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인간인가? 솔직히 인간다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본래부터 여러 가지가 뒤섞였던 그녀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부나마 존재하던 인간다움마저 사라져 버렸다.
헤모리아.
라비스타를 떠나기 전. 알피에로는 그녀에게 많은 피를 주었다. 알피에로뿐만이 아니다. 라비스타에 은둔하는 라사트 클랜의 모든 뱀파이어가 헤모리아에게 피를 먹였다.
“그렇지.”
마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쟁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울림인가.
마족들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어갔다. 재앙의 세냐에 대한 경계, 두려움, 그 감정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ㅡ 그녀에 대한 감정 이상으로, 전쟁이란 단어에 어린 감정은 짙고도 무겁다.
재앙의 세냐는 일부러 감시를 내버려 두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멜키스 엘하이어의 배후에 재앙의 세냐가 있는 것은 분명한 일. 그녀가 당장 아롯에 있다고 해도, 마족들이 나하마의 문제에 개입한다면…… 재앙의 세냐도 움직임을 보일 것이 틀림없었다.
“마왕이라.”
최고위 서열의 마족들은 전쟁뿐만 아니라 ‘마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 아이리스 따위도 마왕이 되지 않았나. 그녀가 어떻게 마왕이 될 수 있었는지까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대 유폐의 지팡이였던 에드몬드 코드렛이 추구한 비원. 목숨과 맞바꿔가며 완성한 술식.
무턱대고 믿은 것은 아니다. 이곳의 마족들 중에서도 흑마법에 능한 자들은 있다. 술식의 골자 자체는 검토했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은 확인했다.
문제가 있다.
헬무드에서는 절대로 인간을 제물로 삼을 수가 없다.
헬무드의 모든 인간 시민과 관광객들은 유폐의 마왕의 보호를 받는다. 아멜리아 머윈에게서 술식을 제공받을지라도, 헬무드에서는 의식을 거행할 수가 없다.
“내 주인은.”
마스크에 가려진 헤모리아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당신들이 사막에서 날뛰어 준다면, 즉시 의식을 준비해 줄 거야.”
“아멜리아 머윈이 직접 오는가?”
“의식을 발동하는 순간에는 와 있겠지.”
위험성이 많은 모험이다. 과연 유폐의 마왕이 침묵해 줄 것인가? 헬무드의 마족이 타국에 건너가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만약…… 유폐의 마왕이 간섭한다면…….
“나는 모든 권속을 동원할 것이다.”
서열 33위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안다. 특히 그에게는 유폐의 마력이 심겨 있다. 유폐의 마왕이 전쟁을 바라지 않고, 징벌을 내리고자 한다면…… 이 마력은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여기서 무조건적인 안전을 도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멜리아 머윈이 말하길, 에드몬드 코드렛은 사마르 대수림에서 의식을 통해 마왕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유폐의 마왕이 간섭하기는커녕 묵인했단다.
유폐의 마왕은 직접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에게도 관대했다. 300년 동안 평화를 지켜 왔으면서도, 많은 것을 묵인해 왔다.
어쩌면, 저 자비로운 마왕도 핑곗거리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히 마왕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은 크나큰 무례이나, 늙은 마족들은 저 가능성을 아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과거에 유폐의 마왕이 얼마나 잔혹하고 과감했는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이 선고한 바에 따르면, 용사가 바벨에 진격한 순간이 평화의 끝이다.’
가만히 기다려 보아도 이 시대의 평화는 끝이 예정되어 있다.
그때 시작될 전쟁에서…… 과연 주역이 될 수 있을까? 이 방에 모인 마족들은 결코 주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50위 내의 최상위 서열일지라도 똑같다. 2명의 공작이 전쟁의 주역이 될 것이며, 직접 일어선 유폐의 마왕은 모든 전쟁을 허무히 끝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하마에서 전쟁을 벌인다면.
그곳에는 유폐의 마왕도, 유폐의 칼도, 몽마의 여왕도 없다. 판데모니엄의 득실거리는 마족들도 없고, 수도를 지키는 검은 안개도 없다.
전쟁의 주역이 될 수 있다. 공포와 제물을 수급하여 마왕이 될 수 있다. 이런 기회는 앞으로는 절대 없을 터.
“멜키스 엘하이어.”
서열 57위의 마족, 하르페우론. 그는 팔걸이를 으스러트리며 내뱉었다.
“그 인간 계집은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것이다.”
“독점할 생각은 말게.”
나하마의 던전을 습격하는 미치광이 대정령사. 그녀의 이름이 나온 순간, 하르페우론 외에도 여러 마족들의 눈동자에 살의가 어렸다.
“자네만 그 계집을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야.”
멜키스에게 지독한 조롱을 들었던 마족들의 살의가 공명 되었다.
‘내 주인은 죽어가고 있어.’
헤모리아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진즉부터 적의를 떠올리고 있는데도 제재가 들어오지 않아. 나에 대한 구속력이 떨어진 거다.’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헤모리아는 여전히 제 심장에 박힌 말뚝의 존재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멜리아에게 예전처럼 헤모리아의 모든 것을 감시할 여력은 없다.
그렇다는 것은, 헤모리아 쪽에서 아멜리아를 기만하고 배신할 수도 있다는 것.
‘전쟁…….’
어떤 식으로 배신할까. 어떻게 해야 아멜리아를 죽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헤모리아는 전쟁을 상상했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주인과 마음이 맞았다.
헤모리아도 전쟁이 벌어져서, 세상이 끔찍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환생 424화
우주
레헤인야르에서의 생활은 이른 아침부터의 명상으로 시작된다.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전생부터 해온 것으로, 명상하는 동안에는 마나의 흐름을 다스리는 것에 집중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명상은 백염식의 별을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다. 전생에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코어를 살피기 위해. 이미 예정된 붕괴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 명상을 붙들어야 했다.
지금은,
우주를 들여다보고 있다.
기존의 백염식을 구성하던 별의 회전은 사라졌다. 7개의 별, 코어 자체가 사라졌다. 보통의 경우, 코어가 사라졌다는 것은 평생 마나를 다룰 수 없는 폐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유진은 보통에 해당되지 않았다. 별이 사라졌음에도 유진은 여전히 마나를 느끼고, 마나를 사용하고 있다.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자유롭게, 마나를 지배하고 있다.
우주.
지금 유진의 안에는 의미 그대로의 우주가 담겨 있다. 유진의 존재 자체가 우주를 품고 있다.
백염식의 단계를 올릴 때마다 하나하나 늘렸던 코어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 대신 유진의 우주에는 무한에 달하는 별의 반짝임이 존재했다. 마나의 흐름을 구성하는 소자 하나하나가 별처럼 빛을 발했다.
유진은 제 몸 안에 담긴 우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인간의 몸이란 세상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작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지금 유진의 몸 안에는 도시 하나, 나라 하나를 훨씬 웃도는 마나가 담겨 있다.
존재의 그릇.
조금씩 이해해 본다. 백염식의 성취가 오르는 것은, 백염식의 성질을 이해하면서 그릇을 키우는 것. 유진이 마나를 자유롭게 다뤘음에도 백염식의 성취가 단계별로 올랐던 것은, 그릇의 크기를 떠나 백염식의 이해가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이해하지 않았어도, 별의 개수가 적어도, 유진은 백염식의 성취 이상으로 마나를 잘 다루고, 잘 싸워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부족함을 느꼈다. 지금 이상의 힘을 원했다. 이해를 갈망했다. 그럴 때마다 백염식의 단계가 올랐다.
아이리스를, 마왕을 죽일 때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갈망했다. 지금의 나로 부족하다. 백염식을, 베르무트를 넘어서야 한다.
신성을 깨치고 기적이 더해졌다.
이 우주는ㅡ 유진이 갈망하여 도달한 종착점.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백염식이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의, 하멜 다이너스의, 전쟁신 아가로트의 심상이 더해진, 백염식에서 시작했으나 백염식이 아니게 된 결과물.
기적.
‘마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인간이 백염식을 배우고, 마나를 수행하기 시작한 나이는 13살부터. 지금 유진의 나이가 22살이니, 햇수로만 따져도 아직 10년이 되지 않았다.
물론 백염식은 대륙의 모든 마나 수행법과 비교해도 독보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수행법이다. 거기에 유진은 전생의 기억과 더불어 본가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고, 마법과 이터널홀의 수행방식까지 더했으며, 대수림에서 뽑아 온 세계수와 번개불꽃의 덕도 톡톡히 보았다.
백염식의 성취 자체만 낮았다뿐이지, 대륙 역사에서 유진만큼이나 빠르게 많은 마나를 쌓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유진은 카르멘이나 길레이드 같은 가문의 어른들보다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을 감안해 보아도 유진에게 깃든 우주는 말도 안 된다.
‘신력.’
신성이 강해지는 만큼 신력도 늘어난다. 유진은, 제 안의 신성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신력이 늘어나는 것을. 우주가 확장되고 별이 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늘어나겠지.”
명상을 마치고 눈을 뜨니, 어느새 메르가 앞에 앉아 있었다. 메르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야 거기 동굴에 틀어박혀 있으니 체감이 잘 안 되겠지만, 지금 바깥에서 네가 얼마나 유명한 줄 알아?”
메르는 되려 자신이 으스대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몇 달째 아롯에 가 있는 세냐가, 메르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것이다.
“관광객이 너무 들이닥치는 바람에, 시무인은 입국자 통제까지 걸었대.”
유진이 마왕을 토벌했다는 것은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고, 시무인의 드워프들은 유진이 제한을 건 시간 안에 성상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지금 시대에서 최초로 세워진 용사의 성상. 막대한 관람료를 걸어놓아도 관광객이 끊이질 않을 텐데, 관람을 무료로 해버리니 시무인 광장은 과장 하나 없이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사람이 그득하단다.
“시무인뿐만이 아니지. 유라스의 교황도 널 위한 헌사를 발표하면서 빛의 광장에 네 성상을 세웠고, 키옐도 황궁 앞 광장에 네 성상을 시공하고 있대.”
“내 허락은 받아야 하는 것 아냐?”
이 대화는 머릿속에 떠드는 목소리를 메르가 전달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대화 자체에 메르의 의지는 개입하지 않지만, 표정 마저 얌전히 두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메르는 일부러 못난 표정을 짓고, 혀를 삐죽 내밀고, 눈을 까뒤집는 등 갖은 수를 써가며 유진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다.
“허락은 무슨. 물어보면 싫다고 할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좋다고 세우라 할 거면서.”
“당연히 세우라 하겠지. 나한테 나쁠 것 하나 없으니까. 그래도 거 뭐냐, 내 모습으로 세우는 성상이니까, 자세 정도는 요구할 수 있지 않나…….”
“왜? 시무인에서처럼 성검 번쩍 들고, 망토도 휘날리게?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그때 너 엄청 촌스러웠어. 대체 뭐야 그게? 300년 전에도 그런 조각상은 촌스럽다는 소리 들었다고.”
세냐가 그렇게 말했고, 제 뺨을 쭉 당기고 있던 메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건 저도 공감해요, 유진 님.”
“……원래 조각상이란…… 그 뭐냐…… 일부러 촌스럽게, 어? 과장적인 모습을…….”
“살면서 조각상 세워본 적도 드문 놈이 아는 척하기는.”
세냐가 중얼거렸고, 메르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더는 참지 못하고 홱 손을 뻗어 메르의 뺨을 꼬집었다.
“어쨌든 말이야. 대륙 여기저기서 널 떠받드는 것을 보면, 어휴, 내가 다 민망하다니까.”
“민망하기는 뭐가 민망해? 너도 옛날에 다 누렸던 것 아냐.”
“나는 너처럼 즐긴 적 없거든? 우리 중 누구도 너처럼 즐긴 적 없어. 왜일까? 응? 왜인 것 같아?”
살짝 각이 보이니 득달같이 살수가 파고든다. 유진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것 봐, 또 자기 불리하니까 입 다물지. 비겁한 녀석.”
“피할 수도 없고 받아칠 수도 없는 공격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 못 피해? 왜 못 받아쳐? 해 봐, 할 수 있잖아.”
하면 천하의 쌍놈에 개새끼가 되는데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 네 쪽은 어때? 박쥐 새끼들이 널 감시하기 시작한 지도 몇 달이 넘었잖아. 뭐 특별한 일은 없어?”
“없어. 고작해야 박쥐 새끼가 나한테 뭔 짓을 하겠어? 같잖게 감시만 계속하고 있는데, 내 쪽에서 한 번 쳐볼까 고민 중이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저쪽도 등신이 아닌 이상 네가 눈치채고 있다는 것은 알겠지.”
어떤 놈인지는 조사해 뒀다. 아롯의 음지에서 활동하는 뱀파이어 클랜. 놈들 자체는 약해빠져서 이름을 알아 둘 필요도 없지만, ‘뱀파이어’라는 것만 알아도 진상을 파악하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누아르 제벨라가 꿈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파악할 필요도 없이, 뱀파이어라면 무조건 알피에로 라사트와 연관이 있을 터. 유진이 의도했던 대로, 아멜리아 머윈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유진은 아멜리아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를 쥐고 있다. 아멜리아가 라비스타에 은둔하고 있다는 것도, 알피에로가 아멜리아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나하마의 던전 배후에 어떤 마족이 있는지도 알고 있다.
“서열 26위, 33위, 40위.”
그 밑의 서열까지 더하면 30명이 넘지만, 유진과 세냐는 최상위 서열의 마족 3명에게만 우선적으로 주목했다.
“26위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어. 300년 전에도 무투파 마족으로 이름을 떨쳤던 놈인데, 가비드랑 비교하면 하찮은 수준이었지.”
그럭저럭 싸우는 재미가 있었던 놈이기는 하다. 300년이란 시간이 마족들을 강하게 만든 것을 생각하면, 놈 역시 시간의 덕을 보았으리라.
하지만ㅡ 유진이 생각하기에, 26위 밖에 안 되는 서열이라면 절대로 지금의 자신의 적은 아니었다.
“나도 33위와 40위의 이름은 기억해. 마법으로 나를 꽤 성가시게 했었거든.”
세냐도 유진과 마찬가지로 저들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300년 전에, 고위마족들의 결코 쉬운 적이 아니었다. 동료들 없이 단독으로 마주쳤다면 상황이 난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 이후에 흐른 시간에서 강해진 것은 마족들뿐만이 아니다.
“움직이리라 생각해?”
“솔직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아멜리아를 노골적으로 꾀어내고 있다. 감시까지 보냈으니, 아멜리아도 이쪽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사막 던전을 모두 파괴해서 아멜리아의 팔다리를 뽑아버릴 뿐.
“발자크는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던걸. 아멜리아가 사막에 세력을 만드는데 여러 공을 들이기도 했고, 그년이 꾀어낸 마족들이 하나같이 성격이 X같은 놈들이라면서.”
“결국 그 자식도 흑마법사잖아. 믿어도 되는 거야?”
발자크 루드베스.
그 흑마법사가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멜키스와 접촉했던 발자크는, 한동안 사막 깊은 곳에 틀어박혀 있다가…… 최근에 다시 멜키스에게 접촉해 왔다.
발자크는 태연하게 사막 던전 흑마법사들이 계약한 마족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고, 자신이 추측한 아멜리아의 목적을 전달했다.
에드몬드 코드렛이 대수림에서 벌였던 의식. 그 술식은 블러드메리와 함께 아멜리아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멜리아 본인이 술식을 사용해 제 존재를 마왕으로 바꾸는 것을 노리나? 그런 가능성이 절대로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겠지만, 발자크는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 추측했고, 유진도 발자크의 생각에 동의했다.
라비스타에 은둔한 아멜리아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멜리아의 목적이 제 자신이 마왕이 되는 것이라면, 굳이 라비스타에 틀어박힐 이유가 어디에 있나. 유진과 세냐의 보복이 두렵다면,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의식을 벌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멜리아 머윈. 그년이 마왕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에드몬드의 술식을 쓸 생각이 없는 것은 확실해.”
정황을 보건대, 아멜리아는 오래전부터 나하마를 앞세운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대륙 모든 국가 중에서 나하마가 아멜리아의 기준에 적합했으리라.
황폐한 사막은 흑마법사를 양성하기에 제격이고, 나하마의 술탄들은 대대로 타국의 비옥한 영토를 욕심내 왔다. 대륙 모든 국가 중에서, 전쟁을 갈망한 것은 나하마가 유일하다.
-아멜리아 머윈은 유폐의 삼마 중 가장 오래된 흑마법사고, 우리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행보를 보여왔습니다. 에드몬드 코드렛은 헬무드에서 작위를 지냈고, 저는 아롯의 흑색마탑에 틀어박혔죠. 아…… 물론 제 행보도 당신들이 보기에는 이질적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흑색마탑주로 지낸 것은 사실입니다만, 제가 아롯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저는 제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그냥, 제 자신의 연구에 몰두했을 뿐이죠. 흑색마탑에서 몰래 사적인 흑마법사 군대를 양성하지도 않았고, 아롯의 심부를 파고들어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지도, 국왕을 꼭두각시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멜리아 머윈은 어떻습니까? 예, 그녀는 제가 방금 말한 일을 모두 다 시도했고, 훌륭하게 성공했습니다. 그것들을 추진하면서도 에드몬드와의 관계를 유지했죠. 사마르 대수림의 일을 기억합니까? 에드몬드는 자신의 오랜 비원을 시도하는 순간에 아멜리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둘 사이의 유대가 신뢰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둘이 서로의 비원을 응원하는 사이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고위 마족이라면 당연히 마왕이 되고 싶어 하겠지.”
메르의 입을 빌린 세냐가 내뱉었다.
아멜리아가 처음부터 마족들에게 저 조건을 제시했을지는 모를 일이나, 지금 상황에서 아멜리아는 저런 의도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낸 나하마의 기반이 파괴된다는 것은, 아멜리아의 평생이 허무해지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지만, 내가 마법사로서 생각한다면…… 내가 평생을 추구하던 것이 개박살 나버리는 상황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
아멜리아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지만, 그 썩을 년이 라비스타에서 기어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는 거지.”
“안 나오면 지가 어쩔 거야?”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결국은 늦고 빠르고의 문제다. 이번에 나오지 않는다면 아멜리아가 평생 추구한 비원을 박살 낸 뒤에, 나중에 라비스타에 쳐들어가서 아멜리아를 족치면 된다. 직접 기어 나온다면? 그 거대한 사막이 아멜리아의 무덤이 될 것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데스나이트.’
누아르의 꿈에서 보았을 때, 데스나이트는 멸망의 마력과 뒤섞이고 있었다. 그 당시의 모습은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놈에게 꺼림칙한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놈은 여전히 자기를 하멜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성찰을 거듭한다면 기억의 구멍을 깨달을 수 있을 텐데. 아멜리아의 마법이 기억을 억제하고 있나? 유진은 표정을 구기면서 생각했다.
“슬슬 후배님들 올 시간이야. 너는? 오늘도 모론한테 두들겨 맞을 예정인가?”
“두들겨 맞기는. 요즘은 내가 발라먹는데.”
“양심적으로 거짓말은 하지 말자.”
“거짓말 아닌데? 대충 승산 비교하면 육 대 사 정도는 돼.”
“누가 육인데?”
“이미 지난 결과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얼씨구. 모론한테 안부나 전해줘.”
“그래.”
유진은 대화를 마치고서 몸을 일으켰다.
모론의 거처에 틀어박히고 어느덧 반년이 넘었다.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모론과 대련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은 예삿일이었는데…… 최근 보름 정도는 부상의 정도가 크게 줄었다.
추구하던 것.
이미 아는 감각을 새기는 것. 새로이 알아가는 것. 아가로트의 신성과 직관을 떠올리며, 하멜과 유진을 섞는 것. 아가로트의 전투 기술에 하멜과 유진을 더하는 것. 사고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융화하고 합일하여 승화시키는 것.
몇 달 동안 그 과정을 반복했다. ‘나’라는 존재를 단련했다. 내가 강해지고 있음은 진즉에 확신했다.
그 성과는 얻었다.
사선을 넘나들 때마다 깨치는 감각들을 새로이 조율했다.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이해했다. 매일 반복해서 모론과 대련하고, 해가 저물고 나면, 새벽이 깊을 때까지 명상하며 전투를 복기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면, 어제보다 나아졌음을, 어제보다 강해졌음을 실감했다.
“고맙다.”
모론은 이미 레헤인야르의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없었다면, 지금만큼 강해질 수 없었을 거야.”
“그 말은 틀렸다, 하멜.”
모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끼를 앞으로 들었다. 몇 달 전에 썩둑 잘린 단면은…… 모론을 빙그레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하멜. 너는…… 내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강해졌을 거다. 너는 옛날부터 그랬으니까.”
300년 전. 용병이었던 하멜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하멜은 베르무트의 동료들중에서 가장 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하멜은 동료들 중에서 베르무트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너와 다르다. 하멜. 네가 없었다면, 나는…… 으하하. 지금처럼 네 곁에 서 있지도 못했겠지.”
몇 달 동안 반복한 대련에서 무언가를 얻은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모론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르만을 사냥했다. 그 시간이ㅡ 모론의 힘을 더 강하게, 도끼질을 더 능숙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 시간 자체가 독이 되어 모론을 마모시켰다.
“나는 네 덕에 많은 것을 기억해 냈다. 내가 과거 도끼를 어떻게 휘둘렀는지. 어떻게 휘두르고 싶었는지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광기에 파묻혔던 기억과 감각을 다시 떠올렸다.”
“겨우 반년이야.”
유진은 피식 웃으며 모론의 팔뚝을 툭 쳤다.
“네가 나와 어울려주지 않았다면 반년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겠지.”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라이미르아의 손을 잡은 크리스티나가 서 있었다.
“너희한테도…… 고맙다는 말을 수십 번 해도 부족할 정도지. 아니스, 크리스티나.”
“버릇이 너무 나빠지는 것 같아서 치료해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스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저와는 달리 크리스티나는 마음이 너무 약하더군요. 매번 치료마다 뼈를 직접 맞춰가며 공을 들이다니 원…… 한 번 정도는 거꾸로 붙여버려야 버릇이 고쳐지는 것인데.”
“으흠…… 제 존재가 유진 님께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크리스티나는 못된 말을 더 퍼붓고 싶어 하는 아니스를 밀어 넣고서 양손을 모았다.
“산을 내려간 뒤에.”
유진을 보는 모론의 눈동자에 드물게도 걱정이 어렸다.
“정말로…… 그…… 탕녀의 도시에 갈 생각인가?”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걱정하는 거냐? 가볍게 정찰하러 가는 거야. 그리고, 내가 거기서 모습을 보이면…… 아멜리아 머윈이 안심하고 기어 나올 수도 있잖아.”
“그 탕녀가 하멜,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들었다만…… 나는…… 모든 마족 중에서 그녀가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너와 상성이 최악이긴 하지.”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대비책이 몇 개 있단 말이야.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니 벌써부터 걱정은 하지 마.”
“알겠다.”
모론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오늘 안 갈 수도 있어.”
“하멜, 그건 무슨 말인가?”
“너랑 마지막 대련은 이기고 가야지.”
유진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오늘 만약 진다면, 내일 이기고 난 뒤에 하산할 거다.”
“…….”
“너한테 지고서 내려가는 건 절대 안 돼.”
“하멜.”
모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대련에서 이긴 네가 산을 내려가 버릴 때. 남겨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
“하멜, 네 행동은 이기고 도망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야,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딨어! 이기고 도망치다니? 이겼는데 왜 도망쳐? 하지만, 하지만 내가 너와 마지막 대련에서 지고 산을 내려가게 되면. 기분이 개 같잖아!”
“하멜, 너는 이기적인 말을 하고 있다. 이기고 내려간 너는 마음이 편하겠지만, 산에 남겨진 내 마음은 절대 편하지 않을 것이다. 하멜.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의식한 적이 없는데, 지금 네 말을 들으니 자꾸 의식하게 된다.”
“등신들.”
듣고 있던 아니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내뱉었다.
“뭐 어쩌자는 겁니까? 무승부가 날 때까지 싸우겠다는 겁니까?”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지.”
“음.”
유진과 모론의 대답을 들은 아니스의 눈썹이 더욱 찌푸려졌다.
“전 말입니다. 가끔 당신들을 보고 있으면, 예, 이곳에 없는 세냐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대체 나이를 어디로 처먹은 것인지가 참 궁금해집니다.”
“말은 똑바로 해, 아니스, 나는 모론과 세냐보다 나이는 덜 먹었어.”
“아니스. 나도, 세냐도 하멜이 없을 때에는 지금처럼 유치하지 않았다.”
“그것도 나 때문이라는 거냐?”
유진은 발끈해서 물었고, 모론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언제 싸울 겁니까?”
아니스는 꽉 막히는 답답한 기분을 느끼며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예? 대체 언제 싸울 겁니까. 그냥 입으로 싸울 겁니까? 어제도 그제도, 반년 내내 싸웠으면서 왜 오늘도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냥 어제의 싸움을 마지막으로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강해졌…….”
ㅡ쿠웅! 치마 안쪽에서 플레일의 철구가 떨어졌다.
“가자, 모론.”
유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모론의 등을 두드렸다.
빌어먹을 환생 425화
몇 달 전부터 대련의 장소를 바꿨다.
힘 조절을 안 하게 된 것이 아니다. 가진 힘을 풀어내면서, 주변은 파괴하지 않고, 상대에게만 집중하는 것에 서로가 익숙해진 것이다.
유진이 모론의 힘과 전투방식에 익숙해졌듯이, 모론도 수백 년 동안 써먹어 본 적 없는 힘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전투감각의 재활을 끝냈다.
라구르야란.
세상의 끝. 아무것도 없는 땅. 먼 곳에 정지한 바다는 보이지만,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산맥과 바다 사이에 존재하는 이 공백의 땅에는 그 무엇도 살지 않는다.
‘나는…….’
모론은 도끼를 양손으로 잡았다.
유진은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 서 있다. 오른손은 성검을 쥐고 있고, 자세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편안해 보인다. 오만함에 의한 자세는 아니다. 저 여유와 평정은 만변(萬變)을 낳는다.
‘앞으로 하멜을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담담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반년 전. 유진의 검에 도끼가 베이는 순간부터 예정된 사실이기도 했다.
그 시점에서부터 유진이 가진 무수한 가능성은 모론이 도달한 ‘힘’을 넘어서 있었다.
매일 대련을 반복하던 반년.
모론은 자신이 특별히 강해졌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이 반년은, 모론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재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의 전성기는 사명을 막 시작했던 150년 전이었고, 그 긴 세월 동안 전성기는 지나 버렸었다. 밝은 눈은 남았으나 전투에 대한 모든 감각이 광기에 마모되었다.
하지만.
광기를 떨쳐내고, 유진과 대련을 하면서, 지나 버린 전성기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마모된 감각을 되살렸다. 만족스러운 성과는 거두었다. 하지만, 전성기‘보다’ 강해진 것은 아니다.
유진은 어떤가. 모론이 반년 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았다면, 유진은 제 자신에 많은 것을 더해 넣었다.
어제의 나보다 강하다는 말. 마치 농담처럼 들리는 말이나, 모론은 저 말이 결코 농담 따위가 아니란 것을 잘 알았다. 실제로 모로는 매일 체감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어제 대련을 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것이 정말로 어제의 하멜인가? 모론은 자신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여야만 했다.’
고대 전쟁신의 환생. 그러한 운명.
자각 없던 전생일 뿐. 베르무트가 하멜을 선택한 것은 저러한 운명의 소유자기 때문이겠지만, 모론은, 하멜의 특별함은 전생보다는 천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가학적이다 싶을 만큼 제 자신을 몰아붙이고, 단련을 한 시도 게을리하지 않고, 몸이 부서지는 고통에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안주하기는커녕 쉬지 않고 다음을 추구하는 것.
하멜은 그런 사람이다.
‘네 동료여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모론은 도끼를 들었다.
‘너와 재회하기 전까지 미치지 않아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모론은, 이 반년 동안 자기 자신이 하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어서 좋았다. 완전히 미쳐 버렸다면. 도끼조차 휘두를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면. 하멜이 바라는 대로 사선을 넘나들게 할 수도 없었을 테니.
“하멜.”
모론의 들어 올린 도끼 너머로 유진을 보았다.
“너는, 반년 동안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한 적이 없지 않은가?”
대련의 승률을 따진다면, 모론이 앞선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유진은 모론과의 대결에서 많은 제한을 두고서 임했다.
이클립스를 쓴 적이 없다. 이그니션은커녕 프로미넌스도 쓴 적이 없다. 월광검은 꺼내 본 적도 없고, 다른 무기를 쓴 적도 없다. 모론과의 대련에서 유진이 사용한 것은 성검과 백염식, 공검뿐이다.
“그렇지.”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저것들을 쓰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모론과의 대련에서 유진이 바란 것은, 아가로트의 신성과 직관을 깨치고, 의식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를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대련을 반복하며 사선을 넘나드는 것.
프로미넌스와 이그니션을 써버린다면 저런 식으로 대련할 수 없게 된다.
이그니션은 유진에게 단기 결전을 강제한다. 백염식이 변화하고 육체와 코어가 강화되면서 반동도 크게 줄었지만, 그래도 이그니션을 한 번 쓰면 며칠은 골골거려야 한다.
프로미넌스에는 이그니션 같은 반동은 없다. 하지만 발동한 순간에 유진의 화력은 증폭되어 버리는데, 그것은 유진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유진은 모론과의 대련에서 ‘힘’ 싸움은 할 생각이 없다. 모론의 힘을, 힘이 아닌 다른 것으로 흘려내고 쳐내는 것이 목적이다.
“하멜.”
모론은 씩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나 또한 패배가 필요하다.”
그 말.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모론을 응시했다.
모론이, 어떤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패배.
유진은 몇 번이나 모론에게 패배했다. 나이트마치 때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결국 ‘패배’한 것은 사실. 이곳에서 보낸 반년 동안 겪은 패배는 세어볼 것도 없는 일.
패배를 통해 배운 것들. 내가 부족하다 느꼈던 것들. 그래서 더해 넣은 것들.
이해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직접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유진이 해야 할 것은ㅡ 모론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유진은 말없이 오른손에 쥐고 있던 성검을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검을 놓아 텅 빈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던 크리스티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 토벌 이후로 처음이군요.”
[반년 동안 용케도 참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론에게 처맞고 반죽음 신세가 될 때마다 쓰고 싶었을 텐데.]
아니스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 신성마법을 일으켰다. 여덟 장의 날개가 펼쳐지고, 발밑에는 빛이 퍼져 나갔다.
“손을.”
크리스티나의 왼손은 라이미르아가, 오른손은 메르가 꼭 쥐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다가온 속삭임에 라이미르아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메르는 지금 자신이 크리스티나의 손을 쥐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손은 잡고 있어야겠는데, 세냐 님이 없으니 성녀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성녀들이 심술궂게 굴었다면 절대로 손을 잡지 않았겠지만, 매일 머리를 빗어주고, 옷을 입혀주고, 함께 목욕도 해주는 데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잖은가.
메르마저 그럴진대, 진즉부터 성녀들을 따르던 라이미르아는 오죽할까.
‘어머니.’
언젠가는 당당히 말하리라. 라이미르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크리스티나의 로브자락을 꼬옥 잡았다. 그러는 동안 크리스티나는 성흔이 새겨진 왼쪽 손바닥을 앞으로 뻗으며 결계를 만들었다.
결계가 만들어진 것과 유진이 이그니션을 발동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ㅡ쿠우우웅!
유진을 중심으로 검은 불꽃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맹렬히 회전하며 점점 퍼져 나가는 불길이 나선을 그렸다.
불꽃은 마냥 검지는 않았다. 불꽃의 안에 무수한 반짝임이 존재했다. 그 모습은ㅡ 마치 은하수가 유진을 휘감는 것처럼 보였다.
우주.
이그니션이 유진이 품은 우주를 세상에 내보였다. 끝없이 퍼져 나갈 것만 같은 우주의 확장이 멈췄다.
빠지지직! 성간에 번개가 흐르고, 우주가 유진을 중심으로 압축되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공백의 땅에 돌풍이 퍼져 나갔다.
“맙소사.”
현상의 여파만으로 결계가 박살 났다. 돌풍에 밀려 엉덩방아를 찧은 크리스티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깜빡였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이해가 되지 않느니라.”
후폭풍을 염려하여 팔을 드래곤의 것으로 바꾸었던 라이미르아가 몸을 떨었다.
헤츨링도 결국은 드래곤. 라이미르아는, 지금의 유진에게서 느껴지는 터무니없이 거대한 ‘힘’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드래곤의 팔 뒤에 숨었던 메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성운이 하늘로 치솟는다.
백염식이 변화하고 이그니션이 변한 것처럼, 프로미넌스 역시 변화했다. 외날개의 형태는 같으나, 더 이상 그것은 불꽃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론도 넋이 나간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이그니션이 발동되고, 우주가 확장되었을 때. 모론은 자신도 모르게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우주가 응축되고, 유진의 등 뒤에 성운의 날개가 치솟았을 때에는ㅡ
“으하하…….”
모론은 발밑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발을 끈 자국. 뒷걸음을 친 흔적. 훌쩍 멀어진 거리. 이만큼의 위기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물러선 적이 얼마 만인가?
이질적인 색.
모든 것을 집어삼켜 물들이는 난폭한 검은색.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붉은색.
유진은 두 개의 색이 뒤섞인 신검을 가슴에서 뽑아냈다.
“월광검은 안 쓴다.”
금색 눈동자에 광채가 흐른다. 신성(神性)과 직관이 사고에 깃든다.
아가로트의 신검. 유진 라이언하트가 ‘용사’로 숭배되기 시작하면서 신력이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신검은 여러 번 휘두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검은 여러 가지로 위험하니까. 그래도 서운해하지는 마라, 모론.”
그럼에도 신검은 꺼내어 손에 쥔 것만으로 유진의 신성을 증폭시킨다.
“이게 내 전력인 것은 틀림없으니까.”
이그니션을 썼다. 프로미넌스로 화력을 배가시켰다.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하는 신검까지 꺼냈다.
“으하하하…….”
손바닥이 땀에 흥건하다.
“자신이 없구나.”
모론은 도낏자루를 꽉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저 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나, 무엇인지는 직감할 수 있다.
저 검이야말로 전쟁신의 상징. 이미 멸망해 버린 지난 시대에서 몇 명이나 되는 마왕을 죽인 검. 그 시대를 끝내버린 멸망의 마왕에 대적한 검.
“영광이라 해야 할까.”
모론은 씩 웃으면서 도끼를 머리 위로 들었다.
ㅡ꽈드드드득……! 모론이 선 공간이 크게 한 번 부풀고 압축되었다. 도끼 주변의 공간이 지직거리더니 일렁거리고, 곧이어 거미줄처럼 얇은 균열이 퍼져 나갔다.
‘결계의 안쪽이 아니라서 다행이구나.’
제아무리 베르무트의 마법이 대단하고, 결계가 완벽할지라도. 이 정도로 규격을 벗어난 두 개의 힘이 충돌한다면ㅡ 결계가 파괴될지도 모른다.
아니.
결계가 아니라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로도 자신의 전력이 얼마큼의 힘을 지녔는지 가늠해 본 적이 없다. 그는 단순 악력과 근력만으로 공간의 축을 끌어당기고 무너트릴 수 있다. 이 세상에 당연하게 적용되는 법칙들을 단순한 힘만으로 역전시키고 파괴할 수 있다.
그런 일을 하였을 때, 전력이었던 적은 없다. 그냥, 바라면 되었다.
“더욱이.”
꽈직, 꽈직, 꽈지지직. 모론의 전신 혈관이 울룩불룩 치솟았다. 모론의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흔들렸다. 그는 꽉 다문 이빨을 드러내면서 몸을 낮추었다.
“필요한 일.”
전력을 가늠해 본 적이 없다면 지금이야말로 전력을 다하면 될 일. 맞부딪쳐, 패배한다면.
‘바라는바.’
쿠우웅!
모론이 발을 디뎠다.
지금의 둘에게 이 정도의 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모론은, 한 걸음 나아감과 동시에 도끼를 내리찍었다.
전력을 다한 일격. 그다음은ㅡ 준비하지 않았다. 일격으로 필살을 생각하였으니, 다음은 필요가 없다. 이 일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
‘그런가.’
도끼질로 갈라낸 것이 신검의 빛에 뒤덮이는 것이 보인다. 저 검고 붉은 신검은 그 자체로도 경이로우나, 그것 하나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베고 가르는 참격에 백염식의 불꽃, 아니, 우주가 더해진다.
크다.
찰나의 순간, 모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평생을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라는 인간은 대부분 다른 무언가보다 컸다. 덩치, 힘, 심지어 지금 손에 쥔 도끼조차도. 모론 루하르란 존재의 것은 언제나 거대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모론은, 덮쳐오는 우주에 비해 자신이란 존재가 참으로 작다는 것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우습게도, 그러한 실감은 언짢지 않았다. 굴욕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만족했다.
저 거대한 경이를 보았기에 모론은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지금 나 자신이 작고 약하여 패배했기에, 지금의 내가 부족하기에, 다음에 더 크고, 강해지기를 갈망할 수 있다.
“하하.”
모론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도끼를 내려놓았다.
저번처럼 베이지는 않았다. 자루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다.
“역시 졌구나.”
하지만 도끼를 더 밀어낼 수는 없었다. 신검은 모론의 도끼를 베지도 모론의 몸을 베지도 않았음에도 마음을 꺾었다.
“만족했냐?”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신검을 내려놓았다. 모론은 벙긋 웃으면서 도끼를 땅에 꽂았다.
“내가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넌 강해.”
“하멜, 너보다는 약하다.”
모론은 도끼를 놓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약하단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나는 지금에 만족할 수 없다. 이 도끼는, 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뽑지 않을 것이다.”
이그니션이 끝나고, 프로미넌스가 사라졌다. 일렁거리던 우주가 다시 검은 불꽃으로 되돌아오고, 흩어져서 사라졌다. 유진은 주저앉고 싶은 것을 참으며 호흡을 골랐다.
‘잠깐 쓴 건데도 뒤질 것 같네.’
반동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다루는 힘이 너무 커져서일까? 패배를 인정한 모론조차도 멀쩡히 서 있는데, 승자인 자신이 비틀거릴 수도 없는 노릇. 유진은 구겨지려는 표정을 붙잡았다.
“약속…… 아니. 맹세하겠다.”
모론은 유진의 앞에 다가와서 악수를 권했다.
“나는 지금보다 강해질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유진은 억지로 웃으면서 모론의 손을 잡았다.
붙잡힌 손이 너무 아파서,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빌어먹을 환생 426화
제벨라 시티
“멍청이.”
아니스는 혀를 쯧쯧 차면서 유진의 팔을 주물렀다. 빛에 둘러싸인 손가락이 근육을 어루만질 때마다 유진의 턱 근육이 씰룩거렸다.
“어째 반동이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몸의 성능이 따르지 못하는 거야.”
유진은 꽉 물고 있던 입술을 벌리고서 내뱉었다.
암실에서 환골탈태까지 겪었던 육체. 하지만 지금이 백염식에 이그니션과 프로미넌스를 동시에 써버리면, 문자 그대로 ‘인간’의 규격을 한참이나 넘어버린다.
“그래도. 전생보다는 나아.”
전생은 이그니션을 반복해 쓴 결과 코어가 망가졌지만, 지금의 유진은 그것을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증폭된 화력을 몸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
‘신력이 늘어나고 신성이 강해지면 육체에도 변화는 올 거다.’
가진 힘이 많아질수록 이그니션으로 배가시킬 화력도 증폭된다. 당장은 균형이 너무나도 크게 어긋나서 고생스럽지만, 언젠가는 육체도 신성에 적응하고 변화할 터.
그때가 되면……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생각에 잠겼다.
라이자키아와의 전투.
그때 유진은 프로미넌스와 이그니션을 동시에 쓴 것도 모자라, 이그니션을 한 번 더 중첩시켰다. 본래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던 일이지만, 아가로트의 반지 덕에 성공했다.
물러설 수가 없어서. 죽는 한이 있어도 라이자키아를 죽이고, 세냐를 구하고 싶어서 저질렀던 미친 짓이다.
지금도 그때의 결정이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그니션을 중첩해서 라이자키아를 순간적으로 압도했고, 코어와 몸뚱이가 조금만 더 버텨줬다면 혼자서 라이자키아를 쓰러트렸을지도 모른다.
신성에 따라 육체가 변화하면, 이그니션을 중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유진은 그것을 상상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악!”
생각이 깊어진 만큼 긴장이 느슨해졌다. 꾸욱, 허벅지를 꾸욱 누르는 손길. 다리가 몇 갈래로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 유진은 허리를 튕기면서 비명을 질렀다.
“많이 아프십니까?”
대뜸 터진 비명에 크리스티나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훑었다.
“이렇게나 고통스러우시다면 며칠 요양하고 출발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요.”
“안 돼.”
유진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깔끔하게 모론한테 이겼잖아. 나한테 진 모론이 아무 상처 없이 서 있는데, 승자인 내가 누워서 끙끙거리면 체면이 뭐가 되냐.”
“모론님도 유진 님이 아픈 걸 참고 있는 것을 눈치챘을 거예요.”
유진의 옆에 앉은 메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크리스티나가 하는 것처럼 유진의 손바닥을 주물렀는데, 당연하게도 신성력도 치유마법도 쓸 수 없는 메르의 행동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주무를 때마다 손바닥만 아팠다.
그래도 유진은 메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알아서 뭐? 어쨌든 나는 멀쩡히 서서 모론과 악수도 했고. 내 발로 모론을 떠났잖아.”
“은자여, 본녀의 존재를 무시하면 안되느니라. 은자의 발로 떠난 것이 아니라, 본녀의 날갯짓으로 떠난 것이니라.”
라이미르아의 목소리는 저 앞에서 들려왔다.
지금 유진과 메르, 크리스티나는 드래곤의 모습을 취한 라이미르아의 등 위에 타고 있다.
모론과의 마지막 대결이 끝나고, 지체하지 않고 레헤인야르를 떠났다. 모론 앞에서 끙끙 앓고 싶지 않다는 유진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반년이나 같이 지냈고, 헤어지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찐득한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몸뚱이가 아파 죽을 것 같지만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신성력이 통증을 조금씩 진정시키고 있고, 유진이 가진 자체적인 회복력도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벌러덩 누워 있던 유진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서 앉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멜, 상처가 낫기 전에는 절대로 무모한 짓을 하면 안 됩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붙겠다. 나도 몸이 멀쩡해지기 전에는 제벨라 시티에 갈 생각 없어.”
제벨라 시티. 그 말에 메르는 꼴깍 침을 삼켰다.
헬무드에 있을 적에 몇 번이나 광고로 보았던 제벨라 시티. 헬무드, 아니, 대륙에서 가장 화려하고 놀거리가 많다는 제벨라 파크.
……사실 놀이동산보다는 카지노와 온갖 유흥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곳이지만, 메르나 라이미르아는 저런 어른의 유희보다는 놀이동산 따위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유진 님. 정말 싸우러 가는 것은 아니죠?”
“안 싸워.”
유진도 모론과의 대련을 통해 강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누아르 제벨라와 결판을 지을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유진이 가늠하기에 누아르 제벨라는 마왕만 아닐 뿐이지, 가진 힘은 300년 전에 뒈진 마왕들을 이미 한참 넘어서 있었다.
“세냐도 없는 상황에서 누아르 제벨라에게 싸움을 거는 것은 미친 짓이지.”
“하지만 유진 님은 미친 짓을 자주 하시잖아요.”
“얘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언제 미친 짓을 자주 했어?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근거가 없는 짓은 절대 안 해.”
유진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메르에게 핀잔을 주었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무모하고 말도 안 되는 짓일 수도 있겠지만, 유진은 대부분 자신의 행동에 마땅한 근거를 두었다.
“자살도 근거가 있어서 저지른 짓입니까?”
“네가 그 말 할 줄 알았다.”
아니스가 쏘아붙였고, 유진은 시선을 피했다.
“하멜, 당신이 주장하는 근거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제벨라 시티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라이언하트 본가, 혹은 흑사자성에 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있을 뿐. 유진의 정확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유진이 그렇게 모습을 감추고 있으면, 라비스타에 틀어박힌 아멜리아 머윈이나 그녀가 협력하는 마족들도 언제 유진이 나타날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을 터.
그렇다면 확실하게 행보를 보여준다. 지금 시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노골적인 꾀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쪽은 아멜리아 머윈이다. 노골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확실하게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니, 아멜리아 머윈도 더는 침묵할 수 없으리라.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면 제벨라 시티 말고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겁니다. 차라리 유라스에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가서 할 게 없잖아.”
“대성당들만 골라서 순회해도 유라스 전역에 당신의 이름이 울려 퍼질 겁니다.”
아니스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크리스티나도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니스의 말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교황청이 직접 유진을 용사라 공표하고 성인으로 추대하기는 했어도, 신도들은 성상에 경배하는 것보다 유진의 모습을 직접 보고 목소리를 듣는 것을 바랄 것이다.
만약…… 만약, 유진이 대성당의 단상에 서고, 그 옆에 성녀인 자신이 함께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고 성스러운 일인가! 레헤인야르의 동굴에서는 유진이 단련에만 몰두한 탓에 특별한 추억은 만들지 못했고, 딱히 그것이 아쉬운 것도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저런 생각을 하니 욕심과 번뇌가 다시 꾸물거리는 것만 같았다.
“용사가 뭐 성당에서 기도하고 찬송가 부르는 존재는 아니잖아.”
“그럼 용사가 뭐, 카지노에 가서 놀음이나 하는 존재입니까?”
“내가 놀음하러 가냐?”
“당연히 그건 아니겠죠. 하멜, 당신이 제벨라 시티에 가려는 것은…… 누아르 제벨라. 그 창부가 이룩한 힘의 근간을 확인해 두고 싶은 것 아닙니까?”
누아르만큼 300년이란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써먹은 마족은 없을 것이다.
유진도 그녀에 대해 진즉부터 여러 조사를 했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적인 것을 감안해도 감탄이 나올 만큼 누아르는 열심히 살았다.
휘하 몽마들을 적극 사용해 전쟁영웅들의 힘을 빼앗아 몰락시키고, 대륙 각지에 몽마들을 파견해 정기를 수급하면서 헬무드의 내실도 소홀히 두지 않았다. 그녀의 첫 번째 도시 드리미아는 헬무드에서 수도 판데모니엄 다음으로 많은 인간이 사는 도시이며, 두 번째 도시 제벨라 시티는 헬무드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도시다.
영지 관리만 한 것도 아니다. 300년 동안 누아르 제벨라가 손을 댄 사업만 해도 수십 개는 되는데, 종류도 모두가 제각각이다. 건설업, 연예 매니지먼트, 카지노, 호텔, 미용, 의류 등.
즉, 누아르 제벨라는 헬무드에서, 아니,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마족이란 것이다. 누아르는 그러한 노출도와 지명도를 제힘으로 삼고 있다. 당장 대륙에서, 제벨라 시티에 무료 숙박권을 받는다면 거절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지금 와서 내가 그 도시를 쓸어버려도 누아르의 힘이 줄어들지는 않겠지.”
유진은 눈썹을 구기며 내뱉었다.
“이미 정기를 뽑아먹을 대로 뽑아먹었을 테니 말이야.”
“그래도, 이번에 도시를 파괴한다면 그 창부가 더 이상 강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할 수 없는 일이야. 그 도시 한정으로는 내가 용사랍시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없을걸. 거기 간 사람들은 나랑 누아르가 같이 물에 빠져 있으면 날 버리고 누아르를 먼저 구할 테니.”
“은자여, 걱정하지 마니라. 은자가 물에 빠진다면 본녀가 반드시 구해주겠노라.”
“이 멍청이,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날갯짓이나 열심히 하세요.”
라이미르아가 냉큼 어필하자, 메르는 매콤한 주먹으로 라이미르아의 등 비늘을 두드렸다.
“음…… 그래…… 고맙다. 어쨌든…… 도시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단 말이지.”
“그럼 정찰에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누아르를 잡으려면 결국 그년의 도시에 쳐들어가야 돼. 나중에 대뜸 들이박았다가 예상하지도 못한 것이 튀어나오면 어떡해?”
“유진 님, 유진 님. 제가 말이에요, 헬무드에서 제벨라 시티에 관한 책자를 여러 개 모아놨거든요. 이게 유진 님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메르는 굴러온 돌멩이나 다름없는 라이미르아에게 밀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저 멍청한 어휘까지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일이지만, 메르는 자신에게 라이미르아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현명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메르는 자연스럽게 유진의 다리 사이에 앉아서 제벨라 시티의 책자를 몇 권 꺼냈다. 헬무드 워프게이트의 관광책자뿐만 아니라, 서점에서 구입한 책도 껴 있었다.
“음…… 그래…… 고맙다…….”
메르가 꺼낸 책들은 제벨라 시티를 소개하는 책. 랜드마크와 주요시설, 꼭 가봐야 할 맛집, 어린아이를 둔 부모에게 추천하는 여행루트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당연히…… 유진이 정찰을 통해 알아내고 싶은 정보는 없었다. 유진이 파악하고 싶은 것은, 제벨라 시티가 보유한 다른 병력에 대해서였다. 누아르도 공작인 만큼 분명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을 텐데, 그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 몽마라도 누아르의 권속이라면 병력으로 써먹을 수 있겠지만…… 그년은 개인 기사단 같은 것도 없나?’
카지노다 보니 보안요원 등은 득실거리지만…… 이쪽은 명단 파악이 안 된다. 드리미아에 있을 적에도 기사단 같은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누아르 제벨라 자체만으로도 일인군단이라 할 수 있으니, 사병대를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누아르만 생각하고 쳐들어갔다가 대병력이 튀어나오면 귀찮은 일이다.
“그 창부가 태도를 바꿔서 우리를 공격하면 어떡합니까?”
“안 그럴걸.”
“단언할 만큼 그녀를 믿는 겁니까?”
“그년이 지금의 우리를 죽이고 싶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용마성에 쳐들어가기 전. 누아르가 대뜸 호텔에 찾아왔을 때. 그때 누아르는 본신으로 직접 온 것이었다. 만약 그때 누아르가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죽이려 했다면…… 제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그년을 죽일 거다. 하지만 그년은 나랑 생각하는 머리가 달라.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나를 죽이려 한 적이 없어.”
이것을 신뢰라고 할 수 있을까.
“이번에도 그럴 거다. 확신할 수 있어. 내가 그년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닌 이상, 누아르는…… 제벨라 시티에서 날 공격하지는 않을 거야.”
누아르의 총애와 관심은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질척하고 역겹다. 유진은 그 찢어 죽일 몽마의 사랑에 살의 외의 다른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복잡한 유대에 신뢰가 전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잖은가. 유진은, 누아르가 자신을 절대로 이번에 죽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복잡하군.’
유진은 누아르를 죽이고 싶다.
누아르는 어떤가? 그녀의 살의는 굉장히 수동적이다. 그녀 자체는, 유진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아르가 바라는 것은ㅡ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유진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유진이 살의를 포기한다면…… 누아르는 몸소 나서서 유진의 살의에 다시 불을 지피려 들 것이다.
결국 유진과 누아르는 언젠가 서로를 죽이게 될 것이고.
‘지금은 아니다.’
유진은 무덤덤하게 그를 확신하며, 메르가 건넨 가이드북을 넘겼다.
제벨라 시티의 랜드마크.
하늘을 나는 제벨라 페이스.
그 머리 위에, 파라솔을 펼치고 썬베드까지 두고서…… 비키니 차림에 고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누아르 제벨라의 사진.
유진은 표정을 구기면서 책을 덮어버렸다.
* * *
[랄랄라~ 랄랄라~]
[해피해피해피 제벨라~]
[에브리데이~ 제벨라데이~]
[웰컴 투 더 제벨라파크~]
[드림스 컴 트루~~]
[제, 제, 제~ 제제제~ 제벨라 파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것만 같은,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성벽과 성문. 도시 바깥에 둔 워프게이트에서 성문까지 이어지는 길은 얼룩 하나 없이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드넓은 길 양옆에 선 기둥은 사이사이에 홀로그램 화면이 연결되어 있는데, 제벨라 연예기획사에서 데뷔한 아이돌들의 군무를 비롯해 다양한 영상이 재생된다.
득실거리는 인파의 너머. 높은 성벽의 위,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조형물.
“…….”
사진으로 보았던 제벨라 페이스.
실제로 본 제벨라 페이스는, 뭐라고 해야 할까. 위압감이 달랐다.
경악스러웠다.
“……하나 아니었나?”
유진은 높은 하늘을 날고 있는 제벨라 페이스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 도시 상공에는 3대의 제벨라 페이스가 날고 있었다.
빌어먹을 환생 427화
하늘을 떠다니는 금속의 머리, 제벨라 페이스. 이름처럼 누아르 제벨라의 얼굴을 형상화한, 저 기괴한 비행물체의 크기는 어지간한 저택만큼 거대했다.
심지어 하나만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가이드북으로 확인했을 때는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지금 제벨라 시티 상공에는 3대의 제벨라 페이스가 날고 있다.
똑같이 뿔은 달고 있지만, 얼굴이 똑같이 생긴 것은 아니다. 머리카락의 형태나, 전체적인 색깔에 확연한 차이가 존재했다.
“미친…….”
유진은 3대의 제벨라 페이스들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저 비행물체에 가미된 센스를 유진은 이해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혹자는 저것을 보고서 예술이니 뭐니 떠들지 몰라도, 유진이 보기에는 누아르 제벨라 특유의 광적인 자기애의 현신일 뿐이었다.
하지만. 저 비행물체가 아무 의미도 역할도 없이 떠다니는 것은 아니다. 유진은 망토 안쪽에서 아카샤를 쥐었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어지간한 시그니처보다 공들였군.’
제벨라 페이스에는 여러 종류의 마법이 더해져 있는데, 유진과 아카샤의 능력으로도 제벨라 페이스에 입력된 모든 마법을 간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숨기지 않고 하늘에 올려놓아 과시하는 것이니, 다른 누군가에게 간파당하지 않도록 공을 들였다는 뜻이리라.
‘저 비행물체의 눈깔이 환상의 마안의 권능을 확산시킨다지. 3대 모두가 연동되어 권능을 확산하는 것은…… 아니, 그건 불가능해.’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도시에 제벨라 페이스를 파견해서 장거리로 환상의 마안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제벨라 페이스 한 대로 제국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누아르 제벨라가 직접 탄 것 외에는 환상의 마안을 확산시킬 수 없어.’
그럴지라도 경이로운 일이기는 했다. 저만한 크기라면 도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눈을 맞대고 환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유진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제벨라 페이스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생각을 계속했다.
‘나머지 두 대에도 무슨 역할이 있을 텐데. 아니…… 어쩌면 단순히 자기 과시를 위해 만든 것일 수도…….’
누아르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저것들에게 담긴 마력을 살펴보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진 않았다. 도시 정중앙에 날고 있는 것이야 지금도 누아르가 직접 타고 있는 모양이고, 다른 두 대는…… 당장 저 대가리 하나만 폭발시켜도 용마성만큼의 땅덩어리는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위협적인, 의도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가 떠다니는 도시에 입장하려는 인파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헬무드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도시. 성문을 통과하는 입장료만 해도 상당한 액수인데, 아직 한참 먼 성문까지 사람들의 머리가 가득했다.
그나마 이 정도의 줄로 그친 것도, 제벨라 시티 측에서 출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제벨라 시티에 들어오려면 예약을 걸고서 족히 몇 달은 기다려야 하고, 후원금 명목으로 우선 입장권을 구매할지라도 당일에 바로 출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루하르 국왕에게 직접 받은 휘장이 있다. 그 덕을 보아 루하르에서 바로 출국하여 제벨라 시티에 도착은 했다만…… 줄이 들어가는 속도를 보니, 못해도 한나절은 이렇게 줄을 서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특별 취급을 받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멀찍이 옆을 보면, 홀로그램 스크린 너머에 VIP들을 위한 입장 라인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렇게 줄을 서는 동안에도 새카맣고 길쭉한 리무진이 오고 가며 VIP들을 태워 나르는 중이다.
이 도시에서 루하르 왕국의 휘장 덕은 볼 수 없겠지만…… 지금이라도 유진이 정체를 밝히며 요구한다면, 입장을 관리하는 요원들이 즉시 유진을 안으로 모실 것이다. 어차피 세상이 알게끔 행적을 보일 생각이었으니, 가명 같은 것을 쓰며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줄 서던 도중에 마족한테 가서, 자기 신분을 밝히고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구차하지 않은가?
행적을 드러낼 생각이기는 해도 구질구질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유진은 마음속에서 자존심과 합리성의 중간지점을 저울질했다.
치직.
대기라인을 가르고 있는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노이즈가 발생했다. 칼 같이 맞춘 군무를 추고 있던 아이돌의 움직임이 정지하더니, 전혀 다른 영상이 나타났다.
제벨라 시티의 주인, 누아르 제벨라의 모습이 홀로그램 스크린에 나타났다.
갑자기 바뀐 스크린 화면에 줄을 선 사람들 대부분이 놀란 소리를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스크린에 비치는 누아르는 커다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한 거품 덕에 노출은 별로 없었지만, 저 아름다운 공작이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모습을 송출하는 것에는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휘둥그레 뜬 눈을 깜빡거리던 누아르가 움직였다. 그녀는 물에 흠뻑 젖은 앞 머리카락을 들추면서 고개를 앞으로 내밀더니, 무언가를 탐색하듯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와우.”
이윽고, 누아르는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왜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모습을 송출한 것일까. 무엇을 찾아 시선을 돌린 것일까. 추측할 필요도 없이 뻔한 일이다. 마지막에 유진은 누아르와 눈동자가 마주친 것을 느꼈다.
“유진 님…….”
메르와 라이미르아. 둘은 두근거리는 설렘과 누아르에 대한 경계. 그것에 더해 유진의 눈치까지 살피느라 바빴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여태까지 보았던 바에 따르면, 유진 님은 몽마의 여왕이 망측한 짓거리를 할 때마다 정색하며 짜증을 내고 분노했었다…….
“으, 은자여, 본녀는 저 도시에 꼭 가지 않아도 괜찮느니라. 본녀는 은자와 성녀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느니라.”
라이미르아는 허둥거리며 유진과 크리스티나의 손을 잡았다.
약삭빠른 도마뱀 같으니. 메르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빼앗은 라이미르아를 흘겨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뭘? 저년이 지랄하는 것 보고 싶지 않았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지.”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하면서 양손에 나눠 쥔 애들의 손을 놓았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속단할 수는 없는 일. 유진은 경계를 유지하면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도시 상공에 떠 있던 제벨라 페이스가 다가오고 있다. 누아르 제벨라가 직접 타고 있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는 놈이다.
갑자기 제벨라 페이스가 성벽을 넘어 대기 중인 행렬의 위로 날아들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지 마라.”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메르는 고개를 푹 숙였고, 라이미르아는 양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크리스티나도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정작 유진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제벨라 페이스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이 지르는 환호성은 어느새부터 뚝 멎었다.
유진은 힐긋 시선을 돌려 옆을 보았다. 고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하나같이 멍하니 풀려 있었다.
‘환상의 마안.’
단순히 날아오기만 한 것이 아니다. 누아르 제벨라는 이곳 군중들 전원에게 환상의 마안을 걸었다. 그들이 어떤 환상을 보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지는 것을 보니 즐겁고 행복한 환상을 보는 모양이었다.
물론 유진은 환상 따위 보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은ㅡ 지금, 행렬 전체를 포착하는 환상의 마안에 저항해 보기 위해서였다.
고개 숙인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발밑에 빛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유진을 중심으로 고작해야 몇 걸음 정도뿐이지만, 이 공간은 유진의 신력에 보호되고 영향을 받는 성역이 되었다.
‘이런 느낌이군.’
성역의 중심. 평소에 보이지 않는, 보일 리 없는 것이 보였다. 제벨라 페이스의 커다란 눈동자에서부터 파동이 퍼져 나가고 있다. 하지만, 파동은 유진이 만든 성역을 침범하지는 못했다.
제벨라 페이스. 커다란 수정 눈동자의 안쪽. 파동이 시작되는 곳. 큼직한 옷을 걸친 누아르 제벨라가 보였다.
지금 유진의 눈동자는, 몽마의 여왕. 그 존재의 깊이를 일부나마 들여볼 수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마력은 유진이 가진 우주보다도 대단했다. 모론을 패배시켰을 때처럼 이그니션과 프로미넌스를 중첩해 화력을 극대화시켜도, 누아르 제벨라의 마력과 힘 싸움은 성립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애당초 저 존재에게 죽음을 줄 수 있을까? 신성이 사고를 흐르고 직관을 만들었다.
