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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7

 


“…….”


유진은 그 빛 속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밀어닥치는 감정에 빛을 ‘조금’ 이해했다. 곧, 감았던 눈이 떠졌다.


오른손이 가슴에 올라갔다.


“신검.”


나직한 중얼거림이 끝을 고했다.


빌어먹을 환생 490화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허무 속에서 결국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사실 나도 알아. 기술의 완성도에서 격차가 너무 많이 났다. 내가 나름 개량했던 기술들은, 결국 ‘진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


대답이 돌아올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 부족하던 것이 아니잖아. 나는…… 나는, ‘강하다’고 생각한다. 300년 전에 죽은 마왕들보다 훨씬 강해.”


망령도 알고 있다.


“이 강함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란 것은 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 강함에 자만하고 자부하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나에겐 힘이 필요했고, 너는, 필요한 만큼 힘을 주었지.”


이건 결국 넋두리다.


“네가 내게 무엇을 바랐는지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너는 계속해서 힘을 보태주었으니…… 내 선택 자체가 아주 틀렸던 것은 아니겠지.”


거기까지 말하고서.


망령은 잠시 입을 닫고 침묵했다. 짙고, 복잡하고, 질척한…… 그런 감정이 몰려왔다. 망령은 감정의 파도에 잠식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난 실패했지.”


한숨이 씁쓸한 웃음이 되었다.


“최선은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조금만 더 하면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실패했어.”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멸망의 마력. 베르무트의 백염식과 마법. 하멜의 기술. 화신다운 직관과 직감. 가진 모든 것을 조율하여 풀어내는 것이 어설펐나?


“……하긴.”


잠시 생각하던 망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실패한 것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비록 유진이 ‘오늘’ 증명에 성공했다 한들,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해서는 패배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ㅡ 이 시대, 이 세상, 모든 것에 ‘다음’이 없게 된다. 전생을 반복하고, 안배가 더해져 특별해진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약속할 상대가 없는 이상 유폐의 마왕은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으리라.


상상이 불안이 되고 짙어진다. 동시에 두려움이 태어났다.


“나는 옳았던 걸까?”


내가 더 잘했다면? 내가 더 강했다면. 유폐의 마왕이 진실을 알려준 것이 마왕 나름의 마지막 자비였다면? 베르무트가, 나를 화신으로 삼은 것이. 다음을 기약하라는 의지였다면.


“아니.”


망령은 크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저런 나약한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력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다. 가진 모든 것을 써서 유진을 죽이려 했다.


닿지 못했을 뿐이다. 유진은, 강했다. 그 무식한 놈은 성녀의 보조 없이, 세냐의 도움 없이 망령을 베었다.


“결국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는 법일까.”


작은 중얼거림.


“진짜와 가짜와는 관계없다.”


대답이 들렸다.


망령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공허한 세계. 쇠사슬에 묶인 의자에 앉은 베르무트가 보였다. 그는, 이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지는 않았다.


고개를 똑바로 든 베르무트의 얼굴은, 여전히 초췌해서 마모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흐리멍덩하기는커녕 또렷한 빛을 품고 있었다.


“너는 너일 뿐이니까.”


베르무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어서 그리 듣기 좋지는 않았다. 망령의 기억 속에 있는 베르무트의 목소리와도 크게 달랐다.


하지만. 달라졌다고 해도 그는 틀림없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


“제멋대로 행동한 것은 나였지.”


망령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베르무트를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선택할 수가 없었다.


“하멜에게도, 세냐에게도, 아니스에게도, 모론에게도, 그리고…… 네게도. 나는, 멋대로 이해를 강요했다. 무엇 하나 설명하지 않고, 내 뜻대로만 행동했지.”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것에, 망령은 벌어지던 입술을 억지로 닫았다. 베르무트는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지금 말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무리하고 있다.


“나는, 네게 힘을 준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선택을…… 네게 맡긴 거다. 네가 무엇을 하였건. 내게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자격은 없다.”


망령의 몸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그는, 베르무트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했다. 베르무트에게 더 큰 무리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말은, 망령인 뇌까렸던 말의 대답이었다.


“네게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베르무트가 말했다.


“내 바람이, 괜히 너를 휘말리게 한 것만 같아서. 네가 바란 적 없는 입장과 선택을 강요한 것만 같아서.”


처음 보았을 때의 베르무트의 시선은, 적의가 대부분이었다. 그때의 베르무트는 망령의 존재를 긍정할 수가 없었을 거다.


소중한 동료의 시체에서 태어난 데스나이트. 자신을 하멜이라고 멋대로 착각하는 가짜.


하지만, 도중부터 베르무트의 시선은 바뀌었다. 적의는 사라지고, 연민이 빈자리를 대신 채웠다. 왜 베르무트가 그런 감정을 품었던 것인지. 망령은 그 이유를 이해했다.


“나는 네 존재를 인정한다.”


베르무트는 씁쓸히 웃었다. 갈라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망령은 우두커니 서서 베르무트를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지금 너는 왜 그러고 있는 것인지. 그런 너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베르무트에게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을 걸어봤자 원하는 모든 대답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베르무트와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커다란 기적이다.


“그리고, 미안하다. 네게 너무…….”


“됐어, 새끼야.”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늘고 갈라진 목소리. 망령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야.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 내가 선택한 거라고.”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감정을 가다듬었다.


“내게 힘을 주어서 고맙다.”


베르무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내게, 기회를 줘서 고맙다.”


베르무트의 존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철그럭, 하는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그보다 멀리, 파도가 치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버텨.”


피차 시간이 많지 않다.


“네 동료들이.”


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뭘.’


망령은 그렇게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네 친구들이 널 구하러 갈 테니.”


베르무트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에 베르무트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끼릭, 끼리릭. 점점 강하게 당겨지는 사슬에서 쇳소리가 울렸다.


점점 베르무트의 모습이 희미해진다. 동시에 세계가 무너져 내린다. 망령은, 이 한순간의 기적에 감사를 느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그래.”


패배했다.


하지만 실패한 것은 아니다. 망령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았다. 전력을 다해 용사를, 유진을 시험했다. 그러고서 패배했다.


이 패배는 절대로 실패가 아니다. 망령은 패배했을지라도 유진은 승리했으니까. 패자다운 넋두리는 할지언정,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미래를 저주해서는 안 된다.


망령이 해야 할 것은.


유진을 믿는 것이다.


그의 동료들을 믿는 것이다.


그를 따르는 세상을 믿는 것이다.


“하하.”


망령은 짧은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돌렸다.


기적이 이뤄 준 재회. 원하는 만큼의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상관없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들었으니.


그러니 이제는.


“가자.”


끝을 맞이할 때다.


ㅡ콰아아아!


3번째 휘두르는 신검은 마지막임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강렬한 빛을 발했다. 전장의 염원과 기도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모두가 유진의 이름을 연호하며 가슴에 품고 우러른 만큼, 신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닿았다, 라고 생각했지만. 망령의 불꽃은 유진에게 닿지 못했다. 부서진 성검이 내뿜은 빛은 불꽃의 침범을 불허했다.


가슴에서 뽑은 신검은.


모든 것을 베었다. 불꽃도, 마력도, 망령의 존재까지도.


받아들였다.


망령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늘이었다. 마력이 말소된 하늘. 망령은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큭큭 웃었다.


“기적.”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어느 즈음부터 시작된 기적이었을까? 신검이 뽑혔을 때? 신검이 불꽃을 베었을 때? 아니면, 내 존재 자체를 베었을 때? 모르겠다. 그만큼 찰나였다.


하지만 기적은 달콤하고 길었다. 망령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손은ㅡ 여전히 가슴에 올라가 있었다. 의외로 몸은 멀쩡했다. 허리부터 썩둑 잘렸거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망령의 존재는 베였고, 더 이상 되살아날 수 없다. 노심도 거의 붕괴했다. 신검 때문이 아니더라도, 망령은 곧 소멸한다.


“이게 내 증명이로군.”


망령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유진은 망령의 바로 근처에 있었다.


지쳤다. 일어서 있는 것도 힘들다.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기절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 그럴 수는 없었다.


“증명?”


유진은 툭 내뱉었다.


전장은ㅡ 정리되고 있다. 신검이 망령을 벤 순간, 신기하게도 누르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망령이 폐허에 떨어진 후부터는 누르들의 몸뚱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저 괴물들의 존재를 구성하던 마력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는 전장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 순간, 유진이 해야 할 것은ㅡ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다.


“너를 위한 증명.”


망령은 유진을 보며 웃었다.


“나는 전력을 다해, 널 죽이려 했다. 그렇지만 죽이지 못했지. 나는 패배했고, 네가 이겼다.”


그 패배 자체가 유진 라이언하트의 힘을 증명한다. 유진은 망령보다 강하다. 비겁하다는 말도 늘어놓을 수 없을 완벽한 승리다.


“훌륭하다.”


망령이 말을 이었다.


“너는…… 강해. 나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하다.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강해지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방금 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소멸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베르무트를 만났다.”


“그러냐.”


유진은 놀라지 않았다.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신검이 망령의 존재를 베는 순간. 놈의 잔재가 어디론가 흘러갔다. 유진의 능력으로는 간섭이 불가능했지만, 망령의 존재가 무엇에 연결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흘러간 곳이 어디인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새끼가 뭐라디?”


“날 인정한다더군.”


“잘됐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망령의 옆에 털썩 앉았다.


“다른 말은 안 해?”


“내게 미안하다더군.”


“당연히 미안해야지, 개새끼. 그런데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안 했냐?”


“그런 말은 안 했다.”


“진짜 개새끼네.”


유진은 고개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네가 구하러 갈 거라고 말했다.”


“어.”


“그 외에는…… 네가 흥미를 느끼거나, 필요하다고 느낄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다만, 베르무트 또한 시간이 많지 않았거든.”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망령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모론은 못 부르지만…… 바란다면 세냐랑 아니스는 불러줄 수 있어.”


“새끼. 내가 그 둘이랑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라는 거냐?”


망령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가 세냐와 아니스, 모론에게 품은 감정은 결국 하멜의 기억에 기인한 것이다.


거기에 동경이 섞여 있다.


“그딴 배려는 필요 없다. 나는…… 지금이 좋아.”


진심이었다.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미련은 없냐?”


“남기지 않기로 했다.”


망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련을 남기는 것. 미련을 갖는 것.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


패배에 대한 미련. 실패에 대한 미련.


“남긴들 무의미하니까. 그러니…….”


“지랄하지 마.”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망령의 어깨를 툭 쳤다.


“뒈져가는 놈이 어떻게 미련을 안 남겨? 억지로 생각해 봤자 진짜 미련이 안 남는 것도 아니잖아.”


“…….”


“미련을 느끼면 그냥 두고 가라.”


어깨를 쳤던 손이 움직였다. 가슴에 얹고 있던 망령의 손등 위에 유진의 손이 얹어졌다.


“내가 가져갈 테니까.”


망령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 찬란한 금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에는 한 점의 비웃음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제 자신에 대한 확신. 신념. 결의. 그런 것만이 가득했다.


“……하하!”


미련을 남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로라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유진의 말이 옳다. 만족스러운 죽음일지라도 끝에는 누구나 자그마한 미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


꾸욱. 망령은 가슴을 손가락으로 쥐면서 말했다.


“네가 가져가라.”


패배했다. 이기고 싶었는데, 패배했다. 닿을 것만 같았는데 닿지 못했다.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용사는, 유진 라이언하트는,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베르무트를 구할 수 있을까. 아니스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세냐는? 모론은?


그, 모든 미련을 유진에게 맡겼다. 그렇게 바랐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을 본 망령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망령의 몸이 재가 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망령은 제 몸이 붕괴하는 것을 웃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미련을 남기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보다, 미련을 남기고, 맡기는 것이 오히려 더 마음이 편안했다.


“너라면 할 수 있겠지.”


“당연히 할 수 있지.”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고, 망령도 함께 웃었다.


“그래.”


얹었던 손등이 상반신과 함께 재가 되었다. 망령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유진 라이언하트니까.”


전쟁신의 환생이니까.


하멜의 환생이니까.


용사니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망령이 그냥 그였듯, 유진 역시 그냥 그일 뿐이다.


“졸리지는 않군.”


하멜의 기억에서 마지막은 졸렸던가? 잘 모르겠다. 애당초 기억 속의 최후는 조작된 것이었으니.


지금은 졸린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조용히, 의식이 꺼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가라.”


망령이 중얼거렸다.


“그래.”


유진은 손에 남은 재를 움켜쥐었다.


“가자.”


용사가 대답했다.


빌어먹을 환생 491화


소멸한 망령이 남긴 것은 한 줌 남짓한 재뿐. 유진은,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에 남은 재를 응시했다.


미련을 두고 가라고 말한 것은 유진이다. 함께 가져가 주겠다고 말했다. 망령은 거절하지 않았다. 억지로 미련을 떨쳐내려 했던 망령은, 결국 유진이 말한 대로 미련을 남겼다.


놈이 가진 미련이 무엇인지.


“이상한 기분이야.”


하나하나 들은 것은 아니다. 가진 미련을 털어놓을 만큼의 시간은 망령은 갖지 못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망령이 최후에 가진 미련이 무엇인지ㅡ 알 것만 같았다. 세상에 대해. 인연에 대해. 미래에 대해. 나에 대해.


그런 것들. 유진은 손바닥의 재를 천천히 거머쥐었다. 이걸 뼛가루라고 할 수 있을까. 유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놈을 ‘가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놈이란 존재를 이해했나? 이해는 멀다고 생각하지만, 대화는 나누었다.


놈은 적이었나?


유진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도시’의 흔적은 거의 남지 않았다. 이 널따란 땅은, 단순히 과거에 도시‘였던’ 폐허가 되었을 뿐이다.


누르는 모두 죽었다.


사람들도 여럿 죽었다. 침공 때 하우리아에서 탈출하지 못한 시민들. 망령의 힘에 홀려 괴물이 된 병사와 전사들. 인간, 이라고 세지는 않는 흑마법사들.


유진과 함께 온 해방군들.


아군 중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겠다. 이런 생각은 애초부터 한 적이 없었다. 어린애들이 모여 하는 전쟁놀이에도 부상자가 나오는 마당에, 마족과 괴물과 싸우는 진짜 전쟁에서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과장해서라도 큰 피해라고는 할 수 없다. 전장의 규모와 상대해 쓰러트린 적들을 생각하면, 아군의 피해는 경미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군의 죽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백 명은 넘을 사상자가 나왔다. 세냐가 뒤를 봐주고 성직자들이 실시간으로 상처를 치료했기에 저 정도의 피해로 끝났다. 만약 세냐가 전장을 돌보지 않거나, 성직자들의 손발이 맞지 않았다면ㅡ 피해는 훨씬 더 컸으리라.


“적이지.”


유진은 움켜쥔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망령은 전쟁을 벌였다. 그것이 유진을 위한 전쟁이었을지라도, 놈이 전쟁을 벌인 것은 사실이다. 나름대로 시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추방이란 명목으로 피난도 시켰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전쟁이다.


아군이 피해를 입었다. 경미한 피해일지라도 누군가가 죽고 부상을 입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망령이 불러 모은 흑마법사와 언데드, 마물, 마족, 누르다.


망령은 ‘적’이다.


“하지만 마왕은 아니었어.”


유진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적일지라도 마왕은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고 이해를 시도했다. 방식이 달랐을지언정 추구한 바는 결국 같았다.


그래서 놈의 ‘미련’을 가져가기로 했다. 유진은 천천히 가슴을 움켜쥐었다.


파직.


조금 남은 신력이 유진의 손을 휘감았다. 조그마한 단검 하나로도 만들 수 없는 신력이지만 별 상관없었다. 검으로 휘두르기 위해 뽑아낸 신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진은 손을 휘감은 검붉은 신력을 잠시 응시했다. 그것은 백염식과는 다른 형태의 불꽃처럼 보였다.


반대편 손을 신력의 불꽃에 가까이 가져갔다. 쥐고 있던 손가락을 열자, 검은 재가 흩날려 불꽃에 삼켜졌다.


[장례입니까?]


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새 다시 성녀들과 연결된 것이다. 호된 욕설과 꾸중, 못해도 쌀쌀맞은 목소리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아니스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화 안 났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 감정을 우선할 수 없으니 참고 있을 뿐. 당연히 화는 났습니다. 이따가 하멜, 당신의 엉덩이를 때려줄 겁니다.]


“그거참 무섭군…….”


[질문에나 대답하십시오. 지금 당신이 하는 것은 장례입니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의식입니까?]


“옛날에는 이렇게 했다.”


유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유해를, 재를, 신력으로 태워서. 더하는 것이지.”


[무엇을 더하는 겁니까?]


“미련, 신념, 긍지, 뭐 그런 것들. 진짜로 더해지는 것은 아니야. 으레 그런 의식이지.”


신력의 불꽃 속에서 재가 춤을 추었다. 이윽고 서서히 재가 사라져간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주술 비슷한 것은 싫어했던가?”


[어릴 때는 그랬죠. 정확히 말하자면, ‘싫어해야 한다,’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식의 장례는 주술과 이단이라고도 배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망령이란 존재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 그것은 아니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아니스는 망령의 선택을 존중할지언정,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민은 품고 있다.


망령은 결국 혼자였으니.


[소멸한 그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그 존재가 괴로운 삶을 살아간 어린양으로서, 죗값을 치른 뒤에 천국에 인도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냥은 인도될 수 없나 보군.”


[이유야 어쨌건 그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아니스는 단호히 말했다. ……빛이 정말로 죗값을 물을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만. 아니스는 굳이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리고 하멜. 당신도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시스터. 유진 님은 이그니션의 부담으로 움직이지 못하실 겁니다.]


[어머나, 크리스티나,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저희가 직접 가야겠군요.]


[네,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멜. 잘 들었지요? 저희가 곧 갈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나 마나 몸을 가누기 힘들어할 테니, 얌전히 그 자리에 엎드려 엉덩이를 까고 계십시오.]


[시스터? 엉, 엉덩이라니, 대체 무슨 망측한 말을 하시는 겁니까?]


[내심 기대하는 중이면서 모르는 척 내숭은 떨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 당신도 얄미운 하멜의 엉덩이를 때리고 싶지 않습니까?]


재잘재잘 오가는 이야기에 유진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도저히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차분한 척하고 있지만 아니스는 굉장히 화가 난 상태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아니스는 진심으로 유진의 엉덩이를 때릴 생각인 것이 틀림없었다……


‘도…… 도망……’


불가능하다. 아니스의 말마따나 이그니션의 대가로 몸을 가눌 수가 없다. 유진은 급히 망토를 들췄다.


“메르야, 나를 데리고 도망쳐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메르는 아까부터 기절한 상태였다. 전투의 보조에 대한 부담은 없었지만, 거듭된 충돌의 파장은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가로 창백했던 얼굴에 더욱 핏기가 가셨다.


유진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성녀들을 태우고 있는 라이미르아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라이미르아뿐만이 아니다. 세냐도 가까이 오고 있다.


“…….”


아니. 그냥 해방군 전원이 유진에게 오고 있다. 수백의 기병대와 수천의 지상군이,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승리의 기쁨이야 당연히 나눠야 하는 것이다. 승전보를 알리고 축제도 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껏 용사이자 전쟁신다운 위엄을 보이며 전쟁을 끝냈는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에게 구박을 받고 엉덩이를 얻어맞는다? 기껏 쌓아 올린 숭배와 신앙이 시궁창에 처박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엉덩이를 때리는 건 좀…….”


황급히 말을 덧붙이다가.


오싹거리는 기분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그 높은 하늘의 끝자락에서, 무언가가 반짝 빛을 발했다.


순식간에 하늘이 일그러졌다. 낙하해 오는 빛은 구름을 관통하고 하늘에 구멍을 뚫었다.


“저 개새끼.”


스스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유진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의지는 한둘이 아니었다.


성녀들이 즉시 기적을 일으켰다. 눈부신 빛이 유진을 휘감았다. 검신이 부서진 성검도 빛에 호응했다. 라이미르아가 용언을 외었다. 세냐가 다수의 대마법을 일으켰다. 멜키스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로베리안의 판테온이 통째로 이동해 유진을 위한 방패가 되었다. 이바타가 도끼를 던졌다. 알체스터가 공검을 휘둘렀다. 카르멘이 와이번의 위에서 도약했다. 시엘이 피를 토하며 마안을 부릅떴다. 라파엘로가 아폴로와 함께 비상했다. 길레이드가 라이언하트의 깃발마저 집어 던지고서 달렸다. 시안이 경악하여 유진의 이름을 외쳤다. 아만이, 오르투스가, 아이빅이, 마탑주들이.


모두가 의미를 잃었다.


마검 글로리. 유폐의 마왕이 직접 하사한 검. 현존하는 마안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위신의 마안. 그 모든 것을 사용하는 가비드 린드먼의 힘은, ‘유폐의 칼’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라이미르아의 용언을 통째로 부정했다. 세냐의 마법을 마나의 근원 채로 베었다. 몸을 직접 날렸던 멜키스의 오메가 포스가 박살이 났다. 로베리안의 판테온도 두 동강 났다. 이바타의 도끼가 소멸했다. 알체스터의 공검이 허공에서 터졌다. 카르멘은 검풍에 휘말려 뒤로 날아갔다. 시엘의 마안은 적을 붙들지 못했다. 라파엘로와 아폴로가 함께 추락했다. 지상에 내려앉은 충격파가 길레이드와 시안을 함께 날려 버렸다. 가비드는 그 외에 모든, 유진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베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유진을 감싼 빛. 추락한 가비드는 그 빛을 꿰뚫어 보았다. 빛 한가운데의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겁에 질렸나? 죽음을 직감했나? 분노했나? 찰나의 순간, 가비드는 유진의 표정을 상상했다.


모두가 틀렸다. 일그러져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유진은 오히려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입술 한쪽 꼬리를 비틀어 올린 비웃음.


“…….”


유진과 망령의 전투 내내 고민했다. 그리고 억지로 결론을 쥐어짰다.


이 행동은, 마족다운 것은 아니다. ‘유폐의 칼’이란 명예로운 이름에 부합한 행동도 아니다. 하지만 헬무드의 대공으로서는 옳은 행동일 것이다.


전투를 보면서 직감했다. 몰살의 하멜. 유진 라이언하트. 용사. 그는, 너무 강해졌다. 심지어 전투 중에도 계속해서 강해졌다. 놈의 검은 진즉부터 마왕에게 닿을 만큼 예리했고, 이제는ㅡ 유폐의 마왕의 옷자락 정도는 능히 벨 수 있을 것만 같다.


저것이 마지막이라면. 굳이 이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가비드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 결코 유진 라이언하트의 마지막이 아니란 것을. 그의 검은 더욱더 예리해질 것이다. 특히 망령을 베었던 그 검붉은 빛의 검은ㅡ 성검이나 월광검 이상으로 치명적이며, 가히 무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가비드의 위신(威神)의 마안은, 유진의 검이 가진 가능성을 엿보았다. 저것이야말로 신위(神威). 결코 묵인해서는 안 될 신앙의 정수.


그렇기에 배제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헬무드의 ‘적’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적기다.


놈은 지쳤고, 방심했다. 지금이라면 무조건 죽일 수 있다. 놈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두가 유진을 지키려 들겠지만,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를 사용한다면 모든 방해를 배제하고 일검에 유진을 죽일 수 있다.


“……허.”


이래서야 내 꼴이 우스워질 뿐일 것은 안다.


마족의 투쟁심. 유폐의 칼다운 긍지. 가비드 린드먼 개인의 열망.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헬무드의 대공다운 선택을 하기로 했는데.


저 비웃음을 봐버리니 그럴 수가 없었다. 가비드는 스스로 자조하며 손에 힘을 풀었다.


ㅡ화아아악!


시커먼 빛을 뿜어대던 글로리가 우뚝 멈췄다. 가비드는 빛을 가르지도, 유진을 베지도 않았다. 그냥 제자리에 멈춰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왜 멈추냐?”


유진은 여전히 비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무서워서 죽이려 한 것 아니었어?”


“그랬지.”


가비드는 부정하지 않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네 비웃음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 지금 여기서 널 죽이면…… 나는 평생을 후회할 것 같다. 그리고 평생을 미련을 갖게 될 거다.”


“미련?”


“300년 전과 똑같이 되겠지.”


그때 가비드는 하멜과 세냐를 죽이지 않고 물러섰다. 하멜의 살의와 기백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가비드에게 있어서, 하멜과 싸워 끝을 보지 못했던 것은 긴 후회로 남았다. 그때의 굴욕. 한순간이나마 느꼈던 공포. 청산하지 못한 감정은, 하멜이 죽어버림으로써 절대로 극복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유진을 죽인다면ㅡ 앞으로 평생을 후회와 미련을 갖게 될 것이다. 굴욕과 공포 또한 더욱 곪아 썩어가리라.


“그리고.”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글로리를 거두었다.


“내가 널 죽이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검을 내리찍었을지라도…… 정말로 널 죽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군.”


직전까지는 무조건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글로리를 거둔 지금에 와서야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가비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가비드의 바로 뒤에 있었다. 태양을 등졌기 때문인지 누아르의 얼굴은 평소보다 음영이 짙었다. 그래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금 누아르의 얼굴에 표정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보라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던 눈동자조차도, 지금은 빛을 잃고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마어마한 살의. 누아르에게서 살의를 느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저 살의는 ‘낯설다’. 마치 누아르 제벨라가 아닌 다른 존재의 살의를 맞닥트리고 있는 것만 같다.


동시에. 가비드는 누아르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느꼈다.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까지 썼는데도 누아르가 배후에 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가비드가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유진을 죽이려 했다면ㅡ 누아르는 지체없이 개입했을 것이다.


그걸,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누아르의 방해마저 배제하고서 유진을 죽일 수 있었을까?


“이 정도였던 거요?”


가비드는 누아르를 응시하며 물었다.


중의적인 질문이었다. 가비드는, 누아르가 이만큼이나 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힘이야 인정하는 바이지만,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에 버금갈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누아르가 이 정도로 유진을, 하멜을 위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집착도 알고는 있었지만…… 저 살의는 ‘진짜’다. 누아르는 정말로, 정말로 유진을 위해 가비드를 죽일 생각으로 나섰다.


“…….”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움직여, 가비드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빛에 휘감긴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약지의 반지.


안쪽에 새겼던 이름.


하멜 다이너스의 이름을 새겼던 반지를 느꼈다.


빌어먹을 환생 492화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를 처음으로 보았던 것은 300년 전의 전쟁 시대. 전쟁이 발발하기 수백 년도 전부터 누아르는 ‘몽마의 여왕’이었으며, 전쟁 시대에서도 그 지위를 유지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전쟁 시대의 무수한 사건을 거치면서, ‘몽마의 여왕’의 이름은 인간들에게 끔찍한 악몽과 동의어가 되었다.


‘몽마’는 그리 강한 종족이 아니다. 재주도 많지 않다. 고위 몽마라면 보다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지고 있겠지만, 대부분의 몽마가 가진 재주는 ‘꿈’을 파고드는 것뿐. 잠으로 인도하는 것조차도 뜻대로 할 수가 없어서, 하위 몽마들은 술이나 약, 혹은 몸까지 사용해 가며 정기를 취한다.


여왕은, 누아르 제벨라는 다르다.


공포를 쌓고 악몽이 되었다. 대단치도 않은 종족인 ‘몽마’이면서도 마왕을 논할 만큼의 힘을 거머쥐었다. 그 누구도 누아르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녀가 여왕이 되고서 ‘몽마’라는 종족 자체의 격이 올랐다.


그 시대는 즐겁고 좋았다. 눈치 볼 것 없이 마음대로 날뛸 수 있었다. 마족다운 본능과 욕망에 충실할 수도 있었고, 몽마다운 본능과 욕망에 충실할 수도 있었다. 수백 수천 수만의 꿈을 희롱했고, 인간의 목숨을 잡초나 벌레처럼 짓밟았다.


잡초? 벌레?


비유가 아니다.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실제로 그러했다.


대부분 인간은 100년도 살지 못한다. 전쟁 시대에서는 수명이 훨씬 짧아진다. 오래 살아봐야 수십 년. 그 수십 배의 시간을 살아온 누아르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종족은ㅡ 나약하고, 하찮고…… 단점이 가득한 종족이었다.


장점이 없지는 않다. 누아르도, 인간이 ‘필요하다’는 자각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마족이나 다른 종족에게 정기를 뽑아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인간은 ‘사냥감’으로 아주 훌륭했다. 숫자가 많고, 일 년 내내 발정기라 할 수 있기에 번식률도 높다. 지성을 가지고 있고, 대화가 가능하며 무언가를 가르치면 배우는 것도 빠르다. 그렇기에 ‘꿈’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으며, 정기의 회복도 빠르다.


그 정도의 자각.


동등하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생각하는 장점이라고는 사냥감으로서의 장점뿐. 인간을 싫어하지는 않다. 오히려 좋아한다. 귀엽다, 정도의 생각은 가질 수 있었다.


그런.


고작 인간 따위가.


마족과의 전쟁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ㅡ특별한.


그런 인간은 있다. 앞서 말했듯 다른 짐승들처럼 발정기가 구분된 것도 아니라서, 의욕과 상대만 있다면 언제고 번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수가 많다.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간혹 종족의 규격에 어긋난 ‘특별한’ 놈들도 나타난다.


300년 전에도 그런 ‘특별한’ 인간이 5명 있었다.


유라스의 시조 이후 처음으로 성검 알테어의 주인이 된 용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북방 야만족들 중에서도 호전적인 것으로 유명한 바야르 부족의 차기 족장, 모론 루하르.


빛의 신에게 선택 된 역대 성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녀, 아니스 슬리우드.


인간이면서도 대수림 엘프과 함께 자란 대마법사, 세냐 메르데인.


전장에서 위명뿐만 아니라 악명도 높던 용병, 하멜 다이너스.


최초에 그들에게는 거창한 수식어는 많이 붙지 않았다. 하지만 서열 5위 살육의 마왕이 저들에게 살해당한 후로, 각자의 이름 앞에 거창하고도 두려운 수식이 붙었다.


절망의 베르무트.


공포의 모론.


지옥의 아니스.


재앙의 세냐.


몰살의 하멜.


당연히 누아르도 저들의 이름을 들었다. 활약에 대해서도 들었다.


관심이 갔다. 특히나 그녀는 마족들 중에서도 인간을 애호하는 편이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난다면ㅡ 거느리게 될 거대한 영지에서, 제법 넓은 땅을 인간을 위해 제공할 용의도 있었다.


마음은 당장 저들을 보러 가고 싶었다. 특별한 인간은 맛조차도 특별한 법이니까.


하지만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전쟁은 한창이었고, 헬무드는 넓었으며, 누아르가 선택한 전장은 용사들의 동선과 겹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겹쳤다. 겹칠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넘게 이어진 전쟁. 살육의 마왕, 참혹의 마왕, 광란의 마왕이 죽었다. 넓은 헬무드에서 남은 마왕은 고작 둘 뿐. 그마저도 멸망의 마왕은 ‘성’을 두지 않고 떠도는 마왕이기에, 사실상 ‘영지’는 유폐의 마왕의 것만 남은 상황.


죽은 마왕들의 땅은 모두가 인간에게 정복되었다. 자연스레 마족들의 영역은 함께 줄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에게 충성한 마족의 대군은 건재했으며, 영지 판데모니엄 후방의 땅들은 인간의 발길에 정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경의 정복을 꿈꾸는 모든 열망이 판데모니엄으로 향했다. 헬무드에서 살아남은 많은 인간이 판데모니엄으로 향했다. 코흘리개에 지나지 않던 대륙의 소년들도 청년이 되어 무기를 쥐고 판데모니엄으로 향했다.


누아르도 전장을 옮겼다.


유폐의 마왕과 계약은 맺지 않았다. 마왕과의 계약 따위, 족쇄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을 마왕에게 종속되어 힘을 받아먹는 처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계약은 맺지 않았지만 거래는 했다. 판데모니엄의 일정 구역에 군림하여 ‘사냥’을 허락받았다. 유폐의 마왕 휘하에서 활약하는 대신, 언젠가 전쟁이 끝난다면. 활약 하에 작위도 약속받았다.


더 큰 욕심은.


내지 않았다. 10년 넘게 이어진 전쟁 시대에서 큰 힘을 쌓았다. 어쩌면 정말로 마왕의 자리를 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린다면?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가, 웃으며 그만두었다.


“그런 것은 욕심이 나지 않는걸.”


애당초 욕심이란 것이 뭘까? 무언가를 탐내는 마음. 하지만 누아르는 그 ‘욕심’이란 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가져왔기 때문이다. 가지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 바란다면 가질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아쉬움을 느낄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가 만드는 환상은 현실과 다를 것이 없으니 말이다.


마왕의 자리? 대마왕의 자리? 유폐의 마왕이 가진 영지? 꽤나 대단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욕심이 나지 않는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가 추구하고 바라는 것은-


“뭘까?”


누아르 본인조차도 욕심과 갈망을 형언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스스로도 알 수 없던 것들을,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멜 다이너스.


몰살의 하멜.


그는, 그는…… 특별했다. 그에게 느낀 ‘특별함’ 자체가 누아르에게는 의외라 생각됐다.


5명. 용사와 동료들. 가장 특별한 것은 누구일까? 100명에게 묻는다면 모두가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가장 특별한 것은 용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고.


하지만 누아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베르무트도 특별하기는 했다. 모론도, 세냐도, 아니스도, 모두가 특별했다.


하멜만큼은 아니다. 다른 4명이 가진 특별함은, 하멜이 가진 특별함만큼이나 누아르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들을 처음으로 습격했을 때. 누아르는 가진 힘에 자신이 있었지만 ‘적’들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상대는 3명의 마왕을 쓰러트린, 인간이란 ‘종’을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전사들. 애당초 몽마는 정면에서의 승부를 장기로 삼는 종족이 아니니, 누아르는 ‘몽마’답게 싸우기로 했다.


5명의 꿈을 파고들었다.


“아.”


강렬한 감정. 밑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골.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자맥질. 진한 피의 냄새. 금속과 금속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부딪치고, 결국에는 살을 베고 뼈를 가르며 내장까지 파고드는, 절명의 단말마와 신음, 비명, 뒤섞이는 감정,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증명받는 삶과, 과열과, 황홀과, 망아와.


살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살의. 전장에서 싸우고, 상대를 죽이게 만드는 원초적인 감정. 그 어떤 인간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하고 거대한 살의. 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살의.


그때의 오싹거림을 잊을 수가 없다. 평생 단 한 번도 나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순간, 누아르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번 겪어보았음에도, 누아르는 그 순간의 오싹거림과 끝내 도달하게 될 죽음을 재현할 수가 없었다.


하멜은 특별했다.


누아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해줬다. 스스로 자각한 적 없는 욕심과 갈망을 깨닫게 해줬다.


특별하기에 시선이 갔다.


집착했다.


내가 평생을 모르는 것을, 나에게 깊숙하게 새겨주기를 바랐다. 내가 그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듯, 그 또한 나를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를 바랐다.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특별하다 여기고, 무언가 다른 것을 바라며,


“우리가 꼭 이럴 필요가 있는 걸까.”


“후후,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이러지 않고…… 다른……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후회하는 건가요?”


“너는.”


“후회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당신이 너무 깊이 스며들었나 봐.”


“…….”


“당신도 그런 거죠?”


만약 그가 후회와 애증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피범벅인 손을 들어 눈꼬리와 뺨을 닦아주면서.


“나는 평생 당신을 잊지 못할 거야.”


이런 뻔한 대사를 읊으며.


만약 그에게 죽는다면, 그 또한 황홀하고 기쁠 것이다.


내가 그를 죽인다면, 평생 그를 추억하며 상실감을 품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둘 모두 좋다. 어느 쪽이든 삶에 다시 없을 특별함이니.


그 욕심과 갈망은,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의 것이다.


-신이시여.


지금의 그녀라는 존재. 헬무드의 공작. 드리무어와 제벨라 시티의 주인.


감정.


욕심.


갈망.


모든 것은 당연히도 누아르 제벨라의 것이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아니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아니게’ 되고 있다. 주관이 흔들리고 있다. 다른 무언가가 섞이고 있다.


-나의, 신이시여.


그녀는 일국을 지배했고 주변국을 침략했으며, 손에 넣은 모두를 제물로 바쳐 악신의 자리에 도전했다.


-당신은, 과거 제게 모든 것을 빼앗으셨사옵니다. 신화를 목전으로 두었던 저는, 당신에 의해 몰락했사옵니다.


그녀는 전쟁신의 성녀였고.


-나의 신이시여. 저는 당신을 증오했습니다. 복수를 바랐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그 증오와 복수심마저 유흥으로 여기셨지요. 언젠가, 언젠가 제가 당신께 복수할 것을 고대하였지요.


그전에는 황혼의 마녀라 불리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허무해졌사옵니다.


누아르 제벨라의 삶이 아닌, 전쟁신의 성녀이자 황혼의 마녀의 삶. 그 끝을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것도 아닌 삶은,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멋대로 떠오른 기억이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손가락으로 뇌를 후벼 파고 몇 번이나 사고를 끊어냈음에도, 끊어진 사고가 연결될 때마다 바라지 않은 기억이 더해지고 감정이 동반되었다.


전장.


넓은 전장. 괴물과 인간의 시체가 뒤섞인 곳. 다가오는 멸망.


검붉은 신력.


-제 얼굴이 추하여 보여드리기 부끄럽사옵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어루만졌었지.


얼굴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그에게는 언제나 요염하고 아름다운, 그런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마저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아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어.


마지막이 다가오는데도.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어.


나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남길 수가 없었어.


-평소랑 똑같이 아름다운데 뭘.


당신은 나를, 아름답다고 말해주었어.


평소랑 똑같이.


-나의 신이시여.


나는 당신을 배신할 생각이었어. 언젠가, 언젠가 반드시. 언제든지 할 수 있었어. 내가, 당신의 성녀가 되었던 것은 언젠가의 타락을 위해서였어. 신을 배신하고 신도를 제물로 바친 성녀. 그러한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우리의 마지막인 지금, 저는, 당신의 뜻을 거절하겠나이다. 저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옵니다. 나의 신인, 당신의 죽음을 먼저 보지 않을 것이옵니다.


나는.


당신을 배신할 수가 없었어. 당신의 적이 되고 싶지 않았어. 당신은 여흥처럼 나를 거두었지. 언젠가 내가 배신할 것을 기대했을 거야.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할 수가 없었어.


당신이 나에 대한 감정이 변해 버렸듯, 나도 변해 버려서.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들어주마.


당신은 최후까지 자비롭고 상냥했어.


하지만.


하지만, 나는.


-입맞춤을.


이것을 마지막 바람으로 삼고 싶지 않았어.


언젠가.


당신의 전쟁이 아름답게 끝이 났을 때.


내가 그때까지 당신을 배신하지 못해서, 배신할 수 없어서, 여전히 당신의 성녀로 곁에 있었다면.


황혼의 마녀가 아닌, 전쟁신의 성녀로 남아 있다면.


내가 당신의, 당신이 나의 끝이 되어달라 청하고 싶었어. 죽음이 아닌, 다른 의미의 끝을 바랐어. 평화로운 세계에서, 전쟁이 없어진 세계에서.


황혼의 마녀가 아닌,


전쟁신의 성녀도 아닌,


-제게 죽음을.


당신의 반려로.


“…….”


누아르 제벨라는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승리를.”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면서, 목에 건 반지를 움켜쥐었다.


언젠가 하멜의 손가락에 끼워주고 싶었던 반지.


누아르 제벨라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


“축하해요.”


그 반지를 부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면서.


“유진 라이언하트.”


저 이름을 속삭였다.


빌어먹을 환생 493화


시선이 새카맣다.


평소의 누아르 제벨라와 다르다. ‘평소’라고 말할 만큼 그녀에 대해 잘 안다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의 누아르가 뭔가 다르다는 것은 느껴질 수밖에 없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주변이 특별히 어두운 것은 아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일지라도, 유진의 눈은 상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은 누아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그 표정이 어떤 감정에 기인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는 분명하게 보인다.


색이 없다고 느껴졌다. 영롱한 빛을 발하던 보라색 눈동자가, 지금은 심연의 구렁텅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칙칙하고 어둡게 느껴진다. 저 깊은 밑바닥에 대체 무엇이 존재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뭐지?’


이런 기분이 곧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신에 여유가 없어서일까? 유진은 지금 멀쩡한 상태가 아니다.


망령과의 전투가 끝난 것이 불과 방금 전이다. 이그니션의 반동으로 온몸이 아프고 정신도 어지럽다.


조금이나마 수습하기도 전에 습격을 받았다. 이 상황부터가 받아들이기 벅차다.


“야아아아!”


가뜩이나 혼잡한 상황. 일단 수습부터 하고 싶은데,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승리를 축하하고 여운을 즐기기도 전에 대뜸 습격받았다. 심지어 그 습격은 굉장히 유효했다. 흉수가 직접 칼을 거두지 않았다면, 저 칼은ㅡ


“이 개새끼야!”


설마 저 새끼가 이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300년 전부터 재수가 없던 놈. 그래도 ‘기사’인 만큼의 명예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방심을 떠나서, 상대가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을 노리고 습격할 줄이야.


그 사실이 세냐로 하여금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의 분노를 느끼게 했다.


콰르르르르!


세냐가 은하를 이끌고 왔다. 앞으로 뻗은 프로스트가 서리를 휘감았다. 등진 은하에서 수십 가지의 빛이 번쩍였다. 순식간에 펼쳐진 마법들이 가비드를 포착했다.


이 거리,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바람. 절대률이 세냐의 의지에 부응했다.


가비드는 흠칫 놀라서 뒤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개의 빛은 어느새 가비드를 휘감았다.


“허.”


솔직하게 감탄이 나왔다. 아까 전.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는 세냐의 마법을 베었다. 하지만 지금은 ‘베는 것’이 아까처럼 쉽지 않았다.


‘이건…… 마법인가?’


위신의 마안을 떴다. 여태까지 보았던 마법과는 궤가 다른 힘. 벨 수가 없다. 아니, 벨 수는 있겠지만 베이지 않는다.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고 강한 힘.


그렇기에 가비드도 똑같이 대응했다. 단순하고 무식한 힘으로 쳐낸다. 위신의 마안이 붉은빛을 발했다. 글로리의 칼날을 새로운 힘이 휘감았다.


철그럭.


유폐의 사슬이 검신을 휘감았다. 포위한 마법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사슬이 펼쳐 나가며 마법들을 휘감았다.


끝이다. 저 사슬은 유폐의 권능이고, 위신의 마안은 마왕의 권능마저 완벽하게 실현시킨다. ‘마법’은 결코 저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끝?’


그걸 정하는 것은 가비드가 아니다. 저 마법을 펼친 것은 세냐이니, 끝을 정할 수 있는 것도 세냐뿐이다. 300년 전에 세냐의 마법은 저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설령 유폐의 마왕 본인일지라도 세냐의 마법을 멋대로 끝낼 수 없다.


끼릭, 끼리릭. 마법을 붙들었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끝, 이라고 생각했던 가비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콰지직! 사슬이 완전히 끊어졌다. 마법이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며 가비드를 덮쳤다. 꽈아앙! 폭발 속에서 가비드의 몸이 뒤틀렸다.


“허…….”


가비드는 너덜너덜한 넝마가 되어 아래로 추락했다. 그는 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헛웃음을 흘렸다.


유폐의 사슬이 끊어졌다. 세냐의 마법은 사슬로 붙들려 끝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세냐의 마법이, 마법의 영역을 초월했다는 말이다.


“경이롭군.”


콰콰콰쾅! 마법의 연쇄는 가비드를 땅에 처박고서도 끝나지 않았다. 지면이 쩍쩍 갈라지면서 가비드의 몸은 땅속 깊숙이 처박혔다. 그 위에 환한 빛이 떨어졌다.


라이미르아에게서 뛰어내린 크리스티나는 빛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부릅뜬 눈으로 가비드를 노려보며 손을 뻗었다.


분노한 아니스의 저주도 크리스티나의 의지에 부응했다. 대지에 빛이 스며들었다. 찬란한 빛이 재생을 억제했다. 가비드는 땅속 깊이 파묻히면서 눈을 찡그렸다.


‘하멜뿐만이 아니군.’


재앙의 세냐. 그녀의 마법은 300년 전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마법의 영역마저 초월했다.


전력으로 마법에 대항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냐도 똑같을 터.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당대의 성녀의 신성력은 틀림없이 지옥의 아니스를 넘어섰다. 마력의 흐름을 끊어내고 불사력마저 부정하는 빛. 그리고 저 찬란히 빛나는 날개들을 보라.


‘모두가…… 마왕을 위협할 수 있다.’


헬무드의, 판데모니엄의 적. 가비드는 그 사실을 느끼면서 입술을 씹었다.


세냐와 크리스티나 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몸을 수습한 저항군의 주력들이 다시 움직였다. 그들은 깊은 구덩이에 처박히고 빛에 뒤덮인 가비드를 포위하며 적의를 드러냈다.


“유진 님!”


가비드의 봉인에 몰두하면서, 크리스티나는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 전에 유진이 대뜸 손을 들어 크리스티나가 다가오는 것을 제지했다.


“괜찮아.”


“하지만……!”


“알잖아. 지금 내 상태는 신성마법이나 치료로는 효과가 없다고.”


코어를 폭주시킨 대가는 육체나 내장의 부상과는 다르다. 애당초 코어부터가 실재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아무리 치료마법에 특화되었을지라도, 이그니션의 반동은 치료가 안 된다. 유일한 치료는 그냥 며칠 정도 푹 쉬는 것뿐이다.


“…….”


크리스티나는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유진에게 가까이 가려 한 이유는, 그를 치료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부축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걱정’되기 때문이다. 지금 유진의 근처에는 몽마의 여왕이 있다. 누아르 제벨라가…… 있다. 그녀가 유진에게 과도한 친절과 집착을 보였던 것은 알고 있다.


뭔가가 이상하다. 평소와 다르다. 그런 분위기는 크리스티나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예전이라면.


누아르 제벨라가, ‘지금’, ‘갑자기’, 유진을 죽이려 들 것이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누아르는 절대로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저 미치광이 몽마는, 유진과 서로 죽이는 것에 대단한 의미와 감정을 부여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니 둘의 끝은 진득한 교류와 준비를 거치고서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지금, 갑자기, 누아르가 대뜸 유진을 죽일 것만 같다. 저 목을 양손으로 쥐고서 힘을 주어 조르고 부러트릴 것만 같다……. 만약 누아르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지금의 유진은 저항이 불가능하다.


“괜찮아.”


이번의 말은 크리스티나뿐만 아니라 세냐에게 향한 것이기도 했다. 유진에게 다가오려던 세냐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진도 그녀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누아르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어서?


그 믿음이 아주 없다고는 말하지는 못하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유진은 누아르와의 기묘하고 뒤틀린 신뢰를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배제하고서도, 지금의 누아르와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워낙 태도가 단호했기에, 세냐와 성녀들은 더는 유진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땅속에 처박아 둔 가비드에게 의식을 쏟아부었다.


가능하다면…… 오늘 여기서 가비드를 죽이거나, 봉인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불가능하겠지.’


죽이는 것도 봉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유폐의 칼이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니다. 지금 저렇게 붙잡혀 있는 것은…….


‘확인하고 있는 거야.’


세냐의 마법이 어느 정도인지. 성녀들의 신성력이 어느 정도인지. 포위하는 적의가 어느 정도인지.


세냐는 쯧 혀를 찼다. 일찍부터 전력을 노출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그녀도 매한가지였기에, 마법의 위력을 적당히 조절했다.


“…….”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아르는 변함없는 얼굴로 유진을 응시하고 있다. 그것부터가 신경 쓰였다. 이런 상황에서 누아르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다른 때였다면 아무 말이라도 조잘거렸을 텐데.


-축하합니다!


시무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누아르는 과격한 수영복을 입고 연회장에 난입해서, 유진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건넸다.


-승리를.


-축하해요.


-유진 라이언하트.


뚝, 뚝 끊어지던 목소리. 여전히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입술이, 뒤틀려 있다. 저건 미소인가? 감정과 대조가 안 된다.


그녀의 손을 보았다. 그, 빌어먹을 반지를 끼고 있던 왼손은. 목걸이의 반지를 움켜쥐고 있다.


“……너는…….”


유진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자신도 모르게 나올 것만 같은 한숨을 삼켰다.


“표정이 왜 그런 거예요?”


누아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녀는, 꽉 쥐고 있던 목걸이를 놓았다.


부숴 버리고 싶었다. 손가락에 끼운 반지도, 목에 건 반지도 전부. 하지만 부수지 못했다. 아주 살짝만 힘을 주면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는데. 정작 그 힘을 주지 못했다.


“당신을 축하해 주었잖아요, 나의…….”


신이시여.


자신도 모르게 나올 것만 같은 말을 삼켰다. 누아르는 다시 한번 더 표정을 가다듬었다.


“유진.”


표정과 함께 감정을 정리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나의 것’이 아닌 기억과 감정을 깊숙한 곳에 처박았다.


이게 싫다. 누아르가 떠올리는 모든 기억과 감정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야만 한다. 그녀가 하멜을, 유진을 사랑하는 이유도 온전히 누아르의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뜸 떠올린 기억이. 현생의 것도 아닌 기억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 기억과 그에 따른 감정들이.


“힘들지 않아요?”


감정을 제멋대로 어지럽히고 있다. 나의 하멜에게, 사랑하는 남자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만든다.


특히.


특히, 누아르에게 ‘혐오’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 마지막이, 누아르가 평생 바라던 것을 가볍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마지막 바람을 말하면서 죽었다.


누아르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하멜의 살의에 반했다. 저 남자의 순수한 살의를 받으며 죽음을 그리고 싶었다. 서로에게 특별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 둘은 특별했던 것이다. 이미 나는 먼 옛날에 죽었다. 사랑하는, 그의 품에 안겨서, 입맞춤과 죽음을 받았다.


“지금 말이에요. 당신, 많이 힘들잖아요.”


누아르는 사뿐 유진에게 다가왔다.


웃는 얼굴. 표정만 그럴 뿐이다. 유진은 저 표정에 걸맞은 감정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앉아도 괜찮아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서 있는 것도 힘들지만, 유진은 그 자리에 똑바로 서서 누아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하하, 왜 그렇게 쳐다봐요? 나의 유진. 혹시,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래요?”


누아르가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유진을 향해 살짝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약한 모습을 보는 것이 좋은걸. 당신은, 언제나…… 언제나 강한 모습만 보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같은 모습은 보기 힘드니까, 더 많이 보고 싶어.”


“…….”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직접 부축해 줄 수도 있어요. 더 원한다면 무릎도 내어주죠. 아니면 내 가슴에 안겨서 쉬고 싶나요?”


미소에 짓궂음을 섞었다. 슬며시 뻗은 손이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후후, 마음 같아서는 그다음 일도 속삭이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런 행위는 지금 당신에게는 힘들 테니까. 아핫, 꼭 그렇지도 않은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지라도, 꿈에서는…….”


“누아르 제벨라.”


유진의 입술이 열렸다. 대뜸 불린 이름에, 누아르는 두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녀는 잠시 동안 유진을 응시하더니,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뭐예요? 내 이름을 부르고. 누아르…… 제벨라. 네, 그게 바로 저예요.”


“너도.”


결국 삼키지 못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떠올라 버린 거냐.”


“…….”


“그럼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유진은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렇게 누아르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름다운 얼굴. 짓궂은 미소. 빛이 없는 눈동자.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칙칙한 감정.


“성녀?”


그녀는 전쟁신의 성녀라고 불렸다.


“마녀?”


성녀이기 전에는 황혼의 마녀라고 불렸다.


“……아리아?”


그 이름을 말했을 때.


유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저항은 할 수 없었다. 그대로 땅에 등부터 찍히려는 순간에, 부드러운 손길이 등을 받쳤다.


누아르였다. 그녀는 유진을 밀친 주제에 조심스레 받쳐주며, 함께 아래로 기울었다.


짤랑거리며 내려온 목걸이. 반지가 유진의 눈동자 앞에서 흔들렸다.


가쁜 호흡. 달콤한 숨결이 다가왔다. 칙칙하게 죽어 있던 누아르의 눈동자에 새로운 빛이 태어났다.


“…….”


누아르는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은 눈으로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빌어먹을 환생 494화


그녀에게 이름은 없다. 어렸을 때, 부모가 지어준 이름조차도 없다.


어느 시대에나 천애 고아는 있다. 자아가 여물기도 전에 부모를 여읜 아이들. 혹은 태어나자마자 보자기에 감기거나, 바구니에 담기거나 하여 버려진 아이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태어난 고아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뒷골목에서 살고 있었다.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무리를 이뤘다. 물론 그 위에는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큰,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삶. 병에 걸리거나 몰매를 맞거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삶.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 처지를 당연하다며 받아들이고 살았다. 그냥 잘 먹고 잘 자는 하루면 족하다 여겼다. 내일이나, 모레나, 사흘 후, 나흘 후, 닷새 후, 일주일 후, 한 달 후, 일년 후, 그런 미래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녀는 달랐다. 지저분한 뒷골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몸이 그럭저럭 자라게 되면. 구걸이 아닌 다른 일을 해야 할 거다. 그렇다고 해서 돈벌이가 나아지나? 그것도 아니다.


뒷골목에서 들꽃이나 들고 다니는 삶. 들꽃의 값이야 하찮다. 그렇게 벌리는 돈은 앳된 어른들에게 뜯어먹힌다. 병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 뒷골목까지 기어들어 와 들꽃을 사는 놈이 깨끗할 리는 없는 법이고, 흥분한 남자는 으레 난폭한 법이란 것을 그녀는 눈짓만으로 학습한 상태였다.


몇 년 남지 않았다. 뒷골목을 빠져나가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든 살 수 있겠지. 위험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욱 각박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름이 뭐냐.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며 궁리해 봤자 결국은 어린아이. 그녀가 저지른 행동도 지극히 어린아이다웠다. 길거리에서 동냥을 할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항상 몇 푼씩 던져주던 노파에게 말을 걸었다.


몇 번씩, 꾸준하게, 그녀 딴에는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지만ㅡ 그 모든 것이 노파에게는 노골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없어요.


이름이 없다는 말은 진짜였다. 뒷골목에서 서로를 칭하던 이름은 이름이라고도 할 수 없는 별명이었으니.


-그렇다면 내가 이름을 주마.


노파는 마녀였다. 잡아먹히지는 않았다. 대신에 시종이 되었다.


많은, 일을 도왔다. 어린 소녀에게는 소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여럿 있었다. 다른 아이들을 꾀어내어 노파의 가마솥으로 인도하는 일도 했고, 좀도둑질도 했으며, 산에서 약초나 버섯을 따고, 노파를 대신해 글을 쓰는 일도 했다.


많은 것을 배웠다.


재능이 있었다.


-네 이름은…….


노파를 죽였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복수심이라는 감정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히려 노파에게는 감사를 느꼈다.


노파 덕분에 그녀는 뒷골목을 나왔다. 글과 마법을 익혔다. 세상을 홀로 살아가기 위한 재주를 익혔다.


만약, 노파가 그녀의 행복을 기원했다면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파는 행복을 기원하지 않았다. 젊고 아름다운 제자를 동경했다.


아니. 언제부터 그녀가 제자였던가? 분명 잠시 사용할 시종으로 데리고 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자가 되어버려서, 가진 재주를 모두 빼앗겼다. 노파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녀를 제 손으로 죽여 삶아 먹고자 했다.


그래서 죽였다.


“아리아.”


당시 그녀의 이름은 아리아가 아니었다. 노파는, 그녀에게 다른 이름을 주었다.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이름이다. 지금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


노파를 죽이고 혼자가 되면서 이름은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어느 나라가 왕궁에서 일할 마법사를 뽑는다기에, 그쪽으로 향했다.


지원 마감은 진즉에 되었지만, 문제는 되지 않았다. 진즉에 지원을 신청하고 설렘을 안고서 왕궁으로 찾아가는 촌뜨기 마법사는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골라서, 죽였다. 얼굴과 신분을 빼앗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왕궁에 들어가고 수십 년.


오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골목에서처럼 그걸 쫓다 보니, 궁정마녀가 되었다.


-황혼의 마녀.


어느 순간부터는 이름보다 저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의도했다.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마법적으로 숭배를 끌어낸다.


그런 시대였다. 인간이 숭배를 통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던 시대. 당시의 그녀도 사도(邪道)로서 인외를 추구했다.


유폐의 마왕이 시작한 난세. 국왕과 대신들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왕국 전체를 발아래에 두었던 궁정 마녀.


어떤 의미에서는 마족과 마왕보다 지독했으며, 발밑에 거느린 나라는 공포라는 채찍과 당근으로 조련했고, 그 흉포한 악명은 주변 국가의 군주들마저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황혼의 마녀가 바로 그녀였다.


-제발.


패배했다. 마녀가 쌓아 올린 오만하고 잔악한 성채는 전쟁신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죽고 싶지 않았나?


삶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나? 미련이 남았나?


아니면.


-이름이 뭐냐.


저무는 황혼을 등지고서, 검을 어깨에 걸친 남자의 모습에 홀려 버렸던 걸까.


-당신께서 새로 지어주소서.


그간 가지고 있던 이름들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던 적은 없었다. 당연히 아끼거나 소중히 여긴 적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저 남자와 아주 긴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그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듯이, 나도 언젠가 그의 모든 것을 빼앗고 말리라.


그러기 위해서, 나는 저 남자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 또한 그를 특별한 존재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달라 청했다. 아끼지도, 소중히 여기지도, 특별한 의미를 둔 적도 없던 하찮은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내가, 그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기 위해서.


“……아리아…….”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유진을 응시했다.


아리아, 아리아…… 그 이름. 어렴풋하게 남아 있던 기억이, ‘아리아’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에 보다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누아르는 헐떡이는 호흡을 꾹 삼켰다. 특별한 이름, 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격정과 동요. 언제나 여유와 웃음이 묻어나오던 누아르 제벨라에게서 설마 저런 표정을 보게 될 줄이야.


다른 이유에서라면 유진도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누아르의 역린이라면, 아예 적극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생각마저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누아르가 보이는 표정과 감정. 그녀에게서 역린과 같은 ‘이름’은, 유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황혼의 마녀, 전쟁신의 성녀. 저 이름들에서 묻어나오는 인상보다, ‘아리아’라는 이름에서 묻어나오는 인상이 훨씬 더 강렬하다.


그래서 깊이 사무친다. 갑작스레 누아르가 덮쳐온 것에 다들 놀라서 이쪽을 보았다. 당연히 세냐와 성녀 등은 유진에게 다가오려고 했지만, 유진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뻗어 그들을 제지했다.


“왜 막죠?”


누아르가 내뱉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유진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누아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대뜸 손을 뻗어서 유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날,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죽이고 싶다고 바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의 유진은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들다. 누아르가 살짝만 힘을 준다면 나뭇가지 부러트리듯이 목을 부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단순 허세로 내뱉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누아르는 보란 듯이 살의를 내비쳤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울적한 눈으로 누아르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너와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너를 우습게 본다고? 설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너를 우습게 여긴 적이 없어.”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유진에게 있어서 오랜 숙적이다. 유진은 단 한 번도 그녀가 가진 존재의 격과 힘을 우습게 여긴 적이 없다. 갈X의 여왕이란 멸칭을 내뱉으면서도, 그녀와의 전투를 상상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패배부터 염두에 뒀을 정도다.


“……대화…….”


누아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 번지는 이름. 자꾸만 퍼져 나가는 기억. 누아르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눈을 한 번 감았다.


붙들린 멱살이 놓였다. 하지만 손은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유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ㅡ화아악! 누아르의 등 뒤에서 박쥐의 날개가 치솟았다.


