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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8

 


“허.”


유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헤자르에게서 듣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고민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가비드가 ‘왜’ 이런 짓을 하였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이미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


“결투.”


전쟁을 바랄 것이라고, 전장에서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비드가 바란 것은 전쟁이 아닌 결투다.


놈은, 세상 모두가 그 시작과 결과를 알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빌어먹을 환생 524화


늦은 밤.


밤이되 어둡지 않은 도시. 화려한 야경에 오히려 낮보다 밤이 밝은 도시.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의 하늘에 있었다.


이제는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제벨라 페이스의 안에서. 너무 밝은 야경에 오히려 푸르게 보이는 밤하늘과, 지상의 빛에 의해 잘 보이지 않는- 머나먼 곳의 별과 달을 보았다.


저 아래의 도시. 야경은 화려하지만 왁자지껄한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지금 제벨라 파크에 있는 모든 관광객은, 누아르의 환상의 마안이 보여준 꿈에 빠져 있다.


‘제벨라 쇼타임’이라 불리는, 이 도시 최대의 이벤트. 관광객들은 제벨라 쇼타임을 위해 찾아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상의 마안이 보여주는 ‘꿈’에 한계는 없다. 바라는 모든 것을 꿈에서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제벨라 쇼타임에 정해진 일정 같은 것은 없다. 오직 누아르 제벨라의 기분에 따라 시작된다.


“그대가 미쳤다는 것은 알지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진즉부터 알았다. 제벨라 페이스 안에 멋대로 들어와서, 이쪽에 다가오며 말을 걸 것이란 것도 알았다.


알면서도 무시했다. 굳이 싫다고 면박을 주며 내쫓을 만큼의 사이가 아니다. 누아르는 저 마족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알고 지낸 지 수백 년이니 그럭저럭 지인(知人)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라고는 생각했다.


“설마 이 정도까지 미쳤을 줄이야.”


가비드 린드먼은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헬무드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며, 가장 많은 정기와 세금을 거둬들이는 도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도시. 그것이 바로 제벨라 시티다.


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 제벨라 시티는 새로운 관광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벨라 시티는 마치 봉쇄선언이라도 한 것처럼 관광객을 거부하고 있다.


기묘한 것은 그것에 대한 관광객의 불만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 도시에 방문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헬무드에 입국한 관광객들은, 도시의 성문 앞에서 거부당했음에도 아무런 항의 없이 다른 도시로 떠났다.


“나에게도, 이 도시에게도 사정이란 것이 있어요.”


누아르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속삭였다. 그녀는 손가락 사이에 걸친 와인 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설마 내 행동이 법을 저촉하였나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합법일 리는 없죠. 그래서, 당신이 나를 제재하러 온 건가요?”


여전히 누아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비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지적하고 제재해야 할지 모르겠군. 제벨라 공작. 그대가 제국의 국고에 어마어마한 지분을 가진 납세자라는 것과, 그간 제국의 기틀을 다진 공로를 인정하여도…… 이건 너무나 과해. 그대가 가진 모든 재산을 국고에 환원할지라도, 나는 그대에게 ‘처형’ 판결을 내릴 걸세.”


“아하하.”


저 말에 누아르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가비드는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하여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도시를 봉쇄한 것.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최면을 강요하여 인지를 조작해 돌아가게 만든 것. 그것들만 해도 제국 역사상 다시 없을 중죄지만.”


가비드가 손가락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그는 저 아래에 펼쳐진, 화려히 빛나며 침묵을 유지 중인 도시를 보았다.


“이 도시의 모든 존재를 인질로 잡은 것은 중죄를 넘어 무조건 청형의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일.”


벌써 나흘째다.


제벨라 시티, 제벨라 파크의 모든 관광객. 공원의 모든 노동자까지. 무엇 하나 예외로 있지 않았다. 지금 이 도시에서 누아르 제벨라와 가비드 린드먼, 둘을 제외하고서 깨어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의 바람을 들어주었을 뿐인걸.”


누아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다들 바라는 꿈이 있어서 온 거잖아요? 흐응, 이전까지의 나는 아주, 아주아주 각박했죠. 다들 꿈을, 내가 보여주는 제벨라 쇼타임을 보고 싶어서 온 것인데, 나는 쇼타임을 매일 보여주지 않았거든요.”


“희소성을 유지하고 싶어서, 뭐 그런 이유 아니었나?”


“아하하! 맞아요. 보고 싶을 때 항상 볼 수 있으면 누가 간절히 보고 싶어 하겠어요? 뭐, 그래도 꽤 자주 보여주었다고는 생각하는데. 운 없는 관광객들은 쇼타임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곤 했죠.”


그런 관광객은 금세 다시 제벨라 파크를 찾아온다. 사실 쇼타임을 본 관광객도 마찬가지다. 탐욕에 끝은 없다. 한번 달콤한 꿈을 맛보면 그 한 번에 중독되어 다시 찾아와 꿈을 갈망한다.


누아르 제벨라의 환상의 마안이 보여주는 꿈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이다.


“뭐, 그래서 해봤어요. 모두가 꿈을 바라고 온 것이니까, 꿈을 보여준 거죠.”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거대한 도시에 마족과 인간의 수는 수백만이 훌쩍 넘는다.


그 어마어마하게 많은 존재가, 누아르 제벨라가 만들어낸 꿈에 갇혀 있다. 마왕이 아닌 마족 중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오직 누아르 제벨라 뿐이다. 아니. 마왕일지라도 지금 누아르처럼 수백만의 존재를 인질로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꿈이 아닌 수백만의 꿈.”


무한을 말할 수 있을 마력으로 강제로 잠에 재운 것도 아니다. 공포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지금 저 도시에서 꿈을 꾸는 존재 중에서 불행이나 공포 같은 종류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환상의 마안은 도시의 모든 존재가 바라는 꿈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현실에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지만, 그들의 뇌가 만들어낸 정신세계 속에서는 현실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환상을 즐기고 있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 없는 이상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아니잖나. 그대는 대체 무엇이 목적인 건가?”


더 큰 힘을 바라서? 정기를 끝없이 수급하며 무한한 마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누아르 제벨라는 이미 저것을 손에 넣었다. 누아르의 마력은 진즉에 마왕의 수준을 뛰어넘었고, 그녀는 이미 몽마(夢魔)라는 종의 정점이다.


“그대가 지금보다 더 큰 힘을 바란다면 마왕이 되어야 할 걸세. 설마 그 방법을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사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이미 마왕조차 넘어서 있지만.”


“아하하…….”


누아르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내게 궁금한 것이 많군요, 가비드. 나를 처형하기 전에 사정을 듣고 싶은 건가요?”


“내가 그대를 처형하러 온 것이 아니란 것은 알지 않나.”


가비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누아르는 짧게 웃으며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제야 의자를 돌려, 가비드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죠. 애당초 당신이 나를 죽이는 것이 가능할지부터 논해야겠지만.”


“허어. 설마 여기서 내 자존심을 긁으려 할 줄이야.”


“아하핫! 가벼운 농담을 한 것뿐이에요. 음, 아니야. 솔직히 말할게요, 가비드. 나는 말이에요. 하우리아 때의 당신과 싸운다면- 무조건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어요.”


누아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덧붙일 것도 없지만, 당신이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를 사용할지라도 말이에요.”


“그랬겠지.”


자존심에 대해 말했지만, 가비드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는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누아르를 응시했다.


“지금은 어떤가?”


“모르겠어요.”


누아르가 여전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능력’ 같은 것은 내가 훨씬,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때와 같은 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참 신기하죠? 하우리아에서 당신을 본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텐데…….”


누아르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는 가비드를 꿰뚫어 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으로도 저 깊이의 밑바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마치 당신은 두 달이 아닌, 백 년은 겪고 온 것 같아.”


그 말에 가비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큼의 시간을 보냈을까. 그, 시체와 무기가 널브러진 황야에서. 여전히 그 남자의 정체는 모른다. 죽고, 현실로 돌아와서, 다시 사슬을 내려치고, 싸우고, 죽고, 현실로 돌아와서.


몇 번이나 그것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라.”


가비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이면 되었지. 굳이, 그대와 확인하고 싶지는 않으니.”


“아하하. 나를 처형하러 온 것도 아니고,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아니라면. 왜 나를 찾아온 건가요?”


누아르는 웃으며 물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야, 가비드는 이미 답을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이나 한잔할까 해서.”


가비드는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제국의 건국과 동시에 담갔던 술이지. 아, 내가 직접 담근 것은 아니야. 언젠가…… 하하, 언젠가를 위해 장인에게 의뢰했던 술일세.”


“아하, 그렇다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술이란 것이네요? 흐흥, 당신이 그냥 술이나 한잔하자고 권했다면,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즉시 거절했을 거예요.”


누아르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누아르의 앞에 큼직한 의자와 테이블이 나타났다.


“하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술을 가지고 왔다면 궁금해서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건 궁금하네요, 가비드. ‘언젠가’를 위해 의뢰했던 술이라고 했죠? 그 언젠가가 대체 뭔가요?”


“뻔한 질문을 하는군. 뭐라고 생각하나?”


“대륙 정복?”


누아르가 샐쭉 웃으며 물었다. 가비드는 의자에 앉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게는 그것 외에 다른 바람이 없었지. 유폐의 마왕님도 그것을 바라고서 전쟁을 벌이셨으리라고 생각했네. 약속을 맺기는 하였지만, 언젠가는 깨질 것이라 생각했고.”


“그 언젠가에 마실 술을 지금, 나랑 마시겠다라…… 아하하, 이건 아주 낭만적이네요. 왜 지금 마시려는 걸까. 왜 그 ‘언젠가’를 기다리지 않는 걸까…….”


누아르는 가비드의 앞에 빈 잔을 놓아주며,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수백 년을 보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가비드의 외견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꼭 그렇지도 않나.’


눈빛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분위기. 300년 동안 거르지 않았던 대공의 업무에서도 물러나고, 바벨도 떠난 두 달 남짓의 시간 동안……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걸까?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결투 때문인가요?”


누아르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물었다. 가비드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술병의 봉인을 열어갔다. 제국의 영광. 뻔한 이름이지만, 가비드는 이 술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사실 가비드는 술을 그리 즐기지는 않는다. 마셔도 잘 취하지도 않거니와, 억지로 취할 필요를 느낀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취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유폐의 칼이 되었을 때.


너무 기뻐서, 너무 영광스러워서. 잘 마시지도 않던 술을 마셔보았다. 특별한 날이었다. 평소 하지 않은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느껴본 적이 없는, 특별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술에 취했다. 진탕 마시면서, 취기를 억제하지 않았다. 꽤 즐거웠다.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마셔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홀로 있을 때는 입에 대지 않았다. 취한 적도 없었다. 취한 상태의 즐거운 기분은 알았지만, 유폐의 칼과, 헬무드의 대공은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래, 언젠가. 약속이 깨졌을 때. 유폐의 마왕이 전쟁을 재개하고, 대륙 모든 땅이 헬무드의 영토가 된다면.


그때는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싶을 것 같았다. 이 술, 제국의 영광은- 그 언젠가의 미래를 위해 만든 술이다.


“결투는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지 않나.”


가비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공들여 뜯은 봉인을 옆에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코르크의 봉인 마법마저 해제했다. 그렇게 술병이 열렸다.


제벨라 페이스의 안이 향긋하고 독한 주향으로 가득 찼다. 누아르는 떠도는 향을 음미하며 쿡쿡 웃었다.


“과연.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는다……. 아하하,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300년을 기다린 술도 마실 수 없게 되니까. 그래서 지금 마시겠다는 건가요?”


“그렇네.”


“조금 신기하네요. 당신이라면 무조건 결투에서 승리한 뒤에, 이 술을 축배로 삼거나…… 아니면 바라던 언제까지 기다릴 것만 같은데.”


“그대도 알지 않나.”


가비드가 술병을 들었다. 그는 누아르의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말을 이었다.


“상대는 그, 몰살의 하멜일세. 30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으며, 그 힘의 밑바닥을 가늠할 수가 없어. 그리고 장담하건대, 그는 하우리아에서 보았을 적보다 더 강해졌을 걸세.”


“당신도 그때보다 강해졌죠.”


“그대도 마찬가지고.”


누아르와 가비드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웃었다. 누아르가 먼저 술잔을 들었다. 가비드도 거절하지 않았다. 둘의 술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맛에 대한 말은 하지 말게.”


한 모금 마신 뒤, 가비드가 말했다. 그는 술잔을 천천히 흔들면서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감상은…… 온전히 나의 것으로만 남기고 싶거든. 이 술을 의뢰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좋아요. 가비드, 당신에게 이런 낭만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요.”


누아르는 입술을 핥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대신, 다른 것은 묻고 싶은데. 물어도 되죠?”


“얼마든지.”


“왜 나를 처벌하지 않기로 한 거죠?”


예상했던 질문이다. 가비드는 피식 웃으며 술잔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그는 몇 번 향을 즐긴 뒤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유폐의 마왕님께서 그대를 처벌을 명하지 않으셨으니까?”


“아하하! 그건 당연하죠. 음, 가비드, 당신은 이 말을 불쾌하게 들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말하고 싶으니까 말하도록 할게요. 만약 내가 이 도시의 수백 만에게 꿈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조리, 다, 죽여서, 잡아먹을지라도.”


누아르의 웃음이 짙어졌다.


“유폐의 마왕은 나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을걸요? 아, 물론 방금의 말에는 조건이 받쳐져야 해요. 한 10년 전에 내가 이런 짓을 했다면, 음, 죽이지는 않았어도 제재는 했을 것 같네요. 어디 제국 바깥으로 추방시키거나……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의 나에게는 맡은 역할이 있으니까?”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고서 깔깔 웃었다. 그녀는 내려놓았던 술을 다시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가비드. 유폐의 마왕이 내게 그렇게 할지라도, 당신은 그러지 않잖아요?”


“나는 유폐의 마왕님의 명을 어기지 않아. 마왕님께서 그대를 처벌하라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를 처벌하지 않을 걸세.”


“하지만 지금처럼 나와 웃으며 술을 마시진 않겠죠. 술병 대신 글로리를 들고 찾아와서, 공격하거나 죽이지는 않는 대신 나를 모욕하고 경멸할 거예요.”


“그렇겠지.”


가비드도 술을 더 마셨다.


“예전이라면 그랬을 거야.”


“무엇이 당신에게 변화를 만든 거죠?”


누아르의 눈이 곡선을 그렸다.


“역시 결투인가요?”


누아르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왜, 하멜과 결투하려는 거죠?”


빌어먹을 환생 525화


“왜냐니.”


가비드는 빈잔에 술을 새로 채우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는 줄곧 하멜과 싸우고 싶었네.”


“싸움과 결투는 다르죠.”


누아르도 똑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가비드 린드먼이 어떤 사내인지 안다. 그는 수백 년 전부터 유폐의 칼이었고, 역대 유폐의 칼 중 가장 오랜 시간을 유폐의 마왕을 섬겼다. 그는 전임자들 중 가장 강하고, 가장 충성스러운 유폐의 칼이다.


“당신이 바라는 결투는 유폐의 마왕의 뜻을 어기는 것이잖아요. 유폐의 마왕은 하멜이 바벨을 오르는 것을 바라요. 그러니 당신은 바벨에서 하멜을 기다려야 하지 않나요? 그것이 유폐의 마왕의 뜻이니까.”


누아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마치 가비드를 유혹하듯 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은 하멜에게 결투를 선포했어요. 바벨이 아닌 다른 장소. 하멜이 바벨로 향하기도 전에 말이에요.”


“그렇게 됐군.”


가비드는 술잔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누아르는 풋 웃으면서,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등받이에 기대었다.


“단순히 하멜을 죽이고 싶은 것이라면 이전에도 기회가 있었죠. 아주, 아주 쉽게 죽일 수 있을 기회가 말이에요.”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하우리아의 전쟁이 끝났을 때. 가비드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가비드는 진심으로 글로리를 뽑고,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여 하멜을 덮쳤다.


당시의 하멜은 굉장히 무력했다. 그 주변에 하멜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영웅들은 많았지만, 가비드의 마검(魔劍)은 그 모든 방해를 단절하고서 하멜을 죽일 수 있었다.


죽이지 않았다. 검을 멈췄다. 하멜의 비웃음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 비웃음을 무시하고 기어코 검을 휘둘렀을지라도, 하멜을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누아르 제벨라의 힘은 대단했다. 그녀는 가비드조차 눈치챌 수 없게 뒤를 잡았다. 만약 가비드가 마검을 끝까지 내리찍었다면, 어떻게든 누아르에게 가로막혔을 것이다.


“그때도 나는 아주 감정적이어서.”


원치 않은 과거의 기억. 나의 것이 아닌 황혼의 마녀의 기억.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혼동.


그 모든 감정들은,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하멜과 서로 죽이려는 순간에 다시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때의 달콤함이 될 것이다.


“내 행동이 유폐의 마왕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사실이지.”


술잔을 비웠다.


“하지만 제벨라 공작. 그대도 말했듯, 유폐의 마왕님은…… 그대가 이 도시의 수백만을 잡아먹을지라도 침묵하실 걸세.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일 뿐일세. 내가 그분의 뜻을 거역해 하멜과 결투할지라도, 그분은 즐겁게 내 거역을 방관하시겠지.”


“수백 년을 유폐의 마왕에게 충성한 당신이, 이런 식으로 거역하는 것이 신기하고 궁금한 거예요.”


누아르는 술잔을 비우지 않았다. 그녀는 술잔을 찰랑찰랑 흔들기만 하며 가비드를 응시했다.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에서 요염한 빛이 흘러나왔다.


“유폐의 마왕의 뜻을 거역할 만큼.”


누아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바뀌었다. 공간 자체가 누아르의 목소리에 공명하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의 ‘소리’가 가비드를 파고들었다.


“하멜을 죽이고 싶나요?”


이건, 본래 누아르 제벨라가 가지고 있던 능력과 다르다. 지금 이곳은 꿈이 아닌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의지가, 현실에 간섭하여 개변을 일으키고 있다.


몽마의 성질과 환상의 극한. 그렇게 해서 도달한 인식의 조작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저 터무니없는 몽마는 그 영역마저 초월한 모양이다.


“하멜을 시험하고 싶나요?”


속삭이는 말은 가비드의 진의를 끌어내려 하고 있다. 누아르의 시선과 목소리가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있다.


이 순간에 가비드는 확신했다. 만약 그가 황야를 지나오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정체 모를 사내와 검을 부딪치고, 끝내 그에게 검을 닿게 만들지 못했다면.


누아르 제벨라와의 전투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비드가 위신의 마안을 쓰고 글로리를 뽑을지라도, 누아르가 무너트린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탈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내 역할이에요, 가비드.”


어느새 누아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찰랑찰랑 흔들던 술잔을 내려놓고, 둘 사이에 있던 자그마한 테이블을 지나쳤다. 가비드의 눈은 누아르를 쫓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하멜이 바벨에 오르기 전에, 먼저 싸워야 할 것은 바로 나예요. 유폐의 종인 당신은 바벨에서 하멜을 기다리는 것이 어울려요. 그것이, 당신에게 올바른 흐름이에요.”


“제벨라 공작.”


가비드는 빈 술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단지 하멜과 싸우고 싶을 뿐이네.”


꿈이 흔들렸다.


“칼로서 평생을 유폐의 마왕님께 충성하였지. 거역 없이 살았어. 하지만 나도 결국은 한 명의 마족이고, 검사였던 모양이야.”


“무슨 말이죠?”


“유폐의 마왕님이 바라시는 것은 하멜이 바벨을 올라, 어전에 도달하는 것일세.”


가비드가 말을 이었다.


“물론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하멜을 위해 바벨과 어전의 문을 활짝 열어두지는 않으시겠지. 하멜이 어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련을 넘어야 할 걸세.”


“그렇겠죠.”


“나는 어전의 앞에서, 마왕이 용사에게 내리는 시련의 마지막이자…… 유폐의 칼로서, 하멜을 가로막겠지.”


가비드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때 내가 싸울 하멜이 과연 전력일까.”


“…….”


“나는 하멜과의 싸움을 간절히 바라네. 전력을 다하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죽이기 위해 덤비는 하멜과 싸우고 싶은 걸세. 하지만 바벨에서 만날 하멜은 그러지 않을 걸세. 그럴 수가 없어. 그는, 나를 넘은 뒤에 어전에 들어가야 하니까.”


흔들림이 멈추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던 누아르는, 마치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듯이 가비드의 앞에 앉아 있었다.


“하멜을 죽이고, 시험하는 것이 그대의 역할이라 하였지.”


빈 잔에 다시 술을 부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그대보다 먼저 해야 해. 하멜과의 싸움을, 그의 목숨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세. 만약 그대가 먼저 하멜을 죽여 버린다면…… 하하, 나는 평생을 후회하겠지. 그리고 평생을 하멜에 대한 패배감을 갖고 살아야 할 거야.”


가비드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패배감이라. 누아르는 의외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 가비드는 단 한 번도 하멜에게 패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아르는 저 패배감의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 가비드 린드먼이 유폐의 마왕의 뜻을 거역했다. 유폐의 칼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마족은 헬무드의 대공인가? 누아르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두 달의 짧은 은거. 가비드는 대공의 모든 업무조차 내려놓았다. 그리고 만약 가비드가 대공으로서 하멜을 죽이기로 결정했다면, ‘결투’ 따위는 벌이지 않을 것이다.


“이건 곤란한걸요.”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턱을 손에 괴었다.


“당신이 하멜을 죽이고 싶은 것처럼 나도 하멜을 죽이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이 하멜을 죽여 버리면, 내가 하멜을 죽일 수 없게 되잖아요.”


“그렇겠지.”


“이거 어쩌죠?”


“나는 설득되지 않을 테니, 그대의 뜻을 주장할 방법은 하나뿐일세.”


“그게 뭘까요?”


“날 죽이는 것.”


가비드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진짜로 그렇게 말할 줄이야. 누아르는 즐거운 기분이 들어 쿡쿡 웃었다.


이곳은 제벨라 시티. 누아르의 영지다. 설마 이 땅에서 영주를 앞에 두고 저런 말을 하다니.


“좋아요.”


누아르는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서를 양보해 주죠.”


“감사하지만, 양보의 이유가 궁금하군.”


“나도 유폐의 마왕과 똑같아요.”


누아르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하멜이 나를 찾아와야 해.”


술잔을 비웠다. 누아르가 잔을 내려놓았고, 가비드가 잔을 채워주기 위해 술병을 들었다. 하지만 누아르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잔을 안으로 끌어당겼다.


“하멜이 나를 만나러, 나를 죽이러, 이 도시에 와야 해. 응, 그래야만 해요. 내가 먼저 하멜을 죽이러 찾아가지는 않을 거예요.”


말을 이을 때마다 누아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니 가비드. 당신이 먼저 결투하도록 해요. 내가 친히 순서를 양보해 주죠.”


“만약 내가 하멜을 죽인다면?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하멜과 만날 수 없게 될 텐데.”


“아하하…… 나에게 지독한 말을 강요하는군요. 그래도 당신과는 오랜 지인이니까,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무슨 말을 듣게 될 것인지는 뻔했지만, 가비드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누아르는 그 노골적인 손짓에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하멜을 이길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이 두 달 동안 굉장히 강해진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하멜은 이길 수 없어. 나의 하멜은, 이 결투에서 당신을 쓰러트리고…… 바벨에 향하기 전에, 나를 죽이러 올 거예요.”


“이거 참, 정말로 지독한 말이로군.”


“아하하! 그러니 순서를 양보해 준 거예요. 하멜이 당신을 죽이고서 내게 올 것이라 믿으니까. 음, 그래도 기도는 해야 할까?”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


“당신의 패배와 죽음.”


누아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가비드는 무릎을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제벨라 공작. 그러니까, 그대는…… 나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나를 죽여 버린 하멜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단 말인가?”


“흐응, 그건 어떨까.”


누아르는 입술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말이에요. 하멜을 죽이고 싶기도 하고, 하멜에게 죽고 싶기도 해요.”


“허어…….”


누아르의 말에 거짓은 없다. 하지만 가비드는 그 말의 내용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이고 싶고, 죽고 싶기도 하다니?


가비드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상대는 누아르 제벨라다. 가비드는 이미 수백 전에 누아르의 언동과 감정에 대한 이해를 포기했다.


하우리아에서.


누아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를 보았다. 그때, 가비드가 보았던 누아르의 얼굴은- 알고 지낸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다. 생각해 보면, 저 몽마는 ‘하멜’과 엮일 때마다 그랬다.


처음 하멜을. 베르무트와 동료들을 습격하고 돌아왔을 때. 누아르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와 같은 얼굴을 했었다. 죽이든가 홀리게 하여 지치게라도 만들기를 바라고 파견한 것인데, 왜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서 부끄러워하던 것인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아서 화만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멜이 죽었을 때. 약속이란 것이 맺어진 바람에, 마족들은 대놓고 축제를 벌이지는 않았다. 다른 마족이야 어쨌건, 가비드는 축제를 벌이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와 동료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않았다. 손쉽고도 당연한 승리를 앞서서 거절한 것은 바로 유폐의 마왕이었다.


가비드는 어떤가. 그는 전쟁에서도, 싸움에서도 패배했다. 약속이 맺어졌고 하멜이 죽어버렸으니 다시는 설욕할 수 없게 됐다.


누아르는 가비드와도, 다른 마족과도 달랐다. 그녀는 아마…… 모든 마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하멜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하우리아에서는. 가비드가 하멜을 죽이려 했다는 이유로 분노했다. 가비드가 보았던 그 어느 순간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분노했다.


그 분노는.


‘정말로 나에게 향한 것이었을까.’


누아르의 언동과 감정은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에게 있어서 ‘하멜’은 굉장히 특별한 존재다. 하멜이 죽어 유진 라이언하트로 환생했을지라도, 여전히 그는 누아르에게 특별하다. 오히려 한 번 죽고, 환생했기에 더욱 특별할지도 모른다.


하멜을 죽이고 싶다.


하멜에게 죽고 싶다.


가비드는 확신했다. 누아르 제벨라는 미쳤다.


저 미치광이 몽마는, 미치광이의 방식으로 하멜을 사랑하고 있다.


“그렇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저 알 수 없는 말에 대해서, 가비드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보아온 지인에 대한 존중이었다.


누아르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가비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듯, 두 공작은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존중하며 의문들은 가슴 안에 묻어놓았다.


“결투 말이에요.”


누아르의 입술이 열렸다.


“기한은 내년이 끝나기 전. 장소는 하멜보고 정하라고 하였죠.”


“나는 결투를 준비하고 있었지.”


‘사슬’은 더 사용할 수 있다. 몇백 몇천 번이고 그 황야에 들어가서, 남자와 만날 수 있다.


“몰두하던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네. 나는 하멜과 결투만을 생각하여 준비하는데, 하멜은 아니지 않나. 그건, 굉장히 불공평한 일이지.”


가비드 본인도 준비가 완벽히 끝나지는 않았다. 조율 자체는 되었지만, 솔직히 더 앞에 도달하고 싶었다. 가비드의 검은 황야의 남자에게 닿았다. 하지만, 남자를 쓰러트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먼저 선포한 건가요?”


“만약 하멜이 이미 준비가 되었다면 내일이라도 날을 잡아도 상관이 없네. 하지만 그도 약간이라도 준비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래서 기한을 내년이 끝날 때까지 잡았네.”


“흐흥.”


“멋대로 결투를 선포했는데, 기한과 장소 정도는 하멜이 정하는 것이 예의겠지. 아마 헬무드는 선택하지 않을 테고…….”


“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하멜이 내년이 끝나도록 날짜와 장소를 잡지 않는다면 어쩔 건가요?”


누아르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설마 하멜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하멜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아하하! 궁금해서 물어보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이 결투를 청했는데 하멜이 도망갈 리가 없죠.”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함께 술을 마시고 싶어서…… 그리고 결투의 ‘허락’을 맡기 위해서. 이게 끝인가요?”


“하나가 더 있네.”


가비드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미리 말해두지. 이건 부탁이 아닐세. 헬무드의 대공으로,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어머…… 대공의 업무에서는 물러섰으면서 대공의 권한은 누리시겠다?”


“아마 그대도 거절하지는 않을 걸세.”


“뭐, 그건 들어보고 결정하죠. 그래서 뭔데 그래요?”


가비드의 입술이 열렸다.


“…….”


누아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경악하고서 가비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진심인가요?”


“물론.”


“이건…… 이건, 굉장히…… 의외네요. 설마 당신이 내게 그런 부탁을 할 줄이야. 아니, 부탁이 아니었지. 명령…… 명령이라.”


누아르는 더듬더듬 말을 잇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요. 받아들이죠. 거절하지 않겠어요.”


“설득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로군.”


“아하하…… 설득이라니. 이걸 거절할 리가 없잖아요?”


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가비드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마저 비웠다. 그는 누아르가 자신 쪽으로 당긴 빈 잔을 힐긋 보며 물었다.


“술이 입에 맞지 않나?”


“어머. 맛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면서요?”


“마시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거든.”


“아하, 뭔가 오해하고 있군요. 가비드, 이 술은 무척이나 맛있어요. 내가 술을 거절하는 것은, 맛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그럼?”


“이건 당신의 술이잖아요.”


누아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향기롭고, 진하고, 독한, 취하기 위한 술. 하지만 나는 이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내 앞에서 취해 추태를 보이고 싶다면야, 아하하, 바라는 꿈 정도는 꾸게 해주죠.”


“하하하!”


가비드도 똑같이 웃었다. 그는 아직 넉넉하게 남은 ‘제국의 영광’을 손에 잡고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배려해 주어서 고맙네. 그래, 이건…… 내가 취하기 위해 만든 술이지. 다른 누군가와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혼자 즐기기 위한 술이야.”