불가능. 지금 유진에게 누아르 제벨라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수단을 쓰건, 유진은 누아르 제벨라를 죽일 수가 없다
유진은ㅡ 그 사실을 이해하고, 어이가 없어서 그만 웃어버렸다. 저만한 힘, 저만한 격을 가졌으면서 마왕이 아니라고?
‘성역을 펼쳐서 마안에 저항은 가능하다.’
하지만 누아르가 전력으로 권능을 펼칠 때도 저항이 가능할까. 만약 환상에 빠질지라도ㅡ 신성으로 의식을 회복하는 것은 저번에 확인했다. 지금의 검증으로 확신하게 된 것은, 신력을 지금보다 훨씬 키우지 않고서는 누아르를 죽일 수 없다는 것. 유진은 점점 가까워지는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뜨거운 시선.’
누아르도 유진을 쳐다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아래에 있지만, 누아르의 눈동자는 오직 유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누아르가 유진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잖은가.
설마…… 이 도시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당신이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나의 도시에 온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환영해 줄게요.
시무인에서 헤어지기 전에 여지를 두기는 했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하멜이, 제벨라 시티를 즐기기 위해서 방문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라. 하멜이 도시에 왔다. 누아르는 호기심과 설렘을 느끼면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싸우러 온 것일까? 드디어, 나를 죽이러 온 것일까?
‘아냐.’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애정을 덜고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누아르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만약 지금 날 죽이러 온 것이라면, 당신에게 실망할 것 같아.”
누아르도 유진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심지어 지금 유진의 곁에는 세냐 메르데인도 없지 않나.
‘하지만…….’
절대로 죽일 수 없는 격차. 그것은 건재하지만, 누아르는 유진의 ‘힘’에는 놀람을 느꼈다. 시무인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하물며 저 힘은 인간이 사용하는 마나와는 다르다.
신성력……? 빛을 신앙하기라도 시작한 것일까? 누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환상의 마안이 유진을 침범하지 못하고 있다.
‘내 마안의 대처법을 마련한 모양이야.’
집중해서 노려볼까 싶었지만, 아마 그렇게까지 해버리면 하멜이 화를 내겠지. 누아르는 꿈속에서의 데이트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의식을 장악해 만들어낸 꿈. 그런데도 유진은 홀로 의식을 되찾았었다.
“절대…… 는 아니겠어.”
누아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 하멜은 절대로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지금의 유진에게는, 누아르가 판단할 수 없는 이질적인 힘이 존재했다.
이질적?
“……?”
신성력이 낯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누아르는 여태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성직자를 타락시켜 왔다. 전쟁시대에서 누아르가 농락하고 죽인 신성기사단만 군단 단위는 될 것이며, 그 이전부터 성직자의 욕망을 들추고 타락시키는 것은 누아르의 취미였다.
그런데, 지금 유진의 발밑에 존재하는 ‘빛’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만들었다.
의식하기 시작하니 신경이 쓰이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서,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왼쪽 손가락. 당연히 그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누아르는 그 사실에 이유 모를 애틋함을 느꼈다.
누아르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법 혼란스러웠지만, 그렇다 한들 이미 스쳐 지난 감정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
“사랑?”
누아르는 가까이 온 유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텅 빈 약지에 대한 의식을 떨쳐내고서 한 걸음 걸었다.
쿠구궁.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열린다. 누아르는 의미 모를 애틋한 감정을 지워내고서 활짝 웃었다.
“제벨라 시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
꿈인가?
누아르 제벨라. 긴 세월을 살아온 그녀지만, 지금의 상황은 똑바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제벨라 시티에 찾아온 하멜. 직접 마중을 나가기는 했지만, 행복한 재회는 기대하지 않았다.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험악한 욕을 몇 마디 얻어듣고, 이쪽에서 말하는 사랑을 담은 권유는 모두 거절당하겠지.
이 도시에서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하멜. 어때요? 이 안에 들어와서 함께 날아볼까요?
거절을 상정하고서 했던 말이다. 엿을 먹고, 꺼지라는 말을 듣고 나서…….
‘그래.’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답. 누아르는 아직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물음표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하멜?”
우두커니 서 있던 누아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옆을 돌아보았다.
제벨라 페이스의 안. 누아르가 평소 생활하는 화려한 방.
유진 일행은 지금 이 방에 들어와 있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도시를 내려보던 유진은, 누아르의 부름에 힐긋 시선을 돌렸다.
“뭐냐.”
“음…… 으흠. 아주 의외라서요.”
크리스티나는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손을 꼭 쥐고서 한참 뒤편에 있었다. 유진의 대답과 행동에 당황한 것은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제벨라 시티에 온 이상 누아르 제벨라가 접촉할 것은 당연한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니스는 유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불안감을 억누르면서, 유진과 누아르의 등을 쳐다보았다.
‘……시스터.’
[예. 저도 보았습니다.]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열리고, 누아르가 걸어 나오기 전. 점점 다가오는 제벨라 페이스를 보던 유진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누아르에 대한 경계만 가득하던 눈동자가 흔들리고, 눈썹과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러한 표정이 어떤 감정에 기인한 것인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잘 알고 있었다.
절망.
‘대체 무엇에?’
몽마의 여왕과의 격차 때문에 절망했나? 그럴 리가. 성녀들은 그런 이유로는 절대로 유진이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해괴한 장치에는 나도 여러 궁금증이 있으니.”
유진은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거절하지 않은 거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에서 보는 것이 더 잘 알 수 있을 테니.”
거기까지.
유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누아르에게서 시선을 뗐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진은 제벨라 페이스의 안을 살피는 것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마주 서 있는 유리창을 통해 제벨라 시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유리에 흐릿하게 비치는 누아르 제벨라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환생 428화
나답지 않다.
그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유진 본인이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다. 제벨라 페이스에 궁금증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누아르 제벨라의 방에 제 발로 직접 들어올 정도인가?
안에서 보면 뭔가 다른 것을 더 알 수도 있다, 라는 말은 결국에는 변명거리일 뿐. 실제로 지금 보이는 것은 상공에서 내려보는 제벨라 시티의 풍경과, 창을 통해 흐릿하게 비치는 방의 정경. 그리고.
누아르 제벨라.
유진은, 그녀에게 쏠리는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다. 이해하고 있기에 역겹고 불쾌했다. 사고에 녹아든 신성. 그를 거쳐 이뤄지는 직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이해하게 되는 눈.
누아르 제벨라의 힘을 가늠했다. 그녀의 존재를 주의 깊게 들여보았다. 그것까지는 문제가 없다. 뭔가 특별한 것이 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아가로트가 죽던 순간.
그라는 존재를 가장 크게 뒤흔들었던 것이 누구인가. 아가로트가 최후의 최후에 도망치라고 말했던 상대가 누구인가.
전쟁신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신군에게 죽음을 강요하던 순간조차도, 아가로트는 한 명의 여자는 도망쳐서 조금이라도 더 살기를 바랐다. 그녀에게 신의 죽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전쟁신의 성녀.
황혼의 마녀.
유진은, 누아르 제벨라의 존재에서 황혼의 마녀를 느꼈다. 지금의 누아르에게 아가로트의 신력은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유진의 사고에 깃든 신성은 누아르의 영혼의 정체를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감정이 섞인다.
유진은 자신이 하멜일지언정 아가로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가로트로 살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가로트의 기억, 감정, 그 모든 것은 결국 타인의 것이다. 유진은, 자각해 버린 아가로트를 구분하고 싶었다.
“…….”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모든 마족 중에서 마왕, 아니, 대마왕에 가장 가까운 마족. 전쟁시대 때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몽마의 여왕’이라는 악명은 드높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 누아르는 굉장히 마족다웠다는 말이다.
물론 그 시절까지 거스른다면 너무 옛날이지만, 굳이 그 먼 시절까지 갈 필요도 없지 않나. 전쟁시대 때 누아르가 전멸시킨 군대만 해도 몇 개 군단은 된다. 하멜의, 유진의 기준에서 누아르는 무조건 죽여야 할 적이다.
그러한 인식에, 아가로트의 감정이 섞인다. 그것은 유진에게 있어서 끔찍하고 역겨운 일이었다.
아가로트가 황혼의 마녀를 성녀로 삼고, 그녀와 어떤 관계를 쌓았건, 그 모든 유대는 아가로트의 것이지 절대로 유진의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유대와 감정이, 멋대로 의지를 침식한다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관심이라?”
누아르는 유진의 감정을 헤아릴 수는 없었다. 왼손가락의 공허함과 애틋함은 짧게 스쳐 지나간 것일 뿐이라, 유진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누아르에게는 많은 감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유진에게는 아가로트의 신검이 있다. 그로 인해 자각된 신성은 점점 강해지고 있고, 유진 본인도 아가로트의 기억 일부를 보았다.
심해의 심연에 묻힌 도시가 유진에게 기억을 되새겼듯, 아가로트가 마지막까지 미련을 남겼던 황혼의 마녀 또한 유진에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준다.
하지만 누아르는, 유진처럼 기억이나 감정을 떠올릴 수 있는 연결고리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 신성에 대한 향수로 단편적인 감정은 느꼈으나, 그 이상은 느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전쟁신의 성녀도, 황혼의 마녀도 아니다.
누아르 제벨라.
몽마의 여왕. 헬무드 제국의 공작. 드리미아와 제벨라 시티, 제벨라 파크의 주인. 그녀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유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의도적인 몸짓이 섞였다. 부랴부랴 나오느라 걸쳤던 가운이 살짝 흘러내리고, 누아르의 살결이 노골적으로 보였다.
“제가 하멜, 당신에게 많은 애정을 지닌 것이야 뭐, 이제 와 말하기에는 입 아픈 일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적이잖아요? 이 멋진 제벨라 페이스에 대해서는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냥은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누아르는 유진이 이런 것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지금 시대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옛날에는 용병과 창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특히 전쟁시대는 어지간한 용병단에는 창부 무리가 포함되었다.
그런데도 하멜은, 용병으로 처음에 이름을 떨쳤던 주제에 이런 종류의 유혹에는 내성이 없었다.
누아르는 유진이 얼굴을 붉히거나, 표정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것을 기대했다. 어느 쪽이건 자신의 행동에 의해 하멜이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 누아르에게는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맞아.”
하지만 유진은 얼굴을 붉히지도, 표정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는 이쪽이 무안할 만큼 아무런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린 적이지.”
유진의 이성은 누아르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언젠가 누아르를 반드시 죽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ㅡ 가슴 밑바닥에서, 조금은 ‘다른’ 관계를 바라는 감정이 번지고 있다.
구분했다. 저 감정은 하멜의, 유진의 것이 아니다. 누아르가 속삭인 것처럼 유진과 누아르는 서로를 ‘적’이다. 그 말이 유진을 가슴을 차갑게 식혔다.
“하멜. 날 죽이러 온 건가요?”
누아르는 유진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싹할 만큼 차가운 살의를 느꼈고, 그것에 설렘을 느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나는…… 열렬히 당신을 맞이하겠지만, 마지막에는 실망할 것만 같아요.”
설렘과는 별개로, 누아르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세냐 메르데인도 없다. 이 세상에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다른 조력자를 데려온 것도 아니다. 성룡도 되지 못한 헤츨링을 전력으로 쳐야 하나? 주인에게 조율을 받았다고 해도 사역마는 결국 사역마일 뿐.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이 시대의 성녀. 확실히, 누아르도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우습게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원에서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성녀다운 특별함은 대단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용사의 존재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마왕 토벌 등의 경험을 쌓은 덕인지, 이제는 ‘성녀’임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의 특별한 힘이 느껴졌다.
“널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면? 어떡할 거냐?”
“우리는 서로의 적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나는 우리의 관계가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둘이 서로의 최후를 장식한다면…… 그 이전은 어떤 관계건 상관없다구요.”
특별하다라.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으로서는 널 죽이는 것이 불가능해.”
“흐흥.”
잠자코 인정하는 모습에 누아르는 짓궂은 가학심을 느꼈다.
그 하멜이 손바닥 안으로 스스로 들어왔다고 할 수 있는 상황. 즐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겠지만…… 누아르는 그러한 생각을 접어두었다. 300년 전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으나, 지금은 전쟁 상황도 아니며, 이곳은 누아르의 도시기 때문이다.
“제벨라 파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평범한 도시도 아니다. 헬무드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대가만 지불한다면 바라는 모든 쾌락과 유희를 즐길 수 있는 도시. 제벨라 파크의 직원들은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미소로 환대한다.
설령 그 손님이 언젠가 이 도시를 박살 낼 생각뿐인 용사일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도시의 주인인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환영했다.
“무엇을 즐기고 싶나요? 이 도시에서 가장 사람이 몰리는 곳은 카지노인데, 하멜, 당신이 카지노를 즐길 것 같지는 않고…….”
누아르는 재잘재잘 떠들면서 시선을 힐긋 돌렸다. 크리스티나의 손을 꼭 잡고서 뒤쪽에 숨은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보였다. 누아르는 둘의 눈동자에 어린 설렘을 눈치채고서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저것들을 어리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누아르는 순간 고민이 들었지만, 겉보기에 어린아이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일단 말은 계속했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시설도 잔뜩 있답니다. 제벨라 파크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테마파크를 모토로 삼고 있거든요.”
어린아이들을 위한 시설, 이라는 말에 라이미르아와 메르는 꿀꺽 침을 삼켰다. 누아르는 빙글 몸을 돌리더니, 크리스티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냥 걸어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넉넉한 품의 가운이 누아르의 몸에 착 달라붙더니 완전히 다른 옷이 되었다. 누아르의 옷은 마치 그림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나 입을 법한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드레스가 되었다.
또각, 또각, 또각. 누아르가 걸을 때마다 높다란 구두 굽이 소리를 발했다. 누아르는 가슴을 보란 듯이 내밀고서 크리스티나를 내려다보았다.
“…….”
크리스티나, 그리고 아니스는 가슴을 내밀고 있는 누아르를 고까운 눈으로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대로 승부를 해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하는 짓거리가 우습고 마음에 안 들며 천박해서 짜증만 났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위압감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누아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의 존재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뭡니까?”
아니스가 의식의 앞으로 나왔다. 저 갈보의 여왕을 대하는 하멜의 반응이 왠지 이상했지만, 그 이유를 당장 물을 수는 없는 일.
‘설마…….’
아니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능성을 애써 부정했다.
“당신에게는 딱히 볼 일이 없어요. 아니면, 당신에게도 남몰래 숨긴 욕망이 있나요?”
누아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가볍게 의식을 넘어 무의식의 표면을 떠보려 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성녀의 정신 방벽이 견고했다. 생김새만 보면 가슴 깊은 곳에 음습한 욕망이 그득할 것 같은데. 누아르는 언젠가 반드시 성녀의 욕망을 들춰보리라 생각했다.
“빛이 영과 육을 언제나 비추시는데, 남모를 욕망 따위가 있겠습니까. 제게 볼 일이 없으시다면 부디 물러서시거나 고개를 돌려주십시오. 누아르 제벨라. 당신이 입을 열 때마다 빨다 만 걸레 냄새가 지독해 숨을 쉬기 괴롭습니다.”
“맙소사.”
상상도 못 한 폭언. 누아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내뱉고 나서 아차 싶었던 것은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스의 복제품이라 그런가?’
얼굴이 닮은 것이야 진즉부터 알았지만, 설마 혓바닥까지 닮았을 줄이야. 아니, 어쩌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지옥의 아니스의 환생일 수도 있다…… 누아르는 여러 가정을 떠올리면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이가 없을 만큼 저속한 음해라…… 뭐라 대꾸하고 싶지도 않네요.”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낮추었다. 성녀의 뒤에 숨은 메르와 라이미르아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아니스는 냉큼 뒤로 물러섰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몸을 낮춘 누아르의 얼굴 한복판에 무릎을 꽂아버리고 싶었지만, 그 마음은 간신히 참아냈다.
“제 아이들에게 다가오지 마십시오.”
아니스,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제 아이들? 당신 아이도 아니잖아요?”
“다가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녀들은 누아르의 말을 무시하고서 내뱉었다. 그 말에 감격한 라이미르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언제나 어머니라 부르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차마 그렇게 부를 수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설마, 경애하는 성녀에게서 직접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성녀들의 오른쪽 손을 잡고 있던 메르도, 라이미르아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메르에게는 세냐라는 창조주가 있기는 하다만, 세상에 꼭 어머니가 한 명뿐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경우에 따라서는 두 명의 어머니도 있을 수 있는 법. 직접 낳은 어머니와 가슴으로 낳은 어머니. 메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성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얘들한테 흉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거든요. 나도 아이들은 굉장히 좋아해요.”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화악! 일그러진 공간에서 피크닉에 어울릴 바구니가 나타났다. 누아르는 바구니 안에 손을 넣으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아마 쟤들도 나를 좋아할걸요?”
바구니에 넣은 손이 밖으로 나왔다. 꼭 쥐고 있던 주먹이 열리자,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2개의 코인이 나타났다.
“제벨라 파크의 스페셜 코인을 뛰어넘는, 스페셜 스페셜 코인이랍니다.”
스페셜 스페셜이라는 말에 두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말이에요, 세상에 딱 2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코인이에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제가 지금, 당신들을 위해 만들어낸 코인이니까요. 스페셜 스페셜 코인에 불가능은 없답니다! 그 코인을 가진 자는, 제벨라 파크에서 신과 동등하다구요!”
“또 무슨 미친…….”
“순수한 호의일 뿐이에요. 어차피 저를 죽이러 온 것도 아니라면서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당신이 정말로 이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바람을 무조건 억누르며 못 하게 해서는 안 된답니다.”
그 말에 아니스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의식의 안에서 이야기를 듣던 크리스티나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로 만들어진 둘에게 유년기의 기억은 언제나 강압과 강박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아르는, 그런 성녀들의 과거를 뻔히 짐작하고서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싫어하던 것을 똑같이 겪게 하고 싶은 것이라면, 흐흥, 그것도 이해해 드리죠. 인간이란 대부분이 자기 혼자만 불행을 겪은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여 연쇄를 만드는 법이니까.”
“감히……!”
“받아도 된다.”
아니스가 발끈해서 폭언을 뱉으려는 순간. 창밖을 내려보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이 도시. 놀기 좋게 잘 만든 것은 사실이잖아.”
“……유진 님.”
“박살 나기 전에 놀아봐야 할 것 아냐.”
아니스는 잠시 주저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도 조금은 유진의 뜻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이곳만큼 놀이에 특화된 도시는 없다. 언젠가 유진이 누아르를 죽이러 온다면ㅡ 이곳, 제벨라 시티부터가 폐허가 될 것이다.
“받아도 됩니다.”
아니스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아니스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메르는 오만하게 턱을 꼿꼿이 세우고서, 누아르의 손에 들린 코인을 매몰찬 손길로 빼앗았다.
“내…… 내놔!”
턱은 세웠지만 눈동자와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메르가 먼저 그렇게 행동하니, 라이미르아도 용기를 냈다. 용마성에 갇혀 지내던 시절부터 동경하던 누아르 제벨라 공작…… 라이미르아에게 있어서 누아르는 여전히 닮고 싶은 멋진 마족 여자였지만, 그러한 동경은 성녀들에 대한 경애를 넘지 못했다.
“고, 공물을 바치는 것이니라!”
라이미르아도 냉큼 손을 뻗어서 누아르에게 코인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런 무례를 겪으면서도 누아르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낮추었던 몸을 일으키며, 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이대로 영원히 하늘을 떠돌아도 난 즐거울 것 같지만…….”
누아르는 여전히 창밖을 노려보고 있는 유진의 등을 보았다.
“그랬다가는…… 여러 욕심이 나버릴 것만 같은데. 아니면, 어때요? 당신들만 먼저 내리고, 나와 하멜, 둘만이 남는 것은?”
“저기로 가지.”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저 아래에 보이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누아르의 복장과 마찬가지로, 그림 동화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알록달록하고 과장 된 외관의 성이었다.
오기 전에 가이드 북을 통해 알아본 정보에 따르면 제벨라 파크는 컨셉에 따라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다. 카지노 따위의 도박과 클럽 등의 유흥을 목적으로 한 구획이 제벨라 파크의 중심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관광객을 위한 구획도 부족함 없이 충실하게 형성되어 있다.
“제벨라 캐슬!”
후다닥 유진의 곁으로 달려온 라이미르아가 울부짖었다. 그녀는 뒤늦게 깨닫고서 홱 고개를 돌려 누아르를 쳐다보았다.
“맞아요! 지금의 저는 제벨라 캐슬의 가장 높은 탑에 갇힌 아름다운 프린세스 제벨라랍니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판타지 스퀘어에는 나름대로 배경 스토리가 있지만, 그것까지는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제벨라 파크에 꼭 가고 싶다 생각했던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판타지 스퀘어의 배경 스토리에 통달해 있다.
저곳, 제벨라 캐슬은 판타지 스퀘어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이다. 동시에 판타지 스퀘어에 존재하는 모든 어트랙션과 스토리의 중심이기도 했다. 제벨라 캐슬의 탑에는 프린세스 제벨라가 감금되어 있다. 프린세스 제벨라는 언젠가 자신을 구하러 올 용사를 기다리며…….
그런 뻔한 동화가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머리를 스치는 동안, 제벨라 페이스는 유진이 가리킨 성에 가까이 다가갔다.
“최상층의 방을 드리죠. 대륙의 국왕이 청해도 내주지 않는 비밀의 방이에요.”
비밀의 방.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울림인가.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흥분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누아르는 능숙하게 둘의 표정을 살피면서 반응을 끌어냈다.
“최상층의 방.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누아르의 손가락이 부딪치며 딱, 소리를 발했다. 그러자 제벨라 캐슬의 정원에 존재하는 커다란 호수의 수면이 요동쳤다. 그 호수의 놀이기구를 즐기고 있던 관광객들이 놀란 비명을 내질렀지만, 호수의 현상은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사악한 드래곤!”
“카이카리아!”
소용돌이에서 시커멓고 커다란 드래곤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검은 비늘만 봐도 노골적이었지만, 라이미르아는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크아아아! 호수에서 날아오른 카이카리아가 탑에 가까이 다가가며 불을 뿜었다.
“이 성에는 마음씨 착한 공주를 괴롭히는 온갖 위협들이 존재하죠…….”
쿠르르릉! 성의 하늘이 돌연 시커멓게 물들었다. 파직거리는 번갯불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성을 드리웠다. 커다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마법사의 그림자.
“사악한 마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
그림자에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통해 성별은 유추할 수 있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다니…… 하긴, 대륙 모든 마법사들의 지지를 받는 세냐를 저런 식으로 희화화할 수는 없었으리라.
“드래곤의 구애를, 마녀의 질투를 받는 공주가 머무르는 곳은 바로 제벨라 캐슬의 가장 높은 탑.”
어느새 누아르는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귓가에 속삭이면서 두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 방에 지내는 당신들이 바로, 성에 갇힌 공주인 거예요.”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환생 429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유진 일행을 탑의 방에 내려준 뒤.
누아르는 곧장 제벨라 캐슬을 떠났다. 같이 내려서 유진과 시간을 보낼까는 욕심도 들었지만, 유진의 상태가 이전답지 않으니 누아르도 욕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살의는 여전했어. 하긴, 나에 대한 살의가 바뀔 만한 사건은 없었으니.”
누아르는 푹신한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이전에 꿈을 보여준 것? 라비스타와 베르무트에 대한 정보를 주었지. 하지만, 그러한 호의가 하멜에게서 살의를 거둬갈 리는 없다. 실제로 그 순간에 하멜은 이전과 다름없이 누아르를 증오하고 살의를 내비쳤다.
하멜에게서 작은 의문이 생겼던 것은 사실이다. 누아르도 그건 이해하고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결국에는 인간이라, 마족인 누아르의 사고방식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너를 증오하지 않는 것을 바라서. 네게 몇 번의 도움을 받아, 너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손을 잡아서, 함께 유폐의 마왕과 싸우…….
끝까지 듣지 않은 말. 들을 가치가 없던 말. 누아르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멜의 말은 굉장히 ‘귀여웠다’. 당연히 누아르는 저딴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멜이 누아르를 죽이는 것 하나를 바란다면, 누아르는 그보다 한 가지를 더 바란다.
하멜의 손에 죽고 싶다.
‘나’를 죽이지 못한 하멜을 죽이고 싶다.
하멜이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기를 바란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증오하기를 바란다. 순수하고 올곧은 살의로 무장해서 내 앞에 서기를 바란다.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나를 죽여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최후의 최후에는 작은 망설임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욕심쟁이야.”
누아르는 뺨을 어루만지며 키득키득 웃었다.
감정적인 교류. 기왕이면 몸까지 몇 번 섞을 수 있으면 좋고. 그래, 둘 사이에 추억이 몇 개는 존재했으면 좋겠다. 나, 혹은 당신이…… 서로에게 죽음을 주기 코앞까지 왔을 때. 그 최후의 최후에, 우리 둘이 똑같이, 추억을 떠올리며…… 작은 망설임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 망설임을 넘어서서.
원초적인 살의를 집행하고 나면. 돌이킬 수가 없게 되면. 어느 쪽이든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기왕이면, 기왕이면…… 죽여 버린 것을 후회하고, 슬퍼하고, 애도하고, 자기 자신마저 원망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누아르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당신도 그렇게 되는 걸까? 하지만…… 이상한걸. 나는 아직 당신을 그렇게 바꿀 만큼 질척거리지 않은 것 같은데.”
누아르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중요한 것이 있다.
‘살의를 거두면 안 돼.’
설마 하멜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안 한다. 얼마큼의 추억과 유대가 더해졌듯, 하멜은 하멜다워야 한다. 최후의 최후에, 망설임에 살의를 거둬버린다면. 누아르는 주저 없이 하멜을 죽일 것이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후후, 내가?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감정과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야.’
누아르가 최후에 망설여 손을 거둔다면.
‘그 순간에 당신에게 죽는 것도 멋지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순간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살의를 거둔다면. 설마, 절대로,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쪽의 호의와 애정을 ‘오해’해서, 적의와 살의를 거둔다면. 나를 죽이려 들지 않는다면.
그때는 누아르 쪽에서 욕심을 버릴 수밖에 없다. 최후의 망설임, 낭만, 로맨틱한, 그런 것을 포기할 수밖에.
시무인의 왕성에서 말한 것처럼ㅡ 하멜이 ‘싫어할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멜이 증오와 살의를 저버린다면, 직접 나서서 증오와 살의를 재충전시켜 줄 것이다.
공주님이 될 생각에 신이 나서 외치던 두 꼬마를, 아니스처럼 폭언을 뱉던 성녀를, 세냐 메르데인을,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라이언하트의 쌍둥이와, ‘유진 라이언하트’의 친부와, 다른 라이언하트 전원을 찢어 죽이고 나면.
하멜은.
“내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그런 일을 저지르면, 하멜은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당신도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무렴, 내가 직접 말한 것이잖아.”
지금 하멜이 무엇에 의해 흔들림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누아르는 하멜을 의심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것과 뭔가 연관이 있나?’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반년 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주제에…… 갑자기 제벨라 파크를 방문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아르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지금 헬무드에는 전운이 떠돌고 있다. 이미 여러 마족들이 나하마로 넘어갔는데, 바벨의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심지어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조차도 침묵하고 있다.
바벨은 침묵하지만, 판데모니엄에는 여전히 평화롭다. 통제가 걸린 것도 아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은 수면 위에서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수면의 아래. 전쟁에 목마른 마족들이 움직이고 있다. 나하마에 건너간 것은 그쪽 던전 흑마법사들과 계약을 맺은 마족들뿐만이 아니다.
전쟁. 다음 시대를 선점하고 싶어 하는 젊은 마족. 전쟁시대에서부터 살아남은 주제에 내세울 것이 없는 퇴물들.
누아르는 그들이 나하마로 건너간 것을 비웃음과 함께 이해했다. 언제일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큰 전쟁이 벌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판데모니엄에서 시작될 전쟁에서, 지난 시대에서도 살아남지 못한 퇴물들과 이룩한 것도 적은 애송이들이 활약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나하마에는 제법 많은 마족들이 건너가게 되었다. 유폐의 마왕이나 가비드가 제동을 건 것도 아니니, 앞으로도 건너간 마족들의 수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메마른 사막에 마족이 얼마나 넘어 가건ㅡ 그곳에서 벌어질 전쟁의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사막은 아멜리아 머윈의 공개 처형장이 될 것이다.
‘반년 동안 어디서 뭘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무인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어. 그 뭔지 모를 힘까지 생각한다면, 지금 싸웠다면…… 혼자서 아이리스를 죽였겠지.’
아멜리아 머윈은 죽어가고 있다. 그녀가 특별하고도 뛰어난 흑마법사라는 것은 누아르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라비스타에 틀어박힌 상태에서 멸망의 마력에 선고된 죽음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다면 결국은 라비스타에서 빠져나올 터. 노골적으로 전쟁을 바라고 전쟁을 준비해 왔으니, 아멜리아는 전장이 될 사막에 올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시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된 아멜리아 머윈이ㅡ 지금의 하멜을 감당할 수 있을까? 누아르는 아멜리아가 가지고 있는 패들을 가늠해 보았다.
그녀가 지닌 패 중에서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더는 데스나이트라고도 부를 수도 없는 망령. 그 존재에 멸망의 마력을 더하면서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의 유진과는 전투가 성립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아멜리아도, 그녀의 애완동물들도, 비참하고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하멜이 이 도시에 온 것은 아멜리아를 꾀어내기 위해. 혹은 헬무드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겠지.’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일방적으로 이쪽의 애정을 이용하며 덕을 보겠다는 것인데…… 누아르는 그 사실에 아무런 불쾌도 느끼지 않았다.
아멜리아가 비참하게 죽는 것은 누아르도 보고 싶은 광경이다. 누아르는 아멜리아가 찢겨 죽는 모습을 상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
뺨을 어루만지던 중에, 손가락에 신경이 쓰였다. 누아르는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얼굴 앞으로 왼손을 쭉 뻗어보았다.
“……흠.”
당연히 누아르의 왼손은 텅 비어 있다.
뜬금없이 반지에 대한 생각은 왜 떠올랐던 것일까? 누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까 스쳐 지나간 감정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잘되지 않았다. 워낙 빠르게 지나가고, 잔재랄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보았다. 그러자 누아르의 왼손에 화려하고 굵직한 반지가 휙휙 나타나고 사라졌다.
평소 누아르가 자신을 꾸미기 위해 끼던 반지들. 어색하거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취향이 바뀌었나?’
누아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휙휙 털었다.
* * *
제벨라 캐슬의 가장 높은 탑, 최상층 펜트하우스. 평소 손님을 절대로 받지 않는다던 말은 사실이었는지, 가구 외에 생필품은 거의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진 일행이 펜트하우스에 들어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직원들이 우루루 올라와서 물품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달받은 물품 중에는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위한 옷도 여러 벌 있었다. 흑암의 망토 안에도 둘을 위한 옷은 종류별로 수십 벌이 있기는 하지만, 직원들이 가져다준 것들처럼 ‘공주’ 같은 옷은 없다.
결국 둘은 꺅꺅거리며 한참 동안 공주드레스를 고르다가, 도저히 고르지 못해 유진과 성녀들의 추천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나가서 구경하고 와.”
“네?”
“은자여! 본녀와 메르, 단둘이서 나가란 말이니라?”
“그래.”
설마 유진이 둘뿐인 외출을 허락할 줄이야.
메르는 믿을 수 없단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별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제벨라 파크. 몽마의 여왕이 다스리는 도시지 않나.
“저희가 납치되거나 그러면 어떡해요?”
“누가 너희를 납치할 것 같은데?”
“갈X의 여왕이요.”
메르의 대답에 유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메르의 입에서 갈X의 여왕이란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 호칭 자체는 틀릴 것이 없다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 험하고 저렴한 말 아닌가?
“그런 못된 말은 어디서 배워먹었어?”
“유진 님, 혹시 진심으로 물어보시는 건가요?”
“그럼 내가 농담으로 물어보겠니?”
“일단 저 말은 유진 님과 세냐 님과 아니스 님에게 들었구요. 저거 말고도 못된 말 많이 아는데, 과연 누구한테 배웠을까요?”
“얘 말하는 것 좀 봐. 아주 시건방져.”
“그 시건방짐은 누구한테 배웠을까요? 한번 맞춰보세요.”
알록달록 공주 드레스를 입은 메르가 잘 만든 장난감 지팡이를 흔들며 물었다. 만약 애니실라가 봤다면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을 만큼 깜찍한 모습이었지만, 내뱉는 말은 얄밉기 짝이 없었다.
“……그 서큐버스 년이 너희를 납치할 가능성은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왜요?”
“너희를 납치해서 얻을 이득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은자여, 본녀는 사실 은자와 성녀의 손을 잡고 구경을 나가고 싶느니라.”
라이미르아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다가와 라이미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 떠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라이, 오늘은 메르와 둘이서 사이좋게 놀고 오십시오.”
“성녀여…….”
“다음에 저와 유진 님과 가고 싶은 장소를 탐색하는 겁니다. 둘이 어떤 장소를 고를지 기대하겠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등을 떠밀어주니, 라이미르아와 메르는 언제 주저했냐는 듯이 깡총거리며 펜트하우스를 떠났다.
“세냐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겁니까?”
둘이 떠난 것을 확인한 뒤,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펜트하우스에 도청이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했다. 유진은 널따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대답했다.
메르가 유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유진이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은 의식의 깊은 곳에 감출 수 있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가 황혼의 마녀의 환생이라는 것은ㅡ 메르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아니, 세냐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사실 유진이 비밀을 지켜달라 말한다면 메르도 어쩔 수 없이 따르겠지만, 그래 버리면 메르에게 거짓말을 강요하는 꼴이지 않나.
“정확히 말하자면 네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방에 장식처럼 놓였던 술병을 들고서 유진의 옆에 앉았다.
“하멜, 당신 혼자서 왔다면 숨길 수 있었겠죠. 하지만 저와 같이 오고, 제가 봐버린 것을 어떻게 합니까?”
“역시 눈치챈 거냐.”
“당신답지 않았으니까요.”
아니스는 술병의 코르크를 뽑으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티나도 그렇지만, 저 역시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에는 능숙하답니다. 특히…… 저희는 ‘절망’이란 감정을 굉장히 잘 알고 있죠.”
술병이 유진 쪽으로 기울어졌다. 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술병을 받았다. 잔에 따르고 싶은 기분도 아니어서, 그대로 입술로 가져가 술을 입안에 콸콸 부었다.
유진은 그대로 술병을 반 정도 비운 뒤에 아니스에게 돌려주었다.
“아가로트의 기억입니까?”
아니스는 줄어든 술병의 무게를 가늠하며 물었다.
확신까지는…… 없다. 하지만, 저 하멜이. 그토록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하던 누아르와 대치한 순간에 ‘절망’을 느낀다면, 저런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누아르와의 격차? 그런 것이야 진즉부터 알던 것. 아니스가 아는 ‘하멜’이라는 남자는,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 절망감을 느낄 만큼 얕은 남자가 아니었다. 하물며 상대가 ‘적’이라면 더더욱.
“어.”
억누르지 않은 취기가 확 하고 올랐다. 뱃속이 불꽃이라도 삼킨 것처럼 뜨거운데, 머리는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하멜, 당신이…… 그렇게나…… 절망한 것을 보고. 저도 나름대로, 추측은 했습니다.”
술병을 들었지만, 아니스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마시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즉부터 알았다. 크리스티나의 번뇌를 비웃었던 것이 바로 아니스 본인이었으니. 하지만, 그래도, 조금의…… ‘기대’가 정말로 없었는가. 아니스는 그러한 생각에 도저히 ‘그렇다’라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에 전생은 없다. 세냐와 모론, 아니,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고대의 누군가의 환생일 수는 있어도,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결코 누군가의 환생이 될 수 없다. 그녀들의 존재, 혼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절망하고 싶지는 않다. 자각도 기억도 없는 전생 따위보다 지금의 현실이 중요하고 소중한 법이니.
하지만, 자각과 기억이 있는 자에게. 전생의 인연은 가벼운가?
“황혼의 마녀.”
전쟁신의 성녀.
아니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몇 번이고 탄식을 흘렸다. 그 침묵에서,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다니까?”
“말 안 하면, 뭐 답이 나옵니까?”
“무슨 답?”
“당신 혼자서 고민한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유진은 다시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아니스. 이 문제에서 답은 하나밖에 없고, 나는 그 답 외에 다른 것을 찾을 생각이 없어. 그래서 너나, 크리스티나, 세냐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무슨 말입니까?”
“누아르, 그년이 황혼의 마녀의 환생이라서 뭐? 아가로트가 그녀를 특별하게 여겼건 말건,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잖아.”
유진은 아니스의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았다. 평소였으면 절대로 술병을 뺏기지 않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스도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유진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너희가 알 바는 더더욱 아니지. 너희는 아가로트가 아니니까.”
“…….”
“즉, 누아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철저하게 나 자신의 문제라는 거야.”
유진은 술병에 남은 술을 모조리 입안에 부어버렸다.
“누아르 제벨라를 죽인다.”
“……하멜.”
“그래, 나는 하멜이지. 유진 라이언하트기도 하고.”
유진은 술병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나는 저것 외에 다른 답은 생각하지 않아.”
빌어먹을 환생 430화
하멜답고 유진다운.
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저 대답은 그녀가 알고 있는 ‘그’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에 자유로운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랬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아니스는,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저것을 떠올려 버린 유진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아니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은 왜 찾아?”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요.”
“안 그럴 것 같은데.”
투덜거리는 대답. 아니스는 한숨을 내쉬며 유진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유진의 금색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설령 후회할 지라도, 그 후회는 내가 감당할 것이지.”
“저는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은 별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고. 내가, 아가로트의 기억과 감정에 홀려서 누아르를 죽이지 못하겠다고 결정하면. 아니스 그 결정에 납득할 거냐?”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결정한다면, 너는…… 납득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세냐도 그럴 것이고.”
“안 돼. 틀렸어.”
유진의 손도 움직였다. 그는 무릎 위에 얹힌 아니스의 손등을 덮고서,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기울여 아니스의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아니스, 크리스티나. 너희는 내 동료야. 나를 위해주고 있지. 그리고 나와 함께 마왕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어.”
“……예.”
“그렇다면, 내가, 내 것도 아닌 기억과 감정에 흔들려서 병신 같은 결정을 내리려 할 때. 너희가 해야 할 것은, 내 뒤통수에 그 흉악한 철구를 꽂아버리는 거야.”
“…….”
“누아르 제벨라가 황혼의 마녀의 환생이라서, 뭐? 누아르에게 그 기억은 없다. 있을지라도 안 돼. 황혼의 마녀는 내 기준에서 씨X년이었고, 누아르 제벨라도 마찬가지로 씨X년이다. 너희 기준에서는?”
“험한 말을.”
“왜, 너 욕 좋아하잖아.”
유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코앞에서 저런 미소를 보자, 아니스의 가슴이 괜히 설레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서 유진의 얼굴을 밀어냈다.
“저희 기준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겠습니까? 특히 저는 하멜, 당신과 함께 그 끔찍한 시대를 겪었습니다. 당연히 제 기준에서도 누아르는 죽여 마땅한 년입니다.”
“맞아. 그러니까…… 내게 다른 답이 있지 않겠냐는 말 따위는 하지 마.”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아르 제벨라. 그년도 다른 답 따위는 고르지 않을 거다.”
“무슨 뜻입니까?”
“그 미친년은 내 손에 죽거나, 아니면 제 손으로 나를 죽이고 싶어 하거든. 프라이드가 높고, 자기애도 지독하지.”
“노골적이죠.”
아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밖을 보았다.
그녀는 하늘에 떠다니는 3대의 제벨라 페이스와ㅡ 이 도시 중심에 우뚝 솟은, 누아르 제벨라의 전신상을 보았다. 오른손에는 꽃다발, 왼손에는 돈주머니를 들고 있는 행운의 제벨라 상. 이 도시 카지노에서 대박을 터트려서 집에 돌아가자는, 제벨라 드림의 상징물.
“……그녀만큼 자기애가 넘치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 세냐조차도 서클 마법식와 위치크래프트, 이터널 홀에 자기 이름을 넣지 않았건만…… 제벨라 시티, 제벨라 파크, 제벨라 페이스, 제벨라 캐슬 등. 그녀에 관련된 대부분의 것에 이름이 들어가 있다.
“맞아. 그런 누아르한테 가서, 사실 전생의 너랑 아는 사이라서 못 죽이겠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면. 그년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아?”
“좋은 대답은 안 할 것 같군요.”
“아마 내 주변부터 다 죽이려 할 거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내뱉었다.
“누아르라면 무조건 그럴 거야.”
일그러진 신뢰.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유진은 누아르를 이해하고 있다.
유진이 아가로트의 기억과 감정을 거부하듯, 누아르도 자신이 황혼의 마녀의 환생이라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건, ‘누아르 제벨라’인 자신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아니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아르 제벨라와 황혼의 마녀. 확실히, 그것은 자신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무엇을 할 겁니까?”
“구경.”
“……정말로?”
“카지노는 별로 가고 싶지 않고, 그냥 이쪽 구역을 돌아다니다가…… 밤에는 혼자 도시나 살펴보게.”
도시가 화려할수록 명암이 뚜렷한 법. 유진은 제벨라 시티의 어둠이란 것을 보고 싶었다. 그 어둠이 시커멓고 썩어 있을수록, 누아르에 가진 망설임이 사라질 테니.
둘 사이의 대화가 단절되었다.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섣불리 유진에게 말을 건네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왜 자꾸 쳐다봐?”
“그럼 안 쳐다봅니까?”
뚱한 표정으로 돌아온 대답.
유진은 지금 대답한 것이 아니스인지, 크리스티나인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빈 술병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괜히 미안하네. 너 좋아하는 술을 내가 다 비워 버려서.”
“술이야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가져다줄 텐데 당신이 미안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저는 지금 술 마실 기분이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네가 그럴 때도 있냐?”
“예, 저도 참 놀랐습니다. 그토록 술 좋아하는 저도 마시고 싶은 기분이 아닐 때가 있더군요. 제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다니, 참 고맙습니다, 하멜.”
아니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빈정거렸다. 유진은 그런 아니스를 어떻게 대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뻗었다. 대뜸 다가온 손이 어깨에 올라가자, 아니스는 화들짝 놀라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뭐, 뭡니까?”
“걱정해 줘서 고맙다.”
진지한 얼굴, 낮게 깔린 목소리. 어깨를 감싸 쥐는 손가락. 아니스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머릿속에서는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다.
[시스터!]
안 된다. 바꿔주지 않을 것이다. 양보해 줄 수 없다. 지금 이 거리에서 하멜의 감미로운 시선을 느끼는 것은 바로 나 아니스 슬리우드다.
[시스터!]
크리스티나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니스는 이 육체의 적법한 주인의 부르짖음을 애써 무시하면서 생각했다.
‘크리스티나, 이 정도는 저도 누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만약 여기서 하멜이 더 용기를 내어 다가온다면, 그때는 반드시 당신께 양보하겠습니다.’
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삐죽거리던 입술을 조금 더 내밀었다. 그 모습이 흡사 오리 같았지만, 지금의 아니스에게 그런 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순간. 욕심을 부리며 양보하지 않는 아니스도, 비명을 지르며 권리를 주장하던 크리스티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말로만?”
“응?”
“걱정해 줘서 고맙다더니. 말로만 고맙다고 하면 끝입니까?”
아니스는 여전히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고서 말했다. 입술을 너무 내민 탓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스가 있는 대로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노골적으로 눈짓을 해대니, 유진도 결국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 음…….”
“하멜. 저와 크리스티나는 항상 당신을 위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네, 저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시스터, 왜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 또한 유진 님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재빨리 나선 크리스티나가 말을 덧붙였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아니스가 지금 와서 어떻게 날 위해 죽어줄 수 있다는 걸까? 유진은 그것이 굉장히 궁금했지만, 직접 말했다가는 아니스에게 몇 대는 얻어맞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런 저희에게, ‘걱정해 줘서 고맙다’라는 말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입니다.”
“어…… 그래도…… 고마운 것이니 고맙다는 말을 해야…….”
“그래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로만 고맙다고 하면 끝이냐고. 이거 참, 생각해 보니 당신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오리처럼 내밀고 있던 입술이 들어갔다. 아니스는 어쩔 줄 몰라 흔들리는 유진의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등신은 왜 밥상을 차려줘도 먹지를 못하는가?
“하멜, 당장 요 반년 동안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와 크리스티나는 당신의 뜻을 따라, 매일매일 눈만 오질라게 내려대는 설산에서 지냈습니다.”
“어…… 어어.”
“모론이 끌어다 준 온천은 뭐,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만. 그 외에 괜찮거나 좋다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죠. 그렇다고 매일을 편안하게 쉰 것도 아니었지요? 하멜과 모론, 당신들이 매일매일 사지가 부러지고 피범벅이 되어서 돌아왔으니.”
“어…….”
“심지어 하루에 한 번도 아니었죠? 두세 번은 기본으로 저와 크리스티나의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그것에 대해서는 치료를 받을 때마다 고맙다고…….”
“말로만 고맙다고 하면 끝이냐고 몇 번을 말하게 만드는 겁니까?”
아니스는 두 눈을 얇게 뜨고 유진을 흘겨보았다.
그럼 고마울 때 고맙다고 말을 해야지 다른 뭘 해야 하나? ……유진은 아까 전 있는 대로 입술을 내밀던 아니스가 떠올랐다.
“……어…… 아니스. 네 몸은, 그러니까, 크리스티나의 것이잖아. 그렇지?”
“맙소사, 하멜!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저 이상으로 열렬히 바라는 것이 바로 크리스티나입니다!”
[시스터!]
“지금 제 머릿속에서 크리스티나가 내지르는 외침이 당신의 귀에 들리지 않아 참으로 다행입니다. 앙큼하고 망측하며 음습한 크리스티나!”
[시스터! 제 머릿속에서 나가십시오!]
“말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설마 축객령을 들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아니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튼, 하멜! 모든 것은 크리스티나도 바라는 바이니, 당신이 괜히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어휴…….”
“어휴? 참으로 시건방진 새끼입니다. 뒈질 뻔한 당신을 살려준 것이 몇 번인데!”
아니스가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 그런 쪽으로 공격해 오면 유진이 할 수 있는 대응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진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잡고 있던 아니스의 어깨를 홱 끌어당겼다.
갑작스레 몸이 당겨진 것에 대해 아니스는 놀란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런 일에 있어서 우유부단을 넘어 찌질하기 짝이 없는 하멜이, 이 정도로 과감하게 행동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아니스의 몸은 유진 쪽으로 돌려졌고, 어느새인가 등 뒤로 넘어갔던 손이 등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은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것으로 끝을 장식했다. 쪽, 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ㅡ 아니스는 맞닿은 입술의 부드러움과, 감길 듯 말 듯이 얇게 떠진 유진의 눈동자를 보았다.
“하…….”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아니스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하…… 한 번 만 더.”
크리스티나인 척하고 욕망을 채울 심산이었는데, 아니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지르면서 아니스의 의식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머리채가 잡힌 것만큼의 충격이어서, 아니스도 놀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나아!]
성흔이 새겨지고 신성력이 강해진 것은 알고 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성장했을 줄이야! 크리스티나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비명을 무시하고, 바로 앞에 있는 유진의 눈동자를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부…… 부디.”
더듬더듬 움직인 손이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헤매었다. 본심 같아서는 유진의 가슴에 얹거나 끌어안고 싶은데, 아직 크리스티나에게는 그만한 용기는 없었다. 결국 크리스티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서 목에 걸린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유진은 부끄럽고 민망해서 당장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여기서 진짜로 그래 버렸다가는 앞으로 평생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입술이 포개졌다. 그 순간, 크리스티나는 솟구친 본능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입술이 살짝, 아주 살짝 열렸다. 밀어 넣은 혀가 유진의 혀와 얽혔다.
“?!”
유진은 기겁하면서 펄쩍 뛰어올랐다.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던 크리스티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 아, 아니스 님!”
시스터라는 부름마저 잊었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외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크리스티나! 완전히 미쳐 버린 겁니까!]
“이런…… 이런 망측한 짓을……!”
크리스티나는 머뭇거리며 아니스의 탓을 하다가, 유진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뜨거워서 터질 것만 같았고 몸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개를 숙였던 크리스티나는 슬쩍 시선을 들어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당연히 유진의 얼굴에 분노 같은 감정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자신의 행동과 유진의 표정에 어린 당황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슬금슬금 발을 뒤로 끌었다.
“유…… 유진 님. 저, 저는 방에서 빛께 기도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어…… 어어.”
“부, 부, 부디, 유진 님도…… 예, 좋은 하루 되십시오…….”
더듬거리며 어떻게든 말은 끝마쳤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크리스티나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소파를 붙잡았다.
“너, 너 괜찮냐?”
“괜찮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후다닥 말을 내뱉고서 다시 걸음을 떼었다. 마음이 급하고 간절한 덕인지 후들거리던 다리도 제대로 움직여 주었다.
쿵! 크리스티나가 들어간 방문이 닫혔다. 유진은 그 안에서 들리는 신음과 비명을 애써 무시하면서 입술을 더듬었다.
설마 혀가 들어올 줄이야……! 전생에 경험이 없던 것도 아닌데, 이게 대체 뭐라고 놀라 버린 것일까. 유진은 놀라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 저녁이 되고서야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돌아왔다.
둘은 펜트하우스를 떠났을 때와 비교해서 치장이 늘어 있었다. 메르의 경우에는 머리에 왕관 하나를 얹었지만 라이미르아는 뿔을 알차게 활용하여 왕관을 고리처럼 뿔에 몇 개씩 걸었다.
“뭐야 그건?”
“제벨라 벌룬이에요.”
풍선까지 저따위로 만든 것인가. 유진은 둥둥 떠다니는 누아르의 얼굴 풍선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재미있었니?”
“네!”
“반의반에 반의반도 보지 못했느니라! 은자여, 이 도시는 꿈과 희망이 가득 차 있느니라!”
후다닥 달려온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유진의 양옆에 앉아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둘은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는지를 먼저 떠들었고, 그 뒤에는 자신들이 가진 스페셜 스페셜 코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선망 어린 시선을 받았는지를 떠들었다.
“돌아다니면서 군것질도 잔뜩 한 모양이니 밥은 안 먹어도 되겠네.”
“그건 아니에요.”
“이미 다 소화가 되었느니라.”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식사는 나가서 할까 했지만, 아직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의식해서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밥은?”
“괜찮습니다…….”
정작 돌아온 대답은 저랬다. 그렇다고 둘을 방에 내버려 두고 밖에 나가서 먹고 오는 것도 정 없는 일 아닌가. 소파에서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수다를 들어주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서, 주문한 음식들이 도착했다.
“……저 케이크는 뭐냐?”
호화로운 음식들이 그득 깔린 식탁이 들어와 거실을 채우는데,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눈에 띄고 화려한 음식은 몇 개나 되는 층을 가진 웨딩케이크였다.
초콜렛은 물론이고 다양한 종류의 크림과 과일에 색깔이 알록달록한 케이크를 보고서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왕님께서 주문하신 케이크입니다.”
“당장 갖고 꺼…….”
꺼지라는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냥 놔두고 꺼져.”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음식을 나른 몽마들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서 물러났다.
“케이크는 밥 먹고 먹어라.”
꼬마 아닌 두 꼬마가 꺅꺅 환호성을 질렀다.
케이크 말고도 누아르가 주문한 음식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니 왠지 입맛이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음식에 무슨 죄가 있겠나. 실제로 음식의 맛은 굉장히 훌륭했다.
식사를 하면서, 리모컨을 조작했다. 이전에 헬무드의 호텔에 묵으면서 익숙해진 TV를 켜자,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제벨라 시티의 지역 채널이었다.
“…….”
제벨라 페이스에 함께 올라타는 유진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에 라이미르아는 먹던 음식이 목에 걸려서 켁켁 댔고, 메르도 기겁하며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유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채널을 돌렸다. 이번에 나오는 것은 헬무드 전역에 방영되는 뉴스 채널.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가 제벨라 공작이 다스리는 제벨라 시티에 방문했습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와 함께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방문한 그는, 용사라기보다는 마치 한 명의 아버지처럼 보입니다.]
[용사인 그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제벨라 시티에 방문한 것일까요? 제벨라 공작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제벨라 파크를 즐기기 위해 온 것일까요? 아니면, 제벨라 공작과 만나기 위해서일까요?]
[제벨라 페이스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 아마 후자일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글쎄요, 용사가 신생 마왕을 쓰러트리고서 아직 일 년도 흐르지 않았는데…….]
[그 후로 잠적하던 그가, 왜 제벨라 시티에?]
[민감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제벨라 공작이 유진 라이언하트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지요? 가비드 공작이 유폐의 마왕님의 뜻을 전하러 시무인을 방문했을 적에도, 굳이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예, 그곳에서 용사와 제벨라 공작이 남들을 피해 둘이서만 밀담을 나누었다고…….]
패널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진은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별말도 안 했는데 알아서 잘해주는구만.”
오히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환생 431화
뉴스에서는 유진과 누아르가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음모론을 실컷 떠들었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깔끔한 영상이 전달된 것을 보면, 누아르가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패널들이 떠드는 음모론에도 누아르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리라.
이토록 빨리 퍼지리라고는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다만, 오히려 빠른 것이 유진이 바라는 바였다. 만약 소문이 퍼지지 않았더라면, 유진이 직접 대놓고 제벨라 파크를 활보했을 것이다.
음모론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불나불 떠드는 말은 길어도 결국은 확인되지 않은 억측들뿐인 데다, 유진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누아르 제벨라와 손을 잡지 않을 것을 알 테니.
‘그래도, 당분간은 이 도시에서 지내야겠지.’
문득 키옐 라이언하트 본가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무인에 떠나있던 시간까지 더하면, 본가의 자기 방에 돌아가지 않은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식은 전하고 있다. 유진 쪽에서 일방적으로 보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레헤인야르에 갈 때도, 제벨라 시티에 도착하기 전에도 본가에 소식을 보냈다.
가끔 세냐를 통해서 본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있다.
카르멘은 백염식의 8성에 오르기 위해 폐관수련 중이고, 길레이드와 기온은 차례대로 7성에 도달했다. 시안도 5성을 넘기 위해 노력 중이고, 시엘은 최근에 5성에 도달했단다.
‘본가의 힘은 충분해.’
멜키스는 본가의 숲을 드나들기 위한 핑계로 숲의 엘프들에게 정령술을 가르쳤다.
엘프는 정령술에 대한 적성이 높다. 따로 정령술을 수행하지 않아도, 하급 정령 정도는 자연스럽게 불러낼 수 있는 것이 엘프란 종족이다. 그러한 적성에 멜키스의 가르침까지 더해지니, 라이언하트 숲의 엘프들은 대부분이 중급 이상의 정령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은 즉, 라이언하트는 수십 명에 달하는 중급 정령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 외에도 증원된 백사자 기사단이 있고, 흑사자 기사단은 카르멘의 3번대와 기온의 5번대가 본가에 상주하고 있다.
‘지금의 라이언하트도 강하긴 해. 내가 없어도 카르멘 님이 있고.’
카르멘이라면 상대가 고위 마족이라도 큰 걱정이 안 된다. 심지어 지금은 백염식의 8성에 올랐다고 하니, 아이리스 토벌 때보다 더 강해졌을 것 아닌가.
거기에 길레이드와 기온도 있고, 세냐가 직접 보강한 대결계도 있다. 그 대결계는 거의 모든 공격을 방어하고, 적습이 온 순간에 즉시 세냐에게 소식을 전달해 준다.
라이언하트는 자체적으로 워프게이트를 보유하고 있다. 만약 본가가 적에게 습격당하면, 대결계가 버티는 동안 아롯에 있는 세냐가 워프게이트를 통해 넘어올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먼저 라이언하트를 칠 리는 없다…….’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멜리아 머윈인가? 궁지에 몰리면 쥐새끼도 고양이를 무는 법, 이라고들 하지만…… 아멜리아 머윈이 과연 저만큼이나 미친 짓을 벌일까?
표면적으로 나하마의 문제에 키옐은 개입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아멜리아나 혹은 그녀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라이언하트 본가를 친다는 것은, 키옐 제국의 영토를 침략한다는 것. 가뜩이나 불리한 구도에서 제국군까지 적으로 돌리는 꼴이 된다.
‘내가 부재중이라고는 해도 저런 짓을 벌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유진이 본가를 비우고 있는 것, 이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서, 유진이 항상 본가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라이언하트가 베르무트의 후손이고 무가인 이상, 외부의 위협은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 유진이 굳이 강조할 것도 없이, 라이언하트란 성씨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저러한 자각이 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내 문제도 바쁜 것을.”
진즉에 밤이 되었지만 도저히 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을 떠다니는 3대의 제벨라 페이스가 알록달록한 레이저를 쏴대고, 거리도 조명이 없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밤이 없는 도시라고 하더니…… 과연 이름대로였다.
이 영지의 이름은 제벨라 시티지만 거의 대부분의 토지가 제벨라 파크에 사용되고 있고, 조금이나마 남은 토지조차도 제벨라 파크의 직원들을 위한 거주지로 쓰인다. 이 어마어마하게 큰 제벨라 파크는 총 4개의 구획으로 나뉜다.
지금 유진 일행이 머무르는 판타지 스퀘어. 다양한 놀이기구와 사파리, 대형 워터파크까지 딸린 어드벤처 스퀘어. 도박 등의 유흥을 내세운 겜블 스퀘어. 성적인 유흥을 내세운 드림 스퀘어.
4개의 구획은 자체적인 워프게이트로 연결되어 있는데, 제벨라 파크의 이동수단은 워프게이트뿐만이 아니다. 땅덩어리가 워낙 넓은 데다 관광객의 수도 어마어마한 탓에, 워프게이트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워프게이트는 이동하는 ‘재미’가 부족하다. 이러한 초대형 관광지에서는 이동하는 것에도 나름의 재미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제벨라 파크의 지하에 있는 것이 바로 ‘드림 트레인’이다. 유진은 대부분의 이름에 ‘제벨라’를 사용한 주제에, 기차의 이름에는 제벨라가 붙어 있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 영지의 지하에는 수십 개의 노선을 순회하는 기차들이 존재한다.
밤이 없는 도시인만큼, 제벨라 트레인은 24시간 내내 운행한다. 지금 시간에 판타지 스퀘어의 지하도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낮에 실컷 논 아이들을 숙소에 재운 보호자들이 대부분이다. 제벨라 파크 내 구역에 출입 제한이 있는 곳은 없지만, 아무래도 아이들을 데리고서 겜블 스퀘어나 드림 스퀘어에 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지금 유진의 주변은 그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체취에 술 냄새, 향수 냄새가 뒤섞여 욕망의 냄새를 만든다. 겜블 스퀘어로 향하는 사람들은 돈을 보고, 드림 스퀘어로 향하는 사람들은 육욕을 본다.
어느 쪽이든 노골적인 욕망이고, 모두가 누아르 제벨라가 받아먹는 공물이 될 것이다.
지하도의 모두가 기차를 타는 것은 아니다. 드림 스퀘어도, 겜블 스퀘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몸에서는 찌들고 지린 악취가 풍긴다.
지하도의 언제나 열려 있는 비상문들. 그곳에 들어가서 더욱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면, 기차 달리는 소리가 일상처럼 들리는 폐선로에 도착한다.
말이 폐선로지, 처음부터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곳이다. 깊고도 긴 폐선로는 제벨라 파크의 4개 구획을 모두 관통하고 있다.
이곳은 쓰레기장.
분리수거도 되지 않는 인간쓰레기들이 4개 구획에서 떨어져, 이 폐선로에 도착한다.
이 쓰레기장에 떨어진 사람들을 대부분 2종류로 나뉜다.
일확천금을 꿈꾸다가 겜블 스퀘어에서 전 재산을 꼬라박은 사람. 육욕에 눈이 멀어 드림 스퀘어의 호스트에게 모든 것을 전 재산을 꼬라박은 사람.
어느 쪽이든 제벨라 파크에서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 그들은 밤에는 이 쓰레기장에서 잠을 청하고, 낮에는 지상으로 올라가 4개 구획을 떠돈다.
