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나는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았다.
“위대한 베르무트님처럼 말입니다.”
“성검말고 다른 것은 없냐니까?”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신성제국은 유진님을 용사로 인정하되, 세상에 공표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300년 전에도 베르무트가 용사가 되어, 성검의 주인이 된 탓에 귀찮은 일들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유진님이 신성제국에 오신다면, 교황 예하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유진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겁니다.”
“됐고.”
유진은 손을 뻗어 다과로 준비 된 쿠키를 움켜쥐었다.
“다른 건 필요 없어. 크리스티나님. 당신은 쓸 만한가?”
“...네?”
“쓸 만하냐고. 성녀 후보에, 주교까지 될 정도면 사제로서도 뛰어나겠지? 신성마법. 얼마나 잘 쓸 수 있어?”
“...유진님이 제게 어느 정도의 수준을 기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크리스티나가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손에 쥐었던 쿠키를 보았다. 어느새 유진이 쥐고 있던 쿠키는 빵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녀로 불리는 만큼의 기적은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아무 쓸모 없잖아.”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봤자 진짜 술만 못하지. 이 빵도 결국, 겉모양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지 진짜 빵만큼 배가 부르지는 않잖아.”
이 정도 기적은 아니스도 손쉽게 썼었다. 아니스의 기적이 없었다면 헬무드에서 마물을 잡아먹지도, 오염된 물을 마시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유진이 말했던 것처럼, 저 기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쿠키가 없다면 빵을 만들어낼 수 없다. 술을 성수랍시고 마시던 아니스도 자기가 만들어낸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다.
“잘린 팔을 붙일 수 있나?”
“...그건...”
“상처에서 쏟아낸 피를 되돌릴 수 있나?”
“...”
“박살난 눈동자를 재생할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크리스티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유진이 말한 것들은 정말로 기적이라 할 만한 것들이다. 신성제국의 역사에서 저만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베르무트의 여정에 함께했던 신실한 아니스 뿐이었다.
“...지금의 제게는 아니스님만큼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성녀로 임명받은 몸. 언젠가는 아니스님만큼 전능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아니스가 특별했던 것이다. 그건 아쉬운 일이지만, 치유마법을 쓰지 못하는 유진으로서는 크리스티나와 동행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부상으로 골골댈 일은 줄어들 것 아닌가.
“가주님.”
유진은 고개를 돌려 길레이드와 도이네스 쪽을 보았다. 노크도 없이 들어와서, 주변은 신경 쓰지 않고 크리스티나와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둘은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무례하다 꾸짖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저럴 만도 한 문제 아닌가. 적어도 길레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했던 아이다. 그런데 대뜸 성녀가 찾아와서 용사를 운운했으니, 감정이 격렬해질 것도 당연했다.
“보물고에 있는 성검. 제가 잠시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음.”
길레이드는 찻잔을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 문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까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위대한 베르무트. 관에는 시조의 유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관해서는 새벽 늦게까지 도이네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이언하트에서 이를 알고 있는 것은 유진과 길레이드, 도이네스 뿐이다. 도저히 다른 원로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문제였다.
확신은 불가능한 일이나, 의견은 일치했다. 장례식은 거짓. 시조님은 죽음을 위장하고 사라졌다... 300년이 흐른 지금의 후손들로서는 그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죽음 이후로 시조님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것이 라이언하트에 있어서는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그리고 지금. 신성제국은 300년 만에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의 ‘용사’를 인정했다. 본래 성검은 신성제국의 것. 라이언하트가성검을 상징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시조 이후로 그 누구도 성검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오직 가주만이 성검을 ‘뽑아 드는 것’이 가능했지만, 전설처럼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용사는 싫으면서, 성검은 원하는 것인가?”
도이네스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본가의 보물들은 가주라고 해서 마음대로 관리할 수 없다. 특히나 그것이 성검 같은 것이라면, 반드시 원로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저는 죽어도 싫지만, 성녀님이 절 보고 용사라고 하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용사라고 해서 시조님처럼 용사다운 일을 당장 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요.”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아 물론. 저는 성녀님이 용사다운 일을 강요해도 절대 안 할 겁니다. 원로원주님이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어찌 할 지는 오직 제가 결정할 겁니다.”
“가문이 자네에게 바란다고 해도?”
“예.”
유진은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망신스런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가문의 위신도 떨어트리지 않을 거고요.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나는 빛의 신의 신도는 아닐세.”
도이네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신의 안목을 의심할 수는 없지. 신이 자네를 용사라 말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야. 나는 원로원주로서 자네의 뜻을 존중할 걸세. 자네가...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충실하다면. 시조님의 뒤를 잇기 부끄럽지 않다면. 가문은 자네를 지지할 걸세.”
그것은 노골적인 경고이기도 했다. 멋대로 구는 것이 과하다면 간섭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
“예.”
유진은 히죽 웃었다. 도이네스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 유진을 묘한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래라면 다른 원로들과 논의해야겠지만. 이 문제는 그럴 수가 없겠군. 그러니, 가주. 내 월권을 부디 눈감아 주게.”
“그 말씀은... 예. 잘 알겠습니다.”
길레이드는 반색하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네게 필요한 것이라면, 나도 가주로서 기꺼이 보물고의 문을 열어 성검을 쥐어주도록 하마.”
“다른 것도 가져가도 됩니까?”
유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왕 빌려가는 거. 시조님이 사용하던 무기들도 함께 가져가고 싶습니다.”
“...하하!”
도이네스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무릎을 두드리면서 유진을 응시했다.
“욕심이 많구먼.”
“어차피 보물고에서 나올 일도 드문 것들 아닙니까?”
“그곳의 보물들은 본가의 것일세. 당장은 필요가 없어서 쓰이지 않지만, 앞으로도 필요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네.”
“다 가져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조님의 무기들만 가져가겠, 아니, 빌려가겠습니다. 어차피 웬만한 것들은 다들 알맞은 주인에게 쥐어져 있을 것 아닙니까?”
마창 루인토스는 도이네스에게, 분쇄추 지골라스는 도미닉에게 있다. 당장 길레이드가 가진 검도 베르무트가 쓰던 검이다.
“...가주.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도이네스는 유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길레이드에게 말을 돌렸다.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길레이드는 당황하지 않고 잠시 턱을 어루만졌다.
그에게는 다른 자식들이 있다. 이오드에게는 자격이 없지만... 성인이 된다면, 시안과 시엘도 보물고에서 원하는 무기를 하나씩 선택하게 된다.
“...비환검 자벨은 시엘에게. 게돈의 방패는 시안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검과 포식검 아스펠, 뇌광궁 페르노아, 용격창 카르보스. 이렇게 네 개만 빌려가겠습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비환검은 시엘과 잘 어울렸다. 손에 익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잘만 다룬다면 시엘의 검술과 궁합이 잘 맞는다.
‘게돈의 방패는 의외인데.’
대련했을 때. 시안은 방패를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안이 방패를 다루는 것에 미숙한 것은 아니다.
그건 다분히 유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시안의 뇌리에는 검과 방패를 능숙히 다루며, 미노타우르를 찢어발기던 유진의 모습이 강렬히 박혀 있었다.
왼팔에 게돈의 방패를 단다면 꽤 그럴듯할 것 같기는 했다. 패링까지 능숙해진다면 왠만한 공격으로는 시안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아스펠은 챙겨야 돼.’
월광검도 월광검이지만, 템페스트를 제대로 불러들이려면 어마어마한 마나가 필요하다. 환염식에 아스펠까지 쓴다면 마나 고갈에 허덕일 일도 줄어들 것이다.
“...그 셋은 다루기가 까다로워 보물고를 나간 일이 드문 무기들이지.”
“유진이라면 아스펠을 잘 다룰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여러 무기를 능숙히 다루니, 뇌광궁과 용격창도 훌륭히 다루어내겠죠.”
“음...”
도이네스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가주의 뜻이 그러하다면. 나도 허락하도록 하겠네. 다만, 귀중한 무기인 만큼 취급에 주의해 주게.”
“당연히 그래야죠.”
유진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당장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바로 말인가?”
“성인식도 끝났고. 제가 더 흑사자 성에 남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도이네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길레이드를 돌아보았다.
“...보물고의 문을 열려면 가주가 동행해야 하지 않나. 아직 논의해야 할 이야기가 남았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또, 시험은 끝났지만 성인식이 끝난 것은 아니야. 성인식은 내일 그랜드 홀에서 치룰 테니, 떠나 거려든 이틀 뒤에 떠나도록 하게.”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목욕?”
“그거야 매일 하는 것이죠.”
유진은 보란 듯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도이네스는 유진의 넉살에 다시 웃어버렸다.
“성을 떠난다면 본가에 머무를 건가?”
“아뇨.”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내려놓은 빵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진은 그녀를 힐긋 보며 말을 이었다.
“성녀님이 저와 함께 가신다니, 잠시 여행을 가려 합니다.”
“여행? 어디로?”
“사마르 대수림입니다.”
“아...”
크리스티나가 놀란 표정을 하고 유진을 돌아보았다.
“현명한 세냐님이 그곳에 은거하셨다는 이야기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설마, 유진님은 세냐님을 찾으러 가시는 겁니까?”
“저는 세냐님의 제자이기도 하니까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빛의 신께서는 세냐님에 대해서는 계시를 주지 않으신 겁니까?”
“...그런 계시는 받지 못했습니다.”
“아니스님에 대해서는 물어보셨습니까?”
“저 이전의 성녀님들과 사제님들이 아니스님의 행방에 관한 계시를 바라였지만, 그 무엇도 듣지 못했습니다.”
“어제 제가 엿을 날린 것에 대한 답은 없었습니까?”
“말씀이 짓궂으십니다.”
미소 짓는 뺨이 씰룩거린다.
“그냥 궁금해서요.”
유진은 얄밉게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출성
“호위도 없이 가겠다는 겁니까?”
남쪽으로 간다는 말을 전하자, 제노스는 이유보다는 호위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마르 대수림. 그곳은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정글이다. 그 크기만 하더라도 키옐 제국의 영토에 버금가며, 셀 수 없이 많은 부족들이 국가를 이루어 숲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은 외부의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숲의 깊은 곳에 자리한 부족들이 그러한 성격이 강했다.
키옐은 수백 년 전부터 사마르를 제 국토로 삼기 위해 원주민들과 교섭하고, 필요하다면 무력까지 동원해 왔다.
잘 되지 않았다. 사마르는 넓었고, 원주민들이 너무 많았다. 기나긴 시간을 숲에서 살아 온 원주민들은 외부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들의 문명을 독특한 형태로 발전시켜왔다.
주술과 정령. 숲에서의 싸움법. 그 뿐만이 아니라, 사마르의 원주민들은 몬스터까지 가축처럼 부려낸다. 사마르는 수십 개의 부족국가로 분열해 있지만, 키옐과 맞설 때에는 ‘사마르’라는 거대한 부족연합이 되어 통치를 거부했다.
하지만 키옐은 제국이다. 하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사마르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것은.
헬무드가 사마르 부족들의 자유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말이 자유를 지지한다지, 사정을 따져 보면 여러가지 이해가 일치한 것이다.
헬무드는 300년 동안 대륙의 인정을 바라왔다. 전쟁에 피해를 입은 국가들을 지원하고, 이민을 받아들였다. 자국의 영토에 신성제국의 교구를 허락하고, 신성제국과 항마연합이 변경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까지도 눈을 감아 주었다.
그럼에도 대륙의 국가들은 아직 헬무드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왕과 마족, 마물은 너무나 위험하다.
사마르는 키옐과 버금가는 크기를 가진 거대한 숲이다. 헬무드는 사마르를 보호하며 부족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다른 국가들도 헬무드의 지지에 은근히 힘을 싣는다. 그들은 키옐이 저 거대한 숲을 영토로 더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키옐도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사마르를 정복할 수는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렇게 한다면 헬무드가 개입할 것이다.
“너무 위험한 곳입니다.”
제노스는 사마르의 야만족들이 위험하고 거칠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흑사자 성이 있는 우클라스 산은 사마르의 숲과도 이어져 있다. 최근에는 얌전하지만, 사마르의 야만족들은 우클라스 산을 통해 키옐의 밀입국을 여러 번 시도해 왔다.
때문에 흑사자 성의 기사들은 항상 사마르를 경계하고 있다. 흑사자 기사단은 라이언하트의 소속이면서, 키옐의 인정을 받아 국경수호의 임무도 맡고 있는 것이다.
“불편한 곳이기도 하고요. 그곳은 워프게이트도 없고, 도시도 없습니다.”
“사제가 과장이 심하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도시가 왜 없어?”
“...사형이 알고 있는 도시는 없다는 겁니다. 숲 한복판, 낮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은 곳을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 많이 살면 도시지 뭐.”
“화장실도 푸세식일 겁니다.”
“그게 뭐 어때서? 자연친화적이고 좋잖아.”
유진의 대답에 제노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왕이면 가지 말라는 겁니다. 저도 물론 사형의 실력은 믿지만, 사마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 뿐만 아니라 운도 따라야 합니다.”
“운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실력이 뛰어나면 되는거지.”
“...그건...”
“까놓고 말하자고, 사제. 사제가 보기에는 내 실력으로는 사마르에서 살아남기 부족하다 판단한 거잖아. 그렇지?”
제노스는 대답 대신에 눈썹만 살짝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린 사형의 자존심을 대놓고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 걱정된다. 19살의 어린 사형. 타고난 자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카르멘과 대련했던 모습을 보면 실력도 뛰어나다. 그렇다고 해도 사마르는 호위 없이 떠돌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다.
세상에는 그 위험함을 스릴이랍시고 즐기는 이들이 많다. 돈 많은 상인들. 이색적인 관광을 원하는 귀족들. 그들은 거금을 들여 호위와 가이드를 모집하고, 사마르로 들어간다.
그리고 년 마다 꼭 몇 명은 사마르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운이 좋다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돌아올 수 있지만, 운이 없다면 시체도 건질 수 없게 된다.
“위험하니까 가지 말란 말은 여기 오기 전에도 실컷 들었어.”
사마르에 가겠다는 말에 길레이드는 펄쩍 뛰면서 반대했다. 이유가 어쨌건, 길레이드는 양자인 유진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마르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의외로 도이네스는 길레이드처럼 극렬히 반대하지 않았다. 앞으로 몇 달 뒤에는 유진도 성인이 된다. 어른들이 싸고돌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다만, 유진이 빌려가기로 한 무기들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그 애매한 상황에서 유진의 뜻에 힘을 실어 준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성녀인 자신이 유진과 함께 간다면, 틀림없이 신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라며 길레이드를 설득했다.
“사제, 나도 등신은 아니야. 죽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에 아무 이유 없이 가는 것이 아니라고. 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가는 거고, 내 한 몸 지킬 자신도 있어.”
“...사형의 백염식은 4성이라고 들었습니다.”
제노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백염식을 익히지 않았지만, 사형 같은 나이에 백염식의 4성에 오른 이는 본가의 역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좀 대단하긴 해. 거기에 마법까지 익혔거든.”
“사형의 실력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사제가 보기에 내 실력이 부족하다면?”
“위험한 곳에 가지 못하도록 막을 겁니다.”
유진은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거 참. 내가 싫다고 하면, 사제가 날 사형으로 존중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지금 바로 할까?”
“먼저 연무장에 내려가 계십시오. 가벼운 대련이라지만 서로에 대한 강요가 걸린 이상 참관인이 필요하니, 제가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유진은 킬킬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형이랍시고 사제의 뜻을 묵살하지는 않을 건데 말이야.”
“확실한 편이 좋으니까요.”
그렇게 연무장에 사람들이 몰렸다. 도이네스를 필두로 한 원로들. 가주인 길레이드. 그리고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들까지. 유진은 연무장 바깥에 선 사람들을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렀다.
“참관인치고는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더 이상 제노스에게 하대를 할 수는 없었다. 제노스는 제복의 상의를 옆에 벗어두며 대답했다.
“참관인을 부탁한 것은 가주님뿐이었네. 하지만 유진, 자네와 내가 대련한다고 하니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주 많더군.”
당연한 일이었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그는 흑사자 기사단에서도 도미닉, 카르멘과 함께 세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다.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 방계 출신이면서도 자질 하나만으로 본가의 양자가 된 인물. 여러 가지 의미로 라이언하트 역사에 유례가 없는 소년이다.
“진검 대신에 목검을 쓰도록 하지.”
“검강은?”
“그래서야 목검을 든 의미가 없잖은가. 마나의 운용은 육체에만 제한하는 편이 서로에게 안전할 걸세.”
제노스는 그렇게 말하며 목검을 들었다. 유진도 목검을 들었다. 진검과 검강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힘으로 휘두른 목검은 뼈를 으스러트리기에 충분하다. 마나까지 더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마나실드로 몸을 보호한다. 마나실드가 뚫려 부상을 입는다면 패배. 간단한 룰이다.
“마법은?”
“필요하다면 쓰도록 하게.”
“제노스님이 제게 보고 싶으신 것은 마법이 아닐 테니, 마법은 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유진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제노스는 그 대답에 반응하지 않고, 목검을 쥐고서 뒤로 물러섰다.
“카르멘 경.”
둘의 대치를 지켜보던 도미닉이 입을 열었다. 그는 턱을 어루만지며 카르멘을 힐긋 보았다.
“경은 제노스 경과도, 유진과도 대련해봤잖습니까. 저 대련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둘은 닮았지.”
카르멘은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녀는 시가를 손가락에 걸치고서 팔짱을 꼈다.
“마법이라는 변수가 없다면. 유진 저 꼬마가 제노스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해. 분명 그럴 텐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
“제노스 경도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입장이잖아. 대련에서 상대를, 하물며 본가의 자제를 병신으로 만들거나 죽일 수는 없으니.”
카르멘은 이 대련의 행방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건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예감 때문이었다. 공격을 흘려내는 패링. 그건 제노스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이다.
유진도 그와 같은 기술을 구사한다. 제노스의 제자거나, 가르침을 받았거나. 그렇게 생각될 만큼 둘의 기술은 비슷했다.
‘...하지만... 완성도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직접 상대해본 바. 기술의 완성도는 제노스보다 유진이 뛰어나다고 느꼈다. 유진과 대련할 때의 카르멘은 전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퍼부었던 공격은, 19살 꼬마가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무겁고 강력했었다.
1분 안에 패배시키겠다고 장담했었다. 1분은커녕 3분이 지나도 쓰러트리지 못했다. 아니, 침범하지도 못했다... 봐준 것도 아니었다. 부조리할 만큼 효율적으로 마나를 다루며, 공격을 흘려냈단 말이다.
그 기술은 제노스보다 우월했다.
“먼저 오게.”
제노스가 선공을 양보해주었다. 까마득한 선배이기도 하니, 그 양보는 타당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마침 잘 됐어. 한 번 봐두고 싶었거든.’
그 염병할 하멜 식. 개 같은 베르무트. 놈이 정립해서 가르친 하멜 식에 대해서는, 유진도 제노스를 통해 구성을 읽어 두어서 잘 안다.
따로 읽지 않았어도 알 수밖에. 하멜 식에 존재하는 10개의 형은 죄다 하멜이 쓰던 기술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 말이다.
‘기술로는 내가 우월해. 하멜 식을 뜯어 고쳐주기는 했지만, 제노스가 수십 년 익힌 기술을 바로 체화하지는 못했을 거고.’
설령 체화했을 지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조차도 유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 아닌가. 즉, 이 대련은 본래라면 성립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제노스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대련을 하자 말한 것은, 기술에 구애받지 않는 역량을 확인하기 위해. 또, 같은 기술로도 제노스가 유진을 압도해낸다면... 참관하는 이들은 몰라도, 유진은 더 이상 제노스에게 고집을 부릴 수 없게 된다.
‘걱정이 과해, 사제.’
유진은 목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시작은... 그래. 하멜 식 제 이 형... 아니 씨팔. 내가 왜 이 개 같은 이름을 떠올리는 거야?’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면서 지면을 발로 밀었다.
만뢰. 말이 만뢰지, 그냥 검을 수십 개로 분영해 찌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검강까지 더한다면, 만개까지는 아니어도 수백은 넘는 검로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만뢰...!’
제노스의 눈이 확 뜨인다. 기술의 이름을 외치지는 않았지만, 제노스가 저 기술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 다르다. 내가 아는 만뢰가 아니야. 하멜님의 비전서로 개량 된... 진정한 만뢰...!’
어린 사형이라고 조금은 우습게 보고 있었다. 배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형이라고 부를 뿐, 순수한 실력으로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이 펼친 진정한 만뢰를 보니, 제노스는 더 이상 자기 실력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유진은 진정한 만뢰를 완벽하게 체화하여 펼치고 있었다.
검강을 섞지 않았음에도 목검의 검로가 수십 개로 나누어진다. 그렇게 각자 다른 검로가 빈틈없이 파고든다. 제노스는 즉시 목검을 뒤로 당겼다.
하멜 식 제 삼 형.
라이트닝카운터.
ㅡ파직! 제노스의 목검이 쾌속한 번개가 된다. 퍼붓는 검로의 중심을 번개가 꿰뚫는다. 쩌엉! 서로의 목검이 뒤로 튀어 오른다. 실패다. 라이트닝카운터는 상대의 공격과 닿지 않는 반격이다. 하지만 제노스는 주저하지 않고 검을 끌었다.
‘하멜 식의 번개는 멈추지 않는다.’
운용된 마나가 육체를 통제한다. 반동으로 밀려나는 팔이 마나의 흐름에 강제적으로 움직인다. 하멜 식의 극의는 육체의 모든 움직임을 마나로 완전하게 통제하는 것. 그렇기에 빠르고 강하다. 그 어떤 상황, 어떤 상태에서도 공격과 연계할 수 있다.
제노스의 만뢰가 유진을 덮친다. 유진의 눈동자는 수십 개로 분열하는 검로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기술은 쓰기 나름이다. 제노스의 만뢰는 유진의 기준으로는 열등한 것이지만, 제노스의 실력과 경험이 열등한 기술을 보완하고 있다.
그렇지만 보인다. 보이고 있다. 유진의 몸이 뒤로 빠진다. 목검의 검로가 한 순간 붕 뜬다.
‘라이트닝카운터는 예고없이 친다.’
순간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고.
‘아니 시발, 라이트닝카운터가 아니라... 베르무트 그 개새끼 때문에 기술명이 머리를 자꾸 맴돌잖아...!’
번개가 쏘아졌다. 유진의 반격은 제노스의 것보다 매끄럽고 은밀했다. 제노스는 가슴팍을 파고드는 공격을 걷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판단했다.
‘이게 진정한 라이트닝카운터...!’
제노스는 무리해서 쳐내기보다는 뒤로 물러서는 것이 옳다 판단했다. 그렇게 아슬하게 벗어난 뒤, 제노스의 목검이 난무했다.
하멜 식 제 사 형 수라광살. 모론이 수라 같다고 평했던 어지러운 검격이 공간을 휩쓴다. 유진은 목검을 쥔 팔을 몸에 바짝 붙이며 검격 속으로 진입했다.
패링. 목검과 목검이 부딪치고, 미끄러진다. 가까운 검격을 걷어낸 뒤, 유진의 목검이 손 안에서 빙글 돌았다. 그렇게 역수로 쥔 검을 지면을 긁으며 위로 쳐올린다.
‘드래곤버스트!’
제노스가 아는 드래곤버스트는 검강을 강하게 응축시켜, 참격과 함께 터트리는 것이다. 지금의 대련에는 검강이 사용되지 않지만, 저 형태는 틀림없이 드래곤버스트였다.
그를 상대하는 것으로 선택한 것은 데드엔드. 제노스의 목검이 하늘 높이 치솟는다. 그리고 단두대의 칼날처럼 아래로 떨어진다.
ㅡ꽈앙! 목검과 목검의 충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 서로가 두른 마나가 충돌하며 지면을 뒤흔든다. 그 광경에 참관인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아무리 제노스가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다지만, 19살의 유진이 제노스와 호각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괴물 새끼...!’
시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제노스와 대련한다길래, 내심 유진이 흠씬 처맞는 것을 기대했다. 그걸 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구경을 나왔는데, 저게 대체 무슨 일인가?
‘나라면... 나라면 진즉에 땅에 쓰러졌을 거야. 말도 안 돼...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과 대련하는데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고?’
목이 바짝바짝 탄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꼼질거리고 있다. 시안은 당장 목검을 들고, 저 사이에 껴서 싸워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물론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토악질을 하며 땅에 쓰러지게 되겠지만, 그를 통해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약해. 한참 부족해. 그게 뭐?’
시안은 눈을 감는 것도 잊고서 대련을 지켜보았다. 저 사이에 껴서 싸울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집중해 보는 것만으로도 시안의 머리는 유진과 제노스의 기술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파고 들 수 없다.’
제노스는 경악을 넘어 감탄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 자제한 힘으로는 압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압도는커녕 조금씩 밀린다는 느낌이다. 그를 분명히 체감한 것은 마나패링과 라이트닝카운터. 제노스는 마나를 자제한 상태에서 유진처럼 완전하게 기술을 펼칠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유진의 마나 지배력이 월등하다는 증거였다. 하멜 식 자 육 형, 사이클론. 검에 섞인 회전이 제노스의 검로를 뒤틀고, 즉시 수라광살과 연계된다. 제노스는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라이트닝카운터의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번개를 쏘아냈지만, 상응해 온 번개가 제노스의 번개보다 빠르다. 파악! 즉시 몸을 뒤틀긴 했지만, 유진의 목검이 제노스의 어깨를 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대단하군...!”
제노스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나실드는 뚫리지 않았다. 그러나 제노스는 더 해 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것. 기사로서, 선배로서 굴욕적인 일이다. 하지만 제노스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에 한 치의 부끄럼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감탄하고, 더더욱 유진을 인정했다.
그를 인정하는 것은, 존경하는 대스승인 하멜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제노스의 사형이며, 하멜 식의 진정한 계승자다.
“내가 졌네. 자네는 정말 대단하군...!”
사형이라고 목 놓아 부르짖고 싶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제노스는 목검을 내려놓고 유진에게 다가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찬 눈으로 유진의 어깨를 꽉 쥐었다.
“...눈물은 대체 왜?”
“나는... 결막염이 있어서. 가끔 이렇게 눈물이 흐르곤 하네.”
제노스는 하늘을 올려 보며 유진을 끌어안았다. 부담스런 행동이다... 하지만 제노스의 눈물이 워낙 뜨거워 보여서, 유진은 도저히 그를 밀쳐내지 못했다.
“...멋지군.”
카르메는 두 남자의 뜨거운 포옹과, 까마득한 후배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제노스의 기사도에 감탄했다. 그녀는 손에 걸치고 있던 시가를 입에 물고, 가죽장갑까지 벗은 뒤에 짝짝 박수를 쳤다.
짝짝... 짝짝짝.
카르멘이 그렇게 박수를 치니, 지켜보고 있던 모두도 덩달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뜨고서 보고 있던 시안도,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열기를 느끼며 격렬히 박수를 쳤다.
‘유진... 넌 내 양자지만, 라이언하트의 자랑이 될 것이다.’
길레이드도 감동을 느꼈다. 유진이 사마르에 간다는 말을 했을 때, 절대로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일을 두고 제노스와 대련을 한다기에, 흔쾌히 참관인이 되기로 하고 이곳에 왔다.
내심 유진이 패배하기를 바랐다. 필요하다면 도중에 개입해서라도, 유진의 패배를 공언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아들이 위험한 곳에 가지 못하도록 보호하려 했다.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카르멘과의 대련 때도 보긴 했지만, 몇 년 만에 유진의 실력을 제대로 보았다. 지금의 유진은 더 이상 품에 가둬 보호할 어린 사자가 아니었다. 지금의 유진은 무리를 떠나 독립해도 부족함 없이 장성한 사자가 되었다.
‘역시... 틀리지 않았어.’
기온도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는 본가에서부터 유진과 여러번 대련해 왔다. 시안과 시엘에게도 검술을 가르쳤지만, 정작 유진에게는 그 무엇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가르치기 전에도 이미 다 할 줄 아는 아이였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저런 형식의 대련에서, 기온은 단 한 번도 유진을 압도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단순한 느낌이 아닌, 사실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아이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전투감각을 타고났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그를 몸으로 해낸다.
‘마음에 안 들어.’
시엘도 박수는 치고 있지만, 그녀의 눈은 유진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는 박수를 치지 않고,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서 유진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눈은 유진에 대한 감탄이나 경악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다. 시엘은 좀처럼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출성
이례적으로 흑사자 성에서 벌이는 만큼인지, 라이언하트의 성인식은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특별하지는 않았고,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원로들이 전하는 덕담은 말만 조금씩 달랐지, 내용은 똑같았다. 라이언하트에 부끄럽지 않을 것. 제 행동에 책임을 질 것...
셋 중에서 대표를 맡은 것은 시안이었다. 이오드가 참석하지 못했기도 하고, 가주 계승에 가장 가까운 것이 시안이었기 때문이다.
시안은 감격을 숨기지 않고 가슴에 손을 얹어 맹세를 읊었다. 유진과 시엘은 시안보다 한 걸음 뒤에 서서, 시안의 맹세를 따라 외었다.
그렇게 성인식이 끝났다.
“아직 성인이 되기까지 몇 달 남기는 했지만, 성인식도 치렀으니 우리는 성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아성으로 돌아오는 길. 시안은 거들먹거리며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 형제. 술이나 한 잔 할까.”
“아주 꼴깝을 떠는 구나.”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시안의 손을 툭 쳐냈다. 그러자 시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구기고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 어때? 너 설마 술을 마셔 본 적 없는 거냐?”
“마셔본 적 있어.”
“뭐... 라고? 언제?”
“아롯에 있을 때.”
그 태연한 대답에 시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한때, 시안이 사춘기를 겪던 시절. 여러 소년들이 그러하듯, 시안도 못된 짓에 멋스러움을 느꼈다.
15살의 시안은 여러 무용담들에 나오는 방랑 기사들을 동경했다. 약자에게 정의롭고, 적에게는 가차 없는. 낡아 후줄근한 망토를 두르고, 술과 담배를 즐기며, 고독을 곱씹으면서도 많은 여자들을 사랑하는 배드애스...
하지만 본가에 있는 여자들은 시종들뿐이었고, 시안에게 있어 시종들은 여자이기 전에 가문의 일꾼들이었다. 사랑할 대상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니 시안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포기하고, 시종들을 닦달해 담배와 술을 구했다.
방에서 담배를 피고 술을 마셨다가는 무서운 어머니에게 들켜 혼쭐이 날 것이 뻔했다.
가문의 기사들과 시종들이 창고 뒤편에서 담배를 피기도 하니, 연무장의 창고라면 들킬 염려가 적을 것 같았다. 떠다니는 먼지 한복판, 낡은 벽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한 모금... 독하기 그지없는 위스키를 잔에 따르지 않고, 병째로 벌컥벌컥.
그를 실행하기 직전. 유진이 창고의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불붙인 담배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저 지독한 녀석은 때린 것에 그치지 않고, 시안의 귀를 잡고서 애니실라에게까지 끌고 갔다. 그렇게 어머니에게도 혼쭐이 났다.
“나... 나보고는... 이런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 해야 된다며 혼을 냈으면서...! 정작 자기는 아롯에서 술을 마셔?!”
“마시고 싶어서 마신 것은 아니고.”
“개자식!”
시안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어깨를 바들거리며 떨었다.
“크리스티나 보좌주교 말이야.”
시엘이 입을 열었다.
“뭔가 수상해.”
“얘는 갑자기 또 뭐라는 거야.”
“어제 너와 제노스 경의 대련 때도 그렇고. 오늘 성인식에서도 널 묘한 눈으로 쳐다본단 말이야.”
“유진이 아니라 날 쳐다본 것일 수도 있어.”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시안은, 크리스티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오늘 성인식의 주인공은 나였잖아. 너희는... 그러니까... 날 띄우기 위한 조연이었지. 안 그래? 맹세를 읊은 것도 나였고, 맨 앞에 서있는 것도 나였어.”
“오빠는 좀 닥쳐 봐.”
시엘이 눈썹을 확 찡그리며 시선을 흘겼지만, 시안의 미소는 건재했다. 그는 잘 차려입은 예복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면서 말을 이었다.
“처음 뵈었을 때도 느꼈지만,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은 참 아름다우셔... 성녀 후보라서 그런지, 뭐라 잘 표현할 수 없는 성스러움이 흘러나온다고 할까...”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정식 성녀가 되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유진이 용사라는 것과, 크리스티나와 둘이서 사마르 대수림으로 떠난다는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길레이드도, 도이네스도 그 사실들에 대해서는 공표하지 않았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너도 느꼈을 것 아냐? 크리스티나 보좌주교. 이상하다 싶을 만큼 널 주목하고 있어.”
시엘은 유진의 주먹을 힐긋 보았다. 이틀 전만 해도 피를 철철 흘리던 주먹. 지금은 상처 하나 남아있지 않다. 시엘은 그때 유진의 험악하던 분위기를 떠올렸다.
“내가 좋은가 보지.”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그 말에 시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렸지만, 시엘은 시안처럼 웃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삐딱하니 기울이며 유진을 응시했다.
“몰래 밀회라도 즐겼나 봐?”
“농담에 그리 정색할 필요가 있냐?”
“너, 내일 본가로 돌아간다며? 그렇게 빨리 돌아갈 이유가 있어? 시안 오빠는 올해까지는 흑사자 성에 남겠다는데, 너도 같이 남아서 좋아 환장하는 수련이라도 하지 그래?”
시안은 대견하게도 흑사자 성에 남기로 했다. 그러기로 한 것은 유진과 제노스의 대련 때문이었다. 본가의 기사들도 뛰어나긴 하지만,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들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몇 달 동안, 흑사자 성에 머무르며 대장들에게 지도를 받기로 결심한 것이다. 길레이드는 아들의 뜻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들은 물론이고 원로들까지도 차기 가주 후보인 시안의 지도를 맡기로 했다.
시엘이 생각하기에, 저런 조건이라면 유진이 성에 남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본가에 있을 적부터 수련이라면 좋아 죽던 녀석 아닌가. 마침 흑사자 기사단에는 고위 마법사들도 소속되어 있고, 다양한 무기와 기술에 능한 대장들도 있다.
그런데도 유진은 성에 남지 않는단다. 태어나서부터 쭉 함께였던 오빠만 성에 남는단다. 시엘은 그 사실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도 너가 떠나는 날 함께 떠난다는데.”
“어차피 떠나는 거 같이 떠나는 거야. 따로 떠나면 워프 게이트를 두 번 가동해야 하잖아.”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어?”
“오늘 따라 왜 이리 의심이 많으실까. 심지어 의심할 필요도 없는 것들인데 말이야.”
“...본가에 돌아가서는 여행을 떠날 거라며? 어디로 갈 건데?”
“따로 정하진 않고, 그냥 세상 구경이나 하려고.”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랑 함께?”
시엘은 어려서부터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유진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영묘에 다녀온 후로 아버님과 원로원주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 너도... 그랬고.”
“그것과 내가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랑 여행을 가는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는데.”
“맞아. 크리스티나님이 한가한 분도 아니시고, 왜 저 녀석이랑 같이 여행을 가냐?”
시안도 유진의 말에 동조하여 시엘을 흘겨보았다.
“동생아. 그냥 솔직하게 말해. 유진이 나랑 같이 성에 남았으면 하는 거잖아, 그렇지?”
“오빠는 당연한 말 좀 하지 마.”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같이 남지 그러냐? 여행이야 나중에도 갈 수 있잖아.”
결론은 그것이다. 시안도 유진과 함께 흑사자 성에 남고 싶었다. 유진에게 받은 책은 열심히 읽고 외웠지만, 아직 그 뜻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유진에게서 뭔가를 더 배우고 싶었다. 엄격하고 나이많은 원로들. 산전수전 다 겪으며 거친 대장들. 그들에게 지도 받는 것도 값진 경험이 될 테지만, 기왕이면 형제인 유진에게 더 지도받고 싶었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떠난다는 거야?’
서운함도 있었다. 3년 만에 돌아왔으면서 또 본가를 떠난다니. 쌍둥이 동생인 시엘도 흑사자 성에 가버렸으니, 본가에 남은 것은 시안 혼자뿐이다.
형제는 많은데. 그 넓은 본가에서 혼자 지냈단 말이다. 물론 그 시간은 외로움을 느낄 순간도 없이 바쁘고 충실했지만, 기왕이면 형제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귀여운 자식.”
시엘은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하다. 하지만 쌍둥이인 시안은 그러지 못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시안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 형제끼리 술이나 한 잔 할까.”
“나도 같이 마실 거야.”
“훈련은 어쩌고?”
“오늘은 일정에 없으니까 괜찮아.”
시엘은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진짜 떠날 거야?”
“어.”
한 번 결심하면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전생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성에서 몇 달 동안 지내는 것도 꽤 즐겁기는 하겠지만,
사마르에 가야 할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이유. 대수림 어딘가에 있다는 엘프의 마을을 찾아야 한다.
그곳에 정말 세냐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어쩌면 오래 전에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더욱 엘프의 마을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세냐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아니스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건 모론도 마찬가지다. 그 등신은 100년 전까지 모습을 드러냈다지만, 대뜸 은거를 선언하고 사라져 버렸다.
모론의 후손들, 루하르의 왕가는 선왕의 은거를 존중하고 있다. 아무리 라이언하트일 지라도, 대뜸 찾아가서 선왕의 거처를 알려달란 청을 루하르 왕가가 들어줄 리가 없다.
아크리온에서부터 세냐와의 길이 이어졌다.
하멜의 무덤. 세계수의 나뭇잎.
사마르 대수림 어딘가에 있을, 엘프의 마을.
“...어쩔 수 없지.”
시엘은 유진이 절대로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란 것을 느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우리끼리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잖아. 내일 네가 떠나기도 하고, 성인식을 끝낸 기념도 할 겸. 기왕 마실 거 엄청 좋은 술을 마셔야지.”
“좋은 술?”
좋은 술이라는 말에 시안의 눈이 번뜩인다.
“카르멘님의 진열장에 엄청 비싼 술이 있어. 3번대 기사들의 말에 따르면 가격도 가격이지만 구하기가 엄청 힘든 술이래.”
“그런 귀한 술을 카르멘님이 주실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몰래 가지고 올 거니까.”
“동생아... 그래도 괜찮은 거냐?”
“괜찮아. 카르멘님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시니까. 가끔 테이블에 꺼내 놓으시지만, 잔에는 술과 색깔이 비슷한 홍차만 따라두셔.”
“참 일관적인 분이시군.”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병의 내용물만 다른 술로 바꿔놓으면 아무 문제없을 거야.”
그렇게 되어, 밤중에 유진의 방에 셋이 모였다. 시엘은 자신이 어떻게 카르멘의 방에 침입하여 술을 훔쳐냈는지에 대한 무용담을 떠들었고, 시안은 동생의 용기에 감탄하며 태어나서 처음 마셔보는 술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보다 못하기 마련이다. 19살의 시안은 쓰디 쓴 술보다는 따뜻한 우유가 더 즐거웠다.
“좋은 술이군...”
그렇지만 시안은 허세를 부렸다. 시안은 술 한 모금에 표정을 찌푸린 시엘을 보며 냉큼 말을 걸었다.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이렇게 쓴 걸 왜 마시는 거야?”
“난 음료수보다 맛있는데... 시엘. 넌 힘든 일 없이 순탄하게 자라서 술을 즐기지 못하는 거야.”
쌍둥이로 태어나 같이 자란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시엘은 오빠의 허세가 같잖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시안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역시 오빠는 대단해.”
그렇게 시안은 연거푸 술을 마시고서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시안을 침몰시킨 시엘은 유진을 타겟으로 돌렸다.
하지만 유진은 시안과는 달리 술을 잘 마셨다. 잔뜩 취하게 해서 여러 가지를 캐물으려는 계획은 실패였다. 가져 온 술이 바닥났는데도 유진은 멀쩡했다.
“...왜 안 취해?”
“조금 취한 것 같기도 하고.”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랑 어디를 가려는 거야?”
“같이 안 간다니까 왜 자꾸 똑같은 걸 물어보는 거냐?”
유진은 널브러진 시안을 침대에 던져놓고, 시엘을 아성 밖까지 배웅해주었다.
“내일 배웅 나갈게.”
그러나 시엘은 배웅을 나오지 못했다. 침입을 눈치 챈 카르멘에게 붙들려 이른 아침부터 일대일 훈련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워프 게이트 앞. 먼저 와있던 크리스티나가 유진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길레이드는 도이네스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때문에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거라. 어차피 보물고의 문을 열려면 가주인 내가 함께 가야 하는 일이야. 그리고... 네가 성검을 뽑는 것을 직접 보고 싶구나.”
길레이드의 말은 진심이었다.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로 그 누구도 성검의 인정을 얻지 못했다.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다지만, 길레이드는 유진을 아들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복잡하다. 이오드 때문이었다. 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장남인 이오드와 양자인 유진의 대비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아픈 손가락.
길레이드는 장남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유진의 앞에서 드러내지 않았다. 유진을 떠나보낸 뒤, 길레이드는 다시 흑사자 성에 돌아와야 한다.
시안이 흑사자 성에 머무는 몇 달은 가주의 자리에 걸 맞는지에 대한 시험도 겸해질 것이다. 원로원은 가문의 위신을 떨어트린 이오드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을 셈이다.
길레이드는... 그 몇 달 동안, 원로원을 끈질기게 설득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가주 계승의 문제가 아니라, 이오드가 다시 본가에 돌아올 수 있도록.
그 뒤에는 보사르 영지로 가서 이오드와 테오니스를 만나고 싶다. 설령 원로원을 설득하는 것이 실패할 지라도, 부인과 아들을 만나서 묵은 감정을 풀어내고 싶었다.
워프게이트를 지나고 라이언하트의 본가에 돌아왔다. 미리 연락을 취해둔 덕분에 본가의 워프게이트 앞에는 마법의 가동에 필요한 인력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정말 제하드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않을 셈이냐?”
“제가 사마르에 간다고 하면, 아버지는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가지 말라고 붙잡을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군.”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가주님도 절 걱정하고 계십니까?”
“...물론... 나도 걱정하고 있지. 하지만 걱정 이상으로 자네를 믿고 있네.”
“너무 위험한 일에는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할 겁니다. 저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니까요.”
유진은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뒤따르던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시선에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저 또한, 유진님의 여행이 위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쿠키를 빵으로 바꾸는 기적이 위험한 상황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사마르의 야만족들이 빵을 좋아할 지도 모르잖습니까.”
크리스티나의 미소가 뒤틀린다. 유진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앞을 보았다.
어느새 보물고의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는 것은 6년 만이었다. 유진은 쭉 목에 걸고 다닌 목걸이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보물고의 문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크리스티나님이 함께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성검을 뽑는 자리에 성녀가 동석하지 않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크리스티나는 물러 설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느릿히 성호를 그으며 말을 이었다.
“성검은 300년 동안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유진님이 성검의 인정을 얻으신다면... 빛의 신께서 유진님의 여정을 축복하시며, 여정에 대한 계시를 내려주실 지도 모릅니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성직자가 그렇게 쉽게 신을 팔아대며 핑계를 대도 되는 거냐?”
“유진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맹세코, 단 한 번도 신의 이름을 가볍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크리스티나도 함께 보물고로 들어가기로 했다. 길레이드는 6년 전과 마찬가지로,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으로 문고리를 어루만졌다. ㅡ끼릭. 문에 장식된 음각이 꿈틀댄다.
보물고의 문이 열린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6년 전과 똑같았다. 중앙에 꽂혀있는, 화려한 금색의 검. 보물고의 내부를 밝히는 조명과는 별개로, 스스로 빛을 내는 검.
성검.
“아아... 저것이... 빛의 성검, 알테어...”
크리스티나는 감탄성을 흘리며 양 손을 모아 쥐었다. 성검의 이름을 들은 것은 유진도 오랜만이었다.
“유진님, 어서...”
“나중에.”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길레이드를 쳐다보았다. 미리 허락은 구해두었지만, 마음대로 보물고를 돌아다니는 것도 무례하지 않은가.
“내 눈치는 보지 말거라.”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제야 유진은 히죽 웃으며 보물고를 누볐다. 용격창 카르보스, 뇌광궁 페르노아, 포식검 아스펠. 그 3개의 무기들은 6년 전에 있던 위치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하나만 잘 써도 나라 하나를 정복할 수 있는 무기들인데.’
과장은 아니었다. 베르무트가 위니드를 휘두르면 폭풍이 일어났고, 카르보스를 내지르면 산이 사라졌으며, 페르노아를 쏘면 지면이 붕괴했다. 아스펠은 저들만큼 거대한 현상을 일으키진 못했어도, 마족들의 대규모 마법을 양단하며 위력을 과시했다.
‘베르무트, 욕심쟁이 새끼 같으니. 이만한 무기들을 혼자 독점하다니.’
성검을 제외한 대부분의 무기들은 여행 중에 얻은 것들이다. 그 당시의 하멜은 일행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마나의 양이 부족해서, 마나를 잔뜩 처먹는 저 무기들을 다룰 수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용격창과 뇌광궁은 마나를 너무 많이 처먹는다.
‘뭐, 마나는 앞으로도 늘어날 테니까. 거기에 마법도 익혔으니, 아스펠을 사용하는데에 문제도 없지.’
유진은 히죽 웃으며 망토의 안에 무기들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성검의 앞으로 다가갔다. 6년 전에도 뽑는 것에 실패했는데... 유진은 손을 뻗기 전, 크리스티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만약 안 뽑히면 어떡해?”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신께서 계시를 내린 이상, 유진님은 성검을 뽑을 수 있습니다.”
차라리 뽑히지 않기를.
유진은 진심으로 바랐다. 그는 여전히 신의 계시를 믿지 않았고, 용사도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성검을 손에 쥐었을 때.
‘씨발.’
아직 뽑으려고 힘을 주지도 않았지만, 유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6년 전에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은 성검.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쉽게 뽑힐 것 같았다.
출성
뽑기 싫다는 바람은 진짜였지만, 크리스티나와 길레이드가 두 눈을 빛내며 쳐다보고 있으니 시늉만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유진은 자신의 예감이 어긋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성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예감은 어긋나지 않았다. 보기에도 깊이 박혀 있던 성검은, 가볍게 힘을 준 것만으로도 쉽사리 뽑혀버렸다. 유진은 목구멍에서 치솟는 욕설을 삼키며, 잠깐 동안 성검을 응시했다.
“오... 오오... 오오...!”
길레이드는 감격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떨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지금 새로운 역사의 중심에 서있다.’
빛의 신과 성녀가 유진을 용사로 인정했다. 그러나 길레이드는 빛의 신의 신도가 아니었기에, 저 말보다는 성검이 300년 만에 뽑혀 나왔다는 것에 더 큰 감명을 받았다.
“아아...!”
크리스티나의 감격은 길레이드보다 컸다. 그녀는 즉시 자리에 무릎을 꿇고서,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유진은 그 중심에 서서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었다. 빛이 성검으로 흘러들어온다. 유진은 감각을 활짝 열어, 그 빛이 성검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느꼈다.
신성력.
애매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분명히 실존하는 힘. 신을 숭배하는 사제나 성기사들만이 ‘힘’으로 발현할 수 있는 빛.
‘그렇군. 성검이 촉매인가.’
유진은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어도 뭐 상관없는 것. 본래는 그리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계시니 뭐니 지랄 맞은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숭배는 개뿔. 경멸하고 있지.’
그럼에도 유진은 성검에 깃든 ‘빛’을 느끼고 있다. 신앙심이라고는 쥐뿔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성검의 신성력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유진은 성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마나에 따라 움직이듯, 신성력이 빛이 되어 검신을 휘감는다. 그렇게 마나가 아닌 신성력으로 검강을 만들어냈다.
“아아!”
무릎을 꿇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성검을 휘감은 빛을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얼마나 찬란한 휘광인지요...!”
“흠...”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감탄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의식은 모조리 성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휘광. 단순히 찬란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 쓰잘데 없이 화려한 검이 마(魔)의 족속들에게 얼마나 상극이고 강력한지, 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마나와는 다른 힘.’
신앙심은 쥐뿔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성검의 주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만큼 강력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 가뜩이나 마나를 잔뜩 잡아먹는 무기가 늘어났는데, 성검은 마나를 잡아먹지 않는다.
즉, 연비가 굉장히 좋은 무기란 말이다. 그 사실은 솔직히 즐거웠다.
‘휘두르는 맛은 없어 보이지만.’
전생부터 온갖 무기를 사용해 왔지만, 성검처럼 ‘무기’의 격식에 벗어난 검은 사용한 적이 없었다. 성검은 검으로 휘두르기 보다는, 기사 서임이나 의식에나 쓰이기 알맞은 예식용 검이다.
하지만 날은 예리하다. 즐겨 쓰지는 않을 것 같지만, 보험으로 챙겨둘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유진님. 목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으십니까?”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크리스티나가 물었고,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성검 알테어. 그 검은 오래 전, 이 땅에 강림하신 빛의 신이 직접 제련하신 검입니다.”
신성제국 유라스의 건국신화.
아주 오래 전. 대륙에 인문이 태동하기도 전, 세상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 시대에 마왕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족과 마물, 몬스터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불리었다.
괴물들에 비해 인간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이 피워낸 불씨는 무언가를 태우고 고기를 굽는 것은 가능했으나, 해가 저물고 찾아오는 어둠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신화의 시대에서, 불꽃은 뜨겁기만 할 뿐 환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괴물은 어둠에서 태어났다. 해가 저문 밤은 괴물의 시간이었다. 나약한 인간들은 제들끼리 모여 괴물에게 맞섰으나, 싸움이 되지 않았다. 인간들이 사냥 당할수록 밤은 길어지고, 괴물들은 포악해졌으며, 웃음은 울음으로 바뀌어갔다.
모든 희망이 절망이 되려 할 때.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다. 신이 강림했다. 신은 어둠을 밝히고, 뜨겁기만 한 불꽃에 밝음을 주었다.
신성제국. 유라스의 건국신화는 오만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지금의 세상이 빛의 신이 강림했기에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라 믿는다. 다른 모든 신들이 빛의 신의 자식이라 주장한다.
“빛의 신께서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 제 피와 살로 검을 만들어냈습니다. 알테어는 빛의 신의 첫 번째 자식이자, 신께서 이 세상을 위해 남기신 가장 찬란한 횃불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유라스의 신화일 뿐이다. 각 나라마다 다른 신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녀인 크리스티나는 다른 신화를 존중할 생각이 없었다.
“즉, 알테어에는 신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300년 전... 위대한 베르무트는 알테어의 주인이 되어, 신의 계시를 따랐습니다.”
“허...”
그에 대한 반박 수십 가지가 머리에 떠올랐지만, 유진은 잠자코 크리스티나의 말을 들었다.
“영웅이 세상을 떠돌며 맞닥트린 온갖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알테어가 영웅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알테어의 계시가 없었다면... 그 위대한 베르무트도 세 명이나 되는 마왕들을 쓰러트리지 못했을 겁니다.”
“허... 허허.”
잠자코 들으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고, 길레이드도 함께 웃었다.
“크리스티나 성녀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조님은 성검이 시키는대로 얍얍 싸웠다는 거네?”
“얍얍 싸우지는 않았겠지만, 성검의 보조를 받으셨을 겁니다.”
“성녀님은 300년 전에 태어나지도 않으셨으면서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
“300년 전에 태어나지 않았던 것은 유진님도 똑같지 않습니까?”
이 발칙한 것아. 유진은 순간 내뱉으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날조가 참 예술적이군. 성검의 보조? 횃불 역할은 훌륭히 해냈었지.’
베르무트는 단 한 번도 성검의 계시란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아니스조차도 성검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뭐. 우리 둘 다 300년 전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진실은 알 수 없지. 그런데 대체 누가 성녀님께 그런 말을 해준 건데?”
“성전(聖傳)으로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성전...?”
“유진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님은 신성제국에서도 성인(聖人)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계십니다. 설마 유진님은 라이언하트의 일원이면서도 ‘베르무트 전서’에 관해서는 읽어보신 적이 없는 겁니까?”
“어... 음...”
유진은 곧장 답하지 않고 길레이드를 힐긋 보았다. 그러자 길레이드는 낮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 베르무트 전서는,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여 라이언하트에서는 취급하지 않고 있소.”
“그런...!”
“나도 뭐... 어렸을 때 한 번 읽어보긴 했는데, 워낙 내용이 터무니가 없어서...”
난민들을 이끌고 바다 앞에 서더니, 성언을 외며 검을 들자 바다가 갈라졌다...
그딴 개소리만 가득하던 책이다. 동화책보다 훨씬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단 말이다.
‘...확실히... 저런 내용이 있긴 했지.’
나의 사도 베르무트야. 내 친히 네 팔을 거들 터이니, 신의 빛을 일으켜 어둠을 밝히어라.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저 베르무트 전서는 라이언하트 뿐만이 아니라, 역사학자들에게도 외면당하는 책이다. 어린아이의 시선에 맞춘 동화책보다 신빙성이 없다고 취급되는 책이란 말이다.
“...그래서... 유진님은 성검에게서 아무런 계시도 듣지 못하시는 겁니까?”
“음...”
유진은 성검을 노려보며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오.”
“아아! 계시를 들으신 겁니까?”
“내 머릿속에 순간 들려 온 목소리가 있는데, 이것이 계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목소리를 들으신 겁니까?”
“크리스티나 성녀님보고 입 좀 닥치래.”
그 말에 크리스티나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의 이름을 빌어 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먼저 말했잖아? 계시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그렇다는 것은 유진님의 머릿속에 저에 대한 악담이 가득하다는 말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유진님의 머릿속에 마귀가 깃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마귀랄 것까지야... 나는 어려서부터 정신이 가끔 오락가락하고,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곤 했지... 지금... 윽... 지금처럼. 이... 씨발아.”
“예?”
“어쩌면 내 안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제가 있을 지도 몰라. 그 또 다른 유진 라이언하트가 성검의 목소리를 빌어 사특한 말을 하려 하는 군...”
“지금 저를 우롱하시는 겁니까?”
크리스티나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다. 유진은 보란 듯이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리면서 성검을 망토 안에 집어 넣었다.
“나는 가끔 내 의중과는 다르게 주둥이가 움직이곤 하지.”
“그것은 심각한 병입니다. 유진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직접 유진님의 병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마음의 병은 스스로 고쳐야 하는 것이야. 나 유진 라이언하트,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된 자로서 나 자신의 나약함을 성녀님께 기대고 싶지 않군.”
“뭐 어쩌자는 겁니까?”
“슬슬 나갑시다.”
유진은 망토를 휘날리며 크리스티나를 지나쳤다.
“제하드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구나.”
길레이드는 워프 게이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는 멀리 있는 별채를 의식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유진은 가주의 배려에 감사를 느꼈다.
“가주님이 적당히 둘러대 주십시오.”
“언제 돌아올 지도 모르지 않느냐. 아무리 나라도, 몇 년 동안이나 제하드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올해의 마지막 날에 이 편지를 아버지께 전해주십시오.”
유진은 전날 미리 써둔 편지를 길레이드에게 전해주었다.
“저는 별 일 없을 겁니다. 어디서든 제 한 몸 지킬 자신이 있고, 그 위대한 신께서도 제 여정을 비호에 주신다고 하시잖습니까.”
“음...”
길레이드는 빛의 신의 비호보다는, 유진의 능력을 믿었다.
‘...크리스티나 성녀도 함께 가기도 하고...’
“...유진. 나는 널 믿는다.”
“감사합니다.”
유진은 빙긋 웃으며 길레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와서 부르기에는 늦었지만. 큰 아버지라고 불러도 됩니까?”
“...뭣...?”
“제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계시기도 하고... 가주님이 아버지보다 몇 살 많으시잖습니까. 그러니 큰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
악수나 하자고 손을 뻗은 것인데. 길레이드는 유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네가 나를 어찌 부르건, 나는 6년 전부터 널 아들로 생각했단다.”
“감... 사합니다.”
믿어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보물고에서 무기를 잔뜩 가지고 나온 것이 미안해서 한 말인데. 길레이드의 반응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몸조심하고, 여행의 뜻을 이루길 바라마. 아들아.”
“예... 큰 아버지. 부디 강녕하십시오.”
뜨거운 포옹이 끝났다. 그래도 길레이드는 제하드처럼 눈물을 펑펑 쏟지는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활짝 펴고서 유진을 배웅해 줄 뿐이었다. 허나 그 빛나는 시선이 제하드의 눈물만큼이나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전생에는... 이렇게 배웅을 받은 적이 많지 않았다.
“사마르에는 워프 게이트가 개통되어 있지 않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키옐의 남쪽관문에서부터는 도보로 이동해야 할 겁니다. 알고 계십니까?”
“대충은.”
“계획은 없으신 겁니까.”
“그건 성녀님도 마찬가지 아닌가?”
“유진님보다는 착실하게 준비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우선. 유진님의 신분증은 쓰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주목받을 테니까?”
“예.”
“신분증 위조는 힘들 텐데. 특히 국경을 지날 때에는 검문이 엄중할 거고.”
하지만 국경을 지난 순간부터는 신분증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사마르는 무법지대로 통할 만큼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며, 대륙의 국가에서 공용되는 신분증도 사용하지 않는다.
“검문을 통과하는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는 로브의 안쪽에 넣었던 손을 빼서 유진에게 건넸다. 그녀의 손에는 백지의 신분증이 들려 있었다.
