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인에 도착하고서 며칠을 지냈다. 시안은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이 대륙 전체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게다가 아까 전에는 교황조차도 유진의 말에 순응하지 않았나.
“마왕은 어땠냐?”
시안은 크흠 헛기침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예전부터 했던 생각이다.
아마, 자신이 평생 동안 검을 휘두르고 노력해도 유진과 동등한 위치에는 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망해 버리려고 하면…… 저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고약한 형제는, 귀신같이 시안이 절망해 버리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닦달을 해댔다.
대련을 핑계 삼아 두들겨 패고 약 올리기까지 하며 시안을 발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발끈해서 검을 열심히 휘둘러도, ‘실력’에 있어서 유진과의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
“세더라.”
턱을 긁적거리며 대답하는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만한 위업을 달성한 유진은ㅡ 아득하게 먼 곳에 있는 존재일 텐데. 시안은 유진에게서 그런 종류의 거리감은 느끼지 않았다. 용사건, 마왕을 토벌했건, 부모가 완전히 다를 지라도, 시안에게 있어서 유진은 ‘형제’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시안은 씩 웃으며 유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유진이 해낸 것. 대륙 전체가 유진을 주목하는 것. 시안이 갖지 못한 것. 하지만 질투는 들지 않았다. 그것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릴 때에는 아마 질투했을 것 같은데.
‘내가 포기해 버린 건가?’
아니. 그런 감정과는 다르다. 여전히 시안의 검은 유진을 겨누고 있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유진과 대등한 자리에서 검을 겨루고 싶다는 갈망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갈망과는 별개로, 유진에 대한 경의와 우애가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잖아.’
지금 느끼는 감정은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잘난 형제가 자랑스럽다.
“새끼, 왜 이래? 부담스럽게.”
유진은 시안의 옆구리를 쥐어박으면서 투덜거렸다.
라이언하트가 가족 간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세냐는 아롯과,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신성제국과 함께 있었다. 당연하게도 둘은 별로 대화를 바라지 않았지만, 상대가 집요했다.
“언니, 언니, 왜 마왕과의 전투에서 절 부르지 않은 거예요?”
멜키스는 세냐의 팔에 매달려서 칭얼거렸다.
세냐는…… 솔직히 멜키스가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예전부터 세냐는 이렇게 무대포로 들이대는 상대가 어려웠다. 특히나 세냐를 혼란스럽게 하는 점은, 멜키스 엘하이어가 진짜배기 광인이라는 것이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와는 달라…….’
항해를 함께했던 카르멘은, 언동은 많이 이상할지언정 상식은 부족하지 않았다. 어쩐 면에서는 일행 중에서 제일 상식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한 필요한 순간에는 그 누구보다 진지했으며, 마왕과의 전투가 끝난 뒤에도 승리의 기쁨에 취하지 않고 자기반성에 몰두할 만큼, 무인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괜히 아이빅이나 다른 기사들이 카르멘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할 정도였단 말이다.
하지만 저 멜키스 엘하이어는 어떤가? 아롯의 국왕은 물론이고, 세냐와 유진의 비밀을 어느 정도 눈치 챈 로베리안마저도 언동을 조심하는데. 멜키스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세냐를 언니, 언니 하고 부르며 매달려 칭얼거리고 있다…….
세냐를 더더욱 소름 끼치게 하는 것은, 언동만 보면 머저리에 천치에 광인인 멜키스가 가지고 있는 정령술사와 마법사의 자질이었다.
‘3명의 정령왕과 동시 계약…… 거기에 순수 마법사로도 8서클에 도달했다니…….’
신의 실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질.
‘사람으로는 완성이 덜 되었다는 점을 보면 신이 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
세냐가 멜키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혐오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정작 세냐 본인은 자기 자신을 멜키스와 동일하단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언니, 저는 언니를 위해서라면 땅 속에도 불 속에도 번개 속에도 들어갈 수 있어요.”
“다…… 당연히 그렇겠지. 너는 대지와 불꽃과 번개의 정령왕과 계약을…….”
“아아, 언니! 제가 계약한 정령왕들을 기억해 주시는군요! 네, 맞아요, 저는 대지와 불꽃과 번개의 정령왕과 계약했어요. 하지만 저는 두려워요, 언니, 만약 제가 언니를 위해 폭풍 속에 들어가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슬프게도 저는 폭풍 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언니가 바란다면 제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지라도 폭풍 속에 뛰어들겠지만, 그렇게 제가 죽어버려서는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세냐는 멜키스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허락한 것을 후회했다.
“언짢아 보이시는 군요.”
세냐가 멜키스에게 시달리는 동안, 크리스티나는 교황과 대면했다. 교황은 라파엘로의 호위까지 물려놓고서 크리스티나와 가까이 섰다.
사실 이 자리에서 라파엘로는 교황에게 있어 호위라 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 빛의 ‘진짜’ 광신도는, 크리스티나가 대뜸 명령을 내려도 한 치의 주저 없이 교황의 목을 베려 들 것이다. 라파엘로에게 있어서 교황의 권위는 성녀인 크리스티나보다 높지 않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유진 님이 바란다면, 라파엘로는 성녀마저 죽이려 들겠지.’
교황은 그 사실을 의식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신성제국에서 라파엘로 이상의 실력자는 없다. 혈십자 기사단 전원이 라파엘로를 죽이려 들지라도, 라파엘로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애당초 혈십자 기사단에게 ‘단장을 죽여라’는 명령은 통하지 않는다……. 신앙심에 평생을 바치고, 신앙심을 위해 가혹한 단련을 해온 것이 바로 혈십자 기사단이다. 그들은 단장인 크루세이더가 절대로 빛을 등질 리가 없음을 확신하기에, 교황이 단장을 죽이라 명령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알 수 있듯, 신성제국의 지배구조는 굉장히 기형적이다. 교황이 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것은 사실이나, 결국 신성제국에서 절대적인 것은 교황의 의지가 아닌 빛의 의지다.
피차 똑같은 ‘가짜’일 적에는 교황이 성녀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용사에 의해 빛의 샘이 무너졌다. 여태까지 신성제국이 무슨 짓을 하여도 묵묵히 빛을 비추었던 신은, 빛의 샘의 붕괴에서 세르지오 로게리스 추기경과 수백 명의 성기사와 이단심문관을 돌보지 않았다.
빛은 용사의 의지를 따랐고, 세르지오 추기경과 수백 명의 성기사, 이단심문관이 용사의 검에 죽었다. 그리고 성녀는 신화에서 빛이 가장 총애했다는 천사보다 많은 8장의 날개를 펼쳤다.
그 둘이…… 아니, 당장 크리스티나 혼자서 날개를 모두 펼치고서 신성제국 상공에 떠올라, ‘교황이 빛을 저버렸다’라고 말 한마디만 한다면. 신민들 모두가 교황청을 돌을 던져 무너트리고, 교황을 끌고 내려와 화형대에 매달 것이다.
“성하의 의도가 지저분하고 노골적이시니 언짢을 수밖에요.”
크리스티나가 내뱉었다. 교황은 그 말에 의외라는 듯이 눈을 빛냈다.
“저를 성하라 불러주시는군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가 성하께 존중을 보이지 않는다면, 모두가 우습고 이상하게 여길 것 아닙니까.”
“허허…… 실제로 저는 우습고 이상한, 그리고 흉측한 늙은이입니다.”
“저는 지금 성하가 자조하시는 것조차 역겹게 느낍니다.”
“부디 그렇게 여겨주십시오. 로게리스 ‘성녀님.’ 당신과 유진 용사님은 마왕 토벌에 성공하셨습니다. 빛의 샘의 붕괴 때에는…… 제가 어떻게든 빛의 뜻을 곡해하며 제 자신을 위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손과 함께 가슴에 얹었다.
“차라리 이 추레한 늙은이를 편히 해주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제게 그 대답을 듣기 위해 다가오신 겁니까?”
“빛께 맹세컨대, 저는…… 사리사욕을 취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어리석어 빛의 뜻을 곡해하고, 이런 방법이라도 빛을 위하며 신국(神國)을 이뤄야 한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
“하지만…… 저와 역대 교황과 추기경들은 유라스를 신국으로 만들기 위해 했던 것들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빛의 선택을 받은 신인(神人)과, 성령이 깃든 사도가 유라스를 통치하며 이끄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크리스티나는 차분한 눈으로 교황을 응시했다. 저 말이 진심이고 아니고를 떠나, 교황은 방금 말한 상황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아뇨.”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물론이고, 유진 님 역시 유라스에 군림은 바라지 않으십니다.”
“…….”
“그러니 성하께서는, 계속해서 성하로 계십시오.”
“성녀님.”
“하지만 착각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성하께서는 성하로 계시되, 빛의 뜻을 대표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빛의 뜻을 헤아리려 하셔도 아니 됩니다.”
크리스티나는 얇게 뜬 눈으로 교황을 응시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교황은 조금의 불쾌함도 느끼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리스티나는 교황에게서 시선을 떼 뒤쪽을 보았다. 교황이 아닌 성녀를 위한 전투신관 부대. 은광이 크리스티나를 향해 성호를 그었다.
“……성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예.”
“성전(聖戰)이…… 벌어질 것입니다. 정확한 시기는 아직은 알 수 없으나, 성전의 준비를 하십시오.”
“예.”
“성전의 준비 동안 유진 님을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순교자들을 모으겠나이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신앙적이고…… 각오가 된 이들로 은광을 증원하십시오.”
크리스티나는 괴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은광은 결사대다. 처음 조직할 때부터 그렇게 만들기로 했다. 그에 대해서는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납득하고 추진했다.
유라스의 신성마법학부는 기나긴 시간 동안 기적을 연구하고 기적을 개발해 왔다. 그들은 모조화신인 성녀를 만들었고, 그 성녀를 통해 성유물을 양산했으며, 성지의 개발까지 이뤄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신성마법학부가 보유한 성유물들에 성례를 치러 빛에 돌려보냈다. 키메라와 다를 것 없는 신성병기들도 빛에 돌려보냈다. 진행 중이던 대부분의 연구자료들도 파기했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남겨두었다.
무조건 도리(道理)를 따라서는 유폐의 마왕, 그리고 멸망의 마왕과 싸워 이길 수 없다.
한때 광명사제단의 일원이었던 전투사제들. 저들은ㅡ 신성력으로 제련한 생체병기다. ‘완성도’에서 비교는 안 되겠지만,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동류라 할 수 있다.
저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성전에 몸을 바치고 빛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저들 같은 병기를 양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보다 부족할지라도 은광은 증원해 둘 필요가 있었다.
[천국은 존재합니다.]
괴로움을 느끼는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아니스의 목소리도 괴롭고 우울했다.
[빛이 그들을 천국에 인도할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유진은 입을 쩍 벌리고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 눈부신, 화려해도 너무 화려한…… 그리고 너무나도 커다란 사자가 유진의 앞에 있었다.
“만드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시무인의 황제, 오세리스는 생색을 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정이 빠듯하다 보니 말입니다. 그것 아십니까? 드워프 길드의 장인들은 인간 장인들과는 절대로 협업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이 개선행진을 위해, 최초로 인간 장인과 드워프 장인들이 협업을 했답니다.”
“우리도 도왔다.”
이바타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시키는 대로 나무를 옮기고, 썰고, 다듬었지.”
아만도 함께 웃었다.
“…….”
유진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끔찍함과 수치심을 느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유진 공이 보기에는 낯설지도 모르겠군요. 저건 말입니다, 셰도르 섬의 축제의 꽃. 퍼레이드에 쓰이는 ‘플로트’라고 합니다. 아 물론 저 플로트에는 따로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플래티넘 라이온.”
플로트의 앞에서 가슴을 활짝 펼치고 있던 드워프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 플래티넘 라이온에 사용한 백금과 보석만 해도 성 몇 채는 살 수 있을 거요. 게다가 아롯의 마법공학까지 접목시켜, 놀랍게도 이 플래티넘 라이온은 바퀴로 구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걷는다고! 하하, 멋지지 않소?”
“으흠, 그렇다고 합니다, 유진 공.”
오세리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플래티넘 라이온을 가리켰다.
“오르십시오.”
“…….”
“플래티넘 라이온이 퍼레이드의 선두에 설 겁니다. 이미 길은 퍼레이드를 위해 비워놓았고,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퍼레이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진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찬란히 빛나는 플래티넘 라이온 외에도 수십 대의 플로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살펴보니 그중 몇 대는 이번에 새로 만든 것이고, 대부분은 기존 퍼레이드에 쓰이던 플로트처럼 보였다.
분명한 것은, 저 수십 대의 플로트 모두를 합한 것보다 플래티넘 라이온이 훨씬 화려했다. 저 플래티넘 라이온은 독보적으로 크고 웅장했다.
“다크 라이온이 아니라 아쉽군.”
홀린 듯이 플래티넘 라이온을 쳐다보던 카르멘이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
유진은 어금니를 꽉 씹었다.
귀항
유진은 전생부터 관심받고 인정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게 정당한 평가든 과장된 평가든, 부정적인 평가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으로의 삶 21년, 하멜 다이너스라는 이름으로의 삶 38년. 그리고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아가로트라는 이름으로의 삶까지 하여, 유진은 자신에게도 정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치스럽다. 끔찍하다.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다.
태어난, 아니, 기억이란 것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처럼 수치스러운 순간이 있었나? 유진은 덜덜 떨면서 난간을 붙잡았다.
‘도, 도망칠까?’
앞, 옆, 위, 어디를 봐도 찬양만이 가득했다. 하늘은 펑펑펑 쏴대는 축포의 빛깔로 가득 찼고, 양옆에는 개선 퍼레이드를 구경 나온 시민들이 손에 꽃다발이나 형광봉 따위의 제각각 물건을 흔들어대며 외쳐댔다.
“유진 님!”
“유진 라이언하트!”
“용사!”
저들이 외치는 소리가 축포 소리보다 훨씬 컸다. 사람들이 그득한 것은 거리뿐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의 옥상 위에 사람들이 서 있다.
옥상에만 올라간 것도 아니다. 그냥, 올라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위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행렬은 왕궁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고생 좀 했어.”
바로 위. 훅하고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유진은 눈썹과 뺨을 씰룩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멜키스 엘하이어의 시그니처, 정령합체 인피니티 포스. 거대한 정령거인이 된 멜키스가 코를 쓱 문질렀다.
“아무래도 그렇잖아? 행진하려면 길이 일직선이어야 편하지. 복잡한 수도 거리를 좌회전 우회전하면서 가는 것은 모두에게 귀찮은 일이잖아.”
“…….”
“그래서 이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님이 나선 거지! 아, 다른 마법사들도 고생하기는 했어. 저기 저, 뒤에서 따라오는 기사들도 힘쓰는 일에 나서주기는 했지만, 으흐흥, 가장 힘을 많이 쓴 것은 바로 이 멜키스 엘하이어 님이란 말씀이야.”
듣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었다. 멜키스와 계약한 정령왕은 총 셋. 번개와 불꽃, 대지. 그중에서 대지의 정령왕의 힘을 사용한다면, 땅과 건물을 통째로 움직여서, 항구부터 왕궁까지의 길을 뚫는 것도 가능하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활짝 웃고, 어? 손도 흔들어주고 그래야지. 이렇게!”
멜키스가 보란 듯이 양팔을 치켜들었다.
그녀에게도 인간의 마음은 남아 있던 것인지, 대수림에서와는 달리 지금의 정령거인은 옷을 입고 있었다. 불꽃의 정열과 번개의 짜릿함을 표현하는 것만 같은 드레스였다.
멜키스는 드레스를 팔랑팔랑 흔들었고, 옥상 위에서 뿌려지는 꽃잎을 한곳에 모아 플래티넘 라이온의 위에 집중하여 살포했다.
“…….”
유진은 이를 꽉 물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꽃잎들이 비처럼 머리 위로 쏟아진다……. 차라리 그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꽃잎이 너무 많은 탓에, 자신을 찬양하는 이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악귀처럼 일그러진 유진의 얼굴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안 보이게 되었다.
“즐겨.”
이 개같이 화려한 플래티넘 라이온에 올라탄 것은 유진 뿐만이 아니다. 전통적인 용사와 동료들이라고 할 수 있을 성녀와 대마법사. 세냐는 훗 웃으며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환호와 찬양받아 마땅한 일을 했잖아, 나의 제자야.”
“……세냐 님은 익숙하신가 봅니다?”
“흐흐흥, 당연히 익숙하지. 너의 아름다운 스승은 이번까지 해서 4명의 마왕을 토벌한 것이니 말이야. 지금 같은 개선은 익숙하단다.”
지금의 개선은 세냐에게 다채로운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300년 전. 하멜과 함께 즐겼던 개선은, 지금과 비교하면 굉장히 초라했다. 시대 자체가 초라하게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고 돌아왔을 때. 그때에는 아주, 아주 화려한 개선 축제가 열렸었다. 하지만 마경에서 돌아왔던 ‘4명’ 중 누구도 축제를 즐기지 않았다.
즐길 수가 없었다.
“지금은…… 즐길 수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웃는 세냐의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직접 말하지는 않아도, 유진은 지금 세냐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건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안에 있는 아니스도 똑같은, 아니,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성녀로 추앙받다 죽은 아니스는 환호와 찬양에 익숙하다.
아니스는 ‘혼자’가 되어 환호와 찬양을 즐긴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환호와 찬양은 ‘성녀’로서 받는 것이 아닌, 동료들과 함께여야만 마땅한 것이었다.
“…….”
크리스티나는 마음속에서 용기를 냈다.
‘축제’에 대한 갈망은 크리스티나도 가지고 있다. 유진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았던 신실한 아니스의 탄신제. 그때의 축제도 화려했었지만, 마왕 토벌의 개선제보다는 절대로 화려하지 않다.
지금 크리스티나의 행동은 자신의 갈망에 의해서가 아니다. 아니스를 위해, 그리고 세냐를 위한 것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대뜸 손을 뻗어 유진의 손을 붙잡았다. 반대편 손으로는 유진과 세냐가 손을 서로 쥐여주었다.
“만세!”
크리스티나가 버럭 외치며 팔을 치켜들었다. 유진의 팔도 함께 일어났고, 함께 붙들려 있던 세냐의 팔도 높이 올라갔다. 크리스티나는 본래 섰던 자리로 돌아가며, 위로 치켜들었던 팔을 아래로 내렸다.
“만세!”
크리스티나가 다시 외쳤다. 세냐가 허둥거리며 크리스티나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만세!”
둘 사이에 선 유진은 순식간에 만세삼창을 함께 하고서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와아아아!”
갑작스러운 만세삼창. 하지만 군중들을 열렬한 환호로 화답했다. 지금 거리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유진이 똥을 싸도 환호하고 좋아할 만큼 유진 라이언하트란 이름에 매료되어 있었다.
“꺄아아!”
멜키스도 찢어지는 환호성을 지르며 양손을 치켜들었다. 그 거대한 정령거인이 만세를 해버리니 뒤따르던 토벌대 전원이 움직였다.
플래티넘 라이온의 뒤, 사자 모습의 플로트에 올라탄 카르멘이 시엘과 디자이라의 손을 잡고서 만세를 외쳤다. 뒤의 플로트에서는 스칼리아 공주가 경배의 눈물을 흘리며 자페르 왕자와 오르투스, 디오르, 마이스와 만세를 외쳤다. 또 뒤의 플로트에서는 아이빅이 다른 용병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또 뒤의, 뒤의, 뒤의, 토벌대뿐만 아니라 절도 있는 모습으로 뒤따르는 각국 정예기사들까지 만세를 외쳤다.
“광신이 따로 없군.”
키옐의 황제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그는 황제다운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 만세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루하르과 아롯의 국왕, 심지어 교황마저 양팔을 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만세를 하지 않으면 군중들의 시선에 좋지 않게 보일 것이란 걱정이 들었다.
결국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아주 살짝 양팔을 올렸다.
‘대륙의 판도가 바뀌는군.’
마왕을 죽여 버렸으니, 허울뿐인 용사도 아니게 되었다…….
지금의 시대가 약속이 끝난 뒤에도 존속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만약 존속하게 된다면…… 그것은 용사가, 유진 라이언하트가 시대를 영위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뜻. 약속을 떠나, 대륙의 평화를 수호했다는 뜻.
그렇게 되어버리면 라이언하트란 이름은 키옐 제국이 결코 울타리 안에 가둘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여태까지도 사실 그랬지만, 앞으로는 균형이랄 것도 없이 키옐 제국이 라이언하트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당장 저 용사가 헬무드와의 전면전을 선언해 버린다면, 신성제국의 광신도들이 순교를 부르짖으며 성군을 조직할 것이다.
용감한 모론의 후예인 루하르도 참전할 것이고, 현명한 세냐를 거스를 수 없는 아롯도 참전할 것이다…….
“……만세!”
광신이 가득 한 개선제가 황제로 하여금 결의를 다지게 만들었다. 황제는 단호한 결의를 표정에 띄우고서, 방금보다 높이 양팔을 치켜들었다.
변화하는 대륙. 제국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젠 황제 본인부터가 용사를 따라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용사가 유폐의 마왕을, 그리고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가. 대륙이 힘을 모은다면 헬무드의 마족들과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앞으로 대륙의 대세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세!”
황제는 용사를 믿기로 결심했다.
* * *
화려하게 치장된 거리의 행진은 시무인 왕성에 도착하며 끝이 났다. 군중들은 왕성 밖에서 여전히 함성을 질렀고, 광기에 취한 수백 병은 성문으로 돌진하거나 성벽을 기어오르다가 마법의 찜질을 당했다.
와아ㅡ 와아아아!
유진은 요란한 함성을 무시하며 플래티넘 라이온에서 뛰어내렸다.
“이 플래티넘 라이온은 유진 공께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뒤따라 도착한 오세리스 국왕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에게 굽신거렸다. 유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플래티넘 라이온을 올려다보았다.
이 반짝거리는 플로트는…… 해체해 처분할 때의 가격도 가격을 떠나, 상징적인 면이 훌륭했다. 아무렴, 이 시대의 용사가 처음으로 마왕을 토벌하고, 개선제에 행진을 하며 사용한 물건이지 않은가.
유진에게 고대 전쟁신의 신위와 신격이 남아 있음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성물(聖物)이 될 자격도 충분한 물건이다.
“……이거 하나로 만족하라는 것은 아니겠죠?”
유진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물어보았다. 설마 저런 질문을 해올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오세리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예?”
“연회보다는 우선 공적부터 배분하도록 합시다.”
그 말로 의해 왕궁 회의장에 많은 사람들이 입실했다. 오세리스를 포함한 각국의 지도자들. 오르투스, 마이스, 아이빅, 카르멘 등이 포함된 토벌대의 주역들.
“자.”
회의실에 들어온 유진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앉는 것을 기다린 뒤에,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로 걸어 나왔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도 민망한 사실이지만, 마왕 토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았습니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오르투스를 쳐다보았다. 오르투스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 공의 발언은 사실입니다. 유진 공이 나서지 않았다면 저희는 마왕 토벌을 위해 진군하기는커녕 시무인에 돌아왔을 겁니다. 그랬다면, 토벌의 적기를 놓쳐 버린 신생 광란의 마왕은…… 갖게 된 시간만큼 강해지고 세력을 확장하여, 토벌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을 겁니다.”
“뭐, 어렵기는 해도 토벌은 가능했겠죠. 이번의 몇십 배에 달하는 희생을 치르겠지만 말입니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그 희생은 시무인 뿐만 아니라 각국의 전력이 부담하게 됐을 겁니다.”
유진은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각국 지도자님들께서는…… 헬무드를 치는 것도 아니고, 신생 마왕을 토벌하자는데 전력 지원을 불허하시진 않겠지요?”
“너는 내 벗이다.”
이바타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네가 도움을 청했다면, 나 혼자서라도 너를 위해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루하르도 마찬가지일세. 마왕 토벌은 왕국의 시조, 용왕 전하의 오랜 위업. 그를 이을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있어 무한한 영광이요 천명이지.”
“아롯도 그렇습니다. 현명한 세냐 님께서 용사, 유진 공과 함께하는 이상…….”
다인돌프는 말을 잇다 말고 세냐의 눈치를 보았다. 불만족스러운 눈. 다인돌프는 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아니! 세냐 님이 함께하지 않으실지라도, 그분을 숭상하는 우리 아롯의 마법사들은 유진 공을 위해 전선으로 떠났을 겁니다.”
다인돌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선언했고, 세냐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라스에 성전과 순교를 두려워하는 배교자는 없나이다.”
교황이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용사께서 부름을 주셨다면, 저 에우리우스는 당신의 신실한 종복이 되어 성전의 기수가 되었을 겁니다.”
“키옐도 그리 했을 것이오. 미리, 논의를 하였다면…… 말이오.”
우둔한 하멜의 환생임을 떠나, 용사를 믿기로 한 키옐의 황제도 저렇게 대답했다. 물론 말만 그리했을 뿐, 마왕 토벌의 전이었다면…… 여러 핑곗거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 버린 일. 이제 와서는 염두에 둘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지도자들과 함께 앉은 길레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흔들림 없이 고요한 눈으로 유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라이언하트가 가장 먼저 널 따랐을 것이다.”
유진은 길레이드의 눈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고 무한한 신뢰를 느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대륙 전체가 적이 되어도 라이언하트만큼은 유진을 따라줄 것이다.
유진은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끼면서 웃었다.
“다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유진은 답답한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탄탄한 팔뚝을 쭉 뻗었다.
“저도 당당하게, 제 공적을 요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허공에 글자가 적히기 시작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여러분과 협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냥 요구하는 것이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무인은 망치섬 드워프들을 라이언하트에 파견한다. 작업에 관련된 보수는 시무인이 지불한다. 파견되는 장인은 유진 라이언하트가 망치섬 드워프들과 직접 협의한다.
“뭐 거절은 하셔도 됩니다만…… 기왕이면 거절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저와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시무인은 가장 큰 섬인 셰도르와 라루파, 두 섬의 중앙에 용사의 성상을 세운다. 성상의 관광 상품화는 금한다. 또한 마왕 토벌 성공을 기념하는 개선문을 세운다. 마찬가지로 관광 상품화는 금한다. 성상의 건축 후, 한 달에 한 번 왕족은 성상 앞에 감사의 예배식을 올린다.
“그 무슨!”
오세리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왕족이 성상에 직접 예배를 올리라니! 종교국가도 아닌 시무인에서 저런 일을 하란 말인가?
‘용사의 우상화…….’
교황도 놀란 감정을 느꼈다. 그는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이 적는 글을 보다가, 그 근처에 앉아 있는 크리스티나를 힐긋 보았다.
교황이 시선을 줄 줄 알았다는 듯이 크리스티나도 교황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고, 교황은 침묵했다.
“싫으면 안 하시면 됩니다.”
“아니…… 그…… 싫다는 것은…….”
좋은 관계를 위해서.
오세리스는 저 말의 뜻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방금 오갔던 이야기 아닌가. 유진 라이언하트가 바란다면 여러 국가의 군대가 움직인다. 사실 군대를 이끌 것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유진 혼자서 작정해도 시무인을 몰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이건…… 요구가 아니라…… 협박 아니오?”
“저는 그런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닌데……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어쩔 수 없고요.”
유진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아니 그런데, 거참, 들어보니 참 불쾌합니다. 협박이라뇨?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제가 전하를 협박하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전하를 대신해, 이 나라의 영해에서 날뛰던 해적을! 마왕을 토벌하고 왔습니다. 그런 제게 저리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 서운합니다.”
“아니…… 그것이…….”
“제가 뭐 왕위를 달라 했습니까? 그냥 제가 한 일이 있으니, 성상만 2개 세워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전하를 대신해 개고생을 한 저를 위해, 전하께서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왕족 아무나 대표하여 제 노고에 감사해 달라는 것이잖습니까? 이게 어렵습니까?”
“어어…… 그건…… 아니오…….”
“그런데 왜 버럭 소리를 지르신 겁니까?”
따져 묻는 말에 오세리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곁에 있던 스칼리아 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스…… 스칼리아?”
“제가! 아바마마 대신, 왕가를 대표하여! 용사님의 성상에 예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스칼리아가 열의에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오세리스와 자페르는 입을 떡 벌리고서 스칼리아를 쳐다보았다.
“좋습니다.”
유진은 스칼리아가 나서줄 것이라고 짐작했었기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오세리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음 요구사항을 적기 시작했다.
“이번에 거둔 전리품들에 대해서입니다만…….”
그것에 관해서는 큰 욕심은 나지 않았다. 적당히, 공적에 따라, 투명하게 배분할 것.
“시무인의 국보인 엑시드. 2개만 빌려주십시오.”
“뭐…… 뭐라고…….”
“어차피 이미 3개나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중 1개는 오르투스 경이 쓰고 있고…… 나머지 2개는 솔직히 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직접 입고 전장에 나가실 것도 아니고. 만약 그렇게 하시겠다면, 제가 꼭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세리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뒷목은 욱신거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국보 엑시드? 드래곤하트를 사용한 시무인의 보물! 왕가의 상징! 그것들 2개나 빌려달라고?
“그냥 빌려주는 것이 어떻소?”
키옐의 황제가 심술궂은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유진 공의 말마따나, 오세리스 당신이 엑시드를 입고 전장에 설 것도 아니잖소.”
남의 나라 국보라고 쉽게 말하기는……! 오세리스는 두 눈을 부릅뜨고 황제를 쏘아보았다.
“빛께서도 공물에 기뻐하실 겁니다.”
교황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도 오세리스의 속을 뒤집었다. 공물? 누구 마음대로 공물인가!
“아…… 알겠소. 빌려, 빌려주겠소.”
화가 치솟지만 오세리스에게는 대세를 거스를 힘이 없었다. 그는 비틀비틀 자리에 앉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것들까지는 유진에게 있어서 ‘당연히’ 얻어야 할 것들.
“그럼 마지막으로…….”
여기서부터는 분위기에 따른 욕심이다.
하지만, 요구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까 말씀들 하셨잖습니까? 제가 마왕 토벌에 관해 도움을 청했다면, 다들 망설이지 않고 저를 돕겠다고 하셨지요?”
유진은 보란 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인즉슨, 제 요구를 왕권을 앞세워 들어주겠다는 뜻들이시죠?”
귀항
이 자리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받아낼 수 있을까.
돈? 이미 많아도 너무 많다. 으레 정말로 진귀하고 필요한 것은 돈을 아무리 많이 퍼부어도 가질 수 없는 법이라, 이제는 돈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보물도 마찬가지다. 시중에 풀린 드래곤하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무인의 국보 엑시드는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다. 그마저도 유진이 사용하기 위해 빌린 것도 아니었다. 엑시드를 쓰느니 라이미르아의 지원을 받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받아두면 누군가는 쓰겠지.’
당장 라이언하트에는 유진보다 엑시드를 잘 써먹을 사람들이 많았다. 토벌 중에서도 카르멘은 엑시드로 화력이 증폭되어 마왕의 정면에 설 수 있었고, 길레이드나 기온도 엑시드의 덕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윗세대에 비해 아직 마나가 넉넉지 않은 시안과 시엘이 써도 괜찮을 것이다.
더 이상 유진은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었다. 무기야 이미 잔뜩 가지고 있고, 마나에 대한 지원도 마찬가지다.
당장 유진은 마나 쪽으로는 세 종류의 지원을 받고 있다. 아카샤로 마나를 증폭하고, 메르로 연산을 가속하며, 라이미르아에게서는 드래곤하트와 용언의 지원을 받고 있다. 거기에 자체적으로 프로미넌스까지 펼쳐 버리면, 정신이 버티는 한 몇 날 며칠이고 전력으로 싸울 수 있다.
그렇기에 물질적인 것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
“음…….”
황제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용사의…… 개인의 요구를 왕권을 앞세워 들어달라. 저 말은 일종의 초법(超法) 권한을 달라는 말과 진배없었다.
‘과해.’
황제는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제국의 황제조차도 법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망나니 폭군이 아닌 이상에야 군주라도 제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려고 든다면, 왕권을 앞세워 법과 절차를 무시할 수는 있다. 그것이 바로 황명이고 왕명이다.
‘아무리 용사라고는 하지만…… 개인에게 그만한 권한을 약속하는 것은…….’
물론 유진 라이언하트를 일개 개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만한 특권은 과하지 않은가? 황제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유진 공. 만약 그대가 마왕이나, 그에 준하는 대적과 맞서기 위해 도움을 청해온다면, 짐은 다른 무엇보다 그대의 부탁을 우선할 것이오.”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멱살을 쥐고 따귀나 주먹질을 하지는 않겠지. 황제는 유진의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꼭 군을 동원해야 하는 부탁이 아닐지라도, 그대의 부탁이 적절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짐은 그 부탁을 들어줄 용의가 있소. 하지만 ‘부탁’을 생략하는 것은…….”
“유라스는 상관없나이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듣고 있던 교황이 대뜸 끼어 들어왔다.
“빛의 용사시여. 당신께서는 지상에 내린 빛, 신인(神人)이십니다. 당신께서 명하신다면 이 미천한 종복은 감사와 기쁨으로 따르겠나이다.”
저 늙은이가 정말로 노망이 났나? 저런 말을 단둘이서도 아니고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고? 황제는 두 눈을 부릅뜨고 교황을 쳐다보았다.
‘이러면 네가 곤란하겠지, 어린 것아.’
교황은 황제를 힐긋 쳐다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빛과 용사에 대한 신앙은 진심이다. 유진이 바란다면 유라스 전체를 바치겠다는 생각도 진심이다. 하지만, 유라스만이 유진에게 휘둘리는 것보다는ㅡ 유라스와 비슷한 국력을 가진 키옐 제국도 함께 휘둘렸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면, 루하르도 약속하겠소.”
아만도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약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만은 유진의 요구를 지극히 간단하게 받아들였다. 유진이 요구하는 것이 군주 이상의 초법 권한인 것은 맞다. 하지만 막말로 유진이 유라스에서 죄를 저지르고 그를 무마코자 저 권한을 행사할까? 아니면 군권을 장악해 반란을 도모할까?
“벗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이바타도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다인돌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롯도 그리하겠습니다.”
오가는 이야기에 황제의 얼굴이 구겨졌다.
유라스는 법보다 신앙을 우선하는 미치광이들의 제국이다. 루하르도 시조인 용왕이 건재하다는 것을 대륙에 증명하였고, 유진이 아무리 용사라 해도 ‘용감한 모론’을 함부로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런데 너희 둘은 뭐야?’
뻔뻔하기 짝이 없는 아롯! 저 나라는 입헌군주제다. 왕가는 장식과 다름없고, 국정은 대부분이 의회가 굴리고 있단 말이다. 그러한 왕가에서 왕권이라 할 것이라고는 아브람의 정원에 무슨 나무나 꽃을 심을지를 결정하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대수림에서 온 저 원주민. 저 숲속 깡촌에 뭔 놈의 법이 있겠는가? 왕도 아니고 족장이라는 놈이 왕권은 왜 운운하나? 저 야만인은 자기가 가진 권한이 제국 황제의 권한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시무인도 약속하겠습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오세리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저렇게 내뱉은 뒤에, 황제가 그랬듯이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냥 해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황제는 똥 씹은 표정을 하고서 오세리스를 노려보았다.
“용사인 유진 공이 왕권을 이용해 부당한 짓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 혼자만 손해를 볼 수는 없다. 오세리스의 생각도 교황과 비슷했다. 본래라면 황제의 눈치를 보는 입장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용사에게 협력하기로 약속한다면, 국가 간에 동맹이 형성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상식적이고……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요구라면……!”
“그건 제가 잘 판단하겠습니다.”
새끼, 결국 굽힐 거면서 왜 빳빳이 서려 드는 거야?
‘그러다 부러지는 거야 새끼야.’
유진은 망토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망토 안에 있던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각각 상자 하나씩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저걸 보고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의자에 걸쳐져 있던 망토에서, 갑자기 2명의 소녀가 걸어 나온 것이다.
그나마 세냐와 빼닮은 메르에 대해서는 대해서는 모두가 정체를 알았지만, 머리에 사슴의 뿔을 달고 이마 한복판에 보석을 박은 라이미르아는 다들 눈을 끔벅거리며 쳐다보았다.
“열어보십시오.”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들고나온 상자는 군주들 앞에 놓였다. 교황이 가장 먼저 상자를 열었다.
“이건…….”
상자 안에는 검은 사자의 휘장이 3개 들어 있었다.
“서로 편한 것이 좋지 않습니까? 국정에 바쁘신 분들에게 제가 매번 부탁을 올리는 것도 죄스러운 일이니, 그 휘장에 약속해 주시는 것이 간편할 듯합니다.”
역시. ‘부탁’ 자체를 생략해 달라는 것인가.
황제는 여전히 똥 씹은 얼굴을 하고서 상자를 열었다. 총 6개의 휘장. 저것을 왕패(王牌)로 지정해 달라는, 발칙하기 짝이 없는 요구…….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휘장을 잡았다.
“알겠네.”
국가의 장들이 모였다길래, 곤도르를 시켜 제작한 휘장이다. 분위기에 따라 욕심을 부려도 될 때 써먹을까 했는데,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어디 나갈 때 신경을 덜 써도 되겠어.’
당장 키옐에서 워프게이트를 이용할 때, 저 휘장을 보인다면 워프게이트 이용기록을 말살해 버릴 수도 있다. 정보길드가 아닌 제국 정보조직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필요할 때에는 타국의 밀정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정보길드만으로 헬무드의 상황을 살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놈들은 근본적으로 장사꾼이다. 의리나 그런 것보다는 정보의 값어치를 우선한다. 그런 만큼 고가의 정보는 질이 높다만, 돈을 우선하는 놈들이다 보니 목숨을 담보로 삼아야 할 위험한 영역은 꺼려 한다.
하지만 국가의 정보조직은 돈이 아니라 충성심, 애국심 같은 신념으로 움직인다. 유진이 탐을 내는 것은, 죽음을 불사한 밀정들이 보내는 정보들이었다.
“세금 감면은 안 됩니까?”
유진은 제 몫의 휘장을 챙기며 황제를 슬쩍 쳐다보았다.
“라이언하트가 세금을 참 많이 내고 있는데…….”
“뿌득…….”
황제의 꽉 다문 입술 사이에서 어금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길레이드는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납부는 제국 시민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할 의무란다.”
“그래도 기왕이면 적게 내는 게 더 좋지 않나……. 아예 안 내면 더 좋고요.”
“뿌드득…….”
차라리 황위를 달라 하지 그러냐? 황제는 목젖까지 치솟은 외침을 간신히 삼켰다. 욱해서 내뱉은 저 말로 돌아올 대답이 두려웠다.
“……논의해 보겠네.”
황제는 최대한 확답을 피했고, 유진도 더 요구하지는 않았다.
* * *
회담이 끝나고 왕궁 밖에 나오니, 그새 넓은 정원이 새롭게 꾸며져 있었다.
어디서 옮겨 온 것인지 모를 커다랗고 화려한 분수대가 금빛으로 반짝이는 물을 내뿜었다. 그 빛나는 물을 본 순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교황을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교황은 식겁하고 대답했다. 유진은 높이 치솟았다 아래로 떨어져 고이는 샘을 보고서 중얼거렸다.
“빛의 샘.”
“…….”
“어우…… 깜짝이야.”
분수대 뒤에는 플래티넘 라이온이 위용을 과시했다. 궁정 요리사들은 설치된 테이블에 바쁘게 음식과 음료를 날랐다. 촤라라락! 멜키스가 발을 구를 때마다 정원의 잔디와 흙이 매끈한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나중에 원래대로 돌려줄 거요.”
덜덜 떠는 오세리스를 향해 다인돌프가 위로를 건넸다.
직접 나선 것은 멜키스뿐만이 아니었다. 로베리안과 히리두스도 연신 마법을 써가며 왕궁정원의 개조에 동참했다.
왕궁 담벽이 쭉 치솟더니, 높은 하늘까지 덮는 천장이 되었다. 천장이 벽에서 유리로 바뀌고, 마법사들은 유리창에 비치는 하늘을 도화지 삼아 알록달록한 별들을 그려 넣었다. 곳곳에 켜진 마법의 촛불은 천천히 색을 바꾸어가며 분위기를 조성했고, 대리석 바닥에는 폭신한 융단이 깔렸다.
그렇게 정원이 연회장으로 바뀌어가는 동안, 토벌대의 주역들은 연회에 걸맞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유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입고 있는 제복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 저항했지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항상 똑같은 제복만 입으시는데, 이럴 때에는 다른 옷을 입으시지요.”
세냐는 오늘 무도회에서 유진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었다. 입맞춤을 넘어서는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했다.
그녀의 기준에서도 과하다 싶을 만큼 매혹적인 드레스. 등에는 옷감이 거의 없다시피 한…….
‘…….’
그만두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 옷감에 덮이지 않은 등짝을 드러낸다는 것은 ‘현명한 세냐’에게는 너무나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드레스는 다른 사람이 아닌 유진에게만 보여주고 싶었다.
시엘은 드레스의 선택조차 할 수가 없었다. 연회가 준비되는 내내, 애니실라가 시엘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울음을 참았기 때문이다. 시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며 어머니를 달랬지만, 뒤이어 찾아온 길레이드와 기온, 시안 등에게도 똑같은 걱정을 들어야만 했다.
위로와 대화가 끝날 즈음. 시안은 아만에게 붙들렸다.
“아일라를 데려올 것을 그랬군.”
“아…… 예…… 하하하…….”
“아일라가 자네 얘기를 자주 해. 편지를 주고받는다지?”
“예…… 예에. 공주님께서 꼭 답장을 해달라 하시기에…….”
“공주님이라 부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냥 편하게 부르게, 둘만의 편지에서는 아일라를 뭐라고 부르고 있나?”
“예……? 그냥 공주님이라고…….”
“그럴 필요 없다니까. 내 딸은 말일세, 평소에 공주님이라고 자주 불리는 탓에 공주님이란 호칭에 아무런 특별함도 느끼지 않아. 내 특별히 알려주지. 아일라는…….”
아만은 시안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아기사슴이라고 불러주면 아주 기뻐한다네.”
“…….”
“토끼라 불러주는 것도 즐거워하지.”
시안은 꿀꺽 침을 삼켰다.
루하르의 아일라 공주와는 저번에 만남을 가졌다. 확실히…… 아일라 공주는 ‘아기사슴’이나 ‘토끼’라는 부름이 어울릴 만큼,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아름답고 귀여운 소녀였다. 저 험상궂은 야수왕의 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컸다.
당시에 11살이었는데, 도저히 그 나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때 보았을 적만 해도 시안과 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시안이 기억하기에, 11살 아일라 공주의 성장상태는 17살 적의 시엘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거기서 더 자라 버리면…….’
시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예비 장인 아만을 힐긋 쳐다보았다.
시안이 보기에 아만은 거인처럼 보였고, 자연스럽게 시안의 머릿속에서는 거인만큼 자란 아일라 공주가 까마득한 높이에서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식은 언제가 좋겠나?”
“네…… 네?”
“내 딸은 자네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니까? 자네도 아일라가 마음에 들지 않나?”
“하…… 하지만 공주님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렇다면 식은 나중으로 미루고 함께 사는 것부터 먼저 하는 것은 어떤가?”
“예……?”
“아, 걱정하지 말게. 자네보고 루하르에 와서 지내라 할 생각은 없으니. 차기 가주인 자네를 데릴사위로 들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 아일라를 라이언하트에 보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시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아일라 공주님의 의사를 존중…….”
“으하하, 사위, 내가 끔찍이 아끼는 딸아이의 의견을 묵살하는 몹쓸 아비로 보이는가? 아일라가 하도 시안 오빠, 시안 오빠를 입에 달고 살며 보고 싶다 칭얼대기에 하는 말일세!”
대체 아일라 공주는 나의 무엇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시안은 도저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연회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시안은 아만의 어깨동무를 감당하며 아일라 공주에 대한 자랑을 들어야만 했다.
세냐는 망측한 드레스를 얌전히 넣어두고 우아한 드레스를 선택했지만, 등짝뿐만 아니라 가슴골까지 푹 파인 멜키스의 드레스를 보고서 후회와 안도가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시엘은 백장미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었고, 유진은 성녀들의 강요로 답답한 턱시도를 입었다. 정작 유진에게 환복을 강요한 성녀들은 사제복을 벗지 않았다.
“왜 너는 옷 안 갈아입어?”
“하멜, 제가 300년 전의 연회에서 다른 옷을 입은 적이 있습니까?”
유진은 미리 준비했을 것이 분명한 변명을 돌파할 수 없었다.
연회장이 완성되고, 옷도 갈아입었고, 분위기도 흥이 올랐지만.
연회를 곧장 시작할 수는 없었다.
“서프라이즈!”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청객이 난입해 왔다.
귀항
시무인은 사시사철 따스한 섬나라다. 콜로세움과 거리 축제 등 볼거리들이 끊이질 않고, 에메랄드빛의 바다가 아름답다. 어느 해안가를 가건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셰도르와 라루파는 사람이 너무 많아 번잡하지만, 배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휴양용 섬들이 많다. 그런 섬들은 부호들의 별장으로 쓰이거나, 고급 리조트로 개발되어 신혼여행지로 애용된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오늘 그녀의 의상 컨셉은 그쪽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
사람 많은 바닷가. 모두가 수영복을 입고 해수욕을 즐기지만, 누구보다 주목을 받는 아름다운 여인. 혹은 사랑하는 예비신랑을 위해 혹독한 자기관리를 해온 해변의 신부. 혹은 조용한 프라이빗 비치를 거니는 슈퍼스타.
어느 쪽이든 수영복을 입었다는 말이다.
백옥 같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비키니. 일부러 살짝 늘어트린 끈이 누아르의 꼬리와 같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누아르가 발을 딛는 곳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런웨이가 되었다.
누아르는 모델처럼 완벽한 워킹을 펼치며, 활짝 열린 성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서프라이즈!”
누아르는 활짝 웃으며 가슴을 내밀었다. 연회장에 모인 수천 명의 시선이 누아르에게 향했다.
이 상황을 인지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각자가 달랐다. 성문이 멋대로 열리고, 비키니 차림의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단순하고 쉽게 생각할 일은 절대 아니다.
이곳에 있는 것은 그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의 본신(本身). 게다가 지금 누아르는, 용마성과 관련해 유진과 만났을 때와는 달리 몽마(夢魔)다운 존재감을 흘리고 있었다.
몽마.
서큐버스.
이 마족은 인간을 홀린다. 저급 몽마일지라도 인간 하나쯤은 우습게 홀리는데, ‘몽마’라는 종의 정점, 여왕의 존재감은 순식간에 연회장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평범하지 않다. 음식을 나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부산스럽던 시종들은 모두가 얼굴을 붉히고 땅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렸으나, 각 국에서도 거르고 거른 정예들은 몇 번의 호흡만으로 평정을 되찾았다.
ㅡ그럴 수 있던 것은 누아르의 자비였다.
마왕이 되지 않았음에도 마왕의 격을 넘어선 서큐버스. 누아르가 작정하고 존재감을 내뿜었다면, 정예 기사일지라도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이 자리에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 연회장의 절반 정도는 무력화시킬 수 있었고, 환상의 마안을 뜬다면 개미를 짓밟듯이 쉽게 학살극을 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아르는 대학살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도, 이곳의 모두를 유혹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다들 놀랐어요?”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포위는 누아르가 질문을 내뱉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연회장의 수천 명이 누아르를 에워쌌다.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기사들. 특히 성기사들이 전면에서 누아르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너무 빠른 남자는 여자가 싫어하는 법인데.”
누아르는 까딱, 고개를 기울이며 눈동자만을 위로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허공에는 크루세이더, 라파엘로가 멈춰 있었다.
이 미치광이 성기사는, 누아르를 포착하자마자 등 뒤의 십자대검을 뽑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바랐던 대로 누아르의 몸을 둘로 갈라 버리지는 못했다. 광신을 통해 얻은 신성력도, 소년의 체격에 담긴 강인함도, 누아르의 마력에 의한 속박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느긋하고 천천히, 그리고…… 젠틀하게 여자 위에 올라타도록 해요.”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시선을 움직였다.
“당신은 너무 작아서 올라타지도 못했지만.”
라파엘로의 몸은 누아르의 시선과 함께 움직였다. 거칠게 내동댕이쳐지거나, 저 먼 벽에 처박히지는 않았다. 누아르는 아주 부드럽고 친절하게 라파엘로의 몸을 땅에 내려놓았다.
“갈X년이……!”
그러한 취급은 이전의 조언과 더불어 라파엘로의 머리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라파엘로는 눈을 까뒤집고 다시금 누아르에게 덤벼들려 했지만, 뒤에서 뻗은 손이 라파엘로의 어깨를 붙잡았다.
“여전히 성격이 참 급하십니다.”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라파엘로의 어깨를 당겼다.
만약 제지한 것이 교황이었다면 듣지 않았겠지만, 상대가 유진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라파엘로는 즉시 살의를 가다듬었다. 유라스의 누구보다도 광신도인 라파엘로에게 있어서, 지금의 유진ㅡ 용사의 뜻 하나하나가 빛의 뜻이었다.
‘쌍년.’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누아르를 쳐다보았다.
불과 몇 주 전에 솔가르타 해역에서 만났었다. 설마 오겠나 싶었는데, 진짜로 와버릴 줄이야. 하물며 이번에는 휘하 몽마의 몸을 빌린 것도 아니고, 본신으로 와버린 것이다.
‘자신 있다는 건가?’
지금 이곳의 전력을 모두 사용한다면, 누아르를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평소 지내는 영지에 쳐들어가서 누아르를 죽이는 것보다, 영지 바깥에 온 지금 누아르를 죽이는 것이 훨씬 편하지 않을까. 물론, 절대로 쉽지는 않을 것이다. 죽일 수 있고를 떠나서, 누아르에게 덤빈다면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건질 사람은 10명도 안 될 것이다.
“쯧.”
10명은 무슨. 지금 덤비면 몰살이다. 유진은 누아르의 등 뒤에 선 마족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워프게이트를 썼다면, 왕성에 난입하기 전에 먼저 연락이 왔을 것이다.
‘그 멀리 있는 헬무드에서 혼자 날아왔나 했는데.’
나이트마치 때도 그랬다. 저놈은 워프게이트를 사용하지 않고 대뜸 레헤인야르에 나타났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놈이 가지고 있는 위신(威神)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의 권능을 자유로이 사용하게 만든다. 유폐의 마왕이 공간이동을 쓰듯이, 가비드도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면 공간이동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제벨라 공작.”
가비드는 씰룩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무턱대고 난입했다간, 적의를 받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확실히 예를 갖추고 찾아가도록 하자고 말이오.”
내뱉는 말은 누아르의 행동에 대한 질책이었지만, 가비드의 눈은 유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먹물 같은 얼룩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린드먼 공작. 이렇게 서민적이고 소탈하며 장난스러운 모습이, 오히려 모두를 안심시킨다니까요?”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머리카락을 넘겼다. 몸을 크게 흔들며 비튼 과장 섞인 동작이 풍만한 가슴을 흔들었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아요? 표정부터 좋지 않은 당신과는 달리, 지금 내 모습은 아름다운 바다와 화려한 연회와 달콤한 만남을 즐기러 온 모습이잖아.”
가비드는 저 헛소리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어둠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고, 유진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뭘 보냐?”
그냥 쳐다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삐딱한 말투로 질문도 던졌다.
“…….”
가비드는 욱하고 치미는 살의를 억눌렀다. 누아르가 학살을 위해 온 것이 아니듯, 가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우선 사과부터 하겠소.”
그 말은 유진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포위를 유지하고 있는 기사들. 당장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화약고라도 앞에 둔 것처럼 긴장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예고하지 않고 무턱대고 찾아온 점. 허락을 구하지 않고 성문을 열어버린 점. 시작을 앞둔 연회를 망쳐 버린 점.”
“알면 됐고.”
“……그대…… 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짐작하고 있소. 그대들이, ‘축하’만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오.”
“알면 말하든가…….”
“…….”
꽈득. 가비드는 주먹을 꽉 쥐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저 건방진 인간 새끼의 얼굴을 땅에 처박아 버리고 싶었지만, 가비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건, 유폐의 마왕이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비드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가비드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진도 그 사실은 알았다.
당장 몇 주 전, 심해 밑바닥의 심연에서 유폐의 마왕과 만났었다. 대담은 유진에게 분명한 답을 주었다. 아직 약속은 끝나지 않았고, 유진이 바벨에 향하지 않는 한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다른 마족도 아니고, 너 새끼가 유폐의 뜻을 무시하고 날 해칠 리가 없지.’
그래서 유진은 마음 편히 가비드의 감정을 긁을 수 있었다.
“말 안 해?”
“대체 뭘 믿고 건방을 떠는 거냐……?”
“너희 마왕을 믿지.”
건들거리며 이죽거려 주니 가비드의 턱이 말 그대로 박살 났다. 너무 강하게 이를 악물어서 일어난 참사였다.
가비드는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며 유진을 노려보다가,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가비드는 재생된 턱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유폐의 마왕님의 전언이오.”
가비드는 유진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키옐의 황제. 유라스의 교황. 헬무드가 없다면,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두 명의 인간.
“유폐의 마왕님은, 광란의 마왕이 벌인 난동과 헬무드를 연관 지어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고 계시오.”
그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비드는 웅성거림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허나, 광란의 마왕이 벌인 난동과는 별개로, 다크엘프 ‘아이리스’의 난동과, 그녀의 근본이 헬무드와 무관하다 부정하지는 않겠다고 하셨소. 비록 영지전에 패해 추방되었다고 해도, 그녀가 ‘마족’이며 헬무드에서 살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적게나마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오.”
뭐하자는 수작이지? 가비드의 말에 당황한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헬무드는 도의적인 보상을 베풀 것이오.”
“……보상이라. 배상금이라도 지불하겠다는 것이오?”
황제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 질문에 가비드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배상금? 그건 아니오.”
“그럼 대체 무슨…….”
“말하지 않았소. 도의적인 보상을 베푼다고 말이오. 본심을 말하자면, 나는 이것부터가 납득이 되지는 않소. 아이리스는 마왕이 되기 전에 헬무드에서 추방되었고, 아이리스가 마왕이 될 때까지 방치한 것은 바로 이 나라 아니오?”
가비드는 눈동자에 비웃음을 담아 오세리스 국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런 나와는 달리,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정말로 자비로우시지. 오세리스 국왕. 경청토록 하시오.”
오세리스는 그 눈동자와 마주친 것만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떨었다. 가비드는 덜덜 떠는 오세리스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폐의 마왕님께서 말씀하시길, 아이리스와 휘하 해적들에게 피해를 입은 인간은 아무런 절차 없이 헬무드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소. 돈 한 푼 지불하지 않고 헬무드에 이민을 올 수 있단 말이오.”
그 말에 오세리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물론 이민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고 해서 헬무드에서 차별을 받는 일은 없을 거요. 헬무드는 이민자를 차별하지도, 차등하지도 않으니 말이오.”
“대, 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 오세리스 국왕.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오? 그대가 묵인하고 방치했던 아이리스와 해적들.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인간을, 무능한 시무인 왕가와 이 나라를 대신하여 유폐의 마왕님이 보살피겠다는 거요.”
오세리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고, 주변에 있던 군주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헬무드의 이민복지시스템은 대륙에 정평이 나 있으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헬무드로 이민을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피해자 한정이라지만, 아무런 절차 없이 이민자를 수용하겠다니!
“저것은 유폐의 마왕님이 약속한 보상이고.”
누아르가 가비드의 옆에서 몸을 내밀었다. 그녀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저도 따로 보상할 생각이랍니다. 인과를 따지자면, 제가 아이리스와의 영지전에 승리해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 다크엘프를 추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여 버렸다면, 해적이 되지도, 마왕이 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에요.”
나오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일단은 끼어들지 않고, 누아르가 내뱉을 개소리를 기다렸다.
“제 보상은…… 바로바로! 제벨라파크의 무료입장권! 그리고, 스페셜 코인이랍니다!”
짜자잔! 누아르는 입으로 그런 소리를 내며 양팔을 번쩍 들었다.
ㅡ촤라라락! 누아르의 머리 위 공간이 갈라지더니, 붉은색의 코인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 스페셜 코인을 가지고 있으면 제벨라 파크의 시설 대부분을 무료로, 거기에 아무런 대기 줄 없이 이용할 수 있답니다! 그 외에도 아주 많은 특혜가 있어요!”
쏟아지던 코인의 비가 멈췄다. 누아르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바닥에 널브러졌던 코인들이 한곳에 모여 탑을 쌓았다.
“시무인에서 온 관광객이라면, 제벨라 파크에서 이 스페셜 코인을 발급받을 수 있어요. 그럼 여기 있는 코인은 뭐냐?”
누아르는 자신을 멍한 눈으로 보는 기사들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바로 여러분을 위한 선물이에요. 바다까지 건너가며, 용사를! 유진 라이언하트를 축하하고, 지키러 오신 여러분들을 위한 선물! 자자, 자자자! 사양하지 마세요. 이 코인 하나만 있으면, 평생 살아도 얻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얻게 될 거예요. 제벨라 파크에서는 여러분의 온갖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답니다!”
“그딴 소리나 하려고 온 거야?”
유진은 더는 듣지 않고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찌릿, 오싹, 두근. 누아르는 강렬한 전율을 느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아, 저 눈!’
역시. 빙의체로 받는 시선과는 비교가 안 된다. 누아르는 활짝 웃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저와 가비드가 여기 온 이유가 보상 때문인 것도 맞기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당연히 따로 있어요.”
“무슨 이유?”
유진은 누아르와 가비드를 노려보면서도 다른 쪽을 의식했다. 지금 세냐와 크리스티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따로 부하를 데려오지는 않은 것 같아.]
성문 밖을 살피던 세냐가 말했다.
나이트 마치 때와는 달리, 가비드는 ‘검은 안개’를 끌고 오지 않았다. 하지만 위신의 마안을 쓴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가비드는 검은 안개를 소환할 수 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그 사실을 경계하며 신성결계를 준비했지만ㅡ 그녀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신성결계라도, 가비드가 위신의 마안을 쓰는 것 자체는 막을 수가 없다. 대마왕의 권능은 성녀의 신성력마저 무시해 버린다.
하지만, 만약 가비드가 검은 안개를 불러온다면. 검은 안개가 출현함과 동시에 결계로 타격은 줄 수 있으리라.
“진짜 이유는 바로…….”
누아르가 말을 이었다.
“축하합니다~”
“……?”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노래.
“유진 라이언하트의 마왕 토벌을~ 축하합니다~”
경악과 고요 속에서 누아르의 미성이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유진 라이언하트의~ 마왕 토벌을~ 축하합니다~”
가비드는 숨도 쉬지 않고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지금만큼은 유진도 가비드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유진도 숨도 쉬지 않고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짝짝짝~”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짝짝짝 박수를 쳤다.
“호 불어요!”
박수를 위해 부딪쳤던 손이 떨어지고, 누아르가 양손을 유진에게 내밀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들려 있었는데, 케이크 한복판에는 굵은 초가 꽂혀 있었다.
누아르는 흔들리는 촛불을 유진에게 더욱 가까이 내밀었다.
“소원을 생각하면서! 호 불어요, 유진! 한 번에 꺼트려야…….”
유진은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퍼억!
높이 차올린 발길질이 케이크를 누아르의 얼굴에 처박았다.
귀항
미리 손발을 맞춘 코미디라도 지금처럼 깔끔하고 완벽하게 면상에 케이크를 처박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코미디라면 사방에서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가 들려오겠지만, 지금 주변에서는 숨 쉬는 소리조차 크게 들리지 않았다.
다들 누아르가 분노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이 누아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유진은 누아르에 대해 그럭저럭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이딴 것으로 누아르가 눈을 까뒤집고 분노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더 짜증이 난다.
누아르 제벨라. 저 빌어먹을 몽마는 300년 전부터 그랬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사람의 꿈을 파고들어 괴롭히고, 하멜이 죽여 버리겠다고 악을 쓰고 온갖 심한 욕을 해도 헤실헤실 웃으며 좋아했다.
유진은, 하멜일 적부터 단 한 번도 누아르 제벨라의 ‘분노’라는 감정을 본 적이 없었다.
“……으흠.”
철벅. 누아르의 얼굴이 짓뭉갰던 케이크가 아래로 떨어졌다. 누아르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양손으로 케이크를 받아냈다.
보이는 얼굴이 엉망이었다. 얼굴은 크림 범벅에, 머리카락도 달라붙어 있다.
누아르는 도톰한 입술을 살짝 열더니 혀를 내밀었다. 분홍색의 혀가 입술 주변의 크림을 핥았다.
혀만 쓰지도 않았다. 누아르는 길게 뻗은 손가락을 얼굴로 가져가더니, 뺨에 묻은 크림을 느릿하게 훑더니, 사탕이라도 된 것처럼 혀로 핥짝였다.
“…….”
그 노골적인 섹스어필에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유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누아르가 먼저 말했다.
“케이크도 종류가 다양하잖아요?”
“…….”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디저트처럼 달콤한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굳이 선호하는 케이크를 고르자면, 바로 이것.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딸기 쇼트케이크를 좋아해요. 이렇게, 빵 층 사이사이에 딸기와 크림이 있고, 표면에도 폭신하게 크림을 바른 것 말이에요.”
뭐 어쩌라는 거지.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더니, 뭉개진 케이크 한복판에서 붉은 딸기를 집어 들었다. 누아르는 그 딸기를 입에 쏙 넣고서 우물우물 씹었다.
“유진. 당신이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는지 알았다면, 그에 맞춰서 준비했을 텐데 말이에요. 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려나? 유진, 당신은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나요?”
“닥쳐.”
“좋아하지 않는 건가요? 어머나, 그럼 나랑 똑같네요! 나도 케이크는 좋아하지 않아요. 바로 당신처럼 말이에요.”
누아르는 활짝 웃으며 케이크를 등 뒤로 던져 버렸다. 케이크는 날아가면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뒤편에 있는 누군가가 케이크에 얻어맞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누아르의 얼굴에 남아 있던 크림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역시. 우리 둘은 잘 맞는 것 같아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
“뭐, 우리 같은 사이는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눈동자만 봐도 마음을 알 수 있는 법이죠. 그 증거로, 유진, 저는 지금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맞춰볼까요?”
“아니, 맞추지 마.”
“하지 말라니…… 우리 둘만의 비밀로 남기고 싶은 건가요?”
죽여 버리고 싶다. 유진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죽여 버리고 싶은데 당장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답답하고 미칠 일이다.
누아르는 유진이 숨을 씨근거리는 것을 보며 허리에 손을 얹고 웃었다.
“당신에게 케이크를 주지 못한 것과, 촛불을 불게 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뭐, 그건 상관없어요. 대신에 제가 당신의 크림을 먹었으니까요.”
“왜 자꾸 말을 그딴 식으로 하는 거지……?”
“왜냐뇨, 그야, 재밌잖아요. 특히 당신이 하나하나 반응해 주는 것이 너무 재밌어.”
누아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던 가비드는 눈가를 일그러트리고서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지금 가비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유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벨라 공작. 우리는 헬무드의 사절로 온 것이오. 제발, 시답잖고 저열한 대화로 헬무드의 이름에 먹칠은 하지 말아주시오.”
“뭐 어때요? 더 이상 엄격, 진지, 근엄할 필요가 없잖아요.”
누아르는 유진에게 눈웃음을 치며 속삭였다.
“정말로요, 유진. 이건 장난 따위가 아니라구요. 우리는 아이리스…… 광란의 마왕이 벌인 헛짓거리에 대한 보상과 더불어, 당신을 축하하러 온 거예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유진은 눈썹을 콱 구기고서 누아르와 가비드를 번갈아 보았다.
헛소리라면 가비드가 나서서 정정할 텐데…… 가비드는 어금니를 꽉 씹을 뿐,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정말이라니까요? 유폐의 마왕님은, 당신 유진 라이언하트가 진정으로 용사다운 위업을 달성한 것. 신생 마왕을 토벌한 것에 축하의 뜻을 전하셨어요.”
이어지는 말에 주변이 웅성거렸다. 다들 유폐의 마왕과 헬무드가, 마왕 토벌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경계하여 이곳에 모인 것이다. 그런데 경계는커녕 축하를 전해 올 줄이야.
‘새끼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굳이 이렇게 대놓고 축하를 전할 필요가 없을 텐데.
‘아니, 이렇게 대놓고 축하를 전해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는 건가?’
아가로트의 조각상 앞에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폐의 마왕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이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자,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회장을 멋지게 꾸며놓았네요. 먼 곳에서 오기도 했는데, 저희도 조금 즐겨도 되겠죠?”
“제벨라 공작.”
누아르는 저렇게 말했지만, 가비드의 생각은 달랐다.
“전령의 역할은 끝났소. 우리가 여기 남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 뿐이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들 때문에 연회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오.”
“흐음, 그건 린드먼 공작, 당신이 너무 무게를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아르는 빙글 몸을 돌려서 가비드를 응시했다.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파티에 가는 것이니까, 그 자리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구요.”
순간 가비드의 머릿속에서 저 헛소리에 대한 반박이 수십 가지는 떠올랐다.
당장 이 연회장에서 거의 모든 남자들은 가비드와 별다를 것 없는 정장 차림이었고,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것은 누아르 제벨라 한 명뿐이었다. 멜키스 정도가 노출이 많은 드레스를 입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누아르의 비키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뭐? 자리에 맞는 옷? 가비드는 당장 입을 열어서 저 헛소리를 논파하고 싶었지만ㅡ 그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임을 알기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저 막무가내의 여자에게 논리적인 이야기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 뭐라 대꾸를 한들 결국 누아르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다. 가비드는 하찮은 인간 군중들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정 즐기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가비드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저를 두고 갈 건가요?”
“그래도 될까 고민 중이오.”
“흐흥…… 당신이 그러고 싶다면 저는 상관없어요. 뭐,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지, 바로 돌아갈 필요도 없잖아요? 이렇게 멀리 나온 것도 오랜만이니까, 여행이나 좀 하다가 돌아가도 좋을 것 같아.”
돌아온 대답에 가비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워커홀릭인 누아르가 제벨라 시티를 내버려 두고 여행을 즐길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가비드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누아르를 버려두고서 혼자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함께 돌아가도록 하지. 단, 나는 이곳의 연회를 즐길 생각은 없소.”
