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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0

 야곤은 부푸는 흑점이 완성되고 폭발하기 전에 손으로 붙잡았다. 도중에 멈춘 폭발은 야곤의 손등을 한 번 들썩이게 하고 말았다.


높은 하늘까지 도약한 유진은 그대로 분쇄추를 아래로 내리찍었다. 거대한 힘이 야곤의 몸에 처박혔다.


하지만 야곤의 몸에 미동은 없다. 놈은 오히려 분쇄추의 힘 속에서도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 시커먼 눈동자에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섬뜩함을 느끼며 웃었다. 맷집이 좋고 힘이 세다는 점은 모론을 닮았지만, 비교될 정도는 아니다. 야곤이 아무리 강해봐야 모론보다 강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기는 했다. 정작 모론에게는 무기를 쓰지 않았으니 질 수밖에 없다고, 무기를 쓰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떠들었지만…… 아마 무기를 써도 졌을 거다.


‘네가.’


왼손은 여전히 분쇄추를 쥐고 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오른손은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모론은 아니잖아.’


오보론을 물어 죽였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그 오보론은 300년 전에 모론을 지나치지 못했다. 오보론이 강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지만, 300년 전의 모론이 더 강했다.


라비스타의 마수, 야곤, 이런저런 흉명을 쌓을 만큼 꽤 강한 놈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놈은 모론이 아니다. 가비드 린드먼도 아니고, 누아르 제벨라도 아니다.


하지만. 놈을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저 괴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야곤이 날뛰는 것을 보면서 유진은 그를 확신했다. 그러니 굳이 야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용마성의 중심핵을 박살 내고, 성이 추락하는 혼란 중에 라이미르아를 데리고 탈출한다. 야곤 정도의 마족이라면 용마성과 함께 떨어져도 죽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주 많은 마족이 성과 함께 뒈질 거다.


그.


아주아주 멋지고, 신나는 일을 잠시 뒤로 미뤄두고서.


유진은 오늘 야곤을 죽여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그니처인 프로미넌스를 처음 썼던 곳은 레헤인야르의 이면. 그곳은 빈말로라도 프로미넌스로 싸우기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모론과의 전투에서 쓴 능력은 깃털의 도약과 약식의 흑점을 난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레헤인야르의 이면은 마나도 거의 없다시피 했고, 원시정령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연속 도약 하나로도 시그니처로서의 가치는 충분하겠지만, 유진이 프로미넌스에 부여하고 싶었던 것은 도약뿐만이 아니다.


프로미넌스로 살포한 깃털이, 유진의 마나에 녹아든 세계수의 정령이 원시정령을 끌어당긴다. 불꽃이 되어 번져나가는 마나가 대기 중의 마나를 집어삼키며 점점 크기를 키운다.


연동된 정신이 마나와 원시정령을 장악한다.


이것은 이그니션이 아니다. 이그니션처럼 심장과 코어를 폭주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이 보통 때에는 다루지 못할 어마어마한 고출력의 마나를 다루게 해준다.


그 거대한 마나를 몸에 담아 써버리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몸이라도 금세 지쳐 버린다. 하지만 괜찮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는다는 것. 심장과 코어가 폭주하지 않는다는 것. 순수한 육체의 고통이라면.


왼손 약지의 반지가 붉은빛을 발했다.


전쟁신 아가로트의 반지. 이 반지의 능력은 굉장히 심플하다. 육체의 재생력을 강제로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수명을 갉아먹는 종류의 마법이지만, 천부적이라 할 정도로 타고난 몸뚱이와 극한까지 해낸 단련은 전부 다 끝난 뒤에 좀 피곤한 정도로 그치게 해줄 거다.


심장과 코어의 뻐근함 없이, 이그니션 때의 만능감이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씩 웃으며 망토 안에 넣었던 오른손을 뽑았다.


마창 루인토스.


그 시커먼 창이 허공을 꿰뚫었다.


야곤의 발아래에서 수백 수천의 창이 솟구쳤다.


아곤


쿠르르릉!


거듭된 진동이 지하를 뒤흔들었다. 라이미르아는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흙먼지에 놀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서 진동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사실 이대로 천장이 무너지고 이 지하공간이 매몰되어도, 라이미르아는 죽지 않는다. 인간은 당연히 죽고 어지간한 마족도 생매장당하겠지만, 라이미르아는 드래곤이다. 폴리모프로 유지 중인 모습을 버리고 전신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굉장히 무식한 탈출법이다. 아직 헤츨링이다 보니 고등한 용언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하에서 탈출하는 정도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마법이다.


하지만 라이미르아는 지하를 탈출한다는 마음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위에서부터 전해지는 진동ㅡ 전쟁의 소리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예민한 감각은, 직접 보지 않아도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 드래곤인 라이미르아는 존재가 가진 마나나 마력 따위의 기질에 민감하다.


사신장이 죽었다. 저항이랄 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솔직히 말하자면 사신장의 죽음은 조금도 안타깝지 않다. 오히려 통쾌하다. 라이미르아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이 이토록 쉽고 간단하게 죽어버린다는 점이었다. 수백 년 살아온 사신장이 죽는 데에는 고작 몇 초도 걸리지 않았잖은가.


“아버님…… 아버니이임…….”


훌쩍거리던 라이미르아는 별 추억도 없는 아버님을 찾았다. 흑룡공 라이자키아. 그는 라이미르아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다운 인식보다는 용마성의 성주, 흑룡공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


그 외의 인식을 쌓을 만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라이미르아는 제 아버지인 흑룡공을 애타게 찾았다.


라이미르아가 태어났을 때. 흑룡공은 딸의 이마에 드래곤하트의 파편을 박아 넣었다. 딸을 확실한 소유물로 삼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알을 낳게 하고 잡아먹어야 할 때에 딸이 저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흑룡공의 본심은 그랬지만, 라이미르아는 그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오히려 라이미르아는 이마의 홍옥이 흑룡공의 애정의 상징이라 생각했다. 흑룡공만 용마성에 있었다면 지금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흑룡공만 있었다면 용공녀인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라이미르아는 훌쩍거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간절히 바라면 흑룡공께서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와 주실지도 모른다.’


문득 든 생각이 참으로 그럴듯했다. 라이미르아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이마의 홍옥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 무도한 침입자가 인정사정없이 때렸을 때는 비명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지만, 제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은 그리 아프지 않았다. 고통을 주기 위한 손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흑룡공이여……. 제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어서 빨리 용마성으로 돌아오소서…….”


당연히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라이미르아는 잠깐 동안 홍옥을 어루만지며 기도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의 위엄, 용기의 충천 때문은 아니었다. 머리 위의 진동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본녀 혼자서는 도망칠 수 없다…….’


침입자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니다. 라이미르아는 울적한 눈으로 중심핵을 돌아보았다. 이 핵이 건재한 이상, 라이미르아가 용마성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ㅡ쿠우우웅!


“히이익!”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동이 지하를 뒤흔들었다. 라이미르아은 몸을 공처럼 말고서 오들오들 떨었다.


나중에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대체 언제 돌아오는 것인가? 도망친 것은 아니다. 침입자는 지금 바로 위에서 백작의 선봉과 싸우고 있다…….


‘침입자도 꽤 강하지만 선봉도 강할 것이니라.’


둘을 비교해 본다.


백작의 선봉은 무조건 라이미르아를 죽이려 들겠지만, 침입자는 라이미르아를 죽이지 않고 용마성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고 했다. 그렇기에 라이미르아는 당연히 침입자의 편을 들어야만 했다. 용마성이 통째로 추락하는 한이 있어도, 흑룡공은 사랑스러운 딸의 생존을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본녀는 저 위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라.’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안정되었다. 두려운 전투가 계속되는 위에는 결코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쿵, 쿵 하는 진동은 두렵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아주아주 깊은 지하에 있으니 진동이 올 뿐. 가까이 가지 않고,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곳에 있으면 된다.


“과연 본녀는 영리하도다!”


생각이 정해진 후, 방긋 웃으며 용언을 읊었다. 깨지지 않고 안전하고 쾌적한 결계가 라이미르아의 몸을 감쌌다.


라이미르아는 편히 앉아서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 * *


창림(槍林). 마창 루인토스의 권능. 지정한 좌표에 무수히 많은 창날을 생성해 목표를 꿰뚫는다. 창림으로 생성해 내는 창은 본질적으로는 마창과 똑같아서, 어지간한 방어수단은 모조리 관통해 버린다.


끼긱.


끼기긱…….


야곤은 빼곡한 창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창림이 꿰뚫는 순간, 고슴도치의 가시마냥 야곤의 털이 일어섰다. 그 억세고 날카로운 털은 창날을 부서트리지는 못했지만, 궤적을 뒤틀어 야곤을 보호했다.


“흐…….”


야곤의 입술이 열렸다.


“흐하…… 흐하하! 하하하!”


놈은 큰 소리로 웃으며 양팔을 펼쳤다. 콰드득! 빼곡한 창들이 모두 다 박살 났다.


야곤이 위로 뛰어올랐다. 단숨에 유진이 있는 곳까지 도달한 야곤이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사라졌다. 그걸 몇 번이나 보았다.


야곤은 전투에 익숙하고 시야가 넓으며 맹수 특유의 사냥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유진의 기묘한 이동이 마법의 공간도약을 고속화한 것임을 간파했다. 그리고, 그 도약은 지금 이 지역을 떠돌고 있는 무수히 많은 깃털을 매개체로 삼는다.


매개체를 알았다고 해서 도약지점을 간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깃털이 너무 많고, 계속해서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아도 예측 정도는 가능했다. 야곤은 깃털의 존재를 의식했고, 도약 순간에 유진의 ‘냄새’를 쫓았다.


무식하게 큰 덩치와는 달리 야곤은 굉장히 빨랐다. 유진이 출현하고 바로 직후에 야곤이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ㅡ화악! 프로미넌스가 다시 깃털을 흩뿌렸다. 야곤은 유진을 향해 주먹을 던지면서도 방금의 도약을 의식했다.


의식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직 손에 들고 있던 루인토스. 굳이 찌르는 동작을 취할 필요는 없다. 권능의 시동(始動)은 창을 쥐는 것으로 충분하니.


창림을 완벽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공간의 이해와 계산이 필수적이다. 본래부터 유진은 그런 종류의 작업을 메르에게서 보조받고 있다. 하지만 프로미넌스를 쓰는 도중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야곤을 향해 흩날린 깃털에서 창들이 쏘아졌다. 깃털을 창림의 생성좌표로 삼은 것이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깃털에서 수많은 창이 쏘아졌다. 콰, 콰, 쾅! 쉬지 않고 쏘아댄 창에 얻어맞은 야곤이 땅으로 떨어졌다.


유진은 그 위를 추격하며 분쇄추를 들었다.


단순한 권능. 그 근원은 본래는 마왕의 힘이었다. 하지만 흑사자성 이후로 분쇄추와 마창은 완전히 유진의 지배하에 놓였으며, 근원인 힘조차 유진의 마나로 대체되었다.


프로미넌스로 이그니션을 대체했다. 코어와 심장은 안정된 상태지만, 마나는 폭주상태처럼 날뛰고 있다. 그 힘이 분쇄추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분쇄추를 내리찍었다. ㅡ꽈르르릉! 거대한 용마성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분쇄추의 힘이 성터를 통째로 침강시켰다. 야곤이 중간에서 완충제처럼 버티지 않았더라면, 용마성이란 거대한 땅덩어리의 일각이 아예 소멸해 버렸을 것이다.


피슉! 위로 들어 막았던 야곤의 팔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너무나도 거대한 힘을 받아낸 대가치고는 하찮았지만, 야곤은 최근 수백 년 동안 자신의 피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낯설고 신기했다. 회갈색의 털이 붉게 물들어 간다…….


꽈아아앙!


유진은 야곤이 감상에 젖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한 번 더 내리찍은 분쇄추가 야곤의 팔을 완전히 터트렸다.


꽈아앙! 야곤의 몸이 앞으로 꺾이고, 두 다리가 굽혀졌다. 꽈아앙! 야곤의 몸이 완전히 지면에 처박혔다.


그대로 짓뭉개 터트릴 생각이었다. 유진은 한 번 더 분쇄추를 내리찍었다. 확실히 끝내기 위해서 깃털로 야곤을 포위하기도 했다.


무언가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은 좌표의 대신이자 수많은 눈이다. 외날개를 펼친 순간에 유진의 감각은 인간이 가진 오감(五感)을 아득하게 넘어선다.


육감, 아니, 그조차도 우습게 초월해 버린 영역의 새로운 감각. 타고났고, 전생부터 다듬어온 전투감각은 프로미넌스의 낯선 감각에 휘둘리지 않고 혼동하지도 않는다.


목젖에. 아니. 살갗에 칼날이 파고드는 순간에는 언제나 특유의 섬뜩함이 있었다.


미숙하던 시절에는 그 섬뜩함을 너무 늦게 느껴서. 믿지 않아서. 어떨 때는 몸이 따라주지 못해서 전신에 여러 흉터가 남게 되었다.


미숙하던, 300년 전의 이야기다. 지금의 유진은 그렇지 않았다. 파고드는 섬뜩함에 즉각 대처했다. 내리찍던 분쇄추는 도중에 거두지 않았다. 끝까지 밀어냈고, 야곤을 포위했던 깃털에서 창을 쏘았고, 공간을 도약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마력이다.


유진은 그 마력이 낯설지가 않았다. 300년 전에 느꼈던, 그리고 레헤인야르에서 누르에게 느꼈던 불길함.


야곤의 별명은 라비스타의 마수.


라비스타는 멸망의 마왕이 은둔한 영지이며, 야곤은 멸망의 마왕과 계약을 맺은 권속이다. 아비인 오보론 때부터 이어진 계약이다. 스멀스멀 치솟는 마력이 야곤의 털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회갈색의 털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마력이 뒤덮은 것은 털 뿐만이 아니었다. 야곤의 얼굴까지도 검은 마력에 뒤덮이고, 눈동자는 핏물을 녹인 것만 같은 적흑색이 되었다.


분쇄추의 힘이 야곤의 몸 위로 떨어진다. 직전까지만 해도 엎어져 있던 야곤은 이미 두 발로 서서,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육안으로 무언가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 투명한 힘이 분쇄추의 힘을 관통하고 소멸시켰다. 깃털에서 쏴댄 수많은 창도 야곤의 마력을 뚫지 못했다. 오히려 닿는 순간 부식이라도 된 것처럼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멸망의 권속이 갖는 기본적인 힘. 유진도 저 마력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저 불길한 마력은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맞닿는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소멸시킨다.


300년 전, 멸망의 권속은 그 수도 많지 않았고 특별할 만큼 이름을 떨친 놈들도 없었다. 간단한 이유였다. 멸망의 마왕은 권속에게조차 무심했다. 마력은 베풀었지만 그 이상은 해주지 않았다. 보호조차 해주지 않았다.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마력은 계약을 맺어 사용하는 권속조차 위협한다.


그래서 멸망의 권속은 강하지만 빨리 죽을 수밖에 없었다. 격렬한 전투와 전쟁이 계속될수록, 멸망의 마력은 권속의 몸을 무너트리고 자멸하게 만들었다.


기왕이면 놈이 마력을 쓰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튼튼해도 너무 튼튼한 놈인지라 생각처럼 되지가 않았다.


야곤이 고개를 돌렸다. 온몸을 덮은 어둠 덕에 야곤의 얼굴도, 입도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쪽을 보는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어이없는 새끼네.”


유진은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피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있다.


왜 그런 것인지 알았다. 지금 야곤은 전신에 멸망의 마력을 두르고 있다. 그 마력이 계속해서 야곤의 몸을 무너트리고 파괴하는데, 야곤이 가진 수인족 특유의 강력한 재생력이 몸이 파괴되는 속도에 상응하고 있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재생력…… 하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전투가 길어지면 야곤의 재생력은 느려질 거고, 결국에는 멸망의 마력에 자멸하게 되리라.


‘그게 쉬웠으면 놈이 마수라고 불리지도 않았겠지.’


유진도 그딴 식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누구 하나가 특별히 빠르지는 않았다.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뛰어들었다. 야곤은 본격적으로 마력을 둘렀다. 충분히 빠르고 민첩했던 아까에 비해 폭발적으로 속도가 더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욱 까다로워졌다.


이제 야곤은 단순하고 무식하게 맨몸으로 싸우지 않는다. 닿는 것만으로 부식시키는 멸망의 마력을 두르고 있다.


유진은 프로미넌스를 이그니션으로 대체했다. 육체에 가해지는 부담은 아가로트의 반지로 즉시 재생한다. 직접 공격당하는 것은 항상 경계하고 있지만, 이제는 직접 닿는 마력까지 경계해야 한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과거에 싸우던 전장에서는 닿으면 죽는 것이 일상이었다. 마족은 언제나 인간보다 강하고 비열했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고 재생하는데,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


결국은 다를 것 없다는 말이다. 전 범위에서 덮쳐오는 마력에서 빠져나갔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무한의 길을 만들었다. 도약이 거듭될수록, 자색 불꽃으로 형성된 외날개가 빛을 뿜었다.


콰콰쾅! 직접 때려 갈긴 분쇄추가 야곤의 몸을 뒤로 날려 버렸다. 유진은 너덜거리는 손바닥을 재생시키면서 분쇄추를 망토 안에 쑤셔 넣었다. 마창이 공중에서 창날을 뻗어, 야곤의 몸을 허공에 고정시켰다.


마창을 놓고, 용격창과 뇌광궁을 꺼냈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을 수많은 흑점으로 연성했다.


발사. 요란한 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뇌광궁이 번개를, 용격창이 브레스를 난사했다. 흑점은 유성우처럼 야곤에게 쇄도했다.


섬뜩함.


유진은 미련 없이 포격을 멈추고 무기를 집어넣었다. 마나의 포화를 뚫고 마력이 덮쳐왔다. 유진은 직접 닿지 않고 깃털로 도약했다.


야곤과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가까운 거리에 갔다. 망토에서 뽑은 성검과 위니드를 교차해서 휘둘렀다. 푸확! 야곤의 가슴에서 시커먼 피가 뿜어졌다. 야곤은 물러서지 않고 주먹을 던졌다.


꽉 쥔 주먹을 던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위력은 모론을 연상할 만큼 끔찍이도 강했다. 주먹과 함께 터져나간 멸망의 마력이 공간을 휩쓸었다. 내구도에 신경 쓴 깃털이지만, 멸망의 마력을 연거푸 얻어맞으면서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존에 뿌려놓은 깃털이 일격에 소멸했다.


그렇다면 새로 뿌리면 된다. 외날개가 펄럭였다. 불씨가 깃털이 되어 흩어졌다.


야곤이 다시 주먹을 던졌다. 유진은 이번에는 돌파하지 않고, 뒤로 뿌려놓은 깃털로 연달아 도약했다.


멀리 흩뿌리지 않았기에, 야곤도 유진의 도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유진을 추격했다.


꽝, 꽝, 꽈과광! 유진과 야곤은 용마성의 성터를 벗어나 도시까지 이동했다.


도시는 이미 처참한 상태였다. 높은 건물은 모두 무너져 버린 폐허. 그 폐허에서 짐승과 마족들이 동족을 포식하고 있었다. 힐긋 본 그 광경이 유진의 의욕을 북돋웠다.


유진은 도시 쪽으로 날아가던 방향을 틀었다. 빠지지직! 번쩍 터진 뇌광이 유진의 몸을 가속시켰다.


야곤은 더 이상 날아가지 않고, 오히려 이쪽으로 날아오는 유진을 노려보았다.


깃털의 위치는 파악했다. 야곤의 뒤와 주변에는 더 이상 도약지점으로 삼을 깃털이 없다. 미꾸라지처럼 빠른 저 녀석이 우직하게 정면에서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가속하면서 뿌리는 깃털. 언제 사라진들 쫓아 사냥할 준비를 했다.


맞으면 죽는다. 강렬한 예감이 전해질 만큼의 힘. 야곤과 싸우기 전에 모론을 만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론의 힘을 겪고, 놈에게 흠씬 두들겨 봐서 그런지…… 야곤의 터무니없는 힘이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제법 익숙해져서. 그래서 당황하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유진은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야곤의 공격을 기다렸으며, 놈이 공격을 뻗은 순간에 의도했던 대로 정확히 움직였다. 이번에도 유진은 깃털을 통해 도약하지 않았다. 뇌광의 가속을 조율하면서, 더욱 가속하고, 몸을 비틀었다.


콰가각!


어느새 양손에 쥐고 있던 성검과 위니드가 야곤의 팔을 난도질했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야곤의 목을 쌍검으로 찍어 날리듯이 베었다.


썩둑 잘린 야곤의 머리가 하늘로 붕 떠올랐다. 그 순간에 야곤은 두 눈동자에 잔뜩 경악을 담아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내가 네 애비 목도 몇 번을 베었는데.”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야곤을 지나쳤다. 야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냥 분노했다. 태어나서 목이 잘린 것은 처음이었다.


“커으으……!”


여유가 사라졌기에 웃지 않는다. 사냥이 뜻대로 되지 않기에 짜증이 난다. 목이 잘렸기에 화가 난다. 단순하고 일방적이며 순수하던 살의에 감정이 섞여 악의(惡意)가 되었다.


멸망의 힘이 야곤의 악의를 따랐다.


그건 마치 거대한 헤일과 같았다. 야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끝없는 마력이 공간을 휩쓸었다. 이미 쥐고 있던 성검이 유진을 보호하기 위해 빛을 내뿜었다.


화아아아……..


용마성의 잔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지면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공중에 멈춘 유진은 전신의 얼얼함을 느끼며 아가로트의 반지를 의식했다. 육체의 자잘한 부상이 빠르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맙소사.”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앞을 보았다. 검은 마력이 휘감은ㅡ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고깃덩어리. 야곤이었다. 일순간 터트린 마력이 야곤의 몸을 완전히 파괴하고, 다시 재생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의 모습으로 재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재생 중인 야곤의 몸은 아까보다 크고 흉악했다. 그만큼 멸망의 꺼림칙한 불길함도 강해졌다. 유진은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은 불쾌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꺄아아아악!”


저 아래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라이미르아는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지하에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저 험난한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안전한 결계를 구축하고 앉아 있으려 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라이미르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머리 위의 땅이 멋대로 날아가 버린 것뿐이다.


아곤


성터의 지면이 대거 소멸해 버렸다.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할 천장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지만, 라이미르아는 안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길게 이어지던 비명이 뚝 멎은 것은. 머리 위 높은 곳에 멈춘 유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이미르아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서 입술을 뻐끔거렸다.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라이미르아의 삶 200년을 통틀어 최고최대의 위기인 것은 틀림없었다.


유진은 훤히 드러난 라이미르아와 용마성의 중심핵을 힐긋 쳐다보았다. 땅속 깊이 처박혀 있으니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야곤의 힘이 유진의 생각 이상으로 무식하고 강했다.


“보, 보, 본녀를 구하러 온 것이냐?”


저 아래의 라이미르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지하에서 날아오르려고 하기에, 유진은 대답보다 먼저 활짝 핀 손을 뻗어주었다.


“거기 있어라.”


“뭐라……?”


“거기 있는 게 여기보다 더 안전할 거다.”


그렇단다. 라이미르아는 반론하지 않고 일으켰던 몸을 다시 낮췄다.


“……잠깐…… 차라리 당장 중심핵을 부수는 편이 낫지 않으냐? 그렇다면 본녀도 용마성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휘말릴 일도…….”


굉장히 타당한 말이었지만, 유진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설마 드래곤이 그렇게 쉽게 죽으려고.’


유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은 이 전투에서 라이미르아가 휘말려 죽는 것. 하지만 라이미르아는 아주 튼튼한 데다 약소하나마 용언까지 쓸 수 있으니,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라이미르아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었다. 저 멀리서 야곤이 움직여,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멸망과 악의를 두른 야곤은 고깃덩어리에서 탈피했다. 외형적으로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덩치가 조금 커진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놈이 발하는 불길한 마력은 아까보다 더욱 커져 있었다.


아무리 라이미르아가 튼튼하다지만, 저 끔찍한 마력을 직격당한다면 죽어버릴 거다. 그건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었다.


드래곤은 마왕의 마력에 취약하다. 특히 멸망의 마왕의 손에 절반의 드래곤이 전멸하였으니, 멸망의 권속인 야곤을 가까이 오게 두면 안 된다 생각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라.”


조용히 경고를 전한 뒤. 유진은 천천히 앞으로 날아갔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거대한 마력의 한복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야곤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맙소사…….”


카라드 백작은 마물의 등에 서서, 폐허로 변해가는 용마성을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3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흑룡공의 후광으로 보호받던 공작령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변방 출신이면서도 출중한 능력을 증명해 이 자리까지 오른 신흥귀족에게 말이다.


이 광경은 몇 날 며칠 보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즐거웠지만, 카라드 백작은 더 이상 그를 음미할 수가 없었다. 성터에서부터 날아온 야곤과ㅡ 그가 발하는 거대한 악의 때문이었다. 카라드 백작을 필두로 한 비행부대는 전진도 후퇴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야곤?”


헬무드의 삼공, 그다음의 주역을 꼽을 때에 항상 거론되는 마족. 그들과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패악의 오보론, 아버지를 쓰러트렸다는 것만으로도 야곤의 힘은 입증된 것이다.


그런 야곤이 누군가와 전투를 벌였다. 압도하지 못하고 뒤로 밀렸다.


본래부터 끔찍하고 흉흉하던 남자였다. 그의 몸에서는 언제나 피 냄새가 났지만, 야곤에게는 그것과는 다른ㅡ 본질적인 불길함이 있었다.


카라드 백작은 지금에야 그 불길함의 정체를 알았다. 멸망의 마왕. 그 마력은 같은 마족에게마저도 불길함을 전한다.


그리고 야곤은 아군과 적을 구분하지 않는다.


수인은 엘프처럼 아득한 세월을 살며 정령의 사랑을 받지 않는다. 인간처럼 마나에 대한 조예와 대륙 전역을 지배할 번식력도 없다.


대신에 수인은 강인한 육체를 갖는다. 마나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그만큼 날카롭고 강한 이빨과 발톱을 갖는다. 강인한 육체는 어지간한 공격에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당한 상처는 빠르게 재생한다.


어렸을 때 들었던 수인의 역사. 오보론이 이끌던 수인들은 본성을 억누르지 않은 맹수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시대에서 피와 살에 중독되었고, 더 많은 살육과 포식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마왕과 계약하면 수인이라도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된다. 광란의 마왕에게 투신했고, 광란의 함락 후에는 멸망의 마왕에게 의탁했다.


더 많은 살육과 포식을 위해 동족을 배신하고, 섬기던 마왕을 2번이나 바꾼 것이 지금 세대 수인 마족의 선대인 것이다. 그러한 습성은 본성이 되어 야곤에게 전해졌다.


배가 고팠다.


왜 배가 고픈지, 답은 뻔히 알았다. 피를 많이 흘렸다. 재생을 너무 많이 했다. 그렇다면 먹어서 채울 수밖에. 야곤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본성을 거스르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는 어둠 속에서 살점이 꿈틀거렸다.


백작 작위는 도박판에서 딴 것이 아니다. 하급 귀족과의 서열잡이, 영지전, 온갖 전투에서 승리해 왔기에 지금의 카라드 백작이 있는 것이다. 그는 미쳐 날뛰는 악의 속에서 조용히 날을 세운 살의를 느꼈다.


경고를 외치거나, 마물에게 명령할 틈은 없었다. 카라드 백작은 즉시 마물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그 대형 마물의 등에는 백작을 오랫동안 보필해 온 친위대가 타고 있었지만, 백작은 투신에 일말의 망설임도 갖지 않았다.


살짝 망설인 것만으로 휘말려 죽게 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야곤에게서 뻗어져 나온 어둠과 살덩어리가 거대한 입이 되더니, 마물과 친위대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끔찍한 죽음이었다. 멸망의 마력은 집어삼킨 마물과 친위대를 갈기갈기 찢고 가루로 만들어 소멸시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배가 차지 않았다.


푸확! 야곤에게서 수십 가닥의 어둠이 치솟았다.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폐허로 변해가는 도시로 쏘아졌다. 그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아가리를 쩍 벌리며 먹잇감을 탐색했다.


마족 간의 동족포식. 옛날에 질리도록 봤다. 주술이나 흑마법이라면 모를까, 인간이 같은 인간을 먹는다고 해서 특별히 강해지는 일은 없다.


하지만 마족은 다르다. 마족에게 있어서 가장 빠르게 힘을 쌓는 방법이 바로 동족포식이다. 쉽고 빠른 만큼 리스크도 있지만, 서로 죽이는 것이 일상이던 전쟁시대에는 리스크를 감수하며 격과 덩치를 불리고 싶어 하는 놈은 얼마든지 있었다.


‘온다.’


야곤이 생각했다.


굶주림이란 본성에 충실하면서도 이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야곤은 냉정하게 방금 전의 전투를 복기해 보았다.


일방적이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야곤은 태어났을 때부터 강자였다. 싸워서 진 적이 없다. 죽이고 싶은 놈을 죽이지 못한 적이 없다. 배가 고프면 당연히 먹었고, 목이 마르면 마셨다.


그런데 저 사냥감에게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싸우는데 이기지 못했다. 죽이고 싶은데 죽일 수가 없다. 배가 고픈데 먹을 수가 없고, 목이 마른데 마실 수가 없다. 야곤이 삶에서 오늘처럼 부자유를 겪은 적은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지금 같은 순간을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용마성 침공. 흑룡공도 없다고 했다. 배불리 먹기는 하겠지만, 전쟁다운 즐거움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뭔가. 흑룡공은 없었지만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었다. 놈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했다. 목이 잘리고 머리가 날아갔다.


포식과 소화를 끝낸 야곤은 마력을 거두어 몸에 둘렀다. 몸을 갉아먹는 마력이지만 그 대가로 힘을 얻었다.


굉음이 처박혔다.


순간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의식을 붙잡았다. 충돌은 당연하다는 듯이 야곤을 뒤로 날려 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뚫고 나간 건물의 잔해가 야곤을 파묻으려 했지만, 멸망의 마력은 그 잔해까지도 통째로 지워 버렸다.


유진은 울렁거리는 속을 가다듬고, 뒤흔들리는 마나를 통제했다. 저 아래에서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야곤을 노려보며 위니드를 치켜들었다.


바람이 격해졌다. 유진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풍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높이 들었던 위니드를 아래로 내리찍자, 그 거대한 마나의 폭풍이 야곤에게 처박혔다.


그 일격으로 도시 전체가 붕괴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마족과, 용마성을 습격한 마족들이 죄다 폭풍에 휘말렸다. 그들의 처지는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유진은 폭풍 속에서도 몸을 일으키는 야곤을 노려보았다. 흩날리는 모든 깃털이 야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었다.


멸망의 마력은 폭풍 속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꽈아앙! 야곤이 발을 구르자 지면이 증발하고 폭풍이 흩어졌다. 유진은 위니드를 성검으로 바꿔 쥐고서 아래로 떨어졌다.


검과 발톱, 아니, 그보다 먼저 빛과 마력이 충돌했다. 성검이 내뿜는 빛이 멸망의 마력에 저항했다. 하지만 특별히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서열 1위 대마왕의 마력은 그만큼이나 강했다.


정면충돌을 고집한다면 빛이 삼켜지고 검신이 소멸해 버릴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유진이 정확한 순간에 검을 흘리고 물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진은 그런 식으로 야곤의 마력을 깎아냈다.


“괴물들이다.”


카라드 백작은 펑펑 터져 나가는 힘의 파장에 허우적거렸다. 이 도시에는 수백에 달하던 군세와, 그보다 몇 배는 많은 마족들이 살고 있었다. ㅡ그 대부분이 전투에 휘말린 것만으로 죽어버렸다.


지금 충돌하는 두 힘이 마족에게는 끔찍한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멸망의 마력은 같은 마족이라도 소멸시키고, 성검의 빛은 마족을 정화시킨다. 아무리 마족이라도 도망치지 못하면 휘말려 죽어버린다.


‘크게 밀리지는 않지만 우위도 점할 수 없다.’


짧은 순간, 성검을 수백 번을 휘둘렀다. 야곤이 두른 마력을 연거푸 베었지만 정작 놈의 털가죽까지는 칼날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족의 마력이라면 닿는 순간에 정화해 버리는 빛인데도 말이다.


‘대마왕.’


심지어 서열 1위의 마왕이다. 성검이 무디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멸망의 마력을 일소시키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그래도 성검은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이 미쳐 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마력에서 정신을 보호해주는 것도, 유진의 마나가 마력에 침식당하지 않게 해주는 것도 성검의 빛 때문이다.


야곤을 죽이는 데 필요한 것은 몸을 지키는 빛이 아니다.


비추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검의 형상을 한 파멸.


월광검.


날뛰는 악의에 물러서며,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로디의 광산에서 파편을 회수한 후, 월광검을 제대로 꺼낸 적은 없었다.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솔직히 말해서, 유진은 이 월광검을 완벽하게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휘두르는 것 정도야 할 수 있다. 하지만 월광검을 휘둘렀을 때, 파괴할 영역을 정확히 지정하고 힘의 세기를 조율할 자신이 없었다.


광산에서도 그랬다. 파편들이 모였을 때. 유진은 틀림없이 월광검을 쥐고 있었다. 그때 유진은 광산을 매몰시킨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시작된 공명을 최대한 컨트롤하려고 했다.


하지 못했다. 유진은 최선을 다해 빛을 억누르려 했지만, 의지를 넘어선 파멸의 빛이 주변을 휩쓸고 광산을 무너트렸다. 다행히 헬무드를 떠도는 중에는 월광검을 꺼내야 할 만한 상황은 없어서, 나중에 별 탈이 없을 장소에서 차근차근 월광검을 조율할 생각이었다.


‘조율이라.’


씰룩거리는 뺨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유진은 히죽 웃으면서 월광검의 칼자루를 뽑았다.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파편을 회수한 월광검. 솔직히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 궁금했다.


300년 전. 월광검은 마왕의 마력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지금의 월광검에 그때 같은 위력은 기대 안 해.’


특색 없는 칼자루. 칼날을 감추던 칼집을 뽑았다.


광산 이전의 월광검은 파편 하나로 만들어졌던 빛의 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광산에서 회수한 파편이 더해지면서, 월광검의 검신은 1/3 정도 수복되었다.


부족한 검신은 창백한 달빛이 채웠다. 파편 하나였을 적의 월광검은 빛이 마구잡이로 날뛰어댔는데, 오히려 지금은 정련된 칼날처럼 곧게 뻗었다.


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마구잡이로 날뛰기를 바라는 터무니없는 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이 욱신거릴 정도다. 유진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월광검을 옆으로 들었다.


고오오오…… 달빛이 흔들렸다. 검강이나 공검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월광검은 그런 종류의 기교와 합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것은 검의 형상을 한 파멸이다. 무엇과도 섞이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것을 갈기갈기 찢고 붕괴시키고 소멸시킨다. 300년 전의 베르무트조차 월광검에 여러 기교를 섞지 못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월광검은 그냥 휘두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악의 가득한 마력이 달빛에 뒤덮였다. 모든 것을 침식해 멸망시키는 마력이, 달빛은 집어삼키지 못했다. 오히려 멸망의 마력은 달빛 속에서 흐느적대다 녹아버렸다.


휘두른 검광이 반월을 그렸다. 야곤은 본능적으로 뒤로 펄쩍 뛰었다.


반월이 삼키고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뭐지?’


털이 곤두섰다. 피부에 소름이 돋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심장은 누가 움켜쥐고 흔드는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 야곤을 혼란스럽게 했다.


야곤은 달빛을 쥔 유진을 보았다. 지금 저 손에 쥐어진 빛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검강? 마법? 신성력?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저 빛은 그 무엇도 아니면서 그 무엇이든 파멸시키는 힘이었다. 야곤은 저 빛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이해했고, 직감되는 죽음에 불길함을 느꼈다.


“크허어엉!”


등 돌려 도망친다는 것은 야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다. 공포라는 낯선 감정을 포효로 감추고, 야곤은 허공을 박찼다.


꽈과광!


월광과 마력이 어울렀다. 검강이나 공검 같은 기교는 쓰지 않는다. 유진은 그저 할 수 있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마력을 피해내고, 충분하고 올바른 곳에 월광검을 뻗었다. 제아무리 강한 검이라지만 대충 휘둘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검은 정교할수록 잘 닿는 법이다.


도시가.


아니, 세상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곳은 ‘용마성’이라 일컬어지던 장소가 아니었다. 폐허는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가 되었으며, 땅거죽은 모조리 뒤집혔다.


월광이 한 번 더 휩쓸었을 때, 그 뒤집힌 땅거죽마저 소멸했다. 야곤은 그 빛 속에서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월광이 번뜩일 때마다 지면이 점점 낮아진다. 발을 디딜 곳이 사라져 간다. 저 미쳐 버린 월광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용마성을 통째로 깎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아니, 아니다. 하늘로 펄쩍 뛰어오른 야곤은 주변을 둘러보고서 깨달았다.


용마성의 대지가 통째로 깎이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냥, 용마성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지속된 파괴행위에 중심핵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곤두박질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용마성의 고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애매한 추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왕이면 이 성이 지상영지 카라블룸에 통째로 처박혔으면 좋겠다.


유진은 씩 웃으며 프로미넌스를 활짝 펼쳤다. 야곤은 반사적으로 움찔 뒤로 물러서 버렸다. 여태까지 저 불꽃의 날개가 떨쳐졌을 때마다 뭔가 반드시 일어났었는데,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뭘 한 거냐?”


“부쉈어.”


야곤이 물었고, 유진은 웃으며 답했다. ㅡ쿠우우웅! 용마성 전체가 뒤흔들렸다. 월광검을 휘두른 것도 아닌데 지진이 일어났다. 그 지진은 만신창이가 된 땅덩어리를 쪼개면서 용마성의 대지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용마성의 추락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유진이 한 일은 간단했다.


라이미르아를 감시하기 위해 중심핵 쪽에 프로미넌스의 깃털을 몇 장 남겨놓았었다.


그 깃털로 흑점을 만들어 중심핵에 처박았다. 그로 인해 중심핵은 산산조각이 났고, 통제수단이 완전히 사라진 용마성이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함께 죽자는 거냐?”


야곤은 점점 빨라지는 추락을 느끼면서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 질문에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 이 땅덩어리가 아래에 처박히기 전에 뒈져.”


아곤


내뱉은 말을 증명하듯이 유진은 허리를 비틀고 검을 휘둘렀다. 터져 나온 월광이 허공을 휩쓸었다. 야곤은 맞부딪치지 않고 펄쩍 뛰었다.


중심핵의 파괴로 시작된 추락. 수백 년 하늘을 떠다니던 땅덩어리가 산산조각 나면서 흩어지고 있다. 야곤은 대지의 잔해를 박차며 허공을 뛰었다.


단순히 뛰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몸에 두른 마력이 야곤의 뜻대로 움직였다. 아까 수많은 마족들을 집어삼켰던 마력이 재현되었다. 야곤은 등 뒤에서 튀어나온 마력의 촉수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유진을 공격했다.


그 모습은 거대한 곰의 등에 수십 마리의 뱀이 돋아난 것처럼 보였는데, 그리 멋진 모습은 아니었다.


유진은 혀를 쯧 차면서 프로미넌스를 가속시켰다. 본래부터 빠른 뇌광이지만, 프로미넌스의 날개를 펼친 상태에서는 더욱 빠르다. 통제도 완벽해서 예전처럼 속도에 휘둘리는 일도 없었다.


너무 빨라서 놓쳐 버리는 것? 그야말로 우문이다. 지금 유진은 이 공간 전체를 관측하고 있다.


그렇기에, 시야 바깥으로 사라진 야곤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았다.


덮쳐오는 뱀들의 아가리 너머. 야곤의 거대한 발톱에 마력이 응집되고 있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월광검의 칼자루를 역수로 쥐었다.


빠지직! 자색의 번개가 꼬리를 그리며 이어졌다. 그 번갯불을 탁색의 월광이 뒤덮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참격이 야곤의 마력을 일소시켰다.


야곤은 침식당하는 마력을 과감히 끊어냈다. 저 불길하기만 한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멸망의 마왕은 서열 1위의 마왕이다. 그 유폐의 마왕보다도 격이 높은 대마왕이란 말이다. 그런 대마왕의 마력이 힘겨루기조차 되지 않는다.


“두령?!”


살아남은 마족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추락하는 건물 잔해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대던 수인이 야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야곤은 그 고함에 답하는 대신에 마력의 채찍을 뻗었다.


배고픔 때문이 아니었다. 야곤은 끌어당긴 부하를 이쪽까지 덮쳐오는 월광의 방패막이로 삼았다. 꽤 실력과 힘이 뛰어난 부하인데, 월광의 참격 안에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 광경을 직접 보고, 야곤은 다시금 납득했다. 지금 유진과 전투가 성립하는 것은 몸에 두른 멸망의 마력 때문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야곤은 진즉에 저 월광 속에서 소멸했을 것이다.


“……넌…….”


ㅡ쿠웅! 야곤은 크게 뒤로 물러섰다. 성의 추락은 점점 가속되고 있지만, 야곤은 그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거대한 성이 지면에 떨어진다면 지상영지 카라블룸이 초토화되겠지만, 그것도 야곤이 알 바는 아니었다. 추락 정도로 야곤은 죽지 않는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ㅡ 유진이 내뱉은 말뿐이었다. 너는 이 땅덩어리가 아래에 처박히기 전에 뒈져. 그 이죽거림이 오만하기만 한 도발이 아니라는 것은 느끼고 있다.


어쩌면 정말로.


“대체 뭐냐?”


타인에게 무심하고 제 본능에만 충실했다. 하지만 그런 야곤조차도 유진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


그게 전부인가? 고작 그것만으로 저렇게나 강하단 말인가? 야곤은 강하다. 삼공을 제외한다면 헬무드에서 야곤만큼의 힘을 쌓은 마족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야곤은 단 한 번도 유진을 압도하지 못했다. 압도는커녕 유효타를 꽂아 넣은 적도 없다. 피 한 방울 흘리게 하지 못했다. 야곤의 광폭한 힘이 유진에게 해낸 것은, 그의 몸을 뒤로 밀어낸 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방어는 꿰뚫지 못했다…….


저 알 수 없는 검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전황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이었기 때문이다. 야곤은 유진이 월광검을 꺼내기 전조차도 압도할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기묘한 움직임…… 이었다. 어린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면서도 숙련된…… 상대를 어린아이로 취급하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실력.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얼굴.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던 여유.


“나는 네가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야곤은 유진 라이언하트를 모른다. 실제로 만난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그 전에도, 이름은 들었지만 많은 관심을 둔 적은 없었다.


야곤의 시선은 아래가 아닌 위를 보았다. 헬무드의 삼공.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을 맺은 삼마. 굳이 대륙에 시선을 주어야 한다면, 대륙 제일로 논해지는 기사들에게나 시선을 주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너무 젊었다.


“너는…… 위대한 베르무트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야곤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위대한 베르무트 사이에 공통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 결국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런 비밀이 있지 않고서는 자신이 압도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네 애비 목도 몇 번을 베었는데.’


열이 잔뜩 오른 머리.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말이 다시금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이 야곤에게 어떠한 확신을 주었다.


“하멜.”


유진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하멜 다이너스.”


이곳에서 유진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은 야곤뿐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오늘, 조금 뒤에 야곤은 죽을 것이다.


유진의 대답에 야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멜 다이너스.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몰살의 하멜.”


야곤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걸렸다. 부정과 탄식, 그런 것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 정체가 야곤을 후련하고 즐겁게 만들었다. 물어 죽인 아비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하멜의 위명은 대륙보다 헬무드에서 오히려 더 유명했다.


영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야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잔해를 박찼다. 높은 공중에서 야곤이 운석초롬 추락했다. 단순무식한 돌진, 유진은 그 움직임을 직시하면서 허리를 틀었다.


마력과 월광이 교차했다. 시커먼 피가 튀었다. 야곤의 거대한 팔이 썩둑 잘려서 흩날렸다. 일검에 잘렸다는 것이 놀랍고도 신기했다. 야곤은 잘린 팔을 무시하고 손아귀의 마력을 터트렸다.


마력이 일으킨 폭발이 유진을 집어삼켰다. 그 짧은 사이에 잘린 팔도 재생되었다. 야곤이 양팔을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손톱이 참격을 그렸다. 어지럽게 떠돌던 잔해가 난도질당했다.


그 어디에도 유진의 모습은 없었다. 야곤은 섬뜩함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건물이 야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제벨라 스테이크 하우스. 커다란 간판에 새겨진 상호가 야곤의 눈동자에 한가득 새겨졌다.


내리꽂히는 건물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꽈지지직! 건물이 둘로 쪼개지면서 콘크리트 먼지가 쏟아졌다. 크허엉! 야곤은 뿌연 먼지 사이에서 울부짖었다.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온 주변을 휩쓸었다.


콘크리트 먼지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에 자그마한 점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점들은 서로 달라붙어 크기를 키웠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은 고작해야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덩어리였으나, 야곤은 그 흑점이 품은 가공할 힘을 느꼈다.


“세상에나.”


다른 누군가를 경악시키는 것은 언제나 야곤의 몫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야곤은 덮쳐오는 폭력에 헛웃음을 흘렸다.


ㅡ꽈과광! 무수히 많은 흑점이 야곤을 덮쳤다.


“크륵……!”


일그러진 입술, 악다문 이빨 사이로 핏물이 튀었다. 방어에 집중했는데도 뚫려 버렸다. 멸망의 마력은 마족에게 있어서도 독이다. 그 지독한 마력을 두르면서 지속적으로 재생력을 소모했다. 거기에다 목이 베이고, 팔이 베이고, 그 외에도 여러 상처를 입었다. 힘의 근간인 마력의 일부마저 월광검에 소멸되었다…….


야곤은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고서 주먹을 들었다. 하지만 유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공간도약으로 또 모습을 감추었나. 아니면 내 시야가 좁아지고 감각이 무뎌진 것인가? 야곤은 핏물을 삼키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죽음이 온다.


무뎌진 것인가 싶던 감각이 비명처럼 경고를 전했다. 야곤은 언제나 충실했던 본성에 따라 손을 뻗었다. ㅡ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반격이나 방어 말고 무조건 피해야 했다.


깨닫는 것이 늦었다. 섬뜩하게 뽑혀 나온 월광이 초승달을 그렸다. 그를 가로막으려 했던 야곤의 오른손은 마력과 함께 두 동강이 났다.


야곤은 급히 팔을 회수하려 했지만, 휘어졌던 초승달이 다시 위로 치솟더니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써걱! 달빛이 야곤의 팔을 어깨부터 절단했다.


‘아직 재생할 수 있다.’


조금 더딜 뿐. 하나 남은 손을 활짝 펼쳤다. 상대는 인간.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몰살의 하멜이라 해도, 결국은 인간이다.


한 번.


한 번만 닿으면 된다. 야곤의 힘이라면 닿는 순간에 저 몸을 쥐어 터트릴 수 있다. 오러실드건 뭐건 멸망의 마력과 야곤의 힘은 방어 통째로 몸을 으깨 버릴 것이다.


그를 바라며 손을 뻗었다. 속내야 뻔했고, 호응해 주지 않을 만큼 인정머리가 없지도 않았다. 유진은 입꼬리를 비틀면서 손을 마주 뻗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야곤의 손과 가까이 오면서 천천히 펼쳐졌다.


야곤은, 유진의 손아귀에서 피어나는 새하얀 불빛을 보았다. 반짝이는 빛이 서로 달라붙었다. 둥그런 구체 속에서 검은 점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클립스.”


속삭이는 조롱이 야곤을 파고들었다. 유진이 던진 태양이 완전한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ㅡ꽈아아앙! 저 먼 하늘의 태양이 몸에 처박힌 것만 같았다. 정통으로 처먹은 이클립스. 프로미넌스를 거친 약식도 아니다. 그 어마어마한 힘이 야곤의 의식을 완전히 날려 버렸다.


콰콰쾅! 의식과 함께 야곤의 몸도 멀리 날아갔다. 그 몸은 추락 중인 지면을 강타, 아니, 꿰뚫었다. 땅속 깊이 처박힌 야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쿨럭쿨럭 기침을 토했다.


처박힌 몸이 만들어낸 구멍으로 세상을 올려다보았다. 우물 속에서 보는 하늘처럼 시야가 좁고 한정되어 있었다. 그 자그마한 시야를 유진이 가득 채웠다.


무수히 많은 흑점이, 태양이 떨어졌다. 야곤은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양팔과 머리를 보호했다.


폭격이 계속될수록 대지가 사라져 간다. 그만큼 야곤이 움직일 공간은 넓어졌지만, 거듭된 폭격은 야곤에게 모든 자유를 앗아갔다.


‘죽는다.’


실감이 강해진다. 야곤은 컥컥 피를 토하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붉고 검은 시야. 폭격이 끝나는 순간…… 아니, 생사를 확인하러 다가오는 순간에. 야곤은 아직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을 상상했다. 일방적으로 몰리던 싸움, 근접했던 죽음. 하지만 결국에는 살아남을 것이다. 여태까지의 삶에서 가장 고됐던 전투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단 한 번도 위기와 죽음을 체감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그를 체감하게 된 기념비적인 날이 될 것이다. 뛰어넘은 사선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아니, 몰살의 하멜의 심장과 모든 것을 씹어 삼킨 뒤에 나는.


빛이 시야를 밝혔다. 붉게 만들었떤 피도, 으깨져 보이지 않던 어둠도 사라졌다. 야곤의 두 눈에는 저 섬뜩하고 탁한 달빛만이 가득했다. 마치 눈동자 안에 만월이 뜬 것만 같았다.


찰나를 노리려 했다. 어떻게…… 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욕심 많은 바람이었을 뿐이니. 야곤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는 마지막에 직감해 버린 것이다.


이길 수 없다. 오늘, 지금, 나는 죽는다. 결국은 유진의 말이 맞았다. 아직ㅡ 용마성은 땅에 처박히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야곤이 땅속 깊이 처박혔고, 이제는 곧 죽게 될 거다.


“몰살의 하멜.”


야곤은 가슴에 박힌 월광검을 응시했다. 여태까지는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칼날을 뒤덮은 빛이 너무나도 강렬하고 오싹하고 불길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제 심장을 꿰뚫고 있으면,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검은 대체 뭐냐.”


심장을 꿰뚫은 달빛이 야곤의 몸을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그가 두르고 있던 마력은 진즉에 전소해 버렸다.


“월광검.”


“역시.”


야곤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릴 적에, 오보론에게 들었던 적이 있다. 베르무트가 가진 가장 끔찍하면서 강력한 검. 용사의 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불길한 검. 세상 모든 것을 파멸해 버릴 것만 같은 검. 라이언하트에 계승되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검.


“멸망의 마왕은 어떤 마왕이냐.”


유진은 월광검을 뽑지 않고서 물었다.


야곤은 멸망의 권속. 얼마 되지 않은 권속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 이름을 떨친 놈이다. 어쩌면 멸망의 마왕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식할 수 없는 마왕.”


야곤은 피범벅인 입술로 웃었다.


실제로 만난 적은…… 있다. 아무도 없는 신전.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고 있으면, 어느새 계약이 맺어져 있다. 야곤은 그렇게 계약을 맺었고, 멸망의 마왕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너 정도 되는 놈도 모르는 거냐.”


“나는 멸망의 마왕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멸망의 마왕은 권속의 죽음에 무감각하다. ……오히려 광란의 마왕이 특별했던 것이지, 모든 마왕은 권속에 큰 의의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특히 마음에 들었던 권속이라면, 죽지 않을 정도의 힘 정도는 베풀어 줄 수 있을 텐데. 멸망의 마왕은 그러지 않았다. 야곤도 그를 기대하지 않았다.


“같은 마왕이라도 멸망을 이해할까 싶군.”


야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를 토했다.


“……몰살의 하멜. 너는…… 내 아버지, 오보론을 알지.”


“어.”


“나는 내 아버지보다 강했나?”


마지막 질문이었다. 야곤은 진심으로 그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다. 자기 자신이 아버지보다 강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전성기와 싸워보고 지금의 자신을 죽이는 몰살의 하멜에게도 답을 듣고 싶었다.


“네가 조금 더 강한 것 같기는 한데.”


유진은 피식 웃으며 월광검을 뽑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그때보다 너무 세졌거든.”


만족할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물어볼 기력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심장에서 뽑혀 나온 월광검이 야곤의 목을 베었다.


나의 하멜


용마성의 중심핵 앞. 라이미르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떨었다. 갑작 터진 폭발로 중심핵은 파괴되었지만, 그녀는 아직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이유 모를 폭발이 중심핵을 파괴한 것은 맞다.


하지만 모두 다, 완벽하게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교묘하게 조절된 것처럼, 폭발은 중심핵의 절반 정도만 날려 버렸다.


시스템의 중추는 파괴되었으니 용마성은 더 버티지 못하고 추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라이미르아는 자유를 얻지 못했다. 거의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도, 중심핵은 그 존재만으로 라이미르아를 얽매고 있었다.


그것은 라이자키아가 용마성의 안위보다 라이미르아에게 훨씬 집착했다는 뜻이었다. 설령 중심핵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용마성이 파멸을 맞는 일이 있어도, 라이미르아에게 끝까지 자유를 주지 않겠다는 망집.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용마성과 라이미르아, 둘이 함께 파멸하기를 바란 저주.


당연히 라이미르아는 아버지 흑룡공의 악의까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라이미르아는 용마성의 고도가 점점 떨어지는 것과, 그리 멀지 않은 도시에서의 폭음ㅡ 그에 동반된 파괴행위에 덜덜 떨었다.


도시가 사라지고 있다. 저 거대한 용마성의 도시가. 땅덩어리가, 과자를 쪼개듯이 조각나고 있다……. 그리고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펑펑 터지며 가루로 바스러졌다.


꿀꺽.


라이미르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연속된 폭발과 파괴 속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침입자의 모습이 보였다. 전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익숙하지 않은 라이미르아였지만, 저 모든 것이 일방적인 폭력이라는 것은 알았다.


상대는 불길한 마력을 두른 괴물. 드래곤의 본능이 경고하기를, 절대로 대적해서는 안 될 존재. 그런 괴물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날아가고, 팔이 잘리고, 피를 뿜다가ㅡ 결국에는 큼직한 건물 잔해에 처박히고…….


‘죽었다!’


괴물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들던 불길한 힘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라이미르아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름도 모르는 침입자.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떠…… 떠, 떨어진다…….”


ㅡ쿠웅! 추락 중인 용마성의 잔해가 뒤흔들렸다. 라이미르아는 울상을 지으며 중심핵을 끌어안았다.


이제 정말 머지않았다. 앞으로 수십 초 이내에, 얼마 남지 않은 용마성의 땅덩어리는 지상 영지 카라블룸에 처박혀 대재앙을 일으키리라.


“너 뭐하냐?”


화륵! 번개불꽃이 튀어 올랐다. 깃털을 좌표 삼아 도약한 유진은 피곤한 얼굴로 라이미르아를 쳐다보았다.


프로미넌스를 이그니션으로 대체했다. 그로 인한 부담은 아가로트의 반지로 충당했다. 그는 결국 유진의 원기를 소모한 것이라, 이그니션의 반동에 비할 만큼은 아니어도 피로가 극심했다.


“보, 보보, 본녀…… 본녀는 도망칠 수가 없느니라…….”


라이미르아는 덜덜 떠는 목소리를 내며 울먹거렸다. 유진은 반쯤 파괴 된 중심핵을 쳐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퍼펑! 유진이 쏘아낸 검강이 중심핵을 완전히 파괴했다.


“히익!”


라이미르아는 바로 옆에서 터진 폭발에 놀랐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양팔로 머리를 끌어안았다.


“끼약!”


유진은 말로 설명하는 대신에 먼저 행동했다. 버둥거리는 라이미르아를 한쪽 팔로 끌어안고, 아직 불타오르는 프로미넌스를 활짝 펼쳤다.


유진은 순식간에 용마성에서 벗어나 높은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라이미르아는 가속으로 가해지는 부담에 비명을 지르면서 유진의 팔을 끌어안았다. 충분한 높이까지 날아오른 뒤에.


추락하는 용마성을 내려다보았다.


“이야.”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ㅡ꽈아아아앙! 이 세상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커다란 굉음이 터졌다. 어마어마한 진동이 하늘까지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아득한 높이에서 추락한 용마성이, 대마법사가 일으킨 메테오샤워처럼 지상영지 카라블룸에 처박혀 버린 것이다.


카라블룸은 저런 대공폭격에 대한 방비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마족 시민들의 피난이 제때 이뤄졌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연달아 추락한 용마성의 잔해는 도시를 완전히 휩쓸어 버렸다. 직접 처박힌 곳은 그 충격에 지면이 소멸했고, 추락지점에서 시작된 충격파가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쿠구구구궁! 폭음과 진동이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유진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그는 이 거대한 용마성을 굳이 조각냈다. 여러 번, 여러 곳에 떨어트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과자라도 챙겨올 걸 그랬어.”


“저한테 있어요.”


망토 안의 메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녀는 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재해를 힐긋거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팝콘상자를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팝콘을 먹으며 카라블룸이 초토화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음료수가 없는데도 팝콘은 목메는 일 없이 꿀떡꿀떡 잘 넘어갔다.


“아앗…… 앗…… 본녀의…… 본녀의 영지가아…….”


“뭐가 네 영지냐.”


“맞아요. 뭐가 네 영지인가요? 영지를 버리고 도망치겠다고 결정한 것은 당신이었잖아요.”


“우우…… 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니라. 본녀는 영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싶었지만, 본녀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느니라. 본녀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니라.”


라이미르아는 그렇게 변명하며, 유진과 메르가 먹는 팝콘을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신에 근접한 생물. 마법의 조종. 그리 불리는 드래곤은 식사를 할 필요가 없다. 마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도 기호 삼아서 식사 정도는 한다. 라이미르아도 200년 동안 별궁에서 이런저런 음식을 먹곤 했었다.


하지만. 드래곤, 흑룡공의 혈육, 용공녀. 그런 자각과 자존과 존엄을 가진 라이미르아는 저런 불결하고 하찮아 보이는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평소였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팝콘을 씹는 유진과 메르의 표정이 참으로 만족스러워 보였다. 고소하면서 짭짤한 향과 와작거리는 소리가 라이미르아의 호기심을 잡아끌었다.


“그것…… 참으로 맛이 있어 보이는구나. 공물로 바친다면 본녀가 참으로 기쁠 것이니라.”


“뭐라는 거야.”


“태도가 막돼먹어서 안 줄 거예요.”


단호한 거절에 라이미르아의 눈동자에 절망이 내리 앉았다. 별 애착도 없던 영지가 파괴당하는 것보다, 먹고 싶은 팝콘을 받지 못하는 것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쯧.”


초토화되던 지상을 보던 유진의 눈동자가 얇아졌다. 도시 바깥까지 밀고 나가던 흙먼지와 파괴가, 어느 경계선에서부터 부자연스럽게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워낙 높은 곳에서 보고 있던 덕에 그 경계선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파괴에 휩쓸린 것은 카라블룸뿐. 영지의 밖까지는 충격이 일절 전해지지 않았다. 커다란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뒤흔들리고 있는데, 경계선 바로 밖에는 지면이 갈라지기는커녕 나무 한 그루 쓰러지지 않았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파괴가 경계선 밖으로 넘어가지 않게끔 제한한 것이다.


* * *


“허억…… 헉…….”


살았다.


아까부터 드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파괴에 휩쓸려 왼팔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기는 했지만, 죽지 않았다. 그 말도 안 되는 싸움에서 왼팔 하나로 목숨을 건졌다면 오히려 싸게 먹힌 것.


당장 재생되지 않는 것은 야곤이 휘둘렀던 기묘하고 불길한 마력 때문이지, 날아간 왼팔은 머잖아 재생될 것이다. 즉, 육체적으로 손해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잃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카라드 백작을 절망시켰다.


그는 이 전쟁에 아주 많은 것을 걸었다. 모았던 재산 대부분을 야곤과 맹수 용병단을 고용하는 데 사용했다. 그간 함께해 온 친위대를 비롯해 정예사병까지 모두 투자했다.


승리했다면, 손해를 메우는 정도가 아니라 먼 미래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흑룡공이 직접 만든 용마성을 소유하는 것. 그리고 카라블룸의 거대한 광산과, 그곳에서 노역 중인 드워프들의 공물을 독차지하는 것이 카라드 백작의 목적이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혹시라도 찾아올 흑룡공과 싸워줘야 할 야곤은 죽어버렸다. 용공녀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용마성도, 카라블룸도, 광산도,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이건…… 이건, 이야기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카라드 백작은 거대한 손으로 땅을 움켜쥐며 오열했다.


혼잣말이 아니었다. 백작과 조금 떨어진 곳. 추락으로 모든 것이 휩쓸려 버린 경계선의 바로 앞. 고작 몇 걸음 앞에서의 파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멋대로 착각해 버린 것 아니야?”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카라드 백작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눈으로,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파괴를 응시했다.


“백작. 나는 네 후원자가 아니야. 네게 라이자키아는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알려준 것은 말이야. 아주 높은 곳에 있는 내가, 열심히 기어오르려는 네게…… 살짝 은혜를 베풀어준 것이지.”


누아르 제벨라가 카라드 백작에게 접촉한 것은 새벽의 꿈속에서였다.


백작은 과감한 기습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야곤을 설득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당장 성에는 용공녀라는 헤츨링이 있을 뿐이지만, 전쟁 도중 흑룡공이 나타난다면? 오히려 흑룡공이 백작의 본진이라 할 영지를 쓸어버린다면?


그런 불안을 불식시켜 준 것이 바로 누아르 제벨라였다. 대뜸 백작의 꿈에 나타난 누아르는, 불안해하는 백작에게 라이자키아는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덕분에 백작은 불안과 망설임을 떨치고, 야곤이 바란 과감한 기습에 동참했다.


“나는 네 승리를 약속한 적이 없어. 그리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 이번 전쟁에 라이자키아는 개입하지 않았잖아.”


홀린 듯 멍한 눈동자가 위로 들렸다. 누아르는 높은 하늘에 서 있는 유진 라이언하트를 보았다.


“흑룡공은 오지 않았지만…… 유, 유진 라이언하트가…… 용사가 있었습니다. 공작님……! 다, 당시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이 전쟁에 개입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누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카라드 백작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고, 백작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백작은 그것에 억울함과 분노를 느꼈다.


“당신은 헬무드의 공작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헬무드의 적인 용사가, 마족 간의 영지전에 멋대로 개입한 것을 묵인했습니다. 이건…… 이건 중대한 사안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바보구나?”


누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설령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너무 허탈하고 절망해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건가?”


정곡이었다. 카라드 백작은 흠칫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아. 이제 와서 후회할 필요는 없어. 네가 그럴 생각이 없었을지라도, 내가 네게 했을 일은 똑같았을 테니.”


“예……?”


“별일 없었다는 거야.”


굳이 뒤를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전쟁이란 보통 이런 거잖아. 서로 쾅 부딪쳐서, 한쪽이 모든 것을 잃어버려. 요즘 마족들은 서열잡이니 영지전이니 하며 말끔한 전리품을 얻고 싶어 하는데 말이야. 옛날에는 그렇지가 않았거든? 전리품이라 할 만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 명예 따위나, 잘린 머리나, 사라지지 않을 흉터…… 뭐 그런 것들이었지.”


카라드 백작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 내가 너무 꼰대처럼 말했나? 뭐 어떡해, 나는 옛날 마족이 맞단 말이야. 물론 영지도 훌륭한 전리품이라고는 생각해. 하지마아안…… 날로 처먹으려는 네 정신머리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네. 백작, 너는 멀쩡한 용마성과 멀쩡한 카라블룸을 얻고 싶어 했잖아? 그러면 안 돼. 용마성도 카라블룸도 도시도 광산도 전부 다 라이자키아가 만든 것. 본질적으로 라이자키아의 색으로 물들어 버린 것이란 말이야…….”


백작은 아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네가 정말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모두가 용마성하면 라이자키아를 떠올릴 텐데? 그러면 안 돼. 전부 쓸어버리고 황무지를 네 것으로 삼아야지. 거기서 네 색의, 본질적으로 네 것의 무언가를 쌓아 올려야 그게 네 영지가 되는 거야. 나만 해도 그랬잖아?”


나찰공주 아이리스의 영지였던 검은그늘 숲. 누아르는 영지전에 승리하고 숲의 주인이 되고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나무를 뽑아버린 것이었다.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서 숲을 콘크리트 정글로 만들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그 영지에서 검은그늘 숲을 떠올리지 않는다. 지금 그 땅덩어리에 있는 것은, 하늘을 떠다니는 거대한 제벨라 페이스와 도시 중앙의 아름다운 제벨라 금상과 화려한 네온사인. 헬무드 최고 최대의 랜드마크, 제벨라 시티인 것이다.


“오늘 이곳에서는 그런 전쟁이 벌어진 거야. 카라드 백작. 너는 요즘 귀족답지 않게 적의 영지를 모두 쓸어버렸고, 용마성을 통째로 추락시켜 네 위세를 증명했어. 하지만…… 하지만 안타깝게도 살아남지는 못했지. 너는 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힘이 다해 죽어버린 거야. 그래도 허무하지는 않잖아? 그 라이자키아의 용마성을 추락시킨 젊은 귀족.”


카라드 백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이미 한참이나 멀어졌지만, 백작의 귀에 누아르의 속삭임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너는 그렇게 역사에 이름 한 줄을 새길 거야.”


“으아아악!”


카라드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ㅡ콰직! 하늘에서 떨어진 시커먼 마력이 백작의 거구를 짓뭉갰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이언트 데몬의 강인한 육체는, 내뿜은 피와 살점과 내장 따위만을 세상에 남겨놓았다.


“그게 끝인 거야.”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그것뿐이다. 만약 생존자가 있고, 그들이 다른 무언가를 보았을지라도. 이곳에서의 일은 결코 발설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몽마의 여왕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이 전쟁에 유진 라이언하트가 개입했다는 것. 그 라비스타의 마수가 일방적으로 유린당해 죽었다는 것. 그 순간에 손에 쥐었던 것이 성검 알테어가 아닌, 불길한 빛을 내뿜는 회색의 검이었다는 것.


그 주인이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닌, 300년 전의 망령이라는 것.


전부 다 꿈처럼 잊힐 것이다. 누아르는 흥분으로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며 웃었다.


ㅡ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톱니바퀴가 알맞게 맞물리는 것만 같았다.


왜, 21살의 유진 라이언하트가 그토록 강한 것인지. 그토록 마족을 증오한 것인지. 의아하리만큼 정신력이 강한 것인지.


‘왜 그리 나를 싫어하는지.’


전부 다 이해되었다. 그 끔찍하고 불길한 월광검을 잊었을 리가 없잖은가. 그 움직임을 잊었을 리 없잖은가.


“300년 동안 바뀌었나 봐.”


누아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박쥐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더는 수라광살이라고 외치지 않는 것이 조금은 서운해.”


높은 하늘에 선 유진과 누아르의 눈이 마주쳤다.


“나의 하멜.”


몰살의 하멜.


300년 전 첫사랑의 이름을 읊조리며, 누아르는 방긋 웃었다.


나의 하멜


“요즘 애들은 낭만이 없다니까.”


키득거리는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무조건 득실만 따지려 하고, 확실하게 이기고 싶은 싸움만 하려고 해. 그렇게 느슨해 빠진 정신머리를 가진 주제에, 제 자신의 이기적인 관대함을 신념이란 것으로 포장하고 말이야.”


유진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누아르 제벨라를 노려보았다.


“혹시 내 말이 늙은 꼰대의 투정처럼 들리나요?”


“네가 실제로 늙기는 했지.”


“저런. 레이디에게 그런 말을 하면 못써요. 하지만,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용서하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어느 정도 내 심정을 이해할 것 아니에요?”


누아르와 유진이 같은 높이에 섰다. 그녀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의 하멜.”


들킬 것이라고 각오는 해뒀다. 하지만 그 몽마의 여왕에게, 저 입으로, ‘나의 하멜’이라는 소리를 들어버리니 유진의 표정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치솟는 살기에 메르는 즉시 망토의 틈으로 숨어들었다. 팔에 매달려 있던 라이미르아는 누아르와 눈이 마주치고서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저 마족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별궁의 TV에서 자주 보았던 얼굴. 수백 년 동안 헬무드의 중심을 벗어난 적 없는 화제의 귀족. 셀럽들의 셀럽.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라이미르아가 가장 동경하던 마족이다. 언젠가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흑룡공과의 친분을 통해 사인을 받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ㅡ 실제로 본 제벨라 공작은, TV에서 보았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아름다우면서 두려웠다. 사인이나 사진은커녕,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에 눈조차 마주칠 수가 없었다.