“신성제국의 사제들은 대륙 곳곳을 여행합니다. 그 여정에서 고위사제들은 원치 않은 시선들을 받곤 하죠.”
“그래서 위조 신분증을 들고 다닌다?”
“사용하셔도 곤란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신분증을 받았다. 워프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크리스티나는 유진에게 백지 신분증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방법은 어렵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핏방울이 맺힌 엄지손가락을 신분증에 가져다 대고, 가명으로 쓸 이름을 외는 것으로 곧장 신분증이 새로 만들어졌다.
“만들기는 했는데. 이 신분증은 결국 신성제국에서 발급된 것 아닌가?”
“그렇기에 저희의 신분이 보증됩니다. 유진님. 저희는 선교사로서 사마르에 출입하는 겁니다.”
“진짜로 사마르의 원주민들을 포교할 생각은 아니겠지?”
“가능하다면 시도해 보겠지만, 애석하게도 사마르의 원주민들은 빛의 신을 존중하지 않는답니다.”
크리스티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신을 섬기는 극성맞은 사제들은 해마다 사마르로 포교를 떠나고,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한다.
“유진님이 사마르로 가겠다고 하신 후로, 저도 나름대로 사마르에 대해 조사해 보았습니다.”
“뭐 알게 되신 것이 있으신가?”
“간혹 사마르에서 엘프가 목격되곤 한다지만... 그 엘프들조차도 ‘영지’에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는 군요.”
크리스티나가 로브를 뒤집어쓴다.
“몇 년 전부터는 헬무드의 다크엘프들이 흘러들어와 떠돌이 엘프들과 접촉하고 있답니다. 유진님이 엘프의 마을을 찾고 싶으시다면, 다크엘프들이 그러하듯 떠돌이 엘프들과 접촉을 시도해야 할 겁니다.”
사마르에 가겠다고 말한지 고작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그것도 흑사자 성에서 나름의 조사를 끝냈다는 것은... ‘성녀’라는 신분이 상당히 편리하다는 것이다.
‘...다크엘프라.’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머리를 털었다. 손이 머리카락을 헤집을 때마다 회색의 머리가 검정색으로 물든다. 제복에 새겨진 라이언하트의 문양마저 때어내고, 유진은 망토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좋은 기억은 없는데.’
300년 전. 헬무드를 떠돌 적에,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의 위기를 겪었었다.
그 중 특히나 인상적인 기억. 마왕과의 전투를 제외하면...
유폐의 칼에게 얼굴이 썰릴 뻔 했을 때.
그 전은...
‘아이리스.’
광란의 수양딸.
나찰(羅刹)이라 불린 다크엘프.
사마르
서열 5위, 살육의 마왕은 분쇄추 지골라스를.
서열 4위, 참혹의 마왕은 마창 루인토스를 가졌다.
서열 3위, 광란의 마왕은 특별한 무기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광란의 마왕은 대군(大軍)을 거느렸다. 놈의 군대에는 유별날 정도로 이종족의 비중이 높았다. 카마쉬를 필두로 한 거인족이 광란의 군대의 선봉이었고, 그 외에도 수인족과 엘프. 인간에서 변질 된 뱀파이어나 라이칸슬로프 같은 놈들도 광란의 군대에 속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던 네 명이 광란의 사천왕이라 불렸다.
거인족의 두령, 진열(震裂)의 카마쉬.
뱀파이어 로드, 유혈(流血)의 사인.
수인족의 광인, 패악(悖惡)의 오보론.
다크엘프 공주, 나찰(羅刹)의 아이리스.
300년 전. 하멜은 베르무트와 함께 카마쉬를 죽였다.
그 뒤에, 살육과 참혹의 마왕을 죽였다. 기세를 몰아 광란의 마왕성까지 나아가는 중, 유혈의 사인을 필두로 한 뱀파이어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 싸움에서 사인을 죽였다. 좀처럼 죽지 않는 뱀파이어지만, 아니스의 신성력과 베르무트의 성검은 끝내 사인의 몸을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광란의 마왕성에서는 수인족과 다크엘프들의 공격을 받았다.
오보론과 아이리스. 둘은 사인처럼 죽지 않고, 광란의 어전까지 물러서서 태세를 정비했다.
끔찍한 싸움이었다.
오보론도, 아이리스도 강했다. 광란의 마왕은 말할 것도 없이 강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쓰러트렸다.
베르무트가 광란의 마왕을 상대하는 동안, 모론은 오보론을 상대했다.
하멜의 상대는 아이리스였다.
‘아버지!’
그 처절하던 외침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광란이 쓰러질 때, 피투성이였던 아이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광란에게 달려들었다.
하멜은 아이리스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 다크엘프는 상대하기 까다롭고 강했다. 아이리스가 간다 한들 광란의 죽음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하멜은 아이리스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실패했다. 죽어가던 광란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남은 힘을 반격이나 소생에 사용하지 않고 오보론과 아이리스를 탈출시키는 것에 사용했다.
그곳의 누구도 광란의 마왕이 저런 행동을 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세냐의 마법은 오보론과 아이리스의 탈출을 막지 못했다. 그 베르무트조차도 광란의 행동에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었다.
‘죽여, 죽여 버리겠어. 너... 너희들 전부...! 아, 아아, 아버지...!’
공간이 쩍 갈라져서 문이 열리고, 광란의 어둠이 아이리스와 오보론을 휘감았다. 아이리스는 발작하면서 덤비려 했지만, 외팔이가 된 오보론이 아이리스를 붙잡았다.
‘하멜, 네가... 네가 나를 막아서...!’
‘씨발, 개소리하고 있네. 내가 막아서 뭐?’
하멜은 아이리스의 원망을 비웃었다. 다 죽인 아이리스를 놓치게 되는 지금 상황도. 광란의 가슴에 검을 처박은 베르무트 대신, 자기를 더 원망하는 아이리스도. 죄다 어이가 없었다.
어쨌건, 광란의 마왕은 그렇게 죽었다. 아이리스와 오보론은 탈출했고, 다크엘프와 수인들도 흩어졌다.
300년이 흐른 지금.
로드를 잃은 뱀파이어들과 라이칸슬로프들은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의 휘하에 들어갔다.
거인족들은 헬무드의 험난한 산중에서 자기들끼리 뭉쳐 부족을 이루었다.
오보론은 멸망의 마왕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150년 쯤 전에 제 아들에게 목이 뜯겨 죽었다.
아이리스는.
‘그 뒤에 마주친 적은 없었지.’
죽여 버리겠다고 저주를 토하며 독기 어린 눈을 치켜떴으면서. 아이리스와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때 죽였어야 하는데.’
엘프가 그런 것처럼, 다크엘프도 오래 산다. 놈들의 수명은 천 년은 훌쩍 넘는다. 애당초 엘프와 다크엘프는 다른 종족이 아니다.
엘프가 마왕에 의해 타락하고, 마기를 받아들이면 다크엘프가 된다.
‘아버지는 개뿔이.’
환생한 지금도 그 순간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광란의 마왕은 사천왕을 죄다 자식으로 삼았고. 그 산처럼 거대하던 카마쉬가 광란의 장남이었다. 카마쉬는 죽기 직전에 ‘아버지’를 부르며 죽었다.
웃기지도 않은 가족놀이. 피도 섞이지 않은 주제에, ‘가족’이라는 관계로 묶어서 어쭙잖은 유대감과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광란은 자신이 죽는 순간에 ‘딸’과 ‘아들’인 아이리스와 오보론을 탈출시켰다.
왜? 그만한 여력이 남았다면 차라리 자폭이라도 하던가. 그렇게 했어도 베르무트는 죽일 수 없었겠지만, 마왕이라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나.
‘그나마 오보론이 뒈진 것은 다행이긴 한데... 놈을 물어 죽였다는 아들도 만만찮은 또라이겠지.’
수인족은 그 안에서도 종족이 여러 개로 나뉜다. 300년 전의 오보론은 수인족 중에서도 광인이라 불릴 만큼 또라이였는데, 놈에게서 나온 아들도 아비와 다를 것 없이 또라이인 모양이다.
유진은 오보론의 아들과, 아이리스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르 대수림. 이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헬무드보다 위험한 곳이다. 헬무드만큼 마족이 득실거리지도, 마왕이 가까이 있는 곳은 아니다만. 사마르에는 질 나쁜 쓰레기들이 많다.
이곳은 다른 국가처럼 신분증이 통용되지 않는다.
국가에서, 도시에서 살 수 없는 흉악한 범죄자들. 감옥에 처박혀 썩거나, 처형당하지 않은 놈들. 탈옥하거나 잡히지 않았거나, 어쨌건 그런 놈들은 헬무드 아니면 사마르로 흘러들어온다.
물론 사마르에도 ‘법’은 있다. 다만 그 법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국가의 법과는 아득하게 떨어져 있기에, 사마르가 무법지대라 불리는 것이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야만적이고, 부족마다 따르는 법이 다르다. 보통의 국가에서 살인은 ‘죄’다. 하지만 사마르에서는 꼭 그렇지가 않다. 한없이 가벼운 이유로도 살인을 용서하고, 일부 야만 부족들은 이유 없는 살인조차도 용맹함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마르에서 포교활동이라니. 꽤나 대중적인 자살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갈색 피부의 남자가 얇게 뜬 눈으로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훑어보았다.
크리스티나가 말한 것처럼, 위조 신분증으로 키옐의 남쪽 관문을 통과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사마르는 키옐의 영토보다 넓은 주제에, 워프게이트가 열려있지 않다.
설치는 되어 있는 모양이지만, 사마르에서 워프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대부족에서도 인정받은 소수 뿐. 외국의 귀족들은 아무리 돈을 갖다 바쳐도 사마르의 워프 게이트를 사용할 수 없다.
즉, 관문을 지나서는 마차나 말을 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이동한 끝에, 관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무역도시에 도착했다.
말이 무역도시지, 키옐이나 아롯의 도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높다란 건물도 없고, 도로도 지저분하다.
“이유가 중요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크리스티나의 신분증을 뒤집었다.
“어디 보자... D등급 모험가로군. 그래서 뭐?”
“...이곳은 모험가 길드와 제휴한 여관 아닙니까? 등급에 알맞은 대우를 받고 싶습니다.”
“하하! 수녀님. 순진한 척을 하는 건가, 진짜 순진한 건가? 이곳이 키옐과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사마르의 마을이야. 신분증이니 모험가 등급이니, 아무 쓸모도 없다고.”
여관주인은 끌끌 웃으며 신분증을 도로 밀어냈다.
“등급에 알맞은 대우? 최근 들은 농담 중에서 가장 웃기는 농담이군. 수녀님. 그러니까... 여기는 사마르야. 이곳은 모험가 길드와 제휴한 여관이지만, 어느 길드에 가던 똑같아.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새끼들의 신분증은 믿을만한 것이 못 되고... 아아, 그만, 그거 아니야.”
“뭐가 아니란 거야?”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돈, 돈이 아니라고. 돈 꺼내지 마. 아무 쓸모 없어. 댁들은 사마르에 대해서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건가? 사마르에서는 공용화폐를 안 써. 여기서 쓰이는 건...”
“나도 아니까, 괜히 말 끊지 마. 뒤지고 싶지 않으면.”
유진은 빙긋 웃으며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였다. 건너편에 앉은 여관주인은 갑작스레 돌변한 유진의 태도에 순간 당황했다.
“어린놈의 새끼가 버릇이 없...”
여관주인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테이블 아래의 부저에 손가락을 올렸다. 살짝 누르기만 하면 위층에 있는 용병들이 내려올 것이다. 하지만 부저를 누를 수 없었다.
테이블의 아래를 쑤시고 들어 온 단검이 여관주인의 손가락에 닿았다.
“어허. 서두르지 말고.”
“...너 이 새끼... 지금 뭐하자는 거야?”
“말부터 끝까지 듣지?”
유진은 망토의 안에서 자그마한 보석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카지탄의 에미르에게서 받아두었더 보석 중 하나다. 그걸 본 여관주인의 눈이 부릅 떠졌다.
“공용화폐는 안 쓰이지만, 보석은 쓰일 것 아냐? 누구나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좋아하니까.”
“...”
“자, 아저씨. 지금부터는 내 말 끊지 말고 대답만 해. 내가 하는 말을 내 모습만으로 판단하지도 마. 아저씨도 칼밥 꽤 먹은 용병일 것 아냐. 그렇지?”
여관주인의 얼굴이 조금씩 굳는다. 그는 손가락에 닿은 단검의 예리함을 느꼈고, 아무런 징조 없이 찔러들어온 것에 경각심을 느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아직 앳된 티가 채 벗겨지지 않은 눈앞의 꼬마에게서 느껴지는 살기가 심상치 않다.
‘나한테만...’
살기는 낭비없이 여관주인에게만 집중되고 있다. 용병 출신의 여관주인은 유진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만한 크기의 보석 하나가 방값이야.”
“...”
“우리는 둘이니까, 방 두 개.”
유진은 보석 하나를 더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여기보다 좋은 여관도 많겠지만, 뭐, 편의성을 따진 거지. 무슨 말인지 알아?”
“...정보?”
“잘 아네. 모험가 길드라면 용병 길드나 정보 길드와도 연결되고 있을 것 아냐? 그러면서 모험가를 위한 숙박시설도 맡고 있고.”
“...현상금사냥꾼들인가?”
여관주인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만큼 정제 된 살기를 내뿜으면서 정보를 요구하는 건, 여관주인이 알기론 현상금사냥꾼들 밖에 없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내 멍청한 동료가 떠든 것처럼 목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나는 보석이 많고, 아저씨는 보석을 좋아해. 그렇지?”
“...으음...”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만만해 보인다고 해서 강도짓이라도 하려 했다가는... 다 뒈져. 진짜로. 먹은 밥그릇과 칼밥만큼 눈치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저씨 생각은 어때? 날 죽이고 품을 뒤질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못할 것 같군.”
살기가 점점 강해진다. 여관주인의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엘프를 찾고 있어.”
유진은 다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이번에 꺼낸 것은 처음 꺼낸 보석의 몇 배나 될 만큼 커다란 보석이었다. 그걸 본 여관주인의 눈에 탐욕이 어린다. 저 커다란 보석이 불러일으키는 욕심은 살기로 인한 공포보다 커다랬다.
“다크엘프말고, 그냥 엘프. 내 알기로 이 마을에 엘프가 가끔 드나든다는데... 누구든 좋아.”
“...시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군.”
여관주인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엘프에 대한 정보는 그만한 크기 보석 세 개는 받아야 돼. 어떤 이유로 엘프를 찾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엘프를 거느리고 싶어 하는 부호와 귀족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은 유명하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엘프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는 모양이지?”
“...정보상과 연결하는 대가로 그 보석 하나를 받겠네. 나머지 계산은 정보상과 직접...”
유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씨발놈이 어디서 돈을 나눠 처먹으려고.”
화악! 유진의 손이 여관주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윽!”
“더 크게 소리 질러도 돼.”
유진은 여관주인을 대신해 테이블 아래의 부저를 눌러주었다. 그러자 곧장 계단에서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뛰어내려온다.
“유진님?”
크리스티나는 당황하여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유진은 오히려 크리스티나를 향해 헛웃음을 내뱉었다.
“완드 안 뽑고 뭐해? 저 새끼들 안 막을 거야?”
“너희 뭐야?!”
“남자랑 여자다, 개새끼야.”
빠득! 유진은 여관주인의 손가락을 잡아 꺾었다. 그 당당한 말에 용병들은 잠시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각자 무기를 빼들고서 달려들었다. 유진은 직접 대응하지 않고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 앞에 손을 들었다. 화악! 그녀에게서 뿜어진 빛이 기다란 채찍이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허억!”
용병들이 놀란 소리를 낸다. 빛의 채찍은 용병들을 휩쓰는 대신, 그들의 팔과 다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유진은 그걸 보고서야 히죽 웃으며 여관주인을 돌아보았다.
“크리스티나. 이 새끼 이름이 뭐라고 했지?”
“...잭슨입니다.”
“흔해 빠진 이름이군. 야, 잭슨. 내가 방금 말했잖아. 다른 여관이 아니라 이 여관에 온 이유. 편의성 때문에.”
뚜둑...! 잭슨의 손가락이 조금 더 꺾인다. 잭슨은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르려했지만, 유진의 손은 잭슨의 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네가 정보상이라는 걸 알아서 여기로 온 거라고. 그런데 뭐? 중개료를 받고, 정보상이랑 연결해줘? 계산은 정보상과 따로 해? 이 씨발아, 어디서 고객을 등 처먹으려고 들어?”
“끄... 끄으으...!”
“내가 소란피우기 싫어서 돈만 주고 깔끔하게 거래하려고 했는데, 네 심보가 못되 처먹어서 안 되겠어. 어디... 그래. 정보길드에도 나름의 법이 있잖아? 사마르라고 정보길드의 법이 다를 것 같지는 않은데. 개수작을 부리면 손가락 하나 자르는 거, 맞지?”
“그... 그건 오래 전에 폐지된 법...”
“언제 씨발아. 300년 전에? 그럼 지금 법은 뭔데. 손톱 뽑는 거냐? 난 정보 길드원 아니니까 그 법 지킬 필요 없지? 네가 좆 같이 굴었으니까 나도 좆 같이 굴어도 되는 거지?”
유진은 눈을 부릅뜨고서 잭슨을 노려보았다. 그는 테이블 아래에서 쥐고 있던 손가락을 놓아주고서, 단검을 테이블 위에 내리 찍었다.
“정해, 개새끼야. 어느 손가락 잘라줄까? 오른손? 왼손? 나도 적절히 양보해서, 네가 자주 쓰는 손은 피해줄게. 너 오른손잡이지? 그러니까 왼손. 검지 잘리면 일상생활이 불편할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중지 잘라줄게. 아마 검지보다는 나을 거야. 평생 왼손으로 엿은 날릴 수 없겠지만, 그 정도면 개수작의 대가로 싸잖아.”
이곳 여관주인의 이름이 잭슨이고, 정보길드에 속한 정보상이라는 것은 크리스티나가 알려주었다.
본래는 적당한 값을 내고 필요한 정보를 살 생각이었지만, 으레 계획이란 것은 상황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갑작스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유진의 상식으로는 호구 취급을 받는 것보다는 소란을 감수하고 기강을 잡는 편이 나았다.
“자, 마음 편히 먹고. 내가 자르기 쉽도록 왼손 활짝 펼쳐 봐. 싫어? 싫으면 하나 더 얹을게. 중지랑 약지 어때?”
“나, 날 위협하면 정보 길드가...”
“이 새끼가 협박까지 하네.”
콰악! 내리 찍은 단검이 잭슨의 중지를 끊어버렸다. 잭슨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유진은 놈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그거 무서웠으면 네 목잡고서 손가락 자른다고 하고 있겠냐?”
유진은 덜덜 떨리는 잭슨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잘 생각해. 손가락 하나 없는 거, 불편해도 살만은 하잖아. 지금이라면 손가락 하나로 봐줄게. 아, 걱정하지마. 정보가 확실하다면 보석도 줄 테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고통과 공포가 잭슨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방금 전만 해도 상황이 이렇지는 않았다. 뭣도 모르고 들어 온 어중이떠중이 둘. 정보길드와 엘프에 대해서 운운한 것은 놀라웠지만, 사마르에 들어 온 놈들의 속사정은 잭슨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냥 중개료만 받아먹고. 적당한 정보상과 연결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애꿎은 손가락만 대뜸 잘려버렸다...
“그게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정보길드는 정보길드고, 일단 날 좆같이 대하고 일을 귀찮게 할 넌 여기서 죽여야겠어. 저기 묶여 있는 용병들도 다 죽이고. 그 뒤에는? 뒈진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안 그래?”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잭슨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때어냈다.
“하지만 말이야. 네가 부디 잘 생각해줬으면 해.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할 정도면... 뭔가 단단히 믿는 것이 있어서가 아닐까?”
“...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알 바 없고. 엘프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
유진은 단검을 툭 밀어, 테이블에 널브러진 손가락을 치워냈다.
“지... 지혈이라도... 제발...”
잭슨은 더듬거리며 말했고, 크리스티나가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움직인 유진의 손이 잭슨의 손가락을 움켜 쥐었다.
“끄으...!”
“가만히 있어. 지혈해 줄 테니까.”
유진의 지혈법은 무식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잘린 손가락을 꽉 쥐는 것으로 피를 멎게 만들었다. 잭슨은 몸을 파르르 떨며 제 손을 쳐다보았다. 피범벅이 된 유진의 손이 다른 손가락을 부러트리거나 뽑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말해.”
유진은 태연한 표정을 하고서 의자에 앉았다.
사마르
“너무 무식한 것 아닙니까?”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따져 묻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아까도 그랬다. 갑작스런 상황, 크리스티나는 놀라고 당황스러워했지만, 유진의 과격한 행동에 노여워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은 유진에게는 제법 인상적이었다. 평범한 성직자라면 유진의 과격함에 분노했을 것이고, 굳이 손가락을 자른 것을 꾸짖었을 것이며,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잭슨에게 치유마법을 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러지 않았다. 놀랍고 당황하되, 유진의 행동을 가로막지 않았다. 나서서 치유마법도 써주지 않았다.
‘평범한 성직자라면.’
애당초 크리스티나는 평범한 성직자가 아니다. 신성제국 유라스의 성녀후보. 아니, ‘성녀.’ 그러한 배경 뿐만 아니라, 크리스티나의 생김새 덕분에 유진은 다시 한 번 아니스를 강하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무식한 새끼들한테는 무식하게 해줘야지.”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그리고. 너야말로 무식한 말을 하는 거 아니냐? 내가 꺼낸 보석이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인지 알아? 하나만 잘 팔아도 일 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야. 그걸 개수작 섞어서 꽁으로 받아 처먹겠다는데, 손가락 하나면 존나 싼 거지. 안 그래?”
“흐음...”
크리스티나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유진님의 말은 이해했습니다. 저와 유진님이야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환경을 지녔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진님이 제시했던 보석은 크나 큰 가치를 지닌 것이죠.”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로브의 후드를 눌러썼다.
“게다가 저와 유진님은 어린 시절에는 크게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잖습니까. 그러니 더더욱 재물의 귀중함을 잘 알고 있지요.”
“이해했다면 다행...”
“하지만. 그를 감안하더라도, 정보상의 손가락을 자른 것은 과하다 생각합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윽박만 질러도 충분했을 텐데요.”
“이런 곳에서 정보상으로 구르는 새끼가 협박 따위에 위축될까? 손가락 하나면 오히려 깔끔한 거야.”
“그가 복수하려 들면 어떻게 합니까?”
“그만큼 눈치가 없을까?”
“분노는 때로는 이성을 먹어치웁니다.”
“오히려 이렇게 겁 없이 구는 것이 놈으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만들지.”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럼에도 보복하려 든다면, 그 등신 같은 선택을 해버린 걸 후회하게 만들어줘야지. 나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오히려 보복하려 들었으면 좋겠어.”
“과연.”
크리스티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유진이 저리 말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유진님은 특이한 분이십니다.”
“왜?”
“키옐의 라이언하트라면 대륙 굴지의 명문가이잖습니까. 하지만 아까 유진님의 행동은 명문가의 자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칠었습니다. 마치 잔뼈 굵은 용병처럼 말입니다.”
“네가 아는 명문가 귀족 자제들은 호구 잡힐 짓에도 하하호호 웃으며 홍차나 홀짝거리나 보지?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하자고. 명문가 도련님치고는 참 무식하십니다, 라고 말이야.”
“그건 처음에 말했습니다.”
너무 무식한 것 아닙니까? 유진은 아까 들은 말을 떠올리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죽이지는 않았잖아.”
“대신 손목을 하나 더 자르셨죠.”
“괘씸죄는 더해야지.”
잭슨은 엘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며 애걸했다.
*
300년 전.
다섯의 마왕이 세상을 먹어치우려 할 때. 종족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엘프와 드래곤이다.
드래곤은 본래부터 그 수가 많지 않았는데, 마왕과 대적하며 절반에 달하는 드래곤들이 죽음을 맞았다.
엘프는 드래곤보다 사정이 나빴다. 엘프는 마왕과 대적하지도 않았음에도 점점 죽어갔다.
병 때문이었다. 마왕의 불길한 힘은 순수한 엘프들에게는 치명적이었고, 예고 없는 발병은 기나긴 수명을 가진 엘프들을 어쩔 도리 없이 죽음으로 몰아갔다.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낀 엘프들.
노예로 부려지다가 탈출한 엘프들.
마병(魔病)에 걸린 엘프들.
이유는 다양하지만, 여러 엘프들이 사마르 대수림으로 돌아온다.
대수림에서 태어나고, 바깥으로 나갔던 엘프들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대수림에서 태어나지 않은 엘프들도 대수림 깊은 곳에 있다는 엘프의 영지를 찾아 헤맨다.
마병에 걸린 엘프들은 저런 이유보다 간절한 이유를 가진다. 발병하면 아무리 길어도 5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되지만, 숲이 울창한 사마르에서는 그보다 긴 시간을 버틸 수 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사마르 대수림으로 돌아 온 엘프들 중에서 엘프의 영지를 발견한 엘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엘프는 긴 세월을 살고, 아름다우며, 아무리 나이를 먹건 타고난 아름다움이 늙지 않는다. 그런 엘프를 노예로 부리고 싶어 하는 부호나 귀족들은 한 둘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떠돌이 엘프들은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는 사냥감이 된다. 불과 몇 년 전만하더라도 이 도시에는 외지에서 들어 온 사냥꾼과 노예상인이 여럿 있었다.
지금은?
없다. 암암리에 활동하는 놈들은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는 사냥꾼과 노예상인은 씨가 말랐다.
다크엘프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이 도시에 나타난 다크엘프들은, 사냥꾼과 노예상인을 역으로 사냥하며 세력을 형성했다. 그 험악한 다크엘프들은 정보길드의 입을 틀어막고, 도시에 나타나는 엘프들과 접촉하고 있다.
왜?
떠돌이 엘프를 다크엘프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들은 사마르에 들어온 엘프들을 설득한다. 아무리 떠돈들 엘프의 영지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곳에 사는 엘프들은 영지를 감추었고, 바깥의 동족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다크엘프가 된다면.
더 이상 사냥꾼과 노예상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갑작스레 발병하는 마병(魔病)을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된다. 이미 마병에 걸렸다 해도 괜찮다. 다크엘프는 마병으로 죽지 않는다.
“광란의 공주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숲의 밤은 어둡고 길다.
크리스티나는 노숙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고, 성녀랍시고 엉덩이가 무겁지도 않았다. 그녀는 직접 장작을 모아다가 모닥불을 피웠고, 야영을 준비했다.
“알아.”
아이리스.
300년 전에 죽이지 못한 다크엘프. 광란의 수양딸.
‘그때 죽여야 했어.’
오보론은 멸망의 마왕에게 의탁하고, 제 아들에게 목을 물어 뜯겨 죽었다.
아이리스는 다른 마왕이나 마족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야말로 광란의 마왕의 정통한 후계자라 주장하며, 새로이 마왕이 되기 위해 헬무드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타당한 주장이기는 했다.
뱀파이어와 라이칸슬로프들은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의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오보론의 아들과 수인족은 멸망의 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마왕과 마족에게 복속하지 않은 것은 거인족과 다크엘프 뿐. 하지만 거인들은 광란의 후계자라 주장하지 않고, 헬무드의 오지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있다.
오직 아이리스만이 광란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마왕 자리를 노리고 있다.
“...가진 힘과는 별개로, 광란의 공주... 아이리스는 헬무드에서 그리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모닥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있던 알카르트 교구에서도 아이리스에 대한 비웃음이 떠돌았습니다. 순혈(純血) 마족도 아닌 다크엘프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마왕을 논한다는 비웃음.”
“순혈 마족이란 것도 웃기는 말이지.”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고기를 씹었다.
“애당초 순혈을 따지면 데몬 외에 어느 마족을 순혈이라 할 수 있겠어? 몽마나 다른 마족들은 죄다 데몬의 아종이잖아.”
“하지만 그들은 마족으로 태어났죠.”
300년 전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뱀파이어나 라이칸슬로프 같은, 인간에서 ‘변한’ 놈들은 마족에 속하면서도 순혈주의자 마족들에게는 반마(半魔)니 잡종이니 하면서 멸시 받았다.
오히려 마족들에게는 반마보다는 흑마법사의 대우가 좋았다. 상하관계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광란의 마왕의 수양딸인 그녀는, 마왕이 아님에도 엘프를 다크엘프로 타락시킵니다.”
그래서 후회하게 된다. 아이리스를 300년 전에 죽였다면, 다크엘프는 더 늘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헬무드의 고위 마족들 중에서는 아이리스를 후원하려는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만, 그녀는 후원을 일체 거절하고 자신의 힘만으로 기반을 키우고 있습니다.”
“웃기는 일이야.”
유진은 고기에 붙은 뼈까지 와작와작 씹었다.
“순혈주의자들에게 멸시받았으면서, 결국 자기도 순혈주의자인거잖아. 가뜩이나 엘프는 수가 적고, 다크엘프는 더 수가 적어. 그 쥐뿔도 없는 종족만으로 세력을 꾸리고서 다른 마족과 경쟁하고, 마왕이 되겠다고? 꿈도 크셔.”
아이리스는 마왕이 될 수 없다.
유진은 300년 전의 마족들의 힘을 잘 알고 있다. 아이리스는 분명 강하지만, 그 힘은 몽마의 여왕 같은 최고위 마족들과 비교해서 크게 우월하지는 않다.
세력에서도 비교가 안 된다. 만약 마족 중에 새로운 마왕이 태어난다면, 그 자리에 가장 가까운 것은 헬무드의 3명의 공작들일 것이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블랙 드래곤, 라이자키아.
하나 같이 진절머리 날 정도로 악연이 깊은 놈들이다.
‘그나마 저 놈들과 견줄 만한 마족들을 300년 전에 조져둬서 3명만 남은 거지.’
잭슨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크엘프에 대해 떠들었다. 엘프에 관한 정보를 흘리면 다크엘프에게 죽게 된다면서. 제발 엘프에 대해 묻지 말아달라고 애걸했다.
즉, 처음부터 엘프에 대한 정보를 말할 생각도 없으면서 정보료와 주선료를 받아먹으려 했다는 것이다.
‘아이리스는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다크엘프와 충돌했을 때, 마왕의 간섭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아이리스뿐이다.
‘...적어도 여기서 아이리스와 마주칠 일은 없어.’
다크엘프들은 설득한 엘프들을 헬무드로 데리고 간다고 했다. 엘프를 타락시킬 수 있는 것은 아이리스뿐. 즉, 그녀는 사마르 대수림이 아닌 헬무드에 있다.
대화가 단절되었다. 장작이 타는 소리, 벌레가 우는 소리. 크리스티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뜨겁게 데운 차를 마셨다. 유진은 마지막으로 남은 꼬치구이를 잡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침묵이 길어지는 중에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허락을 받아야 하나?”
유진은 고기를 씹으며 물었다.
“무슨 허락 말입니까?”
“살인.”
“제가 허락해드릴 일은 아닙니다만... 유진님 대신 기도는 해 드리겠습니다.”
“살인의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
“아니오. 진혼과 정화의 기도를 올려야지요.”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마의 종복을 처단하는 일을 어찌 죄라 할 수 있겠습니까? 허나 그들 또한 이 땅에 나고 자란 생명이며, 빛으로 인도해야 할 어린 양들일지니. 기도를 올려 타락으로 어두워진 혼을 밝히고, 인도해야 합니다.”
‘성녀는 죄다 또라이인 모양이군.’
유진은 고기를 삼키며 아니스를 떠올렸다.
‘흙은 흙으로!’
아니스는 신성마법 외에도 메이스를 잘 다뤘다.
‘재는 재로!’
밝게 빛나는 메이스는 마족의 머리를 여러 번 깨부쉈다.
‘먼지는 먼지로!’
아니스가 메이스를 드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난전 중에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메이스를 들곤 했다.
‘찬란한 빛이! 어둠을 밝히노라!’
메이스로 머리를 깨고, 진짜 성수로 안개를 일으키고, 번쩍이는 날개를 펼치고. 그러면서 기도를 외치던 아니스의 모습은 성녀라기보다는 또라이에 가까웠다.
“...혹시 너도 메이스를 휘두르나?”
“네?”
“메이스. 몰라?”
“...뭔지는 압니다만. 저는 메이스보다 철퇴를 선호합니다.”
“...철퇴...?”
“예. 무거워서 들고 다니지는 않습니다만...”
“...필요하면... 말해. 망토 안에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크리스티나가 방긋 웃으며 감사를 말한 직후.
어둠 속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고, 데굴데굴 굴러왔다.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놀라지 않고 굴러오는 것을 쳐다보았다.
정보상. 잭스의 머리였다. 혀를 빼물고, 눈깔이 뒤집힌 머리. 유진은 근처까지 굴러 온 잭슨의 머리를 발로 툭 밀어냈다.
“철퇴. 지금 빌려주실 겁니까?”
“아니.”
유진은 무릎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락은 필요 없다 했으니, 기도나 해.”
접근은 진즉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서로 침묵하는 동안 거리가 좁혀졌고, 크리스티나에게 허락을 묻기도 전부터 유진은 이미 어찌 할 지를 결정했다.
“사냥꾼이냐?”
어둠속에서 질문이 날아온다.
“아니라고 하면 돌아갈 거니?”
유진은 상냥한 말투로 대꾸했다.
“...엘프에 대해 묻고 다닌다고 들었다.”
목소리가 조금 가까워진다. 한 명의 다크엘프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다.
“각박한 세상에서 먹고 살려 노력하던 아저씨인데.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니?”
“정보상이 너희에 대해 말하더군. 갑자기 들이닥쳐서, 엘프에 대한 정보를 사려 했다고.”
“엘프에 대한 정보는 안 팔았단다.”
“놀라지 않는 군. 우리에 대해 들었나?”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품 안에서 고이 접힌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쓱 닦았다. 그 쓸데없이 우아한 모습에 다크엘프는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나?”
유진은 손수건을 탁, 탁 털었다.
“혼자 왔니?”
“...뭐?”
“혼자 왔구나.”
유진은 손수건을 공중에서 떨어트렸다.
“시건방진 새끼.”
손수건이 바닥에 닿기 전.
폭풍이 손수건을 저만치 날려버렸다.
사마르
몰아치는 바람에 다크엘프의 표정이 급변했다. 놈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허리춤을 훑었지만, 그보다 유진이 놈에게 다가가는 것이 더 빨랐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일으킨 바람은 다크엘프를 놀라게 했을 뿐. 이동에는 블링크를 사용했다.
무기를 쥐지 않은 맨 손이 다크엘프에게 향한다. 간단하게 잡혀주지는 않았다. 다크엘프의 몸이 뒤로 꺾인다. 불안정한 자세, 곡예라도 부리는 것처럼 다크엘프는 제자리에서 제비를 돌았다. 그러면서 휘두른 다리가 유진의 머리로 날아왔다.
유진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는 뻗던 손을 꺾어, 손등을 앞세워 다크엘프의 발길질을 받아냈다. 단순히 쳐내는 것이 아니다. 유진의 손을 뒤따른 바람이 다크엘프의 몸을 집어삼킨다.
“큭!”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그 중심에 삼켜진 다크엘프는 양팔로 제 머리를 보호하며 힘을 끌어냈다. ㅡ콰르르! 회색의 마나가 다크엘프의 몸을 휘감았다.
‘마나는 제법인데, 마기는 별 볼 일 없군.’
하급 마족보다 조금 나은 정도. 그래도 실력은 하급 마족보다 훨씬 우월하다.
엘프가 그런 것처럼, 다크엘프도 오래 산다. 100살의 인간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늙은이지만, 100살의 엘프는 동족들 사이에서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
엘프는 넘치는 시간의 축복을 받은 종족 중 하나다. 그 시간 동안 마나만 우직하게 수련해도 인간을 우습게 볼 만큼 강해진다.
그렇다면 엘프가 인간보다 무조건 우월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 300년 전, 베르무트는 인간이었다. 모론도, 아니스도, 세냐도, 하멜도 인간이었다. 인간은 엘프의 수십 수백 배가 될 만큼 숫자가 많고, 그 득실거리는 인구 중에서는 가끔 수명의 차이를 묵살해 버리는 괴물들이 나타나곤 한다.
이곳에 온 다크엘프는, 자신이 상대하는 것이 그런 괴물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현실은 분명했다. 다크엘프는 자신이 왜, 어떻게, 땅에 처박혔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그가 처한 현실은 가진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었다.
“...커윽.”
아직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입술이 열리고, 핏물이 튀어나왔다. 단순하고 깔끔한 엎어치기. 그것 뿐인가? 아니, 땅에 처박히기 전에 몇 대 더 맞았다.
단검을 쥐고 있던 팔을 뻗었고, 잡혔고, 꺾였다.
팔이 당겨지며 늑골에 팔꿈치가 처박혔다. 마나실드는 그 일격에 분쇄되었고, 뼈가 부러졌다.
올려붙인 주먹이 턱을 얇게 치고 지나갔다. 한 순간 의식이 단절되었다.
그 뒤에 땅에 등부터 처박혔다. 팔과 늑골, 어깨...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찌르르 울린다. 뼈만 부러진 것이 아니라 내장도 상했는지, 숨을 쉴 때마다 비린내와 핏물이 올라온다.
변변찮고 허무했다. 싸움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다크엘프는 숨을 헐떡거리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이 다크엘프는 전사가 아니었다. 자신을 쓰러트린 상대에 대한 경의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인간 놈...!”
다크엘프를 끌어낸 것은 의도했던 일이다. 다크엘프의 근거지를 쳐들어가는 것보다는, 잭슨을 통해 다크엘프가 자신을 추격하도록 의도했다.
만약 잭슨이 지레 겁을 처먹고 얌전히 있었다면 다크엘프를 끌어낼 수 없었겠지만, 유진은 놈이 얌전히 있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굳이 손목까지 잘라버린 것이다.
“반응하기 난감하군. 난 인간도 맞고 놈도 맞는데, 네 말을 욕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유진은 망토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이죽댔다. 다크엘프는 한 번 더 핏물을 쿨럭거리며, 아직 멀쩡한 왼팔로 땅을 짚었다.
“죽여 버리겠...”
이런 상황에서 흔하게 듣는 말이었다.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란 말이다.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발을 들어, 다크엘프의 왼손을 짓밟아 버렸다.
콰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끄아아아!”
다크엘프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엘프란 종족에서 외모만큼이나 부각되는 것은 바로 길쭉한 귀다. 그 귀는 기다란 만큼 많은 소리를 듣는다.
그 뛰어난 청각은 다크엘프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보다 정확히 알게 해주었다. 그가 내지른 비명은 먼 곳가지 퍼지지 않고 이 주변에만 맴돌고 있다.
‘마법...!’
소리가 퍼지지 않도록 차단한 것이다. 다크엘프는 더 비명을 지르지 않고, 짓밟힌 손을 빼내려 용을 썼다. 하지만 유진은 다크엘프의 손을 놔주지 않고, 그대로 웅크리고 앉아 다크엘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갈색의 피부. 새빨간 눈동자. 300년 전부터 변하지 않은 특징이다. 유진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서 손을 뻗었다.
유진은 다크엘프의 망토를 끌어내리고, 놈의 목깃을 찢어서 내렸다. 그러자 다크엘프의 눈동자가 뒤흔들린다. 놈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서 입에 고인 피를 유진의 얼굴로 퉤 뱉어냈다.
“개자식! 너 따위에게 범해지느니 죽는게 낫...”
“이 새끼가 뭔 뜬구름잡는 소리야. 내가 널 왜 범하냐?”
애당초 이 다크엘프는 남자였고, 설령 여자일 지라도 유진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진은 전생에 용병으로 살았던 시절조차도 여자를 강제로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디 보자... 그래, 역시 그렇군.”
유진은 다크엘프의 왼쪽 쇄골부터 가슴팍까지 새겨진 문신을 노려보았다. 뒤집힌 산양의 두개골. 뿔의 생김새가 유별나다. 구부러진 뿔이 한 쌍, 위로 삐죽이 솟은 뿔이 한 쌍.
두 쌍의 뿔을 가진 뒤집힌 산양의 두개골. 광란의 마왕의 상징이다. 이 문신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는 것은 광란의 마왕의 부하라는 증거다.
‘300년 전부터 살았다면 이따위로 허접할 리가 없지.’
아마 비교적 최근에 다크엘프가 되었거나, 아이리스의 수하로 들어간 놈이리라. 아니면 나이가 어리던가. 어느 쪽이든, 이 다크엘프가 아이리스의 부하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네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기왕이면 좋게 좋게 협력해 줬으면 해.”
“죽여라.”
다크엘프가 내뱉었다. 사냥꾼이 물을 것은 뻔하지 않은가. 다크엘프는 설령 자신이 죽을 지언정, 동족에 대해서는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면 편하게 죽는 것이 좋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진은 다크엘프의 입을 쉽게 열게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의 소리가 멀리 퍼지지 않도록 차단해 놓은 것이다.
고문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필요한 상황에 주저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유진은 다크엘프에게 빼앗았던 단검을 손에 쥐었다.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잠이나 자던가.”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나가 몸을 일으켰다. 유진은 헛웃음을 뱉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기도문이라도 읊어서 회개하게 만들 건가? 아니면 철퇴로 손가락부터 자근자근 으깨버리려고?”
“그런 거친 방법은 쓰지 않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크엘프의 몸을 넘어가서, 놈의 양팔을 뒤로 꺾어서 잡았다.
“뭘 하려는 건데?”
“심문입니다.”
크리스티나가 완드를 뽑았다. 완드의 끝에 달린 십자가가 크리스티나의 가슴에 붙는다. 그녀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다크엘프를 응시했다.
이윽고 크리스티나의 입술이 달싹거린다. ㅡ화악! 자그마한 주문이 신성력을 일으켰다. 십자가의 중심에 박힌 푸른 보석이 크리스티나가 일으킨 신성력에 공명하며 빛을 발했다.
일렁거리는 빛이 다크엘프에게 향한다. 마기에 의해 타락한 다크엘프들은 신성력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다크엘프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절 보십시오.”
크리스티나가 소곤거렸다. 그녀의 미소는 자애로웠고, 목소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상냥했다.
‘이건...’
다크엘프는 뒤에서 붙들고 있는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정면에서 보고 있었다. 지금 크리스티나가 사용하는 신성마법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니스는 저런 신성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크리온에서 마법을 공부하며, 여러 마법에 대해 접해보았다. 직접 익히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신성마법에 대한 서적들도 몇 권 읽어 본 적이 있었다.
정신 마법은 일반적인 마법과는 방향성이 다르다. 아롯에서 정신 마법을 깊이 다루는 곳은 흑색 마탑 뿐이다.
하지만. ‘마법’의 규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뜻대로 주무르는 것에 가장 능통한 것은 흑마법이 아닌 신성마법이라고 했다.
신성제국의 이단심문관. 300년 전, 흑마법사가 배척받던 시절. 유라스이 이단심문관들은 흑마법사들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두려운 악몽이었다. 그 시대에서는 모두가 흑마법사를 적대했지만, 유라스의 이단심문관들은 흑마법사를 아예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지금 시대에서 이단심문관들은 300년 전 만큼 거칠지는 않다. 흑마법사라고 하여 무조건 사냥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유라스에는 이단심문관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신성제국의 사제들을 감시하고, 신앙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경고한다.
“...이런 신성마법도 쓸 줄 알았나?”
“즐기지는 않습니다.”
“아까 사용했으면 좋았잖아.”
“정보상에게 말입니까? 그는 심보가 고약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인간이었고, 빛의 신도도 아니었습니다. 이 신성마법은 그런 자에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티나는 완드를 거두고서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더듬거리며 말을 읊던 다크엘프는, ‘말’로 완성되지 않은 목소리만 웅얼대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보시다 시피... 의지를 무너트려, 진심에서 우러나오게 만드는 고해는 정신을 붕괴시킵니다.”
사용할 수는 있었겠지만, 아니스는 저런 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이 심문 마법은 함부로 사용해서 안 되며, 저 스스로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락한 엘프. 심문을 주저할 대상이 아닙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양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그의 고해를 통해, 우리는 숭고한 목적에 한 걸음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필시 신께서도 그 고해에 귀를 기울이셔, 타락으로 어두워진 혼을 빛의 뜰에 들이실 것입니다.”
“죽여도 된다는 말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라, 혼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뱀 같은 여자.
아니스와 똑같지는 않지만, 크리스티나도 아니스처럼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미소로 감춘 본심이 고약하다는 점도 비슷하다.
유진은 축 늘어진 다크엘프의 목덜미를 붙들고서 일어섰다. 놈은 아직까지도 입술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외진 곳에서 죽일 생각이었는데, 크리스티나는 가만히 있지 않고 유진을 따라왔다.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유진은 다크엘프의 목을 베는 대신, 놈을 눕혀놓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잠시 뒤. 다크엘프의 심장이 멈췄다.
크리스티나는 그 모습을 의외라는 눈으로 지켜보다가, 심장이 멈춘 다크엘프의 곁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잠시 동안 기도를 올린 뒤, 완드를 들어올렸다.
ㅡ화아악! 크리스티나가 일으킨 빛이 다크엘프의 몸을 삼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크엘프의 시체가 재로 변해 사라졌다.
“...전지전능한 빛의 신이시여, 부디 이 타락한 영혼을 받아 살펴주소서. 혼에 드리운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시고, 생전의 업을 성화로 태워주소서.”
크리스티나가 읊는 기도문은 하멜의 무덤에 새겨진 기도문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본래 기도문이라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인 법이다.
“제가 도움이 되었습니까?”
기도가 끝나고. 크리스티나가 몸을 일으켰다.
“응.”
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크리스티나의 심문이 아니었다면, 숲의 긴 밤 동안 다크엘프를 고문해야 했을 것이다.
“휴식은 뒤로 미루지.”
“추격을 경계하시는 겁니까?”
다크엘프는 혼자였고, 동료를 데려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크엘프와 접촉한 이곳에서 야영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새벽 동안은 더 이동해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야 할 길도 멀어.”
심문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 여럿 있었다.
문신으로 먼저 확인하기는 했지만, 다크엘프에게서 직접 아이리스의 부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란의 독립군.
아이리스를 필두로 하고, 다크엘프들로만 이뤄진 조직이란다. 놈들은 사마르의 엘프들을 포섭하며 세력을 키우는 한편, 발견되지 않은 엘프의 영지까지 탐색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엘프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있다.
다크엘프가 되라는 권유를 거절한 엘프들은 대수림의 깊은 곳으로 향한다.
엘프들은 자신들이 노예로서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고, 대수림에서 살아가는 부족들 중에서는 엘프를 존중하지 않는 야만부족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모든 엘프들의 목적은 세계수가 우뚝 선 엘프의 영지로 들어가는 것. 하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길이 막혀 버렸으니, 영지에 들지 못한 엘프들은 얼마 되지 않은 동족끼리 모여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그 마을은 사마르의 초입에서부터 아무리 빨리 잡아도 한 달은 이동해야 한다.
‘...수호자라...’
떠돌이 엘프들이 모이는 마을. 사냥꾼과 야만부족들의 공격에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
“...그곳의 엘프들은 인간을 배척한다고 했지요.”
“환영하게 만들면 되잖아.”
“어떻게?”
“엘프라고 선물을 싫어할까?”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세상에 선물 싫어하는 놈은 없어.”
이번에 심문한 다크엘프는 영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유진이 판단했던 것처럼, 놈은 영지에서 태어나지 않은 바깥 출신의 어린 엘프였다.
유진이 찾는 것은 영지에서 태어난 엘프다.
‘기왕이면 세냐에 대해 아는 놈으로.’
200년 전쯤에 영지를 떠난 엘프라면, 세냐와 마주쳤을 수도 있지 않은가.
< 사마르 >
엘프는 발이 빠르다. 특히 숲에서의 엘프는 마법의 보조라도 받는 것처럼 빠르게 달린다.
하지만. 아무리 엘프라고 해도, 외발로는 빠르게 달릴 수 없다. 외발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기는 하여도, 숙련된 사냥꾼들을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엉성한 의족은 이미 부서졌다. 머리도 어지럽다.
엘프는 자신이 머지않아 쓰러지게 될 것을 직감했다. 도저히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간신히 사마르에 도달했는데, 쓰러져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을지가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햐!”
날카로운 고함들이 가깝다. 원주민들의 고함이다. 커다란 바칸울프에 탄 전사들은 도망치는 엘프를 몰아세우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진즉에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사냥감이 절망하여 마음이 무너지게 두기 위해서다.
엘프는 높은 가치를 지닌 사냥감이다. 원주민 사냥꾼들은 엘프를 잡아 노예로 부리는 것보다는, 엘프를 구매하기 위해 찾아 온 외지의 노예상에게 파는 것을 선호했다.
그렇다보니 사냥감을 크게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가뜩이나 외발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떨어지는데, 몸에 흉터까지 남겼다가는 값이 너무 떨어져 버린다.
“...아아...!”
절뚝거리며 달리던 엘프는 탄식을 흘리며 발을 멈췄다. 정신없이 달리기만 한 지라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원주민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대한 공포로 이성이 흐려진 것이다.
그렇게 절벽까지 몰려버렸다. 엘프는 덜덜 떠는 눈으로 절벽의 아래를 내려 보았다. 까마득한 높이. 아래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엘프는 절뚝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엘프의 주변에 길쭉한 창이 내리 꽂혔다.
“꺄악!”
엘프는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원주민 전사들이 퇴로를 막았다. 그들을 태운 바칸 울프들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서 으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흉측한 가면을 쓴 원주민들이 낄낄 웃으며 엘프에게 손짓했다. 저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잡히라는 뜻이다. 엘프는 떨리는 입술을 악물었다.
저 야만족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처음 맞닥트렸을 때부터 몇 번이나 애걸했지만, 저들은 뜻 모를 원주민어만 떠들어댔다.
엘프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바칸 울프의 등에서 내려 온 원주민들이 엘프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창을 내려놓고, 보란 듯이 양 팔을 활짝 벌렸다.
둥그런 가면. 쭉 찢어진 눈구멍. 엘프는 그 안에서 탐욕과 성욕이 번들거리는 눈을 보았다. 그 시선이 엘프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엘프는 터지는 비명을 삼키고서,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
철벅철벅.
크리스티나는 바짓단을 잡아 올리고서 빨래를 밟았다. 그녀는 성녀 후보이기 전에는 수도원에 떠맡겨진 고아였다. 덕분에 빨래 같은 잡일은 익숙했다.
“팔자가 참 좋으십니다.”
익숙한 건 맞지만, 즐기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티나는 얇게 뜬 눈을 흘겨 유진을 돌아보았다.
“나도 노는 것은 아니야.”
유진은 낚싯대를 세워놓고 강가에 앉아 있었다. 그런 주제에 낚시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의자까지 깔아놓고 앉아서 마도서를 탐닉하고 있었다.
“마도서를 읽으면 마법을 배우게 되고, 마법을 배우면 내가 강해지지. 내가 강해지면 앞으로의 여정에서 위험이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말이 참 기십니다.”
“이미 몇 번이나 말해줬는데도 네가 따져 묻잖아. 그런 고생하기 싫었으면 날 따라오지 말았어야지.”
유진은 책장을 넘기며 이죽댔다.
“내가 놀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너만 부려먹는 것도 아니고. 역할분담, 몰라?”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독서에 집중해 주십시오.”
“너한테 계속 빨래 같은 잡일 시킨 것도 아니고. 사냥이나 싸움은 내가 하고, 빨래 말려주는 것도 내가 하지. 네가 하는 건 빨래랑 요리 정도? 그마저도 요리는 맛이 없어서 거의 내가 하고 있고.”
“독서 안 하십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네 요리는 문제가 너무 많아. 나는 간을 세게 한 것이 좋다고 몇 번을 말해? 고기는 너무 태우지 말고 살짝 핏물이 배어나오는 정도가 좋다고.”
“유진님의 몸을 생각해서 하는 것입니다.”
“네 취향대로 하는 것이겠지. 나는 존나 건강해서, 향신료 팍팍 치고 핏물 뚝뚝 떨어지는 고기 먹는다고 병 따위 안 걸려.”
크리스티나는 더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 숲에 들어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여정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성격이 얼마나 드센지를 잘 파악하게 되었다.
특히 언쟁에서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이길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성직자로서 자애로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노라 생각했지만, 유진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성직자고 뭐고 저 뒤통수를 한 대 갈겨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 책에는 세탁에 관한 마법은 적혀있지 않은 겁니까?”
“신성마법에는 세탁 마법 없냐?”
“신성마법에 왜 세탁에 관한 마법이 있어야 합니까.”
“그럼 나는 왜 세탁 마법을 익혀야 하냐? 내 손으로 세탁할 일이 얼마나 된다고.”
거짓말이었다. 아롯에서 익힌 다양한 마법들 중에는 세탁 마법도 있었다. 그냥 심심풀이로 크리스티나를 골려먹는 것 뿐이다. 지금 와서 사실 세탁 마법을 쓸 줄 안다고 말한다면, 크리스티나에게 귀싸대기를 한 대 얻어맞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게다가 지금 세탁하는 것은 크리스티나의 사제복이었다. 유진이야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망토 안에 넉넉히 넣어두었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렇지 못했다.
크리스티나도 공간마법이 걸린 가방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가방은 흑암의 망토처럼 수납공간이 넉넉하지 못했다. 숲을 돌아다니다보면 옷은 하루도 가지 못하고 지저분해지고, 크리스티나는 말끔해야 할 사제복에 오물이 묻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다른 옷을 입으면 되잖아.’
‘성직자가 사제복을 입지 않는다면 무엇을 입는단 말입니까? 특히 유진님과의 동행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니, 사제복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
아주 이해가 안 되는 말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아니스도 여행을 다닐 적에는 사제복을 고집했다.
‘헬무드에서는 아무거나 주워 입었지만.’
어쨌건, 저 차가운 물에서 맨발로 빨래를 하는 것은 크리스티나가 자초한 일이란 말이다. 그러니 유진은 세탁 마법을 써주지 않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빨래가 끝나면 젖은 옷을 바람의 정령으로 말려주니, 그 정도면 충분히 도리를 다 한 것 아니겠는가.
“...음.”
유진은 마도서를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낚싯대가 반응해서는 아니었다. 유진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 상류 쪽을 보았다.
“몬스터입니까?”
크리스티나는 물을 흠뻑 머금은 로브를 쥐어짜다 말고 유진을 돌아보았다. 이 숲은 몬스터가 득실거리고, 강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세탁을 하고 있다 보면 강 속의 몬스터가 덮쳐오곤 한다.
“아니.”
유진은 낚싯대를 들며 대답했다.
“월척이네.”
히죽 웃으며 낚싯대를 휘둘렀다. 길게 풀려나간 낚싯줄이 유진의 마나를 머금는다. 유진은 낚싯줄을 뜻대로 움직여,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부유물을 붙잡았다.
“...엘프?”
크리스티나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낚아 올린 엘프를 강변에 내려놓았다. 남쪽의 사마르 대수림은 언제나 후덥지근하지만, 물은 차갑다. 유진은 창백하게 질린 엘프의 몸을 내려 보다가 손을 뻗었다.
엘프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유진은 우선 바람의 정령을 불러서 젖은 옷을 말리고, 마법으로 불꽃을 일으켰다.
“크리스티나.”
“네.”
크리스티나도 빨래를 하다 말고 엘프의 곁으로 다가왔다. 환한 빛에 어린 양손이 엘프의 몸을 쓸어내린다. 그러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혈색이 돌아왔다.
‘...노예 출신이군.’
옷을 들춰보니, 배꼽 부근에 낙인이 새겨져 있다. 노예제도는 전생부터 폐지된 법이지만, 그 시절에도 불법 노예는 넘치도록 많았다.
“...발이...”
“잘린 지 오래 됐어. 스스로 자른 거겠지.”
유진은 엘프의 왼쪽 발을 힐긋 보며 말했다. 절단면이 거칠게 뭉개져있는데,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싸구려 의족에 살이 쓸린 것이리라.
“노예상에게 탈출한 것일까요?”
“깨워보면 알겠지.”
처지는 안쓰럽지만, 이 우연한 만남은 유진에게 있어서는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유진은 엘프의 어깨를 잡고서 가볍게 몇 번 흔들었다.
“커읍.”
엘프는 눈을 뜨기 전, 숨을 쿨럭거리며 물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몸을 뒤틀어대며 신음소리를 냈다.
“너무 움직이지 마.”
급한 치료는 해두었지만, 엘프의 몸 상태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전신 타박상과 골절... 구타에 의한 것은 아니다. 아마 높은 곳에서 물가로 떨어지며 입은 부상 같았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지 말라는 말부터 할 걸 그랬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엘프의 몸을 놓았다. 눈을 뜬 엘프는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번갈아 보다가, 바닥을 기며 뒤로 물러섰다.
“다... 당신... 당신들. 누구? 야만인?”
“기껏 건져줬는데 못하는 말이 없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별 생각 없이 투덜거린 것인데, 엘프는 즉시 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용서를 빌었다. 크리스티나는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유진을 힐긋 보았다.
“유진님의 얼굴과 언동이 두려운 모양입니다.”
“내 얼굴이 뭐? 엘프만큼 아니어도 어디 가서 꿀릴 얼굴은 아닌데.”
“...아하하!”
크리스티나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엘프는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양손을 모아 싹싹 비볐다.