“보여주고 싶지 않아.”


누아르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페가수스 아폴로의 날개만큼이나 커다란 날개. 위로 치솟았던 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며 유진과 누아르를 감쌌다.


“듣게 하고 싶지도 않아.”


유진은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주요 인사들에게 하멜의 환생이란 것은 밝혔지만, 아가로트의 환생이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걸 말해서 무엇 하나? 300년 전의 하멜과는 달리 아가로트는 까마득한 신화시대의 인물인데.


지금부터 누아르와 나눌 것은,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다.


‘괜한 오해를 사게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대수롭지도 않았다. 오늘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은가. 누아르는 시무인의 연회에 난입해서 유진을 축하하고, 그 후에는 밀담마저 나누었다.


제벨라 파크에서 야밤에 밀회를 나누던 것도 대륙에 진즉에 사진이 퍼지기도 했다. 오해? 오해라면 이미 진즉부터 있었다.


“철저하시군.”


유진은 코앞에 있는 누아르의 얼굴을 보며 이죽댔다.


그녀의 날개가 차단한 것은 주변의 시선과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망토 안에 있는 메르와, 정신적으로 연결해 놓은 세냐와 성녀들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고 있다. 날개를 통해 펼친 강력한 마력결계 때문이다.


“대화는 단둘이서 하고 싶으니까요.”


누아르가 속삭였다. 사방을 감싼 날개. 밤보다 짙은 새카만 어둠.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도 유진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인다.


조금 감정이 진정되었다.


“대화하자고 말한 것은 당신이잖아요. 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하멜.”


조금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저 이름을 말했다. 누아르는, 저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언제까지 가까이 있을 거지?”


누아르와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 풍성한 머리카락은 마치 암막 커튼처럼 내려와 유진을 감싸고 있다. 짤랑거리는 반지도 함께 내려와 유진의 쇄골에 누웠다.


“내가.”


양손은 유진의 뺨을 감싸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섬세하게 유진의 뺨을 어루만지고, 얼굴의 윤곽을 따라 움직였다.


“만족할 때까지.”


손가락에 직접 닿는 실감을 원했다. 기억 속에서가 아닌, 진짜로 눈앞에 존재하고 접촉하는 진짜를 원했다. 누아르는 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유진의 얼굴을 더듬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린 것에 대한 절망으로 씹어댄 입술. 누아르의 숨결에서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다.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전투에서 몇 번이나 피를 흘렸다. 둘은 서로의 숨결에서 피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한 피의 냄새가 서로를 강하게 연결했다. 희미하던 기억의 빈자리들을 피의 냄새가 채웠다. 서로의 끝.


“……후후.”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녀는 조금 더 머리를 가까이 기울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 눈동자에 유진의 모습이 모두 담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손끝으로 느끼면서,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닮지는 않은 것 같아.”


누아르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는 조금 더 거칠게 생겼거든요. 응, 투박한 것은 아니야. 꽤…… 멋진 남자,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갑옷이 잘 어울리는 남자. 말을 타는 것이 잘 어울리는 남자. 커다란 검이 잘 어울리는 남자.”


“…….”


“남자들 사이에 있는 것이 잘 어울리는 남자. 호령하는 것이 잘 어울리는 남자. 전장이 잘 어울리는 남자.”


덥수룩한 머리. 강렬한 눈매. 또렷한 이목구비. 건들거리면서도 진지할 때는 한없이 진지한. 웃으면서 분노하고, ‘내 것’에 민감하며…….


“아하하…….”


누아르는 다시 한번 웃었다.


“아니구나. 그는, 당신과 꽤 닮았어요.”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태도와 분위기, 그런 것들이 닮았다.


“그런가.”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똑같지는 않다. 결국 다른 사람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닮았다는 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닮았을 뿐이지. 나는 아가로트가 아니야.”


“나는 어때요?”


누아르가 웃으며 물었다.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해요?”


“조금은.”


“하긴. 아주 닮지는 않았겠죠. 애당초 그녀는 인간이고, 나는 몽마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왜.”


얼굴을 더듬던 누아르의 손은 어느새 유진의 목에 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목을 조르지는 않았다.


섬세하게,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누아르의 손끝이 유진의 목젖을 어루만졌다.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른 거죠?”


아리아.


“나는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그녀가 아니니까.”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유진이 대답했다.


“확인?”


누아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런 이유에서였다면 아주 효과적이었다. 애당초 누아르는 유진에게 ‘이런’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언젠가 밝힐지라도. 굳이 밝히지 않아도 서로가 눈치채고 있겠지만.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지도 않은 지금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아’라는 이름을 들어버린 순간ㅡ 몸이 멋대로 움직여 버렸다.


“나도 확인이 필요해.”


누아르의 머리가 조금 더 아래로 기울였다.


날개로 덮인 어둠 속에서, 유진과 누아르의 입술이 닿았다.


빌어먹을 환생 495화


고개를 내리면서 생각했다.


떠올라 버린 기억. 그에 따른 감정.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은,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옛날 이름들.


특별하다고 생각한 것들.


황혼의 마녀.


전쟁신의 성녀.


‘그’에게 직접 받은, ‘아리아’라는 이름.


“…….”


누아르가 살아온 수백 년이 넘는 시간에서, 지금만큼이나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다. 누아르에게 있어서,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결정짓는 것들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여태까지 누아르는 그렇게 살아왔다.


기쁨, 분노, 슬픔, 그런 종류의 모든 감정. 판단과 고민, 선택 등의 모든 것들은, 온전히 누아르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하멜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복잡하고 진실한 감정에 긴 고민을 하고, 욕망을 저울추에 올렸으며, 하멜에 대한 애정과 집착, 그가 가진 원초적 살의, 앞으로 살아갈 긴 시간 동안 가질 상실감과 후회, 비애, 미련, 반대로 누아르 자신이 죽었을 때 갖게 될 충실함과 만족…….


그, 모든 것들은 누아르가 선택한 것이다. 다른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아닌 것만 같았다. 지금의 누아르에게는 그녀의 것이 아닌 불순물이 너무 많이 섞여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 자신의 것도 아닌 기억과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오늘 알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할 행동들이 온전히 ‘나’의, 누아르 제벨라의 것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가비드 린드먼이 대뜸 유진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누아르는 굳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곧장 영지로 돌아갔거나, 제벨라 페이스에 틀어박혔을 것이다.


‘이미 늦었어.’


아리아라는 이름을 들어버린 순간, 기억과 감정이 너무 강하게 떠올라 버렸다. 이후의 행동들은ㅡ 아무리 생각해도 ‘나’답지가 않았다. 누아르는 그 사실에 자조하며.


지금 순간조차도 후회를 느꼈다. 입술과 입술이 닿을 뿐인 입맞춤. 멈춰버린 호흡. 둘 중 누구도 눈은 감지 않았다. 분명하게 뜬 눈동자가 서로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상상과는 다르다.


만약, 하멜과 입을 맞추게 된다면. 가볍게,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밤의 격정적인 입맞춤도 욕심이 나지만ㅡ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그’ 하멜과 침대에 누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입맞춤을 상상했다. 서로가 서로의 끝이 되어주는 순간. 누아르가 하멜의 손에 죽든가, 혹은 하멜이 누아르의 손에 죽든가. 피범벅이 되어서, 숨이 가늘어지면서, 눈앞이 어두워지는 그 순간에.


반지를 끼워주고.


속삭임을 나누고.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는.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들어주마.


“달라.”


닿았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유진과 이마를 맞대었다. 유진은 무어라 말하지 않고 누아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뭐가 다르다는 거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네가 진즉에 기억을 떠올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하하…….”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았다.


약지의 반지.


왜 그때 갑자기 반지를 떠올린 것인지. 화려한 보석이 박힌 것도 아닌, 평범한 것을 넘어 투박하게 생긴 반지를 왜 그리도 갖고 싶다고 생각한 것인지. 왜, 그때, 동이 터오는 거리에서, 하멜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린 것인지.


“하멜.”


누아르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닿아서, 확실하게 알았어요. 나는…… 아리아가 아니야. 아리아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누아르 제벨라야.”


“…….”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누아르의 양손이 다시 한번 유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뺨을 더듬던 손가락이, 유진의 입술로 올라갔다.


“‘그’의 입술은 더욱 거칠었거든요. 피의 냄새가 났고…… 애정이…… 있었어.”


“그랬겠지.”


유진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아가로트니까. 네가 아리아가 아니듯, 나도 아가로트는 아니야.”


“하지만 나에게는 아리아의 기억과 감정이 있죠.”


“나도 마찬가지야.”


“하멜.”


누아르가 속삭였다. 커다란 눈동자에 유진의 얼굴이 비춰졌다.


“우리의 것이 아닌 그 기억과 감정이, 우리를 다르게 만들까요?”


“아니.”


유진은 낮은 목소리로 부정했다.


“내가 나고, 네가 너라면. 우리는 달라지지 않아. 달라져서는 안 돼.”


“아.”


누아르가 풋 웃었다.


“멋진 대답이에요.”


누아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것이 아닌 기억과 감정이 번뇌가 될지언정, 그녀는 미혹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황혼의 마녀이자 전쟁신의 성녀이던 아리아보다ㅡ 몽마의 여왕이자 헬무드의 공작이며 드리무어와 제벨라시티의 영주, 누아르 제벨라의 자아가 강하기 때문이다.


입맞춤으로 확인했다. 상상과도 달랐다. 그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바람은 여전히 같아요.”


누아르의 얼굴이 천천히 멀어졌다.


“그때, 바에서 말했던 것을 기억하나요? 나는 여전히…… 죄책감, 상실감, 후회, 그런 종류의 감정을 겪어보고 싶어요. 나는, 누군가가 나를 증오하며 죽기를 바라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는 당신을 증오하지 않지만, 당신이 나를 증오하고 사랑해 주기를 바라요.”


이게 옳다.


누아르는 목걸이의 반지를 거머쥐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갖는 사랑은, 우리 중 누군가의 죽음으로 끝이 나야 해요.”


이게 옳다.


누아르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마음속에 번지는 흔들림을 억눌렀다. 미혹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흔들림’마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얼굴은 멀어졌지만 누아르는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유진의 위에 앉아서,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이건 싫어.”


“뭐가 싫다는 거냐.”


“나는 당신을 죽일 때, 망설이고 싶었어요.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당신을 죽이고 평생을 후회하며 상실감에 슬퍼하고 싶었어요. 당신도, 나에게 그래 주기를 바랐어요. 망설임 끝에 날 죽이고…… 나라는 존재를 영원히 추억해 주기를 바랐어.”


“…….”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잖아요. 내가 당신을 죽이고서 느낄 후회와 상실감이 온전히 나의 것일까? 당신은 어떨 것 같아요? 나는, 누아르 제벨라로서 후회할까요? 아니면 아리아로서 후회할까요?”


“네가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네가 날 죽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 죽는 것은 너다. 그러니 네가 하는 고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아하하…….”


누아르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럼 당신은 어때요? 당신이 나를 죽이고서 느낄 감정은 누구의 것이죠?”


“나의 것.”


“뻔한 대답이야.”


“내 먼 전생이 아가로트라는 것은 상관없어. 나는 널 죽일 거고, 그거로 끝이다. 널 죽인 뒤에 느낄 감정?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지.”


“도망치는 건가요?”


“미몽(迷夢)에 허덕이고 싶지 않은 거다.”


유진은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너도 꿈에서 깨어나라.”


누아르는 대답하지 않고 유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유진은 그 시선을 받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그냥 나야. 너도 그냥 너고. 전생의 기억? 감정? 미안한데, 나한테는 그딴 것보다 지금이 중요해. 지금의, 내가 더 중요하단 말이다.”


내뱉는 말의 끝에서 호흡을 삼켰다. 유진은 누아르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내뱉었다.


“약속, 기억하냐?”


“……기억하고 있어요. 나에게 3번의 질문을 할 수 있게 해준 약속.”


“마지막 질문을 하지. 누아르 제벨라. 너는 나와 ‘뭘’ 하고 싶은 거냐.”


제벨라 파크에서 2번 질문했고, 답을 얻었다. 나중을 위해 아껴두었던 마지막 질문이지만, 유진은 지금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잔인해요.”


누아르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무나 상냥하죠.”


“뭔 개소리야.”


“지금 나의 나약함을 이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하멜. 몽마의 여왕인 내가…… 후후, 이런 꿈에 헤매게 될 줄이야.”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 제벨라 파크에서 함께 밤을 거닐 때. 누아르는, 하멜이 ‘흔들리고 있다’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때의 하멜은 이상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것도 아니었다. 제벨라 파크에서 만났을 때부터 하멜은 동요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순간은 생생하다.


함께 제벨라 페이스에 타서 하늘을 날았다. 활발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밤거리를 즐겼다. 당시의 누아르는, 하멜이 흔들리는 이유가 ‘과거’와의 괴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300년 전의 누아르 제벨라와, 지금의 누아르 제벨라에 대한 괴리.


그 흔들림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보고 무엇에 착각하여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흔들림은…… 하멜에게 깃든 감정은, 아름답게 장식될 서로의 최후에 감미로움을 더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나에게 슬픔과 절망을 주는 것은.”


과거의 괴리,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하멜이 느꼈던 괴리가 아주 먼 전생이었을 뿐.


“내가 가진 당신에 대한 사랑에, 다른 이의 사랑이 섞여 버렸기 때문이야.”


누아르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는 유진의 얼굴을 쓰다듬는 대신,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렇게 누아르는 앉은 자세로 유진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하멜.”


유진의 귓가에 누아르의 입술이 다가왔다. 부드러운 목소리, 달콤한 숨결, 누아르 제벨라의 목소리가 유진의 귀를 핥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준 덕분에, 나는…… 내가 아닌 과거마저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나?


이제는 그때 하멜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질문에 대답하죠.”


그때의 하멜은, 흔들림을 느끼게 하던 황혼의 마녀가 아닌 ‘누아르 제벨라’를 보며 말했던 것이다. 누아르가 입맞춤을 통해 서로의 존재와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듯, 하멜에게도 ‘확인’이 필요했다.


-없어요.


그때 누아르는 일말의 흔들림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 대답으로. 하멜은 마음을 먹었다. 이러한 문답에서 누아르는 이미 자신의 의지로 대답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입장이 반대가 되었을 뿐, 지금도 똑같다.


“내가 황혼의 마녀였고, 아리아였으며, 전쟁신의 성녀라는 것.”


얇은 웃음. 누아르는 조금 더 강하게 유진의 몸을 끌어안았다.


“당신이 전쟁 신이었고, 아가로트였으며, 하멜이었다는 것.”


말을 내뱉을수록 자신의 존재가 결정되는 것만 같다. 단어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려서, 자아를 무겁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고, 알고 싶지 않았던 것에 괴로워하고, 서로와 나 자신의 존재성을 혼동하고, 나의 것이 아닌 기억과 감정에 흔들리면서 애증을 느끼고…… 그럼에도 살의를 거두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서로를 파괴하다가, 최후의 최후에 다시 망설여 버리는.”


어깨에 걸쳤던 머리를 들었다. 누아르는 자세를 바꾸어 유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모든 것은 맹독처럼 치명적이고 달콤하겠죠. 확신할 수 있어요, 하멜. 만약 내가 당신을 죽이게 된다면. 내가 일찍이 상상했던 후회와 상실감, 비탄 등의 감정은 모두가 어설픈 것이 될 거예요. 어쩌면, 어쩌면. 나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지도 몰라요.”


“…….”


“당신도 그럴까요?”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누아르가 말한 ‘끝’에서, 자신이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그것을 섣불리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아르는 유진의 침묵을 응시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과 눈동자. 허나 그 뒷면에서의 흔들림을 응시했다. 결국, 누아르는 다시 웃어버렸다.


“그럴 거야.”


몸을 일으키던 누아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천천히 다가오던 처음과는 달랐다. 누아르는 대뜸 유진의 목을 틀어쥐더니, 돌발적으로 입술을 맞춰왔다. 짓뭉개는 입술, 거칠게 비집고 들어 온 혀가 유진의 혀와 얽혔다.


입맞춤의 순간은 짧았다. 하지만 누아르의 몇 초는, 유진을 완전히 유린하기에 충분했다. 달콤함이나 낭만, 풋풋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격렬하고 짐승 같은. 입술이 떨어지기 전. 누아르의 이빨이 유진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당신의 기억에 있는 옛날의 ‘그년’보다, 내가 훨씬 더 매력적이거든요.”


“……이…… 미친…….”


가볍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누아르는 혀를 뻗어 피를 핥더니, 다시 한번 유진의 입술을 짓뭉갰다. 저항은 불가능했다. 피에 젖은 혀가 입안에서 날뛰었다. 얽히는 혀를 몇 번이나 씹어주었지만 무의미한 반항이었다. 입안에서 피의 맛이 퍼졌다.


또다시 몇 초. 피와 섞인 타액이 유진과 누아르의 입술 사이에서 실을 만들었다.


“그년의 어설픈 입맞춤과는 달라요.”


누아르는 젖은 입술을 열며 활짝 웃었다. 유진이 욕설을 쏟아내기도 전에, 누아르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ㅡ화아악! 펼쳤던 날개가 접혔다. 둘만이 존재하던 어둠에 빛이 스며들었다.


“하멜.”


누아르가 속삭였다.


“나는 여전히 여명이 싫어요.”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이 싫다.


제벨라 파크의 여명에서 들었던 말. 누아르는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며, 피범벅인 입술을 벌려 웃었다.


“이제는 황혼도 싫을 것만 같아.”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영원히 꿈을 꿀 수 있는 밤이 좋아.”


누아르는 ‘몽마의 여왕’다운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럼 안녕, 하멜.”


그때의 여명과 달리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환생 496화


ㅡ화아악!


누아르는 제벨라 파크에서처럼 걸어가다가 안개가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 접었던 날개를 모두에게 과시하듯이 활짝 펼치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도약해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누아르는 힐긋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았다. 피와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술을 거칠게 문질러 닦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괜히 즐겁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당신의 말대로야.”


가볍게 닿았고, 그 뒤에는 몇 번이나 거칠게 짓뭉갰던 입술에는 아직 유진의, 하멜의 감촉이 남아 있다. 엉켰던 타액과 피의 맛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누아르는 입술을 넘어 심부까지 새겨진 ‘사랑’의 감촉을 음미하며, 천천히 양팔을 들어 제 어깨를 끌어안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은, 변하지 않아. 당신과 내가 바라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행위의 결말은 보다 아련하고 비극적이겠지. 그러니 더더욱 깊게 사무칠 거야.


누아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술을 핥았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누아르 제벨라야. 내가 사랑하는 것은 하멜 다이너스이자 유진 라이언하트인 당신이야.”


황혼의 마녀이자 전쟁신의 성녀, 아리아의 사랑과는 다르다. 누아르는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란 존재가 느꼈던 ‘사랑’은, 온전히 그녀 자신의 것이라고.


설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전생의 인연에 이끌렸을지라도. 이제는…… 혼란에 헤매지 않을 것이다. 그, 운명적인 사랑이란 것도 달콤히 즐길 수 있을 터이니.


“당신이 나를 순수하게 증오할 수 없게 되었을지라도.”


지상이 점점 멀어진다. 하지만 누아르의 눈은 똑바로 유진을 보았다. 고개를 치켜든 유진이 이쪽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조차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ㅡ 누아르는, 양손을 앞으로 들어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그 감정까지 즐기면 되는 거야.”


끓어오르는 애정에 몸이 절로 떨린다. 지금 당장에라도 아래로 내려가 하멜을 덮치고 싶다.


누아르가 욕망대로 행동한다면, 대체 누가 누아르를 막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지금의 하멜은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 즉, 마음만 먹는다면 하고 싶은 것을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당장 내려가서 하멜을 납치해 버릴까? 어깨에 짊어 메고서 제벨라 페이스로 함께 들어가 버릴까. 우주까지 날아올라 버릴 것만 같은 멋진 밤을 보내버릴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상상이 누아르의 몸을 오싹오싹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오늘은 아니다. 벌써 하멜을 갖거나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누아르는 샘솟는 욕망을 억누르며 몸을 돌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문질렀지만, 진득하게 달라붙은 감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입안을 짐승처럼 유린하던 혀. 얽히고 섞이는 타액과 피의 맛.


“썩을 년.”


뿌득. 유진은 욕설을 내뱉고서 입술을 강하게 씹었다. 하늘 높이 가버린 누아르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분노를 삭이며 홱 몸을 돌렸다.


걸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다리에 힘이 쭈욱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유진은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괜찮나?”


주저앉은 유진에게 다가온 것은 이바타였다. 아까 전, 가비드의 검풍에 휩쓸려 버린 탓에 이바타의 팔은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는 고통스러운 내색 하나 보이지 않고서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어. 너는?”


“아끼던 도끼를 잃었을 뿐이다.”


이바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대부분의 인간이라면 도끼를 잃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만큼 가비드의 검풍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멜키스가 몸을 던져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고, 이바타의 몸뚱이가 원체 튼튼한 덕에 경미한 부상으로 그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부상도 이바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검풍에 직격당한 멜키스의 경우에는 오메가 포스가 파괴되었지만, 육체의 상처는 거의 없었다.


유진은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바타의 부축을 받았다.


“……너는 뭐…… 음…… 기억 같은 거 안 떠올랐냐?”


성녀였던 누아르가 기억을 떠올려 버렸다. 대전사였던 이바타도 기억을 떠올렸을 확률도 충분히 존재하니, 유진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어보았다.


“기억? 무슨 말인가?”


이바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렇게 되물어버리니 유진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두 눈을 끔벅거렸다. 곧, 유진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아까 전장에서나…… 내 모습을 보고, 뭐 떠오르는 것 없었냐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인연이 얕은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가로트가 ‘아리아’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전사도 아가로트의 동료이자 벗으로서 긴 시간을 함께했다.


‘……미련인가.’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아리아는 최후의 순간에 강렬한 미련과 감정을 남겼다. 대전사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 전장에서, 멸망의 마왕이 날뛰었을 때. 대부분의 죽음은 인식할 틈도 없이 일어났다.


오히려 ‘그런’ 죽음은 대전사가 바라던 것이었으리라.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 것. 주군을 위해 죽는 것. 아가로트의 기억에 존재하는 대전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감정은 있었다.”


“감정?”


“내가 특별하다고는 생각 안 한다. 오늘 전장에서, 너를 본 모두가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다. 이바타를 비롯한 전장의 수뇌 일부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유진은- 그 특별한 ‘전생’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새롭고 강렬한 인상을 모두에게 남겨놓았다. 그와 함께라면 패배가 없을 것 같다. 그가 앞에서 검을 휘두른다면, 그 무엇도 가로막지 못할 것 같다.


그렇기에 그와 함께 가고 싶다. 그의 뒤를 따르고 싶다. 그가 시작하는 모든 전쟁에서 진군하고 싶다.


패배를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위.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신위. 마치, 마치 전쟁의 결과를 결정하는 신을 보는 것만 같은…….


“신앙.”


대수림을 지배하는 조란의 대족장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숲에는 숲만의 신앙이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바타는 ‘이’ 감정을 신앙 이외의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 감정은 ‘동경’은 아득히 초월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마지막에, 빛에 휘감긴 상태에서 뽑아낸 검붉은 참격에서는…… 인간이 따를 수 없는 신비를 느꼈다.


“신앙이라.”


유진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전쟁을 통해 신앙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 유진의 바람이다. 그 바람대로 되기는 했다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망령이 순수한 악이 아니어서. 마왕이 아니어서. 결국, 전쟁에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어서. 누아르가 기억을 깨우쳐서. 나 자신의 감정이 진해져서. 그리고.


저 새끼 때문에.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유진은 눈썹을 구기며 내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부축 없이 홀로 서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진은 깊은 구덩이 아래를 노려보았다.


가비드 린드먼.


어마어마한 힘들이 공간 채로 놈을 짓누르고 있지만, 가비드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놈은 힐긋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와 대화는 끝났나?”


“얼씨구. 그거 배려해 주겠다고 그러고 있는 거였어?”


“그럼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나.”


가비드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솔직히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싶군. 세냐 메르데인. 그대의 마법은 확실하게 인간을 초월했다. 설마 내가 ‘마법’을 베지 못할 줄이야.”


가비드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는 하늘에 떠 있는 세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대의 신성력도 인정하겠다. 전쟁 시대를 겪어 본 내가 보증하지. 그대의 기적은 이미 아니스 슬리우드를 뛰어넘었다.”


시선은 성녀들을 넘어, 구덩이를 에워싸고 있는 모두를 훑었다.


“지금 시대의 인간들은, 300년 전보다 훨씬 강하다. 단언토록 하지. 300년 전에 그대들이 있었다면, 그 시대의 마왕들은 베르무트와 동료들이 아닌 그대들의 힘으로도 쓰러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가비드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살육의 마왕, 참혹의 마왕, 광란의 마왕은 지금 시대 인간들의 힘으로 쓰러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저들 모두가 3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용사’를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베르무트와 동료들이 그러했듯, 그대들 역시 바벨에서 좌절했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평화를 구걸하고, 약속을 맺었겠지.”


그 나지막하면서도 오만한 선언에 모두의 눈빛이 매서운 빛을 발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정면에서 반박하지는 못했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은 격이 다르다.


“너는.”


가비드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나라면 다르다, 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나?”


“네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런 내용이 아닐 것 같은데.”


유진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가비드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저 건방진 미소의 뒤에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헤아리려 했지만, 좀처럼 심중을 알 수가 없었다.


“……내 딴에는 너를 배려하려 한 것인데 말이야. 필사적으로 숨기던 것 아니었나?”


“여태까지는 그랬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유진은, 여태까지는 자신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최대한 감추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멜’의 이름에는 이런저런 악연이 많다. 당장 오늘의 가비드부터,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알자마자 바로 죽이려 덤비지 않았나. 만약 진즉에 환생의 사실이 알려졌다면, 유진이 준비되기도 전에 적들이 알아서 찾아왔을 것이다.


‘아이리스 그 병신도 날 족치러 왔겠지.’


환생을 밝혀서 이득보다는 잃을 것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감췄다. 하지만 지금은? 적이, 죽이려 올지도 모르는 것? 이제 와서는 적이라 할 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진의 모든 ‘적’이 환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유폐의 마왕, 누아르 제벨라, 가비드 린드먼. 그 셋을 제외하고 마경에 유진의 적이 있나?


없다. 단언할 수 있다. 저 3명이 끝이다. 나머지는 ‘적’이라 생각할 수도 없는 조무래기다.


“허.”


가비드도 저 오만한 뜻을 느꼈다. 하지만 불쾌감은 느낄 수 없었다. 신세대라 할 수 있을 젊은 마족 중에 유진의 적이 있나?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던 야곤은 몇 년 전에 죽었다. 야곤을 제외한 젊은 마족들이 유진의 적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구세대의, 전쟁시대를 겪은 마족들 중에서는? 서열 50위 이내의 고위 마족들. 그중에서도 한 자릿수의 서열을 가진 최고위 마족들. 마력을 하사받은 그들이, 유진의 적이 될 수 있을까?


‘부족하다.’


서열에서 제외된 검은 안개 소속의 마족 중에서도, 단독으로 유진과 전투가 가능한 마족은 없다. 아니. 검은 마족 전원이 유진에게 덤빌지라도 패색이 짙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감출 필요가 없으시다?”


“그래.”


가비드의 눈동자에서 붉은 광채가 피어올랐다. 손에 쥔 글로리에서도 시커먼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점점 부풀어오르는 마력에 세냐도 눈썹을 찡그렸다. 위신의 마안과 마검 글로리. 역시, 아무리 절대률일지라도 단순히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한가. 세냐와 크리스티나가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됐어. 잡을 수도 없는 놈한테 괜히 힘쓰지 말고, 다들 물러서.”


하지만 유진이 먼저 말했다. 저 말에 세냐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유진을 흘겨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마법을 거두었다. 동시에 성녀들도 신성력을 거뒀으며, 구덩이를 에워싼 전원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륙의 최고정예라고 할 수 있는 전원이 유진의 말을 따르고 있다. 의심을 하되 거절하지 않고 먼저 행동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가비드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긴장을 느끼게 만들었다.


300년 전의 하멜은…… 전사로서 강하기는 했어도 인망이 두텁지는 않았다. 그러한 면모는 베르무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모론조차도 홀로 왕국을 세울 만큼 인망이 두터웠다.


하멜은 그렇지 않았다. 그를 오랫동안 봐온 동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하멜을 스쳐 지나간 대부분 사람은 그를 거칠고 몰상식하며 난폭한 남자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하멜은 말 한마디로 일국을 간단히 멸망시킬 전력을 움직일 수 있다…….


“변했군.”


“그렇게 말할 만큼 네가 날 잘 아는 것은 아닐 텐데.”


“남들만큼은 안다고 생각했다만.”


가비드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유진이 환생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적’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힘을 얻은 뒤에도 굳이 환생을 감춘 것은-


부끄러워서.


그런 이유도 있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신앙 때문이다. 유진은, ‘300년 전의 영웅 하멜 다이너스’와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를 구분하고 싶었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순수하게 ‘용사’를 숭배하고, 신앙하게 만들려고 했다. 하멜의 환생이란 것이 밝혀진다면, 아무래도 ‘용사’에게 쏠리는 신앙이 순수하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번 전쟁을 통해서 유진은 더욱이 확신했다. 존재를 깨부수고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빛과 섞였고, 전장에서의 숭배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하멜 다이너스의 존재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넘어설 수 없다. 하멜에 대한 숭배조차도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힘으로 더해질 것이다.


그것은 인지의 문제다. 지금 시대에서 2명의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은. 300년 전 베르무트의 동료로서 3명의 마왕을 쓰러트린 영웅 하멜 다이너스보다 더욱 커졌다.


“나는 하멜의 환생이다.”


그래서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선언했다. 이전처럼 듣는 귀를 제한하지도 않았다. 유진이 내뱉은 말은, 이 장소의 수천 명이 확실하게 들을 수 있을 만큼이나 선명했다.


“허.”


담담하면서 선명한 목소리. 복잡한 수식은 따르지 않는 선언.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푸확! 마력이 솟구쳤다. 가비드는 깊은 구덩이에서 도약해서 유진의 앞으로 떨어졌다. 부축하고 있던 이바타가 움찔하며 반응하려 했지만, 유진의 손이 이바타를 붙잡았다.


그건……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지금의 유진은 풀 한 포기 뽑기 힘들 만큼 힘이 빠진 상태다. 말이 부축이지, 축 늘어진 유진의 몸은 이바타에게 걸쳐진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손목을 잡는 유진의 손에서는. 마치 이바타의 존재를 통째로 붙드는 것만 같은 힘이 느껴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따르게 됐다. 저 강렬한 마력에서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고 싶지만, 유진이 ‘괜찮다’는 듯이 붙잡으니 정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서 이바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몰살의 하멜.”


유진의 앞에 내려온 가비드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말하는 것이 늦었지만, 가비드는 살의를 담아 저렇게 내뱉었다.


“오랜만이기는, 새끼가.”


유진은 살의 대신에 혐오를 담았다.


“나 힘 빠진 것 알고 대뜸 기습해서 죽이려 한 주제에, 왜 갑자기 신사다운 척이야? 씨X놈이.”


빌어먹을 환생 497화


“…….”


가비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지만, 솔직히 저 발언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세울 수가 없었다. 유진이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파악하고서 기습하여 죽이려 한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내 행동에 부끄러움은 느낀다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국 변명일 뿐이지만, 가비드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했다. 칼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휘둘렀다. 최후에는 결국 칼을 거두었다. 그 모든 것은- ‘마족’다운 투쟁심과, ‘유폐의 칼’다운 명예 때문이다.


기습을 작정한 것은, 헬무드의 대공다운 일이었다.


“어, 그래, 알았어.”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가비드의 변명 따위나 듣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비드의 속내를 긁는 것도 꽤 구미가 당기는 일이기는 했다만…….


‘지금은 참자.’


몸만 멀쩡해도 시도했을 텐데.


유진은 아쉬움에 쩝 입맛을 다셨다. 제 몸 하나 간수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가비드를 자극했다가는 주변 사람만 고생할 것이 뻔하잖은가.


“그런데 말이야. 너랑 내가 재회의 말을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 응?”


“각박한 말을 하는군. 아, 너는 나와는 사정이 다르니 어쩔 수 없나. 너는 진즉부터 정체를 숨겨서 나를 기만하였으니.”


“왜. 그래서 화가 나?”


“아니. 화는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섬뜩함은 느껴지는군. 설마 네가 이런 책략을 쓸 줄이야.”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아니, 모든 것이 매끄럽게 이해되었다.


첫 만남이었던 나이트마치. 유폐의 마왕에게 초대를 받은 후, 유진은 대뜸 성검을 뽑아서 가비드를 공격했었다. 당시의 가비드는 유폐의 마왕이 남긴 말을 신경 쓰느라 유진에게 일절 공격을 하지 않았었고, 유진은 빛의 계시를 운운하며 가비드를 죽이려 들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노골적인 암살 시도였다.


“얼씨구. 그냥 할 말 가려가면서 널 병신 취급한 것뿐인데. 이게 책략이라 할 만큼 대단한 건가?”


내뱉고서 아차 싶었다. 도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여서 도발을 해버렸다……. 게다가 이 도발은 꽤나 잘 먹혀서, 가비드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유폐의 마왕이 시킨 거냐?”


이 주제로 말하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해서 가비드를 도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유진은 즉시 화제를 바꿔 버렸다. 사실 이 화제야말로, 유진이 가비드에게서 듣고 싶던 것이다.


“뭘 말이냐.”


“나 죽이려 든 거.”


“하.”


가비드는 진심으로 불쾌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유폐의 마왕님이 이런 비겁한 명령을 내리실 리가 없지 않나.”


“허허, 지가 한 행동이 비겁한 줄은 아네.”


또다……. 이번에도 또 유진의 의도와는 달리 도발이 튀어나와 버렸다. 유진은 아차 싶었지만, 내심 억울함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벼 팔 틈을 보이는 가비드가 병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다.”


가비드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에는 네 납득은 필요 없다. 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가 옳다고 여긴 것은 선택했을 뿐이니.”


“허.”


“마음에 들지 않나?”


“당연한 것을 묻네.”


“하멜.”


가비드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내 자비 때문이다. 내가, 검을 멈췄기 때문이다.”


“네가 대뜸 검을 휘두른 것부터가 내가 두려워서지.”


유진도 똑같이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래서. 어쩔 거냐? 멈춘 검을 다시 휘둘러 나를 죽일 거냐.”


“그 대답은 이미 했을 텐데.”


지금 유진을 죽이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다.


“나는 오늘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님의 뜻이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도, 너를 오늘 베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가비드 스스로도 지금의 자신에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유폐의 마왕의 뜻은 절대적이다. 가비드는 절대로 그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 하지만 아까 검을 뽑아 기습한 것은- 유폐의 마왕의 뜻이 아니다.


헬무드의 대공. 유폐의 마왕에게 부여받은 작위. 300년 동안, 마경의…… 제국의 발전을 보아왔다. 대륙의 그 어느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국. 오늘 가비드가 유진에게 검을 휘두른 것은, 제국의 ‘대공’으로서 옳다고 생각해서다.


“다음에.”


최후에는 결국 검을 거두었다.


마족의 투쟁심. 유폐의 칼다운 명예. 언젠가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기억에 각인 된 하멜에 대한 감정을 깔끔하게 넘어서기 위해서. 300년 전에는 저런 복잡한 것들은 존재치 않았다. 칼은 칼답게 주인의 명을 따르면 될 뿐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겁함 없이, 정면에서 네 목을 베마.”


300년은 가비드에게도 변화를 주었다. 이것을 즐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원치 않는 변화에 자조해야 하나?


가비드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부나 전해줘라.”


유진은 물러서는 가비드를 향해 말했다.


“할 말 있으면 수작 부리지 말고 나한테 직접 오라고 말이야.”


유폐의 마왕에게 전하는 말이다. 가비드는 멈칫하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고 싶었지만…… 방금 결정한 마음을 1분도 지나지 않아 물릴 수는 없는 노릇.


결국 가비드는 대답하지 않고서 몸을 돌렸다.


의문은.


가비드도 가지고 있었다. 이번 나하마의 전쟁은 너무나도 이상하다. 유폐의 마왕은, 망령의 행동을 묵인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덕분에 헬무드는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해 라비스타에 봉인한 초대형 마물을 모두 잃었다.


손해는 그뿐만이 아니다. 유폐의 지팡이인 아멜리아 머윈은 제압당해 포로가 되었다. 고위 마족들 상당수와 나하마에 심어놓은 흑마법사가 모두 죽었다.


거기에 멸망의 마왕의 영지, 라비스타에서 사는 마족들 대부분이 죽은 것. 설마 멸망의 마왕이 제 권속이 죽은 것들에 분노할 것 같지는 않다만, 혹시라도 멸망의 마왕이 날뛴다면? 가비드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아 한숨을 참았다.


‘내게 언질이라도 주셨다면 좋을 것을.’


유폐의 마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가비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공간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새끼, 갑자기 또 칼 뽑는 거 아닐까 긴장했네.”


가비드가 사라진 후.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그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곁에 내려온 세냐가 눈을 흘겼다.


“저 새끼가 덤빌 것을 걱정했다면 애초에 도발을 안 하면 되는 것 아냐?”


찰싹! 세냐의 손이 유진의 어깨를 따끔하게 후려쳤다. 평소라면 소리만큼의 따끔함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평소와 경우가 한참이나 달랐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지만, 몸이 경련이라도 난 듯이 덜덜 떨리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세냐가 모르고 때린 것일까? 당연히 아니었다. 유진이 하멜일 적부터 동료였던 그녀가 이그니션이 끝난 후의 대가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세냐가 유진을 한 대 찰싹 때린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며 감정적인 행동이었다.


‘개새끼.’


빌어먹을 갈X의 여왕과 단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둘이서 대체 무엇을 했을까? 소리도 투시도 차단해 놓고서 나눌 만한 이야기가 대체 무어가 있을까?


날개가 둘을 뒤덮기 전. 갈X의 여왕이 유진을 덮쳤다. 망측하게도, 유진을 눕혀놓고 그 위에 올라탔다.


‘아리아는 또 뭐야?’


세냐도 유진과 비교해 만만찮을 정도로 귀가 밝다. ‘아리아’라는 이름을 들었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갈X의 여왕은- 누아르 제벨라는, 크게 동요했다. 그녀가 저만큼이나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인물인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날개가 걷혔을 때. 유진과 누아르의 입술은 똑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와, 번들거리는…….


“…….”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뻗어 나갈 것만 같은 주먹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만약, 만약…… 유진과 누아르 사이에 불미스럽고 망측하며 파렴치한 입맞춤이 있었다면. 그것은, 절대로 유진의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날개가 걷히고 나서, 유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입술이 닳도록 문질러댄 것이었으니.


그를 통해 알 수 있다. 입맞춤은 강제적으로 이뤄진 것이 틀림없다. 부끄러움이라곤 모르는 갈X의 여왕은, 그 이름처럼 지저분하고 행동거지가 가벼운 행동을 해버린 것이다.


이그니션의 대가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유진을 덮쳐서, 깔고 앉아서, 싫다고 저항하는 유진을 힘으로 제압하고, 나약한 초식동물을 사냥하여 잡아먹는 포식자처럼, 천천히, 욕망껏…….


“꿀꺽.”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 세냐는 꿀꺽 침을 삼켰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왜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일까? 세냐는 그 이유를 파헤치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유진은 개자식이다.


그리고 세냐는 저 개자식의 개 같은 부분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은 훈육을 해야 해.”


세냐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못된 짓을 했으면 단호히 ‘안 돼’라고 말하면서 필요한 벌을 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세냐는 유진을 ‘찰싹’ 때린 것에 죄책감이나 후회는 느끼지 않았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유진이 세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복잡하고 질척한 생각을 알 리가 없었다. 뜯겨 날아갈 것만 같던 팔의 통증도 가라앉았으니,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넌 몰라도 돼.”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똑바로 해.”


“지금 묻고 싶은 것이 있기는 한데, 나중에 물어볼게. 여기서 물어보면 안 될 질문일 테니까.”


가늘게 뜬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그런 종류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세냐뿐만이 아니었다. 날개를 하나씩 접으며 내려오는 크리스티나도, 그 안에 있는 아니스도, 세냐와 다를 것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쯧.”


아니스는 얼추 사정을 파악하고 있다. 누아르 제벨라가 전쟁신의 성녀의 환생이란 사실은 제벨라 파크에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유진도 굉장히 동요했었다.


제 딴에는 괜찮다, 변하는 것은 없다며 못을 박았지만- 그것이 뻔한 허세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니스는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세일지라도. 유진은, 하멜은, 결국 누아르를 죽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긴 망설임과 괴로움을 느낄지라도, 결국 유진의 선택은 변치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스는 그것이 싫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하멜은, 스스로 너무 가혹한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누아르가 죄를 뉘우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필요에 의해 협력하겠다고 나선다면. 누아르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꼭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멜이, 내심 그것을 바란다면. 아니스는 최선을 다해서 하멜의 선택을 지지하고 싶었다. 누아르를 죽이지 않는 것으로 하멜이 덜 괴롭다면 말이다.


[하지만 유진 님의 선택은 바뀌지 않았겠죠.]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니스의 생각도 같았기에, 그녀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저 아리아라는 이름은 전생의 본명이겠죠.’


누아르 제벨라는 과거를 깨우쳤다.


‘둘이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둘은 서로를 죽이려 할 겁니다.’


누아르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는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하멜이 더욱 커다란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차라리 누아르가 기억을 깨치기 전이었다면, 하멜은 그녀에게서 다른 모습을 보지 않았을 테니.


-아니스. 이 문제에서 답은 하나밖에 없고, 나는 그 답 외에 다른 것을 찾을 생각이 없어.


-누아르, 그년이 황혼의 마녀의 환생이라서 뭐? 아가로트가 그녀를 특별하게 여겼건 말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잖아.


-너희가 알 바는 더더욱 아니지. 너희는 아가로트가 아니니까.


-즉, 누아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철저하게 나 자신의 문제라는 거야.


허세가 가득하던 말.


-나는 저것 외에 다른 답은 생각하지 않아.


하멜답고 유진다운 말이었다. 저 모든 대답은, 아니스가 알고 있는 ‘그’에 부합한 대답이었다.


그렇기에 누아르를 죽이면, 하멜은 후회할 것이다.


아니스가 알고 있는 ‘그’는 그런 남자니까.


“우선 휴식을…….”


감정을 가다듬고, 한숨 대신에 입을 열었다. 전쟁은 우군의 승리로 끝났다. 승리의 기쁨을 즐기기도 전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 버렸다. 아니스는 앞장서서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다.


“끼아아악!”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뜬금없는 까마귀의 우짖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괴성의 주인은 당연히 멜키스였다. 오메가 포스가 파괴된 여파로 백색마탑 마법사들과 함께 널브러져 있던 멜키스는, 몸이 조금 회복되자마자 즉시 비명을 지르며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유진아!”


멜키스가 모래밭을 펄쩍 뛰어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상태에서 멜키스의 육탄공격을 받아버리면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유진이 기겁하는 소리를 내자 이바타가 알아서 손을 들어 유진의 앞을 막아주었다. 거기에 세냐도 마법을 써서 멜키스를 허공에서 붙잡았다.


“놔! 놔아!”


멜키스가 버둥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나는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네가 방금 말했잖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고!”


그 외침에 유진의 이마에서 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너, 너 정말로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야?!”


예상했던 질문이지만, 유진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빌어먹을 환생 498화


오늘 하루 몇 번이나 선언을 하는 것일까?


망령과 싸우는 도중에 한 번 선언했다. 높은 하늘에서 전투를 내려다보고 있는 가비드가 들을 수 있게끔. 검을, 휘두르면서.


-내가 하멜이다.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까 전. 가비드를 한 번 더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이곳의 모두가 들을 수 있게끔, 한 번 더 선언했다.


-나는 하멜의 환생이다.


오늘만 해도 두 번을 선언했다. 그런데 분위기를 보니까 한 번 더 해야 할 것만 같다…….


유진은 있는 대로 눈썹을 찡그리고서, 공중에 묶인 멜키스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세냐의 마법에 묶여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


멜키스에게는 여러모로 좋은 감정이 많다. 정말로 솔직하게 말해서 악감정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멜키스는 여태까지 유진에게 잘 대해주었고, 특히 멜키스가 이룩한 ‘힘’은, 앞으로도 유진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잘 지내고 싶다. 멜키스가 바란다면,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대가를 확실히 주고받는 관계라면 부탁들 들어줄 용의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멜키스에게 악감정이 생길 것만 같다. 멜키스와 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희미해진다…….


“유진아!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네가, 네가 정말로 우둔한 하멜의 환생인 거냐니까?!”


저 외침을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 가비드는 굉장히 신사적인 놈이었다. 적어도 그 새끼는, 유진에 대한 ‘경의’를 담아 말하지 않았나.


‘몰살의 하멜’.


마족들이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유진은 저 이름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저, 우둔한 하멜이라는 엿 같은 이름보다는 훨씬 멋진 울림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유진은, 멜키스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썩 좋은 의미도 아닐 별명을 외치다니…….


“우둔한 하멜의 환생!”


멜키스가 꽥 외쳤다. 그녀는 군중의 호응을 이끄는 바람잡이처럼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서 짝, 짝 박수까지 치기 시작했다.


“우! 둔! 한!”


열심히 박수를 치던 멜키스가 주변에 눈총을 주었다. 곁에 있던 백색마탑 마법사들은 거절의 자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지치고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멜키스를 따라 박수를 치며 복창을 이어갔다.


“하! 멜!”


“우! 둔! 한!”


“하! 멜!”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저 외침에 무언가 의미는 있는 것인가? 왜 자기 혼자 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연호하게 만드는 건가? 왜 백색마탑 마법사들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내는 건가?


“용! 사!”


“유! 진!”


“라! 이! 언!”


“하! 트!”


왜 우둔한 하멜에서 유진 라이언하트로 바꿔 외치는 것이지? 지칭이 달라지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우둔한 하멜을 외칠 때에는 눈치를 보느라 입술을 열지 않던 사람들이,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를 외칠 때는 슬금슬금 호응을 더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의 목적은 이곳의 모두가 유진을 외치게 만드는 것인가?


[하멜. 저것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무언가다.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다운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누군지 모를 창조주는 저것에 커다란 재능을 내렸지만, 대가로 인격에 거대한 구멍을 남겨놓았다…….]


망토 안의 위니드가 웅웅거렸다. 빼도 박도 할 수 없이 멜키스와 계약을 맺어버린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메가 포스. 멜키스 엘하이어와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마치 심연을 떠도는 것만 같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를 들여보는 것만 같았다. 그 미지의 공포를 어찌 형언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와 다른 정령왕들은, 멜키스 엘하이어라는 거대한 혼돈 안에서 뒤섞이며…… 나의…… 나의 존엄은…….]


템페스트가 덜덜 떨면서 중얼거렸다.


“찬! 란! 한!”


외침이 더해졌다. 카르멘이었다. 그녀도 가비드의 검풍에 휘말렸던 여파로 얼굴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 외에 부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 전용으로 개조된 엑시드, 마룡갑(魔龍甲)의 성능이 워낙에 출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르멘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건재한 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찬! 란! 한!”


카르멘은 자신이 만든 별명에 아주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드래곤슬레이어, 혈사자, 그 별명들도 마음에 들었지만-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는, 내뱉어 버린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전율해 버릴 만큼 좋았다.


그러니 모두가 유진을 저렇게 부르게 만들고 싶었다.


위대한 베르무트.


용감한 모론.


신실한 아니스.


현명한 세냐.


우둔한 하멜.


그리고.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찬! 란! 한!”


카르멘의 목에 핏대가 섰다. 사자후라 해도 될 만큼 커다란 목소리라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고 사막을 진동시켰다.


카르멘이 그렇게 외치기 시작하니, 그녀를 따르는 흑사자들도 똑같이 연호할 수밖에 없었다.


쿵, 쿵, 쿵! 절도 있는 발 구름. 하지만 지저분한 모래 구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카르멘과 흑사자들의 외침이 모래를 흩트렸기 때문이다.


“유! 진!”


“라! 이! 언!”


“하! 트!”


대체, 대체 무슨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인가. 유진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그는 흠칫 놀라서 옆을 보았다.


이바타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뺨이 살짝 씰룩거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


이대로 두었다가는 수천 명이 유진 라이언하트란 이름을 연호할 것이다. 사실 그것이 유진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진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숭배란 이런 식으로 탄생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만약 지금 몸이 멀쩡한 상태라면, 이름을 외치는 전원의 뺨따구를 갈겼을 것이다. 멜키스도 당연히 한 대 얻어맞아야 한다. 카르멘도 어쩔 수 없이 한 대 정도는 유진에게 얻어맞아야 할 것이다.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시끄러운 외침들 속에서 중후한 목소리를 들었다. 외침은 아니다. 작은 중얼거림.


길레이드였다. 그는 시안의 부축을 받고 선 상태로 나직이 이름을 외웠다. 무어가 그리 감동스러운 것인지, 길레이드의 눈동자는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 곁의 시안은 아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고, 시엘도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


한 대씩 때려주겠다는 생각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성녀들과 세냐를 보았다.


지금 저 육체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상황이 아주 흡족하다는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냐는 아예 대놓고 유진을 놀리듯 웃고 있었다.


“그…….”


우둔한 하멜.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3개의 이름을 외치던 목소리들이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로 완전히 하나가 될 즈음. 유진은 간신이 입을 열었다.


“그…… 그만.”


작은 목소리. 하지만 열렬히 연호하던 모두가 유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며칠이나 이어질 것만 같던 외침이 뚝 멎었다. 수천 명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대체 뭘 알았다는 것일까. 직접 말하는 유진조차도, 내뱉은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유진은 제발, 저 민망하기 짝이 없는 연호를 그만두어주기를 바랐다.


“대답해 줘!”


멜키스가 외쳤다. 그녀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유진에게 호소했다.


“유진! 네가, 네가 정말로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야?”


“예…….”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정말로 환생이란 것이 가능하단 말이야?! 심지어 그냥 환생도 아니잖아!”


멜키스가 비명을 질렀다.


“네가 틈만 나면 말하던 가문의 선조! 위대한 베르무트가, 사실은 네 동료였다는 말이지?! 네가 베르무트보다 존경한다고 말했던 영웅! 우둔한 하멜이! 사실은 너 자신이었던 거야?!”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머리가 좋아야 한다. 외워야 할 술식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마법사들 중에서도 독보적이어야 할 대마법사는,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머리가 좋다는 것은 여러 방향성이 있겠지만, 기억력만큼은 뛰어나야 한다.


즉 멜키스는 기억력이 좋다. 유진이 지나가듯이, 별생각 없이 말했던 하멜에 관한 칭송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맙소사, 맙소사! 어떻게 그럴 수가! 환생도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타인인 척 자기 얼굴에 금칠을 했다는 것이 더욱 말도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멜키스는 제 머리를 손으로 짚어가며 외쳤다. 놀랍게도 지금의 멜키스에게는 한 점의 악의도 없었다. 정말로 단순하게, 유진이 과거에 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저렇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멜키스가 무슨 악의가 있어서,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를 조지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그것은…….”


설마 이렇게 대놓고 물어올 줄이야. 유진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을 더듬었다.


그 순간, 세냐가 유진을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럴 수도 있지.”


“네?”


“그럴 수도 있지.”


뭐가 그럴 수도 있다는 걸까. 유진도 이해가 안 되어서 세냐를 쳐다보았다.


그런 감정을 시선에 담은 것은 유진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얼떨떨한 눈으로 세냐를 쳐다보았다.


“언니, 갑자기 무슨 말을…….”


세냐의 머리카락이 위로 스멀스멀 치솟았다.


“그럴.”


세냐의 눈동자에서 빛이 번뜩였다.


“수도.”


세냐의 등 뒤에서 은하가 열렸다.


“있지.”


충분했다. 수천 명 중 누구도 세냐에게 반문하지 않았다. 그냥,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멜키스조차도 지금의 세냐에게 다른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세냐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지는 멜키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죠, 언니,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멜키스도 냉큼 태도를 바꾸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도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더 말꼬리를 잡았다가는 세냐에게 혼쭐이 날 것이 뻔했다.


아니, 어쩌면 혼쭐이 나는 수준이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 세냐의 눈동자에서는 그만큼의 살의가 느껴졌다.


멜키스는 사정을 모르지만, 지금 순간에 나선 것은 세냐로서도 필사적이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유진이 대답할 경우, 동화책에 적힌 별명에 관해 발끈할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러다가 동화책의 저자에 대해 말해 버린다면? 또 개인적으로 발끈하기도 했다. 타인인 척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세냐는 진심으로 ‘그럴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다.


“……으흠.”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현명한 세냐고, 신실한 아니스였기 때문이다…….


“멋진…… 멋진 일입니다.”


로베리안은 홀로 눈물을 흘렸다.


오직 그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비밀. 300년을 초월한 인연. 비극으로 끝났던 동화책의 다음 장.


로베리안은 그 모든 것을 상상하며 박수를 쳤다. 마음 같아서는 시무인에서처럼 바이올린이라도 켜고 싶었지만, 판테온의 입구가 파괴당한 지금 소환 마법은 사용이 힘들었다…….


그래서 로베리안은 열과 성을 다해 박수만 쳤다. 평소 진중하던 적색마탑주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멜키스 때와는 다른 호응이 만들어졌다. 거의 모든 마법사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가 빛의 뜻이구나.”


라파엘로도 감탄해서 박수 쳤다. 모든 성기사와 성직자들이 유진을 위해 박수를 쳤다.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카르멘도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유진은, 이제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환생.”


모두의 뒤에서.


발자크는 홀로 감탄하여 중얼거렸다.


욱신거리는 팔을 감싸 쥐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 마물이 아니지만 그 어느 마물보다 마물답고, 멸망의 권속들보다도 더욱이 멸망에 가까운 괴물들.


발자크의 ‘글러트니’는 괴물들의 시체를 포식했다. 뿐만 아니라 죽은 마족들의 시체도 보이는 족족 포식했다. 한계를 한참 넘어선 과식은 팔에 고통 외에 감각이 없게 만들고, 더해진 것들이 섞이는 과정은 당장에라도 토악질을 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괴로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뿌옇고 지끈거리던 머리는 오히려 맑게 갠 것 같았다.


똑같이 감탄하고 신비롭다고 생각했다. 설마 환생이란 것이 존재할 줄이야. 게다가 이것은 단순한 환생도 아니다. 용사라는 이름의 대물림. 누구도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300년 만에 용사가 태어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하멜 다이너스가 유진 라이언하트로 환생한 것은 운명이다.


긴 시간 평화를 이어온 유폐의 마왕이, 약속의 끝을 말한 것은 운명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시대의 종막(終幕)이 온다. 그대로 저물어 버릴지, 다음 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발자크는.


자신이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것에 감사를 느꼈다.


빌어먹을 환생 499화


“용케 안 죽었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하늘에서는 유진과 망령이 격돌했고, 지상에서는 수천 마리의 누르와 군대가 맞붙었다.


그 결과, 하우리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과장 보태지 않고 멀쩡한 건물이 남지 않았을 정도다. 그런데도 건물 옥상에 방치되었던 아멜리아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아니.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육체야 별 부상이 존재하지 않지만, 아멜리아의 정신은- 세냐가 보여주는 악몽 속에 갇혀 있다.


주변 건물이 죄다 무너지는 와중에도 목숨을 건진 것은, 아멜리아가 특별히 운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세냐가 남기고 간 결계가 아멜리아를 보호한 것이다.


“확 죽여 버릴까 싶었는데.”


세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아멜리아의 몸을 툭 걷어차며 말을 이었다.


“네 의견을 따라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신경 써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사실 이제 와서 아멜리아가 죽고 말고는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고작 아멜리아 따위를 신경 쓰기에는 유진이 너무 강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등 추한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보았으니, 솔직히 이제는 아멜리아가 죽건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블러드 메리.”


아멜리아 자체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지만, 저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유진은 히죽 웃으면서 아멜리아의 손에 쥐어진 블러드 메리를 보았다. 역대 유폐의 지팡이에게 계승되어 온 마법 지팡이.


드래곤 하트를 아낌없이 통째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아카샤와 동격이다. 아카샤에게 다른 마법을 이해하게 만드는 권능이 깃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블러드 메리에도 권능이 깃들어 있다.


“역대 소유자의 마법을 계승할 수 있어.”


유진의 곁에 서있던 세냐가 입을 열었다.


“네게 탐나는 권능은 아니지. 안 그래?”


“흑마법사라면 모를까.”


유진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블러드 메리의 역대 소유자는 모두가 유폐의 지팡이. 흑마법사에게 있어 전임자들의 마법을 아무 노력 없이 그대로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이겠지만, 유진과 세냐는 흑마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발자크한테 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유진은 근처에 없는 발자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발자크가 당장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도, 그와 언젠가 싸우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 전쟁. 발자크는 아주 많은 것을 얻었다. 그가 만든 새로운 시그니처, 글러트니는 손으로 포식한 것에서 힘과 기억을 얻는다. 발자크는 전장에서 꽤 많은 마족과 마물, 심지어 누르까지 포식했다.


내버려 두었다. 발자크가 포식을 통해 힘을 늘려봤자, ‘마법’으로는 세냐를 절대로 능가할 수 없다. 마력만 무식하게 키워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유진은 발자크가 ‘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발자크 본인에게 뚜렷한 적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전설적인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비원이 순수하고 진실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싸우게 된다. 발자크 본인이 바라지 않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을 노리는 이상은 언젠가 반드시 발자크와 싸우게 된다.


언젠가 싸우게 된다면.


적어도 발자크가 만족할 만큼의 싸움을 해주고 싶었다. 포식으로 얻은 힘이라고 해봐야 유진의 적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럴지라도.


“하지만 블러드 메리는 선 넘었지.”


굳이 발자크를 위해 선물까지 할 정도는 아니다.


“어쩔래?”


“일단 내가 가질게.”


세냐가 말했다. 유진은 그 대답이 의외여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흑마법을 익히려는 것은 아니겠지?”


“익힐 생각은 없지만, 알아두고 싶다는 욕심은 나네.”


세냐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흑마법도 결국은 마법이니까 말이야. 거기에 역대 유폐의 지팡이들이라면,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났던 흑마법사들이지. 그래 봤자 이 현명한 세냐 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런데 왜 굳이 갖겠다는 거야?”


“마법의 여신이 되려면, ‘마법’이라 불리는 모든 것에 능통해야 할 것 아냐?”


웃는 얼굴에 목소리도 가벼웠지만, 세냐의 눈동자는 굉장히 진지했다. 유진도 저 말이 절대로 농담이 아니란 것쯤은 느끼고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어.”


가까워지고 있다니? 블러드메리를 집어 들던 세냐는 저 뜬금없는 말에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갑자기 뭐야?”


“뭐라 설명은 어려운데, 느낌이 그래.”


“흠,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빛을 둘렀던 유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니, 그 순간의 유진은- 단순히 빛을 두르는 것이 아니라, 빛과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에 무언가를 ‘느꼈던’ 것은 세냐도 똑같았다.


‘정말로 인간이 아닌 것만 같았어.’


격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넘어서는 것만 같았다.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블러드 메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마법, ‘절대률’ 역시 마법의 격을 넘어선 것이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목표로 잡은 마법의 여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격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격을 이루어야 할 것 같다.


“드래곤 하트까지 가질 거냐?”


“아니. 내가 갖는 것은 너무 사치스럽지. 별 필요도 없고.”


절대률이 없었다면 이터널 홀의 부상을 보완할 겸 드래곤 하트에 욕심을 냈을 것이다. 지금의 세냐에게 드래곤 하트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 볼일이 끝난 뒤에, 찌든 마력을 정화하고…… 흠, 그래도 쓸 수 있다면. 다른 마법사한테 선물이라도 하지 뭐. 아니면 라이언하트에 넘길까?”