“어…… 어디를 혼자 가는 게냐. 보, 본녀도 들어가고 싶느니라…….”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너는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오면 안 된다구요. 여기는 메르의 방이에요.”


라이미르아는 메르를 따라서 망토의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매몰찬 손길이 라이미르아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메르가 망토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사역마의 술식이 유진에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라이미르아는 들어가고 싶어도 망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설마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죠? 아, 오히려 그렇게 생각해 준 것이 내게는 뿌듯할 것 같아. 당신의 예상 이상으로 내가 당신에 대해 잘 알았다는 뜻일 테니까요.”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지.”


유진은 누아르의 장단에 맞춰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치솟는 살기를 가라앉히면서 내뱉었다.


“등신이 아니라면 말이야.”


“흐흥, 그렇다면 차라리 모르는 척할 걸 그랬을까? 나는 당신에게 등신 취급받는 것도 꽤 즐거울 것 같거든요.”


누아르는 보란 듯이 뺨을 붉히며 몸을 꼬았다.


“사랑에 눈이 먼 등신. 꽤 낭만적이지 않아요?”


“미친년.”


“왜 야곤과 싸운 거예요?”


300년이나 지나 버린 시대에서 하멜과 재회했다. 이 운명적인 만남은 누아르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지만, 납득이 잘되지는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멜은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을 대며 자신을 감추었다.


“오늘 죽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누아르 제벨라의 개입이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용마성의 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벗어났다면 모를까. 작정하고 개입해서 야곤과 싸웠고, 놈을 죽였다. 그리고 용마성을 카라블룸에 처박았다.


시작부터 누아르 제벨라에게 포착될 것은 각오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었겠지만, 유진이나 누아르나 피차 그리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잖은가.


……물론 아주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유진이 판단하기에, 야곤은 위험한 놈이었다. 저 정도 격과 호전성을 지닌 마족이라면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해질 위험성이 있었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못한 것. 지금 시대에 환생하고, 300년 전의 적을 마주할 때마다 그런 후회를 얼마나 많이 했던가.


그래서 야곤을 죽이기로 마음먹었고, 결국은 죽였다.


“아하.”


짧은 대답이었지만, 누아르는 유진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이해했다.


“과연 그렇군요. 야곤은 오늘이 가장 약했으니까, 죽여야 한다면 오늘이 적기였어요.”


이 전쟁은 카라드 백작이 승리했을 것이다. 백작은 용마성과 카라블룸을 전리품으로 얻고, 야곤은 전쟁을 갖기로 했다. 그 결과, 용마성의 마족들 대부분이 야곤에게 소화되었을 거다.


그다음. 용마성을 침몰시켰다는 명예는, 백작이 중앙의 수도 판데모니움으로 진출할 교두보가 되었을 거다. 백작과 야곤의 계약은 흑룡공 라이자키아가 나타날 때까지이니, 야곤은 백작의 곁에 남게 된다.


새로이 중앙에 진출하는 신흥귀족. 시비를 걸고 싶어 하는 마족은 한둘이 아닐 터. 백작은 야곤을 히트맨으로 쓰고, 야곤은 백작을 고위마족과의 전투에 필요한 명분으로 삼는다. 쓰러트리고 잡아먹을수록 야곤의 격은 높아질 터. 야곤에게는 그런 미래가 확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야곤을 죽여야 한다면 오늘 죽이는 것이 적기였다.


“아하…….”


누아르는 유진 라이언하트ㅡ 아니, 하멜 다이너스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용사,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 그들 중에서 누아르가 가장 의식하고 관심을 가졌던 것이 하멜이었다.


그는 동료들과는 다른 별 볼 일 없는 배경을 가졌다.


엘프가 키워낸 대마법사.


북방 전투부족의 대전사.


광신과 망집이 만들어낸 모조화신.


ㅡ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의 가장 가까운 곁에 서서 싸웠던 것은, 저 셋이 아니었다. 특별한 과거도 없던 용병 출신의 남자가, 용사의 곁에서 싸웠다.


그 이유는 누아르 제벨라도 잘 알고 있었다. 300년 전. 누아르는 하멜의 꿈 깊은 곳까지 침입했던 적이 있다.


용사 일행이 꿈을 공격당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때에 거둔 쾌거였으며, 그 시절에 하멜이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를 지독하게도 증오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300년이나 흘렀는데 여전한 것도 있어.”


하멜은 천재였다.


베르무트의 동료 중에서 천재가 아니었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멜은 천재였지만, 오히려 천재였기에 한계가 명확했다. 그는 천재성에 비해 나약한 그릇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베르무트의 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른 동료들보다도 지독하게 마족에 대한 ‘단순한’ 살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베르무트는 용사였다.


세냐는 엘프 종족의 미래를 위해 마왕을 죽여야만 했다. 마왕이 존재하는 한 엘프는 마병을 떨칠 수 없고, 세계수는 죽어간다. 특히 나찰공주 아이리스가 저지른 엘프족의 대학살이 세냐의 살의에 더 큰불을 지폈다.


모론은 북방 바야르 부족의 차기 부족장이자 대전사다. 그의 부족은 헬무드와 인접했고, 헬무드에서 풀려나온 마물은 모론의 고향을 짓밟았다. 모론은 부족과 설원의 미래를 위해 마왕을 토벌하겠다고 결심했다.


아니스는 신성제국이 만들어낸 모조화신이다. 존재의 근원부터가 마왕과 싸우고 세상을 구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아니스 본인이 그를 바라지 않았다 한들, 그녀의 자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성녀의 운명을 따르고 있었다.


반면에 하멜은 어떤가. 그는 부족의 명운 따위 짊어지고 있지 않다. 한 종족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입장도 아니었다. 성검의 인정을 받지도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운명을 강요받지도 않았다.


하멜은, 바란다면 얼마든지 다른 삶을 살 수가 있었다.


가족을 잃고 마을을 잃었다. 전쟁시대에 그런 일을 당한 이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누군가는 복수를 바라고, 누군가는 복수를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하멜은 특별했다. 그는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복수를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섰다. 3명이나 되는 마왕을 죽였다. 하멜이 선택한 삶이자 운명이었다. 그는 검을 쥐어 마왕과 마족 학살의 운명을 선택하고 증명해 왔다.


부족을 구한다. 종족을 구한다. 세상을 구한다. 처음의 하멜에게 그런 거창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단지 복수를, 아니, 마왕을 죽이기를 갈망했을 뿐이다.


“결국 그러고 싶었던 거잖아요.”


용마성의 모든 마족을 죽이고 싶다.


카라블룸에 대재앙을 일으키고 싶다.


야곤을 죽이고 싶다.


그러한 욕망이, 누아르가 보았던 하멜 다이너스라는 인간의 본질이었다. 그가 베르무트의 곁에 설 수 있게 된 근원이었다. 최초의 순수한 살의는 후에 세상을 구하겠다는 사명이 되었으나, 그 과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을 구하려면 모든 마왕을 죽여야 한다.


당시 베르무트와 동료들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생명을 장작처럼 태우면서 앞장 섰던 것이 바로 하멜이었다.


용사 베르무트보다 더, 마족의 대적자라 불리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사랑스러워.”


꿈의 밑바닥에서 하멜과 마주했다.


당시 하멜이 토해내던 저주와 증오. 누아르가 절대적이어야 할 꿈속에서, 하멜의 살의가 꿈을 깨부쉈다. 환상의 마안으로 희망과 절망을 연거푸 보여주었으나 하멜의 살의는 올곧았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주아주 많아요.”


몸이 뜨겁다. 당장에라도 끌어안고 싶다. 육체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나누고, 꿈의 밑바닥에 파고들어 육체로 할 수 없는 깊디깊은 교감을 나누고 싶다.


“300년 전에 죽은 당신이 왜 살아 있는 것인지. 왜 라이언하트의 성을 대고 있는 것인지. 환생?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당신과 함께 다니는 모조화신은 정말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일까?”


유진은 대답 없이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그 불경하고 무모하고 독기 어린 시선이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왜 역사에도 이름이 남지 않은 월광검이 당신의 손에 있는 것인지. 왜 용공녀가 죽지 않고 당신의 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지금부터 당신이 무엇을 하려고 드는지.”


누아르의 말이 멈췄다. 라이언하트 가문. 사라졌던 월광검. 200년 전에 죽은 베르무트. 하멜 다이너스의 환생.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과연, 안목은 뛰어나. 그래. 자신이 해내지 못한 것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했다면…… 후후, 바로 당신이 적임자였을 거예요. 나의 하멜. 유폐의 마왕이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겠죠. 심지어 직접 만나기도 했으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별것 아닌 말. 그래도 하나만 대답해 주면 안 될까요? 나의 하멜. 가비드 린드먼은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렸나요?”


누아르는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향해오는 애틋한 시선에 유진은 경멸을 느꼈다.


“아니.”


“멋져……! 그럼, 헬무드에서 당신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나와 유폐의 마왕뿐이라는 거죠? 아, 너무 좋아. 그러니 더더욱 묻지 않을래. 어느 정도 비밀이 있는 편이 서로를 흥분시키는 법이잖아요?”


“헬무드를 떠난다.”


유진은 보란 듯이 월광검을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지금의 내가 헬무드에서 더 해야 할 일은 없거든.”


“떠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 나의 하멜. 당신은 용마성을 추락시켰고, 수많은 마족을 몰살시켰어요. 게다가 라이자키아의 외동딸을 납치했죠.”


“그럼 어쩐다. 헬무드의 법으로 심판받게 되나? 기껏 환생도 했는데, 허탈하게 뒈지겠군.”


“아…….”


저 뻔뻔함! 누아르는 가슴앓이를 느끼며 신음을 뱉었다.


“나의 하멜. 이 내가, 당신이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요. 정말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죽어야만 한다면, 당신의 죽음은 300년 전보다 값지고 고결해야만 해요.”


“어떻게?”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해 죽거나.”


누아르의 고개가 까딱 기울었다.


“마왕에 준하는 마족에게 도전해 죽거나.”


너무할 정도로 노골적인 말이었다. 누아르는 방긋 웃으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검은색의 카지노코인이 유진에게 날아왔다. 설원에서 건넸던 것과 똑같은 코인이었다. 그때는 받지 않았지만, 지금은 받아둬야만 했다.


“그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멜, 당신은 헬무드의 모든 검문에서 자유로울 거예요.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때에도 신분증 대신에 그 코인을 제시하도록 해요. 만약 당신이 용공녀가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마족을 데리고 다녀도, 그 코인이 있다면 문제없이 워프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다 좋은데.”


유진은 손에 쥔 코인을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날 하멜이라고 부르지 마.”


“아…… 그랬죠. 이건 당신과 나의, 후후훗…… 비밀이니까요. 알았어요. 아, 그런데 용공녀가 이미 들어버린 건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말 못 하게 틀어막아야지.”


“그건 내게 아주 쉬운 일인데. 아예 기억을 바꿀 수도 있어요. 당신에게 협조하도록 말이죠.”


반짝거리며 빛나는 눈동자가 라이미르아에게 향했다. 드래곤이라지만 아직 어린 헤츨링이 환상의 마안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라이미르아를 등 뒤로 감추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조금은 상냥해진 걸까? 그런 점도 매력적이야. 알았어요, 나의 하멜. 당신이 하지 말라니까 하지 않을게요.”


누아르는 마안을 거두고서 방긋 웃었다.


“정말 하지 말아야 할 순간에는, 당신이 아무리 애걸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너만 그럴까?”


코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에 누아르는 아랫입술을 핥았다.


……헤어지기 전에 가벼운 포옹이나 입맞춤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그것으로 누아르는 당장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이고, 하멜은 더한 증오와 분노와 살의를 안게 될 텐데. 다음 만남을 위해 그렇게 이별하는 편이 서로에게 즐겁지 않을까?


‘참아.’


누아르는 끓는 욕망을 가라앉혔다. 첫사랑과의 운명적인 재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되는데, 몸이라도 살짝 닿아버렸다가는 다음을 기약하기는커녕 당장의 충동을 억누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 황무지는 로맨스의 클라이맥스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배경이다.


“우리의 마지막은 제벨라 시티에서 장식하도록 해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속삭였다. 이미 충분히 완벽하고 아름다운 제벨라 시티지만, 오늘 이후로는 더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용마성이 떨어지려는 순간. 누아르는 추락으로 인한 파괴가 카라블룸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마력장막을 펼쳤다. 도시에 있는 모든 몽마들을 탈출시켰다.


광산의 드워프들도 탈출시켰다. 광산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 라이자키아에게 귀속되어 있던 드워프 일족 전체의 계약을 강탈하고 그들을 탈출시켜 은혜를 베풀었다. 일족 대대로 라이자키아를 위해 세공품을 만들어온 드워프들은, 이제부터는 누아를 위한 제벨라 시티의 건축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나를 죽일 곳도. 내가 당신을 죽일 곳도 그곳이어야 해.”


“내가 미쳤다고 네 영지에서 싸울까?”


“미친 것은 맞죠. 하멜. 당신도, 당신 동료들도. 300년 전에 마왕의 영지인 마왕성에 굳이 쳐들어가서 마왕을 죽였잖아요.”


“네가 마왕은 아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누아르는 짓궂게 웃으며 날개를 활짝 펼쳤다.


“뭐. 나의 하멜. 당신이 바란다면, 제벨라 시티에 나의 마왕성 하나쯤은 세워보도록 하죠.”


“뭘 굳이.”


“서운한 말 하지 마요.”


박쥐의 날개가 펄럭였다. 누아르의 몸이 뒤로 쭈욱 밀려났다.


“그런 것이 낭만이잖아.”


나의 하멜


누아르 제벨라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아래로 내려왔다.


“조마조마하신 거 다 알아요.”


“아닌데?”


“몽마의 여왕이 대뜸 덤비는 것이 아닐까 긴장하셨잖아요.”


“아니라니까?”


“유진 님은 거짓말쟁이예요.”


“뭔가 착각하는데, 전부 다 내 계산대로야. 나는 처음부터 누아르 제벨라는 날 여기서 죽일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고.”


“예, 예. 정말 유진 님은 대단하세요.”


히히덕거리는 메르의 머리카락을 한 번 헤집어주고서 땅에 섰다. 파괴가 멎고 흙먼지가 가라앉은 땅은, 문명이 통째로 지워져 황무지가 되었다.


“……이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이미르아가 황무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까지 어깨를 움츠리고서 유진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황무지와 유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라이미르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몰래카메라인가?”


“얘 뭐라는 거냐?”


“아주…… 아주 잘 만들어진…… 블록버스터급의 몰래카메라…… 어, 어쩌면 본녀는 지금 제벨라 공작이 만들어낸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본녀의 꿈을 무대로 한 대환장의 몰래카메라…… 헬무드 전역에 송출되고 있는 것인가……?”


더듬더듬 내뱉는 말. 유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라이미르아 딴에는 굉장히 신빙성이 있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은가. 환상의 마안의 주인이자 그 어떤 꿈도 만들어낸다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공작이 나타나기도 했었고…… 어제부터 일어난 모든 사건이 라이미르아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갑자기 별궁의 문이 열려 자유를 얻었다. 누군지 모를 침입자에게 수모를 겪었다. 그다음 날 용마성이 침공을 당했다. 전쟁은 결계를 박살 내고 도시를 휩쓸었다. 격전 끝에 용마성이 추락하고 지상영지가 초토화되었다.


그 침입자의 정체는? 하멜 다이너스. 300년 전에 죽은 우둔한 하멜.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


“그…… 그렇구나. 이, 이 모든 것이 본녀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한 몰래카메라인 것이니라……. 그렇지 않고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슬슬 몰래카메라가 끝날 때가 되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꿈에서 깨어나고, 평온한 별궁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곧 꿈에서 깨어나겠지……. 작별이니라, 꿈의 침범자여. 이제 와서 하는 말이다만, 꿈속임을 감안하고서도 네놈은 무례에아아각!”


느긋한 얼굴로 이어가던 말이 비명이 되었다. 헛소리에 장단을 맞춰줄 생각일랑 없었다.


그래서 홍옥에 딱밤을 때려주었다.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준 것이다. 적당히 때린 것이기는 했지만 라이미르아는 홍옥을 감싸쥐고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네, 네네, 넷.”


“오늘 내가 한 일. 내 정체. 뭐 그런 것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라.”


굽힌 손가락을 라이미르아의 이마에 겨누며 차분히 말해주었다. 라이미르아는 딸꾹질을 해대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나한테 도망칠 생각도 하지 말고.”


“보…… 본녀를 어디로 데려갈 셈이냐……. 그것은 알려주어도 되지 않느냐…….”


라이미르아는 겁에 질려서 훌쩍거렸다.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네 애비를 찾으러 간다.”


“무어라……?”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나는 널 사용해서 네 애비를 찾아낼 거다.”


“본녀의 아비…… 흐, 흑룡공을 찾겠다고? 흑룡공을 찾아서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이니냐?”


라이미르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메르가 유진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메르는 라이미르아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납치하는 모양새가 되어 함께 다니게 되어버렸으니, 얕게나마 인연을 쌓아가게 되지 않았나.


저 멍청하리만큼 순진한 꼬마 드래곤의 마음을 조금은 생각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유진의 옷깃을 잡은 것이다.


“네 애비를 죽일 거다.”


유진도 메르의 속내는 알았다. 하지만 거짓말까지 해가며 배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의 거짓말이 선의에 의한 것이든 동정에 의한 것이든,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거짓말은 배신하게 되었을 때. 나중에 거짓말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큰 원망과 증오가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메르의 입이 떡 벌어졌고, 라이미르아의 두 눈은 휘둥그레 떠졌다.


“그 상황에서 널 인질로 삼을지 안 삼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나는 뭔가를 인질로 삼는 것을 선호하지 않아서, 아마 널 인질로 쓸 일은 없을 거다.”


“너너, 너너는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라 들었다……. 요, 용사가 어찌 인질 같은 비겁한 짓을 한다는 것이니냐……?”


“그래서 말했잖아. 아마 널 인질로 쓰지는 않을 거라고.”


유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하면서 라이미르아의 손을 끌고 갔다.


“서로 이해가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해라. 너도 애비를 만나고 싶고, 나도 네 애비를 만나고 싶은 거잖아. 물론 나는 네 애비를 죽이기 위해 만나려는 것인데, 네 애비가 나한테 호락호락하게 죽어주지는 않을 것 아냐?”


“무…… 물론이니라. 본녀의 아버지, 흑룡공은 헬무드의 공작이니라……. 그 제벨라 공작과 동급이란 말이니라.”


라이미르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까 보았던 제벨라 공작의 ‘격’은 라이미르아로 하여금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침입자…… 그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라는 유진 라이언하트도 대단히 강했지만, 헬무드의 공작보다 강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 허튼 꿈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니라……! 너, 너는 절대로 흑룡공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니라. 그러니 얌전히 본녀를 놓아주고…….”


“응,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닥치고 내 말 들어. 어찌 됐든 나는 널 데리고 네 애비를 찾을 거야. 나는 네 애비를 죽이고 싶고, 네 애비도 날 죽이고 싶을 거야. 둘 중 누가 이길까? 그것은 그때 해봐야 아는 일이니까, 허튼짓 말고 얌전히 따라와.”


“본녀에게 거부권은 없는 것이니냐……?”


“왜 당연한 것을 묻지? 열 받게? 몇 대 패면 얌전히 따라오려나?”


“보, 본녀는 아까부터 얌전했느니라…….”


유진이 눈동자를 번뜩이며 쏘아보자, 라이미르아는 양손으로 입까지 틀어막았다. 그렇게 닥치게 만들고 나니 한결 생각하기가 편해졌다.


‘어떡하지…….’


이번에도 저질러 버렸다. 사실 생각 이상으로 잘되기는 했다. 야곤은 죽였고, 용마성을 추락시키면서 엄청나게 많은 마족을 죽였다. 라이자키아와의 길을 연결할 라이미르아도 확보했다. 이 모든 사태는 누아르 제벨라가 책임져 주기로 했다…….


‘아니스랑 크리스티나가 화낼 텐데…….’


그것이 유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니스에게는 300년 전에도 여러 번 혼이 나봤기 때문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흠칫 움츠리게 된다.


……같은 몸을 쓰고 있기 때문인지, 크리스티나도 아니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궤변에 독설가 기질은 예전부터 있기는 했는데, 아니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보다 예리해지고 있다.


유진은 저번에 무릎이 꿇려졌던 것을 떠올리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부디…….


무릎을 꿇고 있던 다음에.


-저를 너무 걱정 끼치지 말아주십시오.


촉촉이 젖은 눈동자와 목소리. 떨리던 손. 끌어안던 팔. 살짝 닿아 눌리던…….


“아아아아아아.”


쓸데없을 만큼 훌륭한 기억력이 재현하려는 기억과 감각을 억지로 떨쳐냈다. 유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멍청한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양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 사이사이에 매콤한 따귀가 섞였다. 뭔가 싶어 감은 눈을 떠보니, 메르가 망토 사이에서 빼꼼 나와서 유진의 따귀를 후려치고 있었다.


“너 뭐 하니?”


“저질을 패고 있어요.”


감히 세냐 님을 두고서 그런 생각에 빠지다니! 그 속 검은 성녀듀오가 당장의 세냐 님에게는 불가능한 육탄공세를 해대며 유진 님의 마음을 흔든 탓이다. 메르는 이럴 때야말로 자신이 확실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유진 님. 부활한 세냐 님의 살결도 크리스티나 님의 살결만큼 부드러울 거예요.”


“얘가 못 하는 말이 없어……!”


유진은 기겁하며 메르의 머리를 망토 안으로 욱여넣었다.


호들갑을 떨며 걷는 유진의 뒤를, 아직까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라이미르아가 따라가고 있었다.


* * *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여전히 말레라의 호텔에 있었다.


[속보, 속보입니다. 용마성이…… 라이자키아 공작님의 공중영지인 용마성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테라스에 서서, 용마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루올 영지의 카라드 백작이 일방적으로 시작한 전쟁입니다. 가벼운 전초전 뒤에 협상 테이블이 깔릴 것이라 예상되었는데…… 하하! 아주 의외입니다. 요즘 시대에 카라드 백작처럼 터프한 마족이 있을 줄이야.]


[점령으로 끝내지도 않았어요. 그 용마성을! 300년 동안 흑룡공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용마성을 추락시킨 겁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에요. 지상영지 카라블룸에는 피난 권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피난 권고가 발령되기 전에 용마성의 수뇌부를 몰살시켰다는 거죠!]


[헬무드가 제국이 된 후로도 영지전이나 서열잡이는 많았지만, 상대의 영지와 영지민을 말살하는 영지전은 처음입니다……. 카라드 백작. 변경의 흔한 신흥귀족이라 생각했는데, 이빨을 숨긴 호랑이였군요.]


[살아남았다면 중앙에 진출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어찌 보면 명예로운 죽음이라 할 수 있지요. 백작은 자기 목숨을 불태워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은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죠.]


[이 전쟁에서 백작이 라비스타의 마수를 고용했다죠? 야곤. 그와 수하들도 용마성에서 함께 죽었다는데…… 헬무드의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젊은 마족들을 너무 많이 잃었군요.]


[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흑룡공이 없었을지라도, 용마성은 강했습니다. 흑룡공을 대신해 용마성을 책임지고 이끌던 사신장ㅡ 예, 뭐, 요즘 젊은 마족들에게는 아득한 선배. OB지요!]


[아 그게 참,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속이 뻥 뚫리기도 합니다, 예. 그렇잖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OB를 대우하지 않고 무능하기만 한 꼰대다 뭐다 하는데, 용마성의 마족들이 OB의 저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았다! 뭐 그런.]


[아아아,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 싶기도 해요. 시대가 너무 변했잖습니까? 저희 OB가 날뛰던 때야 300년 전의 전쟁시대고, 지금은 평화의 시대니까…… 저희가 힘이 없어서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어디까지나 평화를 위해. 아, 광고 보고 계속하도록 하죠.]


삐익.


TV가 꺼졌다. 아니스는 혀를 쯧 차면서 고개를 돌렸다.


“OB니 뭐니 꼴값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뭐, 젊은 세대 마족과 옛날 세대 마족의 세대갈등이 이슈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꽤 즐겁군요. 기왕이면 젊은 세대 마족이 쿠데타라도 일으켜 주면 좋으련만.”


“……하하…… 그러게 말이야.”


“용마성에서 뒈진 카라드인지 뭔지 하는 놈이 살아남았다면, 언젠가 놈이 중심이 되어 쿠데타가 일어났을까요? 어쩌면 그것 때문에 누아르 제벨라가 접근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도 옛날 세대 마족이니까요.”


“하하…… 그럴지도 모르…….”


“웃음이 나옵니까?”


크리스티나도 화를 내면 무섭다. 하지만 아니스가 화를 내면 더 무섭다. 적어도 크리스티나는 때리지는 않을 거다. 아니스는 때린다. 반 죽이고 멀쩡히 회복시킨다.


“그 누아르 제벨라가 세대갈등을 심화시키지 않기 위해 간섭했을 리가 없잖습니까. 당신 성격에 얌전히 탈출했을 리는 없고. 저 용마성…….”


“내가 그런 거야.”


“그건 솔직히 잘했다고 칭찬해 드리겠습니다. 하멜, 당신의 무식하고 과감한 결단 덕분에 몇만에 달하는 마족이 몰살당했습니다.”


짝짝. 아니스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운이 좋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그런 일을 벌였으면서 누구에게도 포착되지 않았지요. 일단 뉴스에서 당신의 이름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하…….”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면 그 대가리를…….”


아니스가 플레일을 움켜쥐었다. 유진은 즉시 무릎을 꿇고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야곤에 대해 말했다. 왜 용마성을 떨어트린 것인지를 말했다. 누아르 제벨라와 만나서…….


“그 정신 나간 갈X가 기어코 당신의 환생을 눈치챘다는 겁니까!”


“애가 듣는데 갈X는 좀…….”


“닥치십시오 하멜.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겁니까? 그 갈X는 꿈을 희롱합니다. 여태까지라면 몰라도, 당신이 하멜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그 갈X는 적극적으로 당신의 꿈을 노릴지도 모릅니다.”


아니스는 300년 전의 악몽들을 떠올리며 진절머리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꿈의 맹공. 연달아 꾸는 악몽. 때로는 끔찍하고, 때로는 발칙하던 꿈들. 갈X의 여왕이라서인지 누아르는 그런 꿈을 만드는 것에 아주 능숙했었다.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웃…….”


신뢰가 가득 담긴 눈. 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전생부터 하멜의 저런 올곧은 눈에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그럴지라도 누아르 제벨라. 갈X의 여왕은 강적입니다. 잊은 겁니까? 하멜. 우리는 300년 전에, 5명이었음에도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망할 것이 죽일 수 있는 싸움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잖아. 우리가 그럴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마왕을 죽이는 것을 너무 우선한 탓이었습니다.”


아니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플레일의 자루를 어루만졌다. ……아직까지 쥐고 있다. 유진은 시커먼 철구를 힐긋거리며 불안을 삼켰다.


“……마지막은 제벨라 시티에서, 라.”


맹약은 아니다. 웃으며 내뱉은 가벼운 말일 뿐이다.


“낭만이라.”


수백 년, 아니, 그 이상의 긴 세월을 살아온 마족이다. 이루고 싶은 것은 모두 이루는 환상의 마안의 주인. 마왕에 가장 근접해 있는ㅡ 아니, 격과 힘이라면 하위 서열의 마왕을 넘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닐 대마족. 그런 마족이 내뱉은 말.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 이번에만 해도 그랬어.”


하지만 죽이지 않았다. 유진은 확신했다. 몽마의 여왕은, 누아르 제벨라는. 유진이 제벨라 시티에서 ‘도전’하지 않는 한, 유진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좋습니다. 납득하겠습니다.”


아니스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하멜. 저 꼬마는 대체 뭡니까.”


아직 모든 대화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니스의 손가락이 유진의 뒤, 얌전히 서 있는 라이미르아에게 향했다. 손가락이 겨눠지자, 라이미르아는 커다란 소매를 떨치며 외쳤다.


“본녀는 용공녀 라이미르아! 흑룡공의 혈…….”


꽈앙!


날아간 철구가 라이미르아의 귀 바로 옆을 꿰뚫고 벽에 처박혔다.


철그럭. 팽팽히 당겨졌던 사슬이 축 늘어지며 라이미르아의 어깨에 걸쳐졌다. 라이미르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짙은 눈웃음 덕에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미르아는 저 방긋 휘어진 눈웃음 너머에서 지독한 살의를 느꼈다.


“왜 라이자키아의 딸이 살아서 여기 있는 겁니까?”


“세…… 세냐를 구하는 데 저 꼬맹이가 필요해서 그래.”


“마음이 약해져서 구한 것은 아니고?”


“그런 게 아니라…… 어…… 잘 봐, 아니스. 쟤가 라이자키아 딸인 것은 맞는데, 마룡은 아니야. 그냥 드래곤이라고.”


“어머.”


눈꺼풀을 뚫고 나오던 살의가 깔끔하게 사라졌다. 아니스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플레일의 철구를 회수했다.


“저도 참. 너무 흥분해서 알아차리지 못했군요. 아, 이해해 주십시오. 제가 헤츨링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그만…….”


“딸꾹…….”


“자아,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300년 내내 성녀라 불리는 몸. 두려움에 떠는 어린양을 돌보는 것은 아주 익숙하답니다. 이리 와 제 품에 안기도록 하십시오.”


아니스는 플레일을 내려놓고, 양팔을 활짝 벌리고서 라이미르아에게 다가갔다.


한순간 가신 살의의 공백은 자애로움과 따스함이 채웠다. 그것은 라이미르아가 유년기부터 갈망하던 모성애와 닮아 있었다.


“으…… 으우…….”


수난에 대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라이미르아는 훌쩍거리며 아니스의 품 안에 안겼다.


‘인질.’


코를 훌쩍거리는 라이미르아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아니스는 방긋 웃었다.


외전, 막간


고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너무 덜 익혔나. 씹을 때마다 검붉은 핏물은 뚝뚝 떨어지고, 씹는 턱이 아플 만큼 질겼다.


짐승도 아닌 마물의 고기.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먹고 싶지 않을 고기지만, 그래도 뭐 먹을 만했다.


이런 종류의 식사도 몇 년을 하다보면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보통의 인간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는 마기를 깔끔히 정화하고 나면 고약하기는 해도 먹을 수 있게 된다. 레시피에 대해 나름의 노하우가 생기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비장의 레시피는 사용하지 않았다.


시간도 없었고, 공들인 요리랄 만한 것을 할 장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굽지는 않았다. 소금이나 후추, 그 외에 향신료들은 뿌렸다.


대부분이 마족에게 노획한 것이다. 이 빌어먹을 땅에 인간이 먹을 것이 전무하지는 않다. 마족에게도 미식의 문화는 있기 때문이다. 식재료는 많이 다르지만, 거르고 거르다 보면 인간도 충분히 사용할 만한 것들은 꽤 많이 남는다.


“맛있냐?”


“맛없습니다. 마실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런 것치고는 계속 마시고 있잖아.”


“마족의 것이 아닌, 인간의 술은 오랜만이니까요. 사실 이건 술이라 할 수도 없는 쓰레기, 깊이는 없이 독하기만 한 물일 뿐입니다만…… 그래도 선물로 준 것이니, 맛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투덜거림과 술을 따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열악한 상황에 비해 쓸데없이 화려한 술잔 5개가 바닥에 놓였다. 언젠가 얻었던 전리품인데, 특별한 날마다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희멀거면서 걸쭉한 술이 잔들을 채웠다.


“자, 그럼. 다 같이 건배를 해봅시다.”


아니스 슬리우드. 애주가인 그녀가 가장 먼저 술잔을 높이 들었다.


고작해야 술잔 하나인데 무겁다고 생각했다. 안에 담긴 술 때문이다.


며칠 전에 조우했던 3명의 기사에게 받았던 술이다. 본래는 그보다 훨씬 수가 많았겠지만, 검은 안개를 맞닥트렸다고 했다.


혈전…… 아니, 학살 중에 도망쳐 살아남은 것이 겨우 3명. 그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이 지역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경에서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말했다.


아마 그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부상은 치료해 주었다만, 꺾여 버린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절망해 버린 패잔병 3명이 힘을 합쳐서 탈출하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면 이 땅은 마경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사히 고향에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아니스는 굉장히 성녀 같았다.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패잔병들을 위한 기도를 해주었고, 죽은 동료들을 애도해 주었다. 상처마저도 말끔히 치료해 주었다.


이 술은 기사들에게 받은 것이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패잔병들이 왜 저 독한 술을 소중히 들고 다녔는지는 짐작이 갔다. 공포와 절망이 극에 달했을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취한 상태로 자살이나 하려던 모양이다.


그러던 중에 만나 버렸다.


사실 드문 일도 아니었다. 저와 비슷한 경험은 너무 많아 이제는 세기도 힘들었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지만, 어떠한 계기로…… 도망치겠다 마음먹은 사람들. 동료를 잃고 살아남은 패잔병들. 혹은 현명한 지휘관의 결단으로 발길을 돌리는 군대.


낡아 찌그러진 갑옷을 두들겨 펴고, 이빨 빠지고 금이 간 무기로나마 무장한 기사와 병사들. 목에, 혹은 손목에 겹겹이 건 군번줄, 전우의 유품, 직접 만들어 매단 훈장.


그들은 결국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물러선다. 공포와 절망을 이기지 못했다. 세상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당장의 목숨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비난해서는 안 된다. 누구일지라도 저들을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보통 저런 식으로 맞닥트린 사람들은 비난을 당할까 부끄러워하곤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이루지 못하고 포기한 것을 이쪽에 바란다.


그런 사람들과 마주할 때에는 항상 표정을 관리하고 몸가짐을 바로 해야 했다. 의연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우리는 괜찮다. 공포도 절망도 없다. 우리라면 할 수 있다. 그러한 자신감을 보여주어야 했다.


마주했을 때의 인사. 동경 어린, 간절한 시선, 존경과 존중. 어느 순간부터 이들 5명은 모두의 희망이 되었다.


부디 세상을 구해주십시오. 마왕을 쓰러트려 주십시오. 지나칠 때에 주고받는 인사도 언제나 저런 말들이었다.


‘무거워.’


마경의 중심.


지옥의 깊은 곳에 가까이 갈수록, 짊어지게 되는 것들이 많아진다. 도망치거나 쓰러진 이들을 넘어올 때마다 점점 더 많고 무거워진다.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일그러진 입술을 벌려 술잔을 물었다. 독한 술인데 물처럼 쉽게 넘어갔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목구멍에 달라붙는 것이 불쾌했다.


그것뿐이었다. 한참 씹어 삼켰던 고기도, 향신료를 잔뜩 뿌렸는데도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이 술도 마찬가지였다. 독한데,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이유는 안다. 머리가 살짝 망가진 모양이지.


세냐는 입술을 잘근 씹고서 술잔을 내려놓았다.


“X같은 맛이지?”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세냐는 괜히 주먹을 쥐고서 시선을 돌렸다.


붕대를 칭칭 감은 남자ㅡ 하멜 다이너스. 그는 반쯤 누워서 술잔을 흔들었다.


“환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맛이야. 아니스. 네가 술을 좋아하는 것이야 다들 알고 있다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술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멜. 이건 술이 아닙니다. 당신 말마따나 X같은 맛이 나는 물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얼마나 좋아. 난 또, 네 머리가 돌아서 이걸 술이랍시고 권한 줄 알았지 뭐야.”


하멜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세냐와 살짝 시선이 마주쳤다. 칭칭 감은 붕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찡긋였다.


미친놈.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쓸데없이 눈썰미가 좋은 녀석이라, 세냐의 표정이 잠깐 일그러진 것에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함께 맛이나 보자고 권했더니. 하멜, 당신은 배려해 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너야말로 배려가 부족하다니까. 이 술뿐만이 아니라, 이 죽도 그래.”


“그런 주제에 그릇까지 싹싹 핥아 먹지 않았습니까?”


“주면 먹어야지 뭘 어째. 네 요리 실력이 처참한 것도 아는데.”


“혓바닥이 잘 돌아가는 것을 보니 다 나은 모양입니다?”


“맞아.”


하멜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얼굴에 감은 붕대를 풀면서 웃었다.


“엄살떨며 누워서 쉬려고 했는데, 술맛도 X같고 죽 맛도 X같아서 그럴 수도 없겠다. 네 말대로 다 나았으니까, 괜한 배려는 이제 집어치우자고.”


붕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하멜의 얼굴이 드러났다.


반절 날아가 너덜거리는 왼쪽 귀. 얼굴의 자잘한 흉터. 그중에서도 특히나 깊게 파인 흉터가 보였다.


오른쪽 턱 끝에서부터 눈과 이마까지 가른 대각선의 흉터. ……며칠 전에 새로 생긴 흉터다. 저 흉터를 보자, 세냐의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가슴 중앙을 꽉 눌렀다.


“신경 쓰지 말라니까.”


하멜의 눈동자가 세냐를 빤히 보았다. 저 흉터로 눈동자를 잃을 뻔했지만, 다행히도 참격은 안구까지는 닿지 않았다. 하멜이 직전에 고개를 젖혔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검은 안개의 대장, 가비드 린드먼. 놈은 ‘유폐의 칼’이라 불릴 만큼 강했다.


“네 잘못으로 입은 상처도 아니고, 내가 상처 입는 것이 한두 번이냐? 세냐, 그냥 너나 나나 운이 없었던 거야. 설마 정찰 중에 유폐의 칼과 맞닥트릴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널 데리고 제때 도망쳐야 했어.”


세냐는 떨리는 가슴을 꽉 누르며 말을 이었다. 미쳐 뛰는 심장만큼이나 목소리도 엉망으로 떨리고 울먹댔다.


“도망칠 수 없었으니 싸웠던 거야. 괜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너랑 나, 둘 다 목숨은 건졌잖아.”


세냐에게 상처는 없었다.


하멜이 앞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다. 마법사인 세냐는 선두에 서는 일이 없었다. 하멜이, 모론이, 베르무트가. 앞에 서서 싸우는 동안, 세냐는 그들이 쓰지 못하는 강력한 마법을 난사했다.


유폐의 칼과 조우했을 때도 그랬다. 하필이면 그때에는 베르무트도 모론도 아니스도 없었다. 하멜과 세냐 둘뿐이었다.


언제나와 같이ㅡ 별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익숙했고, 세냐는 하멜과 둘이서 정찰하는 시간이 좋았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눌 뿐이지만, 하멜과 둘이서 걷는다는 것이 좋았다. 하멜이 나만을 보는 것이 좋았다.


“궁상떨지 말라니까.”


하멜이 눈썹을 찡그렸다. 세냐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폐의 칼과 조우한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


서로의 경계가 부족했나? 아니었다. 세냐는 언제나처럼, 아니,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과하게 경계했다. 하멜도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정찰이라지만 느긋한 산책 따위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둘은 가비드와의 조우를 간파하지 못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위신(威神)의 마안은 하멜의 감각과 세냐의 마법을 무시하고서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히려 세냐, 너랑 나여서 이 정도로 그친 거야. 모론이었으면 무식하게 싸우다가 목이 날아갔을걸?”


“유폐의 칼은 그리도 날카로웠나.”


“당연히 날카로웠지, 등신아. 이명부터가 ‘칼’인 새끼인데, 안 날카로우면 칼이 아니라 다른 이명으로 불렸겠지. 그래도 한 번 겪어 봐서 다행이야. 간극은 대충 알았어. 나 혼자로는 절대 못 이길 것 같은데.”


툭. 하멜이 세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평소였으면 뭐라고 쏘아붙였겠지만, 지금의 세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아직까지 끈적거렸다. 아니, 까끌까끌했다. 모래를 씹어 삼킨 것만 같았다.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리고 눈동자 안쪽이 아팠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하멜은 선명했다.


“베르무트. 너랑 합을 맞추면 충분히 이겨. 내가 앞에서 받는 동안…… 아니, 말해 뭐 하냐. 너라면 괜찮을 테니, 알아서 하겠지.”


이 또한 언제나 해왔던 일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멜은 항상 베르무트와 합을 맞춰서 싸웠다. 살육의 마왕을 죽일 때도. 참혹의 마왕을 죽일 때도. 광란의 자식들과 싸울 때도. 그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했던 거인 두령 카마쉬를 죽일 때도.


“그리고 나도 괜찮아. 알아서 할 수 있어.”


하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세냐는 하멜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손끝뿐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조금씩 떨리고 있다. 평소처럼 넉살을 떨고 재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불대지만, 하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몸을 감은 붕대가 풀린다. 흉터투성이의 몸. 분쇄추에 스쳤던 오른쪽 어깨의 커다란 흉터. 그 외에 수십 개의 흉터. 아니스의 신성마법으로도 치료되지 않은, 너무 많은 흉터들.


세냐는 저 흉터를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다. 저들 중 10개 정도는 세냐를 보호하다가 입은 흉터였다. 마법이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캐스팅에 시간이 걸린다.


‘내가 약해서.’


틀린 말이다. 세냐는 강하다. 이 시대, 아니,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존재했던 마법사 중에서 세냐만큼 강하고 위대한 마법사는 없을 것이다.


세냐 메르데인. 그녀의 마법은 드래곤에 준하고, 마왕의 목마저 노릴 수 있다. 지금의 세냐는 그 정도의 마법사다. 16년 동안 마경을 떠돌고, 수많은 마족과 3명의 마왕을 죽이면서 도달한 경지다.


16년 전에는 나약했다.


나약해서, 여러 전투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곤 했다. 실수는 언제나 세냐를 죽음과 가깝게 했으나, 항상 하멜이 가로막아 죽음이 더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평생 사라지지 않을 흉터. 전투의 업.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인데, 오늘은…… 지금은, 특히나 세냐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출발은 언제 할 거냐?”


몸의 떨림은 의식하지 않았다.


심장이 아프다. 근육에 잘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충분하리만큼 쉬었는데…… 몸의 회복이 늦다.


이유는 안다. 16년 동안 혹사시킨 몸이 제발 좀 그만해 달라며 애걸하는 것이다.


“나는 괜찮아. 얼마든지 싸울 수 있어.”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짜증 날 뿐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경고했던 아니스와 세냐의 침묵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 등신 같은 모론조차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쳐다보는 것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멜.”


짧은 침묵의 끝에서 입을 연 것은 베르무트였다.


건배는 했지만, 베르무트는 아직까지 술잔을 비우지 않고 있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 베르무트는 계속해서 술잔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베르무트의 시선이 들렸다. ‘라이언하트’라는 성처럼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는 잿빛 머리카락. 그 아래에서 금색 눈동자가 칙칙이 빛났다.


“너는 이곳에 남아라.”


하멜의 표정이 굳었다. 세냐는 화들짝 놀라서 베르무트를 돌아보았다. 아니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옳아.’


그 누구보다 아니스가 하멜의 상태를 잘 알았다. 일행이 부상을 당할 때마다 치료를 도맡은 것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모론의 몸에도 하멜만큼 수많은 흉터가 있다. 하지만 모론과 하멜의 육체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모론의 육체는, 신의 기적이라 할 만큼 강인하다. 무모한 전투를 계속해도 모론의 육체는 망가지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상처를 입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의 육체도 험난한 전투를 쉬지 않고 계속해도 지치지 않을 만큼 강인했다.


하멜은 다르다. 강인하기는 하지만, 모론과 베르무트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멜이 여태까지 살아남고, 전투에서 베르무트 다음의 무게를 부담할 수 있었던 것은ㅡ 그가 나약한 육체를 커버할 만큼 강하고, 전투에 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장과 코어에 너무 큰 부담을 주는 이그니션은 육체의 규격을 한참 벗어난 기술이다. 마경에 깊이 들어갈수록 적은 강해진다. 하멜의 실력도 늘었다.


부족했다. 지옥에 가까이 갈수록 하멜이 이그니션을 사용하는 빈도는 점점 늘어났다.


마경을 떠돈 지 어언 16년. 유폐의 마왕의 영지에 진입한 최근 3년 동안 이그니션을 쓴 횟수가 그 이전의 13년 동안 쓴 횟수보다 많을 정도다.


그 결과, 하멜의 몸은 너무 많이 망가졌다. 언제 심장이 멈추거나 혈관이 터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코어가 완전히 폭주해, 체내의 마나와 함께 몸이 펑 터져 죽게 될지도 모른다.


“……저도 베르무트 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강하게 권할 수는 없었다. 아니스는 하멜을 너무나 잘 알았다. 저 남자는 이 권유를 굴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제 몸을 돌볼 만큼 현명했다면 저렇게 망가지지도 않았겠지.


“X까는 소리하지 마라.”


역시 하멜은 격분했다. 그는 옆에 놓았던 검을 쥐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세냐는 화들짝 놀라서 하멜을 붙잡으려 들었지만, 모론이 거대한 손을 뻗어서 세냐의 어깨를 잡았다.


“뭐 이 등신아?!”


“하멜의 분노는 타당하다.”


모론이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역시 하멜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말에 무조건 동감할 수는 없었다.


하멜은 전사다. 그가 싸우기를 바란다면, 싸우게 해주어야 한다.


만약ㅡ 하멜이 전투에서 죽어버린다면. 그때에는 하멜을 돌려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울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모론은 하멜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냐는 그딴 것은 몰랐다. 하멜은 정상이 아니다.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머리를 말하는 것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주제에 왜 고집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


언젠가 다들 웃으며 떠들지 않았나? 세상을 구하고, 대륙에 돌아가서 무엇을 할지.


정확히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다들, 막연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야, 그때는 정말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3명의 마왕을 죽였다. 남은 마왕은 2명뿐. 막연하고 멀게 느껴졌던 것이ㅡ 이제는 어느 정도 보이게 되었다.


우리는 행복해져야 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니까.


“앉아, 하멜.”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 사실은 무섭고 절망스러워 미칠 것만 같다. 언젠가부터 뭘 먹어도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몽마의 여왕이 보여주는 악몽보다, 홀로 꾸는 악몽이 더 두려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을 자는 것이 두려웠다. 정신을 말끔히 씻고 안정시키는 마법을 개발했다. 아니스에게 부탁해 신성마법으로 두려움을 떨치려고도 해봤다.


악순환이다. 당장 머리를 씻고 감정을 가라앉혀도, 머리 위의 회색 하늘과 고개를 돌려 보이는 유폐의 마왕성을 보면ㅡ 다시금 공포가 밀려온다.


죽고 싶지 않다.


무책임하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도망친 놈들. 죽어가는 와중에도 미련을 유언으로 떠넘긴 놈들. 멋대로 기대하며 우리를 희망으로 삼은 모두들.


왜 너희가 실패한 것을 우리에게 바라는 거냐.


비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증오스럽다.


부러웠다.


가능하다면 함께 포기해서 돌아가고 싶다. 3명이나 되는 마왕을 죽였으면 충분히 잘했으니까. 언젠가, 다시, 2명밖에 남지 않은 마왕을 죽이러 올지라도. 당장은…… 그래, 하멜의 몸이 나을 때까지만.


“너, 제대로 싸울 수도 없잖아.”


저러한 바람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세냐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저, 이기적인 생각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마왕은 2명이나 남았다. 마왕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계속 혼란스러울 거다. 마물과 마족이 사람을 죽이고, 마병이 엘프를 죽일 것이다.


죽은 엘프들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


“그런 네가 함께 가면 오히려 우리의 방해가 돼.”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죽지 않을 것이다. 행복하지 않다.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다. 뭘 먹어도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고? 음식이 개같이 맛없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돌아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은 마왕을 다 죽이면 해결된다.


“그러니까, 하멜, 기다리고 있어.”


5명 모두가 살아야 한다. 지금 가장 죽을 확률이 높은 것은 하멜이고, 몸도 정상이 아니니까, 여기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당연히 옳다. 하멜이 납득하지 않을지라도ㅡ 세냐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세냐가 그리는 행복은 모두가 함께 살아남는 것.


‘자그마한 집은 싫어.’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막연하던 미래를 그리곤 했다.


‘기왕이면 커다란 저택이 좋아.’


반드시 도달하자 믿었다.


‘숲이 많고 공기가 좋은, 하늘이 높고 푸르른 곳. 밤이 되면 별이 잔뜩 뜨는 곳. 짠 바람 부는 바다보다는 완만한 강줄기가 흐르는 땅.’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부끄러운 상상.


‘별채 하나는 통째로 서재로 삼고 싶어. 해가 저물면 벽난로를 피워, 따스한 주황불이 서재를 밝혀. 그곳에서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적고 있겠지.’


그때에 나는 몇 살이고, 어떤 모습일까.


‘너는 그때도 여전할 거야. 여러 무기나 휘두르고 땀을 잔뜩 흘리고 와선, 혼자서 마음대로 씻고서 젖은 머리를 털며 서재에 들어오겠지. 나는 네 태도를 문제 삼아 뭐라 핀잔을 주겠지만, 네 장난질에 결국은 웃어버릴 거야.’


불침번을 서는 하멜을 힐긋거리다가, 괜히 눈이 마주치면 벌떡 일어서곤 했다.


‘가끔은 옛날 추억이나 떠올리면서 야외에서 캠핑도 하고. 아니스, 모론, 베르무트도 불러서 밤새도록 떠들며 웃는 거야.’


잠이 오질 않아. 어차피 곧 있으면 교대니까, 그냥 깨 있을래.


‘그때 하멜. 너는ㅡ 내 곁에 있는 거야. 내게 가장 가까운 곳에.’


세냐는 숨을 고르며 하멜을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 짐작이 잘되지 않았다.


‘내 미래에, 내 행복에, 네가 없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아.’


아마, 꼴사나운 얼굴일 거라고 생각했다.


외전, 막간


“이 개자식아. 다들 널 걱정해 주는 건데, 왜 네가 지랄 발광이야? 왜 내가 너 때문에 울어야 해?”


세냐는 괜히 윽박을 지르면서 하멜을 걷어찼다. 이 발길질로 하멜이 꽈당, 넘어지는 것을 바랐다. 봐, 너는 내 발길질도 버티지 못할 만큼 약해졌잖아.


그러니까 여기 그냥 있어.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거니까. 우리가 돌아올 것을 믿고 기도나 하고 있으란 말이야.


“개소리하지 마, 세냐.”


하멜은 넘어지지 않았다.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성큼 다가와 세냐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나 없이 유폐의 마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없으면 누가 널 위한 시간을 벌지? 내가 없으면 누가 모론을 억제해? 내가 없으면 누가 아니스의 앞을 지켜? 내가 없으면, 누가 베르무트와 함께 싸우는데?”


“고집부리지 마, 하멜……! 지금의 네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그래, 나는 내 몸을 잘 알지. 너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나는 반병신이 되어가고 있지. 그래도 싸울 수 있어. 언젠가 싸우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야. 너희를 보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멜은 헛웃음을 흘리며 세냐의 어깨를 놓았다.


“내가ㅡ 그게 될 것 같아? 세냐, 아니스, 베르무트. 너희는 날 알잖아. 내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냐? 짐이 된다고? 발목을 잡는다고? 뭐 어쩌라고. 내가 방해되면 너희가 알아서 두고 가. 나는 씨X 기어서라도 쫓아갈 테니까!”


“……하멜.”


베르무트가 긴 한숨을 쉬었다.


하멜은 세냐를 지나쳤다. 그녀는 흠칫 놀라 하멜의 손목을 잡았지만, 거칠게 휘두른 손이 세냐의 손을 떨쳐 버렸다.


“너희가 날 버리고 간다면, X같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게. 내가 쫓아가면 되니까. 그런데…… 여기서 기다리라고? 나보고, 그렇게, 하라고? 싫어 개자식아.”


베르무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왕은 너와 함께 쓰러트릴 거다.”


베르무트는 하멜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널 위한 것이라고 했다. 유폐의 마왕이 있는 어전까지 가는 데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 그 길은 우리가 연다. 너는 그때까지 이곳에서 쉬어라. 그리고 유폐의 마왕과 싸울 때에…….”


“그게 말이 되냐?”


하멜은 코웃음을 치며 베르무트의 멱살을 놓았다.


“버릴 거면 아예 버리든가, 뭐? 유폐의 마왕과 싸울 때 날 다시 데리고 가? 내가 씨X 그딴 명예를 바라고 16년 동안 이 지랄을 한 줄 알아?”


“하멜,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단지…….”


“난.”


하멜이 내뱉었다.


“기어갈 수도 없을 만큼의 병신 쓰레기가 된다면, 그냥 뒈질 거다.”


“하멜……!”


“살아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기어가는 것이 가능할 때에는…… 너희랑 간다.”


병신 같은 고집이다. 하멜 스스로도 그걸 알았다. 다들 자신을 위해서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직 몇 번은 싸울 수 있다. 이 망가진 몸은 아직은 뜻대로 움직인다.


정 움직일 수 없게 되어도.


그때는 망가진 몸으로나마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남아버리면, 비참함에 자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병신처럼 고집 센 거, 너희도 알잖아.”


하멜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털썩 앉았다.


“……여기 남으라고 하면, 내가 고맙다고 남을 줄 알았냐? 차라리 뒈지고 말지. 말했듯이, 내가 방해된다면 그냥 버리고 가라. 먼저 가 있으란 말이야. 내가 알아서 쫓아갈 테니까.”


“이 병신아!”


세냐는 빽 고함을 지르며 하멜의 따귀를 때리려 했다. 보통 이럴 때에 하멜은 굳이 가만히 있어서 세냐의 따귀를 맞아주었지만, 이번에는 맞아주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젖혀서 따귀를 피했다.


“봐. 내 몸 잘 움직이잖아. 그 대마법사, 세냐 메르데인의 따귀도 피할 수 있다고.”


“이, 이 병신……!”


“마음대로 하게 둡시다.”


아니스가 내뱉었다. 아직 앞에 놓여 있던 술병에는 절반가량의 술이 남아 있었지만, 아니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병나발을 불며 술을 죄다 비워 버렸다.


“저 개자식이 말로 해도 들어 처먹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멜을 두고 가려면, 저 새끼의 다리를 지금 당장 아작 내야 할 겁니다.”


“기어서라도 따라간다니까.”


“그럼 양팔까지 박살 내면 되겠군요. 그렇게 하면 애벌레처럼 등허리를 들썩거리며 따라올 겁니까? 어머나, 방금 상상해 봤는데 하멜, 그 모습은 당신에게 썩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 순간을 대비하여 지금이라도 기는 연습이라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버러지.”


아니스가 이죽거렸다. 하멜은 그 말에 눈썹을 콱 찡그리면서 아니스에게 다가갔다.


“야 아니스,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꽈작! 아니스는 들고 있던 술병을 하멜의 대가리로 내려쳐 버렸다. 술병이 깨지며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화끈한 일격에 세냐와 모론은 넋이 나가서 입을 쩍 벌렸다.


가장 놀란 것은 하멜이었다. 설마 술병으로 머리를 내려칠 줄이야! 모욕을 당한 것은 나인데, 대체 왜 내가 맞아야 하는 거지?


하멜은 어안이 벙벙하여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곱게 말할 때 들으면 좀 좋습니까?”


방금만 해도 비웃음을 띠고 있던 얼굴이다.


지금은 웃지 않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떨리고 있다. 충혈되어 가는 눈동자는 떨리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다. 세냐는 결국 울어버렸지만, 아니스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감정을 감추는 것에 능숙했다. 지금 울지 않을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하멜. 당신이 정말 방해가 되어서, 여기 있으라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세냐와 저…… 아니, 우리 모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기에, 이곳에 남아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


“유폐의 마왕성은 저희가 여태까지 넘어온 마왕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겁니다. 여태까지 살아남았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저희 중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멜은 순순히 그 사실은 인정했다. 유폐의 영지를 떠돈 지도 어언 3년이다.


이 땅은 지옥이다. 다른 마왕의 영지에서는ㅡ 조금이나마 희망이란 것이 존재했다.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멜의 동료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했다.


약할지라도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폐의 영지에는 그러한 희망의 잔불조차 남아 있지 않다. 죽고, 살아남아, 도망칠 뿐. 지금 이 땅에서, 유폐의 마왕을 토벌하겠다는 목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곳의 5명뿐이었다.


서열 2위의 대마왕.


이전의 마왕들 모두가 죽어가며 비웃음과 저주를 토했다.


너희는 결국 유폐의 마왕에게 죽게 될 것이다. 유폐의 마왕성이 너희 모두의 무덤이 될 것이다. 살육과 참혹과 광란은, 서열 1위의 멸망의 마왕이 아닌 유폐의 마왕의 이름을 떠들었다.


“만약 우리 중에 누군가가 죽게 된다면…….”


“그건 나겠지.”


“……예. 그러니까 당신은 이곳에…….”


“내가 너희를 대신해 죽어야 해.”


하멜은 그렇게 말하면서, 유리파편이 달라붙은 머리를 털었다.


“……무슨 말을 하건 나는 같이 간다. 아직 싸울 수 있으니까, 그것뿐이야.”


“이 병신!”


세냐가 꽥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하멜을 노려보았다.


ㅡ어떻게 말해야 하지? 머리가 아팠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 병신은 들어 처먹지를 않는다. 정말로 제압이라도 해야 하나?


그 뒤에, 다음에, 하멜과 마주 볼 수 있을까.


“엉망이군.”


베르무트가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큭큭 웃었다.


그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모두가 놀라서 베르무트를 쳐다보았다. 베르무트는 평소에 잘 웃지 않는다. 특히 지금의 상황은 웃을 만한 상황도 아니잖은가.


“하멜. 네 말은 모순적이고 논리가 없어. 감정뿐인 고집을 우길 뿐이다.”


“그래서 꼽냐?”


“아니. 오히려 그편이 너답다고 생각한다.”


베르무트는 아직 마시지 않았던 술잔을 들어 올렸다.


“네 뜻은 알겠다. ……함께 가자. 유폐의 마왕성, 다른 마왕성과 비교되지 않을 끔찍한 곳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죽지 않아. 누구도 죽지 않을 거다.”


베르무트의 ‘말’은 신기하다. 터무니없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도 반드시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믿음을 준다. 용사. 모두가 베르무트를 그렇게 부른다. 하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인정하고 싶지 않은 녀석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지옥에서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건 베르무트일 수밖에 없었다.


유폐의 마왕이 아무리 강해도. 절대 싸울 수 없을 것만 같은 멸망의 마왕이 있어도.


베르무트가 있다면, 어떻게든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니 함께 가야 해.’


하멜은 입술을 뿌득 씹었다.


“베르무트의 말이 맞다.”


모론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누구도 죽지 않는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모두 다 살아남을 거다. 싸움이 끝나고, 유폐의 마왕의 시체 앞에서 모두 함께 술을 마실 거다.”


베르무트가 들고 있던 술잔을 비웠다. 그는 드물게도 눈썹을 찡그리면서 술잔을 내려놓았다.


“하멜의 말도 맞군. 지독하게 맛없는 술이야.”


“……베르무트 님.”


“험난한 곳에 도전하는 만큼 사기가 중요하겠지. 이런 술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건 즐겁지 않아.”


베르무트의 손가락이 허공을 그었다. 쿵!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술독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에 아니스가 두 눈을 부릅뜨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베르무트 님! 술은 이미 다 떨어졌다고 말했잖습니까!”


“거짓말이었지. 미안하다.”


“왜 그런 거짓말을!”


“정말 중요하고 기쁠 때에 마실 술은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베르무트는 빙긋 웃으면서 술독을 열었다. 아니스는 이미 성배를 들고서 술독 앞에 서 있었다. 날이 서 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변했다.


세냐는 그것이 싫었다. 이렇게 넘겨서는 안 될 문제였다.


“뭐 어쩌겠습니까.”


성배에 술을 가득 받고 돌아온 아니스가 세냐의 곁에 앉았다. 그녀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술잔을 세냐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멜은 고집을 꺾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하멜의 마음을 바꾸지 못합니다.”


“왜 못 해? 차라리 반병신으로 만들어서…….”


“하지도 못할 이야기는 그만두십시오, 세냐. 그랬다가는 평생 하멜에게 원망을 받게 될 텐데. 당신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얇게 뜬 눈이 세냐에게 향했다. 세냐는 그 시선에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힐긋 고개를 돌리니, 하멜은 어느새 모론과 베르무트 사이에 앉아 투덜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도 죽지 않을 겁니다.”


아니스가 성배를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유폐의 마왕성은 힘든 곳이겠지만, 우리는 여태까지 그랬듯이 살아남을 겁니다. 쓰러지고 다쳐도, 제가 있으면 죽지는 않습니다.”


“…….”


“그리고 세냐, 당신도 있지 않습니까? 하멜에게서 가장 심각한 것은 코어와 심장. 코어가 폭주해 붕괴하려는 순간에 당신이 곁에 있다면, 폭주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겁니다. 오히려 하멜은 저희와 함께 가는 것이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응.”


“하멜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유폐의 칼과 싸울 때와는 많은 것이 다를 겁니다. 저도 있고, 당신도 있고, 모론도 있고, 베르무트 님도 있습니다. 하멜이 정면에서 전부 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니스는 떠들던 입술을 잠시 멈췄다.


“……제가 뭘 이리 떠들어야 하는 것인지. 그냥, 저 병신은 내버려 둬도 알아서 살아남을 겁…….”


“너도 납득이 필요한 거잖아.”


세냐가 중얼거렸다.


“하멜을 두고 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 이곳에 두고 가지 않아도 하멜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멜에게 원망받고 싶지 않고, 하멜을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직접 내뱉으며 괜찮을 거라고 위안 삼는 거야.”


“……저는 당신들의 동료이자 성녀이니 당연한 겁니다.”


“정말 그것뿐이야?”


아니스는 성배를 내려놓았다. 근처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주 멀게 들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하멜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멜은 모론과 술잔을 부딪치며 웃고 있었다. 부상은 다 나았고, 아무렇지도 않다. 술을 퍼마셔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게 떠들면서 흉터 가득한 가슴을 두드렸다.


‘쓸데없는 배려.’


……베르무트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금색 눈동자를 살짝 휘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배려 덕에 세냐와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알고 있었습니까?”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저 등신과 병신 둘 빼고는 다 알걸. ……마법을 써준 것을 보면, 베르무트도 알고 있을 거고.”


“숨기는 것에는 능숙하다 생각했는데.”


“능숙이야 하겠지. 그런데 아니스, 너는 별로 숨길 생각도 없었잖아. 안 그래? 하멜에게는 노골적이었으면서.”


“어머. 저도 모르게 욕심이 묻어나왔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세냐, 당신이 보기 답답해 자극하고 싶었든가……. 멍청한 하멜을 골리고 싶었던가.”


아니스는 쿡쿡 웃으면서 내려놓은 성배를 다시 집었다. 그걸 보란 듯이 흔들면서 세냐에게 속삭였다.


“제 감정은 당신처럼 진심이지 않습니다. 그냥…… 네. 저는 이런 경험도 없고, 순결하게 살아서.”


“누구는 안 순결해?”


“운명이 그렇다는 겁니다. 저는 성녀니까요. 그냥 가벼운…… 예. 가벼운 심술, 장난, 뭐 그런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빼앗을 생각은…….”


“그것뿐이야?”


세냐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거로 만족할 수 있어?”


“……만족하지 않으면 뭐 어쩌라는 겁니까. 방금도 말했듯이, 저는 성녀입니다. 제 몸은 빛께…….”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살아서…… 돌아간다면,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잖아. 성국이 네게 남자를 사랑하지 말라 떠들고, 네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도와줄게. 너랑 나 둘이서 교황 모가지 하나 못 딸 것 같아?”


“……무식한 말이군요. 신앙심이 없는 당신이라면 그래도 되겠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제 존재 자체가 신앙에 비롯된 것이니. 신앙을 배신해 버리면, 저는 죽어 지옥에 가게 될 겁니다.”


“지옥에서 살고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 그러면 수지가 안 맞잖아.”


세냐는 술을 홀짝거리며 웃었다.


“우리는 이미 지옥에 살고 있어.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이 지옥을 구할 거야. ……그렇게 행복해져야 하는데, 아니스, 너만이 지옥에 남는 것은 싫어.”


“…….”


“우리는 많은 일을 했어. 특히 너는 많은 사람을 구했지. 나는…… 빛의 신은 믿지 않지만 말이야. 수많은 사람을 구한 성녀가…… 고작, 남자랑 결혼했다고 트집 잡아 지옥에 떨어트릴 만큼 신이 쩨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신의 뜻을 사람이 어찌 알겠습니까.”


아니스는 풋 웃으면서 세냐를 돌아보았다. 아직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니스는 손가락을 뻗어 세냐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당신 말마따나 저희는 지옥에 살고 있으니, 행복한 꿈 정도는 꾸어도 되겠지요.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예. 그때에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부 엉망이야.”


세냐는 짧게 숨을 토하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아까만 해도 울고, 화내고, 미칠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어.”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우리 중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란 믿음. 하멜은 괜찮을 것이란 믿음.”


아니스의 성배와 세냐의 술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믿지 않는 것보다는 믿어버리는 것이 마음이 편해지는 법입니다.”


믿음이라. 세냐는 깔끔히 비운 술잔을 내려놓았다. 베르무트가 특별한 날을 위해 아꼈다는 술. 그래서인지 ‘맛’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단순히 술이 맛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라.”


이제는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내려놓은 술잔, 그 옆에 둔 아카샤가 보였다.


‘괜찮아.’


아니스의 말대로다. 유폐의 칼과 갑작스레 마주쳤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다르다. 베르무트가 있다. 모론도 있다. 아니스도 있다.


‘아무도 죽지 않아.’


세냐는 아카샤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서 술을 마시던 하멜과 눈이 마주쳤다.


그 개자식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보란 듯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세냐는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똑같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주었다.


‘하멜은 죽지 않아.’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외전, 막간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잠이 깨어버렸다. 바로 눈을 뜨지 않고 몇 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잠이 들기 위해서였지만, 한번 말끔하게 깨어버린 잠은 노력한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었다.


결국 세냐는 짜증 담긴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떴다. 잠들기 전에 아니스의 신성마법으로 정신을 안정시키고, 세냐 본인도 수면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지옥과 가까운 이곳에서는 저러한 방비들은 큰 소용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성이 내뿜는 강렬한 마기가 일대에 가득하고, 누아르 제벨라와 몽마들은 틈만 있다 싶으면 꿈속을 침입하려 든다. 결국 가로막힐 뿐이지만, 저러한 모든 것이 ‘공격’이 되어 신성력을 걷어내고 마법을 흩트리며 정신을 오염시킨다.


다른 마법사들은 부정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세냐는 마법사라면 무릇 예민한 정신병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래저래 신경 쓰이고 짜증 나고 스트레스받을 일이 너무나도 많았으니, 불면증과 얕은 잠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잠이 오질 않나.”


“응.”


세냐는 뻐근한 눈을 문지르면서 고개를 돌렸다.


모닥불 앞에 앉은 베르무트가 보였다. 흔들리는 불길 너머에 금색 눈동자가 차분히 떠 있었다. 세냐는 그 시선을 받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잠은 억지로라도 자두는 편이 좋아.”


대마법사와 성녀가 함께 있는 이 파티는 잠이 절실하지 않다. 정말 최소한의 시간만 잠을 자고, 부족한 부분은 마법과 신성마법으로 대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괜찮아. 컨디션에 문제도 없고.”


세냐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절실하지 않다고 해도, 불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심신의 피로를 마법과 신성마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결국 나중으로 미뤄버리는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버티는 것은 결과적으로 수명을 깎아버린다.


“무리하는 것은 아닌가?”


베르무트가 물었다. 세냐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모닥불 너머에 있는 베르무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창백한 흰 피부와 잿빛 머리카락은 불빛의 색에 물들었지만, 눈동자만은 선명한 금색으로 남아 있다. 벌써 16년을 함께 여행하고 있지만ㅡ 저 눈동자에 응시당할 때, 아직도 세냐는 흠칫하는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우리 중에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어? 베르무트, 너도 무리하고 있잖아. 안 그래?”


세냐는 태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저 남자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세냐도, 아니스도, 모론도, 하멜도, 모두가 여정을 겪으며 무언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베르무트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세냐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 남자는 처음부터 초월적이었으며 완벽했다. ‘더’ 초월적이고 완벽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나, 그렇다 해서 처음의 베르무트가 불완전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신비롭고 영웅다웠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인간, 아니, 그런 존재 같았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 위대한 영웅이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모른다. 이것만큼은 다른 동료들도 공감할 것이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베르무트의 ‘진심’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모두가 그러하듯, 베르무트 역시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는 것에는 맹목적이었다.