“네, 네. 나으리의 얼굴은 굉장히 훌륭하십니다. 엘프 따위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멋지십니다. 마, 마님도 아름다우십니다.”
“...마님?”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얘 왜 이래? 정신이 좀 이상한가?”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엘프는 비는 것을 멈추고 땅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네... 네. 저는 정신이 이상, 머, 머리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 제가 어리석거나,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여도 용서해 주세요...”
“얘 좀 진정시켜 봐.”
유진은 즉시 크리스티나의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바구니에 가득 담긴 젖은 빨래를 가리켰다.
“아름다운 종족이시여. 제 이름은 크리스티나. 빛의 신을 섬기는 사제입니다. 저기 옷을 말리고 있는 남자는 절 따르는 시종이자 호위무사이니,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종은 무슨.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바람의 정령을 불러들였다. 정령이 일으킨 바람이 젖은 옷을 말리기 시작했다.
“저희는 당신을 위협하고, 해를 끼칠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행한 일을 겪은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저... 정말인가요...?”
“네, 물론입니다. 곤경에 빠진 이를 구하고 돕는 것은 성직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만약 세상에 용사가 있다면, 그도 분명 정의롭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진을 힐긋 보았다. 대놓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유진은 빳빳하게 마른 옷가지들을 대충 접어두며 코웃음을 쳤다.
“...제... 제 이름은... 나리사라고 합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신세한탄이 시작되었다.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나리사는 탈주 노예였다. 그녀의 주인은 키옐 제국의 부호로, 10년 전에 암시장에서 나리사를 구매했다.
“네 나이가 몇인데?”
“130살입니다...”
“인간 나이로 치면 13살이라는 말이군.”
“인간 나이?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크리스티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엘프의 수명이 대충 1000년 쯤 되잖아. 평범한 인간도 무병장수하면 대충 100년을 사니까, 엘프의 수명을 인간의 수명으로 치환하면 100년을 10년으로 치는 거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너무 말도 안 되는 논리라 비웃을 수도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고, 나리사는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모았다.
“네... 네. 저는 엘프의 나이로는 130살이지만, 인간의 나이로 치면 13살입니다...”
“그래서 네 고향은 어딘데? 사마르에서 태어났나?”
“...키옐의 오돈 산이 제 고향입니다.”
“거기서도 엘프가 살아?”
“지금은... 살지 않습니다.”
나리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사정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산속 깊은 곳에서 엘프가 숨어 사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그렇게 숨어 사는 엘프가 사냥꾼에게 붙잡혀 노예가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아... 가엾게도...”
크리스티나는 실로 오랜만에 성녀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양팔을 뻗어 나리사를 안아주며, 바들거리며 떠는 등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제 발목을 자르고 탈출하여, 이 숲까지...”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지나쳤다. 그녀는 나리사를 보듬으면서 유진을 힐긋 보았다. 별 말은 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고, 유진은 피식 웃었다.
엘프는 강인한 종족이다.
그들은 인간과는 달리 모든 정령과 친화력을 갖고, 따로 수행하지 않아도 마나를 느낀다. 근육도 인간보다 유연하고 힘이 넘친다.
사냥꾼들은 자기가 사냥하려는 종족에 대해서 잘 알고,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서 사냥에 임한다.
이 숲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냥꾼으로 태어났고, 사냥꾼으로 자라왔다. 높다란 절벽. 아래는 강. 평범한 인간인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만한 높이에서 추락한다면 물은 바위만큼 단단하게 변한다.
인간이라면 죽겠지만,
엘프는 죽지 않는다.
몸이 튼튼해서가 아니다. 정령친화력은 말 그대로 정령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다. 엘프가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것은, 바람에 섞인 정령이 엘프의 등을 떠밀어주기 때문이다.
이번 추락도 그랬다. 바람이, 강물이 엘프의 몸을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사냥꾼들은 엘프의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가룽 부족이군.”
유진은 큼직한 바위에 앉아서 사냥꾼들을 맞이했다. 대수림에 들어온지 한 달. 무턱대고 떠돌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몇 번인가 숲을 횡단하는 상인들과도 마주쳤고, 다른 부족의 원주민들과도 마주쳤었다.
썩 즐거운 만남은 아니었다. 상인들은 크리스티나의 외모를 희롱했고, 원주민들은 호위 없이 둘 뿐인 외지인들을 노예로 삼으려 들었다.
그들 모두 등신 같은 행동의 대가는 톡톡히 치렀다. 그 과정에서 유진은 숲에 사는 여러 부족들에 대해서 들었다.
숲이 깊어질수록 원주민들은 야만적이고 흉포하며, 외지인을 배척한다. 가룽은 그런 부족이다.
놈들은 외지인을 붙잡아 노예로 삼는다.
붙잡은 외지인이 속 편히 관광 온 부호나 귀족이라면 거액의 몸값을 받고 넘긴다.
그마저도 운이 좋은 경우다. 운이 없다면 잡아먹힌다. 원주민 부족 중에는 식인 풍습이 있는 부족이 몇 있는데, 가룽도 그랬다.
“외지인.”
커다란 늑대의 등에 탄 원주민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놈은 얼굴에 쓴 가면을 젖히고서 유진을 빤히 보았다. 원주민의 얼굴은 흉터와 문신으로 가득했다.
“여기서 무얼. 하나?”
험악한 외모와는 달리 공용어는 할 줄 아는데, 말이 어눌했다.
“뭐하기는. 앉아서 쉬고 있지.”
“귀족? 어디의?”
“알아서 뭐하게.”
“냄새.”
원주민이 코를 킁킁거렸다. 유진은 킬킬 웃으며 망토를 들춰보였다.
“그 정도로 냄새가 나나?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깔끔한 편이라서 매일 몸을 씻는단 말이야.”
“엘프의 냄새.”
“내가 엘프로 보이냐?”
“외지인.”
원주민은 뒤로 들췄던 가면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가룽의 사냥감. 빼앗는 건가?”
“사냥감에 주인이 어디 있어? 먼저 잡은 놈이 주인이지.”
유진은 들췄던 망토를 내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대한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사마르
바칸 울프. 대수림에 사는 저 늑대 몬스터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하다. 게다가 길쭉한 발톱의 안쪽에는 마비독을 분비하는 독선까지 있다.
먼저 발톱으로 할퀴고, 움직임이 굳어가는 사냥감을 물어 죽이는 것이 바칸 울프의 사냥법이다.
대수림의 원주민들은 몬스터를 길들일 줄 안다. 가룽 부족도 그랬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사육해 온 바칸 울프들은, 제 등에 원주민 전사들을 태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길들인 바칸 울프는 복잡한 숲을 평지처럼 달리며, 전사들이 노리는 사냥감에 발톱과 이빨을 박아 넣는다.
늑대들이 달려들었을 때. 유진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선두를 달리던 늑대가 훌쩍 뛰어올라 유진을 덮친다. 놈은 이빨보다 발톱을 먼저 휘둘렀다.
콰득!
허공에서 피의 비가 내렸다. 지면에서 불쑥 솟아난 바위 송곳이 늑대의 몸을 관통했다. 늑대가 고통스런 울음을 터트린다. 그 위에 타고 있던 전사는 죽어가는 늑대의 등을 박차고 유진에게 뛰어들었다.
“캬악!”
놈은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유진에게 창을 내리찍었다. 유진은 아직 무기를 뽑지 않았다. 그는 맨손을 불쑥 뻗어 허공에서 창을 붙잡았다.
그렇게 끌어들여, 원주민의 안면에 주먹을 처박았다. 비명은 없었다. 유진의 주먹은 일격에 안면을 함몰시켰다. 유진은 나뒹구는 전사를 무시하고, 뺏어 쥔 창을 양 손으로 들었다.
창날이 번들거린다. 금속의 빛깔은 아니었다. 바칸 울프의 마비독을 바른 창. 유진은 피식 웃으며 바위에서 껑충 내려왔다.
늑대들은 더 달려들지 않고 멈춰 있었다. 콰당! 바위 송곳이 흙이 되어 무너지고, 꿰뚫렸던 늑대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직 숨이 붙어 있지만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마법사?”
전사들 중에서 공용어를 쓸 줄 아는 놈은 한 명 뿐인 듯 했다. 놈은 두 눈을 얇게 뜨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너. 가룽의 전사. 죽였다.”
“아직 살아있을 걸?”
사실이었다. 안면이 움푹 들어가기는 했지만, 원주민은 아직 살아있었다. 놈은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아니. 죽였다. 더 싸울 수 없다.”
놈은 어눌한 공용어를 내뱉으며 다른 전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늑대에 타고 있던 전사들이 땅에 내려온다. 유진은 대기 중의 마나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가룽 부족. 원주민 전사라고 해서 우습게 볼 상대는 아니다. 넉넉한 호위를 대동한 상단과 귀족들을 습격해대는 만큼, 부족 전사들의 실력은 뛰어나다.
우우...
우우우...
불길한 소리. 지면이 꿈틀거린다. 전사들의 몸이 낮아진다. 유진은 땅을 힐긋 보았다.
‘땅의 정령이군.’
사마르의 원주민들은 주술과 정령을 다루는 것에 능하다. 울창한 숲에서 태어나 자란 만큼 숲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처음처럼 땅을 마법으로 주무르는 것이 귀찮게 되었다. 땅은 마나로 펼친 마법보다는 정령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다.
‘...아니. 땅의 정령뿐만이 아니야.’
다른 것이 섞여 있다. 마나는 아니고... 유진의 입술이 뒤틀렸다.
“밥맛없게 구네.”
이 느낌은 흑마법과 비슷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저들은 마족이나 흑마법사처럼 마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주술.
늑대들의 몸이 축 늘어진다. 몬스터의 혼이 전사들에게 깃든다. 전사들의 몸이 꿈틀거리고, 불길한 소리가 거세어진다. 유진은 퉤 침을 뱉으며 창을 앞으로 들었다.
파악! 전사들이 땅을 박찬다. 놈들의 움직임은 인간에 몬스터가 반쯤 섞인 것 같았다. 혼을 덧칠하는 것도 역겨운데, 저 움직임은 유진으로 하여금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멜의 시체에 라이칸슬로프의 혼을 처넣은 데스나이트.
ㅡ빠아앙! 대기가 찢어진다.
유진이 던진 창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덤비던 전사의 몸을 터트렸다.
*
강가로 돌아왔을 때, 나리사는 크리스티나의 옷을 대신 개고 있었다.
“왜 쟤한테 시키는 거야?”
“제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은혜를 갚고 싶다며 멋대로 시작한 것입니다.”
“멋대로 했으면 하지 말라고 말하면 되는 거잖아.”
“은혜를 갚겠다며 자발적으로 나섰는데, 제가 그만두라 한다면 나리사님의 난처하실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갖다 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말끔한 유진의 모습을 살피며 방긋 웃었다.
“어느 부족이었습니까?
“가룽.”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나리사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가룽이라면 작은 부족이 아닙니다. 전부 죽인 겁니까?”
“그럼 몇 명만 죽일까? 나 강하니까, 더 죽고 싶지 않으면 쫒을 생각 말라고 경고하고?”
“경고한들 듣지 않았겠지요.”
“그렇겠지.”
유진도 불필요하고 귀찮은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충돌하지 않고 좋게 풀고 싶었다. 하지만 원주민 전사들은 설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가룽 부족은 엘프의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말하면, 가진 돈을 죄다 빼앗은 뒤 몸값까지 받아 팔아넘길 놈들이다.
“뭐 이 지역에서 계속 지낼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뭐래?”
“직접 물어보지 그러십니까?”
“쟤 내 눈도 잘 못 마주치잖아.”
“그건 엘프의 귀가 너무 많은 것을 듣기 때문이겠죠.”
크리스티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웃었다. 덩달아 일어선 나리스는 유진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강하고 멋지신 분. 제가... 제가 거, 겁이 너무 많아서. 죄송합니다. 제 귀가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
“듣지 말아야 할 것은 또 뭐야? 내가 저기서 뭐 못할 말이라도 했냐?”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텐트로 다가갔다. 이 커다란 텐트는 마법으로 간편화 된 아티펙트라, 기둥에 달린 버튼을 한 번 누르면 깔끔하게 접힌다.
부피는 크지만 유진에게는 곤란할 것이 없었다. 유진은 망토의 안에 텐트를 집어넣고서 나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뭘 들었는데?”
“비... 비명과... 살려달라는...”
‘사, 살려다오.’
‘아까는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면서 센 척 하더니. 갑자기 목숨 구걸은 왜 하는 거냐? 멋없게.’
‘나는... 가룽의 전사. 돌아가지 않으면. 추격자가... 올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은 곳에 우리의 동료도 있다.’
‘널 살려 보내도 추격자는 올 거 아냐. 내가 너희 사냥감을 빼앗았으니까. 그러니 지금 널 죽여 두면 날 잡으러 올 놈이 한 명 줄어드는 것이니까, 지금 죽이는 것이 낫겠지? 안 그래?’
“저... 저 때문에... 곤란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곤란하다기 보다는 귀찮은 거지. 그리고 네가 도와달라고 했냐? 강물에 둥둥 떠내려 오는 걸 내가 멋대로 건져 올리고, 네가 부탁하기 전에 내 마음대로 걔들 죽인 거잖아.”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나리사가 개던 옷가지들도 망토에 집어넣었다.
“유진님이 업으실 겁니까?”
“업으라니, 또 뭔 말 같지도 않은 소...”
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나리사를 쳐다보았다. 썩둑 잘린 왼발. 나리사는 유진의 시선에 어깨를 움츠리면서 일어섰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외발로도 잘 뛸 수 있습니다. 가, 가다가 쓸만한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다면 목발로 삼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저기 제발, 나한테 제발, 그 빌어먹을 제발이라는 말 좀 제발하지 말아 줄래?”
“히... 히익... 죄, 죄송합...”
“죄송한데 제발, 그 죄송하다는 말도 제발 좀 하지 말아줄래?”
유진은 투덜거리며 바람의 정령을 불러들였다. 갑작스레 나타난 바람이 제 몸을 둥실 띄우자, 나리사는 당황하여 허공에서 몸을 허우적거렸다.
“도중에 화장실 가고 싶으면 말해. 괜히 참다가 싸지 말고.”
“네... 네.”
나리사는 그렇게 대답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녀도 엘프 답게 정령술과 마법은 조금 할 줄 알았다.
다만, 엘프는 평화를 지향하는 천성으로 선천적인 자질을 썩히는 종족이다. 13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았지만, 나리사의 정령술과 마법은 초보자 수준을 조금 웃도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엘프는 그런 종족이다. 긴 세월을 살되, 그 세월의 대부분을 숲에서 산새와 지저귀고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에 소모하는 종족.
그래도 나이 빨이라는 것이 있기는 해서, 수백 년을 산 엘프의 대마법사는 인간 대마법사를 우습게 볼 만큼 강하다.
“저어... 저... 유진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엘프 나이로 치면 200살쯤 되겠군.”
“네...? 아... 아. 네,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이렇게나 정령을 자유로이 다루시고... 그 흉포한 전사들을 겁에 질리게 할 만큼 강하시다니... 조, 존경스럽습니다.”
떨림이 조금 멎었다. 나리사는 선망 어린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크리스티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엘프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멋지고 훌륭한 얼굴에... 이제는 존경까지? 유진님이 평생 들을 칭찬을 오늘 다 듣는 것 같으십니다.”
“아닌데? 나는 어려서부터 저런 칭찬 많이 들었어. 얼굴 잘 생겼다는 말도 여러 번 들었고.”
전생에서 하멜의 얼굴로는 그다지 들은 적이 없었지만, 환생한 얼굴로는 정말 여러 번 들어보았다. 유진 본인도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이런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새끼, 잘 생겼네.
“설마 유진님. 나리사님이 방해된다고 도중에 버리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저는 유진님이 그 정도로 인격이 파탄 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버릴 거면 줍지도 않았어. 좋은 명분이잖아? 떠돌이 엘프를 보호하며 엘프 마을로 인도하는 거. 마을을 지킨다는 수호자가 아무리 성격이 지랄 맞아도, 동족마저 내치지는 않겠지.”
그 대답에 나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나리사.”
“네, 네에.”
“너, 세계수가 있다는 엘프의 영지를 찾아 온 거냐?”
“그 이유도 있지만... 도시보다는 대수림에서 숨어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마, 마병도 걱정되고...”
“마병에 걸린 것 같지는 않은데?”
“네... 저는 아직 걸리지 않았지만,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나리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마병. 엘프만이 앓는 병. 엘프의 영지에서 지내던 세냐가 세상에 나온 이유도 그 마병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엘프가 마병에 걸리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마왕이 다섯 명 모두 살아있던 300년 전에는 수많은 엘프들이 마병에 걸려 죽었다. 그건 영지에서 살아가던 엘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세냐는 엘프의 영지를 박차고 나왔다. 다섯 마왕을 모두 죽이고, 엘프가 더 이상 마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마병은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는 병입니다.”
크리스티나가 중얼거렸다.
“신성마법의 빛으로도 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유폐의 마왕도 마병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는 병’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마병을 없애기 위해서는 마왕과 마족들이 다 같이 자살해야 할 테니.”
유진은 심드렁히 대답하며 나리사를 돌아보았다.
“너희 부모님도 대수림 바깥 출신이신가?”
“네...”
도움이 안 되는 군. 차마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지만, 유진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우지차는 가룽 부족의 대전사다.
석상이 연상될 정도의 거구. 빡빡 민 머리와 근육질의 몸뚱이에는 흉터와 문신이 가득하다. 우지차는 차가운 분노를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방적이군.”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의 전사와 바칸 울프. 모두가 일방적으로 도륙이 났다. 우지차는 천천히 걸으며 시체들을 살폈다.
곧, 우지차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이미 죽은지 며칠 지난데다 몬스터들에게 훼손되기도 했지만, 시체들에 남은 상처가 죄다 달라서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놈은 주먹에 맞아 죽었고, 어떤 놈은 검에 베였으며, 어떤 놈은 창에 쑤셔지고, 어떤 놈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터졌고, 어떤 놈은 대형몬스터에게 쥐어 짜인 것처럼 으깨져 죽었다.
하지만. 시체에 남은 흔적과는 달리 땅에 남은 발자국은 원수가 한 명이라 일러주고 있었다.
“한 명이군.”
그렇게 평가한 것은 우지차 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이 솔솔 잘 통하는 큼직한 셔츠를 입은 남자가 우지차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가룽 부족의 전사들이... 1명을 당해내지 못하고 사냥감을 빼앗겼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다.”
우지차의 대머리에 핏줄이 돋는다. 그는 살벌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되찾아 올 거다.”
“당연히 그래야지. 엘프를 선물로 준다는 말에 우리 도련님이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아?”
“엘프를 원한다면. 다른 엘프를 줄 수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시장이 열린다. 아마 이번에도 엘프가 한 둘은 나올 거다.”
가룽 부족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여러 부족들이 참가하는 노예시장.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그 시장에는 노예로 영락한 부족의 죄인들, 길들인 몬스터, 그리고 노예로 삼은 외지인들이 거래된다.
그 시장을 이용하는 것은 사마르 원주민들뿐만이 아니라, 부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외지의 귀족이나 상인들도 찾아온다. 그들의 목적은 노예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흔치 않은 구경거리를 관람하는 것이다.
“다른 엘프는 안 돼. 우리 도련님은... 그러니까... 조금 취향이 유별나셔서. 몸 어디가 썩둑 잘려나간 엘프에 집착하신단 말이야.”
남자는 민망하단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약간 그... 결손 페티시? 그런 쪽이라고. 눈이 하나 없거나, 팔다리가 잘리거나...”
“원한다면 잘라서 주지.”
“아니 아니, 안 된다니까. 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해봤겠어? 도련님은 그런 인위적인 것에 흥분하지 않으신다고. 그냥, 원래 잘려 있어야 돼. 물론 그 외발 엘프도 처음부터 외발로 태어난 것은 아니겠지만, 도련님은 자신에 의해 발이 잘린 엘프 말고 그냥 발이 잘린 엘프를 원하신다고.”
“미친놈이군.”
우지차는 그 도련님의 괴상망측한 취향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시장에 나온 엘프는 돈을 주고 사야 하잖아. 뭐 하러 헛돈을 써? 그 외발 엘프를 잡으면 되는데.”
“블론. 재촉하지 마라.”
“재촉이 아니라... 재촉처럼 들렸어? 그럼 그런 거로 하지 뭐.”
블론은 투덜거리면서 시체를 툭 걷어찼다.
“그보다... 실력이 대단한데. 일단, 기사 출신은 아닌 것 같아. 용병인가? 용병이 혼자서 여기까지 들어 와 떠돌 이유가 뭐가 있지?”
“사냥꾼일 거다.”
“이 깊은 숲까지 혼자 들어올 정도면 평범한 사냥꾼은 아니겠지.”
“죽은 지 이틀은 지났다. 아직 쫓아갈 수 있다.”
우지차는 그렇게 말하고서 뿌득 이를 갈았다.
“지루한데 잘 됐어. 같이 가자고. 아, 우리 둘만 가는 건 아니지? 너희 전사들을 죽인 건 한 명이지만, 놈에게 동료가 더 있을 지도 몰라.”
“겁먹었나?”
“하하! 시무인의 십이걸(十二傑) 중 하나인 내가?”
블론은 껄껄 웃으며 우지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냥 신중한 편이 좋다는 거지.”
꿈
숲의 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사마르에 들어 온 지 한 달 동안,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밤마다 번갈아 불침번을 섰다.
두 명 뿐이었던 일행에 나리사가 더해졌다. 엘프의 예민한 청각은 주변을 경계하기에 충분하지만, 위급한 상황에 제 한 몸 지키지 못할 나리사를 불침번으로 세울 수는 없었다.
그러니 오늘 밤도 유진과 크리스티나 둘 만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유진은 제 나름대로 크리스티나에게 존중과 배려를 베풀고 있었다. 으레 불침번은 초번과 말번이 편한 법. 유진은 매일 크리스티나에게 초번과 말번을 양보하고, 가장 고된 중간 시간을 부담했다.
“유진님.”
자그맣게 부르는 이름. 그것만으로도 유진은 눈을 떴다. 그는 피로한 기색 없이 몸을 일으켰다. 들춰진 텐트의 입구 너머에 크리스티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전달사항은?”
“없습니다.”
숲의 밤은 몬스터가 배회한다. 본래라면 야영 중에 몇 번이고 몬스터가 습격해 와야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결계는 몬스터의 이목에서 야영지를 감춘다.
그렇다고 결계를 맹신하여 불침번을 서지 않을 수는 없었다. 유진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것에는 철저했다. 용병으로 떠돌아다닐 적, 등신 같은 용병 동료들이 불침번을 건성으로 하다가 위험에 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오늘은 꽤 몸을 움직이셨는데. 저는 그리 피곤하지 않으니, 오늘은 더 주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아까 가룽 부족의 전사들을 치우고 온 것을 신경쓰는 모양이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걱정 어린 질문에 피식 웃었다.
“피곤할 만큼 움직이지도 않았어. 5시간 뒤에 깨울 테니까 걱정 말고 잠이나 자.”
크리스티나는 더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그녀가 유진에게 익숙해지지 않았을 적에는 이런 문제를 두고서 유진과 몇 번이나 언쟁을 벌이곤 했었다.
교훈은 얻었다. 이런 문제에서 유진은 물러서지 않는다. 상대의 배려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기준에 엄격한 것이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크리스티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물러섰다. 유진은 붕 뜬 머리를 대충 손으로 누른 뒤, 텐트 밖으로 나왔다.
텐트를 넉넉히 챙겨오기를 잘했다. 유진은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텐트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모닥불 앞에 앉았다. 맞은편의 텐트에서는 나리사가 자고 있다.
“...크흠.”
유진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망토를 들췄다. 이미 몇 번을 완독한 마도서. 아롯을 떠날 적에 로베리안에게 받은 마도서다.
‘스승님께 편지라도 한 통 보낼 걸 그랬나.’
로베리안을 스승으로 여기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멜로 살았던 전생의 나이를 포함해도 로베리안의 나이가 더 많았다. 그건 유진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이유였다.
그렇게 독서를 시작하고, 시간이 꽤 흘렀다. 숲의 밤은 조용하지는 않다. 벌레 우는 소리도 시끄럽고, 바람이라도 불면 울창한 나뭇가지들이 몸을 떨어댄다. 조금 멀리서는 몬스터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크흐흠.”
유진은 다시 한 번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리스티나는 숲에서 야영을 한 첫 날부터 잘 잤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티나는 진즉 잠에 들어서, 그녀의 텐트에서는 차분한 숨소리만 들려온다.
“...나한테 뭐 볼 일 있냐?”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책을 덮었다. 그 말은 이미 잠든 크리스티나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었다. 맞은편의 텐트가 살짝 흔들리고, 입구가 들춰졌다.
“그... 죄... 죄송...”
“죄송이라는 말 하지 말라니까.”
나리사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유진은 괜스레 모닥불에 장작을 밀어 넣었다.
“숲이 시끄러워서? 아니면, 여러 일을 겪다 보니 무서워서 잠이 안 오나?”
“...”
“혹시 이상한 걱정이라도 하는 걸까 싶어서 말해두는데. 자고 있는 널 버리고 갈 생각은 없어. 나도 마냥 호의로 널 챙긴 것은 아니라고. 네가 필요하니까 챙긴 거지.”
“...그... 그렇다는 것은... 역시...”
나리사의 눈이 흔들린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저는 유진님이라면 상관없어요.”
“뭐?”
“이미 각오도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아, 아앗. 각오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 이니까... 그래서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
“저기, 잠깐,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각오? 어쩔 수 없는 것? 기다리고 있었? 다고? 뭘?”
“...다만... 제 몸에는 흉터도 여럿 있고, 다리도 성치 않은데다... 유, 유진님의 기준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어요.”
“네 몸에 흉터가 있는 것이 왜 내 기준에서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지...?”
유진은 뺨 근육을 경련시키며 물었다. 그러자 나리사는 흠칫 몸을 떨더니, 몇 번인가 숨을 골랐다.
“...유진님은 흉터가 많은 몸을 선호하시는 것인가요...?”
유진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나리사가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각오하였는지를 짐작했다. 노예살이를 하며 험한 꼴을 겪어왔을 테니 이해가 되지 않을 일도 아니었다만, 유진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야. 난 네 텐트에 기어들어갈 생각도 없고, 은혜를 몸으로 갚으라고 밀어붙일 생각도 없어.”
“...네...?”
“대체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어린놈의 자식이 못하는 말이 없어요 아주.”
그 말에 나리사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어린놈의 자식이라니. 나리사의 나이는 130살이다.
“물론 네가 나보다 오래 살기는 했지만, 넌 인간 나이로 계산하면 13살이라고.”
“아... 네에...”
나리사는 잠시 유진을 응시하다가, 자세를 바로 하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유진님.”
“감사할 것 없다니까. 나도 네가 필요해서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몇 번을 말해?”
“...엘프 마을의 수호자를 말씀하시는 거죠? 마, 만약 제가 수호자와 만나게 된다면, 유진님께 큰 은혜를 입었다고 꼭 전해드릴게요.”
“당연히 전해야지. 그 수호자라는 자식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 새끼가 날 인간이랍시고 배척하려 들 때에는 네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놈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서 막으란 말이야.”
유진은 그렇게 말해주고서 다시 마도서를 펼쳤다. 나리사는 유진의 무심하면서도 배려 넘치고 정의로운 언행에 선망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얼굴이 잘생기니 엘프의 유혹도 다 받아보는 군.’
따지고 보면 유혹이랄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유진은 대충 그렇게 생각했다.
밤이 지난다. 5시간이 흐른 뒤, 유진은 크리스티나와 교대하고서 자신의 텐트로 기어들어갔다. 굳이 잘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유진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당장 휴식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쉴 수 있을 때 쉬고 잘 수 있을 때 자둬야 한다.
유진은 그런 것에 익숙했다.
*
오랜만에 꿈을 꿨다.
평소에는 꿈을 잘 꾸지 않는다. 자려고 들면 언제나 깊이 잠들고, 깨려고 하면 곧장 깨어난다.
꿈은 정신을 피로하게 만든다. 유진은 꿈을 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행복하건, 불행하건, 평범한 일상이건, 꿈은 현실이 아니다. 유진은 사람이 왜 꿈을 꾸는 지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꿈이 현실과는 어긋나 있다는 것은 알았다.
전생에서.
광란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유폐의 마왕에게까지 가는 여정은 길고 긴 악몽과 같았다. 서열 2위의 대마왕. 그 위치처럼 유폐의 마왕은 강력한 부하들과, 많은 군세를 거느리고 있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는 유폐의 마왕의 부하는 아니다. 마왕이라고까지는 불리지 못했으나, 그 시절에도 누아르 제벨라는 수많은 몽마를 거느린 ‘여왕’이자 강력한 힘을 가진 마족이었다.
유폐의 마왕에게까지 가는 여정 동안, 누아르 제벨라는 몇 번이고 하멜과 동료들을 습격했다. 그녀는 지독하리만큼 끈질겼고,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나타나서 하멜과 동료들의 정신을 무너트리려 했다.
그러한 경험이 있기에, 유진은 꿈을 경계한다. 악몽을 혐오한다. 몽마를 증오한다. 누아르 제벨라의 공격은 살육과 참혹과 광란의 마왕에 버금갈 만큼 일행을 괴롭혔고, 어떤 면으로는 마왕과 싸우는 것보다 역겨웠다.
‘...이건...’
유진은 지금의 꿈에서 강렬한 이질감을 느꼈다.
자각몽. 유진은 지금 자신이 꿈 속에 있음을 인지했다. 하지만 지금의 꿈은 꿈이라 인지되되, 유진의 의지로 개변되지 않았다. 꿈속의 유진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존재하고만 있었다.
‘...몽마의 습격?’
의지대로 되지 않는 꿈. 정신이 오싹거린다. 전생을 그대로 기억하는 유진의 정신력은 어지간한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지하지 못한 새에 꿈이 만들어졌다. 이만큼이나 꿈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몽마, 그것도 고위 몽마일 터였다.
‘꿈... 언제부터? 나는...’
유진은 당황하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300년 전 하멜 다이너스의 환생. 유진 라이언하트. 제하드 라이언하트의 아들이자, 길레이드 라이언하트의 양자. 적색마탑주 로베리안의 제자.’
기억에 혼선은 없다.
‘이 꿈은... 몽마의 공격과는... 달라.’
공격이 아니다. 몽마의 공격과 같은 불쾌한 끈적거림은 없다.
꿈이 흔들린다.
‘아.’
처음 보는.
그럼에도 왠지 낯이 익은 풍경이 만들어진다. 널따란 지하 공동. 근육질의 거구가 제 몸의 몇 배는 될 법한 동상을 짊어지고 있다.
‘이곳이면 된다.’
‘되기는 뭐가 된다는 겁니까? 중앙은 거기서 조금 더 옆으로, 아니, 뒤로... 세냐. 어떻습니까?’
‘조금... 흑... 오른쪽... 흐윽... 응... 거기, 거기야.’
‘...놀라운 일이다...! 이 깊은 지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하멜, 하멜! 너인가? 네가 와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인가? 울지 마라, 하멜! 우리는, 나는 너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모론, 제발, 등신 같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의 대가리 위에 떨어지는 것은 비가 아닙니다. 세냐의 눈물이란 말입니다.’
‘과연... 비 치고는 너무 짜다고 생각했다.’
‘먹지... 먹지 마, 등신 새끼야. 왜 내 눈물을 받아 처먹고 있어?!’
‘울지 마라, 세냐. 하멜도 네가 우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하멜... 하멜, 개새끼...! 왜 그렇게 뒈진 거야? 왜...! 주, 죽지 않을 수 있었잖아. 그냥... 그냥 돌아갔으면...’
‘...세냐. 하멜은 나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전사였다. 나 모론보다 대단한 전사였다. 하멜은, 전사로 죽고 싶었던 것이다.’
‘전사로 죽고 싶어? 지랄하지 마, 모론...! 죽으면 그냥 죽는 거지, 전사로 죽으면 뭐가 달라? 전사로 죽지 말고, 그냥 인간으로 살아남으면 되는 거잖아...!’
아.
유진은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보았다. 처음 보는 곳이 아니다. 이것은, 나하마 사막 지하에 있던 하멜의 무덤. 그곳이 처음 만들어지던 때의 광경이다.
모론이 동상을 일으켜 세운다. 아니스는 그 모습을 확인한 뒤에, 발을 질질 끌며 벽으로 다가갔다.
‘하멜, 당신은 자세가 나쁩니다.’
‘뜬금없이 뭐라는 거냐.’
‘보기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배움이 짧은데다 용병생활을 길게 하였으니 이해는 합니다만, 저희와 함께 떠나게 된 이상 당신은 올바르지 않은 자세를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왜냐니... 당신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까? 하멜. 당신의 동료는 신성제국의 인정을 받은 성검의 주인, 용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입니다. 그리고 저는 신성제국의 성녀, 아니스 슬리우드입니다.’
‘그래, 나는 하멜 다이너스다.’
‘왜 내 이름은 말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모론 루하르. 긍지 높은 바야르 부족의 전사이자, 부족장 다락 루하르의 아들...’
‘닥치십시오, 모론.’
‘등신.’
‘하멜...! 당신은 모론에게 말이 너무 심합니다.’
‘너도 방금 모론보고 닥치라고 했잖아.’
‘하지만 저는 모론을 등신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설령 모론이 등신이 맞다 할 지라도, 등신을 등신이라고 직접 부르는 것은 굉장히 큰 결례입니다.’
‘나는 등신이 아니다.’
‘하멜, 당신은 자세만 나쁜 것이 아니라 품행 자체가 나쁩니다. 저열합니다.’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언동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입을 닥치고 있으면 사람들은 당신의 입에 어떤 걸레가 물려있는지 판단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좋지 않은 자세부터 고쳐갑시다.’
‘내 자세가 뭐 어떻다는...’
‘지금도! 다리를 꼬지 마십시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으십시오. 발, 발을 질질 끌지 마십시오. 듣기 싫은 소리가 납니다. 걸을 때도 어깨와 가슴을 펴고... 나이프는... 나이프는! 펜을 쥐듯이 가볍게... 대체 어느 미친놈이 나이프로 도끼질하듯이 고기를 썬다는 말입니까?!’
‘내가.’
옛날, 아니스는 하멜의 품행을 고치겠답시고 한참을 매달리곤 했었다. 무의미한 노력은 아니었다. 언동은 고쳐지지 않았지만, 아니스의 귀찮고 끈질긴 교정 덕에 하멜은 있어 보이는 예절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군 주제에.
지금 아니스는 발을 질질 끌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걸었다. 그녀가 발을 끌 때마다 지면에서 지익, 지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흑...’
운다.
그 아니스가 울고 있다. 언제나 방긋방긋 웃어대며, 사람 속을 박박 긁어대던 아니스가. 그 아니스 슬리우드가 울고 있다!
‘...전지전능하신 빛의 신이시여, 부디... 부디 이 우둔한 어린양을 보호하고 살펴주소서. 안식 뒤의 험난한 여정을 자비와 사랑으로 이끄시고, 어린양이 가는 길에 어둠이 드리워도 빛으로 길을 열어주소서.’
울면서 벽에 기도문을 적고 있다.
‘...생전의 업을 성화로 태워주소서. 고통과 절망이 기다리는 문이 아닌,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천국의 문을 열어주소서. 천국에 들기에 부족한 선행은 부디 제 어깨에 올려주시고, 언젠가의 재회를 같은 곳에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소서.’
우뚝 세운 동상.
모론은 그 앞에 섰다. 놈은 입을 꽉 다물고 하멜의 동상을 올려 보았다. 옷은 왜 벗은 거냐. 더워서? 그래, 사막은 덥지. 더우면 벗어야 해.
모론은 그런 놈이었다. 더우면 벗고, 추우면 입고,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앞에 적이 있으면 달려들고, 적이 얼마나 강하고 위험하건.
‘모론! 막아!’
그렇게 말하면,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달려들어서 막았다.
‘...하멜.’
그러니 지금 모론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슬퍼서인 것이다. 눈물이 날 만큼 슬퍼서. 그래서 우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너와 승부를 가리고 싶었다... 너와 나...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전사인지.’
욕구대로 행동하는 녀석이었지만, 저것만큼은 직접 행동하지 않았다.
모론에게 그것은 지극히 간단하고 당연한 이유였다.
동료니까.
친구니까.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전사인지를 가리려면, 손속에 사정을 두는 일 없이 전력으로 임해야 한다. 그렇게 서로의 기량을 부딪쳐야 한다. 그러다 보면 둘 중 하나는, 어쩌면 둘 모두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그래서 모론은 하멜과 싸우지 않는다.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전사인지를 가려보고 싶다 생각해도, 동료이자 친구인 하멜과 전력으로 싸울 수는 없다.
모론은 그런 녀석이다.
‘나는 너와 싸워 볼 수 없었다. 앞으로도, 싸워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하멜. 싸우지 않았어도 나는 안다. 널 인정한다. 하멜. 너는... 나보다 위대하고, 용감하고, 강한 전사다.’
세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주저 앉아 있다. 그녀는 아까부터, 처음부터 울고 있었다. 지금도 울고 있다. 펑펑 쏟아내린 눈물이 바닥을 적신다.
‘...죽지 않고... 살았으면... 어떻게든 되었어. 하멜. 우리는... 우리는... 행복해 져야 했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우리가 행복해 질 자격이 있었다고...’
평범하게, 남들처럼 결혼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살다가 할머니가 되고 싶어.
‘그거 알아? 하멜... 사람들이 우리 보고 영웅이래. 세상을 구한 영웅. 하하...!’
세냐는 새빨개진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동상을 올려다 보았다.
‘하멜. 너는... 아마 그 말을 싫어할 거야. 너는 개새끼에, 성격도 엿 같으니까. 영웅이라는 말에 쌍욕을 퍼붓겠지. 영웅? 마왕을 다 죽이지도 못했는데 왜 우리가 영웅이야? 하면서.’
세냐는 울면서 웃었다.
‘우리는... 사명을 이루지 못했어.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래, 어쩔 수 없었겠지. 네가 죽어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하멜. 우리를 너무... 원망하지는 마. 지금이 아니더라도, 응, 지금은 불가능하더라도.’
세냐가 주먹을 쥔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할 수 있어. 우리를 부르는 영웅, 그 개 같은 말에 당당할 수 있어. 언젠가는, 네가 바라던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
세냐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러기 위한 약속일 테니까.’
베르무트.
그는 멀찍이 서서 동상을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유진이 잘 알고 있는 베르무트의 얼굴이었다. 세냐는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
‘...그래.’
베르무트가 입을 연다.
‘그러기 위한 약속이지.’
‘...너만이 알고 있는 약속.’
세냐는 책망하듯 중얼거렸다. 그리 말한 주제에, 세냐는 더 이상 베르무트를 노려보지 않았다.
‘...미안해. 베르무트. 내가... 너무... 흥분했어.’
‘...글을 쓰지.’
베르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들었다. 몇 번이고 보았던 공간마법. 활짝 열린 공간의 틈새에서, 큼직한 비석이 떨어진다.
‘무덤에 추모석은 있어야 할 테니.’
하멜 다이너스.
(성력 421~459.)
베르무트가 손을 뻗어, 비석에 하멜의 이름을 저었다. 비틀거리며 일어 선 세냐가 베르무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쭈뼛거리면서 베르무트와 비석을 번갈아 보았다.
‘...그 밑에는 내가 적을래.’
‘그래.’
‘개새끼, 바보, 병신, 얼간이, 쓰레기.’
‘...그것만 적는다면 추모석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 뒤에 각자 적고 싶은 말을 적으면 되잖아.’
‘다음은 나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하멜은 개새끼도 맞고, 바보도, 병신도, 얼간이도, 쓰레기도 맞습니다.’
‘그렇지만 용감했다.’
‘...용감하며 신실했습니다.’
‘...병신 같았지만 현명했어.’
‘...위대했다.’
모두가 추모석에 글을 적는다.
‘...관을 옮기지.’
추모석을 동상 앞에 둔 뒤. 베르무트가 중얼거리며 뒤편에 두었던 관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든다.’
모론이 나섰지만, 베르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들지.’
‘당신 혼자 할 생각은 마십시오. 모두가... 함께 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모론, 엎드려.’
‘왜 엎드려야 하지?’
‘네가 우리보다 훨씬 크잖아. 너랑 같이 드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네가 엎드려서 관을 등에 짊어져. 우리는 옆에서 거들게.’
‘관을 짊어지고 기어가라는 것인가? 전사는 땅을 기지 않는...’
‘하멜을 위해서 그 정도도 못해?’
‘친구를 위해서라면.’
모론이 땅에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세냐는 기겁하며 모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누가 들어도 농담이었잖아...! 엎드려 길 필요 없어. 그냥 네가 알아서 허리 숙여서 같이 들어.’
꿈이 흔들린다.
‘...세냐. 그 목걸이는...’
‘관에... 아니... 내가 가지고 갈게.’
‘...순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모두가 동의한 일이잖아.’
흔들리는 꿈속에서, 세냐는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하멜이 바라던 세상을 만든 뒤에... 그때... 보내줄 거야.’
‘...신이시여.’
아니스는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이 배덕을 부디 눈감아 주소서. 감아주지 못하신다면, 천국에 들기 위한 과업을 당신의 종인 제 어깨에 더욱 올려주소서. 그렇게... 언젠가의 재회를 같은 곳에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소서.’
‘...아니스.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건가?’
‘우리가 갈 수 없다면 대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나는... 우리 부족의 천국은... 빛의 신의 천국과는 다른 곳이다.’
‘다르지 않습니다. 천국은... 천국은 필시 같은 곳일 겁니다. 우리는 분명히, 낙원에서 재회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아니스는 새하얀 관을 쓸며 서글피 웃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
눈을 떴다.
유진은 멍하니 텐트의 천장을 올려다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씨팔.”
이불처럼 몸에 두르고 잤던 흑암의 망토.
그 안에서 성검 알테어가 삐죽 나와, 유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꿈
‘...이게 왜 손에 잡혀 있는 거야?’
보물고에서 가지고 나온 후. 손에 익혀 둘 겸 몇 번 휘둘러 본 적은 있었지만, 성검을 전투에서 사용한 적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검은 너무 눈에 띈다. 그 쓰잘데없이 화려한 예식용 검은, 손에 쥔 것만으로도 눈에 띄지만 마나를 불어넣으면 찬란한 빛까지 내뿜는다.
사마르의 야만족들은 거칠고 욕심이 많다. 그들뿐만이 아니라도, 사마르에는 위험한 놈들이 많다. 헬무드가 아닌 이상 제 한 몸 지킬 자신은 있었으나, 이쪽에서 뭔가 행동하기 전부터 이목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위조 신분증을 사용했고, 회색 머리도 마법으로 검게 바꾸었다. 알테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성검이지만, 유진은 사마르에서 알테어를 꺼낼 생각은 없었다.
쭉 망토 안에 처박아 두고, 꺼내지 않았단 말이다. 그런데 왜 알테어가 지금 손에 쥐어져 있는가? 설마 자면서 뒤척거리다가 망토에서 알테어가 떨어져 나왔나? 아니면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몽유병이나 강박이 있어서, 이런 험지에서 잠자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꺼내 손에 쥐어버린 건가?
그럴 리가 없않은가.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눈가를 손끝으로 훔쳤다. 다행스럽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무덤에 관해서는 저번에 눈물을 펑펑 쏟아버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아도 감정은 가라앉는다. 이미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꿈의 기억이, 그곳에서 보았던 광경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오래 전의 그 순간에 함께 했던 것처럼.
‘...따지고 보면 함께 있기는 했지.’
죽은 시체로 함께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내 시체는 관 속에 있었어. 내가 꿈에서 보았던 것은... 망상인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세냐도, 모론도, 아니스도, 베르무트도. 유진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에, 처음 무덤에서 동상과 추모석을 보며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내 상상이 꿈으로 바뀐 것일지도 몰라.’
만약 이 꿈이 상상이 아니라면. 300년 전에 정말로 벌어진 일이라면.
왜 그것이 꿈으로 나타났나?
“너냐?”
유진은 알테어를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의 꿈은 몽마의 공격 따위가 아니었다. 몽마는 이런 식의 꿈을 만들어 공격하지 않는다. 몽마의 공격이라면 꿈 속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
유진은 이미 깨달은 상태였다. 그 꿈은 정신을 무너트리기 위한 공격이 아니다. 유진이, 하멜이 죽어 존재하지 않던 순간을 보여준 것뿐이다.
잠에서 깨었을 때. 유진의 손에는 알테어가 쥐어져 있었다.
“...이게 계시야?”
유진은 알테어를 들어올렸다. 묻는 말에 성검은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데. 그런 내게도 계시가 내려오는 건가?”
흔히 상상하는 계시와 다르기도 했다. 으레 신의 계시라는 것은 뭔가 비범하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언질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방금 꾸었던 꿈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 그것도 까마득한 300년 전의 과거를 보여주었다.
“의미를 알 수가 없어. 나한테 뭘 전하고 싶은...”
‘세냐. 그 목걸이는.’
‘내가 가지고 갈게.’
‘순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모두가 동의한 일이잖아.’
‘하멜이 바라던 세상을 만든 뒤에.’
‘언젠가의 재회를 같은 곳에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소서.’
‘언젠가는, 네가 바라던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
‘우리는 분명히, 낙원에서 재회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진은 목걸이를 꽉 쥐었다. 이 목걸이를 가지고 간 것은 세냐다. 아니스는 그것을 두고서 순리에 어긋난 일이라고 말했다. 세냐는 모두가 동의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목걸이는 세냐의 손을 떠나,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서 발견되었다.
‘찾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보여줄 거라면 확실히 보여주란 말이다.
‘내가 접하지 못한, 그런 것을 보여 달라고.’
세냐와 베르무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베르무트는 마왕과 어떤 약속을 맺은 거지? 그래서 지금 다들 어떻게 된 건데? 베르무트와 세냐, 아니스, 모론, 모두 다 살아있는 건가? 유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끼며 알테어를 망토 안에 넣은 뒤, 텐트 밖으로 나왔다.
밖에도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버섯과 야채를 잔뜩 넣은 맑은 스프였고, 요리사는 나리사였다. 본래 아침을 담당하는 것은 불침번의 말번인 크리스티나인데, 그녀는 나리사가 스프를 끓이도록 내버려두고서 햇살 따스한 곳에 앉아 아침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너냐?”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나 잠자는 중에 텐트로 들어왔냐고.”
“파렴치한... 유진님.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가 왜 유진님의 텐트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크리스티나는 눈을 찡그리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만약 정말로 크리스티나가 유진의 텐트에 들어와,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면 유진이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침 당번은 너잖아.”
“제가 하려고 했습니다만, 나리사가 돕겠다고 나서주었습니다.”
“저건 돕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혼자서 다 하고 있는데?”
“식재료와 도구는 제가 제공했습니다.”
“저것도 내가 준비한 거잖아... 버섯도 내가 따온 거고.”
“유진님. 사소한 문제를 걸고넘어지지 마십시오. 이른 아침부터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대뜸 저를 의심하시고, 파렴치한 생각까지... 혹시 꿈에서 제 모습이라도 보신 겁니까?”
크리스티나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어온다. 그 모습. 유진은 꿈에서 보았던 아니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 닮아서 문제인 것이다.
“아니.”
그럴 지라도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다른 사람이다. 그래도 신경은 쓰인다. 다른 사람인 건 맞지만, 어쩌면 아니스의 후손일 지도 모르잖은가.
꿈에서 아니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유진은 크리스티나에게 조금 친절히 대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나리사가 듣지 못하도록 마법을 써서 소리를 차단한 뒤에 입을 열었다.
“...저기. 성검 말이야. 그거 가끔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그런가?”
하지만 그 전에. 성검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보기로 했다. 일단 유진이 알기로, 전생에서 성검이 멋대로 움직인 적은 없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 아.”
크리스티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대꾸하다가, 두 눈에 이채를 발했다. 그녀는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경건한 눈으로 유진을 올려보았다.
“유진님, 계시를 받으신 겁니까?”
“아니... 그냥 개꿈을 좀 꾼 것 같은...”
“성검이 유진님에게 신의 목소리를 전한 것이군요.”
“신의 목소리는 아니고...”
“유진님. 영혼의 맑은 진심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유진님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시지만, 사실은 유진님도 신앙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고, 부끄럼을 느끼지 마십시오.”
“부끄럼 느낀 적은 없...”
“인간이 어둠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언제나 거칠고 재수없는 유진님이지만, 아직 미성숙한 나이이시니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 자애로운 신께서는 그런 유진님의 마음을 엿보시고, 어둠이 두렵지 않도록 행차하신 것입니다.”
“...”
“그로 인해 유진님 무의식적으로 바라신 것입니다. 나는 어둠이 두렵지 않다, 나는 어둠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한 바람이 유진님으로 하여금 신의 자비이자 기적의 현상인 성검을 쥐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유진님은 성검의 따스한 빛 속에서 잠드셨고, 꿈 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으신 겁니다.”
“맞아. 나는 계시를 받았다. 내 꿈에 신이 나타났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그 말에 크리스티나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모았다.
“아아! 역시 그렇군요! 유진님, 신께서 무슨 말을 전하셨습니까?”
“너 보고 입 좀 닥치래.”
“...”
“내 꿈속에서 나타난 신 말인데. 존나 못생겼더라. 아니, 그건 못생겼다는 수준을 넘어 끔찍한 추물이었어. 바퀴벌레랑 지네랑 구더기를 뒤섞어 놓은 것만 같은 모습에, 화상으로 문드러진 오크의 대가리 같은 것이 달려서 뀌익, 뀌익 하면서 말이야.”
“유진님.”
“크리스티나는 언제나 말이 너무 많다... 뀍... 말도 많은 주제에 논리가 없다... 신앙을 언변으로 이용하려 들지 말라... 뀌익... 신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주장을 포장하지 말란 말이다... 뀌이익...”
“닥쳐주십시오.”
아니스와 닮았으니 앞으로 친절하게 대하자고 생각했다만, 그건 불가능했다.
“스프가 다 되었어요.”
“네.”
“고기는 없나?”
나리사의 스프는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
“슬슬 추격이 올 때가 되었는데.”
나리사와 합류한지 사흘.
“그렇겠죠.”
가룽 부족의 전사들과 맞닥트렸던 장소는 놈들의 영역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사냥에 나간 전사가 10명이나 돌아오지 않고, 심지어 그 사냥감이 판매가치가 높은 엘프라면. 부족이 그 일을 간단히 넘길 리가 없었다.
“시체는 어떻게 두셨습니까?”
“태웠지.”
당연히 그렇게 했다. 괜히 시체를 남겼다가는 추격을 쉽게 할 빌미를 준다. 유진은 죽인 전사들과 바칸울프를 마법으로 죄다 태워서, 뼛조각 하나 남지 않게끔 정리했다.
“그래도 사흘이나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추격에 난항을 겪는 모양이지.”
숲은 넓다. 넓은 만큼 위험이 많고, 이곳에 사는 부족들 간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가룽은 거친 부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의 영역도 아닌 곳을 함부로 침범할 수는 없다. 그것이 부족 간의 법도였다.
‘사마르의 부족’으로 남고자 한다면, 그 법도를 지키는 것이 맞다.
가룽의 대전사. 우지차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험악한 대머리 남자는 커다란 근육만큼이나 커다란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숲에서 태어나고 숲에서 자란들 결국은 숲에서 죽게 될 뿐.
대부분의 부족이 그러하듯, 가룽 부족도 외지의 상단과 지속적으로 교류해오고 있다.
상단의 주인은 해상왕국 시무인의 코발 백작이다.
가룽 부족은 작은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데, 몇 년 전부터 광산에서 미스릴이 채굴되기 시작했다.
코발 백작은 가룽 부족이 가진 광산에 채굴되는 질 좋은 미스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미스릴을 공급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광산 자체를 구매하고 싶어 한다. 미스릴이 채굴되는 광산이라면, 다른 귀중한 광석도 잠들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광산을 제대로 개발해야 하는데, 무턱대고 곡괭이질만 한다고 광산은 개발되지 않는다. 숲에서 태어나 사냥에 익숙한 원주민들은 광산을 개발할 만한 지식이 없다. 그냥 무기와 도구만 만들 수 있는 철만 캐내는 것이 고작이다.
코발 백작은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드워프 장인들까지 동원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쪽이 아무리 의욕을 내더라도, 가룽 부족은 광산을 매각할 생각도, 선대부터 거느려 온 광산을 외지인이 개발하게 허락할 생각도 없었다.
그건 가룽 부족장의 고집이다
부족장은 늙었다. 우지차는 기회를 보아 부족장을 끌어내리고, 스스로 부족장이 될 생각이다. 그 뒤에는 광산을 팔아넘기고 거금을 받을 것이다. 외지인들이 들어 와 광산을 개발하는 것은 우지차가 알 바가 아니었다.
쭉 숲에 처박혀 부족장으로 늙을 생각은 없다. 힘은 늙으면 약해지지만, 돈은 늙는다고 해서 약해지지 않는다. 우지차는 코발 백작을 연줄로 삼아 숲을 떠나고 싶었다. 드넓은 바다를 건너, 멋진 도시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
그러한 미래를 그리고 있기에, 우지차는 이 살이 뒤룩뒤룩 찐 꼬맹이의 저질스런 취향에 맞춰주고 있었다. 존중과 이해는 할 수 없지만, 거절하고 무시하지는 않았다.
우지차가 부족장을 끌어내리고, 광산을 매각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코발 백작은 휘하의 기사와 아들을 이곳에 보냈다.
다자랑 코랄. 백작의 아들인 돼지새끼. 우지차는 다자랑의 비위를 맞춰, 화려한 미래로 부상할 날개로 삼고 싶었다.
다자랑은 외발의 엘프를 갖고 싶어 한다. 사냥이 실패했다는 것에 분노했다. 전사라는 놈들이 병신 엘프 하나 잡지 못하냐며 조롱했다. 그러면서 너희를 믿지 못하겠다며 이곳까지 따라왔다.
사흘이나 흘렀는데도 엘프를 따라잡지 못한 것은, 저 돼지새끼의 투정 때문이기도 했다. 놈은 조금만 걸어도 덥다고 징징거렸다. 늑대의 뒤에 태우면 냄새가 난다고 지랄했다. 좀 빨리 달린다 싶으면 속이 울렁거린다고 고함을 질렀다.
백작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죽여 버렸을 텐데. 우지차가 몇 번이나 살의를 느낄 때마다, 호위기사인 블론이 우지차를 달래주었다.
“조금만 참아. 자네가 고생해 준 것에 대해서는 내 필히 백작님께 전해드릴 테니.”
“확실하겠지?”
“암, 그렇고말고. 백작님은 뛰어난 인재에게 무척이나 자비로우시지. 대전사로서의 실력, 도련님에 대한 호의 가득한 선물... 하하! 백작님은 틀림없이 자네를 중용할 거야.”
블론은 그렇게 말하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렇게 하자고. 광산을 매각하기 전, 한 번 시무인에 오도록 하게. 내가 친밀한 레이디들을 소개시켜 주지. 모두 다 귀족가의 레이디들이야. 자네 정도의 사내라면 레이디들도 호감을 가질 테고, 만약 관계가 잘 발전된다면... 자네는 바로 귀족이 될 수도 있어.”
그러한 달램이 우지차의 분노를 진정시켰다. 그래,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추격은 예정보다 늦었지만, 감히 부족의 사냥감을 훔쳐간 도둑놈들로 추측되는 놈에 대한 흔적은 발견했다.
“우지차님.”
탐색에서 돌아 온 전사가 우지차를 부른다.
“누군지 모를 자식이 저 앞에 앉아 있습니다.”
“야방 부족인가?”
이곳은 야방 부족의 영역이다. 다른 부족의 전사 수십 명이 침범했으니, 야방 부족의 전사들이 경계하여 나온 것도 당연했다. 야방 부족은 가룽 부족과 비교해도 크게 꿇리지 않는 부족. 그렇다는 것은, 서로가 충돌했을 때 잃는 것이 비슷하고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정을 설명하면 길을 비켜줄 것이다. 부족의 전사가 살해당했고, 사냥감을 빼앗겼다. 미리 사자를 보내어 허락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분노할 테지만, 그건 우지차가 알 바가 아니었다. 숲 밖의 미래를 그리는 우지차에게 숲의 법도와 부족간의 사정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야방 부족의 전사는 아닙니다.”
“설마 도둑의 동료인가?”
추격을 눈치 채고서, 동료를 남겨 길을 막도록 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우지차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전사들을 몇 명 죽였다고 오만해진 모양이다.”
도둑의 동료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야방 부족의 전사가 아니라면 자비를 베풀 필요도 없다. 길을 막는다면, 그냥 치우고 가면 되는 것이다.
“엘프는 언제 잡는 거야?”
돼지 새끼, 다자랑이 칭얼거린다. 우지차는 입매를 씰룩거리며 다자랑을 돌아보았다.
“저 앞에 엘프를 훔쳐 간 도둑의 동료가 있는 것 같다. 도련님도 가자.”
“왜? 싫어. 난 그늘에 있을래...”
“다 같이 갈 거다, 도련님. 놈을 사로잡는다면 엘프를 더 빨리 잡을 수 있을 거다. 도련님이 여기서 쉬고 있을수록 엘프를 잡는 것은 늦어진다.”