“흠, 알았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제가 찾아가도록 하죠.”
당연히도 누아르는 가비드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로서도 가비드가 이곳에 없는 것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기 전, 가비드는 유진을 한번 쳐다보았다.
‘…….’
건방진 놈.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인성이 고약한 것을 떠나서,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인간은 건방져도 될 만큼 강해졌다. 외적인 도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유진이 마왕을 쓰러트린 것은 사실이잖은가.
‘대륙 최강이라 해도 문제가 없겠어.’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인간 기사들 중에서 최강을 논할 때에 항상 거론되는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알체스터 드라고닉.
라파엘로 마르티네스.
거기에 루하르 왕국의 야수왕과 라이언하트의 가주.
하지만, 가비드가 보기에 연회장의 인간들 중에서 유진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압도적이었다. 가비드의 생각대로,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는 300년 전 마경에 도전하던 베르무트보다 강하다고 느껴졌다.
‘바벨에 오를 당시의 베르무트보다 강하다…….’
생각이 그곳에 도달하고서, 가비드는 피식 웃어버렸다.
베르무트보다 강하다? 위협적이랄 것도 못 되지 않은가. 그 베르무트도 300년 전에 바벨을 정복하지 못했는데…… 가비드는 언짢았던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군, 세냐 메르데인.”
열린 성문을 걸어나가기 전. 가비드와 세냐가 마주 보았다. 성문 옆을 지키듯 서 있던 세냐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가비드를 노려보았다.
“너무 살기를 뿜지는 말게.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 말이야.”
“잘난 척, 뭐라도 되는 척 말하는 것이 웃기네. 혼자 도망친 주제에 말이야.”
“모론 루하르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그 등신도 말할 만큼 네가 추했던 거야.”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렇게 앞을 비켜주었지만, 가비드는 곧장 나가지 않고 세냐를 잠시 노려보았다.
“뭘 봐?”
“……언동이 험한 것은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치 않았군.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점잖아져야 하지 않나?”
“그런 말은 나 말고 저 갈X한테나 하지그래?”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누아르를 가리켰다. 그런 말을 들으니 가비드는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세냐를 지나쳐서 성문을 나가 버렸다.
ㅡ쿠웅. 열렸던 성문이 닫혔다. 그렇다고 해서 연회가 재개되지는 않았다. 불청객들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고, 아직 연회장에는 누아르가 남아 있었다.
“연주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신나는 노래라도 틀면 흥이 오를 텐데.”
어느 틈에 누아르는 양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유진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다.
“뭐 하자는 거야?”
유진은 잔을 받지 않고 내뱉었다. 누아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샴페인 잔을 거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나라에 대한 보상과, 당신에 대한 축하.”
“바라지는 않았는데. 뭐 어쩌겠어, 제멋대로 찾아와서 쥐여준 것을 말이야.”
“그러니까 서프라이즈인 거죠.”
“용건은 끝나지 않았나? 설마 진짜로 파티를 즐기겠다고 남은 거냐?”
“당신과의 파티는 언제나 갈망해 왔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저랑 춤 한 곡 추겠어요?”
“개소리 마.”
“그럴 줄 알았어요.”
누아르는 훗 웃으며 거둔 샴페인 잔을 입술로 가져가더니 한 모금 홀짝거렸다.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목소리는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렸다.
[당신에게 흥미로울 이야기가 있어요.]
그 말에 유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누아르를 상대하는 것은 싫다. 하지만 좋고 싫음과는 별개로, 누아르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에둘러 말하는 것은 질색이야.”
누아르에게는 예전에 도움을 받았다. 라이미르아를 확보하기 위해 용마성에 잠입한 것과, 용마성을 떨어트린 후의 뒷수습. 그 모든 것을 누아르가 해주었다.
당연하게도 유진은 누아르의 도움에 대해 일말의 감사도 느끼고 있지 않다. 누아르가 무슨 생각으로 도움을 주었건, 유진이 가진 생각은 하나뿐이다.
살의(殺意).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감사를 느낄 이유는 없다. 상대가 같은 인간이라면 보은하겠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닌 마족이다.
마족 중에서도 아무 인연이 없는 상대, 최근 태어난 어린놈이라면 간신히 예외로 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유진에게 있어서 ‘누아르 제벨라’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마족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아르가 말한, ‘흥미로울 이야기’. 그것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들어두어 손해는 없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의 유진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일 것이다. 즉, 지금 누아르 제벨라는 유진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래도 유진은 누아르를 죽인다.
“여기서 하기는 조금 그런데……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침실도 좋고.”
누아르는 유진의 살의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요염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유진은 누아르와 침실에 들어갈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는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왕궁에 우뚝 선 성탑을 가리켰다. 누아르는 유진이 가리킨 탑을 보고서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냈다.
“남녀 둘이 탑에 올라 밀회를 갖는다니. 낭만적이야. 우리 같이 별도 보고 그러는 건가요?”
여전히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유진은 누아르를 한번 노려본 뒤에,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았다. 여전히 주변에서는 경계 가득 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유진은 그들 중에서도 라이언하트 쪽을 향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란 뜻으로 손을 한번 흔들어주었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가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아.”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성탑은 높았지만, 한 번의 도약으로 테라스에 도착했다. 유진은 테라스에서 몸을 기울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박쥐의 날개를 펼친 누아르가 천천히 테라스로 다가오고 있었다. 테라스에 도착한 누아르는 난간에 걸터앉으며 방긋 웃었다.
“모두가 걱정하고 있네요. 내가 당신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나 봐.”
“본론이나 말해.”
“이렇게 높이 올라왔는데, 조금은 로맨틱해져도 되지 않을까요? 봐요, 하멜, 여기 경치가 멋지지 않아요?”
연회장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기는 했다. 연회장 천장을 유리로 만든 덕에 밤하늘의 별들이 잘 보였고, 조금만 고개를 들어서 먼 곳을 보면 성벽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보이기도 했다. 개선 축제 중인 것은 도시도 마찬가지라, 저쪽 하늘에서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본론이나 말하라니까.”
“말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누아르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이건 어때요? 말로 하지 않고, 당신에게 직접 보여주도록 할게요. 그편이 당신에게도 좋을 거야.”
“……보여주겠다고?”
“같이 꿈을 꾸는 거예요.”
누아르의 눈동자에서 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유진의 눈동자는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누아르는 유진의 분노를 느끼면서 웃는 목소리를 덧붙였다.
“당신은 이미 나를 엄청나게 싫어하고 있고, 나도 당신에게 미움받는 것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말이에요.”
“…….”
“약속할게요, 하멜. 당신에게 ‘꿈’을 보여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의 밑바닥을 엿보지는 않을 거예요.”
유진이, 하멜이 누아르를 증오하는 이유가 바로 저것이다. 300년 전에 누아르는 ‘하멜 다이너스’라는 인간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았다.
과거의 기억, 스쳐 지나갔던, 반대로 너무 오래되어 곪아버린 감정들. 마족에 대한 살의. 동료들에 대한 여러 감정.
베르무트에 대한 질투.
마왕에 대한 두려움.
나 자신에 대한 혐오.
그 외에, 여러 가지 감정들.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내 안의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은 것들. 정작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던 것들. 그 모든 것이 누아르에게 보였다.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거냐?”
“라비스타.”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유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가 얼마 전에 그곳에 다녀왔거든요.”
멸망의 마왕이 은둔한 영지.
“미리 말해주는 것은 여기까지. 이후는…… 꿈에서 봐야 해요.”
“별로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아뇨.”
누아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수 있어요, 하멜.”
누아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보지 않는다고 말하면, 언젠가 당신은 틀림없이 후회할걸요?”
빌어먹을 환생 395화
꿈
누아르가 저렇게까지 단언하는 것을 들으니 짜증보다 호기심이 더 강해졌다. 유진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 님. 위험하지 않을까요?]
[으…… 은자여, 본녀가 위대한 드래곤인 것은 사실이나, 몽마의 여왕과 대적할 자신은 없느니라…….]
망토 안의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본래라면 둘은 연회장의 다양한 진미를 즐기며, 실제 나이와는 상관없이 어린 아이다운 방식으로 파티를 즐길 셈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괜찮아.’
둘의 걱정은 타당했다. 지금부터 누아르는 유진에게 환상의 마안을 사용할 것이고, 유진은 저항하지 않고서 ‘꿈’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말은 즉, 유진의 목숨이 누아르의 수중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말이다. 유진이 꿈속에 있는 한, 누아르는 아주 간단하게 유진을 희롱할 수 있다. 꿈속에서 얼마나 저항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만약 저항이 불가능하다면…… 자칫하다가는 영영 꿈속에 헤매어 현실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고, 정신이 붕괴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진은 그것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스스로도 마뜩잖았지만,
유진은 누아르를 믿었다.
저 미치광이 탕부는, ‘이런 방법’으로 유진을 굴복시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연회도 화려하게 꾸며지기는 하였으나, 이 연회는 유진의 개선을 축하하는 자리이지, 누아르와 유진 둘을 위한 연회는 아니다.
이런 장소에서, 혓바닥을 교활히 놀리고 기만하여 ‘꿈’ 속으로 끌어들여서…… 손쉽게 굴복시키는 것.
‘그럴 리가 없지.’
누아르 제벨라가 그럴 리가 없다. 누아르 제벨라는 ‘절대로’ 그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 유진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대체 뭐에요?]
메르는 저 기묘한 신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주제에. 저 신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유진은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테라스에 있던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누아르는 유진이 더 이상 묻지 않고 자리에 앉는 모습에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그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꾸욱 누르며 유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누아르도 유진에게서 신뢰를 느꼈다. 기쁘고, 달콤한, 그런 기분에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어버렸다. 이러한 신뢰는 세상에서 오직 유진과 누아르, 단둘이서 공유하는 것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누아르는 생전 처음으로 풋풋한 설렘이란 것을 느끼며 유진의 눈동자를 빤히 보았다.
지금. 누아르는 유진을 보고 있다. 유진도 누아르를 보고 있다…….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가빠지는 호흡을 내뱉었다. 이러한 시선은, 의자에 앉아서보다는 같은 침대에 누워서 나눠야 제맛인데.
“……침대로 갈까요?”
“X까는 소리 말고 빨리하기나 해.”
날이 바짝 선 대답이 돌아왔다. 충분히 예상했던 대답이고,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의 미련과 아쉬움은 있어서, 누아르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까는 소리 말고 빠는 소리는 자신 있는데…….”
상상을 뛰어넘은 대답. 유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망토 안에서 듣고 있던 메르도 똑같이 입을 떡 벌렸다. 오직 라이미르아만이 대답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친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욕망에 솔직한 말을 하는 거죠. 미안, 미안해요, 하멜, 내가 실언을 했어요. 그러니까 가지 말고 다시 앉아요.”
유진이 질겁하며 떠나려 하자, 누아르는 냉큼 태도를 바꾸어 애걸했다. 결국 유진은 다시 누아르의 앞에 앉아서,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에 불을 켰다.
“할게요.”
누아르는 더 이상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그 대신 드물게도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눈동자를 똑바로 떴다. 보라색 눈동자에 여러 가지 색이 떠올라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잠이 든다.
그런 과정은 필요가 없다. 환상의 마안이 켜졌다. 유진은 그 권능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순식간에 유진의 의식은 현실을 떠나, 누아르가 만들어낸 꿈으로 인도되었다.
“이건 제 기억이에요.”
무너져 내리는 현실 속에서, 누아르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 * *
전쟁이 끝나고 300년. 헬무드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그 300년보다 긴 세월을 살아온 누아르에게 있어서, 전쟁 이후 헬무드의 발전은 기묘하고 낯설었다.
이 찬란한 문명은 유폐의 마왕이 단독으로 이뤄낸 것이다. 만약 유폐의 마왕에게 그럴 의지가 있었다면, 이미 수백 년 전에 헬무드의 문명은 지금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런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폐의 마왕은 전쟁 이전에는 자기 영지의 발전을 도모한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무심했지.’
누아르가 기억하기로, 본래 유폐의 마왕은 이렇게 정무에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유폐의 마왕은 다른 마왕들이 그러하듯 압도적인 힘으로 휘하 권속을 찍어 누르고, 마찬가지로 무식한 힘으로 영지에 군림했다. 이후 자잘한 통치는 유폐의 마왕이 아닌, 방패와 지팡이, 칼이 도맡았다.
하지만 전쟁 이후 유폐의 마왕은 변했다. 그는 가장 먼저 바벨과 제 영지 판데모니엄을 ‘수도’로 선포하고, 어떻게 생각해낸 것인지 모를 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헬무드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지금의 헬무드는 대륙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높은 수준의 문명을 가지고 있다. 마도왕국이라는 아롯이 마법과 기계공학을 접목시켜 이동수단을 한창 개발하고 있을 때, 헬무드는 영토 전역에 마력 케이블을 매설하고, 유폐의 마왕의 마력을 전달받는 검은 탑을 세워 마력자동차를 상용화했다. 게다가 판데모니엄을 통제하는 에어피쉬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첨단 기술이다.
그 모든 것이, 유폐의 마왕이란 존재 덕분에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유폐의 마왕이 바벨에서의 마력 공급을 중단한다면, 헬무드 전역이 말 그대로 정지해 버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폐의 마왕은 헬무드의 유일하며 절대적인 군주였다.
하지만.
이 헬무드에서도 유폐의 마왕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 헬무드의 찬란한 문명이 비추지 않는 곳이 있다.
헬무드 영토에서 북쪽 끝. 고요한 회색 바다, 그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섬.
그 섬의 이름이 바로 라비스타다.
‘멸망의 영지’.
누아르는 회색 바다를 응시했다.
이 바다는 다른 바다처럼 푸르지 않다. 물고기 같은 평범한 생물은 살지도 않는다.
생기(生氣)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바다. 드넓은 헬무드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지만, 이 회색 바다와 유일한 섬인 라비스타는 멸망의 마왕이 다스리는 영지다.
그걸…… 다스린다고 해야 할까. 누아르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곳은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섬이다. 헬무드의 마족들이 유폐의 마왕이 제공하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편의를 누리는 동안, 라비스타의 마족들은 300년 전의 시간에 멈춰 있다.
“쓰레기통.”
누아르는 회색 바다 너머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라비스타는 헬무드의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다.
300년 전. 대륙과의 전쟁에 동원되었던 그 셀 수 없는 마물이 다 어디에 갔을까?
지성을 갖추지 못하고 단순한 명령밖에 수행하지 않는, 짐승만도 못한 마물들. 약속 이후로 유폐의 마왕은 그 수많은 마물을 단순 노동자원으로 사용했다. 그렇게 사용하고,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마물들은 모조리 라비스타에 처박았다. 지금도 그때의 수많은 마물들은, 라비스타의 주변 바다 밑, 혹은 지면 아래에 잠들어 있다.
“별로 찾아가고 싶은 곳은 아닌데.”
라비스타까지 가는 배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섬은 용마성보다도 폐쇄적이다. 300년 전부터 라비스타에 살던 마족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멸망의 권속이며, 그들은 라비스타에 다른 마족은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게 가로막는다.
누아르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ㅡ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배편도 없고, 워프게이트도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날개를 활짝 펼쳤다.
“제벨라 공작님.”
해상을 가로지르는 중에 한 명의 마족이 누아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말끔한 옷차림에 새하얀 피부. 인큐버스라 해도 믿을 만큼 요염한 색기를 흘리는 남자. 누아르는 그를 알아보고서 코웃음을 쳤다.
“그럭저럭 300년 만이네?”
몽마와 뱀파이어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하는 짓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몽마는 꿈과 교접을 통해 정기를 취한다.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 정기를 취한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라면 힘으로 사냥하면 될 일이나, 강한 존재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유혹하는 등 다양한 수단이 필요하다.
비슷하다고 해서 친밀감을 가진 적은 없다. 먹잇감이 겹친다면 상대의 종 자체가 방해가 된다. 그래서 누아르는 옛날에는 뱀파이어가 싫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별로 싫지 않게 되었다. 뱀파이어라는 종족 전체와의 격차는 300년 전부터 존재했고, 지금은 뱀파이어의 모든 역사를 들고 와도 누아르를 넘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누아르는 남자를 향해 방긋 웃을 수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름은 알피에로 라사트. 전쟁 시대에서 거대한 뱀파이어 클랜을 이끌던 수장이다.
알피에로와 비슷한 규모의 클랜을 이끌던 사인은 광란의 마왕의 양자가 되어 클랜의 덩치를 불렸으나, 그 거대 클랜도 광란의 죽음과 함께 몰살당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왕에게 복속하지 않던 알피에로는, 전쟁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멸망의 마왕에게 복속했다.
하지만 전쟁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알피에로와 클랜 뱀파이어들. 그리고 멸망의 마왕에게 복속한 마족들은, 섬기는 마왕을 따라 이 외딴 라비스타에 은둔하게 되었다.
“시간이 꽤 흐르기도 했으니, 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하하…… 저희에게 있어서 300년은 수명이 다할 만큼의 시간은 아니지요.”
“내가 알기로 라비스타에 인간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누아르는 두눈을 반짝이며 알피에로를 응시했다.
“뱀파이어가 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300년이나 살 수 있나? 흠, 너 정도 격의 뱀파이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휘하 뱀파이어들은 불가능하지 않아?”
“수가 꽤 줄기는 했습니다.”
“동족포식이라도 한 거야?”
누아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뱀파이어가 뱀파이어의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피를 마시는 것을 상상하니 우습고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오.”
알피에로가 고개를 저었다.
“라비스타에 오고서, 저희 클랜의 뱀파이어들은 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저희 주군께서는 피에 스며든 인간의 정기보다 무겁고 진한, 그렇기에 피보다 달콤한 것을 나누어주셨지요.”
방긋 휘어지는 눈동자. 그 틈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불길하고 꺼림칙한 마력(魔力).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권속에 대한 애정이 없지는 않으신가 봐?”
“애정과는 다릅니다. 바라기에 내려주시는 것뿐.”
“그럼 왜 수가 줄었다는 거야? 답답한 은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이라도 한 거야?”
“하하…… 나가고 싶다 하여 내보내 주는 클랜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가고 싶은 클랜원들은 죽어 제물이 되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은 제물이 아니라 견디지 못해 죽었습니다만.”
알피에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견디지 못했다……. 굳이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감당할 만큼의 격을 갖추지 못한 뱀파이어들은, 멸망의 마력을 견디지 못했다.
“저와 제 클랜의 안부나 묻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닐 텐데요.”
알피에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꺼림칙하고 불길한 마력은 점점 강해졌다.
“제벨라 공작님. 당신께서도 아시다시피…… 라비스타는 헬무드에서도 특별한 곳입니다. 독립된 곳이라 해도 무방한 자치령이죠. 라비스타는 헬무드의 지배를 받지 않고, 헬무드의 법이 통용되지도 않습니다.”
“응, 그건 나도 잘 알아.”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알피에로는 눈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제벨라 공작님을 마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부디 돌아가 달라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제벨라 공작님이라 해도…….”
뻐어엉!
알피에로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는 웃고 있던 눈을 똑바로 뜨고서 옆을 힐긋 쳐다보았다. 시커먼 회오리 같은 것이 알피에로의 귀 바로 옆에 멈춰 있었다.
“네가 말하는 헬무드의 법은 제국으로서의 법이지?”
“…….”
“난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마족이야. 오히려 법이 없으면 더, 더 잘 살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법의 수호를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야.”
누아르는 단 한 번도 헬무드 법의 덕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망할 법은 오히려 누아르에게는 가혹하고 과중했다. 여태까지 뜯긴 세금만 생각하면, 가끔은 세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30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정도였다.
“라비스타에 헬무드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기론…… 법이 없다면, 마족답게, 힘으로 해결한다는 거지? 그렇다면 알피에로, 네가 날…… 힘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거야?”
웃음 짓는 눈동자가 천천히 벌어졌다.
“어떻게 할 건데?”
알피에로는 대답하지 않고 누아르를 응시했다. 잠시 동안 침묵하던 알피에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디, 돌아가 달라, 부탁하기 위해 나왔다고 말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마력을 슬금슬금 키워가며 날 압박하던걸? 그리고 덧붙이려면 말도 시건방져. 아무리 제벨라 공작님이라 해도, 그다음은 뭔데?”
“……라비스타의 마족들은 제벨라 공작님의 방문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그들 전체가 제벨라 공작님께 덤비려 들지도…….”
“아하하, 내 걱정을 해주는 거야? 하지만 괜한 걱정이야.”
“돌아가실 생각은 없는 겁니까?”
“응, 없어.”
“……대체 무슨 일로 라비스타에 들어오시려는 겁니까?”
알피에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누아르는 까딱, 고개를 기울이더니 손가락을 흔들었다.
“저 섬. 딱 봐도 삭막해 보이는데, 유흥이 필요하지는 않아?”
“…….”
“놀 거리 말이야, 놀 거리. 내가 무상으로 시설 몇 개를 세워주는 건 어때?”
“필요 없습니다.”
“그건 네가 결정할 수 없어, 알피에로.”
누아르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나는 누아르 제벨라야. 이 세상에서 내 결정을 번복시킬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아. 마왕도 아닌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뜻을 거스르지?”
“……공작님께서는 멸망의 마왕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멸망의 마왕님께서 지금 내 행동이 무례하다 느끼신다면, 확실히 책임을 지도록 할게. 정말로 꾸짖으려 하신다면 말이야.”
누아르는 킥킥 웃으려 알피에로를 지나쳤다. 알피에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라비스타에 들어오시려는 진짜 이유가 뭡니까. 방금 같은 농담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진짜 이유라……. 별로 대단하지는 않은걸. 가고 싶고, 보고 싶어서, 그래서 온 거야. 그게 전부인데?”
유폐의 마왕에게서 듣지 못한 것들. 물어봤자 들을 수 없는 것들.
월광검의 폭주.
꺼림칙하고 불길한, 멸망의 마력.
유폐의 마왕은, 누아르에게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다. 누아르 본인도 유폐의 마왕에게 자유를 바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누아르는 자유롭다. 유폐의 마왕과의 문답에서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면. 아직 뿌연 의혹이 남아 있다면, 누아르 스스로 움직여 답을 모색하는 것도 가능하다.
“난 자유로우니까.”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환생 396화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가능한, 그 정도의 지성을 가진 마족이라면 ‘멸망의 마왕’에 대한 의문은 한 번쯤은 품어보았을 것이다. 심하게는 멸망의 마왕이 정말로 실재하는가에 대한 음모론까지 존재할 정도로, 멸망의 마왕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멸망의 마왕이 그 존재를 역사상 가장 강하게 드러냈던 것이 300년 전의 전쟁시대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모든 마왕과 마족들은 ‘마경’이라 구분 지어진 헬무드에 머물렀다
갇혀 지내지는 않았다. 몽마나 뱀파이어처럼, 마족들 중에는 인간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마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시대 이전에도, 마족이 인간을 습격하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과, 대륙 전체와의 전쟁이 처음으로 선포된 것은 바로 300년 전이다.
헬무드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거느린, 그렇기에 헬무드의 깊숙한 곳에 머물러 있던 유폐의 마왕. 아득한 세월 동안 조용히 지내던 그 마왕이, 대뜸 마경 근처의 소국을 하룻밤 사이에 멸망시켜 버렸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모른다. 유폐의 마왕의 행동에는 아무런 징조가 없었다. 그냥, 밤이 지나고 해가 떠보니 나라 하나가 멸망해 버린 것이다.
마경과 대륙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폐의 마왕의 갑작스러운 침공. 하위 서열의 세 마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마군(魔軍)을 일으켜 대륙을 침공했고, 대륙의 국가들은 기겁하며 대응에 나섰다.
그 시점까지만 해도 멸망의 마왕은 침묵했다. 서열 1위의 대마왕다운 위엄이랄지, 아니면 단순히 무관심했던 것일지는 모르나…… 멸망의 마왕은 군세를 일으키지 않았다. 멸망의 마왕을 섬기던 권속들도, 대륙에 진출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침묵하던 멸망의 마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대륙의 모든 드래곤들이 헬무드의 하늘로 날아왔을 때다. 유폐의 마왕이 가장 먼저 드래곤들을 맞이했고,
조금 뒤에, 멸망의 마왕이 나타났다.
‘그게 정말 마왕이기는 할까.’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드래곤이 드래곤답지 않게 허무히 죽어 나가던 전장을 직접 보았었다. 당시의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약했고, 힘을 갈망하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드래곤이 집결하여 헬무드를 공습하러 왔을 때. 누아르는 혹시라도 몇 마리의 드래곤을 사냥하여, 그 심장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런 기대를 품고 전선으로 향했다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홀로 전선에 나타난 유폐의 마왕은, 그 전선에서 누아르와 같은 탐욕을 가지고 온 모든 마족들을 방관자로 만들었다.
학살. 그건 정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수백 마리의 드래곤이 브레스를 내뿜고 용언을 외며 천지를 무너트렸지만, 그 모든 저항은 유폐의 마왕의 마력 앞에서는 어린아이 손짓마냥 무력했다. 찰나에 수백 수천의 빛이 번쩍거리고 나면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피를 쏟으며 땅에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슬에 갈기갈기 찢기고 분쇄되었다.
절반가량의 드래곤이 죽었을 때. 유폐의 마왕은 뒤로 물러섰다.
멸망이 강림했다.
누아르는 그때 보았던 광경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감정과 순간이었지만, 단순하게 그때 보았던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고, 서로 섞이며 회오리치는가 싶더니, 다시 나뉘고, 시야 자체에 스며들어 물들이고 범벅되다 멀어지는, 온갖 색의 향연.
시각을 통해 뇌 자체가 강간당한 것만 같은, 뒤끝에 남는 역한 불쾌감.
이해하려고 하면 정신이 갉아 먹히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불길함.
‘이질적이야.’
누아르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 지금은 죽고 소멸한 3명의 마왕들을 포함해,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마왕도 만나보았다. 그중에서도 멸망의 마왕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것이 과연 마왕이 맞기는 한가. 마왕이 아니라면 그 존재는 대체 무언가. 왜 그런 것이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가.
“왜 이제 와서 그러시는 겁니까?”
알피에로는 더 이상 누아르를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에 수행과 감시하기로 한 것인지, 누아르보다 조금 뒤쪽을 날았다.
“300년 동안, 제벨라 공작님은 단 한 번도 라비스타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시잖습니까.”
“이전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제법 진심으로 한 대답이다. 유폐의 마왕과 대륙의 ‘약속’이 건재하던 때. 누아르는 평화 속에서 제힘을 키우는 것을 선택했다.
그 평화로운 시대에서, 꺼림칙하고 불길한 멸망의 마왕에 대해 알아둘 필요는 없었다. 전쟁시대에서도 목적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떠돌던 것이 멸망의 마왕이다.
유폐의 마왕과 베르무트가 약속을 맺어 성립된 이 평화의 시대에서, 멸망의 마왕은 단어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라비스타에 은둔하고 있다.
하지만 약속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짐작 따위가 아니다. 유폐의 마왕이 직접, 약속의 끝에 대해 말하지 않았나. 그 약속에는 필시, 멸망의 마왕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약속의 끝은 평화의 끝. 그렇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멸망의 마왕은 과연 지금처럼 침묵하고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반대로 말하자면, 약속이 끝나지 않는 한 멸망의 마왕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누아르가 라비스타에 억지로 들어가 헤집고 다녀도, 멸망의 마왕은 누아르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ㅡ 유폐의 마왕에게 듣지 못한 답들을 모색할 적기가 아닌가. 누아르는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월광검과, 멸망의 마왕과ㅡ 월광검과 뒤섞이던 유진을 떠올렸다.
“야곤이 죽은 것은 알아?”
라비스타에서 사는 마족들은 폐쇄적이다. 듣자 하니 라비스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규율도 없는 듯 한데, 당장 뒤따르는 알피에로도 그렇고 절대다수의 마족들은 라비스타를 떠나질 않는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라비스타를 떠난 마족이 몇몇 있고, 그중에서는 드물게도 이름을 떨친 이가 있다.
아버지 오보론을 물어 죽이고, 맹수 수인들로 패거리를 이뤘던 야곤. 그리고ㅡ 아멜리아 머윈.
‘따지고 보면 마족도 아니지만.’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알피에로를 돌아보았다. 조금의 반응을 기대했는데, 알피에로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예, 들었습니다. 용마성을 추락시키고 죽었다고 말입니다.”
“맞아. 꽤 아까운 죽음이지? 난 야곤을 젊은 마족들 중에서는 제일 뛰어나다고 평가했거든.”
“실제로 그랬지요. 성정을 떠나, 야곤의 힘과 젊음은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가 조금 더 이성적이고 참을성이 있었다면, 고작 용마성 전투 따위에서 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표정은 평온했지만, 알피에로의 애도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참을성이라…… 무엇에 대한 참을성일까. 누아르는 빙긋 웃으며 다시 앞을 보았다. 수백 년 동안 침묵하는 주인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기다리는 걸까.
“은둔 생활이 지루하지 않아? 알피에로. 너 정도의 마족이라면, 당장 판데모니엄에서도 높은 자리는 보장되어 있을 텐데 말이야. 아니면, 어때? 차라리 내 도시에 와.”
“제벨라 시티 말입니까?”
“아하하, 라비스타에도 소문은 들어가나 봐? 맞아, 제벨라 시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훠어얼씬 성공해서 말이야, 여러모로 인력이 부족하거든. 알피에로, 너뿐만 아니라 네 클랜 전체도 받아줄 수 있어.”
“제안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왜? 역시, 멸망의 마왕님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만약 멸망의 마왕님이 부르시거나 하면 즉시 내 곁을 떠나도 좋아.”
외부에 손을 뻗을 정도로 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알피에로의 반응을 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알피에로가 냉큼 수용한다면, 제벨라 시티의 화장실 청소나 시키면 되겠다 생각했다.
“멸망의 마왕님은 저와 클랜을 필요로 하지 않으실 겁니다.”
알피에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분의 뜻과는 관계없이, 저희는 라비스타에서 그분을 섬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환상의 마안을 써볼까. 꿈과 정신을 파고들어, 알피에로의 심중을 죄다 긁어볼까.
아니, 그것에는 여러 가지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불길하고 이질적인 멸망의 마력은 이쪽의 정신부터 무너트린다. 정신을 침범하는 누아르에게 있어서 꺼림칙한 상대. 누아르는 고작 알피에로의 꿈을 들여다보기 위해 정신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왕에 대한 충성…… 수준이 아니야. 마치 광신도 같은걸.’
여태까지 누아르가 악질적인 취미 삼아, 숱하게 망가트리고 몰락시켜 온 종교인들. 멸망의 마왕에 대해 말하는 알피에로는 그런 광신도들과 닮아 있었다.
‘하긴, 그것은…… 마왕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운 것 같기는 해.’
신성력과 기적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신이 실재하는 것 같기는 한데…… 긴 시간을 살아왔지만, 누아르도 신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란 점에서는 멸망의 마왕이나 신이나 크게 다른 존재는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면 숭배하고 신앙할 수도 있는 법. 우민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어 숭배받는 것은 누아르에게 낯설지 않았다. 당장 제벨라 시티와 드리미아에는 누아르를 신처럼 섬기는 벌거벗은 원숭이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아무것도 없네?”
누아르는 텅 빈 해변과 그 저편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착한 라비스타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도 없는 황야. 해변에도 물결이 오가지 않는다. 저 황량한 섬에 떠도는 것이라고는 불타고 남은 것만 같은 잿빛 먼지뿐이었다.
“내가 알아서 들어갈까? 아니면 네가 열어줄래?”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황야를 가리켰다. 그러자 알피에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왔다.
화아악! 먼지만 떠돌던 황야가 갈라지더니,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두더지들 같네.”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날개를 접었다. 그녀는 알피에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구멍으로 낙하했다.
‘근본이랄까.’
아득한 옛날.
인간이 몬스터와 마물의 구분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 마물에게 지성과 자아가 깃들지 않아, 마족으로 거듭나지도 못했던 시절.
그 시절에 세상에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불꽃은 뜨겁기만 할 뿐 어둠을 밝히지 못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빛은 오직 아침과 낮에 뜬 태양뿐이었다. 밤하늘을 가르던 번개도 선만 죽죽 그어질 뿐 어둠을 밝히지 못했다.
낮과 밤이 완벽하게 양분되던 시절에, 인간은 낮을 살고 마물은 밤을 살았다. 빛 한 점 없던 밤은 마물의 시간이요, 인간은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다.
신화에 따르면 빛의 신이 세상에 강림하사, 인간에게 빛을 주었단다. 빛의 신이 강림하면서부터 불꽃은 어둠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요란하기만 하던 번개도 번쩍이는 찰나에 세상을 환히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부터, 인간과 마물의 우위는 역전되었다. 본래부터 인간에게는 지성이 있었고, 이제는 어둠마저 낮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마(魔)라는 어둠에서 태어난 마물들에게 본래 자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물들에게 자아가 깃들었다. 단순한 괴물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규정하게 되면서, 마물은 마족이 되었다.
그렇게 마족이란 종이 세상에 나타났다. 모든 정령이 원시정령을 근본으로 두듯, 마족의 근본은 빛없는 어둠을 떠돌던 마물이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이 라비스타의 지하도시는 마족이란 종(種), 마(魔)의 근본을 핥는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야 인간이 살 수 없을 만도 하네.”
기묘하게 뒤틀린 공간. 황량한 섬의 지하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달한 이곳은 지하가 아니다. 공간의…… 아니, 차원의 틈이라 해야 할까.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끝없이 펼쳐진 어둠을 돌아보았다.
“인간이라면 이곳의 어둠에 절대로 눈이 익숙해지지 않을 거야. 아주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보게 되어버리면 미쳐 버릴걸.”
누아르는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시커먼 어둠 속에 잠든 마물들이 보였다.
전쟁시대에 사용되었던 마물들…… 아니, 그보다 훨씬 많다. 헬무드의 역사에 존재했고, 살아남은 모든 마물들이 이 도시의 어둠에 ‘걸쳐져’ 있었다. 그 셀 수 없이 많은 마물들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 휘갈겨 그린 그림이나 오로라처럼 보였다.
“저건…… 와아! 지네산맥이잖아? 전쟁 이후 어디에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유폐의 마왕님도 참 너무하셔. 전쟁 중에는 영지의 수문장으로 그렇게 부려먹었으면서 말이야.”
유폐의 마왕성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던 초대형 마물, 지네산맥. 누아르는 어두운 하늘에 성운처럼 떠돌고 있는 지네산맥을 가리키며 웃었다.
“하긴, 전쟁도 끝나고 쓸 곳도 없었을 테니, 여기라도 처박아 놔야겠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쟤들 갑자기 정신 차려서 덤비는 것은 아니지?”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알피에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시선을 느꼈다.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알아서 해 보라는 거야?”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눈동자를 빛냈다.
환상의 마안이 일렁거렸다. 본래는 단순한 최면과 환각 정도에나 쓸 마안. 다른 마안들에 비해 그다지 격이 높은 권능은 아니다.
하지만 누아르 제벨라가 쓰는 환상의 마안은 정말로 현실을 환상으로 바꿔 버린다. 굳이 꿈을 파고들지 않아도,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을 모두에게 역으로 환상을 보여주어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노골적인 엄포와 과시. 어둠 속에서 누아르를 지켜보던 마족들은 즉시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리 몸을 숨겨봤자 누아르의 시야에서는 벗어날 수 없고, 서로가 서로를 포착하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누아르에게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너무들 경계하지 마. 그냥, 관광객이나 한 명 왔다고 생각해.”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환상의 마안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빙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알현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고…… 흠, 어떻게 다가갈 방법은 없나?’
이 지하에는 불길한 마력이 가득 차 있다. 어지간한 마족이라면 이곳에 들어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미쳐 버릴 것이다. 하지만 누아르에게는 입맛이 조금 더러울 뿐, 정신이 오염되거나 하는 이상은 없었다.
‘마왕성이라도 하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누아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권속들이 살고 있는 도시…… 불빛은 없다. 도시, 라고 생각했지만, 헬무드의 도시다운 인프라는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식사는 전부 마력으로 대체하는 모양이야. ……어떻게 이런 곳에서 300년 동안이나 처박혀 있을 수 있는 거야?’
멸망의 마력이 정신을 세뇌하기라도 하나? 칙칙하기 짝이 없는 도시를 둘러보고 있자니, 진즉에 라비스타를 떠난 야곤이나 아멜리아가 정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력이 있다는 것은 멸망의 마왕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
아주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 떠돌고 있는 마력보다 짙은, 마왕의 편린은 느껴보고 싶었다.
만약에라도, 멸망의 마왕이 대화가 ‘가능한’ 존재라면…… 대화를 나눌 용의도 있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잡아먹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지만, 그에 대한 방책조차 없이 무턱대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일단 탐색을…….’
짙디짙은 마력 표면에 실오라기처럼 얇은 마력이 뻗어 나갔다. 누아르는 의식을 집중하고서 탐색을 계속했다.
“어머나.”
곧 누아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무언가를 찾아낸 것이다. 누아르는 호기심을 외면하지 않고 움직였다.
“야.”
유진이 대뜸 입을 열었다.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던 누아르가 우뚝 멈춰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희끄무레한 유령 같은 모습이지만, 유진은 틀림없이 존재하여 뚱한 얼굴로 누아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한 거예요?”
“뭘.”
“지금 말이에요. 이 ‘꿈’에 당신이 어떻게 개입한 거죠?”
이 모든 것은 누아르의 기억. 불과 며칠 전에, 누아르가 라비스타에 가서 겪었던 일들이며, 누아르가 자신의 기억을 꿈으로 바꾸어 유진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꿈에서 유진은 주체가 아니다. 이 꿈에서 유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뜸 유진이 나타난 것이다. 기억을 꿈으로 재생하던 누아르는 진심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위협 없이 만들어낸 꿈이라지만, 제 의지로 개입해서 나타나다니…….
‘인간의 정신력이 아니야.’
당연히 인간의 정신력이 아닐 수밖에. 유진은 누아르의 당황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하늘에 일렁거리는 마물들을 가리켰다.
“저거. 진짜냐?”
“네……?”
“진짜냐고.”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묻는다면 일단은…… 가짜죠. 지금 하멜,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제가 만들어낸 환상이니까요.”
“아니, 네가 본 것은 진짜냐고.”
“물론이죠, 하멜, 제가 이런 거짓말을 해서 무슨 이득을 취할 수 있겠어요? 당신 성격이 조금만 더 유순하고 그랬더라면, 일부러 무서운 것을 보여주어 겁먹어 떠는 모습을 보고 싶다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그런 성격이 아니잖아요?”
“진짜란 말이지…….”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마물들을 쳐다보았다.
많아도 너무 많은 데다 크기까지 한 마물들. 저것이 모조리 쏟아져 나오는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났다.
“저기…… 하멜. 어떻게 한 거예요?”
“뭘.”
“이 꿈에 나타난 것 말이에요. 제가 아무리 방벽에 주의하지 않았다지만, 단순 정신력으로 뚫릴 만큼 하찮진 않은데…….”
“그냥 해보니까 되던데.”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하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몸뚱이가 제대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유진은 유령 비슷한 지금 모습으로 만족하고서 누아르를 흘겨보았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멸망의 마왕을 보러 가는 건가?”
“그전에 누구를 더 만날 거에요.”
“누구?”
“아멜리아 머윈과 유쾌한 동료들이요.”
그 말에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 씨X년과 개새끼들에 관심이 없는데. 그냥 생략하고 멸망의 마왕부터 보러 가면 안 돼?”
“그럼 꿈을 아예 다시 짜야 되고, 그 과정에서 픽션이 섞여 버려요.”
오히려 잘됐다. 누아르는 냉큼 몸을 기울여서, 흐늘거리는 유진에게 팔짱을 꼈다. 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누아르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누아르는 유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너무 질색하지 말아요, 하멜. 그들의 꼬락서니를 봐두는 것도 당신에게 도움이 될걸요?”
꿈속에서 데이트를 하게 될 줄이야.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다시 기억을 재생했다.
빌어먹을 환생 397화
이전까지의 ‘꿈’에서 누아르 제벨라는 1명뿐이었으나, 이제부터는 2명이 되었다. 누아르는 기억을 거스르는 화자(話者)로서의 자신과, 관측자로서의 자신을 별개로 두었다.
이유인즉슨, 유진과 팔짱을 끼기 위해서였다. 누아르는 실재했던 기억대로 움직이는 자신을 지켜보며, 곁에서 발버둥 치는 유진에게 속삭였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것도 조금 그렇지만, 하멜, 저는 참 완벽하지 않아요?”
“놔라.”
“얼굴이나 몸매 같은 당연한 것은 말할 가치도 없죠. 그런 외적인 부분조차도 무결점. 그러나 하멜, 저는 모든 취향마저도 존중하고 수용할 수 있답니다. 만약 당신이 큰 가슴보다 작은 가슴을 좋아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어요.”
“놓으라고.”
“말인즉슨, 저는 당신의 모든 취향에 맞출 수 있다는 것이죠. 설령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부끄럽고 음습한 것이라 해도 말이에요. 정말로, 정말로 만에 하나, 하멜, 당신이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라면…….”
“놔 미친년아!”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그제야 누아르는 샐쭉 웃으며 유진의 팔을 놓아주었다.
“농담이에요, 하멜, 너무 화내지 말아요. 아니, 농담이 아닌가? 어디서부터까지가 진담이었냐 하면, 제가 완벽하다는 것. 그것에는 거짓의 여지가 없죠. 외적인 미(美)뿐만이 아니라 성격과 조건 등.”
“네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에 부끄럽거나 민망하지는 않은 거냐?”
만약 이 말을 메르가 들었다면, 메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유진의 평소 언동을 지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메르는 없었기에, 유진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누아르를 지적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무어가 부끄럽고 민망하죠?”
누아르의 대답은 어느 정도 유진의 심금을 울리고 공감대를 형성시켰지만, 그것보다 누아르에 대한 살의와 짜증이 훨씬 더 강했다.
유진이 대꾸하지 않고 두 눈을 매섭게 뜨자, 누아르는 어깨를 바르르 떨며 속삭였다.
“하지만 이렇게나 완벽한 저조차도, 사랑 앞에서는 바보가 되어버려요.”
심한 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내뱉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또라이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꿈속의 누아르가 어딘가에 도착했다.
저택은 라비스타의 다른 도시가 그러하듯 불빛 하나 존재하지 않았으며, 벽조차도 칙칙한 검은색이었다.
누아르는 풀 한 포기 없는 정원으로 내려오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멍멍!”
그 소리는 누아르 본인이 직접 입을 열어 낸 소리였다. 커다란 개목걸이를 목에 달고, 굵직한 쇠사슬이 말뚝과 연결되어, 축사(畜舍)처럼 보이는 개집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헤모리아는 개 짖는 소리는 내지 않고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잘 어울리는 코스튬이네?”
누아르는 헤모리아를 향해 이죽댔다. 한때 신성제국의 이단심문국, 말레피카룸에서 ‘단두대’라 불리던 이단심문관. 하지만 이제는 신성제국에서도 파문되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아멜리아 머윈의 애완동물이 된 여인.
예전의 헤모리아는 입 전체를 가리는 금속 마스크를 썼지만, 지금의 마스크는 개처럼 주둥이가 튀어나와 있다.
“까득…….”
비죽 튀어나온 마스크 안에서 이빨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아르는 헤모리아를 비웃으며 저택의 문으로 다가갔다.
“쟤는 아직도 이빨을 가네.”
유진은 헤모리아를 훑어보며 혀를 끌끌 찼다. 머리털은 난발에 눈에는 독기가 가득한 꼴을 보아하니, 고생을 참 많이 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잘 죽였으면 저런 꼴도 안 당했을 텐데.’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앞을 보았다. 꿈속의 누아르가 멋대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성격도 좋으셔.”
“제 인품이야 원래 훌륭하죠. 그런데 갑자기 무슨 말인가요?”
“저 똥개가 널 노려보는데도 내버려 두잖아.”
“아하핫,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하멜, 땅바닥의 개미가 당신을 노려본다고 해서 굳이 밟아 죽일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그렇게 밟아 죽여서 구차한 생을 깔끔하게 끝내주는 것보다, 계속 바닥을 기는 것이 훨씬 더 괴로운 삶일 텐데 말이에요.”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꿈속을 따라 앞으로 들어갔다.
“아멜리아 머윈. 그 썩을 년은 왜 사막이 아니라 여기 있는 거냐? 라비스타에는 인간이 없다며. 하지만 그년은 인간이잖아.”
“아멜리아 머윈은 인간이 아니에요.”
“뭐?”
“인간의 성질이 짙긴 하지만, 그녀는 반인반마랍니다.”
그 말에 유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이종 간의 혼혈은 희소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희소한 것이 인간과 마족의 혼혈이다. 유진은 하프 뱀파이어인 알카르트의 교구장, 에일린 플로트를 떠올렸다.
“아멜리아의 모친은 라비스타의 마족이었고, 세상에 나왔다가 인간과의 자식을 임신했죠. 후에 라비스타에 돌아가 아이를 낳았는데, 짜잔, 그게 바로 아멜리아 머윈이랍니다.”
“……허어…….”
“그래서 아멜리아가 특별한 거예요. 인간과 마족의 혼혈. 그렇게 섞여버리면 오히려 마족 같은 마력(魔力)은 각성하지 못하는데, 아멜리아는 스스로 마력을 깨치고 흑마법사가 되었죠. 어미를 따라서 멸망의 마왕과 계약하지도 않고 말이에요.”
누아르는 유진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아멜리아가 지금 라비스타에 와 있는 것은, 공포 때문이죠.”
“공포?”
유진은 누아르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찡그렸다. 누아르는 시커먼 복도를 걸으며 유진에게 속삭였다.
“생각해 봐요, 하멜. 아멜리아 머윈은 몇 달 전의 나이트마치까지만 해도, 당신을 위협스러운 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야 아멜리아 머윈은 당신이 하멜이라는 것을 몰랐고, 반대로 자기 곁에는 스스로를 ‘우둔한 하멜’이라 생각하는 데스나이트를 호위로 두었죠.”
“그 새끼 존나 약하던데.”
유진은 여전히 구겨진 표정을 유지하고서 내뱉었다.
사실 저 평가는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었다. 기억적으로 여러 개변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전투능력만을 본다면 그 데스나이트는 생전 하멜 수준인 것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네, 전생 수준을 진즉에 뛰어넘은 당신의 적수는 아닐 테죠. 그리고 그 사실은 아멜리아 머윈도 알게 되었어요. 하멜, 당신은 사마르 대수림에서 데스나이트를 패배시키고 에드몬드를 죽였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멜리아 머윈이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뒤틀었다. 누아르는 유진의 냉소를 힐긋 쳐다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게다가 현명한 세냐까지 부활해 버렸잖아요? 그렇게 되면 겁 없이 굴던 아멜리아도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죠. 지은 죄가 있으니 말이에요.”
누아르의 말대로다. 하멜의 무덤과 시체를 훼손한 아멜리아에게 세냐는 거대한 분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사막의 던전을 버리고 이곳에 처박힌 건가.”
“네. 이곳이라면 설령 당신이라도 쉽사리 올 수 없으니 말이에요. 하멜, 당신도 멸망의 마왕을 벌써부터 자극하고 싶지는 않잖아요?”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기도 전에 멸망의 마왕에게 향하는 것은 미친 일이다. 아무리 아멜리아를 죽여 버리고 싶어도, 유진에게는 그 정도의 자제심은 있었다.
하지만 당장 느껴지는 짜증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유진이 표정을 왈칵 구기고 있자, 힐긋거리며 이쪽을 보던 누아르가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을 거예요.”
“……무슨 말이냐?”
“뭐, 그건 조금 더 보면 알아요.”
꿈속의 누아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숨죽여 웃더니 홱 옆을 돌아보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어둠이 갈라지고 문이 열렸다.
내뿜어지는 마력(魔力)이 얼마나 무겁고 포악한지는 유진도 느꼈다. 유진은 누아르의 뒤에 서서 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부적을 마치 붕대처럼 덕지덕지 붙인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형태가 명확하지는 않았다. 꼬물거리는 슬라임처럼 보이기도 했고, 빛을 비출 때 벽에서 스멀거리는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그것이 소리를 냈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목이 쉰 남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유진은 그 짧은 음성에서 강렬한 살의와 증오를 느꼈고, 그로 인해 저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섞이고 있네요?”
꿈속의 누아르가 속삭였다. 그녀는 어둠과 함께 꿈틀대는 망령을 향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하멜.”
꿈속의 누아르는 그것을 하멜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저것이 하멜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저것이 하멜이란 자각을 가지고서, 하멜답게 행동하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자각과 발악에 의해 저것이 완성된다면. 모조품이 한없이 진짜에 가까워진다면, 그때는 꽤나 재미있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아르…… 라…….”
“맞아요, 저에요, 하멜. 누아르 제벨라. 저번에 바벨에서 보았을 때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되었네요?”
“…….”
“데스나이트의 육체도 잃고, 남은 것은 영혼뿐. 아멜리아 그 여자도 참 고약하다니까, 죽은 이에게 안식은 주지 못할망정…… 쉼 없이 괴롭히고 있잖아.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멜.”
“…….”
“당신을 당신이라 증명하던…… 시체는 소멸해 버렸죠. 베르무트의 후예,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말이에요. 그렇게 되어버린 이상, 당신을 ‘하멜’이라 증명하는 것은…….”
누아르가 몸을 낮춰 어둠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연민을 연기했다.
“지금 제 앞에서 꿈틀거리는 가련한 영혼 하나뿐. 그렇지만, 하멜, 당신도 알고 있죠? 세상 누구도 지금의 당신을 보고서 그 ‘하멜 다이너스’를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세상이 기억하는 당신은 ‘우둔한 하멜’로 300년 전에 죽었잖아요. 대체 누가, 그 영웅이 타락해서 데스나이트가 되었다고 상상하겠어요?”
“…….”
“물론 당신은 억울해할 수도 있어요. 지금 당신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자각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당장 나조차도 당신이 정말…… 내가 알던 하멜이 맞는 걸까 의심이 되는데. 게다가 지금의 당신은, 순수하게 ‘하나’인 것도 아니잖아요? 보아하니 너무 많은 것이 섞인 모양인데.”
유진은 복잡한 눈으로 망령을 응시했다.
저것은 하멜의 시체에 남은 기억을 토대로 만든 가짜다. 숲에서 만났을 때는, 그랬다. 지금의 저것은 더 이상 데스나이트라고도 부를 수 없게 되었고, 누아르의 말마따나 여러 가지가 섞여 혼 자체가 불순(不純)해 졌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육체가 사라졌건, 너무 많은 것이 섞였건, 저 망령은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것이다.
저것이 ‘하멜’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자기 자신을 하멜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심지어 그 기억이 유폐의 마왕성에 오를 당시의 것이며, 놈이 떠들어댄 것처럼 동료들에게 ‘배신’당한 것을 진실이라 믿고 이상.
유진이 생각하기에ㅡ 그 상황에서의 하멜은, 절대로 지금 처지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 목적이 있는 이상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동료들을 만나서 복수하려 할 거다.
혹은.
‘왜 그랬냐고 묻겠지.’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유진이 기억하는 ‘하멜’이란 놈은 그런 성격이었고, 특히나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던 유폐의 마왕성에서…… 꼴사나운 자살이 아니라, 동료들의 배신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하는’ 하멜이라면.
이미 절망과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놈이, 저깟 처지로 절망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망령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아르는 망령이 반응해 주지 않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넌 꼴이 왜 그래?”
저편에 아멜리아 머윈이 서 있었다.
유진이 보기에도 아멜리아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바닥에 고인 망령이 그러하듯, 아멜리아 역시 전신의 태반에 부적을 붕대처럼 감고 있었다. 그나마 붕대가 적은 얼굴을 쳐다보니, 피부 표면에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균열이 간 것이 보였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아멜리아가 갈라진 목소리를 토했다. 균열은 피부뿐만이 아니라 눈동자에도 번져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눈썹을 찡그리자 눈동자가 ‘쩌적’하고 갈라졌다.
“내가 어디에 있건, 그건 내 자유야. 안 그래?”
“여기는…… 라비스타입니다. 당신이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영지입니다.”
“흐흥, 정말 내게 금지(禁地)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 영지에서 내 출입을 금할 수 있는 것은 멸망의 마왕님일 텐데, 내게는 그분의 불호령이 들리질 않거든.”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아니면, 네게는 멸망의 마왕님의 목소리가 들려? 그분이 나를 언짢아하시나?”
“…….”
“아하.”
누아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꼴이 왜 그런지 알겠네. 네가 이곳 출신이던 것도 벌써 수십 년 전…… 유폐의 마왕과 계약하고서, 이곳에 돌아온 것은 처음이지?”
아멜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씹었다.
“심지어 지금 너는 유폐의 ‘지팡이’가 되어 더욱 많은 권능을 얻었지. 아하하…… 네 존재 자체가 이 땅에서 반발당하고 있구나? 육체가 없는 죽은 영혼이라면 섞이기라도 할 텐데, 너는 살아 있으니 섞이지도 못하고 부서질 뿐.”
“날 비웃으러 온 겁니까?”
“설마. 내가 너 따위를 비웃으러 올 만큼 한가해 보여? 여기 온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야.”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 지었다. 환하고 밝은, 그런 미소를 지으면서 코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이렇게 봐버렸으니 비웃을 수밖에 없네. 비웃고 싶지 않은데도 비웃음이 나와서 곤란할 정도야. 네가 겁에 질려 숨어든 고향은 널 지켜주지 않아. 그래서 아멜리아 머윈, 지금 너는 죽어가고 있구나?”
“…….”
“불쌍한 아멜리아 머윈. 지금 네게는 썩은 시체의 악취가 나. 네가 즐겨 가지고 놀고 끌어안던 그 썩은 내가 네 몸에서 풍기고 있어.”
반발. 유진도 이해하기 쉬운 단어였다.
누아르 제벨라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을 맺지 않았다. 그녀의 마력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다. 반면에 아멜리아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을 맺었고, 그 마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라비스타에서 반발당하는 것이다.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다……. 그래, 그렇군. 어차피 아멜리아는 라비스타에서 오래 버틸 수가 없어.’
죽은 영혼. 아니, 애당초 죽은 적도 없는, 만들어진 영혼에 불과 한 망령은 이곳에서 천천히 섞여 간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망령처럼 섞일 수 없기에, 고통과 함께 버티는 것이 고작이다. 아멜리아가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결국은 라비스타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충분히…… 비웃었다면, 나가주십시오.”
“비웃으려 한다면 몇 날 며칠 동안도 더 비웃을 수 있지. 하지만 그만둘게, 아멜리아 머윈. 나는 널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어하는 것도 아니거든.”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너, 멸망의 마왕님의 어전이 어디인지 알아?”
“모릅니다.”
“정말로?”
“어딘지 알지라도, 당신에게 알릴 생각은 없습니다. 애당초 당신은 무엇하러…….”
“사실 네 안내를 바라고 온 것은 아니야.”
웃음기 가득 실린 목소리에 아멜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기 온 것은…… 너와 하멜이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그게 전부였거든.”
누아르가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를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곧 무언가를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잠깐, 제벨…….”
ㅡ꽈아아앙! 누아르가 들었던 양 팔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공간이 크게 출렁거리더니 저택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꽈아앙! 또다시 누아르가 팔을 움직였다. 누아르가 가진 터무니없는 마력이 공간을 때려 부쉈다.
“멈춰!”
아멜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저택에 녹여낸 여러 마법들이 누아르의 난동에 의해 박살 났고, 그 반동으로 아멜리아는 시커먼 피를 토했다.
“아하하핫!”
누아르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연달아 마력을 내리찍었다.
우우우우우! 저택 밖에서 머무르던 마족들이 앞다투어 이곳으로 난입해 왔다. 그중에는 도중까지 누아르를 안내했던 알피에로도 있었다. 그는 설마 이 라비스타 한복판에서, 누아르가 이렇게나 무식한 짓을 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입을 반쯤 벌리고서 누아르를 돌아보았다. 유진과 함께 꿈을 관측하던 누아르는, 꿈속의 자신이 벌인 행동을 못마땅하단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당신과 함께 볼 줄 알았다면, 조금 더 고상하게 하는 건데.”
“너 뭘 하는 거냐?”
“보면 알잖아요, 하멜, 벽을 두드리는 거죠.”
“벽?”
“네.”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아래를 가리켰다.
“멸망의 마왕님은 저 아래…… 아니, 그렇다고 지하 깊은 곳은 아니고, 차원의 너머에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곳으로 가기 위해 벽을 부수는 거예요. 굳이 이곳에서 한 건…… 아멜리아 머윈이 자꾸 저보고 가라고, 가라고 해서, 그런 거예요.”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아멜리아를 돌아보았다.
누아르의 난동에 휘말려 토혈하던 아멜리아는, 이제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땅에 엎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아르는 마침내 ‘벽’을 깨부쉈다.
“제벨라 공작!”
알피에로가 비명을 지르며 누아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달려들던 모습 그대로 땅을 나뒹굴었다.
알피에로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난입했던 수십 명의 마족들이, 누아르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땅에 엎어졌다.
강제수면. 고위 몽마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시야에 포착한 상대를 강제로 잠들게 하는 권능이다. 누아르가 펼치는 강제수면은 고위마족일 지라도 한순간에 잠들게 해버린다. 거기에 꿈을 반복시키는 몽중몽(夢中夢)은, 정신에 깊이 간섭하지 않고도 거듭된 꿈속을 헤매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모든 마족들을 제압한 뒤, 누아르는 깔깔거리는 웃음과 함께 ‘아래’, 깨부순 벽의 저편. 라비스타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마력의 근원지로 떨어졌다.
“아……!”
오싹하는 전율. 누아르는 굉장히 오랜만에 ‘자신’을 보호했다. 이 섬뜩한 공간에서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조차도 위협을 느꼈다. 그녀는 마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계속해서 아래로 추락했다.
“……멸망의 마왕은 저 아래에 있는 거냐?”
“아마도요.”
“아마도?”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휙휙 지나가는 어둠의 저면에, 거대한…… 신전 같은 것이 보였다.
“뭐, 계속 보시면 알아요.”
추락하던 누아르가 신전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녀는 바로 신전에 들어가지 않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수고 들어온 벽에서 다른 누군가가 더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조금 지나면 다들 꿈에서 깨어나든가…… 바깥의 다른 마족들이 난입해 올지도 모른다.
이미 충분히 일을 벌이고 과격하게 행동하고 있으나, 누아르는 이 이상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이 신전은 멸망의 마왕의 어전. 아무리 누아르라도 어전에서 난동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누아르는 나직이 인사를 올린 뒤에 신전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전은 텅 비어 있었다. 마왕을 위한 옥좌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마왕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아르는 당황하지 않고 계속해서 신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결계라.”
누아르는 빙긋 웃으며 눈가를 어루만졌다.
이곳의 결계까지 부수고 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할 것 같다. 하지만 ‘결계’가 있다는 것이 누아르에게 여러 가지 짐작을 하게끔 만들었다.
키이잉……!
누아르의 눈동자에 불빛이 켜졌다. 극한의 마력이 집중된 눈동자가 결계를 응시했다.
눈동자가 결계의 안쪽을 들여다보았고,
사슬에 얽매인 의자가 보였다.
빌어먹을 환생 398화
유진은 숨을 삼켰다.
의자와 사슬. 저것을 처음 본 순간, 유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유폐의 마왕이었다.
그 마왕은 언제나 사슬 소리와 함께 강림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사슬을 망토처럼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유폐의 마왕은 멸망의 마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진실이 어떨는지는 모를 일이나, 유진이나 다른 이들이 생각하기에ㅡ 유폐의 마왕은 멸망의 마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진이 과거 몇 번인가 멸망의 마왕에게 가까워지려 할 때면, 항상 유폐의 마왕에게 간섭을 받기도 했었다.
이곳은 멸망의 영지인 라비스타. 그 심부의, 멸망의 마왕의 어전이라 할 수 있을 신전이다. 허락 없이 가까이 다가온 침입자를 유폐의 마왕이 밀어낸다…….
아니.
흐릿하던 풍경이 또렷해진다. 그것을 본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뜻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곁에서 함께 보고 있던 누아르가, 유진의 팔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가까이 갈 수 없어요.”
누아르가 속삭였다.
“꿈이라고는 해도 이것은 제가 직접 체험한 것. 제가 보았던 시야는 여기까지가 한계에요. 가까이 간들, 하멜, 당신이 무언가를 더 보거나 느낄 수는 없어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꿈’이 요동쳤다. 목격한 것에 대해 누아르의 ‘정신’이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서 있던 꿈속의 누아르가 크게 휘청거렸고, 그녀의 두 눈과 코, 입에서 시커먼 피가 줄줄 쏟아졌다.
“베르…… 무트?”
피를 토하면서 누아르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를 토했다.
사슬 묶인 의자에 앉은 것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유진은 그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베르무트는ㅡ 암실의 환영에서 보았을 때와 비교가 안 될 만큼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던 잿빛 머리카락은 긴 시간 동안 빗질하지 않은 것처럼 지저분한 난발이 되어 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팔걸이에 축 늘어지다시피 걸쳐진 팔이나 움츠린 어깨, 힘없이 뻗은 다리를 통해 베르무트의 상태는 확인이 가능했다.
호흡의 기미조차도 없다. 베르무트는 마치 저 모습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정지해 있었다.
유진은 몸을 덜덜 떨면서 다시금 베르무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누아르는 유진을 강하게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소용없다니까요.”
“놔.”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누아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유진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제야 유진은 비틀거리며 베르무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바라는 대로 베르무트와의 거리는 좁혀주지 않았다. 유진의 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계선은, 꿈속의 누아르가 선 위치까지가 고작이었다.
“말했잖아요. 제가 보았던 시야는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그 선 너머까지는 제 의식이 도달하지 못했어요.”
계속해서 걸음을 뻗어 보지만, 꼴사나운 제자리걸음이 반복될 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쥐었다.
“베르…… 무트,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맞죠? 왜 당신이 거기 있는 거죠?”
꿈속의 누아르가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 코, 입에서는 계속해서 검은 피가 흘렀다. 저 불길한 마력은 누아르의 격마저 침범하며 피해를 주고 있었다. 오염되지 않고 버티고는 있지만, 역으로 침범하겠다는 생각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위대한 베르무트.
절망의 베르무트.
저 아름답고 기묘한 남자에 대한 ‘공포’는 300년 전부터 품고 있었다. 그 시대에 누아르는, 하멜을 포함한 동료들 전원의 꿈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하멜의 꿈도, 모론의 꿈도, 세냐의 꿈도, 아니스의 꿈도 들여다보았다.
베르무트의 꿈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꾸는 꿈의 밑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 남자, 베르무트에게는 ‘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동료들이 가슴 깊은 곳에 어떠한 꿈을 가지고, 그 꿈과 현실에 여러 감정을 품었지만ㅡ 유일하게 베르무트에게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베르무트가 익힌 기묘한 마법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신력이 특히나 강한 인간들이 의지로서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듯, 베르무트도 마법을 사용해 자신을 보호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누아르는 처음 몇 번은 하멜과 동료들의 꿈을 들여다보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세냐와 아니스의 결계를 돌파하지 못했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 베르무트기에, 그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정신을 보호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가? 300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누아르는 그때의 베르무트에게 아무런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들여다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보았던 것일까. 만약 보았던 것이라면, 그때 보았던 것은.
“베르무트 라이언하…….”
누아르는 다시 한번 베르무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이었다. 저 모습 그대로 박제된 것 같던 베르무트가 움직였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소리가 크게 들렸다.
촤라락! 의자에 연결되어 있던 쇠사슬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높이 솟구친 쇠사슬은 의자와 베르무트를 통째로 휘어 감고, 그로도 모자란 것인지 공간까지 몇 번을 꿰뚫어가며 매듭을 만들었다. 누아르는 그 갑작스러운 소란에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끼릭, 끼리릭. 쇠사슬이 하나 된 소음을 만들었다. 칭칭 감은 사슬 사이에서 베르무트가 고개를 들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눈동자가 뜨였다.
유진은.
광란의 마왕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월광검이 폭주하고, 어딘지 모를 허무 속으로 끌려들어 갔을 때. 그때 유진은, 그 허무의 한복판에서 베르무트를 보았다.
보았다……. 라고는 해도, 베르무트의 모습을 똑바로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곳에 아른거리던 인영(人影)이 베르무트라고 확신했고, 실제로 그건 베르무트가 확실했다.
그러나 지금 저 안광에서 유진은, 베르무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정황상 월광검의 폭주 때 말을 걸었던 베르무트와, 지금 저렇게 의자에 결박된 베르무트 사이에는 오랜 시간차가 없을 텐데.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던 그때보다, 지금 보이는 베르무트가 더더욱 놈답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두 눈을 뜬 베르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에서 유진은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베르무트가 얼마나 마모되었는지. 놈의 눈동자가 얼마나 탁한지.
베르무트는, 유진이 기억하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나약해 보였다. 작고 초라해 보였다. 암실에서의 베르무트가 지치고 초췌하다면, 지금의 베르무트는 절망하고 망가진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하란 말이다.
유진은 베르무트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감정은 격해질 대로 격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르무트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결국 이곳은 누아르의 꿈이며, 유진이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건 베르무트는 반응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지나 버린 과거란 말이다.
격정 속에서 그 사실에 짜증이 났다.
유진은 뿌득 이를 갈았고, 꿈속의 누아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베르무트를 응시했다. 마찬가지로 베르무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아르는 침묵 속에서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화아아악!
누아르가 걸음을 뻗은 순간 모든 것이 멀어졌다. 틈새처럼 열렸던 문도, 그 너머에 사슬과 함께 앉은 베르무트도, 신전도, 아멜리아 머윈의 저택도, 라비스타의 지하도시마저도.
“여기까지예요.”
꿈이 흩어졌다.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누아르가 보여주고자 했던 꿈은 끝났지만, 이 세상마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누아르는 유진을 향해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후는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라비스타에서 추방되다시피 쫓겨나서, 먼바다에 떨어져서 허우적거리다가…… 음, 제 젖은 모습을 보고 싶은 건가요?”
방금 전에 보았던 것들에 대한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누아르가 개소리를 해왔다.
평소였다면 누아르의 개소리를 무시하거나, 혹은 쌍욕을 박아버렸겠지만…… 지금 유진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방금 보았던 것들을 다시금 이해하려 노력했다.