완벽하고 초월적인 존재. 속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영웅. 그래서 세상은 베르무트를 용사라고 부른다. 베르무트와 16년을 함께 떠돈 세냐와 다른 동료들도, 베르무트를 용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베르무트는 모두의 중심이자 버팀목이 되었다. 그 툴툴거리는 하멜조차도 이것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3명의 마왕은커녕 맨 처음 맞닥트린 살육의 마왕조차도 쓰러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멀어.’


고작 모닥불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세냐는 베르무트가 참으로 먼 존재라고 느꼈다. 함께 싸우고, 떠들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이제는 일상이라 할 모든 순간에 베르무트는 가깝다. 용사, 동료, 친구.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럴 때. 베르무트가 초연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을 때면, 그 가깝던 베르무트가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오히려 베르무트가 그렇게 느껴지기에, 가끔 내뱉는 말들에 절대적인 신뢰가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참나.”


세냐는 욱신거리는 두통을 떨칠 겸 고개를 몇 번 흔들고서 주변을 보았다.


벌러덩 누워서 자는 모론. 세냐의 조금 곁에는 아니스가 몸을 웅크리고서 잠들어 있었다.


하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위한 거야? 아니면, 하멜을 위한 거야?”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베르무트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베르무트. 너는 하멜에게 특히 무른 것 같아. 언제나 그랬지만 말이야.”


“나만 그렇단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억울한데. 우리 모두가 하멜에게 특히 무르지 않나?”


베르무트가 난감하다는 듯이 웃었다.


지옥의 깊은 곳. 자그마한 소리도 예민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자그마한 소리로 대화를 나누지만, 아니스와 모론은 잠에서 깨지 않는다. 지금 세냐에게도 어둠 너머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베르무트의 마법 때문이다.


“이미 수십 번 말해둔 것이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 베르무트. 이 지긋지긋한 헬무드를 떠나서, 대륙에 돌아가면…….”


“내 마법을 연구하고 싶다는 것이지? 솔직히 별로 내키지는 않아.”


“뭐 어때? 그때가 되면 세상은 평화로울 거고, 내가 네 마법을 연구한다고 해서 네게 뭐 나쁜 짓을 하겠냐구. 어디까지나 마법의 발전을 위해…….”


“네 호기심이 더 크지 않나?”


“내 호기심이 충족되고 답을 얻는 것이 곧 마법의 발전이야.”


오만한 말이지만 세냐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민망한 기색도 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교대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 ……혹시 모르니까, 하멜에게 다녀올게.”


“세냐, 네가 원한다면 교대하지 않아도 괜찮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조금 더 용기를 내보라는 것이지.”


베르무트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냐는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거렸다.


불침번의 다음 순번은 세냐다. ……교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베르무트가 연달아 불침번을 서겠다는 말인가? 왜?


‘용기?’


ㅡ이해했다. 세냐의 두 눈이 크게 떠졌고, 입도 함께 벌어졌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사라졌지만 양 뺨에서 화끈거리는 열이 느껴졌다.


“뭐뭐뭐, 뭐라, 뭐라는 거야?!”


“내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했나?”


베르무트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세냐는 괜히 몸부림을 치며 달아오른 뺨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뜨, 뜬금없는…… 이상한 말을 하잖아! 요, 용기라니…….”


“나로서는 네 반응이 오히려 당황스러운데. 16년 동안이나 품은 연심이 아직도 부끄러울 수 있는 건가?”


“16년…… 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베르무트는 놀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세냐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기억을 더듬고, 햇수를 헤아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15년 반 정도…….”


“아직도 그렇게 부끄럽고 민망하다면 용기를 내기도 힘들겠어. 도움이 필요한가?”


“괜한 짓…… 하지…… 마! 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리고…… 그리고 말이야, 그럴 상황도 아니잖아?”


세냐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무턱대고 내뱉은 변명은 아니었다. 품어 온 감정이 아무리 대단하고 무겁건, 지금 당장 우선해야 할 것은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감정은……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까지 미루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언젠가.”


베르무트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선 세냐를 응시했다.


“……언젠가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우리가 웃으며 떠들던 미래를 누리게 될 날에.”


미래의 이야기는 자주 나누었다.


모론은 왕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니스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하멜은 낯부끄러워하며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에게 칼이나 가르쳐 볼까, 라는 말을 몇 번인가 했었다.


세냐는.


남들처럼 결혼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살다가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그런 삶만이 평범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세냐는 그런 삶을 바랐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베르무트도 저렇게 웃곤 했다.


낯설지 않은 미소였다.


“……흥,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야, 베르무트. 당장은 내가…… 어…… 음, 하멜을, 그래. 그렇게 되어버렸지만, 나중에는 또 모르는 일이잖아? 응? 대륙에 돌아가면…….”


아무리 그래도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세냐는 자신이 하멜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말뿐이라도, 그 말도 안 되고 있어서는 안 될 미래를 내뱉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자신이 부정을 저지르는 것만 같았다.


결국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베르무트는 그런 세냐의 모습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네 마법 연구의 소재가 되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너와 하멜이 결혼식에…… 그래. 주례는 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야.”


“미, 미…… 미친 소리 하지 마. 결호오온?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니까! 나, 난 갈 거야, 베르무트. 너답지 않은 개소리는 더 이상 못 들어먹겠어!”


뜨거워진 얼굴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세냐는 더듬더듬 내뱉으면서 홱 몸을 돌렸다.


설마 베르무트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평소 농담을 잘 하지도 않던 베르무트가 한 말이라서 감정이 더 크게 요동쳐버렸다.


……하지만. 감정과는 별개로 머릿속에서는 멋대로 망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것’은 이미 여러 번 상상해 보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부끄러운 망상 말이다.


‘개~ 같은 년.’


아니, 사실 알고 있는 존재가 하나 있긴 했다. 머릿속의 망상이 구체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은, 누아르 제벨라에게 처음으로 습격받았을 때…… 그 빌어먹을 년에 의해 ‘꿈’을 꿔버렸기 때문이다.


단출한 결혼식은 싫다. 인생에 한 번뿐인 이벤트잖은가. 기왕 결혼식을 올린다면, 대륙 모두가 알고 역사에도 기록될 만큼의 성대한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세상을 구한 영웅들의 결혼식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했다.


대륙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왕성. 그곳에 사는 것이 왕인지 황제일지는 모르지만, 통보해 두면 알아서 성을 비워줄 것이다. 대관식보다 훨씬 성대하고 화려하게. 그러면서도 장엄하고 아름답게.


대륙의 모든 왕들은 하객으로 참석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마왕에게도 닿는 대마법사의 치졸한 분노를 맛보게 되리라. 어디서 힘 좀 쓴다는 귀족들도 모두 참석해서, 영웅들이 세상을 구하는 동안 긁어모은 제물을 예물로 바쳐야 할 것이다.


……베르무트가 주례를 서고. 모론은 사회나 보라고 할까? 그 등신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일 터…… 그렇다면 아니스가?


‘안 돼.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아무 왕에게나 시키면 되겠지. 본래는 아니스에게 축복을 받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차라리 공동결혼식은? 모두가 놀라겠지만 뭐 어떤가.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면 뭐든 해도 된다.


‘하멜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아니, 오히려 이번 생에 나라를, 세상을 구한 것일 테니 저 정도 호사는 누려도 된다. ……상상해 보니 제법 괜찮은 광경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턱시도를 입은 네 양옆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나랑 아니스가 서는 거야. 베르무트가 우리를 부르면, 셋이서 함께 입장하는 거지. 모론 그 등신은 입장하는 우리를 보고서 펑펑 울 거고.’


오히려 잘됐다. 각자 손에 부케를 들고 있을 테니, 마지막에 베르무트와 모론을 향해 던지면 될 것이다.


‘그 둘은 그때도 결혼하지 않았을 것 같아. 베르무트는 왠지 평생 독신으로 살 것 같고…… 모론은…… 음…….’


다시 생각해 보니 모론은 의외로 결혼을 빨리할 것 같았다.


‘그럼 내가 모론보다 못난 것 아냐? 어…… 어쩔 수 없네. 모론한테 지면 평생 놀림이 될 테니까, 내가 히…… 힘을 내서, 모론보다는 빨리 결혼을…….’


어쩌면 지금 나는 누아르 제벨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발칙한 갈X의 여왕이 정신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미치고 부끄러운 생각을 깊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으흠.”


그럴 리가 없다.


멀찍이 보이는 하멜의 모습을 보고서, 세냐는 이 모든 것이 꿈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떠도는 모든 망상과, 가슴을 날뛰게 만드는 이 감정은 누아르의 최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말마따나 16년…… 아니, 15년하고 반을 품었던 감정이다. 이에 대한 혼란은 10년도 전에, 아니, 어쩌면 9년하고 몇 개월 전에 납득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래도 여전히 부끄럽고 설레는 것은, 단지 세냐가 그런 성격이기 때문이다.


진즉에 받아들인 감정이라지만, 그 감정을 모두 내비치고 들이박을 수가 없다. 그래, 언젠가는 이 감정을 하멜에게 제대로 확인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세냐 스스로 말하기 전에 저 우둔한 바보 병신이 먼저 알아차려 줬으면 좋겠다…….


세냐 쪽에서 얼굴 붉히며 마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기왕이면, 기왕이면 하멜이 먼저 꽃다발…… 아니, 들꽃이라도 하나 들고서 고백해 주면 좋겠다.


세냐는 하멜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도록 유도해 왔다.


문제는 저 남자가 굉장히 우둔한 바보 병신이라는 것이었다.


방법을 바꿨다. 아주 가끔, 어쩔 수 없고 필요하다 싶을 때. 세냐는 제 감정을 살짝살짝 하멜에게 드러내 보았다. 그것은 세냐 스스로 회고하기에도 완벽했다. 하멜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말이다.


‘…….’


베르무트와 아니스가 알아차렸지만, 그건 둘이 필요 이상으로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멜 저 새끼는 이런 문제에서 모론 이상의 등신인 모양이었다.


“넌 왜 또 그러고 있어?”


세냐는 표정을 가다듬고서 하멜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얼굴이 빨간가? 오히려 빨간 편이 저 멍청이에게 알맞은 어필이지 않을까?


싫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부끄러워서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러는 넌 왜 안 자냐?”


바닥에 앉아 있던 하멜이 고개를 들어 세냐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시선이 맞닿았을 때.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풋 웃어버렸다.


결국 이런 것이다.


15년이나 된 감정이라지만 세냐는 여전히 이 감정이 부끄러웠고,


하멜에게 설레었다.


“베르무트 다음 불침번이 나잖아, 바보야.”


“교대까지 시간이 1시간도 넘게 남았잖아.”


“미리 깨서 준비하는 것이 매너잖아.”


“뭔 되지도 않는 구라를 치고 있어. 뻔하지, 또 잠이 안 오는 거냐?”


하멜은 툴툴 웃으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세냐는 대답 대신 코웃음을 쳤다. 하멜의 말마따나 뻔하고, 자주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억지로라도 자. 너 제대로 잠 못 잔 지 꽤 되었잖아. 그러다 몸 상한다.”


“네 주제에 내 걱정은 하지 말아 줄래?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세냐는 다시 한번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 말만큼은 장난기를 모두 덜어낸 진심이었다.


하멜은 대답 대신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흉터 가득한 상체가 땀에 흠뻑 젖었다. 앉은 주변에는 하멜이 즐겨 사용하는 여러 무기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 또한 뻔하고, 자주 있던 일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하멜은 제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마치 강박처럼 무기를 휘두르며 자신을 단련했다.


“내가 이러는 것 한두 번 보냐?”


“아까 나눴던 말은 그새 까먹었어? 네 몸 병신이니까, 그냥 좀 쉬라고.”


“쉬면 오히려 둔해져. 이렇게 조율해 놔야 필요할 때에 몸이 잘 움직인다고.”


“무식한 소리 좀 하지 마. 아니스한테 또 처맞고 싶어? 아니면 그래, 내가 지금 널 패버리는 수가 있어.”


“무리는 안 해.”


하멜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흙투성이의 손을 툭툭 털고서, 발 앞에 놓인 수건을 집어 들었다.


“내가 괜찮고, 움직여도 되는 선을 알아두는 거야.”


“……그걸 알아둬야 할 정도면 진짜 심각한 거야.”


“세상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땀에 젖은 몸을 대충 닦으면서 하멜이 웃었다.


“이것도 다, 죽지 않으려고 하는 거야.”


“……그냥…….”


“응, 난 안 돌아가. 나 혼자 기다리고 있지도 않을 거야. 그냥 너희랑 갈 거고, 정 내가 걱정되면 네가 나 안 죽게 잘 지키든가.”


세냐가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하멜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세냐는 벌렸던 입술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표정을 확 구기고서 하멜의 가슴을 철썩 때렸다.


“개자식.”


얄미워서 꽤 힘을 주어 때렸다. 그러나 하멜은 아픈 기색 하나 비치지 않으며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무트는 너한테 이상할 정도로 무른 것 같아. 왜 몸도 성치 않은 병신이 수련하게 내버려 둔 거야?”


“날 잘 아니까.”


“아까만 해도 그래. 베르무트가 밀어붙였으면, 너를…….”


“너랑 똑같아.”


툭. 근처에 놓여 있던 대검이 하멜의 발에 차여 위로 떠올랐다. 하멜은 대검을 허공에서 거머쥐고서 어깨에 걸쳤다.


“세냐. 결국 너도 밀어붙이지 못했잖아. 베르무트도 똑같다고. 밀어붙인들 내가 들어 처먹지 않을 것을 아는 거지. 그렇다면 오히려 눈길 닿는 곳에 두는 편이 낫잖아.”


“……네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날뛰는 고집쟁이 병신이라는 말을 참 잘도 포장한다.”


“거봐, 세냐, 너도 날 잘 알잖아.”


“네가 그럴 때마다, 널 걱정하는 내가 바보 같아.”


“그럼 걱정하지를 마.”


하멜은 히죽 웃으며 제 가슴을 엄지손가락으로 쿡 눌렀다.


“난 안 죽어.”


웃기는 말이다. 안 죽는다는 말은 세상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저런 말을 내뱉고서 죽어버리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하멜이 무조건적인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세냐는ㅡ 그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믿고 싶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세냐를 포함한 모두가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을 바쳐왔으니까.


“……바보.”


세냐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알아서 조심할 거야. 무리도 안 할 거고. 그러니까 하멜, 너도 그래야 해. 조심하고, 무리하지 마. 날…… 죽이고 싶지 않으면, 네가 날 지켜야 돼. 나도 널 지킬 테니까.”


“너랑 나만 그러겠냐? 우리 모두가 그럴 텐데. 내 생각에는 말야, 우리 중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건 아마, 모론이지 않을까? 그 새끼는 무식하게 돌진해 버리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 그럼에도 하멜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방금 내뱉은 말에 대한 결론은 이미 오래전에 내놓았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죽지만 않으면 다음이 있어. 하멜.”


세냐는 그렇게 말하고서 보란 듯이 웃었다.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았다. 하멜은 눈을 끔벅거리다가, 괜히 웃으면서 대검을 한 번 휘둘렀다.


‘이런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아.’


세냐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런 상황은 서로에게 익숙했다. 하멜이 무기를 휘두르며 자신을 단련할 때. 대부분 그 근처에는 지금처럼 세냐가 앉아 있었다.


이럴 때에 서로에게 대화는 큰 필요가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세냐는 말없이 하멜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구경했다.


“……유치한 놈.”


할 말은 해야 했다.


“뭐?”


“나 보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마나도 쓰지 않고, 맨몸으로 무기 휘두르는 거. 네 몸 멀쩡하다고 시위하는 거야 뭐야?”


“아닌데? 그냥 몸을 단련하고 있는 건데? 이래서 마법사가 문제야, 그놈의 마나 만능주의. 무조건 마나만 단련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니까? 몸도 함께 단련을 해야…….”


“잘 알았으니까 적당히 해. 네가 야밤에 수련하는 것이야 모두가 알지만,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이따 아침에 아니스가 널 가만두지 않을걸.”


그 말에 하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진심으로 아니스의 폭력을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세냐는 하멜이 슬쩍 마나를 풀어내는 것을 보며 킥킥 웃었다.


“……베르무트랑 무슨 얘기 했냐?”


세냐의 웃음이 민망한 것인지, 하멜이 헛기침을 하며 대뜸 물어왔다.


“무슨 얘기 했겠어? 그냥 네 욕 했지.”


“매일 하는 거잖아.”


“맞아. 그냥, 매일…… 아니, 자주 하는 얘기 했어.”


“뭔 얘기했는지 알겠네. 나중에 우리는 뭐 하고 있을까, 그런 얘기?”


역시 서로를 잘 아나 봐. 세냐는 그렇게 생각하며 풋 웃었다.


“맞아.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도 되잖아. 마왕도 2명밖에 안 남았고.”


“남은 2명이 전에 죽인 3명보다 더 힘들 것 같지만.”


“그렇게 고집을 부려대더니 이제 와서 약한 소리야? 그래서 하멜, 너 정말 고아들한테 칼 가르칠 거야? 네 이름 따서 고아원이라도 하나 만들게?”


“생각해 봤는데, 고아원 말고 차라리 아카데미를 하나 짓는 것은 어떠냐? 전국의 전쟁고아들을 모아다가 이거저거 가르치는 거지.”


“아하, 그래, 네 이름 따서 하멜 아카데미, 뭐 이런 거? 네가 아카데미를 짓는다면 전쟁고아 말고도 입학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줄을 설 텐데.”


“설마 멀쩡한 부모 죽이고 오는 또라이는 없겠…….”


“미친 소리 좀 하지 마.”


세냐가 정색하고서 말을 끊었다.


“……아카데미는 꽤 괜찮을 것 같아.”


저 헛소리와는 별개로, 하멜의 의견은 세냐의 마음을 조금 동하게 만들었다. 취지가 어쨌건, 이 끔찍한 세상을 구하고 난 다음을 가꾸는 일 아닌가.


“나도 계속 마법 연구를 할 거니까……. 음, 그래. 하멜, 네가 아카데미를 세운다면, 내가 친히 마법 과목의 교수가 되어줄게.”


“마법 아카데미는 아롯에도 있잖아. 마탑도 있고.”


“하! 아롯의 마법사들이라고 해봐야 나보다 열등한 주제에 대접만 받고 싶어 하는 꼰대들이잖아. 장담하는데, 아롯 마탑주와 교수들을 죄다 모아놓은 것보다 내가 훨씬 더 마법을 발전시키고 후대들에게 잘 가르칠걸?”


모두가 함께 얘기하던 미래. 떠들던 바람이 항상 똑같지는 않았다. 이야기할 때마다 조금씩, 혹은 아주 많이 바뀌곤 했다. 그때마다 바람도, 마음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널 도와줄게. 그런 미래는…… 꽤 좋다고 생각해.”


세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멜은 민망한 것인지 고개를 아예 돌리고서 대검을 휘둘렀다.


“네가 아카데미의 교장이 되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지만.”


“다시 생각해 봤는데, 그냥 안 할란다. 나는 그냥 어디 공기 좋고 평화로운 곳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살란다.”


“부끄러워하기는.”


세냐는 쿡쿡 웃으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야기할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미래.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세냐는, 행복한 삶을 바랐다.


언젠가부터 세냐가 그리는 행복한 삶에는 항상 하멜이 옆에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외전, 막간


유폐의 마왕성은 거대한 지네 산맥이 에워싸고 있다.


그 구불구불한 산맥은, 가진 이름처럼 마치 살아 있는 지네 같이 꿈틀거린다. 그렇게 지네 산맥은 거대한 벽이 되어 마왕과 마왕성을 유폐한다. 동시에 산맥에 진입하고 넘어가려는 침입자를 산속에 유폐하여 죽여 버린다.


끔찍하고 거대한 지네 산맥을 넘는 순간부터 하늘이 바뀌어 버린다. 유폐의 마왕. 이 터무니없이 강력한 대마왕은,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버린다.


지네 산맥 넘어서부터는 하늘에 낮과 밤이 존재하지 않는다. 태양은 유폐의 마왕이 존재하는 하늘을 밝힐 수가 없고, 밤은 유폐의 마왕이 발하는 마력보다 어두울 수가 없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뿌연 회색 하늘 아래. 새빨갛게 물든 대지가 있다. 붉은 평원. 그곳에 존재하며 떠도는 것은, 칙칙한 검은 안개뿐이다.


유폐의 마왕의 심복이자 칼, 가비드 린드먼이 이끄는 마족 기사단ㅡ 검은 안개. 유폐의 마왕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검은 안개의 주둔지인 붉은 평원을 넘어야 한다.


검은 안개는 강하다. 300명의 마족으로 구성된 그 기사단은 헬무드의 악몽이라 일컬어진다. 유폐의 마왕성을 목표로 한 여러 기사단과 군대가 검은 안개에게 몰살당했다.


끊이질 않는 비보에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누군가는 절망하고 도망치지만, 누군가는 굳이 나서서 이곳에 왔다. 결국은 난도질당해 죽을지라도, 제 시체에 칼날이 박히는 동안에 다른 누군가가 대신 검을 뻗어줄 것이라 믿는 자들. 도망치던 발걸음을 다시 돌려서, 실낱같은 희망에 제 목숨을 바쳐보자고 다시 결심한 사람들.


‘아.’


지나친 시체 중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지네 산맥을 넘기 전에, 우연히 만났던 패잔기사들. 맞닥트린 검은 안개에 대부분의 동료들을 잃었다던 3명 중 1명. 더럽게 맛없는 술을 건네면서, 꼭 마왕을 쓰러트려 달라며 울던 기사.


썩둑 잘린 상반신이 다른 시체의 틈에 섞여 있었다. 원통하다는 얼굴도,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표정을 짓기도 전에 머리가 잘린 것일지도 모른지만, 세냐는 그런 우울하고 끔찍한 생각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마경을 떠나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한 주제에, 왜 여기서 죽은 것일까. 다른 2명은 어디에 있고? 다 같이 마음을 바꾼 것일까, 아니면 혼자서 결단할 걸까.


……찌그러진 흉갑에 조악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사자의 문장. 언젠가부터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상징이 된 문장이었다.


“아아아아!”


사방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있다. 지금 붉은 평원에는 1,000명이 넘는 기사와 병사들이 진군하고 있다. 나아가는 모든 자들의 가슴에는 저 사자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용사 베르무트와 동료들이 유폐의 마왕성으로 향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자발적으로 모인 기사들이다. 그들은 찌그러진 갑옷에 사자의 문장을 새기고서, 베르무트와 함께 지네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이 넓은 붉은 평원을 가로막은 검은 안개를 향해 돌진했다.


선봉은 돌진하고 죽었다.


가비드 린드먼이 이끄는 검은 안개는 그 흉명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하다. 정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선봉의 무장으로는 칼질 한 번을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뿐인가? 이 평원에 있는 적은 검은 안개뿐만이 아니었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쏟아져 나온 마물의 군세가 검은 안개의 뒤를 따랐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아군의 사기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군이 죽을수록 사기에는 광기가 섞이며 더욱 충천했다.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용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있다. 그 베르무트가 눈부시게 빛나는 성검을 높이 들고서 진군을 외치고 있다.


그뿐인가? 이곳에 있는 것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뿐만이 아니다. 그와 처음부터 함께 싸워 온 4명의 동료들이 함께 있다.


모론은 선봉과 함께 돌진했다. 검은 안개의 날카로운 칼날도 모론의 몸은 베어내지 못했다. 함께 돌진했던 선봉이 쓰러질 때마다 모론은 피를 토하듯이 울부짖었다. 양손에 나눠 쥔 도끼와 해머가 안개를 터트리고 마족의 머리를 으깨고 마물의 몸을 짓뭉갰다.


그 바로 뒤에 하멜이 달렸다. 여태까지의 모든 전투에서 그랬듯, 하멜은 베르무트의 옆을 지키며 보조를 맞췄다. 이 난잡한 전장에서도 베르무트와 하멜의 전투는 자유롭고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이그니션은…… 쓰지 않았어. 다행이야.’


순간이나마 세냐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함께 싸우는 이들이 늘어난 만큼 하멜의 부담이 줄어든 것이다. 이곳에 온 기사들의 바람이 바로 그것이었다.


용사 베르무트와 동료들.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려 줄 영웅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게 하는 것. 그들이 최대한 전력을 온존하게 돕는 것. 오직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온 것이다.


ㅡ쏴아아아아! 태양이 뜨지 않는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비처럼 퍼부어졌다. 세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저편을 보았다.


로사리오를 양손에 움켜쥐고 기도를 올리는 아니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바로 아래에는 피범벅에 낡은 백의를 입은 성직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이 발하는 모든 신성력을 전해 받은 아니스가 다른 성직자들에게는 불가능할 커다란 기적을 일으켰다.


쏟아지는 빛이 부상을 빠르게 치유했다. 눈앞을 스치는 칼날에 대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었다. 지쳐 둔해지는 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베르무트이 성검과 함께 검은 안개를 밝히고 마족의 마력을 상쇄했다. 마력이 정순하지 못한 마물들은 빛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정화되었다.


“세냐 님! 준비가 되었습니다!”


뒤쪽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세냐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카샤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높이 날아오른 세냐는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아롯의 마법병단의 생존자들. 그리고 각국의 전투마법사…… 모두 해봐야 수십 명이 고작이고, 그중에 세냐의 눈에 차는 ‘진짜’ 대마법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상관없다. 복잡한 술식은 미리 전파해 두었다. 조율부터 술식의 전개는 모두가 세냐가 도맡았다.


숫자가 적고 대마법사가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세냐 본인이 마법사 수백 명을 합친 것보다 뛰어난 대마법사인데.


영창이 시작되었다. 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거대한 마나가 세냐의 몸속에서 고리를 이루었다. 하나둘 늘어난 고리가 아홉 개가 되고 하나로 겹쳤다.


“아아…….”


지상의 마법사들은 세냐를 경의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세냐가 어떤 식으로 마법을 쓰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세냐의 경지가 자신들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을 초월적인 경지라는 것은 알았다.


세냐 메르데인. 마족과의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날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마법의 역사에 가장 크고 선명하게 새겨질 것이다. 세냐 메르데인이라는 이름이 마법사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비록 이 전쟁에서 마왕이 승리하고, 대륙 모든 존재가 마족에게 멸망할지라도. 마족이 마법이란 학문을 언급할 때에, 세냐 메르데인의 이름은 묻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ㅡ만약 이 전쟁에서 대륙이 승리한다면. 대륙의, 아니, 앞으로 태어날 모든 마법사가 세냐 메르데인을 지향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마법이 완성되었다.


죽음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탄환 수백 개가 유성우처럼 쏟아졌다.


단순한 탄환이 아니었다. 고농도의 마나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빚어낸 폭우. 극한까지 응축시킨 마나는 검은 안개 기사들이 몸에 두른 마력과 갑옷을 관통하고 몸에 처박혀 심장까지 뿌리를 내리고 폭발한다.


뒤엉켜 싸우는 난전 중이지만, 세냐가 퍼붓는 마법은 기민하게 움직이며 마족만을 노렸다. 검은 안개 중에서도 실력이 낮은 마족들 수십 명이 몸에 수십 다발의 탄환을 처맞고서 폭사했고, 백 마리가 넘는 마물이 분쇄육이 되어 평원을 피로 적셨다.


“재앙의 세냐……!”


검은 안개를 지휘하던 가비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가 시뻘건 불빛을 발하자, 검은 안개를 집요하게 노리던 마법의 탄환이 연달아 터지면서 소멸했다.


아직 세냐의 영창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영창을 가속했다. 아카샤가 영창에 호응하며 빛을 내뿜었다. 지상의 마법사들도 눈, 코, 입에서 피를 쏟으며 필사적으로 보조를 맞췄다.


하늘이 일그러졌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압도적인 질량과 무게를 가진 구체가 뿌연 하늘을 짓뭉개면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메테오. 우주권에서 끌어온 운석은 아니지만, 저만한 질량이 지상에 처박힌다면 하나의 국가, 아니, 문명마저 소멸해 버릴 것이다.


ㅡ콰아아아아아!


운석이 떨어진다. 가비드와 검은 안개가 기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이곳에 재앙의 세냐와 지옥의 아니스가 있을지라도, 저만한 질량의 운석이 처박히며 일어날 파괴에서 아군을 보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왕님!”


가비드가 비명을 질렀다. 저 거대한 메테오는 이 붉은 평원이 아닌, 유폐의 마왕성에 직격하려 하고 있었다.


마나로 발현해 낸 공격이라면 유폐의 마왕에게 쉽사리 가로막힐 가능성이 있다. 마왕이란 족속은 인간의 마법을 코웃음 치며 파훼하곤 한다.


그렇기에 굳이 ‘메테오’라는 물리적 폭격을 고집했다. 이미 며칠 전에 만들어놓고 지금 소환해서 떨어트리는 저 메테오는, 유폐의 마왕성을 통째로 짓뭉갤 만큼 거대했다.


영창을 달싹거리는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저 거대한 메테오를 유도하고, 표면에 수십 개의 공격마법을 보조로 덧붙였다.


‘죽어……!’


세냐는 진심으로 그를 바랐다. 부디 이 메테오가, 저 끔찍한 마왕성을 통째로 짓뭉개 버리기를. 유폐의 마왕이 저항하지 못하고 마왕성과 함께 매몰되기를.


우우우우우우ㅡ!


우뚝 선 유폐의 마왕성에서 시커먼 어둠이 치솟았다. 그 어둠은 장막이 되어 마왕성을 휘감는가 싶더니, 첨탑 꼭대기에서 하나의 점으로 모였다. 촤라라락! 어둠이 엮어낸 사슬이 추락하던 메테오를 휘감았다.


……아무런 소리도 동반되지 않았다. 폭음, 굉음, 정말 아무 소리도 없었다. 사슬에 휘감긴 메테오는 그렇게 허무히 소멸해 버렸다. 세냐는 그 광경을 믿지 못하고서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유폐의 마왕.’


세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마왕성을 노려보았다.


사슬이 솟구쳤던 첨탑의 꼭대기. 그곳에 선 남자가 보였다.


유폐의 마왕은ㅡ 여태까지 죽이고, 만났던 모든 마왕과도 다른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머리에 뿔을 단 데몬이긴 했으나, 그는 굉장히 인간다운 모습이었다. 형태조차 명확하지 않던 멸망의 마왕이나, 데몬이되 흉악하고 거대했던 다른 마왕들과 비교하자면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고 작은 모습이었다.


시선을 느낀 것일까. 유폐의 마왕이 살짝 고개를 돌려 세냐가 선 하늘을 보았다.


ㅡ키이잉! 시선이 닿은 것만으로 정신이 붕괴해 버릴 것만 같았다. 아찔한 두통이 의식을 뒤흔들고, 세냐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야. 괜찮냐?”


화악! 불어닥친 바람에 익숙한 체취가 실렸다. 세냐는 잠깐 감겼던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도약해 온 하멜의 얼굴이 보였다. 세냐는 하멜의 품에서 몸을 가누며 헐떡이는 숨을 내뱉었다.


“피 냄새나.”


“당연히 그렇겠지.”


하멜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하면서,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날름 핥았다.


베어 죽인 마족의 피. 그리고 제 상처에서 흐르는 피. 세냐는 로브를 적셔오는 피의 뜨거운 온기를 느끼며, 하멜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이그니션 쓴 건 아니지?”


“안 썼어.”


“거짓말.”


“잠깐 쓴 거니까 거의 안 쓴 거야. 이 정도면 반동도 적어.”


하멜은 투덜거리면서 세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때렸다.


“내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하지 그러냐? 응? 내가 어제도 말했잖아. 괜히 마왕성 노릴 생각 말라고. 유폐의 마왕이 병신도 아니고, 성 위에서 처박는 마법 공격 하나 대처 못 하겠냐?”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어.”


“그래, 그래. 덕분에 네 마법이 유폐의 마왕에게는 별 타격을 못 준다는 것은 미리 알았지.”


“저런 마법 말고 다른 마법을 쓰면 돼.”


세냐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하멜의 옷깃을 놓았다. 타악. 땅에 선 하멜은 세냐를 내려놓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대마법은 쓰지 말고 적당히 보조나 하면서 몸이나 추슬러. 나는 다시 간다.”


“……베르무트한테 가는 거야?”


“그럼 내가 그 새끼 말고 누구한테 가겠냐? 너 떨어지는 거 보고 놀라서 오기는 했는데, 베르무트 쪽도 존나게 빡세. 일단 오늘 가비드 그 새끼 목은 따두고 싶은데…….”


하멜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ㅡ꽈아아앙! 뒤엉킨 전장의 저편에서 폭음이 터지고, 탁색의 월광이 하늘로 치솟았다. 베르무트가 월광검을 꺼낸 것이다.


“……그러지는 못할 것 같군.”


연달아 번지는 월광을 피해 가비드가 하늘로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놈의 두 눈이 시커먼 빛을 내뿜고, 한 손으로 쥔 검에 거대한 마력이 불꽃처럼 매달렸다.


마검 글로리. 유폐의 마왕이 하사한 저 마검에 위신의 마안의 권능이 더해지자,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월광도 제대로 전진하지 못했다.


“……잠깐이 아니잖아.”


세냐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중얼거렸다. 하멜은 어느새 전장을 가로질러서 베르무트와 합류했다. 월광검을 꺼낸 베르무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하멜도 이그니션을 쓸 수밖에 없다.


“거짓말쟁이.”


이번 전투에서는 이그니션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지켜줄 것이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성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붉은 평원을 정복하고 검은 안개를 말살해야 한다. 그렇기에 모두가 필사적인 것이다.


수적인 열세임에도 전투의 흐름이 일방적인 것은, 세냐와 아니스, 모론, 베르무트, 하멜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적을 말살하기 위해서는 1명의 아군이 수십 명의 마족과 마물을 죽여야만 했다.


이 전장에서 싸우는 기사와 병사들은 세냐의 동료들과 비교할 수 없이 약하다. 그들은 팔다리가 날아감에도 주저하지 않고서 적의 몸에 칼을 꽂았다. 몸에 쌓은 마나를 폭발시켜 자폭하는 이들도 많았다.


오늘의 승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필사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세냐는 하멜의 거짓말에 더 이상 푸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로브 안의 아공간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뒤는 16년 동안 해온 전투와 똑같았다.


마나가 고갈되지 않도록 포션을 물처럼 마시면서 마법을 난사했다. 아니스의 빛으로 몸을 지탱하고, 전방에서 날뛰는 모론이 여는 길을 따랐다. 적진의 수괴를 몰아붙이는 하멜과 베르무트를 의식했다. 공습할 틈이 있을 때마다 마법을 쏘아서 가비드를 위협했다.


오랫동안 싸웠다. 이곳에는 낮과 밤이 존재하지 않지만, 족히 하루는 싸운 것만 같았다. 끊이지 않을 것만 같은 함성도 희미해지고 드문드문 끊겼다. 평원은 그 이름처럼 붉은 피로 뒤덮였고 사방에서 시체와 피의 냄새가 풍겼다.


죽은 눈으로 마법을 영창했다. 너무 움직인 입술은 진즉에 마르고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흘렀지만, 세냐는 계속해서 마법을 외면서 비틀비틀 걸었다.


“……세냐, 세냐!”


등 뒤에서 끌어안은 양팔이 세냐의 몸을 멈추었다. 세냐는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피 냄새를 온몸에 두른 아니스가 숨을 헐떡거렸다.


“끝났습니다.”


“……아니스?”


“끝났단 말입니다. 멍청한 세냐……! 항상 모론과 하멜을 욕하는 주제에, 당신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또 마법에 잡아먹힌 겁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기전에서 마법을 난사면서도 피아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마법과 완전히 공명시켜야 한다. 그 순간의 세냐는 전투마법에 최적화된, 움직이는 마법대포가 되어버린다.


“……잡아먹히는 것이 아냐. 이건…….”


“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잘 압니다. 어쨌든, 끝났습니다.”


아니스는 성흔의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그녀는 세냐의 찢어진 입술과 너덜거리는 양손, 질질 끌리던 발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도 당신이 모론보다는 상처가 얕군요. 다행입니다.”


“모론은 어떤데?”


“글쎄요.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양팔이 4번 정도 잘렸고, 하반신이 1번 날아갔습니다. 아, 다리의 부상은 따로입니다.”


“…….”


“아군의 피해는…… 간략히 말하자면 200명 정도 살았습니다. 단지 목숨이 붙을 뿐인 사람을 제하자면 100명도 안 되겠지만, 예. 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하멜과 베르무트는?”


“무사합니다.”


아니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세냐에게 손을 뻗었다.


화아악……!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희미해진 빛이지만, 아니스가 일으킨 기적이 세냐의 부상을 빠르게 치유했다.


“……유폐의 칼은 놓쳤지만 말입니다.”


“아…….”


“놈이 작정하고 패주해 버리니 잡을 수 없었습니다. 누아르 제벨라의 환상의 마안도 까다로웠습니다만, 가비드 린드먼이 가진 위신의 마안은…… 솔직히 말해서, 베르무트 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즉에 전멸해 버렸을 겁니다.”


아니스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분하단 표정을 지었다. 가비드 린드먼이 가진 위신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이 직접 내린 것이라 알려져 있다.


가비드에게 있어서 신이란 무언가? 바로 유폐의 마왕이다. 가비드가 가진 마안은 이름처럼 신의 힘을 현현시킨다. 유폐의 마왕의 권능을 빌려온단 말이다.


“…….”


세냐는 떨리는 손을 꽉 쥐고서 고개를 돌렸다. 뻐근한 두 눈으로 전장을 돌아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보다 시체가 훨씬 많았다.


‘하멜.’


베르무트의 부축을 받고 있는 하멜이 보였다. 그는 입가의 피를 벅벅 문질러 닦다가, 세냐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 개새끼. 도망 잘 치더라.”


하멜이 쉰 목소리로 떠들며 손을 흔들었다.


* * *


아군의 시체를 수습은 포기했다. 하지만 장례마저 포기하지는 않았다. 아니스와 살아남은 성직자들은 피범벅의 평원에서 무릎을 꿇고, 신께 기도를 올려 죽은 전사들의 혼이 천국에 인도되도록 기도했다.


“뒤를 맡기기로 했다.”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성을 응시하며 말했다.


“검은 안개와 마물의 군세는 전멸시켰다. ……지금 저 마왕성에 잔존한 병력은, 우리 다섯으로 돌파한다. 유폐의 방패와 지팡이, 칼이 성에 남아 있겠지만…… 우리 다섯이라면 넘을 수 있을 거다.”


“그래, 다섯.”


마물의 시체 위에 앉은 하멜이 중얼거렸다. 이그니션을 썼는데도 하멜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했다. 그 지독한 반동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루루 몰려가는 것보다 우리끼리 가는 것이 나아. 우리끼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고, 서로를 챙길 수 있으니까.”


“지네 산맥 바깥의 마족과 마물이 가세하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뒤를 맡긴다는 것이다.”


모론이 대답했다.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아군의 모습은 패잔병처럼 처참했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빛을 담아 혁혁했다.


“저들은 전사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리의 뒤를 지켜줄 것이다.”


“내일 바로 출발하지.”


하멜이 말했다. 그 말에 아니스가 흠칫 놀라서 하멜을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특히 당신은 휴식이 필요…….”


“반동은 없어.”


하멜은 보란 듯이 몸을 일으키면서 대답했다.


“오히려 몸이 굉장히 가벼워. 그리고 나 하나 때문에 며칠이나 여기 있어 버리면, 평원을 공략한 의미가 없어지잖아.”


“하지만…….”


“괜찮다니까.”


하멜이 씩 웃었다. 베르무트는 가만히 하멜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말이 맞다. 여기까지 와버렸으니, 더는 지체해서는 안 돼. 그러나 하멜, 이것만큼은 약속해라. 내가…… 우리가 너를 두고 가지 않듯이, 너도 우리를 두고 가서는 안 돼.”


“죽지 말라는 말을 귀찮게도 돌려 말하네.”


“우리는 처음과 마지막까지 함께 가야 한다. ……도중에 쓰러질 것 같다면, 억지로 버티지 말고 기대도록 해라.”


“그래, 그래.”


하멜은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마물의 시체에서 훌쩍 뛰어 내려왔다. 세냐는 그런 하멜의 움직임을 주시해서 보았다.


전에 이그니션을 썼을 때는 몸도 가누지 못하더니…… 반동이 없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나의 흐름도…… 안정되어 있어. 괜찮아.’


세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일 유폐의 마왕성을 오른다.


외전, 막간


이전에 죽였던 마왕 중, 서열 3위인 광란의 마왕은 휘하에 4명의 심복을 두었다. 광란의 자식들, 혹은 광란의 사천왕이라고 불리던 강력한 마족들이다.


놈들은 마왕의 총애를 받고, 마왕의 양자가 되어 큰 힘을 하사받았다.


진열의 카마쉬, 유혈의 사인, 패악의 오보론, 나찰의 아이리스. 다른 마족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한 놈들이었지만ㅡ 싸워서 죽일 수는 있었다. 오늘 유폐의 마왕성에 오른 5명의 영웅들은, 이미 수년 전에 카마쉬와 사인, 광란의 마왕을 죽이고 아이리스와 오보론을 패퇴시킨 장본인들이다.


하지만.


광란의 자식들과 유폐의 심복들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격이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유폐의 방패와 지팡이의 강함은 놈들이 마왕성을 나와 전장을 휩쓸었던 전쟁 초반의 소문 정도로만 파악했을 뿐. 그 둘과 실제로 맞닥트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과는 이미 2번의 교전을 겪었다. 유폐의 심복은 강하다. 광란의 자식들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각오도 해두었다.


“쿨럭.”


하멜은 핏물을 토하며 고개를 들었다. ……방패에 처맞고, 기억이 끊어졌다. 짧은 시간이나마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다.


“하멜! 괜찮습니까?!”


비명 같은 외침이 앞에서 들려왔다.


빛을 내뿜는 날개를 펼친 아니스의 등이 보였다. 얻어맞은 순간 몸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력이었다. 아니스의 신성마법이 없었다면 정말로 몸이 꽝 터져 버렸을 것이다.


‘……맞을 만한 공격이 아니었는데.’


하멜은 핏물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유폐의 방패, 우로고스. 놈은 그 이름처럼 거구의 마족이다. 거인만큼은 아니지만 모론보다 두 배는 큰 덩치에 거무튀튀한 갑옷을 빈틈없이 입고 있다. 그리고 왼손에는 성문을 통째로 뜯어왔다 해도 믿을 법한 커다란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는 드래곤마저 일격에 관통할 것만 같은 커다란 창을 들었다.


……덩치가 큰 만큼, 공격할 곳도 많았다. 갑옷과 방패를 거르고도 우로고스의 육체는 강인했지만, 그렇다면 부서질 때까지 패면 된다.


반격? 우로고스는 결코 느리다고 할 마족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 덩치와 갑옷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하지만 하멜이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작이 큰 만큼 예측하기도 쉬웠다.


그런데도 피하지 못했다. 피하려고 했는데, 한순간이나마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맞고, 결국은 이 꼴이었다. 하멜은 큭큭 웃으며 입가의 피를 벅벅 문질렀다.


‘아직 괜찮아.’


얻어맞은 순간에 전신 뼈가 으스러졌겠지만, 아니스의 신성력이 상처를 치유해 놓았다. ……완치는 아니었다. 제대로 붙지 않은 뼈가 삐걱거리고 망가진 내장이 쑤셨다.


이곳이 유폐의 마왕성이기 때문이다. 성 전체를 짓누르는 마력만으로도 몸에 부담이 심한데…… 유폐의 지팡이, 그 말라비틀어진 리치가 성문에서부터 펼쳤던 흑마법이 신성력의 치유를 늦추고 있다. 그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멜은 휘청휘청 걸어 나오며 앞을 노려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날개를 펼친 아니스의 등이다.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하멜은 저 등에 빼곡하게 새겨진 성흔이 피로 흠뻑 젖어 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조금 옆에 선 세냐와 눈이 마주쳤다. 세냐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하멜을 힐긋힐긋 쳐다보면서도, 걱정의 말은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그녀의 의식 대부분은 마법을 통제하고, 입술은 끊임없이 영창을 내뱉고 있었다.


“괜찮아.”


하멜은 씩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보란 듯이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휘몰아치는 신성력과 마법의 너머, 모론과 베르무트의 모습이 보였다.


모론은 자기보다 덩치가 큰 우로고스를 정면에서 막아내고 있었다. 저 무식한 놈은 무기도 내팽개치고서, 우로고스가 밀어붙이는 방패를 양손으로 가로막았다.


둘이 내지르는 괴성이 홀에 쩌렁쩌렁 울렸다. 우로고스가 전력을 다해 방패를 밀어붙였다. 그럴 때마다 모론의 발은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부풀어 오른 근육이 피부를 터트리며 핏줄기가 치솟았다.


그럼에도 모론은 완전히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조금 밀리는 것? 상관없었다. 지금 우로고스와 싸우는 것은 모론뿐만이 아니잖은가. 그가 저렇게 우로고스를 막고, 붙잡는 사이에.


베르무트가 간극을 파고들었다. 교차해 휘두른 성검과 월광검이 우로고스의 몸을 빛으로 뒤덮었다.


ㅡ꽈과광! 우로고스는 자신이 밀어낸 거리보다 더욱 멀리 밀려났다. 견고하던 갑옷에 쩌적 금이 가고, 얼굴을 뒤덮은 투구에서 검은 피가 뿜어졌다.


“하멜!”


베르무트가 고함을 질렀다. 놈답지 않게 격정적인 외침.


함께 싸우는 전장에서, 언제나 베르무트는 하멜의 이름을 외쳤다. 근접전에서 자신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것이 하멜뿐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무트가 일격을 가하면 하멜이 곧장 공격을 이어붙인다. 그리고 다시 베르무트가 공격한다. 마족과 마왕의 전투에서 둘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싸웠다.


하멜은 외침에 실린 걱정을 느끼고서 입술을 비틀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하멜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야!”


불안해 쳐다보던 세냐가 비명을 질렀다.


괜찮다니까. 하멜은 다시 중얼거리며 심장과 코어를 함께 움켜쥐었다.


이미 오래전에 알았지만, 다시금 알았다.


하멜은 아니스처럼 신성력을 쓸 수 없다.


세냐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멜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앞에 나가서 싸우는 것뿐이다.


하멜은 강하다.


베르무트보다 강하지는 않다. 하멜은 월광검은커녕 성검도 휘두를 수가 없다. 베르무트처럼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없었다.


하멜은 강인하다.


모론보다 강인하지는 않다. 우로고스의 일격에 날아가 죽을 뻔한 하멜과는 달리, 모론은 지금도 정면에서 우로고스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다.


ㅡ만약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내가.’


하멜이 죽어도 모론이 남아서 버텨줄 것이다. 하멜이 싸우지 못하게 되어도 베르무트가 싸워줄 것이다.


이그니션.


희미해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기 전, 하늘이 잠시 밝아질 때가 있다. 불빛은 완전히 꺼지려는 순간에 밝게 타오른다. 하멜은 제 자신의 잔불에 생명을 장작 삼아 밀어 넣었다. 남은 수명, 육체의 한계, 그딴 것은 진즉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멜이 바치는 것을 집어삼킨 불꽃이 점점 거대하게 부풀었다. 말라비틀어진 코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격렬한 마나를 내뿜었다. 하멜은 호흡을 삼키면서 무릎을 굽혔다.


꽈아앙!


발을 내디딘 순간 마나가 폭발했다. 하멜은 폭주하는 마나의 격류를 가속으로 사용하며 한순간에 베르무트의 곁에 섰다. 베르무트는 하멜이 몸에 두른 거대한 마나와, 빛이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고서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재개된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하멜과 베르무트의 공격이 우로고스의 창을 부러트리고 갑옷을 부쉈다.


모론은 우로고스의 방패를 빼앗고서 둔기처럼 휘둘러 우로고스를 벽에 처박았다. 일점에 집중시킨 마법과 신성력이 우로고스에게 작렬했다. 쏟아지는 폭격이 갑옷을 완전히 깨트리고 놈의 몸을 찢어발겼다.


월광검이 우로고스의 목을 베었다.


“가자.”


우로고스의 시체를 가장 먼저 넘은 것은 하멜이었다. 미쳐 날뛰는 코어를 진정시키고, 턱에 말라붙은 피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너 미쳤어?!”


세냐는 자신의 부상도 제대로 추스르지 않고서 달려들었다. 그녀는 홱 뻗은 손으로 하멜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뭘 가자는 거야?! 네 몸이…….”


“잘 움직이잖아.”


하멜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붉은 평원에서의 전투와 똑같았다. 이그니션을 썼는데도, 몸에 반동이 없다. 하멜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완전한 붕괴를 앞둔 코어에 빛이 남아 있다. 이 잔불이 꺼져 버리면 영영 싸울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니, 불씨와 함께 생명도 꺼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잔불이 켜진 동안에는 움직일 수 있다. 싸울 수 있다. 평생을 바라고 싸워 온 육체가ㅡ 곧 찾아올 마지막에 최후의 저항을 해주고 있다.


하멜은 이 잔불이 최대한 늦게 꺼지도록 주저앉고, 불씨를 지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직 더 타오를 수 있다면 더, 더 생명을 불태워 나아가고 싶었다. 이곳은 아직 유폐의 마왕성의 하층이었고, 유폐의 마왕은커녕 방패 하나 죽였을 뿐이다.


“……위로 간다.”


내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닐까.


베르무트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멜의 눈에 뜨였던…… 빛을 보았다. 베르무트는 그 빛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빛을 믿고 싶었다.


“……진입한 이상 여유를 부릴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더 있다고 해서, 성 전체의 마력과 저주를 해주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아니스는 필사적으로 불안을 떨쳐냈다. 그녀는 굳게 닫힌 성문을 돌아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유폐의 마왕은 침입자를 멀쩡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마왕성에 진입한 즉시, 성문이 닫혀 버렸다. 저 성문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유폐의 마왕을 죽이거나, 혹은 마왕과 교섭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다섯 명 중에서 대체 누가 마왕과 교섭하려 들겠는가?


“마왕은 우리가 휴식하게 두지 않을 거다.”


모론도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하멜의 몸을 번쩍 들었다. 하멜은 어이가 없어서 모론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모론은 개의치 않고서 하멜을 어깨에 앉혀놓았다.


“이대로 가자. 하멜. 너는 내 어깨 위에서 최대한 휴식하도록 해라.”


“별.”


하멜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모론의 어깨에서 뛰어내리지는 않았다. 세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로브 자락을 움켜쥐었다.


“어쩔 수 없네.”


불안한 생각을 떨치고, 세냐는 억지로 웃었다.


“하멜, 너는 뒤로 좀 빠져 있어. 이 대마법사 세냐 님의 마법에 휘말리지 않도록 말이야.”


자주 내뱉던 농담이다. 세냐는 아카샤를 위로 들어서, 모론의 어깨에 걸터앉은 하멜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괜찮아.’


며칠 동안 수십 수백 번은 되뇌던 말을 다시 생각했다.


이그니션을 쓰긴 했어도 하멜의 몸은 괜찮아 보인다. 그리고 다들 여력이 있다. 애당초 마왕성에 진입하고서 편하게 싸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폐의 마왕성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전의 마왕성도,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휴식 없이 최상층까지 올라가서 마왕과 싸웠다. 이들 5명은 언제나 그렇게 불리하고 절망적인 싸움을 해왔다.


‘이번에도 똑같아.’


싸움이 끝난 뒤를 상상했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마왕성을 정복한 다음. 그런 미래를 그리는 것만으로 불안해 미칠 것만 같은 가슴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당연한 절망에 짓눌려 미쳐가는 것보다, 닿지 않을 것만 같은 희망이 가까이 있다고 의식했다.


‘희망.’


세냐는 입술을 씹으며 모자를 눌러 썼다.


* * *


유폐의 지팡이. 블러드메리의 주인. 리치. 베리알.


놈이 설치한 끔찍한 함정들을 넘었다. 반복해 온 기습도 넘겼다.


중층에 진입했을 때야 놈을 정면으로 맞닥트렸다. 이 층 전체가 베리알의 던전이었다. 놈은 수많은 소환물을 불러내고서 침입자를 맞이했다.


마왕의 마력을 다뤄내는 베리알의 마법은 위협적이었지만, 세냐와 베르무트의 마법도 크게 부족하지는 않았다. 끝없이 일어서는 소환물의 시체. 세냐는, 네크로맨서가 싫었다.


전투의 양상은 중요하지 않다.


세냐는 최선을 다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보았다.


베리알의 라이프배슬은 박살 났다. 불사에 가까운 리치라지만, 라이프배슬이 파괴되면 당연히 죽는다.


월광검에 휩쓸리던 도중, 베리알이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죽음을 각오하고서 쏘아낸 공격이었다.


그런 만큼 뻔했다. 베리알의 저주는 베르무트를 노렸지만, 베르무트라면 피할 수 있었다.


모두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베르무트를 의심해도, 하멜은 베르무트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멜은 베르무트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안다. 베르무트가 얼마나 강한지를 안다. 베르무트는, 저깟 공격에 죽지 않는다.


“왜?”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래서 더욱, 믿기지 않았다. 하멜이ㅡ 멋대로 베르무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베르무트가 저주를 피하기도 전에, 하멜이 제 몸을 저주의 방패막이로 삼았다.


“대체 왜?”


모르겠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멜은, 저곳에 있으면 안 되었다. 베리알과의 마법전투에서 전사인 하멜과 모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런 전투에서 둘의 역할은 세냐와 아니스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싸웠다. 하멜이 힘겨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렇게 끝나야만 했다.


“하멜.”


세냐는 비틀거리며 하멜에게 다가갔다. 베르무트는 멍하니 서서 하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발. 세냐가 중얼거렸고, 모론이 괴성을 질렀다.


“하멜!”


모론이 하멜의 몸을 들어 올렸다.


……가볍다. 모론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모론은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돌리다가, 가까운 벽에 다가가 하멜을 앉혀놓았다.


“아…… 아니, 아니스. 빨리 이리로 와라. 하멜이…… 하멜이…….”


아니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성직자인 그녀의 역할. 동료가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니스는 그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저주.’


평범한 저주도 아니다. 유폐의 지팡이, 사상 최악의 흑마법사이자 리치라 불리는 베리알이 목숨과 맞바꿔 갈긴 저주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저주가 몸을 관통해 버렸다.


“……하.”


하멜이 고개를 뒤로 기울이며 웃었다. 입을 열자마자 시커먼 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 광경에 아니스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니스는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았다. 마왕의 마력을 사용한 리치의 저주는, 지금부터 하멜의 몸을 천천히 붕괴시킬 것이다.


아니스가 빛의 모조화신으로 만들어진 성녀일지라도, 마왕의 마력을 모조리 정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하멜의 몸은 완전히 붕괴해서 소멸해 버릴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마왕의 저주를 입은 영혼은 천국도 지옥도 갈 수 없다. 죽음과 동시에 마왕의 소유가 되어버린다. 그 사실이ㅡ 더욱이 아니스를 절망시켰다.


하멜은 천국에 갈 수 없다.


“하멜…… 하멜, 하멜……!”


세냐가 울부짖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하멜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도중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세냐는 무릎발로 기어서 하멜에게 다가갔다.


“……뭘 우냐?”


하멜이 툴툴 웃으며 말했다.


대체 왜 웃는 거야? 세냐는 하멜이 웃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물범벅인 얼굴을 세차게 가로저었다. 엉망으로 흔들리는 시야로 하멜을 보았다.


몸 중앙을 관통한…… 구멍이 보였다. 그러나 그 구멍에서 하멜의 몸속이 보이지는 않았다. 구멍 자체에 저주가 가득 담겨, 새카만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저주가 번져가며 하멜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니스…… 뭐, 뭐하는 거야. 빨리 와. 상처가…… 상처가 커지고 있잖아.”


구멍에서는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세냐는 덜덜 떠는 손을 로브 안으로 집어넣었다.


엘릭서. 그래, 엘릭서가 있다. 신성력을 가득 담은 성수와 마법을 배합한 만능의 치료약. 신성마법의 회복을 기다릴 수 없을 때에 사용하는 비상약이지만, 아니스와 싸울 때에는 사용할 일이 없어서 여분이 꽤 되었다.


“……괜찮아.”


세냐는 또 그 말을 중얼거렸다. 당연히 괜찮아야 해. 세냐는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엘릭서를 꺼냈다. 병을 열고, 상처에 엘릭서를 부었다. 한 병을 모두 부었는데도 상처는 낫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엘릭서는 충분히 있다. 그리고 아니스도 있지 않은가. 당장은 큰 충격을 받아서 주저앉아 있는 모양이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이쪽으로 뛰어올 것이다. 하멜, 이 병신! 언제나처럼 쏘아붙이며 하멜을 멀쩡히 낫게 해줄 것이다.


“……괜찮아.”


몇 병이나 되는 엘릭서를 부었다. 하멜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피만 쿨럭쿨럭 토했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하멜의 눈동자에서는 빛이 희미해졌다.


“꺼져.”


하멜이 말했다. 간신히 쥐어짠 것처럼 힘없는 목소리였다.


“제발.”


세냐는 울면서 하멜을 쳐다보았다.


머리가 아팠다. 입안에서는 끔찍한 맛이 느껴졌다. 제멋대로 뛰어대는 심장이 뻐근하고 불안했다. 몸이 춥고, 뜨거워서, 덜덜 떨렸다.


“그래서…… 그래서 말했잖아. 그냥 돌아가라고. 왜 고집을 부리고 따라와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세냐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느끼며 입을 틀어막았다.


“세냐. 일단 그거 집어넣어.”


하멜은 힘없이 웃으며 세냐를 쳐다보았다.


“엘릭서. 몇 개 있지도 않은 귀한 걸 왜 여기 쓰려고 해. 헛짓거리하지 마.”


“하지만……!”


세냐는 오열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엘릭서가 귀하다고? 하멜의 상처를 치료하지도 못하는, 가장 필요한 순간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이깟 것이?


비틀거리며 다가온 아니스가 세냐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로사리오를 움켜쥐고,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문을 읊었다. 손끝에서 발현된 빛이 하멜의 상처를 감쌌다.


그 빛은 어둠을 밝혀내지 못했다.


“됐어.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아. 난 못 살아. 이제 곧 죽는다고.”


하멜은 피를 토하면서도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을, 세냐는 도저히 듣고 싶지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토할 것 같아. 세냐는 헐떡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피할 수 있었어.”


비틀거리며 다가온 베르무트가 중얼거렸다.


“네가 이럴 필요가 없었다고.”


베리알의 저주는 베르무트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걸, 하멜이 멋대로 가로막았다.


세냐는 도저히 베르무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꺼지라니까.”


하멜은 웃으며 내뱉었다.


“너도 알았을 거야.”


베르무트는 창백하게 질린 자신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네가 이렇게 죽을 필요는 없었다.”


세냐는 소리 죽여 오열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멜의 손에…… 온기가 사라져 간다. 하멜의 눈동자에 빛이 꺼져간다.


“이 정도면 명예로운 죽음이야.”


대체 뭐가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건데.


세냐는 간신히 하멜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흐르는 눈물이 너무 뜨거워서, 이 온기를 하멜에게 더하고 싶었다.


“같이 가봤자 짐짝만 될 게 뻔했고. 돌아가기도 싫었어.”


결국 하멜은 바보에 병신 같은 고집쟁이다.


하멜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 괜찮다, 는 말이 억지로 만들어낸 희망뿐이라는 것은 사실 세냐도 알았다. 하층을 지나고, 전투가 반복될수록 하멜의 몸은 둔해졌다. 전투에서도 중심에 서지 않았다.


같이 가면 모두의 방해가 된다.


와버린 이상 돌아갈 수는 없다.


“넌 존나 잘났으니까, 내가 감쌀 필요는 없었겠지.”


하멜의 목소리가 꺼져간다. 제발, 괜찮아, 제발. 세냐는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하멜의 손을 감싸 쥐었다.


“……졸리니까 이제 좀 가라.”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맙다.”


베르무트가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하멜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감은 눈을 다시 뜨지도 않았다. 감싸 쥔 하멜의 손이 축 늘어졌다.


세냐는ㅡ 하멜의 행동이 지독하게 미웠다. 아팠다. 마음을, 남기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다른 유언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그것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두에게 평생의 저주가 될지라도.


꼭 마왕을 죽여라.


세상을 구해라.


행복해라.


이런 흔해 빠진 유언을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멜은, 저 개자식은 그런 저주를 남기지 않았다. 동료들을 믿어서? 설령 그럴지라도.


“내게는…… 내게는, 필요해.”


하멜이 죽은 미래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다. 세냐가 그렸던 미래에, 행복에, 하멜이 없던 적은 없었다.


“내게는…… 필요하단 말이야.”


유언이 저주가 될지라도,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다.


만약 하멜이 남은 마왕을 죽여달라고, 세상을 구해달라고 말했다면, 세냐는 평생을 그를 위해 살았을 것이다.


만약 하멜이 행복하라고 유언을 남겼다면…….


“……제발…….”


그 저주가 평생을 불행하게 만들겠지만. 세냐는, 억지로라도 하멜을 위해 행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전지전능한 빛의 신이시여, 부디…… 부디 이 우둔한 어린양을 보호하고 살펴주소서. 안식 뒤의 험난한 여정…… 을…… 흑…… 자비와 사…… 사랑으로, 이끄시고, 어린 양이 가는 길에…….”


아니스는 기도문을 마저 읊지 못하고 오열했다. 멍하니 서 있던 모론이 괴성을 질렀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날뛰며 벽과 바닥을 주먹으로 때려 부쉈다.


쾅, 쾅. 모론의 괴성과 굉음 속에서 아니스와 세냐는 함께 오열했다. 베르무트는 여전히 자리에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 안 돼.”


한참 울던 세냐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까지 감싸 쥐고 있던 하멜의 손이 너무 가벼웠다. 몸을 관통한 저주가 하멜의 몸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세냐는 사라져가는 하멜의 몸을 부둥켜안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가, 가면 안 돼. 나…… 날 두고 가지 마……!”


세냐는 하멜의 얼굴에 뺨을 가져다 대며 울부짖었다. 기도문을 끝까지 읊지 못한 아니스가 충혈된 눈으로 세냐와 하멜을 보았다.


“제발…… 말해줘.”


세냐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하멜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마왕의 저주는 하멜의 시체를 모조리 소멸시켜 버렸다.


“아니스, 제발. 하멜은…… 하멜은, 천국에 간 거야? 응? 천국에…… 가야 하잖아.”


세상 누구보다, 우리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당연히 우리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살아서 행복할 수 없었다면ㅡ 죽어서라도. 세냐는 숨을 헐떡이며 아니스를 돌아보았다.


“……가지…… 못했습니다.”


아니스가 울면서 말했다. 그 말에 세냐는 비명을 지르며 아니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째서?! 네, 네가 항상 신이 있다고, 천국이 존재한다고 말했잖아……! 죽은 모두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하멜의 혼은…… 당연히…… 천국에 가야 하지만…… 그 혼은 지금…… 유폐의 마왕에게 있습니다. 유폐의 마왕이 놓아주지 않는 이상, 하멜은…….”


“아아아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세냐는 자리에 엎어지고서 바닥에 이마를 처박으며 비명을 질렀다.


전쟁의 끝도 보지 못하고, 행복해지지도 못하고, 16년을 전장을 떠돌며, 싸우고, 싸우기만 하다가. 이렇게 죽어서…… 천국에도 가지 못한다고? 평생을 마왕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고?


“……아직.”


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세냐는 베르무트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 침착하고 감정이 드물었던 베르무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공허한 눈동자의 아래는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아직, 끝은 아니다.”


“끝……?”


“아직 우리가 있다.”


베르무트는 그렇게 내뱉으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 말에 광분하던 모론이 우뚝 멈췄다. 아니스도 멍한 눈으로 베르무트를 올려다보았다.


“……맞아.”


세냐도 중얼거렸다. ……피범벅의 손이 보였다. 그 피가 하멜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냐는 피범벅인 손을 천천히 폈다. 하멜이 소멸하고 남은 목걸이가 보였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면 돼.”


흔들리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하멜의 혼을 구하면 돼.”


베르무트의 말이 맞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있다. 내가 있다. 세냐는 바닥에 내팽개쳤던 아카샤를 움켜쥐었다.


“언젠가.”


하멜의 목걸이를 뺨에 가져다 대었다. 사라져 버린 하멜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렀다. 입안에서는 여전히 끔찍한 맛이 났다. 세냐는 입안을 씹어 피의 맛을 보았다.


‘나는…… 살아 있어.’


이 현실을 끔찍하다 여기며,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언젠가…… 네가 바라던 세상에서 만날 수 있기를.”


스스로 내뱉은 말을 평생의 저주로 삼고자 했다.


세냐는 빛 한 점 없이 어두운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았다.


베르무트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는 베르무트의 뒤를, 어깨를 축 늘어트린 모론이 따랐다.


아니스는 덜덜 떠는 손으로 성수병을 열었다. 성수를, 아니, 술을 입안에 부으려 했지만 술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냐는 아카샤를 쥐고,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도중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하멜이 죽은 벽이 보였다. 시체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세냐는 저 벽에서 하멜을 보았다.


“……기다려, 하멜.”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네 혼을 구하러 갈게.”


이바타 자하부


누아르가 장담했던 대로였다.


유진은 용마성의 추락과 카라블룸의 소멸에 대한 조사를 받지 않았고, 무연고의 일행인 라이미르아에 대한 신분 조회도 받지 않았다. 정말 아무 문제 없이, 지내던 호텔을 나와서 수도 판데모니엄으로 이동했다.


굳이 판데모니엄에 온 이유는, 헬무드에서 국외로 빠지기 위해서는 수도에 위치한 국제 게이트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국할 때에는 변경의 알카르트 교구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판데모니엄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유진은 300년 전에 보았던 판데모니엄과, 지금 자신이 선 판데모니엄을 비교해 보았다.


“많이도 변했군.”


콘크리트 정글 사이에서도 우뚝 솟은 99층의 빌딩. 하늘까지 닿을 것만 같은 높은 마왕성, 바벨. 유진은 전생의 바벨과 지금의 바벨을 비교하며 혀를 내둘렀다.


바벨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던 붉은 평원. 인간과 마족과 마물의 시체가 그득하고, 검은 안개의 전설이 끝났던 땅.


이곳에는 수많은 빌딩이 세워졌고, 그 중심에는 전쟁시대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추모공원도 있었다.


‘지네 산맥은 어디로 간 거야?’


300년 전에 이 영지 외곽을 지네 산맥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흉측하고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산맥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를 세우면서 산맥 전체를 밀어버렸나?


‘아니면 어디다 처박아놨거나.’


전생부터 악명 높았던 지네 산맥은 지형이 아니라 대형 마물에 가까웠다. 저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 아래에 그 거대한 지네가 파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헬무드의 변화는 괄목적이지만, 특히 이곳 판데모니엄의 변화가 경악스러웠다. 왜 마왕성이 99층의 빌딩이 되어 있고, 하늘에 떠다니는 저…… 수백 대는 훌쩍 넘는 작은 물고기들은 또 뭔가?


“감시당하고 있어요…….”


메르가 불안한 얼굴을 하고서 유진의 옷깃을 잡았다.


에어피쉬. 헬무드에 들어오기 전의 관광책자에도 소개된, 판데모니엄이 자랑하는 완벽한 치안 시스템.


“저, 저 물고기를 보세요, 유진 님. 저 녀석들은 이 넓은 도시를 24시간 내내, 빈틈없이 감시한대요. 그 정보는 마왕성 바벨의 관제국으로 송출되고요.”


“흐흐흥, 잘 아는구나, 메르여. 네 말대로, 저 에어피쉬는 판데모니엄이 자랑하는 완벽한 치안 시스템이니라. 만약 도시 내에서 불법적인 일이 관측된다면, 바벨의 관제국이 즉시 치안부대를 파견하는 것이니라.”


큼직한 후드를 뒤집어쓴 라이미르아가 턱 끝을 세우며 웃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본래 구불구불한 금색의 사슴뿔이 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뿔이 달려 있지 않았다. 유진이 너무 눈에 띈다며 가리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라이미르아는 반발했다. 흑룡공의 딸이자 드래곤인 그녀에게 있어서, 이마의 홍옥과 뿔은 드래곤으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뿔을 없애지 않으면 홍옥을 칼로 찍어버리겠다는 말을 들어버리면, 드래곤의 존엄을 잠시 내려놓을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러니 메르여, 유진 님이여. 너희는 이곳에서만큼은 본녀의 눈치를 보아야 할 것이니라. 만약 본녀에게 부당한 폭력과 괴롭힘이 가해진다면, 본녀는 판데모니엄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높은 비명을…….”


