누가 모르나요?]


[아름다운 세냐가 지팡이를 들었어요. 아카샤! 그 지팡이가 내뿜는 빛은 세냐만큼이나 아름다웠죠. 아시나들 모르겠는데, 거인족은 종족 중 으뜸가는 마법 내성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귀여운 세냐의 마법이 아무리 강력해도, 거인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는 거예요.]


[하물며 상대는 바로 그 카마쉬! 수백 년 묵은 거인이자, 거인족 역사상 가장 강력한 두령이었죠. 하지만 여러분, 강력하다고 해서 위대한 것은 아니에요. 카마쉬가 딱 그랬죠. 놈은 제 종족을 통째로 마왕에게 팔아넘긴 호로 새끼죠.]


[세냐는 아름다운 마법으로 아름답게 카마쉬를 붙잡으려고 했어요.]


아름다운 마법으로 아름답게 붙잡는다는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


유진은 동화책을 읽다 말고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카마쉬를 붙잡는 것을 불가능했어요. 그 호로 새끼는 제 종족을 팔아넘긴 대가로, 마왕에게 강력한 힘을 받았거든요. 맨몸으로도 드래곤과 싸울 수 있는 것이 거인인데, 마왕의 마력까지 두른 카마쉬는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재앙과 같았어요.]


개정판에도 거인족 두령 카마쉬와의 전투는 나왔었다. 하지만 이 초판처럼 카마쉬에 대한 이야기가 적나라하지는 않았다. 나쁜 거인족. 어린아이들을 타겟으로 한 동화책인지라, 그렇게 순화되어 나왔었다.


[물러설 수 없습니다. 우아하고 상냥한 아니스가 성스러운 빛을 내뿜었어요. 그래요. 물러설 수는 없었죠. 카마쉬의 뒤에는 수백에 달하는 거인의 군세가 있었고, 놈들은 팔미르 평원을 진군하던 중이었거든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경 헬무드의 초입에 있는 팔미르 평원. 300년 전의 그곳에는 헬무드와의 경계를 가르는 높다란 장벽이 있었다.


카마쉬는 마왕에게 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거인의 군세를 이끌고서 직접 장벽을 무너트리러 왔었다. 그 어떤 왕국이나 제국의 군대로는 그 살아움직이는 재앙을 가로막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로막아야 했다.


[상냥한 아니스가 로사리오를 높이 들었을 때, 맙소사.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어요. 거인족에 맞서는 인간의 군대는 하찮을 만큼 작았지만, 아니스의 축복은 모두의 용기와 힘을 북돋았죠.]


[수백에 달하는 거인과 맞서는 인간은 수천 명. 너무 적지 않냐고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지금 이 책을 읽는 당신은, 거인들의 진군을 앞두고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그 덩치 큰 괴물들은 팔미르 평원에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발걸음으로 지진을 일으켰다고요.]


[그리고 사실 우군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랬다.


유진은 수백 년 전의 전생을 떠올렸다.


[그곳엔 베르무트가 있었거든요.]


위대한 베르무트.


올마스터.


무신.


놈은 찬란히 빛나는 성검을 높이 세우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스가 내리는 빛의 비에 성검의 힘이 더해졌다. 모두의 머릿속에서 공포나 절망 따위의, 전쟁에 도움되지 않는 감정들이 말소되었다. 그 순간, 그곳의 인간들은 죽음이나 고통, 거인, 심지어 마왕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스의 축복은 불필요한 감정을 말살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어지간한 상처들은 즉각 치유해 버리고, 아무리 오래 싸워도 지치지 않게 만든다. 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리미트를 풀어버려서, 전투에 더욱 적합하게 만든다.


거인은 강력한 마법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냐의 마법이 무용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거인들의 발걸음 이상으로 대지를 뒤흔들고, 갈라놓았다. 대지에서는 용암이 치솟고 하늘에서는 벼락이 떨어졌다.


[모론 그 등신은 카마쉬와 정면에서 힘을 겨루고 싶어 했어요. 다들 모론을 등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는데, 하멜 그 싸가지 없는 새끼만이 모론의 아가리를 후려갈겼죠.]


‘이 등신 새끼야. 힘싸움? 카마쉬 저 호로 새끼한테 가서 팔씨름 한 판 하자고 그러게? 개지랄 떨지 말고 저기 병사들이랑 같이 있어.’


‘왜 그래야 하지?’


‘네가 안 막아주면 쟤들 다 거인 발에 깔려 육포 될 것 아냐!’


답답하고 어이없어서 그렇게 외쳤을 때, 모론은 잠깐 입을 헤ㅡ 벌리고 있다가,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그렇군. 하멜, 너는 저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것이구나.’


‘왜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냐? 기왕 같이 싸우는 거, 많이 죽는 것보다는 덜 죽는 것이 낫지.’


‘알았다. 내가 저들의 방패가 되도록 하지.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맨날 하던 거.’


많이 죽는 것보다는 덜 죽는 것이 낫다.


아군의 이야기다. 당연히 적군은 무조건 많이 죽이는 것이 좋다. 그건 하멜이 특히나 자신 있고,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론이 병사들의 앞에 섰을 때, 아직까지도 자기들이 잘난 줄 아는 기사들이 베르무트에게 향했죠. 우리는 개똥장미 기사단이고 말똥쥐꼬리 기사단이고 어쩌고 하면서,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기사단 이름 따위를 거창하게 읊으면서요. 그 머저리들이 하는 말은 결국 이거였어요.]


함께 싸우겠소.


[뭘 함께 싸워요? 쟤들 다 덤벼 봐야 카마쉬 발가락 하나 자르기 힘들 텐데. 그리고 말만 같이 싸운다지, 걔들이 바라는 것은 후대까지 전해 질 베르무트의 신화에 자기들 이름을 더하는 것이었어요.]


[게다가 베르무트는 여럿이랑 싸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자기랑 같이 싸워봐야 별 쓸모도 없이 끌려 다니다가 고기방패가 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거든요.]


[위대한 베르무트. 그 인간 같지 않은 괴물과 함께 싸울 수 있고, 베르무트가 싸움터에서 의지하던 것은 한 명뿐이었죠.]


‘하멜.’


‘어. 왜.’


[우둔한 하멜.]


‘왼팔. 할 수 있나?’


‘난 오른팔이 좋은데. 카마쉬 저 새끼 오른손잡이 아냐?’


‘그렇다면 네가 오른팔을 맡아라.’


‘뭘 굳이 왼팔 오른팔 나눠? 그냥 알아서 할게.’


[그건... 으음... 글로 쓰기 힘드네요.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적어보려고 시도는 많이 했거든요? 하지만 여기까지 읽었다면 눈치 챘을 거예요. 저는 글빨이 별로 좋지 않아요. 그냥 생각 나는대로 쓰는 거지.]


[어쨌든,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어요. 산처럼 커다란 카마쉬. 베르무트와 하멜은 뭐... 모론만큼은 아니어도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았는데, 카마쉬랑은 종이 다르니 비교가 안 됐죠.]


[하지만 카마쉬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어요. 카마쉬가 발을 뻗으면 하멜이 도끼로 놈의 발목을 찍어버렸죠. 카마쉬가 팔을 휘두르면 하멜이 검으로 놈의 팔을 베었어요. 카마쉬가 주먹을 던지면 하멜의 창이 놈의 주먹을 꿰뚫었어요.]


[그리고 베르무트가 카마쉬의 목을 베었죠.]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 아니스의 축복을 믿고 나댔던 것이다. 아찔할 때마다 세냐의 마법이 끼어들었고, 베르무트가 공격을 걷어주었다. 성검의 빛과 베르무트의 도움이 없었다면, 혼자서 카마쉬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왕의 힘을 두른 카마쉬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검뿐이었죠. 그 성검은 베르무트만 주인으로 인정했으니, 결국 카마쉬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베르무트뿐이었어요.]


[목이 깔끔하게 썰린 카마쉬가 쏟아낸 피가 평원을 휩쓸었어요. 어디 강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말이에요.]


[카마쉬는 죽었지만 거인들은 물러서지 않았어요. 그래도 뭐 처음보다는 전황이 훨씬 간단해졌죠. 카마쉬의 죽음으로 마왕의 가호도 희미해졌으니, 아름다운 세냐의 아름다운 마법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었어요.]


여기까지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책을 쓴 건 세냐 아니면 아니스야.’


물론 이 오래 전의 동화책은 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니 알겠다.


현명한 세냐.


신실한 아니스.


그런데 이 초판본에는 세냐와 아니스의 앞에 별에 별 지칭이 다 붙는다. 아름다운 세냐. 우아한 아니스. 귀여운 세냐. 상냥한 아니스. 앙증맞은 세냐. 매혹적인 아니스.


‘이 새끼들 뭐하는 거야?’


반면에 모론과 하멜은 지독하게도 시달린다. 등신 같은 모론. 병신 같은 하멜. 머저리 모론. 개 같은 하멜. 시끄러운 모론. 욕쟁이 하멜.


차마 베르무트에게는 뭘 덧붙일 수 없는 것인지, 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대한 베르무트라고만 나온다.


그런 지칭 뿐만이 아니었다. 이 초판본은 개정판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야만적이면서도, 내용이 자세했다. 카마쉬와 거인족들과의 전투뿐만이 아니라, 헬무드에서 있었던 여러 일들도 꽤 자세히 나와있었다.


300년 전에 출간된 이 동화책의 저자는, 소문을 주워들어 노래로 엮는 음유시인이라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유진이 직접 읽어본 바, 이 책의 저자는 음유시인 따위가 아니었다. 음유시인이 쓴 것 치고는 인물간의 관계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똑같이.’


세냐와 아니스는 사이가 좋았다. 메르가 말하기를, 세냐는 아니스를 뱀 같은 여자라 표현했다는데. 그건 새삼스럴 것도 없는 평가였다. 여정 도중에서 세냐는 몇 번이나 아니스에게 대놓고 뱀년이라고 욕을 해댔었다.


그렇게 사이가 좋았으니... 이 동화책은 둘이 같이 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서로를 두고서 아름답다느니 우아하다느니 개소리를 붙여 놓은 것도 납득이 된다.


‘아니면 둘 중 하나가 써놓고, 자기가 쓴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세냐가? 아니스가? 유진은 잠시 고민해 보았다. 놀랍게도... 둘 모두 이런 개짓거리를 할 만큼 지독한 성격이기는 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대놓고잖아.’


“이거 세냐님이 쓴 거 아냐?”


유진은 혼자 생각하지 말고 메르를 돌아보았다. 마침 이곳에는 수백 년 전에 세냐와 함께 했던 사역마가 있었다.


“미친 소리 하지 마세요.”


마도서를 읽던 메르가 질색이란 표정을 하고서 대답했다.


“세냐님이 왜 그런 소설을 써요?”


“아니... 읽다 보면 유달리 세냐님에 대한 지칭이 많이 나오더라고.”


“아름답고, 귀엽고, 앙증맞은? 나참... 설마 세냐님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썼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음...”


“그건 세냐님에 대한 모독이에요.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자기 손으로 쓰는 이야기에서 자기 이름 앞에 그런 말을 붙일 수 있겠어요?”


“...으음...”


“아무리 유진님이더라도 세냐님에 대한 모독은 용서치 않아요.”


메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며 말했다. 그 격한 반응에 유진은 더 이상 따져 묻지 않고 동화책을 휘휘 넘겼다.


[세냐. 난 너를 좋아했어.]


‘이 부분은 왜 개정판이랑 똑같냐?’


세냐일 리가 없다.


유진은 하멜의 죽음을 읽고서 그를 확신했다. 이 동화책을 쓴 것은 아니스다.


‘순례를 떠나기 직전까지 신성제국에서 성녀로 불렸다고 했지. 그 생활이 미칠만큼 지루했던 모양이야.’


그러니 이런 미친 짓을 했지. 아니스의 성격이라면 자기 자신을 두고서 우아하고 상냥하고 매혹적이라고 써 갈길 법 하다. 세냐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덧붙인 것은...


‘세냐를 엿 먹이고 싶었던가.’


세냐. 난 너를 좋아했어.


‘덩달아 나도 엿 먹이고. 그 시발 것이.’


북받치는 울분에 유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나하고 읽었던 것이지만, 이 동화책에도 유폐의 마왕과의 결전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부분만큼은 개정판과 동일했다. 약속을 맺고, 평화를 위해 헬무드를 떠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행복하게.


유진은 혀를 차며 동화책을 닫았다.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는 세냐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고, 유진의 기분은 나빠졌다.


“다시 하시려고요?”


“어.”


“시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유진님 수준에는 너무 오만하다고 봐요.”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다. 유진은 피식 웃어주며 위치 크래프트로 향했다.


“어려운 것에 도전해야 보람이 있는 거야.”


“실패만 하는데 보람은 무슨.”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메르는 유진을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유진이 하려는 것에 흥미가 있었다.