“가주님이나 카르멘 님의 엑시드에 더해도 될 것 같고…… 아니면 제노스한테 줄까? 로베리안 님께 드려도 좋을 것 같네.”


유진은 별생각 없이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즉시 세냐의 두 눈이 얇게 떠졌다.


“대놓고 하멜의 환생이요, 했으면서 아직도 로베리안을 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제 와서 로베리안아, 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냐?”


“이상할 게 뭐야?”


“나는……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지적하지 마.”


유진은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유진은 나름대로 사람을 대하는 것에 기준을 두고 있었다. 인성이 훌륭하고, 나한테 잘해주고…… 그런 점에서 로베리안이나 길레이드는 ‘님’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멜키스 님은?’


여태까지 유진은 멜키스에게도 꼬박꼬박 님이라고 붙여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나?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대우해 주어야 할 사람인가?


당대의 마법사들 중에서 멜키스가 가장 강력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다. 헬무드와의 전면전에서 멜키스는 절대로 제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경이로운 힘과는 별개로, 멜키스 엘하이어의 인성은 어떤가?


-네가 베르무트보다 존경한다고 말했던 영웅! 우둔한 하멜이! 사실은 너 자신이었던 거야?!


“뿌득.”


생각할수록 뒷목이 당긴다. 유진이 홀로 분노해서 이를 갈자, 곁에서 부축하고 있던 아니스가 대뜸 유진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팡!


“악!”


경쾌한 소리와 달리 고통은 뼈에 사무쳤다. 예상하지 못한 불의의 일격에 유진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물론 아니스는 유진이 쓰러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뱀처럼 감겨 온 팔이 유진의 가슴을 붙잡았다.


“…….”


너무 바짝 붙었다. 유진은 팔을 압박하는 부드러운 감촉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이를 악물었다.


“화를 내면 회복이 늦어집니다.”


귓가에서 아니스가 속삭였다. 유진은 저 말이 너무나도 억울하게 느껴졌다.


화를 내면 회복이 늦어진다니? 검증이 된 것인지는 둘째치고, 여태까지 이그니션을 쓴 뒤에 화를 낸 적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 번이 넘을 텐데?


“…….”


엉덩이를 때리기 위한 핑계일 뿐일 터. 유진은 굳이 이유를 캐묻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꼭 그것만이 이유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스는 유진을 흘겨보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그 갈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겁니까.”


“…….”


“하멜. 당신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저는 깊숙하게 묻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니까요. 비록 당신의 입술에서 그 갈보의 냄새가 짙게 남았을지라도. 입술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몸 구석구석에 체취가 배었을지라도, 예, 저는 이유를 묻지 않을 겁니다.”


꾸욱. 팔을 압박하는 감촉이 강해졌다. 아니스의 속삭임이 이어질수록 세냐의 눈도 점점 예리하게 변해갔다.


“하지만. 존중은 하되, 서운함을 느낄 수밖에 없겠죠. 예, 저는 계속해서 당신에게 서운함을 느낄 겁니다.”


“그…… 비밀로 할 생각은 없어. 단지 아직은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뭔 놈의 상황을 찾는 겁니까? 어디 조용한 방 안에서, 각자 의자에 앉아서 술이나 차를 깔아두고서야 입을 열 생각이었습니까?”


어떻게 알았지?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아니스와 세냐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은 너무…….”


3명은 폐허가 된 하우리아에 서 있다. 근처에는 없지만, 해방군도 도시 구석구석을 탐색 중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를 생존자나 적의 잔당을 색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잔해에 파묻혀버린 전리품을 노획하기 위해서였다.


“저것도 아직 살아 있고…….”


슬며시 내려가는 눈동자가 아멜리아를 보았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널브러진 아멜리아는, 가끔 몸을 씰룩거리며 입술을 뻐끔댔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뭐 어떱니까? 저것은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인데.”


“그냥 확 죽여?”


“안 됩니다, 하멜, 그건 제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죽으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것 아닙니까?”


“지옥에 가지 않을까…….”


“지옥보다 살아서 고통을 느끼는 것이 더욱 괴로울 테니, 죽이면 안 됩니다. 저것은 앞으로도 연명시켜야 합니다.”


아니스가 고집스레 말했다. 아멜리아에게 강렬한 원한을 품은 것은 아니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비록 처벌의 기회는 놓쳤지만, 감히 하멜의 시체를 욕보인 아멜리아에게 빠른 죽음을 선사하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유진은 한숨과 함께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설명해야 할 것은 누아르가 황혼의 마녀의 환생이라는 것이다. 성녀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세냐는 누아르의 과거조차 모르고 있다.


‘이런 꼴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그니션의 반동으로 부축 없이는 서지도 못하는 상황. 유진은 제 꼴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아르 제벨라는 황혼의 마녀의 환생이며, 오늘 누아르는 자신의 전생을 자각했다.


감정이 폭주했다.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서,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의 정체를, 감정을, 바람을, 확인했다.


그것뿐이다.


세냐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유진이 보기에도 의외라 느껴질 정도로, 세냐의 얼굴은 굉장히 차분했다. 오히려 아니스 쪽이 입술을 몇 번 씹으며 감정을 억눌렀다.


“너는.”


침묵이 끝났다. 세냐가 입을 열었다. 깊은 녹색의 눈동자가 유진을 응시했다.


“그것으로 괜찮은 거야?”


왜 내게 말하지 않았던 거야? 라는 질문을 상상했다. 하지만 세냐는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왜, 유진이 말하지 않았던 것인지. 세냐 스스로도 납득했기 때문이다.


저 개자식은 언제나 그랬다. 자신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운 것은 온전히 자기 혼자서 끌어안으려 했다. 저 버릇은 한 번 죽어도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유진. 네가 그것으로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누아르 제벨라. 그 갈보의 여왕을 죽이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니까.”


유진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세냐는 그 모든 것에 공감할 자신은 없었다. 유진과 누아르가 서로에게 품는 감정은 그들만의 것이며, 세냐가 절대로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괜찮지 않다면. 나도 괜찮지 않아. 그년을 죽이고 싶지만…… 그래서 네가 괴롭다면…….”


이어가던 말이 멈췄다. 세냐는 입술을 닫고서 유진을 빤히 보았다.


혼자서 제대로 설 수도 없어서, 아니스에게 부축받고 있는 유진을. 아까 전까지만 해도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추한 모습을 보인 주제에.


지금은.


지금의 유진은.


“아니야.”


초연하지는 않다. 유진의 감정은 복잡하고 질척하다.


미련, 후회, 그런 것들은- 결국에는 당연한 것이다. 어떠한 선택을 하든, 선택하지 않은 것에 미련을 갖고서 후회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에서 의지가 태어난다. 우둔하고 추한, 저 남자는. 결국에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것을 선택할 것이며, 선택에 후회하고 좌절할지언정 결국에는 딛고 일어설 것이다.


만약.


만약에, 일어서는 것을 힘겨워한다면.


‘지금처럼.’


곁에서 부축해 주면 되는 것이다. 일어서서,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기에 세냐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유진이 내린 선택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한 대만 맞자.”


세냐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 말에 유진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꿀꺽 침을 삼키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지 않아?”


“결정은 내가 해.”


“갑자기 왜 때린다는 건지부터 말해봐.”


“나한테 비밀로 했잖아.”


“그건…….”


“한 대로 봐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


세냐는 오른팔을 붕붕 휘두르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뱀처럼 휘감긴 아니스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아니스는 유진과 함께 빙글 돌아서, 세냐가 때리기 쉽도록 각도까지 조정해 주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


철썩!


엉덩이에 처박힌 통증이 유진의 생각을 끊었다.


* * *


사슬의 문이 닫혔다.


판데모니엄, 마왕성 바벨의 90층. 수백 년 동안 사용해 온 집무실. 가비드는 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환생.’


유폐의 마왕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직접 만난 순간. 아니, 그보다 전부터…….


‘이해가 안 돼.’


유폐의 마왕을 섬긴 이래로, 마왕의 뜻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의 심중에 대체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억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유폐의 칼인 그에게 있어서, 마왕의 뜻은 언제나 절대적이었으며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가비드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마검 글로리. 가비드는 풀어 내린 마검을 벽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복장을 점검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넘겼다.


그러고서 몇 번의 심호흡을 했다.


“처음인가.”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수백 년 동안 가비드의 의지로 어전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가비드는 언제나, 집무실에서 마왕이 내려오는 것을 기다렸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가비드는 의문에 답을 얻고자 어전의 문을 열었다.


빌어먹을 환생 500화


바벨의 91층. 마왕의 어전으로 향하는 문. 마왕의 뜻 없이는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이지만, 밀어 여는 손에는 아무런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이다.


가비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을 활짝 열었다. 수백 년 동안 가비드는 스스로 이 문을 연 적이 없었다. 언제나 90층에 마련된 집무실을 지켰을 뿐.


드문 일이지만, 유폐의 마왕은 가끔씩 가비드에게 전언을 보냈다. 대부분이 헬무드의 정무에 관한 것이었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가비드도 똑같다. 그는 헬무드의 대공으로서, 이 거대한 제국이 벌이는 모든 일을 관할하며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유폐의 마왕에게 전언을 올렸다.


그 모든 것은 대면 없이 이뤄졌다. 대공이자 유폐의 칼이라 불리는 가비드조차도, 어전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애당초 가비드는, 마왕의 부름 없이 어전의 문을 두드린 적조차 없었다. 그가 어전에 들어간 적은, 유폐의 지팡이 임명식 같은…….


‘그것은 예외 중의 예외였지.’


유폐의 지팡이를 임명하는 것에 어전이 개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애당초 그 이례적인 행사는 임명식이 중점이 아니었다. 서열 100위까지의 마족을 모아놓고 솎아내는 것이 마왕의 목적이었다.


‘신기한 기분이군.’


기억을 더듬으면서, 가비드는 피식 웃어버렸다.


확실했다. 전쟁이 끝나고, 마경이 제국이 되고, 마왕성이 빌딩이 된 후로, 가비드가 홀로 어전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


왜, 여태까지 오르지 않았던 것일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오를 일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헬무드.


이 거대한 제국은, 유폐의 마왕 없이는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헬무드가 대륙의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이 진보할 수 있는 이유는, 영토 전역에 세워진 검은 탑 때문이다. 헬무드의 랜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검은 탑들은, 판데모니엄에서 보내는 마력을 수신하여 증폭시킨다. 그 마력은 지하 깊이 매설된 케이블을 통해 영토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제국 전체가 유폐의 마왕의 마력에 기생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유폐의 마왕은 홀로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가비드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수백 년 동안, 바벨의 90층에서 수도를 내려봐 왔다.


마경을 제국으로 바꾼 것은 유폐의 마왕이다. 검은 탑을 세운 것도, 케이블을 매설한 것도, 모두가 유폐의 마왕이다.


지금 헬무드에 존재하는 대부분 기술. 마도왕국이라 거들먹대는 아롯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이 진보한 마법 공학도 유폐의 마왕이 베푼 것이다.


왜, 유폐의 마왕이……. 승리를 목전에 둔 전쟁을 멈춘 것인지. 대륙을 완전히 정복하지 않은 것인지. 마족보다는 인간의 안락한 생활을 위한 것만 같은 제국을 세운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300년. 가비드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마왕의 뜻에 따라왔다. 마왕을 위해 일해왔다. 유폐의 칼로서 어전의 아래를 지켰고, 검은 안개의 단장으로서 친위대를 조련했으며, 대공으로서 헬무드의 업무에 충실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했다. 부름도 없었는데 스스로 어전의 문을 연 것. 허락조차 구하지 않은 것. 무례를 용서해 달라 청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


“폐하.”


가비드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시커먼 어둠. 높은 천장. 아니, 그것은 천장이라기보다는 무한히 펼쳐진 밤처럼 보였다. 그 밤하늘 한복판에 사슬에 감긴 옥좌가 있다. 유폐의 마왕은 그 옥좌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체 시선만 내려 가비드를 보고 있었다.


“…….”


유폐의 마왕의 얼굴을 본 순간.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청하지 않았다. 노크조차 없었다. 그냥 무턱대고 쳐들어왔다.


그런데도 유폐의 마왕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존재하지 않았다. 짜증도 노여움도 없었다. 늘상 그러하던 권태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왕은-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곡선을 그리는 눈과 입술. 가비드는 허탈한 웃음을 토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 행동을 무례라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예상을 벗어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예상대로의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례라 생각할 이유가 있나.”


유폐의 마왕이 큭큭 웃으며 말했다.


“어전에 들지 마라…… 는 명령을 내린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혹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아닙니다.”


가비드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제게 그런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네 자유였지.”


끼릭. 옥좌를 묶은 사슬에서 쇳소리가 울렸다.


“설령 내가 네 출입을 자유로이 두지 않았을지라도. 가비드 린드먼. 너 스스로 의지로 문을 열어 이곳에 들어왔다면, 나는 그것을 무례라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어째서이십니까?”


“우리는 그만큼의 유대를 쌓지 않았나?”


유폐의 마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가비드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유대? 유대라고? 유폐의 마왕이, ‘유대’를 말한 것인가?


“어찌…… 어찌, 저따위와 유대를 말씀하십니까.”


“너는 오랫동안 나를 섬겼지.”


끼릭. 사슬이 다시 소리를 냈다. 유폐의 마왕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여서 가비드를 내려다보았다.


“내 밑에는 이제는 세는 것조차 귀찮고 버거울 만큼 많은 마족이 있다. 이 ‘제국’에 살아가는 모든 마족이 나의 백성이며, 제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민자들은 육신이 죽은 후에 완전하게 나의 백성이 되겠지.”


유폐의 마왕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지만, 가비드는 저 표정과 목소리에서 지독한 권태를 느꼈다.


‘저’ 권태야말로 유폐의 마왕의 근원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서 ‘권태’란 일상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권태로이 읊조리는 저 말에는 거대한 무게가 실려 있다. 유폐의 마왕이 말한 대로, 저 옥좌의 밑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존재들이 있다. 또한 유폐의 마왕은 바라기만 하면 언제든지 대륙의 모든 존재들을 밑에 둘 수 있다.


“그 수많은 존재 중에서 나를 가장 오랫동안 섬긴 것이 바로 너다.”


너무나도 무거운 말이다. 가비드는 당장에라도 짓눌려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저 말 또한 옳았다. 유폐의 마왕이 거느린 수많은 마족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마족이 바로 가비드다.


“…….”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얼마나 오랜 옛날인지조차도 셈이 어렵다. 그만큼 먼 옛날.


가비드는 유폐의 칼이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처음부터 유폐의 칼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가비드 린드먼은 마족 중에서 가장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 데몬으로 태어났다.


유폐의 칼, 지팡이, 방패.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왕을 섬기는 최측근. 그 시대에서 실력에 자신이 있는 마족이라면 누구나 저 자리에 오르기를 갈망했고, 그것은 가비드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일을 거쳤다. 차근차근 서열을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의 가비드에게는 위신의 마안도, 마검 글로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가비드는 강했다. 수백 년을 더 살아 온 마족들을 상대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폐하의 말씀대로, 저는 그 어떤 마족보다 오래 폐하를 섬겼습니다.”


갈망하던 대로 유폐의 칼이 되었다. 전쟁시대가 열리기도 전부터 가비드는 유폐의 칼로서 마왕의 곁을 지켰다.


어린 시절의 가비드가 그러했듯, 수많은 마족들이 ‘유폐의 칼’이 되고자 도전해 왔다. 전쟁시대가 끝난 후로는 도전을 받은 적이 없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고 마족답던 수백 년 전에는. 전쟁시대가 열리기 전에는. 가비드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투쟁적이었다.


자리를 빼앗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유폐의 지팡이가 몇 번인가 바뀌었다. 유폐의 방패도 몇 번인가 바뀌었다. 하지만 유폐의 칼은, 가비드가 저 이름을 갖게 된 후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폐의 칼’은 특별한 이름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는.”


300년 전의 전쟁 시대. 용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를 필두로 한 결사대가 바벨에 침입했다. 그들은 당대 유폐의 방패였던 우로고스를 죽였다. 그리고 당대 유폐의 지팡이, 베리알을 죽였다.


하지만 유폐의 칼은 꺾이지 않았다. 패배했을지라도, 가비드는- 살아남았다.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패배했다면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했다. 유폐의 마왕이 ‘물러서라’고 명했기 때문에.


“그토록 오랜 시간 폐하를 섬겼음에도, 여전히 폐하의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왜 그때 물러서라 명하신 걸까. 왜 내게 패자에 걸맞은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신 건가. 패배한 나는 왜 아직도 유폐의 칼이라 불리고 있나.


왜 베르무트와 맺지 않아도 될 약속을 맺으셨나. 왜 대륙을 정복하지 않으셨나. 왜 마경에 제국을 세우고 인간들을 받아들였나.


약속이란 대체 무언가.


“왜 하멜을 죽이지 않으신 겁니까.”


수많은 의문 중, 가비드는 저 의문에 가장 절실히 답을 원했다.


“폐하께서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몰살의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을 겁니다.”


“언제부터였을까.”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


“나라고 해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멜 다이너스의 환생은…… 미리 안배되어 있던 것이지만, 정확한 시기까지는 알 수 없었지. 소문 시끄러운 혈계식이 없었다면, 유진 라이언하트의 정체를 알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터.”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위치한 것은 시커먼 어둠뿐. 이곳은 마왕성 바벨의 최상층, 마왕의 어전이다. 이곳의 천장은 하늘과 가장 가까울 테지만, 하늘과 이어져 있지는 않다.


“……안배된 환생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부터가 운명이지.”


“…….”


“이 시대를 선택한 것은 베르무트가 아니다. 베르무트에게는, 그런 능력까지는 없었으니.”


그 말을 들은 순간. 가비드의 뺨이 움찔 떨렸다. 그는 불과 수십 분 전에 보고 왔던 대륙의 영웅들을 떠올렸다.


가비드 본인이 말하지 않았나. 지금 시대의 영웅들이 300년 전에 있었다면, 베르무트와 동료들 외에도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가 몇 명은 더 있었을 것이다.


“베르무트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이 시대가, 하멜의 환생을 바랐다는 겁니까?”


“그런 것을 운명이라 말하겠지.”


유폐의 마왕이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운명…… 대체 누가?


‘빛?’


자연스럽게 가비드의 머릿속에는 ‘신’이 떠올랐다.


대마왕조차도 관장할 수 없는 운명. 특히 환생에 관여할 수 있는 존재가 신 외에 누가 있을까?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강력한 신은 바로 빛이다.


‘환생을 안배한 것은 베르무트…….’


그는 빛의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였다. 동시에 꺼림칙하고 불길한, 멸망의 검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 양면성을 지닌, 마족에게 절망처럼 여겨지고 인간에게는 희망이라 여겨지던 자는- 대체 무엇을 위해 하멜의 환생을 바란 것일까.


“더욱 이해가 안 갑니다.”


가비드는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 시대가 하멜의 환생을 선택했다는 것을, 조금 더 깊이 이해했다. 가비드가 겪었던 그 어느 시대보다 지금의 시대가 강하다. 하나로 집결된 힘은, 유폐의 마왕이 만들고, 가비드가 대신해 돌봐온…… 이 거대한 제국을 위협하기 충분하다.


“놈은, 헬무드의 적입니다.”


“그렇다.”


“폐하께서는……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말씀하셨지요. 놈이, 바벨을 오르기 전까지, 절대로 죽이지 않겠다고.”


“그렇다.”


“놈이 바벨에 오르기 전에.”


무례한 질문이란 것은 안다.


“제가 놈을 찾아가, 죽이는 것은 안 되는 겁니까.”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굳이 유진이, 용사가 바벨을 오르게 두어야 하는가? 뻔히 적이 될 존재를, 그것도 시간이 주어질수록 치명적으로 변해가는 존재를. 왜 짓밟지 않고 기다려 주는가.


유폐의 마왕은 대답하지 않고 가비드를 내려다보았다. 가비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묵하던 유폐의 마왕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윤허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고 물러나겠습니다.”


“그 후에도 여전히 유폐의 칼로서 내게 검을 바칠 것인가.”


“그 이름을 주신 것도, 마검과 마안을 하사하신 것도 폐하이십니다. 제 검은 바칠 필요 없이 폐하의 것입니다.”


“헬무드의 대공으로서는 어떠한가?”


“언젠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준비에 몰두하겠지요.”


“가비드 린드먼으로서는?”


불쑥 묻는 질문에 이번에는 가비드의 말문이 막혔다.


“네가 어전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 내게 의문을 품는 것. 그 모든 것은 유폐의 칼도, 헬무드의 대공의 것도 아닌 가비드 린드먼의 의지 아닌가?”


“…….”


“칼뿐이라면 단순히 주인의 뜻에 따르면 된다. 대공이라면 황제인 내 뜻에 따르면서 제국을 위하면 된다. 그것들에 굳이 너 자신의 의지를 둘 필요는 없다.”


“…….”


“하나의 존재인 너는 어떠한가? 나 유폐의 마왕에게 답을 구하는 것은, 칼인가? 대공인가? 아니면 너인가?”


그렇게 묻는 유폐의 마왕에게는 아까와 같은 권태는 느껴지지 않았다. 가늘게 뜨며 웃고 있는 눈동자에는 드물게도 ‘즐거움’이란 감정이 어려 있었으며, 나직한 목소리에도 활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저는…….”


가비드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놈이 바벨에 오르기 전에, 먼저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서인가?”


“제가 칼이라면, 그렇다 대답할 것입니다.”


“헬무드를 위해서인가?”


“제가 대공이라면, 그렇다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를 위해서로군.”


“예.”


결국 가비드는 가슴 밑바닥의 감정을 드러냈다.


“하멜을 죽이고 싶습니다.”


살의는 300년 전의 굴욕에 의한 것.


“유진 라이언하트와 싸우고 싶습니다.”


전의는 이번의 전투를 보았기 때문에.


“만전의 용사와, 싸우고 싶습니다.”


어전을 들어왔을 때 품었던 의문들은 모조리 내려놓았다. 유폐의 마왕에게 답을 청하지도 않았다.


하멜이 환생한 이유? 그를 죽이지 않은 이유? 헬무드 제국의 안녕?


그 외에 수많은, 그따위 것들은 무시했다. 가비드는 마족다운 폭력성과 투쟁심을 야만적으로 드러냈다.


“전쟁이 아닌 결투를 하고 싶습니다.”


빌어먹을 환생 501화


유폐의 칼.


명예로운 이름이란 것을 안다. 스스로 긍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저 이름이 싫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쟁 시대가 끝나고, 유폐의 방패는 증원되지 않았다. 적에게 한번 부서진 방패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폐의 지팡이는 증원했다. 블러드 메리 때문은 아니다. ‘유폐의 지팡이’는 전쟁 시대 전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간 흑마법사 중 최고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자리였다. 헬무드 ‘제국’은 흑마법사도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다. 유폐의 마왕은 다른 마왕이나 마족과 달리, 흑마법사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전쟁은 막 끝났다. 약속을 통해 평화가 태어났지만, 그 시절의 대륙에는 마왕과 마족, 흑마법사에 대한 혐오가 만연했다. 동시에 전화(戰禍)를 수습하지 못한 왕국과 살길이 막막한 인간은 넘쳐났다.


그때가 제국의 여명기였다. 유폐의 마왕은 뛰어난 흑마법사에 최측근의 자리를 보장했고, 제한 없이 받아들인 이민자들에게는 다시는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의 안락함을 주었다.


유폐의 칼은.


여전히 가비드 린드먼이었다.


방패는 부서졌기에 폐기되었다. 지팡이는 정치적으로 쓰였다. 하지만, 칼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커다란 의미가 주어졌다.


유폐의 칼은 대공의 지위를 갖게 됐다. 이 거대한 제국에서 유폐의 마왕을 제외하면 가비드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자는 없다.


유폐의 칼은 헬무드에서 기사도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됐다. 방패가 부서지고 지팡이가 꺾이는 순간에도, 칼은 부러지지 않고 주인을 지켰다. 충성스러운 기사는 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인을 위해 싸웠다.


전쟁 시대가 끝나고 300년. 유폐의 칼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가비드 린드먼’이라는 이름에 더욱 커다란 후광을 부여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사. 가장 오랫동안 유폐의 칼로 불리며, 가장 오랫동안 마왕을 섬긴 최측근.


-아니다. 가비드는 저러한 칭송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꺾이지 않았다고? 헛소리다. 유폐의 칼은 이미 300년 전에 부러졌다. 방패와 지팡이처럼 죽지 못한 것은, 유폐의 마왕이 칼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폐의 칼이란 이름을 반납하지 못한 것은, 유폐의 마왕이 그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결투라.”


저 말은 마왕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일찍이 대륙에게, 제국의 모든 마족에게 선언했다. 용사가 바벨을 오르는 것을 기다리겠다고 말이다.


다른 마족이라면 괜찮다. 사적인 감정, 탐욕, 명예욕, 혹은 용사에 대한 증오. 300년 전의 케케묵은 복수심이라도 괜찮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이라도 상관없다. 애당초 저 선언은 유폐의 마왕 개인의 것이지, 헬무드 모든 마족에게 강제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만약 다른 마족이 제멋대로 행동해서- 용사를 먼저 죽이려 든다면.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유감도 표하지 않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이곳, 마왕성 바벨에서 기다리는 것은 ‘용사’다.


마왕에게 도전하는 용사. 마왕을 위협할 수 있는 용사. ‘고작’ 다른 마족에게 죽어버린다면 용사라 할 수도 없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유폐의 칼’이 그런 행동을 해선 안 된다. 유폐의 마왕이 말했듯, ‘칼’은 단순하게 주인의 뜻에 따르면 된다.


“그냥 죽이는 것으로는 부족한가.”


유폐의 마왕이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인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청이지만, 유폐의 마왕은 조금의 불쾌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표정으로 내색할 만큼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망령의 때와 같다. 유폐의 마왕은 불규칙을 좋아한다. 그가 봐왔던 여러 번의 과거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좋아한다. 그러한 것들이 지금의 세계가 특별하다 느끼게 만들고, 만에 하나라 할 수 있을 기대를 쌓아가기 때문이다.


“가비드 린드먼. 네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죽이려 했던 것을 보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망령에 대해 생각했다. 그라는 존재의 마지막에 대해서 애도를 느꼈다. 무가치하게 태어났던 그는 최후를 앞에 두고 존재에 의미를 찾았다.


그에게는 마지막까지 이름이 없었다. 그라는 존재가 이름을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폐의 마왕은. 설령 이름 없는 존재로 죽었을지라도, 하멜에서 태어난 데스나이트를. 이름을 거부하고 제 자신을 망령이라 말한 자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라는 존재에게 영원이 있다면 말이다.


“나는 그 순간에 네가 결의한 것, 행동해 버린 것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을 일부 알게 된 망령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을 내렸다.


망령의 선택은 유진 라이언하트를 시험하는 것. 자격이 없다면 직접 죽이는 것. 그렇게 다음 시대로 가능성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옳은가? 망령에게는 옳았다. 유폐의 마왕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왜 저를 비난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네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까.”


유폐의 마왕에게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행해 온 것들이 있듯, 다른 존재도 마땅히 그럴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뚜렷한 주관을 존중했다.


“너는 스스로 처분했겠지.”


다만, 그러한 주관에는 존중에 걸맞게 책임이 필요하다.


“유진 라이언하트를 죽이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인 뒤에, 자신의 목숨을 끊었을 거다.”


가비드 린드먼은 놀라지 않고 유폐의 마왕을 바라보았다. 곧, 가비드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하지만. 너는 직전에 검을 거두었다. 뜻을 바꾸었다.”


유폐의 칼답게. 헬무드의 대공답게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면. 유폐의 마왕은 그 선택도 존중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즐거운 감정은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가비드 린드먼. 나의 기사여. 너는 긴 세월 나를 섬기면서도, 내 뜻의 진의를 파헤친 적이 많지 않았지. 의문을 느끼고, 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쯤에서 그만두었을 뿐. 닫힌 문을 열고, 허락 없이 어전에 들어와서 내게 답을 바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


“지금의 너는 간절하고 욕망적이구나. 수백 년 유폐의 칼을 지냈지만, 이만큼 너 자신의 욕망에 몰두한 적이 있던가.”


“없습니다.”


“그만큼.”


유폐의 마왕이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셀 수 없이 많은 인과를 엮은 사슬들이 마왕과 함께 일어났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싸우고 싶다는 건가.”


“예.”


“만전의 그와 싸우고 싶다고 말하였지. 그렇다면 굳이 결투를 벌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는, 언젠가 바벨에 온다.”


“폐하.”


가비드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만약 제가 바벨에서 유진 라이언하트를 기다린다면. 그는…… 놈은,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겁니다.”


“허.”


저 대답에 유폐의 마왕의 미소가 보다 짙어졌다. 가비드는 고개를 숙인 채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놈은 반드시 여력을 두고 싸울 겁니다. 어쩌면, 혼자서 싸우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저와 승부를 내는 것에 몰두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유폐의 칼은 어전의 앞을 지켜야 한다. 300년 전에도 그랬다. 붉은 평원에서 후퇴한 후, 가비드는 태세를 정비하고 어전의 앞을 지켰다.


평원을 지나 바벨에 침입한 용사와 동료들의 앞에는 많은 시련이 있었다.


마족 전체 중에서 최정예라 할 마족들. 겉으로 드러난 서열과는 다른 진짜 강자들. 목숨을 도외시하고 금기마저 범하며 힘을 끌어낸 시한부들. 치명적이고 집요한 함정들. 방패와, 지팡이.


그 모든 시련을 넘어야만 어전의 앞에 도착할 수 있다. 300년 전에는 시련을 넘는 과정에서 하멜이 죽었다. 성녀의 기적도 절대적이고 무한하지는 않다. 지속된 기적은 성녀를 지치게 한다. 마찬가지로 대마법사의 마나도 무한하지 않으며, 전사의 체력도 무한하지 않다.


300년 전. 어전까지 올라온 인간 중, 베르무트를 제외한 3명은 한계를 코앞까지 두고 있었다.


그렇게 유도했다. 과정이 어쨌건 승리가 목적이라면, 가비드는 처음부터 나서서는 안 됐다. 적들을 최대한 지치게 하고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승리를 위해서는 옳았다. 결국, 그럼에도 패배했지만. 그 시대는 정당하고 비겁하고를 따질 만한 시대가 아니었다.


인간도, 용사도 마찬가지다. 승리를 바란다면 혼자서 싸워서는 안 된다. 베르무트와 동료들. 그들 5명은 함께 싸우는 것으로 3명의 마왕을 죽였으며, 결국에는 바벨까지 도달했다.


“그렇겠지.”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


“마왕성에 오른 이상, ‘용사’가 해야 할 것은 마왕을 죽이는 것이다. 한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고, 안락한 휴식도 취할 수 없다.”


언젠가 유진이 바벨에 오른다면, 그는 많은 시련을 넘어서 어전의 바로 아래까지 도달할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이미 300년 전의 베르무트를 뛰어넘었다. 그는 혼자서도 살육과 참혹과 광란을 죽일 수 있고, 베르무트와 세냐와 아니스와 모론과 하멜 모두가 힘을 합친 것보다 강하다.”


유폐의 마왕은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는 한 점의 과장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비드도, 놀라지 않고 받아들였다.


“단언할 수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내가 여태까지 보았던 ‘용사’ 중에서 최강이다. 심지어 그는 아직까지 성장하고 있지. 언젠가 그가 바벨을 오르기 시작한다면, 어전의 바로 아래까지는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오를 수 있을 거다.”


“너와의 전투에서는 어떨까.”


유폐의 마왕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옥좌와 이어진 사슬이 망토처럼 마왕의 뒤를 따랐다.


“이그니션을 자제할 겁니다.”


가비드가 대답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슴에서 뽑아내는 빛의 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번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검도 자제할 겁니다.”


유진이 가비드를 쓰러트린다면, 곧장 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그니션을 썼으니 며칠 휴식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신검을 모두 사용했으니 신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 유폐의 마왕의 자비는 성 밖에서나 베푸는 것. 마왕은 성의 침입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놈은, 전력을 다해서 저와 싸우지 않을 겁니다. 세냐의 도움을 받을 것이고, 성녀의 지원도 받을 겁니다. 어쩌면 다른 동료를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레헤인야르에는 공포의 모론이 있다. 그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은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고서, 전쟁 시대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유진의 동료가 되어줄 것은 모론 한 명이 아니다. 사막에서 보았던 지금 시대의 영웅들. 그들이 모조리 유진에게 가세한다면…….


“저는 그렇게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망령처럼 싸우고 싶다. 동료의 도움을 거절하고, 순수하게 기사 대 기사로, 전사 대 전사로, 인간 대 마족으로 싸우고 싶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두고 싸우고 싶다. 이그니션을 쓰게 만들고 싶다. 그 정체 모를 검을 자제 없이 휘두르게 만들고 싶다.


그런 싸움은 마왕성 바벨에서는 할 수 없다.


“만약 네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죽인다면.”


“폐하의 뜻을 거역한 죗값은 스스로 치르겠습니다.”


“죽음으로 갚겠다는 건가.”


유폐의 마왕은 가비드 앞에 내려섰다.


“네가 유진 라이언하트게 패배한다면, 당연히 죽게 되겠지. 어느 쪽이든 죽는다면, 아무도 어전의 앞이 비어버린다. 졸지에 제국은 대공을 잃게 되고, 검은 안개도 단장을 잃게 된다. 그 상황은 생각해 보았나.”


헬무드 제국에서 가비드 린드먼은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 만약 가비드가 죽는다면, 판데모니엄의 행정 시스템부터가 마비될 것이다.


“지금부터 생각하겠습니다.”


무책임한 말이지만, 가비드는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설마 저 가비드 린드먼에게서 이만큼이나 욕망스러운 청을 듣게 될 줄이야. 유폐의 마왕은 저 대답에 더욱 큰 즐거움을 느꼈다.


“일단 후임부터 준비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검은 안개의 부단장이다. 그는 일머리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전투 실력도 뛰어나니, 임시로나마 가비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후임은 준비할 필요 없다.”


“하지만…….”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를 반납할 필요도 없다.”


가비드의 뺨이 움찔 떨렸다.


유진과의 결투는 가비드가 가진 개인적인 욕망에 의한 것이다. 유폐의 칼로서, 대공으로서 바라는 것이 아니다. 승리와 패배, 어느 쪽이든 가비드는 목숨을 바칠 생각이다.


그러니 유폐의 칼이란 이름부터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마검 글로리와 위신의 마안도 반납할 생각이었다.


“너무 오만하지 않은가?”


유폐의 마왕이 손을 들었다. 활짝 펼쳐진 손에 검 한 자루가 쥐어졌다. 가비드가 집무실에 두고 온 마검 글로리였다.


“마안도, 글로리도 없이. 오직 몸뚱이 하나로 용사와 결투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


“너는 유폐의 칼이다.”


천천히 내려온 글로리가 가비드의 어깨에 닿았다. 가비드는 고개를 깊이 낮췄다.


“알겠습니다.”


“조율이 필요하겠군.”


“예. 아무래도 결투는 오랜만이기에.”


“도움을 주도록 하지.”


끼리릭. 뒤쪽의 사슬 중 하나가 머리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은 그 사슬을 통째로 뜯어냈다. 가비드의 앞에서 흔들리던 사슬이 똬리를 틀더니, 묵직한 사슬 뭉치가 되었다.


“저택에 돌아가서 사용해라.”


“예.”


가비드는 사슬의 정체를 묻지 않고, 양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글로리를 놓았다. 그러자 글로리는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가비드의 허리춤에 나타났다.


“폐하께서는 제 승리를 바라십니까?”


가비드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사슬에 끌리듯, 다시 옥좌가 있는 밤하늘로 오르는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


“아니.”


유폐의 마왕은 거짓 없이 대답했다.


“나는 네가 패배해 죽는 것을 바란다. 그래야 용사가 바벨에 오를 테니.”


가비드는 저 대답에 불쾌나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한 기분을 느끼며 벙긋 웃었다.


“예.”


그렇게 대답한 순간에 어둠이 걷혔다. 직전까지 가비드는 어전에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일상처럼 지내던 집무실도 아니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저택의 정문. 거의 사용은 하지 않는, 가비드의 저택이다. 가비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하늘을 지탱하듯이 우뚝 선 바벨이 보였다.


“의사도 묻지 않으시는군.”


언제나 그렇듯이. 가비드는 큭큭 웃으며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환생 502화


찬란한


바벨의 90층, 대공 집무실의 불빛이 꺼졌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대공은 공식적으로 ‘휴직’을 발표했다. 제국 역사 300년 중에 대공이 잠시 자리를 비운 적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휴직을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무기한 휴직. 자세한 이유도 알리지 않았다. 그저, ‘일신의 사정’이라고만 밝혔을 뿐이다. 대공의 갑작스러운 휴직 선언에 제국 내부의 언론들은 경악하고, 외신들마저도 관심을 가졌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국 역사 300년 동안 사실상 린드먼 대공이 황제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황제, 유폐의 마왕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어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다른 왕국이나 제국처럼 관료들을 불러놓고 제국의 미래를 논하지도 않는다. 여태까지 저러한 업무는 모두 다 린드먼 대공의 역할이었고, 유폐의 마왕은 정리되어 올라오는 보고서 등을 확인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허수아비인 것은 아니다. 황제의 허락 없이는 그 무엇도 진행되지 않는다. 황제 본인이 무언가를 바랄 때에는 일방적으로 통보만 할 뿐, 검토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어전에서 내려오지 않는 황제와 제국의 관료들 사이에서 그나마 창구와 같은 역할을 하던 것이 린드먼 대공이다. 때문에, 린드먼 대공의 휴직에는 제국 관료들뿐만 아니라 제국민들까지도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린드먼 대공의 휴직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부재중인 기간 동안 누군가가 대리로 업무를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제벨라 공작의 이름이 대두되었다. 대중에게는 친근한 이미지인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수완은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제국에서, 아니, 대륙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사업가를 선정한다면 무조건 제벨라 공작의 이름이 후보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제벨라 공작은 수도 판데모니엄에도, 마왕성 바벨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판데모니엄의 문제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설령 문제가 생길지라도 개입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평소와 똑같은 생활을 보냈다. 어쩌면 제벨라 공작의 심중에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대중에게 드러난 제벨라 공작의 생활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제벨라 파크에 있었고,


가끔, 기분이 내킬 때마다 제벨라 페이스와 함께 하늘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꿈을 보여주었다.


제벨라 파크의 페스티벌에도 참가했고, 공원 내의 클럽이나 펍 등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넷 백작은 뭐 하는 새끼야?”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시선을 내렸다.


제벨라 공작의 아찔한 일상. 읽을 가치 없는 가십. 사진 속의 누아르 제벨라는, 등이 훤히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서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새하얀 목에 걸린, 쇄골을 지나서, 가슴골 사이에 걸린 목걸이. 흔드는 왼손, 약지의 반지. 유진은 그것들을 애써 무시했다.


“바벨의 관료 중 하나입니다. 정식 소속은 기획재정부 기획조정실의…….”


“강합니까?”


이어지는 설명을 도중에 뚝 끊었다. 유진은 홱 고개를 돌리면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서열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르넷 백작의 서열은 103위입니다. 변동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태연한 미소로 유진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바벨의 공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꼭 서열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긴, 아무리 마족이라도 싸움만 잘하는 무식한 놈들로 제국을 굴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발자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유진은 못마땅하단 눈으로 발자크의 정수리를 보았다.


하우리아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열흘이 흘렀다. 폐허의 수습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대부분의 해방군은 전장을 떠나서 근처의 도시, 살라르로 복귀했다.


아직 해방군은 해산하지 않았다. 먼바다에서 벌였던 전투와 달리, 이번은 국가 안에서 벌인 전쟁이었다. 그렇다 보니 수습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거기에 전쟁의 승리와는 별개로, 폭탄과 같은 선언이 있지 않았나.


“당신은 돌아가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유진은 신문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오히려 이쪽에 있는 것이 당신에게는 불편할 텐데요.”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왜요. 제가 당신을 걱정하는 것이 뭐 이상합니까?”


“하하, 아닙니다. 감사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흑마법사인 제가…… 설마 그 ‘하멜’ 님에게 걱정을 받게 되다니.”


“지금 비꼬는 겁니까?”


“아뇨, 절대로 아닙니다. 상상해 본 적 없는, 신비한 일이라서 그만.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자꾸만 의식하게 되어버리는군요.”


발자크가 고개를 들며 난감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르넷 백작은, 헬무드 내에서나 바벨 내에서나 크게 두각을 보이던 마족은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바벨에서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마족이죠. 애당초 백작이라는 작위와…… 바벨의 공직자라는 것부터가 평범하지는 않지만.”


“대공의 대리를 수행할 정도는 아니다?”


“예, 그렇습니다.”


“기획재정부가 따지고 보면 대공의 직할기관 아닙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바벨의 모든 부서가 대공의 직할입니다.”


“허.”


유진은 솔직하게 감탄하여 고개를 흔들었다.


유폐의 칼. 그냥 싸움만 잘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제국에서 저만큼 많은 일을 하고 있던 건가.


“아르넷 백작의 업무 처리 능력이 뛰어난지까지는 저도 파악한 적이 없습니다만…… 자리다운 능력은 가지고 있기에 선출된 것이겠죠.”


유진은 다시 신문에 눈동자를 돌렸다.


린드먼 대공이 집무실을 떠난 지 열흘이 되었지만, 놀라우리만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제국의 정사에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단순한 업무만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다. 린드먼 대공은 바벨에서 맡고 있던 모든 업무에서 물러났지만, 바벨의 그 누구도 대공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대공 대리로 90층 집무실에 올라간 아르넷 백작은, 놀라우리만큼 완벽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유폐의 마왕의 아바타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흠, 가능성이 아니라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갑작스레 쓴 감투를 저만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아르넷 백작이라는 마족은 실재했다. 하지만 지금의 아르넷이 제정신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 만약 유폐의 마왕이 놈을 아바타 삼아서 가비드의 업무를 처리해주고 있는 것이라면-


“이 정도로 해줄 일이 뭐가 있지?”


유진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투덜거렸다.


단순한 휴직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가비드 린드먼, 그 자식이 갑자기 바벨을 떠나 저택에 처박힐 이유가 무어가 있을까? 그리고 유폐의 마왕은 왜 가비드를 위해서 이 정도의 편의를 봐준 것일까.


“숙청당했을 가능성은?”


문득 든 생각에, 유진은 발자크를 돌아보았다.


열흘 전. 가비드는 대뜸 유진을 습격했다. 유진이 이그니션의 대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을 정확히 노려서, 목을 베려 했다.


실패가 아니었다. 가비드는 직접 검을 거두고, 유진과 대화를 나누고서 물러섰다. 하지만 검을 거두었을지라도 그때 가비드가 유진에게 보였던 살의는 진짜였으며, 그것은 유폐의 마왕의 뜻에 정면으로 반한 것이었다.


“숙청이라.”


발자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요. 유폐의 마왕님은 언제나 행동에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유진님도 전에 보지 않으셨습니까?”


“이오드의 일 말입니까?”


“예. 이오드 라이언하트를 꼬드겼던 인큐버스…… 후후, 정황상 그 배후에는 제벨라 공작이 있었겠지만, 제벨라 공작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죠. 결국 인큐버스 하나만 죽었을 뿐.”


그 처형을 명령한 것이 바로 유폐의 마왕이었다.


“린드먼 공작은 마왕의 뜻을 거역하고, 유진님을 공격했습니다. 유폐의 마왕님이 처벌하기에 충분한 죄…… 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린드먼 대공이 숙청된 것이라면. 굳이 그 사실을 숨길 리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모르겠다는 겁니까?”


“예. 하멜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판데모니엄의 린드먼 저택가로 가서 대공의 생사를 확인하겠습니다.”


“됐습니다.”


유진은 질색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저를 하멜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예, 유진님.”


“몸은 좀 어떻습니까?”


가느다란 시선이 발자크를 훑었다. 본래부터 하얗던 얼굴은 지금은 더욱이 창백했고, 뺨도 조금 들어가서 안경이 크게 느껴졌다. 글러트니가 심어진 오른팔은 회색의 붕대로 칭칭 감겨 있다.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자크에게서 ‘무언가’가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멸망의 권속인 누르를 잔뜩 포식하고, 마물과 마족까지 포식하지 않았나.


“소화가 어렵군요.”


“체했으면 토하는 것이 좋을 텐데.”


“하하…… 어지간해서는 맛볼 수 없는 것들이니, 억지로라도 소화를 시켜야죠.”


“유폐의 마왕 쪽에서는 별말 없습니까? 돌아오라거나.”


“예, 감사하게도.”


“나를 감사하기 위해서인가?”


“유진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폐의 마왕님은, 굳이 저를 눈으로 쓰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발자크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열흘 만에 부름을 받아 유진과 독대했다.


묻고 싶은 것은 여럿 있다. 죽음에 대해. 환생에 대해.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전쟁에 대해. 사명에 대해.


묻지 않았다. 가득한 의문을 모조리 속 안에 감추었다.


발자크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그가 흑마법사인 이상, 절대로 유진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전에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지만- 그가 몰살의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알게 되니, 가능성 자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거리감은 허락하는가. 발자크는 빙긋 웃었다. 그로서도 이 정도의 거리감이 좋았다. 단순히 ‘적’으로 여겨주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진이 따로 축객령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발자크는 눈치가 빨랐다. 부름을 받아 대화를, 아니, 대화 비슷한 것을 나눌 수 있던 것은 아르넷 백작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그에 관한 대화는 이미 끝났다.


“계속 이 도시에 있을 겁니까?”


물러서는 발자크에게 유진이 말을 걸었다.


“아니면, 아롯에 돌아갈 겁니까?”


“이 도시에 남지는 않을 겁니다. 아롯에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왜요? 세냐나 다른 마법사들과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 자리는, 제게는 정말 기적이나 축복과 같은 자리였지요. 하지만 이제는 제가 있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럼 어디로 갑니까?”


“조금 방랑을 하려 합니다.”


“흠.”


추적할까? 표식을 붙일까. 유진은 잠시 고민했다.


“예.”


발자크와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난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천히 물러선 발자크가 유진의 방을 떠났다.


“하아…….”


문이 닫히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유진은 의자를 한계까지 뒤로 젖히고, 양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대로 고개까지 젖혀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내가 미쳤지…….”


탁자 위의 수북한 신문들. 유진이 애써 무시하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충격! 유진 라이언하트의 정체는 하멜 다이너스의 환생?]


[300년 전 대륙을 정복하고 인간을 노예로 삼으려던 마왕들이 좌절한 이유는?]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그의 엄청난 정체에 헬무드가가 경악!]


[유진 라이언하트의 정체에 충격에 빠진 판데모니엄의 근황.]


[‘하우리아 해방전’이 끝나자마자 ‘유폐의 칼’이 잠적한 이유는? 숨지 마라!]


[‘우둔한 하멜’, 마족들에게는 XX의 하멜? 마족들이 두려워하던 이름의 정체는?]


[현재 헬무드의 마족들이 난리 난 이유. ‘제발 전쟁은 벌이지 말아주세요!’ 전 대륙 최초, 익명의 고위마족과의 솔직 대담.]


[헬무드에서 출간되었지만 판매되지 못하고 말살된, 전쟁 시대의 회고록. ‘나는 하멜에게서 살아남았다.’ 말살된 원고 일부 복원 중.]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가 유진 라이언하트와 밀회를 나누었던 이유? 300년 전부터 이어 오던 끈질긴 악…… 연……?♥ 제벨라 파크에서의 로맨틱한 데이트, 미공개 사진 대방출!]


“허어억…….”


요란한 글꼴로 적힌 기사들을 본 유진은 머리가 어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저게……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유진이 가장 보기 괴로운 기사는, 누아르와 관련된 마지막 기사였다. 그냥 악연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중간에 질질 끄는 것일까? 그리고 하트는 왜 처박은 것이며, 로맨틱한 데이트? 미공개 사진?


‘내가 미쳤지.’


어질거리는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정말로 미친 짓이었다. 기세를…… 기세를 너무 타버린 것이다. 싸우는 도중에 흥분해서. 내가 하멜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아니, 차라리 그때는 수습할 수 있었다.


가비드 린드먼, 그 새끼한테 굳이 한 번 더 선언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가 하멜이다, 이딴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저…… 저 빌어먹을 기사들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크아악!”


유진은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뒤로 넘어간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그런 소리 따위 유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유진의 귀에 울리는 것은 수치심과 분노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뿐이었다.


유진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신문들을 향해 홱 손을 뻗었다.


화르륵! 유진의 마음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수북이 쌓인 신문들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하지만 타버린 것은 지금 이 방에 있는 신문들뿐. 며칠 전부터 간행된 신문들은 이미 대륙 전역에 퍼졌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대륙 사람들 절반은 저러한 기사 중 하나는 봤을 것이고, 거의 모든 대륙 사람들이 유진이 하멜의 환생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크아아악!”


유진은 머리를 붙들고서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가 왜 틈만 나면 까마귀 우짖는 것만 같은 비명을 지르는 것인지,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도저히, 맨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으니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내시는 거예요?”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울부짖던 유진은, 홱 고개를 들어서 문을 보았다.


“…….”


저건 대체 뭘까.


안 어울리게도 정장을 차려입은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환생 503화


“…….”


말문이 턱 막혔다. 머릿속도 혼란스럽다. 대체 저 꼬라지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유진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며 앞을 보았다.


“후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 메르. 저 당돌한 꼬맹이는 상하의를 깔끔한 검은 정장으로 맞춰 입었다. 거기에 신발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을 것만 같은 구두를 신고 있다.


유진은 도저히 저 차림새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후후.”


다른 웃음소리. 시선을 돌려 라이미르아를 보았다.


라이미르아의 차림새도 메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몸에 딱 맞는 자켓, 깔끔한 셔츠와 바지, 구두, 그리고.


“안경은 왜 쓰고 있는 거냐?”


지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이미르아를 쳐다보았다.


“안경은 중요하느니라.”


라이미르아가 안경을 손가락으로 척, 올리며 으스댔다.


“왜냐하면, 본녀는 은자의 비서이기 때문이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유진의 말문이 다시 막혔다. 이번에는 입술조차 뻐끔거릴 수가 없었다. 유진은 입술을 멍청히 벌렸다.


후후. 라이미르아가 어른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안경을 올렸다. 하지만 이미 안경은 콧대 높은 곳에 걸쳐져 있었다. 렌즈 너머에서 안경의 코 받침이 미간을 짓눌렀고, 너무 가까이 다가온 렌즈가 광대를 뭉개는 것이 보였다…….


“저는 유진 님의 매니저예요.”


메르는 안경은 쓰지 않았지만, 다른 소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 가방을 보다 잘 보이도록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유진 님의 스케줄은 앞으로 제가 관리할 거예요.”


그렇다면 비서는 하는 일이 대체 뭔가? 비서와 매니저가 무슨 차이인가? 애당초 둘은 무슨 헛바람이 들어서 저런 차림새로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유진은 일단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두 꼬맹이의 차림새가 귀엽기도 했고, 대체 무슨 헛짓거리를 할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우선 이것을 봐주세요.”


메르는 보란 듯이 앞으로 내밀고 있던 서류 가방을 활짝 열었다. 가방의 크기에 비해 훨씬 많은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복잡하면서도 흐뭇한 표정으로 둘을 보던 유진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불과 방금 전. 수치심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태워 버렸던 신문들. 그중에서도 유진에 관련된 기사만을 오려 모은 스크랩.


[우둔한 하멜의 환생,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여태까지 정체를 숨겼던 이유는?]


[현명한 세냐, 그녀는 300년 연하를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300년을 넘은 연심.]


“크아악!”


유진은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로도 부족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시커먼 눈꺼풀, 요란하게 크기를 키우고 강렬한 색깔까지 넣은 글자들이 아른거렸다.


“똑바로 보세요, 유진 님!”


“은자여, 대륙의 모두가 은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느니라! 은자야말로 대륙의 슈퍼스타인 것이니라!”


메르가 다리에 매달리고, 라이미르아는 팔에 매달렸다. 유진은 두 꼬맹이가 흔드는 대로 휘청거리면서 더듬더듬 내뱉었다.


“왜,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유진 님, 저희가 왜 유진 님을 괴롭히겠어요?”


“은자여, 혹 누가 은자를 괴롭힌 것인가? 방금 떠나간 사악한 흑마법사가 은자의 마음을 심란케 하였는가? 본녀가 당장 놈의 머리에 브레스를 퍼붓겠느니라!”


걱정해 주는 것인지 놀려먹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은 마음이 부서질 것만 같은 괴로움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덩달아 엉덩방아를 찧기 전에 냉큼 유진에게서 떨어졌다.


“유진 님,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지금 대륙이 유진 님을 주목하고 있잖아요? 이건 엄청난 기회에요. 이 주목도를 잘 이용해야 유진 님의 신력을 팍팍 늘릴 수 있다구요.”


메르는 유진의 얼굴에 스크랩을 바짝 들이밀었다.


[300년의 짝사랑이 결실을 맺다, 비극을 뛰어넘은 로맨스.]


[스승과 제자의 금기된 사랑의 행방은?]


“말했듯, 본녀는 은자의 비서이니라. 이 혼란스러운 주목 속에서 은자와 본녀가 해야 할 것은, 낭설에 휘둘리지 않고 주관을 밀어붙이는 것이니라.”


라이미르아도 유진의 얼굴에 스크랩을 바짝 들이밀었다.


[소시지와 맥주, 치즈와 와인, 용사와 성녀. 모든 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조합.]


[하멜은 크리스티나 성녀에게서 신실한 아니스를 보는가? 두 성녀의 공통점을 파헤치다.]


“…….”


스크랩을 처음 시작한 것은 메르였다. 여태까지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 때문에 대놓고 알릴 수가 없었지만, 유진의 정체가 밝혀졌으니 더는 세상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됐다. 그렇기에, 메르는 기세를 몰아서 세상 전체에 확실히 못을 박아버리고 싶었다.


라이미르아는? 그녀는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메르가 눈에 불을 켜고서 유진과 세냐에 관련된 기사를 수집하는 것을 보고,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르가 세냐에게 편향되어 있듯, 라이미르아도 성녀들에게 편향되어 있다. 그래서 성녀에 관련된 기사를 모았다.


“…….”


수치심이 진정됐다. 어디 쥐구멍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졌다. 유진은 보다 이성적으로 돌아왔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왜 비서고 매니저인 거냐?”


“유진 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기자들이 아주 많아요.”


“기자들뿐만이 아니니라. 귀족과 왕들까지 은자를 만나고 싶어 하니라.”


“유진 님이 그들 모두를 상대하기는 귀찮잖아요? 유진 님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 봐야, 몸은 하나잖아요.”


“타당한 말이니라. 그러니 본녀는 비서로서, 은자가 신경 쓰지 않도록 일정을 조절해 줄 것이니라.”


“너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일정 조정은 매니저인 내가 할 거예요. 너는 안 어울리는 안경이나 벗고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라구요.”


“본녀의 안경은 어머니가 준 것이니라!”


두 꼬맹이가 서로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다투기 시작했다.


유진은 둘을 굳이 말리지 않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도저히 읽고 싶지는 않지만, 스크랩의 내용도 대충 훑었다. 그러니 보다 확실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 잘했다.”


다른 것을 떠나, 저 많은 기사를 오려서 붙인 정성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인데, 두 꼬맹이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서니 매니저니…… 그런 것은 할 필요가 없어. 그냥,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유진 님은 바쁘시잖아요.”


“은자의 생생한 이야기를 토대로 동화책을 개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느니라. 은자가 원한다면 본녀가 스케줄을 잡겠느니라.”


라이미르아의 말은 솔직히 유진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동화책을 개간한다고? 우둔한 하멜이라는 개 같은 별명을 300년 동안 대륙 모두에게 각인한, 그 빌어먹을 동화책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


유진은 꿀꺽 침을 삼켰다. 내용 자체는 내버려 두더라도, 하멜의 이름 앞에 붙은 ‘우둔한’은 좀 바꿔 버리고 싶었다.


-‘우둔한 하멜’, 마족들에게는 XX의 하멜? 마족들이 두려워하던 이름의 정체는?


아까 불태웠던 신문의 기사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유진 님의 영웅담으로 새로 책을 내고 싶다는 이야기도 많아요. 먼 미래까지 이어져서, 대륙 모든 어린 아이들이 읽게 될 새로운 동화책 말이에요.”


메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솔직히 메르는 이미 출간된 지 수백 년 된 동화책의 내용은 바꾸고 싶지 않았다. 물론 메르도, 유진이 ‘우둔한’ 하멜의 별명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을 때.


하멜의 행적을 두고 ‘우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 것인가? 유진 본인조차도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차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딱 맞는 별명을 뭐 하러 바꿔 버리나.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의 일대기.”


“우둔한에서 찬란한까지.”


두 꼬마가 각자 스크랩을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직접 말한 제목들 외에도 여러 제목이 적혀 있었다. 신문 등지에 거론된 수십 개의 동화책 제목을 나름대로 엄선한 것들이다.


“유진 님도 당연히 아시겠지만, 새로운 동화책에는 제가 무조건 등장해야 해요. 저에 관련된 이야기를 말하실 때는 항상 저를 대동해 주세요.”


“당연히 본녀도 등장해야 하느니라. 본녀와 은자의 운명적인 첫 만남과, 본녀가 은자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히 서술해야 하느니라.”


유진은 마음을 내려놓았다.


“나가.”


“네?”


“나가!”


두 꼬맹이를 번쩍 들어서 문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방에 돌아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스크랩, 모조리 불태워 버릴까 했지만, 하나하나 오려 붙인 정성스러운 것을 차마 태울 수가 없었다…….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스크랩들을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하아…….”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언해 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들지만, 이미 내뱉어 버린 것을 물릴 수는 없는 법. 이미 대륙 전체가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아아…….”


끊이질 않는 한숨.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지금 이 방은 굉장히 조용하다. 걸음 소리, 한숨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유진은 울적한 얼굴을 하고서 창문에 손을 얹었다.


“와아아아!”


창문을 살짝 연 순간. 즉시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방 안에 들어오는 불필요한 소리는 마법으로 차단했다. 하지만 창문을 여니 즉시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용사님!”


“유진 님!”


“하멜!”


함성 속에 섞인 다양한 외침. 성벽 너머에 모인 수많은 군중이 목이 쉬어라 유진을 연호하고 있다.


살라르의 시민들만 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국가에서 넘어온 사람들. 그들은 마치 용사와 유진, 하멜의 이름들에 묶인 광신도처럼 며칠 동안이나 찬양을 쏟아내고 있었다.


300년 전 영웅의 환생. 2명의 마왕을 쓰러트린 당대의 용사. 사실 망령은 진짜 마왕이 아니기는 했지만, 대륙에는 마왕으로 알려져 있다. 용사라는 것만으로도 칭송하기 충분할 터인데, ‘환생한 용사’라는 것에 더해진 신비감은 칭송을 넘어 광신까지 끌어내었다.


‘신력은 계속 늘고 있어.’


시무인에서 성상을 세웠을 때보다 훨씬 크게 느끼고 있다. 유진에게 깃든 신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망령과의 전투에서 부서지고, 섞여 들어온 것. 그렇게 더해진 것이- 더욱이 번지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었다. 우주를 느꼈다. 반짝이는 별들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밝으며 많다.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면,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신도들의 목소리.


“손이라도 흔들어주시지 그럽니까?”


불쑥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지는 않았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방긋 웃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성직복을 입은 그녀는, 유진의 시선에 보다 미소를 짙게 하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모두가 유진 님이 나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몸이 아직 아파서 못 나가.”