라이미르아의 말이 점점 낮아졌다. 유진이 두 눈을 살벌하게 뜨고서 라이미르아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홍옥을 얻어맞은 것은 아니지만, 저 살벌한 시선은 라이미르아에게 충분한 두려움을 주었다.


“비명을…… 비명을 지르지는…… 않을 것이니라. 보, 본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니라…….”


“왜 얘 기죽이고 그러십니까?”


꼬옥. 크리스티나가 라이미르아의 손을 감싸 쥐면서 유진을 흘겨보았다. 그 모습에 라이미르아는 크게 감격하여 크리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를 가져본 적이 없었지만, 만약 어머니가 존재했다면 이렇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쟤가 개소리를 하잖아.”


“설령 그럴지라도 무조건 폭력을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예민하기에 특히 신경 써 훈육을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라니…… 쟤 나이가 너랑 내 나이를 합치고 4배는 해야 하는데…….”


“인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유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니 어린아이가 맞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라이미르아가 개소리를 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래곤인 라이미르아가 나이답지 않은 애새끼라고도 돌려 말했다.


하지만 말의 속뜻은 라이미르아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크리스티나의 손을 소중히 감싸 쥐고 팔을 품에 안으며 히히 웃어댔다.


“어머니라 부르고 싶으니라.”


“예?”


“아니…… 보, 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닷…….”


사실 이것은 아니스가 앞장선 의식적인 조련이었다.


그 블랙 드래곤 라이자키아가 딸에 대한 부성애를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용공녀에게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다. 부성애를 떠나, 라이자키아가 제 딸에게 소유욕과 더불어 제물로서의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아니스는 라이미르아를 메르에 대한 대항마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세냐 그 계집애는 영악하게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은 사역마를 남겨놓았다.


여정 중에 떠들어대던 ‘행복한 미래’에 대한 집착과 여한 때문일 것이고, 세냐 본인도 그 사역마가 유진에게 이어질 것이란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메르는 유진에게 이어져 버렸잖은가. 주인을 닮아 영악하고 앙큼한 저 사역마는, 마치 자신이 하멜과 세냐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식처럼 굴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지금만 해도 유진의 옆자리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란 듯이 붙어 있는데, 언젠가 세냐가 부활한다면? 모녀처럼 행동할 둘의 행동이 얼마나 파괴적일 텐가?


‘……아무리 그래도 시스터. 저희와 아무 연관도 없는 용공녀와 모녀 행세를 하는 것은…….’


[크리스티나! 모녀 행세까지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세냐와 메르를 상대할 만큼의 적당한 소꿉놀이 정도면 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하멜은 마음이 약해서, 불행한 사연을 가진 용공녀를 아주 내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용공녀를 대하는 점에서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와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질로서의 가치, 메르에 대한 대항마. 그것보다는 그냥 용공녀의 처지가 가여웠다.


[그러니 챙겨주고 싶은 것 아닙니까? 사실 가능하다면 세냐가 돌아오기 전까지 하멜 사이에서 자식을 하나 낳고 싶었…….]


“예?”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뭘 놀라고 그럽니까? 크리스티나, 당신도 은근히 바라지 않았…….]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의식을 공유하는 제게 기겁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점이 당신의 귀여운 점 중 하나입니다. 아니면 크리스티나, 당신이 메르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끄끄,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예,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하멜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 테니……. 음…… 그것도 막상 해보면 나쁘지 않을 듯싶습니다……. 크리스티나, 방금 제가 아주 괜찮은 생각을 떠올렸는데, 제가 당신인 척하고서 어린아이처럼 하멜에게…… 혀 짧은 소리도 내면서…….]


“악!”


성녀라고는 믿기지 않는 음습함!


크리스티나는 더는 듣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또 시작이군.”


워낙 자주 본 광경이라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대체 아니스가 머릿속에서 무슨 말을 떠들어댔길래 저렇게까지 발작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유진은 차마 진실을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소, 소리 지르시면 들킬 거예요……!”


메르가 호들갑을 떨며 유진의 팔에 매달렸지만,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안 들켜.”


누아르에게 받은 검은색 카지노 코인. 워낙에 수상쩍은 위인이어서, 코인에 대해서 여러 조사는 해두었다.


이 코인에 깃든 것은 마법이 아니다. 누아르의 강대한 마력이 권능으로 화해 깃들어 있다. 코인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인식의 개변을 일으키는 것이다.


‘환상의 마안.’


누아르 본인이 마안을 뜨는 것처럼 다채로운 인식 개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헬무드의 엄격한 신원조회는 가볍게 희롱해 버린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판데모니엄의 에어피쉬는 포착한 모든 대상의 신원을 조회하며 감시한다.


용마성의 추락과 카라블룸의 소멸은 지금 이 순간에도 판데모니엄의 전광판과 홀로그램에서 뉴스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용마성의 생존자인 용공녀가 이곳에 있는데도 에어피쉬가 달라붙지 않고 있다. 즉, 누아르가 준 블랙 코인이 에어피쉬의 관측마저 속여넘겼다는 것이다.


‘마안의 권능이 너무 강해. 누아르와 싸우게 된다면 마안에 대한 대책부터 마련해야 하는데…….’


당장으로서는 해결책이 없다. 당장 저번에 호텔에서 누아르가 찾아왔을 때, 유진은 코앞에서 펼쳐진 환상의 마안의 권능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랄랄라~ 랄랄라~]


[해피해피해피 제벨라~]


[에브리데이~ 제벨라데이~]


[웰컴 투 더 제벨라파크~]


[드림스컴트루~~]


“…….”


홀로그램 전광판에서 춤을 추는 마족 아이돌들이 보였다.


제벨라 연예기획사에서 데뷔한 드림걸즈. 발랄함을 컨셉으로 잡은 5명 걸그룹 앞에서 누아르 제벨라가 똑같은 의상을 입고서 춤을 춰가며 제벨라 파크를 홍보하고 있었다…….


“저저…… 수치심도 없는…… 어찌 저런 발칙한 의상을 입고서…….”


성직자인 크리스티나가 문화충격을 느낀 것인지 말까지 더듬었다.


비슷한 충격을 느낀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홀로그램 전광판에서 벌어지는 칼군무를 노려보다, 결국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가자.”


코인 덕에 검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만, 그렇다고 아주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수도 판데모니엄. 유폐의 마왕성이 있는 곳이자, 놈의 심복인 가비드 린드먼이 있는 곳이다. 특히 가비드는 대공이면서 헬무드의 치안총감을 맡고 있다.


괜히 판데모니엄에서 하릴없이 기웃거리다가 가비드나 검은 안개에게 포착되기라도 하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아무리 누아르 제벨라의 권능이 강할지라도, 가비드의 눈 마저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라이언하트 저택에 돌아간다고 하셨지요?”


“오래 걸리지는 않아. 잠깐 들러서 뭐 좀 빌려오려는 것이니까.”


서둘러 용마성에 왔던 것은 라이자키아의 헤츨링을 확인해 두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려서 용공녀도 사로잡았고, 라이자키아가 대수림의 토지에 묶여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이대로 사마르 대수림으로 향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라이자키아를 확실히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다른 준비가 조금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크리스티나 너는 이 꼬맹이를 감시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이야기는 미리 해두었다. 순수한 전투력만 따진다면 크리스티나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여차하면 아니스가 힘을 보태줄 것이다. 게다가 라이미르아에게 미리 용언을 받아 두었으니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애당초 저 정신연령 낮은 헤츨링이 도망칠 생각을 할 것 같지도 않다만.’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크리스티나의 옷깃을 잡고서 걷던 라이미르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본녀도 라이언하트의 저택이란 것을 구경하고 싶으니라. 본녀가 듣기를, 라이언하트가 대륙 제일의 무가이며 저택도 웅장하다 하였다. 그리고 보기 드문 엘프도 잔뜩 사는 곳이라 들었느니라.”


“참 잘 아는구나.”


“본녀는 별궁의 안에서 여러 정보를 접하였느니라.”


하루 종일 TV나 보았다는 말이다. 라이미르아는 가슴을 활짝 펴며 으스댔지만, 유진은 굳이 상대해 주지 않았다.


“라이언하트는 널 싫어할 거예요. 네가 있을 자리는 없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냐? 본녀가 무엇을 하였다고 라이언하트가 본녀를 싫어한다는 것이니냐?”


“네 아빠를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나요?”


“우읏…… 보, 본녀는 흑룡공의 딸이지만, 아버님에 대한 미움과 본녀가 상관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느니라…….”


라이미르아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걸해도 라이미르아를 당장 본가에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유진은 본가를 떠나 어딘가에 다녀올 적마다 항상 식객을 데리고 돌아왔다.


나하마에서는 라만을, 사마르에서는 100여 명의 엘프를, 그리고 신성제국에서는 크리스티나를. 그리고 이번에 용공녀를 데리고 간다면? 애니실라의 부채가 손아귀에서 아작 나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음에 들어 하실지도…….’


라이언하트의 안주인 애니실라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과거의 표독스러운 점이 많이 사라졌다. 유해졌다는 말이다. 메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어린아이를 특히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라이미르아도 꽤 귀여워할지도 모른다. 유진으로서는 그것이 더 곤란했다.


라이미르아를 인질이라고까지 생각은 하지 않는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을 줄 대상인 것은 아니다. 라이자키아를 죽인 뒤에 그녀의 처우에 대해서는 아직 답을 내놓지 못했지만, 상식적으로 아비의 원수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메르여, 너는 본녀에게 그리 얄밉게 굴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자꾸 그러면 흑룡공께 이야기하여 널 혼쭐 낼 것이니라.”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네 아버지는 유진 님이 죽일 거예요.”


“흑룡공이 인간에게 죽을 리가 없지 않느냐. 네가 지금이라도 본녀를 공경한다면, 저 인간이 죽어도 너는 본녀의 시종으로 삼아 목숨을 부지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니라.”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가 유진으로 하여금 주먹을 쥐게 만들었다…….


* * *


라이언하트 저택에 들르기로 한 목적은, 시안이 가지고 있는 게돈의 방패를 빌리기 위해서다. 헬무드로 떠날 적에는 시안이 아직 루하르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방패를 빌리지 못했다.


게돈의 방패는 막아내는 모든 공격을 허무공간으로 전송해 버린다. 마나만 받쳐준다면 어떤 공격이든 막을 수 있단 말이다.


터무니없이 강력한 권능인 만큼 마나의 부담도 크다. 막아내는 공격이 강력할수록 한 번의 방어에서 소모되는 마나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그 베르무트조차도 게돈의 방패를 연달아 쓰지 못했을 정도다.


‘상대가 마왕이기는 했지만.’


차원의 틈에 있는 라이자키아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은, 라이자키아가 무조건 전성기보다 약해졌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다. 게돈의 방패를 쓴다면 라이자키아의 브레스도 몇 번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차원의 틈새가 내게 유리한 전장인 것도 아니지.’


그곳은 마나와 원시정령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모론과 한 판 붙었던 레헤인야르의 이면과 비슷한 환경이다.


‘프로미넌스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용마성에서 했던 것처럼 이그니션을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깃털을 사용한 공간도약도…… 불가능할지도 몰라.’


깃털이 공간좌표를 대신한다고 해도, 차원의 틈새에서 공간도약이 제대로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잘못하여 틈새에서 다른 틈새로 도약해 버리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유진 님이라도 손쓸 도리 없이 죽어버리겠죠. 아니면 라이자키아처럼 어딘지 모를 틈새에 갇혀 버리든가요.]


‘끙.’


정확히 판단을 내리기는 이르지만, 가능성이 높긴 했다.


‘프로미넌스가 봉인되었다면 전투가 굉장히 힘들어져. 내 마나가 아무리 많아도 드래곤과 화력대결은 불가능해.’


[그 드래곤은 수백 년 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잖아요.]


‘라이자키아는 고룡이잖아. 놈의 드래곤하트는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품고 있을 거고, 처박힌 수백 년을 수면기로 견뎠다면 마나의 소모도 엄청 크지는 않을걸.’


프로미넌스를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정면에서 화력 대결도 해볼 법하지만, 지금 조건에서 정면대결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은 게돈의 방패로 넘기고, 월광검과 다른 무기들을…….


“유진 님?”


생각하는 중에 라이언하트의 정문에 도착했다. 유진은 저 앞에서 들려온 놀란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정문 경비를 서고 있던 백사자 기사단의 기사들이 놀란 얼굴을 하고서 다가왔다.


“자아를 찾는 여행에서 돌아오신 겁니까?”


“미리 전갈을 주셨다면 저택 내의 워프 게이트를 열었을 텐데…… 아니, 그보다 왜 걸어서 오시는 겁니까? 마차나 말도 타지 않으시고…….”


무사히 판데모니엄을 떠나 키옐의 수도에 도착했다. 라이미르아를 크리스티나에게 잠시 맡겨두고, 유진은 걸어서 라이언하트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마차가 달리는 것보다 유진이 달리는 것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효율은 그렇지만 귀족다운 품위가 없는 이동이기는 했다. 물론 유진은 그런 것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색이 필요해서요.”


그러니 대충 둘러대었다. 나름 깔끔한 대답이라 생각했는데, 기사들의 표정이 왠지 이상했다.


“그러…… 십니까.”


늦은 사춘기라도 온 것인가? 아니면 역시 카르멘 라이언하트와 닮은 것인가.


뇌광, 혈사자. 기사들은 유진의 별명들을 떠올리며 다시금 납득했다.


“가주님과 가모님이 유진 님을 얼마나 찾으셨는지…….”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그 말에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분이 저를 찾으셨다고요? 편지는 제대로 남겼지 않습니까?”


“아…… 예. 하지만 며칠 전부터 유진 님의 손님이 찾아와서 말입니다.”


“손님?”


찾아올 손님이 따로 있나?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 누가 찾아온 겁니까?”


“사마르 대수림, 조란 부족의 차기 족장입니다.”


“이바타 자하부. 나흘 전에 유진 님의 손님이라며 혼자서 찾아왔습니다.”


떠올랐다. 2년 전 엘프들을 데리고 사마르 대수림을 떠날 때, 이바타가 이끄는 조란 부족의 전사들의 보호를 받은 적이 있다.


-네게 물질적인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언젠가, 내가 라이언하트의 저택을 찾아간다면. 네 손님으로 맞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그렇게 헤어지고 2년 동안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오기 전에 내게 편지부터 보내라고도 했는데.”


“이바타 자하부가 찾아오기 전에 유진 님께 편지가 몇 통 오기는 했습니다.”


“답장도 기다리지 않고 대뜸 찾아온 것을 보니 뭔가 급한 일이 있었나 보네요.”


유진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사마르 대수림으로 떠나려던 차에 이바타가 찾아온 것이 단순한 우연 같지는 않았다.


이바타 자하부


“어디를 다녀온…….”


돌아온 아들을 마중하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왔던 제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으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만약 유진이 돌아오면, 자세한 것은 묻지 말고 받아들여 주자던 가족 간의 대화가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좋은 얼굴이 되었구나.”


“예?”


“유진아. 이 아비는 너보다 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 삶에 있어서 유일하게 특별한 것이 바로 아들인 너란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네가 대뜸 가출했을 때…… 굉장히 걱정이 되었지만, 이 아비는 아들을 믿었다. 자아를 찾는다……. 허허. 성인식은 이미 치렀지만, 네가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된 것 같구나.”


되는대로 내뱉는 말이었지만 막상 내뱉어보니 제하드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듬직하게 자란 아들의 얼굴을 보니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와락!


유진은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대뜸 끌어안아 온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짝짝. 제하드의 등 뒤에 서 있던 라만과 니나도 분위기를 탄 것인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저택에 잠깐 돌아오면서 유진이 가장 경계한 것은 카르멘 라이언하트였는데, 다행히 현재 카르멘은 부재중이었다.


유진이 남긴 편지에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카르멘은 제자인 시엘과 종자인 디자이라를 데리고서 기사수행이랍시고 저택을 떠난 상태였다.


‘다행이군.’


카르멘을 믿고 편지를 남긴 것이기는 하지만, 유진은 이 여행과 찾아낸 자아에 대해서 카르멘과 긴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 유진 님은 카르멘 님과 굉장히 닮았어요. 유진 님이 카르멘 님을 꺼려 하는 것은 내심 강한 동질감을 느껴서. 하지만 그것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동족혐오라고 생각해요.”


“너 시발 미쳤니?”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들 해요. 유진 님이 제게 욕까지 하시면서 발끈하시는 것은 제 말에 정곡이 찔렸다는 뜻이에요.”


“네가 내 뭘 알아?”


“저는 유진 님이 사실은 멋진 기술명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새로운 기술을 만들 때마다, 굳이 기술에 이름을 붙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에 대해서 긴 고민을 하고 계신다는 것도 알아요. 그렇게 고심해서 지은 기술명이 내심 굉장히 마음에 들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들을까 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시는 것도 알아요.”


메르의 말이 이어질수록 유진의 눈썹은 파들파들 떨렸다.


“하지만 가끔, 유진 님은 자신도 모르게 기술명을 입 밖으로 내뱉곤 하세요. 그때 유진 님은 깜짝 놀라시면서도 주변의 반응을 살피시죠. 유진 님은 카르멘 님이 싫고 나잇값을 못한다고 여기시지만, 카르멘 님께 기술이 멋지다는 평가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세요.”


“다…… 닥쳐.”


“저는 유진 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오직 저만이 유진 님의 딜레마를 이해하고 있죠.”


메르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은 유진으로 하여금 주먹이 파르르 떨리게 만들었지만, 차마 메르의 머리를 쥐어박지는 못했다.


“주먹이 떨리고 계시네요, 유진 님. 제 말에 올바른 반박을 할 수 없으니 부당한 폭력으로 저를 억압하고 싶으신 거죠?”


메르가 입술을 히죽 비틀며 물었다.


왜 참아야 하지? 유진은 빠르게 마음을 바꾸고 메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야! 거 보세욧! 이 폭력이야말로 제 말이 옳다는 증거예요!”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소식을 들은 이바타가 미리 응접실에 가 있다고 했지만, 유진이 바로 응접실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뜸 떠나서 한 달여 만에 돌아왔으니, 가주인 길레이드에게 인사부터 올려야 했다.


“좋은 얼굴이 되었구나.”


미리 말이라도 맞춰둔 것인가. 길레이드도 제하드와 똑같은 말을 하며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혼자 돌아온 것이니?”


“예.”


“크리스티나 주교는?”


“볼일이 있다 하여 잠시 헤어졌습니다.”


애니실라는 의문과 경계가 반씩 섞인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매번 저택 밖을 나돌 때마다 누군가를 한 명은 데려왔는데, 이번은 혼자서 돌아온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바타 자하부가 어떤 이유로 찾아온 것인지 들으셨습니까?”


“묻기는 했다만, 답은 듣지 못했다. 그는 라이언하트가 아닌 너와 나눠야 할 이야기라 하더구나.”


길레이드는 의문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유진에게 있어서는 의문스러운 말이 아니었다. 애당초 대수림을 떠날 적에, 이바타는 라이언하트가 아닌 유진에게 큰 관심을 두었었다.


‘사담이나 나누자고 이 먼 곳까지 왔을 리도 없고…… 나한테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부탁이라도 있는 건가?’


사마르를 떠날 적에 이바타의 도움을 받았다.


대수림의 깊은 곳, 유진과 크리스티나 둘이라면 몰라도 100명이 넘는 엘프를 데리고 무사히 탈출하려던 때. 이바타와 조란 부족이 호위를 자처해 주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본가의 응접실.


조란 부족의 후계자, 이바타 자하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진을 맞이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바타가 일어서는 만큼 유진의 고개와 시선은 위로 올라갔다.


“……허…….”


유진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이바타의 체격은 사람의 규격을 벗어나 있었다. 그 거구였던 야수왕, 아만 루하르보다도 크다.


‘모론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모론 그 새끼. 왕이니까 첩실도 여럿 뒀을 것 아냐.’


모론의 핏줄이 사마르로 빠져서 조란 부족의 뿌리가 된 것이 아닐까. 유진은 거구의 이바타를 보면서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도 이바타와 모론의 결정적인 차이는 있었다.


이바타는 일반적인 상식과 예의를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그는 원주민의 복장이 아닌 도시 귀족들의 깔끔한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몸이 워낙 우락부락한 근육질이라 예복을 차려입은 모습에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2년 만이로군. 네 이야기는 대수림에서도 들었다.”


“소문이 거기까지 흘러 들어가나?”


“조란은 폐쇄적인 부족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바깥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류하고 있다.”


구릿빛으로 그슬린 얼굴. 벙긋 휘어진 입술 사이에서 하얀 이가 반짝였다.


“미리 편지는 보냈다만,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더군. 예의가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내게도 사정이 있어 답신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대부족의 후계자가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모론의 핏줄은 아닌 모양이야.’


저 상식적인 모습에 유진은 이바타의 혈통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했다. 유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내가 저택을 떠난 중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사과할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


이바타는 벙긋 웃으며 유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로 찾아온 거냐? 언젠가 네가 찾아올 때 손님으로 맞이해 달라…… 는 이야기였지. 그러고서 2년 만에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을 것 아냐? 설마 진짜 손님 대접을 원하고서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기왕이면 그러고 싶었다. 나로서는 너와 친분을 쌓아가며 장기적이고 우호적인 관계가 되고 싶었으니.”


이바타는 웃음기를 가다듬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먼저 말해두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엄밀히 말하여 네게 부탁하는 것은 아니다.”


“역시 내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거지.”


“그렇기는 하다만, 내게 부탁을 밀어붙일 생각은 없다. 모든 것을 듣고서 네가 거절해도 상관없다. 2년 전 내가 네게 작은 도움을 주기는 했다만, 그 일과 지금 내가 말할 이야기는 무게가 크게 다르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가벼운 사안은 아닌 모양이었다.


유진은 뭐라 대꾸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이야기를 계속해 보라는 제스처였다.


“대수림의 여러 부족 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흉맹한 부족이 있다. 코칠라 부족이다.”


유진도 아는 이름이다. 이바타가 말한 대로, 코칠라는 대수림에서도 가장 거대한 부족이다. 동시에 헬무드에서 여러 지원을 받는 부족이기도 했다.


코칠라는 대수림에서도 가장 깊숙한 오지에 터를 잡고,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굉장히 폐쇄적인 부족이다. 놈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부족 외의 다른 부족과는 아무 교류도 하지 않는다.


“최근 코칠라 부족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놈들은 불과 몇 달 사이에 5개의 부족을 침략하고 정복했다. 코칠라가 다른 부족을 정복하는 것은 이전에도 몇 번 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이상하리만큼 기세가 강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바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전사의 혼을 빼앗기고 있다. 혼이 대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뭐?”


“내 아버지, 조란의 부족장은 코칠라의 독주를 두고 보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조란 하나가 아니다. 이미 여러 부족들이 조란과 규합했고, 코칠라의 군대와 맞부딪쳤다.”


사마르에는 사마르의 문화와 신앙이 있다. 그들의 신앙은 머나먼 과거로부터 세계수와 엘프의 영향을 받았다. 원주민들은 모든 것에 정령이나 혼이 깃들고,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대지로 돌아가 혼의 순환을 거친다고 믿는다.


그러한 문화와 신앙에서 비롯된, 사마르의 독특한 마법이 바로 주술이다.


유진도 2년 전에 겪어본 적이 있었다. 사마르의 전사들은 정령술사도 아니면서 정령의 도움을 받고, 몬스터나 전사의 혼을 자신에게 강령시키기도 한다.


“코칠라와의 첫 번째 충돌에서 우리는 승리도 패배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진군하지 않고 물러섰다.”


이상을 알아차린 것은 그다음이다. 전통적으로 전사의 장례는 부족의 주술사가 맡는다.


“모든 시체가 똑같았다. 강한 전사도, 약한 전사도, 시체가 혼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성불해 버린 것 아니냐?”


“조란의 대주술사가 강령술을 썼음에도 혼을 불러내지 못했다. 오히려 혼을 불러내려던 대주술사의 혼이 빼앗길 뻔하였다.”


유진도 마법사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지만, 이바타의 말이 이어질수록 유진의 표정도 진지하게 바뀌었다.


“코칠라의 영토에 침투시켰던 밀정이 가지고 온 것이다.”


이바타가 품에서 헤진 종잇조각을 꺼냈다. 마법으로 기록한 영상이 아닌, 직접 무언가를 그려 넣은 종이였다.


종이를 넘겨받은 유진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인간의 뼈를 쌓아 만든 탑.


“코칠라는 사마르에서도 독보적인 식인부족이다. 놈들은 부족 내의 노예를 기호로 잡아먹고, 지배하는 식민부족에서 정기적으로 제물을 수급받는다. 그리고 부족의 행사 때마다 많은 인간을 부족의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신?”


“대지의 신. 사마르 부족들은 대부분이 대지의 신을 주신(主神)으로 여긴다. 하지만 신앙의 형태는 제각각이다. 조란은 인신 공양은 하지 않지만, 코칠라는 인신 공양을 한다.”


이바타도 불쾌한 것인지 표정을 구기고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인골탑은 너무 과하다 생각한다. 이전에도 항상 코칠라의 영토를 염탐했지만, 저만한 크기의 인골탑은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저것 하나만이 아니다. 밀정은 코칠라의 영토에서 새로운 인골탑이 계속해서 세워지는 중이고, 포로를 제물로 바치는 공양이 매일 이어진다고 말했다.”


“흠.”


유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벽에 난 창문의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멜키스 님.”


“안 훔쳐 들었어. 이 누나가 그렇게까지 무례한 사람이 아니야.”


저 아래의 정원에 멜키스 엘하이어가 서 있었다. 유진을 얇게 뜬 눈으로 멜키스를 내려다보았고, 멜키스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팔을 활짝 들어 올렸다.


“진짜라니까? 솔직히 궁금해서 듣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너무 무례한 일이잖아. 그래서 안 훔쳐 들었어. 나는 그냥 여기 아래 서 있기만 했다구.”


백색마탑주인 멜키스가 라이언하트 본가에 와 있는 것은 놀랍지도 않았다. 그녀는 애니실라에게 지속적인 선물공세와 교류를 통해, ‘손님’에서 애니실라의 ‘친구’로까지 올라왔다.


그뿐인가? 멜키스는 애니실라가 내심 숲의 엘프들을 가엾게 여기는 점을 파고들었다.


멜키스는 엘프들의 자립과 라이언하트의 전력증강을 위해서 엘프에게 정령마법까지 가르치는 것이 어떻겠느냐 권유했고, 결국 허락까지 얻어내서 숲의 워프게이트까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망토 안의 위니드가 진동했다.


[참으로 악랄한 여자다.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 안주인을 홀리고 엘프들의 처지마저 이용하다니.]


멜키스를 싫어하는 템페스트가 발끈해서 목소리를 냈다.


[언젠가 저 악랄하고 수치스러운 정령사는 죗값을 치르게 되리라.]


‘너는 왜 그리 멜키스를 싫어하니?’


[하멜, 왜 당연한 것을 묻는가? 저 여자는 정령왕과 계약까지 맺었으면서도 근거 없는 미신을 맹신하고 있다.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저런 사이비가 당대 제일의 정령술사라니…… 당장은 그녀의 추태가 세상에 크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세상 모두가 멜키스 엘하이어의 추태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템페스트가 치를 떨며 말했다.


추태라……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멜키스의 옷차림을 훑었다.


지금 그녀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부츠에, 강렬한 붉은색의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누아르 제벨라를 보고 와서 그런지, 멜키스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게 개성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왜 거기 서 계신 겁니까?”


“왜기는, 얘. 자아를 찾겠다며 떠난 네 이야기도 듣고 싶고, 그 먼 사마르에서 널 만나러 찾아왔다는 원주민의 이야기도 궁금하고…… 히히, 뭔가 재밌는 사건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 이 누나는 최근 굉장히 한가해서 말이야, 일상을 떠나보고 싶다고 할까…….”


“뭐라는 건지…….”


“어쨌든 말이야, 그래서 여기 서 있던 거야. 엿듣지는 않아도, 여기 서 있으면 네가 나한테 말을 걸어 올 것 아니니?”


멜키스가 한쪽 눈을 찡그리듯 윙크하며 웃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


“……됐고, 여기 올라와 보세요.”


“이 누나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이거 이거…… 설마 잊은 것 아니지? 이 누나는 아롯의 백색마탑주야. 내 말 한마디가 원래는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건데.”


“그냥 거기 계세요.”


“하지만 유진, 너랑 나는 보통 사이가 아니잖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어. 고작 몇 층 위는 당연히 갈 수 있고!”


멜키스가 폴짝 뛰어 창틀을 넘어왔다. 유진은 혀를 쯧쯧 차면서 창문을 닫았다.


“어머나…… 어제 지나가면서 살짝 보긴 했는데, 엄청 크다. 사람이랑 오우거라고 해도 믿겠어.”


“참 무례하시네요.”


“문화권이 달라서 그래. 이건 아롯에서는 되게 가벼운…… 친하지 않은 사이에도 건넬 수 있는 농담이야. 설마 키옐이나 사마르에서는 이런 농담을 하지 않는 거니?”


멜키스는 너스레를 떨면서 이바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바타는 화를 내기는커녕 껄껄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조란에서 온 이바타 자하부라고 한다.”


공용어를 배우면서 존댓말은 배우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멜키스에 대한 고까움을 어필하는 것일까…….


유진은 멜키스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이바타와 나눈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과연.”


모든 이야기를 들은 멜키스가 방긋 웃었다.


“그거 아니? 정령술사에게 있어서 사마르 대수림은 일종의 성지 취급을 받는단다. 너도 알겠지만, 그곳은 정령이 가득한 땅이거든. 아롯의 마법학계의 단골 주제 중 하나가 뭔지 알아? 바로 마법의 기원이야. 신들이 실존했다는 신화시대부터 이어진 고대마법이 현대화되어 지금의 마법이 된 것인데, 그중에서도 정령술의 기원은 사마르의 원시종교 중 애니미즘을 근원으로…….”


“본론만 말하면 안 되나요?”


“사마르의 주술은 원시적 정령술의 일종이란 말이지. 인간의 혼을 정령으로 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는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논쟁이야. 인간이 정령이라니, 그건 정령에 대한 모독 아니니? 정령은 인간처럼 추잡하지 않다구.”


“그래서요?”


“뭐 내 의견과는 별개로, 사마르의 주술…… 특히 강령술은 원시적이면서도 꽤 자기주장이 강한 마법이지. 아, 난 주술도 결국 마법이라 생각해. 하지만 말이야, 강령술은 결국 사람의 몸에 다른 혼을 잠시 묶어두는 것이거든? 주술 중에서도 특히나 고등한 것이지만, 방금 이야기는 강령술이 혼을 다루는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르네.”


멜키스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사마르의 주술 중에서 혼과 정령을 촉매나 제물로 쓰는 종류가 여럿 있는 것은 알아. 하지만 ‘혼’을 다루는 쪽에서 특화된 것은 주술이 아닌 다른 마법이지. 유진, 너도 알잖아?”


“짐작은 하는데, 확신이 적어서요. 저는 주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후후, 그렇다면 이 누나가 널 대신해 확신해 주지. 인골탑? 대규모 인신 공양? 그거야 뭐 야만스러운 문화구나, 싶지만. 전쟁에서 죽은 혼을 빼앗겼다고? 그런 종류의 마법이 흑마법 말고 또 뭐가 있겠어?”


이바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팔짱을 끼며 멜키스의 이야기를 들었고, 유진도 표정을 구기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 많은 혼을 가지고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하지. 저만한 혼을 제물로 사용하는 흑마법은 끔찍한 이단이야. 300년 전의 전쟁시대라면 몰라도, ‘지금’의 흑마법에서 저런 종류의 흑마법은 용납되지 않아. 애당초 전쟁시대 이후로 인간의 흑마법에서 인간의 ‘혼’을 다루는 것은 엄금되어 있어.”


“헬무드가 간섭했다?”


“나이트마치에 유폐의 마왕이 직접 왔다며?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는데, 유폐의 마왕이 한 말은…… 되게 애매모호하더라?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먼저 평화를 끝내지 않는다고 했잖아.”


멜키스는 킬킬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설마 마왕이 직접 와서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생각해. 그만한 존재라면 말 한마디가 존재적인 의미를 가질 테니까. 그렇다면 사마르에서 벌어지려는 흑마법은 지금 시대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일까. 그리고 마왕 본인이 개입하지도 않은 일이고…….”


“사마르 대수림 안에서 끝날 사소한 문제란 말인가?”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응, 그렇지 않을까나? 그 헬무드의 마왕님이 보기에는 촌구석 숲에서 벌어지는 작은 헤프닝일지도 모르지.”


그 말에 이바타의 주먹에서 ‘뿌득’ 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코칠라에서 대규모 흑마법을 준비하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해. 아, 유진. 그거 알아?”


“뭘요?”


멜키스가 유진을 돌아보며 웃었다.


“아롯에서 발자크 루드베스가 사라졌어.”


이바타 자하부


아롯의 흑색마탑주, 발자크 루드베스.


검은 테의 안경. 깔끔한 가르마의 단발. 마른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 유진은 몇 번이나 만났던 발자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와는 여러 번 대화를 나누어보았지만, 유진은 발자크가 ‘어떤’ 사람인지는 여전히 잘 알 수가 없었다.


이유는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멜이 죽고서 300년이나 흘러 버렸다. 세상은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유진은 여전히 하멜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는 하멜이었고, 유진으로 지금까지 살았음에도 하멜로 살던 시절의 잔재를 완전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실제로 가보았던 헬무드가 인간이 제법, 아니, 아주 많이 살기 좋은 제국이 되었을지라도. 유진에게 있어 헬무드는 지옥이자 마경이다. 지금 유폐의 마왕은 대륙과 인간을 위하는 정책을 펼치는 성군이지만, 유진에게 있어 유폐의 마왕은 인간을 벌레처럼 죽여대던 끔찍한 마왕이며, 마족도 똑같았다.


그리고 흑마법사. 지금 시대에서 흑마법은 마법의 학파로 인정받고, 흑마법사도 존중받고 있다. 하지만 유진에게 있어 흑마법사는 마왕과 마족의 앞잡이이자 동족인 인간을 배신한 후레자식이다.


……시대가 너무 많이 바뀌어 버렸다. 유진도 변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타협하려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하지만 흑마법사, 라고 하면 색안경이 쓰고 보게 된다.


발자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없었던 것도, 결국은 흑마법사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발자크는 여태까지 유진에게 악의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유진에게 항상 도움을 주곤 했다.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시그니처의 창작에도 제자에게도 해주지 않을 조언을 해주었다.


그럴지라도 유진은 발자크의 호의를 마냥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 저러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잘해주고 언젠가 배신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 새끼 내 그럴 줄 알았다.”


역시 흑마법사는 상종해서는 안 될 개새끼들이다. 멜키스는 즉시 분노를 드러내는 유진을 쳐다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스승에 제자라 해야 할지, 너도 흑마법사는 엄청 싫어하는구나!”


“저는 처음부터 발자크 루드베스가 수상쩍었습니다. 나한테 노골적으로 친한 척하면서 자꾸 뭔가를 알려주고 도와주려 하고 말이야. 왜 이러나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네요.”


“뭘 말이야?”


“그 새끼는 나중에 저한테 살살 처맞고 싶어서 잘해줬던 겁니다.”


그 단호한 대답은 멜키스의 말문마저 틀어막았다.


멜키스는 잠시 동안 두 눈을 깜빡거리며 유진을 쳐다보다가,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뭐, 그렇구나. 하지만 말이야. 아직 발자크가 주모자인 것이 확실하지는 않으…….”


“저만한 규모의 흑마법을 펼치는 것이 가능한 흑마법사는 흔하지 않잖습니까. 그리고 발자크가 아롯에서 사라졌다면서요?”


“음…… 갑작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흑색마탑에 정식으로 휴가서도 남겼다더라구.”


멜키스는 뜨끔거리는 양심을 무시했다. 본래 마탑주는 자신이 군림하는 마탑에서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될 존재다. 아주 부자유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아롯의 국외로 나갈 때에는 마탑과 궁정에 언질이라도 주어야 한다.


……하지만 멜키스는 그러지 않았다. 휴가서를 작성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가고 싶은 곳을 갈 뿐인데 뭘 보고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오늘만 해도 그랬다. 멜키스는 백색마탑과 아롯의 궁정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서 라이언하트에 왔다.


하지만 멜키스가 제멋대로 구는 것과, 발자크가 제멋대로 구는 것은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나. 발자크는 흑색마탑주에 오르고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롯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휴가서에는 뭐랍니까?”


“음…… 휴양 겸 잠깐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던데. 목적지는 따로 알리지 않았던 모양이야.”


“멜키스 님도 알겠지만, 저는 처음부터 발자크 루드베스가 수상했습니다. 자기는 아주 착한 사람인 척하면서, 제가 흑마법사라고 꺼려 하니 뭐랬더라. 흑마법사는 합리적인 존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자신은 실리를 위해 마왕과 계약했다고 말이에요.”


예부터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서 듣기 좋고 논리를 갖춘 말을 내뱉는 놈은 대부분 사기꾼이었다.


“……나는 그 발자크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만.”


잠자코 듣고 있던 이바타가 입을 열었다.


“헬무드가 코칠라에게 보내는 다양한 지원에 마법과 마물이 있다는 것은 안다. 헬무드의 마법사들은 코칠라에서 주술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어린 주술사들을 양성한다. 그리고 코칠라를 위해 마물을 사역한다.”


“발자크 외에 다른 흑마법사가 있다는 말이로군.”


“너는 아예 발자크가 주모자라고 확신하고 있구나?”


“아닌데요? 확신까지는 안 합니다. 그냥 그 새끼가 처음부터 수상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거지.”


사실 아멜리아 머윈을 더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있어 압도적인 이점을 가진 전장, 사막을 떠날 이유가 있나? 그녀의 말 한마디면 나하마의 군대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고, 사막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 계파의 마법사들도 동원될 텐데.


‘그래도 기왕이면 아멜리아 머윈이었으면 좋겠어.’


아멜리아가 사막을 떠나 대수림에서 무언가 수작을 버리고 있다면. 그것은 유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사막에서 첫 만남부터가 유쾌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쭉 아멜리아 머윈을 벼르고 있었는데. 대수림에서 맞닥트린다면 아멜리아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목을 잘라버릴 것이다.


‘아니면…… 에드몬드 코드렛. 이쪽은 정보가 너무 부족해.’


블러드메리의 주인. 현 유폐의 지팡이. 어쩌면 삼마가 아니라 다른 흑마법사일지도 모른다. ……가령, 헥토르를 사주한 흑마법사나 마족이라든가.


확실한 것은, 유폐의 마왕이 이 일의 주동자는 아니란 것이다. 멜키스가 말한 것처럼 유폐의 마왕 정도 되는 존재가 이런 개수작을 벌일 리가 없었다.


유폐의 마왕이라면 흑마법에 제물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정 제물이 필요하다면 그냥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지금 대수림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직 대수림 내부에서만 국한되어 있다. 원주민 부족 간의 항쟁. 이것은 그 넓은 숲의 역사에 흔해 빠진 일이었고, 대륙의 국가는 관여하지 않는 일이다.


“같이 가줄게.”


유진은 생각을 정리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침 나도 사마르에 볼일이 있거든.”


“볼 일? 무슨 볼일?”


“비밀입니다.”


“나도 같이 갈래.”


멜키스가 유진의 팔에 매달리며 칭얼거렸다. 그 행동에는 백색마탑주다운 품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도 갈 거야. 재미있을 것 같잖아! 대수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도 궁금하고, 무엇보다 용서가 되지 않아.”


“뭐가요.”


“대수림은 정령술사의 성지 같은 곳이라니까! 그런데 왠 흑마법사가 대수림에서 사악한 음모를 벌이고 있는 거잖아. 당대 제일의 정령술사인 나, 멜키스 엘하이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역시 백색마탑의 정령공주십니다.”


“끼아악!”


멜키스가 기겁하며 유진의 팔을 뿌리쳤다. 그 정신 사나운 모습에 이바타도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을 수도 없었다.


유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조차도 확신을 갖지 않고 찾아왔는데, 일이 굉장히 잘 풀리지 않았나. 유진뿐만 아니라 멜키스 엘하이어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게 될 줄이야.


“고맙다.”


이바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네가 충분하다 느낄 보답을 준비하도록 하겠다. 또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네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두귀를 틀어막고서 어린 시절의 수치스러움을 떨치려 노력하던 멜키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도 도와줄 건데?”


“……백탑주를 위한 보답도 준비하겠다.”


“암, 그래야지. 그리고 유진! 나한테 할 말 없어?”


“뭘요.”


“레헤인에서 날 위한 선물을 가져다주기로 했잖아!”


멜키스가 드물게도 정색하고서 말했다. 유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멜키스를 보다가, 망토를 슬쩍 들춰서 큼직한 돌덩어리를 꺼냈다.


“어련히 줄 텐데 성격도 급하셔.”


레헤인에서 드물게 채굴되는 불꽃이 깃든 돌, 화정석. 그것만으로도 값어치가 높은 소재지만, 지금 유진이 꺼낸 화정석은 돈이 있어도 쉽게 살 수 없는 최상등급의 화정석이다.


“끼약!”


화정석의 선명한 붉은색에 멜키스의 눈이 뒤집혔다. 그녀는 유진에게 건네받은 화정석을 뺨에 문질러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뜨거워! 마치 방금 불 속에서 꺼낸 것만 같아……!”


그렇게 외치면서 옷깃을 들추더니, 화정석을 가슴골로 밀어 넣었다. 그 모습에 유진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고 머릿속에서는 템페스트가 비명을 질렀다.


[하멜. 저 미치광이에게 왜 저러는 것이냐고 물어봐라.]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몰라서 묻니? 촉매와의 감응도를 높이기 위해서야. 이 열기를 내 피부에 전달하고, 내 체온을 더하면서…….”


[저딴 미신을! 이프리트가 정상이 아니고서야 저 사이비와 계약을 맺을 리가 없다.]


템페스트가 발광했다. 유진은 머릿속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템페스트를 무시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장 대수림에 떠날 필요는 없지? 며칠 뒤에 떠나자고.”


“나도, 나도 시간이 필요해.”


멜키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가슴 사이의 열기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서 양팔을 끌어안았다.


“로베리안한테도 말해두지그래?”


응접실을 나오면서 멜키스가 말을 걸어왔다.


“네 스승은 너 이상으로 흑마법사를 혐오하잖아. 특히 네가 휘말리게 된 문제라면 당장에라도 날아올걸?”


“그렇게 말하지 않으셔도 연락을 드리려 했습니다.”


로베리안은 현재 세냐가 라이자키아의 저주에 의해 봉인된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다. 라이자키아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겠지만, 대수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이프리트와 계약을 맺으러 갈게.”


“꼭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나라면 할 수 있어. 왠지 그런 필을 느끼고 있거든.”


멜키스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복도의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왜 굳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 *


시안은 수련장에 있었다.


형제가 돌아왔는데 얼굴도 비치지 않다니. 유진은 시안이 괘씸해서 한 대 때려 버릴까 생각했지만, 땀을 뻘뻘 흘려대며 검을 휘두르는 시안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많이 늘었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실력이 크게 늘었다. 몸놀림도 나무랄 데가 없었고, 특히 마나의 조율이 훌륭했다. 유진이 몇 년 전에 가르쳤던 것을 완전히 체득해 낸 것이다.


‘결국 내가 잘 가르친 덕분이군.’


유진은 가슴 간질거리는 뿌듯함을 느꼈다. 왜 나이 먹고 제자를 키우는 것인지 이해되는 것만 같았다.


“뭘 자꾸 보냐?”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시안이 검을 멈췄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유진을 홱 돌아보았다.


그 시건방진 모습이 다시금 유진의 생각을 바꾸었다. 유진은 시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의 허벅지에 로우킥을 갈겼다.


“악!”


“이 새끼가. 돌아온 형제한테 인사는 하지 못할망정!”


“네가 멋대로 저택 떠나는 것이 한두 번이냐!”


“아무리 그래도 돌아온 걸 봤으면 반갑다는 말은 해야 할 것 아냐!”


시안은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자아를 찾겠다는 낯부끄러운 편지를 남기고 떠난 주제에 뭐 저리 당당하단 말인가. 얼굴을 맞대면 부끄러워 할 것 같아서 나름 신경 써서 평소처럼 맞이한 것인데…….


“게돈의 방패 내놔.”


“뭐?”


“방패 내놓으라고. 어차피 너 지금 쓰지도 않고 있잖아.”


“갑자기 돌아와서 뭔 소리야!”


뻐억! 유진은 다시 한번 시안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시안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내놓으라면 내놔!”


“이 미친 새끼! 이유는 말하고 내놓으라 하든가!”


“쓸 데가 있어.”


“그러니까 어디다 쓸 건데!”


시안이 꽥 고함을 질렀다. 괜한 이야기를 해서 걱정을 사고 싶지는 않았는데.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강탈하려 했건만,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 시안의 저항이 거세었다.


결국 유진은 시안에게 방패가 필요한 이유를 대충 설명해 주었다. 라이자키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사마르 대수림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너 미쳤냐?”


시안은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물었다.


“거기 숲속 원주민들의 싸움에 왜 굳이 네가 끼어들어?”


“흑마법사가 벌이는 짓이고, 나는 용사잖아.”


그런 대답을 들으니 시안의 말문이 막혔다. 유진은 시안의 표정이 구겨진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와 아주 무관한 일도 아니야.”


“왜?”


유진은 흑사자 성에서 이오드가 펼쳤던 흑마법과, 그곳에 있던 헥토르의 영혼이 누군가에게 거둬졌음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시안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러니까. 헥토르와 계약한 흑마법사가, 이오드가 벌인 흑마법을 재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혹일 뿐이야. 확실하지는 않아.”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했다. 이오드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놈에게 마왕의 잔재가 함께했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다 해도, 가능성은 있는 거잖아. ……헥토르는 라이언하트의 방계. 그리고 이오드는…… 본가라고.”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유진은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무관하지 않다고 한 거잖아. 내가 가서 확인해 볼 테니까, 너는 더 신경 쓰지 마.”


“가주님께 보고해야 해.”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지잖아 새끼야. 가주님 성격이라면 분명 책임감을 느끼고서 라이언하트의 전력을 동원할걸.”


“그게 뭐 어때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냐?”


“확실하지도 않은 일이고, 내가 멋대로 판단한 것뿐이야. ‘아직’은 내 개인적인 문제인데, 가문의 힘까지 동원하고 싶지 않아.”


전력이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8서클의 대마법사 2명의 도움을 받기로 했고, 유진도 있다. 조란을 필두로 한 사마르 부족들의 군대도 있다. 어차피 전쟁은 원주민들이 할 것이고, 유진은 철저하게 흑마법을 파훼하고 주모자를 노릴 셈이었다.


하지만 라이언하트의 기사단이 동원된다면 그럴 수 없게 된다. 광범위한 흑마법을 상대하다 보면 기사단에서도 어쩔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다. 유진은 이 전쟁에서 굳이 라이언하트가 피를 흘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주님을 배려하는 거냐?”


잠시 침묵하던 시안이 입을 열었다.


정곡이었다.


“이오드 그 새끼가 미친 짓을 하고 뒈졌을 때. 가주님이 굉장히 괴로워하셨잖아.”


그럴 수밖에. 이오드는 길레이드의 장남이다.


이오드는 가문의 이름에 똥칠을 하고, 본가의 직계가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을 주모하며, 라이언하트의 전복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오드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길레이드는 이오드를 사랑했다.


길레이드는 아들의 죽음에 괴로워했다. 자신이 아들을 올바르게 키우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며 자책했다.


사마르에서 벌어지는 흑마법이 이오드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하지도 않을 이야기를 해서 아들의 죽음을 다시금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돈의 방패는 빌려주마.”


시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나도 너랑 같이 갈 거야.”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너랑 같이 갈 거라고. 네가 거짓말을 할지도 모르니까, 나도 사마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직접 보고 확인할 거다. ……이 문제에 무관하지 않은 것은 너뿐만이 아니라고.”


시안도 그때 흑사자 성의 숲에 있었다. 헥토르한테 기습을 당하고 쓰러져서, 이오드에게 붙잡혔다.


“나는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야. 지금의 가주님이 나서지 못할 문제라면, 내가 확인해야 돼.”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그게 뭐? 내가 저번처럼 네 발목을 잡을 것 같아서 데려가고 싶지 않아? 마음대로 해, 네가 데려가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라도 확인하러 갈 거니까.”


논리가 결여된 헛소리. 일방적인 고집. ……유진의 가슴이 쿡쿡 쑤셨다.


“그래, 이런 기분이군.”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중얼거렸다. 설마 300년이 지난 지금 시대에 와서 그때 동료들의 마음에 공감하게 될 줄이야…….


솔직히 데려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시안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시안을 위험한 전장에 데려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건 당신의 이기적인 바람입니다.’


설원에서.


누아르 제벨라의 습격을 받고, 시안과 시엘을 먼저 보냈을 때.


자괴감에 허덕이는 쌍둥이를 안타까워하던 유진에게, 아니스가 저런 말을 했었다.


-시대는 우리의 바람대로 흐르지 않습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나약하고 가벼워, 어쩔 도리 없는 거대한 흐름에 휘말릴 수밖에 없지요. 특히나 저 쌍둥이는 베르무트 님의 후예. 그들의 이름이 라이언하트인 이상, 시대의 격동의 최전선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할 때에 사선에 스스로 걸어갈지. 아니면……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칠지. 그것은 하멜,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운명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것이어야 합니다.


-정말로 당신의 형제들을 위한다면, 그들을 어린아이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의지를 존중해 주십시오.


시안은 굳이 따라가겠다고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유진에게 맡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책임감이 시안으로 하여금 저렇게 말하게 만들었다.


“알았다.”


유진은 그 뜻을 꺾고 싶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며 밀어붙이는 시안에게서, 300년 전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좋아.”


시안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네가 데려가지 않겠다고 굴었으면, 나는 이 일을 가주님께 보고했을 거야.”


“이 개자식이.”


유진은 일어선 시안의 허벅지에 다시 한번 로우킥을 갈겼다.


300년 전의 하멜은 저렇게 쪼잔하지 않았다.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바타 자하부


“그래서. 진짜로 이프리트랑 계약한 거예요?”


“불꽃의 정령왕 이프리트 님이라고 부르렴.”


“진짜 계약했냐구요.”


“비밀이야.”


“계약 못 한 것 같은데? 계약했으면 멜키스 님 성격상 이렇게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실실 웃으며 건네는 놀림에 멜키스의 눈빛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유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무조건 계약할 수 있다는 필을 느꼈다면서, 결국 이프리트랑 계약하지 못한 거죠?”


“불꽃의 정령왕 이프리트 님이라고 부르렴.”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데요?”


“지금 이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참지 못한 멜키스가 빽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가슴 사이에 소중히 넣어 둔 화정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확실히 말해두는데, 계약은 실패가 아니야. 이 멜키스 엘하이어에게 실패란 존재하지 않아. 그냥 조금, 서로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았달까? 계약이란 그런 것이야. 계속 조율하면서 서로에게 맞춰보고, 이쯤이면 되었다 싶을 때 그래, 계약합시다! 하는 거라고.”


“실패한 거 맞네 뭐.”


“아니라니까! 지금은 의견을 조율하는 단계란 말이야. 그러니까 유진, 너도 말조심해야 해. 지금 이 대화는 위대하곤 정열적인 불꽃의 정령왕 이프리트 님이 듣고 계신단 말이야. 이프리트 님, 저는 당신을 이렇게나 열렬히 사모하고 있어요.”


멜키스는 화정석을 양손으로 소중히 들어 올려 뺨에 비벼댔다. 그 광경에 템페스트가 머릿속에서 뿌득 이를 갈았다.


“너는 언제까지 눈에 힘주고 있을래?”


유진은 의자를 뒤로 기울이면서 옆을 돌아보았다. 미간에 힘을 빡 주고 있는 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뭐.”


“지금도 눈깔에 힘주고 있잖아.”


“저 새끼들 아까부터 우리를 힐긋거리고 있잖아.”


시안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뜬금없이 소매의 단추를 풀어서 걷어 올렸다. 주먹을 꽉 쥐자 단단하게 갈라진 전완근이 꿈틀거렸다. 그것으로도 부족한 것인지, 시안은 허리춤의 검까지 풀어서 남들 눈에 잘 보이도록 테이블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가지가지 하는군.”


“사마르의 원주민들은 외국인을 납치해서 잡아먹고 팔아넘긴다잖아. 특히 이곳 무역도시가 원주민들의 사냥터라더라.”


라이언하트의 저택은 이틀 전에 떠났다. 사마르에는 워프게이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키옐의 남쪽 관문에 도착하고서 직접 이동하여 국경을 넘어, 대수림 직전에 위치한 무역도시에 도착했다.


시안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사마르는 대륙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 무법지대라, 각국에서 탈주해 온 범죄자들이 많다. 그런 범죄자들은 공격적이고 난폭한 원주민들과 결탁하여 여러 범죄를 저지르는데, 굳이 이 위험한 곳까지 찾아온 부유하고 생각 머리 없는 관광객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병신도 아니고 우리를 노리겠냐.”


유진 일행은 노상주점의 야외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시 시선을 돌리고서 서둘러 지나쳤다. 음지에서 살피는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에게는 분위기란 것이 풍기게 마련이다. 라이언하트의 제복을 입지 않았지만, 유진이 두른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만들 만큼 살벌했다.


“이거 참 맛있구나.”


정작 테이블의 분위기는 훈훈하기만 했다. 라이미르아는 접시에 담겨 나온 뭔지 모를 볶음 요리를 탐닉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뺨에 묻었습니다.”


건너편에 앉은 크리스티나가 냅킨으로 라이미르아의 뺨을 닦아주었다.


“어머니…….”


라이미르아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벌써 며칠 동안이나 이런 보살핌을 받고 있다. 첫 만남에서는 흉악하기 짝이 없는 플레일에 맞아 죽을 뻔했는데, 그 이후로 저 금발의 성직자는 굉장히 상냥하고 살가웠다. 라이미르아는 진심으로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어머니이기를 바랐다…….


‘흑룡공께 말씀드려 저 인간을 내 유모로 들일 것이니라.’


라이미르아는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흑룡공을 죽이겠다며 도전하는 것은 저 유진 라이언하트 혼자뿐이었다. 그렇게 죽는 것은 라이미르아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 성직자는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저도요, 유진 님, 제 뺨에도 뭐가 묻었어요.”


라이미르아의 옆에 앉아 음식을 먹던 메르가 칭얼거렸다. 유진은 귀찮아하지 않고 메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저게 정말 드래곤 맞니?”


“용공녀라고 부르거라, 하찮은 인간이여.”


“저게 정말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이라고……?”


멜키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사마르에 함께 오게 되었으니, 시안과 멜키스에게도 그 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유를 해야만 했다.


용마성의 추락과 카라블룸의 소멸에 관여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전쟁 도중에 용마성에 잠입해서 용공녀를 납치했다. 그렇게만 말해두었다.


“드래곤에 대한 환상이 박살 났어.”


시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ㅡ시안이 계속해서 긴장하고 주변을 살피는 것은, 이곳 사마르가 무법지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수림에서 벌어지는 흑마법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그것뿐인 줄 알았는데, 더욱 중요한 일이 있다.


현명한 세냐를 구한다. 시안은 그 무거운 목적에 짓눌려 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는 간섭할 수 없는 거야?”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무역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라이미르아에게 용언마법을 사용해 보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라이자키아가 있는 차원의 틈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차원의 틈에 웅크린 라이자키아는, 자신의 존재를 사마르 대수림의 토지와 묶어버렸다. 드래곤의 존엄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박령과 다름없는 존재로 영락해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라이자키아는 200년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고, 차원의 틈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라이자키아의 공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라이미르아를 열쇠로 삼아서 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은 대수림의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다.


‘아니면 대수림을 전부 지워 버리든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대수림을 전부 지워버린다는 것은, 세냐가 봉인된 세계수와 엘프의 영지까지 날려버린다는 뜻이다.


라이자키아를 죽인다. 세냐를 구한다. 그 둘을 함께 이루기 위해서는, 대수림의 깊은 곳에서 차원의 문을 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일만 없다면 대수림을 돌파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은데.’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바깥을 보았다.


무역도시는 저번에 왔을 적과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유진은 이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는 전쟁에 휘말렸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교역되는 물자는 무기 따위의 전쟁물자가 대부분이고, 관광객은 드물다. 전쟁의 냄새를 맡고 온 죽음의 상인과 하이에나들의 모습도 보인다. 부족에게 고용된 용병들도 자주 보였다.


‘광란의 독립군은 철수했다던데. 이번 전쟁에 아이리스가 관여된 것은 아닌 모양이야.’


아이리스를 필두로 한 다크엘프 집단. 광란의 독립군. 저번에 방문했을 적에는 그 시커먼 귀쟁이들이 무역도시에 뿌리를 내리던 중이었다.


수장인 아이리스는 누아르 제벨라와의 영지전에서 패배하고, 해적으로 영락해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적이 바뀐 것은 아니다. 아이리스는 여전히 제 세력을 키우고 격을 인정받아 마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는 이 전쟁에서 재미를 보는 것보다는, 많지 않은 동족이 피해를 입지 않게끔 후퇴시키고서 바다의 노략질에 집중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왔다.”


멜키스가 웃으며 말했다. 검붉은 로브를 입고 금발을 뒤로 묶은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적색마탑주, 로베리안 서피스. 아롯에서 곧장 출발한 그와는 오늘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했었다.


“오랜만입니다.”


다가온 로베리안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바타는 도시의 관문 밖에 가 있기로 했고, 기다리고 있던 로베리안도 도착했으니 이곳에 더 앉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유진 일행은 거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주님에게는 비밀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로베리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시안 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이렇게 함께 보니 대비가 확실했다. 21살, 똑같은 나이지만 유진은 태연하다 못해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걷고 있었다.


‘……저게 정상이지.’


로베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시안과 시엘, 유진을 어릴 적부터 보아왔다. 본가의 쌍둥이도 천재라 불릴 만큼 비범하였지만, 유진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대수림의 깊은 곳에서 뭔지 모를 흉계가 꾸며지고 있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모여 전쟁을 벌인단다. 그리고ㅡ 200년 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현명한 세냐의 구출이 시도된다.


긴 세월 살아온 로베리안마저도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심풀이 삼아서 온 멜키스가 태연한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로베리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흑마법에 대한 혐오. 그것뿐이라면 살벌함으로 무장할 수 있겠지만, 대스승이라 섬기던 세냐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21살의 청년인 시안은 오죽하겠는가. 하물며 시안이 이곳에 온 것에는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로서의 사명감까지 더해져 있다.


……그보다 큰 무거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 유진일 것이다.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 세냐의 후계자. 심지어 차원의 틈에 있다는 라이자키아와 싸워야 할 장본인도 바로 유진이다. 그 싸움은 로베리안이 간섭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유진의 얼굴은 태연했다. ……여태까지 참 많이도 느꼈던 기분이지만, 이번에야말로 위화감이 강렬했다.


“유진 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예? 제가 왜요?”


“긴장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여서…….”


“보기만 그럴 뿐입니다. 저 엄청 긴장하고 있습니다.”


전혀 그래 보이지가 않았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것을 알지만. 로베리안은 마법사다. 그는 이 세상에 ‘정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시그니처를 창작한 순간부터 유진은 마법사로서 로베리안과 동등했다.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마법의 종류를 구분해서는 안 된다. 시그니처를 사용한 마법전에서 로베리안은 더 이상 유진에게 우위를 점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유진이 전력을 다한다면? 로베리안은 유진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21살의 청년인데 말이다.


……어쩌면…… 로베리안은 다시금 의혹을 상기하며 유진의 등을 보았다. 바로 앞에서 걷는 저 등은 21살의 청년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듬직하고 노련해 보였다.


‘어쩌면 유진 님은…….’


“악!”


로베리안의 생각을 끊은 것은 시안이 내지른 외마디 비명이었다. 유진이 바로 옆을 걷고 있던 시안에게 대뜸 로우킥을 갈겨버린 것이다.


“얼굴 좀 펴, 새끼야. 얼굴 피는 김에 어깨도 같이 좀 펴고. 고집부려서 따라온 주제에 뭐 그리 죽상이야?”


“대체 왜 때리는 거냐……?!”


“너 긴장 풀어주려고.”


……내가 괜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로베리안은 머릿속에 떠오른 의혹과 지금 유진의 모습을 겹쳐보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로베리안은 내심, 유진 라이언하트가 위대한 베르무트의 환생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모습을 보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와 전설에 내려오는 위대한 베르무트와 유진 라이어하트가 도저히 겹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 가볍고 능글맞은 모습은 우둔한 하멜과 닮지 않았나.


‘그것이야말로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위대한 베르무트가 자신의 피를 이은 후손으로 환생하는 것. 믿기 힘들지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둔한 하멜이, 아무 연고도 없는 라이언하트에 대체 어떻게 환생할 수 있겠나? 죽은 혼은 순리에 따라 흐르게 마련인데.


‘어느 미치광이가 순리를 거슬러 우둔한 하멜의 혼을 붙들지 않고서야…….’


한번 생각해 보았지만,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로베리안은 왠지 모를 섬뜩함과 떨떠름함을 애써 무시했다.


“발자크 루드베스에 대한 소식은 따로 없었습니까?”


“아…… 예. 없었습니다. 그는 보름 전에 절차대로 휴가서를 제출하고, 흑색마탑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시고요?”


“아롯을 떠난 것은 확실합니다. 솔직히, 저는 이번 흉계를 꾸민 것이 발자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발자크가 수상쩍은 인물이라는 것은 저도 동의합니다만, 그가 만약 흉계를 꾸미려 한다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굴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기는 해. 발자크는 왠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비밀 공방에서 인체실험이나 할 것 같은 이미지잖아.”


멜키스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답답합니다. 크리스티나. 가서 하멜의 엉덩이나 한번 쓰다듬으십시오.]


‘예?’


[하멜과 둘이서 여행을 할 때에는 저도 마음대로 나올 수 있었는데, 일행이 늘어나 버렸으니 제가 밖으로 나올 수 없잖습니까.]


‘언제는 그런 것을 신경 쓰셨습니까? 나오고 싶다면 나오셔도 됩니다, 시스터. 유진 님을 하멜이라 부르는 것만 조심하신다면 말입니다.’


[아뇨, 나오지 않을 겁니다. 제가 나서야 할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나가겠지만…… 저는 가급적 이번에는 당신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유진이 전쟁의 냄새를 맡았듯, 아니스도 전쟁의 냄새를 맡았다. 아니스는 전쟁에 익숙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전쟁에 익숙하지 않다.


[……당신은 이 숲에서 많은 시체를 보게 될 겁니다. 전쟁이 얼마나 잔혹하고, 당신이라는 1명의 성직자가 전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자비한 전쟁에서 당신이 아주 작은 존재란 것을 알게 될 겁니다.]


‘…….’


[처음 목도하는 전쟁이 당신을 망가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성장시킬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 크리스티나, 제가 당장 해드릴 조언은…… 모두를 구하겠다는 오만한 욕심은 버리십시오. 당신이 정말로 구하고 싶은 것만을 보십시오.]


‘예, 시스터.’


크리스티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하며 유진의 등을 보았다.


ㅡ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했다. 유진이 보는 것을 똑같이 보겠다고 결심했다. 성녀가 용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따라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의식하니,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크리스티나는 붉게 변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 * *


“기왕이면 조금 더 인간다운 모습이 좋았는데.”


헥토르는 표정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타당한 불만이었다. 지금 헥토르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절대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2개여야 할 팔은 6개가 되었는데, 그렇게 늘어난 팔에서 2개는 우악스러운 몬스터의 것이다. 하반신에도 인간의 다리가 아닌 몬스터의 다리가 붙었다. 늘어난 팔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몸통도 크고 두꺼워지고, 그 위에 달린 얼굴도 흉측했다.


“몸이 잘 맞지 않나?”


“그럭저럭 적응은 했습니다. 그냥,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


“너무 불만은 갖지 말게. 자네의 영혼이 가진 형태에 딱 맞춰서 만들어낸, 자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몸뚱이니 말이야.”


헥토르 라이언하트의 육체는 죽어 소멸해 버렸다.


그 순간에 헥토르의 영혼은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 에드몬드 코드렛에게 소환되었다.


그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영혼의 형태라. 헥토르는 혀를 차면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영혼으로만 존재하다가 최근에야 육체를 받았다.


이 흉측한 몸뚱이는 인간성을 포기한 만큼 강했고, 잘 움직여 주었다. 처음에는 6개나 되는 팔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어색하고 난감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헥토르는 6개의 팔을 가볍게 움직여 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투기장.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관중석에 앉은 것은 에드몬드 혼자뿐이다. 본래 이곳은 코칠라가 거둬들인 노예들이 서로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는 곳이다. 잔학함이 문화로 자리 잡은 부족이라서인지 곳곳에 그런 흔적이 보였다.


흙 알갱이 하나하나에 깃든 피비린내. 투기장의 벽 앞에는 인골을 엮어 만든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장식처럼 세워놓은 기다란 꼬챙이의 끝에는 어제 죽은 시체들이 매달려 있다.


별 혐오감은 느끼지 않았다. 스스로도 신기할 만큼 모든 것이 태연했다.


“어우.”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난입했다. 관중석으로 들어온 남자가 헥토르를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참 끔찍하게도 생겼네. 죽여 버리고 싶게.”


“미리 말도 해두었는데, 어디를 다녀온 건가?”


“산책.”


손은 말끔하게 닦여 있지만 남자에게는 피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에드몬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산책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오긴 해주어서 고맙네.”


“그래서. 저걸 죽이면 되는 건가?”


남자가 손가락을 들어 헥토르를 가리켰다.


“아니. 죽이면 안 돼. 어디까지나 저 몸뚱이의 성능과 적합률을 테스트해 보고 싶은 것이니까.”


“그딴 이유라면 굳이 나까지 불러서 할 필요도 없을 텐데? 뻔한 구라는 치지 말지, 내 실력도 한번 봐두고 싶은 거잖아.”


“당연히 그런 이유도 있지.”


“마음에 안 들어. 마스터의 부탁만 없었으면 너도 죽여 버렸을 텐데.”


남자는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내뱉었지만, 에드몬드는 빙긋 웃기만 했다.


“내 마음도 이해해 주게. 그 우둔한 하멜의 실력을 봐두고 싶다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


에드몬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ㅡ 하멜이 에드몬드의 목젖에 검을 들이밀었다.


“날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남자가 눈동자를 칙칙하게 빛내며 내뱉었다. 목젖에 칼날이 붙어왔지만 에드몬드의 안색은 평온했다.


“네가 내 존재에 여러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내 마스터인 것은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가리를 조심하란 말이야.”


에드몬드는 어깨를 살짝 으쓱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네. 조심하도록 하지.”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거두었다. 그는 투기장에 선 헥토르의 앞에 뛰어내려, 들고 있던 검을 뒤편에 던져 버렸다.


“검은?”


“네깟 새끼 하나 패는데 검까지 쓸 필요가 있나?”


헥토르는 뭐라 답하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남자는 6개의 손에 검을 쥔 헥토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킬킬 웃었다.


“옛날 생각나네.”


이바타 자하부


300년 전의 대영웅, 하멜 다이너스.


헬무드의 마족들 중에서 그 시대를 겪어 본 대마족들은, 그를 몰살의 하멜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마족이 아닌 에드몬드는, 몰살의 하멜이라는 이명보다는 우둔한 하멜이라는 별명이 익숙했다.


‘과연.’


에드몬드는 뒷짐을 지고 서서 투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저것은 우둔한 하멜 본인은 아니다.


아멜리아 머윈이 사막에서 발견한 하멜의 무덤. 그곳에서 도굴해 낸,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썩지 않은 시체를 사용해서 만들어낸 데스나이트.


‘여전하군.’


아멜리아 머윈에게는 독특한 고집이 있다. 그녀 본인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인지, 아멜리아는 부적합한 존재에 집착한다.


당장 그녀가 최근에 가지고 놀고 있는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 겉보기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몸뚱이는 뱀파이어를 기초로 삼아 배양해 낸 키메라다. 영혼도 본래 그 몸뚱이에 태어난 것이 아닌, 배양 과정에서 불어넣은 영혼이라고 했다.


저 데스나이트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들었다. 아멜리아는 운 좋게 도굴해 낸, 데스나이트로 빚어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소재를 두고서 여러 시도를 했었다. 인간보다 호전성이 높고 강한 전투본능을 가진 수인의 혼을 불어넣은 적도 있다.


아예 다른 종족을 넣어버리니 거부반응이 너무 커서, 그다음으로는 라이칸슬로프의 영혼을 시도했다.


