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아닙니다.”
“저희가 유진경과 세냐 님을 감시하고 있던 것은, 황제 폐하의 뜻이십니다.”
황제. 그 이름이 나온 순간, 유진은 쯧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거절은 못 하겠군.’
어차피 며칠 뒤에 싫어도 한번 봐야 될 놈이기도 하고.
“갑시다.”
“예?”
“폐하도 저를 만나고 싶으셔서 여러분을 보낸 것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갑시다.”
다분히 계산적인 말이기도 했다.
지금 시간을 보라. 벌써 해가 저물었다. 당장 황궁에 도착하면 시간상 황제와 저녁을 함께할 것이고, 저녁을 먹고 나면 밤이 깊어질 것이다. 그만큼 시간이 늦어진다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라는 핑계를 댈 수 있게 된다.
‘다음에 일찍 만나는 것보다 지금 늦은 시간에 만나는 것이 낫지.’
황제가 먹는 밥이 궁금하기도 했다.
황제
“이건 너무하지 않나?”
유진은 보란 듯이 다리를 꼬아 삐딱한 자세를 취했다. 어마어마하게 무례한 일이기는 했지만, 지금 유진은 그딴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거절하지 않았다.
부르는 대로 와주었다.
세냐는 함께 오지 않았다. 황제가 부른 것은 유진뿐이었다. 세냐는 자신이 제외되었다는 것에 당황해했지만, 일단은 수긍하고서 먼저 저택에 돌아가 주었다.
그렇게 세냐를 먼저 보낸 후. 유진은 백룡 기사단의 기사들과 함께 마차를 탔다.
거기서부터 슬슬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것? 그거야 뭐 걸어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만. 마차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창문은 뿌옇게 칠해서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도시의 거리를 달릴 때는 흐릿하게나마 창밖이 보였는데, 황궁 내부에 들어온 순간부터는 아예 밖이 보이지 않았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굳이 이해해 주려 한다면 할 수 있기는 했다.
제국의 황궁. 이 거대한 나라에서 가장 존귀하신 황제 폐하가 거하는 곳. 그런 곳이니 보안에 심혈을 기울이고 비밀스러워야 할 터.
하지만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에서 내리고 난 뒤에도 가관이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은 아주아주 정중한 태도로 안대를 건네주었다.
그쯤 되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과연 어디까지 하려는가 싶어서, 거절하지 않고 안대를 써주었다.
당연히도 평범하고 단순한 안대는 아니었다. 높은 수준의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 시각뿐만이 아니라 청각과 후각, 기감마저 차단하고, 방향감각까지 상실하게 만든다.
그래 봤자 유진의 마법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저항하고 무시도 가능했지만, 유진은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만약 그래 버린다면, 눈에 불을 켜고서 지켜보는 근위기사들이 트집을 잡아댈 것이 뻔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하려고 든다면 황제에 대한 불경죄를 넘어 반역죄까지 뒤집어씌울 수 있으리라.
안대를 쓰고, 기사들에게 인도되어 도착한 방은ㅡ 마차에 타기 전에 상상했던 웅장한 대전(大殿)의 중심도 아니었고, 화려한 미식이 가득 찬 식탁의 앞도 아니었으며, 그 흔해 빠진 응접실도 아니었다.
작지는 않은 독방.
명령인지 부탁인지. 기사들은 벽에 붙은 의자에 앉아달라고 말했고, 유진은 웃으면서 시키는 대로 해주었다.
“내가 무슨 죄라도 지었습니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고서 약 30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입을 닫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참 많이 참았다고 생각했다. 일단 30분이나 닥치고 앉아 있지 않았나? 유진은 왼쪽 허벅지에 걸친 오른발을 까딱까딱 흔들면서 맞은편을 노려보았다.
그곳엔 낯이 익은 얼굴의 기사가 2명 서 있었다. 황제를 섬기는 근위기사단인 백룡 기사단. 1번대 대장인 카리안 디아크와 2번대 대장인 데어리 디아크.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둘은 쌍둥이지만 이란성이라서인지 그리 닮지는 않았다. 그로도 모자라 동생인 데어리는 태닝이라도 한 듯 피부가 갈색이라 알아보기가 쉬웠다.
하지만. 오늘부터 유진은 ‘데어리 디아크’라는 이름에서, 쌍둥이니 동생이니 태닝 피부니 하는 것은 연상하지 않기로 했다.
“눈깔을 뽑아버릴까.”
툭 내뱉은 말. 두눈에 한껏 힘을 주고서 유진을 노려보고 있던 데어리의 표정이 순간 멍하니 풀렸다.
저 꼬마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진과 데어리는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고, 직접 이야기를 나눈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며, 이곳은 황궁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이고, 데어리는 이 공간에서 집행권을 가지고 있는 극소수의 기사였으며, 앞서 말한 모든 것을 제치고서, 일단 데어리의 나이는 유진보다 2배는 많았다.
“방금 뭐라고 한 건가?”
그래서 데어리는 일단 그렇게 물어보았다.
머릿속의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런 경우가 간혹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유진이 그런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확실하게, 자신의 의지로 저 말을 내뱉었다.
그냥 이 모든 것이 꼽고, 뭣도 없고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자식이. 정말로 그런 사람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눈깔에 힘을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깔을 뽑아버릴까 라고 했습니다.”
본심은 황제의 욕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아직 유진에게는 그 정도의 자제력이 남아 있었다.
왜 세냐를 초대하지 않은 것인지도 이해했다. 이건 속내가 뻔하고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그 현명한 세냐에게 이런 압박은 할 수가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를 보였다가는 세냐가 먼저 황궁을 뒤집었을 것이다.
그럼 유진에게는? 못할 것이 없기는 했다. 유진의 명성은 제쳐두고서, 그가 속한 라이언하트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한 가문이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콱.’
유진이 황제에 대한 쌍욕을 참고 있는 것은, 가문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기 서서 눈깔을 부릅뜨고 있는 저 두 새끼는? 황제도 황족도 아니잖은가?
“뭐…… 라고?”
“새끼가 귀가 잘 안 들리나.”
기왕 내뱉은 거. 유진은 존칭도 때려치웠다. 그는 앞으로 뻗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데어리에게 이죽거렸다.
“열 받으면 나랑 한번 붙든가. 폐하도 아직 안 오셨고 방도 널찍하니 결투하면 되겠네.”
“네놈!”
“목소리 낮춰 새끼야, 폐하가 거하시는 황궁에서 불경하게 말이야. 쌍놈 새끼도 아니고 열 받는다고 버럭버럭 질러대면 어떡해?”
이죽대는 말에 데어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숨을 씨근거리며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데어리는 주저하지 않고 손수건을 던지려 했지만, 그 순간에 카리안이 난입했다.
“그만.”
“말리지 마!”
“이길 자신은 있고?”
분노한 것은 카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이 쌍둥이는 처음부터 유진을 경계하고 적대했다. 백룡 기사단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키옐 제국 제일의 기사단을 말할 때. 항상 언급되는 것은 백룡 기사단과 라이언하트의 백사자, 흑사자 기사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지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1년 전에 벌어진 대항전에서, 백룡 기사단은 라이언하트의 백사자기사단에게 7 대 3으로 패배했다.
패배의 결정적인 이유가 저 유진 라이언하트 때문이었다. 20살의 청년이…… 백룡 기사단의 3명을 패배시켰다. 심지어 일방적이고 압도적으로 말이다.
패배한 3명 중에는 4번대 대장인 에볼트 마기우스도 있었다.
대항전 이후로 백룡 기사단은 더 이상 제국 제일의 기사단이라 언급되지 않았다. 이 거대한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은 라이언하트의 기사단. 일개 가문의 가병(家兵)이 제국의, 황제의 무력(武力)을 넘어섰단 말이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유진 라이언하트다. 백룡 기사단이란 자부심을 수십 년 동안 가지고 있는 카리안과 데어리가 유진을 적대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적대하고 경계하는 것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카리안이 생각하기에, 동생인 데어리와 유진이 결투를 벌인다면 10분, 아니, 5분 만에 동생의 패배로 결말이 날 것이 틀림없었다.
카리안 본인도 대장이니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고, 동생의 실력도 인정하는 바이지만ㅡ 유진 라이언하트. 이제 21살, 곧 22살이 될 저 젊은이는…… 일반적인 상식에 속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
데어리도 내심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숨을 씨근거리다가, 결국은 손수건을 구겨버리고서 품 안에 쑤셔 넣었다.
“지금 상황이 많이 불쾌한가?”
카리안은 동생이 진정한 것을 확인하고, 유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불쾌하냐고? 저 질문이 오히려 더 얄미웠다.
“당연히 불쾌하지.”
뚜둑.
유진은 손가락을 꺾으며 대답했다. 이 방은…… 수상쩍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대로 파악하지는 않았지만, 당장 느끼기에는…… 깊은 지하인 것만 같다. 등을 대고 있는 벽도 일반적인 자재가 아닌 것 같다.
“아무 죄도 짓지 않은 나를 죄인처럼 끌고 왔잖아.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말이야.”
“자네가 정말 죄인이라면 이 방이 아닌 감옥에 보냈겠지. 그리고 폐하께서 자네와 대담하지 않으실 것이고.”
카리안은 그렇게 말하고서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폐하께서 늦으시는 것에 너무 불쾌해하지는 말게. 유진 라이언하트. 자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의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
용사.
“하지만 이곳은 키옐 제국이고, 자네는 이 제국의 시민이며, 자네의 가문인 라이언하트는 300년 전부터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네. 그런 자네가…….”
“그래서. 황제 폐하는 무고한 시민을 이딴 식으로 대해도 된다는 건가?”
“그 문제는…… 내가 말할 것이 못 되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폐하의 시간은 아주 귀중하다는 것일세.”
카리안은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영광으로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자네도 알겠지만…… 이 방은 은밀하고 특별한 곳일세. 내가 알기로, 이 방에 들어와서 폐하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폐하가 ‘진실 된 관계’를 쌓고 싶어 하는 사람뿐일세.”
“진실 된 관계?”
“그래. 자네의 양부인 라이언하트의 가주도 이 방에 들어온 적은 없어.”
불온한 심증이 향하는 황족. 혹은 고위귀족. 이 ‘진실의 방’은 대대로 그럴 때 쓰여 왔다. 카리안이 알기론, 작위도 없는 사람이 이 방에 들어온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격은 충분하지. 위험하기도 하고.’
카리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술을 닫았다. 사실 더 이야기할 수가 없기도 했다.
방의 문이 열렸다.
당대 키옐의 황제. 스트라우트 2세가 화려한 망토를 펄럭이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황제’라는 단어에서 흔하게 상상할 수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커다란 왕관과 망토. 위엄 가득한 얼굴에 한 손에는 지팡이까지 들었다.
황제는 혼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바로 등 뒤. 마치 그림자처럼 따르는 기사는, 백룡 기사단의 단장인 알체스터 드라고닉이었다. 그는 방에 앉은 유진을 보고서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당장 무어라 말하지는 않고 조용히 황제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가 들어온 순간. 카리안과 데어리는 즉시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유진도 일단은 예를 갖추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럴 필요 없다. 자리에 앉도록.”
황제가 대뜸 말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대의 무릎이나 꿇리자고 이리 부른 것은 아니니.”
시선과 목소리가 차갑다. 유진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으면서, 씰룩거리는 뺨을 진정시켰다. 황제는 그런 유진을 지그시 응시하며 지팡이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그러자 유진의 맞은편에 화려한 옥좌가 나타났다. 황제는 그 의자에 털썩 앉고서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대와는 언젠가 꼭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
“영광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기쁘군. 사실은 더 일찍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네만…… 흠. 짐도 한가하지 않았고, 그대도 바쁜 시간을 보냈었지.”
황제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빙긋이 웃었다.
“사실 만나고자 했다면 지금보다 일찍 만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자네가 아는지는 몰라도……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말이야. 아직 어린 아들에게는 알현의 자격이 부족하다면서 한사코 자리를 미루더군. 3년 전이었나? 흑사자 성에서 있었던 라이언하트의 동란. 짐은 그때, 라이언하트 가주뿐만 아니라 그대도 부르려 했다.”
“지금이라도 불러주셔서…… 성은이 참 망극하옵니다.”
그딴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지만, 유진은 일단 그렇게 말해주었다.
“짐은 그대에게 관심이 많아.”
황제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대를 수식하는 말은…… 너무나 많아. 당장 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만 하여도 몇 가지나 되는군.”
“…….”
“아직 젊은 그대의 행보에 대륙의 모두가 주목하고 있지. 짐도 마찬가지라네. 그대는…… 라이언하트이기 전에, 제국의 시민이니 말이야.”
황제는 느긋한 어조로 말하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알체스터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폐하……!”
“아직 짐의 말은 끝나지 않았네.”
황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고는 다시 유진에게 말을 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짐이 그대를 오늘 이 자리에 부른 것은, 그대를 평가하고…… 칭찬하고, 그러기 위해서가 아닐세.”
“그럼 어떤 이유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지.”
지팡이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대가 무엇을 했고,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지팡이가 땅에 닿는 순간. 알체스터는 급히 손을 뻗어 황제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근처에 있던 카리안과 디아크는 알체스터가 옥체에 손을 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둘이 동시에 뽑은 검이 알체스터의 행동을 가로막고.
ㅡ화아악! 방을 구성하는 벽이 사라졌다. 황제의 뒤편에 선 알체스터와 카리안, 데어리의 모습도 사라졌다. 끝없이 확장된 공간에서, 유진과 황제만이 서로의 의자에 앉아 마주 보았다.
“이건……?”
유진은 두 눈을 얇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벌어진 일이 낯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진은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징조 없이 무언가가 일어났다.
“정신과 정신의 대화.”
황제가 옥좌에 앉아서 껄껄 웃었다.
“너무 놀라지는 말게. 그대와 짐의 육신은…… 방 안에 그대로 앉아 있으니까. 짐이 알기로 그대는 뛰어난 마법사라지? 그러니 이해하기 쉬울 걸세. 이건…… 오래되고 신비한 마법이지.”
“허.”
지금 벌어진 일. 이 공간. 유진은 라이언하트 지하에 있는 암실을 떠올렸다.
암실에서 벌어진 일도 지금과 비슷했다. 아무런 징조 없이, 어떻게 간파하기도 전에ㅡ 의식이 육체에서 독립되어 별개의 공간에 구현되는 것.
“라이언하트의 시조.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키옐 황가에 바친 선물이지.”
황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황제의 눈앞에 화려한 술잔이 나타났다. 거리가 꽤 멀었는데도 술잔에서 풍기는 향은 유진의 코를 울릴 만큼 강렬했다.
“황제인 짐은 현실에서도 위대하며, 바라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에서의 짐은, 진정한 의미에서 전능하지.”
이곳은 현실이 아닌 정신의 세계다. 바라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전능함은 유진이 아닌 황제만의 것. 유진도 시험 삼아 여러 가지를 상상해 보았지만, 황제처럼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그대도 이해했겠지.”
황제는 향기로운 술로 입을 축이고서,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방. 아니, 이 세계에서 짐은 더욱이 전능하다. 그리고 현실 이상으로, 이 세계에서 짐과 그대는 평등하지 않다.”
300년 동안, 이 방은 제국의 황제들에게 요긴히 쓰여 왔다. 저열한 욕망을 드러내고 싶을 때도 즐겁게 쓸 수는 있지만ㅡ 이 방의 참된 가치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황위를 계승할 때. 부왕은 계승자들을 이 방에 불러 최후의 검증을 마친다. 과연 누가 제국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을 것인가. 가슴에 어떤 욕망과 야망을 품고 있는가. 300년 동안 제국의 황제들은 이러한 검증을 거쳐서 선정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쓰였다. 신하의 충성이 진실 된 것인지 이해할 때. 누군가의 진의를 파악하고 싶을 때. 그리고.
“그대가 아무리 뛰어난 기사이자 마법사여도. 성검의 선택을 받은 용사일지라도. 이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짐은, 아주 작은 의지만으로 그대의 정신을 죽일 수 있다.”
적을 제거할 때.
“짐의 행동이 폭거라 생각하나?”
황제는 술잔을 흔들며 걷기 시작했다.
“폐하가 라이언하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하! 그렇지는 않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진즉에 이 방에서 라이언하트의 가주를 제거했겠지. 짐뿐만이 아니다. 선황제들 모두가, 라이언하트를 주목하고 탐내었지.”
황제의 걸음이 멈췄다.
“그것뿐이다. 주목하고 탐내었지만, 억지로 가지려 들지는 않았다. 세상을 구한 위대한 베르무트에 대한 경외…… 또한, 라이언하트는 제국에게 충성하였으니. 제거할 필요도, 무리해서 손에 쥐려 들지도 않았지.”
황제는 다시 한번 술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후우…… 하지만 말이야. 지금의 라이언하트는 너무 커졌지. 이 정도나 커졌으면 목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어.”
“…….”
“그에 관한 것은, 자네와의 ‘대화’가 끝난 뒤에 천천히 생각해 보지.”
“라이언하트에 목줄을 채우기 위해 저를 이곳에 부르신 겁니까.”
“아니!”
황제는 힘을 준 목소리로 답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이것만큼은 말해두지. 이 모든 것은 짐의 사사로운 욕망 때문이 아니다. 그대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짐은 제국의 안녕과 대륙의 평화를 바라기에, 그대를 이곳에 부른 것이다.”
“허…… 그러십니까? 제국의 안녕과 대륙의 평화를 바라시면서 왜 저를 탄압하시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가? 그대가 제국의 안녕과, 대륙의 평화를 해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콰작! 황제가 들고 있던 술잔이 박살 났다.
“성검의, 빛의 신의 선택? 용사. 영광스럽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위대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정말로 영웅이, 용사가 필요한가?”
번뜩이는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레헤인의 나이트마치, 그대가 유폐의 마왕과 나눈 대화는 짐도 들었다. 그대가! 유폐의 칼인 가비드 린드먼을 어떻게 희롱했는지도 보았다.”
저 미친놈을 막아라!
유진이 가비드를 공격했을 때, 황제는 체통도 잊고서 저렇게 고함을 질렀었다.
“유폐의 마왕이 말했지. 약속의 끝! 그리고 전쟁! 그 마왕은, 헬무드의 제왕은, 먼저 전쟁을 벌이지 않아. 하지만 우리가 전쟁을 벌인다면 피하지 않겠지.”
판데모니엄으로 와라.
나의 마왕성 바벨을 올라, 내게 검을 겨누어라.
너희가 그러고자 한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서 기다리도록 하겠다.
“대체 누가 전쟁을 바랄까?”
황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용사가 없다면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300년 동안 그래 왔지!”
“누가 용사가 되고 싶어서 되었나…….”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내뱉었지만, 황제는 유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격정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대가 마왕에게 검을 겨누지 않는다면!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대는 그럴 생각이 없지 않나? 그대는 마왕에게 도전을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헬무드의 공작인 가비드 린드먼을…….”
“뭘 그것 가지고 호들갑이십니까.”
유진은 보란 듯이 다리를 꼬면서 웃었다.
“폐하는 모르시는 모양인데, 헬무드의 용마성. 그걸 바닥에 처박은 것이 바로 접니다. 공작? 하하, 라이자키아 그 새끼를 죽인 것도 나고요. 언제 한번 라이언하트 저택에 와보십시오. 뒈진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보여 드릴 테니.”
“뭐…… 라고?”
황제의 눈동자가 부릅 뜨였다. 그는 어깨를 덜덜 떨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용마성을 떨어트린 것이 그대라고? 수백 년 동안 은둔한…… 마룡 라이자키아를, 그대가 죽였다고?”
“궁금하면 한번 보시든가.”
이 상황은 유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정말 그런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공간이, 이곳에 쓰인 마법이. 황제를 전능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 방을 만든 것은 베르무트잖아.’
의심하지 않았다.
이 방에서, 황제는 유진을 제압할 수 없다. 황제가 자신 있게 떠든 것처럼, 유진의 정신을 죽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유진은,
하멜은 베르무트를 믿었다.
“한번 보라고?”
황제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지팡이를 들었다. 우우우우! 공간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는! 짐 앞에서 어떠한 거짓말도 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 너의 모든 것이, 너의 모든 생각이, 너라는 인간의 밑바닥이! 짐에게 이해될 것이다!”
“아 해보시라니까.”
“시건방진……!”
지팡이가 유진에게 향했다.
“우선 무릎을 꿇…….”
흘러들어오는 의식.
완전하지 않은, 어렴풋한 이해.
황제는 명령을 끝까지 내뱉지 못하고,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뭐?”
황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중얼거렸다.
“우둔한 하멜?”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 이 개새끼야.”
황제
사람은 왜 욕을 하는가.
그것에 관해서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는가? 욕은 그냥 하는 것이다.
그냥, 진짜 그냥.
욕이 나와서.
욕을 하고 싶어서.
욕을 할 수밖에 없어서.
지금 유진도 그랬다. 이 상황과, 황제에게 욕이 나왔다. 욕을 하고 싶었다.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 아니, 저 개새끼를 보라.
내뱉던 말이 가관이다. 뭐? 제국의 안녕과 대륙의 평화? 결국 저 개새끼는 헬무드를, 마왕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오늘 이곳에 유진을 불러다가 목줄을 채우려 했다.
사실 달리 생각하면, 황제의 말도 이해는 갔다. 헬무드는 너무 거대한 제국이고, 그곳에는 유폐의 마왕뿐만 아니라 멸망의 마왕까지 있다. 대륙의 모든 국가와 인간과 이종족이 힘을 합쳐야만 간신히 헬무드와의 전쟁이 성립할, 아니, 두 마왕이 직접 전선에 나선다면 전쟁은 일방적인 흐름이 될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시대를 산 황제이기에, 저런 말은 할 수도 있다.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진은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다. 유진은 자신의 사고방식이 300년 전의 과거, 전쟁시대에 묶여 있음을 인정했다. 남이 뭐라고 하건 유진은 꼰대가 맞았다.
“나 때는 말이야, 이 개새끼야.”
유진은 의자를 발로 뻥 걷어차면서 내뱉었다.
“아주 엿 같은 세상이었어. 곳곳에서 마족과 마물, 흑마법사가 개 짓거리를 벌이고 말이야. 마경에서는 마왕의 군대가 스멀스멀 기어 내려왔지.”
“어…… 어어…….”
“대체 누가 전쟁을 바라느냐고? 나 때는 시X 전쟁을 벌이고 싶어서 벌인 줄 아냐? 어? 마왕 그 개자식들이 세상에 먼저 선방을 쳤다고. 넌 시X 황제란 새끼가 역사도 안 배웠니?”
황제는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황족이었으며 계승서열 1위의 황자였다. 그런 사람이다 보니 태어나서 욕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고, 마찬가지로 스스로 욕을 내뱉어본 적도, 그럴 필요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멜은? 변두리 시골마을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욕이 친숙했다. 골목대장을 해먹던 어린 시절부터 주둥이에 욕을 달고 살았다. 용병이 되고서부터는 그냥 입에 걸레를 물고 살았다.
베르무트의 동료가 된 후. 아니스에게 등짝을 맞아가면서까지 품행의 교정을 받았지만, 본래 사람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어디까지나 예전에 비해서 욕을 ‘덜’하게 되었을 뿐. 하멜로 죽고, 유진으로 환생한 지금까지도 유진에게 욕은 친숙했다.
“그렇게 선방을 처맞았으니, 그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서 싸웠단 말이야. 지금의 평화? 이것도 시발 나 같은 옛날 사람들이 너희 대신 피를 흘리고 뒈져서 얻은 거라고. 알간? 그런데 이 좋은 세상에서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자라서, 운도 좋게 황가에서 태어나 황제가 된 너란 새끼는. 아오, 이 개새끼!”
유진은 얼굴을 콱 구기고서 황제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황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태어나서 맞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렇게 치켜든 주먹이 자신에게 향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반응이 없는 것. 유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일단 열이 받고 짜증이 났기에, 하고 싶은 말부터 쏟아냈다.
“뭐? 제국의 안녕과 대륙의 평화? 이 갈아 마실 새끼. 너는 유폐 그 새끼가 무게 잡고 떠들어댈 때 뭘 들은 거야? 용사고 자시고, 나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뭔지 모를 약속은 끝이 난다고! 약속이 끝나면 어떻게 되겠냐? 어떻게 되기는! 유폐 그 새끼가 300년 전에 했던 짓을 다시 벌이겠지. 그게 뭔지 알아?”
“…….”
“세상이 X된다고! 어? 그냥 X된다고 이 등신아. 이 어린놈의 새끼야. 너는 300년 전 조상들이 마왕한테 선방을 얼마나 아프게 처맞았는지 알면서도 그딴 말을 해?”
황제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황제는 이 모든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천박하고 교양 없는 말을 쏟아대는 남자. 유진 라이언하트. 그것이 틀림없는데, 황제가 이 공간의 권능으로 이해한 유진 라이언하트의 안에는 우둔한 하멜이 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300년 전에 죽은 우둔한 하멜이 왜 유진 라이언하트의 안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우둔한 하멜이, 300년이 흐른 지금 시대의 키옐 제국 황제에게 험한 욕설을 쏟아내면서 훈계를 한다고?
이걸 대체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이 개새끼야, 너보다 300년 일찍 태어난 어르신이 말을 하는데 어디서 아가리를 닫고 있어? 대답 안 해?”
“무…… 무엄…….”
“무엄? 무엄은 이 개새끼를 확!”
지금까지는 그나마 욕을 하는 것으로 참았는데, 황제가 저따위로 구니 욕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참는 노력이라도 할 텐데, 지금은 참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쯤 되니 황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상황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저런 표정을 하고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니란 것쯤은 황제가 아닌 동네 똥개도 이해할 것이다.
“이놈!”
황제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화아악! 이 공간에서의 전능함은 건재했기에, 황제는 스스로 바란 대로 하늘 높이 떠오를 수 있었다. 그는 높은 하늘에 옥좌를 만들고 앉아서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제국의 황제인 짐에게……!”
“이리 안 내려와?”
“네, 네 정체를 스스로 말하라!”
“뭘 말해? 네 잘난 권능으로 이해한 것 아니었어? 너도 내가 누군지 알잖아.”
“그…… 그건…….”
“그래, 말해달라니까 말해줄게. 난 유진 라이언하트고, 300년 전 뒈진 하멜의 환생이다. 됐냐? 내 시대의 황제도 너처럼 나한테 시건방은 안 떨었어, 이 씨X놈아!”
거짓말이다. 300년 전에 황제를 만나 본 적이 있긴 한데, 본격적으로 마경을 떠돌기 전이었다.
바다를 건너서 마경을 좀 떠돌며 이름을 좀 날리고, ‘마왕 토벌’이라는 목적을 정하고 재정비를 위해 대륙에 돌아왔을 때. ‘용사 베르무트’와 동료들은 키옐의 황제를 비롯한 대륙의 지배자들을 알현했다.
망해가는 세상에서 백서의 고혈을 빨아 개최한 연회. 마왕을 토벌하러 떠나는 영웅들과, 그 선두에 선 용사에 대한 송별. 당시에도 마음에 들지 않은 자리였지만, 그렇다고 황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해대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만약 하멜이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지 않고 돌아왔다면? 과연 그때의 황제가 지금 시대의 황제처럼 시건방을 떨었을까?
유진은 그러진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뱉은 저 말이 거짓말일지라도, 유진 본인은 거짓말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짐은…… 키옐의 황제다.”
황제는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고,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켰다. 환생? 세상에 그런 일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여전히 믿을 수 없었지만ㅡ 믿어야만 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대가 300년 전 영웅, 우둔한 하멜의 환생일지라도. 짐 앞에서 이토록 무례할 수 없…….”
“왜 그래서는 안 되는데?”
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끝까지 젖혀야 발바닥을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곳. 유진은 시험 삼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문제없이 잘 움직였다. 다음으로, 제자리에서 몇 번 가볍게 폴짝폴짝 뛰어보았다.
“잘 생각해 봐. 네가 날 이곳에 부른 것은, 이 공간의 잘난 권능으로 날 제압하거나 조지기 위해서잖아.”
“그건…….”
“아니라고? 황제란 놈이 거짓말해도 돼?”
“제국의 안녕과,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다!”
황제는 물러서지 않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대가 우둔한 하멜이라면 더더욱 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터인데? 그대는 300년 전의 그 끔찍한 전쟁을 직접 보고 겪지 않았나!”
“잘 알지.”
“지금의 평화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와 그대를 비롯한 영웅들이 얻어낸 것이다! 짐은, 후대의 황제로서 이 평화를 지속해야 할 의무가…….”
“너 시X 내 말을 제대로 안 들었구나? 가만히 있어도 약속은 끝난다니까!”
“그럴지라도…… 다른 방법은 있을 것이다. 아직 약속은 끝나지 않았잖은가! 그리고 약속이 끝난다고 해서 무조건 마왕이 전쟁을 벌일 것이란…….”
“안 벌일 것이란 보장도 없지! 야, 네가 나보다 마왕을 잘 아냐? 어? 나보다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말꼬리를 잡아?”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을, 마왕을 죽이지 않고 평화를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
꽈드득. 황제는 팔걸이를 양손으로 강하게 쥐면서 내뱉었다.
“짐이 그대를 부른 이유는! 그대가 섣불리 행동하지 않도록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대의 진의를 파악하고, 이해하여, 그대가 제국과 세상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그래서 어쩌시겠다고?”
유진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이죽댔다.
“너도 해봤잖아. 지금 이 공간에서 네가 가진 권능은 날 위협하지 못해.”
“짐의 권능을 우습게 보지 마라!”
“웃기고 앉았네. 누가 보면 이 권능이 네가 갈고닦아 만든 것인지 알겠어. 이거 베르무트가 준 거잖아?”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지팡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쿠르르릉! 또다시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앉은 높은 상공에서 거대한 검이 나타났다.
“유진 라이언하트, 아니! 우둔한 하멜이여. 그대의 존재는 제국과 세상에 크나큰 위협이 된다. 그러니 짐은 이곳에서 그대를 심판하리라!”
“네 생각대로 한다고 치자. 여기 안 온 세냐는 어떡할래?”
“그건…….”
“이제 너도 알잖아. 내가 세냐의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내가 황궁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세냐가 당연히 날 찾으러 오겠지?”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말대로, 유진을 어떻게 제압하거나 죽이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현명한 세냐의 존재가 크나큰 위협이었다. 그녀를 이 방으로 데리고 올 수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만ㅡ 후계자, 아니, 오랜 벗에 관한 문제로 크게 분노한 대마법사에게 과연 대화가 통할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뜻을 거둘 수는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위험하다. 용사라는 것만으로도 평화에 위협이 되는데, 그의 정체가 사실은 300년 전의 망령이라면 더더욱! 이곳에서 목줄을 걸어야만 했다.
“지금 네가 하는 것이 정말 맞다고 생각하냐?”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세냐가 살아 있고, 모론도 살아 있지. 그리고 나도 있어. 대륙의 사정도 300년 전보다 훨씬 낫지. 그만큼 유폐의 마왕과 마족들도 강해졌겠지만, 300년 전처럼 엄청나게 불리하지는 않단 말이야.”
“…….”
“너는 내가, 용사가 세상에 위협이 된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게 맞아? 오히려 내 존재는 세상이 정말 X됐을 때의 보험이지 않나?”
황제.
스트라우트 2세는 어리석지 않았다. 라이언하트에 대한 욕심도 있고 야심도 있지만, 지금 이 행동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대의가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를, 용사를 죽인다.
그런 선택지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황제는 유진이 말한 것처럼 용사의 존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아직 약속이 끝나지 않은 지금. 평화가 유지되는 중에 용사가 젊은 혈기로 날뛰어 헬무드와 마왕에 시비를 거는 것만큼은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야 전례가 있지 않은가? 유진이 나이트 마치에서 유폐의 마왕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세우지 않았다면. 물러서려는 유폐의 칼에게 굳이 덤벼들지 않았다면. 황제도 이런 극단적인 방법이 가능한 장소에 유진을 앉혀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는 너무 위험하다.”
황제는 긴 한숨을 쉬면서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하늘에 떠 있던 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심지어 그대는 용마성을 떨어트리고…… 헬무드의 공작 라이자키아를 살해하지 않았나? 이 사실들이 알려진다면 틀림없이 논란이 될 것이다.”
“용마성 떨어트린 것은 비밀이니까 괜찮아.”
“라이자키아 공작을 살해했는데, 용마성 추락이 비밀로 남을 것이라 보는가!”
“에이 괜찮다니까. 라이자키아가 당시에 용마성에 없다는 것은 헬무드 마족들도 다 알고 있고. 유폐의 마왕도 라이자키아가 죽은 것은 신경도 안 써.”
“그걸 어떻게 확신…….”
“네가 나보다 유폐 그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아냐?”
유진이 그렇게 물어보니 황제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유진도 그리 당당하지는 않았다. 유진도 300년 전에 유폐의 마왕과 마주 선 적은 없었고, 환생하고서 몇 번 만나기는 하였는데…… 유폐의 마왕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인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야. 너는 지금 세상이 굉장히 평화롭다고 생각해서, 그 평화를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거든?”
“그게 무슨 말인가?”
유진은 사마르 대수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황제에게 말해주었다.
유폐의 삼마인 에드몬드 코드렛. 놈이 대수림 깊은 곳에서, 수천수만 명의 원주민을 제물로 삼아서 마왕이 되기 위한 의식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못 믿겠으면 네 권능으로 확인하라니까?”
황제라 해서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아까만 해도 그랬다. 황제는 유진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려 했지만, 이곳의 권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유진이 우둔한 하멜이라는 것뿐이었다…….
‘역시. 잘 안 되는 모양이지.’
유진은 황제의 반응을 통해 다시금 확신했다.
이 공간을 만든 베르무트는, 이곳의 권능이 하멜에게 위협이 되지 않게끔 안배하였다. 하멜의 환생을 위해서는 라이언하트가 반드시 존속해야 하기에, 그 안배는 유진뿐만 아니라 라이언하트의 ‘피’에도 똑같이 적용되리라.
“그리고 내가 뭐 당장 전쟁을 벌이거나, 마왕과 싸우겠다는 것도 아니라고.”
“…….”
“이미 300년 전에 한 번 죽었다가 환생했는데. 내가 미쳤다고 또 죽을 게 뻔한 묫자리에 들어갈까? 나도 다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어.”
“음…….”
“현명하게 생각해. 스트라우트 2세 폐하. 우리가 서로 적대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나도 당연히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라. 300년 전에 평화를 위해서 싸우다 뒈지기도 했다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황제를 향해 내려오라 손짓했다.
“올려다보기 힘들다 야. 우리 내려와서 조금 더 가깝고 진득한 얘기를 나눠보자. 그래, 우리 한번 네가 좋아하는 진실 된 대화를 해보자고.”
살살 달래듯이 건네는 말. 태도가 불손하고 말투가 아주 건방졌지만…… 황제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유진의 말에 동감하기도 했다. 세상의 평화.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좋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높이 떠올랐던 옥좌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과거의 영웅이여. 다시금 짐을 소개하겠다. 짐은 키옐 제국의 48대 황제인 스트라우트 데오드라 키옐이라…….”
“이 개새끼 이리 와.”
유진은 황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옥좌가 손이 닿는 높이까지 온 순간에 냅다 손을 뻗어 의자 다리를 붙잡았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 지가 황제라고 반말이나 찍찍 내뱉는데, 이 새끼야 내가 너보다 300살은 오래 살았어!”
“뭐, 뭐 하는 짓이냐?!”
황제가 당황하여 팔을 휘저었다. 옥좌를 다시 높이 올리고, 유진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이 당기는 힘에 옥좌가 땅에 떨어졌다.
“뭐 하는 짓이냐고? 널 위한 짓을 하려는 거다.”
“무슨 말을……?!”
“네가 건방지고 싸가지가 없는 것은 태어나서 제대로 처맞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 괜찮아, 여기서 처맞는다고 해서 현실의 네가 아픈 것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서 황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몇 대만 맞자.”
냅다 휘두른 손바닥이 황제의 뺨에 작렬했다.
황제
방 안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알체스터는 이러한 상황과 침묵이 익숙했다.
알체스터는 황제가 황자이던 시절부터 호위 기사를 맡았고, 그때부터 주종관계를 떠나 서로를 벗이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알체스터는 이 방에 대해서 잘 알았고, 왜 황제가 이곳에 유진 라이언하트를 부른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납득은 되지 않았다. 벗이라고 해서, 섬겨야 할 주군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 뜻에 납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알체스터는 이 방의 존재 목적을 안다. 이곳은 대대로 키옐의 황제가 벗과 적을 가르는 곳이며, 벗에게는 완전한 이해를, 그리고 적에게는 일방적인 처벌을 내리는 곳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알체스터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하는 호위기사가 내뱉을 말은 아니지만, 알체스터는 도저히 이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까?”
디아크 형제는 검을 거두지 않고서 물었다. 동시에 뽑아낸 검이 교차하여 알체스터의 목젖 앞에 멈춰 있었다.
예리한 칼날이 살갗에 닿고 있지만, 알체스터는 검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손에 쥐고 있는 황제의 어깨를 노려보았다.
“손을 거두십시오, 알체스터 경.”
“아무리 그대가 폐하의 최측근일지라도. 지금 경의 행동은 지나친 무례입니다.”
알체스터는 뿌득 입술을 씹고서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디아크 형제도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둘은 여전히 알체스터를 경계하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서 유진의 양옆에 섰다.
알체스터는 눈썹을 찡그리며 디아크 형제를 노려보았다.
“이번 일 모두 다. 폐하께서는 내게 이번 일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단장도 알고 계실 텐데요. 유진 라이언하트. 저 건방진 녀석을 단장은 아주 마음에 들어 하잖습니까?”
“마음에 들어 한다고?”
“총애라고 해야 하나?”
디아크 형제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이죽댔다. 알체스터는 둘의 말에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들어 넘기고 싶지 않군. 카리안 경, 데어리 경. 마음에 들어 한다. 총애한다. 그 말은 꼭, 내가 유진보다 뛰어나고 높으며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 같잖나?”
알체스터는 그렇게 말하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황제와 유진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둘의 정신은 이 공간이 아닌 의식의 세계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으리라.
“나는 나 자신이 그런 위인이라 생각하지 않아. 내가 유진보다 나이가 많은 것? 그게 무어가 중요한가. 기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 여러 가지가 있지. 명예, 실력, 용기, 신념.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셀 수 없이 많아.”
“…….”
“난 말일세. 기사가 갖춰야 할 수많은 덕목에서, 유진보다 크게 앞서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네. 오히려 내가 유진보다 부족한 것이 많겠지. 그렇기에 나는 유진을 마음에 들어 하거나, 총애하지 않아.”
알체스터는 유진의 검을 보았었다.
“내게 있어서 유진은, 기사로서 존중하고 있네. 동등하고 싶고 함께 실력을 겨루고 싶으며, 경외를 품은 대상이기도 하네.”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말아주십시오. 알체스터 드라고닉 경. 당신은 백룡 기사단의 단장이자 황제 폐하의 검이며, 제국 제일의 기사입니다.”
“그래, 맞아. 백룡 기사단의 단장. 황제 폐하의 검. 하지만 제국 제일의 기사? 하하!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지. 정작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알체스터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 이 제국에 나보다 뛰어난 기사를 말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몇 명이나 되는 기사들을 말할 수 있네. 대륙 전체를 범위로 잡는다면 한 손으로도 셀 수 없겠지. 그리고 단언컨대. 그중에는 유진 라이언하트, 저 청년도 있겠지.”
“알체스터 경!”
“목소리를 낮추게, 폐하께서 눈을 뜨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그러나.”
“알체스터 경이야말로 언동을 조심하십시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지금 그대는 폐하의 결정을 의심하…….”
“당연히 의심하고 있지.”
알체스터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잠든 유진의 양옆에 선 디아크 형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일을 먼저 알았다면, 나는 내 목이 날아갈지라도 폐하께 간언을 올렸을 걸세. 그대들도 이 방의 존재 목적을 알지 않나.”
“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두렵기에 자세히 알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체스터 경. 폐하는 유진 라이언하트를 억압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진실 된 대화를 위해…….”
“대화? 하하…… 그대들은 이 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가? 이 방에서 벌이는 것은 대화가 아닐세. 물론 회유도 아니지.”
알체스터는 주먹을 강하게 쥐며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의 일을 알지 못했지만, 그대들은 알고 있었지 않나. 어째서 폐하께 간언하지 않았나? 진정으로 대화가 필요했다면 이 방에 와서는 안 되었어.”
황제가 유진을 이 방에 불러온 이유.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ㅡ 유진이, 용사가 제국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거하거나, 굴복시키거나. 황제에게는 저 2개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 라이언하트에게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성검의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왕 본인에게 직접 인정을 받은 용사다.
300년간 지속된 약속의 끝이 다가오는 지금. 위대한 베르무트가 그랬듯이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시대를 이끌어야 할 용사가, 제국 황제의 응원과 지지는 받지 못할망정 핍박을 받는다니? 대화가 어떻게 끝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나, 알체스터는 황제의 결정에 환멸을 느꼈다.
“이 방에 와서는 안 되었다니……. 경의 말은 마치, 폐하의 대의를 의심하는 것 같군요.”
“내가 그렇다 말한다면, 폐하께 보고할 것인가?”
“물론 그리 할 것입니다.”
“하하! 그렇다면 나도 폐하와 진실 된 대화를 하게 되겠군.”
알체스터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황제가 그렇게 한다면, 알체스터는 저항하지 않고 대화를 받아들일 것이다.
더 이상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디아크 형제는 만에 하나 알체스터가 다시 옥체에 손을 댈까 경계하였으나, 알체스터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황제의 뒤를 지켰다.
“……으음…….”
그렇게 이어진 침묵을 깨트린 것은 나직한 신음이었다. 모두가 움찔 놀라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리고, 감겨 있던 눈이 뜨였다. 그 순간에 유진은 즉시 정신을 차리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유진과는 달리, 황제는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에 황제의 어깨가 마치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덜덜 떨렸다.
“폐하?!”
바로 뒤에 있던 알체스터가 당황하여 황제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황제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피가!”
데어리가 비명을 질렀다. 푹 숙인 황제의 얼굴. 코에서 쌍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알체스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급히 황제의 앞으로 이동하여 손목의 맥을 짚고 안색을 살폈다.
맥박과 호흡에 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냥 코피만 흐를 뿐이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네놈!”
“감히, 감히 폐하를!”
디아크 형제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일어난 발검이 유진에게 쇄도했다. 방금 막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유진의 정신은 멀쩡했다.
양옆에서 파고들어 오는 검.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양손을 뻗었다. 화륵! 순식간에 일어난 백염식의 불꽃이 유진의 양손을 덮었다.
“진정들 하지?”
디아크 형제의 검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기습적으로 뽑아 휘둘렀다고는 하나 충분한 힘을 실었는데. 둘의 검은 앞을 가로막은 손바닥을 넘어서기는커녕 작은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아니, 닿지도 못했다.
유진의 손바닥을 감싼 자색 불꽃은 디아크 형제의 검강을 출력면에서 압도하며 오히려 뒤로 밀어내었다.
“폐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카리안과 데어리는 뒤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검강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질문을 한 주제에, 둘은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금 검을 내리찍었다.
제압하기 위한 공격이 아니다. 작정하고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뚝뚝 묻어나오는 검이다. 황제가 저 꼴이 되어버렸으니 이해는 가는데, 그렇다고 얌전히 베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거 진정들 하라니까.”
말로 해서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디아크 형제의 검이 가까이 오는 순간. 유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광폭한 두 개의 검강은 애꿎은 허공만 베었다. 디아크 형제는 유진이 피했다는 것보다, 그 움직임을 조금도 쫓지 못했다는 것에 순간 당황했다.
“커윽!”
당황이 사라지기도 전에 고통이 엄습했다. 꽉 막힌 호흡과 함께 데어리의 몸이 꺾였다. 간장을 깊이 파고든 주먹. 어느새 유진은 데어리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적당히 힘을 빼고 때려주었는데, 한 대로 성이 풀리지 않았다. 데어리 디아크. 이 개새끼가 아까 눈깔에 잔뜩 힘을 주고서 자신을 노려보았던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다고 정말로 눈깔을 뽑아버리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니, 유진은 적당히 타협해 주었다.
뻐억! 데어리의 머리가 뒤로 튕겼다. 짧게 끊어 친 주먹이 데어리의 왼쪽 눈자위를 때린 것이다.
“눈!”
데어리는 비명을 지르며 눈자위를 붙잡았다. 절묘한 힘 조절로 눈알은 터트리지 않았지만, 눈두덩이 불로 지진 것처럼 아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꽈직! 채찍처럼 휘둘러 찬 다리가 데어리의 왼쪽 정강이를 박살 냈다. 데어리는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광경에 형인 카리안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유진은 공평하게 대응해 주었다. 동생은 왼쪽 눈자위와 정강이를 때려주었으니, 형은 반대로 오른쪽 눈자위와 정강이를 때려주었다.
“진정하라고 말했잖아.”
유진은 기절해서 바닥에 나뒹군 형제를 향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고는 표정을 가다듬고서 앞을 보았다.
알체스터 드라고닉. 그는 여전히 황제를 살피고 있었다. 바로 등 뒤에서 디아크 형제가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당해 버렸지만, 알체스터는 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폐하를 모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큰 문제는 없으시네.”
알체스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의원이 아니지만, 지금 폐하의 용태가 의원에게 가야 할 정도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네. 조금만 안정을 취하면 깨어나실 거야.”
“하지만…….”
“고민을 하고 있네.”
알체스터는 고개를 돌려 유진을 쳐다보았다.
“내가 폐하를 밖으로 모신다면, 이곳에 남은 디아크 형제가 자네를 붙잡을 수 있을까?”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체스터의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저 둘은 뛰어난 기사지만, 자네를 감당할 수는 없어. 자네의 입장에서 본다면 디아크 형제…… 백룡 기사단의 대장들은 어린아이와 다름없겠지.”
“둘의 마음이 너무 급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결과는 이미 나버렸잖나. ……내가 폐하를 모시고 밖에 나간다면, 지금의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얌전히 이곳에 남아 있을 텐가?”
“그럴 겁니다.”
“대체 무슨 일을 한 건가.”
알체스터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는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이유야 어쨌건, 자네는 깨어났고…… 폐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계시지. 심지어 피까지 흘리셨네.”
“…….”
“내가 폐하를 이 방에서 모시고 나간 순간…… 자네는 제국의 황제를 해코지한 반역자가 되어버릴 걸세. 제국의 법은 자네가 용사라 해서 피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이 일은 자네 하나로 끝나지 않을 걸세. 라이언하트 본가는 물론이고 방계 전체까지 반역죄를 뒤집어쓰게 되겠지.”
“그렇겠죠.”
“자네는…… 그 죄를 바라지 않겠지. 내가 방을 나간 순간. 아니, 내가 이곳에 있어도. 자네는 어떻게든 탈출을 생각하겠지. 얌전히 죄인이 될 생각이라면 디아크 형제를 쓰러트리지도 않았을 테니.”
“예.”
“그렇기에 나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세.”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알체스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허리춤의 검을 어루만졌다.
“자네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내가 지금 자네를 가로막거나. 아니면…… 자네가 도망치도록 돕거나.”
“……예?”
“이 황궁에서 나는 아주 많은 것을 할 수 있네. 당장 의식을 잃은 폐하를 잠시 숨기는 것. 혹은 폐하를 납치하거나. 그런 식으로 시간을 버는 것도 가능하고, 자네가 이 황궁의 수많은 눈들을 피해 탈출하게끔 도울 수도 있어.”
“알체스터 경.”
“물론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 나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300년을 이어 온 가문의 명예. 아니, 가문 자체를 잃게 될 거야.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어찌 본가의 가족만큼은 제국을 탈출할 수 있어도, 라이언하트의 수많은 방계는 제국에 남을 테니. 그들은 모두 처형당할 것이고.”
말을 하면 할수록 절망스럽고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알체스터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자네는 살 수 있어. 도망쳐서, 제국을 떠나고, 타국에 숨어 후일을 도모할 수 있겠지.”
“후일이라 함은?”
“마왕을 죽이는 것. 용사인 자네가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지 않나.”
“그것을 위해 절 돕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자네를 반역자로 만들어 형장에 오르게 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세상을 위한 선택이겠지. 그래,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군.”
알체스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그런 알체스터를 묘한 눈으로 보다가,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뭐 하는 건가?”
“도망칠 생각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그러니 알체스터 경도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번 일은 결코 가볍게 끝나지 않을 걸세.”
“별일 없이 끝날 겁니다.”
유진은 아직 의식을 잃은 황제를 빤히 보면서 말했다.
“폐하는 무척 자비로우시니까요. 그러니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실 때까지 저와 함께 기다려 보죠.”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예.”
알체스터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유진을 얼굴을 빤히 보았다. 거짓말을 하거나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알체스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음…….”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신음과 함께 황제가 눈을 떴다. 알체스터는 급히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알체스터…… 경…….”
황제는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무릎을 꿇은 알체스터의 너머. 한쪽 다리가 기괴하게 꺾여서 기절한 디아크 형제가 보였다.
그 뒤편. 의자에 앉은 유진이 보였다. 황제와 눈이 마주친 유진은 한쪽 눈을 찡긋이면서 웃었다.
“허억!”
황제의 머릿속에 끔찍한 폭력의 향연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륵! 난생처음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황제의 정신을 자극했고, 기껏 멎었던 코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알체스터가 비명을 질렀고, 유진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는 어깨를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괘, 괜찮, 괜찮다.”
“폐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알체스터는 떨리는 황제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예?”
“아무 일도 없었다……!”
황제는 유진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황제
당연히 아무 일도 없지는 않았다.
그 세계에서 전능해야 할 황제는 유진의 앞에서는 전능하지 못했다. 황제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유진의 손에 잡히면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떻게 저항하기 위해 공격도 해보았지만, 어떤 식의 공격도 유진과 닿아버리면 사라져 버렸다.
방어도 마찬가지였다. 두껍게 세운 벽도, 전신을 뒤덮는 결계도, 유진의 손에 닿으면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결국 황제는 유진에게 엉망으로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유진의 입장에서는 그리 심하게 때린 것도 아니었지만, 황족으로 태어나 황위에 오른 인간에게 ‘구타’란 평생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낯선 것이었다.
‘엄살 심한 새끼.’
황제는 귀싸대기를 맞을 때마다 목이 찢어져라 악악 비명을 질러대고, 주먹으로 몇 대 때리면 세상이 무너져라 괴성을 질러댔다.
그렇게 한참을 두들겨 패고서 무릎을 꿇으라 시켰다. 전능하지 않게 된 황제는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었다.
키옐의 황제.
스트라우트 2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의식의 세계에서 한참 이어진 구타. 정신이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황제가 느끼기에는 그러했던 고통의 연쇄.
복수?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 의식의 세계에서 무력한들, 현실의 스트라우트 2세는 여전히 키옐의 황제였다. 그 권력으로 시도해 볼 복수의 방법은 여러 가지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죄가 없는가?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애당초 그럴 것도 없이, 불경죄에 반역죄만 끼얹어도 라이언하트 가문 전체를 역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스트라우트 2세는, 황제는 그 사실을 뼈가 저릴 만큼 잘 알았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정체.
300년 전의 영웅인 우둔한 하멜.
여태까지 숨겨온 것을 보면 본인이 세상에 밝힐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가문 전체가 역적이 되고, 제국에게 주살 당할 처지가 되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정체를 밝혀야 할 터.
‘아니, 그럴 필요도 없는가.’
황제는 꿀꺽 침을 삼키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시선을 잘 마주칠 수가 없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현실의 몸뚱이를 구타당한 것도 아닌데, 저 금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욱신욱신 아파왔다.
‘모두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겠지.’
현명한 세냐.
용감한 모론.
이 둘은 유진 라이언하트가 과거의 벗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나이트마치에서도 그랬잖은가? 갑작스레 나타난 용감한 모론은 유진 라이언하트를 옆에 끼고 다니면서 친애를 과시했다. 그리고 긴 은거에서 돌아 온 현명한 세냐는, 아롯을 떠나서 아예 라이언하트의 본가에 눌러앉았다…….
황제는, 키옐은 유진과 라이언하트 가문을 역적으로 몰아갈 수 없다. 그렇게 해버린 순간 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인간들이 적이 되어버린다. 제국 외의 다른 국가들의 여론도, 아니, 제국 시민들의 여론도 냉담할 것이다.
“후우…….”
황제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최초의 의도는 유진의 심중을 알아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족쇄를 거는 것이었다.
의도대로 심중을 알게 되기는 했다만…… 차라리 알게 되지 않았다면. 황제는 모든 진실이 두렵고 무거웠다. 결국 이 시대에서 마왕과 헬무드와의 전쟁은 필연이 되리라.
“슬슬 가봐도 되겠습니까?”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의 발밑에는 아직까지 디아크 형제가 널브러져 있었다.
사실 둘은 이미 진즉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처참하게 패배당한 것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일어서지 않고 얌전히 기절한 척을 하고 있었다. 박살 난 팔다리가 아팠지만, 황제가 보는 앞에서 절뚝거리며 일어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런 상처는 치료를 빨리하는 것이 중요한데. 제가 계속 여기 앉아 있으면, 저 쌍둥이 대장님들도 계속 아픈 것을 참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
“…….”
“싸움만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절한 척도 못 하는군.”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이죽댔다. 그럼에도 쌍둥이는 반응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황제가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경. 이만 돌아가도 좋네.”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유진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들겨 패는 것 말고 대화를 나눈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별로 대단한 대화는 아니었다.
앞으로 잘해라.
어디 가서 괜한 말 하지 말고 눈치껏 행동해라.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내가 뭘 하건 신경 쓰지 마라.
일방적인 통보는 아니었다. 저렇게 말한 만큼, 유진도 앞으로 제국과 황제의 체면을 신경 써주겠다고 약속했다. 가령 앞으로 뭔가 일을 벌일 때. 특히 제국 밖에서 원치 않은 사건에 휘말려야 할 때…… 그럴 에는 황제에게 언질이나마 주기로 했다.
제국의 황제에게 하기는 너무한 말들이었지만, 고맙게도 황제는 알겠노라 대답해 주었다. 황제는 지치고 서글퍼 보이는 눈동자를 감으며 말했다.
“알체스터 경. 유진 경을 바깥으로 안내해 주게.”
“폐하는 어찌하시려옵니까?”
“짐은…….”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함께 나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폐하.”
“짐은…… 짐은…… 그래, 그리하겠다.”
황제는 머뭇거리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알체스터는 이 기묘한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궁금하지만 캐물을 수도 없었다. 상황과 눈치에 따른 침묵은 호위기사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래서 알체스터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고 황제를 부축해 주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유진도 비틀거리는 황제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팔이 잡히는 순간. 황제는 기겁하며 몸을 뒤틀었지만, 유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황제의 팔을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지, 짐은 괜찮다.”
“그럼 어서 나가도록 하죠.”
마음 같아서는 놓으라고 말하고 싶은데…… 도저히 그런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유진과 알체스터의 부축을 받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유진이 추측했던 대로였다. 이 방은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첨탑의 지하 깊은 곳이었다.
“폐하!”
지상으로 올라온 유진을 기다린 것은 수십 명의 근위기사들이었다. 아마 방에 들어오기 전에 황제가 미리 배치해 둔 기사들이리라.
‘설마 여기서 붙잡으란 명령을 하진 않겠지?’
유진은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그 순간에 유진과 황제의 눈이 마주쳤다.
‘이 개새끼가.’
아마 황제도 한순간이나마 고민했던 모양이다. 유진은 부축하느라 잡고 있는 황제의 팔을 은밀히 꼬집어 주었다. 그러자 황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짐은…… 짐은 괜찮다. 다들 물러서라. 피곤하여 잠시 부축을 받고 있을 뿐이다.”
황제는 급히 내뱉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유진 경. 오…… 오늘의 대화는 무척이나 즐거웠지. 그래, 에볼트 경. 그대가 유진 경과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지? 그러니 그대가 유진 경을 바깥으로 안내해 주게.”
첨탑 밖에 배치된 기사들 중에는, 저번의 대항전에서 유진에게 패배했던 4번대의 대장. 에볼트 마기우스도 있었다. 그는 대뜸 황제에게 지목당한 것에 무척이나 당황해했지만, 황제의 뜻이니 반문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폐하. 그럼…… 내일 세냐 님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알…… 겠다.”
유진은 황제의 팔을 놓아주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한쪽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인 데다, 보는 눈도 많으니 충분히 예를 차려준 것이다.
‘가증스러운…… 괴물…….’
왜 그 방의 힘이 유진에게는 통하지 않았는가? 라이언하트의 피 때문에? 아니면 우둔한 하멜이라서? 모른다.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황제는 떨리는 표정을 가다듬고서 몸을 돌렸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었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도 황제와 함께 물러섰다. 유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굳게 문이 닫힌 첨탑. 라이언하트 본가 지하의 암실과 비슷한, 베르무트가 남긴 방.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내심 그런 기대를 했는데, 암실 때처럼 베르무트의 환영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황제와 같이 있어서 그랬나? 다음에 혼자 들어가면 뭔가 더 나올까…….’
생각은 그렇게 해보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본가의 암실과 황궁의 방. 굳이 2개에 나눠서 환영을 나눌 이유가 없지 않나. 황제가 말한 것처럼, 이곳의 방은 베르무트가 제국에게 바친 선물일 뿐이리라.
이유는 짐작이 갔다. 베르무트는 유진의, 하멜의 환생을 의도했다. 대략적으로 300년 뒤에. 반드시 라이언하트 가문의, 베르무트의 후예로 환생하게끔 의도했단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라이언하트 가문이 존속해야만 했다. 베르무트가 제국 황가에게 이 방을 선물한 것은, 라이언하트가 결코 제국의 적이 되지 않으리란 충성스러운 맹세였을 것이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이지만, 내일이라도 세냐와 다시 와봐야겠어.’
유진은 첨탑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오랜만입니다, 에볼트 경.”
“그래…… 오랜만이구려.”
에볼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볼트는 유진의 몸에서 엷은 피 냄새를 맡았고, 유진의 소매에 튀긴 피를 보았다.
“아, 이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 피가 아닙니다.”
“경의 피가 아니라는 것은……?”
“디아크 경들의 피입니다. 이거 참, 두 분이 제게 불만이 많았던지라…… 깔끔하게 결투로 끝을 냈지요.”
“설마, 죽인 겁니까?”
“에이 그럴 리가요. 아무리 결투라 해도, 폐하가 보는 앞에서 어떻게 근위기사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냥 적당히, 폐하께서 보기 즐거우실 만큼만.”
유진은 너스레를 떨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백룡 기사단의 1번대 대장과 2번대 대장과의 결투가 고작 눈요기 수준이었단 말인가?
“허……. 허허.”
멍하니 서 있던 에볼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 * *
대뜸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궁에 다녀왔으니, 길레이드나 다른 어른들이 유진을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찾아온 어른들은 저 말을 반복하고서야 간신히 돌려보낼 수 있었다.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어찌 그리 편협하단 말입니까?”
“유라스의 교황도 그런 식으로 저희를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문제는 가문의 어른들이 아니었다. 유진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서로 번갈아가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 새끼를 확.”
세냐는 아예 지팡이를 꺼내 들고서, 당장에라도 키옐의 황궁에 쳐들어갈 듯이 굴었다.
“너는 왜 나이를 먹어도 성격이 그 모양이냐?”
유진은 기겁하여 세냐에게 지팡이를 빼앗았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세냐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너……! 지금 나보고 나이가 많다고 한 거야?!”
세냐는 억장이 무너진 표정을 지으며 울부짖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멜, 말이 너무 심합니다.”
“아무리 세냐 님의 나이가 많다 하여도, 유진 님이 직접 그런 말을 하시면 큰 상처가 될 것입니다.”
둘은 슬쩍 세냐의 편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세냐는 비틀거리다가 메르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의…….”
“예, 그렇겠지요. 메르 당신도 알맹이는 200년이나 묵었으니 말입니다.”