“씨X.”
잘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전처럼 의문이 더 강하지는 않았다. 의문을 느낄 여지 없이 대부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놈은 지금 라비스타에 있다. 유폐의 사슬에 묶여서, 의자에 앉아서, 멸망의 마왕의 신전 안쪽에 앉아 있다. 정황상 베르무트의 뒤편에는 멸망의 마왕이 있는 듯싶었는데, 그렇다는 것은…….
‘멸망의 마왕은 300년 동안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는 건가?’
예전에도 그러한 가능성은 염두에 두었다. 월광검과 라이언하트의 피. 베르무트는 멸망의 마왕과 너무 많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유진은 감정을 진정시키고서 누아르를 바라보았다.
“방금 네가 보여준 것들. 그건…….”
“진실이에요.”
누아르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대답했다.
“당신이 왜 그런 의심을 하는지는 알아요, 하멜. 마족을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당신은, 마족인 제 말을 믿고 싶지 않겠죠. 하지만 하멜, 제가 이런 ‘거짓’을 보여주어서 어떤 이득을 얻을까요?”
“나를 X되게 할 수 있지. 어쩌면 네 손을 더럽히지 않고 날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하하! 하멜,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게, 저한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누아르는 웃는 소리를 냈지만 진정으로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드물게도 화가 난 얼굴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잠시 동안 그 시선을 받던 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제정신이 아닌 네게 있어 이득은 아니겠지.”
“맞아요. 하멜, 당신을 골탕 먹이고 괴롭히는 것의 주체는 온전히 저여야만 해요. 저는 이런 수작을 부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당신을 괴롭힐 수 있다구요.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당신을 죽이는 것? 맙소사, 하멜, 제가 그런 것을 바랄 리가 없잖아요! 만약 당신이 죽고, 그것이 저에 의한 것이라면, 반드시, 반드시! 당신의 목숨을 거두는 것은 제 손이어야만 해요. 당신의 죽음은 제 품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구요.”
“……네가…… 이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만들어낸 것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거짓이라 고한다면. 나는 네게 분노할 거야.”
“아하하! 그렇게도 생각하다니, 나를 꽤 잘 아는군요. 하지만 하멜, 제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요? 날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는 상대에게 살의를 심어주기 위해서라면, 네, 저는 그런 방법을 쓸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저를 원망하잖아요? 증오하잖아요? 죽이고 싶잖아요? 그런 당신에게 제가 무엇하러 더 부채질을 하죠?”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말이에요. 제가 당신에게, 그 이상의 원망과 증오와 살의를, 분노를 심어주려 한다면. 이런 ‘꿈’을 꾸게 할 필요도 없죠. 솔직히 말해, 이건 귀찮고 복잡한 데다 어렵거든요. 당신의 감정을 의도한 대로 이끌, 섬세한 꿈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누아르의 뺨이 씰룩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제가 당장 라이언하트에 쳐들어가서 당신의 형제들을 죽인다면? 가족을 죽인다면? 혹은, 세냐 메르데인이나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죽인다면? 당신이 아끼는 꼬마 사역마를 부숴 버리면? 애완동물처럼 거둔 용공녀 라이미르아를 죽인다면?”
세상이 일렁거렸다. 지금 이곳은 유진의 의식 속이다. 누아르가 보여주고자 하는 꿈이 끝나 버린 이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유진이 느끼는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누아르는 두 눈을 깜박거리다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하핫.”
어느새 누아르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유진이 느낀 감정이, 누아르를 도륙 내버린 것이다.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다시 만들어냈다.
“흠, 어디까지나 예를 들었을 뿐이에요. 당신에게 불쾌한 예시였겠지만, 어쨌든, 제가 이런 귀찮은 수작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럼 이래서 네가 얻는 이득이 뭔데?”
“글쎄요, 꼭 이득이 필요해서 한 행동은 아닌데…… 굳이 이유를 찾자면, 으으음…….”
누아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두 눈을 샐쭉 휘었다.
“하멜,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
“제가 본 것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건 당신에게 있어서 간절한 것일 테니까요. 어쩌면, 제가 이걸 보여주면…… 당신이 ‘나’에게 가진 인식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했죠.”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유진은 눈썹을 씰룩거리며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설마 너와 나 사이에 오해가 있거나, 너와 나 사이의 원한이 300년 전의 것이며, 지금의 너는 달라졌으니까……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
“으흠.”
“내가, 너를 증오하지 않는 것을 바라서. 네게 몇 번의 도움을 받아, 너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손을 잡아서, 함께 유폐의 마왕과 싸우…….”
“아핫.”
누아르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하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저는 말이에요, 당신이 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기를 바라요. 오해? 우리 사이에 오해랄 것이 있나요? 300년 전의 원한? 아하하, 필요하다면 새로운 원한을 쌓을 용의도 있어요. 그리고…… 음, 받아들인다? 손을 잡아? 그건 꽤나 구미가 당기네요, 침대에서라면 서로를 받아들이고 손을 잡아도 될 것 같아요.”
누아르는 유진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하멜. 제가 바라는 것은 꽤나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거예요. 언젠가 말이에요, 우리가 서로를 죽일 때. 저는…… 우리 중 누가 되었건, 최후에 작은 망설임을 느끼길 바라요.”
“……망설임?”
“네. 우리 둘 사이의 추억이란 것을 떠올리면서, 숨통을 끊는 것을 망설이는 거죠. 그것이 변수가 되어 승패를 뒤집거나, 그러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요.”
누아르는 푹신한 의자를 만들어서 앉더니, 느릿하게 다리를 꼬며 요염한 자세를 취했다.
“제가 당신에게 이러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추억’을 쌓는 거예요. 저와 당신의 추억은 대부분의 300년 전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그 후로도 여러 가지가 생겼잖아요?”
나이트마치로 향하던 설원.
용마성 침공 전의 호텔.
솔가르타 해역에서의 함대 갑판 위.
그리고 지금.
“앞으로도, 저는 기회가 있다면 몇 번이나 더 당신에게 다가갈 거예요. 그렇게 저는 당신과의 추억을 쌓을 거고…… 하멜, 당신의 안에도 무언가가 쌓이겠죠.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서로를 죽이게 될 거고, 죽이고 난 뒤에.”
누아르는 그 미래를 상상하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마…… 나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될 거예요. 당신을 죽여 버린 것을 후회하고, 슬퍼하고, 애도하고…… 어쩌면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죠. 하멜, 나에게 있어서 그 모든 감정은 ‘처음’인 것이 될 거예요.”
도저히 정상적인 관점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누아르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널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도 않을 거고, 널 죽인 뒤에 기쁨과 후련함 외에 별 감정은 느끼지 않을 거다.”
“흐흥,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에요. 죽어버린 뒤니까 말이죠. 그리고 하멜,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저를 죽일 확률보다, 제가 당신을 죽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을걸요.”
유진도 당장은 누아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누아르의 언동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누아르는, 자신이 ‘무조건’ 유진을 죽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제멋대로 유진과의 추억을, 감정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원하는 대로 유진을 죽였을 때, 쌓아 올린 모든 감정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이다.
“왜 내게 집착하는 거지?”
유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점이었다.
“그건 말이에요, 하멜, 당신이 저를 죽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널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 말고 많을 텐데. 인간 말고 마족 중에도 얼마든지 있지.”
“하지만 그들 중에서 당신만큼 강렬한 감정을 가진 사람은 없어요. 당신만큼 특별한 사람도 없고, 당신만큼의 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죠.”
“……그토록 죽고 싶다면 유폐의 마왕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그러냐. 아니면 멸망의 마왕에게 들이박든가.”
“당신은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저는 말이에요, 저를 강렬하게, 특별하게, 지독하게 증오하는 사람에게 죽고 싶은 거예요. 마왕…… 그들은 얼마든지 저를 죽일 수 있지만, 저는 그들에게 있어서 특별하지 않잖아요. 반대로 저 자신도 그들을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고.”
누아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멜, 당신의 생각 이상으로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답니다. 당신이 싫다고 밀어내도 상관없어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유진은 지독하단 표정을 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너의 그…… 정신 나간 감정이, 유폐의 마왕을 배신하게 할 만큼 중요한 거냐. 너는 유폐의 마왕 편 아니었나?”
“맙소사!”
누아르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하멜,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배신이라뇨? 저는 애당초 유폐의 마왕의 편이었던 적이 없어요!”
“……?”
“물론 유폐의 마왕은 헬무드의 황제고, 제가 공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유폐의 마왕에게 충성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구요. 제가 라비스타에 찾아간 것이나, 거기서 본 것을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에요.”
“뭔 개소리를…….”
“단적으로 말해서 저는 유폐의 마왕의 권속이 아니에요. 제가 가진 모든 것은 온전히 제가 이룬 것이고, 제 존재의 주인은 바로 저란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고서ㅡ 누아르는 무언가에 생각이 미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 설마 하멜! 지금 저를 걱정해 준 건가요? 제가 유폐의 마왕을, 당신을 위해! 배신했다고! 생각하고서, 제가 엄벌에 처해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 거죠?”
“나 대신 유폐의 마왕이 널 죽여 버리는 것도 좋지 않은가 생각했다.”
“거짓말! 절 걱정한 거죠! 맞아요, 저는 유폐의 마왕을 배신했어요. 하멜, 당신을 위해! 사랑을 위해!”
“이 개 같은 꿈은 언제 깨는 거야?”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빌어먹을 환생 399화
유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누아르의 얼굴이었다. 똑같이 잠에서 깨어난 것일 텐데, 아니, 애당초 그녀는 잠들지 않았던 것이리라.
“꺼져!”
유진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바로 앞에서 유진의 숨결을 맡고 있던 누아르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놀라서 움직이다가 입술이 닿았으면 로맨틱했을 텐데요.”
그러한 해프닝을 노골적으로 바라고서 가까이 있던 것이다. 입맞춤을 바랐다면 유진이 꿈을 꾸는 사이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겠지만, 누아르는 그런 식의 희롱은 취향이 아니었다.
유진은 입술을 핥는 누아르를 노려보고서 하늘을 힐긋 쳐다보았다. 꽤 오랫동안 꿈을 꾼 것 같은데, 시간은 그리 많이 지난 것 같지 않았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인지, 저 아래의 연회장에서는 음악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연회다운 즐거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들 탑에 올라간 유진과 누아르를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진은 잠시 누아르를 노려보다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 말이 맞죠?”
누아르가 샐쭉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 보면 후회할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
“흐흥, 설마 하멜, 지금 자존심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의 그런 성격을 좋아해요. 반전매력이라고 해야 할까? 참 귀여워.”
“안 가냐?”
속이 부글부글 끓는 와중에 간신히 그런 말을 내뱉었다. 누아르는 방긋 웃으면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의 추억을 아름답게 장식할 겸, 아래에서 같이 춤 한 곡 추는 것은 어때요?”
유진은 대답 대신에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누아르는 길고 울퉁불퉁한 유진의 손가락을 야릇한 눈으로 보며 난간에 등을 기대었다.
“손가락이 참 길…….”
“그만!”
“알았어요, 알았어. 어린애도 아니고 뭐 이런 것 하나하나에 반응하나 몰라.”
누아르는 고개를 기울여 테라스의 바깥을 보았다. 아래 연회장에서 노려보는 시선들과 눈이 마주쳤다.
누아르는 그중에서도 특히나 사나운 세냐와 크리스티나, 시엘의 시선을 확인하고서 히죽 웃었다.
“순진한 척, 이런 것에 관심 없는 척하면서…… 당신도 남자이긴 한가 봐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여자만 해도 3명이잖아요. 흠, 하긴, 당신 외모와 능력이면…… 3명이 뭐에요? 당신 좋다는 아가씨들을 과장 좀 보태서, 라이언하트 저택에서부터 키옐 수도까진 일렬로 줄을 세울 수 있을걸요.”
질투 같은 감정은 없다. 누아르는 자신과 유진의 관계야말로 그 누구보다 진실 되며 질척하고 낭만적인 관계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것은 흔해 빠진 사랑보다 격정적이고 운명적이다. 저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한낱 수명에 구애된 관계일 뿐이나, 누아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존재와 운명을 말 그대로 종결짓는 것이다.
“춤은.”
그렇게 생각하니, 이 연회장에서 유진과 손을 잡고 춤이나 춰보고 싶다는 갈망이 하찮게 느껴졌다. 만약 정말로 춤을 춘다면ㅡ 앞으로 추억할 때 즐겁고, 상실을 겪은 뒤에 추억하면 가슴 아릴 추억일 테지만.
“다음에 추도록 하죠. 이곳은 당신과 나를 위한 무대가 아니니까.”
그 기념비적인 추억. ‘처음’을 이런 곳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름대로 화려하게 꾸민 연회장이지만, 누아르의 기준에는 한참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누아르를 훗 웃으며 검은 박쥐의 날개를 펼쳤다.
“당신이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나의 도시에 온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환영해 줄게요.”
누아르는 유진에게 손을 살랑 흔들었다.
유진은 의자에서 일어서지 않고, 누아르가 날아가는 것을 노려보았다. 밤하늘이 투과되는 천장 가까이까지 오른 누아르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천장을 통과하고서 사라졌다.
“어휴.”
누아르가 떠나고 나서야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의자를 뒤로 까딱까딱 기울이며 눈썹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더 괴물이야.’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저 마족은 300년 전에도 마왕들을 제외한 마족들 중에서는 손에 꼽힐 만큼 강한 고위마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ㅡ 굳이 마왕을 제외할 필요도 없을 만큼의 힘을 이룩했다.
예전에 몇 번 마주쳤을 때에도 누아르의 힘과 격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누아르가 가진 권능을 제대로 겪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방금 보았던 꿈. 그것은 꿈이란 것을 먼저 알지 못했다면, 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현실감이 넘쳤다. 그 꿈에서는 주체인 누아르 제벨라뿐만 아니라 그녀가 보고 겪었던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단순하게 비교해 봐도 아이리스보다 훨씬 강해.’
라이자키아는 하찮게 느껴질 만큼의 힘. 광란의 마왕으로 각성한 아이리스일지라도 누아르가 보기에는 우스울 것이다.
‘마력만 따져봐도 이미 마왕의 격은 한참이나 넘었어. 이번에야 저 미친년이 작정하지 않았으니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서로를 정말로 죽이기로 한 싸움에서는, 과연 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까.
찰나의 잠을 영원한 꿈으로 연결해 버리는 괴물. 눈 깜빡이는 시간 정도로만 잠들어 버려도, 유진의 의식은 아득한 꿈을 헤매게 될 것이다. 더욱이 끔찍한 것은, 누아르의 환상의 마안을 사용하는 강제수면과 몽중몽은 1명만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가도 저 몽마의 여왕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미 먼 과거 전쟁시대에, 누아르는 3만 명의 대군을 황야에서 간단하게 익사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진 지금이라면…… 제아무리 많은 군세를 대동한 들, 누아르의 시야에 포착된 순간 몰살당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랄 것은…… 내가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
세냐와 아니스는 어떨까. 300년 전에는 누아르에게 개고생을 하다가, 도중부터는 저항이 가능했다.
……지금은 가능할까? 조건은 똑같지 않다. 옛날의 누아르는 지금보다 약했고, 직접 앞에 서서 마안을 쓰지 않았다. 유진과 동료들이 마경에서의 여정에 지쳐 잠깐씩 눈을 붙이는 순간을 지독하고 집요하게 노려왔다.
즉, 세냐와 아니스조차도 ‘정면’에서 환상의 마안을 겪어본 적은 없는 것이다.
‘내가 저항이 가능한 것은, 내게 신성(神性)이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도 점점 강해지겠지.’
신성은 숭배받을수록 강해진다. 유진은 그 사실을 자그마한 위안으로 삼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누아르가 말한 대로인 것이다. 유진과 누아르가 싸운다면, 아마, 아니, 거의, 무조건, 누아르가 이길 것이다. 유진 본인부터가 저 터무니없이 강한 마족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유진이 구겨진 얼굴로 생각에 잠기는 동안에도 저 아래에서는 음악이 흘렀다. 모두가 누아르가 연회장을 떠나는 것은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회를 재개할 수는 없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유진이 혼자서 탑 위에 남았기 때문이다.
“표정이 왜 그래?”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유진을 위해 세냐가 직접 테라스로 올라왔다.
“누아르 그 갈X가 너한테 못된 짓이라도 한 거야?”
“나중에 얘기해 줄게.”
유진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베르무트가 라비스타에 있다. 이 정보는 유진 혼자서 알아서는 안 된다. 동료인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와는 공유해야 한다. 그렇다지만 당장 말할 수도 없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 이것은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가 처음으로 마왕을 토벌한 것을 기념하는 개선제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가뜩이나 마족들의 난입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는데, 유진이 더 궁상을 떨어버리면 연회가 흐지부지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지.’
찾아와 준 손님들을 위해서ㅡ 라기보다는, 태연하게 웃어넘겨야만 용사에 대한 경배도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흠…….”
세냐는 유진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유진에게 건넸다.
“설마 네가 그 갈X와 말 못 할 짓을 나눈 것은 아닐 거고.”
“너까지 이상한 말 할래?”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잔을 받았다. 보통은 단숨에 비우는 술이 아니지만, 답답한 속을 달랠 겸 쭈욱 들이켰다. 세냐는 계속해서 묻는 대신에 훗 하고 웃었다.
“기분도 나아졌으면, 나의 제자야, 우리 같이 내려가자꾸나.”
“네가 그런 말투를 쓰니까 뭔가 좀 그러네…….”
서로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받은 뒤. 유진과 세냐는 함께 연회장으로 내려왔다.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이 따라붙었다. 다들 유진이 누아르와 어떤 대화를 나눈 것인지 궁금하단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캐묻지는 않았다.
“혹시 그 수영복 어디 브랜드인지는 못 들었어?”
오직 멜키스만이 눈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서 저따위 질문을 해댔다.
아직까지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한 회심의 농담 따위는 아니었다. 파격적인 패션이라 하면 멜키스도 어디 가서 꿀린 적이 없었지만, 오늘 연회에서만큼은 누아르에게 압도되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파격적이고 아름다웠다. 멜키스는 마족이란 것을 떠나 누아르를 존중하기로 했고, 진심으로 누아르가 입었던 비키니의 출처가 궁금했다.
“그걸 시X 제가 어떻게 압니까?”
“너…… 아무리 그래도 누나한테 욕을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니? 예전에는 멜키스 누나, 누나, 하면서 대접해 주더니, 이제는 머리도 커지고 남들이 용사라고 불러주니까 누나한테 막 욕도 하고 그러는 거야?”
“제가 언제 멜키스 님을 누나라고 불렀습니까?”
“몰라. 아무튼 너 때문에 우울해졌어. 그러니까 위니드 좀 빌려줘.”
“아직도 포기 안 하신 겁니까?”
“포기? 이 멜키스 엘하이어의 사전에 포기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아. 솔직히 유진아, 네가 생각하기에도 참 너무하고 그렇지 않니? 아니 생각을 해 봐. 정령왕 중 3명이나 내가 좋대. 번개의 정령왕도, 대지의 정령왕도, 불꽃의 정령왕도, 다 나랑 계약해서 행복하고 만족스럽고 좋대. 그런데 왜 템페스트만 싫다는 거야? 그럼 템페스트가 이상한 것 아니야? 내 말이 이해가 안 돼?”
멜키스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박력에 압도되기도 했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멜키스의 말은 옳았다. 사람이 정상이 아니라곤 해도 멜키스가 3명의 정령왕과 계약한 전무후무한 대정령사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항구에서 멜키스의 헛짓거리에 정령왕들이 반응해 준 것이나, 고작 행진 따위에 시그니처인 정령합체를 쓰는데도 반발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령왕들이 멜키스와의 계약을 만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인 듯했다.
[잠깐, 하멜, 그 생각은 근본부터 틀려먹었다. 이미 계약을 맺은 이상 정령사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대지와 번개는 몰라도, 불꽃의 정령왕은 멜키스 엘하이어에 대한 호감에 의해 계약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마왕의 탄생을 막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계약을 맺은 것이다.]
머릿속에서 템페스트가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양쪽 모두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기에, 유진은 엄격한 대법관의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멜키스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조건에 따라 위니드를 잠깐 빌려드리죠.”
[하멜! 정신이 돌아버린 것인가? 그리고 위니드는 너의 것이 아니라 라이언하트의 보물이다! 베르무트가 가문에 남긴 것이란 말이다! 그것을 네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빌려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템페스트가 괴성을 내질렀다.
생각해 보니 저 말도 맞았다. 당장 예전 아롯에서 유학하던 시절, 유진은 위니드를 멜키스에게 잠깐 빌려주는 문제로 카르멘과 흑사자 기사단의 보증을 얻어야만 했었다.
“그래도 될까요?”
하지만 그때의 유진은 고작해야 17살의 어린 나이였고 용사도 아니었던 데다 카르멘과도 첫 만남이었다.
지금은?
‘내가 누구?’
전쟁신 아가로트.
라이언하트의 자랑.
빛의 용사.
흑사자…….
“조건이 합당하다면.”
카르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히 넘기는 것도 아니고, 며칠 빌려주는 것이라면 상관없단다.”
원로원주인 클라인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 네 뜻대로 하거라.”
길레이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아아아악!]
템페스트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끼아아악!”
멜키스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환희에 찬 외침이 연회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다. 슬쩍슬쩍 눈치를 보던 악단이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유진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들도 슬그머니 떠났다.
뒤바뀐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유진은 잠시 눈을 감고서 음악을 감상했다.
사실 감상하려 노력은 해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귀족다운 교육의 일환으로 이런 종류의 음악을 여럿 들어보았지만, 유진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음악에 대한 조예도 없었고, 음악을 감상하며 무언가를 느낄 만큼의 감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것은 아가로트일 적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도 흐르는 리듬에 따라 춤을 추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전생은 몰라도 이번 생에서는 그런 교육은 철저하게 받은 것이다.
하나, 둘, 셋. 유진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발가락 끝을 까딱거려 보았다. 이 팔다리가 훤칠하여 비범한 몸뚱이는, 리듬에 대충 몸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남들로 하여금 꽤 그럴듯한 춤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좋아.’
유진은 결단을 내리고서 세냐를 향해 다가갔다.
로베리안, 멜키스, 히리두스와 함께 서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던 세냐는, 유진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흡 숨을 삼키며 샴페인 잔을 달달 떨었다.
“스승님.”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이름을 부를 수는 없다. 유진은 표정을 관리하면서 정중히 세냐의 앞에 섰다.
“제자와 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세냐의 뺨에 홍조가 어렸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로베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로베리안은 유진이 하멜의 환생임을 짐작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로베리안은 거대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300년 전에 이뤄지지 못했던,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두 영웅이ㅡ 과거의 로맨스를 이어나간다.
외로이 죽은 영웅은 환생해 용사가 되었고, 대업을 달성한 마법사는 세상의 경애에도 비탄에 차서 수백 년을 고독하게 살았다. 그러한 둘이 3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로베리안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기 위해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 로베리안 서피스, 현명한 세냐를 대스승으로 섬기는 자이자, 우둔한 하멜이자 유진 라이언하트의 스승 된 자로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로베리안은 즉시 수인을 맺고서 무언가를 소환했다.
아름다운 곡선의 바이올린이 나타났다. 로베리안이 마법 다음으로 자신 있어 하는 것. 어려서부터 즐겼던 악기. 지금까지도 감성에 찬 새벽이면 홀로 켜곤 하는 것이 바이올린이다. 심지어 이 바이올린은 마법의 바이올린이기도 했다.
“제가 한 곡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설마 그 진중하던 적색마탑주가 연주를 자처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같은 마탑주인 멜키스와 히리두스가 경악해서 로베리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로베리안은 한 점의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치고 턱을 얹었다.
띠리링~
반짝반짝 빛나는 활이 현을 스쳤다.
빌어먹을 환생 400화
로베리안의 즉흥연주. 연회장의 악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라. 왕궁에서 개최된 연회. 심지어 그냥 연회도 아니다. 대륙의 강력한 지도자들 대부분이 모인, 용사의 마왕토벌을 기념하는 개선제다.
그런 연회에 초빙된 악단이 보통 악단일 리가 없잖은가. 수십 년 동안 음을 맞춰온, 개개인이 예술계에 큰 인정을 받고 있는 음악인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갑작스레 바이올린을 꺼내 든 로베리안의 행동은 당황스러울 뿐만 아니라 오만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로베리안이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 순간에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대륙에서 마법으로 한 손에 꼽힐 8서클의 대마법사. 현명한 세냐의 제자이자 유진 라이언하트의 마법스승인 적색마탑주. 평생을 마법에 바친 사람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연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 바이올린의 보정 덕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를 제외하고서도 로베리안의 연주실력은 훌륭했다.
미리 음을 맞춰본 적은 없다. 하지만 악단은 즉시 로베리안의 연주에 화합했다. 풍성해진 음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나 주목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칼을 뽑은 이상 뭐라도 썰어야 한다.
유진은 긴장을 가다듬고,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세냐는 춤을 따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유진의 인도에 따라서 사뿐사뿐 움직였다.
‘이거…… 이거 뭐야…….’
세냐는 꼴깍 침을 삼키면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시선을 높여야만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유진도 고개를 살짝 숙여 세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키가 큰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여서 쳐다보는 그 각도. 세냐는 어깨를 바르르 떨다가, 자신도 모르게 유진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오늘따라 왜 이리 잘생겼…….’
아니, 아니지. 원래도 잘생기기는 했다. 흉터가 가득했던 전생의 얼굴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 어찌 말한다면 개차반 같은데 사실은 개차반 같지 않은 성격이 험악한 얼굴과 어우러져 매력을 발산하는, 그런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즉, 사실은 정말로 못생긴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은 흉터와 인상 때문에 저평가를 받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세냐의 주관적인 생각이었지만, 만약 다른 누군가가 세냐의 앞에서 ‘하멜 얼굴 진짜 못생기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한다면, 상대가 누군지에 따라서 응징을 가할 용의도 있었다.
ㅡ그러한 복잡하고도 자질구레한 문장이 덧붙어야 하는 하멜과는 다르게, 유진은 그냥 잘생겼다. 누가 봐도 잘생겼다. 지금 세냐의 눈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잘생기게 느껴졌다.
저 망할 자식은 300년 전부터 그랬다. 가끔, 정말로 아주 가끔이지만,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사람의 정신을 후려치고 마음을 쾅쾅 두들겨 버린다.
유진과 세냐. 둘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제각각 눈을 맞추어 페어를 이루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연회에 와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많을 뿐 아니라, 신분도 높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중장년층이다. 하지만 청년층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중 반은 젊은 기사들이고 남은 반은 시무인의 귀족이었다. 귀족들은 어떻게든 연회장의 인사들과 인연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말을 걸고 춤을 권했다.
시안에게도 많은 아가씨들이 찾아왔다.
유진의 형제. 라이언하트의 차기가주. 정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겠지만, 어떻게 오늘을 기점으로 인연을 쌓는다면 언젠가 첩실로라도 들어갈지 모르는 일.
시안에게 찾아오는 아가씨들도 시무인 고위귀족의 여식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라이언하트와는 견줄 수 없다. 가문을 위해서, 혹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미래를 위해서. 그녀들은 시안에게 다가갔다.
정작 시안은 이런 자리가 어색했다. 여러 번 상상은 해보았지만, 직접 와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유진의 영향을 받은 탓에, 시안도 가진 시간의 대부분을 수행에 쏟았다. 뿐만 아니라 차기 가주라는 의식을 갖고 여러 방면으로의 수양도 하기에, 파티 따위를 즐길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겪었던 파티도 어머니 애니실라와 함께 방문했던 것인데, 시안이 갔던 파티는 키옐 최상위 귀족들의 파티였다. 그 파티의 모두가 애니실라의 눈치를 보았기에, 젊은 아가씨가 시안에게 다가온 적도 거의 없었다.
“…….”
시안은 울적한 눈으로 앞을 보았다.
어머니는 실로 오랜만에 부끄러운 듯이 웃으시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계신다. 연회장의 중앙에서는 세냐 님과 유진이 춤을 추고 있다.
‘심지어 기르가스 저 새끼도…….’
우락부락한 덩치에 수염까지 길러, 2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30대는 넘어 보이는 기르가스. 프릴이 달린 예복. 어울리지 않는 수준을 넘어 흉물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저런 끔찍한 센스를 가진 기르가스조차도 아리따운 귀족 영애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기르가스뿐만이 아니다. 시안이 아는 남자들 중에서 지금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기를 한참이나 지난 기온도, 백사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세자르도, 심지어 대수림에서 온 이바타까지!
시안도 춤을 출 수 있었다. 함께 춤을 추자고 다가온 아가씨들이 많았단 말이다. 하지만 그 많던 아가씨들도 모두 떠나 버리고, 지금 시안의 곁에는ㅡ 조금만 힘을 주면 예복이 뻥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은 아만 루하르가 서 있었다.
“정말로 아일라를 데려올 것을 그랬군. 딸아이와 자네가 춤을 춘다면 아주 보기 좋았을 텐데 말이야.”
“하하…… 네…….”
“사위, 솔직히 나는 감동했네. 저토록 많은 아가씨들이 춤을 권한다면 예의상 한 곡이라도 출 법한데, 설마 사위가 먼저 나서서 모두 거절할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약혼녀의 부친이 있는 파티에서 다른 여인과 춤을 어찌 출 수 있겠는가…….
물론 생각만 이리할 뿐, 이곳에 아만이 없었어도 시안은 춤을 추는 것에 별로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가오는 여인들이 어떻게든 라이언하트와 인연을 트고자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춤을 추지 않고 있는 것은 시안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성녀들은 와인을 쉼 없이 마셔대며 연회장 중앙을 쳐다보았다.
“첫 번째가 되지 못해서 아쉽지 않나요?”
곁에 서 있던 시엘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성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기에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시엘은ㅡ 지금 저곳에서 춤을 추는 것이 자신이 아니란 것에 대한 아쉬움과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시엘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유진이 ‘처음’으로 연심을 품은 상대가 바로 세냐다. 이 궁상맞고 난잡한 관계는, 세냐의 이해와 더불어 모두가 도저히 포기를 못 해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에 시엘은 세냐에게 질투를 느끼기보다는,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게끔 이해해 주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ㅡ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가슴 밑바닥은 자꾸 손톱으로 긁히는 것만 같고, 뱃속은 울렁거린다.
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아니스 님…… 인가?’
쉬지 않고 와인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니스가 아닐까, 라고 짐작만 할 뿐. 시엘은 아직 둘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가 없었다.
징조도 없이 의식이 바뀌어 버릴 때, 그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진뿐이었다. 입이라도 열어 말을 한다면 세냐도 구분은 하였지만, 유진은 신기하게도 성녀들이 입을 열지 않아도, 시선의 미묘한 변화나 호흡 등을 통해 둘을 구분해 냈다.
‘안 어울리게 섬세하다니까.’
시엘이 그렇게 생각할 즈음, 반쯤 비운 와인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저는 가진 것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방긋 웃으며 돌아온 대답. 크리스티나였다. 아니스가 선호하는 맥주나 고도수의 술들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와인 종류는 아니스가 깃들기 전에도 간간이 마시던 술이다.
“그리고 세상이 오늘 하루로 끝이 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저는 서두를 생각이 없답니다.”
“……아니스 님도 그러신가요?”
“저라고 다를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 역시 크리스티나와 마찬가지로,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저는 300년 전부터 첫 번째는커녕, 그의 곁에 설 수 있으리란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시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팔짱을 꼈다.
“즉, 제게 있어서는 지금의 모든 것들이 이뤄질 리가 없던 꿈과 같은 것입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시엘은 어깨를 바르르 떨며 괜히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아니스는 그런 시엘의 반응이 즐거워 쿡쿡 웃었다.
“저나 크리스티나는 하멜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만…… 욕심쟁이인 당신은 그 이상을 바라겠지요? 슬슬 둘의 춤이 끝날 테니, 당신이 용기를 내볼 생각이라면 지금이 적기일 겁니다.”
“……두 분은 가지 않을 건가요?”
“저와 크리스티나는 춤을 출 줄 모른답니다. 그리고 성녀인 저희가, 비록 상대가 용사일지라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며 기뻐하는 것은, 별로 고결해 보이지 않을 겁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유라스의 성기사와 사제들 중에서 춤을 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엘은 주변을 살피고서 꼴깍 침을 삼켰다.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시엘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머릿속의 망설임을 떨쳐내 버렸다. 하지만 마음의 떨림은 어쩔 수가 없어서, 시엘은 기분을 가라앉힐 겸 연회장 구석에서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는 라이미르아와 메르를 응시했다.
둘은…… 어린 소녀의 체구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먹던 중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메르가 대뜸 라이미르아의 뿔을 붙잡았다. 예전에는 당하기만 했던 라이미르아도 이제는 반격을 학습한 것인지, 물러서지 않고 메르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왜 저러는 걸까…….’
그렇게 서로 티격거리다가 다시 음식을 집어 먹는다.
정말로 정신연령은 육체를 따르는 것인가? 시엘은 저 둘이 200년 넘는 시간을 살아온 존재라는 것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바보 같고 멍청한 둘을 지켜보다 보니 가슴의 떨림이 상당히 가라앉았다.
음악이 끝났다.
“자, 자, 잘 추네.”
아무리 길어야 5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 하지만 체감하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짧았다. 1분은커녕 몇 초 만에 음악이 끝난 것만 같은 기분이다.
‘몇 시간은 더 춰도 괜찮은데.’
세냐는 괜히 로베리안이 얄밉게 느껴졌다. 사정을 짐작하고서 곡을 연주하겠다고 나섰다면, 기왕 연주할 거 아주 긴 곡을 선정할 것이지, 왜 이렇게나 짧은 곡을 선정한 것일까. 어쩌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닐까?
“……표정이 왜 그래?”
유진의 표정. 미묘한 각도로 비틀린 입술. 함께 씰룩거리는 뺨. 높낮이가 달라진 눈썹.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들릴 만큼 얄미운 표정.
“스승님 춤 진짜 개 못 추시네요…….”
은밀한 속삭임.
“마법사라서 몸 쓰는 재주가 없다, 라고 하기엔…… 싸움은 잘하시잖아요? 그런데도 춤을 이렇게나 못 춘다는 것은, 타고났다는 것이겠죠.”
세냐는 입술을 반쯤 벌리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연습을 더 하셔야겠습니다.”
멋진 댄스. 잘생긴 얼굴. 세심한 배려 섞인 리드. 두근거림. 그런 것들이 차갑게 식었다.
이 미친 자식은 대체 뭘까? 세냐는 꽉 쥔 주먹을 덜덜 떨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잠깐…….’
항구에 도착하기 전. 300년 전의 왕궁무도회를 추억하며 나누었던 시답잖은 대화.
그 시절의 하멜과 세냐는 둘 다 춤을 잘 추지 못했다. 300년이 흐른 지금, 세냐는 여전히 춤을 잘 추지 못한다. 하멜이 죽어버린 세상에서 춤을 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멜은 춤을 잘 출 수 있게 되었다. 세냐는 먼 옛날과 거의 그대로지만, 하멜은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멜이 하멜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얼굴이 바뀌고, 몸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었을지라도. 지금 세냐의 앞에 있고, 세냐가 사랑하는 남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300년 전의 하멜이라면.
춤을 추고 나서 저렇게 놀렸을 것이다. 세냐는 자신의 이해에 확신을 가졌다. 저 상냥한 개자식은, 세냐의 기분이 울적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이 과거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피력하기 위해 개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고마워.”
세냐는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웃음을 지었다. 눈물이 고여 버린 것이 민망해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왜 우는 거지…….’
설마 춤을 개 못 춘다고 놀린 것에 그토록 상처를 받은 것일까. 유진은 떨떠름히 세냐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놀랍게도, 세냐가 도달한 ‘이해’는 근본부터가 잘못되었다. 유진은 세냐를 위해서 저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세냐가 춤을 개 못 추었기 때문에 놀려먹은 것이다.
현명한 세냐일지라도 그 진상을 당장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더 춤을 추고 싶었지만, 더 춤을 추었다가는 눈물이 펑펑 나와 버릴 것만 같았다.
휘청휘청 물러난 세냐는 영문 몰라 하는 멜키스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음악이 바뀌었다.
이 무슨 우연인가? 새로이 연주되는 음악은 시엘이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익숙한 것으로, 본가에서 예법 교육을 받을 때 유진과 곧잘 들은 음악이었다.
‘이건 운명이야.’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이제 와서 뭘?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장소가 라이언하트 본가 저택이기는 했지만, 유진과 춤을 추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법 교육을 받던 중에 몇 번이나 유진과 손발을 맞춰 춤을 춰보았단 말이다.
아마…… 14살 때였던가.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어린 나이. 부끄러움보다는 유진에게 장난을 치고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서, 춤을 추다가 몇 번씩, 일부러 휘청거리곤 했었다.
함께 콰당 넘어지면 재밌겠지. 그런 생각으로 했던 장난이지만, 나름대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휘청거려 보아도 유진은 흐트러지지 않고 시엘을 리드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시엘은 킥킥 웃으며 유진에게 다가갔다. 우두커니 서 있던 유진은, 시엘의 걸음 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돌렸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드디어 왔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 이 연회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면, 시엘이 무조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익숙한 노래 아냐?”
유진은 먼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어 보였다. 그 말과 웃음이 시엘을 놀라게 했다.
“기억하고 있어?”
“당연히 기억하지. 예법 선생이라고 왔던 콧수염 난 아저씨 이름은 몰라도, 그 아저씨가 질릴 만큼 틀어대던 이 노래는 기억해.”
나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구나.
시엘은 놀란 호흡을 가다듬으며,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유진을 향해 살짝 손을 건네며 입술을 열었다.
“피차 익숙하다면ㅡ 같이 한 곡 어때?”
말하고 난 뒤.
시간이라는 것이 녹인 치즈처럼 쭈우욱 늘어난 것만 같았다. 실제로 흐르는 시간과 느껴지는 시간의 간극이 어마어마했다. 길어봐야 몇 초 정도가 흘렀을 텐데, 그 짧은 시간이 시엘에게는 너무나도 길고 느리게 느껴졌다.
“그래.”
하지만. 유진의 대답이 돌아온 순간, 시간의 흐름이 다시 돌아왔다. 녹인 치즈가 아니라 팽팽하게 당겼던 고무줄처럼, 홱 하고 줄어든 것만 같았다. 시엘은 태연한 척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결국 대답 대신에 다문 입술로 미소를 그리며 유진의 손을 잡았다.
찌릿.
손과 손이 닿는 것. 처음인 것도 아닌데, 마치 처음인 것처럼 살결과 안쪽에서 전류가 흘렀다. 그 순간부터는 익숙하던 음악마저 귓가에서 한참 멀어졌다.
유진의 숨소리만 들렸다. 어찌어찌 몸을 움직여 춤은 추고 있는데, 내가 과연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맞는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 스텝이라도 확인할까.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시엘의 눈동자는 유진만을 보았고, 다른 것은 보려고 들지 않았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역시 네가 아니면 안 돼.’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함께 있고 싶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유진이 어디를 가건 함께 가고 싶다.
‘……안 돼.’
어렸을 적에 자주 들었던 음악. 함께 췄던 춤. 이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둘 다 어린 나이가 아니게 되었음을 떠나, 유진은 너무나도 높고 먼 곳에 가버렸다. 이렇게 같이 춤을 추고, 어린 시절을 회상해 봐도, 옛날과 똑같아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
시엘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춤 선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너무 가까이 기울인 덕에 품에 안긴 것처럼 보였다.
“열심히 할게.”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본가에 돌아가서, 네 말대로, 열심히 해서…… 네게 한 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게.”
대마법사인 세냐가 할 수 없는 것. 성녀인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할 수 없는 것.
하지만 시엘은 할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마나를 수행하는 것. 백염식의 성취를 올리는 것. 당장 뜻대로 써먹을 수 없는 마안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날 믿는다고 해줘.”
별것도 아닌 말인데 왜 이리 말하기가 무거운 것일까. 얼굴은 또 왜 이리도 화끈거리는 것일까. 시엘은 머뭇거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뭐 그리 떨면서 말하는 거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시엘의 팔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당겨져 휘청거리던 몸이, 유진의 품 안에서 빙글 돌았다.
“난 당연히 널 믿어, 시엘.”
돌아온 대답에 시엘은 숨을 삼켰다.
기대했던 대답. 예상했던 대답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머리가 하얗게 질려 도저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시엘은 살짝 고개만 끄덕거렸다.
충분했다. 널 믿는다. 사실 정말로 바라는 것은, 훨씬 더 낯부끄럽고…… 사랑이 가득한 그런 말들이지만, 그건 지나친 욕심이다.
‘충분해.’
들리지 않았던 음악 소리가 다시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어찌 움직이는지 분간되지 않았던 몸도 의식되었다.
‘맙소사,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도저히 춤이라고 할 수 없이, 유진에게 끌려다니기만 하고 있었잖은가.
시엘은 멍청한 짓을 한 자신에게 혀를 찼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까 유진과 춤을 추었던 세냐 님보다는 잘 춰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만 본다면 세냐 님과 좋은 승부를 벌일 수 있을 만큼 처참한 춤을 춰버렸다.
‘안 돼.’
시엘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이후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시엘과 춤 한 곡을 끝내니 멜키스까지 와서 춤을 추자며 주접을 떨었다. 세냐는 제법 노골적으로 멜키스를 노려보았지만, 멜키스는 그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서 유진에게 매달렸다.
“제발, 제발!”
결국 로베리안과 히리두스가 멜키스를 붙들고 나서야 유진은 자유롭게 되었다.
“춤은 즐거우셨습니까?”
다음에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둘을 상대하여 술을 물처럼 목구멍에 부었다.
“어차피 저는 춤을 출 생각도 없고, 당신이 춤을 춘다고 해서 유치한 질투를 느끼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저 혼자만 술을 마셨고, 당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지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저와 어울리셔야 합니다.”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고 한 주제에 눈빛은 살벌했다.
유진과 짧은 대화라도 하고 싶어서 다가왔던 사람들. 심지어 그 이바타조차도,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시선에 움찔하여 유진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결국 유진은 파티가 끝날 때까지 크리스티나의 옆에 앉아 술만 퍼마셨다.
빌어먹을 환생 401화
성상
개선제는 끝났고, 타국에서 찾아 온 손님들도 돌아갔다.
라이언하트도 키옐과 흑사자 성으로 돌아갔다. 유진을 위해 주저치 않고 시무인에 오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국경인 흑사자 성을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저기 말이야, 저기, 우리 언제쯤 하는 거야?”
아롯의 국왕과 궁정마법사단, 마탑주들은 돌아갔지만 멜키스는 시무인에 남았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유진을 찾아와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진의 뒤를 졸졸 따르며 졸라댔다.
“뭘 말입니까.”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묻자, 멜키스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에 비굴한 미소를 지으면서 양손을 슥슥 문질렀다.
“그…… 유진아, 우리 어제 좋았잖아. 응?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는 아니야?”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어제 말이야, 어제, 연회장에서. 설마 그때 나눈 약속은 취기로 내뱉은 가벼운 거였어? 그냥 하룻밤 불장난일 뿐이었던 거야?”
멜키스는 억지로 눈물까지 쥐어짜며 유진에게 매달렸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들기 위해 억지로 밀어붙이려는 모양이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으흠.”
필사적인 어필은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멜키스는 낮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숙였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세냐 언니, 언니가 어떻게 말 좀 해 줘요. 언니도 어제 들었잖아요!”
“뭐…… 뭘…….”
“위니드 말이에요, 위니드! 언니가 유진이랑 춤추기 전에, 쟤가 저한테 위니드를 빌려주겠다, 라고 말했잖아요!”
그 말에 세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헉하고 나온 숨을 삼키고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수도 중심의 광장. 미리 고지가 된 덕에 인파는 통제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시무인 왕국기사단이 광장 전체를 빙 둘러싸며 경계를 서고 있다. 덕분에 이 넓은 광장 안에 사람은 없다시피 했지만ㅡ 그래도, 그래도, 세냐는 혹여 저 말을 누가 듣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뭘 이제 와서…….]
메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사소한 것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세냐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민감한 일이다. 어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좋다고 춤을 췄어도, 그다음 날이 되면 어제의 춤이 떠올라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드는 것이 바로 세냐 메르데인이라는 인간이다.
“마음대로 기억은 날조하지 말아주십시오. ‘조건’에 따라서 빌려드리겠다고 말했지, 제가 언제 그냥 빌려준다고 했습니까?”
“너 진짜 너무한다. 내가 여태까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꼭 하나하나 조건을 덧붙여 해?”
“제가 언제 해달라고 직접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멜키스 님이 알아서 해준 거잖아요. 그리고 저는 멜키스 님께 도움을 받을 때마다,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유진, 유진아, 너 그런 말이 진짜 못된 거야. 상응하는 대가? 너와 나 사이가 그렇게 무미건조한 사이는 아니잖아! 그냥 도와주고 싶으면 도와주고, 빌려주고 싶으면 빌려주고, 그러면 좀 좋아? 당장 나를 봐! 이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님은, 널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에서 네 편에 서주기 위해 이 먼 남쪽 나라까지 날아왔다고!”
멜키스는 양팔을 방방 흔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뭘 그리 생색을 내십니까, 저를 위해서 와 준 사람이 멜키스 님 혼자는 아니었잖아요. 솔직히 청색마탑주, 히리두스 우즐렌 님이야 말로 어마어마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윽…….”
“청탑주님은 제 스승도 아니시지만, 제가 유라스에서 유학할 적에 몇 번이나 마법에 관한 조언을 주셨죠. 청문회에서도 제 편에 서주셨구요.”
“으윽…….”
“이번에도 저를 위해 시무인에 와주셨는데, 청탑주님이 제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으셔요.”
“그 정도면 네가 뭐라도 좀 해줘야 하는 것 아니니? 선물이라도 보내던가 하면서 말이야.”
가만히 듣다 보니 뻔뻔함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멜키스는 실눈을 뜨고 쏘아붙였다. 유진도 생각해 보니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서 내심 생각했다.
‘신년 기념으로 선물이라도 하나 보내드려야…….’
아무튼 당장 중요한 것은 청탑주와의 관계가 아니잖은가? 유진은 슬금슬금 다시 다가오려는 멜키스를 흘겨보며 말했다.
“생각해 둔 조건은 없으십니까?”
“생각이야 해봤지. 근데 참 어렵더라, 유진아, 너는 가진 것이 너무 많잖아. 나랑 백색마탑이 가지고 있는 아티펙트라고 해봐야 네가 가진 것보다 대단하지 않아. 그렇다고 돈을 주자니, 내 전 재산을 줘봐야 네 눈에 차지 않을 것 같고.”
“그건 그렇죠. 사실 저도 당장 뭔가가 필요해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지를 둔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정령사인 멜키스가 템페스트와 계약을 맺는 것이 앞으로의 전투에서 더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정령왕 3명과 계약을 맺은 멜키스의 힘은, 세냐를 제외한 마법사들 중에서 최고전력이라 할 수 있다.
지금만 해도 그런데, 멜키스가 템페스트와 계약을 맺는 데 성공한다면? 멜키스 한 명만으로 마족이 득실거리는 전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음…… 그렇겠지.]
템페스트는 멜키스를 싫어한다. 그 이유는 멜키스가 대정령사다운 품위가 없기 때문이고, ‘멜키스 엘하이어’라는 인간이…… 너무……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제쳐놓았을 때, 멜키스의 자질이 천재적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템페스트도 나름의 각오를 하고, 결의를 다졌다. 폭풍은 300년 전의 미련에 얽매여 있다. 그는 여전히 북상을 바라며, 먼 과거의 전쟁에서 거머쥐지 못한 승리를 갈망하고 있다.
언젠가 유진이 마왕성을 오를 때. 템페스트는 저번 전투에서 그랬듯이, 가능한 선에서 유진을 도울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ㅡ 다른 방법으로, 더욱 크게 전쟁을 기여할 수 있다면……. 솔직히 그쪽이 더 욕심이 났다.
“아티펙트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다……. 그렇다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뿐.”
멜키스는 천천히 양손을 들더니, 검지손가락을 들어 유진에게 빵야, 총을 쏘았다.
“나를 줄게.”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던진 말.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세냐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식었다.
뚜둑. 로브에 가려진 크리스티나의 몸에서도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이토록 반응이 좋지 않을 줄이야. 멜키스는 겨누었던 손가락을 얌전히 내리고서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 내 몸과 마음을…….”
“맞을래요?”
“진짜 너무한다. 아무리 그래도 누나한테 맞을래요는…….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지 말고 들어 봐.”
멜키스는 급히 품 안에서 펜 한 자루를 꺼내더니 허공에 글자를 휘갈겨 썼다. 그러자 글자를 적은 공간이 썩둑 잘리더니 백색의 종이가 되었다.
멜키스는 그렇게 만든 빳빳한 종이를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뭔지 알아?”
“뭔데요.”
“짜자잔! 바로 멜키스 쿠폰이야! 네가 이걸 사용한다면, 대신 죽어달라, 자살해라, 뭐 이런 부탁은 들어주지 않겠지만…… 어지간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할게.”
과연, 마법의 계약인가. 유진은 은색의 멜키스 쿠폰을 살피며 말했다.
“설마 한 번으로 끝나는 건 아니죠?”
“어…… 어?”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만약 멜키스 님이 템페스트랑 계약을 맺는다면 앞으로 수십 년은 계약이 유지될 텐데, 그걸 주선해 준 제 부탁은 딱 한 번 들어주고 끝낸다니.”
“어…… 그…… 그런가……?”
“이렇게 합시다.”
300년 전. 용병일을 할 때부터 체득한 것은, 약속이건 계약이건 한 번 기세를 잡았을 때 우기는 것이 중요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문제는 대부분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마왕이 모두 뒈질 때까지를 만기로 하죠.”
“어…… 그 전까지,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야……?”
“잘 생각해 보세요, 멜키스 님. 솔직히 이 뭐냐, 멜키스 쿠폰? 이게 없어도 제가 부탁을 하면 싫다고 하실 겁니까? 들어주실 거잖아요? 설마 안 들어주실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그, 내용에 따라 조금 고민은 할 수 있겠지만…… 아마 들어주지 않을까……?”
“그렇죠? 그런데 멜키스 님, 제가 여태까지 멜키스 님한테 사적인 부탁을 한 적이 있나요? 중요한, 세상을 위한, 정의로운, 꼭, 꼭 멜키스 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만 부탁을 했었죠.”
“그건…… 그렇지.”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래서 마왕이 모두 뒈질 때까지를 만기로 하자는 거예요. 세상이 완벽하게 평화로워지면 멜키스 님의 도움이 필요할 일도 없을 테니.”
“세상이 평화로워져도 부탁할 일은 있지 않을까? 흐흐흥, 이 멜키스 님은 싸움 말고 다른 것도 잘한다구.”
“그럼 만기를 늘릴까요. 멜키스 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어떻습니까?”
“아…… 아냐, 그냥, 그래, 마왕이 다 죽을 때까지로 하자.”
앞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아득한 시간을 약속하는 것보다는 마왕이 다 죽을 때까지가 낫겠지. 이미 멜키스는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약속한 겁니다.”
“응!”
멜키스가 헤벌쭉 웃으며 대답했다. 그 즉시 유진은 망토에서 위니드를 꺼내 멜키스에게 건네주었다.
“꺄아악!”
멜키스는 위니드를 받아들고 비명을 질렀다. 벌써부터 위니드의 검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템페스트의 결의와 각오가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나 가도 되지? 응?”
“네, 가세요.”
유진은 멜키스 쿠폰을 살펴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 쿠폰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정령계와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건 이 쿠폰을 통해서 멜키스와 소통이 가능하다.
“꺄아아오!”
멜키스는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위니드를 붕붕 휘두르며 날아가 버렸다. 높은 하늘로 날아간 것을 보니, 옛날 아롯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디 높은 곳에서 템페스트와 교감을 시도하려는 모양이었다.
“당장 부탁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크리스티나는 멜키스가 날아가서 사라진 하늘 저편을 힐긋 보면서 물었다. 하지만 유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쟤가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 성격은 착한 것 같아. 그러니까, 이상한 부탁으로 골려 먹는 건 안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세냐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서클 마법의 창시자로서는 재기 넘치는 후배에게 꽤 많은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같은 마법사로서는 멜키스의 어마어마한 재능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세냐는 멜키스를 보호할 생각으로 말한 것이다.
“이상한 부탁으로 골려 먹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알몸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게 만들거나…….”
“내가 그딴 부탁을 왜 해?”
“그럼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데?”
즉석에서 짜낸 생각은 아니다. 멜키스에게 받을 수 있는 것 중 마땅한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낸 이상, 멜키스가 쿠폰을 제시하기 전부터 그녀에게 부탁할 권리를 얻을 생각이었다.
“나 대신 사막을 좀 헤집어 달라 부탁하려고.”
“……아멜리아 머윈. 그녀는 지금 라비스타에 숨어 있다고 하셨지요?”
크리스티나가 두 눈을 얇게 뜨며 말했다.
어제, 유진이 누아르를 통해 보았던 ‘꿈’. 그것에 대해서는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에게도 전해두었다.
멸망의 마왕이 잠든 영지, 라비스타. 그곳에 아멜리아 머윈이 숨어 있다. 그리고ㅡ 베르무트는 사슬에 묶인 의자에 앉아, 마왕의 어전이라 할 수 있을 신전에 봉인되어 있다…….
“나하마 사막 던전은 헬무드 다음으로 흑마법사들이 많아.”
세냐의 귀환으로 인해, 아롯의 흑색마탑은 스스로 몰락했다. 흑마법사들은 현명한 세냐가 오래전에 흑색마탑의 설립에 반대했고, 여전히 흑마법사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선 아롯엔 흑마법사들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헬무드로 돌아가거나, 나마하 사막의 지하던전으로 들어갔다.
“아멜리아 머윈, 그년은 라비스타에 계속 숨어 있을 수 없어. 언젠가는 버티지 못하고 라비스타를 나오게 되겠지. 그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사막왕국 나하마. 그곳에서 아멜리아 머윈에게 궁정마법사장 같은 직접적인 지위는 없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지위가 없을 뿐, 아멜리아 머윈이 술탄의 최측근이라는 것은 세상 모두가 알고 있다. 당장 아멜리아는 나이트마치에 술탄의 조언자로 참가했었다.
동시에 아멜리아는 사막의 던전 마스터. 그녀의 직접적인 제자는 없을지라도, 사실상 아멜리아의 명령에 복종하는 흑마법사들을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던전의 흑마법사 학파에 대한 정보는 키옐 정보국 소속의 첩보원들에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키옐은 나하마의 인접국이며, 나하마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을 적대하고 있다. 헬무드만 없었다면 진작에 키옐과 나하마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것이다.
“그 넓은 사막을 나 혼자 뒤지는 것보다, 멜키스 님한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편하잖아. 그분은 대지의 정령왕과 계약했으니, 사막 뒤지는 것은 나보다 훨씬 잘할걸.”
아멜리아가 없는 동안, 두더지처럼 사막에 굴을 파고 숨은 흑마법사들을 색출해 사냥한다.
아멜리아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속이 뒤집힌 아멜리아가 라비스타 밖으로 뛰쳐나오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헬무드의 눈치를 보는 나하마를 엿 먹이기 위해서.
‘눈치껏 고개 숙이고 시무인에 왔다면 봐줬을 텐데.’
헬무드 다음으로 많은 흑마법사들을 데리고 있는 개 같은 나라. 유진은 300년 전에도 나하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용병 시절에 사막 출신 어쌔신들에게 엿을 많이 먹기도 했고, 나하마가 흑마법사들이나 마족과 편을 먹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나하마랑 전쟁을 벌이실 셈입니까?”
크리스티나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롯의 마탑주는 중립에 서야 하는데…… 자칫하다가는 아롯과 나하마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수 있어. 그렇다면 마탑주들의 입장이 곤란해질걸.”
세냐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유진은 보란 듯이 제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바로 어제, 유진이 왕들에게 나눠주었던 사자의 휘장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뭐.”
이 휘장은 유진의 요구를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왕권까지 사용하며 들어주겠다는 약속이다. 세냐의 말처럼, 아롯에서 마탑주는 중립에 서야한다. 마탑주인 멜키스가 나하마를 들쑤시다가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아롯은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멜키스에게 책임을 물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 휘장을 쓴다면. 나하마 저 자식들이 흑마법사를 싸고도는 꼴이 잘못된 것이니, 까짓거 전쟁을 벌이자고 한다면?
“양아치 자식…….”
세냐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진은 아무 부정도 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저 상황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나하마가 정말로 헬무드의 종복임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잖은가?
일단은, 표면적으로 나하마는 헬무드와 별 관계가 없다. 그냥, 술탄의 조언자가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이자 당대 유폐의 지팡이일 뿐. 그리고 흑마법사들이 사막을 참 좋아해서 그 나라에 많이 산다는 정도의 관계가 전부다.
‘지랄하네.’
유폐의 마왕은 술탄을 위해 직접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개자식의 행동거지를 보건대, 지가 전쟁은 일으키지 않아도…… 헬무드 마족들이 나하마를 돕는 것까지 통제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하마가 이리저리 얻어맞는 것을 못 참고서 전쟁을 벌인다면, 흑마법사들과 계약을 맺은 마족들이 나하마의 전쟁에 참전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것이 오히려 유진의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자…… 그럼.”
유진은 표정을 가다듬고 앞을 보았다. 멜키스에게 받을 것도 받아낸 이상, 이제는…… 광장에서의 볼일을 처리해야 한다.
“포즈…… 를 잡아야 하나…….”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의 성상은 바로 이 광장에 세우기로 했다.
유진은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는 드워프 장인들을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환생 402화
장담컨대, 유진의 현생과 전생과 전전생을 모두 더해도, 시무인에서 겪는 경험이 ‘수치심’이란 감정에 관련지어서는 최고봉일 것이다.
플래티넘 라이온과 함께한 퍼레이드만으로도 끔찍했는데…… 지금은, 광장을 둘러싼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성상에 쓸 포즈를 취하게 되어버렸다.
“내가 진짜 궁금하고 몰라서 묻는 건데, 이걸 꼭 여기서 해야 하나?”
유진은 참다못해 숨을 씨근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성상 조각을 담당하고 있는 꼬장꼬장한 모습의 드워프가 두 눈을 치켜떴다.
“이 풍경에 가장 어울리는 성상을 세워야 할 것 아뇨?”
“조각상 장인쯤 되면 방구석에서 포즈를 잡아도 이 풍경에 최적화시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용사님께서 전문적인 모델이라면. 손끝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생기를 드러내고,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어떤 풍경에건 어울릴 수 있는 묘사력의 소유자라면 모를까…….”
드워프는 머리에 덮어 쓴 빵모자를 손끝으로 올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본래 조각상이라는 것은 조각사 뿐 아니라 모델도 중요하답니다. 안타깝게도, 용사님께서는 출중한 외모에 비해서는 포즈가 영 아니올시다.”
“…….”
“너무 어색하다 생각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종류의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조각상도 여럿 있지만…… 지금 이곳에 세울 것은 용사의 성상이지 않습니까? 마왕을 토벌한 용사. 그 당당함과 용감함, 고결함을 드러내야 하는데, 용사님께서는 너무 부끄러워하고 계십니다.”
“내게 그런 감정을 요구하고 싶다면 구경꾼들부터 치우쇼.”
“저들 모두가 용사님을 존경하고 숭배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 용사님, 이 드워프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묻습니다만…… 성상을 세우라 요구한 것은 용사님이시지 않습니까?”
유진은 대답 대신에 헛기침을 했다. 드워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남들이 억지로 세우자 한 것도 아니고, 용사님의 요구대로 세우기로 한 것인데…… 왜 그리 부끄러워하십니까?”
“빨리 끝냅시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었다가는, 수십만 군중이 보는 앞에서 저 얄미운 난쟁이를 두들겨 패버릴 것만 같았다.
‘참자…….’
시무인에 성상과 개선문을 세우는 것에는 유진의 신성에 있어 많은 의미를 갖는다. 용사가 처음으로 마왕을 쓰러트린 바다. ‘언젠가’라고 말할 것도 없이, 지금 당장만 하여도 유진의 업적은 전설이자 신화가 되었다.
성상과 개선문은 노골적인 상징이 될 것이고, 이 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각국의 사람들이 성상을 보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신문을 시작으로 다양한 서적에도 성상과 개선문이 실릴 것이며, 그 모든 것이 ‘용사’를 우상화할 것이다.
솔직히 저쯤 되면 낯부끄럽다는 감각보다는 현실성이 없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젊은 용사가 공명심과 명예욕에 눈이 멀었구나,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유진에게 굉장히 필요한 일이다.
백염식에서 별은 사라졌다. 예전처럼 별을 늘려가면 되겠지ㅡ 라는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월광검은 아직 시험해 볼 여지가 남았고, 그것이 과연 잘 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신검과 신력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용사가 숭배될수록 신력은 늘어날 것이고 신검은 강해진다.
마왕이 공포와 경외를 힘으로 삼듯이, 신은 숭배와 신앙에 따라 힘이 커진다. 누아르가 제벨라 시티 전체를 정기 공장으로 삼았다면, 유진은 대륙 전체에서 신앙과 숭배를 끌어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얼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이 덜했다. 드워프의 말마따나 성상은 당당하고 용감하고 고결해 보여야 한다…….
유진은 결의를 다지고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당당하고 용감하고 고결해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조각상, 그래, 조각상.
세냐는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상을 가지고 있다. 당장 아롯에 세냐의 조각상이 과장 없이 수십 개는 된다. 마탑이 우뚝 선 수도 펜타곤뿐만 아니라, 아롯 전역에 있는 조각상까지 더한다면 말이다.
그뿐인가? ‘현명한 세냐’는 지금 시대 마법사들의 선지자이자 이정표이기에, 아롯 말고 다른 나라에도 조각상은 흔하게 세워져 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마법과 관련된 장소라면 거의 무조건 세냐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아니스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신실한 아니스. 그녀는 위대한 베르무트와 함께 유라스의 최고위 성인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대륙 전역은 몰라도, 유라스에서는 베르무트 이상으로 성민들의 사랑을 받는 성인이다. 때문에 아니스의 성상도 유라스에만 수십이요, 빛의 신교가 전파된 국가까지 더한다면 몇 배는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ㅡ 우둔한 하멜의 조각상은 어떠한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용사와 동료들’, 5명의 조각상에 포함된 적은 있어도…… 하멜 단독의 조각상은 단 하나뿐이다.
‘내 무덤.’
그 생각을 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하멜의 고향은 튜라스 왕국이다. 하지만 정작 튜라스 왕국에서는 하멜이 자기네 왕국 출신이라는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시에는 영지의 인구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세상인 데다, 하멜의 고향이 변경 중의 변경이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막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조각상들은 베르무트와 동료들로 세워진 것. 그나마 나은 것이, 모론이 제 왕국 수도에 세워놓은 조각상이다. 적어도 그 조각상은 모론과 하멜, 2명뿐이다.
‘생각하니까 열 받네.’
화가 나기도 하고, 특별하단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아가로트였고 하멜이었던 유진 라이언하트의 조각상이, 유진의 뜻에 의해 최초로 세상에 세워지는 것이다.
결의가 더욱 강해졌다. 유진은 망토를 활짝 열더니 성검을 뽑았다.
세냐의 입이 쩍 벌어졌다. 크리스티나의 눈을 통해 유진을 바라보던 아니스도 똑같이 경악했다.
단순히 성검을 꺼낸 것만이 아니다. 유진은 꺼낸 성검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높이 들린 성검의 칼날에 환한 빛이 어렸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망토가 펄럭거렸다.
그냥 펄럭거리는 것이 아니다. 유진의 자세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게. 방해가 되기는커녕, 우뚝 선 유진의 자세에 그 이상 어울릴 수가 없을 만큼, 완벽한 모양새로 망토가 펄럭거리고 있다.
빛도…… 조금 이상했다. 유진의 주변에 마치 휘광 같은, 하지만 눈이 부셔서 유진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게 하는 빛이 아니라, 되레 유진의 모습을 뚜렷하고 멋지게 만드는 조명 같은 것이 풍경에 섞였다.
“미친놈…….”
세냐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망토를 열심히 펄럭거리며 모양을 잡는 것은 메르였고, 공간에 빛을 스며들게 하여 유진에게 필터를 씌운 것은 라이미르아였다. 유진은 망토 속에 있는 둘의 보조를 받으면서 근엄하고 정의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아아, 어찌 저리도 고결하고 늠름하신지요……!”
아니스조차 경악하고 있지만, 크리스티나는 이미 넋이 나가서 양손을 부여잡고 유진을 우러렀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었다. 세냐와 아니스야 유진과 너무 잘 아는 사이라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지, 광장 바깥에서 유진을 바라보던 사람들을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
아무리 드워프라고 해도 조각상을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만들려고 하면 만들 수야 있겠지만ㅡ 이번에 만들어야 하는 조각상은 용사의 성상. 앞으로의 길고 긴 역사에 무조건 남을, 그렇기에 여태까지의 역사에 존재했던 그 어느 조각상보다도 아름답고 훌륭한 조각상이어야만 했다. 사실, 드워프의 고집대로 한다면 완성까지 앞으로 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당연히 유진은 그만큼 긴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한 달.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용사님! 한 달이라니,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안 된다면 안 됩니다. 한 달에서 조금만 늦어져도, 댁들이 만든 조각상은 내가 직접 이 나라를 찾아와서 부숴버릴 겁니다.”
“그 무슨!”
“무슨은 무슨, 의뢰인인 내가 그렇게 해달라는데 뭐 그리 말이 많습니까? 어쨌든, 방금 말했듯이 한 달 안에 완성되지 않으면 당신네 종족에 작업은 맡기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이 세상에서 저희 드워프 말고 어떤 종족이 용사님의 모습을 세상에 남길 수 있겠습니까!”
“찾아보면 다른 종족에도 있겠죠. 저는 인간 조각사들 실력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엘프들 중에서도 조각사가 있을지도 모르고.”
“송충이처럼 숲에서 나뭇잎이나 갉아먹고 초록 똥을 싸대는 귀쟁이들이 예술이 무언지 알기나 하겠습니까? 그들이 조각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나무껍질뿐입니다!”
드워프가 울부짖었다.