“용사가 거짓말을 하면 못씁니다.”


“용사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도 있었나? 베르무트 그 새끼도 거짓말은 참 많이 했는데.”


유진은 눈썹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몸이 아직 낫지 못했다는 핑계로 살라르 궁전에 처박힌 지도 벌써 열흘째. 몸은 진즉에 회복됐다.


하지만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눈을 빛내며 연호하는 군중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출정 전에는 멋지게 깃발까지 드셨잖습니까?”


“그때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냐.”


“글쎄요, 저는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이곳에 온 사람들은 유진 님에게 연설 같은 것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닐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가슴 앞에 양손으로 모아 기도하며 활짝 웃었다.


“그냥, 직접 보고 싶은 것입니다. 영웅의 환생. 당대의 용사를. 시대를 새로이 밝히는 빛을.”


“…….”


“앞으로의 시대가 여태까지처럼 평화롭지 않다는 것. 이제는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상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전쟁을 모른다. 마왕과 마족이, 흑마법사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300년 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은 앞장서서 인간을 위해왔고, 마족과 흑마법사도 난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지금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헬무드는 ‘제국’이지 ‘마경’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이 약속의 끝, 평화의 끝을 말할지라도,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남해에서 나타난, 신생 광란의 마왕. 나찰공주 아이리스. 그녀가 마왕이 되었음에도, 대륙의 ‘평범한’ 사람들은 위협을 가깝게 느끼지 못했다.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너무 빠르게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는 마왕이 되었음에도 존재감을 과시하지 못했다. 대륙에 진출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아이리스는 대륙에 오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하지만 망령은 다르다. 그는 대국인 나하마의 수도를 함락했다. 나하마의 술탄이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었다. 반나절, 아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수도를 함락했다. 거대한 마물과 언데드의 군대, 마족과 흑마법사, 그리고 마왕.


애써 외면하는 것을 할 수 없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보다 확실하고 가깝게 전쟁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의 수명이 끝나기도 전에, 유폐의 마왕이 전쟁을 시작해서 대륙을 불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 의존할 존재를 바라는 겁니다.”


크리스티나가 유진의 곁에 다가왔다.


“의존이라.”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하긴. 성당에 가서, 보이지도 않는 빛에게 기도하는 것보다는…… 살아서 존재하는 나를 직접 보는 것이 마음이 편하겠지.”


창밖에 슬쩍 손을 내밀어 흔들어주었다. 와아아아! 함성이 더욱 커졌다. 마치 궁전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빛이라.”


크리스티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신이라 할 만한 존재가 아니란 것은 유진 님도 느끼시지 않았습니까?”


빌어먹을 환생 504화


창문 밖에서 들리는 열렬한 함성과는 달리, 크리스티나의 뇌까림은 나직하고 쌀쌀했다. 유진은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성녀가 자신의 의지로 직접 신을 부정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의외로 차분했다. 분노와 배신감, 절망, 그런 종류의 감정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


우선 유진은 그렇게 물었다.


심증은 있다. 확신도 있다. 하지만 증거랄 것은 없다. 그렇기에 유진은 괜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은 성녀기 때문이다.


“저를 배려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추궁하는 형태의 말은 아니었지만, 크리스티나의 시선은 거짓이나 배려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결국 유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에 뻗었던 손을 집어넣었다.


탁.


창문이 닫혔다. 바깥의 요란한 함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서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배려.


부정하지는 않았다. 유진이 굳이 ‘빛’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결국은 배려심 때문이다.


둘은 성녀로 태어났다.


처음부터 그랬다.


빛을 섬기기 위해, 빛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탄생해서 자라왔다. 그 과정에서조차도 일반적인 유년기를 갖지 못했다.


신앙을 퍼트리기 위한 상징.


신도를 현혹하는 상품.


기적을 편리하게 사용하는 신성 병기.


그것이 성녀다.


빛에 대한 신앙을 강요받았다. 전쟁을 겪고, 긴 세월을 살아온 아니스는 빛과 종교에 대한 환멸을 품었다. 하지만 그런 아니스조차도 결국에는 ‘빛’의 존재까지는 부정하지 않았다. 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다는 것과, 천국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전쟁 시대. 아니스뿐만 아니다. 당시의 모든 성직자. 아니,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조차도 그 시대에서는 ‘신’의 존재를 찾았다. 신이 시대를 구원하고, 죽은 이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했다.


“언제부터 알았냐?”


크리스티나는 아니스만큼이나 절실하지 않다. 그녀는 아직 젊고, 아니스가 겪었던 끔찍한 시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크리스티나일지라도 천국의 존재는 갈망했다. 죄지은 자는 지옥에 가고, 선한 자는 천국에 가는 것이 올바른 이치라고 믿었다.


“아마, 유진 님과 비슷한 순간에 느꼈을 겁니다.”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빛이, 그 어느 때보다 찬란히 빛나며 유진 님께 스며들었을 때.”


그것이 어느 순간을 말하는 것인지는 유진도 알았다.


망령과의 전투. 망령이 모든 망설임을 버리고, 유진을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둘렀을 때. 놈의 마력이 불꽃이 되어 유진에게 쏟아졌을 때.


“빛이 이 세상에 남긴 성검, 알테어가 부서졌을 때.”


그 순간에 성검 알테어는 부서졌다. 검신이 완전히 박살 났다. 하지만 검신이 박살 났다고 해서 성검이 성검이 아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검신이 부서짐으로써, 성검은 진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더 이상 검신에 갇히지 않게 된 빛이 유진의 몸을 감쌌다.


빛의 요람 속에 있던 것은 아주 짧은 찰나. 하지만 그 찰나에, 유진은 빛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하멜.”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크리스티나와 다르지 않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성녀입니다. 다른 성직자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그 어느 성직자보다 ‘빛’에 가까운 저희는- 성검에서 쏟아진 빛에서, 빛에 대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빛은 신이라 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니스가 말했다.


“그것은 신이라 여길 만한 거룩한 의지가 없습니다.”


의혹은 예전부터 있었다. 전쟁 시대 때부터 그토록 바랐음에도 빛은 현신해 주지 않으셨다. 그 무엇보다 빛에 가깝던 아니스에게조차도 계시를 내려주지 않았다.


그 불합리한 세계에서는 억지로라도 빛의 존재를 믿어야만 했다. 빛이, 신이 존재하고, 천국이 존재한다고 광신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시대였다.


다행히 믿음의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은 있었다.


성검과 용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하지만 그가 정말로 용사였는가?


“저는 ‘그것’을 어떤 존재라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만, 제가 느낀 그것은…… 결코 신이라고 할 만한 존재는 아닙니다. 단지…….”


“내가 느낀 것도 너희와 비슷해.”


유진이 입을 열었다.


“빛은…… 대부분 사람이 생각해서 떠올리는 ‘신’은 아니지.”


아가로트가 가지고 있던 신성(神性)과 빛의 신성은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유진은, 빛이 평범한 ‘신’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멜. 당신은 빛이 ‘신’이 아니라는 제 말을 부정하는 겁니까?”


아니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빛이 가진 진실은, 아니스에게 적잖은 배신감을 주었다. 생전의 그녀는 절실하게 빛의 은혜와 기적을 갈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긴 세월 전장을 걸었고, 수많은 시체를 보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죽어 간 모든 인간들이 천국에 인도되기를 기도했다. 아니스가 빛을 두고서 신도답지 않은 거친 말을 쏟아내던 것은, 그만큼 빛을 갈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스가 느낀 빛에는, 그녀가 생전에 바랐던 신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진실이, 오히려 아니스를 이성적으로 만들었다. 생전부터 이해할 수 없었던 빛의 무심함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너도 계시는 몇 번인가 들었잖아.”


“계시?”


아니스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예. 저도 몇 번인가 계시를 들은 적이 있죠. 죽은 제가 천사가 된 것도 빛의 기적이었고 말입니다.”


어떻게 천사가 되었는지. 그 순간은 기억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니스는 천사가 되었고, 빛 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 거대한 빛의 바다에는 아니스 외에 다른 천사들도 있었다. 기적을 펼칠 때 강림하는 천사들. 하지만 그 천사들에게는, 아니스와 같은 자아가 존재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가 들었던 계시는 아니스가 내린 것이다. 유진이 성검을 통해 보았던 꿈도 아니스의 기억을 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용사가 된 것이 빛의 선택이지.”


유진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13살. 라이언하트 본가의 혈계식이 끝나고, 길레이드와 함께 보물고에 들어갔었다. 그때 처음으로 ‘성검’을 보았다.


“어렸을 때의 나는 성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빛은 유진을 선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너희를 만나고 성검을 뽑을 수 있게 됐어.”


“……당신을 찾아가라고 한 것이 빛의 뜻이었죠.”


“베르무트의 무덤을 파헤치라 한 것도 빛의 뜻이었고.”


“…….”


“빛의 정체는 모르겠다만.”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망토에서 성검을 꺼냈다. 성검의 칼날은 이전의 전투에서 박살이 났다. 하지만 지금 성검의 칼날은 멀쩡하게 존재했다.


“놈이 나를 특별히 여기는 것은 맞는 것 같아.”


유진은 성검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해한 빛은…… 전지전능하고 그런 존재는 아니었어. 그냥, 그냥…… 바라면 힘을 주는, 끝없는 힘의 덩어리 같은 거였지.”


그 ‘힘’은 마나와 마력과는 다르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왕과의 계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입문하는 것으로 빛과 계약해서, 믿고 바람이란 신앙에 부응하여 힘을 내려준다.


“아니스. 너는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냐?”


예전에는 ‘있다’라고 대답했다. 천사가 되어서 떠돌던 빛의 바다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혼’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혼들은 빛의 바다 어딘가에서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니스는 그 장소가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이승에서 죽은 자는, 빛에 인도되어 천국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장소가 천국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도 똑같아.”


유진도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빛에게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특별한 의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천국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유진이 말했다. 그러자 칼날이 순간 흐물거리며 요동쳤다. 이윽고 한 줄기의 빛이 되었다.


금속이 아닌 순수한 빛. 유진은 성검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스, 크리스티나.”


유진은 성검을 똑바로 세우면서 성녀들을 보았다.


“빛이 신이 아니고, 천국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중요한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질문이 어렵고 난해했기 때문은 아니다. 성검을, 빛을 똑바로 세운 유진의 모습. ‘성검’이라는 껍데기에서 벗어난, 진정한 빛이 발하는 찬란함에 순간 압도되었다. 그리고- 빛과 섞여 동화된 유진의 존재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요하지요.”


아니스가 동요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하지만 빛은 진즉부터 수상쩍었습니다. 저를 만든 종교에 대해서는 환멸만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느꼈던 천국이, 천국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모으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빛이 신이 아닐지라도, 유진 님은 용사십니다. 빛이 세상을 비추지 않을지라도 유진 님의 존재가 세상의 빛이 되실 겁니다. 빛이 모든 신도를 평등하게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유진 님은 특별하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순식간에 안쪽으로 밀려난 아니스는 저 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언어로 치환되지 않은 무지막지한 사랑과 광신을 직접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천국이라.”


유진은 입맛을 다시며 성검을 내려놓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 빛 한 명인 것은 아니잖아.”


빛을 믿는 종교가 가장 클 뿐이지, 대륙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다. 성직자와 성기사 등이 사용하는 신성마법, 기적은 빛은 전유물이 아니다. 물론 질과 양적으로 빛의 신교 쪽이 우월하기는 하다만, 신성마법과 기적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빛 외에 다른 신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했다.


“빛의 천국이 없어도 다른 신의 천국은 있을 것 아냐? 그럼 되지 않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아니스가 질색하며 유진을 째려보았다. 그 매선 시선에 유진은 즉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빛의 천국이 없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까짓거 나중에 한번 확인하러 가지 뭐.”


“얼씨구. 그게 바란들 쉽게 되겠습니까? 저도 한 번 죽어봤고, 하멜 당신도 한 번 죽어봤는데. 천국은커녕 지옥의 존재조차 확인하지 못했잖습니까.”


“그건 그래.”


“그리고 하멜, 다른 신의 천국이라니! 아무리 빛의 정체가 제가 기대하던 신이 아니라지만, 일단 저는 빛의 성녀입니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저희를 다른 신이 천국에 인도하겠습니까?”


“신이란 것들이 그렇게 쪼잔할까.”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성검을 망토 안에 넣었다.


“그럼 뭐, 나중에 내 천국으로 오면 되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둘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반쯤 벌리고서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


“……방금 무슨 말을 한 겁니까?”


“빛의 천국에도, 다른 신의 천국에도 못 가면. 내 천국에 오면 되지 않냐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주 잠깐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든 것이 고작인데, 밖에 모인 군중은 이쪽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 뭐라 외치고 있었다.


“신이 뭐 별거냐? 전생에 나도 해먹은 것이 신이고, 지금도 어떻게 신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는데. 그럼 뭐, 나중에 진짜 신이 되면…… 천국도 만들 수 있겠지.”


만들 수 있을까? 일단 내뱉기는 했지만, 유진도 확신은 없었다. 신화시대에 ‘아가로트의 천국’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당초 그 시대에 혼자만의 천국을 가진 신이 있기는 했나?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혀를 차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튼, 빛의 천국에 못 간다고 궁상떨지 말란 말이야. 까짓 천국 없으면 내가 만들어준…….”


“풋.”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니스가 참지 못하고 웃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하…… 아하하! 아하하핫!”


웃음이 터진 것은 아니스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도 입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유진은 대뜸 웃는 성녀들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내가 뭐 이상한 소리 했냐?”


“아니…… 아닙, 아닙니다, 유진 님.”


요 며칠 동안 가지고 있던 고민이 우습게 느껴졌다.


빛이 신적인 존재가 아니란 것? 빛에 세상을 비출 의지가 없고, 신도에게 평등치 않으며, 천국의 존재가 확실치 않다는 것?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아무튼 빛은 유진을 선택했다. 성검의 주인으로, 용사로 삼았다. 그것 하나면 충분한 것이다.


빛에 세상을 비출 의지가 없을지라도, 유진은 마왕을 죽일 것이다. 빛의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진이 새로 신이 되어 천국의 문을 열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아니스의 손이 목에 건 로사리오를 거머쥐었다. 크리스티나의 손이 반대쪽 손을 감싸 쥐어 기도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저희는 유진 님의 성녀인 것이군요.”


여태까지 둘은 ‘빛’의 성녀였다. 하지만 이제는, 빛보다는 유진의 성녀가 되고 싶었다. 저 말에 유진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망토 안에 넣은 성검에서의 ‘빛’을 느꼈다. 내면의 우주에 깃든 빛이 순간 커진 것만 같았다.


“읏.”


웃으며 유진을 보던 성녀들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크리스티나는 흠칫 놀라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의 중심에 상처가 났다. 흐르는 피가 손목을 지날 즈음,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하지만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성흔…….”


아니스가 놀라서 중얼거렸다. 화들짝 놀란 유진도 가까이 다가와 손목을 잡았다.


“갑자기 뭐야?”


아니스는 대답하지 않고 오른손의 성흔을 응시했다. 과거 아니스는 빛의 샘에서 세례를 받고, 인위적으로 등에 성흔을 새겼다. 유라스의 교황과 추기경들이 가진 성흔도 똑같은 인조 성흔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왼손은, 시무인의 바다에서 진짜 성흔을 발현했다. 지금 오른손에 새겨진 성흔도 그때와 똑같은 진짜다.


“하멜. 팔을 한번 잘라봅시다.”


아니스가 홱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성흔이 늘어났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기적’의 힘이 강해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거 제가 할 수 있던 기적도 쓸 수 있을 겁니다.”


“잠깐…….”


“어느 정도의 기적이 가능할지 시험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를 믿으십시오.”


“아니…… 꼭 나로 시험할 필요는 없잖아…….”


“그럼 누구로 시험합니까?”


“내가…… 내가 다른 녀석의 팔을 잘라올게.”


“맙소사, 하멜,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만약 그랬다가 팔이 다시 안 붙으면 어떡합니까?”


“내가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내 팔이 어지간한 사람 팔보다는 훨씬 귀중하지 않냐?”


툭 내뱉은 말에 이번에는 아니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맙소사, 맙소사!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오만한 말입니까? 하멜, 그러고도 신과 천국을 운운하는 겁니까!”


“나도 말하고서 이건 좀 아니다 싶기는 했어.”


“사실 하멜, 당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저도 그래야 할 상황이라면 당신 대신에 목숨을 던질 겁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당신이 직접 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어…… 어어…….”


“그토록 싫다니 팔은 자르지 않겠습니다. 병동에 가면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이 있을 테니, 그쪽에 가서 시험해 보도록 하죠.”


유진의 손은 아직 아니스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아니스는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샐쭉 웃었다.


“성흔에서 피를 흘리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기억납니까? 하멜.”


“당연히 기억하지. 그럼 잊었겠냐?”


“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저는 당신이 성흔의 피를 닦아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후후, 언제였던가요? 무심한 얼굴로, 평소랑 똑같이 피를 닦고 연고를 바르는 당신이 얄밉다 생각했었는데.”


“상처 돌봐주는데 얄미울 것은 또 뭐냐?”


“윗옷을 벗고, 맨살을 훤히 드러냈는데도 하멜, 당신은 아무렇지 않아 했잖습니까. 처음에는 뺨을 붉히고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했던 주제에,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상처만 돌보는 당신이 얄미웠습니다. 그래서 괜히 가슴을 가린 손을 살짝 내리곤 했었는데.”


[시스터! 그래서 유진 님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유진 님이 시스터의 가슴을 훔쳐보았습니까? 육욕을 이기지 못하고, 성흔의 피를 닦던 수건과 손을 가슴으로 뻗은 것입니까?]


머릿속에서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과 외침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예전의 크리스티나는 부끄럼을 견디지 못하고 망측하다 외쳤는데, 이제는 적극적이고 사적인 갈망이 섞인 호기심을 보였다……. 정신이 격렬히 동요했다.


아니스의 말문이 막힌 사이에, 유진은 손수건을 꺼내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었다.


“아프지는 않은가 보네.”


“아쉽게도.”


“뭐가 아쉽다는 거야?”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아니스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아니스는 손바닥에 새겨진 성흔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등에 새겨졌다면 좋았을 텐데요.]


크리스티나가 아니스의 아쉬움에 공감하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환생 505화


살라르에서 지낸 열흘 동안 세냐의 얼굴은 보기가 힘들었다. 도시에 돌아온 즉시, 블러드 메리를 들고서 지하실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블러드 메리. 드래곤 하트를 통째로 사용한 이 호사스러운 지팡이에는, 역대 유페의 지팡이들의 기억과 마법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지팡이에 기록된 마법의 대부분은 흑마법이라, 세냐는 사용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마법의 여신을 목표로 하는 몸이라면, 사용하지 않을 저속한 흑마법이라도 알아는 둬야 한다. 아니,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이해해야 한다.


“흑마법도 결국 마법이니까.”


처음 블러드 메리를 들고 방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몰두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직 마법의 여신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세냐는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마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시대의 마법은 당연하다는 듯이 ‘서클’ 마법식을 사용하고 있다. 흑마법사들조차도 편리하다는 이유로 서클 마법식을 응용하고 있을 정도다.


그 서클 마법식을 만든 것이 바로 세냐다. 과장 없이 단언할 수 있다. 서클 마법식을 사용한 마법이라면, 가볍게 훑어본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건…….’


서클 마법식을 사용하지 않은 마법이라면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리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세냐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다. 새로운 마법식을 만들었다는 것은 기존의 마법식에 통달했다는 것이니, 시대에 뒤처진 구닥다리 마법들은 몇 번 다시 보는 것만으로 이해할 자신이 있었다.


“이 새끼들 뭐야?”


블러드 메리에 기록된 마법과 기억들은, 솔직히 세냐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구닥다리 마법이라고 폄하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도 왕국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아롯의 왕립도서관, 아크리온에는 고대의 마법들도 제법 많이 남아 있다. 당연히 세냐는 아크리온의 모든 마법에 통달했기에, 고대의 마법에도 정통했다.


그 아크리온의 모든 마법을 끌어모아도, 블러드 메리에 기록된 마법의 절반도 못 될 것이다. 그만큼 블러드 메리에는, 지금 시대에 전승되지 않은 오래된 마법의 원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단순 마법만 남은 것도 아니다. 블러드 메리의 진가는 마법에 관한 ‘기억’마저 보존한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답안지를 보고 문제를 푸는 것과 다름없다. 심지어 이 답안지는 답만 덩그러니 적힌 것이 아니라, 답에 도달하기 위한 해설까지 붙어 있다.


그러니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실에 틀어박힌 열흘 동안, 세냐는 침식을 잊고서 블러드 메리를 붙들고 명상에 잠겼다.


검은 바다를 떠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불필요한 기억들.


예를 들자면 흑마법의 벽을 넘는 법.


수행하여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고, 편법으로 벽을 넘는 법. 제물을 쓰는 의식을 벌이거나 마왕에게 비는 등, 세냐가 절대로 하지 않는 것들.


그 외에 여럿, 불쾌하고 쓸모없는 기억들.


마도(魔道)에 아무 쓸모 없는 기억들은 일절 배제했다. 하지만 흑마법은 몰두해서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근 300년 동안의 기록은 그리 볼 가치가 없었다. 아멜리아와 에드몬드, 그 전의 지팡이 몇 명의 기억은- 세냐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시대 전의 기억은 꽤 봐둘 가치가 있었다. 세냐도 상대해 본 적이 있던 유폐의 지팡이, 리치 베리알. 놈의 시그니처 격이었던 저주들은, 약간 손을 보면 ‘마법’으로도 응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전대 유폐의 지팡이, 에드몬드 코드렛. 놈의 마법은 세냐도 보았었다.


대수림에서의 전쟁에 직접 간섭할 수는 없었지만, 놈이 주제도 모르고 세계수를 써먹으려고 든 탓에, 전장은 살펴볼 수 있었다.


마법 실력? 그럭저럭 뛰어났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에드몬드의 마법 실력은 당대의 마탑주보다 윗줄이다. 하지만 놈은 그 대단한 마법 실력을 제대로 써먹으려 들지 않았다.


마법사로서의 자신을 대표해야 할 시그니처가 고작 방어 결계라니! ‘큐브’라는 이름이었던가? 세냐가 보기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시그니처다. 그만큼의 마법에 도달했으면서 왜 그딴 시그니처를 만든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아멜리아 머윈. 그년은 정말이지…… 세냐는 혀를 쯧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걔 시그니처가 뭐였지?”


본 적도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멜리아는 시그니처를 쓸 시간도 갖지 못했다. 싸움 비슷한 것이라도 해야 마법을 쓰고 시그니처를 쓸 텐데, 하우리아 전쟁에서 아멜리아가 한 것이라고는 지하에 틀어박혀 사령술을 쓰다가 목숨을 구걸한 것이 전부다.


다른 유폐의 지팡이들. 전쟁이 끝난 후에 뽑혔던 유폐의 지팡이는- 솔직히, 역대 모든 유페의 지팡이 중에서 최약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시대에는 흑마법사의 암흑기였기 때문이다. 쓸 만한 흑마법사는 대부분이 전쟁 중에 죽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것들은 신성제국의 이단심문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서 찾아다녔다. 괄시를 피해 헬무드로 넘어간 것들은 아무래도 황금기라 할 수 있던 전쟁시대의 현역들보다 못한 이류들뿐.


그런 놈 중에서도 ‘유폐의 지팡이’는 뽑아야 했다. 유폐의 마왕은 흑마법사의 대우를 보장하듯, 버러지들 사이에서 유폐의 지팡이를 뽑아 블러드 메리를 넘겼다.


‘이름이 뭐더라?’


세냐도 그 시대의 유폐의 지팡이는 실제로 본 적이 있었는데, 이름을 기억할 가치도 없는 허접쓰레기였다.


“이 새끼들 뭐야?”


몰두하고 열흘이 지났을 때.


세냐는 결국 이렇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가지고서 고작 그 정도밖에 못 한 거야?”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결국은 흑마법이니 대단할 것도 없다, 라고 생각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 들 정도로, 블러드 메리에 담긴 ‘지식’은 대단했다. 하지만 최근 300년의 마법들은, 건질 것보다 버릴 것이 많은 쓰레기들이다.


하지만- 베리알을 마지막으로 한 과거의 ‘유폐의 지팡이’들의 마법과 지식은, 지금 경지에 이른 세냐로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마법의 경지, 위력, 그런 것을 떠나서 흥미로웠다.


그런데도 최근 유폐의 지팡이들은, 이 뛰어난 지식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사용하지 않았다. 마법을 쓰되, 깊이 이해는 하지 않았다. 이해해서 새로운 것을 낳으려 하지 않았다.


세냐가 추구하던 것과 결이 다를지언정, 블러드 메리에 담긴 마법들은 진리를 논하기에 충분할 진데. 진리를 앞에 두고 겉만 핥아대다니…….


“이래서 요즘 것들은 안 된다니까.”


세냐는 투덜거리면서 블레드 메리를 내려놓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명상에 너무 몰두한 탓에 밤낮이 구분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굶주림과 갈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굶주림과 갈증을 느꼈다. 더 깊이 알고 싶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다. 세냐는 지식의 굶주림과 탐구의 갈증을 느끼며 입술을 핥았다.


‘전부 다 보지 못했어.’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을 몰두했는데…… 블러드 메리의 ‘전부’를 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부 볼 수가 없었다.


‘봉인?’


베리알을 지나, 전쟁시대에서부터도 ‘과거’로 넘어갔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흑마법사, 리치, 마족 등의 기억을 보았다.


하지만 밑바닥까지는 볼 수 없었다. 도중부터 기억이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놈이 초대 유폐의 지팡이는 아니야.’


아득한 옛날의 마족. 놈도 블러드 메리를 계승받았다. 놈 이전에 유폐의 지팡이가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 기억에 도달할 수가 없다. 굳게 닫힌 문 같은 것이, 다가오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얼마나 옛날인지. 놈 이전에 유폐의 지팡이가 누구였는지도 모르겠어.’


블러드 메리에 기록되는 것은 마법과 그에 관한 기억들뿐. 그 외에 기억은 담겨 있지 않다. 기록된 마법을 통해 시대를 유추해 볼까? 그조차도 쉽지 않다. 블러드 메리에 기록된 마법은 고대의 것. 세냐는 기억 속에서 고대의 마법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다.


‘너무 옛날이야.’


아롯에 남은 기록보다 오래 된 마법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년 전의 마법. 어쩌면 그보다 옛날의…….


‘……지금 시대의 마법이기는 한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블러드 메리는 언제부터 존재했던 걸까? 유폐의 마왕은, 아가로트가 살았던 신화시대에도 존재했다. 만약 그 시대에도 ‘유폐의 지팡이’ 비슷한 것이 있었고, 그들이 블러드 메리를 계승 받아왔다면? 애당초 지금 시대에서 ‘고대 마법’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신화시대의 마법.”


세냐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현재 대륙에서 세냐만큼 고대의 마법에 정통한 마법사는 없다. 그녀는 아롯에 남은 마법뿐만 아니라, 장생족인 엘프들에게도 마법을 배웠다.


‘만약 블러드 메리가 신화시대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라면, 나에게 없는 것을 확실히 더할 수 있어.’


그 시대에 존재했던 마법의 여신, 상아탑의 ‘현자’. 세냐는 그녀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황혼의 마녀의 환생은 누아르 제벨라. 아가로트의 환생은 유진…… 아마 나는 현자의 환생이 아닐까? 어쩌면 모론은 거신의 환생일지도 몰라.”


확신은 없지만 심증은 있다. 세냐는 운명이란 것을 그리 믿지는 않지만, 베르무트에 관해서는 운명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300년 전, 만약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해 연결된 것이라면? 아가로트가 하멜로, 현자가 세냐로, 거신이 모론으로 환생하고. 가장 완성에 가까운 성녀, 아니스가 태어나고, 그 모든 것에 호응하여 베르무트가 갑자기 나타나서, 모두를 동료로 삼아…… 마경을 정복하기 위해 간 것이라면.


‘그럼 베르무트는 대체 뭔데?’


마지막에는 항상 똑같은 의문이 남는다. 베르무트는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저 모든 것을 파악한 걸까. 베르무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세냐는 답답한 기분에 혀를 찼다.


블러드 메리의 밑바닥에는 신화시대의 마법이 남아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문은 봉인되어 있다. 아마, 유폐의 마왕의 소행일 것이다.


“재밌네.”


굳게 닫힌 문. 사슬에 의한 봉인. 굴욕과 울분뿐인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300년 전, 마왕성 바벨의 최상층. 유폐의 마왕과 싸웠던 어전.


무조건 이기고 싶었다. 무조건, 정말로 무조건,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싶었다. 놈을 죽여서 하멜의 혼을 되찾고 싶었다. 하멜이 바랐던 대로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싶었다.


실패했다. 처참하게 패배했다. 세냐가 자신했던 마법은, 유폐의 마왕의 사슬을 풀어내지 못했다. 대부분의 마법이 차단되어서, 세냐가 할 수 있던 것은- 마법으로 만드는 것에 실패한 마나를 난사하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달라.’


세냐는 블러드 메리를 꽉 쥐며 생각했다. 사슬이 문을 막고 있다면 부숴버리면 된다. 문이 잠겨 있다면 비틀어 열면 된다. 사실 바람처럼 쉽게 열지는 못하겠지만, 으레 문이란 두드리면 열리는 법이다.


“음.”


블러드 메리를 너무 꽉 쥔 탓에 손이 쑤셨다.


“꼭 이런 모양일 필요는 없을 텐데.”


세냐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블러드 메리를 노려보았다.


끝에 달린 붉은 보석은 드래곤 하트. ‘사악한 지팡이’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두 쌍의 손뼈가 드래곤 하트를 감싸고 있다. 마치 두 명의 손이 드래곤 하트를 떠받드는 것만 같은 모양이다. 세냐는 드래곤 하트에 찰싹 달라붙은 열 개의 손가락뼈와, 지팡이를 휘감고서 꿈틀거리는 혈관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흑마법사란 것들은 티를 내지 못해서 안달이라니까.”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커먼 로브를 입고, 음침하게 굴고. 당장 블러드 메리부터 꼭 이런 생김새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양을 바꿀 수는 없을까? 세냐는 블러드 메리를 이리저리 살피며 생각했다.


“이거 좀…….”


아공간에 수납해 두었던 프로스트를 꺼냈다. 세냐는 프로스트의 끝에 달아놓은 드래곤 하트와, 블러드 메리의 드래곤 하트를 비교해 보았다.


“희한하게…… 생겼네.”


가공을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블러드 메리의 드래곤 하트는…… 프로스트의 드래곤 하트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생김새 자체는 비슷하지만, 육안으로는 구별할 수 없는 이질적인 느낌.


‘최고(最古)의 지팡이.’


아카샤는 300년 전에 드래곤이 만든 것. 프로스트는 최근에 드래곤 하트를 보강한 것. 하지만 블러드 메리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어진 것이다.


오래되어서 다른 걸까? 마음 같아서는 아예 분해해서 살펴보고 싶은데, 괜히 그런 짓을 했다가 블러드 메리의 기록이 소실될 것이 두려웠다. 잠시 둘을 두고서 비교하던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두 개의 지팡이를 아공간에 쑤셔 넣었다.


“엘프의 영지나 한번 다녀와야겠는걸.”


아카샤를 만든 것은 드래곤과 엘프들. 세냐에게 고대의 마법을 전수한 것도 엘프들이다.


세냐는 영지에 남은 엘프 장로들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꽤 오랜 시간 가만히 앉아서 명상만 한 탓에 몸이 뻐근했다. 뼈는 삐걱거리고 근육이 저리고 몸은 찝찝했다. 세냐는 뭉친 머리카락을 대충 털면서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


“…….”


문을 연 즉시 눈이 마주쳤다. 뭐야 이거, 정말로 운명인가? 세냐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문을 열자마자 이렇게 딱 마주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운명은 아니었다. 유진은 진즉부터 지하실 문 앞에 앉아서 세냐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뜸 문을 열고 들어갈까, 아니면 문을 열라고 두드릴까. 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세냐가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문이 열릴 기미가 보여서, 일어나 세냐를 맞이한 것뿐이다.


하지만 세냐는 그 당연한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자신을 너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던 유진과 운명처럼 마주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칭하기를 ‘현명한’ 세냐였지만, 마법이 아닌 다른 문제에는 그리 현명하지 못했다.


“…….”


감격해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 세냐는 치명적인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열흘 동안 틀어박혀 명상만 한 몰골이 그리 보기 좋을 리가 없다는 문제였다. 뻐근함을 이기지 못해 구부정한 자세, 떡진 머리, 그 외에 이런저런. 아마 늪지대에 틀어박혀 연구만 해 온 라이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몰골일 것이다.


그래서 세냐는 냉큼 뒷걸음질을 쳐서 문을 닫았다. 문을 열고 나온 세냐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유진은 뭐라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몇 초 후. 다시 문이 열렸다. 다시 나타난 세냐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떡졌던 머리카락은 찰랑거리고, 피부에도 광이 났으며, 그새 옷도 새로 갈아입었다.


세냐는 엷은 분홍빛의 입술을 열며 방긋 웃었다.


“이 스승님이 보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던 거니, 제자야?”


“이제 스승 제자 따질 필요도 없지 않냐?”


“그렇기는 한데, 나는 널 제자라고 부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좋을 건 또 뭐야?”


“스승과 제자의 그런…… 그런 관계가 제법 맛있단 말이야.”


세냐는 히죽 웃으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대체 뭐가 맛있다는 걸까? 유진은 저 감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왜 여기 있는 거야?”


“왜기는. 네가 열흘 동안 안 나오길래…….”


“열흘? 내가 열흘 동안이나 틀어박혀 있었어?”


“얼씨구. 며칠이 흘렀는지도 몰랐던 거야?”


“흠, 그만큼 집중하고 있었거든.”


세냐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눈을 찡그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위에 뭐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


“네 표정은 왜 그렇게 죽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그러고 보니…… 세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유진의 차림새를 살폈다. 지금 유진은 언제나 입던 옷과 망토 말고, 뜬금없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덥수룩한 머리도 빗질로 넘긴 상태였다.


“……?”


그 모습은 세냐에게 낯이 익었다. 아롯에 처음 돌아와서 데이트했을 때와 비슷한…… 세냐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그때의 그, 낭만적인 입맞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펑펑 내리던 눈 하늘에서 맞닿았던 입술…… 설마, 전쟁도 끝났으니 기분을 풀 겸 데이트를?


“으흠…… 으흐흠, 자, 잠깐만 기다려. 나도 준비가 필요해.”


“준비는 무슨 준비, 지금 그 모습이면 충분해.”


“그…… 그래? 지금도 괜찮아? 하긴, 나는 뭘 입어도 아름답…….”


“나가서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유진은 우울한 표정을 하고서 몸을 돌렸다. 나가서? 쓸데없는 얘기? 세냐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딜 나가?”


“밖에.”


“데이트하러?”


“아니.”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기자회견.”


빌어먹을 환생 506화


대륙 모두가 주목하던 하우리아 해방전이 끝났다.


시무인 남해 끝에서의 전투와는 달리, 해방전에는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기사단과 용병단 대부분이 참전했다. 사실상 헬무드 제국을 제외한 모든 강국의 정예가 참전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주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데, 하우리아 해방전에는 여러 가지 드라마가 더해졌다.


전쟁 시대 이후 300년, 왕국의 수도가 함락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과정에서 술탄이 죽었고, 수도의 사람들 대부분이 추방당했다.


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마왕이 행한 짓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존재는 ‘마왕’이 틀림없었다.


망령이 따로 이름을 알리지 않았고, 헬무드에서도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륙은 망령을 ‘무명의 마왕’이라고 불렀다.


무명의 마왕. 전쟁시대 때 악명을 떨친 마물들. 헬무드에서 추방 처분을 받은 ‘전’ 유폐의 지팡이, 아멜리아 머윈과 마족들. 멸망의 영지 라비스타에서 은둔하고 있던 마족들. 전쟁시대 이후 이만한 규모의 전쟁은 없었다.


그리고.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의 정체.


300년 전의 영웅, 우둔한 하멜의 환생.


기자회견.


이름 그대로의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살라르 에미르의 궁전. 성벽 밖에는 군중들이 바글거린다. 그들은 전쟁에 활약한 영웅들,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여 환생한 ‘용사’를 직접 보고 싶어 이곳에 왔다.


성벽의 안쪽. 궁전의 정원에는- 대륙에서 각지에서 온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들은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오늘 이 자리의 주역들이 단상에 오르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분이 계신 것 같은데?”


모인 기자들 중 누군가가 슬쩍 운을 텄다. 그렇게 말이 나온 순간, 대부분 기자가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거, 종족 차별적인 말은 하지 맙시다.”


불그스름한 피부와 머리의 뿔. 우락부락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정장을 입은, 얼굴에 비해 한참 작은 안경을 쓴 마족이 넥타이를 어루만지며 답했다.


“종족 차별이라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올시다. 그냥, 마족이 이 회견 자리에 있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 아뇨?”


“안 될 것이 뭐가 있습니까? 헬무드에도 뉴스가 있고 신문이 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대륙에서 헬무드 이상으로 미디어를 구축한 나라가 있기는 합니까? 마왕님의 은혜가 끊이질 않는 헬무드는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제국 모든 가정에 고화질의 뉴스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마족은 자부심을 숨기지 않으며 으스댔다. 그는 뭐라 반박하지 못하는 인간 기자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특파원으로서 대륙의 소식을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취재하고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취재한 기사는 바로 오늘 저녁에 헬무드 전역에 전파될 겁니다.”


“참 잘났수.”


“용사를 취재하는 데 마족이 객관적이고 투명할 수 있는 거요?”


“300년 전 우둔한 하멜에게 죽은 마왕이 3명이고, 자잘한 마족의 수는 셀 수가 없을 만큼 많을 텐데?”


기자들이 대놓고 언짢아하며 비꼬았다. 그러자 마족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으하하! 우둔한 하멜이라니! 나는 말입니다, 당신네 인간들이 왜 아직까지도 그런 멸칭을 쓰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아니…… 그 이름은 멸칭이 아니라…….”


“당신들 말처럼 300년 전에 하멜은 3명의 마왕을 죽였고, 수많은 마족을 죽였습니다. 당장 우리 아버지부터가 하멜이 있던 전장에서 돌아가셨지요! 하지만 저를 비롯한 마족들도 그 두려운 인간 남자를 향해 ‘우둔한 하멜’이라는 멸칭은 쓰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기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인간들의 불편한 침묵 속에서 마족 기자는 혼자 열변을 토했다.


“하멜 다이너스, 그 남자는 당신네 인간의 영웅 아닙니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와 함께 눈부신 전과를 올린 영웅! 그런데 왜 인간의 역사는 하멜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은 겁니까?”


“그…… 그것은…….”


“헬무드는 과거의 죄를 잊지 않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우리는 대륙을 침략했고, 그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침략에 앞장서고 죽었던 살육과 참혹, 광란의 마왕의 죽음을 추모하지도 기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왜 하멜을 추모하지 않는 겁니까? 대륙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 비극적인 영웅을 추모하지는 못할망정 왜 ‘우둔한’ 하멜이라는 멸칭을 붙이고서 조롱하는 겁니까?”


모인 기자들은 억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둔한 하멜’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은 신원미상의 동화책 저자다. 그 동화책이 전국에 퍼지면서 베르무트와 동료들의 별명이 고정되었다.


위대한 베르무트.


용감한 모론.


현명한 세냐.


신실한 아니스.


우둔한 하멜.


저 다섯 이름은, 지금 시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족이 저 이름을 멸칭이라며 꾸짖는 것이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하지만 억울한 것은 억울한 것이고, 마땅히 반박하거나 변명할 말이 궁색한 것은 사실이었다.


‘설마 하멜이 환생할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저런 말을 변명이랍시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기자들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단상만 힐긋거렸다.


오늘 기자회견의 주인공은 하멜의 환생, 유진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다. 이미 약속한 시간은 조금 지났는데, 둘은 아직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궁전 안.


유진은 팔짱을 끼고서 세냐를 응시했다. 하지만 세냐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괜히 아래를 보았다가, 옆을 보았다가 하면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내…… 내가 뭘?”


슬쩍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힘은 실리지 않았다. 애당초 지금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부터가 세냐에게 아직 인간의 마음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저기 저 마족 새끼도 그러잖아. 우둔한 하멜이 멸칭이라고 말이야.”


“마족 나부랭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당장 가서 죽여 버려야…….”


“특파원이랍시고 온 놈을 죽이면 어떡합니까?”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죽여 버리는 거지. 어차피 헬무드랑 척진 사이인데, 특파원인지 뭔지, 입에 기름 처바른 놈 죽여봐야 달라질 것이 있어?”


세냐가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 야만적이고 무식한 말에 유진조차도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세냐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너에게 더 이상 떨어질 이미지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조금 자제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미지? 내 이미지가 뭐 어때서?”


어쩜 저리도 뻔뻔할 수가.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똑같이 할 말을 잃고서 세냐를 빤히 보았다. 여러 의미를 내포한 시선에 세냐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내…… 내 이미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자기객관화가 부족하군.”


유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저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멜이 내뱉는 것은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니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웬만한 것이라면 유진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크리스티나조차도, 지금만큼은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으흠…… 유진 님, 그리고 세냐 님. 슬슬 나가셔야 합니다.”


“아니…… 하…… 씨…….”


유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길레이드와 카르멘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딴 기자회견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잘 숨기고 있던 것을 멋대로 공개해 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예 확실하게 입장을 발표해 놔야지 더는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도망쳐 버리시면, 본가에 돌아가서 큰 곤란을 겪게 되실 겁니다.”


크리스티나가 속삭였다. 그녀는 유진이 본가의 안주인인 애니실라와, 친부인 제하드 등에게 유독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유진이 회견을 거부하고 도망친다면, 기자들과 군중은 라이언하트 영지 바깥에 진을 치고서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돼버리면 애니실라의 손아귀에서 수십 개의 부채가 아작 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그렇겠지…….”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 싫어하는 유진과 달리, 세냐는 오히려 굉장히 의욕적이었다.


세냐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서, 세간의 소식은 들었었다. 시무인 무도회 이후 떠도는 이야기. 그 현명한 세냐가, 300년이나 어린 제자를, 심지어 동료인 위대한 베르무트의 까마득한 후손과 정분이 났다는 이야기.


시대가 바뀐 것은 맞다. 스승과 제자 사이, 서로 마음만 같다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300년의 나이 차이는 너무하지 않은가? 그것도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과! 정말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우둔한 하멜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저런 이야기들은 세냐를 굉장히 억울하게 만들었다. 유진이 그 하멜의 환생인데 대체 무슨 문제인가? 300년의 차이? 그게 뭐가 대수냔 말이다.


“저기 저기, 너희도 확 밝혀 버리지그래?”


“무엇을 말입니까?”


“네 안에 그 아니스 슬리우드가 있다고 말이야. 이제 와서 밝혀도 아무 문제 없지 않아?”


세냐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크리스티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음흉한 이유가 있었다. 25살의 젊은 성녀, 크리스티나의 안에 300년 묵은 구렁이 같은 아니스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젊음’은 더 이상 성녀의 무기가 되어주지 못할 것이다. 세냐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300살이라는 나이를 공유하고 싶었다.


“싫습니다.”


크리스티나 대신 아니스가 대답했다.


“배려해 준 것은 고맙지만, 제 존재를 밝힐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스는 세냐가 저만큼 구질구질하고 추한 이유로 권하는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해서, 저 말이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멜은 죽어서 환생했지만, 저는 그런 것이 아니잖습니까. 저는 300년 전에 죽었고, 영혼만 남은 존재입니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죠.”


“또 그런 비관적인 말을 한다.”


“냅둬, 아니스는 이런 주제에는 항상 저런 태도란 말이야.”


아니스가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세냐와 유진은 저런 모습이 이미 익숙했다. 둘은 서로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말을 주고받았다.


“아무튼, 저는 제 존재를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크리스티나에게 깃들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크리스티나가 해온 공로를 저의 것으로 만들 테니까요.”


[시스터, 저는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실제로 제 공로랄 것은 모두가 시스터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것이잖습니까?]


“제가 싫은 겁니다.”


아니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불완전한 형태로 이 세상에 남아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덧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귀찮아서 싫습니다. 제 존재가 알려지면 유라스의 광신도들이 저를 굉장히 귀찮게 굴 겁니다. 저는 그런 일은 질색입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세냐도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쉬움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혹시 아니스, 너 혼자 죽은 상태란 것을 신경 쓰는 거야?”


“당신은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니, 만약 신경 쓰는 것이라면 말이야, 내가 나중에 마법의 여신이 되어서 네 몸을 만들어줄게.”


사실 이전에도 몇 번 시도는 해본 적이 있다. 메르를 만들었을 때처럼 사역마의 육체를 만들고, 아니스의 혼을 정착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천사가 되어버린 아니스의 혼은 크리스티나와 동화되어 있어서 강제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만약 분리에 성공했을지라도 위험성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마법의 여신이 된다면, 아니스에게 새로 육체를 만들어주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세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아니스의 손을 꼭 잡았다.


“한쪽은 나를 위한 천국을 만들겠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절 위한 육체를 만들겠다는 겁니까.”


아니스는 풋 웃으며 중얼거렸다.


“과연 성공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나중에…… 네, 나중에.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반응이 너무 덤덤한 것 아냐?”


“하멜, 그럼 제가 감격해서 눈물이라도 흘리기를 바란 겁니까?”


“조금은.”


“만약 제가 눈물을 흘렸어도 당신의 등은 떠밀었을 겁니다.”


아니스는 눈을 흘기며 유진의 정강이를 툭 걷어찼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겁니까? 빨리 다녀오십시오.”


“진짜…… 진짜 가기 싫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기자회견? 가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욕은 해도 되는 건가? 유진의 표정이 복잡해지자, 세냐가 코웃음을 치며 유진의 등을 찰싹 때렸다.


“왜 긴장하는 거야?”


“긴장이 아니라 후회하고 있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하멜이란 소리는 평생 하지 않았을 텐데.”


“이럴 줄 몰랐다는 것도 웃기네.”


“기자회견이 대체 뭐 하자는 건데? 가서 무슨 말을 해?”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냥 아무 말이나 하면 되지 않아?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지. 까놓고 우리한테 누가 뭐라 할 수 있는데?”


세냐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300년 전에 세상을 구했어. 완벽하게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 시대에 우리만큼 잘 싸운 놈은 없었잖아.”


“그건 그래.”


“지금은 또 어떤데? 요즘 것들이 제대로 하지를 못하니까, 300년 지나서도 우리가 고생하고 있는 것 아냐?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대로 굴 자격이 있어.”


그 말은 유진의 후회를 제법 많이 달래주었다.


그래, 세냐의 말이 맞았다. 정체를 밝혀 버린 것. 그에 따른 민망하고 부끄러운 후회는, 그간 유진이 해왔던 언행들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유진이 적극적으로 하멜을 변호하며 존경한다고 떠든 것은, 세상이 하멜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베르무트와 용감한 모론, 우둔한 하멜, 이렇게 셋을 나열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하멜 님을 존경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된 지금의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하멜이면서 하멜이 아닌 척, 하멜을 존경한다고 말한 것?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세냐의 말마따나, 300년 전 그 고생을 하고 지금 시대에서도 고생하고 있는 유진은 마음대로 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진은 가슴을 활짝 폈다. 어깨를 더 이상 움츠리지 않았다. 끝까지 잠근 셔츠의 단추도 몇 개나 풀었다. ‘하멜’의 것인 목걸이. 벗은 적이 거의 없는 부모님의 유품. 유진은 목걸이를 드러내고서 뚜벅뚜벅 걸었다.


닫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온 즉시 웅성거림이 뚝 멎었다. 정원에 모인 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유진과 세냐를 쳐다보았다. 유진은 하나로 모인 시선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늦어서 불만 있습니까?”


유진은 기자들을 내려다보며 툭 내뱉었다.


“…….”


설마 저렇게까지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세냐의 입이 떡 벌어졌다.


빌어먹을 환생 507화


너무나도 파격적인 발언. 정원에 모인 기자들도 아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멍청히 입술만 벌리고서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한참 늦은 것은 맞다.


늦은 시간만큼 땡볕 아래에 서 있었으니, 불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기자 중에서 대체 누가, 저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 있겠는가? 불만이 있어도 알아서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심지어 유진이 대놓고 불만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모인 기자 중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냥, 알아서 시선을 피했다. 이 순간에 기자들 대부분이 새삼 자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동화책의 내용을.


위대한 베르무트를 필두로 한 5명의 영웅들 중에서, 가장 성격이 더럽고 망나니처럼 굴던 남자가 누구였는지를.


300년의 시간을 넘어,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의 용사로 환생했을지언정- 저 남자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거, 불만들 있는 것 같은데, 속으로 엄한 생각 말고. 불만 있으면 까놓고 말합시다.”


단상 위에 올라온 유진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곧 유진은 기분이 언짢아져 눈썹을 왈칵 찡그렸다.


“아니, 사람 불러다 놓고 의자도 안 깔아두면 어떡해? 댁들은 의자에 앉아도 되고, 나는 그냥 서서 떠들라는 거야 뭐야? 이거는 너무 좀, 경우 없는 상황이지 않나?”


단상에 의자가 없었다. 사실 유진은 의자가 있건 없건 평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까짓 몇 시간 일어서서 떠든들 다리가 아파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때에는 일일이 꼬투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대로’ 하기로 해서가 아니라,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기자란 족속들은 의자에 앉아 있고, 자신은 서 있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드잡이를 해놔야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어쩜 저렇게 속이 뻔히 보일 수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유진의 꼬라지를 보던 아니스가 탄식을 흘렸다.


‘저런 당당하신 모습이 용사에 지당하십니다.’


[크리스티나……! 그렇게나 억지로 하멜을 두둔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하멜의 꼬라지는 열 살배기 코흘리개도 하지 않을 유치하고 추한 짓입니다.]


‘그 순수함조차도…….’


[제발, 크리스티나!]


더욱이 심각한 문제는, 크리스티나가 제법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진심은 아니스에게도 강하게 전달되었기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크리스티나의 광신에 저항했다.


“의자는…… 여기 있어.”


그 세냐조차도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러자 유진의 뒤에 푹신한 의자가 나타났다.


“요즘 것들은 예의가 없네, 예의가 없어.”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기자들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단상 위의 유진을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23살. 여기 모인 기자 중에서 유진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몸뚱이의 나이만 23살일 뿐, 영혼은 그 하멜 본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나이를 300살로 쳐야 하는가? 아니면 죽었을 당시의 나이와 지금의 나이를 더해서 계산해야 하나?


“바쁜 사람 불러놓고서 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하는 겁니까?”


유진은 널따란 의자에 몸을 기울이며 내뱉었다. 저 짜증 섞인 말에 기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 기자회견 자체가 열렬한 구애로 얻어낸 것. 오늘이 아니면 다시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 일.


“주간 키옐의 스프렌 브리드라고 합니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께 질문이…….”


“일일이 소속이랑 이름은 소개하지 맙시다. 어차피 나는 오늘 들은 당신들 이름을 기억할 생각도 없고, 가능하다면 다시 또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유진은 손사래를 치며 다리를 꼬았다.


“인당 질문은 한 번. 모른 척 한 번 더 질문을 하면, 회견은 거기서 끝입니다. 그리고 질문에 무조건 대답해 주지도 않을 겁니다. 대답하기 싫고 짜증이 나는 질문은 그냥 무시할 겁니다. 당연히 그 경우에 질문권은 소모한 거고.”


“…….”


“나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다시 침묵이 만들어졌다.


기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독점 기사도 아니고, 이런 공개적인 기자회견은 어차피 정보가 공유된다. 한 명당 한 개의 질문밖에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과 겹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기사의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 대체 어떻게 환생하신 겁니까?”


처음에 일어섰던 기자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에게 질문했다.


“패스.”


“예?”


“패스라고요.”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하고 자시고, 유진은 환생에 관한 질문에는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베르무트가 환생시켜줬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래서 유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질문을 넘겼다.


“…….”


질문이 묵살 당한 기자의 뺨이 씰룩거렸다.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기자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꿀꺽 침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 정체를 밝히신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마왕을 2명이나 죽였으니, 이제는 더 숨길 필요가 없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유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저 말은 거짓말이다. 환생을 밝힌 것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다. 한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서. 굳이 말하자면, 먼 위에서 보고 있던 가비드 린드먼을 약 올리기 위해 밝혔던 것이다.


차마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할 수가 없었다.


“2명의 마왕을 죽여서……! 즉, 유진 님께서는 힘을 쌓으며 미래를 대비하고 계셨던 겁니까? ‘하멜’의 환생임을 누구나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혹은, 하멜의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기자가 냉큼 질문에 이어 물었다. 이번 질문에도 유진은 별 고민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예. 여태까지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확신이 부족했는데, 마왕 2명을 죽여보니 힘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 외에 정체를 숨겼던 것은…… 과거의 적들에게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이언하트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제법 진심이 섞여 있었다. 힘이 충분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는 실제로 저런 생각을 하고서 정체를 숨겼었다.


“라이언하트……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감히 묻겠습니다. 과거, 라이언하트의 영지인 우클라스 산맥의 흑사자 성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혹, 그 사건도 유진 님의 정체에 관련되었던 겁니까?”


“당시 이오드 라이언하트는 300년 전에 죽은 살육의 마왕과 참혹의 마왕의 잔재에 홀렸었습니다. 여태까지 얌전하던 마왕의 잔재가 갑자기 날뛴 것은, 뭐, 원수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몇 년 전의 일. 하지만 이오드의 폭주는 앞으로의 라이언하트 역사에 다시 없을 수치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유진은 굳이 질문을 넘기지 않고, 애매한 태도로 대답해 주었다.


“아아……!”


“죽은 마왕들조차도 하멜 님의 존재감에 몸을 떤 것인가?”


“그렇다는 것은, 이오드 라이언하트의 폭주는 단순히 광기에 의함은 아니라는 것이군…….”


기자들이 수군거리며 노트에 바쁘게 글을 적었다. 유진은 오가는 이야기에 내심 흡족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와서 이오드의 명예를 챙겨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놈이 싸지른 똥을 수습하느라 잔뜩 늘어난 길레이드의 주름을 조금은 메워주고 싶었다.


“유진 님은 13살에 라이언하트의 전통인 혈계식을 치르셨고, 이후 라이언하트 역사상 최초로 본가의 입양아가 되어 백염식을 익히셨습니다. 본가의 양자가 되어 백염식을 익히는 것은 유진 님의 계획이셨습니까?”


“백염식이 욕심이 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베르무트 그 새끼의 백염식은 300년 전부터 대단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모든 기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의 입에서 나온, ‘베르무트 그 새끼’라는 말 때문이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베르무트보고 새끼 거리는 것은 좀 그렇지 않아?”


“새끼가 새끼지 뭘. 난 아직도 가끔 그 새끼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아.”


“사실 나도 그렇기는 해.”


유진과 세냐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약…… 만약, 백염식을 익히지 못했다면? 그래도 지금만큼 강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정신을 차린 다른 기자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만큼 강해지지는 못할 겁니다.”


굳이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백염식을 익히지 않았다, 라는 전제부터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라이언하트에 환생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백염식은 익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백염식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랬어도 언젠가는 지금만큼의 힘에는 도달했을 것이다. 백염식 대신에 제하드의 가문에 이어져 온 그저 그런 적염식을 익혔어도, 어떻게든 뜯어고쳐서 훨씬 낫게 만들었을 테니.


하지만 그랬을 경우, 지금만큼의 힘에 도달하는 것에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현재 유진의 나이는 고작 23살이다. 하멜로 죽었던 나이보다 어리다. 백염식에 입문하고서 이제 딱 10년밖에 안 된다.


전생의 기억. 아가로트의 신력. 그런 것들이 더해졌다고 해도, 10년 만에 대륙 제일에 서고 마왕을 단독으로 죽일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유진이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이만한 힘을 얻은 것은, 라이언하트에 환생해서 백염식을 익혔기 때문이다. 베르무트의 안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언하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백염식을 익히지 않았다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 년은 더 필요했을 것이다.


“유진 님은 300년 전에 이미 많은 업적을 세우셨습니다. 3명의 마왕을 죽였고, 수많은 마족을 죽이며 전장을 승리로 이끄셨죠. 그리고 최후에는 유폐의 마왕성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냥 본론만 말합시다.”


“그…… 크흠, 예, 알겠습니다. 전생에 그만큼이나 세상을 위하셨는데, 환생한 삶에서는 조금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겠다,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은 없으십니까?”


기자가 헛기침을 섞으며 질문을 마무리했다. 유진은 이번에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지금도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유진이 입을 열었다.


“나는 하멜일 적부터 세상에서 마왕이란 놈들을 모조리 다 죽여 버리고 결심했고, 그렇게 살다가 내가 먼저 죽어버렸습니다. 어찌어찌 다시 태어났어도, 내 결심은 바뀌지 않습니다.”


“오오……!”


딱히 여론을 의식해서 한 말은 아닌데, 기자들이 감탄성을 내지르며 유진을 우러렀다. 문틈 사이로 그 광경을 보던 크리스티나도 탄성과 함께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시스터, 들으셨습니까? 아아, 유진 님은 어찌 저리도 고결하신지요! 이 세상에 용사라는 단어는 오직 유진 님에게만 어울립니다.’


아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에 뭔가가 단단히 씌어버린 크리스티나에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사실 아니스 본인도 저 말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유일한 마족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진은 그 거구를 고깝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뭐라 핀잔은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어보쇼.”


“유진 님은 헬무드 제국과의 전쟁을 바라시는 겁니까?”


마족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 질문에 모든 기자들이 눈을 빛내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저것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기자들이 가장 궁금하고 듣고 싶어 하는 답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유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생각할 필요가 있는 질문이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투로 대답해야 할지는 고민이었다.


“전쟁을 바라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닐 텐데?”


유진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몸을 기울여 마족을 노려보았다.


“나도 300년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자각은 하고 있어. 옛날에는 마족이라면 무조건 죽여야 할 적이었고, 흑마법사는 동족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마족의 앞잡이가 되어 인간을 팔아넘기는 개새끼들이었지.”


표정이 사나워진 만큼 말투도 사나워졌다. 유진은 굳이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내가 뒈지고서 300년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 마족은 그럭저럭 대화를 나눌 만한 상대가 되었지. 네가 지금, 내 앞에 멀쩡히 살아서 질문이란 것을 하고, 내가 무시하지 않고 대답해 주는 것 부터가 세상이 변했고, 내가 나름 적응하려 노력했다는 증거야.”


끔찍하고 거대한 살의가 마족에게 집중되었다. 정장을 입고 안경을 썼어도, 그는 헬무드 내에서 무투파인 마족이다. 100위 안에는 들지 못해도 제법 높은 서열에 올라 있기도 하다.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유진에게 있어 공작급을 제외한 마족은 모두가 평등하게 하찮았다. 최하위 서열의 마족이건 최상위 서열의 마족이건, 지금의 유진에게는 밟아 죽일 수 있는 벌레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


“그러니 네 질문은 무시하지 않고 대답해 주지. 헬무드와의 전쟁을 바라느냐고? 아니. 내가 바라는 것은 헬무드가 아닌, 마왕과 마족과의 전쟁이다.”


“그…… 그건…….”


“나만 전쟁에 미친 살인광으로 생각하지 마. 평화가 어쩌고 떠들던 유폐의 마왕도 나와 똑같이 전쟁을 바라고 있지 않나? 그건 마족들도 마찬가지지. 당장 며칠 전 하우리아에서 내 앞에서 얼쩡거리다 죽은 마족이 몇 명인지는 아나?”