“아…… 아니에요. 저는 세냐 님의 유년기대로 만들어졌기에, 존재한지는 200년이어도 정신연령은…….”
“참으로 편리한 설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크리스티나.”
“예, 아니스 님. 23살인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크리스티나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교대로 앞에 나서야 할 아니스는 그러지 못하고 움찔 굳어버렸다. 저 교묘한 말에 숨겨진 비수가, 세냐와 메르뿐만 아니라 아니스 자신도 노리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만 같은 살벌한 침묵.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유진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세냐. 너는 내일 나랑 같이 황궁에 가야…….”
“황궁을 전복시키러 가는 거야?”
축 늘어져 있던 세냐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멜. 드디어 너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냐?]
망토 속의 위니드가 웅웅거리더니, 템페스트가 말을 걸어왔다.
언제였던가. 템페스트는 북벌을 위한 군세가 필요할 것이라며, 유진에게 직접 황제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종용한 적이 있었다.
“개소리하지 말고.”
당연히 유진은 황제가 될 생각도, 황궁을 전복시킬 생각도 없었다.
라이언하트의 암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라이언하트의 핏줄이어야만 한다.
황궁 첨탑 지하의 방. 그곳의 ‘힘’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의지가 있어야겠지만, 방 자체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큰 기대는 하지 마.”
세냐가 눈을 얇게 뜨며 말했다.
“베르무트의 마법은 300년 전에도 정체를 알 수가 없었어. 내가 아롯에서 연구해 보기도 했었지만, 그때도 성과는 없었지. 베르무트에게 구멍이 뚫렸던 지금의 나도, 놈이 쓰던 마법의 정체를 모르겠단 말이야.”
“고대 마법이란 추측은 하고 있잖아.”
“정체를 모르겠으니까 그렇게 추측할 뿐이지. 전에도 말했지만, ‘고대’라는 것은 모호한 점이 많아.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머나먼 신화의 시대…… 그 시대가 어땠는지는 드래곤조차 대답할 수 없어.”
세냐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크리스티나를 힐긋 보았다.
“신화와 전설이 실존하던 시대야. 빛의 신이 실존하던 시대.”
“신께서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 대해 정확히 말해줄 수 있는 존재는…… 마왕뿐이겠지.”
“그래서. 내일 같이 안 가겠다고?”
“가기는 해야지.”
세냐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성과가 없을지라도 뭐라도 찾아내려 해봐야 할 것 아냐? 혹시 모르지. 열심히 긁다 보면 베르무트가 남긴 암호라도 나올지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유진이 그러하듯, 세냐도 황궁의 방에 베르무트가 남긴 메시지 따위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베르무트는,
과거의 동료가 자신을 찾아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전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가슴골과 어깨, 등까지 훤히 드러낸 고혹적인 드레스를 입고서 키득키득 웃었다.
공작이라는 지체 높은 귀족이 입기에는 파격적인 노출이지만, 당연히도 누아르는 당당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줄 만한 게스트가 많지 않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 아쉽네.”
누아르는 화려한 빛깔의 선글라스를 콧잔등 아래로 살짝 내리며 중얼거렸다.
“무엇이 아쉽다는 거요?”
누아르의 근처에는 말끔한 턱시도 차림의 가비드가 서 있었다. 평소의 가비드였다면 누아르의 차림새를 두고서 품위가 없다며 지적하겠지만, 지금 가비드의 머리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가비드는 그답지 않게 긴장해 있었고, 초조해하며, 흥분하고, 설레하고 있었다.
“뻔한 질문은 하지 말아요, 가비드. 당신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바로 이곳.”
누아르는 살포시 웃었다. 옅게 색을 칠한 입술이 열릴 때마다 달큰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흥분과 설렘은 누아르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기분은 누아르의 가슴과 몸을 뜨겁게 달구었고, 이 긴 세월 살아온 서큐버스는 지금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며 마력을 흘려댔다. 어지간한 마족은 지금의 누아르 앞에서 욕망의 통제는 물론이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리라.
물론 가비드는 그러지 않았다. 누아르의 마력이 아무리 강하고 뇌쇄적인들, 지금의 가비드는 누아르를 보고 있되 그녀에게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허리에 매단 마검 글로리의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침묵했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이죠? 수십…… 아니, 100년이 다 되어가지 않나?”
“97년 만이로군.”
가비드가 즉시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97년하고 134일.”
“거의 100년이네. 그렇죠? 아주, 아주 오랜만이야.”
이러니 설레고 흥분될 수밖에. 누아르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꾸욱 눌렀다.
“그래서 아쉬워. 우리 마족에게 있어서 100년 단위의 시간은 엄청나게 긴 시간이 아니지만…… 이건…… 오늘은, 아주 특별하잖아요? 만약 나였다면.”
“언동을 조심하도록, 제벨라 공작. ‘만약 나라면’이라고? 그 말은 마치 당신이 황위를 찬탈…….”
“제발, 오버 좀 하지 말아요, 가비드 린드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진심으로 마왕님의 황위를 노리겠어요?”
누아르는 미소를 살짝 지우고서 가비드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가비드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도 농담이 통하지 않는 고지식한 남자인데, 유폐의 마왕에 관한 문제에는 진지해도 너무 진지하다.
“그냥, 나라면 말이에요. 거의 100년 만에 어전의 문을 연 것인데, 이것보다 더. 훨씬 더. 화려하게, 게스트도 잔뜩 불러서. 그래, 기자들도 부르고, 타국의 사절들까지 불러서. 화려한 파티를 벌였을 거예요.”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로군.”
가비드는 웃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는 더 이상 누아르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아예 눈을 돌려버렸다.
“멍청하고 재미없어.”
누아르는 멀어지는 가비드의 등을 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토록 유폐의 마왕에게 충성하면서 이렇게나 시야가 좁다니. 하긴, 저 남자는 수백 년 전부터 그랬다. 유폐의 마왕에게 선택받아 ‘칼’이 된 후부터, 가비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유폐의 마왕에게 바치고 유폐의 마왕의 뜻만을 따랐다.
‘그렇기에 잘 보지 못하는 거야.’
뿌듯한 즐거움이 누아르의 가슴을 충만히 채웠다. 그녀는 따스한 열락을 느끼면서도 애틋한 그리움에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 나의 하멜.
잊지 못할 첫사랑.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지, 가비드 린드먼. 그 유진 라이언하트의 정체가 바로…… 300년 전의 하멜이라는 것을 말이야.’
이 헬무드에서도 그 진실을 아는 존재는 몇 되지 않으리라. 아마 유폐의 마왕과…….
‘그리고 나. 마왕과, 나. 아마 유폐의 마왕은 스스로 깨친 것일 테고……. 나는…… 후후, 하멜에게 직접 들었어.’
심증일 뿐이지만, 누아르는 그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고가 누아르를 더욱 즐겁고 설레게 만들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은, 누아르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신뢰…… 그래, 이건 신뢰야. 하멜, 당신은 나를 잘 알아. 나도 당신을 잘 알지.’
당연히 잘 알 수밖에. 누아르는 300년 전에 하멜의 꿈을 파고들었다. 하멜 다이너스라는 인간의 밑바닥까지 들어가서, 그 깊은 곳에 응어리진 증오를 핥았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다.
‘나의 하멜,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절대로 당신과의 비밀을 떠벌리지 않을 것이니까. 특히, 이 쓸데없는 부분에서 진지한 재미없는 남자에게는 더더욱.’
누아르는 지었던 미소를 감추고서 가비드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죠?”
“무엇을?”
“거의 100년 만에 마왕님이 어전을 개방한 이유 말이에요.”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그 중심에 우뚝 선 마왕성 바벨은 99층의 초고층 빌딩이다.
이 바벨에서 91층부터가 바로 마왕의 어전인데, 이곳의 문은 최근 100년 동안 열린 적이 없었다. 마왕의 최측근이자 호위기사인 가비드조차도 그 100년 동안 어전에 들어간 적이 없었단 말이다.
“이유야 확실하잖소.”
“유폐의 지팡이를 새로 임명하는 것? 아하하…… 이제 와서 말이에요? 그 에드몬드 코드렛도 90층에서 지위와 블러드메리를 하사받았는데?”
“…….”
“그리고 말이야. 에드몬드와 발자크, 아멜리아, 그 3명도 90층. 가비드, 바로 당신의 집무실에서 마왕님과 계약을 맺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어전의 문을 열고 임명식을 벌인다고?”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내 기준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말이야, 이건 비밀스러운 행사도 아니잖아요?”
누아르의 말대로였다.
이 행사는 비밀스러운 행사는 아니었다.
100년 만에 열린 어전의 문. 지금 이 대전에는 헬무드에서 내로라하는 힘과 권력을 가진 고위마족들이 모여 있다. 가장 낮은 작위가 백작. 그렇다고 모든 백작들이 모인 것도 아니다.
대부분이 300년 전의 전쟁시대를 겪고, 그곳에서 전과를 올려, 지금까지 살아오며 힘을 키워온 ‘진짜’ 마족들. 서열 100위까지의 마족들 전원이 이곳에 모였다.
“아핫…….”
시선들이 오싹하다. 욕망을 숨기지 않는 시선. 개중에는 누아르의 육체를 탐하는 것이 아닌, 누아르의 힘과 존재를 탐내는 폭력적인 시선도 섞여 있었다. 물론 누아르가 느끼기에는 하찮았으나, 그래도 이러한 열망은 누아르의 기분을 즐겁게 만들었다.
“감히 마왕님의 뜻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가비드가 입을 열었다.
“에드몬드…… ‘전대’ 유폐의 지팡이가 불미스러운 죽음을 당하지 않았나.”
“살해당했죠. 욕심이 너무 과했기 때문이야. 아니면 재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에드몬드의 뜻을 존중했소.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의지는 존중해 마땅해.”
“아하…… 정말로? 주제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사자를 모독하지 마시오. 유폐의 마왕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에드몬드는 의지를 실현하려 한 것이오.”
“결국은 실패했지. 누가 죽였는지, 당신은 알잖아요?”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에드몬드의 욕심은 악이겠지. ……용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반드시 막아야 할 것일 테고.”
“유진 라이언하트. 그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훌륭한 인간이라 생각하오. 강철의 의지를 가진 인간. 마치 베르무트와 같은…… 그래서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소. 그가 하루라도 빨리, 용사인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바벨에 오르기를.”
가비드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는 글로리의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진심을 담아 내뱉었다.
“에드몬드의 불행한 죽음이 다가 아니지. 올해는 참 많은 일이 생겼어. 최근 수백 년 동안 있었던 이슈보다 올해 벌어진 이슈가 더 많고 심각하잖소. 그…… 용감한 모론이 돌아왔고, 마왕님이 직접 성녀와 용사의 존재를 인정하였으며, 헬무드에서는 용마성이 추락했지. 유폐의 지팡이가 살해당했고…… 그리고…….”
“재앙의 세냐가 돌아왔죠.”
누아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심증뿐이라지만 우리는 사실 진실을 느끼고 있잖아요? 세냐 메르데인의 은거에는 라이자키아가 관여되어 있었어요. 둘은 사이좋게 은거……. 후후, 실종되었죠.”
“…….”
“세냐 메르데인이 돌아왔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라이자키아, 그 멍청하고 욕심 많은 검은 도마뱀은 200년 전에 죽었던 걸까? 200년 전에 죽었다면 지금 와서 세냐 메르데인이 돌아온 것도 이상해. 함께 봉인되어 있다가…… 라이자키아가 죽어버려서 봉인에서 풀려난 것이라면 모를까.”
“억측이군.”
“이러한 말이야 큰 고민 없이 내뱉을 수 있는 것이죠. 책임져야 할 만큼의 무게도 없고 말이야. 세냐 메르데인의 후계자가 누구죠? 유진 라이언하트. 그렇다면…….”
“라이자키아가 어린 용사에게 죽었을 거라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요?”
가비드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만약 그렇다면…… 후후. 라이자키아가 그만큼이나 하찮은 존재로 영락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애도해야 할까. 아니면 유진 라이언하트의…… 젊은 용사의 뛰어남에 찬사를 보내야 하나.”
“내버려 둘 거죠?”
“어땠으면 좋겠나?”
뻔한 질문을.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히 내버려 두어야죠. 마왕님의 선언도 있으셨고…… 흐흥,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 꼬마가 조금 더 맛있게 익는 것을 기다리고 싶어. 굶주린 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잡으러 가서는 안 된다.
‘나의 하멜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
누아르는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다.
하멜이, 유진이 준비가 될 때까지. 그가 300년 전과 변함 없는ㅡ 아니, 그보다 잔학한 살의를 가지고서 모든 것을, 누아르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러 올 때까지.
“마왕님의 뜻도 그러하셨지.”
가비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폐의 마왕이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는 100명의 마족들……. 그들의 표정에는 이 기다림에 대한 지루함보다, 무언가에 대한 기대가 대부분이었다. 100년 만에 열린 어전. 직접 내려와 임명식을 주관할 마왕이,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전쟁.’
300년 전의 시대를 겪은 마족들. 그중의 여러 마족들은 평화와 여러 가지의 이유와 유혹 등에 타락하여 힘을 잃었다.
하지만 이곳의 마족들은 다르다. 그들은 여전히 포악하며, 피와 전쟁에 굶주려 있다. 때문에 그들은 오늘의 임명식에서, 마왕이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들.’
가비드는 다른 마족들을 비웃었다.
유폐의 마왕은 직접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 나이트마치에서 유폐의 마왕은 이미 대륙의 왕들에게 그 사실을 공언했다.
감히 마왕의 의중을 헤아려 본다면, 오늘 어전의 문을 열고서 마족들을 불러낸 것은…… 굶주린 마족들이 괜한 짓을 벌이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함일 것이다.
“건방지게도.”
누아르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의 주인공이라는 거야, 뭐야? 나조차도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열린 문에서 걸어 들어온 여인 때문이었다. 나하마의 무희가 입을 법한 하늘하늘한 천 옷에, 입가를 면사로 덮은 갈색 피부의 여인.
“검은 가시.”
마족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사막의 던전 마스터, 검은 가시, 데스앤서. 아멜리아 머윈. 그녀를 지칭하는 별명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오늘 아멜리아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내려지리라.
“먼 곳에서 오느라.”
아멜리아는 면사 너머에서 웃으며 말했다.
어전에 들어온 것은 아멜리아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2명의 수행인이 있었는데, 1명은 금속 재질의 마스크로 입가를 가리고 목에 개목걸이를 찬 헤모리아였다. 그녀는 주변의 마족들을 적의 가득한 눈으로 훑으며 마스크 안쪽에서 까득 하고 이를 갈았다.
헤모리아의 옆에는 시커먼 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투구까지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있었다. 모든 마족들이 그 정체를 파악했다.
짙은 죽음의 냄새…… 언데드 중에서도 가장 고등하다는 데스나이트.
그래 봤자 언데드일 뿐. 전쟁시대를 겪은 마족들에게 있어서 데스나이트는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 시대의 마족들에게 있어서 데스나이트는 일종의 전리품 취급을 당하곤 했다.
죽인 인간 기사나 전사. 놈들을 강제적으로 굴복시키거나, 혹은 유혹해서 타락시켜 만들어낸 전리품.
‘뭐지?’
하지만 대부분의 마족들은 데스나이트에게 비웃음을 짓지 못했다. 데스나이트가 노골적으로 내뿜은 살의가 마족들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건…….”
어딘가 익숙한 살의. 가비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데스나이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데스나이트의 시선도 가비드에게 닿았다.
철컥.
데스나이트의 갑옷이 움직였다. 그 순간 헤모리아가 움찔 놀라서 데스나이트를 쳐다보았고, 아멜리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안 됩니다.”
뚜두둑…… 아멜리아의 마력이 데스나이트의 몸을 옭아 죄었다. 투구 안쪽에서 시뻘건 안광이 번뜩였지만, 아멜리아는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하…….”
다시 내뱉은 말에 데스나이트가 마른 웃음을 토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비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아니, 멋진…… 하하,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장난감? 애완동물?”
“기사.”
아멜리아가 가비드와 시선을 맞대며 속삭였다.
“내 호위기사예요. 모욕하지 말아주겠어요?”
“이곳에 데려와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대의 기사가 불쾌해하지 않던가?”
“그도 자신의 처지와 상황은 이해하고 있어요.”
“목줄을 단단히 붙들고 있게. 괜히 소란이라도 벌였다가는 훈육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그 말에 데스나이트의 안광이 다시 불을 뿜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가비드에게 달려들 것처럼 보였으나, 아멜리아의 마력 때문에 뜻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에 강렬한 살의만이 가비드에게 쏟아졌다.
“정말이네. 아주 재미있어.”
누아르도 데스나이트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 강렬한 살의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잖은가.
누아르는 하멜의 영혼이 환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저 데스나이트의 정체가 궁금하고, 오히려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혼을 세뇌했나? 아니면 기억을 투영해 만든 것일까……. 어느 쪽이든 재미있어. 자기가 진짜인 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가짜인 거잖아?’
데스나이트의 정체를 눈치챈 것은 누아르와 가비드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시대를 겪은 마족들 중에서 몇몇은 전장에서 하멜을 본 적이 있었다.
몰살의 하멜. 그를 마주하고서 살아남은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족들은 데스나이트에게 호기심뿐만 아니라 강한 유열을 느꼈다. 그, 몰살의 하멜이. 마족에게 그만큼의 살의를 쏟아내며 날뛰던 인간이. 완전히 타락하고 조련당해 데스나이트가 된 것이 아닌가?
ㅡ쿠우웅.
웅성거림이 뚝 멎었다. 천장에서, 아니ㅡ 아득하게 높은 곳에서 내리누르는 위압감이 모든 마족을 침묵시켰다.
마족들은 망설이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비드와 누아르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가장 앞선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멜리아 머윈. 그녀는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가비드와 누아르의 뒤편에서 무릎을 꿇었다. 헤모리아는 거대한 절망과 공포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데스나이트는ㅡ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굴욕을 느꼈다.
천장에서 시커먼 계단이 내려왔다. 바벨의 최정상 99층에서 내려온 계단이 91층의 어전까지 이어진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창백한 피부에 검은 장발의 남자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헤모리아는 간신히 눈동자를 들어 ‘유폐의 마왕’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ㅡ 마왕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밤’과 ‘어둠’을 인간으로 빚어낸다면 저럴까 싶을 만큼 섬뜩하고 요염했다.
철그럭.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유폐의 마왕의 뒤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쇠사슬이 끌렸다. 그 시커먼 사슬이 한데 뭉치니 마치 망토처럼 보였다. 유폐의 마왕은 계단을 끝까지 내려오지 않고 도중에 멈춰서, 대전에 모인 100명의 마족들을 보았다.
“많군.”
가장 먼저 들린 말은 그것이었다. 유폐의 마왕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유폐의 지팡이를 상징하는 시뻘건 마법지팡이ㅡ 블러드메리가 나타났다.
“유폐의 지팡이를 새로 임명하기 전에 앞서.”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마족은 절반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여라.”
어전
절반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여라.
그 말을 이해하는 것에는 복잡한 생각은 필요가 없었다.
절반. 그러니까, 지금 이 대전에 모인 마족의 숫자가 100명이라면ㅡ 50명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자살할 생각이 없다면, 바로 옆에 있는 마족을 죽이라는 말이다.
조금도 어렵지 않은 말. 하지만 이곳에 모인 마족들 중에서, 유폐의 마왕의 말을 곧장 이해하고 행동하는 마족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림한 마왕의 선언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100년 만에 바벨의 어전이 열렸다. 오늘 이곳은 서열 100위까지의 마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새로운 유폐의 지팡이를 임명하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다.
그런데 갑자기 서로 죽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아무리 피에 굶주리고 폭력을 갈망하는 마족들이라지만, 유폐의 마왕이 내뱉은 이치에 어긋난 명은 곧장 이해하기가 버거웠다.
“아핫.”
아니.
모두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해한 마족이 있기는 했다.
다만, 그녀의 행동이 늦은 것은ㅡ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싹한 희열이 몸을 떨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누아르 제벨라의 발밑에서 어둠이 치솟았다. 길쭉하게 튀어나간 어둠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그녀에게서 한참이나 떨어진 방 끝에 서 있던 마족의 미간을 꿰뚫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간을 꿰뚫고 뇌와 두개골을 터트린 송곳이 크게 확장되더니, 마치 쩍 벌린 아가리와 같은 모양이 되어 마족을 통째로 삼켜 버렸다.
“뭣들 하는 거야?”
입안에서 느껴지는 감미로운 피의 맛. 누아르는 조금 더 붉어진 입술을 할짝대며 웃었다.
“유폐의 마왕님이 직접 허락하신 것이잖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응? 300년ㅡ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우리 마족들이 즐기던 거잖아.”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걸터앉더니, 관능적인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살육전. 모든 절차를 무시한 서열잡이. 영지전이라 생각해도 좋아. 죽인 상대의 힘을, 혼을, 영지를, 존재를, 모든 것을 갖는 거야.”
죽은 마족의 피비린내가 대전에 퍼져나갔다. 하나둘 마족들이 몸을 일으켰다.
전쟁시대를 겪은 마족들은 그리움과 향수에 눈을 빛냈다. 그보다 낮은 서열의, 전쟁시대를 겪지 못한 젊은 마족들은 상위서열에 대한 야망과 마왕의 앞에서 직접 힘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열망에 이를 악물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서로 죽이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광포한 마력들이 연신 충돌했지만, 어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바로 곁에서 마력의 폭풍이 몰아치는데도 누아르 제벨라와 가비드 린드먼에게는 산들거리는 바람조차 다가오지 않았다.
“패기 있는 녀석이 없네.”
누아르는 아쉬움에 입술을 핥으며 마족들의 살육을 지켜보았다. 아까만 해도 누아르에게 온갖 욕망들을 쏟던 시선이 많았는데, 정작 살육이 허락되니 그 어느 마족도 누아르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서열 2위의 대마족이다. 그마저도 누아르가 가비드와 싸우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 헬무드의 여러 마족들은 실질적인 서열 1위는 몽마의 여왕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실정이다. 아무리 이곳의 마족들의 피에 굶주려 있다 해도, 결과가 뻔한 싸움에 몸을 던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당신은 안 할 건가요?”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가비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으며, 뒤에서 벌어지는 전투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가비드의 의식은 오롯이 유폐의 마왕에게 향하고 있었다.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아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오. 당신은 날 죽이고 싶소?”
“나도 당신과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야.”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계단에는 여전히 유폐의 마왕이 서 있었다. 그는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한 눈으로 마족들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때문에 서열 100위 안의 마족들이 서로 죽이는 것인데, 유폐의 마왕의 표정에는 그에 대한 감흥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감흥을 느낄 이유가 어디에 있나. 유폐의 마왕이 바라고 명한다면, 마족 100명의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 피가 흐를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런 명령을 내린 걸까?’
누아르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전쟁시대 이후로 헬무드의 인구수는 과해도 너무 과할 정도로 늘어왔다. 지금이야 엄격해졌지만, 헬무드가 막 제국이 되었을 당시에 유폐의 마왕은 국경을 과감하게 열고, 느슨하면서도 호의적이고 복지적인 이민정책을 펼쳐 헬무드의 시민을 늘렸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말 그대로 유폐의 마왕이 ‘전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마족을 통제하면서, 대륙 전역에서 귀환시킨 수많은 마물들의 보금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국토를 ‘힘’으로 쪼개고, 바다를 ‘힘’으로 땅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국토를 확장시켰다. 그러고 나서 ‘힘’으로 헬무드 전역에 마력 케이블을 깔고서 검은 탑을 세워 헬무드를 발전시켰다…….
그 전지전능한 절대군주 휘하에서 헬무드는 300년 동안 대륙, 아니, 역사 최대 최강의 제국이 되었다. 이 풍요로운 제국에 이민을 오고자 하는 사람들로만 국경선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이 된 후로 헬무드에는 이종족 이민자뿐만 아니라 마족의 수도 빠르게 늘었다.
간단한 이유였다. 전쟁이 없고, 서로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죽이고 싶어서, 놈이 가진 것이 탐이 나서.
그런 이유로 서로 죽이던 마족들은 유폐의 마왕의 치세하에 ‘법’을 학습 받았다. 이제 마족들은 서열 잡이나 영지전을 벌이려면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고, 고작 그것만으로 마족의 사망률은 크게 줄었다.
‘……숫자가 너무 많다고? 뭘 새삼스레. 그렇게 만든 것이 마왕 본인인데.’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고민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살육이 끝났기 때문이다.
아멜리아 머윈은 조용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살육. 궁금하고 관심도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아멜리아가 저곳에서 함께 춤을 춰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마족은 절반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여라.’
아멜리아는 흑마법사지만, 마족은 아니다. 데스나이트도 마찬가지다. 언데드는 마족이 아니다. 키메라인 헤모리아도 마찬가지다.
“잘 참았어요.”
아멜리아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바로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데스나이트에게 전한 말이었다.
300년 전 죽은 하멜의 육체와 기억에서 투영해 만든 가짜. 그럴지라도 데스나이트는 자기 자신이 하멜이라고 믿고 있다.
대수림에서의 전쟁에서ㅡ 데스나이트는 육체를 잃었다. 하지만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아멜리아에게 돌아와, 그녀가 새로이 만든 육체에 깃들었다.
유일하게 ‘진짜’였던 육체마저 소멸하였으니, 이제 그에게는 ‘하멜’다운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영혼도 가짜고, 기억도 가짜. 그럼에도 데스나이트는 자신을 하멜이라 믿으며, 하멜다운 자아를 갖고, 거짓이 섞인 기억을 맹신하며 거짓된 복수심과 증오에 분노를 갖고 있다.
마족을 죽이고 싶다. 마왕에게 무릎을 꿇고 싶지 않다. 마왕을 죽이고 싶다.
그러한 의지는 가졌으나, 동료들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가짜기억에 따른 복수심과 증오를 앞서지 못했다. 머뭇거리고 주저하던 몸에 아멜리아의 명령이 가해지니, ‘복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위안하며 무릎을 꿇게 되었다.
‘씨X, 씨X, 씨X…….’
태연할 수는 없었다. 데스나이트는 미쳐버릴 것만 같은 분노를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분노하면서도, 데스나이트는 이 순간의 ‘분노’와 ‘굴욕’에 안심했다.
이 상황. 과거에 죽이지 못했던 원수들을 앞에 둔 상황에서 저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ㅡ 그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신하게 만들어주었다.
“끝났군.”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그는 더 계단을 내려오지 않고, 피비린내가 가득 찬 대전을 돌아보았다.
100명의 마족은 마왕이 명령했던 대로 50명이 되었다. 대부분 전쟁시대의 오랜 마족들이 살아남았는데, 개중에는 전쟁을 겪지 못한 젊은 마족들도 몇몇 서 있었다.
“살아남은 너희에게는 선물을 주마.”
유폐의 마왕이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나의 마력의 일부. 이건 어디까지나 선물이기에, 너희를 계약으로 속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지. 헬무드의 시민권을 갖는 모든 마족은 죽어서 내 품에 안기게 되니까.”
“폐하……?!”
가비드는 놀람을 감추지 못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유폐의 마왕이 말했듯이, 마왕은 휘하 마족과 계약을 맺을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계약의 ‘대가’로 힘을 줄 필요도 없다. 위신의 마안을 가진 가비드조차도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을 맺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위신의 마안은 심복을 위한 마왕의 선물일 뿐이었다.
마왕이 마족에게 마력을 선물한다는 것. 그것은 마족의 격을 몇 단계나 위로 끌어올린다는 뜻이다. 심지어 1명의 마족도 아닌 50명의 마족에게 그러한 선물을 내리다니! 이것은 전쟁시대에도 없던 특혜였다.
“너희의 힘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이 빙긋이 웃었다.
“내가, 선물한 힘. 자유롭게 주었듯이 빼앗는 것 역시 나의 자유다.”
영예로운 기쁨에 잠겨있던 마족들의 표정이 하나둘 바뀌어갔다.
“마족간의 서열전에서 내 힘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공평하지 않으니까 말이지. 서열전은 힘으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마족은 그리했지.”
천천히 내려오던 걸음이 91층의 어전에 닿았다.
그 순간. 피범벅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던 대전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까처럼 깔끔한 파티홀의 모습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아……!”
바뀌어 버린 풍경에 가비드가 몸을 떨며 신음했다. 누아르조차도 입술을 핥으며 눈을 빛냈다.
수십 수백 개의 자물쇠가 덕지덕지 붙은 거대한 문. 300년 전의 바벨, 마왕의 어전으로 통하던 문의 모습이 보였다. 짧고, 작은 살육의 흔적이 있었던 이 공간은ㅡ 방금과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오랜 세월과 흔적이 고인 공간으로 바뀌었다.
“패배하면 힘을, 혼을, 영지를, 존재를 빼앗긴다. 말인즉, 승자는 패자의 모든 것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법은 지금의 마계에도 남아 있지만…… 불필요하고 번거로운 절차는 없애도록 하지.”
“손수건이나 장갑은 어떤가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누아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인간들이 결투할 때처럼 말이에요. 품에 손수건을 두고, 장갑을 끼고…… 후후, 매번 그러는 것은 어쩌면 제법 귀찮은 일일 테지만. 어떤 방식이건 지금보다 간단하겠죠.”
“채용한다.”
“좋아요. 아주 좋아. 아니면 결투장을 주고받는 건요? 그건 지금도 하고 있지만, 결투장의 작성 서식도 아주 귀찮고 심사도 따로 받아야 하니…… 응, 절차를 없앤다고 하셨으니, 그냥 아무렇게나 쓴 편지로도 서로 죽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채용한다.”
“승패를 가르는 것은 역시 목숨이겠죠? 항복은…… 그런…… 불명예스러운, 부끄러운 짓을 하는 놈이 어디에 있겠어요? 아, 그래도 입회인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서열전……. 후후, 서로 죽이는 결투가 공평하도록 말이야. 마왕님, 만약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저 누아르 제벨라에게 명해주세요. 제 휘하에는 아주 많은 몽마가 있으니까요. 그 아이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입회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요.”
누아르는 우아한 자세로 치마 끝자락을 들면서 몸을 숙였다. 유폐의 마왕은 누아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마족들을 보았다.
“말했듯 서열전은 간단하게 바뀐다. 이곳의 너희들은 살아남았고, 내게 힘을 받았지만, 너희들 간의 서열전은 물론이고 이곳에 없는 다른 마족 간의 서열전에서도 내 힘은 쓸 수 없다. 그러니 안주하지 말라. 언제고 현재 누리는 것을 빼앗길 수 있음을 자각하라.”
촤르르륵! 유폐의 마왕의 뒤에 끌리던 수많은 사슬들이 몸을 일으키더니, 마왕이 앉을 수 있는 옥좌가 되었다.
유폐의 마왕은 사슬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아서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는 혼란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나는 큰 혼란은 바라지 않는다. 특히 제국의 ‘일반’ 시민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불안해하기를 바라지 않아.”
“…….”
“존재를 빼앗는다는 것은 얽힌 계약까지 빼앗는다는 것이지. 상위 마족은 수많은 일반 시민과의 계약이 얽힐 수밖에 없는 존재다. 서열전은 자유로이 벌여도 좋으나, 이후의 수습은 빈틈없이 해야 할 것이다.”
“계약의 정리는 입회인이 맡아도 될 것 같아요. 저 누아르 제벨라에게 입회인 독점의 권리를 주신다면 말이에요.”
갑작스러운 서열전의 개정. 이전까지의 서열전에서 입회인의 역할을 맡는 것은 명망 있는 상위마족이나 바벨에서 파견된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서열전이 굉장히 많아질 것이며, 계약의 정리 외에도 서열전 이후로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아질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입회인이 중요해질 것이다.
수백 년 동안 헬무드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로 입지를 굳혀온 것이 바로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이 새로운 사업ㅡ 입회인 시스템에서 어마어마한 돈 냄새를 맡았다. 특히 민간사업도 아닌 제국이, 마왕이 직접 주관하는 사업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며, 이런 문제에서 유폐의 마왕의 씀씀이는 결코 좁지 않았다.
“계획안을 정리해서 올리도록.”
“네에!”
누아르는 질식할 것만 같은 돈과 황금의 냄새를 상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임명식을 시작하지.”
드디어. 유폐의 마왕이 시선이 아멜리아에게 닿았다. 아멜리아는 자신이 이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도 갖지 않았다.
블러드메리.
대대로 유폐의 지팡이가 소유하던 마법지팡이. 사실 아멜리아는 여태까지 블러드메리에 욕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저딴 지팡이를 갖지 않아도 아멜리아는 스스로의 마법과 힘에 넘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블러드메리가 갖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왕의 힘? 그런 것보다는 블러드메리에 남아 있을 기억이 아주 궁금했다.
대체 사마르 대수림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가? 에드몬드 코드렛은 ‘어떻게’ 실패하였는가?
대강 이유는 알고 있다. 데스나이트의 증언을 통해, 아멜리아는 대수림에 유진 라이언하트가 난입했다는 것을 들었다.
데스나이트가 너무 일찍 쓰러져 버렸다. 에드몬드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지 못했다.
아멜리아는 의식의 결말이 궁금했다. 그곳에 함께 있었다는 발자크 루드베스ㅡ 놈이 무언가 수작을 벌이고, 에드몬드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블러드메리에도 그에 관한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
블러드메리는 그런 지팡이다. 모든 유폐의 지팡이의 혼은 마왕에게 돌아가지만, 소유자의 ‘기억’은 블러드메리에 남는다. 저 사악하고 불길한 지팡이는 피를 마시고 기억을 저장한다.
“아멜리아 머윈. 이리 가까이 오라.”
“네.”
아멜리아 머윈이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 데스나이트가 움찔거렸고, 헤모리아가 숨을 죽였다. 데스나이트가 들어 올린 안광이 유폐의 마왕에게 향했다.
시선이 잠시 마주쳤으나, 유폐의 마왕은 데스나이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에서 무언가 관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데스나이트에 그 어떤 감정도 관심도 보이질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하멜은, 전생에 유폐의 어전까지 오지 못했다. 저 사슬과 자물쇠 가득한 문을 보지 못했다. 유폐의 마왕과 직접 대면하지 못했다. 망가지고 죽어가는 육체는 전투가 아닌, 동료들의 배신과 조롱에 의해 쓰러졌다.
유폐의 마왕의 무관심과 무감정이 데스나이트에게는 거대한 굴욕감을 주었다.
“아멜리아 머윈.”
유폐의 마왕은 데스나이트를 보지 않고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곁에 떠 있던 블러드메리가 아멜리아의 앞으로 날아갔다.
“오늘부터 네가 유폐의 지팡이다.”
“네.”
아멜리아는 양손으로 블러드메리를 받으며 얇은 미소를 지었다.
어전
유폐의 지팡이의 임명식 자체는 굉장히 간단하게 끝이 났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고위마족들. 어쩌면 정다운 인사말로 시작해서, 서로의 근황과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고,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하하호호 웃고 춤이라도 출 수 있는 파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ㅡ 절반의 마족이 죽어버린 순간부터 그런 미래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짧은 임명식이 끝난 후. 가비드가 나서서 마족들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마족들은 시키는 대로 어전을 떠났다. 그들도 당장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살육에서 살아남아 얻은 것. 유폐의 마왕의 ‘힘’.
그 힘을 하사받는 것에 특별한 절차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전에서 물러선 순간. 마족들은 자신의 몸 안에 미증유의 힘이 깃든 것을 인지했다.
이 힘이 얼마나 강한가. 어떻게 해야 잘 다룰 수 있는가. 또, 앞으로의 변화에 어떤 식으로 적응해야 하나. 마왕의 힘은…… 다른 마족 간의 서열전에서 사용할 수 없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나? 마족들에게 쓸 수 없는 힘을, 누구에게 겨누라며 쥐여준 것인가?
마족들은 각자의 생각에 몰두하며 바벨을 떠났다.
“서운하지 않아?”
누아르 제벨라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게도 마왕의 선물은 깃들었지만, 누아르는 그 힘에 별다른 매력과 욕심을 느끼지 못했다.
힘? 그런 것은 진즉에 가지고 있었고, 충분하여 부족함이 없었다. 하위 서열의 마족들이 마왕의 힘을 가졌다고 해도, 누아르는 하고자 한다면 그 마족들을 몰살시킬 자신이 있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신감이지만, 누아르는 자신의 힘을 확신했다. 그녀의 권능인 환상의 마안이 강력한 것은, 누아르 본인의 마력도 마력이지만 그녀가 결코 패배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면 서운할 것 같애.”
고민할 필요도 없고, 준비해야 할 것도 없다. 사실 준비할 것은 많았다. 감사하게도 유폐의 마왕은 누아르의 사업 아이템ㅡ 입회 시스템을 채용해 주었고, 계획서를 준비해 오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마족들 중에 누아르의 기획을 빼앗아 선점할 정신 나간 놈은 없을 것이고, 계획서도 누아르 본인이 작성할 필요 없이 그녀 휘하의 고학력 마족들이 대신 작성해 줄 것이다.
“그렇잖아? 오늘의 주인공은 너여야만 했는데. 정작 네 임명식은 5분 만에 끝나 버렸지.”
누아르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살짝 비틀어 돌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상관없어요.”
아멜리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파티 따위나 즐기고자 그 먼 사막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니까요. 네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냥 네가 즐기지 못해서 아쉬운 것 아닌가요?”
“맞아, 굉장히 아쉬워. 어전의 문이 열린 것도 100년 만이고, 고위마족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도 오랜만이잖아? 너랑 만난 것도 오랜만이고.”
누아르는 히죽 웃으며 아멜리아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멜리아. 너는 사막에 틀어박히고서 단 한 번도 헬무드의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지? 오랜만에 너와 술을 마실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를 참 많이 했는데 말이야.”
“나는 너랑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아요.”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마. 그냥 앉아서 술만 마시자는 건데 뭘? 왜, 내가 널 침대로 끌고 가기라도 할까 두려워?”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저 말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몽마의 여왕이다.
아멜리아는 대답 대신에 누아르의 두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영롱한 보랏빛의 눈동자. 그 어떤 마법으로도 흉내 낼 수 없을 권능이 깃든 환상의 마안.
“아, 걱정하지 마.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야.”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나는 이 마안으로 너의 모든 욕망을 보여주고 겪게 해줄 수 있는데…… 어때? 관심 있어?”
“나는 네게 화대를 줄 생각이 없어요.”
“어머, 화대라니…… 그런 말은 하지 마, 나는 네게 화대나 받자고 이러는 것이 아니거든? 그냥 관심이 있어서 그래.”
누아르의 눈동자가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데스나이트의 모습이 잡혔다.
“네가 나랑 놀고 싶지 않다면, ‘그’는 어때?”
“내 것이 탐나나요?”
“네 것이라…… 아하하, 내가 아는 ‘그’는 저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꽈드득. 갑옷이 뒤틀렸다.
누아르와 마주친 순간부터, 아멜리아는 데스나이트의 행동을 억제했다. 데스나이트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누아르에게 덤벼들 것과, 누아르가 데스나이트의 진짜 정체를 간파할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게 놓아줘. 안 될 것도 없잖아? 아멜리아, 너와 그의 인연보다…… 나와 그의 인연이 훨씬 길 텐데?”
“제벨라 공작. 너도 알다시피, 그는 너를 굉장히 증오하고 있어요. 내가 목줄을 놓아버리면…….”
“나를 증오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지. 걱정하지 마. 그냥, 오랜 친구와 인사하고 싶을 뿐이야.”
끼긱, 끼기긱. 누아르의 말이 이어질수록 데스나이트의 갑옷에서 쇳소리가 심해졌다.
아멜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며 데스나이트를 속박하던 마력을 거두었다.
“오랜만이에요.”
누아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의 하…….”
콰드득! 달려든 데스나이트가 누아르의 몸을 벽에 처박았다.
“오랜, 친구?! 네가?!”
데스나이트는 괴성을 지르면서 갑옷의 양팔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주먹에 얻어맞는 누아르의 몸을 부서지고 터지며 피가 튀었다. 순식간에 누아르의 육체를 파괴한 데스나이트는,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누아르의 목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아, 나는 괜찮아요.”
아멜리아는 눈살을 찡그리며 데스나이트를 저지하려 했지만, 누아르는 비명이나 신음 한 번 내지 않고서 웃었다. 그녀는 부서진 몸을 재생시키지 않고, 데스나이트의 악력에 목이 으스러지는 도중에도 말을 계속했다.
“하멜. 당신이 나를 지금까지 증오하는 것이 무척이나 기뻐요. 그래도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무시당한 것은 너무 서운한데, 당신은 나와의 만남이 반갑지 않나요?”
“이 개 같은…….”
“300년 전에 죽은 당신이 왜 그런 모습으로 부활했는지, 나는 아주 궁금해요. 하지만 묻지는 않을게요. 내 질문이 당신에게 굴욕과 불쾌를 줄 것 같거든요. 나는 당신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
퍼억! 데스나이트의 주먹이 누아르의 안면에 처박혔다. 굴욕? 불쾌? 데스나이트의 안광이 덜덜 떨렸다.
데스나이트로 부활한 것.
증오와 복수심 때문이다.
베르무트의 후예. 라이언하트를 멸살하고 싶다. 세냐와, 아니스와, 모론과 관련된 모든 것들도 싸그리 다 죽여 버리고 싶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왔는데.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불리던 라이언하트의 어린놈한테 패배했다.
그 패배는, 데스나이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위안의 여지가 없는 완벽하고 압도적인 패배였다. 육체는 소멸했고, 영혼만이 남았다. 존재를 연명하기 위해 임시로나마 영혼을 갑옷에 정착시킨 것이 지금 데스나이트의 처지였다.
그런 비루한 꼴로, 아멜리아와 함께 헬무드에 왔다. 살아서 도달한 적 없는 바벨의 어전에 언데드가 되어, 흑마법사의 종이 되어서 도달했다. 300년 전에 죽이지 못했던 적들의 비웃는 시선을 받았다. 유폐의 마왕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하멜이 300년 전에 마왕과 함께 가장 죽여 버리고 싶었던 마족.
그 마족이 웃으며 친한 척을 하고, 조롱과 다를 것 없는 역겨운 배려를 말했다. 이걸ㅡ 이걸, 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나.
“여전한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누아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몸과 머리가 파괴되었는데도, 누아르는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데스나이트의 옆에 서 있었다.
부수고 죽인 것이 환상인지, 아니면 시체를 그대로 두고서 육체를 처음부터 재생해낸 것인지.
데스나이트는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단지, 이 모든 것이 증오스럽고 절망스러웠다.
‘인격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잘 만들어진 가짜야.’
누아르는 굳이 데스나이트에게 진실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만약 저 데스나이트의 인격이 정말로 하멜과 똑같다면, 이 모든 굴욕과 증오와 절망에도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누아르 제벨라가 사랑한 하멜은 절대로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는 주저앉고 도망치느니 차라리 사지에 목숨을 던지는 인간이었다.
죽을 수 없는 몸이라면, 죽음보다 증오가 앞선다면. 당장의 굴욕과 절망마저도 씹어 삼키면서 기어오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 정말이지.’
누아르는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웃었다.
물론, 저 데스나이트가 그렇게 할지라도. 누아르는 데스나이트에게 자신의 목숨을 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진짜에 근접한들 저 데스나이트는 진짜가 아니니까.
만약, 이 세상에서 다른 누군가가 누아르에게 죽음을 알게 해줄 수 있다면ㅡ 그건 반드시 진짜 하멜이어야만 했다.
“크아아!”
데스나이트가 괴성을 지르며 누아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누아르는 더 이상 데스나이트가 자신을 희롱하게 두지 않았다. 누아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고, 데스나이트의 몸이 정지했다.
“나랑 술은 마시기 싫다고 했지?”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아멜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대로 사막에 돌아갈 거야? 네 말마따나 먼 사막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 더 즐기고 가는 편이 아쉽지 않을 텐데. 다시 생각해 봐, 어때? 내가 널 위한 파티라도…….”
“질척거리지 마요. 나에게는 다른 일정이 있어요.”
“일정? 무슨 일정?”
“오랜만에 헬무드에 돌아오기도 했고, 경사스러운 일도 있으니…… 고향에 한번 들를 생각이에요.”
고향.
누아르는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아멜리아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누아르도 알고 있었다.
헬무드의 변경.
멸망의 마왕의 영지, 라비스타.
그곳은 헬무드의 영토이나, 유폐의 마왕의 시선과 통치가 닿지 않는 땅이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마족들은 외지의 마족을 철저하게 배척한다. 그런 점에서 용마성과 닮기는 했지만, 용마성과 라비스타의 폐쇄성은 격이 다르다.
라비스타의 마족들은 헬무드의 마족 서열에도 속하지 않는다. 라비스타의 마족들이 숭배하는 것은 300년 전에 잠든 멸망의 마왕뿐이며, 그들은 유폐의 마왕에게도 충성하지 않는다.
그 폐쇄적이고 원시적인 땅에서 외부에 가장 이름을 떨친 것은, 라비스타의 마수라 불리던 야곤과 유폐의 삼마가 되었던 아멜리아 머윈 둘뿐이다.
“네가 고향을 그토록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좋아하지 않아요.”
아멜리아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하지만…… 당장은 사막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죠.”
“도망치는 거야?”
아멜리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정곡인가?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팔짱을 꼈다.
“하긴. 도망칠 수밖에 없겠지. 넌 유진 라이언하트와 악연이 있고…… 재앙의 세냐도 돌아와 버렸잖아? 네가 한 짓을 안다면, 그 재앙 같은 마법사가 네 사막을 통째로 뒤집어엎으려 들 테니까.”
“나는 그녀가 두렵지 않아요. 유진 라이언하트도 마찬가지고.”
“정말 그래?”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 싶을 뿐이에요. 지금 당장은.”
아멜리아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우뚝 정지한 데스나이트를 마력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돌렸다.
도망?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말이라 생각했는데ㅡ 그 말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았다.
데스나이트의 기억에서 보았던 유진 라이언하트의 힘. 곁에 있던 성녀의 신성마법. 그리고, 아롯에서 녹색마탑주의 시그니처를 개박살 내고 아브람을 통째로 수장시키려 했다는 세냐 메르데인.
그것들을 알게 되었을 때에 아멜리아가 느꼈던 감정. 아멜리아는 그 감정을 제대로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퍼억!
“카학!”
그래서 바로 뒤에 서 있던 헤모리아의 명치에 지팡이를 쑤셔 박았다. 갑작스레 얻어맞은 헤모리아는 배를 감싸 쥐고서 몸을 숙이며 컥컥 숨을 토했다.
철그럭! 아멜리아는 헤모리아의 목줄을 잡아끌면서 바벨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데스나이트도 삐걱대는 쇳소리를 흘리며 아멜리아의 뒤를 따라갔다.
“어머 불쌍해라.”
누아르는 멀어지는 아멜리아와 애완동물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 * *
예상대로였다.
세냐는 아카샤까지 뺏어 들고 방을 이리저리 탐색했다. 강제와 다름없이 끌고 온 스트라우트 2세에게 방의 권능도 사용하게 시켰다.
하지만 첨탑 지하의 방에서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결국 유진과 세냐는 황제의 체면을 위해, 함께 식사까지 마치고서 라이언하트 저택에 돌아왔다.
“어땠습니까?”
숲의 근처. 라이자키아의 거대한 시체 앞에서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물어왔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직접 골라주었던 자켓을 보란 듯이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세냐는 배알이 꼴리는 기분을 느꼈다.
“어디 외출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옷을 입고 있니?”
“제가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와 있는데 당연히 옷을 걸쳐야지요.”
“너 성녀잖아. 성녀는 하얀 로브를 입어야 하는 것 아냐? 요즘 애들은 빠져가지고 말이야, 성직자가 성직자답지 않게 굴어도 돼? 아니스도 우리랑 헬무드에서 구르기 전까지는 항상 성직복을 입었어.”
“300년 전의 성녀이신 아니스 님께서도 허락하셨고, 빛의 신께서는 제가 로브를 입지 않은 것 따위를 질책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말은 유진조차 어이가 없게 만들었다.
크리스티나와 이런 관계가 되기 전. 그녀와 함께 사마르 대수림에 갔을 때, 크리스티나는 성직복과 흰 로브를 고집했다.
-다른 옷을 입으면 되잖아.
-성직자가 사제복을 입지 않는다면 무엇을 입는단 말입니까? 특히 유진 님과의 동행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니, 사제복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말했던 주제에. 지금의 크리스티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너…… 너 자꾸 말대꾸하지 마. 어디서 어른이 말하는…… 흡…….”
자신도 모르게 나와 버린 말. 세냐는 흠칫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지만, 크리스티나는 세냐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 예, 그렇지요. 제가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세냐 님. 세냐 님이 무려 저보다 300살이나 많으신데, 23살의 한참 어린 제가 시건방지게 세냐 님께 말대꾸를 하면 안 되지요.”
“그…… 건…… 아니야, 괜찮아.”
“아뇨, 괜찮지 않습니다. 세냐 님이 우뚝 선 고목이라면 저는 막 돋아난 파릇한 새싹이라 할 수 있잖습니까? 그런 제가 어찌 세냐 님에게 불경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아냐, 정말로 괜찮아. 그냥 말대꾸해도 돼.”
“그렇다면 네, 알겠습니다. 세냐 님. 허락을 받았으니 앞으로도 편히 말대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냐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 옷이 꽤 마음에 드나 봐?”
이렇게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세냐는 표정을 가다듬고, 몸에 두른 망토 자락을 살짝 들쳐 보였다.
“그거 알아? 너와 아니스에게 선물한 옷들 말이야. 그건 유진 혼자서 고른 것이 아니라 나의 고민도 들어간 거야. 고르는데 별로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
“하지만 저희를 위해 유진 님께서 ‘직접’ 생각해서 골라주신 것이죠.”
“뭐 그렇지? 하지만 내 망토는 무려 하루 동안 고민…….”
“아하핫.”
크리스티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진은 이어질 말들을 예상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하루? 아닙니다. 그 망토는 유진 님이 그날 당일 구매하신 망토입니다.”
“어?”
“그리고 말입니다, 세냐 님. 유진 님이 세냐 님을 위한 망토…… 선물을 준비하신 것은, 아니스 님이 선물을 준비하라고 조언했기 때문입니다.”
세냐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아니스 님이 조언하지 않으셨다면 유진 님은 빈손으로 세냐 님을 만나러 가셨을 겁니다. 그뿐입니까? 유진 님이 그 날 하신 모든 치장도 저와 아니스 님의 조언 때문입니다.”
“어…… 어어…….”
“그리고 말입니다. 세냐 님이 받으신 것은 망토 하나……. 저는…… 후후.”
크리스티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목걸이의 줄을 살짝 들어 올렸다.
“유진 님께서 직접 생각하고 고르셔서 제 목에 무려 ‘두 번’이나 걸어주신 목걸이.”
세냐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제가 받은 자켓과, 아니스 님이 받으신 코트.”
꽈드득. 세냐의 어금니가 강하게 씹혔다.
“어머나…… 저는 3개의 선물을 받았군요.”
“이 새끼 어디 갔어?!”
세냐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유진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먼 곳에서 들리는 외침을 애써 무시하며 도망치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준비
애니실라는 홍차의 향을 즐기며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이던 정실 테오니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같은 자식을 낳은 부모이자 여인으로서 큰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어쨌건 테오니스의 죽음 덕에 애니실라는 바라던 대로 라이언하트라는 거대한 가문의 안주인이 되었다.
테오니스가 저렇게 가버린 탓에 애니실라도 변할 수밖에 없었고, 바라던 안주인이 됨으로써 마음도 넉넉하고 풍요로워졌다. 극성맞던 자식교육도 부드럽게 바꾸었고, 쌍둥이의 선택과 의지를 존중하기로 했다.
양자로 들어온 유진 라이언하트.
그 아이는 처음부터 경계의 대상이었는데, 애니실라가 생각하기에 유진은 너무 걸출하고 뛰어났다. 쌍둥이의 경쟁자가 되어버린다면 무슨 수를 써도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적으로 삼지 않으려 했다. 시안과 시엘에게도 그렇게 행동하라 당부했고, 다행히 애니실라가 바라는 대로 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어린아이 같지 않던 유진이, 애니실라를 새어머니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애니실라가 낳은 쌍둥이는 유진의 형제가 되었다.
고맙게도 유진은 가주 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가주가 되는 것을 질색하며, 형제인 시안이 가주가 되기를 적극 지지해 주었다.
만약 시엘이 가주가 되는 것에 욕심을 냈다면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팠을 텐데, 다행히 시엘도 가주 자리에 욕심은 내지 않았다. 결국 큰 문제 없이 시안이 가주가 되는 것이 확실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기가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저택은 애니실라가 처음 이 가문에 왔을 때와 비교해서 아주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녀가 처음 라이언하트에 왔을 때, 이 저택은 굉장히 삭막하고 고요했다.
넓어도 너무 넓은 저택. 이 저택에서 ‘가족’이라 할 수 있던 것은 남편인 길레이드뿐이었다. 테오니스는 애니실라를 가족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어린 이오드도 애니실라를 피했다.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들. 애니실라가 처음 왔을 때에는 이 저택의 모든 기사들이 테오니스의 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틀려가는 테오니스의 성품 탓에 점점 기사들의 마음도 떠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이 저택에서 애니실라의 편은 오직 남편 하나뿐이었다.
ㅡ그마저도 애니실라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처음 혼인했을 때의 길레이드는 빈말로라도 좋은 남편이라 할 수가 없었다. 라이언하트의 가주인 이상 마땅한 실력과 명성을 갖춰야만 했기에, 길레이드는 저택을 비우는 날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애니실라는 적이 가득한, 넓어도 너무 넓은 저택에서 홀로 지내야만 했다. 애니실라의 친가인 카이네스 백작가는 제국에서도 입지가 탄탄한 명문 귀족가문이지만, 애니실라는 단 한 번도 친가에 설움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
라이언하트라는 거대한 가문의 안주인이 되겠다는 야망. 20여 년이 흐른 지금, 결국 애니실라는 적들을 아군으로 만들었고,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라이언하트 저택은 삭막하고 고요하기는커녕 북적거리고 시끄러웠다. 동물 따위나 풀어놓았던 숲에는 엘프들이 살고 있고, 가족은 2명이 늘었으며, 과분한 식객도 2명이 더 생겼다.
점점 식구가 늘어날 때마다 애니실라의 걱정도 늘어났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고 나면, 의외로 별일 없이 평화롭고 좋았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애니실라는 살짝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다.
현명한 세냐. 가문의 시조인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 그 전설적인 인물이, 애니실라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고 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고, 가시방석에 앉는 것처럼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 앉아보니 불편할 것도 없었다.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애니실라가 상상하고 그렸던 인물상에서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이런 생각은 굉장히 실례될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애니실라는…… 300년을 살아온 세냐가 순진하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마치…… 마치 딸처럼.
‘그럴 리가 없는데…….’
물론 생각만 그렇게 할 뿐. 정말로 세냐를 딸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부인은…….”
홍차의 향을 즐기던 세냐가 입을 열었다.
이 티타임을 제안한 것은 세냐였다.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그런 순수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세냐에게는 간사하고도 확실한 목적과, 애니실라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남편이 부인을 하나 더 들이려 든다면 어떤 생각을 하실 것 같나요?”
“네?”
“으흠…… 그러니까요. 부인이 여기서 한 명 더…… 늘어난다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나요?”
의도를 알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애니실라는 두 눈을 깜빡이다 표정을 가다듬었다.
“세냐 님. 당장 저부터가 남편의 후처였답니다.”
“아,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부인은 본처가 되셨잖아요?”
“네. 제가 간절히 바라는 자리기는 했습니다만…….”
“불행한 사고가 있었다고는 들었죠. 저는…… 으흠, 부인의 자격을 의심하지 않아요. 제가 알지도, 만나본 적도 없는 고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이것을 어떻게 풀어 말해야 할까? 세냐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곁에서 얌전히 과자를 집어 먹던 메르가 세냐와 애니실라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남편이 더 이상 부인을 늘릴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남편이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려 든다면. 저는, 네, 잘 지내기 위한 노력은 할 것입니다.”
“남편을 원망하지는 않으실 건가요?”
“원망은 하겠죠. 저도 여자니까요.”
애니실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결국 후처가 들어온다면. 저는 잘 지내려 노력할 겁니다. 후처가 제 자리를 노리지 않는다면 말이죠.”
“자리?”
“정실의 자리.”
애니실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저도 후처로 들어와 정실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두 번째보다는 첫 번째가 당연히 좋지 않습니까?”
“역시 그렇죠?”
“남편이 저를 가장 사랑하고, 제 자리를 직접 나서서 지켜준다면. 제 자식이 가문을 이어나갈 수 있다면. 저는 남편이 부인을 몇 명을 늘리건 상관없습니다.”
“정말…… 정말로요?”
“음, 다시 생각해 보니…… 상관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귀족가의 남자가 여러 부인을 들이고, 마찬가지로 귀족가의 여인이 여러 데릴사위를 들이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애니실라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결국 여러 부인과 남편을 둔다면, 그 본인이 쓰레기가 아닐까요?”
“쓰레기……!”
“네, 이건 비밀이에요. 제 남편…… 으흠, 가주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약간 쓰레기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옛날에는요.”
길레이드가 후처를 들인 것은, 테오니스가 더 이상 애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라이언하트는 제국, 아니, 대륙 제일의 명문 무가(武家). 본가의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라이언하트 중에서 가장 뛰어나야 했고, 어린 나이부터 형제들과 자연스러운 경쟁구도에 세우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다.
길레이드가 들으면 억울해할지도 모르는 말……. 하지만 젊은 시절의 애니실라는 솔직히 저런 생각을 했었다.
“쓰레기…… 맞아, 쓰레기가 맞죠?”
세냐는 흥분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애니실라에게 티타임을 제안했나? 누군가와 같이 유진의 욕을 하고 싶은데, 제하드를 찾아가서 유진 욕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오빠인 시크나드? 그는 결국 엘프라서 인간과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다…….
“세냐 님은…….”
막상 입은 열었는데, 애니실라는 곧장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이 세냐에게 너무 무례하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너무 노골적이었잖은가? 남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뻔하게 굴었는데, 설마 모른 척해줘야 하는 것인가?
순간의 고민.
며칠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른 새벽부터 드레스룸에서 옷을 고르던 세냐와 메르.
엄마랑 딸.
아빠는?
“…….”
그뿐인가? 저택 시종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 하루를 거르지 않고 숲의 산책로를 거니는…… 스승과 제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엘프들을 통해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세냐 님은…… 그…… 유진을…….”
“크흡.”
세냐가 마시던 홍차를 뿜었다. 입술 밖으로 품위 없이 홍차가 튀었는데, 옆에 앉아 있던 메르가 즉시 마법을 사용해 홍차가 테이블에 쏟아지는 것을 가로막았다.
이 시점에서 세냐가 홍차를 뿜을 것을 예상하는 것은 메르에게는 굉장히 간단하고 쉬운 계산이었다.
“제제제, 제가, 유진을 뭘요?”
세냐는 입가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면서 허둥댔다. 메르는 그런 세냐를 흘겨보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세냐 님, 여기 오실 때와는 말이 다르세요.”
“내내, 내가 뭘?”
“애니실라 님을 세냐 님의 편을 만들어서,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교제를 인정받겠다고 하셨잖아요.”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 메르는 세냐를 대신해서 발언했다. 그 말에 세냐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고, 애니실라의 입술도 쩍 벌어졌다.
“교…… 교제!”
“아니…… 어…… 흠, 으흐흠!”
“이미 그런 관계이신 겁니까?”
“어…… 어, 으음, 왜…… 왜요! 그러면 안 되나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세냐는 덜덜 떠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부인도, 부인도 잘 알겠지만! 유진 쟤는 그, 여러 가지 매력이 넘치잖아요? 네? 그렇죠? 나이가 어리기는 한데, 어어, 사실 알맹이가 그렇게 애 같지도 않고…….”