흑사자기사단이 떠나고서 열흘. 유진은 깨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아크리온에 머물렀다.


처음 이틀은 메르가 조언한 대로 아래층의 마법을 살폈다. 11층의 전투마법. 9층의 화염마법. 7층의 전쟁마법. 6층의 공간마법.


특히 흥미를 가졌던 것은 6층의 공간마법이다. 아직은 쓸 수도 없는 블링크를 위해서가 아니라, 흑암의 망토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최상위의 공간마법이 새겨진 이 망토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방어구지만 어찌 다루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망토 안의 아공간은 지금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 그냥 아무 물건이나 잡고서 망토 안에 넣으면 된다. 꺼내는 것도 그냥, 망토 안에 손을 넣어서 꺼내면 된다.


하지만 공격의 리바운드는 돌려보낼 공간의 좌표를 따로 계산해야 한다. 즉, 필요한 때에 재빠르게 위치한 공간의 좌표를 파악하고, 돌려보낼 좌표를 지정해야 한단 말이다. 좌표 검색만 하더라도 고난이도의 마법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꽤 관심이 가긴 했지만.


유진은 다시 12층으로 돌아왔다. 위치 크래프트에서 보았던 이터널 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위치 크래프트에 접속하고.


보고.


기절했다.


세 번째부터는 기절하지 않았다. 유진의 정신이 저 터무니없는 마나의 움직임에 익숙해 졌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보는 것으로 무엇을 얻겠나. 제대로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만큼의 이해가 필요하다.


‘이터널 홀.’


서클마법의 궁극.


‘백염식.’


라이언하트의 마나수련법.


‘마나를 다루는 것은 익숙해. 백염식도 익숙하고.’


응용해서 더해 볼 생각이다.


이터널 홀을 완전히 재현하는 것은 지금의 유진에게 불가능하다. 그를 재현하려면 최소 9서클은 넘어서야 한다.


이터널 홀. 그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거대한 서클의 안에 무한하게 증식하는 서클을 붙잡아두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서클을 순환, 붕괴, 재구성하면서 마나를 증폭시킨다.


유진은 마법을 쓸 때 서클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백염식의 별로, 코어로 서클을 대체하고 있다. 세 개의 별을 회전시켜 하나의 원을 만든다.


그렇게 만든 원 안에 복수의 서클을 더해 넣을 수 있다면.


유진은 위치 크래프트의 앞에 서서 피식 웃었다.


전생의 하멜은 백염식을 배우지 않았다. 마법도 배우지 않았으니, 서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멜이 익힌 것은 용병들 사이에 떠돌던 싸구려 마나수련법. 그것에 하멜 본인의 경험과 개량이 더해졌다. 후에 세냐가 고쳐 주기도 했다.


거창한 이름 따위는 없었다. 어디 적어다가 후대에 남길 생각도 없었고, 전수해 줄 만한 제자도, 후손도 없었다. 그냥... 이 세상에서, 하멜 혼자만 익혔던 마나수련법이다.


코어를 키운다. 코어를 이루고 있는 마나를 연쇄적으로 터트린다. 내부의 폭발로 가속시킨 마나를 전신에 퍼트린다. 폭발시킨 마나는 몸 바깥으로 배출하지 않는다. 온전히 마나를 폭발시켜 필요한 순간마다 힘을 집중했다.


하멜은 그것만으로 카마쉬의 팔다리를 썰었다.


‘넌 전투감각을 타고났어.’


언젠가 베르무트가 했던 말.


‘너 정말 이따위 마나수련법을 돈 주고 샀다고?’


세냐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해가 안 돼. 이딴... 쓰레기로... 마나를 수련해서... 지금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유진은 제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가능성은 보인다. 그렇다면 당연히 할 수 있다. 무조건 이터널 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3성의 백염식. 별을 이어 만든 서클. 그 안에서 마나를 폭발시킨다. 단순한 폭발로는 안 된다. 한 번 터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그를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앞에서 보여주기도 하고.”


의식의 한복판. 유진은 무한한 마나의 바다가 원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이터널 홀. 세냐가 창안해 낸 서클의 궁극점은, 이미 여러 번 보았음에도 경외감을 전해준다.


이제는 의식을 잃지 않는다. 유진은 제 의식을 관조하며 마나의 흐름을 보았다. 무한히 만들어지는 서클과, 그를 품은 거대한 원. 의식이 집중됨에 따라, 이 바다에서 티끌만 못할 유진의 마나가 감응한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19살


19살의 여름.


바깥의 날씨는 푹푹 쪄서 더웠지만, 아크리온의 내부는 쾌적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는 대충 위로 묶어 두었다. 아크리온의 내부는 공기정화나 온도조절 등의 여러 편의를 위한 마법이 가득했지만, 이 무더운 더위에 털이 북실거리는 망토를 걸치는 사람은 유진뿐일 것이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냥, 편해서.


묵직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이 흑암의 망토는 무게가 거의 없다. 사실은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마법이란 아주 편리한 것이다.


무게가 그대로 느껴질 지라도 불편할 것이 없기는 했다. 10살이 되기 전부터 무거운 모래주머니들을 몸에 매달고서 일상생활을 해왔는데, 이깟 망토의 무게에 거슬림을 느낄 이유가 없잖은가.


덥지도 않다. 이 망토는 주인의 감각체계와 공명하고 기온과 체온을 쉼 없이 살핀다. 그 어떤 상황에서든 주인의 쾌적함을 추구해 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편리하지만, 유진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역시 망토에 내장 된 공간마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공간.


유진은 손에 쥔 펜을 빙빙 돌리면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몇 시간 전부터 써 내린 논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면을 글자로 빼곡하게 채워버렸다. 유진은 그것을 대충 말아다가 망토의 안에 던져놓고, 그 안에서 다시 빈 종이를 꺼냈다.


“슬슬 식사하러 갈 시간 아닌가요?”


맞은편에서 말을 걸어온 것은 메르였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며, 양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아까 많이 먹고 왔어.”


“뭘 새삼스레. 유진님은 항상 많이 먹잖아요. 지금도 배고픈 것 아니에요?”


“조금 고프긴 한데. 지금 밥 먹으러 가면 집중 깨져서 안 돼.”


거짓말. 메르는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며 볼을 부풀렸다. 집중이 깨진다니. 유진을 보아 온지 어느덧 2년. 메르는 유진이 집중하지 않았던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니에요?”


“그렇지도 않은데.”


“기왕 논문을 쓰기로 한 거니까. 차분하고 천천히, 작은 실수 하나 남기지 않게... 음... 그러니까. 신중하게 쓰는 편이 좋잖아요?”


“서두르지도 않고, 차분하게 쓰고 있어. 천천히는 모르겠고. 퇴고는 항상 하는데, 일단 내 눈에는 실수가 안 보여. 신중하게 쓰고 있단 말이지.”


유진은 펜을 빙빙 돌리며 대답했다. 메르는 그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통의 마법사들은 말이에요. 자기 마법을 정리한 논문을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하거든요?”


“내가 마법 배운 시간이 수십 년이 안 되는데.”


“그러니까, 유진님이 벌써부터 논문을 쓰는 것은 굉장히 오만하다는 거죠! 괜한 짓 하지 마시고, 앞으로 한 10년 마법에 몰두하시면서...”


“우리 메르가 부끄럼이 많네.”


유진은 히죽 웃으며 메르를 응시했다. 그러자 메르는 질색이란 듯이 눈썹을 구기곤, 불끈 쥔 두 주먹을 유진의 앞에 들어보였다.


“제가 자꾸 선 넘지 말랬죠?”


“난 선 넘은 적 없는데?”


“우리 메르라니! 제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전 유진님보다 200년은 오래 살았어요.”


“우리 메르 할머니가 부끄럼이 많네.”


“죽일까.”


메르의 어깨가 파들거리며 떨린다. 그렇다고 유진을 향해 살의를 퍼붓지는 않았다. 저렇게 놀려대는 것도 2년이나 되었으니 익숙해져 버렸다. 게다가 메르 본인도 말만 저렇게 할 뿐, 유진이 자신을 저렇게 대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지는 않았다.


낯설고, 신기하고, 그리웠다. 수백 년 동안 아크리온에 출입한 마법사들 중, 메르를 저렇게 어린아이 취급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가끔 연구라는 지랄 맞은 핑계를 대며 메르와 위치 크래프트를 해부하는 또라이들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메르와 충분한 거리를 두고서 어렵게 대했다.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메르는 그 현명한 세냐가 직접 만든,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본딴 사역마다. 또한 마법 역사상 가장 대단하다는 위치 크래프트의 인공지능이기도 했다. 비록 해부는 했을 지라도, 위치 크래프트를 접한 모든 마법사들은 메르에게 경외를 표했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현명한 세냐에 대한 존중? 그녀가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유진에게 있어서 세냐는 그냥 세냐였다.


“내가 떠나는 것이 싫어?”


“으...”


“거 봐, 싫잖아. 내가 여기 드나든 지도 벌써 2년인데. 이곳에 꾸준히 드나드는 사람은 거의 나 뿐이더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죠.”


메르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투덜거렸다.


“다른 마법사들은 이미 오래 전에 위치 크래프트를 접했으니까요.”


유진이 아크리온에 입장하고서 2년. 그는 거의 매일 아크리온에 왔고, 세냐의 전당에서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을 보냈다.


대단하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크리온에 들어오게 된 마법사들은, 모두가 유진처럼 열심히 마법을 탐닉한다.


아크리온에 출입하는 마법사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마법에 넘치는 자부심과 확신을 갖고 있다. 그것을 보다 견고하게 가다듬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법사들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메르가 존재하고서 200년. 아크리온에 출입하는 마법사들은 모두가 마탑주였고, 마법사 길드장이었고, 아롯의 궁정마법사였고, 아롯의 왕족이었다. 보기 드문 천재성을 타고나고, 그것을 이미 증명해 낸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위치 크래프트는 선학이 남긴 위대한 마법이다. 서클 마법의 궁극점, 이터널 홀. 위치 크래프트를 처음 접한 마법사라면 그 위대함에 감탄하고 경악하여 기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를 몇 번. 마법사들은 위치 크래프트를 이해하고, 탐구하고자 시간을 들인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깨달아 버린다.


저 진리는 아직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못했다.


거기서부터 발걸음은 줄어든다. 위치 크래프트는 위대한 마법이지만, 이곳에 출입하는 대마법사들은 이미 자기들의 마법체계를 확립했고, 무조건 위치크래프트를 모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감탄과 경악을 끌어안고, 참고하면서... 독자적인 연구를 거쳐 제 마법을 완성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진은 특이했다.


메르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아니면 제 자신의 마법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고가 유연해서? 마법사다운 고집이 적어서? 아마 전부 다일 것이다.


2년. 유진은 아크리온에 머무는 시간의 절반을 위치 크래프트와 함께 했다. 기절하지도, 코피도 쏟지 않고서. 한참을 위치 크래프트에 접속해 있다가 나온 뒤에... 세냐의 전당의 마도서들을 읽었다.


그렇게 본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뱁새가 황새의 걸음을 흉내 내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데, 유진의 마법수준과 위치 크래프트는 뱁새와 황새 정도가 아니라 지렁이와 드래곤, 벌레와 신 이상의 차이가 난다.


눈이 너무 높은 것이다. 명문 중의 명문인 라이언하트 가문의 도련님. 그냥 도련님도 아니고, 가문 역사상 최초로 방계임에도 자질을 인정받아 양자가 된 도련님 아닌가? 제 자신의 천재성에 심취해,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하늘을 보는 것이 뻔해 보였다.


그런데.


유진은 위치 크래프트를 이해했다. 아니... 그것을 이해라고 해야 하나? 학습. 2년 동안이나 유진을 보았지만, 메르는 유진이 하는 것을 이치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말 그 논문을 완성하면. 아롯을 떠나는 건가요?”


“네가 그걸 몇 번 물어봤는지 알아?”


“오늘까지 하면 137번째예요.”


“그렇지. 내가 논문을 쓰기 시작한 것이 반년쯤 전이니까... 대충 하루에 한 번은 물어봤다는 거지.”


“두 번은 안 물어봤네요.”


메르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그래요.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유진님이 아롯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떠나고 여기서 뭐 하라고?”


“뭐든지 하실 수 있겠죠. 적색 마탑주가 언제 은퇴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적색 마탑주는, 유진님이 바라신다면 주저 없이 유진님을 후계자로 공표할 거예요.”


“난 마탑주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궁정마법사단은 어때요? 트렘펠 위자도르도 유진님을 욕심내고 있잖아요.”


트렘펠 위자도르. 아롯의 궁정마법사장. 그는 일 년쯤 전부터 유진과의 거리를 좁혀 오며, 궁정마법사단의 한 자리를 권하고 있었다.


“호네인 왕세자도 유진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호네인 왕세자의 라인은 향후 아롯에서 못해도 수십 년은 떵떵거릴 수 있는 라인이에요.”