그들의 눈에도 욕망은 있다. 오히려 이 폐선로 쓰레기들의 눈에 어린 욕망이 웃으며 지하도를 걷는 사람들이 보인 욕망보다 노골적이고 질척했다.
저들은 돈 몇 푼 생기면 즉시 겜블 스퀘어에 가거나 드림 스퀘어로 향한다. 도박으로 가진 돈을 불리는 것을 꿈꾸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정신을 잠깐의 유흥과 꿈으로 도피시킨다.
제벨라 파크의 폐선로는 워낙 유명해서 유진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폐선로의 입구에 도착한 유진은, 곧장 내려가지 않고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하도와 폐선로까지 깊이는 대략 수십 미터는 될 법했다. 몇 분 간격으로 덜컹, 덜컹하는 기차 소리가 났고, 그럴 때마다 천장과 바닥이 흔들렸다.
드문드문 떨어진 간격마다 천장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식수는 저 물로 해결하는 모양인데, 몸을 씻을 생각은 안 하는 것일까? 표정을 구기고 폐선로를 내려다보던 유진은 곧 납득했다.
지하도로 올라가면 깔끔한 화장실들이 많지만, 이 깊은 폐선로에 화장실은 없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흐르는 수로가 화장실로 쓰이고 있기는 한데…… 큰 의미는 없어 보였다.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반짝반짝 빛이 나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제벨라 파크의 어둠. 지하 깊은 폐선로. 인간쓰레기 굴. 유진은 삐걱거리며 깜빡거리는 폐선로의 조명을 힐긋 보았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들은 대부분이 불빛이 희미해서 있으나 마나였다.
“돈…….”
폐선로로 내려가던 중, 어둠에서 뻗어 온 손이 유진의 앞을 막아섰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내려오는 짧은 사이에 벌써 몇 번이나 구걸을 들었다. 유진이 뒤집어쓴 로브가 지저분하지도, 악취가 배이지도 않아 말끔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걸은 여러 번 들었지만, 돈은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유진은 저런 종류의 인간에게 혐오 말고 다른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다.
“돈이 안 된다면…….”
앞을 막은 손이 흔들린다. 유진은 눈썹을 일그러트리고서 손의 움직임을 보았다.
“사랑을…….”
엄지와 검지가 착, 붙더니 하트를 만들었다. 그 모습은 유진에게 강렬한 살의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손가락으로 만든 하트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유진은 굳이 참지 않았다.
촤악! 직접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시커먼 마나가 참격이 되어 손목을 썩둑 잘랐다.
“조금 고민이라도 하고 잘라야지,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절단면에서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데, 저렇게 말하는 뻔뻔함이 대단했다.
유진이 얇게 뜬 눈으로 어둠을 노려보고 있으니, 똑같이 로브를 뒤집어쓴 누아르 제벨라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하멜. 지금은 기분이 꽤 괜찮아 보이네요? 아까는 되게 안 좋아 보였는데.”
“아까?”
“네, 아까, 제벨라 페이스에서 말이에요. 그때의 당신은…… 음, 솔직히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냥 널 보면 기분이 X같아.”
“흠, 아까는 X같다기보다는 다른 의미로 안 좋아 보였는데…….”
누아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유진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신이 여기 올 줄 알았어요.”
“…….”
“음,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을 감시했죠. 혹시 불쾌한가요? 에이, 이런 것으로 불쾌해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여긴 내 도시고, 당신이 머무는 곳도 내 소유의 호텔이라고요. 그러니 당신의 움직임은 모두 내게 전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아요?”
“뉴스.”
“아, 봤어요? 나는 당신이 그 뉴스를 본다면, 나한테 화를 내러 찾아오지 않을까도 예상했는데.”
“그렇다면 네 예상이 틀린 거지.”
“후후후. 예상이 틀릴 것도 예상했어요.”
누아르는 으스대면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당신의 의도를 조금 읽었달까? 내 취향을 조금 추가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누아르는 키득거리면서 폐선로를 가리켰다.
“그래서. 어때요?”
“뭘 묻는 거냐?”
“이 도시의 구린 곳을 보기 위해 온 것 아닌가요?”
누아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당신의 관점에서 생각해 봤어요, 하멜.”
“…….”
“300년 전. 당신이 살아 있던 시대에서, 인간이 마족을 원망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죠. 원망 당할 짓을 마족이 많이 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지금 시대가 그렇지는 않잖아요?”
유진은 뭐라 대꾸하지 않고 누아르의 말을 들었다. 누아르는 보란 듯이 양손을 들어 하트를 만들었다.
“지금 시대는 사랑과 평화의 시대라 할 수 있죠. 마족이 인간을 사냥하고, 전쟁을 벌이지도 않아요. 이곳 헬무드는 마족이 인간을 보호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고요.”
유진은 누아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전에 헬무드는 돌아다녔고, 그러기 전에도 지금 시대에 마족과 인간의 관계가 어떤지는 학습했다. 처음에는 인정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지만, 300년이란 시간은 상식이 바뀌기에 충분하고 긴 시간이었다.
“이곳 제벨라 파크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춘 도시에요. 딱히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있죠. 돈을 주고 꿈을 판달까? 뭐, 꿈에 매달려 가진 돈을 다 써버리는 것까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거고요.”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 폐선로는 그런 멍청이들을 위한 장소죠. 제벨라 파크를 설계하는 당시부터 ‘쓰레기’가 생길 것은 예상했으니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멜, 당신은 이 도시에서 저를 증오할 이유를 찾고 있는 것 아닌가요?”
유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답. 누아르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흐흥. 하지만 말했잖아요, 저는 이 도시에서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있다니까요? 아…… 괜한 오해는 말아요. 저 쓰레기들은 내가 강제로 잡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자기들이 나가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요.”
누아르는 손가락을 뻗어 폐선로의 천장을 가리켰다.
“저기 저 물줄기 보여요? 저거도 제가 미리 뚫어놓은 거예요. 여기 사람들 물은 마셔야 할 것 같아서. 똥덩어리가 떠다니는 수로랑 구석의 오물들도 주기적으로 인부를 보내 청소하고 있어요. 또, 원하는 사람에 한해 일자리도 주고 있죠!”
“…….”
“그 외에 필요한 최저치의 복지는 해주고 있다고요. 그래도 자발적으로 쓰레기 짓을 하는 걸 어떡해요? 집 돌아가라고 돈을 줘도 카지노나 서큐버스 클럽에 가서 날려 먹는단 말이야. 그럼 저도 어쩔 수 없는 거죠?”
“맞아.”
유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이 도시에서 뭔가, 작정하고 악행을 벌이지는 않는 것 같더군.”
솔직히 기대보다 한참 떨어지긴 했다. 유진은 이 폐선로에서 차라리 끔찍한 인체실험 따위가 벌어지는 것을 기대했었다. 아니면 변태적 취향을 가진 인간이나 마족을 위한 살육쇼라든가.
없다. 나름대로 찾아보고 마법도 써봤는데, 제벨라 파크는 정확하게 ‘알려진 대로’였다. 폐선로는 인간쓰레기들이 있고, 화려한 위쪽에는 욕망에 취한 사람들이 배회한다.
“내가 이 도시에서 널 더 증오할 이유를 찾던 것도 맞아.”
“흐흐흥, 아쉽게 됐네요? 지금의 저는 합법적인 장사만 하고 있어요. 불법하고 사악한 짓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게 문제야.”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의 헬무드, 유폐의 마왕은 인간에게 굉장히 잘해주고 있지. 헬무드 법을 따르는 이 도시도 인간에게 험한 짓을 하지 못해.”
“맞아요. 몽마가 꿈에서 정기를 뽑는 것조차 강탈이 아닌 거래를 해야 하죠. 그게 합법…….”
“그게 문제라고.”
유진은 다시 한번 누아르의 말을 끊었다.
“지금 시대가 잘못된 거다.”
“……네?”
“마족인 네가 인간을 발라먹는 것이 합법이라는 지금 시대가. 그리고 이 도시가 잘못된 거야.”
그 지독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말에 누아르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물론, 네가 이 도시에서…… 조금 더 악랄하게 인간을 발라먹었다면, 나는 너를 더욱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하겠지. 하지만 네가 그러지 않는다고 해서, 너에 대한 증오와 살의가 부족한 것은 아니야.”
“…….”
“네 말대로 여기는 이 도시에서 가장 구린 곳이야. 가장 냄새나고, X같고, 없어도 되는 곳.”
유진은 눈을 찡그리면서 천장을 가리켰다.
“솔직히 저 천장이 무너져서, 저 쓰레기들이 죄다 뒈져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아.”
“…….”
“하지만 기왕이면 내가 안 하고 네가 했으면 좋겠어.”
“왜요?”
“난 사람이고 너는 마족이니까.”
맙소사. 누아르는 웃으며 유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제가 그런 짓을 하기 전에 막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멜, 당신은 용사잖아요.”
“나는 저 새끼들 말고도 구할 사람 많아.”
“흐음.”
태연한 대답. 누아르는 미소를 짙게 지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폐선로는 전부 죽어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때요?”
제벨라 파크는 대륙 최고의 관광지다. 당장 위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키옐 수도 시민수에 버금갈 것이다.
“하멜. 당신은 저를 죽이기 위해 이 도시에 오겠다고 했죠? 마찬가지로, 저도 제 성에서 당신을 맞이할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결국, 이 도시가 우리를 위한 전장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겠지.”
“어머나. 그럼 우리 둘의 싸움으로 수천 만의 사상자가…….”
“네가 미리 치워놔야 하는 것 아니냐?”
당연하지 않냐는 투의 질문에 누아르가 조심스레 반문했다.
“……왜요?”
“방해되니까.”
“음. 저한테는 별로 방해가 안 되는데…… 어…… 음, 네, 그래요. 헬무드 법에 따르면, 마족 간의 항쟁에서 인명피해는 철저히 금하고 있기는 한데…… 당신이 저를 죽이러 오는 상황이면 유폐의 마왕 쪽에서도 전시상황을 선포할 텐데, 그 상황에서 법이 뭐…….”
“나한테 방해가 되잖아. 너는 인명피해를 생각하며 머뭇거리고 전력도 다하지 못하는 나랑 싸우고 싶은 거냐?”
말문이 막혔다. 누아르는 동그랗게 뜬 눈동자를 몇 번 깜빡거리다가,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며,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하멜도 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며 살의를 불태우는 하멜을 훨씬 더 보고 싶다.
“……당신이 도착하기 전에 관광객들은 전부 내보내도록 하죠.”
누아르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관광객들 붙잡고 인질극을 할 것도 아니니, 도시에 붙잡아 둘 필요가 없기는 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유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서 누아르를 지나쳤다. 누아르는 위로 올라가는 유진의 등을 보다가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요?”
“위에.”
“왜요?”
“그럼 저 냄새 나는 쓰레기 굴로 내려갈까?”
“저거 보러 온 거잖아요.”
“더 볼 필요가 없게 됐잖아.”
“그럼…… 어…… 다시 돌아가나요? 제벨라 캐슬에.”
“꺼져.”
“그럴 순 없죠.”
누아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진에게 팔짱을 꼈다.
“기왕 나온 거, 저랑 놀아요.”
나중에 아련히 후회할 추억을 쌓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환생 432화
“진짜로 미쳐 버린 거냐?”
유진은 어이가 없어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개소리에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방금 누아르가 한 말은 유진이 이해하는 정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놀자고? 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미 여태까지 필요 이상으로 누아르와 많이 엮였다. 유진은 이 이상 누아르와 엮이고, 함께 무언가를 하며 추억을 쌓고, 감정적인 교류 따위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괜한 자극을 받고 싶지 않아서?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죽이기로 작정한 적과 필요 이상으로 교류하는 것도 웃기는 일 아닌가.
“너무 그러지 말고.”
누아르는 배시시 눈웃음을 치면서 유진의 팔을 안쪽으로 당겼다.
표정과 말투, 태도와는 달리 손아귀의 힘은 상당해서, 유진으로서도 바로 뿌리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사실에 유진은 더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얼마나 같이 놀고 싶길래 이 정도로 힘을 쓰는 건가? 그게 이만큼이나 힘을 쓸 일인가?
“왜 이렇게 질척거려?”
“글쎄요, 왜 이러는 걸까?”
정작 누아르 본인도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유진과 이런 식으로 얽혔던 적은 많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은 굉장히 쿨했다고 생각했다. 야릇한 유혹을 여러 번 건네기는 했어도 전부 농담이었고, 유진 쪽에서 거절한다면 미련을 길게 두지 않고 물러섰었다.
하지만 지금은…… 드물고도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 않다.
“낯선 기분이야.”
속삭임과 함께 누아르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강하게 붙잡은 유진의 팔을 조금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누아르는 유진의 단단한 팔뚝을 가슴에 파묻으면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하멜. 당신에게 열망을 느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후후. 왜일까요? 지금의 기분은 낯설고 신비로워.”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가 의문스럽다. 하멜에 대한 사랑은 300년 전부터 느꼈지만, 지금처럼 애가 타는 기분을 느낀 적은 없다.
먹음직스럽게 자라서? 정말로, 나에게 죽음을 알려줄 수 있을 만큼 강해져서? 아니면…….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만월이에요. 알고 있어요?”
“놔.”
“마(魔)의 족속은 거의 대부분이 만월에 영향을 받죠. 마력도 강해지고, 욕망도 강해져. 저급한 마족의 경우에는 만월의 밤에 폭주해 리는 경우도 있어요.”
누아르는 말하다 말고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저급한…… 네, 저급한. 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아요. 나는 여태까지 그랬던 적이 없어요. 하지만, 오늘은…… 욕망이 나를 저속하게 만들어버린 걸까?”
유진은 누아르의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그곳에서 스멀거리는 노골적인 감정은 낯설지 않다. 300년 전부터 ‘누아르 제벨라’에게서 보았던 감정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 옛날에 보았던 감정이기도 했다. 황혼의 마녀가 아가로트를 보던 눈도 저것과 비슷했다.
그것이 유진에게 짜증과 분노를 일으켰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가로트가 아니듯, 누아르 제벨라도 황혼의 마녀는 아니다. 그럴진대 지금 누아르가 보이는 감정은 황혼의 마녀와 너무나 닮아 있다.
ㅡ화륵.
유진의 주변에서 시커먼 불길이 일렁거렸다. 지금 상황에 대한 짜증과 분노가 유진에 하여금 난폭한 수단을 강구하게 만든다.
벌써부터 누아르와 충돌하면 이쪽이 압도적인 손해를 볼 뿐이지만, 그러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누아르와 ‘살’이 닿은 것이 치가 떨린다.
“그 정도로 나랑 놀기 싫은 거예요?”
“우리가 하하호호 놀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
“놀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법이지만, 흠, 알았어요. 너무 화내지 마요, 하멜.”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의 팔을 놓았다. 그것뿐, 물러서지는 않았다. 누아르는 여전이 유진의 바로 옆에 서서 빙글빙글 미소를 지었다.
“이건 어때요?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나랑 같이 있어준다면, 당신이 궁금한 질문을 3개 대답해 줄게요.”
“……너한테 궁금한 것은 없는데?”
“흐흥, 뻔한 거짓말은 하지 말죠? 이 도시까지 온 당신이 내게 궁금한 것들이 없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아까 내게 했던 말은 그새 잊은 거예요? 하멜. 당신은 제벨라 페이스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 말에 유진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그래, 불과 반나절 전에 누아르에게 저런 말을 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유진은 증식한 제벨라 페이스의 정확한 용도를 파악해 두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짓말을 하고 싶다. 누아르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여럿 있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유진은, 지금 누아르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후.”
유진은 부글대는 감정을 억눌렀다. 치미는 살의도 함께 가슴 밑바닥으로 쑤셔 박았다.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저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등신짓이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라고 해 봐야 앞으로 6, 7시간 정도. 고작 그 시간만 버리면, 저 몽마의 여왕에게 3개의 질문을 할 수 있다.
“좋아.”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아르의 말마따나, 제벨라 시티에 온 것은 그녀에 대해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다.
“대신, 질문들에 먼저 대답해라.”
“설마 제가 다 놀고 대답은 안 하고 도망칠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가능성은 있지 않나?”
“글쎄요, 제 쪽에서 생각하자면 하멜, 당신이 대답만 홀라당 먼저 듣고 가버리는 것이 더 현실성 있는데.”
누아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차가운 눈동자. 저런 눈동자와 표정은 항상 보던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이 예전보다 더 차가워 보인다.
‘나뿐만이 아니야.’
누아르는 지금의 자신이 평소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자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진 역시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엇이 그런 변화를 만드는 걸까? 보름달? 그럴 리가 없지.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대답 안 하는 것 봐. 되게 얄밉네. 그래도 하멜, 저는 당신을 믿어요. 믿는 만큼 배신당하면 화가 나겠지만.”
누아르는 ‘배신’이라는 단어에 혀를 굴리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아까우니, 문답은 위로 올라가면서 하죠? 여기는 패배자의 절망과 오물과 쓰레기의 냄새가 너무 지독하니까.”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유진은 먼저 계단을 올라가는 누아르의 등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뒤를 따랐다.
“그래서, 그 병신 같은 머리통은 대체 뭐냐?”
“병신 같은 머리통이 아니라 제벨라 페이스예요.”
“그래서 대체 뭐냐고.”
“흐흥, 어지간히 궁금하셨나 봐. 아까 물어봤을 때 대답 안 해주기를 잘했다니까.”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러자 누아르가 걸치고 있던 누더기와 다름없는 로브가 사라졌다. 한순간 누아르는 속옷 차림이 되었고, 유진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3대의 제벨라 페이스는 기본적으로 제 마안의 능력을 확산시키죠. 하멜, 당신도 봤잖아요?”
“그건 진즉부터 알아. 이 도시에 오는 병신들 중에서 그걸 모르는 놈들도 있나?”
이 도시의 명물. 정해진 일정 없이, 오직 누아르의 기분에 따라서 시작되는 제벨라 쇼타임.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몽마의 여왕이 만드는 ‘꿈’.
이 도시의 하늘을 나는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열리고, 여왕이 ‘쇼타임’을 선언하는 순간에 제벨라 페이스의 눈동자가 비추는 곳에 환상의 마안의 권능이 작용한다.
“네가 직접 타지 않은 머리통에서 환상의 마안이 써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런데 왜 3대나 있는 거냐고.”
“말도 안 된다? 아하하, 하멜, 그런 말은 가볍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저에게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구요.”
“……뭐?”
“제가 이 도시에서 여태까지 수급한 정기가 어느 정도일 것 같아요?”
누아르는 유진을 힐긋 돌아보면서 웃었다.
“여태까지, 라고 할 것도 없죠. 당장 오늘 하루에, 제벨라 파크에서 수급되는 정기의 양을 상상할 수 있어요?”
유진은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요, 하멜, 이 도시에서 수급되는 정기는 더 이상 제게 유의미한 힘이 되지 않아요. 저는 이미 정기를 받아먹어 마력으로 환산하는 방식으로 강해지는 선을 진즉에 초월했거든요.”
오만한 말. 하지만 의심의 여지는 없다. 당장 마왕이 된 아이리스만 하더라도 무한에 달하는 마력을 손에 넣었지만, 그 압도적인 힘을 ‘어떻게’ 쓰느냐가 격을 나누는 법이니.
“환상의 마안은 결국, ‘환상’을 보여주는 거예요. 현실을 개변시킬 수는 없죠. 하지만 말이에요, 하멜, 지금의 나는 그 이상도 할 수 있어요.”
“……무슨 말이냐?”
“이 도시 자체가 내가 만들어낸 ‘꿈’ 자체란 말이에요.”
누아르는 고개를 기울여 유진을 응시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하멜. 당신과 내가 폐선로의 계단에 있는 동안, 밑바닥의 쓰레기 중 그 누구도 우리를 올려다보지 않았어요.”
“…….”
“지금만 해도 그래요. 우리는 밤이 없는 도시의 지하도를 걷고 있잖아요? 하지만 왜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요?”
그 말에 유진의 걸음이 멈췄다. 폐선로에 내려가기 전만 해도 지하도는 사람이 득실거렸다.
하지만 지금은ㅡ 아무도 없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꿈속에 들어와 버린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유진은 지금 자신이 선 곳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확신했다.
덜컹, 덜컹. 먼 곳에서 기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그 소리를 의식하며 계속해서 감각을 확장시켰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다만, 이 주변에 없을 뿐이었다.
“……공간 자체에 암시를 거는 거냐?”
“맞아요.”
누아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늘을 나는 3대의 제벨라 페이스는, 도시에서 수급한 정기를 공간에 순환시키죠.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강해지고 있어요. 정기를 수급하고, 마력을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완벽하게 장악한 이 도시는 점점 ‘현실’이 아닌 나의 ‘꿈’이 되어갈 거예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거예요.”
저 말이 무엇인지 이해한 유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말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다면…… 정말로 이 공간, 도시 자체가 누아르 제벨라의 꿈이 되어버릴 것이다. 잠이 들지 않고 버텨도 현실 자체가 흉기가 되어 덮쳐올 것이다.
환상의 마안에 있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약점은, 결국 ‘환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꿈속에서 강렬한 암시를 걸건,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누아르가 유진에게 온갖 말도 안 되는 환상을 보여주어도, 유진은 현혹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가진 의지력이 강하기도 하고, 신력과 신성을 강화한다면 확실하게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면 환상의 마안에 약점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누아르 제벨라의 힘은 말 그대로 ‘전지전능’에 도달할 것이다.
그 터무니없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첨병이…… 저 병신 같은 대가리 3대라니.
‘지금이라도 파괴하면?’
“파괴는 소용없어요.”
마치 유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누아르가 말했다.
“파괴되면 다시 만들면 되는 거죠. 아니면 제가 직접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지하도를 나오는 동안 다른 사람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밤거리에 나오니 사람이 득실거렸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유진과 누아르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벌써부터 걱정하지는 마요, 하멜.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니까. 지금 가능한 것은…… 인식을 살짝 바꾸는 정도?”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폐선로의 그 많은 사람과 직접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당연하단 듯이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지하도에도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주변의 아무도 유진과 누아르를 보고 있지 않다.
환상의 마안을 쓴 것도 아니다. 꿈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이 주변 자체에 당연하게 암시가 작용되고 있다…….
“제벨라 페이스에 대한 대답은 이것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다른 질문은 뭐예요?”
“……고민 중이다.”
유진은 치미는 한숨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본래는 누아르가 보유한 세력이나 친위대 따위를 파악하고 싶었다. 다음에 누아르를 죽이러 올 때, 그녀의 부하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올 때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그딴 것을 경계할 수준도 되지 않았다.
‘성역으로 저항할 수 있나?’
정신이 침범되고 꿈으로 끌려가는 것은 정신력과 신성으로 저항할 수 있다.
현실이 침범되는 것은 성역으로 저항이 될까? 상황이 무조건 절망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진 역시 할 수 있는 것은 많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 이 도시 전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누아르가 군림하는 영지가 된다면. 성역은 신이 군림하는 영지다.
사실 명확한 답은 있다.
이 도시에서 싸우지 않는 것.
‘해줄 리가 없지.’
유진은 표정을 구기면서 내뱉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지금 질문하는 것 맞죠?”
“그냥 닥치고 있을까?”
“장난 좀 쳐봤어요, 하멜. 나도 당신이랑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거니까, 너무 각박하게 굴지 않을게요. 그래, 이건 어때요? 당신이 손을 들고서, 질문! 하고 외치면 그때만 카운트하는 거로.”
누아르는 손가락을 세우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앞으로 두 개 남았어요.”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냐고.”
“제벨라 백화점에 갈 거예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는 아는 거냐?”
“시간이 뭐가 중요해요? 하멜, 이곳은 밤이 없는 도시예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려 했지만, 유진은 냉큼 걸음을 옮겨 누아르와 거리를 두었다.
“대체 뭘 사러 가겠다는 건데?”
“에이, 꼭 뭐 살 것이 있어야만 쇼핑을 하나요? 그냥 구경도 하고…… 흠, 아니야, 지금은 사고 싶은 것이 몇 개 있어요. 당신이 날 위해 옷을 몇 벌 골라주는 것도 기쁠 것 같아.”
“꺼져.”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죠. 상관없어요. 나는 옷 되게 많아요,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럼 대체 왜…….”
“반지는 어때요?”
누아르는 손가락을 하늘의 반짝임에 비춰보며 말했다.
“반지가 갖고 싶어.”
빌어먹을 환생 433화
반지, 라는 말에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뜬금없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유진은 무어라 욕을 내뱉으려 했지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움찔 굳어 버렸다.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깊은 곳에 처박아 둔 기억이 가슴을 후벼팠다.
‘반지?’
황혼의 마녀의 마지막. 아가로트는 그녀에게 성물인 반지를 주고, 도망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황혼의 마녀는 신명을 거절했다. 그녀는 반지를 받지 않고 돌려준 뒤에, 최후의 소원으로 입맞춤과 죽음을 바랐다.
아가로트는, 제 손으로 목을 부러트려 죽인 황혼의 마녀의 가슴 위에 반지를 올려놓았다. 그녀의 시체에서 몸을 돌려 멸망의 마왕에게 향했다.
그 이후에 반지는 어떻게 되었나. 세상은 멸망했다. 안개와 파도가 시체만 남은 세상을 집어삼켰다.
그 후로ㅡ 길고 긴 시간이 흘렀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세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바다 깊이 파묻혔거나, 아니면 해류에 따라 떠돌거나…… 반지는 드래곤의 손에 들어갔고, 운명적으로 유진에게 되돌아왔다.
“……왜 하필 반지야?”
누아르 제벨라에게 황혼의 마녀의 기억이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누아르 제벨라가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존재라 해도, 죽음으로 끝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글쎄요?”
유진의 짐작대로다. 누아르에게 전생의 기억은 없다.
아가로트라는 이름, 황혼의 마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이전보다 강하고 분명해진 유진의 신성에…… 그녀의 혼이 멋대로 감응해 버렸을 뿐이다. 그마저도 확실한 기억도 아니고, 단편적으로 부서진 기억도 아니다.
감정.
애매하고 흐릿한 감정. ‘반지’를 가지고 싶다는 이유 모를 충동. 누아르는 ‘왜’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
“왜 하필 반지일까. 왜일까……. 아까 갑자기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오늘 하루의 감정선 대부분이 갑작스럽고 충동적이다.
하지만……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아르는 평소에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녀는 몽마의 여왕.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충동적이고 욕망적이고 감정적이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하멜.”
누아르도 문득 다른 것이 깨달아 유진을 돌아보았다.
“당신도 반지를 하나 끼고 있었잖아요?”
그 반지는 누아르도 기억하고 있다.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 평범한 반지는 아니었다.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추측하기로는 아마 진짜 아티펙트. 그것도 마법이 새겨진 것이 아닌, 고대의 신과 관련된 성물일 것이다.
“……반지?”
“설마 지금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아이리스와의 전투에서 파괴됐던 반지 말이에요. 부상을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던.”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때 유진과 아이리스가 어떻게 싸웠는지는 똑똑히 보아 기억하고 있다. 유진은 대답 대신에 누아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지금 유진은 굉장히 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누아르가 반지를 가지고 싶어 하고, 아가로트의 반지에 대해 묻는 의중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누아르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떠올린 기억을 토대로 이쪽을 떠보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애당초 누아르라면 저런 식으로 떠보는 것보다는 노골적으로 들이박겠지. 유진은 혼란을 진정시키면서 입을 열었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내 반지에 대해 묻는 것이 뜬금없잖아.”
“그런가요? 흠,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요. 기왕 갖기로 한 거, 당신의 것과 비슷한 반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 그래. 차라리 이편이 낫겠어. 어때요? 우리 그냥 똑같은 반지를 한 쌍 맞출까요?”
스스로 떠올린 것이지만 아름답고 훌륭했다. 누아르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유진을 돌아보았고, 당연히 유진의 얼굴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내가…….”
“미쳤냐고 말하려는 거죠? 후후, 하멜,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모두 예상했답니다. 당연히 당신은 저랑 같은 반지를 맞추지 않겠죠.”
누아르는 춤추듯 몸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유진의 곁을 지나쳤다. 그녀는 텅 빈 유진의 양손을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억지로 당신 손가락에 끼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런 표정 짓지 마요, 하멜. 지금 억지로 끼우겠다는 것이 아니라구요? 나중에, 응, 그래, 나중에. 당신이 내 품에서 죽게 될 때.”
“…….”
“그때…… 절망 속에서 죽어가는 당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당신 귓가에 속삭이는 거죠. 사랑해요, 라고.”
“미친년.”
“난 아름답고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당신은 반지를 받지 않겠지만…… 후후, 그 순간에는 거절할 힘도 없을 거야. 하멜, 당신은 어때요?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우리 둘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만나고, 최후에 당신이 승리하게 되면.”
누아르는 고개를 기울여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짙고 기다란 속눈썹 아래. 보석처럼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는 강렬한 기대를 담고서 반짝거렸다.
“당신과 나. 우리의 길고 긴 인연이 종지부를 끝내는 그 순간에…… 나에게 마지막 선물 같은 것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없어.”
“소원이라고 말해도?”
“네 소원을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유진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흥, 그것도 예상했던 대답이야.”
서운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유진이 마지막을 장식할 선물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누아르가 준비하면 되는 것 아닌가? 기왕 ‘반지’를 사기로 했으니, 아예 한 쌍을 사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언젠가 하멜을 죽일 때.
“내 손에 반지를 끼우고. 죽어가는 당신의 손에 반지를 끼우는 거야. 그리고…… 당신이 죽은 뒤에, 약지의 반지를 보며 영원히 당신을 추억하는 거죠.”
“…….”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당신도 나처럼 그랬으면 좋겠어요.”
누아르는 유진을 쳐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유진은ㅡ 그 미소를 똑바로 응시할 수가 없었다. 응시하고 싶지 않았다. 누아르가 내뱉는 모든 말에 다른 의중이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지라도……. 지금 그녀가 하는 말들은 유진에게 무겁고 날카롭게 다가왔다.
“……헛소리 말고 가기나 하지.”
“걸어가니까 오래 걸리는 거예요. 기차를 타거나 차를 타면 진즉에 도착했을 텐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동 수단을 탈 생각은 없었다. 누아르는 걷는 속도를 늦추며 유진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거리. 지금, 제벨라 시티의 모든 조명은 가장 아름다운 색채로 조율되어 유진과 누아르를 둘러싸고 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아르와 연결된 상공의 제벨라 페이스. 도시 전체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주변을 조작한 것이다.
거기에 누아르의 암시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으니, 도시 전체가 누아르와 유진 둘을 위한 세상이 되었다.
“팔짱…… 껴도 될까요?”
누아르는 보란 듯이 양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꺼져.”
당연히 유진은 험악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 * *
전쟁신 아가로트의 성녀.
황혼의 마녀.
그녀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었겠지만, 유진은 그 이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라구르야란에서 떠올렸던 아가로트의 기억 자체가 워낙에 단편적이고 희미했던 탓도 있겠지만ㅡ 유진이 생각하기에는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떠올린 기억. 그 상황에 존재하던 것은 아가로트뿐만이 아니다. 아가로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기억에서 ‘이름’을 가진 것은 아가로트 본인뿐. 가장 오래된 벗이라는 대전사조차도 ‘대전사’라고만 기억될 뿐이고, 아가로트에게 특별한 여인이던 성녀 역시 ‘성녀’, ‘황혼의 마녀’라고만 기억되고 있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아가로트가 어느 정도 인정하고서 의지하던 다른 신들도, ‘현자’와 ‘거신’이라는 별칭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쩌면, 아가로트가 자기 외에 다른 존재의 이름을 기억하지도 않는 성격파탄자일 수도 있지만…… 유진은 그런 확률을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내 무의식이 거절하는 것 같아.’
지금으로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유진은 아가로트의 기억에서 감정적인 영향은 받고 싶지 않다. 지난 시대와 지금 시대의 ‘나’를 구분하고 싶다. 그러한 바람이, 떠올린 기억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잘되지는 않았다. 정말로, 구분하고 싶었다면…… 기억에서의 감정을 거세해야 했다. 물론 그래 버리면 기억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았겠지만.
이름을 잊은 주제에, 다른 것들은 제법 세세히 기억이 난다.
전쟁신의 성녀. 황혼의 마녀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노을빛을 연상시키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탐스럽게 길렀고, 낮도 밤도 아닌 어스름하여 검푸른 눈동자를 가졌다.
얼굴…… 은 누아르와 닮지 않았다. 성격도 세세히 뜯어보면 다른 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살결을 가까이하면서 속삭이는 점 등은 닮았다.
‘환생해도 천성은 그대로인 건가?’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썹을 구겼다.
이곳은 겜블 스퀘어와의 경계선에 위치한 백화점. 고가의 명품들만 취급하며, 어지간한 재산으로는 입장조차 할 수 없는 VIP층.
VIP층이기는 해도, 쇼핑을 즐기는 사람은 제법 많다. 대륙에서 온 귀족들. 소국의 왕족도 있고, 헬무드의 마족도 몇몇 있다.
“저건…… 설마…….”
“유진 라이언하트?”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돌린 주제에, 이곳에서는 돌릴 생각이 없는 건가.
유진은 짜증을 느끼며 시선을 움직였다. 이쪽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눈동자와 숙덕거림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유진의 심기를 긁는 것은 역시 ‘마족’이었다.
남작. 그리 높다고 할 작위는 아니지만, 헬무드에서 꽤 알짜배기 영지를 가진 놈이라고 했다.
그런 영지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마족과의 영지전에서 빼앗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 남작의 경우에는 다른 고위 마족에게 후원이란 명목의 충성줄을 여럿 펼쳐두는 것으로 영지를 유지하고 있단다.
“…….”
유진이 살기를 풀어내자, 남작의 새빨간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조금은 엷어졌다. 유진은 어깨를 움츠리고서 물러서는 남작을 노려보며 들으란 듯이 내뱉었다.
“저따구로 생긴 새끼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영업방해 아닌가?”
실제로 남작의 생김새는 흉측했다. 피부는 빨갛고 눈은 셋에, 하반신에는 염소의 다리를 달고 있다. 대놓고 모욕을 던졌지만, 남작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층을 떠나 버렸다.
유진의 짜증에 겁을 먹은 것은 남작뿐만이 아니었다. VIP층의 다른 손님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군거림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들 유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돈만 낼 수 있으면 손님은 평등한 법이에요.”
누아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열 손가락을 뻗었다.
“물론 저도, 허스트 남작이 흉측하게 생긴 것은 인정해요. 하지만 그 흉측함도 돈이 있다면 나름의 개성이 되는 법이죠.”
“왜 여기서는 암시를 걸지 않은 거냐?”
“전부 다 유진, 당신을 위해서죠.”
주변의 듣는 귀가 있으니, 누아르도 유진을 ‘하멜’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백화점의 모든 손님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만약 누아르가 말실수를 해서 ‘하멜’이란 이름을 말해 버렸다면. 유진은 일단 소문을 틀어막기 위해 주변 모두를 사로잡거나 죽였을 것이다.
“착한 제가 직접 알려줬잖아요. 허스트 남작은 다른 여러 마족에게 돈을 바치고 있고, 그중에는 사막에 기어간 놈들도 있죠.”
누아르는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허스트 남작은 아주 자연스럽게 당신의 상황을 전달할 거예요.”
“용사인 내가, 너랑 단둘이 반지를 사러 왔다는 것을 말이냐?”
유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내뱉었다. 그러자 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대체 상황을 어떻게 만드는데?”
“글쎄요? 어떻게든 바뀌지 않을까요? 아항, 일단 이건 확실해요. 아멜리아 머윈은 저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저도 아멜리아 머윈을 별로 안 좋아해요. 우리 둘은 서로를 싫어한다구요. 그리고 유진, 당신도 그녀를 싫어하죠!”
“…….”
“적의 적은 친구…… 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우리 둘이 함께 반지를 살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멜리아 머윈도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에이, 진심은 아니죠. 그냥 아무 말이나 해봤어요.”
누아르는 장난기가 뚝뚝 묻어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유진은 당장 가서 저 턱을 걷어차, 혀를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억눌렀다.
“……다 봤으면 나가지?”
“왜 그리 마음이 급해요? 밤은 아직 긴데 말이야. 그리고 유진, 우리가 지금 나가서 뭐 할 것도 마땅치 않잖아요?”
누아르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유진을 보았다. 시선이 ‘끈적’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유진은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실감했다.
“물론…… 저는 이 긴 밤을 찰나로도, 영원으로도 만들 수 있어요. 유진, 당신이 아무리 도도하게 굴어도 제 침대에서는…….”
“꽈득.”
“흠, 후회는 안 할 텐데. 알았어요, 알았어. 침대에 가자는 얘기는 더 안 할게요. 대신 제 옆에 와보세요.”
“여기서도 보인다.”
“그래도 기왕이면 옆에서 보는 것이 더 잘 보이잖아요? 서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인데, 저 혼자 고르기는 싫단 말이에요.”
“네 멋대로 정한 거잖아.”
유진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서 내뱉었다.
지금 누아르의 열 손가락에는 전부 반지가 끼워져 있고, 그녀는 한참 동안 반지를 고르고 있었다. 저마저도 10개로 ‘줄은’ 것이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누아르는 수십 개의 반지를 가져다 두고서 고민했었다.
긴 시간에 걸쳐 엄선한 반지가 10개. ……형태는 다들 비슷했다. 큼직한 보석 따위는 달려 있지 않다. 그렇다고 작은 보석이 세공된 것도 아니다. 장식이 없는 수수한 반지. 솔직히 얼핏 봐서는 구분도 힘든 평범한 반지들.
“……너무 수수한 것 같은데.”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것으로 하면 되잖아.”
“하지만 이런 반지가 끌린단 말이야.”
누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얼마 동안 고민하던 끝에, 누아르는 결심하고서 반지를 선택했다. 누아르가 고른 반지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금색의 반지였다. 그녀는 만족스럽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 당신도 껴봐요. 손가락에는 맞아야 할 것 아냐.”
“꺼…….”
“꺼지라구요? 네, 알았어요. 제가 알아서 하죠. 직접 껴보지 않아도 대충 보면 알거든요? 사실 잴 필요도 없어요. 싸구려 반지도 아니고, 이런 반지는 어느 손가락에 끼우든 둘레가 맞춰진다구요.”
누아르가 손뼉을 짝짝 치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다가왔다.
“포장은 필요 없어. 이대로 가져갈 거야.”
“원하신다면 각인도 가능합니다. 여왕님.”
“각인? 각인이라…….”
누아르는 빙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직접 할게.”
유진의 이름을 적어도 되겠지만, 그 이름보다는 ‘하멜’의 이름을 적고 싶었다.
손바닥 위의 반지가 마력에 둘러싸여 둥실 떠올랐다. 반지 안쪽에 이름을 새기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게 내 거예요.”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향해 반지를 들어 보였다. 그녀의 약지 둘레에 맞춘 자그마한 반지의 안쪽에는 ‘하멜 다이너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건 당신 거.”
다른 반지가 들렸다. 그쪽에는 ‘누아르 제벨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아르는 유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쿡쿡 웃더니,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웠다.
“당신 반지는 내가 가지고 있을게요. 줬다가는 틀림없이 버릴 테니까.”
길게 뻗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한 올 잡았다. 톡 끊어진 머리카락이 반지에 엮이며 검은색의 목걸이로 바뀌었다.
사실은 목에 걸어주기를 원했지만, 저 남자가 그래 줄 리가 없다는 것은 누아르도 잘 알았다. 그녀는 제 손으로 목걸이를 걸고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가요.”
“어디로?”
“기왕 백화점에 왔는데, 반지 하나 사고 쇼핑을 끝내는 것은 아쉽잖아요? 당신은 뭐 갖고 싶은 것 없나요?”
“없어.”
“그 두 꼬마는 갖고 싶은 것이 많을 것 같은데.”
“나도 돈 많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죠.”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의 옆을 지나쳤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ㅡ 지금의 상황에서 유진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누아르의 뒤를 따랐다.
빌어먹을 환생 434화
누아르에게 끌려다니다시피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솔직히 일행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아서 멀찍이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누아르는 그런 꼼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몇 번이나 유진의 이름을 부르고, 가까이 다가와서 팔을 끌어안는 등의 수작을 부렸다.
그것이 몇 번이고 반복되니 유진도 결국은 포기했다. 반쯤 넋을 빼두고 누아르를 따라다니며, 짐을 들어주면서……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굴렸다.
남은 질문은 2번. 어떤 질문이 유의미할까. 역시, 거느린 사병에 대해서 물어볼까.
아니,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 솔직히 이 도시에서 뭐가 튀어나와도 놀랍지도 않거니와, 얼마나 많은 병력을 보유했건 간에 결국 가장 큰 난적은 누아르 제벨라 본인이다.
‘유폐의 마왕이나 가비드 린드먼 쪽을 파고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가령, 유폐의 마왕의 약점이라든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약점? 그런 것이 있기는 할까. 설령 있을지라도, 누아르가 알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네게 뭘 물어볼지에 대한 생각.”
유진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귓가에 흐르는 음악이 거슬린다.
차라리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계속 움직이기라도 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움직이지도 않고 있다.
쇼핑을 끝내고 도착한 장소. 잔잔한 음악과 셰이커 흔드는 소리가 어울리는 분위기 좋은 바. 유진과 누아르는 구석의 자리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오늘이 아니라 다음에 물어봐도 괜찮아요.”
누아르는 술잔을 흔들며 웃었다. 유진의 앞에도 술잔은 있지만, 아직 잡지는 않았다. 어느덧 새벽이 깊었고, 앞으로 몇 시간만 지나면 해가 뜰 것이다.
“다음에도 너랑 어울릴 생각은 없어.”
“참 일관된 사람이네요. 그런 점을 좋아하지만, 데이트 상대로는 재미가 없는걸.”
“데이트?”
“지금 당신과 내가 하는 것이 데이트가 아니면 뭐예요?”
반박할 기운도 없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술잔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나는 네가 이해가 안 돼.”
“기뻐요, 하멜. 드디어 저와 ‘대화’하고 싶어진 건가요?”
누아르의 호들갑에 반응하지 않았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따사로운 색채의 조명 아래에서 누아르의 미소가 보였다. 그녀는 무어라 말하지 않고, 유진의 말을 기다렸다.
“대화? 대화라…… 글쎄. 푸념이나 하고 싶은 기분이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술잔을 들었다. 그 행동에 누아르는 감격하여 입을 크게 벌렸다.
“하멜. 저와 함께 술을 마시려는 거예요?”
“내가 X 같아서 마시고 싶은 거야.”
“그렇군요! 알겠어요, 하멜. 당신이 혼자 마시듯, 저도 혼자 마시도록 할게요. 우리는 이렇게 마주 앉아 있지만, 함께 마시는 것은 아닌 거예요.”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술잔이 다가왔지만, 유진은 무시하고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래서 하멜. 제 무엇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전부.”
빈 술잔을 내려놓자, 누아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독하디독한 황갈색의 술이 잔을 반쯤 채웠고, 유진은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네가 나한테 질척대는 것.”
“그건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 도시에 들인 공도 이해가 안 된다.”
“흐응, 이해가 안 된다, 라. 나는 오히려 그 말이 이해가 안 되는걸요. 이곳이 어떤 도시인지, 무엇을 위한 도시인지는 하멜, 당신에게 이미 말했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공을 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요?”
누아르가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새로 사서 갈아입은 옷은 목이 움푹 파인 디자인이라, 저렇게 몸을 숙이니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저 가슴골보다 위에서 흔들리는 목걸이ㅡ 반지에 시선이 갔다.
“도시를 봤다.”
유진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너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자기애가 넘치지.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것에 네 이름을 붙일 정도로 말이야.”
도시의 이름은 제벨라 시티. 테마파크의 이름은 제벨라 파크. 날아다니는 머리통은 제벨라 페이스. 성의 이름은 제벨라 캐슬. 기차의 이름은 제벨라 트레인……. 저것들 말고도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대륙 최고의 관광지라 했지. 과연 사람이 득실거리더군. 어린애들도 많고.”
“……아하.”
누아르의 두 눈이 샐쭉 휘어졌다. 그녀는 지금 유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눈치챘다.
“죄책감에 대해 묻고 싶은 건가요?”
“꼭 그 감정만을 짚고 싶은 것은 아니야.”
“상실감?”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었다.
“아니면 후회? 그런 것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마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헬무드를 보면ㅡ 정말로 ‘잘’ 알고 있던 것인지, 가끔은 의문이 들곤 했다.
전쟁시대에서 마족은 적이었다. 다르게 정의할 수는 없었다. 그 시대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마족은 무조건 싸워야 할 적이었다. 평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마왕을 죽이고 마족을 몰아내야 했단 말이다.
하지만, 과연 모든 마족이 ‘적’이었나? 그것에 대해서는 유진도, 하멜도, ‘반드시’ 그렇다고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마족이란 하나의 종족이고, 셀 수 없이 많은 마족 중에서는…… 어쩌면 인간을 해치지 않은, 인간에게 우호적인, 그런 마족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그 생각에 몰두할 필요가 없었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나쁜 마족, 착한 마족, 이딴 구분을 하는 것보다는 그냥 모든 마족을 적이라 여기고 죽여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 시대는 다르다. 평화의 시대다. 3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 평화의 시대에서 태어난 마족을 ‘적’이라고 둬야 하나? 이 시대의 ‘제국’ 헬무드에서 태어나, 이민자인 인간들과 당연하단 듯이 어울리며, 인간에 대한 호의만을 가진 마족은 ‘적’인가?
언젠가 전쟁은 벌어진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에라도 유진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당장 바벨에 쳐들어간다면 유폐의 마왕은 300년간 약속으로 지켜온 평화를 끝내 버릴 것이다.
“당신이 기억하는 300년 전과, 지금 시대의 괴리를 생각하나요?”
누아르의 보라색 눈동자에서 빛이 일렁거렸다. 그녀는 유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의식을 파고들어 생각을 훔쳐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아르는 유진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는지를 꿰뚫어 보았다.
“내가. 당신이 아는 300년 전과 달라졌거나…….”
누아르는 소파에 앉은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갱생이라도 해버려서, 나를 굳이…… 적으로 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 건가요?”
“조금은.”
완전히 무시할 문제는 아니다. 약속이 끝이 나고, 유폐의 마왕이 전쟁을 일으킬 때. 상당수의 마족들은 동조할 것이다.
특히 전쟁시대를 겪은 상위서열의 마족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이 틀림없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나중의 전쟁을 기다리지 못한 마족들 상당수가 사막에 넘어가 있다.
하지만 모든 마족이 동조할까? 3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평화에 물들어버린 마족도 있지 않을까. 평화가 당연한 시대에서 태어난 마족들은 오히려 전쟁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아르 제벨라.
이 도시의 주인. 매일 끊이질 않는 관광객들은 누아르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친근하고 가까운 마족 중 으뜸은 바로 누아르일 것이다. 유진은, 그녀의 바람을 정확히 파악하고 싶었다.
“나와 관련된 것을 떠나, 너는 전쟁을…….”
“후후.”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아르가 먼저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한모금 마신 술잔을 내려놓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지금부터의 대답은, 당신에게 남은 질문 중 하나를 소모하는 것으로 치죠.”
“…….”
“그만큼 내가, 진심으로 대답하겠다는 거예요. 일말의 거짓 없이.”
유진은 반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딱히 물어볼 것도 당장은 없는 데다, 누아르 제벨라의 ‘본심’을 들을 수 있다면 교환할 법하다고 생각했다.
“난 말이에요, 하멜.”
누아르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져갔다.
“죄책감. 상실감. 후회. 그러한 종류의 감정을 겪어보고 싶은 거예요.”
“…….”
“이 도시를 찾아온 모든 손님들은 모두가 가슴 안에 욕망을 가지고 있죠. 남자, 여자, 어린아이, 노인, 모두가 똑같아요. 그들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풀기 위해, 꿈을 꾸기 위해 이 도시에 찾아와요.”
누아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것뿐이에요. 그들이 제게 바라듯, 저 역시 그들에게 바랄 뿐. 지금은 나도 바라는 것이 있기에 상대하지만, 바라는 것이 없다면? 하멜, 아마 당신은 이 대답을 좋아할 거예요.”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 도시에 찾아온 모두가 나를 증오하며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기뻐할 거예요.”
정답이다.
유진은 그런 대답을 원했다. 저 몽마의 여왕이 300년 동안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평화의 시대에서 조금도 갱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전쟁? 아하핫……. 맞아요, 전쟁은 벌어지겠죠. 당신과 나, 둘 중 하나가 죽는 것이 먼저일지, 전쟁이 먼저일지는…… 흠, 이건 조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 같은데. 내가 당신을 죽인다면, 유폐의 마왕은 전쟁을 일으킬까요?”
“모르지.”
“그렇다면 가정을 해보죠.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유폐의 마왕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동조하지 않은 마족은 꽤 많을 거예요. 300년 전에도 그랬거든요. 하지만 그걸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전쟁이 싫은 마족은 알아서 물러설 것이고, 저는…… 후후, 당연히 선봉에 있겠죠.”
누아르는 하멜의 저런 면을 꽤 좋아했다. 저 남자는 제멋대로에 감정적인 것 같은데도 의외로 그렇지 않다. 감정적으로 보이는 행동에는 나름의 이성과 계산이 깔려 있다. 행동과 선택에는 항상 최소한의 근거와 명분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점을 알기에, 누아르는 유진의 기대에 부응해 주고자 했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증오해야 할 적이 변해 버린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 도시의 주인으로, 수많은 인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내가. 그 사랑에 물들어, 똑같이 인간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모양이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틀렸다. 누아르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마족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누아르 제벨라’인 자신과 ‘하멜’, 둘 뿐이다.
“나는, 그냥 나예요. 하멜, 당신이 아는 누아르 제벨라. 어쩌면 당신은 나를 잘 모를지도 모르죠. 그럴지라도 문제는 없잖아요? 이것만큼은 장담하는데, 나는…… 당신이 죽여야 할 ‘적’이에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의심이 든다면, 내가 기꺼이 ‘적’이 되어주죠.”
제벨라 시티에 온 뒤로 하멜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태까지 흔들림을 보인 적이 없는데…… 이 도시에서는 몇 번이나 흔들림을 보이고 있다. 기억의 괴리 때문에? 과연 그것뿐일까. 누아르는 정확한 답은 알 수가 없었지만.
저 흔들림은ㅡ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어떤 면을 보았던 것인지, 어떤 착각을 하여,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싸우는 것에 가슴에 걸리는 것이 많아졌다는 것은, 아름답게 장식될 최후에 감미로움을 더해줄 것이다.
“적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나?”
유진의 감정은 고요히 가라앉았다. 번뇌, 미혹,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황혼의 마녀가 아닌 누아르 제벨라를 응시했다.
“없어요.”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과 함께 침대에 눕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하멜, 이건 애증(愛憎)이 아니에요. 나는 당신을 증오하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갖는 사랑은, 누군가의 죽음 외의 끝은 존재하지 않아요.”
증오 없이, 오직 사랑으로만 죽음을 바라고 있다. 유진은 그 말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생각을 깊이 하지는 않았다. 이해를 포기했다.
“하.”
미련을 가질 여지도 없다. 유진은, 자신의 생각과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하하, 하하하…….”
가슴을 꽉 메우는 답답함이 사라졌다. 누아르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유진이 실없는 웃음을 흘리기 시작하자, 누아르도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아, 그래도……. 이런 날이 왔다는 점에서는 평화도 꽤 좋네요. 설마 당신과 웃으며 술을 마실 날이 올 줄이야.”
지금의 상황 자체가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상상이 되지 않던 것 중 하나였다. 그토록 마족을 증오하던 하멜과, 이렇게 얼굴을 마주 대고 앉아서 술을 마신다니.
“꿈만 같아.”
누아르는 손으로 턱을 괴며 유진을 응시했다.
그녀는 몽마의 여왕. 영원한 꿈이 없다는 것을 그 어느 존재보다 잘 알고 있다. 갈망하는 인간들에게 한순간에 영원과 같은 환상을 주지만, 정작 그녀는 이 현실에 얽매여 있다.
앞으로 머지않았다. 고작해야 몇 시간 뒤에는 이 낭만적인 꿈이 끝나 버린다. 매달리는 인간의 마음을 조금 이해했다.
과연, 이 아쉬움이 싫어 꿈의 계속을 바라는가. 누아르는 그 ‘아쉬움’을 즐기며, 유진에게 속삭였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내 방에 갈래요?”
“꺼져.”
“그럼 우리 옛날이야기나 하죠. 그래, 이건 어때요? 당신과 저의 첫 만남. 당신의 꿈에서…….”
콰직! 유진의 손안에서 술잔이 박살 났다.
* * *
시답잖은 이야기들에 어울려줬다. 누아르가 말하고 싶어 하는 ‘옛날이야기’란 유진의 살의를 충천시키는 전쟁시대의 이야기뿐이라, 결국 옛날이야기는 주제로 삼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는 꽤 많이 나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아르가 일방적으로 떠들고 유진은 대부분 듣기만 했다.
여명기의 이야기.
전쟁이 끝나고, 헬무드가 제국이 되고서의 이야기. 누아르가 어떻게 공작에 오르고, 세력을 확장시켰는지. 그녀의 야망과 욕망 앞에서 얼마나 많은 정적들이 잡아먹혔는지.
“라이자키아 말이에요. 그 멍청이는 내가 노리는 가장 큰 먹잇감이었죠. 놈이 새끼를 잔뜩 까고서 힘이 불어나 오만이 하늘을 찌를 때. 그때 잡아먹을 생각이었는데.”
환한 불빛들 탓에 하늘의 색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과 누아르도 지금 동이 터오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네가 먹혔을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요? 아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멜, 당신도 라이자키아와 싸워봤잖아요? 그 멍청하고 오만한 드래곤은, 드래곤이라는 것 외에는 잘난 재주가 없었다고요.”
누아르는 유진의 바로 옆을 걸으면서 깔깔 웃었다. 그녀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주변 건물의 불빛이 꺼졌다.
“라이자키아는 먹지 못했지만…… 흐흥, 당신이 환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마왕이 되어서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했을 거예요. 당신은 모르죠? 제가 마왕이 되지 않는 것은, 순전히 당신 때문이라구요.”
“바라면 언제든지 마왕이 될 수 있다는 투로 말하는군.”
“아하하! 그 머저리 아이리스도 마왕이 되었는데, 제가 뭐가 부족해서 마왕이 못 되겠어요? 그리고 저는 마왕이 될 수 있는 방법도 이미 알고 있다구요. 하지 않을 뿐이지.”
만약.
바라는 대로, 하멜을 죽이고 나면ㅡ 그때는. 누아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멜. 나는…… 여명이 싫어요.”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이 싫다.
“옛날도 싫었지만, 앞으로는 더 싫을 것 같아.”
어느새 누아르와 유진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불빛은 모두 꺼졌다. 하지만 멀찍이 걷는 사람 중에서는 누구도 이 현상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여명이 거리를 밝혀온다. 누아르는, 그 희미한 빛에 닿은 유진의 모습에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감정이 떠오르고 뒤섞인다. 누아르는, 알 수 없는 데자뷰를 느끼면서 속삭였다.
“지금이 황혼이라면 좋았을 것을.”
해가 저무는 때라면. 밤이 걸쳐진 때라면.
애틋함에 목이 타는 것만 같다. 이상하게 눈동자가 시리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핫.”
설마 눈물까지 흘리게 될 줄이야. 누아르는, 지금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이유를 곡해할 수밖에 없었다.
꿈의 끝이 이토록 아쉬운 것이던가.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왼손을 쥐었다.
약지의 반지가 느껴졌다. 누아르는 놀란 얼굴로 선 유진을 응시하다가, 방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안녕, 하멜.”
빌어먹을 환생 435화
몇 걸음 걷던 누아르의 몸이 안개로 흩어졌다. 유진은 사라지는 안개를 응시하다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마지막에 누아르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우는 거지? 놀이가 끝나는 것이 아쉬워서? 미친 짓을 일삼는 누아르라면 저딴 이유로 눈물을 흘리는 ‘척’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 느끼기에 방금 보았던 눈물은…… 연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누아르 본인조차도 눈물이 흐르는 것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지금이 황혼이라면 좋았을 것을.
누아르가 남긴 중얼거림이 머릿속에 맴돈다.
“…….”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유진은 떠도는 상념들을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아가로트의 기억, 감정. 그리고 누아르 제벨라의 전생.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겠다고는 진즉에 결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다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아르와의 대화에는 많은 가치가 있었다. 누아르가 이 도시에서 완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대해 알았다. 누아르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적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3번의 질문 중에 아직 하나가 남기는 했지만, 당장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써먹으면 되겠지. 사실 더 물어볼 것도 없고…….’
누아르가 떠난 영향인지, 텅 비었던 주변에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했다. 유진은 후드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괜한 시선을 차단한 뒤, 숙소인 제벨라 캐슬로 향했다.
‘크리스티나랑 아니스가 걱정하고 있을 것 같은데…….’
정찰할 겸 다녀오겠다고 말은 해뒀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넉넉잡아도 자정쯤에는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미 아침 해가 떠버렸다. 아니스가 구박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워 어깨가 축 처졌다.
……어제.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감촉이 떠올랐다. 유진은 헉하고 숨을 삼키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연하게도 지금 입안에서는 평소와 다른 감촉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진은 몇 번 더 헛기침을 하고서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스의……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제벨라 캐슬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유진은 그런 걱정을 했다.
펜트하우스에 올라오고서는, 직전까지의 걱정이 사소했던 것임을 직감했다.
진즉에 해가 뜨기도 했지만, 제벨라 파크는 밤이 없는 도시. 이 최상층의 펜트하우스는 실내조명 대신에 창밖의 야경을 조명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 펜트하우스는 새카만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들은 두꺼운 암막 커튼에 가려져 있고, 천장 샹들리에를 비롯한 모든 조명들이 꺼져 있다.
“……음…….”
어두컴컴한 거실. 커다란 소파의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는 거실에 드리운 어둠과 같은 새카만 성직복을 입고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불 끄고…… 뭐 하는 거야?”
유진은 저기서 두 눈을 감고, 소파 위에서 무릎을 꿇고, 옆에는 플레일을 내려놓은 성녀가 크리스티나인지, 아니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 험악한 상황만 놓고 본다면 아니스일 것 같은데, 최근 들어서는 크리스티나도 아니스와 비교해서 뒤처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칵.
성녀는 대답 대신에 리모컨을 조작했다. 그러자 거실의 TV가 켜지고, 미리 녹화해 둔 영상이 재생되었다.
어제저녁에도 보았던 제벨라 시티의 자체 채널. 하지만 속보랍시고 나오는 영상은 어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허어…….”
녹화된 영상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심야의 백화점에서 반지를 고르는 누아르 제벨라. 화면 속의 누아르가 유진을 돌아보며 반지를 들어 보이고, 유진이 무어라 대답을 하는 영상. 각도 탓에 표정은 절묘하리만큼 가려져 있고, 목소리는 아예 빠져 있다.
“오해야.”
유진은 냉큼 대답했다. 하지만 성녀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처음과는 달리 눈은 뜨고 있지만,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조명이 꺼진 거실보다 음침하게 느껴졌다.
빨리 감기. 백화점에서 반지를 고르는 상황이 지나간다. 다른 층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옷을 고르는 누아르. 말없이 따라다니는 유진.
“오해야.”
유진은 다시 말했다. 다시 빨리 감기. 이번에는 배경이 바뀌었다.
새벽의 거리를 걷는 유진과 누아르. 이번에도 각도가 절묘해서, 둘의 뒤쪽에 알록달록한 모텔 건물이 여럿 잡혔다.
유진은 진심으로 억울해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니라니까!”
“무조건 죽인다.”
성녀의 입이 열렸다.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단호하게 내뱉으시더니.”
삐걱, 하고 머리가 돌아갔다. 칙칙한 눈동자 어둠 속에서 돌연 안광을 발했다.
유진은 저 눈동자에서 전해지는 섬뜩함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어느새 손바닥이 땀에 축축하게 젖었다.
“늦은 밤에 백화점에서 반지를 고르고, 새벽에는…….”
크리스티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오해란 놈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유진은 후다닥 뛰어와 크리스티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기, 크리스티나,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 오해라고, 오해. 내가 누아르 저년이랑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하룻밤의 불장난인 겁니까.”
크리스티나의 눈에서 다시금 안광이 번뜩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푸른색 귀화(鬼火)가 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유진 님. 저는 모든 일에서 유진 님을 믿고 싶지만, 지금 유진 님에게서는 저 갈X의 향수 냄새와 살 냄새. 그리고…… 술 냄새가 납니다.”