마족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유진은 여전히 살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애당초 내가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들어도. 유폐의 마왕이 그것을 바라지 않을 거다. 놈은 이미 평화의 끝을 예고했지. 요즘 마족들은 유폐의 마왕이 평화주의자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유진은 그렇게 이죽거리고 난 뒤에 살기를 거두었다.


그제야 마족은 숨을 헐떡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살기는 걷혔지만 좌중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유진은 침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더 물어볼 것도 없는 모양인데, 슬슬 여기서 그만…….”


“질문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그 목소리에 유진은 얼굴을 왈칵 구겨졌다.


“유진 님과 세냐 님은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구체적으로 대답해 주십시오!”


어울리지 않는 안경을 쓴 멜키스가 땅에서 솟구쳤다.


빌어먹을 환생 508화


비유가 아니다.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정말로 땅에서 솟구쳤다.


나름 극적인 등장을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멜키스는, 깊은 땅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지상으로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멜키스의 옷에는 흙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대지의 정령왕 야노스의 계약자인 그녀는, 아무리 단단한 땅일지라도 물처럼 자유로이 잠수하고 헤엄치는 것이 가능했다.


‘어떻게?’


갑자기 멜키스가 솟아오른 것. 유진은 그것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땅속에 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유진은 멜키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내 감각을 속일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가능하고 말고를 떠나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유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멜키스는 현시대의 마법사들 중에서 최강이라 평가될 대법사다. 그런 실력자임에 불구하고, 안타까울 만큼 저급한 이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자회견에 난입하기 위해 이만큼의 공을 들였다고?


‘언니.’


멜키스는 단상을 올려보며 열의를 불태웠다.


‘제가 언니를 위해 해냈어요.’


이 순간. 세냐와 멜키스는 은밀히 시선을 교환했다. 세냐는 표정이 바뀌지 않도록 주의하면서도 내심 흡족한 기분을 느꼈다.


무엇을 숨기랴? 유진의 감각을 속이고, 기자회견에 멜키스가 난입할 수 있도록 수를 쓴 것이 바로 이 현명한 세냐인 것이다.


왜 굳이 멜키스인가? 세냐가 판단하기에, 멜키스야말로 가장 이런 형태의 돌발행동에 어울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냐가 부탁한다면 누가 감히 거절을 하겠냐만, 세냐에게도 아직 인간의 마음은 남아 있었다.


만약 멜키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난입해서 저런 질문을 한다면? 유진도 차마 면전에서 험한 소리는 내뱉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을 응어리로서 마음에 담아두는 쪼잔한 성격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유진이 괜찮아할지라도…… 평범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얼빠진 행동이 상대에게 민폐가 되었다는 생각에 속앓이를 할 것이다. 하지만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에게는 저런 평범하고 보통의 반응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이 발칙한 음모는 고작 한 시간 전에 시작되었다. 기자회견에 대해 대충 듣고 난 뒤. 세냐는 곧장 유진을 따라가지 않고, 먼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열흘 내내 골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왔는데, 대충이라도 준비는 더 해야 할 것 아냐?


-준비? 뭔 놈의 준비가 더 필요해? 차림새만 말끔하면 됐지.


-이 멍청아, 네가 보기에는 말끔할지 몰라도 내 기준에서는 아니야. 아무튼 나는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해.


그렇게 유진을 쫓아낸 뒤. 세냐는 다시 지하실로 돌아와 멜키스에게 연락을 보냈다. 세냐가 멜키스에게 부탁한 말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우선, 회견 중에 몰래 난입할 것.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너무 눈에 띄고 숨기기도 힘드니, 땅에서 튀어나오는…….


-두더지처럼요?


-그래, 맞아, 두더지!


-아 언니, 그래도 제가 명색이 아롯의 백색마탑주에 금세기, 아니,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가장 대단한 정령술사인데…… 품위 없이 땅속에서 두더지처럼 튀어나오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아요?


-너 누구 마음대로 나를 언니라고 불러?


-농담한 거예요, 언니! 언니가 튀어나오라고 하면 저는 땅속이건 불 속이건 튀어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언니, 굳이 몰래 할 필요가 있어요? 그냥 처음부터 회견 자리에 서 있으면 안 돼요?


-네가 회견 자리에 처음부터 있으면, 유진은 널 보자마자 도망칠 거야.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언니가 질투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유진 걔랑 엄청 친해요.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당장 멜키스를 불러와 혼쭐을 내고 싶었다.


-헛소리…… 헛소리하지 말고, 이따 기자회견 때 유진한테 말이야, 세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좀 대놓고 물어봐.


-어머어머어머어머! 언니, 역시 그런 거예요? 네? 역시 그런 거죠?


그런 이야기가 끝나고. 유진을 겨냥한 음모는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다.


멜키스에게 구체적인 질문들은 일러주지 않았지만, 세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광인에게는 광인 나름의 디테일이 있는 법. 두루뭉술하게 주제만 던져 주었을 뿐이지만, 멜키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즉, 세냐에게 있어서 멜키스는 최고의 히트맨이라 할 수 있었다. 유진에게 들이박는 것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이후에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체면을 신경 쓰지도 않는다. 또한, 유진은 은근히 멜키스에게 약한 면이 있기도 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 대답해 주세요!”


멜키스는 번쩍 든 손을 보란 듯이 흔들며 외쳤다. 단상에서 내려다보는 유진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멜키스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유진 님은 세냐 님과 정확히 어떤 사이입니까? 대체 둘은 무슨 관계인 겁니까? 저는 그게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다른 기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멜키스의 존재 자체에 당황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멜키스의 난동을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방금까지 유진의 살기에 집중되어 주저앉았던 마족 기자조차도, 식은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두 눈을 빛내며 멜키스를 쳐다볼 정도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멜키스의 돌발적인 질문은, 모두가 궁금해하면서도 차마 물어볼 수 없던 질문이었다.


사실 조금 말랑한 분위기였다면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물어봤겠지만, 불과 방금 전에 유진은 이 자리의 모두를 죽여버릴 것만 같은 살기를 내뿜지 않았던가.


“…….”


저런 질문을 틀어막기 위해 살기를 내뿜고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 것인데. 설마 멜키스가 이딴 식으로 난입해 올 줄이야……!


유진은 가슴이 답답하게 막히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제게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왜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을 하는 겁니까?”


“여기서 제가 평소처럼 반말을 하면 너무 건방져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건 자각하면서 저한테 그딴 질문은 왜 합니까?”


“저는 기자 자격으로 온 겁니다.”


멜키스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저,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유진은 뿌득 이를 갈았다.


“자격? 뭔 놈의 자격!”


“아롯의 주간 정령술의 아무튼 기자입니다.”


멜키스가 되는대로 떠들자, 유진의 뺨에는 경련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멜키스는 유진이 이를 꽉 물고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질문을 강조했다.


“대답해 주세요!”


“패스하겠습니다.”


“대답해 주세요!”


“다음 기자분.”


“대답해 달라구요!”


“회견은 여기까지 하는…….”


“아아아!”


멜키스가 빽 고함을 질렀다.


“아아아앙!”


단순한 고함은 아니었다. 앙탈 비슷한 것이 섞인…… 아니, 마치 어린아이의 생떼 같은.


“아아아아악!”


어쩜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 사람이라면 저래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시엘이 대뜸 눈물을 쏟았을 때. 그때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는 이해가 아주 안 되지는 않았다.


그야 당시 시엘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감정적으로 괴로운 일을 겪어 본 적도 없었으며,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대뜸 크리스티나가 시엘의 뺨을 갈겼을 때? 그것도 어찌어찌 이해는 간다. 시엘이 어렸듯 크리스티나도 어렸다. 특히 크리스티나는 스스로가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만 같은 광신도였어서, 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무가내로 강요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저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녀는 결코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도 아니다. 그녀가 항상 자칭하던 대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 가장 대단한 정령술사다……. 그런 멜키스가, 저런 짓을 해도 되는 건가?


“으흠…….”


유진이 경악하는 중에, 세냐가 낮게 헛기침을 뱉었다. 그녀는 히트맨의 자신을 돌보지 않는 활약에 감탄하면서 유진을 힐긋 보았다.


“대답하지그래?”


“어…… 뭐?”


“대답.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이쯤에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세냐는 유진에게 은근히 눈빛을 보내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유진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아니…… 왜 여기서 그런 걸…….”


“그럼, 여기 말고 다른 데서 말할 거야?”


세냐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유진은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승과 제자…….”


“그런 비겁한 대답을 하면 어떡합니까!”


적당한 대답으로 일단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는데, 멜키스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확실하게 대답해 주세요!”


“아니 그게 참…….”


“300년 전에는 그런 유언을 남겼으면서, 왜 이제 와서 머뭇거리는 겁니까?”


유언, 이라는 말에 유진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나는 그런 유언 남긴 적 없습니다!”


“거짓말! 죽기 직전에 세냐 님에게 마음을 고백했잖아요!”


“아니라니까! 나는 그런 유언 안 남겼다고요! 그건, 그건 동화책의 날조라고!”


유진은 진심으로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빌어먹을 동화책 때문에 괴로움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화책만 없었으면 우둔한 하멜이라는 엿 같은 별명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고, 그리고 또…….


“세냐 님!”


유진이 부글대며 끓는 감정을 잠시 삭이는 동안, 멜키스의 총구가 세냐에게 향했다.


“세냐 님이 대답해 주세요! 하멜 님이 정말로 유언을 안 남겼나요?!”


멜키스에게는 세냐를 공격할 마음은 없었다. 이 질문 자체가 세냐를 위한 마음으로 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멜키스는 동화책의 저자가 세냐란 것을 모르고 있다. 동화책의 마지막에 적힌 유언 자체가, 먼저 죽어버린 하멜에 대한 세냐의 비애란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 그게…… 음…….”


세냐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동화책의 유언이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유진의 시선 때문에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괜한 말을 해버린다면, 자칫하다가는 유진과의 폭로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폭로전에서 세냐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기억이 잘 안 나네……. 300년 전의 일이라…….”


그래서 세냐는 시선을 피하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기억이 안 나? 유진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사, 사실 유언이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응? 중요한 것은 300년 전이 아니라 현재지. 그래서, 우리는 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전사와 마법사. 동료. 스승과 제자.”


유진은 이를 꽉 물고서 내뱉었다. 그 대답에 세냐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렇게 입술만 내밀 뿐. 세냐는 대놓고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뭐 그런…… 시기가 시기인지라 뭐……. 하지만 언젠가…… 마왕 다 죽이고서 우리가 멀쩡히 살아 있으면…… 그때가 되면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격하게 확인하는 사이가 되지 않나…….”


이어가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알아가면 알아가는 사이인 것이지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사이는 대체 뭔가? 그리고 과격하게 확인하는 사이는 대체 뭐고?


대답은 애매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곳의 사람들 중에서 저 대답에 실린 미묘한 뉘앙스를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세냐조차도 입술을 떡 벌리고, 뺨을 점점 붉힐 정도였다.


“결혼할 건가요?”


멜키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저 대답 자체는 멜키스의 기준에서는 너무 애매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멜키스는 보다 확실한 대답을 원했다. 그것이 세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하는 거죠? 그렇죠? 아니면 연애부터 하나요? 어쩌면 이미 하고 있는 건가요?”


“…….”


“만약 그런 것이라면 언제부터 했나요? 300년 전부터? 아니면, 아니면 세냐 님이 아롯에 돌아왔을 때부터? 아니면, 아니면 아롯에 오기 전에?”


멜키스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멜키스는 굉장히 마법사다웠다. 그녀는 당장 치솟는 탐구욕을 억누르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고 보니, 유진 님은 대수림에서 처음 돌아왔을 때 아카샤의 소유권을 가지고 계셨죠! 그때 세냐 님을 찾았다고도 말했었고. 설마, 아카샤가 둘 사이의 예물 같은 건가요? 맙소사, 맙소사! 맞아, 그리고 메르는? 그때 유진, 너는 아카샤랑 더불어 메르도 아크리온에서 데려갔었잖아!”


얼마나 마음이 급한 것인지 말투도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세냐 님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았다는 사역마……! 마치, 마치 세냐 님의 자식과 같은…… 너와…… 세냐 님의? 맙소사! 이미 둘 사이에는 자식이 있었던 거야!”


멜키스는 제 자리에서 방방 뛰어오르며 외쳤다. 입을 꾹 다물고 저 이야기를 듣던 유진은, 결국 주먹을 꽉 쥐었다.


[맞아요! 저는! 저는 유진 님과 세냐 님의 자식과 같은 존재인 거예요! 제 이름은 메르 메르데인이지만 언젠가는 메르 라이언하트가 되는 거예요!]


망토 안의 메르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도…… 나도 언젠가는 라이미르아가 아니라 라이미르아 로게리스가 되는 것이니라. 그리고 또 언젠가는 라이미르아 로게리스에서 라이미르아 라이언하트가 될 것이니라……!]


[멍청이! 라이미르아 라이언하트라니, 그 얼마나 구린 이름인가요? 차라리 줄여서 라이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가요? 이 라이라이라이라이!]


메르는 메르메르메르데인이라고 놀림 받던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놀려댔다. 유진은 머릿속에서 오가는 시끄러운 소리들에 보다 더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유진아, 아니, 유진 님! 유진 님은 스승으로서의 세냐 님이 좋으신가요, 동료로서의 세냐 님이 좋으신가요? 그 감정은 하멜일 적보다 역시 더 커졌겠죠?”


“…….”


“아, 그런데…… 크리스티나 성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게 참, 우리가 꽤 오래 알고 지냈잖아? 나는 유진 너랑 크리스티나 성녀가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지 안단 말이야. 특히 크리스티나 성녀가 널 볼 때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설마 모르는 건 아니죠? 나 말고 너희를 본 모든 사람들이 알 텐데?”


“…….”


“세냐 언니랑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사이면, 크리스티나 성녀랑은 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 하긴, 용사랑 성녀는 궁합도 알아볼 필요도 없는…….”


“꺼져.”


유진은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서 나직이 내뱉었다. 대뜸 튀어나온 험한 말에 멜키스가 비명을 질렀다.


“유진아!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꺼져!”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콰지직! 유진이 앉아 있던 의자가 일어서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 났다. 의자뿐만이 아니었다. 단상 자체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을 파고 들어갔다.


“너희, 너희 전부 다! 꺼져! 내 눈앞에서 당장!”


“유, 유진 라이언하트 님! 저희는 아직 질문을 하지 못했…….”


“꺼지라고!”


“하지만…… 하지만 유진 님……! 아직 유진 님에게 듣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헬무드와의 구체적인 전쟁 계획과, 앞으로의 유진 님의 행보와…… 그리고…….”


“꺼져!”


기자들의 애걸 따위, 더 이상 유진의 알 바가 아니었다.


제 발로 꺼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꺼지게 할 수밖에. 유진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홱 손을 뻗었다.


-콰르르르! 유진이 일으킨 마법이 수십 명의 기자들을 동시에 하늘로 띄워버렸다.


[제발, 멜키스 엘하이어, 지금은 가만히 있어라. 절대로 하멜의 마법에 저항하지 마라…… 제발!]


‘맙소사, 템페스트……! 나를 걱정하는 거야?’


[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멜의 정신을 걱정하는 것이다…….]


템페스트가 탄식을 흘렸지만, 멜키스는 그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마법에 저항하지 않고 기자들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가 해냈어요, 언니.’


이번 일에 나서는 것에 세냐에게 무언가 보답을 약속받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재밌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꼭 보답을 약속받지 않아도, 이번 일을 통해서 세냐와 친밀도가 크게 올랐을 것은 틀림없었다.


‘잘했어.’


멜키스의 생각대로였다. 확실하고 구체적인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대답은 들었다. 세냐는 여전히 붉은 뺨을 어루만지며 유진을 힐긋 쳐다보았다.


유진의 얼굴도 똑같이 붉었다. 물론, 유진의 얼굴이 붉은 이유는 순수한 분노 때문이었다. 유진은 공중에 띄운 기자들을 모조리 성벽 밖으로 던져 버린 뒤에,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주, 죽일까?”


“죽이기는 뭘 죽여? 죽이지 마, 참아. 쟤가 성격이 좀 이상해도 실력은 좋잖아! 싸움도 잘하고…….”


세냐는 헤벌죽 웃지 않으려 애쓰며 유진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빌어먹을 환생 509화


아이빅 슬라드. 이 남자는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아이빅이 가장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별명은 역시 ‘용병왕’이다. 세상 사람들도 ‘아이빅 슬라드’라는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지 못해도, ‘용병왕’이라는 노골적인 별명은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저 별명은 자칭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마다 ‘용병왕’이라고 불렸던 용병은 꼭 하나씩 있었다.


칼밥을 먹는 용병 중에서 가장 강한 용병. 그러면서도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대한 세력을 거느린 용병.


현시대에서 아이빅만큼 ‘용병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용병은 없다. 그가 단장으로 있는 슬라드 용병단은 누구나 대륙 최고라고 꼽는 용병단이다.


단순히 머릿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실력도 출중하다. 지금은 해체된 수준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모두 몰살된, 마수 야곤의 맹수 용병단과 유일하게 맞승부가 가능했던 것이 바로 슬라드 용병단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슬라드 용병단 산하에는 다른 용병단이 수십 개나 있다. 비즈니스로 연결된 귀족과 왕족도 세는 것이 힘들 만큼 많다.


거기에 내로라하는 기사단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금은 교류를 완전히 단절했지만- 불과 몇 년 전에는 헬무드의 고위 마족들과도 커넥션이 있었다.


단순 실력만 해도 최강자의 반열에 거뜬히 이름을 올린 남자. 거느린 세력과 영향력은 어떤 의미로는 기사단장보다 커다란 남자. 그가 바로 아이빅 슬라드다. 그가 입을 연다면 슬라드 용병단과 산하 세력뿐만 아니라, 용병계 전체가 움직일 정도다.


“…….”


그만큼 대단한 아이빅 슬라드는…… 지금은 쩍 벌어져 있어야 할 어깨를 초라하게 움츠리고, 불안감을 어쩔 줄 몰라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맙소사…… 맙소사……!’


사람에게는 가끔 이런 일이 있다. 특별하게 중요하지 않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잠깐이나 다뤘던 시답잖은 주제. 그것에서 파생된 짧은 대화. 딱히 무거웠던 것도 아니고, 무언가 다른 주제로 이어지지도 않았던.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기억 어딘가에 떠돌고 있던 것이…… 갑자기 퍼뜩, 떠오르는 일이 있다.


아이빅이 그랬다. 그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오늘 아침, 아니, 아침이 아닌 점심. 전날 기분 좋게 퍼마셨던 술 덕분에 정오가 한참 지나서 일어나, 나른한 정신을 방치하며 휘청휘청 침대에서 걸어 나오다가.


갑자기 떠올라 버렸다.


대충 1년 전의 일이다. 신생 광란의 마왕이 아닌, ‘해적여제’ 아이리스를 토벌하기 위해 출항했을 때. 아이빅은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가 타고 있는 배에 잠시 방문했었다.


그때.


셋의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시종들.


그중 가운데 서 있던,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에 실력이 범상치 않아 보였던…… ‘유리’라고 이름을 댔던 시종.


후에 그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경악과 의문이 가득했지만 차마 사정을 묻지 못했던.


-아이빅은 하멜 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엘의 뜬금없던 질문.


-전설적인…… 대단한 용병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존경은 하지 않아.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하멜 그 사람을 용병이라 쳐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하멜…… 우둔한 하멜. 그 위업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 위업이 용병으로 쌓은 것은 아니잖아?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로 쌓은 거지.


-물론 하멜은 용병일 때도 대단한 사람이었다고는 들었는데…… 흠, 같은 용병들에 대한 평가가 좋았던 적은 거의 없거든? 하멜도 용병을 싫어하고, 용병들도 하멜을 싫어했다지.


-뭐라 할까, 하멜 그 사람은 자기가 몸담은 업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없었다고. 괜한 억지를 부려대면서 다른 용병들을 괴롭히고, 하멜 때문에 분쇄된 용병단도 엄청 많았다더라. 그래서 나는 하멜을 별로 존경은 안 해.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갑작스러운 시엘의 질문에, 아이빅은 거짓말 하나 섞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유리 아가씨는 왜 자꾸 이를 가는 것이지?


“커헉…….”


아이빅은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신음을 토했다.


왜 지금 떠오른 것이지? 그야, 기억할 필요가 없는 대화였으니까. 아니, 사실은 그 기묘하며 진실을 파헤쳐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상황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기 때문이리라.


결국 아이빅은 그 후에 라이언하트 시종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광란의 마왕을 몰아붙이던, ‘용사’의 신위를 직접 보았다. 그래서- 그래서, ‘시종’에 관한 의문을 더더욱 물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부러 잊었던 것이 갑자기 떠올라 버렸다.


“…….”


하우리아 해방전에서 보았던 유진 라이언하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승되어 오는 ‘우둔한 하멜’의 일화들을 떠올렸다.


잠깐의 고뇌. 결국 아이빅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용서를 빌러 가자.”


300년 전. 하멜이 아직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지 않고, 용병계에서 한창 악명을 떨치던 시절. 전장에서 하멜에 의해 해체된 용병단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세한 이유까지는 전승되지 않았지만, 마족과의 전쟁에서 인간 용병이 인간 용병단을 해체시킬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한 전승 자체가 하멜의 성격이 얼마나 사나웠는가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당연히 아이빅은 슬라드 용병단의 해체를 원하지 않았다. 수많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하멜에게 구박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기왕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현시대에 용병왕이라 불리는 자로서 하멜의 인정과 존중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빅은 자신의 방을 박차고 나왔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떠올라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찾아가 무릎을 꿇건 머리를 박건 사죄는 해야 한다.


“…….”


방을 나와 복도를 걷던 중.


궁전 정원에서의 기자회견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회견이 오늘이었던가.


“…….”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딴 기자회견을 하필 오늘 한 것인가? 아니, 저것을 기자회견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기자회견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저것에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멜키스 엘하이어의 주접 쇼라고 해야 할 것이다.


“허어어…….”


아이빅은 당장에라도 도망치거나 숨고 싶은 기분을 느끼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멜키스의 주접 덕분에 하멜의, 유진의 기분은 최악에 치달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빅은 잠깐 동안 제자리에 서서, 단상을 통째로 주저앉힌 유진이 숨을 씨근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법에 의해 담벽 밖으로 날아간 기자들이 아우성을 질러댔지만, 유진은 그쪽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으흠…….”


유진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니, 세냐도 유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유진의 얼굴을 힐긋힐긋 쳐다보며 생각했다.


‘멜키스의 입을 막아야겠어.’


당연히 멸구(滅口)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잘 어르고 타일러서, 멜키스의 입에서 ‘세냐 님이 시켰어요’라는 이야기만 나오지 않게 할 생각이다.


“애가 조금 이상할 뿐이지 성격은 착해.”


세냐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유진이 멜키스를 진심으로 싫어하지 않도록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조금?”


유진은 홱 고개를 돌려 세냐를 째려보았다. 그 사나운 시선에 세냐는 꿀꺽 침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많이.”


“성격이 착하기는 하지. 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이거저거 많이 챙겨줬고. 뻔하게 등 처먹는 것에 당해주기도 했고.”


유진은 바닥을 뚫고 움푹 들어간 발을 뽑으면서 투덜거렸다.


“오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뭐…… 괜찮아.”


과연 사람의 적응력은 남다른 것일까. 멜키스의 저런 주접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인지, 방금 전까지 치솟았던 분노는 금세 식어버렸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멜키스가 알아서 날뛰어준 덕분에 남은 기자 수십 명을 한 번에 쫓아낼 수가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성격이 아주 난폭하다는 것도 과시를 할 수 있었으니,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겁이 없는 놈이 아니라면 유진을 더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문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다가왔다. 유진은 방긋 웃으며 다가오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에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 어어…….”


멜키스에게 마지막으로 받았던 질문이 바로 크리스티나에 관한 것이다. 성녀와 도대체 어떤 사이인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 궁합도 알아볼 필요가 없는 조합.


……유진은 괜시레 민망한 기분이 되어 시선을 피했다.


[후후…….]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유진이 관계를 제대로 의식하고 있으며, 민망하고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그것만으로 행복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멧돼지처럼 무식하게 들이박는 세냐는 포악한 방법으로 확답을 원했지만, 성녀들은 그렇지 않았다. 뭐 하러 확답을 원하나? 감정이란 서로를 간지럽히다가 천천히 겹치고 섞이는 것이다…….


복도의 창문을 내려보던 아이빅은, 숨을 삼키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아이빅은 저 셋의 관계를 뚜렷하게 알지 못한다. 그런 아이빅이 보기에는, 유진이 치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으로 보였다. 저 현명한 세냐가 유진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것으로 보였고, 성녀가 분노한 용사를 달래는 것으로 보였다.


“허어…….”


꼭 이런 상황에서 용서를 빌어야 하는가? ……어쩌면 유진이 잊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1년이야 정체를 감추기 위해 별말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밝힌 후로도 아이빅을 호출하지 않았잖은가.


‘그럴지라도.’


아이빅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치도 않은 희망을 바라며 도망치는 것은 추하기 짝이 없는 일. 어쩌면 저 무서운 영웅은, 아이빅이 스스로 찾아와 용서를 비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결심을 똑바로 세웠다. 아이빅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찾아가, 진심으로 용서를 빌자. 그때의 무례를 사죄하고, 하멜이란 사내가 얼마나 대단한 전사였는지를 칭송하자.


“?”


결의를 다지고 찾아온 유진의 방 앞.


닫힌 문 앞에 선 사람들이 보였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아이빅은 이해하지 못하고서 물었다.


“그러는 자네는 왜 이곳에 온 건가?”


시무인의 퍼스트, 오르투스 하이만.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아이빅을 쳐다보았다.


문 앞에 선 것은 오르투스뿐만이 아니다.


루하르의 국왕, 아만 루하르.


백룡 기사단의 단장, 알체스터 드라고닉.


흑사자 기사단의 1번대 대장, 제노스 라이언하트.


그 딸인 제니아 라이언하트.


“나는…… 유진 님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겁니다.”


아이빅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오르투스도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유진 님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이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어도, 뭘 당연한 말을 하느냐는 뉘앙스. 아이빅은 눈썹을 구기고서 오르투스를 흘겨보았다.


본래 둘은 서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했다. 서로의 흠을 탐색하며 약점을 잡으려 했을 정도다.


광란의 마왕의 토벌전에서 함께 싸웠다. 전장에서 등을 맞대고, 서로를 도왔다. 이번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둘은 이미 전우다.


그렇다고 갑자기 친해질 수는 없는 법. 옛날만큼 싫어하지는 않아도, 아이빅과 오르투스는 여전히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경이 유진 님께 볼일이 뭐가 있습니까? 설마 나이트 마치 때처럼 유진 님을 스카웃하고 싶은 것은 아닐 테고.”


“자네가 그걸 어찌 알고 있는 건가?”


“허허,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 설마. 주제넘은 말을 한 것에 대한 용서를 빌려고 온 겁니까? 하긴. 유진 님을 품기에는 남쪽 시골 나라인 시무인은 너무나 초라하지요. 스카웃을 권한 것 자체가 유진 님에 대한 모욕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그 시골 나라에서 제일도 아니고 차석인 자가 말은 잘하는군.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것도 그 정도로 뱉으면 하나의 재주로 삼을 수 있을 걸세.”


“뭐요? 오르투스 경, 당신이 큰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경에 대한 나름의 존중과 시무인 왕국의 사정을 헤아려 퍼스트에 도전하지 않는 거요. 막말로 그 쪼잔한 국왕이 용병 나부랭이한테 퍼스트의 칭호를 줄 것 같지도 않고.”


“아이빅 슬라드,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게. 아무리 그대가 세컨드라 해도, 국왕 전하에 대한 험담을…….”


“그만, 그만!”


둘의 언쟁이 점점 격해지자, 아만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중재에 나섰다.


“싸움을 하고 싶으면 혀를 놀리지 말고 아예 검을 뽑게! 내가 직접 심판을 봐줄 테니까!”


“전하도 참. 뭐 이런 일로 칼을 뽑으라 하십니까?”


아이빅은 즉시 너스레를 떨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와중에 오르투스를 한 번 노려보면서 말이다. 오르투스도 논쟁을 더 격화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혀를 쯧 차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이빅, 그래서 자네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가?”


점잖게 서 있던 알체스터가 입을 열었다.


“나는 유진 님의 쾌차에 대한 축하를 겸해, 사담을 나누고 싶어서 왔네.”


아이빅에게만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알체스터는 스스로 부끄러운 점이 없고 당당했기 때문에, 숨김없이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솔직히, 검사로서의 조언을 받고 싶기도 해서 왔지.”


“음.”


제노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딸을 돌보지 않고 알체스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알체스터 경. 경께 꼭 드리고 싶던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멜 님…… 아니, 유진 ‘사형’이 사용하시는…….”


“사형?”


“아, 죄송합니다.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본래 제노스는 유진을 사형이라고 불렀다. 제노스의 가문에 계승되던 ‘하멜식’의 적법한 계승자가 유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의 정체가 하멜 본인이기에, 더 이상 사형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유진 스승님이 사용하시는 검기(劍技). 형태가 달라서 확신이 없었습니다만…… 검강을 중첩시키는 방식이 꼭, 드라고닉 가문의 공검(空劍)과 비슷하더군요. 혹시 경께서 직접 유진 스승님께 가르친 겁니까?”


스승님? 알체스터는 그 호칭에 잠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하면 스승님이란 호칭에 문제는 없단 생각이 들었다. 제노스의 가문이 하멜을 대 스승으로 모시는 것에 대해서는 알체스터도 알고 있었다.


“가르치다니……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은 아닙니다. 제노스 경도 아시다시피, 몇 년 전에 유진 님이 드라고닉 가문에 머무른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예, 그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경의 아드님을 스승님이 직접 지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그때 아들에게 마나를 조작하는 요령을 가르쳐달라 청하면서, 저도 유진 님께 공검을 알려드린 것뿐입니다.”


공검은 드라고닉 가문을 대표하는 비기다. 드라고닉 가문의 사람도 아닌 외인에게 공검을 가르친 것은 순전히 알체스터의 독단이었다.


그만큼 알체스터는 유진의 재능에 매료되었었다. 그때의 알체스터는, 유진이 가주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라이언하트의 중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더 나아가, 언젠가 대륙 최강의 기사가 될 것이라고도 확신했다.


그런 유진에게 드라고닉의 무예가 더해진다면, ‘유진 라이언하트’의 위명과 함께 드라고닉의 무예도 역사에 남으리라고 생각했다…….


옳은 판단이었다. 유진은 공검에 큰 감명을 받았고, 새로이 기술을 만들 때도 적극적으로 공검의 묘리를 활용했다.


“역시! 스승님의 검기는 공검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군요.”


“그토록 애용해 주시니 저로서도 영광일 따름입니다.”


“저는…….”


제노스는 한 번 헛기침을 하며 옆에 선 딸, 제니아를 힐긋 보았다.


“알체스터 경과 마찬가지로, 스승님의 쾌유를 꼭 축하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제 딸아이가, 스승님께 꼭 사죄를 드리고 싶다고 하여…….”


“사죄…….”


아이빅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빅 슬라드. 당신도 스승님께 사죄드릴 일이 있는 겁니까?”


“예…… 하하…… 이게 참, 말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 무례를 범했던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이빅은 그렇게 말하며 오르투스의 표정을 살폈다. 무례에 대한 사죄. 그 말에 오르투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사죄를 위해 온 것은 오르투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나 말인가?”


아만이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아이빅을 돌아보았다.


“상처도 나았으면 같이 목욕이나 하러 가자고 왔네. 이 궁전의 욕탕이 아주 훌륭하지 않나?”


“목…… 목욕?”


“전에도 한 번 했었지.”


아만은 유진과 함께 목욕했던 것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로군. 그때는 나만 목욕했어. 그러니 이번은 같이해야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사죄를 위해 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빌어먹을 환생 510화


“…….”


복도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진은 문 앞에 선 사람들을 살펴보고, 나름대로 혼자서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도저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오르투스, 아이빅, 아만, 제노스, 제니아. 저 다섯 명이 뜬금없이 왜 같이 있는 것인지. 그것도 왜 저 정도 되는 인사들이 복도에, 아니, 방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서 뭣들 하십니까?”


그래서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제노스가 즉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유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 강녕하셨습니까?”


“아니…… 뭔 강녕이야?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보는 줄 알겠네. 며칠 전에 보지 않았냐?”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제노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옆을 보았다.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딸과 눈이 마주쳤다. 제노스는 그런 딸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목 아프겠다. 그러지들 말고 고개 들어.”


유진은 제노스의 인사를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다. 제노스와의 관계도 꽤 오래된 데다가, 제노스가 하멜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아는 일. 솔직히 유진이 보았던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하멜을 존경하는 것이 제노스일 것이다.


“제니아 님은 왜 그러고 계십니까?”


유진은 제니아의 정수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니아 님’. 노골적으로 거리감이 드러나는 호칭에 제니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고, 제노스도 숨을 삼켰다.


“딸 아이가 과거의 무례를 사죄드리고 싶다고 하여…….”


과거의 무례? 유진은 눈을 끔벅거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당초 유진에게 있어 ‘제니아 라이언하트’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이오드가 흑사자 성에서 지랄을 했을 때.’


기억이 났다.


-저는 유진 님에게 절대로 지지 않을 겁니다.


그때 제니아는 노골적로 유진에게 적의를 드러냈었다. 순전히 질투 때문이었다.


당시 27살이던 제니아는,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유진이 제노스의 총애를 받고, 자기네 가문에만 전승되던 하멜식을 계승했다는 것을 굉장히 불만스러워했었다.


“아하.”


질투심에 불탔던 것은, 그만큼 제니아가 ‘하멜식’에 대해 자부심이 넘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유진은 당시 제니아의 태도에 별 불만을 갖지 않았었다. 솔직히 말하면 질투랍시고 한 것들이 승부욕을 불태운 것뿐이라, 오히려 귀여울 지경이었다.


애당초 그 빌어먹을 사냥제에서 이오드가 마왕 의식을 벌이고, 도미닉이 원로원주를 시해하고, 헥토르가 본가 쌍둥이와 방계 아이들을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제니아의 히스테리가 기억에 남을 리가 없지 않은가.


“뭘 사죄까지야…….”


“스승님이 신경 쓰지 않으신다고 해도, 딸 아이가 꼭 사죄를 드리고 싶다고 하여서…….”


“죄송합니다!”


제니아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유진은 기자회견에서의 모욕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이 하멜을 두고 우둔하다고 비웃어도, 참된 의의를 아는 자들은 하멜의 희생을 숭고하다고 기억하고 있다.


또, 모두가 위대한 베르무트와 용감한 모론을 존경한다고 말할 때, 남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은 하멜을 존경한다……. 현 라이언하트의 가주이자 인품이 훌륭한 길레이드 라이언하트가 가문의 시조보다 하멜을 존경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 고개들 들어. 더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복도에서 하지 말고 들어가서들 하자고.”


어디 선물이라도 줄 것 없나? 유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세상의 억지스러운 멸시 속에서도 하멜식을 계승해 온 가문. 모두가 하멜을 비웃을 때 진심으로 하멜을 존경하며 하멜식을 단련한 가문. 과거 제노스의 기술을 보완해 주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으로는 선물이 부족할 것 같다.


‘아예 내가 쟤네 가문 후견인이 되어서 좀 챙겨줄까? 둘은 너무 늦었지만, 앞으로라도 저 가문 후손들에게 백염식도 가르치고…….’


라이언하트의 전통? 애당초 그 전통부터가 베르무트가 하멜의 환생을 위해 안배한 것이다. 계획대로 환생했으니 더는 전통을 챙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염병할 혈계식은 없애 버리고…… 음…… 백염식을 죄다 익히게 하는 것은 좀 그러니, 좀 똘망똘망한 애들 엄선해서 가르치는 편이 가문의 미래를 위해 낫겠지.’


예전이라면 원로원 측에서 절대로 허락하려 들지 않겠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사실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 아니어도, 유진의 영향력만 두고 생각해도 원로원이 귀를 닫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위니드 가질래?”


“예?”


“아니…… 분쇄추랑 마창은 가끔 쓰는데 말이야. 나 이제 위니드 이거 별로 안 쓰거든. 아니면 용격창? 뇌광궁은 어때?”


사실 위니드가 없어도 템페스트는 부르면 와줄 것 같고…… 본가의 보물을 마음대로 줘도 되는가?


그런 문제는 지금 유진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유진에게 문제라고 할 것은, 망토 안을 뒤지던 손을 서로 붙잡고서 꼬집고 간지럽히다 잘근잘근 깨물어대는 메르와 라이미르아였다.


“일단 서서 얘기하는 것도 그러니, 다들 안으로 들어갑시다.”


“잠…… 잠깐.”


아이빅이 급히 끼어들었다.


“하멜 님…… 아니, 유진 님. 저 같은 경우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말하기는 조금 그런 이야기인데, 가능하시다면 독대를 해도 괜찮은지에 대해 여쭤봐도 될지를 여쭈어봐도…….”


“뭐요?”


저 새끼는 왜 저런 식으로 귀찮고 어지럽게 빙빙 돌려서 묻는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하기는 좀 그런 이야기는 대체 무엇이고?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아이빅을 빤히 보다가.


“…….”


짚이는 바가 있어서 숨을 삼켰다.


“좋아. 단둘이서 얘기합시다.”


“저, 저도.”


오르투스가 냉큼 입을 열었다. 아만과 알체스터는 딱히 둘이서만 나눌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다른 둘이 저렇게 말해 버리니 흐름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유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닫힌 방문 앞에 일렬의 줄이 만들어졌다.


“거참…….”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만들어진 줄을 흩트리지는 않았다.


지금 문 앞에 선 자들은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 특히 알체스터와 아만은 유진이 제법 존경하고, 큰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럼…… 어…… 한 명씩 들어오십시오.”


졸지에 개인 면담 같은 형태가 되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노스는 유진이 떨떠름해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딸 아이의 무례에 대한 용서는 빌었고, 유진도 흡족해하며 사죄를 받아주지 않았나.


“그래?”


“예.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노스의 곁에 선 제니아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사죄를 떠나, 존경하는 하멜과 꼭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긴…… 오늘이 아니어도 가문에서 인사를 드리면 되는 거야.’


어차피 유진은 본가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나중에라도 방문하면 될 터. 제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유진은 물러서는 부녀를 흐뭇하게 배웅한 뒤에 몸을 돌렸다.


유진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아이빅이 냉큼 뒤를 따라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이빅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았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일단 의자에 앉았다.


“없던 일로 합시다.”


“……예?”


머리를 박고 있던 아이빅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 배에서 있던 일.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요.”


“유진 님……!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유진 님을 모욕한 것에 대한 사죄를 꼭…….”


“아니, 그, 모욕? 뭐? 아, 나보고 용병이 어쩌고 했던 거?”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일단. 오해에 대해서는 바로잡아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뭐 용병들 사이에서 악명을 날렸던 거는…… 어…… 아무래도 거친 직종이잖아요?”


“예…….”


“그러니까, 어디든 그럴 텐데. 얕잡아 보이지 않고 무시 안 당하려면 좀 지랄 맞아야 했단 말이에요. 나는 특히 그랬지, 원래 잘난 놈은 여기저기서 질투하게 마련이니까.”


“예…….”


“그런데? 내 심기 거슬렀다고 용병단이 몇 개 해체되었다는 건 말이에요, 상당히 악의적인 헛소문이에요. 아마 그 새끼들, 전장에서 시체랑 부상자들 주워다가 흑마법사에 팔아넘기던 새끼들이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면 처음부터 흑마법사한테 돈 받고 민간인 납치하고 물자 빼돌리던.”


“그런 천하의 개…….”


“개새끼들이지! 그럼 어째? 죽여야지. 당신이라면 안 죽였을 거야?”


“저도 죽였을 겁니다.”


“그렇지?”


유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저것들 외에 다른 악명도 좀 있겠지만, 그것들은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기에도, 용병일 적의 하멜은 독기가 바짝 올라서 성격이 아주 지랄 맞았으니.


“죄송합니다. 제가 하멜 님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 지금 시대의 나에 대한 이야기는 오해가 대부분이니까. 아무튼 사죄할 필요는 없고…… 정 신경 쓰이면, 어, 네 별명이 용병왕이잖아요. 하멜은 사실 이러이러한 용병이었다~ 뭐 이런 얘기나 좀 하고 다녀. 부하들이랑 술 먹으면서.”


“예.”


“그 외에 다른 건 없던 일로 하자고.”


유진은 차마 제 입으로 ‘여장’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여장은 잘못되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됐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사람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다. 대체 왜 그랬던 걸까? 무엇에 홀렸던 걸까…….


“예…….”


아이빅도 눈치 없이 굴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억지로 붙들고 그때의 이야기를 해봐야 유진의 기분만 나빠지고 욕만 먹을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나가봐.”


“예, 감사합니다.”


아이빅은 자리에서 일어서고 꾸벅 고개를 숙인 뒤 퇴장했다. 열고 나간 문이 닫히기도 전에 오르투스가 냉큼 걸어들어왔다.


“경은 대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사죄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아니. 어디 나 몰래 욕이라도 하고 다닙니까? 나는 짚이는 바가 없는데 사죄할 사람은 뭐 이리 많아?”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며 내뱉었다. 오르투스는 공손한 자세로 서서 바닥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아이빅이 남긴 무릎 자국이 보였다. 그 앞에 움푹 파인 자국은…… 머리를 박은 것인가? 오르투스는 자신도 머리를 박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대체 뭘 사죄하고 싶다는 겁니까?”


“하멜 님께 너무…….”


“유진이라 부르세요 그냥. 내 지금 이름이 하멜인 것도 아닌데 왜 자꾸 하멜이라고 부릅니까? 듣는 내가 다 헷갈리네.”


“예, 유진 님.”


오르투스는 표정을 가다듬고서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아이빅이 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기 위해서였다.


“내가 무릎 꿇으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바라지도 않는데. 애꿎은 무릎은 왜 자꾸 꿇습니까? 괜히 내가 나쁜 사람 같게.”


“죄스러운 마음 때문에…….”


“그러니까, 대체 뭘 했는데 그럽니까?”


저렇게까지 미안하다고 할 일이 무어가 있길래? 유진은 정말로 짚이는 바가 없었다. 사죄할 입장이 반대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게…… 시무인에서의 개선제가 너무나 초라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


“워낙 급하게 준비했던 지라 여러모로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시일이 촉박했던지라 개선문의 완성도도 떨어지고…… 그리고, 유진 님이 저희 왕국에 왕가의 참배를 요구하셨을 때, 국왕 전하가 역정을 내기도 하셨지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오르투스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멍하니 그 말을 듣던 유진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결국 도중에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잠깐…… 잠깐만요. 사죄하고 싶다는 것이 그런 문제들입니까?”


“예? 아…… 죄송합니다. 나이트마치에서 처음으로 뵈었을 때에 제 태도가 불쾌하셨다면 그것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돼…… 됐습니다. 저는 불쾌했던 적이 없으니, 어서 나가십시오.”


유진은 주춤거리는 오르투스의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몸은 어떠십니까?”


뒤이어 알체스터가 들어왔다. 유진은 굉장히 멀쩡한 사람인 알체스터를 보자마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아주 멀쩡합니다. 아픈 곳도 없고요.”


“며칠 전에 문안을 드렸을 때는 아직 걷기 힘들어하셨는데.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알체스터는 유진이 권한 자리에 앉으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알체스터 경께서는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겁니까? 설마 경께서도 제게 사죄할 일이 있으신 겁니까?”


“사죄라……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유진 님께 사죄드릴 만한 무례는 범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살짝 시선을 돌리니 바닥의 흔적이 보였다. 알체스터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유진 님을 찾아온 목적은 쾌차를 축하드리기 위해. 그리고, 만약 괜찮으시다면 검에 관한 조언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조언이라? 어떤 조언을 바라시는 겁니까?”


“이번 전쟁.”


알체스터는 의자 옆에 풀어놓은 검을 힐긋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만한 규모의 실전은 처음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와 백룡기사단은 ‘전쟁’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키옐은 대륙의 다른 국가들이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제국이다. 대륙에서 키옐과 힘 싸움을 할 수 있을 만한 국가는 신성제국 유라스와 헬무드 제국뿐. 하지만 유라스와 키옐은 우방국이나 다름없고, 헬무드는- 절대로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키옐의 백룡기사단은, 가진 명성과는 달리 ‘진짜’ 전쟁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제국 내의 분란에 개입하고, 실전과 다름없는 전투훈련만을 해왔을 뿐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경도 그렇고 백룡기사단도 그렇고, 이번 전쟁에서 굉장히 잘 싸우시지 않았습니까?”


수십 미터에 달하는 공검을 자유로이 다루면서 적군과 성벽을 숭덩숭덩 썰어내는 알체스터의 활약은 유진에게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하하.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요.”


알체스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지막’.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알체스터를 포함한 영웅들은 유진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전원이 덤볐음에도 가비드의 일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린드먼 공작의 검은…… 제가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이 있어도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절대적이었습니다.”


“음…… 놈에게 벽을 느끼신 모양이군요.”


“예. 물론, 제가 린드먼 공작보다 약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린드먼 공작이 검에 몰두한 세월만 수백 년일 테니, 100년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제 검이 린드먼 공작에게 닿을 리가 없지요. 저는 유진 님과 같은 천재가 아니니.”


“너무 자조하십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되, 그만큼 충격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벽은 저 자신이 수행하여 넘어야 하는 것. 유진 님에게 직접적인 가르침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어떤 조언을?”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실 검에 대한 조언이라면 유진은 해줄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이미 알체스터의 검은 그만의 것으로 완성되는 중이라, 유진이 조언한들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드라고닉 가문의 시조. 오릭스 드라고닉 님의 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그 뜬금없는 이야기에 유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유진 님은 300년 전에 시조님의 검을 직접 보셨지 않으십니까? 저희 가문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진 님은 시조님의 무(武)에 관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벗이라고 들었습니다.”


“어…… 음…….”


“유진 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의 공검은 시조님의 검을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현 드라고닉의 가주인 저는, 후손들이 쌓아 올려 완성한 공검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만약 가능하다면 지금의 공검으로 시조님의 검과 겨뤄보고, 시조님의 검을 통해 공검을 보다 더 진화시키고 싶습니다.”


알체스터의 열의 가득한 말에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에 관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벗이라니……. 유진은 오릭스와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이름을 갈아치우고, 반인반룡이라면서 거들먹거리는 오릭스를 불러서 두들겨 팬 적이 있기는 했다.


“으음…… 그러니까…… 저보고, 알체스터 님의 공검과 오릭스의 공검을…… 비교해 달라?”


“예.”


“그…… 허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시절 오릭스의 검은, 드래곤하트에서 뽑아낸 무식한 마나를 마구잡이로 휘둘러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오릭스의 검은 커다란 풍선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알체스터 경의 공검이 오릭스의 검보다 뛰어납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지금의 알체스터와 오릭스가 겨룬다면. 10초도 되지 않아 알체스터의 검이 오릭스를 썰어버릴 것이다.


“예?”


“정말로요. 경의 검은 이미 진즉에 오릭스를 뛰어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경께서는 얽매이지 않아도 될 것에 얽매이고 계십니다.”


알체스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유진은 표정을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굳이 오릭스의 검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뭣 하러 자기보다 약한 놈을 의식하십니까?”


그 말에 알체스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저 말을 무례하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저 간단한 말에 오히려 막혔던 혈 같은 것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알체스터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알체스터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라면, 간단한 계기에서 이어지는 작은 깨달음 하나로도 많은 것이 바뀐다. 유진은 알체스터의 눈동자에 깃든 빛에 피식 웃어버렸다.


“감사합니다.”


알체스터는 유진과 함께 웃으며 옆에 놓은 검을 집어 들었다. 그는 유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방을 나갔다.


이번에도 방문이 닫히기 전, 아만 루하르가 거구를 들이밀었다.


“전하는 무슨 볼일로 오신…….”


“같이 목욕이나 하러 가지.”


“예?”


“싫은가?”


“예…….”


유진이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자, 아만의 넓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열렸던 방문이 닫혔다.


빌어먹을 환생 511화


전쟁이 끝나고 300년.


마경 헬무드가 ‘제국’이 된 후로, 이만큼이나 검에 몰두한 적이 있던가.


‘없다.’


어쩔 수 없는 변명이란 것을 하자면, 몰두할 시간이 없었다. 그만큼 제국의 여명기는 혼잡했다.


가비드가 대공의 업무에 몰두하는 동안.


다른 2명의 공작은 각자의 방법으로 힘을 키우는 것에 몰두했다.


흑룡공 라이자키아는 자신의 헤츨링부터 시작해 출산을 반복시켜, 드래곤을 양산하려고 했다. 낳고, 잡아먹고, 낳고를 반복하겠다는 광기 가득한 계획. 만약 성공했다면 라이자키아는 마룡이 아닌 끔찍한 괴물이 되었겠지만, 그만큼의 힘은 손에 넣었을 것이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는, 수많은 몽마들을 통해 대륙 전역에서 정기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영지를 철저하게 개발했다. 그 결과, 누아르는 마왕의 수준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괴물이 되었다.


가비드는 대공의 업무 외에 스스로의 단련에는 그리 몰두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가비드는 300년 전보다 더 강해졌다. 다른 공작들보다 몰두하지 않았음에도, 제국이 강성해질수록 가비드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유폐의 마왕의 마력이 강해져서? 아니. 유폐의 마왕은 300년 전부터 강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비드는…… 자신의 힘이 강해진 것이, ‘헬무드의 대공’이란 지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누아르 제벨라가 2개의 영지를 사용해 큰 힘을 얻었듯, 가비드는 제국의 대공으로 힘을 얻은 것이다.


‘부족하다.’


만족스럽지는 않다. 가비드가 추구하던 힘은 이런 종류의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마력? 마왕의 권능을 사용하게 해주는 위신의 마안? 그런 종류의 힘보다는-


“검을.”


린드먼 대공가.


이 넓은 저택에는 지금 가비드 혼자뿐이다. 본래도 거의 드나들지 않던 저택. 그나마 관리를 위해 시종은 많이 두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내보냈다. 시종뿐만이 아니다. 저택을 채우고 있던 가구들도 모조리 없애버렸다.


이 넓고 텅 비게 된 저택에 새로 채운 것은, 가비드 린드먼이라는 마족과- 글로리가 아닌 몇 자루의 검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이 건넸던 사슬 하나.


가비드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사슬을 앞으로 들었다.


유폐의 마왕에게서 직접 받은 사슬 뭉치.


사슬이란 유폐의 마왕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 유페의 마왕의 ‘힘’을 실현하는 것.


오랫동안 유폐의 마왕을 섬겨왔다.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는 이상, 알려 들지 않아도 유폐의 권능은 알 수밖에 없다.


사슬은 묶는 것. 통제하는 것. 가두는 것. 유폐의 권능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사슬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무언가를 유폐하고 있다.


처음 사슬을 받았을 때.


당연하게도 가비드는 사슬의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가비드는 여태까지 유폐의 마왕에게 받은 것이 많았다.


유폐의 칼이라는 이름.


위신의 마안.


마검 글로리.


헬무드의 대공.


모두가 유폐의 마왕이 준 것이다. 하지만 저런 것들은 모두가 직관적이었다. 받은 즉시,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받은 사슬은 달랐다.


저택에 돌아오고 꼬박 하루 동안 사슬의 용도를 고민했다. 마력을 불어넣어 보기도 했고, 위신의 마안으로 이해하려고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런 저런 방법을 써보았음에도 사슬의 용도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조율이 필요하겠군.


그 말을 다시 떠올렸다.


오랜만의 결투. 유폐의 칼과, 헬무드의 대공이란 지위는 내려놓았다. 한 명의 마족이 되어 결투하고 싶다.


-도움을 주도록 하지.


가비드의 모든 열망을 듣고 나서,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저리 말했다. 가비드가 그렇게까지 갈망했던 것은-


300년 전의 하멜에게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물러섰기 때문이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비드는 자기 자신이 죽을 때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가비드를 구속하고 있다. 열망은 과거의 실패에 대한 미련에서 태어났고,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면에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기에 끊어내야 한다. 가비드를 이끈 것이 300년 전의 하멜에 대한 미련이라면, 그것을 끊고서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지금 시대에 있는 것은 ‘몰살의 하멜’이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싸우고 싶다. 전쟁이 아닌 결투를 하고 싶다.


가비드는 묵묵히 검을 들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사슬 뭉치. 당장 수행에 몰두해도 원하는 만큼의 조율을 끝낼 수 있을까 의문인데, 이 사슬을 이해하느라 꼬박 하루를 허비했다.


그래서 베었다.


용도는 모른다. 이렇게 다루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내 용도를 이해할 수 없다면, 아예 베어서 없애 버려 눈앞에서 치워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유폐의 마왕은 사슬 뭉치에 대해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가비드도 사슬 뭉치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마왕이 직접 준 것이기에, 감사를 전하며 받았을 뿐이다. 이전의 가비드라면, 용도를 알 수 없어도, 이해할 시간이 부족해도.


절대로 유폐의 마왕의 하사품에 검을 휘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가비드는 검을 들어 사슬 뭉치를 겨누며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물건을 설명 없이 하사하다니. 가비드는 큭큭 웃으며 천천히 검을 위로 들었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유폐의 마왕이 바라던 것이리라. 가비드가 과거에서 이어진 망집을 끊어내는 것. 유폐의 칼도, 헬무드의 대공도 아닌, 한 명의 마족으로 몰두하는 것. 그것이 단순히 말뿐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것.


가비드는 주군이 짓궂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커다란 감사를 느끼며 검을 내리찍었다.


ㅡ쩌어엉!


칼날과 사슬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텅 빈 저택의 내부에 불꽃이 흩어졌다. 어느 순간 금색의 불씨가 시커멓게 바뀌고, 순식간에 저택 내부가 불꽃의 색에 뒤덮였다.


가비드는 한 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비드는 린드먼 저택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평야. 배경의 소품처럼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


가비드는 당황하지 않고 황야를 걸었다. 처음 사슬에 검을 내리치고, 이 알 수 없는 세계로 인도되었을 때. 그때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이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했었다. 글로리를 휘두르기도 했고,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둘을 함께 사용해도 황야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탈출 시도가 실패한 뒤에는, 이 공간을 이해하는 것을 시도했다. 주변의 시체를 살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들. 모두가 ‘진짜’처럼 느껴졌다. 냄새도, 맛도, 모두가 진짜 시체와 똑같았다.


시체를 충분히 살핀 뒤에, 본격적인 탐색을 위해서 움직였다. 일단 이 황야의 끝이랄 것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알 수 없는 공간에 던져져 버렸다. 긴장과 경계는 부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맞닥트리기 전에 먼저 눈치챘다. 저 앞에 누군가가 있다. 그것은 주변의 시체들과는 달리 확실하게 살아있다.


그렇게 인지한 순간. 그것이 움직였다. 사라졌다, 라고 느낀 순간. 그것은 이미 가비드의 코앞까지 와있었다.


공격당했다. 투박하고 커다란 검이 가비드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지만 대응이 늦지는 않았다. 몇 번 합을 나누고, 상대의 실력에 감탄한 직후.


죽었다.


마치 직전까지 합을 나누던 것이 장난이었던 것처럼, 그 순간의 ‘검’은 격이 달랐다. 흉포하기 짝이 없는 칼 놀림은 가비드의 방어를 난도질하고서 끝내 목을 물어뜯었다.


이렇게 갑자기 죽는다고? 그런 의문과 허무함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놈의 검은 대단해서, ‘이 정도면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경외마저 느낄 정도였다.


죽은 뒤에.


눈을 떴을 때, 저택에 있었다. 온몸이 난도질이 되고 목이 베이는 순간의 기억과 감각은 이토록 또렷한데, 가비드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사슬 뭉치를 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의 현상이 사슬에 의한 것이란 정도는 알았다. ‘어떻게’라는 것은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가비드에게 필요한 것은 대결에 앞선 조율이다. 300년 동안 전투에서는 한발 물 서 있었고, 순수하게 수행에 몰두할 시간이 없었다.


이런 상태로 유진과 결투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유진의 실력은 지금 이 순간이 전성기이며, 하락할 일 없이 앞으로도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는 이미 300년 전 하멜의 경지를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그 절망의 베르무트조차도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와 결투한다면 필패일 것이다.


가비드 린드먼은 강하다. 지금의 유진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가비드는 자신의 패배는 생각하지 않았다.


승리할지라도,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다. 아니. 틀림없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조율이 필요하다. 검을 내려놓고 보낸 300년이 허무하지 않도록. 결투에서 상대를 모독하지 않도록. 승리해 만족할 수 있도록.


“감사합니다.”


황야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사슬을 ‘처음’으로 사용하고서 9일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가비드가 체감하는 시간은 9일보다 훨씬 길었다.


이 ‘황야’의 시간 흐름은 현실과 어긋나 있다. 이곳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머물러도, 현실로 나가면 고작 몇 분 정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이만큼의 괴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몰두하다가는 정신이 부서질 것이다. 마족일지라도 무리해서 반복하다가는 똑같이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가비드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부서질 만큼 몰두하기를 바랐다.


몇 가지 이해한 것들이 있다.


이 황야는, 가비드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의 권능으로, 그 언제일지 모르는 머나먼 과거의 기억을 통째로 유폐했다. 즉, 이 기억은- 먼 과거에 실존했던 누군가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황야에 나타난 남자는…….


인간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렇게밖에 느낄 수가 없었다. 인간이 이만큼 강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마치 싸움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강하고 난폭했다. 맞닥트려 전투에 돌입할 때마다 그러한 생각이 강해졌다.


철저하게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 수천수만의 전투를 통해 완성시킨 검.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는 전장이 아니고서는 단련할 수가 없는 검.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비드가 기억하는 역사에서 이만큼이나 강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인가? 정말 인간이기는 한 것인가? 이름은 무엇이고, 대체 어느 시대에 존재한 것인가?


처음에는 그런 의문을 가졌지만, 몇 번 죽고 나니 의문이 말끔히 사라졌다. 상대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죽지 않는 것.’


설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먼 곳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닥에 꽂아 둔 대검을 뽑아 어깨에 걸치더니,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가비드에게 다가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지만, 언제나 똑같이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때에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기습을 시도했고, 어느 때에는 가비드가 먼저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작은 매번 달라도, 마지막은 똑같았다. 가비드는 아직까지 저 남자에게 제대로 된 부상을 입혀본 적이 없었다.


일방적인 패배가 지긋지긋해서,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를 전력으로 써본 적도 있다.


오히려 그때가 가장 끔찍했다. 가비드가 위신의 마안을 쓴 순간, 남자의 ‘힘’이 달라졌다. 글로리를 휘둘렀을 때. 남자의 힘은 그 자체가 검이 되어, 글로리를 정면에서 밀어냈다. 위신의 권능으로 남자의 힘을 억누르려 했지만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일방적으로 유린당했다. 힘의 출력 자체가 다르다고 느꼈다. 결국 가비드는 끔찍한 무력감을 느끼며 패배했다.


“네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남자와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저 남자는 기합 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저 남자와 가비드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은 오직 전투뿐이다.


“하멜과 무언가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하겠지.”


가비드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글로리를 꺼냈다.


남자가 사용하는 알 수 없는 힘.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저 힘은- 유진이 망령에게 사용했던 ‘검’과 비슷하다.


“하멜의 선조인가? 아니면…….”


글로리를 들어 남자를 겨누었다. 남자는 여전히 건들거리며 가비드에게 다가오고 있다.


“하멜의 전생인가?”