“원한다면 이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방을 내어드리죠.”


“아니, 괜찮네. 남은 술은 내 방에 돌아가서 마시도록 하지.”


가비드는 술병을 다시 봉인하며 피식 웃더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쯤은 남겨야겠어.”


“축배를 위해서?”


“그래.”


촤라락! 옷소매 안쪽에서 쏘아진 사슬이 공간의 문을 열었다.


“과연 그 축배를 내가 마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중얼거림을 남기고, 가비드는 사슬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빌어먹을 환생 526화


“오히려 잘됐어.”


긴 고민 끝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비드와는 언젠가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전장은 무조건 바벨의, 유폐의 어전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곳에서 싸웠더라면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았을 거야.’


유폐의 마왕과의 결전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 그렇다는 것은 절대로 이그니션을 쓸 수 없다는 것. 그 시점에서 신검을 몇 번 휘두를 수 있을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만약 바벨에서까지 신검에 제한이 있다면, 가비드와의 전투에서는 신검을 쓰면 안 돼.’


쓸 수 있는 모든 재주를 유폐의 마왕에게 쏟아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승산이 없다. 아니, 애초에 바벨에 오를 시점에서 신검을 휘두를 ‘횟수’를 신경 쓴다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신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를 수 있던 아가로트조차도 유폐의 마왕보다는 약했을 것이다. 심지어 유폐의 마왕은 신화시대보다 ‘더’ 강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마족은 늙을수록 보통은 강해지니까…….’


마왕인 이상 마력의 총량에 구애받지는 않을 것이다.


신화시대 이후로 유폐의 마왕이 얼마나 긴 시간을 살아왔는지를, 유진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 유폐의 마왕에게 결코 허무하게 작용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유진은 무조건 아가로트보다 강해야 한다. 아가로트보다 강하지 않고서는 유폐의 마왕과 전투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바벨을 오르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을 터. 어전에 도달하기까지 최대한 힘을 온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은 솔직히 부담된다. 가능하다면 바벨에서 강적과의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싶다.


“강적.”


유진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가비드 린드먼. 그리고…… 누아르 제벨라.”


설마 이제와서, 세상 아무도 모르는, 오직 유폐의 마왕만 알고서 꽁꽁 숨겨놓은…… 가비드 린드먼보다 강한 대마왕의 친위대, 유폐의 사천왕, 이딴 게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지금의 헬무드에서 유폐의 마왕을 제외하고, 유진에게 있어 ‘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저 둘뿐이다. 그중 누아르 제벨라와는 바벨에서 맞닥트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무조건 제벨라 시티에서 유진과 마주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난관인 것은 가비드.


“긍정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맞은편의 아니스가 정색하고서 내뱉었다.


가비드가 결투를 선포하고 고작 반나절. 성상과 교전의 일로 유라스에 돌아갔던 성녀들이 부랴부랴 라이언하트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가비드의 결투 선포는 성상 건축과 교전 개편을 ‘그따위’의 일로 만들 만큼 파급력이 컸다.


“결투라면, 하멜, 당신과 가비드 ‘둘’이서 싸우는 것 아닙니까?”


“결투니까.”


유진은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아니스는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했다. 길고 긴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일단 아니스는 한 번 호흡을 삼키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거절하십시오.”


그 말에 유진은 두눈을 끔벅거렸다. 유진은 잠시 아니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보란 듯이 새끼손가락을 세워서 귀를 후벼팠다. 아니스는 지금 유진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똑같이 눈을 끔벅거리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몇 번 귀를 파던 유진은, 새끼손가락을 후- 불고서 말했다.


“뭐라고? 잘 못 들었어.”


그렇게 대놓고 말하니 아니스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진이 자신에게 대놓고 엿을 먹인 것임을 말이다.


아니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평소에는 아니스가 저런 표정으로 다가오면 유진도 어깨라도 움츠리거나 시선을 피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고 눈에 힘을 주고서 똑같이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만큼 유진은 가비드와의 결투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하멜.”


아니스는 유진을 노려보았다. 눈동자에 담긴 고집을 느꼈다. 아니스가 알고 있는 ‘하멜’과 ‘유진’도 결투에서 도망칠 인간은 절대로 못 된다.


“누군가가 간섭할 수 없는 결투라면,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가비드가 결투를 선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니스가 알 바가 아니었다.


“하멜. 당신이 강하단 것은 압니다. 하지만 ‘결투’는 위험합니다.”


아니스는 유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유진의 어깨를 붙잡고 속삭였다.


“그렇겠지.”


당연히 유진도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여태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러왔다. ‘어떻게’ 싸우느냐. 그에 대한 방식은 이미 300년 전부터 정해놨다.


상대는 수백 년을 살아온 마족과 마왕. 놈들은 종족부터가 인간보다 우월하다. 유진은, 하멜은,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 100년도 살지 못하는 것에 반해 마족은 그냥 수백 년을 산다. 인간은 극한까지 육체와 마나를 단련해야만 수명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거늘, 마족에게는 그냥 수명의 한계란 것이 존재하지 않다.


인간은 아무리 단련한들, 불로(不老)에는 도달하여도 불사(不死)는 손에 넣을 수 없다.


하지만 마족은 다르다. 고위 마족은 머리를 터트리고 육체를 모조리 불태워 재로 만들어도 소생한다.


그래서 성직자의, 성녀의 보조가 필요하다. 성녀의 존재는 온전히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목이 잘리는 것과 같은, ‘즉사’는 성녀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치명상이라면 성녀의 기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결투라면 제가 당신을 보조할 수 없습니다.”


아니스가 내뱉었다. 300년 전부터 아니스의, 성녀의 역할은 똑같았다. 이번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녀가 합류한 후로 유진은 과감하게 싸울 수 있게 됐다. 그전에는 최대한 부상을 입지 않는 방향을 선택해 싸웠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세냐도 당신을 보조할 수 없습니다.”


300년 전에는 전쟁을 했다. 고위마족과 마왕을 상대로 단독으로 싸우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동료들과 합을 맞추어서 싸웠다.


모론이 전위로서 공격을 받아내고, 하멜과 베르무트는 공격진으로서 모론이 만든 틈을 파고들었다. 아니스가 후방에서 기적을 일으켜 부상을 치료하고 힘을 북돋웠으며, 세냐는 힘을 모아 강력한 마법을 때려 박았다.


“망령과 싸울 때도 사실상 나 혼자 싸웠잖아.”


아이리스와의 전투에서는 세냐와 성녀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망령과의 전투는 달랐다. 해방군이 힘을 합쳐 길을 열었고, 유진은 단독으로 망령과 전투를 치렀다.


“상대가 다릅니다……!”


아니스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유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아니스는 조금 더 몸을 숙여, 유진을 가까이서 노려보았다.


“하우리아에서 싸운 망령은…… 하멜, 당신은 그와의 전투에서 밀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전투에서 당신이 쭈욱 망령을 압도했다고 생각합니다.”


“꼭 그렇지는 않아. 놈은 강했어. 나와 비등할 정도로 말이지.”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만, 예, 하멜,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다르게 말하도록 하죠.”


아니스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당신은 망령과의 전투를 매우 유리하게 끌고 나갔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망령이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망령은 하멜, 당신의 기술을 썼습니다. 그리고 베르무트 님의 기술을 썼습니다. 둘 모두 하멜, 당신이 잘 아는 것이죠.”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스의 말이 옳다. 유진은 망령이 순간, 순간마다 어떤 기술을 사용할지를 예측했다. 경험에 의한 예측은 신성과 직관에 의해 확실한 예지가 되었고, 그래서 대응이 가능했다.


“기술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단순 화력조차도 당신이 망령보다 강했습니다.”


“놈은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예, 멸망의 마력은 너무나 파괴적인 힘이니까요. 화신 같은 존재가 되었던 망령도 결국은 멸망의 마력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전투에서 월광검을 지배했고, 성검의 봉인과 같던 형상을 부수었습니다.”


아니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망령과 다릅니다.”


짧은 침묵 뒤에 긴 한숨이 따랐다.


“상대는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입니다. 하멜, 당신도 그때 보았을 텐데요. 가비드 린드먼이 위신의 마안을 쓰고, 마검 글로리를 꺼내서 당신을 공격했을 때. 그 자리의 누구도 가비드 린드먼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쳐서? 방심해서? 아닙니다. 그 순간에 가비드 린드먼의 일검은 우리 중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


그 일검은 유진도 기억하고 있다. 하늘의 끝자락에서 내리꽂힌 일검.


“우리 중 아무도 죽지 않았던 것은, 가비드 린드먼이 오직 당신만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예, 그것이 가비드 린드먼이 ‘기습’에 두었던 나름의 배려였겠지요. 하멜, 당신이 그때 죽지 않은 것도…….”


“그 새끼가 검을 거두었기 때문이지.”


유진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 아니스. 그리고 크리스티나도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겠지. 결투에서는 기적으로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 세냐의 보조로 가비드의 대응을 강제할 수 없다. 나 혼자서, 놈과 싸워야 한다.”


“불공평합니다.”


아니스가 내뱉었다.


“둘 중 하나가 무조건 죽어야 하는 결투입니다. 그렇지만 하멜, 당신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비드 린드먼을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뭘 새삼스레.”


유진은 손을 들어 아니스의 손목을 잡았다.


“여태까지 나는, 우리는, 몇 번이나 그런 상대와 싸워왔지. 죽여도 잘 죽지 않는 놈들. 팔다리가 잘려도 당연하다는 듯이 재생시켜서 덤비는 놈들.”


“…….”


“네 말이 맞아, 아니스. 인간이 마족과 싸우는 것은 굉장히 불공평하고 불합리해. 하지만 내가 평범한 인간인 것은 아니잖아.”


이건 안 된다.


아니스는 결국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멜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그는 결투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투를 받아들였을 때의 이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죠.”


그래서 아니스도 태도를 바꾸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가비드 린드먼을 바벨 밖으로 끌어내서 싸우는 것. 예, 이건 매력적인 일입니다. 바벨에서 싸웠다면 당신의 힘을 온존해야 했을 테니까요.”


“바로 그거야.”


“하멜, 솔직히 저는, 바벨에서의 전투가 저희에게 있어서 크게 불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전력을 다하지 못할지라도, 세냐가 있지 않습니까?”


“세계수에서 돌아온 세냐가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는 미지수야.”


“약해지지는 않았겠죠.”


“뭐…… 그야 그렇겠지.”


유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 노골적으로 꽁해 하는 모습에 아니스이 눈썹이 한 번 더 씰룩였다.


“……이미 가비드 린드먼이 결투를 선포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결투를 거절하냐면, 세상 사람들 전원이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상당수가 당신을 겁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군요.”


“뭘 모르겠군요야, 무조건 놀리겠지. 겁쟁이 새끼라고 말이야.”


“으흠…… 예, 아마 그럴 겁니다. 2명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한창 전설과 신화를 쓰고 있는 당신에게 겁쟁이란 모멸이 붙는 것은…… 그리 좋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야. 신앙이란 숭경과 외경에서 만들어진다고. 세상 누가 결투가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를 섬기겠어?”


마냥 고집으로만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비드가 알고서 한 일은 아니겠지만, 이미 결투가 선포된 이상 유진은 거절할 수가 없다. 거절해서는 안 된다.


“현자를 만나서 확실하게 느꼈어. 인간으로 아무리 강해져 봤자 결국은 인간이야. 다른 마왕이라면 인간의 격으로도 상대가 가능하겠지만, 상대는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이라고. 놈들은…… 인간의 격으로는 싸움이 안 돼.”


더욱 확실하게 신위에 도달해야 한다. 다섯 번 뽑는 것이 한계인 신검을 평범하고 가볍게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신검 외에도 신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결투를 받아들이고, 만약 승리한다면…… 하멜, 당신이 말한 숭경과 외경은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여태까지 유진 라이언하트가 죽인 마왕은 둘. 하지만 그 둘을 합친 것보다 ‘유폐의 칼’을 쓰러트렸다는 것이 큰 반향을 불러올 것이다.


특히 헬무드의 마족들에게 있어서 ‘유폐의 칼’이란 이름은 굉장히 크다.


“……결투인 척하고 합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세냐까지는 몰라도, 제가 몰래 당신을 보조하는 겁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빛을 보태주면서.”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비겁하고 말고가 뭐가 중요합니까?”


“성녀가 하는 말이라곤 믿을 수가 없군…….”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아니스는 저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


“결투라고 해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무인의 투사들처럼 콜로세움에서 결투를 벌였다가는 구경꾼들 전원이 공격의 폭풍에 휘말려 죽어버릴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아무리 마법과 신성마법으로 결계 같은 것을 친들, 유진과 가비드가 충돌한다면 결계가 즉시 소멸해 버릴 것이다.


“구경꾼이 없다면 오히려 쉽지요. 세냐가 매복해서 가비드를 공격하고, 제가 당신을 보조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너무 비겁하다니까?”


“뭐가 비겁하다는 겁니까? 어차피 가비드를 죽이면 아무도 모를 텐데.”


“싫어.”


유진이 눈썹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아니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하멜. 결국 당신이 가비드와 결투하고 싶은 것이군요?”


“당연하지. 싫으면 미리 싫다고 말을…….”


“처음부터 답을 혼자 정해놨으면서 왜 저와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내가 얘기하고 싶어서 얘기하냐? 너가 대뜸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아니스는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그녀는 로브 안쪽에 두었던 플레일을 꺼냈다. 쿠웅! 유진과 아니스 사이에 있던 테이블의 철구에 의해 폭삭 주저앉았다.


“미안해.”


유진은 일단 사과했다.


“뭐가 미안하다는 겁니까?”


“너는 날 걱정하는 것뿐인데, 내가 고집만 부려서.”


설마 이렇게 바로 정답을 말할 줄이야. 아니스는 마음속으로는 감동했지만, 그걸 표정으로 내비치지는 않았다.


“왜 그토록 가비드와 결투하고 싶은 겁니까. 신앙 핑계는 대지 마십시오.”


“전력으로 싸우고 싶…….”


“그건 이미 들었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하우리아에서 그 새끼는 날 죽일 수 있는데 안 죽였어.”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왜 놈이 그 순간에 검을 거뒀는지. 왜 유폐의 마왕의 뜻마저 거스르고 나를 기습한 것인지. 왜, 나에게 결투를 선포한 것인지.”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X같아.”


우선 그렇게 말했다.


“가비드 린드먼. 그 새끼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 새끼는 자기 나름대로 명예와, 승부욕, 그런…… 생각을 해서 검을 거두었겠지. 이번 결투도 그래. 가비드 린드먼은 유폐의 마왕의 뜻을 거역했다.”


“……그건 저도 신기하다 생각했지요.”


“평생 섬긴 유폐의 마왕의 뜻에 반할 만큼, 나와 결투하고 싶어 한 거야. 바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서로가 뒷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곳에서. 가비드 린드먼은 다른 누구도 간섭하지 않게, 일대일의 결투를 원하고 있어.”


“…….”


“그러니 거절하고 싶지 않아.”


말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결투. 저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 이런저런 계산이나 대의를 따지는 것은 납득을 위한 변명일 뿐이다. 사실 유진은 굳이 저런 변명을 만들 필요 없이, 스스로 바라고 있다.


그냥 결투하고 싶다. 그냥 가비드 린드먼과 싸우고 싶다.


“진즉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아니스는 혀를 차면서 플레일을 다시 로브 안으로 집어넣었다.


“언제 할 겁니까?”


다행히 가비드는 유진에게 꽤 많은 유예를 줬다.


“내년이 끝날 때까지라고 말했지요. 설마 당장 하겠다고 굴지는 않겠지요?”


“그야 당연하지.”


만약 가비드가 기한을 올해로 두었다면, 유진은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억지로 싸울지, 아니면 자존심을 굽히고 결투를 조금 더 뒤로 미룰지. 아니면, 아예 결투를 무시할지. 유진이 결투를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가비드가 충분한 유예를 줬기 때문이다.


‘300년 전이었으면 그냥 들이박았을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유진은 이번 시대의 자신이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세상이 끝장날 수 있단 것을 안다. 이미 300년 전에 제멋대로 행동해서 한번 죽어본 몸. 유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기한은 아슬아슬할 때까지 써먹을 거야.”


“……결투 장소로 생각해 둔 곳은 있습니까?”


“시간은 내가 정했으니까 장소는 같이 정할까 싶은데.”


아니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잠시 유진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이?”


“응.”


유진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번 만나자고 하지 뭐.”


빌어먹을 환생 527화


알카르트 교구. 신성제국 유라스와 헬무드 제국의 국경이 맞닿은 영지. 사실상 대륙에서 유일한, 헬무드와의 중립구역.


300년 전. 전쟁이 막 끝났을 때, 이 지역은 헬무드와 대륙에게 있어서 중요하고도 정치적인 의미를 가졌다. 당시 대륙 사람들은 마경을, 마족을, 유폐의 마왕을 믿지 않았다.


당연한 불신이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당장에라도 대륙을 짓밟을 것처럼, 아니, 실제로 짓밟아 정복하기 직전이었던 유폐의 마왕이- 대뜸 종전을 선언하고, 거대한 마경 전역을 제국령으로 삼아버렸으며, 전쟁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나섰을 때.


대체 누가 마왕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나? 용사, 위대한 베르무트가 앞장서서 유폐의 마왕과의 ‘약속’에 대해 강조하지 않았더라면, 마경 헬무드가 ‘제국’이 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생각나는군.”


가비드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걸었다.


“알카르트 교구. 이곳은 대륙에, 특히 국경과 관계없이 많은 영향력을 가진 신성제국에 대한 타협의 의미로 선포했었지.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마족이 빛의 신을 신앙한다는 것은 싸구려 술집의 우스갯소리도 못 되었어.”


그럼에도 헬무드는, 유폐의 마왕은 알카르트 교구를 공인했다. 마왕이 받아들이고 마족이 고개를 숙인다. 그 행위 자체가 대륙에 대한 선전이었던 것이다.


“헬무드 제국의 여명기. 마왕 폐하께서는 대륙에 다양한 원조를 베풀려 하셨지만, 누구도 제국에 찾아오려 하지 않았지. 그렇다고 마족이 직접 자기네 땅에 찾아오기를 바라지도 않았어. 그 시기에 이곳, 알카르트 교구는 꽤나 유용한 교역지로 쓰였지.”


“저는 그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알카르트의 교구장. 에일린 플로르가 입을 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새하얀 로브로 감싼 여인. 가비드는 피식 웃으며 에일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얀 가면에 덮여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동자에 어린 감정을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대공께서 말씀하셨듯, 그 시대에서 마족이 교화되어 빛을 믿는다는 것은 우스갯소리도 되지 못했지요.”


에일린은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감정을 가다듬었다.


“그 시대에, 이 지역에서 신앙은 하찮았습니다. 마족들은 인간을 죽이지 않는 대신에 짓궂게 희롱하였지요. 성경을 외는 성직자들을 마치 술집 작부처럼 대하면서 말입니다.”


에일린 플로르. 무척이나 희소한 반인반마. 가비드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마족과 인간의 혼혈은 아멜리아와 에일린을 포함해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일찍이 저는 제 존재 자체를 저주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이곳이 유라스의 교구가 되지 않았다면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이런 생각도 하였습니다.”


에일린은 다시 한번 눈을 감았고, 떴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빛에 신앙을 품기 전. 에일린은 저런 못된 생각에 매몰되어 100년을 살았다. 그녀는 헬무드의 시궁창을 떠돌고, 마족 귀족과 인간 관광객, 이민자들의 동정에 기대어 살았다.


“저는 무척이나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고, 그 빛을 따라 걸어 빛의 품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보살핌을 받았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에일린은 고개를 돌려 가비드를 보았다.


“제가 입은 은혜를 나누고 싶어 이곳, 알카르트의 교구장을 자처했습니다.”


“그대가 집전하는 예배에 대해서는 나도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지.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업무가 너무 바빠 시간을 내지 못하였네.”


“제 예배에 찾아오는 마족들은 대부분 비슷하지요. 반인반마가 떠드는 신앙을 구경하기 위해. 혹은 비웃기 위해. 대공 전하께서는 어느 쪽이십니까?”


“나는 그대를 존중하네.”


가비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가 집전하는 예배에 참석한다면, 나는 경의를 갖고서 그대의 이야기를 들을 걸세. 하지만 교화되지는 않겠지. 나는 빛의 신을 숭배할 수 없는 몸이니까.”


“대부분의 마족이 그러합니다.”


에일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었다.


“하지만. 일부……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신앙에 입문하는 마족들이 있습니다. 또, 기댈 곳이 간절한 마족들이 신앙을 품습니다.”


“하하하. 그런 일을 기대하고서 이곳, 알카르트 교구를 유지하는 것이지. 마왕 폐하가 아무리 위대하신들, 모든 마족을 보살피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런 마족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에일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빛에 대한 신앙에 입문하여, 성경을 읽고 자신에게 빛이 깃드는 것을 기다리는 마족들은…… 전쟁이 벌어진다면,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국의 법은 전시에 있어 시민에게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을 걸세.”


“…….”


“300년 전과 마찬가지일세. 폐하께서 전쟁을 선포하면, ‘바라는’ 마족은 참전하면 되는 걸세.”


“잔혹한 말씀을 하십니다.”


에일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족의 흉포함은 천성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억제될 수 있던 것은, 위대한 베르무트와 유폐의 마왕님이 약속을 맺어 종전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천천히 교화되어 빛을 섬기게 된 마족들도, 대륙에서 인간과 함께 사는 마족들도…… 모두가 고삐와 재갈을 벗어 던질 겁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참전해 버린다면 빛에 대한 신앙이 너무 얇은 것이 아닌가.”


가비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에일린 플로르 교구장. 그대는 어떤가?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겠지만, 그대의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마족의 것. 그대는 전쟁이 벌어져도- 여전히 성직자로 있을 것인가?”


에일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 말은 매일 밤 에일린이 자문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싶습니다.”


“확신이 없는 대답이로군.”


“저 또한 마족의 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마인 이상 천성에 잡아먹혀 짐승처럼 날뛰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100년 넘게 믿어 온 신앙이, 제게 깃든 빛이, 제 안의 사악한 천성을 억누르리라 믿습니다.”


“믿는다, 라. 하긴, 신앙이 그런 것이지.”


“……결투.”


에일린의 걸음이 멈췄다.


“만약 린드먼 대공 전하께서 승리하신다면, 곧바로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까.”


“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네. 폐하께서 전쟁을 유보하신 것은, 용사가 바벨에 오르기를 바라셔서니까. 용사가 패배해 죽는다면, 폐하께서 더는 바벨의 어전에 앉아 계실 이유가 사라져 버리니.”


“용사가 승리한다면?”


“나는 패배해 죽을 것이고…… 그럼 개전이 늦춰지겠지. 용사가 바벨에 오를 때까지 말이야.”


“…….”


“언제까지고 늦출 수는 없네.”


가비드는 걸음을 멈춘 에일린의 등과, 그녀의 앞에서 굳게 닫힌 문을 보았다.


“용사가 바벨에 오르지 않아도 약속의 끝은 다가오고 있네. 그건 폐하께서 미리 말씀하셨지. 언젠가, 결국에는 약속이 끝이 날 걸세.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폐하께서 바벨의 어전에서 기다리겠다고 선언하신 것이 세상에 대한 마지막 자비라고 말일세.”


가비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즉, 이런 차이일세. ‘누가’ 침략하느냐. 용사가 바벨에 오르면, 용사가 바벨을 침략하는 것일세. 하지만 용사가 바벨에 오르지 않고 약속이 끝이 나버리면…… 헬무드가 대륙을 침략하겠지. 어느 쪽이 더 끔찍할 것 같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에일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잡았다.


“결투. 대공 전하의 패배를, 간절히, 진심을 담아 기도하겠습니다.”


“하하하.”


가비드는 저 대답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용서하도록 하지, 에일린 플로르 교구장. 그대는 성직자로서 내 패배를 기도할 수밖에 없을 테니.”


문이 열렸다. 에일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물러섰다. 가비드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문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늦었나?”


“아니.”


문의 안쪽. 방 한가운데 놓인 널찍한 소파. 건들거리는 자세로 앉아 있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일찍 와있던 것뿐이지.”


30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알카르트 교구는 굉장히 상징적인 중립지역이다. 그래서 유진과 가비드는 이 장소에서 결투에 관한 회담을 갖기로 했다.


“혼자일 줄은 몰랐는데.”


가비드는 유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같이 오겠다는 사람은 많았는데, 내가 오지 말라고 했다. 유난 떨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알카르트에서 회담이 결정되었을 때. 라이언하트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진이 아는 강자들 전원이 함께 가겠다며 찾아왔다. 심지어 호네인 왕세자와 아만 국왕은 왕국군을 파견하겠다고 말해왔으며, 교황 또한 성기사 전원을 출정시키겠다고 떠들었다. 오히려 이 경우에서는 키옐의 황제가 이성적이었을 정도였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는?”


“내보냈어. 나를 너무 걱정해서.”


“하하. 내보냈다고는 해도 별 의미는 없군. 아주 노골적이야.”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피부가 저릿거리고 있다. 공기 자체에 신성력이 녹아서 흐르는 것만 같다. 문이 열리고, 가비드가 들어온 시점에서부터 이곳, 알카르트 성당은 강력한 신성결계에 포착되었다.


“유난이라니까.”


이 노골적이고 강력한 신성력을 유진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그는 표정을 찡그리며 망토를 들췄다. 지금 유진의 망토 안에는 대부분 함께하던 메르와 라이미르아도 없다. 유진은 어색할 정도로 조용한 망토 안에 손을 넣어, 성검을 꺼냈다.


-빠직.


성검에 빛이 흘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방 안까지 영향을 주던 성녀들의 신성력이 모조리 성검 알테어에 흡수되었다. 유진은 전류처럼 빛이 흐르는 성검을 다시 망토 안에 넣지 않고, 대충 뒤쪽에 꽂아두었다.


변모한 성검의 모습에 가비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알테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성검은, 300년 전과 모습이 달라졌다. 하우리아에서 망령과 전투할 때, 성검의 칼날이 부서졌던 것은 보았다. 그 결과, 금속의 칼날에 갇혀 있던 빛의 원형이 해방되었다.


“신기하군.”


지금의 성검의 칼날은- 마치 투명한 유리 같은 것에 덮여 있다. 빛을 봉인하는 것이 아니다. 투명한 유리는 빛을 붙잡지 않고 그대로 세상에 밝히고 있다. 그 모습만 보면 살짝 두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다.


하지만 결코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위신의 마안을 쓸 필요도 없이, 가비드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유리와 같은 검신은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


“월광검에 이어 성검까지…… 베르무트의 애검(愛劍)들은 모두가 네 손에서 다르게 바뀌는구나.”


“그 새끼가 이상하게 썼나 보지.”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걱정을 물리친 것에 대해서 이따 성녀들에게 한 소리 듣겠지만, 스스로 말했다시피 유진은 이 자리에서 유난을 떨고 싶지 않았다. 당장 가비드는 검은 안개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오지 않았나.


“왜 내가 결투를 선포했는지 궁금해서 회담을 연 건가?”


가비드가 갑작스러웠듯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대뜸 결투에 대해 조율하자며 장소를 정하라기에, 중립지인 이곳 알카르트 교구의 성당을 선택했다.


“아니. 별로 궁금하지는 않아.”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가비드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결투를 청한 것인지는 이미 홀로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가비드의 대답은 유진의 생각과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건 더 이상 유진의 알 바가 아니었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과 결투하고 싶다.


지금 유진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날짜는 내가 정한다. 그것이면 충분해. 장소까지 내 마음대로 정하고 싶지는 않거든.”


“허. 왜 굳이? 나는 그대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려 했거늘.”


“똥개도 제집 안마당에서 조금이라도 먹고 들어갈 텐데. 만약 내 마음대로 장소를 정해서, 네가 출정을 오는 형태가 되어봐라. 그럼 내가 이겨도 조금 찝찝하거든.”


“하하!”


설마 저런 이유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이었지만, 이렇게 듣고 보니 참 하멜다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기왕이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낫겠지. 피난을 시키면 될 문제기는 해도, 너랑 내가 싸운다면 그 지역은 소멸해 버릴 테니.”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가비드가 고개를 저었다.


“이 결투에 대해서는 유폐의 마왕님께 보증을 받았다. 폐하께서는 너와 나의 결투가 세상에 큰 피해를 주지 않도록, ‘장소’에 친히 권능을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권능?”


“너와 나의 결투라면 마땅한 무대가 필요하지 않겠나.”


가비드의 뺨이 씰룩거리더니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300년부터 고대한 결투. 그것을 두고 ‘직접’ 하멜과, 유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할 만큼의 즐거움을 느꼈다.


“기사들 간의 결투와 시합이 명물인 시무인에는 커다란 콜로세움이 있지. 만약 너와 내가 그곳에서 결투를 한다면,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친히 권능을 내려 콜로세움을 사슬로 감아주실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네가 걱정인 인명피해와 지역의 소멸은 일어나지 않는다.”


“허.”


이번에는 유진이 놀란 소리를 냈다. 설마 유폐의 마왕이 그렇게까지 해주겠다고 나섰다니. 그렇다는 것은, 가비드의 거역은 역시 유폐의 마왕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시무인의 콜로세움은 쓰고 싶지 않은데. 차라리 새로 만들고 말지.”


“그렇다면 결국 장소부터 정해야겠군. 헬무드 제국령을 제외하고…… 흠, 이곳 알카르트 교구는 어떤가?”


“싫어. 여기는 도시 한가운데잖아.”


“인명피해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텐데.”