이미 예상했던 것이지만 확정되어 버리니 충격이 가볍지 않았다. 애니실라는 멍한 눈을 깜빡거리며 세냐의 말을 들었다.
“제가…… 어, 제가 어떻게 설명은 잘해드릴 수가 없는데! 저랑 유진 사이에는 굉장한 유대가 있거든요? 어어, 엄청난 유대예요. 그 유대에 300년은 아무것도 아니야. 설마…… 설마! 부인, 제가 300살이라서 유진과의 교제를 인정 못 한다는 건가요?”
“세…… 세냐 님, 잠시 진정을…….”
“나이가 대수야? 어? 300살이 뭐 어때서! 내가, 내가 300살을 산 것은 맞는데요. 쌩으로 300살을 먹었냐고 하면 굉장히 억울하거든요?”
“진정…….”
“내가 300살인데! 사실은 300살이 아니야. 어? 300살이냐고 하면 억울하단 말이야.”
서러움이 폭발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 사악한 여자에게 말로 흠씬 두들겨 맞을 때 세냐에게 제대로 된 저항은 불가능했다. 특히나 세냐를 서럽게 만드는 것은, 처지 면에서 세냐와 크게 다르지도 않은 아니스의 존재였다. 둘은 서로는 결코 물어뜯지 않고, 마치 머리 둘 달린 뱀처럼 작당하고서 세냐를 괴롭혔다…….
“내 몸 좀 봐요. 이게 300살 먹은 몸으로 보여? 아니란 말이야! 20살로 완벽하게 구성했다고. 몸이 20살인데 왜 내가 300살이야? 어? 정신? 나는 300살이지만 20살처럼 생각해! 300살이지만 20살처럼 산단 말이야! 이게 왜 300살이야!”
“세냐 님, 세냐 님 제발!”
애니실라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서 세냐에게 다가갔다.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는 현명한 세냐! 그녀가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지 않고서 20살이라 부르짖는 것이, 저택의 시종과 기사들에게 들릴까 봐 걱정되었다.
“세냐 님. 저는 세냐 님이 300살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 정, 정말이에요?”
“네, 물론이죠. 세냐 님은 저보다 젊고 아름다우셔요. 정신…… 20…… 20살 같다고 생각해요. 불경한 말이지만, 저는 세냐 님이 마치 딸 같다고 생각…….”
“거봐……! 그럴 줄 알았어요. 부인은 메르를 마치 딸처럼 귀여워하셨다면서요? 부인보다 150살은 많은 메르를!”
애니실라로서는 인지하고 싶지 않아 줄곧 외면하던 사실이었다…….
메르는 괜히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세냐가 미워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저도 200살이지만 소녀의 몸을 하고 있어요. 제 자아도 소녀의 것이고요.”
“나도 그래! 나도 300살이지만 아가씨의 몸을 하고 있어.”
“아가씨라는 말은 조금 나이 들어 보이네요.”
메르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고, 세냐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편을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같은 편의 몸에 칼을 꽂아 넣다니……!
“진정…… 진정하세요 세냐 님. 저는, 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나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네.”
“그럼 제가 유진과 교제하는 것을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인정……? 제가 인정해야 할 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유진의 친부모가 아닌데…….”
“하지만 이 가문의 안주인이 애니실라 부인이시잖아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애니실라는 혼란스러워서 머뭇거렸다.
물론 애니실라가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이기는 하다만, 이 가문의 실세는 유진이지 않은가? 유진이 누구랑 교제하고 혼인하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유진의 의지일 것이다. 그 문제에는 애니실라와 길레이드, 심지어 친부인 제하드조차도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막말로 유진이 좋아서 그렇게 하겠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인정해 줘요.”
“네……?”
“인정해 줘요, 빨리.”
“제하드 님에게는…….”
“부인이 인정하고 저 대신 말해주세요.”
최초에 세냐가 품었던 간사한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애니실라를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고, 그녀의 인정을 얻는 것. 그 뒤에 애니실라를 통해 길레이드와 제하드에게 교제 사실을 전하는 것.
“아…… 알겠습니다. 일단, 네, 바라시는 대로 인정하겠습니다. 남편과 제하드 님에게도 제가…… 어어…… 전하도록…… 해보겠습니다.”
“부인.”
세냐는 아직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감싸면서 머뭇거렸다.
“설마 지금 제가 주접스럽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제가 주접이냐구요.”
아니라고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일 테지만…… 애니실라는 도저히 ‘아닙니다’라는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세냐는 애니실라의 두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보고 딸 같다고 했잖아……!”
“그건…….”
“거짓말한 거예요?”
“마, 말이 그렇다는 거였죠. 주접……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하게는 생각했다는 거잖아요?! 어떻게 제게 그럴 수 있어요? 나 현명한 세냐야! 이 가문을 세운 베르무트, 그 자식이랑 친구 하던 사이라구요. 그런 저를 주접이라고 생각하다니!”
“제발, 세냐 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저한테도 반말해요.”
“네……?”
“메르한테는 반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저한테도 반말해요. 딸처럼!”
“세냐…… 세냐 님.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몰라,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그냥…… 그냥 부인 딸 할래. 나는 아가야.”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쏟아낸 말들이 세냐의 머릿속에 거대한 폭풍을 만들었다. 평범한 정신 상태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끄러움이 세냐의 정신을 도피시켰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애니실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이 눈 뜨고 볼 수 없는 주접과 추태는 자신이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세냐…… 야……!”
“어…… 엄마…….”
“세냐야…….”
“엄마……!”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메르는 어이가 없어서 세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지금 이 모든 것에서 가장 커다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세냐였다. 그녀는 강렬한 자살충동을 느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 아니…… 부…… 부인.”
“네…… 세냐 님.”
“부인의…… 딸이 있잖아요?”
“네…… 시엘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한번 만나고 싶네요……. 저, 저는 사이좋게 지낼 자신이 있어요.”
“네…… 따, 딸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애니실라는 내심 시엘이 걱정스러웠다.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시엘이 유진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걸 어찌해야…….’
혈연관계는 아니다. 방계라고는 해도 한참 먼 곳이니 혼인에 문제는 없다. 유진이 양자라는 것이 당장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이야 혼인을 맺을 때에 파양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그렇게 되는 것은 오래전부터 길레이드와 애니실라의 바람이기도 했다. 시안의 가주계승을 확고히 하고, 시엘이 유진과 좋은 관계가 된다면 본가의 큰 경사가 되었으리라.
“헌데…… 세냐 님. 유진과 교제 중이라 하셨는데…… 크리스티나 성녀는 대체 유진과 어떤 관계입니까?”
용사와 성녀. 솔직히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다. 시엘 이상으로 세냐가 노골적이고, 크리스티나 성녀는……. 저 둘을 어린아이로 느껴지게 할 만큼 대놓고 유진에게 어필하지 않았나? 세냐가 라이언하트에 오기 전, 크리스티나가 라이언하트에 먼저 식솔로 지냈을 때. 그녀가 유진에게 얼마나 헌신적인 애정을 보였는지는 본가의 모두가 보았던 사실이다.
“몰라서 묻는 거예요?”
“역시……!”
“쓰레기……. 쓰레기야. 그 새끼는 쓰레기예요.”
애니실라는 저 말에 동의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쓰레기…… 쓰레기는 맞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굉장히 능력 넘치는 쓰레기 아닌가? 300년 전의 대영웅인 현명한 세냐에, 이 시대의 성녀, 그리고…….
‘내 딸까지…….’
그렇게 생각하니 애니실라는 왠지 화가 났다.
유진 라이언하트.
쓰레기에 도둑놈.
“차…… 잘 마셨어요.”
세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니실라도 덩달아 일어섰다. 둘은 잠시 동안 어색한 시선을 나누었다.
“저는…… 세냐 님을 응원합니다.”
“네…….”
“너무 마음 상해하지는 마셔요.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으음…… 만약, 만약에 유진이 부인을 더 들여도.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네? 아까랑 말이 좀 다르신데요?”
“으흠, 아닙니다. 저도 사이좋게 지내도록 노력한다고 했잖습니까?”
애니실라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세냐는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시엘과 만난 적이 없었고,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메르에게도 시엘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음……. 알았어요. 저도 크리스티나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사실을 말하자면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사이좋게 지내도록 노력…….”
세냐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갑작스럽게 하늘이 어둡게 변했다. 주변이 밤처럼 어두워지자, 애니실라는 당황하여 하늘을 쳐다보았다.
“맙소사……?!”
애니실라는 경악하여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이언하트의 저택 하늘.
날개를 활짝 펼친 드래곤의 모습이 보였다.
준비
세냐와 메르가 티타임을 가질 때,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곁에 있었다.
커다래도 너무 커다란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정화하는 작업. 성검의 힘을 빌린다면 정화작업이 예상보다 빨라질 것이다. 유진도 전투 외의 일에서 성검을 쓸 일은 없는 데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라 최근 며칠은 쭉 크리스티나의 곁에 있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 대부분은 말이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섬기는 신은 빛의 신이고, 유진이 가진 성검도 빛의 신의 성검이다. 사실 빛의 신성력이라는 것이, 꼭 하늘과 주변이 밝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유라는 것은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는 법.
[무서운 아이…….]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은 바로 크리스티나였다.
해가 떠 있는 시간과 저물어 있는 시간. 어느 쪽이 더 길고 짧은지는 계절마다 다른 법이지만, 크리스티나는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유진을 독점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해가 저문 시간. 밤. 밤에는 무엇을 하나? 보통 사람은 잠을 잔다. 누군가는 잠을 자지 않고 엄한짓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세냐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세냐가 해 저문 밤에 유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밤 산책 정도가 고작이었다.
“앞으로 얼마쯤 걸릴까?”
“넉넉잡아 보름이면 끝날 것 같습니다.”
그 질문에서 크리스티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도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는 한 달 이상 걸리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성검의 빛이 더해진 덕에 앞으로 보름이면 정화 작업은 끝이 난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써먹느냐인데.”
유진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드래곤의 사체를 써먹을 방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드래곤이란 소재는 다루기가 굉장히 어렵다.
사실 ‘어렵다’는 것보다는 ‘모른다’라는 것이 정답이다. 역사상 드래곤이 가장 많이 죽었던 것은 300년 전. 그 이전 대륙의 역사에서 드래곤이 인간에게 사냥당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대륙에는 드래곤을 소재로 사용한 무기와 방어구가 굉장히 적지만 존재하고 있다. 그런 아티펙트가 존재하는 것은 드래곤의 자비와 은총이다.
죽어가는 드래곤이, 자기 자신의 육체를 자연에 되돌리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베풀기를 선택하는 것.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대륙의 역사에서 그런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당장 세냐가 가진 아카샤만 해도, 엘프족과 인연을 맺었던 드래곤이 죽음을 앞에 두고 선물한 것이다. 유진이 하멜이었을 적에 동료들과 헬무드를 떠돌 때에도, 죽어가는 드래곤을 만나서 드래곤하트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드라고닉 가문의 시조인 오릭스 드라고닉도 던전을 헤매다 드래곤의 은총을 입었다.
긴 대륙의 역사에서 그런 경우는 드물지만 존재했다. 문제는 너무 드물어서, 드래곤의 소재를 다룰 줄 아는 장인은커녕 기술조차 제대로 전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이언하트는 무가다 보니 장인 길드와 커넥션이 있고, 길드 내에서도 마스터라 불리는 최고 장인들과 친분이 많다. 하지만 그쪽으로 의뢰를 넣어보았지만, 장인 길드의 마스터들조차도 드래곤을 다루는 것에 ‘자신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정도의 최상급 소재라면 당연히 완벽한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
‘결국 드워프 쪽으로 가야 하는데.’
장인 길드에 드워프는 없다. 그 콧대 높은 종족은 인간 장인들과 자신들이 같은 취급을 받으며 길드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용마성에서 드워프를 데리고 오는 것인데.”
유진은 그 사실이 아쉬워서 쩝 입맛을 다셨다. 그때 드워프들을 라이언하트로 데리고 왔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듣자니 용마성의 드워프들은 누아르 제벨라, 그 탕부가 거뒀답니다.”
크리스티나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벨라 파크인지 뭔지. 그곳에 투입되어서 일하고 있다는군요.”
“주인이 바뀌었단 말이지. 미련한 땅달보 새끼들, 기껏 자유롭게 만들어줬더니 이제는 누아르의 발가락을 빨고 있는 거야?”
유진은 혀를 차며 내뱉었다.
물론 유진이 용마성을 떨어트린 것은 드워프의 자유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용마성에서 무급으로 노예 취급을 당하던 것과는 달리, 누아르 제벨라 밑에서의 드워프들은 매일매일 부족함 없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 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당연히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그 사실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교황청과 라파엘로 단장에게도 문의는 해보았습니다. 유라스 쪽에도 드워프 장인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들은 세공품과 성상 조각 같은 분야가 전문이라…… 무기와 방어구는 자신이 없다는군요.”
“결국 시무인 쪽에서 알아봐야 하나.”
대륙에서 가장 많은 드워프가 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시무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무인은 오래전부터 ‘기사의 나라’라고 불렸고, 대륙 각지의 자유기사들이 수행을 위해서라도 꼭 한 번은 머무는 나라다. 또한 자잘한 전투가 많아 용병들도 굉장히 많다.
그렇다 보니 기사와 용병들을 위한 장비제작 기술이 발전했다.
또한 시무인을 대표하는 마법 갑옷인 엑시드. 그 가변갑옷도 최상급부터 질 나쁜 하급까지 여러 종류인데, 상급 이상의 엑시드는 모두가 드워프들이 만든 것이다.
‘격랑 기사단의 단장. 오르투스 하이만의 엑시드가 드래곤하트를 일부나마 쓴 것이었지. 비늘과 가죽도 사용되었고 말이야.’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시무인은 드래곤을 소재로 사용한 여러 무기와 엑시드를 국부로 보유하고 있다.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완벽하게 가공하려면 시무인에서 드워프를 데리고와야 할 것이다.
말은 쉽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시무인의 드워프들은 무형문화재라 불리면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왕가는 드워프의 기술을 절대로 외국에 노출되지 않게 보호하고 있다.
‘아이리스를 죽여주고, 그 대가로 드워프들을 지원받으면 되겠지. 아니, 그거로 퉁 치기에는 이쪽이 손해 같은데…….’
대해적이 되어버린 아이리스 덕에 시무인은 여러 가지로 곤란을 겪고 있다. 시무인이 작정하고 해군과 오르투스를 파견할지라도, 수백 척에 이르는 해적함대를 이끄는 아이리스를 상대하기는 버거울 것이다.
특히 무대는 바다. 아이리스의 암전의 마안은 공격성뿐만 아니라 기동성도 뛰어나기에, 시무인의 해군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아이리스를 몰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다르다. 아이리스가 아무리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오합지졸인 해적 아닌가? 일단 그 망할 다크엘프의 목만 따버리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키옐에서 한 판 붙었을 때는 이클립스와 프로미넌스가 없었다. 이그니션도, 월광검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시무인에서는 그렇게 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 거기에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의 지원까지 받는다면?
‘상대가 누아르나 가비드라면 모를까. 아이리스 정도야 뭐…….’
솔직히 긴장할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리스가 300년 전보다 강해지기는 했다지만, 지금 싸운다면 당연히 죽일 수 있다. 애당초 그 누아르 제벨라가 아이리스를 압도적으로 패배시켰지 않나.
아이리스 ‘따위’에게 고전해 버리면, 마왕은커녕 누아르조차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응?”
유진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위에서 나타난 마법 반응이 감각에 잡힌 탓이었다. 곧, 유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시커먼 밤이 되었다. 높은 하늘에서 날개를 활짝 펼친 거대한 몸뚱이가 태양을 가려버린 것이다.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놀란 얼굴이 된 것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
새카만 비늘의 블랙드래곤이, 위용을 과시하며 아래를 내려 보고 있었다.
[흐흐…… 흐흐흐!]
블랙드래곤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 뻔한 일이었다……. 유진은 공기를 진동시키는 웃음소리를 듣고서 표정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보아라, 미천한 인간들아. 이것이 바로 본녀의 진신이니라! 이 흑요석처럼 빛나는 비늘! 하늘을 덮는 날개!]
잔뜩 으스대는 목소리. 상공에 갑자기 드래곤이 나타나 버리니,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이 놀라서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들은 당황해 웅성거리면서도 즉시 태세를 정비했다.
“드래곤!”
길레이드와 기온도 놀라서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유진이야 저 드래곤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여러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헬무드에 다른 마룡이 있어서 라이자키아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이 아닐까? 혹은 다른 블랙드래곤이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돌려받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닐까?
“괜찮습니다…….”
어느새 지붕 위로 올라온 유진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오오, 은자…… 아니, 인간이여!]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라이미르아는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유진을 보았다.
[그대가 바란 대로 본녀는 드래곤의 힘을 되찾았느니라! 이 모습이야말로 본녀의 진정한 모습이다!]
은자라고 부르던 주제에, 금제가 풀려 힘이 넘치는 모양인지…… 지금의 라이미르아는 유진을 은자라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도발적으로 눈가를 빙글 휘어 보이면서 날개를 펄럭였다. ㅡ화아악! 거대한 바람이 숲을 뒤흔들었다.
[후후…… 후후후. 본녀는 드래곤 중에서도 특별하고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지금의 본녀라면 어쩌면…….]
“너 미쳤니?”
유진은 목소리를 내리깔고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내려와?”
[보…… 본녀에게 명령하지 말…….]
“확 씨.”
유진은 주먹을 불끈 쥐고서 위로 들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저 위까지 날아가서 흠씬 패주고 싶은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싶었다. 이전에 라이미르아에게 얻어맞는 아픔이 무엇인지 확실히 가르친 탓이었다.
[…….]
아리아르텔에게서 홍옥의 금제를 제거받았다. 200년 동안 억제되었던 드래곤의 힘이 돌아왔다.
덕분에 라이미르아는 이제 자유롭게 폴리모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모습이 아닌 본래 모습으로 변신도 가능하게 되었다. 여태껏 쓰지 못했던 용언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아리아르텔에게 용언의 사용법에 대해서도 조언을 받았다.
갑자기 손에 들어온 힘은 라이미르아를 잔뜩 흥분시켰다. 그래서 유진이 데리러 오기 전에, 직접 하늘을 가로질러 라이언하트의 저택으로 날아왔다. 아르아르텔이 위치를 알려준 덕에 헤매지도 않았다…….
[으흠…….]
라이미르아의 흥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저 아래에서 번뜩이는 금색 안광. 비늘을 푹푹 찌르고 파고들어 오는 분노. 그것을 느낄 때마다, 아직 라이미르아의 이마 한복판에 박힌 홍옥이 욱신욱신 아파왔다.
[장난이니라……. 너, 너무 화를 내지 말거라.]
“빨리 내려와.”
[알겠느니라……. 으, 은자여.]
이 힘이라면 어쩌면. 흥에 취해 그런 생각을 했었다만, 잘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라이미르아가 힘을 회복해 봐야 아직은 헤츨링. 그런데 유진은 고룡인 라이자키아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니, 라이미르아가 뭔 수를 쓰건 유진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라이미르아는 얌전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진은 다시 한번 주먹을 들어 보이며 내뱉었다.
“그 꼴로 내려오려고? 너 진짜 혼날래?”
[우으…….]
아리아르텔이 말하기를, 드래곤은 위대하고 존엄한 존재라 했다. 그 어느 순간에도 드래곤은 드래곤다운 위엄을 보이며, 결코 굽히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멸시와 굴욕에 결사코 저항해야 한다고 들었다.
‘멸시와 굴욕이 아니니라. 은자는 본녀의 목숨을 구했기에 은자인 것이니라. 그러니 본녀는 은자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느니라…….’
또한 드래곤이란 세상을 수호하는 의무가 있으며, 그래야 할 때에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들었다.
‘은자는 용사이니라. 은자가 세상을 구하는 것에, 세상을 수호하는 본녀가 힘을 보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라. 그러니 본녀는 은자에게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은자의 동료인 것이니라.’
라이미르아는 그런 식으로 납득시키며 용언을 외었다. ㅡ화아악! 대지를 덮었던 날개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거대한 블랙드래곤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
유진은 아래로 내려오는 라이미르아의 모습을 보고서 눈썹을 실룩거렸다. 원래 라이미르아는 메르와 외형적으로 나이가 별로 차이 나지 않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크리스티나와 누아르를 뒤섞어 놓은 것만 같은 성숙한 모습에, 머리의 뿔까지 전보다 훨씬 커져 있다.
“오늘부터 이것이 본녀의 모습…….”
“당장 바꾸지 못해?”
“무, 무어가 문제라는 것이냐? 은자여, 은자도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
“애새끼가 어디서 이상한 것만 보고 배워서! 그게 대체 무슨 꼴이야?! 옷은 또 뭐고!”
“오…… 옷이 뭐 어땠다는 것이냐?”
라이미르아가 억울하단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이걸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왠지 기억에 익는 옷이다 싶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판데모니엄의 마법 스크린에서 춤을 춰대는 마족 아이돌의 무대의상이었다.
“누가 그딴 옷을 입고 돌아다녀!”
“드, 드림걸즈의 모두가 이 옷을 입고 춤을 췄느니라.”
“바꿔!”
“어떤 모습으로 바꾸란 것이냐……? 으, 은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겠느니라. 그러니 일단 주먹을 내리거라……. 본녀는 그 주먹이 무서워서 은자에게 다가가지 못하겠느니라…….”
“예전 모습으로 바꿔.”
“은자는 자그마한 본녀의 모습을 원하는 것인가?”
“어.”
“은자가 어린 모습을 원한다니…… 알겠느니라.”
말이 좀 이상하지 않나? 유진은 목에 턱 걸리는 것이 있어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곁의 길레이드와 기온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아래의 기사와 시종들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제가 시안도 아니고…….”
“내가 뭐?!”
부랴부랴 칼을 들고 나왔던 시안이 아래에서 억울하단 표정을 하고서 고함을 질렀다.
“아니 그…… 너는 열 살배기랑 약혼을 하잖아.”
“아직 안 했어!”
“어쨌든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나는 어린아이를 그…… 딸처럼 좋아한다는 것이지, 다른 의미는 없다는 말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개자식아!”
시안은 억울하고 화나서 부르짖었다.
그러는 사이에 라이미르아가 모습을 바꾸었다. 그녀는 유진에게 익숙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서 사뿐 지붕 위로 내려왔다.
“은자가 원하는 모습을 하였느니라.”
라이미르아는 아직 유진의 주먹이 들린 것을 보며 쭈뼛거렸다. 확,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유진은 일단 주먹을 내리고서 어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게…… 음…….”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유진은 잠시 고민하면서 길레이드의 눈치를 보았다. 길레이드는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유진이 먼저 말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쟤는…… 어…… 라이자키아의 딸입니다.”
“마룡의 딸……?”
“네. 그러니까…… 제가 아버지를 죽여 버렸으니, 미안해서 일단 거두었는데…… 아,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어요.”
“본녀는 은자에게 은혜를 입었느니라.”
“저거 보세요. 정말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쟤는 어, 음, 애완동물이라고 해야 하나…….”
“드래곤이 애완동물이라고?”
기온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단 내뱉기는 했는데, 유진도 애완동물이라는 말은 너무하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저 아래의 테라스에 서 있는 애니실라과 세냐, 메르가 보였다.
“메르의 친구입니다.”
유진은 잘됐다 싶어 메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메르랑 사이가 아주 좋아요. 아마 애니실라 님도 얘를 좋아할 거예요.”
왠지 애니실라의 시선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유진은 별생각은 하지 않았다.
준비
보름 동안 유진은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특히 유진이 몰두한 것은, 예전에 비해 그나마 드래곤답게 된 라이미르아를 곁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
라이미르아는 좀이 쑤셔서 괴로워했지만, 유진은 라이미르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헤츨링이라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 라이미르아를 직접 전장에 내보내서 싸우게 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망토 안에 넣어두고 보조 정도는 맡기고 싶었다.
“쏴라.”
유진은 망토를 들추며 말했다.
며칠 동안 수십 번이나 했던 일. 라이미르아는 군말하지 않고 망토의 안에서 입을 벌렸다.
ㅡ콰아앙! 안에서 쏘아진 시커먼 브레스에 유진의 망토가 크게 펄럭거렸다.
웬만한 결계라면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주변에는 세냐가 직접 만들어 놓은 결계가 펼쳐져 있었기에, 일직선으로 쏘아진 브레스는 결계와 부딪쳐 소멸했다.
“좋아.”
유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투에서 딱히 화력의 부족성을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유진은 고화력을 자랑하는 병기와 기술을 몇 개나 가지고 있었다.
월광검과 성검, 용격창, 뇌광궁, 마창, 분쇄추. 고화력의 무기만 해도 6개. 거기에 공검과 이클립스까지 있다. 유진이 작정하고 끌어간 화력전은 고룡인 라이자키아와의 전투에도 크게 밀리지 않았었다.
[크흠…….]
망토 안에서 위니드가 진동했다. 왠지 주눅이 든 템페스트가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온 것이다. 위니드도 굉장히 좋은 무기기는 하지만, 단순 화력에는 다른 무기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위니드를 잘 쓰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빌려주지는 않겠지? 만약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차라리 위니드를 보물고에 봉인해라.]
‘왜. 뭐 걱정이라도 돼?’
[넌 불과 며칠 전에 포식검을 시안 라이언하트에게 양도하지 않았나!]
‘그거야…… 나한테는 이제 포식검이 큰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유진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템페스트의 말대로, 유진은 며칠 전에 시안에게 포식검을 양도했다. 사실 양도란 말도 우스운 것이, 원래 포식검은 유진의 것이 아니라 라이언하트의 것이다.
이전까지는 필요해서 들고 다녔지만, 이제는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포식검 아스펠의 이점은, 사용자가 마법사가 아닐지라도 마법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 어지간한 마법사를 상대로 압도적인 이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시그니처까지 완성한 대마법사이며, 대부분의 마법을 이해할 수 있는 아카샤까지 가지고 있다.
물론 포식검이 마법을 베는 것 외에도 다른 이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포식검은 마법을 베고, 그 마법에 사용된 마나를 흡수한다. 예전에 유진은 마나를 너무 많이 잡아 처먹는 월광검을 다루기 위해 포식검을 필요로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더 이상 마나가 부족할 일이 없었다. 전투가 아무리 길어져도, 환염식에 주변의 마나를 끌어다 쓰는 프로미넌스가 있는 이상 유진의 마나는 절대로 고갈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더 이상 포식검을 쓸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시안은? 시안은 마나를 많이 처먹는 게돈의 방패를 쓰고 있다. 최근 백염식이 5성에 올라 마나가 넉넉해지기는 했다만, 그렇다고 해도 게돈의 방패를 남용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시안에게 포식검을 준 것은, 시안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야. 가주님도 동의했고, 시안도 원했다고. 애당초 포식검이 내게 아니었는데 양도는 뭔 놈의 양도야?’
[그런가? 그렇군. 하멜, 나…… 아니, 위니드도 마찬가지다. 위니드는 네 것이 아닌 라이언하트의 것이다.]
템페스트가 두려워하는 것은, 유진이 더 이상 필요 없다면서 멜키스에게 위니드를 빌려주는 것이었다…….
유진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코웃음을 쳤다.
‘거참. 다른 정령왕들은 다 잘만 계약했는데 왜 너만 고집을 부리는 거냐?’
[그들이 미쳐 버렸다고 해서 나까지 미쳐 버리라는 것인가?]
템페스트가 부르짖었다. 유진은 그 말을 무시하면서, 위로 들추었던 망토를 내려놓았다.
“으엑.”
망토가 내려오기 전에 라이미르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지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속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오늘 하루에 브레스를 연달아서 너무 많이 쏴댄 탓도 있겠지만, 아직 유진과의 ‘연결’이 제대로 안정화가 되지 않았다.
“은자의 사고가 자꾸 흘러오는 기분이 든다…….”
“처음 며칠만 그렇다고 했잖아. 곧 괜찮아질 거다.”
급박한 전투 도중에 즉각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사고를 연결할 수밖에 없었다. 사역마인 메르는 유진이나 세냐와 사고가 연결되어도 멀미를 느끼지 않지만, 라이미르아는 조금의 멀미를 느끼고 있었다.
“본녀를 착한 아이라고 생각해 다오.”
“그래, 그래.”
“본녀를 칭찬하고 귀여워해 주어야 하느니라.”
“그래, 그래.”
유진은 바라는 대로 대답하고 생각해 주면서 라이미르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만약 지금 옆에 메르가 있었다면 질투심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겠지만, 다행히도 지금 메르는 이곳에 없었다.
‘좌표나 여러 계산은 메르한테 맡기고, 부가적인 지원은 라이미르아한테 받는다.’
블랙드래곤은 단순 브레스 외에도 독기도 내뿜을 수 있다. 라이자키아의 독기처럼 지독하지는 않겠지만, 드래곤의 독기는 어지간한 마족을 상대로도 여러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용언은…… 솔직히 얘가 용언을 쓰는 것보다 내가 직접 마법을 쓰는 것이 더 강한데…….’
“은자여, 드래곤인 본녀의 힘을 우습게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진짜 위험한 순간에는 꼬리라도 꺼내서 방패로 쓸 수 있을 거고…….’
“끄,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거라…….”
라이미르아가 울상을 지으며 망토 밖으로 뛰어내렸다.
“라이자키아 그 새끼는 지 팔다리 꼬리로 바꿔서 공격 잘만 막던데, 너는 그런 거 못 하냐?”
“본녀의 비늘은 흑룡공처럼 튼튼하지 않느니라……. 그, 그리고 흑룡공처럼 빠르게 폴리모프를 할 수도 없느니라.”
라이미르아는 낯빛이 창백해져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유진은 조금의 아쉬움을 느끼면서 라이미르아에게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더 조정할 것은 없으니까, 가서 놀고 와라.”
“정말 가도 되는 것이냐?”
“그래.”
창백했던 얼굴에 바로 혈색이 돌아왔다. 라이미르아는 히히 웃어대며 저택을 가리켰다.
“애니실라가 본녀의 옷을 골라주겠다고 하였느니라.”
“그래, 그래.”
“본녀의 예리한 눈치로 보건대, 애니실라는 본녀를 좋아하고 있느니라.”
“애니실라 님은 어린아이를 좋아하시지.”
생각했던 대로 애니실라는 라이미르아를 마음에 들어 했다. 메르가 처음 라이언하트에 왔을 때처럼, 틈만 나면 라이미르아에게 과자를 쥐여주고 옷을 사다 입혔다.
‘세냐랑도 잘 지내는 것 같고…….’
조금 거리를 두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애니실라와 세냐가 잘 지낸다는 것은 유진에게도 조금은 의외였다.
그리고…… 기분 탓일까? 요즘 저택에서 마주칠 때마다, 애니실라의 눈초리가 왠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정은 끝나신 겁니까?”
라이미르아가 저택으로 가버린 후. 근처에 있던 크리스티나가 웃는 얼굴을 하고서 다가왔다.
“그래.”
아리아르텔에게 받은 드래곤하트로 프로스트를 보강하는 것은 며칠 전 끝났다.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정화하는 작업도 어제 끝났다. 유진과 라이미르아의 연결도 더는 조정할 것이 없다.
더 이상 저택에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내일 바로 떠나면 되겠어.”
* * *
유진은 신분증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위조한 신분증도 아니고, 유라스 교황청의 통제를 받는 백지 신분증도 아니다. 이것은 키옐에서 ‘정식’으로 발급된 진짜 신분증으로, 유진이 스트라우트 2세에게 직접 부탁해서 받아낸 것이다.
-제발…… 황궁을 무턱대고 찾아오지 마시오. 아무리 그대가 과거의 영웅이랄 지라도 제국의 황제와 대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절차가 있는 법이잖소. 그리고…… 신분증? 설마 못된 짓을 하는 데 쓰기 위한 것이오?
-내가 하멜이고 얘가 세냐인데, 우리가 못된 짓을 왜 하니?
-그럼 왜 신분증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발급이나 해줘.
300년 전과는 달리 지금 시대에서는 사람들 대부분이 신분증을 가지고 있고 신분증이라는 것이 너무 보편화되어 있다. 그 신분증이 없으면 워프게이트도 쓸 수가 없고, 검문을 당할 때에 신분증을 제출하지 못하면 바로 구속되어 버린다.
이해는 간다. 워프게이트가 설치되면서 장거리의 이동이 굉장히 편리해졌고, 특히 왕국 간의 이동이 간단해졌다. 개인마다 신분증이 없다면 자국민과 외국인도 구분하지 못할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세상이다 보니 유명성은 불리한 점이 너무 많았다.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 3명은 유명해도 너무 유명했다. 그런 3명이 키옐을 떠나서 시무인에 입국하면, 곧장 왕가에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그 뒤에는?
감시를 당하거나, 간섭을 받거나.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사실은 아이리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아이리스가 아무리 오만할지라도, 세냐가 시무인에 입국한다면 모습을 감추려 할 것이다.
그것은 유진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아이리스가 생각 없이 해적질을 벌이는 중에 급습하는 것. 거기서 아이리스에게 도망칠 여지를 주지 않고 바로 목을 따버리는 것이다.
‘생각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겠지.’
[당연히 그렇겠죠.]
망토 안의 메르가 코웃음을 쳤다.
[유진 님이 신분을 감추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나하마에 갔을 때나, 사마르에 갔을 때나…… 헬무드에 갔을 때에도 그랬지.’
[저는 유진 님이 나하마와 사마르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헬무드에서…… 유진 님은 딱히 자신을 숨기지 않았잖아요? 신분을 어떻게 감추려고 시늉은 했지만, 수틀렸다 싶으면 바로, 아주 바로!]
유진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고, 나하마와 사마르에서도 마찬가지긴 했다. 크리스티나의 도움으로 백지 신분증을 쓴 적도 있었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베르무트의 잘못이지.’
[여기서 왜 베르무트 님을?]
‘그야, 라이언하트 가문이 너무 유명한 것은 베르무트가 제 가문을 너무 키웠기 때문이잖아. 응? 내가 라이언하트가 아니라 어디 뭐 흔해 빠진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신분을 감추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허…….]
‘그리고 말이야. 이 빌어먹을 회색 머리카락이랑 금색 눈동자도 너무 눈에 튀잖아. 누가 봐도 아~ 라이언하트구나! 하는 특징이라고.’
[네 뭐…… 그렇죠.]
‘그리고 또! 이 백염식이라는 것도 너무 특징이 확실해. 이렇다 보니 내가 숨기고 싶어도 잘 숨길 수가 없는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정체를 드러내게 되는 거야.’
[참 대단하시네용. 결국 유진 님은 억울하시다는 거죵?]
대놓고 비꼬는 말투……. 유진은 망토 안에 손을 넣어, 메르의 뺨을 꼬집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이번은…… 아주 은밀해야 하니까, 정체를 잘 감추도록 노력할 거라고.’
아이리스가 해적으로 세력을 빠르게 확장할 수 있던 것은, 시무인이 아이리스를 묵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가 타국의 무역선을 털어먹고, 통행료를 뜯어내고, 그러한 지저분한 돈들은 시무인 왕가에 뇌물로 흘러 들어갔다. 해적을 잡아야 하는 해군도 아이리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아먹었다.
시무인이 아이리스를 묵인한 것은 뇌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무인은 아이리스를 사용해 바다에 넘치는 해적들을 통제하고 싶어 했다. 또한 아이리스의 힘에도 욕심을 냈다. 시무인이 바랐던 것은 아이리스와 거래하고, 그녀의 힘을 국가 전력으로 삼는 것이었으리라.
물론 시무인은 바라는 대로 아이리스와 좋은 관계가 되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아이리스는 시무인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이제는 타국뿐만 아니라 시무인 소속의 상선과 무역선 등을 털어먹고 있으며, 해군과도 적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적대관계가 되었다고 해서, 시무인과 아이리스 사이에 줄이 완전히 끊어졌을까?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뇌물을 받아먹은 해군 윗선이나 관료들을 숙청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으레 뇌물이란 것은 어느 시대에서건 받고 싶어 하는 놈이 넘치게 마련이다. 그때 숙청이 이뤄졌을 지라도 지금은 또 다른 누군가가 아이리스에게 뇌물을 받아먹고 정보를 넘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똑같이 뇌물을 받아먹은 왕가를 숙청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
‘아이리스가 미리 알고서 숨어버리면 굉장히 골치가 아파져. 바다는 엄청나게 넓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최대한! 중요한 순간까지 정체를 감추고 있을 거다.’
[과연! 이번에는 그렇게 하신다는 거죠.]
‘그래, 쟤처럼 말이야.’
유진은 고개를 돌려 세냐를 힐긋 보았다.
저 대단한 마법사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이고서,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머리 모양을 바꿔보고 있었다…….
“너희도 바꿔야지!”
세냐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내가 알아봤는데, 시무인은 인종이 되게 다양하대.”
“그야 그렇겠죠. 온갖 국가의 자유기사와 용병들. 그리고 상인들이 드나드는 국가 아닙니까.”
“맞아! 그러니까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단 말이야. 어때? 크리스티나, 너는 피부가 희니까, 이번에는 아예 까맣게 바꿔 버리는 건?”
“네?”
“피부를 검게 바꾸면 누구도 널 성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 아냐?”
“세냐 님이 먼저 피부를 검게 바꾸신다면 저도 재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세냐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리면서 거울을 들어 보였다.
“……으흠. 머리카락은 검게 하고, 눈 색깔은 뭐로 할까?”
“그냥 그대로 두면 되지, 눈 색까지 바꿀 필요가 있나.”
“그 말은, 지금 내 눈 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말이야? 응?”
“어 그래.”
“진짜 영혼 없이 대답한다.”
세냐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서 다시 거울을 돌아보았다.
그냥 이대로 풀어 내릴까? 아니면 묶을까. 묶으면 어떤 식으로 묶을까? 세냐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마차는 멈춤 없이 달려, 키옐의 워프게이트에 도착했다.
“시엘 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길레이드에게 시엘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현재 시엘은 현재 시무인에서 이름을 떨치며 인기몰이 중이었다.
여러 기사와 용병들이 시무인에 찾아가서 수행하는 것은 그 나라에 존재하는 독특한 법 때문이다.
시무인을 찾아온 기사와 용병들은 자기 자신을 ‘투사(鬪士)’로 등록할 수 있다. 그렇게 투사 등록을 하고 나면, 시무인 전역에 존재하는 투기장에 출전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투기장은 음지에도 있겠지만, 양지의 투기장에서 벌어지는 결투는 서로를 죽이는 것이 아닌 쇼맨십 가득한 스포츠에 가깝다.
스포츠라고는 해도, 투기장의 결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승리하여 쌓은 승점은 곧 투사의 가치가 되고, 승점에 의해 ‘랭킹’이 결정된다.
그런 점은 마족의 서열을 연상시키지만, 마족의 격을 구분하는 서열과는 달리 랭킹은 어디까지나 투사들에게만 적용되며, 랭킹이 높을수록 여러 편의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타국의 기사와 용병들이 시무인에서 수행을 쌓는 것이다. 죽음을 크게 걱정할 필요 없이, 시무인에서 투사 등록을 하면 많은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 말이다.
시무인 십이걸은 투사 랭킹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12명을 말하는 것.
은사자 카르멘 라이언하트의 제자.
최연소 시무인 십이걸.
랭킹 7위.
백장미, 시엘 라이언하트.
“만나기는 해야겠지만…… 대놓고 찾아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백장미라.
‘혈사자가 낫군.’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시무인
남쪽 바다의 시무인은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섬나라다. 절반이 넘는 인구와 인프라는 중심의 셰도르 섬과 라루파 섬에 몰려 있으며, 당연히 왕성도 중심인 셰도르 섬에 위치해 있다.
워프게이트도 마찬가지다. 셰도르와 라루파를 제외한 다른 섬들에는 워프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워프게이트는 편리한 만큼 어마어마한 설치비용이 들고, 설치한 뒤에도 꾸준히 관리비용을 지불하며 유지보수를 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적은 다른 섬들에는 워프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시무인은 아직까지 해상무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었다. 워프게이트가 없는 섬들과 교역하기 위해서 배를 띄우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 외에 시무인에 속하지 않은 약소국들이나 문명화가 되지 않은 사마르와의 교역에도 배가 사용된다.
그 고생을 하느니 그냥 워프게이트를 조금 더 설치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설치가 되지 않는 것에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 오래된 섬나라는 워프게이트가 범용화되기 전부터 해상무역이 중심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쪽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자그마한 어선을 만드는 조선회사부터 군함이나 여객선을 만드는 조선회사가 뭉친 길드. 무역길드.
워프게이트가 설치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잃게 되는데, 대체 누가 그들을 책임지겠다 장담하며 워프게이트 설치를 추진하겠는가?
“어쩌면 유라스처럼 비밀스레 쓰이는 워프게이트가 있을 수도 있지.”
유진은 가이드북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신성제국인 유라스는 누구나 인정하는 선진국이지만, 수도를 제외하고서는 워프게이트가 거의 없다. 표면적으로만 그랬다. 트레치아 대성당의 지하에는 일반 신민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고위성직자들만이 사용하는 워프게이트가 숨겨져 있었다.
“유라스와 시무인은 사정이 다릅니다. 시무인이 수천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인 것은 맞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나라에서 제대로 된 영토라 할 것은 중심의 셰도르와 라루파 섬뿐이죠.”
크리스티나가 흔들리는 몸을 난간 쪽에 기울이며 말했다.
“유라스는 워낙 땅이 넓고, 곳곳에 신민들이 살고 있기에…… 으흠. 표면적으로는 워프게이트를 거부해도, 신앙을 전파하는 목적에서는 워프게이트를 비밀스레 활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너 아직 유라스를 꽤 좋아하는구나?”
“아뇨,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생각할 뿐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 나라를 좋아한 적이 없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정색하고서 말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무인과 유라스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는 겁니다. 이 나라의 재벌과 귀족, 왕족과 관료 같은 상위계층은, 굳이 셰도르와 라루파를 떠날 이유가 없다는…….”
“히약!”
크리스티나의 옆에 있던 라이미르아가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 라이미르아의 머리에는 뿔 같은 것은 달려 있지 않았다. ‘이상한 짓은 하지 말 것’. 그런 약속을 하고서 망토 밖에 나온 라이미르아는, 난간 밖으로 몸을 잔뜩 내밀고서 아래를 보고 있었다.
“저저, 저것 보아라. 엄청, 엄청 커다란 물고기가 있느니라.”
“이 멍청한 것. 저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돌고래라고 하는 거예요.”
머리를 검게 물들인 메르가 라이미르아와 엮은 팔짱을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메르의 말대로였다. 난간 바깥의 바다, 수면 아래에서 헤엄치는 돌고래들이 보였다.
“점프!”
“점프해!”
두 꼬맹이들이 꽥꽥 비명을 질러댔지만, 지금 이 배에 타고 있는 수십 명의 관광객들도 돌고래를 가리키며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어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세상이 참 좋아졌다 싶지 않아?”
어떻게 묶을까 긴 고민을 하였지만, 결국 세냐는 머리를 묶지 않았다. 그녀는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누르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지금 시대는 배도 엄청 빠르잖아. 옛날에 우리가 배를 타고 헬무드에 갔을 때에는 가는데 만 한 반년 걸렸지?”
“그쯤 걸렸지.”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난간에 몸을 기울였다.
마나 동력의 엔진을 사용한 유람선. 출발한 지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닌데, 어느새 셰도르 섬이 멀리 보였다.
“워프게이트를 썼으면 진즉에 도착했을 텐데 말이야.”
“기왕 온 거, 뱃놀이도 즐기고 그러면 좋잖아. 메르도 그렇고, 라이 쟤도 바다를 처음 본다는데.”
“라이는 또 뭐야? 또라이의 라이인가?”
“푸훗!”
유진의 중얼거림에 세냐가 웃음을 내뱉었다. 그 짧고 굵은 웃음에 크리스티나가 적잖게 당황하여 세냐와 유진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웃어야 하나? 유진을 위해서라도 웃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크리스티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안 웃어도 됩니다. 미친 것들…….]
아니스도 저 웃음의 감성만큼은 공감할 수가 없어서 혀를 찼다.
“라이미르아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것도 너무 길잖아. 그렇다고 미르라고 부르자니 메르랑 헷갈리고.”
“본녀는 라이라는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드니라.”
돌고래를 쫓던 라이미르아도 헤헤 웃으며 호응했다. 기왕 신분을 제대로 숨겨보기로 했으니, 호명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기는 했다.
“그래, 세라.”
“어, 유리.”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굉장히 성의 없는 이름 아닙니까? 글자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나름 흔한 이름들이지 않나?”
“특히 네 이름이 가장 흔하지, 크리스.”
원래 이름에서 두 글자를 뺐을 뿐. 크리스티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리와 세라, 크리스. 흔한 이름이기는 했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에 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무인에서 두 번째로 큰 섬, 라루파. 투사들의 성지이자, 시무인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관광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유진의 목적은 몰래 시무인에 들어와서 아이리스의 동향을 파악하고, 아이리스를 처죽이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시무인의 대공인 오르투스가 지원을 약속했지만ㅡ 대공이라는 양반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미리 이야기라도 전했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오르투스와의 만남이 성사되기도 전에 아이리스가 숨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경계해서다. 다행히 시엘은 1년 전부터 시무인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우선 시엘과 접촉한다면 아이리스의 동향을 파악하면서 오르투스와의 연결도 부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엘에게 무조건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유진도 시무인에 오기 전에, 라이언하트의 여러 연줄을 동원하여 정보는 파악해 두었다.
아이리스가 이끄는 광란의 해적단. 그 다크엘프는 고작 몇 년 사이에 남해의 크고 작은 해적단 수백 개를 일통하고, 이 바다에서도 가장 험하다는 솔가르타 해역을 거점으로 삼았다.
솔가르타 해역은 시무인에서도 해류가 미쳐 날뛰어 ‘악마의 바다’라고 불린다. 바다에서 수십 년을 살아 온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뛰어난 선원들도 솔가르타 해역에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뱃사람의 기술로 부족하다면 마법을 더하면 않나? 누구나 생각은 떠올릴 수 있겠지만, 솔가르타 해역은 지금까지 공략된 적이 없었다.
그곳이 ‘악마의 바다’라고 불리는 것은, 마법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자세히 파악되지 않았으나, 해역 깊은 곳에 매몰된 천연자원의 탓이 아닐까하는 추측이 있다.
“내가 듣기에는 영 개소리지만 말이야.”
세냐는 마차의 창밖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라루파에 도착하자마자 탄 마차는, 이 섬에서 가장 커다란 콜로세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무식한 것들은 대량의 마나스톤이 매몰되어 있고, 그 돌덩이들이 내뿜는 마나가 마법을 방해한다고들 하는데……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 그 외에도 여러 가설이 있기는 하지. 마법을 방해하는 천연자원이야 드물기는 해도 없지는 않으니,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닌가 하는 개소리들.”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말이야, 마법을 제한하는 범위가 굉장히 좁거든? 어디 보자……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아드레이트인데, 그 지랄 맞게 넓은 해역에 봉마 역장을 펼치려면 바닷물만큼 많아야 할걸.”
“암초는 많다더라.”
“그래, 그 해역 자체가 지랄 맞은 이유가 해역에 섬들이 엄청 많아서라며.”
솔가르타 해역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해적들의 거점이다.
“그쪽에서 왜 마법이 잘 안 써지냐, 그건 내가 직접 가봐야 확실하겠지만…… 흠, 떠도는 가설 중에서 내가 그럴듯하다 싶은 것은 이거야. 솔가르타 해역이 드래곤의 레어였다는 것.”
바다 깊은 곳. 혹은 섬과 이어진 해저동굴. 어떤 드래곤이 솔가르타 해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고, 불필요한 접근을 가로막기 위해 해류를 엉클어놓고 마법을 방해하는 역장을 펼쳤다는 가설.
“아리아르텔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드래곤이 수면기에 들어갔다고 했지만, 드래곤이 잠들기 전에 펼친 마법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냐. 드래곤이라면 레어에 어마어마한 보물을 쌓아놨을 거고, 당연히 자신이 잠에 빠진 동안 보물이 그대로 있기를 바랐겠지.”
“그 해역에서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데, 마안은 쓸 수 있는 겁니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해적단이 저 악마의 바다를 거점으로 삼는데 성공한 이유. 어둠과 어둠을 이은 통로를 활용해 미쳐 날뛰는 해류를 통째로 뛰어넘어 버리게 해주는, 아이리스가 가진 암전의 마안 때문이다.
“마안은 마법과 달라. 마나를 쓰지도 않고…… 마족 중에서도 드물게 타고나는 권능이지.”
유진은 눈살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300년 전의 전쟁에서도 마안을 쓰는 마족은 많아봐야 수십 명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아이리스가 가진 암전의 마안과, 가비드가 가진 위신의 마안은 굉장히 특별하지. 그건 무려 마왕에게 ‘직접’ 받은 권능이니 말이야.”
단순히 격으로만 따지자면 저 2개의 마안이 환상의 마안보다 격이 높다. 환상의 마안이 보여주는 것은 이름 그대로 환상일 뿐, 현실을 개변하지는 않으니까.
단지…… 그 마안은 몽마의 여왕인 ‘누아르 제벨라’와 너무나도 잘 맞았다. 거기에 누아르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격을 키우고, 환상의 마안을 극한까지 단련해냈다.
ㅡ와아아아!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환호성이 창밖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뭐야?”
유진도 환호성에 놀라 창밖을 보았다. 차도 저편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양팔을 흔들며 열광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탑. 꼭대기에서 영상이 마법으로 투영되고 있었다. 헬무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마법 스크린을 흉내 낸 것일까? 하지만 저 탑 꼭대기의 스크린은 헬무드의 것과 비교하면 조악했고, 숫자도 저것 하나뿐이었다.
“손님들도 시합을 보러 가는 것 아닙니까?”
말을 이끌던 마부가 껄껄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오프닝매치가 시작한 겁니다. 뭐 저 매치업은 그리 볼 가치가 없으니까,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마도르 콜로세움은 예고한 경기시간은 결코 조정하지 않으니까요.”
“볼 가치가 없는 매치업인데 뭐 저리 열광들 하는 겁니까?”
“아…… 손님들은 마차에만 있었을 테니 못 보셨군요. 방금 저 화면에 오늘의 주인공이 잡혔습니다.”
마부는 창밖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유진을 돌아보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씩 웃었다.
“백장미, 시엘 라이언하트.”
그 상쾌한 미소에 유진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거리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화면에 시엘의 얼굴이 잡혔다는 것만으로 열광하고 있다는 건가?
“인기가 엄청 많은가 봅니다?”
“하하하! 뭐 그리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손님들도 2등급 좌석을 예약하고 보러 가는 중 아닙니까. 이야, 그 구하기도 힘들고 비싼 티켓을…….”
“음…… 운이 좋았지요.”
당연히 운은 아니다. 비싼 돈을 들여서 구매한 티켓이다.
사실 더 비싸고 좋은 티켓도 구매는 할 수 있겠지만, 이 도시에서 평범한 관광객이 구할 수 있는 제일 좋은 티켓은 2등급이 한계였다. 1등급 티켓만 해도 구매하려면 작위가 필요했고, VIP 티켓은 이름처럼 VIP만 구매가 가능했다.
“사실 뭐, 당연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21살이라는 파릇파릇한 나이에 얼굴도 예쁘고…… 그리고 오늘 매치업은 백장미에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렇습니까?”
“예. 오늘 메인 매치에서 백장미의 상대는, 똑같이 십이걸에 이름을 올린 기사입니다. 백장미보다 랭킹이 낮은 10위지만, 우습게 볼 상대는 아니지요.”
랭킹 10위. 이명은 철벽의 기사.
“백장미보다 승점이 낮기는 합니다만, 둘이 대결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백장미가 이번 대결에서 이긴다면, 승점이 충족되어 상위랭킹에 대결을 제안할 수가 있죠. 그리고 철벽도 굉장히 필사적일 겁니다. 이번 대결에서 패배하면 승점이 왕창 깎여서 랭킹을 유지 못 할 테니까요.”
유진은 마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크린을 주시했다.
볼 가치가 없는 매치업…… 이라고 했지만, 정말로 그렇지는 않았다. 듣기를 랭킹 100위권에 간당간당한 투사들의 대결이었는데, 의외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상대를 죽여선 안 된다.’
그런 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오가는 공방이 살벌했다. 시무인 콜로세움의 결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방향은 바로 ‘재미’다. 관중들을 열광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승점이 높아도 인기를 끌 수 없다. 인기 없는 투사는 스폰서도 붙지 않고, 티켓 파워도 없기에 심한 경우에는 콜로세움에 서지도 못한다.
그렇다 보니 투사들은 생과 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거듭된 공방에서 점점 상처가 늘고, 피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왜 시엘 라이언하트가 백장미라 불리는지. 손님은 아십니까?”
저 멀리 마도르 콜로세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
시엘에 대해서는 유진도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최근 일 년 동안 수십 번의 경기를 치러 랭킹 7위가 되었다. 전적은 무려 34승 0패.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경기에서 시엘이 단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이 컸구만.’
나이트마치에 가던 도중, 누아르 제벨라의 습격을 받았다. 함께 있던 시엘과 시안은, 누아르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둘이 그 사실을 얼마나 분해했는지.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과 굴욕감. 그 날의 경험은 쌍둥이에게서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시안은, 대수림에서 헥토르를 쓰러트리는 것으로 변화의 결실을 맺었다.
-보지 마, 가까이 오지도 마.
시엘도 그런 것일까. 유진은 눈밭에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시엘의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던 말을 떠올렸다.
-난 또다시 이런 일에 휘말리기 싫어. 네게 방해가 되는 것도 싫고.
-바보가 아니니까 주제 파악을 하고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왜?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불쌍하단 생각이 들고 그래? 만약 그런 거라면 진짜 싫어. 난 네게 동정 따위 받고 싶지 않아.
-부끄럽고 민망해서 더 이상 너랑 같이 있기 싫어.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평생 동안 미워할 거야.
그 말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 * *
와아아아!
마도르 콜로세움의 2등급 좌석. 그래도 나름 급이 높은 좌석이라, 시합을 관람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시합이 시작하지 않은 지금, 당장 보이는 것은ㅡ 백장미의 물결이었다.
“백장미!”
“시엘 라이언하트!”
사방에서 외쳐대는 이름. 시엘의 팬들은 새하얀 옷을 똑같이 맞춰 입고, 시엘의 이명인 새하얀 장미의 꽃잎을 뿌려댔다.
경기장에 보다 가깝고 편히 볼 수 있는 윗등급의 좌석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심지어 수십 명밖에 안 되는 VIP들 중에서도 새하얀 장미꽃을 든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오르투스는 없군.’
만약 오르투스가 경기를 보러 왔다면 어떻게 접촉을 시도했을 텐데. 유진은 그런 아쉬움을 느끼면서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나는 그 시엘 아가씨를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어떤 사람이야?”
세냐는 메르가 경기를 보기 편하도록 살짝 위로 들어주었다.
“만나보면 아실 겁니다.”
크리스티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라이미르아를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덕분에 사이에 낀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 큰 여자 둘에 어린아이가 둘. 가운데에 남자 하나…… 대체 이게 다른 사람의 눈에, 특히 카르멘과 시엘의 눈에 어찌 비칠지가 두려웠다…….
“대체 뭐야? 메르도 말 안 해주고, 크리스 너도 말 안 해주고. 왜 그러는 거야?”
“시안 님은 보셨을 것 아닙니까?”
“당연히 봤지, 애기 같고 귀엽더라.”
“쌍둥이니까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성격은…… 으흠, 아주 귀엽죠.”
크리스티나가 시엘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는 것은, 솔직히 시엘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엘이 유진에 대해 품은 감정. 그것이 명백하다고는 판단할 수 없어서, 크리스티나는 아예 언급을 안 해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저기 나오네.”
유진은 손가락을 들어 경기장을 가리켰다.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시엘이 아닌 디자이라였다.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온 디자이라가 손을 번쩍 들자, 문 안쪽에서 새하얀 카펫이 도르르 굴러 나왔다. 그렇게 이어진 새하얀 길이 경기장의 중심까지 이어졌다.
디지이라는 구김 하나 없이 말끔히 펴진 카펫을 확인한 뒤, 우아한 자세로 몸을 돌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ㅡ저벅. 열린 문 안쪽에서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아!
고막이 아플 정도로 커다란 환호성. 관중들이 흔들던 새하얀 장미꽃들이 일제히 경기장으로 던져졌다. 이미 꽃잎이 소복하게 쌓인 경기장에, 큼직한 장미꽃들이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시합은 저거 치우고 하겠지?”
발 디딜 틈 없이 꽃들이 쌓이는 경기장을 보면서 세냐가 중얼거렸다. 물론 저 꽃잎과 장미들은 시합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경기장 구석의 마법사들에 의해 시합 시작 전에 말끔히 치워질 것이다.
유진은 손을 뻗어, 펑펑 쏟아져 내리는 장미 하나를 낚아챘다.
시엘이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흑사자 기사단의 제복과는 다른 새하얀 제복을 입었지만, 왼쪽 가슴에는 똑같이 라이언하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시엘은 환호성에 호응하여 방긋방긋 웃으며 관중석에 손을 흔들며 카펫 위를 걸었다.
“허.”
유진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쟤가 저렇게 컸나 싶었다.
시무인
랭킹 10위의 철벽의 기사.
그는 이명과 딱 맞아떨어지는 모습이었다. 2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구에 두꺼운 갑옷까지 입으니, 과장 좀 보태어서 시엘보다 3배는 커 보였다.
거기에 몸 전체를 가릴 법한 커다란 방패를 들고, 반대쪽 손에는 커다란 창까지 들었다. 방패로 막고, 창으로 찌르고. 간단하지만 까다로운 전법. 그는 철벽의 기사라는 이름처럼, 작정하고 방패 뒤에 숨어서 시엘이 다가오는 것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철벽은 아니었다. 시합 자체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엘의 얇은 검이 내뿜는 검강은 송곳처럼 길고 날카로웠고, 거기에 현란한 검술까지 더해지니 단어 그대로 상대를 ‘해체’해 버렸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찰나. 그사이에 움직인 수십 번의 참격이 두꺼운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렸다. 시작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시엘의 상대는 졸지에 투구만 쓴 속옷 차림이 되었다.
“백장미!”
“시엘 라이언하트!”
심판이 시엘의 승리를 선언했다. 압도적인 결과. 다가온 디자이라가 시엘에게 칼집을 건네주었다.
시엘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검을 칼집에 넣고,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시엘이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은 상대에게서 등을 돌리자, 건너편에서 대기하던 디자이라가 닫혔던 문을 열었다.
다시 하얀색 카페트가 굴러 나왔다. 시엘은 새하얀 길이 발끝 앞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뒤, 관중석을 향해 방긋방긋 웃음을 날리며 퇴장했다.
“얼마나 걸렸어?”
“8분하고 43초쯤 걸렸네요.”
디자이라가 시엘의 뒤를 따르면서 대답해 주었다.
“결판나고 인사하는 시간까지 더하면 13분쯤?”
“나름 의미 있는 시합이었는데. 서비스로 10분은 채워서 손이라도 흔들 걸 그랬나?”
관중들을 향해서는 쭉 미소를 유지했지만, 지금 시엘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에 목표로 잡았던 시간은 10분. 여유롭게 쓰러트리기는 했지만…… 솔직히 시합의 내용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어만 굳히는 상대를 일방적으로 베어내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카르멘 님은?”
“뻔한 시합은 볼 가치가 없다고 안 오셨죠.”
“볼 가치가 없는 시합이었긴 해.”
“다음 시합은 조금 다르겠죠. 승점도 채웠으니 상위랭킹에 도전할 수 있잖아요? 설마 도전할 생각이 없으신 건가요?”
디자이라는 조금 앞서 걷는 시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에 붙은 장미의 잎을 털어주었다. 시엘은 자신보다 키가 큰 디자이라를 올려다보면서 샐쭉 웃었다.
“6위까지가 딱 절반이잖아. 거기부터가 십이걸의 ‘진짜’라고들 하던데, 여기까지 왔으니 도전은 해봐야지.”