“에이 씨...”
결국 다자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지차는 길을 막고 있다는 놈을 잔혹하게 죽여 버리고, 그걸 다자랑이 보게 하여 겁에 질리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살의를 불러 일으키는 태도도 조금은 누그러지리라.
“끼야!”
수십에 달하는 늑대들이 숲을 달렸다.
꿈
늑대들이 멈춘다. 들었던 대로였다. 울퉁불퉁한 숲길 한복판에 한 명의 남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가룽 부족의 대전사, 우지차다.”
우지차는 호기롭게 외치며 늑대의 등에서 내려왔다.
“감히 부족의 사냥감을 훔쳐 간 도둑을 찾고 있다. 너. 외발의 엘프를 알고있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놈은 큼직한 망토를 몸에 두르고, 후드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답해라.”
우지차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는다. 친히 공용어까지 써가며 말해주었는데, 남자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우지차는 남자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번쩍 손을 들어올리자 늑대들이 으릉거린다. 수십 명의 전사들이 남자를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했다.
“사냥? 사냥하는 거냐?”
다자랑의 목소리에 열기가 어린다. 신체가 훼손 된 여성에게 흥분하는 다자랑은 자신이 직접 발로 뛰어 사냥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나, 사냥을 보는 것과 사냥감의 시체를 보는 것은 좋아한다.
“블론, 블론! 나도 가까이 간다. 혹시 저 새끼가 날 인질로 삼으려고 하면, 네가 막는 거야. 알았지?”
“예, 도련님.”
블론은 다자랑을 말리지 않았다.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익숙했기 때문이다.
“네 동료에 대해서 말해라.”
우지차는 등에 메고 있는 대검의 칼자루를 쥐었다.
“엘프를 어디로 데리고 갔나. 놈들에 대해 말하고, 안내한다면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
“이 대머리 새끼야! 누구 마음대로 죽이지 않고 살려? 안 돼, 안 돼! 죽여! 팔다리를 뽑아 죽여!”
다자랑은 꽥꽥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우지차는 뿌득 이를 갈고서 다자랑을 노려보았다.
“...으하하.”
앉아있던 남자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다. 그는 무릎을 손으로 철썩철썩 두드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돼지새끼가 분수에 안 맞는 비단옷에 금목걸이를 찼구나.”
“...여기 돼지새끼가 어디 있다는... 블론! 저, 저 새끼가 지금 나보고 돼지라고 한 거야? 그렇지?! 맞지! 나보고 돼지라고! 잡, 잡아 와! 내 앞에 무릎 꿇려!”
다자랑은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며 광분했다.
“자, 자.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도련님이 서두르지 않으셔도, 이제 곧 즐거운 것을 볼 수 있으실 겁니다.”
블론은 그렇게 말하고서 남자를 돌아보았다.
“자네. 뱉는 말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조심할 것이 뭐가 있나? 나는 너희의 요구를 들을 생각이 없어.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을 거고. 그러면 결국 여기서 싸우게 될 텐데.”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우지차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가? 엘프에 대해서도, 동료에 대해서도 말할 생각이 없나?”
“이건 말해줄 수 있겠군.”
후드로 덮인 어둠 속에서 금색 안광이 번뜩였다.
“너희 부족의 전사들은 죄다 쓰레기였다. 전사라고 자처하는 꼴이 우스울 만큼 나약했다. 그리고 비열하고, 겁쟁이였다. 놈들이 날 처음 맞닥트렸을 때 얼마나 허세를 부렸는지 아나? 그 허세가 얼마나 빨리 박살났고, 최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으며 내게 목숨을 구걸했는지 아나?”
“...가룽의 전사들을 모욕하지 마라.”
우지차의 머리에서 핏줄이 꿈틀거린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기회를 주마.”
“...기회?”
“추격을 그만두고 물러서라. 지금이라면 물러서도 잡지 않는다. 돌아가서, 저 못생긴 돼지의 엉덩이나 닦아줘라.”
“죽여! 죽이라고!”
다자랑이 눈을 까뒤집고 악을 썼다. 그쯤 되니 블론도 더 이상 웃으며 서있을 수는 없었다. 철부지 도련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블론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코랄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다.
“우지차. 이 일은 내가 처리하겠네.”
“...음.”
우지차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족 전사가 모욕 받았다는 것에 분노를 표하긴 했지만, 그 앙갚음은 엘프를 데리고 있는 도둑들에게 풀면 된다. 여기서는 블론의 위신을 헤아려 물러서는 편이 좋다.
“내 이름은 블론 지라크라고 하네.”
블론은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허리의 검을 더듬었다.
“시무인 왕국의 코랄 백작가를 섬기고 있지.”
“블론... 블론 지라크라... 아아, 그렇군. 시무인 십이걸.”
남자는 짧은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무인 십이걸은 왕국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는 12명의 기사를 부르는 말이다.
“그래. 부끄럽게도 십이걸의 하나로 불리고 있지. 이름 모를 무뢰한이여, 이제 와서 후회한들 늦었네. 내가 섬기는 가문의 도련님을 모욕한 죄, 그 목숨으로...”
“주제파악을 잘 하고 있어.”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워하는 것이 맞아. 시무인 십이걸이라고 해 봐야 네 나라에서만 줄을 세운 12명이잖아? 그리고 너, 블론 지라크. 십이걸 중에서도 말석인 놈이 뭐 그리 대단한 척 나서나?”
“...너는 태어난 것을 후회할 만큼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죽게 될 것이다.”
블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허리에 걸린 길쭉한 검을 뽑아 남자에게 겨누었다.
“나는 이 싸움에서 기사도를 따르지 않겠다. 이건 기사간의 결투가 아니며, 네가 내 명예를 존중하지 않듯이 나도 네 명예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난 기사가 싫다.”
금색 눈동자가 히죽하고 휘어진다.
“말이 너무 많거든. 언제까지 떠들기만 할 거지?”
우선 팔 하나를 자른다. 블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뻗었다. 그 한 걸음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혀 검을 찌른다. 이 쾌속한 찌르기는 블론이 자부하는 쾌검술이 극한으로 발현된 것이다.
“엇.”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밸런스가 무너졌다.
간단한 이유였다. 검을 찌른 팔이 통째로 뜯겨졌기 때문이다.
“거 봐.”
움직임에 망토가 흔들린다. 살짝 들춰진 후드 아래 금색 눈동자가 웃고 있다.
“부끄러워해야 할 만큼 약하다고.”
“이...!”
블론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반대편 손을 휘둘렀다. 더 이상 그 손에 검은 없었지만, 블론은 맨손에 검강을 휘감고서 남자를 베려 했다.
하지만 그 팔도 뜯겨졌다. 떨어지지는 않았다. 블론의 양 팔은 남자의 손에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는 맨 손으로 블론의 검강을 파괴하고, 팔을 뜯어낸 것이다.
“주제파악이 부족했군.”
남자는 잡고 있던 팔을 놓고서, 활짝 펼친 손으로 블론의 배를 잡았다.
“옥... 오옥... 오곡... 오오옥...!”
블론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남자가 손을 쥐어 갈 때마다 블론의 굵은 허리가 얇아져갔다. 콰득! 남자가 손을 완전히 쥐었을 때. 블론의 몸이 둘로 나뉘었다.
시무인 십이걸. 블론 지라크는 그렇게 죽었다. 다자랑은 그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우지차는 다자랑보다 더 경악했다. 처참하게 죽은 전사들의 시체가 떠올랐다. 주먹에 맞아 죽고, 검에 베이고, 창에 쑤셔지고, 폭탄에 맞은 것처럼 터지고, 쥐어 짜여 으깨져 죽은 시체들.
잘못 생각했다. 전사들을 벤 것은 검이 아니었고, 쑤신 것은 창이 아니었고, 터트린 것은 폭탄이 아니었다. 쥐어짜인 것.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흔적만이 진실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보지 않았나. 블론은 남자의 한 손에 쥐어 짜여 죽었다.
“그러게 왜 따라와?”
남자가 웃었다. 그는 날카로운 손톱을 적신 피를 털면서 말을 이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친절하게 시체들도 남겨줬잖아. 그런 시체를 보면 무서워서라도 오지 말았어야지.”
“그... 으... 자, 잘못...”
“너도 똑같군. 가룽 부족의 대전사, 우지차.”
늑대들이 꼬리를 내린다. 몬스터의 흉포함은 그 이상의 공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늑대들뿐만이 아니었다. 전사들 모두가 본능적인 공포에 몸을 떨었다.
‘죽는다.’
우지차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건, 저 괴물을 물러서게 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도시에서의 화려한 삶. 미래. 그 모든 것이 죽음에 뒤덮인다.
‘지금.’
남자가 움직였고,
우지차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문제점이 있다.
떠돌이 엘프들이 모여 이뤘다는 마을. 그 존재는 확실하다. 뒈진 정보상 잭슨에게는 듣지 못했지만, 다크엘프의 말에 따르면 엘프의 마을을 소문이 아니라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그를 어떻게 찾는가. 다크엘프도 마을의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대수림의 깊은 곳, 아잔 부족의 근처. 그곳 어딘가에 엘프의 마을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다크엘프는 그 마을에 다가가지 않는다.
수호자가 두려워서.
300년 전에, 엘프들은 다크엘프를 혐오했다. 엘프로서의 본분을 잊고, 마왕에게 빌붙어 종족의 본질을 일그러트린 배신자들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300년 전의 시대에는 세상 모두가 마왕을 혐오했다. 마병으로 죽어가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마왕은 목숨을 구걸할 대상이 아닌, 종족을 무더기로 죽인 원수였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 마왕은 300년 전처럼 혐오 받지 않는다. 마왕을 추종한다고 해서 예전처럼 돌에 맞아 죽지도 않는다. 흑마법사라고 무차별적으로 사냥당하지도 않는다.
다크엘프도 마찬가지다. 꺼려지는 대상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무조건 혐오할 대상도 아니란 말이다. 따지고 보면 약속 이후로 태어난 다크엘프들은 억울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피해자다.
마병. 다크엘프가 되거나, 사마르에 들어오거나. 제 한 몸 지킬 수 없다면 사냥당할 수밖에 없는데, 다크엘프가 되면 마병을 극복하고 아이리스의 보호까지 받을 수 있다.
결국 다크엘프가 되는 것은 엘프의 선택이다. 엘프로 살던가, 아니면 다크엘프로 살던가. 유진은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엘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할 수도 있다 싶었다.
하지만 수호자는 다크엘프를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떠돌이 엘프를 거두고, 마을을 보호한다. 다가오는 사냥꾼들은 가차 없이 죽여 버린다.
다크엘프도 마찬가지다. 수호자는 다크엘프를 동족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그건 낡아빠진 관점이었다.
유진의,
하멜처럼 낡아빠진 관점.
‘아마.’
유진은 아직 만난 적 없는 수호자를 상상했다. 어
‘그 수호자라는 놈은, 나이가 300살은 훨씬 넘을 거야.’
어설픈 추측.
‘아무리 적게 잡아도 400살 쯤.’
엘프는.
무언가를 죽이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전쟁에도 참가했을 거고.’
엘프는 동족을 죽이지 않는다. 엘프와 다크엘프는 다르다. 수호자가 그렇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다크엘프를 혐오하고 있어서.
300년 전의 다크엘프들은 엘프가 혐오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다. 엘프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사랑을 받는 종족이다. 마왕이 군세를 일으키고, 마병이 창궐했을 때. 많은 엘프들이 마왕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엘프들은 각지의 산과 숲을 전장 삼아서 마물과 마족을 상대했다. 광란의 마왕은 저 엘프 레인저들을 상대하는 것에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아이리스를 필두로 한 다크엘프 병단.
당시의 엘프들은 다크엘프를 죽이는 것을 주저했다. 마왕에 의해 타락한, 가련한 동족이라고 생각했다. 구할 수 있다고, 설득해서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크엘프는.
아이리스는 엘프들이 다크엘프를 혐오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숲을, 산을 불태웠다. 아이리스는 한때 엘프였기에 엘프의 성질을 잘 이해했다. 엘프들은 불타는 숲과 산에서 비명을 지르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숲과 산을 태우는 불을 끄는 것이었다.
‘마을의 위치는... 모른다. 다크엘프는 마을 근처라도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고해’를 읊던 다크엘프는 그렇게 말했다.
‘수호자는... 다크엘프를 잔혹하게 죽인다. 무릎을 꿇려놓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낸다. 그 창자를... 길게... 늘리면서 죽게 내버려 둔다. 놈은... 놈은 미치광이다.’
어설픈 추측이지만.
저 말이 유진으로 하여금, 수호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그건 아이리스의 처형법이야.’
공포심을 주기 위해.
아이리스는 엘프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다크엘프가 될지, 엘프로 죽을지 선택하라면서. 엘프 포로들을 꿇려 앉혀놓고 동족이 잔혹하게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
바람에 실려 공중에 떠있던 나리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유... 유진님. 노래가, 노래가 들려요.”
“역시 그런가.”
유진은 놀라지 않고 중얼거렸다. 은밀하게 숨겨진 엘프의 마을. 그런 주제에 떠돌이 엘프를 어떻게 인도하나 싶었는데. 엘프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흔적을 남겨두는 식이었나.
“노래라... 나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데?”
유진은 감각을 곤두세우며 중얼거렸다. 그는 엘프는 아니지만, 엘프만큼 귀가 예민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마나까지 동원해 보아도 나리사가 말한 ‘노래’라는 것은 들리지 않았다.
“음... 으으음... 이건... 그러니까...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 울리고 있어요. 마치... 마치 마법처럼...”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있어?”
“보다 안쪽으로... 네... 어... 어어...?”
나리사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저... 저기... 어... 유진님...?”
“뭔데.”
“머릿속의 목소리가... 저한테 무슨 말을 전하라는데요...”
“말 해.”
“절 내려놓고... 물러서라 말하고 있어요.”
“물러서지 않으면?”
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나리사는 울상을 지으며 대답을 주저했다.
“말해, 나리사.”
“...더 이상 함께 오면... 흑... 유진님과 크리스티나님을 죽여버리겠다고...”
“그래?”
유진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선 바람을 끌어당겼다.
“날 죽이려면 직접 나와야 할 텐데.”
유진은 나리사를 직접 업었다.
“일단 만나보고 생각하자고.”
어쩌면 수호자는 전생에서 만난 적이 있는 놈일지도 모른다.
수호자
등에 업은 나리사를 몸에 바짝 붙이고, 망토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바람의 정령도 불러들여 주변을 에워쌌다. 거기에 마나실드와 방어마법도 몇 개 섞었다.
그에 호응하여 크리스티나도 신성마법을 전개했다. 신성마법은 동급의 방어 마법보다 우월하다. 유진은 펼쳐진 결계의 범위를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뒤에 바짝 붙어.”
“네.”
크리스티나는 반감 없이 대답했다.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거역하지 않았다.
몇 걸음 나아가면서, 유진은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먼저 무기를 뽑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갔을 때.
날카로이 세운 감각에 무언가가 잡힌다. 잡힌 순간에 벗어난다. 아니, 가까워진다. 경계는 진즉부터 하고 있었고, 대응은 즉시 이뤄졌다. 망토에서 뽑혀 나온 검이 허공을 갈랐다.
까앙! 충돌과 동시에 검이 깨진다. 유진은 박살나 흩날리는 파편을 무시하고서, 아직 망토 안에 두었던 오른손을 꺼냈다. 충돌 순간에 격렬히 요동치던 마나가 포식검 아스펠에 잡아먹힌다. 유진과 습격자 사이의 힘이 텅 비었다.
“꺅!”
유진은 더 이상 나리사를 업지 않았다. 바람의 정령이 나리사를 끌어안고 뒤로 물러선다. 크리스티나도 즉시 완드를 들고서 나리사를 빛으로 휘감았다.
몸이 자유로워졌다. 유진은 지체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낡은 로브를 뒤집어 쓴 수호자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 쭉 뻗은 아스펠의 검신이 꿈틀거리고, 흐느적거리며 쏘아졌다.
카캉!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아스펠은 부러지지 않는다. 수호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수호자는 더 공격하지 않고, 공격을 받아내려 검을 곧추세웠다.
아스펠이 바닥을 긁는다. 위로 치켜 올린 검격이 마나를 터트린다. 그에 맞서 수호자의 검이 움직였다. ㅡ싸악! 폭발이 수호자를 삼키기 전, 그가 휘두른 검이 공간을 양단했다.
[...그 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유진은 더 검을 휘두르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포식검 아스펠이군.]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호자는 유진을 물끄러미 보면서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라이언하트가 떠돌이 엘프를 보호했나?]
“얼굴이나 보이고 말해.”
가슴이 두근거린다. 유진은 표정을 가다듬고, 아스펠을 다시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허.”
달싹거리는 입모양을 본 수호자가 자그마한 탄성을 흘렸다. 그는 잠시 동안 유진을 응시하다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닮았다, 라고 생각했는데. 닮은 것이 아니었나.]
유진은 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침묵에 수호자는 검을 내려놓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하멜 다이너스.]
알아차려주기를 바라면서 검을 휘둘렀다. 부끄럼 덕에 도저히 입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아래에서부터 위로 쳐올리던 검격. 그건 하멜 식의 제 오 형, 드래곤버스트였다.
[안식을 얻지 못하고 망령이 되어 떠돌고 있나?]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목소리로 내지 않고 달싹거리기만 한 입술. 그렇게 ‘이름’을 불렀다. 아스펠을 알아보고, 저만한 실력을 가진 나이 많은 엘프. 아이리스를, 다크엘프를 증오하면서 지닌 증오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잔혹한 엘프.
유진의 기억에서 그런 엘프는 많지 않았다.
탁한 녹색 머리카락.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호할 만큼 아름다운 얼굴. 뺨을 가로지르고 있는 흉터.
시크나드.
“목적이 뭐냐.”
시크나드는 더 이상 머릿속으로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검을 칼집에 넣으면서, 유진과 나리사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크리스티나에게 옮겨진다.
그는 잠시 동안 크리스티나를 응시했다. 유진이 시크나드를 알 듯이, 시크나드도 유진을, 하멜을 알고 있다. 즉, 시크나드도 300년 전의 아니스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묻는 것이 우스운가.”
시크나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는 따라오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유진은 굳이 묻지 않고 시크나드의 뒤를 따라갔다.
“...아시는 분입니까?”
크리스티나가 곁으로 다가와서 묻는다. 나리사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아는 사람이었으면 대뜸 공격해 왔겠어?”
“하지만 공격을 거두었잖습니까.”
“우리 모습을 보고 멋대로 착각하는 모양이지.”
유진은 그렇게 이죽거리면서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모습이 닮았다는 것도 도움이 되는 군요.”
크리스티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더 묻지 않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리사의 어깨를 자애로운 얼굴로 끌어안아 주었다.
걸어 나갈 때마다 풍경이 일그러진다. 외부에서 알아차리고, 간섭하기 힘들 만큼 고등한 결계 마법. 놀랄 일은 아니었다.
떠돌이 엘프가 모이는 마을이라니. 사냥꾼과 야만족들이 군침을 흘릴 사냥터 아닌가. 그럼에도 위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수호자의 존재뿐만 아니라 마을을 보호하는 마법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리사를 데려오기를 잘했어.’
만약 그녀를 앞세우지 못했다면, 이 넓은 숲을 한참이나 헤맸을 것이다.
“...이만한 규모의 결계라니.”
크리스티나는 감탄을 흘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출입하기 전에도, 그리고 안에 들어온 지금에도 위화감이랄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로서 유진의 경지는 5서클을 웃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5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중급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유진의 예민한 기감과, 위치크래프트에 대한 지식은 결코 중급마법사 수준이 아니었다.
‘...평범한 결계가 아니야.’
유진은 마법적인 관점으로 결계를 이해하려 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결계 속을 걷고 있는데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유진이 기억하는 시크나드는 마법사로서 뛰어난 엘프는 아니었다.
“...이 마을에 엘프가 몇 명이나 있는 거지?”
“100명 정도.”
그 대답에 나리사가 감탄을 터트렸다. 멀찍이 보이는 집들에서 엘프들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시선은 적의와 공포가 섞여 있었다.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어쩔 건가?”
“크리스티나. 알아서 시간 때우고 있어.”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갑작스런 말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흥미를 가득 담은 눈으로 엘프들을 돌아보았다.
“무례한 짓은 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와 나리사를 내버려두고, 시크나드의 뒤를 따라갔다.
“경계심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왜. 나 없는 사이에 쟤네 둘 잡아두고 인질극이라도 하게?”
“그리 할 이유가 있나?”
“없지. 그러니 난 경계하지 않는 거고.”
“이곳의 엘프들은 외지인을 싫어한다.”
“그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 적의가 굉장히... 날카롭거든. 하지만 지닌 적의를 실현할 만큼 능력 있는 엘프는 적어 보이는데.”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프들을 살폈다. 100명이나 있을 줄은 몰랐지만, 크리스티나를 위협할 만한 엘프는 시크나드 뿐이라 생각되었다.
피식거리며 웃던 시크나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여자.”
“닮았지?”
“닮은 정도가 아닌데.”
“나도 처음에 보고 놀랐어. 하지만 닮았을 뿐이야.”
“너를 속이고 있을 수도 있지.”
“시크나드. 네가 날 알아봤듯, 아니스도 날 알아볼 수 있었을 거야.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숨기지는 않았거든. 알아봤다면 너보다 훨씬 빨리 알아봤겠지.”
크리스티나와 다니는 동안 몇 번이나 검을 뽑았다. 아니, 그 전부터. 흑사자 성에서 제노스와 검을 겨룰 때, 유진은 하멜식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건 제노스에게 인정을 얻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크리스티나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시선이 묘하기는 했다. 그게 제법 신경 쓰였지만, 크리스티나는 하멜에 관련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정말로 아니스라면. 굳이 자신을 숨길 이유가 없을 터였다.
“...그도 그렇군.”
시크나드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웃었다. 그는 낡은 오두막의 문을 열고서, 유진을 향해 들어오라 손짓했다.
“너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유진은 마주 웃으면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 간 순간.
시크나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허리를 젖혔다. 휘두른 팔꿈치가 옷감 너머로 스친다. 유진은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손을 뻗어, 시크나드의 옷깃을 잡았다. 그렇게 몸을 바짝 붙여서 놈과의 간극을 좁혔다.
“많이 컸구만. 먼저 싸움을 걸 줄도 알고.”
“네가 너무 어려진 것이지.”
시크나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잠시동안 그렇게 대치하다가, 시크나드가 먼저 손을 놓았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유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만. 전생보다는 약하군.”
“그건 어쩔 수 없지. 이 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거든.”
“인간의 몸... 몇 살이지?”
“곧 20살.”
“...하하!”
유진의 대답에 시크나드는 쾌활한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인간이라 감안해도 어린 나이로군. 그럼에도 지금 만큼의 완성도라... 환생을 여유롭게 즐기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세상이 이 꼴이 안났으면 여유롭게 즐겼을 거야. 전생에 하지 못했던 것들도 하면서.”
유진은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앉았다.
“...그 몸. 베르무트의 후손의 몸인가?”
“너무 많이 묻지는 마. 나도 만족스레 대답할 만큼 이 환생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
“그런가?”
“나는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었다. 내게 있어서... 죽음과 환생은 바로 이어져 있어. 천국이나 지옥에 들르지도 않았고... 그냥... 죽고, 눈을 떠보니까... 갓난아기였지.”
시크나드는 유진의 맞은편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 나는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태어났고, 어쩌다 보니 본가의 양자가 되었다. 그렇게 살다가... 뭐... 여기로 온 거지. 그 이유는 너도 짐작할 테고.”
“...세냐.”
“너는 뭐하고 살았냐. 300년, 엘프에게 있어서도 짧은 시간은 아닐 텐데.”
“즐거운 시간도 아니었지.”
시크나드가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300년 전. 시크나드는 마왕에 맞서던 엘프 레인저 중 한 명이었다. 최전선이라 할 수 있던 헬무드. 시크나드를 포함한 엘프 레인저들은 숲과 산을 뛰어다니며 마족의 군세를 상대했다.
전생에 하멜은 시크나드와 만난 적이 있었다. 헬무드에서 마족 군세와 싸우는 중에, 엘프 레인저들과 합동 작전을 펼친 적이 있다. 당시 시크나드는 혈기 넘치는 젊은 엘프였고, 어린 시절의 세냐를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
세냐는 시크나드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시크나드는 엘프이면서도 엘프답지 않았다. 특히 그는 세냐가 엘프들을 위해 위험한 전장에 나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세냐에게 몇 번이나 숲으로 돌아가라고 쏘아붙였고, 세냐가 말을 듣지 않자 억지를 부렸다.
힘으로 꺾으려 들기에.
하멜이 나섰다. 시크나드는 강했지만, 하멜만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냐를 지켜라.’
두들겨 패서, 바닥에 자빠지게 만들었다. 시크나드는 피와 먼지투성이가 된 주제에, 헉헉 몰아쉬는 숨으로 꽤 폼 나는 말을 내뱉었다.
‘지키기는. 저 계집애가 나보다 더 셀 걸?’
시크나드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하멜과 세냐, 베르무트... ‘용사 일행’은 앞으로 나아갔다. 시크나드와 엘프 레인저. 그들을 포함한 대항군은 마족의 군세가 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후방에 남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아이리스가 이끄는 다크엘프 병단이 엘프 레인저들을 대거 몰살시켰다.
“네가 죽은 후. 베르무트의 약속으로 전쟁은 끝났다.”
시크나드가 말을 이었다.
“나와 다른 엘프들은... 영지로 돌아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간신히 얻은 평화를, 복수심만으로 깨트릴 수는 없었으니.”
300년 전의 약속은 마왕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유폐의 마왕도, 멸망의 마왕도 굳이 약속을 맺을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템페스트가 말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은, 대등한 싸움이 아니었다. 싸움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베르무트가 있었기 때문이고, 만약 멸망의 마왕까지 가세했다면 베르무트라 할 지라도 그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폐의 마왕은 약속을 맺어주었다. 베르무트도, 아니스도, 세냐도, 모론도 죽지 않았다. 그 장소에서 죽은 것은 하멜 뿐. 그 누구도 더 죽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베르무트는 키옐 제국에 돌아와 공작이 되었고, 모론은 북방에서 루하르 왕국을 세웠으며, 아니스는 유라스에서 성녀가 되었고,
세냐는.
“...그 아이는... 엘프의 영지에 돌아와, 위령제에 참석했었지.”
“...위령제?”
“‘밖’에서 죽은 엘프의 영혼은 결국에는 세계수로 돌아온다.”
그건 엘프의 신앙이다. 엘프의 영지 중심에 우뚝 선, 수천 년 묵은 요정목. 엘프들은 그 거대한 요정목을 ‘세계수’라고 부르며, 엘프 선조들을 비롯해 죽은 엘프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전쟁이 끝나고. 엘프의 영지에서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세냐는 엘프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엘프의 가족이다. 그리고... 엘프들 중 누구보다도 ‘복수’를 이뤄냈지.”
‘아아아!’
아이리스와 다크엘프 병단이 엘프들을 몰살 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세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목이 쉴 때까지 비명을 지르고, 피눈물을 흘렸다. 분노와 증오로 폭주한 마나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다. 모론은 세냐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갔다가 마법에 얻어맞아서 수십 킬로 밖으로 날아갔고, 아니스는 미쳐 날뛰는 마법이 일행을 집어 삼키지 못하도록 진땀을 흘려가며 결계를 유지했다.
폭주하는 세냐를 진정시키기 위해 하멜은 목숨을 걸었다. 베르무트가 세냐의 마력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목숨을 건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진은 다크엘프가 싫다. 현 세대의 다크엘프들은 억울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커먼 피부와 붉은 눈과 길쭉한 귀를 볼 때마다 엉엉 울던 세냐의 모습이 떠올랐다. 품에 안겨서, 옷에 눈물과 콧물과 피를 잔뜩 묻히고서... 못생긴 얼굴로 울어대던 세냐가 떠오른단 말이다.
‘주, 주, 죽여 버릴 거야.’
‘어.’
‘진짜... 전부... 전부 죽여 버릴 거야. 다크엘프도, 아, 아, 아이리스를, 광란의 마왕도.’
‘혼자 죽이지 말고 같이 죽여.’
실패했다. 광란의 마왕은 죽였지만, 아이리스는 죽이지 못했다. 그곳의 누구도 광란의 마왕이 설마 제 목숨을 버려가며 아이리스와 오보론을 탈출시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고, 그건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하다.’
‘사과하지 마.’
‘놓치면 안됐었...’
‘사과하지 말라고, 개새끼야. 네가 놓치고 싶어서 놓쳤던 것도 아니잖아.’
기껏 머리까지 숙여가며 사과했는데, 세냐는 그렇게 쏘아붙이며 하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이리스는 죽이지 못했다. 그래도 광란의 마왕은 죽였다. 세냐는 그것에 만족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세냐는 아롯으로 갔고, 엘프는 영지에 남았다.”
“너는 지금 여기에 있잖아.”
“300년은 긴 시간이니까.”
시크나드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나는... 어떻게든 복수를 이뤄내고 싶었거든. 그래서 숲을 나와, 세상을 떠돌았다. 그 빌어먹을 다크엘프를 죽여버리기 위해서 말이야.”
“...세냐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은 모양이지.”
“그 아이는 나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존재니까. 나는 고작 한 명의 엘프일 뿐이지만, 세냐가 움직이면... 약속으로 얻어 낸 평화가 깨질 지도 모른다.”
아이리스는 죽지 않았다. 그 다크엘프는 아직까지 살아서, 광란의 독립군을 이끌고 있다. 자신이야말로 광란의 마왕의 적법한 후계자라 주장하면서 마왕이 되려 한다.
시크나드의 복수는 실패했다.
“...세냐가 엘프의 영지로 돌아와 은거했다고 하던데.”
“소문일 뿐이다.”
“날 믿지 못하는 거냐.”
“하멜. 너와 나 사이에 무조건적인 믿음이 세워질 만큼의 신뢰가 있었던가?”
그도 그렇지.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널 하멜로 보았지만, 널 믿지는 않는다. 너는... 300년 전에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었다. 설령 네가 기적처럼 환생했다고 해도, 지금 내 앞에 있는 네가 순수하다고는 믿을 수 없다.”
“이해해. 나도 처음에는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했거든. 나는 정말 하멜인가? 왜 환생한 거지? 기왕 환생했는데 대체 뭘 해야 하나? 내 환생이 누군가의 의도라면, 내가 환생해서 하는 짓거리들 모두가 결국에는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어 춤을 추는 것 아닌가?”
유진은 킬킬 웃으면서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말이야, 시크나드. 그런 고민이란 것은 내게 있어서 개뿔도 쓸모가 없는 것들이더라고. 나는 하멜이다. 나 스스로 그렇게 확신하면 충분한 거야. 전생의 하멜은 무엇을 바랐지? 모든 마왕을 죽이는 것을 바랐다. 지금의 나는? 똑같아. 나는 모든 마왕을 죽일 거다.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헬무드에서 꺼드럭거리는 마족들 모두를 죽여 버릴 거다.”
“...”
“문제는 이거야. 내가 바라는 것은 명확한데, 너무 어려워. 지금의 나로서는 어렵단 말이야.”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겠지.”
“아니. 불가능하지 않아.”
유진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망토에서 손을 빼지 않고서 시크나드를 노려보았다.
“불가능에 한없이 가까울 만큼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아. 나는 할 수 있다. 반드시 할 수 있다.”
“...”
“시크나드. 나는 세냐를 만나야 해.”
“...죽었다.”
시크나드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고, 유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개소리하지 마.”
유진은 망토 안에서 세계수의 잎을 꺼냈다. 그것을 본 시크나드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건...?”
“만약 세냐가 죽었다면 내 눈으로 시체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아. 날 납득시키고 싶다면, 세냐의 시체를 가져와라. 아니면 시체가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하던가.”
유진의 반대쪽 손은 아직 망토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크나드는 유진에게서 살의는 느끼지 않았지만, 살의가 없을 지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난 전생과는 달리 마법도 꽤 익혔거든.”
이 마을의 결계는 어지간한 마법사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이다.
“날 납득시키고 싶다면, 이 마을의 결계에 대해서 먼저 납득시켜야 할 거야. 이 결계. 세냐가 만든 것 아니냐?”
시크나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하멜. 만약 내가 널 끝까지 믿지 않고, 입을 열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쩔 건가?”
“300년 전이랑 똑같이 할 거다. 널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버려서, 싫어도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들 거다.”
“지금의 네게는 불가능할 텐데.”
“불가능하지는 않아.”
ㅡ화륵. 백염식의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비하자면 어려운 축에도 안 들어.”
시크나드와 싸워 이길 수 있나?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낸다면. 월광검, 포식검, 용격창, 뇌광궁, 폭풍검, 성검. 무장도 충분하고, 처음부터 이그니션을 쓴다면 무조건 이긴다.
“그런가.”
시크나드는 큭큭 웃으며 세계수의 잎을 보았다.
“...따라와라.”
수호자
시크나드가 안내한 곳은 제 집의 바로 뒤편의 공터였다. 유진은 널찍한 공터를 돌아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왕 할 거면 조금 더 멀리 나가지?”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서 처맞으면 앞으로 다른 엘프들 보기에 쪽팔릴 것 아냐. 미안한데, 나도 네 입장을 배려해 줄 상황이 아니라서. 만약 싸우게 되면 탐색이나 봐주는 일 없이 바로 전력으로 갈 거야.”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백염식을 운용했다. 하지만 돌아 온 반응이 생각과 달랐다. 시크나드는 우두커니 서서 눈을 끔벅이다가, 한심하다는 듯이 탄식을 내뱉었다.
“죽고 다시 태어나도 천성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군.”
“뭐 새꺄.”
“그러니까... 하멜. 나는 너와 싸우려고 여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 난 또. 다짜고짜 따라오라 길래, 싸우러 가자는 건 줄 알았지.”
“싸울 이유가 없어졌다.”
시크나드는 그렇게 말하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하멜. 네가 무턱대고 찾아 와 세냐에 대해 물었다면, 나는 네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무례하기는 해도 명확한 근거를 갖고서 나를, 이곳을 찾아왔지.”
세계수의 나뭇잎.
“네가 그걸 가지고 찾아 온 이상, 세냐에 대해 무조건 침묵할 수는 없지. 다만... 하멜. 나는 네가 기대하는 것만큼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아는 것이라도 말해.”
“지금 네 눈앞에 있지 않나.”
시크나드는 피식 웃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내 눈앞에?”
유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천천히 시야를 넓혀, 주변을 살폈다. 넓은 공터. 우두커니 선 시크나드. 나무가 몇 그루. 그것뿐이다.
“...허어.”
숲의 한 복판에 있는 엘프의 마을. 나무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저 나무는 독특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때어 나무에 다가갔다.
사마르에 들어 온 지 한 달이 넘었다. 나무라면 매일매일 질릴 만큼 보아왔다. 똑같은 나무들만 본 것도 아니다. 이 넓은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그 종류만 수백은 넘었다.
유진은 식물학자도 아니고, 미묘하게 다른 나무의 생김새를 모조리 암기할 만큼 나무에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시크나드의 곁에 선 나무를 보고 있자니 없던 관심마저 솟아날 지경이었다.
“...요정목.”
사마르 대수림. 그곳에서도 엘프의 영지에서만 자생한다는 나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나무이자, 마법 지팡이의 소재로 제일로 꼽히는 나무가 요정목이다.
“단순한 요정목이 아니지.”
시크나드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나무를 돌아보았다.
“이 나무들은 세계수의 묘목이다.”
“...그렇군.”
이해했다. 유진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약 100명의 엘프들이 살고 있는 마을. 이 마을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결계는 어지간한 마법사로는 흉내낼 수도 없을 고등한 것이다.
“...이건... 마법인가?”
“하멜. 네가 ‘지금’ 시대의 마법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마법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고대 마법.”
“엘프들 중에서도 맥을 이은 자가 드문 마법이다. 그 세냐조차도 고대 마법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시크나드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의 기둥을 쓸어내렸다.
“...마법의 이치에 밝지 않은 나는... 이 고대의 마법을 숲의 은혜와 기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이 몇 그루의 나무는, 세계수가 우뚝 선 엘프의 영지처럼 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진법인가.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나무들을 살폈다. 세계수의 묘목이라는 요정목은 고작해야 세 그루. 따로 마법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체적으로 결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연 고대 마법. 일반적인 마법과는 이치가 다르다.
“...세냐가 한 거냐?”
“말했을 텐데. 세냐도 고대 마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그럼. 지금 이것이 네가 말한 것처럼, 숲의 은혜나 기적이라는 거냐.”
시크나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멜. 나는 엘프의 영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
“그건 나뿐만이 아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 마을에 사는 엘프들은 약 백 명. 숲 밖에는 더 많은 엘프들이 있겠지.”
200년 전. 현명한 세냐는 돌연 아롯에서 모습을 감추고 은거에 들어갔다. 그녀의 은거에 대해 가장 정론으로 취급되는 것이, 사마르 대수림 어딘가에 있다는 엘프의 영지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게 무려 200년 전의 일이다. 세냐는 아롯에서도 위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고, 그녀의 갑작스런 은거에 대해서 아롯은 국가차원으로 세냐의 행적을 추적했다.
아롯은 세냐의 은거를 배려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세냐가 제대로 된 편지라도 남기고 은거했다면, 아롯은 세냐의 은거를 배려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냐의 은거는 너무 갑작스러웠고, 당시의 아롯은 흑색마탑의 설립과 관련해 혼란스러웠으며, 그 흑색마탑을 앞장서서 반대했던 것이 바로 세냐였다.
어쩌면 흑마법사들이. 어쩌면 헬무드의 마족과 마왕이 세냐를 암살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뜬소문으로 취급되는 말이지만, 20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아롯은 세냐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절단을 사마르 대수림으로 보내고, 엘프들과 접촉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롯은 세냐를 찾아내기는커녕, 엘프의 영지도 발견하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엘프의 입이 무겁다 한 들, 200년 전의 아롯은 세냐를 찾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 모든 엘프들이 영지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수많은 엘프들이 영지에서 태어났지.”
“...”
“하멜. 나는 그곳의 풍경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세계수가 얼마나 웅장하고, 그를 중심으로 펼쳐진 엘프의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을 ‘어떻게’ 드나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바깥에서 살던 엘프들은 결국 사마르로 돌아오곤 한다. 하지만 그런 엘프들조차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숲을 떠돌고 있다.
“마법이군.”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억에 대한 간섭. 한둘도 아니고, 엘프 종족 전체의 기억에 간섭했다. 그런 종류의 마법은 후유증이 심각하다. 으레 정신을 주무르는 마법은 아무리 조심하여도 상대의 정신을 망가트리게 된다.
“그 외에 기억의 혼탁은?”
“없다.”
후유증이 없는 정신마법... 그런 것이 가능한가? 종족 전체의 기억에 간섭하여, 원하는 부분만 편리하게 삭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유진이 아는 마법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세냐라면.
“...결국 너는 세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
“그래.”
시크나드는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 숲에 돌아온 것은 수십 년 전이다. 나는... 헬무드를 떠돌면서 복수를 이루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지. 내가 그곳에서 얻은 것은 날 좀먹는 병뿐이었다.”
마병.
유진은 움찔 놀라서 시크나드를 응시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크나드는 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시선에 시크나드는 피식 웃으며 제 옷을 들춰보였다.
가슴의 정 중앙부터 검은 반점이 먹물처럼 번져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은 거냐?”
“이 숲을 나가지 않는다면.”
마병에 걸린 엘프는 길어도 5년을 넘기지 못한다.
“이 또한 은혜로운 숲이 베푼 기적이지.”
“...세계수?”
“그래.”
5명의 마왕이 살아있던 300년 전과는 다르다. 사마르에 돌아오면, 마병에 걸려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다른 숲은 안 된다. 요정목, 세계수가 존재하는 사마르 대수림만이 엘프의 목숨을 보전시킨다.
“...감성팔이로 넘길 생각은 마.”
유진은 시크나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저 요정목들을 ‘세계수의 묘목’이라고 말했어.”
“남의 서글픈 과거사를 두고서 감성팔이라니. 너는 예나 지금이나 인성이 개차반이구나.”
“뭘 새삼스레. 확실히 하자는 것뿐이야.”
“그에 대해서는 숨길 생각 없다.”
시크나드는 코웃음을 치며 요정목을 손으로 쓸었다.
“...고향에서 죽고 싶었다.”
“또 또 감성팔이.”
“끝까지 들어라 개자식아.”
“엘프야 말로 잘 만들어진 이미지의 수혜자들이지. 생김새가 아름답고 평화를 사랑하고 숲에서 산답시고 다들 엘프가 착하고 고운 말만 쓰는 줄 알아요.”
“우리는 실제로 그런 종족이다.”
“구라치지 마 시발아. 엘프가 정말로 착하고 고운 말만 쓰는 종족이라면, 왜 엘프가 키운 세냐가 싸구려 용병들보다 쌍욕을 잘 했던 거냐?”
“...우리는 아름답고 평화를 사랑하기에, 피 흐르는 싸움보다 혓바닥을 날카로이 단련한 것이다.”
“어, 그래, 귀쟁이 새끼야. 감성팔이나 계속해 봐.”
고향에서 죽고 싶었다. 그를 간절히 바라며 사마르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떠돌고, 기억을 더듬어 본 들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수십 년 전에도 숲의 원주민들은 야만스러웠다. 엘프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발정난 개새끼들. 나는 마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깟 야만족들 하나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향을 찾아 가는 길, 나는 위기에 처한 떠돌이 엘프들을 구하고...”
“어, 그래서 저 요정목이 왜 세계수의 묘목이냐고.”
“...꿈을 꿨다.”
시크나드는 표정을 왈칵 찡그리며 내뱉었다. 꿈, 이라는 말에 유진은 얼마 전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성검이 보여 준 꿈. 어쩌면 신의 계시일 지도 모르는 꿈. 유진은 눈을 반짝 빛내며 시크나드에게 다가왔다.
“설마 네 꿈에 세냐가 나온 거냐?”
“...아니. 세냐는 나오지 않았다.”
그 대답에 유진은 노골적으로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크나드는 그 표정에 주먹을 꽉 쥐면서 말을 이었다.
“...대신, 세계수의 모습을 보았다.”
거대한 세계의 뿌리에서 자그마한 나무들이 갈라져 나오는 꿈. 단순한 꿈은 아니었다. 꿈에서 깼을 때, 시크나드의 앞에는 세 그루의 어린 묘목이 심어져 있었다.
“...흠.”
과연. 저런 꿈까지 꾸었다면, 이 마을의 결계는 정말로 은혜로운 숲의 기적이라 할 만 했다. 유진은 놀람을 가다듬고서 세계수의 묘목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제는 묘목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자랐지만, 저 요정목들은 세계수라 불리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썩을.”
유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결국 뭐야? 너도 세냐나 엘프의 영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거잖아.”
“아무 것도 모르지는 않다.”
시크나드는 손가락을 들어, 유진이 들고 있는 세계수의 나뭇잎을 가리켰다.
“하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진짜 세계수의 나뭇잎이다.”
“그럼 가짜 세계수의 나뭇잎이겠냐?”
“...나는 고향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도, 찾을 수도 없었지만. 그 나뭇잎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다.”
세상 어디에 있건, 세계수의 나뭇잎을 사용한다면 엘프의 영지로 워프할 수 있다. 그 사실은 유진도 잘 알았다.
“이건 이미 사용된 나뭇잎이야.”
“하지만 바스러지지 않고 남아있지. 네가 세계수에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 나뭇잎이 널 영지로 인도해 줄 것이다.”
“...진짜?”
유진은 눈을 반짝 뜨며 물었다. 하지만 시크나드는 그리 내뱉은 주제에 영 확신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본래라면 그렇겠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가 없군. 나를 포함한 엘프들은 어떠한 마법에 의해 기억이 지워졌다. 뿐만 아니라 사마르 어디에서도 엘프의 영지를 찾아낼 수 없었어.”
“...봉인.”
유진이 중얼거린 말에 시크나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로 엘프의 영지가 봉인 된 것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세계수의 나뭇잎이 남아서, 네게 쥐어졌다는 것은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 위해서일 지도 모른다.”
시도해 볼 수밖에 없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린 나뭇잎을 응시했다. 살짝만 힘을 줘도 바스러질 것 같은 주제에, 이 나뭇잎은 손아귀에 꽉 쥐어도 바스러지지 않는다. 유진은 나뭇잎에서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그건 마나와 비슷하지만, 보다 생기가 가득했다.
“...하멜.”
“그 이름으로는 더 부르지 마라.”
유진은 세계수의 나뭇잎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300년 전의 이름이잖아. 지금 내 이름은 하멜이 아니라 유진이다.”
“중요한가?”
“중요하지. 나 환생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지 않단 말이야.”
“아니스를 닮은 여자에게도 네가 하멜이라는 것을 밝힐 생각이 없는 건가?”
“없어. 내가 환생했다는 걸 아는 건... 템페스트와 세냐의 사역마, 유폐의 마왕, 그리고 너 뿐이다.”
“...세냐에게 사역마가 있었나?”
“몰라? 언제 기회가 되면 아롯에 가 봐. 거기 왕립 도서관에 ‘메르’라고 세냐의 사역마가 있는데, 세냐 어릴 적과 아주 똑 닮았어.”
“너는 세냐의 어린 시절을 모르잖나.”
“몰라도 그냥 보면 꼬마 세냐라고 알아차릴 수 있다니까.”
시크나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세냐가 마을에서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를 떠올렸다. 잠시 그 머나먼 과거를 떠올리던 시크나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나는 아롯에 갈 수 없다.”
“알아. 너 마병 걸려서 숲 못 나가잖아.”
“알면서 왜 말한 거지?”
“약 오르라고.”
시크나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잠시 동안 유진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화들짝 놀라서 어깨를 폈다.
“유폐의 마왕도 네 환생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알고 있을 거야. 그래서 세냐의 도움이 필요한 거고. 뭐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놈의 꿍꿍이는 모르지만, 날 아는 주제에 죽이려 들지 않았거든.”
건방진 새끼.
유진은 하멜의 무덤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며 뿌득 이를 갈았다. 곱씹어 볼수록 그때의 상황은 짜증나고 엿 같았다. 아멜리아에게 죽을 뻔 한 것. 하멜의 시체가 데스나이트로 만들어진 것. 그것들도 굉장히 짜증나는 일이지만,
그 이상으로 짜증나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300년 전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폐의 마왕은 유진에게 어떠한 짓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멜리아가 유진을 죽이고, 강제하지 못하도록 물러서게 만들었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니.’
그리 말할 수 있는 일인가? 시크나드는 유진에게 내심 경악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진. 네게 부탁이 있다.”
“그러시겠지. 따라오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유진은 시크나드의 ‘부탁’이라는 것에 별 고민은 하지 않았다. 뻔하지 않은가. 녀석은 어떻게든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테고, 아마 봉인 되었을 엘프의 영지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진이 가진 진짜 세계수의 나뭇잎 뿐이다.
“아니. 그런 부탁이 아니다.”
하지만 시크나드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마을을 비울 수 없는 입장이다. 비록 결계가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지만, 이 결계는 절대적이지 않아. 집요하게 파고든다면 마을은 발견된다.”
“그럼 뭔데?”
“이 마을의 엘프들을 데리고 가 다오.”
그 부탁은 예상하지 못했다. 유진은 당장 답하지 못하고 시크나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답은 못해주겠는데. 이 나뭇잎이 무조건 엘프의 영지로 인도해 줄 것이란 보장은 없잖아.”
“...만약 그렇다면, 이곳의 엘프들을 사마르가 아닌 다른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보호해 다오.”
“네 마음은 이해하는데, 오히려 숲을 나가게 되는 것이 엘프들에게 위험한 것 아닌가?”
유진의 눈은 세 그루의 요정목을 보았다.
“이 숲이 엘프에게 개 같은 곳이라는 것은 나도 알아. 외지인과 원주민이 합심해서 엘프들을 사냥하고, 바깥에 팔아넘기지. 그렇다지만 엘프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숲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잖아.”
“요정목을 옮겨 심으면 된다.”
“요정목이라는 것이 뿌리 캐내서 옮겨 심을 수 있을 만큼 쉬운 나무였냐?”
“세계수의 나뭇잎이 있다면 가능하지.”
“어떻게?”
“그 나뭇잎을 묻은 토지에 요정목을 옮겨 심으면 된다.”
유진은 곧장 답하지 않고 시크나드를 응시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시크나드는 유진이, 아니, 라이언하트 가문이 엘프족의 후견인이 되어주기를 부탁하는 것이다.
무법지대인 사마르에서는 엘프의 대우가 처참하지만, 다른 대륙의 국가들이 사마르만큼 노골적으로 엘프를 처참히 대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북방 루하르 왕국은 엘프를 귀빈으로 대하고, 신성제국도 엘프의 사냥과 박해를 엄중히 취급하고 있다. 애당초 엘프 뿐만 아니라 노예제도 자체가 300년 전부터 폐지된 악법이다.
하지만 엘프들이 루하르나 신성제국에 의탁하는 것은 힘들다. 헬무드와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엘프의 마병은 마왕과 마족의 존재로 발병하는 것이기에, 헬무드와 가까운 곳에서는 아무래도 발병의 빈도가 늘어난다.
키옐은 헬무드와 한참 떨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라이언하트 가문은 남쪽 우클라스 산 전체를 영지로 삼고, 수도의 본가도 거대한 숲을 저택령에 포함하고 있다.
“...부탁한다.”
시크나드가 고개를 숙였다.
“부탁은 무슨.”
유진은 피식 웃으며 시크나드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냥 본가 숲에다가 나무 세 그루 옮겨 심고서, 엘프 백 명 쯤 숲에 풀어 놓으면 되는 거잖아.”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흔쾌히 말했다.
시크나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냐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시장
“수염이라도 붙이는 것이 더 심술궂어 보일 것 같습니다만.”
“심술궂게 보일 필요가 있는 거냐?”
“기왕 노예상으로 위장할거, 누가 봐도 확실히 노예상처럼 보이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그럴 듯 해.”
유진은 고깝다는 표정을 하고서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왜 나만 위장하냐? 너도 위장해야지.”“왜 저도 위장해야 합니까?”
“그럼 사제복입고 나 신관이요 하고 거들먹거리며 노예시장 들어갈래? 거기 새끼들이 퍽이나 너 들여보내주겠다.”
“...실로 그럴 듯한 말입니다만, 저는 이 옷을 벗고 모습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굳은 얼굴을 하고서 턱을 당겼다.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건 사제복을 벗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저까지 꼭 위장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사제의 동행도 이유를 둘러댄다면...”
“네 입장은 둘째치고, 신성제국이 욕을 제법 들어 처먹을 텐데. 신관이 노예상에게 뒷돈을 받아 처먹고 엘프를 매입한다... 그런 소문이 돌아도 상관없는 거냐?”
그 말에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굳는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사실 네가 안 따라가면 될 일이긴 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유진님의 여정에 함께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뭘 의무까지야.”
유진은 그렇게 놀려대면서 다시 거울을 보았다. 과거 볼레로 거리에서 썼을 때보다 고등한 변신 마법. 골격까지 바꿀 수는 없지만, 지금 유진의 얼굴은 험상궂은 중년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거기에 머리색도 잿빛에서 누런색으로 바꾸었고, 양 손 가득 기름을 발라서 옆으로 넘겼다.
오늘. 사마르의 부족들이 대거 참가하는 노예시장이 열린다. 일 년에 두 번밖에 열리지 않는 이 시장에는 사로잡은 외지인을 포함해 여러 종족들이 출품되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의 가치를 자랑하는 것이 바로 엘프다.
세계수의 나뭇잎을 사용해 엘프의 영지를 탐색하러 가기 전. 유진은 노예시장에 참석해, 그곳에 출품될 엘프들을 가로채기로 했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정말로 세계수의 나뭇잎을 사용해 엘프의 영지로 인도될 지는 의문인데, 그 일이 끝나면 이 마을의 엘프들을 라이언하트의 본가로 데려갈 것이다. 먼저 본가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거리가 거리이니 일단 먼저 데려가고서 허락은 나중에 구할 생각이다.
어차피 그렇게 데려갈 거. 노예시장에 출품되는 엘프들도 먼저 챙겨두는 편이 깔끔하지 않은가.
“수염까지는 과해.”
유진은 거울 앞에서 표정을 이리저리 구겨보이며 중얼거렸다.
“네, 지금 나리의 얼굴은 충분히 심술궂어 보이십니다.”
맞장구를 친 것은 애꾸눈의 엘프였다. 그녀는 하나 뿐인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는데,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았다.
수호자 시크나드의 손님이라지만, 이 마을의 엘프들 중 상당수가 인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건 애꾸눈의 엘프, 레베라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곳 엘프들이 유진에게 반감을 갖는 이유는, 조만간 숲을 떠나 라이언하트 본가에 귀속 된 숲에서 살게 될 것이란 예고 때문이었다.
이해는 하고 있다. 그 사실은 수호자 시크나드가 직접 예고한 것. 야만족과 사냥꾼이 득실거리는 사마르보다는, 라이언하트 본가의 숲에서 사는 것이 안락할 것이다. 이 마을의 엘프들을 보호하고 있는 요정목까지 함께 이주한다 하였으니, 마병에 대한 걱정도 없을 것이다.
다만... 레베라를 비롯한 여러 엘프들은, 동족도 아니고 숲도 아닌 인간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것에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유진도 그런 엘프들의 입장은 얼추 헤아리고 있었다. 노예시장에 참가해 출품된 엘프들을 먼저 챙겨두는 것도, 굳이 말하자면 보여주기 식으로 친절함을 과시하는 것이다.
‘어찌 받아들일 지까지는 신경 못 써주겠고.’
그래도 처음 보였던 적의보다는 누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감수하며 노예시장에 나가고, 거금을 들여 출품된 엘프를 구매해 마을로 데리고 온 단다. 그리고 숲보다 안전한 라이언하트의 영지에서 먹고 살게 해준단다.
‘저만큼이나 해주는데 인간이라고 무턱대고 싫다고 빼액거리면 그게 엘프냐? 호로새끼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토의 형태를 바꾸었다. 그러고 있자니 잠시 밖에 나갔던 크리스티나가 돌아왔다.
“유진님. 이걸 보십시오.”
돌아 온 크리스티나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는 사제복 바깥에 큼직한 로브를 걸치고서 유진의 앞에 다가 와 한바퀴 빙글 돌았다.
“이렇게 하면 사제복을 벗을 필요도 없고, 후드를 쓰면 제 얼굴도 가릴 수 있습니다.”
“그걸 대단한 발견이랍시고 자랑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냐?”
묻는 말에 크리스티나의 미소가 씰룩거린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도는 것을 멈추고,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며 로브의 단추를 잠궜다.
“...정말 저는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목발을 짚고서 근처에 서있던 나리사가 쭈뼛거렸다. 노예시장에 가는 것은 두렵지만, 여러 은혜를 베풀어 준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돕고 싶다는 마음도 공존하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괜히 너 데리고 갔다가, 가룽 부족과 맞닥트리면 일이 귀찮아 질 테니까.”
“...네...”
가룽 부족, 이라는 말에 나리사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거대한 늑대를 탄 추격자들을 피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린 것이 고작 며칠 전의 일이다.
“너도 굳이 따라 올 필요 없어.”
“상품도 없는 외지인이 시장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반론할 수 없는 말이었다. 유진은 시크나드에게 미리 받아 둔 상패(象牌)를 확인했다. 사마르의 대부족 중 하나인 어보르 부족에서 발급 된 상패다. 이게 없으면 아무리 노예상인이라 주장한 들 시장에는 들어갈 수 없다.
“아니면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파시겠습니까. 나리가 신분을 밝히신다면, 여러 대부족에서 나리를 귀빈으로 받아 시장에 출입할 수 있게 해주실 겁니다.”
“가문 이름에 똥칠까지 해대며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데.”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레베라는 하나 뿐인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상패를 지니시고, 상품을 가지고 가신다면 소정의 출입금만 내고서 시장에 들어갈 수 있으십니다.”
“검문은?”
“하지 않습니다. 그 상패부터가 상인들 사이에서 돌려쓰는 것이니까요.”
유진은 그런 상패를 왜 시크나드가 가지고 있던 것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뻔하지 않은가. 노예상인들이 떠돌이 엘프를 잡겠답시고 기웃거리다가, 시크나드의 검에 썰려 죽은 것이리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 시장을 경험해 보았으니, 필요한 만큼의 안내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레베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 손발과 목에 직접 족쇄를 매달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리사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특히 레베라가 발에 찬 족쇄에 묵직한 사슬까지 매달 때, 나리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히... 히익... 힉...”
경기를 일으키는 나리사와는 달리 레베라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비틀거리고 일어서서, 길게 늘어트린 사슬을 유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벌써부터 잡아야 하나?”
“얼굴만큼 험악하게 다루셔야 합니다. 괜히 절 배려하셨다가는 다른 상인들이나 원주민들이 유진님을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오냐, 노예야.”
유진은 곧장 대꾸하며 사슬을 잡아끌었다. 그 모습에 나리사는 입을 틀어막았고, 레베라는 군말 없이 고개를 푹 떨궜다.
*
“난 라이언.”
“...저는 티나.”
시장에 도착하기 전. 먼저 말을 맞췄다. 유진의 가명은 라이언이고, 크리스티나의 가명은 티나로 하기로 했다.