썩을.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고서 망토를 몇 번 들춰보았다.
과연, 반나절 내내 누아르와 다녔던 탓인지, 확실히 냄새가 배어 있기는 했다.
“다 설명할 수 있어.”
“듣기 두렵습니다.”
“야! 두렵기는 뭐가 두려워?! 내가 정신이 돌아버리지 않고서야…….”
“저 갈X가 유진 님을 제압하고 강제로 현혹하여 노리개로 삼은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만…… 지금 유진 님의 의식은 맑아 보이는군요.”
“난 멀쩡해. 아무 일도 안 당했고, 아무 일도 없었어.”
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오해할 만한 상황이란 것은 인정한다만, 성녀들에게 그런 오해를 받는다는 것은 유진으로서는 서럽고 억울하며 화가 났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성녀들은 유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잖은가.
“……으흠.”
유진이 진심으로 감정을 담아 노려보고 있으니, 크리스티나도 낮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눈동자의 귀화를 거두었다. 리모컨을 조작하자 어두컴컴하던 거실에 불빛이 켜지고, 창가의 커튼도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농담입니다.”
“뭐라?”
“너무 늦게 돌아오시길래 장난을 쳐본 것입니다. 저와 아니스 님이 이런 문제로 유진 님을 의심할 리가 없잖습니까.”
갑작스레 떠올린 이전 시대의 정, 그런 것에 휘말리거나…… 아니면 방금 말했던 대로, 누아르에게 억지로 현혹당해 끌려간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조금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ㅡ 유진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유진’과 ‘하멜’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이렇게 불 꺼놓고 분위기를 잡고 있었으면서 장난이었다고……?!”
“유진 님이 새벽에라도 연락을 주셨다면 제가 이런 심술은 부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연락을 줘!”
“어떻게든 하셨어야죠.”
크리스티나는 옆에 두었던 플레일을 집어 들며 말했다. 휘두른 것도 아니고 막대를 잡았을 뿐인데, 유진은 괜히 위축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제가 정말로 유진 님의 외도를 의심했다면, 이렇게 불을 끄고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럼?”
“직접 유진 님을 찾으러 갔겠지요. 사실 아니스 님은 새벽 중에 몇 번이고 유진 님을 찾으러 가자고 조르셨습니다.”
그렇게 말한 순간, 크리스티나의 몸이 살짝 떨렸다. 아니스로 의식이 바뀐 것이다.
“크리스티나가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아주 제 머리 위에서 춤을 추는군요!”
“걔는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많이 컸어.”
유진은 크리스티나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니스는 저 말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한 것인지, 경멸로 눈썹을 찡그리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엉큼한 자식 같으니. 크리스티나를 처음부터 그런 눈으로 보았던 겁니까?”
“내가 뭐 이상한 말을 했니?”
“순진한 척하지 마십시오, 하멜, 저는 어제의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제의 일…… 두 눈을 끔벅거리던 유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어제 뭘 했다고! 나는, 나는 어제의 일에 죄가 없어. 그, 나한테 애먼 짓을 한 것은 크리스티나였…… 아니, 너였잖아!”
“크리스티나의 거짓부렁을 믿는 겁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입맞춤은 크리스티나가 했는데 혓바닥만 제가 움직이는 것이 말이 되냔 말입니다!”
“그…… 내가 너희의 상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해서 말이야. 말은 아니스 네가 하고, 몸은 크리스티나가 움직이고…… 이거 되는 것 아니었어?”
“미친 새끼! 진심으로 말하는 겁니깟!”
아니스는 버럭 외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유진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이건 크리스티나가 찬 겁니다!”
“지금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냐?”
“이건 못 믿으면서 어제 혓바닥이 저라는 말은 왜 믿은 겁니까?!”
“그건…… 그건 네가 할 법한 일이라서…….”
“저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저는 그런, 그런 음탕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내뱉고, 다시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스에서 크리스티나로 주도권이 넘어왔다.
“시스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음탕한 짓을 한 것이 되어버리잖습니까! 어제의 문제는 이미 저희끼리 합의가 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서로가 적절히 역할을 나누어 진도를 나가기로 합의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새벽이다. 홧김에 내뱉어 버린 아니스는 아차 싶었지만,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둘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얼떨떨한 얼굴로 보던 유진은, 화제를 돌릴 겸 거실을 슥 둘러보았다.
“애들은 어딨어?”
“지금 시간이 몇 시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아직 아침입니다. 그 두 꼬마가 지금처럼 이른 시간에 일어나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라이는 몰라도 메르는 안 자잖아.”
“잠은 안 자도 자는 척이나 잠 비슷한 것은 하잖습니까. 궁금하면 방에 가서 직접 보십시오. 저는 크리스티나와 담판을 지어야겠습니다.”
아니스는 등허리를 꼿꼿이 세우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유진은 칼끝이 자신을 떠난 것에 안도의 한숨을 삼키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넓은 만큼 방도 많지만, 라이미르아와 메르는 같은 방을 고집했다. 지금만 해도 둘은 커다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었다.
“자는 척은 왜 하는 거야?”
유진은 방문을 살짝 열고서 투덜거렸다. 아무리 방음이 좋은 방이어도, 헤츨링인 라이미르아와 고성능 사역마인 메르의 감각은 자그마한 소란마저 감지해 낸다.
“다 끝났나요?”
메르가 이불을 턱 끝에 걸치고서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침대 옆에 다가가,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가 끝났냐는 거야?”
“훈육이요.”
“훈…… 뭐? 훈육? 누가 누구를?”
“아니스 님이 유진 님을요.”
메르가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물었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아래로 내려가 메르의 뺨을 꼬집었다.
“내가 아니스한테 훈육을 왜 받아!”
“밤거리를 배회하며 못된 짓을 하셨잖아요.”
“내가 무슨 못된 짓을 했다는 거야?”
“세냐 님한테 이를 거예요.”
메르가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흘겨보았다.
그건…… 그건 유진으로서도 오냐 하고 넘기기 힘든 발언이었다. 유진은 꼬집은 손가락에 슬쩍 힘을 풀고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음…… 아롯에서 바쁘게 마법 개발과 수행 중인 세냐에게 괜한 말을 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방해가 될 거야.”
“말 한번 잘하셨어요. 세냐 님이 그렇게나 열심히 하고 계시는데, 유진 님은 새벽에 갈X의 여왕이랑 밀회를 즐기셔도 되는 건가요?”
“너…… 너 내가 그런 못된 말 쓰지 말랬지. 그리고 밀회는 무슨 밀회?”
“은자여, 은자여, 메르의 머리만 쓰다듬고 뺨을 꼬집는 것은 너무한 차별이니라. 본녀도 은자의 손길을 원하느니라.”
라이미르아가 이불 속에서 꼬물대며 메르에게 제 몸을 걸쳤다.
“최근 들어서 본녀는 은자에게 서운한 점이 하나 있느니라.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은자가 본녀를 대하는 것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는 것이니라.”
“내가 뭐가 달라졌다는 거냐.”
“은자는 최근 몇 달 동안 본녀의 이마를 단 한 대도 때리지 않았느니라.”
라이미르아가 손가락을 들어 이마의 홍옥을 가리켰다.
“물론…… 물론 홍옥에 딱밤을 맞는 것은 아주아주 아프니라. 하지만, 은자가 메르의 뺨을 꼬집고 꿀밤을 쥐어박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본녀도 가끔씩은 이마의 딱밤을 맞고 싶다고 생각하느니라아악!”
따악! 라이미르아의 말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메르가 홍옥에 매콤한 딱밤을 먹인 것이다.
“이 멍청이. 그토록 맞고 싶은 것이라면 내가 때려주겠어요.”
“본녀는! 은자의 애정 어린 딱밤을 맞고 싶은 것이니라!”
둘은 평소대로 뒤엉켜서 다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진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릴 때 살던 기돌. 그 시골 거리에서 곧잘 보이던 길고양이 2마리가 다투는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그…… 맞을 짓을 안 했는데 때리면 내가 개새끼가 되잖아.”
“본녀가 맞을 짓을 하면 때려주는 것인가?”
“맞을 짓을 하면…… 어…… 근데 나는 맞을 짓보다 착한 짓을 하는 게 좋은데.”
“그래도…… 그래도 가끔은 예전처럼 때려주기를 바라악!”
따악! 이번에도 라이미르아의 말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던 메르가 또다시 홍옥을 정확히 타격한 것이다.
연달아 두 대를 얻어맞으니 라이미르아도 꺅꺅 비명을 지르며 메르에게 달려들었고, 둘은 다시 고양이처럼 뒤엉켜 다투어 댔다.
유진은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앉아서 둘의 다툼을 관망했다. 저렇게 실없이 다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속세의 모든 문제가 하찮게 느껴졌다…….
마음 편히 차라도 한 잔 곁들이고 싶은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데, 주변의 바람이 일렁거렸다.
[하멜.]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제가 생겼다.]
“문제? 무슨 문제. 멜키스 님 때문에 그래?”
[그렇다.]
문제, 라고 말은 하지만. 템페스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평온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하나뿐이었다. 멜키스 쪽에서만 문제랍시고 호들갑을 떨어댈 뿐. 실제로는 별로 긴급하지도 심각하지도 않은 문제라는 것.
“무슨 일입니까?”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 생각해서 말을 걸었다. 그러자 바람이 일렁거리면서 멜키스의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유진아! 유진아! 큰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마족!]
멜키스가 꽥 비명을 질렀다.
[날 죽이겠다는! 그 못생긴 새끼가 나타났어!]
멜키스의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오열할 것처럼 질척했다.
하지만 유진의 얼굴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열 57위의 하르페우론이 멜키스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환생 436화
가짜
바람의 정령왕과의 계약 주선의 대가로 사막에 넘어온 지도 반년이 훌쩍 넘었다.
약소국의 산골 마을 출신인 멜키스는 산을 뛰어다니고 냇가에서는 멱을 감다가 개구리와 벌레 따위를 잡아 불에 구워 먹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갖게 된 강력한 생활력 덕에, 빈말로도 쾌적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사막 생활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평소에 멜키스는 사막의 모래 밑에서 생활했다. 항상 같은 굴에서만 지내지는 않았다.
요 반년 동안 멜키스의 손에 의해 생매장된 흑마법사의 수는 이미 세자릿수가 넘는다. 멜키스는 지금 자신을 노리는 적들이 한둘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나하마의 술탄은 대외적으로는 흑마법사 사냥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지만, 꾸준히 어쌔신 부대와 모래술사들을 보내고 있다. 두 달쯤 전부터는 훈련이란 명목으로 군대도 나돌아다니는데,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찾아다니듯이 움직이는 등 탐색에 적극적이다.
소용없는 일이다. 대지의 정령왕, 야노스의 가호를 받는 멜키스에게 있어 이 거대한 사막은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이미 몇 번이나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희롱했고, 그러는 와중에도 꾸준히 흑마법사의 던전을 탐색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던전의 탐색이 힘들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던전 자체는 찾아내도, 흑마법사와 조우가 힘들어졌다. 이미 여러 번 허탕을 친 것으로 판단하건대, 드디어 던전 마스터들이 고집을 꺾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안마당이나 다름없는 던전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사막에서 살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이곳에서의 생활이 엄청나게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반년이나 넘게 사막에서 살다 보니 아롯의 도시가 그리웠다.
백색마탑, 사랑스럽고 충성스러운 마법사들. 듣자 하니 아롯에서 현명한 세냐가 대륙 모든 대마법사들을 모아놓고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는데…… 멜키스는 자신이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몹시나 서러웠다.
몇 번이고 다시 유진에게 이제는 돌아가도 되지 않겠냐고 어필했지만…… 유진의 입장은 여전했다. 고위 마족이 사막에 넘어왔다고는 해도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니니, 직접적인 변화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사막에 있어 달란다.
“어떡해?”
멜키스는 커다란 모자를 푹 눌러쓰며 속삭였다.
이곳 라그라 오아시스 도시는 나하마에서도 유명한 휴양도시다. 사막 한복판에 있는 곳이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오아시스는 거대한 호수와 다름없으며,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차갑다.
그간 열심히 일한 나 자신에게 주는 포상 겸해서, 멜키스는 벌써 사흘 동안 이 도시에서 머무르고 있다. 지금만 해도 그녀는 파격적인 비키니를 입고, 오아시스 근처의 썬 베드에 누워 몸매를 과시하고 있었다.
기왕 사막에 와 있는 것, 이미지도 바꿔볼 겸 태닝이나 해볼까……. 나름 진지하게 고민을 하던 중에,
마족을 봤다.
사실 헬무드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마족을 보는 것이 엄청나게 드문 일은 아니다.
헬무드가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국가고, 대륙의 다른 국가들에 마족에 관련된 법이 거의 없는 점, 그리고 마족 이민자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 점 때문에 타국에서 마족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아롯에도 관광을 빌미로 장기 체류를 하는 마족은 몇몇 있다.
이곳, 라그라 오아시스도 마찬가지다. 나하마에서도 유명한 휴양도시인 만큼, 관광을 온 마족은 간간이 보였다.
그들이 정말로 관광객인지, 아니면 관광을 빌미로 한 불법체류자인지까지는 멜키스가 알 바가 아니었다. 당장 아롯 수도의 볼레로 거리 같은 암시장에 마족 불체자들이 녹아 사는데, 마족과 유착하고 있는 나하마에 마족 불체가 적을 리도 없잖은가.
여태까지 나하마에서, 이 도시에서 보았던 마족들은ㅡ 이렇게 말하는 것도 조금 이상한 표현이겠지만, ‘평범한’ 마족들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일반 마족 시민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저 마족은 다르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한 감각은 멜키스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족이 나타난 순간에 숨을 삼켰고, 감히 쳐다보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못해 어깨를 움츠렸다.
주변을 자연스레 압도시키는 존재감. 여태까지 봐왔던 일반 마족 시민과는 다른 ‘고위 마족’. 사실 다른 사람들이 마족을 주변을 압도하는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헬무드 서열 57위의 하르페우론 백작. 이전에 멜키스가 쏟아낸 원색적인 비난에는 한 치의 거짓이나 과장이 없었던 것이다.
우락부락한 덩치에 흉측한 모습. 성인 남자의 2배는 될 법한 거구는 그럭저럭 인간의 몸뚱이와 비슷하지만, 어깨 위에는 코끼리의 머리가 달려 있다. 축 늘어진 귀는 마치 벌레의 날개처럼 퍼덕거리고, 4개의 눈동자는 시뻘건 색의 요사스런 안광을 흘린다.
특히나 보기 힘든 것은, 하르페우론이 사타구니만 가린 수영복 차림이란 것이다.
쫙 달라붙는 삼각 수영복을 입은 하르페우론은 양옆과 뒤에 여자들을 대동하고서 나타났는데, 뒤쪽에는 수행인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들도 여럿 보였다.
[멜키스.]
“알아.”
야노스가 속삭였다. 뒤따르는 남자들도 기척이 심상치 않다.
몇몇은 어쌔신으로 보이고, 나머지는 전사들인가? 고위마족들이 나하마에 넘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ㅡ 설마 이런 곳에서 맞닥트리게 될 줄이야.
‘날 잡으러 온 건가?’
특정되지 않기 위해 마법으로 얼굴은 바꿨지만, 괜히 신경이 쓰여서 옆에 벗어 두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서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맞닥트린다면 사막 한복판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관광지에서 만날 줄이야! 아니, 어쩌면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미녀를 끼고 삼각 수영복을 입은 하르페우론의 모습은, 이 만남이 우연이란 생각에 힘을 실었다.
그래도 맞닥트린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멜키스는 썬베드 옆에 쌓아 둔 튜브와 서핑 보드를 지나, 자연스럽게 탈의실로 향했다.
“유진아! 유진아! 큰일이야!”
탈의실 뒤편으로 넘어가, 하르페우론이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된 즉시 바람의 정령을 불러들였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마족!”
멜키스는 꽥 비명을 질렀다.
“날 죽이겠다는! 그 못생긴 새끼가 나타났어!”
대답은 곧장 돌아오지 않았지만,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 작은 소리에서 느껴지는 떨떠름한 감정에 멜키스의 표정도 덩달아 떨떠름해졌다.
[혼자입니까?]
“응? 누나는 당연히 혼자 있지. 아…… 아니야, 혼자가 아니야, 정령들도 같이 있어.”
괜히 또 정령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 것이 아닐까. 멜키스는 즉시 말을 바꾸었다.
[아뇨…… 멜키스 님 말고요. 하르페우론, 그 새끼가 혼자냐구요.]
“응? 아니 아니, 걔는 혼자가 아니야. 괴물딱지처럼 생긴 주제에, 웬 미녀들을 4명이나 끼고 있던데? 뒤에는 전사와 어쌔신을 수행인으로 두고 있고.”
[다른 마족은 없는 겁니까?]
“응.”
멜키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잠깐의 침묵 뒤에, 바람의 정령이 유진의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그럼 가서 인사나 하시죠.]
“뭐어?”
[인사나 하시라구요.]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얏! 하르페우론이라니까? 마족이라고! 서열 57위! 날 죽이겠다고 선언했던 놈! 내가 인사하러 가면, 저 흉악한 마족이 안녕하세요~ 하고 내 인사를 받아주겠니? 날 죽이러 들겠지!”
[바로 그겁니다.]
유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뭐가 바로 그거라는 거야! 네가, 네가 하르페우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 코끼리 대가리를 달고 있다고! 심지어 코가 두 개야! 너는, 너는 내가 저 꾸물거리는 두 개의 코에 농락당하다 죽는 걸 바라는 거야?”
[아니…… 멜키스 님. 일단 진정하시구요. 멜키스 님처럼 강하신 분이 고작 서열 57위에게 죽을 리가 없잖습니까.]
“얘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무책임하게 말하네. 죽을지 안 죽을지는 해봐야 아는 거야.”
[저는 멜키스 님을 믿습니다.]
“나도 나를 믿기는 해.”
멜키스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호들갑을 떨며 말은 했지만, 자신이 하르페우론보다 약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서열 57위의 고위 마족이라는 점. 헬무드 제국의 백작이라는 점이 멜키스를 조금 긴장시켰다. 흑마법사나 마물과는 싸워본 적이 있지만, 고위 마족과 싸운 경험은 없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거지? 가서 인사하라는 거.”
[그 자식이 멜키스 님을 알아본다면 죽이려 들겠죠?]
“그렇겠지?”
[멜키스 님도 얌전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놈이 죽이려 든다면 반격하셔야죠.]
“당연히 그래야겠지?”
[하르페우론을 죽이신다면 아롯에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 말에 멜키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정말?”
[기왕이면 죽이기 전에 심문도 하시면 좋구요.]
“이따 부를게.”
멜키스는 헤벌쭉 웃으며 바람을 흩트렸다.
드디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사막을 떠나 아롯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발자크한테 인사 정도는 해둬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발자크를 만나지 못한 지도 벌써 두 달은 넘었다. 그 수상쩍은 흑마법사는 멜키스가 더는 꼬리를 밟을 수 없을 만큼 은밀하게 나돌아다니면서 은신처도 꽁꽁 숨겨놓았기 때문에, 멜키스 쪽에서 연락을 취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인사를 하고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심 없는 인사일지라도 그 음침한 남자가 이상한 오해라도 해버리면 끔찍한 일이니. 멜키스는 발자크에 대한 생각은 내려놓고, 어떻게 하르페우론에게 다가가고 죽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으흠.”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모양이다. 멜키스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ㅡ쿠르릉……!
맑았던 하늘에 시커먼 어둠이 회오리치고 있다. 그 중심에서 어둠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멜키스의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음…….”
멜키스는 우선 커다란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살짝 위로 들추고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알았대?”
“나를 너무 우습게 본 것 아닌가?”
하르페우론이 목소리를 내뱉자, 두 개의 코가 촉수처럼 꿈틀거렸다. 사실 멜키스는 저것이 정말로 ‘코’인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양옆에 시커먼 상아까지 달고 있는 것이 코끼리인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제법 힘을 잘 숨겼지만, 정령의 기척은 완전히 숨겨지지 않았더군.”
방금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는 과정에서 새어나갔나? 주변의 정비와 경계는 확실하게 공을 들였는데.
[서열 57위는 결코 낮은 서열이 아니다. 멜키스, 네 경계는 뛰어났지만, 저 마족의 간파력도 뛰어난 것이다.]
[계약자여. 나는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싶지 않다. 이 주변에는 무고한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나를 불러내라! 내 불꽃으로 저 끔찍한 마족을 재로 만들어 버리리라!]
정령왕들이 각각 목소리를 냈다. 그중에서도 레빈의 말에는 멜키스도 동의했다.
그녀도 이 평화로운 휴양도시 한복판에서 마족 사냥은 하고 싶지 않았다. 멜키스는 하르페우론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며 하늘을 물들이는 마력을 가늠하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그…… 우리, 초면이지? 코가 참 멋있네.”
“멜키스 엘하이어.”
우연한 만남이다.
헬무드에서 나하마로 넘어오기는 했지만, 즉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마왕화의 의식을 주관해야 할 아멜리아 머윈이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탄은 전쟁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것은 하르페우론이나 다른 마족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아멜리아 머윈이 오고, 마족들이 등을 떠민다면 술탄은 싫어도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머지않을 그 날이 올 때까지 휴양을 즐길 셈이었는데. 설마 이 도시에서 죽여 버리겠다 다짐한 멜키스 엘하이어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직까지 나하마를 떠나지 않고 사막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술탄조차도 멜키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무능한 병사들을 대신해 부디 멜키스의 폭거를 멈춰달라 부탁했을 정도다.
“네가 뱉은 모욕은 잊지 않았다.”
하르페우론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멜키스는 슬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검은 장발이 은발로 물들면서 짧아지고, 눈동자도 본래의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음…… 실제로 보니까 그때보다 훨씬 나은 것 같기도…….”
“이곳에서는 죽이지 않으마.”
빠직, 빠지직! 거대한 마력이 하르페우론을 휘감았다.
“널 죽이고 싶어 하는 마족은 나 외에도 여럿 있으니 말이지……! 제발 죽여달라고 애걸할 때까지 고통을 준 뒤에…….”
“끼아악!”
딱히 그 광경을 상상했기 때문은 아니지만, 멜키스는 일단 비명을 질렀다. 하르페우론의 말을 끊고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한 기지였다.
쿠웅!
동시에 멜키스의 발이 힘차게 땅을 밟았다.
콰드드득! 대지가 굵직한 창이 되어 하르페우론에게 쇄도했다. 그 공격 자체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거대한 마력은 쇄도한 대지의 창을 모조리 분쇄했으나, 흩어지는 흙과 모래가 다시 연결되면서 하르페우론의 눈앞을 덮었다.
동시에 멜키스의 발밑이 치솟았다. 야노스의 손이 하늘 높이 던져 버리고, 빠지지직! 레빈의 번개가 몸을 휘감았다. 번개에 뒤덮인 멜키스는 시커멓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가로질렀다.
“멜키스 엘하이어!”
설마 도망치려는 것인가! 하르페우론은 분노하여 고함을 질렀다.
눈앞에 질척거리는 흙의 장막을 걷어내자, 이번에는 시뻘건 화염이 덮쳐왔다. 하지만 이 역시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굳이 마력을 둘러 보호할 것도 없이, 고위마족의 육체는 이 정도의 불꽃으로는 화상조차 입지 않는다. 하르페우론은 비웃음을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르페우론은 그 덩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가속했다. 그는 번개와 함께 멀어지는 멜키스의 뒤를 따르며, 저 시건방진 인간을 어떻게 능욕할지를 생각했다.
“오지 마악!”
저 멀리서 도망치는 멜키스가 내지른 비명이 들려왔다.
하르페우론에게 있어 저 비명은 오랜 추억을 떠올리게 할 만큼 감미로웠다. 지금의 헬무드에서는 인간의 절규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르페우론은 설렘마저 느끼며 멜키스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나갔다.
도시에서는 이미 한참이나 멀어졌다. 그것은 오히려 하르페우론에게도 편하고 좋은 일이었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으며 대학살을 벌이는 것도 바라마다 않은 일이지만, 벌써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참도록 하지.’
꽈지직!
하늘을 가로지르던 번개가 사막에 떨어졌다. 도주를 포기했나? 아니면 땅속으로 도망칠 셈인가. 하르페우론은 비웃음을 흘리며 하강했다.
그 순간.
번쩍, 하고 빛이 터졌다.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고 하늘에서는 수십 갈래의 번개가 떨어졌다. 지진이 난 것처럼 사막이 뒤흔들리더니 모래대지가 통째로 뒤집혔다.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는 하르페우론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땅에 내려서지 못하고 급히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빠직, 빠지직! 거대한 마나가 폭풍이 되었다. 불, 번개, 대지의 힘이 마나와 함께 어우러지고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정령합체.”
정령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인피니티 포스……!”
긴말은 필요 없다.
시작부터 시그니처를 사용해 변신한 멜키스는, 꽉 쥔 주먹을 하르페우론을 향해 내질렀다.
“파이어 펀치!”
하르페우론이 풍선처럼 터졌다.
빌어먹을 환생 437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서열에서 50위 이상은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속된 말로 거품이 껴 있다.
1년 전. 최상위 서열의 마족 100명이 바벨에 호출되었고, 황명 하에 상잔하여 50명으로 줄었다.
살아남은 50명은 유폐의 마왕과 계약도 맺지 않고서 마력을 하사받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날 바벨에서 살아남은 마족들은 그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당시 서열 110위던 하르페우론은 그날 바벨에 호출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가진 서열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마족 간의 서열전은 굉장히 간단해졌고, 하르페우론도 그 수혜를 입어 서열을 올렸다.
상위 서열 50명이 죽고, 서열전을 벌여 도달한 서열이 57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보다 높은 서열에 도달할 수 있다. 서열전에서는 유폐의 마력을 쓸 수 없다고 하니, 상성에 맞는 상대를 잘 고른다면 50위 안까지 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 이제는 서열전에 목을 맬 필요도 없게 되었다. 사막의 전쟁이 시작된다면ㅡ 수백 년 전에 그러했듯이, 인간의 피와 공포로 힘을 키울 수 있게 될 테니.
아멜리아 머윈이 과연 약속했던 대로 마왕의 의식을 벌일 수 있는지까지는 신뢰할 수 없는 일이나, 예부터 전쟁의 피와 비명은 마족을 살찌우는 양식이었다.
‘말도 안 돼.’
유폐의 마왕에게는 호출조차 받지 못했다. 바벨에서의 상잔이 없었다면, 하르페우론의 서열은 높아 봐야 107위다. 아직 피와 공포를 즐기며 힘을 키우지 못했다. 아멜리아 머윈과 만나지도 못했다.
그럴지라도 이건 말도 안 된다.
8서클의 대마법사.
인간의 기준에서 어마어마한 강자. 무시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은 하르페우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고, 경계를 생각하던 것이…… 막상 현실에서 맞닥트리니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에게는 전쟁시대를 겪은 마족조차도 거스를 수 없는, 마족의 것과는 다른 기묘한 마력(魔力)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법사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경박하고 천박한 행동거지. 대면하자마자 겁에 잔뜩 질려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비굴한 미소를 짓다가…… 꼴불견에 시끄러운 비명을 지르며 도주까지.
그런 상대에 대해 ‘강자’라는 인식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멜키스의 태도는 연기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실돼 보였다.
“썬더볼트 킥!”
지금도 멜키스의 태도는 똑같이 꼴불견에 흉했다. 그녀는 꽥꽥 비명을 지르면서 유치한 기술명을 외쳐댔고, 팔다리를 어설프게 휘저었다. 하지만. 그 꼴사나운 외침과 어설픈 움직임에 따른 ‘힘’은 믿기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보라. 날벌레 한 마리 제대로 맞추지 못할 것만 같은 발길질이지만…… 빠직, 하고 터져 나온 번개와 불꽃은 하르페우론의 몸을 박살 내고 지져 버리고 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허억…….”
이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체 왜 도망친 거지? 설마 일부러 꿰어냈다는 것인가?
하르페우론은 아까 도망치려던 멜키스의 표정과 비명을 떠올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이해가 힘들었다. 이토록 강하다면 그만큼 자존심도 강할 텐데, 그러한 자아를 일말의 주저 없이 져버리고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추한 모습만이 하르페우론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대마법사, 그리고 대정령사에 대한 무지(無知). 멜키스가 복수의 정령왕과 계약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ㅡ 설마, 한 명의 인간이 세 명의 정령왕의 ‘모든’ 힘을 동시에 끌어낸다니!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아니, 직접 싸워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
‘모, 모두 다 멜키스 엘하이어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아니, 이조차도 그녀의 의도인가?’
멜키스에게 조롱을 받은 마족은 하르페우론뿐만이 아니다. 지금 나하마에 건너온 마족 중에 멜키스에게 살의를 품은 마족은 5명이 넘는다. 그들 모두가 언젠가 멜키스를 만난다면 가볍고 악랄하게 혀를 놀린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안 된다. 그 모든 것이 멜키스의 설계라면, 지금 하르페우론이 그렇듯이 다른 마족들도 멜키스를 우습게 보고 덤벼들었다가 잡아먹힐 것이 뻔했다.
‘이 사실을 알려야…….’
간절히 생각하지만, 하르페우론은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일 것임을 직감했다. 전투가 시작되고서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그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다.
……전투? 이것이 전투이기는 한가?
압살. 멜키스를 통해 구현된 정령왕들의 전력은 고위마족의 마력을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증발시켰다.
힘 싸움을 포기하고 도주를 시도했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땅에서는 모래가 출렁거리고, 하늘에서는 번개가 우릉이고, 그 사이에서는 공기가 뜨겁게 타올랐다.
멜키스도 자기 자신의 힘에 솔직히 놀랐다. 사마르 대수림에서도 인피니트 포스로 전투를 했었지만, 그때는 이프리트와 계약을 맺은 직후였던지라 시그니처가 불완전했었다.
지금의 인피니트 포스는 말하자면 완전체. 대수림에서 부랴부랴 만들었을 때와는 다르다.
‘내가 이렇게나 강하다니!’
어쩌면, 어쩌면 지금의 나는 그 ‘현명한 세냐’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마법사로서의 수준과 깊이, 위업은 비할 수 없겠지만ㅡ ‘힘’이라면 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잔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는 마법사로서의 수준과 깊이, 위업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힘’. 오직 힘만이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오늘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면 똑똑한 사람보다는 그냥 힘이 센 사람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멜키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어깨가 으쓱이고 콧대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하르페우론을 내려다보았다.
그 흉물스러운 코끼리 얼굴의 마족은, 저러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한 모습이었다.
“……음…… 살아 있기는 한 거지?”
몸뚱이는 모조리 타버렸고, 머리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마저도 길쭉해 채찍 같던 코는 썩둑 잘린 모습이다. 멜키스는 슬금슬금 다가가며 물었다.
“죽…… 여라…….”
하르페우론이 귀를 푸들푸들 떨며 말했다.
사실 멜키스도 본심을 말하자면 당장 하르페우론을 죽이고 싶었다. 저 흉측한 얼굴을 계속 보는 것이 불쾌한 것과는 별개로, 갑자기 하르페우론이 부활하거나, 동료 마족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와 충분히 떨어지기는 했지만 인피니트 포스의 위용은 멀리까지 퍼져 나갔을 테니, 어쩌면 다른 곳에 있던 마족이 이쪽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응? 너도 사실은 살고 싶잖아.”
멜키스는 주변을 살피면서 하르페우론에게 다가왔다. 가능하다면 심문하라고 했는데…… 멜키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고문? 해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막상 해보면 잘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머리만 남아도 살아 있을 만큼 생명력이 질기니, 일단 이빨부터 뽑고 눈이라도 후벼 파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고통 말고 다른 방법을 써야 하나?
“질문에 대답하면 살려줄게.”
“죽여라.”
“그냥 살려주고 끝이 아니라…… 음…… 챙겨도 줄게. 이게 무슨 말이냐면, 너 배신자랍시고 복수하러 올 놈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죽여라.”
나름 상냥하게 말을 걸었지만 하르페우론의 태도는 단호했다. 마족 사이에도 의리는 있는 건가? 아니면 인간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때문인가.
“좋아,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이빨부터 뽑을게.”
오랫동안 심문할 생각은 없다. 이빨을 뽑고, 눈알을 뽑고, 그래도 말하지 않는다면 심문은 포기한다.
멜키스는 나하마의 국경을 넘어 아롯에 갈 방법들을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의지에 따른 모래가 한 쌍의 손이 되어 하르페우론의 입을 억지로 열었다.
“자 그럼 어금니부터 뽑게쓰아아악!”
근엄하게, 상대방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내뱉던 말이 높다란 비명이 되었다. 멜키스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팔을 휘저었다. 콰르르르! 불꽃과 번개가 주변을 휩쓸었다.
팔을 휘두르고 나서 아차 싶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하르페우론이, 방금의 공격으로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펄쩍 뛰었다 내려온 멜키스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앞을 보았다.
“이 정도면 일부러 하시는 것 아닙니까?”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로브에 튄 재를 털어냈다.
“당신 대체 뭐야?”
멜키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쏘아붙였다.
저번처럼 방심하고 있던 것도 아니다. 인피니트 포스를 펼친 상태고, 다른 마족이 난입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발자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저 수상쩍은 남자가 하르페우론의 바로 뒤 그림자에서 치솟고 난 순간에야 발자크를 알아차렸다. 마나와 마법, 그런 것으로 먼저 느끼는 것은 불가능했다. 육안에 담기고 나서야 존재를 인식했다.
“당신…… 설마…… 유령인 거야?”
멜키스는 더듬거리며 물어보았다. 그런 것이 아니고서야 발자크의 존재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척을 숨기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정령왕 3명과 융합한 인피니트 포스 상태로도 간파하지 못한다니?
“은신 마법은 원래 제 특기 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특기라고 해도…….”
“제 명줄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마법이니, 아무리 물어보신들 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발자크는 드물게도 단호한 태도로 선을 그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멜키스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좋아, 알았어.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을게. 그런데…… 이건 너무 무례하지 않아?”
“어떤 점이 무례하다는 것인지요?”
“다짜고짜 내 앞에 나타나서, 내 사냥감을 빼돌렸잖아.”
멜키스는 발자크의 손에 붙들린 하르페우론을 가리키며 말했다. 머리가 붙잡힌 하르페우론은 4개의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면서 상황을 살피려 했지만, 자기 머리를 잡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 누구냐?”
저 말이 묘하게 느껴졌다. 마족인 하르페우론이 흑마법사의 마력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하물며 발자크가 계약한 상대는 유폐의 마왕. 쭉 숨어 있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 순간까지 하르페우론이 마력을 감지하지 못한다니?
“과연. 제가 큰 무례를 범했군요.”
발자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땅에 내려섰다. 그는 들고 있던 하르페우론의 머리를 앞에 내려놓고, 멜키스를 향해 머리를 깊이 숙였다.
“멜키스 님. 당신을 우습게 보거나 모욕하기 위해, 또, 당신을 위협하기 위해 숨어 있다가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을 방해하기 위해, 제 사욕을 채우기 위해 하르페우론을 빼돌린 것도 아닙니다.”
“그럼?”
“제 의견을 먼저 전달하고 싶었습니다만, 너무 제 안위만을 신경 쓴 탓에 멜키스 님의 당황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제가 붙잡지 않았더라면, 이 머리는 완전히 재가 되어버렸을 겁니다.”
“당신 의견은 뭔데?”
“그에게 심문을 하고 싶은 것이시라면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숙이고 있던 고개가 살짝 위로 들렸다. 멜키스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발자크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저 남자의 본심까지는 간파할 자신이 없었지만…… 심문에 도움이 될 것이란 말은 진심일 것이다.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지?”
“마법이죠.”
“그러니까! 어떤 마법이냐고!”
“제가 이 사막에서 새로 개발한 시그니처입니다. 멜키스 님도 같은 대마법사시니…….”
“물어보지 말라고? 수상쩍은 자식. 그럼 됐어. 당신이 뭔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는데, 뭘 믿고 당신에게 맡겨? 저 못생긴 코끼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그냥 꺼져!”
“절 믿지 못하신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발자크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법과 마나에 맹세하겠습니다. 저는 하르페우론에게 들은 것을 답하는 데에 있어 그 어떤 거짓도 섞지 않을 것이고, 멜키스 님과 다른 분들에게 위협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흑마법사잖아. 마법과 마나의 맹세가 효력이 있긴 해? 나중 가면 사실은 흑마법사니까 어쩌고, 하면서 맹세를 무시하는 것 아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맹세가 장난도 아니고, 그따위 말장난으로 무시하거나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를 고평가…… 해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그런 재주는 부릴 수 없습니다.”
멜키스는 뚱한 표정으로 발자크를 쳐다보았다. 아직까지 하르페우론은 발자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대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맹세까지 하면서 돕겠다고 나서는 거야?”
“저도 심문을 통해 알게 되는 것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완성시킨 시그니처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큽니다.”
“……그래, 알았어. 어디 해봐.”
새로 만든 마법을 써보고 싶다. 멜키스도 젊은 시절에는 그런 욕구를 억누르지 못해 많은 사고를 치곤 했었기에, 저 마음에는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물론 단순한 공감과 존중 때문에 발자크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시그니처라면 봐둘 필요가 있어.’
하르페우론을 심문해서 알게 되는 정보보다, 발자크의 새로운 시그니처가 더 가치 있는 정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시그니처는 광범위를 포착하여 감각을 하나씩 차단시키고 끝내는 죽여 버리던 ‘블라인드’. 대량학살에는 저것 이상으로 특화된 시그니처도 없겠지만…… 동급이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상대에게는 무력할 것이다.
만약, 멜키스 본인이 발자크와 싸우게 된다면…… 솔직히 블라인드가 펼쳐진 상황에서도 압승할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 적이 될지도 몰라.’
어쩌면, 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멜키스는 저 수상쩍은 남자가 도저히 아군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고, 언젠가 치명적인 순간에 무조건 적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심증만으로 당장 발자크를 족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은 그 나중을 대비하여 시그니처를 확인해 두려는 것이다. 멜키스는 철저한 계획성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두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발자크를 주시했다.
“그럼…….”
노골적인 시선이지만 발자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왼손을 뻗어 하르페우론의 머리를 들더니, 시선을 마주칠 수 있도록 방향을 돌렸다.
“너는…….”
4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발자크 루드베스…… 아니…… 아니, 말도 안 돼.”
“무엇이 말도 안 되는 겁니까?”
발자크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 미소를 정면에서 본 하르페우론의 뺨이 푸들푸들 떨렸다.
“흑마법사인 네가 어떻게…….”
하르페우론은 발자크에게서 일말의 마력도 느낄 수가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마왕과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에게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머리만 남아 감각이 둔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잠시 후, 하르페우론은 새로이 깨달았다.
마력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서 당연히 느껴야 할 정기와 영혼조차도 느껴지지 않고 있다. 지금 코앞에 발자크가 있지만, 그가 정말로 이곳에 실재하는 것이 맞는지조차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원하던 반응이라 기쁩니다.”
발자크는 웃으며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소매가 미끄러져 내려가자, 검은색의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팔뚝이 드러났다.
문신으로 새긴 술식. 너무나 복잡하고 빼곡하게 얽힌 술식은 팔뚝 피부가 새카맣게 물든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내게……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질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촤르륵……! 팔뚝을 휘감은 술식이 움직였다. 깨알처럼 작은 글자들이 하나하나 움직이더니, 발자크의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퍼져 나갔다. 이윽고 새카맣게 물든 팔과 손가락이 꿈틀거리더니, 먹물로 그린 것처럼 시커먼 뱀으로 바뀌었다.
“크아아아!”
하르페우론은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쩍 벌린 뱀의 아가리에 이빨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시커먼 어둠은 보였다.
저것에 삼켜지면…… 죽어서 윤회할 수도, 소멸되어 끝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발자크가 허락할 때까지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 끔찍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제, 제발…….”
듣지 않았다. 오른팔의 뱀이 기형적으로 커지더니, 하르페우론의 머리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멜키스는 혐오와 경악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뭐…… 뭐 한 거야?”
“잡아먹었습니다.”
발자크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꿀렁거리던 뱀의 머리가 다시 손으로 되돌아왔다. 발자크는 오른팔을 툭툭 털며 멜키스를 돌아보았다.
“고문하고 심문하는 것보다 이쪽이 압도적으로 빠르고 편리하니까요.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르페우론의 기억은 모두 남아 있습니다. 흠, ‘책’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책……?”
“예. 제게 잡아먹힌 하르페우론의 모든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제 안의 서랍장에 꽂은 겁니다. 이런 식으로 저장하는 편이 제 기억과 자아와 뒤섞이지 않아 혼선이 없…….”
“힘은?”
“마력도 제게 더해졌지요.”
여전히 발자크의 얼굴은 태연했고, 멜키스의 눈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날 속였어!”
“속이다뇨? 저는 맹세에 어긋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설마 저런 식으로 잡아먹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멜키스는 당장 발자크의 배를 때려 토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발자크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멜키스 님. 우선 이곳을 벗어나도록 합시다.”
“당신도 오려는 거야?”
“제가 이대로 가버리면 멜키스 님과 유진 님이 제게 오해를 할 것 같으니까요.”
“유진…… 유진 이름은 왜 나와? 나는 걔랑 아무 상관도 없어.”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움직이도록 합시다.”
멜키스는 유진과의 의리를 어필했지만, 발자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빌어먹을 환생 438화
하르페우론이 죽었다.
그 이름은 아멜리아 머윈도 알고 있다. 상위서열에 이름을 올린 마족. 수도 판데모니엄에서는 밀려났다고 해도, 100위권 내의 서열은 우습게 여길 만큼 낮은 서열은 아니다.
그런 고위마족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죽어버렸다. 오아시스 도시까지 뒤따랐던 시종들의 말에 따르면,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와 우연히 조우하고서 그녀를 죽이겠답시고 쫓아갔단다.
대정령사.
블러드메리에 담긴 에드몬드의 기억을 봐두었기에, 멜키스의 힘에 대해서는 아멜리아도 파악하고 있다. 세간에 퍼진 소문은 기행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복수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으면서도 마법으로도 8서클에 도달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치부할 만큼 대단한 일이다.
아멜리아도 둘이 전투를 벌인다면 백탑주가 우위일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설마 그 전투라는 것이 수십 분도 되지 않아 끝날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죽여도 잘 죽지 않는 고위마족이 도망은커녕 전투에서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다.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런 경고는 진즉에 전해 두었다. 하지만 말뿐인 경고라 아무런 억제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어떡하지?’
마왕화 의식은 아멜리아 머윈이 직접 가지 않고서는 벌일 수 없다.
은밀성? 그 병신 같은 하르페우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 백탑주와 충돌해 뒈졌는데, 은밀히 마족을 움직이고 의식을 준비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현명한 세냐는 여전히 아롯에 있어.’
그 오만하고 늙은 마법사는 뱀파이어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것을 훤히 알면서도 내버려 두고 있다.
그녀는 벌써 수개월 동안 다른 대마법사들과 함께 아크리온에서 회동을 가지면서, 간간이 마탑이나 아카데미의 강단에 오르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오히려 그쪽이 신경 쓰인다.
아니, 두렵다.
불길한 상상은 때론 거대한 공포를 만든다. 특히나 현실이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다면. 매일매일 간신히 숨만 쉬며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궁지에 몰려 있다면, 상상에 비관이 섞이는 순간, 마치 그것이 반드시 일어날 것만 같은 절망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아멜리아는 유진 라이언하트의 모든 것이 두려웠다. 신생 광란의 마왕을 쓰러트렸다는 힘도 두렵지만, 지금 아멜리아로 하여금 미칠 것만 같은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ㅡ 바로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와의 관계였다.
둘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대관계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의 공식적인 서열은 2위. 그 바로 위 서열이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공작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누아르 공작이야말로 헬무드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다. 유폐의 마왕이 사라진다면, 누아르 공작이 헬무드의 실권을 쥘 뿐만 아니라 새로이 황위에 오를 수도 있단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누아르 공작과 용사는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유진이 마왕을 토벌했을 때는 굳이 끼어들어 사적인 축하를 전하기도 했고, 그날의 연회에서도 둘이 따로 시간을 보냈단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누아르 공작이 다스리는 제벨라 파크에서 둘의 밀회 장면이 유출되기도 했다.
어쩌면, 어쩌면…… 단순 이해관계가 아니라, 질척하고 감정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멜리아를 더욱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었다.
아멜리아는 자신과 누아르 공작이 결코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멜리아 본인부터가 몽마는 음탕하고 추잡하다는 인식의 소유자였고, 당연히 몽마의 여왕인 누아르 제벨라에게 호의를 가졌던 적이 없었다. 로열티에 가입하고서도 모임에 참석한 적은 없었고, 드물게 누아르와 마주치는 자리가 있을 때도 가까이 다가간 적은 없었다.
혐오.
그런 감정을 숨긴 적은 없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그년은 나를 죽이러 올 수 있어.’
아멜리아가 은둔한 곳은 멸망의 영지, 라비스타. 용사가 아무리 무식하게 행동한들, 헬무드의 끝인 이곳까지 쉽사리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아르 제벨라는 다르다. 헬무드에서 그녀가 갈 수 없는 땅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누아르는 몇 달 전에 라비스타에 들어왔고, 아멜리아를 희롱하고서 저택을 무너트리는 난동을 벌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죽이러 오고 있을지도 몰라.’
이미 육체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기는 하다. 머리 아래는 대부분이 괴사했고, 수액 욕조 밖으로 나간다면 즉시 숨이 끊어질 것이다.
어쩌면…… 라비스타를 떠나도 몸이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지하도시에서 보낸 시간은 약 1년. 멸망의 마력은 아멜리아의 육체를 망가트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영혼 자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죽을 수는…….’
결단을 내려 라비스타를 떠나, 나하마로 가야 하나. 아니면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하나.
그런 고민도 깊이 할 수 없다. 광증처럼 번져가는 불안이 아멜리아에게 냉정을 앗아간다.
어쩌면 내일, 아니,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멸망의 마력에 자멸하든가, 아니면 쳐들어온 누아르에게 죽든가.
당장 나하마에서는 하르페우론이 죽었고, 계속해서 마족이 죽어 나간다면 술탄은 돼지가 되어 춤을 출 것이며, 유진 라이언하트와 누아르 제벨라는 현명한 세냐의 주례를 받으며 행복한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기긱, 기기긱…….
최근 들어서는 사고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멸망의 마력에 의한 괴사가 뇌까지 진행이 된 모양이다.
‘…….’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혼혈이 태어나는 것은 기적과 같은 확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어난 혼혈아가 기적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인간 쪽에서는 불행으로 여겨지고, 마족 쪽에서는 멸시를 받는다. 대부분은 성장기 즈음에 자살하거나 살해당하고, 운이 좋게 살아남아도 제구실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평범한 삶, 이라는 것을 손에 넣은 경우는, 아멜리아가 아는 한 존재하지 않았다.
의지할 곳을 찾아 종교에 빠지거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하거나, 세상 자체에 증오심을 갖거나…….
아멜리아의 경우는 후자였다.
이 증오가,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기억’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된 즈음부터. 그녀의 얼빠진 어머니는 자유를 꿈꾸어 라비스타를 떠나고서, 욕망에 휘둘려 함부로 몸을 굴리다가, 누군지도 모를 인간 놈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런 주제에 바깥에서 정착도 하지 못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가족이라고도 할 수 없는 동족들에게 태어날 자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ㅡ 대체 무슨 정신인 것인지, 어머니는 임신한 상태로 라비스타에 돌아왔다.
아멜리아 머윈은 이 시커멓고 음산한 지하도시에서 태어났다. 사랑이란 것을 받은 기억은 없다. 라비스타의 마족들은 아멜리아를 멸시하기 전에 없는 존재로 취급했고, 어머니는 처음 잠깐 동안은 모성애란 것을 흉내 내다 얼마 가지 않아 질려 했다.
어머니는 몇 년 후에 죽었다. 점점 과중 되는 멸망의 마력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혼자가 된 아멜리아의 유년기는…….
‘왜…… 옛날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거지?’
죽음을 앞에 둔 뇌가 제멋대로 주마등을 보여주는 건가?
보고 싶지 않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아멜리아는 필사적으로 사고를 회전시켰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뇌가 멋대로 사고를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머나먼 과거,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유년기를 배회했다.
“…….”
콰드득.
과거를 배회하는 사고에 이상한 소리가 섞였다.
마치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만 같은 소리.
콰득, 콰득, 콰득.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똑같은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무언가가 부서지고, 달라붙고, 부서지고, 달라붙는 것을 반복하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아멜리아에게도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끊어지고 있어……?’
영혼에 직접 연결해 놓은 족쇄 중 하나가 끊어지고 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흐리멍덩하게 녹아가던 사고에 번쩍 빛이 들어왔다. 이 족쇄는 데스나이트의 것.
‘아, 안 돼.’
몸이 붕괴하고 정신이 오염되어 죽어가는 중에도 라비스타에 남은 것은, 현명한 세냐와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희망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시대에서 구할 수 있는 전사의 ‘시체’ 중 최고는, 당연히 위대한 베르무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체가 안치된 장소는 흑사자성이고, 정확한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무리 아멜리아 머윈이라도 흑사자 성에 쳐들어가 위대한 베르무트의 무덤을 도굴하는 것은 시도할 수가 없었다. 라이언하트도 라이언하트지만, 위대한 베르무트를 경애하는 유폐의 마왕부터가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큰 미련은 두지 않았다. 그녀는 운명적인 우연으로 사막의 지하에서 어떤 무덤에 도달했다.
우둔한 하멜의 무덤. 왠지 모르게 파괴되어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아멜리아가 알 바가 아니었다. 무덤 깊은 곳, 부패한 곳 없이 완벽하게 남은 대영웅의 시체가 아멜리아를 흥분시켰다. 영혼은 진즉에 성불한 것인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없다면 만들면 된다.
고고한 대영웅의 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타락시킬 자신도, 굴복시킬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육체는 완벽하게 남아 있다.
다른 영혼을 쑤셔 넣어 조율하는 과정을 거치고, 육체에 남은 기억을 되살려 영혼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데스나이트는 아멜리아에게 있어서 희망이었다. 비록 패배해 육체는 잃었어도, 라비스타에서 멸망의 마력이 더해져 변질을 이뤄낸다면,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거대한 힘을 갖게 될 것이라 믿었다.
가능성이 없던 것도 아니다. 이상하게도 멸망의 마왕은 데스나이트를 총애하듯 굴었다. 죽지 않을 만큼 마력을 부여하고,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고, 다시 마력을 부여하고, 그렇게 뒤섞어서 변화할 수 있게끔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아멜리아도 한계까지 여기서 버텼다.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족쇄가 끊어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다.
데스나이트가 소멸했다.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멜리아가 이 빌어먹을 지하에서 버티던 시간의 대부분이 무의미해졌다…….
“……?”
부서지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대신에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구의 발소리인지 모르겠다.
알피에로 라사트? 이곳에 멋대로 올 만한 마족은 그 정도인데…… 다가오는 발걸음에서 알피에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사실이 더더욱 아멜리아에게 공포를 주었다.
멸망의 마력이 그득한 이 땅에서,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존재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모습이라도 확인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아멜리아의 눈동자는 진즉에 기능을 잃었고, 마력도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마법의 눈도 띄울 수 없다.
지금 아멜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액이 담긴 욕조에 누워서 발소리만 듣는 것뿐이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커질수록 공포는 부푼다. 몇 달 동안 착용하고 있는 호흡기 안에서 뱉어대는 숨결이 가빠질수록 썩은 시체 냄새가 짙어졌다.
“……어이.”
발걸음이 멈추고 목소리가 들렸다.
“그 꼴로도 살아는 있는 모양이군.”
목소리를 알아채고, 놀라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길이 아멜리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괴사해 붕괴하는 육체가 손아귀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아…….”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뱉고, 목소리가 나왔다는 것에 경악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전신의 감각이 되돌아왔다. 죽은 것과 다름없던 몸뚱이에서 전해진 고통이 뻣뻣하던 사고를 각성시켰다.
“아, 아아악!”
아멜리아는 수개월 만에 자신의 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이전에야 감각을 대부분 끊어놓아 육체적 고통을 외면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강제로 수복된 감각에 아멜리아는 피를 토하면서 몸을 뒤틀었다.
‘피?’
아멜리아는 지금 자신이 피를 토하고 있는 것과, 몸을 비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붕괴했던 육체와 내장이 어느새 멀쩡하게 수복되어 있고, 수액으로 대체했던 피도 몸 안에 당연하다는 듯이 흐르고 있었으며, 예전에 잃었던 심장 또한 멀쩡하게 쿵쾅대고 있었다.
“너…… 너…….”
아멜리아는 뒤늦게 눈동자를 떠서 앞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동자에는 이미 빛이 깃들어 있었다.
남자.
누군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기억하는 얼굴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는 얼굴에 아무런 흉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얼굴뿐만이 아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에도, 아무 흉터도 존재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에게는 생기(生氣)가 느껴졌다. 이전처럼 시체를 되살린 데스나이트, 언데드의 기질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멜리아는ㅡ 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는 양손에서, 살아 있는 존재 특유의 온기를 느꼈다.
“아아…… 아아아아!”
존재가 바뀌었다. 육체를 잃고 혼만 덩그러니 남은 망령이, 멸망의 마력과 뒤섞이며 전혀 다른 존재로 승화되었다. 아멜리아가 품었던 희망이 결실을 맺었다.
“너…… 너, 너! 변화에 성공한 것이군요?! 그래서, 그래서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된 것이군요!”
여전히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아멜리아는 기쁨에 겨워 울부짖었다. 하지만 기뻐 외치는 아멜리아와는 달리, 남자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
이대로 목을 꺾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존재일 테지만, 그에 관한 감정 따위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와 증오, 혐오 따위의 감정만 그득했다.
남자는 이 감정이 대체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존재 자체가 거짓으로 시작된 ‘나’의 감정인가? 아니면, 기억이 조작되어 모욕을 담고 동료들에게 살의를 주입 당한 ‘하멜’의 감정인가?
나는 대체.
“……아멜리아 머윈.”
그 공허한 땅에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겠다.
베르무트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그 진의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존재를 증오하면서도, 나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존재를 용납하고 힘을 주었다.
“네 눈에는 내가 뭐로 보이나?”
왜 이런 질문을 한 것일까.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 저 계집에게 듣는 대답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텐데.
“뭐로 보이냐니…….”
아멜리아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멜 다이너스. 네 얼굴도 살피지 않고, 나를 찾으러 온 겁니까?”
족쇄가 끊어졌다. 더 이상 아멜리아에게 데스나이트를 통제할 수단은 없다. 아멜리아는 그 사실을 다시금 자각했다. 지금, 어깨를 붙잡은 손이 목을 죈다면…… 저항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몸을 죽이던…… 멸망의 마력이 사라졌다. 바로 앞에 있는 데스나이트가, 하멜이, 멸망의 마력과 그 저주를 거둬낸 것이다.
“……그런가.”
망령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아멜리아의 어깨를 놓고서, 손을 움직여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흉터가 없는 얼굴.
내 것이 아닌 얼굴.
대답은 들었지만, 망령은 자신이 누구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환생 439화
그곳에 처음 도달했을 때부터, 체감하는 시간과 실제의 시간이 맞물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 공허한 세계에서는 찰나가 영원처럼, 혹은 영원이 찰나처럼 흐르고 있었다.
텅 비었음에도 법칙이 뒤죽박죽인 세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만 같은 세계에서, 그는, ‘위대한 베르무트’는…… 홀로 앉아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로를 보았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말을 걸었다. 온갖 감정이란 감정은 다 쑤셔 담아서 오열하고 부르짖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까지, 망령은 자신을 ‘하멜’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한 질문조차도 망령은 하멜다웠다. 조작된 기억에 따르면 베르무트는 하멜을 배신했다. 동료들 중에 가장 먼저 하멜의 등에 칼을 꽂았다.
그럼에도, 망령은 베르무트에 대한 증오와 원망을 먼저 쏟아낼 수가 없었다. 배신에 대한 증오와 원망보다 베르무트가, 알 수 없는 공허에 홀로 앉아 있다는 현실을 우선했다.
공허 속에서 베르무트는 마모되고 부패되고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은 정말로 타다 남은 재가 뭉친 것처럼 보였고, 빛으로 보석을 만든 것처럼 찬란히 빛나던 금색 눈동자는 색이 탁해 칙칙했다.
왜 여기에 있느냔 질문에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다른 것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나를 배신한 것이냐 물었다. 왜 그런 식으로 나를 끊어낸 것이냐 물었다.
만약, 내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식으로 버리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우리는 10년이 넘도록 함께 마경을 떠돌고, 3명의 마왕을 쓰러트렸으며, 언제나 같은 전장에서 등을 맞대고 싸웠다. 그런 내가 부상으로 망가져서 싸울 수 없게 되었다면, 동료들에게 방해가 되었다면.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 했다. 내가 너를, 너희를 존중하고 아낀 것이. 내가 너희를 동료고, 친구라고 생각한 것이……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최소한 너희는 나에게 연민 정도는 주어야 했다. 나를 그런 식으로, 무참히 버리는 것에 도리(道理)란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가 한 짓은 우리가 도살하던 마족이나 흑마법사보다 못한 짓이었다.
몇 번이나 그렇게 외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족쇄에 묶인 채로 의자에 앉아, 싸늘한 눈동자로 망령을 노려보기만 했다. 망령은 그 시선에서 강렬한 적의를 느꼈다. 그, 적의란 감정이 망령에게 더더욱 비참함을 주었다.
나를 그렇게 배신하고, 이런 식으로 재회했는데도 여전히 나를 적대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재회했더라면 최소한의 죄의식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은가. 네가 정말로 ‘위대한’ 베르무트고, 용사라면, 과거 배신해서 죽였던 동료와의 재회에 일말의 죄의식을 느껴야 옳지 않은가.
조금씩.
조금씩, 베르무트의 시선에 어린 감정이 변해갔다.
추하기만 한 절규가 조금은 닿았기 때문인가. 매달려서 구걸하여 받아 낸 죄의식이라도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배신당해서 죽고, 언데드로 되살아나서, 흑마법사의 꼭두각시가 되고,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베르무트의 후손에게 패배하고, 육체를 잃고 영혼만 남아 멸망의 마력에 뒤섞인. 비참하고 한심한 처지지만, 베르무트가 죄책감을 느껴준다면. 그런 선택을 해버린 것에 후회해 준다면.
조금이지만, 구원이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베르무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냐와 모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망령은 그들에게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언젠가 재회하게 된다면, 복수보다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들에게 사과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기대했던 감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적의가 사라지고 새로이 깃든 감정은,
연민이었다.
망령은 그 감정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해를 거부했다. 이런 처지가 되어 과거에 구걸하는 나를 연민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모르겠다. 영원이 찰나 같고 찰나가 영원 같던 공허 속에서, 망령은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그의 앞에는 베르무트가 있지만 여전히 둘 사이에 대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연민의 감정도 바뀌지 않았다.
공허에는 망령의 절규 외에 다른 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망령이 입을 다물면, 그 세계는 정말로 아무런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그 세계에서는 잡스러운 마법도, 구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었다.
왜 베르무트가 지금의 내게 연민을 품는지. 그것에서부터 시작한 생각은, 망령이 진즉부터 품고 있던 의문과 이어졌다.
기억의 괴리. 동료들에 대한 괴리.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경을 돌파해 온 동료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등신 같이 굴면서도 호탕하게 웃고, 그 어떤 적을 앞에 두고서도, 설령 마왕이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돌진하던 모론이.
독설가에 폭력적이면서도 성녀라 불리던, 그 이름처럼 전장의 모든 이를 구하고 천국으로 인도하고 싶다는 이상을 따르며 성흔에서 피를 흘리던 아니스가.
재수 없게 굴다가도 바보처럼 울고, 웃고, 그런 주제에 전장에서는 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끔 마법으로 보조해 주던 세냐가.
한 명씩 떨어트려 놓으면 각자 결함이 있고, 하나같이 독불장군처럼 굴며 제멋대로 행동하던 멍청이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모두가, 진심으로 믿고서 따를 수 있던 베르무트가.
저 4명이 나를 배신했다고?
매일 밤 모닥불 앞에서 불침번을 서며 시답잖은 대화들을 나누고, 그 황량한 마경에서도 눈동자만큼은 반짝반짝 빛내며 전쟁이 끝난 후의 미래를 떠들던 놈들이.