본래라면 이런 의혹은 품지 않을 것이다. 가비드는 세상에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것이 존재할 것이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당장 유진 라이언하트가 300년 전의 환생이라면, 어쩌면…… 그 하멜조차 누군가의 환생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남자의 어깨에 걸친 대검이 움직였다. 건들거리는 걸음이 살짝 바뀌었다. 시큰둥하던 표정에서 눈빛이 번득였다. 가비드의 위신의 마안도 불길한 빛을 토했다.


아가로트의 검이 가비드를 덮쳤다.


빌어먹을 환생 512화


전후의 수습은 여러 가지가 남았지만, 유진은 그런 문제까지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이런 종류의 일들은 익숙하지도 않았으니, 남들보고 알아서 하라 하고 아예 뒤로 빠지기로 했다.


라이언하트로 돌아가는 날.


유진은 백 대는 훌쩍 넘는 짐마차의 앞에 섰다. 나하마 에미르들이 앞다투어 보낸 공물들이다. 저 그득한 공물 중에는, 과거 유진이 알차게 등쳐먹었던 카지탄 에미르, 타이리 알 마다니의 공물도 있었다.


정작 본인은 별생각이 없다만, 유진이 이번 전쟁의 주역이자 영웅인 것은 세상 모두가 안다. 하멜의 환생이란 것이 없어도 유진은 이미 시대의 영웅이자 용사다.


졸지에 수도가 증발하고 술탄은 죽었다. 후계자는 어찌 목숨을 부지 했다만, 세력이랄 것도 없고 지지기반조차 빈약한 후계자가 엉망이 되어버린 나하마를 수습하기는 힘들기에, 타국의 원조와 에미르의 협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에미르들이 후계자를 제치고 나하마에 새로운 술탄이 되는 것도 방법 중 하나겠지만- 애석하게도 에미르들 중에는 그만큼 야심이 큰 인물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술탄의 아들은 키옐에 망명했고, 키옐은 앞으로 후계자를 지원하기로 약조했다.


그리고 키옐에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다. 결국 이 짐마차는, 앞으로 잘 좀 봐주십사 하는 의미로 보낸 공물이다. 키옐 황제에게 보낸 공물보다 유진과 라이언하트에게 보내는 공물이 몇 배는 더 많을 정도였다.


“이건 어떡해?”


유진은 마차의 구석을 가리키며 눈을 찡그렸다. 그곳에는 마차의 짐칸에도 실리지 못한, 거적때기로 대충 몸만 가려놓은 아멜리아 머윈이 서 있었다.


일단 살아는 있다. 숨은 쉬고 심장은 뛰고 있으니, 살아만 있는 것이다. 지금 아멜리아의 정신은 연속된 죽음의 굴레에 갇혀 있다. 살아 있되 산 것이 아닌 것. 세냐가 아멜리아에게 내린 형벌이다.


“일단은 데려가야 돼. 나중에는…… 어디 사막 던전에 봉인이라도 해놓을까?”


“그러다가 나중에 봉인이 풀리면 어떡합니까?”


“내가 직접 한 봉인이 풀릴 리가 없잖아!”


세냐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세냐와 달리, 아니스는 영 미덥지 못하단 듯이 세냐를 힐긋 보았다.


“저는 말입니다, 절대로 풀리지 않는 봉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참 걱정도 많으셔. 그럼 어떡할까? 그냥 깔끔하게 죽여?”


“죗값을 충분히 치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죽이는 것은 오히려 저 못된 것을 위한 일일 겁니다.”


아니스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번에도 나누었던 이야기지만, 아니스는 아멜리아에게 간단하고 빠른 죽음은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하멜의 무덤을 도굴하고, 시체를 모욕한 죄는 살아서 억만 번을 죽고 죽어서도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중죄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뭐, 본가에 처박아놓을까.”


“저 흉흉한 것을 왜 본가에 둡니까?”


“마구간이나…… 아니면 전용 감옥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어서, 니나한테 가끔 밥이나 챙겨주라고 하면 되잖아. 음, 아니야, 지금 니나가 저거 밥이나 챙겨줄 짬밥은 아니지…….”


10년 전 갓 견습 시종에서 벗어났던 니나는, 지금은 저택을 총괄하는 시종장이 되었다. 유진은 잠시 아멜리아를 어떻게 처분할지를 고민했다.


“아크리온에 기증할까.”


“예?”


아니스는 유진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냐는 즉시 이해하고서 눈을 빛냈다.


“좋은 생각이야. 아크리온에는 흑마법에 관련된 서적이 여러 가지로 빈약하단 말이지.”


“그거 다 너 때문이라던데? 네가 아크리온에 흑마법서를 절대로 반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며?”


“그건…… 그건, 으흠, 당시의 시대상과…… 내가…… 생각이 좀 닫혀 있었기 때문이지.”


세냐는 헛기침을 섞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여전히 세냐는 흑마법사가 싫고, 흑마법을 혐오한다. 하지만 혐오는 혐오고, 흑마법이란 것에도 제법 깊이와 이치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당장 세냐는 오늘 아침만 해도 블러드 메리를 붙들고서 고대의 흑마법을 이해하는 것에 몰두했다.


“이걸 아크리온에 기증해서 흑마법의 교본으로 쓰면 꽤 괜찮을 것 같아.”


“인도적으로 괜찮은 겁니까?”


“이 망할 것이 죽인 사람이 몇 명이고 해온 짓이 있는데, 이것에 도리는 왜 따지는 거야? 개 같은 짓을 했으면 똑같이 개 같은 짓을 당해야 해.”


세냐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까딱 흔들었다. 그러자 축 늘어져 있던 아멜리아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진은 꼭두각시처럼 축 늘어진 아멜리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저것도 대수림에 데려가겠다고?”


“가는 길에도 연구는 해야 하니까.”


아멜리아를 당장 죽일 수 없는 것에는 죗값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세냐가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흑마법을 직접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냐는 마력(魔力)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리 마나의 형질을 바꾸어도, 마나를 마력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흑마법은 마력이 아니고서는 사용할 수 없다. 애당초 세냐 본인이 흑마법을 ‘직접’ 사용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블러드 메리를 통해 알게 된 고대의 흑마법에는 흥미가 있다.


이론을 확실하게 이해하려면 역시 검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냐는 아무리 용을 써도 흑마법을 쓸 수 없다.


그래서 편법을 사용했다. 지금의 아멜리아는, 세냐에게 있어서 살아 있는 마력 배터리나 흑마법 사용장치와 다름없었다. 혹은 흑마법 전용 사역마…….


“저런 것을 사역마라고 하는 것은 저에 대한 모독이에요, 유진 님.”


유진의 생각을 읽은 메르가 망토 밖을 고개를 쏙 내밀었다. 메르는 사나운 시선을 쏘아대며 유진의 옆구리를 매콤하게 쥐어박았다.


“저것에는 제대로 된 자의식도 자유도 없잖아요.”


“그…… 사역마는 보통 그렇지 않나? 네가 특별한 거고.”


“특별…… 특별, 네, 맞아요. 저는 특별한 존재죠. 유진 님에게도, 세냐 님에게도!”


방금 전까지 눈을 치켜뜬 주제에, 메르는 ‘특별하다’라는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헤헤 웃었다. 그녀는 더 이상 유진의 옆구리를 쥐어박지 않고, 양팔을 써서 허리에 매달렸다.


“마치 고목에 매달린 매미 같으니라.”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해요, 멍청이.”


라이미르아가 웅얼거렸고, 메르가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물론 라이미르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유진은 졸지에 허리에 두 명의 꼬마를 매달게 되었다.


“헤모리아. 걔도 살아 있다며?”


“네. 하멜, 당신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걔를 좋아하지 않던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엄청 싫어하는 것은 아니야. 따지고 보면 걔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잘못을 한 건 아니잖아? 응? 그냥 좀 띠껍게 군 거지.”


“팔다리를 죄다 잘라놓고 그렇게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니스가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유진은 적잖은 억울함을 느끼며 항변에 나섰다.


“야, 내가 자르고 싶어서 잘랐…….”


다시 생각해 보니 자르고 싶어서 자른 것은 맞았다. 그래서 유진은 한 번 말을 멈췄다.


“자른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정당방위였다니까? 빛의 샘, 어? 그 새끼들이 거기서 개짓거리했잖아. 그거 보면 화가 나, 안 나? 나야지! 화가 나는 게 당연한 거야. 일단 나는 화가 났고, 빛의 샘 걔도 아마 화가 났을 거야.”


“누가 뭐랍니까?”


“지금 뭐라고 하잖아, 네가! 아무튼, 그때 나는 정당방위였어. 그리고 내가 대뜸 쳐들어가서 지랄한 것도 아니잖아!”


“대뜸 쳐들어간 것은 맞잖아요, 유진 님. 제가 그때 유진 님이랑 같이 워프게이트 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허리에 매달린 메르가 투덜거렸다. 반대쪽에 매달린 라이미르아는 지금의 대화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빛의 샘에 대한 이야기는 메르에게도 몇 번 들었다. 하지만 정확하고 자세하게 들은 적은 없었다. 더 이야기해달라고 조를 때마다, 메르는 ‘끔찍해서 떠올리기도 싫다’라고 거절했었다.


그렇다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라이미르아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공유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서운했다.


유진은 허리에 매달린 라이미르아가 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일부러랄 것도 없었다. 유진의 손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라이미르아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아니 뭐, 그래, 내가 대뜸 쳐들어간 것은 맞지. 근데 내가 걔들 대뜸 공격했냐? 내가 헤모리아 팔다리를 그냥 잘랐어? 아니잖아! 나는, 나는 경고했어. 안 비키면 뒤진다고. 그런데 걔들이 안 비켰잖아, 어? 그럼 뒤져야지. 안 그래?”


라이미르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뿔을 만지작거리면서 항변했다. 성녀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면서도 해야 할 말은 참지 않았다.


“하멜, 다 좋은데 그…… 저렴한 어휘는 어떻게 안 되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라고 부르며 찬송하는데, 그런 당신이 뒤진다니 뭐니 하는 것은 너무…….”


“얼씨구.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못 참겠다. 아주 성녀 나셨어. 어?”


“그럼 제가 성녀지 뭡니까?”


“그 성녀께서 틈만 나면 욕에, 술 퍼마시고, 언짢다 싶으면 폭력을…… 또, 또, 또 봐봐. 나 때리려고 하잖아.”


“맞을 소리를 하면 맞아야 하는 겁니다.”


유진은 더 이상 아니스를 자극하지 않고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도망치는 와중에도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불편하지 않도록 몸을 받쳐 들었다.


“그런데 헤모리아 걔 반쯤 뱀파이어 됐잖아. 아니…… 아니지, 그걸 뱀파이어라고 해야 하나?”


“근본부터가 이것저것이 섞인 키메라였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뱀파이어는 아닙니다. 생존에 무조건 피를 마실 필요도 없고, 태양 아래에서도 활동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인간이 아닌데, 풀어놔도 되나 몰라.”


“라파엘로 경이 책임지고 감시하겠다고 했으니 내버려 둬도 될 겁니다. 자랑이랄 것도 못 되지만, 유라스의 배교자 감시 체계는 철저하고 지독하니까요. 화형당하거나 고문당해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헤모리아는 뱀파이어다운 악행은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


“예. 그녀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지까지는 제 알 바가 아니지만…… 글쎄요. 한가한 시골 마을에서 농사나 짓거나…… 아니면 도시의 빵집에서 빵이나 굽거나…….”


사실 마족이 성직자가 되는 것이 경우가 없지는 않다. 당장 크리스티나가 과거 보좌주교를 지냈던 알카르트 교구의 교구장, 에일린 플로르 수녀만 해도 하프 뱀파이어다.


하지만 헤모리아는 신관으로 돌아올 수 없다. 아무리 라파엘로가 헤모리아의 이단심문관일 때의 실적을 감안해서 목숨을 살렸을지라도, 빛을 등진 것과 다름없는 행적을 보인 헤모리아가 다시 성직에 서는 것을 용서할 리가 없다. 애당초 라파엘로가 헤모리아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죽음 이상의 형벌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빵…… 빵이라…….”


유진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금속 마스크를 쓰고, 까득까득 이를 갈아대는 헤모리아가 반죽을 하고 빵을 굽는 모습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뭐…… 위생문제는 별로 없겠네…… 반죽하다가 침은 안 흘릴 것 아냐.”


“침이라니……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그런 지저분한 이야기는 자제하도록.”


세냐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놀려댔다. 그 말에 유진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놈의 찬란…….”


끝까지 말은 하지 못했다. 유진은 무언가 퍼뜩 떠올라서 헉하고 숨을 삼켰다. 허리에 매달린 두 꼬마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뒤, 유진은 후다닥 다른 곳으로 뛰었다.


“카르멘 님.”


짐마차들의 뒤쪽. 길레이드와 함께 공물을 확인하던 카르멘이 보였다.


“음.”


카르멘은 유진을 보자마자 표정을 가다듬고서 가슴과 어깨를 활짝 폈다. 그녀는 왼쪽 가슴에 새겨진 사자 문양을 과시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찬란한 사자여.”


“…….”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물 수밖에 없었다.


저 빌어먹을 ‘찬란한’이라는 별명의 창시자가 바로 카르멘 라이언하트다. 나하마의 태양이 너무 뜨겁게 작렬하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방금 그녀가 내뱉은 ‘찬란한’이란 단어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카르멘의 제복에 새겨진 사자 문양이 조금 더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잠깐.”


기분 탓이 아니었다. 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카르멘의 사자 문양을 노려보았다.


노골적이지 않게, 아주 섬세하게…… 자수가 더해져 있었다. 그 자수가 주변의 빛을 받아, 사자 문양에 찬란한 반짝임을 낳고 있다…….


“이거 뭡니까? 왜 카르멘 님 제복만 이 모양이에요?”


“역시 알아보는군.”


카르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의 문양을 가리켰다.


“내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곧 라이언하트 전원에게 보급할 제복이다.”


“전원에게? 그, 본가가 아니라 방계 전부한테?”


“물론이다.”


“아니, 잠깐만요. 라이언하트 사자 문양 이거, 제복에 새길 수 있는 것은 본가뿐이잖아요.”


“본가에는 보다 찬란한 반짝임을 넣을 것이다.”


유진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저 말은 그러니까, 조금 반짝이는 문양의 제복은 방계 전원에게 입히고…… 본가는 더 찬란하게 반짝이는 제복을 따로 입겠다는 것인가? 유진은 어깨를 덜덜 떨며 길레이드를 쳐다보았다.


“멋진 일이구나.”


믿었던 길레이드마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가문밖에 모르는 참된 가주는, 새로운 제복이 라이언하트를 더욱 영광스럽게 만들고 모든 라이언하트에게 새로운 자부심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길레이드까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에 유진은 무어라 날뛸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반짝이는 제복을 모조리 한 곳에 모아다가 불살라 버리고 싶었지만…… 결국 유진은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카르멘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것인가? 찬란한 사자여.”


“그…… 그 찬란한, 이라는 말은 언제까지 할 겁니까.”


“우둔한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건 그런데…….”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 모두가 너를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라 칭송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고도로 엿을 먹이는 것이라고. 아주, 아주 심술궂고 고약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카르멘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는 것은, 추궁할 필요도 없이 잘 알 수 있었다. 카르멘은 정말로 유진이 자랑스러워서. 유진이 칭송을 받기를 바라서. 그리고 자신의 작명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저러는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유진은 뿌득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런데…… 카르멘 님, 가주님. 설마 본가에서…… 제…… 개선식이나…… 환영식…… 뭐 그런 종류의 연회가 준비되고 있습니까……?”


키옐의 황제에게서도 연락이 왔었다. ‘키옐’의 위대한 영웅, 유진 라이언하트의 성대한 개선식을 열겠노라고. 신성제국 유라스의 교황까지 참석하여 축복을 내리고, 수도의 성문에서부터 시민들을 불러모아서…….


당연히 거절했다. 곱게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만약 그런 헛짓거리를 벌인다면 그대로 황궁에 쳐들어가 멱살을 잡아버리겠다 윽박을 질렀다. 시무인에서 개선식을 할 때도 민망해서 죽고 싶었는데, 그것보다 몇 배는 더 화려하게 개선식을 하겠다니. 유진은 더 이상 수치를 느끼고 싶지 않았다.


“…….”


길레이드와 카르멘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곧, 길레이드가 낮은 헛기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가문의 식구들만 모아서 조촐하게…….”


“방계도요?”


“방계도 똑같은 라이언하트지 않느냐.”


유진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번에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들고서 본가에 돌아왔을 때의, 방계 수십 명이 모였던 연회가 떠올랐다.


“싫습니다.”


“허어…… 그래도 큰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인데…… 연회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진짜, 진짜 싫습니다. 정 연회를 하셔야겠다면 저는 빼고 하십시오.”


“정말 싫은 것이냐?”


“예. 진짜로요.”


유진이 정색하고 대답하자 카르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미 플래티넘 라이온도 꺼내 놓았는데…….”


“아니……! 그게 아직도 멀쩡히 남아 있었습니까? 내가 아예 분해해 버리라고 말했는데……!”


“그 귀하고 의미 있는 것을 아깝게 왜 부수나? 본가 보물고에 멀쩡히 가져다 놓았지.”


“예, 제가 이번에 그냥 부숴 버리겠습니다.”


“절대, 절대 안 된다. 그것은 찬란한 라이언하트의 상징으로 후대에 물려줄 것이다.”


그렇게 대답한 것은 카르멘이 아닌 길레이드였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완고하게 굴며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예. 알겠으니, 연회는 하지 맙시다. 그건 진짜 싫습니다. 또 그 빌어먹을 플래티넘 라이온은 다시 집어넣으세요. 그거 꺼내면 저 진짜 난리 납니다.”


“가족끼리 조촐히 식사하는 것도 싫은가?”


“본가 사람들만 먹는 자리라면 참석하겠습니다.”


유진은 태도를 굽힐 생각이 없었다. 길레이드와 카르멘은 굉장히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결국은 유진의 뜻을 존중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본가에는 잠깐 얼굴만 비치고 다시 떠날 겁니다.”


“또 무슨 모험을 하러 떠나는 것이지?”


방금까지 시무룩했던 카르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대수림의 세계수를 잠깐 보고 올 생각입니다.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세계수!”


카르멘이 환한 얼굴로 외쳤다. 유진은 더 이상 카르멘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뒤로 물러섰다.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그렇게 물러서자마자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구석에서 용용이의 고삐를 끌고 있던 시엘이 유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찬란한!”


시엘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선창하자, 뒤를 따라오던 디자이라가 즉시 호응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다른 흑사자들도 함께 외쳤다. 시엘은 놀릴 의도로 외친 것이지만, 흑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눈동자는 유진에 대한 찬미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유진은 마음처럼 욕설을 쏟아내지 못했다.


빌어먹을 환생 513화


우화


유진이 사마르 대수림에 오는 것도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처음 사마르 대수림에 왔을 때. 유진과 동행한 것은 크리스티나뿐이었다. 그때의 크리스티나와 유진의 사이는 빈말로라도 ‘친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만남. 빛의 계시를 운운하는 광신도적인 면모. 반면에 유진은 빛에 대한 신앙이란 쥐뿔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뜸 성검의 인정을 받아버린 것에 대해서도 영 꺼림칙한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삐걱거리는 점이 많았다.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수상쩍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티나도 유진의 용사답지도, 명문가 자제답지도 않은 행동거지를 언짢게 생각했다.


그래도 둘은 끝까지 대수림을 횡단했다. 서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도 않았지만, 은근히 순탄치 않았던 여정은- 결국 둘의 사이를 조금은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풋풋한 시절이었죠.]


아니스는 흐뭇한 기분을 느끼며 속삭였다.


그때의 아니스는 크리스타에게서 구분되지도 않았다. 그녀는 크리스티나의 혼에 뒤섞여 있었고,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는 천사로서 깨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럴지라도 하멜과의 여행은 즐거웠다.


[크리스티나. 당신은 그 당시만 하여도 하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마음 한편으로 하멜을 시기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때는 제가 몹시 미숙하였지요. 그렇다 보니 사고가 몹시 편협하여, 유진 님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 시절은 크리스티나에게 있어서는 부끄럽고도 아쉬운 흑역사다. 그때는 정말로 순수하게, 널따란 밀림에서 유진과 동행인 것은 크리스티나 혼자뿐이었다.


그 시절 유진의 망토에는 메르도, 라이미르아도 없었다. 또한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도 아니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었다…….


[크리스티나……! 제 존재가 방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맙소사, 시스터, 그럴 리가요! 제가 시스터의 존재를 방해라고 생각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만약 언젠가, 정확히 언제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입맞춤 이상의 망측한 체험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 순간에, 대체 누가 먼저여야 하는가? 몸뚱이는 하나고 정신은 둘이라는, 유례가 적고 난감한 사태를 어찌 타개해야 하는가?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일진대…….]


‘하지만 시스터, 제가 이런 말씀까지는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 몸뚱이의 주인은 결국 제가 아닙니까?’


[맙소사……! 크리스티나, 설마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호랑이를 키웠군요.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기만 한 어린 양이라 생각했는데, 당신은 어느 순간부터 호랑이가…… 아니, 음험한 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예,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죽었으면 얌전히 성불이나 할 것이지, 주제넘게 이승에 남아 있는 제가 잘못인 겁니다!]


아니스는 저 긴말을 더듬거리지도, 쉬지도 않고 한 호흡으로 쏟아냈다.


‘시스터, 제가 고심해 보았습니다만, 그…… 언젠가 그날이 왔을 때. 누가 육체의 주도권을 잡게 될지는 따로 정할지언정, 맺음의 순간에는 온전히 혼자여야 하지 않을까…….’


[크리스티나,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으흠…… 방법을 찾는 것에는 많은 고심이 필요하겠지만, 아마 세냐 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일시적으로 한쪽의 의식을 잠들게 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처음 대수림에 왔을 때가 아쉽고 후회스러웠다.


그때, 그때…… 쓸데없는 생각과 의심 따위를 갖지 않았다면. 유진을 똑바로 보고 다가갔다면.


[그것이야말로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크리스티나. 당신이 하멜을 마음에 두기 시작한 것은, 빛의 샘에서 하멜이 당신을 구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이후 제 탄신제에서 하멜에게 달콤한 속삭임을 들었기 때문에! 그 순간의 폭죽, 시선, 그런 것들이 있었기에 당신이 하멜을 연모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적극적이지 않던 크리스티나가 설마 저런 발칙한 생각을 가지게 될 줄이야. 이제는 놀람을 넘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스가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는 거지, 그렇지?”


지면에서 살짝 발을 띄워 날고 있던 세냐가 홱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말이라니……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이상한 말은 제가 아니라 크리스티나, 당신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스터는 평소와 똑같으십니다.”


크리스티나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아니스에게 있어서 저 말은 굉장히 비겁하고 중의적으로 들렸다. 평소와 똑같다니? 그런 대답은 세냐의 질문에 확실한 답변이 되지 못한다.


“또 또 음습한 욕망을 떠들고 있는 모양이로군.”


세냐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투덜거렸고, 크리스티는 대답 대신에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무서운 아이…….]


머릿속에서 아니스의 탄식이 들려왔지만, 그것도 무시했다. 크리스티나는 앞서 걷는 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 님과 이 숲에 오는 것도 벌써 세 번째로군요.”


“그렇네.”


유진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아니었다. 그녀는 유진의 거의 모든 여정에 함께 했다는 것에 뿌듯하고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처음 왔을 때는 날 찾으러 왔던 거였잖아. 두 번째는 날 구하러 온 거였고.”


세냐가 냉큼 입을 열었다.


“그렇지.”


이번에도 유진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이유가 어쩌고 횟수가 어쨌건 이미 모두 지난 일. 지금 유진에게 굉장히 신경 쓰이는 것은…….


“숲이 무척이나 아름답군.”


선두에서 성큼성큼 나아가는 카르멘 라이언하트의 존재였다. 그녀는 밀림을 탐험하는 것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흑사자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시선을 보낼 때마다 왼쪽 가슴에서는 가문의 문양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느낌의 숲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법을 피해 도망친 무법자들이 득실거리고, 야만스러운 식인종과 몬스터들이 도사린 험지가 바로 사마르 대수림이었지.”


카르멘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숲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옛날 일이 떠오르는구나. 내가 아직 흑사자가 되기 전. 기사로서, 무인으로서의 수행을 위해 대륙을 떠돌았을 때. 나는 아무런 장비와 준비를 갖추지 않고 홀로 이 숲에 왔던 적이 있다.”


이번에 대수림에 온 이유는, 엘프의 영지에 방문하기 위해서다.


세냐에게 마법을 가르친 엘프의 장로들. 수백 년이 넘는 긴 시간을 산 엘프들에게, 블러드 메리에 남아 있는 고대의 흑마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다.


그 외에 다른 목적도 있다. 유진은 세계수를 본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처음 세계수에 도착했을 때에, 그 거대한 나무는 라이자키아의 독기에 병들어 있었다. 세냐의 죽음을 멈추고, 수많은 엘프들을 연명시키는 것에 몰두해 메말라 있었다.


그런 상태임에도 세계수는 몇 번이나 ‘기적’을 일으켰다. 유진에게 깃들어 번개불꽃이 된 세계수의 정령, 그 또한 기적이라 할 만한 것이다. 라이자키아와의 전투에서 세냐가 나타나고, 죽기 직전이던 유진의 몸이 회복되었던 것도 세계수의 기적이었다.


과거 템페스트에게, 그리고 이바타에게 들었던 세계수와 관련된 신앙도 신경 쓰인다. 대수림에는 죽음과 윤회에 대한 믿음이 있다. 모든 존재는 죽어서 세계수로 인도된다. 세계수는 인도받은 영혼을 순환시키고 다시 세상에 퍼트린다…….


그러한 이야기에 나름의 근거가 있다면, 확실하게 봐둘 필요는 있다. 과거의 유진은 세계수의 특별함 자체는 똑바로 느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무언가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진은 자신에게 깃든 신성을 의식하면서, 더욱 깊이 생각에 잠겼다.


‘세계수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난 몰라. 세냐도 모른다고 했고.’


엘프의 장로들은 알고 있을까? 만약 세계수가 고대부터 존재했다면, 정말로 혼의 윤회란 것과 관련이 있다면…….


‘유폐의 마왕은 거느린 모든 혼을 유폐시킨다고 했다. 유폐의 마왕에게 죽으면 환생이 불가능해. 그렇다면 세계수의 역할은 유폐의 마왕과 정반대…….’


확대해석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세계수가 유폐의 마왕에 대항하는 보루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혼을 유폐하고 관장하는 것은 유페의 마왕이 가진 권능. 정작 멸망의 마왕에게 죽은 혼들은 소멸하지도, 유폐되지도 않고 다음 시대로 넘어간다…….


그렇다는 것은, 멸망의 마왕 자체는 혼의 윤회 같은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 멸망의 마왕에게 죽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홀로 숲에 들어온 지 열흘째였던가. 당시의 나는 아주 젊어서,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치고 강했기 때문에 오만했고, 이 거대한 숲을 우습게 보았지. 끊이질 않는 습격, 야만스러운 식인종들의 웃음소리…… 놈들은 멀찍이서 나를 감시하며 틈을 보았지. 하지만 나는 카르멘 라이언하트. 결코 유린당하지 않았다. 놈들은 자신들이 사냥꾼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유진이 생각에 잠긴 중에도 카르멘은 계속해서 과거의 무용담을 떠들었다.


“아는가, 찬란한 유진. 사자는 백수의 왕이다. 이 세상 모든 맹수들의 왕. 즉,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사냥꾼이란 말이다. 반면에 그때 날 노리던 야만인들은 아주 잘 쳐줘 봐야 들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발톱과 송곳니를 숨기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을 때. 그날 밤, 숲은 숲이 아닌 도살장이 되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유진은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백수의 왕을 골라야 한다면 사자보다는 곰이 더 가깝지 않은가?


유진이 유년기를 보냈던 튜라스 변경 마을의 숲에서는 흉포한 곰이 곧잘 나타나곤 했다. 곰은 집요하고 영리하고 잔인하다. 숲에 사는 고블린이나 오크가 곰보다 많은 사람을 죽이지만, 그런 놈들조차도 곰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한 마리의 아름다운 사자 그 자체였다. 감히 라이언하트를 사냥감이라 생각했던 어리석은 짐승들을 굶주림 없이 사냥했다. 지독한 일을 하고 있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잔혹한 야생에서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


생각을…… 계속해서. 지금 시대에 존재하는 인연이 우연의 산물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만큼 우연이 겹친다면 이 자체가 안배된 운명일 것이다.


정황상 세냐와 모론의 현자와 거신의 환생.


왜…… 황혼의 마녀만이 마족, 누아르 제벨라가 된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저 둘은 확실하게 이번 시대에서 유진의 동료가 되었다. 베르무트가, 그렇게 만들었다.


아가로트의 대전사의 환생, 이바타 자하부. 이것조차도 베르무트의 안배란 생각은 안 든다. 운명의 소용돌이랄 것에 끌려왔나? 그렇다면 그 운명은 세계수가 관장한다는 윤회와 관련이 있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대전사의 환생은 결코 유진에게 해는 되지 않는다. 사마르 전역을 지배하는 이바타가 유진에게 무한한 호의를 가지고 있고, 만약 녀석을 대전사로 삼는다면, 그 거대한 조란 부족의 전원을 유진의 ‘신도’로 삼을 수 있다…….


“그 시절만 해도 이 숲은 참된 의미로 야생이라 할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빈말로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되었군.”


카르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숲을 둘러보았다. 숲 자체는 남아 있지만, 지금 카르멘이 걷는 곳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대수림을 통일한 조란은, 이전까지의 원시 부족의 형태를 버리고 제대로 된 국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합병된 여러 부족의 원로들은 이바타의 뜻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젊은 부족민들이 이바타를 지지하고 있다.


그렇게 숲은 천천히 바뀌고 있다. 빈말로라도 현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구조물들이 세워지고 숲의 정령들을 존중하는 선에서 개발과, 무법자들에 대한 추격과 처벌이 이뤄지고 있다.


“이쯤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진은 조심스레 카르멘에게 말을 걸었다. 대수림에 갓 설치되었다는 워프 게이트를 사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워프 게이트가 숲의 초입에만 있는 것이 문제였다.


조금만 더 걸으면, 아직 개발이 시작되지 않은 진짜 숲을 맞닥트릴 것이다. 그때가 되어버리면 카르멘과 헤어지기도 난감해진다.


“내가 말했을 텐데, 찬란한 유진.”


“…….”


“나는 이 여정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본래 카르멘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멜키스와 카르멘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것이다.


멜키스에게는 인품이랄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밑바닥의 밑바닥에 아슬아슬하게 고인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카르멘은 다르다. 그녀는 누구나 인정할 만큼 인품이 훌륭한 ‘진짜’ 기사다. 카르멘의 인품에 대해서는 유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카르멘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카르멘을 존경할 정도다.


카르멘은 상대를 존중하고, 헤아릴 줄 안다. 아무리 자신이 바랄지라도, 상대가 원치 않는다면 고집을 꺾고 물러설 줄 아는 참된 위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척이나 이례적으로, 카르멘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무조건 고집만 부리는 것이 아니기도 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카르멘이 이번 여정에 동참하겠다며 댔던 이유는 제법 타당한 것이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는 라이언하트에서 유진 다음가는 실력자다. 라이언하트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젊은 처녀의 몸을 유지하고 있지만, 현 가주 길레이드의 고모다. 흑사자 성의 원로들 중 누구보다도 배분이 높은 라이언하트의 최고 어른이다.


그만큼의 긴 시간을 순수하게 무에 쏟아부었다. 현재 카르멘의 백염식은 8성에 이르렀으며, 그 실력은 라이언하트를 넘어 대륙의 영웅 중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유진을 제외하고 일찍이 대륙 제일에 오르내리던 강자들. 알체스터, 오르투스, 아만.


카르멘은 저 셋과 동일선상에 있지는 않다. 저 셋부터가 카르멘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반걸음은 앞선 강자로 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강한 카르멘도, 가비드의 검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알체스터가 느꼈던 무인으로서의 굴욕과 무력감은 카르멘에게도 똑같이 작용된 것이다.


“나는 새로이 우화해야 한다.”


카르멘이 말했다.


“기존의 수행으로는 더 이상 나를 새롭게 만들 수 없다.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알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접해야 한다.”


“…….”


“나는 세계수를 본 적이 없다.”


“본가에서 보셨잖아요.”


“그건 진짜 세계수가 아니지. 그리고, 이번 여정이 단순히 세계수를 보고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찬란한 사자여, 그대가 굳이 이곳에 걸음을 향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 것일 터.”


정곡이다. 하지만 유진은 표정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카르멘은 말을 계속 이었다.


“나 역시 필연을 느낀다. 찬란한 사자여, 너와 함께하는 이번 여정은 나를 새로이 우화시킬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화라니…….”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것이다.”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이 숲에서, 세계수에서. 나는 나비가 된다.”


빌어먹을 환생 514화


세 번째 방문한 대수림. 엘프의 영지로 향하는 여정에 특별한 사건 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 거대한 숲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위험이라고 해 봐야, 지금의 유진을 위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전히 숲에는 몬스터들이 많았지만, 놈들은 마물과 달리 두려움에 대해서 알고 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포식자와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설령 영역이 침범당할지라도 즉시 포기하고 도망쳐 버린다.


예전처럼 원주민들을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숲의 모든 부족은 조란에게 정복당했다. 인신매매 등의 범죄, 심할 경우 식인까지 손을 대던 모든 야만부족은 조란에게 관습과 흉포성을 거세당했다.


그렇다 보니 여정은 평화롭고 한가로웠다. 여정 중에 그나마 돌발적인 사건이라고 할 것은, 조란의 대족장인 이바타가 대뜸 찾아왔던 것뿐이었다.


왜 미리 알리지도 않고 숲을 찾아온 것이냐며, 당장 국빈으로 조란에 초청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다음에.”


거절했다. 몇 년 전 방문했던 조란이 과연 얼마나 발전했을지는 조금 흥미가 동했지만, 굳이 일정을 추가할 만큼은 아니었다. 유진이 단적으로 거절하니 이바타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바타는, 대족장의 체면이랄 것보다 유진의 사정과 뜻을 우선시했다.


“숲의 가호가 있기를.”


말뿐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 숲에서 이바타의 말은 그것만으로도 언령과 같은 힘을 갖는다. 한마디 말은 그 자체로 유진과 일행에게 가호를 부여했고, 그로 인해 여정은 훨씬 더 평화로워졌다.


“나는 조란을 보고 싶었다.”


카르멘이 아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조란의 이바타와 전사들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카르멘도 익히 보아 알고 있다.


많은 전사들 중에서도 철저히 엄선된 정예들은 라이언하트의 흑사자 기사단과 전투 훈련이 가능할 정도고, 대족장 이바타는 유진과 동갑인 젊은 나이임에도 영웅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렇기에 직접 조란을 보고 싶었다. 그 젊고 용맹한 전사들이 어떤 삶을 살며, 어떤 수행으로 자신을 가다듬는지를 봐두고 싶었다. 그러한 경험 자체가 우화에 필요한 양분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시엘이랑 같이 보러 가시면 되잖습니까.”


“나중이라, 찬란한 사자여, 나에게는 그리 많은 시간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누가 들으면 시한부라고 오해할 말을 하는군. 유진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말을 카르멘에게 직접 건네지는 않았다.


유진이 다년간 살펴보며 판단한바,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는 ‘시한부’라는 설정을 굉장히 선호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평소에 시가를 물고 다니다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콜록콜록 기침을 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피도 좀 토하고…….’


곁에 있던 사람이 놀라서 다가와 손수건을 건네면, 거친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을 밀치거나…… 혹은 쓸쓸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손수건을 거절할 것이다. 누군가가 병명이라도 묻는다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는 식으로 빙 둘러서, 실속이라곤 없는 대답을 하겠지.


[바로바로 나오시는 것은 보니, 유진 님과 카르멘 님은 역시 닮은 구석이 있어요.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닥쳐라.’


망토 안의 메르가 이죽거렸고, 유진은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대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망토 안에 손을 넣어 직접적인 제재도 가해주었다.


“시엘이 서운해하지 않았습니까?”


유진이 망토 안의 메르를 열심히 간지럽히는 동안, 크리스티나가 카르멘에게 질문했다.


“그 아이에게는 더 이상 내가 가르칠 것이 없다. 이제부터는 그간 쌓아 올린 것을 토대로 삼아, 자신만의 무를 완성할 때니까.”


카르멘은 진중한 표정을 하고서 시가를 입에 물었다.


저 말에 대해서는 유진도 공감했다. 시안과 시엘. 두 쌍둥이는 이미 그 나이의 천재가 오를 수 있는 경지의 한계에 도달했다. 그 한계를 부수고 나아가 도달하는 곳은 천재를 넘어서는 영역이고, 그것은 온전히 둘에게 달려 있다.


“시안과 시엘은 무척 운이 좋았지. 아마 라인언하트 역사에서 그 쌍둥이보다 운이 좋은 아이는 없을 거다. 물론, 너를 제외하고 말이지.”


“그건 그렇죠.”


유진도 쌍둥이가 천운을 타고났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명문 라이언하트의 본가에서 태어나 백염식을 익혔다는 것부터가 천운이라 할 일이지만, 그것 외에도 쌍둥이에게는 많은 행운이 따랐다.


“나는 말이다, 찬란한 사자여. 너와 만난 것이 시안과 시엘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카르멘은 여전히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문 상태로 말을 이었다. 저렇게 시가를 물고서 말을 하는데도 발음이 새지 않고 정확하다는 것이 카르멘의 숨겨진 재주 중 하나였다.


“너는 쌍둥이가 열등감에 매몰되지 않게 조율해 주었다.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열등감은 추한 시기가 되지 않고, 긍정적인 향상심이 되게 만들었다. 만약, 너와 만나지 않았다면…… 혹은 네가 쌍둥이를 신경 써주지 않았다면. 둘은…….”


카르멘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시가를 손가락에 걸쳤다. 그녀는 한숨을 담배 연기처럼 길게 내뿜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이오드 라이언하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이 되었을 거다.”


유진도 저 말은 부정하지 않았다. 13살의 쌍둥이가 성격이 고약했던 것은 유진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안은 선민의식에 찌든 귀족가 망나니였고, 시엘은 직접 나서지 않고서 주변을 이용하여 남을 골려 먹는 악랄한 꼬맹이였다. 둘이 어릴 때 성격대로 성장했다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뻔한 귀족 악역이 되었을 거다.


“행운을 누린 것은 쌍둥이뿐만이 아니지. 찬란한 사자여. 나 역시 너와 만나게 된 것을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과찬이십니다.”


“아니. 결코 과찬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네 존재 자체가 라이언하트의 행운이다. 네 존재로 라이언하트는 새로이 우화했다…….”


최근에 우화라는 단어에 꽂힌 모양이군.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카르멘의 말을 들었다. 어찌 됐든 지금 카르멘의 말에 가식은 느껴지지 않았고, 결국 유진에 대한 칭송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무를 봐주었기에. 네가 빛을 발하며 앞을 밝혀주었기에. 쌍둥이도, 나도, 가주도…… 라이언하트 모두가, 네 뒤를 따르게 되었다.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는 라이언하트를 네게 선물로 주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 찬란한 사자여, 네가 라이언하트로 태어난 것 자체가, 라이언하트에게 큰 선물인 것이다.”


카르멘은 다시 시가를 입에 물었다. 당연하게도 지금 이 모든 말은 카르멘의 진심이었다. 그렇게 말하니 유진도 카르멘의 진심에 적잖은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멜은 보기와 다르게 참 귀가 얇습니다.]


‘마음이 몹시 순수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뇨…… 제 생각에는 순수와 상관없이, 그냥 칭찬에 목말라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칭찬은 곰도 춤추게 한다는.]


‘시스터, 유진 님은 곰이 아닌 사자십니다.’


[말은 바로 하십시오, 크리스티나. 그냥 사자가 아니라 ‘찬란한 사자’지요. 눈치챘습니까? 어느새부턴가 하멜은, 찬란한 사자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남몰래 밀담을 나누었다. 유진은 둘을 신경 쓰지 않고 감동한 눈으로 카르멘을 쳐다보았다.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생각해 줄 줄이야. 유진은 감동의 여운에 웃으며 카르멘에게 손을 뻗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선을 다해 카르멘 님의 우화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어울리지 않는 고집을 부려 여정에 함께했다. 그러니 찬란한 사자여, 너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여정 중에 논검 형태로나마 대련을 반복해도 되겠는가?”


논검이라면 직접 움직여서 싸우는 것이 아닌, 입으로 행동을 읊는 식으로 전투를 이미지하는 것이다. 그런 종류에는 유진도 별로 경험이 없었지만, 긴 고민은 하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카르멘 정도의 고수라면 직접 움직일 필요 없이 명상만으로 수행할 수 있다. 입을 통해 말하는 논검이라도, 카르멘이라면 즉시 머릿속에 상황을 그려 전투를 지속할 수 있다.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암실을 반복할 때, 유진과 카르멘은 꽤 여러 번 대결했었다. 지금 대결한다면 무조건 유진이 승리하겠지만- 논검에서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닌 전투에서 판단과 감각.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찰이 논검의 심득이다.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카르멘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시가를 케이스 안에 집어넣었다. 그만큼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뜻이었다. 유진도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세계수까지의 길은 일직선. 예전에는 오고 가는 데 몇 달이 걸렸지만, 가호와 마법을 덕지덕지 바르고 가는 지금은 넉넉잡아 일주일이면 도착할 터. 거기에 논검을 단순한 여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카르멘 정도의 고수와 논검을 나누고, 전투 상황을 보다 넓은 관점으로 고찰한다면 무언가 얻는 것이 있으리라.


“시작은 어떻게 합니까?”


“선공부터 정하지. 찬란한 사자여, 내가 양보받아도 되겠나?”


예전이라면 실력의 우위가 진즉에 역전되었을지라도, 카르멘이 유진에게 선공을 양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카르멘이 자처해서 선공을 가져갔다. 아무리 카르멘이라도 그 대영웅 하멜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것은 지나친 오만함이라 생각한 것이다.


“얼마든지.”


유진이 대답한 순간. 카르멘은 잠깐 호흡을 삼켰다.


“다섯 걸음 앞에서 철권연쇄를 시작으로 이클립스와 패왕각으로 네 허리와 가슴, 머리를 동시에 노리겠다.”


“……예?”


“철권연쇄, 이클립스, 패왕각.”


지금 농담하는 것인가? 순간 그런 의문마저 들었지만, 당연히 카르멘은 농담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짜 전장에 섰을 때만큼 진심을 보이며 유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철권연쇄가 유진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그 자체는 허초로 삼았으며, 초승달과 같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발차기, 이클립스가 허리를 훑고, 반 바퀴 정도 돌아서 뻗은 패왕각이 유진의 머리를 깨부수고 있었다.


“어…… 어, 예, 저는 칼을 뽑아서 일단 발차기를…….”


“발차기라 함은 이클립스인가, 패왕각인가?”


“아…… 예, 이클립스입니다. 아무튼, 예, 이클립스를 막고서 칼부림으로 압박을…….”


“압박이라. 칼부림이란 것은, 수라광살인가?”


“예?”


“유진, 논검은 구체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 칼부림이라면 이해하기 힘드니, 수라광살이라면 수라광살이라고 똑바로 말을 하도록.”


논검이 이토록 어렵고 민망한 것이었나. 해본 적이 없으니, 지금 하는 것이 정말로 논검이기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예…… 어…… 수라광살로…….”


“그렇다면 나는 네 수라광살을 뇌광일섬으로 대응하겠다. 나의 뇌강일섬은 정확히 중앙을 꿰뚫어 수라광살의 검기를 흩어지게 만들고 네 가슴을 노린다.”


“제 수라광살이 주먹질 한 번으로 흩어질 만큼 약하진 않은데…….”


“논검을 심도 깊이 나누기 위해서는 현실과는 조금 타협해야 한다. 이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닌, 다양한 상황에서의 타개책이니.”


그렇게 들으니 무척이나 그럴듯하다고 느껴졌다.


“그럼…… 저는…… 뇌광일섬을 라이트닝카운터로 반격하겠습니다…….”


“뇌광일섬을 라이트닝카운터로 반격한다라! 기발하고 멋지군.”


카르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유진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둘이 멍청한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부끄러운 기술명을 떠들고 있을 때. 세냐는 일행의 가장 뒤를 따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지금 유진의 멍청한 짓을 비웃거나, 아니면 멍청한 짓에 동참했겠지만. 지금의 세냐는 그쪽에 정신을 돌리지 않고, 블러드 메리를 들고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세냐의 앞에는 거적때기 대신 멀쩡한 로브를 입은 아멜리아가 걷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게게 풀렸지만, 저번처럼 쓰러질 듯이 걷지는 않았다.


치직.


세냐보다 조금 앞에서 걷던 아멜리아의 주변에 검은색 전류가 튀었다. 세냐가 아멜리아에게서 마력을 뽑아낸 것이다. 지금 세냐는 의식을 여러 개로 나누어서, 여러 개의 마법을 동시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블러드 메리에 기록된 고대의 흑마법. 어느 시점부터는 봉인이 걸려 보다 깊이 파고드는 것이 힘들었다. 역대 유폐의 지팡이 대부분은 블러드 메리에 봉인이 걸려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가? 바로 현명한 세냐다.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세냐만큼 뛰어난 마법사는 배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세냐가 봉인을 뚫기 위해 몰두했다. 뚫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거기에 이 봉인은 흑마법을 응용하지 않고서는 파고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흑마법을 응용하면 되는 것이다. 아멜리아를 마력 배터리로 삼는 것은 역시 정답이었다. 그녀에게서 과감하게 마력을 뽑아내고, 흑마법에 마법을 섞어서 응용해 보니- 웬걸, 블러드 메리의 봉인을 조금이나마 엿보는 것이 가능했다.


‘이건 인간의 흑마법이 아니야.’


잠조차 줄이며 장고했다. 봉인을 완전히 열지도, 블러드 메리의 깊이를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세냐는 먼저 결론을 내렸다.


‘마왕의 마법. 혹은, 마왕에 준하는…… 초월적인 존재의 마법.’


고대의 신? 그렇게 구체적으로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것이 ‘인간의 마법’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근거는 세냐 자체였다. 300년 전. 아니, 불과 몇 년 전일지라도 세냐는 블러드 메리의 마법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 겉핥기로나마 이해를 흉내 냈어도, 직접 사용하는 것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


세냐는 한 손에 블러드메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프로스트를 들었다. 둘을 천천히 교차시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언어처럼 들리지 않는 주문을 짧게 외웠다. 아멜리아에게서 뽑아낸 마력과, 세냐 본인의 마나가 뒤섞였다. 블러드메리와 프로스트의 드래곤하트가 서로 다른 색의 빛을 발했다.


“윽…….”


손바닥이 저릿할 정도의 진동이 지난 뒤. 마력과 마나가 하나의 결정이 되어 세냐의 눈앞에 나타났다. 세냐는 거기서 일단 마법을 멈췄다. 본능적인 직감 때문이었다.


‘이건 내가 아직은 다스릴 수 없는 힘이야.’


시도 자체는 해볼 수 있지만, 어떠한 반동이 올지 모르겠다.


만약…… 만약 조정에 실패한다면. 그래서 이 힘이 폭주해 버린다면. 이 자리의 누군가가 죽고 말고를 떠나, 숲 자체는 소멸해 버릴 것이다.


‘단순히 섞었을 뿐인데 이런 위력이라고……? 아니, 아니야. 섞인 것 자체가 단순하지 않은 거야. 배합의 방법으로 쓴 마법부터가 내 이해를 벗어난 것이니까.’


세냐는 그렇게 생각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녀는 아직은 다루기 힘들다 판단한 ‘힘’을 분해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두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분해하고,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하나로 모은 힘이 세냐의 의지를 벗어났다.


‘폭주?’


순간 세냐의 머릿속에는 이런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힘의, 마법의 폭주라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런 식의 폭주를 겪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터널 홀을 만들 때나 몇 번의 실패와 폭주를 겪었지, 이터널 홀을 만든 후로는 마법에 관해 실패란 것을 겪어 본 적은 없었다.


이 폭주는 위험하다. 단순 마법의 폭주가 아니다. 마법이 되기 전의 힘. 특히 이 힘은 시험해  생각조차 뒤로 미룰 만큼, 무식하고 폭력적이고 강력하다. 이 힘이 멋대로 날뛰다가 터져 버리기라도 한다면. 유진과 그 일행들은 어떻게든 몸을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대수림이 통째로 날아가버릴 지도 모른다.


그만큼 위험하지만, 세냐는 당황하지 않았다. 힘이 의지를 벗어나는 순간, 세냐는 즉시 절대률을 발동했다. 어떻게든 힘을 통제하고, 분해하는 것에 몰두했다.


‘뭐야?’


이어지는 결과, 아니, 직감. 폭주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려던 세냐지만, 지금은 정말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힘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폭주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오히려, 멋대로 날뛰는 힘이, 세냐를 인도하고 있었다.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일단은 분해해서 치워두려 했는데. 마치 힘 자체에 의지가 있어, 세냐의 판단을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잠깐…….’


머릿속이 환해졌다. 생각을 바꿨다. 폭주를, 힘을 억누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에 힘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인도에 따르고, 힘의 흐름을 보았다. 그것뿐인데도 세냐는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이 힘을 어떻게 마법으로 만들고,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그것은 세냐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기묘한 의구심을 주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왜 폭주하는 힘이 나를 가르치는 것처럼 움직이는 걸까. 이 가르침은…….


“……?”


그 순간에 세냐는 어떠한 소리를 들었다. 스쳐 지나간 것이지만,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희미한 웃음소리.


ㅡ화아아악! 웃음소리가 지나가고, 힘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그것은 더 이상 알아서 움직이며 세냐를 인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하게 폭주하는 것도 아니었다. 세냐는 움찔 놀랐지만, 힘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교차시킨 지팡이 앞에 모인 힘이 회오리쳤다. -퍼엉! 힘이 폭발했다.


그 폭발에 위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꽃잎 수천 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세냐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천천히 사라지는 꽃잎들을 지켜보았다.


“……뭐, 뭐야?”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세냐는 아직도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알았다.


방금의 인도를 통해 힘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세냐는 그것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은 생각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지쳐버렸다. 걷기도 힘들어서 아멜리아를 기어가게 하고 그 위에 앉아서 갈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냐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의식하며 앞을 보았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유진과 카르멘이 보였다.


“어…… 아무 일도 아냐.”


세냐는 우선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끝난 즉시 카르멘이 감탄을 터트렸다.


“방금 그 힘은 무엇입니까?”


“이거? 어…… 이 현명한 세냐 님의 새로운 마법이라…….”


“필살의 마법……! 멋진 이름이 필요하겠군요.”


“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


세냐는 기겁하면서 카르멘을 외면했다.


빌어먹을 환생 515화


카르멘의 외침대로 마법다운 이름은 붙일 수가 없었다. 아직 그것은 마법이 아닌 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 자체에 이름을 붙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이 힘은 마나도 아니고, 마력도 아니다. 블러드 메리가 기억하고 있는 고대의 방식대로 조합해 만든 힘.


일단 영력(靈力)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후로 몇 번이나 똑같은 시도를 해보았지만, 처음과 같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영력을 만드는 것 자체는 매끄럽게 성공했다. 영력을 통제하는 것도 잘되었다. 하지만 영력의 폭주는 일어나지 않았다.


‘뭐였을까?’


세냐는 영력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법에 너무 몰두하다가…… 깨달음 같은 것을 얻은 걸까. 물아일체에 빠져 지금보다 앞선 경지를 엿본 것일까. 아니면, 마법의 여신에 가까워지면서 기적 같은 것을 접한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은 많이 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답은 낼 수가 없었다. 애당초 영력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부터 이제는 미심쩍게 느껴졌다. 너무 몰입한 중에 착각해 버린 것이 아닐까? 웃음소리는 또 뭐였지?


‘모르겠어.’


고민해 보아도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세냐는 일단 포기했다. 대신, 제법 괜찮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영력을 ‘어떻게’ 응용할지를 시도해 보았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것은, 마나를 영력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만큼 시도가 쉬웠고, 성과도 빠르게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강력했다. 하위 서클의 마법일지라도 세냐가 사용한다면, 서클 이상의 위력을 갖는다. 그런데 영력을 사용해 마법을 써보니, 절대률을 쓴 것도 아닌데도 ‘절대’적인 위력이 만들어졌다.


“으으으…….”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강력한 힘은 사용할 때마다 세냐를 굉장히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직 사용이 어설프기 때문이다. 영력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어서, 이터널홀의 마나를 완전히 영력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힘으로 절대률을 부여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유폐의 마왕과 싸울 수 있나?’


영력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해버린다.


영력은 강력하다.


영력은 마나와 마력을 섞어 만든다. 세냐의 경우, 필요한 마력은 아멜리아에게서 뽑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마력은 대부분이 유폐의 마왕의 것이다.


‘아멜리아에게도 따로 마력이 있지만, 차이가 너무 심해.’


유폐의 마력을 섞어 만든 영력으로 유폐의 마왕을 공격할 수 있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마력의 근본이 어쨌건, 섞여서 영력으로 만들어낸 순간 아예 다른 성질을 갖게 되니까.


하지만 이 힘은 결국 블러드 메리에 기억되고 있던 것. 봉인을 넘어, 아득한 옛 시대의 마법. ……하지만 결국 블러드 메리에 기억된 것인데, 과연 이 방법이 유폐의 마왕에게 유효할까?


‘단순하게 따라 하는 것은 안 돼.’


세냐는 300년 전의 바벨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멜이 죽었던 날. 세냐가 꿈꾸며 그려왔던 모든 미래가 박살 난 날. 그때 세냐는 절망했고, 슬퍼했고, 그 이상으로 분노하고 증오했다. 그날, 아니,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모든 것의 원인을 유폐의 마왕으로 삼았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면, 무언가가…… 바뀔 것만 같았다. 하멜은 이미 죽었지만, 유폐의 마왕을 죽인다면. 하멜의 혼을 되찾아, 어떻게든…… 어떻게든 다시 하멜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떠나, 그때 세냐는- 말도 안 되는 것에라도 매달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무조건 유폐의 마왕을 죽이겠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지만 그렇게 결의했음에도 허무하게 패배했다. 그날 바벨의 어전에서, 세냐는- 동료들 중에서 제일 나약했다. 그녀의 모든 마법은 유페의 마왕에게 제대로 닿지도 못했다.


아니스의 빛은 사슬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모론은 팔다리가 사슬에 묶였음에도 괴성을 지르며 전진했다. 하지만 세냐의 마법은 유폐의 사슬을 상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 어전에서, 세냐는 마법사다운 역할을 거의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무력감과 절망은 세냐에게 줄곧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터널홀을 만든 것도, 절대률을 만든 것도, 모두가 유폐의 마왕에게 대적하기 위한 것이다.


‘영력은 강해. 하지만 유폐의 마왕에게 무조건 먹힌다는 보장은 없어. 우선 블러드 메리의 마법을 더 깊이 이해해야…….’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유진이 불쑥 말을 걸었다. 세냐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뭐, 뭐?”


“저번부터 말도 거의 안 하고 있잖아.”


며칠 전 세냐가 겪었던 일은 전해 들었다.


블러드 메리의 기억. 마나와 마력을 섞어 만든 영력. 제대로 공격은 되지 않았지만, 영력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유진도 느꼈다. 세냐가 작정하고 영력으로 공격한다면, 유진도 공검이나 월광검을 쓰지 않고서는 대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앞에서 멍하니 걷고 있는 아멜리아의 뒤통수가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블러드 메리는 유페의 지팡이들에게 계승되던 거잖아? 지팡이 안의 봉인도 아마 유폐의 마왕이 한 것일 테고. 그렇다면 결국, 내가 유폐의 마왕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것 아냐?”


세냐는 투덜거리면서 손끝에서 마나를 뭉쳐, 아멜리아의 뒤통수로 쏘았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아멜리아의 머리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럼 안 하면 되잖아. 꼭 블러드 메리의 마법에 집착할 필요 없이, 다른 식으로 마법을 만들면 되는 것 아냐?”


대뜸 아멜리아가 한 대 얻어맞았지만 유진은 그쪽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건드리지 않기엔 너무 아까운걸. 흑마법이란 것을 떠나서, 굉장히 매력적이란 말이야. 이게 정말 흑마법인지도 모르겠고.”


“고대의 마법?”


“응. 흑마법이랑 이것저것 섞여 있기는 한데…… 아무튼, 내가 느끼기에는 인간의 마법이 아니야. 그래서 굉장히, 굉장히 신경 쓰인단 말이지. 왜 유폐의 마왕이 이걸 내버려 둔 걸까?”


“몰랐을 수도 있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세냐가 실눈을 뜨고 유진을 쏘아보았다.


“유폐의 마왕이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돼. 일부러…… 일부러 내버려 두었거나. 왜?”


“그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는 유폐의 마왕을 낳은 엄마도 모를걸. 그 새끼한테 엄마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유진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말했다. 그 과격한 발언에 앞서 걷던 카르멘마저 경악하여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르멘은 끝내 유진의 발언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 유진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세냐와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너무나도 평온했기 때문이다.


“마왕한테 부모가 있습니까?”


“당연히 부모가 있겠지. 걔들이 뭐 땅에서 대뜸 튀어나오지는 않았을 것 아냐.”


“다른 마왕이라면 몰라도 유폐의 마왕은 없을지도 모르지. 애초에 그 새끼가 죽고 다시 태어난 적이 있기나 해?”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는 이번 여정에 참가하면서 많은 기대를 했었다.


목적지는 존재부터가 전설에 가까운 세계수. 비밀에 싸인 엘프의 영지. 그곳에 함께 가는 동료는 하멜의 환생,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현명한 세냐. 성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전설에 남을 모험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 모험을 통해 우화하여 보다 강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정은 모험이라기보다는 산책처럼 한가했고, 위험이랄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환상과 현실은 다른 법인가.”


카르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여정에서 알게 된 것은 있다. 여러 번 나눈 논검은 카르멘의 사고를 자유롭게 해주었고, 폭언을 일상처럼 떠드는 세냐와 유진에게서는 강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아아……!”


환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중얼거린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인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대신 현실에 나타난 환상에 대한 놀라움, 기쁨, 감탄 등의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세계수!”


카르멘은 양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을 만큼 눈앞의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라이언하트 본가에 심어진 세계수의 묘목들도 다른 나무보다 커졌지만, 저 ‘진짜’ 세계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보라,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세계수의 위용을. 하늘을 실제로 받치고 있는 것처럼 활짝 펼쳐진 가지들을. 그 사이사이를 덮은 나뭇잎들을! 카르멘은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세계수의 아래. 오래된 유적처럼 보이는, 족히 수백 년은 되었을 마을이 보였다.


“엘프……!”


카르멘은 감격해서 내뱉었다. 엘프야 라이언하트의 저택에서도 많이들 보았지만, 세계수와 함께 살아가는 엘프들은 뭔가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좋아졌네.”


유진은 하늘을 덮은 세계수와, 엘프의 마을을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몇 년 전 크리스티나와 함께 왔을 때, 이 땅은 죽기 직전에서 멈춰 있었다. 마나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세계수의 가지와 나뭇잎은 살짝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바스러질 정도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마나는 충만하고, 정령의 존재도 가득히 느껴졌다. 그 무엇도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땅이었는데, 지금은 그 무엇이든 살아갈 수 있을 땅이 되었다.


“라이자키아의 썩을 독기도 정화했고, 엘프들도 깨어났으니까 말이야.”


세냐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유진, 너랑 내 고향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저번에 너 데리러 가려 했는데, 네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수백 년이나 자다 깨어난 모습을 누가 보여주고 싶겠어?”


“자는 모습 보여주는 건 괜찮고?”


이죽거림을 무시하고 앞장섰다. 세냐는 보란 듯이 프로스트를 꺼내 들고, 엘프의 마을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 내려갔다.