“유폐의 권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


유진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가비드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진을 빤히 보았다. 곧, 가비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만하구나, 하멜. 그렇지만 네 오만함을 꾸짖지는 않으마.”


“도시를 제외하고 사람이 없는 곳.”


“바다는 어떠한가? 아이리스. 그 한심하고 가여운 다크엘프가 수장된 남해의 끝도 좋겠군.”


“바다 한복판에 결투장을 만들기는 귀찮지.”


“그렇다면 산이나 숲은 어떤가? 우클라스 산. 이곳도 썩 괜찮군. 넓고, 사람이 살지 않지.”


“그곳은 라이언하트의 영지다. 그리고 흑사자 성과 베르무트의 무덤이 있다. 너와 유폐의 마왕을 오게 하고 싶지 않아.”


“흠, 이해가 가는군. 좋다. 그럼…… 북쪽의 끝은 어떤가? 레헤인야르. 그곳이라면 모론도 우리의 결투를 볼 수 있겠군.”


그 제안에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헤인야르의 너머, 라구르야란.”


“허.”


가비드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기묘한 땅에 대해서는 나도 안다. 머나먼 바다와 이어진 세상의 끝. 허나 누구도 끝과 끝의 연결을 확인할 수 없었다지.”


“그곳이라면 날뛰어도 문제는 없을 거다.”


“장소는 정했고…… 날짜는?”


“내년이 끝날 때까지 했지? 아슬아슬하게 미루도록 하지.”


“그건 상관없다. 네게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


가비드의 태도와 대답에서는 숨길 수 없는 여유가 묻어나왔다. 유진도 그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두달 동안 칩거했다더니. 몰래 수행이라도 했나?”


유진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말했다. 태도에서 감정이 묻어나오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방에서, 가비드를 보았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좋지 않아졌다. 좋지 않아질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불편한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지금 싸우면 죽는다.’


유진은 쯧 혀를 차며 생각했다.


“좋은 대련 상대를 구해서 말이다.”


가비드가 웃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환생 528화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의 상대라면 더 궁금한데.”


대련 상대.


유진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가비드를 응시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유진이 체감하는 가비드의 실력은, 고작 몇 달 사이에 이뤄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지금의 헬무드에 내가 모르는, 너와 대련할 수 있는 상대가 있나? 설마 누아르 제벨라가 상대해 주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대체 누가 가비드를 상대해 주었을까.


유폐의 마왕?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유폐의 마왕이 대련 상대가 되어주었다면, 가비드가 저토록 가볍게 말할 리가 없다.


“네가 무엇을 경계하는지 안다.”


가비드는 빙긋 웃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굳이 말하지 않고, 너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괜찮겠지만…… 나는 그런 식의 장난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다. 그러니 솔직히 대답해 주지. 하멜, 내 대련 상대는 마족이 아니다. 헬무드의 시민도 아니고, 이 세상의 존재도 아니다.”


“뭐?”


“폐하의 오랜 기억에서부터 재현한 환상…… 아마 너도 아는 존재일지도 모르겠군.”


유진은 잠시 가비드를 응시했다. 기억에서 재현한 환상.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알 수도 있는 존재란 말이 유진의 감정을 긁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하멜.”


가비드는 품 안의 사슬 뭉치를 의식하며 말을 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널브러진 황야를 알고 있나?”


“……?”


“나는 유폐의 마왕님의 은덕에 의해 그 이름모를 황야를 떠돌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이다. 그리고 그 황야에서 내가 맞닥트리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죽음이었지.”


시체가 널브러진 황야.


유진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날 죽이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상대였다. 대검을 짊어진 남자. 내가 싸우건, 싸우지 않건, 남자는 항상 내 목숨을 끊었다.”


“…….”


“현실에서 흐른 시간은 고작해야 두 달 남짓이지만, 황야의 나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았다. 그, 황야에서, 대체 몇 번의 죽음을 겪었는지 모르겠다.”


가비드는 손가락을 들어 유진을 가리켰다.


“나는 그 남자의 정체를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이 세상의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 역사가 기록되기도 전의 먼 옛날이라는 것. 그리고.”


남자의 ‘검’.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맞상대가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올렸을 뿐. 가비드는 아직까지 남자의 검을 넘어서지 못했다. 위신의 마안을 써도, 글로리를 사용해도, 남자의 검을 넘어서서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멜, 너는 그 남자를 알고 있을 거다.”


황야에서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 죽지 않기 위해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고, 글로리를 뽑았다. 그때 남자의 검을 처음 보았다.


검붉은 빛이 만들어내는 검신. 무자비하고 포악하며 거스를 수 없는 폭력의 결정.


그 검은, 망령을 죽였던 하멜의 검과 닮았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냐.”


어떻게 저렇게 강해졌나 했더니. 설마 유폐의 마왕이 가비드에게 저런 방식으로 원조를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환상이라니 다행이야. 난 또, 내가 모르는 강자가 새로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 다행이라고 할 일은 아닌가. 유진은 쯧 혀를 차며 생각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가비드는 지금보다 더, 더 강해질 것이다. 당장 유진은 가비드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가비드가 강해지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그 남자와 어떤 관계인지도 제법 궁금하다만, 그런 것까지는 캐묻고 싶지 않다.”


“그럼?”


“이름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왜?”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거창한가?”


가비드는 스스로 말하고서 피식 웃었다.


“하긴, 내 쪽에서 멋대로 생각하는 것도 우스울 일이지만. 그렇지만 하멜, 나는 그 남자의 검에 탄복했다. 설마 세상에 이토록 강한 남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검에서 수백 수천 번을 죽었고, 죽음이 번복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나를 예리하게 깎아냈다.”


“…….”


“그렇기에 순수하게 남자의 이름과 정체가 궁금한 것이다. 나를 이토록 죽이고, 끌어낸 상대의 이름을 알고 싶다.”


“아가로트.”


툭 내뱉었다.


“전쟁신, 아가로트.”


가비드는 순수한 존중으로 아가로트의 이름을 궁금해하고 있다. 그러니 유진도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전쟁신 아가로트…….”


가비드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이름을 되뇌었다. 동시에 긴 세월 살아오면서 쌓인 기억을 더듬었다.


전쟁신, 아가로트.


찾았다.


“아이리스가 틀어박혔던 바다에 그 이름이 남아있었지. 신앙이랄 것도 없는, 아주 오래된 전설 같은 형태로 말이다.”


아이리스가 대뜸 남쪽 끝에 틀어박혀, 드워프들을 납치해 뭔지 알 수 없는 꿍꿍이를 꾸밀 때. 가비드도 개인적으로 아이리스의 음모를 짐작하기 위해 정보를 긁어모았었다. 그때 아가로트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인상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시대에 신앙과 종교를 남기지도 못한, 아득한 고대의 신의 이름을 기억할 가치가 어디에 있나.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재회하다니.


가비드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의문에 대답해 줄 의무 따위는 없었을 텐데. 친절에 감사하마.”


“만족하냐?”


“그 남자가 먼 고대에 전쟁신이라 일컬어지는 격의 소유자라면, 하하, 만족할 수밖에 없지.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쓰러트리지 못했으니.”


가비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괜찮겠나?”


“뭘 물어보는 거냐?”


“결투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년. 하멜, 너 또한 그 시간 동안 강해지겠지. 하지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나는 너 이상으로 1년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사슬을 열쇠 삼아 들어가는 황야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현실과 어그러져 있다.


“감히 권하자면, 너로서는 차라리 지금 당장 나와 결투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하멜. 나는, 확신할 수 있다. 1년 후의 나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할 것이다. 어쩌면, 그 전쟁신의 검마저 넘어설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지.”


유진도 저 사실을 정면에서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네가 아가로트와 비슷하거나……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가비드가 눈을 끔벅거렸다. 유진은 가비드가 의문을 묻기 전에 먼저 대답했다.


“나에게는 아가로트를 넘어섰다는 확신이 필요하거든.”


흐릿한 기억과 견주어 얻어낸 판단은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1년 뒤의 가비드와 결투해서 승리한다면, 진정으로 아가로트를 넘어섰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무덤덤한 목소리. 가비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고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결투 자체가 그리 공정하지는 않을 것 같군. 하멜. 당연히 너도 알고 있겠지만, 결투는 너와 나 단둘이서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결투에 현명한 세냐나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는 개입할 수 없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마족이 인간보다 모든 면이 우월하단 것을 안다. 네 검이 몇 번이고 나를 벤들, 나는 치명상을 입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


“또한 위신의 마안은 내가 섬기는 유폐의 마왕님의 권능을 그대로 재현시키지.”


“그건 상관없어. 네가 위신의 마안을 쓰듯, 나도 성검에서 빛의 기적을 끌어내니까.”


“하멜.”


가비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바란다면, 이 결투가 훨씬 더 공정할 수 있도록 규칙을 추가하마. 네가 내 심장을 부수거나 목을 벤다면, 나는 죽지 않아도 패배를 인정하겠다. 패배를 인정하고, 나 스스로 목숨을 끊겠…….”


“하하하!”


유진은 가비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무릎까지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개소리하지 마, 가비드 린드먼. 심장을 부수거나 목을 베면 패배를 인정하겠다고? 하하하! 유폐의 마왕이 내게 그래 줄 것 같냐? 멸망의 마왕이 나와 규칙 따위를 정하고 싸울까?”


아니.


유진은 단언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깟 규칙은 필요 없어. 나는 1년 뒤의 결투에서 널 죽인다. 그렇게 이긴다. 그 뒤에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고, 바벨에 올라서, 유폐의 마왕을 죽인다. 그리고 멸망의 마왕을 죽이러 간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오만한 말이다. 가비드도 유진이 강하단 것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베르무트마저, 300년 전 바벨에서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다.


“내 말이 너를 모욕하였군.”


하지만 가비드는 저 말에 오만이란 감정을 읽을 수 없다. 오히려 광기에 가까운 맹신을 느꼈다. 몰살의 하멜은,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는. 진심으로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조율할 사안이 없구나.”


가비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투장의 건설은 어떻게 할 건가? 네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


“라이언하트에서 데리고 있는 드워프가 꽤 많은데, 걔들보고 만들어놓으라고 하면 되겠네.”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온 대답. 가비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을 돌린 가비드의 앞에 사슬의 문이 열렸다.


“그럼 1년 뒤에…….”


“잠깐.”


유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가비드를 붙잡았다.


“다른 부탁 하나만 해도 되냐?”


“……부탁?”


설마 저 하멜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이 나올 줄이야. 가비드는 저 말이 굉장히 의외여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너 가기 전에 나 좀 어디 떨어트리고 가라.”


가비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진은 먼저 좌표를 말했다. 가비드는 몹시 당황했지만, 방금 유진에게 들은 좌표를 머릿속에서 그리며 눈동자를 몇 번 끔벅였다.


“이곳은…… 남해 아닌가? 내가 읽은 것이 정확하다면, 광란의 마왕이 된 아이리스가 죽은 바다인데?”


“맞아.”


“이곳은 왜 가려는 것이지?”


“이유는 됐고.”


“허…….”


부탁을 하는 입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뻔뻔했지만, 가비드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마 전쟁신 아가로트와 관련된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이리스가 죽은 바다에는 아가로트의 이름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궁금하기는 하다만…….”


결투까지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전적으로 유진에게 달린 일. 가비드는 긴 시간 기다려 온 적수를 탐색하거나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도 1년 동안 몰두할 일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가비드는 유진에게 들은 좌표대로 사슬 문을 조작했고, 유진은 그 짧은 사이에 종이를 꺼내서 무어라 휘갈겨 적었다.


-쏴아아…….


사슬이 만든 문에서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방금까지는 헬무드에 있는 린드먼 저택가의 텅 빈 방 안을 비추었는데, 지금은 광활한 바다를 비추고 있다.


유진은 그 바다를 보자마자 즉시 발을 뻗었다.


“그럼…… 1년 뒤에 보지.”


가비드는 끊겼던 말을 다시 이었다. 유진은 대답 없이 사슬의 문을 지나다가, 대뜸 가비드를 향해 손을 들어 주었다.


“허…….”


우뚝 선 가운뎃손가락. 가비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저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 역시 하멜답다고 해야 하나? 가비드는 유진이 바다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테이블에 남은 유진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훔쳐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유진이 접지도 않고 훤히 펼쳐둔 탓에 어쩔 수 없이 내용을 보게 되었다.


[1년 동안 수행하고 올게. 라구르야란 쪽에 결투장 만들기로 했으니까, 나 대신 라이언하트 드워프들한테 결투장 만들라고 시켜. 나중에 화내지 말고, 너무 걱정하지도 마.]


“허…….”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적어 놓은 편지에 가비드는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저렇게 적어놓고 대뜸 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라구르야란에 결투장을 만들기로 했으니 드워프들한테 시키라니…….


“나중에 따로 편지를 보내야겠군.”


하멜이 남긴 편지대로 일을 진행하였다가는 무언가 하나쯤은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하멜 대신, 결투의 날짜와 장소에 대해서 라이언하트에게 편지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나 무책임하다니.”


가비드를 쯧쯧 혀를 차며 새로이 사슬의 문을 열었다.


* * *


사슬의 문을 지난 순간, 곧장 바다로 떨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능력은 굉장히 편리해서 부럽단 말이야.’


워프 게이트를 쓸 필요 없이, 좌표만 알고 있다면 언제든지 한 걸음 만에 도착하는 권능. 이러한 권능은 세냐와 드래곤도 갖지 못한, 오직 마왕만의 권능이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


이곳은 남해의 끝. 머나먼 바다와 가까운, 아이리스가 죽은 장소. 그리고 아득한 옛날에는 광란의 마왕이 유페의 마왕과 약속을 맺은 장소.


아가로트가 다스리던 도시.


전쟁 신의 성지가 묻힌 바다.


“나 혼자 왔으면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말이야.”


유진은 바다로 떨어지면서 중얼거렸다. 이곳은 워프 게이트와 한참 떨어진 바다라, 배를 타거나 하늘을 날지 않고서는 도착할 수 없다.


남은 시간은 ‘고작’ 1년.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어떻게? 이번에도 모론을 찾아가서 무작정 대련을 해야 하나. 그런 식의 대련에서 얻을 것이 아직 남아 있을까?


‘없어.’


지금의 유진은 모론보다 강하다. 유진이 떠난 사이에 모론도 새로 수행을 했겠지만, 그럴지라도- 더 이상 모론과의 대련에서 무언가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수로 돌아가서, 현자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카르멘처럼 넝쿨에 들어가 거신의 환영과 대련해야 하나. 그건 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현자의 경고를 정면에서 무시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결국 지금의 유진이 모색할 수 있는 방향은 하나뿐이다.


‘신력.’


어딘가 틀어박힐 장소가 필요하다.


다른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나의 근원을, 오직 나만을 관조할 수 있는 장소.


“여기 말고는 없지.”


떨어지던 발이 바다에 닿은 순간.


마치 바다가 문이라도 된 것처럼 ‘쩍’하고 갈라졌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갈라진 바다의 틈 사이로 떨어졌다.


‘1년.’


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1년 동안 여기서 안 나온다.’


심해의 심연이 활짝 열렸다.


1년이 흘렀다.


빌어먹을 환생 529화


1년은 빠르게 흘렀다.


헬무드의 대공,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은 회담 이후로 라이언하트 본가에 직접 친서를 보냈다.


친서에는 1년 뒤에 있을 결투가 정확히 어느 날짜에,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이뤄질지에 대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의 ‘잠적’은 개인적으로 수행에 몰두하기 위해서이며, 본인은 결코 결투의 상대인 용사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맹세마저 곁들였다.


가비드로서는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알카르트 성당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유진이 후다닥 편지를 적어 남기기는 했지만, 그 일방적인 편지의 내용으로는 유진의 뜻을 유추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결국 의심의 화살은 가비드에게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년.”


시엘은 눈썹을 왈칵 찡그리며 내뱉었다.


“곧 결투를 약속한 날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을 뱉을 때마다 호흡이 얼어붙어 뿌연 김이 되었다. 혹한. 이 추위는 키옐의 겨울이 아니다. 지금 시엘은, 몇 년 전 나이트마치를 치렀던 레헤인야르의 훈련기지에 와있었다.


“도망친 것은 아니잖아.”


맞은편에 선 시안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넓은 세상,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않고, 하멜이, 유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얼간이들은 시안과 시엘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누가 뭐래? 그 자식이 도망쳤을 리가 없지.”


시엘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서 시안을 노려보았다.


“내가 언제 도망쳤다고 했냐? 도망친 것은 아니라고 했지.”


시안도 물러서지 않고 똑같이 시엘을 노려보았다. 적잖은 감정이 실린 시선이 쌍둥이들의 백색 불꽃을 일으켰다.


각자가 도달한 백염식은 똑같은 6성. 하지만 결코 똑같지는 않은 불꽃들이 일렁거리며 눈보라를 잠재웠다.


“어휴.”


잠시 노려보다가, 결국 시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불꽃을 거두었다.


“너랑 나랑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남들 보기 부끄럽게.”


“미안해.”


시엘도 불꽃을 거두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쌍둥이가 자그마한 일에도 발끈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가비드 린드먼과의 결투가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잠적해 버린 유진은 돌아오기는커녕 소식 하나 들려오지 않고 있다. 쌍둥이가 백염식의 6성에 오르고, 암실을 극복하고 나왔는데도 라이언하트 본가에는 간략한 편지조차 도착하지 않았다.


그쯤 되니 라이언하트, 아니, 대륙 전체가 유진의 행방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제국과 왕국이 앞장서고 정보길드를 동원하고 시민들의 제보까지 모집했음에도, 대륙 그 어디에서도 유진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결투를 앞에 두고서 도망쳤다.


솔직히 이런 소문이 나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유진이 그간 해온 일이 있는 데다, 성격이 워낙 유명한지라 소문이 격화되지 않을 뿐.


결투가 정해진 시점부터 잠적하고, 1년 동안 소식은커녕 행방도 묘연한 데다, 결투가 사흘 남은 시점에서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바다라.”


시안은 표정을 구기고서 중얼거렸다. 라이언하트와 유진의 지인들은, 유진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시간이 워낙 촉박하다 보니 불안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남해의 끝 말이야.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는데, 뭐 수행할 만한 데가 있나?”


“있…… 을걸?”


광란의 마왕, 아이리스와 전투를 치르고 그녀를 죽였던 바다. 그 밑바닥에 무언가가 있다는 시엘도 안다. 하지만 그녀는 심해와, 그보다 깊은 심연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유진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그곳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세냐 님이랑…… 크리스티나 성녀 언니뿐이지.”


“성녀님이라고 부를지 언니라고 부를지 둘 중 하나만 하지?”


“싫어, 그냥 언니라고 하기에는 민망하고 부끄럽단 말이야.”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괜히 발치의 눈을 걷어찼다.


유진이 없는 1년. 성국에서 돌아온 크리스티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한참 동안 나오지 않고서 술만 퍼마셨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식객. 밖에 나오지 않고 술만 찾아대는 성녀를 상대하는 것은 시엘의 몫이었다.


“성녀님한테 뭐 들은 것 없어? 이제는 더 이상 비밀로 하고 감춰둘 수도 없잖아. 사흘,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고.”


“진짜 없어. 나도 성녀 언니가 취했을 때 몇 번이나 캐보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단호한 얼굴만 봤단 말이야.”


그만큼 유진의 비밀이 중요하단 것일 터. 예전이라면 시엘은 자신만 소외된 것에 우울함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은 공표되었고, 시엘 같은 경우에는 진즉에 유진에게 한 번 들이박았다가 걷어차인 몸.


하지만 한 번 걷어차였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최후의 최후에 받아들여지면 되는 일. 시엘은 몇 년 전 얻어맞은 화끈한 따귀를 떠올렸다…….


“설마 시간을 헷갈린 것은 아니겠지……?”


시안은 홀로 결의를 다지는 동생을 무시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있는 산봉우리. 저곳을 넘으면 라구르야랸이 있다.


“그, 바다 한복판이면 날짜를 알기도 힘들잖아. 아슬아슬할 때까지 시간을 쪼개서 수행하다가, 날짜를 헷갈린 걸지도…….”


“유진이 바보야?”


“바보는 아니지만 가끔 바보 같은 구석이 있기는 하잖아. 그리고 남해 끝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말 그대로 대륙을 횡단해야 한다고. 워프게이트를 쓴다고 해도 사흘이면 시간이 너무 부족해.”


이미 시무인부터 시작해서 이곳까지의 최단루트에는 각국의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만약 유진이 워프게이트에 모습을 보였다면 진즉에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워프게이트에도 유진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


“알아서 오겠지 뭐…….”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시엘도 도저히 확신은 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결투에서 도망칠 리는 없다. 사흘 안에 무슨 수를 써서도 도착은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시엘과 시안은 도저히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유진이 라이미르아라도 데려갔더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으로 날아서 오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유진은 라이미르아를 데려가지 않았다. 메르도 데려가지 않아서 사정도 알 수가 없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세냐와 카르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세계수에서 우화하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그 둘이 유진과 같이 돌아오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흘이라는 빡빡한 시간 안에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기대를 걸어보아도 솔직히 회의적이다. 이곳은 대륙의 최북단. 그리고 유진이 틀어박힌 곳은 남해의 끝. ‘머나먼 바다’를 가로지른다면 곧장 라구르야란에 도달할 수 있지만…… 대륙의 역사에서 머나먼 바다를 횡단한 전례는 단 한 번도 없다. 북쪽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남쪽 끝에도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확인한 적이 없다.


“어떻게든 올 겁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시엘과 시안은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점점 거세어지는 눈보라. 휘날리는 눈발 너머에서 휘청휘청 걸어오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보였다.


“머나먼…… 바다…… 히윽…… 바다를 가로질러서 오는 것은, 끅, 유진 님도 하지 못하던 일이지만, 히끅, 어떻게든 올 겁니다.”


놀랍게도 크리스티나는 양손에 각각 다른 술병을 들고 있었는데, 두 술병은 공평하게 비워져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체면도 신경 쓰지 않고, 두 개의 술병을 동시에 들어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 그러니까, 딸꾹, 두 분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 밖이 무척 춥습니다. 그러니까, 히끅, 안에, 안에 들어가십시오.”


누구보다 유진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크리스티나다. 본래 도통 마시지 않던 술이 부쩍 늘어난 것도 유진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잊기 위해서다. 놀라운 것은, 매일 술을 저렇게 마시고 있음에도 크리스티나가 폐인처럼 일상을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진이 없는 1년. 초창기에는 방에 틀어박혀서 시엘을 강제로 앉혀 놓고 술만 퍼마셨지만, 한 달 정도 그렇게 지낸 뒤, 크리스티나는 술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유라스에 돌아가서 성국 전역에 유진의 성상을 세웠다. 성경에 유진에 관한 구절을 추가했다. 그러고는 홀로 세계수에 다녀왔고, 최근 몇 달 동안은 레헤인야르로 넘어와, 결투장을 건축 중인 드워프들을 축복했다. 대망치협곡에 은거한 모론과도 만남을 가졌다.


“서…… 성녀님, 술이 너무 과하신…….”


“오, 시안 님,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날이, 날이 너무 추워서, 몸을 덥히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있을 뿐. 제 정신은 아주 멀쩡합니다.”


크리스티나는 깔끔하게 비운 술병 2개를 흔들며 웃었다. 얼큰한 취기로 번진 미소에 시안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결투장 쪽은 어때요?”


“아하핫…… 시엘, 당신도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그곳, 그곳은 아주 멋지답니다. 제가 특히나 드워프님들에게 부탁, 힉, 부탁했으니 말입니다. 아름답고 웅장한, 차…… 찬란! 찬란한 유진 님의 신화를 쓰기에 아주 어울리는 곳이지요.”


콰작! 말하는 도중, 크리스티나의 술병이 박살 났다.


“이제 유진 님만 오면 되는 것입니다. 오실…… 오실 때가 되었는데, 왜 오지 않으시는 걸까요? 저는, 저는 유진 님을 아주 많이, 끅, 믿고 있습니다만, 유진 님이 제게 제대로 된 편지 한 통 전하지 않으신 것은, 힉, 지금 생각해도 아주 서운합니다.”


또 시작인가. 시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발을 뒤로 끌었다.


“시엘!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리, 이리 오도록 하십시오. 밖은 추우니까, 제 방에 함께 갑시다. 시안…… 시안 님도 어떻습니까?”


“저는…… 차기 가주로서의 업무를 해야 하기에……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차기 가주의 업무라면, 허윽,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이해하겠……씁니다. 하지만 시엘, 당신은 괜찮지요?”


시엘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다. 누군가는 크리스티나의 폭주를 붙잡아야 한다……. 다른 일이라면 아니스에게 맡기면 될 일이지만, 술에 관한 문제는 그 셋에게 맡길 수가 없다.


“네…….”


“네! 그럼, 그럼 갑시다.”


방긋 웃는 크리스티나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서 시엘의 옷깃을 잡았다.


끌려오게 된 크리스티나의 방. 이곳은 이미 폐허와 다름없었다.


시엘은 두려운 눈으로 구석을 보았다. 그곳에는 지쳐 쓰러진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구겨진 넝마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어째서일까요?”


혼자 새 술을 꺼내 마시기 시작한 크리스티나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유진 님은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제게 단 한 통의 편지도 보내지 않으신 걸까요?”


“수…… 수행이 바빴겠죠.”


“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진 님에게 있어서 이 결투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 유진 님이 패배하신다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립니다. 그러니 수행에 몰두하실 수밖에요.”


“그렇죠…….”


“하지만 저는 너무나, 너무나도 서운합니다. 대뜸 남겨진 제 기분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으신 겁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시엘, 당신은 어떻습니까? 시안 님은요? 제하드 님은!”


“…….”


“이해…… 이해는 합니다.”


설움을 토하던 크리스티나가 감정을 붙잡았다. 아마 머릿속의 아니스에게 언질을 들은 것만 같았다.


아니…… 정말로 그럴까? 솔직히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지금 취해서 진상을 부리는 것은 크리스티나인가, 아니스인가?


“아마, 유진 님이 들어가신 곳은 심해의 밑바닥…… 그곳은…… 유진 님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장소일 겁니다. 제가 아무리 바란들,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네.”


그것에 대해서는 들었다. 다만 그 아래에 대체 뭐가 있는지를 듣지 못했을 뿐. 때문에 시엘을 나름의 상상력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심해의 밑바닥에 해저동굴이라도 있는 것일까? 라이언하트 호수의 밑바닥처럼 말이다. 어쩌면 드래곤의 레어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제게 언질은 주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근처에 배라도 띄워놓고서 유진 님을 기다렸을 겁니다.”


“지금 그곳에 배는 있죠? 마이스 님이 유진 님을 마중하기 위해 가 계신 것으로 아는데.”


“그건, 그건 어디까지나 마중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갈 수는 없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긴 탄식을 흘리며 입에 술을 콸콸 부었다.


“허윽…… 저는…… 저는, 만약을 대비해야 합니다. 만약 유진 님이 사흘 안에 오지 못하신다면. 세냐…… 세냐 님도 이곳에 계시지 않으니, 제가 가비드 린드먼을 상대해야 합니다…….”


“네?”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시엘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진과 세냐를 대신해서 가비드 린드먼을 상대한다니! 설마 그 유폐의 칼을 상대로 플레일이라도 휘두를 생각인가? 아니면 정신을 번쩍 깨우고 눈물을 뚝 그치게 만드는 매서운 따귀를 선사할 셈인가.


“아…… 아무리 성녀 언니님들이라도 그건 너무 무모하지 않을까요. 차라리 제가 모론 님을 불러올게요.”


라구르야란의 결투장은 모론이 있는 대망치 협곡과 가깝다. 암전의 마안의 권능을 쓴다면 한 걸음 만에 모론을 불러올 수 있다. 사실 굳이 암전의 마안을 쓰지 않아도 모론의 도약력이라면 몇 초도 되지 않아 결투장에 도착할 수 있다.


백염식의 6성에 오르고, 암실을 극복하면서 시엘의 실력은 극적으로 상승했다. 특히나 시엘은 마나를 늘리는 것에 몰두했고, 백염식의 경지와 상관없이 단순 마나의 총량은 8성에 오른 길레이드와 기온마저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다른 분들도 많잖아요? 알체스터 경과 오르투스 경도 있고, 아이빅 님과 아만 국왕님도 계신 데다 대마법사들 전원이 와 계시니…….”


“가비드 린드먼과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로서는…… 모두와 함께 합공을 하고 싶습니다만. 그랬다간 나중에 돌아온 유진 님이 화를 내실 겁니다. 그리고 가비드 린드먼은 우리 모두가 합공했을 때 굳이 싸워줄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무사히 빠져나가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유진 님을 비웃고 모욕할 것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진이 결투에 늦을 경우를 대비할 뿐.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반드시 돌아올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가 하려는 것은, 가비드 린드먼을 설득, 아니, 부탁하는…… 딸꾹, 것입니다. 유진 님과의 결투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유진 님이 조금 늦는 정도는 이해해 줄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뇨, 솔직히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해는 하지 않겠죠. 어쩌면 나름의 대가를 요구할지도. 일단 저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용의는 있습니다.”


시엘은 잠시 크리스티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가비드에게 애걸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무릎을 꿇는 것은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다. 그, 신실한 아니스도- 유폐의 칼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건 끔찍한 굴욕이다. 시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입술을 몇 번 잘근거리며 씹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무릎을 꿇겠어요. 유진을 위해서라면 라이언하트 모두가 무릎을 꿇을 거예요.”


“굳이 라이언하트가 굴욕을 자처할 필요는 없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희가 생각할 것은, 무릎을 꿇느냐 마느냐보다…… 유진 님을 믿는 것이지요. 저도, 유진 님을 믿습니다. 만약을 대비할 뿐이죠.”