동료들이.
친구들이, 나를 배신했다고?
베르무트가 내 등에 칼을 꽂았다고?
세냐의 마법이 내 몸을 날려 버렸다고?
모론의 도끼가 내 몸을 끊어냈다고?
아니스가 저주를 퍼부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저 병신 같은 거짓말을 왜 믿고 있었던 거냐. 왜 강하게 의심하지 않았던 거냐. 고난을 함께 넘어온 친구들은 믿지 않은 주제에, 왜 흑마법사와 마족의 말은 믿은 거냐. 왜, 흑마법사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 거냐. 왜 마왕을 탄생시키고 세상을 X 되게 만드는 일에 동참한 거냐.
왜 베르무트의 후손에게 칼을 겨눈 거냐.
알고 있다. 거스를 수 없던 것이다. 명령에 무조건 따르게 만드는 족쇄를 달고 있었다. 그럴지라도 망령은 제 자신을 혐오할 수밖에 없었다.
의심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공들여 만든 영혼. 특히나 정교하게 만든 자아가, 기억의 괴리에 의문을 품었다.
외면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편한 분노와 증오를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망령 자신이었다.
그 선택 자체는 하멜답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짜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망령은 우두커니 서서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망령은…… 자기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적의. 연민. 기억의 괴리. 그 모든 것은 망령으로 하여금 진실을 알게 만들었다. 아멜리아 머윈과 다른 개자식들은 나를 ‘하멜’이라고 부른다. 나 또한 여태까지 내가 하멜인 줄 알았다.
내게 주어진 기억은 가짜다.
그것만으로 자신을 ‘가짜’라 정의하기에는 부족했다. 베르무트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공허는 조용했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만들어진 기억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떠올렸다. 기억과 자아의 밑바닥까지 핥았다.
누군가를 떠올렸다.
되새기고 반복하는 기억 속의 ‘나’와, ‘하멜’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녀석이 있다.
그는 지금 시대의 인간이다.
성검을 쓰고, 월광검을 쓰고, 그 외에 다른 베르무트의 무기를 사용하던.
베르무트의 재림이라고까지 불리는, 베르무트의 후손이다.
‘나’의 기술을 쓸 줄 안다.
북쪽에서는 모론을 만났다.
세냐와…… 아니스를 닮은 지금 시대의 성녀와 함께 마왕을 토벌했다.
‘나’의 기술을 쓴다.
…….
‘나는 정말 나인가?’
-내가, 이렇게나마 되살아나서. 가장 먼저 한 생각이 뭔지 아냐?
저런 말을 한.
-베르무트 그 새끼가 남긴 씨를 죄다 말살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게 왕국을 세운 모론, 그 등신의 왕가도 말살할 거다.
나는.
-이건 조금 아쉬워. 아니스랑 세냐는 새끼를 안 깠잖아. 아니스는 몰라도 세냐는 뭐라도 남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러고 보니. 네가 세냐의 후계자라며? 넌 뭐 아는 거 없냐? 세냐, 그 개 같은 년이 남몰래 붙어먹은…….
나인가?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망령은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그 순간에 욕을 내뱉지는 않았다. 하지만 망령은 그 순간에, ‘욕’ 따위로 쏟아낼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이 부푸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라면 그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만약, 만약 망령이ㅡ 내 앞에서, 어떤 놈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된다면.
숨이 턱, 턱 막혀와서, 목소리를 내뱉는 것조차 고역스러울 것 같다. 목구멍에 칼날이 박힌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것 같다. 지옥 불을 처넣은 것처럼 머리가 뜨거울 것 같다. 귀에는 찡하는 소리가 맴돌 것 같다. 가슴은, 심장은, 터질 듯이 뛰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뻗을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처럼.
“이상하다 싶었어.”
망령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베르무트가 잘 훔치고, 아무리 잘 계승되었다고 해도…… 그건 말이 안 돼.”
유진이 펼치던 기술은 모두가 ‘나’보다 나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보다 진보되어 있었다. 마치 내가, 하멜이, 직접 보완한 것처럼.
유진이 내비쳤던 근원적인 혐오. ‘나’라는 존재를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던 혐오. 그것도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혐오스럽겠지. 놈의 입장에서 보자면, 300년 전에 죽은 자신의 시체가 멋대로 일어선 것이다. 그 안에는 누군지도 모를 머저리의 혼이 들어가 있고, 참 가관이게도 그 머저리가 ‘하멜’이라 자칭하는 꼴인 것이다. 그리고 그 머저리, 병신, 개새끼가.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해대며 동료들을 욕보인 것이다.
혐오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멜이라도 ‘나’에게 혐오가 든다. 이 혐오는 하멜으로서의 감정이자, ‘나’로서의 감정이기도 했다.
나는.
“나는 뭐냐.”
망령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저 위에 있는 것은 하늘이 아니다. 지하도시의 천장이다. 그 시커먼 어둠에는 지네산맥을 비롯해 300년 전에 날뛰었던 초대형 마물들이 그득했다.
“…….”
저 마물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다.
300년 전의 전장에서 죽이지 못했던 마물들. 하지만 이 기억은 하멜의 것이다. 망령이 가진 대부분의 기억은 모두 하멜의 것이고, 그에서 비롯된 자아조차도 하멜의 것이다. 내가 가짜라는 것을 자각한 지금에야 망령의 기억과 자아가 태동한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실을 말하자면 망령은 하멜이고 싶었다. 그 기억과 자아를 가진 내가 하멜을 자처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의 괴리를 깨닫고 아멜리아의 족쇄를 끊었다.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를 잊었다.
망령은 부서진 유리 조각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쳐 보았다.
새로이 구성된 지금의 얼굴에 흉터는 없다. 흉터가 하멜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니, 이 얼굴, 이 육체는 하멜이 맞지 않은가? 만약 필요하다면 흉터는 얼마든지 새길 용의가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그는, 하멜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환생한 그에게는 현재의 처지와 이름에 걸맞은 삶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가 하멜이어도 되지 않나.
“……하하.”
이어지는 생각에 망령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치미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구역질.
그래, 알고 있다. ‘하멜’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멜이라면,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내 존재가,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에게, 세냐에게, 모론에게, 동료들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그래서 날 죽이지 않은 거냐.’
생각했다.
‘베르무트. 나는, 네가 왜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네가 멸망의 마왕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안다.’
너는 가짜인 나에게 적의를 보였다.
너는 가짜인 나에게 연민을 보였다.
너는 가짜인 나에게 마력을 주었다.
너는 가짜인 나에게 자유를 주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바랐다면, 나에게 자유만 주면 되었다. 마력을 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생각했다.
‘내가, 진짜 하멜을 돕기를 바란 거냐.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도 알 텐데. 나는 결국 가짜고, 하멜의…… 유진의 여정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
지금 이 힘으로 유폐의 마왕을 상대할 수 있나? 모르겠다.
망령은 손에 들고 있던 유리 조각을 마력으로 소멸시켰다. 자연스럽게 일으킨 마력은ㅡ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망령은 지금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의해 보았다.
‘지금 나는 그 어떤 권속보다 멸망의 마왕에 가깝다. 지금 나는 마왕이 아니지만 살육과 참혹과 광란보다 강하다.’
멸망의 화신(化身).
‘하지만 이 힘으로 세상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유폐의 마왕에게 통용될지도 의문이고, 베르무트, 너를 구하는 것도…… 멸망의 마왕과 맞서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하지.’
생각했다.
‘네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너는 왜 나를 죽이지 않았나. 너는 왜 내게 자유와 힘을 준 것이냐. 너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는 거냐.’
지금이라도 다시 그 공허에 찾아가서 묻고 싶다. 너는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이미 시험은 했다. 멸망의 신전과 공허는 닫혔고, 바란 들 망령은 그곳에 찾아갈 수 없다. 감히 짐작하자면…… 망령을 화신으로 삼아버린 것이 베르무트에겐 큰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공허라.’
자아를 깨치고.
내가 가짜임을 알고.
쏟아부어지는 마력을 받아내면서, 그 세계에서 밀려날 때.
망령은 베르무트가 존재하는 세계를 보다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흉터.
베르무트는 공허 자체에 새겨진 거대한 흉터에 앉아 있었다.
“그건 뭐지.”
망령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턱을 괴었다.
뭐냐고 묻고 싶은 것은 아멜리아 머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숨 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등 위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굴욕적이지만- 감히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지금 아멜리아는 알몸으로 엎드려 있고, 그녀의 등에는 망령이 앉아 있었다. 생애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굴욕이지만, 오히려 그런 처지가 주변에 비하면 상당히 나은 축이었다.
초토화된 주변에는 알피에로를 비롯한 마족들이 피범벅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빌어먹을 환생 440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짐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저것’은 더 이상 아멜리아의 통제를 듣지 않는다. 멸망의 마력이 뒤섞이면서, 저것은 단순한 언데드도, 데스나이트도, 망령도 아니게 되었다.
우둔한 하멜의 시체. 그 몸뚱이를 잃고 조악하게나마 새로 만든 몸뚱이. 결국은 모두가 ‘살아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언데드였는데, 지금의 저것은 언데드라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종복의 족쇄가 끊어졌다. 아멜리아는 저것에게 더 이상 아무런 명령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저것은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는 것에 아멜리아의 마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뿐이다. 명령을 내릴 수 없고, 명령을 들을 필요도 없는, 완벽하게 대등한 관계가 되었다.
대등?
아니다. 지금은 저것이 아멜리아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서 있다. 저것이 아멜리아를 죽이고자 한다면, 아멜리아는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왜?’
족쇄가 끊어진 것은 알겠다.
그런데 왜?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모르겠다.
아멜리아는 저것에게, 망령에게, 굉장히 잘 대해줬다고 생각한다. 헤모리아에게는 너무할 만큼 가혹하게 대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만약 헤모리아가 족쇄를 잃게 된다면, 즉시 배신을 꾀해도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망령이 배신을 꾀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가혹하게 대한 적? 없다. 폭력을 쓰지도, 폭언을 쓰지도 않았다. 여태까지 아멜리아는 망령에게 아주 정중하게 대해왔다. 주종 관계이면서도 부하라 무시한 적은 없다. 비록 망령의 기억과 자아가 가짜일지라도, 300년 전의 대영웅다운 프라이드를 존중해 주었단 말이다.
그것뿐인가? 필요한 것은 모두 베풀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증오, 복수심. 그 모든 것들이 아멜리아가 만들어내서 주입한 것이라 해도, 망령에게 있어서 저 감정은 진짜니까. 그래서, 망령이 느끼는 욕망과 충동을 존중해 주었다. 증오와 복수를 하고 싶다기에 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어린 용사에게 패배하고 돌아왔을 때? 헤모리아가 그러고 돌아왔다면 폭언을 퍼붓고 모욕하고 비웃었겠지만, 망령에게는 그러지도 않았다. 오히려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 귀한, 세상에 하나뿐인, 다시는 만들 수 없는, ‘진짜’ 하멜의 몸뚱이를 잃고 혼만 남아서 돌아왔는데도…… 용서해 주었다. 이해해 주었다. 더 강해지고 싶다길래, 강해질 수 있는 발판을 준비해 주었다.
그만큼 해주었는데. 호의를 베풀었는데.
왜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건가?
“…….”
가슴에서 부글부글 끓는 감정과 불만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지금, 혓바닥을 생각 없이, 가볍게 놀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명확했기 때문이다.
알몸으로 엎드려서 의자로 쓰이는 굴욕……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올랐다. 아멜리아 머윈. 그녀가 비루하고 나약하던 시절.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해야 했던 시절.
머나먼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아멜리아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굴욕이라도 감내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발가락까지 핥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까지 할 만큼.
망령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멜리아에게서 멸망의 마력을 뽑아내고 육체를 재생시켜 준 망령은, 자신이 잠들었던 수개월 동안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캐물었다.
아멜리아의 대답을 듣고 난 뒤.
망령은 돌연 아멜리아의 머리채를 붙잡고서 저택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 순간까지 아멜리아는 당황해서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망령은 가장 먼저 저택에 손을 썼다. 폭삭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꽝’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만큼 요란하게 저택을 폭발시켰다.
적막하던 도시에 굉음이 울려 퍼지니, 사방에서 마족들이 나타났다. 그중 선두에 선 것은 당연히 알피에로였다. 알피에로는 망령이 육체를 가지고서 되살아난 것에 경악했고,
덤비지는 않았다.
다른 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멸망의 마왕의 권속인 마족들은, 지금의 망령에게서 본능적인 경외를 느꼈다.
하지만 망령은 마족들의 경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멜리아의 머리채를 붙들고 나온 것, 저택을 폭파한 것과 마찬가지로, 망령은 돌발적으로 행동했다. 근처에 있던 마족의 머리를 땅에 처박았고, 마족들 사이로 뛰어들어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경외를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무턱대고 날뛰는 망령에게 얌전히 처맞을 용의까지는 없었다. 알피에로와 마족들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무의미했다. 아멜리아가 보기에도, 마족과 망령 사이에는 개미와 인간 정도의 격차가 존재했다. 수백 년 동안 라비스타에서 터줏대감으로 지내 온 고위 마족들이 모조리 쓰러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동이 끝난 후.
망령은 아멜리아를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
“나는 뭐냐.”
골똘히 생각하던 망령이 대뜸 내뱉었을 때. 아멜리아는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의자답게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결국 그녀는 쭉 침묵을 고수했고, 그 선택은 옳았다. 만약 아멜리아가.
“너는 하멜 다이너스에요.”
라고 대답했다면, 망령은 치미는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더한 굴욕을 주었을 것이다.
“…….”
어느 정도 생각은 정리했다. 망령은 엉덩이로 깔고 앉은 아멜리아를 힐긋 보았다. 특별히 더 큰 굴욕을 주고 싶어서 알몸으로 엎드리게 한 것은 아니다. 하멜에게도, 망령에게도 그런 악취미는 없다.
그냥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 아멜리아는 몸통의 태반이 붕괴해서 수액에 잠겨 있었다. 마력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재생이 일어났지만, 몸통은 재생되어도 옷까지 재생되는 것은 아니거니와, 애당초 수액 욕조의 아멜리아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망령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조악한 육체가 소멸하고, 멸망의 화신으로 거듭나며 육체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망령은 아멜리아와 달리 바지라도 입고 있다.
알몸으로 날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널 어쩐다.”
망령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아멜리아는 움찔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은데.”
내게는 저 계집을 죽일 자격이 있다.
망령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멜리아가 망령을 창조한 것은 맞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자아는 이런 식으로 태어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오히려 이렇게 탄생시킨 창조주를 증오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증오가.
진짜 하멜의.
유진 라이언하트의 증오보다 큰가?
‘나는 저 계집을 죽일 자격이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가, 망령보다 더, 저 계집을, 아멜리아 머윈을 죽일 자격이 있다.
세냐 메르데인도 마찬가지다. 소중한 동료의 시체를 희롱하고 언데드로 만들어버린 흑마법사. 망령이 ‘기억하는’ 세냐라면, 아멜리아를 제 손으로 찢어 죽이고 말겠노라고 벼르고 있을 것이다.
모론 루하르도 마찬가지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등신이란 놀림을 받을 때마다 호탕하게 웃곤 했다. 하지만 망령은 ‘기억하고’ 있다. 웃지 않고 분노하는 모론이 얼마나 살벌한지.
저들 모두가 망령 이상으로 아멜리아를 죽이고 싶어 할 것이다. 저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망령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자, 아멜리아는 꿀꺽 침을 삼키면서 몸을 움츠렸다.
눈동자에 스치고 지나간 감정.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잖은가. 저…… 섬뜩한 살의. 생을 갈구하는 아멜리아는 저 살의를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는…… 네가 왜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대충은 안다.”
망령의 입술이 열렸다. 그는 더 이상 아멜리아를 ‘마스터’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것이 아멜리아의 눈동자를 절망으로 물들였다.
“계속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무엇이 잘못된 걸까.
족쇄가 끊어졌다. 자유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는 저 살의와 증오가 납득이 안 된다. 왜 나를 원수 보듯 대하는 것이지?
‘기억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 그런 것이라면 당연히 분노할 테지.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거지?’
생각했다.
기억이 조작당했다는 사실을,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이 주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를 죽이려 들어야 해.’
하멜의 기억을 토대로 저것의 영혼을 만든 것은 아멜리아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것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족쇄를 걸어놓은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도 나를 죽이지 않는다…….’
진실?
어디까지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이지? 아멜리아는 동요를 삼키고서 망령을 응시했다.
“……너는 누구죠?”
이 질문은 역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기도 했다.
“글쎄.”
저 질문을 받은 순간에 망령의 감정은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는 아직 무엇이 나인지 고를 수가 없었다. 고를 자격이란 것이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감히 욕심을 말하자면, 망령은, 여전히 자신을 하멜이라고 생각했다.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 거야.’
예상하지 못한 일. 아멜리아는 이런 상황을 맞닥트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족쇄가 끊어진 것부터가 그녀가 예상하지 않은 일이다.
‘전부 깨달았는데도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내가 창조주라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이쪽에서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것만 같다. 창조물과 피조물의 관계를 떠나, 저것과 아멜리아 사이에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있다.
아멜리아는 저 힘이 필요했다. 그녀가 온갖 굴욕을 감내하며 생을 갈구한 것은, 반드시 이루고 싶은 비원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전쟁을. 가능하다면 대륙의 모든 생명이 저물어 버릴 만큼 커다란 전쟁을. 수백이니 수천이니 하는 인간의 목숨은 개미무리 정도로 가볍게 취급될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
‘내 손으로.’
정말로, 정말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내 손으로 직접 일으킨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해 버리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멸망의 화신이 된 망령과 협력한다면…… 정말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는.”
먼저 입을 연 것은 망령이었다. 아멜리아가 생각했듯, 망령도 생각했다.
이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망령은 고민의 결론을 냈다.
“나하마에 가라.”
“……네?”
“전쟁을 바라는 것 아니었나? 열심히 준비했잖아.”
망령은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더 이상 라비스타에 있을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 나하마에 가라. 거기서…… 전쟁을 일으켜.”
지금 아멜리아가 어떤 처지인지.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들어뒀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아멜리아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녀가 일으킨 전쟁에서, 헬무드ㅡ 마족과 들러붙은 나하마를 짓밟고, 아멜리아를 사냥할 생각이다. 그 전쟁을 이용해, 대륙의 우군을 결속시키려는 모양이다.
유진이.
하멜이 그것을 바라기에.
망령은 아멜리아의 등을 떠밀었다.
“하르페우론이 뒈졌다지. 그 새끼야 뒈지건 말건 대단찮은 전력이지만, 놈의 죽음이 허무하게 취급된다면 나하마의 마족들이 X같아 하겠지.”
“…….”
“그렇잖나? 그 새끼들에게 동료애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놈들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고, 계속 여기 숨어 있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마족들은 너의 전쟁에서 물러설 거고, 너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겠지?”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아멜리아는 크게 숨을 삼키며 말했다.
“……나하마에 갈 생각이에요. 몸은 자유로워졌고,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너는 어쩔 셈이죠?”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모르겠다. 보다 직접적으로 묻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칼자루가 저쪽에 있는 마당에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아멜리아는 긴장하고서 망령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가 먼저 나하마에 가 있으면.”
망령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꽉 막힌 지하도시의 천장. 하늘에 녹아든 거대 마물들.
“……나중에 나도 따라간다.”
“그 대답은…… 너도 전쟁을 바라는 건가요? 내 전쟁에 협력하려는 건가요?”
아멜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망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망령에게 그런 마음은 없었다. 아멜리아가 나하마에 가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등을 떠미는 것은 순전히 유진을 위해서. 망령 본인은 전쟁에 섞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
정말로 그런가? 만약에 전쟁 중에 유진이 죽는다면. 내가, 유진을 죽인다면…….
머릿속에.
세냐의 우는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였지? 그래, 아이리스가 엘프 레인저들을 잔학한 방법으로 죽였을 때. 세냐는 불타 버린 숲에서, 숲과 함께 산채로 불탄 엘프들의 시체 앞에서 엉엉 울었다.
‘……하멜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울었겠지.’
망령에게 그 순간의 기억은 없다. 그가 기억하는 하멜의 마지막은, 동료들에게 배신당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하는 세냐의 ‘마지막’ 얼굴은, 눈물기라곤 존재하지 않는 비웃음이었다.
역겹다.
이런 기억을 믿고 모두를 증오했던 내가 역겹다.
다른 기억을 가진 유진을 질투하는 내가 역겹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아멜리아가 조심스레 덧붙인 순간. 망령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아멜리아의 몸을 걷어찼다.
뻐억! 배를 걷어차인 아멜리아는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공처럼 멀리 날아가지도 않았다. 그녀는 숨을 쉬지 못하고 배를 끌어안았다.
“나중에라고 했지.”
당장 아멜리아를 따라서 나하마에 갈 수는 없다. 아직 내가 누구인지 정하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왜, 베르무트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 굳이 살린 것인지. 왜 나를 멸망의 화신으로 삼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멸망의 화신이 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차라리 베르무트가 확실하게 일러주었다면. 부탁이라도 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망령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생각과 선택은 망령이 할 수밖에 없었다.
‘…….’
망령은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우선해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유폐의 마왕.’
내가 놈과 싸울 수 있나?
‘만약 싸울 수 있다면, 지금 내가 가진 힘은…… 유진에게, 하멜에게 도움이 된다.’
정말로 그런가?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나?
망령은 꼬리에 매달린 사악한 의문을 외면했다.
빌어먹을 환생 441화
헬무드 제국 수도, 판데모니엄.
중심.
유폐의 마왕성, 바벨.
90층에 위치한 집무실의 주인, 가비드 린드먼 공작. 그는 최근 며칠 동안 제대로 휴식도 하지 못하고 서류를 붙들고 있었다.
고위마족들 상당수가 나하마로 넘어갔다. 명목상으로는 관광이지만, 가비드는 장담할 수 있었다. 요 몇 달 동한 나하마에 건너간 마족 중에서 정말로 관광을 하기 위해 간 마족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유폐의 마왕은 나하마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가비드에게 따로 언질을 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비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을 위한 입장문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가비드다. 정말로 나하마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마족들이 전면에서 날뛴다면 300년 동안 기껏 바꿔놓은 마족에 대한 인식이 나락에 처박힐 것이다.
어차피 약속의 끝은 선언되었는데, 마족에 대한 인식이 나락에 간들 상관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만약을 위한 사태는 대비해야 한다.
‘차라리 나하마의 전쟁에 지원병력을 보내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헬무드와 나하마는 동맹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헬무드가 나하마의 지원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와서 말하자면, 가비드는 솔직히 억울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나하마에게 병력이나 물자를 지원하는 서류에 도장을 찍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주장한들 믿을 리가 없지.’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가비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헬무드는 나하마를 지원하지 않는다. 전쟁이 벌어져도 참전하지 않을 것이다.
아멜리아 머윈과 선동당한 마족들. 무엇을 약속받은 걸까? 에드몬드가 시도했던 마왕 의식?
성공할지는 의문이다만, 만약 성공한다면…… 메마른 사막에서 일어난 전화(戰火)는 세상 전체를 불태울 것이다. 정말로 만약에, 아멜리아가 주도한 마왕 의식을 통해 전쟁 중에 복수의 마왕이 탄생한다면…….
‘전쟁시대의 재림이군.’
5명의 마왕이 공존했던 시대.
위협이라고는 생각 안 한다. 자격 없는 자가 억지로 왕관을 쓴들 정말로 왕이 되는가? 나찰공주라 불리던 아이리스조차도 마왕이 되어 제대로 군림하지 못했는데, 판데모니엄에서도 자리를 온존하지 못한 놈들이 마왕이 된 들 위협이라 여길 이유가 어디에 있나.
당장 먼 과거, 살육과 참혹과 광란의 마왕이 멀쩡히 살아 있던 시절에도, 가비드의 주인인 유폐의 마왕은 다른 마왕들과 격이 달랐다.
‘하지만…… 다른 마왕이 참전한다면 사실상 약속은 끝이라고 봐야 할 터.’
유폐의 마왕이 바라는 약속의 끝은, 유진 라이언하트가 바벨을 오르는 것. 하지만 유폐의 마왕을 침묵을 보면, 꼭 저 방법을 고집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멜리아 머윈이 나하마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이미 오래되었고, 진즉부터 유폐의 마왕은 묵인하고 있었다.
‘나하마의 전쟁으로 약속이 끝이 난다면…… 헬무드가 중립 시늉을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지원을 준비하는 편이 좋을까. 마군(魔軍)을 파병하거나…… 아니, 검은 안개만 파병해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가비드가 공작에 검은 안개의 단장이라고 해도 저런 결정은 독단으로 내릴 수 없다.
철야의 이유는 나하마 때문만이 아니다. 헬무드에서 벌어질 전쟁도 미리 대비해야 한다. 시무인에서 보았던 유진 라이언하트. 아무리 상대가 아이리스였다지만, 마왕을 토벌한 이상 용사의 힘을 경시해선 안 된다.
일반시민들의 피난계획. 특히 인간 이민자들의 안전은 신경 써야 한다.
과연 그 판국에 마족이 인간을 지켜야 할지는 의문이다만, 유폐의 마왕이 명하지 않는 이상, 가비드는 헬무드의 법을 따라야만 한다. 헬무드 법에서 인간 이민자와 관광객은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약자다.
전시를 대비한 훈련도 해야 한다. 이미 진행 중인 훈련도 있고, 계회도 짜야 한다. 오늘도 아래층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참모진들과 함께 밤을 보낼 것 같았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아직도 제벨라 시티에 있다……. 둘이 정말로 손을 잡았을 리는 없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군.’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노골적으로 유진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호의 따위로 손을 잡지 않는다. 가비드는 누아르가 얼마나 욕망적인 괴물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
살피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가비드는 콧등에 걸친 안경을 벗으면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착각일 리가 없지.”
솔직히 당황했다.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지 못할 정도였다. 가비드는 의자를 뒤로 끌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건가? 아니면…… 귀신이라도 보고 있는 건가?”
저 얼굴.
30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잊은 적은 없다. 예전에는 가끔 꿈에, 악몽에 나왔을 정도다.
몰살의 하멜.
귀신은 아니다. 지금, 창가에 서 있는 하멜에게 언데드다운 사기(邪氣)는 느껴지지 않는다. 사기는커녕,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만 같은 생기가 느껴지고 있다.
‘뭐지?’
하멜은 죽었다. 300년 전에 바로 이곳, 바벨을 오르다가 죽었단 말이다. 가비드는 두 눈을 얇게 뜨고서 하멜을 응시했다.
……몇 가지 다른 점을 깨달았다.
저곳에 서 있는 하멜에게는 아무런 흉터가 없었다. 가비드가 남겼던 칼자국은 물론이고, 하멜이 마경에서 넘어온 수많은 사선의 상징이라 할 흉터 중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사기가 아닌 생기가 느껴진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생기는 느껴지는데, 다른 것이 결여되어 있다.
‘마나가 없다.’
하멜에게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이렇게 직접 보고 있는데도 단번에 꿰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이 가비드를 경악시켰다.
……아니. 저것이 정말 하멜이 맞기는 한가?
“……라비스타에 있던 것 아니었나?”
하멜의 거죽을 쓴 전혀 다른 것. 가비드는 벽에 기대어 선 하멜을 그렇게 정의했다. 아멜리아가 하멜의 시체에 남은 기억을 통해 만들어낸 가짜.
“며칠 전까지는.”
돌아온 대답에 가비드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
“아멜리아 머윈은?”
“나하마에 보냈지.”
가비드의 눈동자가 붉은빛을 발했다. 위신의 마안이 망령을 들여본 순간, 눈동자 안쪽에서 강렬한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가비드는 눈썹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멸망의 마왕님과 계약한 건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했지만, 그럼에도 믿기지 않았다.
멸망의 마왕이 권속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족도 흑마법사도 아닌, 제대로 된 생명이라고도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존재와 계약을 맺어주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계약……?’
들여다볼수록.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눈동자 안쪽은 여전히 욱신거리고, 머릿속에서는 뇌가 뭉개지고 뒤섞이는 것만 같았다.
과거에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다.
멸망의 마왕을 가까이서 보았을 때.
‘대체 무슨……?’
멸망의 마력은 그 권속에게도 무자비하다. 감당하지 못한다면 자멸해 버린다. 아멜리아 본인부터가 멸망의 마력을 감당하지 못할 텐데, 그녀가 만들어낸 가짜가 어떻게 저 정도의 마력을 감당할까? 가비드는 더더욱 망령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더욱 의문인 것은.
망령이 어떻게 저기 서 있을 수 있는가였다.
이곳은 판데모니엄의 중심, 마왕성 바벨. 가비드 본인이라도 바벨에 몰래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이곳은 1층도 아니고 90층인 데다, 가비드가 알아차린 것도 망령이 먼저 기척을 발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들어 온 것이냐는 질문을 끝까지 내뱉지도 못했다. 가비드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고, 의자 옆에 두었던 마검 글로리를 쥐었다.
망령이 저 앞에 서 있었다. 흉터 하나 없는 얼굴로 이쪽을 빤히 보는 하멜의 얼굴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움직인 거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그것뿐이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된다. 이 방 안에서, 위신의 마안으로 보고 있던 상대를 놓쳤다고? 단순히 빠르게 움직인 것이 아니다. 마법 같은 종류의 방법을 써서 공간을 도약한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마치 전쟁시대 때의 멸망의 마왕처럼.
“……놀랍군.”
우선 감정을 가다듬었다.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생각해야 할 것은, 망령의 정체나 능력에 대해서가 아니다. 적인가? 아군인가? 어느 쪽이든 침입의 죄는 물어야 할 터.
찰칵.
글로리의 칼날이 칼집을 빠져나왔다.
마검이 뽑힌 순간에 망령 역시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은 아무런 무기도 쥐지 않았으나, 그의 의지는 검을 바랐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텅 비었던 손에 회색 마력이 맺히더니 길게 뻗어 검이 되었다.
ㅡ빠아아아앙!
공기가 갈기갈기 찢겼다. 발검과 동시에 시작된 참격. 마검의 칼날이 수천 개의 잔영을 남겼다. 이윽고 덮친 마력의 폭풍이 집무실을 진동시켰다.
망령은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격과 폭풍은 망령을 해치지 못했다.
참격이 시작되고 폭풍이 뒤따를 때 망령의 검도 춤을 추었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서 시작한 검무가 모든 참격의 궤적을 바꾸어놓았다.
가비드는 그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빛을 발하는 마안은 저 찰나에 망령의 검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 움직임이 대단하다고 평가할 선을 아득하게 넘었다는 것도 이해했다.
“흉내도 극한에 달하면 진짜를 뛰어넘는가.”
저 칼부림의 근원은 하멜의 검이다. 가비드는 뺨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가비드는 한 명의 무인으로서 망령의 검을 인정했다.
“뛰어넘어?”
망령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는 저 말을 찬사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진짜를 뛰어넘었다는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망령은 자신의 검이 결국은 원전에서 비롯된 것이며, 원전을 뛰어넘었다고 할 만큼 대단치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멜에게서 시작된 검. 망령의 자아가 하멜을 복사한 것이고, 그가 가진 모든 기억이 하멜의 것인 이상, 검을 아무리 단련해 봐야 결국에는 근본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유진의 검을 보았다.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지금은 인정하고 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시금 검을 맞댈 수 있다면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검은 진짜 하멜의 검과 여전히 닮았을 것이다.
뛰어넘었을까?
‘그럴 리가.’
유진의 삶은 망령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치열했다. 망령이 멸망의 마력을 받아먹으며 헐떡거릴 때 유진은 라이자키아를 죽이고 광란의 마왕을 죽였다. 그가 하멜이라면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단련했을 터. 그런 생각이 망령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칙칙한 살의가 흘러나왔다. 검을 이룬 불길한 마력이 망령의 살의에 호응했다. 스멀스멀 퍼져 나가는 마력이 공간을 침식했다.
그 순간에 가비드는 기괴한 이질감을 느꼈다. 백 년 넘도록 지냈던 이곳, 집무실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감히.”
그 기분에 가비드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유폐의 마왕의 어전 바로 아래층. 유폐의 마왕과 가장 가까운 장소에 다른 마력이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다니. 가비드의 손이 글로리를 고쳐잡았다.
철그럭.
‘위’에서 들려 온 소리에 가비드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글로리를 휘두르려던 것을 멈추고, 쭈욱 뒤로 물러서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망령도 흠칫 놀라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그곳에는 천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별 하나 뜨지 않은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한복판. 높고도 깊은 어둠에서 유폐의 마왕이 있다.
“가비드 린드먼.”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가비드는 깊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물러서라.”
“허나, 유폐의 마왕님.”
“내 손님이다.”
나지막한 대답은 가비드의 반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가비드는 반쯤 뽑았던 글로리를 즉시 칼집에 다시 넣고서 고개를 숙였다.
화악.
글로리가 칼집에 들어간 순간에 공간이 변화했다. 망령은 움찔하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가비드의 집무실에 있었지만, 지금은…… 새카만 어둠의 한복판에 있었다.
“너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망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멜 다이너스? 아니면 다른 이름을 바라나?”
망령이 대답하지 않자, 유폐의 마왕이 머리를 까딱하고 기울였다. 그는 잠시 동안 망령을 응시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네가 여기 온 것.”
우우우.
어둠이 일렁거렸다.
“이름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구나.”
망령에게서 흘러나온 마력이 어전을 진동시켰다. 그 ‘힘’에 유폐의 마왕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베르무트의 뜻도 아니구나.”
“무엇을 알고 있…….”
망령은 내뱉던 말을 도중에 삼켰다.
그 의문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중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령의 오른팔이 위로 들렸다. 지금 그는 아무런 무기도 쥐고 있지 않다. 지금의 그에게 무기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그래도, 하멜이라면.
무기를 쥐었을 것이다. 아마, 검을 쥐었을 것이다. 망령은 씁쓸한 아쉬움을 느꼈다. 가능했다면, 가비드 린드먼과도 제대로 검을 맞대보고 싶었는데.
“혼란을 품고 있나?”
유폐의 마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런 존재, 이런 상황은 예측에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이러한 불규칙을 좋아한다.
“네 존재에, 네가 갖게 된 힘에 의미를 찾고 있나?”
끼기긱.
어둠 속에서 사슬이 나타났다. 무수히 많은 사슬이 창끝처럼 머리를 들어 망령을 겨누었다.
멸망의 화신이 되었다.
이 힘이 유폐의 마왕에게도 통할까, 통하지 않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검증이 필요하다.
통한다면? 이 힘으로 유폐의 마왕을 공격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다음이란 것이 존재할까?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하고, 검증하고, 물러서서, 유진과 합류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유폐의 마왕이 저런 말도 안 되는 자비를 베풀어줄 것인지를 떠나, 저런 불확실한 것에 목숨을 건다니.
라비스타를 떠나고서 이미 며칠이 흘렀다.
판데모니엄에 오면서, 여러 가지를 보았다. 마경 헬무드. 변화한 세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데스나이트가 되고서도 몇 번이나 헬무드를 봐왔다.
그럴 텐데도 느껴지는 감정이 달랐다.
외면하던 것들.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보았다.
동화책을 읽었다. 역사책도 읽었다. 요즘 나도는 신문도 보았고, 길거리에 서서 뉴스도 보았다.
새로이 더해지는 정보가 늘어날수록 자기혐오도 부풀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망령이 사라졌다. 유폐의 마왕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큭큭 웃었다.
그는 어둠 속에 녹아든 이질적인 마력을 느꼈다. 텅 빈 살의. 유폐의 마왕은 배후에서 찔러오는, 목적 없는 칼끝을 향해 물었다.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것을 바라는구나.”
유폐의 마왕은 망령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었다.
솔직히 그랬다. 차라리 이곳에서 유폐의 마왕에게 죽어버린다면. 그래, 300년 전에 하멜이 하지 못했던 것처럼, 유폐의 마왕에게 죽는다면.
괴로운 고민과 자기혐오, 욕심, 질투, 그딴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런 점도 하멜답나.”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운명은 반복되곤 한다.
유폐의 마왕은 그 어떤 마왕보다, 그 어떤 신보다, 이 세상의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다.
지금의 운명은 반복된 적 없다.
빌어먹을 환생 442화
-혼란을 품고 있나?
-네 존재에, 네가 갖게 된 힘에 의미를 찾고 있나?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것을 바라는구나.
유폐의 마왕이 읊조린 모든 말은, 마치 망령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한 말 같았다.
그래서 망령은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망령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란 존재에 대해 혼란을 품고 있다.
왜, 베르무트가 내게 힘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이 힘을 대체 어떻게 쓰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고,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민과 자기혐오 끝에 마왕성 바벨에 왔다.
유폐의 마왕에게 덤벼서, 죽고 싶다.
-그런 점도 하멜답나.
그 말은 망령의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아니다.’
동화책에 적힌 하멜의 죽음은, 동료를 구하기 위해 제 몸을 던진 희생이었다.
망령은 300년 전에 정확히 어떤 상황과 감정으로 하멜이 죽음을 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선택하는 ‘자살’과 다른 의미의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라곤 생각했다.
지금의 망령은 절망했다. 모든 고민과 자기혐오의 도피로 죽음을 선택지에 두었다.
더는 싸울 수 없어 몸이 망가진 것도 아니다. 동료를 위한 것도 아니고, 세상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 힘이 유폐의 마왕에게 통할까? 그에 대한 검증과 절망에 의한 포기, 둘을 모두 저울대에 올린다면.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를 망령은 잘 알고 있다. 이 자살은 철저하게 나를 위한 것이다. 그 어떤 대의도 없다.
두근.
그럴 텐데.
왜 이리도 가슴은 두근거리나. 이유는 알고 있다. 망령은, 이 상황 자체에 설렘을 느꼈다.
마왕성 바벨. 그 최상층의 어전. 유폐의 마왕과 대치하고, 전투를 벌인다는 것.
하멜이 그토록 바랐음에도 해내지 못한 것.
“병신.”
망령은 스스로에 대한 자조를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쇠사슬이 창처럼 뻗어 망령을 노렸다. 저 단순한 공격에는 아무런 살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저 높은 곳에서 빙그레 웃고 있는 유폐의 마왕에게 ‘살의’ 같은 폭력적이고 질척한 감정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저 공격이 무르고 약하며 상냥한 것은 아니다. 적중당하면 죽는다. 망령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고서 허공을 쥐었다.
꽈지직! 회색 마력이 검이 되었다.
“잘 다루는군.”
유폐의 마왕은 저 이질적이고 불길한 마력의 정체를 안다.
멸망의 권속들이 갈망하는 원류. 그러나 아무리 갈망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멸망’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힘.
“권속을 넘어 화신이 되었나. 너와 같은 존재는 오랜만에 본다.”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말했다. 화신이란 신이 세상에 간섭하기 위한 수단. ‘예전’에는 신은 그런 식으로나마 세상에 간섭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됐다.
망령이 검을 휘둘렀다. 사슬이 부서졌다. 망령은 한걸음에 공간을 도약했다.
가로막혔다. 무언가에 부딪쳤다. 부딪치는 순간까지 벽을 느끼지 못했다.
밀려나면서 깨달았다. 어느새 망령의 주변 공간에는 사슬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유폐의 마왕의 어전. 모든 법칙이 그의 사슬에 얽매어 있는 곳. 이 유폐 된 세상에서 그는 절대적인 존재다.
‘……저 사슬은 뭐지?’
유폐의 마왕의 등 뒤. 언제나 달고 다니는 사슬. 지금도 저 많은 사슬은 마치 망토처럼 유폐의 마왕 등 뒤에 늘어져 있는데, 반대편 끝은 공간을 관통해서 다른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다.
즉, 지금 유폐의 마왕은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망령은 저 사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유폐의 마왕이 무엇과 연결된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꽈득.
의문을 무시하고, 망령은 다시 검을 잡았다.
푸확! 회색 마력이 폭발하며 사방에 뻗어 나갔다.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힘이 어전의 붕괴를 바랐다. 유폐의 마왕은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뒤집었다.
쿠우우웅! 뻗어 나간 마력이 소멸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모든 것이 반전되었다. 당황하지 않으려 했는데. 미리 각오도 예상도 해두었는데. 직접 겪어버리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사슬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망령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이곳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망령의 존재에 거대한 부하가 걸리고 있다. 잠시 힘을 푸는 것만으로 존재가 뭉개질 것만 같다.
수백 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유폐의 마왕은 멸망의 마왕과 공존해 왔다. 그는 마왕들 중 유일하게 멸망의 마왕과 같은 전선에 섰다. 약속이 맺어진 순간 멸망의 마왕은 라비스타에 은둔했다.
‘저 사슬은 멸망마저 묶는가.’
우둑, 우두둑. 부하를 이겨내지 못한 몸이 으스러졌다. 하지만 그 고통은 멸망의 마력에 절여지던 때의 고통보다 크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굽혔던 몸을 일으키는 망령을 보며 큭큭 웃었다.
“죽음을 바라는 것 아니었나?”
허무한 죽음은 싫다.
나오려는 대답을 삼켰다. 결국 제멋대로인 고집. 유진 라이언하트를, 하멜을, 세냐 메르데인을, 모론 루하르를, ‘나’의 것이 아닌 기억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뿐.
“너는 모순덩어리로군.”
유폐의 마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망령은 반박을 호흡과 함께 삼키며 어둠을 박찼다. 사슬에 묶여 감금된 마력이 풀려났다.
콰르르! 회오리치는 마력이 망령의 주변을 휘감았다. 그 형상은ㅡ 멸망의 마왕을 작게 축소시킨 것만 같았다. 그 중심에 선 망령의 모습에 유폐의 마왕은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큼이나 허락받았나?”
꽈아앙! 멸망이 전진했다. 세상을 구속하고 있던 모든 사슬이 크게 출렁거리고,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 정도로 저항감을 느낀 것이 얼마 만이던가?
‘300년.’
잊을 리가 없지. 유폐의 마왕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직접 손을 들었다. 핏기없이 새하얀 손이 어둠을 움켜쥐는 순간, 어전을 가득 채운 모든 어둠이 쇠사슬이 되었다.
촤르르르륵! 유폐의 마왕이 손에 쥔 사슬은 하나뿐이지만, 그 하나의 사슬에 터무니없이 많은 사슬이 얽혀 있었다.
가볍게 당긴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사슬을 잡아끄는 동작은 간결했다.
망령에게 부딪친 충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형언할 순 없는 충격이 망령의 의식을 단절시켰다.
부딪쳐 날아가지는 않았다. 유폐의 사슬은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수만 개의 사슬이 거미줄처럼 펼쳐지더니 멸망을 붙잡았다.
끼긱, 끼기긱. 붙잡혔다고 끝인 것은 아니다. 사슬이 마력 하나하나에 압박을 가하는 동안에 단절된 의식이 이어졌다.
꽈지직! 망령이 몸을 일으키고 멸망의 형상이 확산했다. 기껏 붙잡았는데 사슬이 끊어졌다. 망령은 짐승처럼 포효하며 유폐의 마왕을 향해 달렸다.
망령이 휘두른 검에는 멸망의 마력이 녹아 있었다.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힘이지만 유폐의 마력 그 자체인 사슬은 소멸하지 않는다. 부서지기는 하지만 금세 다시 연결되어버린다.
망령이 달려드는 것을 보던 유폐의 마왕이 다시 사슬을 잡아끌었다.
거리가 멀어지거나, 접근을 방해하거나.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슬을 끌어 ‘당긴’ 것처럼 망령의 몸이 당겨졌다.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멱살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에도 망령은 제 몸을 통제했다. 멸망의 마력이 망령의 몸을 뛰어넘어 폭풍처럼 몰아쳤다.
유폐의 마왕의 눈이 곡선을 그렸다.
기나긴 시간 동안, 대마왕에게 투쟁이란 것은 존재치 않았다. 그 베르무트와 동료들조차도 유폐의 마왕에게 투쟁을 실감시키지 못했다. 당연히 투쟁이란 행위와 관련된 감정도 진즉에 희미해졌다.
지금도 그렇다. 이 전투는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서는 투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폐의 마왕은 망령의 힘을 존중했다. 비록 그가 정상적인 존재도 아니거니와 바벨을 똑바로 오른 것도 아닐지라도. 300년 전 베르무트와 동료들에게 그러했듯, 유폐의 마왕은 이 어전에 들어와 살의를 내비치는 망령을 ‘적’이라 인정하고,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뿐이다.
대마왕의 몰두는 끔찍하고 잔인했다.
어전은 다른 의미에서 베르무트가 있는 공허처럼 되었다. 이곳에서의 찰나는 무한한 폭력에 의해 영원처럼 늘어졌다. 시간의 흐름 자체가 대마왕의 마력과 의지에 유폐되고 제멋대로 희롱되는 것만 같았다.
저항은 했다. 단 한 번도 저항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하멜의 기억에서 태어난 가짜. 망령은, 이곳에 죽으러 왔다. 하지만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없었다.
내 존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곳에 온 선택은 결국에는 고민과 자기혐오에서의 도피다.
그렇지만.
유폐의 마왕의 앞에서 서고, 놈에게 덤비면서. 망령은 제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했다. 죽기 위해서 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니, 처음부터. 망령은 진심으로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덤볐다.
“그런가.”
망령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망령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가며 유폐의 마왕에게 맞섰다. 하지만 그 무엇도 도달하지 못했다.
멸망의 화신. 그런 존재가 되었는데. 아니, 오히려 이런 존재가 되었기에, 지금의 힘은 유폐의 마왕에게 닿지 않았다. 닿으려는 순간마다 ‘철그럭’하는 사슬 소리가 들렸고, 모든 공격이 무로 돌아갔다.
“이 힘으로는 너를 죽일 수 없군.”
중얼거린 뒤에 시커먼 피를 토했다. 망령은 기침을 쿨럭대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저 높은 밤에 유폐의 마왕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토록 공격을 퍼부었는데, 유폐의 마왕에게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럴 수밖에. 망령의 공격은 유폐의 마왕의 옷깃에조차 닿은 적이 없었다.
우두둑…….
고개를 드는 것으론 부족하다. 망령은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마력으로 구성되어 마력을 연료로 삼은 육체가, 망령의 뜻에 곧장 따라주지 않았다. 너무 많은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일으키는 몸이 먼지가 되어서 부서졌다.
망령은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시커먼 피를 컥컥 토하면서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을 때. 망령은 더 이상 자신이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였다. 팔다리는 방금 공격의 여파로 사라졌고, 당장은 재생이 되지 않았다. 초라하게 남은 몸뚱이는 마력째로 사슬에 붙잡히고 관통되었다.
압도적이다.
절감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격차를 느꼈다. 망령은 직접 다른 마왕과 싸워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가진 하멜의 기억에는 과거 마왕을 토벌하던 경험들이 남아 있다.
살육의 마왕, 참혹의 마왕, 광란의 마왕.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저 마왕들과 비교해서 모든 것이 달랐다. 마왕(魔王)이란 단어 자체가 유폐의 마왕을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유폐의 마왕 외의 다른 존재들은 마왕을 칭호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저들이 자신을 마왕이라 자칭하는 것부터가 유폐의 마왕을 모욕하는 것이다.
“대마왕.”
망령은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사마르 대수림에서 죽은 에드몬드 코드렛. 놈은 의식이 성공한다면 대마왕이 될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고작 그 정도 힘으로 대마왕이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어 비웃음만 나온다.
도중에 유진에게 죽어 의식을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만, 그때 준비된 제물의 수십 배를 바칠지라도 진짜 대마왕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애당초 저 힘은 제물을 바치고 의식 따위를 벌여서 얻는 힘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죽여.”
망령은 고개를 들며 내뱉었다. 경계선이랄 것이 존재하지 않던 어두운 세계는 어느새 어전다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망령은 허공에 튀어나온 사슬에 묶여 공중에 매달려 있고, 맞은편의 옥좌에는 유폐의 마왕이 앉아 있었다.
전투는 끝났다.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전투에 몰두하지 않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군.”
“……착각?”
“나는 마왕이지 신이 아니다.”
뭘 당연한 말을 하는 거냐. 망령은 눈썹을 찡그리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신이라면 네가 바람을 들어주겠지만, 마왕인 나는 그럴 이유가 없다. 오히려 네 바람을 거절하며 비웃지.”
유폐의 마왕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어둠에 녹아든 사슬이 움직이더니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내 손에 죽고 싶어서 여기 온 이상, 나는 절대로 너를 죽이지 않는다.”
유폐의 마왕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망령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항하기 위해 마력을 쥐어짰지만,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사슬이 망령을 집어 던졌다. 유폐의 마왕은, 사슬의 원이 연결한 문에 망령을 던지고 나서 뇌까렸다.
“존재의 의미는 스스로 구하는 것. 마왕에게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다른 곳으로 날아간 망령에게 지금의 속삭임은 닿지 않을 것이다.
상관없다. 조언을 위해 말한 것도 아니니. 유폐의 마왕은 쿡쿡 웃으며 사슬을 지워냈다.
그만큼 짓밟았는데도 저 존재는 절망하지 않았다.
죽기 위해 온 주제에,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다.
마지막, 죽음을 구걸하던 순간조차도 눈동자에 절망은 없었다.
그렇기에 저 존재는 의문들에 새로운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그 답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빌어먹을 환생 443화
아롯의 수도 펜타곤. 도시의 명물인 부유역에 도착한 멜키스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이 부유역에서 가장 높은 지붕 위에 올라갔다.
“아아! 아아아아!”
많은 관광객들이 지붕 위의 멜키스를 가리키며 숙덕거렸지만, 멜키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젖히고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까아아……!”
멜키스의 고향은 북쪽 항마연합 소속인 알로스 왕국. 아롯 영토의 절반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나라다.
알로스 왕국에서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13살이 넘어서부터 아롯에 넘어와서 살았다.
약소국 산골 마을의 싱그러운 소녀가 운명적으로 정령과 인연을 맺고, 대정령술사가 되겠다는 꿈만 품고서 돈 한 푼 없이 아롯으로 향했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정령과의 유대로 극복해 가며 아롯에 도착하고, 수도 펜타곤에 입성하여 백색마탑에 초빙받고, ‘정령공주’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정령사가 된 이야기는 몇 날 며칠을 떠들어도 모자라고 책으로 써도 수십 권은 될 대서사시다.
아무튼, 그 기나긴 이야기의 무대인 아롯은, 멜키스에게 있어서는 제 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다. 사실 알로스에서 산 햇수보다 아롯에서 산 햇수가 몇 배는 많고, 알로스에는 아무런 인연도 남기지 않았으니 아롯이야말로 참된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고향을 떠나, 1년 가까이 사막에서 살았다. 매일매일 모래바람을 받고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면서 지냈다. 어쌔신과 흑마법사 등의 보복을 경계하면서 잠조차 편히 자지 못했다…….
[…….]
멜키스와 연결된 정령왕들은 저 감상에 떨떠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힘들고 괴로웠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정작 현실에서는 굉장히 잘 지내지 않았던가? 심지어 불편한 것들은 모두 다 정령들이 해주었다.
“내가! 내가 돌아왔다!”
나름 힘들었던 사막 생활의 회고를 끝낸 뒤. 멜키스는 양팔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사막에서야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고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며 모습을 감추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 멜키스 엘하이어가! 아롯에 돌아왔다!”
유진에게서 아롯에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은 들었지만, 그동안 나하마에서 불법체류 하며 난동을 부린 멜키스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하마를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표되지 않았다뿐이지, 나하마에서 멜키스는 이미 사상 최악이라 해도 좋을 범죄자인 것이다. 멜키스가 사막에 묻은 흑마법사의 숫자만 해도 이미 백 단위고, 그녀를 사로잡거나 죽이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된 어쌔신과 전사들까지 더하면 수백은 우습게 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하마를 떠나는 데 도움이 된 것이 발자크였다.
저 남자는 수상쩍은 행동거지처럼 불법적인 일에도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멜키스는 발자크와 함께 사막을 횡단하여 국경을 넘고, 다른 국가들을 경유해서 이렇게 아롯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발자크와 함께 말이다.
“…….”
발자크는 질색하는 얼굴을 하고서 멜키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입국한 즉시 난동을 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상식의 소유자라면 저지른 일들이 있으니, 아롯에 와서도 상황을 지켜볼 겸 얌전히 지내려 할 텐데…….
같이 다니는 중에도 지긋지긋하리만큼 절감한 사실. 멜키스 엘하이어에게 일반적인 상식은 없다. 여전히 멜키스는 양팔을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오열하고 있다.
“……크흠.”
마음 같아서는 모른 척을 하고 헤어지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은둔의 목적은 달성했고, 이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슬프게도 발자크가 생각하는 ‘다음’에는 멜키스가 필요했다.
[멜키스 님. 그쯤하고 내려오십시오.]
부유역은 언제나 사람들이 많다. 그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숙덕대는데,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자신에만 몰두하는 멜키스가 대단했다.
발자크는 멜키스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 쓴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신에게 여러 종류의 마법까지 걸었다. 덕분에 부유역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발자크를 포착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으흠.”
멜키스는 발자크가 몇 번을 더 청하고 난 뒤에야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주변 가득 몰린 사람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인사를 받아주고, 그녀를 존경한다는 젊은 정령술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마탑 시험에 응시한다는 수험생들을 위해 파이팅까지 외쳐주었다.
“…….”
발자크는 참을성 있게 그 모든 것을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멜키스의 옷깃을 잡고 시간을 끌게 만드는 시민들에게 마법을 갈기거나, 시답잖은 이야기들 하나하나에 반응하면서 한 걸음 걷고 멈춰대는 멜키스를 발로 걷어차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
부유역을 떠나는 공중마차에 타기까지 1시간은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발자크는, 멜키스와 마차에 타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대애~단 하십니다.”
“응? 뭐가?”
“정말로,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멜키스 님.”
“내가 대단하다는 사실은 세상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지.”
“설마 지금 제 말을 순수한 칭찬으로 받아들이신 겁니까?”
발자크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멜키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속이 끓는 것을 넘어 증발하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사람 한 명씩 일일이 다 상대하시는 겁니까?”
“평소에는 안 그래.”
“평소에는 안 그러시면서 왜 오늘은 그러시는 겁니까?”
“생각해 봐, 발자크, 나는 거의 1년 만에 아롯에 돌아왔어.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마중 나와 있잖아.”
“뭔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곳 사람들 중에서 멜키스 님을 마중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저들은 각자 자기만의 이유로 이곳에…….”
“설령 그럴지라도, 내가 오고 나서는 나에게 이끌려 모여든 거잖아! 그럼 나를 마중한 것과 다름없지. 그리고 다들 날 좋아해서 곁으로 다가왔잖아? 그렇다면 나도 사랑에 부응해 줘야지.”
안 되겠다. 저 미치광이와는 이성적인 대화가 성립이 안 된다. 발자크는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진정시킬 겸 창밖을 보았다.
“난 오히려 당신이 이상해.”
“제 어떤 점이 이상하시다는 겁니까.”
“그건…… 그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 당신은 이상하지 않은 점보다 이상한 점이 훨씬 더 많거든?”
“지금은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당신도 아롯에 돌아온 것은 오랜만이잖아. 그런데 아무 감상도 안 느끼는 거야?”
“감상은 느끼고 있습니다. 멜키스 님, 당신처럼 과시하지 않을 뿐이지.”
발자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늘을 나는 공중마차. 발자크는 저 아래의 도시를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저도 이 도시는 꽤나 좋아합니다. 이 도시는 저를 좋아하지 않겠지만.”
“갑자기 웬 자학? 새로운 컨셉인가?”
멜키스가 중얼거렸고, 발자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음, 발자크,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알겠어. 그…… 음, 나는 말이야, 동정심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멍청한 여자가 아니야.”
“또 무슨 개소리를…….”
“당신이 아무리 불쌍한 척…… 척이 아니라 실제로 불쌍한 것은 맞지만, 어, 내가 당신을 동정할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개소리하지 마십시오. 멜키스 님. 대체 저한테 왜 그러시는 겁니까?”
“진정해.”
실컷 긁어놓고서 진정하라니. 발자크는 노려보던 시선을 물리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도시 먼 곳에 우뚝 서 있는 새카만 탑이 보였다.
흑색마탑.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헬무드 다음으로 많은 흑마법사들이 지내는 곳이었지만, 지금의 흑색마탑은 텅 비어 있다. 마탑주인 발자크의 돌발적인 은둔에 이어, 흑마법사를 혐오하기로 유명한 세냐가 아롯에 귀환했기 때문이다.
세냐가 직접 으름장을 놓은 것은 아니다. 흑마법사들은 자발적으로 마탑을 떠났다. 헬무드로, 나하마로, 혹은 아롯의 뒷골목으로.
“약속.”
발자크의 입이 열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멜키스를 응시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무슨 약속? 우리가 약속을 했던가?”
“…….”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노려보지 마. 세냐 님한테 잘, 자알~ 소개해 줄게.”
멜키스는 히히 웃으면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나는 세냐 님과, 아니, 세냐 언니랑 엄청 친하거든. 언니 동생 하는 사이야. 당신이 흑마법사라고 해도, 내가 옆에 있으면 언니도 공격하지는 않을 거야.”
“저는 세냐 님이 초면의 상대를 대뜸 공격할 정도로 경우 없는 분은 아니시라 생각합니다.”
“세냐 언니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것 아냐? 음, 이건 말이야,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세냐 언니가 막…… 그…… 우리가 기대하는 ‘현명한’ 분은 아니셔.”
멜키스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서 수군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멜키스가 저런 말을 하다니. 발자크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멜키스 님에게 바라는 것은, 세냐 님의 앞을 막아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멜키스 님과 유진 님께 보여드린 친절과 호의 등을…….”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발자크, 당신 말은 이거잖아. 세냐 님과 친해지고 싶은 거지? 응? 다른 대마법사들처럼 세냐 님이랑 같이 마법 연구도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빡!”
“예?”
“내가 당신 속을 모를 것 같아? 그렇게 웃는 얼굴로 다가와서 모두를 방심시킨 뒤에, 그, 뭐야, 당신 시그니처. 그거로 한 명씩 잡아먹으려는 것 아냐?”
갑작스러운 추궁에 발자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사고가 저렇게 전개되는 것일까? 저 뜬금없는 모함에는 화를 내야 하나? 화를 내면 화를 냈다고 책잡히지 않을까……. 발자크는 생각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짓은 안 합니다…….”
“당신 시그니처 이름은 뭐야?”
“글러트니입니다.”
“블라인드로 불 끄고! 글러트니로 잡아먹고! 아냐?”
“아닙니다.”
발자크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에 공중마차가 땅에 내려섰다. 발자크는 더는 말하지 않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왕립도서관 아크리온.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발자크는 움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마력?’
나름대로 은밀하게 숨어 있기는 하지만, 흑마법사인 발자크는 마력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아크리온 주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박쥐와 쥐를 보았다.
발자크가 그쪽을 주시하는 동안, 멜키스는 성큼성큼 걸어서 아크리온의 문을 열었다.
“내가 돌아왔다!”
멜키스는 부유역에서와 똑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아크리온의 안으로 들어갔다. 박쥐와 쥐. 뱀파이어의 사역마를 쳐다보던 발자크도 멜키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크리온의 1층.
본래 아크리온에서는 그 어떤 마법사도 마법을 쓸 수 없는 것이 규칙이다. 이곳에 출입하는 대마법사일지라도, 아크리온에서 마법을 써버리면 이 탑의 온갖 마법들에 집중포화를 당하게 된다.
아크리온에 저 마법 시스템을 처음으로 짜 넣은 것이 바로 현명한 세냐다. 수백 년이 흐르면서 보안 마법들은 최신식으로 교체되었지만, 마법사 죽이기에 특화시킨 골자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발자크는 새삼 아크리온의 보안이 참으로 엄중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 걸음 들어왔고, 눈 한 번 깜빡거릴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저항도 못 했다. 애당초 저항할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인지하기도 전에 사로잡혔다. 발자크는 그 찰나의 순간에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마법이 작용했는지를 생각했다.
열린 문을 막 지나쳤던 몸은 어느새 1층 중앙에 떠 있다. 팔다리는 마법의 사슬에 붙들렸고, 수십 개에 달하는 마법의 칼날이 몸을 겨누고 있다.
그 외에도 가시되지 않은 마법이 수십. 만약 발자크가 저항을 시도하고, 운 좋게 당장의 속박을 풀어낼지라도 즉시 다른 마법들이 연계될 것이다.
“…….”