라이언은 용병 출신의 사냥꾼이고, 티나는 라이언의 부인이다.
“꼭 부인으로 해야 합니까?”
“그럼 너도 노예 할래?”
“...애당초 부부끼리 사냥꾼이라니...”
“끼리끼리 논다는 말도 있잖아.”
“지금 유진... 아니, 라이언님의 얼굴로 끼리끼리 논다는 말은 제게 있어서 굉장히 큰 실례입니다.”
“미안한데 지금 네 얼굴도 그리 잘나지는 않아.”
이죽대는 말에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표독스럽고 성질 고약해 보이는 아줌마로 바뀌어 있었다.
“기왕 하는 거 말투도 바꿔.”
“네?”
“그 얼굴에 사근사근 말하니 하나도 안 어울려. 좀 욕도 써가면서, 목소리도 긁고...”
“...꼭 그래야 합니까?”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일을 망칠 셈이냐.”
“노... 노력하겠... 노력, 노력한다.”
“안 하느니만 못하군. 차라리 벙어리인 것으로 가는 게 어때? 어차피 거기서 네가 입을 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크리스티나는 입을 꾹 다물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본래 얼굴이라면 저렇게 노려보지 않고 눈웃음으로 감추었을 텐데, 얼굴이 바뀌어서 그런지 노려보는 시선도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노예시장의 개최권을 가진 것은 대부족들 뿐. 이번에 시장이 열리는 곳은 지얄 부족의 영역이다.
‘난 도시에라도 들어갈 줄 알았는데.’
외지인과 타부족이 오가기 때문인지, 시장은 도시가 아닌 숲 한복판에서 열린다. 암시장이란 점에서는 아롯에 있는 볼레로 거리와 닮았지만, 본질만 닮았을 뿐 이곳의 노예시장은 볼레로 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원초적이었다.
출입할 때에도 그랬다. 숲 곳곳에서 순찰을 도는 지얄 부족의 전사들은 출입하는 상인들에게 눈을 부라렸고, 타 부족의 손님들에게도 위협적으로 굴었다.
‘시장은 뒷전이군.’
대충 이해가 갔다. 1년에 2번 밖에 열리지 않는 시장. 이 시기에는 적대 관계의 부족들도 싸움은 벌이지 않는다. 대부족들이 노예시장에서 싸움을 벌이지 않도록 조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지라도 이만큼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여기저기 싸움의 씨앗이 뿌려진다. 서로 경계하고 적대하는 만큼 덩치를 부풀려 서로의 세력을 견준다.
각 부족과 연줄을 둔 귀빈들도 그 광경을 내심 즐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시장 자체가 진귀한 볼거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노예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권이 거래된다.
사마르는 넓다. 이곳은 나무만 득실거릴 뿐만 아니라, 대륙에서 보기 드문 귀중한 자원들도 파묻혀 있다. 값비싼 보석이나 미스릴이 채굴되는 광산. 몬스터의 다양한 소재. 그 외에도 마나를 인공적으로 늘리고, 육체에 힘을 더하는 영약들. 각 부족들에게 내려오는 선대의 유산들.
외지의 귀빈들에게 있어서는 저러한 것들이 노예나 엘프보다는 가치가 높다.
“...몸뚱이 어디 한 구석이 망가진 엘프를 원한다.”
다자랑 코랄. 이 돼지는 제 앞에 존재하지 않는 이권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고, 소유해 가지고 놀 수 있는 엘프 노예가 더 탐이 났다.
“...서두르지 마라.”
우지차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고서 다자랑을 달랬다. 이 가룽 부족의 대전사는 며칠 전, 정체 모를 괴한과 맞닥트리고서도 목숨을 부지했다.
괴한의 변덕 때문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오줌을 지리고 목숨을 구걸하는 우지차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서 사라져 버렸다.
우지차는 그때의 일을 부끄럽다 여기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라면 누구든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실제로 거기 있던 가룽 부족의 모든 전사들이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똥을 지린 놈도 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목숨을 구걸한 놈도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 전사들에 비하자면 우지차는 당당했고, 대전사다운 명예도 지켰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되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오줌은 지렸지만 똥은 지리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것이면 되지 않는가. 시무인 십이걸 중 하나, 블론 지라크는 죽어버렸지만 우지차는 죽지 않았다. 귀중한 손님인 다자랑 코랄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것이면 된다. 블론에게 시무인의 레이디들은 소개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다자랑의 비위만 잘 맞추면 시무인에서의 화려한 미래는 얻을 수 있다.
“너... 너 말이야. 너. 나한테 잘 보여야 돼.”
다자랑은 눈을 한껏 치켜 뜨고서 우지차를 노려보았다.
“블론이 죽었다고 해서, 나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너도... 너도 알지?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지.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알아?”
다자랑은 등신이지만 뇌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 아버지인 코랄 백작에게서 우지차와의 거래에 대해서 수십 번은 들었다. 가룽 부족에 도착하고서도 죽은 블론에게 다시 수십 번을 들었다.
“너희 부족의 광산 말이야. 그거. 네가 원하는 조건에 맞춰서 거래해주는 것은 우리 아버지뿐이야.”
사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지차가 여러 곳에 견주어 본 바 코랄 백작이 만족스런 거래 상대이기는 했다. 일단 코랄 백작은 시무인 내에서도 입지가 큰 귀족이다.
“블론이 죽은 거...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자랑은 그 순간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욱이 두려운 것은 블론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시무인 십이걸. 비록 말석이라고 해도 블론은 시무인에서 12명 안에 드는 기사였고, 코랄 백작은 블론을 굉장히 아꼈다. 그래서 머저리 아들의 호위로 붙여주며 사마르에 보낸 것이다.
“도련님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안다.”
우지차는 눈을 부릅뜨고서 다자랑을 응시했다.
“블론의 죽음은 사고였다. 거래가 성사된다면, 나도 도련님이 바라는 대로 코랄 백작에게 증언할 것이다.”
“그래... 그래. 브, 블론은 똥통에 빠져 죽은 거야. 술에 취해서... 너, 너희 부족의 화장실은 푸세식 똥간이니까. 거기서 발을 헛디뎌 죽은 거야.”
“...그것보다는 술 취해 말을 타다가 낙마해 죽은 것으로 하지. 어쨌건, 도련님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도련님도 내가 걱정하지 않게 해달라.”
“응, 으응. 알았어. 아버지한테 잘 말해서, 네가 아버지에게 기사서임을 받을 수 있게 해 줄게.”
기사서임. 그 말에 우지차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죽은 블론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블론이 죽은 덕에 우지차의 미래가 한층 더 밝아졌다.
그만한 기사를 잃었으니 코랄 백작은 다른 강한 전사에게 눈독을 들일 터. 우지차는 자신이 블론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코랄 백작에게 기사 서임을 받고, 어느 정도 실적을 올리면 블론이 속해 있던 시무인 십이걸에도 이름을 올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귀족으로 화려하게 살 수 있다.’
우지차는 비죽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원초적이고 지저분한 시장을 보라. 외지인 노예들이 알몸에 족쇄를 차고서, 가판대에 올라 간 고깃덩이처럼 진열되어 있다.
“살려주세요!”
여러 외침들. 다들 자기가 어느 나라에서 온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외쳐대고 있다. 노예로 팔려나온 부족의 죄인들도 제 덩치를 최대한 부풀려가면서 공포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우지차는 그를 보며 결의를 다졌다. 지금 그는 꼬마 돼지의 호위로 이 시장에 와있지만, 언젠가는 시무인의 귀족이 되어 이곳에 올 것이다. 가룽의 대전사로서는 감히 눈도 마주할 수 없는 대부족의 유력자들을 상대로 거들먹거리며, 그들이 앞 다투어 줄을 대려들 귀족이 되어 이곳에 다시 올 것이다.
우지차는 머나먼, 아니, 그리 머지않을 미래를 그리며 입술을 씰룩댔다.
“우지차!”
대뜸 다자랑이 우지차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저, 저기 저 엘프. 저거!”
“엘프?”
지금까지 시장을 돌아본 바, 확인한 엘프는 한 명 뿐이었다. 문제는 그 엘프가 남자라는 것과, 팔다리가 멀쩡히 달려있어서 다자랑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저기 앞에!”
하지만 지금, 다자랑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우지차는 다자랑이 가리키는대로 앞을 보았다.
“...팔다리는 다 달려있는데?”
“눈이 하나 없잖아!”
다자랑은 침까지 튀어대며 외쳤다. 과연. 다시 쳐다보니, 저 앞의 엘프는 오른쪽 눈 하나가 흉터로 뒤덮인 애꾸였다.
“안대도 안 했어... 저거... 저거 칼자국인가? 아니면 화상?”
저 노골적으로 드러난 흉터가 다자랑의 흥분을 끌어올렸다. 우지차는 저 비틀린 성벽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화려하고 달콤한 미래를 위해서는 다자랑을 만족시켜야 했다. 우지차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어이.”
엘프를 끌고 다니는 상인은 남녀 한쌍이었다. 다자랑은 눈을 끔벅거리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체격은 제법 좋았지만, 수십 년 동안 숲에서 단련해 온 우지차의 몸과는 비교가 안 된다.
‘용병 출신 사냥꾼인가. 실력은 그저 그렇군.’
우지차는 가룽의 대전사다운 날카로운 안목으로 사냥꾼의 실력을 평가했다.
‘옆은... 아내인가?’
똑같이 얼굴이 찌그러진 것이 부부인 것 같았다.
‘몸은 거의 단련되지 않았군. 마법사... 아니면 창부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우지차는 우람한 팔 근육을 과시하며 팔짱을 끼고 앞을 막아섰다.
“그 엘프. 나한테 팔아라.”
시장
이 노예시장은 이틀 동안 열리는데, 그 중에서 엘프가 거래되는 날은 첫날 뿐. 둘째 날 부터는 원주민들이 길들인 몬스터나 길들이기 나름인 어린 몬스터들이 거래 된다.
고가에 희귀한 종족이기 때문에, 엘프가 거래되는 구역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자금은 부족하지 않다. 카지탄의 에미르에게 뜯어낸 보석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억 셀은 넘고, 그 외에도 사마르에 들어오기 전에 환전한 보석이 5억 셀 쯤 된다.
레베라가 말하길, 이 시장에서 엘프의 시세는 기본이 3억 셀이라고 했다. 성별과 용모, 육체의 상태에 따라 값은 다르지만, 넉넉히 잡아도 5억 셀이면 엘프를 구매할 수 있다.
보통 이 시장에 출품되는 엘프는 많아봐야 2명 정도. 유진이 가진 자금이라면 충분히 엘프를 독점할 수 있다.
‘생각보다 싼데.’
처음 레베라에게 엘프의 값을 들었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곱씹어 보면 그렇게 싼 값도 아니긴 했다. 사마르에 돌아 온 엘프들은 여러 가지의 하자를 가지고 있다.
당장 나리사만 해도 한쪽 발이 잘렸고, 레베라는 애꾸눈이다. 노예에서 탈출해 이 먼 숲까지 오다 보면 여러 고생을 겪게 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된다.
그 상처는 꼭 육체의 상처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엘프도 정신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특히 트라우마는 노예 생활을 겪은 대부분의 엘프들이 지닌 고질병 중 하나다.
사지가 멀쩡한 것도, 순결한 것도, 어린 것도, 정신이 멀쩡한 것도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병에 걸렸을 수도, 걸릴 지도 모르는 엘프가 최소 3억 골드라는 것이다.
‘거인의 불알에 맞먹는 군.’
가르기스 개자식. 유진은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머나 먼 친척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 우락부락한 근육 돼지 덕분에 경제관념이 이상해져 버렸다.
‘아직도 그러고 지내나?’
사실 아롯에 있을 적에 가르기스의 편지가 몇 번 오긴 했다. 놈은 유진의 생일마다 꾸준히 축하 편지와, 몸에 좋은 보약 같은 것을 함께 보내 왔다.
먹지는 않았다. 가르기스가 보낸 보약들은 하나같이 수상쩍고 재료가 지독했다. 그 보약들은 은근히 제 나이를 걱정하는 로베리안과 멜키스에 대한 선물로 바뀌었고, 가르기스 덕분에 유지는 멜키스에게도 제법 예쁨을 받았다.
“라이언님.”
“알아.”
유진은 시답잖은 생각을 그만두고 앞을 보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거구의 대머리가 성큼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유진은 놈의 우락부락한 근육에 이리저리 새겨진 문신을 보았고, 허리춤에 걸고 있는 부족의 표식을 확인했다.
‘가룽 부족.’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 시장은 근방의 부족들이 대거 참가하는 큰 행사다. 혹여 마주쳐 소란으로 번질까 해서 나리사도 데려오지 않았다. 얼굴? 그거야말로 염려할 것 없는 일이다. 유진은 자신을 공격했던 가룽 부족의 전사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켰다.
“어이.”
대머리 전사가 시선을 내리깐다. 유진도 키가 큰 편이긴 했지만, 놈은 유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 엘프. 나한테 팔아라.”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유진은 대머리의 뒤에서 실실 웃고 있는 돼지를 힐긋 보았다. 햇빛에 거의 그을리지 않은 피부. 옷감을 뚫고 나올 만큼 푸짐한 뱃살. 고생이라곤 해본 적 없어 보이는 손.
‘가슴의 문양... 어느 가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의복은 키옐의 복식이 아니야. 시무인이로군.’
남쪽 바다의 섬나라. 해상왕국 시무인.
“죄송합니다만, 이 엘프는 팔 수가 없습니다.”
그 대답에 우지차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내리 깐 시선에 살의를 담아서 유진을 노려보았고, 유진은 슬쩍 어깨를 움츠리면서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팔 수 없다고? 어째서?”
“그게... 팔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
애꾸눈이라고는 해도 레베라의 용모는 아름다웠으니, 다른 누군가가 거래를 제안해 올 때 거절하며 둘러 댈 이유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
“이 엘프는 저주받았습니다.”
“...저주? 엘프를 죽이는 병에 걸렸다는 말인가?”
“과연, 알고 계시는군요. 예, 이 엘프는 그 병에 걸려있습니다. 이 숲에서는 어찌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숲을 나가면 며칠 지나지 않아 죽게 될 겁니다.”
그 말에 우지차의 표정이 구겨졌다. 우지차는 더 유진을 압박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자랑을 돌아보았다.
“병에 걸렸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자 다자랑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면서 헤벌쭉 웃었다.
“오히려 병에 걸렸다면 잘 됐지! 그만큼 값이 쌀 것 아냐? 어이. 이 엘프, 1억 셀에 팔아라!”
다자랑의 외침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지요. 병에 걸렸다고 해도 엘프는 엘프인데, 어찌 1억 셀이라는 헐값에 팔겠습니까?”
“그럼 3억 셀. 3억 셀을 주마. 그 정도면 되겠지?”
다자랑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덩이를 씰룩댔다. 그러면서 탐욕 가득한 눈으로 레베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3억 셀이라굽쇼? 나리는 이 숲에서 사는 분이 아니신 듯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냐? 이 숲에서 지내는 동안 가지고 놀면 되는 것이다.”
미친놈이군. 고작 며칠의 유희에 3억 셀을 쾌척한다고? 3억 셀이면 가르기스가 좋아 환장하는 거인의 불알을 한쌍 구매할 수 있는 거금이다.
“...나리. 실례되오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23살이다.”
묻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다자랑은 가슴을 활짝 펴며 대답했다. 그 말에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23살? 제 힘으로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을, 운 좋게 귀족 가문에 태어난 것뿐인 놈. 지 애비가 아등바등 벌어 모은 재산을 며칠 즐기는 것에 홀라당 까먹으려 들어?’
유진은 다자랑에게서 이오드의 모습을 보았다. 마법 배우라고 아롯에 유학을 보냈더니, 서큐버스와 놀아나며 흑마법까지 입문하려 한 호로새끼.
“나리. 정말정말 죄송합니다만, 나리에게는 이 엘프를 팔지 않을 겁니다.”
“뭐야?!”
“제 몰골로는 믿기 어려우실 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나름 제 직업과 장사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안목이 맞다면 나리는 시무인 고위 귀족가의 자제분이신 듯 한데, 그런 분에게 병 든 엘프를 파는 것은 제 상인으로서의 긍지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긍지? 그게 뭔 개뼈다귀 같은 소리인가. 고작해야 엘프 노예를 파는 상인놈이 긍지는 무슨 긍지?
“이 천한 상인놈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 설마, 내가 나중에 엘프가 병들었다는 것을 트집삼아 환불이라도 해 달랄까 걱정하는 거냐?”
다자랑은 눈을 부릅뜨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난 다자랑 코랄. 시무인의 코랄 백작이 내 아버님이시다. 나는 가문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이 거래가 끝난 후에 네게 어떠한 핍박도 하지 않을 것이다.”
노리개로 삼을 엘프를 구매하는 것에 가문의 이름과 명예까지 걸다니.
‘이오드만도 못한 호로 새끼로군.’
“나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상인으로서의 긍지가 허락하지 않는 것이지요. 저는 이 엘프를 나리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팔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개자식아. 내가 괜찮고, 돈까지 내고서 사겠다는데 왜 네가 팔지 않겠다 지랄이냐? 그래, 5억, 5억 셀에 사마. 부족하냐? 그럼 8억!”
다자랑은 침을 튀겨가며 내뱉었다. 언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코랄 백작이 시무인의 고위 귀족인 것은 사실이지만, 가룽 외의 다른 대부족들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제 와서 새로이 줄을 대기에는 늦었고, 이번 시장을 관리하는 것은 지얄 부족이다. 시장에서 다툼을 벌인다면 그들이 개입해 올 것이다.
“나리가 제게 팔라 하시는 것은 엘프가 아니라, 제 긍지입니다. 저는 8억 셀이 아니라 80억 셀을 주셔도 긍지를 팔지 않을 것입니다.”
유진은 눈을 부릅 뜨고서 말했다. 다자랑은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지만, 우지차는 감탄한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긍지! 비록 상인의 긍지라지만, 저 긍지라는 단어는 아직 우지차에게 조금 남아있는 전사의 혼을 묵직하게 울렸다.
“그럼... 그럼 팔지 말고 그냥 줘.”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저는 이 엘프를 팔지 않고, 제가 직접 숲 밖으로 데리고 가서 죽게 할 겁니다.”
“장사치란 놈이 왜 손해를 감수하려는...”
“손해가 아닙니다. 긍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럼 이만.”
유진은 더 말하지 않고 다자랑을 지나쳤다. 다자랑은 그런 유진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우지차가 먼저 다자랑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 이 개새끼야. 왜 날 막는. 아니, 너 왜 도와주지도 않고 닥치고 있던 거냐?”
“내가 나서서 협박이라도 했다면 지알 부족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그게 뭐 어쨌다고! 나는... 나는 저 엘프를 원해...!”
“걱정하지 마라.”
우지차는 몸을 낮추어 다자랑의 귀에 속삭였다.
“어차피 저 엘프는 팔지 않겠다고 말했다. 놈이 시장을 나와, 지알 부족의 영역을 벗어나면. 그때 습격해 놈을 죽이고, 엘프를 빼앗으면 된다.”
“...그래도 되는 거야...?”
“괜찮다.”
본래는 안 된다. 이 시장은 여러 부족이 합의해 열리는 것. 이 시장에서 사용되는 상패를 소지한 상인은 공격해선 안 된다.
우지차가 알 바는 아니었다. 상인이 운운한 긍지는 전사의 혼을 울렸지만, 우지차는 전사보다 귀족이 되고 싶었다.
“...헛소리가 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그게 그럴 듯하게 들렸다면 네 머리가 잘못 된 거야.”
“헛소리, 라고 먼저 말했습니다. 라이언님 덕에 저는 그리 쓸모는 없는 삶의 지혜를 하나 깨치게 되었습니다.”
“삶의 지혜?”
“예. 논리보다는 목소리의 크기를, 설득보다는 대꾸할 틈을 주지 않는 억지가 언쟁의 승패를 가른다는 것입니다.”
“티나, 너는 천재구나...!”
유진은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대뜸 지른 탄성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네가 방금 말한 삶의 지혜라는 것은 모두 다 네게 배운 거야. 그런데 너는 이제야 깨달았다고? 그렇다는 건 너는 자각 없이 날 가르쳤다는 거잖아!”
“닥치십시오.”
크리스티나는 눈을 치켜뜨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이후의 거래는 나름대로 매끄러웠다. 유진은 두 명의 남자 엘프를 구매했는데, 그 중 한 명은 마병에 걸려 있어 시세보다 싸게 구매할 수 있었다.
사소한 문제라면, 마지막 남은 여자 엘프였다. 그 엘프는 마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흉터도 없어서, 상인이 부르는 값이 시세보다 훨씬 비쌌다. 거기에 유진 말고 다른 몇 명이 거래에 참가해서, 엘프의 구매는 자연스레 경매로 바뀌었다.
“...10억 셀.”
유진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입찰가를 올렸다. 즉석 경매에 몰린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10억 셀이라면 남은 보석을 모조리 긁어모아 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시장에서는 라이언하트의 블랙 카드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더 올리지 마라. 아니, 그냥 올려. 그럼 깔끔하게 포기할게.’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괜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 보석을 내가며 엘프를 구매했다.
하지만 가진 돈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정 그렇게 된다면 포기할 수밖에. 물론 그렇다고 엘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복면이라도 뒤집어쓰고 강도가 될 뿐이다.
“10억 셀. 10억 셀 나왔습니다.”
제발, 제발 입찰해라.
“예, 10억 셀!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이 개자식아.”
“예?”
“아니... 고맙소.”
유진은 치미는 울화를 삼키며 보석상자를 꺼냈다. 이것으로 유진은 가진 보석을 모조리 탕진해 버렸다. 엘프 한 명을 시세보다 2배는 넘게 팔아치운 노예상인의 얼굴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놈은 잇몸을 만개시키면서 보석을 하나하나 감정하며 액수를 확인했다.
“자, 데려가쇼.”
“...”
“나야 좋은 거래를 해서 즐거운데. 형씨는 참 특이하구먼. 엘프를 넷이나 데리고 뭘 할 생각이요?”
아가리를 확. 유진은 끓는 속을 삭이며 몸을 돌렸다. 엘프 마을부터 끌고 온 수레에는 이제 레베라를 포함해 4명의 엘프가 타게 되었다.
“...라이언님.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가련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에 쓰인 돈입니다. 아깝다 여기지 마십시오.”
“누가 뭐래? 그냥 안 괜찮다고. 내가 돈 15억 썼다고 꽁해질 놈으로 보이냐?”
“지금 꽁해 계시지 않습니까.”
“난 원래 이렇게 생겼어.”
환생하고서 돈 걱정은 해본 일이 없지만, 그래도 큰돈을 쓰게 되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15억이라고 해 봐야 고작해야 불알 5쌍 값이잖아.’
위안삼아 생각해 보았지만 그리 도움은 되지 않았다.
유진이 말을 타고 수레를 끄는 동안, 그곳에 탄 엘프들은 레베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영락없이 노예낙인이 찍히고 팔려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레베라의 말은 다른 엘프들에게 희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구겨졌던 유진의 얼굴도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라이언님.”
“알아.”
유진은 히죽 웃으며 말의 고삐를 당겼다. 말이 속도를 올린 만큼 수레가 덜컹거린다. 엘프들은 놀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엘프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했으나, 지금 엘프들의 얼굴은 공포가 번져가고 있었다.
레베라는 침착하고자 노력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은 마을의 수호자, 시크나드가 직접 전했었다.
위험한 곳에 가게 되지만, 위험한 일은 일어지지 않는다.
아니. 설령 위험한 일을 맞닥트릴 지라도,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시크나드는 그렇게 말하며 레베라를 안심 시켰다.
...정말 그런가? 레베라는 들리는 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쿵쿵거리는 발걸음. 좁혀지는 거리. 야만족의 전사. 왜 쫒아오는 거지? 시장의 상인은 습격하지 않는 것이 야만족들의 규칙일 텐데.
“...라이언님...?”
긴장과 공포가 호흡을 가빠지게 만든다. 레베라는 미칠 듯이 뛰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면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말에 탄 유진은 뒤에서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왜들 그래?”
“괘... 괜찮은 겁니까?”
“당연히 괜찮지. 오히려 잘 됐어.”
유진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빠르게 좁혀지던 거리가 어느 기점에서부터는 좁혀지지 않는다. 습격해도 문제가 벌어지지 않을 위치까지 기다리는 건가?
‘나야 고맙지.’
유진은 굳이 방향을 틀지 않고 똑바로 나아갔다. 그렇게 지알 부족의 영역을 벗어났고, 조금 더 수레와 함께 숲을 달렸다. 언제쯤 오려나. 지금?
지금.
거리가 빠르게 좁혀온다. 그리고 추월되었다. 나무 위를 달려 온 추격자가 저만치 앞에 떨어져서 수레를 가로막는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수레를 멈추었다.
“우우읍..,!”
우지차의 등에 매달려 있던 다자랑은 치미는 구토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급히 우지차의 등에서 내려와, 바닥에 웩웩하고 구토를 시작했다.
“내려와라.”
바로 뒤에서 토악질이 이어지고 있지만, 우지차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유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면서 수레에 타고 있는 크리스티나와 엘프를 확인했다.
아직까지 아줌마의 얼굴을 하고 있는 크리스티나에게는 관심없었다. 우선 저 애꾸눈 엘프를 다자랑에게 넘긴 뒤, 남은 3명의 엘프는... 우지차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유진은 마부석에서 내려오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네 이름이 다자랑 코랄이라고 했지?”
유진은 우지차처럼 손가락을 뻗어, 다자랑을 가리켰다.
“우욱... 웨엑.”
다자랑은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토만 했다. 사실 대답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유진은 엘프 3명을 사느라 15억을 썼다.
다자랑은 레베라를 8억 셀에 사겠다고 말했다.
즉, 다자랑에게는 최소 8억 셀에 달하는 보석이 있다는 말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지.’
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수레에서 펄쩍 내려왔다.
‘나는 강도짓 안 하려고 했어. 그런데 저 새끼가 먼저 강도가 되어 내 앞을 막았잖아.’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상황파악이 안 되나?”
우지차는 겁먹은 기색이 없는 유진을 보며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부족의 다른 전사들은 데려오지 않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고작 해야 노예상인 한 명이다. 놈을 찢어 죽이는 것은 우지차에게 있어서 벌레를 짓이겨 죽이는 것보다 쉬운...
“뭐야?”
우지차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 앞에 있던 노예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장
‘어디로 간 거지?’
가룽의 대전사, 우지차는 당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예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도망? 비싼 돈 주고 구매한 엘프와 마누라를 내버려 두고 도망쳤다고?
만약 정말 도망친 것이라면, 대체 어느 틈에? 눈앞에서 시선을 돌린 적은 없었다. 눈은, 몇 번 깜빡였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눈 정도는 깜빡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 눈을 깜빡이는 찰나. 유진이 가속하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
ㅡ뻐억! 시야 밖에서 날아 온 발길질이 우지차의 턱을 걷어 찼다. 그 일격은 우지차의 예상을 아득하게 벗어났다. 천한 노예상 따위가 저렇게 움직일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결과적으로 우지차는 짧은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했다. 기습적인 공격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 일격으로 우지차의 의식이 단절되었다. 눈동자가 게게 풀리고, 2미터가 넘는 거구가 휘청거린다.
철퍽.
뒤로 넘어간 우지차의 대머리가 토사물의 정중앙에 떨어졌다. 아직 멀미를 떨쳐내지 못하고 헐떡이던 다자랑은 꽥하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뭐, 뭐, 뭐약!”
다자랑은 입가의 토사물을 닦지도 못하고 펄쩍하고 뒤로 뛰어올랐다. 뛰어오르려고 했다. 삶의 대부분을 고도비만으로 살아오며 혹사당한 무릎은 갑작스런 도약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
결국 다자랑은 생각했던 것처럼 멀찍이 물러서지 못했다. 두어걸음 물러서고, 비대한 몸의 출렁거림에 다시 구토감이 솟구쳤다.
“우웨엑...”
의식을 잃은 우지차의 얼굴에 토사물이 쏟아졌다. 전생부터 온갖 지저분하고 끔찍한 것들을 보아 온 유진이지만, 눈앞의 광경에는 솔직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더러워 시팔.”
“우욱... 우웩...”
“대체 얼마나 처먹어댔길래 토해도 토해도 끝이 없는 거냐?”
유진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에 응축된 바람이 다자랑에게 쏘아졌다. ㅡ퍼억! 바람의 탄환이 명치에 꽂힌다. 흩어지지 않는다. 템페스트와 계약한 유진에게 있어서 ‘바람’은 코어의 마나처럼 당연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우우... 우우옥...!”
명치에 처박힌 바람이 소용돌이가 된다. 다자랑의 뱃살이 소용돌이에 휩쓸려 요동친다. 단순히 살만 뒤흔드는 것이 아니다. 격렬한 바람은 다자랑의 위장을 뒤흔들었고, 아직 토해내지 못한 위장의 잔여물을 억지로 식도 밖으로 뽑아냈다.
백작가에서 태어나 고생 같은 것은 겪지 않고 살아 온 다자랑에게, 지금의 고통은 평생 당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당해 볼 일이 없는 미지의 감각이었다. 다자랑은 뱃속의 모든 것을 토해낸 뒤에, 바닥을 엉금엉금 기면서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렸다.
“사, 사, 살려, 살려 주세요...”
“누가 너 죽인대?”
유진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대답도 못하고 웩웩 토악질만 해대기에, 더 토해낼 것이 없도록 만들어줬을 뿐이다. 유진은 다자랑에게 더 가까이 가지 않고 손가락만 앞으로 뻗었다.
“야.”
단순히 가리킨 것 뿐이지만 다자랑은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저 뻗은 손가락에 지목당하고, 바람에 얻어 맞아 느낀 통증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23년의 인생, 백작가 도련님으로서의 권위는 당장 눈앞에 있는 주먹에서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너 돈 얼마나 있냐?”
유진은 뻗었던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노골적인 제스쳐. 오히려 그것이 다자랑을 안심시켰다. 원하는 것이 돈이라면 간단하고 깔끔하지 않은가.
“고, 공용화폐로는 3억 셀. 보석으로는 10억 셀 쯤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그 돈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래?”
“무... 물론 드려야죠...”
“주겠다고 하니 고마운데 말이야. ‘나중에’ 이 일을 기억하고, 날 찾아 복수하려는 것 아냐?”
유진은 ‘나중에’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다자랑을 응시했다. 그 말은 다자랑으로 하여금 23년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머리를 굴리게 만들었다.
곧장 결론이 나왔다. 나중을 말한다는 것은, 죽이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다자랑은 즉시 고개를 조아렸다.
“코... 코랄 백작가의 명예를 걸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죄 없는 아버지의 명예는 왜 거는 거냐?”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다자랑을 노려보았다.
“나는 네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굳이 뭘 했다면, 네가 바라던 엘프를 팔지 않은 것이지. 근데 물건을 팔고 팔지 않고는 상인인 내 마음이잖아, 그렇지?”
“네... 네.”
“그렇게 헤어져서 끝날 수 있었는데, 네가 날 조지려고 했잖아. 맞지? 저기, 아직까지 기절해 있는 야만족이랑 결탁해서 말이야. 그렇게 나 조지고, 나랑 같이 있는 여자도 조지고, 내가 데리고 있는 엘프들도 죄다 빼앗으려고 했잖아. 그렇지?”
“네...”
일어나지 마라.
다자랑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우지차는 아직까지 쓰러져 있다. 만약 놈이 깨어나면? 우지차가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가룽 부족의 대전사. 노예상 따위의 일격에 정신을 잃고, 블론을 죽인 괴물에게는 오줌을 지리면서 목숨을 건 놈인데?
다자랑은 덜덜 떨면서 품에 손을 넣었다.
“이 모든 건 네가 만든 거니까, 책임도 네가 져야지.”
품안에서 꺼낸 것은 자그마한 주머니였다. 다자랑은 그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고서 탈탈 털었다. 그러자 큼직한 보석상자들이 바닥에 쿵, 쿵 떨어졌다.
“목숨 값이다.”
유진은 두 눈을 얇게 뜨고 다자랑을 응시했다.
“네가 날 다시 찾으려 든다면, 그때는 보석이 아니라 네 목숨으로 값을 치르게 될 거야.”
얼굴은 바꿨다. 사마르에서 사용한 신분도 가짜다. 애당초 숲에 제대로 들어온 후부터는 신분증을 사용한 적도 없다. 공용 화폐? 보석? 그딴 것쯤은 얼마든지 깔끔하게 세탁할 수 있다.
그래도 경고는 해둔다. 유진이 불러 낸 바람이 무거운 보석상자들을 둥실 띄웠다.
“...헉.”
우지차가 눈을 떴다.
처음 느껴진 것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맛.’ 그 뒤에는 어딘가 익숙한 ‘냄새.’ 그 두 가지가 멍한 정신을 일깨운다.
“크악!”
우지차는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머리와 얼굴에 뒤범벅 된 토사물을 거칠게 문지르면서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무릎을 꿇은 다자랑. 공중에 떠있는 보석상자. 저 앞에 서있는 노예상.
분노가 우지차의 몸을 움직였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대전사라는 위치는 험상궂은 얼굴로만 따낸 것이 아니다. 쾌속하게 운용 된 마나가 우지차의 몸을 가속시켰다.
하지만 그 가속은 유진에게는 느릿하게만 보였다. 유진은 혀를 끌끌 차며 발로 땅을 지그시 눌렀다. ㅡ콰드득! 땅이 솟구쳐 장벽이 된다.
‘마법!’
우지차는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러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사마르의 전사들은 정령마법을 익히지 않고도 정령의 가호를 받는다. 이 광활한 숲에서 태어난 전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정령에 대한 친화력을 갖고 있고, 우지차의 경우에는 바람의 정령의 가호를 받고 있다.
모든 바람에 섞여 있는 원시의 정령. 그건 우지차를 거구에 걸맞지 않게 민첩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지금의 도약은 영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우지차가 바란 것은 저 높은 하늘까지 뛰어올라, 시건방진 노예상을 머리부터 내리찍어 박살내는 것이었는데. 지금의 도약은 장벽만 간신히 뛰어넘는 것에 그쳤다.
‘어째서?’
간단한 이유였다. 의지를 갖지 않은 원시의 정령은 고위 정령을 거스를 수 없고, 이 공간의 바람은 유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즉, 우지차와 유진의 상성은 최악이었다. 유진은 우지차를 향해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ㅡ콰아아! 거대한 바람이 우지차를 삼켰다. 그리고 바람이 칼날로 바뀌어, 우지차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캬아아악!”
우지차는 날카로운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버둥거렸다. 유진은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서 우지차를 응시했다. 털 한 올 없는 머리통과는 달리 우지차의 몸에는 털이 수북했다. 유진은 고개를끄덕거고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ㅡ뻐엉! 바람이 터진다. 몸을 휘감고 있던 바람이, 우지차의 체모를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뿌리채 뽑아버렸다.
“끄아아아!”
우지차는 생전 처음 느끼는 종류의 아픔에 비명을 질렀다. 매끈해진 우지차가 땅에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지 않았다. 유진은 다시 바람을 일으켜, 우지차의 몸을 높다란 곳으로 띄워버렸다.
“놔, 놔라!”
우지차는 어떻게든 바람에서 벗어나려 용을 썼다. 코어를 혹사시키며 마나를 쥐어짜고, 자신에게 가호를 내린 정령에게 간절히 소망했다. 그에 더해, 가룽 부족의 전투 주술까지 사용했다.
가룽의 전투 주술은 혼의 힘을 빌려온다. 일종의 강령술인 것이다. 가룽 뿐만 아니라 강령술을 전투 주술로 삼는 부족은 여럿 있고, 우지차가 쓴 것은 사마르에서는 특별하다 할 것은 아니었다.
써서는 안 됐다. 유진은 우지차의 주변을 떠도는 혼들을 느꼈다. 그건 흑마법으로 불러내는, 진즉부터 자아가 무너진 원령들과 닮아있다.
‘역겹게도.’
유진은 저런 종류의 주술을 싫어한다. 흑마법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비는 베풀지 않았다. 애당초 자비를 베풀 상대도 아니잖은가. 먼저 공격해 온 것은 저 자식이다.
“으아악!”
다자랑은 높다란 곳에서 들리는 비명에 덜덜 몸을 떨며 귀를 틀어막았다. 우두둑, 뿌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 살려달라는 비명. 다자랑은 도저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블론을 너무나도 쉽게 찢어 죽이던 괴물을. 금색으로 번쩍이던 맹수의 눈을. 입술이 말려 올라 갈 때마다 보이던 날카로운 이빨을.
‘도, 돌아가고 싶어. 집으로... 시무인으로...’
우지차의 비명이 멀어진다. 멎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진다. 팔다리가 뒤틀린 인간이 멀리 날아가서 떨어지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천운이 따라 살아남는다고 해도, 더는 움직이지 못할 몸으로 이 난폭한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건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보석상자들을 망토의 안에 챙기고서,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크리스티나는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 말이 유진에게는 고약한 농담으로 느껴졌다.
“평안한 죽음은 개뿔. 만약에 살아도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될 거고, 운좋게 떨어지자마자 죽어도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고 죽게되는 건데.”
“하지만 죽음 뒤에는 평안을 얻겠지요.”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뒤틀려 있다니까.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삐를 잡았다. 덜컹거리며 수레가 움직인다. 엘프들은 숨을 죽이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러면서도 아직 바닥에 엎어져 있는 다자랑을 힐긋거리며 보았다. 노예로 팔리며 박해에 익숙해진 엘프들은, 저 인간 귀족이 무릎 꿇고 애걸하다가 아직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미지의 유열을 느꼈다.
레베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예전의 주인에게 칼로 그이고, 불에 지져진 오른쪽 눈을 어루만졌다. 알 수 없는 열기가 눈자위에 감돌고 있었다. 그 열기는 불에 지져졌을 때 느낀 아픔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열기였다.
‘...멋져.’
레베라는 홀린 눈으로 유진의 등을 응시했다.
*
“...아마 서쪽으로 나아가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이네.”
“어쩔 수 없지 않나. 기억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단 말이다.”
시크나드는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내 기억에 남은 것은... 몇 가지의 단편적인 기억들뿐이다. 그것에 의존해서 영지를 찾아 헤맸고, 절망했었지.”
“그렇다면 아예 함께 가지 그러냐?”
유진은 삐딱하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시크나드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동안 유진을 응시하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마을을 비운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권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저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정목의 결계는 절대적이지 않다. 이 떠돌이 엘프의 마을이 몇 년 동안이나 유지되는 것은, 시크나드가 가까이 다가 온 침입자들을 썰어 죽였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다크엘프들의 접촉이 잦다.”
시크나드는 곁에 내려놓은 검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 올 때마다 잡아서 고문하고, 죽였다. 그러면서 사정을 들었지. 아이리스. 그 타락자가 제 입지를 위해 타락을 전염시키려 한다더군.”
“...”
“우습지도 않아. 그 계집은 괴물, 아니, 존재해선 안 될 추물이다. 한때 같은 엘프였다는, 동족이었다는 것이 믿기지도 않을 정도야. 300년 전에 엘프들을 몰살한 주제에. 이제 와서 엘프를 포용하겠다고?”
꽈득. 시크나드는 칼자루를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이리스는, 다크엘프들은 떠돌이 엘프에게 ‘제안’을 할 뿐이라지만, 그게 사실일 리가 없어. 놈들은 협박하고, 강제로 다크엘프로 만든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인다. 내가 이 마을을 비운 동안... 만약, 다크엘프들이 들이 닥친다면?”
시크나드는 300년 전의 전쟁에 참가했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엘프 레인저의 생존자다. 아이리스가 불태운 숲에서, 창자가 모조리 뽑혀나간 엘프들의 시체 수백 구를 보았다. 그 광경은 수백 년 동안 떨쳐내지 못한 주박이 되어, 시크나드를 사로잡고 있다.
“...영지를 찾아낸다면 네 노이로제도 나아지겠지.”
유진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300년 전의 광경들에 사로잡힌 것은 시크나드 뿐만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곳이니 말이야.”
“...그렇겠지.”
시크나드는 꽉 쥐고 있던 칼자루를 놓으며 중얼거렸다.
“만약 발견하지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사마르만큼은 아니지만, 본가의 숲도 넓으니까. 엘프 백 명 쯤은 들어가서 살아도 티도 안 날 거다.”
“...게다가 안전할 테고.”
시크나드는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하멜.”
“뜬금없이 뭐라는 거냐.”
“...네가 오지 않았다면, 이 마을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네게 감사인사를 말하는 거다.”
“난 또 뭐라고.”
유진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서쪽으로 가서... 뭐 다른 것은 없냐?”
“수백 년이 흘렀으니 풍경도 달라져있겠지.”
“쓸모없는 자식.”
“...서쪽으로 향하면서, 잎사귀를 의식해라. 그렇게 하면 아마 영지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시크나드는 시선을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로군.”
“알면 됐어. 이제 간다.”
유진은 시크나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선 오두막을 나갔다.
마을의 입구에는 이미 크리스티나가 와있었다. 그녀는 유진을 따라 온 시크나드에게 목례를 전한 뒤, 유진을 쳐다보았다.
“이제 출발하는 겁니까?”
“어.”
입구에 나온 것은 크리스티나 뿐만이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사는 엘프들 전원이 배웅을 나와있다. 그들 중에도 빛의 신을 섬기는 신도가 있는 것인지, 몇몇의 엘프들이 크리스티나를 향해 양손을 모으고서 기도를 올렸다.
아니. 크리스티나 뿐만이 아니다. 여러 엘프들이 유진을 간절한 눈으로 보고 있다.
그러한 시선은 낯설지 않았다.
‘무거워.’
예나 지금이나. 기대를 담은 시선은 무겁기 짝이 없다.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들은 이 마을이 절대적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러니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는 나보다 훨씬 더 무거웠을까.’
나리사가 훌쩍거리며 울고 있다. 고작 며칠 다녔을 뿐인데 그새 정이라도 든 건가. 그러면서 물기 젖은 눈에 선망을 담아 유진을 보고 있다. 레베라도 나리사와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베르무트.’
모두에게 용사라고 불리고. 모두에게 기대받고. 어딜 가든, 베르무트를 알아 본 놈들은 세상을 구해달라고, 마왕을 물리쳐달라고, 자식의, 부모의, 친구의 복수를 해 달라며 매달리곤 했다.
“난 용사가 싫어.”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었다.
“...네?”
크리스티나는 의아하단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돌아봤다.
“그냥 그렇다고.”
세냐
시크나드가 일러 준 대로 서쪽으로 나아가기를 며칠.
떠돌이 엘프의 마을을 떠나고서 특별히 문제랄 것은 벌어지지 않았다. 몬스터와는 여러 번 마주쳤고, 근처 부족의 흔적은 발견했지만 원주민과 마주치진 않았다.
“...앗.”
품안에 넣어 둔 세계수의 나뭇잎이 ‘움찔’하고 떠는 것을 느꼈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동하는 며칠 동안 유진의 감각 대부분은 이 마른 나뭇잎에 집중되어 있었고, 아무리 간절히 기다린다 하여 착각해 느낄 만큼 유진은 어설프지 않았다.
유진은 즉시 품안에서 나뭇잎을 꺼냈다. 불어오는 바람을 정지시키고, 손바닥 위에 올린 나뭇잎을 응시했다.
다시 한 번, 나뭇잎이 움찔거린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 온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손바닥 위의 나뭇잎이 조금씩 움직인다. 방향을 살짝살짝 틀어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침반 같네.”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뭇잎을 다시 품에 넣었다.
“왜 넣으시는 겁니까?”
“계속 손바닥에 올리고 다니는 것도 번거롭잖아. 어차피 품 안에 있어도 ‘어디’를 향하는 지는 느낄 수 있어.”
방향은... 서쪽에서 조금 틀어져 있다. 시크나드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지를 찾아내지 못한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지. 유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갈수록 나뭇잎의 반응이 강해진다. 처음에는 움찔거리는 수준으로 방향을 가리켰을 뿐인데, 이제는 품안을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친다.
나뭇잎의 반응이 강해지는 만큼, 유진의 걸음도 빨라졌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따라왔다.
“유진님.”
“알아.”
내뱉는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유진은 주변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나부끼는 바람. 평범한 바람과는 다르다. 바람뿐만이 아니다. 땅도, 나무도, 벌써 두 달 가까이 떠돌며 익숙해진 ‘숲’과 다르다.
하지만 유진은 무엇이 다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은 망토의 안에서 위니드를 꺼냈다.
[...이건 놀랍군.]
머릿속에서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타부타 설명할 것 없이, 템페스트는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원시 정령... 아니. 세계수의 정령인가.]
‘그게 뭔데?’
[원시 정령이 무엇인지는 아나?]
‘알지. 의지를 갖지 못한 최하위 정령이잖아.’
그 대답에 템페스트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최하위 정령이라...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아닌가?’
[원시 정령은 정령의 순수한 본질이다.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보다 나약하고, 실프가 일으키는 바람을 거스를 수도 없지만... 원시 정령은 실프의 바람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
[정령왕인 나도, 하급 정령인 실프도, 한때는 원시 정령이었다는 것이다.]
‘...마나와 비슷한가.’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래. 원시 정령은 마나와 비슷하지. 마나의 또 다른 모습... 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 마나가 어디에나 존재하듯, 원시 정령도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 모든 바람과 흙, 불, 물 등은 마나와 원시정령으로 구성되어 있지.]
‘한때 원시 정령이었다고 말한 주제에, 대답이 뭐 그렇게 애매해?’
[하멜. 너는 태아였을 때의 기억을 지니고 있나?]
‘...태어난 순간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하지만 네 어미의 뱃속에 있을 때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기억하는 것조차, 네가 전생의 기억과 인격을 그대로 가지고 환생했기 때문이지 않나. 보통의 사람은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 한들, 태어난 순간부터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렇겠지. 그래서 세계수의 정령이라는 건 또 뭔데?’
템페스트와 계약하고 사마르에 온 뒤.
어쩌면 템페스트를 통해서 엘프와, 엘프의 영지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템페스트는 바람의 정령왕. 그리고 엘프는 선천적으로 정령친화력을 타고났으며, 따로 정령술을 익히지 않고도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종족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정령에게 있어서 계약은 절대적이다. 아무리 템페스트가 바람의 정령왕이라 할지라도, 휘하 정령에게서 계약자에 관한 정보를 토설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
템페스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바람에 깃든 것이 바람의 정령이라면, 세계수에 깃든 것이 세계수의 정령인 것이다. 나무의 정령과도 달라.]
‘...세계수라고 해 봐야 오래 묵은 요정목일 뿐이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그냥 말해본 것뿐이야. 나도 세계수가 특별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어린 묘목만으로 결계를 펼치고, 마병의 진척을 막는 나무를 단순히 오래 묵기만 한 고목이라 말할 수는 없다. 애당초 요정목부터가 희귀하며 강력한 마법소재로 쓰인다.
[...엘프는 세계수에 신앙심을 갖지. 죽은 선조들. 죽어갈 자신들... 모든 엘프의 혼이 세계수로 인도되어, 종족을 수호할 것이라고 믿는다.]
‘절대적인 신앙은 아니잖아. 빛의 신을 섬기는 엘프도 있던 걸.’
[그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신앙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어쨌건, 세계수는 하나의 종족에게 신앙으로 여겨지는 만큼 영적이고 강력한 존재인 것이다.]
숲이, 공간이 흔들린다. 땅이 점점 움직이고, 나무들이 몸을 젖힌다.
[나는 바람의 정령왕이지만, 이곳의 바람은 지배할 수 없다. 나뿐만이 아니다. 그 어떤 정령왕도 이곳의 정령에게 간섭할 수 없을 것이다.]
품속의 나뭇잎이 진동한다. 바깥으로 꺼내보니, 나뭇잎이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멋대로 공중에 떠오른다. 유진은 나뭇잎을 붙잡지 않았다.
ㅡ화아악!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렇게 길이 열린다. 나뭇잎은 그 안으로 날아 들어갔고, 유진은 크리스티나에게 손을 뻗었다. 크리스티나는 머뭇거리다가 유진의 손을 잡았다.
“...위험하지는 않을는지...”
“설마.”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크리스티나를 바짝 당겼다. 그리고 땅을 박차, 열린 공간의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둘이 통과한 직후, 공간은 다시 닫혀버렸다.
꿈틀거리며 길을 만들어냈던 숲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조금 뒤.
ㅡ쿠웅!
머나먼 곳에서 도약해 온 남자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리저리 휘어지며 길을 열었던 나무들도 멀쩡히 돌아왔고, 뒤집혔던 흙도 평평히 돌아와있다.
길은 닫혔다.
“놓쳤군.”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는 투덜거리면서 코를 킁킁댔다. 냄새도... 없다. 분명히 이쪽에서 사라졌는데, 그 모든 것이 허상이었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썩을.”
남자는 입가를 뒤틀며 욕설을 내뱉었다. 평화롭게 안내받고 싶었는데.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이게 다 그 꼬마 놈이 너무 민감하기 때문이다. 한참 거리를 두고서 냄새만으로 뒤를 따라왔으니 조금 늦어버렸다.
‘이 근처... 인가?’
모르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이 자리에 있었을 텐데... 이곳에는 냄새가 남아있지 않다. 냄새가 떠도는 곳은 전혀 다른 방향... 아니. 이 근방의 숲 전체에 냄새가 흩어져 있다. 나무가 이리저리 꺾이며 길을 만들고, 바람이 떠돌았기 때문인가.
‘미로 같군.’
남자는 냄새를 추격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여기서 무턱대고 기다려 볼까. 언제 나올 줄 알고? 그리고 똑같이 이곳으로 나올 것이란 보장이 있나? 자칫하다가는 한참 기다리기만 하다가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할 수도 있다. 남자는 그런 것은 질색이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돌아올 곳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
“...와아...”
저런 소리도 낼 줄 아나.
유진은 곁에서 들려 온 맑은 탄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본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여태까지 보았던 얼굴 중에서 제일이라고 할 만큼 순수했다. 허례도, 허식도 없이. 크리스티나는 눈앞의 광경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유진은 세계수의 나뭇잎을 다시 품에 넣어두고, 고개를 돌렸다. 이 광경에 감탄하고 있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우산 같군.”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빈약한 비유였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정말로 우산 같았다. 거대한 나무. 세계수. 셀 수 없이 많고, 무성한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우산처럼 하늘을 덮고 있다.
“우산이라기보다는... 천장 같습니다.”
“그게 그거지 뭘. 결국 덮고 있는 거잖아.”
유진은 하늘을 올려보며 대답했다. 아니, 올려보는 것은 하늘이 아니다. 어딜 보아도 나뭇가지와 나뭇잎 뿐.
그 아래.
도시가 펼쳐져 있다. 존재한지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도시. 이렇게 내려보고 있으니 오래 된 유적처럼 보인다.
‘아니. 저 정도면 진짜 유적이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이곳으로 연결해 주었던 길은 보이지 않는다. 나무 뿌리와 넝쿨, 흙 따위가 서로 뒤엉켜서 길을 막고 있다.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일단... 이건 알겠어. 이곳은 아름답지만, 무언가가 살아갈 수 있는 장소는 아니야.”
“...그래 보이는 군요.”
크리스티나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곳의 모든 것은 세계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이군요. 눈에 비치는 것과 달리... 마나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묘한 일이다.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세계수는, 눈으로 보기에는 라이언하트의 숲과 영맥처럼 마나가 가득해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는 마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저 푸르른 나뭇잎도, 겉으로 보기에는 생기가 넘쳐 보여도 왠지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대면 허무하게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대체 뭐지?’
베르무트의 무덤을 떠올린다. 만들어진 조화가 가득 피었던 공간. 이곳의 나무와 풀은 가짜가 아니다. 진짜이되, 생기가 없다.
[마나가 결계에 집중되어 있는 건가?]
‘정령은?’
[...흠... 기묘하군. 정령들이 고요해. 존재는 하지만, 내비치지 않고 있다.]
템페스트가 중얼거렸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고, 크리스티나도 빛의 날개를 펼치고서 유진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둘은 절벽에서 내려와, 도시를 걸었다. 오래 된 건물들. 땅에서 치솟은 뿌리가 건물들에 이어지고, 휘감고 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엘프들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도시에 엘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은 아름답지만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마나가 너무나도 희미하고, 먹고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것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를 지나며.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을 보았다. 그 나무들을 세계수의 뿌리에 휘감기고 연결되어 있었지만, 요정목은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과일나무. 유진은 나무에 가까이 가서 손을 대보았다.
‘...죽었군.’
툭, 미는 것만으로 나무가 쓰러져 버린다. 나무 뿐만이 아니다. 흙도 메말라 있다. 도시 곳곳에 비치 된 우물도 물이 남아있지 않다.
‘떠돌이 엘프들을 이주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겠어.’
토양을 개간하고, 여러 씨앗을 심어서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곳의 대지는 죽어 있다. 그것도 꽤 오래 전부터 말이다. 대량의 마나를 공급하지 않고서는 이곳을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량의 마나라... 얼마만큼?’
[라이언하트 본가의 영맥. 못해도 그곳의 몇 배는 필요할 거다.]
‘드래곤하트라면?’
[...세냐의 지팡이라도 훔쳐 올 생각인가?]
아카샤. 세계수의 가지와, 드래곤하트로 만들어낸 마법지팡이.
‘필요하다면.’
[드래곤하트로도 부족할 거다. 그리고... 마나로는 부족할 것 같군. 하멜. 나는 이 공간에서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낀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 느낌은... 마치... 마왕의 불길함을 연상시키는 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이곳은 엘프의 영지야. 저기 앞에는 세계수가 있다고.’
유진은 그렇게 대꾸하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엘프는 어디로 간 걸까요.”
“단체로 겨울잠이라도 자는 걸 지도 모르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사라도 갔던가.”
“농담하시는 겁니까?”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곳은 누구도 살 수 없는 땅이다. 엘프도 없어. 설마 여기 사는 엘프가 몰살이라도 당한 건가? 그런 것치고는 도시가 너무 멀쩡하잖아.”
아무도 없지만, 폐허는 아니었다.
도시를 가로질러서 세계수에 가까이 다가간다. 멀리서 볼 때도 컸지만, 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세계수의 거대함이 실감되었다. 세계수는 산만큼이나 거대했다.
그 아래에.
세계수와 맞닿은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우물의 물은 마르지 않은 주제에, 호수에는 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진은 고요히 가라앉은 수면을 내려 보았다.
깊은 호수의 바닥. 세계수의 뿌리가 보인다. 도시 전역에 펼쳐진 뿌리가 땅에서, 호수에서, 그렇게 세계수로 이어져 있다. 유진은 몸을 낮춰 호수의 수면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이거 참...”
마나가 희박한 것이 아니다.
이 공간에 존재해야 할 마나가, 세계수로 집중되어 있다. 뿌리가 혈관처럼, 마나를 피처럼 세계수로 흐르게 만들고 있다. 유진은 정신을 집중해, 마나가 정확히 어디로 흐르는 것인지를 느꼈다.
찾았다.
유진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말없이 호수를 향해 발을 뻗었다. 수면은 찰랑거림 없이 유진의 발을 받아냈다.
“유진님.”
“여기서 기다려.”
불쑥 그렇게 말했지만, 크리스티나는 반문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호숫가에 남았다.
커다란 호수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은 세계수의 바로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위치는... 어디라도 상관없나. 유진은 품속에서 나뭇잎을 꺼내, 세계수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세계수의 표면이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유진은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무의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통로.
유진은 묵묵히 그곳을 걸었다. 이곳은 세계수의 안쪽이다. 바깥에는 마나가 희박했지만, 안쪽은 유진이 가보았던 어느 장소보다 마나가 가득했다.
[...고요하군.]
“정령들 말이냐.”
[그래. 원시 정령... 세계수의 정령들. 자아는 없을 테지만, 그들이 널 응시하고 있다.]
“어때. 환영하는 것 같아?”
[그런 것 같군.]
유진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엘프들이 보인다.
그들은 편안한 얼굴을 하고서 나무넝쿨에 휘감겨 있었다. 이 넓은 통로의 벽에 엘프들이 파묻혀 있는 것이다. 죽은 것... 은 아니다. 오랜 잠에 들었을 뿐. 희미한 호흡과 고동이 공명한다. 두근, 두근. 하나 된 소리가 거대한 요람처럼 느껴졌다.
“...아.”
긴 잠에 든 엘프들을 지나쳐.
유진의 걸음이 멈췄다.
“...찾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반갑다고 웃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네가 그랬듯이, 눈물이라도 펑펑 쏟아야 하는 걸까.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다른 엘프들처럼, 긴 잠에 빠져 있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가지고서.
몸의 반신이 세계수의 넝쿨에 삼켜져 있었다.
유진은 떨리는 손을 뻗어, 세냐를 만지려 했다. 결국 하지 못했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세냐가 부서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이곳에 오기 전에 보고, 쓰러트렸던 죽은 나무들처럼 말이다.
‘...가슴이 뚫렸어.’
그 구멍에서 세계수의 넝쿨이 엮여있다. 세냐는 그렇게 세계수와 연결되어 있었다.
‘...죽지 않았다.’
세냐는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었고, 심장도 뛰고 있었다.
유진은 웃으려 노력했다.
“야.”
잘 되지 않았다. 유진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세냐를 응시했다.
“세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너 왜 그러고 있냐.”
유진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울었다.