“세냐!”


마을의 엘프들이 세냐를 알아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엘프는 외모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종족이다. 화장을 하거나 옷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저 종족은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종족을 못나게 만든다.


“……으흠.”


세냐는 저 아름다운 종족들 사이에서 자랐다. 엘프들에게 직접 못난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의 세냐는 자신의 외모를 비하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주변 어디를 보아도 다 엘프들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뭣 모르던 어린 시절의 일. 지금의 세냐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현명한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특히 그녀는 300년 전 하멜에 들었던 ‘예쁘다’라는 칭찬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고, 언젠가 하멜과 반드시 고향에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신혼여행 같은 것으로 오고 싶었는데.’


그것이 아주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 * *


세계수와 맞닿은 거대한 호수. 장로의 집은 호숫가 근처다.


“미리 이야기해 주었다면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을 텐데 말이다.”


장로는 엘프답지 않게 얼굴에 잔주름이 있고, 수염까지 기른 모습이었다. 아드실론. 그는 팔백 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온, 현재 이 영지에서 가장 긴 세월을 살아온 엘프다.


“뭘 연회까지.”


“네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


인자한 미소를 짓던 아드실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세냐가 순간 쏘아낸 강렬한 시선 때문이었다. 유진을 만나기 위해 아롯으로 떠나기 전. 세냐는 아드실론과 엘프들에게 민망한 선언을 하고 떠났었다.


“…….”


반쯤 죽었다가 살아났다. 마을의 모두가 사실상 세냐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감사와 보답을 전하기도 전에, 세냐가 영지를 떠나게 되었다.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현명한 세냐. 세상이 세냐의 귀환을 원하고 있다는 것은, 세냐와 함께 수백 년 잠들었던 엘프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내주었다. 하지만 배웅에서 모든 엘프가 눈물을 흘렸다. 당연히 세냐도 울었다. 울면서, 끌어안으면서도,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해, 당차게 말해주었다.


-다음에는 남편을 데리고 올게요.


아직은 아니다. 애당초 저 말은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나서 돌아오겠다는 결의이기도 했다. 설마 이런 일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이야…….


세냐는 새삼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음…… 시크나드와…… 엘프들은 잘 지내고 있느냐?”


“오라버니는 잘 지내고 계시죠. 마병은 낫지 않았지만, 심해지지는 않았어요.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구요.”


“라이언하트가 거두어준 덕분이지.”


에드시론은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세냐의 옆에 앉은 유진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대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유진에 대해서는 세냐에게 들었다. 세냐와 엘프들, 그리고 세계수마저 병들게 만든 마룡 라이자키아를 죽인 자.


하멜의 환생.


베르무트의 후예.


“유진 라이언하트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유진은 공손히 대답했다. 아무리 유진이라도 800년이나 살아온 에드시론에게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다.


“예, 유진 라이언하트 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사실 제가 대표로나마 직접 라이언하트를 방문 드렸어야 옳은데…….”


“괜찮습니다.”


엘프들의 사정은 유진도 알고 있다. 세냐야 마법으로 즉시 육체를 재구성했지만 긴 잠에서 깨어난 엘프들은 그러지 못했다. 독기 자체는 정화했어도 몸을 편히 움직이기 위한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라이언하트가 엘프족의 후견인이 된 후로 엘프 사냥은 거의 없어졌지만, 세상에는 하지 말라고 할수록 기를 쓰고 하는 놈들이 있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의젓한 자세로 앉은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8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온 엘프, 심지어 일족의 장이 있다는 것에 기쁨과 감동을 느꼈다.


“라이언하트의 은덕을 엘프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종족은 라이언하트의 평생의 우군이 될 것이며, 백 년을 넘고 천 년을 넘어서까지 라이언하트를 칭송할 것입니다.”


에드시론은 카르멘을 향해서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 말이 카르멘을 더욱 기쁘게 했다. 그녀는 감동을 견디지 못하고 왼쪽 가슴의 사자 문양에 손을 얹었다. 카르멘의 손가락 사이에서 사자 문양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 후로 제법 긴 사담을 나누었다. 에드시론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유진에게 친절했다. 물론 그것은 유진이 엘프족의 은인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세냐의 약혼자이기 때문이었다.


“조언을 받기 위해 왔어요.”


사담이 끝날 즈음, 세냐가 화두를 바꾸었다. 그 말에 에드시론의 눈이 빛을 발했다.


“바깥에서 바쁜 네가 아무 일 없이 방문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만…… 조언이라니. 내가 네게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세냐에게 마법을 가르친 스승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스승이라뇨! 저는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세냐에게 마법을 가르친 것은 저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은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신 전대 장로님과…… 그리고…….”


에드시론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왕에게, 마족에게, 혹은 마병에 의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 많은 엘프들. 이 마을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모두가, 세냐에게 마법을 가르쳤지요.”


“하지만 제게 처음으로 마법을 가르쳐주신 건 장로님이잖아요.”


세냐도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에 이르러 세냐에게 마법을 가르친 엘프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은 에드시론뿐. 그렇기에 세냐는 에드시론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너는 특별하고 멋진 아이였지.”


에드시론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마치 마나의, 마법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아이 같았지. 숲에 살아가는 야만인들이 ‘가호’라고 하여 특별한 힘을 사용하지. 부족마다 다른 의식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아. 세냐. 너는 처음부터 가호를, 아니, 그 이상의 축복을 지니고 있었단다.”


“제가 특별하긴 하죠.”


세냐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에드시론은 감았던 눈을 뜨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듯 세냐를 응시했다.


“시크나드가 너를 처음 숲에서 데려왔을 때가 기억나는구나. 바구니에 담겨있던 갓난아기. 그게 너였지. 그런 네게 처음 마법을 가르친 것은…… 하하, 지금 생각하면 가벼운 장난 같은 것이었지.”


“장로님이 살아오면서 가장 잘하신 일이에요.”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아무튼, 내가 네게 마법을 가르치고…… 네 천재성에 숲에서 마법에 일가견이 있던 모든 엘프가 네게 매달려 마법을 가르쳤지. 기억하느냐? 세냐. 네가 숲을 떠날 때, 엘프들 중에선 너보다 나은 마법사는 한 명도 없었다.”


“아하하, 당연히 알죠.”


“그렇게 잘 알면서, 내게 무슨 조언을 받고 싶다는 것이냐?”


에드시론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자 세냐가 유진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유진은 이유를 묻지 않고, 망토를 열어 아카샤를 꺼냈다.


“아카샤! 오랜만에 보는…….”


세냐도 프로스트를 소환해 아카샤 옆에 내려놓았다. 프로스트를 본 에드시론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건…… 지팡이의 이름은 뭔지 모르겠지만……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드래곤하트가 달려 있는 것 같…….”


에드시론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세냐는 블러드 메리도 소환하여 옆에 내려놓았다.


“허어…….”


에드시론은 나열된 3개의 지팡이를 보고서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드래곤이 보면 기겁할 풍경이 아닐까 싶군.”


유진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환생 516화


세냐가 에드시론에게 듣고 싶은 조언은,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머나먼 과거에 관해서다.


전쟁 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유폐의 지팡이들. 세냐가 알고 있는 유폐의 지팡이는, 죽는 순간에 저주를 퍼부어 하멜을 죽게 만든 베리알뿐이다. 후대의 유폐의 지팡이들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 세냐가 궁금한 것은, 베리알 이전의 유폐의 지팡이들에 대해서다.


놈들이 대체 얼마나 옛날부터 존재했는가. 그때부터 블러드 메리는 놈들에게 계승되고 있었나?


그리고 블러드 메리에 남아 있는 고대의 마법들. 세냐에게 마법의 기초를 가르치고, 인간의 것이 아닌 엘프의 마법과 고대의 마법에 대해 가르친 것이 바로 에드실론이다.


만약 활동하는 드래곤이 있다면 그쪽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활동하는 드래곤은 라이미르아와 아리아르텔 둘뿐이다.


라이미르아는 용마성에 갇혀 지내느라 제대로 마법을 배운 적도 없다. 아리아르텔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마법 실력이야 라이미르아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만, 헤츨링 시절부터 거의 혼자 자라다시피 한 데다 마법조차도 서클 마법을 익혔다. 그렇다 보니 아리아르텔이 세냐에게 마법에 관한 조언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법서는 몇 권 빌리긴 했거든요.”


나하마에서 키옐의 라이언하트로 본가로 돌아간 후. 세냐는 홀로 아리아르텔을 찾아가, 오래된 마법서들을 빌렸다. 대뜸 찾아가서 한 요구였지만 아리아르텔은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만큼 아리아르텔은 마법에 관해 세냐를 존경했다.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은 아니더라고요. 뭐라고 해야 할까, 와! 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는 아니고…… 그냥 심심한? 무조건 오래된 마법이라고 대단한 것은 아니니까요.”


“사장된 것에는 사장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에드시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대의 마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비롭고 대단한 것은 아니란다. 대부분은 원시적이고 조악해서, 지금의 마법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졌지. 마법도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으냐? 과거의 마법을 보완하고 개발해서 도달한 것이 지금의 마법이란다. 그것에 가장 첨단을 달렸던 것이 세냐, 너이고.”


“으흠.”


어린 시절 마법을 가르친 스승에게 저런 인정을 들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저 인정이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여태까지 수십 번은 들은 인정일지라도 말이다.


세냐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유진과 크리스티나, 카르멘을 힐긋 보았다. 대놓고 자신을 인정해 박수라도 쳐보라는 뜻의 시선이었다.


유진은 그 노골적인 시선을 똑같이 노골적으로 무시해 주었다. 세냐가 으스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아니스도 크리스티나의 박수를 제지했다. 놀랍게도 카르멘까지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녀는 엘프의 장로와 현명한 세냐가 나누는 신비로운 이야기에 매료되어, 세냐의 눈치를 볼 겨를이 없었다.


“……음.”


보기 좋게 무시당했지만, 세냐는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며 블러드 메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장로님. 저 지팡이에 기억된 마법들은…… 굉장히 신비롭고…… 묘해요. 제가 여태까지 알던 고대의 마법들과는 확실하게 달라요.”


“결국은 흑마법이지 않느냐?”


“그렇기는 한데…… 흑마법이라고 무조건 배척하기에는, 마법의 가치와 깊이를 무시할 수가 없더라구요.”


“하하.”


에드시론은 나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세냐 네 입에서 흑마법에 대해 그런 평가를 들을 줄이야. 하지만 세냐. 네가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마법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제가 저 마법들을 보고서 느꼈던 것이 있어요. 그런데, 제 판단을 장로님은 불쾌하게 여기실지도 몰라요.”


“말해보거라.”


“블러드메리가 기억하는 고대 마법의 일부는 엘프의 마법과 닮았어요.”


세냐의 말은 에드시론의 얼굴에서 웃음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엘프의 마법. 이것은 말 그대로 엘프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마법으로, 기본적으로 엘프가 아니면 익힐지라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일한 예외가 바로 세냐다. 어린 시절부터 엘프와 함께 자란 세냐는 종족이 엘프가 아닌 인간임에도 엘프의 마법 일부를 익혔다. 하지만 세냐는 다른 마법사에게 엘프의 마법을 가르치는 것도, 익힌 마법을 이론이나 술식으로 정립하는 것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엘프의 마법에 술식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법’이라고 불리지만, 세냐가 느끼기에는 성직자가 사용하는 신성마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성직자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며 청한다면, 엘프의 마법은 마나에 기원(祈願)한다. 마나에 기원하고 공명하여 발현시키는 것이 엘프의 마법이다.


“이 지팡이는 소유주의 마법을 기억해요. 술식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에 관한 기억 자체를 보존하고 있어요.”


그것은 답안지를 보고 문제를 푸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세냐는 한 명의 마법사로서, 흑마법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블러드 메리의 기억을 탐닉했다.


하지만 봉인 너머 깊은 곳에 보존된 마법들은- 답안지란 것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안지가 너무나도 부정확하고 애매했다. 그전의 마법들은 술식과 사용하기 위한 요령이 있었는데, 어느 깊이에서부터는 요령은커녕 술식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마법들은 굉장히 순수해요. 사용하기 위한 술식이나 요령 없이, 오로지 마나와…… 마력과의 공명을 우선하죠.”


“과연.”


에드시론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그는 이내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확실히, 네가 말하는 마법은 엘프의 마법과 비슷하구나. 그러나 세냐,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게다. ‘이런 마법’은 엘프의 마법하고만 닮은 것이 아니다.”


“네.”


세냐도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시선을 움직여 유진과 크리스티나, 아니스를 보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기적. 그리고- 드래곤의 용언(龍言). 모두가 특별한 술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적을, 기도를, 기원을.


결국은 어떠한 의지(意志)로 일으키는 것. 그 의지에 신이, 신력이, 마나가 답해주는 것. 세냐의 절대률도 그러한 의지력에 기인하는 마법이다.


“단순히 옛날의 것이 아닌 마법. 고대가 아닌, 훨씬 이전의…….”


에드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나 역시 엘프이기에 엘프의 마법을 익히고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종족에게 가르치거나, 해석할 수는 없다. 이건 그런 형식의 마법이 아니야. 그렇기에 나는- 세냐, 네게 마법에 관한 조언은 해줄 수가 없다.”


에드시론의 대답은 처음과 바뀌지 않았다. 세냐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로서의 실력, 마법에 대한 이해, 그런 것이 부족해서 조언해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단순하게, 해줄 말이 없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분이라면 네게 대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


다른 분? 세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엘프 중에서 가장 마법에 정통한 엘프가 에드시론이다.


그런 에드시론 외에 대체 누가 세냐에게 조언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장로님. 설마 제가 모르는 장로님의 장로 같은 엘프가 있는 거예요? 아무도 모르게 어디 깊은 숲속에 은거하는, 그런 전설의 엘프?”


세냐가 후다닥 에드시론에게 다가와서 눈을 빛냈다.


“전설의 엘프라니, 그런 엘프는 없다. 현재 이 세상에서 가장 늙은 엘프는 나일 게다.”


“그럼 대체 누군데요? 설마 드래곤?”


“서두르지 말거라.”


에드시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블러드 메리를 쳐다보았다.


“저 지팡이에 사용된 드래곤 하트에서 무언가 ‘다른’ 것은 느껴지는구나.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블러드 메리에 손을 뻗었다.


“마법에 대한 조언은 내가 아닌 다른 분이 해줄 수 있겠지만, 이…… 불길한 지팡이에 대한 감정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세냐가 처음 에드시론을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블러드 메리 자체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아카샤나 프로스트와 똑같이 드래곤 하트를 사용한 지팡이인데, 뭔가…… 다른 종류의 꺼림칙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에드시론을 찾아오기 전에도 세냐 나름대로 블러드 메리를 감정하기 위한 시도는 했었다.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지내는 드워프들도 찾아가 보았고, 라이미르아와 아리아르텔에게도 자문을 했다.


드워프들은 차이점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대장장이다운 방법으로 살펴보았을 때, 블러드 메리의 드래곤 하트와 아카샤, 프로스트의 드래곤 하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이미르아와 아리아르텔은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똑같은 드래곤 하트인 것은 맞는데,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있다고 말했다. 그 대답은 세냐가 느꼈던 것과 동일했다.


“드래곤 하트랑은 조금 달라.”


유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옛날에 드래곤 하트를 직접 본 적 있잖아.”


300년 전의 마경. 유진과 동료들은 멸망의 마력에 침식당해 죽음을 기다리던 드래곤을 만난 적 있다. 전생에 하멜의 마나가 폭발적으로 늘었던 것은 그때 드래곤 하트를 동료들과 나누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에 의해 가공된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에드시론은 블러드 메리에 시선을 거두고서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이것과 관련된 답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세냐, 네가 궁금해하는 것은 이 불길한 지팡이의 기원이니까.”


에드시론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카샤를 돌아보았다.


“아카샤의 주인이 바뀌었다지?”


“죄송해요.”


세냐의 표정이 빠르게 바뀌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서 어깨를 움츠렸다.


“아카샤는 저만의 것이 아닌데, 제가 멋대로 굴었어요. 그때는…… 유진에게 아카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오해를 하고 있구나, 세냐. 나는 널 꾸짖는 것이 아니다. 꾸짖을 자격도 없고 말이야. 그리고 나도 네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단다. 아카샤는…… 이미 네 손에서의 역할을 다했으니 말이야.”


에드시론은 닫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멀찍이서 장로의 집을 쳐다보던 엘프들은, 세냐가 유진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오자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300년 전의 일이 떠오르는구나. 세냐, 네가 숲을 나가기 전. 숲을 나가고자 했지만, 내가 너를 나가지 말라 붙잡았지.”


“만약 그때 장로님이 붙잡지 않으셨다면, 저는 마경에서 개죽음을 당했을 거예요.”


평소에는 오만방자하게 구는 세냐지만, 갓난아이 시절까지 기억하는 에드시론 앞에서는 평소처럼 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세냐는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했다.


“제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 마왕과 싸울 수 있던 것. 살아서, 돌아와서, 현명한 세냐가 된 것은 아카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설마 이 마당에도 ‘현명한 세냐’라고 자칭하다니. 뻔뻔하기로는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유진이지만, 세냐의 저런 구석을 볼 때마다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저만큼 뻔뻔하니까 자서전과 다름없는 동화책에 자신을 현명한 세냐라고 적은 거겠지…….’


에드시론조차도 동화책의 저자가 세냐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세냐의 말에 적잖은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카샤는 너를 위해 만들어진 지팡이였지.”


300년 전. 유폐의 마왕이 전쟁을 일으키자, 모든 드래곤이 함께 날개를 펼치고 마경으로 향했다. 세상을 위해, 대의를 위해.


드래곤의 뜻은 고결했지만,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은 끔찍이도 강했다. 드래곤들은 바벨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그 전투에서 절반이 넘는 드래곤이 죽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드래곤들은 마왕의 마력에 오염되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을 갖게 됐으며, 라이자키아는 마룡이 되었다.


죽어가는 드래곤 중에는 세계수의 엘프들과 교류하던 드래곤이 있었다. 일부 드래곤이 그러했듯, 그 드래곤도 어차피 죽게 될 목숨을 허무히 자연에 돌려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엘프 숲의 마법 천재.”


에드시론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의 너는 그렇게 불렸지.”


마법 천재라는 단어 외에 세냐를 수식할 단어는 없다. 에드시론과 엘프들이 가르친 마법의 기초를 세냐는 10살이 되기도 전에 응용하고 다루었다. 엘프가 아니면 익힐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마법마저도 다뤄냈다.


“그는, 내 벗, 아카샤는, 죽어가는 순간에 네 이름을 떠올렸단다. 엘프가 아닌 인간 소녀. 그럼에도 모든 엘프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천재.”


드래곤은 마왕과 싸울 수 없다. 마왕의 마력은 드래곤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이다. 학살 속에서 모든 드래곤이 그렇게 판단했다.


엘프도 다르지 않다. 마왕과 맞서기 위해 세상에 나간 엘프에게는 전투보다 마병이 더욱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로웠다.


“아카샤는 네 손에 쓰이길 위해 스스로 드래곤 하트를 뽑았다. 아카샤를 기억하는 드래곤들이 드래곤 하트에 가호를 부여했고, 나와 엘프들이 세계수의 가지를 써서 지팡이를 만들었지. 세냐, 네가 미숙하던 시절에 아카샤는 네게 필요한 시간을 주었다. 네가 더 이상 아카샤에 기댈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네가 인정한 이에게 똑같이 아카샤를 넘겼다면, 그 또한 아카샤의 바람과 같을 게다.”


에드시론의 눈이 유진에게 향했다. 유진은 오른손에 쥐고 있는 아카샤를 의식하며 에드시론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카샤가 도움이 된 것, 부족하던 시간을 준 것은 유진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아카샤가 없었다면 유진은 이만큼 빠르게 마법의 경지를 높일 수 없었을 것이며, 프로미넌스 등을 개발하는 것에도 난항을 겪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제는 별로 쓰지도 않는데…….’


예전에는 다양한 마법들을 편하게 쓰기 위해 아카샤를 사용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마법 자체를 잘 쓰지 않게 됐다.


간단한 이유다. 마법보다 다른 것을 훨씬 잘하게, 강하게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프로미넌스는 항상 사용하는데, 프로미넌스는 결국 유진의 전투 방식을 보조하는 마법이다.


[그래도 프로미넌스를 조정하는 데에 아카샤랑 제 도움을 받고 계시잖아요.]


‘그것까지 신경 쓰면서 싸우면 사고가 둔해지니까.’


[그럼 충분히 잘 쓰고 계시잖아요? 물론 저는 마법사의 사역마니까, 유진 님이 무식하게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것보다는 마법사다운 세련된 전투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메르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이쪽입니다.”


에드시론의 걸음은 호수 앞에서 멈췄다. 세냐가 낮은 탄성을 내질렀고, 크리스티나도 놀라서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계수의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유진도 조금 놀라서 물어보았다. 지금 에드시론이 멈춘 곳은, 몇 년 전에 유진이 세냐를 찾아왔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수의 중심. 세냐와 엘프들이 잠들어 있던 곳.


“저 안에 아직 깨어나지 못한 엘프가 있는 겁니까?”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에드시론을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그럼 왜 저기를?”


“선령(先靈)께 조언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선령?”


놀라서 되묻자 에드시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계수에 깃든 선령들이라면, 세냐의 의문에 답해주실 수 있을 겁니다.”


빌어먹을 환생 517화


이 숲에는 세계수에 대한 신앙이 존재한다. 모든 존재는 죽어, 세계수에게 인도된다는 신앙.


“모든 존재인 것은 모르겠지만, 엘프의 선조들이 세계수에 인도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에드시론이 앞장서서 호수를 걸었다. 유진이 대수림에 방문한 이유는 세계수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다. 몇 번이나 세계수에 의한 기적을 겪은 데다, 유진에게도 세계수의 정령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드시론의 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모르시다니, 그건 어떤 이유입니까?”


특히 유진이 가진 궁금증은 세계수에 관련된 신앙. 죽음과 윤회에 대한 믿음.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에드시론이 대답했다.


“어쩌면 세계수가 전설처럼 모든 혼을, 생명을 윤회시키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저를 비롯해 선대 장로들은 세계수의 전설을 직접 확인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어째서요?”


“이미 죽어 안식에 든 자를 깨우는 것은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니까요.”


그 대답은 지극히 엘프다웠다. 하지만 정작 지금 하려는 일과는 모순되었다. 결국 지금, 에드시론은 안식에 든 선령들을 깨우러 가는 것 아닌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드시론은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냐가 바라는 조언들은 누군가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의 세상.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이 건재하고, 언제 다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며, 300년 전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욱 끔찍한, 모든 것이 마왕에 의해 완전히 짓밟힐지도 모르는. 그러한 재앙에 정면에 맞서실 것이 유진 님과 성녀님, 그리고 세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에드시론은 유진과 세냐를 돌아보았다.


“선령들께 도움을 구한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닙니다. 200년 전, 세냐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서 세계수에 떨어졌을 때. 그 상처는 저와 다른 엘프들의 마법이나 치료술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선령들의 도움을 받았지요.”


“세계수의 기적 아니었어요?”


세냐가 놀란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그 질문에 에드시론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기적이란 바라여 내려지는 것이란다. 그리고 선령님들은 세계수에 깃드셨으니, 그날 널 구했던 것이 세계수의 기적이란 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


그 말에 세냐도 나직이 탄성을 뱉었다.


돌변한 베르무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세계수로 돌아왔을 때. 라이자키아의 습격을 받았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라이자키아의 공격을 막아내고, 역으로 놈을 외차원으로 추방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세냐의 능력이 아니었다. 엘프들의 의지와, 세계수의 힘이 더해져서 일어난 일이다.


여태까지 세냐는 그 모든 것이 세계수의 기적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에드시론의 말에 따르면, 세계수의 안에는 엘프 선령들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라이자키아를 추방시킨 것과, 세냐와 엘프들의 죽음을 멈춘 것, 후에 유진을 구할 수 있게 한 것마저도 선령들의 돌봄이 있었기 때문인가?


“이상한 기분이네.”


세냐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스스로 정통한 마법사라고 생각하기에, 신앙이나 기적 같은 것은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부터가 사고의 자유와 가능성이란 것의 무한함을 가로막는 벽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마법이건 신성마법이건, 얕기 그지없는 편견으로 괄시하는 것은 너무나 큰 오만이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어서? 애당초 마법이란 그래야 마땅하지 않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세계수의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세계수의 잎사귀를 열쇠로 삼아 들어갔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에드시론이 손을 뻗는 것만으로 천천히 세계수가 열렸다.


“오…… 오오…… 오오오…….”


넋을 잃고 따라오던 카르멘은 감격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카르멘이 겪어보고 싶던 전설 그 자체의 모험이다.


용사와 성녀와 마법사의 동료로 여행하고 있다. 세계수를 찾아온 숲에서 엘프족의 장로를 만나고, 이제는 엘프의 선령을 만나기 위해 세계수의 안으로 들어간다…….


카르멘은 벅찬 감동을 느끼며 왼쪽 가슴의 찬란한 사자 문양에 손을 얹었다. 어릴 때 온갖 동화책을 섭렵하면서 품었던 꿈을 지금에서야 이루게 될 줄이야.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아서, 카르멘은 남몰래 눈에 힘을 주었다.


기다란 통로.


이곳은 몇 년 전에 왔을 때와 비슷했다. 여전히 이곳은 유진이 갔던 그 어느 장소보다 마나가 가득하다. 저택 부지 자체가 천혜의 영맥이 되어버린 라이언하트 본가와도 비교가 안 된다.


‘고요하지는 않은가.’


[그렇다.]


“아 씨 깜짝이야.”


대뜸 들린 대답에 유진은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한 유진의 행동에 다른 이들이 오히려 더 놀라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그렇게 대답한 뒤에, 유진은 머릿속에 갑자기 말을 건 템페스트에게 윽박을 질렀다.


‘야! 갑자기 말을 걸면 어떡해?’


[언제는 내가 미리 알리고 말을 걸었나? 그렇게 허락을 구하는 것 자체가 갑자기 말을 거는 행위 아닌가?]


‘이 새끼 요즘 멜키스 님이랑 놀더니 태도가 아주 패고 싶어졌네. 싫다 싫다 한 주제에 아주 싫지는 않았나 봐? 이렇게 닮아진 것을 보니.’


[사과해라!]


유진이 이죽거리자마자 템페스트가 격렬히 고함을 내질렀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폭풍이 몰아치지는 않았지만, 유진의 머릿속에서는 폭풍만큼 요란한 소리가 웅웅댔다.


[나는 그 광인과 닮아지지 않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해. 시끄러워서 원.’


[사과해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이 너무 심했다 싶었다. 만약 유진도 누군가 멜키스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약 상대가 죽여도 상관없는 놈이라면 일단 죽여 버릴 것이다.


[네 사과를 받아들이마.]


템페스트가 씨근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더니, 이내 유진에게 익숙한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하멜. 너도 느꼈겠지만, 이 장소는 고요하지 않다.]


몇 년 전에 세냐를 만나기 위해 이 장소에 왔을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세계수의 정령들이 고요히 유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는 날 환영하는 느낌이었지.’


유진은 정통한 정령술사는 아니다. 그가 계약한 정령은 바람의 정령들뿐이고, 그마저도 위니드를 촉매로 삼고 템페스트와의 인연을 통해 맺은 계약이다. 만약 유진이 작정하고 정령술을 팠다면 정령술사로도 대성했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하멜, 너는 멜키스만큼 위대한 정령술사가 되었을 것이다.]


저 말은 결국 멜키스가 대단한 정령술사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 아닌가?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려는 생각을 후다닥 심상 깊이 감추었다.


[그때는 고요히 너를 환영했다면, 지금은 열렬히 환영하는군.]


템페스트가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열렬한 환영이란 것은 유진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마나에 완전히 녹아들어 하나가 된 세계수의 정령이 간질거리는 느낌. 피부가 괜히 오싹거리고…… 웃음소리 같은 것이 멀리서 맴도는 것만 같았다.


“신기하군요.”


에드시론도 놀 하며 중얼거렸다.


“정령들이 이렇게나 기뻐하고 환영하는 것은 저도 처음 봅니다. 은인을 알아보는 것일까요?”


“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유진은 슬쩍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희끄무레한 기류가 나타나더니, 유진의 손을 한 바퀴 휘감고 손가락에 매달렸다. 느낌이 희미하기는 했지만, 마치 갓난아이가 손가락을 잡아 흔드는 것만 같았다.


설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호응이 올 줄이야. 유진은 움찔 놀라서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서로를 구했잖아.”


세냐가 말했다.


“너는 라이자키아를 죽이면서 나랑 엘프들, 세계수를 구했지. 그리고 세계수는 죽어가는 너를 구했어. 그러니 서로를 특별하고 친근하게 여길 수밖에.”


“낯간지럽네.”


유진은 헛기침을 뱉으며 손을 내렸다. 과거 엘프들의 요람처럼 보였던 통로는 지금은 텅 비어 있다. 하지만 공허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따스하고 충만한 마나. 벽면에 엉킨 뿌리들에도 활력이 가득 느껴졌다.


통로의 끝. 에드시론의 걸음이 멈췄다. 본래 세냐가 누워있던 끝에는 이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뒤에 물러서 주십시오.”


에드시론은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끝의 벽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세냐는 눈을 반짝 빛내며 에드시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200년 전에도 그랬다지만, 세냐는 그 순간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베르무트에게서 도망치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과연.]


아니스도 에드시론의 모습에 나직이 감탄을 터트렸다. 에드시론의 주변에 ‘빛’이 일어나고 있다.


[세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습니다. 저것, 엘프의 마법은…… 신성마법과 닮았습니다.]


‘기적이란 말씀이십니까?’


[네.]


주변에 나타난 빛이 점점 부풀었다. 그 과정은 술식이나 영창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진은 자신의 우주에 섞인 신력과, 세계수의 정령들이 저 빛에 감응하는 것을 느꼈다.


“읏.”


세냐도 놀란 소리를 냈다. 아공간이 멋대로 떨리고 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아공간 자체가 박살 날 것만 같았다.


그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세냐는 급히 아공간을 열었다.


블러드 메리. 생김새부터 불길한 최고(最古)의 지팡이가 요사스러운 빛을 내뿜고 있다. 피처럼 새빨간 빛. 그 빛이 뿜어질 때마다 블러드 메리의 지팡이를 휘감은 혈관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철그럭’하는 쇠사슬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유폐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 다른 장소라면 잠시 내버려 두어서 상태를 지켜볼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 이곳은 세계수의 내부다. 만약 이곳에서 유폐의 마력이나 권능이 터져 나온다면 세계수에 악영향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세냐는 급히 마법을 일으켰다.


카가각! 복잡한 문자들이 자체로 고리로 연결됐다. 그렇게 만든 봉인이 블러드 메리를 휘감았다. 절대률까지 부여한 봉인이 블러드 메리가 흘려내는 요사스러운 붉은빛을 억눌렀다. 쇠사슬 소리도 점점 희미해졌다.


[괜찮다.]


돌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세냐 혼자만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안에 있던 모두가 목소리를 들었다.


[별일 없을 것이다. 그러니 봉인은 거두어라.]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 단지 말뿐인데도 목소리 자체에 힘이 깃든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목소리. 세냐는 흠칫 놀라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엘프의 선령과 대화하기 위해 마법에 몰입한 에드시론의 옆. 그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빛이, 어느새 다른 형태를 갖추고 서 있었다. 그것은 비스듬히 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너, 너 뭐야?”


세냐는 놀라서 외쳤다. 바로 옆에 저런 것이 나타났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에드시론을 쳐다보자, 빛이 나직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 엘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문을 여는 것만으로 실신한 것뿐이다.]


“문?”


[후배야, 네가 의문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런 대화는 조금 뒤에 할 수 있지 않은가?]


세냐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유진이 앞에 나섰다. 그는 당장에라도 이터널 홀을 열려는 세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뭐?”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야.”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럽고 믿기지 않은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세냐와, 앞에 선 빛의 인형을 번갈아 보면서 중얼거렸다.


“맞냐?”


[너는 여전히 참으로 무례하구나. 너란 존재의 천성은 백번 죽고 백번 다시 태어나도 변치 않을 것이다.]


인형은 쿡쿡 웃으며 속삭였다. 세냐는 여전히 지금 모든 상황이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빛의 인형의 말은 믿을 수 없어도, 유진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뒤, 블러드 메리에 가한 봉인을 벗겨냈다.


[후배여, 참으로 훌륭한 마법이다. 너는 독자적으로 길을 개척하였구나. 설마 후배의 마법이 유폐, 그 노마(老魔)를 억누를 줄이야. 아무리 노마가 본신이 아닐지언정.]


유진은 저 ‘후배’라는 지칭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 인형이 유진이 생각하는 존재가 맞다면- 여태까지 유진이 가진 예측이 근본적으로 어긋난 것이기 때문이다.


봉인이 벗겨진 블러드 메리가 다시 붉은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철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뒤따랐다.


블러드 메리가 공중에 떠올랐다. 지팡이를 휘감고 꿈틀거리는 혈관의 일부가 떨어져 나오더니, 끝에서 봉오리 같은 것이 부풀었다.


“이건.”


부푼 봉우리가 열렸다. 피어난 것은 꽃이 아닌 붉은 눈동자였다. 외눈이 데굴 구르더니 빛의 인형을 응시했다.


“놀랍군.”


[나의 메리가 이곳에 오게 된 것부터 네 묵인 덕분인데. 네가 놀랄 일인가?]


인형이 웃으며 대답했다.


빌어먹을 환생 518화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지만 여전히 청아하고 낭랑했다. 아무런 마법도 가미되지 않은 ‘그냥’ 목소리일 뿐인데, 인형의 목소리는 ‘깊이’ 들렸다. 마치 귀가 아닌 존재 자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의 메리?”


유진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노골적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뿐.


“묵인이라.”


눈동자가 곡선을 그렸다. 머나먼 바벨의 어전에서, 유폐의 마왕은 진심으로 유쾌함을 느끼며 웃고 있었다.


“이것을 묵인이라고 해야 하나?”


[얄미운 말을 하는구나, 노마야. 너는 여전히 얄밉고 고약해. 네가 하고자 하였다면 나의 메리를 파괴할 수도, 빼앗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대도 말하지 않았나.”


빙글 웃는 눈동자가 세냐를 향했다.


“내가 ‘직접’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메리에 남은 마력만으로는 그녀의 마법을 거역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직접 나서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바벨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을 했거든.”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인형을 보았다. 인형은 여전히 비스듬히 선 자세로 모두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대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놀랍군.”


[많은 대가를 치렀지.]


인형이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너와의 해후가 반갑지는 않구나, 노마야. 너는 왜 이곳에서 눈을 띄웠는가? 나의 영락을 비웃기 위해서? 나를 말살하기 위해서?]


“내가 그럴 것이라 생각하나?”


[아니. 너는 그런 이유로 온 것이 아니겠지. 그냥, 그냥. 네 생각을 벗어난 광경을 직접 보기 위해서. 그렇게 확인하기 위해서.]


인형의 머리가 살짝 움직였다.


[하지만 노마야. 나는 네가 지금 이 순간을 확인하게 둘지라도, 이다음은 보게 두지 않을 것이야. 네 입장이란 것이 참으로 모호하고 묘하다는 것은 안다만, 그럴지라도. 너는 결국 마(魔)다. 마의 왕이다. 너는 나의 적이었고, 이곳 모두의 적이다.]


“그래야지.”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야 옳다. 나는 먼 옛날부터 마왕이었고, 지금도 마왕이며, 먼 미래까지 마왕일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나는 언제나 마왕이다.”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말하고서 인형을 똑바로 응시했다.


“말했듯, 이것은 내게 있어선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다. 나는 그대의 존재가 사라졌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라졌었지.]


인형이 대답했다.


[사라졌었어. 그래, 나는 틀림없이 사라졌었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지. 노마, 네가 알 수 없게.]


그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제법 길게 웃음을 이어갔고, 웃을 때마다 눈동자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바벨의 어전에서, 쇠사슬의 의자 위에서 유폐의 마왕은 체면을 신경 쓰지 않고 고개까지 주억거리면서 웃었다.


“그런가. 과연,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어. 그대는 정말로 사라졌던 것이군. 그리고 지금, 어떠한 이유로 다시 태어난 것이고.”


유폐의 마왕은 의자에 보다 깊숙이 몸을 파묻고 손등에 턱을 괴었다. 무수한 사슬이 뱀처럼 머리를 들더니, 유폐의 마왕의 몸을 천천히 감쌌다. 유폐의 마왕은 사슬 하나하나에 얽힌 인과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대는 나와의 해후가 반갑지 않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대와의 해후가 무척이나 반갑군. 드물게도, 나는 그대에게 욕심이란 것을 느꼈었으니.”


[아하하하…… 그건, 굉장히, 언짢고 모욕적인 권유였지.]


웃음과 함께 인형이 손을 뻗었다.


[그만 물러가라. 노마야. 이 요람을 더 이상 네 존재로 더럽히지 말라. 나의 감동을 방해하지 말라.]


“존중하마.”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대답하며 마지막으로 웃었다. 웃음에 의해 휘어진 눈동자가 완전히 감겼다.


-퍼억! 혈관의 끝에 매달렸던 눈동자가 터지며 사라지고, 징그럽게 돋아난 혈관도 다시 꿈틀대며 블러드 메리를 휘감았다.


“어…….”


그 이야기 동안, 세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을, 방금 나누었던 대화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사고는 이해에 대해서 진즉부터 멈춰 있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인형을 응시했다. 경악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들을 품은 셋과는 달리, 카르멘의 감정은 경악과는 전혀 달랐다.


감동.


카르멘은 거대한 감동을 느꼈다. 방금, 이 자리에 유폐의 마왕이 왔다. 대마왕의 본신이 직접 강림한 것은 아니지만, 대마왕은 대마왕답게 사악한 분신으로 이 자리에 나타나 대화에 참가했다.


그 흉물스러운 눈동자며…… 또.


-너는 결국 마다. 마의 왕이다. 너는 나의 적이었고, 이곳 모두의 적이다.


‘모두의’.


카르멘은 꽉 쥔 주먹을 왼쪽 가슴에 얹었다.


무엇을 의심하랴. 저 신비로운 빛의 인형이 말한 ‘모두’에는, 당연히 카르멘 라이언하트도 속해 있다.


-그래야 옳다. 나는 먼 옛날부터 마왕이었고, 지금도 마왕이며, 먼 미래까지 마왕일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나는 언제나 마왕이다.


대마왕의 대답은, 카르멘이 생각하기에 지극히 대마왕다웠고 완벽했다. 사악한 존재에 걸맞은 대답. 카르멘은 유폐의 마왕이 말한 ‘누군가’가 자신일 수도 있다고 믿었고, 반드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허.”


유진도 감정을 가다듬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번 웃었다.


“정말…… 맞냐?”


[또, 그렇게 무례하게 묻는구나. 아까의 대답은 대답으로서 부족했는가?]


“확신이 부족해서 그래.”


[아가로트.]


인형이 속삭였다.


[네 먼 과거가 그러했겠지만, 지금의 너는 아가로트라 불리는 것이 불편할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생이란 영혼의 과거이니.]


인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유진을 응시했다. 비스듬히 서 있던 인형은 자세를 바로 세우고서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너를 아가로트라 부르겠다. 망자의 몇 없는 욕심을 이해해 다오. 나는, 지금의 너에게…… 그리고 네 이름에 익숙하지 않으니 말이야.]


유진은 말없이 인형을 응시했다.


[확신이 부족하다고 말하였지.]


인형이 말했다.


[그렇다니 확실히 대답해 주도록 하마. 나의 이름은 비슈르 라비올라. 머나먼 과거, 우뚝 선 상아탑의 고고한 현자였으며, 마법의 신좌(神座)에 오른 몸.]


“아……!”


모호했던 것들이 확실해졌다. 세냐는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슈르 라비올라. 처음으로 듣는 이름. 하지만 ‘상아탑의 현자’에 대해서는 유진에게 들었다. 그녀야말로 세냐가 현재 목표로 두고 있는 마법의 여신이었던 자.


아마, 아니, 틀림없이. 세냐는 현자가 자신의 전생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된 거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다. 절묘할 정도로 세냐와 현자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말 그런가? 애당초 유진에게는 ‘현자’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모론의 전생이라 생각했던 ‘거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여기에, 내 앞에 있는 너는…… 정말로 너인가? 아니면, 너의 기억 같은 것을 본뜬 다른 존재인가?”


[홀로 착각했던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구나.]


현자가 고개를 흔들며 비웃었다.


[방금 말했을 터이다. 나의 이름은 비슈르 라비올라.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온전히 나이다.]


현자는 빙글 몸을 돌렸다. 저 앞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숙인 에드시론을 보았다. 그녀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엘프의 장로라도 고작 이 정도인가. 문을 연 것만으로 저리도 깊이 실신해 버리다니……]


어쩔 수 없지. 현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손을 들었다. 손끝에 맺힌 빛이 점점 부풀더니, 세계수의 안을 가득 채웠다.


발이 붕 떠올랐다. 짧은 부유감 도중에 풍경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유진은 거대한 세계수의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탁 트인 초록의 벌판에 서 있었다.


“이곳은…….”


주저앉았던 세냐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 장소가 낯설지 않았다.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몇 년 전 아니스의 기적에 의해 세냐와 만났던 장소였다. 초록의 벌판. 가까운 곳에 보이는 거대한 세계수. 현실이 아닌 세계수의 초상세계.


“나는 현실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거든.”


목소리가 들렸다. 존재에 스며드는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 유진은 흠칫 놀라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


세계수의 가지 위. 그곳에는 빛의 인형이 아닌, 현자가 서 있었다. 허리까지 기른 머리카락은 에메랄드처럼 윤이 흐르고, 눈동자는 사파이어처럼 반짝였다.


“…….”


유진은 입을 떡 벌리고서 현자를 쳐다보았다.


현자는 세계수의 가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높이가 상당했지만, 현자의 추락은 풍선이 내려오듯 느릿했다. 부드럽게 땅에 내려선 현자는,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거렸다.


“흠, 육체란 좋구나. 이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육체를 진정 육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흙과 풀이 밟히는 기분은 참으로 좋아. 이 내음도, 바람도.”


“…….”


“내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보아 감동해 말을 잇지 못하는가?”


현자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유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얌전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왜, 왜 알몸이야?!”


넋을 잃고 있던 세냐가 빽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왜 알몸이냐고! 옷은 입어야 할 것 아냣!”


“음?”


세냐의 외침에 현자가 눈을 깜빡였다. 지적대로 지금의 현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더니 깔깔 웃었다.


“어쩐지, 바람의 감촉이 너무나도 짙다 싶었건만. 옷을 입은 것을 잊었구나. 육체를 갖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어쩔 수 없나.”


“옷이나 입으라니까!”


“아하,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나 싶었는데. 아가로트, 내 몸을 보는 것이 부끄러운가? 이것 참 이상하군. 네가 내 헐벗은 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현자는 깔깔 웃으면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것이 아니라고? 저 말은 이곳의 모두에게 거대한 폭력이 되었다. 유진은 입을 쩍 벌렸고, 세냐와 크리스티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기, 기억 안 나.”


유진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대답에 현자가 더욱 크게 웃었다.


“먼 옛날 나를 그토록 재우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참으로 못된 사내로고.”


그 말에 유진은 식은땀을 줄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현자는 유진의 공포를 비웃으며 옷을 새로 만들었다. 그 옷은, 짓궂게도 세냐의 옷과 똑같았다.


“왜 내 옷을 입는 거야?”


“후배여, 그대의 옷이 마법사의 옷이지 않은가? 마법의 길을 걷고 그 정점에 섰던 내가 후배의 옷을 입어 준 것에 감사를 느끼지는 못할망정, 왜 불쾌해하는 것인가?”


“당신도 옛날에 입던 옷이 있을 것 아냐……!”


“그렇기는 하다만, 나는 후배의 옷이 마음에 드는구나. 아, 걱정하지는 말거라, 후배여. 나는 후배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현자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세냐를 응시했다. 그 시선과 미소는 세냐의 생각을 정면으로 관통한 것이라, 세냐는 꿀꺽 침을 삼켜 버렸다.


“나의 존재는 오직 이곳에서만 존재한다. 그야, 나는 아주 오래전에 신대(神代)와 함께 끝을 맞이하였으니.”


현자의 시선이 움직였다. 청옥색 눈동자가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나의 존재는 영혼조차 아니기에, 누군가에게 깃들 수도 없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지금 나의 존재는 메아리와 같다.”


“……메아리?”


“후배야.”


현자가 다시 세냐를 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세냐에게 다가왔다.


“신대의 종말과 함께 사라졌던 나를, 네가 불러낸 것이다. 마법에 대한 갈망으로, 진리에 대한 추구로, 마나에 대한 기원이, 후배, 너의 목소리가. 바라던 것들에 닿아, 그 메아리로서 나를 불러냈다.”


블러드 메리에서 들었던 웃음소리. 세냐는 흠칫 놀라서 블러드 메리를 쳐다보았다. 그 지팡이는 여전히 불길하기 그지없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아아.”


현자는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블러드 메리에 손을 뻗었다.


“나의 메리. 유폐의 마왕은 너를 참으로 지독히 다루었구나. 혈관에, 뼈에, 모양새뿐만이 아니도다. 사기(邪氣)가 아주 깊숙이 배어 있어. 어쩔 수 없구나,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긴 세월 너를 쥐었던 주인들은 모두가 오물과 다름이 없었으니, 그 오물의 악취가 배어버릴 수밖에.”


표정을, 감정을 가다듬었다. 순간 품었던 불경하고 하찮은, 부끄러운 생각을 고요히 만들었다.


지금 앞에 있는 것은 신화시대의 현자. 인간의 몸으로 마법의 신좌에 앉은 몸. 세냐는 아득한 시대의 선인이자, 추구하던 곳에 먼저 오른 선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공손히 블러드 메리를 건네주었다.


“기쁜 만남이다.”


현자가 웃으며 속삭였다. 그녀는 넘겨받은 블러드 메리를 양손으로 쥐었다.


-빠직.


블러드 메리를 감싸고 있던 흉측한 혈관이 부서졌다. 끝의 보석을 감싸고 있던 뼈들도 부서졌다. 혈관이 넝쿨이 되었다. 뼈가 잎이 되었다.


보석은 붉은 꽃이 되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메리.”


현자의 손에서 메리가 빛을 발했다.


빌어먹을 환생 519화


부서진 보석에서 드러난 꽃봉오리가 천천히 열렸다. 꽃잎이 하나하나 열릴 때마다, 붉은 파편이 가루로 바뀌어 흩날렸다. 현자는 잠시 동안 두 눈을 반개하고서 메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메리의 꽃잎이 완전히 열렸다. 그러자 현자는 천천히 메리를 앞으로 들어 올렸다.


-화아아악! 흩날리던 붉은 가루가 회오리치며 허공에 떠올랐다.


퍼엉!


가루가 다시 꽃잎이 되었다. 꽃잎이 하늘에서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세냐는 그 광경을 멍하니 올려보았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쏟아지는 꽃비는, 저번에 처음 ‘영력’을 만들었을 때와 똑같았다.


“역시, 당신이었던 거야?”


세냐는 헛웃음을 흘리며 현자를 응시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메리’를 쳐다보고 있던 현자는, 세냐의 말에 나직이 웃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인도가 불쾌하였나?”


“갑작스러워서 당황하기는 했지.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어. 내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니까.”


“아하하. 그렇다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잠깐 인도했을 뿐이지만, 후배는 이해가 아주 빠르더군. 나로서는 살짝 방향을 가리킨 것뿐인데, 후배는 즉시 내가 가리키는 대로 힘을 흘려보냈지.”


“그게 뭐 대단하다고. 애초에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만큼의 마법사가 될 수도 없었을걸.”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지만, 인정받는 것이 기쁜 것인지 턱은 점점 위로 솟고 어깨도 으쓱 펼쳐졌다.


“왜 그 지팡이가 유폐의 마왕에게 있던 겁니까?”


멍하니 주변을 보던 크리스티나가 놀람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하고,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었다. 에드시론이 엘프의 ‘선령’에게 묻고자 했던 것이 바로 블러드 메리의 기원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보내기 위해서다.”


현자가 대답했다.


“메리에는 나의 마법이 남아 있지. 사실 그 마법이란 것은 나 외의 존재는 쓸 수가 없는 것이라, 스스로 마법사라 자처하지만 마법에 대해 참된 이해를 갖지 못한 얼간이들에게는 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하지만 세냐는 저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메리’의 밑바닥에 남은 고대 마법의 일부를 보았다. 그것은 술식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바라는 기적이나, 마나에 바라는 기원인 엘프의 마법과 비슷했다.


“아무나 쓸 수 없는 마법이라고 해도, 나의 메리는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나는 메리를 멸망의 물결에 휩쓸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노마에게 메리를 주었다.”


현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웃음을 흘렸다.


“그것에는 약속이랄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 욕심을 갖고서 찾아온 노마에게, 나를 모욕하지 마라 일갈하면서…… 아하하, 메리를 주었지. 하지만 노마가 메리를 부수지는 않았으니, 긴 세월이 흘러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지.”


“욕심이라.”


유진은 저 말을 듣는 것이 거북했다. 그는 현자를 물끄러미 보면서 물었다.


“유폐의 마왕이 네게 어떤 욕심을 보였던 것이지?”


“나를 육적으로나 성적으로 탐한 것은 아니니 질투는 하지 말거라.”


현자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뜬금없고 고약한 놀림에 유진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하지만 유진이 무어라 화를 내기도 전에 현자가 말을 이었다.


“노마는 나의 혼을 바랐다.”


“……혼?”


“놈은 마왕 중의 마왕. 몇 번의 멸망을 보았는지도 알 수 없는 태고의 마왕이다. 놈은 원한다면 마왕의 혼조차 거느릴 수 있지. 그렇게, 거느린 혼과 함께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 권능이야말로 유폐의 마왕을 더욱이 마왕답게 만든다. 유폐의 마왕은 다른 마왕들과는 달리 멸망조차 거스를 수 있다.


“멸망의 물결이 세상을 덮을 때. 나를 찾아온 노마는, 내 혼을 바라면서 마왕의 자리를 약속하더구나. 그 시대의 마왕들이 범접할 수 없는 대마왕의 자리와, 나의 기억을 보존시켜 줄 것을 약속했어.”


지금의 이야기는 카르멘의 이해를 아득히 벗어나 있다. 애초에 그녀가 아는 ‘과거’란 300년 전의 전쟁시대뿐이고,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뿐이다. 멸망의 물결? 아가로트? 상아탑의 현자? 전부 다 카르멘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카르멘은 궁금증을 표출하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다물고 들었다. 어쨌든 지금의 이야기는, 카르멘을 너무나 흥분시키는 ‘진짜’ 신화였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언짢고 모욕적인 권유였다. 나는 마왕이 되어 구차하게 연명하고 싶은 마음 따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혼이 노마의 사슬에게 종속되는 것이 싫었다.”


현자는 쿡쿡 웃으며 메리를 어루만졌다.


“그래서 욕설과 함께 메리를 던져주었지. 그토록 나의 권능이 탐이 난다면, 네가 그 잘난 ‘다음’에 알아서 써먹으라고 말이야.”


“하지만 메리에는 봉인이 있었어.”


세냐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현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 봉인은 내가 남긴 것이다. 아무리 내가 끝에 스러질지라도, 자격도 존중도 없는 무뢰배들에게 나의 메리를, 나의 마법을 남길쏘냐. 그래서 봉인을 남겼지. 정말로 재능이 있는 후학이 직접 봉인을 푼다면, 진정으로 나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 테니.”


세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현자와, 그녀의 손에 쥐어진 메리를 쳐다보았다. 지금이야 아름다운 꽃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까 전만 해도 저 지팡이는 ‘블러드 메리’라고 불리며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냐는 그, 혈관이 울룩불룩하고 뼈로 장식된 블러드 메리를 떠올리며 표정을 왈칵 구겼다.


“그 끔찍한 모양새도 당신의 취향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나의 메리에게 그런 불길한 장식을 할 리가 없지 않나! 그 모양새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뭐 그렇겠지.”


세냐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저 지팡이, 메리는 흑마법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애당초 지금의 메리에는 ‘마력’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폐의 마왕이 직접 메리를 바꾼 것이리라. 꽃을 마력의 덩어리로 바꾸어, ‘유폐의 지팡이’들에게 계승시켰다……. 왜?


‘유폐의 지팡이는 가장 뛰어난 흑마법사들이었으니까.’


블러드 메리의 기억을 보아서 알고 있다. 베리알도 그랬지만, 놈 이전의 흑마법사들도 하나같이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그런 놈들조차도 현자가 남긴 봉인은 풀지 못했다…….


“안도한 얼굴이구나.”


현자는 샐쭉 눈웃음을 지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내가 뭘.”


“설마 이 현자의 눈을 속일 수 있다 생각하였느냐? 멍청이. 나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가 훤히 보인다. 노마가 나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메리를 전리품으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았느냐?”


현자가 킬킬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유진은 그 말에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현자가 갑자기 나타나고, 블러드 메리에서 유폐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나의 메리’라고 운운하였을 때. 저런 불길한 상상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닌가?


“……네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


유진은 한 번 더 표정을 가다듬었다.


대답을 상상하거나……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지금부터 듣게 될 대답은 유진이, 아니, 아가로트가 모르는 일이다. 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에게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이다.


“잠깐.”


조용히 듣고 있던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유진은 갑자기 끼어든 카르멘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누는 모든 이야기는 카르멘이 알지 못하는 것.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기왕이면 유진으로서도 알게 하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옛날’을 넘어 지난 시대의 이야기를 현대의 사람이 들어버리면 혼란스러울 뿐이다.


“나는 듣지 않겠습니다.”


놀랍게도 카르멘이 직접 그렇게 말하였다. 그녀는 감격과 고동을 감추며 평온을 가장했다. 만약 이 자리에 멜키스가 있었다면 까마귀 우짖는 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이야기를 듣고 대화에 끼어들려 했겠지만, 카르멘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카르멘 본인에게는 특별한 자각이 없지만, 그녀를 오랫동안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카르멘이 놀라울 정도로 상식적인 사람임을 안다…….


“지금부터 나누실 이야기들은 제가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궁금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저는 두렵습니다. 저는 세상에는 굳이 알지 않아도 될 정보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카르멘은 꽉 쥔 주먹을 왼쪽 가슴에 붙이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한 정보는 저의 상상력을 제한합니다. 저를 멋대로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차분한 목소리. 유진은 놀람과 감탄을 느끼며 카르멘을 바라보았다. 괜히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위인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훌륭하다.”


현자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감탄했다.


“후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였음을 인정하겠다. 하지만 이 장소까지 초대하여 놓고 배제하는 것은 나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 그러니 나 비슈르 라비올라가 묻노니, 그대 후인이여, 이름이 무엇인가?”


“찬란히 빛나는 라이언하트 가문의 은사자. 카르멘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카르멘은 숙였던 고개를 일으키며 현자를 응시했다. 왼쪽 가슴의 사자 문양이 찬란한 빛을 발했고, 카르멘의 금색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빛을 발했다. 현자는 카르멘의 결의에 다시금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지금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만약 내게 바라는 것이 있고, 그것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나는 한 가지 그대의 바람을 들어주겠다.”


“저는 이 숲에 모험을 바라고서 찾아왔습니다.”


꾸욱. 가슴에 붙인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바라던 모험은 하였습니다. 숲을 헤매는 시간을 그리 길지 않았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은 제 평생에서 가장 신비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모험에 응당 따라야 할 ‘시련’이 부족한 것이 아쉽습니다.”


“과연. 그대는 시련을 바라는가? 묻노니, 카르멘 라이언하트여. 그대는 무슨 연유로 시련을 바라는가?”


“유진이 나아 갈 길을 함께 걷고 싶기 때문입니다.”


카르멘은 흔들림없이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결연한 대답에 유진은 다시 한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현자도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다행히도 나는 그대의 바람에 응해줄 수 있다.”


현자가 메리를 뻗었다.


콰르르르! 조금 떨어진 곳의 땅이 흔들리더니, 땅속 깊숙한 곳에서 세계수의 넝쿨이 치솟았다. 지면 밖으로 튀어나온 넝쿨이 반구체의 형태로 서로 얽히고 뭉쳤다.


“저 안으로 들어가라.”


넝쿨이 살짝 벌어지더니 통로를 만들었다.


“저 안에는 네게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줄 적이 있다. 너는 저곳에서 수십 수백 번 죽겠지만 실제로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사선에서의 체험은 네가 바라는 시련으로 부족함이 없으리라.”


“아아!”


카르멘도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저 안에 대체 무엇이 있을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 것은 먼저 듣지 않고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카르멘은 깊은 감사를 담아 현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넝쿨을 향해 달려갔다.


“저 안에 뭐가 있는 거냐?”


유진도 굳이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르멘이 들어간 넝쿨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크게 출렁거리는 것을 보니, 일단 물어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신이 있다.”


현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모두가 경악해서 현자를 돌아보았다.


“음,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군.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기억하는 거신이 있다.”


“기억?”


“실물도 아니고 본인도 아니지. 하지만 내 기억에 있는 거신의 힘은 그대로 재현했으니, 이기기는커녕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야.”


현자에게 악의는 없다. 그녀는 진심으로 카르멘의 기개에 감복하였고, 그녀가 바라던 ‘시련’을 재량대로 제공했을 뿐이다. 그럴지라도 유진은, 현자를 질렸다는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아가로트의 기억. 현자와 거신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단편적인 인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거신은 그 이름만큼 무식하게 크고 강했다. 본신의 덩치가 너무나 커다란 탓에 그럭저럭의 거구만큼 줄이고 다니기는 했지만, 그렇게 덩치를 줄여도 힘은 거의 줄지 않았다. 아가로트조차도 거신과 단순 힘 싸움은 벌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카르멘이 강하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 수준. 경계에 근접하다 해도 아직은 인간 수준. 거신에게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선을 수백 번 넘으면 천치라도 무언가를 얻는다.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천치 따위가 아니니, 더욱 많은 것을 얻겠지.”


“수백 번을 죽일 생각이냐?”


“그건 그녀의 의지에 달린 일이지. 저곳과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고, 나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정녕 의지가 강철과 같다면, 필시 시련에서 무언가를 얻으리라.”


당연히 그만큼 시달리면 얻는 것은 있을 것이다. 다만 저 방법은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굉장히 무식했다. 저런 종류의 수행은 이전에 유진도 해보았다.


라이언하트 지하에 있는 암실. 죽어도 현실에서는 죽지 않는 그 장소에서, 유진은 당시 그리던 ‘이상적인 나’의 환영과 싸웠었다. 그 수행은 유진만 누렸던 것이 아니다. 카르멘도 일찍이 암실을 극복했었다.


하지만 이번은 상대와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 암실에서의 환영과의 격차는 그럭저럭 싸울 만한 정도였는데…… 만약 저 넝쿨 안에 나타나는 것이 진짜 거신이라면- 카르멘은 일격조차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싫어도 우화할 수밖에.”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현자는 빙긋 웃으며 메리를 내렸다.


“자아, 그럼 이야기를 계속할까. 아가로트. 너는 내가 어찌 죽었는지가 궁금하다 하였지.”


“……어.”


“아하하. 나로서는 네 솔직한 생각을 듣는 것이 즐겁다만. 후배, 네게도 그렇고 말이다.”


현자는 세냐의 것과 똑같은 로브의 옷깃을 살짝 흔들었다.


“후배여. 나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를 안다. 내가 인형으로 나타났을 때, 너희가 무엇에 경악하였는지를 안다. 후배여, 너는 네 존재가, 나 비슈르 라비올라의 환생이라 생각하였던 것이지?”