꼭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설령 이길 지라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상처 하나 없이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시엘은 그런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시무인에 온 것은 수행을 위해서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35번을 싸웠고, 모두 다 상처 없이 승리했다.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상처 없이 이기기 위해서 시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검을 휘둘렀고, 시합이 잡히면 철저하게 상대를 조사했다.
디자이라는 솔직히, 그런 시엘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1살 많을 뿐인데…… 시엘의 실력은 디자이라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곳까지 가 있었다.
‘나이트마치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벌써 몇 년 동안 종자로서 시엘을 보아왔다. 본래부터 시엘은 수행을 게을리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최근 1년은 아예 사람이 바뀌어 버린 것처럼 검에 매달렸다. 백염식의 성취 자체는 여전히 4성에 머물러 있지만, 검술만큼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성장했다.
“아, 그리고 시엘 님. 레베론 후작이 꼭 한 번 식사라도 하자면서 종자를 보내왔는데요.”
“내가 왜 그 늙은이랑 밥을 먹어? 하는 말이야 뻔할 텐데 말이야, 스폰서를 해줄 테니 자기 소유의 투기장에서도 한번 시합해 달라는 것이겠지.”
“카미로 투기장도 제법 유서 깊은 곳이잖아요? 시합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인맥 늘릴 생각을 한다면 그래줄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내가 인맥 더 늘려서 뭐해? 아무리 길어야 내년 여름쯤에는 떠날 사람인데.”
올해도 벌써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 세웠던 계획으로는 22살의 생일 전에 시무인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시엘은 내심 아쉬움을 느끼며 혀를 찼다.
‘4월…… 그때까지 5위 안에 들 수 있을까.’
라이언하트 본가의 편지는 받았다. 얼마 전, 오빠인 시안과 유진이 돌아왔다고 했다. 세상에 소문은 퍼지지 않았지만ㅡ 사마르에서 원주민 부족 간의 전쟁이 있었고, 유진과 시안이 그 전쟁에 참가했단다.
가문의 배신자인 헥토르 라이언하트가 그 전쟁에서 시안의 손에 죽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시엘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지만, 이어진 편지의 내용은 앞서 적힌 내용을 모두 잊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유진이 마룡 라이자키아를 죽였다.
그 소식이 시엘의 의욕을 더욱 고무시켰다.
최연소 십이걸. 랭킹 7위. 충분한 영예라고 생각했는데, 시안과 유진을 생각하면 부족해도 한참이나 부족했다. 더 높이. 가능하다면 랭킹 5위 안까지는 들고 싶다…….
“……흥.”
시엘은 생각에서 벗어나서 시선을 살짝 위로 올렸다. 바보 같은 디자이라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지, 마주친 시선을 껌뻑거리다가 벙긋 웃어 보였다.
저 멍청한 웃음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엘은 활짝 핀 손바닥으로 디자이라의 엉덩이를 철썩 후려쳤다.
“끼얏! 뭐, 뭐야? 갑자기 왜 때려요?”
“멍청한 디자이라! 내가 널 왜 때린 건지도 몰라?”
“시엘 님이 절 후려친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들으나 마나 별것도 아닌 이유로 후려친 거겠죠. 가령 제가 내려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존경한다고 해서 말대꾸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디자이라는 시엘의 구박이 익숙했기에,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눈에 힘을 주고서 시엘을 쏘아보았다.
“한심한 것!”
시엘은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직접 깨닫지 못했다면 굳이 설명해 줄 필요도 없지. 시엘은 디자이라의 엉덩이를 한 대 더 찰싹 때려주었다.
“나는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갈 테니, 너는 먼저 가도록 해.”
“네? 들르기는 어디를 들러요?”
“내가 어디를 가건 내 자유야. 게다가 이후 일정도 없잖아!”
“레베론 후작이 꼭 밥 한 끼 하자고 사정을 했다니까요?”
“그 대답은 이미 했잖아! 안 먹어, 정 밥을 먹어야 한다면 나 말고 네가 대신 먹어주도록 해.”
“저도 그 음흉한 늙은이랑 밥 먹기 싫어요. 그 늙은이는 가끔 마주칠 때마다 저를 지저분한 눈으로 쳐다본단 말이에요.”
“그건 네 엉덩이가 쓸데없이 크기 때문이야. 끼니마다 밥을 몇 그릇씩 처먹으니 군살이 붙는 거라고.”
“군살이라니……! 제 몸에 쓸데없는 살은 없어요. 전부 다 근육이라고요.”
디자이라는 진심으로 억울해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물론 시엘은 그런 디자이라의 마음을 알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다시 한번 디자이라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빨리 가기나 해!”
“정말……!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건지 말이나 좀 해주든가. 맨날 때리기만 하고…….”
디자이라는 구시렁거리면서 시엘을 지나쳤다. 커다란 카페트를 들고서 뒤를 따르던 시종들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시엘의 눈치를 살폈다.
“뭐 해? 너희도 가야지.”
“네, 시엘 님.”
시종들이 총총걸음으로 디자이라의 뒤를 따라갔다.
시엘은 그들이 복도 끝의 문을 열어 사라지고,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잠자코 서서 기다렸다.
“흥.”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허리춤의 검을 어루만졌다.
“나 혼자야. 이걸로 부족해?”
시엘은 바로 검을 뽑지 않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면서 말했다. 시종들은 물론이고 멍청한 디자이라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시엘의 예리하게 날이 선 감각이 이 공간에 은신하고 있는 기척을 간파한 것이다.
드물지만 몇 번 있던 일이기는 했다. 이 나라에서 시엘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유명인이라, 그런 시엘의 명성을 노리는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
승점이 한참 부족한 중간계층의 투사들. 그들 중에서도 질이 나쁜 놈들은, 비겁한 암습을 시도하면서까지 시엘을 쓰러트리는 것을 원했다. 정식 절차를 밟지 않은 결투일지라도 그 ‘시엘 라이언하트’에게서 승리했다는 소문을 욕심내는 것이다.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패배한 상대가 분을 풀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제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암살자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예전에는 아직 시합을 벌이지도 않은 상위 랭킹의 투사가, 언젠가 시엘과 시합하는 것이 두려워 암살자를 보낸 적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시도가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엘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누굴까? 철벽의 기사가 보낸 암살자? 아니면 단순히 이름값을 올리기에 눈이 먼 얼간이?
‘어쩌면 내게 들이대고 까인 귀족 나부랭이일 수도 있지.’
이 나라에는 시엘을 지지하는 팬들도 많지만, 그만큼 적도 많았다.
특히 어떻게든 시엘과 염문을 날리고 싶어 하는 귀족과 투사들. 당연히 시엘은 그럴 마음이 없었기에, 언제 한 번 차나 한잔하자는 제안이나 파티에서 춤 한 번 추자고 들이대는 것들은 칼처럼 쳐내 왔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셈이야?”
시엘은 눈을 찡그리면서 검을 뽑았다.
누군가가 은신해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 정확한 위치가 잡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시엘을 조금 긴장시켰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상대는 뛰어난 암살자이거나 마법사인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잘됐어. 전투의 실감이 덜하다 싶었으니.’
디자이라와 시종들을 먼저 보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백염식을 운용했다.
화륵! 시엘의 몸을 감싼 새하얀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가 휙 날아왔다.
시엘은 즉시 반응했다. 날아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
정확하게 검을 휘둘렀다. 속도와 힘의 배분도 완벽했다. 그럴 텐데, 베지 못하고 가로막혀 버렸다.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은은한 장미의 향기가 시엘의 코를 간질였다.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향기.
시엘에게 ‘백장미’라는 이명이 붙은 것은, 다분히 시엘이 의도한 바였다. 그것을 민망하고 부끄럽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처음 투사가 되어 콜로세움에 섰을 때. 시엘은 보란 듯이 새하얀 제복을 입고서 머리에는 백장미를 꽂고 나왔다. 디자이라를 시켜 백장미의 꽃잎을 뿌리게 했다.
장미, 그중에서도 백장미를 선택한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피가 난무하는 콜로세움에서 붉은색은 너무 흔했다. 그 한복판에서 순결을 의미하는 백장미로 선다면 쉽사리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엘은 자기 자신에게 ‘백장미’라는 이명을 부여했다.
시무인의 랭킹 시스템의 본질.
왜 이 나라의 투사들이 이름 앞에 이명을 붙이고 다니는가. 주목받기 위해서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유명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엘은 그 유명세를 만들기 위해서는 관중들이 쉽게 몰입하고 연호할 수 있는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이해했다.
그건 시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호감을 사고 귀여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 따위, 시엘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던 것이었다.
“어휴 놀래라.”
잘 알아 익숙하고, 잘해왔지만ㅡ 모두에게서 원하던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정작 시엘은 자신이 진심으로 갈구하던 반응은 제대로 얻어본 적이 없었다.
앙큼한 꼬마였을 때도, 조금 더 나이를 먹어 솔직하게 부끄러움을 느끼던 시절에도, 그마저 지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게 된 시절에도.
“표정이 왜 그래?”
유진 라이언하트.
본가의 양자. 어려서부터 시엘과 남매가 된, 멀고 먼 친척.
어렸을 때는 유진과 남매가 되었다는 것이 마냥 좋았다. 내가 생일이 빠르니까 너보다 누나라며, 그렇게 으스댄 적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아마, 사춘기를 맞이했을 때에는 그것이 싫었다. 왜 싫었는지, 그때의 시엘은 스스로도 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냥…… 싫었다.
지금은 그때 ‘왜’ 싫었던 것인지를 이해하고 있다. 뭘, 새삼스레. 그 감정의 본질은 ‘지금’이 아니라 이미 몇 년 전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너…….”
그래서 지금 시엘은 표정의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오늘 이렇게 만나리란 준비는 하지 못했다. 준비는커녕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엘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크게 벌렸던 입술은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많이 놀랐나 보네.”
유진은 히죽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손가락이 내려감에 따라, 손끝에 막혀 있던 시엘의 검도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리 그래도 대뜸 칼을 휘두르면 어떡해? 기껏 준비한 선물이 베일 뻔했잖아.”
선물이라고 해봐야 콜로세움에서 펑펑 내리던 장미꽃을 주워온 것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그럴듯한 선물을 준비할 걸 그랬나? 유진은 뒤늦은 후회를 느끼며, 손에 들고 있던 장미를 시엘에게 내밀었다.
“자.”
여전히 시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입만 헤 벌리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왠지 장난을 치고 싶었다. 유진은 히죽 웃으면서 장미의 꽃송이를 시엘의 입에 가까이 들이밀었다.
“우풋!”
그제야 시엘은 정신을 차리고서 푸푸 숨을 뿜었다. 떨그렁! 제대로 쥐지도 못한 검이 땅에 떨어졌다.
기겁하며 뒤로 물러선 시엘은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서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 너너, 너…….”
“한 번만 말해. 아무리 반가워도 그렇지, 반응이 너무 격한 거 아니야? 시엘 라이언하트.”
“너……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네…… 네가 본가에 있다는 편지를 사흘 전에 받았는데…….”
“사흘 전에 라이언하트에 있었다고 해서 오늘도 거기 있으란 법은 없잖아. 내 성격 몰라?”
“잘…… 알지. 네가 무슨 일만 있으면 본가를 떠나서 여기저기 쏘다닌다는 거.”
시엘은 뒤늦게 감정을 수습하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뜻대로 잘되지는 않았다. 어떻게 표정은 정리했는데, 놀란 심장이 콩콩거리며 뛰었다.
“설마 날 보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건…….”
“그럴 리가 없지. 네가 절대로 그런 인간이 못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아니까.”
시엘은 자학적으로 웃으면서 벽에서 등을 떼었다. 그녀는 얼굴 앞까지 다가왔던 장미를 손으로 받아주며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너무 놀라서 이제야 눈치챘는데, 유진의 모습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봐야 잿빛이던 머리색이 갈색이 되고, 금색 눈동자가 갈색이 되었을 뿐.
고작 그 정도의 변화일 뿐이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에 깨닫고서 경악한 것이다.
왜 머리색과 눈의 색을 바꾼 것일까. 시엘을 보기 위해 온 것이라면 저런 일은 할 필요가 없었을 터.
놀라게 하기 위해? 그럴 리가. 시엘은 유진을 알아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녀는 가슴 한구석에서 조금의 씁쓸함을 느꼈지만, 고작 그딴 것에 감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마워.”
시엘은 방긋 웃으면서 장미를 머리에 꽂았다. 그리고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갔다.
“네가 무슨 이유로 시무인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내 경기를 보러 온 거잖아?”
그거면 충분했다. 시엘은 양팔을 활짝 벌리더니 대뜸 유진을 끌어안았다.
“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오랜만이야, 유진.”
남매니까 끌어안아도 괜찮다.
시엘은 여전히 그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 핑계로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은ㅡ 조금은 좋았다.
포옹은 짧게 끝났다. 시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방금 전까지 시합을 치르고 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엘은 혹시나 싶은 생각에 어깨를 움찔 떨고서 유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혹시 땀 냄새나?”
“안 나는데?”
솔직한 대답이었다. 지금 시엘에게 나는 냄새라고는 은은한 장미향이 전부였다. 시엘은 집중해서 유진의 표정을 살핀 뒤,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흠, 일단…… 여기 계속 서서 대화할 건 아니잖아? 어떻게 할래, 같이 갈까?”
“일행이 따로 있어.”
일행. 시엘은 크리스티나 성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역시 그렇겠지. 시엘은 두 눈을 얇게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어디 있는데?”
“아직 관중석에 있겠지.”
“그럼…… 좋아.”
시엘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두꺼운 수첩과 펜을 꺼냈다.
저 딱 맞는 바지에 들어가기는 조금 부피가 큰 물건들이었다. 슬쩍 본 수첩은 수백 번은 족히 펼쳤다 닫은 것처럼 헤져 있었다.
“뭐야 그건? 일기장?”
“일기도 쓰고…… 다른 여러 가지도 적어. 왜? 보고 싶어?”
“봤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이상한 건 안 적혀 있으니까 괜한 생각 마.”
간단한 일기. 시합 상대에 대한 정보. 그런 것들을 적어 놓은 수첩이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벽에 등을 기대었다.
“난 또. 시라도 적은 줄 알았지.”
“참나. 내가 그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해 보여?”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수첩에 글자를 휘갈겨 쓰더니, 종이를 부욱 찢어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머무르는 숙소야. 경비가 있기는 한데, 네 실력이라면 아무 문제 없을 것 아냐? 그러니까 알아서 찾아와.”
“문이라도 열어놓지?”
“내가 정말 그러기를 바라? 나는 여기저기서 참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단 말이야. 내가 안 하던 짓을 해버리면, 저택을 감시하던 파파라치들이 신문에다가 온갖 소설을 써놓을걸. 그래도 괜찮아?”
어려서부터 눈치가 없다고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유진부터가 변장을 하고 있는 데다 정면에서 만나러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앞으로의 만남도 은밀한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럼 오늘 밤에 갈게.”
유진은 건네받은 종이를 품 안에 넣으며 대답했다. 오늘 밤. 시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빙글 몸을 돌렸다.
“이따가 봐.”
꼭 오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말까지 해버리면 너무 질척거리는 것 같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시엘은 유진에게는 ‘도도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시엘은 더 이상 유진을 붙잡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시무인
메모에 적힌 주소는 라루파 섬에서도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부촌이었다. 사람이 넘쳐 북적거리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 지역의 거리는 품위 있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표면적으로만 그랬다. 콜로세움이 많은 라루파 섬의 부촌에는 투사들이 많이 살고 귀족들의 별장도 많다. 그렇다 보니 시엘이 경고했던 파파라치들이 거리 곳곳에서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한 시선은 유진 일행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비가 삼엄할 대공의 저택에 잠입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거리의 어둠에 숨죽인 파파라치의 시선 따위, 세냐가 나설 것도 없이 유진의 마법으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의외로 시엘이 머무르는 저택은 커다랗지는 않았다. 유진의 고향, 기돌에서 살던 저택과 비슷한 크기였다.
‘하긴. 쭉 사는 것도 아니고, 식구라고 해봐야 카르멘 님과 디지이라뿐이니까.’
3명이 살기에는 과분한 넓이기는 했다. 경비는 있지만 기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유진 일행은 경비들의 이목에서 간단하게 벗어나 담장을 넘었다.
정원이랄 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평평히 밟힌 연무장이 보였다. 슬쩍 본 것만으로도 저 연무장이 얼마나 많이, 자주 쓰였는지 알 수 있었다.
오후의 시합에서 보았던 시엘의 모습. 물 흐르듯 이어진 경쾌한 스텝. 유진은 연무장에 남은 발자국과 시엘의 모습을 대비해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택은 3층이었다. 힐긋 올려다본 창문은 모두가 닫혀 있었고 커튼까지 쳐져 있었다. 뒷문도 잠겨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유진은 잠긴 문고리에 손을 얹고서 머릿속으로 영창을 외웠다.
잠긴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유진이 마법을 능숙하게 쓰는 모습에 세냐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직접 마법을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마법이란 결국 세냐에게서 비롯된 것 아닌가? 그러니 세냐는 유진의 마법에 흐뭇함을 느낄 자격이 있었다.
“왔군.”
저택의 3층. 널찍한 소파의, 굳이 정중앙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던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카르멘은 미리 세팅을 마친 테이블 위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잘 관리된 골동품을 연상시키는 재떨이. 각도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세하게 조정했다.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재떨이의 옆에 내려놓았다. 꺼내놓은 시가는 먼저 입에 물어둘까 싶었지만, 벌써부터 입술로 떫은맛을 느끼기 싫어 재떨이에 걸쳐놓았다. 대신에 뚜껑을 아직 열지 않은 위스키를 손으로 잡아, 소파의 등걸이에 팔을 걸쳤다.
시엘과 디자이라는 카르멘의 저런 꼴값이 익숙했다. 그래서 아무 지적도 하지 않고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둘은 아직까지 문 너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카르멘 님이셔.’
간혹 저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긴 하지만, 시엘과 디자이라는 카르멘을 존경했다. 존경할 수밖에 없는 위인이기는 했다.
“혈사자.”
문이 열리는 순간에 맞춰 카르멘이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유진은 저 말을 듣고서 우뚝 몸이 굳어버렸다.
“드래곤 슬레이어.”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카르멘은 재떨이에 걸친 시가를 입에 물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이제는 카르멘의 표정이 굳을 차례였다.
유진의 뒤에 선 여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야 이전에도 몇 번을 보아 익숙하고 반가웠지만, 저 검은 머리의 여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왠지 처음 보는 것 같지 않은…… 어디서 봤더라?
“메르?”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 느낌.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시엘이었다. 시엘은 의아하단 표정을 하고서 세냐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머리카락 색이 다르기는 하지만, 저 녹색 눈동자와 얼굴은 메르와 굉장히 닮았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메르가 그대로 나이를 먹어 성장한 것만 같은…….
“현명한…… 세냐 님?”
진실에 도달한 시엘이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자이라는 여기서 왜 현명한 세냐의 이름이 나오는지 이해는 못 했지만, 시엘이 놀라서 일어서니까 함께 일어섰다.
카르멘도 입에 물고 있던 시가는 일단 내려놓았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세냐에게 향했다.
“훗…….”
세냐는 자신에게 향하는 경외를 즐겼다. 그녀는 우아한 자세로 뒷머리를 손으로 살짝 털었다. 그러자 검은 머리카락이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그래, 바로 나야. 현명한 세냐 메르데인.”
세냐는 사뿐사뿐 걸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저걸 보면 참,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하멜도 할 수만 있다면 저렇게 자신을 떠벌리며 으스대고 꼴값을 떨었을 겁니다.]
‘유진 님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결한 분이시죠.’
[음…… 예…….]
고결하다니. 반박할 말이 수십 개는 족히 떠올랐으나, 아니스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나 어려운 사람 아니까 편히들 앉아. 너희는 뒤에서 뭐 해? 나의 후계자 유진, 어서 옆에 앉도록.”
“예에, 세냐 님.”
일어서 있던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의 재떨이와 시가. 아직 손에 쥐고 있는 위스키…… 그 변함없는 모습이 오히려 유진을 안도시켰다.
“오랜만입니다.”
“혈사자, 드래곤 슬레이어.”
“그 말은 아까도 하셨는데…….”
“몇 번을 칭송해도 부족한 말이지. 기억해 두어라, 유진. 네 모든 이명은 나, 은사자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지어준 것이다.”
카르멘은 그 사실이 진심으로 자랑스러운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카르멘 라이언하트.’
세냐는 카르멘을 살펴보았다.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연배로 따지면 가주 길레이드의 고모라고 들었다.
‘그래 봤자 나보다 200살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실. 세냐는 즉시 생각을 멈추고서, 테이블의 시가에 주목했다.
“펴도 괜찮아. 나는 아무 신경도 안 써.”
“네.”
“말 놔도 괜찮아.”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카르멘은 멜키스보다 상식이 있었다. 카르멘은 점잖게 거절하고서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퐁.
라이터의 뚜껑이 열리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뚜껑이 닫혔다.
퐁.
다시 뚜껑이 열렸다.
“?”
유진과 크리스티나야 카르멘이 저러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 익숙했지만, 세냐는 아니었다. 세냐는 카르멘이 왜 저러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라이터에 기름이 없나? 세냐는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고, 손가락을 들어 불꽃을 일으켰다. 화륵! 카르멘의 입에 물린 시가에 불이 붙었다.
“푸읍.”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는 항상 시가를 물지만, 시가에 불을 붙인 적은 아주 어렸을 때 한 번뿐이었다. 그때 뭣도 모르고 연기를 깊이 빨았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시가에 불을 붙인 적이 없었다.
자연스러운 호흡을 통해 입안을 채우는 연기. 카르멘은 기겁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내뿜는 숨과 함께 시가를 뱉어버렸다.
“아 뜨거!”
카르멘의 옆에 앉아 있던 디자이라는 시가를 피하지 못했다. 그녀는 불에 덴 허벅지를 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카르멘은 그 불상사를 신경 쓰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시엘은 화들짝 놀라서 컵에 물을 따라 카르멘에게 건넸다.
“?”
짧은 순간에 일어난 소동은 세냐의 이해를 벗어나 있었다.
세냐가 어벙한 표정을 짓는 동안 소동이 진정되었다. 디자이라의 바지는 자그마한 구멍이 났고, 화상은 크리스티나가 치료해 주었다. 카르멘도 연거푸 마신 물로 입안의 텁텁함을 씻었다.
“불은 괜찮습니다.”
카르멘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세냐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 어어.”
세냐는 방금 소동의 주범이 된 것만 같아, 일단 미안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멘은 입술에 쓴맛이 완전히 가신 것을 확인하고, 다시 케이스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
그 행동 또한 세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냐가 입술을 헤 벌리고서 눈을 깜빡거리자, 옆에 앉은 유진이 슬쩍 고개를 기울며 속삭였다.
“내버려 둬요.”
“왜…… 저러는 거야?”
“원래 저러니까 내버려 둬요 그냥.”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카르멘은 당당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의 행동에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카르멘은 시가를 물고서 라이터를 몇 번 퐁퐁 거린 뒤에, 아직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의 뚜껑을 열었다.
꼴꼴꼴.
물론 카르멘은 위스키는 마시지 않는다. 그녀는 테이블에 세팅해 놓은 잔에 위스키를 채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원수보다 잔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방 한쪽의 진열장. 마시지도 않는 여러 술병의 옆에 함께 세워놓은 고급스러운 술잔들…….
“으흠.”
카르멘이 집중해서 술잔을 고르는 중에, 시엘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세냐가 지금 상황의 여러 가지를 이해하지 못하듯, 시엘도 지금 상황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여럿 있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세냐 님. 저는 시엘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저, 저는 디자이라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디자이라도 바지의 구멍을 손으로 가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세냐는 당황에서 벗어나 표정을 바꾸었다.
“응, 그래. 너무 예의 차리지 않아도 괜찮아.”
시엘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유진과 크리스티나, 그리고 세냐. 크리스티나와 유진의 거리가 가까운 것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세냐와 유진의 거리가 가까운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현명한 세냐가 유진을 후계자로 공언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 즉, 둘은 스승과 제자인 것이다.
그런 사이니 친밀한 것도 당연하겠지만ㅡ 저렇게 직접 닿는, 가까운 거리가 윤리적으로 옳은가? 300년 전의 거리감으로는 저것이 당연한 건가?
“으흠…… 세냐 님과…… 크리스티나 성녀가 유진과 함께 온 것은…….”
심지어 변장까지 하고서 말이다. 시엘은 맞은편에 앉은 셋을 시야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나찰공주 때문이군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짐작은 했다. 그 외에 저 셋이 시무인에 올 이유가 어디에 있나.
3명…… 고작 3명이 아니다. 한 명은 무려 300년 전부터 이름을 떨친 전설적인 대마법사. 그리고 이 시대의 성녀와 용사.
“맞아.”
유진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시엘은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상황을 살피고, 정보 수집을 하려고 온 거야? 아니면…….”
“죽이러 왔지.”
“대뜸?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전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리스에게는 빚이 있지.”
그 말에 세냐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유진도 전생부터 아이리스와 악연이 있기는 하지만, 세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시엘은 세냐가 내뿜는 살의를 느끼고서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나찰공주.”
카르멘이 양손에 술잔을 들고서 돌아왔다. 그녀는 세냐와 크리스티나의 앞에 술잔을 내려놓고, 우아한 자세로 술을 따라주었다.
위스키인데 마치 와인을 따르듯, 높은 곳에서 술병을 기울이고서 말이다. 그렇게 따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멋있어서.
[크리스티나, 저랑 바꿉시다.]
‘시스터?’
[당신은 술을 잘 즐기지 않아 모르겠지만, 지금 카르멘이 따르는 위스키는 아주아주 진귀한 것입니다. 제가 살아 있던 시절에도 간혹 즐기던 추억의 술이지요.]
‘진정하십시오, 시스터.’
[빨리! 빨리!]
크리스티나는 독촉대로 몸을 바꿔주었다. 아니스는 즉시 술잔을 잡아 들더니, 가득 찬 위스키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 호쾌한 모습에 카르멘은 잠시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 잔 더.”
“……음.”
이 맛없고 쓴 것을 대체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걸까.
카르멘은 그런 의문을 느끼면서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술이 따라지자마자 잔이 비워졌고, 결국 카르멘은 포기하고서 위스키를 크리스티나의 앞에 놓아주었다.
“……나찰공주.”
자리에 앉은 카르멘은 방금 하려던 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녀는 입에 문 시가를 손가락에 걸치고서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에는 그렇게 불렸지만, 지금 시무인에서 아이리스는 나찰공주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바로 해적여제(海賊女帝).”
나이트마치 때까지만 해도 아이리스 산하의 해적선은 수십 척이었으나, 지금 아이리스의 이름 아래 모인 해적기만 해도 백 개가 넘는다. 그렇기에 시무인의 사람들은 아이리스를 ‘해적여제’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해적들이지.”
세냐가 이죽댔다.
“그 잡것들이 솔가르타 해역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면, 이렇게 신분을 감추고 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냥 도착하자마자 찾아가서 쓸어버렸겠지.”
300년 전에 마족들이 부르던 이름은 ‘재앙의 세냐’.
그 이명대로, 세냐는 마족과의 전쟁에서 몇 번이나 재앙을 일으켰다.
수백 척의 해적선? 그래 봤자 해적이고, 숫자만 많을 뿐이지 마족에 비교될 강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포착할 수만 있다면 바다에 소용돌이를 만들건 파도를 일으키건 벼락을 떨구건 메테오를 처박건, 할 수 있는 방법은 굉장히 많았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아이리스가 처박힌 곳이 멀어도 너무 먼 바다라는 것. 마법을 제한하는 솔가르타 해역이라는 것.
과연 그 해역의 악명이 세냐를 얼마나 억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세냐는 최대한 ‘신중하게’ 아이리스를 죽일 생각이었다.
절대로, 도망칠 여지를 두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절대로, 반드시, 아이리스를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유진과 아니스도 동감했다.
아이리스. 그 시커먼 엘프와 얽혀서 보았던 여러 지옥. 불타는 산과 숲, 들판, 미끼로 쓰여 비명을 지르던 엘프들, 어둠 속에 숨어 집요하게 기습하던 다크엘프 레인저들.
엘프는 아주 오래 산다. 다크엘프도 엘프만큼 오래 산다. 작정하고 숨어버린다면ㅡ 아이리스는 앞으로 수십, 수백 년은 숨을 수 있을 것이다.
유진 일행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아이리스가 누구도 알 수 없는 남해 어딘가의 무인도에 숨어서 수십 수백 년을 버티는 것이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네가 키옐에서, 나의 후계자 유진과 함께 아이리스와 싸웠다는 것은 들었어. 운이 좋지 않았지.”
“제가 부족하여 죽이지 못했습니다.”
“널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이런 말은 불쾌하게 들릴까? 나는 말이야, 너와 유진이 아이리스를 놓친 것이 오히려 기뻐. 덕분에 그 망할 년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선명한 살의. 카르멘은 피부가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세냐 님. 솔가르타 해역은 아주 멉니다. 그곳까지 가는 배편은 존재하지 않고, 설령 배를 통째로 구매한다고 해도 사해(死海)까지 항해해 줄 선원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솔가르타 해역의 악명은 나도 알지. 그 괴상한 바다는 마법은 둘째 치고 도달하기도 힘들다지?”
“그래서 도움을 청하러 온 겁니다.”
유진이 입을 열었다. 카르멘은 빙긋 웃으며 유진을 보았다.
“어떤 식의 도움을 말하나? 이 은사자의 송곳니와 발톱을 빌리고 싶나? 아니면 백장미의 가시를? 아니면…….”
카르멘은 디자이라를 힐긋 보았다. ……디자이라에게는 아직 그럴듯한 이명이 없었다.
“흑진주의 반짝임을 빌리고 싶나?”
그래서 즉석에서 별명을 지어주었다. 반짝임을 빌린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이지? 디자이라는 이해하지 못해 카르멘을 쳐다보았다. 물론 카르멘도 자신이 내뱉은 말의 뜻은 이해하지 않았다.
“어…… 아뇨. 그런 도움 말고, 오르투스 경과 만나고 싶습니다.”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나이트마치 때 오르투스 경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겠군. 해군함대를 끌고서 정면으로 나찰공주를 치고 싶다?”
“그것도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함대를 이끌고 가면 아이리스가 도망치거나 숨어버릴지도 모르죠. 오르투스 경이 어떤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배나 몇 척 빌릴까 합니다.”
“배?”
“상선이나 무역선. 아이리스가 털어먹고 싶을 만큼 커다랗고 멋진 놈으로.”
당장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개였다. 하나는 솔가르타 해역으로 쳐들어가는 것. 다른 하나는 아이리스를 밖에 꾀어내는 것.
후자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아이리스가 습격할 만한 상선이나 무역선이 필요했다.
“여제는 부하가 너무 많아졌어. 어지간해서는 솔가르타 해역을 벗어나지 않아. 휘하 해적선만 바깥으로 내보내 노략질을 하고 있지.”
“부하라도 꾀어내죠. 놈들 배에 잠입하는 방법도 써볼 법한데?”
“다른 방법도 있어.”
시엘이 입을 열었다.
“카르멘 님이 말한 것처럼 여제는 부하가 너무 많아졌지. 시무인의 해군과 비교하자면 숫자도 수준도 딸리지만, 여제가 더해진 것만으로 일국의 해상병력을 희롱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야. 그래서…… 최근 여제는 아주 과감한 짓을 했지.”
아이리스에 관한 소문은 여럿 있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소문도 있다.
“본래 여제는 시무인의 국선(國船)은 노리지 않았어. 토벌함대와도 전투를 피했지. 그런데 말이야, 한 달 전부터 여제의 태도가 바뀌었어.”
“솔가르타 해역 근처를 정찰하던 군함 10척이 통째로 실종됐다더군.”
카르멘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셰도르 섬으로 이송되던 현금수송선까지 아이리스에게 통째로 납치당했다.”
시무인의 영해에 속한 수많은 섬들. 그곳의 사람들에게서 거둬지는 세금은 배편으로 보내진다.
“현금수송선뿐만이 아니다. 왕가에 바쳐지는 다양한 공물들도 약탈당하고 있지. 통행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배와 선원들 모두 다 아이리스에게 납치당했다.”
과거 오르투스에게 들었을 때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이리스는 해군의 토벌함대와의 마찰을 피했고, 민간 상단과 무역선을 약탈했다.
“수치스러운 일이지. 그래서 왕가는 모든 사실을 은폐했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게 됐거든.”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술잔을 흔들었다.
“계속해서 입을 닫고 있다가는 드워프 길드가 시위를 벌일 테니.”
“드워프?”
갑자기 나온 종족명에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무인
시무인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드워프가 사는 나라다. 그 타고난 장인종족은 가진 손재주만큼이나 실력이 완고하고, 다른 이종족이 그러하듯 시끌벅적한 인간 도시에서 사는 것을 질색한다.
그래서 시무인 왕가는 드워프들을 위해 섬 하나를 통째로 자치령으로 선물했다. 사실 그것은 다른 나라에 드워프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또 드워프들이 시무인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한 처사였지만 결과적으로 서로를 만족시킨 결정이 되었다.
망치섬.
드워프들이 직접 고른 섬이고, 수백 년 동안 드워프들의 취향대로 개발되어 온 드워프만을 위한 낙원.
매달 드워프들이 요구하는 대량의 맥주와 광물 따위의 자원, 그리고 의뢰된 장비의 설계도면이 망치섬에 수송된다. 그리고 망치섬의 드워프들은 의뢰받은 장비를 완벽하게 만들어서 수송선에 태워 보낸다.
보통 드워프와의 거래는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만, 정말 중요한 의뢰인 경우에는 드워프가 직접 배에 타고 본섬에 올 때도 있다.
보름 전. 망치섬에서 실력으로 줄을 세운다면 선두부터 채울 드워프 장인들이 망치섬에서 배를 타고 셰도르 섬으로 출발했다.
시무인을 대표하는 격랑 기사단. 퍼스트 오르투스 하이만이 이끄는 그 기사단은, 구성원 전원이 상등급의 엑시드를 보유하고 있다. 엑시드는 부여된 기믹과 성능만큼이나 관리가 까다로워서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수송선에는 10명의 드워프 장인과 10명의 제자가 타고 있었지. 고작해야 20명이라지만, 망치섬의 모든 기술을 정수라 할 드워프들이었어. 그리고 음, 드워프들이 제작한 다양한 물건들도 함께 있었지.”
망치섬에서 셰도르 섬까지는 배를 타고 넉넉잡아 나흘은 항해해야 한다. 하지만 출발하고 이틀 차에 수송선에서 보내오는 신호가 뚝 끊겼고, 지금까지 수송선은 도착하지 않았다.
드워프 장인 하나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드워프야말로 단어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드워프가 10명. 그들의 기술을 전수받은 도제가 10명. 거기에 망치섬의 생산품들까지 싣고 있던 배.
당연히 보안은 철저했다. 격랑 기사단 1개 부대와 랭킹 4위의 대장, 6서클 고위마법사들이 섞인 전투마법사 수십 명, 일반 병사 수백 명.
사실 시무인 국기를 달고 있는 국선이란 것만으로도 해적선은 가까이 와선 안 되었다.
“여제가 제대로 선을 넘어버린 것이지.”
카르멘이 라이터의 뚜껑을 열고 닫으며 말했다.
“드워프 종족이 엮인 이상, 시무인은 더 이상 여제의 폭거를 묵인할 수 없게 되었다. 왕가는 드워프를 위해 섬 하나를 통째로 자치령으로 삼아 줄 만큼 진심이었으니 말이야.”
“드워프는 가성비가 좋은 종족이지.”
세냐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냐를 쳐다보았다. 세냐는 그 시선에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왜들 그렇게 봐? 아, 요즘 애들은 드워프에 대해서 잘 모르나?”
“아니…… 모르지는 않은데.”
“봐봐. 드워프란 것들은 말이야, 기본적으로 못생긴 땅딸보라서 세상을 잘 돌아다니지 않으려고 해. 얼굴은 검댕을 가득 묻히고 다니고, 몸에선 퀴퀴한 땀 냄새와 찌든 술 냄새에 담배 냄새, 마구잡이로 기른 수염은 씻지도 않아 온갖 벌레가 살지.”
어휴. 세냐는 그 악취를 상상해 보란 듯이 코를 부여잡고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드워프의 손재주만큼은 인정이지. 드워프가 대충 만든 물건이 인간 장인이 온갖 공을 들여 만든 물건과 비등할 정도니까. 거기에 드워프들은 기본적으로 물욕이 적어. 자신의 기술을 돈을 받고 파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야. 그냥 대충? 그래, 드워프들은 대충 살아. 돈 대신 맥주만 잔뜩 처먹이든가, 아니면 드워프가 마음이 동하고 영감을 느낄 만한 소재만 주면 얼마든지 부려먹을 수 있지. 그래서 드워프는 가성비가 좋은 종족이란 거야.”
“어…… 어어.”
“즉, 이 나라는 드워프를 아주 잘 써먹고 있단 말이지. 자치령이라고 해봐야 저 먼바다의 작은 섬 하나를 던져준 거잖아? 뭐 하늘 맑고 바다 예쁜 휴양지긴 하겠지. 그게 이 나라에 어마어마한 손해는 아닐걸? 장비제작에 드는 소재야 클라이언트가 준비하고 오히려 막대한 의뢰금까지 붙일 텐데. 말했다시피 드워프는 돈 욕심이 없으니 중간에 수수료랍시고 왕창 떼갈 수도 있을 거고, 대신 바라는 대로 맥주나 잔뜩 실어서 배에 보내면…….”
장대하게 이어지는 드워프에 대한 혐오 발언.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서 세냐를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냐는 인간이지만 엘프들과 함께 자랐으며, 엘프와 드워프는 정반대라 할 종족이라 먼 옛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세냐 님은 그 말을 누구한테 들은 건가요?”
“응? 누구겠어? 우리 오빠한테 들었지. 그리고 나도 300년 전에 드워프를 몇 번 보긴 했는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던데? 아직도 기억나. 내가 단검 몇 개 만들어달라고 의뢰했는데, 마법사 나부랭이가 뭔 칼을 휘두르냐고 지랄을 했었지…….”
세냐는 먼 기억을 떠올리며 그립단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때 세냐의 곁에는 하멜도 있었기에, 그 일의 전말은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 드워프는 마법도 쓰지 않는 세냐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설움을 참으며 단검 세트를 제작해 주었으며, 대가로 3통의 맥주를 받았다…….
“어…… 음. 요즘 드워프들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설마 현명한 세냐의 입에서 저렇게 짙은 종족 혐오 발언을 듣게 될 줄이야. 시엘은 당황한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대부분의 드워프가 망치섬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셰도르 섬에 드워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셰도르 섬에는 드워프 길드가 있다. 그들은 망치섬에 들어가는 의뢰를 1차적으로 점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들은 망치섬 드워프들과는 달리, 도시의 삶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인 젊은 드워프들이다.
“종족의 어른들이 대거 납치당했으니 드워프 길드가 반발할 수밖에요. 그들은 이미 왕가의 모든 주문에 대해 파업을 선언했습니다. 왕가가 장인들을 구출하지 않는다면, 일반 고객들의 의뢰도 파업하고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죠.”
이미 아이리스의 폭거는 어떻게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져 버렸다.
그것은 시무인의 잘못이 컸다. 이 나라는 아이리스를 견제할 적기를 스스로 놓아버렸으니 말이다.
“즉, 유진 네가 여제를 죽일 생각이라면 지금이 적기란 말이야.”
시엘은 그렇게 말하며 카르멘을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오르투스 경이 최근 며칠 동안 카르멘 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거든.”
“도움?”
“뻔한 이야기지. 여제의 토벌대에 참가해 달라는 말이야. 카르멘 님은 외국인이지만,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시니까.”
“대답은 아직 하지 않았다.”
카르멘이 시가를 입에 물고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태까지 마음대로 행동했던 유진과는 달리, 놀랍게도 카르멘에게는 저러한 상식이 박혀 있었다.
카르멘은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잘 알았다. 상대가 그 다크엘프 아이리스라면 카르멘도 목숨을 걸어야 하기에, 그런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가문과 의논을 해야 한다.
오늘 유진과 만나지 않았다면. 카르멘은 원로원주이자 동생인 클라인과, 본가 가주인 길레이드에게 출전에 대한 편지를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의 때를 위한 유서도 한 통 적어서 시엘에게 남겼을 것이다.
“명분이 충분하다고 해서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님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너. 용사, 혈사자, 드래곤 슬레이어…….”
“그냥 하나만 하면 안 됩니까?”
“셋 모두가 너를 칭하는 말이지, 유진 라이어하트. 그런 네가 여제의 죽음을 바란다면, 라이언하트는 무조건적으로 네 의지를 따를 것이다.”
위대한 베르무트. 300년 전의 용사. 라이언하트 가문은 저 위대한 베르무트에 의해 시작되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위대한 베르무트와 같은 용사라면, 라이언하트는 당연히 유진의 의지를 따른다.
“그럼, 유진 라이언하트. 네 바람대로 오르투스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지. 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오르투스는…… 아주 깨끗하여 문제없는 사람은 아니다만, 여제와 결탁할 사람은 아니다.”
“흠…….”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본래는 상선이나 무역선으로 위장해 아이리스와 접촉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리스가 대놓고 시무인의 왕권을 위협해 버려서, 곧 토벌대가 출정하게 되었다.
“아뇨. 그렇다면 제가 오르투스 경과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유진은 그렇게 판단했다.
왜 아이리스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는가?
300년 전. 광란의 마왕이 죽은 후, 아이리스는 항상 똑같은 것을 바라왔다. 그 다크엘프야말로 망집의 화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광란의 마왕의 부활. 피 한 방울 통하지 않은 주제에, 아이리스는 진심으로 광란의 마왕을 아버지라 여겼다.
우스운 것은, 끔찍한 학살을 벌였던 광란의 마왕 본인도 그랬다는 것이다. 광란의 마왕은 아이리스를 비롯해 4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모두가 피는커녕 종족조차 다른 수양자식들이었다.
광란의 마왕은 그러한 자식들을 사랑했다. 자식들도 광란의 마왕을 사랑했다. 왜 그랬던 것인지는 당시의 유진도 이해하지 못했다.
광란의 자식들 중, 거인족 두령인 카마쉬와 뱀파이어 로드였던 사인은 아버지를 위한 전쟁에서 죽었다.
수인족 두령인 오보론과 다크엘프 공주인 아이리스도 그렇게 죽으려 하였으나, 광란의 마왕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서 둘을 탈출시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마왕의ㅡ 아버지의 죽음이 아이리스에게 망집을 주었다.
그 후 300년. 전쟁이 없는 시대. 마왕이 날뛰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
하지만 아이리스는 광란의 재림을 꿈꾼다. 죽은 마왕을 부활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아이리스 자신이 새로운 광란의 마왕이 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누아르 제벨라와의 영지전도 그러한 야망 때문이었다. 결국 패배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헬무드에서 추방되었고, 떠돌다 정착한 곳이 바로 이 거대한 바다.
아이리스는 자신이 충분한 힘을 모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파도가 출렁거리는 바다가 아닌, 두 발로 서고 지배할 수 있는 ‘영토’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무엇이 필요할까? 마왕도 결국은 왕. 왕이라 불리기 위해서는 통치할 땅과 백성이 필요하다.
“꾀어내고 있잖아요.”
아이리스는 노골적으로 시무인이 토벌대를 보내도록 유혹하고 있다. 더 이상 은폐할 수도 없는 일이니, 시무인은 아이리스가 바라는 대로 토벌대를 보낼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 시무인만의 일. ‘여제’라 불려도 결국은 해적. ‘기사의 나라’라는 불림에 자부심을 가진 나라가, 해적 토벌의 문제로 외국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터.
“토벌대를 보내도 아이리스는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몇 명을 보내건 몰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테니까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싸움을 건 것이다. 토벌대를 사로잡아 노예로 전락시키거나, 아니면 역으로 시무인 본섬에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오르투스 경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토벌대가 구성된다면, 사람이 아주 많아지겠죠. 오르투스 경을 통해 그곳에 들어가느니, 아예 밝히지 않고서 몰래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만에 하나. 용사인 유진과 성녀인 크리스티나, 그리고 현명한 세냐가 토벌대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이리스는 태도를 바꾸어 전투를 피할지도 모른다.
“그렇군.”
카르멘도 그 사실을 이해했다. 토벌대의 규모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무인의 해군함대는 물론이고 격랑 기사단 전원이 참전할 것이다.
그 외에도 시무인에서 명성을 떨치고 싶은 투사들도 참전할 것이며, 돈 냄새를 맡은 용병들도 참전할 것이다.
“저도 가고 싶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시엘이 입을 열었다.
“투사 랭킹 7위. 설마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시엘.”
“카르멘 님은 실전에서만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가르치셨어요. 하지만, 솔직히 이곳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실전이라기보다는 쇼에 가까웠어요. 더 높이 가면 다를까 싶었지만, 그렇지도 않을 것 같아요.”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오빠는…… 유진과 함께 전쟁을 치렀잖아요?”
“이 멍청아, 거기는 숲이고 이번에는 바다잖아.”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야?”
시엘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시안이 나랑 전쟁을 치른 것이 뭐? 시안이 했으니까 너도 하겠다 이거야?”
“그럼 안 돼?”
“안…….”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는 시엘의 눈이 유진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북방 설원에서 보았던 눈. 그때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차지는 않았으나, 그때만큼 결연한 눈이었다.
“유진 님.”
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스였다. 그녀는 유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시엘 님의 선택입니다.”
“끙…….”
“뭐 어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말이야.”
세냐도 깔깔 웃으며 유진의 등을 두드렸다.
“옛날 생각난다, 얘. 시엘이라고 했지? 나이는 21살이고.”
“네.”
“어디 보자, 1달 뒤에는 22살이 되네? 내가 네 나이쯤에도 바다를 탔지. 맞아, 딱 그 나이에 바다 건너 헬무드에 들어가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별로 그리운 과거는 아니었다. 세냐는 그 끔찍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러한 나날이 있었기에 지금의 현명한 세냐 님이 있는 것이지. 아, 너무 걱정하지는 마. 너는 베르무트의 까마득한 후손에다가, 나의 후계자, 유진 라이언하트의 남매잖아?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엄청 신경 써서 봐줄게.”
베르무트에게 죽을 뻔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냐는 베르무트를 믿고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보니 베르무트의 후손들ㅡ 특히 아직 충분히 여물지 않은 본가의 쌍둥이들이 굉장히 귀엽게 느껴졌다. 괜히 뭐라도 하나 먹여주고 싶고 챙겨주고 싶었다.
시안은 그런 세냐가 부담스럽고 어려워서 이리저리 도망 다녔었다. 하지만 시엘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세냐를 향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감사합니다. 세냐 님.”
“편하게 불러, 편하게. 너도 날 언니라 부르는 것은 어떠니?”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물론 시엘도 세냐를 언니라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경 써서 봐준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이기는, 나의 후계자야. 아이리스 그 개 잡것에게 다치지 않도록 지켜주겠다는 말이지. 아, 혹시 너 질투하는 거니? 걱정하지 마렴 후계자야! 내가 너도 꼭 지켜줄…….”
“거참, 가서 마법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장담해도 되는 겁니까?”
“후계자야! 유폐의 마왕조차도 나에게서 모든 마법을 억제하지 못했단다. 그 유폐의 마왕도 하지 못한 일을 솔가르타 해역이 할 수 있을 것 같니? 조금 불편함은 있겠지만, 이 현명한 세냐 님에게서 마법을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아?”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가슴을 활짝 폈다.
“잘 알아두렴. 이 현명한 세냐가 마법이고, 마법이 곧 현명한 세냐란다.”
“허…….”
유진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엘 라이언하트
우선 저택의 경비와 시종들을 해고했다. 갑작스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근로기간에 비해 두둑한 퇴직금들을 쥐여주니 다들 별말 없이 해고통보를 받아들였다.
어제 시합에 승리한 것으로, 시엘은 상위 투사에게 도전할 승점을 채웠다. 언젠가 있을 랭킹전을 위한 비밀스러운 수행.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으로 삼았다.
물론 시엘은 랭킹전을 준비할 생각은 없었다. 랭킹전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했다. 아직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드워프 길드가 적극적으로 압박을 넣고 있으니 조만간 해적여제의 토벌이 정식으로 공표될 것이다.
아마, 토벌대에는 다른 상위랭커들도 대부분 참가할 것이다.
랭킹 1위는 격랑기사단의 단장인 오르투스. 시무인에서 가장 뛰어나고 강한 기사가 그이기에, 오르투스는 싫어도 토벌대를 이끌어야 한다.
랭킹 2위는 기사가 아닌 용병이다. 슬라드 용병단의 단장인 아이빅 슬라드. 흔히 용병왕이라고 불리는 거물이다. 전쟁을 스스로 찾아다니는 용병이 이런 큰 건수에 참가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 외의 상위 투사들. 시엘이 파악한바, 그녀보다 높은 곳에 있는 6명 중에서 토벌대에 참가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아이리스에게 죽었거나, 혹은 납치당했을 랭킹 4위를 제외하고선 말이다.
“후.”
시엘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수행이야 라이언하트와 흑사자 성에 있을 때에도 거른 적은 없다. 하지만 단언컨대, 시무인에 오고서 새로 짠 수행의 커리큘럼은 이전의 수행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혹독했다.
이 커리큘럼을 조율해 준 카르멘조차도 난색을 표했을 정도며, 함께 시작했던 디자이라는 나흘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시엘은 1년 가까운 지금까지, 매일 가혹한 수행을 거른 적이 없었다. 저택의 연무장. 그다지 가혹한 환경이 아닌 만큼, 최대한 육체와 정신을 쥐어짜면서 강도는 단계별로 높여갔다.
‘가능성…….’
그만큼 몸과 정신을 몰아붙였는데 머릿속은 여러 생각이 떠돌았다.
토벌대가 해적여제를 죽일 가능성. 그것은 굉장히 높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시무인의 전력으로만 구성된 토벌대라면ㅡ 솔직히 승산이 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카르멘과 유진, 크리스티나, 거기에 현명한 세냐까지 더해지면 토벌대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ㅡ나는?’
시엘은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거친 손바닥이 보였다. 그 손으로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몸을 천천히 쓸었다. 스스로를 작거나, 하찮다고 생각하고는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시엘 라이언하트.
명문 라이언하트 본가의 후예. 은사자 카르멘 라이언하트의 제자이자, 최연소 흑사자. 마찬가지로 최연소 시무인 십이걸.
그 ‘최연소’라는 이름은 결국 ‘어리고 미숙하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엘은 그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21살이었으며, 미숙하지 않을 만큼의 경험은 쌓지 못했다.
‘내가 도움이 될까?’
그 생각이 시엘의 머리를 새벽부터 어지럽혔다. 답을 궁리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외면해서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외면해도 자꾸만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함께 가도 되는 걸까?’
함께 가겠다고 먼저 말한 것은 시엘이다. 지금 와서 대답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냥, 따라가기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위험? 위험하지 않도록 잘 숨어다니면 되는 일.
하지만 시엘의 바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시엘은, 유진과 함께 가고 싶은 것이다. 오빠인 시안이 그랬듯이, 유진과 함께 전쟁을, 위험을 극복하고 싶었다.
오빠에게도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대수림에서의 무용담이 가득 적혀 있었는데, 오빠의 활약보다는ㅡ 유진이 얼마나 대단한지. 유진이 얼마나 강한지. 그런 이야기가 많았다.
시엘은 오빠가 부러웠다. 결과적으로 오빠는 유진과 함께 전쟁을 치렀고, 승리했으며, 그를 통해 무인으로서 성장했다. 동시에 자신의 성취를 유진에게 보여주고 인정받았다.
어느새부터인가.
아니, 처음부터.
유진과 쌍둥이의 관계는 그랬다.
셋은 동갑이고 남매였지만, 단 한 번도 똑같은 수준에 선 적은 없었다. 시안과 시엘에게 있어서 유진의 뒤를 보는 것은 당연했고, 노력하여 얻은 성취를 유진에게 평가받고, 인정받는 것이 당연했다.
-많이 늘었네.
시엘은 저 말을 기분 나쁘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듣기 좋았다. 그렇게 인정받고 칭찬을 받을 때마다 아득하던 차이가 조금씩 좁혀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어린아이의 욕심과 성인의 욕심은 크기도 방향도 차이가 난다. 지금의 시엘은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그, 눈이 지긋지긋하리만큼 가득 쌓인 설원에서. 분하고 서글퍼서 엉엉 울었을 때, 시엘은 더 이상 자신이 유진의 등을 쳐다보고 인정과 칭찬만 받아도 헤헤 웃던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검에.”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시엘은 손바닥의 땀을 털고서 고개를 들었다.
올해의 마지막 달. 키옐이었다면 눈이라도 내리거나 찬바람이 쌩쌩 불 텐데, 이곳 시무인은 12월도 태양빛이 뜨겁고 강렬했다.
눈부신 하늘. 태양빛이 따가워 찡그린 시야에 유진의 모습이 잡혔다. 유진은 창문 밖에 몸을 반쯤 내밀고서 시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잡념이 실린 것이 너무 잘 느껴져.”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모르는 거야? 만약 정말 모르는 것이라면 조금 실망할 거야.”
장난기 가득한 말.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바닥에 꽂힌 검을 발로 차올렸다.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그랬어.”
시엘은 허공에서 검을 낚아채고서 투덜거렸다. 유진은 씩 웃으면서 조금 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렇게 나와도 돼?”
“안 될 건 뭐가 있어?”
“정체를 감추고, 뭐 그러고 싶었던 거잖아. 시종이랑 경비들은 다 해고했지만, 내 저택은 파파라치들이 감시하고 있다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잖아도 세냐가 아침부터 저택 안에 이런저런 마법을 설치했다. 아롯의 마탑주가 올지라도 저택 담장 바깥에서 내부사정을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마법 차암 편리하네.”
“왜. 너도 배워둘 걸 하는 후회 들어?”
“이제 와서 뭘? 검이라도 꾸준히 팠으니까 이 망정이지, 괜히 팔자에도 없는 마법까지 건드렸다가는 이만큼도 안 됐을 거야.”
시엘은 코웃음을 치면서 상의를 들췄다. 새하얀 피부, 또렷하게 새겨진 복근이 대뜸 유진에게 노출되었다. 유진은 순간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들춰 올린 밑단으로 얼굴의 땀을 닦는다……. 딱히 이상한 행동은 아니지만, 당연히도 시엘이 지금 ‘이렇게’ 땀을 닦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시엘은 유진이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는 것을 확인하고서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이야?”
“뭐 어때서 그래? 어렸을 때는 별말 안 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인마. 땀 흘리고 배 까면 감기 걸린다.”
“이 더운 날씨에 감기는 무슨…….”
“원래 여름 감기가 지독한 거야.”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시엘을 향해 마른 수건을 던져주었다. 시엘은 들췄던 밑단을 입술로 앙 물고서, 양손을 들어서 수건을 받았다.
“뭐 복근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땀에 반들거리는 하얀 복근. 유진은 여전히 시선을 반쯤 돌리고서 이죽댔다.
“미안한데 네 복근보다 내 복근이 더 선명하고 잘 잡혔거든?”
“뭐래, 누가 너한테 자랑하려고 배 까고 있는 줄 알아? 그냥 더워서 이러는 거야.”
거짓말이다. 유진이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어서, 계속해서 반응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시엘의 짓궂은 장난은 어려서부터 봐서 익숙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저 나이 먹고 제 몸으로 장난질이라니…….
“어디서 몹쓸 짓만 배워서 말이야.”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시엘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화악! 손끝에서 일어난 바람이 시엘의 몸을 감쌌다. 흐르던 땀이 바람에 실려 날아갔고, 덩달아 시엘이 물고 있던 옷도 본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유진은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시엘을 쳐다보았다.
“너 남한테 막 배 까고 그러다간 시집 못 간다.”
“뭐래?”
“슬슬 너도 혼인 생각할 때가 되긴 했잖아. 시안도 조만간 다시 루하르에 올라간다더라.”
“하? 결국 루하르의 어린 공주님이랑 혼인한다 이거야?”
시엘은 어이가 없어서 내뱉었다.
야수왕 아만 루하르의 딸인 아일라 루하르 공주. 시엘도 루하르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만난 적은 있었다. 다행히 아일라 공주는 선조인 용감한 모론이나, 아버지인 야수왕을 그리 닮지 않아 예쁘고 귀여웠다.
예쁘고 귀여운, 11살 소녀였다.
“바로 결혼하는 것은 아니고. 일단은 식 없이 약혼만 맺는다더라. 결혼은 아일라 공주님이 17살이 되면 한다던데?”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새언니라니…….”
“그래도 성격은 착한 것 같다며?”
“나도 11살 때는 착했어.”
“별로 그랬던 것 같지는 않은데…….”
유진은 어릴 적에 보았던 시엘을 떠올리며 이죽댔다.
“그래도 뭐. 시무인의 공주님보다는 낫지 않아?”
시무인의 스칼리아 공주. 본래 시안의 약혼 상대 중에는 그녀도 있었지만, 시안이 게거품을 물면서 ‘싫다’고 부르짖은 덕에 약혼은 무마되었다.
“그 반미치광이보다는 낫지.”
스칼리아에게 질색한 것은 시엘도 마찬가지였다.
설원에서 용병들을 마구잡이로 썰어대던 모습. 몽마의 여왕이 보여주는 악몽, 그를 피하기 위한 불면증, 신경과민에 따른 불면증과 스트레스……. 그렇다 해서 스칼리아 공주가 벌였던 것이 학살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정말로 스칼리아 공주에게 학살이란 기호가 없는가? 시엘은 그 사실은 장담하지 못했다.
설원에서 함께 이동하던 중에, 식사거리로 잡은 사냥감을 대하던 스칼리아의 모습이 ‘평범하다’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약혼이라…….”
상대가 11살의 어린 공주라는 것은 둘째 치고, 어려서부터 함께 지냈던 오빠가 약혼을 맺는다는 것이 시엘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으흠.”
시엘은 유진에게서 받은 수건을 목에 두르며 방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혼담 비슷한 것이 있었어.”
“뭐어?”
“아, 가문에 정식으로 들어온 것은 아냐. 말했잖아, 혼담 비슷한 것이라고. 그냥 가벼운 제안이랄까…….”
유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싶었다. 시엘은 창가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유진을 힐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으흠, 너도 아는 사람이야. 친하지는 않지만.”
“누군데?”
“오르투스 경의 아들인 디오르 하이만 경. 나이는 23살에, 투사의 랭킹은 낮지만…… 그거야 디오르 경이 시합을 치르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실력은 정평이 난 사람이지.”
뭐라고 반응이라도 해봐. 시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모든 신경을 유진에게 고정했다.
“오르투스 경이 몇 번이나 제안을 했었거든. 아들인 디오르 경과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말이야. 으흠, 그 이유야 뻔한 것 아니겠어?”
“허…….”
“사실 디오르 경뿐만 아니라, 시무인에 있는 동안 여러 제안을 받았었지. 음…… 받아들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야, 다들 자기네 잘난 아들이랑 꼭 한번 만나달라면서 얼마나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어느새 그런 나이인가…….
유진은 왠지 모를 복잡한 기분을 느끼면서 시엘을 내려다보았다. 시엘은 지금 저 표정에 대체 어떤 감정이 내포된 것인지 잘 구분할 수가 없었다.
‘괜한 말을 했나?’
으흠. 시엘은 헛기침을 하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뭐…… 나는 아직 혼인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러는…….”
넌 어떤데?
자연스레 물어보려 했는데,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화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질문도 아닌데. 그냥, 가볍게 물어보면 되는 것인데.
‘듣기 싫어.’
그리고 무서웠다. 어젯밤에 보았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크리스티나 성녀와ㅡ 현명한 세냐 님. 대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래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 않았고,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시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고서 고개를 들었다.