인간에서 변이해 버린 종족.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 정작 아멜리아 본인은 만족하지 않았지만, ‘펫’이라 부르면서 몇 년 동안 애착을 두었다.


그것마저도 망가져 버렸다. 갑자기 무덤에 진입한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멜리아가 아끼는 데스나이트를 망가트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영혼은 소멸해 버렸지만, 다행히 하멜의 시체는 소멸하지 않았다.


방법을 바꾸었다. 그 과정에는 같이 유폐의 삼마라 불리는 일원이자, 당대에 유폐의 지팡이를 맡은 에드몬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멜리아가 고집을 꺾었다면, 그냥 높은 적합성을 가진 인간의 혼을 불어넣었으면 된다. 실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의 기사 하나를 죽이고서 혼을 강탈했으면 된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런 방법을 바라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부적합한, 존재 자체가 뒤틀린, 세상이 환영하지 않을ㅡ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에 집착했다.


여러 실험과 시도 끝에 만들어진 데스나이트가 저것이다. 상대의 모습을 투영해 흉내 내는 마물, 도플갱어의 혼을 조합했다. 썩지 않고 멀쩡히 남아 있는 시체의 뇌를 혼에 투영시켰다.


저건 300년 전의 대영웅, 우둔한 하멜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하멜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미치광이다.


하지만. 저 데스나이트는 자기 자신이 하멜이라 자처할 자격이 있다. 하멜 본인의 육체를 갖고, 하멜의 심상과 기억을 투영해 냈다. 물론 철저한 복종을 위해 마족에 대한 복수심은 거세시켰다. 억지나 다름없는 기억을 새겨 넣어 개변시키고, 진심으로 납득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데스나이트. 아멜리아 머윈을 마스터라고 따르며 충성하고, 마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살의는 사라진 꼭두각시 전사.


“더 해야 되나?”


데스나이트가 고개를 돌려 에드몬드를 쳐다보았다.


간단한 무장. 생전의 습관을 그대로 투영했기 때문에, 저 데스나이트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갑옷은 선호하지 않는다. 무기도 특별한 것보다는 부서져도 상관없는, 그리고 다양한 무기를 선호한다.


그 다양한 무기에는 맨손도 포함된다. 데스나이트가 헥토르가 가진 이형의 육체를 완전히 해체해 버리는 것에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강력한 재생력을 부여한 헥토르의 육체는 뽑고 뜯어내고 부숴도 계속해서 재생했지만, 그때마다 데스나이트는 즐겁게 웃으면서 파괴와 해체를 반복했다.


“충분하군.”


에드몬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헥토르가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하고 널브러져 있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영혼은 망가지지 않았고, 거듭된 고통과 쇼크에 정신이 좀 붕괴해 버린 것뿐이다. 저 정도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으로 고쳐낼 수 있다.


“조금 과한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제법 애착을 둔 부하니까, 의례적인 말은 해두었다. 그러자 데스나이트는 코웃음을 치면서, 몸뚱이에서 뜯어낸 헥토르의 머리를 발로 짓뭉개 터뜨려 버렸다.


“나름 살살 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손속이 거칠어져버렸네. 어쩔 수 없잖아, 이 새끼, 라이언하트라며?”


“그렇지. 직계는 아니지만.”


“베르무트 그 개새끼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는 것이 문제야.”


너는 동료들에게 배신당해 죽었다.


최후의 순간에 베르무트의 검이 네 심장을 꿰뚫었다. 동료들 모두가 널 배신했다. 마왕과 싸웠던 네 죽음은 300년이 흐른 지금은 우스운 농담거리로 다뤄지고 있다.


동료들은 자신의 추악한 배신을 알리지 않고, 유폐의 마왕과도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보위를 위해 유폐의 마왕과 협상을 맺었다.


널 가여워 한 유폐의 마왕이 네 육체와 혼을 돌보았다. 그리고 네 존재가 아멜리아 머윈에게 하사되었다.


ㅡ아멜리아가 개변시킨 기억이다. 자기 자신을 하멜이라 믿는 데스나이트는, 그 기억을 의심하지 않는다. 마왕에게 감사하고, 아멜리아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동료들을 증오하며, 특히 라이언하트에 거대한 살의를 가지고 있다.


“네가 네 가문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나는 널 완전히 죽여 버렸을 거다.”


데스나이트는 꿈틀거리며 재생하는 헥토르를 향해 속삭였다. 데스나이트는 피범벅의 손을 털고서 관중석으로 올라왔다.


“너 따위에게 내 실력을 의심받는 것도 열 받는 일이지만, 마스터의 친구라니까 참아줄게. 하지만 다음은 없어. 전투가 없을 때에 날 귀찮게 불러대지 마라.”


“주의하도록 하지.”


“세상 참 많이 좋아졌어. 흑마법사 나부랭이가 내 앞에서 실실 웃어대고 말이야.”


데스나이트는 코웃음을 치며 에드몬드를 지나쳤다.


에드몬드도 멀어지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저렇게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솔직히,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을 참는 것이 고역이었다.


뒤틀린 기억과 일방적인 증오. 하멜 본인이 아니면서 자기 자신을 하멜이라고 믿는다. 흑마법사와 마족에 대한 증오가 남았다는 듯이 말해대지만, 저 데스나이트에게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데스나이트는 흑마법사와 마족에 대한 증오를 떠들어댄다. 투영한 기억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이다.


“아멜리아가 사랑할 만해.”


저 부조화가 아멜리아가 고집하고 집착하는 점이다. 그 끔찍한 마녀도 본질에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인지.


에드몬드는 큭큭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산산조각 나서 흩어져 있던 헥토르의 몸뚱이가 한 번 흐물흐물하게 녹았다. 그리고 서로 엉겨붙고, 멀쩡한 모습으로 수복되었다.


“어땠나?”


에드몬드는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헥토르의 눈동자에 천천히 빛이 되돌아왔다.


“……저걸 통제할 수 있습니까?”


몸에 고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헥토르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악마적이다. 그 외의 평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헥토르도 실력에 자신이 있다. 본래부터 그는 라이언하트에서 방계 제일의 실력자라 평가를 받았다. 기사수행을 하던 루하르에서는, 대륙 제일을 논할 때에 항상 빠지지 않는 하얀 송곳니의 명예기사로 서임 받았을 정도다.


‘생전’에 평가받던 실력이 그랬다.


드러내지 않던 진짜 실력. 심지어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고 강한 육체까지 받았는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건 비웃음으로 가로막히고 무자비하게 유린당했다.


“아주 잘 만들어졌지?”


에드몬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 대영웅, 우둔한 하멜의 전투능력을 그대로 재현했네. 죽은 육체는 데스나이트로 만들면서 생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어. 마나를 쓰지 못하는 대신에 마력을 자유롭게 다루어 내. 그뿐인가? 저 데스나이트가 정말 뛰어난 점은, 성장의 여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지.”


“……그래서 묻는 겁니다. 저걸 정말로 통제할 수 있는 겁니까?”


“나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인데…… 하하, 자네가 마법에 무지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군. 통제할 수 있느냐고? 당연하지. 저건 결국 데스나이트고, 그런 존재는 주종계약을 절대 거스를 수 없어.”


“하지만, 에드몬드 님. 저 데스나이트의 주인은 당신이 아닌 아멜리아 머윈이지 않습니까?”


대수림에서 준비 중인 의식은 에드몬드뿐만 아니라 헥토르에게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중요한 의식이다.


헥토르는 저 유폐의 지팡이의 비원에 매료되었다. 이미 인간으로서는 죽었지만, 에드몬드의 비원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더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 의식에는 불확실한 점이 너무 많다. 대수림이란 땅을 통째로 관통하고 있는 블랙드래곤의 사념. 에드몬드는 그마저도 이용해서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마법에 무지한 헥토르는 저 자신감에 공감이 힘들었다.


그뿐인가? 그 수상쩍은 사막의 던전마스터가 에드몬드에게 협력하는 것도 투명하게 믿기가 힘들었다.


“나와 아멜리아는 적이 아닐세.”


에드몬드는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오히려…… 서로의 비원에 협력하는 입장이지. 잘 듣게, 헥토르. 마법사에게 있어서 비원이란 것은 평생을 몰두해서 이뤄야 할 이상이지만, 다른 마법사와 꼭 경쟁해야 되는 것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서로의 비원이 향하는 방향성이 똑같지 않으니 말이야. 그래서 나와 아멜리아는 사이좋게 협력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아멜리아의 도움을 받아 비원을 이루고, 그 후에 나도 아멜리아를 돕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아멜리아와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둘이 가진 비원의 방향성이 얼마나 크게 다른지도 잘 알고 있다. 이 일에서 서로가 배신해야 할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저 데스나이트의 창작에 도움을 주었네. 그리고 이곳에서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빌려왔지. 모든 것이 끝나면, 저 데스나이트는 다시 아멜리아에게 돌아갈 뿐이야. 그리고 아멜리아가 바랄 때에 내가 도움을 건네는 것이지.”


“……저는 당신의 비원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아멜리아 머윈의 비원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녀의 비원은 제법 복합적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아멜리아는 힘을 바라네.”


“힘?”


축약해도 너무 많이 축약해버린 대답이다. 그래서 헥토르는 저 대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아멜리아 머윈 정도 되는 흑마법사가 힘을 더 바란다는 것이 의문스러웠다.


“아주 많은 힘.”


에드몬드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비원에 대해 본인도 아닌 내가 자세히 말하는 것도 실례될 일이지. 하지만, 우리가 왜 협력하는 것인지는 자네도 알 수 있을 거야. 이 숲에서의 모든 것이 완성되면, 나는…… 하하, 아멜리아가 바라는 커다란 힘을 더해줄 수 있는 조력자가 될 걸세.”


“……정말 성공할 수 있는 겁니까?”


불안한 얼굴로 건넨 질문. 에드먼드의 웃음이 짙어지고,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물론이지. 변수는 없어.”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마왕의 잔재에게서 얻어낸 술식. 혼의 재구성, 육신의 창조.


이오드는 마왕의 잔재를 어둠의 정령왕으로 초월시키는 것으로 마왕에 준할 존재가 될 뻔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이오드 본인이 큰 변수였다. 자격 없는 코흘리개가 너무 거대한 힘을 손에 쥐게 된 탓이다.


잔재로 영락해 버린 마왕의 사념은, 용사 베르무트에 대한 증오로 라이언하트 본가의 피와 영혼을 제물로 바랐다.


‘고작’ 그 정도다. 달리 생각한다면 고작 그 정도의 제물로도 이오드는 마왕의 잔재를 완성시키고, 새로이 마왕이 될 수 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이오드에게 마왕의 잔재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몬드에게는 어둠의 정령도, 마왕의 잔재도 없다.


그럴지라도 에드몬드는 실패하지 않는다.


술식의 골자는 알았다. 그걸 새로이 해석하고 보완했다. 마법의 규모가 규모이고, 에드몬드의 지향점이 특별한 만큼…… 대량의 제물이 필요하겠지만, 이 숲에서 원주민의 씨가 말라 버릴지라도 당장 대륙의 눈은 이곳에 향하지 않는다.


‘운이 좋아.’


헥토르의 기억에서 술식을 베껴냈을 때. 에드몬드는 믿지도 않던 신을 느끼며 희열했다. 에드몬드 본인이 수십 년을 추구해도 완성하지 못했던 마법. 설마 300년 전에 죽은 마왕의 잔재에게서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행운은 끊이질 않았다. 삼공 중 하나인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그 강력한 존재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설마 그 흔적이 통째로 이 토지에 새겨져 있을 줄이야.


‘멍청한 도마뱀의 무덤이 이곳인 것도 큰 행운이다.’


토지에 새겨진 라이자키아의 사념. 정작 라이자키아 본인은 차원의 틈을 떠돌고 있는 모양인데, 에드몬드는 이 조건을 즐겁게 이용하기로 했다. 이 대수림이란 땅을 마법의 토대로 삼고, 지맥의 힘을 끌어내듯이 라이자키아의 마력을 끌어온다.


제물로 바쳐질 무수히 많은 혼. 유폐의 지팡이라 인정받은 에드몬드의 마법력. 드래곤하트를 통째로 사용한 블러드메리의 마력. 거기에 고룡이자 마룡, 라이자키아의 마력까지!


이건 실패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에드몬드는 서두르지 않았다. 완벽한 성공을 위해 지금도 숲 곳곳에는 의식의 촉매가 되어줄 인골탑을 세우고 있다. 영혼을 속박시킨 피로 물줄기를 만들어 숲에 흘리고 있다.


‘이론대로라면 세계수의 힘까지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이오드가 의식에 성공했다면, 그는 마왕이 되었을 것이다. 겨우, 마왕이 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의식이 성공했을 때. 에드몬드는 그보다 더 거대한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서열 하위권의 마왕이 아닌 진짜 대마왕의 힘을 거머쥐게 되리라.


에드몬드는 나약하고 평범하며 너무 많기까지 한 인간이란 존재성을 버리고, 본질부터가 완성된 대마왕이 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삶에 미련은 없다. 대마왕으로 거듭나느냐, 인간으로 남느냐. 고민의 여지가 있는가? 에드몬드에게는 성공에 대한 확신과, 그를 이뤄낼 능력이 있었다.


“할 수 있다, 나라면.”


에드몬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확신에 찬 선언이었다. 헥토르는 조용히 그 뒤를 따르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바뀐다.’


능력을 모두 인정받지 못하던 방계에서의 삶. 그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으나, 헥토르에게 라이언하트라는 거대한 명문 무가를 전복시킬 만한 능력은 없었다.


방계 제일이란 평가를 받으면서도 가슴은 언제나 공허했다.


아무리 인정받아도 결국은 방계. 위대한 선조에게서 이어지는 백염식은 익힐 수도 없는 처지. ㅡ공허함에 방황하던 도중에, 에드몬드의 접촉을 받았다. 에드몬드는 헥토르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가 이뤄낼 수 없는 미래를 보여주었다.


인정이 필요한 가문이라면 오히려 버려버린다. 대륙의 라이언하트가 아닌, 헬무드의 라이언하트를 새로이 우뚝 세우면 된다. 라이언하트가 이어 온 300년의 역사는, 새로운 대마왕이 열 시대에서는 하찮은 역사가 될 것이다.


……둘이 확신 가득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 도중에도 숲 곳곳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인피(人皮)를 엮어 만든 가면을 쓴 코칠라의 전사들이 약소부족을 습격했다. 너무 많은 인질은 즉석에서 벌인 학살로 숫자를 줄였다. 전사들은 에드몬드의 철저한 교육을 따랐다.


건네받은 흑마법의 단검으로 인질의 가슴을 가르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심장을 뽑았다. 직접 그릴 필요 없이, 단검은 산제물의 피를 인도하여 의식의 톱니바퀴로 삼았다.


피가 흙에 스며든다. 깊은 땅속에서 피가 수맥처럼 흘러간다. 그 뒤에, 영혼을 빼앗긴 시체를 난도질해서 뼈를 발골하고, 탑을 쌓는다…….


“과연.”


학살이 지나간 곳.


피비린내 그득한 마을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마을 중앙에 우뚝 선 인골탑에 다가가더니, 턱을 어루만지며 인골탑을 살펴보았다.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겠어. 에드몬드, 그 친구의 마법 센스에는 감탄이 나올 정도야.”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이 인골탑의 목적을 알았다. 이 탑은 코칠라의 원주민들이 잔학함 만으로 세운 토템이 아니다. 인골탑은 땅속에서 흐르는 피의 강을 연결하고, 알맞은 곳에 흐르도록 인도하고 있다.


“나로서는 시도할 수도, 떠올릴 수도 없는 마법이군.”


발자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정했다.


같은 유폐의 삼마라 불리지만, ‘마법사’로서 가장 높은 역량을 가진 것이 바로 에드몬드 코드렛이다. 그래서 에드몬드가 유폐의 지팡이라 불리며, 블러드메리를 하사받은 것이다.


발자크는 자신이 마법사로서는 에드몬드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지금도 확인했다. 예전부터,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흑마법사는 아멜리아와 에드몬드와 비교해서 특별히 우세한 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와 계약을 맺었다. 즉, 발자크에게는 대마왕이 눈여겨볼 만한 자질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장기가 무엇인지 잘 안다. 과거, 청색마탑에 있을 적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발자크 루드베스는 속임수에 능하다.


이바타 자하부


몇 년 전. 크리스티나와 단둘이서 대수림을 가로지를 때는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때는 은둔해 버린 세냐와, 엘프의 영지를 탐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도중에는 떠돌이 엘프들의 마을까지 찾아내야 했다. 괜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원주민 부족은 빙 돌아서 지나갔고, 이곳저곳 탐색하느라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앞장선 이바타는 이 넓어도 너무 넓은 숲의 길에 익숙했다.


길에 익숙하다기보다는 숲이 이바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이바타는 그냥 앞으로 나아갈 뿐인데, 빼곡한 나무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몸을 움직여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울퉁불퉁하고 질척하여 걷기 힘든 땅도, 이바타가 발을 뻗으면 평평하고 단단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땅이 발을, 바람이 등을 떠밀어주기도 했다.


“조란의 족장이 계승받는 숲의 가호다.”


사마르의 원주민들은 숲과 원시정령의 사랑을 받는다.


그중에서도 노골적이고 강력한 애정이 바로 가호. 태고부터 이어온 정령마법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힘이다. 몇 년 전에는 계승받지 못했던 힘인데, 숲의 정세가 불온해 지고 이바타가 성년이 되면서 가호의 계승이 이뤄진 것이다.


다른 부족을 빙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원주민들은 부족의 영역에 굉장히 민감하지만, 이바타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영역을 관통해 버렸다.


조란은 숲에서 손에 꼽히는 대부족이고, 이바타는 조란의 대전 사이자 차기 족장으로 확정된 몸이니 저래도 되었다.


로베리안의 소환수들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불러낸 말들은 복잡한 숲에서도 기민하게 움직이며 속도가 처지지 않았다. 덕분에 일행은 무역도시에서 출발한 지 일주일 만에, 숲 깊은 곳에 있는 조란 부족의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란 부족은 유진이 숲에서 보았던 부족 중에서 가장 커다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대수림이 워낙에 거대한 탓도 있지만, 부족의 영지는 어지간한 귀족령보다도 컸다.


영지의 외곽에서 하루하고 반나절을 더 이동했다. 외곽부터 경계를 서는 전사들을 보았고, 수십 개가 넘는 마을을 지나고 나서야 조란의 수도에 가까이 올 수 있었다.


“유진 님.”


소환수에 타고 있던 메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얘 계속 이상해요.”


메르의 앞에는 라이미르아가 타고 있었다. 메르는 대놓고 라이미르아를 견제하면서도, 자신과 여러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서로 나름 사이좋게 지내는 중이었다.


보통 라이미르아가 떠드는 시건방지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이야기를 메르가 트집을 잡는 패턴이었는데, 서로 꽤 죽이 잘 맞아 숲에서도 같은 소환수를 타고 이동했다.


“본녀는 멀쩡하느니라…….”


라이미르아가 즉시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평소 같은 힘은 없었다. 유진은 창백하게 질린 라이미르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상태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어제부터였다. 잠자는 중에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더니, 그 후로도 깊이 잠들지 못하고 가위에 눌렸다. 일어나서도 식사는커녕 물도 제대로 마시려 들지 않고, 비 오듯이 식은땀을 흘리고 몸을 떨어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라이미르아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서 메르의 품에 안기듯이 앉아 있다. 반복해 씹은 입술은 너덜거리지는 않았지만 잇자국이 선명하고 빨갛게 부어 있었다. 앞머리도 땀에 달라붙어 축 처져 있었다.


“본녀는…… 태어난 이래로 별궁을 나간 적이 없느니라. 본녀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왔단 말이니라. 그런 본녀가 별궁을 떠나 이 덥고 끈적거리는 숲을 가로지르면서, 모진 핍박까지 받고 있는 것이니라…… 그러니 당연히 몸이 안 좋아질 수도 있는 법이니라.”


“드래곤이?”


“드래곤과는 관계가 없는 문제라 생각하느니라. 이건…… 이건 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그런 문제이니라.”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행 중에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있다. 어제 라이미르아의 상태가 이상해지고서 둘이 곧바로 상태를 확인하였지만, 라이미르아의 이상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짚이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닌데 말이야.”


“무…… 무어냐.”


“네 애비가 널 보고 있는 거다.”


유진은 히죽 웃으며 말해주었다. 갑자기 라이미르아의 상태가 이상해질 이유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대수림에 들어오고서, 주기적으로 용언마법을 확인해 보고 있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외곽에서부터 라이자키아에게 연결되는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했다.


외차원으로 추방되는 순간. 라이자키아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놈은 목숨을 부지하고, 언젠가 반드시 이 세상에 돌아오겠다는 집념으로 대수림과 자신의 존재를 묶어 버렸다. 숲속 깊이 들어올수록 연결이 강해지는 것은 확인하고 있으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못해도 숲의 중심까지는 가야 할 것 같았다.


이쪽에서 라이자키아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가는 만큼, 그 집념 강한 블랙드래곤도 이쪽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곳에 데리고 온 라이미르아의 이마에 박힌 홍옥은 라이자키아가 가진 드래곤하트의 일부다.


“네 상태가 이상해지는 것이 심리적인 요인이라면, ‘왜’ 그런 것인지는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거야. 아냐?”


“우으…….”


“어제 물어봤을 때는 그냥 기분 나쁜 꿈을 꿨다고 했지? 정말 그것뿐이냐? 아예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고.”


라이미르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진의 말이 맞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꿈의 내용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새카만 어둠. 자기 몸조차 보이지 않는, 기분 나쁘고 짙고 끈적끈적한 어둠 속에서. 나 혼자만이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둠의 저편에서 누군가가 라이미르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본능적인 꺼림칙함과 공포에 도망치려 했지만, 꿈속의 라이미르아는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네 존재는 날 위한 것이다.


기억에 선명히 남은 흑룡공의ㅡ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스멀스멀 다가온 어둠이, 아니, 본래부터 라이미르아를 속박하고 있던 어둠에 분명한 무게와 살의와 탐욕이 더해졌다.


그 순간에 어둠이 달라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라이미르아는 ‘이런’ 감각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라이미르아의 꿈은, 라이미르아로 하여금 상황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라이미르아는 누군가의 입안에 들어가 있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상태로, 거대한 존재의 입안에 들어가서ㅡ 차가운 혓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몸을 으적으적 씹어 삼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라이미르아에게 커다란 공포를 주었다.


산 채로 꿀꺽, 삼켜졌다.


“히이이익…….”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한 번 깨어나고서 다시금 잠을 청했다. 악몽은 반복되지 않았으나, 그보다 기분 나쁘고 의식을 괴롭게 하는 악몽을 꾸었다.


이 세상의 바깥에서, 누군가가 라이미르아를 노려보고 있다. 직접 손을 뻗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혼이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메르는 바들거리며 떠는 라이미르아가 불쌍했다. 그래서 슬쩍 손을 뻗어 라이미르아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새 크리스티나도 타고 있는 소환수를 이끌어 라이미르아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아…… 알았다.”


손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는 손길과, 정수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라이미르아의 떨림은 안정시켰다. 라이미르아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사악한 인간이여. 네가 본녀의 정신을 침략한 것이 틀림없으렷다.”


“뭐라는 거야.”


“본녀의 악몽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었느니라. 본녀에게 그런 꿈을 보여주어 이득을 얻는 것은 유진 라이언하트, 네놈뿐이니라.”


되는대로 뱉는 말은 아니었다.


흑룡공이 딸을 산 채로 잡아먹을 이유가 어디에 있나? 저 사악한 용사가 흑룡공과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사악한 꾀를 부린 것이 틀림없었다.


“유진 님, 참으십시오.”


“참으셔야 합니다.”


유진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본 로베리안과 크리스티나가 말을 덧붙였다.


[왜 참아야 합니까? 맞아도 쌀 소리를 하면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드래곤의 머리통을 때릴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야.”


“내가 저렇게 굴어도 참을 거냐?”


아니스와 멜키스, 시안의 의견은 달랐다. 따악! 유진이 나서기도 전에 메르가 라이미르아의 정수리를 한 대 후려쳤다.


“도착했다.”


조란의 수도. 숲속에 세워진 도시.


멀리서도 보이는 것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사원이었다. 사마르의 공통신앙인 대진의 신을 모시는 사원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사원이 수도에서 가장 높고 커다란 건축물이었다. 나머지 건물들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보았던 것처럼 높이 낮은 사각형의 단조로운 건물들이었다.


수도는 넓었다. 물론 키옐의 수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유진의 고향인 기돌보다는 컸다.


“새삼 드는 생각인데, 내 고향은 정말 시골 촌구석이었군.”


“이제야 인정하는 거냐?”


시안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너는 아니라고 박박 우겼지만 말이야, 어렸을 때 네 몸에는 정말로 소똥냄새가 났다고. 이 숲속 도시에도 소똥 냄새는 안 나는데 말이야.”


“똥통에 얼굴 처박기 전에 조용히 해.”


말뿐인 협박이 아니라는 것은 시안도 아주 잘 알았다.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가늘게 뜬 눈으로 수도의 방벽을 응시했다.


“분위기가 이상하네.”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문도 닫혀 있고, 방벽 위에도 경계가 강했다. 전투화장까지 그린 전사들이 두 눈에 힘을 주고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할 거냐?”


유진은 앞에 선 이바타의 등을 보면서 물었다. 분위기가 왜 저런 것인지는 유진도 알았다. 사마르로 출발하기 전에, 이바타에게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바타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전신의 근육은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꿈틀거리고 있었고, 대놓고 드러내는 분노와 살기가 공간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내가 해야 한다.”


이바타가 내뱉었다. 그는 소환수에서 내리고선,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앞에 나아갔다.


“이바타 자하부!”


방벽 위에 선 남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바타보다 조금 작기는 했지만, 인간과 고릴라의 혼혈이라 해도 믿을 거구에 얼굴이 특히 험상궂었다.


“아무리 차기 족장일지라도 네 행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무어가 말이오?”


“이것은 조란과 동맹이 해결해야 할 전쟁이다. 하지만 너는! 족장이 노쇠해진 틈을 타 독단을 벌였다!”


“조란의 긍지를 버린 것이냐!”


내지르는 고함들이 시끄러웠다.


라이언하트에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은 이바타의 독단이었다.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서로 후퇴했던 첫 전투. 이바타의 아버지인 조란의 족장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치명상을 입었다.


그 첫 전투에는 이바타도 참가했다. 승리도 패배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진군하지 않고 물러섰다……. 라고 고집을 부렸지만ㅡ 전력의 차이는 처음부터 절감했다. 코칠라에게는 확실한 여유가 있었다. 놈들은 헬무드에게서 지원받는 마물도 부리지 않았고, 사악한 주술사들도 동원하지 않았다.


승패에 대한 여지는 조란에도 있었다. 갑작스레 시작한 전투였다. 동맹의 결집이 다 되지 않았다. 대지의 신에 승리를 위한 의식도 올리지 못했다. 코칠라가 주술사를 동원하지 않았듯, 조란과 동맹도 주술사를 동원하지 않았다.


부족의 원로들과 이바타의 친척들. 자긍심만 높은 전사들. 동맹 부족의 족장들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바타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바타는 첫 전투에서 조란의 멸망과 부족민의 몰살을 보았다.


“아버지께 허락은 받았다.”


이바타가 내뱉었다. 조란과 동맹의 힘만으로는 코칠라를 무찌를 수 없다. 이바타는 혹시라도 유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족장의 허락을 받고 숲을 나왔다.


“족장은! 형님은 돌아가셨다. 아들인 네가 부족을 비운 동안에! 부상의 고통에 괴로워하다 결국 대지의 품에 안겼단 말이다! 너는 형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처음에 고함을 질렀던 남자. 족장의 동생이 이바타의 삼촌이다. 그는 조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형님께 허락을 받았다고? 부족의 명예와 긍지를 앞서 온 형님이 바깥의 인간을, 신성해야 할 전장에 들이는 것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유진은 저 외침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옛날부터 느낀 것인데, 신성함을 핑계로 뱉어대는 새끼들은 대부분 병신이더라.”


“그거 저보고 하는 말입니까?”


크리스티나가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쏘아보았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시선을 피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바타 자하부. 너는 조란의 족장이 죽어가며 의식이 혼란스러운 중을 노린 것이다.”


“내가 그럴 이유가 있나?”


“이유는 알 필요가 없다. 이 전쟁에 외지인을 개입하려 든 것부터 너는 족장에 마땅한 명예를 스스로 져버린 것이다.”


“외지인을 먼저 끌어들인 것은 코칠라다.”


“코칠라와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코칠라는 헬무드의 도움을 받지만, 조란은 숲 밖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전쟁에 패배하면?”


“우리는 패배하지 않는다.”


내지르는 고함은 강압적이기만 할 뿐 논리가 없었다. 이바타는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게 무엇을 바라나.”


“조란을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조카인 내게 족장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그토록 싫은가?”


“내가 그런 감투에 눈이 멀어 이러는 것 같으냐? 나는 부족의 명예와 긍지를 위하려는 것이다.”


당연히 이바타는 저 말을 믿지 않았다. 이바타의 뒤에 선 유진과 다른 사람들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방벽에 도열한 전사들도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족장 대리를 맡은 이바타의 삼촌과 동맹의 부족장들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은 유진으로 하여금 뻔하고 한심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보아하니 전쟁 시늉을 좀 하다가 패배를 받아들이고, 코칠라의 산하로 들어가기로 합의가 된 모양이었다.


이곳 원주민들의 권력투쟁이야 유진이 큰 알 바는 아니었다.


“네 뒤를 봐라, 이바타. 네가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않고 데려온 지원 병력은 고작 그 7명이 끝이지 않은가?”


“전사다운 용맹함도 없어 보이는 남자도 겨우 3명이다.”


우리 얘기인가?


유진은 곁에 있는 시안과 로베리안을 힐긋 쳐다보았다. 마법사인 로베리안과 별로 세 보이지 않는 시안은 그렇다 쳐도.


“내가?”


전사다운 용맹함이 없어 보인다고?


“2명의 여자는 대체 왜 데리고 온 것이냐? 네 부정을 가리기 위한 공물이냐?”


“내 아내가 되어라.”


“남은 2명은 나이도 차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족장들이 이바타와 유진 일행을 가리키며 비웃어댔다. 멍하니 서 있던 멜키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기 말이야,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저기 저 아저씨가 나보고 아내가 되라고 하지 않았니?”


“멜키스 님 말고 크리스티나한테 한 말일 겁니다.”


“응? 왜? 왜 그렇게 생각해? 나한테 한 말인 것 같은데? 지금 저 아저씨가 나 보고 있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멜키스 님보다는 크리스티나를 더 아내로 맞이하고 싶을 겁니다.”


그 말이 크리스티나의 가슴에서 꿈틀거리던 짜증과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렇다는 것은 유진 님도 나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뜻인가?’


[하멜이 보통 사람은 아니지만, 크리스티나, 방금 저 말은 사실상 프로포즈라 해도 무방하다 생각합니다.]


아니스도 호들갑을 떨었다. 멜키스는 정색하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아닐걸? 왜? 나나 크리스티나 성녀나 둘 다 예쁜데?”


“멜키스 님이 크리스티나보다 나이가 3배는 많으니까요.”


심드렁한 대답에 멜키스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한가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성벽 위에서는 비웃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성벽을 노려보던 이바타의 얼굴은 여전히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바타는 크게 숨을 삼키더니, 빙글 몸을 돌려서 모두를 바라보았다.


“모두 미안하다.”


이바타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과를 전했다.


“환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고는 말했었지만, 설마 저렇게나 저열한 모욕까지 해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이바타 자하부! 차기 족장이라는 자가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냐!”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이바타는 그 말을 무시하고서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명예와 긍지를 떠드는 전사란 자가, 설마 저렇게나 추할 줄은. 더는 이 문제로 당신들을 귀찮고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 바란다면 당장에라도 숲 밖으로 인도해 주겠다.”


“에이, 그럴 필요는 없어. 말했듯이 나도 숲 안쪽에 볼일이 있다니까.”


“그렇다면 잠깐만 기다려 다오.”


이바타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도와달라는 말은 필요가 없었다. 이바타는 뿌득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방벽 위에서 모욕이 더 들려왔지만, 이바타는 더 이상 그를 듣고서 대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무기 하나 들지 않은 맨손을 꽉 쥐고서, 성큼성큼 방벽을 향해 걸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면이 용수철처럼 이바타의 발을 튕겨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이바타는 한 번의 도약으로 방벽의 위까지 치솟았다.


조란의 족장 대리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바타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이바타가 분노해 덤벼 오는 것을 유도해, 이바타를 아예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단순히 입만 산 전사가 아니었다. 부족 전체에서도 그만큼 뛰어난 전사는 드물었다.


등 뒤에 감춰두었던 창이 위로 들렸다. 족장 대리는 힘에 찬 고함을 지르며 창을 내던졌다. 거대한 마나를 휘감은 창이 굉음과 함께 공간을 꿰뚫었다.


맹렬하게 날아든 창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이바타의 손에 잡혔다. 이바타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창을 다시 내던졌다.


뻐어어억!


마나도 두르지 않고, 힘만으로 내던진 창이 족장 대리의 몸을 관통했다. 꽈르르릉! 몸을 관통하고도 힘을 잃지 않은 방벽을 무너트렸다.


“우아악!”


근처에 있던 부족장들이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무너지는 방벽에서 뛰어올라, 아래로 떨어지던 이바타에게 덤벼들었다.


이바타의 맨손이 그들 모두의 팔을 하나씩 뽑아버리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꺼으으으…….”


무너진 방벽의 잔해에 파묻혔던 족장 대리가 창과 함께 높이 들렸다. 이바타는 창에 꿰뚫린 삼촌을 흔들며 내뱉었다.


“넌 전사가 아니다.”


대답을 듣기 위해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이바타는 높이 든 창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직! 땅에 처박아 버린 족장 대리의 몸이 터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한순간에 외팔이가 된 부족장들은 상처만 붙들 뿐, 이바타를 죽이라는 명령은 내뱉지 못했다.


“문을 열라고 명령해라.”


이바타는 얼굴에 튄 핏물을 닦지 않고 명령했다.


방벽의 문이 열렸다.


발자크 루드베스


족장 대리가 죽었고, 동조했던 다른 부족의 족장들은 모두가 사이좋게 왼팔이 뽑혔다. 장벽의 일각도 무너져버렸고, 근처에 도열해 있던 전사들 일부도 휘말려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부족의 전사들은 이바타에게 반발하지 않았다. 족장 대리에게 동조했을 가능성이 큰 부족의 원로들도 얌전히 이바타와 일행을 맞이했다.


이바타가 정면에서 족장 대리를 으깨 죽이고, 다른 부족장들의 팔을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대륙의 다른 국가라면 모를까, 숲의 부족들은 힘을 중시했다. 후계자로서 정통한 이바타가, 비슷한 정통성을 가진 족장 대리를 힘으로 처죽여 버렸으니 반발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강해.’


시안은 이바타를 떠올렸다.


단순히 덩치만 큰 원주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안도 상대의 실력을 평가할 만한 눈은 가지고 있다. 라이언하트의 기사단에서도 대장급, 아니, 그중에서도 최상위권에 들 만한 실력이라고는 알아보았다.


하지만 막상 실력을 보게 되니, 그보다 평가를 높여야 할 것만 같았다.


나이트마치에서 보았던 대륙의 기사들 중에서 이바타보다 강하다고 할 만한 기사가 몇이나 될까? 족장 대리랍시고 거들먹거리던 원주민조차도 대륙에 나가면 일국의 기사단장은 해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저 떡대, 심지어 나랑 유진과 동갑이잖아.’


나이까지 생각하니 스스로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유진은 라이언하트 역사상 제일의 재능이라 평가받는 괴물이고, 저 이바타 자하부도 조란을 넘어, 이 드넓은 대수림에서 제일을 논할 수 있는 대전사가 아닌가.


“또, 또 궁상떤다.”


유진은 시안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시안이 발끈하여 유진을 돌아보았다.


“내가 뭐?”


“뻔하지. 이바타의 실력을 보고, 나는 왜 이리 약한가 생각하는 것 아냐?”


내 표정이 그러게 잘 읽히나? 시안은 표정을 왈칵 구기고서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 넓은 세상에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냐? 인간 중에서 싸움 재능으로 줄을 세우면, 그래, 최정상을 노릴 수 있는 것은…… 너도 잘 아는 유명한 기사들. 라이언하트에서는 가주님이나 카르멘 님, 나 정도?”


“…….”


“이바타 쟤도 그럴 자질과 실력이 있지. 너랑 시엘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상위권은 될 수 있어도 최정상은 힘들어.”


“누가 몰라?”


“아 물론 이건 담백하게 말한 현실인데. 꼭 현실이 상식대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잖아. 그 뭐냐, 내가…… 굉장히 존경하고 동경하는 위인 중에서…….”


“으흠…….”


유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곁에 있던 메르가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멜 님은 말이야. 그, 시작은 의외로 평범했거든? 그분이 이룩한 영웅적 행보와는 다르게 말이야. 용병으로 이름을 꽤 떨치긴 했는데, 사실 그 시절의 하멜 님은 대영웅엔 한참 미치지 못했지…….”


“그 이야기는 나도 알아. 별로 강하지 않던 하멜 님이, 위대한 베르무트 님의 동료가 되면서 빠르게 강해졌다는 거잖아.”


시안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하지만 하멜 님이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옆에 베르무트 님이 있어서잖아. 베르무트 님이 하멜 님을 지도해서…….”


“시X 누가 그래? 아닌데? 하멜 님은 베르무트 님의 지도를 받지 않았어. 하멜 님이 강해진 것은, 하멜 님이 혼자서 열심히 노력해서 그래.”


메르와 함께 있던 라이미르아도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그 시선도 무시했다.


“그리고…… 어…… 많은 전장을 겪은 덕이지. 하멜 님이 타고난 재능은, 어, 처음에는…… 음…… 꽃이 피지 않았다고나 할까. 많은 전장을 겪고, 전투를 반복하면서 꽃이 활짝 펴버린 거야.”


되는대로 뱉는 말은 아니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과거의 자신은 그랬던 것만 같았다. 용병계에서 이름은 꽤 떨치긴 했는데…… 대륙의 전장과 마경의 전장은 비교가 되지 않았었다.


만약 베르무트를 만나지 않고, 동료가 되지 않고 헬무드로 갔다면.


‘……아마 몇 년 안에 죽지 않았을까.’


베르무트에게 지도를 받은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하멜이 생각하기에 지도보다는, 바로 옆에 베르무트라는 괴물이 있다는 것이 자신을 더 자극했었다.


베르무트에게 지고 싶지 않다. 베르무트보다 강해지고 싶다. 하멜은 쭉 그것에 집착했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데, 너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냐?”


시안은 여전히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하지만 축 늘어진 어깨가 어느새 으쓱 펴진 것을 보니, 유진의 격려가 도움이 된 것은 확실했다.


“너나 이바타의 강함은 절감했지만, 그렇다고 내 기가 죽은 것은 아니야. 그런 좌절은 설원에서 이미 느꼈다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순순히 고맙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말했듯이, 시안은 이미 설원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제대로 느꼈었다. 그것이 자신의 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것도 알았다.


유진과 이바타는 강하다. 시안은 약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시안은 미래의 자신까지 약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형제가 기껏 격려해 주는데 말하는 태도가 확.”


유진은 괜히 멋쩍어져서 시안의 다리를 걷어찼다.


전술회의에 나갔던 이바타가 돌아온 것은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바타의 모습은 아까 전과 달라져 있었다. 짐승의 머리뼈에 세공을 더한 투구를 쓰고, 화려한 목걸이와 팔찌도 주렁주렁 달았다.


“정식으로 족장이 된 모양이군요. 축하합니다.”


로베리안이 먼저 축하를 건넸다. 이바타는 쓴웃음을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변화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슴팍에 새로이 새긴 커다란 문신이었다. 새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도 피부는 붉게 붓지도 않고 멀쩡했는데, 피의 냄새는 강렬했다.


“누구 죽이고 왔냐?”


문신에 의한 피냄새는 아니다. 유진은 이바타의 커다란 손을 힐긋 보면서 물었다.


“한심한 늙은이들을 죽이고 왔다.”


“족장이 되자마자 숙청부터 하다니.”


“족장이 되지 않았어도 죽여 마땅한 놈들이었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젊은 전사들은 전쟁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죽은 족장 대리와 다른 부족의 족장들. 그리고 조란의 원로들 일부는 이미 전쟁을 포기했다.


그들도 한때는 숲을 뛰어다니며 전투를 즐기던 전사였으나, 나이를 먹고 손에 쥔 것이 너무나 많아진 지금은 죽고 죽이는 전투보다는 안락한 노후를 바라게 된 것이다.


“내가 없는 사이 결정된 일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패배를 반복해, 코칠라가 만족할 만큼의 피와 영혼을 건넨다. 그 뒤에 항복하여, 코칠라의 부속이 된다.”


당연히 이바타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젊고 호전적인 그는 이 전쟁에서 승리를 바란다. 대부분의 전사들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돌아오기 전 동안 이미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다고 들었다. 4개의 부족이 멸망했고, 조란의 북쪽 숲 일부도 코칠라에게 짓밟혔다. 우리는 더 진군하지 못했다.”


이바타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짐승 가죽을 펼쳐 벽에 걸었다. 뭔가 했더니 숲의 지도였다. 이바타는 두 눈을 얇게 뜨고서 지도를 응시했다.


“네 기억이 틀림없다면, 세계수와 엘프의 영지가 위치한 곳은 이쯤이다.”


이바타가 지도에 큼직한 송곳을 하나 꽂았다.


세계수라고 해서 대수림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심에서 꽤 먼 서쪽에 위치 하고 있다.


물론 저 장소에 진짜로 세계수가 있는 것이 아니기는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수는 저곳에 걸쳐진 별개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여기부터가 코칠라의 영역이다.”


세계수와 멀리 떨어진 곳에 송곳이 꽂혔다.


유진은 그것에 조금 안심했다. 세계수의 잎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곳의 결계를 여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만, 경계는 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복당한 곳.”


지도에 여러 개의 송곳이 꽂혔다. 모두 꽂히고 날 때까지 잠자코 보고 있던 유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순한 정복 전쟁은 아니군.”


영토를 확장하고 싶었다면 주변의 부족의 땅덩이부터 잡아먹었을 것이다. 실제로 코칠라의 본진 주변에도 여러 개의 송곳이 꽂히기는 했지만, 그 외에도 본진과 한참 떨어진 곳에도 많은 송곳이 꽂혀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바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함께 지도를 보고 있던 로베리안, 심지어 멜키스의 표정도 진지했다. 대마법사인 둘은 이 전쟁이 흑마법의 사전단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짐작은 갑니다.”


로베리안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라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마법과 그러지 못한 마법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법사는 자신이ㅡ 아니,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대마법을 꿈꿉니다. 그럴 때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다른 수단을 강구하죠.”


“그게 꼭 제물이나 고위 존재와의 계약으로 국한되는 것은 아니야.”


멜키스가 말을 받았다.


“토맥(土脈)이란 것이 있어. 대지에 깃든 마나가 순환하는 흐름이지. 토맥에서 특히 마나가 풍부하게 고인 곳이 영맥인데, 보통 영맥은 굉장히 드무니까…….”


“아마 코칠라의 정복지 상당수가 토맥의 갈래라고 생각합니다. 배후의 흑마법사는 토맥에 흐르는 마나를 자신이 사용할 수 있도록 술수를 부려놓았겠죠.”


“발자크 개새끼.”


유진이 내뱉었다. 그 갑작스러운 욕에 로베리안이 눈을 끔벅거렸다.


“……저는 개인적으로 발자크가 배후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건 아직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일단은 발자크가 배후라고 생각하도록 하죠.”


“음…….”


로베리안은 차마 유진처럼 발자크에게 불합리한 욕은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추측일 뿐입니다. 저로서는 당장에라도 이곳을 떠나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진군의 준비는 되었다. 명령한다면 집결한 모든 전사들이 코칠라를 치러 갈 것이다.”


“쉽고 빠른 해결책이기는 하네. 정복지를 차근차근 밟아가며 코칠라의 본진을 쳐버리면 끝날 테니.”


“흑마법이라면 제힘으로 정화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오가는 이야기. 실체를 갖는 전쟁에 시안은 긴장하여 주먹을 쥐었다.


메르는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에 굳이 어울리지 않고, 한쪽 구석에서 라이미르아와 가위바위보에 열중했다.


“잠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바타는 상식적으로 양해를 구하고서 몸을 돌렸다.


문밖으로 나간 이바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발자크 루드베스가 투항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발자크 루드베스가 투항했다.”


모두가 이바타처럼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직접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으로 직접 봐버리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유폐의 삼마. 아롯의 흑색마탑주. 속내를 알 수 없고, 거동까지 수상하기 이를 데 없던, 이 전쟁의 배후에 있어야 할 흑마법사.


발자크 루드베스는 전사들에게 포박되어서 방으로 인도되었다. 입고 있었을 로브마저 벗겨졌고, 가진 무장도 모두 해제된 상태였다.


검은 칼날을 가진 롱소드. 단검 4개. 공간 마법을 사용한 포켓 아티펙트. 마법지팡이. 심지어 언제나 쓰고 있던 안경까지 빼앗기고, 신발까지 벗겨진 맨발. 양손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였고, 영창을 외지 못하도록 입에도 재갈이 물렸다.


구차한 모습이었다.


방 안으로 끌려온 발자크는 우선 모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입에 물린 재갈 탓에 인사를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유진은 여전히 당황해서 발자크를 손으로 가리켰다.


“당신 대체 뭐야?”


발자크는 대답하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바타는 이곳까지 인도해 온 전사들을 방 밖으로 내보내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고문을 해야 하나?”


발자크가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눈썹을 씰룩거리면서 손가락을 들었다. 날 선 바람이 발자크의 입에 물린 포박을 끊어냈다.


“오랜만입니다.”


발자크는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그렇게 말해왔다.


유진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는 발자크의 손을 묶은 구속을 끊을지, 아니면 발자크의 목을 끊을지를 잠시 동안 고민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로베리안이 당황을 가다듬고서 물었다.


갑작스러운 투항.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니만큼, 이것조차도 무언가로 이어지는 흉계일지도 모른다. 멜키스는 이미 정령왕을 소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크리스티나도 플레일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코칠라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에드몬드 코드렛입니다.”


발자크가 말했다.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질문과 다른 대답을 하면 일단 마법으로 몸을 지져 버릴 생각이었는데. 로베리안은 준비한 마법을 펼치지 못하고 입술만 반쯤 벌렸다.


“에드몬드는 정예를 분산시켜 사마르의 토맥을 점령하고, 마나의 흐름에 간섭하는 것이 전쟁의 목적입니다.”


“잠깐…….”


“이미 에드몬드의 목적은 상당히 진행되었습니다. 마법이 완성된다면, 에드몬드는 마왕이 될 겁니다.”


그 이야기가 모두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고, 유진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왕.


의혹은 있었다. 하지만 내심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오드는 특별한 경우였다. 마창과 분쇄추에 남은 마왕의 잔재가, 이오드의 타락에 주목하고 속삭였기에 의식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흑사자 성에서 마왕의 잔재는 모두 소멸했다. 뒈진 헥토르에 의해 술식이 유출되었단 한들, 마왕의 잔재가 없는 이상 그 술식으로 마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터였다.


“그건 불가능할 텐데.”


“제게는 불가능합니다. 아멜리아 머윈에게도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에드몬드라면 가능합니다. 그는 블러드메리를 가지고 있고, 이 숲이 가진 여러 이점을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일단, 흑탑주.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지? 투항은 또 뭐고?”


“투항에 대해서는 보이는 대로입니다. 저는 유진 님과 여러분께 협력하기 위해서 투항했습니다.”


발자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모두의 표정을 살폈다.


“……불쾌하시겠지만, 여러분이 조란의 수도에 오는 것은 직접 보았습니다. 코칠라와 전쟁을 벌이는 조란의 정세는 살피고 있었으니까요.”


감시 목적의 사역마를 조란 곳곳에 숨겨 두었다. 장벽에서의 소란도 보았다.


“협력?”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발자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나는 그 말을 못 믿겠는데. 당신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겠고.”


“그렇다면 먼저 제 말을 들어보고, 이야기가 끝난 뒤에 직접 확인하러 가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적탑주와 백탑주라면, 코칠라가 점령한 토맥을 본 것만으로도 제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에드몬드를 배신하는 이유가 뭐지?”


“아…… 유진 님, 그 말은 틀립니다.”


발자크가 고개를 저었다.


“에드몬드와 저는 배신이 존재할 관계가 아닙니다. 저는 처음부터 에드몬드의 뜻에 동조한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애당초 에드몬드는 제가 이 숲에 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할 겁니다.”


발자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겠군요. 저는 이 숲에 오고서 굉장히 조심스레 움직여왔는데, 조란에 투항하면서 저 자신을 노출해 버렸습니다.”


“부족에 코칠라의 눈이 있다는 건가?”


이바타가 으르렁거렸다. 발자크는 옆에 바짝 다가온 이바타의 거구에 위축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없는 것이 이상하죠.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이 대화가 끝난 뒤에, 제가 수도에 존재하는 에드몬드의 눈을 탐색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에 포착되는 것이 문제라면 몰래라도 찾아오지. 왜 대놓고 투항한 거지?”


“몰래 접근했다간 유진 님의 눈먼 칼에 죽을 확률이 높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유진 님께 투항하여 공조하는 것이 제가 암약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누구에게 낫다는 거야?”


“물론 우리 모두에게 말입니다. 유진 님이 이곳에 있고, 제가 더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에드몬드도 초조해질 겁니다. 특히 그 친구는…… 아…… 에드몬드가 정말 제 친구인 것은 아닙니다. 그냥 마땅히 칭할 말이 없어서 평소에 말하던 것이 그만.”


“됐고, 에드몬드가 왜 초조해진다는 건데?”


“저희 둘은 똑같이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했으니까요.”


발자크는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에드몬드는 제가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확신할 겁니다. 자신이 열심히 준비한 마법이 제게 찬탈 되는 것이 아닐까 경계할 것이고, 준비가 눈에 차지 않아도 서둘러 의식을 완성하려 할 겁니다.”


“에드몬드가 그렇게 오해할 거라는 듯이 말하는데, 당신이 진짜로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정말로 그러고자 했다면 제가 왜 이곳에 왔겠습니까?”


발자크의 말이 맞다고 느꼈다. 정말 에드몬드의 흑마법을 찬탈할 생각이었다면, 그가 이곳에 올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쭉 숨어 있다가, 유진과 에드몬드과 충돌하는 순간에라도 모습을 드러내어 마법을 빼앗는 것이 합리적이다.


“제 존재와 영혼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발자크의 목소리가 마법의 맹세가 되었다.


“저는 마왕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인간이기를,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존재로 남는 것을 바랍니다.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죽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에드몬드가 마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발자크는 빙긋 웃으며 유진을 보았다.


“용사인 유진 님을 도와서 말입니다.”


흑마법사가 내뱉는 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발자크 루드베스


유진의 여전히 경계 어린 눈으로 발자크를 보았다.


방금 발자크가 내뱉은 말이 흑마법사답지 않기는 했지만, 결국 발자크는 흑마법사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 유진은 발자크를, 흑마법사를 믿을 수가 없었다.


마법적인 맹세. ‘무조건’이라 할지라도 마법사는 저런 맹세를 결코 내뱉지 않는다. 입 밖으로 맹세를 내뱉은 순간부터 앞으로의 행동에 강력한 제약이 걸리기 때문이다. 흑마법사ㅡ 대마법사인 발자크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발자크는 너무나 쉽고 가볍게 맹세를 뱉었다.


자신의 행동에 절대적인 확신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유진은 발자크가 의심스러운 만큼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저 맹세가 거짓이라는 것. 흑마법사인 발자크가 마법의 맹세를 무시할 수 있는 어떠한 비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제 말을 믿는 얼굴이 아니시군요.”


발자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몇 번이나 했던 말이지만, 나는 세상에 좋은 흑마법사는 뒈진 흑마법사밖에 없다고 생각해.”


“제게 존칭을 그만둔 것은 지금 저와의 만남이 언짢으셔서입니까?”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새끼한테 말을 높여줄 필요가 있나? 아직 뒤통수를 얻어맞지 않았으니 당신이라고 부르는 거야. 아니면, 개새끼라 불러줄까.”


“그건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것에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아롯에서 발자크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발자크는 흑사자 성에서 펼쳐졌던 의식을 궁금해했고, 유진은 술식은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의식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알려주었다.


-혼의 재구성과 육신의 창조라…… 마법학적으로는 금기로 치부되는 것들이지만, 여러 흑마법사들이 추구하는 연구방향이군요.


-제게는 별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혼의 재구성이라는 것은 결국 내 혼을 다른 무언가로 탈바꿈하는 것이고, 육신의 창조도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깃든 그릇을 바꾸는 것…… 즉, 본질을 바꿔 버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마법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를 신념이라고 말해도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때의 발자크는 진심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지금 발자크를 무조건 믿을 수 있나? 그의 정보를 신용하고, 투항한 발자크를 곁에 두어도 되는 건가?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발자크의 주인은 결국 유폐의 마왕이 아닌가?


“……유폐의 마왕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무심하시죠.”


발자크가 당연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 사건은 에드몬드가 홀로 저지른 것입니다. 에드몬드는 코칠라의 가장 큰 후원자…… 아니, 사실상 코칠라의 ‘영주’에 가깝습니다.”


“사마르의 대부족이 헬무드 공작의 영지란 말인가.”


이바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발자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대수림과 부족들의 역사가 길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대륙의 국가들이 강하게 간섭했다면 대수림 부족들의 역사는 진즉에 끊어졌을 겁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만, 네 말이 맞다. ……대륙의 권력자들은 이 넓은 숲을 항상 욕심내 왔지. 헬무드의 마왕이 숲의 보존과 자유를 말하지 않았다면, 숲은 수백 년 전에 도시가 되었을 거다.”


유진도 아는 이야기였다. 접때부터 헬무드는 대수림의 부족들에게 지원을 시작했다. 대륙의 국가들이 숲을 점령하고, 원주민들을 착복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견제였다.


그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은 것이 바로 코칠라다. 숲 깊은 곳의 대부족. 야만스럽고 잔인하며 폐쇄적인 코칠라는 헬무드의 지원을 받아 더욱 덩치를 키웠다.


“…….”


순간 유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만, 유폐의 마왕이 저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300년 동안 대수림은 ‘변하지 않았다’. 이곳은 300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숲이고, 원주민들이 숲을 지키고 있다.


라이자키아는 자신의 존재를 대수림의 토지에 묶어버렸다. 숲이 사라진다면 연결이 끊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라이자키아가 차원의 틈에서 사라지게 돼버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라이자키아가 이 세상에 돌아올 수 없게 될 뿐. 반대로, 이 세상에서는 라이자키아를 탐색하는 것은 쉽지 않게 된다.


‘……억측이야.’


숲이 숲으로 남았기에 라이자키아와의 연결이 유지된다. 방법을 찾는다면 그 연결을 통해 라이자키아에게 도달할 수 있다.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아카샤를 노려보았다.


아리아르텔에게 받은 용언마법 덕에 라이자키아를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용언마법이 없었어도 라이자키아는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었을 거다.


세냐가 말하지 않았나. 틈과 이어진 장소에 도달하면, 아카샤가 반응해 줄 것이라고.


즉, 숲이 남아 있고, 아카샤를 손에 넣는다는 조건이 충족되면ㅡ 어떻게든 라이자키아를 찾을 수 있었다. 아카샤를 손에 넣었어도 숲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라이자키아를 찾을 수 없다.


세냐를 구할 수 없다.


“……유폐의 마왕은 대체 뭘 바라는 거냐?”


유진은 딱딱하게 굳은 뺨을 어루만졌다.


이번뿐만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마왕이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진은 300년 전에 유폐의 마왕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유폐의 마왕은 멸망의 마왕과 함께 드래곤을 학살하고, 다른 마왕들과 함께 전쟁을 일으켰다. 마왕의 명을 따르는 흑마법사들이 국가를 전복시키고, 마족과 마물의 군세가 대륙으로 몰려왔다. 마왕 본인들은 헬무드에서 움직이지 않는 동안, 마왕의 힘은 착실하게 대륙을 먹어치웠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서는 어떤가. 유폐의 마왕은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자신에게 도전한 모든 영웅들을 죽이고, 세상의 희망을 꺼트릴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 약속? 내용조차 모르는 그것으로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마경은 제국이 되었고, 마왕은 황제가 되었다. 유진이 직접 보았던 헬무드는…… 대륙의 어느 국가보다 발전하고 풍족하며 평화로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이 하멜이라는 것을 안다. 크리스티나가 아니스라는 것도 안다. 모론을 직접 보기도 했다. 과거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적들을 보았음에도 적의는커녕, 호의를 베풀었다.


“저는 유폐의 마왕님이 무엇을 바라는지까지는 모릅니다.”


발자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압니다. 유폐의 마왕님에게 있어서 헬무드를 제외한 모든 국가는…… 언제든지 정복할 수 있는 땅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폐의 마왕님은 사실, 대륙의 평화에는 큰 관심이 없으실 겁니다. 자신이 지배하는 헬무드를 제외하고서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심하다는 건가? 일단, 당신 말이 사실이라 치자고. 에드몬드가 배후의 흑마법사고, 마왕이 되기를 바란다 쳐. 그리고 성공한다면, 유폐의 마왕은 자신에게 거스를 수 없는 마왕 하나를 얻는 거잖아. 결국 헬무드의 힘이 커지는…….”


“그건 다릅니다. 에드몬드가 의식을 완성하면, 그의 육체와 영혼ㅡ 존재 자체가 ‘에드몬드 코드렛’이 아니게 됩니다. 마왕…… 아니, 의식의 규모와 바치는 제물, 사용하는 힘을 보면 대마왕이 되겠죠.”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글쎄요……. 유진 님의 생각도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유폐의 마왕님이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유폐의 마왕님은 그냥…… 에드몬드가 마왕이 되는 것, 될 수 없는 것에 관심이 없으실 겁니다.”


유진은 그 말이 더욱 믿기가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발자크도 믿을 수 없었다. 유진의 불신을 의식한 로베리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흑탑주. 그대가 정말로 결백하다면, 제약을 더해도 되겠나?”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면.”


발자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로베리안은 작게 주문을 읊고서 손을 들어 올렸다. ㅡ화악! 마나로 형성된 작은 단검이 로베리안의 손바닥 위에 올라갔다.


“이 단검을 그대의 심장에 박아 넣을 걸세. 마법의 단검은 박아 넣고 있어도 아무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겠지만, 그대가 우리에게 적의를 가지거나, 위해를 가하려는 순간에 그대의 심장을 찢어발길 거야.”


“잔인하군요.”


“이해해 주게. ……단검은 에드몬드의 의식이 실패하면 뽑아주지. ……나는 적의란 감정은 모호한 것이라 생각하네. 어쩌면, 그대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고, 일말의 적의 없이 배신할 수 있어. 그렇기에 보험을 하나 더 들도록 하지.”


손바닥의 단검이 분열해 2개가 되었다.


“이 쌍둥이 단검은 내가 아닌 유진 님에게 주도록 하겠네. 그대가 적의를 품지 않아도, 유진 님이 단검에 마나를 주입하는 순간에 그대의 심장은…….”


“꽂으십시오.”


발자크는 조금의 긴장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저 태연함과 대범함은 로베리안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예전부터 그대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어.”


로베리안은 고개를 흔들면서 발자크에게 다가갔다.


마법의 단검을 심장에 박아 넣는 것에는 고통은커녕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유진은 쌍둥이 단검을 로베리안에게 건네받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심장을 찢을 수 있는데.”


“유진 님이 그러고 싶다면 하셔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제가 여기서 죽어도 유진 님이 에드몬드를 막아주실 것 아닙니까.”


“그 신뢰의 이유를 모르겠다고.”


“용사인 유진 님은 에드몬드가 마왕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분이시잖습니까.”


맹목적으로까지 들리는 말이었다.


유진은 혀를 내두르면서 단검을 거두었다. 바람의 칼날이 발자크의 손발을 묶고 있는 구속을 잘라냈다.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는데. 당신의 비원은 뭐야?”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 저희의 목적이 성공한다면. 그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말하지 않으니 더 듣고 싶은데.”


발자크는 대답 대신에 쓴웃음을 지으며 안경을 썼다.


* * *


다음 날. 대대적인 진군에 앞서, 유진 일행이 먼저 조란의 수도를 떠났다. 이바타가 부족에 없는 동안 코칠라에게 짓밟혔다는 조란의 북쪽 변경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건 발자크의 제안이었다. 맹세를 하고 심장에 단검까지 박았지만, 아직 일행은 발자크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코칠라가 짓밟은 토맥을 눈으로 직접 보고, 에드몬드의 의식의 실체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이 숲에서의 술법은 토맥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토맥을 따른 마나의 흐름을 비틀어 에드몬드에게 인도하고, 전쟁의 사망자를 제물로 삼는 겁니다. 토지에 스며든 피와 영혼은 뒤틀린 토맥의 흐름을 따라, 에드몬드에게 인도되는 겁니다.”


의식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제 발자크에게 들어두었다.


“코칠라의 정복지에는 사람의 뼈를 사용한 인골탑이 세워집니다. 그 인골탑이 의식의 장치인 것이죠. 하지만 지금 와서 인골탑을 무너트리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인골탑이 세워진 순간, 이미 토맥의 흐름이 뒤틀리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흐름을 다잡으면 되는 것 아닌가?”


“적게 잡아 수십 명의 피와 영혼을 제물로 바친 장치입니다. 심지어 그 마법은 유폐의 마왕님의 마력으로 기능하고 있지요. 저희가 무슨 수를 쓰건 토맥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발자크는 유진을 힐긋 보며 천천히 말했다.


“……물론 저도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에드몬드와 마찬가지로 수십 명…… 아니, 역량을 생각하면 적어도 에드몬드의 2배에 달하는 제물을 바친다면. 예, 흐름을 뒤틀 수는 있겠군요.”


“설마 허락을 받을 생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


“당연히 아닙니다. 유진 님이 허락해 줄 리도 없다 생각했고, 저도 산제물을 사용하는 것은 꺼리는 편입니다. 언제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흑마법사라고 해서 모두가 사령술에 능하고 산 제물에 태연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발자크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발자크는 새벽 내내 수도에 숨어 있는 에드몬드의 눈을 탐색했다. 영혼을 담보로 힘을, 혹은 풍족한 삶을 얻은 사람들이 발자크에게 지목당했고, 이바타는 일말의 의심 없이 그들을 처형했다.


그 외에도 수도 주변에 숨어 있는 사역마들이 색출되었다. 더 이상 수도에는 에드몬드의 눈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에드몬드는 이미 유진 일행이 조란을 돕기 위해 찾아왔으며, 같은 유폐의 삼마인 발자크 루드베스가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용사가 의식을 망칠 수도 있다. 어쩌면 발자크가 제물을 바쳐서 의식을 빼앗으려 할지도 모른다.


“의식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뒤틀린 토맥이 향하는 중추를 파괴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서 중추는 에드몬드 본인과, 블러드메리일 겁니다.”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 아카샤와 마찬가지로, 드래곤하트를 통째로 사용한 마법지팡이.


“즉, 에드몬드나 블러드메리 둘 중 하나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한 의식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차근차근 준비할 수는 없게 되었으니, 에드몬드도 서둘러 의식을 진행할 겁니다.”


“정면충돌을 해올 거란 말이지.”


“예. 토맥은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확보했으니, 정말 필요한 것은 피와 영혼이죠. 정면충돌에서는 에드몬드도 나설 겁니다.”


더 이상 배후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코칠라의 대군을 분산시켜 다른 토맥을 확보하고, 에드몬드 본인은 전쟁에 나선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 빠르게 전장을 정리하고, 피와 영혼을 확보한다.


“토맥을 파악하고서 그쪽을 먼저 점령해 두는 것은?”


듣고 있던 시안이 의견을 냈지만, 유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의식이 단순한 땅따먹기라면 그래도 되겠지. 에드몬드에게 있어서 더 이상 토맥의 확보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더 확보하면 좋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의식을 진행해 버리면 되니까.”


“역시 라이언하트의 기사단을 데리고 왔어야 하는 것 아냐? 결국 처음에 추측했던 대로 되어버렸잖아. 헥토르, 그 배신자 새끼는 에드몬드 코드렛과 결탁하고 있었고. 이오드의 개수작이 유출되어서 이용당하고 있다고.”


“거참.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니까. 그리고 이제 와서 라이언하트의 기사단을 데리고 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생각해야 할 것 아냐?”


유진의 대답에 시안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은 하지만, 결국 가문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아닌가? 그 생각은 시안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안은 자신이 알고 지내는 가문의 누군가가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언하트는 무가야.’


기사의 가문이다. 그래야 할 때라면 전쟁에 나서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일을 행하는 데에 피를 흘려야만 한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라이언하트가 피를 흘려야 한다.


그것은 시안이 어려서부터 애니실라와 길레이드에게 교육받은 기사도이자, 시조이신 위대한 베르무트부터 내려온 가헌이었다.


‘……그래도…….’


시안은 소환수의 등에 탄 유진을 힐긋 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안이 보고 싶지 않은 ‘피’에는 형제의 피도 포함되었다. 이곳에 없는 시엘,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유진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둘이 피를 흘리게 두느니, 차라리 내가…….


‘……잠깐.’


시엘이라면 몰라도 유진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차기 가주는 유진이 아니라 나잖아.’


유진이 차기 가주로 정해져 있다면, 시안은 기꺼이 유진을 위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차기 가주는 유진이 아니라 시안이지 않은가? 심지어 이전에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네가 가주가 되어야 한다고 권했는데, 거절에 동반된 폭력을 당하지 않았던가?


‘널 위해 피를 흘릴 수는 있지만, 가주가 되어야 할 내가 피를 흘릴 수는 없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바타가 없어서 숲의 나무들은 길을 열지 않았지만, 로베리안의 소환수와 멜키스가 부리는 대지의 정령 덕에 이동은 충분히 빨랐다.


전투가 있었던 조란의 북쪽 변경. 시체들은 진즉에 수습되어서 피의 냄새는 남아 있지 않다. 전투가 끝나고 세워졌던 인골탑도, 조란이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붕괴해 버렸다.


하지만. 발자크가 말한 것처럼 나중에 인골탑을 무너트리는 것은 소용이 없다. 수습된 시체의 피와 영혼은 이미 땅에 스며들었고, 뒤틀린 토맥을 따라서 에드몬드에게 인도되었다.


“나는 흑마법이 싫어.”


멜키스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이 밀림에서도 높은 하이힐과 쫙 달라붙는, 심지어 잔뜩 찢어진 데미지진을 입고 있었다.


“이 땅은 대지의 정령이 존재하지 않아. 토맥이 뒤틀리는 순간, 정령들이 땅을 떠나 버린 거야. 야노스도 엄청 분노하고 있어.”


멜키스는 땅을 어루만지면서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대지의 정령왕의 힘으로 토맥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까?”


“불가능하대. 발자크가 말한 대로야. 이 토맥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뒤틀려서, 흐름과는 다른 곳으로 이어져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의식이 파괴되지 않는 한 이 땅이 죽어버린다는 말이야.”


실제로 이곳의 나무와 풀은 다른 곳과 비교해 큰 차이를 느낄 만큼 메말라 있었고, 흙도 건조된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당장은 본래 깃든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오래지 않아 모두 메말라 버릴 거야. 풀이 죽고, 나무가 죽고, 숲이 죽어버린…… 잠깐, 풀이 죽어? 내 뛰어난 개그 센스가 놀랍네.”


유진은 이빨을 꽉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비행소녀가 된 거냐?


미친!


몇 년 전에 시엘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다시금 떠올려도 억울하고 부끄럽다. 유진은 웃으라고 한 농담이 아니었다. 그냥, 말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더더욱 굴욕적인 것은, 멜키스의 저렇게 말하는 순간에 유진도 머릿속에 똑같은 농담을 떠올려 버렸다. 그리고 멜키스가 농담을 내뱉을 때에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이곳의 술법은 발자크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땅을 살피던 로베리안이 확인을 마쳤다. 멜키스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시스터. 어떻습니까?’


[흑마법과 마력이 잔류해 있기는 합니다. 이걸 정화하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토맥의 뒤틀림을 바로잡는 것은 신성마법으로는 무리입니다.]


아니스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직접 확인도 하였으니 발자크에 대한 의심도 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돌아갈…….”