그 말에 세냐의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그녀는 드워프를 냄새나는 난쟁이 종족이라 멸시하는 종족차별주의자적인 면모가 있었고, 으레 그렇듯이 자기가 멸시당하면 발끈해 버리는 지극히 인간다운 성격의 소유자기도 했다.
“참으십시오.”
아니스는 세냐가 날뛰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유진도 혹시 세냐가 폭주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찔끔했지만, 아니스에게 붙잡혀 진정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음…… 엘프는 아름다운 종족이니 예술에 대해서는 대충 알 것이고, 수명도 기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용사님은 엘프가 가진 종족적인 결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 겁니까! 그 멍청한 종족은 수백 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가진 수명 대부분을 숲에서 멍하니 지내는 것에 할애합니다. 그 종족이 가진 수명만큼의 값어치만 했어도 대륙최강자와 대륙최고마법사와 대륙최고현자와 대륙최고장인 모두가 엘프로 채워졌을 겁니다.”
“놔, 놔, 놔봐, 좀, 저 난쟁이를 확!”
유진이 듣기에는 모두가 맞는 말이었지만, 세냐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쨌든…….”
아니스의 만류를 뿌리치고 드워프의 머리를 지팡이로 찍으려 한 세냐를 간신히 진정시킨 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드워프를 쳐다보았다.
“제 생각은 안 바뀝니다. 한 달. 그 이상은 안 줍니다. 용사인 제 최초의 조각상을 만들어냈다는 위업을 종족 역사에 쓰고 싶으시다면, 한 달 안에 끝내십시오.”
“끄으…….”
“당신이 필요로 한 창작의 영감이란 것도 이미 받았다면서 뭐 그리 굼벵이처럼 구는 겁니까?”
유진이 선보였던 포즈는 드워프의 뇌리에 확실하게 새겨졌다. 다각도에서 관찰하고 이리저리 위치를 바꾼 결과, 이 광장에서 가장 완벽한 장소도 선출해 냈다.
이제는 기억대로, 그리고 마법의 도움을 빌려 기록한 대로 조각상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협상하지 않고 드워프를 돌려보낸 뒤, 시엘과 디자이라, 카르멘이 머물렀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 셋은 이른 아침에 다른 식구들과 함께 본가로 돌아갔다.
-날 믿는다고 해줘.
그때 시엘의 간절하던 눈동자는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오늘 아침, 배웅을 나갔을 때. 의외로 시엘은 여러 말을 하지 않고 유진과 헤어졌다.
-기다리고 있어.
환한 웃음. 흔들림 없는 목소리.
……결의를 보건대, 지금쯤이면 호수 밑바닥에서 백염식의 수행에 열중하고 있으리라.
“이제 시무인에 볼일은 없는 거지?”
“어.”
저택에서 따로 챙길 짐은 없다.
오세리스 국왕에게 받은 2개의 엑시드. 곤도르를 필두로 한 드워프 장인 10명. 망토 안에 처박아 놓았던 라이자키아의 사체.
그것들 모두 다 본가에 보냈다. 공방도 새로 차려야 하니 시간은 꽤 걸리지만, 아무리 늦어도 올해 여름 즈음부터는 드워프들에 의해 라이자키아의 사체가 해체되고, 라이언하트를 위한 무장이 제작될 것이다.
“내일 출발하면 돼.”
유진은 소파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채로 대답했다.
나하마 사막을 헤집는 것은 일단 멜키스에게 전담시킨다. 용사인 유진이 처음부터 나서는 것보다는, 아롯 소속이자 중립인 멜키스가 사막을 헤집는 것이 나하마의 반응을 보기 좋을 것이다.
그동안, 유진과 동료들은,
루하르에 가기로 했다.
“모론, 그 등신에게 뭐 선물이라도 사다 줘야 하는 것 아냐?”
세냐는 두눈을 반짝거리며 즐거워했다. 유진과 아니스야 작년에 모론과 만났지만, 세냐는 모론과는 거의 200년 만에 재회하는 것이다.
“그 자식 머리가 반쯤 돌아버렸다며? 정신 건강에 뭐가 좋더라? 캔버스랑 물감세트는 어때? 정신 이상해질 때 그림이라도 그리라고 하는 거야.”
“그, 네가 뭐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모론은 너처럼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봉인된 것이 아니거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기가 알아서 구할 수 있다고.”
“그럼 족쇄는 어때? 평범한 족쇄 말고, 내가 직접 만든 마법 족쇄.”
“갑자기 뭐라는 거야?”
“모론을 위한 선물 말이야. 족쇄. 자기가 미칠 것 같을 때 몸에 족쇄를 차라 하는 거야.”
“네가 뭐 유폐의 마왕이냐?”
유진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세냐가 기겁하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마왕이냐고 묻는 건 너무하지 않아?”
“제가 듣기에도 옳지 않은 비유였습니다, 하멜, 사과하십시오.”
“그래…… 미안하다.”
둘이 정색해 버리니 유진도 얌전히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세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캔버스와 물감세트가 좋을 것 같아. 유진, 네 말처럼 모론이 필요한 것을 알아서 구할 수 있을지라도, 그 등신이 제 손으로 캔버스랑 물감세트는 사지는 않을 것 아냐.”
“의외로 모론에게는 그쪽 방면의 재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멜, 세냐,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모론은 야영 중에 한가하다 싶으면 돌이나 나무토막을 들고 조각을 하곤 했지요.”
혼자 술을 홀짝거리던 아니스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유진도 그 기억이 떠올랐다. 확실히, 아니스의 말대로 모론의 조각은 그럭저럭 훌륭했었다.
“모론이 엘프보다 낫군.”
“너…… 너 이 개새, 뭐라고 했어?! 엘프 중에도 예술가는 있어! 당장 우리 오라버니도 그림을 잘 그려. 조각을 하던 엘프도 있었다고!”
“근데 왜 세상의 유명한 장인은 죄다 드워프인 거냐.”
“엘프는 드워프처럼 탐욕스럽지 않으니까! 엘프에게 있어서 세상 모든 것은 자연의 것이야. 돈으로 거래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엘프는 예술품을 남기는 데 집착하지 않아, 만들고 나면 자연으로 돌려보낸다고!”
세냐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주장했다.
당연히 유진은 세냐의 주장에 대한 진위여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유진은 건성으로 대답해 주며, 방 한쪽에서 게임에 열중하는 메르와 라이미르아나 쳐다보았다.
둘은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는데, 사실 저 둘이 무슨 게임을 하건 승패가 갈리는 일은 드물었다. 메르가 이길 것 같으면 라이미르아가 판을 뒤집었고, 라이미르아가 이길 것 같으면 메르가 판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월광검은 모론이 있는 곳에서 시험하려는 겁니까?”
“하긴, 월광검이 또 폭주해 버리면, 널 진정시키는 것은 우리보다는 모론이 적임자일 거야.”
모론은 무식하리만큼 튼튼하고 강하다. 마나와 마법, 신성력까지 거부하는 월광검이지만 모론의 ‘힘’은 통할 것이다.
“그런데…… 등신 모론이 정신이 돌아버린 이유가 멸망의 마력과도 관계가 있다며? 월광검이 모론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 아냐?”
“그럼 내가 모론을 다시 두들겨 패버리지 뭐.”
“너랑 모론 둘 다 폭주하면 어떡하라고?”
“그럼 너희가 우리를 두들겨 패.”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세냐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몰라도. 모론은 멀쩡할 거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모론이니까.”
-네가 이상해질 때마다, 괴롭고 미쳐갈 때마다. 나는 널 등신이라고 부르면서, 널 패러 올 거다.
모론과 헤어지기 전에 나눴던 대화.
-모론. 너는 고독하지 않아. 약해지지도 않았어. 왜냐고? 내가 너한테 죽도록 처맞았잖아. 그것만으로 네 강함은 증명되는 거야. 넌 여전히 용감하고 강한 전사라고.
어설프고 서투른 위로였다. 모론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부축을 받으며 건넸던 말이다.
하지만, 그 대화를 나누었기에 유진은 모론을 믿었다.
“저도 하멜의 말에 동감합니다. 모론은, 괜찮습니다. 그의 정신이 불안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저희는 불과 1년 전에 모론과 만났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듣던 아니스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론, 이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살아있었어도, 누군가에게 꼭 부탁을 해야 했다면. 베르무트 님뿐만 아니라, 우리도 당신에게 부탁했을 겁니다.
아니스마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렇다면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모론은 그렇게 대답했다.
“열 받네.”
가만히 듣고 있던 세냐의 얼굴이 뺨이 실룩거렸다.
“너희가 지금 머리에 떠올리는 거. 그거, 내가 없을 때잖아.”
“그렇지? 네가 세계수에 봉인되었을 때니까.”
유진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지만, 아니스는 뱀처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네, 세냐, 이것은 당신이 갖지 못한, 저와 크리스티나, 하멜, 그리고 모론의 추억이랍니다.”
그 말이 세냐의 주먹을 부르르 떨리게 만들었다.
“모론 그 자식보고 한 번 더 미쳐달라고 하자. 완전 미치지는 말고, 한 반의반만.”
“너 쓰레기니?”
“진짜 미치지 말고 미친 척만 하라고 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나 없을 때 했던 상황만 똑같이 연출하자고. 나도 모론이 제정신을 차렸을 때 그럴듯한 말 한마디 해주고 싶단 말이야.”
“뭐 하러 연출을 합니까? 그냥 모론을 만나서 전하면 될 것을.”
“멀쩡한 정신으로 반갑게 재회한 마당에 그런 말을 해버리면 이상하잖아.”
“당신은 언제나 이상했으니 이제 와서 괜한 걱정은 마십시오.”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술잔에 술을 꼴꼴꼴 부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모론을 위해 할 말을 생각하던 세냐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서 급히 내뱉었다.
“북쪽 나라면 춥지? 겨울옷…… 아니, 아니야! 뜨거운 강!”
“온천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온천! 모론 그 자식이 자기네 고향 온천을 엄청 자랑했었잖아! 300년 전에는 못 들어갔는데, 이제는 같이 들어갈 수 있겠…….”
으흠.
세냐는 말을 하다 말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녀는 유진의 얼굴을 한 번 살폈고, 술잔을 든 상태로 멈춰 있는 아니스를 한 번 살폈다.
“……아니스, 너랑 같이 말이야.”
“……예에…… 그렇군요. 저도 기억이 났습니다. 300년 전에 그런 약속을 했었죠, 세냐, 저와 당신 둘이 같이 온천에서 목욕을 하자고 말입니다.”
세냐의 급발진에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아니스는, 엉성한 수습에 대한 실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빌어먹을 환생 403화
라구르야란
[그 여자는 미쳤다.]
뭘 새삼스레.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발이 푹푹 들어가는 눈밭을 걷기 위한 신발로 바꿔 신었다.
[하멜. 나는 세상과 너를 위해 결심했다. 내가 생리적으로 혐오하는, 멜키스 엘하이어와 계약을 맺기로 말이다. 즉, 예전 아롯에서와는 경우가 다르다는 것이다. 멜키스가 해괴한 미신을 따르지 않아도, 나는 이번만큼은 멜키스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템페스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유진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설원횡단을 위한 외투로 갈아입은 유진은,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사이좋게 앉혀두고서 옷차림의 점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미친 여자는 처음부터 나와 정상적이고 평범한 대화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멜, 멜키스가 위니드를 가져가고서 가장 먼저 무엇을 하였는지 아나? 알몸으로 바다 위를 날아다녔다!]
높은 탑에라도 올라갈 줄 알았는데. 아, 하긴, 탑에 올라가서 바람을 맞는 것은 예전에 시도했던 방법이다. 그때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본 것인가.
그래…… 바다는 높은 탑만큼이나 바람이 많이 불지. 그리고 ‘바닷바람’은 그 자체만으로 내륙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것. 그것이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하는 데에 얼마나 큰 이점을 부여해 줄지는 모를 일이지만.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메르의 귀도리 위치를 바로잡아 주고, 라이미르아에게는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한참을 알몸으로 날아다니고 나서야 그 미치광이는 위니드를 끌어안고서 나와 대화를 시도했다. 대화의 내용…… 은 세세히 말하고 싶지 않지만, 멜키스 엘하이어가 제정신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대의를 우선하지 않았다면, 그 미치광이와 계약은커녕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을 것이다.]
유진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기껏 빌려주었는데, 멜키스는 바로 다음 날 저택을 찾아와서 위니드를 돌려주었다.
멜키스는 바람의 정령왕을 다루는 베르무트를 동경했기에, 옛날부터 간절하게 템페스트와의 계약을 바라왔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전무후무한 자질을 가진 대정령사일지라도 가지고 있는 그릇이 무한하지는 않았다.
번개의 정령왕. 대지의 정령왕. 불꽃의 정령왕. 멜키스가 계약한 정령왕만 해도 셋이나 된다. 그런 상태에서 정령왕 하나와 더 계약을 맺는 것은, 정령왕 본인이 바랄지라도 불가능했다.
[한 명의 인간이 셋이나 되는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부터가 있을 수 없는 일……. 아쉬운 일이구나, 하멜, 나는 진심으로 멜키스 엘하이어와 계약을 맺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템페스트의 목소리는 굉장히 평온해 보였다. 반대로 아침에 찾아온 멜키스의 얼굴은 죽을상이었다. 얼마나 울어댄 것인지 눈은 탱탱 부었고, 목소리도 갈라져 있었다…….
‘아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잖아. 정령왕인 너랑은 계약을 맺지 못했어도, 중급 바람의 정령과는 계약을 맺었다며?’
다행히도 계약의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릇이 부족하다면 키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계약을 떠나서, 멜키스는 템페스트에게 집착했다.
그래서 중급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어, 지금 이 순간에도 정령을 시켜 템페스트에게 말을 걸고 있다. 당연히 템페스트는 멜키스에게 꼬박꼬박 대답해주지 않고 무시하는 중이다.
[절대!]
템페스트가 힘을 주어 내뱉었다.
[절대! 나와 멜키스가 계약을 맺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맺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의 그릇이라는 것이 키우고 싶다고 해서 키워질 만큼 간단한 것은 아니잖은가? 멜키스가 지금부터 백 년의 수행을 가질지라도, 나와 계약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을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멜키스가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 짜증 나기는 하지만, 직접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니 템페스트는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유진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템페스트가 멜키스와 계약을 맺었다면 악랄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하멜 너는 개새끼이구나.]
유진의 생각을 읽은 템페스트가 욕설을 내뱉었다. 유진은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오른손 왼손으로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손을 하나씩 잡아주었다.
‘뭐, 결과적으로 다들 잘된 것 아냐? 너는 멜키스 님과의 계약을 피했고, 멜키스 님은 계약은 맺지 못했어도 너와 연결고리를 갖게 되었지. 그리고 나도 그…… 그 쿠폰을 사용해서, 멜키스 님을 나하마로 보내 버렸고.’
나하마 사막을 헤집으면서 흑마법사 던전을 공격해 달라는 말에 기겁을 했지만, 계약의 여지가 남게 된 이상 멜키스도 쿠폰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진짜 뒤탈 없는 거지?
-물론이죠.
-진짜? 진짜로? 막 나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면서, 트렘펠 그 할배가 나를 처형시키겠다고 하면…….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시켰다고 하면 아무 문제 없다니까요?
-그, 저기, 유진아, 네가 아롯 국왕한테 줬다는 휘장은 알겠는데…… 아롯은 전제군주국이 아니거든? 아롯 왕권은 별 힘이 없다고! 의회가 나를 처형하라면…….
-아니 그 의회란 것들이 저보다 셉니까? 용사보다 목소리 커요?
멜키스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멜키스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유진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대답을 들은 것이 오늘 아침이니, 아마 지금쯤이면 살벌하게 더운 나하마 사막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진은, 나하마와 정반대로 살벌하게 추운 북쪽 루하르에 도착해 있다.
“본녀는 눈을 처음 보느니라……!”
라이미르아가 꺅꺅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비교적 의젓하게 유진의 손을 잡은 메르는, 라이미르아의 머리에 돋은 사슴뿔과, 주변에 흩날리는 눈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코만 빨가면 루돌프 같을 텐데.”
갑작스러운 말. 유진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예상치 못했던 말이라 웃음이 터지려 하는데, 메르가 무심한 얼굴로 내뱉은 말에 낄낄 웃어버리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데, 유진의 표정을 살피던 메르가 피식하는 시건방진 미소를 지었다.
“아파요, 유진 님.”
얄미워서 뺨을 꼬집자 메르가 칭얼댔다. 나이 많은 꼬마 둘의 손을 잡은 유진을 흐뭇한 얼굴로 보던 크리스티나는, 멀찍이 보이는 루하르의 왕성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왕성에 들르실 겁니까?”
“야수왕은 바로 어제 봤잖아. 왕성에 들를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바로 가면 되지.”
이번 설원 횡단에는 아무 준비도 할 필요가 없었다. 저번 횡단 때 쓰던 장비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고, 그때처럼 시안과 시엘의 수행을 겸할 필요도 없었다.
모론이 있는 곳은 레헤인야르 대망치의 협곡. 사방이 하얀 설원에서는 방향을 찾기 힘들지만, 이전에 한 번 도달한 이상 길을 헤맬 일도 없었다.
“제가 그 장소의 공간좌표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죠, 유진 님.”
좌표는 기억해도 이동은 직접 해야 한다. 그래도 저번 횡단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편하고 빨랐다. 저번에는 고작해야 늑대 썰매를 탔지만, 이번에는 다른 탈 것이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본녀에게 목도리를 감아주고 장갑을 끼워준 것이냐?”
수도 하멜른을 떠나, 북쪽 도시인 로스르크로 이동한 뒤. 마차를 타고서 성문 밖으로 이동했다.
라이미르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은자인 유진이 챙겨주는 것이 기쁘긴 했다. 성벽 밖의 설원까지 오는 데에는 마차를 탔기에 눈밭은 별로 걷지도 못한 데다, 유진의 손도 오래 잡지 못했다.
“라이, 네게 선물해 주고 싶어서.”
“오오오……!”
유진의 대답에 라이미르아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드래곤인 그녀는 이깟 날씨에 아무런 추위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이 감아준 목도리와 장갑, 털옷은 몸이 아닌 마음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평생을 아버지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는 라이미르아에게 있어서, 무심한 얼굴을 하고서 세심히 챙겨주는 유진은 이미 은자이며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저 말을 보라! 시무인에 몰래 입국할 때만 사용했던 ‘라이’라는 가명을 굳이 불렀다는 것은, 저 두 글자를 특별한 애칭으로 삼겠다는 뜻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선물, 선물이라니……!
라이미르아는 감격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목도리를 벗었다.
“어쩔 수 없도다, 드래곤인 본녀가 다른 종족을 등에 태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은자의 부탁이라면! 본녀는 기꺼이 등을 내주겠느니라.”
유진에게 선물 받은 장갑과 털옷, 장화까지 벗은 뒤에, 라이미르아는 새하얀 눈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진은 기겁하며 뛰어나가 라이미르아를 붙잡았다.
“여기서 말고 하늘 높은 데서 변신해!”
성벽 너머에서 드래곤이 나타났다가는 로스르크가 뒤집힐 것이 뻔했다.
“히잉…….”
인간의 모습에서 변신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라이미르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지만, 유진이 말하는 대로, 하늘 높이 구름 너머까지 날아오른 뒤에 폴리모프를 해제했다.
메르는 드래곤피어에 민감했다. 정교한 술식으로 이뤄진 사역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냐에게 술식을 보강받은 지금, 메르는 라이미르아가 무의식적으로 내뿜는 드래곤피어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렇게 덩치가 커지니까 징그럽게 보이네요.”
“본녀의 등 위에서 떠들지 마니라.”
어찌 됐든 라이미르아의, 드래곤의 등은 넓었고…… 그 자체만으로 안락하지는 않았다. 두껍고 커다란 비늘이 딱딱하고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리가 불편한 것은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한 법. 넓은 등 위에 푹신한 융단을 깔고, 세냐가 앞장서서 이런저런 마법을 쓰자, 눈발 날리는 하늘을 날고 있음에도 훈훈하고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300년 전에도 드래곤 하나 꼬셔서 이렇게 날았으면 얼마나 좋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세냐. 그 시대에서 드래곤을 타고 날아다녔다가는 마족이나 마물에게 집중공격을 당했을 겁니다.”
물론 지금 시대에는 그런 경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이 북쪽 설원은 몬스터가 득실거리기는 하지만, 정신이 돌아버린 몬스터라도 드래곤에게 덤비지는 않는다.
즉, 드래곤은 현존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완벽한 탈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천적이랄 것도 없으니 따로 경계할 필요도 없고, 결정적으로 빠르다.
비행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로스르크의 성벽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 속도라면 사나흘 즈음 대망치 협곡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출발한 지 나흘째에 대망치 협곡에 도착했다. 그마저도 밤마다 텐트를 치고 넉넉하게 휴식을 가져 나흘을 채운 것이지, 휴식 없이 이동만 집중했다면 이틀 만에 대망치 협곡에 도착했을 것이다.
빠르기는 하지만…… 중요하고 위급한, 필요할 때에 모론을 데려오기는 너무 늦다. 바벨의 전투에서 모론의 지원을 받으려면, 역시 시엘의 마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시간은 충분한가……?’
누아르의 꿈에서 보았던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마모될 대로 마모되어서,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던 모습. 고개를 들었을 때 보였던 눈동자.
……유폐의 마왕은…… 유진이 바벨을 오르는 것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약속의 끝’이 다가온다고 말했었다.
바벨에 도전하는 것과 관계없이, 약속이란 것이 끝나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유진이 생각하기에 ‘약속’이란 쇠사슬 묶인 의자에 앉은 베르무트 자체였다. 베르무트가, 제 몸을 바쳐서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는 것이다.
약속의 끝은, 베르무트가 더 이상 봉인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됨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베르무트가,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유진은 그런 ‘끝’을 바라지 않았다. 세냐도,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묻지는 않았으나, 모론 역시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마왕을 죽이는 것을 소망한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 멸망을 봉인하고 있는 베르무트도 구하고 싶었다.
베르무트가 완전히 망가져서, 베르무트가 아니게 되어버린다면ㅡ
‘…….’
상상만 해도 기분이 엿 같아졌다. 유진은 어떻게 해서든 제정신이고 멀쩡한, 오래오래 까지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수명이 남은 베르무트와 만나고 싶었다.
그 비밀 많고 속내를 알 수 없던 개자식의 얼굴을 주먹으로 몇 대 후려갈긴 뒤, 세냐에게는 네가 당했듯이 저 새끼의 가슴에도 바람구멍을 내놓으라고 채근할 것이다. 아마 성격 고약한 세냐는 기다렸다는 듯이 베르무트의 가슴을 뚫어버릴 테고, 그 뒤에는 아니스가 빛을 속삭이며 상처를 치료할 것이다.
‘모론, 그 새끼도 데려와서 베르무트를 두들겨 패라 해야지.’
베르무트 그 새끼의 부탁 때문에 어언 150년을 레헤인야르에 처박혀 있으니, 모론도 내심 베르무트를 패버리고 싶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각자의 묵은 원한을 청산한 뒤에는…….
아마, 다 같이 부둥켜안고 엉엉 울지 않을까. 하멜의 몸과는 달리, 지금의 육체는 이상하게 눈물샘이 예민해서…… 모든 것이 다, 잘, 끝나 버리면, 울고 싶지 않아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울고 나서, 며칠 동안 술을 퍼마시다가…….
“……?”
뭔가 온다. 벌러덩 누워 있던 유진은 홱 몸을 일으켰다.
[꺄아아악!]
까마득한 상공. 거대하고 높은 산맥보다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기묘한 우월감에 젖어 있던 라이미르아가 비명을 질렀다.
ㅡ쐐애애액!
하늘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커다란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시야에 잡힌 것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버린 나무였다. 저 아래에서, 웬 미친놈이 근처의 나무를 뽑아서 투창하듯이 던져 버린 것이다.
[꺄아아아아아!]
라이미르아가 비명을 지르는 동안에 나무가 가까워졌다. 그냥 나무라고 하지만, 날아오는 속도도 속도지만 안에 욱여넣은 ‘힘’은 헤츨링의 몸통을 간단하게 관통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야! 모론 멀쩡하다며!”
이런 공격을 해대는 미친놈은 모론 뿐이다. 세냐가 기겁하며 지팡이를 소환했고, 크리스티나도 급히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유진은 저 외침에 대답하지 않고, 라이미르아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꽈아앙! 유진의 발이 나무를 걷어찼다. 몸이 뒤로 쭉 밀려나고 다리가 얼얼했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절벽 위에 선 모론이 보였다. 저 망할 자식은 이번엔 나무가 아니라 도끼를 던지려 하고 있었다. 유진은 처음에 날아온 것이 도끼가 아니라 나무인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등신아!”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보니,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정신상태가 악화된 것 같지는 않았다.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모론을 향해 떨어졌다.
“하, 하멜?”
모론은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불과 방금 전까지 모론은 레헤인야르의 이면에서 누르를 죽였고, 수십 년간 그랬듯 누르의 시체를 라구르야란을 향해 집어 던졌다. 지독한 일상을 치르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데…….
웬 블랙드래곤 한 마리가 높다란 하늘 위를 날고 있지 않겠나. 다른 드래곤이라면 몰라도, ‘블랙드래곤’이라면 두 눈이 부릅떠질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 블랙드래곤이 눈동자 가득 오만함을 담아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거기에 누군가를 탐색하듯이 능선을 훑어보고 있다면.
짧은 순간, 모론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블랙드래곤. 마룡. 라이자키아. 그리고, 세냐.
대망치 협곡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이면을 들락거리는 모론은 세상의 소문에 귀가 밝지 않았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마룡을 쓰러트리고, 광란의 마왕을 쓰러트렸다는 소문도 아직 듣지 못했다. 그런 모론이 제 머리 위에 블랙드래곤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일단 취한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떨어트린다.’
사정은 일단 떨어트리고 나서 알면 되는 것. 그래서 가까이 있던 나무를 집어 던졌다.
“이 등신 새끼. 아무리 그래도 나무를 집어 던져? 애가 맞고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 하멜.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 네가 말하는 ‘애’는 저 블랙드래곤을 말하는 것인가?”
“그럼 애가 쟤 말고 또 누가 있냐?”
“드래곤이 나무를 맞아 다칠 리가 없잖은가.”
“도끼도 던지려고 했잖아! 그리고 새끼야, 네가 던진 나무는 드래곤도 잘못 맞으면 뒤져!”
모론은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유진을 쳐다보다가, 우선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팔을 활짝 벌리더니 유진을 끌어안았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갑다, 하멜. 그런데 왜 네가 여기 있는 것인가?”
“놔라!”
“설마 하멜, 내가 걱정되어 찾아온 것인가! 나를 두들겨 패러 온 것인가? 으하하! 걱정은 고맙지만, 나는 아직 멀쩡…….”
모론의 말이 도중에 뚝 끊어졌다. 그는 유진을 품에서 놓지 않고,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내려오는 세냐의 모습이 보였다.
“허어…….”
떨리며 벌어진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모론의 품 안에서 버둥거리던 유진은 이후의 일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허어어엉!”
모론이 오열하고, 유진의 머리 위에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빌어먹을 환생 404화
“그러니까…….”
모론은 눈물에 흠뻑 젖은 수염을 털었다. 매선 추위에 의해 수염에서는 얼음 알갱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 진풍경에 메르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참았다. 다른 때였으면 웃음을 참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마음 가는 대로 웃을 수가 없었다.
“으윽…… 흐윽…….”
바로 옆에서 세냐가 아직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세냐와 모론의 재회는 어언 200년 만이었고, 서로가 보낸 200년이 절대로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르는 저렇게 울어대는 세냐의 앞에서 도저히 웃음을 터트릴 수가 없었다.
“그……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었다는 것이냐? 다른 마족도 아니고, 그 아이리스가?”
모론이 벌게진 눈을 끔벅거렸다.
모론이 기억하는 아이리스는…… 강하긴 했다. 하지만 마왕이 될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마왕이 된 아이리스가 하멜, 네게 죽었고…… 하멜…… 네가…… 신이라고?”
모론은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자코 듣기는 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알겠다. 이런 문제로 동료들이 장난을 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멜이 신이라고? 모론은 코를 훌쩍거리면서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냐.”
유진은 당당히 가슴을 펴고서 대답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신이었다는 말입니다.”
세냐의 뺨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던 아니스가 말을 덧붙였다. 정확한 지적이었지만, 그 말이 오히려 모론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신이 아니라 옛날이 신이라면…… 우리와 함께 여행하던 하멜이 신이었다는 말인가? 아니스, 세냐, 우리는 신과 함께 여행하던 것인가?”
“아니 그 옛날이 아니라…… 전생의 전생에 신이었다고.”
“전생의 전생……?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모론이 눈을 끔벅거렸다. 굳이 저 등신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일까…… 유진은 그런 생각을 했다.
“됐고, 모론, 잘 지냈냐?”
“예전보다는 훨씬 잘 지낸 것 같다.”
여전히 이해는 잘되지 않았지만, 모론 또한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모론에게 있어서 유진이 전생의 전생에 신이었다는 것이나, 아이리스가 마왕이 되었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도 그럭저럭 평범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게 되었구나.”
저런 것보다 지금이 중요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던 세냐와 재회했다. 위중한 상처를 입고 봉인되었다고 들었는데, 직접 본 세냐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옛날.
모론의 눈동자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하멜이 가끔 이야기하곤 했던, 튜라스 변경이라는 고향을 찾아가서…… 다른 누군가가 찾아낼 수 없을, 깊은 지하에 무덤을 만들었을 때. 모두가 하멜을 애도했다. 울면서 하멜의 이름을 부르고 추억을 떠올렸다. 조각상을 일으켜 세우고, 비석에 이름을 적었다.
그 뒤에는,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고 생각한다.
아니스는 유라스에 돌아갔다. 세냐는 아롯에서 녹색마탑주를 지냈다. 베르무트도 키옐로 돌아가, 대공의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모론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수십 년 동안 바쁘게 지냈다. 가끔, 동료들의 소식을 들었다. 베르무트는 찾아가도 거의 만나지 못했지만, 세냐나 아니스는 가끔 찾아가서 만난 적이 있었다.
하멜의 죽음은 모두를 바꾸었다.
그중에서도 세냐는.
마경을 떠돌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낄 정도로 변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세냐는 아롯에서 지낼 때와 달리 표정이 다채로웠다. 잘 울고, 잘 웃고, 그런 자신이 괜히 민망해서 하멜을 걷어차고, 아니스가 웃고, 하멜은 투덜거리는.
모론은 우두커니 서서 동료들을 보았다. 환생한 하멜의 모습은 바뀌었지만, 저렇게 선 3명은ㅡ 모론이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모론, 왜 또 우는 겁니까?”
“세냐도 엉엉 울었잖아. 내 생각에는 말이야,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많아지나 봐.”
“아하, 그럴듯한 말입니다, 하멜. 실제로 저와 당신은 울지 않고 있죠.”
아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300년을 정직하게 살아온 모론과 세냐와 달리, 아니스는 젊은 크리스티나의 육체에 빙의한 상태다. 그렇기에 아니스는, 유진이 나이를 가지고 세냐를 놀릴 때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한 마디씩 거들 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마법이 어쩌고 하면서 날뛰었겠지만, 지금 세냐의 감정에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세냐와 모론은 다시 서로를 부둥켜안고서 펑펑 울었다.
유진은 그런 둘을 꼴사납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모론이 무서워 등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라이미르아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무서워 안 해도 돼. 저 새끼 등신이야.”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모론의 눈물이 멎었다. 한쪽 바위에 앉아 있던 유진은, 망토에 묻은 눈을 털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 울었냐?”
“재수 없는 놈.”
세냐가 빨개진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200년 만에 친구 만나면 울 수도 있는 거지, 왜 자꾸 옆에서 얄밉게 굴어?”
“나는 저번에 만났으니까.”
“하멜을 탓하지 마십시오, 세냐. 하멜이 재수 없게 구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하멜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엄청 울지 않았습니까? 제 앞에서도 울었고, 모론을 만났을 때도 울었습니다.”
“야…… 야, 아니스, 내가 언제 울었어?”
“그럼 안 울었습니까? 하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비참하고 외롭게 죽은 저와의 재회에서, 그리고 백여 년 동안 고독하고 괴롭게 싸워 온 모론과의 재회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입니까?”
그때 울었던가? 유진의 눈동자가 부르르 흔들렸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울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기서 ‘울지 않았다’고 우겼다가는 모두에게 개새끼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슬프면…… 우는 게 당연한 거지.”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손바닥 뒤집듯이 가볍게 바뀐 태도에 세냐의 두 눈이 얇아졌지만, 모론은 껄껄 웃으며 옆에 두었던 도끼를 어깨에 걸쳤다.
“계속 여기 있을 건가? 저 위에 올라가면 내가 지내는 동굴이 있다. 그곳으로 가자.”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트마치 때 만나기는 했지만, 이 산맥에서 모론이 어떻게 머무르는지는 자세히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일국을 건국한 왕이니, 설산 어딘가에 작은 성이라도 세워두고 지내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동굴이라니…… 모론다운 일이긴 했다.
모론의 안내로 도착한 동굴은,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로 보이진 않았다. 아마 모론이 직접 만든 것이리라. 동굴 안은 수십 년 넘게 머무른 곳이라서인지 생활에 필요한 것은 대부분이 갖춰져 있었으며, 심지어 안쪽에서는 온천도 흐르고 있었다.
“설마 지금 들어가려는 건 아니지?”
“이 온천은 수십 년 동안 모론이 혼자 쓴 거잖아.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여기를 왜 들어가?”
“흐르는 물이니 깨끗할 겁니다.”
“그래도 싫어……!”
짧은 잡담을 나눈 뒤에, 대충 정리된 상에 모여 앉았다.
“라이자키아를 죽였다. 세냐를 구했다. 마왕이 된 아이리스를 죽였다…… 이곳에 온 것은 저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서인가?”
세냐가 봉인에서 깨어났으니 모론과 재회하기 위해 설산에 올 예정은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 볼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확인할 것이 몇 개 있어.”
월광검에 대해서는 별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아이리스와의 전투에서 폭주하기는 했지만, 그때의 유진과 지금의 유진은 다르다.
월광검이 폭주했을 당시에 백염식은 ‘별’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의 백염식은 더 이상 별로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유진의 백염식은 라이언하트에 전례가 없는 새로운 것이 되었고, 그러한 변화에 따른 힘은 유진 본인이 체감하고 있었다.
월광검이 폭주했던 것은ㅡ 당시 유진이 월광검의 힘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검합일이 불완전했다. 달빛에 불꽃을 섞던 중에 역으로 잡아먹혔다.
“모론.”
만에 하나 이번에도 폭주하게 된다면.
“네가 내 팔을 뜯어라.”
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다, 하멜.”
모론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새끼들 미친 겁니까?”
아니스는 기겁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유진의 멱살을 잡았다.
“이보십시오, 하멜, 당신은 인간의 팔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전생에는 있다가도 없는 것이었지. 나나 모론에게는 말이야.”
“그립구나, 하멜,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함정에 빠져 내 다리가 잘렸을 때. 아니스는…… 아니스는 짓궂게도, 내 다리를 반대로 붙여 버렸지.”
“그건 아니스 마음도 이해해야 돼. 모론 네가 등신처럼 앞으로 돌진하다가 그 꼴이 났던 것 아냐?”
유진은 모론과 함께 먼 추억을 회상했다. 아직 멱살을 잡고 있던 아니스는, 유진의 표정이 추억을 떠올리며 아련해지자 거세게 멱살을 흔들었다.
“전생에 당신네들 팔다리가 있다 없다 했던 것은 순전히 당신들이 병신처럼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저는 당신들 팔다리가 잘리거나 으깨져도 잘, 재생을, 해주었지요! 등에서 피를 쏟아가며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팔다리를 재생시킬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스터, 모든 것은 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크리스티나가 죄책감을 느끼며 사과하고 있습니다! 팔다리를 재생시킨다는 비정상적인 일을 못 하는 것에 말입니다!”
“진짜로 팔 뜯길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안심해.”
유진은 아니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하지만 저 말에 아니스의 눈썹이 오히려 위로 치솟았다.
“안심하라면서 왜 저런 말을 하는 겁니까?”
“결의의 표명이랄까…….”
“미친 자식!”
“무조건 안전하게, 다칠 일 없이, 그렇게만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상대가 상대인 이상 각오는 항상 해야 하는 거고, 자칫하다가는 피가 흐를 수도 있는 거야.”
“무모한 짓을 하겠다는 말을 뭐 그리 포장하는 겁니까?”
“성공하면 월광검을 더 잘 쓸 수 있게 돼.”
유진은 웃지 않고 말했다. 서늘한 안광에 아니스는 움찔하고서 멱살을 놓았다.
“위험성이 두렵다면, 월광검은 앞으로 쓸 수 없게 되는 거고. 이 문제는 시무인에 돌아가는 배에서 이야기를 끝냈을 텐데?”
“……그때 분명히 말했습니다, 유진 님. 당신의 결정이 당신을 파멸로 향하게 한다면, 저와 아니스 님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겁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소중히 여기신다면, 부디 당신의 안위를 신경 써달라고 말입니다.”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 돌아가 털썩 앉았고, 아니스가 술병의 뚜껑을 열었다.
“하멜. 당신이 팔을 뜯으라는 헛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저는 가만히 있었을 겁니다.”
“그만큼 괜찮다는 거지.”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주고, 다시 모론을 보았다.
“최근…… 그, 누르가 자주 나오거나…… 라구르야란이 이상하거나. 그런 적은 없었냐?”
어떠한 징조가 있지 않을까 염려했다. 월광검이 폭주하면서 베르무트와 잠깐이나마 닿았다. 그리고 라비스타를 찾아간 누아르 역시 베르무트에게 다가갔다.
만약, 추측한 대로 베르무트가 멸망의 봉인이라면…… 섣불리 다가가게 된 것으로 무언가 악영향이 생겼을 수도 있지 않은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구나.”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모론이 입을 열었다.
“우선, 하멜, 누르는 항상 다르게 나온다. 어느 날은 수십 마리가 나타날 때도 있고, 어느 날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그것은 최근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산맥을 지킨 150년 동안 항상 그랬다.”
누르의 출현에 패턴이랄 것은 없다.
“나도 한때는 누르의 출현을 예측해 보려 여러 시도를 했었다. 오늘 얼마나 나타날지, 또 언제 나타나지 않을지. 그것을 예측하는 것만으로도 내 이성을 맑게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에 예측이랄 것은 통하지 않았다.”
유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게는 아가로트의 기억이 잔재처럼 남아 있다. 특히나 선명한 것은, 아가로트의 말년이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세상의 반대쪽에서 괴물이 나타났다. 워낙에 수가 많고 흉포한 데다 이질적이라,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괴물과의 전쟁은 길었고, 쉬웠으며, 지독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괴물의 수는 끝이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나타났다.
놈들이 나타나는 것에는 징조랄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갑자기 저 ‘끝’에 나타나서,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아가로트와 괴물의 전쟁은 길었고, 쉬웠고, 지독했지만ㅡ 허무하게 끝났다.
갑자기 멸망의 마왕이 강림했기 때문이다.
“라구르야란은…… 언제나 똑같이 보였다.”
아가로트의 기억은 유진에게 여러 가지를 경계하게 만들었다.
괴물, 누르는 멸망의 권속. 그, 자아조차 없는 하찮고 약한 것에 ‘권속’이라 부름은 과분하지 않은가 싶으나, 유진은 누르가 멸망의 징조인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징조란 기미이니, 언젠가는 일이 벌어진다. 누르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언젠가 멸망의 마왕이 강림한다. 베르무트가 멸망을 봉인하고는 있지만…… 150년 전에 시작된 징조. 망가지고 초췌해진 베르무트. 유폐의 마왕이 고했던 약속의 끝.
라구르야란의 회색 바다.
“모론, 나는 네 눈을 믿는다.”
300년 전에, 일행 중에서 가장 멀리 볼 수 있던 것은 모론이다. 저 설원의 대전사는 아무런 마법을 쓰지 않아도, 세냐가 천리안의 마법을 썼을 때처럼 먼 곳을 정확하게 보았다.
“심지어 지금 네 눈은 예전보다 더 밝지.”
모론의 꿈에 나타난 베르무트는, 끝을 경계하라는 말과 함께 모론에게 두 가지의 힘을 주었다.
누르의 시체를 던져 넣을 레헤인야르의 이면과, 보이지 말아야 할 것마저 볼 수 있게 하는 눈. 그 눈으로 모론은 이 커다란 산 어디에서 누르가 나타나건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고, 크리스티나에 빙의한 아니스의 영혼마저 보았으며, 유진을 처음 보았을 때도 바로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네가 라구르야란이 옛날과 똑같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똑같은 것이겠지. 징조는 징조일 뿐인 거야.”
모론은 유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세냐와 아니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온 것은 모론을 만나기 위해서, 월광검을 다시 쥐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었던 건가?
“……하멜. 대체 무엇을…….”
“라구르야란에 나가보려고.”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별것 아냐. 라구르야란의 끝에 바다가 있었지? 쪽배를 타고 갈까, 아니면 그냥 날아갈까, 바다 위를 걸을…….”
“자, 잠깐, 잠깐 하멜, 라구르야란에 나가겠다고? 그 바다를 건너겠다는 말인가?”
모론이 다급히 물었다.
레헤인야르의 너머, 라구르야란. 아무것도 없는 땅. 넘어가서는 안 될 땅. 세상의 끝. 태양도 달도 별도 뜨지 않는 곳. 흙발로 짓밟힌 눈처럼 지저분한 뿌연 색의 하늘이 펼쳐진 곳. 그 너머의 얼어붙은 바다.
누구도 살지 않고, 누구도 살지 못하는 세계. 그곳이 라구르야란이다.
“멀리 안 가. 그냥 살짝만 나가보려고.”
“하멜……!”
“왜 기겁하고 그래? 멀리 가지도 않는다니까? 당장 가겠다는 것도 아니야, 일단 월광검 문제부터 해결하고. 살아 있는 누르도 한번 봐둔 뒤에 갈 거다.”
“내…… 내 눈으로 보았을 때, 예전과 변함이 없게 느껴지긴 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의견일 뿐이다. 나는, 나의…… 정신은, 그리 맑지 않았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잘못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단 말이다.”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유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론, 네 정신이 맛이 갔던 것은 뭐 사실인데, 그렇다고 네 기억마저 흐려진 것은 아니었잖아. 네 눈이 뿌옇게 된 것도 아니었고.”
“…….”
“그럼 됐어.”
믿고 안 믿고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론이 그렇게 보았다면 그렇게 보인 것일 뿐이다.
빌어먹을 환생 405화
월광검을 쥐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해도 별문제가 있을까 싶었지만, 혹시라도 동굴이 무너져버린다면…… 세냐와 아니스가 그럴 줄 알았다며 놀려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라구르야란으로는 왜 가겠다는 거야?”
나름대로 이유에 대해 궁리하던 세냐가 말을 걸어왔다.
라구르야란, 이라는 말은 설원 원주민들이나 사용하는 언어인데, 대륙 공용어로는 ‘넘어가서는 안 될 땅’이란 뜻이다.
“세상이 둥글다는 것을 직접 증명이라도 해보고 싶은 거야?”
그 이야기는 이제 와서는 직접 증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의 학자들이 관측을 끝내고 증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ㅡ 그런 주제에, 북쪽 끝과 남쪽 끝이 정말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누구도 확인하지는 못했다.
레헤인야르 너머에는 라구르야란이 있다.
남해 솔가르타 해역 너머에는 머나먼 바다가 있다.
둘은 이어져 있을 테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확인한 적은 없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야.”
“그럼 뭔데?”
“제대로 봐두고 싶거든.”
동굴 밖은 어느새 밤이었다. 드물게도 눈은 내리지 않았고, 덕분에 밤하늘도 맑아 잘 보였다.
유진은 밤하늘에 수놓은 별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서 보는 하늘은 태양이 보이고, 달이 보이고, 별이 보인다. 하지만 경계선이라 할 수 있을 대망치 협곡을 지나, 레헤인야르의 정상을 넘으면ㅡ 하늘이 바뀌어 버린다. 뿌옇고, 아무것도 뜨지 않는…….
베르무트가 앉아 있던 공허와 똑같이 된다.
“아가로트는 멸망의 마왕과 싸우다가 죽었잖아.”
이어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유진이 처음 보았던 아가로트의 기억. 시체의 산 위에 앉은 아가로트.
……하나가 더 있다. 피 냄새가 그득한 전장. 시체가 흔한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전장. 절망감에 어깨를 늘어트리고서 비틀비틀 걷던 남자.
아가로트의 전쟁에서 그런 기억은 없다. 전쟁의 신인 아가로트는 항상 승리만 했던 것은 아니다. 패배도 여러 번 겪었다. 하지만 아가로트에게 있어 패배는 결코 절망할 거리가 아니었다. 승리와 패배, 모두가 전쟁이라 할 수 있으니.
하지만, 암실에서 보았던 아가로트는 절망해 있었다. 그가 걷는 전장은 패배해 버린 전장이 아닌, 모든 것이 끝나 버린 전장이었다.
유진은 아가로트의 ‘죽음’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유폐의 마왕도 말해주었다. 누르와의 전쟁에서 멸망의 마왕이 강림했을 때, 아가로트는 물러서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죽었다.
“누르가 넘어오는 라구르야란으로 나아가면, 아가로트가 죽었을 당시의 기억이 감응되어 떠오를지도 모르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두 개의 단편 사이의 공백을 이해하거나…… 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과 어떻게 싸웠는지. 멸망의 마왕이 얼마나 강한지, 그런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고.”
유폐의 마왕은 저런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라구르야란에 나가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가능성 정도의 이야기다. 하지만 해볼 가치는 있었다. 솔가르타 해역에서 아가로트의 기억을 떠올리고, 전생의 전생을 자각했던 것은 여러 조건이 맞물렸기 때문.
성물인 반지, 그리고ㅡ 심해에 파묻힌, 아가로트를 숭배하던 도시. 그와 더불어, 마왕이 된 아이리스와의 전투에서의 격정 따위가 무의식에 잠재되었던 먼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금은 어떤가? 성물보다 더한 신검을 가슴에 가지고 있다. 내가 아가로트라는 자각이 있다. 아가로트를 죽이고, 신화시대에 종말을 선언한 ‘바다’가 있다.
무덤덤한 목소리. 전생에 이어 전생의 전생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세냐로서는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보통의 사람은 자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인격이 붕괴되지 않을까?
‘네 자아가 특별한 것일까……?’
아득한 옛날, 신화시대에 태어나, 인간의 몸으로 신격에 도달한 존재. ‘특별’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자아. 세냐와 아니스, 모론은 멀찍이 가서 멈춰 선 유진을 응시했다.
“그럼 슬슬 해볼까.”
유진은 손에 쥔 월광검을 들어 올렸다. 고작 그렇게 움직인 것뿐인데 세냐와 아니스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그녀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각자 준비에 들어갔고, 모론도 다르지 않았다.
“하멜. 만약 해야 한다면, 네 팔을 자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뽑아버리는 것이 좋은가?”
“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기왕이면 팔꿈치 밑으로 자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깔끔하게 손목만 자르거나.”
“알겠다.”
모론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히 유진은 월광검보다 모론의 저런 표정이 더 두려웠다.
백염식을 일으켜 본다.
일곱 개의 별은 사라졌다. 이제 유진의 가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뜬 우주가 있다. 설산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맑고, 별은 무수히 많으나, 유진의 가슴에 깃든 우주에 비하자면 저 별 뜬 밤하늘조차도 하찮다.
마나의 원자 하나하나가 별의 불티. 기존의 백염식이 별을 공명하고 회전시켰다면, 이제 유진의 백염식은 우주를 공명시킨다. 우주를 구성하는 별을 불꽃으로 변환한다. 그렇게 일으키는 불꽃은, 밤하늘처럼 검다.
화아악!
검은 불꽃이 일어났다. 타오르는 불길이 갈기처럼 흩날렸다. 세냐와 아니스는 저 불꽃을 이미 보았으나, 모론은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다. 모론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리며 주먹을 쥐었다.
“멋지군.”
모론은 저 힘을 평하는 데에 다른 수식은 덧붙이지 않았다.
처음 보아 느낀 인상은…… 강함과 결속. 이전에 주먹을 맞대었을 때 느꼈던 불꽃도 강하기는 했지만ㅡ 지금처럼 완전한 결속은 느끼지 못했다. 그때에는 유진이 불꽃을 두른 것 같았지만, 지금은 마치 유진이 불꽃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멜, 만약 지금의 나와 네가 싸운다면…… 저번처럼 쉽게 이기진 못할 것 같다.”
“미안한데 그때도 무기만 들었으면 내가 이겼어.”
“으음…….”
“지금은 뭐, 그래, 무기를 쓰지 않고, 네게 유리한, 너만 잘하는 맨몸 싸움을 해도…… 할 만하다? 그럼 말 다 했지 뭐.”
딱히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 모론에게 저런 평가를 들이니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모론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모론은 하멜을 친구로서 좋아하고, 전사로서 존경하고 있다. 하지만 좋아하고 존경은 하지만, 자신이 하멜보다 약하단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한번 겨뤄보도록 하지.”
“니들이 애니? 서로 누가 세니 약하니 그게 뭐가 중요해?”
“저건 나이랑 상관없이 중요한 거야. 그러는 세냐 너도, 아롯에서 녹탑주가…….”
“‘전’ 녹탑주.”
“그래…… 전 녹탑주가 너를 쪼오끔 얕잡아 보니까 바로 눈 뒤집혀서 패버렸잖아.”
“패버리다니! 말은 바로 해, 패버린 것이 아니라 선배로서 교육을 해준 거야. 야, 그리고 그게 지금이랑 경우가 같아? 그 자식이 쓰는 서클 마법식은 내가 만든 거라고! 그런데 까마득한 선배에 대한 존경심 없이 그토록 무례하게 굴면, 당연히 손수 교육을 해줘야지!”
“둘이 뭐가 다르다고…….”
잠자코 듣고 있던 아니스가 투덜거렸다.
300년 전에도 그랬지만, 하멜과 세냐의 성격은 닮은 구석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죽이 잘 맞는 것이다.
한때 아니스는 저렇게나 닮은 둘을 조금 부러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처럼 경박해지고 싶다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렇게 추해지고 경박해지려면 인간으로서의 존엄 일부를 포기해야 할 것만 같았다.
끼릭.
아교를 발라 붙인 것처럼 철썩 달라붙어 있던 칼집에서 칼자루가 떨어진다. 예전에 월광검을 뽑을 때에는, 마나를 불어넣은 순간에 달빛이 넘실거리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달빛이 일어나지 않는다. 완전히 칼집에서 빠져나온 월광검은ㅡ 예전처럼 불길하고 두렵기는커녕, 초라하고 추레해 보였다. 예전에 카자드 구릉지의 광산에서 회수했던 파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모습은 당장에라도 산산조각이 나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쓸 수 있는 것 맞아?”
세냐가 경계를 누그러트리지 않고서 물었다. 유진은 대답 대신, 천천히 월광검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ㅡ화르르륵! 유진의 몸을 덮은 검은 불꽃이 월광검으로 옮겨졌다.
월광검이 박살 났다. 깨지기 직전과 다름없던 검신이 소리 없이 터지더니, 달라붙어 있던 파편 수백 개가 비산했다.
그 광경에 세냐가 놀란 소리를 냈고, 아니스가 빛을 일으켰다. 모론도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월광검이 터져 버리니 유진도 놀랐지만, 지금 이것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서는 손을 들어 일행의 행동을 제지했다.
실제로 흩어졌던 월광검의 파편들은, 폭발의 기세처럼 멀찍이 날아가지는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ㅡ 유진과 칼자루 주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진의 불꽃 범위 안에 고정되었다.
이윽고 불꽃의 흐름에 따라 파편들이 부유했다. 흩날리는 불티에 파편이 깃들었다.
합일(合一). 아이리스와의 전투에서 도달했던 합일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때의 합일은, 유진의 분노와 짜증으로 억지로 이뤄낸 것이었다.
무식한 힘으로만 칼자루를 으스러트리고, 월광을 지배하기 위해 마나를 쏟아부었다. 결과적으로 월광과 마나를 양립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월광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해 역으로 삼켜지고 폭주가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ㅡ 자연스럽게 함께 움직이고 있다. 유진은 차분한 눈으로 떠도는 파편들을 보았다. 의지가 바라자 파편이 하나의 의지에 따라 모여들었다.
쩌저적! 수백 개의 파편이 칼자루에 달라붙어 검신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렇게 형성된 검신은 여전히 반 토막밖에 되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균열은 가지 않고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우우우……!
검은 불꽃 안에서 달빛이 피어났다. 공허하리만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월광검에 다시금 불길함이 나타났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월광검의 끔찍한 불길함마저도 유진의 관조 아래에 있었다. 유진의 의지는 결코 월광검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맙소사…….”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월광검이 폭주하던 때. 세냐는 유진의 바로 곁에 있었다. 그때 유진에게 느껴진 불길함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지금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때 유진의 월광검은, ‘불길함’ 하나만을 본다면 베르무트의 월광검보다 더했다. 베르무트가 휘둘렀던 월광검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할지언정 철저하게 베르무트의 통제를 따랐으나, 바다에서 폭주하던 월광검은 피아구분을 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진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불길했다.
지금은…… 다르다. 여전히 저 달빛은 껄끄럽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비틀고 속을 역하게 만드는 불길함을 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저 불길한 달빛과, 밤하늘처럼 검은 불꽃의 어울림은 아름다웠다.
“하멜……!”
멍한 눈으로 유진을 보고 있던 모론이 대뜸 고함을 질렀다. 그의 밝은 눈은 유진의 뒤편에서 괴물이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설산의 레인저는 누르를 두고서, 몬스터이면서 몬스터와는 다르다고 했다. 마물인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누르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몬스터란 결국 괴물을 말하는 것이기에, 저 설명은 모두가 옳은 말이다.
멸망의 징조인 저 괴물은, 여태까지 그랬듯이 갑자기 나타났다. 공간의 일그러짐이나 그런 종류의 현상도 동반하지 않고, 그냥 갑자기 나타나 버렸다. 유진도 등 뒤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누르는 저번에도 봤다. 거인만큼이나 큰 유인원계에, 머리에는 뿔을 단 모습. 그 모습이 누르의 기본은 아니다. 신화시대에 나타났던 누르들도 모두가 제각각으로 다른 모습을 가진 괴물이었다.
지금의 누르‘들’은 그때 보았던 누르와는 달랐다. 거인만큼 커다란 누르들 십여 마리가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흉흉한 눈동자. 크륵거리는 숨소리. 존재 자체에서 발하는 불길함. 이렇게 대면하니 신화시대의 괴물과 누르가 똑같다는 것이 새삼 확인되었다.
“하멜! 물러서라!”
뒤에서 모론이 고함을 질렀다.
별로 이해되는 외침은 아니었다. 이깟 괴물이 뭐가 위험하다고 물러서라 마라인가. 아마 모론이 생각하기에, 지금 유진이 월광검에 집중하느라 전투가 불가능하다 판단한 모양이었다.
꼭 그렇지도 않았다. 월광검과의 신검합일은 이제 끝났고, 유진은 얼마든지 전투가 가능했다.
칼날이 얼마나 잘 드는지 시험이나 해볼까.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월광검을 들었다. 반 토막 난 월광검의 칼날이 누르에게 향했다.
쿠웅.
당연히 덤벼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모든 누르가 동시에 유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검은 불꽃 속에서 스멀거리는 월광을 응시하는 누르의 모든 눈동자에 두려움이 떠돌았다.
광기, 살의, 흉포함, 그런 종류의 감정은 모두가 말살되었다. 저 단순한 괴물들은 경외나 경배 같은 감정은 갖지 못했으나, ‘월광검’에는 절대로 항거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이럴 수가…….”
누르가 무릎을 꿇는 모습은 처음 본다. 모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누르들에게 다가갔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누르를 죽였다. 누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파악하기 위해 여러 시도도 해보았다. 죽이지 않고 전신을 박살 내서 방치한 적도 있고, 고문을 해본 적도 있으며, 혹여 동족의식이 있지 않을까 해서 인질을 잡아본 적도 있다.
모두 다 통하지 않았다. 누르는 대화도 이해도 소통도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공포도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저 눈동자에 실린 감정은 틀림없는 공포였다.
“하멜,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흠.”
잠시 월광검을 보던 유진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 빛에서 지들 주인을 느꼈나 봐.”
월광검은 멸망의 검. 월광검이 가진 불길함은 건재하다. 오히려, 지금은 유진의 불꽃에 의해 억눌려 있다. 어떤 의미로는 그 불길함마저 유진의 불꽃에 ‘섞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유진은 혀를 차면서 월광검을 휘둘렀다.
달빛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 흐르는 참격이 모든 누르의 목을 베었다. 놈들은 목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비명은커녕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잘린 머리가 아래로 떨어진다. 절단면에서 아직 피는 흐르지 않는다.
머리가 눈밭에 닿는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어느새 이곳은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론이 누르의 시체를 쌓아온, 레헤인야르의 이면이 되었다.
“뭐야?”
유진은 놀라서 모론을 쳐다보았다.
“말이라도 하고 결계를 열어야지!”
누르는 시체조차도 지독한 불길함을 내뿜는다. 땅에 묻거나 태워도 그 불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저 괴물의 시체가 많아졌다가는 설산과 세상에 영향이 갈 테니, 누르의 시체는 현실이 아닌 이면에 처박아야 한다.
모론이 시체를 버리기 위해 이면의 문을 연 모양이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 내가 아니다.”
하지만 모론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 대답에 유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모론이 열지 않았다면, 갑자기 왜 이면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월광검?’
모론을 찾아서 처음 이면에 들어갔을 때. 월광검이 열쇠로 쓰였었다. 하지만 그때랑 지금은 현상이 다르지 않나? 유진은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헤인야르, 대망치 협곡의 이면. 마치 300년 전의 헬무드처럼 모든 것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곳. 인간에게 지옥과 다름없던 흉측하고 울퉁불퉁한 대지. 비죽비죽하거나 배배 꼬인 산.
마치 어린아이가 못난 그림 솜씨로 지옥을 그린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누르의 시체에서 나온 독기(毒氣)에 의해 변질된 것이다. 최초의 이 공간은 설산을 거울로 비춘 것과 똑같았다는데, 100년 넘도록 쌓인 시체가 내뿜는 독기가 풍경을 지옥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
월광검이 진동했다. 유진은 움찔 놀라서 월광검을 쳐다보았다.
잡아먹고 있다.
그렇게 느꼈다. 월광검의 달빛이, 이 세상의 독기와 불길함을 잡아먹고 있다. 잡아먹어서, 살을 찌우고 있다.
ㅡ콰르르르! 유진을 중심으로 달빛이 회오리쳤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세냐가 비명을 지르며 프로스트를 높이 치켜들었다. 모론도 지금이라고 생각하고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여전히 유진은 그 둘의 반응이 무서웠다. 그는 월광검을 높이 들고서 버럭 외쳤다.
“아니야! 나 괜찮아!”
“괜찮기는! 누가 봐도 안 괜찮아 보이거든?!”
“아니, 진짜 괜찮다고! 괜찮으니까 모론 이 개새끼야, 도끼 내려놔!”
거짓말이 아니었다. 유진의 자아는 여전히 또렷하고, 월광검은 통제를 따르고 있다.
다만ㅡ 이 공간에 녹아든 독기와 불길함이, 멋대로 움직이며 회오리칠 뿐이었다.
“그럼 왜 이러는…….”
말을 잇던 아니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회오리치는 달빛이 높이 세운 월광검으로 흘러갔다.
반 토막 난 검신에 달빛이 이어졌다.
빌어먹을 환생 406화
월광검의 검신은 부러져 있다.
먼 과거 베르무트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후에.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저 불길한 검은 유진에게 계승되었다. 몇 년 전 카자드 구릉지의 광산에 쳐들어가 파편을 긁어모으기는 했다만 그래 봤자 멀쩡하던 시절 검신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칼날이…….’
셀 수 없이 많은 누르의 시체가 뿜어낸 독기. 100여년에 걸쳐 축적된 불길한 독기가 달빛에 섞이고, 칼날과 이어지고 있다.
유진은 점점 길게 뻗어 나가는 검신을 노려보았다.
폭주.
이 변화는 유진이 의도한 바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 월광검에 일어난 것이 폭주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유진은 지금의 현상에서 위기감이란 것은 느낄 수가 없었다.
‘이미 섞였어.’
유진의 불꽃과 달빛은 섞여서 하나가 되었다. 이 세계에 축적된 불길한 독기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월광검을 강화하고 있다. 파편을 더 모을 필요 없이 검신을 수복하고 있다.
하지만 ‘월광검’ 자체에 유진의 힘이 섞여 하나가 된 지금. 월광검의 힘이 더 커진들, 유진의 통제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ㅡ화아악!
회오리치던 달빛이 소멸했다. 그 중심에 홀로 선 유진은, 높이 들고 있던 월광검을 천천히 앞으로 내렸다.
일직선으로 뻗은 검신. 연마를 거치지 않은 칼끝은 뭉툭하여 마치 몽둥이처럼 느껴졌지만, 애당초 월광검이란 베거나 찌르는 식으로 사용하는 검이 아니다.
똑같다…… 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300년 전. 부서지기 이전의, 베르무트가 사용했던 월광검. 그때의 월광검과 지금의 월광검의 감각은,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다르다’. 하지만 쭉 늘어난 검신 자체는 예전과 비슷했다.
“묘하구만.”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월광검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칙칙한 회백색의 검신은 그대로인데, 살짝 힘을 불어넣어 보니 은은한 달빛이 켜졌다.
이것부터가 전과는 달랐다. 본래 월광검은, 마나를 불어넣으면 난폭한 달빛을 내뿜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살벌하고 커다란 빛을 내뿜는 대신, 효율 좋게 응축시킨 검강처럼 검신 표면만 얇게 덮을 뿐이었다.
‘약해진 것이 아니야.’
유진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면서 월광검을 움직여 보았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는 칼날. 표면을 덮으며 검신의 움직임을 따르는 달빛이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것이 보였다. 본래 마구잡이로 뿜어내던 달빛이, 이제는 완전하게 하나로 뭉쳐진 것이다.
심지어 여유가 있다.
그 사실이 유진의 팔뚝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아이리스와의 전투보다 껄끄럽고 강한데, 최대출력이 아니라니……. 심지어 지금의 월광검은 유진의 마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약의 이야기지만, 월광검에 공검을 덮는다면? 월광검의 달빛을 불꽃과 섞여 이클립스를 생성한다면?
“허…….”
솔직히 어떤 위력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뒷감당이 두려워서 차마 여기서 시험해 볼 수도 없었다.
유진은 길쭉해진 월광검을 칼집에 넣으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으흠…….”
주변은 아주 조용했다.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놀라 버린 것이다. 유진은 칼집에 넣은 월광검을 망토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모론을 쳐다보았다.
“고마운 줄 알아.”
“…….”
“봐, 내가 여기를…… 아주…… 말끔하게 만들어줬잖아.”
유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르의 독기로 일그러졌던 풍경들 모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모론은 두 눈을 끔벅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은 더 이상 울퉁불퉁하지 않았고, 산도 제멋대로 생겨 먹지 않았다. 호흡할 때마다 느끼던 역한 악취도 사라졌고, 아무 데나 던져놓았던 누르의 시체들마저도 사라졌다.
그러한 변화는 모론에게 있어서 기적과 같았다.
100년 넘도록 이어온 전투…… 모론의 광기는 전투에서만 쌓인 것이 아니다.
전투 뒤의 고독. 어디를 보아도 누르의 시체뿐이게 된, 익숙해지지 않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럽고 기분이 역해지는 이 공간이 모론의 광증을 촉발시켜 왔다. 독기는 신성마법으로도 정화가 되지 않았고, 결국 모론이 할 수 있는 것은 참고 견디는 것뿐이었다.
“하…… 하하…….”
모론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 세냐와 아니스가 후다닥 다가왔다.
“너 방금 그거 뭐야?”
“하멜, 어떻게 한 겁니까?”
당연하게도 질문의 세례가 이어졌다.
짐작이란 것을 해보자면, 방금 유진이 해낸 것은 월광검을 재구성한 것이다. 기존의 월광검은 파괴했다. 흩어지려던 파편에는 유진의 불꽃이 깃들었고, 유진의 의지에 의해 다시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로 인해 월광검에 대한 지배력이 강해졌고…….
나름대로의 결론은 도달했지만, 저 감각적인 부분을 세냐와 아니스에게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유진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몰라.”
자랑입니다, 내가 못 살아, 당신은 대체 아는 게 뭡니까? 네가 했는데 모른다는 게 정상이야?
세냐와 아니스는 번갈아 주고받으며 유진의 등짝을 두들겼다. 둘의 손맛은 매콤함을 넘어 얼얼할 정도였지만,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 깨달은 것인지 더 질문하지는 않았다.
“으하하! 으하하하하!”
그러는 동안에도 모론은 큰 소리로 웃어대며 설산을 뛰어다녔다. 순식간에 정상까지 올랐다가 절벽에 뛰어내리고 다시 돌아온 모론은, 그때까지 등짝을 얻어맞고 있던 유진을 번쩍 들어 올렸다.
“고맙다, 고맙다, 하멜!”
유진의 몸이 높이 던져지고 떨어졌다.
* * *
그날 밤은 새벽까지 떠들었다.
아이리스의 죽음에 대해. 심해의 심연에서 보았던 신화시대의 유적에 대해. 유폐의 마왕과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ㅡ 시엘에게 깃든 마안.
“나도…….”
미친놈처럼 술을 퍼먹으며 웃던 모론의 표정이 바뀌었다.
300년 전의 바벨, 정상.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 하멜이 없던 전투.
최선은 다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정말로 만족스럽게, 후회 없이 싸웠다면…….
머릿속에 떠오른 미련에 모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라도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 모든 것을 쏟아붓고…… 죽지 않았을까.
“싸울 수 있다, 는 것인가.”
모론은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300년 전보다 훨씬 강하다. 유폐의 마왕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을지라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이룩한 힘을 부딪쳐 보고 싶었다. 오래전에, 함께 싸우지 못했던, 하멜과, 다시. 그러한 생각이 모론의 주먹을 꽉 쥐게 만들었다.