세냐
크리스티나와 함께 오지 않기를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녀와 이 안까지 함께 왔다면, 세냐의 모습을 본 즉시 눈물을 흘려버린 이유에 대해서부터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으리라.
함께 오지 않았으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유진은 넝쿨에 휘감긴 세냐를 보고서 소리없이 눈물을 쏟았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다. 의문과 슬픔. 거기에 안도와 분노. 세냐는 죽지 않았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모습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긴 했지만 분명하게 살아있었다.
템페스트는 침묵하고 있다. 그 또한 이 상황에 대해 여러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템페스트가 아는 한 독보적으로 뛰어나고 강력한 대마법사였다.
300년 전, 세냐보다 뛰어났던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베르무트 또한 대단한 마법사긴 했지만, ‘마법’이란 학문을 이해한 것에 있어 세냐는 베르무트보다 몇 걸음은 앞서 있었다.
그런 세냐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체 잠들어 있다.
잠시 동안 눈물을 쏟고서. 유진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나이를 먹기는 먹었나 봐.”
유진은 입술을 뒤틀며 내뱉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눈물이 잘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어려서 그런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환생한 이 몸뚱이는 아직 19살의 것이니까. 아니면... 그냥,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 그런 걸 지도 모르고. 유진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목소리. 들리냐?”
그렇게 말을 걸어 보고, 세냐의 반응을 확인해 본다.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감긴 눈꼬리가 떨리거나, 눈꺼풀 뒤의 눈동자가 움직이거나, 입술이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유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에, 세냐를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괜히 손을 대서 망가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걱정을 느끼며, 어린 새싹을 만지듯이 조심스런 손길을 세냐에게 뻗었다.
ㅡ파앙.
닿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뻗은 손끝과 세냐 사이에서 빛이 터졌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연록색의 빛이 세냐와 넝쿨을 뒤덮는다. 이윽고 세냐는 넝쿨에 연결된 그대로 견고한 수정에 삼켜졌다.
유진은 손가락을 뻗어 수정의 표면을 두들겨 보았다. 쉽사리 깨부술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 설령 깨부술 수 있을 지라도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봉인이군.]
“그렇겠지.”
템페스트가 중얼거렸고, 유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활짝 펼친 손을 수정에 가져다 대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마나의 흐름. 세계수에 집중 된 거대한 마나가 세냐를 감싸고 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 세계수가 연명시키고 있다? 엘프들은?’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200년 전. 누군가가 하멜의 무덤에 침입했다. 사역마가 파괴된 것을 느낀 세냐는 즉시 하멜의 무덤으로 향했다.
거기서 그 누군지 모를 침입자와 세냐가 싸움을 벌였다. 싸움은 격렬했고, 무덤이 죄다 폐허가 되었다. 동상과 추모석을 제외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침입자는 관을 열고, 시체를 꺼냈다.
왜?
이유는 모른다. 어쨌건 시체는 관 밖으로 나왔고, 월광검이 관 위에 봉인되었고, 세냐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세계수의 나뭇잎을 사용해 이곳까지 워프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도시가 텅 비고, 이곳의 엘프들이 세계수 안에 틀어박혀 잠들었고, 세냐는 봉인되었고, 바깥 엘프들의 머릿속에서 영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건가.
“편지라도 좀 남겨놓으면 좋아?”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했다. 저 봉인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이다. 세냐의 상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하다. 유진은 그런 것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다.
봉인은 몰라도, 부상과 치료에 대한 전문가는 저 밖에 있다.
울었습니까?
평소라면 그런 농담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입을 닫고 침묵했다. 붉게 충혈 된 눈동자, 눈물자국이 남은 뺨. 그 모든 것이 노골적으로 보였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람 같군요.”
대신에 다른 말을 했다. 크리스티나는 넝쿨에 엮여서 파묻혀 있는 엘프들을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사람 생각이란 것은 다 똑같나 봐. 나도 여길 보고서 그렇게 생각했거든.”
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들렸다.
그렇게 둘은 세계수의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아.”
크리스티나는 수정 안쪽에 눈을 감은 여인을 보았다. 현명한 세냐. 유진이 먼저 알려줄 것도 없이, 크리스티나는 저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크리스티나는 떨리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수정을 향해 다가갔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가슴 한복판의 구멍. 그곳에서 엮여 나온 세계수의 넝쿨. 미약하게 뛰는 고동과 호흡. 크리스티나는 수정 앞에 서서 허리춤의 완드를 꺼냈다.
밝은 빛이 크리스티나를 휘감는다. 그녀는 빛이 어린 눈으로 세냐를 응시했다.
“...심장이 망가져 있습니다.”
지금 크리스티나의 눈은 세냐의 몸 안을 보고 있다.
“심장뿐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주요 장기들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오염?”
“네. 심장처럼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잖아.”
“...네.”
살아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다. 크리스티나는 그 말을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만. 마법이 생을 연명시키고 있군요.”
“살릴 수 있나?”
그 말. 너무 무겁게 들려와서,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보겠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완드를 가슴 앞에 들고서 두 눈을 감았다. 십자가의 중심에 박힌 푸른 보석이 반짝일 때마다 그에 공명하듯이 빛이 번져간다.
유진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빛의 한복판에서 크리스티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의 발아래에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나고, 그를 중심으로 이형의 문자들이 더해져 마법진을 그렸다.
신성마법의 위력은 신앙심에 따라 결정된다. 지금 크리스티나가 펼치는 것은 최상위급의 소생마법으로, 신성제국 내에서도 펼칠 수 있는 신관이 극히 드물다. 타국의 대부호들이 신성제국에 해마다 천문학적인 금액을 후원하는 이유가 바로 이 소생마법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살릴 수 있다. 이 급의 소생마법은 마법이 아니라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 텐데.
크리스티나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그녀는 감은 눈을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하고, 신성력을 끌어냈다.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결국은 기적은 아니란 것일까. 크리스티나가 내뿜는 빛은 수정을 통과해 세냐의 몸으로 흘러들어갔지만, 세냐의 상처는 조금도 낫지 않았다.
눈으로 보이는 상처뿐만이 아니다. 크리스티나가 내뿜는 빛은, 세냐의 몸 안에 정체모를 오염을 정화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오염은 함부로 손을 대어 정화해서는 안 된다. 족히 수백 년 동안 세냐의 육체 안에 새겨진 오염은,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존재 일부라도 된 것처럼 마나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이렇게 오염 된 육체는 처음 본다. 저주의 한 종류인가? 현명한 세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의 육체를 이만큼이나 망가트릴 수 있는 저주가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신성력이 역류된다.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꽉 씹고서 의식을 집중했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주변의 모든 것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세냐의 육체가 신성력의 빛을 밀어내는 것. 기적에 준하는 소생 마법이 허무하게 흩어지는 것.
곁에서 지켜보는 유진의 눈이 울적함에 물드는 것. 그 시선이 싫었다. 성녀라고 보란 듯이 선언까지 했었는데, 기적이 필요한 순간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과자부스러기를 빵으로 만들고,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것도 기적에 속하는 것이냐며 비웃음을 들었다. 잘린 팔다리는 붙일 수 없는 것이냐며 이죽댔다. 지금, 제대로 기적을 펼쳐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비웃음을 들을...
ㅡ찌잉.
크리스티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불가능한가.
유진은 내심 각오를 다졌다.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진땀을 흘려가며 신성마법을 펼치고 있지만, 세냐의 상처는 낫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두라며 손을 뻗으려 했는데.
크리스티나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리했구만.”
휘청하고 쓰러지려 하길래 손을 뻗어 주었다. 신앙심에 기반 한 힘이 신성력이지만, 그렇다고 무한한 힘은 아니다. 마나처럼 너무 남발하면 결국 고갈이 나버린다.
파아악!
뻗은 손이 빛에 휩쓸린다. 유진은 눈을 크게 뜨고서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하나, 둘, 셋... 크리스티나의 등 뒤에서 여덟 장의 날개가 나타났다.
빛으로 이뤄진 날개.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킨다. 그 존재는 크리스티나와 반쯤 이어져서, 여덟 장의 날개를 펼치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사.
“...아니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흑사자 성에서, 베르무트의 무덤으로 떨어질 때에 보았던 천사. 틀림없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천사는 크리스티나와 닮았지만 별개의 인물이었고, 그 얼굴은 유진이 기억하는 300년 전의 아니스와 똑같았다.
천사가 고개를 내린다. 그녀는 푸르게 빛나는 눈으로 자신과 연결 된 크리스티나를 보다가, 앞을 보았다. 그곳엔 수정과 넝쿨에 삼켜진 세냐가 있었다. 잠시 그를 응시하던 천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천사는 유진을 응시했다.
무감정했던 천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휘어진 눈과 입 꼬리. 그 얇은 미소는 유진이, 하멜이 알고 있는 아니스의 미소 그대로였다.
“...아니스.”
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이었다. 천사는, 아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는 300년 전과 똑같았고, 여덟 장의 날개는 신비로웠으며, 빛에 휘감긴 모습은 성녀라고 으스대던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자애롭고 신성해 보였다.
활짝 펼친 여덟 장의 날개가 빛을 발했다. 축 늘어진 크리스티나의 손에 잡혀 있던 완드가 공중에 떠올랐다. 십자가 정중앙에 박힌 보석이 신성력의 빛에 공명하듯 푸른빛을 뿜었다.
유진은 지금 벌어지는, 벌어지려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은 전생에도 겪어 본 적이 없었고, 현생에서 익힌 마법적 지식으로도 이해가 불가능했다.
다만.
빛이 폭풍처럼 몰아치다가, 주변의 모든 것을 삼켜 덧칠하는 것을 보았다.
ㅡ...
번쩍, 하고 터진 빛이 시야를 밝힌다. 어느새 유진은 체험한 적 없는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엘프의 도시. 그곳에서 살아갔을 모든 엘프들이, 도시를 떠나 세계수의 앞에 모여 있다. 그들은 절박한 표정을 하고서 무어라 고함을 질렀으나, 그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절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공포. 그를 가져 온 존재는 높다란 하늘 한복판에 떠있었다. 시커먼 망토로 전신을 감싼 남자. 그 모습이 낯에 익었다. 매끄러운 장발. 새빨간 눈. 일그러진 미소.
다섯 명의 마왕이 몸을 일으켰을 때. 가장 먼저 대항한 종족이 있다.
드래곤.
그 중에서 종족의 수장을 배신하고, 가슴을 갈라낸 배신자. 드래곤의 역사상 최초로 동족포식의 죄를 범하고, 마기에 제 존재를 직접 오염시켜 기쁘게 타락을 받아들인 드래곤.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놈이 하늘에 떠서 엘프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놈의 뒤편에선 하늘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부서져서 떨어지고 있다. 태양을 등진 라이자키아에게서 어둠이 번져간다. 그렇게 번지는 어둠이 엘프 영지의 하늘을 밤으로 바꿔간다.
라이자키아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거린다. 엘프들이 아우성을 친다. 그 모든 것이 유진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라이자키아의 웃음이 뒤틀리는 것은 선명하게 보였다. 놈의 전신을 휘감은 망토가 꿈틀거렸다.
그렇게 라이자키아는 인간의 모습을 버렸다. 시커먼 빛이 한 번 터지고, 거대한 드래곤이 높은 하늘에서 날개를 활짝 펼친다. 타락해 시커멓게 변색된 비늘. 피를 그득 담은 것 같은 거대한 눈동자. 라이자키아가 입을 크게 벌리자, 날카로운 이빨들 사이에서 시커먼 빛이 모여들었다.
브레스. 마법이라 할 만큼 복잡하지는 않다. 브레스는 드래곤이라면 누구나 내뿜을 수 있다. 하지만 라이자키아의 브레스는 다른 드래곤의 브레스와 비교가 안 된다. 세상은 놈을 마왕이라고는 부르지 않지만, 유진이 기억하는 라이자키아는 마왕에 준할 만큼의 괴물이었다.
그 라이자키아가 작정하고 브레스를 내뿜는다. 이곳의 엘프들이 라이자키아의 브레스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즉,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브레스를 직면한 엘프들은 죽음을 예감했다. 모두가 그를 각오했다.
시커먼 브레스가 뿜어지는 순간.
엘프들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세냐였다. 뻥 뚫린 가슴에서 피는 흐르지 않고 있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어서, 마치 죽은 시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라이자키아가 브레스를 뿜었을 때. 세냐는 모든 엘프의 뒤에 있었다.
브레스의 빛이 터졌을 때. 세냐는 모든 엘프의 앞에 있었다.
세냐가 손을 뻗는다. 라이자키아가 내뿜은 브레스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라이자키아의 커다란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브레스를 받아치는 세냐의 입술에서 검은 핏물이 흘렀다.
엘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세냐를 붙잡았다. 그들의 눈, 코, 입에서도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가 치솟더니 세냐와 엘프들을 휘감았다.
뿌리에 휘감기며, 세냐는 펼쳤던 손을 움켜쥐었다. 라이자키아가 존재하는 공간이 통째로 뒤틀리더니, 라이자키아가 이끄는 어둠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이자키아가 다급히 날개를 펼치면서 몸을 뒤튼다. 수십 수백 개의 마법진이 라이자키아의 주변에 나타난다. 라이자키아가 뭐라고 고함을, 아니, 비명을 지른다. 놈이 만들어낸 마법진이 점점 침식되어 사라진다.
세냐는 검은 피를 쏟아대며 라이자키아를 응시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그녀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다가 쭉 뻗은 주먹을 가볍게 흔들었다.
가운데 손가락만 불쑥 일어난다.
세냐가 엿을 날린 순간. 라이자키아의 거대한 몸체가 일그러진 공간의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유진은 그 모든 것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세냐가 휘청거리며 쓰러진다. 엘프들은 세냐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들도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하나 둘 쓰러져갔다.
“얼레리꼴레리~”
유진은 흠칫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수백 년 전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지금은? 이건 또 뭐냐.
“얼레리꼴레리.”
환상? 꿈? 아니면, 성검의 농간? 천사. 아니스...? 정신이 뒤죽박죽이다. 유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서 신음을 흘렸다.
“얼레리꼴레리...”
대체 뭐냐. 라이자키아는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왜 놈이 엘프 영지의 하늘에서 서있던 거냐. 세냐는? 엘프들은... 그 후로 어떻게 된...
“...얼레리꼴레리.”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대답 좀 하지 그래?”
유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바보에 멍청이, 등신.”
거대한 나무의 아래.
“게다가 울보이기까지.”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네가 그렇게 눈물이 많은 줄은 처음 알았어.”
“...”
“지금도 봐.”
세냐가 방긋 웃었다.
“또 울잖아, 하멜.”
세냐
이것도 꿈인가.
유진은 멍한 눈으로 세냐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는 여러 가지 기억이 섞여 있었다. 유진이, 하멜이 기억하는 300년 전의 세냐. 아롯의 저택에 남은 초상화. 메르데인 광장의 동상. 성검이 보여주었던 과거.
모두가 그녀였다. 세냐 메르데인. 연보라색에 풍성한 머리카락도. 큼직한 녹색 눈동자도. 그 모두가 유진이, 하멜이 기억하는 세냐였다.
“언제까지 울고 있을 거야?”
세냐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 하멜이 이렇게 울보인 줄은 처음 알았어. 너, 예전에는 울었던 적이 없잖아.”
“...”
“뭐 300년이나 흘렀... 아니, 네게는 300년이 아닌가? 네가 체감하는 시간감각을 잘 모르겠는 걸. 나는 환생을 겪어 본 적 이 없어서 말이야.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나는 네 또 다른 일면을 보게 된 것에 꽤 즐겁거든.”
세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계속 울기만 할 거야? 나한테 엿을 날렸을 때에는 지금처럼 안 울었...”
“너 뭐야?”
유진은 얼굴을 확 구기며 내뱉었다. 이 빌어먹을 눈물은 왜 또 멋대로 흐르는 거냐. 병신 같은 몸뚱이, 울 생각이 없는데 왜 혼자서 눈물을 질질 흘려대는 거야?
“씨발, 뭐냐고 너. 대체 뭐하자는 거야? 어? 지금 이건 또 무슨 수작인데? 나는 왜 여기 있고, 너는 왜 여기 있고, 네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아니, 너 뿐만이 아니라.”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머릿속이, 감정이 엉망이다. 그럼에도 유진은 성큼성큼 걸어 세냐에게 다가갔다.
“아니스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씨발 아니스가 천사가, 왜 그것도 날개를 여덟 개나 가지고 있는 건데. 모론. 모론은? 그 새끼는 뭐하고 있어?”
“하멜.”
“...베르무트. 그 새끼는... 어떻게 된 거고. 내 무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리고 나는. 난? 왜 환생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너희들 씨발, 누구 하나 나한테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하멜.”
유진은 자신을 부르는 이름에 답하지 않았다. 눈물은 더 나지 않았다. 차라리 목놓아 통곡이라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감정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다. 머리가 핑핑 돈다.
유진은 숨을 헐떡거리며 앞을 보았다. 세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눈앞에 서있는데, 존재하는 것 같지가 않다.
아롯에서 보았던 것처럼.
눈앞의 세냐는 유령과 다를 것 없이 느껴졌다.
“...대체 뭐냐고.”
유진은 뚝뚝 끊기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떨리는 손을 세냐에게 뻗어 본다. 닿을까. 아롯에서는 닿지 못했다. 그때의 세냐에게는 아무런 말도 전하지 못했다. 알아보겠지, 라는 식으로 엿만 날렸을 뿐이다.
사실은 엿을 날리는 것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었다. 유령처럼 헤매는 세냐의 어깨를 잡아끌거나, 그 앞을 가로막고서 끌어안고 싶었다. 만약 그랬다면, 세냐는. 저 얄밉고 고약한 계집애는.
‘너 미쳤냐?’
라고 쏘아붙이며 정강이를 걷어찼을 것이다. 아니, 그건 세냐의 지랄 맞은 성격을 떠올려 보면,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이 아니라 귀싸대기를 갈겼을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았다. 뭐라도 세냐를 실감하고 싶었다. 아롯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불러대도 세냐는 듣지 못했고,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하멜.”
닿았다. 뻗은 손끝이 세냐의 뺨에 닿아있다.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진은 부드러운 살결을 느꼈다. 온기 하나 없는 피부에서 세냐의 존재를 느꼈다.
“난 여기 있어.”
세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초상화에서 지은 자애로운 미소와 닮았다. 세냐에게 어울리지 않는 미소. 하지만 틀림없는 세냐의 미소였다.
“...씨발.”
유진은 욕설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너 그렇게 웃는 거 존나 안 어울려.”
“개자식아.”
즉시 욕설이 돌아왔다. 세냐는 유진의 머리채를 낚아채고서 흔들었다. 그 손길에는 힘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너도 똑같아, 하멜. 그 낯짝은 대체 뭐야? 네가 날 알아보고서 엿을 날리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네가 하멜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야.”
“누군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아냐.”
“흐흥. 말은 그렇게 하면서, 지금 낯짝에 꽤 만족하고 있는 것 아냐? 하멜 너, 옛날부터 은근히 그런 점을 신경 썼잖아.”
“...내가 뭘?”
“모르는 척 하긴. 우리 다섯이서 처음 파티에 갈 때 기억 안나? 너 그런 파티 처음이라면서, 뭔 병신 같은 예복 사다 입고서 머리도 잘랐잖아.”
“...언젯적 얘기를 하는...”
“뭐 전생의 네 낯짝은 아무리 꾸민들 험악하고 사나웠는데, 지금은... 뭐... 괜찮네. 거지처럼 하고 다녀도 전생 네 얼굴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애.”
세냐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손을 들었다. 뻗은 양 손이 유진의 뺨을 잡았다. 세냐는 유진의 뺨을 조물거리다가, 혼자서 키득키득 웃어댔다.
“내가 기억하는 얼굴은 아니지만, 너는 하멜이야. 그건... 틀림없어. 하멜. 돌아... 왔구나. 정말로. 돌아온 거야.”
“...”
“신기한 기분이야. 얼굴도, 몸도 다르지만. 네가 하멜이라는 것을 아니까 네 전혀 다른 모습이 하멜로 느껴져.”
세냐의 손가락이 유진의 얼굴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뭘 하는가 했더니. 세냐는 매끈한 유진의 얼굴에다가 흉터를 그리고 있었다. 전생에, 하멜의 얼굴에 가득했던 흉터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당겼다.
“재수 없게 뭐 하는 거야?”
“...뭐가 어째? 재수가 없어?”
“재수 없지 임마. 왜 멀쩡한 얼굴에 흉터를 그려대?”
“그냥 뭐. 전생이랑 얼마나 다른가 그려보는 거야.”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유진의 뺨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전생의 얼굴보다 뺨이 말랑하네.”
“젖살이 덜 빠졌나 보지.”
“젖살... 젖살? 아하하! 귀엽네, 하멜. 그 몸 몇 살이야? 응, 확실히 아직 앳돼 보이긴 해.”
“19살.”
“와... 진짜? 진짜로? 아직 19살 밖에 안 됐다고? 으으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하멜, 네 나이가 22살이었지? 그때의 너는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늙어 보였는데...”
기억난다. 용병으로 꽤 이름을 떨치던 시절. 헬무드로 넘어가기 위해, 항구에 머무르던 중에 대뜸 베르무트 일행이 찾아왔었다.
‘어디에나 있을 용병 새끼잖아. 그런데 저놈을 꼭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어?’
세냐는 그렇게 틱틱거리며 하멜을 흘겨보았었다. 그때부터 대마법사라며 이름 높았던 세냐는, 용병 나부랭이이던 하멜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건 하멜도 마찬가지였다. 첫만남부터 재수없게 투덜거리는 놈에게 뭐하러 관심을 주나. 서로가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베르무트에게 끌려가다 시피해서 일행이 되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세냐는 하멜을 무시했고, 하멜도 세냐를 무시했다. 오히려 아니스가 투덜거려대면서도 하멜을 챙겼고, 모론은 뭐... 처음부터 하멜을 살갑게 대했다.
“기억나.”
세냐는 킥킥 웃으면서,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때어냈다.
“항구를 떠나서, 우리는 같이 배를 탔었지. 커다란 상선이었어. 헬무드로 이어지는 뱃길은 몬스터와 마물이 가득하고, 정신 나간 흑마법사들이 언데드로 이뤄진 유령선을 타고서 출몰하곤 했지.”
“...어.”
“그때의 우리는 어리고... 미숙했어. 베르무트는 그때부터 괴물같았지만. 너도, 나도, 아니스도, 모론도. 베르무트만큼 완성되지 않았었지. 나는 내 실력을 과신해서 멋대로 굴었고, 그러다가...”
“죽을 뻔 했지.”
기억난다. 언데드의 유령함대. 베르무트와 아니스가 언데드를 상대하는 동안, 모론과 하멜과 세냐는 바다에서 날뛰는 몬스터와 마물을 상대했다.
제 잘난 맛에 흠뻑 취했던 세냐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법을 퍼부었다. 너무 방심했다. 바다 밑바닥에 숨어있던 흑마법사들이 세냐를 요격했고, 갑작스런 공격은 세냐의 마나를 역류시켰다.
소용돌이치는 바다로 추락하던 세냐를 구한 것이 하멜이었다. 그때부터 세냐는 하멜을 더 이상 무시하지 않았다.
‘고마워.’
코에서 쌍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세냐는 그렇게 말했었다.
‘됐고, 코피나 닦아.’
‘...어.’
‘그리고 나대지 말고. 하늘 좀 날아다닐 줄 안다고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아주 혼자 지랄발광을 하던데 말이야. 원래 이런 전장에서는 많이 나대고 눈에 띄는 놈이 먼저 뒈지는 법이야. 알아?’
‘고마운 건 고마운데, 너 좀 개 같네.’
“세냐.”
머릿속에 번지는 과거의 기억을 떨쳐낸다.
바로 눈앞에 그 세냐가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유진은 세냐의 눈을 응시하며 내뱉었다.
처음부터 물어보았던 말이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베르무트는 무슨 약속을 했지?”
“...”
“대답해.”
“하멜.”
세냐는 힘없이 웃으며, 유진의 어깨를 툭 밀었다.
“기적을 믿어?”
“...뜬금없이 뭐라는 거냐.”
“네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 나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 모두가 기적인 거야.”
지직.
공간이 일렁거린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세냐의 뒤편에 있는 자그마한 나무에 거대한 세계수가 겹친다. 힘없이 웃는 세냐의 모습에도 ‘현실’이 겹쳐졌다.
“...넌 죽은 거냐.”
“아니.”
세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ㅡ지직. 그렇게 웃는 모습 너머에서 현실이 보인다. 핏기 없는 얼굴. 평온히 감긴 눈. 가슴의 구멍. 뒤엉킨 넝쿨.
“하멜.”
세냐가 입을 열었다.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마.”
“...뭐?”
“베르무트는... 우리보다, 아니, 세상의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짊어졌어. 그 자식이 약속을 맺지 않았다면...”
“널 그 꼴로 만든 게 베르무트냐.”
“하멜.”
“베르무트냐고 물었잖아. 나도, 병신이 아니야. 세냐. 난 내 무덤에 갔어. 거기서...”
“알아. 네 혼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세계수의 잎을 뒀었으니까.”
세냐는 씁쓸히 웃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뭐?”
“목걸이. 하고 있구나.”
세냐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가슴을 가리켰다.
“여러 가지로 고생을 많이 했지. 하멜, 그거 알아? 네 육체와 혼. 원래라면 말살되거나, 유폐의 마왕의 장난감이 되어야만 했어. 하지만... 돌아왔더라.”
“...”
“나는 그곳에서 베르무트가 정확히 어떤 약속을 맺었는지 몰라. 하지만... 그 녀석이 맺은 약속에는, 그곳에 있던 나와, 아니스와, 모론의 생환. 그리고 네 육체와 혼을 돌려받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놈도 아니고 유폐의 지팡이라 불리던 베리알의 마법에 당해 죽었다. 운이 좋다면 그대로 소멸되거나. 최악은, 놈이 섬기는 유폐의 마왕에게 바쳐지게 된다.
하지만 유진의, 하멜의 혼은 소멸하지 않았다. 육체도 소멸하지 않고 남아서, 관에 들어갔다.
“나는 네 혼을 그 목걸이에 담았어.”
‘세냐. 그 목걸이는...’
‘관에... 아니... 내가 가지고 갈게.’
‘...순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모두가 동의한 일이잖아.’
성검이 보여주었던 과거.
“사람이 죽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스는 천국에 간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니스처럼 신을 믿지 않거든. 나는 마법사야, 하멜. 내가 직접 보거나, 내가 이해한 것이 아니고서는 믿을 수 없어. 아니, 결국은 핑계였지.”
세냐는 쿡쿡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널 먼저 보내고 싶지 않았어, 하멜. 그냥... 그냥. 그렇게 되더라. 너는 네 죽음에 만족했어? 만약 그랬다면, 너는 개자식이야. 누구 마음대로 만족하고 죽는 건데? 나도, 아니스도, 모론도... 베르무트도. 그 누구도. 네 죽음을 바라지 않았어. 우리는 네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죽어버린 널 먼저 보내고 싶지 않았어.”
모두가 동의한 일이잖아.
“그래서 네 혼을 붙잡았어. 네가 먼저 떠나지 않도록.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네가 바랐던, 우리 모두가 바랐던 세상. 모든 마왕을 죽이고 나서, 그때... 그때 보내려고 했어.”
그렇게 내뱉는 세냐는.
유진이 기억하는 세냐 그대로였다. 제멋대로의 고집. 이치에 어긋날지언정 자기 자신의 이해와 납득을 우선한다. 그러한 고집에 순리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마법사는 정신이 병든 족속이고,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무트는.”
세냐는 고개를 들어 유진을 보았다.
“우리와는 조금 생각이 달랐나 봐. 베르무트가 왜, 어째서 그랬는지는 몰라. 나는 베르무트가 아니고, 그 자식을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했어.”
“...세냐.”
“네 혼을 잡아 놓은 목걸이... 계속,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네 무덤에서 빼앗겨 버렸어.”
그 말이 유진의 머리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 자식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거든. 네 무덤에서, 내 사역마를 죽여서, 날 오게 만들었어. 그렇게 날 불러내서 대뜸 공격했지.”
세냐는 자기 가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게 정말 베르무트였을까. 사실 잘 모르겠어. 베르무트는, 죽었단 말이야. 죽었는데... 그럴 텐데. 멀쩡하게 살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날 공격하고, 쓰러진 내게서 목걸이를 빼앗고. 날.”
“세냐.”
“하멜,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마.”
그 말에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원망하지 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네가 여기 있다는 건. 베르무트가 네 혼을 되살린 것이겠지.”
“그 개새끼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어. 심지어 널 죽이려 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세냐는 웃으면서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 자식이 날 죽이려고 한 것처럼, 나도 그 자식을 죽이려고 했어. 하멜. 네가 배신감을 느끼는 것처럼, 나도 배신감을 느꼈어. 너만큼, 아니, 어쩌면 너보다 더.”
“...”
“그래서 나를 더 믿을 수 없는 거야. 날 그곳에 불러들이고. 날 죽이려 했던 것은 정말로 베르무트일까. 내가 그곳에서 싸우고, 죽이려 했던 것은 베르무트가 맞는 걸까.”
“아닐 수가 없잖아...!”
“넌 거기 없었잖아, 병신아.”
뻗은 주먹에서 가운데 손가락이 들렸다.
유진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고 웃어버렸다.
“뒈질 뻔한 건 나인데, 왜 네가 나보다 더 화를 내고 지랄이야? 거기서, 직접 싸우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내가 말하는데. 진즉에 뒈져서 목걸이에 혼만 남아있던 네가! 왜 내가 하는 말에 따박 따박 지랄이냐고!”
“...허.”
“말을 하면 좀 들어먹을 줄 알아야지. 너는 어찌 된게 한 번 뒈졌다가 살아나도 성격이 지랄맞아? 병신처럼 남의 말 들어처먹지 않다가 한 번 뒈졌으면, 어? 좀 사람 말을 들어먹을 줄 알아야지!”
“세냐 맞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너 뒈진 동안 나는 나이도 많이 먹었고 좀 점잖아져서 참으려 했는데...! 너는 전생이나 지금이나 병신 쪼다 새끼야.”
세냐는 그렇게 내뱉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유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하멜, 잘 들어. 날 죽이려 한 건 베르무트였던 것 같긴 한데 베르무트가 아닌 것 같애. 알아들어?”
“너 지금 네가 지껄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아, 몰라! 아닌 것 같다고 하면 아닌 줄 알 것이지...! 어쨌든 말이야, 나는 약속에 대해서는 잘 몰라. 네가 환생한 것은 베르무트가 한 걸 텐데, 그건 뭐... 잘 됐다고 생각해. 너랑 천국에서 재회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서 재회할 수 있게 됐잖아.”
세냐는 그렇게 내뱉으며 유진의 멱살을 흔들었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야?”
“하멜.”
“그거 말고! 환생한 이름이 뭐냐고.”
“...유진.”
“...네 머리색에 눈동자랑... 마나. 내가 지금 머릿속에 막 뭐가 떠오르는데, 이게 현실일까 좀 두려워.”
“아마 맞을 걸.”
“진짜야? 너 진짜,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한 거야?”
“어.”
“이름은 유진 라이언하트겠네?”
“...어.”
“베르무트 그 자식이 치매에 걸린 건가?”
세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진의 멱살을 놓았다.
“왜 널 자기 후손으로 환생시킨... 음... 흐음. 과연. 아내를 열 명 넘게 들이고, 자식을 왕창 낳았을 때에는 헬무드에서 고생한 만큼 잘먹고 잘살고 싶은 건가 싶었는데... 후손을 늘린 것이 네 환생을 위했던 건가...?”
“잘은 모르겠는데, 베르무트 후손으로 태어나서 기분 엿같았던 건 나야.”
“엿같기는 하겠지만 좋은 점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일단 네 낯짝이 전생보다 훨씬 낫고, 몸뚱이도 하멜일 적보다 낫지 않아?”
“...그건 그렇지.”
“기억도 그대로에... 전생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육체... 네가 남은 마왕을 조져주길 바라는 건가?”
“그럴 거면 자기가 직접 환생하면 되잖아. 아니, 환생할 것도 없이...”
“너 사실 하멜이 아니라 모론인 것 아냐?”
세냐는 그렇게 내뱉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저 말에는 유진도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사과해라.”
“응. 미안해. 내 말이 좀 심했어.”
“조심해.”
“흐흥. 재수 없는 걸 보니 하멜이 맞아. 틀림없어. 어쨌든 말이야, 베르무트가 직접 환생하지 않고 직접 마왕을 조지려 하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세냐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턱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네가 적임자야.”
“뭐?”
“너 말이야. 버러지 같은 몸으로도 그만큼이나 강했잖아. 전생의 기억 그대로, 전생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몸으로 환생한다면... 난 말이야. 네가 베르무트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병신아. 베르무트한테 맨날 처발린 건 이해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너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베르무트에 근접했어. 베르무트는 특별했지만, 너도 놈 못지않게 특별했다고. 베르무트는 결국 실패했지만, 하멜 너라면...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그 말에 유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세냐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유진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쪼개긴. 좋냐?”
“...크흠.”
“어쨌든 말야. 하멜. 베르무트를 너무 원망하지는 마. 나도 별로 원망하지 않을 거니까.”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뿐이잖아.”
“닥쳐. 난 마법사야. 눈으로 봐도, 나 스스로 납득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아.”
“아까랑 말이 조금 바뀐 것 같다?”
“까놓고 하멜. 네가 베르무트를 원망할 게 뭐가 있어? 뒈진 널 되살려줬잖아. 그것도 전생보다 훨씬 멋진 몸으로! 설명을 안 해줬다고? 뭐 어쨌다는 거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지. 네가 뭐라고 베르무트를 원망해?”
세냐는 그렇게 내뱉으면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가슴 뚫린 나도 원망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야. 알겠어? 난 베르무트를 믿어. 그러니까 너도 베르무트를 믿어. 우리는... 베르무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몰라 시발.”
“뒈졌다 살아나도 여전히 애새끼 같은 면이 있다니까.”
“아니스랑 모론은 어떻게 된 거냐니까?”
“몰라. 아니스가 왜 천사가 된 거야? 너만 놀란 거 아니니까 나한테 묻지 마. 모론? 그 등신은 왕국 세우고... 아! 너 그거 알아? 모론, 그 등신이 진짜 왕이 됐어!”
“내가 모르겠냐?”
“흐흥, 모론이 진짜 왕이 될 줄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네가 루하르 왕국의 개국 행사에 있었어야 했는데... 모론 그 등신, 파티에 팬티에 망토만 두르고 왔다니까?”
“...왜?”
“내가 녀석한테 선물을 줬거든. 선량하고 용감한 사람한테만 보이는 예복이라고 팬티를 줬는데. 그 새끼, 진짜 그 팬티만 입고 나온 거야. 신하들이 기겁하니까, 너희는 선량하고 용감하지 않아서 이 옷이 보이지 않는 거라면서...”
세냐는 말을 하다 말고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도 아니스한테는 감사해야지.”
“...”
“지금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스가 기적을 일으켜준 덕분이잖아.”
“...여기 오기 전에, 과거를 봤어.”
“라이자키아.”
세냐의 얼굴이 구겨졌다.
“따지고 보면 베르무트보다 그 도마뱀 새끼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된 거야.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내가 골골대며 죽어가는데 대뜸 결계를 박살내고 쳐들어왔다고!”
“...정확히 어떻게 된 거냐?”
“봤잖아? 놈이 브레스를 쏴갈겼고, 내가 막았지. 나도 멀쩡하지 않아서 완벽하게 막지는 못했어. 기억하지? 라이자키아의 브레스. 그건 마기의 덩어리잖아. 아니, 라이자키아 본인이 마기의 덩어리지. 시궁쥐처럼 병균 덩어리라고.”
세냐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주먹을 쥐었다.
“엘프들은 죄다 오염됐고. 나도 상처에 마기가 흘러들어갔어. 그렇게 놈의 저주가 걸렸지. 죽기 직전에 간신히 세계수와 연결해서, 내 몸과 엘프들을 세계수 안에 봉인시킨 거야.”
세냐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바깥의 엘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자칫하다간 나랑 엘프 수백 명이 떼죽음 당할 상황이었으니까. 영지 자체를 봉인하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끔 엘프들의 기억을 개변시켰... 아. 이건 세계수에 남은 고대의 마법이야. 이 나무는 엘프들의 혼과 연결되어 있거든.”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너도 봤잖아. 나랑 엘프들은 세계수 안에 봉인...”
“그거 말고. 어떻게 해야 네 눈을 뜨게 할 수 있냐고.”
유진은 세냐와 마주보고 앉았다. 세냐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가까이 있는 유진을 응시했다.
“하멜. 나는 두 가지를 실패했어.”
세냐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서 팔짱을 꼈다.
“하나. 라이자키아를 죽이려고 했는데, 죽이지 못했어. 만약 놈을 죽였다면, 상처에 스며든 저주를 정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다른 하나는?”
“놈을 쫒아낸다는 것이 과해서, 외차원으로 추방해버린 거야.”
세냐의 눈썹이 구겨졌다.
“뭐 제대로 추방했다면 저주가 지속되지 않았을 텐데. 아직까지 남은 것을 보면 추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거지. 그래도 더 심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차원의 틈에 고립된 모양인데. 놈도 참 대단해. 수백 년 동안 차원의 틈에 처박혀서 살아있다는 것 아냐?”
“그래서.”
유진은 빙긋 웃었다.
“차원의 틈에 처박힌 라이자키아를 죽이면. 너도 괜찮아지는 거냐?”
“...아마도.”
“놈을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지?”
“지금의 네게는 무리야.”
“알아. 그래도 말해. 가능해질 때 찾아가서 죽여줄 테니까.”
세냐는 당장 말을 잇지 않고 유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하멜이구나.”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세냐는 풋하고 웃었다.
세냐
“...음.”
세냐의 미소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녹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서 잠시 동안 유진을 응시했다. 그렇게 빤히 보다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이던 세냐가 홱하고 유진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유진은 그 갑작스런 접근이 부담스러워, 즉시 손을 들어서 세냐의 얼굴을 가로막았다.
“왜 이래? 미쳤냐?”
“손 치워 봐.”
치우라고 한 주제에 세냐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알아서 유진의 양 손을 붙잡고, 아래로 내려버렸다. 그리고서는 두눈을 얇게 뜨고 유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조금 다른 것 같기는 한데... 아니... 같은가?”
“무슨 말이야?”
“하멜 너. 마법을 익혔구나?”
세냐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아직까지 잡은 유진의 양손을 붕붕 흔들어대며 깔깔 웃었다.
“그냥 마법도 아니고! 내가 만든 마법을 익혔어. 그렇지?”
“...어.”
“흥, 흐흥, 흐흐흥. 뭐, 당연한 거지. 내가 사라지고 수백 년이 흐르긴 했겠지만, 이후에 나만큼 뛰어난 마법사가 태어났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는 건,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내가 만들어낸 서클 마법식을 익혔다는 뜻이겠고.”
“...뭐 그렇지.”
“하지만! 하멜, 너는 서클 마법식만 익힌 것이 아니야. 네 마난를 보건데... 베르무트의 백염식에 내 위치크래프트를 접목시켰구나. 그렇지?”
세냐는 뭐가 그리 즐겁고 좋은지 계속해서 웃었다. 표정만 웃는 것이 아니라, 흥흥 거리며 콧노래까지 불러댔다. 유진은 그것이 괜스레 얄밉게 느껴졌다.
서클 마법식을 익힌 것도, 위치크래프트를 익힌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는 건. 유진이 세냐의 제자라는 뜻이다. 유진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세냐의 제자랍시고 떠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세냐 본인에게서 사제지간을 공인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어쩔 도리 없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익히기는 했는데...”
“앞으로 날 스승으로 섬기도록 해.”
“내가 익히려고 익힌 것이? 아니라. 먼저 죽은...”
“나 안 죽었어.”
“...사라진 너에 대한... 옛 동료이자 친구에 대한 애도랄까... 어...”
“뭐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 네가 서클 마법식을 안 익혔어? 위치크래프트 안 익혔냐고. 나는 스승이고, 너는 제자야. 알았어?”
“콱 다시 뒈져버릴까. 마법 그까짓 거 평생 안 쓰면 되는 거 아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하멜. 이미 배워서 단물 다 빨아 처먹어놓고, 이제 와서 뭐? 사람이 어찌 그리 뻔뻔할 수가 있어?”
“뭘 새삼스레.”
“응, 전생에도 넌 뻔뻔한 개자식이었지.”
세냐는 빠르게 납득했다. 그녀는 붕붕 흔들어대던 유진의 손을 놓았지만, 아직까지 웃음을 지우지 않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거리가 가깝다. 새삼 새냐는 그것을 자각했다. 그녀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발끝으로 유진의 무릎을 툭툭 찼다.
“...너무 가깝잖아. 저리 좀 가 봐.”
“자기가 다가와 놓고서 왜 나한테 지랄인지.”
“...내가 언제 다가왔어?”
“너 진짜 늙어서 치매라도 온 거냐? 아까 내 얼굴 붙잡고 쪼물댄 건 그새 까먹었어?”
“하멜 너, 앞으로 한 번만 더 나한테 늙었다느니 어쩌니 해 봐.”
세냐의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너도 유폐의 마왕성에서 안 뒈졌으면 나랑 나이 똑같았잖아. 그러니까, 네 나이를 세려면 전생부터 세야 하는 거야.”
“개소리도 그럴 듯 하게 해야 들어먹는 시늉이라도 하지. 야, 그게 말이 되냐? 뭔 놈의 나이를 전생부터 세? 몸뚱이 나이로 세야지. 나는 환생해서 몸이 파릇파릇하게 젊고. 너는...”
“한 마디만 더 해.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뭐 그렇다고.”
“육체는 허무한 거야. 게다가 내 육체는 수백 년 전부터 봉인되어 있고, 그 전에는 몇 번이나 재구성시켰어. 만약 봉인에서 풀려난다면 다시 재구성 될 테고, 그럼 내 몸은 다시 1살부터 시작하는 거야.”
“어, 그래. 너 1살해라. 공갈젖꼭지라도 하나 선물해 줄까? 내가 너 등에 업고서 우쭈쭈쭈 둥가둥가도 해줄게.”
이죽대는 말에 세냐의 주먹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녀는 유진을 노려보다가, 크게 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뭐 됐어. 그보다,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거야? 하멜 너, 전생에는 내가 몇 번이고 마법을 가르쳐준다고 했는데도 들어 처먹지를 않았잖아.”
“그건 전생이고.”
유진은 툭 내뱉고서, 괜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300년이나 흘렀잖아. 나만 환생하고, 너나 다른 녀석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고. 마왕은 둘이나 남아있고... 그러니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 뿐이야.”
전생의.
하멜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족해도 한참이 부족하다. 고맙게도 환생한 몸뚱이는 하멜일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전생에 가졌던 재능은 환생하고서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베르무트는 없다. 아니스도 없다. 세냐도 없다. 모론도 없다. 놈들이 없으니, 놈들이 할 줄 알았던 것을 하멜도 모조리 다 할 줄 알아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라이언하트의 혈계식을 납득할 수 없었음에도 반골로 지내지 않았다.
괜한 고집과 자존심을 부리지 않고 본가의 양자가 되었다.
내심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베르무트의 백염식을 익혔다.
위니드를 포함해서 베르무트가 다루던 무기들을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욕심을 냈다.
전생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마법을 익히려고 아롯에 유학을 갔다.
몇 년 동안 아크리온에 처박혀서 세냐의 마법을 탐닉했다.
모두 다. 전생의 하멜보다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당장 결실을 맺을 수 없을 지라도 미래를 위해 씨앗을 뿌렸다. 언젠가, 그래, 언젠가. 전생의 ‘나’를 초월해서, 남은 두 명의 마왕을 죽여버리기 위해서.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 전생의 아집을 버렸다. 유진은 그 구구절절한 마음까지는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세냐도 자세한 사정을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유진이, 하멜이. 그 바보에, 병신에, 머저리에, 고집불통에, 재수 없던 놈이... 전생에 그토록 말해도 들어 처먹으려 하지 않던 고집을 꺾은 이유.
세냐는 하멜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았다.
“미안해.”
그래서 세냐는 고개를 푹 숙였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그냥. 널 고독하게 만든 것 같아서.”
“별.”
푹 숙인 세냐의 정수리가 보였다. 연보라색의 풍성한 머리카락. 그 모습이 아크리온에 있는 메르를 연상시켰고,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세냐의 정수리를 두드렸다.
“...뭐하는 거야?”
“네 사역마가 떠올라서.”
“...아... 메르. 너도 그 아이를 만났겠구나.”
“나름 잘 지내고는 있어.”
“퍽이나.”
세냐는 유진의 손을 밀어내고서 표정을 찌푸렸다.
“아롯의 늙은 마법사들이 메르를 얌전히 내버려뒀을 리가 없지. 내가 사라지고서 엄청 괴롭혀댔을 거야.”
“...그거야 뭐. 네가 위치크래프트의 후반권을 가져갔기 때문이잖아.”
“아. 그거?”
세냐는 잠시 눈을 깜박거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이야.”
“...뭐라고?”
“위치크래프트의 후반권이라는 건 없어. 굳이 따지자면 내 머릿속에 있는데, 이건 마도서로 엮는 것이 불가능한 마법의 진리 같은 거지.”
“...아롯의 왕가에 위치크래프트 후반권의 사본이 있다던데?”
“그건... 으음... 내 나름대로 왕가를 배려해 준 거지. 마도왕국의 왕가라면 뭔가 좀 그럴 듯하고 상징적인 마도서를 소유하고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냥 내가 만든 고위마법들을 정리한 것 뿐이야.”
유진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헤 벌렸다. 그러다가 간신히 놀람을 추스르고, 더듬거리며 내뱉었다.
“사기쳤다는 거냐?”
“에이, 말이 조금 그렇다. 사기가 아니라,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거야. 어쨌든 대단하고 유니크한 마도서를 선물한 것은 사실이고. 내가 만든 마법이고, 내가 엮은 마도서니까 무슨 제목을 붙이건 내 마음이잖아?”
세냐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뭐... 나도 내가 이렇게 은거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원래부터 은거를 생각하고 있기는 했는데, 엄밀히 말해서 사고를 당한 거잖아.”
“...아롯의 마법사들이 위치크래프트 후반권과 네 은거의 진실을 밝히겠답시고 메르를 해체했었다는데.”
“뭐가 어째? 이 은혜도 모르는 개자식들. 내가 마법 역사에 얼마나 공헌했는데, 나 은거했다고 내 사역마를 그렇게까지 괴롭혀?”
세냐의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대뜸 유진을 발로 걷어찼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유진은 이 갑작스런 발길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무 짓도 하지 않고서 처맞아야 하는가.
“왜 날 때리는 거냐?”
“여기 너랑 나밖에 없잖아!”
“그렇다고 왜 날 때리는 거지...?”
“너무 억울해 하지 마! 나중에 내가 아롯에 돌아가면, 걷어차는 수준이 아니라 거길 아예 뒤집어버릴 거니까. 병신 같은 왕족들. 머저리같은 마법사들! 나 사라지고 200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위치크래프트이 후반권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히다니!”
세냐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발을 쾅쾅 굴렀다.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반권이라는 것을 접하고 싶어서 궁정마법사단에 들어가는 것까지 고민했는데... 후반권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등신인 건 너도 마찬가지야, 하멜!”
“등신은 내가 아니라 모론이고.”
“그래, 너는 병신이지! 너도 위치크래프트를 봤을 것 아냐? 네 자질에, 느껴지는 마나를 보면 위치크래프트를 조금은 이해했을 것 같은데. 그런 너도 후반권의 존재를 믿은 거야?!”
“...나는... 물론 믿지 않았지.”
“거짓말 하지 마.”
“따지고 보면 네 잘못이잖아. 왜 그런 거짓말을 해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어? 뭐? 선의의 거짓말? 돌아가서 아롯을 뒤집어? 그러기 전에 너는 메르한테 무릎 꿇고 사과나 해. 네 거짓말 때문에 메르만 고생했잖아.”
“...당연히 사과할 거야.”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위치크래프트, 어땠어?”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거냐?”
“솔직한 감상. 나에 대한 경탄. 마법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다시는 없을 천재에 대한 경외.”
“어. 네 마법 쩔더라.”
“그게 다야?”
“...엄청 쩔더라.”
“솔직하지 못한 녀석.”
세냐는 언제 입술을 삐죽거렸냐는 듯이 헤실거리며 웃었다.
“응, 쩔기는 해. 위치크래프트의 핵심은 이터널 홀이야. 아크리온에 둔 위치크래프트는, 이터널홀을 머저리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교본일 뿐이라고.”
“그래. 너 잘난 것 알겠으니까, 말 그만 돌리고 내가 물었던 것에나 대답해.”
유진은 웃지 않고 세냐를 응시했다.
세냐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라이자키아. 그 도마뱀 새끼,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는데?”
“...지금의 네게는 무리라니까.”
“누가 몰라서 물어? 당연히 무리겠지. 전생에도 나 혼자서 잡을 수 있나 확신이 없던 새끼인데.”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는 괴물이다. 타락하기 전부터도 젊은 드래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했다는데, 놈은 로드를 죽이고 그 심장을 포식해 더욱 끔찍한 괴물이 되었다.
“세냐. 너 지금 나 걱정하는 거냐?”
“...아냐.”
“아니기는. 누굴 등신으로 아나. 반쯤 죽어서 봉인 된 네가 쌩쌩하게 살아있는 날 걱정하는 것도 웃기지 않냐?”
“...만약에.”
세냐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네가 날 위하겠답시고, 라이자키아를 찾다가. 결국에 라이자키아를 찾아서... 죽어버리면? 그럼 난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쫄아서...”
“넌 몰라.”
세냐는 작은 웃음을 내뱉었다.
“넌, 아무 것도 몰라. 하멜. 넌 절대로 몰라. 네가 죽고 나서... 남은 우리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내가 무슨 기분으로 네 목걸이를 지니고 있었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서 네 무덤에 있었는지.”
“알아.”
유진은 세냐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거기서 애새끼처럼 얼마나 질질 짜댔는지 알아. 네가, 아롯에서 수십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
“...”
“그런 너는 내 기분을 알아? 알 리가 없지. 여기 처박혀 봉인되어 있던 너는 절대로 몰라. 너는, 전생의 나는 알아도 지금의 나는 모른다고.”
“...그렇겠지.”
“그럼 알아가야지. 네가 여기 처박혀 있으면 절대로 나에 대해 알 수 없어. 세냐 메르데인. 괜히 나 걱정하며, 환생한 내가 한 번 더 뒈질지도 모른다는 망상은 집어치워.”
세냐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네가 날 찾았고, 나도 널 찾았어. 미안한데 난 그거로 안 되겠거든. 나는 여기 처박힌 너를 어떻게든 끄집어 낼 거다. 네가 멀쩡히 일어서 걸어서, 나랑 함께 갈 수 있게 만들 거다. 네가 싫다고 징징거리며 주저앉아도 억지로 끌어낼 거다.”
그 말에 세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진은 양손으로 세냐의 어깨를 움켜쥐고, 그녀의 떨리는 녹색 눈을 노려보았다.
“불만 없지?”
“...아하핫.”
내뱉어 묻는 말에 세냐는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의 널 모른다고? 아니, 아니야. 나는 널 알아. 하멜. 환생해 몸이 바뀌고, 얼굴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어도... 넌 내가 아는 하멜 그대로야.”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알겠네.”
“...응.”
세냐는 울면서 웃었다.
“넌 여전해.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뭐 난다는데.”
“개소리 많은 점도 바뀌지 않았네.”
“그래서 라이자키아를 어떻게 찾을 수 있냐니까.”
유진은 아직 잡고 있는 세냐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크리온에 아직 내 지팡이가 남아있어?”
“아카샤? 남아있지. 위치크래프트랑 같이 잘 보관되어 있어.”
“당연히 그렇겠지. 그곳의 병신 마법사들 수준으론 아카샤의 봉인을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
세냐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세냐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가만히 좀 내버려 둬. 개새끼야.”
결국 참다못한 세냐가 유진의 뺨을 찰싹 때렸다. 이번에도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아캬사의 봉인을 풀 술식을 알려줄게.”
“아카샤를 가지면 라이자키아를 찾아낼 수 있는 거냐?”
“...쉽지는 않을 거야. 라이자키아를 추방해 버린 것은 놈의 발악과, 내가 멀쩡하지 않아서 벌어진 사고니까. 그래도 하멜, 네가 아캬사를 가지고 있다 보면 차원의 틈 어딘가에 고립 된 라이자키아를 느낄 수 있을 거야.”
그것에 대해서는 세냐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일단 라이자키아가 이 세상 차원의 틈 어딘가에 고립된 것은 확실하다. 아예 다른 차원으로 추방되었거나, 죽어버린 것이라면 놈의 저주가 수백 년 동안이나 지속될 리가 없다.
“대륙을 싸돌아다니란 뜻이군.”
“...싫으면 하지 마.”
“내가 언제 싫대? 까짓 거 하면 되지. 게다가 네 잘난 지팡이도 갖게 되는 거잖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말이야. 내가 나중에 멀쩡해지면, 아카샤를 돌려받을 거야. 그리고. 괜히 날뛰다가 아카샤의 드래곤하트를 박살내기라도 하면...”
“나도 알아. 드래곤이 찾아온다는 것 아냐? 아니. 오히려 그게 낫지 않나? 일단 드래곤이 나보다 마법은 잘 쓸 테니까.”
“그 자존심 높은 도마뱀들이 네 부탁을 친절히 들어줄까. 자기들 종족이 선물한 지팡이를 일부러 박살낸 자식에게 브레스를 쏴 갈길까. 네 몸으로 시험해 보고 싶다면 어디 해 봐.”
“나중에 정 안되겠다 싶으면 해보지 뭐.”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놈은 전생에도 유명했지만, 현대에도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당장 헬무드에 존재하는 세 명의 공작 중 하나가 라이자키아다.
세냐가 라이자키아를 차원의 틈으로 추방해 버린 것은 200년 전.
하지만 아직까지 헬무드에는 라이자키아가 존재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면, 헬무드에 있다는 라이자키아는 본인이 아닌 거야.”
유진이 전한 의혹에 세냐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곳에 처들어왔던 것은 틀림없이 라이자키아 본인이었어. 만에 하나 추방이 실패했다면, 놈이 다시 이곳에 쳐들어왔겠지.”
“본인이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라이자키아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건가?”
“헬무드의 마족 새끼들이 있지도 않은 라이자키아의 지위를 존중해 줄 리가 없잖아. 아마... 라이자키아의 분신이거나, 헤츨링이겠지.”
“...헤츨링?”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라이자키아를 떠올렸다. 그 블랙드래곤에게 헤츨링이 있던가?
“그건 나도 몰라. 그 도마뱀이 새끼를 깠는지 안 깠는지 어떻게 알아? 하지만. 어느 쪽이든 네게 나쁜 일은 아니...”
세냐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유진은 그 모습을 비웃으며 세냐의 다리를 철썩 때렸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래, 나쁜 일은 아니지. 라이자키아의 분신이건 헤츨링이건, 어느 쪽이건 라이자키아와 인연이 있다는 거잖아. 놈을 캐다 보면 라이자키아가 처박힌 좌표를 알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르고.”
“...괜한 짓 하지 마, 하멜.”
“안 해. 이미 한 번 죽었는데 또 죽기는 나도 싫어.”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아 맞다.”
웃다가, 문득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유진은 즉시 웃음을 지우고서 세냐를 노려보았다.
“야. 그거 뭐냐?”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동화책.”
세냐의 표정이 굳었다.
“우둔한 하멜.”
“...어..”
“그거 누가 쓴 거야?”
“모... 몰라. 재밌긴 하더라. 나도 보고서... 어... 아니 보지 않았는데...”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아크리온에 동화책 초판이 버젓이 남아있더만.”
“그건... 그냥... 기념으로 가져다 둔 거야.”
“아니 개수작부리지 말라니까. 메르가 너 그 동화책을 수백 번은 넘게 읽었다던데?”
“걔는 왜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거야? 수백 년이나 방치했으니 어디 망가졌나...”
“그 초판본 내용이 아주 가관이더만. 아름답고 귀엽고 깜찍하고 앙증맞은 세냐.”
“까, 깜찍하고 앙증맞다는 내용은 없었어. ...아마도.”
세냐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어쨌든 아름답고 귀엽다는 말은 있었잖아. 너 제정신이냐? 어떻게 제 손으로 그렇게 적을 수가 있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걸 왜 적어? 난, 난 아니야.”
“그럼 아니스냐?”
“어... 어어.”
“이게 끝까지 수작부리네. 너무하단 생각 안 해? 너랑 아니스는 귀엽고 아름답고 깜찍하고 앙증맞고 지랄맞고, 어? 그런데 왜 모론은 등신이고 나는 개새끼야?”
“내가 안 적었다고!”
세냐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서 빽 고함을 질렀다.
세냐
“그래서 누구냐니까.”
“...몰라.”
“네 입으로 모른다 모른다 계속 나불거리는 것도 부끄럽고 뻔뻔하지 않냐?”
“...닥쳐.”
“만약 아니스가 쓴 것이라면, 네가 모른다고 잡아 때는 것은 아니스의 명예를 위해서인가? 그렇게 잡아 때면 결국 네가 의심받게 되는데?”
유진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추리에 나섰다.