“한가하면 여기 좀 내려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옛날부터 눈치는 빠른 편이었으니, 그냥……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시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너도 방에만 있느라 몸이 찌뿌둥할 것 아냐?”
“마침 심심하던 차긴 해.”
“그럴 거면 세냐 님, 크리스티나 성녀랑 같이 나가지 그랬어?”
“여자들이 쇼핑하러 가는데 내가 따라가서 뭐 해?”
“뭐 하기는, 짐이라도 들어주면 되지.”
시엘은 땀에 달라붙은 민소매를 살짝 떼어내다가, 유진을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아하…… 너 괜히 휘둘릴까 봐 피한 거지?”
“아닌데?”
“아니기는. 난 말이야, 어제 그 얘기. 아주 괜찮다고 봐.”
“헛소리하지 마.”
유진은 드물게도 정색하고서 어깨를 떨었다.
“나보고 여장을 하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어제 나눴던 이야기다.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는 정식으로 토벌대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카르멘과 시엘을 통해서 토벌대에 들어가기로 했다. 토벌대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조회가 필요할 테지만, 카르멘이라면 그런 과정쯤은 무시할 수 있다.
자유기사, 용병, 시종. 어떤 식으로든 유진 일행은 카르멘, 시엘과 함께 토벌선에 탈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ㅡ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유진이 남자라는 것.
“기왕 정체를 숨길 거 확실하게 숨기면 좋잖아. 설마 그 잘난 유진 라이언하트, 용사가 여자로 변장하고서 토벌대에 참가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생각은 안 하겠지!”
“그래! 해적여제도 생각하지 못할 거야. 안 그래? 네가 여자로 변장해서 몰래 숨어 있다가, 해적여제의 앞에서 정체를 밝히고 성검을 뽑으면ㅡ”
시엘은 그 광경을 상상하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해적여제라면 놀라고 어이가 없어서 도망치지도 못할걸.”
“…….”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닫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ㅡ 가만히 듣고 있어보니 시엘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장을? 그건 너무하지 않나?
“북방의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 어떤 난폭한 신이 자신의 무기인 망치를 거인에게 도둑질당해서, 망치를 되찾기 위해 여장을 하고 거인의 신부로 잠입한 신화.”
“뭐 어쩌라는 거야?”
“그 용맹하고 난폭하던 신도 목적을 위해서 여장을 하는데. 인간인 네가 여장을 못 할 게 뭐가 있어? 잘 생각해 봐 유진, 여장은 오직 남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남자다운 행동이야.”
“개소리하지 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여장까지 할 필요가 없어. 그냥 용병으로 위장하거나, 정 안 되면 밀항을 하고 말지.”
“용병으로 토벌대에 참가하려면 랭킹이 필요할걸? 아무리 카르멘 님이라도 그쪽은 건드리기 힘들어. 그래서 세냐 님과 크리스티나 성녀도 나와 카르멘 님의 시종으로 배에 타는 것을 선택한 거고.”
“랭킹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투사등록이라도 해주지. 나흘만 기다려 봐, 최소 100위 안에는 이름을 올리고 올 테니까.”
유진은 뿌득뿌득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리고 너 말이야, 시엘. 자꾸 놀리기만 하는데, 그렇게 내가 여장한 모습을 보고 싶은 거냐?”
“응, 보고 싶어.”
“너 미쳤어?”
“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덩치와 근육은 어쩔 수 없지만, 네 얼굴은 흠…… 꽤 예쁘장한 편이잖아?”
“개소리 말고 비환검이나 꺼내 봐.”
유진은 더 이상 여장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소매의 단추를 풀고서 걷어 올린 뒤, 시엘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제 시합도 그렇고. 수행하던 것 보니까 칼질이 많이 늘었던데. 오랜만에 대련해 줄게.”
시엘 라이언하트
시엘이 보물고에서 선택했던 무기는 비환검 자벨.
자벨은 검이기는 하지만 채찍처럼 쓸 수도 있고, 가벼우면서 빠르고 날카롭다. 복잡한 특징만큼 다루기는 까다로우나,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면 여러 가지 기교를 넣어 변칙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자벨의 특징은 시엘과 잘 맞았다. 어렸을 때부터 시엘은 가볍고 빠른 쾌검에 흥미를 보였으며, 약점을 파고들어 쑤시는 검기를 즐겼다.
“콜로세움에서는 안 쓰던데?”
“원래 진짜 필살기는 아껴두는 법이잖아.”
시합에서 자벨을 꺼낸 적은 없었다. 상대를 우습게 여긴 것은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자벨을 쓸 만큼의 상대는 만난 적이 없었다. 만약 자벨을 써야만 한다면, 5위 이상의 최상위 랭커와의 시합이라고 생각했다.
“너랑은 어려서부터 여러 번 대련했었지.”
시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벨을 칼집에서 뽑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네게 상처 하나 입힌 적이 없어.”
“나도 그렇잖아.”
“너는 일부러 그런 거잖아. 나를 다치게 하지 않고 제압했었지.”
쭉 본가에 있던 시안만큼은 아니겠지만, 시엘이 유진과 대련을 한 횟수도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었다. 나이트마치로 향하던 설원에서도 곧잘 유진과 대련을 했었다.
이긴 적? 당연히 없다. 상처를 입힌 적도 없다. 유진과의 대련은 언제나 결과가 똑같았다. 시엘이 어떤 전법을 택하든 오래지 않아 처참하게 파훼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면 항상 칼날은 시엘의 목 앞에서 멈춰 있었다.
그럴 때 시엘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졌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나면, 유진은 칼날을 거두면서 시엘에게 씩 웃어주곤 했다.
‘이번에는.’
다른 표정을 보고 싶었다.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것만 같은 웃음이 아닌, 깜짝 놀라 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유진을 진지하게 만들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누나잖아?’
생일로 따지자면 시엘이 유진보다 몇 달 먼저 태어나기는 했다.
물론 시엘은 진심으로 자신이 유진보다 누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유진에게 어린아이 취급받는 것이 질색이라 저러한 반발을 느끼는 것뿐이었다.
그래.
어린아이 취급은 질색이다. 똑같은 코흘리개 시절에도, 유진은 마치 어른처럼 굴면서 시엘을 어린아이처럼 대했다. 어렸을 때에는 그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ㅡ 어린아이가 아니게 된 언젠가부터는 그러한 취급이 싫었다.
‘흔들림.’
유진은 시엘의 칼끝에서 감정적인 동요를 느꼈다. 오랜만이라서 긴장했나? 아니, 그런 것에 의한 동요가 아니다.
‘욕심이군.’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아니, 인정받고 싶어서인가? 유진도 저런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벌써 먼 과거지만, 유진도 하멜일 적에는 저러한 감정에 의한 동요를 검에 담은 적이 있었다.
유진에게 있어서, 저러한 감정의 대상은 베르무트였다.
놈에게 인정받고 싶다. 놈을 놀라게 만들고 싶다.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고서 몇 년 동안은 저러한 감정이 유진을 괴롭게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감정은 유진에게- 하멜에게 필요한 감정이었다. 그 감정에 집착했기에 하멜은 강해질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베르무트가 어떻게든 뛰어넘고 싶을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베르무트는 몇 번이나 하멜을 좌절시켰지만, 동시에 하멜로 하여금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쌍둥이라서 그런가. 시안도 유진에게 저런 감정을 품었는데, 시엘도 똑같았다. 아니ㅡ 오히려 감정의 질척함과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은 시안보다, 하멜보다 더한가?
“후…….”
칼끝의 흔들림이 사라졌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칼끝이 떨리다니.
‘이래서야 어린아이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
욕심이라도 좋다. 시엘의 호흡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한 걸음 물러서 줄까.
순간적으로 들었던 생각이다.
‘안 돼.’
그러한 배려가 상대에게는 끔찍한 굴욕이 될 수도 있다. 유진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베르무트는 정말 개새끼였다. 놈이 배려랍시고 하던 짓은 하멜에게 있어서는 모두 다 굴욕이었다.
조금 더 노력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동료가 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베르무트에게서 저 말을 들었다.
그 자식 딴에는 패배감에 젖은 하멜을 위로한 것이었겠지만, 하멜은 저 말을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건방진 새끼.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저딴 말을 해?
언젠가.
반드시.
‘뭐, 결과적으로는 내게 도움이 된 말이긴 했지.’
저 말이 열 받아서, 더욱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댔으니. 사실 그건 하멜의 성격이 지랄 맞고 자존심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주었다.
다가온 걸음에 시엘은 방긋 웃었다. 미소와 동시에 검이 채찍이 되었다. 촘촘히 분열한 칼날이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유진의 목으로 날아왔다.
대련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참격은 깊었다. 하지만 유진은 시엘이 저렇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공격에 망설임은 없고, 어린아이다운 치기도 없었다.
피했던 칼날의 궤적이 바뀌었다. 참격이 다시금 유진의 목을 파고들었다.
카앙! 칼날과 칼날이 부딪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맨손이었는데, 어느새 유진은 검을 쥐고 있었다.
한 번 걷어냈지만 공세는 그치지 않았다. 칼날이 폭풍처럼 유진에게 휘몰아쳤다. 유진은 조금씩 검을 움직여서 참격을 흘려냈다.
시엘은 크게 뜬 눈으로 유진의 움직임을 보았다. 겉에서부터 조금씩 깎아내려 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격이 달라.’
그 당연한 사실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났나? 시엘도 수 싸움은 굉장히 자신이 있었지만, 유진과 검을 맞대고 있으니 간파와 예측이라는 것을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저 터무니없는 녀석은 무식해 보이면서도 모든 것을 계산하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계속 압박하다 보면 조금이라도 틈이 생길까. 그렇게 생각하며 공세를 가속시켰지만 통하지 않았다. 시엘이 한계까지 속도를 올렸음에도 유진의 검은 여전히 정교했다. 이쪽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필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파고들며 공격의 흐름을 끊어냈다.
캉, 캉, 캉.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시엘의 귓가에 맴돌았다.
공격의 흐름이 끊어진다. 몰아붙이는 리듬이 빼앗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공방은 역전되었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자벨의 낭창한 참격이 유진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이제 자벨은 더 이상 거리를 뻗어 나가지 못했다.
조금씩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고집부려 앞으로 나가거나, 제자리에서 버틴다는 것은 선택할 수가 없었다.
시엘은 유진에게서 거대한 벽을 느꼈다. 어떻게든 기어 올라가 마주 서고 싶은데ㅡ 저 거대한 벽은, 시엘이 다가오거나 기어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싫어.’
뒤따르는 것이 싫다. 올려다보는 것도 싫다. 멀리서 보는 것도 싫다.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했던 생각.
시엘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건 고작해야 대련일 뿐이다.
하지만 시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패배야 당연한 것. 시무인에서 1년 수행했다고 해서 유진을 이기거나, 작은 상처라도 입힐 수 있으리란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한 패배라고 해도, 옛날과 똑같이 패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야 어렸을 때랑 똑같잖은가.
지금 이 순간에도 걸음은 계속 뒤로 밀려나고 있다. 높고 험준한 벽은 계속 가까이 다가오며 시엘을 내려다보고 있다.
뿌득.
시엘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성적으로, 혹시라도 존재하는 승산을 찾아서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만두었다. 몰리는 순간부터. 아니, 검을 뽑은 순간부터 패배는 확정되어 있었다.
담담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패배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면.
해야 할 것은 발악뿐이다.
촤라락! 길게 늘어난 자벨이 유진의 검에 얽혔다. 그 순간에 시엘은 칼자루를 던져 버리고서 맨몸으로 유진에게 뛰어들었다.
‘뭐야?’
그 행동은 유진을 잠깐 당황하게 만들었다. 설마 시엘이 검을 던져 버리고서 맨손으로 덤벼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엘이 주로 다루는 무기는 검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라이언하트, 그 본가에서 태어난 이상 어렸을 때부터 대부분의 무기를 다룰 줄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시엘이 검 다음으로 ‘잘’ 다루는 것은 무기가 아니다.
주먹과 다리. 그것은 시엘의 스승인 카르멘 라이언하트의 영향이었다. 시엘의 격투술은 카르멘에게 직접 배운 것이며, 시엘의 주먹과 다리는 칼과 비교해도 좋을 만큼 예리했다.
꽉 쥔 주먹이 유진의 얼굴로 날아왔다. 순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주먹이 시야에 잡힌 순간에 유진도 검을 놓았다. 격투에 자신 있는 것은 시엘뿐만이 아니다. 유진도 전생부터 무기만큼 격투에 익숙했다.
쉭! 시엘의 왼쪽 주먹이 유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시엘의 오른쪽 손이 유진의 턱을 노리고서 꺾여왔다. 유진의 왼팔과 시엘의 오른팔이 부딪쳤다. 그러자 시엘은 오히려 오른팔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유진과 왼팔을 얽히게 만들었다.
퍼억! 시엘이 다시 왼쪽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것마저 유진의 오른손에 붙잡혔다. 그렇게 서로의 양손이 잡혔고, 시엘은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앞으로 밀어붙였다.
서로가 작정하고 힘 싸움을 한다면 시엘이 유진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억지로 힘으로 밀어붙였다가는 시엘이 다치게 된다.
유진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잖은가. 그래서 유진은 힘 싸움을 해주지 않고, 시엘이 밀어붙이는 대로 물러서 주었다.
몇 걸음 밀려난 순간. 시엘의 허리가 옆으로 비틀렸다. 휘두른 발길질이 유진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굵은 고목을 끊어낼 만큼 힘 있는 공격이었지만, 유진의 몸은 조금도 휘청거리지 않았다.
뻐억! 오히려 유진의 반격이 시엘의 몸을 날려 버렸다.
‘너무 세게 찼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밀어 차는 발길질은 정확하게 시엘의 배에 꽂혔다. 뒤로 날아 가버린 시엘은 낙법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연무장 바닥에 나뒹굴었다.
“커윽……!”
시엘은 배를 감싸 쥐고 신음을 흘렸다. 유진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시엘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
예전에는 이쯤 가서 대련이 끝났다. 하지만 시엘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얻어맞은 배가, 복근이 쥐어뜯기는 것처럼 아팠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처럼 아팠다.
“아악!”
시엘은 아픔에 비명을 질렀고, 울분에 고함을 질렀다. 시엘은 손으로 땅을 긁으면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콰당! 시엘과 유진의 몸이 부딪쳤다. 시엘은 양손으로 유진의 허리를 감싸고, 체중에 마나까지 활용하여 유진의 몸을 밀어냈다.
콰당! 유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시엘은 유진이 ‘일부러’ 넘어져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에 대해 많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엘은 넘어진 유진의 몸 위에 올라탔다. 일어서지 못하도록 두 다리로 유진의 허리를 감쌌고, 양 주먹은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대로 내리찍은 주먹은 유진의 양손에 가로막혔다. 유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엘을 올려다보았다.
시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주먹을 내리찍으려 했지만, 유진의 힘이 너무 강했다.
“너답지 않은데.”
유진이 말했다. 시엘은 꽉 다물고 있던 이빨을 간신히 열었다.
“나다운 것이 뭔데?”
“뭐?”
“대련하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너한테 져서, 아~ 또 져버렸네, 그따위 말을 하면서 웃는 게 나다운 거야?”
“…….”
“그러다가, 네가 뻗는 손을 잡고 일어서서. 아니면, 주저앉아 있다가 너한테 머리라도 쓰다듬어지고서. 그래도 많이 늘었다? 라는 말에 등신처럼 웃고 마는 것이 나다운 거야?”
“너 왜 그래?”
“왜 그러냐고?”
시엘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네가 아는 나는, 여전히 어린애인 것 같아.”
“시엘.”
“나는 그게 싫어.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너는 왜ㅡ 나를 어린애처럼 봐? 나랑 동갑인 주제에. 왜 나를 애새끼 취급만 하는 거야?”
“그렇게 취급한 적 없어.”
“거짓말!”
시엘이 버럭 소리 질렀다.
유진은 더 이상 시엘의 손목을 강하게 잡지 않았으나, 시엘은 양팔을 밖으로 빼내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의 손을 밀어붙이며 상체를 숙였다.
시엘의 얼굴이 유진에게 바짝 다가왔다.
“날 봐, 유진 라이언하트.”
시엘의 숨결이 가깝게 느껴졌다.
“날, 어린애로 보지 마. 그냥, 그냥 나를 봐.”
“시엘.”
유진의 눈빛이 착잡하게 변했다.
“내가 네 자존심을 상하게 했나?”
“응.”
“널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기분 나빠?”
“응.”
“그래, 알았어.”
뚜둑.
뚜두둑.
유진의 몸이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엘의 다리가 허리를 붙잡고, 체중 이상의 힘이 몸을 억누르고 있지만. 그런 것은 유진에게서 자유를 앗아가지 못했다.
유진이 완전히 일어섰음에도 시엘은 여전히 유진의 허리를 다리로 안고 있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 대만 맞아주면 안 돼?”
“싫어.”
“왜?”
“애 취급하지 말아달라며?”
돌아오는 대답에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동등한 대상으로 봐주기를 원했다. 어린애가 아닌, 그냥 여자로 봐주기를 원했다.
“알아.”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그 말에 시엘의 눈빛이 멍해졌다. 시엘은 잠시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나쁜 새끼.”
꽈앙!
시엘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유진은 축 늘어진 시엘을 일으켰다.
“우와…….”
구석에서 감탄이 들려왔다. 힐긋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돌아온 세냐와 크리스티나가 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는 내 등이 더 아픈 것 같아.”
방금 유진은 시엘의 몸을 땅에 내리 꽂아버렸다. 세냐는 그 광경을 떠올리며 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 요령이 없는 것 아닙니까? 하멜.”
아니스가 눈을 찡그리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네 말마따나 나는 요령이 없어. 하지만 방금은 대련이었고, 시엘은 제 입으로 패배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고. 그러니까…….”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것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텐데요.”
“안다니까, 알아.”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기절한 시엘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냐?”
“그걸 왜 저한테 묻는 겁니까?”
아니스는 유진을 흘겨보면서 시엘에게 손을 뻗었다. 호되게 땅에 처박히긴 했지만, 원체 몸이 튼튼한 덕인지 시엘의 부상은 크지 않았다.
“우선 올라가서 눕히도록 하죠.”
“저기 말이야, 어,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응?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 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야?”
세냐가 슬금슬금 다가오며 물었다.
“설마? 정말로? 그런 거야? 그, 남매 아니었어? 아, 어, 맞아, 양자였지 너. 아니, 그래도 되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그럼 너 말고 누구한테 물어봐 이 개자식아!”
“왜 나한테 욕을 해? 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유진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시엘이 어렸을 때부터 요망하게 굴던 것은 안다.
언젠가부터는 그 행동거지에 다른 진심이 실린 것을 느꼈다.
전생의 아니스와는 달리 시엘은 노골적이었다. 아무리 유진이 이런 쪽에 눈치가 부족했어도, 시엘의 태도와 감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니까.
가볍게 지나갈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시엘의 태도와 발언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지나가거나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엘의 감정은 유진의 생각 이상으로 진했다.
“베르무트 개새끼.”
환생한 육체. 얼굴이 좀 못생겼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유진은 여기 있지도 않은 베르무트를 원망하면서 몸을 돌렸다.
시엘 라이언하트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한 것 아니야?”
디자이라의 오늘 하루는 이른 아침부터 바빴다.
시합을 많이 치르지도 않았고, 랭킹이 낮기는 했어도 디자이라 또한 시무인에 등록된 투사다.
앞으로 나흘 후. 승리가 뻔한 시합이 예정되어 있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시합에 나가겠지만, 해적여제 토벌에 함께 가기로 한 이상 시합 일정을 조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디자이라는 이른 아침부터 카르멘과 함께 마도르 콜로세움의 주인을 만나, 예정된 시합을 취소했다.
그렇게 오후에 저택으로 돌아왔는데ㅡ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디자이라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유진을 쏘아보았다.
“시엘 님의 별명은 너도 알잖아, 백장미야, 백장미! 30번이 넘는 시합을 치르면서 단 한 번의 상처도, 심지어 흙먼지도 뒤집어쓰지 않은 고결한 백장미라고!”
“어…… 음…….”
“뭐가 음이야? 말을 제대로 해, 유진 라이언하트! 아무리 너와 시엘 님이 남매고, 대련이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고결한 백장미를 땅에 처박을 수가 있어? 그것도 등부터 쾅!”
“어…….”
“평범한 사람은 그렇게 처박으면 죽어버려. 죽는다고! 죽지 않으면 척추가 박살 나서 평생…….”
“잠깐.”
유진은 디자이라의 말을 도중에 끊고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은 전반적으로 옳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 왜 시엘한테는 님자를 붙이고 나한테는 반말이니?”
반박할 말이 궁색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했다.
“…….”
쉬지 않고 쏘아대던 디자이라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이 짧은 순간, 그녀는 어언 1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를 회고했다. 혈계식에서 처음 만났던 유진 라이언하트. 그때도 별생각 없이 반말을 했던 것 같은데……. 디자이라는 으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미안해…… 요.”
“그래.”
“하지만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고, 유진…… 님이 잘못한 것은 맞잖아요? 왜 시엘 님을 땅에 처박냐고요!”
“시엘도 그걸 바랐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또라이도 아니고 제 몸을 땅에 처박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
“후흡.”
디자이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세냐에게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냐는 아차 싶어서 급히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
디자이라는 영문을 알 수가 없다는 얼굴로 세냐를 쳐다보았다.
왜 웃는 것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현명한 세냐’라는 이름을 생각하니 쉽사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할 뿐.
-라이는 또 뭐야? 또라이의 라이인가?
세냐는 머릿속에 맴도는 말장난을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어쭙잖은 동정을 바라지 않은 것이겠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옆에는 흙먼지가 닦여 말끔해진 시엘이 쓰러져 있었다. 카르멘은 눈을 감은 시엘의 얼굴을 잠시 동안 응시했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셈이지?”
진즉에 정신은 차렸다. 이 방 안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디자이라뿐이었다.
땅에 처박히면서 입은 타박상은 크리스티나가 치료해 주었었기에, 몸에 부상도 없었다. 그러나 시엘은 몸 깊숙한 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특히 가슴 깊은 곳이 아렸다. 시엘은 그 분명한 통증에 입술 안쪽을 살짝 씹었다.
“복기를 했어요.”
시엘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몸을 일으켰다.
“별 의미는 없었지만요. 너무 일방적으로 당해 버려서, 복기해도 건질 것이 없어요.”
“나는 의미가 없다는 말을 싫어한다.”
카르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떤 패배일지라도 의미는 있다. 손쓸 도리 없이 일방적으로 당해 버렸다고 해도, 그 패배에서 무언가 의미는 찾아야 해.”
“음,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니…… 의미가 없지는 않아요.”
“무언가 깨친 것이 있나?”
“네. 맨땅일지라도 등부터 처박으면 죽을 만큼 아프단 것이요.”
시엘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어깨를 주물렀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통증도 없네요? 성녀님 덕분인가요?”
시엘과 크리스티나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시엘이 곧잘 지어 보였던 장난스러운 미소. 하지만 크리스티나, 그리고 아니스도 시엘의 표정이 거짓임을 쉽사리 간파했다. 표정과 가면은 크게 다른 것이 아니고, 유라스의 성녀는 대대로 가면을 능숙히 바꿔 쓸 줄 알아야만 했다.
“처음부터 대단한 부상은 아니었습니다.”
크리스티나도 가면을 썼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 느끼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시엘을 ‘동정’하는 표정을 지어버린다면. 저 자존심 강한 귀족 아가씨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는 것조차 동정입니다.]
아니스가 씁쓸한 투로 지적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쓰기로 한 가면을 바꾸지 않았다.
“치료는 하였습니다만, 혹 아직 불편하거나 아픈 곳이 있으십니까?”
“있기는 한데, 로게리스 성녀님의 신성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것만큼은 고칠 수 없을 거예요.”
시엘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따라 움직인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세냐를 먼저 보았다. 이윽고 소파를 떠나서, 창가 쪽에 선 디자이라를 보았다. 멍청하고 착한 디자이라는 자세한 이유도 모를 텐데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시선이 멈춘 곳은 당연히 유진의 얼굴이었다. 시엘은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카르멘 님. 죄송하지만, 방을 나가주시겠어요? 디자이라 너도.”
아끼는 제자. 항렬을 따지면 조카손주이지만, 카르멘이 시엘에게 갖는 감정은 그보다 훨씬 가까웠다. 카르멘은 시엘에게 이유를 묻지 않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아…… 네.”
디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눈치가 그리 많지 않기는 했지만, 지금의 시엘에게 질문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럼 저희도…….”
크리스티나가 뒤로 물러서며 세냐에게 눈짓을 주었다. 세냐도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느끼고서 소파에서 일어서려 했다.
“아뇨.”
그 순간이었다. 시엘의 손이 크리스티나의 손목을 붙잡았고, 또렷하게 뜬 금색 눈동자는 세냐의 얼굴을 응시했다.
“두 분은 여기 계셔야 해요.”
“네?”
“어…… 왜?”
“그래야만 하니까요.”
가슴은 욱신거리고, 감정은 흔들렸다. 하지만 시엘이 내뱉는 목소리에 그러한 동요는 없었다. 시엘은 이 상황에서 무리하고 있었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유진은 시엘이 원하는 대로 굴도록 일단은 내버려 두었다. 이 상황은 결국 유진이 자초한 것이었으며, 그는 이런 상황에서 모르는 척하고 도망칠 정도로 비겁하고 구질구질한 남자는 아니었다.
카르멘과 디자이라가 방을 나간 후. 유진은 차분한 눈으로 시엘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시엘.”
“내가 말할 거야.”
이름을 부른 순간에 시엘이 내뱉었다.
“나는, 너한테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아. 유진…… 유진 라이언하트.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러 번이 되겠지만…… 일단은 이거야.”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잘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굴고 싶지 않은데. 시엘은 여전히 욱신대는 가슴을 꾹 누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언제부터야?”
우선 그것을 물어보았다.
“언제부터 내 마음을 알았어?”
에둘러 말할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시엘은 창가에 선 유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옛날부터.”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옛날이 언제인데?”
“내가 양자가 된 직후.”
그때의 시엘은 13살이었다. 13살 소녀가 감정을 숨겨봐야 얼마나 잘 숨기겠나. 어린 시엘 딴에는 들키지 않게, 살살 장난을 치는 선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다. 육체의 나이는 똑같이 13살이었어도, 유진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그대로 있었다.
“그래?”
시엘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8년 전의 일이다. 시안과 시엘, 그리고 유진의 나이가 13살일 적. 가문의 전통인 혈계식을 끝내고, 방계인 유진은 실력을 인정받아 본가의 양자가 되었다.
어머니ㅡ 애니실라는 현명하고 계산적이었다. 애니실라는 뛰어나도 너무 뛰어난 양자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는, 자식들과 진심으로 ‘남매’가 되기를 바랐다.
양자인 유진은 절대로 가주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13살 소년이 보여준 가능성이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를 견제하겠답시고 유진을 배척하는 방법도 쓸 수는 있었겠지만, 애니실라는 그런 방법 대신에 유진과 쌍둥이 사이를 ‘정’으로 묶는 것을 선택했다.
-유진과 적이 되지는 마. 형제다운 우애를 쌓도록 하렴. 저 아이가, 네 힘이 되어줄 수 있게끔 만들어. 양자라고 업신여기지 마. 너와 동등하게 대해. 함께 놀고, 수련하며, 추억을 쌓아. 저 아이가 네게 원한을 갖게 하지 마. 그렇게…… 언젠가 저 아이가, 네게 도움을 줄 수 있게끔 만들어.
저 말은 시안에게 향한 것이었지만, 시엘도 그 뜻은 얼추 이해했다. 애당초 시엘은 저 말을 듣기 전부터 유진에게 강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명도 들어본 적 없는 시골에서 찾아온 머나먼 친척. 본가에 온 첫날에 오빠를 두들겨 패고, 방계이면서도 혈계식에서 우승한 소년. 유진은 호기심 많던 시엘이 관심을 가질 수가 없는 상대였다.
친해지고 싶다. 남매가 되었다. 가까이 다가갈 이유는 많았다. 시엘의 입장에서는 마음 편히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곁을 맴돌다가, 슬쩍 다가가서 말을 걸고, 귀찮아하는 기색을 느끼면 더욱 노골적으로 들이밀었다. 가문에서 천방지축으로 자란 시엘에게 있어, 갑작스레 생긴 남매는 모든 것이 새로운 존재였다.
ㅡ남매?
13살. 그 어린 나이에서도 저 단어에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 당시에는 위화감일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명확히 규명할 수 없던 위화감은, 사춘기가 지나면서 부정한 감정이 되었다.
남매? 남매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쌍둥이 오빠인 시안은 부모가 같다. 이복오빠인 이오드도 혈관에 흐르는 피의 반은 같다.
하지만 유진은? ‘남’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시엘이 바란 것은 남매가 아닌 ‘남’이었다.
시엘 라이언하트. 그녀 자신이 유진을 그렇게 여겼듯, 유진 또한 그리 여겨주길 바랐다.
“그렇게 옛날부터 알았으면서.”
시엘은 여전히 가면을 유지했다. 가면 안쪽의 맨얼굴을, 뒤흔들리는 감정을 아직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 나를…… 아니, 아니야. 이건 너무 뻔한 질문이지?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아, 유진. 모를 리가 없잖아. 내가 어찌 굴건, 너는ㅡ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똑같이 대하니까.”
“시엘.”
“알고 있단 말이야. 너는 나를 어린아이로 여겨. 네 눈의 나는 언제나 13살의,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요망한 줄 아는 애새끼일 테지.”
아직은 안 돼. 시엘은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다른…… 것을 물어볼래. 아주 다르지는 않아. 질문 자체는 똑같거든. 유진, 언제부터야?”
“…….”
“언제부터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와 연애 관계였어?”
“시엘.”
“설마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은 아니겠지? 너희…… 아하하, 아니, 아니지. 당신들.”
가슴의 욱신거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아픈 것에 그치지 않고 뜨거웠다. 마치 몸 안에 활활 타오르는 불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불은 뜨거운 열기로 시엘의 가슴을 태우고, 지독한 연기를 말로 바꾸어 입술 밖으로 내뱉어 보라 속삭였다.
“언제부터야?”
“시엘 님.”
크리스티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도, 그리고 아니스도. 유진과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세냐의 자비와 이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두 성녀는 하멜이ㅡ 유진이 자신들을 사랑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만약 세냐가 정면에서 그것을 거절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녀들이 평소 세냐에게 심술궂은 말과 미소를 곧잘 던지긴 했지만, 그것은 둘에게 있어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상대가 세냐라면, 그렇게 해도 된다. 세냐라면 이해해 줄 것이다. 이미 300년 전에 세냐와 이야기가 된 사실이기도 하니까. 그런 것이라도 없다면ㅡ 일방적으로 세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잖은가.
하지만 상대는 그 세냐 메르데인이 아니다. 21살의, 시엘 라이언하트다. 세냐는 성녀들을 머리 둘 달린 뱀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진짜로 머리 둘 달린 뱀은 아니었다.
“얼마 안 됐어.”
유진은 성녀들이 대답하게 두지 않았다. 그는 시엘의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전부터 감정의 전조는 있었지. 내가 병신이라 잘 느끼지 못했지만.”
“하.”
시엘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응, 그래, 알고 있었어. 너…… 아니, 당신들은 아주, 노골적이었으니 말이야. 그렇잖아요? 로게리스 성녀. 라이언하트에 식솔로 왔을 때부터 당신은…… 유진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봤죠.”
“시엘 님…….”
“그건 이해할 수 있어. 성녀와 용사, 상상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누가 먼저였어?
누가 먼저 사랑한 거야?
누가 먼저 고백했어?
누가 먼저…….
시엘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멋대로 튀어나오려는 질문, 돌아올 대답이 너무나 두려웠다. 몸 안에서 활활 타는 불꽃, 이미 타버릴 대로 타서 재만 남았을 텐데…….
“하지만 이건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시엘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체로 내뱉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 당신은, 괜찮아. 하지만…… 현명한 세냐 님. 세냐 님은, 대체 뭐예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시엘은 이것을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세냐 님은…… 안 되잖아요. 네? 그렇지 않아요? 우리랑 시대가 너무 다르잖아요. 세냐 님도 그러한 자각이 있지 않아요? 이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요.”
“어…… 어어…….”
세냐는 크리스티나나 아니스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시엘의 심문이 시작된 순간부터 가시방석 위에 앉은 것처럼 모든 것이 불편하고 괴로웠다. 세냐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냐 님이…… 현명하다는 이명까지 가진 세냐 님이, 이럴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예요. 그리고 세냐 님은, 우둔한 하멜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고, 고백은 하멜이 했…….”
“하지만 세냐 님도 같은 감정을 품으셨잖아요? 동화책이 실제 역사와 다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안 돼……. 절대, 절대로 안 돼.”
“안 될 것은 뭐야.”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람 감정에 절대라는 것은 없어, 시엘.”
“네가 그런 말을 해?!”
시엘은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감정에 절대가 없다고? 날 무조건 어린애로 취급하던 네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유진이 뭐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시엘은 홱 손을 뻗어 유진의 말을 가로막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대답이 두려웠다.
“언제부터야?”
그래서 다시 똑같은 것을 물어보았다.
“세냐 님과는 언제부터 그랬어? 응? 네가 사마르에 처음 갔을 때?”
“…….”
“왜 대답을 안 해? 그래, 강요는 안 할게.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볼게. 누가 먼저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하하, 하하하!”
누가 먼저였어?
누가 먼저 사랑한 거야?
누가 먼저 고백했어?
누가 먼저.
“로게리스 성녀와 세냐 님. 둘 중 누가 먼저야?”
그 질문은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이 지나갔다. 시엘은 그 침묵 속에서 홀로 낄낄대며 웃었다.
“유진. 너를 비난하거나 그럴 생각은 없어. 사실, 이상한 것은 내 쪽일 거야. 그렇지? 우리는…… 우리는 남매니까. 하지만 말이야. 응? 그때 우리는 13살이었어. 무슨 말인지 알아? 너랑 나는! 남매보다, 남이었던 시간이 더 길단 말이야.”
시엘은 더 이상 입을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
“누가 먼저냐고?”
가면을 쓰고 있을 수도 없었다. 시엘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쩔 줄 몰라 하던 크리스티나가 손을 뻗었지만, 시엘은 사나운 손길로 뿌리쳤다.
“나야.”
눈앞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로게리스 성녀도, 세냐 님도 아니야. 바로 나란 말이야. 유진, 유진 라이언하트. 널 가장 먼저 본 것은 나야.”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몸 안을 활활 태우던 불이 두 눈에서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내가 먼저, 가장 먼저. 널 좋아했어. 네가 애새끼라 취급하던 내가! 가장 먼저, 너를 좋아했다고.”
“…….”
“그런데 왜?”
시엘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왔다.
“왜 나는 안 돼? 왜 나는 애새끼 취급만 해? 왜 나는 네게 여자가 될 수 없는 거야? 내가, 내가 대체 뭐가 부족했던 건데?”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시간이 부족했다는 개소리는 제발 하지 마. 나는 널 어렸을 때부터 봤어. 네가, 날 어렸을 때부터 봤듯이! 나도 널 어렸을 때부터 봤단 말이야. 너는 나한테 어린애가 아니게 되었는데, 왜 너는 나를 어린애로 보는 거야?”
스스로가 비참했다.
“대체 내가…… 뭐가 부족했던 건지 모르겠어. 내가 못생겼어? 매력이 없어? 성격이 개 같아서 그래? 만약 그런 것이라면, 나는, 나는 고칠 수 있어.”
“그런 것이 아냐.”
“아니면 대체 뭐냐고! 대체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시엘은 울면서 외쳤다.
주변의 시선은 더 이상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이후에 대체 어떤 감정을 갖고 어떤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볼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시엘은 양손을 뻗어 유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누구보다 먼저 널 봤다고 했잖아. 누구보다 먼저, 널 좋아했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나는…….”
“그건 아니야.”
시엘이 흘리는 눈물이 너무나 선명했다. 뺨을 타고 턱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무겁게 느껴졌다. 어깨를 붙잡은, 양손의 떨림이 유진의 가슴을 흔들었다.
“날 먼저 보고, 좋아한 것은 네가 아니야.”
“그게 무슨 말…….”
“나는 네가 아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니야.”
오열하는 시엘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하멜이야.”
“……뭐?”
“하멜, 하멜 다이너스. 300년 전에 뒈진 하멜의 환생이 나라고.”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시엘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납득할 수밖에 없겠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슴이 아프고 쓰리고, 꽉 막혔지만. 이 대답이 시엘을 납득시키고, 물러서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
“뭐…….”
파들파들 떨리던 시엘의 입술이 열렸다.
“뭐 어쩌라는 거야?”
시엘 라이언하트
깔끔하게 물러서는 것도 방법이기는 할 것이다. 이 감정은 결국 13살 소녀가 품었던 것이고, 세상에는 이런 말도 있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 위안하면서 물러설 수도 있다. 시엘은 더 이상 자신이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
나이를 먹는다는 것,
많은 것을 겪고, 알게 되는 것,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
13살 때 품었던 감정이란 결국 얼마나 자그마한 것인지를 깨달아 버려서.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 위안하면.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라고 생각해 버리면.
내 첫사랑이고,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좋은 감정을 쌓아버리면.
이런 것을 승리와 패배로 나누고 싶지 않지만.
굳이 나누어서, 패배를 인정해 버리면.
아직 젊고…… 세상은 넓고…… 그러니까, 언젠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시엘 라이언하트는 그딴 것은 바라지 않는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뭐 어쩌라는 건가. 세상 누군가는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법이라는 뻔하고 하찮은 말을 읊조리며 씁쓸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3살 때 품었던 감정이 자그마한 감정이라 대체 누가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길다는 것이 뭐 어쨌다는 건가?
오히려 더욱 긴 시간을 살아가야 하기에 지금의 감정을 포기 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것을 겪고, 알게 되었기에 지금의 감정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는 만큼 감정이 쌓였다. 어른이 되어버렸기에, 아이 때부터 품은 감정에 절실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다는 위안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쌓였던 감정은 시엘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은 인연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첫사랑? 상대가 나를 좋아해 주지, 아니, 사랑해 주지 않는 것? 나 대신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패배?
시엘은 울면서 이를 악물었다. 승리와 패배라니? 다른 무엇보다, 시엘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시엘 라이언하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싸워보기는커녕 유진과 제대로 마주 선 적도 없었다.
시엘이 아직 젊은 것은 맞다. 세상이 넓은 것도 많다. 하지만, 시엘은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앞으로 수십 수백 년을 살 건, 지금만큼 순수하며 절실한 감정은 품지 못할 것임을.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13살 어린 소녀의 첫사랑보다 나은 누군가를 만날 수 없을 것임을.
도도한 척 굴고, 장난을 치고, 요망한 척 웃음을 흘리는 것은 지금 같은 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았다. 순수하고 절실하다면 그만큼 필사적이어야 했다.
제발 나를 봐달라고,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구질구질하고 추할지라도 울면서 매달려야 한다.
구질구질하고 추하다고?
아니, 전혀.
시엘은 자신이 쏟아내는 눈물에도, 목 놓아 서럽게 부르짖는 애걸에도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체면 따위를 차릴 생각도 없고, 마냥 예쁘게 실실 웃어대며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진흙탕에 구르며 발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했다.
“뭐 어쩌라는 거야?”
그런데 뭐라고?
“환생?”
유진이 그 말을 내뱉은 후. 시엘이 반응할 때까지의 침묵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몇 초. 하지만 모두의 머릿속에서는 그것보다 긴 시간이 흘렀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그리고 세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들은 시엘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저 라이언하트의 아가씨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도도하며, 짓궂은 장난기의 소유자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시엘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하는 것. 왜, 나는 안 되는 것이냐며 애걸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지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데…… 여기서 환생을 밝힌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쭉 보아온 시엘에게?
‘오히려…….’
세냐는 꿀꺽 침을 삼키며 유진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그녀는 시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여기서 환생을 밝히는 것은 제법 좋은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냐는 저 어린 아가씨의 오열 섞인 애걸이 가슴 아프고 듣기 괴로웠다. 너무 안타깝고 가여웠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했던 상대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남매가 아닌 300년 전 인물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저 아가씨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것만큼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거짓말도 아니잖은가?
“네가 하멜의 환생이라고?”
이 방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체감한 것은 당연히 시엘이었다.
하멜의 환생. 그 말을 들은 순간, 시엘의 머릿속에서는 13살 때부터의 기억이 연결되었다.
쉽사리 믿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시엘은 저 말이 거짓말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환생’했다는 것을 전제로 까는 것만으로도 유진에 대한 수많은 의문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고.”
시엘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내뱉었다.
의심은 하지 않는다. 13살부터 8년을 알고 지낸 유진 라이언하트는, 300년 전의 영웅인 하멜의 환생이다.
“네가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아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니게 되는 거야?”
울면서 묻는 말에 유진의 표정이 멍해졌다. 시엘은 여전히 손목을 잡은 유진의 손을 뿌리치면서 헐떡였다.
“아니잖아. 네가 환생했건 말건, 너는, 유진 라이언하트야. 너는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을 갖고서 나를 만났어.”
“그건…….”
“널 먼저 보고 좋아한 것이 내가 아니라고 했지. 아니ㅡ,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왜냐면, 나한테 너는 하멜이 아니라 유진이니까.”
억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엘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유진을 만나지도 않은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시엘 라이언하트는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야만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니, ‘시엘 라이언하트’라는 인간의 평생에서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이 바로 눈앞의 남자였다.
“그러니까…….”
시엘은 다시 유진의 어깨를 잡았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울음과 함께 내뱉은 모든 말들을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완전히 타서 재만 남은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나를…….”
거기서 한 번.
시엘은 머뭇거렸다.
“…….”
굴욕?
“나도…… 봐줘.”
아니다.
시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유진은 지금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에게 있어서 시엘은ㅡ 남매라는 감각과는 조금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꼬마였다. 예전부터 보아온 꼬마.
그 꼬마가, 자신을 더 이상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아달라며 울고 있다.
“나는…….”
시엘은 고개를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어릴 때부터 유진은 어딘지 모를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아니, 시선뿐만이 아니라 유진이라는 사람 자체가 멀게 느껴졌다. 왜 항상 동갑내기 남매를 어린아이 취급하였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여기에 있어.”
유진 라이언하트는 300년 전의 과거를 보고 있다. 그때부터 이어진 인연을 우선하고 있다.
“나도, 너와 함께 여기에 있다고.”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그리 예쁘지 않았다. 너무 울어버렸고, 숨을 헐떡거린 탓에 목소리는 쉬었고 갈라졌다.
“비겁해.”
시엘은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를 일그러트리며 억지로 웃었다.
“현재에서…… 도망치지 마,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전생에 하멜이어도, 지금은…… 유진이잖아.”
“…….”
“네가 한 말은…… 나에게는 너무 비겁하고 잔인하게만 들려. 결국, 너는 내 감정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않았잖아.”
유진은 눈을 감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미는 감정이 한숨으로 새어 나왔다. 한숨이 되지 못하고 잔류한 감정이 혀를 짓눌렀다.
여기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입을 닥치고 시선을 피하는 것은, 정말로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유진은 감았던 눈을 떴다.
쉽사리 목소리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ㅡ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와, 울음이 선명한 눈시울 때문이었다.
시엘이 건넨 말은 높낮이는 모두 달랐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실렸던 감정은 언제나 무거웠다. 아니, 날카로웠다. 말에 얻어맞는 것이 아니라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
“너를 그렇게 본 적이 없어.”
시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나를 그렇게 보았던 것은 눈치챘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어. 현재에서…… 도망치지 말라니. 시엘, 오히려 그것이 나한테는 굉장히 잔인한 말이야.”
시엘의 어깨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왜냐면, 전생의 나는 병신이었거든. 병신처럼…… 죽어버렸다고. 그것으로 끝나면 모를까, 환생을 해버렸지. 왜 내가 환생했는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내가 환생을 하고…… 지금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뭘 생각했는지 알아?”
유진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X같더라.”
“…….”
“하멜로 뒈졌을 때. 나름 미련을 청산하고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더라. 병신 같던 나는 그냥 도망쳤던 거였어. 내가 할 수 없게 된 것들에 대해서 이기적으로 도망친 거였다고. 그, 병신에게 다시 삶이 주어진 거야. 과거에 도망쳤던 내가…… 어떻게 과거를 외면할 수 있겠냐?”
시엘은 흐르는 눈물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이 대답도 네게는 비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새끼야. 네 말대로…… 지금의 나는 유진이야. 그러나 동시에 하멜이기도 해. 그런 나라서, 너와 같은 감정은 가질 수가 없었다고.”
“난…… 상관없어.”
기껏 닦아낸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여태까지, 그랬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오늘, 지금부터라도. 아니, 내일부터라도. 앞으로라도…….”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시엘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모조리 쏟아내면서 텅 비었던 가슴이 산산조각 났다. 어떻게든 참으려 했지만, 토해내는 울음을 가로막기에는 시엘의 손은 너무나 작았다.
“아아…… 아아아…….”
대체 왜?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왜 가장 갖고 싶은 것은 가질 수가 없는 것일까. 필사적으로 발악했는데, 왜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가 없는 것일까.
“아…… 우으…… 으아아앙…….”
여기서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 더 추하게 매달려야 할까?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혼란스럽고 슬프기만 했다. 스스로가 너무 비참했다.
훌쩍.
목 놓아 우는 시엘을 보던 세냐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세냐는 어떻게든 눈물을 참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른 생각을 하려 했지만, 이미 터져 버린 눈물샘은 전설적인 대마법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울기 시작한 것은 세냐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이미 한참 전부터 유진의 망토 안은 눈물바다였다.
라이미르아는 눈가를 연신 문질러대며 엉엉 울어댔고, 메르는 어떻게든 우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옷자락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사…… 상관없어.”
시엘은 또다시 그렇게 말했다. 이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그렇게 본 적이 없어도. 나랑 같은 감정을 품지 않아도, 나는, 나는 아무 상관 없어.”
각오는 진즉부터 하고 있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를 싫어하지는…… 마…….”
시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싫어하다니? 설마 저런 말이 나올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기에, 유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야, 잠깐, 시엘, 그게 대체 무슨…….”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직!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갑작스러운 소리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로게리스 성녀?”
크리스티나의 발밑.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 박살 난 것이 보였다.
투둑, 투두둑! 크리스티나가 걸을 때마다 신발 바닥에 달라붙은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깊고 선명하게 남긴 발자국에서 떠난 크리스티나가 성큼거리며 시엘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뭐…….”
시엘 또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철썩! 매섭게 후려친 따귀가 시엘의 얼굴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그 광경에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 유진은 기겁하면서 크리스티나를 붙잡았다.
“왜 애를 때리고 그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
“유진 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왜 애를 때리고 그…….”
간파한 살의에 몸이 절로 반응했다. 쐐액! 매서운 따귀가 유진의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렀다.
“피해?”
“잠깐…….”
“피하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인지 아니스인지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누구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건, 저런 말을 듣고서 피해 버린다면 후환이 더욱 두려웠다.
쫘악! 한 번 더 휘둘러 친 따귀가 유진의 머리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시엘 아가씨는 얘가 아닙니다.”
크리스티나는 섬뜩한 안광을 빛내며 내뱉었다.
[신이시여…….]
소리죽여 울던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그리고 시엘 아가씨.”
크리스티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얼얼한 뺨을 붙잡고 있던 시엘은 훌쩍거리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어이가 없어서 크리스티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지금 자신이 뺨을 맞은 것인지. 시엘은 그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시엘.”
크리스티나는 조용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시엘에게 다가갔다.
“당신 지금 대체 뭘 하는 겁니까?”
“뭐…… 뭘 하냐니…….”
“당신은 저를 모욕했습니다.”
모욕? 시엘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변명이나 반박은 들을 생각도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시엘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무도한 오만, 그에서 비롯된 모욕이지요. 또한 당신은 저를 무시했습니다. 당신은 과거의 하멜 님이 아닌 지금의 유진 님을 사랑하는 것이 오직 자신뿐이라는 듯이 굴었습니다.”
“그건…….”
“그게 저에 대한 모욕이자 무시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내가……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어? 로게리스 성녀, 당신도 결국은 유진이 아닌 용사를 보고 있는 것 아냐? 게다가 보아하니 당신은 유진이 환생했다는…….”
이번에도 시엘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번개처럼 빠르고 날카로운 따귀가 아까 맞은 곳과는 다른 뺨을 후려쳤다.
“틀린 말입니다. 반박할 가치도 없다 생각하지만, 시엘, 당신은 지금 너무 울어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니 제가 확실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유진 님이 성녀가 아닌 저를 보아주셨기에, 저 또한 용사가 아닌 유진 님을 보고 있습니다. 환생? 저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는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를 사랑합니다.”
“내가 뭘…… 뭘 잘못해서 당신한테 맞아야 하는 거야?!”
가뜩이나 서글픈데 따귀도 2대나 맞아버렸다. 시엘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크리스티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래, 내가 당신을 모욕하고, 무시하고 있던 것은 인정하겠어.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맞을 이유는 없어……! 내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유진을 알았어. 내가 먼저……!”
“보고만 있던 것은 당신입니다.”
크리스티나가 코웃음을 치며 이죽댔다.
“예, 당신은 ‘유진 라이언하트’를 어렸을 때부터 보았지요. 하지만 그것뿐이잖습니까?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아달라더니, 정작 지금 당신은 어린아이처럼 울고 불며 떼를 쓰고 있지요. 멍청하게도.”
“로게리스 성녀……!”
“물론 저는 자애로워야 하는 성녀이기에, 당신의 바람을 무시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바란 대로, 어린아이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크리스티나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그러니 같은 어른으로서 당신을 비웃는 겁니다. 세냐 님이 봉인된 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제가 유진 님과 처음 만나기 전까지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언젠가, 나중에,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감정을 뒤로 미뤄댔겠죠. 아아, 그렇군요, 시엘, 당신은 결국 두려웠던 겁니다. 섣불리 마음을 전했다가, ‘남매’라는 유대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한 것이죠.”
시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크리스티나는 눈물로 얼룩진 시엘의 눈을 마주 보며 속삭였다.
“무엇이 부족했냐고요? 당신은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서 울며 매달리게 된 겁니다. 당신이 오만한 겁쟁이였기에 유진 님을 빼앗긴 겁니다.”
그 말에 시엘의 이성이 뚝 끊어졌다. 철썩! 자신도 모르게 휘두른 손이 크리스티나의 따귀를 갈겼다.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크리스티나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이미 크리스티나는 시엘의 따귀를 갈긴 순간부터 몸에 빛의 가호를 두르고 있었다.
“이…… 이……!”
“왜 그러십니까? 분하십니까?”
분하냐고? 당연히 분했다.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더더욱 분한 것은, 크리스티나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시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래서 포기할 겁니까?”
“닥…… 닥쳐……!”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비웃음이 사라졌다. 싸늘하던 목소리에도 온기가 깃들었다.
오늘 이 방에서 시엘이 내뱉었던 말들에 누구보다 가장 깊이 공감한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과거에 지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
“지금 이곳에 있는 날 봐달라고, 그 마음에 간절한 것이지요?”
“…….”
“그의 곁에 누가 있건, 함께 머무르고 싶은 것이지요?”
시엘은 더 이상 크리스티나의 멱살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다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당연…… 하잖아…….”
“정녕 그런 것이라면, 싫어하지 말아달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크리스티나가 시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연달아 맞은 매서운 따귀를 떠올린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방금처럼 따귀는 날아오지 않았다.
“사랑하게 만드는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보란 듯이 시엘의 눈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싫어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로게리스 성녀……?”
“틀렸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
“뭐……?”
“언니라고 부르십시오, 시엘.”
크리스티나는 쥐었던 주먹을 펴더니, 그 손으로 시엘을 일으켜 세웠다.
“제 방으로 갑시다.”
“왜……?”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크리스티나는 시엘의 대답을 듣지 않고 강제로 잡아끌었다. 성직자답지 않은 강건한 힘에, 시엘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비틀비틀 끌려갔다.
시엘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녀가 불쌍해서 훌쩍훌쩍 울던 세냐. 갑작스레 이어지는 따귀 소리와 매몰찬 비난에 덩달아 겁을 먹어버린 세냐.
그녀는 시엘과 크리스티나를 따라 나가기 위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세냐 님은 오지 마십시오.”
“어……? 왜?”
“세냐 님은 유진 님과 전생부터 알고 지내셨잖습니까.”
째릿 쏘아진 시선.
그럼 아니스는?
세냐는 그렇게 내뱉고 싶었지만, 이 시대 성녀의 살벌한 눈초리는 300년 동안 살아온 전설적인 대마법사를 얌전히 자리에 앉게 만들었다.
시엘 라이언하트
문밖에 엿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라면 모를까, 카르멘과 디자이라는 남의 방을 엿들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상식의 소유자였다.
문밖을 확인한 크리스티나가 팔을 당겼다. 시엘은 아직까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평생 흘린 눈물보다 방금 수십 분 동안 흘린 눈물이 더 많았다. 흑사자 기사단과 카르멘의 지독한 훈련보다 방금 지나간 수십 분이 힘들고 괴로웠다,
평생 따귀를 맞아본 적이 없는데, 방금 전에 따귀를 2대나 맞았다.
그 모든 사실들이 시엘을 비틀비틀 걷게 만들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부축 따위는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부축하기 위해 일어선 유진을 사나운 시선으로 쏘아 보았다.
“방에 계십시오.”
“아니…… 그럴 수는…….”
“지금 시엘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닌 이해입니다. 그리고 장담컨대, 이곳에서 시엘을 가장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저입니다.”
300년 전 하멜의 환생인 유진. 그는 과거를 외면할 수 없다. 먼 옛날부터 살아온 세냐는 지금 시대에서 태어나 살아온 시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다르다. 비록 그녀의 몸에 아니스가 깃들기는 했으나, 크리스티나는 이 시대에 태어나고 살아온 인물이었다.
[크리스티나. 저 아이에게 제 존재를 밝힐 셈입니까?]
‘예, 시스터. 혹시 문제가 되리라 여기십니까?’
[설마요. 하멜이 제 환생을 밝혔는데, 이제 와서 제가 처녀귀신이 되어 당신에게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숨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니스는 감정을 가다듬고서 혀를 찼다.
[시엘이 누구에게 떠들고 다닐 만큼 입이 가벼운 아이도 아니고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는 겁니까?]
‘시스터에게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서 제멋대로 행동해 버렸기에.’
[맙소사, 크리스티나, 그것에 대해 당신이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당신이 이렇게 행동해 준 것이 무척이나 기특하고 즐겁습니다.]
아니스는 한 점의 거짓 없이 말해주었다.
마경을 떠돌며 온갖 고생을 했다. 슬퍼하며 눈물 흘릴 일은 셀 수 없이 많이 보아왔다. 아니스가 살아온 평생은, 솔직히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 비통하고 괴로운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 삶을 살았다 해서 감정이 마모되지는 않았다. 마경에서는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즐거운 일도 많았으며, 동료들과 보낸 십수 년은 성녀일 뿐이던 아니스 슬리우드를 한 명의 인간으로 만들었다.
[크리스티나. 당신의 존재는…… 제가 그러하듯 초대 성황에게서 비롯된 것. 성녀란 결국, 인격보다는 가치와 능력이 우선되는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구에서 벗어났습니다. 제가 구원받았듯, 당신도 구원을 받았지요.]
‘…….’
[당신이 시엘을 가엾게 여긴 것. 동정심, 그것은 결코 부정한 감정이 아닙니다. 동정하기에 손을 뻗을 수 있으며, 구원은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제가 옳은 일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손을 뻗…….]
아니스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으흠…… 따귀를 날리지 않았다면, 시엘은 계속해서 울다 절망하고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따귀를 날리고, 시엘을 억지로 일으켰기에 그녀는 절망스러운 감정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겁니다.]
‘제가 유진 님의 역할을 빼앗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맙소사 크리스티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방금 상황에서 하멜이 시엘의 따귀를 갈겼다면 모든 것이 끝장났을 겁니다. 크리스티나, 방금 시엘의 따귀를 때릴 수 있던 것은 오직 당신뿐이었습니다. 세냐 그 멍청한 계집애는 시엘에 대한 괜스러운 죄책감 때문에 혼자 울어댔고, 저도 뭐…… 으흠.]
소리죽여 울던 것은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괜스러운 죄책감이라 비하하듯 말하기는 했지만, 아니스도 그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그만큼 엉엉 울며 오열하는 시엘의 감정은 무겁고 거대했다.
문은 진즉에 닫혔다. 유진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방안을 빙빙 맴돌았다. 억지로 따라가야 하지 않았을까? 시엘과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나?
“정신 사나우니까 좀 앉아.”
세냐가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물론 유진은 세냐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너무 등신같이 군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애매하게 여지를 두느니, 단호하게 구는 편이 시엘을 위한 것일 테니.
“안 되겠어.”
마음을 다시 먹고,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둘을 쫓아서……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으로 향했다.
“어딜 가?”
세냐가 내뱉었다. 파앗! 멀쩡하던 문이 마법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던 유진은, 눈썹을 왈칵 찡그리며 세냐를 돌아보았다.
“뭐 하는 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뭐 하는 건데?”
“뭘 하기는, 내 문제를 해결…….”
“네 문제?”
세냐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한순간에 방의 온도가 영하까지 떨어졌다. 떠도는 냉기에 호흡이 얼어붙었다.
유진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는 거야?”
“이건 네 문제가 아니야, 유진 라이언하트.”
세냐는 보란 듯이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우리’의 문제야.”
“그 뭔…….”
“네가 300년 전에 병신같이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았으면 이런 일은 안 벌어졌을 거 아냐?”
“아니…… 그…….”
“그래서 우리의 문제라는 거야. 나와 아니스는 네가 그렇게 병신같이 뒈지는 것을 막지 못했잖아. 어쩌면, 어쩌면 네가 죽지만 않았으면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멸망의 마왕까지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랬다면 베르무트가 뭔지도 모를 약속을 맺을 필요도 없이, 완벽하게 세상을 구할 수 있었을 거야.”
그게 말이 되냐?
말이 목젖까지 치솟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돌이켜 보면, 그때 하멜이 죽지 않았어도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는 패배했을 것이다. 시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몸 상태로 전투에 임해봐야 방해만 되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암실에서 베르무트의 환영이 말했었다. 하멜이 죽지 않고, 함께 바벨의 정상에 올랐으면 마왕과 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뭔지도 모를 베르무트의 계획이 망가진 이유가 바로 하멜의 죽음ㅡ 자살 때문이라는 것은 유진도 알고 있다. 세냐도 알고 있다. 그래서 유진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네가 죽지 않았다면ㅡ 으흠, 굉장히 희망적인 말이지만, 모든 것이 다 잘되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너…… 너랑 내가…… 어…….”
세냐 님, 용기를 내세요. 애니실라님 앞에서 그런 짓까지 한 주제에, 지금 와서 체면을 신경 쓰며 부끄러워하는 것인가요?
머뭇거리는 세냐에게 메르의 의지가 전해졌다. 오히려 그 말이 세냐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다…… 다 잘되었을지도 모르지!”
너랑 내가 진즉에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살아서 어쩌고저쩌고.
목소리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세냐의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혹한이 감돌던 방 안 온도도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뭐…… 네가 죽기는 했어도, 나와 아니스…… 모론이 더 강했다면,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도 있었겠지. 그렇게 나름대로 잘 끝냈다면, 환생까지 한 너도 복잡한 생각 없이 편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고.”
“300년 전에 그렇게 끝났다면 내가 환생하지도 않았겠지.”
“그건 아닐걸.”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세상을 구했어도 네가 없는 것은 싫어.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다른 녀석들도 똑같았을 거야. 모든 존재는 죽고 다시 태어나 윤회한다고들 하잖아.”
“전생의 기억은 없었겠지.”