땅이 가볍게 흔들렸다. 지진이라고 할 정도의 진동은 아니었다. 유진은 놀라서 ‘흔들림’이 시작된 곳을 쳐다보았다.


흙이 치솟아 뭉치고 있다. 순식간에 사람 몸만 한 흙의 기둥이 만들어졌다.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일행이 반응하기도 전에, 흙의 기둥이 쩌적 갈라졌다.


갈라진 틈.


안쪽에서 번뜩이는 눈동자와 유진의 눈이 마주쳤다.


발자크 루드베스


틈 사이의 눈동자가 움직인다. 잠시 유진에게 멈춰 있던 눈동자가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은 크리스티나에게서 멈추었다.


‘뭐야?’


순간 든 생각. 시선이 마주친 것은 지극히 찰나였으나, 유진은 등골의 섬뜩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그것뿐인데도 피부가, 감각이 먼저 알아차렸다. 지독한 마력. 흑마법이란 확신. 그럼에도 낯설지가 않은.


마찬가지로 찰나였다. 돌연 치솟아 있던 흙의 기둥이 박살 났다. 그 안에 있던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그 폭발적인 유진도 잠깐 놓쳤을 정도였다. 아니, 놓쳤다기보다는ㅡ 순간이나마 압도당해 버렸다.


강함? 그런 것이 아니다. 유진을 압도한 것은 끔찍한 증오와 살의였다. 세상 모두를 죽여 버릴 것보다 더 강렬한 증오와 살의가, 유진을 지나쳐 크리스티나에게 쇄도했다.


크리스티나는 기사도, 전사도 아니다. 라파엘로에게 직접 배운 만큼의 전투력은 갖추고 있지만, 그녀의 역할은 후방에서 기사나 전사를 보조하는 성직자다. 사실 그녀가 뛰어난 기사나 전사였을지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황과 경악. 크리스티나의 몸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속에 있는, 크리스티나와 똑같은 것을 보고 있는 아니스마저도 이 순간에는 당황하고 경악했다.


증오와 살의가 크리스티나의 목덜미를 노렸다. 칼날처럼 휘두른 손이 크리스티나의 목을 쥐어뜯기 직전. 가까스로 유진이 개입했다.


꽈앙! 바로 앞에서 부딪친 충돌.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끌어안아 보호하는 대신에 급히 뒤로 밀쳐 버렸다.


“앗……!”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크리스티나가 조금 늦은 비명을 질렀다. 유진이 끼어드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저 손이 크리스티나의 목을 뜯어버렸을 것이다. 유진은 간신히 붙잡은 손을 노려보았다.


붙잡은 손은 인간 같지 않게 차가웠다. 마치 얼음덩어리를 붙잡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익숙했다. 거칠게 다루어 굳은살이 빼곡한 손바닥. 마디마디가 두꺼워 울퉁불퉁한 손가락. 여러 개의 흉터가 얽힌 손등.


“닮았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남자는 자신을 가로막은 유진을 보지 않았다. 일그러진 얼굴, 부릅뜬 눈동자는 유진의 뒤에서 입을 틀어막고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덤벼들 만큼 많이 닮았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맞지? 정말 그뿐인가?”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사나운 눈매. 대각선으로 그인 흉터와, 콧잔등을 가르는 흉터. 그 외의 자잘한 흉터. 살의와 증오로 범벅인 눈동자. 뒤틀린 미소. 덥수룩한 앞머리. 거슬려서 대충 묶고 다녔던 뒷머리.


“그게……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300년이야. 자그마치 300년이라고. 그런데, 300년이 흐른 지금 시대의 성녀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네가. 네 얼굴이. 그 씹어 먹어도 모자를 아니스와 어떻게 이렇게나 닮을 수 있는 거지?”


유진과 아니스는 저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스의 기억을 보았던 크리스티나도 저 얼굴을 알았다.


아롯의 왕립도서관, 아크리온의 최상층. 세냐의 전당에는 과거 동료들의 모습이 영상으로 남아 있다. 그곳의 사역마였던 메르와, 마탑주인 로베리안, 멜키스, 발자크도 저 얼굴이 누구인지 알았다. 라이언하트 본가에 세워놓은 동상을 보았던 시안도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너 사실 아니스인 거 아니냐?”


하멜의 시체로 만들어진 데스나이트가 웃었다. 그 존재를 알아본 아니스가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데스나이트……!]


유진에게 저번에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봐버리니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시체를 되살린 데스나이트. 저 언데드는 300년 전에도 셀 수 없이 많이 보았었다.


그 시대의 전쟁이 끔찍했던 것은, 죽음조차도 온전한 안식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에 겁을 먹고 승리를 포기한 수많은 기사와 전사들이 흑마법사와 마족에게 존엄과 영혼을 팔았다.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은 죽어서 저열한 언데드가 되었고, 모두에게 인정받던 강자들은 죽어서 데스나이트가 되었다.


데스나이트는 죽은 시체를 흑마법으로 일으켜서, 이승을 떠나야 할 영혼을 시체에 묶어 두어서 만든다.


하멜의 시체로 만든 데스나이트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하멜의 혼은 환생해 이곳에 있는데, 저 데스나이트의 몸에 들어간 혼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너…….”


유진은 구역질을 삼켰다. 자신의 시체로 만든 데스나이트는 몇 년 전에 이미 본 적이 있다.


“대체 누구냐?”


놈은 자기 자신이 우둔한 하멜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때의 데스나이트는 누군지도 모를 라이칸슬로프의 영혼을 안착시킨 불완전한 모조품이었다. 육체에 남은 기억의 일부나마 흉내 내기는 했다만, 전생의 하멜의 인격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였다.


“하멜 다이너스.”


데스나이트가 대답했다.


놈은 자기자신을 우둔한 하멜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크리스티나를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서, 바로 앞에 있는 유진을 보았다.


“……잿빛 머리카락. 금색 눈동자. 베르무트 그 개새끼랑 닮았어. 참 신기하단 말이야, 300년이나 흘렀잖아. 그 새끼는 정말 개처럼 새끼를 많이 깠던데, 어떻게 그 많이 깐 새끼들이 죄다 잿빛 머리에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거지?”


구역질이 더해졌다. 그리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저번의 데스나이트와는 달리 지금 앞에 있는 데스나이트는ㅡ 하멜을 굉장히 잘 흉내 내고 있었다.


“그래서 네 이름이 그…… 유진 라이언하트냐? 베르무트처럼 성검의 인정을 받았다는. 내가 지금 널 처음 보기는 하는데 말이야, 네 이야기는 마스터에게 조금 들었거든.”


마스터?


“네가 꽤 세다며? 세상이 너를 베르무트의 재림이라고들 한다던데. 내가, 이렇게나마 되살아나서. 가장 먼저 한 생각이 뭔지 아냐?”


우둑.


데스나이트의 손이 꿈틀거렸다. 얼음덩어리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손에 거대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베르무트 그 새끼가 남긴 씨를 죄다 말살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게 왕국을 세운 모론, 그 등신의 왕가도 말살할 거다.”


더해진 무게가 유진의 손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가 저주를 언어로 내뱉을 때마다 유진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 갔다.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데스나이트의 증오와 살의가 덩치를 키우며 유진을 잡아먹으려 들었다.


“이건 조금 아쉬워. 아니스랑 세냐는 새끼를 안 깠잖아. 아니스는 몰라도 세냐는 뭐라도 남길 줄 알았는데.”


잡아먹히지 않았다. 데스나이트가 쏟아내는 증오와 살의 속에서도 유진은 존재했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세냐의 후계자라며? 넌 뭐 아는 거 없냐? 세냐, 그 개 같은 년이 남몰래 붙어먹은…….”


“야.”


유진의 입이 열렸다. 가로막고 있는 손은 더 이상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감정이 사라졌던 눈동자에 섬뜩한 불빛이 켜졌다.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욕을 내뱉지는 않았다. 숨이 턱, 턱 막혀 와서, 목소리를 내뱉는 것조차 고역스러웠다. 목구멍에 칼날이 박힌 것만 같았다. 지옥 불을 처넣은 것처럼 머리는 뜨겁고, 귀에는 찡하는 소리가 맴돌았다.


가슴은, 심장은ㅡ 더 생각하지 않았다. 유진은 숨을 토하면서, 가로막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꽈아앙!


손을 거둔 즉시 주먹을 쥐어서 내던졌다. 데스나이트는 즉시 반응하여 주먹을 받아냈지만, 몸뚱이 채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뻗은 주먹이 얼얼했다. 유진은 손목을 털면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유진 님!”


데스나이트가 내뱉던 말을 듣고 분노한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지르면서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대스승에 대한 모욕을 들은 로베리안도 어느새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멜키스와 발자크도 데스나이트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고, 시안도 검을 뽑았다.


“나서지 마십시오.”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뱉었다.


이해는 바라지 않고, 대답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 싸움. 아니, 저 개새끼를 죽이는 것은 유진 혼자서 해야 할 일이었다. 저 몸뚱이는 과거 유진의 것이었다.


데스나이트가 되어버린 육체에 깃든 영혼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놈은ㅡ 자신이 정말 하멜이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댄다. 스스로를 하멜이라고 말하는 주제에, 하멜이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있다.


왜? 인격을 보니 육신의 기억을 투영해 낸 듯한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굳이 묻지 않았다. 의문 따위보다 분노와 살의가 강했다. 유진은 더 이상 무표정하지도 무감정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미쳐 발광하는 맹수처럼 번뜩였고, 무조건적인 살의가 몸을 밀어냈다.


“허.”


한참 뒤로 밀려난 데스나이트가 손을 털었다. 시동도 없이 내지른 주먹인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그리고 보라. 이 평화로운 시대에서 태어난 애송이가, 저렇게나 살벌할 수 있는 건가?


“요즘 애새끼 같지가 않네.”


데스나이트는 큭큭 웃으면서 손을 쥐었다 폈다.


라이언하트와 아롯의 마탑주가 개입했으니 나서달라.


에드몬드에게 들은 부탁은 그것이다. 데스나이트와 에드몬드가 있던 코칠라의 수도는 이곳에서 한참 떨어져 있지만, 토맥을 비틀어놓은 이곳에는 좌표가 새겨져 있다. 좌표만 있다면, 언데드 소환물인 데스나이트를 전송할 수 있다.


거짓된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는 데스나이트는 에드몬드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하멜이라 믿는 그는, 자신을 배신한 모든 것에 복수를 바란다.


베르무트의 후손인 라이언하트. 그것만으로도 피에 고픈데, 가증스러운 뱀, 아니스와 똑같이 생긴 현시대의 성녀까지 봐버렸다.


데스나이트는 아랫입술을 핥으며 허리의 칼자루를 쥐었다.


갓 성인이 되었다는 라이언하트의 애송이…… 지만, 베르무트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놈이다. 데스나이트는, 자신이 ‘살아 있을 적’을 똑똑히 기억했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베르무트도 갓 성인이 된 나이었지만, 그 나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강했었다.


자신을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은 베르무트는 증오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베르무트의 강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놈이 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고 불리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칭송되는 놈을 이 손으로 직접 죽여 버리고 싶었다.


데스나이트가 칼을 뽑았다.


나서지 말라고 했다. 그 말에 실렸던 감정이 너무나도 살벌하고 무거웠기에, 모두가 그 자리에 서서 유진의 등을 보았다. 당연히 완전히 마음을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여차하면 유진을 받쳐주기 위해 준비를 마쳐둔 상태였다.


유진은 뒤를 보지 않았다. 뛰지 않고 걸었다. 데스나이트에게 다가가던 유진도 망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수많은 무기가 유진의 손끝에 스쳤다.


마창 루인토스를 지나쳤다. 분쇄추 지골라스를 지나쳤다. 포식검 아스펠을 지나쳤다. 뇌광궁 페르노아를 지나쳤다. 용격창 카르보스를 지나쳤다.


성검 알테어에서 잠시 멈췄다. 지나쳤다. 월광검을 쥐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위니드가 멋대로 진동하더니 하멜의 손에 얽혀왔다.


[하멜……!]


머릿속에 울리는 외침. 거짓 한 점 없는 순수한 분노에 유진도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래.”


위니드의 칼자루를 쥐었다. 망토 밖으로 은청색의 칼날을 뽑은 순간, 제멋대로 나부끼는 폭풍 유진의 머리카락과 망토 자락이 나부꼈다.


“너라면 내 감정을 잘 알겠지.”


거대한 바람이 유진의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폭풍이, 템페스트가 포효했다. 유진은 위니드를 높이 세우고서 데스나이트를 노려보았다.


“위니드……! 템페스트, 너도 죽여 버릴 놈이지!”


데스나이트가 마주 웃으며 고함을 질렀다.


빠지지직! 칼집을 빠져나온 검에 시커먼 불꽃이 휘감겼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검은 오러는 마나가 아닌 마력이었다. 데스나이트는 불길하고 시커먼 색의 검강을 일으키면서 유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색의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불꽃이 갈기처럼 흩날렸다.


꽈아앙! 마력과 불꽃이 충돌했다. 폭풍이 그 뒤를 휩쓸었다. 데스나이트는 베어낼 수 없어야 할 폭풍에 검을 휘둘렀다. 난도질하는 참격이 폭풍을 찢었다.


[하멜!]


템페스트가 고함을 질렀다.


[이 녀석에게 인간의 영혼은 없다! 마물의 혼을 뒤섞어 조합한 괴물이다!]


“그렇겠지.”


유진은 찢어 발겨지는 폭풍 속에서 중얼거렸다.


방금의 칼부림을 통해 확신했다. 라이칸슬로프의 영혼을 사용했던 데스나이트는 하멜의 검기(劍技)를 재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데스나이트는 완벽하게 검기를 재현하고 있다.


수많은 마물 중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따라 하는 놈은 도플갱어뿐이다.


하지만 따라 하는 것도 결국은 보았던 것을 흉내 내는 수준. 깊이까지는 흉내 내지 못한다. 하지만 저 데스나이트는 완벽하게 수라광살을 펼치고 있다.


‘도플갱어의 교감력을 증폭하고, 시체에 남은 기억을 완전히 투영시킨 모양이야.’


누가 만들었지? 아멜리아 머윈. 사막에 있어야 할 그 처죽일 년이 대수림에 왔나?


저 데스나이트, ‘마스터’라고 말했었다. 아멜리아를 말하는 것이겠지. ……기억을 완전히 투영한 주제에, 흑마법사를 주인으로 섬겨?


“개새끼가.”


손에 쥔 위니드가 빙글 돌았다.


꽈꽝! 몸을 베어오던 검강이 가로막혔다. 유진은 조금도 뒤로 밀리지 않고 오히려 검을 전진시켰다.


순식간에 참격과 참격이 부딪쳤다. 휘감아오다 스쳐 갔다. 결을 따라 흐르는가 싶더니 찰나를 파고들어 온다.


밀리지 않는 것은 데스나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파고드는 참격을 하나하나 걷어내면서 유진의 움직임을 살폈다.


발의 위치가 계속해서 바뀐다. 체중을 쓰는 것도 능숙하다. 검을 휘두를 수 없는 자세에서 쏘아지는 참격이 수많은 변칙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새끼 뭐야?’


데스나이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유진의 검기에 강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건 실력이 뛰어나다는 수준이 아니다. 이미 완성되어 있다. 심지어 그 완성은 데스나이트의, 하멜의 것과 흡사했다.


‘어떻게?’


헥토르 라이언하트. 가문의 배신자인 그 자식에게 라이언하트에 대해서 들었다. 베르무트가 만든 흑사자라는 놈들 중에서, 하멜의 비기를 전승받은 놈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는 하멜의 무덤을 발견하고, 하멜의 비기를 계승받은 장본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욱 죽여 버리고 싶었다. 내가 남기지도 않은 것을, 가증스러운 베르무트가 멋대로 훔쳐서 후손에게 가르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쓸 줄 안다고? 내가 직접 가르치지도 않은…… 아니, 베르무트가 잘 남긴 것인가?’


이미 알고 있는데도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유진의 검기는 계승받았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거울?’


그러한 생각이 데스나이트의 증오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본인을 앞에 두고 어쭙잖은 흉내를 내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하멜이라고 미리 말도 해주었는데. 그런데도 하멜의 검기를 쓰는 것은ㅡ


“모욕도 정도가 있지.”


꽈드득. 데스나이트는 일그러진 얼굴로 내뱉었다.


이것까지 따라올 수 있는지 보자고.


데스나이트의 검이 흔들렸다. 흘러넘치던 마력이 검에 응축되어 달라붙었다.


하멜의 검기에는 명확한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범적인 흐름은 있겠다만, 필요한 순간에는 얼마든지 비틀어낼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데스나이트는 그렇게 검을 바꾸었다. 손에 쥔 검은 오직 유진을 죽이기 위한 살검이 되었다.


참격이 한곳에 집중된다. 유진이 폭풍의 힘을 더하듯, 데스나이트는 마력을 더하고 있다. 단순한 마력이라면 힘으로 밀어내겠지만, 저것은 단순한 마력 따위가 아니었다.


마력에 의해 강화된 시체의 몸뚱이. 일체된 마력이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힘.


치직.


유진의 불꽃에 번개가 섞였다. 집중된 참격이 유진을 난도질하려는 순간. 뇌광으로 가속한 검이 참격의 중심을 꿰뚫었다.


“……대체 뭐야?”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쪽의 가슴이 꿰뚫렸을 것이다.


이 시체의 몸뚱이는 가슴이 꿰뚫려도 죽지 않겠지만, 생전의 기억을 모두 가진 데스나이트는 검에 꿰뚫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후손 따위에게 상처를 입고 싶지 않았다.


“너 정말 베르무트의 후손이냐?”


저 검은, 데스나이트가 ‘어디로’ 검을 휘두르고 무엇을 노리며 어떻게 몰아갈 지를 완벽하게 간파한 한 수였다. 데스나이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폭풍과 참격이 다시금 춤을 추었다.


발자크 루드베스


휘두르는 검에 자꾸 무언가가 얽혀 온다. 원하는 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베르무트의 후손. 저 애송이는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검이 움직여 가는 궤도를 차단했다.


‘수읽기가 능해. 아주…… 멀리 보고 있어.’


타고난 감각뿐만이 아니다. 저것은 학습하고 검증까지 마친 경험이다.


이 평화의 시대에 이만큼이나 싸움에 능숙한 놈이 있을 줄이야. 마스터에게 듣기를, 300년 이후로 전쟁은 거의 벌어지지도 않았다던데.


‘좋지 않은데.’


냉정하게 생각했다. 지금 싸워야 할 상대가 저 유진 라이언하트 하나뿐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뒤에는 아롯의 마탑주가 3명이나 있다. 아니스를 쏙 빼닮은 현시대의 성녀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다.


‘이그니션을 쓰면…… 다 죽일 수 있나?’


데스나이트로 만들어진 몸에 더 이상 심장은 뛰지 않는다. 하지만 코어는 존재하고 있다. 마나가 아니라 마력으로 구성된 코어이기는 하지만, 의도적으로 폭주시켜서 힘을 증폭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이그니션을 쓴다면, 언데드의 몸뚱이로 견뎌낼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마력을 일으킬 수 있다.


부담은 여전히 존재했다. 생전처럼 쓰고 나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거나, 수명이 줄어드는 종류의 부담은 아니다. 폭발시키는 마력이 크면 클수록 언데드의 몸뚱이가 붕괴해 버린다.


“쯧.”


데스나이트는 혀를 차면서 눈썹을 구겼다.


폭풍을 상대하던 검이 바로 앞에서 바스러졌다. 데스나이트는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검을 미련 없이 버리고서 마력으로 양손을 뒤덮었다. 손바닥 사이에서 응집된 마력이 시커먼 폭탄이 되었다.


ㅡ꽈아앙! 폭발이 폭풍을 잠시 가로막았다. 그 짧은 틈. 데스나이트의 오른손이 검강에 뒤덮였다.


그에게 뒤를 봐주는 동료는 없었다. 전생과는 다르다. 곁에서 같이 싸워줄 동료도, 앞을 막아줄 동료도, 뒤에서 힘을 보태줄 동료도, 상처를 돌봐줄 동료도 없다.


아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한번 죽어 되살아난 언데드의 몸뚱이는 인간일 때에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과감한 행동이 가능했다. 데스나이트는 전신을 마력의 갑옷으로 보호하고, 참격의 정면을 파고들었다.


폭풍은 폭발에 가로막혔지만, 유진의 검은 가로막히지 않았다. 유진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자색의 불꽃이 따랐고, 불꽃이 곧 참격의 궤적이었다.


카가각! 데스나이트가 두른 마력이 불꽃에 갈라졌다. 언데드의 몸뚱이에도 선이 그어졌다.


그 순간. 데스나이트의 손이 사라졌다. 집중된 시야의 밖에서 마력의 칼날이 덮쳤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바짝 붙은 거리에서 시야를 희롱하는 것은, 전생부터 유진이 즐겨 쓰던 잡기술이었다.


시야 밖에서 날아온 칼날의 앞을 위니드가 가로막았다. 그리고 왼손은 다른 곳으로 뻗었다.


“쯧.”


의식의 사각을 노리고서 던졌던 단검이 유진의 손에 붙잡혔다. 단검이 노렸던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저 가증스러운 얼굴은 죽여놓고 싶었는데. 데스나이트는 아쉬움에 혀를 차면서 발을 뒤로 물렸다.


“너 이 새끼, 진짜 잘 보는구나.”


노림수가 연달아 가로막히니 짜증이 났다. 몸이 아직 덜 풀렸나? 300년 만에 눈을 뜨기도 했고, 이 정도 수준의 전투도 오랜만이다. 무기의 차이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라이언하트만 아니었어도 기특하다 머리를 쓰다듬어 줄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복잡한 기분이었다.


생전에 후계자는 남기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검을 가르친 적도 없었다. 그렇게 죽었는데, 30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시대에서 전승자를 만나 버렸다.


문제는 그 전승자가…… 베르무트의 후손이라는 것. 저 애송이에게 이어진 것들이, 베르무트가 제멋대로 훔친 기술이라는 것.


생전에 베르무트를 신뢰했기에, 데스나이트는 이 모든 것에 증오와 분노를 느꼈다. 그 감정이, 거두었던 걸음을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칼을 한 자루밖에 들고 오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이곳이 전장이라면 주변에 쓸 만한 무기들을 찾아 쥘 수 있을 텐데.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흙과 자갈, 나무 따위가 고작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언데드로 되살아난 이 몸이 아주 튼튼하다는 것이다. 데스나이이트는 양손을 느슨히 펼치고서 몸을 낮췄다.


질주에 소리는 없었다. 완전히 낮춘 몸이 지면에 미끄러졌다. 흐느적거리던 손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유진은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자리에 그대로 서서, 위니드만 살짝 움직였을 뿐이다.


공방은 충돌하지 않았다. 위니드를 세운 방어에 닿으려는 순간, 데스나이트가 몸을 뒤틀었다. 휘두른 손이 칼날을 피해서 유진의 목덜미를 노렸다.


이번에도 유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데스나이트가 밟고 있던 땅이 뒤집혔다.


순간적으로 거리가 늘어났다. 데스나이트는 휘두르던 팔을 거두는 대신 몸을 통째로 회전시켰다. 쭉 늘어난 마력의 손톱이 유진의 온몸을 덮쳤다.


그 공격에는 유진도 걸음을 옮겼다. 서로의 거리가 크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지금의 간극은 유진에게나 데스나이트에게나 싸우는 것에 불편함이 없었다.


시안은 경악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데스나이트와 유진의 접전을 지켜보았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쏴대고 있다. 둘은 아슬아슬하게 서로에게 닿지 않으면서 공격을 거듭했다. 대체 몇 수 앞을 보고 움직이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당장 눈앞에 오는 공격에 신경 쓰는 순간 흐름을 빼앗겨 버린다. 유진도, 데스나이트도 자신에게 유리한 흐름을 빼앗기 위해 공격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진의 검은 데스나이트의 공격보다 가볍다.


데스나이트보다 크게 빠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전투의 흐름은 유진에게 기울고 있었다.


데스나이트가 그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머리가 욱신거린다. ‘기억하는’ 전투법이 생각처럼 먹히지 않고 있다.


‘몸이 잘 안 움직이는 것만 같아.’


착각이다. 언데드가 된 이 몸뚱이는 오히려 생전보다 잘 움직이고 있다. 잦은 전투와 이그니션의 남용으로 망가졌던 몸뚱이.


한번 소멸했지만, 유폐의 마왕의 권능으로 소멸에서 수복시킨 육체. 너무 완벽하게 수복시켜서 망가진 그대로지만, 아멜리아 머윈은 망가진 몸뚱이에 전성기 이상의 스펙을 주었다.


‘……머리가…….’


혼과 육체의 부적합? 아니다. 이 데스나이트의 조율에는 에드몬드까지 힘을 보탰다. 존재 자체가 부조화지만, 그렇다 해서 육체와 혼의 적합률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싸운다면, 300년 전의 기억에 의존하는 데스나이트가 유진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유진은 데스나이트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공격해 올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진 본인은 300년 전처럼 생각하고, 싸우지 않는다.


유진 라이언하트로 환생해서 살아온 21년. 전생이 전생이었던 만큼 너무 높고, 먼 곳을 보던 눈. 이제는 그 시야가 높지도 멀지도 않았다.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은 결코 유진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 본인이 인정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투영된 기억이 너무 완벽하게 흘러갔다. 압도할 수 없다. 오히려 밀리고 있다.


기술이 부족하지는 않다. 힘은? 속도는? 마나가 마력으로 대체되었을 뿐. 결국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럴 때에 ‘하멜’은.


얻어맞아 튕겨 나온 오른손이 아래로 꺾였다. 구부러진 손가락이 데스나이트의 가슴으로 향했다.


이그니션. 자칫하면 언데드의 몸뚱이가 붕괴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데스나이트에게는 그런 반동 따위는 사소했다.


라이언하트에 대한 증오. 베르무트를 떠오르게 하는 저 불꽃의 갈기. 아니스를 빼닮은 성녀. 세냐의 후계자. 인정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정면에서 부정하고 싶다. 전부 죽여 버려야만 이 답답하고 끔찍한 증오가 해소될 것이다.


뛰지 않는 심장에 죽은 손끝이 파고들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코어에서 주입되는 노도의 마력에 데스나이트의 의지가 더해졌다.


유진은 당연히 저 동작을 알았다. 설마 뒈진 몸으로 이그니션까지 쓸 수 있을 줄이야. 마음 같아서는 똑같이 이그니션을 써서 처죽이고 싶은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화륵! 유진의 등 뒤에 자색의 불꽃이 모이기 시작했다.


ㅡ꽈지직!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 뒤편에 있던 크리스티나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완전히 막지 못한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멜키스는 놀라서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로베리안은 즉시 수인을 맺고서 마법을 일으켰다. 발자크도 몸을 바짝 낮춰 땅에 손바닥을 얹었다.


소용없었다. 토맥의 마나와 블러드메리, 마왕의 마력까지 동원하는 에드몬드의 간섭이다. 그는 이 공간을 감싸고 있던 신성력의 결계를 힘으로 부수었고, 로베리안이 펼친 방해마법도 즉시 돌파해 버렸다.


‘발자크 루드베스.’


에드몬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해올 줄이야. 교묘하게 파고드는 방해가 견고한 신성력의 결계보다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늦지는 않았다.


“……뭐야?”


공중에서 떨어진 데스나이트가 내뱉었다. 그는 마력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손에서 시선을 떼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르무트의 후손들도, 아니스를 닮은 성녀도, 세냐를 추종하는 대마법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 있었는데ㅡ 한순간에 코칠라의 수도로 돌아와 버렸다.


“무리하게 둘 수는 없네.”


유진의 시그니처가 완성되고, 데스나이트의 이그니션을 발동되기 직전이었다. 에드몬드는 아멜리아에게 들어 둔 소환마법을 써서 데스나이트를 다시 이곳으로 불러왔다.


“그래도 의욕은 좀 생기지 않았나?”


에드몬드는 찡그리고 있던 눈썹을 펴고서 데스나이트를 쳐다보았다. 언데드에게 치명적인 성녀가 있었다. 아롯의 마탑주도 3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에드몬드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꽈아앙!


덮쳐 온 공격이 에드몬드의 방어마법에 가로막혔다. 에드몬드는 희뿌연 결계 너머를 응시하며 두 눈을 얇게 떴다.


“의욕?”


데스나이트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분노로 몸을 덜덜 떨면서 내뱉었다.


“그러니까. 내 의욕을 끌어내기 위해서, 날 그곳에 보냈다는 거냐?”


“그것뿐만은 아니었네.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서 모두 죽일 수 있기를 바랐지. 아쉽게도 불가능했던 것이고.”


“불가능? 개소리하지 마. 네가 날 불러내지 않았다면, 전부 죽일 수 있었어!”


“정말 그런가?”


에드몬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데스나이트는 즉시 대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무어라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오히려 데스나이트는 당장의 분노를 가다듬고서 입술을 닫았다.


“……확신은 못 하겠군.”


격렬해졌던 감정을 가다듬었다. 전투는 이성적으로 해야 한다. 감정이 앞서서는 안 된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인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베르무트의 후손. 하멜의 전승자. 세냐의 후계자.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


데스나이트는 머릿속에 선명히 남은 그 이름을 곱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싸웠다면 몇 명은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전부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겠지.”


“나는 그대를 잃어서는 안 될 입장일세.”


에드몬드가 말을 이었다.


“그대도 바라는 복수를 모두 이루지 않고서 쓰러지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이번은 전장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그대의 의욕도 고취되었고, 나도 상대를 확실히 알았으니…… 다음은 나도 그대를 도울 수 있을 걸세.”


“…….”


“소감은 어떤가?”


데스나이트는 더 이상 에드몬드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방금의 전투를 복기했다.


“지금의 나는 정상인가?”


데스나이트가 물었다.


“몸이 생전 이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알겠어. 아마, 지금의…… 이 언데드의 몸이라면. 모론 그 등신과 난타전도 가능할 거다. 그런데, 나는 그 애새끼 하나 압도하지 못했어.”


“흠…….”


에드몬드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저 데스나이트는 자신을 하멜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자신을 하멜이라 말하는 것에 일말의 주저도 의심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 데스나이트가 ‘진짜’ 우둔한 하멜인 것은 아니다. 생전의 기억을 주입하고, 그를 완전하게 투영하는 도플갱어일 뿐이다.


아멜리아 머윈은 기억에 완전히 적응한 순간부터 도플갱어가 하멜의 인격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단순히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소화하고 난 뒤. 그때야말로 독립적인 자아가 탄생하며, 혼이 깃들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아멜리아가 에드몬드에게 데스나이트를 빌려준 것은, 나중을 위한 빚이기도 하지만…… 전장에서의 경험이 데스나이트를 기억의 체화(體化)를 넘어 승화시켜 줄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 기대할 만은 하지만, 글쎄. 본질을 넘을 수 있는지는 회의적인데.’


에드몬드는 아멜리아처럼 불확실한 가능성은 잘 믿지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완벽한 설계뿐이다. 저 데스나이트에게 성장의 여지는 충분히 많다.


하지만, 기억을 투영해 냈을 뿐인 도플갱어가 아멜리아가 기대하는 것처럼 고차원적인 존재로 거듭날지는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그러한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 에드몬드는 고민을 끝내고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생전의 기억에 너무 휘둘리고 있어.”


적당히 돌려 말하면서도 자극해 주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네. 그대는 인간이었고, 300년 전에 죽었지. 다시 되살아나기는 했지만, 인간으로 되살아난 것도 아니야.”


“…….”


“죽은 지 수백 년이나 되었으니, 영혼과 기억이 불완전할 수도 있는 법.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그대를 되살려낸 아멜리아 머윈은 내가 아는 네크로맨서 중에서도 정점. 그대가 활약했던 300년 전의 네크로맨서들과도 비교가 안 될 존재일세.”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말이로군.”


“하하…… 그대가 가진 본능적인 혐오감도 지금의 불편함에 일조하고 있을 걸세. 그대는 자신이 정상이냐고 물었는데, 음,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는 정상은 아니야.”


데스나이트는 대답하지 않고 에드몬드를 노려보았다. 에드몬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웃었다.


“오래된 망자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지. 당장 자신의 존재에 거부감을 갖고, 생전의 기억에만 집착하는…… 아, 그렇다고 해서 집착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닐세. 망자에게 있어 집착은 존재의 근간이라 할 수 있으니까.”


에드몬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데스나이트의 표정은 차분해졌다.


“다만, 기억에 집착하지 않고 감정에 몰두해 보게. 생전의 수많은 전투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이 생각을 해보는 것이 그대의 불편함을 덜어 줄 답일지도 모르지.”


“흠.”


데스나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한번 뒈졌다가 살아나서 그런지,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해. 생각해 보면…… 나는…… 생전에는 항상 그랬는데 말이야. 과거의 경험…… 넘어온…… 사선. 기억. 하지만 당장의 전투는 달라. 휘둘려서는 안 돼.”


지끈거리던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싸울지. 항상 생각하고…… 그래야만 했어. 유진 라이언하트한테 노림수가 통하지 않던 것은…… 놈이 날 잘 알아서야. 내가, 녀석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데스나이트는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저것도 결국은 과거의 습관대로 하는 것이지 않을까? 에드몬드는 멀어지는 데스나이트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너무나 강했던 유진 라이언하트와의 충돌이 데스나이트에게 자극이 된 것은 확실했다. 이번 전투에서 압도하지는 못했지만…… 데스나이트가 장담하던 이그니션이란 것을 쓰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지 않아.’


에드몬드의 표정이 다시 찌푸려졌다.


느긋하게 준비를 마칠 생각이었는데, 설마 라이언하트와 마탑주들이 개입할 줄이야. 사실 그들 이상으로 발자크 루드베스의 존재가 에드몬드를 긴장시켰다.


‘뭘 바라는 거지? 역시…… 내 의식을 빼앗을 셈인가?’


그리고 하나 더.


‘라이자키아의 헤츨링이 있었다. ……용마성의 추락 때 탈출했나? 그 추락에 유진 라이언하트가 간섭한 건가?’


생각을 계속했다. 대수림은 차원 밖의 라이자키아와 연결되어 있다.


……현명한 세냐는 대수림에 숨겨진 엘프의 영지에 은거하고 있을 터. 유진이 헤츨링을 데리고 온 것이 현명한 세냐와 무관하지는 않을 터.


그 현명한 세냐가 200년이 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에드몬드가 대수림을 의식의 무대로 삼은 것은 세냐가 봉인되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수를 직접 찾아내는 것은 실패했지만, 의식이 완성된다면 세계수와 세냐의 힘까지 잡아먹을 수 있다는 기대도 했었다.


그런 만큼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서 의식을 벌이고 싶었는데…… 헤츨링과 유진, 그리고 발자크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더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에드몬드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하나는 발자크 루드베스에게 의식을 빼앗기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명한 세냐가 부활하는 것.


어느 쪽이든 에드몬드에게는 최악의 불행이 될 터였다.


“여유를 부릴 수가 없군.”


에드몬드는 표정을 구기며 내뱉었다.


발자크 루드베스


프로미넌스를 발동시키기 위해 모였던 마나가 흩어졌다. 유진은 구겨진 얼굴로 하늘을 노려보다가, 표정을 가다듬고서 몸을 돌렸다.


“괜찮아?”


입가의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보였다.


신성마법의 결계는 미숙하지 않았지만, 에드몬드가 동원한 힘이 너무 강력했다. 무식하고 파괴적인 힘으로 박살 나버린 충격은 크리스티나 본인이 짊어져야 했다.


“괜찮…… 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서 빛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몸 안의 통증이 신성력에 의해 가라앉았다. 그렇게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마음은 도저히 편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유진 님. 제가 부족했…….”


“그런 말 하지 마.”


유진은 태연한 표정을 하고서 대답했다. 입가에 핏자국이 선명한 크리스티나에게 언짢은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런 대답이 오히려 크리스티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크리스티나가 입술을 잘근 씹어대며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그 모습에 혀를 차면서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고 크리스티나에게 다가갔다.


“당대에 유폐의 지팡이라 불리는 놈이야. 거기에 이런저런 힘까지 이용하고 있고. 네가 아무리 성녀라도, 그런 조건에서 결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네.”


[하멜의 말이 맞습니다, 크리스티나. 저조차도 300년 전에 단독으로 유폐의 지팡이를 억누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데스나이트가 내뱉던 증오와 저주가 계속해서 맴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니스는 감정을 가다듬었다. 도망친 데스나이트가 진짜 하멜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감히.]


진정시킨 것이 아니다. 예리한 분노로 가다듬었다.


아니스는 그 데스나이트와 흑마법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멜의 시체로 장난질을 벌인 것조차도 용서치 못할 모독인데, 데스나이트로 하여금 하멜을 자처하고 흉내 내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거짓된 기억을 집어넣어서, 하멜의 입으로, 300년 전의 모두를 모욕했다.


“……음.”


로베리안도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아롯의 적색마탑을 대표하는 마법이 바로 소환마법이고, 적탑주인 로베리안은 이 시대 제일의 소환사를 자처해도 될 인물이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로베리안은 여러 마법을 섞어서 데스나이트의 역소환을 막으려고 했지만, 에드몬드가 사용하는 거대한 힘에 간섭하지 못했다.


“이것을 봐주십시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역소환에 간섭하기에는 로베리안이 가진 마나가 너무나도 부족했으나, 그 짧은 순간에 로베리안은 마력의 흐름을 역으로 탐지했다.


로베리안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풍경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마력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에드몬드가 위치한 공간에 ‘눈’을 소환하는 것에 성공했다. 거리가 거리이다 보니 강력한 소환수를 현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관측은 가능했다.


모두가 로베리안이 보여주는 풍경을 주시했다.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코칠라의 수도. 높은 상공에서부터 내려 보는 수도의 모습은 잔악하고 살벌했다.


피라미드의 형태의 커다란 제단. 셀 수 없이 많은 포로들이 제단에 오르고 있다. 그 꼭대기에서는 인피로 만든 가면과 옷을 입은 주술사들이 쉬지 않고 포로의 가슴에 구불구불한 칼을 박아 넣고 있었다. 산 채로 심장을 뽑는 의식이었다.


심장이 뽑힌 포로들은 휘청거리다가 피라미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포로의 시체는 저 아래에 파놓은 구덩이로 떨어졌는데, 구덩이의 안에는 수천은 족히 될 것 같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몸에서 뽑아냈는데도, 심장은 멎지 않고 펄떡거렸다. 인피의 가면을 쓴 주술사의 곁에 있던 전사들이 심장을 건네받았다. 그들은 심장을 조심스레 피라미드의 뒤편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해골을 엮어 만든 커다란 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안에는 끈적하고 검붉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펄떡거리는 심장은 솥에 들어간 즉시 용해되어 액체와 뒤섞였다.


“끔찍해라…….”


보이는 풍경에는 멜키스조차도 정색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시체에 대한 내성이 많지 않은 시안은 구역질을 참기 위해 입술을 씹었다.


저러한 의식이 벌어지는 제단은 하나가 아니었다. 코칠라의 수도에는 저러한 제단이 5개나 있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만큼 제단의 형태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역오망성. 예부터 흑마법에서 즐겨 사용되는 상징이다.


“훔쳐보는 것은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영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베리안이 굳은 표정으로 마법의 눈을 움직이니, 어느새 가까이 날아온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중절모를 쓰고 짧은 망토까지 두른,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 에드몬드 코드렛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발자크의 마력은 아니군. 적탑주…… 로베리안 서피스인가? 그렇겠지.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도 보기는 했다만, 그대는 이런 종류의 마법에 능하지 않을 테니.”


“내 뭘 안다고 평가질이야?”


멜키스가 표정을 왈칵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실이기는 했다. 멜키스도 대마법사라 불릴 만큼 여러 마법에 능하기는 하다만, 에드몬드가 말했듯이 즉흥적이면서도 섬세하기까지 한 소환마법의 대가는 아니었다.


“우선, 똑같이 마법의 길을 걷는 자로서…… 찬사하고 싶군. 설마 그 짧은 순간에, 심지어 힘의 차이가 비교도 안 되는 마법을 역탐지하고 이 먼 거리에서 사역마까지 소환해 내다니.”


“당신의 칭찬 따위는 듣고 싶지 않소.”


“내가 흑마법사라 그런가? 그대의 어린 시절이 흑마법사에 의해 불행했다는 것은 안다만…… 흠,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지. 어차피 나와 그대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테니.”


로베리안을 보던 에드몬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하지만. 그대와 나는 얼마든지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발자크 루드베스.”


당연하게도 에드몬드는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이곳과 코칠라 수도의 거리를 한참이나 떨어져 있지만, 에드몬드의 눈동자에 담긴 차가운 분노는 투영되는 영상으로 알 수 있을 만큼 짙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가 벗이라고 생각했네. 그만큼 오래 알고 지냈고, 여러 이야기를 나눠왔으니까.”


“잘 생각해 보게, 에드몬드. 우리는 분명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무용하지 않았나? 나는 굉장히 의례적인 대화였다고 생각하는데.”


“지독한 이야기를 하는군. 그래서, 우리의 교류가 무용했으니 나를 배신하는 건가?”


“배신이라는 말도 틀리다고 생각하네. 애당초 나는 자네의 편이었던 적이 없어. 자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듯, 나 역시 내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이네.”


발자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한 여유가 에드몬드의 눈썹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내 의식을 빼앗을 셈인가?”


“그럴 수도 있겠군.”


“나는 자네를 잘 알아. 발자크 루드베스. 자네에게 그 정도의 역량은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웃으며 돌아온 질문에 에드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잘 안다, 라는 말부터가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에드몬드는 발자크가 어떤 마법사인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 아멜리아 머윈조차도 어떤 마법사인지를 알고 있는데, 발자크가 어떤 마법사인지에 대해서는 답을 낼 수가 없었다.


유폐의 마왕과 계약하기 전. 발자크는 청색마탑에서 차기 마탑주로 거론될 만큼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러던 중에 돌연 청색마탑을 떠나서 헬무드를 찾아왔다.


마왕과 알현하기 위해 찾아오는 마법사는 무수히 많다. 당연히 그들 대부분은 마왕의 알현은커녕, 바벨에 입성조차 불가능하다. 하지만 발자크는 차기 마탑주로 거론될 만큼 뛰어난 마법사였기에 유폐의 마왕도 알현을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마법사로서의 능력만으로는 마왕과 계약을 맺을 수 없다. 오히려 역량만을 따졌다면 더더욱 계약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유폐의 마왕에게는 아멜리아 머윈과 에드몬드 코드렛이 있었다.


발자크는 마왕과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은 그 욕망이 유폐의 마왕의 흥미를 끈 것이다.


그렇게 유폐의 삼마가 만들어졌다. 교류는…… 했었다. 서로의 사상을 파악할 만큼 깊지는 않았다. 역량? 보이는 역량이라면 하찮다고 여겼다. 그보다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로 마법을 겨뤄보아야만 했다.


겨뤄본 적은 없었다.


“……불쾌하기 이를 데 없군.”


에드몬드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내뱉었다.


“그렇게 말한다니 내 확실히 선언해 주지. 발자크. 내가 주관하는 의식은 완벽하고, 그대 따위에게 빼앗길 만큼 하찮지 않아.”


발자크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드몬드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유진에게 향했다.


“부서지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을 걸세. 유진 라이언하트. 나는 그대가 용사라는 것을 알고, 유폐의 마왕님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대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죽일 수는 있고?”


유진은 입술을 뒤틀며 물었다.


“네가 보냈던 칼은 무뎌 빠졌던데 말이야. 그 칼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냐?”


“분노와 혐오가 노골적이군. 역시 라이언하트일 뿐만 아니라 우둔한 하멜의 전승자라 이건가? 일단 정정부터 하지. 칼이 무디던 날카롭건, 내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네. 나는 칼이 간절한 나약한 흑마법사가 아니거든.”


코칠라의 수도까지 진군해 오도록 유도할까? 이곳을 전장으로 삼는다면, 에드몬드는 지려야 질 수가 없다. 이 크고 잔인한 도시는 오래전부터 에드몬드의 영지였으며, 의식의 중심지로 삼으면서 막대한 힘이 밀집되어 있다.


그건 상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에드몬드는 여유를 부릴 입장이 아니었다. 상대의 명확한 목적을 모른다는 것이 에드몬드의 여유를 앗아갔다. 저쪽이 진군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에드몬드는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대도 준비의 시간을 갖게 된다. 발자크가 어느 정도의 수작이 가능한지를 모르겠다. 대마법사인 마탑주 2명도 거슬린다. 하물며 저 2명은 아롯의 대마법사들 중에서도 ‘전쟁’에 특화된 마법사다.


소환수로 물량공세를 할 수 있는 적탑주. 그리고 2명의 정령왕과 계약해 수많은 정령을 부릴 수 있는 백탑주.


‘이곳을 전장으로 삼는들…… 현명한 세냐가 더해진다면…….’


에드몬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세냐의 부활이다. 겨뤄본 적이 없으니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비교해 볼 수는 없다만, 세냐 메르데인은 마왕까지 위협했던 대마법사다. 유리한 전장에서 일대일 마법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저만큼이나 갖춰진 전력에 현명한 세냐까지 더해진다면……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내 손으로 그대들을 모두 죽이도록 하겠네.”


결정을 내렸다. 수도를 버리고 진군한다. 한 번의 전면전으로 의식에 필요할 제물을 수급한다.


적들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는 미지수이나, 대대적인 전면전 한 번이면 의식을 벌일 수 있는 제물이 충족된다.


“지금 당장 야만인들을 대지신의 발자국으로 진군시키겠네. 도망치고 싶다면 얼마든지 도망치도록. 그 정도의 자비는 베풀어줄 테니 말이야.”


대지신의 발자국이 무엇인지는 어제 지도를 보아 알았다.


코칠라와 조란의 중간쯤에 위치한 넓은 골짜기. 이 우거진 숲에서도 유일하게 숲이 아닌 곳. 사마르 원주민들은 그 움푹 팬 넓은 골짜기를 대지의 신이 남긴 발자국이라고 믿으며, 대부족간의 전쟁을 벌일 때에 전장으로 삼았다. 조란과 코칠라가 몇 달 전 처음으로 충돌했을 때에도 대지신의 발자국이 전장이었다.


에드몬드의 말은 노골적인 유도였다. 대지신의 발자국도 인골탑이 세워지고 토맥이 뒤틀린 땅이다. 그럴지라도 코칠라의 수도에 처박힌 에드몬드를 죽이러 가는 것보다, 대지신의 발자국에서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콰직.


영상이 뭉개졌다. 마법의 눈이 파괴된 것이다. 로베리안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의 말대로군. 흑탑주. 에드몬드는 의식을 서두르고 있어.”


진군할 필요가 없는데도 진군하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에드몬드가 의식의 성공에 간절하며, 방해와 변수를 묵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상보다 서둘러 하는 것 같은데, 이유는 짐작이 됩니다. 유진 님의 존재…… 그리고 세냐 님의 부활을 경계하는 것이겠죠.”


발자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세냐의 부활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을 통해 세냐의 행방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짐작했다.


‘세냐 님이 자유롭다면 합류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그분의 부활에 다른 조건이 필요한 모양이야.’


발자크는 라이미르아를 주목했다. 정체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만, 저 어린 소녀는 굉장히 노골적인 헤츨링이었다.


“……아까 그 데스나이트 말이야. 정말로 하멜 님인 거냐?”


시안이 입을 열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손으로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내뱉던 말들이 하나도 이해가 안 돼. 라이언하트를 몰살하고 싶다고? 대체 하멜 님이 왜 그런 말을 하는…….”


“아니야.”


유진이 내뱉었다.


“그 데스나이트. 시체는 하멜…… 님을 쓴 것이 맞지만, 지껄여 대던 인격은 하멜 님이 아니었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하멜이니까 새끼야.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을 뻔했으나, 직전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렸으니 자신이 하멜이라고 밝혀도 뭐,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별개로 부끄러움에 자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유진은 시안에게 하멜 ‘님’의 대단함에 대해 많이도 떠들어댔는데, 사실 내가 그 하멜 님이라는 것을 밝혀버리게 되면…….


“……그…… 정령은 말이야, 인간의 영혼을 볼 수 있거든? 템페스트 님이 그러더라, 저 데스나이트는 하멜 님이 아니라고 말이야.”


“확실해? 그런 것치고는 자기가 하멜 님이라고 지껄였잖아.”


“내가 뭐 하러 이딴 거짓말을 쳐?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하멜 님은 그 데스나이트처럼 병신이 아니야. 그리고 네 말마따나 하멜 님이 왜 라이언하트를 몰살하고 싶어 하겠냐? 모론…… 님이나 세냐 님, 아니스 님을 그딴 식으로 저주할 이유가 대체 어딨냐고.”


“……동화책의 내용을 알고 화가 난 것은 아닐까?”


듣고 있던 멜키스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크리스티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갑자기 헛기침을 토했기 때문이었다.


“일리 있는 주장이군.”


유진조차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세냐와 아니스가 동화책의 공동집필자다. 둘은 하멜이 환생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따위 동화책을 남겨 버렸다. 환생해서 동화책을 처음 봤을 때, 유진도 이를 뿌득뿌득 갈기는 했었다.


하지만 동화책을 두고서 세냐와 아니스를 저주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렇잖은가? 이렇게 환생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유폐의 마왕성에서의 죽음은…… 이기적인 자살이었다.


망가진 몸, 더 싸울 수 없다는 현실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죽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동료들이 죽음에 분개하여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려 주기를 바랐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본들, 그 죽음은 결국 추하고 이기적이었다. 유진은 그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앞에서 뒈지는 것을 보여줬는데, 세냐와 아니스가 동화책에 장난질을 한 정도는 사소한 일이다.


‘……자기들 사심을 좀 덜 담았으면 좋았겠다만.’


유진은 동화책에 적힌 하멜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으흠. 하멜 님은 그깟 동화책의 내용 때문에 동료들을 저주할 만큼 얕은 사람이 아닙니다.”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요.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예? 저는 하멜 님의 전승자에, 세냐 님의 후계자고, 어, 모론 님과도 만나봤으니까…… 어…… 그분들에게 하멜 님이 얼마나 영웅다웠는지를 들었다고요.”


[크리스티나. 하멜은 어떻게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까?]


‘……저는…… 유진 님의 자기객관화가 훌륭하다고 생각…… 합니다.’


[맙소사……! 크리스티나, 당신은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쓰인 겁니다.]


아니스가 비명을 질렀고, 크리스티나는 얼굴만 살짝 붉혔다.


“솔직히 그 데스나이트는 경계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 능력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요. 오히려 데스나이트의 주인, 아멜리아 머윈이 에드몬드와 결탁한 것이 짜증 나는데…….”


“데스나이트만 빌렸을 뿐, 아멜리아는 대수림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발자크가 대답했다.


“어떻게 확신하지?”


“에드몬드가 저를 경계하듯, 아멜리아도 경계의 대상일 테니까요. 애당초 에드몬드는 이곳에서의 의식에 다른 흑마법사나 마족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코칠라 부족의 전사들과 주술사만을 도구로 쓰고 있습니다. 이만큼의 대의식에 다른 흑마법사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대단한 일입니다만. 그렇게 한 것은 흑마법사로서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수를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던 것이죠.”


발자크는 그렇게 말하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아멜리아가 에드몬드에게 협력했다면, 이 의식은 진즉에 완성되었을 겁니다. 에드몬드가 밸런스가 고루 잡힌 대 흑마법사라면, 아멜리아는 사령술의 정점에 도달한 네크로맨서입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언데드의 군대를 쓴다면 보급과 휴식 따위도 필요 없죠.”


“나는 흑마법사가 전부 싫지만, 그중에서도 네크로맨서가 제일 싫어.”


유진은 데스나이트의 면상을 떠올리면서 내뱉었다


발자크 루드베스


대지신의 발자국에서 전면전을 벌이자는 선전포고.


부족 원로들의 표정은 처참히 굳었지만, 이바타나 젊은 전사들은 오히려 환영하는 얼굴이었다. 대지신의 발자국이 갖는 여러 가지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코칠라도 명예는 아는 모양이다.”


이바타가 씩 웃으며 말했다. 대지신의 발자국은 예부터 대부족의 명운을 건 전쟁의 무대로 쓰였다. 어느 곳에서 죽건 대지의 신은 전사의 혼을 인도하지만, 대지신의 발자국에서 죽으면 대지의 신의 품에 안겨 전사의 요람에 누울 수 있게 된다.


조란의 전대 족장, 이바타의 아버지는 코칠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부상이 원인이 되어 죽어버렸다.


그 첫 번째 전쟁의 무대도 대지신의 발자국이었으니, 이바타의 전의가 고취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코칠라에게 빼앗긴 전사들의 혼을 되찾는 것을 대의로 삼았다.


조란과 동맹 부족의 전사들은 새벽녘부터 출전의 의식을 치렀다.


수도의 중심. 불을 지른 사원이 활활 타올랐다. 높다란 불꽃이 하늘에 오르고 열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출전을 앞둔 전사들은 그 거대한 불꽃에 개인의 소지품을 던져 넣었고, 주술사들은 여러 약초를 던져 넣었다.


약초가 불타며 만들어진 연기가 흩어진다. 전사들은 연기를 맡고 괴성을 지르거나 춤을 추었다. 대륙의 여러 국가에서는 마약으로 취급되는 환각성의 약초이지만, 사마르 원주민들에게는 일반적인 기호품이었다.


약초는 태울 뿐만 아니라, 술도 되어서 보급되었다. 맛은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다. 대용량의 술에 환각초를 재워놓은 술. 상처의 고통과 두려움을 잊게 만드는, 일종의 도핑이다.


유진 일행은 저 요란한 의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각자 해야 할 일이 바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도시의 수원(水原)에 접촉하여 신성력을 풀어냈다.


유진에게는 특별하거나 신기한 모습은 아니었다. 300년 전에도 아니스가 저러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약식으로나마 만드는 성수. 환각초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광기를 촉진시킨다면, 성수는 상처를 치료하고 의식을 빛으로 밝혀 용기를 북돋는다. 유진도 전생에 성수의 도움은 여러 번 받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유라스에서 성직자들을 데려오는 것인데.”


성수의 양산 작업은 아니스의 전문이다. 크리스티나를 지도하면서 몸을 나눠 쓰던 아니스가 투덜거렸다.


유라스에는 광명사제단이라 하여 전투신관 조직이 있다. 나이트마치 이후, 교황은 광명사제단 내에서 크리스티나를 필두로 한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은광(恩光).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직접 엄선한 신관들로 조직된 특수부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아니지만, 은광의 전투신관들은 조직된 즉시 크루세이더 라파엘로에게 전투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나름 기준을 두어 고르기는 했다만 전쟁을 모르는 애송이들입니다. 그래도 저한테 신성력을 빌려줄 수는 있을 테니, 데려왔다면 제 수고가 많이 줄었겠지요.”


아니스라도 대군에게 내려주는 기적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성녀라도 신성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직자가 많으면 그들에게 신성력을 빌려 광범위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마족들이 아니스를 ‘지옥’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니스가 있는 전장에서 인간을 죽이기가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성직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강력한 기적. 아니스의 빛이 깃드는 순간에는 상처가 즉시 치유되고 죽여도 잘 죽지 않는다. 모순된 말이지만, 인간이 살아 있는 언데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만큼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없으리라. 이곳의 원주민들은 빛의 신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아니스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피로가 역력했다. 최소한의 휴식을 가지고, 기도를 반복하면서 신성력을 쏟아낸 까닭이었다.


“저는 이곳의 원주민들이 죽는 것은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아니스가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말만 저렇게 할 뿐, 유진은 아니스가 절대로 누군가의 죽음을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래. 너 힘들게 뭐 하러 살려? 그냥 죽게 내버려 둬.”


그렇게 대답해 주자, 아니스는 뻐근한 눈자위를 어루만지며 유진을 흘겨보았다.


“……참 못된 말을 하는군요, 하멜. 당신이 아는 제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오히려 나는 널 잘 알고, 너무 믿고 있지. 아니스, 이번에도 그러겠지. 나는 네가 누군가의…… 인간의 죽음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상상되지 않아.”


지금만 해도 그랬다. 아니스는 투덜거리면서도 계속해서 성수를 만들고 있다. 탈진한 크리스티나를 대신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아니스 슬리우드는, 모든 인간을 구하기를 바랐다. 이미 지나버린 끔찍한 시대에서 죽는 모든 인간을 동정했다.


“인간의 죽음이 의식의 제물이 되는 전쟁입니다. 너무 많이 죽으면 의식이 완성될지도 모르니, 잘 죽지 않게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아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신성력을 짧은 시간에 너무 쓴 것인지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하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현기증, 다리에 잠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정도. 아니스라면 얼마든지 균형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아니스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괜찮아?”


유진이 즉시 다가와 아니스를 부축해 주었다. 아니스는 뭐라고 답하지 않고 잠깐 동안 유진의 부축을 받았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스뿐만이 아니었다. 아니스는 존재에 교감되어 오는 크리스티나의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의식을 살짝 거두었다.


“……크흠…….”


아니스의 머리가 기울었다. 그녀는 유진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유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니스가 이런 식의 스킨십을 즐긴다는 것은 알고 있다. 전생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실제로 한 번 죽어서인지 전생 같지 않게 짓궂고 욕망적이다.


이유는 알고 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스가 중얼거렸다.


……정말 아니스인가? 순간 유진은 확신하지 못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 구분에 어려운 적은 없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라고 해도 사소한 차이점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구분이 어려웠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유진 님은 세냐 님을 구하러 가실 겁니다. 저는, 유진 님이라면 세냐 님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크리스티나였다.


“세냐가 죽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세냐를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해버립니다. 지금, 내가, 하멜, 당신의 곁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세냐가 이곳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아니스였다.


“……옳지 않은 생각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떠올리고, 열중해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죄악감을 느끼고 비참해집니다.”


“하멜, 당신이 저보다 세냐를 의식하던 것을 압니다. 예전부터 저는 당신에게 있어서 ‘안타까운 동료’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유진 님에게 구원받았습니다. 유진 님에게 저는 특별했을 겁니다. 그건……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오히려 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유진 님께 선택받은 것만 같아 기뻤습니다.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유진 님의 곁에서. 아니, 뒤를 따라서 가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크리스티나의, 아니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하멜. 당신이 저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기적인 여자입니다. 그냥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두렵고 겁이 납니다. 세냐 님이 부활하여 유진 님의 곁에 오게 되었을 때. 그때의 저는…… 지금처럼 유진 님의 곁에 있어도 되는 겁니까? 지금처럼, 유진 님을 바라보아도 되는 것입니까?”


“큰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입맞춤으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저는, 참는 것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욕심과 마음은 더욱 커져서, 제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세냐 님이 돌아오시면…… 저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스스로가 못나고 부끄러웠다. 아니스도 결국 내뱉어 버린 진심이 배덕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세냐가 돌아온다고 해서 너희의 위치가 달라질 리가 없잖아.”


그 떨리는 어깨가 애처로웠다. 동시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아니스의 마음? 노골적인 말까지 들었으니 당연히 안다. 크리스티나도 짐작은…… 했다. 그런데 둘이 세냐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의식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세냐가 어떨지는 솔직히 몰라. 하지만 내가, 세냐가 돌아온다고 해서 너희를 다르게 볼 리가 없잖아.”


“그 말은.”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렸다. 확실했다. 아니스였다. 눈동자를 채운 눈물은 진심이겠지만, 지금 유진은 너 눈물 어린 눈동자에서 간사한 뱀을 느꼈다.


“유진 님도 저를 마음에 두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는지요?”


아니스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도 울먹거리며 그런 말을 해왔다. 그 말에 실린 무게가 모론의 주먹보다 무거웠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크리스티나인지 아니스인지 둘 다인지 모를 손이 유진의 옷깃을 단단히 붙잡았다.


“세냐가 돌아와도 제가 이래도 된다는 뜻이겠지요?”


“만약 세냐 님이 저를 도둑고양이 취급하며 해코지하려고 하실 때, 제 앞에 서주실 겁니까?”


“잠깐…… 잠깐. 아니스, 당연히 세냐가 돌아와도 너는 어……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지. 어. 사실 네가 세냐가 돌아온다고 해서 뭐 행동이 바뀔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아…….”


유진은 허둥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 세냐가 널 도둑고양이 취급은 안…… 하지 않을까……. 널 해코지하지도 않을 거고…… 만약에라도 그런다면, 나는 당연히 널 지켜주긴 할 건데…… 이건…… 음…… 일단 세냐가 돌아오고 난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잘생긴 얼굴로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군요.”


“하멜, 당신은 쓰레기입니다.”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같은 비난이 들려왔다. 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덜덜 떨었다.


“시X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유진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유진을 실눈을 뜨고서 쳐다보았다. 눈을 얇게 뜬 탓에 고여있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흠. 오해하실까 봐 말해두는데, 유진 님, 이 눈물은 진짜입니다. 저만 운 것이 아닙니다. 아니스 님이 먼저 우셨습니다.”


“크리스티나!”


“이런 것은 인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시스터.”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몸을 기울여 유진의 품에 안겼다.


“……어째야 할지 모르신다면,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안아주십시오.”


유진은 어정쩡하게 들린 양팔을 살짝 내려 크리스티나의 등을 안아주었다.


……아니스 때문에 크리스티나의 성격이 비교적 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크리스티나는 첫 만남에서부터 아니스와 다른 의미의 음험한 광기가 있었다…….


“떨림이 전해져 오는군요. 자주 생각하던 것이지만, 당신은 참 귀엽습니다.”


“아니스니……?”


“누굴까요?”


성녀는 확실히 대답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유진은 진실이 두려워서 얌전히 등만 토닥거려 주었다.


* * *


환각제는 도저히 쓰고 싶지 않아 술만 마셨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시안은 한참 뒤척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까 보았던 것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많아도 너무 많은 시체. 산 채로 뽑히는 심장. 제물. 그런 것들은 시안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멀고 끔찍한 이야기였다.


“무서우면 그냥 여기 있어도 된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이었다. 그는 잠도 자지 않고 아카샤를 붙들고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시안은 뻐근한 눈자위를 어루만지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바닥에 앉은 유진의 곁. 라이미르아가 웅크리고서 자고 있었다. 뭔지 모를 악몽 때문에 잠을 자지 않으려 들었는데, 크리스티나 성녀의 신성마법 덕에 간신히 잠에는 든 모양이었다.


“아직도 그러고 있냐?”


시안은 유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것을 투덜거렸다.


유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안다. 라이미르아를 흑암의 망토 안에 집어넣기 위한 마법. 드래곤은 마나만 있다면 생존할 수 있으니, 망토 안의 아공간을 한 번 더 격리시켜 라이미르아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중이다.


쉽지는 않았다. 이미 아티팩트로서 완성된 흑암의 망토에 간섭하여, 기존에 걸린 마법을 비트는 것이다. 헤츨링인 라이미르아는 고차원적인 용언을 쓸 수 없기에, 저 작업은 유진 스스로 해야만 했다.


“로베리안 님이나 멜키스 님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


“두 분도 바빠. 그리고 내 물건인데 내 힘으로 해야지.”


“엄밀히 말해서 그건 멜키스 님한테 빌린 것 아냐?”


“말이 빌렸지, 사실상 내 거지 뭐.”


유진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둘이 바쁜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로베리아는 전쟁에 쓰기 위한 소환수의 조합을 다시 짜고 있고, 멜키스는 잠시 수도를 비웠다. 정령과 마나가 가득한 이 숲에서 이프리트와의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굳이 라이미르아를 망토 안에 넣어두려는 것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라이미르아를 이곳이나 다른 곳에 두고 갈 수는 없다. 적인 에드몬드도 라이미르아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테니, 고립된 라이미르아를 확보하려는 시도도 할 법하지 않은가.


“무서우면 그냥 여기 있어도 된다니까.”


작업도 얼추 끝났다. 유진은 시안을 쳐다보면서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시안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라이언하트. 무가에서 태어났지만, 시안은 전쟁을 모른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막연하고 멀기만 한 것이다.


전쟁뿐만이 아니다. 시안은 여태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몬스터, 마물, 그런 것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어렸을 적부터 죽여왔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사마르의 원주민. 솔직히 좋은 생각을 가져본 적은 없다.


하지만 시체를 봐버리니 마음이 달랐다. 며칠 뒤의 전쟁에서도 더 많은 시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시체들 중에서는 시안이 죽인 시체도 있을 것이다.


“사람 죽이는 거. 좋은 경험은 아니야.”


시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진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다. 당장…… 이오드가 유진의 손에 죽지 않았나.


“가능하다면 평생 그런 경험은 하지 않는 것이 낫지.”


“너는 처음 사람 죽였을 때 기분이 어땠냐?”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어.”


유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죽여야 할 상황이었고, 죽여야 할 놈이었지. 안 죽였으면 내가 죽였을 거고. 그래서 죽였다. 거기서 무슨 기분을 느껴야 되냐? 죄책감? 그런 건 하나도 없더라. 나는…… 음…… 개새끼, 꼴 좋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시안은 그 대답을 듣고서 웃었다.


“너답다.”


“너는 어떨 것 같은데?”


“나도 비슷하지 않을까. 전쟁이니까, 내가 살려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 새끼들도 날 죽이려고 할 것 아니냐?”


“뭐 그렇겠지만. 꼭 그런 경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나는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야.”


시안이 대답했다.


“의식의 실체를 안 이상, 내가 물러서는 일은 없어. 이 일이 라이언하트…… 이오드에게서 비롯된 것이니까. 나는 차기 가주로 책임을 지고, 관여할 의무가 있어. 네게 전담시킬 생각도 없고.”


“새끼, 잘 컸네.”


“네가 나보다 뭔가 좀 더 어른스럽다는 것은 알겠는데, 나는 네 형제야. 너보다 엄청 어리지는 않을 거라고.”


시안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그 말은 비단 유진에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안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말은 네 기가 살 것 같아서 하기 싫었는데. 너는 내 생각보다 좋은 가주가 될 것 같다.”


“……하. 당연한 말 하지 마. 나는 어려서부터 후계자 교육을 착실하게 받았다고.”


“네가 그렇게 큰 것은 사실 애니실라 님보다는 내 덕택이라 생각한다만.”


“네가 나한테 뭘 해줬다고 난리야. 나 두들겨 패고 욕하는 것 말고 뭘 했는데?”


시안은 괜히 민망해져서 그렇게 내뱉었고, 유진이 자신을 때리러 올 것이라 직감했다. 하지만 유진은 생각과는 달리 피식 웃기만 했다.


“네 실력이라면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해라. 다치지 말고.”


“너나 잘해.”


“진짜로 조심하라고. 네가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애니실라 님이 날 죽이려 들 거야.”


“너나 잘하라니까.”


시안은 투덜거리면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납득이 잘 가지 않는 것들이 여럿 있다. 유진의 저 여유의 이유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강할지라도, 이런 규모의 전쟁은 유진도 처음일 텐데.


‘……그게 오히려 너답다만.’


이런 전쟁일지라도 유진은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 드는 생각이지만, 시안은 유진이 다치거나 쓰러지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오히려 자신이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안은 자신이 형제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동등해지고 싶었다. 그것이 형제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형이잖아.’


입 밖으로 내뱉으면 한 대 얻어맞겠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던 정신이 평온해졌다.


데스나이트를 상대로 살의를 쏟아내던 유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쟁이 아무리 무서워도, 분노한 유진보다는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다.


대지신의 발자국


새벽 내내 활활 타던 제단의 불꽃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순간에 사그라졌다.


전사들은 채 가시지 않은 약초와 재의 잔향을 뒤로하고 수도를 떠났다. 숫자가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조란의 전사들이었지만, 동맹국의 전사들도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얼추 세어보아도 수천은 족히 될 법한 원주민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숫자는 많았지만, 무장은 대단치 않았다. 철제 갑옷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그나마 입은 것이 가죽 소재의 갑옷이었다. 그마저도 입지 않은 전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사들은 발달된 근육 위에 갑옷 대신에 문신이나 전투화장을 그려 넣거나, 정령의 가호를 둘렀다.


조란의 족장인 이바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련한 몬스터의 등에 타고서 최전선을 이끌었다. 훤히 드러낸 상체에는 본래부터 문신이 많았는데, 대지신의 발자국이 가까워질수록 이바타의 몸에는 점점 더 문신이 늘어났다. 함께 온 조란의 주술사들이, 정령의 가호를 문신으로 더해주기 때문이었다.


[대단하구나.]


템페스트는 솔직한 감탄을 내뱉었다.