뭐라고 말이나 하고 싶은데, 그럴 자유도 없었다. 입을 연 순간에 뺨이 찢길 것이다. 발자크는 뺨에 닿은 칼날을 힐긋거리면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발자크는 자신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에 감사했다. 만약 지금의 자신에게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면, 저 경이롭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대마법사를 경배하고, 칭송하는 것에 열중했을 것이다.
ㅡ현명한 세냐.
그녀는 발자크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아니, 상상을 뛰어넘었다. 만약 이 세상에 마법의 여신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저런 모습이리라. 아니. 지금 당장 마법의 여신을 자처할지라도, 발자크는 조금의 의문 없이 수긍할 것만 같았다.
그만큼 현명한 세냐는 신성하고 아름다웠다.
천장에서 내려온 그녀는 천체의 고리를 주변에 둘렀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는 새하얀 서리가 흩날렸고, 나부끼는 보라색 머리카락에서는 신비로운 금색 기류가 얽혔다. 그중에서도 특히 발자크를 전율시킨 것은, 끝이 없다 느껴질 정도로 깊은 녹색 눈동자였다.
“흑마법사.”
세냐의 입술이 열렸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동자를 깜빡이며 발자크를 응시했다. 대답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발자크는 숨을 삼켰다. 최상층의 대마법사들이 뒤늦게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흑마법사도 아니고.”
세냐가 말을 이었다.
멜키스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바로 뒤에 있던 발자크가 저 앞에 구속된 된 것을 보았다. 그 앞에 떠 있는 세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심상치 않았다.
멜키스는 꼴깍 침을 삼키고서 후다닥 발자크의 옆으로 뛰어갔다.
“세냐 언니!”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지금의 나는 그 ‘현명한 세냐’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마법사로서의 수준과 깊이, 위업은 비할 수 없겠지만ㅡ ‘힘’이라면 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잔혹산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는 마법사로서의 수준과 깊이, 위업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힘’. 오직 힘만이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현명한 세냐. 아니, 세냐 메르데인. 그녀가 존경할 가치 있는 위인이라고는 인정한다. 나이가 300살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 앞으로 찾아올 난세에서는, 300살이라는 나이와 선지자로서의 위업보다는 마법사로서의 ‘힘’이 중요한 것이다.
“세냐!”
그래서 멜키스는 ‘언니’라는 말은 잠시 내려놓았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언니고 동생이고 하는 호칭은 서로를 무디게 할 뿐. 1층에 내려온 모든 대마법사들이 경악해서 멜키스를 쳐다보았다.
“?”
경악한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멜키스를 쳐다보았다.
멜키스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걸었다. 고요 속에서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가 울렸다.
“너무 험하게 굴지 말아줄래?”
멜키스는 훗 웃으며 발자크를 가리켰다.
“저건 내 손님이야.”
이 중에서 가장 경악한 것은 발자크였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멜키스를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멜키스는 걱정하지 말란 뜻으로 발자크에게 한쪽 눈을 찡긋 윙크했다.
“그러니까 진정하고, 조심스레 내려놓도록 해.”
“…….”
“흠, 내 말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지?”
멜키스는 코웃음을 치며 엄지손가락을 들더니, 바깥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와. 이 멜키스 엘하이어 님의 인피니트 포스의 힘을…….”
화아아아악!
세냐의 살기가 멜키스를 집어삼켰다. 멜키스의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고,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다리를 모으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농담이에요, 언니.”
빌어먹을 환생 444화
단순한 살기만으로 이렇게 될 수 있나? 멜키스는 닭살이 돋은 팔뚝을 비볐다.
다시 떠올려보는 것부터가 두려운 일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봐도 단순한 살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눈이 마주쳤을 때. 뭔가…… 뭔가 일어났다. 그것을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아주 낯선 기분은 아니다. 예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다.
‘맞아.’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던 중에 떠올랐다.
예전에, 처음으로 아크리온에 들어왔을 때. 최상층 세냐의 전당에 올라서 위치크래프트를, 이터널 홀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기분. 엿보아서는 안 될,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초월을 봐버렸을 때의 경악.
시선이 마주친 순간에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이다. 살의 때문이 아니다. 눈동자를 통해 찰나나마 들여다보았던, ‘세냐 메르데인’이란 마법사의 근원이 멜키스를 주저앉혔다.
‘마법?’
그런 종류의 마법인 것일까? 잠깐 보았을 뿐이라 견적이 잡히질 않았다.
분명한 것은, 저 위대한 마법사는 멜키스의 예상을 아득하게 초월한 존재라는 것. 멜키스가 모래밭에서 열심히 뒹구는 사이에 현명한 세냐가 무언가를 추구하여 도달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도 예전보다 발전했구나.’
멜키스는 세냐에 대한 경외와 더불어,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예전에 처음 아크리온에 들어와서 위치크래프트를 보았을 때는 정신을 잃었지만, 이번에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주저앉기는 했어도 그 이상의 망신은 당하지 않았다…….
“으흠…….”
멜키스는 슬쩍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이곳은 아크리온의 최상층, 세냐의 전당. 아카샤와 세냐의 초상화와 300년 전 동료들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 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멜키스는 상석에 앉아서 턱을 괴고 있는 세냐의 표정을 살폈다.
“언니…… 화났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냐는 멜키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앞을 노려보았다. 멜키스는 가슴이 조마조마하는 것을 느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언니, 정말로 장난이었다니까요?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언니에게 진심으로 그랬겠어요? 그냥, 그냥, 오랜만에 만난 언니에게 요즘 유행하는 최신 장난을…… 맞아! 언니는 아롯에 있어서 잘 몰랐겠지만, 나하마에서는 요즘 저런 장난이 유행이에요. 어린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늙은 사람들까지 모두 다 즐긴다구요.”
되지도 않는 말이지만 멜키스는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석에 가까운 곳에 앉은 로베리안이 열심히 멜키스에게 곁눈질을 보냈지만, 지금의 멜키스는 그 눈짓을 알아차릴 정신이 아니었다.
“제가 언니랑 유진 위해서 그 푹푹 찌는 사막에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래요, 알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언니한테 다시는 이런 장난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언니, 화 좀 풀어요. 표정도 좀 풀고! 제 말에도 대답 좀 해줘요.”
쟤들은 누구야? 열심히 애걸하던 멜키스는 처음 보는 얼굴들에도 주목했다.
키옐의 궁중마법사 헤링턴 카리지. 은둔자 라이나인 보어스. 최근에 대마법사가 된 둘과 일면식은 없었지만,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대마법사인 것은 분명했다.
‘나는 맨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데, 후배란 놈들은 편하게 의자에 앉아?’
알아서 일어서 있지는 못할망정, 눈치 없는 것들 같으니. 멜키스는 부글부글 끓는 속과는 달리 비굴한 미소를 유지했다.
“언니…….”
“크흠!”
로베리안은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제야 멜키스는 고개를 돌려 로베리안 쪽을 보았다.
그는 멜키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붙였다. 아무리 멜키스가 정신이 없어도 저 노골적인 제스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제법이야.”
쭉 침묵하고 있던 세냐의 입술이 열렸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웃더니,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앞으로 뻗었다.
“네 정신력이 특별할 만큼 강한 건가? 아니면, 유폐의 마력의 특혜인가?”
공중에 속박된 발자크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정신은 잃지 않았는데, 그것이 최선이었다. 살짝만 긴장을 풀었으면 바로 정신을 잃었으리라.
그만큼 저 시선은 살벌하고 위력적이었다. 이런 비유는 조금 이상할 테지만, 발자크는 세냐의 녹색 눈동자에서 마안과 같은 힘을 느꼈다. 하지만 인간은 마안을 가질 수 없다. 마안은 일부의 마족에게만 발현되는 특질이다.
즉, 저 ‘시선’은 마안이 아니라 마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봐도 이해는 쉽지 않았다.
마법으로 저만한 마성(魔性)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 저 시선이 끌어내는 감정은 매료와 경외, 선망 등 여러 종류인데,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된다.
굴복.
“…….”
생각을 다시 했다. 발자크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던 마법의 ‘틀’을 부수었다.
마법에 저런 것이 가능하냐고? 그런 의문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마법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 발자크 본인은 도저히 저것을 추구할 수도,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도 없겠지만,
그녀는 현명한 세냐다. 세상 모든 마법사가 존경하는 마법사. 마법사들의 마법사.
“하하…….”
발자크는 자신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이 웃음을 무례나 모욕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목소리를 낼 자유를 받은 지금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양손을 쓰지 않고서는 마도서를 들 수 없던 어린 시절부터 선망했던 인물을,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는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나.
“제 정신력이 특별히 강하다기보다는, 역시 유폐의 마왕님의 마력 때문일 겁니다.”
“시건방져.”
세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앞에서. 유폐의 마왕을 ‘님’이라고 부르다니.”
“불손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저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유폐의 마왕이 권속이 존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징벌할 만큼 쪼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저 또한, 세냐 님이 하찮은 이가 보신을 위해 입을 조심하는 것을 이해해 주지 못하실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발자크의 대답에 다들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특히 발자크와는 젊어서부터 인연이 있던 청탑주 히리두스는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세냐를 존경하고 선망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간혹 세냐가 굉장히 감정적인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만약 세냐가 저 말에 진심으로 언짢음을 느껴 발자크를 죽인다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을 텐가?
게다가 세냐가 발자크를 죽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발자크가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인 것은 사실이고, 언젠가 적이 되면 되었지, 절대로 아군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맞아.”
세냐는 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길게 뻗은 검지손가락이 발자크를 향해 원을 그렸다.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지. 흑색마탑주, 발자크 루드베스. 난 말이야, 흑마법사에 대해서는 도저히 좋은 감정을 품을 수가 없어. 특히 유폐의 마왕과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라면 더더욱.”
“이해합니다.”
“나에게는 널 죽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너는 억울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널 죽이지 않을 거야.”
촤라락! 발자크를 구속하던 마법들이 사라졌다. 세냐는 바닥에 떨어지는 발자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 적탑주에게도 듣고, 청탑주에게도 들었어. 물론, 나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제자에게도 말이야. 발자크 루드베스. 네가 내 제자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지?”
“제 입으로 대답하기에는 난감한 질문이십니다.”
“사마르 대수림에서도 꽤 활약했다고 들었어. 네가 없었다면 일이 아주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던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따랐을…….”
“그런 대답은 너무 뻔하게 느껴지는걸.”
세냐의 이죽거림에 발자크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자, 세냐는 팔짱을 끼면서 웃었다.
“네 비원은 마음에 들어.”
비원, 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발자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려던 표정이 웃음인지 울음인지, 발자크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설이 되고 싶다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마법사. 나처럼 마법의 역사에 수백 년은 이름을 새길 수 있는, 그런 마법사.”
“……예.”
“넌 한때 청색마탑에서 촉망받던, 차기 마탑주로 거론되던 마법사였다고 들었어. 그런 네가 왜 마왕과 계약해 흑마법사가 되었는지도 들었지.”
“저는 세냐 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발자크는 감정을 가다듬고서 대답했다. 현명한 세냐는 마법의 사랑을 받았다. 마왕을 위협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 세냐 이후로 그런 마법사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발자크는 세냐가 아니다. 한때는 발자크도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마법의 총애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대마법사를 넘어, 전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기대를 배신했다. 그래서 발자크는 흑마법사가 되었다. 위대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마법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제 선택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가능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을 맺어야 했던 겁니다.”
대부분의 마법사라면 어린 시절에 이런 꿈을 가질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마법사가 되고 싶다.
나이를 먹고, 현실을 살아가면서 꿈은 바뀐다. 타협하거나 포기하게 된다. 발자크는 포기보다는 타협을 선택했을 뿐이다.
“네게는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세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발자크를 응시했다.
“네가 그 비원에 순수하고 간절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리고 네가 집착하는 것에도 들었지. 네가 바라는 비원은 철저하게 인간으로 남아서, 전설이 되고 싶은 거지?”
“예. 저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맹세할 수 있어?”
세냐는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천천히 발자크에게 다가가면서 말을 이었다.
“강요는 하지 않아. 네가 맹세하지 않아도, 나는 당장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네가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이상, 언젠가 반드시 널 죽일 때가 올 테니.”
“……예.”
“맹세할 수 없다면, 나는 너를…… 그냥 흑마법사라고 생각하겠지. 별 신경은 쓰지 않을 거야. 대신, 더 보고 있기는 싫으니까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야 해.”
“맹세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네 비원이 멋지다고 생각해.”
세냐가 말했다.
“그걸 진심으로 추구하는 것이라면 말이야. 네가 맹세로 진심을 증명한다면, 나는…… 너를 그냥 흑마법사가 아닌, 마법사라고 생각할 거야.”
“맹세하겠습니다.”
발자크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는 손을 가슴에 얹고, 마력과 마나를 담아 말을 외었다.
“저는 절대로 인간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냐는 그 맹세를 듣고 나서야 히죽 웃었다. 그녀는 아직 주저앉아 있는 발자크의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인간을 뛰어넘을 거야.”
발자크는 세냐의 눈동자에서 아까와 같은 초월을 느꼈다. 눈동자에 어린 빛이 회오리쳤다. 빙글 웃고 있는 눈동자, 회오리치던 빛이 별을 만들었다.
발자크는 멍한 눈으로 세냐를 보았다. 농담일 리가 없다. 발자크는 전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연구에 껴주지는 않을 거야. 유폐의 마왕이 널 통해 엿볼지도 모르니까.”
“그런 일은 하지 않으실 것 같지만…… 예, 알겠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발자크는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비원을 인정받았다. 흑마법사가 아닌, 마법사라고 생각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발자크에게 있어서 저 말은 구원만큼이나 귀중했다.
“……나하마의 문제에 대해, 세냐 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르페우론에게서 뽑아낸 기억은 전달받았어. 별로 도움은 안 되었지만.”
“그래 보이더군요.”
발자크는 창밖을 힐긋 보며 말했다.
뱀파이어의 사역마.
“……아롯에서 활동하는 뱀파이어 클랜에 대해서는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잘못 알았던 모양이군요.”
“아마 제대로 알았을걸?”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창밖을 보았다.
아크리온의 회동과 세냐를 감시하던 뱀파이어는 오도스 클랜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지켜보던 시선의 ‘주인’이 바뀌었다.
어떻게 할까. 이쪽에서 손을 써서 알아볼까. 아니면 일단은 무시해 볼까. 결정하지 못하던 중에, 감히 뱀파이어 쪽에서 먼저 접촉해 왔다.
배신.
그런 것은 경멸하지만, 적들끼리 서로 배신하고 정보를 넘기는 것을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덕분에 세냐는 지금 나하마의 심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마족들이 얼마나 넘어왔고, 무엇이 준비되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언니이…….”
세냐가 코웃음 치는 것을 본 멜키스가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흑마법사도 인정하고 봐줬으면, 저도 봐줘도 되지 않아요?”
“언니라고 부르지 마세요, 멜키스 씨.”
세냐는 언제 웃었냐는 듯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그 말에 멜키스는 무릎 발로 기어서 세냐의 다리에 매달렸다.
“언니! 어쩜 제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제가 언니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밖으로 나갈까요?”
“언니! 그거 다 장난이라니까요! 제가 언니랑 밖에 왜 나가요?”
멜키스는 비명을 질러대며 세냐의 다리를 흔들었다.
확, 걷어차 버릴까. 세냐는 그런 생각을 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멜키스가 일 년 가까이 사막에서 고생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 번만 더 까불면…….”
“절대 안 까불게요! 언니, 언니, 근데 아까 그거 뭐예요? 저 주저앉혔던 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거 마법 같은데. 언니 새로운 시그니처예요?”
“비밀이야.”
아직 미완성이기도 하니, 세냐는 벌써부터 자랑할 생각은 없었다.
“역시, 마법이었습니까……! 저는 이런 종류의 마법이 존재하리라곤 상상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뭐랄까, 언니 자체가 마법이 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는데.”
세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발자크와 멜키스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세냐의 시그니처를 추측했다.
그 추측을 듣는 세냐의 입꼬리는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어깨는 으쓱이고, 가슴은 앞으로 쭈욱 나왔다.
빌어먹을 환생 445화
잔류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꿈을 꾸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을 꿀 수가 없다.
그녀에게 있어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아주 약간의 노력이나 수고를 더한다면 이룰 수 있다.
가끔, 꿈을 즐기고 싶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누아르는 자신의 잠 속에서 꿈을 꾸지 않는다. 솔직히 누아르에게는 제 잠에서 꿈을 꾸는 것보다, 다른 이의 꿈을 만들어 즐기는 게 훨씬 쉽고 편했다.
몽마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지만 정작 자신의 꿈은 꿀 수가 없다.
자각하지 못한, 이게 꿈이라는 것을 꿈속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진정한 의미의 꿈.
직접 꿈을 꿔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꿈은 바란다고 해서 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쉽다고 생각한 적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그런 종류의 감상은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낯설었다.
“흐음…….”
지금도 그렇다.
수십 명은 누워서 뒹굴 수 있을 것만 같은 넓은 침대. 누아르는 그 한복판에 앉아 눈을 깜빡거렸다.
“흐으음…….”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해서 잠까지 자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녀 정도의 격을 지닌 마족이라면 수면 따위는 진즉에 극복해 냈지만, 그래도 누아르는 하루에 일정 시간은 꼭 잠을 잤다. 잘 필요가 없다지만 자지 않을 필요마저 느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배배 꼬면서 생각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확신은 없다만, 왠지…… 꿈을 꾼 것만 같다. 꿈을 꾸었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다. 자각하지 못한 꿈. 잠에서 깨어난 순간에 기억이 증발해 버려서, 희미한 감정만이 잔류하는…….
“뭘까…….”
누아르는 괜히 이불을 끌어다가 몸에 돌돌 말면서 중얼거렸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뒹굴다가 눈을 감았다. 평범하게 꿈을 꾸는 자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
꿈의 미련. 이미 잠에서 깨어나도,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기분. 도중에 끝나 버린 꿈의 다음을 잇고 싶다는 갈망. 지금 누아르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잠들기 위한 노력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바란 순간에 즉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불을 돌돌 말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지 수십 분. 누아르의 두 눈이 반짝 뜨였다.
“안 되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도중에는 아예 잠 속에서 의식을 깨워 직접 꿈을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아까와 같은 기분은 느낄 수가 없었다.
애당초 꿈의 ‘다음’을 바라서 잠든 것인데,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어렴풋한 감정만이 잔류하고 있을 뿐.
“뭘까…….”
누아르는 다시 한번 중얼거리면서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한층 더 부스스해진 머리를 양손으로 헤집으며 침대를 뒹굴었다. 점점 더 희미해지는 감정들을 생각해 본다.
꿈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잔류한 감정은…… 슬픔? 그리움? 미련? 그런 종류의 아련하고 애틋한.
“계절 타나?”
내가? 누아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울 앞에 앉아 엉망인 머리를 정리하고, 자는 중에 없애 둔 뿔을 다시 만들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감정을 떨쳐 내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금세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감정은 어느새 가슴 밑바닥에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어떤 꿈을 꾸었더라? 거울을 빤히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떠오르질 않는다. 누아르는 괜히 얼굴을 어루만지고, 관자놀이를 두드리고, 기껏 정리했던 머리를 벅벅 긁다가 머리채를 가볍게 잡아 뜯었다.
그러다가.
목걸이를 보았다. 왼손 약지에 끼운 반지도 의식했다. 알몸으로 잠드는 순간에도 목걸이와 반지는 벗지 않았다. 잠잘 때뿐만 아니라, 이 한 달 동안 누아르는 단 한 번도 목걸이와 반지를 벗은 적이 없었다.
“……흐응.”
그날 밤부터 새벽을 지나 여명까지의 기억. 감정. 추억. 그리고 증거.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에 끼운 반지는 선명한 색채로 빛을 발하고 있다. 누아르는 약지의 반지를 보다가, 목걸이에 엮은 다른 반지를 들어 올렸다.
‘누아르 제벨라’.
안쪽에 새겨넣은 이름. 누아르는 달콤한 두근거림을 느끼며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언젠가, 죽어가는 하멜의 손가락에 끼울 반지. 하멜의 약지에 맞춘 반지는, 누아르의 엄지손가락에 끼워도 넉넉했다.
‘커다란 손.’
누아르는 하멜의, 유진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길고 굵은 손가락. 마주 잡으면 내 손을 완전히 감싸버리겠지.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보고 싶어졌어.”
화아악! 허공에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났다.
어드벤처 스퀘어의 워터파크. 파라솔 아래에 앉은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화면으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뚱한 표정. 나오고 싶지 않은데, 꼬마들에게 억지로 끌려 나온 것이리라.
“슬슬 떠나려나?”
유진이 제벨라 파크에 온 지도 한 달이 되었다.
나하마의 정세도 변했다. 대놓고 알리지는 않고 있지만, 누아르는 나하마가 임전태세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명한 것은 술탄이겠지만, 그 배후에는 아멜리아 머윈이 있다. 라비스타에 대가리를 처박고 숨어 있던 아멜리아가 드디어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날의 여명 이후로, 누아르는 유진을 찾아가지 않았다.
떠오르는 여명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너무나도 짙어서. 다른 감정으로 덮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너무 가볍게 자주 찾아가면 추억조차 가벼워질 것 같아서.
누아르의 공중저택인 제벨라 페이스는 이미 워터파크 쪽으로 비행을 시작했다.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거울을 돌아보았다. 도착할 때까지 할 일은ㅡ 수영복을 고르는 것. 어떤 수영복이 좋을까? 즐거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 * *
쏴아아.
쏴아아아.
파도풀이라고 불리는 수영장은 이름 그대로 파도가 친다. 바다처럼 넓고, 파도가 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바다인 것은 아니다.
유진이 보기에, 저 수영장은 바다에 존재하는 나쁜 점은 모조리 배제하고 좋은 점만을 극대화한 악마적인 놀이시설이었다.
쉼 없이 치는 파도. 높았다가, 낮았다가, 그것뿐이지만 ‘고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튜브나 고무보트 같은 장난감과 어우러지는 것만으로 아이들을 미치게 만든다.
“꺄아아아!”
“히야아악!”
보라. 고무보트에 탄 라이미르아와 메르가 신나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저런 종류의 놀이를 겪어본 적 없는 크리스티나도 둘 사이에 껴서 열심히 비명을 참고 있는데, 재미있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 참 노골적이었다.
‘어쩌면 아니스일지도 모르지.’
꼬마들을 보호한답시고 아까부터 같이 노는 것을 보면, 아니스도 이 수영장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뭘 굳이 참는 걸까? 눈치 볼 필요도 없는데. 유진은 썬베드 옆에 둔 술병을 따며 생각했다. 이곳은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멋대로 빌린 프라이빗 풀. 이 커다란 수영장에 있는 것은 유진 일행뿐이다.
“그래서. 발자크는 일단 내버려 두기로 한 거냐?”
[응.]
곁을 맴도는 바람이 세냐의 목소리를 실어다 날랐다.
본래 세냐와의 대화는 메르를 통해서 나눴지만, 멜키스가 아롯에 돌아가고서부터는 무조건 메르를 통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멜키스가 소환해 둔 바람의 정령이 세냐의 곁에 머무르며 통신기 역할을 대신해 주었기에, 지금처럼 메르가 열심히 노는 중에도 세냐와 대화가 가능했다.
[흑마법사라는 점을 빼면 꽤 마음에 들어.]
“하는 짓이 굉장히 수상하잖아.”
[원래 마법사는 수상한 구석 한둘은 가지고 있어야 해. 그래야 신비로운 거야.]
“얼씨구. 정작 너는 그런 것 없잖아.”
[나도 남들이 보면 수상하고 신비롭고 막 그럴걸?]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유진은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세냐가 발자크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점. 그것은 유진에게 크게 의외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발자크의 ‘비원’을 듣는다면, 아마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유진도 세냐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발자크의 비원. ‘전설’이 되고 싶다. 대단한 마법사가 되고 싶다. 그러면서도 인간으로 남고 싶다. 마왕이나 다른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그 비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비원을 들었기 때문에. 유진에게 발자크에 대한 경계는 허물어졌다. 이후로도 수상하다 생각하고, 거리를 둔 것은, 발자크가 결국은 흑마법사라서. 타협할 수 없는, 무조건 싸우게 될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라서다.
[유폐의 마왕은 네가 바벨에 오르기 전까지는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는거잖아. 놈이 설마 자기랑 계약한 흑마법사를 써서 수작을 부릴 것 같지도 않고.]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지.”
저런 종류의 의문에서 귀결되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그럴 생각이 없을지라도, 발자크가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는 별개 문제야.”
[흐흥, 내 걱정을 해주는 거구나? 그건 말이야, 유진, 네가 요즘 날 안 봐서 그래. 나 요즘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
세냐가 새로운 시그니처의 개발에 몰두하는 것은 유진도 알고 있다. 정확한 진척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진행된 모양이었다.
“어, 너 잘난 건 알겠는데.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는 거야.”
[발자크의 시그니처 때문에 그래?]
“시그니처에 대해 제대로 묻지도 않았다며? 너무 안일한 것 아냐?”
[마법사로서 존중해 주는 거야.]
“존중은 무슨.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수상쩍지 않냐? 뭔 놈의 시그니처가 마족을 잡아먹어? 그러다가 나중에 너도 잡아먹으려 굴면 어떡해?”
[유진, 너 말이야. 나랑 아니스, 크리스티나가 만약에, 만약에 하면서 너 걱정할 때 어떻게 굴었어?]
돌아온 질문에 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유진이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자 세냐가 쯧쯧 혀를 찼다.
[이 비겁한 새끼. 입 닥치고 있는 것 좀 봐. 자기가 당할 때는 정색하고서 알아서 한다고 그러더니.]
“걱정해 줘도 지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분명히, 세냐가 예전에 저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유진은 세냐와 똑같이, 아니! 조금 비슷하게 행동해 버리는 자신에게 소름이 끼쳤다. 내가 저 싸가지 없는 푼수 새침데기랑 닮았다고? 말도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나하마에까지 데려가는 것은 좀 그런데.”
[방해 안 하고 자기 알아서 싸우겠다는데 뭐 어때?]
“언제부터 흑마법사 말을 그렇게 다 믿어줬냐?”
[흑마법사를 믿는 게 아니라,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마법사를 믿는 거야. 그리고 나도 솔직히 궁금해서 그래. 대체 마족을 잡아먹는 것과 자기 비원을 이루는 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가 인간 편에 서서 전쟁에 활약하고, 마족과 싸우면 대단한 일이기는 하네.”
[음……? 그건가? 그걸 노리는 건가?]
되는대로 뱉은 말인데 세냐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유진도 다시 생각해 보고서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알기로는 여태까지 마족과 대놓고 반목한 흑마법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널 죽이는 것이 목적일지도 몰라.”
[흐흥,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바로 전설이 될 수 있겠지. 성공한다면 말이야.]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티끌만치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내가 쟤보다는 덜 오만하지.’
거짓말로라도 겸손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유진도 자기가 어느 정도 오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오만함이 60 정도라면, 세냐는 100이라고 생각했다.
“박쥐 쪽은?”
[연락은 없어. 그쪽도 이전처럼 정보를 넘길 수 없겠지.]
머윈이 왔다.
박쥐가 보낸 정보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전까지는 마족들과 나하마 심부의 동태를 속속들이 보고했는데. 아멜리아 머윈이 나하마에 와버렸으니 첩자 짓을 할 수가 없게 된 모양이다.
“어쩌면 들켜서 죽은 걸 수도 있지.”
[그건 아닌 것 같아. 나에 대한 감시는 여전하거든.]
박쥐의 정체까지는 모르지만, 놈이 아멜리아 머윈에게 강한 원한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정보를 넘기는 것으로 요구한 대가가, 언젠가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아멜리아 머윈을 죽여달라는 것였으니.
[기다려 보면 연락이 오겠지. 아니면…… 흠, 더 이상 감시를 내버려 둘 필요도 없나? 머윈을 끌어내기 위해서 내버려 두고 있던 거잖아.]
“그렇긴 한데. 일단은 둬 봐.”
[너는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머윈도 나하마에 왔으니, 슬슬 준비해야 하는 것 아냐?]
“준비는 하고 있어.”
제벨라 파크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준비는 이 도시에 오기 전부터 하고 있었다.
“떠나는 것은 이번 주 안에…….”
유진은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제벨라 페이스가 보였다.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서 내뱉었다.
“저년이 또.”
[저년? 년? 어떤 년이야!]
세냐가 윽박을 질렀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열렸다.
비키니를 입은 누아르 제벨라가 멋들어진 자세로 풀을 향해 다이빙했다.
빌어먹을 환생 446화
저만큼 높은 하늘에서 다이빙한다면, 아래가 물일지라도 전신이 박살이 나서 죽어버릴 것이다.
인간이라면 말이다. 당연히 누아르 제벨라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까마득한 하늘에서부터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다이빙한 누아르가 파도풀 한복판에 떨어졌다.
촤아아악! 누아르가 떨어진 곳에서 수면이 회오리쳤다. 이윽고 파도풀 한복판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끄트머리에서 시작된 파도가 소용돌이를 향해 밀려오고, 그 주변을 떠다니던 고무보트가 당장에라도 뒤집힐 것처럼 요동쳤다.
“꺄아악!”
“끼약!”
뒤흔들리는 고무보트 위에서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꺅꺅 비명을 질렀다. 이곳이 실제 바다인 것도 아니고, 수심도 깊지 않고, 실제 바다에 수심이 깊을지라도 저 둘은 물에 빠진들 아무 위협도 겪지 않을 것이다.
즉, 저 비명은 보트가 흔들리는 것이 그냥 재미있어서 지르는 비명인 것이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비명을 참았다. 하지만 표정을 관리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고무보트의 양 끝을 손으로 움켜쥐고서 눈썹을 찡그렸다. 맞은 편에서 웃으며 비명을 지르던 꼬마들은 성녀의 표정을 보았다. 둘은 웃음을 뚝 멈추고 서로 얼싸안으며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으흠.”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겁을 먹은 것을 안 크리스티나는 헛기침을 뱉으며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자애로운 미소와 손을 모은 기도. 하지만 방금 전 악마의 얼굴을 본 꼬마들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후우.”
소용돌이가 멈추고 파도가 사라졌다. 잠잠히 가라앉은 풀의 한복판에서 누아르가 떠올랐다. 그녀는 물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흘러내리는 물방울. 완벽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몸매. 아름다운 얼굴은 말할 것도 없다.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패션을 즐기는 그녀지만, 지금은 순수하고 청초한 느낌을 주고 싶어 새하얀 비키니를 입었다.
누아르는 지금의 자신이 물의 여신처럼 보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어처럼 하반신을 물고기로 바꿔볼까? 그것도 상당히 괜찮을 것 같다.
‘제벨라 파크의 다음 이벤트 컨셉은 인어공주로 해야겠어.’
물론, 유진에게 이 도시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누아르는 지금의 이미지만큼이나 맑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촤악! 흠뻑 젖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물방울을 흩뿌리고, 거기서 작은 무지개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워터파크의 프라이빗 풀. 보고 감탄해 줄 사람은 없지만, 누아르는 지금의 연출에 만족했다. 그녀가 이 순수하고 청초하며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남자는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년이냐니까?]
“이 도시에서 나타날 여자 중 내가 년이라고 할 여자가 누구겠니?”
[갈X의 여왕.]
세냐가 언성을 낮추며 투덜거렸다. 그러는 동안에 누아르는 수면 위에 섰다. 그녀는 무지개를 뒤로하고 수면 위를 사뿐사뿐 걸어 유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뭘 하러 온 겁니까.”
아니스가 고무보트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얼싸안고 몸을 떠는 꼬마들을 지나쳐서 누아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인사는 해두고 싶어서.”
“……인사?”
“곧 떠날 것 아니에요?”
누아르는 방긋 웃었다. 바로 앞에서 아니스가 길을 막고 있지만, 누아르의 눈은 오직 유진만을 보고 있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유진도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차림이 무어가 중요한가?
‘나도 수영복인걸.’
그것만으로 누아르는 풋풋한 설렘을 느꼈다.
청초한 컨셉의 수영복을 입었기 때문일까. 지금 느끼는 설렘이 농익은 것이 아닌 풋풋한 청춘의 것이기 때문일까. 다른 때라면 방해라고 느꼈을 성녀와 꼬마들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같이 놀래요?”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누아르의 행동이 아니스를 기겁시켰다. 바로 앞에 서 있던 누아르는 어느새 아니스의 옆에 있었고, 그냥 서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몸을 기대었다.
“미친 겁니까?!”
아니스는 기겁하며 팔을 빼려 했다. 하지만 뜻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아니스의 팔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팔뚝에 닿는 모든 감촉이 불쾌해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니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치켜들었다.
전력을 다해 따귀를 갈겼지만 손바닥에 닿는 것은 없었다. 팔을 끌어안아 가슴에 파묻던 누아르는 어느새 고무보트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아니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움직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도 놀랄 일이지만, 꼬마들의 앞에 누아르가 있는 것에 놀람보다 분노가 앞섰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성녀는 똑같은 분노를 느끼며 외쳤다.
“내 아이들에게서 떨어져!”
그 외침은 누아르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내 아이들? 말뿐인 것도 아니다. 성녀답지 않은 살의. 동시에 쏘아진 빛이 누아르를 덮쳤다.
“너무하네요. 같이 물놀이나 하자고 온 건데.”
맞아도 죽지는 않겠지만, 신성력은 아픈 것을 떠나 불쾌하다. 누아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보트 위에서 사라졌다.
“당신은 어때요? 하멜. 나와 같이 물놀이를 즐기며 청춘의 추억을 쌓고 싶지 않아요?”
“왜 대답이 뻔한 질문을 하는 거냐.”
유진은 곁을 맴도는 바람의 정령을 역소환하며 내뱉었다. 누아르는 썬베드에 앉은 유진의 몸을 훑어보면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당신은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잖아요.”
뺀질거리는 태도에 욕이 나올 뻔했다. 내뱉지 못한 것은, 누아르의 목걸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반지. 누아르의 왼손 약지에도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
“…….”
여명을 등지고 사라지던 누아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지었던 미소. 눈물.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누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것인지. 왜 평소와는 다른, 아련한 미소를 지었던 것인지. 눈물은 왜 흘린 것인지.
“……며칠 내로 이 도시를 떠날 거다.”
궁금했지만, 묻는 것이 두려웠다. 유진은 누아르의 반지를 무시하며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의식하고 있어.’
한순간이었지만 시선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잖은가. 그렇지만 누아르는 반지에 대해서 언급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감정이 점점 진해지도록. 그렇게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유진만 의식하는 것이 아니다. 누아르도 똑같이 의식하고 있다. 그녀는 이 한 달 동안 반지와 목걸이를 벗은 적이 없었다.
점점 진해지는 감정이 과연 어떻게 스며들까. 어떤 맛으로 완성될까.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멀찍이 있던 썬베드가 바로 뒤까지 날아왔다.
“그렇겠죠.”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안심시킨 아니스가 이쪽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유진이 손을 들어 저지시켰다. 아니스의 뺨이 움찔 떨렸지만, 그 이상의 반발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녀는 유진에 대한 우려를 느끼며 꼬마들과 함께 뒤편으로 물러섰다.
“당신 목적은 아멜리아 머윈을 라비스타에서 끌어내는 거였잖아요? 그녀가 나하마에 넘어왔으니, 하멜, 당신이 더 이상 이 도시에 있을 필요가 없죠.”
누아르는 천천히 움직여 썬베드에 누웠다. 유진 쪽으로 몸을 돌려 누운 그녀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은 며칠 동안 이 도시에 있네요. 당신 성격이라면 당장 떠나도 이상치 않은데 말이에요. 심지어 며칠 내로 떠나겠다니. 다른 준비가 다 되지 않은 모양이죠?”
“뭔 대답을 듣고 싶은 거냐.”
“아무리 당신이 용사라지만 징집령까지는 내릴 수 없겠죠. 그렇게까지 해야 할 상황도 아니고. 당신을 무조건 지지하기로 한 황제와 교황, 국왕들도 그만큼이나 절실하지는 않을 거야.”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누아르는 양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괴었다.
“그래도 상대는 흑마법사와 마족. 심지어 나하마는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국가니까, 이번 기회에 완전히 짓밟아 정복하고 영토를 나눠 갖자는 생각은 다들 하고 있겠죠? 특히 나하마와 여러 번 부딪쳐 온 키옐은 황제의 사욕도 제법 많을 거야.”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는 말이긴 했다.
전쟁은 레헤인야르의 동굴에서부터 준비했다. 키옐, 유라스, 아롯, 루하르, 시뭉니. 5개의 국가가 연합하기로 했다. 각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은 당연히 참전하고, 특히 키옐의 황제는 호위인 알체스터 드라고닉까지 참전할 것을 표명했다.
누아르의 말처럼, 황제는 이번 기회에 나하마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영토 대부분이 사막인 데다, 정복한 뒤에는 다른 연합국들과 나눠야겠지만, 키옐 황제는 수백 년 근처에서 이빨을 드러내 온 적대국을 정복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셈이다.
그것까지는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유진의 목적은 나하마에서 아멜리아 머윈과 흑마법사들과, 피 냄새를 맡고 넘어온 마족들을 몰살하는 것이다. 그 뒤에는 술탄의 목이라도 잡아채고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시키면 될 것이다.
“덕분에 나 같은 사업가는 꽤 곤란해졌죠. 나는 나하마에서도 여러 사업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전쟁이 벌어지면 얼마나 큰 손해를 보는 줄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무기나 군사 쪽도 진출할 걸 그랬어.”
칭얼대는 내용과는 달리 누아르는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은근슬쩍 유진과의 거리를 좁히며 속삭였다.
“나하마의 사업장 중에는 몽마란 종족의 본연에 충실한 사업장도 있거든요? 에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하멜. 저는 불법적인 일은 안 한다구요. 제가 운영하는 사업장은 모두가 헬무드 법을 준수하고 있어요.”
불법이라고 신고당한 적이 없으면 합법 아닌가? 누아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업장은 다양한데, 그중에서 아주 고급진……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점잖고…… 높은? 그런 인간들을 위한 사업장이 있거든요? 전해 듣기를, 조만간 나하마는 쇄국에 들어갈 거예요.”
“쇄국?”
“네. 나하마에 존재하는 모든 외국 관광객을 추방하고, 워프게이트도 내국으로 돌려버린대요. 이미 대부분의 에미르가 술탄이 보낸 밀서에 화답했어요.”
속삭여도 될 만큼 비밀스러운 얘기였다.
나하마에서 활동하는 첩보원들은 키옐이나 다른 나라에도 여럿 있지만, 지금 누아르가 알려주는 이야기의 출처는 나하마의 현직 관료나 에미르일 터. 심지어 침대에서의 밀담도 아니고, 고위 몽마가 직접 꿈을 들여보아 알아낸 것이다.
“밀서의 내용은?”
“거느린 사병과 전사들을 최소의 호위만 남기고서 차출할 것. 그리고 영토에서 최소 1만 명 이상의 남자를 징집할 것.”
나하마의 국군에 모래술사와 어쌔신, 던전 흑마법사들. 에미르의 전사단과 사병대만 해도 병력은 충분할 텐데, 거기에 징집병까지. 나하마의 에미르는 15명이니, 만약 모든 에미르가 술탄의 밀서를 따른다면 징집병의 숫자만 15만이 된다.
누아르는 유진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수십 만의 인간이 벌이는 전쟁. 300년 전의 전쟁의 적이 마족과 흑마법사였던 것과는 달리, 이번 전쟁의 적은 대부분이 인간이다. 누아르는 그것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은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다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텐데, 지금 유진의 표정은, 누아르가 생각했던 것보다 평온해 보였다. 놀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조차도 단순했다. 그냥, 생각했던 것보다 숫자가 많은 것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왤까.’
저 남자는 전쟁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전쟁 시대가 저물고 태어난 지금 시대의 군주와 기사와 병사와 용병 따위는 수십만, 그 이상의 병력이 부딪치고 저무는 전쟁에 질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하멜은 그렇지 않다. 이 시대의 인간 중에서 전쟁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저 남자일 것이다.
하멜은 용병이고 영웅이었다. 지금 시대에서는 용사가 되었다. 그는 전쟁이 무엇인지 알고서도 전쟁을 의도하고 준비했다. 이 전쟁에서 나하마는 헬무드의 동맹국으로 몰락할 것이다.
나라 하나를 정복하는 것. 수많은 인간을 전장에 눕히는 것.
저 남자에게 그런 일들에 대한 각오는 새삼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는 진즉부터 각오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용사가 해야 할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고, 하멜이 바라는 것은 마왕을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누아르는 저 남자가 무정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마족이라면 모를까. 그는 수십만 인간의 목숨에는 결코 태연할 수 없는 남자였다. 나하마의 술탄이 헬무드의 편을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배후에 아멜리아 머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하마에 징집된 병력 대부분은 마왕숭배자가 아닐 것이다.
“발악하는군.”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누아르는 유진의 의중이 궁금했다. 동시에 저 황홀하리만큼 신념에 맹목적인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다.
누아르는 얼음처럼 차가운 금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목걸이의 반지를 움켜쥐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단 생각은 안 드나요?”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건, 충동적이다. 그를 알면서도 누아르는 충동에 거스르지 않았다. 그만큼 이 충동은 욕망적이었다.
누아르는, 유진과 같은 전장에 서고 싶었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전장에서, 같은 것을 향하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고 싶었다.
“상대가 수십만이건 수백만이건, 그 몇십, 몇백 배라도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하멜, 당신이 잘 알겠죠.”
잘 안다.
전쟁 시대에서 마족을 제외하고, 단독으로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마족이 누구인가? 고민할 것도 없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300년 전에 마경을 진군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누아르 제벨라는 악몽 그 자체였다.
그녀가 벌이는 학살에 군대는 필요치 않다. 마경의 시커먼 어둠에서 보라색 쌍안이 번득인 순간에 학살은 이미 끝나 버린다. 3만 명의 군대가 평원에서 익사해버린 것이 가장 유명한 일화지만, 그 외에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학살은 더 있을 것이다.
“나라면.”
누아르가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를 건넸다. 그 목소리는 유혹하듯 달콤했다.
“필요 없는 피가 흐르지 않게 만들 수 있어요. 수십만 군대가 죽음을 각오해도, 누구도 죽이지 않고 평온하게 눈을 감게 만들 수 있죠.”
“아니.”
유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그것을 바랄 리가 없지.”
조금은 흔들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누아르는 방긋 웃어버렸다. 그녀가 하멜과 서고 싶은 전장은, 피가 흐르지 않고 평화로운 전장은 아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군가와 함성과 비명과 절규와 비탄과 애걸이 뒤섞인 곳. 피비린내와 죽음이 떠돌고, 온갖 종류의 감정이 뒤섞이고 이루지 못하는 미련이 허무히 증발하는 전장.
누아르는, 그런 전장에서 하멜을 보고 싶었다.
300년 전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보았었는데. 지금 느끼는 ‘보고 싶다’라는 욕망은 새로우면서 그리웠다. 만약 유진이 방금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누아르가 유진과 손을 잡고 사막의 전장에 섰더라면.
누아르는 최선을 다해 전장을 끔찍하게 만들 것이다.
빌어먹을 환생 447화
누아르의 생각처럼, 유진은 나하마와 저만한 규모의 전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리겠지만, 지금은 딱히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잖은가.
전면전을 바라는 아멜리아 머윈과는 달리, 유진에게는 선택할 방법이 여럿 있었다. 단순 전력만 비교해도 연합 쪽이 나하마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아멜리아가 고위 마족 상당수를 끌어들였다 해도, 이쪽에도 대응할 전력은 얼마든지 있다.
마족들 전원이 의식을 거쳐 마왕이 되는 것?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전력의 우위는 뒤집히겠지만, 바라고 노력한다고 해서 될 수 있을 만큼 마왕의 이름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최초로 의식을 시도했던 이오드 라이언하트는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놈에게 깃든 어둠의 정령, 마왕의 잔재, 혈관에 흐르는 라이언하트의 피로 대부분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하지만 에드몬드 코드렛은 의식의 준비에만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만 했다. 산 제물뿐만 아니라 대수림에 풍부한 마나와 세계수의 지맥, 마룡 라이자키아의 마력까지 총동원했다. 그것으로도 완전치 않아, 전면전을 의도해서 제물의 영혼을 격상시키는 편법까지 써가며 의식을 시도했다.
마족들은 아이리스가 한순간에 마왕이 된 것을 보고서 자기들도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자격 없는 이가 마왕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단순 산 제물만으로는 마왕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1명의 마족이라도 마왕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에드몬드가 그랬던 것처럼 전쟁의 광기와 열망 등으로 영혼을 격상시키는 편법을 써야 한다.
나하마에는 사마르 대수림과 같은 특별함이 없다. 그때 에드몬드는 수만 명의 원주민을 제물로 삼았지만, 아멜리아는 최소 그 몇 배는 될 산 제물을 준비해야 한다.
아멜리아가 나하마에 건너온 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아멜리아가 마족들에게 마왕 의식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마왕 의식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전면전을 유도해야 하는데, 전선에서 대치 상황만 되어도 유진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해진다.
아멜리아가 바라는 대로 치고받고 싸우는 전면전을 해주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일단 유진의 목적은 그 망할 년이 있을 후방을 공습(空襲)하는 것이다. 세냐와 함께 날아가거나, 혹은 라이미르아를 타고 가서 브레스를 쏴갈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마족과 아멜리아를 죽이고 술탄을 사로잡는다면 그것으로 끝…… 인데, 실제로 저렇게 잘될 것이란 확신은 하지 않았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이다.
“할 말 다 했으면 가지?”
“정말,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이런 얘기나 할 생각으로 당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에요.”
고마운 줄 모르는 뻔뻔함. 누아르는 얄밉다는 눈초리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부끄럽지만, 저는 말이에요, 하멜.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뭐 어쩌라는 건지.”
누아르에게 저런 개소리를 듣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유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죽거렸다. 틀림없이 도움이 될 정보를 전해주었는데도 이런 취급을 받다니! 그런데도 서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음. 그냥 보고 싶어서, 라고 했지만요. 사실을 말하자면 ‘그냥’은 아니에요. 이유가 없지는 않단 말이에요.”
“뭐 어쩌라는…….”
“궁금하지 않아요? 네?”
누아르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고, 유진은 질색하며 그녀가 누운 선베드를 발로 밀어버렸다. 그토록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누아르는 신경도 하나 쓰지 않고 기어코 유진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물어보지 않는다면 누아르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 뻔했다.
“……보고 싶어진 이유가 뭐냐.”
물어보는 중에도 감정이 실려 뺨이 씰룩거렸다. 과연, 누아르는 질문을 받은 즉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꿈을 꿨어요.”
“……꿈?”
유진은 몽마가 ‘진짜’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에, 저 대답은 갑작스럽고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네.”
“……무슨 꿈?”
하지만. 저런 사실을 모를지라도, 누아르가 말한 ‘꿈’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유진이 처음 아가로트의 기억을 보았던 것 역시 꿈이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보고 싶다, 라는 기분이 든 것을 보면 하멜과 관련된 꿈일 것이다. 만나서 직접 말해보면…… 희미한 감정의 잔류에서 기억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무슨 꿈인지는 기억이 안 나.”
여전히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만큼은 조금 더 짙어지는 것만 같다.
누아르는 살짝 뒤로 물러서서 유진의 모습을 보았다. 애타고 아련한…… 뭘까? 누아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누아르야 잔류한 감정을 곱씹으며 여운을 즐길 수 있지만, 유진에게는 여전히 저 모든 것이 뜬금없었다. 유진은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표정을 구기고서 자리에 일어섰다.
“어디 가요?”
“네가 안 갈 것 같으니 내가 가련다.”
“저 꼬마들은 더 물놀이를 하고 싶어 할 텐데요? 하멜, 당신은 아이들 기분은 생각해주지 않는 건가요?”
“내가 여태까지 쟤들 기분을 생각해 줬으면, 쟤들도 가끔은 내 기분을 생각해 줘야지.”
“제 기분은 생각해 주지 않을 거예요? 하멜. 저는 당신이 보고 싶어서 찾아왔…….”
누아르의 말이 도중에 뚝 멈췄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유진을 보다가,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하?”
누아르의 뺨이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그녀는 누워 있던 선베드에서 벌떡 일어서며 내뱉었다.
“아뇨, 하멜. 당신이 떠날 필요 없어요. 제가 할 일이 있던 것을 그만 잊고 있었지 뭐에요.”
“뭐?”
“기왕이면 이 도시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봤으면 좋겠네요. 당신은 바라지 않겠지만, 저는 인사 정도는 해주고 싶거든요. 아, 그리고, 제가 아까 한 말은 한 번 더 생각해 봐요.”
누아르는 빠르게 내뱉으면서 유진에게 한쪽 눈을 찡긋였다.
“아멜리아 머윈과의 전쟁에서 당신을 도울 생각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후다닥 말하고서, 누아르는 자리에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왔을 때처럼 제벨라 페이스에 올라가는 대신 안개가 되어서 사라졌다.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당장 누아르의 마음이 급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짜증’이 났다.
‘뭐야?’
이 거대한 도시는 누아르의 손바닥 위에 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면 반드시 알아차린다. 지금도 그랬다. 누아르는, 갑자기 도시 외곽에 나타난 이질적인 존재를 감지했다.
마족? 그런 것은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뭐라도 주워 먹을 것이 있어서 도시 바깥을 기웃거리는 놈들은 셀 수없이 많으니까.
하지만 그런 하이에나들은 대부분이 보잘것없다. 누아르가 정색하고서 즉시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신경 쓰이는’ 존재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르다. 특별하다.
이질적이다. 불쾌하다. 누아르는 도시 상공을 가로지르며 생각했다.
“당신.”
도착했다.
관광객은 거의 없는 제벨라 시티의 거주 구역, 그중에서도 변경. ‘남자’는 그곳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모습. 300년 전과 비교해서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 흉터도 없고, 차림새도 다르다.
겨우 그 정도의 변화가 있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 모습을 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언제고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얼굴. 누아르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남자.
몰살의 하멜.
누아르는 지금 자신이 어떤 감정을 보여야 할지를 고민했다. ‘저것’의 정체는 잘 알고 있다.
아멜리아 머윈의 애완동물. 하멜의 시체에 가짜 영혼을 집어넣고, 하멜의 기억을 토대로 자아를 형성해 만든 데스나이트. 아니, 어느 순간부터 저것은 데스나이트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1년 전에 라비스타에서 저것의 모습을 보았다. 시체의 몸뚱이를 잃고, 간신히 영혼만이 남아서 멸망의 마력과 뒤섞이고 있었지. 그때 보았던 바에 따르면ㅡ 언제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소멸하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새로워졌다?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말의, 기대도 걸었었다. 저 존재에게는 짓궂고 잔인한 일이겠지만,
누아르는 저것이 가진 ‘하멜다운’ 자아에는 관심이 있었다. 하멜처럼, 절망하지 않고 발악한다면.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끔찍하게 열악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대대로 해주었다.
아니, 기대를 아득히 넘어섰다. 누아르는 저것에게 기괴하고 이질적인 불쾌감을 느꼈다. 그래서 어떤 감정을 보여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하멜을 대하듯 연기해 줄까. 아니면……
“……하멜.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속 보이는 수작은 하지 말지.”
누아르가 질문한 순간, 망령이 입술을 비틀며 대답했다.
“어머나.”
그 대답에 누아르도 고민을 그만두었다. 연기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니, 언제부터 알아차렸죠?”
“대답할 이유가 있나?”
“흠. 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궁금하거든. 저번에 봤을 적만 해도, 당신은 자기 자신을 하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연기하지 않는 대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냈다. 누아르는 망령에 대한 불쾌와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
하멜의 가짜.
‘이질적이고 불쾌한…… 그래, 그런가. 멸망의 마력이야.’
하지만 알피에로 같은 권속들에게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누아르는 망령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단순히 마력만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존재감. 위압감. 피부가 저릿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본능이 반발하는 것만 같다.
‘멸망의 마력과 섞여 변질되었다 해도, 이 정도라고?’
경시할 수 없는 상대. 누아르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상대는 흔치 않다.
“대답할 생각은 없나 보네요.”
망령이 대답하지 않자,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죠? 아멜리아 머윈과…… 아아, 아하, 그래, 자기 존재를 자각했다면…… 아멜리아의 족쇄도 풀어낸 건가요?”
“유진 라이언하트.”
망령은 불쑥 그 이름을 말했다.
“아직 이 도시에 있나?”
이번에는 누아르가 입을 닫을 차례였다. 그녀는 저 질문의 의중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다른 상대라면 환상의 마안을 써서 정신을 읽어버릴 텐데…… 저 존재에게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멸망의 신전을 들여다보았을 때. 사슬에 묶인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를 보았을 때와 같은 감각이다. 섣불리 ‘꿈’을 보여주었다가는, 되려 이쪽이 무너져버릴 것 같다.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도 알겠지. 그럼에도 라이언하트를 증오하나?’
저 가짜는 베르무트와 다른 동료들에게 배신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라이언하트 가문을 증오했다.
‘……기억에 대한 증오가 아닐지도.’
관점을 바꾸어 다르게 생각해 봤다.
저것은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패배해서 몸뚱이를 잃었다……. 조작된 기억에 의해 라이언하트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유진을 증오하여 복수하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왜 찾아요?”
만약 저것이 유진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이라면. 길을 열어주어야 하나? 아니면 막아야 하나? 누아르는 순간 그런 고민을 했다.
아니, 섣부른 판단이다. 저것이 유진에게 복수를 바라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것의 자아가 하멜에 가깝다면, 복수를 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있나 보군.”
망령은 누아르의 태도가 애매한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유진을 찾는 목적을 정확하게 주장할 수는 없었다.
서로가 오해를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망령은, 누아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 그것을 누아르가 알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누아르도 망령이 유진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를 만나러 온 건가요?”
누아르는 여전히 망령과의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이곳에 있나 확인하러 왔을 뿐이다.”
“대답이 애매해. 확인해서, 뭐? 만나러 갈 거예요?”
조금 강압적으로 굴어볼까. 누아르는 천천히 마력을 풀어냈다. ㅡ쿠구궁! 한순간에 퍼져 나간 마력이 공간을 압박했다. 하지만 망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누아르를 응시했다.
‘누아르 제벨라는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여러 번 호의를 드러냈다.’
이 도시에서 누아르와 유진에 관련 된 스캔들이 터진 것은 망령도 안다. 하지만, 망령이 아는 ‘하멜’은 누아르와 결코 가까이하지 않는 인간이다.
혹시 누아르의 환상의 마안에 포로가 되었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성녀와 함께 있기도 하고, 하멜의 정신력이 환상의 마안에 무너질 것이란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저 갈X에게는 내가 유진의 적으로 여겨지나. 그래서 적의를 드러내는 건가?’
망령은 누아르와 충돌할 생각은 없었다. 아멜리아 머윈과 마찬가지로, 저 갈X를 죽일 ‘자격’이 있는 것은 하멜이다. 망령이 이 도시에 온 것은ㅡ 아까도 말했듯이, 유진이 아직 이 도시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가까이서, 직접, 마주 서서,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멀리서라도 봐두고 싶었다.
“…….”
누아르의 태도로 보건대, 유진은 아직 제벨라 시티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되었다. 망령은 더 이상 누아르에게 말을 걸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야?”
시선을 거두지도 않았는데, 망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야? 누아르는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도시 전역을 시야에 두고서 망령을 찾았다.
찾을 수 없었다.
망령은 제벨라 시티에서 사라졌다.
빌어먹을 환생 448화
마왕성 바벨.
망령은 그곳에서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했다. 죽음을 바랐지만, 그조차도 얻지 못했다.
유폐의 마왕이 말했듯, 마왕은 신이 아니다.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기보다는 비웃음과 조롱을 주는 존재가 마왕이다.
절망의 경계에 섰다.
바벨에서 추방되는 순간도, 추방된 후에도, 망령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답을 구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죽고 싶다 생각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된다.
-죽음을 바라는 것 아니었나?
허무한 죽음은 싫다.
-너는 모순덩어리로군.
유폐의 마왕이 속삭이던 말. 망령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답을 몰라서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너무나 잘 알아서, 대답할 수가 없던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망령이 자신의 모순점을 잘 알았다. 그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자살은 거부한다. 허무한 죽음이 싫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그런 죽음을 바란다. 무가치하고 비참한, 그런 죽음은 싫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욕심이 많고 뻔뻔하지만, 망령은, 진심으로 그런 죽음을 바랐다.
‘하멜처럼?’
동화책에서는 우둔하다며 비웃음을 당하지만, 하멜의 최후는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매번 동료들과 다툼을 벌이던 하멜. 우둔한 하멜. 난폭한 하멜. 하지만 하멜은 동료들을 사랑했어요. 상처투성이가 된 하멜은 도망치기는커녕 동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하멜의 죽음은 동료들의 배신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멜은 동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최후의 순간. 하멜은 사랑하는 동료들의 품 안에서 솔직하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했습니다. 세냐, 난 너를 좋아했어.]
정말로 그랬나? 망령에게는 하멜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죽는 순간의 기억은 아멜리아 머윈에게 조작당한 것. 기억의 조작과 누락이 클수록 하멜다운 자아 형성이 불완전할 테니, 그 이전, 적어도 바벨에 오르기 전까지의 기억은 진실로 하멜의 기억일 것이다.
“…….”
하멜의 자아는 절대 아니라고, 내가 저런 유언을 남겼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멜의 기억을 떠올리며 망령 본인이 판단하기를…….
처참하게 망해가는 세상, 동료애, 싸움이 끊이질 않는 매일 등 여러 요인 때문에 감정을 의식하거나 드러낼 수 없었을 뿐. 하멜이 세냐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는 했던 것 같다.
먼, 기억을 떠올려 보면…… 세냐의 언동에도 묘한 점이 꽤 많았다. 특별한 감정을 품고 숨겼던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니스, 날 위해 기도해 줘.]
저 유언 자체는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기억 속의 아니스는 간혹 서늘한 피를 가진 뱀처럼 냉혹했지만, 성직자 중 그 누구보다 구원을 추구하고 갈망했다. 하멜이 아니라 다른 이가 곁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니스는 진심으로 기도했었다.
[모론. 넌 누구보다 용감한 전사야.]
등신짓과 용감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망령이 생각하기에도 모론은 용감했지만 등신 같은 면모가 적지는 않았다.
[베르무트. 반드시 마왕을 물리쳐 줘.]
사슬에 묶여 의자에 앉은 베르무트의 모습을 기억에서 지웠다. 피가 되고 뼈가 되고 살이 된 멸망의 마력도. 그것을 허락한 것이 베르무트란 것도, 지웠다.
틀림없는 것은,
하멜은 최후의 최후에도 마왕을 죽이는 것을 바랐다.
“나도 그런가.”
망령은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렸다.
답을 구하기 위해, 죽기 위해. 그런 주제에 필사적으로 유폐의 마왕과 싸웠다. 하지만 닿지는 못했다. 이 힘. 멸망의 마력으로는 유폐의 마왕을 죽일 수 없다.
그렇다면 내 존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베르무트는 무엇을 바라고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이렇게 살아 있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바벨에서 추방되고서 한동안 망령은 그런 고민에 빠졌다. 하멜의 기억을 다시 보았고, 하멜이 아닌 ‘나’로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질투, 선망, 욕심, 그런 종류의 감정들을 절감했다.
다른 종류의 확인과 실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누아르 제벨라를 만났다. 대면한 순간에 느낀 감정은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망령은 누아르에게 적의와 살의를 가지고 있다. 그 부정적인 감정은 하멜의 것이다.
망령은 그 감정들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누아르와 마주 섰을 때의 망령은 하멜이었다.
‘이번에는 어떨까.’
울렁거리는 가슴을 무시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뿌연 빛깔의 하늘이 낮게 보였다. 보이지 않는 구멍이라도 뚫린 것인가 싶을 정도로 눈은 쉬지 않고 펑펑 쏟아지고 있다.
북방 루하르 왕국.
헬무드의 제벨라 시티와는 한참 떨어진 곳. 워프 게이트를 쓴다고 해도 망령만큼이나 순식간에 이곳에 도착할 수는 없다. 심지어 지금 망령이 선 곳은 워프게이트도 없는 루하르의 최북단, 세상의 끝을 가로막은 산맥. 레헤인야르다.
까마득한 거리를 도약하는 재주. 처음 썼을 때는 잘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다. 정확한 좌표를 지정해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북쪽, 레헤인야르, 이 넓은 지역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다.
“용감한 모론.”