“너 자꾸 말꼬리 잡을래? 짜식이 성격이 삐딱해서 말이야. 어쨌든, 이번 일은 너만의 문제가 아니란 거야. 아주…… 아주 복합적인 인과가 얽힌 문제라고.”
세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멜이 죽지 않았다면 유진으로 환생하지도 않았을 거고, 시엘이 유진을 좋아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설령 하멜로 환생했다 해도, 마왕을 모두 죽여놨다면? 아니스가 천사가 되는 일 없이 성불하고, 세냐가 300년 전에 죽었다면ㅡ
“윽…….”
그리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만약 저렇게 되었다면. 유진도 시엘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잘난 탓이지.’
너무 잘나서 300년이 지났는데도 죽지 않았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났는데도 살아남았다. 거기에 미모까지 뛰어나고 성격 또한 완벽하니, 어지간한 여자는 유진의 눈에 들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에서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완벽하게 예외적인 존재였다…….
“나는…… 음, 괜찮아.”
“뜬금없이 뭐가 괜찮다는 거냐.”
“네가 시엘 걔를 옆에 둬도 괜찮다는 거야.”
애니실라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리기도 했다.
“제정신이냐?”
세냐는 진심으로 한 말이지만, 유진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곁에 둬도 괜찮다니?
“시엘이 뭔 물건도 아니고!”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거든? 그냥, 내 생각해서 억지로 밀어낼 필요는 없다는 거야.”
“억지로 밀어내는 것 아냐. 나한테 걔는 어…… 음, 가족 같은…… 아니, 가족 맞지.”
“부모는 다르잖아.”
“꼭 부모가 같아야 가족이냐? 평생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걔한테 뭐 거짓말이라도 하라는 거야?”
“그럴 필요는 없지. 밀어내지 말라는 거지.”
“내가 언제 밀어냈어? 그냥…….”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시엘은 좋아한다. 다만, 이 감정은 연애적인 감정은 결코 아니었다. 시엘이 필사적으로 그런 감정을 갈구했지만, 유진은 도저히 그래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확실하게 거절한 것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내가 그렸던 행복에는 무조건 네가 있어야 해. 다른 몇 명이 함께한들, 유진 너만 확실하게 내 옆에 있으면 괜찮아. 그러니까, 거기 서 있지 말고 옆에 앉아.”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세냐는 배시시 웃으며 유진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크리스티나 걔 따귀 잘 때리더라. 그래도 아직 부족해, 아니스의 그 손맛이 안 나.”
“맞은 건 난데 왜 네가 손맛을 운운하냐.”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크리스티나 걔 조금 무섭지 않아? 요즘 들어서는 아니스보다 걔가 더 무서워. 방긋방긋 웃으면서 사람 가슴을 칼로 푹푹 쑤시는 것이……. 에휴, 말해 뭐 하니? 너한테는 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여우처럼 구는데.”
“크흠…….”
“크리스티나 말이야, 시엘 데리고 가서 뭘 하려는 걸까? 설마 무릎 꿇려놓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닐까? 엎드려 뻗치게 해서 매타작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세냐 너는 크리스티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가 몰라서 그래, 원래 크리스티나처럼 내숭 떠는 애들이 자기보다 나이 어리고 약한 애들한테는 귀신처럼 굴어. 실제로 크리스티나한테는 귀신이 붙어 있잖아!”
“나이 많은 너한테도 귀신처럼 굴…….”
나이? 그 말이 나온 순간, 세냐가 유진의 허벅지를 후려쳤다.
맞을 만했다. 유진은 피하지 않고 겸허히 맞아주었다.
* * *
시엘은 무릎을 꿇지도, 엎드려 뻗치지도 않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은은한 불빛이 켜진 방. 소파에 앉은 시엘은 멍하게 뜬 눈을 깜빡거리지도 못하고, 맞은편의 크리스티나를 응시했다.
“로게리…….”
“언니.”
“어…… 언니의 안에, 그러니까, 신실한 아니스 님이 깃들어 계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아니스 슬리우드입니다.”
의식이 바뀌었다. 아니스는 시엘을 향해 방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목소리의 높낮이. 미묘하게 달라진 억양. 다른 무엇보다, 미소의 형태가 조금 바뀌었다. 사실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의 차이는 아니었으나, 정체를 알고서 주의 깊게 살피면 조금은 구분이 가능했다.
“말도 안 돼…….”
“300년 전 인물 중 2명이 죽지 않고 살아 있지요.”
현명한 세냐와 용감한 모론.
“죽은 인물은 환생했고.”
우둔한 하멜.
“이제 와서 귀신을 부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히려 그런 존재가 흔할 텐데요.”
“하지만…… 귀신 같은 존재는 언데드잖아요? 성녀이신 아니스 님이…….”
“아하하, 귀신은 비유를 든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저는 죽어서 귀신이 된 것은 아닙니다. 천사가 되었죠.”
“천사……?”
“네. 빛께서 저를 가엾게 여기신 덕분에.”
아니스는 쓸쓸히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시엘 라이언하트. 부디 제 존재로 인해 크리스티나의 진심은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
“크리스티나와 하멜…… 아니, 유진의 첫 만남은…… 운명, 필연이었습니다. 성녀와 용사는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크리스티나는 제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고, 유진 또한 크리스티나의 안에 제가 깃들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두 분의 외모는 굉장히 닮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엘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울고, 문질러서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아니스를 똑바로 보았다.
“로게리스 성녀에게 그런 의식이 없었을지라도, 유진은 아니겠죠.”
“언니라 부를 생각은 없나 보군요?”
“…….”
“흠…… 당신의 말은 부정할 수 없군요. 하멜…… 아하하, 이해해 주세요. 저는 그를 하멜이라 부르는 것이 익숙해서.”
“제게 과시하는 건가요?”
“어머, 설마요.”
아니스는 엷은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과시란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는 행위죠. 남에게 내비치기 위한 과장 섞인 자랑. 300년이나 어린 당신에게, 제가 무엇이 후달려서 그런 잡스러운 짓을 합니까?”
“후…… 후달?”
“성녀가 할 만한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까? 하지만 사실인 것을 어떡합니까. 시엘 라이언하트. 저는 당신에게 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야, 저는 300년 전부터 하멜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300년 전부터 하멜의 곁에 있었고, 300년 전부터 하멜을 사랑했습니다. 죽어서도 성불하지 못할 만큼 강한 미련을 가졌단 말입니다.”
아니스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아는 것은 하멜입니다.”
“내게 그딴 말을 해주려고 데려온 건가요……?”
“아뇨,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어서. 그리고 당신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말이랍니다. 이건 크리스티나가 아닌 저, 아니스의 입장입니다. 제가 아는 것은 하멜이란 겁니다.”
“…….”
“제가 아는 것은 유진 라이언하트입니다.”
말투와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아니스가 물러서고, 크리스티나가 나온 것이다.
“그 유진 님이 하멜 님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엘. 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는 유진 님을 보고 있습니다. 저를 구원한 것은 300년 전의 하멜이 아닌 지금의 유진 님입니다.”
“당신이…… 나보다 특별하다는 건가요?”
“너무 가시를 세우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당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유진 님께 연정을 품었듯이, 저도 그렇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예요? 서로 비슷하고 닮았으니, 하하호호 웃으며 친하게 지내자는 거야?”
“네.”
곧바로 돌아온 대답. 시엘은 쉰 목소리로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자신 있습니까?”
“뭐…… 라구요?”
“자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시엘 라이언하트.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고 비난하고 밀어내는 싸움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아니면 은밀히 칼을 감추고 다가와 등을 찌를 겁니까?”
“그건…….”
“자존심이 상합니까? 이제 와서? 아까 당신이 흘린 눈물은 대체 뭐였습니까? 왜 나는 안 되냐고 울며 매달리지 않았습니까?”
시엘은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분명 저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시엘은 그런 광경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보았던 광경들. 첩실이라고 겉돌던 어머니. 노골적으로 견제하던 정실 테오니스. 시엘은 자신의 어머니가 본가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에 어머니는 정실 테오니스의 핍박을 견뎌냈고, 본가 기사들마저 포섭해 본가의 실세로 우뚝 섰다.
시엘도 그럴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유진에게 매달려서, 시선을 받고, 사랑을 받고, 언젠가는ㅡ 300년이나 산 주제에 보라색 머리카락과 주접을 과시하는 늙은 마법사와, 눈초리가 나쁘고 가슴에 쓸데없이 커다란 지방만 달고 있는 음험한 성녀를 넘어설 생각이었다.
“저는 당신이 좋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세냐 님과 아니스 님은 서로 같은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감사하게도 세냐 님은 저를 받아들여 주셨고, 아니스 님도 저를 자매처럼 여겨주십니다. 그렇다 한들, 제 본질은 두 분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300년 전에 살지도 않았고, 하멜 님도 모릅니다.”
“…….”
“하지만 유진 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죠, 시엘 라이언하트. 그러니 저는 당신이 좋은 겁니다. 당신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날 어린애처럼 여기는군요.”
시엘은 자학적으로 웃었다.
“아뇨, 동등하게 여기는 겁니다.”
“정말로?”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시엘은 저 맑은 미소에 순간 넋을 잃었다. 방안을 밝힌 은은한 조명과 반짝이는 금발.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ㅡ 한순간이지만, 시엘은 크리스티나가 ‘성녀’라는 것을 실감했다.
“윽…….”
기껏 멎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시엘은 화들짝 놀라서 뺨을 문질렀다.
“위로해 주기를 바랍니까?”
“필요…… 없어요.”
“그렇다면 속이 풀릴 때까지 우십시오. 그래야 내일은 울지 않을 테니까요.”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오늘 울었다고 해서 내일 울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군요. 하지만 기왕이면, 내일은 유진 님에게 눈물을 보이지 마십시오. 당신도 알다시피…….”
“그 자식은 마음이 여린 구석이 있죠. 성격은 못돼먹고 말에도 맨날 욕을 달고 하는 주제에…….”
“그런 점을 사랑하게 된 것 아닙니까?”
“…….”
“저도 그렇답니다. 아니스 님도 그렇고, 세냐 님도 그럴 테죠.”
시엘은 입술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제 방에서 주무십시오. 혼자 우는 것은 외롭고 서글플 테니까.”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탁자에 두었던 성서를 가져왔다. 그녀는 더 이상 시엘을 보지 않고, 무릎 위에 얹은 성서를 펼쳤다.
배려에 비롯된 외면 속에서 시엘은 조용히 울었다.
시엘 라이언하트
아롯 때와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유진은 그것이 두려웠다. 술에 잔뜩 취한 세냐와 아니스, 크리스티나가 잠가둔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왔던 밤. 그때 유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두려움에 벌벌 떨며 자는 척을 했었다.
술냄새 풍기는 악마들은 깔깔 웃어대며 유진의 이불을 빼앗고,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폭력으로 짓밟고서 조롱했다…….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다행히 세냐는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지만, ‘술’이라는 것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300년 전부터 아니스였다.
아니스가 술을 마시고, 크리스티나가 술에 취하고, 함께 있던 시엘도 덩달아 술에 취하면? 도중에 세냐까지 합류해서 다들 술을 개처럼 마신 뒤에 방에 쳐들어와 버리면?
유진은 그러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새벽은 무사히 지나갔다.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창가에 앉아서 긴 생각에 잠겼던 유진의 귓가에 아침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창밖을 보았다. 그리 멀리 있지 않은 동쪽의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에휴…….”
오늘이 시작되었다. 새벽 동안 내내 고민하기는 했지만, 가슴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하염없이 창밖이나 보다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운동복을 입은 시엘이 연무장에 걸어 나왔다. 각도 때문에 표정은 알 수가 없었지만, 어깨가 축 처져 있지도 않았고 걸음걸이에도 흐트러짐은 없었다.
창문을 열까. 아니면 바로 내려가 볼까. 일단은 그냥 무시해야 하나? 유진이 그런 고민에 잠겨 머뭇거리는 사이에, 시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은…… 빈말로라도 멀쩡하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밤새 울어댄 것인지 여전히 눈시울이 붉었다.
눈빛은 또렷했다. 표정도 희미하지 않았다. 시엘은 창밖에 선 유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멍청이.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분홍색 혀가 삐죽 나왔다. 내려와 보란 손짓.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 잘 잤…….”
“이제야 이해가 되네.”
시엘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이야. 너는 라이언하트의 시조이신 베르무트 님보다 하멜 님을 더 존경한다고 말했었지.”
유진은 헉하고 숨을 삼켰다.
다른 사람들…… 특히나 본가 가족들에게 환생에 대해 밝히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 유진이 지니고 있던 거대한 두려움이 성큼 다가왔다.
“나나 오빠가 하멜 님에 대해 작은 험담이라도 하면, 네가 발끈하며 변호한 적도 많았지.”
“어…… 음…….”
“게다가 넌 흑사자 기사단의 제노스 대장님과도 친밀한 사이야.”
유진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시엘은 그런 유진의 반응을 즐기면서 쿡쿡 웃었다.
“제노스 님도 알고 계신 거지?”
“어…… 아, 아닌데?”
“뻔한 거짓말은 하지 말아줄래? 네 정체를 모른다면 별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유진, 네가 하멜 님이란 것을 알게 되니까 아주 많은 것이 다르게 느껴지더라? 생각해 보면, 제노스 님은 한참 어린 네게 쩔쩔매곤 하셨지.”
“그…… 그건…….”
“아, 걱정하지 마. 나한테는 말하지 않은 주제에 제노스 님에게는 말한 것을 탓할 생각은 없으니까.”
새벽 내내 울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시엘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더 나누지는 않았다. 만약 시엘이 대화를 바라거나, 위로를 바랐다면 성녀들은 기꺼이 그리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엘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서글픔에 길었을 밤을 함께 있어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많은 생각을 했다.
“되게 부끄럽겠다, 그치?”
시엘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8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해댄 것 아냐?”
“컥…….”
“심지어 철도 들지 않은 어린애들 앞에서 말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부끄러워서라도 입을 닥치고 있겠지만, 유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시엘을 쳐다보며 말했다.
“금칠이라니? 그건 아니라고 본다. 역사가 하멜 님을…… 아니, 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황하게 이어지는 말. 시엘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유진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네, 네, 우둔한 하멜 님. 무슨 말인지 잘 알았어요. 그러니까, 하멜 님은 후대가 자신을 저평가하는 것이 싫으셨다 이거죠?”
“커흑…….”
“아, 그런데 이건 좀 아니다 싶어요. 스스로 금칠하는 거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 하멜 님은…… 그러니까, 태어난 순간부터 전생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던 거잖아요?”
시엘이 슬쩍 몸을 기울이며 말해왔다.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유진의 가슴에는 예리한 칼날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유진은 고통스러운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그렇다는 건…… 하멜 님은 갓난아기 때부터, 갓난아기가 아닌데 응애응애 우는 소리를 냈다는 거죠?”
“그…… 그것은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무릎발로 엉금엉금 기다가 아장아장 걸음마도 했고?”
“아무리…… 아무리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갓난아기의 몸을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
“기저귀를 차고 대소변을…….”
“그건 안 했어!”
유진은 기겁하며 외쳤다. 정말 그랬는가? 기억이 안 났다. 그 시절의 기억은 이미 오래전에 심연 속에 묻어놓았다. 유진은 뜨거워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시엘은 그런 유진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아니면 하멜 다이너스?”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건가?”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시엘과 시선을 마주쳤다.
붉은 눈시울. 하지만 눈빛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선명했다. 지금 시엘은 진심으로 유진에게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부르면 돼, 시엘.”
“응, 알았어, 유진.”
만약 유진이 ‘하멜’이라고 부르라고 말했어도, 시엘은 듣고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생과 환생이 어쨌건, 시엘에게 있어서 유진은 그냥 유진일 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시선이 걷혔다. 시엘은 빙글 몸을 돌리더니 사뿐사뿐 걷기 시작했다.
“어제는 너무 부끄러운 꼴을 보여 버렸어. 오늘과…… 앞으로는, 응, 그러지 않으려고 해.”
“…….”
“너에 대한 내 감정을 포기하거나 버리겠다는 말은 아니야. 이건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거니까.”
“그러냐…….”
“네가 돌아보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정말로 상관없지는 않다. 기왕이면, 아주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잠깐이라도 시선을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엘은 그런 말을 직접 내뱉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말이야.”
이런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처럼 엉엉 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 시엘은 잠시 감정을 추스른 뒤에,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네가 하멜 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어? 세냐 님이랑 로게리스 성녀. 아니스 님. 메르와 라이미르아. 흑사자 기사단의 제노스 님. 그리고 나. 이 외에 더 있는 거야?”
“유폐의 마왕이랑…… 몽마의 여왕도 알고 있지. 아마 마족 중에는 그 둘만 알고 있을걸.”
“아하…… 몽마의 여왕이 설원에서 습격한 것도 그 때문인 거야?”
“아니, 그건 아냐. 그때의 습격은 몽마의 여왕이 또라이라서 벌인 거고, 그 망할 서큐버스가 내 정체를 안 것은 더 나중 일이야.”
그 외에는……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적색마탑주님이…… 눈치채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이 그렇게 애매해?”
“아마…… 눈치챘을 텐데, 모르는 척해주는 것 같은데…….”
“흐흥, 네가 직접 밝히지도 않았는데 먼저 눈치챘다는 거지? 역시 로베리안 님이셔.”
친부인 제하드와 본가의 어른들. 그리고 오빠인 시안도 유진의 정체는 알지 못하고 있다. 시엘은 그것을 확인하고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시안 오빠한테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뭐?”
“나랑 쌍둥이기도 하고. 시안 오빠는 너를 되게 특별하게 생각하잖아? 내가 그런 것처럼, 오빠도 네가 하멜이라는 것을 자알 받아들여 줄 거야.”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아항,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바라는 거구나?”
노렸던 흐름을 가져왔다. 시엘은 입가의 곡선을 더욱 짙게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
* * *
시무인 왕정은 해적여제에 대한 토벌계획을 공표하지는 않았다. 여제가 정면에서 토벌대를 보내는 것을 바라는 낌새라고는 해도, 아직은 심증 단계이기 때문이다.
공표하지만 않았을 뿐, 토벌에 관한 계획은 진행되었다.
“곤도르 아이언해머라고 한다.”
봉두난발에 갈색 수염을 수북하게 기른 드워프. 곤도르는 카르멘을 향해 큼직한 손을 뻗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여제의 토벌이 이뤄지고, 납치당한 종족 장인들을 구출할 때까지. 나 곤도르 아이언해머는 당신과 함께 움직일 모든 전사들을 전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왕정이 토벌 계획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수도의 드워프 길드는 물론이고 먼 망치섬의 드워프들까지 대거 몰려와 폭동을 벌였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시무인은 국제적으로 큰 망신을 당해 국가의 위신은 추락했을 것이며, 국내의 분위기도 처참하게 추락했으리라.
다행히 왕정은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움직여서 드워프 길드와 교섭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반드시 여제를 토벌할 테니, 부디 소란을 벌이지 말고 얌전히 있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드워프란 종족은 얌전히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얌전히 있어줄 만큼 말 잘 듣는 종족이 아니다. 종족의 보배라 할 수 있을 장인들이 대거 납치되었는데, 어찌 타종족인 인간의 손에만 구출을 맡긴단 말인가?
그래서 망치섬에서 드워프 장인들이 파견되었다. 직접 전투를 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토벌대에 기술적인 지원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곤도르 아이언해머. 그는 망치섬 드워프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인이다. 저번에는 맡은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엑시드 보수 건에 파견되지 않았고, 덕분에 해적여제에게 납치당하는 악재를 피할 수 있었다.
“너에 대한 이야기는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여러 형태로 바뀌는 건틀렛을 무기로 삼는다지?”
카르멘은 대답 대신에 곤도르를 내려다보았다. 장신인 그녀에 반해, 곤도르의 키는 메르와 좋은 승부가 될 만큼 작았다.
“라이언하트의 무구에는 나도 많은 흥미가 있지.”
곤도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솜씨 좋은 드워프 장인은 방어구나 무기를 모두 다룰 줄 안다. 하지만 시무인의 마법갑옷인 엑시드는 신예라 할 장비라, 드워프들 중에서도 완벽하게 다뤄내는 자는 흔치 않다.
드워프의 대부분은 괴짜지만, 그중에서도 곤도르는 특히나 괴짜다. 그는 신예 장비인 엑시드보다는 오래되어 낡은 무구와 유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구시대의 무구와 유물, 그중에서도 특히나 오래 된ㅡ 신화시대의 물건들은, 지금의 기술로도 재현은커녕 ‘왜’ 이렇게 기능하는지를 파헤치는 것조차 난해하기 때문이다.
전 대륙에서 그러한 무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바로 라이언하트 가문이다.
“그 건틀렛도 필시 신화시대의 유물일 테지?”
아무리 귀중한 유물이라도,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무기로서 다뤄야 한다. 그래서 곤도르는 라이언하트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시무인에도 왕가의 시조부터 전해져 온 유물이 몇 있지만, 왕가는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고 왕좌 뒤편에 멋들어지게 장식만 해놓았다.
“크흐흐! 그 라이언하트의 무구를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정비할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군. 오래전에 직접 편지를 써서 보냈을 때는, 정비할 필요가 없다며 거절 당했…….”
“이 건틀렛은 가문의 것이 아니다.”
잠자코 곤도르의 수염을 보고 있던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태어나서 저렇게 수염이 많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곤도르는 사람이 아닌 드워프긴 하다만. 풍성하고 멋진 수염에 조금의 로망을 가지고 있던 카르멘은, 실제로 본 수염의 꼬질꼬질함에 적잖은 실망감을 느꼈다.
“뭣이라? 가문의 것이 아니라고?”
“진실은 밝힐 수 없지만…… 이것은 내 손으로 쟁취해 낸 것. 아니,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카르멘의 애장(愛裝)인 헤븐제노사이드는 레드드래곤에게 직접 받은 것. 그 출처에 관해서는 어린 시절의 약속 때문에 말할 수가 없다. 약속만 아니었어도 드래곤과의 인연을 과시했을 텐데…… 카르멘은 아쉬움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흠, 그렇군.”
카르멘은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의 제자인 백장미, 시엘 라이언하트. 그 아이는 라이언하트의 무구를 하나 가지고 있지.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님이 애용하셨다던 비환검 자벨. 그 이름을 알고 있나?”
낙담하던 곤도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비환검 자벨? 그것이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정비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번 맡겨보아도 괜찮겠지.”
카르멘은 겉으로 보기만큼 단순하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위대한 베르무트가 사용하던 무구들은 300년간 단 한 번도 정비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보물고에 두었어도 낡지 않았고, 전투에서 사용하고 방치해도 망가지지 않았다. 시엘이 가진 자벨도 마찬가지다. 이제 와서 드워프에게 정비를 맡길 필요는 없다.
카르멘도 그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곤도르를 데려가겠다고 생각한 이유는ㅡ 바로 유진 때문이었다.
‘마창과 분쇄추.’
수 년 전 흑사자성에서 벌어진 동란. 분쇄추에 깃들어 있던 마왕의 잔재가, 당시 흑사자 기사단 1번대 대장이자 분쇄추의 주인이던 도미닉을 유혹하고 조종한 것이 동란의 시작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분쇄추와 마창에서 마왕의 잔재는 완벽하게 소멸했고, 유진은 두 무기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그 후로 몇 년이나 지났고, 유진의 역량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잖은가.
물론, 이 문제는 카르멘 독단으로 진행해선 안 될 일이었다.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가 시무인에 입국해서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 그 오르투스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이다.
‘시엘…….’
곤도르와 헤어지고 저택에 돌아가는 길. 카르멘은 제자를 떠올렸다.
카르멘은 평생 이성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라이언하트라는 이름과, 그 가문에서 과분한 것을 받고 태어난 자기 자신이었으며, 은사자란 별명을 붙여 준 잿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였다.
생각대로, 아니, 생각 이상으로 빠르고 강하게 움직여 주는 주먹과 발을 사랑했다. 드래곤에게 선택받고, 이제는 세상을 위해 나아가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했다…….
평생 남자를 사랑해 본 적은 없다.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젊은 나이부터 혼담은 꾸준히 들어왔지만,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자식을 낳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 해본 적 있으나, 간절하지도 않았다.
그 간절하지 않던 생각마저, 시엘을 제자로 들이면서 충족되었다.
그렇기에 카르멘은 제자의, 시엘의 행복을 바랐다.
‘잘되지 않은 모양이던데…….’
시엘의 눈시울이 붉은 것을 보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게 웃던 시엘이, 힘없이 웃으며 말끝을 흐려댔다. 그 모습은 카르멘의 가슴에 송곳을 박았고, 디자이라를 펑펑 울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쩔 텐가? 시엘과 유진의 문제에 카르멘이 개입할 여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개입해서는 안 되었다. 카르멘은 그 정도의 상식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뒤에서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것. 그 아이가 견디기 힘들어 슬퍼할 때 다독여 위로해 주는 것.’
카르멘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택의 문을 열었다. 저럴 수밖에 없는 자신을 무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유진…….’
저택의 복도를 걸으며, 유진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 보았던 것은, 유진이 아롯에 유학 중이던 때였다.
그때의 유진은 고작해야 17살이었다. 그 꼬마가 이렇게나 커버리다니……. 카르멘은 새삼 시간이란 얼마나 빠른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당시 마법에 갓 입문했던 라이언하트의 양자는 고작 4년이란 시간 만에 대마법사가 되었고, 성검에 선택받은 용사가 되었으며, 라이언하트 역사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백염식의 6성에 올랐다.
‘4년…….’
생각해 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잖은가? 소년이 청년이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겠지만, 소년이 괴물이 될 만한 시간은 아니다…….
‘아니, 그때도 괴물 같기는 했군.’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느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그 어린 나이에도 비범했다. 첫 만남 이후로 다시 만날 때마다, 유진은 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성인식 때 가볍게 주먹을 섞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키옐의 수도에서, 아이리스에게 맞서 함께 싸운 적도 있었다. 호흡을 맞춘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보조가 완벽했다. 그리고 백룡 기사단과의 대항전…… 카르멘은 유진의 활약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확실히. 그만큼 대단한 남자라면 시엘이 푹 빠질 만도 하지.’
카르멘은 쿡쿡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
문을 열고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대단한 유진 라이언하트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다
모론과는 당연히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유진도 키가 꽤 큰 편이다.
단순히 위로 길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단련을 거르지 않은 몸. 전생부터 고수해 온 전투스타일에 적합하게 발달시킨 몸도 결코 작지는 않았다.
근육을 숭배하다시피 하는 가르기스는 유진의 몸을 보고서 영 못마땅해하곤 했지만, 오히려 유진이 보기에 가르기스의 무식하게 커다랗기만 한 근육이 꼴불견이었다. 어찌 되었건 유진은 자신의 몸이 갖는 육체미에 제법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유진의 몸은 굉장히 남자답다는 말이다. 빈말로라도 여장에 어울리지는 않다.
널찍한 어깨. 두꺼운 가슴. 울끈불끈한 전완…… 얼굴은 원체 잘생기게 태어났고 아직 앳된 구석이 있기는 하다만, 그런 얼굴에 가발을 뒤집어써 봐야 흉측할 뿐이다.
유진은 최선을 다해 그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유진의 의견을 존중해 주지 않았다. 그것뿐이라면 상관없었으리라.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가 뭐라 주장하건. 유진은 싫은 것은 싫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시엘의 부탁 때문이다. 짓궂고 고약한 부탁…… 사실 유진이 거절했어도, 시엘은 유진의 비밀을 지켜주었을 것이다. 가볍게 떠들 만한 것도 아니잖나. 오빠에게 말해 버릴 것이다, 라고 했어도, 시엘이 정말로 그렇게 떠들 사람은 아니었다.
유진도 그 사실은 알았지만ㅡ 그래도, 그래도…… 시엘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선택했다. 시엘을 위해서, 그녀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들고 싶어서. 고결한 자기희생을 선택한 것이다.
“…….”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의 색을 바꾸는 마법은 제법 간단하다. 육체를 다르게 인식시키는 마법도, 평범한 사람의 인식에만 적용하는 것이라면 아주 어려운 마법은 아니다.
하지만 몸을 아예 바꿔버리는 것은 굉장히 고등한 마법이다. 그러나 대마법사라면 자기 자신의 육체를 재구성하여 다른 모습으로 바꿔버리는 것은 가능하다.
유진은 아직 그 경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유진이 대마법사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8서클을 충족한 것은, 서클을 별로 대체하고 위력을 증폭시키는 환염식. 그리고 아카샤의 보조 때문이다.
유진은 그쪽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화장을 마친 얼굴이 제법 예쁘장하다는 것, 머리카락을 길게 늘이거나 가발을 쓰는 것.
하지만 커다란 키, 두꺼운 근육 위에 예쁜 얼굴이 올라간다면 결국은 흉측할 뿐이잖나?
그러한 희망은 세냐에 의해 박살 났다. 폴리모프처럼 성별과 종족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잘린 팔다리를 새로이 구성해 내는 것은 세냐에게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키를 조금 작게 하고 근육을 한계까지 압축하는 정도의 재구성이라면…….
“이건…….”
세냐는 꿀꺽 침을 삼켰다. 마법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조정했다. 없는 가슴을 봉긋 솟아오르게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 정도라면. 세냐는 스스로의 마법실력에 감탄하고, 유진의 외모에도 감탄했다.
키는 크리스티나와 비슷할 정도까지 줄였다. 두껍던 근육도 한계까지 압축했다. 그런 만큼 벗겨보면 쩍쩍 갈라지고 단단하게 보이겠지만, 옷을 입혀놓으면 보이지 않으니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더…… 잘됐네…….”
앙칼진 인상과 길게 늘려놓은 잿빛머리카락은 어제 장난삼아 사 왔던 순백의 드레스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세냐 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멍한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아름답다……. 미적인 부분에서 느끼는 감상은 아니었다. 그, 고결한 유진 라이언하트가. 여태까지의 삶에서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을 하고서, 스스로 견딜 수 없어 할 만큼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성녀들의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이제…… 됐냐?”
유진은 수치심 속에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낭랑했다.
“머리색과 눈동자색은 바꾸는 편이 낫겠어.”
시엘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모습을 살폈다.
“너를 내 시종으로 삼고서 데려갈 생각인데, 라이언하트의 특징이 남아서야 너무 뻔하잖아? 기왕 여장을 할 거면 완벽하게 해야지.”
“진심으로 날 이 꼴로 하고서 배에 태우겠다고?”
“세냐 님과 로게리스 성녀도 시종으로 위장하고 배에 타기로 했잖아.”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어느 정도 납득한 것 아니었어? 이쪽이 적의 허를 완벽하게 찌를 수 있을 거야.”
“꼭 여장을 해서 허를 찌를 필요는 없어. 그냥 멀쩡한 다른 변장을 해도 된다고. 정 아니면 내가 나무통 안에라도 숨어 있든가…….”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것 아니었어?”
시엘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유진은 말문이 막혀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그래, 시엘의 말대로. 여자 시종으로 변장한다면 그 누구도 유진의 정체를 간파할 수 없을 것이다. 솔가리스 해역에서 마법이 풀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기는 하다만, 거기까지 무탈하게 도달해서 아이리스와 대치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으리라.
‘먼저 들켜 버리면…….’
죽인다.
상대가 누가 됐던 죽여야만 한다.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딴 몰골을 다른 사람 누구에게도 도저히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끼익.
문이 열렸고, 유진의 시간이 멈췄다. 그는 경악한 표정을 하고서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반쯤 열린 문틈에서 카르멘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
이게 대체 뭐지? 카르멘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 유진…… 유진 라이언하트. 왜 그가 저런 모습을?
“으흠…….”
카르멘은 그 이유를 캐묻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은 있는 법. 설마 그 혈사자이자 드래곤 슬레이어이며 용사인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저런 기호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카르멘은 저 정도의 취향은 얼마든지 존중해 줄 수 있는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카르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일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문을 열어두어야 할까? 닫아두어야 할까? 짧은 순간 카르멘의 머릿속에는 그런 고민이 오갔지만, 카르멘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카르멘은 태연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잠깐.”
제때 해명하지 않는다면 눈덩이처럼 오해가 불어날 것이다. 재빠르게 달려간 유진은 닫히는 문틈 사이에 발을 끼워 넣고, 카르멘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나는 이해한다.”
카르멘은 유진의 기분을 헤아리려 노력하며 저렇게 말했다. 이해? 이해는 무슨 이해.
“저기, 카르멘 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딴 옷을 입고 모습을 조금 바꾸고 있는 것은 제가 원했기 때문이 아니란 말입니다. 카르멘 님도 이틀 전에 함께 계셨잖습니까? 나찰공주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 여장을…….”
“그게 농담이 아니었다고? 진심으로 여장을 할 생각이었던 건가?”
“이것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카르멘 님, 이 몰골에 제 진심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카…… 카르멘 님이라면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믿게 할 만한 정보는 조금도 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이러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시엘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음…….”
카르멘은 유진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녀는 많은 것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르멘의 손목을 놓았다.
“잘 어울리는군.”
조심스레 던져진 말에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꿈을 꾸었다.
몇 번째인지 세는 것은 진즉에 포기했다. 언제나 똑같은 꿈.
처음 꾸었을 때는 지금처럼 자주 꾸지는 않았는데, 점점 꿈을 꾸는 주기가 짧아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한 번이었던 것이 사나흘에 한 번이 되었고, 이제는 거의 매일 같이 꿈을 꾸고 있다.
처음에는 누아르 제벨라. 그 갈보의 여왕이 농간을 부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몇 년 전에 영지전을 치르고 나서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인연, 아니, 악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의 패배는 지금 생각해도 뿌득뿌득 이가 갈린다.
영지를 건 일대일 전투. ……그것을 전투라 말할 수 있을까? 아이리스 본인조차도 그러한 생각은 지나친 오만이자 자기만족이라 여겼다. 그 영지전은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희롱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악연은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아이리스는 그때의 원한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헬무드의 영지를 잃어서 이 먼바다까지 왔다. 이곳에서 충분한 힘을 키우고, 언젠가는 헬무드에 돌아가ㅡ 누아르 제벨라를 짓밟을 것이다. 그 추잡한 몽마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온갖 오물을 담는 변기로 만들어서 제발 죽여달라고 바라게 만들 것이다…….
이 선명한 악의는 누아르 제벨라도 알고 있을 터. 그렇기에 처음에는 오해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헬무드에서의 아이리스는 온갖 마족들에게 견제를 받았다. 수하들은 다크엘프만을 고집했다. 그랬기에, 아이리스에게는 300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음에도 다른 고위마족들만큼의 세력은 일구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 남해에서는 다르다. 남해에 넘어와서, 아이리스는 단 한 번도 ‘실패’를 겪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ㅡ 운명이, 아이리스에게 웃어주었다. 아이리스가 남해에 넘어온 지는 고작 2년이 넘었을 뿐이지만, 지금 그녀가 일궈낸 전력은 헬무드에서의 300년보다 거대했다.
아이리스의 말 한마디면 수백 척의 해적함대가 움직인다. 그 막대한 전력을 풀어서, 바다를 건너 대수림으로 들어가려던 엘프도 여럿 사로잡았다.
그 엘프들은 다크엘프로 타락하느니 엘프로 죽겠다고 울부짖었지만, 당연히 아이리스는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야곤의 죽음으로 돌아갈 곳을 잃은 수인 용병들도 아이리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순항(順航).
그래, 단어 그대로 아이리스는 순항하고 있다.
이러한 소식은 헬무드의 오만하고 천박한 갈보여왕에게도 전해졌을 터. 나중에 전면전을 치르는 것보다는,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지금 꺾어두는 편이 낫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저항할 수 없는 악몽을 반복해 보여주어, 정신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것은 누아르 제벨라의 장기니까.
‘아니야.’
의심을 가진 것은 처음뿐. 이 꿈이 악몽 따위가 아니라는 것은ㅡ 몇 번이나 반복해 꾸면서 알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처음 꿈을 꾼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처음에는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뿐.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의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악몽은 괴롭고, 꾸고 싶지 않아야 악몽인 법. 어떤 식으로든 정신을 마모시키고 의지를 무너트려야 악몽인 법이다. 아이리스가 반복해서 꾸는 꿈은 결코 그런 점이 없었다.
오히려…… 달콤하고, 그리웠다. 언제나 같은 꿈이 반복되었지만, 아이리스는 단 한 번도 이 꿈이 지루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아…….”
지루하기는커녕. 언제나 꿈의 끝이 아쉽고 슬펐다. 몸을 일으킨 아이리스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뺨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표정을 움직일 때마다 당겼다. 아이리스는 손등으로 뺨을 몇 번 문지르고서, 꿈의 여운에 잠겼다.
커다란 등. 상냥하게 감싸는 손. 뿌옇게 덮여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이에서도 선명하던 자상한 미소. 먼저 길을 나서는 걸음을 따라서, 함께 나아가는 꿈.
몇 걸음 앞을 걷던 거대한 등은 순식간에 멀어지고,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거대한 그림자가 ‘모두’를 뒤덮는다. 그래, 꿈속의 아이리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모두…… 모두가, 같은 곳을 보며, 함께 걷고 있었다.
“카마쉬, 사인, 오보론…….”
아이리스는 이미 오래전 죽은 형제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거인과 수인, 뱀파이어. 모두 다 다른 종족이었지만, 모두가 틀림없이 형제였다.
“아…….”
아이리스는 긴 탄식을 흘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상한 꿈이다.
분명 그리운 꿈. 먼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꿈이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기억에서 ‘저런’ 광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재하지 않는 기억,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꿈에 투영되었을 뿐인가?
‘아니야.’
근거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이 꿈이 과거가 그리워 만들어진 망상 따위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눈앞에서 걸으며, 모든 자식들의 손을 끌어주던 ‘아버지’는ㅡ 틀림없이 광란의 마왕이었다. 그 뒤를 따르던 자들은 모두가 아이리스가 기억하던 형제들이었다.
‘아버지…….’
아이리스는 300년 전에 죽은 광란의 마왕을 떠올렸다. 마왕임에도 자식들에게 너무나 자상하시던 분. 아이리스는 마지막까지, 왜, 왜 하필 자신이 광란의 자식이 되었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광란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별 볼 일 없던 것이 아이리스였기 때문이다. 카마쉬는 거인족의 두령. 오보론도 타락한 수인족의 두령이었다. 사인은 뱀파이어 클랜 중에서도 손에 꼽히던 대형 클랜의 로드였다.
아이리스에게 그런 거창한 배경은 없었다. 그녀는 고작해야 엘프 레인저 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녀와 같이 타락한 다크엘프는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광란의 마왕은 아이리스를 선택했다. 마왕은 그 선택을 하는데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으며, 가장 나약한 딸을 위해 직접 마안을 내려주었다.
아이리스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신으로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치는 갈색 피부와, 길게 뻗은 귀와, 새하얀 백발과, 새빨간 눈동자를 보았다.
모두가 아버지에 의해 주어진 것들이다. 아이리스는 제 몸을 끌어안으면서 눈을 감았다.
방긋 웃는 운명은 거대한 바람이 되어 아이리스를 이곳에 오게 만들었다. 그래, 이 모든 것이 운명인 것이다.
아이리스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300년 전, 광란의 마왕에게서 받은 암전의 마안. 피처럼 붉은 눈동자에서 검은 얼룩이 꿈틀거렸다.
‘아버지…….’
꿈의 마지막은 언제나 똑같다.
가장 앞에서 나아가던 아버지가 무릎을 꿇는다. 그런 아버지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꿈속 세상이 물에 잠겨 버린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물속에 파묻혀 사라진다. 아버지도, 아이리스도, 다른 형제들도, 전부 다.
“이 꿈은 아버지, 당신이 보여주는 것입니까.”
아이리스는 눈자위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꿈을 언제부터 처음 꾸기 시작했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헬무드에서 용마성이 떨어졌을 때.
오보론을 죽이고 잡아먹은, 야곤이 죽었을 때.
그때부터였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인 나에게…… 길을 열라 하시는 겁니까?”
카마쉬는 300년 전에 죽었다. 사인과 그의 혈족들도 300년 전에 죽었다. 광란의 자식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아이리스와 오보론뿐이었고, 그 오보론조차도 아들에게 잡아먹혔다.
그 아들마저 죽은 지금, 살아남은 유일한 광란의 자식은 아이리스뿐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유지라면.”
아이리스는 선명한 붉은 눈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바다.
태어나서 처음 와 본, 남해의 끝.
불가해가 가득한 사해, 솔가리스 해역.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아이리스는 이곳이 고향처럼 그립고 편안했다.
바다
드넓은 남해에서도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이 해역은, 여러모로 신비하고 불길했다. 이 바다는 남해의 다른 곳들과는 달리 덥지 않고, 오히려 매일 매일이 겨울이다.
눈은 내리지 않는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다. 그저 기온만이 아득하게 낮고, 숨을 내쉴 때마다 호흡은 하얗게 변하며, 물이라도 끼얹으면 즉시 얼어버린다. 그만큼 추운데 해빙이나 빙산은 드물다.
이곳, 솔가리스 해역을 일컫는 말은 여러 가지 있다. 죽음의 바다. 불가해의 바다. 하지만ㅡ 아이리스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죽음의 바다, 불가해의 바다. 그런 것은 300년 전에는 드물지도 않았다.
마경 헬무드의 모든 바다와 대지가 죽음이고 불가해였다. 비상식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모든 현상들이 당연스레 존재하던 시대. 지금의 헬무드는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되었지만, 300년 전은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이…… 기분은, ‘익숙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처음 와보는 바다. 그런데도 아이리스는 이 바다에서 고향 같은 편안함과 그리움을 느꼈다. 요람과도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폐부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어째서?
아이리스는 다크엘프다. 타락하기 전에는 엘프 레인저였고, 그녀의 고향은 초목이 우거지고 푸르른 숲이었다. 바다를 본 적은 몇 번 있기는 하나, 바다를 떠돌고 바다에 사는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그립다……. 아이리스는 묵직한 코트를 몸에 두르고서 방을 나왔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기 때문에, 파도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아이리스의 예민한 감각은 차가운 공기 중에서 소금의 냄새를 맡았다.
숲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 이미 1년이 넘도록 맡는 냄새. 그렇게 익숙해진 것이 아닌,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만 같은 냄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그리운 냄새.
아이리스는 길게 숨을 삼키며, 한 손에 들고 있던 큼직한 모자를 머리에 얹었다.
솔가리스 해역에 온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적의 습격을 방호할 거점. 전에는 다른 무인도를 쓰거나, 그냥 바다를 떠돌았다. 세력이 점점 불어남에 따라, 확실한 거점이 필요해졌다.
다른 이유는, 바다 밑에 잠겨 있다는 ‘무언가.’ 솔가리스의 심해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그중에서 유력한 것이 바로 드래곤의 레어다.
그러한 이야기는 수백 년 전부터 많은 탐험가들, 특히 해적들을 흥분시켰다. 드래곤의 보물을 인양하기 위해 이 바다에 찾아온 탐험가와 해적들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보물을 인양하기는커녕, 제 자신이 침몰하여 심해에 더해졌다. 솔가리스의 심해에 정말로 드래곤의 레어와 보물이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나, 여태까지 이 바다에서 침몰한 배만 해도 수십 척은 된다.
보물? 당연히 갖고 싶다. 심지어 드래곤의 보물이라면 억만금의 가치가 있으니, 만약 발견한다면 앞으로 평생 군자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아이리스가 이 바다에 온 것은, 저렇게 분명한 이유들과는 달랐다. 처음 선택을 내렸을 때에는 저러한 이유들에 마음이 끌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 그런가? 아이리스는 스스로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명확한 근거는 없다.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특별한 바다가 아니어도. 전략적 거점의 쓰임새나, 보물 따위가 파묻혀 있지 않아도.
왠지 이 바다에 왔을 것 같았다. 아무 이유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이 바다에 도착해서 머무를 것만 같았다. 이 바다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와, 이곳까지의 여정과, 이곳에서 본 풍경. 그러한 모든 것이 아이리스에게 이유 모를 확신을 주었다.
“공주님.”
벌써 수백 년 동안 아이리스를 보필해 온 다크엘프가 다가왔다. 그녀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아이리스에게 건넸다.
“또 꿈을 꾸신 겁니까?”
다크엘프는 아이리스의 뺨에 남은 눈물자국을 보았다. 시선을 느낀 아이리스는 손등을 들어 한 번 더 뺨을 문질러 닦았다.
“그래.”
“점점 주기가 짧아지시는군요. 어제도 꿈을 꾸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징조라 생각해.”
코트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다크엘프는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언제나 똑같은 꿈…… 아버지와, 형제들이 있는 꿈이다. 내게 남은 아버지의 마력이 보여주는 것이겠지.”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아이리스는 담배연기를 깊이 삼켰다.
“현명한 세냐 쪽은 어떤가?”
“키옐의 라이언하트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흥…… 과연 그럴까? 그 끔찍한 마법사는 300년이나 흘렀는데도 죽지도 않았지. 나이를 먹은 만큼 유순해지지도 않은 모양이고.”
세냐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아롯 왕성을 통째로 수장시키려 했다지? 아이리스는 오래전에 보았던 세냐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정작 은거하기 직전까지는 얌전히 지냈는데 말이야.”
“뭐, 그때와는 여러 가지로 사정이 다르니 말입니다.”
“그래, 맞아. 사정이 너무 달라졌지.”
300년 전의 용사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용사라는 유진 라이언하트는, 가문 시조의 유지를 지키거나 이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바랄지라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이미 약속의 끝을 경고했다.
300년이 흘렀고, 새로운 용사가 나타났다. 전쟁시대의 주역을 맡은 영웅 중 2명이나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현명한 세냐는ㅡ 아이리스에게 있어서는 특히나 경계할 대상이었다.
“그 인간 계집은 엘프도 아닌 주제에 제 자신을 엘프처럼 생각하는 미치광이야. 피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날 노려보던 눈은 아직도 가끔 생각날 정도지.”
“재앙의 세냐뿐만이 아니죠. 그 시대의 괴물들은 모두가 미치광이에 끔찍했습니다.”
절망의 베르무트를 필두로 한 괴물들. 몰살의 하멜, 재앙의 세냐, 공포의 모론, 지옥의 아니스.
아이리스와 함께 그 시대에서 살아남았던 다크엘프는, 저 5명의 괴물들과 마주했을 때를 회고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다크엘프와ㅡ 아이리스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공주님. 차라리 몸을 감추는 편이 어떻습니까?”
다크엘프는 머뭇거리다 간언했다.
“바다는 넓습니다. 재앙의 세냐가 돌아오기는 했지만, 당장 이곳에 오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일단은 몸을 감추시고 상황을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껏 일궈낸 것들을 모두 버리라고?”
“고작해야 해적들입니다. 공주님을 필두로 한 광란의 독립군만 건재하다면,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는 전력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이리스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수백 척의 해적함대라고 해도 결국은 해적. 머릿수만 많을 뿐, 그리 대단한 전력이라 할 수는 없다.
이곳 전력에서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마안을 가진 아이리스와, 수백 년 동안 그녀에게 충성하며 조금씩 숫자를 늘려 온 다크엘프들. 그리고 야곤의 죽음으로 합류한 맹수 용병단이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이 길다.
“유폐의 마왕이 말한 약속의 끝이 대체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경고까지 나온 이상, 머지않아 전쟁시대가 새로 열릴 겁니다. 그때가 되면, 재앙의 세냐도 헬무드에 향할 수밖에 없겠지요.”
아이리스는 다크엘프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했다. 아이리스만 모습을 감춘다면, 세냐가 이 바다에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 정도 숨을 죽이고 있으면ㅡ
“재앙의 세냐가 아무리 강해도, 유폐의 마왕을 넘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절망의 베르무트가 있을 적에도, 대륙은 유폐의 마왕을 이기지 못했다. 지금 시대에 새로운 용사로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긴 하지만, 과연 그가 베르무트에 비견될 존재일까?
‘비교도 안 되지.’
아이리스는 담배를 퉤 뱉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와는 싸워본 적이 있다. 피차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얼추 수준 파악은 했다.
베르무트와는 비교가 안 된다.
유진뿐만이 아니다. 라이언하트에서 가장 강하다던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의 실력은 꽤 놀랍긴 했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300년 전에도 충분히 이름을 떨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작 그 정도일 뿐이란 말이다. 인간답지 않은 인간뿐이던 5명의 토벌대도 유폐의 마왕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베르무트만도 못한 용사가 성검을 뽑고 앞장서 봐야, 과연 바벨의 입구에나 도달할 수 있을까?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실력이 많이 늘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부족해.’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아이리스는 스스로의 위치를 다시금 자각했다.
마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아이리스는 마왕이 아니다. 애당초 마왕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군림할 만큼의 힘을 쌓고, 거대한 영지와 수많은 권속을 두어야 하나?
“…….”
욱신.
갑작스레 눈동자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자위를 손으로 감싸고서 비틀거렸다.
“공주님?”
“아니, 괜찮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최근 들어서 눈동자가 갑자기 욱신거리곤 했다. 단순히 통증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눈이란 무언가를 보기 위해 있는 것. 이 갑작스러운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아이리스의 마안은 지금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찰나를 스쳐 간 통증에서 아이리스의 눈동자는 깊은 바닷속을 보았다. 밤처럼 시커먼 어둠이 가득 찬 심해. 보글거리며 끓는 물거품. 바닷속 깊은, 아득한 어딘가를.
“드워프들은?”
아이리스는 코트자락을 여미며 걷기 시작했다. 걱정 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다크엘프가 그 뒤를 따랐다.
“작업 중입니다. 지금쯤이면 슬슬 위로 올라왔을 겁니다.”
“감시는 제대로 하고 있겠지?”
“물론이죠. 내려갈 때마다 항상 친위대를 옆에 두어 감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는 모양이더군요.”
보고를 들으면서 아이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바로 앞에서 새카만 어둠이 나타났다. 암전의 마안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어둠. 아이리스는 다크엘프와 함께 어둠의 안으로 들어갔다.
암전의 마안이 만들어낸 어둠과 어둠은 서로 연결하여 통로로 쓸 수 있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넓은 솔가리스 해역의 한가운데에 떠 있는 해적선. 휴식을 취하던 해적들은 아이리스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서 자세를 잡았다.
“오셨습니까?”
해적들과 함께 있던 다크엘프들이 아이리스에게 다가왔다. 아이리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받곤, 고개를 돌려 드워프들을 찾았다.
“팔자 좋아 보이는군.”
아이리스는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렸다. 갑판 한구석에서 드워프들이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저번에 시무인의 국선에서 납치한 망치섬의 장인들. 그중에서도 엄선한 젊고 체력이 좋은 드워프들인데, 그들은 수염을 덜덜 떨며 아이리스를 쳐다보았다.
“잔인한 말 하지 마시오……! 올라온 지 아직 10분도 되지 않았단 말이오.”
“아무리 드워프가 체력이 좋다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몸이 버티지 못할 거요.”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다른 놈들로 교대해야지. 너희들의 스승을 불러올까?”
“그건…….”
“제발, 그러지 마시오. 조금…… 조금만 더 쉬고, 다시 내려가겠소.”
젊은 드워프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아이리스는 그들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그럴 생각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죽어도 너희를 죽여야지, 늙은 드워프들을 굴릴 생각은 없거든.”
“…….”
“그래서, 성과는 있나?”
드워프들은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아이리스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찡그리자, 드워프들 곁에 고여 있던 어둠이 천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요!?”
드워프들은 기겁하여 외쳤다.
저 어둠은 까마득한 심해에 만들어놓은 어둠과 연결되어 있다. 그 심해에는 교대로 내려간 드워프 동료들이 있다. 그들은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무겁고 두꺼운 잠수복을 껴입고, 산소파이프를 달고서 허우적대고 있다.
“내가 너무 잘해주니까 위기감이 부족한 것 같아.”
아이리스는 눈을 찡그리며 속삭였다. 드워프들로서는 어이가 없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 잘해준다고? 저걸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무턱대고 납치해 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는 것이 대체 누구인데?
“대체……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소!”
드워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절규했다.
시키는 대로 잠수복을 만들었다. 심해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한 잠수복이기는 한데, 솔직히 드워프들의 입장에서는 눈에 제대로 차지도 않았다. 다른 때였다면 억만금을 줘도 이딴 것을 만들어서 ‘완성했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때에 장인정신을 외칠 수도 없는 노릇. 그나마 이 급조한 잠수복의 장점은 잠수병에 대한 부담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나, 그조차도 원체 튼튼한 종족인 드워프가 아니고서는 다루는 것이 불가능했다. 인간이라면 이 잠수복을 입고서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시키는 대로 침몰선도 발견했고, 인양도 할 수 있게끔 도왔잖소? 그런데도 이 이상 무엇을 바라기에 우리를 저 시커먼 바닷속에 떠돌게 하는 것이오?”
“설마, 설마 당신 정도 되는 위인이…… 이 바다 밑에 드래곤의 레어가 숨겨져 있다는 뜬소문을 믿는 것이오?”
“로망이 있는 이야기지.”
아이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어둠에 시선을 보냈다. 산소파이프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만큼 좁혀졌던 어둠이 다시 넓게 확장되었다.
“물론 나도 그 말은 별로 믿지 않아. 드래곤의 레어? 하하, 그딴 것이 정말 있기나 할까?”
“그럼 대체 왜, 왜 우리를…….”
“드래곤의 레어인지는 몰라도, 다른 뭔가는 있어. 확실해.”
아이리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뭐냐고?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너희가 죽고 싶지 않다면 그 뭔지 모를 것을 찾아야 할 거야.”
“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나도 내 말이 굉장히 가혹하다는 것은 알아. 이 바다는 굉장히 넓고…… 너희는 고작 10명뿐이니 말이지. 그래서 지금 너희 스승들이 잠도 자지 못하고 망치질을 하고 있는 거잖아?”
아이리스는 큭큭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화악! 새로이 나타난 어둠에 손을 밀어 넣자, 안쪽에서 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리스가 어둠 속의 손을 잡아끌자, 늙은 드워프의 머리가 밖으로 끌려 나왔다.
“바라는 대로 재료도 줬다. 가진 재주라고는 망치질밖에 없는 못생긴 난쟁이 종족이, 망치질도 제대로 못 하나?”
드워프만 입을 수 있는 잠수복이 아닌 제대로 된 잠수복을 의뢰했다.
“그게 어려워? 재료만으로 구현이 불가능하다기에, 내가 마력까지 보태준다고 했잖아? 응? 난 참 쉬워 보이는데. 내 마력을 금속에 담고, 그 금속으로 잠수복을 만들면 되는 거 아냐? 응?”
“사, 사람의 몸은 아주 약하단 말이오. 다크엘프에게 입힌다면 모를까…….”
“저 까마득한 심해에 내 부하들을 밀어 넣으라고?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해야 하지?”
“아, 알겠, 알겠소. 도안은 완성했고, 시험작도 만들고 있…….”
“일주일 주지. 일주일 안에 못해도 50개는 만들어야 할 거야. 그러지 못한다면 여기 젊은 난쟁이들이 50명분의 일을 해야 할 거다.”
아이리스는 그렇게 으름장을 놓고서 늙은 드워프의 머리를 어둠 속에 쑤셔 넣었다.
“뭘 보고 있어? 이쯤 되면 충분히 오래 쉬었잖아, 내가 너희 엉덩이를 걷어차야 들어갈 건가?”
드워프들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옆에 벗어놓은 잠수복을 주섬주섬 입는 모습을 보며, 아이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이죽댔다.
“아, 걱정하지는 마. 바라는 대로 맥주는 잔뜩 줄 테니까 말이야.”
* * *
시무인의 라루파 섬.
라이언하트의 저택에 들어 온 곤도르 아이언해머는 크게 뜬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눈앞에 그득 쌓인 오크통을 뚫어져라 보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게 대체 뭐요?”
곤도르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라는 대로 라이언하트의 저택에 들어왔다. 기왕이면 키옐에 있는 본가의 저택에 가서, 직접 보물고에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ㅡ 그거야 다음에 하면 될 일.
아니, 이 저택에 정말로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다면, 그 먼 키옐까지 직접 갈 필요도 없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유물만 하더라도 대체 몇 개인가?
“뭐긴, 맥주잖아.”
세냐는 가득 쌓인 오크통을 퉁퉁 두드리며 말했다.
“입막음 값이야.”
“뭐…… 라고?”
“입막음. 왜, 부족해? 바란다면 더 많은 맥주를 줄게.”
“아니…… 이해가 잘…….”
“미리 카르멘에게 듣지 않았어? 우리가 이 저택에 와있다는 것은 절대 발설되어서는 안 돼.”
“비밀유지에 대한 계약서는 적었습니다만…….”
“그것 말고 따로 마법의 계약서도 적을 거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정이 없지 않아? 난쟁…….”
으흠.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나올 뻔한 혐오 발언을 헛기침과 함께 삼켰다.
“드워프. 네가 간절히 바라서 이곳에 온 것이기는 하지만, 나 현명한 세냐는 일방적으로 입을 틀어막을 만큼 무정한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이것을 준비한 거지.”
맥주. 아니스가 떨떠름해하면서도 엄선해 준 맥주들이다.
“이만큼 쌓인 맥주라면 네 입을 막기에 충분하겠지?”
“…….”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설마 이거로도 부족해? 이 욕심 많은 드워프 같으니!”
세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곤도르를 흘겨보면서 팔짱을 꼈다.
“저기, 세냐 님. 맥주가 싫은가 봐요.”
잠자코 옆에 서 있던 유진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현명한 세냐란 이름이 드워프들 사이에 끔찍한 종족차별자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설마 그럴 리가. 세상에 맥주를 싫어하는 드워프는 없다니까? 300년 전에도 드워프들은 돈 대신 맥주만 주면 일을 잘해줬다고.”
세냐는 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냐는 듯이 유진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유진이 생각하기에, 세냐의 저러한 인식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엘프들과 함께 자란 세냐는 엘프족 전체에 만연한 드워프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300년 전의 헬무드에서는 솔직히 돈은 큰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돈보다는 당장 마실 수 있는 술이나 음식, 사용할 도구와 장비 따위가 화폐로 쓰였단 말이다.
“당신은 대체 드워프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요?”
뿌리 깊은 혐오 발언에 곤도르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저런 구시대적인 발언을 하는 것인가? 다른 인간이라면 저 말을 내뱉은 순간에 머리통을 박살 냈을 텐데…….
“드워프가 드워프지 뭘…….”
세냐는 곤도르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애당초 그녀는 자신의 발언이 종족 차별적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오빠인 시크나드는 어린 세냐를 앉혀두고 엘프족의 옛날이야기를 곧잘 들려주곤 하였는데, 그런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드워프는 드워프라는 이름보다는 냄새나는 난쟁이 똥자루라고 칭해지곤 했었다.
하지만 세냐는 드워프를 냄새나는 난쟁이 똥자루라고 부르지 않는다. 드워프는 드워프일 뿐. 그것만으로도 세냐는 자신이 굉장히 종족 평등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설마 현명한 세냐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맥주를 잔뜩 줄 테니 비밀을 지키라고? 그 말은 즉, 당신은 내가 직접 작성하고 지장까지 찍은 계약서보다 내 입에 부어질 맥주가 더 무거울 것이라 생각하는 거요?”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계약은 당연히 믿는데 거기에 너희가 좋아하는 맥주도 얹어준다 이 말이지.”
“그건…….”
“그래서.”
세냐의 눈이 가늘어졌다.
“싫다 이거야?”
“…….”
“싫냐니까?”
전설 그 자체인 대마법사의 시선. 곤도르는 부르르 몸을 떨다가 입을 열었다.
“인상적인 선물입니다.”
“으흠.”
“드워프의 취향에 딱 맞는…… 고마운 선물, 감사합니다.”
종족을 대표해 분노하기에는 세냐의 시선이 너무 두려웠다. 그리고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라이언하트의 무구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했다.
결국 곤도르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서 헤벌쭉 웃어 보였다. 세냐는 거 보란 듯이 유진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
그러한 모습에 유진은 마음속 깊이 납득했다.