크리스티나는 다시 잔에 술을 부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늦어도 내일이나 모레쯤은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바람이 무색하게도, 유진은 이틀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났고,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이 도착했다.


빌어먹을 환생 530화


라구르야란.


바로 옆의 레헤인야르에서는 사시사철 눈이 내리지만, 이 땅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회색의 뿌연 하늘. 안개가 고인 것만 같은 땅.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침묵의 바다.


활짝 열린 사슬의 문에서 검은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은 검은 안개를 이끌고서 침묵의 땅에 발을 디뎠다.


“허.”


주변을 둘러보기도 전. 가비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희뿌연 하늘의 위. 이제는 익숙한 제벨라 페이스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안개가 모두 나오고, 사슬의 문이 닫히는 사이에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열렸다.


“당신이라면 혼자서 올 줄 알았는데.”


누아르 제벨라는 코웃음을 치며 하늘에 섰다. 평소 기행과 더불어 파격적이고 화려한 패션을 즐기는 그녀지만, 오늘은 이례적으로 단색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가비드는 누아르의 얼굴을 살짝 덮은 검은 베일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대는 내가 패배해서 죽을 것을 예견했을 텐데.”


“아하하. 물론 그렇지만, 당신의 죽음을 비웃을 생각은 없어요. 난, 당신이 죽는다면 진심으로 애도할 생각이라구요.”


누아르는 얼굴을 덮은 베일을 살짝 들추며 웃었다.


“하지만 이건 조금 의외인걸. 나는 당신이 혼자서 올 줄 알았는데.”


“대륙의 모두가 보고 싶어 하는 결투잖나.”


“그 대답이 훨씬 더 의외야. 가비드 린드먼. 당신이 그렇게 과시욕이 넘치는 남자인 줄은 몰랐는걸요. 이러다가 패배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만약 내가 패배한다면, 더더욱 검은 안개를 이곳에 데려온 의미가 있지. 헬무드의 적이 얼마나 강한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가비드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안개를 돌아보았다.


헬무드의 최정예기사단. 가비드는 설령 자신이 패배할지라도, 이 결투를 통해 검은 안개의 기사들이 무언가를 얻고 깨치기를 바랐다.


“그리고, 꼭 내 바람 때문에 데리고 온 것은 아닐세. 그대도 알지 않나. 검은 안개는 유폐의 마왕을 지키는 친위대. 유폐의 마왕님이 오신다면, 검은 안개도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하네.”


“어머.”


누아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녀는 이미 닫힌 사슬의 문을 힐긋 보며 말했다.


“유폐의 마왕이 직접…… 오는 건가요?”


“결투장에 권능을 내리기로 하셨으니.”


“그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는 설마 직접 올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혹 두려운가? 폐하께서 그대의 무례를 꾸짖을 것이 말일세.”


“아하하! 그럴 리가요.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걸요.”


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가비드는 하늘에서 울리는 웃음소리에 어깨를 으쓱거리고선 걷기 시작했다.


“린드먼 대공. 제벨라 공작이 폐하를 폐하라 섬기지 않는 것을 어찌 꾸짖지 않으시는 겁니까?”


검은 안개의 부관이 가비드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그 혼자만 아니라 검은 안개 전원이 가비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헬무드를 다스리는 황제. 유폐의 마왕 본인이 ‘황제’라는 호칭보다는 ‘마왕’이라는 호칭을 즐기기는 하지만, 어느 쪽이든 휘하 마족들은 예를 갖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누아르 제벨라는 유폐의 마왕을 ‘마왕님’이라 부르지 않고 있다.


“그녀의 격을 인정하기 때문일세.”


가비드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아르는 이미 1년 전부터 유폐의 마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 마치 동격인 마왕이라도 된 것 같은 언동을 사용했다. 그때부터 이미, 가비드는 누아르의 언동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제벨라 공작의 심기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그녀는 개미를 짓밟듯 그대들을 죽일 수 있고, 폐하께서는 그대들의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제벨라 공작을 꾸짖지 않으실 테니.”


“예.”


부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검은 안개는 모두 다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멋지군.”


가비드는 결투장을 올려보며 탄성을 흘렸다. 고작 1년도 안 되어 완공된 건축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웅장한 건물. 가비드는 섬세하게 조각된 벽들을 훑으며 빙긋 웃었다.


“이번 한 번을 마지막으로 삼는 것은 아쉬울 정도야.”


만약 결투에서 승리한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각을 끊었다. 그런 생각은 결투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야 더욱 즐길 수 있으리라.


가비드는 피식 웃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래를 빙 돌아보면 안으로 들어갈 문이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시무인의 콜로세움과 비슷한 이 건축물에는 천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은 화려하지만…… 안은 생각보다 초라한가.”


대부분 비어 있는 관중석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이곳은 대륙의 최북단이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눈이 멎지 않는 설원을 횡단하고, 가파르고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워프 게이트는 설치할 수 있을 텐데. 설치하지 않는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가?’


가비드는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바다와, 불길함이 그득 번진 레헤인야르를 힐긋 보며 생각했다.


나이트 마치로 방문했을 때는 보지 못했는데…… 지금의 가비드는 레헤인야르에 고여있는 사기(邪氣)와 독기(毒氣)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라구르야란을 관망하는 가장 높은 봉우리. 그 최정상에 우뚝 선, 레헤인야르의 산맥보다 거대하게 느껴지는 사내를 보았다.


“공포의 모론.”


거리는 멀다. 하지만 가비드는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모론의 살의를 느꼈다. 이상하게 토막이 난 도끼를 어깨에 세운 모론은, 먼 거리의 가비드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원한다면 조금 더 가까이서 보아도 될 텐데…… 하하. 네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가.”


어깨에 걸친 도끼를 적신 피를 보았다. 가시화한 사기와 독기는 저 피에서 번지고 있었다. 가비드는 큭큭 웃으며 다시 관중석을 내려다보았다.


관중석이 대부분 텅 빈 것은, 이곳이 단순히 대륙과 멀고, 오기가 힘들어서만이 아니다. 1년 동안 잠적한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불신. 그리고- 만약, 만약 유진이 결투에서 패배했을 때에 대한 불안 때문이리라.


“관중석이 가득 찬 편이 좋았나요?”


높은 곳에서 날고 있던 누아르가 속삭였다.


“인간뿐만 아니라 마족들도 왔다면, 흐흥, 어느 쪽의 함성이 더 클지 재어볼 수 있었을 텐데.”


“어차피 이곳에서의 결투는 대륙 전역에 송출된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세상 모두가 결투의 양상과 결과를 알고 싶어 할 테니 말이니까요.”


누아르는 이 커다란 결투장에 설치된 다양한 마법들을 느꼈다. 검은 탑과 마력 케이블을 인간의 방식으로 재현한 모양이지?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식의 영상 송출은 내 전문인데 말이야. 얌전히 도와달라고 했다면 내가 쉽게 만들어줬을 텐데.”


그래도 재현 자체는 훌륭하다. 이 정도라면 미리 선고된 대로, 각국의 주요 광장 등지에서 결투를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용사,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와-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중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을 것인지.


“관중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가비드는 웃으면서 아래로 내려왔다.


“대륙의 영웅들이 있고, 라이언하트가 있지 않은가.”


장소가 장소인 데다 어떤 위험이 생길지 모르는 만큼, 황제나 교황, 국왕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우리아의 전장에서 보았던 영웅들 전원은 참석해 있다.


가비드는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예를 갖추어주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오지 않았군요.”


누아르가 웃으며 속삭였다. 관중석은 물론이고 결투장 어디에도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기척조차도 읽을 수 없다.


“나의 하멜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아직 오늘은 지나지 않았네.”


가비드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건너편. 그래도 헬무드의 깃발을 높이 걸어 준 관중석. 가비드는 그 한가운데에 있는 큼직한 의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행히 저들은 나를 결투장 한가운데에 세워놓고 기다리게 할 생각은 아닌 모양이야.”


“당신이 저 의자에 앉으면, 유폐의 마왕은 어디에 앉죠?”


누아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검은 안개를 이끌며 하늘을 가로지르던 가비드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강림하실 폐하는 저 의자를 옥좌로 삼지 않으실 걸세.”


“하긴, 유폐의 마왕은 항상 그렇죠. 멀쩡한 의자를 두고서 등 뒤의 사슬로 의자를 만들곤 해. 그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사슬 의자가 무어가 편한 걸까?”


가비드는 하늘에서 내려와, 헬무드의 깃발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를 따라온 검은 안개는 넓게 펼쳐져서 가비드의 뒤편에 섰다. 누아르는 아무도 앉지 않은 검은 안개의 기사들을 둘러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오늘이 끝날 때까지 여기 앉아서 기다릴 생각인가요?”


“물론 그럴 걸세.”


“만약 나의 하멜이 오늘 오지 않는다면?”


“나는 하멜이 올 것이라 믿네.”


“만약, 이라고 말했잖아요. 나도 하멜이 올 것이라고 믿어요.”


“만약…… 만약 하멜이 오지 않는다면.”


검은 안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스산한 살의와 함께 안개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의자에 앉은 가비드는 손을 살짝 들어 올리는 것으로 안개를 진정시켰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하멜이 나와 약속한 결투에 오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어서 말일세.”


“흐흥, 나의 하멜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바로 당신이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하멜이 어디에 있는지 알 테고. 당신이 데리러 가는 것은 어때요?”


“그건 하멜과 약속하지 않았네.”


가비드가 고개를 저었다.


“하멜이 오늘 안에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 그가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 되지. 하멜이 결투에서 도망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럼?”


“별로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하멜을 대신해 다른 누군가가 나와 결투를 치러야 할 걸세.”


그 대답에 누아르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이 자리를 떠날 걸세. 어디로 갈지는 아직 생각해 두지 않아 나도 모르겠지만, 어딘가의 도시일 걸세.”


“도시에 가서?”


“그 도시의 모든 사람을 베어 죽일 걸세.”


결투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할 걸세. 가로막는다면, 가로막는 것들부터 베고 가야겠지.”


가비드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


관중석의 앞. 여덟 장의 빛의 날개를 펼치고 있던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정작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비드는 질문을 듣지도 않은 주제에 크리스티나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나를 설득하는 것이 아닐세. 자리로 돌아가,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것이지. 부디 하멜이 오늘이 끝나기 전에 이곳에 도착하기를 말일세.”


“다른 조건은 없습니까?”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오싹한 한기에 등골이 얼어붙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뿐. 크리스티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가비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예전의 크리스티나였다면 가비드와, 누아르와, 검은 안개가 내뿜는 마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오들오들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1년 동안 성장한 것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술이라는 못된 버릇이 생기긴 했지만, 그녀는 양손의 성흔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매일 기도도 거르지 않았다.


“저는 당신이…… 무척이나 신사적이고, 기사도를 우선하는 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진 님과의 결투를 간절히 고대한 만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진 님이 도착하지 못하실 경우도 이해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가.”


“저는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탓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 명과의 결투, 도시 하나의 몰살. 인간의 관점으로는 미친 짓이지만, 당신은 인간이 아니니까요.”


“그런 말은 덧붙이지 않는 편이 그대와 내가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또, 거짓의 가면을 쓰고 대하는 것부터가 당신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합니다.”


겁에 질리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이성적으로 가비드를 보았다. 예전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가비드 린드먼은 끔찍하리만큼 강하다. 유진과 세냐가 없는 이상, 이곳의 전원은 가비드를 감당할 수가 없다. 모론을 불러올지라도 승산은 그리 많지 않을 것만 같다. 게다가 가비드가 굳이 싸우지 않고 위신의 마안을 써서 사라진다면,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저는 솔직하게, 제 뜻을 주장하겠습니다. 가비드 린드먼. 만약 제가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춘다면. 결투의 날짜를 조금 뒤로 미뤄주실 수 있는지요?”


“그대의 입장은 이해하고 말을 하는 건가?”


가비드는 비웃음을 짓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감정을 느끼며 크리스티나를 응시했다.


“그대는 빛의 성녀일세. 유라스의 교황 이상으로 빛에 가까운 인간이지. 그런 그대가, 마족인 내게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겠다고? 그것도 대륙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네.”


“그대의 행동이 빛을 욕보이는 것인데도?”


“제가 섬기는 빛은, 성녀가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는 것을 굴욕이라고 여길 만큼 편협하지 않으십니다. 도시 하나의 목숨을 구하는데 제 무릎이 닳고 입술이 더럽혀지는 것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로게리스 성녀. 내가 그대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다른 제안을 드리지요. 유진 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저를 인질로 잡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알기로, 헬무드와 유라스의 긴 역사에서 성녀가 인질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대를 인질로 잡은들 별로 즐겁지는 않을 것 같은데. 고문할 생각도 없고 말일세.”


“그렇다면 제가 자발적으로 하지요. 내일이 되어도 유진 님이 오지 않으시면 저 스스로 왼쪽 눈을 뽑겠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왼팔을 자르고, 사흘이 지나면 왼쪽 다리를, 나흘이 지나면 오른쪽 다리를, 닷새가 지나면 오른쪽 눈을 뽑겠습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에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성녀가 스스로 자해한단다. 기적을 믿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스스로 인질로 잡혀서 자해하겠다는 말은 성녀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기가 가득했다.


“닷새. 닷새가 지나도 유진 님이 오지 않으신다면.”


[크리스티나!]


아니스는 진즉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외침을 무시했다. 아니스에게 몸을 내주지도 않았다.


[차라리 제가 여기 있음을 밝히겠습니다. 제 혼을 저당 잡게 하겠습니다.]


그 외침. 크리스티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는 제 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크리스티나의 말은 끝났지만, 가비드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하하하!”


곧 가비드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이런 말까지 듣게 될 줄이야.


한참을 웃던 가비드는, 크리스티나의 등 뒤에 펼쳐진 여덟 장의 날개를 보았다. 그 찬란한 날개와 용모는 300년 전의 지옥의 아니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이 만들었다.


“‘성녀’를 인질로 잡고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로군. 하지만 거절하겠네.”


“어째서입니까?”


“고작 도시 하나 분의 인간 목숨과 바꾸기에는, 로게리스 성녀, 그대의 목숨이 훨씬 더 귀중할 테니까.”


“오히려 그편이 당신에게는…….”


“그래. 도시 하나를 죽이지 않고 그대를 인질로 잡고 죽일 수 있다면, 하하, 훌륭한 일이지.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군.”


“…….”


“그러니 나를 더 이상 설득하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게.”


거듭된 거절. 크리스티나는 적잖이 놀란 눈으로 가비드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의 조건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당신의 생각 이상으로 고지식하거든.”


하늘에 누워 있던 누아르가 속삭였다.


“정 애걸하고 싶다면, 가비드 린드먼이 아니라 나에게 애걸하는 것이 좋을걸요? 나라면, 흐흥,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당신 하기에 따라서 가비드를 며칠 정도 막아줄 수도 있어요.”


[크리스티나. 제발, 저 갈X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아니스의 외침을 무시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잘근 씹고서 몸을 돌렸다.


“뭐어.”


누아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녀는 관중석의 너머, 섬뜩할 정도로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당신이 애걸할 필요도 없게 되었지만요.”


크리스티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녀는 급히 날개를 펼치고서 하늘로 치솟았다. 무언가를 느낀 것은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었다. 관중석에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를 돌아보았다.


“그렇군.”


가비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바다 쪽을 보았다.


“왔구나.”


고요한 바다.


그 너머, 머나먼 곳에서- 파도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환생 531화


결투


고오오오…….


의자에서 일어선 가비드의 뒤편에 시립해 있던 검은 안개가 일렁거렸다. 유폐의 칼 직속의, 헬무드 제국 최정예의 기사단. 그들 모두가, 스멀스멀 밀려오는 감정에 침식당했다.


전율.


검은 안개 전원이 느끼는 감정은 똑같았다.


지금 이 결투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 하지만 저 바다 너머에 있는 머나먼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섬뜩하리만큼 고요한 바다를 깨우고, 이곳의 모든 마족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졌다.


‘뭐지?’


하늘에 누워 있던 누아르도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경직된 표정으로 조금 더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 ‘바다’를 확실히 보기 위해서였다.


느낌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라구르야란의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간의 침묵이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이었다는 듯, 지금의 바다는 거세게 넘실거리고, 밀어닥친 물결이 회색 땅을 점점 밀어내고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


바다의 소리가 점점 커진다. 경직되었던 누아르의 얼굴에도 점점 표정이 돌아왔다. 누아르는 첫사랑처럼 설레이는 가슴을 꾸욱 누르면서 속삭였다.


“하멜.”


아직 하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아르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짙고 강렬하게 하멜을 느꼈다. 이 감정은 틀림없는 사랑이고 설레는 증오였다.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하늘에서 멈췄다. 본래 그녀가 앉아 있던 관중석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관중석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바다를 보고 있지만, 크리스티나는 돌아가던 모습 그대로 하늘에 멈춰 있었다.


육체만 이곳에 있을 뿐.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혼은 이미 결투장을 떠나 바다에 향하고 있었다. 두 성녀는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고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


“시스터. 부끄럽게도, 제가 정말 괜한 말을 했지요.”


“제가 몇 번이고 말리지 않았습니까? 크리스티나. 당신이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희생을 자처할 필요도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시스터께서 대신 하셨겠지요.”


“멀쩡히 잘 살아 있는 당신이 인질이 되어 죽는 것과, 이미 한참 전에 죽은 제가 인질이 되는 것. 제가 생각하기에는 후자가 당연히 옳았습니다.”


아니스는 자신과 닮은 크리스티나를 향해 풋 웃어버렸다. 그녀는 활짝 피고 있던 날개를 접고서 크리스티나의 곁에 다가와 손을 잡았다.


“뭐, 이제 와서 떠든들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하지만 크리스티나, 저는 이것이 몹시도 고민이 됩니다. 우리는 하멜을 환영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꾸중해야 하는 겁니까?”


“지금 당장은 환영해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투가 유진 님의 승리로 끝이 난다면. 그때는, 저희를 속상하게 만든 유진 님은 무책임하고 못난 행동의 죗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순간이었다.


ㅡ쏴아아아! 바다가 크게 뒤흔들렸다. 머나먼 곳에서 밀려오던 파도가 라구르야란의 모든 바다를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회색 땅이 얕은 바다가 되었다.


지면을 쭈욱 밀어내는 물결에도 성녀들의 발은 젖지 않았다. 그녀들은 지금 육신을 초월했고, 순수한 영혼만이 남은 천사가 되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똑같이 움직였다. 찬란히 빛나는 날개를 접고, 새하얀 물결이 오고 가는 땅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찰박.


고요히 가라앉은 바다에 발소리가 울렸다. 소리와 함께 잔잔했던 바다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


“늦은 건 아니지?”


너스레를 떠는 목소리. 두 성녀는 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예, 늦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오늘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어느새 해안가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1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모습이 조금 바뀌었다. 1년이라는 세월 동안 얼마나 몰두했던 것일까? 아니스는 풋 웃으며 속삭였다.


“수염 정도는 밀고 오지 그랬습니까?”


“아슬아슬할 것 같았거든.”


“거짓말. 내심 수염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아닙니까?”


속삭이는 놀림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는 수염에 덮인 하관을 어루만지며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티나. 네가 보기에는 어때? 난 꽤 마음에 들거든. 슬슬 내 나이도 수염을 기를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나?”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만, 수염이 없으신 얼굴이 더욱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나. 유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을 들어 얼굴을 훑었다. 그러자 수염이 말끔히 사라지고 맨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일 년 동안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을 털 듯이 정리하고서 해변을 걸었다.


“늦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늦어서 미안해.”


유진은 무릎 꿇은 두 천사에게 다가갔다.


“하멜.”


아니스가 속삭였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유진은- 달랐다. 1년 전과 비교해서 무언가가 달랐다. 방금 밀어버린 수염? 덥수룩해진 머리? 아니,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본질이, 존재가, 혼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이길 수 있습니까?”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짜 ‘신’을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목도 한 것만 같은 기분.


“글쎄.”


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해봐야 알겠지만, 질 것 같지는 않은데.”


느슨한 자신감. 죽고 죽이는 결투를 앞에 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진의 표정은 맑았다. 그 표정에 크리스티나는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았다.


그녀는, 여태까지 유진의 전투 대부분을 함께 했다. 그럴 때마다 유진이 어떤 표정과 감정으로 임했는지도 기억하고 있다.


유진이 겪는 전투의 상대는 대부분 마족이었다. 마왕에 가까운 존재도 있었고, 진짜 마왕도 있었다. 그런 존재에게 유진이 갖는 감정은 대부분 똑같았다. 분노, 증오, 살의, 그런 것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유진에게 신기하게도 분노와 증오,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와 증오, 살의는 없지만- 지금의 유진에게는 다른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순수하고 올곧은 투쟁심이었다. 질 것 같지는 않다. 저 느슨한 자신감에 거짓은 없었다.


유진은 이 결투에서 이기기 위해 온 것이다.


“승리를.”


크리스티나가 속삭였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그의 발이 무릎 꿇은 두 천사들을 지난 순간, 둘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멈췄던 육체로 돌아왔다.


“아…….”


크리스티나는 하늘에서 잠시 전율에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여덟 장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서 하늘을 날았다. 바다를 향한 난간. 그곳에 모인 관중들은,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밀어닥친 파도를 보았다. 격렬히 흔들리고, 지금은 고요해진 바다를 보았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대지를 침식하던 물결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끝과 끝의 경계선에 우뚝 선 남자를 보았다. 관중들은 저곳에서 두 명의 천사가 남자를 맞이한 것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온 남자에게서 강렬한 신성(神性)을 느꼈다. 남자는 누구도 정복하고 건너지 못했던 끝의 바다를 건너왔다.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신화(神話)를 느꼈다.


“유…….”


시엘이 더듬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뭔지 모를,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 진짜 신화를 맞닥트린 것에 뒤따른 신묘한 고양감.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유진.”


그래도 시엘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름을 불렀다.


24년의 삶에서 이렇게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적이 있던가. 이렇게, 내가, 결국은 인간이란 것을 실감한 적이 있던가. 하지만 이 기분은 무력감이 아니다. 무력감과는 다르다.


감동이다. 시엘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똑같은 감동을 느꼈다. 시엘을 시작으로 모두의 말문이 트였다. 길레이드를 위시한 라이언하트 전원이 왼쪽 가슴의 사자 문양에 손을 얹었다.


기사와 용병, 전사, 대마법사. 일컬어지는 모든 영웅이 유진의 이름을 속삭이며 주먹을 쥐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영웅의 부름에 용사가 응했다. 끝과 끝의 경계를 걷던 유진은 어느새 결투장의 난간에 섰다. 용사? 지금의 유진을 용사라 불러도 되는 것일까. 모두가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의 유진은, 더 이상 용사라 일컬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기분 탓일까? 태양이 보이지 않는 이 회색의 땅에, 유진의 주변만이 은은한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유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여 유진을 우러렀다.


신성과 신화가 불러일으킨 감동이 순식간에 푹 꺼졌다. 대신에 섬뜩한 한기가 공간에 퍼져 나갔다.


이곳의 모두가 느꼈다.


유폐의 마왕이 왔다.


관중들 대부분은 유폐의 마왕이 어떻게 이 자리에 강림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틀림없이 이곳에, 심지어 본신 그대로 서 있었다.


일어서있던 모든 검은 안개가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가비드조차도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누아르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하늘에 서서, 관중석에 나타난 유폐의 마왕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마왕을, 헬무드의 황제를 내려다보다니. 그건 어마어마한 무례일 테지만, 유폐의 마왕은 누아르를 꾸짖지 않았다. 누아르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빛.”


관중석의 가장 낮은 곳에 선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며 한 걸음 걸었다. 망토처럼 어깨부터 늘어진 사슬들이 유폐의 마왕이 움직일 때마다 철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빛을 만났나?”


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그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찬란한 빛을 발하는 금색 눈동자. 유폐의 마왕의 저 눈동자 깊은 곳에서 확고한 신성을 느꼈다. 동시에, 굴종하여 존재적으로 따르며 스스로 비추는 빛을 보았다.


“이 자리는.”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면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너와 내가 대담하는 자리도, 내가 너에게 시험받는 자리도 아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 유폐의 마왕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유진은 저 미소를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역은 너와 내가 아니다.”


유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는 반대편 관중석에 있는 가비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비드 린드먼. 오늘 이곳은 너와 나의 결투가 있는 곳이지.”


“하하.”


유폐의 마왕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세상이 흔들렸다.


“그렇군. 내가 마음이 급하였어, 유진 라이언하트. 네 말이 옳다. 오늘 이 자리는…… 너와 나의 무대가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폐의 칼.”


속삭임이 이어졌다.


“나의 기사여.”


“예.”


어느새 가비드는 유폐의 마왕의 곁에 섰다.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유폐의 마왕을 향해 머리를 낮추었다.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돌려 가비드를 보았다. 스릉. 가비드는 허리에 매단 글로리를 뽑고, 양손으로 공손히 받쳤다. 유폐의 마왕은 글로리를 직접 손으로 쥐었다.


“가비드 린드먼.”


“예.”


“나는 이 결투의 승리를 바란다.”


유폐의 마왕은 마치 처음으로 유폐의 칼을 서임했을 때처럼 가비드의 어깨에 글로리를 얹었다.


“그러니 이 결투는 나에 대한 거역이 아니다. 나의 바람, 나의 약속. 만약 네가 그런 것들을 신경 쓰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예.”


가비드가 대답했다.


“승리를 바치겠나이다.”


서임이 끝나고, 가비드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글로리가 다시 가비드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비드는 몸을 일으켰다.


촤라락! 사슬의 망토가 머리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은 언제나 앉던 사슬의 옥좌에 앉았다.


“멋진 곳이군.”


유폐의 마왕은 결투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장소와 오늘의 결투는 신화가 될 것이다.”


-쿠우우웅! 세상이 뒤흔들렸다. 결투장의 중심에서 돌연 사슬이 치솟았다. 출렁거리는 사슬이 다시 지면에 돌아와 넓게 펼쳐지고, 관중석과 결투장을 나누었다. 원형의 결투장 전역을 감싸고서 맞물리던 사슬이 공간에 녹아들었다.


“권능에 감사합니다.”


가비드는 글로리를 다시 허리에 꽂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페의 마왕이 직접 내린 권능. 이제 저 널찍한 결투장에서 어떤 파괴가 일어나고, 얼마나 큰 힘이 부딪친들 관중석까지 피해가 번지지 않을 것이다.


“세냐와 카르멘 님은 아직도 안 온 거야?”


기사 서임과 권능을 시큰둥하게 보던 유진이 물었다.


“네,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거참. 1년이나 지났으면 당연히 돌아와 있을 줄 알았는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발을 떼었다.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관중석의 계단을 걷고, 아래의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이제 내려와라.”


무대에 선 유진이 가비드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비드는 피식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승리.’


이 결투는 유폐의 마왕에 대한 거역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결투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


그것이 가비드에게 남은 마지막 족쇄를 풀었다.


빌어먹을 환생 532화


널찍한 원형의 결투장은 시무인에서 보았던 콜로세움의 몇 배는 될 것 같았다. 그 넓은 결투장의 끝과 끝에서 유진과 가비드가 마주 보았다.


묻지 않고, 공격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직감했다. 누군가에는 짧았을 1년이 서로에게는 그 얼마나 알차고 길었는지를. 특히 가비드는 유진의 성장에 놀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과연.”


가비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멜. 오늘 너와 결투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1년 전, 알카르트 성당에서 회담을 가졌을 때. 만약 그때 결투를 벌였더라면, 가비드는 무조건 하멜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비드가 원한 것은 서로의 전력을 아낌없이 부딪히는 치열한 결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담을 나누고, 하멜이 원한 대로 사슬의 문을 열어주었다. 1년의 시간도 주었다.


그러나 내심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멜이 어떤 수행을 하건, 가비드 자신이 보낼 1년보다 값진 수행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가비드에게는 유폐가 하사한 사슬이 있었고, 그를 통해 인도되는 ‘황야’는 현실의 시간과 동떨어진 장소다. 1년을 우직하게 몰두한다면, 백 년은 훌쩍 넘는 시간을 사용할 수도 있다.


단순하고 무식하게 시간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시체가 즐비한 황야. 그곳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것은 시간이 아니다.


고대의 전쟁신, 아가로트. 역사와 신화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그 존재와 끝없이 싸울 수 있단 것이야말로 사슬의 진가다.


“나는 서로가 전력을 다하는 치열한 결투.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해도 이상하지 않을 결투를 바랐다.”


1년을 훨씬 뛰어넘은, 아득하리만큼 긴 시간을 황야에서 지냈다. 세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많고 많은 죽음을 겪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으면서도 깎여나갔고, 그렇게 마모된 부분에 갈망을 채웠다. 주저앉거나 물러서지 않고 갈망하는 만큼 나아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결투가 너무 쉽고……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닐까.”


처음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마검 글로리가 아가로트의 검을 부러트렸을 때. 전쟁신의 몸에 피를 쏟게 만든 때.


“괜한 걱정이었군.”


가비드는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갑옷 같은 것은 입지 않았다. 어차피 유진이 퍼붓는 공격들은 세상 그 어떤 갑옷이나 방패로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옷 대신에 헬무드의 제복을 입었다. 가비드는 어깨의 견장을 가볍게 털어낸 뒤, 유폐의 칼로서 쌓은 무훈(武勳)을 증명하는 훈장이 가득 달린 상의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많이도 달고 다닌다. 안 무겁냐?”


흑암의 망토를 두른 유진이 이죽거렸다.


“훈장은 명예의 상징과 다름없으니 무거운 것이 당연하지.”


가비드는 사슬의 문을 열어 벗은 제복의 상의를 집어넣었다.