“왕세자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것도 별로.”


“어차피 가주도 못 된다면서 라이언하트에는 왜 돌아가려는 건데요?”


“집에 돌아가는 것에 뭐 대단한 이유가 필요한가?”


“언제부터 그렇게 집을 좋아하셨다고.”


처음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메르는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진의 성취가 놀랍기는 하여도, 그것을 논문으로 정립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의 성장은 메르의 상상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논문을 쓰기 시작한지 반 년. 유진은 애매하던 마법이론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마법을 몇 걸음이나 진보시켰다.


“...그 논문. 정말 공개할 생각이 없으신 거예요?”


“없어.”


유진은 고개를 흔들어 대답했다.


“이 논문은 내 자기만족이야. 어차피 나 말고 활용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냥, 내 마법식을 정리할 겸 적어보는 것이지.”


꼭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저 말도 이미 수십 번은 들었다. 그래서 메르는 삐죽 내민 입술을 집어넣지 않았다. 자기만족 뿐인 논문. 학회에 공개할 것도 아니니, 논문의 퀄리티를 크게 신경 쓸 것도 없다.


그렇다고 대충 쓰지는 않았다. 반 년에 걸쳐 쓴 논문에는 유진의 스승, 적색 마탑주인 로베리안의 검수가 더해져 있다. 공개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먼저 꺼낸 것도 로베리안이었다.


‘이 환염식(環炎式)은 그 어떤 마법사도 재현할 수 없습니다. 마법의 이해와 경지를 떠나, 재현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유진은 일반적인 서클 마법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본가의 백염식 사용자들이 재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유진은 백염식의 별로 서클을 대체한다.


‘저도... 이 논문대로 시도는 해보았습니다만. 시작부터 막히더군요. 저는 코어를 만들지도 않았고, 백염식을 익히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제 서클을 대체해 보았습니다만, 유진님처럼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나가 역류하더군요.’


위치 크래프트의 이터널 홀.


유진은 백염식으로 대체하는 서클에 이터널 홀을 가미했다.


백염식의 경지는 4성.


4개의 별로 하나의 원을 만든다. 그 안에서, 전생의 하멜이 그랬던 것처럼 마나를 연쇄적으로 폭발시킨다. 폭발에 터지는 마나를 무수히 많은 코어로 제련하고, 그를 상응시킨다. 회전하는 불꽃의 원은 마나가 바깥으로 흘려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는다.


그게 환염식이다.


본래는 백염식의 5성에 올랐을 때 시도하려 했지만, 위치 크래프트와의 만남으로 시기가 앞당겨졌다. 마법을 익히면서 매일 마나를 주무르다 보니 백염식의 경지도 올랐다.


아롯에서 보낸 2년은 충실한 정도가 아니라 혹독했다.


로베리안의 제자가 되었다.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을 아크리온에서 보냈고, 남은 절반은 로베리안에게 마법을 배웠다.


그는 대마법사답게 유진의 수준을 명확하게 파악했다. 마나를 다루는 기본. 마법을 일으킬 때에 중요한 술식의 배열이나 마나의 조율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았다.


가르칠 필요가 없다. 로베리안의 판단은 옳았다. 전생의 하멜은 허접한 마나수련법만으로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었다. 하멜은 헬무드 전쟁의 주역이었고, 세 명의 마왕을 죽이는 자리에 함께 했었다.


허접한, 싸구려 마나 수련법을 익히고서 말이다.


그래서 로베리안은 마법에 대해서만 가르쳤다. 무수히 많은 마법들 중에서 정말로 쓸모가 있는 것. 복잡한 술식은 최대한 풀이해 주었고, 마나를 어찌 배열할 지는 순전히 유진에게 맡겼다.


유진이 환염식을 어느 정도 정립하고, 논문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는 검수를 맡으며, 이 독자적인 마법식에 알맞게끔 기존의 서클 마법들을 뜯어 고쳐 주는 작업도 맡아주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환염식으로도 기존의 서클 마법은 사용은 가능했다. 하지만 기왕 독자적인 마법식을 사용할 거라면, 그에 알맞게 개량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쉽고 강하지 않은가.


“삐졌어?”


“제가 왜 삐져요?”


“가지 말라는데 간다고 해서.”


“안 삐져요. 제가 무슨 자격으로 유진님을 막겠어요? 유진님이 가겠다고 하면 그냥 가면 되는 거지. 저는 어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만약 가고 싶다고 생각해도 아크리온을 벗어날 수 없는 사역마인데 말이에요.”


그렇게 쫑알댈수록 메르의 입술은 점점 더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유진님은 그냥 가세요. 이 심심하고 지루하고 조용한 곳에 저를 내버려 두고 그냥 가면 되는 거예요. 저는 몇 년 동안 놀아드린 유진님과의 이별이 전혀 아쉽지는 않아요. 어차피 전 살아있는 인간도 아닌데다, 인간이 제멋대로인 존재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아요.”


“그래?”


“당연히 잘 알죠. 저는 유진님보다 200년은 더 살았으니까. 이별은 익숙해요. 그렇지만 유진님, 떠나기 전에는 저한테 말이라도 하고 가 주세요. 세냐님처럼 말도 없이 훌쩍 떠나지 말고요.”


“알았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굉장히 차분하시네요. 2년 동안 수백 번은 느낀 것 같은데, 유진님은 쓰레기에요.”


“내가 왜 쓰레기야?”


“제가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요. 이유 같은 것은 중요치 않아요. 유진님은 그냥 쓰레기에요. 아주 얄미워. 나이도 한참 어리면서 어른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요. 어른이 말하면 그냥 알겠다고 하면 좀 좋은가요?”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메르는 옆에 벗어놓은 모자를 머리 위에 얹었다.


“...물론... 유진님이 정말로, 제 이야기에 혹해서 아롯을 떠나지 않는다면. 저는 굉장히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되겠죠. 제 인격은 세냐님의 유년기를 베이스로 한 것이라, 제 감정과 언행은 어린아이의 치기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가.”


“네, 당연히 그래요. 그래서 저는 유치한 말을 하고, 유치한 고집을 부리죠. 그런 주제에 한편으로는 납득하고 있어요. 이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내뱉는 나 자신이 바보 같아요. 세냐님은 이러지 않으실 테니까. 제 행동이 세냐님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진다고요.”


“...흠.”


“그러니까. 유진님은 제 말을 흘려들어주세요. 저는 어린아이다운 고집을 부릴 뿐이니, 유진님은 제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거고, 저도 아무 것도 드릴 수 없거든요.”


“아마.”


유진은 논문을 써갈기는 펜을 멈추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진짜 세냐님도 너처럼 행동했을 걸.”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세냐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랬을 걸.”


“유진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진짜 세냐님을 만나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설마 동화책에서 나온 세냐님을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시는 건가요?”


메르는 눌러 쓴 모자를 들추며 얼굴을 보여주었다.


메롱. 메르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건 결국 누군가가 상상으로 써 내린 것일 뿐이에요. 제가 아는 세냐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어요.”


“얼마 안 가 논문이 완성될 거야.”


유진은 메르의 메롱에 메롱으로 화답해 주었다.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아마 여름이 끝나기 전에 완성되겠지.”


“뭐 어쩌라고요.”


“당연힌 난, 떠나기 전에 널 찾아 올 거야. 그때 네게 할 말로 생각해 둔 것이 있거든?”


“뭔데요. 약 올리려고? 죽여 버릴 거야.”


“그때 가서 말해줄게.”


유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19살


2년 동안 세냐의 전당에서만 머무른 것은 아니다. 세냐의 전당만큼은 아니어도 8층과 6층에서도 제법 오랜 시간 머물렀다.


8층 폭염의 전당.


6층 공간의 전당.


더 욕심을 내어, 7층 천앙의 전당과 8층 빙결의 전당에서도 시간을 쓰고 싶었지만. 괜히 이것저것 벌이는 것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8층의 화염마법은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위력적이다. 일으킨 불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마법의 격이 천차만별로 갈리기는 해도, 일단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면 위력은 충분해진다.


불꽃은 그 존재만으로도 강하다. 뜨겁다. 태워버린다.


다만, 터무니없을 만큼의 마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흠이었다. 8층 폭염의 전당은 마법 역사상 가장 강력했다는 화염술사의 마법이 보관되어 있다.


6층, 공간의 전당. 유진 본인이 블링크에 관심이 있기도 했고, 흑암의 망토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공간마법을 익혀둘 필요가 있었다.


8층과 6층.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성과는 거두었다.


“이제야 나오는 군.”


아크리온의 1층.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 마법사가 몸을 일으킨다. 그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친애를 미소에 깔고서 유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또 무슨 일이십니까?”


트렘펠 위자도르. 아롯의 궁정마법사장인 그는 유진에게 관심이 많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트렘펠의 노골적인 호의는 왕세자 호네인의 호의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 둘은 유진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호의를 숨기지 않았다.


“매번 식사나 한 끼 하자고 청하는데. 유진 공이 워낙 바빠서, 여태까지 한 번도 같이 식사를 하지 못했지 않나?”


“밥은 이미 먹었습니다.”


“9시간 동안 아크리온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했는데? 설마 유진 공이 아크리온에서 취식이 불가하다는 점을 모르진 않을 테고.”


관장이 솔직히 털어놓은 모양이다. 유진은 관장실의 닫힌 문을 한 번 힐긋거리고서 대답했다.


“아침에 너무 든든히 먹어두었거든요. 몸이라도 열심히 움직였다면 진즉에 소화가 되었을 터인데, 앉아서 책만 보다보니 소화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9시간 동안 소화가 안 됐다고?”


“그럴 수도 있죠. 식사는 다음으로 미루겠...”


“또 다음인가? 유진 공, 내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 ‘다음’이라는 말을 너무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일세.”


“식욕도 없습니다.”


트렘펠이 눈을 부라렸지만, 유진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저 늙은 마법사가 늘어놓을 이야기야 뻔하지 않은가. 궁정마법사단에 알짜자리를 약속할 테니 어쩌고...


아롯의 궁정마법사단이라면 대륙 제일로 꼽히는 마법병단이다. 그만큼 대우도 좋고, 그곳에 속하기를 바라는 마법사들도 많았다. 아무리 대단하고 명망이 높아봐야 결국은 군대일 뿐이지만,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대엔 군대도 등 따신 공직(公職)일 뿐이다.


‘내가 미쳤냐?’


유진의 나이 19살. 그는 벌써부터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군대는 지긋지긋했다.


아무리 세상이 평화로워도 군대는 군대. 지랄 맞은 위계질서야 라이언하트의 이름과 왕세자인 호네인의 이름으로 씹을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마음껏, 자유롭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좋은 기회를 왜 이리 차대는 건지.’


트렘펠은 답답함을 느꼈다. 설마 이미 다른 곳의 제안을 받았나? 그러한 생각이 트렘펠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당장 유진은 적색 마탑주인 로베리안의 제자다. 마탑주의 직위는 세습되지 않지만, 유진의 자질과 로베리안의 가르침, 라이언하트의 입김이라면 언젠가 유진은 반드시 적색 마탑주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아롯의 마탑과 왕궁은 서로 협력하는 위치이지 한 몸은 아니다. 트렘펠은 어떻게 해서든 유진을 궁정마법사단에 끌어들이고 싶었다. 만약 그리 된다면, 유진이 배경으로 둔 라이언하트의 협력도 쉽게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제네릭, 그 늙은이는 아닐 테고.’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


트렘펠은 그 늙은이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2년 전, 유진이 처음 아크리온에 왔을 때. 제네릭과 마법사 길드장은 끝까지 유진의 출입증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했다.


마법사 길드장의 입장은 이해가 된다. 형평성도 있겠지만, 사적인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오드와 접촉한 흑마법사는 마법사 길드 소속이었다. 흑탑주인 발자크는 이 일과 무관하다며 공언할 수 있지만, 마법사 길드장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마탑이 힘을 갖는 아롯에서 마법사 길드의 힘은 적을 수밖에 없다. 마법사 길드는 마탑에 소속되지 않은 허접한 마법사들의 무리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고, 서럽게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제네릭은 왜 반대를 주장했나?


간단한 일이다. 유진을 추천한 것이 로베리안이기 때문이다.


300년 전. 현명한 세냐는 녹색 마탑주를 지냈다. 그녀가 거두었던 세 명의 제자들 중 두 명은 녹색 마탑에 남았고, 한 명은 적색 마탑으로 소속을 옮겼다.


당대에 이르러선 아롯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현명한 세냐를 대스승으로 섬기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세냐의 정통을 이었노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제네릭과 로베리안 뿐이다.


녹색마탑에 남았던 세냐의 두 제자는 서로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고, 마법을 계승시켰다. 그가 바로 전대의 녹탑주이자, 제네릭의 아버지다.