“네가 그 모욕을 감수할 만큼 아니스와의 명예를 우선할까?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너는 자기가 하지 않을 짓을 덤터기 쓸 만큼 고지식하지는 않아.”
“...네... 네가 뭘 알아.”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네 바로 다음 정도는 알지.”
그 말이 세냐의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그녀는 유진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괜히 시선을 바닥에 내리 꽂고서 손가락만 꼼질거렸다.
“...나... 나는 정말 아냐.”
“내 눈을 보고 말해.”
“300년 전의 일이고... 그...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 모, 모론은 동화책을 엄청 좋아했어. 자기 왕국의 첫 번째 법으로 동화책의 내용을 암기하라는 법을 제정하려 할 만큼 좋아했다고.”
“...그 새끼 진짜 성군이었던 거 맞냐? 그냥 미치광이 독재자에 폭군이었던 것 아냐?”
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표정을 싹 바꾸고서 정색했다.
“아니. 모론이라면 좋아할 만도 하잖아. 맨날 등신 등신 소리만 듣다가, 용감한 모론이라는 멋진 별명이 붙었는데.”
“...그게 멋져?”
이번에는 세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만 용감한 모론이지, 책에서 하는 짓은 등신짓 그대로잖아. 애들 보는 동화책이라 차마 등신이라고 적을 수 없었던...”
“네가 적었냐?”
“...거겠지.”
“그런 것치고 나 가지고는 병신에 개새끼니 온갖 욕을 다 적었던데.”
“...잘 생각해 봐. 하멜.”
세냐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동화책이 나올 때에, 모론은 북방의 부족들을 규합하고 난민들을 모아 개국의 기초를 닦고 있었어. 그런 모론이 등신이라고 적혔어 봐.”
“뭐 어쩌라고.”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너는 모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날 후손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걔들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자기들 국왕이 다른 사람들한테 등신 등신하고 놀리는 걸 들어야 해?”
“...”
“그 동화책에 모론이 등신이라고 적혔다면, 루하르 왕국의 모두가 등신의 백성들이라고 비웃음을 받았을 거야. 그럼 어떻게 되겠어? 왕국의 모든 백성들이 국왕을 따르지 않고 반란이 일어났을 거야. 어쩌면 극성맞은 과격파들이 동화책의 저자를 잡아 죽이겠다고 무차별 살인을...”
“소설을 써라 아주.”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고서 쏘아붙였다.
“그래. 이게 다 일찍, 후손도 남기지 않고 뒈진 탓이지. 어? 내가 일찍 안 죽었으면 나도 우둔한 하멜이라고 적히지는 않았을 텐데.”
“...뭐 그렇겠지.”
“그래서 나한테 왜 그랬냐?”
“...내가 안 적었다고 했잖아.”
“마지막에 나 뒈질 때는 또 뭐야? 세냐, 난 너를 좋아했어.”
세냐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 몸을 덜덜 떨다가, 더 이상 유진과 마주 앉지 못하고 아예 몸을 반대로 돌려버렸다.
“내... 내가 아니야.”
“그럼 아니스냐니까.”
“몰라!”
세냐는 빽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모른다니까! 왜 자꾸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몰라! 다, 다른 새끼가 썼나 보지!”
“부끄럽기는 한가 보네.”
“네가... 네가 잘못한 거야, 하멜. 누가 먼저 죽으래? 누가, 누가 환생하래? 네가 환생하지 않았으면 그 동화책 직접 볼 일도 없었잖아!”
“어. 환생해서 미안하다. 그냥 자빠져 뒈져있어야 했는데. 내가 환생한 것이 잘못된 일이구나.”
그 말에 세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세냐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하고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파들거리며 떨리는 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미안해. 내가 미친 말을 했어.”
“아니... 저기. 그냥 농담한 건데, 왜 진지하게 받고 그래?”
“내가 괜찮지 않으니까... 해서는 안 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잖아. 미, 미안, 미안해. 미안해 하멜.”
세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세냐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 먼저 죽어 미안한 것은 사실이니까.”
“...흑.”
“나보고 우둔한 하멜이라고 적은 게 너인지 아니스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도 뭐 용서해 줄게.”
“...훌쩍.”
“추모석 고맙다.”
세냐는 더 훌쩍거리지 않았다. 방금만 해도 새빨갛던 세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맞아, 추모석...!’
그런 것을 적었었다. 눈물을 펑펑 흘려대며. 하멜의 추모석에 여러 글귀를 적었다. 추모석 뿐만이 아니다. 하멜의 관에도 따로 글을 적었다. 베르무트와 모론, 아니스가 보지 않을 때. 아무도 모르게 관의 뚜껑에 글귀를 적었다.
언젠가, 네가 바라던 세상에서 만날 수 있기를.
핏기 없이 창백하던 얼굴이 다시 달아오른다. 그 모든 것은, 하멜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적어놓은 것이다.
“관에도...”
“주, 죽여버릴 거야.”
“너 내 동상 세울 때 엄청 울더라.”
“내가 언제 울었어? 마음대로 상상하지 마...!”
“모론은 네 눈물 받아먹던데?”
“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그걸 아는 거야? 네 영혼은 목걸이 안에 있었... 너, 너 설마. 목걸이 안에서 영혼만 남은 상태에서 의식이 있었던 거야?”
세냐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세냐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최악을 상상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그냥 꿈에서 봤어.”“꿈?”
“성검이 말이야.”
어쩌면.
유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꿈속의 계시. 그건 정말로 성검이 보여준 것일까. 유진은 여덟 장의 날개를 펼치던 천사를, 아니스를 떠올렸다.
라이자키아가 공격하던 과거를 보여주고.
지금 이렇게 세냐와 마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스가 일으킨 기적 때문이다.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신앙과 상관없이,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틀림없는 기적이었다.
그럼에도 실감하고 싶지 않은 것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세냐는 멀쩡히 움직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고,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현실의 세냐는 가슴에 구멍이 나서, 세계수의 힘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그 현실이 유진의 기분을 일그러트렸다.
“...함께 갈 수는 없는 건가?”
조금 미련이 남았다.
“너. 아롯에서 날 찾아왔잖아.”
“...아주 잠깐, 사념체를 바깥에 흘려낸 것 뿐이야.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쥐어짜서 가능했던 거고.”
“...어떻게 날 찾은 거지?”
“목걸이.”
세냐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 저택에는 예전에 설치한 보안마법들이 남아있어. 가동되지는 않고 있지만, 나와 연결 된 마법이 네가 가진 목걸이를 감지한 거야.”
세냐가 쭉 가지고 있던 목걸이다. 그게 수백 년 만에 저택으로 돌아온 것이니, 마법이 반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마나를 쥐어짜고, 상황을 보러갔어. 몸이 정상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념체를 만들어내는 것에 그쳤지만, 그래도... 널 찾았어.”
유진은 더 이상 답하지 않고 세냐의 곁에 앉아있었다. 세냐도 유진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얌전히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멍하니 앞을 보다가... 가끔, 아니, 꽤 자주 유진을 힐긋거리며 돌아보았다.
“...슬슬 가.”
그렇게 잠자코 앉아 있다가,
세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힐긋거리지 않고, 유진을 똑바로 보았다.
“...여기 더 남아서 좋을 것이 없어.”
유진도 안다.
그래서 유진은 현실이 아닌 꿈으로 현혹시키는 몽마를 혐오한다. 현실이 아니되, 극도로 현실과 가까운 꿈. 거기에 현실과는 다른 이상을 조금만 섞으면, 사람의 정신은 정말로 간단히 현혹되서 망가져 버린다.
“...그렇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제야 유진은 이오드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해 버리면... 달콤한 꿈에 중독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현실을 봐야 한다. 꿈에만 빠져 있어서는 현실의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만나면.”
세냐는 일어서는 유진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하멜이 아니라. 지금의 이름으로 부르도록 할게. 이름이 바뀔 지라도 너는 하멜이니까.”
“네가 세냐인 것처럼.”
“응.”
세냐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뻔히 보이는 노력이었다.
“세냐.”
유진은 세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울지 말고,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바보, 멍청이, 등신, 개새끼.”
기껏 노력하고 있는데.
세냐는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서 유진의 손을 잡았다.
“...네가 멋대로 말하고, 희망을 줘버린 거야.”
“알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기다릴 거야. 널 믿고, 기대하고, 기다릴 거라고.”“당연히 그래야지.”
“...데리러 오지는 마.”
세냐는 코를 훌쩍거리며 일어섰다. 그렇게 잠시 머뭇거리다가, 홱하고 손을 잡아 끌어서 유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가 갈 테니까. 너는... 너는. 기다리고 있어.”
세냐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세냐는 그 손길에 입술을 꽉 물고서, 유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품에 안긴 세냐에게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진은 세냐를 느꼈다. 그녀는, 죽지 않고 살아서 지금 이곳에 있다.
“...그래.”
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세냐도 그 미소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건 기적이야.’
죽어서, 먼저 떠난 너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너는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놓고 싶지 않았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그렇게 생각하면서, 세냐는 유진을 놓아주었다.
‘...아니, 바뀌지 않았어. 너는... 하멜이야.’
세냐는 울지 않았다.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보내주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기적이 끝난다.
의식이 점점 멀어진다. 더 이상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세냐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등지고 있던 작은 나무가 사라진다. 사라진 모든 것들이 환한 빛으로 덮인다. 세냐는 그 한 복판에 앉아, 앞을 응시했다.
“...고마워.”
여덟 장의 날개를 펼친 아니스가 멀지 않은 곳에 서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엷은 미소를 짓고서 세냐를 응시했다.
“네게도 구원이 있기를.”
세냐는 아니스를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아니스의 날개가 천천히 접히고,
빛이 사라진 자리를 어둠이 가득 채웠다.
*
눈을 떴다.
유진은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현실은 바뀐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세냐는 수정안에서 눈을 감고 있고, 그녀의 가슴 한 복판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세계수의 넝쿨이 그녀와 연결되어 있었다.
유진은 잠시 세냐를 응시했다.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세냐와 나눈 대화와, 아크리온에 남아 있는 아카샤의 봉인을 풀 술식.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마.’
그 말도 남아있다. 유진은 씁쓸히 웃으며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노력해 보지.”
그 누구도 베르무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베르무트도 다른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놈은 많은 것을 짊어졌고. 그것에 대해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함께 하려 했었다. 놈은 세냐와, 아니스와, 모론과, 하멜과 함께 마왕과 맞섰다. 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들 중, 저 4명 만이 베르무트와 함께 했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동료들에게도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하멜이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은 후부터. 베르무트는 모든 것을 혼자서 이끌었다.
약속도.
환생도.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베르무트가 왜, 어째서 그랬는지는 몰라. 나는 베르무트가 아니고, 그 자식을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했어.’
‘네가 적임자야.’
‘베르무트는 결국 실패했지만, 하멜 너라면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무거워.”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어깨를 주물렀다.
“이래서 난 용사가 싫다고.”
쓰러진 크리스티나가 보였다.
아니스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빛과 공명했던 완드는 크리스티나의 손가락과 맞닿아 있었다. 유진은 잠시 동안 크리스티나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부축하고 일으켰다.
크리스티나는 아직까지 정신을 잃고 있다. ‘기적’에 휘말리고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그렇게 오랜 시간은 흐르지 않은 것 같다. 다행히 크리스티나는 정신만 잃었다 뿐이지, 몸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정체가 뭐야?’
아니스 본인일 리는 없는데.
‘천사’는 크리스티나와 반쯤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평온히 눈을 감은 세냐의 얼굴이 보였다.
“기다리고 있어.”
유진은 그렇게 인사를 전하고, 크리스티나를 데리고서 세계수의 밖으로 향했다.
[...하멜?]
템페스트의 비명이 머릿속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 빛은 대체...]
“감상에도 못 젖게 하는 군.”
유진은 위니드를 망토 안에 쑤셔 넣으며 투덜거렸다.
불꽃
“...으윽...”
신음소리와 함께 크리스티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다가, 화들짝 놀라 그대로 멈췄다. 지금 크리스티나는 바닥이 아니라 공중에 누워있었다.
“잘 잤냐?”
유진은 뒤를 힐긋 돌아보며 물었다. 크리스티나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먼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계수의 안. 소생마법을 펼치던 중에... 의식이 끊어졌다. 그 뒤로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알았다.
이곳은 세계수의 안도, 엘프의 영지도 아니다.
“...제가 실패한 겁니까?”
크리스티나는 우선 그 사실에 대해 물어보았다. 실패했다. 아마, 아니,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끊어지기 전부터 실패를 예감했다. 크리스티나의 신성력으로는 세냐의 상처를 회복시킬 수도, 그녀의 눈을 뜨게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몸의 상태가 이상하기 때문이었다. 그만한 규모의 신성마법을 펼친 것도 모자라, 가진 신성력을 한계까지 쥐어 짜내서 쏟아 부었다.
‘...몸이 가벼워.’
정신도 피로하지 않고 개운했다. 신성력도 마법을 쓰지 않은 것처럼 충만했다.
“실패했지.”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아래로 내려주며 대답했다.
“빛이 막 번쩍이기는 했는데, 결국 세냐님을 소생시키지는 못했어.”
“...역시.”
“기억이 잘 안 나나 봐?”
“네.”
크리티나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며 눈을 찡그렸다.
“실패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내가 데려왔으니까.”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묻는 것은, 왜 세계수에서 나오셨냐는 겁니다. 한 번의 실패에 벌써 포기하시는 겁니까?”
곧장 대답하지 않고 크리스티나를 응시했다. 유진은 독심술 같은 재주는 없었지만, 지금 크리스티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크리스티나는 천사가 된 아니스에 대해서는 짚이는 바가 없는 듯 했다.
‘아니스는 날 알아봤어.’
그래서 기적을 일으켜 준 것이겠지. 유진은 당장은 아니스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기로 했다. 섣불리 파헤치기도 힘든 문제인데다, 그에 대한 진실을 알려면 크리스티나가 아니라 그 윗선을 파고들어야 한다.
크리스티나를 양녀로 들였다는 로게리스 추기경. 또, 크리스티나를 성녀후보로 삼은 교황.
“...포기하는 것이 아냐.”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소생은 실패했지만, 기적은 일어났거든.”
“...네?”
크리스티나는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네가 의식을 잃는 순간, 빛이 펑하고 터졌어. 그리고 난... 계시를 들었지.”
굳이 아니스와, 세냐에 대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설명하기도 복잡하다. 하지만 ‘계시’를 둘러대면 간단하게 크리스티나를 납득시킬 수 있다.
“...아아!”
실제로 크리스티나는 납득했다. 그녀는 탄성을 내지르며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
‘아니, 거짓말은 아니잖아. 아니스가 천사가 되어서 나타났고, 기적을 일으켜준 것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것도 계시라고 할 수 있지.’
유진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어.”
그래도 차마 신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천사, 라는 말에 크리스티나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천사라니...! 유진님, 천사를 직접 보신 겁니까?”
“...그, 빛이 너무 환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날개를 활짝 펼친 것은 보았지.”
“날개! 유진님, 빛의 천사에게 있어서 날개는 격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혹시, 그 천사의 날개가 몇 개인지도 보셨습니까?”
“...여덟 장이었던 것 같은데...”
“...그럴 수가!”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는 즉시 자리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여덟 장이면 안 되는 거냐?”
“유진님...!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빛의 신께서 이 땅에 강림하셔서 부린 천사 중, 신께서 가장 총애했던 천사가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하였습니다.”
몇 장 줄여서 말할 걸. 유진은 뒤늦은 후회를 느꼈다.
“헌데 유진님이 보신 천사가 정말 여덟 장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면, 보통의 천사가 아니라 빛의 신께서 직접 보내신 사자일 것입니다!”
“...어어... 너무 환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니까? 어쩌면 여덟 장이 아니라 여섯 장이었을 수도 있어.”
유진은 그렇게 둘러대며 아니스를 떠올렸다. 빛이 환하기는 했지만,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아니스가 펼친 날개는 정확히 여덟 장이었다.
‘신의 사자?’
그 아니스가?
“아니오. 그 기적의 순간에 유진님께서 착각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내가 잘못 본 것 같다는데, 기절해 있던 네가 왜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거냐...”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빛의 신께서, 용사이자 성검의 주인이신 유진님을 위해 제 사도를 직접 보내어 계시를 전한 것입니다.”
“어. 네 마음대로 생각해.”
“그래서 유진님. 어떠한 계시를 들으신 겁니까?”
“...세냐님이 눈을 뜨게 하려면,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를 죽여야 한다더군.”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감탄성을 내뱉지도, 흥분을 표정 밖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다.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그에 어린 끔찍한 악명은 크리스티나도 잘 알고 있었다. 타락한 드래곤. 동족포식자. 라이자키아는 헬무드에 세 명 있는 공작 중 하나이며, 마왕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괴물이다.
“...어렵군요.”
“그것에 대해서 너와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어.”
유진은 계속해서 걸으며 말을 이었다.
“천사의 계시에 따르면, 현재 헬무드에 있는 라이자키아는 ‘진짜’가 아니라더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라이자키아는 200년 전에 엘프의 영지를 습격했다. 놈은 세냐님과 모든 엘프를 죽이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성공하지 못했어. 세냐님은 라이자키아을 차원의 틈으로 추방했고, 라이자키아의 독기가 세냐님과 엘프들을 세계수의 안에서 잠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더군.”
크리스티나는 짧은 감탄을 터트렸다.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괴물을 단신으로 상대하고, 차원의 틈으로 추방해 버렸다니.
“...의아한 일이군요.”
천사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물론 유진은 신을 믿지 않고, 이전에도 몇 번이나 계시를 앞세워 신성모독을 범했다. 하지만 설마 이런 문제로 유진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은가.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차원의 틈 밖으로 추방당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라이자키아의 신변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저 세 명은 헬무드의 삼공(三公)이라 불리며 수백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삼공 중 하나인 라이자키아가, 그것도 수백 년 전에 모습을 감췄다면. 헬무드의 다른 마족들이 그 자리를 노리지 않았을 리가 없어. 하지만 라이자키아의 영지인 용마성(龍魔城)은 건재하고, 놈의 이름도 아직 공작 자리에 앉아있지.”
“...누아르 제벨라 공작은 고위 마족 중에서도 대표적인 온건파입니다.”
크리스티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유진의 뒤를 따랐다.
“가비드 린드먼 공작은 유폐의 마왕의 심복을 자처하며, 외부와 교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사상을 가졌는지는 모릅니다만, 라이자키아 공작은 누아르 제벨라 공작과는 정 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아르 제벨라는 인간을 적대하지 않는다. 그 빌어먹을 계집이 마음속에 얼마나 시커먼 지옥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건 그 탕부는 헬무드가 문호를 개방한 후부터 인간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라이자키아는 그러지 않았다. 놈은 난폭하고 미쳤다. 균형의 조율자를 자처하는 드래곤이면서도 로드를 살해하고, 심장을 포식한 호로자식이다. 그러면서도 드래곤 특유의 오만함도 가지고 있다.
놈은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는 살 가치 없는 열등한 벌레라고 여긴다.
“헬무드에서도 외국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 바로 라이자키아 공작의 용마성입니다. 그는 지독한 인간 혐오자고, 그에 관한 소문은 오래 전의 악명을 제외하곤 세상에 떠돌지 않고 있습니다.”
적어도 세상에는 라이자키아에 관련 된 문제가 떠돈 적은 없다. 헤츨링이나 분신. 세냐는 그렇게 추측했다.
‘그렇다고 용마성에 직접 쳐들어갈 수도 없고.’
헤츨링이나 분신이라면 라이자키아보다는 훨씬 못할 테지만. 그래도 드래곤을 만만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일단 세냐가 살아있다는 것은 확인했고, 대화도 충분히 나누었다.
믿고, 기대하고, 기다리겠다고.
세냐는 그렇게 말했다.
‘서두르지 마.’
유진은 감정을 억눌렀다. 당장 해야 할 것은 엘프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의 엘프들을 사마르 밖으로 데려가는 것만 해도 귀찮은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한 두명도 아니고, 백 명이 넘는 엘프들을 데리고서 숲을 횡단해야 한다.
그렇게 라이언하트 본가에 엘프들을 데려다 놓고. 그 뒤에는 다시 아롯에 가서, 아카샤를 손에 넣어야 한다.
아마 그 문제로도 아롯의 마법사들과 드잡이를 해야겠지만, 세냐의 인정과 정통성을 앞세운다면 결국 놈들도 아가리를 다물 수밖에 없으리라.
“...흠.”
유진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망토의 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유진님, 그건...?”
크리스티나가 놀란 표정을 하고서 다가왔다. 그녀는 유진이 들고 있는 길쭉한 나뭇가지와, 매달린 잎사귀를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 꺾어 왔어.”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것 있나? 너도 세계수가 얼마나 큰지 봤잖아. 이거 하나 꺾어봤자 아무 티도 안 나.”
허락도 없이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꺾은 것에 대해서는 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영지로 인도해 주었던 나뭇잎은 챙겨두었지만, 말라비틀어진 나뭇잎 한 장 보다는 파릇파릇한 나뭇잎과 가지가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세계수의 묘목을 라이언하트 본가의 숲으로 옮겨야 한다. 그를 위해서 나뭇가지를 꺾어 오긴 했다만, 그 외에도 다르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는 않았다.
세계수의 나뭇잎은 세상 어디에서건 엘프의 영지로 워프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건 크리스티나가 기절한 동안 시도해 보았지만, 엘프의 영지가 봉인된 탓인지 워프는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세냐에게 시크나드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네.’
뒤늦게 그 생각이 들었다.
‘뭐. 놈도 안부를 전해달란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시크나드에 대한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환생한 삶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것만 해도 며칠 동안은 떠들 수 있을 거다.
‘다음에 하면 돼.’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니까.
유진은 손에 쥐어진 이 자그마한 나뭇가지에게서 세냐를 느꼈다.
*
엘프의 마을로 돌아가는 길은 기억하고 있었다. 결계에 보호되고 있으니 바로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근처까지 간다면 시크나드나 다른 엘프가 마중을 나올 것이다.
도중에 헤매지는 않아서, 이틀 만에 마을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엘프의 마중은 없었다.
“...뭔가...”
거슬린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고서 감각의 날을 세웠다. 마을을 보호하는 결계는, 결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후로도 위화감을 전하지 않을 만큼 수준이 높다.
하지만 지금은 위화감이 느껴진다. 결계를 구성하는 마나가 조금 뒤틀려 있다.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유진은 걸음을 멈추고서 눈을 감았다.
착각이 아니다. 결계의 마나가 뒤틀려 있다. 그 뒤틀림은, 결계가 망가졌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왜? 유진은 감은 눈을 떴다. 의문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먼저 갈 테니 따라와.”
“...네.”
크리스티나는 유진처럼 위화감을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과 목소리가 싸늘해진 것에 어렴풋이 불길함은 예측할 수 있었다.
유진은 즉시 땅을 박차고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크리스티나는 빛의 날개를 펼치고서 유진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비행도 빠르긴 했지만, 유진은 그녀보다 더 빨랐다.
‘고작 이틀이야.’
이틀 만에 누군가가 엘프의 마을을 습격했다. 엘프를 노린 사냥꾼들? 단순한 사냥꾼일 리가 없다. 마을을 보호하고 있는 결계는 세계수의 묘목이 만들어낸 것.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결계를 느끼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크엘프. 놈들이 제 입지를 위해 엘프를 포섭하고 있다는 건 유명한 일이니. 하지만 시기가 너무 절묘하지 않나? 하필 유진이 엘프의 마을에 오고, 떠난 사이에 습격해 왔다고?
‘마나의 뒤틀림. 마법으로 결계를 파훼한 것이 아니야. 그냥... 무식한 힘으로 찢어버린 것 같은데.’
정말 다크엘프인가?
머릿속을 떠도는 여러 의문들 속에서.
며칠 전. 마을을 떠날 적에 배웅하던 엘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간절한 기도를 담은 시선들.
ㅡ화륵.
새하얀 불꽃이 유진의 몸을 뒤덮었다.
불꽃
“이거 참.”
남자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서로 피곤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 굳이 일을 키우는 구만.”
시크나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커다란 손에 목이 잡혀 있었다. 호흡도 제대로 뱉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입을 열어서 나오는 소리는 꺼져가는 신음 뿐이다.
“이게 다 네가 오해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렇게 내뱉으며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시크나드의 몸은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바닥에 피가 뿌려졌다.
바닥에는 이미 피가 그득했다.
“나는 너희를 해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약자를 괴롭히고 싶지도 않고.”
“...크륵...”
시크나드는 입안을 가득 채운 피를 삼켰다.
“처음에도 말하지 않았나. 그냥 여기서 잠깐, 길어봐야 며칠 동안 머무르고 싶다고. 너희를 귀찮게 하지도 않을 거고, 너희도 나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시크나드는 얼마 남지 않은 마나와 힘을 쥐어짰다. 그렇게 팔을 휘둘러, 남자의 목을 수도로 베려 했다.
“그냥.”
휘두른 수도가 목에 닿기도 전. 시크나드의 몸이 땅에 내리 꽂혔다. ㅡ꽈앙! 지면이 들썩거리며, 고여있던 피가 위로 솟구쳤다. 시크나드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극심한 고통은 비명으로도 바뀌지 못했다.
“그 꼬마가 돌아왔을 때. 쾌적한 협상을 위해 인질인 척만 해달라는 것이... 네게는 그리도 어려운 부탁이었나?”
전신의 뼈가 모조리 으스러진 것만 같았다. 코어의 마나도 방금으로 모조리 고갈되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깊게 눌러 쓴 후드. 그늘진 아래에서 보이는 금색의 눈동자. 입을 벌릴 때마다 드러나는 날카로운 이빨.
“...크큭!”
시크나드는 남자를 노려보며 갈라진 웃음소리를 토했다.
“...인질? 우리를 해치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거참. 막혀도 너무 꽉 막혔구만. 평생 속고만 살았나?”
“네... 존재 자체가, 우리를 해치고 있다. 우리를 병들게 하고, 죽음에 가깝게 만든단 말이다.”
“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나도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난 너희 엘프들이 가엽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이 아주 애처로워. 그래서...”
“크... 크크큭! 다크엘프로 만들어준다는 말을... 우리가 감사히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한 거냐...?”
“병들어 뒈지는 것보다 낫지 않나? 말단 다크엘프도 아니고 나찰공주, 그 계집의 직속 다크엘프가 될 수 있도록 주선해 준다고 했지. 넌 그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헛소리 말고... 꺼져라. 짐승아.”
남자는 더 이상 웃으며 넉살을 떨지 못했다. ‘짐승.’ 그건 남자에게, 아니, 남자의 종족에게 있어서 자비를 베풀 수 없는 모욕이었다.
“주제파악을 못하는 군.”
남자는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시크나드의 목을 놓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겁에 질린 엘프들이 보였다. 몇몇 엘프들은 시크나드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다. 난폭한 침입자에게 저항하기 위해, 시크나드와 함께 맞섰던 젊은 엘프들이다.
남자에게 있어서, 엘프의 저항은 하찮기만 했다. 이 마을에서 시크나드를 제외하면 강자라 할 만한 엘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힘이 있다면 이 숲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몇 명 죽여 버려도 괜찮겠지.”
이런 종류의 일에 있어서 본보기는 필요한 법이다. 모두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저 많은 공주를 데리고 돌아간다면, 나찰공주에게 빚을 지워둘 수 있다는 것에 형님도 기뻐할 것이다.
어차피 엘프는 많다. 두세 명 죽여둔 들 문제는 없는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마음 먹고, 바닥에 널브러진 시크나드를 향해 발을 들어올렸다.
자근자근.
밟아 으깨 죽일 생각이었다.
“...음?”
들었던 발을 내리찍기 직전.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빠르게 몸을 틀면서 팔을 휘둘렀다.
ㅡ꽈아아앙!
굉음과 함께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시크나드는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포격’을 쳐내기 위해 팔을 휘두른 것까지는 보았는데, 저 강인한 괴물이 저토록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용격창 카르보스.
이 창은 마나를 너무 많이 처먹는 것이 단점이지만, 마나만 충분하다면 복잡한 마법식 없이 포격을 쏴 갈길 수 있다. 그렇게 쏘아낸 포격은 드래곤의 브레스만큼은 아니어도, 처먹은 마나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위력을 만들어낸다.
유진은 그 커다란 용격창을 어깨에 걸치고서 땅에 내려왔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엘프들. 그들 중에서 가장 상태가 심각한 것이 시크나드였다.
“...하...”
시크나드는 자신도 모르게 ‘하멜’이란 이름을 말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습격자는 죽지 않았다.
“저 새끼. 뭐냐?”
유진은 시크나드를 내려 보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용격창의 포격을 정통으로 갈겼는데도 놈을 죽이지 못했다.
“...야곤의 형제라 말하더군. 유진, 널 노리고 있다.”
시크나드는 헐떡거리며 말했다.
야곤. 그 이름에 유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전생에 만난 적은 없는 놈이지만, 그 이름은 유진도 알고 있었다.
멸망의 마왕을 섬기는 수인족의 두령.
오보론의 아들.
다른 것은 몰라도, 제 아비인 오보론을 물어죽이고 두령 자리를 찬탈했다는 것만으로도 야곤의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오보론은 패악(悖惡)을 이명으로 삼은 만큼 광폭하고 강한 놈이었다. 그런 오보론을 물어 죽인 아들이라면, 오보론 이상의 미치광이에 패악스런 놈일 것이 분명했다.
“...형제라.”
유진은 입술을 뒤틀며 중얼거렸다.
“애비와는 닮지 않은 것 같은데.”
멀리 날아갔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다. 포격을 맞춘 순간에도 느꼈지만, 놈의 몸에는 심각한 상처는 없어 보였다. 두르고 있던 망토만 누더기가 되었을 뿐이다.
‘반응이 빨랐어.’
충분한 거리에서 포격을 쐈다. 굉음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용격창의 포격은 굉음을 먼저 듣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다. 아니. 놈은 굉음이 터지기 전에 먼저 반응했다.
“퉷.”
남자는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돌아왔군.”
로브가 누더기가 된 탓에 남자의 모습이 잘 보였다.
라이칸슬로프는 뱀파이어와 마족에서 파생 된 돌연변이다. 놈들은 뱀파이어처럼 피로서 혈족을 늘린다. 한때 인간이었다고 해도, 라이칸슬로프로 전염되어버리면 본질이 마(魔)에 물들어 버린다.
수인은 라이칸슬로프와 다르다. 엘프나 드워프와 마찬가지로, 수인도 인간이 아닌 종족일 뿐이다. 놈들은 라이칸슬로프처럼 인간과 짐승의 모습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짐승과 인간이 뒤섞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다운 지성을 갖춘 짐승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보니 대부분의 수인들은 짐승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맹수로 태어난 수인들은 그 본성에 휘둘리는 경우가 잦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본성을 억누를 줄 알아야 한다. 수인과 짐승이 다른 점이, 본성을 억누를 수 있는 이성의 유무다.
하지만. 300년 전, 오보론이 이끌었던 수인들은 본성을 억누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가 맹수였다.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육식동물. 그 중에서도 포식자로 군림하는 맹수들. 본성을 이성으로 억누르는 것보단, 이성을 사용해 보다 효과적으로 살육과 포식을 즐기고 싶어 하던 짐승들.
걸어오는 남자도 그러한 맹수였다. 인간처럼 걸어 다니는 짐승. 금색 눈동자와 송곳니. 호랑이와 인간이 뒤섞인 얼굴. 짐승과는 다르게 인간의 손발을 가지고 있지만, 몸을 뒤덮은 털에는 호랑이다운 줄무늬가 선명했다.
“야곤의 형제라며?”
유진은 짐승을 노려보며 말했다.
“패악의 오보론의 아들. 내가 듣기로, 오보론은 곰이었다는데. 그 아들의 형제라는 너는 왜 호랑이냐?”
“꼬마야.”
남자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내뱉는 말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다. 전대 두령님의 이름은 너 따위가 함부로 언급해도 될 만큼 가볍지 않으니 말이다.”
“짐승 새끼가 인간인 척 하기는.”
유진은 그렇게 이죽대며 카르보스를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뭐 잡종 같은 건가? 곰인 오보론이 호랑이와 눈이 맞아 새끼를 깠고, 장남인 야곤은 곰으로 태어나고 둘째인 넌 호랑이로 태어난 거야?”
“말을.”
“만약 그런 것이라면 놀라운 일이네. 곰과 호랑이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수 있다니...! 짐승 새끼인 너도 노새가 뭔지는 알지?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나는 잡종. 그런 잡종은 성별과 상관없이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데... 너도 고자새끼냐?”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유진은 더 이상 비웃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내가 말조심하면. 그냥 돌아가기라도 해주냐?”
유진의 양손은 아직 망토의 안에 들어가있었다.
“나 조지려고 여기 와있는 거잖아. 아냐? 내가 뭔 말을 해도 넌 날 조지려고 할 텐데, 내가 왜 주둥이를 간수해야 돼?”
놈은 유진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마르에서 신분을 드러낸 적은 없다. 이 숲에서 유진에 대해서 아는 것은 크리스티나와 이 마을의 엘프들 뿐이다.
저 짐승 새끼가 유진을 잡으려고 왔다는 것은.
‘누구지?’
숲 밖의 누군가가 주둥이를 놀린 것이다. 신성제국인가? 어쩌면... 라이언하트 쪽일 지도 모른다. 유진은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하트의 인물들 중, 유진이 사마르에 온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흑사자 기사단의 2번대 대장 제노스. 원로원주 도이네스. 그리고 가주인 길레이드. 그 외의 인물에게는 사마르로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유진의 친부인 제하드와 시안, 시엘 쌍둥이조차도 흑사자 성을 떠난 유진의 행보를 모르고 있다.
“꼬마가 입이 험하군.”
남자는 송곳니를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널 죽이려고 했다면 전에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알고는 있나? 네가 다리 병신 엘프를 주웠을 때. 널 추격하던 가룽의 전사들을 내가 대신 치워줬다.”
“귀찮은 일 대신 해줘서 고맙네.”
생각했던 것만큼 추격이 붙지 않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유진은 두눈을 얇게 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는 건, 놈이 진즉부터 유진을 따라다니고 있었단 말이다.
‘감지하지 못했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진의 감각이 아무리 예민하다고 해도, 한참 떨어진 곳에서 추격하는 놈을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하다. 반면에 남자는 유진을 의식하고 있는데다, 수인족 특유의 감각은 먼 거리에서도 유진의 냄새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럼 네 목적은 뭐냐?”
“저 머저리 엘프와는 달리 말이 통하는 군.”
남자는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나는 바랑이라고 한다. 꼬마, 네가 말한 야곤과는 피를 나누진 않았어도 의형제를 맺은 사이다.”
역시. 곰 밑에서 왜 호랑이가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널 추격한 이유는, 이 숲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엘프의 영지를 찾기 위해서다.”
“...”
“꼬마야. 나는 네가 영지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함께 들어가지 못한 탓에 이곳에 와서 널 기다리기로 한 것인데, 네 밑에 널브러진 엘프 자식이 나를 죽이겠다고 먼저 덤비더군.”
“당연히 덤비겠지.”
유진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래서. 영지로 안내해 달라는 거냐?”
“일을 번잡하게 만들진 말자고.”
“안내한 뒤에는?”
“서로 웃으며 헤어지면 되는 거다. 나도 널 죽일 생각까지는 없으니 말이야.”
“왜 영지를 찾는 거지?”“그 이유를 말할 생각은 없다만.”
“좋아. 그러면 다른 걸 묻지. 나에 대해서 네게 아가리를 턴 새끼가 누구냐?”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꼬마야.”
“나한테 바라는 건 많은 주제에, 정작 지는 내가 바라는 걸 하나도 안 해주려 하네.”
“그러한 부조리야말로 강자의 특권인 것이지.”
바랑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마지막에는 웃으며 헤어지자고?’
퍽이나 그러겠다. 유진은 바랑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영지로 안내해 달라니. 고민의 여지가 없는 요구였다. 엘프의 영지, 그 중심의 세계수에는 세냐와 엘프들이 봉인되어 있다.
저 짐승 새끼가 왜 영지로 들어가려는 것인지, 영지로 들어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은 놈을 영지로 안내해 줄 생각은 쥐뿔도 없었다.
말로 해서 돌아 갈 상대도 아니다.
“...유진. 도망쳐라.”
시크나드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바랑도 그 말을 들었다. 놈은 큰 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백 명이 넘는 엘프들을 내버려 두고서 말인가?”
그 말에 시크나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시간이라도 끄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불가능하다. 전력을 다해 덤볐는데도 저 짐승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아무리 시크나드가 마병에 걸려 전성기보다 약해졌다지만, 저 짐승이 강하단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유진도 그 사실을 알았다. 용격창의 포격을 얻어맞고도 자잘한 생채기만 입은 터프한 놈이다. 지금의 유진으로는 바랑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진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편에서 따라 온 크리스티나가 이제야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처참하게 당한 시크나드와 엘프들을 보았다. 유진은 곁으로 다가오려는 크리스티나에게 손을 뻗어 제지했다.
“거기 있어.”
“...네?”
크리스티나는 영문을 알지 못하고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걸음에 바랑은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놈에 대해서는 들었다.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시조의 ‘다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천재.
그래봤자 19살의 어린 인간.
“그만 둬라, 꼬마야.”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저 질문 뿐만이 아니다. 놈과 맞닥트려 나누었던 모든 대화가 유진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유진은 바랑과 협상할 생각도, 놈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유진은 망토 안의 무장을 확인했다. 잡다한 무기가 수십 가지. 폭풍검 위니드. 포식검 아스펠. 용격창 카르보스. 뇌광궁 페르노아.
월광검.
‘무기는 충분하다는 것과.’
망토 안에 들어가 있던 오른손이 빠져나온다. 바랑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망토 밖으로 나온 손은 아무런 무기도 쥐지 않았다.
대신에.
유진은 오른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최악을 막아 줄 고위 성직자가 있다는 것.’
지금의 실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면, 지금 감당할 수 있게끔 나 자신을 조정하면 된다.
19살의 유진은 눈앞의 바랑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전생의 하멜은 당연히 이길 수 있다.
지금의 스펙으로 부족하다면.
전성기의 스펙에 근접시키면 된다.
‘이그니션.’
유진의 오른손이 가슴을 짚었다. 흘려낸 마나가 심장과 코어를 강하게 압박했다.
ㅡ두근.
모두가 그 커다란 고동을 들었다.
폭주한 불꽃이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렸다.
불꽃
‘그거 쓰지 마.’
세냐는 이그니션을 싫어했다.
‘하멜. 넌 무식해서 모르는 모양인데, 코어는 굉장히 섬세한 기관이야. 원래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기관을 마나를 수련함으로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게 코어라고. 그렇다 보니 불완전하고 여러 위험성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전생에 몇 번.
이그니션을 사용하고, 힘이 다해 쓰러졌을 때. 세냐는 힘없이 누운 하멜의 곁에 앉아서, 밤이 새도록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애당초 그 기술은 너밖에 사용할 수 없는 거잖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넌 병신이라,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대단한 특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그건 특기가 아니라 장애야.’
‘...말이 너무 심하지 않냐?’
‘이게 심해? 나는 지금 엄청, 몇 번이나, 참고 있는 거야. 네 덕에 우리는 위험하지 않게 되었지만, 너, 이 병신아. 너는! 위험해 졌잖아. 이게 대체 뭐하자는 거야? 손가락 까딱 못하고 누워서, 진짜 병신이 되어버렸잖아.’
잔소리를 들을 적마다 몇 번이고 욱해서 반박하면, 세냐는 항상 똑같은 결론을 내버렸다.
응, 네가 병신인 거야.
‘알아들어? 병신아. 코어는 절대로 폭주시켜서는 안 돼. 가뜩이나 심장과 가까이 있는 걸 왜 자꾸 폭주시키는 거야? 보통 사람은, 아니, 보통 사람이 아니라! 이 인류 최고의 대마법사인 나도 코어가 폭주하면 죽거나 병신이 된다고!’
‘너도 못 하는 걸 내가 하는 거니까, 특기인 거 맞지 않나?’
‘...어, 그래. 그거 특기 맞아. 너 특별해. 특별한 장애를 갖고 있는 특별한 병신이야.’
대부분의 위험은 베르무트가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놈도 신은 아니어서, 몇 번인가는 베르무트가 감당할 수 없을 위험과 맞닥트리곤 했다.
가령, 베르무트가 동료들을 지킬 수 없을 때. 베르무트가 아무리 잘났든, 놈은 혼자였다. 혼자서 막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니 동료가 있는 것이다. 하멜이 몇 번이나 동료들을 위해 나섰듯, 모론도, 세냐도, 아니스도. 몇 번이나 동료들을 위해 나섰다. 베르무트가 모든 것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놈의 발목을 잡지 않게끔. 각자가 최선을 다했다.
‘하멜. 그 기술은 언젠가 당신을 죽일 겁니다.’
이그니션을 싫어하는 것은 세냐 뿐만이 아니었다. 사용한 반동으로 쓰러질 때. 망가진 몸을 회복시키는 것은 아니스의 몫이었다.
‘당신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마나를 다룬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세냐는 당신이 언젠가 마나의 폭주 때문에 죽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하멜. 당신은 마나의 폭주로 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뭔데?’
‘인간의 몸은 생각처럼 튼튼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할 때. 아니스는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전생의 하멜은 욕설을 쏘아붙이는 세냐보다는 웃지 않고 정색하는 아니스가 더 무서웠다.
‘특히 하멜. 당신의 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튼튼하지 않단 겁니다. 만약 당신이 모론처럼 무식하고 강인한 몸을 타고났다면, 제가 이런 경고를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 몸이 뭐 어쨌다는 거야?’
‘하멜. 당신은 마나의 조율에 관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습니다만... 육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사실은 전생에도 수십, 수백 번을 실감했다. 용병일 적에는 그러한 사실을 자각한 적이 없었다.
육체가 빈약했나? 그건 아니다. 제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할 만큼은 되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모두가 한 분야의 천재라고 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특히 모론과 베르무트의 육체는 하멜과 비교하기가 민망할 만큼 강인했다.
‘그 기술. 이그니션은 코어를 폭주시키는 것 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몸 전체에 너무 큰 부하를 줍니다. 특히 심장. 세냐가 몇 번이나 경고했던 것처럼, 코어는 심장과 가까이 있지요. 그러니 마나의 폭주가 위험한 것인데... 하멜. 당신은 코어 뿐만이 아니라, 심장과 육체 모두를 혹사시킵니다.’
‘...어쩔 수 없잖아. 힘이 늘어난 만큼 몸에 걸리는 부하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금속으로 만든 기계조차도 한계를 넘게 움직이면 망가집니다. 하멜. 당신은 기계가 아닙니다. 당신을 이룬 몸뚱이는 금속이 아니란 말입니다.’
‘...’
‘그건 당신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제가 아무리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한들, 완전히 망가진 것을 망가지기 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멜.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 기술은 당신의 몸을 망가트리고, 지금도 이미 망가져 있단 말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심장은 예전처럼 박동하지 못할 거고, 당신의 몸도 아무리 바란 들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 뭐냐... 싸움은... 아니. 싸움뿐만이 아니라, 인생은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당신은 등신입니까, 아니면 병신입니까?’
‘...꼭 둘 중에 하나 골라야 되냐?’
‘하멜, 당신이 등신 같이 굴면서 병신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제가 당신을 붙들고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모두가 등신이라고 생각하는 모론도 하지 말라고 하면 조금이라도 듣는 시늉을 하는데, 당신은 왜 모론보다 못하게 구는 겁니까?’
‘말이 너무 심하다 야...’
‘어쨌든, 저는 경고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중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병신이 된다면. 동료이자 친구로서 당신이 신성제국의 고급 요양원에서 생활할 수 있게끔 손은 써드리겠습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 네가 내 똥오줌을 받아주는 거냐?’
‘그렇게 되기 전에 제 손으로 안락사는 시켜드리겠습니다.’
전생에 그만큼 경고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쓰는 것을 망설였던 적은 없다. 써야한다, 라고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써야 할 상황이었다.
쓸 때마다.
몸이 망가지는 만큼의 값어치는 했다. 몇 번의 위기를 넘겼다. 특히 쓴 값어치를 톡톡히 봤던 것이, 세냐와 둘이서 정찰을 갔던 중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에게 습격받았을 때다.
그때 이그니션을 쓰지 않았다면. 세냐와 하멜 둘 다 죽었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성에도 이그니션을 연달아 사용했다. 그렇게 유폐의 방패를 죽이고, 유폐의 지팡이를 죽였다.
그리고 하멜도 죽었다.
‘...뭐지?’
바랑은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저 꼬마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린다. 핏발 선 눈동자가 섬뜩함을 전했다. 꽉 다물고 있는 인간의 이빨이, 맹수의 이빨처럼 광폭해 보였다.
‘뭘 한 거지?’
바랑은 유진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환생하고 몇 번이고 했던 생각.
‘지금도.’
이그니션을 쓰면 무조건 이긴다. 무조건 죽일 수 있다.
‘죽일 수 있어.’
코어의 마나가 폭주한다.
백염식 4성.
4개의 별이 맹렬히 회전한다. 이터널 홀을 접목시킨 환염식. 4개의 별로 하나의 원을 만든다. 그 안의 마나를 연쇄적으로 폭발시킨다. 폭발로 터지는 마나를 무수히 많은 코어로 제련하고, 상응시킨다. 회전하는 불꽃의 원은 마나가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는다.
환염식은 코어의 마나를 증폭시키고, 낭비 없이 사용하게 만든다.
그것으론 부족하다. 증폭해 봤자 가진 마나의 총량을 아득히 웃돌 수는 없다. 심장이 계속해서 뛴다. 코어가 과열된다. 별의 회전이 빨라진다.
한계를 넘어선 가동에 코어 자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폭발, 폭발, 폭발. 계속해서 터트린다. 터트린 마나가 전신으로 퍼져간다. 일그러진 코어의 크기가 점점 부풀어간다.
이그니션은 의도적으로 코어를 폭주시킨다. 그렇게 터트린 마나를 전신에 퍼트린다. 마나의 흐름이 격렬해지는 것에 맞춰 심장박동을 가속시킨다. 몸 전체를 폭주해 과열된 코어에 맞춘다.
혈관을 흐르는 피의 열기를 느낀다. 뜨겁다. 가속해 뛰는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마나와 연결 된 몸 전체가 다음 폭발을 준비했다.
유진이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을 움켜쥐고.
그 후로 흐른 시간은 고작해야 몇 초.
그 몇 초 만에, 바랑은 눈앞에 선 꼬마를 몇 초 전과 다르게 인식했다. 폭주하기 시작한 마나가 바랑을 압박했다. 그는 전신의 털을 곤두세우고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수인족의 손. 그 손은 인간처럼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지만, 바랑의 손끝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손톱은 인간이 갖지 못한 맹수의 것이다.
거구가 빠르게 달려든다. 유진은 핏발 선 눈으로 바랑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확실히 알았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았다면, 바랑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그렇군.’
바랑이 휘두른 손톱이 코앞까지 왔을 때. 유진은 판단을 끝냈다.
‘죽일 수 있어.’
ㅡ꽈아앙!
달려들어 손톱을 휘둘러 공격한 것은 바랑이었다.
뒤로 날아간 것도 바랑이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아니, 무엇을 당한 거지? 왜 내가 날아가는 거지? 공격은? 손톱은? 바랑은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휘둘렀던 손톱이 모조리 깨져 있었다.
푸확! 눈으로 본 순간, 바랑의 손바닥이 쩍하고 갈라져 피가 뿜어졌다.
“크헝!”
손바닥이 베였다. 얕은 상처는 아니다. 손바닥이 둘로 갈라져버렸다. 바랑은 고통보다 분노로 포효했다. 이깟 상처, 그에게는 대수로운 상처가 아니다. 수인족의 육체는 상처를 금세 재생시킨다. 특히 바랑처럼 마기를 받아들인 수인족의 재생은 고위 마족에 버금간다.
실제로 바랑이 땅에 착지했을 때, 베였던 손이 멀쩡히 재생되었다. 하지만 바랑은 다시금 공격에 나설 수가 없었다.
유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멜. 저건...]
‘짐승.’
[월광검을 써야하는 것 아닌가?]
‘아니.’
월광검은 너무 눈에 띈다. 정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써야겠지만, 지금은 월광검을 써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다.
‘안 써도 이겨.’
유진은 바람을 느꼈다. 위니드가 불러일으킨 바람. 평소라면 이 바람을 이용해 몸을 가속시키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진이 바람보다 빠르다. 바람이 유진을 쫒아오지 못하고 있다.
과부하가 걸린 몸뚱이, 유진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 움직여 주고 있다. 이 정도로 잘 움직일 줄이야.
‘확실히. 전생의 몸보다 훨씬 좋아.’
팔이 뜯어지는 것 같다. 생각만 그럴 뿐이다. 팔은 뜯어지지 않는다.
‘템페스트.’
유진은 위니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 칼. 얼마나 단단하냐?’
[...음.]
템페스트는 낮게 신음하며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난폭한 바람이 검신을 휘감았다.
[지금 네 전력은 무리 없이 버틸 거다.]
‘그래?’
유진은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검이.
아니, 폭풍이 내리 꽂혔다. 멀리서 보고 있던 크리스티나는 강렬한 예감에 시크나드를 끌어안았다. 화악! 크리스티나가 일으킨 신성력이 찬란히 빛나는 방패를 만들어 엘프들을 보호했다.
ㅡ꽈아앙!
숲이 흔들린다. 내리꽂힌 폭풍이 지면을 박살, 아니, 소멸시켰다. 떨어지고 퍼져나간 바람이 건물들을 집어삼켰다.
“크아아앙!”
바랑은 그 한가운데에서 울부짖었다. 바람이, 그의 전신을 난도질하고 있다. 왼팔에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리 벤 참격이 바랑의 왼팔을 잘라버렸다. 그나마 몸을 뒤튼 덕에 왼팔만 잘린 것으로 끝난 것이다.
“이, 개자식이!”
바랑은 울부짖으며 힘을 끌어냈다. 시커먼 마기가 바랑의 전신을 휘감았다.
바랑은 강하다.
멸망의 마왕 휘하, 야곤이 두령으로 있는 수인족 중에서도 바랑은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다.
그래서 더더욱,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시무인의 십이걸이라며 으스대던 블론도 바랑의 한손에 허리가 끊어졌었다. 그만큼 강인하던 팔이, 고작 일검에 잘려나간 것이다.
‘전력을.’
공격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래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리다고, 인간이라고 너무 우습게 봤다. 인간의 무가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라이언하트. 그곳에서 천재라 불리는 놈이니, 놀랄만한 재주 몇 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다르다. 왼팔이 잘린 것? 그것도 괜찮다. 잘린 팔은 어떻게든 재생시킬 수 있다.
우선, 저 꼬마를 쓰러트리고. 놈의 팔다리를 뽑아버린 뒤, 엘프의 영지까지 벌레처럼 기어가게 만들 것이다. 놈이 보는 앞에서 성녀를 강간해 죽일 것이다. 엘프들도 모두, 모두 죽여서 놈이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바랑은 그렇게 하고자 마음먹고, 팔을 휘둘렀다. 시커먼 마기가 거대한 손톱이 되어 폭풍을 찢어 발겼다.
그 바깥에 유진이 서있었다. 불길한 마기를 가득 두른 바란의 몸은 시커먼 포탄처럼 유진에게 쏘아졌다.
‘오보론과 비교가 안 되는 군.’
유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아멜리아 머윈과도 비교가 안 돼.’
화르륵! 새파랗게 달아오른 불꽃이 검강이 되었다.
‘이딴 새끼를 상대하는 데에 이그니션을 써야 한다니.’
바랑의 맹렬한 돌진을 앞에 두고서.
유진은 제 처지가 애달파 한숨을 삼켰다.
멀다.
돌진하고 있지만, 바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해야 수십 미터. 도약 한 번으로 좁힐 수 있는 거리. 하지만... 하지만 좁혀지는 것 같지가 않다.
기묘한 거리감.
바랑은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멀다고 느끼는 것은, 실제적인 거리가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저 꼬마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아득하리만큼 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닿아야...’
아니.
닿아서는 안 된다. 본능의 경고가 머릿속을 떠돈다. 그럴 리 없다. 바랑은 본능을 부정했다. 가면 죽는다. 그럴 리 없다. 다시금 부정했다.
나는 강하다. 그러한 억지가 바랑을 멈추지 않게 만들었다.
‘나는...’
앞으로 뻗는 손.
마기가 흩어진다. 손톱이 갈라져 깨지고 사라진다. 손가락이, 손이, 수십 수백 개로 베어져 흩날린다. 바랑은 부릅 뜬 눈으로 제 몸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이 바랑에게는 끔찍하게 느리고,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바랑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자리에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랑은 울컥 피를 토하면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쩍 벌어진 몸에서 피와 장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뻗었던 팔... 공격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방패로는 쓰였나. 뻗지도 못했다면, 저 두려운 참격이 몸을 완전히 찢어발겼을 것이다.
“...너...”
바랑은 덜덜 떨며 내뱉었다. 그는 더 이상 서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 너는... 대체... 뭐지?”
파랗고, 하얀 불꽃에 휘감긴 유진이 보였다. 바랑의 눈에, 불꽃을 갈기처럼 두른 유진은 도저히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알면서 뭘 물어.”
유진은 뻐근한 눈자위를 찡그리며 내뱉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불꽃
바랑이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본인에게 다시금 확인 받았지만, 바랑은 여전히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저, 앞에, 서있는 것이.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처럼 위압스런 존재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인간 꼬마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바랑은 이를 악물고 부정했다.
“너는, 너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니다. 대체... 누구지? 설마 드래곤인가?”
이런 오해는 처음 받아 본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네 눈에는 내가 드래곤으로 보이냐?”
바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양팔이 잘렸다. 갈라진 몸에서도 내장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직 바랑은 죽지 않았다. 내버려 둬서는 안 될 만큼 심각한 상처이긴 하지만,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
간신히 목숨만 붙어있을 뿐이다. 이 꼴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가? 방심? 그것도 처음에야 갖다붙인 핑계이지, 지금은 방심을 핑계로 댈 수도 없다.
바랑은 전력을 다했고, 그 전력은 유진과의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저 정체모를 놈은 19살 유진 라이언하트의 거죽을 뒤집어 쓴 미지의 존재였다.
‘...형님.’
바랑은 목을 가득 채운 피를 삼켰다.
아득하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유진이 바랑에게 다가오고 있다. 빠르지 않은 걸음. 저벅거리는 발소리. 그가 가까워질 때마다, 바랑의 몸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바랑은 저 존재가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것은 부정했지만.
이 공포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공포는 선명해진다. 본능이 억지로 발을 움직여, 유진에게 멀어지려 하고 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냐.”
이그니션은 끝나지 않았다. 지속시간에 제한은 있다만, 아직 한참은 여유로웠다.
‘...형님.’
바랑은 떨리는 몸을 움츠렸다. 비록 의형제를 맺은 관계이긴 하나, 바랑은 야곤이 두려웠다. 야곤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랑 뿐만이 아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수인이 야곤을 두려워 한다.
야곤은 수인족에게 있어 공포의 형상 자체다.
의형제.
그건 야곤에게 있어서 대단하지 않은 인연이다. 친부도 직접 물어죽였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의형제가 무엇이 대단하고 소중할까.
바랑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어찌 되건, 야곤은 바랑에게 아무런 애도를 갖지 않을 것이다. 약하니까 죽는 것이라며 비웃을 지도 모른다. 서로가 어렸던 시절, 머나먼 미래를 그리며 맺은 의형제 따위 지금의 야곤에게는 조금도 소중하지 않은 관계다.
“...야곤은 관계없다.”
바랑을 입술을 뒤틀며 내뱉었다.
“이 일은, 야곤의 명령이 아니다. 야곤은 이런 하찮은 일을 명령하지 않는다.”
“하찮은 일이라... 뭐 좋아. 그래서, 영지로 따라 와서 뭘 하려고 했지?”
“내 역할은 영지의 존재와, 위치를 확인하는 것.”
조금 더.
“그것을 확인한 뒤. 너와 성녀를 죽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와라.
“죽이지 않겠다더니. 결국 거짓말이었군.”
“...”
“그래서.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건데? 야곤이 아니면 다른 마족인가? 다크엘프?”
유진이 한 걸음 더 다가갔을 때.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던 피의 색이 바뀌었다. 시커멓게 변색 된 피가 유진에게 튀어나갔다. 바랑은 그를 끝까지 확인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쏟은 피와 내장, 아니, 바랑의 몸 전체가 시커먼 폭탄으로 바뀌었다. 양팔은 잘렸다. 아직 이빨은 남아있지만, 달려들어 봤자 놈에게 송곳니를 박아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바랑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제 목숨을 터트려 유진과 함께 죽는 것이었다.
“유진님!”
크리스티나의 비명은 커다란 폭음에 삼켜졌다. 시커먼 폭발이 유진을 덮친다. 거리는 가까웠고,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굳이 피할 것도 없었다.
콰아아아!
폭발은 유진이 서있던 곳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죽는 순간.
바랑의 눈은 파랗고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그 두 종류의 불꽃이 거대한 장벽이 되어, 바랑이 일으킨 폭발을 가로막았다. 결국 목숨을 버려가며 일으킨 폭발마저 유진에게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한 것이다.
“썩을.”