“이 훈장들은 유폐의 칼과, 대공으로서 받은 것. 지금은 그 무게가 방해구나.”


구김 하나 없이 반듯한 셔츠의 윗단추를 몇 개 풀었고, 소매의 단추도 풀어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그 모습에 유진은 피식 웃었다. 베일 듯이 각을 세운 바지. 흙먼지 하나 묻지 않아 은은한 광까지 발하는 구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반면에 유진의 머리는 정돈하지 않아 덥수룩했고, 망토 아래의 옷은 악취는 없었지만 1년의 고행을 증명하듯 헤져서 너덜너덜했다. 대륙이 주목하고, 관람 중인 결투에 나설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비드는 유진에게 비아냥을 전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고 진중한, 동시에 호기심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유진을 응시했다.


‘신기하군.’


결투장은 넓다. 끝과 끝에 선 유진과 가비드의 거리는 한참이나 멀다. 먼저 발을 뗀 것은 가비드였다. 그는 손에 쥔 글로리를 의식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이곳은 황야가 아니다.’


레헤인야르의 너머, 라구르야란.


‘눈앞에 있는 것은 아가로트가 아니다.’


그런데 왜일까.


가비드는 마치 황야를 걷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황야에서, 처음 아가로트를 보았을 때와 같은 위압감을 느꼈다. 그곳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맡았던 무기들의 금속 내음과, 시체들의 피비린내를 느꼈다.


피부가 저릿거릴 정도의 위압감.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질 때마다 가비드는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의 하멜이, 유진 라이언하트가 얼마나 강한지를. 인간이었을 그의 격이 현재는 어디에 도달해 있는지를. 그러한 실감이 가비드에게 직감을 주었다.


“그런가.”


가비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아가로트였구나.”


속삭이는 목소리.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뚜둑. 유진의 손가락이 뼈 소리를 발했다. 천천히 움직인 오른손이 흑암의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은 관중석의 모두가 보았다. 검은 안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유진과 한 번이라고 같은 전장에 섰던 사람들은 모두가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저 털이 덥수룩한 망토의 본래 주인은 멜키스 엘하이어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진의 상징이 되었다. 저 망토의 안에는 라이언하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무기들이 잠들어 있고, 빛의 신이 직접 빚어낸 성검 알테어와, 기원을 알 수 없는 불길한 달빛과, 마왕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들이 잠들어 있다.


‘처음은 뭐냐.’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다가가던 가비드의 눈이 얇아졌다. 이 결투에 심판 같은 것은 없다. 관중석에서 내려오고 마주 선 순간에 결투는 이미 시작되었다. 겉치레의 인사나 대화도 끝이다.


가비드는 글로리를 강하게 의식했다. 주저하지 않고 위신의 마안을 빛냈다.


찰나, 가비드의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의 가능성이 나타났다. 유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와, 종류에 따라 시작하는 모든 종류의 공격,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대응. 당연하게도 가비드가 떠올리고 결론 지은 가능성에는 성검과 월광검에 대한 것도 존재했으며, 아가로트의 검도 존재했다.


가비드가 다시 한 걸음 걸은 순간.


유진의 손이 망토를 빠져나왔다. 손이 완전히 뽑히기 전. 위신의 마안이 유진이 선택한 무기를 포착했다.


“……?”


그것은, 처음 보는 검이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칼날. 그것은 1년 전에 보았던 성검과 같았지만, 칼날 안쪽에서 일렁거리는 ‘빛’은 성검과 판이했다.


“허.”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위신의 마안이 정체 모를 검에서 느껴지는 ‘힘’을 보았다. 성검 알테어의 빛, 월광검의 불길한 달빛. 저 유리와 같은 검신은 유진이 지배하던 모든 빛을 품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죽은 마왕의 무구들. 분쇄추 지골라스와 마창 루인토스의 권능까지 깃들어 있다. 마치 분쇄추와 마창을 녹이고 새로이 제련한 것처럼 말이다. 결코 섞일 수 없는 양극의 힘들을 어떻게 하나의 검에 녹여냈단 말인가?


“그 검은 뭔가?”


이해하기 힘들다. 결국 가비드는 그렇게 묻고 말았다. 유진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연약해 보이는 칼날을 옆으로 들면서 대답했다.


“신성월광검(神聖月光劍).”


화아아아악! 유진의 몸이 백염식의 불꽃에 삼켜졌다. 동시에 유리의 칼날이 월광과 빛을 발했다. 뒤섞이는 빛을 백염식의 불꽃이 감싼 순간- 빠지지직! 격렬한 소리와 함께 유리의 칼날이 검붉은 불꽃에 휘감겼다.


“레반테인.”


월광검을 부쉈다.


성검을 부쉈다.


마창을 부쉈다.


분쇄추를 부쉈다.


그렇게 부수고 남은 모든 잔해를 빛에 녹였다. 빛은 친히 유진을 위해 망치를 들어, 빛에 녹은 잔해들을 하나의 검으로 만들어주었다.


신성월광검, 레반테인.


이 검은 유진이 오랜 벗에게 받은 선물이며, 기적의 결정이다. 유진은 가볍게 호흡하며 레반테인의 불꽃을 조율했다.


‘역시.’


손이, 혼이, 존재가 떨린다. 투명하고 아름답던 칼날은 지금 포악한 불꽃에 휘감겨 있다.


이 검은 확실하게 규격 외다. 그럴 수밖에. 성검과 월광검, 마창, 분쇄추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조차도 벅찰 텐데, 레바텐인의 중심이라 할 만한 ‘힘’에 어우러져, 가뜩이나 다루기 벅찬 힘이 아득하게 증폭되고 있다.


끼릭, 끼릭, 끼리리릭…….


불꽃이 계속해서 거세어졌다. 그럴 때마다 결투장 전체가 뒤흔들렸다. 사슬의 옥좌에 앉아 결투장을 내려보던 유폐의 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그는 레반테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검인지를 느꼈고, 저 검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보았다.


“그런가.”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유폐의 마왕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결투장과 관중석을 분리한 사슬이 한계까지 늘어나는 것이. 계속해서 힘이 가해진다면 사슬이 모조리 끊어질 것이다.


“그 검이라면 내게도, 멸망에게도 닿겠지.”


촤라라락! 유폐의 마왕의 발밑에서 또다시 사슬이 쏘아졌다. 그러자 결투장의 흔들림이 멎었다. 그렇게 사슬을 보강한 뒤, 유폐의 마왕은 손등에 턱을 괴고서 생각했다.


빛에 대해.


멸망 이후를 비추기 위해 산화한 모든 신들에 대해.


그 중심에서 모두를 떠받친, 가장 거대한 신에 대해.


“이번에야말로.”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번 눈을 감았다.


가비드는 눈을 떴다. 그는 저 눈부시고 포악한 불꽃에 순간 압도되었고, 경외를 느꼈다. 동시에 확신했다. 저 검에는 아가로트의 검도 녹아 있다.


“하하.”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그의 몸이 앞으로 휘청 기울었다. 위신의 마안이 빛을 발했다.


넓은 경기장,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커먼 마력에 휘감긴 글로리가 먼저 유진을 향해 움직였다. 육안으로 쫓을 수 없는 움직임. 유진도 굳이 눈으로 보려 들지 않았다. 가비드와 글로리가 움직이기도 전에 레반테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검이 충돌했다. 마치 글로리가 레반테인의 불꽃에 빨려 들어간 것만 같았다.


ㅡ꽈아아앙! 부딪친 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어마어마한 힘이 서로 충돌했음에도 유진과 가비드 누구도 휘청거리지 않았다. 유진은 이어서 레반테인을 휘두르려 했지만, 생각대로 검이 움직이지 않았다.


끼릭…….


공간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레반테인의 칼날을 붙잡고 있었다. 위신의 마안. 유폐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마안이, 레반테인을 구속한 것이다.


그 짧은 틈은 가비드에게 있어서 영원처럼 길고 충분했다. 마검이 유진을 덮쳤다. 반응하고 싶어도 반응할 수 없다. 잠깐이라도 검을 놓던가, 아니면…….


“……?”


유진의 몸을 관통하려는 순간, 가비드는 이질적인 위화감을 느꼈다. 진즉에 내찔렀던 검이 아직도 유진에게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밀어내고 있는데, 마치 무언가에 막힌 것만 같은- 아니, 아니다. 이건 막힌 것이 아니다.


세상이 느려진 것이다.


“장소를 잘 보고 들어와야지.”


유진이 속삭였다. 그 말이 들린 즉시 가비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평범하게 본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아래에 깔린 것은 회색의 땅뿐이다. 하지만- 지금 가비드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검은 불꽃에 휘감긴 유진의 발과 땅이, 공간이 통째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긴 내 성역이야.”


성역에서 신을 해할 수 없다.


그러니 가비드의 검은 유진에게 닿을 수 없다.


화르르륵! 거세어진 불꽃이 사슬을 끊어냈다. 유폐의 권능을 그대로 담은 사슬이, 레반테인의 불꽃에 녹아서 사라졌다. 유진은 양손으로 레반테인을 잡았다. 가비드는 즉시 글로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꽈아아앙! 가비드의 몸이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그는 양손의 뻐근함을 느꼈다. 입술이 멋대로 씰룩이며 미소를 만들었다.


성역이라니. 가비드에게는 낯선 개념이지만, 유진에게 느껴지는 초월적인 힘과 신격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베이지 않았다.’


유진은 멀찍이서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 가비드를 노려보았다. 지금의 유진은 예전처럼 신검의 횟수에 구애받지 않는다. 레반테인 자체가 유진의 신검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가로트의 신검보다 강하지.’


레반테인에는 아가로트의 신검 자체를 녹여냈다. 그런데도 글로리와 가비드를 단번에 양단하지 못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일 것이다.


‘가비드 저 새끼, 너무 세진 것 아냐?’


그것을 인지하면서 유진은 레반테인의 화력을 낮추었다. 이 빌어먹을 검은 지금 상태로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애당초 레반테인은 지금의 규격을 한참 벗어난 물건이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그만한 태세로 임해야 한다.


“야.”


성역의 중심에 우뚝 선 유진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뻐근한 손을 쥐었다 펴던 가비드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무엇을?”


“너.”


유진은 가비드의 눈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한쪽 눈은 얻다 버리고 왔냐?”


빌어먹을 환생 533화


가비드가 가진 위신의 마안. 당연히 존재해야 할 쌍안(雙眼) 중에서 왼쪽 눈이 마안으로써 기능하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한 쌍의 마안 중에서 왼쪽만이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진의 사고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몇 번의 공격을 나누면서, 유진은 가비드의 눈동자에 단 한 번도 주목을 거두지 않았다.


틀림없었다. 가비드의 왼쪽 눈동자에는 위신의 마안이 깃들어 있지 않다. 저것은, 그냥 평범한 눈이다.


“패널티는 아닐세.”


먼저 가비드는 그렇게 말했다.


“널 모욕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나로서는 이 ‘다음’을 대비할 수밖에 없었거든.”


“다음?”


“만약.”


가비드의 입가에 쓰디 쓴 웃음이 번졌다.


“정말로 만약에, 내가 하멜, 네게 패배했을 때를 위한 대비.”


“…….”


“마안은 사용하기 나름이야.”


오른쪽 눈동자. 위신의 마안이 스산한 빛을 발했다.


“너도 알겠지만, 이 눈에는 나의 주군, 유폐의 마왕님의 권능이 깃들어 있다. 한쌍의 눈으로 쓰건, 하나의 눈으로 쓰건,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진도 잘 알고 있다. 당장 시엘만 하더라도 마안이 깃든 것은 한쪽 눈동자 뿐. 그럼에도 시엘은 한짝의 마안으로 암전의 권능과 부동의 권능을 다룬다.


하지만. ‘마안’이란 것은 저렇게 편리하게 뽑고 남에게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안이란 육체가 아닌 존재에 깃드는 것. 한쪽 눈을 뽑아낼지라도 마안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럴 텐데, 지금 가비드의 왼쪽 눈에는 위신의 마안이 없다.


“……말하는 것을 보니 다른 놈한테 넘긴 모양인데. 누구냐? 내가 없는 사이에 이미 차기 유폐의 칼이 내정이라도 된 거냐?”


“숨길 필요는 없나.”


가비드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나는 후임 따위는 내정하지 않았네. 유폐의 마왕님께서도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았지.”


1년 전, 유진과의 결투를 선언한 직후. 가비드는 바벨에 돌아가, 유폐의 마왕에게 결투에 대해 보고했다.


그리고 위신의 마안의 양도를 희망했다. 만약 거절당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미련을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위신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이 자신의 칼을 위해 하사한 것이니.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가비드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가비드의 청을 받아들였다.


허락을 얻은 뒤, 가비드가 향했던 곳.


제벨라 시티.


“몽마의 여왕.”


속삭이는 대답은 유진이 상상하던 가장 끔찍한 경우에 대한 증명이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유진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투명해진 사슬 벽의 너머, 공중에 편안히 누워있는 누아르 제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당연히 유진은 가비드와 누아르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저 둘이야말로 바벨에 오르기 전에 넘어야 할 커다란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가비드와의 무대는 오늘 마련되었고, 유진은 패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투에서 승리하고 난 뒤를 생각했다. 오늘 가비드를 죽인다면, 바벨에 오르기 전의 난관은 누아르 제벨라 단 한 명만 남는다.


주목해서 누아르 제벨라를 살폈고,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유진에게 섬뜩함을 주었었다. 누아르 제벨라에게는 아무런 힘도, 격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가비드에게 미리 듣지 않았다면, 누아르 제벨라가 위신의 마안을 하나 계승받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리라.


“내가 나중에 서프라이즈로 알려주려 했는데.”


누아르는 허공에 누워서 다리를 까딱거리며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 그렇지만 유진은 저 미소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이 순간에야 유진은 절절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서큐버스란 종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지금에 이르러 서큐버스란 종족을 아득히 초월했다. 그렇다면 마왕이 되었는가?


‘아니.’


저것은 이미 마왕조차 아닌 다른 존재다. 유진은 쯧 혀를 차면서 시선을 내려, 가비드를 노려보았다.


누아르를 죽이기 위한 대비는 지금은 너무 이르다. 유진이 당장 해야 할 것은, 가비드 린드먼과의 결투에서 승리하는 것. 놈을 완전히 죽여버리는 것이다.


“설마 한쪽 마안을 나눠줄 줄이야. 너희 공작이란 새끼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내게 엿을 먹이는데. 넌 오늘 뒈지기 전에 한쪽 마안이 없는 것을 후회할 거고, 뒈지는 순간에 전력이 아니었던 것에 대해서 미련을 가질 거다.”


“힘에 차이는 없네.”


내뱉은 말을 증명하듯 위신의 마안의 빛이 강해졌다.


끼긱, 끼기긱. 사슬은 체화하지 않았지만, 가비드의 주변에서 금속의 소리가 울렸다.


“말했듯이 마안이란 쓰기 나름이니.”


한쪽 마안을 누아르에게 넘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로 인해 힘이 부족해졌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반복한 황야의 전투, 아가로트를 베었던 ‘검’은 한 쌍을 이룬 위신의 마안으로 거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 만약 오늘 패배한다면. 그것은 마안의 결손과는 관계가 없다. 단순히 가비드의 검이 유진을 넘지 못했을 뿐이다.


철그럭.


보이지 않던 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텅 빈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가비드의 왼손을 휘감았다. 동시에 수백 개의 사슬이 유진을 향해 뱀처럼 머리를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공간의 성질이 바뀌었다. 유진은 성역을 압박하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콰르르르! 그 많은 사슬이 마치 창처럼 쏘아진 순간, 레반테인이 다시 불꽃을 휘감았다. 포착된 공간이 활짝 열리고 불꽃의 장벽이 치솟았다. 마창 루인토스의 권능, 창림이 전혀 다른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사슬은 불꽃의 장벽을 관통하지 못했다. 관통할 필요가 없었다. 유폐의 사슬의 권능은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저것은 닿는 것을 모조리 닫아 유폐해 버린다. 마나도, 마법도, 신성력도, 기적도, 사슬에 연결된 순간 주도권을 빼앗긴다.


사슬을 끄는 것은 가비드다. 가비드든 사슬과 연결된 왼손을 당겼다.


퍼어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꽃의 장벽이 소멸했다. 가비드는 능숙하게 왼손에 회전을 넣으며 사슬을 휘둘렀다.


유진은 움직이지 않고 성역의 중심에 섰다.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역이 과연 유폐의 권능 앞에서 얼마큼의 가치를 가지는지.


쿠구구구궁! 결투장이 진동했다. 가비드가 휘두른 사슬은 아무런 벽도 없는 허공에 멈춰서 덜덜 몸을 떨었다.


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유진과 가비드, 둘이 똑같은 것을 느꼈다. 이것은 단순한 힘겨루기. 누구 하나가 특별히 우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힘만을 겨루는 것으로는 아무런 결과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가비드가 앞으로 나섰다. 시커먼 마력이 가비드의 전신을 뒤덮고, 글로리의 칼날로 흘러 들어갔다.


‘시험하고 있군.’


자신의 힘을, 그리고 내 검을. 가비드는 입술을 뒤틀어 웃었다.


과연, 저 성역은 놀랍다. 분명히 죽일 생각으로 찔렀는데도 칼끝은 유진에게 닿지 않았다. 유진을 중심으로 한 반경 수십 미터는 일반적인 상식이란 것이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비드는 성역을 향해 나아갔다.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팽팽히 당긴 사슬을 왼손에 몇 바퀴 더 돌려 감았고, 내딛는 발에 힘을 주었다. 글로리에 일렁거리는 마력은 가비드의 의지에 따라 점점 더 짙어졌으나, 포악해지지는 않고 조용히 응축되었다.


어느 순간, 가비드의 발이 땅을 강하게 밀었다. 팽팽히 당겨졌던 사슬이 순간 느슨해졌다. 사슬에 흐르던 힘이 바뀌었다. 유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성역을 제외한 모든 힘이 가비드의 몸을 앞으로 밀었다. 그것은 질주나 도약과는 전혀 달랐다.


모든 것이 정면에서 때려 박히는 것만 같았다.


찰나에 유진은 그것을 느꼈다. 가비드에게서 이어지는 것은 한 번의 참격. 하지만 그것은 결코 ‘검’에 의한 참격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허.”


가비드 린드먼.


“이 정도였나.”


성역의 법칙. 성역에서 신을 해할 수 없다. 그러니 가비드 린드먼의 검은 닿지 않는다.


그 단순하기에 절대적이어야 할 법칙이 일격에 파괴되었다. 그러고도 검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신살(神殺)의 경지에 도달한 마검이 유진의 목숨을 노렸다.


그렇게 되니 유진도 빠르게 전략을 바꾸었다. 지금 상태로 전개한 성역은 마검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성역의 형태를 바꾼다.’


유진의 등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시그니처, 프로미넌스. 검게 타오르는 빛의 날개가 발현된 순간, 유진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폭발적인 가속이 유진의 등을 떠밀었다. 한순간에 유진과 가비드의 위치가 반전되었다.


지면을 내리찍던 마검이 우뚝 멈췄다. 그만한 힘을 도중에 거뒀음에도 가비드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불균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홱 몸을 돌리고서 유진의 모습을 좇았다.


‘이그니션?’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유진의 손은 가슴에 올라가지 않았다. ‘저것’은 이그니션이 아니다.


프로미넌스,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롯에서 대마법사들의 지원을 받아 만든 시그니처. 저 마법이 어떤 형식이고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가비드도 이미 파악하고 있다.


살포한 깃털로 좌표를 지정하여 연속으로 펼치는 공간도약. 그것도 전투 보조 계열의 마법으로서는 터무니없는 성능을 갖지만, 유진에게 있어 프로미넌스의 극한은, 유사 코어로 활용하여 이그니션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저 성능에 대해서는 나하마의 하늘에서 직접 본 것으로 확인했다.


“이미 마법의 영역은 뛰어넘었군.”


가비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 불꽃은 마나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프로미넌스를 구성하는 술식도 마법이 아니다. 프로미넌스는 마법의 영역을 한참 뛰어넘어 확실하게 기적에 도달했다. 저 검은빛의 날개 자체가 유진의 신기인 것이다.


세상에 성역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프로미넌스 자체가 유진의 성역을 대신했다.


이건 아가로트의 방식이 아니다. 그 전쟁신은 신명(神名)처럼 자신의 성역을 전쟁병기로서 활용했다. 아가로트가 선 전장에서 신군은 결코 지치지 않고 대부분의 부상을 기적으로 치료받았으며, 신력의 은혜까지 받았다.


하지만 멸망의 마왕 앞에서는 아가로트의 성역은 허무히 부서졌다. 즉, 아가로트로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지금’ 판단하자면 아가로트의 방식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마족과의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면 광범위한 성역을 써먹어야겠지만, 지금 유진이 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닌 결투다.


누아르 제벨라와 유폐의 마왕을 죽여야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프로미넌스를 성역으로 만들었다.


치직, 치지직. 유진이 선 공간이 흔들리면서 균열이 일었다. 한계를 넘어 몰입시킨 힘에 세상이 버거워하는 것이다.


가비드는 더 이상 감탄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검을 들었다. 지금의 유진은 성역을 통째로 두르고 있다. 그것이 전투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비드는 아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부딪칠 수밖에. 가비드는 숨을 들이켜면서 마력과 권능을 전면으로 개방했다. 모든 것을 옭아 죄는 사슬이 가비드의 몸을 한 번 휘감았다.


화르르…….


검은빛 속에서 유진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찬란한 금색 눈동자 깊은 곳에서 신성이 번뜩였다.


미증유의 힘이 움직였다. 서로를 상징하는 검이 공간을 가르며 충돌했다.


한 번의 충돌, 꿰뚫어 볼 수 없는 빛의 폭발이 결투장을 가득 채웠다. 즉시 유폐의 마왕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사슬을 몇 겹이나 보강했음에도 결투장이 뒤흔들렸다.


유진과 가비드, 서로의 팔에서 피가 뿜어졌다. 그 광경에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비명을 질렀다.


이 결투는 ‘인간’인 유진에게 있어서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 붙는다. 결투에서 유진은 부상을 입어서는 안 된다. 경상 정도라면 어쩔 도리가 있어도 중상을 입는다면 결투에 크나 큰 지장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유진의 오른팔을 보라. 한 번 검을 부딪쳤는데도 뒤틀린 뼈가 살갗을 뚫고 나왔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터진 근육에서 피가 철철 흐른다. 성녀들의 보조가 있다면 저런 상처는 순식간에 치료할 수 있겠지만, 지금 성녀들은 결투에 개입할 수 없는 입장이다.


“앗……!”


놀람과 걱정을 느낀 순간에 유진의 팔이 멀쩡히 되돌아왔다.


신성력에 의한 초고속 재생? 아니다. 팔이 박살 났다, 라는 현실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성녀들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불사력이었다.


“하하!”


사슬의 옥좌에 앉은 유폐의 마왕만이 저 불사력이 어떤 성질을 갖는지를 이해했다. 그는 웃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릎까지 두드리면서 감탄을 표했다.


“하멜, 너.”


똑같이 부서진 팔을 재생해 낸 가비드도 감탄에 그치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정말로 인간인가?”


질문을 건넨 순간에도 가비드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사방에서 나타난 유폐의 사슬이 유진을 덮쳤다. 유진의 왼손이 레반테인의 칼날을 훑었다. 더해진 신력에 불꽃이 보다 격렬히 타올랐다.


“아니.”


폭발하는 광채 속에서 검붉은 불꽃이 선을 그었다. 레반테인의 칼날을 훑은 왼손이 주먹을 쥐었다. 갑자기 번진 어둠이 빛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신이지.”


중첩된 신력이 작은 구체를 만들었다. 빛을 모조리 빨아들인 구체에 검은 태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힘이 깃들었다.


이클립스가 터졌다.


빌어먹을 환생 534화


신.


그 담담한 선언은 중계에 들리지 않았다. 폭주하는 빛과 폭발이 결투장의 모든 것을 감췄다. 하지만 가비드와, 관중석의 모두가 저 말을, 담담한 목소리에 실린 오만한 확신을 느꼈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유진은 틀림없이 인간의 격을 넘어섰고, 그가 조작하며 만들어내는 힘은 신위라 하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깊이 실감한 것은 유폐의 마왕이었다. 저 신위는, 유폐의 마왕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혹시, 정말로.


이번에야말로.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집중된 운명과 가능성이 낳은 괴물이다. 과연 저 신위는 찬탄할 만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지금의 ‘결투’에서 특별하게 우세하지는 않다. 평생을 추구하던 이름과 입장을 저버리고 제 자신의, 그리고 마족으로서의 순수한 욕망에만 몸을 던진 가비드 린드먼은 신살의 영역에 도달했다. 신화시대였다면 그는 신살자로서 이름을 떨치며 마왕으로서도 최흉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모르겠군.”


유폐의 마왕은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만약 유진이, 하멜이 300년 전에 저만한 격을 얻었다면- 유폐의 마왕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바벨의 문을 활짝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시대가 아니다. 이미 300년이나 흘렀다. 진즉에 멸망했어야 할 시대가, 300년이 더 지속되었단 말이다. 약속이 없었다면, 거기서 작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유폐의 마왕은 여태까지 반복했던 것을 이번 시대의 마지막에도 똑같이 행했을 것이다.


“부족하다.”


유폐의 마왕은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300년 전이라면 저 힘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부족하다. 300년은, 모두에게 충분하고 긴 시간이었다.


보라.


저만한 힘이 폭발했는데도 가비드 린드먼은 물러서지 않고 있다. 300년 전의 그였다면 저 힘 앞에서 무력하게 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가비드는 그렇지 않다. 누아르 제벨라가 무수한 욕망을 모아 마족을 초월했다면, 가비드 린드먼은 반복되는 시간 속에 스스로 유폐하고 검에 무구하여 마족을 초월했다.


마검 글로리가 전진했다. 이곳을 통째로 멸망시킬 것만 같던 빛의 폭발이 칼끝에서 가로막혔다.


옆으로 그었다. 쭉 그어서 완성된 선이 빛을 양단했다. 소리 없이 빛이 소멸했고 모든 것이 텅 비었다. 설마 저렇게 한 번에 베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유진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하.”


짧은 웃음.


하긴, 쉬울 리가 없지.


이 결투가 별 어려움 없이, 쉽고 짧게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도를 넘은 오만이다. 유진이 1년 동안 여러 일을 겪고 비로소 신성을 손에 쥐었듯, 가비드 또한 미지의 체험을 하고 미지의 경지에 도달하였기에 이 장소에 서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들.”


가비드가 중얼거렸다. 결투가 시작된 후. 유진은 자신이 손에 넣은 새로운 힘들을 사용했다.


성검과 월광검, 마왕의 무구를 신검으로 벼려낸 신성 월광검, 레반테인. 성역. 프로미넌스,


“더 이상 없나?”


유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가비드를 응시했다. 저 질문에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유진은 어떤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별로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유진은 깊이 숨을 한 번 삼켰다.


“미안하다.”


딱히 패를 숨길 생각은 아니었는데. 유진은 다시 한번 왼손을 들었다.


-화륵. 레반테인의 불씨가 유진의 왼손에 옮겨붙었다. 새카만 불꽃이 선을 그리면서 유진의 손을 따랐다.


“여태까지 싸움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시작하자마자 쓰는 것은 영 익숙하지 않거든.”


가비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 말과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300년 전 가비드를 압도하고, 공포를 주었던. 혼을, 목숨을 불사르면서 승산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죽이고 말겠다는 필살의 의지. ‘몰살의 하멜’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기술.


검게 타오르는 손이 유진의 왼쪽 가슴을 파고들었다.


-두근. 그 커다란 소리는 결투장의 전원이 들었다. 레반테인의 불꽃이 유진의 심장과 공명하며 일렁거렸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유진을 뒤덮은 불꽃은 오히려 잔잔히 가라앉았다.


만약.


만약 지금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 가비드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그니션을 펼치는 도중에 공격한다면 유진은 무방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니.’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한 방식이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저 자세는 결코 무방비한 것이 아니란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왼손이 가슴에 얹어진 순간에 이미 이그니션은 발동되었다. 지금 유진이 저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은, 이그니션이 늦어서가 아니다. 만약 틈이라고 생각하고 다가간다면.


“하하.”


다가가서는 안 된다. 가비드는 그것을 직감했지만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것이야말로 가비드가 300년 동안 갈망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고작 한 걸음 나아갔을 뿐이다. 그것뿐인데도 가비드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 넓은 결투장이 한없이 좁게 느껴졌다. 마치 자그마한 독방에 유진과 똑바로 마주 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될 만큼 유진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생각하고 행동하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마검이 앞을 베었다. 그렇게 베었을 텐데도 충격을 흘려내지 못했다. 오히려 충격은 가비드가 예상했던 순간보다 한 박자 늦게 때려 박혔다.


몸이 붕 떠올랐다. 혼이 육체에서 뜯겨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날아가게 된 자신이 대체 어디까지 날아가 처박힐 것인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에 가비드가 선택한 것은.


유진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그니션을 쓴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팔을, 레반테인만 휘둘렀을 뿐이다. 그것뿐인데도 참격은 끔찍하게 무겁다.


촤라락!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가비드의 몸을 붙잡았다. 진즉에 방어를 위해서 몸에 사슬을 감아두었는데. 그것은 이미 방금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으스러져 버렸다.


“여긴…….”


유진의 입술이 열렸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낮추면서, 허공에 사슬을 묶어 정지한 가비드를 노려보았다.


“너무 좁아.”


꽈아앙! 유진의 발이 땅을 박찼다. 유폐의 권능에 보호되던 결투장이 그 발 구름 한 번으로 움푹 주저앉았다. 그렇게 도약한 유진은 체공시간조차 갖지 않고서 즉시 가비드에게 도달했다.