“그럼, 몸도 멀쩡한 놈이 안 싸우고 뒤에서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냐.”
유진은 술을 홀짝거리며 투덜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상황에서 모론은 아무리 바라도 싸울 수가 없던 것이지만, 유진은 알면서도 심술궂은 말을 했다. 감격해 버린 모론이 기어코 눈물을 쏟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리 말만 해둔 거지, 막상 그때 되면 너 못 부를 수도 있어.”
“시엘 그 아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한다고는 말했다만, 얘한테 너무 부담 주지 말란 말이야. 만약에 너를 데려올 수 없게 되어도 시엘을 원망하지는…….”
“하멜, 원망이라니! 만약 내가 그 전투에 참전할 수 없게 될지라도, 나는 절대로 시엘 그 아이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농담 삼아 한 말인데, 되려 이쪽이 무안해질 만큼 모론이 정색해 버렸다.
“하멜, 나는 너를 믿는다. 세냐를 믿는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를 믿는다. 그리고ㅡ 베르무트의 약속으로 인해 도달한, 지금의 세상을 믿고 있다. 내가 널 도울 수 없게 될지라도, 세상이 너를 도울 것이다. 특히 내 후손들. 루하르의 전사들이 네 전투를 앞장서서 따를 것이다.”
“음…… 그래 주겠다고 하더라.”
“나는 확신하고 있다, 하멜.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300년 전의 사람들보다 강하다. 그러니 유폐의 마왕과의…….”
“마족도 300년 전보다 강하더라.”
“그럴…… 지라도 나는, 네 승리를 믿는다. 당연히…… 네 전투에 내가 합류할 수 있다면, 승산이 더욱 늘어나겠지만…….”
이 자리에 시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모론은 말을 더듬었다. 이유인즉슨, 모론이 아는 ‘하멜’이란 인간이 워낙 짓궂고 고약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하멜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대답을 시엘에게 전해줄 것 같았다. 모론은 베르무트의 후손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럼.”
새벽이 지난 후.
유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그런 취기 정도는 마나를 일으키자 말끔히 사라졌다. 유진은 아직 술맛이 남은 입안을 마법으로 씻어낸 뒤, 세냐와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다녀올게.”
“……정말로 혼자 가도 괜찮은 거야?”
세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그러면 더더욱 혼자 가야지. 무슨 일이 생겨서 돌아올 수 없게 되면, 너희가 날 찾아오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더 보내기 싫어졌어.”
“멀리 안 가. 아무리 늦어도 정오 전에는 돌아올 거야.”
유진도 만반의 준비는 갖추었다. 세냐가 만든 추적용 단말을 품 안에 넣었고,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축복을 몸에 둘렀다.
동굴을 나와, 레헤인야르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이곳의 경치는 저번에 모론과도 보았었다.
정상에서 보이는 곳.
라구르야란.
이전에 보았을 때와 다른 것은 없다. 저곳에는 여전하리만큼 특별하고, 신비로운 감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날씨는 지랄 맞고, 햇빛은 내려오지 않고, 그 무엇도 깃들지 않은 땅에는 생명이 피어나지 않으며, 마나가 희박하여 마법도 잘 발동이 되지 않는, 무언가가 살아갈 수 없는 요인만이 가득한 땅.
저곳부터가 라구르야란이다. 시선을 높이 들어보면 척박한 땅 너머에 빙해가 보인다. 감상은 똑같다. 저 땅은 베르무트가 경계할 만큼 기괴하고 두려운 대지로는 보이지 않는다.
유진의 등 뒤에서 프로미넌스가 치솟았다. 이 불꽃의 외날개는 철저하게 유진의 영향을 받기에, 이제는 검은색 불꽃으로 이뤄져 있다.
처음 만들었을 때야 별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검은 불꽃 외날개가 되어버리니, 유진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편이 좋을까…….”
작은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크리스티나가 정색까지 하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아뇨, 유진 님, 지금 모습이 좋습니다.”
“뭐?”
“지금이 좋습니다.”
두 사람의 날개는 닮은 구석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나는 유진과 갖고 있는 ‘날개’라는 공통점을 사랑했다.
유진은 저 단호한 말에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괜히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동굴에 들어가 있어.”
그렇게 말은 해주었지만, 누구 하나 정상을 떠나려 들지 않았다. 유진은 걱정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한 번 흔들어 준 뒤에 라구르야란으로 전진했다.
-레헤인야르에 올라라.
-라구르야란을 보아라.
-그곳에서 넘어오는 끝을 경계해라.
대기 중의 마나는 희박하다만, 유진 본인의 마나가 넘치는 덕에 프로미넌스를 유지하며 날아가는 것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멀었던 빙해가 가까워질 즈음. 유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레헤인야르. 그 거대한 산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눈으로는 이토록 잘 보이는데도 멀게 느껴졌다. 저곳에 두고 온 동료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추격 단말로 이어진 세냐와의 연결도 흐릿했고, 성녀들의 가호도 빛이 바랜 것처럼 느껴졌다.
“멀군.”
아직 ‘끝’이라 할 곳에 도달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세상이 멀게 느껴졌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망토 안의 월광검을 꺼냈다. 라구르야란에 가까이 가면 무언가 반응 같은 것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월광검 쪽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검이 멋대로 진동하거나, 달빛이 켜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걸 실망해야 하나.’
월광검을 망토 안에 넣는 대신 허리춤에 걸고, 성검 알테어를 꺼냈다. 의지로 바라니 빛이 켜졌다. 유진은 찬란한 빛에 휘감긴 성검을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 현상은 없었다.
대지가 끝났다.
발밑에는 얼어붙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쯤에서부터 유진은 날지 않고 아래로 내려왔다. 땅거죽만큼이나 두꺼운 얼음은 거인이 걸어도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혹시 얼음 밑의 바다에 무언가 있지는 않을까. 저 밑바닥이 누르의 요람인 것은 아닐까. 유진은 그런 생각이 들어, 두꺼운 얼음 아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바닷속에 누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르는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얼음을 깨부수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뭔가 다른 것이 보이거나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나, 그렇다고 직접 얼음을 깨지는 않았다.
‘뭔 꼴을 겪으려고.’
어디쯤부터 바다가 바다처럼 되어 있을까.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런 것을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니다. 라구르야란에서부터 출발해 머나먼 바다에 도달하는, 세상은 둥글고 북쪽과 남쪽이 이어졌다는 증명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 것은 언젠가의 탐험가들이 증명해야 할 일이고, 유진이 이곳에 온 이유는.
전생의 전생을 회고하기 위해서. 멸망의 마왕에게 죽던 순간만큼은 떠올리고 싶어서.
‘아마…….’
멸망당한 신화시대. 모든 생명이 죽고, 바다가 덮쳤다. 유폐의 마왕은 광란의 마왕과의 약속으로 도시 하나를 심해에 유폐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로 남은 것이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멸망당해 사라졌으리라.
그렇게 사라지고, 바다가 덮이고, 어딘가는 땅이 남았을까, 어쩌면 바다가 된 후에 땅이 생긴 것일까……. 어쨌거나 세상은 새로이 시작되었다.
라구르야란부터 머나먼 바다.
지금 시대의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영역.
이곳부터가 신화시대의 잔재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진의 눈동자가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어째서 이러한 곳이 남은 것일까. 의도한 것인가, 어쩔 수 없던 것인가. 이곳은 멸망당한 뒤에 남은 찌꺼기이고,
유진은 죽은 시대의 망령이다. 오히려 지금은,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의식은 여전히 편협하고 갈망하고 있다. 유진이니 하멜이니 아가로트니, 그에게는 별로 고찰하고 구분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마왕을 죽이고 싶으니까. 마왕을 죽이는 데에 필요하니까.
아가로트의 마지막을 떠올리고 싶은 것은 단지 그 때문이다.
‘구분할 필요도 없지.’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치직. 손끝이 닿은 순간에 검붉은 전류가 튀어 올랐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2번의 환생을 겪었음에도 신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왼쪽 가슴에 신검이 뽑혀 나왔다. 이 검붉은 신력으로 이뤄진 검은, 아이리스를 죽이던 순간보다 빛이 또렷했다. 대륙에 떨친 위명 등이 유진에 대한 숭배와 신앙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신검을 올곧게 세우고서 양손으로 잡았다. 일렁거리는 신력의 칼날을 두 눈으로 응시했다.
기적이란 신이 행하는 것.
“……바란다.”
신이 바라는 것.
귓가에 전쟁의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환생 407화
전장
“신이시여.”
경건한 부름. 아가로트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한 시간 정도 쉬었나. 바로 곁에서의 부름은 나지막하였으나, 그 외에 다른 소리들은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창칼 따위의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베고, 찌르고, 부수는 소리. 비명 소리. 커다란 함성 소리.
다양한 것이 뒤섞여서 쿵쿵, 쾅쾅거리는 소리들. 개중에는 도저히 언어라고 할 수 없는 괴성의 빈도도 컸다.
아가로트는 덥수룩한 머리를 건성으로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여전한가.”
“네에.”
너무 가까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달콤하고 뜨거운 숨결이 귀와 뺨을 간질였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밀쳐냈겠지만, 지금은ㅡ 빈말로라도 ‘평소’라고 할 수 없는 상황.
전시는 익숙하다. 전장도 익숙하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이번의 전쟁에서는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아가로트는 불쾌한 짜증을 느끼며 혀를 찼다.
“퇴각을 전하나이까?”
여자가 키득키득 웃으며 속삭였다.
유폐의 마왕이 시작한 난세에서, 국왕과 대신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왕국 전체를 발아래에 두었던 궁정마녀.
한때 그녀는 황혼의 마녀라 불리며 경원(敬遠)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 마녀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족과 마왕보다 지독했으며, 발밑에 거느린 나라는 공포라는 채찍과 쾌락이라는 당근으로 조련했고, 그 흉포한 악명은 주변 국가의 군주들마저도 시선을 피하게 만들었다.
오래전의 이야기다. 아가로트가 이끌어 승리를 거두었던 수많은 전쟁 중에는 황혼의 마녀의 몰락도 있었다. 패배한 황혼의 마녀는 무너진 성채의 중심에서 자신을 죽이지 말고 전리품으로 거두어달라 간청했다.
지금에 이르러, 황혼의 마녀는 전쟁신의 성녀이자 대신관이 되었다.
성녀는 아가로트가 벌여 온 수많은 전쟁들의 조언자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장난스레 웃고는 있지만 성녀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의 전쟁은 이미 오래되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고 있사옵니다. 나의 신이시여. 당신의 신군(神軍)은 용맹하고 지치는 일이 없고, 당신이 존재하는 한 결코 사기는 떨어지지 아니하옵나이다. 허나…….”
“안다.”
아가로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여태까지와는 많은 것이 달라.”
어렵지는 않았다.
전투 자체만 본다면 그럴 것이다. 어려운 것을 꼽자면 이전의 전쟁들이 훨씬 어려웠다. 마왕의 영지들을 정복할 때. 꼴사납게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 광란의 마왕. 놈과의 전쟁이, 전투 자체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여태까지는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은 전쟁 자체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전투에 어려움은 없다. 그 괴물들은 어지간한 나라 하나는 순식간에 멸망시킬 수 있겠지만, 아가로트를 따르는 군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괴물들과의 전쟁이 시작된 후로, 아가로트의 군대는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았다.
“벌써 셀 수 없이 많은 승리를 거두었는데, 전쟁이 끝나질 않는군.”
문제는 이것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끝날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전투에서 괴물들을 전멸시키면, 새로운 괴물들이 나타나 버린다.
심지어 그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나흘이던 것이 언젠가부터는 이틀이 되고 하루가 되더니, 지금은 전멸시키고 반나절만 지나면 새로운 괴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놈들은 약하다. 하지만 쉽사리 밟아 죽일 수 있는 벌레 정도로 약한 것은 아니다.
“나의 신이시여. 저는 당신께 퇴각을 간언하옵나이다.”
성녀가 아가로트의 팔을 끌어안았다.
“수천, 수만을 아득히 넘어서 적들을 쓰러트려 왔으나, 당신도 저도, 군사들 중 누구도 적들의 정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나의 신이시여, 저 정체 모를 적들이 얼마나 악랄한지는 당신께서 가장 깊이 느끼고 계시지 않나이까.”
“…….”
“적들의 피는 그 자체로 독이 되어 당신의 신력을 마모시키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존재로 전장 자체가 성역화가 되었기에 아직까지 버티는 것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에 모든 군사들이 미쳐버려서 자살하거나 서로를 물어뜯고 잡아먹으려 들었을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아가로트가 판단하기에도 그랬다. 그의 성역에서, 그를 섬기는 군사들은 신력이 존재하는 한 지치지 않는다. 정신은 언제나 맑게 유지되고 죽음에 이를 부상도 즉시 회복된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성녀의 말처럼, 죽은 적들의 사체가 내뿜은 피와 독기가 아가로트의 신력을 갉아먹고 있다. 그로 인한 여파는 군사들보다 아가로트 본인이 짙게 느끼고 있다.
“감히 간언컨대, 이곳에서 계속 전투를 치르는 것은…….”
“퇴각하면 그 뒤는 어쩌고?”
아가로트는 팔뚝에 매달린 성녀를 떨쳐냈다.
“내가 퇴각하면 저 괴물들이 이곳에 가만히 있을까. 놈들의 목적은 어디든지 진군해서, 살아 있는 것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거다. 그것은 이제 와서 다시 검증할 필요도 없지, 이미 놈들에 의해 몇 개의 나라가 멸망했으니.”
“나의 신이시여, 독은 독으로 제압하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신군을 이끌고 차라리 마경으로 투신하는 것은 어찌 생각하시나이까? 진군하는 괴물들이 대륙 모든 국가를 멸망시키고 나면, 그다음에는 마경으로 진군할 터이니, 당신께서 증오하는 마족과 마왕들로 하여금 괴물들과 싸우게 하소서.”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아가로트는 성녀를 흘겨보았다. 실없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아가로트는 차분히 가라앉은 성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신(巨神)이 제 권속과 신군을 이끌고 합류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리고 현자도 오겠다고 했으니…….”
“아하핫…….”
아가로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아가로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공된 보석처럼 영롱한 보라색 눈동자에 비웃음이 담겼다.
“나의 신이시여, 감히 묻사온데, 당신께서는…… 그들의 지원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시나이까?”
“…….”
“전쟁의 신이라 불리시우는 당신께서 지배하지 못한 전쟁이옵니다. 물론 저도 거신이 그 이름처럼 거대하고 강한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혹자가 말하길 거신은 한 손으로 대륙 전체를 들어 올릴 수 있다 하는데, 제가 판단하길 한 손은 무리여도 양 손으로는 들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끙…….”
“그리고 현자. 예, 그 흉맹한 여자는 제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까지 도달한 위대한 마법사이옵니다. 허나 그 여자가 추구해 온 진리는 결코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성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아가로트에게 내침 당한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팔뚝의 근육을 훑고 올라갔다. 성녀는 노골적인 관능에 입술을 핥았다. 이윽고 성녀의 손이 아가로트의 목까지 닿았다.
“나의 신이시여. 애당초 이 전쟁에서의 승리가 당신께 진정으로 중하옵니까?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든 마왕을 죽이는 것이지, 정체도 알 수 없는 괴물을 죽이는 것은…….”
“간언을 넘었군.”
아가로트의 눈이 얇아졌다. 성녀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지만, 곧장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녀는 유혹하듯이 아가로트의 목을 어루만졌다.
“나의 신이시여, 언짢게 듣지 마시옵소서. 제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당신을 위한 것이옵니다.”
아가로트는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성녀를 응시했다. 그 시선은 폐부를 꿰뚫는 것처럼 예리했으나, 오히려 성녀의 몸 안은 뜨겁게 달구어졌다.
“……나도 알고 있다. 이곳의 전쟁이 길어질수록 결국 내 살만 깎아낼 뿐.”
예정대로라면 지금 시기에는 유폐의 마왕과 전쟁을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 대륙의 끝까지 와서 괴물들을 대치했을 때에는ㅡ 이곳의 전쟁이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을 위한 전투 훈련 정도라는 생각 정도만 했다. 퇴각, 퇴각이라…… 성녀의 조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 괴물들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동맹을 맺은 신들이나 나라에 협력을 청해야 하나. 그들이 괴물을 막는 동안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떨까.
‘불가능.’
저 괴물들에게 근원이 없을 리가 없다. 근원이 존재하기에 괴물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그 근원을 없애는 데 성공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이미 수십 수백 번을 했다. 전쟁이 시작된 후로 다양한 방법을 써가며 괴물의 근원을 찾아내려 했지만 모두 다 실패했다.
저것들은 그냥, 갑자기 나타난다. 소환되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그냥 갑자기 나타나 버린다.
괴물을 보내는 것은 마왕인가? 이 또한 여러 번 했던 생각이다. 아가로트는 여러 마왕을 죽여 왔고, 아직 죽이지 못한 마왕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아는 한, 아직 살아 있는 마왕들 중에서 이만큼이나 강력하며 많은 괴물을 권속으로 두는 마왕은 없었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괴물들의 근원. 아가로트는 머릿속에 어떤 마왕의 이름을 떠올렸다.
멸망의 마왕.
아가로트는 오랫동안 마경에서 전쟁을 벌여왔으나, 멸망의 마왕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멸망의 마왕은 다른 마왕처럼 영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권속을 거느리고 있지도 않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 싶어 찾아다녀도 만날 수가 없는 마왕이다.
멸망의 마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도 많지가 않았다. 그 마왕과 맞닥트린 자는 대부분이 죽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은 미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가로트는, 이곳에서 나타나는 괴물들과 멸망의 마왕을 섣불리 연관 지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저 괴물의 주인이 멸망의 마왕이라면.
그렇다면ㅡ 멸망의 마왕은 그 얼마나 끔찍한 존재란 말인가. 저렇게나 많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괴물들 모두가 멸망의 마왕의 권속이라면…… 대체 멸망의 마왕은…….
‘정말로 끝이 없을 리는 없다.’
아가로트는 불안해지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마주해 보지 못한 적에게 벌써부터 두려움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천막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ㅡ와아아아! 전장의 함성이 가깝다. 높게 쌓은 장벽 너머부터가 전장이다.
아가로트가 밖으로 나오자, 휴식을 취하던 군사들이 아가로트를 쳐다보았다. 몸을 일으키거나, 무릎을 꿇거나, 절을 하지는 않았다. 저들 모두가 아가로트를 숭배하는 것은 사실이나, 아가로트와 군사들을 주군과 부하, 신과 신도라는 관계가 아닌 전우였다.
“상황은?”
“여태까지와 똑같습니다.”
우락부락한 거한이 대답했다. 그는 온몸 가득 새긴 아가로트에 관한 문신을 새긴 열성적인 신도이자, 아가로트가 신위에 오르기 전부터 따라온, 아가로트가 신뢰하고 아끼는 대전사다. 아가로트는 대전사를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내가 안에서 잠깐 쉬고 있으면 네가 지도해야지, 너까지 여기 있으면 어쩌란 말이냐?”
“대장, 빌어먹을. 내가 꿀이나 빨려고 여기 와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앞에서 싸우다 보니 몸을 다쳐서 잠깐 들어온 것이란 말입니다.”
괜한 핑계가 아니다. 실제로 대전사의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그 스스로 상처에 약을 펴 바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가로트는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뿌연 하늘 한복판에 검붉은 태양이 떠 있다. 태양처럼 보이는 저것은 사실 태양이 아니다. 아가로트의 신력으로 만들어낸 기적. 검붉은 태양이 비추고 있는 곳은 아가로트의 성역이 되고, 성역 내에서 신도들은…….
“썩을.”
원래 저런 상처는 아가로트가 나설 것도 없이 직접 치료되어야 했다. 아가로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전사를 향해 손을 튕겼다.
ㅡ빠직! 흘러간 신력이 대전사의 몸에 깃들고, 상처가 순식간에 치료되었다.
“아으, 나는 이거 싫은데…… 수명이 줄잖습니까.”
“줄어봤자 상처가 그대로 남은 것보다는 덜 아프고 오래 살 거다.”
아가로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기적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해 내지만, 그 대가는 아가로트 본인의 신력과 더불어 부상자의 수명으로 받아낸다.
하지만 아가로트는 그것에 대해서는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진 수명대로 오래오래 살고 싶다면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굳이 전장에 와서 싸우는 놈이 천수를 누리고 싶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개소리인 것이다.
“다 나았으면 가자.”
“아, 대장, 잠깐.”
대전사가 따라오더니 손가락에 끼웠던 반지를 뽑았다.
“잘 썼습니다.”
“신력을 꽤 많이 뽑아가던데. 그러고도 전투를 못 끝낸 거냐?”
“몇 번 끝낼 뻔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꾸 증원되어서 못 끝낸 거지.”
아가로트는 돌려받은 반지를 약지에 끼웠다. 휴식을 취하던 군사들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가로트의 뒤를 따랐다. ㅡ쿠구궁! 장벽의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증원이라…… 이제는 전멸시키는 것도 힘든가?”
“대장이 직접 싸운다면 전멸이야 시킬 수 있겠지요. 그 뒤에 다시 나타나 버리겠지만.”
“지랄 맞은 자식들이야. 여기까지 싸웠으면 나름 최선을 다한 건데, 다른 신한테 맡기고 우리는 돌아가는 거 어떠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십시오.”
아가로트를 오랫동안 섬겨 온 대전사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화이팅!”
아가로트와 전사들이 문밖으로 나가는 동안, 성녀는 장벽 위로 올라가선 양손을 흔들며 외쳤다. 그녀가 전쟁신의 대신관이자 성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직접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일은 드물었다.
“놀게 두지 말고 데려가서 싸움이라도 시키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러는 것이 하루 이틀이냐. 내버려 둬.”
“킁, 나는 대장이 왜 저 악녀를 거둔 것인지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럭저럭 머리는 잘 돌아가잖아. 싸움이나 할 줄 아는 너랑 나나 달리 운영 같은 것도 잘하고.”
일국을 지배했던 황혼의 마녀. 그 능력 자체는 대전사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그녀를 곁에 둘 필요가 있을까.
처음 황혼의 마녀를 인질로 사로잡았을 때에 아가로트는 신이 아니었고, 그의 주변에는 지략적인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신이 된 후부터 아가로트의 주변에는 대륙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영웅들이 모였고, 그중에는 성녀를 대체할 만한 사람도 있었다.
“결국 정이 들었기 때문에 내치지 못하는 것이잖습니까.”
“누가 아니래?”
“킁, 그때 죽였어야 하는데…….”
“나야말로 궁금하네. 쟤가 너한테 뭐 흉한 짓이라도 했냐? 왜 그리 싫어하나?”
“내가 대장 대신해서 피땀 뻘뻘 흘리며 싸우는 동안 저 쌍년은 뒤에서 응원만 처하거나, 대장 막사에서 음험한 짓을 하잖습니까.”
“오해살 만한 말은 하지 말고. 나 쟤랑 그런 사이 아니야.”
“그건 나도 알죠, 대장과 저 쌍년이 그런 사이가 되어버리면…… 어후,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남자 구워삶는 것을 귀신처럼 잘하던 계집이니, 어쩌면 대장도 저 치마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보통 남자가 아니기는 하지.”
“그리고 나만 저년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현자님도 가끔 올 때마다 제게 몰래 안부를 묻는다고요. ‘그래서 쟤 언제 죽인대?’ 하면서 말입니다.”
“죽일 만큼 흉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나한테 잘하고 도움이 되니까 내버려 두는 거다.”
아가로트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하면서 앞을 보았다.
드넓은 평원. 한창인 전쟁이 보였다. 지평선 쪽에는 시야를 가득 채울 만큼 수가 많은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다.
아가로트는 수를 대충 가늠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저것들 치운다.”
“예.”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는 애들 있으면 챙겨서 요새 안으로 데려 가. 죽은 애들 있으면…… 시체도 챙기고.”
“예.”
아가로트의 몸이 사라졌다. 그는 어느새 먼 하늘까지 날아가 전장을 등 뒤에 두었다. 힐긋 내려 본 발아래는 괴물의 머리들이 가득해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늘도 징그럽게 많구나.”
투덜거림과 함께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모인 신력이 거대한 신검으로 변했다.
빌어먹을 환생 408화
신검을 휘두를 때마다 세상에 검붉은 선이 죽죽 그어졌다. 그 선에 삼켜지거나 닿으면 저항이란 것은 불가능했다. 닿으면 죽는다.
전쟁신의, 아가로트의 신력은 그만큼이나 폭력적이다. 순식간에 수천 마리의 괴물을 죽였음에도 아직 발아래에는 괴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어디를 쳐다보건 괴물뿐. 고개를 돌려 머나먼 뒤까지 봐야만 다른 것이 보였다.
제법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는 요새.
요새, 라고 말은 하지만 남은 장벽 외에 이렇다 할 구조물은 없다. 이 황량한 땅에서 저 장벽만이 유일한 인공물이다.
한때 이곳은 어떤 왕국의 수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 대한 흔적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처음 이 땅에 도착했을 때는ㅡ 모든 것이 끔찍했다. 아니, 이 땅뿐만이 아니다. 괴물들에게 멸망당한 모든 왕국들. 그곳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
수천만을 훌쩍 넘는 시체가 몇 달 동안 방치된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 광경을 표현하기는 지옥이란 단어도 부족하다.
수많은 전쟁을 넘어온 병사들마저 토악질을 해댔고, 아가로트도 솔직히 그 광경과 악취를 보고서 조금 토할 뻔했다. 마경은 물론이고 마왕의 지배를 받던 국가들 중에도 그만큼이나 끔찍하고 토악질 나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워 버렸다. 이미 한참 전에 썩어 문드러진 시체. 왕국의 폐허들은 그 시체에 꼬여서 끔찍한 생태계가 되어 있었기에, 폐허까지 깔끔하게 지워 버렸다.
이 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수많은 인간의 시체와, 수많은 인간이 살았던 도시를 아가로트가 직접 지워서 만든 황야. 그 후에는, 인간 시체와 비슷한…… 아니, 이제는 그 숫자마저 넘어섰을 괴물의 시체가 이 땅에 누웠다.
감히 생각건대, 인류사에서 이곳만큼이나 많은 ‘죽음’을 받아들인 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대체 뭐냐.”
이 질문 역시 몇 번을 내뱉는 것인지 모르겠다.
괴물들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들끼리 잡아먹는 것도 아니다. 놈들이 쏟은 피는 땅에 스며들지도 않는다. 평범한 불꽃으로는 시체와 흔적을 지울 수도 없었다. 아가로트가 신력으로 직접 피워낸 불꽃만이 시체를 지워낼 수 있었다.
그렇게나 지랄 맞은 괴물들이, 아가로트를 향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괴성을 질러댔다.
저건 언어가 아니다. 단어 그대로 괴성일 뿐이다. 놈들은 생김새만큼이나 종류와 크기도 제각각이다. 어떤 놈은 인간처럼 두 발로 걷고, 어떤 놈은 네 발로 걷는다. 개중에는 벌레처럼 여러 개의 다리를 갖고서 기어 다니는 놈도 있다.
당연히, 날개를 퍼덕거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도 있다. 삽시간에 아가로트 주위에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모였다. 놈들이 퍼덕거리는 날개소리가 온갖 괴성을 묻어버렸다.
아가로트는 눈을 찡그리며 왼손을 펼쳤다. 검붉은 신력이 손아귀에서 회오리쳤다.
콰르르르!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신력이 폭풍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수백 마리의 괴물이 순식간에 도륙 났고, 아래로는 피와 살점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어어어! 커다란 소리. 거인처럼 커다란 괴물들이 아가로트에게 손을 뻗었다. 아가로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신검을 휙 그었다.
요란한 소리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아가로트의 신력을 정제해 만들어낸 이 신검은, 그냥 휘두르면 무조건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마왕도 받아내기 버거워하는 신검을 지성 없는 괴물 따위가 받아낼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과연.’
아가로트는 얇게 뜬 눈으로 아래를 살폈다. 전투가 시작되고서 계속 신검을 움직였다. 그 짧은 순간에 아가로트가 죽인 괴물의 숫자만 해도 몇천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아래의 괴물은 줄어드는 기미가 없다.
왜인고 하니, 아가로트가 죽인 만큼 괴물들이 새로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광경. 하지만 그런 탄식은 이미 예전에 했던 것이다. 그냥 저 괴물들에게는 상식이란 것이 통하지 않는다.
‘전투를 못 끝낼 만도 하군.’
대전사는 아가로트 다음으로 강하다. 신력을 직접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반지까지 빌려주었는데 전투를 끝내지 못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전쟁신의 대전사일지라도, 이렇게나 많은 괴물들을 한 번에 전멸시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ㅡ이 전투를 앞으로 어찌 해야 하나. 죽여도, 죽여도 줄어들기는커녕, 어디 한 번 더 죽여보라는 듯이 적들이 많아진다…….
아가로트는 짜증을 느끼면서 신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꽈지지직! 신검의 검붉은 칼날이 하늘에 닿을 만큼 길게 늘어났다.
거대해진 신검을 휘두르니, 실제로 세상이 갈라졌다. 신검이 이미 지나갔음에도 참격의 궤적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스멀스멀 번지면서 괴물들을 집어삼켰다.
번져가던 참격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었다. 검붉은 신력의 고리가 전장을 휩쓸었다. 잠시 그것을 지켜보던 아가로트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높은 곳에 떠 있는 신력의 태양. 아가로트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당기니, 태양이 스르르 미끄러져 아가로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콰르르르! 태양이 신력의 불길을 내뿜었다. 쏟아지는 불길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괴물들을 쓸어버린 신력은 사라지지 않고, 아가로트의 의지에 따라 다시금 형태를 바꾸었다. 신력은 거대한 칼날이 되어 베었다가 수천 개의 화살이 되어 쏘아졌고 망치가 되어 내리찍었다.
본격적으로 학살을 시작하니, 괴물을 죽이는 속도가 괴물이 나타나는 속도를 웃돌았다. 10마리의 괴물이 나타난다면 100마리의 괴물을 죽이는 꼴이었다.
그런 대학살을 벌이고 있음에도 아가로트에게는 굉장히 많은 여유가 있었다. 그는 전방의 괴물들을 휩쓰는 와중에도 최후방의 전황까지 읽어내며 필요할 때에 개입해 주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곳에서 싸우는 이들은 모두가 아가로트의 신도이기에, 그들이 바라는 만큼 신력을 보내주고 기적을 일으켜주면 될 뿐이다. 그것은 장벽 위에 선 성녀의 역할이기도 했다.
거리는 아득하리만큼 멀었지만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성녀는 아가로트를 향해 붉은 입술을 내밀어 ‘쪽’ 소리를 내더니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미친년.”
어느 순간부터 괴물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의 전투가 이제 끝나려 하는 것이다. 아마, 시간을 생각하면 다음 전투는 내일 재개되리라. 어쩌면…… 어쩌면, 더 빨리 시작될 수도 있겠지만.
아가로트는 눈썹을 찡그리며 아래를 보았다. 신력에 채 불타지 않은 시체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이 쏟아내는 불길한 독기가 아가로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연기 없이, 재조차 남기지 않고 불태워도 독기는 남아버리니 태워도 의미는 없다만…… 저 많은 시체를 방치하는 것도 역겨운 일.
아가로트는 언제나 그랬듯이 신력으로 불꽃을 일으켰다.
화르륵! 대지에 불꽃의 장벽이 세워졌다. 아가로트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 불꽃은 남은 시체들을 모조리 불태울 것이다.
아가로트는 불꽃의 장벽을 뒤로하고서 요새를 향해 나아갔다.
그쪽에서는 아직 신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남은 괴물의 숫자가 많지 않으니 곧 끝날 것처럼 보였다.
……별로 만족스러운 광경은 아니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알겠다. 아가로트도 마찬가지고, 신군 역시 ‘처음’보다 약해졌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심신이 지치고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휴식할 때도 되었어.’
생각해 보면 이곳에 오고서 하루를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전투가 끝나면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나날이 너무 길었단 말이다. 완전히 퇴각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 거신이나 현자가 온다면 한 달 정도는 이곳을 맡아달라 부탁하고, 신군을 쉬게 만들어야…….
“……?”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불길한…… 그 정도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의 존재감. 직관적으로 떠오른 불쾌감. 그리고, 인정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공포감.
아가로트는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까지 닿을 만큼 높이 치솟은 불꽃의 장벽. 그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
아가로트는ㅡ 저것이 무엇인지 간파할 수가 없었다. 불꽃 속에서 요동치는 그림자 같은 것. 아지랑이. 존재하는데 존재하는 것 같지 않은, 형상조차 모호한…….
화아아악!
그 무언가가 불꽃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마치 불꽃 안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불꽃이 사라지고 나서야, 아가로트는 ‘저것’을 보다 확실하게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구멍을 뚫은 것처럼 보였다. 구멍의 안과 주변은 온갖 색이 뒤섞여 있다. 번졌다 줄어들고 뒤섞이는 색은 온갖 일그러짐을 만들어서, 세상과 세상이 아닌 것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중심.
구멍의 중심.
아가로트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응시했다. 온갖 색채의 향연 속에서도 중심은 단 하나의 색만 존재했다. 시커먼 어둠.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어둠이 구멍의 중심에 있었다.
“뭐야…….”
아가로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쿠르르르! 아직 불타지 않은 괴물의 시체들이 저것에 끌려들어 갔다. 그 순간, 아가로트는 오싹거림과 함께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 불길하고 어마어마한 존재감. 그 안에 약간이나마 섞인 마성(魔性)을. 그 하나만으로 규명할 존재는 아닐 터이나, 저ㅡ 끔찍하고 불길한 것에는 분명히 마력(魔力)이 존재했다.
그 말은 즉, 저것의 정체는 마왕이라는 것이다.
“멸망의 마왕.”
저것이 정말로 마왕이라면, ‘멸망’ 외에 다른 이름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만큼 아가로트는 저 존재에게서 거스를 수 없고 절대적인 멸망을 느꼈다.
왜 멸망의 마왕이 이곳에 있나? 그 마왕 같지 않은 마왕은 마경을 벗어나지 않는 것 아니었나?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나타날 수 있는 건가? 응당 들어야 할 생각이 머릿속에 들지 않았다.
“신이시여!”
요새 장벽의 성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아가로트가 대면한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인지를 느꼈다. 이 먼 거리에서 보는 것임에도 정신은 미쳐 버릴 것만 같고 혼 자체가 오염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성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시커멓게 죽은 피눈물을 쏟으며 신을 부르짖었다.
“아니, 아니 되옵니다! 신이시여, 제발!”
도망치고 싶다. 모두가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했다. 수많은 신도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아가로트를 따라온 대전사조차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용기 따위를 느낄 수 없었다.
쥐고 있는 칼을 던져 버리고 싶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뛸 수 있도록 갑옷마저 벗어버리고 도망치고 싶다. 대전사마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른 군사들은 오죽하겠나. 겁에 질려 주저앉은 이들도 많고, 무기를 떨어트린 이들도 많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발을 떼 도망치지는 못했다.
이곳이 아직 아가로트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저 하늘 위에 검붉은 태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가로트에 대한 신앙이 신군이 느끼는 공포에 저항했다. 전의를 상실시킬 지언정 전장에서 도망치지는 않게끔 만들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가로트가 도망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가로트가 공포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가로트는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멸망의 마왕을 대면하고 있다. 이곳을 성역으로 삼은 수호신이기에, 멸망의 마왕이 발하는 거대한 압박을 정면에서 받아내고 있다.
미쳐 버릴 것 같다. 신격 자체가 으스러질 것 같다. 인간일 적에도 그랬고, 신이 된 후로도 그랬다만, 아가로트는 자기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일 적에는 인간 중에서 제일 잘난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아가로트는 인간일 적부터 신들의 전장에 섰고 몇 개의 나라를 구했으며 몇 명의 마왕을 죽였다.
신이 된 후에는? 늙은 신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마왕, 마족과의 대대적인 전쟁. 그 난세에서 영웅들은 순식간에 신화를 써 내리고 신격을 얻었기에, 지금 시대에는 아가로트와 같은 젊은 신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아가로트의 눈에는 썩 훌륭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아가로트가 대등, 아니, 약간 아래로 두었던 신이라곤 무식하고 커다란 거신과, 상아탑에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현자 정도뿐이었다.
이 젊고 오만한 전쟁신에게, 지금의 감정은 굉장히 낯설었다. 격의 차이. 내가 하찮은, 존재처럼, 되어버린 것만 같은, 그런, 엿 같은 기분.
“…….”
아가로트는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오른손. 신검을 쥐고 있다. 눈으로 볼 필요는 없었다. 신검의 빛이 바랜 것을 느꼈다. 울렁거리는 가슴에서 공포를 느꼈다. 공포가 전의를 꺼트린다. 나를 무디게 만든다.
“…….”
신검을 보다 강하게 쥐었다. 가슴 속의 공포를 분노와 짜증으로 지워냈다. 제발, 신이시여! 성녀의 비명은 이제는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들리고 있다.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면ㅡ 많은, 아주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저게 뭐지? 무서워. 왜 저런 것이 나타난 거야?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도망치고 싶어. 제발. 죽고 싶지 않아. 신이시여. 도망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신이시여, 제발, 그렇게 서 계시지 마소서.
“…….”
더 먼 곳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오늘 저녁은 무엇을 요리할까. 어머니는 잘 계시겠지? 이 양반은 언제 집에 오려는 거야? 술 한 잔, 아니, 두 잔만 더 마시자고. 여기서 이게 나온다고? 조금만 더 일하면 돼. 곧 월급날이야. 사랑해. 보고 싶었어. 다행이야.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내일은…….
“……도망치라니, 개소리하지 마.”
이곳에 데려온 신군이 아가로트의 신도 전원은 아니다. 대륙 곳곳에 아가로트의 신도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신앙이 아가로트와 신군의 힘이 되고 있다.
“여기서 도망치면 저건 어떻게 할 건데?”
아가로트는 멸망의 마왕에 대해 많은 것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을 지금 여기서부터 막지 않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저것은 앞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고 도망치게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아가로트는 마른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 마왕에게서 적의나 살의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었다.
멸망의 마왕. 그는 일말의 자비 없이 모든 것을 죽여 버릴 것이다. 그가 모든 것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은 살의나 적의, 증오, 그런 감정 때문이 아니다. 저 마왕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전군.”
뿌드득.
아가로트는 이를 갈면서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 잘 들었다. 하지만 이해는 해주지 않을 것이다. 도망치고 싶을 때 도망칠 거면 뭐 하러 참전했나. 애석하게도 저들이 섬기는 신은 심술궂고 지랄 맞다. 이 지독한 신이 판단하기에 지금은 절대로 도망쳐서는 안 됐다.
그렇기에 너희는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만에 하나는 없다. 너희는 무조건 여기서 죽을 거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나도 죽는다.
빌어먹을 환생 409화
높이 들었던 신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가로트의 성역이 전진했다.
공포.
알고 있다. 지금 이 행동은 용기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 전투에서 아가로트는 아무런 용기를 느끼고 있지 않았다.
억지. 정말 억지를 부리고 있을 뿐. 그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아가로트 본인이 지독하리만큼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늘 나는 죽는다.
아가로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죽지 않는 방법…… 도망치는 것? 그것이 가능하고 불가능하고와 상관없이, 아가로트는 도망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신도들의 의견은 묵살했다. 으레 전쟁이란 것에 참전하면, 바라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해야 할 때가 있는 법. 아가로트에게 있어 지금이 바로 그럴 때였다.
“너는.”
콰르르르르! 공간을 가르며 나아간 신검이 멸망의 마왕과 닿았다. 세상 모든 것을 벨 수 있다고 자신했던 신검이지만ㅡ 멸망의 마왕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애당초 ‘육체’라고 할 만한 것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상처를 입히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당장 아가로트는 멸망의 마왕에게서 살이나 뼈, 피 같은 것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 존재의 실체는 무언가. 온갖 색이 뒤섞여 만드는 공간의 일그러짐. 그 한복판에 존재하는 검은 구멍.
……이질적이다.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아가로트는 여태까지 여러 마왕을 죽여왔으나, 저렇게 생겨먹은 마왕은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마왕들은, 생김새가 인간답지 않을지언정 생물처럼 생기긴 했었다.
하지만 저 멸망의 마왕은 어떤가? 분명 눈앞에 있기는 한데, 생명체 같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대체 뭐냐.”
오싹거림이 호흡마저 떨리게 만들었다. 아가로트는 가쁜 호흡을 붙잡으며 질문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것’과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아가로트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신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꽈지지직! 아가로트의 모든 신력이 충천했다. 이 공간을 성역화시키고 있는 검붉은 태양마저 아가로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아아아!”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싶어 했던 군사들. 그들은 섬기는 신의 뜻을 이해했다.
신은, 이 전장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신은 전쟁의 계속을 바랐고, 이곳에 있는 모든 신도의 죽음을 바랐다.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도 이곳에서 죽을 것을 결의했다.
그렇기에 신도들은 더 이상 공포에 얼어붙어 있을 수 없었다. 이곳은 전장이고, 그들이 섬기는 이는 전쟁의 신이다. 신이 이 전쟁에서 모두의 죽음을 바란다면, 신도는 응당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으아아아!”
아가로트의 신군은 언제든 기쁘게 목숨을 바쳤을 신실한 신도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멸망의 마왕의 존재감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 공포를 자극했다.
순교.
하지만. 멸망의 마왕이 자극한 ‘공포’에서도, 아가로트에 대한 신앙은 지워지지 않았다. 신군 대부분이 욕설을 내뱉으며 무기를 들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멸망의 마왕이 두르고 있는 색이 스멀거리며 번졌다. 천천히 나아간 색이 아가로트의 신력을 밀어냈다. 이윽고 그 색은 무기를 쥐고, 함성을 지르며 진군하던 군사들이 마주할 벽이 되었다.
그건 대처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공격이 되었다. 공간 자체에 침식한 것처럼 보이는 색에 닿는 순간, 모든 것이 무력해졌다.
그 색 자체가 멸망의 마력이다. 신군이 몸에 두른 마나나 신력은 멸망의 마력에 닿는 즉시 소멸했고, 입은 갑옷은 저 절대적인 힘에 잠시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목숨이 이토록 허무하게 저물 수 있는 것이었나.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왕군마저 압도하던 군대가 아가로트의 신군이다. 그런 신군이, 진군하는 족족 죽어 시체가 되었다.
“아아아아악!”
바로 앞에서 동료가 죽는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다. 신군의 군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공격을 퍼부었다. 동시에 아가로트의 이름을 연호하고 성가를 부르짖었다. 죽는 순간에는 비명 대신에 순교를 외쳤다.
아가로트는.
신도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널브러지는 것을 보았다. 절규를 들었다. 존재가 꺼지는 것을 느꼈다.
공포와 절망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 두 개의 감정은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지금 아가로트가 필요하다 바라는 것은 분노와 증오, 그에 의한 투지였다.
아가로트는 악을 쓰며 마력을 베었다. 나부끼며 침식하는 마력의 틈을 파고들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신검을 휘둘렀다. 신력으로 이뤄진 태양이 쏘는 햇살이 멸망의 마력과 충돌했다. 밀어내기를 바랐으나 밀어낼 수는 없었다. 닿고 닿을수록 소멸하는 것은 오히려 아가로트의 신력이었다.
아가로트의 눈이 시뻘겋게 빛났다. 수백 수천의 전투에서 승리해 온 전쟁신. 그 눈동자는 이미 하나의 권능이다. 아가로트의 눈은 생전 처음 보는 상대라도 간파한다.
멸망의 마왕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불길하며 끔찍한 마력. 온갖 것이 뒤섞인 혼돈.
그 중심.
여전히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저것은 노골적이었고, 그렇기에 아가로트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꽈아앙!
신군도 무력하게 죽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가로트의 대전사. 전쟁신의 화신. 그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신이 진군을 명했을 때. 대전사는 공포를 느끼면서도 선봉에 섰다. 신께 직접 하사받았던 대검을 휘둘러 마력을 베어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왼팔은 이미 사라졌다. 찢어진 옆구리에서는 피와 내장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대전사는 괴성을 지르며 대검을 휘둘렀다.
‘닿는다.’
나부끼는 색을 넘어, 멸망의 마왕 중심까지 이어지는 위치에 도달했다. 신검의 빛이 짙어졌다. 한 번 찌른다고 해서 무언가가 변할까.
이 일검으로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럴지라도 검을 뻗어야 했다. 뻗지 않는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끝날 뿐이다.
신검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멸망의 마왕의 중심.
어둠이 확장되었다.
…….
눈을 떴다.
귓가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소리뿐만 아니라, 감각 대부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기는 한데, 잘 보이지 않았다.
육체의 감각은 희미하다. 하지만 이건 느낄 수 있었다. 아가로트의 안에서, 신도들의 목소리가ㅡ 들리지 않았다.
대전사가 죽었다. 수십 년 동안 함께 전장을 누벼온 녀석. 대장과 부하, 신과 신도, 고작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아가로트에게 있어서 대전사는 가장 신뢰하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놈이…… 어떻게 죽었는지, 보지도 못했다. 놈뿐만이 아니다. 아가로트는 쿨럭하고 피를 토했다. 명령대로 진군했던 군사들 대부분이 죽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가로트가 생각했고.
“색이 흩어졌사옵니다.”
바로 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로트는 아직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나서…… 저것의 중심인, 구멍이, 검은 것을 내뿜었사옵니다. 그 순간에 이곳이 통째로 뒤덮였고, 검은 것이 사라졌을 때는 시체만 남았사옵니다.”
“……내 상태는?”
아가로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몸의 감각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것은 익숙하지 않다. 신의 몸은 인간의 몸과 달리, 죽어도 죽지 않는다. 팔이 날아가도, 다리가 날아가도, 머리가 날아가도, 신력이 남아 있는 한 싸움을 계속할 수 있다.
“사라진 부분이 남아 있는 부분보다 많사옵니다.”
성녀가 속삭였다. 고통은 없다만…… 아가로트는 피를 토하면서 웃었다.
“멸망의 마왕은?”
“멀리서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멀리서, 라. 내가 날아간 거냐. 아니면 네가 데려온 거냐.”
“둘 다이옵니다. 신이시여, 당신께서는 저 검은 폭풍에 휩쓸리셨으나,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튕겨 나오셨사옵니다. 그 순간에 바로 제가, 당신을 위해 몸을 날렸사옵니다.”
성녀의 속삭임이 가깝다.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재생이 늦기는 하지만,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가로트는 몇 번인가 더 피를 토한 뒤에 말을 이었다.
“너는 도망쳐라.”
슬슬 몸이 움직인다. 아가로트는 뿌옇게 보이는 눈을 찡그리면서 왼손을 움직였다. 약지에 끼운 반지를 빼고서, 성녀를 향해 내밀었다.
“내 성물. 이걸 쓴다면 뭐, 너 하나쯤은 도망칠 수 있을 거다.”
“이제 와서 도망을 명하시다니. 그럴 거면 진즉에 다 같이 도망쳤으면 되었지 않사옵니까.”
“너 하나.”
아가로트의 말에 성녀가 웃음을 흘렸다.
“나의 신이시여, 당신께서 저를 아끼심에 탄복하였사옵니다. 당신께서는 그토록 제가 살아남기를 바라시옵니까.”
“어.”
돌아온 대답이 성녀의 웃음을 멎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도망쳐라. 이쪽에 오고 있을 현자와 거신과 합류해라. 놈들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세상에 멸망이 오고 있음을 알려라.”
“…….”
“그 뒤에는…….”
“쉿.”
성녀가 고개를 저었다.
“나의 신이시여.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셈이시지요.”
“그래.”
“그렇다면, 그렇다면ㅡ 죽은 뒤에, 세상이 어찌 될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그것은…… 당신보다 늦게 죽은 이들이 알아서 할 일이옵니다.”
“…….”
“반지.”
성녀가 웃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는 받고 싶지 않았사옵니다. 사실 받을 것이란 기대도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후후, 참으로 기쁘옵니다. 나의 신이시여, 총애에 감사드리옵니다.”
성녀의 손가락이 아가로트의 뺨을 훑었다.
“나의 신이시여. 지금이 ‘우리’에게 있어서 마지막일 터이니, 저는 주저하지 않고 말하겠사옵니다. 나의 신이시여, 제게 있어서 앞으로의 세상이 어찌 될지는 알 바가 아니옵니다.”
뺨을 타고 올라온 손가락이 아가로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왜냐면, 당신이 없는 세상은 제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나의 신이시여. 당신이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제게 있어서 세상이 끝나 버린 것과 똑같사옵니다.”
“…….”
“또, 나의 신이시여. 저는 당신이 이런 식으로 죽는 것을 바란 적이 없사옵니다.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그것은ㅡ”
“네 손으로 하고 싶었겠지.”
아가로트가 대답했다. 성녀는 여전히 아가로트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예. 나의 신이시여. 당신은, 과거 제게 모든 것을 빼앗으셨사옵니다. 신화(神化)를 목전으로 두었던 저는, 당신에 의해 몰락했사옵니다.”
그녀는 성녀가 되기 전에는 황혼의 마녀라 불리었다. 그녀는 일국을 지배했고, 주변국을 침략했으며, 손에 넣은 모두를 제물로 바쳐 악신(惡神)의 자리에 도전했다.
허나 그를 목전에 두었을 때. 아가로트에게 몰락당했다.
“나의 신이시여. 저는 당신을 증오했습니다. 복수를 바랐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그 증오와 복수심마저 유흥으로 여기셨지요. 언젠가, 언젠가 제가 당신께 복수할 것을 고대하셨지요.”
아가로트는 저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황혼의 마녀’가 벌인 악행은 여럿 있었지만, 아가로트는 그런 것을 흠이라 여기지 않았다.
지금 시대는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해도 될 난세였다. 어쨌든 황혼의 마녀는 실패했고, 아가로트는 그녀를 전리품으로 거두었다.
언젠가 그녀는 복수를 시도할 것이다. 아가로트에게 있어, 그런 흉심을 품은 자를 곁에 두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장난 거리였다.
“이제는 모든 것이 허무해졌사옵니다.”
입술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떨어졌다. 회복된 시야에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ㅡ 엉망이었다. 멸망의 마력에 휩쓸린 아가로트를 데리고 나오는 것은 죽음에 몸을 담그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아가로트는, 반쯤 사라진 성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가까운 거리에서, 피냄새를 맡지 못할 리가 없잖은가.
“제 얼굴이 추하여 보여드리기 부끄럽사옵니다.”
성녀가 갈기갈기 찢어진 입을 열면서 속삭였다.
“평소랑 똑같이 아름다운데 뭘.”
정말로 배신하려 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성녀라는 이름은 타락하여 저버렸을 때를 위한 것이었다. 성녀인 그녀가 섬기는 신을 배신하고, 수많은 신도를 죽였다면, 그녀는 오래전 추구했던 대로 악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 못했다.
“나의 신이시여.”
성녀가 속삭였다.
“우리의 마지막인 지금…… 저는, 당신의 뜻을 거절하겠나이다. 저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옵니다. 나의 신인, 당신의 죽음을 먼저 보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
아가로트는 씁쓸히 웃으며 손을 뻗었다. 아가로트의 손이 성녀의 뺨을 어루만졌고, 성녀는 힘없이 짓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기울였다.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들어주마.”
“아아, 자비로운 나의 신이시여.”
성녀는 쿡쿡 웃으며 아가로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입맞춤을.”
성녀의 숨결이 다가왔다.
“그리고…… 제게 죽음을.”
입술이 닿고. 아가로트의 손이 성녀의 목을 거머쥐었다. 성녀는 피범벅인 입술에 미소를 그렸다.
우둑.
아가로트는 죽은 성녀를 바로 뉘었다. 목이 부러져 죽은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고, 아가로트의 입술에는 맞닿았던 입술의 감촉과 피가 남아 있었다.
아가로트는,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성녀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너희는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만에 하나는 없다. 너희는 무조건 여기서 죽을 거다.
“계시대로군.”
그리고 나도 죽는다.
아가로트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색. 멸망의 마왕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 앞에는 죽은 신도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아가로트는 신검을 만들어 쥐고서 멸망의 마왕을 응시했다.
신검을 뽑았다. 모든 신력을, 신검에 집중했다. 그 외에 다른 기적은 일으키지 않았다. 저것을 상대로는 신의 기적은 무의미하다. 이렇게 정면에서, 마주 서서, 검을 겨눌 수 있다는 것부터가 기적인 것이다.
“…….”
빛이 번져온다.
시체들을 의식했다.
더 이상 몸 안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의 공백을 느꼈다.
그 순간 마음이 고요했다.
‘저것’은…… 분노하고, 증오하고, 그럴 대상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천재(天災)가 그러하듯. 저것은 악의와 살의로 움직이지 않는다.
“…….”
꽈득.
악의와 살의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그래서 분노하거나 증오할 필요가 없는가?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분노와 증오는 온전히 나 자신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모든 것을 끝내 버리려는 멸망에게 분노하고 증오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냔 말이다.
그는 신이지만 한때는 인간이었고, 신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인간으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길었다.
때문에 아가로트는 눈앞에 있는, 인간이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재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멸망에게 인간다운 증오와 분노를 느꼈다.
아가로트는 신검을 들고 앞으로 걸었다.
멸망의 마왕은 처음 나타났을 때와 똑같이,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아가로트와 멸망의 마왕이 만났고, 나부끼며 번지는 색이 아가로트를 집어삼켰다.
그 후, 멸망의 마왕이 멈췄다.
며칠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환생 410화
거기서부터는 ‘기억’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멸망의 마왕에 삼켜진 아가로트는 곧장 죽지 않았다. 그는 끝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심연을 배회했고, 흘러넘치는 마력과 색을 베어냈다.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는 멸망 앞에서는 신과 인간이나 평등했다. 그래야만 할 터였다. 하지만 아가로트는, 멸망 안에서 제법 오랫동안 버텼다. 정신을 미치게 만드는 마력에도 미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잊지 않았다.
이미 사라져 버린 많은 목소리들. 하지만 멀리, 아주 멀리서는 아직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로트를 섬기는 신도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신도들은 생각했다. 죽는 모습조차 끝까지 봐주지 못했던 오랜 벗. 이 손으로 목을 부러트려 죽인 악녀. 길고 긴 전쟁을 함께 하며 승리를 넘어온 전우들. 그 외에 다른 인연들.
그리고 나.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이 나아갈수록 아가로트는 죽어갔다. 그는 끝 모를 심연을 헤매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기억은.
텅 빈 곳에 신검을 꽂는 것. 억지로 걷던 몸이 기어코 허물어지고, 신검을 지팡이 삼아 버티다가ㅡ
‘죽었다.’
유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앞으로 쭉 뻗고 있던 신검을 응시했다. 그 신검은 방금 떠올렸던, 아가로트의 신검과 비교하자면 굉장히 초라하게 보였다.
‘그것보다…….’
유진의 표정은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기껏 아가로트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좋은데, 기억이 완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가로트의 모든 기억이 떠오른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죽기 직전의 기억만 떠올렸다.
누르와의 전쟁. 멸망의 마왕의 강림. 죽음.
“…….”
당연한 말이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 기억에서 유진은 아가로트였다.
아가로트가 느꼈던 감정들. 신도들의 죽음.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유진에게 감정적 잔재를 남겨놓았다. 특히나 마지막에, 아가로트의 성녀가 죽을 때. 그 순간에 아가로트가 느꼈던 감정.
“이건 알겠어.”
유진은 혀를 차면서 신검을 내려놓았다.
“나는 아가로트와는 다르군.”
유진의 전생은 하멜이다. 갓난아기부터 환생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환경과 교육, 경험 등에 의해 하멜일 적과 성격이 아주 똑같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가 ‘하멜 다이너스’와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
하지만 아가로트에게는, 그 전쟁신의 기억에는, 여러 가지 ‘다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유진이 그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유진은 멸망의 마왕과 싸우는 것은 선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능한 선에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을 선택하거나ㅡ 정, 누군가가 희생해서 그곳을 막아야 했다면.
‘나 혼자 남았을 것 같은데.’
도망치자고 울부짖는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진군시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사실, 꼭 그런 필요가 없지 않았나.
멸망의 마왕과의 전투…… 그것은 전투라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멸망의 마왕과 맞서는 데에 신도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은 가혹하게 말하자면 순장(殉葬)일 뿐이었다.
왜, 아가로트가 그런 선택을 내렸나. 당시의 시대와 아가로트란 인간의 자아, 또한, 아가로트가 인간이자 신이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아도, 유진은 아가로트의 선택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애당초 수십 수백 년도 아니고 수천 년 전의 인물을 이해하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고 오만한 일일 것이다.
‘성녀를 마지막까지 곁에 두었던 것도 이해가 안 돼.’
전쟁신의 성녀. 황혼의 마녀. 그녀는 흑마법사는 아니지만, 흑마법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국 하나를 제 마법의 실험장으로 삼았고, 마지막에는 왕국민 전원을 몰살시켜가며 스스로 악신이 되고자 했다. 즉, 성녀가 했던 짓은 의식을 통해 대마왕이 되고자 했던 에드몬드와 비슷한 일이란 말이다.
만약 유진이라면 그런 미치광이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 능력이 출중하건 어쨌건 무조건 죽여 버린다. 평생 충성을 맹세할지라도 곁에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가로트는 어떤가? 그는 마녀를 수하로 거두고, 곁에 두었다. 아무런 감시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마녀를 비교적 자유롭게 풀어두고서 그녀가 언젠가 수작을 부릴 것을 기대하기까지 했다.
“…….”
결국 마지막에, 그 여자는 마녀가 아닌 성녀로서 죽었다. 도중에 몇 번인가 배신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아가로트를 섬겼다.
유진은ㅡ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가로트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고, 감정선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억을 보았음에도 의문은 남는다.
암실에서 보았던 것. 절망감에 어깨를 늘어트리고서, 시체가 그득한 황야를 걷던 남자.
그 모습은 아가로트일 텐데, 정작 아가로트의 기억에서 겹쳐지는 부분은 없었다. 아가로트는 최후의 순간에 절망하지 않고 분노하고 증오했다. 멸망의 마왕과 마주 서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결국은 멸망의 마왕에게 삼켜져 죽었다.
‘……신이라.’
오히려 의문이 더해진 부분도 있다. 아가로트의 시대에서, 흔한 경우는 아니어도 인간은 신이 되는 것이 가능했다. 그 시대에서도 신도들은 신앙에 따라 신성력과 기적을 쓸 수 있었으며, 성직자와 성기사 등의 직군도 존재했다.
동시에 신과 인간의 거리는 굉장히 가까웠다. 아가로트만 해도 신도들과 술을 마시거나 시끌벅적한 연회를 즐겼다. 즉, 바란다면 인간은 언제든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어떤가?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린 빛의 신만 보아도 지상과 거의 소통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성력과 기적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신이 존재함은 틀림없으나, 지금 시대에서 인간이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크리스티나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불가능했다.
‘꼭 숭배받아야만 신이 될 수 있던 것도 아니야. 황혼의 마녀가 그러려 했던 것처럼, 대학살을 벌여 공포의 대상이 되면 악신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인간과 신의 경계가 뚜렷하되 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인간이 신이 된다고? 그게 정말로 가능하다면, 당장 베르무트부터가 신이 되었을 거다. 그 이전에 역사적이 위업을 달성한 이들. 아롯을 건국한 마법왕이나…… 루하르를 건국한 모론조차도 신이 되었을 거다. 에드몬드 같은 놈도 제 종(種)을 바꾸고 싶었다면 마왕 말고 악신이 되는 것을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아가로트의 시대는 멸망의 마왕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지금 시대는, 아가로트의 시대와 결코 똑같지 않다…….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이란 것부터가 다른 것 같다.
어째서?
“…….”
고민해 봤자 알 리가 없잖은가. 아가로트는 멸망 직전에 죽었으니,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바라면 더 떠올릴 수 있나?’
신검을 매개로 삼아 기적을 일으켜, 나 자신의 혼에 새겨진 기억을 떠올렸다. 한 번 성공하기도 했으니, 다른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어쩌면 아가로트의 일생을 처음부터 떠올릴 수도 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죽는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이상하고 껄끄러운데, 아가로트의 평생을 떠올렸다간 자아가 너무 흔들릴 것만 같았다.
결국 하멜은, 유진은, 아가로트와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닮은 점도 꽤 있겠지만, 그만큼 다른 점도 있었다.
‘전생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골 아픈데, 전생의 전생이라니.’
그 시절의 인연이 지금 시대에 환생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유진은…… 그런 것까지는 너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새끼.”
유진은 거머쥔 신검을 움직였다. 검붉은 신력의 빛은 선명하였으나, 별로 만족스럽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강하던데.”
아가로트는 인간이었을 적에도 마왕을 죽였고, 신이 된 후로도 마왕을 죽였다.
희미한 기억들을 연결해 보았다. 마왕 간의 위계까지 세세히 따지긴 힘들지만, 아가로트의 시대의 마왕은 이 시대의 마왕들보다 숫자가 많았다.
거창하고 특별한 기술 같은 것은 쓰지 않았음에도 아가로트는 강했다. 유진은 그것만큼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멸망의 마왕과 대치했던 순간. 아가로트는 오랜 전쟁으로 약화된 상태였지만, 그럴지라도 전투에 대한 감각과 기교는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실전, 전장에 대한 경험은 유진도 많지만 아가로트에 비한 바는 아니었다. 떠올린 기억. 감각 자체가 변해 버린 것만 같다.
부정적인 변화는 아니다. 이 순간, 유진은ㅡ 자신이 예전보다 힘이 강해졌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예전보다 ‘잘’ 싸울 수 있게 되었음은 확신했다.
‘이 이상 나가봐야 더 얻는 것은 없을 거야.’
오히려 예상치 못한 사태에 휘말릴지도 모른다. 유진은 그런 모험은 바라지 않았기에, 조용히 신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얼어붙은 바다 위에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전망은 탁 트였지만, 시야는 맑지 않다. 저 앞은 뿌옇고…… 잘 보이지 않는다.
유진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 * *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는데 절벽에는 여전히 세냐와 아니스가 서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유진이 라구르야란 쪽으로 날아가고서 고작 3시간 정도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고 했다.
모론은 자리에 없었다. 누르가 나타나서 죽이러 간 것이 방금 전이니, 조금 뒤에 돌아올 것이다.
“모론과 한 판 붙을 거야.”
유진은 산책이라도 다녀오겠다는 것처럼 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세냐와 아니스는 그 말을 편하게 들을 수 없었다. 특히, 유진이 저번에 모론에게 된통 얻어맞은 것을 직접 보았던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기겁하며 유진을 말리려 들었다.
“하멜, 모론과 싸울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모론은 더 이상 정신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유진 님, 저도 동감합니다. 이전의 승패가 무어가 중요합니까?”
세냐도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모론의 ‘힘’을 직접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론이 300년을 직접 살았다면. 게으름을 부리기는커녕, 누르라는 괴물을 사냥하는 나날을 살아왔다면…… 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을지는 상상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물론 모론이 살아온 시간이 광기에 점칠 되어 수행다운 수행에 열중하지 못했을지라도, 세냐가 느낀 ‘힘’은 300년 전의 모론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져도 괜찮은 거야?”
“나는 질 거란 생각이 안 들어.”
“그거야 뭐, 월광검에 성검, 신검까지 쓰면 이기겠지. 그런데 유진,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냐? 네가 저런 무기를 쓴다는 것은 모론과 죽일 생각으로 싸우겠다는 건데, 모론은 너와 그렇게 싸우려 들지 않을걸.”
“월광검이랑 신검은 안 써.”
유진은 망토 안쪽에서 성검을 뽑았다.
“쓰는 무기는 성검 하나. 이그니션도, 프로미넌스도 안 쓴다.”
“……너무 오만방자한 것이 아닌지.”
아니스가 중얼거렸다.
“하멜, 당신이 강한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저번에 모론과 싸웠을 적과 비교한다면…… 저 조건에서 당신이 우세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맞는 말이다. 나이트마치 이후 유진이 겪은 전투. 데스나이트, 에드몬드, 라이자키아, 그리고 아이리스. 각 전투 때마다 유진은 강해졌다.
하지만 유진에게 더해진 강함은, 백염식의 변화에 동반된 이그니션과 프로미넌스의 조합. 그리고 월광검과 신검 등에 치중되어 있다.
“원래는 그러겠지.”
유진도 알고 있다. 저번 모론과의 대결에서 유진은 완벽하게 압도당했다. 모론과 공수를 주고받기는커녕 힘에 휘둘렸고, 모론의 수를 완벽하게 간파하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시험해 보고 싶은 거야.”
유진은 성검을 어깨에 걸치고서 고개를 돌렸다.
“내게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이게 나 스스로도 확신이 안 돼. 확인도 안 되고.”
이면에서 돌아온 모론이 유진을 빤히 보고 있었다.
“다른 놈이랑 한 판 붙어서 확인해 보고 싶은데, 내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을 만한 상대가 흔치 않거든. 나보다 확실하게 강하다 말할 상대는 더 드물지.”
“그런가.”
모론은 뺨에 묻은 누르의 피를 손등으로 쓱 닦았다.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잠시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네 뜻은 알겠다, 하멜. 네가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나 외에 누가 너를 시험대에 올릴 수 있겠는가.”
모론은 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멜, 네가 바란다면 나는 언제든지 너와 대결할 것이다. 그것은 300년 전에도 바라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대결에는…… 나도 개인적인 바람을 걸도록 하마.”
“바람? 뭔데?”
설마 모론 쪽에서 무언가를 요구해 올 줄이야.
그 모론이 저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다들 놀란 눈으로 모론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받는 모론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긴다면. 하멜, 너는 ‘졌습니다’라고 5번 외쳐라.”
“…….”
“‘나 하멜 다이너스는 모론 루하르와의 대결에서 졌습니다’라는 글자를 적어라.”
“…….”
“패배에 관해 다른 핑계는 일절 대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모론의 말에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넋을 잃고 이야기를 듣던 아니스와 세냐가 서로의 팔을 찰싹찰싹 때려가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 개새끼. 쪼잔하게 속에 쌓아둔 거냐?”
“하멜, 나는 네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단 한 번도 쪼잔한 적이 없다.”
“내가, 무기를 쥐면 이겼을 거라던 말을 가슴에 쌓아둔 거잖아!”