이 어딘가에 모론이 있다. 그 사실이 망령에게 두려운 기대감을 주었다. 떨리는 호흡이 하얗게 얼어붙어 흩어졌다. 망령은 로브의 후드를 눌러썼다.
레헤인야르는 넓다.
이 넓은 산맥에서 인간 한 명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턱대고 떠돌며 찾는다면 몇 달은커녕 몇 년도 부족할 것이다.
작정하고 끌어낼 방법은 있다. 이 산맥에 정말로 모론이 있다면, 망령이 살짝 날뛰기만 해도 모론이 나타날 것이다.
그가 정말로 하멜이 기억하는 용감한, 아니, 등신 같은 모론이라면. 제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곳에서 ‘마력’이 날뛴다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꾀어낼 필요도 없나.”
망령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거대한 산맥, 그중에서도 대망치 협곡의 위쪽에서 ‘익숙한’ 마력을 감지하는 것은 멸망의 화신인 망령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 걸음 걸었을 때. 망령이 선 장소가 바뀌었다. 망령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그러하듯,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다. 그는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서 천천히 걸었다.
우우우……
아까의 장소는 눈이 펑펑 내릴 뿐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눈보라가 거세다. 매몰찬 눈바람에서 망령은 썩은 고기와 피 특유의 불쾌한 악취를 맡았다. 아니, 망령에게 그 냄새는 악취가 아니었다.
편안하고 아늑한. 익숙한. 친근하고 반가운. 그리운.
“하하.”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가 없는 자각. 망령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악취 아닌 악취에는 멸망의 마력이 녹아 있다. 망령은 바람이 후드를 벗기지 못하도록 붙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멀고 높은 곳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건, 거대한 괴물의 머리였다. 썩둑 잘린 머리. 검보라 피를 뿌리는 머리가 망령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짧은 순간. 망령은 저 괴물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먼 기억 속의 모론이 들려주었던 이야기. 그의 고향, 바야르 부족의 전설. 세상의 끝에서 넘어온다는 누르.
“그런가.”
저 괴물은 누르다. 라비스타에 있는 알피에로 같은 마족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진짜’라고 할 수 있을 멸망의 권속이다. 망령은 잘린 누르의 머리에서 느낀 친밀감을 혐오했다.
콰앙!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누르의 머리가 망령의 뒤편에 처박혔다. 지면에서부터 폭탄이 터진 것처럼 눈이 치솟고 땅이 뒤흔들렸지만, 망령은 여전히 똑같은 자리에 우뚝 서서 흔들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망령은 여전히 고개를 들어서 먼 하늘을 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서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느끼는 감정 중 어느 쪽에 따라야 하는 것일까.
ㅡ꽈아아앙!
일대의 눈이 순식간에 증발해서 안개가 되었다. 뿌연 안개의 한복판에서 망령의 시선은 살짝 낮아졌다.
루하르 왕국을 건국한 자. 백 년 넘도록 이 산에 은둔한 자. 괴물의 목을 자르고 던져 버린 자.
용감한.
등신 같은 모론이 망령의 조금 앞에 섰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망령을 내려다보았다. 망령은 저 눈동자가 무엇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주목했다.
커다란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 새겨진 감정은 당황과 의문.
어떤 표정을 짓고서 맞이해야 하냐고? 느끼는 감정 중 어느 쪽을 따라야 하냐고? 어리석고 오만한, 자기중심적인 데다 욕심 많은 고민이다. 감정을 선택하는 것은 망령이 아니다. 망령은 씁쓸히 웃으며 눌러 쓴 후드를 놓았다.
눈보라가 후드를 뒤로 넘겼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흉터 하나 없는 ‘하멜’이 모론을 보았다.
이미 크게 뜨고 있던 모론의 눈동자가 떨렸다. 높이 솟은 눈썹이 씰룩거리다 미간이 일그러졌다. 수염이 푸들푸들 떨리고, 모론이 입을 열었다.
“감히.”
눈동자를 채웠던 당황과 의문의 감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금의 모론은, 망령의 기억 속에 있는 ‘모론 루하르’와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었다. 망령은 저만큼이나 분노와 적의, 증오, 살의를 드러내는 모론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모론은 망령에게 낯선 감정을 주었다. 낯설다고? 응당 당연한 감정이라고도 생각했다. 모론에게는 저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다.
“감히.”
모론뿐만 아니다. 세냐도, 유진 라이언하트도, 똑같을 것이다. 망령이 두려워했던 대로 되었다. ‘나’의 것이 아닌 기억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피했다. 유폐의 마왕에게 죽기를 바랐다.
그런 것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이제야 망령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에 근접했다.
“감히!”
모론의 분노, 적의, 증오, 살의, 저 모든 감정이. 모론의 일그러진 얼굴이, 시선이, 외침이, 망령이 누구인지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내 앞에 왔는가!”
모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꽈르르르릉! 그저 큰 소리로, 감정을 담아 외쳤을 뿐인데, 설원이 증발해서 태어난 안개가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날아갔다. 쩌렁쩌렁한 외침은 안개만 날려 버렸을 뿐만 아니라 공간을 통째로 흔들었다.
망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떠한 답을 찾아 모론의 앞에 온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망령은, 자신의 구도가 끔찍하게도 이기적이었단 것을 자각했다.
모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300년 전 죽은 동료의 시체가 언데드가 된 것을 직접 목격한 상황이다. 다른 의문을 외치지 않는 것을 보건대, 모론은 이미 유진에게서 데스나이트에 대해 들은 것 같았다.
그렇기에 모론의 행동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망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활짝 펴진 손은 망령에게 다가오는 중에 손가락이 쥐어졌다.
그것뿐인데도 ‘붙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모론은 허공을 움켜쥐는 것만으로 공간을 말아쥐었다. 말려 들어가는 만큼 거리는 소멸하고, 저릿한 압박감이 망령의 전신을 짓눌렀다.
대부분의 마족은 이것만으로 짓뭉개질 것이다. 하지만 망령은 대부분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다. 단순하고 무식한 힘만으로 만들어낸 초월. 그럴지라도 망령은 가볍게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나지 않았다. 망령은 여전히 똑같은 곳에 서서 모론을 보았다. 부릅뜬 눈동자에 넘실거리는 감정을 직시했다. 분노, 적의, 증오, 살의.
슬픔.
‘피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모론의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순간에 망령은 답을 내렸다.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꽈아앙!
레헤인야르 전체가 뒤흔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굉음. 감정에 충실히 주먹을 뻗었던 모론이 오히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쥐었을 때의 저항감도 저항감이지만, 뻗은 주먹이 도달하는 순간까지 확신이 없었다.
때린다. 맞춘다. 그런 종류의 확신이 없었단 말이다. 우스운 말이지만,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명 주먹을 뻗어서 맞췄는데…… 닿은 것 같지가 않다.
“…….”
이상한 기분이다. 닿은 것 같지 않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모론의 주먹에는 피가 묻어 있다. 일격으로 몸뚱이를 터트렸다. 망령에게 남은 것은 하반신이 고작이었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꽈득. 모론은 어금니를 씹으며 내뱉었다. 뒤로 넘어졌던 하반신이 몸을 일으켰다. 멀쩡히 되살아난 망령은 헛웃음을 흘리며 내뱉었다.
“피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안 될 것 같다고.”
모론의 난발이 뻣뻣하게 곤두섰다.
“이곳에 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가.”
“했지.”
망령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우롱하는가.”
치이이익……! 모론의 몸이 열기를 내뿜었다. 대면하고 대화할수록 감정이 주체 되지 않았다.
모론 루하르. 그는 먼 과거부터 동료들에게 등신이라는 놀림을 받곤 했다. 모론 본인이 그 놀림에 대해 불쾌해하고 항변했던 적은 없다. 그의 동료들, 함께 사선을 넘어 온 벗들은 모론을 등신이라 불러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저 존재는 그리 불러서는 안 된다. 세상 모두가 모론을 등신이라 부르고 등신이라 여길지라도 저 존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는 나를 아는가.”
모론이 내뱉었다.
“모론, 루하르.”
망령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모론은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아니. 너는 나를 모른다.”
공간을 뚫고 날아온 도끼가 모론의 손에 잡혔다.
빌어먹을 환생 449화
망령은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모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망령은 모론을 모른다. 저 이름을 알고, 모습을 알고, 기억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망령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망령이 아는 ‘모론 루하르’란, 결국 하멜의 기억에 의한 것이다. 모론 루하르는 하멜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인물이다.
반면에 지금 앞에 선 모론은 기억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저 남자는 기억 속의 모론처럼 등신같이 굴지 않는다.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지도 않는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우정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저 남자에게는 웃음이 아닌 분노가 있다. 신뢰 대신 증오가 있다. 우정 대신 살의가 있다. 모론에게 망령이 하멜이 아니듯, 망령에게 모론은 모론이 아니었다.
틀렸다.
저렇기에 모론은 모론인 것이다. 모론은, 망령이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진실을 알고 ‘나’와 대면한다면, 모론은 틀림없이 저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멜도.
수백 년이 지난 눈앞에, 대뜸 모론의 데스나이트가 나타난다면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모론은 결코 망령을 용납하지 않는다. 망령의 사정을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모론에게 있어서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망령은 씁쓸히 웃었다.
‘내가 애걸한다면 너는 잠시라도 들어주겠지.’
저토록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지만, 망령이 무릎이라도 꿇고 애걸한다면. 모론은 아주 잠시라도 공격을 멈출 것이다. 망령이 사정을 얘기한다면, 내가 가짜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고, 베르무트에게 존재를 허락받았다고 말한다면. 고민하며 망설일 것이다.
모론은 그런 놈이다.
‘그래야 하나?’
나는 하멜이 아니다. 하멜이 될 수 없다. 그 검증에 집착하는 것은 이제 와서는 우습다. 망령이 찾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다.
망령은 유폐의 마왕과 싸울 수 없다. 당연히 멸망의 마왕과도 싸울 수 없다. 그렇다면 누아르 제벨라와 싸워야 하나? 누아르 제벨라나 다른 마족과의 싸움에서 하멜을 도우라는 것이 베르무트의 뜻인가?
겨우 그것인가? 잡졸이나 다름없는 마족들과 싸우는 것이 내 존재 가치인가? 나는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망자여.”
고작 도끼를 잡은 것뿐인데 모론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망령은 강렬한 위압감을 느끼면서 모론을 응시했다.
“너는 하멜이 아니다.”
뻔하디뻔한 말. 부정할 수 없는 말.
“네가 나를 기만하러 온 것인지. 우롱하러 온 것인지는 모른다.”
터무니없는 힘이 도끼에 집중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마력이 일어난다. 저 도끼는 ‘맞아준다’의 규격을 한참 벗어나 있다.
“하지만 망자여. 네가 하멜의 얼굴을 하고, 하멜의 목소리를 내며, 나를 안다고 말한다면. 나는, 하멜의 벗으로서 분노할 수밖에 없다.”
망령은 큭큭 웃기만 했다. 저 말은 실로 모론답다. 저 웃음은 오히려 모론을 잠시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하멜에게 데스나이트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사막 지하무덤에 안치한 시체로 만든 데스나이트. 시체에 남은 기억을 모조리 읽어내고, 철저하게 기억에 맞춰 만들어낸 자아. 거기에 써먹기 쉽도록 기억까지 조작당했다.
‘베르무트를 위해 몸을 던진 것이 아닌, 모두에게 배신당해 죽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데스나이트는 세상을 증오한다. 과거 동료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증오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 추한 망자가 이곳에 홀로 온 이유는 모론도 납득할 수 있었다.
‘나를 죽이러 온 것일 텐데.’
동료에게 배신당해 죽었다고?
모론이 생각하기에도 믿을 가치라고는 없는 거짓이지만, 근본부터 거짓에서 태어난 존재라면 휘둘릴 수밖에 없을 터. 실제로 하멜은 망자에게서 동료에 대한 증오와 모멸을 듣고, 라이언하트에 대한 살의를 받았다고 했다.
까마득한 후손마저 죽이겠다고 발광하던 놈이, 직접적인 원수인 ‘모론 루하르’가 살아 있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복수하러 올 것이다. ……놈의 자아가 하멜과 닮았다면, 망자가 이곳에 온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그런 주제에.
먼저 살의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도 하멜답다.
베르무트의 후손에게는 분노할 수 있어도, 동료들을…… 실제로 맞닥뜨린다면, 아무리 증오하고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멜은 망설일 것이다. 검을 뽑고 덤벼들기 전에, 먼저 배신의 이유를 물을 것이다.
위화감.
모론은 이 위화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의문을 느꼈다. 덤비지 않는다는 점은 하멜답다. 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바로 진실을 쏘아주었다.
너는 하멜이 아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저것은 반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다.
“……설마.”
도끼에 집중되던 힘이 멈춘다. 존재 자체를 짓뭉갤 듯이 압박해 오던 존재감이 살짝 덜어졌다. 분노와 증오, 살의 범벅이던 눈동자에 놀람이 어렸다.
“깨달은…….”
싫다.
이 움직임은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솔직하고 본성적인.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 것과 같았다.
망령은 모론이 진실을 아는 것이 싫었다. 깨달은 진실을 의식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목도하여 나를 평가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일방적인 증오와 살의가 연민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싫었다.
그래.
연민 받고 싶지 않다. 몇 수 접혀서 이해받고 싶지 않다. 본성적으로 뛰어든 망령은 순식간에 모론의 앞까지 도달했다.
모론은, 망령에게서 내뿜은 마력을 느꼈다. 그것이 모론을 경악시켰다.
‘왜 이제야 알았지?’
저 기괴한 존재에게서 여태까지 마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하멜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여 마력의 부재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지금 순간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을 만큼 거대한 마력을 내뿜는다. 심지어 저 불길한 마력은ㅡ
“놈!”
모론에게서 당황과 망설임이 사라졌다.
저 불길한 멸망의 마력. 수백 년 동안 죽여온 모든 누르를 합해도 부족할 것만 같은, 이성을 뒤흔들고 망가뜨리는 광기.
저것이 ‘가짜’라 불렸음에도 발작하지 않은 것. 아마, 지금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이 모론을 아주 잠깐 머뭇거리게 만들었지만.
저것이 마력을 내뿜고 덤벼오는 지금. 모론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저것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모론은 망령을 그렇게 정의했다. 저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망가트릴 것이다. 특히 이곳, 베르무트가 경고했던 ‘끝’과 인접한 레헤인야르에서 저 존재는 다른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꽈아아앙! 모론의 도끼와 망령의 검이 부딪쳤다. 단 한 번 충돌했을 뿐인데, 모론은ㅡ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낸,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감정 중 하나를 절감했다.
다리가 많고 징그럽게 생긴 벌레. 꾸물거리는 쥐새끼 같은. 썩어가는 시체나…… 그런 종류의 것에 느끼는 혐오감. 공격과 공격이 부딪친 것에 대한 충격보다, 몰아치는 마력에 대한 혐오감에 소름이 돋았다.
또, 혐오에서 다른 감정이 적셔왔다. 공포. 덥수룩한 수염 안쪽에서 모론은 뿌득 어금니를 씹었다.
저 마력은…… 누르에게서 느끼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도, 300년 전 멸망의 마왕이 떠올랐다.
“으음……!”
꽉 다문 이빨 사이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 검은 모론의 도끼와 정면에서의 힘 대결을 성립했고, 끝없이 쏟아지는 마력은 모론의 마나를 밀어냈다.
감히.
꽈지지직! 기어코 전진한 도끼가 마력의 검을 박살 냈다. 그대로 도끼가 망령의 몸을 가르는가 싶었지만, 그러기 전에 망령이 훌쩍 뒤로 뛰어올랐다.
모론은 도끼를 계속해서 휘두르는 대신에 발로 땅을 짓밟았다. 쿠우웅! 거대한 굉음과 함께 모론의 주변이 폭발했다.
모론이 양손으로 도끼를 쥐었다. 퍼져 나간 힘이 도끼에 집중되었다. 높은 하늘에 선 망령도 양손을 들었다. 모론의 도끼만큼은 아니지만,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는 너무 큰 검 한 쌍이 망령의 손에 쥐어졌다.
아래로 떨어진 망령이 먼저 공격을 퍼부었다. 어지러운 난격. 모론의 밝은 눈으로도 모든 참격을 읽어내고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당초 모론은 공격 하나, 하나를 전부 다 받아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지럽게 얽히는 난무의 중심을 도끼가 갈랐다.
콰르르르! 마력과 마나가 뒤섞이고 모론은 숨을 삼켰다.
‘가짜일지라도……’
한 번 갈랐음에도 난무는 끝나지 않는다. 참격과 참격이 이어지면서 사방을 압박해 온다. 그 검무는, 모론이 기억하는 하멜의 과거보다 훨씬 진보해 있었다.
동시에 지금의 유진과 닮았기도 했다. 그 사실이 모론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난 반년 넘는 시간 동안, 유진과 매일 몇 번씩이나 대련해 왔다. 덕분에 망령의 공격은 모론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다는 것. 그 사실이 모론에게 섬뜩함을 주었다. 망령의 검은 유진의 검과 다르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하멜에게서 시작된 다른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우위인가? 고민 없이 대답할 수 있다. 유진의 검이 더 우위에 있다.
그럴 수밖에. 떠나기 전에 보았던 유진의 검은, 다양한 것이 섞이며 완성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순수하게 하멜만의 것이 아니라, 전쟁신 아가로트와 환생한 유진 라이언하트의 경험이 더해지고, 모론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사선을 넘어가며 벼려낸 검이다.
망령의 검은 유진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질척하다. 제 살을 깎아낼지라도 상대의 목숨을 끊겠다는, 무조건 상대를 죽이고 말겠다는 증오와 살의로 벼려낸 살검이다.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저 검은 하멜다웠다. 하멜이 철저하고 처절하게 검에 매진한다면 저런 형태가 될 것 같았다.
만약 모론이 유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지금의 망령을, 설령 그가 가짜인 것을 아는 상황일지라도.
‘흔들렸을 거다.’
살의로 벼린 검은 지독하고 집요했다. 짧은 시간 동안 수천 번의 참격을 분쇄했다. 하지만 치명상은 주지 못했다. 애초에 저 존재에게 치명상이랄 것은 존재하지 않을 듯싶었다.
힘에서 밀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대치하고 공격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이쪽이 깎여 나가는 것만 같다. 아니, 깎여 나가고 있다.
누르를 죽여온 100년 넘는 시간이 모론의 정신력을 마모시켰듯, 망령과 대치하는 모든 순간이 그러했다.
“가짜.”
모론은 끓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치하는 것만으로 이쪽이 깎이고 오염되어 미쳐간다고? 그럴지라도 모론은 물러서지 않는다. 혼자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저것에 의해 미쳐 버린다면. 이전처럼 혼자 결계를 방황하고, 누르의 시체를 뜯고, 땅에 머리를 처박으며 죽지 못해 살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유진이, 세냐가, 아니스가,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설령 그런 믿음이 없을지라도 모론은 물러서지 않는다. 미쳐 버리는 것이 두려웠다면 진즉에 베르무트의 부탁 따위는 저버렸을 것이다.
‘가짜.’
몇 번째 저 말을 들었나.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들을 때마다 가슴이 후벼 파이는 기분이다. 망령은 답하지 않고 검을 움직였다.
과연 모론이다. 놈의 힘과 도끼는 기억하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져 있다. 만약, 만약…… 언데드가 된 직후에 만났다면, 싸움은 성립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웃기는군.’
이만큼이나 격차가 나는데. 언젠가 모론을 만나서 복수하겠다고 날뛰었다니. 망령은 쓴웃음을 삼키며 몸을 비틀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도끼. 분명 피했는데도 존재가 뜯겨 나가고 있다.
‘네게 죽으면 편할까.’
그런 생각을 한순간에.
모론의 도끼가 멈췄다. 대처하던 망령의 검도 동시에 멈췄다. 무기를 완전히 거준 것은 아니지만, 망령과 모론은 공격을 멈추고 서로를 응시했다.
“……너는 가짜다. 하멜이 아니다.”
“…….”
“하지만.”
모론은, 당장 느끼는 감정부터 인정하기로 했다.
“네 검은 하멜답다.”
“……뭐?”
“네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네가 내 앞에 온 것 자체만으로, 너는 나와…… 내 벗을 모욕한 것이니.”
모론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 모론 루하르는, 한 명의 전사다. 네 검이…… 처절하게 단련해낸 것임은 느끼고 있다. 잠시뿐이지만 직접 싸워보았기에, 알 수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망령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동요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론이 말을 이었다.
“네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다. 듣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나는, 전사이기에. 이것은 인정해 두고 싶다.”
모론은 아주 잠깐 도끼를 내려놓았다.
“나 모론 루하르는, 너를 한 명의 전사로 인정하겠다.”
상대가 하멜이건 가짜건, 인간이건 괴물이건 중요치 않다. 무기를 쥐고 단련하고 추구하고 싸움에 섰다면 전사다.
모론의 눈에 망령은 전사였다.
“하하…….”
망령은 자신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은 실로 모론다웠다. 모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지금 저렇게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날…… 죽이고 싶냐?”
대답이 뻔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과연 모론의 대답은 뻔하고 단순했다. 모론에게는 망령을 죽일 자격이 있다. 직접 말한 것처럼 망령이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모론을 모욕한 것이다. 모론은, 하멜의 벗으로서 망령을 죽일 자격이 있다.
방금 전의 망령이라면 모론에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망령이 추구하던 것.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 그 의문에 모론은 조금의 답을 주었다.
모론은, 저 용감한 모론은, 망령을 전사라고 말해주었다.
“아니.”
모론은 개인의 분노나 다른 감정을 떠나, 망령을 직시하고 인정해 주었다.
가짜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많고, 망집에 얽매여 있다. 내 존재의 가치를 바라면서도 모론에게 죽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고집이 나를 죽이는 것에 끝나지 않고, 모론조차도 병들어 썩게 만든다는 것은 외면했다.
주변을 보라.
전투는 길지 않았지만 처음과 비교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 일대에 쌓인 눈은 모조리 증발했다. 더 이상 하늘에는 눈도 내리지 않는다. 눈구름으로 뿌옇던 하늘은 이제는 다른 것으로 회색이 되었다.
피.
망령은, 이 몸뚱이에서 뿌려졌던 피를 보았다. 당연스레 의식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피가 낭자했다.
모론의 도끼에 스치고 몸뚱이가 뜯길 때마다 쏟았던 피. 유폐의 마왕 어전에서는 신경 쓰지도, 쓸 필요도 없었지만ㅡ 이곳에서는 다르다.
피가 사라지지 않는다. 피 자체를 회수해도, 땅에 스며든 불길함 자체는 그대로 고여 있다.
모론을 보았다. 그 강인한 몸뚱이에도 상처는 있다. 단순한 상처가 아니다. 마력의 칼날에 베이고 오염된 상처.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모론의 호흡은 거칠고, 눈동자에는 어둠이 아른거리고 있다.
“네게 죽어서는 안 되겠어.”
특히 이곳에서는 안 된다. 망령은 고개를 돌려 먼 산봉우리를 보았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라구르야란이겠지.
“……만나서 반가웠다.”
모론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망령이 먼저 검을 놓고 눈을 감았다.
감았던 눈을 뜨고 하늘을 보았다.
높은 하늘을 떠다니는 부유역들이 보였다.
빌어먹을 환생 450화
“썩을 년!”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온 세냐가 내지른 외침에 모두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 모두가 어지간한 왕국 하나는 쥐고 흔들 수 있는 대마법사들이지만, 그 권위는 이 자리에서는 아무 상관도 없다.
왕립 도서관 아크리온의 최상층, 세냐의 전당. 마법의 여신을 목표로 삼은 역사상 최고이자 최강의 마법사, 현명한 세냐. 그녀가 존재하고 지배하는 이곳에서는 8서클 대마법사가 평범하고 당연하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의 여신을 목표로 하신 분이 썩을 년이라는 욕은 너무하지 않은가…….’
세냐가 대화를 나누고 온 상대가 누구인지는 안다.
유진 라이언하트. 지금 시대에서 세냐의 적전제자인 인물. 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대마법사를 목전에 둔, 아니, 사실상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할 수 있는, 심지어 용사이기까지 한 청년.
솔직히 이곳의 대마법사들 누구일지라도, 저만큼이나 재능 넘치고 잘난 젊은이가 제자라면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피를 이은 친자식보다 소중히 대하면서 사랑을 쏟을 것이다.
그렇기에 세냐가 제자를 아끼고 집착하는 것은 크게 이상하다고 할 문제는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금은 과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는 마법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 마음속에만 담고 있을 뿐 직접 거론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무엇이 언짢으십니까?”
다들 세냐의 눈치를 보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말을 건 이가 있었으니, 바로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였다. 그는 흑마법사이면서도 세냐에게 마법사로 인정받고, 사담을 나누는 중에는 이곳에 착석해도 될 것을 허락받은 유일한 마법사였다.
저 후하고도 애매한 조건 덕에 발자크는 항상 바쁘게 돌아다녀야만 했다.
세냐의 새로운 시그니처에 관한 토의를 나눌 때면, 발자크는 몇 층 아래의 다른 전당에서 지낸다. 오늘의 토의가 끝나고, 마법사로서 사담과 교류를 나누기 시작할 즈음에는 후다닥 세냐의 전당에 올라온다.
꼭 참석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발자크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마법사 중에서 저 조건에서 움직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층을 오르고 내리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저 현명한 세냐와 한 자리에서 마법에 관해 대화하고 교류할 기회를 놓친다? 그런 놈은 마법사의 자격이 없다.
“내 사랑스러운 제자랑 얘기하는 중인데, 어느 미친년이 끼어들어서 대화가 끊겼잖아!”
상석에 털썩 앉은 세냐가 내뱉었다. 다른 대마법사들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발자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의 광기는 헬무드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작위의 권위와 힘이 두려워서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이지요.”
“그치?”
“예. 세냐 님, 그거 아십니까? 수도 판데모니엄의 중심, 마왕성 바벨. 그곳의 초대형 스크린이 있습니다. 제벨라 공작은 자신이 헬무드 최고의 납세자라는 것을 이용해서 가비드 공작을 압박했고, 결국 초대형 스크린에 매달 한 번씩 자신의 광고가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미친 짓을……!”
“하하, 정말로 미친 짓이죠. 제가 헬무드에 유학할 때 그 스크린의 광고가 정말 보기 괴로웠습니다. 언제였던가, 제벨라 공작이 망측한 수영복을 입고 나온 적도 있는데…….”
발자크와 누아르는 적대하는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발자크는 오랫동안 누아르의 후원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 자리에 누아르가 있거나, 대화가 발설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발자크도 말을 조심할 것이다.
이곳에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일. 한참 시간을 들여 누아르를 씹어대던 발자크는, 세냐가 더할 나위 없을 만큼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한 마디 덧붙였다.
“이건 제벨라 공작에게는 비밀입니다, 세냐 님.”
“응? 아항,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발자크. 내가 너한테 문제 될 일을 할 것 같아?”
“감사합니다, 세냐 님.”
세냐는 방긋방긋 웃었고, 발자크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300년이란 시간 동안 세냐에게 이 정도나 대우받는 흑마법사는 발자크가 유일할 것이다.
발자크가 비위를 잘 맞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발자크는 결국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지금 허락된 것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외줄을 타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데. 쿡쿡 찔러오는 노골적인 시선에 발자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멜키스 엘하이어. 두 눈에 쌍심지를 켠 그녀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대마법사들은 발자크에게 질투 따위 감정을 품지 않는데, 저 인격적으로 돼먹지 못한 여자만이 질투를 불태우곤 했다…….
“음.”
세냐가 구상한 술식을 한참 동안 살피던 로베리안이 침음을 흘렸다.
이 술식을 보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다른 길을 걷는 마법사로서 의견 정도는 적을 수 있다. 로베리안은 몇 마디의 글줄과 술식을 바깥에 추가한 뒤에 창밖을 보았다.
“벌써 해가 저물었군요. 오늘도 이쯤 하십니까?”
심야를 넘어 새벽, 동이 터올 때까지 논쟁할 때도 잦지만. 오늘처럼 한적할 때는 해가 저문 저녁 즈음에 교류회를 마치곤 한다.
“응.”
세냐도 창밖을 힐긋 보고서 대답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멜키스가 옆에 바짝 붙어왔다.
“언니, 언니! 저랑 같이 밥 먹어요, 네?”
“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
“저랑, 저랑 둘이서 먹는 것이 싫어요? 그럼 쟤도 부를게요, 쟤, 이름이…….”
어디 시골구석에 은거하다가 나왔다더니, 촌티를 벗지 못해 머리털이 수북하고 지저분해 음침해 보이는 마법사. 이름이 뭐였더라?
“라이나인 보어스입니다.”
멜키스의 열렬한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 라이나인이 이름을 밝혔다. 이름을 들은 즉시 멜키스는 세냐의 팔을 열심히 흔들었다.
“그래요, 라이나인! 저랑 언니, 라이나인! 우리 셋이서 같이 밥 먹어요. 네?”
“내가 너랑 라이나인이랑 밥을 왜 먹냐니까?”
“우리 같은 성별이란 공통점이 있잖아요?! 여기 곰팡내 쉰내 나는 늙은 남자 마법사들과는 나누지 못할 상큼한 이야기! 언니는 그런 것 관심 없어요? 네?”
곰팡내 쉰내는 너무하지 않은가. 내심 뜨끔한 제네릭과 트렘펠이 괜스레 자기 체취를 킁킁 맡았다.
“관심 없어.”
거짓말이다. 아주 살짝 관심이 있다.
파릇파릇한 젊은 시절을 마경에서 마물과 마족과 마왕을 죽이는 데 바치고, 그 뒤에 찾아온 제2의 삶은 마법에 바쳤다. 그런 세냐에게 있어서 동성끼리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상큼한 이야기란 제법 동경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상대가 중요하지 않은가? 세냐는 얇게 뜬 눈으로 멜키스와 라이나인을 보았다.
한쪽은 일평생 골방에 틀어박혀 연구에 매진한 은둔자. 그리고 다른 한쪽은 상큼함과는 아득하게 거리가 이는 광인. 게다가 둘의 나이는…….
“으흠.”
나이가 무어가 중요한가? 세냐는 즉시 생각을 바꾸었다.
어쨌든, 자란 환경이나 성격 같은 것을 종합했을 때, 저 둘은 세냐의 동경을 이뤄 줄 수가 없었다. 굳이 그런 상대를 찾자면…….
‘크리스티나는 안 돼.’
아니스의 존재를 떠나서, 크리스티나 본인의 성격도 음습하고 음험하며 뱀 같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아니스를 넘어섰다.
‘시엘…….’
그 아이가 과연 상큼하다고 할 수 있나? 눈물 콧물 흘리며 울던 모습은 상큼보다는 시큼에 가깝지 않았나.
그래도 굳이 골라야 한다면 멜키스나 라이나인보다는 크리스티나를, 크리스티나보다는 시엘이기는 했다.
“밥은 너희 둘이서 먹든가 해. 난 오늘 바빠.”
“거짓말!”
“거짓말은 뭐가 거짓말이야? 나 진짜로 바빠. 오늘 볼 일도 있어.”
“외람되오나, 세냐 님의 오늘 일정은 없으신 것으로 압니다만…… 올해의 젊은 마법사 상에 관련한 약속은 내일 정오가 아니었는지요.”
라이나인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쟤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세냐는 섬뜩함을 느끼며 눈을 흘겼고, 라이나인은 즉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른 볼일이야.”
“언니, 혹시 남자 만나요?”
“어허!”
세냐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로베리안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는 책상을 쾅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백탑주! 말조심하십시오!”
“말조심은 뭔 말조심…… 남자 만나냐고 묻는 게 뭐 이상한 질문도 아니고…….”
“이상한 질문입니다! 세냐 님이 다른 남자를 만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로베리안은 유진 라이언하트가 우둔한 하멜의 환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둘에게 직접 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정황을 보건대 틀림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사실은 대마법사들 중에서는 로베리안만이 알고 있다…….
300년이란 긴 시간을 지나 이뤄진 영웅들의 사랑. 세상 모두에게 알리고 떠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참아야 한다.
하지만 저 광인이 영웅들의 사랑을 짓밟고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로베리안이 왜 저리도 진심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인지, 멜키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난 진짜 볼일 있으니까 먼저 간다.”
“언니! 어떤 남자…….”
“백탑주!”
멜키스가 질척하게 달라붙었고, 로베리안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과연 정신은 육체를 따르는가? 실제 나이는 손주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들이, 힘이 넘치는 젊은 육체를 가진 것만으로 나이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 청탑주 히리두스는 이것이 마법적으로도 흥미로운 논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8서클에 도달하여 육체가 재구성되며, 뇌까지 새로워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정신연령이 퇴화, 아니, 회춘하는가?’
이곳만 해도 그렇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대마법사가 된 마이스와 헤링턴은 다른 대마법사들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어색해하고 있다.
증명하기 위해서는 보다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추측이 사실이라면…… 대마법사가 된 지 오래된 자일수록 나잇값을 못하는 것도 설명되지 않는가?
떠드는 소리를 무시하고 전당에서 내려와, 아크리온 밖으로 나왔다. 볼일이 있다는 말. 거짓말이 아니다.
조만간 유진이 전쟁을 위해 돌아올 것이다.
‘사실 전쟁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아니잖아.’
여러 국가가 전쟁을 위한 병력을 차출하고 있는 것은 안다. 이번 기회에 대륙에 눈도장을 찍고 싶은 걸까? 아니면 잘난 아들이 전쟁을 통해 개안하기를 바라나.
아롯의 늙은 왕은 왕세자 호네인 아브람을 국왕대리로서 파견할 것이다. 그리고 트렘펠이 이끄는 마법병단의 정예가 유진을 지원할 것이다.
아롯뿐만 아니다. 키옐에서는 알체스터 드라고닉과 백룡기사단, 라이언하트의 정예가 출정한다. 루하르에서는 국왕이 직접 하얀 송곳니를 이끌고 온다. 루하르에서는 크루세이더와 혈십자기사단이, 시무인에서는 퍼스트와 격랑기사단이 온다.
이쯤 와서는 명분이란 것도 필요 없다. 솔직히 세냐가 생각하기에, 저렇게 병력을 집중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국가 하나를 멸망시키는 것은 군대로도 할 수 있지만, 세냐 혼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하마를 내버려 두고, 흑마법사만 족치는 것이라면 우리끼리도 할 수 있지.’
유진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이런 거창한 방법을 따르는 것은ㅡ 나하마에서 흑마법사를, 아멜리아 머윈을, 아주 공개적으로 처참하게 족치는 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삼고 싶어서다.
즉, ‘사악한 흑마법사’ 아멜리아 머윈과, 그녀의 사주를 받은 나하마는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떨치기 위한 제물인 것이다. 동시에 이 전쟁 자체가 대륙과 헬무드에 대한 선전이기도 하다.
‘마왕을 죽인 것보다 파장은 덜하겠지만, 그래도 유진의 신앙은 확실하게 오르겠지.’
아니, 어쩌면 마왕ㅡ 아이리스를 죽인 것보다 파장이 클 수도 있다.
결국 저번의 마왕 토벌은 머나먼 바다에서 이뤄진 것이고, 토벌에 함께 한 산증인은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를 죽이는 것이 정말로 그럴싸한 전쟁의 형태가 된다면, 먼바다에서 마왕을 죽인 것보다 더 큰 파장이 퍼질지도 모른다.
나하마에서의 전쟁 문제도 중요하겠지만, 세냐에게는 오늘의 볼 일이 더 중요했다. 이건 멜키스의 헛소리처럼 남자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머잖아 유진이 돌아올 것이다.
솔직히 세냐는 다가올 전쟁의 준비보다는, 돌아온 유진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지가 더 중요했다. 기왕이면 유진이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을 주고 싶다. 특히나 이번 재회는 아주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반년 넘도록 유진과 떨어져 지냈다. 그 시간 동안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 유진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물론 메르도 있고, 라이미르아도 있고, 모론도 있었으니…… 저 쌍두독사가 엉큼하고 짐승 같은 짓은 하지 못했으리라 믿는다.
그래도,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게다가 최근 한 달은 제벨라 시티에 있었다.
오늘은 다 같이 수영장에 갔단다. 수영장에서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수영복을 입었겠지. 그 상황에서 갈X의 여왕이 난입했다.
‘저번에도.’
제벨라 파크에서 시작해 헬무드를 뜨겁게 달군 스캔들은 대륙에까지 퍼졌다. 스캔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수습된 배후에는 라이언하트와 황제, 교황, 그리고 세냐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스캔들이 있던 것은 사실이고, 세냐도 찍힌 사진은 보았다.
반지.
“꽈득.”
세냐도 아직 유진에게서 반지를 받은 적이 없다. 그녀가 받은 것은 망토뿐이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목걸이도 받고 이런저런 옷을 선물 받았다. 하지만 세냐는 망토뿐이다.
‘……아냐. 옷도 받았던가?’
그게 뭐 중요한가? 정말 중요한 것은, 세냐도 크리스티나도 아니스도 반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인데.
일부러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생각해 버렸다. 세냐는 솟구치는 살의를 간신히 억눌렀다. 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중인 그녀가 살의를 내뿜는다면, 광장의 평범한 사람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다.
“으흠.”
세냐는 호흡을 고르고서 걸었다.
그녀의 명성을 생각하면, 이런 장소에서는 마음대로 걷는 것도 힘들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아니, 숨을 쉴 때마다 열성적인 추종자들이 들러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냐는 평소에 인식저해 마법을 두르고 있다. 외모를 바꾸는 것은 귀찮고 불편하니, 아예 다른 사람이 이쪽을 인식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마법을 부여한 것이다.
물론 세냐는 추종자들의 관심을 즐긴다. 추종자가 아닌 관광객, 혹은 평범한 사람이 쭈뼛거리며 다가오고 싶어 하는 것을 보는 것도 즐겁다.
하지만. 이럴 때는 그 관심을 즐길 수 없다.
세냐는 오늘 유진을 맞이할 때 입을 옷을 살 것이다. 마주친 순간 지난 반년의 기억을 증발시킬 만큼, 그래, 마법의 여신처럼 아름답고 성스러운, 자신도 모르게 반지를 꺼낼 수밖에 없는 옷을 입어야 한다.
‘혹시 모르니 반지도 사놔야겠어.’
먼 옛날 그러했듯, 세냐는 이미 머릿속에서 유진과 반지를 교환하고 세상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까지 올렸다.
어떤 반지를 골라야 할까? 기왕이면 화려한 것이 좋은데. 세냐는 가슴의 설렘을 느끼며 광장을 가로질렀다.
그 현명한 세냐가 직접 쓴 인식저해 마법. 대마법사일지라도 간파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것도 대면한 상태에서나 쉽지 않은 것이지, 이만큼 인파가 많은 곳에서는 아예 불가능하다.
그래서 경계를 풀었나? 아니다. 마법의 여신을 논하고 있는 그녀는 실제로 마법의 근원이란 것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이 순간에도 세냐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의 존재유무를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망령의 시선은 인지하지 못했다. 망령은 모론을 속였듯이 마력을 완벽하게 감췄다. 또한 존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공간에 녹아들었다.
‘세냐.’
공간의 경계. 그곳에서 망령은 세냐를 보았다. 그녀의 인식저해 마법은 망령의 눈을 가리지 못했다.
‘세냐 메르데인.’
변하지 않은 모습.
녹색 눈동자와 보라색 머리카락.
몰아치는 감정이 괴로웠다.
빌어먹을 환생 451화
약속이 맺어지고, 전쟁이 끝난 뒤에 세냐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들었다.
기억 속의 세냐가 그렇게나 고독하고 구도자다운 삶을 살다가 은거했다는 것은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냐가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이 하멜의 죽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서는 쉽게 납득이 되었다.
세냐라면 그럴 것이다.
망령은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지금 그는 하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하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기억이 불완전하다고는 해도 인격과 자아 같은 것은 하멜과 제법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족한 점을 맞춰가면 되지 않은가?
‘하멜이 환생하지 않았다면.’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사마르 대수림에서 은거했던 세냐가 세상에 돌아온 것은, 유진 라이언하트가 그녀를 찾아내서 끌어냈기 때문이다.
세냐가 200년 가까이 은거했던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유진이…… 하멜이 환생하지 않았다면, 세냐는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하멜이 환생한 덕분에, 세냐가 지금 이곳에 있다.
세냐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고무공이 통통 튕기듯이 걸었다.
인식저해 마법 덕에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인가. 망령은 어린아이처럼 걷는 세냐의 뒤를 따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멋대로 떠오르고, 현실과 겹칠 때마다 망령은 불쾌한 괴리감과 자기혐오를 느꼈다.
왜 이곳에 온 것일까? 모론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냐의 앞도 가로막아 보고 싶었나? 그녀에게서 분노와 살의 어린 매도를 듣고 싶었나? 너는 하멜이 아니다, 가짜다, 이런 종류의 말을 들으면서 나를 정의하고 싶었나?
스스로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그런 식으로 등이 떠밀려서 억지로 인정 당하고 싶었나. 증오와 살의의 대상이 되면서 내 것이 아닌 감정을 지워내고 싶었나.
아니면.
이해받고 싶었나?
하멜이 아니다. 너는 가짜다. 그런 것을 떠나, 나라는 존재를 이해받고 싶었나.
-나 모론 루하르는, 너를 한 명의 전사로 인정하겠다.
하멜의 동료들. 내 기억에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이해받고 싶었나. 그리고 언젠가는, 하멜에게, 유진에게도. ‘하멜’과 ‘가짜’가 아닌, 그냥 나 자신을.
“하.”
망령은 머리를 가득 채운 의문들을 억지로 무시했다.
대답은 간단한 것이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세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광장을 빠져나갔다.
망령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앞을 가로막거나 말을 걸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망령은 그 이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결국에는 두렵기 때문이다.
광장을 빠져나오고서부터 세냐는 걷는 대신에 하늘을 날았다. 아롯의 법은 마법사의 시내 비행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지만, 이 나라에서 마법에 관한 모든 법에 세냐는 예외로 되어 있다.
세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롯에게 붙은 마도왕국이란 이름에 지분을 따진다면, 세냐는 자신의 지분이 절반은 훌쩍 넘으리라고 자신했다.
‘최소 7할은 될 거야.’
세냐는 하늘을 날면서 생각했다.
특히 이곳, 수도 펜타곤은 세냐가 설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도시. 펜타곤의 핵심인 부유역도 세냐가 만든 것이고, 왕궁 아브람의 마법결계도 세냐가 만든 것이다. 그만큼이나 열과 성을 쏟은 만큼, 이 도시에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어느 정도는 제멋대로 굴고 있다. 그러나 계산을 거른 적은 없다. 외상을 한 적도 없다.
세냐는 인식저해 마법 덕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있다. 지금 그녀에게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것은 숨 쉬듯이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도둑질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세냐는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부도덕한 범죄와 일탈을 저지르며 해방감이나 쾌감을 느끼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점 앞의 기다란 대기열을 무시하고 혼자서 몰래 들어가는 것에는 소소한 즐거움을 느꼈다. 사실 몰래 들어갈 필요 없이 얼굴만 보여줘도 될 일이지만, 가끔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워낙 유명하고 존경을 받는 만큼, 체면을 신경 써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때는 체면을 과감하게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지금 세냐가 들어온 곳은 펜타곤 패션의 최첨단을 주도하는 의복점. 만약 세냐가 평범하게 이곳에 들어왔다면, 줄을 선 모든 사람들이 세냐를 보며 수군대고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지금 세냐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대저택에 비견될 만큼 넓은 내부의 가장 깊은 곳. 왕족이나 고위 귀족 등을 접대하는 데 쓰이는, VIP를 위한 비밀스러운 살롱. 세냐는 살롱의 안에 도착하고 나서야 마법을 해제했다.
살롱에 미리 서 있던 귀부인은, 문이 열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방안에 나타난 세냐를 보았음에도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의 만남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세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으흠.”
세냐는 인사를 받으면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귀부인은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속삭였다.
“세냐 님의 내방을 아는 것은 오너인 저뿐입니다.”
“정말로?”
“제가 감히 세냐 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으흠…… 저번에도 경고했었지만, 내가 이곳에 온 것과, 그…… 이유. 응?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세냐 님에 관한 모든 것은 제가 죽는 순간까지. 아니, 죽은 후까지도 비밀로 하겠습니다.”
VIP들의 비밀스러운 쇼핑은 대부분이 그렇다. 꼭 남들에게 알리면 안 될 이유가 없을지라도, VIP들은 ‘비밀’이라는 것 자체에 집착하며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오늘의 VIP는 다른 VIP보다 유별나긴 했다.
현명한 세냐. 현재 아롯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자, 대륙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마법사. 라이언하트의 안주인, 애니실라에게 직접 소개받은 인물. 미리 각오는 해두었지만, 저 휘황찬란한 이름은 오너를 내심 주눅 들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세냐가 요구한 주제들도 오너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남자를 유혹하는 옷이라니…… 가벼운 유혹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홀려버려서 프러포즈를 하게끔 만드는 옷이라니. 거기에 반지와 예물까지! 그 현명한 세냐가 저렇게나 노골적이고 절박한 요구를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비밀을 강조하시는 거겠지.’
오너는 소파에 앉은 세냐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벽면의 커튼을 걷어내자, 오너가 준비한 옷을 차려입은 마네킹이 나타났다. 다른 VIP들은 마네킹이 아닌 실제 모델을 요구하며 비밀스러운 패션쇼를 즐기지만, 세냐는 오늘 살롱에서 오너 외의 다른 사람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냐는 마네킹들을 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뻐끔거렸다.
“……과감…… 과감하네.”
가장 앞에 선 마네킹의 옷은, 세냐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을 만큼 과감했다.
솔직히 세냐는 자신이 저런 옷을 입은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가슴팍이고 겨드랑이고 등이고 시원하게 파인 것이, 갈X의 여왕이나 입을 법한 옷이 아닌가.
“남자를 유혹하는 옷이라 하시기에…….”
“그…… 그래도 저건 너무 가지 않았나? 평소 내가 입는 옷이랑은 너무 다른데…….”
“그러한 이미지를 반전시키며 감정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반전…… 바…… 반전.”
“스타일을 하나로 국한하지는 않았사오니, 다른 옷도 살펴주시지요.”
오너는 살포시 웃으며 다음 커튼을 걷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두 번째부터는 첫 번째만큼 파격적이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갈X의 여왕에서 멜키스 수준으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이번에는 아예 달라져서 청초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해서 바뀌는 옷들을 볼 때마다 세냐의 감정도 바뀌었다. 점점 익숙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너가 말한 ‘반전’이란 단어가 뇌리에 선명히 새겨진 것일까. 이상하게 처음의 파격적인 옷에 눈이 갔다. 생각해 보면, 세냐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저런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다. 일단 그녀들은 성녀기 때문에, 저렇게나 파격적인 옷을 입어서는 안 될 입장이다. 하지만…… 하지만, 오늘 유진과 워터파크에 갔으니 수영복은 입었을 것이다.
‘나는…….’
입어본 적이 있나? 있을 리가! 세냐는 그런 종류의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섬나라인 시무인에 갔을 때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이리스 그 빌어먹을 다크엘프 년이 마왕이 되어버린 탓에 해수욕 같은 것은 해보지도 못했다.
‘반전…… 바…… 반전이라…….’
저런 옷은 성녀들뿐만이 아니라 시엘도 입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세냐의 마음은 저쪽으로 기울었다.
굳이 입을 만한 것은 갈X의 여왕뿐인데, 세냐는 자신할 수 있었다. 갈X의 여왕이 저런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에 유진은 쌍욕을 퍼붓겠지만, 세냐가 저 옷을 입고 나타난다면 유진은 얼굴을 붉힐 것이다…….
“…….”
하지만 다른 옷들도 마음에 들었다. 오너가 엄선한 해도 차려입은 마네킹은 수십 개. 그 모든 조합이 세냐의 눈을 빼앗았다.
그럴 수밖에. 세냐는 삶의 절반을 마경에서 보냈고 남은 절반은 마법에 바쳤다. 그녀에게 있어서 ‘옷’이란 로브, 망토, 그런 종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가끔 유진을 의식해 변주를 준 적은 있지만, 전문가가 작정하고 준비한 진짜배기 패션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렇기에 고르는 것이 힘들다. 아니, 그 생각부터가 잘못되었다. 세냐는 마법에서 그러했듯, 사고의 틀을 무너트리고 새로이 생각하여 답을 도출했다.
전부 다 마음에 드는데 꼭 하나만 살 이유가 어디에 있나?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세냐는 완벽한 답안에 만족하며 활짝 웃었다.
“전부 다 살게.”
“전부…… 다 말씀이십니까?”
“응.”
“예, 그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입어보시지는…….”
“그건…… 그건 괜찮아.”
비밀을 보장받기는 했지만, 오너 앞에서 저런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기왕이면,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런 차림은 유진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은…… 준비한 반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의 반지여야 해.”
상대가 주기를 바라는 반지를 자신이 직접 사는 이유가 대체 무얼까. 오너는 저 말을 이해하기 버거웠지만, 상대가 ‘현명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대마법사라는 것을 의식했다. 현인을 뜻을 범인이 어찌 이해하겠나.
“음…… 그런 것을 바라신다면, 제가 세냐 님께서 바라시는 상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만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날 떠보는 거야?”
“절대로 아닙니다.”
어차피 비밀을 약속받기도 했고…… 언젠가…… 언젠가는 결국 모두가 알게 될 것 아닌가? 세냐가 그런 생각을 하며 머뭇거리자, 오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역시 유진 라이언하트 님이십니까?”
시무인 왕성의 연회에서 세냐와 유진이 함께 춤을 추었다는 것은 소문이 파다했다. 만약 저 위대한 마법사가 남자에게 홀린 것이라면, 상대는 어린 용사이자 제자뿐이리라.
하지만 세냐는 그걸 선뜻 인정할 수가 없는 성격이었다. 그런 점은 300년 전과 변하지 않았다.
“뭐, 뭐, 뭐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걔, 걔는 내 제자야.”
“세냐 님, 진정하고 들어주십시오. 저는 이곳 마도왕국 아롯의 수도에서 수십 년 동안 지내며 다양한 고객들을 상대해 왔습니다. 그중에는 젊은 기사와 밀회를 나누는 귀부인이나…… 으흠, 마법 스승과 제자 등도 있었습니다.”
스승과 제자. 그 말에 세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백 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시대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사랑은 그리 문제 될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세냐 님처럼 젊고 아름다운 외모의…….”
“흠흠…….”
“심지어 유진 님께서는 여인이라면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는 완벽한 분이시죠. 위대한 베르무트 님의 후예. 라이언하트의 성씨.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 거기에 빼어난 용모와 출중한 재능. 스승이라면 총애할 수밖에 없는 제자이고, 여인으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십니다.”
오너가 몰아붙일수록 세냐는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몸을 배배 꼬았다.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당기고, 옷깃을 잡고, 소파를 긁었다.
“비…… 비밀이야.”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속삭이는 모습은 300년이란 시간을 산 대마법사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풋풋했다. 오너는 자신도 모르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최선을 다해 반지를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오너는 말한 것처럼 최선을 다했다. 다양한 종류의 반지를 내놓고, 그로도 모자라 잠시 살롱을 나가더니 다른 반지까지 더 가져왔다. 절대로 팔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개인 소장품까지 선보였다.
부끄러워 수줍어하다가, 얼굴을 붉히고, 무엇을 고를지를 고민하고, 괜스레 마네킹에 다가가서 옷을 만져보고, 한번 입어볼까,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흔들고, 여러 종류의 반지를 손에 끼워보면서 배시시 웃는 세냐는
행복해 보였다.
그냥 행복해 보였다.
망령은 한참 동안 세냐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에 충격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냐, 세냐와 하멜의 감정은 망령도 알고 있던 것이니까.
‘그렇군.’
울렁거리는 가슴. 그 밑바닥에서 불꽃이 고이고 있다. 머리는 어지럽고 손끝은 파들거리며 떨린다. 이건 배신감인가? 아니면 슬픔인가.
라비스타를 나와서 보았던 세상은 평화로웠다.
모론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어 보였다.
모론에게 전사로 인정받았다.
세냐는 행복해 보였다.
유진과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세냐와 모론에게 하멜이라고 불리고 싶다.
환생한 하멜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싶다.
여전히 망령은 하멜이 되고 싶었다.
등돌려 나온 망령은 하늘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얼굴을 어루만졌다.
저런 욕망조차도 나의 것이다.
지금 도달한 결론도 나의 것이다.
구분할 것도 없다. 하멜의 기억을 갖고, 하멜을 모방한 자아를 가진 나는, 결국 나인 것이다.
“그래.”
구부린 손가락이 뺨을 할퀴었다. 결심하고, 각오했다.
지금부터,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나란 존재에 가치가 생기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 * *
얼굴을 그냥 뜯어버릴까.
진지하게 그런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래 버리면 불편한 점이 더 많을 것 같다.
아니면 얼굴을 바꿀까? 별로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식으로 바꿔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애당초 얼굴이 중요한가?’
드러내고 다니면 중요하다.
그렇다고 지금의 얼굴로 지내자니, 하멜의 이름에 먹칠하는 꼴 아닌가.
계속 이 얼굴을 드러내고 다닌다면, 세상에 ‘우둔한 하멜’에서 ‘개새끼 하멜’…… 아니, 저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악명이 붙을 수도 있다.
그건 싫었다. 그래서 망령은 가면을 쓰기로 했다. 문양 같은 것 없이, 새하얀 색에 눈구멍만 뚫린 가면.
‘너는 하멜의 이름에 지금 이상의 욕이 달리는 것은 싫을 테니까.’
나도 그렇고. 망령은 피식 웃으며 앞을 보았다.
악명을 신경 쓰고 배려까지 해주는 주제에.
“네가 싫어하는 짓이지만 어쩔 수 없어.”
망령은 괜히 툴툴 웃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게는 이게 옳아.”
망령에게도 이건 하고 싶지 않은, 싫은 일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다.
망령은 멀리 보이는 흑사자성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환생 452화
흑사자 성
키옐 제국 남쪽 끝의 국경을 가르는 우클라스 산맥. 이 험준한 산맥과 국경은 300년 동안 라이언하트 가문의 흑사자 기사단이 수호하고 있다.
여태까지 흑사자 기사단은 국경 너머 사마르 대수림에서 야만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끔 막아왔다. 제국에서 국경 수비군을 지원받는다고 해도, 라이언하트 내부의 문제와 기사단 훈련을 모두 병행하는 이상 흑사자는 바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달부터는 여태까지보다 훨씬 여유가 생길 것이다. 저 거대한 사마르 대수림, 숲에 사는 수백 개의 원주민 부족이 하나의 대부족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조란.
원래부터 사마르 대수림의 패권을 다투던 대부족. 23살의 젊은 족장 이바타 자하부는, 불과 2년 전에 족장의 자리를 계승했다. 이바타는 당시 대수림에 혼란을 퍼트리던 대부족 코칠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에 조란의 기둥을 세웠다.
그 위업은 이바타와 조란만으로 이뤄낸 것은 아니다. 조란이 코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던 것은,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와 성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아롯 마탑주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소 라이언하트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 것은 이바타였다. 숲의 전사들은 젊은 대족장의 힘과 지혜를 인정하고 섬기며, 자처하여 몸뚱이에 조란의 문신을 새겼다.
그 후 2년. 이바타 대족장이 이끄는 조란은, 대수림 역사상 그 누구도, 그 어느 부족도 이뤄내지 못한 부족 대통합을 이뤄냈다. 이바타는 대수림에 새로운 법을 세우며, ‘절대로’ 우클라스 산을 넘어 제국에 밀입국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대족장, 이바타 자하부.’
말뿐인 것도 아니다. 이바타는 유진 라이언하트와의 ‘우애’를 강조했고, 라이언하트와 키옐 제국에 대한 경의를 표명했다. 그 이야기는 이미 1년 전 시무인의 연회에서 주고받은 것이기도 했다.
‘23살의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개. 다른 때에 태어났다면 그 시대의 주인을 노릴 수도 있었을 거다.’
젊은 패기에 야망, 그리고 천운이 따른다면 숲을 넘어 대륙 정벌까지 시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바타에게는 천운까지는 따르지 못했다.
지금 시대의 주인공은 이바타가 아니다.
라이언하트의 원로원주. 클라인 라이언하트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클라인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지금 대륙의, 아니, 시대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
태어난 유진이 세상에 나오면서 시대가 변하기 시작했다. 유진에 의해 변화하고 만들어진 것이 최근의 역사가 되었다. 유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대륙은 지금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조란이 대수림을 정복할 수 있던 것도 유진이 코칠라와의 전쟁을 도운 덕분. 조란이 라이언하트, 키옐과 동맹을 맺은 것도…… 유진이 있기 때문이지.’
대수림은 땅덩어리만 치면 제국과도 견줄 수 있다. 발전한 문명을 거부하고 숲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정확한 인구수는 가늠할 수 없다. 대수림의 원주민들은 실제로 야만인이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이바타는 키옐과의 화친을 바랐다. 부족민들이 저항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문명을 받아들일 의사도 표명했다.
라이언하트와의 다양한 교류도 희망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라이언하트는 300년의 역사를 가진 무가. 동시에 대륙에 유일한 용사의 혈통이며, 당대의 용사 유진이 속한 가문이다. 유진이 언젠가 유폐의 마왕과 맞서려 든다면, 라이언하트는 유진을 위한 검이 되어 선봉에 설 것이다.
또한 나하마와의 전쟁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 한창 훈련에 매진해도 시간이 모자란 판국인데, 조란이 대수림을 통일하면서 국경수호에 여유가 생겼다. 또한 부족장 이바타가 직접 정예 전사들을 이끌고 와서 합동 훈련을 해주고 있다.
그 광경은 무인으로서 보기 좋았지만, 클라인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기왕이면, 이런 일은 내가 죽은 후에 생기길 바랐는데…….”
클라인은 원로원주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한가롭고 평안한 노후를 보내다가 적당한 때에 죽거나, 아니면 은거하는 것이 클라인이 그린 말년이었다…….
“나약한 소리 하지 마라, 클라인.”
곁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카르멘이 시선을 쏘았다. 본래 그녀와 3번대는 기온의 5번대와 함께 본가에 상주하고 있지만, 오늘은 이바타를 상대하기 위해 흑사자 성에 와 있다.
근육질이기는 해도 흰머리와 수염을 기른 클라인과는 다르게, 카르멘은 완벽하게 젊은 몸과 얼굴을 유지하고 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카르멘과 클라인을 보고 할아버지와 손녀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둘은 남매다. 심지어 카르멘이 클라인의 누나다. 현재 라이언하트의 본가에서 카르멘이 가장 큰 어른이며, 방계를 통틀어도 카르멘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이 드물다.
그러니 마땅히 원로원주는 카르멘이 되어야 할 텐데, 정작 그녀는 흑사자 현역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며 원로원주의 감투를 동생인 클라인에게 씌워 버렸다…….
“모든 마왕을 토벌하는 것이야말로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님의 유지이며 라이언하트의 사명. 네가 살아있는 지금 시대에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됨에 감사하고 영광스레 여기지는 못할망정, 약해빠진 소리나 내뱉다니. 네가 그러고도 이 은사자의 동생이자 라이언하트 원로원주라 할 수 있느냐.”
카르멘이 금안을 번뜩이며 쏘아붙였다. 클라인은 어릴 때부터 시달린 남동생답게 어깨를 움츠렸다.
“누님.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 기왕이면…….”
“입 닥쳐라, 클라인.”
“…….”
“시대의 격동이 네 가슴을 울린 적이 정말로 없더냐? 나는, 내가 현역인 중에 라이언하트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시조님과 같은 용사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그와 함께 마왕과 싸운 것도 기쁘다.”
“…….”
“내 기사도는 용사와 함께 완성될 것이다. 사악한 흑마법에 놀아난 나하마를 계도한 후에는 언젠가 유폐의 마왕과 싸우겠지. 모든 것이 끝난 전장에 라이언하트의 깃발을 우뚝 세울 것을 상상하니 피가 끓는군.”
“…….”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지? 감히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누님이 입 닥치라고 하지 않았습니…….”
째려보는 시선에 클라인은 재빨리 다른 말을 이었다.
“제 조카손자가 용사라니! 마왕을 쓰러트렸다니! 아직도 이것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한테 한 대 맞아보면 꿈인지 아닌지 곧바로 알 수 있을 거다.”
“누님, 제 나이를 생각…….”
클라인의 말이 뚝 멎었다.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카르멘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님?”