뚜둑, 뚜두둑. 유진의 오른팔이 뒤로 넘어갔다. 레반테인의 불꽃이 조용히 타올랐다.


ㅡ꽈지직! 허공에서 글로리와 레반테인이 충돌했다. 아까의 충돌은 서로가 대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밀렸다.


가비드는 이를 악물고 버티려고 했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몸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다. 글로리를 휘감고 있는 마력이 통째로 소멸했다.


‘화력이……’


방금 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무리 이그니션을 썼다고 해도 이 정도로 화력이 달라질 수 있나?


가비드가 파악했던 프로미넌스와 이그니션의 동시 발동에서 증폭되는 화력은 대략 3배에서 4배 정도. 하지만 지금의 유진이 뽑아내는 화력은, 가비드의 예상을 너무나도 크게 뛰어넘어 있다.


심지어 화력은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유진의 몸이 넘어지듯 앞으로 기울었다.


사라졌다. 어디에서 나타날지 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소용없었다. 출현과 동시에 도달한 참격이 가비드를 덮쳤다. 다시 한번 가비드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아까의 유진은 비교적 얌전하게 싸웠다.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움직일지라도 지금처럼 역동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유진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눈으로 좇는 것이 불가능했고, 예지와 다름없는 예측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알아도 맞아야 하는 공격을 어떻게 대응하나? 가비드가 할 수 있는 것은 유폐의 사슬을 전신에 두르고, 크게 물러서지 않게 사슬을 연결하고, 방어에 몰두하며 틈을 보는 것뿐이었다.


‘맙소사.’


연달아 수십 번을 처맞은 뒤에야 가비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레반테인의 불꽃을 꺼내고, 유진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여유 따위가 아니었다. 저 미치도록 아름다운 검은 평소의 유진으로서도 감히 휘두를 수가 없던 것이다. 성역을 펼치거나 몸에 두르고 나서야 간신히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그니션을 써야 한다. 폭주 상태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유진 본인이 레반테인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비드의 판단이 옳았다. 레반테인은 유진이 소유한 모든 무기와 시공을 뛰어넘은 염원들로 벼려낸 검이다. 현존하는 모든 마왕과 세상을 끝내버리는 멸망을 불태우기 위한 검이다. 이 검의 전력은 신이라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조차 불태우겠다는 필살의 각오가 필요했다. 제 자신의 죽음이나 그에 따른 공포보다 상대를 무조건 죽이고 말겠다는 순수한 살의가 필요했다.


‘아직.’


유진의 안광이 번득였다. 아직 유진의 왼손은 가슴에 올라가 심장을 쥐고 있다.


“아직 부족해.”


화륵.


심장에서 뽑힌 손가락에 검붉은 불꽃이 옮겨붙었다. 옆으로 누운 레반테인의 칼날을 왼쪽 손끝으로 한 번 훑었다. 살의와 신력을 불사른 빛이 칼날에 깃들었다. 레반테인의 칼날이 부르르 떨렸다.


두근.


유리의 칼날이 맥동했다. 이미 타오르는 불꽃 위에 새로운 불꽃이 더해졌다. 그렇게 불꽃이 한 번 중첩됐다.


‘공검.’


전신이 짓눌리는 것만 같은 압박감. 뚝뚝 끊어지는 사고. 그 속에서도 가비드는 판단했다.


키옐의 명문 무가 드라고닉의 비기. 검강을 중첩하는 공검(空劍). 원리 자체는 원류와 같다. 하지만 지금 유진이 중첩시키는 것은 검강이 아닌 신화(神火). 공검을 쓰기 전에도 가비드의 공격을 봉쇄할 만큼 무거웠는데, 거기서 힘이 더욱 중첩된 것이다.


“부족해.”


이만한 힘을 휘두르는데도 유진은 계속해서 바랐다.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의 칼날이 전진했다. 거기에 유진은 하나의 권능을 더 불어넣었다.


레반테인에 녹아든 분쇄추 지골라스의 권능.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부수고 터트리는 권능을.


불꽃이 다가온다.


가비드는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직감했다. 저 검은, 가비드가 집중시킨 유폐의 사슬을 모조리 으깰 것이다.


그렇게 위신의 마안을 부정할 것이다. 이후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글로리의 칼날마저 깨트릴 것이다. 방어를 위해 몸에 감은 사슬도 레반테인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비드는 검을 뻗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 검은 이미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성질을 갖고 있다.


레반테인은 이미 가비드에게 패배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운명을 정해놓았다. 저 붉고 검게 타오르는 불꽃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운명을 피하거나 도망치는 것과 똑같다.


예지는 틀리지 않았다.


포악하고 폭력적인 신의 불꽃이 모든 사슬을 으깼다. 넘어온 불꽃이 글로리의 칼날을 깨부쉈다. 그러고도 레반테인은 멈추지 않았다. 유진이 바라는 만큼 밀어낸 불꽃의 칼날이 가비드의 몸에 닿았다.


꽈직, 꽈지직. 칼날과 가비드 사이에서 검은 마력이 산화했다. 가비드의 부릅뜬 눈과 유진의 눈이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시선을 거두었다. 레반테인이 가비드의 몸을 베었다. 화르르르! 높이 치솟은 불꽃이 천장을 덮은 사슬에 닿고 흩어졌다.


가비드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고개가 툭 떨어졌다. 유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가비드를 응시했다.


“끄…….”


결투는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 10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10분 동안, 놀랍게도 멜키스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가비드 린드먼의 결투는, 수다쟁이 멜키스의 입을 틀어막을 만큼 장엄했기 때문이다.


“끝났다.”


지금에 이르러 멜키스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결투장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유진이 패배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비드가 너무나도 평온하고 손쉽게 유진의 공격들을 베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이 이그니션을 발동한 후로 승기는 확정되었다. 애당초 멜키스를 비롯해 이 자리의 모두가 유진이 ‘어떻게’ 싸우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없고서는 이그니션을 사용하지 않는다.


“끝났어!”


멜키스는 호들갑을 떨면서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3명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멜키스는 방금 유진의 검에 실린 힘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제아무리 가비드 린드먼이 강하다고 해도, 저 검은 어쩔 도리가 없다. 닿는 순간에 무조건 죽여 버리는 검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끝났다고! 유진이 이겼어!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만세!”


멜키스가 양손을 치켜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관중석에 앉은 이들은 멜키스처럼 수치를 모르지 않았기에, 일어서거나 환호성을 지르는 것 따위의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느끼는 감정도 멜키스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유진과 가비드에게 압도되었다. 특히 유진에게는 정말로 신위(神威)란 것을 느꼈다. 몇 번 되지 않은 공격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됐다. 일격 일격에 세상을 부술 것만 같은 위력이 담겼는데 수백 수천 번 휘두를 이유가 어디에 있나.


“만세!”


침묵 속에서 멜키스만 양팔을 치켜들며 외쳤다.


외침이 반복될수록 관중들도 하나둘 깨달았다. 쓰러진 가비드가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목을 자르고 심장을 부수고 몸을 재로 만들어도 부활할 수 있을 정도의 불사력을 가진 최고위 마족이, 방금의 일격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하나뿐이다. 멜키스가 시끄럽게 외치는 것처럼, 유진이 결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웅성거림이 번졌다. 가비드가 앉았던 의자 뒤에서 기립해 있던 검은 안개들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유진의 신위에 압도된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압도될지라도 유폐의 칼의, 가비드의 힘을 믿었다.


존경하던 대공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투는 격렬했던가? 치열했던가? 가비드가 바라던 것처럼, 서로의 모든 것을 부딪치며 사선을 오가는, 어느 한쪽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대결이었나?


아니다. 압도한 것은 유진이었다. 유진이 이그니션을 쓴 순간부터 가비드의 검은 단 한 번도 유진에게 위기를 주지 못했다.


검은 안개들은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유폐의 마왕 쪽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사슬의 옥좌에 앉아, 손등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수백 년 최측근으로 두었던 가비드의 패배와 죽음에도 유폐의 마왕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부터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에? 가비드의 패배를 직감했기 때문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다.


유폐의 마왕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가비드의 패배와 죽음을 직감한 적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여전히 이 결투의 결과를 알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라는 중얼거림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가비드 린드먼.”


유폐의 마왕의 입술이 열렸다.


유진은 여전히 가비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승리를 확신하고 몸을 돌리거나, 혹시 모를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레반테인을 한 번 더 내려찍지도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유진은 기묘하고 불길한 끈적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고개를 푹 숙인 가비드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이다.”


가비드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빌어먹을 환생 535화


가비드는 자신의 오른쪽 손을 내려다보았다.


글로리가 보였다. 결코 부서질 일 없던 칼날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꽉 쥐고 있던 칼자루는 남아 있었다. 그것뿐이다. 이것은 더 이상 검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검으로서 사용할 수도 없다.


“……신기하군.”


가비드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작은 얼룩 하나 없이 하얗던 셔츠는 넝마짝이 되었다. 구김 없이 각을 세운 바지도 너덜거린다. 닦고 광을 냈던 구두도 마찬가지다.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졌다. 포마드를 발라서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도 엉망이었다. 이렇게까지 정리되지 않고 추한 모습을 세상 모두에게 보이게 되다니.


가비드는 큭큭 웃으면서 눈을 한 번 감았다.


“그런가.”


가비드 린드먼.


그는 무언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근본부터 잘못된 모순을 품고 있었다.


1년 동안 황야를 반복했다. 아가로트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을 겪었다.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고, 글로리를 휘둘러도 결과는 패배라는 결과는 좀처럼 바꿀 수가 없었다.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가 약해서?


아니다. 저것들은 유폐의 권능을 빌려오는 도구일 뿐. 도구가 아무리 특별하고 뛰어날지라도 한심하게 다룬다면 그 정도 수준의 위력밖에 낼 수 없다.


의존하기 전에 스스로 관조해야 했다.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는 결국 유폐의 마왕의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아가로트의 검을 넘을 수가 없다.


유진 라이언하트와의 결투에서 승리할 수가 없다.


“이미 깨달은 것이었을 텐데.”


헬무드의 대공이란 직위를 놓았다. 유폐의 칼이라는 이름도 놓았다. 그를 갈망하여 유폐의 마왕에게 하멜과의 결투를 청했다.


모순이다. 정작 오늘의 결투에 선 것은 가비드 린드먼이 아닌 유폐의 칼이었다.


가비드는 부서진 글로리를 바라보며 큭큭 웃었다. 이 마검의 이름은 영광. 가비드에게 있어서는 위신의 마안과 더불어, 자신을 ‘유폐의 칼’로 만드는 증거였다.


“잠깐.”


가비드는 시선을 들어 유진을 보았다. 여전히 유진은 굳은 표정으로 서서 가비드를 보고 있었다.


“잠깐이면 충분해.”


대답을 듣지 않았다. 가비드는 스스로 글로리의 칼자루를 오른쪽 눈동자에 처박았다.


그 돌발적인 행동에 유진의 뺨이 움찔 떨렸고, 관중석의 모두가 놀란 소리를 냈다. 검은 안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왜 가비드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하.”


오직 유폐의 마왕만이 저 행동이 갖는 의미를 이해했다.


“드디어 버리는가.”


결투가 시작되기 전.


가비드에게서 한 번 글로리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가비드에게 기사의 서임과 글로리를 하사했다.


그때 가비드는 확실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그 자체가 유폐의 마왕이 가비드에게 내린 시험이자 기회였다.


하지만 가비드는 거절하지 않았다. 진즉에 깨달았음에도 결투의 시작에서 가비드는 자신의 모순을 떨쳐내지 못했다. 긴 시간 동안 그를 대표해 온, 그 무엇보다 영광스러워하며 아끼던 ‘유폐의 칼’이라는 이름은 이미 가비드에게 강하게 예속되어 있었다.


마치 사슬에 묶인 것처럼.


-나는 이 결투의 승리를 바란다.


유폐의 마왕이 그렇게 말했을 때, 가비드는 감사하며 유폐의 마왕에게 서임을 받았다.


-그러니 이 결투는 나에 대한 거역이 아니다. 나의 바람, 나의 약속. 만약 네가 그런 것들을 신경 쓰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가비드는 무어라고 대답했던가.


-승리를 바치겠나이다.


이 결투는 유폐의 마왕에 대한 거역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결투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


틀렸다.


가비드는 스스로 깨달았다. 이 결투의 승리는 유폐의 마왕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


이 결투의 승리도, 패배도, 영광도, 죽음도, 모든 것이 가비드의 것이다.


결투에서 유폐의 마왕은 결코 가비드의 주군이 아니다. 주군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이 결투에 임한 가비드의 순수성이 변질되어 버린다.


그래서 가비드는 부서진 글로리로 마안을 꿰뚫었다. 단순히 마안을 꿰뚫어 부순 것이 아니다. 가비드의 의지가 마안을 거부했다. 유폐의 칼로서 누렸던 은혜로운 권능을 저버렸다.


유폐의 마왕은 기쁜 마음으로 거절을 받아들였다.


오른쪽 눈에 처박은 글로리의 칼자루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눈구멍에 새로이 눈동자가 만들어졌다. 글로리와 마찬가지로 위신의 마안이 사라졌다. 가비드가 수백 년 동안 사용하던 힘이 텅 비어버렸다.


그렇지만 가비드는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구멍에 새로운 무언가가 차올랐기 때문이다. 가비드는 알 수 없는 충만감에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미안하다.”


유진이 사과했던 것처럼 가비드도 똑같이 사과를 말했다. 그는 더 이상 휘청거리지 않고 똑바로 서서 유진을 보았다.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버리지 못했던 모양이야.”


가비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들었다. 화아악! 유폐의 마력이 아닌, 가비드의 마력이 길쭉한 검이 되었다. 가비드는 새로이 나타난 검을 쥐었다.


“허.”


유진은 그런 가비드의 모습에 작은 탄성을 흘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마족, 가비드 린드먼. 300년 전에 보았던 놈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유진은 지금의 가비드가 낯설었다. 마치 전혀 다른 존재를 보는 것만 같았다.


“너 정말 마족이냐?”


유진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인간이냐고 묻던 가비드의 질문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질문을 받은 가비드는 짧은 웃음을 흘리며 검을 앞으로 들었다.


“모르겠군.”


가비드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가비드도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


버리고, 추구해서, 채우고, 깨달았다. 이 심득 자체는 마족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아득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사선을 오가며 추구하면 도달하게 되는 격. 천재라 불리기 충분했던 자가 그만한 시간을 몰두하면 당연히 이렇게 된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하고 부조리한 일이다.


“고맙다.”


가비드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하멜에 대한 공포와 열등감이 없었다면 지금의 가비드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오늘의 유진이 가비드를 이만큼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모순을 깨달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유진은 저 감사에 대답하지 않고 레반테인을 들었다.


잠잠해진 불꽃이 다시 타올랐다.


가비드의 변모는 우화라 하기에 충분했다. 저 경지가 얼마나 드높고, 저만한 높이에 오르기 위한 고행을 했다. 그것에 있어서 유진은 순수하게 가비드에 대한 존중을 느꼈다. 놈은 경의를 느끼기에 충분한 남자였다.


그럴지라도 유진이 오늘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화륵. 유진의 왼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신좌에 오르며 우화한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다. 이그니션의 잔존시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히 남아 있다.


정말 그런가?


남은 시간 동안 가비드를 죽일 수 있을까. 아까 이그니션을 썼을 때는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같은 확신이 없다. 처음과 똑같아졌다.


‘해봐야 알겠는데.’


유진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돌파하고서 레반테인을 휘둘렀다. 유진의 독주도 빨랐지만 불꽃의 참격은 그보다 더 빨라서, 이미 가비드에게 도달했다.


빠른 것은 유진 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이 뛰어서, 벤다, 라고 생각한 순간에 가비드도 이미 대응에 나섰다. 그의 오른쪽 눈에 더 이상 위신의 마안은 깃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가비드는 자신의 눈에서 특별한 힘을 느꼈다. 마치, 마치…….


미래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불꽃이 허공에 번졌다. 닿았다, 아니, 닿았나? 닿는 순간에 옆으로 흘렸다.


흐느적거리는 움직임, 가비드는 탈력(脫力)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재현하듯이 유연했고, 레반테인의 불꽃은 가비드의 검을 넘어서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흩어졌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단순 화력으로 압도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을 섞으면 된다.


유진은 다시 한번 가슴의 우주에서 뽑아낸 신력을 레반테인에 더했다. 두근, 하는 공명과 함께 공검이 완성되었다.


‘미래를 본다……. 아니, 그렇지는 않군.’


가비드는 발을 뒤로 끌었다. 무수한 경험에 의한 예측. 그것이 보다 완전하게 날이 선 것뿐.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비드는 공검에 어린 어마어마한 힘을 느꼈고, 여전히 자신이 저 검을 정면에서 받아낼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정면을 고집하지 않으면 된다. 가비드는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옆으로 누운 칼날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한 점에 집중된 불꽃이 가비드에게 내리 찍혔다. 공검의 무게와 힘은 세상을 통째로 양단할 것만 같았다.


검로(劍路)가 보였다.


어지럽게 뒤엉킨 힘의 흐름. 그 중심을 만드는 검로.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검이 불꽃을 역으로 파고들었다. 칼바람과 같은 불꽃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공검이 파훼되었고, 아름답게도 투명한 레반테인의 칼날이 정면에 드러났다.


칼날과 칼날이 닿았다.


둘 중 누구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다. 유진 역시 가비드와 똑같이 공격을 예지했다.


유진이 도달한 신성은 극한의 전투에서 어디를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할지를 알게 해준다. 정면에서 찍어 눌러 버리면 되레 이쪽이 베인다. 그러니 무르고, 다시 파고든다. 칼날이 쇄도했다. 뒤로 살짝 물러선 가비드는 능숙하게 반격을 흘려냈다.


검만을 신경 써서는 안 된다. 가비드는 유진의 왼손에 검은 구체가 뭉친 것을 보았다.


이클립스. 이미 한 번 파훼했던 것이지만 경계할 수밖에 없을 만큼의 꺼림칙한 것이 느껴졌다.


‘미친.’


가비드의 몸놀림이 바뀌었다. 그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유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클립스를 도중에 폭파시켰다.


꽈아앙! 폭발하며 터져 나온 것은 신력의 불꽃이 아니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월광, 저 작은 구체는 태양이 아닌 달이었던 것이다.


‘월광검을 스스로 재생성했다고?’


엄밀히 말하자면 저것은 ‘검’이 아니지만, 폭사되는 달빛은 수백 수천의 칼날과 마찬가지로 예리했다.


가장 이상적인 회피는 달빛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거리를 벌리는 것. 하지만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아무리 넓다고 해도 이곳은 결투장. 유폐의 사슬에 구속된 철장과도 같기 때문이다.


‘다루는 힘이 끔찍할 뿐, 공격 자체는 단조롭…….’


그러한 생각을 비웃듯이 월광의 형태가 바뀌었다. 정면에서 쇄도하던 힘이 우뚝 멈추고, 회색의 월광 틈 사이로 검붉은 전류가 흘렀다. 빠지지직! 이윽고 월광이 거대한, 정말로 거대한 검이 되었다.


칼자루도 없이 달빛만으로 만든 검. 유진은 직접 쥐지도 않은 월광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 공간이 버티지 못하고 일그러지고 깨져 나갔다.


이클립스의 폭발까지 섞으면서 최대한 위력을 증폭시킨, 순수하게 월광만으로 만들어낸 공검. 거기에 신검과 같은 필중과 필살의 기적까지 부여했다.


파훼하기는 늦다. 너무 크다. 모조리 베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갉아낸다. 일순 떠올린 무수한 가능성 중에서 가비드는 유일하다 싶은 정답을 선택했다. 마검이 시커먼 빛을 발했다.


콰가가각! 마검이 월광검의 표면을 긁었다. 그것만으로 양팔이 부서지고 내장이 터졌다. 하나 가비드에게 고통과 죽음은 아주 익숙했다.


그는 움찔거림조차 없이 월광검의 표면만을 베어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촤아악! 하늘이 쩍 갈라졌다. 하지만 가비드의 몸은 갈라지지 않았다. 가비드는 기어코 월광검의 참격 안쪽까지 도달했다.


촤악! 마검이 앞을 베었다. 유진의 가슴 한복판에서 피가 솟구쳤다. 양단할 생각으로 벤 것인데도 참격이 얕게 들어갔다. 유진은 상처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촤악! 이번에는 레반테인이 가비드의 몸을 베었다. 유진도 똑같이 가비드의 몸을 양단하지 못했다.


상처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재생되었다. 레반테인에 다시 불꽃이 점화되었다. 마검도 조용히 빛을 뿜었다.


칼부림이 시작됐다. 유진은 부릅 뜬 눈을 단 한 번도 감지 않고, 한 번의 휘두름에 셀 수 없이 많은 참격을 담았다. 예지하고 대응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이. 가비드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쇄도하는 참격 중에서 무엇이 진실인가. 판단하고 싶었지만 그 자체가 무의미했다. 저 모든 칼날이 진실이며, 확실한 살의와 위력을 갖고서 가비드에게 파고들고 있었다.


“아아아!”


가비드는 고함을 지르며 마검을 휘둘렀다. 황야에서 보낸 아득한 시간이 검에 담겼다. 그리하여 마검은 세상의 이해를 초월했다. 유진이 퍼부은 참격들에 비해 마검의 움직임은 고작해야 몇 번. 하지만 그 몇 번의 참격은 틀림없이 ‘검’이란 것의 극한이었고, 마땅한 진리가 담겨 있었다.


모조리 베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인지를 초월한 공격은 대응할 재간 없이 ‘베였다’라는 결과만을 남겼다. 푸확! 유진의 전신에서 피가 뿜어졌다.


“꺄악!”


얼마 없는 관중들이 유진의 부상에 비명을 질렀다.


모론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레헤인야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서 멀지 않은 결투장을 노려보았다.


전신에서 피를 쏟았지만, 유진은 쓰러지지 않았다. 표정에 곤혹스러움도 없다. 이 정도 부상은 당연하다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멜.”


모론이 입을 열었다. 언제 누르가 나타날지 모르니 레헤인야르를 떠날 수는 없다. 그래서 결투장의 관중석에 앉지는 못했지만, 모론의 밝은 눈은 이 정도 거리에서도 결투의 양상을 모조리 볼 수 있었다.


“이겨라.”


모론은 유진의 승리를 믿고 있다. 그렇기에 모론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저 관중석에 앉아서 우렁찬 목소리로 유진의 승리를 응원하고 싶었다.


……여기서도 충분하지 않은가? 모론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천천히, 깊이 숨을 삼키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유진의 이름과 승리를 외치기 위해서였다.


“하지 마, 등신아.”


대뜸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모론은 커다랗게 유진의 이름을 외쳤을 것이다.


“커흑!”


목소리를 내려던 순간에 가로막혀버렸다. 모론은 크게 놀라 뱉던 숨을 다시 삼켰고, 그로 인해 사레에 들려 버렸다. 모론이 몸을 숙이고 컥컥 기침을 토할 때마다 봉우리가 들썩거렸다.


“네가 소리를 질러 버리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의 고막이 터져버린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 바로 옆에서 들릴 만큼 가까운데도, 모론은 그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컥컥대던 기침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세, 세냐?”


1년 넘게 사라졌던 세냐와 카르멘이 모론의 뒤에 서 있었다.


빌어먹을 환생 536화


“세, 세냐?”


놀람은 진정됐지만 연속해 뱉은 기침의 여파로 목소리가 갈라지고 뚝뚝 끊어졌다. 모론이 더듬거리며 이름을 부르자, 세냐는 미간을 왈칵 찡그리며 핀잔을 주었다.


“나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놀라?”


“어, 어떻게…….”


세냐의 근황에 대해서는 아니스에게 전해 들었다.


세냐는 꽃봉오리가 되어 1년 동안 잠들어 있다……. 그 꽃봉오리가 마법의 신역에 오르기 위한 것이고, 세냐가 그럴 수 있도록 인도해 준 것이 바로 세계수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상아탑의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라는 것도 듣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은 모론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튼 세냐가 꽃봉오리가 되었고, 언젠가는 마법의 신역에 도달해 꽃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오오.”


세냐가 여기 있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 모론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 1년간 봉오리였던 세냐는 드디어 개화하고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즉 그녀는 염원했던 대로 인간에서 시작해 마법의 신역에 도달한 것이다. 그 사실에 모론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냐!”


모론은 버럭 외치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는 이 벅찬 감동과 전율을 공유하기 위해 세냐를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직전까지 그곳에 서 있던 세냐의 몸이, 모론의 팔이 감싸오는 순간에 푹 꺼진 듯이 사라져버렸다.


“왜 이래? 징그럽게.”


어느새 세냐는 모론의 옆에 있었다. 그녀는 모론의 어깨를 찰싹 때리면서 눈을 흘겼지만, 모론은 어리둥절해서 눈만 끔벅거렸다. 방금 세냐가 어떻게 사라지고 나타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이구.”


세냐는 눈을 끔벅거리는 모론을 한 번 흘겨본 뒤, 팔짱을 끼고 서서 결투장 쪽을 노려보았다.


“또, 또 무식하게 싸우고 있네. 저러다 한 번 더 죽어야 정신을 차릴까 볼라.”


세냐는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결투만 아니었어도 당장 가세했을 텐데. 세냐는 제멋대로 결투를 성사시킨 유진에 대한 얄미운 짜증은 잠시 내려놓고, 결투장에서 주목해야 할 다른 것들을 노려보았다.


가비드 린드먼. 놈이 이룩한 격과 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힘과 격을 상대해야 하는 것은 세냐가 아니고, 그녀는 혹시라도 자신에게 차례가 돌아오게 되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만약 세냐에게 차례가 돌아온다면, 그것은 유진이 패배하고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세냐로서는 당연히 그쪽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허공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누아르 제벨라. 결투장을 향한지라 누아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갈X년.’


세냐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아르가 빙글 고개를 돌렸다. 먼 거리를 초월하여 세냐와 누아르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것뿐인데도 무언가가 세냐를 침식하려 들었다.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걷어냈다. 하지만 누아르는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전에도 보통 갈X와 괴물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세냐는 쯧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유페의 마왕이 보였다. 그 또한 세냐가 왔음을 눈치챘겠지만, 조금의 의식도 하지 않고 결투장을 주목하고 있었다.


결투장을 휘감은 유폐의 권능을 보았다. 세냐는 자신의 마법에 대해 생각하고, 둘을 잠시 견주어 보았다. 지금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세냐는 그렇게 판단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여기서 보실 겁니까.”


뒤쪽에 있던 카르멘이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은 1년 전과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모론은 카르멘에게 커다란 변화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이트 마치 때와 비교되지 않는 힘. 헤아릴 수 없이 깊어진 관록.


“멀쩡히 자리가 있는데 굳이 여기 서서 볼 필요는 없지.”


세냐는 모론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하지만 모론은 세냐의 손을 잡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누르 때문에 그래? 몇 년 전 나이트 마치 때는 산을 잠시 비워도 괜찮았잖아.”


“그때와 사정이 달라졌다.”


모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세냐의 말대로, 몇 년 전에는 잠시 산을 떠나도 괜찮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누르의 출현이 많아졌다. 놈들은 원래부터 징조 없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이제는 하루에 몇 번씩, 수십 마리가 동시에 나타났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가?”


“반나절 정도는 누르가 나타나지 않을 거야.”


세냐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공간이 열리고 지팡이가 나타났다.


‘메리’. 현자의 애장(愛杖)은 프로스트와 합쳐져서 새로운 모습을 가졌다. 새하얀 눈꽃의 지팡이가 세냐의 손에 쥐어진 순간, ‘반짝’하고 터진 빛이 레헤인야르 전체에 녹아들었다.


“……?”


모론은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는 마법에 무지하지만, 방금 세냐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밝은 눈으로 레헤인야르를 살피면서 나직이 감탄을 토했다.


“문을 닫았어.”


세냐는 메리를 놓고, 카르멘과 모론에게 손을 뻗었다.


“반나절 정도면 저 무식하고 끔찍한 결투도 끝나겠지. 유진 저 자식이 승리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가서 수고했다고 등짝이라도 두들겨줘야 할 것 아냐?”


“하하하!”


모론은 세냐의 손을 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군. 결투는 이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승리의 감동은 저곳에서만 강렬히 실감할 수 있겠지. 네 말이 맞다, 세냐. 나는 하멜이 승리한다면 그를 번쩍 들어서 하늘에 높이 던지고 받을 것이다.”


“저는 모론 님의 곁에서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외치겠습니다.”


카르멘도 빙긋 웃으며 세냐의 손을 잡았다. 그것뿐인데도 셋의 모습이 동시에 사라졌다. 모론에게는 마법에 휘말렸다는 체감조차 들지 않았다. 그만큼 세냐의 마법은 빠르고 완전했다.


관중석에 도착한 순간 피 냄새가 몰아쳤다.


사라졌다. 결투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유진의 다리가 잘렸다. 피가 쏟아졌다. 신경 쓰지 않고 전진했다. 잘린 다리가 되돌아오고 피는 사라졌다. 기세를 줄이지 않고 레반테인을 휘둘렀다. 가로막혔다. 가비드의 마검은 참 요령 좋게도 레반테인의 불꽃을 흘려내고, 유리의 검신을 잠시 받아내고, 또다시 흘려냈다.


그렇게 검이 꺾인다. 꺾이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유진은 힘을 줄이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꺾이며 흘려지는 힘을 조율했다. 불꽃이 나선이 되어 유진을 감쌌다. 빙글 회전하며 이어진 참격이 또다시 가비드를 노렸다.