저 성격 고약한 계집애가 지금까지 ‘현명한 세냐’라 불리는 것은, 제 손으로 동화책에 그렇게 적어놓았기 때문이란 것을.
바다
곤도르와의 만남을 꺼려 할 이유는 없었다. 베르무트의 무구가 따로 정비가 필요 없다는 것은 유진도 잘 아는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비를 해봐서 나쁠 일도 없잖은가.
마왕의 무구.
현재 유진은 분쇄추와 마창을 가지고 있다. 그 두 개의 무기에는 카르멘의 걱정처럼 마왕의 잔재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본래 남아 있던 잔재는 이오드 사건 때 완전히 소멸했고, 지금 분쇄추와 마창의 권능은 유진의 마나로 구현되고 있다.
원래는 그런 것에 대해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자키아에게서 베르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지금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월광검.’
300년 전에도 정체를 알 수 없던 검. 하지만 이제는 그 정체를 알고 있다.
월광검의 빛에서 일어나는 파멸은 멸망의 권능. 즉, 월광검은 마창과 분쇄추와 마찬가지로 마왕의 무구라는 것이다.
그러한 무구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베르무트의, 라이언하트의 피. 모든 것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베르무트의 존재는 마왕과 연관되어 있다. 모순적인 것은, 그런 주제에 성검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ㅡ 유진은 빛의 신 자체가 별로 ‘좋은 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오, 오오오…….”
곤도르는 눈동자를 덜덜 떨어대며 탄성을 흘렸다. 지금 곤도르의 앞에는, 유진이 항상 망토에 넣어두고 다니던 무기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건 대체 뭐요?”
그중에서도 곤도르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역시 월광검이었다. 칼날이 도중에 뚝 끊어진 검. 곤도르는 월광검을 빤히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부터 저런 모양일 리는 없을 텐데.”
“부서진 거야.”
“내가 고쳐주면 되는 거요?”
“아니, 저건 못 고쳐.”
면전에 대고서 저런 말을 들어버리면 타고난 대장장이 종족인 드워프의 자존심이 꿈틀거리게 마련. 곤도르는 코웃음을 치며 월광검을 가리켰다.
“재질이 특수해 보이기는 한데. 이 세상에 드워프가 고치지 못할 무기 따위는 없소.”
“못 고친다니까.”
“왜 그렇게 확신해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일단 자세히 봅시다.”
곤도르는 오기가 생겨서 월광검에게 손을 뻗었다. 그냥 내버려 둘까? 유진은 순간 그런 고민을 했다.
“잡으면 죽는다.”
직전에 마음을 바꾸었다. 유진은 곤도르의 어깨를 덥석 잡으며 경고했다. 그 극단적인 말에 곤도르는 화들짝 놀라 유진을 돌아보았다.
“오해하지 마. 내가 당신을 죽인다는 것이 아니라, 저 검이 당신을 죽일 거야.”
“그게 무슨……?”
“나 외에는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마검이라는 말이지.”
조금 과장을 섞기는 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월광검은 손에 쥐는 것만으로 정신을 오염시킨다. 300년 전에 하멜과 모론조차도 월광검을 잠깐 쥔 것만으로 정신이 흔들려 발광을 하였는데, 그보다 정신력이 약할 것이 뻔한 드워프가 월광검을 쥔다면? 정신이 통째로 붕괴해 백치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게 죽음과 다를 것이 무언가?
“허어…….”
“마찬가지로 마왕의 다른 무기들은 손댈 생각하지 마.”
“하지만 카르멘 공은 마왕의 무기를 주의 깊게 살펴달라 부탁하였소.”
“카르멘 님한테는 적당히 둘러대면 되잖아. 별문제가 없었다고 말이지.”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언동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카르멘은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굳이 곤도르를 데리고 온 것도, 유진이 마왕의 무구에 의해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유진은 마왕이란 자들이 얼마나 끔찍하고 지독한지. 그리고 죽여도, 죽여도 잘 죽지 않는 지긋지긋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오드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도 정신의 병과 더불어, 분쇄추에 남아 있던 마왕의 잔재 때문이었다.
“…….”
유진은 그때를 떠올리며 표정을 구겼다. 당시 이오드를 조종하던 마왕의 잔재들은 집요할 정도로 라이언하트 적통의 피에 집착했었다. 그런 점을 보면, 결국은 ‘피’의 영향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점은 유진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다. 항상 자아를 의식하고 있고,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에게서 검증도 받고 있다. 무언가 이상이라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었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분쇄추와 마창, 월광검을 사용했음에도 유진은 멀쩡했다.
“흠,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군. 호기심은 들지만 나도 미치고 싶지는 않으니.”
곤도르는 아쉬워하는 시선을 거두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 반지도 꽤나 오래되고 특별해 보이는데? 그것도 당신 외의 사람은 다룰 수 없는 저주받은 물건이오?”
“아니. 별로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끼고 있었는데?”
“에잉, 꼬질꼬질해서 보기 좋지도 않으니 이리 줘보시오. 내가 반짝반짝 광이라도 내드릴 테니.”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유진은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아가로트의 반지를 빼서 무기들 옆에 내려놓았다. 곤도르는 당장 반지에는 시선을 주지 않고, 가장 앞에 놓인 위니드부터 들어 올렸다.
“폭풍검 위니드……! 아, 정말이지 예술품처럼 아름답구나…….”
[하멜, 이 드워프가 보는 눈이 있구나.]
템페스트가 흐뭇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유진은 심드렁한 눈으로 곤도르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곤도르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서, 이리저리 렌즈를 조작해가며 위니드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뭐 보수할 점이라도 있나?”
“연마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은데…… 내 욕심으로는 이리저리 더 건드려보고 싶소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이러한 유물은 괜히 건드렸다가는 뒷감당이 안 되거든.”
“뒷감당?”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기존에 부여되어 있는 능력이 상실될 수도 있다는 말이오. 유진 공, 당신도 마법사잖소? 라이언하트…… 아니, 위대한 베르무트에게서 전해져 온 무구들은 굉장히 특별하지.”
마법이 부여된 무기를 흔히들 아티팩트라고 말한다. 하지만 본래 아티팩트란 지금 시대의 것이 아닌 고대 문명의 물건. 그중에서도 마법 따위의 능력이 더해진 유물(遺物)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 물건들은 모두가 다 진짜배기 아티팩트지. 현세의 마법과 기술로 재현할 수가 없소. 그러니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이야.”
“흠…….”
유진은 곤도르의 말을 들으면서 템페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위니드는 대체 언제부터 존재했던 거냐?’
[모른다.]
‘몰라? 모른다고?’
[내가 위니드와 연결된 것은, 베르무트가 처음 위니드를 쥐었을 때가 시작이다. 그 이전에는 기억이 없다.]
‘그게 말이 돼? 베르무트가 쥐기 전에도 위니드는 존재했을 것 아냐?’
[물론 그랬겠지. 하지만 대체 언제부터 위니드가 존재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유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어리둥절해 하자, 템페스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하멜. 정령은 영생에 가까운 존재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진정 영생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존재에게는 늦건 빠르건 죽음이 존재한다.]
‘정령은 죽어서 어떻게 되는데? 소멸하는 건가?’
[우리에게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순환할 뿐이지. 아무리 대단한 정령왕이라도 자아(自我)를 가진 이상, 언젠가는 그 자아가 마모되게 마련. 그리고 마모는 필연적으로 광기를 낳는다.]
템페스트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침묵했다.
[정령의 본질은 순수(純粹)에 있다. 바람의 정령은 순수한 바람이며, 불꽃의 정령은 순수한 불꽃이다. 그런 정령에게 있어서 광기란 불순(不純)한 것. 정령의 죽음은 불순이 섞인 순간에 일어난다. 자아를 붕괴시켜 제 자신을 정화하는 것이 정령의 죽음이다.]
‘자살이잖아.’
[틀린 말은 아니지. 모든 정령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나는 당대의 바람의 정령왕이다. 하지만 최초의 정령왕은 아니며, 내 이전에 몇 명의 정령왕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전대 정령왕이 순환의 굴레에 들었고ㅡ 내가 새로이 정령왕이 되었다는 것이지. 그러한 나의 시점에서, 위니드와 연결된 것은 300년 전이다.]
유진은 전생을 떠올렸다. 베르무트는 하멜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위니드를 가지고 있었다.
[위니드는 바야르 부족이 지배하던 설원에 잠들어 있었다. 왜 그런 곳에 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베르무트 그 새끼가 어떻게 발견한 것인지도 당연히 모르겠지.’
[물론이다.]
템페스트는 당당하게 인정했다.
저런 점에서 의문스러운 것은 위니드뿐만이 아니다. 베르무트가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 고대의 아티팩트들.
-이건 또 무슨 유적이야?
-고대의 유적이다.
-아니 그걸 몰라서 물어? 여기를 어떻게 찾아낸 건데?
-성검이 알려주었다. 빛의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 잠든 무기가 세상을 구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군.
-아아! 빛의 신께서는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군요. 역시 베르무트 님이십니다!
전생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대화인데. 지금 생각하면 참 묘하기 짝이 없었다.
유진도 성검을 잘 써먹고 있기는 하지만, 성검에게서 빛의 신의 목소리 따위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진이 받았던 계시라는 것도 결국은 천사가 된 아니스가 간섭한 것이었으며, 크리스티나가 들었던 계시 역시 아니스가 전해준 것이었다.
-제가 사자(使者)가 되었을 뿐, 계시는 거짓이 아닙니다. 빛의 신은 당신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지는 않습니다만, 실존하고 계십니다. 다만, 이 세상에 직접 관여하지 못하실 뿐입니다.
아니스가 크리스티나에게 했던 이야기의 내용은 유진도 알고 있다. 어쨌건 빛의 신은 실존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세상을 위하고는 있다.
빛의 신이 300년 전에 베르무트에게 계시를 내려, 마왕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되는 무기들의 행방을 알려주었을 수도 있다.
“호오…….”
유진이 생각에 잠긴 동안, 곤도르는 여러 무기들을 살펴보고 난 뒤에 반지를 집어 들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별 가치가 없는 낡아빠진 골동품일 뿐. 하지만 곤도르는 주의 깊게 보고서 감탄성을 흘렸다.
“이건 아주 오래된 물건이군.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위대한 베르무트의 다른 무구들과 엇비슷한 시대의 물건 같은데…….”
“고대에 존재했다는 신의 기적이 어린 물건이라더군.”
“허어. 그렇다는 것은, 저 성검과 마찬가지의 신물(神物)이라는 것인가?”
“성검처럼 대단한 빛을 뿜는 것은 아니지만.”
아가로트의 반지에 서린 권능은 성검과 비교하자면 지극히도 심플하고 고약했다. 저 반지의 권능은 소유자의 수명을 갉아먹는다. 미래를 빼앗아간다. 죽어야 할 몸을 몇 번이고 일으켜 싸우게 만든다.
“어떤 신의 신물인지 알고 있나?”
“아가로트.”
“전쟁의 신이로군!”
곤도르는 껄껄 웃으면서 반지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아는 거냐?”
“유진 공, 당신도 세냐 님처럼 드워프가 망치질만 할 줄 아는 무식한 종족이라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니지.”
솔직히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곤도르는 유진의 멋쩍어하는 얼굴을 흘겨보며 눈을 찡그렸다.
“엘프도 아니고 인간에게까지 이런 평가를 들을 줄이야……! 잘 듣게, 유진 공. 드워프는 굉장히 고상하고 지적인 종족일세. 특히 고어(古語)를 비롯한 고대사 전반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그래?”
“그렇고말고! 드워프는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장인이자 곡괭이를 휘두르는 광부이며 발굴자란 말일세.”
곤도르는 그렇게 쏘아붙이면 반지를 흔들었다.
“특히 망치섬이 있는 남쪽 섬들에는 아가로트에 관한 전설이 몇 개 존재하고 있네.”
저 낡아빠진 반지에 도움을 받은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특히 라이자키아와 싸울 적에, 아가로트의 반지가 없었다면 진즉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 전에도 아가로트의 반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은…… 빛의 샘. 그리고 가비드 린드먼에게 덤빌 때. 모두가 성검의 빛을 끌어낼 때였다. 그때마다 아가로트의 반지가 제멋대로 날뛰며 신성력을 증폭시키곤 했다.
여러 번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정작 저 반지의 주인이라던 아가로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유진에게 저 반지를 준 것은 아리아르텔이다. 그녀가 말하기를, 아가로트가 살았던 고대는 억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드래곤들조차 회고하지 못하는 먼 옛날이며, 빛의 신을 비롯해 여러 신들이 실존했다는 신화의 시대다.
그 시대에 살았던 신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까? 애당초 신에게 죽음이 존재할까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현재 대륙에는 ‘전쟁의 신 아가로트’를 숭배하는 나라는 없었다. 곤도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해의 섬들에도 아가로트에 관한 신앙은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해 구석 섬들에나 기억되던 놈이, 왜 전쟁의 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녔나 몰라.”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아가로트의 반지를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들은 곤도르는 한심하다는 듯이 유진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야 이곳은 바다지만, 먼 고대에는 바다가 아니었네.”
“뭔 개소리야?”
“그러니까,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 흐르면서 바다가 되었다는 말이지.”
“아니 그게 뭔 개소리냐고. 바다가 그냥 바다지, 뭔 옛날에는 바다가 아니었대?”
“잘만 흐르던 강줄기도 가뭄이 지속되면 땅으로 변해버리지 않나!”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그러니까, 봐봐, 저 끝없이 넓은 바다가. 한 수백…… 아니지, 수천 년쯤에는 땅이었다고 치자고. 그럼 저 많은 물은 대체 어디서 온 건데?”
“대홍수라든가…….”
“얼씨구…….”
유진은 곤도르의 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곤도르는 모욕감에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내뱉었다.
“머나먼 바다에서 범람했다는 설도 있지……!”
“그건 또 뭔데?”
“남해의 끝! 자네도 이 세상이 둥글다는 것 정도는 알지 않나?”
“그거야 알지.”
“하지만 말일세, 남쪽의 끝과 북쪽의 끝이 과연 하나로 이어졌는지는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단 말일세.”
북방 루하르 왕국.
그 나라의 북쪽 끝에는 라구르야란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땅. 넘어가서는 안 될 땅.
세상의 끝.
-레헤인야르에 올라라.
-라구르야란을 보아라.
-그곳에서 넘어오는 끝을 경계해라.
깊은 밤, 라구르야란에서 누르가 몸을 일으킨다. 누르는 드넓은 끝을 걸어, 레헤인야르를 넘어온다. 잠들지 않는 아이는 누르에게 잡아먹힌다.
모론은 그곳에서 ‘끝’이 넘어오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
“남해의 끝. 머나먼 바다……. 그곳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지. 긴 역사에서 수많은 탐험가들이 남해의 끝을 넘어 얼어붙은 북쪽 대지를 밟겠노라 떠났지만, 단 한 명도 성공한 사람이 없어.”
300년 전에.
모론에게, 라구르야란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넓은 땅이었다. 하늘이 굉장히 화를 내는 땅이었다. 태양도 달도 별도 떠있지 않다. 흙발로 짓밟힌 눈처럼 지저분한 뿌연 색의 하늘이 저 끝까지 펼쳐져 있다. 레헤인야르의 가장 ㄴ포은 봉우리에 서서 보면, 라구르야란의 끝에서 넓은 바다가 보였다. 얼어붙은 바다. 누르는 없었다. 그 땅에는 누구도 살지 않고, 누구도 살지 못한다.
유진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와, 모론과 함께 라구르야란을 보았었다.
그곳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다. 회색의 땅, 회색의 하늘, 회색의 공기. 모든 것이 그러한 색이고 공허했다. 그 기괴하고 불길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모론이 집어 던진 누르의 시체들뿐이었다.
아이리스를 죽이고 난 뒤. 세냐와 함께 모론을 만나러 갈 것이다. 유진은 웃으며 배웅하던 모론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대의 이야기일세.”
곤도르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신들이 실존했다는 신화시대. 결국은 지나가 버린 고대이지 않나? 그때 번영했던 문명은 다 어디로 갔을까. 땅에 파묻히거나, 바다에 잠기거나. 그러한 흔적만 겨우 남아 있지.”
“…….”
“남해가 먼 고대에 대지였다는 흔적은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네. 다른 문명이 어떠한 종말을 맞았는지는 모르나, 이 바다에 존재했던 문명은ㅡ 바다에 잠겨 버린 걸세.”
“그 바다가 세상의 끝, 머나먼 바다에서 범람한 것이다?”
고대에 관련한 여러 종말론.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의 끝’이라는 것과 연관해서 생각하니, 곤도르의 말도 조금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는 됐어. 그래서, 아가로트에 대해서 뭐 더 아는 것은 없나?”
“남해 어딘가에 아가로트의 성지(聖地)가 있다는 전설이 있네.”
“바다 밑에?”
“발견되지 않은 무인도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고…….”
“결국 확실한 것은 아니란 말이네?”
“으레 전설이란 그런 법이지!”
곤도르는 괜히 아가로트의 반지를 이리저리 흔들며 투덜거렸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럼 반지나 반짝반짝 닦아봐. 아가로트가 뒈졌는지 살았는지는 몰라도, 자기 신물을 예쁘게 닦아주면 기분이 좋아서 성지에 대해 알려줄지도 모르잖아.”
“자네는 신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놈. 세상이 X 되는 와중에도 직접 나서기는커녕, 저 높은 곳에서 구경만 하는 관음꾼.”
“용사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로군…….”
곤도르는 질겁하면서도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짧고 굵은 팔이 가방을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텅 비었던 방이 순식간에 그럴듯한 공방으로 바뀌었다.
“그럼…… 일단 연마부터 시작하지.”
“오래 걸리나?”
“무기는 칼날만 가는 정도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빨리 끝내. 더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부탁?”
곤도르가 의아하단 얼굴을 하고 돌아보았다.
직접 말하는 것보다는 보여주는 것이 훨씬 빠를 터. 유진은 망토 안에서 꺼낸 것을 곤도르의 앞에 던져주었다.
드래곤의 비늘을 본 곤도르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문
곤도르는 뛰어난 장인이기는 했지만, 당연히 드래곤의 시체를 통째로 다뤄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선대들부터 축적된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전례가 많지는 않으나, 세상을 위해 제 시체를 기증한 드래곤들은 먼 과거에 몇몇 있었다. 그렇게 남겨진 드래곤의 시체는 대부분 드워프들의 손에 의해 가공되었으며, 그때의 지식들은 곤도르와 같은 후대의 드워프들에게도 이어져 있다.
“최신 기술이 집약된 방어구라면 당연히 엑시드지.”
요구를 듣는 동안에도 곤도르는 손을 쉬지 않았다. 꼬질꼬질하던 아가로트의 반지가 순식간에 새것처럼 반짝반짝하게 연마되었다.
곤도르는 엑시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엑시드의 성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좋아하지만 않을 뿐, 엑시드의 제작에 관해서도 완벽에 가까운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엑시드의 제작은 너무 오래 걸려. 특히 드래곤의 소재를 사용한다면 넉넉잡아도 몇 달은 걸릴 걸세.”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대한 문제점도 있다. 이 방을 약식의 공방으로 만들어두기는 했지만, 망치섬에 있는 곤도르의 진짜 공방과는 비교가 안 된다. 화력적인 부분에야 세냐나 유진이 도울 수 있지만, 그 외의 도구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엑시드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몸통만 제대로 보호하는 비늘갑옷 정도면 돼.”
“자네가 쓸 건가?”
“아니.”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을 소재로 만든 갑옷? 꽤 욕심이 나기는 했다만, 급조해 만든 갑옷에 당장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그런 갑옷을 입는 것보다 그냥 오러실드를 두르는 편이 더 낫다.
“시엘이랑 디자이라. 그 둘한테는 이미 말해뒀어.”
바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지간한 위험이라면 저 둘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겠지만, 아이리스와의 전투를 ‘어지간한 위험’이라 치부하는 것은 지나친 오만이다.
앞으로 일주일 뒤.
시무인의 본섬인 셰도르에서 토벌대가 출범한다. 토벌대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을 항해하여, 해적여제가 지배하는 솔가르타 해역으로 진군할 것이다. 어쩌면 솔가르타 해역에 도달하기 전에 아이리스와 부딪칠 수도 있겠지만…… 유진은 그런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리스가 아무리 병신이라 해도, 자기 자신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장을 버리면서 앞으로 나와줄 리가 없잖은가.
“비늘갑옷이라…….”
곤도르는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엑시드도 아니고, 전신갑옷도 아니다. 몸통 하나마 보호하는 갑옷이라면 제작에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육지에서 일주일…… 턱도 없군, 배에 올라타서도 작업해야겠어.”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도면이 떠올랐다. 비늘 몇 개도 아니고, 드래곤의 시체를 통째로 다뤄볼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그 시체가, 용마성에서 동족들을 학대하며 노예로 부려온 마룡 라이자키아라니!
곤도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벙긋벙긋 웃어댔다.
“나와라.”
유진이 망토를 들췄다. 라이미르아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서 걸어 나왔다가, 유진의 생각을 전해 받고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은자여. 일단은 본녀는 흑룡공의 혈육이니라.”
“그게 뭐?”
“으흠…… 본녀의 브레스를 단조의 화력으로 삼는다는 발상은, 너무나 패륜적이지 않은가?”
“네가 언제부터 그런 것을 신경 쓰는 효녀였다는 거냐?”
라이미르아는 반박할 수가 없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라이미르아는 죽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효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상을 모두 알게 된 지금은, 그 끔찍한 마룡에 대해서는 혐오와 경멸을 가지고 있다.
“복수한다고 생각해.”
“은자는 너무한 사람이다…….”
“네가 정 싫다면 억지로는 안 시켜. 앞으로 일주일은 나도 바쁘고 세냐도 바쁠 테니까, 너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었…….”
“오오, 오, 오오오……!”
라이미르아는 감격하여 두 눈을 크게 뜨고 어깨는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성큼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유진의 양손을 마주 잡았다.
“은자가 이만큼이나 본녀를 믿어주었다니! 그렇다면 본녀는 응당 믿음에 부응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 그래.”
“은자는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느니라. 본녀가 은자의 부탁대로 저 드워프와 합작을 할 것이니, 은자는 은자의 일에 몰두하면 된다!”
라이미르아가 머리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길쭉한 뿔이 유진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면서도, 라이미르아가 바라는 대로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라이미르아는 만족하고서 몸을 돌렸다.
“조그마한 드워프야! 본녀의 이름은 라이미르아라고 하느니라. 본녀가 직접 불을 뿜어줄 터이니, 너는 그때마다 망치질을 하거라.”
곤도르는 혼란스러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흑룡공의 혈육? 그렇다는 것은, 저 작달막한 뿔 달린 여자아이가 블랙드래곤의 헤츨링이란 말인가?
“그럼 수고들 하고.”
돌려받은 아가로트의 반지를 손에 끼고서, 유진은 방을 나왔다.
출정까지 앞으로 일주일…… 넉넉한 시간은 아니다. 바다에서도 한 달을 넘게 항해하기는 하지만.
기왕이면 일주일 안에 끝내두고 싶었다.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갔다. 힐긋 본 창문 밖에서 시엘과 디자이라가 카르멘을 상대로 합공하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시 걸음을 떼어 계단을 내려갔다.
저택의 지하.
본래 식료품 창고로 쓰이는 자그마한 방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방 구조 자체를 마법을 사용해 확장하고 강화했다.
유진은 몸에 걸친 망토를 벗었다. 대충 구석에 던져놓으려 했는데, 어느새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양손으로 망토를 받았다. 그녀는 망토를 소중히 감싸 안고서 엷은 미소를 짓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거의 다 됐어.”
방의 중앙.
세냐가 메르를 데리고서 앉아 있었다. 세냐는 평소답지 않게 신중한 얼굴을 하고서 양손을 움직였다.
화아악! 그녀의 앞에 떠 있던 복잡한 수십 개의 마법진이 하나로 겹치더니, 주먹만 한 크기의 구체가 되었다.
메르를 구성하고 있는 마법 술식이다. 세냐는 조정한 술식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흠.”
라이언하트 본가에서부터 구상하던 술식이 이제야 완성되었다.
세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중에 떠 있던 구체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메르의 가슴 안으로 들어갔다.
메르는 바로 눈을 뜨지 않았다. 더해진 술식이 워낙 방대한 데다 복잡하기 때문이다. 세냐는 술식이 사역마의 육체에 적응해 가는 것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내 시그니처를 메르에게 추가했어.”
엠프레스 룰. 8서클 대마법사인 녹탑주를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았던 시그니처. 이 마법은 사용자가 정해 놓은 공간에 작용하고, 그 공간에서 발현되는 다른 마법에 간섭하고 장악하여 지배한다.
상대가 흑마법일 경우에는 지배까지는 불가능하지만ㅡ 흑마법도 결국은 마법. 사용하는 ‘힘’이 다를 뿐이지, 술식 자체는 존재하기에 엠프레스 룰로 간섭하여 방해는 가능하다.
세냐 본인이 사용할 경우, 엠프레스 룰은 9서클 미만의 모든 마법을 지배할 수 있다. 고금을 통틀어 9서클에 오른 마법사는 오직 세냐뿐. 즉, 그녀는 세상 모든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세냐 본인이 ‘직접’ 사용할 경우다. 메르가 아무리 잘 만든 사역마라 해도, 세냐와 동등한 수준의 엠프레스 룰은 쓸 수가 없다.
“메르를 일종의 트리거로 만든 거야. 뭐,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유진, 너는 여태까지 메르에게 마법적으로 여러 지원을 받았잖아? 앞으로 네가 받는 지원에, 이 현명한 세냐 님의 시그니처도 더해졌다는 것이지.”
세냐는 히죽 웃으며 으스댔다. 메르는 유진과 연결되어 있고, 앞으로의 전투에서 유진의 의지에 따라 엠프레스 룰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발동에 필요한 마나가 꽤 많기는 한데, 너라면 아무 부담이 없을 거야. 어디 보자……. 포착범위는 대충 이 저택 정도? 더 확장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거야. 어쨌든 영역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간섭할 수 있으니까. 그 영역 내에서, 너보다 수준이 낮은 마법사는 절~ 대로 널 마법으로 죽일 수가 없어.”
“그 말이 참 애매하단 말이지, 나보다 수준이 낮은 마법사라?”
“서클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구분은 의지력이 큰 몫을 차지하지. 마법이란 결국 마나를 사용해 의지를 발현해내는 것이니까…… 흠, 엄밀히 말해서 유진, 너는 진짜 8서클의 대마법사는 아니지. 하지만 네 의지력과, 여러 가지가 뒤섞인 경지는 대마법사와 준하지.”
세냐는 메르를 안고서 일어섰다. 이번에도 크리스티나가 세냐에게 다가와서 메르를 건네받았다. 크리스티나는 아직 의식을 잃은 메르를 망토로 둘러싸더니,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래서 지금 네 문제가 쉽지 않은 거고 말이야.”
“일주일이면 뚫겠지.”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세냐가 말한 것처럼, 쉽지 않은 문제기는 했다.
백염식.
현재 유진의 백염식은 6성이다. 암실의 시련을 통해, 백염식은 유진에게 최적화되어 자주색의 불꽃이 되었다. 거기에 유진의 마나에는 세계수의 정령이 변형된 번개불꽃도 섞여 있다.
그것만으로도 유진의 백염식은 ‘특별’한데, 그 외에도 다른 것이 섞였다. 세냐가 만든 위치크래프트, 그를 통해 보았던 이터널 홀. 유진이 이터널 홀에 착안하여 환염식을 만든 것이 벌써 4년 전이다.
‘늘 것 같으면서 안 는단 말이야.’
유진은 두 눈을 찡그리고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솔직히 부족하다고 푸념할 경지는 아니다. 유진의 백염식은 6개의 별을 갖고 있지만, 번개불꽃에 환염식까지 사용하면 본래의 경지보다 월등한 화력을 사용할 수 있다. 거기에 공격기인 이클립스와 공검도 본래 경지에서의 공격을 증폭시킨다.
프로미넌스와 이그니션을 중첩시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말이 6성이지, 유진의 힘은 백염식 7성이나 8성과도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확신은 못 하겠군.’
어쩔 수 없었다. 라이언하트의 역사 300년에서 백염식의 극성에 도달한 것은 베르무트 본인뿐. 후손들 중에서 가장 높은 경지는 7성이다.
‘7성보다는 무조건 내가 강해. 8성은…… 본 적이 없고 기록도 없으니 비교가 힘들고.’
죽은 전대 원로원주, 도미닉 라이언하트와 카르멘이 백염식의 7성이다.
둘이 전력을 다하는 것은 유진도 본 적이 없기는 했지만…… 유진이 생각하기에, 저 둘의 불꽃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베르무트.’
비교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은 베르무트뿐. 그때에는 백염식이라는 이름도 없었지만, 베르무트가 둘렀던 새하얀 불꽃은ㅡ 솔직히, 지금 떠올려도 정신을 압도하는 면이 있었다.
세냐가 보여주었던 기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냐가 상대가 베르무트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장소가 하멜의 무덤인 지하였기에 어느 정도 손속에 사정을 두었지만, 그것을 감안하여도 세냐와 베르무트 사이에는 압도적인 격차가 있었다.
그 대단한 이터널 홀의 마법도 베르무트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베르무트의 정체 모를 마법이 세냐의 마법을 찢어발겼고, 결과적으로 세냐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다.
“으흠.”
세냐는 유진의 얼굴이 심각한 것을 살피고서 낮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옆으로 뻗은 손에 프로스트가 쥐어졌다. 그 새하얀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세냐의 발밑에서 은은한 빛이 나타났다.
톡.
세냐가 발끝을 들었다. 고였던 빛이 넓게 확장되어, 방의 바닥과 벽을 물들였다. 그 속에서 새겨지는 글자가 방 전체를 복잡한 마법진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럼, 해볼까.”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움직였다.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라이자키아.’
놈과 싸울 때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버텼다면ㅡ 유진 혼자서 라이자키아를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잘 싸웠다면.
‘라이자키아는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어.’
오히려 300년 전보다 약해진 상태였다.
그런 라이자키아도 혼자 죽이지 못했는데, 놈보다 훨씬 강할 것이 뻔한 누아르 제벨라나 가비드 린드먼은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리고 바벨의 꼭대기에서 기다리는 유폐의 마왕과, 머나먼 라비스타에서 침묵하고 있는 멸망의 마왕은?
ㅡ혼자 싸울 필요는 없다. 300년 전에 그런 것처럼, 아마 놈들과 싸울 때에는 ‘동료’와 함께 싸울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동료의 존재를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에 눈을 돌릴 핑계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부족하다면 채워야 한다. 나약하다면 강해져야 한다.
‘베르무트보다 더.’
유진은 마법진의 중심에 앉았다. 세냐는 그런 유진의 등 뒤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고, 프로스트를 높이 들어 올렸다.
화아악! 세냐의 등 뒤에도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끼릭, 끼리릭. 마법진을 이루는 글자가 서로 얽히더니,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앞에 선 세냐의 중심에서도 자그마한 원이 나타났다.
“이렇게 서 있으니 전생 생각이 나네. 기억나?”
“그때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당연히 그렇겠지, 네가 전생에 익혔던 마나수련법은 굉장히 쓰레기고 쉬운 것이었으니. 하지만 백염식…… 그리고 네가 만든 환염식. 이건, 으흠, 이 현명한 세냐가 보기에도 굉장히 잘 만든 것이야. 사실, 그쪽은 별로 고칠 것이 없을 거야.”
세냐는 이터널 홀을 유지하면서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고친다기보다는…… 음, 뚫어버리는 거지. 부숴 버린다고 해야 하나?”
“조심해, 자칫하다가 코어가 박살 나기라도 하면…….”
“에이, 걱정하지 마. 이 현명한 세냐가 그 정도의 힘 조절도 하지 못할 것 같아? 나를 믿어.”
“사실 나는 너보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를 믿어.”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벽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크리스티나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유진 님이 죽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래…….”
믿음직스러운 말이기는 했다. 유진은 마음의 각오를 하고 두 눈을 감았다.
유진의 백염식은 쭉 6성에 머무르고 있다. 별이 늘어날 것 같은데,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환염식에 번개불꽃까지 더해지며 최적화된 백염식. 평범한 6성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화력을 뿜어대고 있으니, 그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기에도 더 많은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세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방 안 가득 새겨놓은 마법진을 통해서 유진의 몸 안에 존재하는 마나의 흐름을 모조리 확인했다. 마나의 흐름을 ‘보기만’ 하는 것에는 이만큼 커다란 마법진을 새길 필요는 없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간섭하기 위한 마법진이다. 세냐는 정신을 집중하고서 손을 뻗었다.
유진의 의식과 세냐의 의식이 동조되었다. 유진이 먼저 백염식을 운용했다.
화르륵! 자주색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고, 파직거리는 전류가 불꽃의 겉에 흘렀다. 세냐는 피부가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양손을 불꽃에 가져다 대었다.
“아프면 말해.”
세냐가 속삭였다. 유진은 대답 대신에 두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ㅡ꽈아앙!
머릿속에서.
몸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세냐의 마법이, 마나가, 이터널홀이. 유진의 코어에 처박히는 소리였다.
꽈아앙!
똑같은 소리가 다시 울렸다. 6개의 별이 그리던 회전이, 저 무식한 충격에 뒤흔들렸다.
꽈앙!
다물고 있던 유진의 어금니가 박살 났다. 너무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왼손 약지에 낀 아가로트의 반지가 피에 젖으며 은은한 붉은 빛을 발했다.
유진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충격을 견뎌냈다.
‘죽는 게 낫겠어.’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을 했다. 꼴을 보아하니 일주일 동안 수백 번은 두드려야 할 것 같은데……
꽈아앙!
다시 울린 충격이 유진의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워 버렸다.
문
이를 악물게 하는 고통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럴 때마다 몸 안에서 울리는 소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쿵, 쿵, 쿵…….
편안하지는 않다. 두드려 열거나, 깨부수거나, 어떤 식으로 되는지는 몰라도 ‘두드리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유지는 느끼는 고통 이상으로 집중했다.
이 무식한 방법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는. 세냐와 철저하게 보조를 맞춰야 한다. 세냐의 마법과 마나의 덕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유진도 흐름에 맞춰서 백염식을 운용해야 한다.
마나의 흐름에 몰입했다. 유진은 처음부터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감긴 눈꺼풀의 어둠에서 흔들리는 불꽃을 보았다. 그 불꽃은 백염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새하얀 불꽃이 아닌, 유진이 일궈낸 보라색의 불꽃이었다.
유진은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보라색 불꽃의 흔들림을 노려보았다.
쿵, 쿵, 부딪치는 충격에 따라 불꽃은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유진은 불꽃의 춤에 맞추어 쉬지 않고 백염식의 운용을 바꾸었다.
시간의 흐름이 잘 체감되지 않았다. 전생부터 마나의 조작에 몰입하면 항상 이랬다. 눈에 직접 보이지도 않고, 재능이 없다면 ‘느끼게 되는 것’부터에 몇 년이 걸리고, 그것을 또 원하는 대로 다뤄내는 것에 다시 몇 년이란 시간이 필요한 것이 바로 마나다.
마나는 오묘하고 지랄 맞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상냥하고 쉬웠다. 전생의 유진은 잘하는 재주가 여러 가지 있었으나, 그중 가장 잘하고 좋아하던 것이 바로 마나를 다루는 것이었다.
잘하고, 좋아하는 것에는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아주 잠깐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훨씬 긴 시간이 흘러버린 때도 많다.
이렇게나 강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유진이 이 상황에서 자신 외에 다른 것을 일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세냐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 타인의 마나와 완벽하게 동조하고 흐름을 맞추는 것. 다른 대마법사들은 난처해할 일이지만, 세냐라면 무조건 할 수 있다. 심지어 세냐는 유진만 버틸 수 있다면 몇 날 며칠이건 마법을 유지할 수 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 서로의 동조가 어긋나서 혈도가 뒤틀리기라도 한다면?
그런 불상사에 대한 대비도 완벽하게 되어 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둘이자 하나인 성녀들이 곁에 있는 한은 죽고 싶어도 죽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유진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가 있었다. 이것을 얼마나 반복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백염식의 성취와 마나의 흐름, 별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ㅡ 토벌대가 출정하기 전에 7성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애당초 이 방법은 즉석에서 급조해낸 것이 아니다. 시무인에 도착하기 전, 라이언하트에서부터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고 문제점을 검토하여 도출한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유진과 세냐는 이 방법으로 통해서 당장의 벽을 돌파할 수 있으리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야 무조건 잘할 거고, 세냐만 잘한다면…….’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꽈아앙!
희미할 만큼 멀어졌던 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렸다. 몸 안에서 울리던 충격도 정신을 통째로 날려버릴 것처럼 강렬했다.
‘세냐……!’
뭔가 문제가 생겼다. 설마 저 작은 잡념 때문에? 아니 그럴 리가. 유진의 마나 조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잠깐 잡념을 떠올리긴 했지만, 고작 그런 것에 무너질 만큼 가벼운 몰입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했다면, 유진의 잘못이 아닌 세냐의 잘못이다.
오만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유진은 절대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당장 따지면서 쏘아댈 수는 없는 상황이니, 유진은 문제로 인해 뒤틀어졌을 마나의 흐름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의식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문제는 유진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마나의 흐름이 뒤틀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기감이 마비되었나? 그 정도일 리가 없는데. 그만큼 심각한 문제라면 아예 의식이 끊어지거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이라도 지르게 될 텐데. 유진은 현재의 상태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눈을 떠보았다.
“……뭐야 이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유진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저택의 지하 방에서 눈을 떴는데ㅡ 눈앞에 바다가 보이고 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유진은 앉은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서 멍하게 입만 벌렸다.
억지로라도 당황을 진정시켰다. 설마 세냐가 이런 장난질을 할 리는 없고…… 너무 큰 충격에 정신이 어떻게 되어서 환각이라도 보는 것이 아닐까?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환각이라 생각하기에는 보이는 모든 것이 현실처럼 실감이 가득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바다. 아니ㅡ 저것은 바다가 아니다. 조금 늦게나마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제대로 이해했다. 저것은 바다가 아니라, 거대한 파도였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대해도 너무 거대한 파도가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파도의 저편을 볼 수가 없었다. 시야의 모든 범위에 파도뿐이다. 저 말도 안 되는 파도는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았다. 파도 외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래에서 파도와 함께 다가오는 해무(海霧)뿐이었다.
그만큼 커다란 파도가 덮쳐오고 있는데, 바닷바람 특유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식한 즉시 뇌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냄새.’ 유진은 이것이 어떤 냄새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피의 냄새. 내장의 냄새. 부식이 시작된 시체의 냄새. 쏟아낸 오물의 냄새.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죽음의 냄새. 그러한 냄새는 언제나 끔찍하고 역겨운데ㅡ 지금 맡는 냄새는 특히나 지독했다.
유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무엇을 보게 될지는 너무나 뻔했다. 나름의 각오도 했다. 이렇게나 끔찍하고 역겹고 지독한 죽음의 냄새라면, 당연히 그만큼의 시체들이 있을 것이다.
잘 아는 만큼 익숙했다. 300년 전의 끔찍한 시대였고, 전생의 기억 대부분의 배경은 전장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살아 있을 때. 튜라스 변경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던 때를 제외하면ㅡ 유진의, 하멜은 거의 대부분의 삶은 전장에서 보냈다.
전장은 언제나 시체가 많다. 전쟁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인간이나, 엘프나, 드워프나, 그 외 종족, 몬스터, 마물, 마족. 하멜은 어려서부터 저런 시체가 그득 쌓인 전장에서 살아왔다. 시체를 보게 되는 것에 대한 경악 따위는 이미 어린 나이에 졸업했다.
하지만.
지금 보게 된 것에는 경악했다. 아니, 압도당했다.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저쪽에서 보이는 것이 끝이 가늠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파도라면, 이쪽에서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로 거대한 시체의 산이고, 바다였다. 어디를 봐도 시체뿐이었다. 시체가 너무 많아서 다른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게 뭐야?”
환각? 악몽? 유진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에도 ‘파도’는 다가왔다.
파도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전. 먼저 해무가 덮쳐왔다. 그 희뿌연 안개는 죽음의 냄새까지도 모조리 뒤덮어 지워 버렸다.
유진은 그 한가운데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안개가 시체들을 덮는다. 세상이 뿌연 안개에 삼켜져 사라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로 모든 것을 덮치고 지워버릴 파도는 아직 덮치지 않았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갯속. 파도는 보이지 않는다.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유진은 근원적이고 불길한 공포를 느꼈다.
이러한 기분은ㅡ 오래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무엇인지 정확하게 볼 수조차 없던 존재.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본 것만으로도 절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 존재.
ㅡ쿠웅.
파도가 덮치기 전.
무언가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짙은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던 몸이, 그리고 의식이 까마득한 지하로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유진!”
“하멜!”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진은 눈을 깜빡거리며 시야를 확인했다. 놀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세냐와 아니스가 보였다.
“어…… 어어.”
유진은 더듬더듬 목소리를 짜냈다. 목소리를 내자마자 아니스가 품에 와락 안겨 왔다. 아니스는 떨리는 손으로 유진의 몸을 더듬으며 말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진 님,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어느새 앞으로 나선 크리스티나가 울먹거렸다. 움직일 타이밍을 놓쳐버린 세냐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벅거리다가, 늦긴 했지만 일단 크리스티나의 옆에 몸을 밀어 넣었다.
“무슨…… 일? 아…… 이, 일단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의식이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진은 두 명에게 깔리다시피 누워서, 일단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별문제는 없었다. 코어도 멀쩡했고, 혈도가 뒤틀리지도 않았다. 굳이 아픈 곳을 꼽자면 양 뺨 정도였다.
왜?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정신을 잃은 동안에 세냐나 아니스가 몇 대 후려친 모양이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유진은 깔린 몸을 뒤척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세냐를 한번 흘겨보았다.
“세냐 님이 실수한 것 아닙니까?”
“얘 좀 봐,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야? 신에게 맹세코 나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어!”
“세냐 님은 믿는 신도 없으시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정말 아무 실수도 하지 않았어. 만약 실수가 있었다면, 내가 아니라 유진이 한 것이겠지.”
“나도 실수는 안 했는데?”
유진은 누웠던 몸을 앉히고서 중얼거렸다.
“너와 나 둘 다 실수를 안 했으면,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뭐 이상한 점은 없었어?”
“이상한 점? 있었지.”
세냐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유진은 자신의 왼손을 쳐다보았다.
피가 말라붙은 손. 새것처럼 연마했던 아가로트의 반지에 피가 엉겨 붙은 것이 보였다.
“반지가 검붉은 빛을 뿜어대던데, 네가 한 것 아니었어?”
“내가? 왜?”
“그 반지의 능력은 네 몸을 회복시키는 거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나의 흐름을 동조시키는 과정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 그로 인해 유진의 몸 안에서도 문제가 생겼고,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아가로트의 반지를 사용했다.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아가로트의 반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반지가 가끔 멋대로 신력을 보태오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ㅡ 그것은 어디까지나 힘을 보태는 정도였지, 멋대로 권능을 발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지를 깨끗하게 닦아줘서는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반지를 노려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지를 의식해 보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다. 잠시 동안 반지를 노려보던 유진은, 대뜸 왼손바닥을 손톱으로 그어 상처를 만들었다.
세냐와 크리스티나는 그 광경에 당황하지 않았다. 유진이 정신을 차리기도 했으니, 둘 다 냉정하게 상황을 주시할 수 있었다. 유진은 둘의 시선을 받으며 반지의 권능을 일으켰다.
고작해야 손바닥의 작은 상처일 뿐. 치료하는 것에 소모되는 원기(元氣)는 많지 않다. 아가로트의 반지는 그 얼마 되지 않는 원기를 받아먹고서 순식간에 상처를 재생시켰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진은 손을 쥐었다 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뭐였지?’
반복된 충격에 나도 모르게 반지의 권능을 일으켰다? 그건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반지를 사용한 적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진짜 심각한 죽을 위기는 라이자키아와 싸울 적이었는데, 그때 아가로트의 반지를 사용했을 때에는 아까 같은 환영은 보인 저기 없었다.
반지를…… 말끔하게 닦아서? 그럴 리가 없잖은가.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반지에 피를 묻혀보았지만, 이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유진은 반지 낀 손을 이리저리 기울이다가, 말라붙은 피를 닦아냈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나라…… 이 바다에는 아가로트에 관한 신화가 남아 있다.’
아마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가로트의 신화가 남은 땅일 것이다. 아가로트의 반지가 날뛴 것을 저러한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나?
“저는 아가로트라는 이름은 잘 모릅니다.”
유진의 의문에 대해서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한 고대의 신들은 대부분이 지금 시대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요. 유라스의 신학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최초로 신이라 불리셨던 분이 바로 빛의 신입니다. 그분이 밝힌 빛에서 비롯된 신들은 결국 빛의 자식일 뿐입니다.”
아득한 옛날. 마왕조차 존재하지 않고, 마족과 마물, 몬스터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의 먼 옛날. 저러한 존재들을 뭉뚱그려 ‘괴물’이라고만 부르던 옛날.
그러한 옛날에 빛의 신이 강림했다. 인간이 어둠에서 태어나고 어둠과 함께 몰려다니는 괴물들을 두려워하자, 빛의 신은 인간들을 위해 어둠을 밝힐 빛을 주었다. 인간이 피워내는 불꽃에 밝음을 주었다.
빛의 신이 강림했기에 인간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늘에서 강림한 유일한 신은 빛의 신뿐. 그 외의 신들은 빛이 밝힌 지상에서 태어났다.
“유라스의 신학대로라면 아가로트도 그런 존재일 겁니다.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 아닌, 빛이 밝힌 세상에서 태어난 신. 그런 존재들은 대부분이 인간이 숭배하여 태어나지요.”
유라스는 빛의 신이야말로 유일하고 참된 신이라 여기고, 다른 신들은 신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무식한 고대인들이 추켜세운 가짜라고 여긴다.
사실 그러한 이야기에는 유라스도 떳떳하지는 못하다. 오래전 빛의 교인들은 확실한 숭배의 대상이 필요하단 것에 집착하여, 성황의 유골을 사용해 모조화신을 만들었다. 유라스부터가 추켜세울 가짜에 집착한 것이다.
“그런 것이 필요한 시대였지요.”
크리스티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먼 시대에서 인간은 최초로 ‘신’이란 존재를 알게 된 겁니다. 모두가 그러한 존재를, 누군가를 신이라 부르며 숭배하기를 원했습니다.”
빛의 신 이후로 세상에 수많은 신들이 나타났다. 그런 신들 대부분은 지금 시대에는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아가로트가 정말로 ‘신’이라 할 만한 존재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런 존재의 죽음을 어찌 말해야 할지, 그 아득한 옛날…… 신화시대에 있던 일을 우리가 완전하게 해석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유진 님.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 존재 유무가 아닌, 신앙이랍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그런 존재다. 성녀의 본질은 신이 점지한 것이 아닌,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낸 모조화신이다. 철저하게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졌지만, ‘성녀’라 이름 붙인 것만으로 수많은 교인들이 성녀를 성녀라 숭배하며 신의 실존을 믿어왔다.
“유진 님이 가진 반지는 아가로트의 성물이고, 이 바다에는 아가로트에 대한 신화가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바다 어딘가 에서는 아직까지도 아가로트에 대한 신앙의 맥이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반지가 반응했다?”
“확답은 못 하겠습니다. 아니면…….”
크리스티나는 곧장 말하지 못하고 말을 조심했다.
“계시인 걸지도 모르죠.”
머뭇거리는 크리스티나 대신에 아니스가 나왔다. 그녀는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보았다.
“빛의 신은 직접 계시를 내리시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흠, 하멜. 그 반지가 고대의 전쟁신 아가로트의 성물이고, 여태까지 그 존재의 신력이 당신에게 힘이 되었던 적이 있지요? 그렇다면 아가로트는 당신을 꽤 어여삐 여긴다는 것이겠죠.”
“그래서 아가로트가 나한테 계시를 내렸다는 거야?”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크리스티나가 말했듯이,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사이비종교의 교주들이 괜히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신이 참 많았던 것이겠죠.”
유진은 수상쩍다는 눈을 하고서 반지를 노려보았다.
“아가로트가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었는가……. 흠. 유라스의 신학에 따르면 빛의 신 외에 하늘에서 강림한 신은 없다는데, 그것은 솔직히 믿을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유라스…… 빛의 신교 자체가 워낙 뒤틀리고 돌아버린 곳이라서요. 어쩌면 빛의 신 외에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 여럿 더 있고, 아가로트도 그중 하나일지도 모르죠.”
다른 성직자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이야기지만, 아니스는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존재라면 계시도 내릴 수 있겠죠. 그 계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진은 아까 보았던 환영의 내용에 대해 집중했다.
덮쳐오는 해무와 바다.
너무 많은 시체.
“…….”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암실에서 보았던 것.
먼저 보았던 것은, 시체가 흔한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전장. 그 전장을 비틀거리며 걷던 남자. 얼굴은 보이지 않고, 절망감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서 머나먼 곳으로 나아가던 남자.
그다음에 보았던 것은, 수북하게 쌓인 시체의 산. 피와 살이 엉겨 붙은 대검을 어깨에 걸치고, 시체의 산 위에 앉아 있던 남자.
‘그거도 계시였나?’
유진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때 암실에 들어갔을 적에는 아가로트의 반지를 빼놓고 갔다.
하지만 반지 자체는 전부터 끼고 있었다.
왼손 약지의 반지는 고대부터 계약, 결합, 약속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졌다. 유진이 처음 약지에 반지를 끼고, 피를 마시게 한 순간부터ㅡ 유진은 아가로트와 계약을 맺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연결되었다면,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아도…… 계시를 받을 수는 있겠지.’
혹은.
‘아가로트의 기억 일부를 본 것이거나.’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주먹을 쥐었다.
“다시 해보지.”
“뭐?”
“하멜, 미쳤습니까?”
“모르겠으면 한 번 더 해봐야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문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시도해 보았지만, 한 번 더 환영을 보는 일은 없었다. 여러 가지 변칙도 줘보았다. 두드리는 강도를 올리거나, 일부러 아가로트의 반지를 의식하기도 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시라는 것은 철저하게 신의 의사에 달린 것입니다. 기도하는 인간이 아무리 간절히 바란다 해도, 신이 무조건 응답해 주지는 않는답니다.”
“빛의 신의 조언은 없나?”
“그 무뚝뚝한 분이 이런 문제로 조언을 해줄 리가 없잖습니까? 300년 전, 유폐의 마왕과의 결전. 제가 생애 가장 간절한 순간조차에도 빛의 신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내려주지 않으셨는데.”
아니스는 방긋 웃으며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가장 간절한 순간. 유폐의 마왕과 싸울 때일까? 아니면…… 유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가지 중에 무엇이 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을 굳이 아니스에게 묻지는 않았다.
사실 아니스가 저런 웃음을 짓는다는 것에서부터 대답이 뻔하기는 했고, 유진은 그 뻔한 대답에서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크흠…….”
“천사인 너도 신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냐?”
“말이 천사일 뿐. 유령과 별다를 것도 없는 존재지요. 차이가 있다면 날개를 펼치고 빛을 내뿜을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요?”
아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죽어 천사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니스가 빛의 신을 ‘직접’ 만나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신’이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느낄 수는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받았던 계시. 베르무트의 무덤을 확인하고, 유진 라이언하트를 용사라 임명하는 것은 빛의 신의 뜻이었다.
‘그때부터로군.’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자리에 앉았다.
만약, 그때 크리스티나가 계시랍시고 유진을 끌고 가지 않았다면. 도이네스, 길레이드와 함께 베르무트의 무덤에 들어가서, 관을 열어보지 않았다면.
애초에 빛의 신이 저런 계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과연 베르무트의 관을 열어보았을까?
‘언젠가 열어보기는 했겠지.’
베르무트가 정말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때 유진도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베르무트가 늙어 죽었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금하기는 했어도 빠르게 확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유진은 흑사자성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입장이 아니었다.
“아직도 하고 있어?”
시엘이 지하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유진을 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불꽃.
칙칙한 보라색의 불꽃이 유진의 몸을 덮고 있다. 소리 없이 타오르는 마나의 불꽃은 유진의 머리를 넘어 천장까지 넘실거렸다.
열기는 없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격’이 느껴졌다.
‘저게 뭐야?’
이 방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안다. 수행에 방해를 하고 싶지 않아서 매일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나흘 전에 유진의 부탁을 듣기 위해 지하에 내려왔을 때.
그때 보았던 불꽃도 강렬하기는 했지만ㅡ 지금처럼 위압스러운 격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시엘은 반쯤 입을 벌리고서 유진을 쳐다보다가, 표정을 가다듬고서 걸음을 뗐다.
“백염식이 7성에 오른 거야?”
“아직 아냐.”
“아직…… 아니라고?”
시엘은 저 대답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과 비교해서 노골적으로 느껴질 만큼 마나의 질이 오르고 불꽃의 격이 높아졌는데, 아직 7성에 오른 것이 아니라고?
“거의 깨부수기는 했는데, 아직 별이 늘어나지는 않았어.”
빠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이면 7성에 오를 것은 확신했다.
‘그래도 배를 타기 전에는 끝나는군.’
지금 이런 방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유진의 백염식이 여러 의미로 꼬여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백염식의 성취를 올리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 다음에는 이런 편법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일단…… 도서관은 뒤져봤는데, 고대의 신들에 대해서는 서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더라고. 있어봤자 아가로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고.”
시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의 앞에 앉았다.
“그래서 이 분야의 전문가를 만났지. 시무인의 민속신앙을 연구하는 학자 중에서 가장 저명한 분으로 말이야.”
전쟁의 신.
어떻게 포장을 하건, 전쟁이란 결국 누군가를 죽이고 정복하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아가로트는 훌륭한 학살자이고 정복자였다. 그는 신격(神格) 자체가 전쟁이었고, 이름부터를 전쟁으로 삼았다.
왜, 아가로트가 그토록 전쟁을 벌였는지. 전쟁을 주도하고 전쟁에 집착하였는지, 지금 시대에서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ㅡ 아가로트는 혼란스러운 고대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난폭하며, 피비린내를 언제나 곁에 두었던 광기 가득한 신이었다는 것이다.
“학자의 말에 따르면, 아가로트는 대단한 정복자였대.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도 않고, 생애 대부분을 떠돌아다녔다더라.”
전쟁이 끝나면 새롭게 전쟁을 벌였다. 유진은 암실에서 보았던 시체가 가득한 전장을 떠올렸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암실에서 보았던 환영이 아가로트에 관련된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해 어딘가에 아가로트의 성지가 있다던데, 그런 얘기는 없었어?”
“머나먼 바다의 어딘가, 라고는 하는데…… 자세한 위치까지는 알 수 없다나 봐. 그쪽의 무인도에서 아주 드물게 유적이 발견되곤 한다는데, 그것도 대단한 유물이라 할 만한 것은 못되고.”
유진은 약지에 끼고 있는 아가로트의 반지를 노려보았다. 저번처럼 계시라도 더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가로트는 아무런 계시도 내리지 않고 있다.
아가로트의,
반지의 성질(性質)에 대해서 생각했다. 반지가 처음으로, 제멋대로 날뛰어 댄 것은 빛의 샘. 그다음은 루하르에서 가비드 린드먼에게 덤볐을 때.
성검을 사용했을 때다. 유진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회고해 보았다.
분노, 증오, 살의, 그런 종류의 감정들. 모두가 전쟁에서 폭주하는 광기다. 유진은 그런 감정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에게는 저 감정들은 친숙했다.
‘필요해.’
아예 빼버릴까, 생각은 했지만…… 필요한 순간에 덕을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도 그런 순간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나.
‘반지를 얻은 것은 우연…….’
아리아르텔이 아가로트의 반지를 준 이유는, 이 반지가 유진의 여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다.
라이언하트의, 베르무트의 무구를 가지고 있는 유진에게 무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아르텔은 아가로트의 반지를 선택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절묘한 선택이기는 했다. 쓸데없이 무겁고, 움직이기 불편한 방어구보다는ㅡ 죽음을 조금이라도 유보시켜 주는 이 반지에 더욱 큰 매력을 느꼈다.
아가로트의 반지를 얻게 된 것은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쯤 되면 운명이란 생각도 들어.’
머나먼 바다.
혹은 라구르 야란.
의미하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발길이 허락되지 않는 ‘끝’. 그곳이 대체 무엇이며, 그곳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멸망의 마왕과 닮은 불길함을 가진, 누르라 불리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것일까. 그 셀 수 없이 많은 괴물들이 자기들의 땅을 떠나, 끝을 넘어서, 이 세상을 짓밟으려는 것일까.
유진은 반지 낀 손을 움켜쥐었다.
남해의 끝, 그 어딘가에 있다는 아가로트의 성지. 놈의 성물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계시를 받기도 했으니…… 언젠가는 그곳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출항하기 며칠 전부터 셰도르의 바다에는 거대한 함선들이 줄지어 섰다.
솔가르타 해역까지 항해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몇 달. 발달한 마법은 무역에 개념을 크게 바꾸었고, 이제는 많은 물자를 싣는 데에 그만한 크기의 배가 꼭 필요하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마법이라고 해서 법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특히 ‘살아 있는’ 인간에 관해서는 마법에도 여러 제한이 붙는다. 왕복 몇 달의 여정에서 사용할 물자는 그보다 적은 공간에 마법으로 욱여넣을 수 있다.
인간을 대상으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괜히 공간을 무리해서 확장하여 거주공간으로 삼았다가, 항해 도중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인명에 관련된 공간마법이란 언제나 대참사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에, 조심스럽고 엄격하게 다뤄야 한다.
그래서 함선은 크다. 수백 명이라는 목숨을 태우니 당연한 것이다.
줄지어 선 함선들은 대부분이 같은 깃발을 내걸었다. 파도 위에서 날개를 펼친 독수리. 시무인 왕가의 상징이다.
“왕국은 독수리를 참 좋아한단 말이야.”
옆에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봐, 아롯의 왕국기도 그렇잖아.”
“독수리라고 다 똑같은 독수리인 것은 아니잖습니까? 아롯의 왕국기는 지팡이를 발톱에 쥔 독수리인 것으로 압니다만.”
“그래 봤자 다 똑같은 독수리지 뭐.”
“키옐의 상징은 드래곤이에요.”
잠자코 듣고 있던 시엘이 으스대듯 말했다.
“제국이랍시고 재는 거야 뭐야? 하긴, 독수리보다는 드래곤이 더 강할 테지. 덩치도 크고, 하늘도 높이 날고, 마법도 쓰고.”
세냐는 투덜거리면서 시선을 들었다. 왕국기를 매단 함선들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다른 깃발을 매단 배가 없지는 않았다.
특히 검과 창, 화살이 그려진 깃발을 매단 배는ㅡ 왕국 함선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의 위용을 자랑했다.
“용병왕, 아이빅 슬라드의 배입니다.”
카르멘이 말했다. 그녀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면서 시선을 들었다.
드래곤의 머리를 한 선수상(船首像)에 선 남자가 보였다.
“저 남자가 바로 아이빅입니다.”
짧은 금발에 그슬린 피부. 모론이나 이바타, 가르기스처럼 우락부락한 거구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빅의 등에는 저러한 거구들만큼이나 커다란 활이 걸려 있었다.
“검과 창, 그리고 활. 아이빅이 다루는 무기입니다. 저도 예전에 가볍게 겨뤄본 적이 있는데, 우습게 볼 상대는 아닙니다.”
“그야 그렇겠죠. 저 남자가 시무인의 세컨드 아닙니까?”
유진은 먼 곳에 선 아이빅을 힐긋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퍼스트는 격랑 기사단의 오르투스. 그다음 서열의 세컨드가 바로 아이빅이다.
“세컨드…… 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오르투스보다 까다롭지. 애당초 시무인의 ‘퍼스트’는 왕가 직속에게 주어지는 칭호기도 하니, 용병인 아이빅은 퍼스트가 될 수도 없는 몸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이빅의 실력이 오르투스 경보다 위라는 겁니까?”