유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손을 털었다. 바랑은 시체 한 조각 남기지 않았다. 유진은 새카맣게 그슬린 땅을 노려보며, 아직 손에 쥐고 있던 위니드를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유진님...!”
급히 달려 온 크리스티나가 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유진은 쿵쿵 뛰는 심장에 손을 얹으며 눈을 찡그렸다.
“죽게 둬서 안 됐었는데. 네가 저 새끼의 입을 열게 만들어야 했다고.”
바랑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았다. 유진이 할 줄 아는 심문법은 고문뿐이지만, 지금 이곳에는 크리스티나가 있다. 놈이 아무리 입을 닥치고 있든, 크리스티나의 신성마법은 저 아가리를 가볍게 열어 줄 것이다.
“...아뇨. 그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표정을 가다듬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저 수인은 다크엘프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에게 심문마법을 사용한들, 고해를 듣기 전에 혼이 붕괴해 버렸을 겁니다.”
“그래도 저렇게 죽게 둬서는 안 됐어. 네가 입을 열지 못했어도, 더 조지다 보면 뭐라도 떠들었을 지도 모르잖아.”
“...몸은 괜찮으십니까?”
“지금은 괜찮은데. 곧 안 괜찮아질 거야.”
“...네?”
크리스티나는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유진은 굳이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꾸욱... 가슴을 파고 든 손가락이 심장을 어루만졌다. 폭주하던 코어의 열기가 천천히 식어가고, 심장박동이 느려진다.
이윽고 반동이 찾아왔다. 유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몸을 크리스티나가 급히 부축했다.
“유, 유진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머리가 어지럽다. 전신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다. 뼈가, 아니, 혈관을 도는 피가 무겁게 느껴진다. 폭주로 혹사당한 코어가 침묵하고 있다. 지금의 유진은 몸을 가눌 만한 힘도 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은 걸.’
전생에 이그니션을 쓰고 난 뒤에는 항상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쓰러지고 눈을 뜨고 난 뒤에,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에게 온갖 험한 말을 들었었다.
‘전생의 몸보다 튼튼한 덕인가.’
심장의 부담도 그리 크진 않다. 그럴 지라도 남발할 수는 없는 기술이다. 상대를 무조건 죽일 수 있다는 확신. 죽인 뒤에 너덜거리는 몸을 책임져 줄 동료가 있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다.
“지금 치료마법을...”
“소용없어.”
그렇게 말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눕히고서 신성마법을 펼쳤다. 따스한 빛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이그니션을 사용한 뒤의 반동은 치료마법으로도 떨쳐낼 수 없다. 혹사당한 코어의 회복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휴식 외에 방법이 없다.
‘...아니스는 없나.’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뒤편을 보며 생각했다. 강렬한 빛 속에서도 아니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뒈진 짐승 새끼 말이야.”
유진은 바닥에 누워, 저릿거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너랑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누군가가 저희에 대해 입을 열었다는 겁니까?”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사마르에 온 것을 아는 건... 교황예하와 로게리스 추기경 둘 뿐입니다.”
“확실해?”
“...두 분이 다른 누군가에게 알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제가 보고를 올린 것은 두 분 뿐입니다.”
“넌 그 둘을 믿을 수 있냐?”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솔직히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을 각오도 했다. 한 명은 빛의 신교의 최고지도자인 교황. 다른 한 명은 교황 바로 밑의 추기경이자 크리스티나의 양부다. 노골적으로 그 둘을 의심하는 투로 물었으니, 크리스티나가 발끈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동안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은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정확히 읽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유진님은 어떠십니까? 저희에 관한 이야기가 누설되었다면, 신성제국 뿐만이 아니라 라이언하트도 의심해야 합니다.”
“가주님이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이유도 없고. 하지만 원로원주라면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해.”
본가의 정통한 후손보다 뛰어난 양자. 유진이 아무리 거절한들, 유진이 양자로 남아있는 한 원로원은 유진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사실 이유는 꼭 저것뿐만이 아니다.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베르무트의 묘에 시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라이언하트 가문의 명예는 위대한 베르무트가 시조이기에 이어져 온 것이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밝혀지지 않아도 될 진실이 영영 드러나지 않도록 파묻어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너는 어떻지? 교황과 추기경을 믿을 수 있나?”
짧은 침묵 뒤.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아니오.”
가라앉은 목소리.
“저는 그 두 분을 믿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그래야 할 이유는 짐작할 수 없으나, 만약 필요하다면 그 분들은 얼마든지 마족과 거래하실 겁니다.”
“...”
“하지만 유진님. 저도 그 수인이 한 말은 들었습니다. 영지로 안내받은 뒤에, 저와 유진님을 죽일 생각이었다 말했지요. 그 말이 진실인지는 더 이상 알 수 없겠지만, 만약 진실이라면... 수인과 거래한 것은 교황예하도, 로게리스 추기경도 아닐 겁니다.”
“내가 성검의 인정을 받아서?”
“그도 그렇겠지만, 두 분은 절 이런 일로 죽이고 싶지 않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나올 만한 대화주제는 아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미소. 그 미소는 오래 전, 아니스가 신성제국에 대해 말할 때 짓던 미소와 똑같았다.
아니스는 이상하리만큼 신성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모두가 과거의 이야기를 떠들 때에도, 아니스는 침묵하기만 했다. 평소와 다른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지금 크리스티나도 똑같았다.
“...왜?”
“그런 이야기를 흔쾌히 나눌 수 있을 만큼, 저와 유진님의 사이는 아직 깊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그럼 됐어.”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려고 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낑낑 대 보아도 허리가 일정 각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 모습에 크리스티나의 미소가 다시 바뀌었다. 그녀는 쿡쿡 웃으며 유진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시팔 뭐하는 거야?”
유진은 기겁하며 몸을 뒤틀었다.
“유진님이야말로 왜 그러십니까? 저는 유진님을 부축해 드리려 한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 부축이 아니라, 내 겨드랑이를 손으로 긁으려고 했잖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고, 왜 유진님의 겨드랑이를 손으로 긁는단 말입니까?”
크리스티나가 정색하고 되물었다.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이었지만, 유진은 팔 아래로 들어 온 크리스티나의 손가락이 구부러진 것을 똑똑히 느꼈었다.
“...그... 부축 말고. 그냥 손으로 잡아서 일으켜 줘.”
“저항하지 못하고 제 손에 맡겨지는 것이 부끄러운 겁니까?”
“...”
“은근히 귀여운 구석도 있으시군요. 평소 유진님의 언행 탓에 자각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모습을 보고 있으니 유진님이 저보다 연하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유진을 향해 양손을 펼쳤다.
“자. 너무 부끄러워 마시고, 이 누나에게 양 팔을 들어주십시오. 만세,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너 내가 교황이랑 추기경 들먹여서 화난 거 맞지?”
“아니오. 저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말입니다.”
“그럼 나한테 왜 이래? 왜 나를 괴롭히는데?”
“유진님. 업보라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유진님도 이 숲에서 저를 여러 번 괴롭히고, 험한 말로 제 마음에 상처를 주셨지요. 물론 저는 그 일로 하여 유진님을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만, 지금 같은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유진님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유진은 입을 꽉 다물고, 양팔을 허리에 붙였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는 직접 유진의 손을 잡고서 활짝 벌려버렸다. 유진은 최대한 힘을 주어 저항했지만, 지금의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유진님은 고집이 참 강하십니다. 몸의 상태를 보아하니, 제가 부축한 들 걷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들 것을...”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유진님을 직접 업도록 하죠.”
“네가 날 업는다고...?”
“네. 유진님이 떨어지거나 불편하지 않도록, 엉덩이도 확실히 받쳐드리겠습니다.”
유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 나이 먹고 업힌다고? 전생에 거친 용병으로 살았던 과거가 머릿속을 스친다. 유진은 절대로 크리스티나에게 업히고 싶지 않았다.
“자아.”
아무리 싫다 말해도 몸으로 저항은 불가능했다.
“조금 더, 제 목을 꽉 안으십시오.”
“너는... 너는 수치심이 없는 거냐?”
“부상자를 돌보는 것뿐인데 왜 제가 수치심을 느낀단 말입니까? 그러는 유진님은 지금 수치심을 느끼고 계십니까?”
“...”
“그 감정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유진님이 오늘 일을 경험삼아, 앞으로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진은 덜덜 떠는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양손이 증오스러웠다.
불꽃
“슬슬 괜찮네.”
이틀 동안 침대 신세를 졌다.
전생의 몸으로 처음 이그니션을 썼을 때에는 일주일 동안 꼼짝도 못했다. 그 후로 여러 번 사용하며 조금씩 적응했다만, 하멜이 ‘완성’시킨 경지로도 이그니션의 과부하는 사흘 동안 이어졌었다.
‘예측보다 빠르군.’
육체가 훌륭한 탓도 있지만, 과부하의 부담이 전생보다 비교적 짧은 것은, 유진이 사용한 이그니션이 하멜일 적보다 오히려 진보했기 때문이다.
우선, 백염식부터가 하멜의 마나수련법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거기에 이터널홀을 접목시킨 환염식은, 백염식보다 훨씬 우월하면서도 이그니션을 발동시키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하나로 엮은 서클. 그 안에서 연속적으로 서클을 만들며 폭발시키는 것. 그것부터가 코어의 폭주와 닮아있다. 다만, 환염식의 경우에는 코어에 부담을 주는 일 없이 유진이 완벽하게 통제가 가능하다.
이그니션은 환염식의 리미트를 완전히 풀어버린다. 코어와 육체를 폭주시킨다는 것은 전생의 이그니션과 똑같지만, 그 ‘폭주’의 방법이 전생보다 훨씬 세련되어 있다.
‘육체의 부담은 여전히 위험하다만... 그래도 전생보다는 잘 버티는 것 같아.’
유진은 정상적으로 뛰는 심장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물론, 남용해서는 안 될 기술이다. 전생보다 세련되건 뭐건, 제 살을 깎아먹는 기술이라는 본질은 똑같다.
하지만.
의외의 소득은 있었다.
유진은 눈을 감고 코어에 의식을 집중했다. 본래 유진의 백염식은 4성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지금 심장 근처에 머무르는 별의 개수는 하나가 늘어 5개가 되었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백염식은 마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서 여러 실전과 경험, 마나의 총량을 늘리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성취가 늘지 않는다. 유진이 아무리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곤 해도, 마나의 총량을 늘리는 것에는 정직하게 시간이 필요하다.
이 사마르 대수림은 어지간한 영맥에 비견될 만큼 마나가 풍부한 곳이다. 거기에 의도적으로 마나를 폭주시켜, 혹사당한 코어가 대량의 마나를 경험하며 분열에 성공한 것이다.
‘이거 잘만 하면 꼼수로 쓸 수 있을 법도 한데.’
유진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과부하로 인한 성취. 어찌 보면 근육의 초성장과도 비슷하다. 근육은 자주 사용하고, 찢어발길수록 확연한 성장을 보인다.
‘이그니션을 몇 번 더 사용하면 백염식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것 아냐?’
생각은 해보았지만, 이번처럼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부하로 코어를 성장시키려면, 이전보다 강한 부하를 줘야 한다. 그걸 조율하는 과정에서 몸이 망가질 것이 뻔하고, 그렇게 혹사한 뒤에 코어가 반드시 분열하리란 보장도 없다.
결국 유진은 더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마나에 입문한지 6년 만에 백염식의 5성에 올랐다. 이건 라이언하트 가문에서도 전례가 없는 독보적인 성장속도다.
당장 원로들을 포함해 가장 높은 백염식이 7성이다. 그들에 비해 한 세대 어린, 본가의 가주와 동생이 6성이다.
그리고 유진이 5성. 그는 아직 19살이었고, 도달한 성취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할 줄 안다. 게다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바랑.’
이틀 동안.
유진은 자신에게 얽혀 온 음모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멸망의 마왕에게 의탁한 수인족. 오보론의 아들, 야곤의 의형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바랑은 강했다. 이그니션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위니드와 아스펠, 페르노아, 카르보스. 그걸 전부 다 사용하며 마법으로 보조하고, 월광검까지 꺼내야만 간신히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지금’의 유진으로도 간신히 이길 수 있을 만큼의 상대였단 말이다. 유진은 오보론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300년 전. 광란의 마왕에게는 네 명의 사천왕이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광란의 자식들.
거인족의 두령, 진열의 카마쉬.
뱀파이어 로드, 유혈의 사인.
수인족의 광인, 패악의 오보론.
다크엘프 공주, 나찰의 아이리스.
모두가 강자였다. 저들 중 가장 거대했던 카마쉬는, 베르무트와 하멜이 힘을 합쳐 쓰러트렸었다. 사인은 뒈졌고, 오보론과 아이리스는 광란의 마왕의 발악으로 탈출했다.
야곤은 제 아버지를 물어죽인 패륜아다. 그것이 가능했다는 건, 야곤도 최소 오보론만큼은 강하단 뜻이다.
바랑은 강했지만, 야곤의 의형제에 걸맞을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야곤과는 관계없다고 했지.’
바랑이 엘프의 영지를 찾던 것은 야곤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말을 믿을 수는 없다만, 일단 유진은 믿어 보기로 했다. 무조건 불신하는 것보다는 일단은 믿고서 흉수의 선택지를 좁혀본다.
어느 쪽에서 정보가 누설되었나. 크리스티나는 신성제국은 아닐 것이라 말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신성제국이 ‘성녀’와 ‘용사’를 한 번에 죽여서 얻는 이득은 없다.
하지만, 라이언하트는 어떤가? 원로원주인 도이네스 라이언하트. 가문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너무 잘난 양자를 잘라내는 것으로 얻는 이득... 그 선택이 가문을 위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유진이 죽는다면 라이언하트의 후계자 문제는 아주, 아주 깔끔해 진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나? 가문의 기강이 바로 잡힌단 말이다. 유진도 바보는 아니다. 방계 출신의 아이가 본가의 양자가 되었고, 본가의 적자와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다.
실제로 가주가 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유진의 존재 자체가 방계들을 결속시킨다.
라이언하트 본가는 그를 바라지 않는다. 이 가문은 장장 300년 동안 본가만 존귀하게 만들고, 방계는 열등하도록 만들어 왔다.
‘방계 출신뿐만이 아니야.’
본가의 권위. 가문을 쥐에서 주무르고 있는 원로원주.
그에게 있어선, 유진이 방계 출신이라는 것보다 신성제국과 성녀가 공인한 용사라는 것이 더 거슬릴 것이다. 신성제국과 성녀, 빛의 신의 계시. 역사상 ‘용사’라 증명을 받은 것은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뿐이다.
방계 출신의 양자가 시조와 같은 증명을 얻었다. 성검의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시조의 관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이려 들 이유는 충분하다. 신성제국은 마왕의 눈치를 보며, 유진이 용사라는 것을 공표하지 않았다.
유진과 크리스티나만 죽인다면. 시조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게 된다. 직접 나설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마족과 결탁했다. 그만한 부탁을 전할 만큼의 관계라면, 이전부터 이어져왔다는 뜻.
원로원주는 마족과 교류하고 있다.
‘...확신하지는 마.’
유진은 주먹을 힐긋 내려보며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핏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원로원주가 아닐 수도 있어.’
그래서 유진은 당장은 침묵할 것이다. 단독으로 흑사자 성에 쳐들어가서 원로원주를 제압하고, 진실을 캐물을 수 있을까? 불가능. 원로원주, 도이네스 라이언하트의 이명은 불사의 백사자. 백 년 넘게 살아 온 노물이다.
‘내가 멀쩡히 살아 돌아간다면, 음모를 꾸민 새끼가 다음 액션을 취하겠지.’
유진이 그렇게 하기로 한 이유는, 바랑의 목적이 유진과 크리스티나의 살해 뿐 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건 두 번째 목적이었다. 놈의 첫 번째 목적은 엘프의 영지를 확인하는 것. 그것을 위해, 진즉부터 유진을 추격했으면서도 습격하지 않았었다.
‘원로원주가 엘프의 영지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모르겠다. 놈도 세냐를 찾고 싶어 하는 건가? 아니, 모두가 세냐를 찾고 싶어 하겠지.
‘...아니.’
영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은 마왕도 마찬가지일 터.
멸망의 마왕.
유진은 그 이름과, 모습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생에 멸망의 마왕을 ‘보았던’ 적은 딱 한 번 뿐. 그마저도 직접 마주친 것이 아니라, 머나먼 곳에서 움직이는... 움직이는 것 같은, 아니... 그냥 가만히 있었나?
모르겠다.
멸망의 마왕은 그런 존재였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그곳의 모두가 직감했다. 저것과는 싸워서는 안 된다. 저것과는 마주서서 안 된다.
저것을 이해해선 안 된다.
멸망의 마왕은 다섯 마왕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강하며, 기괴하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모두가 그를 이해했다. 다른 마왕을 죽이는 것은 멸망의 마왕에게 도달하기 위한, 놈과의 전투를 ‘최후의 결전’으로 삼기 위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수인족은 멸망의 마왕에게 의탁했다.’
멸망의 마왕은 기괴하지만 고독하지는 않다. 300년 전에도 멸망의 마왕에게는 꽤 많은 권속들이 있었다.
하지만, 고독하진 않아도 기괴하다. 마왕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권속에게 힘을 부여한다. 마왕에게 힘을 받는다면 영혼을 마왕에게 저당 잡힌다. 그 계약은 마족 사이에서도 똑같다.
멸망의 마왕은 권속을 거느리지만, 마왕과의 계약에 걸맞는 힘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권속들은 멸망의 마왕에게 혼을 저당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 계약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 서열 1위의 대마왕의 권속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일. 또한, 멸망의 마왕과의 ‘계약’은 마기를 다룰 수 있게 하는 각인을 부여한다.
다만, 그 각인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마기를 다루는 소양을 인위적으로 갖게 해주는 것 뿐. 즉, 마족이나 흑마법사들에게는 대단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기왕 계약을 맺을 것이라면, 혼을 저당 잡힐 지라도 유폐의 마왕과 계약하는 편이 거대한 ‘힘’이 약속된다.
분명한 것은,
멸망의 마왕은 유폐의 마왕처럼 권속을 다스리는 것에 열중하고 있지 않다. 놈의 권속들은 주인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 기괴한 마왕은, 권속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멸망의 마왕이 세냐에게 간섭한다... 이제 와서...?’
유진은 음모를 이해하는 것은 일단 그만두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억측 뿐. 정보가 더 필요하다.
야곤의 의형제라던 그 놈이 수인족들 중에서 어떤 위치이며, 다른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용마성의 라이자키아에 대해서 어떤 소문이 나도는지.
“준비는 다 됐나?”
마을의 중앙에는 백 명이 넘는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이틀 전, 바랑의 습격에서 부상을 입었던 엘프들은 크리스티나의 신성마법으로 치료받았다. 제발로 움직이지 못하는 엘프들은 없었다.
“그래.”
치료를 받은 것은 시크나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비롯한 엘프들의 표정은 마냥 상쾌하진 않았다. 앞으로 그들은 오랫동안 살았던 마을을 떠나, 대수림을 횡단해야 한다. 도착한다면 마을에서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엘프들은 이 여정이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음...”
가장 큰 문제는, 몇몇 엘프들이 겪고 있는 마병이다. 이 숲에서는 마병이 더 진행되지 않는다지만, 재수가 없다면 숲 밖으로 나간 즉시 마병으로 죽을 지도 모른다.
“...괜찮은 것 같다.”
시크나드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엘프들 중에서 마병이 가장 깊은 것이 바로 시크나드였고, 지금 그의 손에는 길쭉한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아니, 들려있는 것이 아니라. 시크나드는 스스로가 화분이나 받침대가 된 것처럼, 양손으로 나뭇가지를 공손하게 받쳐들고 있었다.
그건 유진이 세계수에서 꺾어 온 나뭇가지였다. 마을의 결계가 세계수에서 갈라져 나온 묘목으로 유지되고 있으니, 세계수에서 꺾어 온 나뭇가지로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생각대로 된 모양이다.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군...”
“그냥 착각 아니야? 확실해?”
“확실하다. 고작 나뭇가지 하나일 뿐이지만... 나는 이것에서 고향의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어머니가 끓여 준 스튜와 비슷한 건가?”
“나뭇가지에서 스튜가 왜 나오나?”
“나뭇가지에서 고향은 왜 나오냐?”
유진은 그렇게 되받고서 위니드를 쥐었다.
[확실하군. 저 나뭇가지에는 세계수의 정령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는 건, 시크나드를 움직이는 결계로 쓸 수 있다는 거지?’
[...움직이는 결계...?]
‘왜. 맞잖아.’
[음... 확실히 그렇군. 네 말이 맞다, 하멜. 저 엘프의 주변에서는 마병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정화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글쎄... 세계수의 안이라면 모를까. 저건 어디까지나 나뭇가지일 뿐이니...]
템페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나뭇가지와 묘목을 네 영지에 함께 심는다면, 언젠가는 엘프의 마병을 정화시킬 만한 거목으로 성장할 지도 모른다.]
‘한참은 걸리겠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세계수의 묘목에 다가갔다. 묘목의 개수는 총 3개. 망토 안에 넣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묘목이 말라 죽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통째로 뽑아서 들고 가기로 했다.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쓰다니...]
‘뭐 어떡해? 지면을 강처럼 흐르게 만드는 것보다, 그냥 뿌리 채 뽑아서 바람으로 들고 가는 것이 압도적으로 마나소모가 적단 말이야.’
[마나의 소모가 적은 것은 내 덕분이지.]
‘어, 고맙다.’
유진은 대충 얼러주며 위니드를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 세 그루의 묘목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러니 기괴한 장관이 연출되었다. 앞으로 유진은 머리 위에 나무 세 그루를 띄우고, 일백이 넘는 엘프들을 이끌고 숲을 횡단할 것이다.
“끔찍하군.”
그냥 들고 다니기만 해서도 안 된다. 휴식할 때마다 나무를 땅에 다시 심고, 말라죽지 않도록 관리해줘야 한다. 사마르에서만 자란다는 요정목은 어지간해선 죽지 않을 만큼 강인한 나무인데다, 세계수의 나뭇가지도 함께 있으니 말라죽을 일은 없겠지만...
“벌써 귀찮아.”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묘목을 뽑아내면서 마을을 보호하던 결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틀 전. 마을을 습격한 바랑은 무식한 힘으로 결계를 망가트렸다. 그 직후, 유진과 싸우면서 자폭까지 해버렸다.
그 커다란 폭발음은 주변의 야만족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결계가 망가진 탓인지, 놈들은 이곳이 떠돌이 엘프의 마을과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결과, 꽤 많은 원주민들이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다. 유진은 놈들과 협상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뭘 해도 눈에 띌 것이고, 엘프들을 포기하지 않는 한은 계속해서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숲에서의 볼 일은 끝났다.
노출되기도 했으니, 더는 조심할 필요가 없다.
유진은 망토에서 활을 꺼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활. 보통의 활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대한 크기. 유진은 자기 키만큼이나 큰 활을 한 손으로 잡고, 하늘을 겨누었다.
백염식의 5성.
겨우 별 하나 늘었을 뿐이지만, 유진의 마나는 전보다 두 배는 족히 늘어났다. 이 뇌광궁은 쓰기에 따라서는 용격창보다 마나를 더 처먹는데, 지금이라면 큰 부담없이 사용이 가능하다.
“귀 막아.”
유진은 먼저 그렇게 경고했다. 앞으로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하던 엘프들이 유진을 쳐다본다.
예전이라면 마냥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은 유진이 바랑과 싸우는 것을 보았다. 그 두려운 습격자를, 얼마나 압도적인 힘으로 패배시켰는지를 보았다.
“네.”
엘프들은 더 이상 유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도 나리사와 레베라는 신뢰를 넘어 선망어린 눈으로 유진을 보며, 시키는대로 귀를 틀어막았다.
“전부 죽일 셈이십니까?”
“누굴 학살마로 아나.”
유진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시위가 존재하지 않던 활. 손가락을 구부리자, 얇은 빛이 활시위가 되어 손가락에 걸렸다.
“일단 한 발 쏴서 경고해보고.”
ㅡ파지직! 당겨진 시위에 전류가 흘렀다.
“그래도 덤비면.”
환염식으로 증폭된 마나가 번개를 만든다.
“어쩔 수 없지 뭐.”
손가락이 시위를 놓았다. 자그마한 번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ㅡ꽈르르릉!
거대한 번개가 머나먼 곳에 내리 꽂혔다.
숲
“그럼.”
투욱! 커다란 손이 유진의 등을 두드렸다. 나름 친애의 의미삼아 두드린 것이겠지만,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손은 가볍게 친 것만으로도 유진의 몸을 뒤흔들었다.
“다음에 만나자고, 친구.”
“누가 네 친구냐?”
유진은 휘청거리는 몸을 잡고서 눈을 흘겼다. 나름 시선을 매섭게 뜨긴 했지만, 유진의 얼굴은 험상궂은 편이 아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눈을 부라리고 있던 탓에 눈매만 더러울 뿐. 개관적으로 보았을 때 잘생긴, 아주 잘생긴 얼굴에 미간만 찌푸려봐야 남자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남자의 얼굴은 굉장히 험상궂었다. 갈색 피부 전신에는 새카만 문신이 가득하고, 얼굴에도 흉터가 여럿 있다. 유진이 아무리 얼굴을 구겨본들, 지금 벙긋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자뿐만이 아니다.
뒤를 따르는 수십 명의 원주민들 모두가 사나운 얼굴과 덩치를 가지고 있다.
조란 부족.
그들은 사마르에서 한 손에 꼽히는 대부족이며, 유진의 곁에 선 남자는 조란의 젊은 후계자다. 액면가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놀랍게도 남자의 나이는 19살로 유진과 동갑이었다.
“술을 나눠마셨으니 친구다.”
“네가 마시라고 개고집을 부려서 마셨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조란 부족과 만난 것은 한 달 전, 엘프의 마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뇌광궁을 사용해 번개를 떨어트리고. 즉시 엘프들을 데리고 출발했다. 지능이 모자란 원주민들은 갑작스레 쏟아진 번개에 기겁하면서도, 엘프들의 대이동에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많은.
정말 많은 원주민들을 눈앞에서 치워냈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만, 손속에 적당히 사정을 줄 상대가 아니었다. 덤벼서는 안 된다. 그런 공포를 심어주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덤빌 것이고, 점점 그 수는 늘어날 것이다.
지독한 여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날에만 백 명에 가까운 원주민들을 치웠다. 시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주변에는 노예시장에 참가한 부족의 전사들이 대거 몰려 있었다. 놈들에게 있어, 백 명이 넘는 엘프들을 추격하고 사냥하는 것은 즐거운 후야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밤이 새도록 습격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 세계수의 묘목을 사용해 다시 결계를 치고, 상황을 더 지켜보거나... 아니면 지원군을 불러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 크리스티나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조란의 후계자, 이바타가 찾아왔다. 유진은 다른 부족들이 노골적으로 이바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무턱대고 공격하는 대신 일단은 이바타를 맞이해 주었다.
‘너. 강하구나.’
소속된 부족과 이름을 소개한 뒤. 이바타는 히죽 웃으며 유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네가 몸에 두른 불꽃이 무엇인지 안다.’
‘알아서 뭐? 인질로라도 삼게?’
‘그리 하려면 조란의 전사들을 여럿 잃게 되겠지.’
이바타는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 엘프들. 네 노예인가?’
‘아니.’
‘그럼?’
‘이 지랄맞은 숲에서 데리고 나갈 거다.’
‘어디로 데려갈 건가?’
‘라이언하트.’
‘그렇다면, 내가 널 돕는 것이 라이언하트를 돕는 것이 되겠군.’
허락도 구하지 않았다. 이바타가 신호를 보내자, 조란 부족의 전사들이 주변에 부족의 깃발을 꽂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사마르의 원주민들을 번개를 떨어트리고, 폭풍을 일으키며, 뭔지 모를 포격을 쏴갈기는 외지인보다 조란의 이름을 훨씬 더 두려워했다.
이후 한 달. 대수림을 가로지르는 동안, 이바타와 조란의 전사들을 쭉 호위를 자처했다. 단지 그들과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도 다른 부족들은 더 습격해 오지 않았다.
“언젠가 라이언하트를 찾아가도록 하지.”
“이것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네게 부탁한 적이 없어.”
“하지만 조란이 널 도운 것은 사실이지.”
이곳까지 오면서 이바타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마르의 원주민들은 키옐제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키옐 제국은 멋대로 숲에 들어와, 제들 마음대로 숲을 망가트리고, 국토로 삼으려는 침략자일 뿐이다.
대부분의 부족들은 그리 생각하겠지만, ‘대부족’들은 다르다. 거대한 숲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대부족들은 작은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한 규모의 부족에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조란 부족도 마찬가지다.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가주가 되지 않는다 해도, 라이언하트가 네 존재와 힘을 무시할 수는 없을 거다.”
처음 이바타를 만났을 때.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근육질의 거구라는 점과 어눌한 공용어가 모론을 연상시켰다.
“나는 그런 너와 친구가 되고 싶은 거다. 우리는 나이도 똑같고, 강하다. 너도 나와 친구가 되어 나쁜 일은 없을 거다.”
첫인상만 그랬다. 이바타는 모론보다 영리했다.
“실제로 그랬지 않나? 내가 너와, 엘프들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너는 오늘 이곳에 도착하지 못했을 거다.”
“그럼 도중에 죽었을까?”
“하하! 죽지는 않았겠지. 너는 강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너와, 시크나드와, 크리스티나. 셋만으로는 백 명의 엘프들을 상처 하나 없이 보호하기 힘들었을 거다.”
이바타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유진의 등을 철썩 때렸다.
“아주 힘들었을 거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한참은 더 걸렸을 거고, 너는 굉장히 피곤해졌겠지.”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바타와 조란의 전사들 덕에 여정이 압도적으로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도중에 이동을 멈추고 결계에 틀어박혀야 했을 지도 모르고, 따로 지원군이라도 부르려 했다면 숲을 왕복하며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네게 물질적인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바타가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내가 라이언하트의 저택을 찾아간다면. 네 손님으로 맞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유진도 이바타와 인연을 맺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사마르에 몇 번을 더 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대부족의 후계자와 인연을 맺어 두어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저쪽의 사정도 파악할 수 있고.’
헬무드는 사마르 원주민들의 자유를 지지하고 있다. 키옐이 무턱대고 군대를 보내 사마르를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헬무드를 포함해 여러 국가들이 키옐이 이 거대한 숲을 소유할 수 없도록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숲에는 헬무드의 마족과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있는 부족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것이 코칠라 부족이다. 놈들은 이 대수림에서 가장 거대한 부족이며,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지배하고 있다.
코칠라 부족은 그 규모에 비해서 소문이 많지 않다. 놈들의 영토가 사마르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탓도 있지만, 부족 자체가 과하다 싶을 만큼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놈들은 대부분의 부족들이 참가하는 노예시장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지배하는 부족 외에는 일절 교류하지 않는다.
유진은 바랑을 사주한 것이 코칠라나, 헬무드를 배후에 둔 부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헬무드와 연관되어 있는 이상, 경계는 해야 했다.
그러한 생각을 이바타에게 전하지는 않았다. 이바타와 조란 부족과 연을 맺는 것은 나쁠 것 없는 일이지만, 아직 유진은 이바타를 믿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놈과 조란 부족의 덕을 본 것은 사실일지라도, 아직 신뢰하기는 한참 이르다.
“찾아오는 건 상관없는데, 밀입국은 하지 마. 올 거면 제대로 절차를 밟고, 오기 전에 내게 편지부터 보내.”
“그 정도 상식은 있다.”
이바타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
애니실라 카이네스.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인 그녀의 아침은 굉장히 빠르다.
애니실라는 동이 트기 전의 새벽에 일어난다. 일찍 일어나되, 곧장 방을 나서지는 않는다. 현재 본가에 가주이자 남편인 길레이드도 없고, 사랑스런 자식들도 없을 지라도. 애니실라는 이 명문 라이언하트 가문의 안주인에 걸맞은 품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특히, 방금 자다 깬 추레한 모습은 가솔들에게는 절대로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애니실라는 잠에서 깬 즉시, 시종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모든 준비를 마친다.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고, 빗고,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른다. 외출 예정도 없고, 찾아 올 손님이 없어도. 애니실라는 용모를 꾸미는 것을 대충하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준비를 마치면 그제야 해가 뜬다. 가주와 자식들이 있다면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겠지만, 지금 본가에 남은 것은 애니실라와 제하드 뿐이다.
적대하고 싶지는 않고, 사이는 제법 원만하도록 꾸려왔지만. 단 둘이 식사를 하는 것은... 솔직히 껄끄럽다. 그건 제하드도 마찬가지여서, 둘은 어지간해서는 함께 식탁에 앉지 않았다.
제하드는 별채에서.
애니실라는 본가에서.
오늘 아침도 평소와 똑같았다.
애니실라는 시종을 대동하고 식탁에 앉아, 커피의 향을 맡았다. 설탕 한 스푼 들어가지 않은 커피 한 잔. 신선한 샐러드. 애니실라가 추구하는 ‘품위’에는 외모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깔끔한 식사와 꾸준한 운동 등이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에 걸맞은 품위를 가꾸는 것이다.
외향적인 면만 중요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가주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본가의 모든 일은 애니실라가 관리하고 있다. 여러 사교파티들.
신년에는 파티가 많다.
다음 주에는 라고스 후작이 주최하는 파티가 있다. 일단은 신년을 기념한 파티라지만, 실상은 제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파티일 것이다.
드문 일도 아니었다. 고위귀족들의 신년파티는 대부분이 저런 것이다. 자신이 주최하는 파티가 얼마나 화려하고, 참석한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를 통해 신년부터 다른 귀족들을 견제하고, 누가 초대를 거절했으며, 누가 어느 파티에 갔는지를 통해 관계를 새로이 하는 것이다.
‘라고스 후작의 파티와 브리드 백작의 파티가 겹치네. 참 노골적이셔.’
애니실라는 코웃음을 흘렸다. 초대장은 두 명 모두에게 왔다. 키옐, 아니, 대륙 제일의 명문가인 라이언하트는 어느 파티건 참석할 수 있다. 부디 와주십사 안달을 내는 것은 저들인 것이다. 어느 쪽 파티에 참석할까... 애니실라는 즐거운 고민을 하며 참석이 결정 된 명부를 확인한 뒤, 보고서를 넘겼다.
이 보고서에는 파티 외에 다른 여러 것들도 적혀 있다. 라이언하트에 관련 된 정보들. 수많은 방계에 관한 소문. 방계의 누가 혼인하고, 자식을 낳았는가 따위의 자잘한 정보부터...
“푸흡.”
애니실라는 입안에서 음미하던 커피를 내뿜었다. 놀란 시종이 다가왔지만, 애니실라는 안주인다운 품위와 시종의 시선을 신경쓸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애니실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커피로 얼룩 진 보고서를 몇 번을 다시 읽었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뭐하자는... 아니, 뭘 하고 오는 거야?’
보고서에는 유진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바로 어제, 유진이 남쪽 관문을 넘어 키옐의 국토로 들어왔단다.
그것만으로도 애니실라가 경악하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대체 언제 키옐을 떠났단 말인가? 유진, 그 아이가 흑사자성을 떠났단 이야기는 들었다.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키옐 어딘가를 유랑 중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남쪽 관문을 넘어 왔단다. 남쪽. 사마르 대수림. 대체 언제, 왜, 사마르에? 그 뿐만이 아니다. 남쪽 관문의 코앞까지 원주민들, 그것도 사마르에서 손에 꼽히는 대부족인 조란 부족의 호위를 받았단다.
“엘프?”
사마르의 야만족들과 대체 뭘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백 명의 엘프를 이끌고 왔단다.
“나무우?”
머리 위에 세 그루의 나무를 띄우고서 말이다. 애니실라는 자신이 꿈이라도 꾸는 것이 아닌가 싶어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팠다. 꿈이 아니다. 이 말도 안되는 보고서가 죄다 사실이란 말이다.
원주민들의 호위를 받고,
백 명의 엘프를 이끌고,
세 그루의 나무를 머리 위에 띄우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문을 넘어 와, 남쪽 도시에서 하루를 묵고, 오늘 아침 수도 세이리스의 워프 게이트에 도착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보고가.
애니실라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일단 입가를 적신 커피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마차... 마차를...”
“애니실라님.”
저택의 집사가 급한 걸음으로 애니실라에게 다가왔다.
“워프게이트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뭔데...?”
“세이리스의 워프게이트가 연결을 요청...”
“누군데!”
“유진님이십니다...”
집사는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애니실라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신음을 흘렸다.
“...대체 그 아이는 뭐지?”
“예...?”
“사마르에 갔다는 보고는 듣지 못했어. 그런데 왜 사마르에서 와?”
“예...”
“엘프는 또 뭐고? 한둘도 아니고 백 명? 백 명의 엘프는 대체 어디서, 사마르겠지! 사마르에서 왜 엘프를, 백 명이나! 데리고 온 거야?!”
“...”
“머리 위에 나무는 왜 띄우고 다녀! 남몰래 그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왜 구경거리가 되어서!”
“그건... 저도.. 잘...”
“연결해줘!”
애니실라는 꽥 고함을 지른 뒤, 자리에 털썩 앉았다.
“...마차 준비해.”
“마중을 가시렵니까?”
“그럼 가지 말까? 워프게이트도 연결하지 말고, 제 발로 직접 오라고 할까?”
괜한 말을 했다. 집사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 그, 개같... 개구쟁이... 같으니...!”
애니실라는 씩씩거리는 숨을 고르며 주먹을 쥐었다.
“어머...”
집사에게 울분을 쏟아내고.
“이거 참... 당황스럽구나.”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유진에게는 살포시 웃어주었다.
“네 친구들이니?”
속에서는 열불이 난다. 하지만 그걸 유진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유진이 본가의 양자가 되고 7년. 애니실라는 단 한 번도 유진에게 험악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나 둘... 어머... 참... 친구가 많구나.”
“화나셨어요?”
유진은 애니실라의 눈꼬리가 파들거리며 떨리는 것을 보았다.
“어머... 얘는... 화는 무슨... 내가 왜 화를 내겠니? 친구를 데려 온 것이 화를 낼 일은 아니잖니.”
‘화난 거 같은데...’
애니실라의 말투가 과할만큼 상냥하다. 유진은 애니실라의 뒤편에 서있는 시종과 기사들을 힐긋 보았다.
그들 중, 백사자 기사단의 2번대 대장인 헤자드와 눈이 마주쳤다. 헤자드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많이 노하셨습니다.
“음... 친구는 아니에요.”
유진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뒤에는 시크나드를 포함해 백 명의 엘프들이 서있었다.
“그럼... 뭐니?”
“식구...?”
“식구...? 유진, 나는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구나.”
애니실라는 깃털부채를 들어, 파들파들 떨리는 입 꼬리를 감추었다.
“음... 식구라기보다는... 이웃이죠.”
“...더욱 알 수 없는 말이구나.”
“본가의 숲이 좀 넓잖아요?”
“...숲은... 넓지. 나무도 많고. 네 머리 위의 나무는 뭐니?”
“숲에 심으려고요.”
“...이미 많은데? 그 나무를 굳이? 머리 위에 띄우고서 온 이유가 있는 거니?”
“이거 비싸고 귀한 나무에요.”
“...멋지구나. 그래서 저 엘프들과, 숲이 넓은 것이 무슨 상관...”
“숲에서 살게 하려고요.”
유진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애니실라가 쥐고 있던 부채가 으스러졌다.
숲
비록 애니실라가 본가의 안주인이라 해도, 저 당돌한 양자는 애니실라가 통제할 수 없었다.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막 양자로 들어왔던 어린 시절이라면 몰라도, 이제 유진은 성인이 되었다.
애니실라는 오래 전부터 현실을 제대로 보아왔다. 그녀의 친자식인 쌍둥이는, 분명 뛰어난 기재다.
만약 유진이 없었다면, 여러 어머니들처럼 제 자식이 천재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진을 직접 본 이상, 애니실라는 도저히 쌍둥이가 천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저 아이가 가주가 되는 것에는 욕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가주가 되는 것을 질색하고 있다.
그러니 적대해서는 안 된다. 유진이 양자로 들어온 이후로 쭉, 애니실라는 유진과 원만한 관계를 꾸리도록 노력해 왔다. 어린 치기와 자존심에 사로잡혔던 시안을 어르고, 호기심과 말썽 많은 시엘이 유진을 너무 자극하지 않도록 다스렸다.
애니실라 본인도 그러도록 노력했고, 시안과 시엘도 유진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피는 거의 섞이지 않았지만, 셋은 형제가 되었다.
시안은 가진 열등감을 향상심으로 바꾸었고, 자신보다 잘난 유진을 미워하기보단 동경하며 뒤따르고 싶어 한다.
시엘도 비슷했다. 그녀는 시안처럼 많은 열등감을 느끼진 않지만, 유진과 시안에게 자극은 받은 것인지 수련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시안과는 다른 의미로 유진을 의식하고 있다...
애니실라가 보기에, 그 관계는 아주 평화롭고 만족스러웠다.
유진은 결국 가주가 되지 않을 것이다. 시엘도 제 친오빠와 가주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대신에 흑사자 기사단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시안은 ‘양보’를 받았다는 것을 쓰려하면서, 가주에 걸맞은 인물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애니실라는 그 바람직한 구도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괜히 자신이 삐딱하게 굴었다가, 저 당돌한 아이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한다면?
“...으흠.”
애니실라는 헛기침을 뱉으며 손을 꼼질거렸다. 으스러트렸던 부채가 덜렁이는 모습이 처량 맞았다.
“사정이 참... 딱하구나.”
엘프들이 타고난 아름다움과, 길고 긴 젊음으로 핍박받는단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솔직히 애니실라도 엘프들의 사정이 가여웠다. 엘프만 걸린다는 마병으로 죽어가는 것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숲을 떠돌다가, 사냥꾼과 원주민들에게 사냥당해 노예로 팔린다는 것도.
‘...뭐... 거두어서 나쁠 것은 없지. 오히려 라이언하트의 위상이 높아지지 않을까?’
애니실라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가 알기로, 대륙 어디에도 저만큼이나 많은 엘프를 보호하는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따로 도와야 할 일은...”
“애니실라님을 번거롭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미 충분히 번거롭다만. 좋게 생각하려 했지만, 마냥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은 백 명이 조금 넘는 숫자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늘어날 것 아닌가?
더욱이 난감한 것은, 저 엘프들을 본가의 가솔들처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숲에서 살게 할 뿐.
결국은 납득 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은 아주 많다.
왜 알리지 않고, 굳이 신분까지 감춰가며 사마르 대수림에 간 것인지에 대해서는 들었다. 현명한 세냐가 은거했다는 엘프의 영지를 찾으러 갔단다. 그만큼 중한 일을, 왜 네가? 그것도 단 둘이서?
심지어 같이 간 여자는 신성제국의 성녀후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지금 크리스티나는 자연스럽게 유진의 곁에 서있었다. 그것이 애니실라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성인식 때문에 흑사자성에 갔으면서, 왜 뜬금없이 현명한 세냐를 찾겠다고 사마르 대수림에 간 건가? 그것도 성녀와 단둘이?
...캐묻지는 않았다.
애니실라는 터지려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 하여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을 수는 없지. 일단 사람을 불러, 숲에 건물들을 올리도록 하마. 그 전까지는...”
“제가 쓰는 별채에 방이 많이 남잖아요? 그때까지는 별채에서 지내라 하죠. 불편해서 싫다하면 뭐, 숲에서 알아서 지내라 하고.”
“...식사는?”
“니나 보고 챙기라 하겠습니다.”
니나는 7년 전만 해도 막 견습 딱지를 땐 직후였지만, 지금은 별채의 시종들을 총괄하고 있다.
‘...결국 가문에서 먹여 살려야 한다는 거잖아?’
알긴 할까? 별채고 뭐고, 이 영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최종적으로는 애니실라를 거치고 있다.
물론 유진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뭐 돈이야 썩어 넘치는 가문인데.’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
“멋진 숲이군.”
애니실라가 돌아간 후.
시크나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널따란 라이언하트의 숲을 돌아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무도, 땅도, 모든 것이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숲이니까.”
“특히,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좋다.”
“불쾌한 냄새?”
“피 냄새 말이다.”
시크나드가 웃으며 답했다.
“사마르의 숲에서는 항상 피 냄새가 떠돌았다. 비명소리도 곧잘 들렸고. 하지만 이곳은 평온하고 좋구나.”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본가의 영지에 속한 이 숲은, 서로 영역다툼을 해대는 야만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몬스터도 없다. 여러 짐승들은 방목해 놓았지만, 숲의 생태를 파괴할 만큼의 포식짐승은 없다. 계절이 겨울이라 나뭇가지에 잎은 달려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숲은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마나도 풍부하고.”
시크나드는 고개를 돌려, 숲의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라이언하트의 영맥이다.”
“...본래부터 있던 것인가?”
“시조 베르무트님이 만드셨다더군.”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시크나드에게 눈길을 주었다. 말을 조심할 것. 그에 대해서는 이곳에 오기 전에 수십 번이나 일러두었다.
시크나드는 유진이 하멜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더더욱, 말을 조심해야 했다.
“...음... 그렇군.”
시조 베르무트님. 시크나드는 유진이 그리 말하는 것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단 둘이 있다면 그를 두고서 놀려주었을 터인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엘프들도 있고, 크리스티나도 있다.
“일단 터부터 고를까.”
유진은 앞장서서 숲으로 들어갔다.
어디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조금 더 깊이 가라.]
‘확실해?’
[확실하다. 세계수의 정령들은 이곳보다 더 깊고 울창한, 생기가 넘치는 곳을 바란다.]
머릿속에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다. 그는 묘목에 깃든 세계수의 정령을 느끼며, 그들이 바라는 곳을 유진에게 일러주었다.
[이곳이면 되겠군. 바람이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어.]
“...여기는...”
유진은 의아하단 표정을 하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나에 처음 입문했던 13살 때 왔던, 라이언하트의 영맥이 근처에 있다. 유진은 멀찍이 보이는 오두막을 응시하며, 허리에 매단 위니드의 칼자루를 쓸었다.
‘영맥과 가까운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원시의 정령은 마나의 또 다른 형태라 할 수 있으니.]
세계수의 정령은 본질적으로는 원시의 정령이다. 유진은 템페스트의 말을 들으며 바람을 의식해 보았다. 하지만 별로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바람은 자연스레 존재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위대한 정령사라 해도, 형상을 갖지 못한 원시 정령을 완벽하게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바람과 땅, 물, 불 따위가 형상을 갖춘 ‘정령’을 통해서 원시정령을 이끌어낼 뿐. 숲에서 나고 자란 사마르의 원주민들이나 엘프들은 정령의 가호를 받아 원시정령의 도움을 받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도움을 받는 것이지 다스리며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의 영맥은 자연히 태어난 곳이 아니라, 베르무트가 직접 만든 것이지. 그래서 저 영맥의 마나는 인위적으로 뒤틀려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베르무트는 그것을 해냈다.
[흠...]
템페스트는 한줄기 바람이 되어 유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멜. 너도 알고 있겠지만, 저 인조 영맥이 붙들고 있는 마나는 무한하진 않다.]
마나는 세상 어디든 존재하지만, 영맥은 압도적으로 커다란 마나를 머금고 있다.
무한하지는 않다. 영맥에서 마나를 수련하면 빠른 진전을 거둘 수 있지만, 너무 오래 지냈다간 영맥의 마나가 고갈되어 버린다. 그래서 라이언하트의 영맥은 엄중히 관리되고 있다.
[이 토지에 세계수의 묘목을 심는다면. 저 영맥은 보다 완전해 질 것이다.]
‘마나가 늘어난다는 건가?’
[그렇겠지.]
유진도 영맥이 편리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마나 수련이 깊어질수록, 영맥의 덕은 그리 볼 수 없게 된다. 코어는 무조건 마나만 늘린다고 해서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의 영맥이라면 그렇겠지만.’
유진은 엘프의 영지에서 보았던 세계수를 떠올렸다. 영지의 마나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세계수의 안은 유진이 기억하는 그 어느 곳보다 마나가 풍부했다.
“가져오길 잘했어.”
“무슨 소리인가?”
갑작스런 중얼거림에 시크나드가 반문했다.
“온갖 개고생을 다한 너희가 이 숲에서 행복하게 살 것을 상상하니, 내 가슴이 다 뭉클해지는 구나.”
그렇게 둘러댔다. 그 말에 시크나드와 엘프들이 감격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바람을 일으켜, 울퉁불퉁한 땅을 대충 정리했다. 그 뒤에 템페스트가 지정한 자리에 구멍을 파고, 세계수의 묘목과 나뭇가지를 심었다.
‘...아무 일도 없...’
따져 물으려는 순간. 유진은 놀란 표정을 짓고서 몸을 낮춰, 손으로 땅을 어루만졌다.
메마르고 차갑던 땅에 은은한 온기가 감돈다. 자그마한 떨림. 묘목의 뿌리가 땅속 깊은 곳으로 뻗어나가는 소리. 묘목의 나뭇가지들이 힘 있게 뻗어나가고, 잎사귀들에 더욱 생기가 깃든다. 세계수에서 직접 꺾어 온 나뭇가지도 살짝살짝 흔들린다.
“아...!”
엘프들은 그 광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이 숲이 기뻐하는 소리를 들었다. 시크나드를 비롯해, 영지에서 태어났던 엘프들은 저 자그마한 묘목과 나뭇가지에서 거대한 세계수를 보았다. 몇몇 엘프들은 감격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과연.”
크리스티나는 낮은 감탄을 흘리고서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았다.
“이런 것이야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네가 섬기는 신이 베푼 기적은 아니야.”
“예,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인도 된 것도 결국은 신의 계시... 모든 기적이 빛의 신이 베푼 기적은 아닐 터이나, 모든 기적에도 빛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유진은 방긋 웃는 크리스티나를 흘겨보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 마나가 늘어나진 않네.’
[시간이 흐른 뒤에, 영맥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너무 오래 걸리면 의미가 없는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넌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 토지에 깃든 원시의 정령들이 세계수에 감응하고 있다...]
‘세계수의 정령이 늘어나는 건가?’
[그렇다. 이 영지의 숲은 오래지 않아, 대륙 그 어디의 숲보다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숲으로 변해갈 것이다. 엘프들은 이 숲에서 살아가며 땅을, 나무를, 꽃을, 숲의 모든 것을 가꾸며 세계수의 정령들과 어울리겠지. 그렇게 요정목은 점점 늘어날 것이고, 요정목이 늘어나는 만큼 숲 전체가 영맥으로 변해갈 것이다.]
‘...’
[숲이 영맥으로 변하고, 라이언하트의 영맥은 전보다 광대한 마나를 품게 될 것이다.]
‘숲지기나 조경사는 더 고용할 필요가 없겠군.’
[...뭐라?]
‘네가 말했잖아. 엘프들이 숲을 가꿔줄 거라고. 나도 사람인지라, 쟤들한테 밥값을 하라 시키는 것은 조금 너무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조경 일을 해준다니, 그거면 밥값으로는 충분하지.’
[...하멜...]
‘왜, 맞잖아. 여기 숲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 숲이라고 그냥 내버려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계절마다 가지치고, 접목하고, 어쨌든 할 일이 많다고. 그걸 엘프들이 알아서 해주면...’
템페스트는 뭐라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자, 주목.”
유진은 감격한 엘프들을 한 곳에 모았다.
“애니실라님한테 허락도 구했고, 나무도 심었잖습니까.”
시크나드에게는 반말을 찍찍 뱉지만, 다른 엘프들 모두에게 반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제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지만, 영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정 외출하고 싶다면, 가문의 시종에게 미리 말을 해두세요. 외출하지 말라고는 안 할 건데, 바깥에서 괜한 시비라도 걸리면 서로 피곤할 것 아닙니까?”
엘프 사냥은 불법이고, 수도 세이리스의 치안은 훌륭한 편이다. 그래도 만약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외출할 때에는 라이언하트의 기사가 동행할 수 있도록 말해두겠습니다. 필요한 것들은 시종들이 마련해 줄 거고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나는 여기서 살기 싫고, 어쨌든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은 분이 있다면 거수해 주세요.”
손을 드는 엘프는 아무도 없었다.
“뭐 당연히 그렇겠죠. 숲에서 뭘 하건 상관은 없는데, 저기 저 오두막 보이시죠? 그쪽으로는 가지 마세요. 절대로요.”
유진은 영맥을 가리키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만약 가면 제가 화를 낼 겁니다. 그리고 또. 이 숲에서 지내다 보면 라이언하트의 기사나 시종들, 그 외 사용인들과 여러 번 마주치게 될 텐데. 그들이 인간이랍시고 무시하거나 시비를 거시면 안 됩니다.”
“그걸 굳이 말해야 하나?”
시크나드가 유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예전이라면 모를...”
유진도 시크나드를 흘겨보았다. 시크나드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300년 전에는 엘프의 선민의식이 당연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엘프의 처지가 각박해졌으니 말이야.”
“모든 엘프가 그런 것은 아니잖아?”
“...하지만 여기 있는 엘프들은, 인간을 두려워하면 두려워했지 무시하지는 않아.”
“음... 그도 그렇군.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아마 내일쯤 사람들이 와서, 여러분이 지낼 마을을 만들기 시작할 겁니다만. 완성되기 전까지는 어디서 지내시렵니까?”
시크나드가 앞장 서서 엘프들의 의견을 모았다.
“...대부분의 엘프들은 숲에서 지내길 바란다만. 몇몇은 별채로 가겠다 말했다.”
“그래?”
“유진, 저 별채는 네가 생활하는 곳인가?”
“나도 생활하고... 우리 아버지도 계시지.”
“시종 출신의 엘프들이 네 시중을 들며 은혜를 갚고 싶다는 군.”
“시중...?”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열 명의 엘프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 중에는 외발의 나리사와, 외눈의 레베라도 있었다.
“너 시종 출신이었냐?”
“비... 비슷하죠.”
“청소할 줄 알아?”
“...할 줄은 알아요.”
거짓말이었다. 노예일 적에 저택에 지내긴 했지만, 청소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막상 하려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리사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요리는?”
“배우면 된다 생각합니다.”
레베라는 요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먹는 것은 자신이 있습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노예로 학대받던 시절, 레베라는 온갖 추잡하고 끔찍한 것들을 먹고, 토하고, 괴로워하며 주인의 가학심을 충족시켜주었었다.
“...음...”
시종이 되어 은혜를 갚고 싶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마땅치 않았다. 어차피 견습시종을 교육하는 건 유진이 할 일이 아니었다.
‘니나가 알아서 하겠지.’
알 바도 아니었다.
*
사막의 전사, 라만 슐호브는 최근 몇 달 동안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사막의 남자들에게 있어, 수염은 과시적인 상징이다. 천민은 수염을 기를 수 없다. 나하마에서는 권위가 높을수록 풍성하고 멋진 수염을 갖는다.
라만의 전 주인인 카지탄의 에미르, 타이리 알 마다니도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라만도 꽤 멋진 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 아침 수염에 향유를 바르고, 빗질하는 것이 라만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 자랑스러운 수염은 라이언하트에 온 첫날에 밀려버렸다. 키옐에, 아니, 라이언하트에 온 이상 라이언하트의 법을 따라야 한다.
얄궂게도 라만에게 법을 집행하는 것은 새로운 주인인 유진이 아니었다.
니나.
이 별채의 시종을 총괄하는 그녀는, 라만의 수염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사복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라만은 자신이 전사라고 주장했지만, 니나에게 있어서 ‘전사’란 본가에 서임한 기사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라만을 본가의 기사로 삼을 수는 없잖은가. 그건 니나의 소관이 아니었고, 유진도 라만을 기사로 삼으려 들지 않았다.
결국 라만은 집사가 되었다. 단련은 틈틈이 하고 있지만, 일상의 대부분은 별채에서 지내며 니나가 시키는 잡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정체성의 혼란은... 그 일이 의외로 즐겁다는 것이다.
큰 주인님인 제하드는 유쾌하고 친절했으며, 니나도 라만을 구박하면서도 생활에 불편한 것이 없도록 여러모로 챙겨주고 있다. 나하마 출신이라며 경계하던 다른 시종들도, 라만이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에 어느 정도 경계를 풀고서 친근히 대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은 나하마에서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평화롭고 좋았다. 모래바람도 없고, 다른 전사들의 견제도 없으며, 수상쩍은 음모도 없다...
하지만.
라만은 자신이 유진의 심복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놓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별채의 집사로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전사로 돌아가 유진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유진은 단 한 번도 라만에게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었지만, 라만은 그러한 결의를 품고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구명의 은혜를 입지 않았나. 어떤식으로든 은혜는 갚아야 한다.
“...”
라만은 우두커니 서서 유진을 보았다.
아니. 유진의 뒤에 서있는 열 명의 엘프들을 보았다. 아리따운 엘프들. 여자와 남자가 섞였지만, 엘프 남자는 여자만큼이나 아름답다.
“...공자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라만은 고개를 끄떡거리며 감탄했다.
“엘프로 이뤄진 하렘이라니. 제 전 주인, 타이리 알 마다니의 하렘에도 엘프는 한 명 밖에 없었는데 말입...”
“뭔 개소리야?”
유진은 라만의 정강이를 걷어 차며 말했다. 라만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아픈 정강이를 움켜잡았다.
“오늘부터 얘들도 여기서 일할 거야.”
“예... 예?”
라만은 놀라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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