카르멘의 표정은 방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그것’을 느낀 것은 카르멘 혼자가 아니었다.
“……?”
오싹하고 밀려온 불길함.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 눈을 손으로 감쌌다.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스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커먼 먹물 같은 것이 흰자를 잠식해 갔지만, 시엘은 지금 자신의 눈동자에 어떤 색이 깃드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느끼는 기분은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바다 위. 광란의 마왕 토벌 때. 월광검의 폭주에 삼켜진 유진을 끌어당겼을 때. 어딘지 모를 공허를 보았을 때.
뭔가 온다.
카르멘과 시엘 외에도 불길함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씩 늘어났다.
‘이게…… 뭐야?’
라이언하트 본가의 예비 가주. 그런 위치를 떠나서 시안은 이바타와 인연이 있다.
조란 전사들과 흑사자의 합동 훈련이라는 것도 관심이 있었다. 백염식 5성의 벽을 좀처럼 넘지 못하고 있어 답답한 기분도 있었기에, 지금 흑사자 성에 와 있었다.
오늘 여기 와서는 안 됐다. 그런 한심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에 시안은 다른 생각을 했다. 그는 쿵쿵거리며 뛰어대는 가슴을 움켜쥐면서 홱 고개를 돌렸다.
“다, 당장, 본가에 지원을 청하십시오.”
근처에 있던 흑사자에 한 말이다.
본가에 지원을 청하는 것이 의미가 있나? 현재 본가에 머무르는 전력 중 최강은 가주인 길레이드와 5번대 대장인 기온. 둘은 백염식 7성에 도달한 실력자다.
그들이 온다고 해서 저 불길한 존재를 상대할 수 있을까. 본가에 상주하는 백사자 기사단 전원이 올지라도 상대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흑사자 성이 지원요청을 듣는다면. 본가는 즉시 아롯의 세냐에게도 위기를 전할 것이다.
현명한 세냐. 그녀가 대마법사들을 데리고 온다면…… 시안은 숨을 헐떡거리며 게돈의 방패와 포식검 아스펠로 무장했다.
흑사자 성에도 워프게이트는 있다. 본가에 보낸 지원이 전달되고 워프게이트로 넘어오기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모른다. 그렇지만 시안은 당장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라이언하트의 예비가주가. 그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의 형제인 내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짓 따위를 할 리가 없잖아.’
이곳 모두가 그렇다.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꺼림칙하고 두려우며 불길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무기를 내려놓고 도망을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흑사자를 결속시킨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이 그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게 만들었다.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라.”
이바타는 거칠어진 호흡을 억누르며 내뱉었다.
그와 조란의 전사들은 라이언하트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전사’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대족장이라는 자리에 앉았지만, 이바타는 자신이 대족장이기 전에 전사라고 생각했다.
결국, 수백 명의 기사와 전사들은 정체 모를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은 선택하지 않았다.
‘언제 오는 거지?’
‘어디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불길하다’라는 기분만 점점 가깝고 강하게 느껴질 뿐이다. 아직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 합동 훈련을 위해 쓰이던 숲의 하늘. 진즉에 해가 저문 밤.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휘황한 달이 걸려 밝은 밤하늘의 한복판. 대뜸 출현해 선 그것은 안개처럼 뿌옇고 회색의 기류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 하지만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얼굴을 모두 덮는 하얀 가면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만은 볼 수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밤하늘에 뭔가가 갑자기 나타났을 뿐. 그런데도 모두가 가슴의 울렁거림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땅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다. 카르멘은 빠득 이를 악물었다.
바다에서 광란의 마왕과 대면했을 때. 공포에 몸이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었다. 그 이후로 다시는 마(魔)에 공포를 느끼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저건…… 뭐지?’
광란의 마왕을 우습다 회상할 정도의 힘. 마력인 것 같지만 무언가 이질적인.
아니…… 정말로 그런가? 아주 낯설지도 않다. 카르멘은, 유진이 사용하던 월광검을 떠올렸다.
‘아니, 달라.’
저것이 더 지독하다. 다른 때였다면 저 새하얀 가면을 더 의식하겠지만, 지금의 카르멘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만큼의 심적 여유가 없었다.
화르륵! 새하얀 불꽃이 카르멘을 휘감았다. 시조 베르무트 이후로 가장 높은 경지. 백염식 8성. 카르멘은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도약해서 공격한다. 머릿속에서 움직임을 그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폼 체인지’라고 내뱉으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 떠 있던 것이, 어느새 카르멘의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알고는 있다. 처음 데스나이트로 부활하고,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에 홀렸을 때. 베르무트의 피를 이은 라이언하트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았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유진 라이언하트를 제외한다면 저 가문의 최고 실력자. 그 평가에 과장은 없어 보인다. 저만한 실력이라면, 멸망의 사도가 되기 전에는 고전했을 것이다.
‘나는 고작 그 정도였나.’
망령의 손이 들렸다. 폼 체인지라고 내뱉을 시간은 없었다.
촤라락! 카르멘이 주먹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회중시계가 묵직한 건틀릿이 되었다. 나아간 주먹이 터트린 풍압과 불꽃이 근처의 클라인을 밀어냈다.
회색 머리카락이 나부끼면서 불꽃이 확산했다. 연이어 공격이 이어졌다. 카르멘은 직접 쏘아낸 불꽃을 향해 뛰어들었다.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는 백염식은 흩어지는 불꽃을 다시 카르멘에게 끌어모았다.
끼기긱! 건틀릿의 형태가 바뀌었다. 육체와 균형이 맞지 않을 만큼 거대해진 주먹이 불꽃을 꿰뚫었다.
ㅡ쿠우웅!
‘무겁다.’
주먹을 뻗었고, 닿았다. 하지만 때리고 부쉈다는 감각은 없었다. 마치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벽을 때린 것만 같았다. 때린 이쪽의 주먹이 오히려 부서질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주먹을 뒤로 물리지는 않았다.
“변신.”
카르멘이 입은 흑사자의 제복. 가슴 정중앙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푸확! 칼날처럼 예리한 빛이 제복을 찢어발겼다. 강렬한 빛이 카르멘의 몸을 감쌌다.
시무인의 지보, 드래곤 하트의 일부를 사용한 마법갑옷 엑시드. 그것에 곤도르와 드워프 장인들이 라이자키아의 비늘과 가죽 등을 사용해 보강한, 카르멘의 전용 갑옷.
“백염룡(白炎龍).”
변신이 끝났다. 검은색과 은색이 어우러진 엑시드를 입은 카르멘은, 여전히 주먹을 뻗은 상태로 왼쪽 주먹을 들었다. 본래 오른손은 헤븐제노사이드를 장착하고 있지만, 왼손에는 아무런 무장도 없었다.
변신하기 전에는 말이다. 사자룡의 왼팔은 마룡의 왼팔. 카르멘의 왼팔을 마나의 불꽃이 휘감았다. 헤븐 제노사이드에 비견할 만큼 날카로운 손톱. 카르멘의 눈이 번뜩였다.
마룡의 왼팔이 쏘아졌다. 드래곤 하트에 증폭된 불꽃이 거대한 드래곤을 만들었다.
꽈르르릉! 요란한 폭음과 함께 망령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날아가지 않고 버티는 것도, 반격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ㅡ 그쪽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카르멘 라이언하트를 봤다. 지금 당장은 그것으로 족하다. 망령은 날아가던 몸을 멈추고 땅에 내려섰다.
“그렇군.”
망령이 땅에 내려선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살의와 공격이 덮쳐왔다.
“이게 베르무트의 후손들인가.”
라이언하트.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 망령을 웃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환생 453화
분노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에서 망령의 정체를 짐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마르 대수림에서 망령과 만났었던 시안조차도 지금의 망령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기 때문도 있지만, 존재감 자체가 너무나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저 가만히 섰을 뿐인데도 피부가 저릿할 만큼의 위압감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정체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 머뭇거릴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의 망령의 존재감은 노골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불길하고 사악한 힘. 단순히 마력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저만큼이나 사악한 마력은 흑마법사나 마족들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정체 모를 것은 마왕,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라는 것. 모두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백염룡으로 변신한 카르멘이 망령을 덮쳤다. 그녀와 동시에 제노스도 땅을 박찼다. 제노스는 백염식을 익히지 않았지만, 기술의 완성도만으로 흑사자 기사단에서 카르멘 다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 기술은 바로 하멜식. 망령은 당연히 그것을 알아보았다.
상대의 정체는 모른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안다. 저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다. 싸워서는 안 될, 싸우고 싶지 않은 존재다.
공포란 감정에 모두가 솔직하다면 누구도 앞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카르멘이 공포를 이겨내고 나아갔듯, 제노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흑사자 성. 300년의 역사를 가진 라이언하트의 영지.
시뻘건 마나의 불꽃이 제노스의 몸을 덮었다. 내부자가 가문을 배신했던 이오드 때와는 경우가 다르다. 이것은 순수하게 ‘적’이 침략해 온 것이다. 군대를 끌고 온 것도 아니다. 단 한 명이 라이언하트의 영지에 쳐들어왔다.
저것을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것을 상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다. 제노스와 카르멘의 생각이 일치했다.
갑작스럽게 합공을 하게 되었지만, 둘의 움직임은 수백 수천 번을 넘게 맞춰본 것처럼 매끄러웠다. 제노스가 평생을 단련한 수라광살과 카르멘의 뇌광일섬이 망령을 덮쳤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하멜식의 계승자. 망령은 씁쓸한 반가움을 느끼며 마력으로 검을 만들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똑같이 수라광살로 대응하거나, 다른 기술로 대응하고 싶었다. 하지만 망령은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이 하멜의 데스나이트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하멜의 이름에 먹칠하고 싶지 않았다.
익혀 온 기술을 배제한다. 무턱대고 휘두른 검으로 타개할 수 있을 만큼 쉽고 가벼운 공격이 아니다. 기술을 배제한다면 그 이상으로 큰 힘을 실어야 한다.
그건 망령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멸망의 화신이 된 그에게 마력의 고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멸망의 마력은 다루는 자마저 감당할 수 없는 파괴적인 힘. 여태까지 많은 권속이 멸망의 마력에 자멸했으나, 망령에게는 그런 위험이 존재하지 않았다.
코어에서 마나를 뽑아내듯, 멸망의 마력을 뽑아냈다.
ㅡ꽈아앙! 직전까지 다가왔던 수라광살과 뇌광일섬이 멸망의 마력과 충돌하여 소멸했다. 저 난폭한 마력은 공격을 소멸시킨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망령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마력이 폭풍을 만들었다.
저 힘은 위험하다. 카르멘과 제노스, 둘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둘은 즉시 뒤로 도약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다른 사람들도 움직였다. 이곳에 없는 기온과 먼저 움직인 카르멘, 제노스는 제외한 7명의 대장이 휘하 기사들을 이끌었다. 순식간에 망령은 수백 명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였고, 바깥은 조란의 전사들이 벽을 만들었다.
압박하는 형태는 노골적인 차륜전. 대장급이 교대로 덤벼가며 상대의 힘을 빼든가, 혹은 사방에서 덮쳐올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전력을 다해 1명을 압박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망령은 혼자고, 저들은 수백 명이 넘는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군이 수백 명일지라도 저것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대장과 원로들이 동시에 덤빌지라도 저것을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지원병력이 오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지원병력이 올 때까지 저것을 붙잡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시간을 끄는 것은 무의미한데.’
본가의 지원군? 아롯의 대마법사들? 현명한 세냐. 이 전투 자체도 내키지 않지만, 세냐와는 더더욱 싸우고 싶지 않다. 어쩌면, 저들이 기다리는 것은 제벨라 파크에 있는 유진 라이언하트일 수도 있다.
……유진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와 부딪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지원군이 넘어올 길들을 미리 봉쇄해 놨다. 워프게이트는 막았고, 마력장을 펼쳐 통신 마법을 차단했다. 이 조건에서 외부의 지원군이 넘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투를 오래 끌고 싶지는 않다.
격이 한참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도망치지 않는 기개. 라이언하트의 기사들뿐만이 아니라, 대수림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원주민들조차도 명예와 긍지를 품고 있지 않나.
-나 모론 루하르는, 너를 한 명의 전사로 인정하겠다.
망령은 저 말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꼭 전사로 인정받았기에 이러는 것은 아니다. 하멜에서 태어난 망령은, 명예와 긍지를 아는 자들을 존중하고 싶었다. 망령은 천천히 숨을 삼켰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실제 시간의 흐름은 바뀌지 않았겠지만, 망령이 느끼는 시간은 영원처럼 길게 늘어났다. 망령은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살의를 읽었고, 그 살의가 어떠한 공격으로 빚어질지에 대한 가능성을 예측했다.
제노스와 카르멘의 공격. 서로 다른 색의 불꽃이 어떤 식으로 호응하며 화합하며 증폭되는지. 그 힘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알았다.
‘둘이 아니군.’
후방에 있는 난폭한 힘을 느꼈다.
대지 전체에서 힘을 뽑아내는 것 같은, 비유하자면 거목이 뿌리째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힘. 저 힘은 인간이 순수하게 수련하여 얻어내고 도달하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힘. 망령은 멸망의 화신으로서 저 힘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기적, 축복, 가호. 그런 종류의 힘. 대수림, 세계수의 가호를 받은 자. 머릿속에 새겨지는, 자신의 것이 아닌 지식에 망령은 가볍게 전율했다. 망령은 지금 머리에 직관을 새겨넣는 것이 누구인지를 의심했다.
‘베르무트? 아니면…… 멸망의 마왕인가?’
체감하는 시간은 여전히 느리다. 이바타가 두 자루의 도끼를 들고 도약하는 것이 보였다. 카르멘과 제노스의 공격은 이미 망령의 마력과 충돌하면서 파고들고 있다.
선두에 선 대장과 원로들. 점점 부풀어 오르는 마력의 불꽃이 살의에 따라 칼날을 세운다. 카르멘과 제노스의 공격이 끝나는 순간에 연이어 저들의 공격이 파고들 것이며, 후방에서 뛰어오른 이바타가 머리 위에 도끼를 찍을 것이다.
‘뭔가 섞여 있다.’
망령의 감각이 활짝 열렸다. 그는 아직 발동되지 않은 암수마저 간파했다.
흑사자 사이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젊은 여자.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망령은 저 여자의 이름이 시엘 라이언하트라는 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왼쪽 눈동자가 다른 흑사자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칙칙한 금색. 이상하게도 저 눈동자에서 인간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눈동자의 빛깔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검붉은색이 눈동자에 섞여 들어가기 시작할 때. 망령은 저 눈동자에 깃든 것이 마법이 아닌 마안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인간이 마안을?’
말도 안 되는 일, 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멜의 지식은 저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망령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저것이 무조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이해했다.
멸망의 신전에 앉아 있던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느리다 체감하는 것은 망령뿐.
망령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시간의 흐름은 변치 않았다. 카르멘과 제노스는 전력을 다하며 망령의 마력을 파고들었다. 그 뒤를 이어 대장과 원로들이 공격을 쏘아내고, 이바타가 도끼를 찍었다.
시엘의 눈동자가 완전히 붉은색으로 변하고, 마안의 권능이 발동되었다. 부동의 마안. 마나가 충분하다면 마왕이라도 잠깐이나마 묶을 수 있는 권능. 마안의 권능이 망령을 포착했다.
가장 먼저 피를 토한 것은 시엘이었다. 망령을 옭아 죄려던 권능은, 역으로 침투한 멸망의 마력에 파괴되었다. 권능을 위해 퍼붓던 마나가 역류하면서 코어에 타격이 들어왔다. 시엘은 울컥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화아아악! 멸망의 마력이 폭풍을 일으켰다. 헤븐 제노사이드에 덮인 카르멘의 오른팔이 뒤로 꺾였다. 검강을 집중시킨 제노스의 검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이바타는 폭풍의 중심을 노려보며 포효했다. 거력을 담은 도끼가 폭풍을 찍어 누를 듯이 떨어졌다. 실패했다. 도끼가 소멸하고 이바타는 마력에 휩쓸렸다.
그렸던 것과 전혀 다른 사태가 벌어졌지만, 대장들이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폭풍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폭풍 속에서 망령이 걸었다. 그는 점점 영역을 넓히는 마력을 무시하고서 양손을 들었다.
빠지지직! 회색 마력이 응집되더니 거대한 검이 되었다. 망령은 제 몸보다 훨씬 큰 대검을 양손에 쥐고서 몸을 비틀었다.
꽈아아앙! 대검이 공간을 갈랐다. 마력의 폭풍이 수백 개의 참격이 되었다. 단어 그대로의 칼바람이 사방으로 퍼졌다.
“시엘!”
시안은 악을 쓰며 시엘의 앞에 뛰어들었다. 그는 게돈의 방패를 세우고 아스펠을 휘두르며 시엘의 앞을 지켰다. 다른 기사와 전사들도 몰아치는 칼바람에 저항하며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멸망의 마력은 검강과 마나를 우습게 소멸시켰다. 순식간에 진한 피 냄새가 숲을 떠돌았다.
칼바람이 그쳤다. 망령은 한 번 휘둘렀던 대검을 어깨에 걸쳤다.
방금의 공격으로 전부 쓸어버린다……. 그런 기대를 조금은 했다. 가능할 만큼의 마력도 실었다.
쓰러진 사람은 제법 있었다. 하지만 일어선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쓰러져야 하는데 억지로 일어서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광경에 망령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는 순수하게 저들에게 경의를 느꼈다.
“넌 대체 누구냐.”
카르멘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는 꺾인 오른팔을 억지로 고쳐 끼우며 망령을 노려보았다. 제노스도 피를 왈칵 토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검은 소멸했지만 백염식의 불꽃이 칼날이 되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망령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망령에게 소개할 이름 따위는 없었다. 허나 이름이 중요할까. 망령은 고뇌 대신에 발을 뻗었다. 어깨에 걸친 대검이 마력으로 흩어졌고, 동시에 망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검.
시야를 뒤덮는 수백 개의 검. 직접 휘두르는 것은 단 하나지만 검격이 수백 개의 참격을 만들어 덮쳐온다.
허와 실을 구분할 여유가 없다. 오른팔과 손가락이 부러졌다. 억지로 끼워 맞추기는 했지만 섬세한 움직임은 불가능하다.
꽈드드득! 헤븐 제노사이드가 억지로 형태를 바꾸었다. 손가락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카르멘은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았다. 데스티니 폼으로 변형한 주먹이 참격을 꿰뚫었다.
툭.
처음에 뻗었던 위력과는 달리 주먹은 아주 가볍게 망령에게 닿았다. 카르멘은 숨을 몰아쉬며 망령을 노려보았다.
“멋지군.”
망령은 진심을 담아 카르멘의 무위를 인정했다. 멸망의 마력은 닿는 것만으로 마나를 소멸시킨다. 하지만 카르멘의 백염식은 멸망의 마력에 저항하며 기어코 참격을 관통한 것이다.
저 평가가 조롱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카르멘은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뭘 하고 싶은 거냐.”
미처 끊어내지 못한 참격이 한 번 더 주변을 휩쓸었다. 억지로 일어섰던 기사와 전사들 중 쓰러진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왜 죽이질 않지?”
저만큼이나 파괴적인 힘을 퍼부었는데도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 저항하는 무기를 소멸시켰다. 상처도 입혔다. 일어서지 못할 만큼의 중상. 결코 가벼운 상처는 아니다. 하지만 치명상은 없다. 죽은 사람도 없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카르멘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저 뭔지 모를 ‘마왕’은, 누구 한 명도 죽일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이곳의 모두를 쓰러트리려 하고 있다.
“절망과 공포를 주고 싶은 건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너는 실패할 거다.”
카르멘은 망령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망령은 그 시선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실패하지 않았다.”
“……뭐?”
“절망과 공포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
망령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다. 카르멘은 가면 안쪽에 어떤 표정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눈동자뿐.
“나는, 분노를 주러 왔다.”
그런 말을 하는 주제에 저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기에 차분한 것이 아닌, 무언가를 체념하고 각오한 것만 같은 차분함이 느껴졌다.
“……분노?”
카르멘은 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노를 주러 왔다니. 대체 무엇을 위해?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망령의 말대로, 그는 목적을 이루었다. 성공했단 말이다. 카르멘은 지금 자신의 앞에 선 망령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건 카르멘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여기서 망령을 만난 모두가 똑같은 분노를 느낄 것이다.
죽일 수 있는데 죽이지 않았다. 감히, 자비를 베풀었다. 그것은 기사에게, 전사에게 있어 견딜 수 없는 모욕이다.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와 절망은 지금 새겨지는 분노를 절대로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맞아.”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성공했어.”
망령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는 즉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진즉에 해가 저문 밤.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휘황한 달이 걸려 밝은 밤하늘.
세냐는 높은 밤하늘 한복판에서 망령을 내려다보았다.
“날 화나게 했단 말이야.”
빌어먹을 환생 454화
밤하늘이 낮아진 것 같다.
모두가 그런 착각을 했다. 밤하늘 가득한 별이 본래 높이보다 한참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마탄이 세냐의 주변에서 별처럼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냐는 분노했다.
광란의 마왕이 된 아이리스와 만났을 때만큼. 300년 전, 다크엘프였던 아이리스에게 엘프들이 학살당한 것을 보았을 때만큼 분노했다.
라이언하트.
세냐와 혈연은 아니다. 하지만 저들은 유진의 가족이고, 친척이다. 실제로 저 아래에는 유진의 남매인 시엘과 시안이 있다. 세냐도 여러 번 만났고, 아이리스를 토벌할 때 도움을 받았던 카르멘도 있다.
모두가ㅡ 부상을 입었다. 시엘은 피를 토하며 숨을 헐떡거리고, 시안은 그런 여동생을 부둥켜안고 있다. 카르멘은 두 발로 서서 주먹을 뻗고 있지만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극심한 내상을 참고서 억지로 서 있는 것이다.
감히.
세냐의 눈동자에서 빛이 회오리쳤다. 설마 흑사자 성을 노릴 줄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초점은 철저하게 나하마에 맞춰놓았다. 실제로 아멜리아 머윈과 마족들은 나하마에 있다.
“넌 뭐야?”
단독으로 흑사자 성에 쳐들어오고, 함락을 목전에 둔 힘. 기괴하고 불길한 마력…… 세냐는 불쾌감에 눈썹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어떻게 넘어왔지?”
망령은 세냐의 질문 대신에 다른 것을 물었다. 워프 게이트는 파괴했다. 마력장으로 통신마법도 차단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세냐는 아롯에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맞이할 때 입을 옷과ㅡ 미래를 기약하며 나눌 반지를 고르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올려보는 세냐의 얼굴에는 미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분노. 망령이 바랐던 그 감정 하나뿐이었다.
“멀쩡한 통신이 끊기면 오히려 의심이 되지.”
아롯에 가 있는 동안에 혹시 모를 사태가 벌어질 때를 대비해서 시엘에게 교신기를 주었다. 평소 연락은 주고받지 않았지만, 항상 신호는 신경 써왔다.
그런데 갑자기 신호가 뚝 끊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어 연락해 보니 교신이 되지 않았다.
“워프게이트를 뚫는 것이 꽤 귀찮기는 했어.”
하지만 뚫는 것에 성공했다. 마력을 사용한 방해장벽에서 좌표를 새로 계산하고 새로운 길을 연결했다. 그것이 ‘마법’으로 가능한 이상, 지금의 세냐에게 불가능한 것은 많지 않았다.
“내가 넘어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면 차라리 워프게이트를 파괴했어야지.”
세냐는 그렇게 내뱉으며 프로스트를 꺼내 쥐었다.
ㅡ키이이잉! 주변을 부유하는 마탄들이 세냐를 중심으로 일주를 시작했다. 세냐의 눈동자 안에서도 알록달록한 색이 회오리치며 보석처럼 빛났다.
저 말이 맞다. 정말로 세냐가 넘어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면, 워프게이트를 아예 파괴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래 버리면, 이곳을 정리하고 떠난 뒤에 문제가 남지 않나.
“……네가 넘어오는 것은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몰살을 바란 것은…….”
“너.”
불쑥 내뱉은 목소리가 망령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목소리.”
놈은 가면을 쓰고 있다. 마법으로 꿰뚫어 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저 가면 자체가 마력의 덩어리고, 그 너머에는 껄끄러운 불길함이 가득했다.
저 목소리. 기억하고 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체격이 전해주는 인상까지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세냐는, 저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감정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세냐의 분노는 더욱 거대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론이 망령을 보고 분노했듯, 세냐도 망령을 보고 분노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만 하더라도 분노하기 충분한데, 이 일을 벌인 것이 하멜의 데스나이트란 사실은 분노에 기름을 퍼붓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냐는 모론처럼 머뭇거리지도, 망령을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당연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를 쏟는 베르무트의 후손들을 본다면, 모론일지라도 괴성을 지르며 분노할 것이다.
망령이 직접 말했듯, 그는 이곳에 절망이나 공포보다는 분노를 주러 왔다. 그렇기에 지금 세냐의 분노는 망령의 의도대로였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 당장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망령은 아까 보았던 세냐의 미소를 떠올렸다. 워프 게이트 쪽을 어설프게 처리했다는 것은 인정했다.
현명한 세냐. 역사상 가장 강력한 마법사인 그녀의 가능성을 너무 얕잡아본 것이다.
“…….”
저것이 왜 이런 짓을 하였는지는 당장 세냐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저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 역할은 유진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세냐는 그렇게 결정하고서 프로스트를 치켜들었다.
별들이 떨어졌다. 수백 수천 개의 마탄이 일제히 망령에게 날아들었다. 요동치는 별의 흐름은 마치 밤하늘에서부터 은하수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상식을 벗어난 형상의 공격은 아름답고 섬세하면서 파괴적이었다. 일제히 쏟아지는 마탄들은 정확하게 망령만을 노렸고, 흐트러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망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는 순식간에 세냐와 거리를 벌리며 전혀 다른 위치에 나타났지만, 수천 개의 마탄은 망령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궤적을 바꾸어 이동했다.
망령은 덮쳐오는 은하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움직임이 간파됐다? 아니, 단순히 저 마법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한 것이다.
피하고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망령이 세상 반대편까지 도망갈지라도 마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 공격에는 그런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환생한 하멜은 마법을 익혀 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망령이 가진 하멜은 마법을 익힌 적이 없다. 그렇기에 망령은 마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 세냐가 구사하는 마법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저것은 꼭 마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검을 휘두르거나, 주먹을 때리거나 하는 식의 공격에서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저 수천 개의 별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부터 확정해 버린다. ‘반드시’ 적중한다는 법칙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게 마법이라고?’
터무니없는 마법이다. 다른 마법사가 저 마법을 보고 진실을 안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수행한 마법일 얼마나 하찮았는지를 깨달을 것이다. 실제로 세냐가 저 마법을 구상하고 실현했을 때, 참관했던 대마법사들은 탄성을 터트리고서 탄식을 흘렸다.
절대률(絶代律).
모두가 시그니처라고 말했지만, 정작 세냐는 이것을 시그니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9서클의 벽을 넘어 10서클에, 아니, 인간 마법사의 벽을 넘어 마법 자체를 다스리는 여신이 되는 것이 세냐의 목표다. 절대률은 마법의 여신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할 수 있게 된 것일 뿐.
게다가 세냐가 생각하기에, 절대률은 아직 완성이라고 할 수 없었다. 부여하는 규칙, 확정시키는 결과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적을 정하고, 반드시 표적만을 맞춘다, 라는 법칙은 부여할 수 있다. 표적이 아무리 빠르건, 세냐가 쫓을 수 없을 만큼의 속도로 움직일지라도, 절대률에 의해 확정된 결과는 ‘절대’다.
‘위력은?’
따돌리거나 피하는 것은 불가. 저런 종류의 마법이 위력마저 강하다면 너무나 불합리하다. 망령은 즉시 마력을 일으켜 마탄에 응전했다.
콰르르르! 안개처럼 퍼져 나간 마력이 마탄과 닿았다. 마탄 하나를 지워낼 때마다 마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어지간한 마족이라면 몇 발 맞는 것으로 죽어버릴 것이다.
직접 겪는 위력조차도 망령의 이해를 벗어났다. 이만한 위력을 가진 공격을 수천 발이나 쏘아댄다고? 아무리 세냐가 대마법사일지라도, 저 정도 대규모 공격을 퍼부으려면 마나가 정말로 무한대여야 할 터. 마법의 위력이 강할수록 많은 마나가 필요한 것이 당연하지 않나?
‘터무니없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망령은 요격되는 마탄에 주목했다. 닿는 순간에 회오리치며 터진다. 그 과정에서 마력을 과하게 깎아내고 있다. 마탄 하나에 실린 마나는 그렇게 많지 않다.
‘마나의 성질이 다르다.’
마나의 성질을 바꾸는 마법이 가능한 건가? 이미 가진 마나를 새로이 가공하여 마력을 상대하는 데 특화시켰다고?
순수한 놀람을 느꼈지만, 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냐의 마법이 마력을 상대하기 위해 가공되었을지라도, 망령은 멸망의 화신이다. 마왕이 그러하듯 망령이 뽑아낼 수 있는 마력은 무한하고, 멸망의 마력은 마나를 소멸시킨다.
소모전을 유도한다면 필승. 꼭 소모전으로 유도하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선다면ㅡ
“…….”
망령의 목적은 세냐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망령은 입술을 씹으며 마력을 뽑아냈다.
빠지지직! 불길함을 내뿜는 칼날이 공간을 양단했다. 참격을 웃돈 마탄이 처박혀 회오리치며 망령의 몸을 파괴했지만, 망령은 제 몸이 파괴당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공격에는 태연할 수가 없었다.
뻐어어억! 마법의 송곳이 참격과 망령의 몸을 동시에 관통했다. ㅡ찌지지지직! 몸속의 신경회로가 타들어 갔다.
불꽃이 마력의 근원을 향해 거슬러 오르고 있다. 고위마족이 가진 불사력을 겨냥한 공격. 마왕마저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가 절대률로 부여된 공격이다.
“크륵.”
망령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동자에 보석 같은 광채를 담은 세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와 전혀 다른 감정이 실려 있기는 했지만, 세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
상대가 누구인지는 확신하고 있다. 목소리와 체격. 분위기가 다르고 얼굴을 가리고 있다지만, 저것은 틀림없이 하멜의 데스나이트다.
‘이해가 안 돼.’
대수림의 전투에서 데스나이트의 육체는 소멸했다. 영혼만 남아서 간신히 도망쳤고, 라비스타에서 멸망의 마력을 받아들였다……. 시무인에서 누아르 제벨라가 전해준 사실은 거기까지였다.
“너.”
세냐가 내뱉었다.
“네가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구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가면을 쓰고 있는 것. 분노를 주러 왔다는 말. 근거는 빈약하지만, 세냐는 확신했다.
데스나이트는 자신의 정체를 깨달았다. 애당초 저것이 정말로 자신을 ‘하멜’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은 벌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증오하고, 복수를 바랄지라도.
그 하멜이, 베르무트의 후손들을 찾아와서 무턱대고 공격할 리가 없다. 말로는 복수를 떠들어도, 하멜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하멜답지 않은 것이다.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것은 하멜답지 않은 짓을 했다. 하지만 저것의 목적이 복수는 아니지 않나. 애당초 복수가 목적이라면 얼굴을 가릴 이유도 없고, 굳이 모두를 죽이지 않을 리도 없다.
“……네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
망령은 몸을 관통한 송곳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세냐는 그런 망령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왜 그 모습을 하는 거지?”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굳이 저 모습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거다. 세냐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망설임은 없다.
하멜이 환생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것을 하멜의 대신으로 삼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생각 자체가 하멜을 모독한 것이니까.
‘그렇기에 너는 잘못된 존재야.’
네 존재 자체가 하멜을 모독하고 있다. 보석처럼 빛나는 세냐의 눈에 감정의 동요는 적다. 그녀는 여전히 망령에 대한 올곧은 살의를 가지고 있다.
퍼엉!
망령의 몸이 박살 났다. 묵묵히 이어 나간 마법들이 철저하게 망령의 살점을 파괴했다.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았다. 저것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작은 흔적 하나 남길 생각이 없었다.
“하아.”
파괴를 계속하던 중에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겨누고 있던 지팡이를 내려놓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안 되네.”
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나아가는 중이지만, 아직 마법의 여신이라 할 만한 격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절대률도 미완성이다.
‘……게다가 특별해.’
마력의 근원을 불태워 소멸시킬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실패했다. 근원에 가까워진 순간 오히려 불꽃이 역으로 소멸당했다. 망령의 근원에 존재하던 것은 세냐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깊고 허무한 공허였다.
눈으로 보자마자 알았다. 저것은 데스나이트도, 마족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 생각하지만ㅡ 마왕. 그것도 멸망의 마왕에 가까운…… 그런 존재라고 느꼈다.
‘공격은 닿았지만, 유효했는지도 모르겠어.’
이만큼 적중했다면 회복기가 필요할 만큼의 중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럴까.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놓쳤다.
어떻게 놓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터트리고, 태우고, 소멸시키고. 그만큼 퍼부었는데 놈은 재생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이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도주를 염려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이 일대에 마나와 마법을 쫙 깔아 두었는데도 놈이 사라지는 것을 붙잡지 못했다. 놈이 어떻게 도망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식은 세냐의 이해를 벗어난 방법이다.
‘도망?’
떠올린 생각에 세냐는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도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놈에게 불리함은 없었다. 놈은, 세냐의 공격에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않았다. 공격을 막아내기는 했어도, 세냐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다…….
“……어쩐다.”
세냐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아래로 내려왔다. 정말 다행이라 할 것은, 이곳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유진은 화를 낼 것이다.
세냐는 그 모습을 상상하기 두려웠다.
빌어먹을 환생 455화
도중에 발목이 잡히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제벨라 파크를 떠나게 된 것에 누아르가 한 번 앞을 가로막기는 했다. 하지만, 유진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누아르는 알아서 물러서 주었다.
그 누아르조차도 지금 유진의 앞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유진과 죽고 죽이는 것을 바라지만, 그 날을 오늘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해서는 안 돼.’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는 등을 보며, 누아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유진의 앞을 가로막아 버리면ㅡ 다시는 저 남자 앞에서 시답잖은 대화를 건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저 남자에게 혹시 모를 다른 감정과, 그로 인한 망설임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지금 유진의 감정은 단호하고 일방적이었다. 아무리 누아르일지라도 저 감정을 가로막았다가는 휩쓸려 버릴 것이다.
그래 버리면ㅡ 여태까지 힘들게 쌓아 올린 모든 감정들이 허무해질 것이다.
누아르는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았다. 서로를 죽이려 들 날이 그 무엇보다 달콤해지기 위해서라도, 지금 순간에 재를 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아르는 유진을 보내 주었다. 유진이 바라는 대로, 가장 빠르게 워프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게끔 제벨라 파크 전역에 환상의 마안까지 써주었다.
“당신은 이걸 호의라고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환상의 마안을 거두었다.
밤이 없는 도시. 이 새벽 중에도 소음이 끊이질 않아야 할 제벨라파크는 지금 적막만이 감돌고 있다. 도시 상공을 떠도는 3대의 제벨라 페이스가, 오직 유진을 위해 도시를 꿈속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 당신이 받아들이는 것과 상관없이, 내가 그러고 싶은 거야.”
누아르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그녀는 손으로 턱을 괴고서 눈앞의 화면을 주목했다.
본래 워프게이트의 좌표 조회는 개인이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곳은 제벨라 시티. 이 도시에서 누아르게에 불가능한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등은 거의 존재하지 않다.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비밀 좌표. 이건…… 흑사자 성이네.’
하멜이 감정을 숨기지 않고서 바로 움직인 것을 볼 때, 흑사자 성에서 심상찮은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누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낮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하멜의 데스나이트.
누아르는 그 존재에 대해서는 하멜에게 알리지 않았다. 놈에게 적의랄 것은 보이지 않았고, 태도 자체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대치했던 순간은 짧았지만, 누아르는 데스나이트…… 아니, 이제는 데스나이트라고도 부를 수 없게 된 ‘가짜’가 하멜의 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진 힘과 불길함, 위험성, 그런 것을 떠나, 가짜에게는 하멜에 대한 살의가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오히려 나를 더 경계하는 것 같았어.’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라면? 정황을 보건대 흑사자 성에서 무언가 사고가 벌어진 것은 틀림없었다.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 뭔지 모를 사고는 가짜가 벌인 것일 수도 있다.
왜?
누아르는 가짜가 저런 과격한 짓을 벌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내 잘못은 아니지?’
동시에, 가짜와 먼저 맞닥트렸으면서도 놈을 사로잡지 않았던 것이 은근히 켕겼다.
* * *
새벽 중에 세냐에게 연락을 받고, 즉시 움직였다.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듣는 것보다,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다스리고.
필요한 만큼 마음의 준비는 했다. 도착하기 전에 세냐에게 대강의 사정은 전해 들었다.
다행히도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상의 경중은 각자 다르지만, 치명상도 없다. 불구가 될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해도, ‘습격’받았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진은ㅡ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도착하고 나서, 눈을 까뒤집고 날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빠득.
다행히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한 노력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았는지, 발로 땅을 찍고, 주먹을 휘두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 던지는 식의 꼴사나운 난동은 부리지 않았다.
대신에 유진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꽉 다문 이빨이 부서지고 입안에서 피의 맛이 났다. 너무 세게 쥔 주먹은 오히려 손가락이 구겨졌다. 그로 인한 통증들은 정신을 바로잡는 것에 제법 도움이 되었다.
“…….”
너무 머리에 열이 오른 탓인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유진은 꽉 막힌 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진의 분위기와 기세에 눌려, 덩달아 숨 쉬는 것을 잊고 있던 흑사자 기사단의 마법사도 간신히 숨을 헐떡였다.
“……피해는…….”
“괜찮습니다.”
말로 먼저 듣고 싶지 않았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고서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거의 없지만ㅡ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선 흑사자 성의 일각이 붕괴한 것은 보였다. 예리하게 날이 선 감각을 통해 저쪽의 소리와 냄새도 느껴졌다.
고통을 참는 신음과 피 냄새. 유진의 잿빛 머리카락이 스멀스멀 위로 치솟았다. 걱정과 긴장 어린 눈으로 유진을 보던 크리스티나가 다급히 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괜찮아.”
“뻔히 보일 거짓말은 하지 마십시오.”
아니스가 나서기 전에 크리스티나가 먼저 그렇게 내뱉었다. 그녀는 신성력에 휘감긴 손으로 유진의 입가를 어루만지며, 으스러진 이빨과 터진 잇몸이 재생시켰다.
“적은 이미 떠났는데, 유진 님은 대체 누구에게 분노하시는 겁니까.”
“나한테.”
크리스티나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술을 타고 흐른 피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그냥 나한테 화가 나.”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저 말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유진이 느끼는 분노는 자신에 대한 책망 때문이다. 저 남자는 책임감 같은 감정에 대해서는 과할 정도로 엄격하다.
[제 가치를 멋대로 판단하고서 자살을 선택할 만큼 병신이죠.]
아니스가 투덜거렸다. 그러는 중에 유진은 먼저 앞으로 걸어나갔다.
망토 안에서는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서로 얼싸안고 떨고 있다. 두 꼬마에 대해서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내일은 어디로 놀러 가자. 어차피 이틀 정도 뒤에 제벨라 파크를 떠나기로 했으니까. 떠나기 전에, 꼬마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맞춰주기로 했었는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가 진짜 애인 줄 아세요?”
유진의 생각을 읽은 메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웅얼거렸다. 메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망토 밖으로 손을 뻗었다.
“유진 님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것은 알아요. 그래도…… 그래도, 너무 무섭게 굴지는 말아주세요.”
“안 돼.”
유진은 일말의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래도 메르의 바람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다. 유진은 빠득 이를 갈면서도 메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메르가 망토 안으로 손을 끌어당겼다.
“은자여…….”
라이미르아도 울먹거리면서 유진의 손을 어루만졌다. 꼬마들의 4개의 손이 열심히 유진의 손을 주물렀다. 부드러운 온기가 전해져왔다.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전해 받는 온기와 비교할 수 없이 피가 뜨겁게 끓었다. 그래도 꼬마들의 하찮은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쉼 없이 조물대는 탓에, 유진은 망토 안에 넣은 손을 주먹으로 쥘 수 없었다.
숲을 지났다.
아니, 이곳은 더 이상 숲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냥 텅 비어버린 공터일 뿐이었다.
잔류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마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만큼 힘을 쏟아냈다면 약간의 마력이 남아있을 법도 한데,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은 희한하게 느껴졌다.
‘피.’
유진은 훌쩍 뛰어 성으로 올랐다. 여기까지 오면서, 다시 각오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일단은 받아들일 각오.
실패했다. 자칫하다가는 꼬마들의 손을 쥐어서 뭉개 버릴지도 모른다.
유진은 즉시 손을 망토 밖으로 뽑았다. 그리고 몇 번 심호흡했다.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동시에, 머리에서는 찌이잉ㅡ 하는 이명이 들렸다.
“그 개새끼.”
입술이 멋대로 열렸다. 마나가 유진의 감정에 호응하여 움직였다. 새카만 불꽃이 갈기처럼 넘실거렸다.
포션 등을 써가며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이 보였다. 붕대를 감은 사람도 많았다. 다행히도 흑사자 성에는 부상 치료에 쓰이는 포션은 차고 넘친다. 신전의 지원을 받아, 치료마법을 쓸 수 있는 성직자들도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수백 명에 달하는 부상자를 한 번에 치료하는 것은 힘들다. 부상의 경중뿐만 아니라, 부상에 스며든 것이 ‘마력’이라면 더욱이 치료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마족, 흑마법사와의 전투가 까다로운 것이다. 살짝 긁힌 상처조차도 치료가 더디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피 냄새가 진하게 났다. 포션을 넉넉하게 부어도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아서. 통증이 심해서. 당장 치명상이 아닐지라도, 내버려 두면 치명상이 되어버린다.
누가 저런 짓을 벌였는지 들었다. 나의, 하멜의 시체로 만든 데스나이트. 하멜의 기억으로 만든 인격.
이해가 안 된다.
만약 놈이 정말로 ‘하멜’을 참칭한다면, 정말로 하멜이라 자각하고 있다면.
‘나는.’
이런 짓은 벌이지 않는다. 그 가짜 새끼는 믿고 싶지 않지만, 놈이 가진…… 하멜의 인격은 조금 믿고 있었다. 뚫린 아가리로 뭔 개소리를 늘어놓건, 놈이, 정말로 하멜의 기억에서 태어난 부산물이라면.
베르무트의 후손들이 있는 흑사자 성을 습격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증오와 복수심에 눈이 돌아가도. 300년이나 흐른 지금 시대에 살아가는 후손들을 대뜸 습격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렇게나마 되살아나서. 가장 먼저 한 생각이 뭔지 아냐?
-베르무트 그 새끼가 남긴 씨를 죄다 말살하기로 했다.
사마르 대수림에서 그 가짜 새끼는 저렇게 떠들었다. 그래서, 정말로 이런 짓을 한 건가.
“…….”
놈과 싸웠다. 검을 맞댔다. 죽이지는 못했지만, 죽음 비슷한 것을 놈에게 처박아 주었다. 그 순간, 순간에 느꼈던 것이 있다. 자살하던 때의 기억이 배신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놈은, 가짜이기는 해도…… 하멜이라 자칭할 정도는 되었다.
나라면 이런 짓은 안 한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결국 가짜인 새끼인데, 뭘 멋대로 판단했던 거냐. 놈은 하멜이 아니다.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왜 놈에게 하멜다운 행동을 기대했던 거냐.
“…….”
그렇지만.
‘이상해.’
죽은 사람은 없다. 치명상도 없다. 치료가 더디다. 내버려 두면 죽는다. 이곳이 300년 전 마경 한복판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흑사자 성이다. 심지어 워프게이트도 파괴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루하르의 고위 신관들이 이동하고 있을 거다. 사실 그들이 올 필요도 없이, ‘성녀’가 도착한 순간부터 부상자들에게 죽음은 박탈되었다.
‘왜 안 죽인 거지?’
베르무트에 대한 복수심. 대수림에서 떠든 선언을 이행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광경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직접 봐버리니 이상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가짜가 흑사자 성을 습격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놈은……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왜?
“야.”
불쑥 목소리가 다가왔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기분으로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세냐 님.”
대화는 자주 나눴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거의 1년 만이다.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인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나 옷차림, 그런 것이 변한 것은 아니다.
분위기. 혹은, 격. 유진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변화를 어떤 식으로 형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새끼 어디로 갔어요?”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니기도 했다. 내뱉은 저 말에 서운함은 느끼지 않았다. 세냐일지라도 이 상황에서는 저것부터 물었을 것이다.
“몰라.”
그래서, 세냐는 지금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 놈의 이동수단은 절대로 마법은 아니다. 그렇다고 흑마법인 것도 아니다.
“갑자기 나타나고,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꽤 여러 번 공격을 처박았다. 그렇게 심어 놓은 마나를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놈이 사용하던 힘은 멸망의 마력. 공들여 처박은 공격과 마나도 결국 소멸해 버린 모양이다.
“……미안해.”
세냐는 머뭇거리다가 저렇게 말했다. 그 뜬금없는 사과에 유진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네가, 아니, 세냐 님이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내가…… 더 빨리 왔다면…….”
“그딴 말 하지 마요. 이건 세냐 님이 죄책감 가질 일이 아니야.”
유진은 그렇게 내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열이 받아서 말실수를 할 뻔했다. 주변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세냐에게 반말을 해버리면 괜한 시선을 받게 될 거다.
“죄책감을 느껴야 할 건 나예요. 나, 이 병신 새끼.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아주 상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은 병…….”
“아니.”
이번에 말을 끊은 것은 세냐가 아닌 다른 목소리였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붕대 감은 팔을 고정한 카르멘이 비틀거리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네가 죄책감을 느낄 문제가 아니다.”
“……카르멘 님.”
“유진. 너 혼자만 라이언하트인 것은 아니잖나.”
카르멘은 평소처럼 시가를 물고 있지 않았다. 저 팔의 붕대도 멋으로 감은 것이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카르멘은, 유진의 앞에 서서 고개를 저었다.
“라이언하트가 공격받은 것에 왜 네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기괴한 상대였다.
정체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힘은, 카르멘이 싸워보았던 마왕을 우습게 여길 만큼 끔찍했다.
상대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단 것을 변명으로 삼을 수 있는가? 아니. 카르멘은 그것을 변명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강했을지라도, 이 허무한 패배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긴 것처럼 괴롭다.
“……알겠습니다.”
유진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대답했다. 죄책감을 완전히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패배해 버린 카르멘이 느끼는 분노와 굴욕감이 유진보다 클 것이다.
“……적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카르멘은 긴 한숨을 내쉬며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유폐의 마왕은 아니지만, 상대는…… 다른…… 마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
“놈이 말하더군.”
꾸욱.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정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놈이 내뱉던 말. 목소리. 별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덤덤한 목소리.
“분노를 주러 온 것이라고.”
카르멘은 태어나서 저 말 만큼 굴욕적인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분노?”
그 가짜 새끼가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바라고 저런 말을 지껄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노를 주러 왔다고?”
만약 지금 눈앞에 그 새끼가 있다면, 유진은 진심을 담아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 *
흑사자 성을 떠나서, 나하마로 갈 생각이었다.
세냐와 싸우게 된 것은 예상외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됐어.’
다른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아무도, 정말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대신 죽음보다 더한 것을 주었다.
“화가 나겠지.”
충분히 죽일 수 있는데,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리의 모두가 알 것이다. 세냐도 알 것이고, 머지않아 도착할…… 유진 라이언하트도 알 것이다.
망령은, 그들이 저 행위에 대해 의문보다 분노를 더 느껴주기를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흑사자 성에 이바타 자하부와 조란의 전사들이 와있던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는 라이언하트뿐 아니라, 역사상 최초로 대수림을 통일한 대부족마저 태워 버릴 것이다.
자연스레 키옐에도 분노는 옮겨가게 된다. 제국 영토, 그것도 국경을 침공당한 것이다. 제국 황제는 분노 전에 체면 때문에라도 이 사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애매하던 명분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유진이 바라던 전쟁이 일어나게 해주었다.
‘이걸로 됐다.’
이제 망령이 할 것은 간단하다.
나하마에 넘어가, 아멜리아 머윈을 지원하면 된다. 그러면서ㅡ 적당히 선전해 주면 된다. 흑사자와 조란의 전사들을 무릎 꿇렸다. 그러면 분노할 대로 분노한 유진 쪽에서 공격해 올 것이다.
‘네가 왜 전쟁을 바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바란다는 것은…… 네게 필요하기 때문이겠지.’
망령은 유진이, 하멜이 아가로트의 환생이란 것을 모른다. 전쟁을 통해 이름을 떨치고, 신력을 키우려는 의중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진이 바라는 이상.
‘이건 나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대로, 유진을 돕고 싶었다. 나는 하멜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하멜이 되고 싶으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하멜을 위하면서.
“그런가.”
나하마에 갈 생각이었다.
모래바람과, 사막을 보았다.
“네가 구한 존재의 의미는 그런 것인가.”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망령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밤에 선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
빌어먹을 환생 456화
“뭐냐?”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헬무드가 아니다. 판데모니엄도 아니다. 바벨도 아니다. 그런데 왜, 유폐의 마왕이 이곳에 있는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망령은 나하마에 있었다. 어딘지 모를 사막. 우선 사막에 넘어온 뒤, 위치를 가늠하고, 아멜리아 머윈에게 갈 생각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서 비명이라도 지를 아멜리아 머윈의 뺨이라도 갈긴 뒤에…… 술탄을 죽일 생각이었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나하마의 패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망령 본인도 나하마의 패배를 바랐다. 술탄이 바라는 혹시 모를 영광 따위는 주지 않을 생각이다. 어차피 꼭두각시로 쓸 뿐일 놈이니, 미리 죽여놓고…… 망령 본인이 술탄의 행세를 할 셈이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왜 갑자기 유폐의 마왕이 나타난 건가? 망령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먼 하늘. 빛은 존재하지 않는데, 몸은 또렷하게 보인다. 마치 검은색 종이에 다른 색으로 그림을 덧그린 것만 같다.
망령은 이 기괴한 세계를 알고 있다. 바벨 91층부터 존재하는 유페의 마왕의 어전. 불과 한 달 전에 망령이 쳐들어갔던 장소.
“이곳은 나의 어전.”
하늘에 선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불리지만, 나는 이곳을 어전이라 여기지 않는다.”
망령은 저 말과 웃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보이는 유폐의 마왕은ㅡ 저번에 보았을 때와 굉장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으로 즐거워 보였다. 또한.
“이곳은 내 이름에 걸맞은 곳이지.”
묻지도 않은 것을 먼저 떠들 만큼 친절하게 느껴졌다.
“감옥.”
망령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유폐’라는 이름에 걸맞은 곳이라면 감옥뿐이지 않은가. 물론, 망령은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보이는 대로’라면 꽤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91층부터 99층까지, 라는 것의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ㅡ 이 9개의 층은 오직 어둠만이 그득하다.
어둠을 밝히는 빛은 없다. 밤처럼 보이지만 별도 달도 없다. 그렇지만, 서로의 ‘존재’는 확실하게 색을 갖고서 어둠 위에 덧칠된다.
오롯이, 오로지 존재하는 유폐의 마왕.
어둠 한복판에 뜬 그는ㅡ 실로 이름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무언가를 유폐하는 자.
반대로, 그 자신조차 유폐된 것처럼 보인다. 마왕의 등을 보라. 수천수만을 아득히 넘어서는, 정말로 셀 수 없이 많은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다.
저 사슬이 유폐하는 것은 마왕 본인인가? 아니면 마왕이 저 사슬로 다른 무언가를 유폐하는 것인가. 망령은 그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답했듯, 이곳은 감옥이다.”
“……너의 감옥인가?”
망령은 떠볼 셈으로 물었다. 그러나 유폐의 마왕은 바로 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왜 이러는 것인지를 모르겠군. 나를 내쫓은 것 아니었나?”
“그 당시에 네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없었으니까.”
-혼란을 품고 있나?
-네 존재에, 네가 갖게 된 힘에 의미를 찾고 있나?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것을 바라는구나.
어전에서, 감옥에서.
유폐의 마왕은 저렇게 말했다.
-너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군.
그 당시에 망령은 죽음을 바랐다. 유폐의 마왕과 싸우다가 죽는다면. 그 과정에서 상처라도 줄 수 있다면. 만족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내 손에 죽고 싶어서 여기 온 이 상, 나는 절대로 너를 죽이지 않는다.
마왕은 망령의 바람을 거절하고 비웃었다. 말했듯이 마왕은 신이 아니다. 간절한 바람을 들어줄 이유 따위, 마왕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는 스스로 구하는 것.”
유폐의 마왕은, 그때 망령이 듣지 못했던 말을 속삭였다.
“마왕에게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뭐?”
“너 이름 없는 망령이여. 너는, 스스로 존재의 답을 찾았다. 나로서는 썩 만족스러운 답이라 여기지 않는다만, 말했듯…… 나는 신이 아니지. 너 스스로 답을 구하고 만족하였다면, 그것이 네게는 답이 맞을 터.”
운명은 반복되곤 한다.
“그렇기에 나는, 너란 존재를 인정하마.”
유폐의 마왕은 그 어떤 마왕보다, 그 어떤 신보다, 이 세상의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네가 특별하고.”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다.
“‘다음’에는 존재하지 않을, 지금에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란 것을.”
지금의 운명은 반복될 수 없다.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지금의 운명에 새로이 간섭하기로 했다.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운명을 관측하고 싶었다.
“너 이름 없는 망령이여. 존재할 리 없는, 존재해서는 안 될, 그럼에도 존재의 답을 구한 네 답이 궁금하구나.”
끼리릭. 유폐의 마왕이 등 뒤에 둔 무수한 사슬 중 하나가 움직였다. 망령은 급히 움직이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멸망의 권능을 사용해 이곳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이 시커먼 세상이, 어전이, 감옥이, 망령의 존재를 유폐하고 있었다.
“그러니 보아라.”
유폐의 마왕이 속삭였다.
길게 뻗은 사슬이 망령에게 닿았다.
망령은 벗어날 수 없었다. 사슬은 망령의 몸을 꿰뚫거나 부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닿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망령이 느낀 충격은 몸이 꿰뚫리고 부서지는 것보다 거대했다. 멸망의 마력과 뒤섞여 화신으로 거듭나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영원보다 훨씬 더 괴롭고 끔찍했다.
시간이 흘렀다.
유폐의 마왕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는 진심으로, 망령이 어떤 답을 내릴지가 궁금하고 흥미로웠다.
“나.”
망령의 입이 열렸다. 비틀거린 망령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ㅡ와르르! 망령의 머리가 아래로 쏟아졌다. 산산조각이 난 머리. 이해하고 싶지 않아 붕괴한 뇌가, 대롱거리며 내려온 눈동자에 비치며 일그러졌다.
“나에게, 무슨 짓을.”
망령은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숨을 삼켰다.
“……무슨 답을…… 기대하는 거냐.”
“기대하는 것은 없다.”
유폐의 마왕이 대답했다.
“네가 무엇을 하건, 그것이 네게 옳을 테니.”
“……왜…… 나한테 이런…….”
망령은 간신히 숨을 삼켰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나에게?”
“인과를 엮은 내가 지금에 직접 간섭할 수는 없는 일.”
“…….”
“하지만 너는 유일하다. 나는, 너란 존재를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너란 존재는 없을 것이다.”
“……나를.”
망령이 내뱉었다.
“밖으로. 내가, 가려던 곳으로 보내라.”
망령은, 유폐의 마왕이 궁금해할 답을 말로 떠들고 싶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도 그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망령의 눈을 보았다. 그는 바벨에 처음 왔을 때 이상으로,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모든 것에 혼란을 느끼고 있다.
그럴지라도 답은 구할 것이다. 혼란을 알게 되었기에, 그에 맞은 답을 구할 것이다. 가려던 곳으로 보내달라…… 유폐의 마왕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더.”
망령이 내뱉었다. 이어지는 말은 갑작스러운 내용이었지만, 유폐의 마왕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망령의 요구에 즐거움을 느꼈다.
“어려운 요구는 아니지.”
망령이 떠났다.
어전에 홀로 남은 유폐의 마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희미해졌다.
“그런가.”
유폐의 마왕은 이제야 베르무트의 의중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 가련하고 고귀한, 그리고 처절하며 집요한 남자가, 왜, 저 존재를 화신으로 삼았는지를.
“너는 끝내고 싶은 것이구나.”
고요한 감옥에서 죄인이며 간수인 자가 중얼거렸다.
화아악!
흩날리는 바람에 실린 모래 알갱이가 보였다.
사막. 망령은 숨을 헐떡이다가, 비틀비틀 자리에 주저앉았다.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던 어전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빛이 너무 밝다.
망령은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양손으로 모래를 짚었다. 이글이글 쬐는 태양열에 익어버린 모래가 손바닥을 달궜다. 뚝, 뚝. 서늘한 식은땀이 모래 위로 떨어지고 즉시 증발했다.
“…….”
망령은 한참 동안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유폐의 마왕이 보여주고 이해시킨 것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우웩……!”
결국 망령은 참지 못하고 토악질을 했다. 시커먼 피만 왈칵 쏟아졌다. 망령은 모래밭 위에서 손을 긁다가, 연신 피를 토하면서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ㅡ뿌드득! 손가락이 머리를 으스러트리고, 피와 뇌수가 뒤섞였다.
머리를 부숴 버렸는데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ㅡ내가, 무엇을 하건, 그것이 내게 옳다고? 당연한 말을. 망령은 뿌득 입술을 씹었다. 그는 멀쩡히 재생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
망령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두커니 선 망령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글이글 쬐는 태양은 눈동자를 태워버릴 듯이 밝다. 햇살에 일그러지는 하늘은 푸르고 높다. 망령은, 잠시 동안 그 높은 하늘을 보았다.
고개를 돌렸다. 사막이 보였다. 울룩불룩 솟은 모래언덕. 흩날리는 모래바람. 멀리, 아주 멀리. 그를 보고자 바라니, 이 삭막한 사막에서도 세워진 도시가 보였다. 이 모래뿐인 땅에서도 생명은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모여서 살고 있다.
더 먼 곳을 보았다.
하멜의 기억과 망령의 기억이 섞였다. 모든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세상의 풍경이 시야에 겹쳤다. 망령은 잠시 동안ㅡ 지금 앞에 존재하지 않는, 기억에서 투영한 세상을 보았다.
담백한 감상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망령은 몇 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렇게 현실로 돌아왔다. 스스로 놀라우리만큼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망령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했다. 행위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은 많이 달라졌다. 간절함이 더해졌다. 망령은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보던 것과 다른 도시가 보였다.
나하마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수도 하우리아. 그 중심에 우뚝 선 화려한 궁전. 망령은 술탄의 궁전을 응시했다.
지금 저 궁전의 주인은 술탄이 아니다. 아멜리아 머윈은 술탄을 대신해 궁전의 옥좌에 앉았다. 나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막의 던전마스터들은 아멜리아를 그랜드마스터라 숭배하며 복속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흑마법사들이 진을 치고, 수십 명의 고위 마족들은 술탄이 만들어놓은 할렘에서 주지육림을 즐기고 있다.
망령은 저 하찮은 복마전을 노려보았다.
본래 망령은 이곳 사막에서 시작될 전쟁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모두의 등을 떠밀고, 아멜리아가 하고픈 대로 날뛰게 하고, 충분한 명분을 갖고서 찾아올 유진에게 아멜리아를 던져주고…… 그 뒤에는…….
모론에게 그랬듯, 유진과도 싸워보고 싶었다. 좋은 말을 들을 것이란 기대는 안 한다. 인정받을 것이란 기대도 안 한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에 그 싸움은 진짜의 승리로 끝날 것이고, 가짜는 가짜답게 퇴장하게 될 것이다.
이름 없는 망령의 삶을 그렇게 끝낼 생각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 * *
하우리아의 빈민굴.
뒷골목의 어둠을 전전하던 헤모리아는 결국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헤모리아가 느끼기에, 부유한 상인, 지체 높은 귀족, 신실한 성직자, 매일 술이나 빨아대는 주정뱅이, 남의 주머니를 뒤지는 좀도둑, 남의 몸뚱이에 칼을 푹푹 찔러대는 살인자, 그 외에도 인간군상은 다양하지만, 피의 맛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식사하는데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피를 마시고 살을 씹어본 결과, 살아 있기만 하면 대부분 먹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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