그의 가문은 적색마탑에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스승이 머물렀던 녹색마탑을 떠나고 다른 마탑에 뿌리를 박다니? 그들의 피를 정통으로 이은 제네릭은 더더욱 로베리안을 싫어했다.


로베리안이 없다면, 세냐의 제자라는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제네릭 뿐이다. 그건 세냐를 숭배하는 이 마법왕국에서 무시될 수 없는 혈통의 힘이다.


그 존재만으로도 가히 눈엣가시라 할 수 있는데. 얄미운 로베리안은 라이언하트 본가의 가주와도 우애를 맺고 있다. 게다가 라이언하트의 적자를 데리고서 편애하기도 했고, 적자가 머저리 짓을 하니 라이언하트의 양자를 아크리온에 들여보내려 한 것이다.


그래서 반대한 주제에. 로베리안이 유진을 제자로 삼은 후로부터는 다시 눈독을 들이고 있다. 남의 것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에 옳다. 제네릭은 어떻게든 유진을 잘 구슬려서, 적색 마탑을 떠나게 만들고 싶어했다.


녹색마탑과 궁정마법사단 외에도 유진을 욕심내는 자들은 많았다.


백색마탑. 흑암의 망토를 9년 동안 빼앗기게 된 멜키스는, 어떻게든 유진을 구슬려 다시 한 번 위니드를 빌리고자 했다. 아니면 흑암의 망토라도 돌려받던가. 그런 물적인 이유 뿐만은 아니었다. 유진은 바람의 중급 정령을 자유로이 부리고 있다.


흑색마탑.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발자크가 유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마탑주들 사이에선 소문이 파다했다. 이오드의 건으로 라이언하트 가문과 흑마법사의 악연이 깊어졌으니, 어떻게든 그를 쇄신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완전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은 청색마탑 뿐이다.


“...크흠. 유진 공. 그... 논문은 잘 되고 있는가?”


“예.”


“유진공이 원한다면 내가 검수를 도와줄 수 있네. 물론 공의 스승인 적탑주가 검수를 도맡고 있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조언자는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좋지.”


“감사한 말씀이지만...”


“잠깐. 아직 거절하지 말게. 내 스스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적색마탑은 결국 소환마법이 장기 아닌가? 나는 소환마법도 곧잘 하지만 전투마법에도 능해. 괜히 궁정마법사장인 것이 아니란 말일세.”


트렘펠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소환마법을 장기로 삼는 적탑주가 해 주는 조언과, 내 조언은 다른 것일세.”


“그럴 수도 있겠지만, 트렘펠님은 제가 무슨 논문을 준비하는지도 모르시잖습니까?”


그건 네가 적탑주에게만 보여줬으니 그렇지. 트렘펠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일갈을 꿀꺽 삼켰다.


“허허... 모르니 알아 가면 되는 것 아닌가? 나도 탑주들 만큼 후학의 지도에 이골이 난 사람일세. 아롯의 마법학회에 주기적으로 논문도 내고 있고, 후배들의 논문을 검수해준 적도 많아.”


“제안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지금 와서 트렘펠님의 제안을 받는다면, 제 스승이신 로베리안님에게 크나 큰 무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어흠... 적탑주는 그 가슴이 바다처럼 넓고 깊다네. 선학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자네를 흐뭇해할지언정 불쾌해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면 로베리안님께 직접 여쭤보겠습니다.”


“어허... 뭐하러 굳이? 차라리 이렇게 하지. 자네와 나,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자네도 스승을 보기 난감하지 않을 거고, 적탑주의 체면도 깎이지 않게끔. 나도... 후학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니 기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유진은 더 이상 듣지 않고 트렘펠을 지나쳤다. 트렘펠은 진득한 미련을 담아 유진에게 손을 뻗었지만,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라질.’


“씨팔.”


트렘펠과 멀어지고서, 유진도 욕을 내뱉었다. 싫으면 싫은 줄 알지 뭐 이리 졸라대는가?


‘이터널 홀에 대해 모르니 저 정도지. 만약 알았으면 내 침실까지 기어 들어왔을 거야.’


유진이 이터널 홀을 백염식으로 재현했다는 것을 아는 건 로베리안과 메르뿐이다.


트렘펠 정도 되는 대마법사라면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마법의 경지와 마나의 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유진이 재현해 낸 ‘환염식’은, 마법을 펼치기 전까지는 백염식과 다르지 않다.


즉, 봐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다.


고위 마법사를 상대로 자신의 경지를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는 것.


로베리안이 말하기를, ‘마법’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유진은 마법사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서클이 없으니 당연한 것이다.


환염식을 쓰지 않고 마법을 썼을 때에도 경지를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마나의 흐름만으로 파악했을 때에는... 4서클 정도.


환염식을 쓸 때에는.


“...쓸 수 있는 마법을 떠나, 위력만 본다면 5서클은 아득히 넘는군요.”


적색마탑의 지하 연구동.


로베리안은 놀람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그는 2년 동안 유진의 스승을 지냈지만, 단 한 번도 유진에게 말을 놓거나 아랫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1서클의 파이어볼이 5서클의 볼케이노샷보다 우월하단 겁니다.”


환염식에 따르는 마나의 폭류(暴流). 이상적이고 쾌속한 배열. 간단한 술식.


무영창.


아니, 그마저도 넘었다. 이터널 홀이 서클마법의 궁극점이라 불리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


마법을 제약 없이 ‘기록’할 수 있다는 것. 스크롤을 사용하지 않고, 제 의식에 기록된 술식을 즉시 읽어내어 마법을 발현해낸다. 그 과정에 영창은 필요 없다.


그것은... 드래곤의 용언마법을 재현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4서클이 한계에요.”


유진은 시커먼 연기를 걷으며 말했다.


“그보다 고등한 마법은 이터널 홀에 담기지 않더라고요. 내 이해가 부족한가?”


“그건 아닐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용량의 한계인 거죠. 유진님의 환염식은, 이터널 홀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것은 아니니까요.”


이터널 홀은 9서클을 초월한 마법식이다. 무한한 마나로 하나의 고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 무한한 서클을 만들어낸다.


지금의 유진은 그 경지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 미쳤다.


“유진님은 서클을 코어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백염식의 4성. 4개의 코어. 코어의 개수가 서클의 개수와 동일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겁니다.”


위력은 터무니없지만.


“단순히 생각하면, 백염식의 경지가 오를 때마다 유진님의 이터널... 아니, 환염식도 강해지겠죠.”


당장은 4서클의 마법만 기록이 가능하지만, 백염식이 5성이 된다면? 환염식에 5서클의 마법까지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마법식이 처음인 만큼, 경지가 오를 때마다 어떤 특이점이 더해질지를 예측해서는 안 된다.


“부디 주의를 놓지 말아주십시오. 지금의 환염식은 단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경지가 오를 때에 무언가 위험성이 더해질 지도 모릅니다.”


그를 대비하기 위해 서클 마법을 뜯어고치는 것이다.


“...이거 참. 나이를 먹을수록 걱정만 느는 군요. 칭찬을 더 하지 못할망정...”


“무조건 잘했다는 소리보단 짧은 조언이 더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면 감사합니다만...”


로베리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상위 서클의 마법은 쓰지 말라는 거죠?”


“예.”


일반적인 서클마법식이라면 이런 경고를 할 필요는 없다. 서클 마법은 체계적이고 안전하다. 기존의 마법식들은 제 수준을 과신한 마법사들이 마나를 폭주시켜 망가지는 일이 잦았는데, 서클마법식이 대중화 되면서 마법사의 폭주 빈도는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하위서클의 마법사는 상위서클의 마법을 쓸 수 없다.


“4서클... 아니, 5서클의 마법까지는 무리 없이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쓰셨고... 그렇다고 6서클의 마법은 시도하지 마십시오.”


환염식에 기록할 수 없다 뿐이지, 유진은 본래라면 펼칠 수 없는 상위서클의 마법까지 쓸 수 있었다. 그가 타고난 연산력과 마나의 지배력은 상위서클의 마법조차도 빠르게 펼쳐내게 만든다.


경악스런 일이지만, 염려되는 일이기도 했다. 쓰지 못해야 할 것을 마음대로 쓴다는 것은 어떤 위험을 불러일으킬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로베리안은 수십 년 동안 고수해 온 수면패턴을 포기해야 했다. 기존의 서클마법을 유진에게 알맞게 고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혹시 모를 위험성까지 생각하면서 써서는 안 될 상위 서클 마법까지 생각해야한다.


“...논문의 완성은 언제쯤을 예상하고 계십니까?”


“여름이 끝나기 전... 그러니까, 9월쯤이면 완성될 것 같아요. 일단은 제 생일까지 완성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자기 만족 뿐인 논문이라고 말은 했지만, 배우고 익힌 것을 확실히 정리하는 것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라이언하트 가문에 바로 돌아가실 생각은 없다고 하셨죠?”


“예. 굳이 바로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길레이드님과 제하드님이 서운해 하실 텐데...”


“가문에는 시안이 있잖습니까. 기왕 몇 년 떠나있는 것, 조금은 늦게 돌아가도 용서해 주실 겁니다.”


시엘은 없다.


그녀는 작년부터 본가를 떠나, 우클라스의 흑사자 성에 가있었다. 바라던 대로 카르멘의 종자가 된 것이다.


항상 그곳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올해만 하더라도 제 생일에는 본가에 돌아왔었다.


파티의 초대장은 왔지만, 무시했다. 시안과 시엘의 생일인 2월은 논문에 몰두하느라 다른 곳에 정신을 둘 수가 없었다.


“본가에 바로 가지 않으실 거라면, 어디를 가실 생각입니까?”


“...루하르 왕국의 명물이라는 아이스크랩. 어렸을 때부터 먹어보고 싶어서...”


“그걸 굳이 루하르 왕국까지 가서? 당장 아롯의 거리에도 아이스크랩 전문점은 많은데...”


“산지에서 먹는 것이 더 각별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거짓말이다. 아이스크랩? 그 새하얀 킹크랩은 본가에서 지낸 겨울 동안 몇 번이나 먹었었다.


“식도락이 취미이셨는지는 몰랐습니다.”


“저야 어렸을 때부터 먹는 걸 좋아했죠.”


“무조건 큰 고기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맛있으니까 좋아하는 겁니다.”


북방 루하르 왕국. 모론 그 등신이 건국한 나라.


“루하르에서... 어... 아이스크랩을 먹고. 그 뒤에는... 나하마에 가서 오아시스를 볼 겁니다.”


“오아시스?”


“나하마의 선인장 전갈이 진미라고 들어서...”


이것도 거짓말이다. 200년 전. 유라스 신성제국에서 성녀라 추앙 받던 아니스는, 교황에게도 목적을 알리지 않고 순례를 떠났다.


세상 곳곳을 떠돌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것이 나하마의 사막 한 복판이었다.


“...갑각류를 좋아하시는 군요.”


루하르의 킹크랩에 이어 나하마의 선인장 전갈이라니.


“...오늘 식사는 랍스타 어떠십니까?”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권했다.


19살


‘오늘 무슨 날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똥줄이 탄 궁정마법사장이 움직인 것이리라. 유진은 들고 있던 랍스타의 집게다리를 일단 내려놓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누추하다고 할 곳은 아니지. 이곳은 펜타곤에서도 유명한 맛집이니까.”


“귀하신 분이란 것은 부정하지 않는 겁니까?”


“마음 같아서는 부정하고 싶은데, 내가 그를 부정하였다가는 왕가의 위신이 우스워지지 않겠나?”


호네인 아브람. 아롯의 왕세자는 수행인 하나 대동하지 않고서 여기에 왔다. 그는 빙긋 웃으며 테이블의 빈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도 되겠나?”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별 의미는 없겠지만, 유진은 로베리안을 힐긋 보았다. 그 또한 유진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저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왕자님,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소. 적탑주가 자리를 비킨다면 유진 공도 난감할 터이고, 나도 대뜸 찾아와서 사제간의 식사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거든.”


“이미 방해는 받았습니다만.”


유진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그걸 생각해 주신다면 아예 식사가 끝난 뒤에 오셨어야죠.”


계승 서열 1위의 왕세자에게 지나치게 무례한 말이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유진의 무례함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아롯에서 지낸지 2년. 유진은 자주는 아니어도 호네인과 몇 번씩 만남을 가져 왔다.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공의 식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걸리더군. 이 가게의 랍스타를 전부 다 먹을 셈인가?”


“에이, 그건 과장이죠. 왕자님도 아시잖습니까? 이 랍스타라는 놈은 껍질 벗기면 속살이 얼마 안 됩니다.”


“유진 공이 해산물을 즐기는지는 몰랐는데.”


“저야 맛만 있다면 뭐든 좋아하죠. 그런데 계속 서 계실 겁니까?”


유진은 빈 자리를 앞으로 빼주며 물었다. 그러자 호네인은 웃 음을 터트리며 자리에 앉았다.


“평소 하지도 않던 배려를 베푸는 것을 보니, 이곳까지 온 발걸음이 무의미해 질 것 같군.”