“아니다, 하멜.”
모론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쪼잔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멜 너다. 남자와 남자가 싸워서 결판이 났는데, 그 뒤에 구시렁구시렁 핑계를 붙인 것은 대체 누구였나.”
모론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작았고, 빨랐다. 모론답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저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드…….”
그래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유진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드…… 등신! 등신아!”
사람이란 말문이 막히면 추하기 짝이 없는 인신공격을 시작하기도 하는 법이다.
빌어먹을 환생 411화
결계의 안쪽, 레헤인야르의 이면을 대결의 장소로 삼았다. 현실에서 모론과 치고받았다가, 서로가 조절을 아예 놔버릴 경우엔 지형이 살짝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산맥 자체가 증발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마 그 정도로 과열되지는 않겠지만.’
일단 생각은 그렇게 해보지만, 유진 스스로도 확신은 없었다. 유진과 모론. 서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이 어느 정도 진심을 낸들 상대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심각한 부상을 입을지라도,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라면 회복해 줄 수 있다. 게다가 정도가 지나친다면, 방관하던 세냐까지 간섭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ㅡ 어떻게 싸우건, 누가 이기건, 유진과 모론은 상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승패로 의가 상할 리는 없다. 다만, 자존심은 걸려 있다.
솔직히 말해서 유진은 전생에도 자신이 모론보다 약하다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전생 하멜은 모론보다 ‘몸’이 약하기는 했다. 그렇기에 모론처럼 무식하게 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싸움에서의 강함과 약함과 대체 무슨 상관인가? 벌써부터 유진은 당연하단 듯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 대결은, 저번처럼 모론을 위해서, 모론의 광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싸움도 아니다. 처음에는 유진이 느끼고 있는 ‘변화’를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는데, 어느새부터 그냥, 단순하고 철저하게, 둘 중 누가 더 강한가에 중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기에 과열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유진은 자신이 모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절대로 지고 싶지는 않았다. 세상 누가 싸움에서 질 생각으로 나서겠는가?
모론도 마찬가지였다.
‘하멜 다이너스’라는 인간을 존경하고 있다. 300년 전부터 그랬다. 그 베르무트가 최초로 부렸던 고집. 용병계에서 한창 악명을 떨치는 중인 젊은 용병을 동료로 맞이하고 싶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ㅡ 세냐와 아니스는 반발했다.
하지만 모론은 그리 반발하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선택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동시에, 새로 들어오는 동료가 ‘용병’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당시의 모론, 세냐, 아니스는 세상에 대한 경험이 적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것이, 모론은 북방 설원 부족 출신이고 아니스는 유라스에서 성녀로 떠받들리던 몸에, 세냐는 갓난아기부터 대수림에서 자랐다.
반면에 수많은 전장을 겪은 용병이라면 다양한 경험이 풍부할 것 아닌가? 아니스와 세냐가 말하는 것처럼 실력이 부족할 수도야 있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전투가 아닌 다른 역할을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
하멜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조무래기 용병들을 쓰러트리는 모습이었을 뿐이지만, 모론은 하멜의 움직임에서 범상치 않은 깊이를 느꼈다. 후에 베르무트와 대결하는 것을 보았을 때. 모론은, 저 남자는 언젠가 강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자기보다 강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다. 하멜은 뛰어난 전사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멜이 나보다 강했는가? 모론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전투에 관해 둘의 성향과 방식은 큰 차이가 있었지만, 그건 역할을 분담한 것일 뿐. 모론도 그래야만 했다면, 얼마든지 하멜처럼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하멜.”
모론은 굵은 팔을 교차시켜 팔짱을 꼈다. 그는 덥수룩한 수염 위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나는 저번 대결에서 네 실력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의 네가, 그때와 비교해 더더욱 강해졌음을 느끼고 있다.”
“뭘 새삼스레.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나는 언제나 강해지고 있어.”
유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발로 땅을 몇 번 문질렀다.
팔짱을 끼고 선 모론. 가뜩이나 큰 덩치가 더 커 보인다. 심지어 점점 커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모론이 임전태세에 들어간다는 증거였다. 유진은 점점 강대해지는 모론의 존재감을 느꼈다. 그리고,
가슴 안의 우주를 관조했다. 백염식이 운용되고, 가슴 안의 우주가 열렸다. 지금, 유진이 모론을 실제보다 크게 느끼듯이, 모론 역시 유진을 실제와는 다르게 느꼈다.
‘기묘하군…….’
다른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은 이질감. 모론의 눈에 비치는 유진은,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 존재감은 위압감 같은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
‘분명히 눈앞에 있다. 이질적이기에 선명하다. 그러면서도 투명하다…….’
뭘까 이 감각은. 모론은 의아함을 느끼면서 팔짱을 풀었다.
모론 루하르. 그는 긴 삶을 살아왔다. 인간 중에서 모론만큼이나 많은 전장을 거쳐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론의 삶에서 단 한 번도 저런 존재감을 내비치는 상대를 만난 적은 없었다.
“선공은.”
유진이 입을 열었다.
“네가 해라. 저번에는 내가 먼저 때렸으니까.”
-정 이길 자신이 있다면. 한 대는 피하지 말고, 막지도 말고 맞아줘라.
그때 모론에게 저런 말을 했었고, 실제로 모론은 저렇게 해주었다. 설마 모론도 똑같은 걸 요구하지는 않겠지. 유진은 혹시나 그러지 않을까 생각하여 변명을 준비했지만, 모론은 유진의 생각만큼이나 추하지 않았다.
“좋다.”
오히려 모론은 선공을 양보받은 것에 대해서도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의 유진이라면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팔짱을 푼 모론은 철추만큼이나 커다란 주먹을 꽉 쥐었다.
쿵, 쿵. 모론이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유진은 오른손으로만 쥔 성검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비스듬히 세운 성검이 유진의 몸과 직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 순간, 모론에게는 더 이상 유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름답게 제련된 칼날의 예기가 유진의 존재감을 완전히 삼켜 버린 것으로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집중과 몰입. 지금 유진과 성검은 완벽한 물아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이 순간 모론은 어떠한 망설임을 느꼈다.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가에 대한 망설임. 그만큼이나 유진에게서 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어디를 공격하건 뚫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론의 주저는 짧았다. 틈이 없는 상대. 뚫을 수 없는 상대. 그건 눈으로 보고서 느끼는 감상일 뿐. 직접 공격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론은 씨익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뒤로 젖혔다.
꽈르르르릉!
이미 쥐어진 주먹이 들썩거린다. 손가락 관절이 더욱 말려 들어가면서, 모론의 주먹 안쪽에서는 우레와 같은 소리가 끓었다.
쿵, 쿵, 쿵! 주먹 근처의 공간이 일그러지고 요동쳤다. 머리 뒤로 뻗은 주먹. 그렇게 들고 있는 주먹에는 세상조차 부술 것만 같은 거력이 깃들었다.
모론의 발이 앞으로 쭈욱 뻗어 나왔다. 꽈아앙! 밟은 땅이 요동쳤다. 그것으로 모론의 몸은 대지에 우뚝 서고 연결되었다.
쿠구구궁! 모론의 허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일직선. 가장 빠르고 강한 주먹을 뻗기 위한 자세가 만들어졌다.
뚜둑, 뚜두둑……! 손등과 오른팔에서 굵은 핏줄이 불거졌고, 근육도 비대하리만큼 부풀었다.
“하멜.”
모론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해도 된다.”
저 말에 유진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새끼, 기억력도 좋기는. 굳이 대답해야 할 질문은 아니었다.
화르륵…… 검은 불꽃이 조용히 타올라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성검 역시, 언제나와 같은 찬란한 빛 대신에 은은한 검은 불길에 뒤덮였다.
‘온다.’
꽈직! 모론의 발이 산을 무너트렸다. 붕괴의 시작보다 모론이 주먹을 던지는 것이 훨씬 더 빨랐다. 주먹이 시야 전체를 꽉 채운다고 느낀 순간, 어마어마한 힘이 공간을 으깨가며 유진을 덮쳤다.
이전의 유진이라면, 이만큼이나 강력한 위력의 공격을 굳이 정면에서 받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공격은 막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낫다. 정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보다 고화력으로 맞받아치거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진의 의지가 일어났고, 성검이 움직였다.
사아악! 많은 힘도 필요 없었다. 몇 걸음씩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흘려내기. 이것은 하멜일 적부터 즐겨 쓰던 기술. 베르무트가 만들고, 제노스의 가문에 전수되던 ‘하멜 식’에는 아예 ‘마나패링’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아무리 유진이라도, 모론의 주먹을 이만큼이나 완벽하고 깔끔하게 흘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지금의 흘려내기에는 그리 많은 힘을 두지도 않았다. 정면에서 덮쳐오는 파도가 작은 돌멩이 하나와 닿아 흐름이 바뀐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허…….”
그것에 가장 놀란 것은 주먹을 던진 모론이었다. 그는 뻗은 주먹을 거두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쥐고 있던 손바닥을 펼쳤다.
단순히 흘려진 것만이 아니다. 닿았다. 그리고 베였다……. 모론은 허허 웃으며 손등을 털었다. 푸확! 붉은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묘하군.”
쿠구구궁! 단 한 번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냐는 진즉에 아니스와 함께 공중에 날아올랐다. 그녀는 얇게 뜬 두 눈으로 모론과 유진을 바라보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던 둘이지만, 산봉우리가 무너지면서 모론은 저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하지만 유진이 선 땅은 무너지기는커녕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니스. 저거 보여?”
“네.”
아니스는 세냐의 곁에서 두 눈을 빛냈다. 마법사인 세냐가 알아차린 변화를 성녀인 아니스가 간파하지 못할 리 없다. 그녀는 균열 하나 가지 않은 유진의 발아래를 주목했다.
“성역(聖域)입니다.”
직접 보고 있지만 믿기지 않았다. 빛의 신교에서도 대주교급의 최고위 성직자는 되어야만 성역을 만들 수 있고, 성녀인 아니스도 당연히 성역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신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녀인 아니스조차도 신성마법으로 성역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유진은ㅡ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자신이 선 공간을 성역으로 만들어냈다. 심지어 저 성역은 ‘빛’의 성역도 아니었다.
“본인의 신격…….”
아니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 성역은 거대하지 않다. 유진이 선 공간. 몇 걸음 정도의 범위만이 성역화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저 성역 내에서 ‘빛’의 신성력이 양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진이 용사이고, 성검을 쥐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빛께서 인정하고 허락한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유진도 자신이 어떤 일을 해낸 것인지를 느꼈다. 의식하고 한 것은 아니었다. 신검을 꺼낸 것도 아니다. 그저 평소처럼 백염식을 운용했을 뿐. 하지만 기억에 흘러들어와 버린 것이, 무의식적으로 백염식에 신력을 섞어냈다.
발아래를 힐긋 내려다본 유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유진이 존재하고 바라는 한 이 성역은 무너지지 않는다. 또한 성역 내에서 유진은 다양한 이점을 갖는다. 아가로트가 그랬듯이, 언젠가는 멸망의 불길함에도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누아르 제벨라의 환상의 마안에도 저항이 가능할 것이다.
아래로 추락하던 모론은 주변의 잔해를 밟고 위로 뛰어올랐다. 단숨에 높은 하늘까지 도약한 모론은 다른 봉우리에 착지했다.
검에 베인 손등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다. 아니스가 신성마법으로 치료하려 했지만, 모론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치료받으면 진다.”
수염이 덥수룩한 모론이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아니스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먼저 코피가 터진 쪽이 지는 것이라는 어린아이 싸움이랑 차이가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뚜둑.
모론이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베여서 벌어졌던 상처가 힘에 의해 오그라들고 피가 멎었다.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펴니 상처가 아예 달라붙었다.
그렇게 처치를 끝낸 모론은 씩 웃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둘의 거리는 한참이나 떨어졌지만, 모론의 눈에는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유진이 가깝게 보였다.
“이상한 힘이 더해졌구나.”
모론은 유진에게서 낯선 기질을 느꼈다. 그건 껄끄럽기보다는 전사다운 호승심을 자극했다.
모론의 자세가 천천히 낮아졌고, 투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동시에 강한 갈망이 하나 피어올랐다. 저, 흔들림 없이 올곧은 자세. 방금 일권으로 물러서지 못하게 만든 유진을 무너트리고 싶다는 갈망.
이렇게나 순수한 욕구를 느낀 것이 얼마 만인가?
꽈직, 꽈지직! 발아래의 지면이 다시 으스러진다. 모론이 선 공간이 일렁거린다. 거구가 땅을 박찼다. 그것에 소리는 따르지 않았다. 도약한 순간에 모론은 유진의 성역을 침범했고, 이윽고 거대한 폭력이 완성되었다.
아까와 같은 주먹. 그러나 무게가 다르다. 이 순간에 유진은 자신의 변화를 강렬하게 체감했다. 이전에 싸울 때는 모론에게서 이렇게나 많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모론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은 알지만, 어느 정도나 손대중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은 모론에게서 아주 많은 것을 보았다. 저 터무니없는 괴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모론에게 얼마나 많은 여력이 있는지. 놀랍게도 저 괴물 같은 놈은ㅡ 전력의 절반 정도밖에 쓰지 않고 있었다.
꽈아아앙! 성검이 뒤로 튀었다. 모론의 주먹도 밀려났다. 하지만 둘의 걸음을 밀려나지 않았다. 모론은 우직하게 한 걸음 내디디며 다른 주먹을 들었다.
‘미친놈.’
오만하다는 말은 못 하겠다. 저 말도 안 되는 힘은, 모론이 300년 동안 쌓아 올린 힘이다. 정신이 미쳐가면서 해온 전투의 산물이다. 그 전력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유진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둘의 경지에서 전력을 부딪친다는 것은 필살을 생각하는 것. 그렇기에, 모론이 그러하듯이 유진 또한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는 이그니션은커녕 프로미넌스도 쓰지 않을 것이다.
‘쓰면 균형이 무너져.’
이전 전투에서는 프로미넌스와 이그니션을 써도 괜찮았다. 그래 봤자 맨몸으로 싸운 것이었고, 유진이 이그니션을 썼어도 모론이 여유롭게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하멜이 이그니션을 쓴다면…….’
모론도 똑같은 것을 느꼈다.
‘내가 밀린다.’
그 사실이 모론을 즐겁게 만들었다.
주먹과 검이 연달아 부딪쳤다. 검의 궤적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유진은 바라는 대로 모론의 주먹을 흘려내고, 모론이 어떻게 공격할지를 예측했다.
허나 유진의 바람만이 무조건 이뤄지지는 않았다. 유진은 모론의 주먹을 베고자 했으나, 처음처럼 모론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는 없었다. 아무리 칼날을 세운들, 모론을 벨 수가 없었다.
“인정하겠다, 하멜.”
수십 번쯤 주먹을 부딪쳤을 때. 모론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맨손으로는 널 못 이길 것 같다.”
그 말에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300년 전부터 모론이 쓰던 무기는 바로 도끼였다.
빌어먹을 환생 412화
도끼.
300년 전부터 모론이 쓰던 도끼는 바뀐 적이 없었다. 부족을 떠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도끼. 그보다 전에, 모론이 한 명의 전사로 자립할 때부터 쥐었던 도끼.
여러 의미가 있는 주제에, 모론은 자신의 애병(愛兵)에 이름 하나 붙이지 않았다.
그런 점이 모론답기는 했다.
“도끼?”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성검을 거두었다.
그토록 부딪쳤는데도 성검의 칼날은 멀쩡했다. 빛의 신교 최대의 성물인 이 검은, 신화에 따르면 빛의 화신이 직접 만든 검이기에, 빛에 대한 신앙이 존재하는 한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다.
“너 다른 도끼를 쓰던데. 예전에 쓰던 도끼는 어디다 뒀어?”
누르를 죽일 때 쓰던 도끼. 라이미르아에게 집어 던졌던 도끼.
그건 모론이 옛날에 쓰던 도끼가 아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원체 험하게 쓰기도 했고, 300년이나 지났으면 진즉에 낡아 부서졌을 것이다.
“언제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세계에 묻어두었다.”
모론은 뻐근한 양손을 쥐었다 펴면서 뒤로 물러섰다. 묻어두었다니. 유진은 저 대답이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묻어놔?”
“더럽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유진이 성검을 아래로 내리며 두 눈을 끔벅거리자, 모론은 껄껄 웃었다.
“하멜. 나는 그 도끼로…… 많은 것을 했다. 베르무트와 처음 여행을 떠났을 때에 그 도끼는 내 등에 걸려 있었다. 세냐와 아니스, 하멜 너를 만났을 때도 도끼는 항상 내게 있었다. 내가, ‘우리’가 마족과 싸울 때. 마왕을 죽였을 때도, 나는 그 도끼를 사용했다.”
모론의 오른손이 들렸다.
“우리가 마경에서 보낸 모든 시간에서 도끼는 내 손발이 되었다. 하멜, 네가 죽고, 베르무트가 약속을 맺고, 평화가 시작된 후에도. 내가 멸망한 북쪽 왕국들의 폐허에서 나의 왕국을 일으켜 세울 때도. 도끼는 내 손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마왕과 마족을 베던 도끼로 산을 베고 대지를 베어 평평하게 만들었다. 물길이 필요하다기에 땅을 찍고 수맥을 끊어 강을 만들기도 했다. 굴을 판다 했을 때도 모론은 앞장서서 도끼를 찍었다.
“하멜. 나는 그 도끼로 마왕을 죽이고 루하르를 세웠다. 그 도끼.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은 그 도끼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나의 삶. 나의 추억. 그 대부분에 함께 했던 도끼에…… 불길하고 지저분한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나의 광기를 더해 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땅에 묻었다. 모론은, 자신의 오랜 애병을 순수하게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도끼를 묻으며 생각했다.”
모론의 손가락이 허공을 쥐었다.
“다음에 이 도끼를 다시 휘두르는 것은, 상대가 마왕일 때. 혹은 내가 진정으로 휘두르고 싶은 상대일 때.”
쿠구궁……
산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멜.”
꽈르르르릉! 산맥 한쪽이 찢어졌다. 그 아래 깊숙한 곳에 파묻혔던 도끼가 치솟더니 모론의 손으로 날아왔다.
쿠웅! 모론은 자기 몸뚱이만큼이나 커다란 도끼를 한 손으로 받아내고 어깨에 걸쳤다.
“나는 지금 네게 도끼를 휘두르고 싶다.”
다르다.
모론이 도끼를 쥔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르를 죽일 때나 쓰던 도끼는ㅡ 지금 저 도끼에 비하자면 흉악함부터가 달랐다. 저 살벌하게 생긴 도끼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왕의 무구보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애병을 쥔 모론의 위압감은 방금 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미친 새끼. 그냥 날 죽이고 싶다고 말하지 그러냐?”
유진은 흉흉한 위압감에 전율하며 투덜거렸다.
저 모습을 보니 견적을 다시 잡아야 할 것 같았다. 방금 공격을 나누면서 생각해 보길, 모론이 설령 전력을 다할지라도 이그니션을 쓰고 무기를 자유롭게 쓴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론이 도끼를 쥔다면…… 승률이 아주 높지는 않을 것 같다.
“모론 네가 나한테 도끼를 휘두르고 싶은 것이라면, 그래, 좋아.”
승패를 떠나서 기분은 좋았다. 그야, 저번 전투에서 모론은 끝까지 도끼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미넌스를 쓰고, 이그니션을 쓰고, 구질구질한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갔음에도…… 모론에게 저런 마음을 느끼게 하지 못했는데.
“5번으로 하자.”
유진은 위를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 모론이 도끼를 쥔 순간부터 아니스와 세냐의 눈에 불이 켜졌다. 둘은 당장에라도 가로막고 싶었지만, 유진과 모론을 생각해서 참고 있었다.
“네 도끼질 5번. 내가 버티면 이기는 거다.”
“왜 내 도끼질인가?”
“난 지금 조건에서 고작 5번으로 널 쓰러트릴 자신이 없거든.”
유진은 그것은 웃으며 인정했다.
“하지만 너는 힘에 여력이 많고, 아끼던 도끼까지 쥐었으니까…… 5번 도끼질로 나를 주저앉힐 자신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으하하하!”
모론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그렇구나. 하멜, 네 말이 맞다. 5번. 해보지.”
또다. 여기서부터 또. 모론의 위세가 바뀐다.
쿠르르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끼가 머리 위로 들린다. 그것뿐인데도 세상을 울리는 것만 같은 굉음이 뒤따랐다. 모론은 높이 든 도끼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꽈득, 꽈드드득! 도낏자루를 잡은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광경을 보고 있으니, 유진은 괴력의 모론보다 저 힘을 멀쩡하게 버티고 있는 도끼가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다.
300년 전부터 쓰던 것이니 족히 수천수만 번은 휘둘렀을 것이다. 그 세월을 증명하듯 자루는 낡았으나, 공간을 쥐어뜯는 모론의 악력에도 으스러지지 않고 있다.
도끼날도 마찬가지다. 색은 거무튀튀하고 탁하지만, 날 부분은 금이 간 곳이나 이가 빠진 부분이 없다.
보면서…… 자연스러운 이해가 들었다. 모론이 말했듯, 저 도끼가 모론 자체였다.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음에도, 모론은 언제나 저 도끼를 아꼈다. 하멜이야 무기가 날이 빠지면 그냥 버리고 전장에서 새 무기를 주워다 썼지만, 모론은 전투가 끝날 때마다 직접 도끼를 닦고 날을 갈았다.
평범한 도끼일지라도 저만큼 오랜 세월을 아끼고 사용하면 혼이 담긴다. 유진은 아티펙트화 된 도끼를 높이 든 모론을 노려보았다.
쿵, 쿵, 쿵! 힘이 집중된 도끼날이 파르르 떨리다가 정지했다.
쿠웅!
모론의 발이 땅을 박찼다. 높이 도약한 모론은 주저하지 않고 도끼를 내리찍었다.
유진은 부릅뜬 두 눈으로 떨어지는 도끼를 노려보았다. 푸확! 백염식의 우주가 흘러넘치고, 검은 불꽃이 치솟았다.
꽈아아앙! 간신히 도끼의 궤적을 흘려냈다. 이전처럼 제자리에 서서는 도저히 받아낼 수가 없었기에, 유진의 몸은 한참이나 옆으로 옮겨졌다. 거기에 양 손바닥이 찢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렸다.
성역은ㅡ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산은 통째로 주저앉았다. 모론은 바닥에 처박혔던 도끼를 뽑더니 옆으로 휘둘렀다.
쿠우웅! 거리는 충분했을 텐데. 도끼를 휘두른 순간, 유진과 모론 사이의 공간이 말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흘려치기엔 늦었어……!’
유진은 기겁하며 성검을 휘둘렀다.
꽈지지직! 성검과 도끼 사이에서 빛이 터졌다. 시커멓게 타오르는 불꽃이 도끼의 풍압에 밀려 한순간 소멸했다. 까각, 까가각! 성검의 칼날이 도끼에 잡아먹힐 듯 눌리고, 양손에서는 기어코 피가 터졌다.
“이걸로 2번!”
모론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외쳤다.
도끼가 뒤로 물러난다. 유진도 성검을 뒤로 당겼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허리를 뒤틀었다. 화르륵! 불꽃이 칼날을 휘감고, 그 안쪽에서는 빛이 공존했다.
“3번!”
꽈아앙! 도끼와 성검이 다시 충돌했다. 충격만으로 영혼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결계 속의 이면이 통째로 붕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쩌렁쩌렁 울려오는 충격에 몸속이 아팠다. 그런 유진에 비해 모론에게는 확실히 여유가 있었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정면에서 받아내는 유진을 보며 씩 웃었다.
‘시작부터 진 내기로군.’
모론은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유진은 시작부터 정면에서 도끼를 받아냈지, 피하면서 반격하지는 않았다. 그것부터가 유진이 모론의 전장에 들어와 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쓰러트리지 못했으니, 모론은 자신의 패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끼질을 멈출 생각은 없다. 이렇게, 팔이 뻐근하리만큼 도끼를 휘둘러 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모론은 껄껄 웃으며 도낏자루를 당겼다.
쿠르르릉! 모론의 힘이 더욱 풀려나왔다. 모조리 무너져 버린 탓에 더 이상 밟을 지면도 없었지만, 모론은 쭈욱 발을 뻗더니 허공을 밟았다. 뚜두둑! 그러자 허공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갔다.
유진의 눈에는 모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가 보였다. 저 미친 새끼는 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점과 면 자체를 짓밟고 있었다. 그리고 저 도끼에는 공간 전체의 무게가 실렸다.
레헤인야르의 이면.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무게가 모론의 도끼질을 뒤따랐다.
촤르르르륵! 성검의 불꽃이 회전했다. 검강이 순식간에 중첩되며 공검을 이루었다. 이그니션과 프로미넌스는 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공검을 쓰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유진은ㅡ 그 사실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공검까지 제한을 걸었다면, 저 도끼질은 도저히 받아낼 수 없었을 테니.
1중첩, 2중첩, 3중첩, 4중첩. 순식간에 최고 중첩에 도달했다. 본래부터 검었던 불꽃에 공검의 중첩이 더해지니, 색도 색이지만 검은 번개 같은 것이 파직거리며 튀어 올랐다.
“미친.”
아래를 보고 있던 세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참 거리를 두고 최고강도의 방어결계를 펼쳐놓았다. 하지만 유진과 모론이 들고 있는 힘을 보니, 충돌 직후의 파동만으로도 지금의 결계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세냐는 즉시 프로스트를 소환해서 방어결계를 중첩시켰고, 아니스도 날개를 펼쳐 결계 안을 빛으로 채웠다.
도끼와 공검이 부딪쳤다. 그 순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순간, 유진과 모론의 모습이 사라졌다. 잔영이 휩쓸리고 다시 재구성되었다.
허무해졌던 세계에서 유진과 모론은 다시 서로를 관측했다. 유진은 왈칵 치솟은 피를 삼키지도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모론도 만만찮은 충격을 입었다. 그는 검은 수염을 피로 적시며 씩 웃더니, 보란 듯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절반도 쓰지 않던 힘. 모론조차도 제 자신의 전력을 알 수 없었다. 지금 휘두를 마지막 도끼에는 꽤 많은 힘을 주었다.
버틸 수 있을까? 이 손으로 하멜을 죽여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한순간 모론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찍어 새끼야!”
눈동자에 어린 망설임을 보았다. 그것이 유진을 짜증 나게 만들었다. 유진은 일그러진 공검에 마나를 퍼부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찌직, 찌지지직! 공검 전체에 균열이 나타났다. 그 균열을 성검의 빛과, 새로 더해진 불꽃이 메웠다. 유진은 한 번 더 중첩을 시도했다. 5번의 중첩은 시도해 본 적이 없다. 지금이 처음이다.
실패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4중첩으로는 저 힘을 못 받아낸다. 이그니션도, 프로미넌스도 쓰지 않은 지금, 도끼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공검의 단계를 올려야 한다.
성공했다. 5중첩의 공검은ㅡ 더 이상 불꽃이나 번개 같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칼자루부터 시커먼 덩어리가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지금 자신의 양손에 쥐어진 힘을 스스로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모론이 도끼를 휘두르는 것이 보인다.
찰나.
유진은 이 검으로 모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히 부딪칠 뿐이라면, 이 순간의 힘은 호각. 허나 모론에게는 아직 여력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당장 호각이라면, 이 순간에 필살을 이루면 되는 것이다.
모론이 전력을 끌어내기 전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 서로의 가공한 힘은 충돌하면서 상쇄되고 소멸한다. 그 순간을 끝으로 두지 않고 잇는다. 모론이 가진 힘의 흐름을 파고든다.
이건 예측이나 예언이 아닌 계시. 유진의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사고에 신성(神性)의 폭발이 이뤄지고, 금색 눈동자는 한순간 신기(神氣)가 깃들었다.
허나ㅡ 거부했다. 모론을 죽인다고? 미친 생각. 유진은 머릿속에 떠오른 직관에 코웃음 치며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굉음은 없었다.
산맥 전체가 소멸했다. 어차피 현실이 아니기에, 산맥은 다시 재구성될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텅 비어버린 세상에서 유진과 모론이 마주 보았다. 모론은 두 눈을 끔벅거리면서 천천히 도끼를 내렸다.
“허……”
모론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도끼날의 윗부분이…… 썩둑 잘려 나간 것이 보였다. 고작해야 손바닥 정도 크기의 날이 소실된 것이나, 모론은 그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5번 받았다.”
유진은 숨을 헐떡거리며 성검을 내려놓았다.
5중첩의 공검. 더 이상 유지가 되지 않았다. 유진은 꺼져가는 불꽃을 백염식의 우주 안으로 수습하며, 칼자루를 쥔 손을 펼쳐보았다.
당연하게도 손바닥은 피범벅이었고, 손가락 몇 개는 부러져 있었다. 카악, 퉤. 유진은 입에 고인 피까지 뱉어내고서 모론을 쳐다보았다.
“확, 도낏자루를 날려버리거나…… 날을 두 동강 낼까 했는데. 그럼 네가 화낼 것 같아서, 끝만 날려놨다.”
원체 큰 도끼다. 손바닥 정도 잘렸다고 해도, 도끼로 써먹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다.
도끼를 베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충돌 직전에 떠올린 직관. 그리고 신성에 의한 사고의 폭발. 유진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손등으로 두드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허…… 허허.”
모론은 헛웃음을 흘리며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뭘 봐, 새……”
“졌습니다!”
모론이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졌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이어졌다. 모론은 양팔을 번쩍 치켜들며 내리 3번을 더 외쳤다.
“나 모론 루하르는! 하멜 다이너스와의! 유진 라이언하트와의 대결에서 졌습니다!”
모론은 한 점 부끄럼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자긍심에 가득 차서 외쳤다.
‘……쟤 왕국 수도에서 외치라고 할걸.’
그 순간.
유진은 머릿속에 들었던 아쉬움을 남몰래 묻어놓았다.
빌어먹을 환생 413화
아무것도 없게 된 이면에서 밖으로 나왔다. 싸우던 도중에, 혹시나 이면 자체가 붕괴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레헤인야르의 이면은 100년 넘도록 누르의 시체를 버리는 쓰레기통으로 삼은 곳이고, 애당초 그럴 목적으로 베르무트가 만든 곳이다. 그 철저한 놈이 전투 따위로 붕괴될 만큼 어수룩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이면에서 나왔지만, 모론은 도끼를 내려놓지 않았다. 놈은 여전히 도끼를 양손으로 쥐고서, 깔끔하게 잘려 나간 도끼날의 끝부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파편이라도 남길 걸 그랬나. 그러면 어떻게 붙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모론이 저토록 멍하니 서 있자, 유진은 괜히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서 말을 걸었다.
자기 자신이나 다름없다던 도끼. 그것이 끝부분이나마 잘려 버렸으니, 모론이 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말이 ‘잘렸다’이지, 파편은 잘려나간 순간에 공검에 휩쓸려 깔끔하게 소멸했기에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
“아니…… 괜찮다. 하멜. 파편이 남았다 해도, 나는 붙이지 않았을 거다.”
눈동자가 멍한 주제에 모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억지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300년 동안 자기 분신처럼 아껴온 도끼인 것은 사실이지만ㅡ 전투에서, 그 하멜과의 전투에서 부러진 것은, 모론이 슬픔을 느낄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전사가 더할 나위 없는 전장에서 죽는 것을 갈망하듯, 무기 또한 마찬가지일 터. 심지어 완전히 박살 난 것도 아니고, 끄트머리만 살짝 잘려 나갔을 뿐 아닌가? 워낙 도끼날이 크기에, 저 정도 잘린 것으로는 쓰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진짜? 진짜로?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유진은 실눈을 뜨고서 모론을 쳐다보며, 슬쩍 옆에 붙어 모론을 툭툭 건드렸다.
“너 이 새끼. 일단 확실히 해두는데, 나는 너한테 내기하자고 한 적 없다? 어? 그리고 조건, 조건 말이야, 그것도 내가 정한 것 아니잖아. 네가 정한 거지. 그리고 나는 너한테 졌습니다 외치라고 시킨 적도 없고, 시킬 생각도 없었어!”
설마 졌습니다 5번 외친 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유진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냉큼 선을 그었다.
“하멜.”
찰싹, 찰싹. 유진의 손바닥에 팔뚝을 내주고 있던 모론이 홱 고개를 돌렸다. 우악스러운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유진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에.”
“어…… 어어.”
“나는 네 검을 보지 못했다. 그 전의 네 검도 빠르고 예리했으나,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내 다섯 번째 도끼를 가르던 네 검은, 틀림없이 내 시야를 초월했다.”
유진도 그 이질적인 순간은 기억하고 있다. 만약, 그 순간에. 유진이 정말로 하려고 들었다면, 모론의 목을 벨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전투 중에 깨달음이란 것이 찾아오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아도 존재한다. 전투에 관한 사고란 것이 변화하고, 무예의 경지가 오른다.
유진도 전생에 몇 번이나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목숨이 걸린 실전. 사선을 넘나드는 중에 깨달음을 얻는 것.
하지만 이번은…… 그런 종류의 깨달음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상대의 공격이 눈에 보이는 것.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면 먹힌다는 것. 그런 식의 계산과 예측은 여태까지도 항상 했었지만, 마지막 검을 휘두를 때 들었던 것은 계산도, 예측도 아니었다. 무조건적인 결과.
유진은 힐긋 시선을 내려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아직 피범벅인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 고작 몇 분 전의 일인데, 떠올리는 것만으로 손이 ‘검’을 바라고 있다…….
“몰라.”
유진은 시선을 거두면서 대답했다.
그 찰나에 이뤄진 직관. 머릿속에는 신성이, 눈동자에는 신기가 깃든 감각. 분명 그 순간의 기억은 또렷한데, 유진은 그 순간을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모른다고?”
“그래. 우연으로…… 감으로…… 그거랑 비슷한 것 같아.”
떨리는 손을 쥐었다 펴며 대답했다.
우연, 감. 그런 불확정요소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굴욕이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론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의 말을 들은 즉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렇다면 그 감각을 완전히 네 것으로 삼아야겠군.”
유진 같은 경지에서 새로운 깨달음이라는 것은 굉장히 드물다.
우연과 감. 그것에서부터 시작일지라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리면 더욱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모론은 같은 전사로서, 유진이 느낀 우연과 감이 천운과 같은 것임을 확신했다.
“그 전에 일단 치료부터 합시다.”
퍼억! 어느새 다가온 아니스가 유진과 모론의 등을 동시에 후려쳤다. 아니스는 안광을 번뜩이며 유진과 모론의 상처를 살폈다.
모론이야 조금 베인 상처가 전부였고, 솔직히 저 정도 상처는 신성마법으로 치료할 정도도 아니었다.
반면에 유진의 상처는 치료가 필요했다. 피가 철철 흐르다가 굳은 양손도 양손이지만, 모론의 무식한 공격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받아내며 뼈와 근육, 장기에 손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그니션은 쓰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안 쓴다고 했잖아.”
“흥…… 만약 하멜, 당신이 이그니션을 썼다면, 모론보다 제가 당신을 두들겨 팼을 겁니다.”
퍼억! 아니스는 다시 한번 유진의 등을 한 대 후려쳤다. 유진은 그 말이 굉장히 억울해서 항변에 나섰다.
“모론보다 먼저?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나는 모론에게 두들겨 맞은 적 없어.”
“전에 두들겨 맞았잖습니까.”
“전은 전이고 오늘은 오늘이지. 오늘은, 그, 굳이 말하자면 내가 모론을? 두들겨 패지는 않았어도 썰어버릴 뻔은 하지 않았나…….”
“살짝…… 살짝 아슬아슬해 보이기는 했지. 난 네가 정말로 모론을 베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니까?”
아니스와 함께 위에서 보고 있던 세냐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도중에 너무 위험하다 싶어, 간섭해야겠다 고민했던 게 몇 번이던가?
“백염식이나 마나뿐만 아니라, 싸움 재주 자체가 늘어난 것 같은데. 뭐 어떻게 한 거야? 너 우리 몰래 수행이라도 해?”
“아이리스 토벌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붙어 다니는데, 내가 몰래 수행을 어떻게 하냐?”
맞는 말이기는 한데…… 하루도 빠짐없이 붙어 다닌다는 말에 세냐는 괜히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워서라도 부정하고 싶은데 사실이라 기분은 좋은……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에는 주변 시선이 민망한…… 그나마 다행이랄 것은, 지금 주변에 있는 것이 과거의 동료들이라는 것.
‘……모론은 알고 있나?’
세냐는 흠칫 놀라서 모론을 쳐다보았다.
저 눈치 없는 등신이 알아차렸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스나 베르무트는 세냐의 감정을 훤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세냐는 그것이 자신의 태도가 어설펐던 탓이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둘의 눈썰미가 너무너무 뛰어났을 뿐. 반면에 모론은 등신이니, 세냐가 하멜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었을 리가 없다…….
“식은 모든 것이 끝나고 올릴 건가?”
“커흡.”
모론이 대뜸 내뱉은 말에 세냐가 숨을 토했다.
“시…… 식? 무슨 식?”
“결혼식 말이다. 너희가 바란다면, 나는 기꺼이 루하르의 왕성을 비워줄 것이다.”
“유라스 교황청도 비울 수 있을 겁니다.”
모론과 아니스가 말을 서로 주거니 받는 것을 들으며 세냐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세냐는 유진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이 신경 쓰여 고개를 돌렸지만, 유진 역시 입술을 꾹 다물고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아, 아, 아니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뭘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아, 세냐. 미리 말해둡니다만, 제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크리스티나와는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겠지만 말입니다.”
[저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시스터. 만약 유진 님과 세냐 님이 맺어지신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참석해 축사를 읊을 것입니다.]
처음이 있어야 그다음이 있는 법. 크리스티나는 세냐가 부케를 던진다면 무조건 낚아챌 각오를 다졌다.
“그…… 내가 말이야. 아가로트가 죽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거든.”
저 화제가 진행되었다가는 실컷 망신만 당할 뿐. 유진은 간절히 화제를 돌리고 싶어 입을 열었다.
“멸망의 마왕을 본 거야?”
그 말에는 모두가 관심을 가졌다.
멸망의 마왕. 세냐가 그 이름을 말하니, 모론과 아니스의 표정도 뻣뻣하게 굳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모론의 동굴을 가리켰다.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지.”
유진은 자신이 떠올렸던 아가로트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르와 멸망의 마왕.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모론의 표정은 더욱이 굳어가고 진지해졌다.
여태까지, 누르의 정체에 대해서는 뚜렷한 확신이랄 것은 없었다. 멸망의 마왕과 관계가 있다ㅡ 그것은 결국 추측일 뿐. 하지만 아가로트의 기억을 통해, 누르가 멸망의 마왕이 부리는 권속이란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멸망의 선봉…… 아니, 그보다는 첨병이라 해야 할까. 이 산에서 나타나는 누르는 하루에 많아봐야 수십 정도이니.”
기억 속의 전장에서는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누르가 나타났다. 지금 이 산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확연히 다르다.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으니, 누르가 많이 나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
베르무트의 이름이 나오니, 진지하던 모론의 표정에서 눈썹과 입술이 축 처져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완전히 미쳐서, 누르를 죽이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레헤인야르와 설원부터 멸망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는가…….”
모론은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이 설원은 모론의 고향이고, 이제는 모론이 세운 나라의 일부다. 모론은 베르무트를 믿는다. 베르무트가 부탁한 것이라면, 틀림없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정신이 혼탁해질 때면, 어쩔 도리 없는 고독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 모두가 사라지고, 나 혼자만이 남아 정체도 모를 괴물을 죽이고 있는 사실에 절망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광기를 떨쳐낸 것과는 별개로, 누르의 정체가 확실해진 이상, 모론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루하르 왕국을 위해서라도, 베르무트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흐르건, 모론은 미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니까. 멸망의 마왕은…… 마왕다운 생김새는 아니란 거지?”
온갖 색이 얽힌 구멍. 세냐는 과거에 보았던 멸망의 마왕을 떠올렸다.
그때에도 멸망의 마왕에게서 온갖 색을 보았지만, 제대로 형태를 보지는 못했었다. 먼 거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멜이 떠올린 기억에 따르면, 멸망의 마왕은 마족은커녕 생물 같은 모습도 아닌 것 같군요. 세상에 뚫린 구멍 같은 느낌이라는 것 아닙니까?”
“어.”
“그 구멍에서 누르가 튀어나오는 것인지, 구멍 안에 본신이 있는 것인지…….”
“아가로트가 그 안에서 죽기는 했는데, 구멍 안이 어땠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
흐릿하게 남은 기억.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떠올릴 수 없는 것이다. 아가로트가 그 안에서 꽤 오랫동안 버티며 싸울 수 있던 것은 분노, 증오, 독기, 그런 감정만이 남아서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지, 정작 자아는 진즉에 박살 나버렸기 때문이다.
“신화시대…….”
세냐는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유진이 떠올린 기억에 등장한 ‘황혼의 마녀’와 ‘현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 시대에서는 마법에 정통하여 신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즉,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될 수 있었어. 그렇지?”
“어.”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 인간은 아무리 잘나봤자 인간. 아, 물론 ‘우리’ 같은 예외는 있지만.”
세냐가 고개를 기울여 모론을 쳐다보았다.
“마나에 입문한다면, 인간이란 종이 가진 수명을 훨씬 초월해서 살 수 있어.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산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냐. 내 자랑은 아닌데, 만약 경배(敬拜)만으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진즉에 신이 되었을걸?”
결코 오만한 말은 아니었다. 당장 지금 세상에서 마법사라면 모두가 세냐를 존경하고 숭배하고 있으며, 마법사가 아닌 이들조차도 ‘현명한 세냐’라면 추켜세우고 있다. 세냐의 말마따나, 숭배와 신앙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녀는 진즉에 신이 되었을 것이다.
“저 시대에서는 가능했던 것이 지금은 불가능하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당장 네 기억에서, 그 황혼의 마녀는 악신의 문턱까지 갔었잖아. 뭐, 네 기억에 따르면 악신이 되는 법과 마왕이 되는 법은 제법 상통하는 것 같고, 나는 그런 존재가 될 생각은 없으니 관심도 없어. 하지만, 현자가 마법사이면서 신이 되었다는 것은…… 흥미롭네.”
“왜. 너도 신이 되고 싶냐?”
“멸망의 마왕까지 갈 것도 없이, 유폐의 마왕을 상대하려면 ‘인간’ 수준으로는 택도 없을걸.”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턱을 괴었다.
“물론…… 이 현명한 세냐 님은, 인간 수준을 한참 넘어섰지만 말이야. 하지만 기왕 넘어선 거, 인간이 아니라 신격을 얻으면…… 보다 확실하게 승기를 엿볼 수 있겠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니스가 눈을 떴다. 그녀는 유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하멜. 아가로트의 시대에서, 빛의 신은 존재했습니까?”
“아마도.”
“아마도는 또 뭡니까?”
“내가 떠올린 건 모든 기억이 아니라고. 죽기 전의 단편적인 기억이라, 아가로트의 모든 지식이 들어온 것은…….”
“됐습니다. 하멜, 그 신화시대에서는 오래된 신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아가로트를 비롯해, 난세에서 태어난 신들이 여럿 있었지요?”
“어.”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톡, 톡. 아니스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 신화시대ㅡ 지금 세상 이전의 세상에 ‘빛’이 존재했다. 멸망의 마왕에게 멸망당하고, 지금 시대가 열렸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존재하는 ‘빛’은, 신화시대에서 살아남은 빛일까요. 지금 시대에 새로이 태어난 ‘빛’일까요.”
“…….”
“전자라면…… 유폐의 마왕뿐만 아니라, 지체 높은 격들의 신들 일부도 멸망에서 살아남아 지금 시대에 도달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전해져 오는 빛의 경전도 신화시대에서부터 이어진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멸망당하고, 텅 빈 상태로 시작했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신이 탄생한 것일까요.”
아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녀는 빛의 성녀이며 천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과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니스뿐만이 아니라, 신성마법으로 소환되는 모든 천사들이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강한 믿음을 가진 성직자는, 죽어서 천사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천사는 이름처럼 빛의 사자 역할은 하지 못한다. 사실상 신성마법의 소환물 취급을 받으며, 신성마법의 증폭제 역할을 할 뿐.
그렇다 보니 천사들은 정작 자기들이 섬기는 신과 대면한 적이 없으며, 소환되지 않는 천사들은 의식조차 깨어있지 않고 환한 빛의 안을 유영한다.
오히려 그것은 빛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빛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아니스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빛의 계시를 받은 적이 있기도 했다. 그 이후로 계시를 받은 적은 없지만ㅡ 아니스는 신이 존재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이 멸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세상에 ‘빛’에 대한 신앙이 태동하기까지에 존재하는 공백은 의심스러웠다.
“뭐 상관은 없습니다만.”
잠시 고민하던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주신이신 빛이야 언제나 수상쩍었고, 빛을 섬기는 종교는 병신이었지요. 수상한 점이 더 늘긴 했습니다만,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일단 이 신성력은 마왕과의 싸움에서 항상 도움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 음…… 내 기억이 정확하진 않은데, 빛의 신은 좋은 신이었던 것 같…….”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에 별로 좋지 않은 신이었을 지라도, 지금 시대에서는 세상에 도움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신도들이 머저리일 뿐, 빛께서 세상에 죄를 지은 적은 없으시죠. 무관심과 방관이 죄라면 죄겠지만.”
성녀가 자기 신을 저렇게나 씹어대도 괜찮은가? 괜찮을 것이다. 빛의 신은 신앙이라곤 쥐뿔도 없는 유진에게도 신성력을 내려주는 자비로운 신이다.
“그럼. 이제 이 나라에서 볼일도 끝난 것 아냐? 이젠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
유진은 모론을 돌아보았다.
“야, 모론.”
“무슨 일인가.”
“나도 여기서 좀 살아도 되냐?”
“좋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모론은 조금의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빌어먹을 환생 414화
싸우면서 느꼈다.
지금의 유진과 이런 식으로 싸워줄 수 있는 사람. 유진이 전력을 다해도 승기를 장담할 수 없는 사람. 오히려 유진을 압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모론 한 명뿐이다.
유진의 주변에는 카르멘이나 길레이드, 알체스터 같은 실력자들은 많다. 하지만, 저들 중에서 가장 강할 카르멘조차도 유진과 이런 식으로 치고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론은 최고의 대결 상대였다. 어지간한 공격은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튼튼하고, 설령 공격이 먹힐지라도 모론의 목숨을 걱정할 필요는 없잖은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모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쪽 벽에 세워둔 자기 도끼를 움켜잡았다. 쿵! 도낏자루가 바닥을 두드리고, 모론은 가슴을 활짝 펼쳤다.
“하멜. 네가 이곳에 살겠다 말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네가 말했던 우연과 감. 그것을 완전히 네 것으로 삼기 위한 것 아닌가?”
“어…… 그렇기는 한데…….”
“좋다! 나 모론 루하르. 전력을 다해 네 수행을 돕도록 하겠다.”
모론은 격정적인 외침을 토했다.
동료들이 떠나 버리면, 모론은 다시 이 산에 혼자 남게 된다. 광기를 떨쳐낸 지금, 이제는 예전과는 달리 고독에 괴로워하지 않지만…… 그래도 혼자만 남아버린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 밑바닥에서 고독이란 것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것만 같다.
상의 없이 내린 결정. 무조건 필요한 일이라 생각은 하지만, 일행이 있다 보니 눈치가 보인다.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니 반발은 없겠지만, 유진은 혹시라도 세냐나 아니스에게 등짝을 얻어맞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어 그쪽을 쳐다보았다.
걱정이 우스우리만큼 둘의 얼굴은 진지했다. 둘도 유진이 아무 이유 없이 이 동굴에 머무르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별다른 이유 없이 동굴에 머무르겠다고 결정한 것일지라도, 세냐와 아니스는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 이 동굴에는 모론이 있잖은가. 달리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이라면, 둘은 모론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 쿰쿰한 동굴에서 지낼 수 있었다.
“동굴에서 머무르는 것은 좋은데, 일단 방을 더 만듭시다.”
이것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 아니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방? 무슨 방 말인가?”
모론이 두 눈을 끔벅거리며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무슨 방이라니요? 방에 방 말고 다른 의미가 있습니까? 모론, 설마 이 방에서 모두 함께 지내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 질문은 되레 모론의 눈동자가 끔벅이는 속도를 빠르게 했다. 모론은 두 눈을 열심히 끔벅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문제가 있는가? 옛날에는 다 같이 한자리에서…….”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그때는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마물이나 잡아먹던 시절 아닙니까!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때 저희가 자던 곳은 ‘방’이 아니었지요! 사방이 탁 트인 마경 한복판이었잖습니까!”
“어…… 어쨌든 그때의 우리는 한자리서 잠을…….”
“이제 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저는 그때부터 당신네들과 한자리에서 자는 것이 싫었습니다. 둘이 뭔 코를 그렇게 골아대는지……!”
“나…… 나는 코 안 골았어.”
유진은 급히 변명에 나섰지만, 모론의 코골이가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놈의 코골이 소리가 마물을 끌어들이지 않을까 하여 방음 결계까지 쳤을 정도다.
“예, 하멜,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코는 별로 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잠꼬대는 지독하지 않았습니까? 항상 당신의 곁에 자는 것이 모론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신의 잠꼬대에 동반된 발길질에 전신이 박살 났을 겁니다!”
“그건…… 그건 어쩔 수 없어. 잠든 순간조차도 긴장하고 꿈속에서도 싸움을 계속하느라 그만…….”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하멜. 저도 이 동굴에서 모론과 함께 지내는 것은 찬성입니다만, 방은 양보하지 못하겠습니다.”
밖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자니 시끄럽고 요란한 눈보라가 거슬린다.
“저쪽 벽을 부수어서 방을 만들고, 온천수를 연결해 주십시오. 그 정도면 저도 만족을…….”
“화장실은 필요 없나?”
모론이 눈을 끔벅거리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난 순간, 아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성큼성큼 모론에게 다가가 멈춰 서더니, 한참 위에 있는 모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니스는 얇은 미소를 지으면서 모론에게 손가락을 까딱였고, 모론은 어리둥절해 하며 허리를 낮추었다.
철썩!
따귀가 모론의 뺨에 작렬했다.
그렇게 한 대 얻어맞았지만, 모론은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여 이렇게 얻어맞은 것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니스에게 이유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어련히 이유가 있어서 맞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냐, 당신은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겁니까?”
손바닥을 털며 자리에 돌아온 아니스가 세냐를 돌아보았다. 실제로 세냐는 유진의 선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진지한 표정만을 짓고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턱을 어루만지던 세냐가 입을 열었다.
“아롯에 가 있을까 해.”
설마 세냐가 저렇게 말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특히 아니스는 놀람을 넘어 경악했다. 그 세냐 메르데인이, 하멜을 떠나서 홀로 행동한다고?
“아롯은 왜?”
유진도 당황해서 그렇게 묻자, 세냐는 팔짱을 끼고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약한 것 같아.”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서클마법식을 창립한 장본인이자 대륙 최초이면서 유일한 9서클 대마법사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마법사 중에서 세냐만큼 뛰어나고 강한 마법사는 없다.
“이 현명한 세냐 님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내가 가장 잘 알지. 하지만, 유진, 네가 그렇듯이 나는 지금의 경지에 만족할 생각이 없어.”
마왕이 되어버린 아이리스와의 전투. 세냐는 그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지만, 승패를 결정지을 만큼의 결정력은 갖지 못했다. 이터널 홀이 부상이 있었다곤 해도, 세냐는 자신의 마법이 ‘고작’ 아이리스를 압도하지 못했다는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은 안다. 무한정의 마력을 휘두르는 마왕을 상대로, 한정된 마나를 다루는 인간 마법사가 우위를 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세냐는 그 불가능을 넘어선 유일한 마법사다. 부족한 마나를 이터널 홀로 대체하고, 정교하게 설계한 마법을 쌓아 올려 마왕을 몰아붙이는 것이 세냐가 택한 전법이었다.
하위 마왕이라면, 저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세냐가 상대해야 할 마왕은 하위 마왕 따위가 아니었다. 신화시대부터 존재해 왔다는 유폐의 마왕. 그리고 신화시대를 종결시킨 멸망의 마왕.
솔직히 부족함을 느낀다. 하멜은, 유진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 저만큼 강해졌는데도 아직도 강해질 여지가 남아 있다.
반면에 세냐는 어떤가? 9서클. 세냐가 직접 창립한 서클마법식에 따르면, 9서클 이상의 경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도달하고 감당할 수 있는 ‘마법’은 9서클까지가 한계인 것이다. 실제로 300년이 흐르는 동안, 대륙의 거의 모든 마법사가 서클 마법식을 익혔음에도 9서클에 도달한 것은 세냐 혼자뿐. 시대에 추앙받는 ‘대마법사’들 조차도 8서클까지가 한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9서클이 ‘마법’의 끝인 것은 아니다. 9서클은 어디까지나 세냐가 규정한 서클마법식의 끝일 뿐. 앞으로의 전투에서 9서클로 부족하다면, 그 경지를 넘어서서, 마법의 미지에 도전하는 수밖에.
“오늘 네가 모론이랑 싸우는 것을 보고 느꼈어.”
세냐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300년 전 동료들 중에서 자존심이 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각자의 분야에서 정점에 섰기 때문이고, 그런 자존감이 없어서는 그만한 경지에 도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아슬아슬하겠지만, 유진, 네가 더 강해진다면 말이야. 나로서는 네게 맞추기가 힘들어져. 당장 아까만 해도, 나는…… 네가 모론의 도끼를 어떻게 날려 버렸는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고 있거든.”
코앞에서 유진의 검을 받아낸 모론이 보지 못한 것. 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던 세냐가 보지 못한 것.
비록 세냐가 살아온 삶 대부분을 무력하게 봉인 당해 있었고, 전사가 아닌 마법사일지라도. 저 둘은 많은 차이를 가진다. 세냐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롯의 마법사들이야 내 기준에서는 애송이들이지만, 그래도 뭐, 대마법사들의 수준은 생각 이상으로 뛰어나던걸. 내가 아롯에 가 있으면 다른 나라의 대마법사들이나…… 한 가락 하지만 은둔해 버린 마법사들이 교류하잡시고 찾아올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이곳에 있는 동안 나는 아롯에 가 있을게.”
지금 시대의 마법사들 중에서 세냐보다 뛰어나고 강한 마법사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세냐는 지금 시대의 마법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지금 세냐가 쓰는 마법은 300년 전의 것이니, 그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마법들마저 받아들여야 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여기 남기로 한 제가 이상해지잖습니까.”
아니스가 두 눈을 얇게 뜨고서 세냐를 흘겨보았다.
“그래도 저희는 유라스에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아롯에서 마법적 성취를 얻을 수 있는 당신과는 달리, 저와 크리스티나는 유라스에서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유라스에 돌아가서 할 만한 것이라곤 은광의 조련 정도.
그러나 솔직히,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누군가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에는 별 재주가 없었다. 결사대로서의 특성을 살리려면 뒤 없는 광신도인 라파엘로에게 조련을 전담시키는 것이 나으리라.
그 외에는…… 유라스의 성역들을 돌며 순례라도 해야 하나? 그것이 신성력과 신앙을 키우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녀’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정말로 신성력과 기적을 늘리고 싶다면, 이 동굴에 남아서 엉망으로 두들겨 맞을 유진을 치료하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스터.]
‘예, 이건 큰 기회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 부끄럼 많은 세냐가 없는 동안, 저희와 하멜은 이 동굴에서 지내는 겁니다.’
[모…… 모론 님도 함께가 아닙니까?]
‘모론에게는 다른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누르, 그 괴물이 나타나면 모론도 동굴을 떠나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사이에 하멜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동굴에 있을 테죠.’
[네…… 네에.]
‘저희는 그 순간을 영리하게 이용해야 합니다. 가령, 모론이 떠난 동안…… 저희가 방 안에서 온천욕을 하고 있다면? 바깥의 하멜에게 수건을 한 장 가져다 달라 말한다면, 하멜은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파…… 파렴치한!]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스가 깃든 이후로 음습한 괴물이 되어가는 그녀였지만, 아직 아니스의 저런 발칙한 상상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내심 좋으면서 아닌 척하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
[아닙니다, 시스터. 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진 님을 치료하면서 제 신성마법이 성장할 것을 기대하여…… 그렇게 유진 님에게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여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해에서 크리스티나의 손바닥에는 성흔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 성흔은 아직 완벽하지 않아, 크리스티나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아하, 그렇군요. 크리스티나, 당신은 피투성이의 하멜을 치료하는 것을 즐거워하였지요?’
아니스가 짓궂은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결코 농담이 아닌 말이었고, 크리스티나도 반박 대신에 기도문만 읊었다.
“네가 아롯에 가면 너무 고립되는 것 아냐?”
“그렇지도 않아. 메르는 네 곁에 두고 갈 거니까, 언제든지 대화는 나눌 수 있어. 너도 일단은 나하마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사막에 가지 않을 생각이라며?”
스윽. 세냐는 고개를 돌려 동굴 구석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유진이 꺼내놓은 침대가 있었고,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사이좋게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사역마인 메르는 잠을 자지 않는다. 정 그래야만 한다면 기능을 살짝 정지해 놓을 뿐.
지금 메르는, 곤히 잠든 라이미르아의 곁에서 실눈을 뜨고 누워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무슨 일 생기면 메르한테 전하고, 나하마에서 만나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세냐는 은밀히 메르와 시선을 나누었다.
세냐도 저 쌍두사 같은 성녀들을 경계하고 있다. 만약 세냐가 없는 동안, 저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린다.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서 검은 불꽃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지만, 세냐는 그 감정은 도저히 의식할 수가 없었다.
‘……알지?’
[네, 세냐 님. 제가 반드시 막도록 할게요.]
메르가 결의를 다지며 대답했다.
“하멜.”
아니스에게 얻어맞은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모론은 자리에 앉았다.
“네가 떠올린 신화시대에 말이다. 우리의 모습은 없었는가?”
모론은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 머나먼 옛날, 동료인 하멜은 전쟁의 신에 올라 세상을 호령했다. 만약 그 시대부터 영혼이 윤회하고 있다면, 모론도 신화시대에서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은 잘 안 나.”
짐작이 가는 인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가로트의 기억 한쪽에 존재하던 거신. 아가로트가 거신에 대해 느끼는 인상과, 유진이 모론에게 가진 인상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확신은 할 수가 없다. 아가로트의 기억이 워낙 단편적이라, 거신이 어떤 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현자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시대와 대비한다면…… 거신은 모론과, 현자는 세냐와 흡사하다. 하지만 유진은 그 둘의 환생이 모론이나 세냐라고는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설령 그럴지라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저렇게 대비가 된다는 것은ㅡ 마치, 운명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성녀.’
마지막에 아가로트가 직접 죽였던 황혼의 마녀. 유진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쪽을 힐긋 쳐다보았다.
‘성녀’라는 역할은 같지만, 그녀들은 황혼의 마녀와는 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신화시대의 인물상과 환생한 지금이 똑같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베르무트도 마찬가지로군.’
놈과 대비되는 인물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가로트의 기억을 모두 다 떠올린다면, 뭔가 새로이 대비시킬 수 있을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멸망한 시대에 많은 눈길을 주고 싶지 않다.
이미 충분히 과거에 얽매여있는데, 더 무거운 과거를 묶고 싶지 않다.
빌어먹을 환생 415화
워프게이트가 있는 도시까지는 함께 가주려 했지만, 세냐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뭐 하러 며칠 걸리는 도시까지 배웅하겠다는 거야?”
“혼자 설원 횡단하면 서러울 것 아냐.”
“서러울 것은 또 뭐람. 느긋하게 걸을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 혼자 날아가면 드래곤 타고 날아온 것보다도 빨리 날아갈 수 있거든?”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로브의 후드를 앞으로 넘겼다.
“시간이 엄청 남아도는 것도 아니잖아. 마음만 받을 테니까, 너는 여기 남아서 모론이랑 열심히 수행이나 하셔. 나도 아롯 가서 열심히 할 테니까.”
“꼭 아롯에 가야 되는 거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물었고, 세냐는 유진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즐거워서 히죽 웃었다. 그녀는 한 손에 든 지팡이, 프로스트로 유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
“굳이 갈 필요가 없다면 뭐 하러 가냐? 신경 쓰이게.”
“갈 필요는 있지. 내가 거기 있으면 잘난 마법사들이 모일 거고, 그 외에도 내가 없는 동안 아롯에 쌓인 마법과 연구들을 그 나라에 가야만 볼 수 있잖아.”
“괜히 나뉘었다가 위험해지는 것 아냐? 유폐의 마왕 그 새끼가 고립된 널 노리면 어떡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진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이 약하고 혼자일 때도 단 한 번도 견제다운 견제를 하지 않았던 유폐의 마왕이 지금 와서 흉수를 쓸 리가 없잖은가.
유폐의 마왕의 진짜 목적까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마족이 세상을 지배하거나, 자신의 적을 말살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
그것에 대해서는 세냐도 공감하고 있다. 프로스트가 유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댈 때마다 새하얀 서리가 흩날렸다.
“흠, 그래도…… 마왕은 몰라도, 마족이 날 노릴 수는 있다고 생각해. 유폐의 마왕이 휘하 마족까지 꽉 잡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오히려 굉장히 느슨하게 풀어놓고 있지.”
“하지만 가비드 린드먼, 그 새끼가 오지는 않을 것 아냐? 갈X의 여왕도 오지 않을 거고.”
세냐는 태연하게 ‘몽마의 여왕’의 앞 단어를 바꿔 불렀고, 유진도 그것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그 둘을 제외하고서, 흠, 다른 고위 마족이 없지는 않겠지만…… 내가 걱정할 정도인가? 그 정도로 요즘 마족이 세?”
“나도 요즘 마족이라 해봐야 몇 놈 안 만나봐서 모르겠는데.”
용마성에서 죽였던 야곤은 꽤 강했었다. 유진은 지금도 그때 야곤을 죽여 놓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흑마법사들은 옛날에 비해서 꽤 치더라.”
“그래봤자 남은 것이라곤 아멜리아 머윈인가 그년뿐이잖아. 그년 때문에라도 오히려 내가 아롯에 대놓고 있는 편이 낫다고 봐.”
아멜리아 머윈은 멸망의 마왕이 잠든 라비스타에 숨어 있다. 그리고 현재 나하마 사막에서는, 멜키스가 유진의 부탁대로 던전을 뒤집으며 흑마법사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멜리아가 사막에 남겨 놓은 기반이 모조리 털려 버릴 터. 세냐가 대놓고 아롯에 있는 것이 확인된다면, 아멜리아가 사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말고 기대나 해.”
“무슨 기대?”
유진이 그렇게 묻자, 세냐는 방긋 웃으며 프로스트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 높이에서 프로스트를 살랑살랑 흔들자, 세냐의 머리 위로 하얀 서리가 떨어져 내렸다.
“이미 그 어떤 마법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오른 이 현명한 세냐 님이, 최후에 이르러 자기 자신마저 뛰어넘는 것을 말이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세냐의 얼굴을 보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며칠이라도 쉬었다 가지. 마음을 정하고 바로 다음 날 떠나는 것은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닙니까?”
동굴 밖으로 나온 아니스가 세냐에게 다가왔다. 아니스의 양손이 세냐의 어깨부터 시작해 팔을 쭉 훑어 내리자, 신성력의 가호가 세냐의 몸에 깃들었다. 세냐는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오늘이 떠나기 좋은 날씨잖아.”
드물게도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고 있다. 사실 세냐의 마법 실력이라면 눈보라가 거세어도 얼마든지 뚫고 갈 수 있겠지만, 기왕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험상궂은 날씨에 떠나는 것보다는 맑은 날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럼.”
부드러운 바람이 세냐의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세냐는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한 손으로 누르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동굴 입구에 서 있는 모론에게 시선을 주며 방긋 웃었다.
“다음에 봐, 모론.”
유진과 아니스와 달리, 모론은 세냐를 붙잡지도, 하루 만에 떠나는 것에 별로 서운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어차피 영원한 이별도 아닌 데다, 결의를 다지고 나서는 이를 붙잡아서는 안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론은 씩 웃으면서 세냐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선수는 치지 마.”
모론에게는 미소를 보였지만, 아니스에게는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 세냐는 으름장을 놓듯이 두 눈에 힘을 주고서 아니스를 한번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니스는 오히려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약속은 안 할 겁니다.”
“비겁한 짓은 하지 말란 말이얏.”
“이런 문제에 비겁하고 말고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의식은 하겠습니다.”
얄미우면서도 아니스다운 대답이었다. 세냐는 기껏 눈동자에 키운 쌍심지를 꺼트리고 실눈을 떴다.
“크리스티나, 너는?”
“죄송합니다.”
크리스티나가 지은 미소는 아니스와는 달랐다. 정말로 난처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짓는 미소…… 세냐는 저런 표정이 더욱 두려웠다. 세냐는 어깨를 바들바들 떨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조심해……!”
마지막으로, 세냐는 유진을 노려보면서 힘을 준 목소리로 경고했다.
대체……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일까. 얼추 짐작은 가지만, 유진은 진실을 듣기가 두려워서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어…… 어어.”
대신 살짝 고개는 끄덕거리며 대답해 주었다. 미덥지 않은 대답이지만, 세냐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ㅡ파아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세냐는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세냐가 떠났다.
남기고 간 말처럼, 그녀가 과연 자기 자신마저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지. 유진은 그것에 대해서는 큰 의심이나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세냐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다’이지, 유진은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자각조차 제대로 안 되어 있다. 모론과의 전투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복기해 봐도, 마지막에 모론의 도끼를 베어냈을 때의 감각은 재현되지 않았다.
‘그래도…… 녹아든 것은 확실한데.’
사고가 아가로트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다.
유진이 해야 할 것은, 머리에 녹아든 아가로트를 보다 체계적이고 확실하게 정립하는 것. 그리고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체화하는 것. 무아지경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또렷한 순간에도 의식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넘어서는 것과 동시에, 잡아먹어야 한다.
‘아가로트를.’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던 전쟁신. 유진이 느낀 아가로트는 제멋대로의 폭군이었으나, 인간에서부터 마왕을 죽이고 신격에 도달한 ‘힘’은 틀림없는 진짜다.