사마르의 원주민, 그중에서도 전사들은 어려서부터 원시정령의 사랑을 받는다. 그것은 전사로서의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원시정령에게는 뚜렷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나와 비슷하면서 다른, 본질적인 속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원시정령에게 사랑을 받고, 가호로서 보호를 받으며 힘을 빌려낸다는 것은 대륙의 정령술과는 궤가 다른 힘이다.


[저 야만인의 몸에 내려진 가호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구나. 그는 많은 원시정령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바타 자하부에게 깃든 가호가 불러내는 원시정령의 힘은, 나나 다른 정령왕의 계약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무수히 많은 원시정령이 이바타의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가 땅을 달리면, 대지에 깃든 정령들이 이바타에게 힘을 준다. 바람이 이바타를 날게 할 것이다. 또, 이바타가 바란다면 불꽃이 타오르고 번개가 내리치며 비가 내릴 것이다.


마탑주들과 크리스티나는 진군 중에도 바빴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에게서 전쟁에 쓰기 좋은 신성마법을 연계 받았다.


크리스티나가 겪는 첫 번째 전쟁은 솔직히 말해, 조건이 굉장히 가혹했다. 성수의 양산과 배급뿐만 아니라 전황에서의 신성마법까지. 다른 성직자의 보조 없이 크리스티나 혼자서 해야 했다.


조건이 열악한 것은 마탑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코칠라는 마물을 부린다. 그 숫자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놈들이 부리는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소환술사인 로베리안이 많은 고생을 도맡아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란의 주술사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재주가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주술이 마법과는 많이 다르다고는 해도, 일단 마나를 사용한다는 점은 같으니 요령만 가르치면 마법적인 도움은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마법의 술식은 이쪽에서 짜줘야만 했다. 로베리안은 밤잠도 줄여가며 방어마법의 술식을 짜고, 주술사들에게 가르쳤다. 압도적 이점을 가진 에드몬드가 대공폭격을 해올 것을 경계한 것이다.


반대로, 발자크는 흑마법의 방어술식을 짜는 것에 전념했다. 더불어 자신의 시그니처, 블라인드에 대해 모두에게 공개해 주었다.


“흐흥. 흐흐흐흥.”


멜키스는 여유롭다 못해 실실 웃어댔다. 왜 웃냐고 물어볼 때마다 멜키스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비밀이라고 대꾸했지만, 그 태도가 너무나 노골적이라서 다들 멜키스가 왜 저러는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납득할 수 없다…….]


간간이 템페스트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유진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이바타가 앞장선 덕에 일주일 만에 대지신의 발자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장을 미리 선점해 두고 싶었다. 숲의 가호로 최단거리의 길을 열었고, 정령들이 등을 떠밀어주어 속도까지 붙었으니 적 진영보다 먼저 도착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다.


오산이었다. 선점을 빼앗길 것이었으면 대지신의 발자국을 전장으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 ‘발자국’에는 도착하지도 않았지만, 진군하는 모두가 피부를 통해 코칠라가 이미 진을 쳤음을 알았다.


그만큼이나 숲에 감도는 모든 것이 불온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새 지저귀는 소리는커녕 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령과 생기가 사라진 대지는, 사막의 모래를 밟는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아직 색이 남아 있는 풀과 나무들은 실상은 살아 있지 않은 조화(造花)였으며, 숲에는 그 특유의 냄새 대신에 죽음의 냄새가 감돌았다.


나아갈수록 전사들의 표정에 불안이 어렸다. 덥고 습할 날씨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에 의한 식은땀이 흘렀다.


쿵! 선두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습격 따위는 아니었다. 맨 앞에서 전사들을 이끌던 이바타가 돌연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 것이다.


“우! 우! 우!”


이바타는 가슴을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고, 입술을 모아 굵은 외침을 토했다. 짧게 끊기는 외침이 죽음의 두려움을 밀어내고 떨어지던 사기를 충천시켰다.


“고릴라 같네.”


멀지 않은 곳에서 따라가던 멜키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두려움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멜키스가 의문스러워 물었다.


“이런 규모의 전쟁은 멜키스 님도 처음 아닙니까? 그런데 괜찮으신 겁니까?”


“순진한 말을 하는구나, 동생.”


멜키스는 킬킬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본래 천재는 범재들의 미움을 받기 마련이야. 그리고 천재는 보통 고독하고, 범재들은 무리를 짓지. 난 어떻겠니? 그냥 천재도 아니고 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천재인 이 멜키스 엘하이어가, 이 고고한 위치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견제를 받았을 것 같아? 내가 성인도 되기 전에 날 죽이려고 찾아온 암살자가 대충 세어 봐도 수십 명은 돼.”


로베리안도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멜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식의 전쟁을 겪어 본 적은 없으나, 그들의 재능이 빛을 발하고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매일이 전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과연. 나이가 나이다 보니 연륜이 넘치실 수밖에요.”


“그러는 동생은? 동생이야말로 괜찮아? 억지로 센 척하는 것 아냐? 무섭고 힘들다면 얼마든지 이 누나의 등에 숨어도 된단다.”


“저도 뭐, 익숙해서 괜찮습니다.”


숲이 끝났다.


이바타는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보았다.


사마르에서 유일하게 숲이 아닌 곳. 수십 미터 아래의 골짜기. 대지신의 발자국. 몇 달 전에 이바타는 이곳에서 코칠라의 전사들과 싸움을 벌였었다.


그때 보았던 풍경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지신이 남긴 발자국은 밤하늘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시커먼 땅이 되어 있었고, 평지의 끝부터 코칠라의 전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저 아래를 채운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몬스터와는 다른 흉악한 괴물들. 헬무드가 코칠라에게 통제권을 부여 한 마물들이 최전선을 채우고 있었다.


쿵, 쿵, 쿵! 골짜기 깊은 곳에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 가죽을 엮어 만든 북이 탁한 소리를 쩌렁쩌렁 토했다. 끼이이이이이! 악기는 북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만든 호루라기가 끔찍한 비명을 토했다.


이바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옆의 전사가 들고 있던 뿔피리를 빼앗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뿔피리를 물었다.


우우우우! 뿔피리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토해내는 숨을 이기지 못한 뿔피리가 먼저 박살 나버렸지만, 이바타가 뿔피리를 부는 동안에는 코칠라의 북소리와 호루라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코칠라의 후열이 검고 붉은 부족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바타도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조란의 깃발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이바타는 깃발을 들거나 흔들지는 않았다. 대신에 몸을 뒤로 꺾더니, 깃발을 창처럼 골짜기 아래로 던져 버렸다.


“아아아아아아!”


이바타는 깃발을 던진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절벽 아래로 질주했다. 조란의 깃발이 바닥에 꽂혔고, 이바타가 땅을 박찼다.


콰드드득! 이바타에게 어린 숲의 가호가 대지를 격변시켰다. 그를 따르던 정령들이 죽어버린 땅에 옮겨갔다. 그러자 가파른 절벽이 뛰어 내려가기 좋은 경사로 바뀌었다.


족장이 질주하는 것을 본 조란과 동맹 부족의 전사들도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이바타가 만들어낸 경사를 질주하며 대지신의 발자국으로 진군했다.


코칠라의 후방. 에드몬드는 그곳에 있었다. 그는 흑마법사다운 새카만 로브 대신에 기품 있는 자주색의 로브를 두르고, 한 손에는 아름다운 블러드메리를 쥐고 있었다. 그런 에드몬드의 주변에는 어려서부터 ‘흑마법’을 교육시킨 코칠라의 주술사들이 진형을 갖추었다.


데스나이트와 헥토르는 저 앞에 있다. 데스나이트야 주입된 원한에 따라 움직일 것이고, 헥토르도 곁에 둘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둘은 알아서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댈 것이다.


“도망치지 않았군.”


에드몬드는 다듬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곳에서는 볼 수 없어야 옳지만, 사방에 설치한 마법의 눈이 적들을 낱낱이 파악했다. 도망쳐도 좋다고 자비롭게 경고까지 해주었거늘……. 누구도 도망치지 않은 것이다.


‘무시할 전력은 아니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싸움의 승패가 아니지.’


에드몬드는 씩 웃으며 블러드메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사전작업으로 뒤틀어둔 토맥은 에드몬드와 블러드베리에게 연결되어 있다. 이 토지에도 이미 의식의 준비는 갖춰놓았다.


코칠라가 죽건, 적들이 죽건, 이곳에서 죽어 흐르는 피와 영혼 모두가 제물이 될 것이다. 전투의 승패가 갈리는 것보다 에드몬드가 의식을 완성하는 것이 빠르다.


‘저들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도망치지 않은 것이고.’


도망치는 것보다, 이곳에서 에드몬드의 의식을 저지하는 것을 선택했다. 과연 용사라 해야 할지. 에드몬드는 큭큭 웃으며 블러드메리를 높이 들었다.


마법사. 특히 대마법사 사이의 전투에서 승패를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시그니처의 선제(先制). 그리고 마법의 상성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에드몬드의 시그니처는 무상성에 가까우며 오만했다.


큐브(Cube).


시커먼 선이 에드몬드의 주변에 죽죽 그어졌다. 선이 서로 이어지며 입방체를 형성했다. 에드몬드의 시그니처가 추구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절대방어와 불사.


발동된 큐브를 마법으로 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블러드메리와 마왕의 마력을 사용하는 에드몬드의 출력을 아득히 초월하지 않고서는 큐브에 흠집 하나 낼 수 없다. 또한, 저 안에서의 에드몬드에게는 고위마족 이상의 불사성이 부여된다. 설령 큐브를 관통해 온 공격이 에드몬드의 몸을 침범할지라도, 큐브에 가득 찬 마력이 즉시 에드몬드의 상처를 치유해 버린다.


에드몬드의 시그니처가 오만한 것은, 큐브에는 공격을 위한 술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벽에 가까운 방어와 불사성. 시그니처의 창작에서 공격성을 도외시한 것은, ‘절대’ 차원의 공격성은 이미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오만하되 오산은 아니었다. 실제로 에드몬드는 절대 차원의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블러드메리에 시커먼 마력이 충전되었다. 에드몬드를 중심으로 진형을 짠 코칠라의 주술사들이 주문을 외며 마력을 동조시켰다.


“이대로 구경이나 해도 좋겠지만.”


어차피 그 누구도 큐브를 부술 수 없을 것이다. 충분한 제물이 모일 때까지 큐브 안에서 지켜보아도 된다.


굳이? 압도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구경만 할 이유가 있나? 에드몬드의 얼굴에 살벌한 미소가 어렸다.


거대한 마력이 하늘 위에서 길고 날카롭게 늘어났다.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죽음의 창이 하늘에서 발사되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도 직접적인 전투는 가능했다. 아니스의 메이스를 소재로 만든 플레일도 능숙하게 휘두를 줄 알고, 상대가 굳이 마물이 아니어도 신성마법으로 요격은 가능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대지신의 발자국에 내려가지 않고 절벽의 위에 남았다. 이 전장에서 크리스티나는 유일한 성직자다. 난잡하고 혼란스런, 광기로 가득 찰 전장을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살피며 개입해야 한다.


이미 선두끼리 충돌했다. 이바타는 거대한 도끼 2자루를 동시에 휘두르며 코칠라의 전열을 붕괴시켰다. 그는 뒤가 없는 사람처럼 전열을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마물과 전사들이 뒤엉켜 싸운다. 마물의 뒤를 따른 코칠라의 전사들이 덮쳐온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서는 죽음의 창이 만들어졌다.


쏘아진 창이 꿰뚫으려는 곳은 아군의 후열. 일격으로 후열을 붕괴시키려는 것이다.


[크리스티나.]


‘예, 시스터.’


크리스티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목에 멘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크리스티나에게 깃든 신성력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아니스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신성력을 크리스티나에게 건네주었다.


300년이나 흘렀음에도 세상 사람들은 ‘성녀’란 존재에 신실한 아니스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이 숲속의 작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적어도 이 숲의 원주민들, 살아남은 전사들은 ‘성녀’란 존재에 신실한 아니스가 아닌 다른 이름을 떠올리게 되리라.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신실한 아니스 본인이 그렇게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ㅡ화아악!


크리스티나의 등 뒤에 8장의 날개가 펼쳐졌다. 아니스의 의식이 크리스티나와 일체 했다. 크리스티나가 손을 들자, 휘몰아치던 빛이 그녀의 손끝에 집중되었다.


하늘에 눈부신 십자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거대한 방패가 되어 쇄도하던 죽음의 창을 가로막았다.


콰아아아! 빛과 어둠이 뒤엉키고 흩어졌다. 이곳에서 다른 성직자의 보조는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신실한 아니스가 크리스티나에게 힘을 더하고 있다. 에드몬드가 쏘아낸 죽음의 창은, 빛의 십자가를 꿰뚫지 못하고 정화되었다.


‘성녀.’


절벽에 남은 것은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었다. 로베리안은 크리스티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는 크리스티나가 일으킨 찬란한 기적에 감탄했다.


유폐의 지팡이, 에드몬드 코드렛. 그의 시그니처에 대해서는 발자크에게 미리 들었다. 절대방어와 불사성. 근접전투에 취약한 마법사라면 누구나 바라는 특성이다.


‘녹탑주의 위그드라실도 그를 추구하여 만든 시그니처지만…… 완성도가 비교되지 않는군.’


위그드라실도 방어와 불사성을 신경 쓰기는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애매하면서 요란하다.


자기 몸을 나무로 바꾸어 숨기는 것…… 추구한 것이 너무 많은 데다 능력을 벗어난 탓에, 위그드라실은 너무 크다. 방어도 뚫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고, 나무를 재생시키는 것은 가능해도 마법사 본인의 불사성은 이뤄내지 못했다.


하지만 저 큐브는 어떤가. 에드몬드 하나를 뒤덮은 사람 크기의 입방체. 저 작은 크기에 절대방어와 불사성을 깔끔하게 집어넣은 것이야말로, 에드몬드가 가진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과시하는 것이다.


“과연.”


우선, 로베리안은 마법사로서 감탄했다. 그도 대마법사이기는 하나 저런 수준의 시그니처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 해서 질투를 느끼지는 않았다. 마법이란 무조건 틀에 박혀야 하는 것이 아닌 무궁한 학문이며, 로베리안이 추구하는 마법은 저런 것이 아니다.


로베리안은 말없이 양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단순히 제물이 필요한 것이라면 이렇게 전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에드몬드 본인이 코칠라 전사들을 몰살시키거나 자결시키면 될 일. 굳이 전쟁을 벌이는 것은…… 단순한 피와 영혼이 필요한 것은 아니란 것. 그래, 엑스터시(Ecstasy)가 필요한 거군.’


대마법사라면 한두 번 경험하곤 한다. 7서클에서 8서클에 도달할 때.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은 경지의 벽이 무너질 때. 몰입한 의식은 자기 자신을 잊고 마나와 서클과 마법과 일체 한다.


마법사뿐만이 아니다. 기사나 전사도 심득이나 깨달음을 얻고 벽을 넘어서는 순간에 무아지경의 엑스터시를 느낀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죽이는 전쟁에서 도달하는 심상. 목숨과 피와 영혼이 하찮아지는 순간에 태어나는 흥분. 광기. 그를 겪으며 살찌운 영혼이 제물로서의 값어치가 월등할 터.


그렇게 살찐 영혼이 이 전장에서의 죽을 때. 피와 혼은 에드몬드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이 에드몬드가 술식에 부여한 법칙이다. 이런 규모와 완성도를 가진 의식에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아예 다른 법칙을 공존시킨다. 죽음이 선제라면 그것보다 앞서면 된다.


“판테온(Pantheon).”


로베리안의 시그니처에 긴 영창과 복잡한 술식은 없다.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소환물을 소환할 뿐.


쿠웅!


이차원에서 거대한 문이 소환되어 땅에 우뚝 섰다. 복잡한 문양이 가득 새겨진 붉은 문이 진동을 시작했다. 로베리안은 맺었던 수인을 풀고서 지팡이를 쥐었다.


판테온의 문이 열렸다. 로베리안의 의식은 이미 판테온과 동조되어 있었다. 로베리안이 만들거나 굴복시켜 온 셀 수 없이 많은 소환물과 소환수들이 문의 안쪽에서 울부짖었다. 그들은 로베리안의 명령에 따라 서로 달라붙고 섞이며 합성되었다.


모든 소환물과 소환수를 하나로 합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전장에서 최적의 조합.


포식.


시체가 땅에 눕게 두지 않는다. 피가 흙에 스며들게 두지 않는다. 영혼이 흐르게 두지 않는다.


판테온 안에서 조합된 소환수들은 시체를 먹고 영혼을 뱃속에 가둔다. 법칙을 선제시킨들 에드몬드의 의식에 완전히 저항할 수는 없을 터이나, 제물이 거둬지는 속도는 늦출 수 있다.


로베리안이 조합한 ‘청소부’들이 판테온에서 쏟아져 나왔다.


“야아아아아아!”


멜키스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내질렀다. 그녀는 이미 엑스터시에 돌입한 것과 같은 흥분에 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 시체? 제물? 그런 것보다 멜키스는 자기자신의 위대함에 심취했다.


사실 운이 좋았다. 화정석을 두고서 이런저런 짓을 죄다 해보았지만, 끝내 이프리트와 계약은 맺을 수 없었다.


사마르 대수림은 정령술사의 낙원이라 불린다. 마나도 정령도 가득하다. 그런 대수림이 흑마법에 짓밟히고 있다. 토맥은 뒤틀리고 마왕을 탄생시키는 의식이 벌어지고 있다.


그 흉행에는 번개의 정령왕 레빈과, 땅의 정령왕 야노스가 분노했다.


불꽃의 정령왕, 이프리트도 분노했다.


이 숲을 구하고 에드몬드의 흉행을 저지하는 조건으로 이프리트와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정령합체! 인피니티 포스(Infinity Force)!”


2명의 정령왕과 합체할 때는 트리니티 포스. 하지만 이제는 3명의 정령왕과 합체하는 것이니 트리니티 포스라는 이름은 쓸 수 없다.


그래서 인피니티.


무한!


멜키스의 두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치솟은 대지가 멜키스의 몸을 집어삼켰다. 내리 찍힌 번개가 흙으로 이뤄진 거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불꽃. 이프리트의 불꽃이 거체의 전신을 뒤덮었다.


“완벽해!”


멜키스는 희열로 몸을 떨었다.


대지의 정령왕을 현신시켜 만들어낸 이 거대한 육체. 멜키스 본인의 그대로 형상화한 육감적인 바디라인, 아름다운 얼굴.


그뿐인가? 이 거대한 육체를 움직이는 번개의 힘. 전신에 덮은 정열적인 불꽃! 몸 전체를 뒤덮은 불꽃에서 아름다운 얼굴만 쏙 빠져나왔다. 타오르는 불꽃이 옷이 되었다. 왼손에는 번개가, 오른손에는 불꽃이 모였다.


“끼아아!”


멜키스는 희열 찬 비명을 지르며 마물의 군세를 짓밟으며 전진했다.


그 요란한 전진의 뒤에서 발자크는 양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의 시그니처는 단점이 많다. 준비가 길고, 발동이 느리다. 시그니처 간의 대결에서 중요한 선제는 어지간해서는 잡을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시그니처가 그러하듯, 마법사 본인의 특징이었다.


발자크는 전면에서 나서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스스로 싸우는 것보다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시그니처는 철저하게 발자크다웠다.


“블라인드(Blind).”


하늘 높은 곳에서 어둠의 장막이 내려왔다.




대지신의 발자국


대지신의 발자국. 이 넓은 공간이 어둠의 장막에 가려졌다. 사방을 에워싸고 하늘까지 가로막은 장막은 대지에서 빛을 앗아갔다.


발자크 루드베스의 시그니처. 블라인드는 그 이름처럼 가장 먼저 시야를 차단한다. 블라인드의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바로 앞이나 옆에 있는 것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볼 수 없게 된다.


이런 식의 난전에서 절대적인 위력을 가진 시그니처지만, 심플해도 너무 심플한 것은 사실. 그러나 블라인드의 능력은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것뿐만이 아니다. ‘시각’은 블라인드가 앗아가는 첫 번째 감각일 뿐이다.


블라인드 속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감각이 하나씩 사라지게 된다.


시각 다음에는 청각.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다. 그다음은 후각.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된다. 그 뒤에는 촉각이 사라진다. 칼에 몸이 베여도 블라인드 안에서는 고통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육감이라 할 수 있는 기감(氣感)이 사라진다. 마법사도, 기사도, 전사도, 마나를 느낄 수 없게 된다.


미각을 제외한 5개의 감각이 사라져도 블라인드의 강탈은 끝나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최후의 의식이 사라진다. 미각 외에 무엇도 느낄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자아(自我)마저 상실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단계별로 빼앗는 것은, 아무리 대마법사의 시그니처일지라도 한 번에 모든 감각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어둠은 발자크가 술식으로 만들어낸 어둠으로, 마법으로 만들어낸 ‘독’이라 할 수 있다. 장막 안에 있게 되는 것으로 중독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독이 강해지는 것이다.


‘역시. 에드몬드의 큐브는 침범되지 않는가.’


발자크는 시커멓게 변한 대지에 섰다. 코칠라의 군세가 당황해 난동을 부리고 있다. 반면에 조란과 동맹부족의 전사들은 블라인드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있다. 그들은 어둠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진군하며 코칠라를 몰아붙였다.


‘이 정도 범위와 숫자…….’


발자크는 수인을 맺고 계산을 시작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앞으로 10분이면 청각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10분 뒤에는 후각. 촉각의 경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넉넉잡아 15분. 거기서 다시 20분 뒤에는 기감이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아를 빼앗는 것에는…… 이건 솔직히 계산이 되지 않았다. 자아의 상실은 개인의 의지력에 따라 크게 갈리기 때문이다.


사실 자아마저 상실시킬 필요성은 없었다. 앞으로 1시간이면 블라인드 안의 적들은 모든 감각이 사라져서 싸울 수 없게 될 것이다. 조건만 갖춰진다면 발자크의 블라인드는 몇만의 대군이라도 무력화시키고 몰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그 업을 짊어질 필요는 없지.’


발자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땅을 짚었다.


이 강력한 시그니처의 파훼는 사실 어렵지는 않다. 블라인드 밖으로 나가 버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골짜기라는 지형과, 몰아붙이는 아군과, 코칠라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뒤에 선 에드몬드의 존재가 적들로 하여금 장막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발자크는 큭큭 웃으며 뒤를 힐긋 보았다.


절벽의 위. 판테온의 소환수들을 통제하고 있는 로베리안이 보였다. 저 위대한 소환술사는 100마리가 훌쩍 넘는 소환수들에게 일사불란한 명령을 내리면서도 전황을 주시했고, 동시에 발자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심장에 박아 놓은 마법의 단검을 의식했다. 스스로 속임수에 능하다고 생각하는 발자크지만, 이 단검의 존재마저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법의 맹세라면 속일 수 있었을 텐데.’


발자크의 영혼은 유폐의 마왕과 계약된 것이다. 마법의 맹세일지라도 마왕의 계약을 앞설 수는 없다.


……로베리안이 심장파괴라는 확실한 수단의 단검을 쓴 것과, 지금도 쭉 감시하는 것. 결국 발자크의 맹세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은데.’


발자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땅을 짚었다. 이 전쟁에서 그는 로베리안이나 유진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 발자크의 목적은 처음부터 확실하고 올곧았다. 그가 이 어둠 속에서 속이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블라인드.”


에드몬드는 뿌득 이를 갈았다.


그도 발자크의 시그니처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 시각을 시작해서 하나하나 감각을 차단한다. 하지만 발자크와 에드몬드가 서로 죽이려도 들었던 적은 없었기에, 실제로 보고 겪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법의 독. 해독은 불가능하겠군. 간섭도 무리인가…….”


에드몬드는 마법사로서의 역량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마법사의 시그니처를 즉석에서 파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미리 알고 있던 덕에 대처는 준비해 두었다. 가급적이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에드몬드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블러드메리를 들었다.


블라인드의 어둠은 에드몬드의 큐브를 침범하지 못한다. 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에드몬드는 확실하게 시각을 보존하고 있다.


대지신의 발자국에 미리 심어놓은 마법의 눈…… 다행히 그쪽의 눈은 건재했다.


원래 생각해 두었던 것은 그 시야를 모두의 망막에 비추는 것이었는데, 최상의 대처는 쓸 수 없었다. 이미 전사들의 시각이 완전히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시각 다음으로 순차적으로 감각이 차단된다. 아무리 빨라봐야 셧다운에는 수십 분이 걸릴 터. 중독의 종류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기감의 차단까지 얼마나 걸리지?’


정확히 유추하는 것은 불가능. 지금 상황에서 가능한 최선의 대처를 할 뿐. 블러드메리의 마력이 공간에 깃들었다.


“끄으으…….”


에드몬드의 주변에 있던 주술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가급적이면 힘을 온존하고 싶었기에, 에드몬드는 주술사들의 생명을 흑마법의 제물로 삼았다.


잘게 분산된 마력이 코칠라 전사들에게 깃들었다. 그러자 전사들의 당황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여전히 그들의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아직 날이 선 기감에 의해 ‘마력’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발자크에게 간파되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와 내 마력은 완전히 같지 않다.’


에드몬드가 그러했듯, 발자크도 마력을 분산시켜 전장의 혼선을 유도할 수도 있다. 당연히 에드몬드도 그것을 경계했고, 대처는 준비해 두었다.


“네 실패다. 발자크 루드베스. 너는 결국 내 눈을 가리지 못했어.”


큐브는 침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에드몬드가 할 일은 아주 간단했다. 우선 발자크를 찾아내서 죽인다. 에드몬드는 씩 웃으며 블러드메리를 들었다. 전장 어딘가에 있을 발자크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곧, 에드몬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광범위로 마력을 탐색하고 있는데, 발자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드몬드는 그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큐브는 침범되지 않았다. 에드몬드의 모든 것이 건재했다. 그런데 왜 발자크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인가?


“같잖은 짓을……!”


ㅡ화아악!


장막 너머에서 쏟아지는 빛이 어둠을 가로질렀다. 시각을 잃은 전사들은 그 빛을 보지 못했으나, 조란과 동맹부족의 전사들은 빛을 보았다.


비처럼 쏟아지던 빛이 쓰러진 전사들을 보듬었다. 모든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지만, 죽음에 이르게 할 치명상은 호전되었다. 그렇게 생의 유예를 받은 전사들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다시 무기를 쥐었다.


“꺄아아아아!”


멜키스는 괴성을 질러대며 쿵쿵 발을 굴렀다. 그녀의 발자국이 지난 곳마다 번개가 흐르고 불꽃이 터졌다.


빠득. 에드몬드는 그 모습을 보고서 이를 갈았다. 실제로 봐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한 명의 정령술사가 3명이나 되는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단 말인가?


‘성녀를 먼저…… 아니, 당장은 오히려 내버려 두는 것이 낫나.’


다시금 냉정히 생각했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전장. 에드몬드에게 무조건 불리한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은 전쟁의 승리가 아닌 의식의 완성이다.


차단되는 감각이 있다면 다른 감각은 오히려 날이 선다. 특히 기감. 에드몬드가 전사들의 몸에 불어넣은 마력은 의식을 고양시키고 두려움 대신에 광기를 만들어낸다.


적들도 다르지 않다. 유리한 전장. 이길 수 있다는 흥분. 고취되는 사기. 쓰러져도 계속 일어서 싸우게 만드는 빛은 무조건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목숨과 목숨이 부딪치는 순간에 피어오르는 생의 불꽃이 의식과 혼을 살찌운다. 그 모든 것이 의식의 산 제물이 된다.


‘우선 백탑주부터 죽여야겠어.’


3명의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술사라니…….


대륙의 역사에서,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에서도 저런 정령술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걸어 다니는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존재만으로 전쟁의 판도가 바뀔 수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죽여야 한다.


블러드메리에서 요사스러운 붉은 마력이 흘러나왔다. ……쿠르르릉! 전진하던 멜키스의 주변 땅이 뒤흔들렸다.


[계약자여.]


“알아!”


대지의 정령왕, 야노스가 멜키스에게 경고했다. 콰르르르! 시커멓게 물든 지면에서 굵은 쇠사슬들이 솟구쳤다.


“이 멜키스 님을 죽이고 싶은 모양이지!”


사슬이 멜키스의 팔다리를 휘감으려는 순간. 멜키스는 코웃음을 치며 발을 굴렀다. 지면에서 솟구친 흙이 여러 개의 손이 되어 사슬을 붙잡았다. 동시에 멜키스는 불꽃에 휘감긴 주먹을 내던졌다.


“파이어 펀치!”


공간을 꿰뚫고 날아온 죽음의 창과 불꽃의 주먹이 서로 충돌했다.


에드몬드의 공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뒤집힌 지면, 그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대형 마물들이 에드몬드의 명령에 따라 멜키스를 덮쳤다.


“썬더볼트 킥!”


못 봐줄 자세였지만, 대충 휘두른 발길질을 따라붙은 번개가 마물들을 후려쳤다. 그 광경이 에드몬드의 어깨를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저만한 격을 지닌 주제에 저토록 품위가 없을 수가……!”


에드몬드는 진심으로 경멸을 느꼈다.


* * *


‘난감하군.’


헥토르는 혀를 차며 눈동자를 깜빡거리고, 4개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도 상황은 파악했다. 그의 영혼은 에드몬드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에, 에드몬드의 전언은 계속해서 들을 수 있었다.


몸에 가득한 에드몬드의 마력과, 여러 가지로 강화된 몸뚱이.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니 눈이 보이지 않아도 주변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 차단되지 않은 청각과 후각. 그리고 피부의 촉각과 예민한 기감. 그것들에 적극 몰입하니, 오히려 눈으로 보는 것보다 주변이 ‘잘’ 보였다. 그것은 마치 제3자의 눈으로 공간 자체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서부터는 움직임에 주저가 사라졌다. 새로 얻은 흉측한 몸뚱이로 벌이는 전투는 굉장히 자유로웠다.


과신은 하지 않았다. 헥토르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육체의 강함에 의한 오만 따위, 데스나이트에게 겪은 처참한 패배 덕에 진즉에 버렸다.


실력에 대한 오만은. ……흑사자 성에서 버렸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헥토르가 1,000번을 덤벼도 이길 수 없는, 괴물 같은 재능의 총아였다.


‘지금이라고 달라지지는 않겠지.’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헥토르는 유진을 찾았다. 왜 그런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았다. 이건 동경과 닮은, 아니, 동경인 척하는 질투였다. 그는 스스로 유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유진이 싸우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유진이 죽는 것을 보고 싶었다.


헥토르가 찾는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시안 라이언하트. 본가의 차기 가주. 그도 이 전장에 오지 않았나.


헥토르가 ‘질투’를 느끼는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재능이 있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알았다. 하지만 방계라는 환경이 헥토르로 하여금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본가의 쌍둥이는 어떤가? 그들의 자질이 정말로 헥토르만큼 뛰어났나? 헥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본가의 쌍둥이는, 흑사자 성의 숲에서 헥토르를 저지하지 못했었다…….


‘그때는 내 손으로 죽일 수 없는 상황이었지.’


이오드의 의식에서 쌍둥이는 산 제물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의 의식에서 쌍둥이가, 시안 라이언하트가 살아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무조건 특별하다 취급되던 본가도, 지금 이 전장에서는 굴러다니는 시체와 다를 것 없이 평범하단 말이다.


헥토르는 6개의 손을 흠뻑 적신 피를 털며 움직였다. 목표를 확실히 정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새로운 살의가 치솟았다.


유진을 죽일 수는 없지만 시안은 죽일 수 있다. 오히려 헥토르에게는,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를 제 손으로 죽인다는 것이 더욱 큰 상징적인 의미였다.


찾았다.


처음에는 구역질이 났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정말로 사람을 죽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준비했었다. 하지만 막상 검을 휘둘러서 사람을 죽여보니, 그런 변명은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그냥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죽여대고, 비명이 들리고…… 그런 상황에서 시안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이자, 이곳에서 결코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후욱.”


처음에는 떨리던 몸도 이제는 떨리지 않는다.


사람을 베는 것이 아주 엿 같은 기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벼린 검이 ‘진짜로’ 사람의 몸을 절단 낼 때에 손에 어떤 감각이 전해지는지, 죽음 직전의 단말마가 어떤 소리인지를 알게 되었다.


모르는 것을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시안의 심장은 쿵쿵 뛰었고 머리는 찡하고 울렸다. 그런데도 몸은 굉장히 잘 움직였고, 시야는 넓고 맑았으며, 사고는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너.”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과는 진즉에 헤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안이 유진을 떠났다. 괜히 따라가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헥토르냐?”


원주민의 가슴에 처박아 넣은 검을 뽑아냈다. 얼굴에 튄 피를 벅벅 문질러 닦으며 앞을 보았다.


이쪽으로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괴물’을 보았다. 그건,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괴물이었다. 몬스터만큼 커다란 덩치, 각기 다른 6개의 팔, 이것저것 뒤섞은 몸뚱이. 흉측한 얼굴.


하지만 눈동자가 낯이 익었다. 본래 자신의 눈동자는 아니겠지만, 시안은 저 4개의 눈동자에서 헥토르를 느꼈다.


“눈은 영혼을 비춘다고들 하던데.”


헥토르는 보이지 않는 4개의 눈동자를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 말에 시안은 퉤 침을 뱉었다.


“뒈졌으면 얌전히 사라질 것이지. 설마 그런 괴물이 될 줄이야.”


“덤빌 셈인가?”


“그럼 내가 도망쳐야 돼? 왜 그래야 하는데. 헥토르, 너는 라이언하트를 배신했어. 내가 다른 놈은 몰라도 너는 여기서 죽일 거다.”


스스로가 신기하고 기묘했다. 저런 괴물…… 을 앞에 두고 있는데,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괴물이 된 헥토르는 시안보다 족히 3배는 컸지만, 시안은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안에게 있어, 그것은 의지이자 사명이었다.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먹칠을 한 놈. 가문의 배신자. 그런 놈을 앞에 두고 뒷걸음질 치거나 도망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차기 가주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오른손으로 검을 들고, 왼손으로는 게돈의 방패를 들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입은 라이언하트의 제복. ㅡ왼쪽 가슴에서 뜨거움을 느꼈다. 본가의 문양이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것만 같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헥토르는, 시안이 입은 라이언하트의 제복과 가문의 문양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시안이 발하는 선명한 살의는 느낄 수 있었다.


다른 감각을 통해 보는 ‘눈’에서, 시안의 몸을 휘감는 새하얀 마나의 불꽃을 보았다.


그 불꽃이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기 시작했다.


* * *


자주색의 불꽃이 날개의 형태로 치솟았다.


유진의 시그니처, 프로미넌스. 흩날리는 불꽃의 깃털이 어둠을 떠돌았다. 그중 몇 개의 불꽃은 블라인드 밖으로 날아가, 절벽 위의 크리스티나와 로베리안의 곁에 두었다. 누군가가 저 둘을 공격할 때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발자크는 안 보여.’


당황하지는 않았다. 블라인드를 파훼하는 것에 가장 빠른 방법은 술사인 발자크를 직접 죽이는 것. 그러니 발자크는 블라인드가 유지되는 동안 몸을 감추고, 에드몬드의 의식에 간섭해 방해에 전념하기로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물론 유진은 그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기에, 미리 받아 둔 마법의 단검을 의식했다.


만약 이 의식이 변화하고, 그것에 발자크의 소행이라면. 유진은 아무런 주저 없이 발자크의 심장을 찢을 것이다. 그 사태를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프로미넌스의 깃털을 사방에 뿌려놓았다.


‘……시안.’


유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몇 개의 깃털은 시안의 근처에 두었다. 만약, 시안이 위험한 상황에 개입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시안은 뭔지 모를 괴물과 전투 중이었다.


‘내가 가서 죽여줘야 하나?’


헥토르, 라고 했다. 설마 저런 꼴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만.


싸우는 것을 보니 시안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상대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시안이 잘 싸우고 있다. 위험한 순간마다 게돈의 방패를 활용해 공격을 흘려내고, 미세한 틈을 파고들어 헥토르에게 검을 찌르고 있다. 시안이 일으키는 백염식의 불꽃은 선명했으며, 지금도 점점 불꽃이 커지고 있었다.


결국 유진은 시안에게 이동하지 않았다. 헥토르와의 싸움이 시안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장 유진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의식을 진행 중인 에드몬드를 죽여야 한다. 놈의 큐브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하지만, 성검으로 일으키는 빛이나 월광검이라면 그 잘난 큐브도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올 줄 알았다.”


유진은 망토 안에 손을 넣으며 중얼거렸다.


어둠을 가르며 다가오는 데스나이트가 보였다.


“수작이 하찮네.”


데스나이트가 이죽거렸다. 그는 언데드다. 오래전에 죽은 몸. 심장은 뛰지 않고, 눈은 원래부터 안 보인다. 감각이란 것이 진즉에 상실된 존재란 말이다.


시체를 일으켜 만든 데스나이트는 블라인드 속에서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데스나이트는 눈동자를 찡그리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꼬마야. 내가 저번에는 잘 싸우지 못했…….”


“변명이 기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웃음. 데스나이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확실히.”


데스나이트가 검을 뽑았다.


대지신의 발자국


마나를 쓸 수 없는 몸이지만, 그럼에도 데스나이트는 마나의 흐름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는 베르무트의 불꽃. 정작 300년 전에, 저 불꽃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라이언하트 가문이 세워지고서 저 불꽃에는 ‘백염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해 듣기론 코어를 별로 셈해서 경지를 가른다던데…….


‘자주색 불꽃…… 베르무트와는 다른 방법으로 마나를 제련한 건가. 아니면 베르무트에게서 시작된 마나수련법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건가.’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데스나이트는 저 불꽃에서 특별함을 느꼈다. 흩날리는 불씨 하나하나가 터무니없을 만큼 고농도의 마나였다.


게다가 불꽃이 다가 아니다. 파직거리며 튀는 번개…… 순수한 마나와는 달리, 정말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번개가 불꽃에 섞여 있다.


‘……등 뒤에 저건 또 뭐야? 날개인가?’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유진의 등 뒤에서 높이 뻗어 있는 불꽃의 날개였다.


눈으로 보기에는 날개…… 처럼 보이는데…… 1장만 돋아 있는 것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아무리 봐도 하늘을 날기 위한 날개는 아닌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를 위한 날개일 텐데. 데스나이트는 외날개가 가진 의의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마나의 발현은 아니다. 무언가 마법일 텐데, 데스나이트는 마법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300년 전에는. 살아 있을 적에는, 마법에 무지해도 되었다. 데스나이트가 마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마법에 대응해 줄 동료가 있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이를 뿌득 갈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저번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몸이 잘, 아니,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었다. 300년이 긴 시간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도. 이 시대에서 태어난 놈이 아무리 날고 긴들, ‘나’를, ‘하멜’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길 수 있다. 이겨야만 했다.


베르무트 본인도 아니고, 놈의 까마득한 후손에게 패배하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의 발이 땅을 밀었다. 찰나에 파고들어서, 몸을 벨 생각이었다.


유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당황은 짧았다. 시체에게는 모순된 말이겠지만, 예민한 감각이 마나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데스나이트는 즉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용격창 카르보스. 베르무트가 저 창을 쓸 때에는 언제나 났었는데…… 사각을 찔러 온 ‘창’은, 데스나이트의 기억과 달리 요란한 소리는 내지 않았다.


“기분 나쁜 놈.”


저번에는 위니드를 썼었는데. 이번에는 검이 아니라 창이라고? 상대를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데스나이트는 짜증과 분노를 느끼며 검을 움직였다. 유진의 창이 그러했듯, 데스나이트의 검도 소리 없이 움직였다.


칼날을 휘감은 마력은 요란하게 덩치를 불리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는 궤적이 어느 순간 번쩍 튀었다.


“수라광살.”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지럽게 얽혀 오는 칼날의 난무. 의외로 낯설지는 않았다. 라이언하트의 지하에 있던 암실. 유진은 이미 그곳에서 ‘하멜’과 싸워본 적이 있었다.


오히려 그때 싸웠던 하멜의 검이 더 날카롭고, 빨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암실의 하멜은 유진의 심상을 투영했던 존재다. 유진이 하멜일 적에 추구하고, 이상으로 두었던 경지에 몇 걸음 다가간 존재였다.


지독하게.


정말 지독하게 암실의 ‘나’에게 죽었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죽은 횟수만 해도 수십 번은 훌쩍 넘을 것이다.


그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수라광살, 이라고 이름 붙였던 저 난무에 허점은 없다. 고질적인 버릇이 있는 것도 아니다. 허점이 없으니 그곳을 찔러 파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대응하는 법은 안다. 연속된 난무가 덮쳐온다면, 이쪽도 똑같이 상대하면 된다. 유진은 발을 뒤로 끌며 용격창을 양손으로 잡았다.


수라광살은 무조건 검으로 펼쳐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직선의 창이 흔들렸다.


이윽고 창이 수십으로 나누어졌다. 흔들린 불꽃이 제각각의 창을 만들었다. 검이 벤다. 창이 찌른다. 검이 찌른다. 창이 때린다. 완전히 다른 무기가 만드는 난무가 얽혔다.


‘당연히’ 데스나이트의 검이 뒤로 밀려났다.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펼치는 기술로는 유진을 절대로 압도할 수 없다.


데스나이트가 어쩔 수 없이 발을 끈 순간. 앞으로 찌르던 용격창의 끝에 빛이 모였다.


꽈아아앙!


창끝에서 포격이 쏘아졌다. ……밀리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으나, 용격창의 포격은 예상했다. 데스나이트는 굳은 얼굴로 몸을 회전해, 브레스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포격을 예상했기에, 데스나이트는 즉시 공격을 연계할 수 있었다.


손을 감싸고 있던 검은 마력이 부풀어 올랐다. 삼킨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무한연옥이 마력의 검강으로 펼쳐졌다.


그 순간에 유진의 손에는 어느새 다른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톱날 같은 칼날을 가진 포식검 아스펠이었다.


콰가각! 아스펠은 마력의 검강을 너무나도 쉽게 베어냈다. 그렇게 유진은 더 앞으로 나와서 데스나이트의 가슴에 아스펠을 휘둘렀다.


방어로 두르고 있던 마력이 깎여나갔다. 데스나이트는 더는 물러서고 싶지 않아서, 아스펠의 궤도에 칼날을 끼워 넣었다.


까앙! 둔탁한 쇳소리. 유진은 미련 없이 아스펠을 거두었다.


다시 무기가 바뀌었다.


커다란 망치. 분쇄추. 데스나이트의 눈동자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저 무기를 모를 리가 없잖은가.


‘위니드에 카르보스, 아스펠, 거기에 분쇄추까지?’


마왕의 무구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베르무트뿐이었는데. 후손인 놈도 분쇄추를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아니ㅡ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저놈이 어떻게 분쇄추를 쥘 수 있느냐가 아니다.


창에서 검. 검에서 해머. 완전히 다른 무기들이다. 다루는 법은 물론이고 간극의 변화가 잠깐의 끊기는 일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다.


……저번의 위화감이 더욱 강해졌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라서? 그런데, 왜.


‘왜 베르무트가 아니라 날 닮은 거냐.’


꽈직! 휘둘러 친 분쇄추가 데스나이트의 몸을 하늘로 날려 버렸다. 마력을 둘러 방어하기는 했다만, 분쇄추의 위력은 데스나이트의 몸뚱이를 찌르르 울리게 만들었다.


후욱.


유진이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왔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과거에 이렇게나 빠르던 놈이 몇이나 있었지? 아니, 있기는 했나?


빠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꽈앙! 망토에서 뽑혀 나온 공격이 데스나이트를 더욱 먼 곳으로 밀어냈다. 위니드. 뒤따른 폭풍이 데스나이트를 덮쳤다. 그는 폭풍을 눈으로 쫓으며 검을 휘둘렀다.


베일리 없는 바람이 베였다. 바람이 검에 휘감기며 궤도를 바꾸었다. 저런 식으로 공격을 흘려내는 패링은 하멜의 특기였다. 유진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데스나이트에게 가까이 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진은 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멜리아 머윈이 듣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내가 하멜이라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직접 말해줄 수 없기에 더더욱, 저 개새끼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부정해 주고 싶었다.


다시 검과 검이 얽혔다. 데스나이트는 방금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유진의 검을 흘려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위니드는 데스나이트가 유도하는 흐름을 겉돌면서 오히려 데스나이트를 희롱했다.


또, 밀린다. 데스나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촤라락! 검과 몸에서 치솟은 마력이 위니드를 붙잡아왔다. 유진은 위니드를 비틀었다. 폭풍과 불꽃이 어우러졌다. 붙잡으려는 마력이 오히려 유진의 힘에 붙들렸다.


검이 더 움직이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급히 왼손을 펼쳐 유진에게 뻗었다. 시커먼 마력이 유진의 몸을 꿰뚫으려 했으나, 그 또한 유진의 손에 가로막혔다. 불꽃이 벽이 되어 데스나이트를 가로막았다.


불꽃의 벽 너머, 유진의 망토가 펄럭였다. ㅡ꽈아아앙! 망토 안에서 벼락의 화살이 쏘아졌다.


뇌광궁 카르보스. 직접 꺼내지 않고 쏜 화살은 데스나이트를 관통하진 못했다. 대신 그의 몸을 다시 한번 하늘 높이 날려버렸다.


“크륵…….!”


데스나이트는 입술을 씹어대며 검을 치켜들었다.


뛰지 않는 심장에서 ‘문’이 열렸다. 이곳과 한참 멀리 떨어진 사막의 지하 깊은 곳. 아멜리아 머윈이 지배하는 마왕의 마력이, 아득한 공간을 뛰어넘었다. 활짝 열린 문에서 끝없는 마력이 쏟아져나왔다.


콰아아아! 데스나이트의 검이 마력에 휘감겼다. 너무 강한 마력이 검신과 칼자루를 소멸시켰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는 여전히 ‘검’을 쥐고 있었다. 순수하며 파괴적인 마력의 결정이 검이 되었다.


그 검이 내뿜는 위압감과 흉흉함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분쇄추를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환히 빛나는 성검, 알테어가 뽑혀 나왔다. 대지신의 발자국을 뒤덮은 블라인드의 어둠. 그 한복판에서도 데스나이트의 시커먼 마력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력의 검이 어두웠으나, 유진의 성검은 눈부시게 빛이 났다. 유진은 성검을 천천히 들며 백염식을 운용했다. 6성의 백염식. 자색의 불꽃이 성검의 빛을 뒤덮었다.


드라고닉 가(家)의 비기, 공검(空劍).


검강이 중첩되기 시작했다. 3중첩을 이뤄낸 순간, 성검을 뒤덮은 검강에 흑점(黑點)이 번져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성검이 박살 나기라도 할 것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지금 성검에 집중된 힘이 강했다.


‘저건 뭐지?’


아래를 보던 데스나이트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저 기술은 하멜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베르무트의, 라이언하트의 것인가?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기술은 위험하다. 데스나이트 본인도 통제가 가능할까 싶은 터무니없는 힘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흐르고 있다. 그러한 힘의 흐름에는 군더더기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했다.


“……하하!”


공검을 본 데스나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베르무트의 후손에 대한 증오. ‘하멜’의 것을 제멋대로 익혀버린 것에 대한 분노. 그에 말미암은 살의. 그따위 감정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오히려 희미해졌다. 데스나이트가 되고서 똑바로 자각한 적이 없는 즐거움이ㅡ 데스나이트를 웃게 만들었다.


하멜다운 미소였다. 데스나이트는 낄낄 웃으면서 검을 내리찍었다. 하늘에서부터 그어지는 시커먼 선이 세상을 양단할 기세로 유진에게 떨어졌다.


성검을 어깨높이까지 들었을 때. 중첩이 끝난 공검이 안정되었다.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휘두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낄낄대는 데스나이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몸으로, 저 얼굴로, 저 목소리로, 아니스를, 세냐를, 모론을, 베르무트를 증오한다 내뱉은 주제에. 자기가 정말로 하멜이라도 된 것처럼 웃어대는 것에 살의를 느꼈다.


‘한 번 더.’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공검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공검에 가득 번지던 흑점. 본래는 터지면서 불꽃 전체를 시커멓게 물들이나, 지금은 달랐다.


검강이 4번 중첩되었을 때. 흑점은 터지지 않고 크게 번졌다. 그리고 불꽃을 완전히 검은색으로 만들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혼이 빨릴 것만 같은 시커먼 불꽃이 성검을 뒤덮었다.


데스나이트의 검이 유진에게 닿는 순간. 그때야 유진은 검을 휘둘렀다.


본래라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머리가 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진의 공검이 4중첩을 이룬 순간부터ㅡ 유진이 중심에 선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힘’이 느려졌다. 순수한 마력으로 이뤄진 검도, 유진의 공검이 만들어낸 흐름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마력의 검이 느리게 흘렀기에.


공검이 휘두르는 것이 늦지 않게 되었다. 통제되던 힘이 폭발했다. 어둠이 뒤흔들렸다. 데스나이트의 검은 공검에 닿는 순간 흩어지며 소멸했다. 세상을 양단해 버린 것은 데스나이트의 검이 아닌, 유진의 검이었다.


‘죽는다.’


그렇게 생각했다. 저 시커먼 불꽃은 마력을 소멸시키고서도 힘이 줄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즉시 몸을 뒤로 밀어내면서 왼손으로 심장을 짚었다. 망설일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죽는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지?


이그니션을 쓴들 이길 수 있나?


나는, 여기서 죽어도 되는 건가?


주입했던 기억에 현실이 깃들었다. 투영했던 인격에 자의가 생겼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 따위는 과거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데스나이트에게는 아니스도, 세냐도, 모론도, 베르무트도 없었다.


그렇기에 혼자서 해야 한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여기서 한 번 더 죽을 수는 없다. 아직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구부린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뛰지 않는 심장을 손끝으로 느꼈다.


코어 대신에 존재하는 마력의 문. 이미 활짝 열려 있지만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데스나이트는 손으로 직접 그 문을 찢고 비틀었다.


이그니션.


확장된 문에서 마력이 쏟아져 나온다. 그 순간에 데스나이트의 머릿속에서 빛이 터졌다. 비틀어 넓힌 문과 함께 사고가 활짝 열렸다.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그는 악을 쓰면서 마력으로 다시 검을 만들었다. 몇 초 전에조차도 마력은 강력했으나, 이그니션을 쓴 지금의 마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격렬한 마력이 다시금 검이 되었다. 이 순간에는 ‘하멜’이어야 하는 자존심 같은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죽고 싶지 않아서. 죽으면 안 돼서.


이그니션이 더해진 마력이 공검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이미 죽어 있는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찢어진 문에서 쏟아지는 마력이 데스나이트의 몸을 활활 태웠다. 데스나이트는 붉고 어둡게 변한 시야 속에서 유진을 찾았다. 성검을 쥔 유진과 데스나이트의 눈이 마주쳤다.


유진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전생의 얼굴을 노려보면서, 유진은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여 주었다.


“개새끼.”


등 뒤의 프로미넌스가 불타올랐다.


공간도약. 처음 한 번 빼고는 사용하지도 않았다. 저 개새끼가, 자신이 잘한다고 착각하는 방식으로 찢어 죽여주기 위해서였다. 이그니션? 너 따위가. 욱하고 치미는 감정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에 손을 얹게 만들었으나, 직전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그니션을 쓸 상대가 아니다. 저깟 새끼에게? 뭐 하러? 유진은 데스나이트를 죽이는 것에 이그니션을 쓸 생각이 없었다.


흩날리던 깃털들이 유진에게 연동되었다. 심장과 코어를 폭주시키지 않는 대신, 프로미넌스로 이그니션을 대체했다.


밀어내고 있다.


실제로 ‘잠깐’이나마 밀어낸 것은 사실이었다. 언데드, 데스나이트의 육체를 붕괴시킬 만큼의 마력이 공검의 전진을 가로막고,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이겼다.’


아주 잠깐, 데스나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확신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얻지 못했다. 오히려 사라지고 부정되었다. 프로미넌스로 증폭된 힘이 데스나이트의 마력을 전소시켰다.


블라인드의 어둠이 한순간 걷혔다. 유진의 검이, 장막이 드리운 공간 전체를 통째로 베어버린 것이다. 참격의 한복판에 있던 데스나이트는, 그 순간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무참한 현실만을 인지했다.


검이 소멸했다. 마력이 소멸했다. 유진의 검이ㅡ 데스나이트의 몸을 잘랐다. 절단…… 아니, 소멸. 데스나이트의 하반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치명상. 끝이 아니었다. 하반신을 지워버린 불꽃이 아직 남은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


데스나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무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난…….”


연속되는 의문. 데스나이트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내가…… 졌다고? 너한테?”


어느새 유진은 데스나이트의 앞에 있었다. 데스나이트는 시커먼 마력을 피처럼 흘리면서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간절하게까지 느껴지는 손짓. 유진은 그에 호응하듯 똑같이 손을 뻗어주었다.


무력하게 허우적거리는 데스나이트의 손과 달리, 유진의 손바닥에는 마나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불꽃과 결합하며 자그마한 태양을 만들었다. 이윽고 태양에 흑점이 번지며 검게 물들었다.


‘아.’


이클립스가 데스나이트의 손을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성검이 데스나이트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건…….”


성검이 관통한 심장이 소멸했다. 이클립스의 불꽃이 남은 육신을 통째로 삼켜갔다. 데스나이트는 그 모든 것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못 이기겠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이클립스가 남은 육신을 모조리 재로 만들었다. 유진은 흩어지는 재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못 이기지 새끼야.”


과거의 망령. 심지어 진짜도 아닌 가짜. 그딴 놈을 죽이는 것에 힘겨움을 느꼈다면, 환생하고 살아온 모든 시간이 허무하지 않은가.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성검을 내렸다.


대지신의 발자국


마력의 사슬이 멜키스의 팔다리를 꽉 묶었다. 실제 몸뚱이였다면 뼈마디가 박살 나겠지만, 시커먼 마력에 붙들린 팔다리는 진짜 몸뚱이가 아니다.


흙으로 빚은 팔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마력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아예 포기해 버린 것이다.


리스크를 감수한 행동도 아니다. 흙으로 무너지던 팔다리가 즉시 몸뚱이에 달라붙어 새롭게 형성되었다.


‘집요하게 노려대기는, 기분 나쁜 자식……!’


인피니티 포스의 중심.


멜키스는 정신을 집중하면서 표정을 찌푸렸다. 전선의 끝에서부터 흑마법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


에드몬드 코드렛, 그 개자식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안전한 곳에서 멜키스의 목숨을 노려왔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지면을 덮은 어둠이 멜키스로 하여금 대지의 정령왕의 힘을 억제하고 있다. 어둠에서부터 전해져 온 흑마법이 인피니티 포스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고, 중심핵으로 기능하는 멜키스를 노리고 있다.


물론 멜키스는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대지의 정령왕과 번개의 정령왕 둘뿐이었다면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아니, 에드몬드가 동원하는 화력을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피니티포스라면 버틸 수 있다. 버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필요한 순간에 반격도 도모할 수 있다.


……파지직! 인피니티 포스의 머리에서 피뢰침 같은 길쭉한 막대가 치솟았다. 거체에 깃든 막대한 에너지가 피뢰침의 끝에 집중되었다.


번개와 불꽃이 하나로 섞였다. 목표는 큐브, 에드몬드 코드렛. 집중된 에너지가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레이저로 쏘아졌다.


콰르르르르르! 관통해 오는 에너지가 심상치 않았다. 에드몬드는 혀를 차며 방어마법을 전개했지만, 그 순간에 장막 너머에서 빛이 추락해 왔다.


거인이 휘두를 것처럼 커다란 빛의 검ㅡ 숫자만 해도 수십이었다. 추락한 빛의 검이 에드몬드의 방어마법을 찢어발겼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역대 성녀의 뼈와 살을 피로 뭉쳐 만든 흉측한 인형. 장막의 너머, 절벽 위에서 8장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보았다.


……저따위 조악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인형 따위가, 저만큼의 성능에 도달했단 말인가?


“모조품 주제에……!”


에드몬드는 분노와 짜증을 담아 노성을 내질렀다.


콰아아아! 멜키스가 쏘아낸 레이저가 에드몬드가 선 지역에 도달했다. 큐브의 보호를 받지 못하던 주술사들. 설령 그들이 만전의 상태였을 지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테지만, 주술사들 대부분은 이미 에드몬드의 마력 배터리 역할을 수행하여 탈진 상태였다.


탈진한 주술사들은 지역을 통째로 휩쓸어버리는 레이저에는 아무런 방어도 세우지 못했다. 번개와 불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큐브 외에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이 정도의 공격이 직격당한 것인데도 큐브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좋지 않아.’


에드몬드는 블러드메리를 들면서 생각했다.


블라인드에서의 교전이 길어지고 있다. 이미 블라인드는 전사들의 시각과 청각과 후각을 빼앗았다. 아직 기감은 살아 있어서 피아의 구분은 가능했지만, 전사들의 사기는 이미 나락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적탑주의 소환수들…… 시체를 집어삼키고 영혼을 가두는군.’


의식에 치명적이지는 않다만 거슬린다. 역시 절벽 위에 있는 적탑주와 성녀부터 죽여야 하나? 직접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의식의 중심인 에드몬드는 대지신의 발자국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릴 수밖에. 우선, 에드몬드는 자신의 의식을 나누었다. 하나는 의식을 집도한다. 다른 의식으로는 네크로맨시 마법에 집중했다. 익숙하고 즐기지 않을지라도, 네크로맨시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죽은 시체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네크로맨시 마법이 포착한 것은 코칠라의 시체뿐만이 아니었다. 조란과 동맹 부족 전사들의 시체도 언데드가 되어 일어섰고, 죽은 마물들도 다시 일어서서 날뛰기 시작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보았다. 네크로맨시 다음의 흑마법은 아직 살아서 전투 중인 전사들을 노렸다.


혼의 순도를 떨어트리고 싶지 않아 쓰지 않으려 했다만…… 전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 이상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광폭화. 전사들에게 심어두었던 마력이 이성을 혼탁하게 만들고 육체를 강화했다.


전사들이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강화된 손발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손톱과 발톱으로 돋아났다. 부푼 근육은 적의 공격에 맞아도 깨지거나 터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될 줄이야……!”


에드몬드는 분노로 몸을 떨며 내뱉었다.


변수를 최대한 걸러내고 통제하고 싶었기에 사마르에 왔는데.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변수들이 날뛰고 있다.


특히 짜증 나는 것은, 저 멜키스 엘하이어를 빠르게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총공격을 쏟아부었다면 모를까. 의식의 주관과 정령왕 3명과 동시에 계약을 맺은 대정령사를 죽이는 것은 동시에 하기 버거웠다.


게다가 그 화력마저도 신성력에 의해 억제당하고 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로사리오를 움켜쥐고 있었다.


에드몬드가 공격을 가할 때마다 크리스티나의 신성력이 간섭해 온다. 완전히 정화해버리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위력을 줄이는 것은 가능했다.


‘죽여야 할 연놈이 너무 많다.’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쭉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발자크도 거슬린다…….


놈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단순히 블라인드를 유지하기 위해 모습을 감춘 것인가? 아니면, 결정적인 순간에 의식을 찬탈하기 위한 수작에 집중하는 건가.


‘하멜.’


에드몬드는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데스나이트를 찾았다. 우선 그의 손을 빌려, 절벽 위에 있는 성녀와 적탑주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스스로를 하멜이라 자처한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할 터.


‘하멜.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절벽 위로 올라가서 성녀와 적탑주를…….’


꽈아아앙! 커다란 소리가 에드몬드의 귀청을 찢었다. 공간의 어둠 전체가 요동쳤다. 세상을 박살 내는 것만 같은 폭음 직후, 번쩍하는 빛이 한순간이나마 어둠을 밝혔다.


다시 블라인드가 빛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에드몬드는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이해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이 한순간이나마 세상을 갈라 버린 것이었다.


‘하멜?’


에드몬드는 급히 데스나이트를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데스나이트가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목소리를 전했던 대상이 아예 지정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 300년 전의 영웅의 시체를 개량해 만든 데스나이트가ㅡ 이 전장에서 소멸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에드몬드는 경악해서 내뱉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강하다는 것은 안다. 저번의 짧은 교전에서 데스나이트는 유진에게 우위를 점하기는커녕 오히려 밀렸었다.


하지만. 유진이 그러했듯, 데스나이트에게도 여력이 많았다. 전력을 다해 싸운다면 결과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패배의 가능성? 염두에는 두었다만 확신은 갖지 않았다.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 우둔한 하멜로 만든 데스나이트다. 육체의 성능보다는 하멜 본인의 기억을 투영한 전투능력을 극대화시켰단 말이다.


그런 데스나이트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패배하고 소멸했다고? 성검의 인정을 받았을지라도, 아직 21살의 어린것에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헬무드의 다른 존재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만큼, 아멜리아 머윈에게 빌려 온 데스나이트는 에드몬드에게 있어서 전력의 큰 축이었다. 그 데스나이트가 너무 빨리 소멸당해 버렸다.


‘함께 죽는 것은 바라지도 않아. 최소한 치명상이라도…….’


에드몬드는 즉시 탐색마법을 펼쳤다. 유진이 치명상을 입어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이기를 바랐지만ㅡ 현실은 에드몬드에게 너무나 무자비했다.


치명상은커녕 작은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친 기색도 크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탐색마법으로 지켜보던 에드몬드와 유진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에드몬드는 자신도 모르게 블러드메리를 움켜쥐었다.


‘헥토르!’


데스나이트와 비교할 수 없이 하찮은 힘이다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그 헥토르조차도 부름에 바로 응답하지 않았다.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에드몬드는 헥토르가 교전하는 상대를 파악하고 분노했다.


“시안 라이언하트? 기껏 몸까지 새로 만들어주었는데, 저딴 애송이한테 붙들려 있다고?”


나누었던 의식들을 총동원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했다.


곧 결론을 내렸다. 미련을, 욕심을 버려야 한다. 처음에 생각했던 이상적이고 완벽한 의식은 이미 실패했다. 전면전에서 의식을 완성시키려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의식에 분산시킨 힘이 너무 많다. 완벽을 추구하던 탓이다. 시간 벌이는 충분할 것이라 계산했는데ㅡ 적의 힘이 너무 거세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것이 실패해버린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에드몬드는 블러드메리를 양손으로 잡고서 마력을 집중했다.


진행 중인 의식의 술식에 간섭했다. 제물로 쓰이는 피와 혼은 양보다 질을 추구하였는데, 더 이상 제물의 질을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제물의 숫자를 빠르게 늘린다. 에드몬드의 입술이 움직였다.


광폭화에 걸려 싸우던 전사들의 움직임이 다시금 바뀌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인간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철저하게 산 제물을 수급하기 위해. 그리고 최후에는 자기 자신들이 제물이 되기 위해 날뛰기 시작했다.


이곳, 대지신의 발자국뿐만이 아니었다. 한참 떨어진 코칠라의 수도. 에드몬드의 흑마법은 토맥을 역류하여 수도에서도 펼쳐졌다.


수도에 전사들은 남아 있지 않다. 전선에서 물러선 늙은이들과 여자, 어린아이가 대부분이다.


흑마법이 그들의 정신에 깃들었다. 이성을 상실한 광인들이 서로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뽑아냈다. 삽시간에 코칠라의 수도에서는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의식이 가속된다. 수도에서 흐른 피와 영혼은 토맥을 타고서 대지신의 발자국으로 공양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에드몬드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원했던 만큼의 격을 가진 대마왕은 될 수 없겠지만ㅡ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인간을 벗는다.’


에드몬드가 간절히 바라던 비원이 그것이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 대마왕이 아닌 그냥 마왕일지라도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것은 맞으니, 타협했을지언정 비원은 이룰 수 있게 된다.


‘모든 제물이 충족되기까지 길어야 10분. 그 정도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지.’


의식의 내용을 바꾸었으니, 더는 멜키스를 억제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마음대로 날뛰어주어야만 제물의 수급이 빨라진다.


로베리안의 소환수들이 이곳에서 제물을 수급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정도밖에 안 된다. 수도에서 밀려올 막대한 피와 혼은 어떻게 막을 텐가?


‘내가 이겼다.’


추구하던 이상도 버렸으니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에드몬드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블러드메리를 들었다. 의식을 단순하게 바꾼 만큼, 에드몬드 본인의 마력은 강해졌다. 거기에 멜키스의 억제도 포기한 만큼, 이제는 에드몬드도 전력을 다해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순수한 마력이 시커먼 손이 되어 일어섰다. 닿는 것을 모조리 멸해버리는 죽음의 손이 앞으로 향했다.


만약 여기서 의식이 실패해 버린다면. 그 원인은 하나뿐일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에드몬드는 아까 전, 데스나이트를 죽이는 데 사용되었던 ‘힘’을 경계했다.


……그 힘일지라도 큐브를 침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유진을 제물로 삼고 싶었다. 의식의 많은 것을 포기하기는 했다만, 저만큼 강한…… 특별한 혼이라면. 단순하게 바꿔버린 의식을 조금이라도 고차원적으로 진화시켜줄지도 모른다.


파앗! 불씨만 흩날리던 허공에서 돌연 유진이 나타났다.


‘마법…… 저런 마법은 모른다. 직접 창작한 시그니처? 깃털을 좌표 삼아서…… 그렇군.’


마법에 입문한 지 5년도 되지 않은 애송이가, 대마법사의 격에 도달해서…… 저만큼이나 수준 높은 시그니처를 만들어냈다고?


“존재 자체가 불합리하군.”


평생 인간에게 질투심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저 불합리한 젊은이에게는 솔직히 질투심이 든다.


그렇기에 더더욱, 죽여서 제물로 삼고 싶었다. 마법사다운 이론 따위는 없다. 그러나 에드몬드는 확신했다.


유진 라이언하트를 제물로 삼을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영락시킨 의식을 통해서라도 대마왕의 격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와라.”


에드몬드는 죽음의 손을 유지하며 내뱉었다. 쿠르르르! 죽음의 손이 유진에게 전진했다. 점점 덩치를 키워가는 손은, 유진에게 닿으려는 때에는 절벽의 일면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그만큼 거대한 손이 파도처럼 덮쳐오지만, 유진의 행동은 아주 단순했다. 성검은 이미 손에 쥐고 있다. 프로미넌스로 대체한 이그니션도 유지 중이다. 마나는 이미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다.


사자의 갈기가 휘날렸다. 성검을 덮은 불꽃에 흑점이 번졌다. ㅡ꽈아앙! 일직선으로 그은 참격이, 전진하던 죽음의 손을 통째로 베어버렸다.


고작 마법 하나가 파괴된 것뿐. 에드몬드에게 타격은 없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마력을 일으켰다. 큐브를 중심으로 한 이 공간은 이미 에드몬드의 영지였다. 그는 한 호흡에 수백의 마법을 동시에 펼칠 수 있었고, 그렇게 펼치는 마법 모두가 인간 하나쯤은 너무나 쉽사리 죽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를 증명하듯, 마법이 실체화되었다. 유진은 망토 속에서 아카샤를 쥐었다. 발현되는 모든 마법들. 무작정 펼치는 것이 아니다. 마법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넓은 공간에 마법에서 벗어날 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진 님!]


망토 속의 메르도 유진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보조에 특화된 메르조차도 에드몬드에게서 마법적인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몬드가 가진 마법사로서의 역량, 격, 모든 것이 유진보다 우월했다. 마법으로 싸운다면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그 사실은 유진에게 조금도 절망적이지가 않았다. 유진의 무기는 마법뿐만이 아니다.


흑마법이 사방을 덮쳐오는 순간. 유진은 망토 속에서 쥐고 있던 아카샤를 놓아버렸다. 그리고 다른 칼자루를 쥐었다.


‘저건…….’


망토에서 무언가가 뽑혀 나왔다. 칙칙한 회색빛이 어둠 속에서 번져갔다. 연계된 마법이 모조리 유진을 덮쳤으나,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회색빛이 움직이니 마법이 더는 유지되지 않았다. 마법의 근원들이 달빛에 먹혀 사라졌다.


‘뭐지?’


에드몬드는 자신도 모르게 큐브를 뒤로 이동시켰다.


싸아아악! 휘두른 달빛이 초승달을 그렸다. 마력은 달빛을 가로막지 못했다. 닿는 순간 소멸해 버리는데 잘 짜인 마법이 무슨 소용인가?


“……설마…….”


에드몬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왕성 바벨. 그곳의 특별기록실에서 읽었던 자료에…… 저와 비슷한 ‘검’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300년 동안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검. 역사에 기록조차 되지 않은 저 검이 왜 하필 이곳에 있느냔 말이다.


“월광검……?”


에드몬드는 믿을 수 없어서 내뱉었고, 유진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웃었다.


“잘 아나 보네?”