“여기 오면서도 내심 아셨을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어디 보자, 음식이 한참 부족할 것 같은데...”


“식사라면 나는 별 생각이 없네.”


“그렇다면 바로 본론부터 얘기하죠.”


유진은 물수건을 내려 놓으며 빙긋 웃었다.


“왕자님이 무슨 제안을 하셔도, 제 결정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


“궁정마법사단장 자리를 약속하겠네.”


호네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에 대해서는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하지.”


“당장은 무리일 텐데요?”


“10년.”


10년 뒤라고는 하지만, 유진의 나이는 아직 19살이다. 아롯의 역사에서 29살에 궁정마법사단장에 오른 마법사는 한 명도 없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난 10년 뒤에 왕이 되어있을 걸세.”


어찌 듣기에는 위험할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VIP 전용인 이 방은 오가는 대화가 절대로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끔 설계되어 있다. 게다가 호네인이 들어 온 순간, 로베리안이 직접 마법을 써서 보안에 주의를 더하기도 했다.


그렇다 해서 호네인이 뱉은 말이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현왕께서는 아직 정정하실 텐데요.”


“오해는 마시오.”


로베리안이 두눈을 얇게 뜨고 묻자, 호네인은 빙긋 웃으며 양손을 들어보였다.


“왕위에 대해서는 이미 부왕께 약속을 받았소. 내 승계서열이야 독보적인데다, 아롯의 백성들도 내가 다음의 왕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베리안도 호네인이 왕이 될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후계자들도 있다만, 호네인은 형제들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아롯은 마도왕국이라 불릴 만큼 마법에 친화적이고 밀접하다. 이 나라는 대대로 위대한 마법사들을 여럿 배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법에 대해 우수한 ‘피’를 자랑하는 것이 아롯의 왕가다.


그들 중에서도 호네인은 특별하고 우수하다. 아롯의 왕족은 어린나이부터 마법을 배우는데, 성인이 되기 전에 5서클에 오른 것은 왕족 중에서도 호네인이 처음이었다.


‘...왕족 뿐만도 아니지.’


아롯에서 수학하는 마법사들 중, 성인이 되기 전에 5서클에 오르는 이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숱하게 듣던 로베리안도 성인이 된 후에 5서클에 올랐었다.


유진과 만나지 않았다면, 저 왕세자가 ‘마법’이라는 분야에서 당대 제일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궁정마법사단은 왕가 직속일세. 물론 의회를 존중하는 만큼의 조율은 거쳐야겠지만, 10년 뒤의 유진 공이라면 자격은 충분하겠지.”


“높이 평가해주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왕자님은 제 마법이 얼마큼의 경지에 올랐는지도 모르시잖습니까.”


“그건 유진 공과 적탑주가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탓이지. 왜 숨길까?”


호네인이 웃으며 물었다.


“숨길만한 이유가 있어서 숨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직접 말하지 않으니 추측할 수밖에 없네만... 다른 마법사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흠.”


“위치 크래프트.”


호네인은 눈을 얇게 뜨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6서클의 서치아이. 그 마법이 유진의 몸에 들어 찬 마나를 보여주었다. 단순한 마나의 크기만을 보았을 때, 유진의 마나는 평범한 5서클을 아득히 웃돌고 있었다.


“이터널 홀을 이해했나?”


“꼭 대답해야 합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부정하는 것만 못하지.”


“왕자님한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그렇다고 솔직힐 말할 생각은 없지만.”


“아롯의 궁정마법사단장. 그 자리에 욕심은 없나?”


“높은 지위야 다른 곳에서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지위는 욕심이 없다. 군대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방금 말한 것처럼, 유진은 자기 능력에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국력으로만 따진다면 키옐 제국은 아롯보다 우월하다. 이 넓은 대륙에서 제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세 곳 뿐이다.


신성제국 유라스. 키옐 제국.


마경 헬무드.


당장 유진의 가문인 라이언하트.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로 본가의 가주는 작위를 지내지 않고 있지만, 라이언하트의 방계 중에는 작위를 가진 고위귀족들이 많다. 유진이 작위를 갖고자 한다면, 가장 낮은 남작 작위는 간단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진 공의 실력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과연, 지위로는 유진 공을 붙들 수 없는가.”


“아롯이 싫은 것도, 궁정기사단장 자리가 싫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욕심이 나지 않을 뿐이죠.”


“그렇다면 배움은 어떤가?”


대뜸 호네인이 말했다. 유진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곁에 앉은 로베리안의 표정은 뻣뻣히 굳었다.


“...왕자님, 설마.”


“아크리온에 보관 중인 위치 크래프트는 상권 뿐일세.”


호네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 공도 알다시피, 현명한 세냐님이 완성하진 위치 크래프트는 총 3권일세. 그 중 상권은 아크리온에서 보관하고 있고... 나머지 2권은 왕궁의 보물고에 보관하고 있지.”


그 말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메르가 말하길, 위치크래프트의 남은 2권은 세냐가 가지고 있을 터였다.


"대체 언제부터?"


로베리안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호네인은 그 시선을 받으며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진 마시오. 왕가가 보관 중인 것은 세냐님이 왕가에 대한 친애로 선물하신 사본일 뿐이오. 세냐님과 원본의 행방은 왕가도 알지 못하오."


"...정말입니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잖소."


로베리안은 잠시 호네인을 노려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왕자에게 수백 년 동안 위치크래프트를 숨긴 것을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 그러니 불만은 거두겠지만, 왕자가 저렇게까지 패를 보이며 포섭하려는 것은 의외라 생각했다.


"위치크래프트를 보여주시겠다는 겁니까?"


“당장은 불가능해.”


호네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로베리안을 힐긋 보았다.


“위치 크래프트는 마법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서일세. 내가 부왕의 총애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나라도 위치 크래프트에 관해서는 마음대로 굴 수가 없어. 하지만... 내가 왕위에 오른다면, 조금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겠지.”


“...”


“부족한 제안은 아니라고 보네. 내가 왕위에 오른다면, 유진 공에게 위치 크래프트를 보여줄 수 있도록 힘을 쓰도록 하지. ...적탑주에게까지는 힘들 것 같지만.”


“기왕 보여주시는 거, 스승님이랑 같이 보면 안 됩니까?”


“적탑주가 소속을 궁정마법사단으로 옮긴다면 재고해 보도록 하지.”


“그렇다면 궁정마법사단장 자리에는 제가 앉을 수 없겠는데요.”


“내가 아는 적탑주라면 그 자리를 욕심내지 않을 것 같은데?”


“잘 아시는 군요.”


로베리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흔들릴 제안이지만. 저는 적색마탑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궁정마법사단에 소속될 마음도 없고요.”


“원한다면 마땅한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소. 소속이 바뀐다 뿐이지, 적탑주가 불편하고 귀찮을 일은 없을 것이오.”


“아니, 괜찮습니다. 위치 크래프트... 굉장히 탐이 납니다만. 저는 대스승의 족적을 무작정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도 추구하는 마법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유진 공은 어떤가?”


고민할 여지가 있나?


위치 크래프트가 얼마나 대단한 마도서인지는 2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수백 수천 번을 들여다 보았는데도 이해가 힘들다. 바로 앞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그리 힘든데, 세냐는 순전하 자신의 힘만으로 위치 크래프트를 만들어냈다.


아크리온에 보관 된 상권만 하더라도 그렇게 대단한데, 남은 2권은 얼마나 대단할까?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다른 위치 크래프트에 세냐와 관련 된 흔적이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흔적이 남았다면, 위치 크래프트를 보관하고 있는 아롯의 왕정이 어떻게든 세냐를 추적해 냈겠지만...


‘보고도 못 알아차리는 것일 수도 있잖아.’


유진은 세냐에 대해 잘 안다. 아롯의 왕가가 발견하지 못한 흔적이라도 유진이라면 발견해낼 지도 모른다.


“...당장은 무리라는 말씀이죠?”


그렇다고 덥썩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위치 크래프트의 열람은 어디까지나 호네인이 왕위에 오른 뒤에나 가능한 일. 앞으로 10년은 뒤인 것이다.


“그렇다면 왕자님이 왕위에 오른 뒤에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그때 하도록 하죠.”


“여지는 남기겠다?”


“군침 도는 제안이니까요. 솔직히 제가 당장 궁정마법사단에 들어갈 필요는 없잖습니까?”


호네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오늘 당장 유진에게 확답을 듣고, 그를 궁정마법사단에 소속시키고 싶었다.


내실을 확실히 다지기 위해서였다. 왕위 계승권이야 흔들리지 않겠지만, 너구리같은 의회의 늙은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계승권 외의 힘이 필요하다.


아롯의 궁정마법사단. 이 마도왕국에서도 특별하게 전투마법에 능한 마법병단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의회와 맞닿은 다섯 개의 마탑과 마법사 길드를 견제하는 것은 부족하게 느껴졌다.


다행스런 점은, 마탑은 일단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법사 길드는 신경 쓰인다. 마탑에 들어가지 못한 마법사들이라고는 해도, 수적으로는 마탑보다 길드가 압도적이다. 그리고 길드는 아롯을 다스리는 의회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일단은 중립인 마탑. 왕가는 존중하지만 의회와 더 가깝다.’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아롯은 수백 년 전부터 입헌군주제를 따랐다. 아롯의 왕이 백성을 통치했던 것은 시조인 마법왕 이후로 몇 대 뿐.


호네인은 그것을 바꾸고 싶었다. 상징뿐인 왕가를 바꾸고, 아롯을 개혁하고 싶었다. 백성을 다스리는 의회는 이미 진즉부터 부패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것인지 모를 흑마법사들이 길드를 좀먹고, 그들의 입김은 의회에 미친다. 뿐만 아니라 헬무드의 마족과 타국의 재력가들이 의회를 후원하고 있다.


그런 주제에, 흑색마탑주인 발자크 루드베스는 의회나 길드와 거리를 두고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다. 그렇다 해서 발자크를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롯을 위해서라도, 불온한 싹은 뽑아야 하는 것이다.


바람은 그러했으나 현재의 왕가에는 그런 힘이 없다. 부왕은 의회나 길드와 다투기를 꺼려하는 유약한 분이시다. 그러니 호네인은 자신이 할 수밖에 없노라 생각하고 있었다.


‘유진 공을 궁정마법사단에 끌어들인다면... 라이언하트의 힘을 빌릴 수 있다.’


사실 내키지는 않는 일이다. 아롯의 문제는 아롯이 해결해야 옳지 않은가.


‘유진 공을 끌어들이면 적탑주도 힘을 실어주겠지. 적탑주가 흑마법사를 혐오하는 것은 유명한 일...’


그를 대놓고 말하며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왕세자인 호네인은 아롯의 치부를 외인에게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물며 의회의 부패는 아직은 의혹일 뿐이잖은가. 사실 볼레로 거리만 하더라도 부패의 온상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거리의 존재는 왕가의 묵인도 더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내 즉위가 확실해 졌을 때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유진 공. 아크리온에서 정확히 무엇을 얻었는지 알려 줄 수는 없는 건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마법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고, 조금 배움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호네인은 그 대답에 만족했다. 조금의 배움이라.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별 의미가 없을 지라도, 상대는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 제일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평가를 받는 어린 사자다.


“지금 작성 중인 논문이 완성된다면 아롯을 떠난다고 들었네. 어디로 갈 생각인가?”


“북방 루하브의 화이트크랩, 나하마의 선인장전갈을 먹으러 갈겁니다.”


“...식도락?”


“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예.”


“...”


호네인이 보이는 반응은 로베리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네인은 얼떨떨한 눈으로 로베리안을 힐긋 보았고, 로베리안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식도락은 훌륭한 취미지.”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하네요.”


유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


여름이 흘러간다.


계절에 알맞은 유희는 즐기지 않았다. 아롯에 오곤 난 후 뿐만이 아니라, 환생한 뒤로 유희에 시선을 돌린 적은 없었다.


본가에 있을 적. 여름이면 시안과 시엘이 바캉스를 가자고 꼬셔댔고, 겨울이면 스키를 타러 가자고 꼬셔댔지만.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유진이 아는 바다는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난파선과 익사체가 떠도는 곳이었다. 헬무드와 이어지는 바다는 끔찍하고 강력한 해양 마물들의 둥지였다.


유진이 아는 눈은 피가 듬뿍 배여 시뻘겋고, 얼어붙은 시체가 곳곳마다 팔다리를 내밀고 있는 공동묘지였다. 최북단의 헬무드의 날씨는 계절과 상관없이 지랄 맞았지만, 그 중에서도 광란의 마왕이 다스리는 영지는 눈보라가 멈추지 않는 혹한의 지옥이었다.


‘이것도 트라우마인가?’