이건 흘려낼 수 없다. 판단과 동시에 가비드는 몸을 앞으로 밀었다. 거리를 벌리는 것은 무의미하기에 최소한으로 받아내는 것을 선택했다.


왼팔을 내줬다. 잘린 즉시 팔은 불타버려 재가 되었다. 불꽃은 멈추지 않고 팔뚝의 절단면에서부터 시작해 순식간에 위까지 타올랐다.


레반테인. 저 불꽃의 검은 살짝만 베어도 순식간에 몸을 태워 버린다.


‘그런가.’


불꽃이 어깨를 침범하기 전, 가비드는 스스로 팔을 더 잘라냈다.


‘그 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나.’


그러한 깨달음이 가비드에게 끔찍한 기분을 주었다. 지금의 레반테인만 하더라도, 유진이 바란다면 순식간에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 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유진이 바라는 것은 세상을 불태우는 마검이 아니다. 마왕을 죽이는 검이다. 저 검이 완성된다면 마족이나 마왕의 불사력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의 불꽃을 내뿜을 것이다.


스스로 왼팔을 내어준 가비드가 간격을 좁혔다. 마검은 이미 유진을 노리고 있다. 유진도 왼팔이 참격에 걸쳤다. 살을 가르고, 근육을 베고, 뼈를 자르는 감촉. 유진의 왼팔이 썩둑 잘렸다.


‘인간의 싸움이 아니군.’


상대가 인간이라면 진즉에 끝이 났겠지만, 지금의 유진은 인간이 아니다. 깎아내는 것으로는 목숨에 닿을 수 없다. 목을 베면 죽을까? 놀랍게도 가비드는 그것조차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럴지라도 검은 멈출 수 없다. 이 결투는 둘 중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그를 위한 살의가 칼날에 깃들었다. 아가로트를 벤 검. 아가로트를 죽인 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비드 린드먼, 놈의 검은 진즉부터 유진의 상상을 초월했다. 가비드를 죽이기 위해서는 저 검을 꺾어야 한다. 그것은 전쟁신으로 군림한 아가로트를 완전히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바라는 바였다. 아가로트보다 강하지 않는다면 유폐의 마왕도 멸망의 마왕도 죽일 수가 없다.


유진은, 저만큼 검을 벼려낸 가비드에게 경외를 느꼈다. 마족이고 적이고를 떠나서 가비드를 인정했다. 저만한 격에 도달하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겪었을까. 얼마나 많이 검을 휘둘렀을까.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인정하고, 내뱉었다. 필사적인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심연에 묻힌 도시에서 보낸 시간은 유진에게도 끔찍하고 가혹했다. 시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살아 있는 자가 없는, 폐허와 무너진 신상의 아래에서 길고 긴 묵상을 가졌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하멜 다이너스의 모든 것을 되감고, 깊이 묻었던 아가로트의 기억을 돌이켰으며, 그 모든 것을 일순(一巡)했다.


그렇게 무아에 이르렀다. 유진과 하멜과 아가로트를 구분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혹은 내가 가졌던,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엮었다. 그러고도 부족했다. 더하고 더한들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 속에서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고 불꽃을 일으켰다.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고, 텅 빈 상태로 다시 생각했다.


무엇이 부족하지? 무엇을 채워야 하지? 몇 번이고 극한을 넘었다. 하지만 이제는 넘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알았다.


‘이게 내 끝이다.’


인간으로서의 종착점. 초월은 이 종착점을 넘어야만 시작된다. 그 지점에 유진은 허무함과 분노를 느꼈다.


고작 이 정도가 끝이어서는 안 된다. 아직, 아직 넘어야 할 것이 있다. 죽여야 할 것이 있다. 여기가 끝이라면 결코 닿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유진은 폐허인 도시를 보았다. 무너진 아가로트의 신상을 보았다. 그, 황야에서. 모든 신군에게 죽음을 명령하던 아가로트를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도망치지 않던, 그 오만하던 전쟁의 신이 어떠한 생각으로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았는지. 무엇이 아가로트의 등을 떠밀었는지.


-찬란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신도들의 목소리. 신앙의 목소리. 멸망을 바라지 않는 자들의 목소리. 오늘의 평안을, 내일의 행복을 바라는 목소리.


-용사.


텅 비어버린 폐허. 절망과 고통 속에서 죽어간 신도들.


아가로트는 실패했다. 폐허와 무너진 신상은 아가로트의 패배와 실패의 증거였다.


그 순간에 유진은, 아가로트로서 절망했다. 전쟁신은 목숨을 바쳐가며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고 붙들었다. 그가 시간을 끌었기에 현자는 세계수가 되었고, 거신과 다른 신들도 다음을 위한 안배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결국 멸망했다. 모든 신도가 죽었다. 다음을 기약한다는 것은 결국 지금을 포기하고 버린다는 뜻이다.


‘X까.’


유진은 지금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는 가비드와 다르다. 가비드는 헬무드의 대공을 버리고, 유폐의 칼을 버리고, 위신의 마안을 버리고, 글로리를 버리고, 욕망과 투쟁심을 그득 채워 검을 벼려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유진 라이언하트는, 용사는, 무엇 하나 버려서는 안 된다.


모조리 안고, 더해야 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지금 유진의 귀에는 세상의 염원이 들리고 있다. 이곳의 결투는 세상에 중계되고 있다. 대륙의 모두가 결투를 보고 있다.


어린아이에게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팔과 다리가 날아가고 내장이 쏟아지는 잔인한 싸움. 그렇지만 어린아이도 이 결투를 보고 있을 것이다.


볼 수밖에 없다. 이 결투에는 과장 하나 없이 세상의 운명이 걸렸다. 만약 유진이 패배해 죽는다면 유폐의 마왕은 지체없이 대륙을 침략할 것이다. 대륙에 사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유진에게 달린 것이다.


-승리를.


염원을 들었다. 부응해야 한다. 버려서는 안 된다. 내뱉기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지금 유진은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니 결코 패배할 수는 없다.


‘무겁다.’


흘려낼 수가 없었다.


마검이 흔들렸다. 가비드는 손에 힘을 주어, 마검의 흔들림을 붙잡았다. 존재를 흔드는 힘.


‘그런가. 하멜, 너의 검에는.’


마검과 함께 가비드의 몸이 뒤로 밀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간극에 불꽃이 깃들었다. 거대하고 무거운 불꽃이 가비드의 몸을 더욱 뒤로 밀어냈다.


‘모든 인간의 염원이 깃들어 있구나.’


승리에 대한 염원. 오늘의 평안과 내일의 행복에 대한 염원. 그러한 모든 염원이 실린 검은 너무나도 무겁다. 저 검을 넘어선다는 것은, 가비드의 손으로 직접 대륙의 내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개의치 않았다. 가비드는 오늘 결투에서 승리할 것이다. 300년 동안 곪은 열등감을 끝낼 것이다. 전부 마시지 않고 남긴 술로 축배를 들고, 마군의 선봉이 되어 대륙을 침공할 것이다. 대륙의 명운 따위 가비드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늘의 승리뿐이다.


“아아아!”


둘은 똑같이 고함을 질렀다. 가진 걸 버리고 벼려낸 검과 염원들로 벼려낸 검이 충돌했다. 검은 다를지라도 집념은 같았다.


하지만 다른 것이 부족했다.


절망이 부족했다. 가비드가 가진 집념도, 갈망도, 열등감도, 유진이 가진 절망보다 부족했다. 세상의 끝을 안다. 유진은 절망을 집념으로 삼았다. 오늘 끝내지 않기 위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촌스럽고 뻔한 말이지만, 용사는 희망의 상징이다.


-화륵.


왼손에 얹은 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귓가에 들리는 염원. 승리에 대한 기도. 내일을 바라는 희망. 그 모든 것을 장작으로 삼아 신화를 피워냈다. 검이 부딪치고, 밀려났을 때. 가비드는 양손으로 마검을 쥐었다. 유진은 왼손의 신화를 레반테인에 흘려냈다.


화르르륵!


유리의 칼날에 격렬한 불꽃이 타올랐다. 백염식의 모든 불꽃이 레반테인과 공명했다. 프로미넌스의 성역이 레반테인에 모든 기적을 중첩시켰다.


그렇게 레반테인은 기적이 되었다.


수백 년의 삶.


검에 대한 몰두.


반복해 온 황야.


전쟁신을 넘은, 신살의 검.


가진 것을 버리고 새로이 채워서 도달한 격.


승리에 대한 집념.


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가비드 린드먼은 강하다. 그는 마족을 초월하고, 마왕마저 뛰어넘어 검의 극예에 올랐다.


하지만 패인은 단순했다.


세상의 염원이, 희망이, 기적이, 가비드의 검보다 강했다.


빌어먹을 환생 537화


세상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것만 같은 불꽃. 가비드는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물러설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검을 세웠으나, 가비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타오르는 신화(神火)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저 불꽃이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신화(神話)를 남길지를.


그 신화에서 가비드는 신에게 거스른 어리석은 마족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신화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결코 바꿀 수 없다. 가비드가 손에 쥔 마검은, 포악하게 타오르는 신의 불꽃에 사라질 것이다.


‘신’.


가비드는 그 단어를 마음속에서 부정했다.


유진이 정말로 빛과 같은 신격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신앙은 마족의 것이 아니다. 가비드는, 마족이 신을 섬기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네 검이 정말로 기적이 되었을지라도.’


잠자코 인정하며 스러지고 싶지 않다. 하멜,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가 정말로 신격을 이루었다고 해도 가비드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아닌 마족이기 때문이다. 마족은 결코 인간의 신앙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가비드 린드먼이 가진 마지막 고집이었다.


“아아아아!”


가비드는 고함을 지르며 불꽃을 향해 마검을 휘둘렀다. 허나 신위를 정면에서 반역하기에는 가비드의 마검은 기적에 미치지 못했다. 이미 결정된 대로, 레반테인의 불꽃이 마검을 불살랐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검을 통째로 재로 만든 불꽃이 가비드의 몸을 침범했다.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이 타서 재가 되는 고통. 그것은 가비드가 수백 수천 번 반복했던 황야에서의 죽음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버텼다. 그대로 불타서 재가 되어 사라져야 할 영혼이, 사라지지 않고 불완전하게나마 형상을 유지했다. 아득한 고통 속에서 가비드는 이를 악물었다.


타오르는 불길. 존재의 모든 것이 타오르는 고통. 화륵거리는 불꽃의 소리. 그 속에, 줄곧 듣지 않던 소리가 다가왔다.


‘아.’


가비드 린드먼.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자리에 섰다. 유폐의 마왕에 대한 충절과 헬무드 제국의 영광을 떠나, 단순히 하멜과의 결투와 승리에 대한 갈망으로 이 자리에 남아 있다. 글로리는 부서졌다. 위신의 마안은 스스로 꿰뚫었다.


그렇게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가비드의 선택이다. 하지만 지금, 관중석에서 결투를 보는 검은 안개는 가비드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았다. 가비드가 결투의 승리를 바라듯, 검은 안개 역시 가비드의 승리를 바랐다.


그들은 가비드가 주저앉았을 때 탄식하고 절망하며 이름을 불렀고, 가비드가 새로이 마검을 쥐고 섰을 때 희망을 담아 이름을 불렀으며, 지금은, 신화 속에 스러지려는 가비드를 보며 간절히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검은 안개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이곳, 라구르야란에서의 결투는 대륙 전역에 중계되고 있다. 인간들뿐만 아니라 마족들도 결투를 보고 있단 말이다.


약속의 종결과 전쟁의 시작을 바라는 마족들은 당연히 가비드의 승리를 바란다. 아직은 전쟁이란 것에 별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 마족들도, 몇 번의 위기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가비드의 승리를 응원했다.


그것이 당연했다. 유진에게 인간의 염원이 집중되었다면, 가비드에게는 마족의 염원이 집중되고 있다.


얄궂고,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가진 것들을 버리고 검만을 남겨 지금이 되었는데. 결국 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뒤를 떠받치고 있는 꼴 아닌가. 가비드는 스스로가 우습고 한심하여 자조했다.


‘그럴지라도.’


가비드는 앞으로 나아갔다. ‘목소리’가 가비드가 쓰러지지 않게끔 등을 받쳐주었고, 이미 모조리 타서 재가 되어야 할 몸을 붙들었다.


‘나는.’


이 ‘염원’은 유진이 받는 것과 격이 다르다. 유진이 염원을 통해 절대적인 기적을 일으켰다면, 지금 가비드에게 집중된 염원은 필연적인 죽음을 아주 조금 뒤로 미루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포악한 불꽃의 너머.


유진이 보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서 가비드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한 점의 비웃음이나 멸시가 존재하지 않았다. 경악과, 감탄만이 있었다.


‘나는, 너를…….’


가비드의 발이 비틀거리며 전진했다.


“가비드 린드먼.”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해지는 응원과, 이미 절감한 탄식 속에서 저 목소리는 또렷하고 가까웠다.


유폐의 마왕의 목소리였다. 그는 사슬의 옥좌에 앉아 있다. 지금의 그에게 일상과도 같던 권태는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오랫동안 곁에 두었던 ‘기사’의 마지막을 눈에 담았다.


“후회를 남기지 마라.”


그 말이 가비드의 정신을 관통했다.


후회, 후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을 버리고 몰두했음에도 최후는 이 꼴이다. 이만한 격에 도달했음에도. 결국 정말 쓰러트리고 싶던 남자에게는 닿지 못했다.


혹시 내가 틀렸던 것일까.


버리지 말아야 했던 것일까.


결투를 고집하지 않고, 차라리…….


“하하.”


그런 후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지독한 불꽃이, 이미 결정이 된 죽음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의식이- 최후의 최후에 스스로를 나약하게 하였나. 가비드는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예.”


검은 안개가 보고 있다. 헬무드의 모든 마족들이 보고 있다. 누아르 제벨라가 보고 있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이 보고 있다.


최후에 후회를 남겨, 추태를 부려서는 안 된다.


불타버린 혼이 남긴 재가 검이 되었다. 후회에 자조하여 멈추지 마라.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면 발악을 계속해라.


‘나는 후회해 죽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이미 결정된 패배일지라도 허무하고 한심하게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손에 닿지 않는 승리를, 닿지 않기에 더, 더 갈망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써 내릴 ‘신화’에서 한심하고 어리석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마족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검을 쥐었다.


콰르르르르!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가비드가 땅을 박찼다. 그는 불꽃을 거슬러서 유진에게 달렸다. 마족은 신을 믿지 않는다. 처절한 의지가 신성을 거역했다. 유진은 불꽃을 퍼부으면서 레반테인을 움직였다.


강한, 경의를 느꼈다. 설마 저러고도 움직일 줄은 몰랐다. 기적과 신화는 가비드의 검보다 강했으나, 존재의 마지막에 불사른 집념은 기어코 기적마저 거역했다.


아니.


저것은 단순한 집념이 아니다. 처절한 마지막에서 태어난 저주다.


푸확! 일순 레반테인의 불꽃이 사라졌다. 그 포악한 신화가 모조리 유리의 칼날에 맺혔다.


그 순간.


가비드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참격을 바꾸었다. 시커먼 재를 흩날리는 참격이 레반테인과 닿았다.


꽈아앙! 신화와 저주가 부딪쳤다.


“하하…….”


가비드는 갈라지고 쉬어버린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아주 조금인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가비드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검은 레반테인에 가로막혔다. 가비드의 갈망은 결국 레반테인을 이겨내지 못했다. 가로막히고, 부서졌다.


하지만 부서지고 튀어 나간 작은 파편이 유진의 뺨을 스쳤다. 그렇게나마 조금, 유진에게 닿았다.


“내가 왜 진 것 같나?”


가비드는 유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유진은 천천히 레반테인을 내려놓으며, 왼쪽 손을 들어 뺨을 쓸었다. 손등에 닦이는 피는 뜨거웠고, 상처는 쓰라렸다.


“내가 너보다 강하니까.”


몇 번이나 몸이 썰리고 치명상을 입었어도 되돌아갔는데, 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앞으로도 쭉, 뺨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너와 나는 짊어진 것이 달라.”


“짊어진 것.”


“나는 절대로, 여기서 져서는 안 돼.”


유진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로트로 죽었고, 하멜로 죽었다.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로 환생했다. 월광검을 받았다. 성검의, 빛의 선택을 받았다.


유진은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다. 무엇 하나 버리지 않았다. 버려서는 안 됐다.


“그래도.”


유진은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느끼며 내뱉었다.


“마지막은 오싹했다.”


시커먼 저주의 검.


신성(神性)이 없었다면 변절한 궤적을 간파하지 못했을 거다. 충돌하기 직전에 꺾인 검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필살의 저주가 되어서 유진의 목을 노렸다. 막지 못했다면 그대로 목이 베였을 거고, 조금이라도 잘못 막았다가는 팔이 잘렸을 거다. 부수고 나서도 파편을 즉시 불살랐기에 뺨을 스치는 것으로 그쳤지,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애꾸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가비드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퍼석! 한쪽 팔이 재가 되었다. 한계까지 떠밀어놓았던 죽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네가 이겼다.”


검은 부러졌지만, 저주를 내뱉고 싶었다. 오늘이 더해지고, 앞으로도 쓰일 신화에 처절하고 절망스러운 종말이 찾아오기를 말하고 싶었다.


하지 않았다. 결국 패자의 넋두리가 될 뿐일 테니. 최선을…… 다했다. 전력을 다했다. 필사적이었다. 한 삶의 마지막으로 두기에 부족함이 없는 결투라고 생각했다.


“하멜……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


가비드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공간이 삐뚤삐뚤 뒤틀렸다. 이러한 조작조차도 되지 않다니.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틈을 열었다. 조그맣게 열린 틈에서 반쯤 남은 술병이 굴러떨어졌다.


“승자에 대한 선물로는 초라하지만, 받아라.”


“이건 뭐냐?”


“보면 모르나. 술이다.”


유진은 바닥을 구르는 술병을 주워들었다. 한 번 개봉되어 반쯤 마신, 라벨도 없는 술. 유진은 그 수상쩍은 술을 살피고서 가비드를 쳐다보았다.


“독 따위는 없다. 애당초 네게 독이란 것은 통하지도 않겠지만.”


“…….”


“널 이기고 축배를 들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패배해 버렸으니, 승자인 네가 가져라. 싫다면 버려도 좋다.”


“아니.”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술병을 망토 안에 밀어 넣었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난 뒤에 마시도록 하지.”


돌아온 대답에 가비드는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잠시 유진을 올려다보다가, 쉰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쓰이지 않기를 바라지.”


“가비드 린드먼.”


유진은 시선을 힐긋 들어 위를 보았다.


“나는 300년 전에 너보다 약했어.”


“…….”


“네가 알아서 물러서지 않았다면 난 네 검에 죽었겠지.”


“내가 너보다 강했다는 것은 나도 안다.”


가비드가 대답했다.


“300년 전에도, 1년 전에도, 나는 너보다 강했다. 내가 널 죽이려고 했다면 언제든지 널 죽일 수 있었겠지.”


“그렇지.”


“하지만 오늘은. 네가 아까 말했듯, 내가 너보다 약했다.”


후련하지는 않았다. 후회가 없지도 않았다. 분했다. 가비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 패배감은…… 300년 전과는 다르군. 이럴 수밖에 없고,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


“유진 라이언하트.”


가비드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떴다.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패배를 보고할 시간을 베풀어주겠나?”


“그래.”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하지.”


“…….”


“나와 결투해 줘서 고맙다.”


유진은 대답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비틀거리며 선 가비드는 멀어지는 유진의 등을 응시했다. 방금 그 말에는 한 치의 조롱도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가비드가 입을 열었다.


“이 결투를 내 마지막으로 만들어줘서 고맙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냥, 한쪽 손을 들어 한 번 흔들었을 뿐이다. 가비드는 그 모습에 큭큭 웃으며 몸을 돌렸다.


반대편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모두가 유진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가비드는 그것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발을 뻗어 한 걸음 걸었다.


-퍼석! 버티지 못한 다리가 재가 되어 무너졌다. 평소라면 금세 균형을 잡았겠지만, 지금의 가비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힘을 잃은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땅에 엎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비드의 몸을 받쳐주었다.


“후회는 없나?”


가비드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설령 시각을 잃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는 일.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없지는 않습니다.”


“바란다면 후회를 거둘 수 있게 해주마.”


옥좌에서 내려온 유폐의 마왕은 사슬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을 써서 가비드를 부축했다. 그 목소리는 고요했고, 아쉬움이나 슬픔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인과를 사슬로 엮은 이 죄인에게 저런 종류의 감정은 진즉에 마모된 지 오래다.


하지만. 아쉬움이나 슬픔이 없더라도, 유폐의 마왕의 말은 진심이었다. 유폐의 마왕이 직접 선택하지 않을 뿐. 만약 가비드가 바란다면, 유폐의 마왕은 가비드에게 결정된 죽음마저 유폐해 버릴 것이다.


“이 결투는 패자의 죽음으로 끝나야 합니다.”


가비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바라건대, 제 끝을 붙잡지 말아주십시오.”


충분한 대답이었다.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뒤따라 내려온 검은 안개가 유폐의 마왕과 가비드를 둘러쌌다.


가비드의 몸은 재가 되어 무너지고 있다. 모든 검은 안개가 검을 뽑아 하늘로 세웠다. 유폐의 마왕은 가비드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벨라 공작.”


하늘에 있던 누아르가 유폐의 마왕의 곁에 내려왔다. 머리 위로 넘겼던 베일은 어느새 아래로 내려와, 누아르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눌 이야기가 있나?”


“설마 당신에게 이런 배려를 받을 줄이야.”


누아르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다운 웃음기는 조금도 있지 않았다.


“내게도 애도의 시간을 주시겠나요?”


누아르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유폐의 마왕은 대답하지 않고 가비드를 내려다보았다.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대가 바라는 대로 되었는데, 그리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군.”


“나도 조금 놀라워요.”


누아르는 유폐의 마왕을 대신해 가비드를 부축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낮추어, 가비드의 머리를 무릎 위에 눕혔다.


“내가 그때 결투를 말려야 했을까요?”


“아니.”


“뭐 그렇죠. 그때 당신을 멈추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누아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가비드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탁해진 눈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몸은 재가 되어서 무너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꿈을 보여줄 수도 있어요.”


누아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누구나 마지막 순간에는 행복한 꿈을 꾸기를 바라잖아요. 가비드 린드먼. 당신이 도달하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것. 그것이 무엇이든, 꿈은…….”


“허무할 뿐일세.”


가비드가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충분히 꿈결 같은 삶을 살았네. 내가 버린 모든 것이, 내가 어린 시절부터 바라던 꿈이었지.”


“이 죽음조차도?”


“패배했지만 악몽은 아니야.”


짧은 웃음 뒤에 목소리가 이어졌다.


“후회도, 미련도 있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럽군.”


“…….”


“그대에게 맡긴 눈이, 그대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를.”


누아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잠시 눈을 감았다. 왼쪽 눈에 깃든 위신의 마안을 느꼈다. 누아르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비드는 누아르의 떨림을 느끼며 쉰 소리로 웃었다.


“……폐하.”


가비드가 입을 열었다.


“제가 폐하의 군림과 영달을 바라도 되겠습니까?”


유폐의 마왕은 칙칙한 눈으로 가비드를 응시했다. 그는 저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았다.


“아니.”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군림과 영달을 추구하지 않는다.”


“…….”


“바라고 싶다면, 가비드 린드먼. 내가 추구해 온 비원이 성사되는 것을 바라라.”


가비드는 유폐의 마왕이 추구하는 비원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이 군림과 영달을 바라는 것이 아니란 것은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저것들을 추구했다면, 300년 전에 약속 따위를 맺을 이유가 없다. 하멜의 환생인 유진을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바벨에서 기다려 줄 필요도 없다…….


“예.”


가비드는 유폐의 마왕의 비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폐하의 비원이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헬무드의 마족은 죽어도 그 혼이 유폐의 마왕을 떠날 수 없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가비드의 혼을 붙잡지 않았다.


가비드가 그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유폐의 마왕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헬무드의 대공, 유폐의 칼.


마족, 가비드 린드먼.


그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빌어먹을 환생 538화


가비드가 마족들에게 애도를 받을 때.


유진은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가비드에 대한 애도와, 배웅을 이미 끝냈기 때문이다. 과연 가비드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했다. 이 결투는 유진에게도 중요했고, 큰 의미가 있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필사적이었다.


“지치는구만.”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유진은 천천히 이그니션을 끝냈다. 몸에 둘렀던 성역이 함께 사라졌다. 1년 전과는 다르다. 인간을 한참 넘어선 유진에게, 더 이상 육체적인 반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멀쩡한 것도 아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몸은 멀쩡히 움직일 수 있다는 점. 하지만 신력의 폭주에 대한 반동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차라리 몸만 아픈 것이 낫지.’


이그니션의 반동으로 당분간은 신력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이랄 점은 마나는 어찌어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신력을 쓸 수 없는 이상 레반테인도 본래 위력의 반의반도 끌어낼 수가 없다.


‘바벨에서 이 꼴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 결투에서 유진은 많은 것을 얻었다. 하나는 신력과 레반테인의 힘. 거기에 대륙에 중계되는 결투에서 승리했으니 신앙도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오르게 될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성과는 가비드 린드먼을 여기서 죽인 것이다. 이제는 바벨에서 유폐의 마왕의 어전에 오르기까지, 유진을 가로막을 수 있는 마족은 아무도 없다.


누아르 제벨라를 제외하고 말이다.


‘바벨에 가기 전에 죽여야 해.’


유진은 무덤덤하게 그것을 생각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이만한 힘을 손에 넣었는데도 확신은 희미하다. 그렇지만, 승패를 떠나서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누아르에게 더 이상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더 이상 ‘몽마의 여왕’이라고 불릴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가비드와 똑같다. 그녀는 이미 ‘마족’의 영역을 뛰어넘어 불가해의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 위신의 마안까지 가지고 있지.’


환상의 마안 하나만으로도 끔찍하고 까다로운데, 거기에 위신의 마안까지. 게다가 누아르는 가비드처럼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안의 활용도는 누아르 제벨라가 압도적으로 뛰어나. 직접적인 전투에 쓰지 않고, 아마 환상의 마안을 보조하는 데 쓰겠지.’


그렇기에 더더욱, 누아르에게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제벨라 시티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찬란한!”


골몰히 생각하던 유진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1년 만에 듣는 빌어먹을 이름. 1년 내내 들었다면 익숙해졌을까?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며 위를 쳐다보았다.


관중석의 모두가 일어서서 유진을 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뛰어내린 것은, 놀랍게도 길레이드 라이언하트였다.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길레이드가 버럭 외치면서 유진의 앞에 내려섰다. 유진은, 그의 왼쪽 가슴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라이언하트의 문장을 보았다.


길레이드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온 라이언하트 전원이 똑같았다. 1년 전 카르멘이 도입한 제복의 새로운 문양…… 유진은 하나둘 앞에 서는 라이언하트들을 울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표정이 왜 그래?”


시엘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 감정을……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솔직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대놓고 좋아할 수도 없는…… 그냥 못 본 체해야 하나?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지 않나? 보아하니 이곳에 없는 라이언하트 전원이 똑같은 문장을 제복 가슴에 새겼을 것 같은데.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쳐서 그래.”


“지칠 만도 하지.”


시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방금의 결투. 가까운 관중석에서 이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비드와 유진의 결투는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꺄아아아악!”


까마귀 같은 외침이 고막을 때렸다. 하지만 유진은 놀라지 않고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아니, 대륙 모든 사람 중에서 저렇게 요란한 소리를 낼 사람은 한 명뿐. 멜키스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중계된다는 것은 추호도 신경쓰지 않고 양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만세, 만세, 만세!”


어느 틈엔가 멜키스의 손에는 커다란 깃발이 들려 있었다. 유진은 깃발에 크게 새겨진 라이언하트의 문장과, 그 아래에 금색으로 쓰인 자신의 이름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유진이 입술을 뻐끔거리는 동안, 멜키스는 꺅꺅 환호성을 지르면서 깃발을 좌우로 펄럭펄럭 흔들었다.


“……음…….”


치미는 욕지기를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참았다.


저건 놀리는 것 같지만 놀리는 것이 아니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라이언하트의 문장도, 열심히 펄럭대는 깃발도, 모두가 유진의 승리를 믿고서 준비한 것들이다…….


유진은 신성을 얻었지만 다행히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멜키스에게 윽박을 지르지 않고 일단은 참아 넘겼다.


“으흠.”


뒤편에 있던 세냐가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가로막은 인파에 몸을 밀어 넣거나, 직접 하늘을 날아서 유진에게 내려오지 않았다. 발을 살짝 뗀 것만으로 세냐는 모두를 넘어, 유진의 앞에 도달했다.


“으흠흠.”


세냐는 헛기침만 하면서 어깨를 활짝 펴고 가슴을 내밀었다. 그녀는 ‘오랜만이다’ 같은 재회의 인사를 기대했지만, 유진은 세냐의 기대대로는 행동해 주지 않았다.


“…….”


그렇지만 세냐는 유진에게 아무런 불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세냐가 눈앞에 선 순간, 유진은 망설임 없이 양팔을 활짝 벌려 그녀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세냐는 이렇게 대뜸 포옹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품에 안긴 순간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오랜만이야.”


빨갛게 달아오른 세냐의 귓가를 속삭임이 핥았다. 세냐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고 어깨는 파르르 떨렸다.


“어…… 어, 어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1년 넘어 맛본 포옹은 세냐에게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세냐는 힘이 풀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가온 모론이 유진과 세냐를 통째로 끌어안고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으하! 으하하하! 하하하하!”