“글쎄. 둘이 진심으로 서로를 죽이려 해본 적은 없을 테니, 실력의 우열은 가리기 힘들지. 하지만 둘과 대련을 해본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흠. 아이빅이 거리를 벌려서, 죽일 작정으로 활을 쏘기 시작한다면…… 내가 싸우기에는 그쪽이 더 까다로울 것 같군.”
그렇게 말하고 난 뒤, 카르멘은 아차 싶어서 덧붙였다.
“물론, 까다롭다는 것이지 나보다 강하다는 것은 아니다. 혈사…….”
“카르멘 님, 지금 그렇게 부르면 아니 되어요.”
뻣뻣한 동작으로 걷던 디자이라가 다급히 카르멘의 말을 끊었다. 음. 카르멘은 작은 신음을 내면서 머뭇거렸다.
그…… 백염식의 7성에 오른.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도 카르멘 자신을 포함해 3명밖에 없는, 가문의 자랑이라 할 수 있을 혈사자의 저런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카르멘을 내심 괴롭게 했다…….
“유…… 리.”
이제는 유진의 표정이 파들거릴 차례였다. 뺨이 경련할 때마다 얼굴에 펴 바른 화장이 느껴진다는 것이 더더욱 유진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쉬잇, 유리, 주먹에 너무 힘을 주면 안 돼. 기껏 압축시킨 근육이 뻥 터져버릴지도 몰라.”
“유리 님, 부디 분노를 진정시켜 주십시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보고 있습니다.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저들 중에서는 유리 님의 분노를 알아차리고 수상하게 여길 만큼 예리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냐와 크리스티나가 곁에 붙어서 속삭였다.
“지금의 처지를 자각해야 해, 유리. 너는 지금 여자처럼 화장을 하고 여자의 옷을 입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여기서 참지 못하고 펑, 터져버리면? 저 많은 사람들이 네가 여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겠지?”
시엘도 재밌어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키득키득 웃으며 속삭였다.
“전부 네 탓이잖아……!”
“부탁은 내가 한 것이지만, 들어준 것은 너잖아. 유리. 네가 조금만 덜 착했다면 이딴 부탁은 들어주지 않았을 텐데.”
시엘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 이제 와서 벗기에도 늦었잖아? 그러니 일단 배를 탈 때까지는, 응? 배에 타고서는 밖에 안 나가면 되는 거니까.”
살살 달래는 말에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 일단 배에 탈 때까지만. 게다가 시엘의 말대로 지금은 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골칫거리인 해적여제를 토벌한다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이 열광할 거리인데, 그 토벌대의 출정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벌이니 구경꾼이 모일 수밖에 없다.
‘열심히들 쳐다보는군.’
아이빅과 마찬가지로, 먼저 배에 오른 사람들의 시선이 강렬했다.
그럴 수밖에. 최연소로 십이걸에 든 시엘만으로도 주목을 살 만한데, 라이언하트의 최강자라 평가되는 카르멘까지 있지 않은가.
비록 숫자는 적을지라도, 카르멘과 시엘, ‘라이언하트’라는 이름만으로도 모두가 이쪽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만큼 열렬한 시선을 받기에.
유진은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걸음걸이 하나하나를 신경 썼다. 굳이 고개를 들어서 저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된다는 점은 편했다.
지금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는 라이언하트의 몸종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아이빅
“옛날 생각이 나네.”
세냐는 입꼬리를 쭉 내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처럼 커다란 함선을 타고서, 대대적으로 과시하듯 출항까지 하는 것은ㅡ 300년 전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실 똑같지는 않았다. 그때, 하멜과 처음 만나서, 함께 헬무드로 출항했을 때. 모두가 함께 탔던 배는 지금 타고 있는 배보다 초라했다.
‘고작’ 아이리스 따위를 토벌하는 데에 동원되는 함대가 이토록 많은데, 300년 전에 ‘용사’ 베르무트와 동료들이 헬무드로 출항했을 때에 함께 떠났던 배는 겨우 열 척도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당시의 항구도시에서는 헬무드로 출항하는 배는 한 척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참하게 죽을 것이 뻔한 항해에 함께하겠다는 자살희망자가 많을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그 ‘용사’ 베르무트가 앞장서는 것만으로도 대세가 뒤집어졌다. 누군가가 등을 떠밀어주거나, 아니면 앞에서 잡아당겨 주기를 원했던 자들은 300년 전에도 셀 수 없이 많았던 것이다.
“안에나 들어가지.”
유진은 작게 죽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마법으로 변조시킨 목소리는 여러 번 들었음에도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유진의 마음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가능하다면, 솔가르타 해역에 도착할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점은, 지금 유진 일행이 탄 배가 사실상 라이언하트의 ‘전용’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선원과 전투원이 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 모두가 라이언하트의ㅡ 카르멘과 시엘의 눈치를 보고 있다.
토벌대의 총대장을 맡은 오르투스가 배려해 준 것이리라. 사실 오르투스도 카르멘과 같은 배를 타는 것은 껄끄러울 것이다. 오르투스가 총대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르투스가 카르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왕족과 같은 배를 타지 않은 것이 어디야?”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선두를 나아가는 기함. 돛 전체에 시무인 왕가의 상징이 새겨진, 웅장한 위용을 과시하는 배. 설계부터 제작까지 모두 드워프의 손에서 태어났다 알려진, 시무인 최강의 군함 라베르시아.
저 배에는 오르투스뿐만이 아니라 시무인의 왕족이 2명이나 타고 있다.
격랑 기사단의 부단장, 공주기사라 불리는 스칼리아 아니머스. 또, 그녀의 이복오빠인 자페르 아니머스.
“격랑 기사단 소속인 스칼리아 공주가 있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왜 왕자까지 있는 거야?”
“공적을 위해서지.”
시엘은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스칼리아 공주는 왕가가 내세운 마스코트야. 이 나라는 꼴같잖게도 ‘기사의 나라’라고 불리고 있으니 말이지.”
기사의 나라. 시무인의 왕가는 저 별명에 집착하고 있다. 왕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콜로세움과, 자유기사와 용병들에게 친화적인 정책들도 저 별명을 의식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기사의 나라라 불리려면 왕족부터가 기사여야 하는 법. 그로 인해 스칼리아 공주는, 왕가가 대중에게 어필하기 좋은 캐릭터로 자랐다.
-이 공주님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잠도 자지 않고 열심히 수련하지만, 실력은 솔직히 그냥 그래요. 나쁘다고 할 수준은 아닌데, 공주기사라 떠받들 만큼 뛰어나지도 않아.
북방 설원. 몽마의 여왕은 스칼리아의 몸을 빼앗고서 키득키득 웃었었다.
정확한 평가였다. 스칼리아 공주는 어린 나이부터 검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 만큼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왕가는 억지로 스칼리아 공주에게 ‘자리’를 주었다. 대륙 제일의 기사단을 말할 때에 항상 거론되는 격랑 기사단의 부단장을 말이다.
“정작 스칼리아 공주는 왕위 계승권과 한참 떨어져 있어. 하지만 자페르 왕자는 달라. 계승 서열 3위인 그는 충분히 다음 왕위를 노릴 수 있지.”
자페르 왕자에 대해 말할 때 시엘의 눈썹이 구겨졌다. 시엘은 유진의 표정을 살피면서 작게 헛기침을 했다.
“왕위가 가시권에 있기는 하지만, 서열 3위가 왕위에 오르려면 여러 노력이 필요하지. 승리가 보장된 토벌대에서 여동생 뒤에 숨거나, 아니면…… 음, 타국 명문가의 여식과 혼인하거나.”
혼인? 그 말에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시엘을 쳐다보았다. 지금 시엘이 저런 말을 하는 속내야 뻔한 것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내용이 궁금하기는 했다.
“으흠…… 뭐 너도 알다시피, 라이언하트는 가진 힘과는 별개로 어마어마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잖아. 기사의 나라의 왕자님이 탐을 낼 만하지.”
“정작 너는 그럴 생각도 없잖아.”
“너 가끔 진~짜 잔인한 것 알아? 특히 지금 같을 때.”
세냐와 크리스티나는 설마 시엘이 또 눈물을 쏟아내는 것이 아닐까 경계했지만, 다행히 시엘은 울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며 유진의 허벅지를 퍽 걷어찼다.
“정작? 너야말로 정작 나한테는 그런 마음 하나도 없으면서, 마치 내 마음 다 안다는 듯이 말이야.”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냐?”
“뭐, 물론, 나는! 네 말대로 자페르 왕자한테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차라도 한잔하자는 편지가 몇 번 오기는 했는데, 그것도 다 무시했고.”
“그래서 저렇게 노려보나?”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너 조심해야 하는 것 아냐? 남들 보는 앞에서 몸종을 걷어차다니. 고결한 백장미가 그래도 돼?”
“얄미운 말하기는.”
시엘은 뚱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과연, 유진의 말대로였다. 기함 라베르시아에서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지고 있다.
후방에 서 있는 2명이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의 남녀. 어울리지 않는 수염, 마찬가지로 어울리지 않는 갑옷을 입은 남자. 저 남자가 아마 자페르 왕자일 것이다.
그 곁에 선 여자는ㅡ 유진도 누군지 안다. 스칼리아 아니머스. 루하르에서 보았을 때에는 불면증에 시달리느라 눈 밑이 시커멨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안색은 좋아 보였다.
하지만 눈빛이 칙칙한 것이, 아주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유진은 시체의 목을 썰어대던 스칼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저는 이 공주님을 습격한 것이 아니라, 도와준 거예요. 천성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스칼리아 공주가 설원에서 용병들을 학살한 것은, 누아르가 보여준 악몽에 의해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스칼리아의 눈에서, 용병들은 죽여 마땅한 악인으로 비쳤다.
하지만 스칼리아의 ‘처벌’은 너무 과했다. 더러운 오물이니 징벌이니 떠들며 학살을 벌였다. 그것이 누아르가 말한 ‘천성’이리라.
“스칼리아 공주는 왜 여길 노려보는 거지?”
“라이언하트가 싫을 테니까.”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를 싫어하는 거야.”
“왜?”
“말했잖아? 라이언하트는 어마어마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왕위에서 한참 떨어진 스칼리아 공주지만…… 만약, 차기 가주로 확정된 시안 오빠랑 혼인을 맺었다면? 공주 본인이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겠지만, 왕가로서는 라이언하트와의 혼약을 놓친 것이 엄청나게 아쉬울 수밖에 없지.”
시안의 약혼 상대로 거론된 것은 2명이다.
시무인의 스칼리아 공주와, 루하르 왕국의 아일라 공주. 하지만 아일라 공주의 나이가 11살밖에 되지 않아, 사실상 시안의 약혼 상대는 스칼리아 공주로 확정된 상태였다.
나이트마치로 향하는 설원에서 스칼리아 공주와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악몽에 미쳐서 학살극을 벌인 것을 보지 않았다면.
“달라.”
시엘이 속삭였다.
“그때 너랑 같이 보았던 것과는 별개로, 공주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것에 오빠랑 내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아? 그래서 약혼 상대를 바꾼 거지. 애초에 정식으로 약혼을 맺은 것도 아니고, 구두로만 오가던 이야기였기도 하고.”
“너를 싫어하는 이유는 또 뭔데?”
“정말 몰라서 물어? 최근 1년 동안 내가 시무인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는 너도 대충 알잖아. 무패의 백장미. 당장 랭킹부터 스칼리아 공주보다 높은 데다, 시합에서의 퍼포먼스, 그리고…….”
이건 직접 말하기 조금 부끄러운데. 시엘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표정을 다잡고서 으스대듯 웃었다.
“외모.”
“…….”
“반박이라도 해봐.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때? 나랑 스칼리아 공주, 누가 더 예뻐?”
“그걸 꼭 대답해야 하나?”
“나는 듣고 싶은데?”
“네가…… 더 예쁘기는 하지.”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해주었다. 그 말에 시엘은 뛸 듯이 기뻤지만, 최선을 다해 표정을 감추었다. 그녀는 도도한 척 훗 하고 웃었다.
“바닷바람이 차지 않니?”
재롱잔치를 보는 기분으로 시엘을 보던 세냐가 입을 열었다.
재롱잔치…… 보기 귀엽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서 시엘의 독주를 내버려 둬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인데!’
유진이 별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만ㅡ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갈 나무란 것이 정말로 세상에 존재할까? 21살의 파릇파릇한 시엘이, 그런 포지션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넘어가라, 넘어가라 도끼질을 시작한다면!
세냐는 그것이 두려웠고, 젊은 혈기 가득한 도끼질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냐는 옆에 서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열심히 눈짓을 보냈다.
그야, 크리스티나는 곧 아니스고, 세냐가 생각하기에 둘은 절대적인 자신의 우군이었다. 둘이자 하나인 성녀들은 때로는 노회하고 때로는 젊은 혈기를 과시할 수 있다. 그래서 세냐는 성녀들과 손을 잡고, 시엘의 도끼질을 가로막을 굳건한 장벽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반응은 세냐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시엘에 대한 일말의 경계 없이, 오히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재롱잔치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지금 크리스티나는 순수하게 시엘을 응원하고 있었다. 세냐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그녀는 두렵고도 공포스러운 추측에 도달했다. 23살인 크리스티나와 21살인 시엘이 손을 잡은 것이다.
저 뱀 같은 아니스는 수명이 다해 죽고 천사가 되어 300년을 산 주제에, 세냐가 나이를 가지고 놀림을 당할 때에는 언제나 크리스티나의 뒤에 숨어버린다. 저 20대의 동맹에서 세냐는 완벽하게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화악!
세냐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뭐라 울분을 토하려던 순간. 돌풍과 함께 누군가가 갑판에 떨어져 내렸다.
“흠.”
난간에 등을 기울이고 있던 카르멘이 몸을 바로 세웠다.
“아이빅.”
용병왕이라 불리는 남자. 그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면서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아이빅에게 꽤 관심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빅의 별명이 바로 용병왕이기 때문이다.
‘옛날 생각나는구만.’
300년 전에,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기 전에는 원래 용병이었다. 그냥 그런 용병도 아니고, 엄청나게 유명한 용병이었다. 그 처참한 시대에서도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었고, 받는 값어치 이상으로 일도 ‘잘’해주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물론 좋은 의미로만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스에게 교정 당하기 전의 하멜은 정말로 개차반 같은 성격이었고, 특히 동종업계의 용병들에게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잔혹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멜은 용병 일을 하면서 좋지 않은 꼴을 너무 많이 당했었다. 배신도 숱하게 당했고, 어린 나이에는 엉덩이의 정조까지 위협당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하멜은 용병이긴 했어도 용병들을 혐오했다.
‘하지만 존경받을 용병이기는 했지.’
자칭하기도 우스운 일이지만ㅡ 유진은, 하멜은 이런 것을 자칭하는 것에 큰 부끄럼은 느끼지 않았다.
하멜은 전설적인 용병이다. 지랄 맞은 성격은 둘째 치고, 업적을 본다면 전설적인 용병이란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전장을 지배하던 용병에서, 용사의 동료가 되어, 3명의 마왕까지 쓰러트렸는데. 이게 전설이 아니고 용병왕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필시 하멜을 존경할 터.’
명문 라이언하트의 가주조차도 가문의 시조보다 하멜을 더 존경하는 마당에, 용병왕이라고까지 불리는 남자가 하멜을 존경하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이 꼴을 하고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고…….’
일단 왜 온 거지? 유진은 슬쩍 몸을 기울여서 시엘의 등 뒤에 숨었다. 여장이 완벽하긴 하지만, 아이빅 정도의 고수라면 유진의 몸을 덮고 있는 부조화를 간파할지도 모른다.
아이빅이 성큼 발을 뗐다. 카르멘은 느릿한 자세로 시가를 물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녀는 다가오는 아이빅의 앞을 가로막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아이빅이었다. 악수라도 권하는 것처럼 뻗던 손이 순식간에 검을 뽑았다. 허리춤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는 참격이 카르멘의 목으로 날아갔다.
카르멘은 당황 없이 응수했다. 가볍게 뻗은 손이 칼날을 걷어냈고, 반대편 손이 아이빅의 목젖을 노렸다.
닿지는 못했다. 칼날이 걷힌 즉시, 아이빅이 미련 없이 뒤로 물러선 탓이다.
“여전히 뛰어나시군, 누님.”
“너도 여전히 무례하구나, 아이빅.”
아이빅은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카르멘의 뒤편에 있는 시엘과 디자이라를 보고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라이언하트의 아가씨들도 오랜만이야. 잘들 지냈나?”
“네.”
“오랜만입니다, 아이빅 님.”
“누님도 참 가혹하셔. 아직 어린 너희를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 밀어 떨어트리지.”
카르멘은 시가를 손가락에 걸치며 말했다.
말하고서 흠칫하고 유진 쪽을 쳐다보았다. 예전에, 유진에게 저 말을 하였다가 지적을 당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아이빅. 이것을 알고 있나? 사실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 밀어 떨어트리지 않는다.”
“뭐?”
“하지만, 사자가 사자답기 위해서는 어린 나이부터 그에 걸맞은 고난을 극복해야 하지. 나는 저 둘을 뛰어난 사자로 키우고 있기에, 이 고난을 부여한 것이다.”
“어…… 역시 누님이셔.”
아이빅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아이빅. 무슨 일로 내 배에 온 것이지? 선수상에서 폼을 잡고 있던 자세를 평가받고 싶나?”
“누님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망토라도 두르고 있었다면 조금 더 멋졌을 거다.”
“아니……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누님 보라고 폼을 잡고 있던 것이 아닌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폼을 잡고 있던 것은 맞잖나.”
“구경나온 내 팬들에게 보여주었던 거지. 시엘 아가씨도 알겠지만, 이 나라에서 투사로 돈벌이를 하려면 실력만큼 팬서비스도 중요하니까.”
아이빅은 뽑았던 검을 칼집에 넣으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여기 온 것은, 누님과 아이리스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야.”
“토벌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것을 굳이 나와 나눌 이야기가 있나. 토벌대의 총대장은 오르투스 경인데.”
“허허…… 나야 그 오르투스 경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아이빅은 먼 곳의 라베르시아를 힐긋 보면서 말을 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고.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오르투스 경한테 여러 의미로 껄끄러운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지.”
“흠…… 일단은 알았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 보지. 그런데 아이빅, 네가 아이리스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지?”
“할 말이야 여러 가지 있지.”
아이빅은 씩 웃으며 말하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시엘의 뒤편을 보았다.
“그런데 저 예쁜이들은 누구야?”
예쁜이들.
그 말이 유진의 뺨을 파들파들 떨게 만들었다.
아이빅
아이빅과 카르멘의 인연은 40년쯤 된다. 카르멘이 아직 흑사자가 되기 전, 기사수행을 핑계로 대륙을 떠돌아다닐 때, 그때부터 용병이던 아이빅과 처음 만났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이다. 둘은 젊은 나이부터 강했고,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았다. 주먹과 칼을 맞댄다는 것, 웃기는 말이지만 카르멘과 아이빅 사이에는 저러한 방식의 대결이 성립되었다.
대결에서 패배한 아이빅은 질척거림 없이 패배에 승복하고, 카르멘을 누님으로 모시겠다 맹세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인연은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지저분한 일을 도맡는 것이 흑사자 기사단. 하지만 그것만이 흑사자 기사단의 존재 의의는 아니다. 흑사자 기사단이 키옐 제국에서 맡는 의무는 남쪽 국경이 우클라스 산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무에 용병단의 힘을 빌릴 수는 없지만, 외적의 침략을 상정한 모의훈련에서는 솜씨 좋은 용병단의 도움을 받곤 한다.
그러한 인연으로 아이빅은 카르멘과, 아니, 라이언하트와 제법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몇 달 전 카르멘의 생일. 호사스러운 파티 따위는 없었지만, 아이빅은 나름 엄선한 선물을 들고서 저택에 찾아갔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존경하는 누님의 생신인데 선물 하나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나.
카르멘의 제자인 시엘과 종자인 디자이라와는 진즉에 안면을 튼 사이였기에, 방문이 어색하지도 않았다. 카르멘이 만족할 만큼 고풍스럽고 화려한 재떨이를 선물로 줬고, 술을 몇 잔 얻어 마시고서 깔끔하게 저택을 나왔다.
그때 저택에 있던 하인의 얼굴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라이언하트에서 데려온 것이 아닌 시무인에서 고용한 하인들. 아이빅은 지금 시엘의 뒤에 선 3명의 얼굴은 본 기억이 없었다.
“평범한 하인도 아닌 것 같고.”
현명한 세냐의 마법은 아이빅의 눈으로도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어도, 용병다운 실전을 통해 가다듬은 아이빅의 본능은 저 3명에게서 무언가 기묘함을 느끼고 있었다.
노골적이지는 않다. 사람마다 다른 분위기 정도로 얼마든지 납득이 가능한 선이기는 했다.
하지만 수상했다.
‘특히 저 여자.’
3명의 특징은 각자 달랐는데, 아이빅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한 장신의 여인이었다. 남심을 묘하게 자극하는 앙칼진 인상도 눈길이 갔지만, 특히 골격이 날카로이 벼린 검을 보는 것만 같아 아름다웠다.
‘옷에 덮여 잘 보이지는 않지만…… 윤곽만으로도 알 수 있겠어. 이 여자는 무인이다.’
저만큼 육체를 단련한 여인이 단순한 하인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여인들에게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은 풍성한 갈색 머리에 같은 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데,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단아함과 고결함이 느껴졌다.
곁에 선 검은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는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대며 상황을 살피는 것이 깜찍했다.
‘이 여자가 리더 격이군.’
다른 두 명은 금발 여자의 눈치를 보고 있다. 하긴, 저만큼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리더에 어울린다.
아이빅은 판단을 마치면서 빙긋 웃었다.
“음…….”
카르멘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아니, 거짓말 자체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카르멘의 그런 성격을 잘 아는 시엘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역시 아이빅 님이시네요. 보시다시피, 제 뒤의 3명은 평범한 하인들이 아니에요. 라이언하트에서 특별한 교육을 받은, 본가 직계의 담당 시종들이랍니다.”
“담당 시종?”
“네. 설마 한눈에 간파하실 줄은 몰랐어요.”
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시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엘은 미리 생각이라도 해뒀다는 듯이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이번 토벌에서 라이언하트는 따로 병력을 지원할 수는 없는 입장이에요. 아이빅 님도 알다시피, 시무인은 자국의 전력만으로 여제를 토벌하겠다 마음먹고 있으니까요.”
“흠…… 그렇지. 아무리 라이언하트가 대단한 가문이라지만, 어쨌든 키옐 제국에 속해 있으니. 사실 키옐 황제 입장에서는 시무인이 제 피와 살을 깎아 먹는 것이 대국적으로 좋다 여길 거고.”
“네, 맞아요. 그래서 가주님께서는 따로 병력을 지원하지 않는 대신에, 기사가 아니면서도 기사 이상의 전력을 보내주신 거예요.”
“기사가 아니면서도 기사 이상이라…… 시엘, 네가 말하는 ‘기사’의 기준이 궁금한데.”
아이빅은 떠보겠다는 의도를 딱히 숨기지 않았다. 그 노골적인 질문에 시엘은 방긋 웃었다.
“당연히 제가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기사들이죠.”
“허허…… 그렇다면 저 아가씨들이 백사자 이상의 전력이란 말이야?”
아이빅도 라이언하트 본가에 가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대륙 제일의 무가라 불리는 가문이 바로 라이언하트. 그 위대한 베르무트의 직계를 어려서부터 모시는 전속 시종이라면, 어지간한 기사도 우습게 여길 실력자여야 하는 것이 오히려 이치에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아이빅의 착각이다. 본가의 전속 시종 중에서 기사만큼, 기사 이상으로 뛰어난 무력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렸을 때 운 좋게 유진에게 간택되어, 지금은 시종장까지 맡고 있는 니나. 그녀는 식칼 솜씨는 뛰어날지언정 그보다 긴 칼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쥐어본 적이 없었다.
“과연……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조금 아쉽기도 하군. 나는 이번 토벌에, 그 유명한 유진 라이언하트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거든.”
“어머, 정말요?”
그렇게 말하는 시엘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이빅은 아쉬움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소문으로 판단하자면, 유진 라이언하트는 꽤나 제멋대로인 청년 같았거든. 용사답게 마족에 대한 강한 증오도 가지고 있고. 그런 인물이라면, 제국과 가문의 뜻은 묵살하고 토벌대에 참가하지 않을까 생각했지.”
“아하하. 아이빅 님은 유진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는데도 정확히 이해하고 계시네요. 맞아요, 유진은 제멋대로에 싸가지가 없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나 봐요. 현명한 세냐 님도 마찬가지구요.”
“맞아, 그래. 현명한 세냐 님도 라이언하트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그분이 오지 않은 것도 정말 의외로군.”
“유진도 마찬가지만, 세냐 님이 노리는 것은 나찰공주 따위가 아니라 마왕이니까요. 섣불리 움직여서 마왕을 자극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에요.”
말은 참 잘하네. 세냐는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물 흐르듯 이어진 대화에 아이빅은 완전히 납득해 버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럼, 아가씨.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아가씨?
지금 저 새끼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른 것인가?
유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다른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유진은 경련하는 뺨을 억지로 붙잡았다.
“아리스라고 합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처음에 정해두었던 가명과는 다른 이름이었다. 크리스, 라는 노골적인 이름보다는 다른 이름을 대는 것이 낫다고 즉석에서 판단한 것이다.
“아리스? 성은?”
“어려서부터 라이언하트를 섬겨온 저희에게 성은 따로 없답니다.”
“그렇군.”
아이빅은 별다른 의심 없이 납득했다. 더 이상 질문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세냐도 곧장 자신을 소개했다.
“세인이라고 합니다.”
처음 정해두었던 가명은 세라. 하지만 세냐도 가명을 살짝 바꾸었다.
그래 봤자 세냐 메르데인이라는 이름에서 앞글자와 뒷글자만 붙인 정도지만, 이번에도 아이빅은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았다. 사실, 그 현명한 세냐가 일개 시종으로 변장할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부터가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전 유리라고 합니다.”
유진은 굳이 가명을 한 번 더 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구차하고 비참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이빅은 저 이름을 듣고 아무런 의심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 유진 라이언하트가 여장을 하고, 자신을 본가의 전속시종이라 소개하며 배에 탄다는 것을 상상할 만큼 아이빅의 사고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안으로 들어가지.”
모든 것을 지켜보던 카르멘이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왠지 아이빅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님, 저 유리라는 아가씨, 굉장한 실력자 같은데. 얼굴도 도도하고 성깔 있어 보이는 것이 매력적이야.”
“너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솔직한 감상을 말하는 거지. 나이는 몇 살일까? 누님보다는 적겠지, 응? 누님, 내가 사심 없이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본가의 전속시종은 그…… 연애도 못 하나?”
“끔찍한 말 하지 마라…….”
카르멘은 차마 아이빅과 눈을 마주 대지 못하면서 발걸음만 서둘렀다. 아이빅은 아쉬움에 쩝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돌려 유진을 쳐다보았다.
윙크.
‘죽일까?’
유진의 가슴이 살의로 가득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제가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어요.”
시엘은 재빨리 유진의 앞으로 나섰다. 유진의 표정이 참혹히 일그러지는 것을 아이빅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빅 님의 별명이 용병왕이잖아요. 그쵸?”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기는 하지. 요즘처럼 용병이 살기 각박한 시대에서, 나만큼 치는 용병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 용병대가 동원되는 전장은 귀족 간의 영지전이 고작.
큰돈을 바란다면, 전투가 많은 헬무드에 가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나ㅡ 세상에 쉬우면서 큰돈을 버는 일거리가 얼마나 되겠나. 적어도 용병처럼 몸으로 때워야 하는 직업은, 보수가 높을수록 위험성도 올라간다.
헬무드의 전장이 그런 곳이다. 마족, 마물이 노니는 전장에서 인간 용병이 살아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지금 시대는 용병계에서는 불황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시대에서도 아이빅은 용병왕이라 불리고 있다.
“아이빅 님은 하멜 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엘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유진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서였다. 시엘이 겪어본 아이빅 슬라우드라는 인간은, 300년 전에 이름을 떨친 대영웅 하멜을 당연히 존경할 것만 같았다.
“하멜? 우둔한 하멜을 말하는 거야?”
“네, 그분도 전설적인 용병이셨잖아요?”
“흠…… 시엘, 네 말대로 하멜은 전설적인 용병이기는 했지. 역사에서 하멜만큼 대단한 용병은 없을 거야.”
아이빅의 대답에 유진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 말은, 역시 아이빅 님도 하멜 님을 존경하시겠네요?”
“아니?”
이어진 대답에 유진의 표정이 굳었다.
“전설적인…… 대단한 용병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존경은 하지 않아.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하멜 그 사람을 용병이라 쳐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네? 방금은 전설적인 용병이라고…….”
“뭐 그렇기는 한데, 하멜…… 우둔한 하멜. 그 위업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 위업이 용병으로 쌓은 것은 아니잖아?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로 쌓은 거지.”
푸욱.
가슴에 굵직한 창이 꽂히는 기분이었다.
“물론 하멜은 용병일 때도 대단한 사람이었다고는 들었는데…… 흠, 같은 용병들에 대한 평가가 좋았던 적은 거의 없거든? 하멜도 용병을 싫어하고, 용병들도 하멜을 싫어했다지.”
“어…… 음, 네, 그렇군요.”
“그렇다니까? 뭐라 할까, 하멜 그 사람은 자기가 몸담은 업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없었다고. 괜한 억지를 부려대면서 다른 용병들을 괴롭히고, 하멜 때문에 분쇄된 용병단도 엄청 많았다더라. 그래서 나는 하멜을 별로 존경은 안 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유진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그런가? 아이빅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틀린 점 없는 맞는 말이 더욱 짜증나고 열 받는 법이다.
“존경이라. 나는…… 하멜 님 말고 모론 님을 존경하지. 용감한 모론. 얼마나 남자다운 이름이냐? 내 생애 가장 아쉽고 후회되는 일을 꼽으라면, 나이트마치에 참가하지 않은 거야. 멀고 추운 북쪽 끝에서 한다기에 갈 생각도 안 했는데…… 설마 그곳에 모론 님이 오실 줄이야.”
머리를 장식처럼 달고 다니는 새끼. 용병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 하멜은 존경하지 않고 모론을 존경한다고? 뭐? 그 새끼가 남자다워? 등신답겠지.
유진은 뿌득뿌득 이를 갈면서 걸었다.
“유리 아가씨는 왜 자꾸 이를 가는 것이지?”
“버릇이에요.”
전속시종이라면 몸가짐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나.
아이빅의 머릿속에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긴 고민은 하지 않았다. 결점만큼 무인으로서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리라. 오히려 실력 위주라는 것이 용병인 아이빅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이빅.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
널찍한 선실. 카르멘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기왕이면 단둘이 말하고 싶었는데. 흠, 하긴, 가족을 의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아이빅은 카르멘의 맞은편에 앉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르투스 경이 껄끄럽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오르투스 경을 배제한 것은 아닐 텐데.”
“누님도 알잖아. 오르투스 경은 진즉부터 여제의 노략질을 묵인하고 있었어.”
“그것이 오르투스 경의 독단은 아니었잖나. 여제를 묵인한 것은 왕가 자체다.”
“물론 그렇기야 한데, 여제의 문제에서 오르투스 경이 떳떳한 것은 아니잖아? 여제는 1년 동안 국선을 제외한 대부분의 무역선을 털어먹었지.”
아이빅은 코웃음을 치면서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거 알아? 누님. 세간에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오르투스 경의 먼 친척이 상업을 하고 있거든. 하하, 그것에 있어서 오르투스 경은 참 철저하더라고. 자신과는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게 철저하게 세탁을 해놨거든.”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뻔한 이야기지. 오르투스 경과 연관이 있는 상단은 여제의 노략질에서도 살아남아 대성했지. 우연히도 오르투스 경에게 바쳐지는 공물도 그즈음부터 양이 늘었고. 겉으로 보기에도 그런데 안 보이는 뒷면은 어떻겠어?”
“네가 그 일은 어떻게 알고?”
“상단을 잘 굴리기 위해서는 용병도 잘 써야 하는 법이지.”
카르멘은 대답하지 않고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녀는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기사도와는 아득하게 거리가 먼,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지저분한 현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저러한 문제는, 왕가가 여제를 길들일 수 있다 생각하던 때에 있던 일 아닌가. 지금은 여제가 왕가와, 아니, 이 나라 전체를 적으로 돌려 버렸고.”
“그렇기는 하지만, 여제와 오르투스 경 사이의 지저분한 거래가 청산되었다고는 확신하기 싫거든.”
“거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오르투스 경이 지금 앉은 대공이란 자리보다 높은 자리를 바라는 것이라면?”
“오르투스 경이 여제와 손을 잡고 반란이라도 도모한다는 거냐.”
카르메의 두 눈이 얇아졌다.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위압감에 아이빅은 우선 손사래를 쳤다.
“내가 조심성이 많아서, 그렇게 의심하고 있을 뿐이야. 아주 가능성이 없는 얘기도 아니라 생각하고.”
“근거는 없다는 말이군.”
“킁, 여제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근거는 되지 않나.”
유진은 오가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으면서, 나이트마치 때 보았던 오르투스를 떠올렸다. 그때 오르투스는 아이리스와 시무인 사이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던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까지도 아이리스와 거래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뭐…… 자기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있지. 당시 나랑은 처음 만난 것이기도 했고.’
그런 것치고 오르투스의 목적은 확실했다.
아이리스를 토벌하는 것에 유진의 도움을 빌리는 것. 시무인을 위해? 아이리스를 길들일 수 없어서? 그런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오르투스가 정말로 아이리스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이라면, 나를 함정으로 꾀어내려 한 것일 수도 있겠군.’
확신할 일은 아니지만, 경계할 만한 이야깃거리기는 했다.
“누님은 확실치 않은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다른 이야기를 해보지.”
아이빅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여제가 바다를 긁고 있다더군.”
“바다를 긁어?”
“심해에 파묻힌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야.”
아이빅
심해.
그 말을 들은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아가로트의 계시로 보았던 광경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많아도 너무 많은 시체.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 거대했던 파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짙었던 해무.
파도보다 먼저 몰아친 해무가 세상을 뒤덮었다. 그보다 늦게 덮친 파도가 모든 것을 삼켰다. 계시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 후로 몇 번이나 계시를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가로트의 반지는 그 이상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곤도르와 신학자의 말에 따르면, ‘머나먼 바다’와 가까운 남해 끝에는 아가로트의 성지가 있다. 아득한 옛날에 그곳은 바다가 아니었으나,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바다가 되어버렸다.
즉, 아가로트의 영지는 바다ㅡ 심해의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솔가르타 해역은 남해의 끝에 있다.
아이리스가 바다를 긁고 있다.
심해에 파묻힌 무언가를 찾고 있다.
유진은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심해에 파묻힌 무언가라.”
유진은 이 대화의 전면에 나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이 어떤 신호를 전하기도 전에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 또한 아이리스의 의중이 궁금했다.
“심해에 대체 무엇이 있다는 거지?”
“그게 참 골 때린단 말이야.”
아이빅은 기울였던 몸을 바로 앉히며 헛웃음을 흘렸다.
“무언가를 찾는 것은 분명한데, 여제 본인도 그것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더군.”
“모른다고?”
“여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일단 내가 파악한 정보로는 그래.”
“그 정보의 출처는 어디냐.”
카르멘의 두 눈이 얇아졌다.
유진은 카르멘의 질문이 마음에 들었다. 멜키스에 버금갈 정도로 이상한 짓을 하는, 아니, 이건 너무 심한가.
[심했다, 하멜.]
머릿속에서 템페스트가 내뱉었다.
이 잘나신 바람의 정령왕은 평소에는 너무 과묵해서 있는지 없는지도 헷갈리는데, 멜키스에 관한 생각을 할 때면 득달같이 나타나서 존재를 과시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괴짜이긴 하지만 미치광이는 아니다.]
유진의 생각에도 그렇기는 했다.
우선 카르멘은 알몸으로 호수에서 명상은 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진지한 대화를 하는 중에는 평소에 집착하고 심취하던 컨셉도 내려놓는다. 보라,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이 방에 들어와서 단 한 번도 라이터를 꺼내지 않았다.
“내 부하들이지.”
“그 말은, 아이빅, 내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군.”
방 안의 공기가 바뀌어 간다.
카르멘은 허리띠에 매달아 놓은 회중시계ㅡ 헤븐제노사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카르멘은 자신의 의중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누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제와 거래했던 적이 있는 것은 아냐. 나는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다고.”
아이빅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제가 해적들을 규합하며 세력을 모으기 시작할 때. 나중을 대비하고 싶었을 뿐이지. 상식적으로 일개 해적ㅡ 아니, 아니지. 여제는 처음부터 일개 해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존재였으니…… 그, 나찰공주 아이리스가. 바다까지 와서 해적이 되고, 휘하에 군단을 만들기 시작한 거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언젠가는 토벌할 수밖에 없는 세력이라고.”
아이빅은 용병이다. 용병이 돈을 버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이다.
“누님과 나도 꽤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 그래서 그런가, 지금 누님이 나를 의심하는 것이 굉장히 슬퍼. 누님이 본 나는, 마족과 몰래 손을 잡는 밸도 없는 새끼였나?”
“용병은 돈을 따르지 않나.”
“하하하! 삼류라면 그렇지, 하지만 나는 일류 중의 일류라고. 돈이야 어디서든 벌 수 있고, 모아놓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더 큰 돈을 벌어서 뭐 해?”
아이빅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일류가 따르는 것은 신뢰와 계약, 명예 등이지. 여제, 아이리스는 결국 패배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나? 300년 전에는 위대한 베르무트와 동료들에게 패배해 도망쳤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몽마의 여왕에게 패배해 도망쳤지. 뭐 강하기야 하겠지만, 계약을 맺을 만한 클라이언트는 아니란 말씀이야. 따라봤자 얻을 것도 없다고.”
“훌륭하다, 아이빅.”
싸늘했던 공기가 다시 바뀌었다. 카르멘은 회중시계를 손에 놓더니, 양팔을 활짝 펼쳤다. 짝, 짝, 짝. 커다란 박수 소리가 세 번 울렸다.
“나는 너를 의심한 것이 아니라 시험한 것이다.”
“음…… 그야 그렇겠지. 역시 누님이셔.”
아이빅은 군말 없이 카르멘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는 카르멘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나는 언젠가 여제의 토벌전이 반드시 벌어질 것이라 생각하고서 부하들을 심어뒀지.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 여제의 명령을 들을 수 있는 위치. 그 정도가 오히려 좋아, 너무 가까우면 많은 의심을 받게 되니까.”
애당초 ‘인간’은 아이리스의 심복이 될 수 없다. 300년 전부터 아이리스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서 곁에 두었던 것은 똑같은 다크엘프뿐.
아이리스의 휘하에는 수천 명이 넘는 해적들이 있다. 하지만 다크엘프의 숫자는 많아봐야 100명. 다크엘프의 귀가 아무리 밝을지라도, 수천 명에 달하는 해적들의 목소리를 듣고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솔가르타 해역 군도는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다른 해역에서 물고기 정도야 잡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물고기만 먹고 살아?”
장물을 처분하거나, 필요한 물자를 보충할 때. 그런 역할을 맡은 해적 중에 아이빅의 부하들이 숨어 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아이빅에게 서신을 보내 여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최근에 아이빅에게 들어온 서신은 이틀 전의 것이다. 여제가 망치섬 드워프들을 납치한 것은, 심해에 잠긴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대체 무엇인지는 여제 본인도 모르는 눈치고, 해적들도 감히 그것에 대해서는 묻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솔가르타 해역의 침몰선들이 목적인 줄 알았다는군. 누님도 알다시피, 그 바다에는 드래곤의 레어가 있다는 소문이 있잖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드래곤의 보물을 찾고자 했던 탐사선 수십 척이 바다에 처박힌 것은 사실이지.”
그 많은 침몰선들 안에 있는 보물만 해도 상당할 터. 실제로 납치당한 드워프들은 아이리스의 닦달 속에서 잠수복을 만들어 입었고, 바닷속에 들어가서 여러 척의 침몰선을 건져냈다.
“하지만 여제의 목적은 침몰선이 아니었어. 그 정신 나간 다크엘프는 바다가 아니라 그 밑바닥을 긁고 있다고. 처음에는 드워프만 시켰는데, 이틀 전부터는 잠수복을 대량으로 찍어내더니 해적들한테도 일을 시키고 있어.”
“대체 뭘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군.”
“아마 지금도 저 뭔지 모를 짓거리를 하고 있겠지.”
“여제가 솔가르타 해역을 근거지로 삼은 것. 드워프들을 납치한 것…… 모두가 이어져 있다는 말이로군.”
카르멘은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여제가 정말로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지. 대충 둘러댄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여제가 바다를 긁기 시작한 이유는…… 꿈 때문이라던데?”
“꿈?”
“그래, 꿈. 여제가 어떤 꿈을 꿨는데, 그 꿈이 글쎄 바다 밑의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거야. 뭔 개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빅은 투덜거리면서 품을 뒤졌다. 그는 습관처럼 담배갑을 꺼냈다가, 헛기침을 하며 담배갑을 다시 품에 넣었다.
“누님이 보기에는 어때? 수상쩍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그렇기는 하군. ……오르투스 경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만, 의식할 필요는 있겠어. 여제가 솔가르타 해역에서 벌이는 일에 대해서는 뭐라 판단하기 힘들고 말이다.”
“애석하게도 나도 바다에 나와 버렸으니, 저 이상의 정보는 갱신되지 않아.”
“넌 무엇을 바라는 거냐.”
아이빅은 담배갑을 집어넣었지만, 카르멘은 시가를 다시 입에 물었다.
“나에게, 아니, 라이언하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을 텐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과연 누가 여제의 목을 가질 수 있을까.”
아이빅이 씩 웃었다. 햇빛에 그슬린 피부와는 달리, 아이빅의 이빨은 깨끗하고 하얘서 반짝거렸다.
“스칼리아 공주? 하하, 왕가는 그것을 바라겠군. 스칼리아 공주라면 왕위 계승의 경쟁자도 못 되고, 공적을 순수하게 왕가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예쁘장한 꽃으로 기용한 공주기사가 여제의 목을 딸 수 있을 리가 없지. 스칼리아 공주보다는 차라리 부관이 여제의 목을 딸 가능성이 높을걸.”
오르투스의 아들, 디오르 하이만. 스칼리아 공주의 부관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실력은 디오르가 더 위다. 겉으로 보았을 때에는 두각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ㅡ 그것은 디오르가 제 실력을 감추는 것에 능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디오르는 먼 거리에서도 유진의 시선을 알아차렸었다.
“욕심부려 따라온 자페르 왕자. 그야말로 가능성이 전무한 사람이지. 취미 수준으로 배운 검술로 왜 배에 탔는지, 하긴, 간절하기는 할 거야. 여제의 목이라도 따지 않고서야 왕권에는 도전할 수 없을 테니. 아니면…… 흠, 시엘은 불쾌하겠지만, 왕자의 머릿속에 지저분한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지.”
“아하하. 자페르 왕자가 항해 도중에 저를 덮치기라도 할까 봐요?”
시엘은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겠어요?”
“덮친다는 건 너무 극단적이고…… 항해 중에 추파를 던져댈지도 모르지.”
“잘라 버린다.”
카르멘이 중얼거렸다.
“뚫어버릴 거예요.”
디자이라도 내뱉었다.
‘패 죽인다.’
유진도 생각했다.
“뭐…… 저 둘은 가능성이 없어. 여제의 목을 딸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셋이야. 카르멘 누님과 나, 그리고 오르투스 경.”
“단독으로는 힘들다.”
“그야 그렇겠지. 나도 일대일로 여제를 죽일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은 안 해. 하지만 으레 그런 법이잖아? 마지막에 결정타를 누가 먹였냐. 누가 여제의 목을 ‘직접’ 잘랐냐. 그 순간에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우리 셋이란 말이지.”
“공적을 양보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허허…… 그래 주면 고맙지만, 나도 그런 부탁은 너무 양심 없다고 생각하거든. 누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단한 건 아냐. 서로 손을 잡자는 거지.”
“그렇군.”
카르멘은 시가를 내려놓았다.
“아이빅. 너는 오르투스 경이 네 목을 노리는 것을 경계하는구나.”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아이빅을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놈의 오르투스에 대한 태도는 아주 일관적이었다.
‘용병답군.’
일류는 신뢰와 계약, 명예를 따른다.
좋은 말이다. 실력이 뛰어나고 가진 것이 많아지면, 이제는 저런 추상적인 것에 눈이 돌아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용병의 본질은 결국 제 몸을 굴려서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직업이다.
유진이 본 아이빅 슬라우드는, 좋은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용병이기는 했다. 남을 죽여 배를 불렸음에도 평화에 찌들지 않고, 제 뒷목을 소중히 감싸고 있지 않나.
“내가 오르투스 경이라면, 이 토벌에서 내 뒤통수를 칠 것 같아.”
아이빅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편이 깔끔하고 쉽거든. ‘세컨드’인 나는 언제고 오르투스 경에게 도전할 수 있고, 시무인에서 내 입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오르투스 경 이상이지. 그런 상황에서 만약, 내가 여제의 목을 가진다면? 으하하, 용병 나부랭이가 일국의 대공 자리에 앉을 수도 있지 않나?”
“욕심나나?”
“아니, 나는 대공 같은 거창한 자리에는 욕심 없어. 하지만 오르투스 경이 내 진심을 알아줄 것 같지도 않고, 항해 도중에 진심을 전할 자신도 없단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아이빅.”
카르멘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정말로 오르투스 경이 너를 죽이려 할지. 정말로 오르투스 경이 여제와 결탁했는지. 나는 그 무엇도 확신이 안 간다. 하지만, ‘여제 토벌’이라는 목적하에 모인 우리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일은 보고 싶지 않다.”
“누님…….”
“전장에서 내 시야 밖으로 나가지 마라, 아이빅.”
카르멘은 내뱉은 말에 스스로 전율했다.
“내 눈길이 닿는 곳에 있어라. 그렇다면, 너는 죽지 않는다.”
“…….”
아이빅은 저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이빅이 쓰는 무기는 3개. 검, 창, 활. 그중에서도 아이빅이 ‘가장’ 자신 있는 것이 바로 활이다.
반면에 카르멘은 근접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른다. 전장에서 아이빅의 시야에 카르멘이 벗어나지 않은 일은 흔해도, 카르멘의 시야에서 아이빅이 벗어나지 않은 일은 흔치 않다…….
“역시 누님이십니다.”
아이빅은 그런 복잡한 생각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는 마주 웃으면서 카르멘의 손을 잡았다. 이것으로 되었다.
오르투스 그 개새끼가 정말로 아이리스와 결탁했나? 모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이리스에게서 뒷돈을 받아 재산을 불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수상하다.
오르투스 그 개새끼가 정말로 날 죽이려 들까? 모른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참 여러 개 같은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여러 개 같은 일 중에서 같은 편을 일부러 죽이는 것은 흔하다 치부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님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지.’
이런 문제에 관해서 카르멘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이빅은 만족하며 손을 놓았다.
“그럼…… 유리 씨라고 했었지?”
아이빅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유진은, ‘유리 씨’라고 불린 순간 등골에 쫙 소름이 돋았다.
“식사라도 한번…….”
“꺼…….”
져.
입술은 저 말을 내뱉고 싶어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유진은 간신히 그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잘 참았다.
끼어들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다 참았다. 생각할 거리도 많았다. 아이빅이 방을 나가고, 배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유진은 크게 숨을 내뱉으며 소파에 앉았다.
“인생 참.”
말없이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유진에게 흑암의 망토를 둘러주었다. 슬금슬금 가까이 온 세냐가 마법을 풀어주었다.
뚜둑, 뚜두둑. 압축된 근골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유진은 망토의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가 괜한 부탁을 했나 봐.”
시엘도 유진의 눈치를 보면서 웅얼거렸다.
“아니, 됐어.”
유진은 연거푸 한숨을 쉬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여장을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이목은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다.
특히 총대장인 오르투스에게 구린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정체를 완벽하게 감추고서 배에 탄 것이 오히려 이점이 되었다.
‘아이리스의 의중을 모르겠어.’
유진은 본래 길이로 돌아온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 다크엘프가 대체 무엇을 찾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꿈? 꿈이라고? 단순히 둘러댄 말인가, 아니면 정말로 꿈에서 본 것을 찾고 있는 건가.
‘드래곤의 레어를 찾아서 군자금으로 쓴다…… 쉽게 생각하면 이건데.’
설마 아이리스도 아가로트의 성지를 찾고 있나? 그렇다면 왜?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
출항한 지 아직 몇 시간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 족히 한 달은 바다에 있어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아이리스는 바다를 긁을 것이다. 뭘 찾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아이리스에게 그만한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최신 함선은 빠르다. 마법이 더해졌으니 더더욱 빠르다. 그럼에도 최소 한 달.
더 빠르게 가려면? 방법은 있다.
하지만 오르투스에게 수상한 점이 있다.
“…….”
유진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사흘 뒤에 라베르시아를 점령합시다.”
라베르시아
“또 잠이 안 오시는 겁니까?”
문을 열고 나온 스칼리아를 맞이한 것은 걱정 가득한 부관의 얼굴이었다.
퍼스트 오르투스 경의 아들, 디오르 하이만. 그는 스칼리아 공주의 얼굴을 보며 씁쓸한 한숨을 삼켰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이른 기사는, 육체마저 조율하여 피로를 효율 좋게 풀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몇 날 며칠을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은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스칼리아 공주의 경지는 육체의 조율을 완벽하게 해낼 만큼 높지도 않았다.
방금 침대에서 일어났을 텐데도 엷게 칠한 화장. 세상에 인식된 ‘공주기사’라는 별명을 의식한 탓이다. 화장과 밤의 어둠 덕분에 며칠 동안 밤을 설쳐 푸석해진 피부도, 뺨까지 내려왔을 다크서클도 보이지 않았다.
“잠은 충분히 자고 있노라.”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는 대답에 디오르는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저 뻔하고 무성의한 거짓말은 여러 가지로 디오르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본 공주는 이 야심한 새벽에 이곳에 있는 귀관의 행동이 오히려 이해가 안 가는군.”
“저는 공주님의 부관입니다. 그러니…….”
“귀관은 본 공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본 공주는 충분한 잠과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지금 밖에 나온 것은 밤의 바닷바람을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공주님.”
“귀관은 본 공주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이로군? 흥, 그렇다면 직성이 풀릴 때까지 본 공주의 뒤를 따르도록 하여라.”
스칼리아 공주는 빈정거리면서 디오르를 지나쳤다.
“그토록 본 공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오르투스 경에게 보고나 하는 것이 어떤가?”
“…….”
“외면할 것이라면 완전히 시선을 돌리는 것이 어떤가 묻는 것이다.”
“단장님께 보고를 올릴 생각은 없습니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대답에 스칼리아는 들으란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더 이상 디오르를 상대하지 않고 갑판을 걷기 시작했다.
감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디오르 하이만에게는 그런 역할이 부여되어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서 스칼리아 대신에 검을 뽑아 싸워줄 만큼 강하고, 스칼리아의 짜증과 불만을 받으면서도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스칼리아의 모든 행동거지를 단장인 오르투스에게 보고하는 역할.
그리고 만약에, 만약에 스칼리아 공주와 정을 통했을 때. 그것을 이용하여 오르투스에게 보다 큰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역할.
디오르는 처음 부관으로 임명되었던 수년 전부터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절대 거슬러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인생은 아버지의ㅡ 하이만 가문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교육받아 왔다.
원래라면 스칼리아 공주의 기행에 관한 것도 아버지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것이 디오르가 받은 교육에서는 옳다.
하지만 디오르는 보고하지 않았다. 나이트마치로 향하던 설원에서 있었던 일. 스칼리아 공주가 벌였던 학살. ㅡ그리고, 스칼리아 공주가 시무인에 돌아와 몰래 즐긴 취미들.
디오르는 그 무엇도 아버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보고했다면 스칼리아 공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아마 왕궁의 탑 같은 곳에 처박히지 않을까.
‘아니.’
저렇게 되어서 오르투스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 잡은 건수를 빌미로 스칼리아 공주를 이용하거나, 더욱 과감하게 저지르자면, 세간에 알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하여 왕가를 이용하거나…….
어느 쪽이건, 디오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칼리아 공주를 위해서? 공주의 부관을 맡으며, 항상 뒤를 따라다니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고- 이 생활을 지키고 싶어서?
아니다. 디오르는 단적으로 말해서, 스칼리아 공주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 관한 보고를 일절 하지 않는 것은ㅡ 아버지, 오르투스에 대한 반항일 뿐이었다.
‘정신 나간 여자.’
오르투스에 대한 반항심과는 별개로, 스칼리아에 대해서는 냉철히 판단하고 있다.
정신 나간 여자. 말 그대로, 디오르가 보기에 스칼리아는 미친년이었다. 원래부터 공주기사라는 모습 뒤에 지랄 맞은 면이 많기는 했는데…… 설원에서의 ‘그’ 사건 이후로는 경계선이랄 것이 아예 사라진 것만 같았다.
디오르가 스칼리아의 방문 앞에서 대기한 것도. 그녀의 밤 산책을 따르는 것도, 모두가 스칼리아가 미친 짓을 벌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도시 뒷골목의 부랑자나 싸구려 용병이라면 몰라도, 이 배의 선원들을 칼로 쑤시기라도 했다가는 수습이 안 될 것이다.
머리가 욱신거렸고,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바다 위라서, 배를 타고 있어서. 그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며칠 동안 자고 싶어도 잠들지 못한 머리가 호소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신경에 점점 날이 섰다.
뒤에서 따라오는 디오르의 걸음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멀리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이 이쪽을 힐긋거리며 쳐다보는 것이 화가 났다. 마스트 위의 관측병이 이쪽을 내려 보는 것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충동질을 불러일으켰다.
“…….”
예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날 때, 무언가를 집어던지거나 때려 부수는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이 드문 것은 아니잖나.
스칼리아도 비슷했다. 예민하고 화가 날 때에, 그녀는 머릿속에서 여러 종류의 폭력을 상상했다. 물론 그 폭력의 집행자는 스칼리아 본인이었고, 그녀에게 폭력을 당하는 사람의 종류는 언제나 다양했다.
상상만 했다. 실제로 행동한 적은 없다. 하지만, 한 번 표출해 본 후부터는ㅡ 점점 충동이 강해졌다.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칼리아는 자신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책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디오르가 싫고 짜증 나지만, 지금 디오르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안도감을 느꼈다. 만약 디오르가 함께 오지 않았다면ㅡ 결국 참지 못하고 저질러 버렸을 것 같았다.
“후우…….”
스칼리아는 어지러운 머리를 달래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겸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출항한 지 어느덧 사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무수히 많은 별빛과 휘황한 달빛이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보이는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연한 말이지만, 세냐는 자신의 마법 실력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유진을 얄밉다는 듯이 흘겨보면서 지팡이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건방진 제자야, 스승님의 마법실력을 의심하지 말거라! 마법도 익히지 않은 기사 나부랭이가 어떻게 내 마법을 간파할 수 있겠니?”
“크흠…… 그렇지만, 저 배에도 대마법사가 있잖습니까.”
“흥! 마법학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을 아롯의 대마법사도 아닌, 남쪽 끝 섬나라의 궁정마법사장에 만족하는 그릇을 가진 놈이잖아. 그런 놈이 잘나봤자 얼마나 잘났겠어?”
시무인은 이번 토벌대를 무조건 성공시키기 위해, 왕궁에 소속된 주요전력을 파견했다.
기사 중에서는 퍼스트인 오르투스와 격랑 기사단. 그로도 모자라, 궁정마법사장인 8서클의 대마법사, 마이스 브리오르까지 출정시켰다.
목적지인 솔가르타 해역은 마법의 사용이 제한되는 지역이다. 그것을 의식한 것인지, 파견된 마법사는 궁정마법사장 마이스 한 명뿐이었다. 8서클의 대마법사라면 솔가르타 해역에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리라.
“대마법사라고 해서 다 같은 대마법사가 아니야. 특히, 이 세냐 님이 만든 서클마법식이 마법사들에게 정형화가 된 후로는 말이야. 흐흥, 제자야, 너도 봤잖니?”
“제가 직접 겪어보기도 했죠.”
“그렇지! 아롯의 녹탑주, 그게 무슨 대마법사야? 대마법사다운 위용도 신비도 없는 버러지가, 스승 잘 만나서 효율 좋고 편법적으로 마법을 익히고 8서클을 찍었다고 대마법사라 불리는 시대라니!”
세냐는 그렇게 내뱉고선 아차 싶은 표정으로 유진을 힐긋 보았다.
“아 물론, 제자야, 너는…… 으흠. 이 스승님이 보기에는 대마법사라 자부할 정도는 된단다. 비록 네가 마법에 전념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고, 라이언하트의 백염식과…… 어…… 이 스승님이 만들어놓은 위치크래프트 덕분에 지금의 마법 경지에 이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으흠.”
“그냥 말을 하지 마시죠?”
“건방진 제자 같으니. 이 스승님이 기껏 칭찬을 해주었는데 참으로 재수 없게 대답을 하는구나.”
얄미운 녀석. 세냐는 유진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이래저래 덧붙이는 말이 많아지긴 했지만,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세냐가 생각하기에도 유진의 시그니처인 프로미넌스는 굉장히 훌륭한 마법이었다.
“이 이상 내려가면 결계에 걸릴 겁니다.”
곁에서 함께 날고 있는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토벌대의 기함. 왕가 소유 최강의 함선. 라베르시아를 점령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카르멘도 납득했다.
마법공학이 더해진 현대의 함선은 300년 전의 함선과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토벌대의 이동은 지금도 충분히 빠르기는 하다. 그렇지만 세냐의 마법이 더해진다면 훨씬 더 빨라질 것이다.
오르투스에 대한 의혹. 그에 대해 지속해서 경계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겠지만, 유진은 그것보다는 아예 오르투스를 제압해 두는 것이 압도적으로 쉽고 편하다고 생각했다.
카르멘도 그 사실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었다. 애당초 카르멘의 소속인 흑사자 기사단은, 가문 내에서 저런 수상한 인물을 처단하고 가문의 법도와 기강을 수호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다.
다만, 오르투스가 라이언하트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 외국인 시무인의 대공이라는 점이 카르멘의 행동을 자제시켰다.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그러한 상식을 똑바르게 가지고 있었다.
유진은 그러한 상식을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세냐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베르시아를 점령하기로 한 것이 결국 유진의 독단이지만, 어이가 없어 할 오르투스에게는 이렇게 말해줄 예정이었다.
-현명한 세냐 님이 글쎄, 오르투스 경을 족치자고 하지 뭡니까?
300년 전의 대영웅. 가문 시조의 친구. 그러한 큰 어른이 저렇게 말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라는 식으로 넘길 생각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그냥 깨부수고 들어갈까?”
“가급적이면 조용히 처리하기로 정하지 않았습니까.”
카르멘은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면, 라베르시아의 모든 병력을 상대로 무력으로 점령하는 방법도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사태다. 카르멘이 바라는 것은, 가급적이면 조용하게. 라베르시아 전체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총지휘관인 오르투스만 상대해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것만 성공한다면 사실상 라베르시아를 점령한 것과 다름이 없다.
“좋아.”
세냐는 빙긋 웃으며 프로스트를 앞으로 뻗었다.
대기 중의 마나농도가 변해간다. 세냐의 시그니처, 엠프레스 룰이 펼쳐진 것이다. 라베르시아를 보호하고 있는 마법결계. 대마법사 마이스가 직접 펼쳐놓은 결계지만, 세냐의 엠프레스 룰을 거역하지는 못했다.
“내려가자.”
유진과 세냐, 카르멘. 3명은 아무렇지 않게 결계를 돌파했다. 결계는 침입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냐는 두 눈을 얇게 뜨고서 라베르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찾았다.”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