유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잘 생각해 보면, 환생한 뒤로부터 유진의 삶은 죄다 전생의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생각을 처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이 강하게 의식 될 때마다, 몇 번이나 떨쳐내려 했었다. 기왕 환생했는데, 언제까지고 전생에 머무르는 것도 아깝고 웃기지 않은가.


하지만 잘 되지는 않는다. 라이언하트의 무기고에서 굳이 목걸이를 챙긴 것도. 세냐의 흔적을 쫒아 아롯에 온 것도. 루하브와 나하마에 가려는 것도 전부 다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다.


기억과 인연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환생하고 19년을 살았지만, 아직은 하멜로 살았던 시간이 훨씬 길다. 유진의 경험은 하멜의 경험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 둘 모두 나인데 뭘.’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이 답도 없는 고민에 오랫동안 빠지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쓰이고 궁금하고 답답한 것을 어쩌란 말인가? 환생도 했고, 300년도 흘렀고, 이름도 바뀌었으니까 전생의 기억을 죄다 무시하자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으으으...”


유진이 그렇게 결론은 내리는 동안.


메르는 맞은편에서 부릅 뜬 눈으로 유진의 논문을 읽고 있었다. 자기만족인 논문. 공개할 생각이 없는 논문. 그렇다고 해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논문이란 자신의 배움을 적은 글이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유진의 논문은 훌륭했다. 다른 마법사는 봐봤자 이해할 수 없겠지만, 위치 크래프트의 인공지능인 메르는 이 논문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코어와 이터널 홀을 완벽하게 접목시켰어. 태생적인 불완정함은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이것 이상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야.’


그런 불안정함을 안고서도 이만큼의 완성도라니. 마법에 입문한지 3년도 되지 않은 병아리가 써낸 논문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 환염식은 대마법사들 이상으로 이터널 홀의 가능성을 재현하고 있다.


‘...태생적인 불완전함. 코어는 서클과는 달라. 그로 인한 변수를... 죄다 센스로 맞춰내고 있어.’


마나에 대한 경악스런 통제력.


‘센스만으로 맞추면서도 마법의 완성도는 포기하지 않아. 이터널 홀에는 미치지 못해도, 유진님의 환염식은 현존하는 서클 마법식을 압도하고 있어.’


마법사는 마법에 미친 작자들이다. 그들은 불완전함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잘못된 마법은 잘못되지 않도록 보완한다. 한 번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진은 그런 불완전함마저 끌어안았다. 전생의 경험과 현생의 자질은 불가능을 아득하리만큼 가능에 근접시킨다. 다른 마법사는 이해할 수 없고, 실패작이라 생각할 마법식도 유진에게는 실패작이 아니었다.


이 환염식은 그러한 부조리함을 토대로 삼았다.


“...후... 훌륭하네요.”


메르는 결국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완성도는... 네. 어차피 유진님만 쓰는 거니까... 어... 조금... 이기적? 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데, 유진님한테는 그렇지도 않고... 유진님의 기준으론... 완성도가 뛰어나네요.”


메르의 표정이 구겨진다.


유진은 자신이 말했던 대로, 여름이 끝나기 전에 논문을 완성했다.


“...언제 떠나실 거예요?”


“모레.”


“유진님 성격이면 내일 떠나실 줄 알았는데.”


“나도 사람이니까 하루는 푹 쉬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적색마탑에서 송별회도 해준다고 해서.”


“참 좋으시겠어요. 가서 맛있는 것도 잔뜩 먹을 것 아니에요? 여기저기서 축하도 받을 거고.”


메르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그녀는 옆에 내려 놓은 커다란 모자를 눌러쓰며 유진을 쏘아보았다.


“유진님. 설마 몇 달 전에 한 말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제게 뭐 할 말 있으시다고 했잖아요.”


“일단 뭐 좀 묻자.”


유진은 기울인 의자를 바로 두고서 말했다.


“네가 듣는 이야기들. 다른 사람한테 전할 수도 있지?”


“얼씨구. 지금 저 의심하는 거죠?”


메르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제가 이 논문이나 유진님에 대한 이야기들. 다른 마법사들한테 일러바칠까봐 그러는 거죠?”


“말한 적 있어?”


“없어요! 녹색마탑주 그 개새끼도 그렇고, 다른 놈들이 유진님 없을 때 저를 얼마나 귀찮게 하는 줄 알아요? 유진님이 몇 년 동안 여기서 뭘했냐는 둥... 하지만 말이에요. 전 유진님과의 의리를 지켰다고요.”


“네가 말하지 않으려 해도, 억지로 들을 수 있는 거잖아.”


“하! 유진님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을, 아니, 저를 그렇게 못 믿어요? 그 개새끼들이 저와 위치 크래프트를 해부해도, 저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왜?”


“그러지 않게끔 저장했으니까요! 이건 유진님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아크리온에 출입하는 마법사들의 보안과 존중을 위한 기능이에요. 저는 유진님 뿐만이 아니라, 이 세냐의 전당에서 연구해 온 모든 마법사들의 정보와 대화기록을 위치 크래프트의 저장매체 가장 깊숙한 곳에 저장하고 있어요. 그 개새끼들이 위치 크래프트를 아예 박살내지 않는 이상, 유진님의 정보가 외부에 노출 될 일은 없다고요.”


“확실해?”


“아 진짜!”


유진이 히죽 웃으며 되묻자, 메르는 참지 못하고 빽 고함을 질렀다. 유진은 씨근거리는 숨을 내뱉는 메르를 보며 큭큭 웃었다.


“그렇게 철저하다면. 내가 지금 하는 얘기도 다른 곳에 새어나가지 않겠네.”


“아 글쎄 그렇다니까. 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난 환생했어.”


대뜸 건넨 말에 메르의 말이 멈춘다. 메르는 찌푸린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다가 내뱉었다.


“무슨 개소리세요?”


“환생했다고.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서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무슨 개소리냐고요. 지금 저 웃으라고 하는 말이세요? 억지로 웃을 수도 없을 만큼 재미가 없...”


“내 전생의 이름은 하멜 다이너스야.”


유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생의 이름은 하멜 다이너스.


현생의 이름은 유진 라이언하트.


“우둔한 하멜.”


19살


메르는 저 말에 자신이 뭐라고 대답해야하는 지를 알 수가 없었다. 평소 유진이 농담을 자주 했던가? 자주까지는 아니어도, 아주 안 하지도 않았었다.


그렇다면 저 말은, 유진이 드물게 하던 농담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네, 잘 알겠어요. 유진님은 전생에 우둔한 하멜이셨군요. 유진님이 솔직히 말해주셨으니, 저도 제 비밀을 알려드리죠.


제가 바로 현명한 세냐랍니다. 하멜 이 개새끼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세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메르는 질문을 바꾸었다. 믿기 힘든 말. 농담이라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만, 메르가 아는 유진은 지금 같은 때에 저런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뜬금없는 말인 것도 아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저 터무니없는 말을 전하겠다고 예고하기도 했고, 방금 전만 해도 함구(緘口)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댔었다.


“못 믿겠어?”


“...믿기 힘든 이야기잖아요.”


유진은 히죽거리며 웃는 얼굴이었다. 메르는 그 표정을 살피다가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사실 ‘환생’이라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다. 인공지능인 메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이 세상 대부분의 존재들은 죄다 누군가의 환생인 것이다.


다만,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환생한다는 것은 절대로까지는 아니어도 불가능에 가깝다. 간혹 세상에는 자신의 전생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있곤 한데, 그들 대부분은 정신이 어떻게 된 미치광이들이었다.


유진은 미치광이인가?


메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음. 믿기는 힘들지만,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면... 유진님에 대해 여러 가지를 납득할 수 있죠.”


“어떤?”


“유진님의 성장속도.”


유진이 마법에 입문한 지는 고작 2년. 그 짧은 시간만에 위치 크래트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마법이라면 이골이 난 대마법사도 아니고, 갓 마법에 입문한 병아리가?


아니.


사실 유진은 위치 크래프트를 ‘마법’으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위치 크래프트의, 이터널 홀을 구성하는 마나의 형태를 이해했을 뿐이다.


그것을 타고난 감각만으로 모방하고, 자기자신에게 알맞게 변형해냈다. 메르의 관점에서 그 일은 ‘천재’라 불릴 자질만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크리온에 출입하는 마법사들 중에서 천재 소리를 듣지 않은 인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유진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면. 하물며 그 전생이,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였던 우둔한 하멜이라면.


“...우둔한 하멜은 여러모로 특이한 인물이었어요.”


메르는 유진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현명한 세냐님은 인간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엘프의 숲에서 자라고, 엘프에게 직접 마법을 배우셨죠. 용감한 모론은 북쪽 혹한의 땅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 그 중에서도 전투부족으로 이름 높은 바야르 부족 대족장의 아들이었어요. 신실한 아니스는 신성제국 유라스의 추기경들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성녀 후보였죠.”


다들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위대한 베르무트.”


“녀석은 노예 출신이었지.”


유진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마족의 제물로 끌려가는 노예들 중에 베르무트가 있었다. 놈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마족의 검을 빼앗았고, 처음 휘두르는 검으로 노예들을 이송하는 마족과 흑마법사 수십 명을 썰어 죽였어. 그리고 노예들을 이끌고 헬무드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마물 수백 마리를 죽였지.”


“솔직히 과장이 심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신화’란 으레 그런 법이니까요.”


“나도 그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사실일 거야. 놈은 괴물이거든.”


유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베르무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 이야기는 모론에게 수십 번은 들었다.


바야르 부족이 살아가는 설원은 헬무드와 인접해 있다. 베르무트는 노예들을 이끌고 헬무드를 탈출하며 설원을 가로질렀고, 그곳에서 모론과 처음으로 만났다.


“...우둔한 하멜은 용사 일행들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했죠. 그는... 베르무트님처럼 ‘시작’부터 두각을 보인 적이 없어요. 특별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하멜은 용병 출신이다.


그 전에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살았다. 마을이 몬스터의 습격으로 멸망한 후, 살기 위해 검을 들었다. 몬스터에 대한 복수심과, 몬스터들을 미쳐 날뛰게 한 마왕에 대한 증오심도 있었다.


그렇게 수 년 동안 용병 바닥에서 뒹굴었다.


세냐처럼 엘프에게 마법을 배우고, 드래곤 하트로 만든 지팡이를 받은 것도 아니다.


아니스처럼 제국 차원의 지원과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다.


모론처럼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걸음마를 땐 순간부터 대자연과 부딪쳐 온 것도 아니다.


베르무트처럼 부조리한 자질을 타고나, 처음 휘두른 검으로 수십에 달하는 흑마법사와 마족을 베어죽인 것도 아니다.


용병이 되기 전의 하멜은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꼬마였다. 용병이 되지 않았다면 제 자신이 평생토록 싸움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우둔한 하멜.


그는 용사 일행 중에서도 가장 별 볼 일 없는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과 수 년 만에 다른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성장했다.


“세냐가 내 얘기를 했었나?”


“아뇨. 하지만 저도... 동화책은 몇 번이나 읽었다고요.”


메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유진을 응시했다.


“만약 유진님이 하멜의 환생이라면, 유진님의 터무니없는 성장속도도 이해가 가요. 하멜도 그랬었으니까요. 동화책에서 나오는 하멜은... 굉장히 고약한 사람이었지만, 성장력만을 따진다면 용사 일행 중에서도 독보적이었어요.”


“꼭 그렇지도 않아.”


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난 말이야. 어지간한 것들은 처음이어도 곧잘 해내. 그렇지만 극한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었어. 베르무트는 무신, 올마스터라 불릴 만큼 온갖 무기에 마법까지 사용했지. 세냐는 분야가 다르다고 했지만, 베르무트의 마법은 어떤 면에서는 세냐보다 뛰어났어.”


“...”


“나는 여정 내내 베르무트를 넘고 싶어 했지. 마법은 가망도 없으니 포기했고, 그때부터 능숙하던 검이나 창 따위의 무기. 심지어 주먹질까지 더욱 단련해서 베르무트를 넘어서려 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베르무트를 이긴 적이 없다.”


하멜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착각하고, 작은 우물 안에서 우월감에 취해 있을 때. 베르무트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놈을 따라잡기 위해 별에 별 짓을 다했는데도 따라잡지 못했다. 여행 도중에 몇 번이나 대련을 했었지만,


언제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는 것은 하멜이었다.


“...그런가요?”


지금 저걸 자조라고 뱉은 건가? 메르는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 위대한 베르무트와 비교한다면 당연히 빛이 바라겠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하멜도 터무니없는 괴물 아닌가?


“남들한테 천재 소리를 들어서 뭐해?”


유진은 메르의 눈에 어린 뾰루퉁함을 보았다.


“베르무트는 좆같아서 한 번은 꼭 이기고 싶은 새끼였는데 말이야. 나는 죽을 때까지 놈을 이기지 못 했다고. 놈이랑 같이 다니면서 몇 번이나 내 부족함만 절감했었지. 놈은 천재였고, 개새끼였어.”