그 대답에 에드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지신의 발자국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월광검은 대륙의 그 어느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베르무트 본인도 헬무드에서 돌아온 후로 월광검을 꺼내거나 누군가에게 보인 적이 없었으며, 라이언하트 가문에도 월광검을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존재가 말살된 검이지만, 바벨의 특별기록실에는 월광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이 남긴 기록이다. 사실 그것은 기록이라기보다는 가비드 개인의 집착이었다. 그는 월광검을 두려워했고, 월광검을 질투했으며, 월광검에 집착했다.


이유는 에드몬드도 알고 있다. 가비드가 가지고 있는 마검, 글로리는 베르무트의 월광검을 뛰어넘지 못했다.


월광검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베르무트에게서도 사라져 버렸을 때. 가비드는 베르무트가 월광검을 파괴하거나 봉인했을 것이라 생각했고, 수백 년 전까지는 월광검의 소재를 탐색했었다.


하지만 가비드는 도중에 탐색을 그만둬 버렸다. 이미 죽은 베르무트에 대한 패배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이미 가지고 있는 글로리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나, 가비드는 도중에 월광검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당시의 기록은 특별기록실에 남았고, 에드몬드는 그 문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월광검. 검의 형상을 한 파멸. 불길한 달빛을 내뿜는 검. 저 검은 마나는 물론이고 마력까지 소멸시킨다. 대마왕의 마력일지라도 월광검의 권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이럴 수가……!’


월광검의 정체를 알고 있기에 동요는 더욱 컸다.


유진의 힘이 아무리 강하고, 그가 성검을 휘두를지라도 큐브의 방어가 뚫리지 않으리란 자신이 있었다. 성검이 내뿜는 신성력이라 봐야 당장 이곳에 실재하지도 않는 빛의 신의 권능이고, 에드몬드는 그 모호한 신적 존재의 힘이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월광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저 검에 깃든 힘은 모호한 신성력 따위가 아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파멸적인 힘. 불길하다는 기록대로였다. 저 칙칙한 회색의 달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에드몬드를 위기감을 주었다.


가까이 다가오게 해서는 안 된다. 에드몬드는 즉시 마법을 일으켰다. 겹겹이 펼쳐진 방어결계가 큐브의 앞을 가로막았다. 공간에 침투시킨 마법들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유진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달빛이 뿌려졌다. 유진은 덮쳐오는 마법들을 소멸시키며 앞으로 전진했다. 월광검이 마법을 상대로 큰 우위를 점하는 것은 맞지만, 이만큼 강한 힘이라면 스스로에게도 부담이 된다. 그 베르무트조차도 월광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지 못했었다.


지금 유진이 가진 월광검은 완전하지 않다. 고작해야 1/3 정도의 파편의 덩어리일 뿐. 그만큼 부담이 줄기는 했지만, 위력도 줄었다. 저만한 격의 흑마법사가 펼치는 마법을 일검에 말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카샤는 마법을 이해하게 해준다. 흑마법이 발현도 되기 전부터 유진의 눈에 보이고 있다. 유진은 마법 간의 연결을 끊으면서 에드몬드와의 거리를 좁혔다.


블러드메리가 사악한 빛을 발했다. 저 마법지팡이는 아카샤와 마찬가지로 드래곤하트를 통째로 사용했다. 하지만 깃든 권능은 다르다.


아카샤의 권능은 마법에 대한 이해. 익힌 적 없는 마법을 이해하게 만들고, 기존의 마법을 권능적으로 이해시켜 최적화시킨다.


블러드메리의 권능은 아카샤보다 난폭하고 전투적이다. 마법을 이해시키는 것보다는 힘과 격으로 찍어 누르게 만드는 것이 블러드메리의 권능이다. 똑같은 마법을 펼칠지라도 블러드메리로 펼친 마법이 ‘무겁다’.


쿠우웅! 휘두르던 달빛이 가로막혔다. 허무하리만큼 쉽게 베어지던 마법들에 블러드메리의 권능이 실리니, 월광검으로도 쉽게 베어지지 않았다.


유진은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저 블러드메리를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유폐의 지팡이라 불리던 리치, 베리알. 놈의 마법을 뚫기 위해 베르무트를 포함한 5명이 덤볐었다.


‘하지만 너는 베리알이 아니지.’


에드몬드가 당대의 유폐의 지팡이라고 불리는 것은 맞다. 하지만 베리알만큼, 베리알보다 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보라. 옛날보다 약화된 월광검인데도 에드몬드의 마법에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


프로미넌스가 깃털을 흩뿌렸다. 유진은 연속적으로 공간도약을 펼치면서 월광검을 휘둘렀다. 달빛이 원을 그리고 만월로 채워졌다.


콰르르! 흑마법의 불꽃이 전소된 틈. 유진은 반대편 손에 쥔 성검에 힘을 집중했다.


공검. 월광검으로는 쓸 수 없지만 성검에는 그러한 제약이 없다. 번쩍 터진 빛이 다시 한번 어둠을 밝혔다.


큐브의 표면이 진동했다. 방어는 깨지지 않았다. 에드몬드는 순간 안도했고, 자신이 그래 버린 것에 굴욕감을 느꼈다.


유폐의 마왕의 마력이 몸을 일으켰다. 큐브의 앞에 4개의 손이 치솟더니, 손바닥 사이에서 시커먼 불꽃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큐브의 주변에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저주의 눈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몸을, 코어를, 심장을 서서히 옭아 죈다. 눈동자 하나만으로도 그런데 수십 개의 눈동자가 유진을 포착했다.


한순간 몸이 굳었다. 에드몬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옥불을 쏘아냈다. 시커먼 불길이 덮치기 직전, 하늘에서 떨어진 빛이 유진을 휘감았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신성력이었다. 몸을 굳게 만들었던 저주가 사라지고, 불길은 짧은 순간이나마 빛에 가로막혔다. 떨어진 빛에 성검이 호응했다. 촤아악! 성검으로 그은 참격이 지옥불을 양단했다.


유진은 그 틈으로 뛰어들지 않고 곧바로 프로미넌스의 도약을 펼쳤다.


콰르르르! 월광검의 빛이 큐브에 작렬했다.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월광의 너머, 큐브의 표면이 뒤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역시 한 번의 참격으로 큐브를 박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에드몬드의 눈동자가 부릅 뜨였다. 당장 큐브는 깨지지 않았지만, 마법을 구성하는 술식에 손상이 전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술식이 붕괴하여 균열이 일어날 것이다. 에드몬드는 급히 마력을 끌어내어 술식의 손상을 수복했다.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군.’


유진은 마력이 큐브를 보강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에드몬드가 큐브를 수복하고 보강하는 것보다 빠르고 연속적인 공격을 가하면 된다.


물론 에드몬드는 유진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거리를 좁혀서는 안 된다. 블러드메리에 다시 마력이 깃들었다.


콰르르르! 고밀도의 마력이 뭉쳐서 다섯 마리의 거인이 되었다. 오직 마법과 마력만으로 만들어낸 거인들이 유진을 덮쳤다.


시간 벌이일 뿐. 에드몬드는 거인들을 무시하고서 다시 마법을 일으켰다.


저주의 눈은 여전히 유진을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장막 너머에서 비추는 빛이 유진을 수호하고 있기에, 아까처럼 유진을 멈추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큐브의 표면에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허공으로 떠올랐다.


꽈르르릉! 그 순간에 유진에게서 폭발이 일어났다. 에드몬드가 일으킨 폭발이 아니었다.


그는 경악하여 유진을 쳐다보았다. 마력으로 만들어낸 거인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되고 있었다.


유진은 손바닥 위에 띄운 태양을 에드몬드를 향해 밀어냈다. 번져가는 흑점이 태양을 검게 물들인 순간, 이클립스가 완성되었다. 기겁한 에드몬드는 허공에 띄운 마법진을 중첩시켰다.


마법진에서 쏘아진 포격과 이클립스가 충돌했다. 힘이 서로 상쇄되는가 싶었는데, 불길하기 짝이 없는 월광이 얽히던 힘들을 양단해 버렸다.


‘대체 뭐냐.’


에드몬드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거리며 퍼지는 감정을 인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마법을 일으켰다. 콰드득! 뒤집힌 대지가 각각의 의지를 가지고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단순한 땅덩어리에 대단한 억제력은 없지만, 흙 알갱이 한 알 한 알에 에드몬드의 마력이 깃들었다. 그 마력이 서로 연결되고 새로운 마법이 되었다.


시커먼 사슬이 땅덩어리를 연결했다. 그 사슬은 쭉 늘어나면서 유진을 공간 통째로 포박했다. 사슬이 팽팽히 당겨지면서 좁혀지고, 구겨지는 공간이 유진을 덮쳐왔다.


쿠우웅……! 더 이상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드몬드는 유진이 구겨진 공간의 안에서 함께 으스러졌기를 바랐다. 그는 하나로 달라붙은 땅덩어리를 다시 한번 사슬로 휘감고, 그걸 통째로 불태워 소멸시키기 위해 지옥불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달빛이 흘러나왔다.


콰득, 콰드드득! 유진은 월광검을 휘두르면서 흑마법의 주박에서 뛰쳐나왔다. 에드몬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내지르며 지옥불을 터트렸다.


“좀 죽어라!”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 무조건 죽일 수 있는, 죽는 것이 맞는 마법들을 연달아 쓰고 있는데. 죽이기는커녕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있다. 저 빌어먹을 월광검이 자꾸만 흑마법을 소멸시켜 버린다.


지금도 그랬다. 닿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불태워 소멸시켜야 할 지옥불이, 월광검의 빛에 가로막혀 역으로 소멸해 버렸다.


에드몬드는 노성을 터트리며 다시금 마법진을 전개했다. 죽음의 창이 연달아 쏘아졌고, 마법으로 일그러진 공간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프로미넌스가 펄럭였다. 약식의 이클립스가 벼락을 가로막고 터졌다. 죽음의 창은 연속적으로 휘두른 월광검과 성검에 가로막혔다.


“좀 죽으란 말이다!”


에드몬드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쿵, 쿵, 쿵! 블러드메리가 땅을 내리찍자 지면에서 송곳과 칼날과 사슬이 치솟았다. 사슬이 붙잡고, 칼날로 베고, 송곳이 꿰뚫었다.


가장 먼저 사슬이 끊어졌다. 송곳은 다른 송곳과 부딪쳤다. 마지막에 덮치던 칼날도 가로막혔다.


“마창!”


에드몬드가 비명을 질렀다. 유진은 그 외침을 무시하고서 마창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공간을 뛰어넘어 출현시킨 창날이 큐브와 충돌했지만, 큐브는 깨지지 않았다. 다음은 분쇄추. 유진은 마창을 망토 안에 던져 넣고서 분쇄추를 꺼내더니, 있는 힘을 다해 공간을 때렸다.


꽈앙! 분쇄추의 일격도 큐브를 깨트리진 못했지만, 큐브의 표면에서 준비 중이던 마법진은 깨트렸다. 유진은 별 아쉬움을 느끼지 않고서 분쇄추도 망토 안으로 던져 넣었다.


유진의 손이 다시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에드몬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블러드메리를 움켜쥐었다. 이번에 망토에서 뽑혀 나온 것은 은청색의 검이었다. 위니드. 저번에 봐둔 검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위니드를 휘두르지 않고 뒤편으로 홱 던져 버렸다. 떠돌던 깃털이 위니드에게 달라붙고서 함께 사라져 버렸다.


“……뭘 한 거냐?”


에드몬드는 위니드가 사라진 것을 경계하고서 내뱉었고, 유진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해 주었다.


“넌 신경 안 써도 돼.”


템페스트가 토하는 불만은 무시했다. 유진은 위니드가 시안에게 전해진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성검과 월광검을 쥐었다. ……그 모습이 에드몬드의 눈동자를 떨게 만들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에드몬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물었다.


“너만,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오랫동안 바라던 비원을 이뤄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역사와 앞으로의 미래를 통틀어 유일한,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인간이, 마법으로, 마왕이 된다는 비원을 이룰 수 있었을 거다.”


피를 토하듯이 절규했다. 에드몬드는 큐브를 뒤로 이동시키면서 마법을 일으켰다. 유진과 에드몬드 사이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앞으로 가고 있는데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내가 네게 대체 무엇을 잘못했나?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네 앞에 서서 널 방해한 적이 없었고, 널 위협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너는 왜 나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것이냐?!”


일그러지던 공간에서 에드몬드의 외침이 어지럽게 울렸다. 꽤 강력한 환각마법이지만 유진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 누아르 제벨라의 환상도 겪어본 마당에, 저딴 환각마법에 정신이 오염될 리가 없잖은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냔 말이다. 나는 마왕이 된다고 해서 네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을 거다. 내 목적은! 마왕이 되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나라는 존재를 초월시키고 마왕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단 말이다! 의식이 성공해 마왕이 되었다면, 나는 정말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거다.”


에드몬드의 절규는 유진도 당황시켰다.


저 새끼,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건가? 흑마법사가 마왕이 되겠다고 헛짓거리를 벌이면 막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얌전히 방구석에 홀로 처박혀서 마왕이 되려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산 제물까지 필요로 하는 의식을 벌이면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건가?


“이 개새끼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진은 불쾌감에 얼굴을 콱 일그러트리면서 월광검을 들었다. 저 개소리는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었다.


사실 에드몬드가 억울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대륙은 숲의 원주민들이 벌여대는 전쟁에 아무 관심도 없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사마르에 왔다.


에드몬드가 내뱉은 것처럼, 이곳에 유진이 오지 않았다면 그의 의식은 깔끔하게 성공했을 확률이 높았다.


“가까이 오지 마라!”


유진이 월광검을 들자, 에드몬드는 비명을 지르며 블러드메리를 휘둘렀다. 시커먼 마력이 파도가 되어 유진을 덮쳤다.


콰아앙! 이클립스가 먼저 파도를 가로막고, 잠시 멈춘 마력을 월광검이 양단했다.


“또!”


에드몬드는 억울하고 서러워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긋지긋한 월광검. 기록으로 봐두기는 했다만, 실제로 보니 저만큼 부조리한 무기가 없었다. 뭔 놈의 검이, 고작 검 따위가! 블러드메리와 마왕의 마력을 저토록 쉽게 베어버린단 말인가!


“내 평생을 바친 마법이! 고작 검 따위에게!”


유진은 저 외침에 화답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심 뚱한 기분이 들었다.


월광검이 고작 검 따위라고 평가받을 무기는 아니다. 에드몬드가 평생을 마법에 바쳤듯, 유진도 평생을 검을 잘 휘두르는 것에 바쳤다. 전생까지 더하면 2번의 삶을 이 짓거리에 매진했단 말이다.


“오지 말란 말이다!”


블러드메리가 땅을 찍었고, 큐브가 움직였다. 에드몬드를 보호하는 절대방어가 통째로 하늘로 떠올랐다.


시간.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나 더? 이미 충분할 만큼의 시간을 끌지 않았나? 에드몬드는 유진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의식을 확인했다.


대지신의 발자국. 여기서 전쟁은 이미 수많은 원주민들을 죽였다. 이 땅에서 수급할 수 있는 피와 영혼은 이미 에드몬드가 세운 기준의 최소치에 도달했다.


그리고 코칠라의 수도. 광폭화로 의도한 대학살. 에드몬드는 토맥을 타고 흘러오는 피와 영혼을 계산했다.


이 정도면 의식을 시도할 수 있나? 그에 대한 계산에 몰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꽈지직! 방해를 돌파하고 온 유진이 월광검을 휘둘렀다. 회색의 달빛이 큐브의 표면을 긁었고 빛이 부서졌다.


“개자식아!”


에드몬드는 진심을 담아 고함을 내질렀다.


큐브의 수복과 의식의 완성.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기까지 와서 모험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마저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꽈드득! 연속적으로 덮쳐 온 월광검의 빛이 큐브의 표면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나라면……!’


최후의 순간. 에드몬드는 자기 자신을 믿었다.


의식 자체의 완성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물의 질을 낮추고 숫자를 늘렸다.


그 숫자가 부족할 리도 없다. 여태까지 쌓은 제물. 수도에서 흘러오는 제물. 이곳에서의 제물. 뒤틀어놓은 토맥은 진즉부터 에드몬드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최초의 의도대로 라이자키아의 마력과 세계수의 힘은 손에 넣을 수 없겠지만…… 그것까지 욕심내다가는 저 월광검에 목이 날아갈 것이다.


에드몬드는 큐브의 수복을 포기하고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존재 모든 것이 블러드메리를 거쳐서 토지의 의식과 연결되었다.


ㅡ콰르르르! 대지신의 발자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면 밑바닥에 새겨놓은 의식의 술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됐다.’


술식이 에드몬드의 존재와 연결되었다. 제물이 바쳐지며 마법이 완성을 향해 달린다. 육체와 혼의 재구성. 인간을 초월해 마왕으로 완성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면서 월광검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에드몬드는 더 이상 월광검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성공이다!”


월광검의 빛이 큐브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이 에드몬드의 눈에는 아주 느리게 보였다.


‘인간’의 사고가 바뀌어간다. 자신의 존재보다 하찮은 것들을 열등히 보는, 초월적 존재의 사고로 바뀌어 간다. 나약해 빠진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는 마왕의 것으로 바뀌어 간다…….


“내가 이겼…….”


에드몬드의 외침이 뚝 끊어졌다.


완성되어 가던 의식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에드몬드를 중심으로 짜였던 술식이 뒤엉켜 꼬였다.


뭐지? 에드몬드는 지금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패할 이유가 없었다. 제물은 충분했고, 의식의 술식도 완벽했는데…….


“……으아아!”


에드몬드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격상하던 중에 멈춰버린 사고가, 의식이 실패한 이유를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만들었다.


제물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는데. 속았다.


이곳까지 흘러들어 와야 할 수도에서의 피와 혼. 그것은 온전하고 순수하게 의식에 바쳐져야 하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선점하고 강탈했다.


“발자크으으!”


바로 앞에, 죽어야 하는데 죽기는커녕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덤벼드는, 무식하고 끔찍한 놈이 있어서. 유진을 상대하느라 발자크를 의식하지 못했다.


……어떻게? 어쭙잖게 초월한 사고조차도 발자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중에 의식의 내용을 바꿀 것을 알았나? 대체 언제부터 수도의 제물을 강탈하기 위한 준비를 했던 것이지?


에드몬드는 부릅뜬 눈으로 발자크를 찾아 어둠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발자크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놈은 블라인드의 어둠에 완전히 동화하여 제 존재를 감춰 버렸다…….


‘내 의식을 찬탈하는 것이 목적인가?’


의식의 일부가 발자크에게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에드몬드가 보기에는 미약한 연결이었다. 저딴 것으로 인간을 마왕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자크의 목적은 마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에드몬드는 다시 결론을 내렸다. 제물을 빼앗은 것도, 의식의 일부를 자신에게 연결한 것도. 그 모든 것은, 에드몬드가 의식의 성공을 확신하고 시도하는 순간에 자멸시키기 위한 노림수였다.


발자크는 에드몬드가 조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블라인드의 어둠은 큐브를 침범하지 못했으나, 발자크가 에드몬드에게 굳이 포착된 순간부터 에드몬드는 발자크를 경계했다. 발자크를 포함한 적들이 의식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대지신의 발자국에 드리운 어둠과 불리한 난전의 의식의 내용을 바꾸고, 수도에서부터 제물을 수급하게 만들었다.


“이…… 개자식……!”


에드몬드는 그래서 발자크에게 더욱 큰 혐오감을 느꼈다.


차라리 발자크가 의식을 빼앗으려 했다면. 에드몬드를 대신해 마왕이 되려고 했다면. 에드몬드 본인이 비원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발자크가 이 의식을 빼앗아 마왕이 된다면ㅡ 분할지라도 인정은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발자크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의식의 일부만을 빼앗았고, 제물의 일부만을 빼앗았다.


고작 그딴 것 때문에 에드몬드의 의식은 실패했다.


“으아아아아!”


에드몬드는 분노와 억울함에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큐브를 박살 내고 쳐들어온 달빛이 에드몬드의 몸을 집어삼켰다.


대지신의 발자국


육체가 소멸하고 있다. 어쭙잖게 초월해 버린 의식이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의 타개책을 찾으려 했지만, 이 상황에서 에드몬드가 살아남을 방법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한다면. 도움이 내려진다면.


‘유폐의 마왕님이시여.’


에드몬드는 필사적으로 애걸했다. 그 유폐의 마왕이라도 뛰어난 수하를 잃는 것이 아쉬울 것 아닌가?


에드몬드는 자신이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죽어 영혼으로 거둬지는 것보다는, 구차하게나마 살아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유폐의 마왕에게도 즐거운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부디, 부디 저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냉혹한 현실이 에드몬드를 더욱 절망시켰다.


유폐의 마왕은 에드몬드가 마왕이 되려는 것도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이 의식과 전쟁에서, 에드몬드가 바라는 대로 마력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에드몬드를 ‘직접’ 돕지는 않았다. 에드몬드를 방해하지도 않았다. 에드몬드가 의식에 성공해 마왕이 되었어도,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에드몬드가 실패해 죽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아쉬움 하나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그런 존재였다.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사실 에드몬드도 알고 있었다.


에드몬드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으며, 유폐의 마왕이 도움을 주기를 바랐으나ㅡ 간절한 기도에도 침묵이 이어질 뿐이었다.


월광검의 참격이 허공을 휩쓸었다. 에드몬드가 필사적으로 붙들었던 몸뚱이는 육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하지만 블러드메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블러드메리를 만든 것은 유폐의 마왕이다. 흩어지는 달빛 속에서 블러드메리가 홀로 떠올랐다. 유진은 저 끔찍한 마법지팡이를 파괴하기 위해 다시 한번 월광검을 휘둘렀다.


달빛이 블러드메리를 삼키려는 순간, 드래곤하트에서 새빨간 마력이 흘러나왔다.


촤르르륵! 마력이 사슬이 되어 블러드메리를 휘감고, 달빛을 가로막았다.


곧 사슬과 블러드메리가 함께 사라졌다. 유진은 땅에 내려서며 빠득 이를 갈았다.


유폐의 마왕. 놈은 에드몬드가 죽는 순간까지 개입하지 않더니, 블러드메리만 회수해 간 것이다.


“개새끼.”


유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망토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 ……에드몬드는 죽기 전에 발자크의 이름을 외쳤다.


완성될 뻔했던 의식이 실패한 것은 발자크의 농간이었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농간을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유진은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발자크를 경계했다. 어쩌면 에드몬드가 경계했던 것처럼, 발자크가 의식을 빼앗아 스스로 마왕이 되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만약 발자크가 마왕이 되었다면. 대지신의 발자국을 감싸고 있는 블라인드의 마력이 가장 먼저 변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블라인드는 처음과 똑같았다.


유진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단검을 들어 올렸다.


“살려주십시오.”


바로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면에 납작 엎드려있던 발자크가 몸을 일으켰다.


“저는 유진 님이 경계하실 만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발자크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유진은 여전히 단검을 쥐고서 발자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유진 님이 에드몬드를 공격할 즈음부터 이곳에 있었습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엎드려 있던 거지?”


“제가 모습을 감추고 있는 편이 에드몬드를 조급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있다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먼저 하던가.”


“방금 제 은신은 그런 요령을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발자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뭘 한 거지?”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제물을 빼앗고, 의식에 일부 간섭하였습니다.”


“간섭?”


“별것 아닙니다. 냉정을 잃은 에드몬드가 착각하도록 의식의 내용을 살짝 흔들었습니다.”


발자크는 그렇게 말하며 유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진 님이 에드몬드를 몰아붙인 덕분입니다.”


“굳이 당신이 의식에 간섭할 필요가 없었어.”


유진은 단검을 발자크에게 겨누며 말했다.


“의식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제물만 빼앗았으면 되었잖아. 안 그래? 결과적으로 의식은 늦춰질 거고, 그 시간이면 내가 에드몬드를 죽일 수도 있었을걸.”


“그랬을지도 모르죠.”


방금 말은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억지가 많았지만, 발자크는 반박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유진은 그런 발자크를 뚱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단검을 집어넣었다.


“……이제 블라인드는 거둬도 되지 않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쟁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에드몬드는 죽었다. 전사들에게 깃들었던 마력은 소멸했고, 광폭화의 마법도 끝났다. 살아남은 전사들은 고함은커녕 신음조차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꺄하하하!”


멀리서 요란히 웃어대는 멜키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이 전장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며, 사방에 불꽃과 번개를 뿌리고 있었다.


그렇게 전진하는 멜키스의 뒤를 로베리안의 소환수들이 따랐다. 다른 쪽에서는 이바타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유진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안을 찾았다.


* * *


여러 개의 팔. 몰아치는 공격. 놈은, 헥토르는 크고 빠르며 강했다. 확실히 말해서 헥토르는 시안보다 강했다.


시안도 그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놈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시안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물러선 순간, ‘시안 라이언하트’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잃게 될 것만 같았다.


그 무언가란, 아마 긍지라고 생각했다.


라이언하트의 배신자.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놈. 마찬가지로 가문을 배신했던 놈들은 헥토르 외에도 여럿 있었으나, 그들 중에서 시안이 직접 징벌한 놈은 아무도 없었다.


이오드도, 도미닉도, 유진에게 죽었다. 그 순간에 시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때조차도 시안은 무력했다.


지금도 그래서는 안 된다. 힘이 부족해 패배할지언정, 배신자인 헥토르에게서 등을 돌리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안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내딛는 걸음의 이유는 긍지, 신념, 사명, 그런 것들. 휘두르는 검에는 살의를 담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전투가 자신에 대한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봐주지 않을지라도, 헥토르를 직접 죽이면…… 목표로 했던 것에 아주 조금은 가까이 왔노라는 실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헥토르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방패로 막고, 흘리고, 틈을 보아 찌르고, 피하고, 다시 휘두르고, 펄쩍 뛰었다가 몸을 틀고, 그런 많은 동작들을 의식하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할 때에 해냈다.


어느 순간부터는 몸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데도 지치는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헥토르의 검이 목젖에 닿으려는 순간에는 갑자기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 한 끗 차이로 피해내기도 했다.


헥토르는 아무리 베어도 죽지 않았다. 상처를 순식간에 재생시키고 다시 덤벼왔다. 도중에 헥토르가 뭐라고 자꾸 고함을 질러댔지만, 시안은 헥토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하나도 듣지 않았다. 배신자의 말. 인간도 아니게 된 괴물의 말은 들을 가치가 하나도 없었다.


죽여도 잘 죽지 않는 헥토르와는 달리, 시안의 몸은 인간이다. 다치면 아프고 피가 나며 잘 움직이지 않는다. 치명상은 모두 피했다. 방패로 막았다. 그래도 자잘한 상처는 쌓였는데, 어느 순간 상처가 사라졌다. 시안은 크리스티나 성녀의 신성마법에 감사했다.


검이 부러졌다. 부러진 칼날을 검강으로 대체했지만 공격이 얕았다. 헥토르의 마력은 검강을 상쇄하고 약화시켰다.


주변에 검은 많았다. 죽은 시체의 손에 쥐어진 검들. 하지만 쥐러 갈 틈이 없었다.


직접 갈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손 앞에 검이 나타났다.


폭풍검 위니드. 유진이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처음으로 쥐었던 검. 위니드가 손 앞에 온 순간, 시안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쥐었다.


“야.”


우두커니 서 있던 시안이 입을 열었다.


헥토르는 죽었다.


어떻게…… 죽일 수 있었는지. 직접 해낸 것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위니드를 쥔 순간부터의 기억이 희미했다.


그냥, ‘잘’ 싸웠던 것 같다. 위니드를 쥐기 전에도 평소보다 잘 싸웠던 것 같은데, 헥토르를 죽이던 순간에는 정말…… 내가, 내가 아니었던 것만 같았다.


어렴풋한 실감은 아직 남아 있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헥토르를 죽인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시안 자신이었다. 시안은 자신이 어떠한 벽을 넘어, 나름의 극한이라 할 만한 영역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강해졌다.


더 강해질 수 있다.


시안은 쓰러진 헥토르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놈은 죽는 순간에 뭐라고 외쳤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시안은 헥토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괴물새끼의 유언은 들을 가치도 없었다.


헥토르의 시체를 보다가, 손에 쥔 위니드를 한번 힐긋 보았다. 시안은 씰룩거리는 입술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봤냐?”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개를 돌린 순간에 결국 웃음이 번지고 말았다. 시안은 히죽 웃는 얼굴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봤지? 응? 봤으니까 나한테 위니드를 보내준 거잖아.”


“그래, 그래.”


“내가 말이야, 햐, 내 입으로 말하기도 좀 민망하지만, 진짜 엄청 잘 싸웠거든? 진짜로. 내가 막 내가 아닌 것 같았달까……. 헥토르 저 새끼가 막 팔을 휘둘러 대는데, 그게 진짜 하나도 안 닿았어.”


“꽤 많이 닿았던 것 같은데.”


시안의 제복은 피범벅이었다. 유진이 그것을 쳐다보며 말하자, 시안은 보란 듯이 양팔을 흔들었다.


“내 피 아냐. 헥토르나…… 어…… 내가 죽였던 다른 놈들의 피야. 봐, 내 몸에 상처 하나 없잖아.”


“있었는데 치료받은 거잖아.”


“어쨌든 지금은 상처가 없잖아. 그래서, 어땠냐?”


“잘 싸우더라.”


“그게 다야? 뭔가 조금 더 깊이 있는 그런 말은 못 해? 이것 봐, 내가 헥토르를 죽였다고!”


“잘했다.”


“백염식도 뭔가 좀 변한 것 같은데…… 그…… 4성과 5성의 중간…… 아니, 5성에 굉장히 가까워진 것만 같은…… 뭔가 딱 느낌이 왔어. 여기서 조금만 더 해보면 5성에 도달할 것만 같아.”


시안은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유진은 그런 시안의 모습에 조금 흐뭇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많이 컸네.”


“……뭐라는 거야? 나는 원래부터 컸어.”


유진이 그렇게 말하자, 시안도 괜히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나이도 똑같은, 심지어 생일까지 따지면 오히려 시안이 몇 달 빠른데. 유진은 가끔 한참 나이 많은 어른처럼 굴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 대부분 꼰대처럼 굴곤 했어서 저 새끼가 또 지랄이구나 생각하곤 했는데…… 지금처럼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거.”


시안은 위니드를 유진에게 돌려주면서,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셨다.


“좋은 검이더라. 막…… 바람이 검강처럼 나가고.”


“안 준다.”


“누가 달래?”


내심 앞으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시안은 그런 생각은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계약하지도 않은 인간에게 위니드를 쥐게 하다니…….]


위니드를 손에 쥐자, 곧바로 템페스트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그런 것치고는 많이 도와준 것 같던데.’


[도와주지 않으면 시안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시안이 죽었다면, 하멜, 네가 날 가만히 두었겠나?]


‘당연히 가만히 안 뒀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시안이 죽었다면…… 유진은 우선 위니드부터 두 동강을 냈을 거다. 그런 생각을 읽은 것인지 위니드의 검신이 가늘게 떨렸다.


[……크흠……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베르무트나 하멜, 너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긴 하지만, 시안에게도 썩 괜찮은 가능성을 느꼈다.]


‘한 꺼풀 벗은 느낌이지?’


[각성이라고 하기는 부족하지만, 그래. 벽을 넘은 만큼의 성장은 거두었지. 무아지경에서 도달했던 경지를 스스로 체화한다면, 차기 가주다운 위엄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템페스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대뜸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멜키스 때문이었다. 블라인드의 어둠이 천천히 걷히는 와중에도 멜키스는 계속해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코칠라의 전사들은 더 이상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멜키스의 불꽃과 번개는 용서 없이 그들을 태우고 지져버렸다.


[……3명의 정령왕과 계약을 이룬…… 유일무이한 대정령사가 저런 인간이라니…….]


‘이쯤 되면 네가 이상한 것 아니냐?’


[뭐라?]


‘너는 멜키스 님을 혐오스러워하지만, 봐. 불꽃의 정령왕과 번개의 정령왕, 대지의 정령왕은 멜키스 님이랑 계약했잖아.’


[그들이 옳고 내가 틀렸다는 거냐?]


템페스트가 격분해 외쳤다.


[알몸으로 정령과 교감하는 광인이 어찌 옳단 말인가! 그런 광인과 계약을 맺는 불꽃과 번개와 대지가 미치광이인 것이다!]


유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냥, 멜키스를 사용해서 템페스트를 약 올리는 것이 재밌을 뿐이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거냐?”


시안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전장을 힐긋거리며 쳐다보았다.


“슬슬 끝난 것 같기는 한데,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잖아.”


“내가 저기 가서 뭐 하냐? 넌 가고 싶으면 가든가.”


“……으흠.”


시안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했다.


사람을 죽이거나,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헥토르와 싸울 때…… 헥토르를 죽일 때. 몸에, 손에 깃들었던 느낌을 다시 한번 붙잡아보고 싶었다.


“애매할 때는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해보는 것이 나아. 괜히 늑장 부리다가는 그새 까먹는다.”


“끙…….”


시안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주변의 검을 하나 주워들었다. 유진은 멀어지는 시안의 등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괜히 데려온 것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조금은 커진 것 같은 등을 보니, 데려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나로군.’


유진은 뻐근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자리에 앉았다. 이그니션은 쓰지 않았지만, 지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중요하지.’


의식은 실패했고, 에드몬드를 죽였다. 이곳의 전쟁도 앞으로 조금이면 끝이 난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유진에게 중요하고, 간절했다.


‘세냐.’


유진은 목걸이를 움켜쥐면서 생각했다.


대지신의 발자국


포로는 거두지 않았다.


깔끔한 몰살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란의 족장이 된 이바타나 동맹부족의 족장들 중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숲에서 자라지 않은 유진이나 다른 사람들도 굳이 그 문제에 간섭하지는 않았다. 코칠라는 식인과 인신공양을 당연하게 해오던 부족이다.


오히려 원주민이 아닌 관점으로도 살려둬서는 안 될 야만인들이었다.


“큰 도움을 받았다.”


전장의 수습이 끝났다. 크리스티나의 신성마법이 있기는 하였지만, 아군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죽은 사람들도 꽤 되었고, 부상자도 많았다.


코칠라는 생존자 하나 남기지 않고 몰살당했으니, 조란의 압승이었다. 이바타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서 유진 일행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대들이 돕지 않았다면 전쟁은 성립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지신의 발자국에서의 전쟁은 끝났지만, 이바타의 군대는 바로 조란에 돌아가지 않고 코칠라의 수도로 진격하기로 했다. 정예라 할 만한 병력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었고, 수도 쪽도 에드몬드의 흑마법에 의해 생존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기세를 몰아, 코칠라를 완전히 정복하겠다는 것이 이바타의 생각이었다. 이만큼의 압승을 거두었으니 동맹 부족의 족장들도 이바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지지했다.


유진은 이바타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는 족장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 대부분은 저번에 이바타에게 팔이 하나씩 뽑힌 자들이었다.


“유진. 존경스럽고 고마운 벗이여. 네 도움을 어찌 갚아야 할지 아직도 고민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하겠다. 코칠라를 정복하고 얻은 전리품의 모두를 네게 주겠다.”


“모두는 너무 과하고 절반만 줘라. 너희도 뭐 버는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냐.”


“나는?”


멜키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다가온 멜키스에게는 매캐한 탄내가 풍겼다…….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머리를 뒤로 당겼다.


“욕심도 참 많으십니다. 이 전쟁 덕에 불꽃의 정령왕이랑도 계약하셨으면서, 뭘 또 바라십니까?”


“엄밀히 말해서 이프리트랑 계약한 건 내가 대단한 탓이지.”


멜키스는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리며 당당히 가슴을 내밀었다. 하지만 곧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알았어. 알았다구. 따로 뭐 안 받을 테니까, 계약은 계속하자. 응? 너도 내심 나랑 계약하고 좋았잖아…….”


유진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떠드는 말을 들어보니, 이프리트가 멜키스의 욕심에 불쾌감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멜키스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머릿속에서 말을 거는 이프리트에게 애걸했다.


“그리고 정령왕의 계약이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물러도 되는 것이 아니잖아……. 내가, 내가 진짜 잘할게. 응? 그래, 내 시그니처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어때? 인피니티 포스가 아니라 널 조금 더 주인공처럼 부각시키는 이프리트 포스로 이름을 바꾸든가……. 아니면 아예 너만을 위한 시그니처를 만들게……. 그, 그리고 백색마탑에서 불꽃의 정령과 계약한 마법사들을 특별대우 해주고…….”


구차하고 비굴한 말들이었다. 템페스트가 언짢음에 헛기침을 내뱉었고, 유진도 멜키스를 외면했다.


“……크흠…… 어쨌든, 유진, 네게는 너무 많은 빚을 져버렸다. 우선 네가 말했던 대로 전리품의 절반을 네게 줄 것이고, 나머지는 정복이 끝난 뒤에 논해도 되겠나.”


“그래.”


이바타는 유진에게 함께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유진이 관여할 전쟁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진의 동료들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코칠라 전사들의 시체를 구석에 가득 쌓고, 기름을 끼얹은 뒤에 불을 붙였다.


이바타와 전사들은 그 많은 시체들은 애도하지 않았다. 대지신이 과연 저들의 혼마저 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동료들에 대한 애도는 하였다.


크리스티나도 지친 얼굴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사자(死者)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 모습에 이바타는 감격해서 무릎을 꿇었다. 사마르의 주민도 아니고, 대지신을 섬기지도 않는 성직자가 죽은 전사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는 것이 이바타를 감격시켰다.


마찬가지로 모든 전사들이 크리스티나에게 감격을 느끼며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 중 많은 전사들이 크리스티나의 기적에 목숨을 건졌다.


집중해 기도를 올리던 크리스티나는, 눈을 뜨고서 화들짝 놀라 버렸다. 험상궂게 생긴 원주민 수천 명이 자신을 숭배하듯 무릎을 꿇고 있으니 놀랄 일이기는 했다.


이바타와 전사들이 먼저 대지신의 발자국을 떠났다. 유진 일행은 바로 떠나지 않고, 잠시 동안 이 땅에 남아서 마법적인 검증을 마쳤다.


에드몬드가 죽었으니, 그를 중심으로 뒤틀려 있던 토맥도 천천히 본래의 흐름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만, 의식에 제물로 바쳐진 모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당수가 의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소멸해버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슬픔을 느끼고서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크리스티나. 우리가 성녀일지라도, 모든 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크리스티나는 탄식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스는 그런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도저히 남처럼 여길 수가 없었다. 지금 크리스티나가 느끼는 슬픔은, 300년 전의 아니스가 몇 번이나 절감하던 것이었다.


[모든 이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였습니다. 지금…… 당신이 어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잘했습니다.]


목에 건 로사리오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 아니스가 밝힌 빛이었다. 그 빛은 로사리오를 넘어, 크리스티나의 몸을 포옹하듯 감싸주었다.


[이 잔인한 전쟁 속에서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크리스티나. 당신은 죽어야 할 이들을 죽지 않게 살려냈고, 많은 사람을 구했으며, 당신에게 정말로 소중한 사람을 지켜냈습니다.]


‘……시스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진즉에 죽은 제가 하멜의 등을 보며…… 그를 빛으로 비출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티나 당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멜을 보았기에, 저도 하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니스는 죽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것에 감사를 느꼈다.


300년 전. 아니스가 간절히 목소리를 갈구했던 빛의 신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잘했다’라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잘했어.”


빛의 신은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지만.


동료들에게는 몇 번이나 그런 말을 들었다. 다가온 유진이 빙긋 웃으며 크리스티나에게 손을 뻗었다.


[이럴 때만 영악하리만큼 눈치가 빠르다니까.]


아니스는 사랑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티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동시에 강한 우려를 느끼기도 했다.


정말로 소중한 사람.


지금 크리스티나에게 그런 사람은 바로 유진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크리스티나의 눈은 항상 유진을 좇았다. 유진이 워낙 잘 싸운 덕에 많은 도움은 주지 못했지만, 흑마법이 유진을 붙잡고 위협할 때마다 크리스티나도 유진에게 빛을 보내주었다.


이번 전투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있을 전투에서…… 크리스티나가 유진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스도 크리스티나와 같은 우려를 느꼈다. 크리스티나와 마찬가지로, 아니스에게도 유진은, 하멜은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세냐도 마찬가지다. 아니스는 반드시 세냐를 구하고 싶었다. 그녀와 다시 만나서 시답잖은 수다를 떨며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스 본인은 세냐를 구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300년 전에 죽었으며, 빙의한 크리스티나도 이번만큼은 유진과 함께 갈 수 없다.


[……믿음.]


아니스는 긴 한숨 끝에 중얼거렸다.


크리스티나도 로사리오를 쥐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검.”


유진은 삐딱하게 서서 발자크를 쳐다보았다.


아직 발자크의 심장에는 마법의 단검이 박혀 있다. 유진이 바란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발자크의 심장을 찢어버릴 수 있었다.


“안 뽑아도 되나?”


유진은 손에 쥔 단검과 발자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정작 마법의 단검을 박아넣은 당사자인 로베리안은, 유진의 뻔뻔함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베리안은 이런 면에서는 착실하고 상식적이었기에, 에드몬드를 죽인 뒤에는 당연히 단검을 뽑을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발자크는 의심스러운 짓도 하지 않았고, 전쟁에서도 허튼짓을 하지 않았으며, 에드몬드의 파멸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유진 님이 그러고 싶으시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폭거와 다름없는 말을 들었는데도 발자크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 단검에 의해 유진 님이 저를 쭉 신뢰해 주신다면 말입니다.”


“신뢰하지 않으니까 단검을 뽑지 않겠다는 건데.”


“하지만 이 단검이 박혀 있는 동안, 유진 님은 그러고 싶지 않으셔도 저를 덜 경계하실 것 아닙니까.”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기는 했는데,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오히려 더 수상쩍었다.


상식적으로 제 심장에 마법의 단검이 박혀 있고, 언제 어느 순간 누군가가 심장을 찢어발길지도 모르는 상황에 저렇게 태연한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의도하는 것일 수도 있어…….’


에드몬드를 심적으로 압박하고 의식을 개판 낸 것도 그렇고, 발자크는 이런 식의 심리전에 능숙하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마법의 단검이 그냥 발자크에게 별 위협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단검이 박혀 있다는 것에 안심을 시켜놓고, 나중에라도 배신한다면? 어느 정도 애매한 믿음이 있는 상태에서 배신당하는 것이 더 치명적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빼주죠.”


유진은 얼굴을 구기고서 내뱉었다. 어느 쪽이든 답은 알 수 없었다. 사실 가장 빠른 것은 지금 당장 단검을 사용해 발자크의 심장을 찢는 것인데, 유진도 차마 그렇게까지 과감한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일단 발자크가 이번 일에서 그 어떤 배신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고, 여태까지도 항상 유진을 도우며 호의적으로 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중은 몰라도, 지금…… 그리고 여태까지 발자크는 유진의 적이었던 때가 없었다.


물론 발자크가 흑마법사인 것은 사실이고, 심지어 놈이 계약한 것은 유진이 반드시 죽여야 할 유폐의 마왕이다.


언젠가, 발자크는 유진의 적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니 유진은 당장 발자크를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흠,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던 로베리안은 즉시 발자크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아악! 발자크의 가슴에서 마법의 단검이 뽑혀 나왔다. 완전히 뽑힌 단검이 빛이 되어 사라지자, 발자크는 빙긋 웃으며 가슴을 어루만졌다.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지 않아서 뽑은 거야.”


“하긴. 유진 님이라면 저를 언제고 죽이실 수 있겠죠.”


발자크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심 단검이 뽑히자마자 공격이나 도주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발자크는 정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에드몬드가 죽었으니 더 이상 유폐의 삼마라고 할 수도 없겠군.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에드몬드의 자리를 대체하나?”


“글쎄요. 유폐의 마왕님이 따로 눈여겨보는 흑마법사가 있다면, 새로이 계약을 맺으실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그런 흑마법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유폐의 지팡이’를 비울 수는 없을 것 아냐? 블러드메리도 회수되었고.”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설마 당신이 다음 유폐의 지팡이로 낙점된 상태인 것은 아니겠지?”


“제가 그 이름을 위해 에드몬드를 죽이는 것에 협조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


“하하…… 제가 유진 님의 의혹에서 결백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듯한데…….”


발자크는 안경을 어루만지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저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유폐의 지팡이라는 이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블러드메리가 매혹적인 지팡이고, 그를 갖게 되면서 얻는 권위는 대단하겠지만…… 저는 유폐의 지팡이라는 이름보다는, 아롯의 흑탑주…… 아니,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이름에 집착합니다.”


“지위에 관심이 없다는 건가?”


“제가 추구하는 명성이 유폐의 지팡이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유폐의 지팡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흑마법사를 대표하는 이름이죠. 달리 말하자면, 유폐의 지팡이가 되어버린 순간 더는 추구할 ‘이름’이 없게 되는 겁니다.”


유진은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발자크는 유진의 눈을 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죽은 에드몬드를 떠올려 보십시오. 에드몬드는 자신이 인간임에도, 인간이란 존재성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흑마법사로서 더는 추구할 경지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마왕이 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제가 추구하는 이상과 비원은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흑마법사의 정점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마왕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유폐의 지팡이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비원이 대체 뭔데?”


“흠.”


발자크는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의 목적을 이룬다면 말씀드리기로 약속했었지요. 제 비원은…… 하하, 직접 말하려니 많이 민망합니다만. 전설이 되는 겁니다.”


“전설?”


“막연한 말입니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마법사. 현명한 세냐처럼 마법의 역사에 수백 년은 이름을 새길 수 있는, 그런 마법사가 되고 싶습니다.”


상상도 못 한 대답이었다. 저 말에 놀란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귀를 활짝 열고 듣고 있던 로베리안과 멜키스도 놀란 얼굴로 발자크를 쳐다보았다.


“……진심이야?”


멜키스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전설이 되고 싶다고?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마법사? 발자크, 당신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모든 마법사라면 어린 시절 품은 꿈이긴 하군…….”


로베리안도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발자크도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렇지요. 특히 아롯에서 배운 마법사라면 누구나 세냐 님과 같은 마법사가 되는 것을 꿈꿔봤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그런 마법사를 비원으로 삼았으면서 왜 흑마법사가 된 건데?”


“백탑주. 당장 당신도 3명이나 되는 정령왕과 계약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나는 정령술사니까. 내 비원은 위대한 마법사가 아니라, 위대한 정령술사가 되는 거라고. 사실상 이미 이뤘다고 보지만 말이야.”


멜키스는 코웃음을 치며 으스대는 미소를 지었다.


“예, 그래서 저는 당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마왕과 계약했느냐. 흠. 흑마법사가 아닌 여러분은 달리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마왕과의 계약이나 정령왕과의 계약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봅니다.”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오히려 백탑주라면 적극적으로 공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당장 내게 불가능한, 내가 평생 수행해도 얻을 수 없는 힘.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줄 수 있는 존재와의 계약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독선 아닙니까?”


예전에, 발자크는 유진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존재가 불확실하고 막연한 신보다는, 헬무드에 확실히 존재하며 직접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마왕이 낫다고 말했다. 믿음, 신앙, 그런 것을 바쳐서 실재시키는 기적보다 영혼을 담보 삼아 맺는 계약이 확실하고 가치 있지 않느냐 말했다.


-흑마법사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실리주의자라는 겁니다. 유진 님도 알다시피, 마법은 가혹하고 짓궂으며, 부조리한 학문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갈망해 보아도, 재능이 없다면 마법사로 대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마족과의 계약은 아주 매력적이라 느껴질 수밖에 없죠. 영혼을 팔고, 원하는 마법을 얻는다……. 그 부담은 순전히 자기 자신이 짊어지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죠. 그로 만족하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될 뿐.


이오드가 그러했고, 에드몬드가 그러했다.


그들은 계약에서 얻은 힘보다 더 많은 것을 바랐다. 그래서 남의 목숨을 해치고, 제물로 삼았으며, 죄를 범했다.


대부분의 흑마법사가 그렇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려 얻는 이익이 분명하다면, 그를 범해 실리를 추구할 수도 있겠죠.


흑마법사뿐만이 아니다. 저런 류의 죄를 범하는 자들 중에는 마법사도 많았다.


“위대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마왕과 계약했다는 건가?”


유진은 그때 발자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물었다. 발자크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연스레 손에 들어오는 것보다, 그 이상을 바랐으니까요.”


그때 했던 대답이기도 했다.


“저는 현명한 세냐가 아닙니다. 그분은 마법의 사랑을 받았고, 마왕을 위협할 수 있는 마법사셨으며, 세냐 님 이후로 그런 마법사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유진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위대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마왕과 계약했습니다. 제 자신의 힘으로 부족했고, 제가 가진 가능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유폐의 마왕님과의 계약으로 길을 열어낸 겁니다.”


발자크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민망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뭐, 결국은 어린아이 때의 치기를 도저히 버리지 못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리저리 꼬고, 나름의 답을 내놓은 것뿐입니다만. 그래도 저는 제 이상에 순수하고 간절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유폐의 지팡이가 되는 것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위대한 마법사란, 철저하게 인간이어야만 합니다.”


“꼭 인간이어야 할 필요가 있나?”


“제가 당장 인간이니까요. 또, 제가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은 ‘인간의 마법’에서입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면 의미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래 사는 엘프,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 마력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마족이나 흑마법을 창조해 내는 마왕. 그런 존재가 된들 ‘위대한 마법사’로 이름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인간은 어딘가 뒤틀려 있고, 그러면서도 순수했다. 적어도 그가 내뱉고 추구하는 이상에 거짓은 없다고 느껴졌다. 오히려 강한 열정과 신념을 느꼈다.


“유폐의 마왕님도 제 뜻을 이해하고 계시니, 저를 유폐의 지팡이로 삼지 않으실 겁니다. 아마 블러드메리는 아멜리아 머윈에게 가겠지요.”


발자크는 그렇게 말하고서 잠깐 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음…… 유진 님이 죽인 데스나이트는 아마 살아 있을 겁니다.”


“시X 뭐?”


“육체는 완전히 소멸했어도 혼은 아멜리아에게 돌아갔을 테니까요. 엄밀히 말해서 그 존재는 제대로 된 데스나이트가 아니었습니다. 움직이는 시체의 몸, 본인도 아닌 합성영혼…… 아마 아멜리아의 수중에 그 혼과 공명하는 라이프배슬이 있겠지요.”


“됐어.”


순간 발끈했지만, 유진은 빠르게 감정을 진정시켰다.


“……육체는 소멸시켰으니까.”


지긋지긋한.


전생의, 하멜의 시체를 소멸시켰다. 어쩌면 다음에 그 개자식이 새로운 몸뚱이를 갖고서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그 새로운 몸뚱이는 더 이상 하멜인 것은 아니다.


유진은 당장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어쩌면 다음에는 굳이 내 손으로 잡을 필요도 없을 것 같고.’


하멜의 시체에 기생하고, 하멜을 자처하며 개소리를 늘어놓던 놈을 세냐가 용서할 리가 없었다.


유진은 세냐가 분노해 미쳐 날뛰는 것을 상상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대지신의 발자국


발자크와 먼저 헤어진 뒤. 유진 일행은 본격적으로 ‘다음’을 준비하기로 했다.


라이자키아 토벌은 이 세상이 아닌, 차원의 틈새에서 이뤄진다.


저번에 잠시 엿보았던 그 공간은 마나가 굉장히 희박했다. 그런 장소에서 마법사는 전력은커녕 평소보다 제약이 많아진다. 심지어 상대는 마법의 조종이라 여겨지는 드래곤, 그중에서도 최고(最古)이자 최강이라 여겨지던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다.


놈은 그 존재만으로 마법사의 상극이라 할 수 있는데, 놈이 처박힌 환경부터가 마법사에게 제약을 걸어버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를 차원의 틈이라면, 정령왕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마찬가지로 다른 차원에서 소환수를 불러내는 로베리안도, 차원의 틈에서 원하는 소환수를 불러내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즉,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로베리안과 멜키스는 그 사실에 크게 아쉬워했다.


로베리안은 설령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될지라도 대스승인 세냐를 구하고 싶어 했다. 멜키스도 마법사로서 존경할 수밖에 없는 현명한 세냐를 구하는 것에 힘을 보태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개죽음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유진은 그들의 조력을 바라지 않고, 혼자서 라이자키아를 죽이러 가겠다고 결정했다.


“승산은 있고?”


멜키스가 먼저 물어보았다. 발자크를 떠나보낸 일행은 코칠라의 수도에 돌아가는 대신, 세계수에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라이미르아와 아카샤로 확인한, 라이자키아와 이어지는 ‘문’이 그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없지는 않죠.”


만전이 아닌 것은 피차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라이자키아도 300년이나 차원의 틈에 처박혀 있었다.


드래곤은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마나만 있으면 살아간다. 차원의 틈새에 떠도는 희박한 마나로는 라이자키아를 불편함 없이 생존시키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을 터. 그러니 라이자키아는 자신이 가진 마나로만 버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안한 점은 많았다. 우선, 라이자키아가 가진 드래곤하트에서 얼마만큼의 마나가 소모되었는가.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할 것은, 라이자키아가 평범한 드래곤이 아니라는 점이다. 놈은 그 존재만으로도 특별한 마룡(魔龍)이다.


라이자키아 이전에도 이후에도 타락한 드래곤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놈은 흑마법사처럼 유폐의 마왕과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 헬무드의 마력을 받아들여 타락했다.


라이자키아에게는 불확실한 점이 많다. 하지만 유진은 놈과의 전투에서 자신에게 어떠한 불리함이 있는지는 확실히 자각했다.


우선, 라이자키아와의 전투에서 프로미넌스의 능력은 모두 활용할 수가 없다. 프로미넌스는 대기 중의 마나와 원시정령을 장악하면서 유진의 힘을 증폭시키는데, 마나도 희박하고 원시정령도 없을 차원의 틈에서는 프로미넌스의 능력을 모두 사용하기가 힘들다.


“음. 그건 제가 도움을 조금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미넌스의 창작에는 로베리안과 멜키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둘도 유진이 맞닥트린 불리함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다.


“저와 백탑주의 마나를 아카샤에 최대한 담아낸다면, 유진 님도 프로미넌스의 능력을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됩니까?”


“저야 상관없습니다. 당분간 마법을 못 쓰게 될지라도, 세냐 님과 유진 님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써버린 마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채워지지만, 마법사에게 마나가 고갈된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왜 나까지?”


“어차피 당신이야 마나가 고갈되어도 정령왕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흥. 적탑주 당신이 먼저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싫다고 빼는 것도 좀 추하지?”


“이미 그렇게 말한 것부터가 추하다는 것을 인지하시오.”


당연히 멜키스는 자기 자신에게 부끄럼을 느끼지 않았다. 유진으로서는 로베리안의 배려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세계수까지 가는 동안, 로베리안과 멜키스는 가진 마나를 밑바닥까지 긁어내어 아카샤에 담아주었다.


드래곤하트를 가공해 만든 아카샤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마나가 담겨 있기는 했지만, 그 마나는 유진이 자유롭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했다. 드래곤하트의 마나는 아카샤가 가진 여러 권능과, 유진이 쓰는 마법을 실현하는 것에 쓰이기 때문이다.


‘내 수준에서 라이자키아에게 마법전을 거는 것은 자살행위지.’


프로미넌스를 제외한 마법은 배제한다. 라이자키아와의 전투에서는 철저하게 전사로서 임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ㅡ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는데. 세계수에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머릿속에는 저런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의 내가 가능한가? 전생보다 강해졌다. 그래, 그런 확신은 진즉에 얻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헬무드의 삼공. 유폐의 칼도, 몽마의 여왕도, 마룡도. 전생에서는 혼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놈이었다. 혼자서는 싸움이 성립하지도 않았다. 동료와, 5명 전부가 덤벼야만 죽일 수 있는 놈들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모론은 북쪽의 끝에서, 베르무트가 경고했던 누르를 막고 있다. 베르무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왜 그랬는지도 모른다.


“…….”


크리스티나도 함께 갈 수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차원의 틈새에 함께 갔다가는, 크리스티나에게 빙의 된 아니스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그 사실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둘은 매일매일 유진을 위한 기도를 했다. 성검 알테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신들이 전할 수 있는 수많은 기적을 알테어에 깃들게 했다.


“빛이시여…….”


둘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신을 불렀다.


부디 유진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기를. 세상의 수호를 저버리고 타락을 선택한 블랙드래곤을 죽일 수 있기를. 그 과정에서 유진이 함께 죽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지 않기를.


부디, 부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오기를.


“하.”


유진은 모닥불을 쳐다보며 웃었다.


이만큼 걱정을 받는 것…… 아니, 그것보다. 유진은 무릎에 걸친 손끝을 쳐다보았다. 태연하게 있으려 하는데 손가락이 멋대로 떨리고 있다.


……환생하고서 이만큼 긴장한 적이 몇 번이나 되었지? 갑작스레 강림한 유폐의 마왕과 맞닥트렸던 적을 제외하고, ‘적’과의 싸움을 앞에 두고서 이만큼 긴장하고……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던가?


‘……조금 더 준비를…….’


백염식도 아직 6성. 아직 더 성장할 수 있다. 아니면 헬무드를 이 잡듯이 뒤져서 월광검의 파편을 조금이라도 더 찾아내든가. 유진 스스로 그럴 것 없이, 라이언하트의 재력이라면 뭔지 모를 쇳조각들을 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확실하게 얻을 수 있나? 모른다. 월광검의 파편을 돈을 풀어 수배한다고? 그것부터가 불가능할 거다.


오랜 마족들은 월광검에 대해 알고 있다. 특히 가비드 린드먼과 누아르 제벨라는 월광검의 지긋지긋함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누아르는 유진에게 월광검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가비드는 모른다. 사라졌을 월광검이 누군가의 손에 있다.


그 누군가가 월광검의 파편을 모으고 있다……. 그것이 알려졌을 때, 가비드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는 추측하기 어렵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 속내를 알 수 없는 그 대마왕이, 과연 유진에게 ‘언제까지’ 시간을 줄까? 마왕성 바벨에서 기다리겠다고 말은 하였지만…… 대체 언제까지?


‘라이자키아도 문제야. 놈은 완전히 무력화되지 않았어. 차원의 틈새에서, 소멸하지 않고 몸을 보호하고 있다.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어…….’


유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불 속에 웅크린 라이미르아가 보였다.


세계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라이미르아의 악몽은 심해졌다. 제 딴에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잘 먹던 밥도 어느 순간부터는 입도 대지 않고 밤마다 악몽을 두려워하며 신음을 참았다.


크리스티나가 매일 신성마법으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혀 주며 품에 안고 잠들게 도왔지만, 지금처럼 크리스티나가 기도하고 있을 때는 라이미르아를 안아줄 사람이 없었다.


‘……라이자키아의 사념은 점점 강해지고, 흘러들어 오고 있다.’


그렇게까지 간섭이 가능하다는 것이 유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유진이 라이자키아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 동안에 라이자키아가 탈출한다면? 세냐가 수백 년 동안 버틸 수 있던 것은 세계수의 기적과, 저주의 근원인 라이자키아가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자키아가 차원의 틈새에서 탈출하고, 이 세상에 돌아왔을 때에도 세계수의 기적이 세냐를 지켜줄 수 있을까.


‘그 개새끼가 세냐를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자존심 강한 라이자키아가, 자신을 수백 년 동안이나 추방시킨 세냐를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유진은 모닥불을 노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지럽게 번지는 생각들을 떨쳐내고 싶을 때. 닥치고 잠이나 자는 것보다는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어디 가냐?”


시안이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유진의 얼굴과,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보고서 숨을 삼켰다.


시안의 기억 속에서 유진은 언제나 여유로웠다. 저렇게나 긴장하고 심적으로 몰린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 괜찮아?”


“잠이 안 와서.”


유진은 보란 듯이 웃으며 야영지의 뒤편을 가리켰다.


“검이나 좀 휘두르고 올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라. 괜히 내 걱정하지 말고.”


저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나? 시안은 유진을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 모습에 유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 집중하고 싶어.”


결국 시안은 유진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멀어지는 형제의 등을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무력감이나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유진에 대한 걱정만을 느꼈다. ……유진이 지금 얼마나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시안에게 있어서 드래곤이란 존재는 전설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단순한 드래곤도 아니고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는, 시조 베르무트가 활동하던 시기에 존재하던 진짜 전설이었다.


……그런 존재와 싸우고, 죽여야 한다는 것은…… 시안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라면…….’


정말로? 더 이상 유진의 등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유진이라면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하려고 했다. 말도 안 되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일지라도. 시안은 유진을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영지에서 그리 먼 곳까지 오지는 않았다. 밤 산책을 해본들 정신이 진정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적당히 멀어진 곳에서, 유진은 검을 뽑았다.


단순하고 평범한 검이었다. 유진은 잠시 동안 검을 노려보았다.


라이자키아와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할 검은 이 검이 아니다. 아마, 이번에도 전투에서는 성검과 월광검의 비중이 클 것이다.


하지만 결국 검을 휘두르는 것은 유진 자신이다. ……전생과는 달리 좋은 무기들이 수중에 들어오기는 했다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실력이 무뎌지는 것은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군.”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런 적은 없었다. 평범하게 좋은 무기들을 쓰던 전생보다는 아무래도 무기의 비중이 커지기는 했다만, 그렇다고 해서 유진의 실력은 무뎌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생보다 예리하고 완전해졌다. 그 훌륭한 무기들도 완벽하게 쓸 수 있게끔 실력을 연마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이기기 위해서. 싸우고 죽여야 할 적들이 너무 강해서. 그러니 필사적으로 자신을 연마했다. 수련을 계속하고, 마법을 배우고, 새로운 기술들을 만들었다.


최선을 다했다. 환생하고서 시간을 허투루 쓴 적은 없었다. 모두가 필요한 일들이었다. 그 모든 것이 있었기에 지금의 유진이 있었다.


‘죽일 수 있다.’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는 쓰지 않고 순수하게 몸을 움직였다. 손에 쥔 검은 마치 신경이 연결된 것처럼 감각이 생생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휘둘리지 않고 싸울 수 있다.


‘구할 수 있다.’


세냐를 생각했다. 멍청하고 불쌍한 계집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세계수의 기적에 연명하고 있는. 언제 상태가 악화되어 죽을지 모르는.


그런 세냐를 구하고 싶다. 결국 유진이 라이자키아 토벌을 강행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세냐를 빨리 구하고 싶어서. 세냐를 만나고 싶어서. 지금도 흘러가고 있는 시간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해, 세냐를 구할 수 없게 되면. 세냐가 죽어버리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빛의 샘에서 그토록 분노해 날뛰었던 것은 아니스를 위해서였다. 아니스와 똑같이 만들어지고 운명의 놀잇감이 되는 크리스티나를 위해서였다.


그때, 유진은 결국 둘을 구해냈다. 빛의 샘을 파괴했고, 샘과 크리스티나에게 깃들어 있던 아니스의 혼을 구했다. 크리스티나를 희롱하던 운명을 부수고 자유를 주었다.


레헤인야르에서 모론에게 굳이 싸움을 걸었던 것은, 수백 년 동안 지치고 미쳐가던 모론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론이 처했던 상황에 유진은 멀쩡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때 유진이 뭘 하건, 모론은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레헤인야르에서 누르를 가로막아야 했다. 답을 내놓을 수 없을지라도 모론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모론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유진은 모론을 두들겨 패서라도 놈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싶었다.


지금도 다를 것 없다. 세냐를 구하고 싶으니까.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그래서 강행하는 것이다.


세냐의 사정을 알고, 세냐와 잠시 동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 바보 같은 계집애 앞에서 꼴사납게 엉엉 울어버렸다. 세냐에게, 반드시 널 구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폼을 잡았다.


“꼴사납게 굴지 말자고.”


유진은 휘두르던 검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해 버렸는데, 너무 늦게 구하는 것도 웃기잖아.”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자기 자신에게 내뱉는 말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잖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새끼한테 덤비는 거.”


전생에는 항상 그랬었는데. 이제 와서 뭘 떠는 거냐.


유진은 자신을 비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검을 휘두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닥불 앞에서 흐르던 땀은 차갑게 식어서 몸을 떨게 만들었는데, 지금 흐르는 땀은 쿵쿵 뛰는 심장만큼 뜨거웠다.


“맞아요.”


망토 안에 얌전히 있던 메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유진이 느끼는 긴장과 두려움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얌전히 있는 것이 유진이 냉정을 찾는 것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쭉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유진이 냉정과 열의를 되찾았다. 메르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나서서 유진의 힘을 북돋워야 한다고 믿었다.


“유진 님은 반드시 그 라이자키아를 죽이고, 세냐 님을 구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 뒤에는 건강하게 돌아오신 세냐 님과 제 손을 나눠 잡고 놀러 가는 거죠.”


“어딜 놀러 가?”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예요. 제일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유진 님은 제 오른손을 잡고, 세냐 님은 제 왼손을 잡아야 해요.”


메르는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메르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유진 님이 그냥 세냐 님과 손을 잡으셔도 좋구요.”


“내가 걔 손을 왜 잡니?”


“안 잡으실 거예요? 제 손은 언제나, 매일, 지금 당장에라도 잡을 수 있지만. 세냐 님의 손은 저처럼 쉽게 잡을 수 없을 거예요.”


“쉽게 잡을 수 없기는…….”


“그 말은! 유진 님은 언제든지 세냐 님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메르는 유진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메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방방 뛰었다.


“하긴, 당연히 그렇겠죠! 유진 님과 세냐 님은 얼레리꼴레리도 한 사이니까요.”


“뭐?”


“얼레리꼴레리요, 얼레리꼴레리. 유진 님이 말했잖아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잊으셨나 본데, 저는 유진 님의 표층 심리도 읽을 수 있다구요. 유진 님이 세냐 님을 떠올릴 때마다 얼레리꼴레리에 대한 기억부터 떠올리는 것은 이미 알고 있어요.”


유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메르는 그런 유진을 더 놀리고 싶었지만, 이 이상 놀려 버리면 유진에게 매콤한 꿀밤을 얻어맞을 것을 그간의 패턴으로 학습한 상태였다. 메르는 유진이 덜덜 떠는 사이에 재빨리 망토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크흠흠…….”


유진이 분노를 삭이는 중이었다. 나무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겁에 질려 하는 것 같아서 보듬어 주려 했건만, 멀쩡해져 버린 것이니냐.”


라이미르아였다. 그녀는 붉어진 눈시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가슴을 펴고서 나무 밖으로 나왔다.


“넌 안 자고 왜 여기 왔어? 크리스티나는?”


“어머니…… 으흠…… 성스러운 인간님은 기도에 푹 빠져 있느니라. 널 위한 기도보다는 본녀를 안아주면 좋으련만…….”


“꼭 한 마디 더해서 매를 벌지.”


“히익.”


유진이 눈을 부라리자 라이미르아는 재빨리 어깨를 움츠렸다.


“……으흠. 괜찮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만, 본녀가 생각하기엔 말이니라. 정말 무섭다면 굳이 흑룡공과 싸우러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할래?”


“흐흐흠…… 본녀가 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라. 그리고…… 그리고 음, 본녀도 아직 흑룡공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달까…….”


라이미르아는 우물쭈물하여 유진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유진을 걱정한다는 것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 망나니 같은 인간 남자는 성격이 개차반에 쓰레기이긴 했지만, 여정 중에 라이미르아에게 꽤 잘 대해주었다.


라이미르아가 다치지 않도록 망토 안에 들어갈 수도 있게 해주었고, 라이미르아가 너무 몸을 떨 때에는 망토 안에서 손을 잡아주기도 했었다…….


“본녀는 흑룡공이 널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느니라.”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네. 난 네 애비를 죽이러 가는 거야.”


“음…… 음, 흐흥. 본녀는 흑룡공이 네게 죽지 않을 것이라 믿느니라. 사악한 인간이여. 네가 인간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만큼 강하다는 것은 알겠다만, 그 힘이 드래곤 중에서도 으뜸인 흑룡공에게 닿을 리가 없지 않으냐.”


“아, 그래. 그럼 네게도 잘됐네. 내가 죽으면 내 애비가 널 아주 어여뻐 해줄 테니까.”


“으흐흠…… 방금도 말했듯이, 본녀는 아직 상봉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달까…….”


라이미르아의 어깨가 다시 축 처졌다.


결국은 이것이다. 라이미르아는 흑룡공이 두려웠다.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강렬해지는 악몽도, 마음과 정신의 떨림이 두려웠다.


그것에는 라이미르아 본인도 의문을 느꼈다. 왜, 아버지인 흑룡공과 가까워지는 것이 이토록 두렵단 말인가?


“그러니까…… 본녀는 이만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은가 생각하느니라. 그, 네가 걱정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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