“……비슷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세냐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현자 본인에게 직접적으로 저런 말을 들으니 민망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후배여, 너는 내가 아니다. 나의 혼은 진즉에 사라졌다. 이곳에 남은 것은 후배의 목소리가 불러낸 메아리일 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현자의 목소리에 어린 쓸쓸함에 유진의 표정도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물어보았고, 현자의 손에서 메리가 빛을 발했다.


꽃잎이 흩날렸다.


“아가로트, 네가 끝까지 보지 못한 끝을 보았지.”


현자가 속삭였다. 증식한 꽃잎이 격렬히 몰아치며 유진의 시야를 감쌌다.


꽃잎이 걷혔다.


시체가 그득한 황야가 보였다.


빌어먹을 환생 520화


유진은 이 황야를 알고 있다.


아득히 먼 옛날. 아가로트와 신군의 주둔지. 아가로트는 이곳에서 멸망의 마왕을 맞닥트렸다. 황혼의 마녀가, 성녀는 도망쳐야 한다고 외쳤다. 대전사도 똑같이 외쳤다. 신군 모두가 도망치고 싶어 했다.


아가로트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치고 싶었다. 저것과는, 멸망의 마왕과는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었다. 이곳에서 도망치면 안 된다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멸망을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군했고.


모두가 죽었다. 신군은 전멸했다. 대전사도 죽었다. 성녀는 신의 품 안에서 죽었다. 혼자가 된 아가로트는- 멸망의 마왕에게 삼켜졌다. 아가로트 스스로 멸망의 마왕에게 걸어 들어갔다.


이건 그다음의 일이다.


“아가로트.”


현자가 속삭였다.


“네가 뭔지도 모를 괴물들과 제법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나는 나의 문제로 무척이나 바빴지. 기억하나? 아가로트. 네가 괴물들과의 전쟁을 끝내고 오면, 우리는 함께 유폐의 마왕을 치기로 했었지.”


“그랬지.”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왕과 신이 공존하던 혼란스러운 시대. 전쟁신과 현자, 거신. 이 셋은 신좌에 오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젊은 신이었다. 그들 외에도 젊은 신은 여럿 있었지만, 저 셋은 특별하고 강했다.


“늙은이들은 네가 주도하는 전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늙은이들의 구시렁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을, 대마왕을 두려워하는 것뿐이라고 비웃었다.”


현자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나대로 전쟁의 준비에 몰두했다. 그래서 네가 증원군으로 와달라고 청했을 때, 서둘러서 준비하지는 않았다. 널 곯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전쟁의 준비에 굉장히 바쁘기도 했다.”


현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청옥색 눈동자가 유진에게 향했다. 유진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짙은 비애를 느꼈다.


“그러지 않았다면 바뀌었을까? 내가, 너의 청을 들은 순간에 바로 떠났다면…….”


“바뀌지 않았을 거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와 거신이 미리 왔다고 해도, 저것을 막을 수는 없었을 거다.”


“그랬겠지. 하지만…….”


현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의 죽음은 곁에서 직접 볼 수 있었겠지.”


멈춰 있는 세계가 시작되었다. 신군과 누르의 시체가 가득한 황야에 기괴하게 섞이는 ‘색’이 나타났다.


“멸망의 마왕…….”


세냐가 흠칫 놀라서 중얼거렸다. 그 곁에서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로사리오를 움켜쥐었고, 아니스는 신음을 삼켰다.


‘직접’ 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 색에 대한 기억이 과거의 두려움을 끌어냈다.


“나는 저것의 앞에서 울었다.”


현자가 말했다.


“너무 늦어버린 나 자신이 미웠다. 아가로트, 너를 삼켜 버린 멸망의 마왕이 증오스러웠다. 나는, 내가 이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상아탑의 현자. 신화시대 마법사의 정점. 인간의 몸으로 마법과 동화되어 신좌에 오른, 마법의 여신.


“나는 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내가 곧 마법이고, 마법이 곧 나였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멸망의 마왕에게 어떤 마법을 써야 할지, 어떻게 해야 너를 구할 수 있을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멸망의 마왕의 안에서 아가로트의 신력을 느꼈다. 다행히도 아가로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반드시 구해야 한다. 어떻게? 어떤 마법으로? 방법이 없다. 현자의 이성은 냉정하게도 그런 결론을 내렸다. 멸망의 마왕에 삼켜진 아가로트에게는 간섭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자는 그렇나 이성을 거부했다. 그만큼 아가로트를 구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밖에서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 안으로 들어간다면? 아가로트가 있는, 멸망의 중심에서…….


“멍청한 생각이었지.”


현자가 씁쓸히 웃었다.


“저 안에 들어갔다면, 나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거다. 만약…… 만약 거신이 조금만 늦게 왔다면. 나는 네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허무히 죽어버렸겠지.”


갑자기 나타난 거신의 손이 현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막는 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거신은 아예 현자의 몸을 손가락으로 감싸 쥐고서 높이 들어 올렸다.


“놓으라고 악을 쓰는 내게, 거신이 일갈했다.”


아가로트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말라.


“나도 외쳤다. 아가로트는 아직 살아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구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거신은 단호히 나를 뒤로 당겼다. 거신은, 내게 굳이 더 말하지는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나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자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녀는 짧은 침묵 동안 오래 전의 감정들을 다스렸다.


“나는 널 구할 수 없다. 거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너처럼 저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저 안에 들어가서 살아 있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에 관한 기억은 유진에게도 희미했다. 신군이 전멸하고, 황혼의 마녀가 죽고. 아가로트는, 멸망의 마왕에 대한 거대한 분노와 증오를 느꼈다.


신검을 들고 멸망의 마왕에게 걸어갔다. 세상 전부를 멸망시키기 위해 전진하는 멸망의 마왕을, 홀로 가로막았다. 멸망의 마왕이 아가로트를 집어삼켰다.


곧장 죽지는 않았다. 죽을 수가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 빌어먹고 엿 같은 멸망이란 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끝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심연을 배회했고, 흘러넘치는 마력과 색을 베어냈다.


현자의 말이 옳다. 그곳은, 누구도 살아 있을 수 없는 장소였다. 멸망 앞에서는 인간도 신도 평등하게 하찮다.


“아가로트.”


현자가 고개를 내렸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청록색 눈동자로 유진을 응시했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멸망의 마왕은 움직이지 않는다.”


받아들였다.


아가로트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멈춰 버린 멸망의 마왕을 공격해서 죽이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모든 신들이 모였고, 똑같은 답을 내놓았다. 저것은 죽일 수 없다.


“우리는 멸망을 앞에 두고 유예를 얻었다.”


만약 저것이 갑자기 나타났다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을 앞에 세우고, 세상의 모든 존재를 죽이기 시작했다면.


“아가로트. 그때의 우리는,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예’를 얻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멸망에 대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늙은이라 멸시하던 노신(老神)들이었다. 그들은 신전과 성지를 박차고 나와 유폐의 마왕에게 교섭을 청했다.


“멸망의 진군이 멈춘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도 놀라운 일이었으리라. 이전에 단 한 번도 교섭에 응하지 않던 노마는, 노신들의 부름에 응해주었다.”


그 자리에는 현자와 거신도 있었다. 수많은 신들이 모인 약속의 신전에, 유폐의 마왕은 홀로 나타났다. 아니, 강림했다. 그 자리의 모든 신들은 유폐의 마왕에게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것은 다른 마왕과 다르다. 저것이야말로 진정 ‘대마왕’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마왕 중의 마왕. 마왕을 거느리고, 마왕의 경배를 받는 마왕.


“하지만 교섭은 그리 매끄럽지 못했지. 많은 신들이 유폐의 마왕에게 물었다. 멸망의 마왕이 대체 무엇이냐고.”


“제대로 대답해 줬나?”


“아하하. 그 고약한 노마가 그럴 것 같은가? 놈은 멸망의 마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 우리가 보고 느낀 것과 똑같은 존재라 하더군. 무얼, 결국은 멸망 그 자체라는 뜻이지.”


현자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멸망에 저항할 방법은 없는가? 멸망을 뒤로 늦추거나, 물러서게 하는 방법은 없는가? 아하하, 우리는 결국 멸망을 죽이는 것은 포기했다. 치욕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으니.”


“……유폐의 마왕이 뭐라 대답했지?”


“다음.”


현자의 뺨이 씰룩거렸다. 그녀는 뒤틀리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다음을…… 대비하라고 말하더군. 저것이 나타나 버린 이상 지금은 곧 끝이 날 터이니, 다음을 대비하라고. 노마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신들은 유폐의 마왕이 남긴 말을 이해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세상은 끝이 난다. 아가로트가 죽으면, 멸망의 마왕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신이 아가로트가 했던 역할을 대신 이어받을 수 있을까? 아가로트처럼 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무의미한 제물이 되어 개죽음을 맞이할 바에는, 다른 방식으로 ‘다음’을 대비하는 것이 옳다고 의견을 모았다.


“나는 홀로 틀어박혔다.”


무엇을 해야 하나. 지금이 아닌 다음이란 것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무엇을, 다음에 남겨야 하나.


“상아탑의 모든 마법사를, 신도를 모았다. 나는 그들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


우리는 곧 죽는다.


“우리가 이룩한 지식과 마법. 모든 것을 망라하여 추구해 온 진리는, 결국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세상과 함께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는 이 세상과 함께 완전히 끝이 나버리는가?


“아니.”


현자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도달한 마법은, 우리가 추구해 손에 넣은 모든 것은 끝나지 않는다. 결코 끝나게 두지 않는다. 우리는 허무에 스러져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현자가 손가락을 들었다.


“존재를 승화시켰다. 나 자신을 거대한 그릇으로 삼았다. 나를 섬기는 모든 마법사들. 나를 신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모든 신도들을 나의 존재에 품었다.”


유진은 현자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어느새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시체가 그득하던 황야가 아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멀리, 멀리 나아가는 파도가 보였다. 해무가 암운처럼 파도를 뒤따랐다. 그 앞에.


멸망의 마왕이 나아가고 있었다.


“닷새가 지나고 멸망의 마왕이 움직였다.”


현자가 속삭였다.


“세상 곳곳에 멸망의 짐승이 나타났다. 놈들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죽였다. 인간을 죽이고, 마족을 죽이고, 짐승을 죽이고, 다른 모든 것을 죽였다.”


시체만 남은 세상을 파도가 덮쳤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가 사라졌다. 어디서 밀려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파도가 세상을 평등하게 뒤덮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현자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거대한 파도. 끝없는 해무.


그 앞에.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바다 한복판에 우뚝 선 나무는 하늘을 떠받치듯 높았다. 마치 하늘과 바다와 땅을 연결하는 것만 같았다.


“멸망과 함께 혼은 소멸해 버리는가?”


현자가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세상이 끝나고 육체가 죽을지언정 혼은 남는다. 이 세상이 새로운 다음을 맞이한다면, 망자의 혼 또한 다음으로 나아간다.”


세계수에는 윤회의 신앙이 있다.


“그럴지라도 나는 영혼을 품었다. 끝을 목전에 둔 지금의 혼과, 다음의 혼마저 품을 존재가 되었다. 아하하. 내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일지라도 그릇이 무한하지는 않아서, 모든 혼을 품을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모두 품을 필요까지는 없었지.”


세계수와 대수림에는 가히 무한에 달하는 마나와 정령이 존재한다. 유진은 현자가 ‘왜’ 세계수가 되었는지를 이해했다.


“죽어서도 신이 되려던 거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현자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신이 되려 한 것이 아니다. 나와, 모두가 신이 되려 한 것이다. 지금 와서 결과를 살펴보니, 아하하, 썩 잘 되었구나. 숲의 존재들은 태어나고 죽는 순간까지 세계수를, 우리를 신앙하지. 숲 밖의 존재들은 세계수에 관한 ‘전설’을 경외한다.”


세계수의 힘은 신성력과는 다르다. 하지만 ‘기적’은 유진도 몇 번이나 겪어보았다. 이바타나 숲의 전사들이 타고나는 가호 또한 세게수가 가진 기적의 다른 모습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세계수의 힘은 점점 커진다. 언젠가 멸망의 마왕이 다시 세상을 끝내려 할 때. 나는…… 내가, 아니, 세계수가 파도의 방파제가 되기를 원하였지.”


현자는 그렇게 말하고서 풋 웃었다.


“결국 미래란 생각하고 대비한 것과 다르게 마련이라. 설마 아가로트, 네가 인간으로 환생하고…… 또다시 마왕과 맞서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거신은 어떻게 된 거냐?”


유진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른다. 나와 마찬가지로, 다음을 위한 대비를 하였겠지만…… 녀석이 무엇을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세계수가 되면서 죽었으니 말이다.”


“…….”


“받아들이기 괴로운 얼굴이구나, 아가로트.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죽은 것은 사실인데. 아무리 나라도 혼과 자아를 유지하며 막대한 혼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죽을 수밖에.”


“메아리…….”


유진은 아까 들었던 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대체 뭐야?”


세냐가 불쑥 내뱉었다.


“나는, 나는 내가 여태까지…… 현자의 환생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야?”


“기적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까.”


현자가 대답했다. 풍경이 다시 바뀌었다. 바다가 사라졌고, 처음과 같은 초원으로 되돌아왔다. 세계수를 등진 현자는 세냐를 똑바로 보며 웃었다.


“후배여, 너는 존재의 근원부터 마나의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자가 손가락을 뻗어 세냐를 가리켰다.


“너는 나 비슈르 라비올라의 환생이 아니다. 네 존재에 나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내가 있는 숲에 왔다. 숲에 버려졌다……. 아하하. 정말로 그런가? 어느 얼빠진 인간 부모가, 이 숲까지 와서 자식을 버리나? 정말 버리고 싶다면 어디든 버리면 되었을 텐데.”


“…….”


“후배여. 나는 네가 어떻게 버려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네가 이 숲에 와서, 엘프에게 거둬져서, 마법에 입문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으리라. 후배여. 네가 지금의 네가 된 것은 필시 마나의 인도일 것이다.”


세냐는 살면서 친부모를 그리워한 적은 없었다. 갓난아이일 적에 숲에 버리고 사라져 버린 부모를 그리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하지만 현자의 말을 들으니, 평생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친부모’라는 존재들에 여러 의문이 들었다.


“이리 오거라.”


현자가 세냐에게 속삭였다.


“함께 마법의 신화(神化)를 논하자꾸나.”


빌어먹을 환생 521화


‘마나의 총아’.


그 말은 세냐의 가슴을 깊고 무겁게 울렸다.


물론, 세냐는 자신의 존재가 무척이나 ‘특별하다’라는 자각은 진즉부터 하고 있었다. 엘프들도 경악하던 마법의 재능. 세냐는 어렸을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느끼고 다룰 줄 알았다.


‘그래. 내가 이 숲에 인도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거야.’


부모가 자식을 굳이 대수림까지 찾아와서 버리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갓난아이가 숲에서 ‘살아 남았다’는 것부터가 특수하다. 야만인과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숲. 하지만 세냐는 그 무엇의 습격도 받지 않았다…….


‘마나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세냐는 주먹을 꽉 쥐고서 현자에게 다가갔다.


-함께 마법의 신화를 논하자.


그 말이 남긴 달콤한 설렘. 지금 시대에는 세냐보다 뛰어난 마법사는커녕 대등한 마법사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대마법사들을 불러 모아 신화(神化)의 연구를 하기는 했지만, 결국 연구의 중심이자 이끄는 선각자는 세냐였다.


어쩔 도리 없는 목마름이 있었다. 대등한 수준의 상대와 마법을 논하고 싶다. 특히 유진이 모론과 대련하며 수행에 몰두하였을 때, 세냐의 갈증은 점점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비슈르 라비올라. 상아탑의 현자. 신대에 마법으로 신화를 이룬, 전대 마법의 여신. 그녀가 오른 신좌는 세냐가 몹시나 갈망하는 것. 세냐는 표정을 가다듬고서 현자에게 다가갔다. 나누는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그녀를 ‘선배’라고 불러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후배의 마법은 몹시 대단하다.”


다가오는 세냐를 향해 현자가 입을 열었다.


“열등한 종류의 마법을 파고들었으면서, 후배는 나의 메리의 봉인을 넘어 신화의 영역에 이른 마법을 겉으로나마 핥았다. 마나의 정수를 정제해 냈다.”


“뭐?”


흐뭇한 얼굴로 다가오던 세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하지만 현자는 세냐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전에, 후배가 스스로 도달해 낸 마법도 찬미할 만하다. 그것은 열등한 종류의 마법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고등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그만한 경지에 이르다니 실로 대단하다.”


“뭐어?”


“유폐의 마왕. 그 노마의 마력을 억누르던 마법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노마가 본신이 아니었을지라도, 나의 메리를 오염시키고 있던 마력은 몹시도 강대하였다. 그럼에도 후배의 마법은, 노마의 마력을 훌륭하게 억제해 냈다.”


저 망할 것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지금 세냐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만이 떠돌았다.


“하지만 후배여. 나는 후배의 마법을 진심으로 찬미하면서도 동시에 걱정이 든다. 그것은, 후배의 마법이란 결국 열등함에 따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세냐는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꽥 고함을 질렀다. 슬슬 성격이 터질 때라고 생각했어서, 유진과 크리스타는 놀라지 않고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듣자 듣자 하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마법이 뭐?!”


“음?”


현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냐를 응시했다. 잠시 세냐의 표정을 살피던 현자는, 뒤늦게 분노란 감정을 이해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아, 그렇군. 후배여, 사과하도록 하지. 내 표현에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구나.”


“오해는 무슨 오해!”


세냐는 평생 저런 평가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마법이 열등해? 다른 누구도 아닌, 현명한 세냐의 마법이 열등하다고? 격렬한 감정에 따라 세냐의 머리카락이 위로 붕 떠올랐다.


“당신이! 옛날 옛적에 엄청 잘난 마법사란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법을 열등하다 평가할 자격은 없어! 나는…….”


“그만. 그만. 후배여, 진정하라. 내가 말하지 않았나.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고. 그렇다면 나에게 오해를 풀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나?”


잔뜩 화가 난 세냐와 달리 현자의 표정은 굉장히 평온했다. 오히려 그것이 세냐의 감정을 더욱 쿡쿡 찔러댔다. 현자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달래는 것보다는 오히려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음, 하긴, 어쩔 수도 없는가. 지금의 마법과 신대의 마법은 체계가 너무나도 다르니…….”


세냐가 좀처럼 화를 진정시키지 않자, 현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메리를 들어 올렸다.


“우선 후배가 가졌던 의문에 대해 답해주도록 하지. 그에 대한 답이 오해와도 상통하니.”


“의문?”


“메리의 봉인 안쪽의 마법. 그리고 엘프들의 마법. 드래곤의 용언.”


현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메리를 들어 올렸다.


“그런 종류의 마법들의 동질은 후배가 도달한 답이 옳다. 저것들에는 ‘술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적을, 기도를, 기원을.


“저런 마법들은 의지로 일으키는 것이다. 바람에 마나가 대답해 주는 것. 바라는 대로 무언가를 일으키는 것. 그것이 바로 마법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마법은 난해하며 무한하다.”


-우우우! 메리의 꽃잎이 흔들렸다. 향기처럼 꽃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세냐의 눈앞에서 도도하게 흘렀다.


어느새 세냐의 얼굴에서 분노가 잠들었다. 세냐는 호기심과 흥미로 눈을 반짝거리며 마나의 흐름을 보았다.


“엘프란 종족은 옛날부터 정령과 마나의 사랑받았다. 하지만 무한한 사랑은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엘프의 마법에는 한계가 있다.”


“……드래곤은?”


“아하하. 그 종족 또한 마나의 사랑받고 있지. 하지만 그 존재들의 마법은 세상에, 무한한 마나에 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타고난 심장에 청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드래곤의 마법은 강하다. 온전히 자신에게 바라여 이루는 마법이기에 오만하고 얕다.”


현자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하찮다.”


화아아악! 현자가 이끌어낸 마나가 세냐를 향해 흘렀다. 세냐는 잠시 주저하다가 프로스트를 들어 올렸다. 세냐는 현자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나를 끌어냈다.


“이해하였는가, 후배여.”


현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세냐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경직된 뺨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인간은 엘프나 드래곤만큼 마나에 사랑받지 못한다. 인간은 마나에 기원하여 답을 구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술식을 만들었다. 난해하고 무한한 마법을, 그를 이끌어내는 마나를, 하찮은 설계에 가두었다.”


섞이지 않는다. 세냐가 이끄는 마나는 현자의 마나와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현자의 마나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세냐의 마나를 지배했다.


“어쩔 수 없는 일임은 안다. 나도 한때는 그러했다. 신대의 마법사 대부분이, 하찮은 설계에 매달리는 머저리였다. 하지만 후배여, 후배는 그래서는 안 된다. 후배는 하찮은 마법사로 남을 셈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열등한 마법을 고집하라.”


세냐는 서클 마법식의 창시자다. 서클 마법식이 도입된 이후로 마법은 300년 전보다 발전하고, 쉬워졌다. 세냐는 그러한 업적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다.


그렇기에 현자의 말에 통감했다. 서클의 ‘한계’에 대해서는 세냐도 진즉부터 깨치고 있었다. 서클은 결국 마법을 9서클로 제한해 버린다. 세냐의 경우야 이터널 홀을 통해 9서클을 아득히 뛰어넘었지만-


“후배의 마법은 진정 무한한가?”


현자가 속삭였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후배의 마법이 진정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조차도 ‘인간’일 적에 후배만큼 마법을 다루지 못했다. 허나 후배여. 후배의 대답한 마법은 결국 인간의 마법이다. 그대가 진정 신좌에 오르고 싶다면, 인간의 마법을 초월해야 한다.”


“어떻게?”


세냐는 숨을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현자의 마나가 세냐의 마나를 인도하고 있다. 그것은 세냐로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흐름이었다. 절대률을 쓴다면 거역할 수 있을까.


‘거역할 수 있어.’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장 절대률로 현자의 인도에 거역한들 무엇을 얻나? 자존감의 충전?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잖은가.


“후배여. 말하였을 텐데. 그대는 마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현자가 웃으며 속삭였다.


“엘프의 마법은 인간이 쓸 수 없다. 인간은 엘프만큼 마나에 사랑받지 않기 때문이다. 엘프의 마법 자체가 엘프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배여. 그대는 엘프의 마법조차 익혀내지 않았나.”


“나는…… 전부 익히지는 못했어. 극히 일부만…….”


“아하하! 그때는 후배가 미숙하던 시절이지. 지금은 어떠한가?”


현자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후배는 더 이상 걸음마를 걷는 코흘리개가 아니잖은가. 장성하여 초월을 목전에 둔 입신(入神)의 마법사다. 죽어 마나에, 마법에 깃들어버린 나, 비슈르 라비올라를 반향(反響)으로 불러낸 장본인이 바로 그대다.”


낭랑한 목소리가 세냐의 존재에 깃들었다. 가빠졌던 호흡이 천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세냐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눈을 감아라.”


현자가 말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라. 만상에 흐르는 마나를 느껴라. 마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무한한 축복과 같은 사랑을 실감하라.”


세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영창과 술식은 열등한 자가 마법을 갈망하여 타협한 것. 허나 후배여, 그대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대는 마법과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 오만하다 생각하지 말라. 신위(神威)에 도달한 이에게 오만은 당연함과 같다.”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양손으로 쥔 지팡이에 기대어 몸을 낮추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세계수의 이면. 현자와 그녀를 숭배했던 신도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혼의 윤회가 이뤄지는 장소.


“의지로 바라라.”


현자는 메리를 놓았다. 메리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태고의 지팡이는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세냐에게 다가갔다. 메리가 끌어낸 흐름은 어느새 세냐를 휘감고, 세냐의 마나와 조화를 이루었다.


“마나에 청하라.”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 존재에 스며들고, 울리는 것만 같은 목소리.


‘아아.’


이제야 알았다. 저 목소리는 단순하게 그런 ‘느낌’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스며들고 울리는 것이다. 그녀는, 현자는 아득한 옛날에 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마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놀라워.”


목소리를 멀게 느꼈다. 육체조차 멀게 느꼈다. 세냐는 순수한 정신체가 되어 자신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들고 뒤를 보았다.


거대한 원이 보였다. 수백 수천, 그를 아득히 넘어서는 원. 무수히 많은 원이 하나의 원 안에 갇혀 있다. 무한한 마나, 무한한 서클, 분열하고, 얽히고, 흩어지고, 다시 분열하고, 얽히고…….


이터널 홀.


오래전, 세냐는 이것을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서클 마법의 궁극점이라고 확신했다. 틀림없이 마법의 진리에 닿았다고도 생각했다. 이 무한한 서클이 일으키는 변화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고 자신했다.


“아하하.”


세냐는 그, 철없던 시절의 마법을 바라보며 그만 웃어버렸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세냐는 웃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터널 홀에 다가갔다. 이터널 홀의 뒤. 우주가 펼쳐져 있다.


그것은 세냐가 최근에 이뤄낸 마법, 절대률이다. 다행스럽게도 절대률은 이터널 홀보다 훨씬 나았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부끄럽고 민망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것은 절대를 자처하면서도 절대가 아니다. 우주로 표현하였으나 우주가 아니다. 이터널 홀을 포용할 만큼 거대하지만, 무한에는 아득히 부족하다. 세냐는 성큼성큼 다가가며 이터널 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빠직!


이터널 홀을 이루는 서클들에 균열이 생겼다. 이윽고 감히 무한을 들먹였던 서클들이 우루루 무너져 내렸다. 붕괴는 이터널 홀뿐만 아니라, 그 뒤에 펼쳐진 우주에도 번졌다.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세계는 세냐에게 존재하던 심상이었다. 그녀가 평생을 가꾸어온 마법의 체계가 붕괴했다. 하지만 세냐는 조금의 아쉬움도 느끼지 않았다.


“고마워.”


지금의 세냐를 만든 것은 저 마법들이다. 세냐가 평생을 추구하며 소중하게 가꾸어온 마법들.


하지만, 이제는 부수어야 한다. 붕괴한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 모든 것은 결국 세냐에게 녹아들어 함께 나아가게 된다.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세냐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빠르게, ‘나’가 작아졌다. 세냐는 티끌조차 되지 못할 만큼 작은 존재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보다 작아졌다.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한 곳.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


눈을 떴을 때. 세냐는 마나의 본질을 보았다. 이 작고 작은 세계에서 세냐의 존재는 더욱이 작았다. 하지만 삼켜지지 않았다.


이해했다. 세냐는, 자신에게 얽힌 마나의 사랑과 그에 따른 운명을 느꼈다. 현자가 말한 대로였다.


“나는 어떻게든 이곳에 도달했을 거야.”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런 세냐에게 있어서 저 말은 너무나도 오만하다. 하지만 세냐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결코 오만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하다. 세냐는 활짝 웃으며 마나를 끌어안았다.


모든 마나가 똑같이 세냐를 안아 주었다.


* * *


“후우우우…….”


현자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손으로 턱을 괴고서 앞을 보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이해가 빠르군.”


설마 조언한 즉시 작고 작은 마나의 세계에 도달할 줄이야. 현자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인도한 것 아니었냐?”


유진은 현자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세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냐가 주저앉았던 자리에는 개화하지 않은 꽃봉오리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메리와 세냐의 마나가 뒤섞이며 만들어낸 마법의 꽃봉오리. 유진은 눈에 힘을 집중하여 꽃봉오리의 안을 엿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도하여 곧장 입신에서 신역(神域)에 도달하게 만든다면 나야말로 절대신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겠나?”


현자는 헛웃음을 흘리며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단순히 방법을 알려주고 길을 가리켰을 뿐이다. 그런데 저 터무니없는 후배는 내가 알려준 방법을 즉시 체화하고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가 버린 것이다.”


“나도 할 수 있나?”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세냐나 현자와는 한참 떨어지기는 하지만, 유진도 마법은 익혔다. 사실 비교 대상이 너무 뛰어난 것이지, 유진도 인간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대마법사다.


“아서라.”


현자가 끌끌 웃으며 말했다.


“성품과 마찬가지로 신성(神性)도 알맞아야 하는 법. 아가로트, 네가 이룩한 신성은 나와 후배와는 맞지 않다.”


“쟤가 마법의 여신하고, 내가 마법의 남신하면 되는 것 아냐?”


유진은 농담 삼아 그렇게 말했지만, 현자는 정색하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정말……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는군…….”


유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환생 522화


“그런데.”


현자가 히쭉 웃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유진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은색이라기에는 조금은 칙칙한 잿빛 머리카락. 황금보다는 맹수의 것과 닮은 금색 눈동자.


“참으로 훌륭한 몸이구나.”


마치 미술품을 감상하듯 집중해서 보던 현자는 가벼운 탄성을 섞으며 말했다. 그 말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 비슷한 기분을 느꼈기에,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았다.


“…….”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유진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상식적이고 존경할 만한 위인인 카르멘은 넝쿨 안에 들어가 있다. 상식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세냐도 지금은 꽃봉오리 안에서 마법의 신역에 도전하고 있다.


남은 것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뿐. 하지만 그녀들이 이런 문제에서 과연 유진을 도울 것인가? 오히려 현자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유진을 희롱하는 것에 재미를 붙일 수도 있다…….


유진은 그렇게나 두려운 상상을 하며 크리스티나 쪽을 힐긋 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크리스티나의 표정인 평온하고 얌전했다. 오히려 그녀는 멀찍이 둔 거리를 유지하며 이쪽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이러고 있는 것에는 몇 개의 이유가 있었다. 아득히 오래전의 ‘신’인 현자에 대한 존중. 크리스티나는 유진과 현자의 재회에 괜히 말을 섞어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현자의 말에 침묵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현자가 유진에게 못되고 모욕적인 말을 한다면 당연히 발끈하겠지만…….


“오래전의 몸도 무척 훌륭하였지만, 후후. 지금은 그때와 아주 다른 매력이 있어. 아니, 아주 다르지도 않은가. 섞여서 더해졌다고나 할까…….”


“크흠…….”


“후후후. 옛날의 얼굴도 마음에 들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의 네 얼굴이 더 취향에 맞는다. 옛날 네게는 귀여운 맛은 없었거든. 아가로트. 너는 네 얼굴을 기억하는가?”


“조…… 조금은.”


“덩치도 우락부락하고, 얼굴도 남성미가 너무 가득했지. 선도 굵직하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 모습은 아주 보기 좋구나. 덩치도 적당하고, 얼굴이 특히 마음에 들어.”


현자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렇게 말이 이어질 때마다 유진의 얼굴은 점점 붉어져 갔다.


물론 유진도 자신의 얼굴이 잘생겼다는 자각은 가지고 있다. 그런 종류의 자각은 10살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특히 현자 같은 인물에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들으니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애당초 유진은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성격도 제법 다른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현자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네가 아가로트의 환생인 것은 맞지만, 아가로트와 정말로 똑같은 인물인 것은 아니니까.”


“……뭐…… 그렇지.”


“아하하!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애당초 내가 제멋대로 네게 아가로트를 투영하고,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니. 무얼, 이러한 행위는 내 짓궂은 욕심과 미련이지.”


현자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진은 잠시 동안 현자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만약 아가로트였다면 지금 같을 때 뭐라고 했을 것 같나?”


“음?”


“아니, 그냥 궁금해서.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


“일단 나를 자빠트렸을 거다.”


현자가 고민 없이 즉답했다. 유진은 너무나 많은 것이 생략된 것만 같은 대답에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왜? 왜 자빠트리는 건데?”


“그야, 내가 네 몸에 흥미와 호감을 말했기 때문이다. 아가로트는 그런 쪽에서는 아주 저돌적이고 화끈하였지. 좋다는 상대를 거르지 않았어.”


유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물었다가는 현자의 입에서 아주 엄한 이야기를 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멜의 전생은 난봉꾼이었던 모양입니다. 전쟁의 신이었다더니 사실은 음탕한 색마였던 것입니다. 지금의 하멜이 그런 천성을 타고나지 않아 다행입니다.]


멀찍이서 듣고 있던 아니스가 투덜거렸다. 크리스티나는 말없이 손을 모으고서 유진과 현자의 대화를 경청했다.


‘하지만 저는 아주 조금은 유진 님이 음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예?]


‘오해……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주, 아주 조금만입니다. 적당히…… 저와 시스터 정도로만…….’


[맙소사……! 크리스티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저희가, 아, 아니, 제가 음탕한 것 같잖습니까!]


아니스가 진심으로 당황하여 꽥 비명을 질렀다.


예전의 크리스티나는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름의 변명은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최소한의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적잖은 아쉬움을 느끼며 유진을 쳐다볼 뿐이었다.


“음.”


현자가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꼭 그렇지도 않았군. 유일한 예외가 있었어.”


“……예외? 무슨 예외?”


“자빠트리는 상대 말이다.”


그 순간. 유진은 현자의 목소리에서 ‘짜증’을 느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표정도 몹시나 노골적이었다. 그만큼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니, 유진도 저것이 어떠한 감정인지 알 수 있었다.


질투.


“아가로트, 너는 좋다는 상대를 거르지 않았다. 상대가 바란다면 거절하지 않고 정을 통하였다. 하지만, 그런 네가 유일하게 예외로 둔 계집이 있었다.”


유진의 표정이 굳었다. 그 ‘예외’가 적용된 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황혼의 마녀.”


현자가 여전히 눈썹을 찡그리고서 내뱉었다.


“그 계집은 나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로 불쾌하고 짜증을 유발하였지. 사도(邪道)의 마법을 파고들어 극한에 이르고, 신역까지 목전에 두었던 계집. 물론 그 계집이 노리던 신좌는 아가로트, 네가 코앞에서 박살 내 버렸다. 만약 그 계집이 바라던 대로 신좌에 올랐다면, 마왕조차도 비웃을 악신이 되었을 거다.”


“…….”


“나는 네게 몇 번이고 경고했었다. 그 마녀는 몹시도 악독하여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르니, 절대로 곁에 두지 말라고. 아예 죽여버리던가. 혹 죽이는 것이 마뜩잖다면, 내게 넘기라고 말이다. 하지만 너는 내 조언을 무시했다. 내가 이유를 물을 때마다, 네 대답은 대부분 똑같았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지?”


“재밌으니까.”


현자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의 너는 정말로 재미 때문에 마녀를 거두어 곁에 두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네가 단순 재미 때문에 마녀를 곁에 둔 것이 아니란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기억조차 희미한가?”


“……아니.”


“아하하! 거 보아라, 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말하면서. 너는 마녀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게 가지고 있구나. 그만큼 마녀가 네게 특별했다는 것이다. 다른 여자는 물론이고, 나, 비슈르 라비올라보다 그 마녀를 특별히 여긴 것이다.”


현자는 생전에 황혼의 마녀가 싫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아가로트가 마녀를 가벼이 품었더라면, 이만큼 질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가로트는 마녀를 품지 않았다. 마녀는 몇 번이고 아가로트를 유혹하였지만, 아가로트는 끝내 마녀를 품지 않았다. 그것은- 현자를 더욱이 씁쓸하게 만들었다. 정말 우스운 것은, 품지만 않았다뿐이지, 아가로트와 마녀는 몇 번이고 서로의 알몸은 보았다는 것이다.


“왜였을까.”


현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의 네게 물어도 대답은 알 수 없지. 하지만, 하지만 아가로트. 이것이 정답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다. 너는 마녀와의 관계를 부수고 싶지 않았다. 너는 욕심이 많았다. 바라는 것을 놓기 싫어했다. 너는 마녀의 배신을 기대해서 거두었다. 애증이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현자는 그렇게 말하며 유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탄이다. 서로를 곁에 두고, 마음을 살피며, 무언가를 기대하고, 최후에는 함께 죽었지. 나는 너와 그러지 못하였는데.”


“덕분에 지금의 내가 고생하고 있지.”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황혼의 마녀는 환생해서 내 적이 되었거든.”


“환생.”


현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마녀를 무척이나 싫어하였지만, 그 운명만큼은 얄궂어 가엽군.”


“궁금하지는 않나?”


“무척이나 궁금하지. 하지만 묻지는 않으마. 너도 말하지 말아라.”


“어째서?”


“나는 결국 잔재조차도 못 될 메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현자의 얼굴에는 의외로 미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후배를 신역에 인도하는 것으로 나는 큰일을 하였다. 머잖아 나는 다시 사라져 버리겠지. 어쩌면 이번을 계기로 하여 세계수의 안에 가냘프게나마 의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아하핫, 살아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처지다.”


“…….”


“과거는 과거로 두는 것이 좋다. 네가 아가로트가 아니듯, 지금의 마녀도 그때의 마녀가 아니겠지. 그것이면 된 것이다. 하지만…….”


현자가 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유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가엽구나.”


“……무엇이?”


“죽어도 안식을 갖지 못한 점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와 너는 여러 가지고 다르다고 생각한다. 네가 짊어진 것이 나보다 훨씬 무거워. 나는 죽었지만, 너는 죽었음에도 다시 살아났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도 먼 과거의 업을 잇고 있어.”


뺨을 더듬던 손이 움직였다. 그 순간에 현자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르구나.’


과거는 과거로 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현자는 눈앞의 남자가 아가로트이되 아가로트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를 아가로트라 부르는 것은, 결국은 현자의 욕심과 미련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련과 욕심으로 눈을 하나씩 가릴지라도, 결국에는 받아들이게 된다. 눈앞의 남자는 아가로트가 아니란 것을.


“그대여.”


현자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름을, 내게 들려다오. 내가 기억할 수 있게 속삭여 다오.”


질문에 어린 무게를 느꼈다.


세상이 멸망하고 새로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시간. 그 시간 동안 세상을 위해, 언젠가의 멸망을 대비하고자 세계수로 존재했던 것이 바로 그녀다. 유진은 저 목소리에 어린 애환에 짓눌려 버릴 것만 같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말했다. 현자가 바라던 대로 이름을 말해주었다. 이름을 말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현자가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나는 그대가 어떻게 환생하였는지 모른다. 왜 이런 과중한 업이 너를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르는 것이 아니야.”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든지 하지 않을 수 있었어.”


300년 전에.


하멜 다이너스였을 때.


전쟁에 부모님을 잃었을 때. 복수를 다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시대 대부분 사람이 그러했듯, 목숨이라고 건진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쥐 죽은 듯이 살 수도 있었다.


하멜은 그럴 수가 없었다. 복수를 다짐했다. 이 개 같은 전쟁을 끝내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일으킨 모든 마왕을, 세상을 개같이 만든 모든 마족을, 마(魔)에 관련된 개새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유진 라이언하트로 환생한 뒤에.


전생을 개같이 살았다. 개고생만 잔뜩 하고 죽어버렸다. 마왕은 다 죽지 않고 살아 있지만, 그래도 세상은 굉장히 평화로웠다. 전생처럼 고생할 필요 없이 살 수도 있었다. 전생에 고생을 하였으니 이번 생은 편하게, 나만을 위해 살 수도 있었다.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유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전생의 결심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생사도 알 수 없는 동료들에 대한 걱정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모든 것보다, 유진은, 그냥.


마왕을 죽이고 싶었다. 불완전한 평화를 바라지 않았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멸망의 마왕을, 유폐의 마왕을, 가비드 린드먼을, 누아르 제벨라를, 라이자키아를, 아이리스를, 그 외에 모든, ‘적’을 죽이고 싶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현자가 웃었다. 지금 그녀의 미소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지만, 눈동자에는 웃음보다 슬픔이 어려 있었다.


“네 살의가 온전히 너의 것인가?”


“…….”


“그 살의부터가 아가로트의 영향일지도 모르지. 너는, 놈은 틀림없는 전쟁의 신이었으니.”


“선택은 내가 했어.”


유진도 자각하고 있다.


마왕과 마족에 대한 거대한 살의. 300년 전 전쟁에서 무언가를 잃은 사람은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하멜은 굉장히 특별했다. 온갖 전투와 전쟁을 겪은 마족들조차도 하멜의 살의에 기겁하며 물러섰을 정도다. 그, 누아르 제벨라까지도.


“계기야 여럿 있겠지. 내가 겪은 일. 전생부터 넘어온 천성. 하지만 선택한 것은 결국 나야.”


“아아…….”


현자의 손이 유진의 어깨를 잡았다.


“결국은 네 운명이 기구한 것이다. 최후조차 평온하지 못했을 텐데. 몇 번을 죽어 살아나도 똑같이 평온하지 못해.”


“이번은 다르겠지.”


유진이 대답했다.


현자의 팔이 유진을 끌어안았다. 유진도 말없이 현자를 끌어안았다. 둘은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를 안아주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네 적은 너무나도 강하다. 마왕 중의 마왕인 대마왕이 너의 적이며, 멸망의 마왕은 마왕이란 호칭이 모욕일 존재다. 나와 거신을 비롯해, 모든 신들은 너처럼 멸망을 붙잡지 못했다…….”


현자가 속삭였다.


“그러니 가호를 주마. 끔찍할 정도로 강한 적들과 싸울 수 있을 가호를. 부족한 너의 신격에 보태 넣을 신위를.”


“…….”


“그러니 너도 잊지 말아다오. 죽은 내가 아가로트를 잊지 않았듯. 지금 네 이름을 기억하듯.”


현자의 손이 유진의 등을 지그시 눌렀다.


“상아탑의 마법사들을. 나의 신도들을. 그리고 나의 이름을. 현자라 불리던, 비슈르 라비올라를. 그 모든 이름을 안고서, 의지를 이어다오. 우리는 패배해 죽었을지언정 멸망하지 않았음을.”


“그래.”


유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억할게.”


그 대답에 현자가 빙그레 웃었다.


녹색의 빛이 유진과 현자를 휘감았다.


빌어먹을 환생 523화


선포


“그래서.”


시엘의 눈동자가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 가호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뭔데?”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도 시엘과 똑같이 빛나고 있었다. 평소의 대부분을 진중한 모습으로 있는 길레이드조차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눈을 어린아이처럼 빛냈다.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야.”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현자에게, 세계수에게 직접 받은 가호. 하지만 유진도 이 가호를 대체 어떤 식으로 써먹을 수 있는지를 잘 알 수가 없었다.


“멸망의 마왕과 맞설 때 도움이 될 거다…… 라고 들었을 뿐이야. 정확히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느냐고는 물어봤지만, 대답이 영 애매하단 말이지.”


-유진 라이언하트.


-이 가호는, 네가 그 순간에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을 들어줄 것이다.


“구체적이지는 않은가.”


도중에 끼어들지 않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길레이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네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겠지.”


“예.”


유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애매모호한 가호에 대해서는 유진도 여러 번 생각했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이 가호는 ‘기적’을 강제한다. 바라는 것에 따라 강제적으로 기적을 일으킨다. 이전 시대를 넘어 기나긴 시간을 존재해 온 세계수의 힘과 신앙. 또 세계수를 이루는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의 마법.


멸망의 마왕과 맞서는 순간. 세계수의 모든 것이 유진이 바라는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세계수를 매개체로 사용하여, 절대적인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는 쓸 수 없는 건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기온이 물었다.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는 가호가 아니니까요.”


유폐의 마왕은 자력으로 쓰러트려야 한다.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가호가 있더라도 멸망의 마왕과 싸움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세냐 님이랑 카르멘 님은 언제쯤 돌아오시는 거야?”


이번에 질문한 것은 시안이었다. 함께 세계수로 떠났지만 돌아온 것은 유진과 크리스티나와 메르, 라이미르아 넷뿐. 세냐와 카르멘은 아직 세계수의 안에 있다.


“나야 모르지.”


본래는 유진도 세계수의 안이나, 엘프의 영지에서 둘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자가 유진의 등을 떠밀었다. 카르멘이 거신의 기억에 들이박는 것은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하지만 세냐의 우화(羽化)에는 얼마큼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이미 후배는 작고 작은 마나의 세계에 도달했고, 그곳에서부터 마법의 골자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평생 경험하며 쌓아 올린 마법을 무너트리고, 진정으로 신역으로의 등반에 오른 것이다.


-그 세계는 도달하는 것이 가장 고되고 난해하다. 이해 빠른 후배는 나와의 대화를 통해 단번에 그 세계에 도달하였지.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유진 라이언하트. 후배가 신역을 등반하는 동안, 네가 이곳에 머무는 것은 시간을 헛되게 쓰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유진도 거기서 마냥 시간만 때울 생각은 없었다. 세계수가 존재하는 그 땅은 세상에서 가장 마나가 풍부한 곳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터. 그러니 유진은 마나의 수행에 몰두할 생각이었지만…….


-참으로 미련한 짓을 하는구나……! 이미 그릇을 골백번 채우고 남을 마나를 가지고 있으면서 뭐하러 굳이 마나를 더 수행하는가? 이 비슈르 라비올라가 보건대, 유진 라이언하트. 그대는 더 이상 마나의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그것에 눈길을 돌리는 것부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진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이미 진즉부터 마나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있다.


-멍청한 그대여, 후배가 이름 붙인 ‘영력’을 탐내는가? 그것은 각자 다르게 변질한 마나와 마력의 교집합에서 끌어낸, 지극히 순수한 정수다. 그 원천(源泉)을 다루는 것부터가 마법의 신역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대는 마법의 신위에 오를 수 없는 몸. 이곳에서 아무리 명상해 봐야 결코 원천의 정수를 손에 넣을 수 없다.


-또한, 그대가 이 땅에 있는 것 자체가 지금의 그대에게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씩 해가 될 수도 있단 말이다.


그 말만큼은 유진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고 묻자, 현자가 엄한 얼굴로 유진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세계수의 신앙은 틀림없는 진짜. 아주, 아주 오래된 원시 신앙이다. 반면에 그대는 어떤가? 신격 자체는 혼에 새겨졌을지라도, 이 시대에서 그대의 신앙은 이제 갓 태동을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 그대가 이 땅에 오래 머무르다가는 신앙 통째로 세계수에 잡아먹힌다. 그대의 신앙이 세계수에 귀속된단 말이다.


면박과 함께 쫓겨났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대화는 나누었다.


언젠가, 만약 가능하다면. 다시 찾아오겠노라고.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인 뒤에. 놈들과의 전투가 어땠는지를 들려주겠노라고.


-그때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면.


현자는 깔깔 웃으며 유진을 배웅했다. 그대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현자의 태도는 쾌활했다.


비슈르 라비올라의 마지막이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한번 끝났음에도 그녀는 메아리가 되어 세냐를 인도했다. 그것만으로 비슈르는, 현자는 만족을 얻었다.


‘세계수만큼이나 빛도 오래된 원시 신앙이야.’


하지만 빛에 신앙을 빼앗긴 적은 없다. 그러니 더더욱 빛의 존재가 미심쩍다. 신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힘의 덩어리란 것은 눈치챘지만, 현자조차도 빛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알지 못했다.


“으흠.”


길레이드의 곁에 앉은 애니실라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식사를 시작합시다.”


지금 유진이 있는 곳은 라이언하트의 본가의 식탁. 잠자코 이야기만 듣고 있던 제하드가 자연스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진이 휘말린 사건들에 시선과 감정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아들을 너무나도 믿고 있을 뿐이다. 카르멘을 제외한 본가 식구들 전원이 모인 식탁이다 보니 니나가 직접 시종들을 지휘했다. 유진은 식탁에 요리와 식기를 배치하는 니나에게 한 번 눈을 찡긋거려 주었다.


“…….”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자, 식당 밖에서 놀고 있던 메르와 라이미르아도 들어왔다. 아니, 한 명 더 있었다. 둘은 자신들보다 훨씬 키가 큰 아일라 루하르의 손을 나눠 잡고서 식탁에 다가왔다.


‘저게 12살…….’


얼마 뒤에는 13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몸……. 아일라가 들어오자 시안이 즉시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섰다. 그는 익숙한 얼굴로 아일라의 손을 넘겨받고, 식탁에 인도하여 직접 의자까지 빼주었다.


그리고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애니실라에게 다가갔다. 자연스레 유진의 시선은 메르와 라이미르아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저 두 꼬맹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12살, 13살로 보이지만 사실은 각각 200년은 족히 묵은 노물이다…….


“자아, 이리 오렴. 오늘 디저트는 너희들이 아주 좋아하는 초코 타르트란다.”


그런 노물들을 40대의 애니실라가 귀엽게 여기고 있다…….


유진은 이 불편한 진실을 그리 의식하고 싶지 않아서 얌전히 식기를 잡았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애니실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이가 무어가 중요한가? 애니실라는 손주를 가지고 싶었고,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애니실라는 옆에 앉힌 두 소녀에게 손수 냅킨까지 둘러주었다.


“크리스티나 언…….”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나올 뻔한 말을 급히 수습했다.


“……성녀는 왜 루하르에 돌아간 거야?”


“내 성상 세우러.”


“?”


돌아온 대답에 시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뭐라고 한 거야?”


“성상.”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기를 썰었다.


“빛의 광장에 내 성상을 세우겠대. 대성당들에도 세워놓고.”


“…….”


“교전에도 나에 관한 내용을 추가한다더라.”


“그, 유진, 네가 직접 가야 하는 것 아니야?”


기온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가면 죽고 싶어질 겁니다.”


시무인에 성상을 세울 때의 기억이 났다. 드워프와 수많은 군중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던 때.


떠올린 것만으로도 당장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한 며칠 동안은 아무도 만나지 않는 장소에 틀어박히고 싶었다.


만약 유라스에서 새로운 성상을 만든답시고 포즈를 취하거나, 대중들 앞에서 성인다운 연설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죽고 싶어질 거다. 신앙의 증폭에 필요한 일일지라도 죽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뭐…… 내가 직접 안 가도 크리스티나가 알아서 하겠지…….”


아니스까지 붙어 있으니, 조금 과하게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숭배를 만들기 위해서 저런 종류의 폭주는 용납해야 한다.


“이런 것도 오랜만이구나. 너는 항상 다른 누군가를 함께 데리고 와서 나를 무척이나 난감하게 하였는데 말이야.”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위해 음식을 접시에 직접 덜고 있던 애니실라가 중얼거렸다. 확실하게 뼈가 있는 말이라 유진은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당분간은 어디 안 가고, 본가에서 지내는 거야?”


“아마도.”


“그럼 내 검이나 봐줘.”


“나랑은 대련도 해.”


시안과 시엘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유진은 음식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세냐와 카르멘, 성녀들이 돌아올 때까지는 본가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괜히 밖을 싸돌아다녔다가 하멜이 어쩌고 하며 다가올 사람을 상대하기도 싫었다.


‘모론은 한번 보러 가야 하는데…… 아니, 꼭 그럴 필요도 없나? 어차피 아만 국왕이 전쟁의 승리는 전했을 테니까.’


정 필요하다면 모론 쪽에서 연락이 왔을 터. 모론이 머무는 레헤인야르는 멀어도 너무 멀어서, 솔직히 직접 가기가 귀찮았다.


‘당분간은 본가에 지내면서 신앙과 신력이나 굴려봐야겠어.’


하우리아 전쟁 이후로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추이는 체감할 수 있다. 신력이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그렇지만,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신검’을 휘두르는 것뿐이다. 발검의 횟수가 3번에서 5번으로 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도저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애초에 아가로트 본인은 신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는데도 멸망의 마왕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꼴랑 5번 휘둘러 봤자…… 멸망의 마왕은커녕 유폐의 마왕도 못 잡을 것 같은데.’


그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신력을 검 외에 다르게 쓸 방법. 아가로트는 신력을 능숙하게 다루며 누르를 학살했고, 성지를 만들어 신군에 축복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진은 아직 신력 자체를 다뤄낼 수가 없었다.


-신력을 다루는 방법? 바보 같은 그대여, 그것은 홀로 도달해야 한다. 나로서는 조언이 불가능하다. 설령 할 수 있을지라도 하고 싶지 않다.


이것에 관해서도 현자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오히려 그런 질책만 들었다.


유진은 쯧 혀를 차며 빈 잔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니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의 잔에 술을 콸콸 부어서 가득 채워주었다. 유진은 가득 찬 잔이 넘치지 않도록 들어서 입가로 가져갔다.


‘붙들어보면 뭔가 방법이 나오겠…….’


술을 반쯤 마셨을 때.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문을 돌아보았다. 조금 지나서 식탁에 모여앉은 사람들이 문을 쳐다보았다.


아직 저 문은 얌전히 닫혀 있지만, 조금 지나서 벌컥 열리게 될 것이다. 급하게 다가오는 발소리 덕에 다들 그 사실을 예측했다.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헤자르 경?”


길레이드는 동요하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수십 년 동안 본가를 섬기고, 작년부터 새로이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이 된 헤자르.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급히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식사를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괜찮네. 자네가 직접 뛰어온 것이라면, 그만큼의 이유가 있는 일일 테니.”


길레이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인가?”


“조금 전. 헬무드 제국의, 가비드 린드먼 공작에게서부터 선포가 있었습니다.”


“선포?”


“예.”


헤자르가 고개를 들었다.


“……린드먼 공작이 유진 님과의 결투를 바란답니다.”


그 말에는 유진도 입이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헤자르가 내뱉은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선포, 결투. 저 노골적인 단어들에 오해의 여지는 없다.


그래서 더더욱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웠다. 가비드 린드먼. 유폐의 칼. 헬무드 제국의 대공. 그런 자식이, 직접 결투에 대해 선포했다고?


“그 새끼가 미쳤나?”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다른 마족이 저런 설포를 해왔다면, 유진도 지금 같은 기분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선포한 것이 ‘가비드 린드먼’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럴 수가 없다. 유진이 알고 있는 가비드 린드먼이라는 마족은 절대로 저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당초 저 선포는 유폐의 마왕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물론 유폐의 마왕은 휘하 마족 중 누군가가 유진에게 결투를 선포하든 신경은 쓰지 않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바라는 것은 유진이 바벨을 오르는 것뿐. 유진이 바벨을 오르지 않는다면, 유폐의 마왕은 움직이지 않는다.


가비드는 유폐의 마왕을 섬기는 기사다. 300년 전부터,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놈의 모든 사고와 행동은 ‘유폐의 마왕’에게 맞춰져 있다. 칼로서, 기사로서, 대공으로서. 유폐의 마왕이 어전에서 유진을 기다리기로 했다면. 가비드도 똑같이 어전에서 유진을 기다린다. 가비드는 그런 놈이다.


‘유폐의 마왕이 명령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놈이 이제 와서 생각을 바꿀 리가 없거니와, 유폐의 마왕이 정말로 생각을 바꾼 것이라면 굳이 가비드에게 결투를 선포하라는 명령은 하지 않을 것이다.


‘300년 전처럼 대뜸 전쟁을 일으켰겠지.’


그렇다면 결국 이 결투는 가비드의 독단이라는 것인데,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그 우직하고 답답한 놈이 유폐의 마왕의 뜻을 거스른 것일까.


‘나를 죽이고 싶어서.’


정말 그것뿐이라면 하우리아에서 죽였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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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소리 말고 가서 자라.” “이익…… 본녀가 친히 널 걱정해주는 것인데……!” “네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잖아.” “보, 본녀가 왜 무서워한다는 거냐? 본녀가 흑룡공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다. 구, 굳이 무서운 것을 꼽자면…… 그…… 흑룡공이 널 한입에 잡아먹는 것이 무섭구나.” 악몽에 대한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산 채로 무언가에게 삼켜지는 악몽. 라이미르아는 떨리는 몸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음…… 만약…… 만약에 말이니라. 흑룡공이 널 꿀꺽 삼키려 한다면, 본녀가 용기를 내서…… 음…… 흑룡공에게 널 삼키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겠노라.” “이상한 말 하네 또.” “계속 들어라……! 그러니까, 음, 흑룡공을 죽이려 드는 네가 죽지 않게끔, 이 용공녀가 직접 간청하겠단 말이니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너를 본녀의 시종으로나마 목숨을 부지하게끔 해줄 것이니라.” 평소라면 라이미르아의 헛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고 홍옥을 한 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과,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만약에 말이니라. 보, 본녀가…… 무언가에게 삼켜지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널 그 무언가의 아가리에서 끄집어 내주마.”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로서는 그 무언가가 대체 무언지를 모르겠지만.” “보…… 본녀도 그런 것은 모른다.” “네가 와작와작 씹혀서 죽으면 어떡하고?” “끔찍한 말은 하지 말거라!” 라이미르아가 빽 고함을 질렀다. “어쨌든, 이건 너와 본녀의 약속이니라. 알겠느냐?” “그래, 그래.” 별것 아닌 대답이지만 라이미르아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라이미르아가 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자, 유진의 망토 틈 사이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메르와 눈이 마주쳤다. “흠. 저렇게 부르니 거절할 수가 없느니라.” 라이미르아는 총총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망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악!” 들어간 즉시 망토 사이에서 라이미르아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 건방진 애새끼. 네가...

Ch1

 프롤로그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쪽팔려 미칠 것 같은 일이지만. 나는 정말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그렇게 착각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남들보다 실력이 느는 것도 빨랐다. 하지만 쉬운 것은 처음까지. 처음에는 남들보다 빠르게 늘었어도, 도중부터는 남들처럼 늘어져 버린다.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럴 수도 있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잖아.  나는 할 수 있어. 천재니까. 결국에는 알고 싶지 않던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철부지의 우스운 착각을 깨부숴준 것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천재와 만난 덕분이었다. 자기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던 우물 안 개구리. 내가 나의 작은 우물 안에서 우월감에 취했을 때. 진짜 천재는 이미 넓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천재가 싫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남도 당연히 할 수 있단 듯이 지껄이는 얘기를 듣다보면 살의가 치솟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건, 지보다 못난 놈을 무시하려 뻗대는 것이건.  여하튼, 들으면 좆같은 기분이 든다. ‘질투하는 건가?’ 질투는 씨발아. 네가 말을 좆같이 했잖아. 그래서 나도 좆같이 굴었는데 뭔 놈의 질투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냥... 네가 안타까워서.’ 안타까워? 뭐가?  ‘조금 더 노력하면...’ 네가 뭘 안다고 노력 운운하는 거냐.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야, 나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네 기준이 존나게 높은 거야. 어떻게 모든 사람이 너처럼 할 수 있겠냐? 네가 천재라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너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알겠냐?  난 너처럼은 못해. * “꺼져.”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가슴에 뚫린 구멍. 그 귀한 엘릭서를 들이 ...

Ch13

 오르투스의 위치를 특정했다. 거기서부터는 모든 것이 간단했다. 일행은 관측병과 경계병의 눈을 속이고서 오르투스가 있는 방의 문 앞에 도착했다. 셋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문을 열었다. 오르투스 하이만. 그는 집무용 책상 너머에 앉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손에 쥔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적고 있던 모양이다. “음?” 예고 없이 문이 열린 것이다. 오르투스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3명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3명. 누구인지는 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다른 배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이곳에? 아니, 무언가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예고는커녕 노크조차 하지 않고 들어온 이유는 대체? 문을 닫는 남자…… 도 알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 잠깐, 유진 라이언하트? 키옐에 있다던 그가 왜 이곳에, 카르멘과 함께 있는 것인가? 사흘 전에 승선한 라이언하트는 3명뿐.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 그 외에 3명의 몸종이 더 있기는 했지만 그중에 남자는 없었다. 그리고…… 저 여자는 누구지? 평범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보라색 머리카락. 방긋방긋 웃고 있는 녹색 눈동자. 손에 든 마법지팡이…… 마법사? 현명한 세냐? “대체 무슨……?” 여전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키옐에 있을 유진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가 이곳에 있는 것. 그리고 카르멘이 저들을 데리고서, 이 늦은 밤에 말도 없이 찾아온 것. ㅡ잠깐. 말도 없이 찾아왔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이 배, 라베르시아는 마법결계가 씌워져 있다. 결계에 누군가가 접촉한다면, 무조건 오르투스와 마이스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다.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결계가 돌파되었다. 그로도 모자라서, 방문 앞에 올 때까지. 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저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었다 한들, 저만한 존재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