“왜 개새끼였다는 거예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악한 짓이라도 한 건가요?”


“그건... 아니고. 놈은 뭐... 착했지. 나쁜 짓도 안 하고. 곤란한 사람은 무조건 도우려 하고... 용사에 알맞은 놈이었는데.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원래 너무 잘난 새끼는 시기를 받기 마련이잖아.”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만큼 대단하면 시기쯤은 받아도 되지 않냐? 그것 뿐이지 뭐.”


“그러니까. 하멜님은 베르무트님이 너무너무, 자기보다도 너무 잘나서 시기했다는 거네요?”


“말하자면 어... 그런 거지. 결국 믿기로 했나 봐? 하멜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는데.”


“믿기 힘들다고 했지 안 믿는다고는 안 했거든요.”


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납득갈 일들이 꽤 많기도 하고요. 유진님 유독 하멜에 대해 칭찬을 많이 했었잖아요.”


“...”


“어디 보자... 그래요. 유진님이 처음 이곳에 온 날이었죠? 유진님은 윗층에 있는 하멜의 영상을 보고서...”


“난 기억 안 난다.”


“괜찮아요, 저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거든요. 유진님을 하멜의 얼굴을 보고서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같은 매력이 있다고 했었어요. 제정신이에요?”


“...”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어떻게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그런 웃기지도 않은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뭐 어때. 나는 내 말에 한 점 부끄럼 없어. 하멜은... 그러니까, 전생의 나는. 나름의 매력이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우욱...”


메르는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 같은 얼굴로 환생했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누가 전생이 지금보다 잘 생겼대? 그냥 독특한 매력이 있다는 거지.”


“그런데.”


메르의 표정이 바뀐다. 그녀는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왜 갑자기 제게 이런 말을 알려주시는 거죠?”


“별 이유는 없는데.”


“제게 무언가 기대하고 계신 것이라면 소용없는 일이에요. 저는 세냐님의 행방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 것도 몰라요.”


“너한테 그런 걸 듣고 싶어서 말한 건 아니야.”


유진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냥. 너랑 2년이나 보고 있었잖아. 처음 널 봤을 때도 느꼈지만... 너는 세냐랑 많이 닮았어. 얼굴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그야... 저는 세냐님의 유년기를 베이스로 삼아 만들어졌으니까요.”


메르는 괜히 눈을 내리 깔며 웅얼거렸다.


“넌 세냐가 죽었다고 생각해?”


“절대 아니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유진은 고개를 돌려 세냐의 초상화를 응시했다.


“300년 쯤 흘렀으니 죽어도 이상하지는 않겠다만. 나는 세냐 그 계집애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죽을 성격은 아니라고 봐. 세냐 말고 다른 녀석들도 그래.”


“...”


“물론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다들 성격이 많이 바뀌었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완전히 바뀌겠냐?”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


유진은 히죽 웃으며 메르에게 손을 뻗었다.


“그래서 찾아볼라고.”


툭. 유진은 메르가 쓰고 있는 커다란 모자를 손끝으로 튕겼다. 메르는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세냐도, 모론도, 아니스도. 다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거나... 그럴 것 같으니까. 찾아내야지.”


큼직한 손이 메르의 머리에 올라간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손을 밀쳤을 텐데, 메르는 그러지 못했다.


“너도 세냐 보고 싶을 것 아냐?”


“...네... 네? 당연히... 네.”


“그럼 더더욱 데려와야지. 세냐도 참 개새끼야. 안 그래? 자기가 만든 사역마를 200년 넘게 방치하고 있는 것 아냐.”


“...세냐님 욕하지 마세요.”


“나는 욕해도 돼. 내가 300년 전에 세냐한테 얼마나 욕을 들어 처먹었는지 알아? 그 망할 년, 내가 뭐만 하면 개새끼니 병신이니... 그래, 너 기억력 좋다고 했지? 내가 처음에 했던 말 기억해?”


“세냐님이 동화책의 저자 같다는 말이요?”


“그래. 네가 들으면 개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꽤 그럴 듯 하단 말이야. 애당초 그 동화책은 나도는 소문만으로 엮은 것 치고는 디테일이 상당히 상당했다고.”


“상당히 상당했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지. 내 생각에, 동화책을 쓴 건 세냐 아니면 아니스야. 어쩌면 그 둘이 합심해서 쓴 걸 지도 모르고.”


유진의 열변에 메르의 표정이 묘해진다. 그녀는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윗층에 남은 하멜의 영상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하멜... 아니, 유진님의 말은. 세냐님이 그 동화책에다가, 세냐, 난 널 좋아했어. 이런 말을 적었다는 거네요?”


“이 씨팔,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그럼 세냐님은 진짜 하지도 않은 말을 멋대로 적었다는 건데. 세냐님이 왜 그런 일을 하겠어요?”


“...나를 엿 먹이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저는 도저히, 세냐님이 자기 이름 앞에 아름답다는 말을 붙이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아요.”


“어쩌면... 어쩌면 아니스가 적은 걸지도 몰라. 아니스는 성격이 굉장히, 좀, 배배 꼬여 썩어 있었거든. 그 동화책에는 아니스의 성녀다운 모습만 부각됐는데, 인간 아니스는 쌍년이었다고.”


“아, 네. 물론 그러시겠죠.”


메르는 그렇게 말하고서 제 손을 코앞까지 들어 휘휘 흔들었다. 유진은 그게 무슨 뜻의 제스쳐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두눈을 끔벅거렸다.


“손 치우세요.”


“웬일이래. 예전에는 매몰차게 쳐냈으면서.”


“...세냐님의 동료시라니까 존중해 드리는 것뿐이에요.”


“그거 참 고맙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메르에게서 손을 땠다. 의자에서 내려 온 메르는 잠시 주저하다가, 크게 숨을 삼켰다.


“...유진님. 맹세할 수 있어요?”


“뭘?”


“유진님의 전생이... 우둔한 하멜이라는 거.”


“맹세야 할 수 있는데 말이야. 내가 하멜인데, 내 앞에서 그 빌어먹을 우둔한이라는 말은 좀 빼면 안 되냐?”


“그럼 뭐라고 말해요. 병신 같은 하멜?”


“대단한 하멜은 어떠냐? 훌륭한 하멜이나.”


“베르무트의 앞에 붙는 ‘위대한’이라는 말이 참 탐이 나셨나 봐요.”


“크흠...”


“어쨌든, 정말 유진님이 전생에 하멜이라면... 한 번 맹세해 보세요.”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이름은 유진 라이언하트. 전생은 하멜 다이너스. 이 모든 것에 한 치의 거짓이 없음을, 내 피와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맹세한다.”


“...잠깐만요.”


맹세를 확인한 뒤.


메르는 몸을 돌려 위치 크래프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양 손을 들어 위치 크래프트에 접속하고,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서있었다.


“...세냐님이 은거하신 후. 여러 마법사들이 몇 번에 걸쳐서 저와 위치 크래프트를 해부했죠. 하지만 그들이 알아내지 못한 것들이 있어요. 위치 크래프트의 저장매체 가장 깊숙한 곳. 위치 크래프의 근원 밑바닥에 기록한 정보. 오늘... 유진님과 나눈 이야기들도 그 밑바닥에 저장될 거고,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거예요.”


메르는 감았던 눈을 뜨고 유진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도... 아롯의 그 누구도 듣지 못한 말이에요.”


“뭐?”


“세냐님의 은거는 조짐이 있었어요. 그 분이 은거하시기... 일주일 전쯤이셨죠. 저는 그때 아크리온의... 이 층에 있었고, 세냐님도 저와 함께 계셨었어요. 그러다가... 세냐님이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으셨죠.”


“...설마 병에 걸렸거나, 그런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에요. 제가 놀라서 묻자... 세냐님은... 자신의 사역마가, 죽었다고 말했어요.”


메르는 곧장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멜의 무덤.”


“...”


“그 무덤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면서... 세냐님은 굉장히 분노하며 내뱉으셨었죠.”


무덤?


하멜의?


“내 무덤이 있었어?”


유진은 멍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메르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도 듣지 못했어요. 하멜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저도 그때 처음 들었거든요.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냐님은 돌연 모습을 감추셨고, 저는 그때의 대화를 위치 크래프트 가장 깊은 곳에 숨겼어요.”


메르는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라지신 거니까요. 괜히 제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는 것으로, 세냐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유진님은... 하멜이니까. 알 자격이 있죠.”


“...무덤...”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난 내 시체가 베리알의 저주로 완전히 소멸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


“...리치의 저주는 육신과 혼을 말살해 버리죠.”


“보통은 그렇지. 내 혼은 멀쩡히 남아서 환생했지만.”


“그렇다면 육체도 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어쩌면... 네. 유진님의 환생은...”


“세냐가 관여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하고 있어. 진실은 모르지만.”


무덤이라. 유진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 더더욱 세냐를 찾아 봐야지.”


19살


만약 세상 어딘가에 하멜의 무덤이 있다면.


‘...헬무드?’


유진은 전생에 죽었던 장소를 떠올렸다.


300년 전의 약속 이후. 마왕과 마족들은 침략을 그만두었다. 마왕의 속삭임에 이지를 상실했던 몬스터들도 정신을 차렸고, 대륙 전역에 퍼져서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습격하던 마물들도 한 마리 남김없이 헬무드로 돌아갔다.


그렇게 100년. 멸망의 마왕은 여전하게 침묵했고, 유폐의 마왕은 마족의 대표로서 피해의 수습에 나섰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다. 마족에게 멸망당한 국가도 너무 많았고, 마족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이들도 많았다. 마왕이 직접 나서서 고개를 숙여 본 들, 마족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다른 마왕들의 이름을 팔았다.


마왕 중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뉘는데, 죽은 살육과 참혹과 광란이 강경파였고, 자신이야말로 유일한 온건파였노라고.


철저한 중립과 침묵을 지키는 멸망의 마왕도 전쟁을 바라지는 않았노라고.


죽은 마왕들의 수족들은 진즉에 용사 일행에게 죽었고, 얼마 남지 않은 수하들은 모조리 유폐의 마왕 휘하에 들어간 뒤였다.


어차피 죽은 마왕들이다. 유폐의 마왕이 그들을 아무리 모욕한들, 이미 뒈진 마왕들이 어떻게 반발할 수 있겠나.


꾸준한 주장과 더불어, 유폐의 마왕은 아낌없이 지원을 베풀었다. 그는 터전을 잃은 전쟁난민들을 위해 헬무드의 외곽에 거대한 도시를 만들었다. 끔찍한 피해를 입은 나라들에는 수하들을 파견해 건물을 새로 짓게 하고 길을 닦아주었다. 막대한전쟁배상금이 피해국의 금고에 쌓였다.


더불어, 이 사태에 책임을 묻는다며 수많은 마족들을 숙청했다. 그렇게 100년. 아니, 전쟁의 배상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헬무드의 주변국들은 300년이 흐른 지금까지 마왕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게 마경 헬무드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제국.’


유진은 헬무드를 제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곳은 마족과 마왕과 마물, 놈들에게 혼을 판 흑마법사며 이종족들이 어우러진 지옥일 뿐이다.


하지만 유진이 그리 생각한들, 세상은 헬무드를 제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헬무드의 지원을 받아먹는 주변국들은 사실상 헬무드의 식민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유폐의 마왕성은 그곳에 있다.


‘내 무덤이 설마 판데모니엄에 있을라고.’


마족이 득실거리고, 유폐의 마왕이 지배하는 헬무드의 수도에?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무덤이 그곳에 있는 것이라면, 그건 하멜에 대한 모욕이다.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헬무드에서 마족을 완벽하게 말살했다면. 그 한복판에 무덤을 둬도 상관없다.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잖은가. 유폐의 마왕도, 멸망의 마왕도 멀쩡하게 살아있다.


‘애당초 내 시체가 정말로 남았나?’


뭐 무덤이 꼭 시체가 있어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세냐가 사역마를 두고, 누군가의 침입에 분노했다는 것을 보면... 세상 어딘가에 숨겨놓은 모양이다.


그게 어디지? 보통 무덤이라면 그 사람과 깊이 관련 된 장소에 만들지 않나? 유폐의 마왕성일 리는 없고...


‘...내 고향인가?’


무덤이 만들어질 만한 장소라면 고향이 유력하지 않나. 유진은 전생에도 별 감흥을 가진 적 없는 고향을 떠올렸다.


하멜의 고향은 튜라스 왕국의 변경이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전생에는 굉장히 지랄 맞은 곳이었다. 가까운 숲에서는 때때로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바다 건너에 있는 튜라스에서는 노략을 일삼는 해적들이 건너오곤 했었다.


“유진님?”