탐난다. 그 예리한 칼놀림을 갖고 싶다. 수천수만의 전투를 겪고 승리하며 단련해 낸 감각과 직관을 갖고 싶다.
다른 놈을 보고서 이러한 갈망을 느낀 것이 얼마 만이지? 유진은 가슴 속 굶주림에 피식 웃으면서,
땅을 팠다.
몸을 구부정하게 숙여서, 양손으로 벅벅 파지는 않았다. 건들거리듯이 삐딱하게 서서, 한쪽 발로 슥슥 동굴 바닥을 문지를 뿐. 저것만으로도 단단한 바닥은 진흙처럼 파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길에 수원에서부터 온천수가 졸졸 흘러들어 왔다.
모론은 누르를 죽이고 오겠다고 나갔고,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눈사람을 만들겠다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덕분에 지금 이곳에는 유진과 크리스티나, 아니스뿐이었다.
동굴 벽을 뚫고, 야영할 때 쓰던 물건들을 풀어놓아 배치한 방. 안쪽에 널찍한 온천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기왕 방을 더 만들기로 했고, 언제까지 이곳에서 머무를지도 확실하지 않은 이상, 유진도 기왕이면 자기 방을 따로 하나 갖고 싶었다.
유진이 방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크리스티나는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왼손바닥에 그어진 성흔을 어루만지며 올리는 기도는 절대로 걸러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의식이자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기도를 올리는 순간에,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잡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빛에 대한 신앙과, 유진에 대한 경배뿐이다.
그래야만 할 텐데.
‘…….’
머릿속이 도저히 맑아지지 않는다. 다른 것을 보지 않고, 대화를 하지 않고, 기도를 위해 홀로 앉아 있으니 애써 외면하려 한 것이 멋대로 머릿속에 맴돌아 버린다.
-하멜.
새벽에 모론이 했던 말.
-네가 떠올린 신화시대에 말이다. 우리의 모습은 없었는가?
모론은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모론뿐만이 아니었다. 세냐도 비슷했다. 인연이란 것이 일생을 넘어 시공마저 초월한 것이라면, 그것은 강력한 운명일 터. 운명적인 만남, 그것은 단어만으로도 심상을 울린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에는 저것에서 아무런 울림을 느낄 수 없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의 영혼이, 그 머나먼 신화시대에 존재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크리스티나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육체는 ‘신실한 아니스’의 복제품이다. 이 육체에 깃든 혼은ㅡ 이십여 년 전, 수도원 앞에 버려졌던 갓난아기의 혼을 인공적으로 가공하여 만들어낸 혼이다.
신성병기, 모조화신인 성녀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복제품인 육체에 아니스의 유골이 더해졌다. 그런 육체와 영혼의 적합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것이 더해지고 덜어지고 섞였다.
그러한 ‘혼’이, 신화시대에 존재했을 리가 없잖은가. 이제는 거의 남지도 않을, 버려진 갓난아기의 혼은 신화시대에 존재했을까? 그것을 과연 나의 혼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우스운 번뇌로군요.]
번민하는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크리스티나. 감히 말하건대, 지금 당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번뇌하고 있습니다.]
‘시스터……?’
[저는 어떻습니까?]
아니스가 속삭였다.
[크리스티나. 당신의 ‘혼’은 갓난아기로나마 태어나서 세상에 울음을 남겼지만, 제 ‘혼’은 그러지도 못했답니다. 저는 울음소리는커녕, 인간다운 형태도 완전히 잡히지 않은 미숙한 태아였습니다.]
그런 태아를 모조화신의 자궁에 이식했다. 인간이라면 진즉에 출산되었을 시기를 훌쩍 넘기고, 온갖 신성마법과 마법을 가미하여 안정시키기고 성장시킨 뒤에 태어난 것이 바로 아니스다.
[저 또한 당신과 비슷합니다. 감히 말하자면, 당신보다 추레합니다. 허나 그것이 정말로 중요합니까? 크리스티나. 이전의 시대가 얼마나 찬란하였건, 그 시대는 이미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곳에 있습니다.]
‘……시스터께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크리스티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희의 영혼이 머나먼 과거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지금 존재하는 저희 영혼은 완전한 인공품이라는 것. 저희만이, 유진 님에 얽힌 운명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
[운명?]
‘그렇…… 지 않습니까? 유진 님께서는 용사십니다. 또한, 먼 과거에는 전쟁신 아가로트로 경배받으셨습니다. 정황상…… 베르무트 님께서 유진 님을 선택하고 환생시킨 것도, 유진 님의 전생을 알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겠죠.]
‘저도 유진 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쟁신 아가로트의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현자와 거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전율하고 탄식했습니다.’
[당신이 그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 확실히…… 현자는 세냐를, 거신은 모론을 연상시키더군요.]
‘저는 그 사실이 괴롭고 슬프며 두렵습니다. 저희의 영혼이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리고…… 어…… 쩌면…….’
[전쟁신의 성녀. 황혼의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운 겁니까?]
크리스티나와는 달리 아니스는 여전히 쿡쿡 웃으며 물어왔다. 크리스티나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아니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히려 저희가 황혼의 마녀라면, 꽤나 멋진 일이 아닙니까? 시공을 초월했음에도 같은 이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니.]
‘하지만, 황혼의 마녀는 사악한…….’
[전생의 업이 무슨 상관입니까? 지금의 저희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리고 크리스티나.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겠는데, 저희는 황혼의 마녀의 환생이 아닙니다.]
‘예……?’
[저도, 당신도, 다른 누군가의 환생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 당신이 생각했던 대로, 만들어진 인공품인 저희의 혼에 과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희가 절대로 황혼의 마녀였을 리는 없습니다.]
여전히 나긋한 목소리. 동시에 가차 없는 말에 크리스티나의 입술이 떡하고 벌어졌다. 그녀는 기도는커녕 무릎 꿇은 자세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왜 놀라는 겁니까? 당신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아…… 아아…….”
[잘 들으십시오, 크리스티나. 전생이라니, 그런 쓸데없는 것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지금 저희는 이곳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논지는 알겠으나, 크리스티나는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전생에 저희가 아가로트와 함께 하지 못했다. 아가로트가 우리를 알지 못했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저희가 알고 있고, 함께하는 것은 아가로트가 아닙니다. 크리스티나. 고개를 돌려 옆을 보십시오.]
왜 옆을 보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크리스티나는 시키는 대로 옆을 돌아보았다.
[…….]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닥을 평평히 다지면서 방 만들기에 열중하던 유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가 그사이에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적절하게 크리스티나의 시선을 유진의 얼굴에 꽂아버릴 셈이었는데,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차가운 분노를 느끼면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진 님? 어디에 계십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에, 휭, 휭, 하고,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동굴 밖에서 들려왔다. 크리스티나는 어떤 일인지 짐작하고서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진은 동굴 밖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목검. 정말로 평범한 목검이었다. 마나도 일절 실리지 않았다. 백염식의 불꽃도 없다. 맨몸으로, 완력으로, 목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도, 그리고 아니스마저도 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누구도 상대하지 않고 홀로 휘두르는 것뿐. 날조차 세우지 않은 뭉툭한 목검. 그것뿐인데도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 극한으로 몰입된 의지가, 목검이 움직이는 궤적에서 다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아.”
유진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날은 이토록 춥고, 검을 휘두른 것은 아주 잠깐인데…… 유진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유진은 이마의 땀을 털어내면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작업하면서 검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휘둘러보고 싶어져서 말이야.”
“…….”
“너는? 기도하다 말고 왜 나왔어? 평소보다 짧게 한 것 아냐?”
크리스티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목검의 궤적에 휩쓸렸던 눈이 유진의 근처에 맴돌고 있다. 달아오른 열기에 의해 유진에게서는 얇은 증기가 오르고 있다. 땀에 살짝 젖은 얼굴이 이쪽을 향해 미소를 짓는 것이, 크리스티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고결해 보였다.
그 순간. 크리스티나가 방금까지 괴로워하던 모든 번민이 허무해졌다.
결국 아니스의 말대로인 것이다. 전생이 없는 것? 아가로트와 아무 인연이 없는 것? 운명이 얽히지 않은 것?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지금 크리스티나는 이곳에 있으며, 그녀를 봐주었던, 자신을 보라고 말했던, 이곳에는 지금 우리 둘뿐이라고 말해주었던 남자는 바로 이곳에 잇다.
“…….”
크리스티나는 조용히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유진은 왜 갑자기 크리스티나가 자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스는, 자신의 열변에도 번민을 떨쳐내지 못하던 주제에, 땀에 젖은 유진을 본 순간 바로 번민을 떨쳐 버린 크리스티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으흠…….]
세냐와 약속을 맺지 않은 것을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빌어먹을 환생 416화
저것
이빨 사이에 끼워 넣은 재갈은 아무리 씹어보아도 부서지기는커녕 이빨 자국조차 남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짜증과 절망 등은 이미 진즉에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까득.”
헤모리아.
그녀의 이름이다. 성은 없다. 어린 시절에는 다른 이름과 다른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단심문국 말레피카룸에 소속된 순간부터 이름과 성씨는 사라지고, 번호만이 남는다.
보통의 심문관이라면 그런 과정을 거치지만, 헤모리아는 달랐다. 그녀는 말레피카룸의 여러 심문관들 중에서도 근본부터가 남다른 존재였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엘리트였다.
아무렴, 말레피카룸의 최고위 심문관이자 차기 국장, 명예롭게 은퇴하여 신앙을 증명한다면 추기경까지 가시권에 있던, 징벌자 아타락스가 그녀의 아버지였다.
헤모리아의 기억이 시작되는 시절부터 아타락스는 심문관이었다. 그렇기에 아타락스에게 성씨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헤모리아에게도 성씨는 계승되지 않았다.
이름은…… 죽은 어머니가 지은 것이다. 언젠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훌륭한 아버지였다. 존경했고, 여러 가지를 배웠다. 특히 신앙적인 부분에서 아버지는 대쪽 같은 분이셨다.
이단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사교도는 죽여야 한다. 이 일은 사악한 것을 너무나도 많이 들여다보고 접하기에, 심문관 본인이 타락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항상 가슴에 빛을 품어야 한다. 비록 몸이 오물에 더럽혀지고 이용하게 될지라도, 언제나 빛을 신앙해야 한다…….
헤모리아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명심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성마법학부에 처음 갔을 때. 신성마법학부의 총장, 피에트로 추기경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헤모리아를 마법진 위에 눕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성직자들이 헤모리아를 둘러싸고서 여러 실험을 진행했다.
먼 과거, 신성제국이 벌였던 마법사냥에서 확보했던 혈마법과 언령주술이 헤모리아의 몸 안에 삽입됐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헤모리아의 몸 안에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켰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지만, 견뎌냈다. 이 모두가 아버지와, 빛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헤모리아는 저러한 실험과 수술 덕에 특별한 존재가 되었고, 말레피카룸 내에서도 아버지의 휘광과 상관없이 활약하고 인정을 받았다.
비록 혈마법의 부작용으로 이빨이 짐승처럼 날카롭게 변해버린 이빨을 숨기기 위해 철제 마스크를 쓰게 됐어도. 가끔 제멋대로 폭주해 버리는 언령주술을 잠재우기 위해 묵언수행이 강제되긴 했어도.
헤모리아는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와 빛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진실한 믿음을 갖고서 빛에 종사하였으니 언젠가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아멜리아 머윈은 헤모리아에게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진실들을 알려주었다.
우선, 헤모리아가 아타락스의 ‘딸’이라고 할 만한 존재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역시 일반적이지는 않다. 헤모리아는 아타락스의 피와 정액 등을 근간으로 두고 만들어진 키메라다. 대륙법으로 엄금된 인간을 사용한 키메라가 바로 헤모리아다.
날카롭게 변한 이빨은 혈마법의 부작용 따위가 아니다. 애초에 헤모리아에게는 뱀파이어의 인자가 심겨 있었다. 헤모리아는 설계된 순간부터, 언젠가 혈마법이 삽입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빛의 신교는 혈마법을 흑마법이 아니라 규정했다. 그건 거짓말이다. 혈마법의 원전은 마족, 뱀파이어들의 권능이다. 하위 뱀파이어들이 상위 뱀파이어들의 권능을 흉내 내어 만든 것이 혈마법인 것이다.
오물에 더럽혀지고, 오물을 이용하는 정도가 아니다. 헤모리아의 존재 자체가 오물이었다. 결코 빛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단이자 사교의 산물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헤모리아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까득.”
그럼에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헤모리아는 빛에 기도를 올리며 죄를 사해 달라 간청했다.
비록 이런 몸일지라도 당신을 신앙하게 해주소서. 그 시체 그득한 구덩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시체를 잡아먹은 것은 사실이오나, 제발 그 죄를 용서해 주소서.
기도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알고 있다. 몇 번을 기도하며 죄를 사해달라 간청한들, 정작 헤모리아에게는 빛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
무턱대고 찾아온 놈은 빛의 샘으로 난입하려 했고, 헤모리아와 이단심문관, 성직자들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빛의 샘에서 벌어지는 신성한 의식은 용사일지라도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빛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라도 의식은 완성돼야 했다.
하지만 용사는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용사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자비하고 잔혹한 짓을 벌였다.
학살. 그날 유진의 검에 죽은 심문관과 성기사만 하더라도 수백 명이 넘는다. 용사는 가증스럽게도 성검을 휘둘렀다. 성검은, 빛은, 용사의 뜻에 거스르지 않고 수백 명의 신도들을 학살했다.
헤모리아는 그 모든 광경을 보았고,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 죽은 모든 성기사와 심문관들이 빛을, 신을 부르짖었으나 그 누구도 빛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헤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시체들과 함께 구덩이에 떨어져서, 팔다리가 잘린 채로 버둥거리며 신을 불렀었다. 하지만 구원도 기적도 오지 않았다. 헤모리아가 그날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다른 신도들의 피를 빨았기 때문이고, 아멜리아 머윈에게 주워졌기 때문이다.
아멜리아 머윈.
당연한 말이지만, 헤모리아는 아멜리아를 증오하고 있다. 애당초 지금의 헤모리아에게 있어서, 증오 외에 다른 감정을 품는 대상은 거의 없다.
거짓과 타락으로 곪은 종교를 증오한다. 철저하게 이용하고 기만한 아버지를 증오한다. 구원을 내려주지 않은 빛을 증오한다. 팔다리를 자르고 나락으로 밀어트린 유진 라이언하트를 증오한다. 바라지도 않은 흉측한 팔다리를 붙이고, 몸 안에 끔찍한 것들을 욱여넣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목에는 개목걸이를 걸은 아멜리아 머윈을 증오한다.
죽여 버리고 싶다.
“까득.”
헤모리아는 재갈을 씹으면서 두 눈을 얇게 떴다.
아멜리아가 말하길, ‘개’는 마당에서 키워야 한단다. 그래서 헤모리아는 지금 마당에 묶여 있다. 그녀의 집은 바로 뒤에 있는 개집이고, 마당 밖을 나갈 수 없도록 목줄도 걸려 있다.
멸망의 영지, 라비스타.
아멜리아 머윈이 이곳에 온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라비스타에 오고서 처음 얼마간, 아멜리아는 저택을 오고 가며 다른 마족과 만나기도 하는 둥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멜리아는 저택 밖은커녕 마당으로도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당장 헤모리아가 마지막으로 아멜리아를 봤던 것은,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가 대뜸 쳐들어왔을 때. 그리고 고약한 심술로 저택을 박살내버렸을 때.
벌써 3달 전의 일이다. 잘난 척, 도도한 척 굴던 아멜리아 머윈은ㅡ 그날, 갑작스레 나타난 누아르 제벨라의 폭거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누아르 제벨라가 높다란 목소리로 웃어대며 저택을 무너트리는 순간, 아멜리아 머윈이 한 일이라곤 꼴사납고 처량 맞게 비명만 지르는 것뿐이었다.
“큭…… 큭큭.”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헤모리아는 목줄에 이어진 사슬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소리죽여 웃었다.
유폐의 지팡이라며 콧대를 세우던 그 아멜리아 머윈조차도 ‘진짜’ 마족 앞에서는 하찮아진다. 게다가, 그토록 잘난 척을 해댄 주제에…… 현명한 세냐와 유진 라이언하트가 두려워서 라비스타에 숨은 것이라니! 그 진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헤모리아를 즐겁게 만들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 헤모리아는 놀라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기척 없이 나타났지만, 헤모리아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알피에로 라사트. 멸망의 마왕을 섬기는 마족.
빛에 대한 신앙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헤모리아가 한때 심문관이었던 기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헤모리아는 여전히 마족이 껄끄럽고 싫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알피에로를 상대로는 조금 마음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뱀파이어가 가진 매료의 기질 때문일까? 어쩌면…… 헤모리아의 몸속에 심어진, 뱀파이어의 인자가 고위 뱀파이어인 알피에로에게 이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둘 중 어느 쪽인지는 헤모리아 본인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대면하고 있을 때에 알피에로는 상냥했고, 헤모리아에게 다양한 것들을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네 주인은? 오늘도 안에 틀어박혀 있나.”
헤모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알피에로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들더니, 허공을 쭈욱 그었다.
“상태가 갈수록 안 좋아지는군.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아멜리아 머윈은 약해져 가고 있다. 이제는 그 범주를 넘어 죽어가고 있다. 이곳 라비스타는 아멜리아의 고향이지만, 그녀가 유폐의 마왕과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고향과의 인연은 단절되었다. 포악한 멸망의 마력은 유폐의 마력과 반발하여 아멜리아를 안쪽에서부터 파괴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이 병약해지는 것은 네게는 즐거운 일일 테지. 실제로 구속이 꽤나 약해지지 않았나?”
입의 재갈 덕에 목소리로 대답할 수는 없다. 그래서 헤모리아는 보란 듯이 목에 걸린 사슬을 흔들어 보였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이 사슬은, 아멜리아의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구속구다.
“후후. 그 물리적인 구속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묻는 것은, 네 안에 심어진 구속이지.”
아멜리아는 철저하다. 자신과 애완동물 사이의 인연이 강압과 폭력으로 이뤄진 것임을 알고 있고, 그것에 감정적인 착각이나 오해는 일절 불어넣지 않는다.
아멜리아의 가학적인 애정과 훈육은 애완동물에게 강렬한 반발과 증오, 복수심을 심을 뿐이란 것을. 그리고 애완동물들은 절대로 주인을 사랑하지 않고,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배신하여 목을 물어뜯으려 들 것이란 것도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헤모리아의 안에는, 절대로 아멜리아를 배신할 수 없게 만드는 구속이 걸려 있다. 그 자그마한 말뚝은 심장 한복판에 박혀서, 아멜리아의 의지에 따라 언제고 헤모리아의 심장을 터트릴 수 있다.
“까득.”
헤모리아는 재갈을 씹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 철제 마스크와 재갈 역시 물리적인 구속구다. 헤모리아가 멋대로 재갈과 마스크를 벗어버리면, 즉시 아멜리아에게서 징계가 내려진다. 말뚝이 박힌 심장이 쥐어 짜이는 것은 끔찍한 고통이다.
“그런가? 하긴, 설령 그럴지라도 네가 함부로 대답할 수는 없겠지.”
알피에로는 빙긋 웃으며 앞으로 걸었다. 사실 그의 움직임은 ‘걷는다’라기 보다는 스르륵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유령처럼 다가온 알피에로는 헤모리아의 옆에 멈춰 서서 속삭였다.
“주인의 몰락을 바라는 네게 몇 가지 즐거운 소식을 전해두마.”
그 말에 헤모리아는 눈을 빛내며 알피에로를 돌아보았다.
“최근 몇 달 동안 나하마 사막의 흑마법사 던전이 습격당하고 있다. 빈도는 제멋대로지만 습격이 허술하지는 않은 모양이더군. 괴멸된 던전의 숫자만 열 개에 육박하고, 사막에 파묻혀 죽은 흑마법사의 숫자도 100명은 넘는다.”
이곳, 라비스타의 지하도시는 섬의 지하, 차원의 틈에 존재하고 있다.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는 이곳에서 바깥의 소식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알피에로를 비롯해 바깥과 연결된 소수의 마족에게 협력을 받아야 한다.
아멜리아 머윈도 다르지 않았다. 사막의 흑마법사 던전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그녀지만, 라비스타에 가득한 멸망의 마력은 인간 흑마법사들 사이의 연결을 약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아멜리아 머윈이 약해지고 죽어가는 지금, 그녀는 자력으로 연결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해서 외부의 정보와 연락은 알피에로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다.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네 주인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의도하여 네 주인을 공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게 누구일 것 같나.”
헤모리아는 당장 대답하지 못하고 뺨을 씰룩거렸다. 느끼는 감정에 솔직하게 웃어도 되는지 잠시 고민한 것이다.
“습격을 벌이는 흉수가 누구인가 하니, 의외의 인물이더군. 아롯의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마탑주들은 아롯의 전략병기로 쓰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 오랜 전통은 아롯에 있어 왕정과 의회의 분리만큼이나 분명한 것. 마탑을 전력에서 구분하고 있기에 아롯에 수많은 마법사들이 수학하는 것이다. 즉, 멜키스 엘하이어가 사막을 헤집는 것은 아롯의 의도가 아니다. 아롯에게는 나하마를 칠 이유도 명분도 없다.”
“…….”
“그렇다면, 던전을 습격하는 것은 멜키스 엘하이어의 독단인가? 나는 그녀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녀가 광인에 괴짜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았다. 하지만…… 광인에 괴짜일지라도 마탑주, 고금제일에 최강의 정령술사라 불리는 자라면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큰 무게를 갖는지. 네 주인을 향해 노골적인 공격을 벌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해하고 있을 터.”
헤모리아는 예전에 멜키스를 만난 적이 있다.
라이언하트의 장남, 이오드가 흑사자 성에서 사악한 의식을 시도했을 때. 그 진상을 파악하고 수습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아타락스는, 아롯의 마탑주들에게 협력을 요청했었다.
그때 보았던 멜키스에게…… 특별한 인상은 받지 못했다. 자리가 자리이고 사건이 사건이었던 지라, 멜키스도 그 상황에서는 나름 점잖게 굴었기 때문이다.
흑사자 성에서 마왕 의식이 벌어졌고 방계라고는 해도 젊은 청년이 제물로 쓰였으며, 원로원주가 손자의 손에 치명상을 입고, 그 손자와 방계의 전도유망한 청년, 버림받은 장남이 가문 전복을 노렸다가 죄다 참살된 사건이다. 아무리 멜키스라도 저 상황에서는 날뛸 수 없었다.
“멜키스 엘하이어가 네 주인에게 사적인 원한이 있던가. 원한의 정도에 따라 독단으로 공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멜키스의 뒤에 다른 주모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까득. 헤모리아가 이를 갈았고, 알피에로는 빙긋 웃었다.
“네 주인은 성격상 많은 곳에 원한을 샀지. 하지만…… 그 원수들 중에서 멜키스 엘하이어를, 아롯의 마탑주를 움직일 만한 거물은 둘 뿐.”
알피에로가 보란 듯이 두 개의 손가락을 세웠다.
“하나는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네 주인과 여러 번 마찰을 빚었지. 나로서는 모든 사정을 알지 못한다만, 네 주인이 그를 죽이고 싶어 하듯이 그 역시 네 주인을 죽이고 싶어 할 것이다.”
“…….”
“다른 하나는 재앙의 세냐. 그녀의 증오와 분노는 나로서도 이해하기 편하다. 네 주인은 몰살의 하멜의 무덤과, 그 시체를 욕보였다. 그 소식은 재앙의 세냐에게도 전해졌을 터.”
그렇게 말한 순간, 알피에로의 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300년 전에 날뛰던 세냐의 모습을 떠올린 탓이다.
알피에로는 세냐와 그 동료들과 직접 싸운 적이 없으나, 멀리서 보았던 것을 지금 와서 떠올려도 몸이 떨릴 만큼 강렬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재앙의 세냐가, 드디어 네 주인을 노리고 있다.”
헤모리아는 더 이상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빙글 휘어 보이며 소리죽여 웃었다.
“하지만, 재앙의 세냐라도 이 라비스타까지 쳐들어오지는 못할 터. 애당초 네 주인이 이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아는지도 의문이지.”
알피에로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현재 재앙의 세냐는 아롯에 있다는군. 적탑주, 청탑주 등지의 대마법사들과 활발히 만나며 교류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백탑주는 사막을 헤집고 있다……. 마치 네 주인을 꾀어내는 것만 같구나.”
“큭…… 큭큭…….”
“사막 흑마법사들은 술탄이 가진 비장의 전력이다. 그것이 공격당하는 이상 술탄도 속이 쓰릴 터이나, 아직 선택하지 못한 그 돼지는 대응조차 망설이고 있다.”
대륙을 등지고 헬무드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대륙과 헬무드 사이에서 눈치를 볼 것인가. 나하마의 술탄 알라부르는 아직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네 주인은 나하마에 만들어놓은 기반이 전멸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것은 단순한 흑마법사들의 땅굴이 아니다. 그 흑마법사들을 다리 삼은 헬무드 마족들이야말로 네 주인의 전력이지.”
“…….”
“과연 네 주인이 어떤 선택을 할까 궁금하구나. 준비해 놓은 것들을 대부분 잃게 될지라도 이 땅에 숨어 지낼지. 아니면, ‘유폐의 지팡이’답게 재앙의 세냐와 정면으로 맞서려 들지.”
아마…….
아멜리아 머윈은 라비스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알피에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헤모리아를 지나쳤다. 저 가여운 잡종은 아멜리아가 불 속에 뛰어들기를 바라는 모양이지만, 아멜리아는 그 정도로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굴욕이나 고통 따위는 한없이 가벼운 수단이라 생각할 것이다.
‘무엇을 바라나.’
아멜리아 머윈은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라비스타에 왔다. 재앙의 세냐와,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가 두려워서. 하지만 정작 라비스타에서 아멜리아 머윈은 죽어가고 있다.
예상하지 못했나? 그랬을지라도, 정말로 죽어가는 지금 이 순간마저 저택에 틀어박힌 것은…… 확실한 노림수가 있기 때문일 터.
“허어…….”
누아르 제벨라에게 무너졌으나, 지금은 멀쩡하게 수복된 저택.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알피에로는,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뱉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일그러진 저택 내부.
나선을 그리며 내려가는 회랑.
알피에로는 저 밑바닥에서 악마를 느꼈다.
빌어먹을 환생 417화
기괴하면서 불길하고, 사악한.
그런 존재감. 알피에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고서 아래를 노려보았다.
뱀처럼 똬리를 튼 복도. 저 아래, 깊숙한 중심에서 어둠이 꾸물거리고 있다.
“…….”
알피에로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300년 전, ‘몰살의 하멜’이었던 것. 인간이었으나 인간이 아니게 된, 영웅이었으나 영웅이 아니게 된. 한때는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인간의 대의에 몸을 바쳤으나, 이제는 세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만이 가득 남은 복수귀. 대의와 명예와 신념을 져버린 언데드.
그마저도 이제는 지나 버렸다. 알피에로는, 저것에 더 이상 ‘언데드’다운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저것은…… 이제는 언데드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알피에로 라사트. 이 오래된 흡혈귀는, 저것의 변화가 무엇에 의한 것인지를 안다. 데스나이트로 소생한 저것은, 이전의 전투에서 육체를 잃었다. 허나 소멸치 않고, 영혼만이 남아 아멜리아 머윈에게 돌아왔다.
아멜리아 머윈은 수중에 돌아온 영혼에 임시적인 육체를 제공했다. 더불어, 강화를 위해 영혼에 여러 가지를 더해 넣었다.
만약 아멜리아에게 충분한 시간과 소재. 일신의 위협이 없었다면, 그녀는 공들여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내고, 영혼을 강화하기 위해 보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을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멜리아 머윈은 위협스러운 적들을 피해 라비스타에 은둔했고, 이 가혹하고 척박한 멸망의 영지는 아멜리아가 바라는 그 무엇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만 가능한 것을 시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경이롭군…….”
알피에로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저것에 육체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농밀하고 거대한 마력은 저것의 영혼에 뒤섞이고, 임시로 주어졌던 육체를 소멸시켰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영혼에 뒤섞였던 불순물마저 완전히 융화되었다.
저것은 육체가 주어지지 않은 영혼과 마력의 덩어리다.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알피에로는 꽉 쥔 주먹을 떨었다. 말아 쥔 손가락, 손톱이 살을 파고들며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알피에로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 감정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잠시 고민했다.
이건, 질투다.
알피에로는 정의한 감정의 이름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벌써 수백 년 동안 멸망의 마왕을 섬기고 있다.
이곳, 라비스타에서 알피에로가 가장 오래된 멸망의 권속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피에로는 현존하는 권속 중에서 자신이 제일로 멸망의 마왕에게 충성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알피에로는 인간이 신을 숭배하듯이 멸망의 마왕을 숭배하고 있으며, 그 신앙에 거스르는 클랜원들은 모조리 마왕을 위한 제물로 바쳤었다.
허나, 멸망의 마왕은 권속에게 무정하고 무심하다. 권속이 아무리 부르짖고 숭배하여도, 멸망의 마왕은 결코 권속에게 목소리를 내려주지 않는다. 바라는 만큼의 마력은 하사하지만…… 그것에 예외는 없다. 멸망의 권속이 된다면, 누구든 바라는 만큼의 마력을 하사받을 수 있다.
즉, 멸망의 마왕에게 ‘특별한’ 존재란 없는 것이다. 바라는 만큼 얻는 마력에 예외는 없다. 불길하면서 강력한 멸망의 마력은, 권속일지라도 감당이 버겁다. 수많은 권속이 멸망의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소멸했다. 알피에로조차도 일정 이상으로 멸망의 마력을 끌어낸다면, 존재가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권속도 아닌 것이…….’
저것도, 저것의 주인인 아멜리아 머윈도 멸망의 권속이 아니다. 아멜리아 머윈은 유폐의 마왕의 권속이며, 저것은 아멜리아 머윈과 유폐의 마력에 의해 데스나이트로 되살아났다.
멸망의 마력은 다른 마왕의 마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때문에 아멜리아 머윈은 죽어가고 있다.
……저것 역시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죽어가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저것에 변화가 일어났다. 언데드이면서 언데드가 아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육체가 완전히 붕괴하고, 영혼에 마력이 뒤섞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
……적응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진화라고 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지금 저것은ㅡ 알피에로나 다른 권속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멸망의 마왕에 ‘가깝다’. 그러한 변화는 아멜리아 머윈에게는 없던, 저것만의 것이다.
그 사실이 알피에로로 하여금 강렬한 질투를 느끼게 만든다. 권속도 아닌, 마족도 아닌, 한때 인간이었고, 한때는 언데드였던 것이…… 알피에로와 다른 권속이 간절히 바라도 도달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알피에로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질투는 져버릴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저것에 분노하거나 증오할 수는 없다. 저것이 그런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결국 멸망의 마왕의 뜻일 터이니.
알피에로는 똬리를 튼 회랑의 깊은 곳을 향해 훌쩍 뛰어내렸다.
얼마 되지 않는 높이. 그러나 저 아래로 도달하기까지의 순간은 길고도 끈적했다. 멸망의 권속이 아니라면, 이 아래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중간쯤에서 존재가 붕괴해 버렸을 것이다.
시커먼 바닥에 도달한 알피에로는 짙은 마력에 전율하여, 저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살아 있나?”
그렇게 묻고 나서, 알피에로는 자신의 질문이 적절하지 못했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살아 있냐니. 저것은 진즉에 죽은 망령이 아닌가.
“…….”
어둠이 움직였다. 스멀거리며 밀려나는 어둠의 안쪽에서 저것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영혼과 마력. 그 둘은 육체와는 달리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분명한 형상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두 개가 뒤섞인 존재는ㅡ 이곳에 그득한 어둠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색’을 가지고 있다.
마치 안개가 뭉친 것만 같은 색. 어린아이에게 색연필을 주고 유령이나 영혼을 그리라고 할 때 칠하는 색.
뿌옇고 탁한 회색.
“……또…….”
회색의 덩어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갈라지고 쉰, 죽어가는 목소리. 고통에 힘겨워하는 것만 같으면서도, 동시에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
“그, 멍청한…… 병신…… 계집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왔나?”
헤모리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알피에로는 그, 반푼이라고 할 수도 없을 잡종 키메라에게 약간의 동정심은 가지고 있으나, 그 동정심은 연민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얕았다. 또 동정심과 별개로, 알피에로도 헤모리아가 멍청한 병신이라는 것을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헛된 희망이라니. 내가 마치 그 아이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큭…… 큭큭…… 오히려…… 더 질이 나쁘지. 알피에…… 로 라사트. 모기 새끼. 차라…… 리 대놓고 묻겠는데, 너는 그…… 병신…… 계집을 구슬려서, 뭘 하고 싶은 거냐.”
“오해를 하고 있군.”
알피에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때 몰살의 하멜이었던 망령에게 다가갔다.
“이 저택에 올 때마다 항상 그 아이를 마주치고 있지 않나.”
알피에로의 입장에서 이 저택의 모두가 불청객이다. 특히 아멜리아 머윈은 짜증을 넘어 경멸스럽다.
반인반마라는 잡종. 구차한 존재성이라도 멸망의 마왕을 섬겼다면 기꺼이 손을 나눠 잡았을 텐데. 아멜리아는 제 욕망을 위해 라비스타를 떠났다. 그런 주제에, 제 몸이 위험해지니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어 라비스타로 돌아왔다.
아멜리아의 뒤에 유폐의 마왕이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멸망의 마왕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방문자를 거절하지 않았기에, 알피에로도 직접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멜리아가 제 발로 나가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대의 주인은…… 애완동물 간의 편애가 극심하니 말이야. 누구는 목줄을 채워 마당에 방치하고, 또 누구는 안락한…… 저택의 안에서 달콤한 향락을 즐기게 하다니.”
노골적인 도발. 망령은 ‘애완동물’이라 불린 것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 비꼬는 말은 여태까지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던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망령은 살의를 조용히 감추며, 메마른 웃음소리를 토했다.
“향…… 락이라.”
이건, 죽음보다 고통스럽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욱이 괴롭다. 살아 있을 적에는 죽음이 끝이었는데, 지금의 망령은 죽음이란 끝을 넘어 성립된 존재다. 때문에 망령에게 소멸 외에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멸. 그것은 죽음보다 무겁다. 바란다고 해서 쉽사리 소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망령에게는 결코, 절대로, 소멸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남았다.
모든 것을 저버렸다. 명예, 신념, 인간성. 져버려 결여된 곳에는 살의와 증오와 복수심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도……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최후의 최후에서 그를 배신한 동료들. 쓸모없어진, 더는 싸울 수 없게 된, 그럼에 불구하고 유폐의 지팡이, 베리알에게 필사적으로 달려들던 순간에.
세냐의 마법이, 그와 베리알을 동시에 포격했다. 아니스의 기적이 뚝 끊어졌다. 부상과 포격으로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는, 언제나 앞장섰던 모론을 위한 고기 방패로 쓰였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ㅡ 베르무트의 검이, 모든 것을 베어버렸다.
그, 배신에 대해 이유를 묻고 싶다. 먼 북쪽 끝의 땅에 모론이 다시 모습을 보였다고 들었다. 수백 년 동안 은거했던 세냐도 돌아왔다고 들었다.
잔인한 복수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 둘에게…… 배신의 이유를 묻고 싶다. 반드시, 물어야 한다.
차라리.
차라리, 먼저 말을 해주었다면. 너는 더 이상 필요 없고,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짐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미끼 역할은 할 수 있잖아?’
면전에서 직접 저런 말을 들었다면, 그는, ‘하멜’은 태연하게 저런 대답을 했을 것이다. 굳이 동료들이 찝찝함을 느낄 필요 없이, 배신이란 배덕을 범할 필요 없이, 하멜이 알아서 제 자신의 최후를 미끼라는 역할로 소모했을 것이다.
“큭…… 큭큭.”
망령은 쉰 소리로 웃었다.
소멸해서는 안 될 이유. 이런 꼴이 되면서까지 비참하고 구차하게 연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떠올릴 때마다 망령에게 끔찍하고 처참한 기분을 주면서도 감정의 심지를 다시 세웠다.
그는 흐릿하게 보이는 알피에로의 얼굴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부…… 럽냐?”
알피에로의 뺨이 씰룩거리는 것이 보였다.
“뻔…… 한 질투는…… 그만둬라. 추하…… 니까.”
꽈득. 알피에로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그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망령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망령은 큭큭 웃으며 속삭임을 이었다.
“하긴…… 네가…… 질투할 만…… 도 해. 네…… 마…… 왕은…… 큭…… 큭큭…… 이상하게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사실이었다.
멸망의 마왕은 망령을 총애하고 있다. 모든 권속에게 평등한 무관심을 주었던 마왕인데, 권속도 아닌 망령의 편의를 봐주고 있단 말이다.
멸망의 마력과 영혼이 뒤섞인다고? 그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망령이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소멸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소멸을 바라지 않으며 버티기 때문만이 아니다. 단순히 말해서, 멸망의 마왕이 망령을 소멸시키지 않고 있다.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하지만 망령은 버티고 있다. 이 또한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망령이 버티고 있는 것조차도 멸망의 마왕이 베푼 자비다.
자비?
“…….”
알피에로는 송곳니를 으스러질 정도로 씹으며 망령을 노려보았다. 총애에 대해서는 진즉에 인지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죽어가는 놈에게 비웃음을 들으니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다.
“……질투라. 인정하지.”
몇 번의 심호흡. 알피에로는 격정을 진정시키고서, 꿈틀거리는 회색을 향해 몸을 낮추었다.
……집중해서 응시하지만, 마력과 영혼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저것은 구분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덩어리다. 이 정도로…… 일체 할 수 있다니.
“부디 질문에 대답해 다오.”
그렇기에 더욱,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는…… 계시를 들은 적이 있는가?”
멸망의 마왕은 단 한 번도 계시를 내린 적이 없다. 계약을 맺을 때조차도, 모습은커녕 목소리조차도 들려주지 않는다. 라비스타에서 태어난 마족들. 드물게도 바깥에서 찾아오는 마족들.
예외는 없다. 텅 빈 신전. 그곳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바란다면, 멸망의 마왕과의 계약이 맺어진다. 그것이 끝이다.
“…….”
망령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몇 번인가.
막연하게 느껴지는…… 그런 장소를 보게 된다. 살아 있을 적이라면 꿈으로 치부할 텐데, 지금의 망령에게 더 이상 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몇 번인가 보았던 그 장소는 대체 무엇일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와, 그곳에 오도카니 존재하는…….
찌릿.
“없다.”
영혼도 고통은 느낀다. 망령은 울부짖고 싶은 비명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저 장소와, 그곳의 존재가 계시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망령은 자신이 보았던 것을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알피에로에게 자문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꼴이 되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마족이 싫었고, 전생에 악연이던 알피에로가 바라는 말 따위는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가…….”
알피에로는 노골적인 실망을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어둠의 저편을 응시했다.
이곳에서부터 이어져 나가는 복도. 그 끝의 방에는 아멜리아 머윈이 있다. 알피에로가 이 저택에 온 이유는 아멜리아 머윈을 만나기 위해서지, 망령과 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망령을 지나치던 알피에로의 입이 열렸다.
“광란의 마왕이 부활했었네.”
망령은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광란의 마왕. 300년 전에 죽였던 마왕이다. 망령이 인간이었을 적, 그 삶이 가장 찬란하던 시기에, 동료들과 함께 직접 죽였던 마왕 중 하나다.
죽은 마왕이 부활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네. 부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죽었으니 말이야.”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유진 라이언하트.”
망령은 그 이름을 싫어한다.
알피에로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기에,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 붙였다.
“그가 직접, 성검을 휘둘러 마왕을 죽였다더군. 마치…… 그의 선조,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처럼 말이야.”
두근.
두근.
두근.
흘러가는 이야기에서 망령은 거대한 고동 소리를 들었다. 존재하지 않을 심장이 뛰는 소리. 망령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헐떡거렸다.
찰나의 순간에 그의 안에서는 여러 가지가 나타나고 사라졌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검을 맞대었을 때. 그의 검을, 압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압도당하고, 기묘한 위화감과 함께ㅡ 결코 거스를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저물어 버렸을 때.
그때 느낀 낙담.
자기혐오.
-내가.
패배하던 순간에 내뱉던 말.
-내가…… 졌다고? 너한테?
망령은 이곳에 없는 유진 라이언하트의 모습을 보았다.
베르무트의 먼 후손. 베르무트의 얼굴도, 분위기도 닮지 않은. 그런 주제에 회색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만은 똑같던. 베르무트와 다른 방법으로 성검을, 분쇄추를, 마창을 사용하던 놈.
마치ㅡ ‘내’가 성검과 분쇄추, 마창을 사용한다면, 아마 저렇게 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멜의 전투법을 닮은 놈.
그래서 베르무트가 더 증오스럽다. 배신한 주제에, 내 수법과 기술을 후손에게 전수하는 것은 끔찍한 기만이다.
“크륵…….”
심지가 더, 거세게 타올랐다. 영혼과 마력이 송두리째 불타 버릴 것만 같았다. 알피에로는 망령이 덜덜 떠는 것을 힐긋 보고서는 아멜리아 머윈의 방으로 향했다.
홀로 남게 된 망령은,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마력과 뒤섞인 영혼, 의식이 막연한 심연을 향해 자맥질했다.
-너는…….
멀리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망령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저것은…….’
의식에 번져가는 회색에서 망령은 무언가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것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그 시선이 결코 우호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빌어먹을 환생 418화
시체의 냄새.
과장을 섞지 않고, 정말로 그러했다. 알피에로는 말없이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텅 비어버린 물약병이 바닥에 그득히 널브러져 있다. 그중 태반은 산산조각이 나 있고, 시커먼 피가 눌어붙은 붕대 따위도 바닥에 수북하다.
쉭, 쉭 하는 숨소리.
반쯤 누운 아멜리아 머윈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가 누운 곳은 침대가 아닌 욕조와 비슷하게 생긴 가구였는데, 안에는 각종 포션을 비롯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진액, 그리고 아멜리아의 피가 고여 있다. 몸에 연결된 관의 움직임으로 보건대, 저 욕조 같은 것을 채우고 있는 액체가 아멜리아의 체액을 대체하는 모양이었다.
“마약까지 섞었나.”
알피에로는 끌끌 혀를 차며, 시체 냄새가 그득하고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방 안으로 발걸음을 들이밀었다. 콰삭. 구둣발에 밟힌 물약병이 산산조각 났다.
“마족이라도 중독시킬 수 있을 만큼 지독한 것들뿐이군. 하지만 별 효과는 없어 보여.”
쉭…… 쉭.
코와 입에 산소마스크까지 쓴 아멜리아 머윈. 그녀는 대답 없이 알피에로를 응시했다.
흐리멍덩한 눈동자…… 멀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약효에 이성마저 흐려졌을 뿐인가? 설마 그럴 리가. 알피에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멜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어떤 마약이라도 존재를 찢어발기는 고통을 덜어낼 수는 없지. 아멜리아 머윈. 내가 보기에, 그대는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어. 체액을 송두리째 바꾸고, 모든 신경을 끊어버리고, 의식마저 허물어트린들…… 그대의 존재가 바뀌는 것은 아니잖은가.”
“뭐 하러 왔죠?”
대답은 아멜리아의 입이 아닌, 욕조에서 비죽 튀어나온 파이프 관에서 흘러나왔다.
“조언부터 달게 듣게. 그대의 몰락이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말이니까.”
“개소리.”
“그대가 이곳에 있고, 유폐의 마왕과 계약이 맺어져 있는 이상, 라비스타는 그대의 존재 자체에 반발할 수밖에 없어.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야. 하나는, 라비스타를 떠나는 것. 다른 하나는 유폐의 마왕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멸망의 마왕과 계약을 맺는 것.”
파이프 관에서 목소리를 흘러나오지 않았다.
간단한 이유다. 이 관은 아멜리아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소리로 바꾸는 것이기에, ‘비웃음’ 같은 소리는 낼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알피에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신전으로 내려가서 바란 즉시 계약이 맺어지는 것은 그대도 알겠지. 제아무리 유폐의 마왕과 직접 맺은 계약일지라도, 멸망의 마왕님과의 계약보다 앞서지는 못해. 그대와 유폐의 마왕과의 관계는 자연스레 청산…….”
“유폐의 마왕이 두려워서 날 라비스타에 들여보낸 주제에. 뭐라도 되는 척 떠들지 마세요.”
“호의를 무시하는군.”
“네가 말하는 것이 호의에 의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아니까요. 너는 내가 싫고, 나가서 뒈졌으면 좋겠죠? 혹은 내가 고통과 공포에 굴복하여, 멸망의 마왕에게 애걸하는 것을 보고 싶죠?”
목소리는 신랄하다. 하지만 욕조에 누운 아멜리아의 몸뚱이는 여전히 축 늘어져 있다. 보글보글하는 소리와 함께, 욕조의 수액이 관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나는 내가 거머쥔 것을 무엇 하나 놓을 생각 없어요. 버텨야 한다면 얼마든지 버티면 되는 거예요.”
쩌적, 쩌저적. 아멜리아의 몸뚱이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져서 조각 난 몸이 수액에 녹아 흩어졌다.
알피에로는 묵묵히 아멜리아의 몸을 응시했다. 수액에 푹 잠긴 몸뚱이는 알몸이고, 오른팔은 남았으나 왼팔은 없었고, 하반신은 상복부 아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 내장의 태반이 소멸했는데도, 흑마법은 시체나 다름없는 몸뚱이를 연명시키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몸이 계속해서 붕괴하고, 썩어가고 있는데도, 아멜리아는 버티고 있었다.
“무엇하나 놓을 생각이 없다라.”
알피에로는 빙그레 웃었다.
“무지란 참으로 우습군. 이미 많은 것을 놓아버리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알지 못하고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말이야.”
“무슨 말이에요?”
아멜리아가 빠르게 되물었다. 알피에로는 그녀가 표정을 짓지 못한다는 사실에 적잖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광란의 마왕이 부활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광란의 마왕을 토벌했다.
재앙의 세냐가 아롯의 마법 학계에 복귀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부터,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가 나하마 사막의 던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술탄은 대륙의 눈치를 보느라 강경대응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가 사막에 두었던 세력은…….”
“끼이이이이이ㅡ!”
알피에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이프 관의 안쪽에서 쇠를 긁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렸다. 아멜리아의 의식에서 떠오른 것. 목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이었다.
끼긱, 끼기기기긱! 파이프가 진동하면서 긁는 소리를 토하고, 욕조에 잠긴 아멜리아의 몸도 바들바들 떨리며 수액이 출렁거렸다.
비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소음. 알피에로는 당황했지만, 아멜리아를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박수까지 쳐대면서 비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아멜리아, 그대에게서 이런 우스운 비명을 듣게 될 줄이야!”
아멜리아의 귀에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아멜리아가 느끼는 분노와 상실감은 죽음에 근접한 몸뚱이의 고통보다도 끔찍했다.
파이프관은 한참 동안 금속의 비명을 내질렀다. 알피에로는 욕조의 옆으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서 유열을 즐겼다.
“부.”
금속의 비명이 끝났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몸에는 아직 간헐적인 떨림이 남아 있었다.
알피에로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서 아멜리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부탁을.”
그 말. 알피에로의 뺨이 씰룩거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낮추어서 아멜리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저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제대로 앞을 보고 있을지는 의문이나, 알피에로는 눈동자 안에 있을 아멜리아의 혼을 노려보았다.
“내가 왜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나?”
“지금까지도 내 부탁을 들어주었잖아요.”
“내가 그래 준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는가?”
알피에로는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루하게 망가진 아멜리아의 육체를 노려보았다.
여태까지 아멜리아의 부탁을 들어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멜리아는 알피에로가 가져다주는 바깥의 정보들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다. 당장 알피에로가 정보를 전달해 주지 않는다면, 아멜리아는 라비스타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눈과 귀를 잃게 된 것과 다름없어진다.
알피에로는 아멜리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잡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제멋대로 돌아와서 제 안위를 위해 틀어박힌 아멜리아에게 짜증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외면하지 않은 것은ㅡ 아멜리아의 심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아멜리아의 목적이 대체 무엇인지. 유폐의 지팡이가 되었다면 차라리 마왕성 바벨에 숨어들 것인지, 왜 유폐의 마왕의 영향권이 아닌 라비스타에 숨어든 것인지.
“알아요.”
파이프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피에로. 너는 내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궁금하겠죠. 어쩌면,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적들이 라비스타에 찾아오는 것을 고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저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쟁 시대 이후로 300년이 흘렀다.
마족에게는 엄청나게 긴 시간도 아니다. 저 시대부터 살아온 수많은 마족 중, 마음껏 날뛸 수 있던 전쟁 시대를 그리워하지 않는 마족이 얼마나 될까.
알피에로는 전쟁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알피에로 뿐만이 아니다. 라비스타에서 은둔자마냥 지내는 마족들. 그들 대부분이 전쟁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본래 멸망의 마왕은 권속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300년 전, 유폐의 마왕이 갑작스레 전쟁을 선포한 후. 헬무드 곳곳에 정체 모를 신전들이 나타났다.
어떤 마족이건 간에, 신전에 찾아가서 갈망한다면 멸망의 마왕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온갖 마족들이 멸망의 마왕과 계약을 맺었다.
대부분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멸망의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한 검증을 거친 다음에는, 이미 충분한 힘이 있음에도 그 이상의 힘을 바라는 마족들이 멸망의 마왕과 계약을 맺었다.
힘을 바라는 이유? 간단했다. 전쟁 시대.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그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 시대를 즐기며 날뛰기 위해서.
알피에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젠가 다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300년 전에 그러했듯, 침묵하는 멸망의 마왕이 일어나 날뛸 것을 믿고 있다. 간절하기에 라비스타에서 인내하고 있다. 유폐의 마왕이 평화를 약속한 이상, 바깥에서 날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ㅡ 만약, 아멜리아 머윈의 적이…… 지금 시대의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해 라비스타에 찾아온다면.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해줄게요.”
파이프관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감정은 섞이지 않는다. 아멜리아 본인의 목소리도 아니다.
“나는 전쟁을 벌일 생각이에요.”
아멜리아 머윈. 그녀는 장치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300년 전과는 달라요. 유폐의 마왕이 시작한 것도, 멸망의 마왕이 시작한 것도 아닌 전쟁을 꿈꾸고 있어요. 바로 나. 아멜리아 머윈이, 전쟁을 시작하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혹시라도 유폐의 마왕이 가로막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었죠. 유폐의 마왕은 권속의 ‘자유’에 굉장히 후하니까. 물론, 책임을 강요하지만요.”
바벨을 도피처로 삼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세냐 메르데인과 적대관계가 된 것은 아멜리아 머윈이 저지른 짓 때문이다. 만약 아멜리아가 저 관계를 청산하기는커녕, 바벨을 도피처로 삼으려 했다면ㅡ 유폐의 마왕 본인이 아멜리아 머윈을 죽였을 것이다.
“준비는 했어요. 술탄을 꼬드겼죠. 지금의 영토보다 최소 3배. 메마른 사막이 아닌 비옥한 땅을 주겠단 말에 눈이 돌아가더라고요.”
“……나하마를 등에 업고 벌이는 전쟁 따위…….”
“전쟁 시대를 그리워하는 마족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파이프관의 목소리가 알피에로의 말을 잘랐다.
“지금 대륙은 평화로워요. 특히 헬무드는, 전쟁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흔적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전을 거두었다 하더군요. 나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아서 모르지만. 너는 직접 그 시대를 살았으니 알겠죠.”
“…….”
“하지만.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편리한 세상이 되어도, 헬무드에 사는 것은 ‘마족’이에요. 지금의 헬무드에 적응하고 돼지가 된 새끼들도 썩어 넘치게 많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교정소란 명목의 수용소에 처박힌 마족도 많죠. 혹은 슬럼가를 전전하다, 밑바닥의 밑바닥인 하수도 살이를 하거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기민한 마족들은 괴물의 본성을 감추고 평화의 시대에 걸맞은 가면을 쓰고 있다.
헬무드의 최상위계층은 대부분이 그렇다. 고위귀족들. 당장 가비드 린드먼이나 누아르 제벨라도 그런 입장이다.
“내가 나하마에서 가장 공들인 것이 뭔지 알아요? 사막의 던전을 완전히 장악하고, 확장하는 거였어요. 결과적으로 나하마는 아롯 이상의 흑마법사들을 보유하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륙에서 가장 많은 흑마법사들의 땅이 되었죠.”
아멜리아 머윈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흑마법사들은 마족과 계약을 맺는 것으로 태어난다.
처음부터 흑마법사를 꿈꾸고 마족과 계약을 맺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평범한 마법사가…… 가진 재능에 절망하거나, 마법의 벽에 주저앉거나, 보통의 마법으로는 추구할 수 없는 것을 탐하게 되면서 흑마법사의 전직이 이뤄진다.
아롯의 흑색마탑이 이미 검증된 흑마법사들의 연구집단이라면, 나하마의 흑마법사 던전은 보다 순수한 ‘학파’다. 던전마스터를 최고 스승으로 두고, 도제식 교육을 통해 흑마법사를 양성하는 곳. 일반 마법사가 던전에서 수학할 경우, 몇 년 동안 흑마법사 스승의 시중을 든 후에 고위마족을 알선받아 계약을 맺는다.
“흑마법사의 배후에는 마족이 있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죠. 그들 모두가 내가 벌이는 전쟁에 찬동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요. 그들 모두 전쟁을 기다리고 있어요.”
사막에 불러 모은 흑마법사들. 배후의 마족들은 판데모니엄에서 실권한 마족들이다.
전쟁 이후 그럴듯한 작위를 받아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지만, 판데모니엄에서의 자리는 보전하지 못한 마족들. 혹은 유폐의 마왕이 선언한 평화에 반발하여 낙향한 강경파 마족들. 누아르 제벨라나 가비드 린드먼에게 밀린 전쟁영웅들.
전쟁 시대를 겪지 못한 신예 마족들도 있다. 그들은 전쟁 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다음 전쟁을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나하마를 통해 전쟁을 벌인들, 그 마족들이 그대에게 협력하지는 않을 걸세.”
“협력하게 만들 수단은 가지고 있어요.”
마왕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유혹할 생각이다. 블러드메리를 통해 에드먼드 코드렛이 준비한 의식은 확인했다. 아멜리아 본인은 그 의식을 벌일 생각이 없지만ㅡ 전쟁을 바라고, 더 큰 힘을 바라는 마족들에게 있어 ‘마왕’의 옥좌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참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아이리스. 그 병신이 마왕이 되었다는 것이 다른 마족들의 엉덩이를 가볍게 만들겠죠. 전쟁을 통해 제물과 공포를 수급하고, 내가 제공한 의식으로 초월을 이뤄 마왕이 된다면. 이 정도라면 전쟁에 여러 마족을 동원할 수 있을걸요.”
“…….”
“너는 어때요? 전쟁을 바라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요. 알피에로 라사트. 너도, 내가 벌이는 전쟁에 숨어들어 마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 네가 바란다면,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가장 먼저 해줄게요. 나하마 수도 전체의 시민을 바쳐서라도.”
“나는 마왕은 되고 싶지 않네.”
알피에로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전쟁. 그리고, 전쟁에 강림하여 날뛰시는 멸망의 마왕을 보는 것. 권속답게, 그 전장에 함께하는 것이니.”
“내 부탁은?”
“그대가 벌이고 싶다는 전쟁에는 흥미가 있네.”
물러섰던 발이 다시 앞으로 나왔다. 알피에로는 욕조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서 아멜리아의 눈을 응시했다.
“어떤 부탁을 하고 싶은가.”
“내 개를 밖으로 내보낼 거예요. 나는 나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 개를 통해 마족들과 교섭하고, 여러 가지로 사용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는 너무 약해져서. 개 목줄 하나 강하게 당길 수 없죠.”
“……그래서?”
“너도 알죠? 밖에 묶어놓은 개는 뱀파이어가 섞인 키메라예요. 그러니까, 네 피를 좀 먹여요.”
“나를 통해서 개를 관리하겠다는 말이군.”
“밖에 풀어두면 어디서 맞아 뒈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약한 개지만…… 네 피를 먹이면 어디서 맞아 뒈지지는 않겠죠.”
“클랜의 다른 뱀파이어를 뒤에 붙여주지.”
알피에로가 로드로 있는 라사트 클랜은, 전쟁 시대를 풍미했던 뱀파이어 클랜이다. 비록 클랜 전원이 라비스타에 은둔하고 있지만, 하위 클랜들은 아직 헬무드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른 개는 내보내지 않을 건가?”
“그건 개 정도로 끝내지 않을 거예요.”
아멜리아가 대답했다.
“솔직히 나도, 그것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빌어먹을 환생 419화
넓어도 너무 넓은 사막. 어느 쪽을 돌아보아도 모래만 그득하고, 머리 위에는 살인적인 햇살이 내리꽂힌다.
특히 이 주변은 나하마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막 중에서도 가혹하기로 이름 높은 곳이다. 근처에 마을도 없고, 오아시스도 없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관광객도 가까이하지 않는 곳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천연의 오아시스가 없다면 인공적으로 만들면 되는 것인데, 굳이 그러지 않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 황량하기만 한 땅이지만ㅡ 흑마법사란 족속은 이런 환경을 아주 좋아한다.
땅속 깊은 곳에서 뭔 짓을 하건 소문이 날 일도, 감시당할 일도 없다. 게다가 사막은 사람 몇 명이 행방불명돼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니, 여러모로 흑마법사들이 활동하기 좋은 땅인 것이다.
“아롯의 흑마법사들이 참 신사적이고 멀쩡한 놈들이었구나 싶다니까.”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로브의 모래를 털면서 투덜거렸다.
“응? 그렇잖아. 아롯에서도 뭐, 가끔씩 사람이 실종되고 죽고 그랬기는 하지만, 흑색마탑 자체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제법 결백했단 말이야?”
마도왕국 아롯. 그곳에는 세상의 온갖 마법사들이 모여든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마법실험은 외도이며 금기지만, 마법사란 족속의 대부분은 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금기를 범하곤 한다.
그러한 습성은 아롯에 어쩔 수 없는 음지를 만들어낸다. 대외적으로 공개할 수 없는 지식을 추구하는 마법사들은 꼭 흑마법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시체나 부랑자 정도에서 그친다면 제법 양호한 것이고, 심할 경우에는 멀쩡한 시민이나 관광객에까지 손을 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마탑 소속의 마법사는 저렇게 선을 넘을 수가 없다. 마탑은 소속된 마법사를 엄격하게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사막에서는, 마법사를 규제하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어. 흑마법사만 문제가 아니라니까? 내가 요 몇 달, 모래로 묻어버린 놈들 중 한 1/3은 그냥 마법사였을 정도야.”
멜키스도 나하마의 흑마법사 던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 던전이 자그마한 마탑의 역할을 대신하며, 길드의 소속조차 거부하는 독자적인 마법사집단. 하지만ㅡ 설마 이 정도로 심각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긴 했다.
마법사, 특히 고위 마법사란 존재는, 결국에는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마법사다운 존재다. 다른 나라의 마법사가 어떻게 지내는 것보다는, 그냥 자신의 마법을 어떻게 발달시키고 다음에는 또 어떤 연구를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바쁘다.
“저기 저기, 그런데 말이야, 이 누나가 말이야, 응? 고향에서 한참이나 먼…… 어, 그러고 보니, 너 내 고향이 어딘지 알아? 당연히 모르겠지! 내가 말해준 적이 없으니까. 짜잔, 내 고향은 저기 북쪽의 알로스 왕국이야. 항마연합에 소속된 코딱지만 한 나라 중 하나지. 아마 알로스 왕국의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나만큼 유명하고 실력 있는 사람은 없을걸.”
멜키스는 쉬지 않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어쨌든, 그 대단한 멜키스 엘하이어가 말이야. 고향에서 한참이나 먼 사막을 외롭게 홀로 떠돌며, 낮에는 쪄 죽고 밤에는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해가며, 사악하고 흉흉한 짓들이나 하는 못된 마법사들과 맞서고 있는데…… 너는 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는 거니?”
[대답은 안 하지만 잘 듣고 있습니다.]
멜키스의 주변을 떠다니던 바람의 정령이 다가와서 대답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여전히 레헤인야르에서 모론과 함께 있고, 이런 식으로 바람의 정령을 사용해 멜키스에게 보고를 들었다.
“정말? 정말이지? 유진아, 나 요즘 외로워. 이 사막에서 고독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달까…….”
[징그러운 말 하지 마세요.]
“징그럽다니! 누나가 외롭다는 것이 네게는 징그럽다 이거야?”
[대체 뭐가 외롭다는 겁니까? 멜키스 님은 혼자서도 잘 놀잖아요. 혼자서도 얘기할 사람 많고.]
“혼자서 얘기할 사람이 많다는 것은 뭔 개소리야?”
[정령들 있잖아요.]
“얘! 정령이 사람이니? 정령은 정령이야.”
[그 말은 어떤 의미로는 정령 차별적으로 느껴지는데…… 멜키스 님은 정령을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 뭐 이런 건가요. 그러한 사상은 템페스트에게 반감을 살 수밖에 없지 않나…….]
“아아니아니아니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내게 있어서 정령은 하찮은 인간 따위보다 훨씬 우월하고 고등한 상위존재야! 나나, 나 따위가 감히 대화 상대로 정할 수 없는, 정령 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것을 기다리는!”
멜키스는 허둥거리며 말을 수습했다.
“그러니까, 응? 템페스트한테 말 좀 잘 전해 줘. 이게 참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 나랑 템페스트 사이에 대화의 연결고리는 이어져 있을 텐데, 내가 아무리 불러도 템페스트 쪽에서 대답이 없어. 혹시, 나와의 연결이 끊어진 걸까?”
[음…… 아뇨. 그건 아닙니다. 템페스트는 그…… 차분한? 조용한? 과묵한 정령사가 좋다네요.]
“그건 바로 나야.”
[멜키스 님이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거는 것에 대답하기가 힘들대요.]
“음…… 잦은 대화로 교감하여 감응을 높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템페스트가 말하길, 일단은 정령사로서의 그릇을 키우는 것이나 신경 쓰라고…….]
“나랑도 대화할 수 있는데 왜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대화를 주고받는 것 자체가 멜키스 님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답니다. 사막에서 과부하가 와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날 걱정해 주는 것이구나!”
멜키스는 호들갑을 떨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너는 여전히 모론 님과 함께 있는 거야?”
[보고 끝나면 다시 모론 님과 대련하러 갈 겁니다.]
“너 지금 나보고 빨리 끊으라고 눈치 주는 거지? 너무하다 정말. 내가 누구 부탁으로 이 엿 같은 사막에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거래였잖아요.]
유진 쪽에서 그렇게 칼처럼 선을 그으니, 멜키스 쪽에서는 할 말이 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뻔뻔한 대정령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 거래~ 참 좋다~ 부럽다 정말~”
[체면이란 것이 없으신가…….]
“응~ 없어~ 그런 거 신경 써봤자 귀찮기만 해~”
[에휴…….]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주 잠깐 시간이 흐른 후. 바람의 정령이 전혀 다른 존재감을 내뿜었다. 멜키스는 화들짝 놀라서 바람의 정령 쪽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초급 정령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주변을 휘감은 바람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가공하기 짝이 없었다.
[……부탁한다.]
바람의 정령이 근엄한 목소리를 뱉었다.
“끼아아악!”
멜키스는 환호성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저 목소리!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의 목소리다. 몇 달 동안 매일 말을 걸어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격려를 전하니, 멜키스의 머릿속에 있던 불만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템페스트가 부탁한다면 어쩔 수 없지!”
더 이상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이 시키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격려를 전했던 템페스트는 다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유진은 매일 하던 대로 모론과 대련을 하러 갔고,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대련의 부상을 수습하기 위해 뒤를 따랐다.
세냐는? 그녀는 아롯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멜키스는 사막을 걷고 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어디를 봐도 모래뿐인, 엿 같은 사막.
하지만 멜키스는 이 사막에서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고 있다. 대마법사에게 불편한 제한을 거는 환경은 마나의 농도뿐이고, 굉장히 특별한 환경이 아니고서는 세상 어디건 마나는 존재한다. 대마법사는 마법만 쓸 수 있다면 물 한 방울 없는 땅에서도 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멜키스는 대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대정령사이기도 하다. 대지의 정령왕과 계약한 그녀에게 있어서, 뜨겁게 달궈지고 발이 푹푹 들어가는 사막의 대지는 조금의 위협도 없었다.
그나마 위협이 될 것은 식량의 유무인데……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모래 밑에 서식하는 갑각류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놀라운 식성과 생활력의 소유자였다.
[이쪽이다.]
“숫자는 얼마나 돼?”
[50명이 조금 넘는다.]
“던전마스터는?”
[내 쪽에서 판단하기에는 7서클. 휘하 마법사들은 평균이 5서클이다.]
“제법 상위 던전이네. 7서클의 흑마법사…… 숨겨진 재주와 마력을 생각하면 대마법사에 근접했다고 판단해야겠지.”
[매장은?]
대지의 정령왕, 야노스가 물었다.
유진에게 되는대로 떠들었을 뿐, 멜키스는 사막에 와서 외로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령은 편한 말동무이자 벗이기 때문이다.
“중견마법사들뿐이라면 모를까. 대마법사급이 있는 이상 편하게 매장할 수는 없겠지. 오히려 밖으로 튀어나와 요란해질 거야.”
마법사의 던전인 이상 외부 공격에 대한 방비는 견고할 터. 거기에 대마법사까지 섞인다면 야노스의 매장에도 버틸 것이다.
아무리 이 사막에 오가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지상에서 마법을 난사하며 날뛰면 너무 눈에 띈다. 사실 요 몇 달 동안 벌인 짓들을 생각하면 진즉에 술탄에게 보고가 됐겠지만…… 반응이랄 것은 없었다. 그 유명한 나하마의 어쌔신들이 암살을 하러 오지도 않았고, 모래술사들의 공격을 받은 적도 없다.
그래도 조심은 해야 한다. 놀랍게도 멜키스에게는 그러한 자각이 있었다.
[이 이상 나아가면 마법트랩이 있다.]
“나도 알아.”
야노스가 경고하기 전에 간파했다.