생각도 정리할 겸, 산책 삼아 아크리온 주변을 거니는 중이었다. 대뜸 들린 목소리에 유진은 이를 꽉 물었다. 어째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마법사들은 ‘우연’이라는 것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자연스런 만남이라도 추구하는 건가? 그럴 거면 기척이라도 제대로 숨기던가. 제발 알아차려 달라는 듯이 기척을 질질 흘려대다가, 반응하지 않고 무시하고 있으면 참다못해 말을 걸어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야심한 시각에.”


“유진님을 따라 왔습니다.”


그래도 발자크는 궁정마법사단장이나 녹탑주보다는 나았다. 마법 가로등 아래에서 걸어 나온 발자크는 유진을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유진님이 아크리온에서 나왔을 적부터 쭉. 눈치 못 채셨습니까?”


“눈치야 진즉부터 챘습니다. 흑탑주님이 아는 체를 하지 않으시기에 저도 가만히 닥치고 있었던 것뿐이죠.”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뭘 새삼스레.”


“하긴. 저와 마주칠 때에는 항상 기분이 좋지 않으셨죠. 설마 저 때문입니까?”


“잘 아시네요.”


아롯에서 지낸 2년 동안 흑탑주와 마주친 적이 꽤 많았다. 만나서 별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언제나 흑탑주 쪽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유진은 노골적인 불쾌를 보이며 대충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런 식이었다. 대화를 길게 나누었던 적은 일절 없었다. 다행히 흑탑주는 유진의 태도를 지적한 적이 없었고, 궁정마법사단장이나 녹탑주처럼 귀찮게 달라붙지도 않았다.


“아롯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들은 겁니까?”


“들리는 곳이야 많죠. 설마 유진님, 적색마탑에서 송별회까지 하는데 이야기가 흘러나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신 겁니까?”


“흑탑주님도 참 한가하시나 봅니다. 남의 마탑 행사에 귀를 기울이고 다니시고. 그런 열정으로 흑색 마탑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흑색마탑의 마법사들은 제가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가 무척이나 한가해요.”


대놓고 면박을 주는데도 흑탑주의 웃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흑탑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싫고, 꺼려진다.


발자크 루드베스. 아롯에서 지낸 2년 동안, 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 놈은 다른 마탑주들과 비교해도 꽤나 특별한 존재였다.


수십 년 전. 발자크는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본래 그는 청색마탑 소속으로, 그곳에서도 차기 마탑주로 거의 확실시 되던 뛰어난 마법사였다. 당대의 청탑주는 히리두스 우즐렌이지만, 발자크가 청색마탑에 있던 시절에 히리두스는 발자크보다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으로 수 년만 있으면 청탑주에 오를 텐데. 대뜸 발자크는 청색마탑을 떠나, 헬무드로 향했다. 마법의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후로 10년. 헬무드에서 돌아 온 발자크는 흑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아롯에 돌아온 즉시 청색마탑에서 흑색마탑으로 소속을 옮기고, 흑탑주의 인정과 흑마법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새로이 흑탑주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흑탑주의 자리에 오른 뒤. 발자크가 아롯에서 무언가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발자크는 청탑주가 된 히리두스와도 그럭저럭 친분을 유지했고, 청색마탑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왕가에도 존중을 보이고, 의회와도 가까이 지냈다. 백색, 녹색 마탑과도 적대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사이가 먼 것은 로베리안이 탑주로 있는 적색마탑 뿐. 그것도 로베리안이 흑마법사를 혐오하는 까닭이지, 적색마탑 차원에서 흑색마탑을 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발자크는 흑마법사이면서도 주변과 원만히 지낸다는 뜻이다. 유진이 보았던 것만 해도 발자크의 일처리는 아주 상식적이었다. 그는 굳이 고개까지 숙여가며 라이언하트에 대한 존중을 보였고, 제 뒤에 있는 유폐의 마왕을 내세워 상황을 주도하거나 누군가를 압박하려 들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썩 괜찮은 흑마법사란 말이다.


다만, 유진의 관점에서 괜찮은 흑마법사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유진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괜찮은 흑마법사는 죽은 시체와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병신 뿐이었다.


“한가해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감정이 좋지 않다보니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유진은 대놓고 이죽거렸지만, 발자크는 피식 웃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유진님은 바빠서 힘드실 것 같군요.”


아니. 마냥 받아 넘기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사람이니까, 한참 어린놈이 꼴 받게 구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이유야 알 수 없었지만, 발자크가 저렇게 대답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유진님을 비꼬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렇게 말하는 게 더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 유진은 바로 답하지 않고 발자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말했잖습니까. 유진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모레 아롯을 떠나서, 루하르와 나하마 쪽에 가신다던데.”


“오늘따라 말씀이 참 기십니다.”


“유진님에 대한 우려 때문이죠.”


“...우려?”


갑자기?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북방 루하르는 헬무드와 가깝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라이언하트의 입김이 닿지 못한다는 것이죠. 본래 루하르는 마족과 흑마법사들의 입국을 엄금하였는데, 5년 전부터 왕가가 고집을 굽혔습니다.”


“...”


“헬무드에는 마족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제 주인이신 유폐의 마왕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도 존재하죠. 애당초 헬무드에 군림하는 마왕이 유폐의 마왕님 뿐만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 말은. 멸망의 마왕이 발호를 준비하고 있단 말입니까?”


“설마요.”


발자크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멸망의 마왕... 님은... 폭거를 즐기지 않으시죠. 또, 유폐의 마왕님을 존중해주고 계십니다. 유폐의 마왕님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멸망의 마왕님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멸망의 마왕.


서열 1위의 대마왕이다. 머나 먼 기억을 떠올렸고, 유진은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멸망의 마왕은 그 이름처럼 멸망을 이끌고 다닌다. 전생에서 용사 일행은 멸망의 마왕과 제대로 대적한 적이 없었다.


멀리서.


멸망의 마왕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유진은 아직도 그때, 자신이 보았던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검은색... 아니... 빨간색인가? 그것조차도 모르겠다. 그냥, 널따란 평원의 건너편에서... ‘색’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사실 그게 정말로 멸망의 마왕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저것이 멸망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멸망이란 말인가. 저것이 서열 1위의 대마왕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대마왕이란 말인가.


그 실존하는 멸망은 잠깐 모습을 보인 뒤에 평원 너머로 사라져버렸고,


그를 보았던 모두가 잠깐 정신을 잃었다. 가서 싸움을 걸자. 죽여야 한다.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스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모두의 정신을 안정시키지 않았다면... 볼썽사나운 광증을 보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진님. 유폐의 마왕님이 움직이지 않으시고, 멸망의 마왕님이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마족이 침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흑탑주님의 주인이 게으르고 무관심해서 아닙니까?”


유진은 도발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발자크는 불쾌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로군요. 예, 사실은 그렇죠. 유폐의 마왕님은 휘하 마족들의 행동을 억압하지 않으시니까요. 제 자비로운 주인님은... 모든 수족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유폐라는 이름과는 달리.


“다만, 확실하게 선은 그어두고 계시죠. 제공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그로 인한 문제는 온전히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이오드님을 구슬렸던 올페르 남작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벌인 문제를 제 목숨으로 책임져야 했습니다.”


“...”


“마족은 난폭합니다. 강력한 마족일수록 더더욱 난폭하죠. 그들 중에는 수백 년 동안 이어 온 평화에 염증을 느끼는 마족들도 많습니다. 세상은 평화롭고... 마족은... 하하. 제 입으로 하기에는 우스운 말이지만, 마족들은 평화를 즐거워하는 종족은 아닙니다.”


“마왕의 묵인 속에서 저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마족이 많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발자크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는 빙글거리며 웃는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이 말은 유폐의 마왕님 휘하의 마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하는 멸망의 마왕님을 섬기는 마족들. 그들은 제 주인의 침묵을 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그러한 침묵 속에서 발자크만이 말을 이었다.


“또, 고위 마족들 중에서는 새로이 마왕이 되고 싶어 하는 마족도 있습니다. 본래 다섯이었던 마왕이 둘이 되었으니, 세 개의 자리가 공석이지 않습니까? 제벨라 공작도 그 자리를 열렬히 바라고 있지요.”


“투표라도 하면 되지 않습니까?”


유진은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마족들을 모아놓고, 새로운 마왕이라도 선출하면 될 것을.”


“하하...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마족들은 투표라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면 투표함을 박살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마족입니다. 그러니 평화를 싫어하는 거죠.”


“경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만 그리 할 뿐, 유진은 발자크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삐딱하니 서서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그렇게까지 말해주셨으니, 루하르는 다음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실력으로 고위 마족과 싸울 수 있나?


유진은 제 힘을 믿었으나, 과신은 하지 않았다. 괜히 지랄 맞은 일에 엮여서 위험에 처하기는 싫었다. 언젠가는 가겠지만, 충분한 확신이 있을 때에 가볼 생각이다.


‘월광검도 신경쓰이고.’


경매장에서 구매했던 월광검의 파편. 이것이 발견 된 곳은 카자드 구릉지라고 했었다. 몇 년 후, 루하르에 갔을 때 카자드 구릉지도 한 번 들러볼 생각이다.


“나하마는... 흠.”


루하르에 대해서는 경고했는데, 아직 발자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사막을 조심하십시오.”


“모래폭풍을?”


“아멜리아 머윈을.”


발자크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그림자가 치솟아 발자크의 손을 휘감았다.


“유폐의 마왕은 라이언하트를 친애한다고 했는데. 그와 직접 계약한 아멜리아 머윈이 저를 해한다면, 유폐의 마왕이 말한 친애가 거짓이란 뜻 아닙니까?”


“그녀는 특별하죠.”


발자크는 유진이 유폐의 마왕을 직접적으로 운운했음에도 미소를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하기 전부터 대단한 흑마법사였습니다. 유폐의 마왕님은 제 수족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중에서도 아멜리아 머윈은 아주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


“만에 하나. 아멜리아 머윈과 예기치 않게 충돌하게 된다면 말입니다. 그녀에게 이것을 건네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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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는, 유진 일행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유폐의 마왕이 ‘다음’을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세상에 희망을 걸 때. “……하하.” 드디어 뜻대로 웃음이 나왔다. 유폐의 마왕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에 대한 시험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유진과 동료들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비록 이렇게 된 것이 유폐의 마왕이 상정하지 못한 변수, 발자크 루드베스의 배신과…… 누아르 제벨라의 잔재의 도움이 있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변수를 사랑한다. 그가 보내온 억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변수를. 멸망으로 수렴할 뿐인 운명을 흔드는 변수를 사랑한다. 변수는 유폐의 마왕에게 치명적일수록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지금의 시대는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마왕에 맞서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충천해 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절망하지 않고, 반항 의지를 박탈할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꿋꿋이 나아갔다. 몇 번이나 권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힘을 보여주며 절망을 강요했다. 포기할 것을,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 영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도 말해주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죽음이 두려워 망설이거나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다. 바라던 절망을 줄 수 없다. 힘을 확인했다. 저들은 기어코 베르무트마저 구하고 말겠다는 욕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끝을 내도 좋지 않은가. “폐하!” 엎드린 유폐의 마왕에게 마족들이 다가왔다. 판데모니엄에 잔류한 마군의 후발대다. 그 목소리와 발걸음에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유폐의 마왕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전쟁 승리 후 대륙을 무차별로 폭격하기 위해 개조한 전투 요새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유폐의 마왕을 추락시킨 공격이 판데모니엄을 휩쓸어버리기도 했지만,

Ch13

 오르투스의 위치를 특정했다. 거기서부터는 모든 것이 간단했다. 일행은 관측병과 경계병의 눈을 속이고서 오르투스가 있는 방의 문 앞에 도착했다. 셋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문을 열었다. 오르투스 하이만. 그는 집무용 책상 너머에 앉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손에 쥔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적고 있던 모양이다. “음?” 예고 없이 문이 열린 것이다. 오르투스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3명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3명. 누구인지는 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다른 배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이곳에? 아니, 무언가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예고는커녕 노크조차 하지 않고 들어온 이유는 대체? 문을 닫는 남자…… 도 알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 잠깐, 유진 라이언하트? 키옐에 있다던 그가 왜 이곳에, 카르멘과 함께 있는 것인가? 사흘 전에 승선한 라이언하트는 3명뿐.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 그 외에 3명의 몸종이 더 있기는 했지만 그중에 남자는 없었다. 그리고…… 저 여자는 누구지? 평범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보라색 머리카락. 방긋방긋 웃고 있는 녹색 눈동자. 손에 든 마법지팡이…… 마법사? 현명한 세냐? “대체 무슨……?” 여전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키옐에 있을 유진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가 이곳에 있는 것. 그리고 카르멘이 저들을 데리고서, 이 늦은 밤에 말도 없이 찾아온 것. ㅡ잠깐. 말도 없이 찾아왔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이 배, 라베르시아는 마법결계가 씌워져 있다. 결계에 누군가가 접촉한다면, 무조건 오르투스와 마이스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다.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결계가 돌파되었다. 그로도 모자라서, 방문 앞에 올 때까지. 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저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었다 한들, 저만한 존재감을 가진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