영역에 발을 들인 순간, 사막은 개미지옥이 되어 멜키스를 밑바닥의 던전으로 빠트릴 것이다. 멜키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은 지하 던전이고, 멜키스가 해야 할 일은 던전의 흑마법사, 혹은 흑마법사가 되려는 마법사를 전멸시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굳이 죽여야 하나~ 라는 생각했다. 그냥 던전만 파괴하고 다니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실제로 던전을 보고 난 뒤. 멜키스는 주저하지 않고 그 던전의 모든 흑마법사를 모래에 매장해 버렸다. 여태까지 그녀가 파괴한 던전은 벌써 10개가 넘어서는데, 그중에서 몰살을 피한 던전은 겨우 3개뿐. 나머지 던전의 마법사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다.
“나도 이해는 해.”
멜키스는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쓰며 투덜거렸다.
“터부시되는 연구는 재미있고 매력적이지. 그래도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을 대할 때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하는 것 아냐? 인간을 대상으로 한 마법실험도 뭐, 종류는 다양하잖아. 근데 왜 이 사막 던전의 놈들은 죄다 그 모양이야?”
[계약자여. 그대도 인간에 관련한 실험이나 연구를 하고 싶다 생각한 적이 있나?]
번개의 정령왕, 레빈이 말을 걸었다.
“있지.”
멜키스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먹어도 싸지 않는 몸.”
[?]
“먹어도 찌지 않는 몸.”
[계약자여. 무슨 말을…….]
“얼마나 편리해? 마법사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인간이 저런 몸을 갖게 되면 그거야말로 유토피아 아니야? 저것이야말로 세상에 이바지하는 올바른 마법실험이지.”
[그…… 불로불사나…… 그런 종류의 연구는 관심이 없나?]
“에이, 불로불사는 무슨. 갈 사람은 가고 보낼 사람은 보내주는 것이 자연의 섭리야.”
멜키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러 종류의 마법을 준비했다. 맨몸으로 던전에 난입하는 것이다.
아마 실험재료 확보의 함정일 테니, 개미지옥에 파묻히는 순간에 몸이 터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
멜키스는 여러 종류의 방어마법을 몸에 두르면서 계속해서 떠들었다.
“만약 세상 모두가 불로불사가 되어버리면, 언젠가는 대지에 발 디딜 곳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버릴걸? 그리고 무조건 오래 산다고 좋은 것이 아니잖아.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축복…….”
“동감합니다.”
“끼야아악!”
바로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멜키스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마법을 쏘아냈다. 화르르륵! 이프리트의 불꽃이 뒤쪽을 휩쓸었다.
“놀라게 한 제 쪽에 잘못이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불꽃의 정령왕으로 공격하다니. 대부분의 사람은 방금 불꽃을 맞으면 재가 되었을 겁니다.”
“뭐뭐뭐, 뭐, 뭐야!”
“요란을 떨면 안 되는 상황 아닙니까?”
“어떻게 요란을 안 떨어?!”
너무 놀라서 머리털까지 곤두섰을 정도다. 멜키스는 후다닥 뒤로 물러서서,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흑색마탑주, 발자크 루드베스.
1년 전, 사마르 대수림. 그곳에서의 부족 전쟁을 끝낸 후, 아롯에 먼저 돌아가겠다며 떠났던 발자크는ㅡ 아롯에 도착하는 일 없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마탑주가 증발해 버린 것이라, 아롯과 마법사 길드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발자크의 행방을 쫓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사라진 발자크의 행방을 두고서 소문만 무성하게 돌았다. 아롯에 복귀한 현명한 세냐가 흑색마탑주를 쳐죽인 것이라는 소문도 있고, 헬무드의 알력 싸움에 밀려 존재가 말살된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멜키스도 크게 관심은 두지 않았다.
발자크 루드베스. 같은 마탑주이기는 해도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닌 데다, 직접적으로 엮인 적은 거의 없다. 그럭저럭 알고 지낸 지는 수십 년인데, 공동으로 무언가를 함께 했던 것은 대수림에서의 전쟁이 처음이었다.
어디서 객사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생각은 했었다. 흑탑주는 이름이며 생김새며 모든 것이 수상쩍은 사람이라, 허무하게 죽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지어, 마법사로서의 비원이 ‘전설’이 되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마법사. 현명한 세냐처럼 마법의 역사에 수백 년은 이름을 새길 수 있는, 그런 마법사가 되는 것이 발자크의 비원이다. 저 정도의 실력와 위치에서, 진지하게 ‘전설’을 꿈꾸는 마법사가 절대로 허무하게 죽을 리는 없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야?”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입니다. 백색마탑주.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발자크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서 멜키스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발자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에게 직접 듣지 않아도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유진 님의 부탁 때문이겠죠.”
“…….”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백탑주, 당신이 개인적인 이유로 흑마법사 던전, 아니, 나하마 전체에 싸움을 걸 리가 없지요. 그럴 만한 동기랄 것이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진 님에게는 그럴 이유가 있죠.”
“아닌데? 유진 걔는 아무 상관 없어. 나 혼자 하는 거야.”
“독박을 쓸 만큼 유진 님과 의리가 깊었던 겁니까?”
“제멋대로 확신해서 떠드는 것은 무례하고 좋지 않아, 흑탑주. 괜히 떠보는 것은 그만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 당신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뭘 하고 있냐니. 구체적으로 대답하기는 힘듭니다만…… 흠. 최근에 한 것은 당신의 보좌입니다.”
“……뭐?”
“백탑주, 당신이 매장한 시체들을 깔끔하게 지워 버리고, 던전에서 처리되지 않은 것들도 말소했습니다. 당신이 죽이지 않고 쫓아낸 흑마법사들과, 도시에 돌려보낸 인질들의 입막음을 새로 했죠. 당신을 사로잡기 위해 파견된 어쌔신들을 돌려보내기도 했고.”
“뭐어?”
“최근 몇 달 동안 당신이 지워버린 던전만 해도 10개가 넘습니다. 그만한 짓을 했는데, 이 나라의 술탄이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겁니까?”
“그걸 묻는 게 아니야.”
멜키스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빛났다. 진즉에 정점에 도달하고 그 너머를 탐내는 대정령사의 위압감이 발자크를 덮쳤다.
“내가 살려 보낸 흑마법사. 도시에 돌려보낸 인질. 당신이 건드린 거야?”
멜키스는 그 사실에 분노했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싶어서 살려 보낸 놈들. 그리고 다행히 목숨을 건진 인질들. 만약 발자크가 독단으로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라면ㅡ 멜키스는 자제하지 않고 분노할 생각이었다.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입니까?”
발자크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막음이라며?”
“말 그대로 입만 막은 겁니다. 백탑주, 당신의 생각처럼 그들에게 험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방금 전까지 분노를 터트리기 직전까지 끌어올린 주제에, 멜키스는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게 감정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홱 몸을 돌리더니, 던전으로 이어지는 개미지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발자크는 먼저 가버리는 멜키스의 등을 멀뚱거리며 쳐다보다가 뒤를 따랐다.
“더 묻지 않는 겁니까?”
“당신 성격상 물어봤자 대답도 안 할 텐데, 뭐 하러 더 물어봐?”
“허.”
“소리를 꽥꽥 지르고 마법까지 써버려서 걱정했는데. 흠, 당신, 무턱대고 내 뒤에서 놀라게 한 건 아니었구나?”
트랩을 중심으로 발자크의 마법이 섞여 있다. 그 덕분인지 던전의 흑마법사들은 자기들 머리 위에 멜키스가 와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말이야. 이건 좀 궁금하거든. 여태까지 나 몰래 뒤처리를 해왔다 말한 주제에, 왜 이번은 직접 튀어나온 거야?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조언하기에는 너무 늦지 않아?”
“이 던전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하려 했습니다.”
“왜?”
“이곳의 던전 마스터는 아라스크라는 이름의 흑마법사인데, 실력과 인성은 둘째치고…… 계약한 마족이 아주 과격하기 때문입니다.”
“누군데?”
“하르페우론. 작위는 백작에, 헬무드의 서열은 57위입니다. 그는 탐욕스럽고 소유욕이 강한 마족입니다. 만약 백탑주, 당신이 던전마스터를 공격하여 죽이려 한다면ㅡ 하르페우론은 분노해서…….”
“오히려 좋아.”
멜키스는 활짝 웃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격한 반응이야.”
“……당신이 아니라 유진 님이 바라는…….”
“응? 아닌데? 내가 필요한 건데? 왜 자꾸 여기 있지도 않은 유진 얘기를 하는 거야? 참 이상한 사람이야.”
멜키스는 휘휘 손을 저었다.
ㅡ콰르르르! 발밑의 개미지옥이 발동하고, 순식간에 모랫바닥이 소용돌이치며 중심으로 꺼져가기 시작했다. 멜키스는 저항하지 않고 모래에 끌려가며 발자크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신은 어쩔 거야?”
“대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서 기다리시겠다?”
발자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개미지옥으로 걸어들어왔다. 멜키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출동!”
멜키스는 양팔을 치켜든 모습 그대로 사막 아래로 떨어졌다.
빌어먹을 환생 420화
발자크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저 수상쩍은 남자는 필시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애당초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치 실종된 것처럼 증발해 버린 것부터가 수상하다.
최근 1년 동안 발자크가 무엇을 하였는지, 왜 이곳 사막에 있는 것인지, 왜, 멜키스가 벌인 일들의 뒷수습을 한 것인지.
“당신.”
짧은 사고를 거쳐, 멜키스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최대한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음…… 때로는……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거야.”
“예?”
“당신이 무슨 짓을 하건, 나는…… 나는 당신의 마음에 보답해 줄 수 없다는 말이야. 그…… 당신도 어디서 꿀릴 능력과 외모는 아니니까, 나 말고도 좋은 사람…… 음, 사실 이건 불가능하지. 이 세상에서 날 대체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대부분의 경우에 언제나 얇은 미소로 대처하던 발자크지만, 이번에는 드물게도 진심으로 정색했다.
“부끄러워서 아닌 척하는 거야? 소용없어. 나는 이미 당신의 마음을 눈치챘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물었습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즉시 결론이 나와. 당신은…… 나를 좋아, 아니, 사랑하는 거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그만하십시오.”
“사마르 대수림이겠지.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피니티 포스를 사용한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엄청났을 테니. 당신은 그때 내 모습에 반해 버린 거야.”
“그만하시라 했습니다.”
“첫사랑. 그 파괴적인 울림에 익숙지 않은 당신은, 도저히 아롯에서 날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도망친 거야. 그렇게 이 사막에 틀어박혀 나를 잊으려 했지만, 아! 하늘도 무심하셔라, 마치 운명처럼! 사막에서 날 만나 버린 거지.”
“…….”
“으흠, 분명히 말해두는데 이건 운명 따위가 아니니까, 괜한 오해는 말도록. 어쨌든 당신은 날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나를 사랑해서, 걱정스러워서! 내 뒤를 스토커처럼 기분 나쁘게…….”
“아닙니다.”
발자크의 뺨 근육이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씰룩거렸다.
“제 존재에 맹세코, 당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은 적은 없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과거와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정말 나 안 좋아해?”
“예.”
칼 같은 대답이었지만 멜키스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묻는 대신, 한쪽 벽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파지직! 손끝에서 쏘아진 번개줄기가 벽을 통째로 지졌다.
“그르르르르……!”
벽에 바짝 붙어서 마법으로 숨어 있던 흑마법사가 감전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멜키스는 번개줄기를 쏘았던 손가락을 후, 불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미지옥으로 떨어져 도착한 던전. 가장 먼저 본 것은 14명의 흑마법사들이었다. 함정을 통해 떨어진 피해자를 사로잡기 위해 나와 있던 그들은, 상처 하나 없이 떨어진 멜키스를 보자마자 당황하며 대처에 나섰다.
그들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멜키스가 훨씬 더 빨랐다. 그녀가 계약한 번개의 정령왕, 레빈은 속공에 있어서 다른 정령왕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5서클 정도의 방어 마법 따위로 레빈의 번개를 가로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번갯불이 번쩍, 터진 순간. 상황은 이미 정리되었다. 야노스에게 부탁해 던전의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는 동안에 발자크를 떠보았던 것인데…… 멜키스는 여전히 의심을 떨쳐내지 못하고서 발자크를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백탑주님.”
발자크가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멜키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제게도 보는 눈과, 생각하는 머리가 있습니다.”
“그 둘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내게 반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너무 잘 기능하고 있기에 당신에게 절대로 그런 감정을 품지 않는 겁니다.”
발자크는 다시 한번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내심 억울하단 생각도 들었다. 이런 오해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발자크는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푼 것에 이상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아직도 유진에게 혹시 게이냐는 질문을 받았던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멜키스.]
대지가 진동했다.
[다른 층에 사로잡혀 있던 인질들은 우선적으로 분리시켰다.]
“공방은?”
[네가 직접 확인할 필요는 없다.]
야노스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고, 멜키스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공방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말. 그것은 야노스가 멜키스를 배려하는 것임과 동시에, 의미 그대로의 말이기도 했다.
“무너트려.”
[알았다.]
ㅡ쿠르르릉! 던전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하의 거대한 공방이 통째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서 한창 실험 중이던 흑마법사들이 놀란 비명을 지르며 붕괴에 저항했지만, 던전 내부에 침입한 대지의 정령왕의 진노는 흑마법사 수십 명 정도로는 결코 막아낼 수가 없었다.
“던전 마스터는?”
[던전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서 강력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나보다도?”
[……네 반의반…… 아니, 그보다 약한가…….]
의도가 뻔한 질문. 굳이 대답해서 멜키스를 으스대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야노스는 공방에서의 희생자들로 멜키스의 분위기가 차가워진 것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정신 나간 계약자는 광인인 것과는 별개로 사람은 착했다.
[흥! 이 이프리트와 계약한 정령사가 흑마법사 따위보다 약할 리가 없잖은가!]
화륵! 소환하지도 않은 불꽃이 멜키스의 주변을 맴돌았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멜키스는, 이프리트의 불꽃이 나타나자 즉시 양손을 모아 문지르며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 그렇고 말고요. 이프리트 님! 당신과 계약을 맺은 제가 8서클도 못 찍은 흑마법사보다 약할 리가 없죠!”
[계약자여! 이곳의 단죄에는 나의 불꽃을 쓰도록 하여라! 나 이프리트는 마왕을 숭배하는 사악한 흑마법사들을 결코 용서치 않는다!]
“네, 알겠습니다!”
[이 평화의 시대에도 흑마법사들의 악행은 끊이질 않는구나! 놈들은 존재부터가 잘못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고,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며 괴물로 만드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아이구, 그렇고 말고요, 이프리트 님! 흑마법사들은 모두가 호로새끼들입니다! 도리를 저버린 개새끼들이에요! 그 새끼들을 모조리 불사를 힘을 제게 주소서!”
멜키스는 이프리트의 불같은 성미를 잘 알았다. 또한 이프리트가 얼마나 흑마법사를 혐오하는지 대해서도 잘 알았다. 그토록 간청해도 계약을 맺어주지 않더니, 에드몬드를 죽이는 조건으로는 곧장 계약을 맺어주었을 정도다.
“……모든 흑마법사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닙눼다~ 눼~ 그러쿤요~ 자기는 차칸 흑마법사다~ 눼~”
멜키스는 혀를 꼬면서 이죽댔다. 저런 말을 듣는다면 누구건 주먹을 불끈 쥐겠지만, 놀랍게도 발자크는 오히려 안쓰럽단 눈으로 멜키스는 쳐다보았다.
“대체 왜 그러고 다니시는 겁니까…….”
“왜 그러냐니, 당신이 수상하니까 그렇지. 그래서 왜 사막에 있었냐니까?”
“마법사다운 수행을 했을 뿐입니다.”
“그걸 왜 여기서 했냐고!”
멜키스는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며 물었다. ㅡ화르륵! 그녀의 주먹이 시뻘건 불꽃에 휘감겼다.
“제대로 대답 안 하면, 파이어 펀치!”
홱 뻗은 주먹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주먹과 함께 뻗어 나간 불꽃은 끔찍한 위력을 선보였다. 전면의 흑마법사들이 펼친 방어마법, 그 외의 다양한 공격 마법들이 이프리트의 불꽃에 일소되었다.
“원, 투!”
연달아 뻗은 주먹의 콤비네이션. 콰르르릉! 왼쪽 주먹이 쏴 갈긴 불꽃이 흑마법사들을 덮쳤다. 그들은 눈앞을 꽉 채운 불꽃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저항했지만, 이프리트의 불꽃은 그들을 통째로 집어삼키고서 재로 만들었다.
“이 파이어 펀치의 뜨거운 맛을 보고 싶어?”
“……협박…… 인 겁니까?”
“흑탑주. 당신 하기에 따라서, 나는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어. 즉 나는 천사이자 악마인 거야.”
“아, 예…….”
발자크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저 앞의 통로에는 수십 명의 흑마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멜키스가 내지른 불꽃 주먹은 모든 것을 시커먼 재로 만들어 버렸다. 파이어 펀치라는 직관적인 이름과 엉성한 자세를 떠나, 위력 하나만큼은 가공한 것이다.
‘……현명한 세냐 님을 제외한 마법사 중에서는 최강…….’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명의 정령왕과 동시 계약한 대정령사이자 대마법사. 멜키스 엘하이어는 지금 시대 최강을 논할 수 있는 마법사다.
“제가 이 사막에서 무엇을 했느냐, 에 대해서는 비밀이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백탑주님. 당신도 마법사라면, 그 건에 대해서는 이 이상 캐묻지 말아주십시오.”
“좋아. 연구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왜 하필 여기냐니까? 당신 연구실은 흑색마탑에 있잖아.”
“저는 여기저기서 많은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발자크가 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
감시, 라. 멜키스는 수상쩍다는 눈초리를 흘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지금만 해도 발자크는 흑마법사와 이어진 마족들의 눈을 의식하여, 강력한 은신 마법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특히 아멜리아 머윈. 그녀는 노골적으로 저를 감시하고 노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써준 편지 덕에, 유진이 아멜리아 머윈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던데? 그 정도면 친한 사이인 것 아냐?”
“아닙니다. 아멜리아 머윈이 흑색마탑과 아크리온에 있는 고서들에 관심을 갖기에, 사본을 만들어준 적이 있습니다.”
발자크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고, 멜키스의 두 눈은 휘둥그레 떠졌다.
“그 대가로, 아멜리아 머윈은 제 부탁을 2번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유진 님에게 주었던 것은 그중 하나…….”
“마탑! 그리고 아크리온의 장서를 유출했다고?!”
“비밀입니다.”
“교수형!”
“백탑주, 당신이 이런 쪽에서 깐깐한 사람일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지킬 건 지켜!”
“제가 잘못된 짓을 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유진 님께 제 부탁을 양도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유진 님은 절대로 머윈의 손에서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 음…… 그래.”
멜키스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로이 유폐의 지팡이가 된 아멜리아 머윈은 저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상대입니다. 그녀는 제가 에드몬드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저를 사로잡아 여러 가지를 묻고 싶어 하겠죠. 그녀뿐만이 아닙니다. 흑색마탑의 흑마법사 전원이 다른 마족들의 눈입니다.”
“그렇겠지, 흑마법사는 마족과 계약하니까.”
“예. 저는 굉장히 곤란한 입장이 되어버린 겁니다.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을 맺었으면서, 용사와 사이가 우호적이고…….”
“유진은 너랑 우호적이라 생각 안 할걸.”
“……용사와 적대적이지는 않죠. 여태까지는 감시 속에서 잘 지내왔지만, 정세가 달라지면서 감시는 훨씬 더 노골적이 될 것이고, 직접적인 간섭이 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현명한 세냐 님이 아롯에 돌아오셨죠. 사실 그것만으로도 제가 아롯을 떠나기에는 타당한 이유 아닙니까? 세냐 님은 흑마법사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나도 안 좋아해.”
“예…… 그래서 저는 이곳 나하마 사막에 정착한 겁니다.”
“아멜리아 머윈을 경계하면서도 사막에 정착한 것이 수상해.”
“램프의 아래가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게다가 그 아멜리아 머윈이 사막을 떠났잖습니까.”
발자크는 말을 멈추고서 멜키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하르페우론의 마력이 증폭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던전 마스터가 적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계약을 새로 한 모양입니다.”
“그래?”
“예. 본인의 영혼은 이미 바치기로 했을 테고, 그 외에 조건을 추가한 것이겠죠. 이 정도면 위협은 되었다고 보는데, 그냥 물러서는 것이…….”
“안 돼. 나는 그 하르페우론이란 놈한테 볼일이 있어.”
멜키스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백탑주. 당신은 하르페우론이 누구인지도 몰랐잖…….”
“아닌데? 알았는데?”
“…….”
뿌득.
발자크의 턱 근육이 씰룩거렸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안경을 올리고서 뒤로 물러섰다.
사실을 말하자면, 멜키스는 당연히 하르페우론이 누군지 모른다. 서열 57위라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위치의 마족 이름을 어떻게 알겠나. 그렇지만 하르페우론에게 볼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빨리 끝내고 싶단 말이야.’
유진의 목적은 알고 있다. 던전을 파괴하여 아멜리아의 전력을 줄이는 것. 그를 통해 나하마를 자극하고, 헬무드의 마족을 끌어내는 것이 유진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 넓은 사막에서 모든 던전을 파괴하는 것은 너무 번거롭다. 나하마를 자극해 봤자 술탄은 너무 과격한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족을 확실히 끌어낼 수밖에.
헬무드의 마족이 나하마로 넘어온다면, 술탄도 더 이상 애매한 입장을 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이 그렇게 진전되면 멜키스도 더 이상 사막에서 고생하지 않고 아롯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제게 많은 것을 캐물으셨으니, 저도 몇 개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하르페우론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놈의 마력이 증폭됐다며. 이 위험하고 긴장되는 순간에 뭘 물어?”
“아무 긴장도 안 하고 계시잖습니까.”
“그야 나보다 약하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긴장할 거야. 그러니까 묻지 마.”
“…….”
“농담이야, 물어봐, 흑탑주, 당신도 그런 표정을 할 수 있구나? 처음 알았어. 어우, 눈을 그렇게 뜨니까 되게 살벌하네. 아, 그래도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은 질문은 좀…….”
“유진 님은.”
뿌득.
발자크는 한 번 더 턱근육을 씰룩대고서 말했다.
“……잘 지내십니까?”
“그럴걸? 나도 걔가 뭐 하고 지내는지는 잘 몰라.”
거짓말이다. 멜키스는 유진이 지금 레헤인야르에서 수행 중인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발자크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멜키스는 발자크를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세냐 님은 아롯에 계신다던데. 유진 님에 대한 소문은 없더군요.”
“걔야 뭐, 자기네 저택에서 뭐라도 하고 있겠지.”
“솔직히 알려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모른다니까? 근데 당신, 굉장히 수상해. 만약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쳐, 그걸 당신이 알아서 뭘 어쩌게? 응? 마왕한테 일러서 유진 걔 죽이려는 거지!”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런 오해를 하실 거면 더는 묻지 않겠…….”
고오오오오오!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시커먼 바람이 치솟고, 계단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꿀렁거렸다. 발자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서 뒤로 훌쩍 물렀다.
“흐흐…… 크흐흐……!”
음산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던전의 마스터이자 루오스 학파의 수장.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흑마법사는 몸을 허공에 띄우고서 계단을 올라왔다.
“소문은 들은 적 있다……. 아롯의 백색 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최근 이유 없이 던전을 습격하는 미친 짓을 벌이고 있다지.”
“날 아는구나!”
“알다마다. 아롯을 닮아 오만한 마법사여! 네 힘은 자부할 만하나, 너란 인간의 역사는 오늘 이곳에서 끝을 맞이하리라. 멜키스 엘하이어! 너는 쳐들어올 던전을 잘못 골랐다.”
쿠르르르! 흑마법사가 양팔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시커먼 마력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거대한 원을 만들었다. 흑마법사는 제자들을 모두 바쳐서 얻은 마력이 주는 전능감을 만끽하며 외쳤다.
“언젠가, 아롯의 마탑주와 꼭 한번 겨뤄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설마 오늘 그 꿈을 이루게 될 줄이야. 걱정하지 마라! 죽이진 않을 테니까. 죽음보다 끔찍한 형벌을 내게 내리마. 너는 오늘부로…….”
“말이 많다!”
멜키스가 주먹을 내질렀다. 이프리트의 화력에 레빈의 번개가 뒤섞였다.
“파이어 펀치!”
꽈아아앙! 전능해야 할 마력에 뻥 구멍이 뚫렸다. 흑마법사는 힘의 여파에 쿨럭 피를 토했다.
“이, 이게 무슨……!”
“나는 멜키스 엘하이어다!”
계단은 더 이상 출렁거리지 않았다. 일부 강림한 야노스가 대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야노스는 멜키스가 바라는 대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멜키스는 발판을 밟고서 흑마법사의 머리 위까지 도약했다.
자세에 한껏 신경 쓴 날아차기.
ㅡ파지지직! 멜키스의 몸이 번개에 휘감겼다. 발끝에 어린 불꽃이 새빨간 선을 그었다.
“썬더볼트! 킥!”
꽈지지직! 멜키스의 발차기가 흑마법사의 몸을 터트렸다. 그는 살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고 불타 버렸다. 멀찍이 떨어진 멜키스는 몸에 묻은 재를 털어내면서 홱 몸을 돌렸다.
“나를 죽이러 와라아아각!”
멋들어지게 대사를 뱉으려 했는데, 멜키스는 놀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뒤로 뛰어올랐다. 불타고 남은 재가 흩날려 사라지지 않고, 한곳에 모여 회오리치더니 웬 괴물의 얼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진정해라, 계약자여. 저것은 마족의 사념이다.]
[심호흡해라, 멜키스.]
[감히! 이 이프리트의 앞에서 마족이 고개를 드는가!]
세 명의 정령왕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고, 그것은 멜키스의 주변에 확실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대지가 뒤흔들리고, 번개가 파직거리고, 불꽃이 일렁거린다. 그 중심에 선 멜키스의 모습은ㅡ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가공하고 경이로운 대정령사 그 자체였다.
“……허어…….”
서열 57위, 하르페우론. 작년 서열 100위까지의 마족이 절반으로 줄어든 이후로 갱신된 서열이기는 하나, 그럴지라도 57위는 헬무드에서도 고위 마족으로 인정받는 서열이다. 비록 사념만으로 강림한 것이라지만, 하르페우론은 저 대정령사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꼈다.
“놀랍군……. 복수의 정령왕과 계약한 대정령사……. 일부의 힘만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령왕의 모든 힘을 끌어내는가…….”
하르페우론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쳐오는 던전 하나가 몰살당한 것이다. 주인 된 자로서 당연한 분노를 느끼지만, 멜키스의 ‘힘’은 순수하게 인정할 만했다.
“나는 서열 57위의 하르페우론 백작이라고 한다. 멜키스 엘하이어…… 그대는 내 소유물을 파괴…….”
“병신!”
멜키스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양손에서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인간에게 털린 병신 새끼!”
“…….”
“서열 57위가 자랑이라고 떠드냐, 이 허접 조무래기야! 버러지 새끼! 지 머리 위에 56명 있는게 뭐가 자랑이라고!”
하르페우론의 얼굴을 띄우고 있던 재가 푸들거리며 떨렸다.
“너 존나 못생겼어! 사막 전갈이 너보단 멀쩡하게 생겼겠다, 이 버러지 새끼! 내 앞에서 그 못생긴 얼굴 집어치워! 보기만 해도 역겨워!”
“……멜키스 엘하이어…….”
분노를 감당하지 못한 재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널 죽이겠다…….”
“해봐 병신아!”
“널…… 죽이러 가겠다.”
“끼아악!”
하르페우론이 남긴 말에 멜키스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환생 421화
“…….”
멜키스에 관해서, 어지간한 일로는 더 이상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좀처럼 표정의 관리가 되지 않았다.
“허어…….”
잠깐의 침묵. 유진은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자 집중해서 뒤틀린 팔다리의 방향을 제대로 맞추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시선을 들어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괜찮아, 아파서 낸 소리 아니야.”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 몰골이다.
양팔은 깔끔하게 부러졌고, 오른 다리는 발목이, 왼쪽 다리는 무릎이 돌아갔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만큼 아파 보여서, 실제로 라이미르아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제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유진은 표정과 감정을 가다듬었다. 우둑, 우두둑. 그러는 사이에 크리스티나는, 과감하게 유진의 다리를 돌려 버렸다. 그러자 반 바퀴 회전해 있던 무릎관절이 으스러지면서도 제 위치를 찾았다.
“히이이익…….”
라이미르아는 자기 무릎을 감싸 안고서 신음을 흘렸다. 곁에서 실눈을 뜨고서 보고 있던 메르는, 돌연 장난기가 발동하여 라이미르아의 무릎을 잡고 흔들었다.
“뚜둑! 뚜두둑!”
“꺄악! 꺄아악!”
메르가 입으로 뼈 소리를 내고, 라이미르아는 호들갑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 난잡한 상황에서도 크리스티나는 심혈을 기울여 유진의 뼈를 맞췄다.
단순히 기적으로 치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서진 뼛조각과 찢어진 근섬유 하나하나를 의식했다. 이런 식으로 섬세한 조절을 반복하는 것이 향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 말 듣고 있어? 응? 그 새끼…… 이름이 뭐더라…… 그래! 하르페우론! 서열 57위! 그 새끼가 날 죽이러 오겠대!]
“…….”
[이 정도면 된 것 아냐? 응? 마족이 나를 직접! 죽이러 오겠다잖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혼자 올 것 같지는 않아. 내가 여태까지 죽은 흑마법사들, 놈들이랑 계약한 마족들!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조금 그렇지만, 아마 걔들도 나를 엄! 청 죽이고 싶어 할걸? 그러니까 다 같이 오지 않을까?]
“멜키스 님.”
유진은 제대로 고쳐진 다리의 감각을 확인하기 위해 발가락을 굽혔다 폈다.
“대단…… 대단하십니다.”
일단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던전을 무너트리는 것? 흑마법사를 생매장하는 것? 솔직히 그것에 대해서는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광인인 것을 떠나, 멜키스 엘하이어의 실력이 말도 안 될 정도라는 것은 유진도 알기 때문이다. 솔직히 멜키스가 정령왕 3명을 모두 강림시켜서 싸움을 건다면, 유진도 월광검은 뽑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 멜키스가, 아멜리아 머윈도 없는 사막에서 위기에 처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열 57위의 마족과 계약한 흑마법사를 정면에서 발라 버린 것도, 멜키스의 실력을 생각하면 결코 대단하다 말할 일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당연하지.’
그렇지만, 사념으로나마 강림한 마족을 앞에 두고서…… 허접 조무래기니, 버러지 새끼니 하는 도발을 건 것은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시대에서 저런 식으로 노골적이고 저렴한 도발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멜키스뿐일 것이다.
[그치? 나 대단하지?]
“예. 템페스트도 감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 유진아, 나 이제 아롯에 돌아가도 돼? 응?]
“안 됩니다.”
[왜애애애?!]
“하르페우론이 멜키스 님을 죽이러 오겠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멜키스 님이 아롯에 계시면 어떡합니까?”
[안 될 건 또 뭐야!]
“지금 아롯에는 세냐 님이 계시잖아요. 하르페우론이 아무리 빡이 돌아도, 아롯에는 절대 못 쳐들어갈 겁니다.”
옛날의 기억을 한참 뒤져본 결과, 하르페우론의 이름은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에도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진 마족이었는데, 설마 지금 시대까지 살아 있었을 줄이야.
걱정은 들지 않았다. 서열 57위? 객관적으로는 높은 서열이겠지만, 멜키스의 말마따나 자기 머리 위에 56명이나 있는 것이 자랑인가?
또한 유진이 생각하기에, 지금 시대의 고위 마족들의 태반은 300년 전에 ‘몰살의 하멜’을 만나지 않은 덕에 살아남은 놈들이다.
때로는 적이 아군보다 확실하고 정확한 평가를 하는 법. 유진은 ‘우둔한 하멜’이라는 병신 같은 이름보다, ‘몰살의 하멜’이라는 소름 끼칠 만큼 멋진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넌 이 누나 걱정도 안 돼? 그 흉악하게 생긴 마족들이 누나를 죽이러 오겠다는데!]
“아마 걔들이 작정하고 덤벼도 멜키스 님을 죽이기 힘들걸요. 그야, 멜키스 님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래의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대정령사시잖아요.”
지금은 멜키스를 한껏 추켜세워 줘야 할 때다. 게다가 딱히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유진아, 누나는 조금 걱정이 돼.]
“무슨 걱정이요.”
[말했잖아, 흑탑주 이 자식이 아주 음흉하다니까. 내가 볼일 다 봤으면 물러가라니까 냉큼 가버리는데, 아주 음흉해.]
“가라 해서 간 건데 뭐가 음흉합니까?”
[걔가 그냥 갔을 거란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분명 어디선가 날 훔쳐보고 있을 거야.]
“흑탑주한테 너무 하시네…….”
하지만 유진도 발자크가 수상하다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가 아롯을 떠난 이유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다만…… 대체 사막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내버려 둬야 하나? 아니면…… 일단 찍어놔야 하나.’
발자크에게는 제법 많은 도움을 받았다. 수상하기는 해도 여태까지 겪었던 것을 토대로 생각한다면, 발자크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유폐의 마왕과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 발자크가 유진의 기준에서 죽여야 할 흑마법사가 아닐지라도, 유폐의 마왕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발자크와 싸워야 한다는 것.
그때를 생각한다면, 몰두하는 연구를 망치는 편이 발자크의 전력을 깎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깔끔하게 돌려보내신 것은 아니겠죠?”
[흐흥, 이 멜키스 누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정령을 시켜서 발자크의 뒤를 추격하게 했지.]
“그렇다면 흑탑주를 감시해 주세요. 던전 공격은 조금만 하시고.”
[조금만?]
“빈도를 확 낮추자는 겁니다. 보름에 하나? 뭐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던전 공격 안 하는 동안 나는 뭐 하라는 거야! 사막에서 태닝이라도 하라는 거얏?!]
“그 나라도 뭐 사막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도 몇 년 전에 잠깐 가봤는데, 도시들이 그럭저럭 화려하고 괜찮던데?”
[저기, 유진아, 아까 내 말 제대로 안 들었니? 술탄이 나를 벼르고 있대! 이미 몇 번이나 어쌔신을 보냈대!]
“대정령사인 멜키스 님이 고작 어쌔신을 무서워하는 겁니까. 제 나이가 19살일 때 거기 어쌔신들을 털어먹었는데. 그리고 멜키스 님의 마법실력이라면 모습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 것은 쉽잖아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팔다리가 말끔히 고쳐졌다. 유진은 열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이는 와중에도 멜키스를 몰아붙였다.
“부탁드립니다, 멜키스 님, 제 주변에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것은 멜키스 님뿐이에요. 설마 이제 와서 하기 싫다고 약속을 어기시려는 겁니까?”
부탁에 살짝 압박도 섞었다. 그러자 멜키스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런 약속을 했담.]
“손해만 보신 것은 아니잖습니까.”
[알았어, 알았다구.]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멜키스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유진은 살짝 멀어진 바람을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템페스트 너, 멜키스 님이랑 계약 맺기 싫어서 거짓말한 건 진짜 아닌 거냐?”
[하멜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내가 멜키스 엘하이어를 거북해하는 것은 사실이다만, 거짓을 말하며 정령왕의 존엄을 버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대답은 그렇게 하였지만, 템페스트는 요즘 들어 많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멜키스 엘하이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ㅡ 그녀에게는 악마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재능이 있었다.
불과 몇 달이 흘렀을 뿐인데, 멜키스가 가진 정령사의 그릇은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다. 척박하지만 자연 본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사막이, 멜키스의 그릇을 넓히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잘 움직이네.”
유진은 울적해 하는 템페스트를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제자리에서 몇 번 뛰어보고, 팔을 뻗어도 보았다. 신경도 깔끔하게 연결되어 움직임에 거북함은 없었다. 유진은 씩 웃으며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아니스와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유진 님.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손바닥의 성흔을 어루만지며 겸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 동굴에서 지낸 몇 달 동안, 그녀의 치료마법은 어마어마한 진전을 거두었다. 유진과 모론이 매일 하루를 거르지 않고 치고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일 싸우다 보면 서로가 익숙해져서 부상의 빈도가 줄 법도 한데, 오히려 유진과 모론은 날이 지날수록 부상이 심해졌다. 서로가 점점 힘 대중을 하지 않게 되면서이기도 했고, 날이 거듭될수록 서로의 공격이 훨씬 더 예리하고 치명적으로 갈고 닦이는 탓이기도 했다.
“하멜, 또 나가려는 겁니까?”
아니스는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흘겨보았다. 자연스럽게 동굴 밖으로 나가려던 유진은, 아니스의 목소리에 흠칫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음…… 조금만 더하면 가닥이 잡힐 것 같아서…….”
“당신이 강해지기 위해 수련을 하는 것이니, 제가 말려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멜, 오늘 한 번 죽을 뻔하였으면 조금 더 쉬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아니스의 얼굴은 굉장히 언짢아 보였지만, 스스로 말한 것처럼 유진의 수련을 말리면서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죽을 뻔한 것도 사실이니, 기왕이면 안정을 취하기를 바랐다.
“괜찮아.”
유진은 고개를 흔들어 대답했다.
“이렇게까지나 사선을 드나드는 것도 오랜만이야. 그렇기에 더더욱, 이 감각이 필요해.”
죽을 뻔했다.
사실이다. 모론은 더 이상 맨손으로 싸우지 않는다. 유진이 동굴에 머물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론은 쭉 도끼를 사용해 유진과 대련하고 있다.
말이 대련일 뿐. 모론의 도끼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휙휙 다가온다. 긴장을 놓았다가는 일격에 죽어버릴 수도 있다.
유진이 그 정도의 위력을 바랐고, 모론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유진에게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의미가 없다. 모론의 도끼를 완전히 넘어서지 않고서는 ‘다음’에 도달할 수가 없다.
앞으로 유진이 죽여야 할 적들이 모론보다 약한가? 아니다. 오히려 모론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저, 말도 안 되는 괴력을 가진 모론조차도. 누아르 제벨라나 가비드 린드먼보다 강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유진이 모론보다 약하다면, 결코 앞으로의 적들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래 버리면 차라리 내가 이 산에 틀어박히고, 모론보고 대신 싸우라고 해야 하나…….’
유진도 월광검을 통해서 레헤인야르의 결계는 열 수 있다. 모론처럼 누르의 출현을 곧바로 알아차리거나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산 곳곳에 프로미넌스의 깃털을 뿌려놓으면 그럭저럭 비슷하게 대응할 수 있으리라.
실없는 생각이다. 모론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론의 ‘힘’은 상성이 너무 확실하다.
가비드와는 어떻게 싸움을 벌일 수 있어도, 누아르가 작정하고서 환상의 마안을 써가며 정신 공격을 퍼붓는다면…… 마법도 쓸 수 없고, 성검도 쥘 수 없는 모론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모론은 과거 누르의 독기에 정신이 극한까지 몰린 적이 있기에, 누아르의 정신 공격에 쉽게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결국 유진이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일. 몇 달 동안 모론의 도끼 앞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유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환생하고서 이만큼 사선을 넘나든 적이 있던가?’
강적과의 싸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진이 맞닥트렸던 강적들은ㅡ 냉정하게 말해서 대부분 ‘하멜’보다 약했다.
위험하다 싶어서 이그니션을 처음 쓰게 만들었던 바랑도, 마수라 불리던 야곤조차도 하멜보다 강하지 않았다. 어둠의 정령이 깃들었던 이오드도 마찬가지고, 월광검과의 상성이 최악이었던 에드몬드도 그랬다.
하멜보다, 유진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던 것은 둘뿐이었다.
마룡 라이자키아. 그리고 신생 광란의 마왕, 아이리스. 둘과의 전투는ㅡ 한 번으로 끝났다.
모론과의 전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유진이 죽지 않고 모론이 죽지 않는 한 전투를 반복할 수 있다. 죽음 직전까지 가더라도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사선을 넘나들 때마다 감각이 새겨져. 검을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도끼를 더 잘 받아낼 수 있는지. 어떻게 휘둘러야 파고들 수 있는지.’
전투 감각에 대해서는 새로이 더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터무니없는 오만이었다. 하멜이 과거 수많은 전장을 거치며 활약하고 살아남은 것은 사실이나, 유진이 도달했다 생각한 것은 결코 극한은 아니었다.
이미 아는 감각을 새기는 것.
그렇게 생각하기보다는, 새로이 알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가로트의 신성과 직관을 떠올리며, 그것에 하멜과 유진을 섞는다. 아가로트의 전투 기술에 하멜과 유진을 더한다. 사고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융화하고 합일하여 승화시킨다.
몇 달에 걸쳐 그러한 과정을 반복하고, 이제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강해지고 있어.’
동굴 밖으로 나왔다.
먼저 치료를 받고서 밖에 나와 있던 모론이 유진을 향해 씩 웃었다. 그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왼쪽 어깨를 붕붕 돌렸다.
“아까는 위험했다, 하멜.”
유진은 팔다리가 부러졌지만, 모론은 왼쪽 팔만 부상을 입었다.
경중을 따지자면…… 유진은 자신이 입힌 부상이 훨씬 더 심하다 생각했다. 사지가 부러지기는 했어도 일단은 달려 있는 것이 중요한데, 아까 유진의 검은 모론의 왼팔을 반 정도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근육이 조금만 덜 두꺼웠어도 썩둑 잘랐을 텐데.’
그렇다면 내가 이긴 것 아닌가? 유진은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리고서 성검을 어깨에 걸쳤다.
“곧 있으면 저녁이니까, 이번에는 간단하게 해보자고.”
“좋다.”
모론도 껄껄 웃으며 도끼를 들었다.
유진을 따라 나온 크리스티나는 매번 피범벅이 되고, 서로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주제에, 대련이 끝나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웃어대는 유진과 모론의 감성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크리스티나. 저 역시 놈들의 미친 짓을 이해할 수 없고, 세냐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세냐 님은 잘 지내고 계실지요?’
[그 계집애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냐를 추종하는 마법사는 많아도 너무 많으니, 아롯에서도 추종자들 사이에 앉아서 잘 지내고 있겠죠. 지금 중요한 것은 세냐가 아니라 저희입니다.]
‘시스터, 제 기적과 성흔의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아까만 해도 잘리기 직전까지 갔던 모론 님의 팔을 무사히…….’
[크리스티나!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세냐가 아롯에 간 지 3달이 흘렀는데, 저희는 하멜과 아무 짓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어, 어쩔 수 없는…… 시, 시스터, 꼭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지금 유진 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머리를 떠도는 음습한 욕망을 근절하려 성호를 그었고, 아니스는 답답하여 한숨을 푹 푹 내쉬었다.
* * *
그 순간, 아롯에서는.
“여신이 되고 싶어.”
현명한 세냐.
이 시대 모든 마법사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존재.
상석에 홀로 앉은 그녀는, 손으로 턱을 괴고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환생 422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모두가 두 귀를 의심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왕립도서관 아크리온의 최상층, ‘세냐의 전당’. 지금 이곳에는 전당의 주인인 현명한 세냐를 필두로 하여, 대마법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궁정 마법사단장, 트렘펠 위자도르.
적색 마탑주, 로베리안 서피스.
청색 마탑주, 히리두스 우즐렌.
그 둘뿐만 아니라 전 녹색 마탑주인 제네릭 오스먼도 있다.
놀라운 사실은ㅡ 이곳에 있는 것이 아롯의 대마법사뿐만이 아니란 것이다.
본래 대륙에서 8서클에 도달한 대마법사는 마도왕국 아롯만 보유하고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국가에도 8서클에 도달한 마법사는 생겨났다.
시무인의 궁정 마법사, 마이스 브리오르.
키옐의 궁정 마법사, 헤링턴 카리지.
거기에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않고 진즉부터 은둔한 대마법사. 라이나인 보어스.
본래 타국의 마법사는 실력과 명성이 어쨌건, 아크리온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몇 년 전에 유진이 아크리온에 들어올 수 있던 것은 그가 사실상 마법에 처음 입문하는 수준이었던 것과 동시에, 그 라이언하트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이스와 헤링턴은 타국의 궁정 마법사. 라이나인은 길드에 이름은 등록되어 있어도, 수십 년 동안 행적이 알려지지 않아 죽은 것으로 치부되었던 마법사다.
그런 셋이 아크리온에 출입하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세냐는 직접 아브람에 난입하고 의회를 뒤집어놓은 뒤에, 다른 층은 출입할 수 없지만, 세냐의 전당만은 출입을 가능케 한다고 협의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아…….”
7명의 대마법사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세냐를 올려다보았다.
그들보다 몇 계단은 높은 상석에 앉아 있던 세냐는, 멍한 표정을 하고서 턱을 괴고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여신이 될 수 있는 걸까?”
지금 저건 농담으로 하는 말인가. 아니면 속에 다른 의미가 감춰져 있는가?
저 뜬금없는 말을 내뱉은 장본인은 바로 현명한 세냐다. 마법에 있어서 진리라 할 수 있는 의미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로베리안을 제외하고서 다른 대마법사들은 아직 세냐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세냐가 말한 ‘여신’이 마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고심했다.
“……세냐 님께서는 지금도 여신처럼 아름답고 현명하며 위대하십니다.”
고심하던 끝에 말을 꺼낸 것은 바로 마이스였다.
거의 모든 마법사가 그러하듯, 마이스는 세냐를 깊이 추종하고 있다. 하물며 그는 저 현명한 세냐에게 시그니처를 직접 보완 받았으며, 광란의 마왕을 토벌하는 전장에서 세냐를 보좌해 마법을 펼치기도 했다. 아직까지 마이스의 심장에는 그때 맹세로 박아넣은 단검이 남아 있었다.
“저…… 저도 동감합니다. 이 세상에 마법의 여신이 존재하신다면, 그건 바로 세냐 님이실 겁니다…….”
더듬거리며 맞장구를 친 것은 전 녹탑주인 제네릭이다.
그는 세냐와의 대결에서 무참히 패배한 뒤에 마탑주 자리에서 은퇴했다. 그 대결은 수도 펜타곤의 시민들 앞에서 벌인 것이라, 이 자존심 강한 대마법사는 그때의 개망신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탑주 자리를 내려놓고, 대외적으로도 모습을 감추어 그대로 은거할 생각이었는데…… 아롯에 돌아온 세냐는 저택에 틀어박힌 제네릭마저 끌고 나왔다.
성격도 마음에 안 들고 시그니처의 수준도 하찮지만, 일단 제네릭은 대마법사다. 세냐는 9서클을 초월하는 것에든 다른 대마법사의 관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여신인 것은 아니잖아.”
세냐는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마이스와 제네릭의 찬사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현명하며 위대한 마법의 여신. 그 평가 자체는 당연하단 듯이 수용한 것이다. 그러한 세냐의 태도에 라이나인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나인 보어스. 그녀는 다른 마법사와 교류하지 않고, 진즉에 은거하여 홀로 마법을 수행해 8서클에 도달했다. 과거 길드에 갱신했을 때가 6서클이었으니, 은둔한 30년 동안 홀로 독학하여 8서클의 대마법사가 된 것이다.
세속적인 욕심은 없다. 명예도 명성도 바라지 않는다. 홀로 명상하고 수행하여 대마법사가 되었고, 언젠가 마법의 끝을 보고 싶다는 것이 라이나인의 유일한 욕심이었다.
그러던 중에ㅡ 아롯에 현명한 세냐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저 전설적인 대마법사는 대륙 전역의 대마법사에게 선언했다.
-마법의 ‘다음’을 만들고 싶다면 아롯에 와라.
이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말인가. 마법의 ‘끝’이 아니다. 마법의 ‘다음’인 것이다. 또한, ‘만들고 싶다면’이라는 말이 라이나인으로 하여금 은거지를 박차고 나오게 만들었다.
서클 마법식을 창안하고, 마법사에서 가장 대단한다는 위치 크래프트를 만든 현명한 세냐와ㅡ 마법의 ‘다음’을 함께 만들 수 있다니!
“그리 말씀하시는 것은…… 세냐 님께서 생각하시는 마법의 ‘다음’은, 여신이 되는 것입니까?”
라이나인은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그녀의 말에 대마법사들의 사고가 전환되었다.
짧은 침묵. 톡, 톡, 팔걸이를 두드리던 세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확립한 서클 마법식을 기준으로 한다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8서클까지야.”
300년 전, 세냐가 처음 서클 마법식을 창안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마나와 마법을 9개의 서클로 나누었다. 그것이 서클 마법식의 시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든 마법이 서클로 구분되고 있다.
하지만 세냐 이후로 9서클에 도달한 마법사는 없다. 지금 이곳에 모인 대마법사들은 이 시대 최고를 논할 수 있는 대마법사들이지만, 그들 중에서도 9서클에 도달한 마법사는 없다.
“내가 9서클인 것은, 서클 마법식 자체가 날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야. 즉, 사실상 당신들이 서클 마법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끝’은 8서클이 끝이란 말이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트렘펠이 대답했다. 그는 이곳 대마법사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8서클에 도달한 최고참이다. 트렘펠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애당초 이 세상에는 ‘9서클 마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요. 8서클 마법은 드물게도 존재하지만, 사실 그 대부분도 세냐 님 이후에 8서클에 오른 선인들이 만든 것.”
“애송이인 제가 말하기도 민망한 일이지만, 대마법사에 도달하고서 다른 마법사의 마법을 배우고 따라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장 젊은 키옐의 궁정마법사, 헤링턴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마법사라면 존재하지 않는 마법도 필요에 따라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니.”
청탑주 히리두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8서클부터는 기존의 마법보다는 제 자신의 마법에 더욱이 몰두하고 추구해야 하며, 그것을 극한으로 발휘한 것이 바로 시그니처다.
“세냐 님께서는 저희가 추구하던 9서클이 허상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민하던 로베리안이 질문했다.
“그건 아니야.”
세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마법에는 무궁한 가능성이 있어. 내가 마법을 추구하는 것처럼, 마법 또한 나를 추구하며 비추지. 마법이 무궁하듯 마법사의 사고도 무궁해. 열망하는 의지를 마나에 빌어 구현하는 것. 그게 마법이지.”
세냐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그었다. 촤라라락! 그러자 허공에서 순식간에 9개의 원이 만들어졌다.
“9서클은 허상이 아니야. 하지만, 대마법사라면 스스로 생각해 봐. 당신들이 추구하는 9서클은, 지금의 경지에서 서클 하나 늘리는 것으로 끝인가? 그렇게 도달한 9서클에 어떠한 신비와 경이가 있지?”
“추구하는 마법의 완성.”
멍하니 듣고 있던 마이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세냐는 킥킥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건 오만한 말이야. 마법에 완성이란 없어. 없어야 해. 왜라고 생각해?”
“만족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맞아. 끝이 아닌데 끝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다음을 상상하기 힘들어. 9서클은…… 당신들이 지금 도달한 마법의 ‘다음’인 거야. 단순히 서클 하나를 늘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세냐 님은…….”
로베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나타난 9개의 원을 보았다.
“그래서 긴 고민을 하고 계시는군요.”
세냐는 대답 대신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화아악! 9개의 원이 서로 합쳐지고 하나의 원이 되었다. 그 원의 안에 무수히 작은 원들이 나타나고 맞물리며 회전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내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어.”
마법. 그 이름 안에 무수히 많은 분야가 나뉜다. 과장 섞어 말하자면, 세상에는 마법사 1명마다 1개의 마법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00년 전. 세냐가 추구하던 마법은, 서클 마법식의 완성으로 한 번 끝을 맺었다. 그것으로 세냐는 자신의 마법을 완벽하게 해석했다고 생각했다.
약속을 맺은 베르무트는 더 이상 마왕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부족했다. 베르무트가 없다면 그 공백을 더 강한 마법으로 채워야 한다.
세냐는, 하멜의 복수를 잊은 적이 없었다. 서클 마법식으로 나 자신의 마법을 끝냈다면, 그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추구하고 추구하여 만들어낸 것이 이터널 홀. 서클 마법식의 극한. 무한히 구성되고 합해지는 서클을 통해 무한을 거머쥐는 것.
“이터널 홀이 내가 정한, 나의 마법의 끝이야.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해. 턱도 없이 부족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마법의 ‘다음’…… 그래서 인간을 넘어서시려는 겁니까?”
“여신.”
마이스는 황홀하단 얼굴을 하고서 양손을 모았다.
“이미 여신에 준한 세냐 님이 정말로 여신이 되어버린다면…… 저 마이스 브리오르. 평생을 신을 섬긴 적 없는 몸이나, 세냐 교의 여신님께 몸을 바치겠습니다.”
“나중 이야기는 그만두고, 어떻게 해야 여신이 될 수 있을지 의견부터 내 봐.”
세냐 교를 만들 생각은 있던 걸까……. 라이나인은 잠시 그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전설적인 영웅을 넘어 마법의 여신이 되어버린 세냐 메르데인. 그녀의 신상 앞에는 필시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이 마도왕국 아롯은 세냐를 주신으로 섬기는 종교 국가로 개혁될 것이다.
“으흠…… 인간이 신…… 여신이 된다. 듣도 보도 못한 일입니다만…….”
라이나인은 상석에 앉은 세냐를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보라색 머리카락. 에메랄드처럼 영롱한 녹색 눈동자. 고민에 잠겼음에도 여전히 수려한 외모…… 라이나인은 같은 여인임에도 세냐의 아름다움에 홀릴 것만 같았다.
“시…… 신이 인간의 육신에 구애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마법, 이라는 것부터를 확실히 규정해야 하지 않을지요.”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가, 혼이 감당할 수 없는가인가.”
로베리안이 중얼거렸다.
마법사의 서클은 심장 언저리에 깃든다. 전사가 갖는 코어와 마찬가지로, 서클 역시 실제로 몸 안에 만들어진 장기는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서클의 크기에 따라 가슴이 울룩불룩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서클의 붕괴는 심장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준다. 감당할 수 없는 마법을 쓰는 것은 서클과 마나의 폭주로 이어지고, 그 경우에도 육체는 타격을 입는다.
“육체를 버리고 정신체가 되는 것은?”
“그게 리치랑 다를 게 뭡니까?”
“흑마법으로 언데드가 되는 것도 아니잖소? 마력이 아닌 마나를 동력으로 삼는다면…….”
“잠깐, 잠깐!”
이야기를 듣던 세냐가 정색하고서 말을 끊었다.
“나는 육체를 버릴 생각 없어. 그게 정답인지도 모르겠고. 정신체가 된다는 것은, 결국 그 뭐야, 신성마법으로 강림시키는 천사 비슷한 것이 되는 거잖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하지만 세냐 님. 고위마법에 있어서 육체는 정신보다 불안정하고 불완전합니다. 정신이 또렷이 마법을 조율할지라도, 육체가 균형을 맞추지 못해 반동이 오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나…… 나는 아닌데? 그런 적 없어.”
세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없지는…… 않았다. 인간의 육체란 아무리 단련하고 강화한들 나약한 것. 반면에, 마법으로 다루는 ‘마나’는 어찌 다루느냐에 따라 인간의 육체를 가볍게 넘어선다.
고위마법은 필연적으로 고출력의 마나가 동반되고, 인간의 육체는 그만한 마법을 쓸 때마다 타격을 입는다. 아무리 정교하게 서클을 만들고 술식을 읊어도, 육체가 가진 내구도는 어쩔 수 없다.
특히 지금의 세냐는 육체뿐만 아니라 혼에도 부상을 갖고 있다.
베르무트에게 당했던 상처. 그 때문에 이터널 홀도 오랫동안 지속할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300년을 살긴 했지만, 육체를 버리는 것은 너무 가버린 제안이야. 그리고 지금 내 육체는 말이 육체지, 세포 단위부터 마나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고출력의 마나에 육체가 부담을 느끼는 것은 전사도 마찬가지다. 전사의 경우, 코어를 단련하고 마나와 일체 되는 과정에서 환골탈태라는 것을 겪어 육체가 재구성된다.
마법을 통해 육체를 재구성한 세냐는, 다른 대마법사들과 달리 마나의 출력에 육체가 충격을 받는 경우가 적다.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9서클의 ‘다음’에 도달하기 위해 육체를 버려야 한다면…… 완전한 정신체가 되어야 한다면…….
‘그건 싫은데…….’
실제 육체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은가……. 세냐는 최대한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히.”
세냐를 여신으로 만들기 위한 마법으로 한창 논쟁이 오가던 중. 트렘펠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뿌득 주먹을 쥐었다.
“내버려 둬.”
진즉에 알아차리고 있던 세냐는, 창밖에 시선을 주지 않고서 말했다.
“하지만, 세냐 님.”
“모르는 척해.”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바로 앞에 놓은 마법서를 넘겼다.
아크리온의 최상층 창밖.
멀찍이 날갯짓하는 박쥐 한 마리가 있었다.
빌어먹을 환생 423화
뱀파이어.
밤의 귀족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족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뱀파이어들이 귀족 소리를 듣던 것은 헬무드와 대륙이 전쟁을 벌이기도 전인 옛날이다. 다른 마족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인간, 정확히 말하자면 ‘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뱀파이어들은, 마족만이 득실거리는 헬무드보다는 인간의 도시에 스며들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에는 마족과 흑마법사에 대한 배척도 심했으나, 고위 뱀파이어들은 능숙하게 인간 사회에 섞여서 귀족 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고즈넉한 성.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파티. 술과 분위기에 취한 귀족 남녀들의 선혈은 뱀파이어들의 양식이었다…….
옛날얘기다. 마족과 인간 사이의 평화협정. 그리고 대륙과 헬무드의 문명화는 뱀파이어 같은 마족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밤의 귀족이라 불리던 그들은 이제는 인간 사회에서 호사를 누릴 수도 없게 되었다. 인간의 정기를 탐하는 몽마들은 걸출한 능력의 여왕 덕에 양지에 진출하는 것에 성공했고, 저급 몽마조차도 음지에서나마 그럭저럭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지만ㅡ 뱀파이어들에게는 몽마의 여왕 같은 강력한 우두머리도 없었다.
수백 년 동안 군림하던 전설적인 클랜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클랜 들은 전쟁 시대에서 궤멸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클랜들은 마족이 인간을 자유롭게 습격할 수 없게 된 시대에 어떻게든 적응해야만 했다.
오도스 클랜. 300년 전에는 그럭저럭 잘나갔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대부분의 뱀파이어 클랜이 그러하듯 이름만 남아 있다. 과거 수십 명에 달했던 클랜원도, 지금은 로드를 포함해 10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오도스 클랜은 헬무드에 정착하지 못한 다른 클랜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형편이 나았다. 밤의 귀족이라 불리던 시절만큼의 풍족함은 누리고 있지 못해도, 돈 한 푼 없어 허덕이지 않을 만큼의 지원은 해주는 후원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래도 되는가…….’
로드, 데비안 오도스는 불안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데비안과 그의 클랜은 아롯의 음지에 정착했지만, 오도스 클랜의 후원자는 무려 헬무드의 ‘진짜’ 귀족 뱀파이어다.
자비로운 후원자께서는 동족 뱀파이어들이 처참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도저히 보고 넘기지 못하고, 오도스 클랜뿐 아니라 대륙 곳곳의 여러 영세 클랜에 다양한 후원을 보내고 있다.
그만큼 은혜를 입었다면 마땅히 갚아야 하는바.
오도스 클랜은 아롯에서 정보 장사로 먹고살고 있다. 정식으로 길드에 등록은 되어 있지 않으나, 정보 길드에서도 싼 맛에 부려먹는 정보원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시키는 대로 배덕한 남녀의 뒤를 쫓거나, 민감하고 사적인 정보를 수집하여 길드나 의뢰인에게 팔아 넘겨왔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클랜이 수집한 정보 중 제법 굵직한 것은 헬무드의 후원자에게 전달된다. 그 외에도 후원자가 아롯의 정세에 관한 정보를 바란다면, 클랜은 발 벗고 나서서 후원자를 위한 정보를 수집하곤 한다.
하지만…… 이번 ‘부탁’만큼은 너무 위험해서 거절하고 싶었다. 지금도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다. 여태까지 열심히 해준 것에 대한 보상이라며 피 한 병을 먼저 받았을 때. 그때 조심했어야 하는데…….
‘이미 마셔 버린 것을 토할 수도 없고…….’
뱀파이어에게 피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그중에서도 동족 뱀파이어의 피, 특히 상위종의 피는 격을 올리는 것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양식이다.
실제로 후원자의 피는 데비안의 격을 몇 단계나 올려놓아서, 이 정도면 중급 뱀파이어 수준은 우습게 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피의 대가로 요구받은 것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현명한 세냐를 감시하라니! 밀착감시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의 행적은 감시하라니!
거절은 불가능하다. 좋다고 피를 마셔 버린 이상, 요구는 더 이상 부탁이 아닌 명령이 되었다. 이미 몸에 섞인 후원자의 피는, 후원자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반발하여 데비안의 몸을 찢어발길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데비안과 그의 클랜 소속 뱀파이어들은, 오늘부터 현명한 세냐의 감시를 시작했다. 지금만 해도 데비안은 몇 마리의 박쥐를 동원하여 세냐를 감시하고 있었다. 세냐가 머무르는 교외의 저택뿐만 아니라, 대마법사들과 회동을 갖는 아크리온 최상층까지 말이다.
누군가를 감시하는 것에는 자신 있다. 수십 년을 이 짓거리로 밥벌이를 하며 클랜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대마법사를 감시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상대는 누구나 인정하는 대륙 최고의 마법사. 심지어 지금 그녀의 주변에는 7명의 대마법사가 있다. 아무리 데비안이 이 짓거리에 익숙하고, 중급 뱀파이어 이상의 격을 획득했을지라도, 대마법사들의 눈을 속이는 것이 가능할까?
솔직히 데미안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아롯에서 정착하여 오랫동안 살아왔다. 마탑주, 대마법사들이 얼마나 강력하고 섬뜩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알아도 어쩔 수 없다. 데비안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대마법사들에게 들켜서 죽든가, 아니면 명령 불복종으로 후원자에게 몸이 터져 죽든가 둘 중 하나다.
데비안은 여태까지 클랜을 후원해 준 후원자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비참하고 허무하게 죽을지라도, 약소하나마 클랜 하나를 이끄는 로드의 품격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데비안은 아직 살아 있었다. 감시는 무조건 눈치챘을 텐데…… 현명한 세냐도, 그리고 다른 대마법사들도, 데비안을 추살하지 않았다.
데비안은 그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 * *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소.”
아베르 남작.
그는 작위 외에도 몇 개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오도스 클랜을 포함한 약소 클랜들의 후원자. 헬무드 뱀파이어 클랜들의 조합장.
뱀파이어 클랜 조합의 전신은, 라비스타에 은둔한 라사트 클랜의 하위 클랜이다.
“뱀파이어의 능력이 비밀공작이 특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마법사의 이목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오. 나조차도 불가능한 것을, 중급 정도의 뱀파이어가 가능할 리가 없지.”
당연히 들킬 것이라 생각하고 시킨 일이다. 현명한 세냐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과감하게 버림패로 쓴 것인데…… 아롯의 뱀파이어들은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현명한 세냐를 감시하고 있다.
“알면서 내버려 둔다.”
남작성 응접실. 이 널따란 공간에는 수십 명의 마족들이 모여 있다. 그들 모두가, 아멜리아 머윈과 협약을 맺은 마족들이다.
“재앙의 세냐의 노림수를 알 수가 없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마족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방에 모인 마족들 중 절반은 전쟁시대를 겪어 보았고, 재앙의 세냐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괴물 같은 인간, 아니,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은 300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늙어 죽지 않았다…….
“뒤를 캐는 낌새도 없다는데.”
“감시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다른 마족이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오만한 괴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지금의 시대에서, 마족의 감시를 받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할 겁니다.”
“하긴. 자비로운 유폐의 마왕님께서 선언하신 평화는 이미 끝이 선고되었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평화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재앙의 세냐는 그렇지 않을 거야.”
마족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리 간섭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군.”
“재앙의 세냐가 정말로 9서클 다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그 서클부터가 재앙의 세냐가 창안한 것이지.”
“이미 극한에 도달한 인간이 다음 단계에 오르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는 않을 거요.”
“물론 그렇겠지. 이미 인간을 한참이나 넘어선 그녀가…… 지금의 자신마저 넘어선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만약 가능하고, 바라는 지점에 도달한다면…… 그녀를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잠깐 동안 불편한 침묵이 생겨났고, 다른 마족이 입을 열었다.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전쟁 시대를 짙게 겪은 늙은 마족. 그는 목을 가로지른 흉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기묘하게도 인간들은 그를 우둔하다 평하나, 내가 기억하는 그는 악귀이자 수라였소.”
수라광살. 그 섬뜩한 칼부림은 아직도 생생하다. 비참하게 살아남은 마족의 목은 난무하던 참격에 절반가량 베였었다.
“누구보다 지독하며 끈질겼던 몰살의 하멜조차도, 결국은 인간의 벽을 넘지 못하여 허물어졌지. 그렇기에 나는 재앙의 세냐가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오.”
“높다란 벽을 오르다 떨어지면 멀쩡하지는 않겠지.”
재앙의 세냐가 제 그릇을 초월하려다 실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그래도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런 바람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여기 모인 수십 명의 마족들 중에서 그 누구도 재앙의 세냐와 싸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인가…….’
젊은 마족들은 비슷한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 늙은 마족들은 나름대로 역사를 써내린 마족들이다. 비록 저들 중 누구도 용사와 동료들을 막아내지 못했고, 상당수는 지금 시대에 이르러 판데모니엄에서 자리를 보전하지 못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또 아니잖은가. 실제로 지금 이 응접실에는, 서열 50위 내에 드는 최고위의 마족들도 3명이나 있다.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저 서열의 마족들은 300년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심지어 저들은 작년 바벨에서의 대숙청에서 살아남아, 유폐의 마왕에게 직접 마력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재앙의 세냐를 말하는 저 최고위 마족들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까득.
짐승이 이빨을 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이딴 이야기나 하자고 모인 것은 아니지 않나?”
금속 마스크 안에서 짜증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도적으로 그녀를 무시하고 있던 마족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본래 아베르 남작이 앉아야 할 의자. 정작 아베르 남작은 창가에 서 있고, 저 자리에는 웬 인간 여자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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