모론은 우렁찬 목소리로 웃으면서 유진과 세냐를 공중에서 흔들었다. 몸이 몇 번을 흔들리고 나서야 세냐는 정신을 차렸다. 아까 모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냐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유진의 품에서 사라져, 땅으로 내려왔다.


“승리!”


모론은 내뱉었던 말을 즉시 이행했다. 그는 유진을 하늘 높이 던지고서 다시 외쳤다.


“승리!”


그대로 도망칠 수도 있지만, 유진은 한숨을 푹 쉬면서 잠자코 아래로 떨어졌다. 모론은 유진의 몸을 손바닥으로 받고, 마치 공을 튕기듯 한 번 더 유진을 높이 던졌다.


“그! 가비드 린드먼과의 결투에서! 네가 승리한 것이다! 하멜!”


“그래, 그래…….”


모론은 유진을 열 번이나 던지고 받고서야 땅에 내려주었다. 유진은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손으로 눌렀다.


“그만.”


더 하려는 모론을 우선 제지했다. 모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진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모두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자 다들 환호를 멈추었다.


“…….”


유진의 표정, 시선, 분위기. 그런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다들 느껴버린 것이다.


가비드 린드먼이 죽었다.


모론은 표정을 가다듬고 몸을 돌렸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모론은 만약을 대비해 이곳의 모두를 지키고서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위치에 섰다.


세냐도 아공간의 메리를 꺼내서 손에 쥐었다. 술식의 준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 세냐의 마법에 더 이상 술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감격에 젖어 기도를 올리고 있던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현실을 의식했다. 크리스티나는 긴장하여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검은 안개들은 가비드의 마지막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원진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검은 안개들은 높이 들었던 검을 착검하고, 위로 열었던 투구의 안면 덮개를 다시 내리며 뒤로 물러갔다.


흩어지는 재 속에서 누아르 제벨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무릎에 조금 남은 재를 손으로 거머쥐었다. 누아르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을 덮은 검은 베일이 심연의 어둠처럼 짙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은 그 뒤에 서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흩어지는 재를 잠시 응시했다.


고요한 시선에 멜키스는 괜히 혼자서 움찔했다. 그녀는 열심히 흔들었던 깃발을 슬며시 아래로 내렸다. 설마 이 호들갑을 두고서 유폐의 마왕이 언짢아한 것은 아닐까? 이 추모의 시간을 감히 모욕했다며 대뜸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멜키스가 대륙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대범할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조금 무서웠다.


“승리를 축하한다.”


유폐의 마왕의 입이 열렸다. 그는 하늘을 떠돌다 사라진 재에서 시선을 떼었다.


진즉에 마모된…… 그런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드물게도, 유폐의 마왕은 조금의 미련을 느꼈다. 가비드의 바람을 묵살했다면. 되살리지 않더라도, 영혼만을 거두어 다음으로 가져갔다면.


‘무의미한가.’


유폐의 마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령 다음으로 가져갔을지라도, 지금만큼 꽃을 피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비드의 우화는 지금 시대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군.”


아쉬움을 덜고, 유폐의 마왕이 중얼거렸다.


가비드 린드먼. 이전에도 몇 번이나 그와 같은 존재를 곁에 두었지만, 이렇게나 아쉬움을 느낀 것은 처음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유폐의 마왕은 시선을 내려 유진을 응시했다. 라이언하트와, 대륙의 영웅들 앞에 선 유진을 본 순간- 유폐의 마왕은 묘한 감회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진즉에 멸망했을 세상이다.


300년 전의 약속이 없었다면, 유폐의 마왕은 몇 번이나 그랬듯이 세상이 해무와 파도에 잠겨 사라지는 것을, 바벨의 가장 높은 곳에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300년 전의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그 일그러진 부산물을. 존재의 근원부터가 용사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억지로 성검을 쥐고서 빛의 외면을 받은 남자를.


빛은 끝까지 베르무트를 용사로 여기지 않았다. 빛은 베르무트의 존재를 이해하지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애당초 빛에게는 베르무트를 이해할 지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베르무트는 성검을 휘둘렀다. 성검을 매개체 삼아 빛을 강제로 뽑아냈다. 사실 베르무트에게는 성검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지만, 그럴지라도 베르무트는 성검을 쥐었다.


‘용사’라는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이 결정되지 않았노라고, 마왕에 맞설 수 있는 영웅이, 빛이 선택한 용사가 여기 있노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베르무트의 약속이 결실을 맺었나.”


유폐의 마왕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용사가, 베르무트가 있었기에 300년 전의 사람들은 마경으로 몸을 던졌다. 약하고 용사가 아닌 자들조차도 베르무트에 감화되어, 세상을 위해 마경에서 죽었다.


대륙은, 인간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패배하지도 않았다. 300년 전. 유폐의 마왕이 잊지 못할 순간들이 몇 개 있다.


하나는 처음으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란 사내를 보았을 때. 그를 본 순간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바벨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벨에서 베르무트를 맞이했다. 저, 도저히 용사라고 할 수 없는 남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했다.


다른 하나는, 처음으로 ‘하멜’을 보았을 때. 그가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어 마경에 왔을 때.


마지막은.


바벨의 최정상. 마왕의 어전. 하멜의 죽음을 넘어온 동료들이 모두 쓰러지고, 베르무트가 봉인하던 본성을 해방했을 때.


“훌륭하다.”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가 바란 대로 약속을 맺어주었다.


그렇게 300년이 흘렀다.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서 300년이란 길다고 여길 시간이 아니었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았다.


멸망이 300년이나 유예된 것이다. 전쟁은 끝났다. 세상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바뀌었다.


지금 유폐의 마왕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약속의 결실이다.


하지만 과연 저 결실을 거둘 수 있을까.


“유진 라이언하트.”


철그럭. 유폐의 마왕의 뒤에 있던 사슬이 움직였다.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약속의 끝은 다가오고 있다.”


“그래.”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 역시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사슬의 의자에 묶여 앉은, 지칠 대로 지치고 마모된 베르무트를.


“약속의 끝을 기다릴 수는 없지.”


여전히 유진은 베르무트가 대체 어떤 새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했다.


놈이 멸망의 마왕과 관계된 존재일지라도- 놈은, 베르무트는,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다. 베르무트가 용사가 아닐지라도, 놈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바람을, 유진이 완성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늦지 않게 찾아갈 테니까.”


유진은 손가락을 들어 목으로 가져갔다.


“도망치지 말고, 목이나 씻고 기다리고 있어.”


슥. 유진의 손가락이 목을 그었다. 검은 안개가 일렁거리며 유진에게 살의를 쏟아냈다. 하지만 그들의 살의는 유진에게 있어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다리마.”


유폐의 마왕은 빙긋 웃으며 사슬의 문을 열었다. 유폐의 마왕이 먼저 문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검은 안개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사슬의 문이 닫혔다.


누아르 제벨라만이 홀로 남았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베일이 덮여 있어,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누아르의 시선을 느꼈다.


“쉿.”


유진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누아르는 손가락을 세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과의 해후, 대화, 교감, 그런 것들은, 여기서 하고 싶지 않아요.”


누아르가 속삭였다.


“약속의 끝이 머지않았다, 라고 했죠. 그렇다면 하멜, 당신은 조만간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을 거야.”


누아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화아아악! 아래로 꽂히는 바람이 지상을 휩쓸었다.


누아르는 펄럭이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눌렀다. 흔들리는 베일 사이로 누아르의 미소가 보였다.


“기다릴게요.”


내리꽂히던 바람이 이번에는 위로 치솟았다. 누아르는 바람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주인을 맞이하러 온 제벨라 페이스가 안광을 빛냈다.


“나의 도시에서.”


그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누아르와 제벨라 페이스가 사라졌다.


빌어먹을 환생 539화


유진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넘기면서, 제벨라 페이스가 사라진 하늘을 노려보았다.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을 만큼 가비드의 죽음이 무거웠던가? 유진은 마지막에 보았던 누아르의 표정을 떠올렸다.


“…….”


사실 유진도 알고 있다. 누아르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가비드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막연하게,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고, 방글방글 웃으며 농담처럼 떠들던- 서로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누아르도 확실하게 인지한 것이다.


과연 그 끝이 어떤 식으로 맺어질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과, 서글픔과…….


‘두려움?’


유진은 손을 힐긋 내려보았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감정은 도저히 깔끔하게 잘라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눈을 감았다.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를 떠올렸다. 빛을 떠올렸다.


한때 유진은 자신이 아가로트의 환생일지라도, 아가로트의 인연과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국 나이고, 내가 아니었을 때의 인연과 감정이란 방해라고 생각했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렇게 구분지은 주제에, 유진은 부정하려 들던 아가로트의 덕을 여러 번 보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모순을 품었다.


‘어쩔 수 없지.’


1년의 절반을 차지한 묵상은, 유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순점을 충분히 인지하게 만들었다.


결론을 내렸다. 유진은, 아가로트일 적의 인연을 도저히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때의 인연이 염원이 되어 지금 세상이,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가로트의 인연을 부정하는 것은, 유진의 근본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렇기에 유진이 해야 할 것은.


‘내가 끝을 맺어야 해.’


황혼의 마녀와, 전쟁신의 성녀와, 아리아와,


누아르 제벨라와의 인연은 도저히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가 없다. 유진에게 녹아든 아가로트의 감정이 도저히 그렇게 두질 않는다.


‘아마, 난……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는 순간…….’


끈적하고 쓰라린 감정에 유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감정과 상상은 마음을 약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솔직히 역겹고 버거웠다. 유진은 혀를 쯧 차면서, 아직까지 떨고 있는 손을 쥐었다.


“유진 님.”


살짝 물러서 있던 크리스티나가 유진의 손을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안 괜찮아.”


평소라면 괜찮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평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정말로 괜찮지 않아서? 가비드의 죽음과, 누아르를 죽일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다.


“나 진짜 힘들어. 1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은, 유진에게 있어서 일종의 항복 선언과 목숨 구걸이었다.


손등을 감싼 크리스티나의 손에서 전해지는 악력, 그리고 성직복 사이로 보이는 플레일의 손잡이. 제대로 편지도 쓰지 않고 후다닥 잠적해 버린 1년.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허리춤에 달린 자그마한 금속제 술병…….


“필사적으로 수련하고 결국에는 승리했지만, 쉬운 승리가 아니었잖아.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결투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만약 제가 조금만 늦게 수련을 시작했다면, 오늘 결투에서 패배해 죽는 것은 가비드 린드먼이 아닌 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유진은 빠르게 말을 이으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대부분이 유진이 뱉은 말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 온 사람들 대부분이 유진이 예의를 갖추는 연장자라는 점…….


“호네인 왕세자님.”


“으, 응?”


갑작스러운 호명. 아롯의 차기 국왕, 호네인 아브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1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성취가 느셨군요. 지금 몇 서클이십니까?”


“8…… 8서클이네.”


호네인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현재 호네인의 나이는 29살. 아롯 왕가의 핏줄은 마법에 특화되게 개발해 온 혈통.


유진이 워낙에 말도 안 될 만큼 특별했던 것일 뿐, 호네인도 본래라면 ‘천재’로 분류될 사람이다. 비록 초입일지라도 29살의 나이에 8서클에 오른 것은 호네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1년 전에는 7서클 아니셨습니까?”


“그랬…… 지.”


“어떻게 1년 만에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르신 겁니까?”


“그건…… 하우리아에서의 전쟁이 내게 영감을 주었…….”


유진의 눈이 얇아졌다. 그가 호네인에게 기대한 대답은 저런 것이 아니었다.


“1년 동안 수련을 거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네.”


하지만 저 질문에 호네인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부왕인 다인돌프 아브람의 당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조국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사자의 자비에 기대지 않고, 사자가 기꺼이 이빨과 발톱을 빌려줄 만큼의 힘을 갖춰야 한다. 그 말을 들은 후로 호네인은 마법에 매진하고 또 매진하였고, 하우리아의 전쟁에서 그간의 수행을 증명하였으며, 전장에서 얻은 깨달음을 붙잡아 8서클의 벽을 허물어서, 유진 다음으로 최연소로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랐다.


“나는 전쟁 이후 1년 동안 하루도 마법의 수련을 거르지 않았어. 유진 공, 그대의 무위가 나에게 마법적으로 커다란 영감을 주었고, 나는 그대의 곁에 서고자 하는 일념으로 매일 같이 마법을…….”


“바로 그겁니다!”


유진은 호네인이 수행에 몰두한 동기와 사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1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매진하는 것! 그것이 왕세자님을 대마법사로 만든 겁니다.”


“어…… 음…… 그렇지.”


“시안, 시엘, 너희도 그렇지?”


타겟이 바뀌었다. 유진이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몰라서 우두커니 있던 시안은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 어?”


“네 마나를 느껴보니 너희 둘의 백염식은 6성에 올랐구나. 가주님과 기온 님은 8성에 오르셨고. 1년 사이에!”


덩달아 언급된 길레이드와 기온 역시 유진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엘은 달랐다. 그녀는 요 1년 동안 성녀들에게 굉장히 시달렸기에, 유진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을 숨기랴. 성녀들은 술에 취할 때마다, 언젠가 유진이 돌아온다면 결투가 끝난 뒤에 머리털을 죄다 뽑아버리겠다고 술주정을 부리곤 했었다.


“네 말이 맞아, 유진. 1년은 절대 길지 않아. 오히려 굉장히 짧지. 벽을 허물고 새로운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루도 허비해선 안 돼. 마음먹은 순간에 즉시 수련을 시작해야 돼.”


시엘은 즉시 유진의 편을 들어주었다. 모르는 척 곯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지만…… 시엘은 지금 유진의 머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정돈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길러서 덥수룩한 것이, 12년 전 라이언하트에 처음 왔을 때, 시골 촌뜨기답던 유진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바타!”


“나는 1년 동안 매일 대수림을 달리며 도끼를 휘두르고 수행했다.”


이바타가 재빨리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요 1년 동안 이바타는 수련보다는 막 국가로서 여명기에 접어든 조란을 다스리고 국무를 보느라 바빴다.


하지만 야만족에서 태어나 열린 생각으로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대수림의 부족을 일통해 대족장이 된 그는 당연히 오성이 뛰어나고 눈치가 밝았다. 그렇기에 유진이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가르기스! 네 근육이 더 커졌…….”


“나는 20년 동안 단 하루도 훈련과 가문 비전의 근육 성장제를 거른 적이 없다.”


근육 성장제,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저만큼 덩치가 커졌는데도 아직도 근육 성장제를 챙겨 먹는 것인가? 이미 덩치는 모론보다도 커졌는데.


‘저 새끼 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거야?’


거인의 불알을 먹었더니 정말로 거인이 되고 싶어진 건가.


“아무튼, 예.”


이 정도면 되었겠지. 유진은 한 번 숨을 삼킨 뒤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1년이 워낙 짧은지라…… 하루라도 빨리 수련을 시작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결투에서 이길 것 같지가 않아서…….”


“…….”


“내가 가려던 장소가 워낙 가기 힘든 곳이기도 하고, 그게, 가비드가 문을 열어주면 바로 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알겠습니다.”


설마, 설마 이 정도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줄이야……. 아니스는 유진의 대범하지 못함에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폐의 칼과의 결투. 유진 님이 전념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가비드 린드먼은 강했습니다.’


[맙소사, 크리스티나, 저 말 같지도 않은 변명질에 홀라당 넘어간 겁니까?]


‘시스터께서도 함께 듣지 않으셨습니까? 유진 님은 변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저게 변명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입니까?]


‘제가 1년 동안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며 마음고생 한 것을 아시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해명해 주신 겁니다. 이 얼마나 상냥한 마음씨입니까……!’


아니스는 그 대답에 또다시 탄식을 흘렸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우호적인 해석…… 거기에 해명과 변명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


“과연, 유진 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단 하루도 쉴 수 없는 고된 수련…… 심지어 수련이 끝났음에도 유진 님은 휴식을 가질 틈 없이, 곧장 이곳에 와서 결투를 치르셨지요.”


“바로 그거야.”


“그렇다면 지금 유진 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입니다. 이곳 결투장에도 휴식을 위한 장소는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결투는 이미 끝났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겠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의 집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물었다.


집? 저 ‘집’이라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본가를 말하는 것인가? 라이언하트의 집이 왜 크리스티나의 집이 된 것일까.


유진은 뻔뻔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저 생각을 애니실라가 알았더라면 애꿎은 부채가 하나 더 아작이 났을 것이다.


“너희와 할 얘기가 있어.”


휴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1년 동안 먹은 것은 망토 안에 쟁여놓았던 육포 따위의 보존식품. 그리고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잔뜩 쑤셔 넣은 사탕이나 과자 종류…… 고기, 고기가 부족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기름진 고기. 그런 고기로 배를 가득 채우고, 술도 마시고, 씻고, 푹 자고 싶다.


아직 그럴 수는 없다. 유진은 모론과 세냐를 돌아보았다. 세냐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유진에 대해 묻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과연.”


크리스티나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은 성녀들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러운 잠적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지만…… 유진이 보낸 1년. 그리고.


[후우……]


아니스가 탄식을 흘렸다. 진즉에 알았고, 복잡하던 마음은 정리했다. 하지만 추측뿐이던 것에서 확실한 진실을 알게 된다 생각하니, 착잡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빛을 만났나?


유진이 결투장에 왔을 때, 유폐의 마왕은 저렇게 물었었다.


“우리는 먼저 돌아가 있으마.”


길레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설마 이번에도 1년이나 사라져 있지는 않겠지?”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본가에 도착하겠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마.”


“조촐하게.”


유진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그렇게 말했다.


“성대하게 말고, 조촐하게. 저택에서만.”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서 결투를 본 모두는 참석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정도라면…… 예.”


“방계의 사람들도…….”


“라이언하트까지라면…….”


“황제 폐하와 교황 성하, 그 외 너를 지지한 귀빈들도…….”


“딱! 거기까지만.”


유진도 더 이상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길레이드는 협상의 성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외에 원하는 것이 있느냐?”


“니나보고 음식을 준비하라고 해주십시오.”


“고기?”


“예. 제가 13살부터 먹던 것으로.”


그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유진이 한창 성장기던 시절. 매일 검을 휘두르고, 백염식을 수행하던 시절. 전속 시종인 니나는 유진이 요구한 대로 무식하리만큼 두껍고 큰 고기를 구해 와, 유진의 취향에 맞게 요리해서 삼시 세끼 접시에 올렸다. 야채보다 고기가 많은 스튜나, 완벽하게 구워낸 스테이크 등…….


“전해두마.”


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투에서 보았던 말도 안 되는 신위와, 12년 전부터 보았던 유진의 어린 시절은 도저히 겹치지 않았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어떤 격을 얻든, 유진은 길레이드의 아들이다.


“그럼, 저택에서 뵙겠습니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왜 안 와? 안 갈 거야?”


뒤편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흠칫 놀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유진 님이 너무 대단한 분이 되셔서 저처럼 꼬질꼬질한 사역마는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지 뭐에요.”


“보, 본녀는 은자를 믿었느니라. 하지만 은자의 대단함은 드래곤인 본녀도 대단치 않게 되어버리느니라. 그래서…… 그래서…….”


“헛소리들 말고 빨리 오라니까.”


유진은 눈썹을 구기며 망토를 열었다. 서로를 힐긋거리던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후다닥 망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유진은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아직 손을 놓지 않은 크리스티나가 유진이 이끄는 대로 함께 하늘로 떠올랐다.


세냐는 그 모습을 못마땅히 보다가 결국 한 마디 내뱉었다.


“너 하늘 날 수 있잖아.”


“지금은 이상하게도 날개가 나오지 않습니다.”


“성녀가 거짓말해도 돼?”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날개가 나오지 않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읊었다. 세냐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디로 갈 건데?”


“모론 집.”


“그 동굴? 왜?”


“라구르야란을 내려볼 수 있으니까.”


“그럼 꼭 거기가 아니어도 되잖아. 저기 저 봉우리면 되는 것 아냐?”


세냐는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모론이 결투장을 내려보던 곳이다.


“뭐, 저기도 상관은 없…….”


화악! 세냐의 마나가 확장되었다. 유진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 세냐의 마나가 유진과 크리스티나, 모론을 감쌌다.


“……지.”


말이 끝났을 때. 4명은 결투장을 떠나 레헤인야르의 봉우리 정상에 도착했다.


“허.”


유진은 주변을 돌아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공간이동은 아닌데?”


“바꿔치기야.”


세냐가 으스대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곳에 있던 마나와, 내 마나를 치환한 거야.”


“제약은?”


“10명 이상은 치환할 수 없어. 물론 내 마나는 수천 명도 손쉽게 감쌀 수 있지만, 그만한 양의 마나를 강제로 치환했다가는 공간의 축이 붕괴해서 대참사가 날 거야. 거리도 대충 이 정도가 한계고.”


“편리하네. 나도 쓸 수 있나?”


“당연히 못 쓰지! 이건 작고 작은 마나의 세계를 이해하고, 완벽하게 영력을 다뤄내야만 쓸 수 있어.”


“결국 영력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냐.”


“현자 선배는 원천의 정수라고 불렀지만, 그건 너무 길잖아.”


“결국 선배라고 부르기로 한 거냐.”


“너 자꾸 깝죽댈래?”


세냐가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였다. 유진은 더 이상 놀리지 않고 헛기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단…….”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모론을 돌아보았다.


“야, 모론.”


“무슨 일인가, 하멜.”


“넌 오늘부터 내 성기사다.”


대뜸 뱉은 말에 모론이 눈을 끔벅거렸다.


빌어먹을 환생 540화


신화


“아하!”


유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끔벅거리는 모론과 달리, 크리스티나는 어떤 의미로 유진이 저런 말을 한 것인지를 곧장 이해했다. 그녀는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제 자리에서 짝짝 박수를 쳤다.


“과연!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역시 유진 님이십니다!”


[설마 저 얼간이가 저런 방법을 떠올리다니……!]


아니스도 똑같이 감탄했다. 성녀인 그녀들은 ‘성기사’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만약 모론이 성기사가 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힘에 더하여 신성력까지 쓸 수 있게 된다.


아니. 그 이상의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빛을 포함하여 다른 종교의 성기사들이 신에게 나눔 받는 힘은 신성력뿐. 하지만 유진이 모론을 ‘직접’ 성기사로 서임한다면, 모론은 성녀들과 마찬가지로 기적과 신성력 이상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가 눈을 빛내며 유진을 보았다.


“모론 님을 성기사로 삼으신다면, 그것은 ‘빛’의 성기사입니까? 아니면 ‘전쟁신’의 성기사입니까?”


“둘 다야.”


유진이 대답했다.


“내가 본래 가진 신성은 전쟁의 신 아가로트의 것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 빛의 신성도 갖게 되었거든. 아니 뭐, 갖게 되었다기보다는 빛이 줬다고 해야 하나…….”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쩝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지금 나는 그렇게 두 개의 신성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럼 내가 직접 서임한 모론은…….”


“오오.”


모론의 감탄이 유진의 말을 뚝 끊었다. 그는 두꺼운 양팔을 하늘 높이 번쩍 들면서 외쳤다.


“전쟁과 빛의 성기사가 되는 것인가!”


여기에 카르멘이 없어서 다행이다.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카르멘이 함께 있었다면, 그녀는 ‘전쟁과 빛의 성기사’라는 거창한 이름에 감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려댔을 것이다.


“…….”


하지만 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카르멘이 없을지라도, 결국 언젠가는 그 상황을 맞닥트리게 된다는 것. 유진은 조용히 그 언젠가의 미래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당장은 모론 한 명만 성기사로 삼겠지만…… 바벨을 공략할 때는 다른 사람들도 성기사로 서임할 생각이다. 우선 전쟁에 참전할 라이언하트 전원과, 그리고…….


‘설마 성기사가 되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부릴 무신론자가 있을까.’


생각해둔 사람들은 이미 있다. 알체스터나 오르투스, 아이빅, 이바타 같은 손에 꼽히는 강자들. 막무가내로 성기사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는 아예 소수에게 큰 힘을 퍼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애초에 ‘성기사단’으로서의 구색은 라이언하트 전원을 서임하는 것으로 충분할 테니.


“전쟁과 빛의 신성이라.”


세냐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리송한 기분을 느끼며 유진을 빤히 보았다.


“그건 결국 아가로트의 것이고, 빛에게 양도받은 거잖아.”


“응.”


“네 신성은 따로 없는 거야?”


예리한 질문이었다. 세냐가 말한 것처럼, ‘전쟁신’이라는 이름의 신성은 아가로트의 것으로, 유진의 혼 자체에 새겨진 신화시대의 것이다. 그리고 빛은, 유진이 직접 녀석에게 신성을 양도받았다.


“만들어가고 있어.”


유진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아서 섣불리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대충 감이 오기는 해.”


가비드와의 결투에서 들었던 목소리들. 그리고 앞으로 유진이 해야 할 것들. 유진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쌓아가야 할 것들.


“그렇다면 너는 결국 3개나 되는 신명을 갖게 되는구나.”


세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우화를 거쳐 마법의 신격을 얻었다. 전대 마법의 여신이 상아탑의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였다면- 당대의 마법의 여신은 바로 현명한 세냐 메르데인인 것이다.


“모론을 성기사로 삼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언젠가 모론이 스스로 신성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니까.”


지금은 신화시대와 다르다. 그때는 인간과 같은 종족들이 업과 덕을 쌓고, 추종과 숭배에서 신앙이 태어나 신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 신화(神化)를 이루는 것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예전이라면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세냐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신화의 문을 닫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숭배와 신앙을 독점했다. 세냐조차도 ‘마법’이라는 이름의 길을 독점하고, 현자의 인도를 받지 못했더라면 100년을 수양해도 마법의 신성에 도달하기 힘들었으리라.


세냐는 그 ‘누군가’에 대해서 짐작했다.


“이제는 들을 수 있겠지.”


세냐가 유진을 똑바로 보았다.


“빛에 대해서.”


지금 시대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린 것은 빛의 신이다. 대륙에는 빛을 제외하고도 다른 신앙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신도 모두를 합할지라도 빛의 신앙보다는 한참이 부족하다. 그것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신성제국’으로 군림하는 유라스가 증명하고 있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각오를 다졌다.


성녀란 존재의 근원. 그녀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섬길 존재로 정해진, ‘빛’이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답은 예전에 유추했다. 빛에 인격이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자신을 섬기고 바라는 자들에게 신성력이란 힘을 내려주는 존재일 뿐이다.


“빛은 정말로 실존하는 신인 것입니까?”


빛은 신이라 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에는 신이라 여길 만한 거룩한 의지가 없다.


과거,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은 성녀들의 생각을 부정했다.


-빛은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해서 떠올리는 ‘신’은 아니지.


유진은 빛이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힘의 덩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빛에는 성검을 내리고, 유진을 용사로 선택하고, 베르무트의 무덤을 파헤치라고 권하는 ‘의지’는 존재했다.


그런 계시는 오롯이 유진을 위한 것. 빛은 유진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 애호하고 있다.


이제 유진은 ‘빛’이 누구인지 안다.


“빛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지.”


유진의 입술이 열렸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먼 곳을 보았다.


결투장을 넘고, 회색의 라구르야란을 넘어, 이제는 고요히 가라앉은 바다와, 뿌옇고 짙은 안개에 가려진- 머나먼 바다를 보았다.


“풍요와 번화의 신. 바다와 항해의 신. 대지와 숲의 신. 기사와 명예의 신. 시간과 운명의 신…….”


그 외에도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명(神名). 세상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신명과, 유라스의 이단심문관들이 경멸하는 사교(邪敎)까지.


“그 모두가 빛의 다른 이름이야.”


지금 세상에서 ‘빛’을 제외한 신앙이랄 것은 대수림의 세계수뿐이다.


“…….”


저런 대답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크리스티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니스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다른 종교의 성직자와 성기사를 보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들에게서 동질감 같은 것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원시 정령과 똑같아.”


유진이 말했다.


“그들이 원시에서 벗어나 바람의, 물의, 대지의, 그런 이름을 갖게 되듯. 순수한 신성력에 성질이라 불릴 것은 존재하지 않아. 마나와도 비슷하지.”


“그…… 말은, 저희가, 빛의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신성력과…… 그들이 이단이나, 열등하다 치부하던, 다른 종교의 신성력이. 결국은 똑같다는 겁니까?”


“똑같지는 않지. 뭐, 똑같은 곳에서 나오기는 했다만.”


유진은 투덜거리며 턱을 괴었다.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는 크리스티나를 대신해 아니스가 육체를 차지했다. 그녀는 황급히 유진의 곁에 다가가며 캐물었다.


“왜 빛은 그렇게 여러 종교를 만든 겁니까?”


“놈의 본질이 수십, 수백이 뒤섞인 덩어리니까.”


아니스는 그 말에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수십, 수백이 섞인 덩어리라고?


“아……!”


곧 아니스는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리고 빛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심각한 얼굴로 유진을 보고 있던 세냐의 눈동자도 가늘게 떨렸다.


둘은 유진이 ‘어떤’ 기분일지를 생각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1년, 대체 어느 시점에서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저것을 알았을 때 도저히 태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신화시대의 마지막을 보았던 신들.”


유진은 바다를 보았다. 도저히 그 너머를 볼 수가 없는 뿌연 해무를 보았다. 그 너머의 머나먼 바다를 보았다.


존재의 발길을 철저하게 금한 곳. 지금 시대의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 절망과 희망을 함께 묻은 곳. 신화시대의 끝을 본, 현자를 제외한 신들의 무덤이자 지금 시대 모든 신의 성지.


“놈이 말하더군.”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는 심연의 폐허 도시에서 눈을 떴을 때.


유진의 눈앞에는 빛이 있었다.


“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을 붙잡고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라고.”


그 말은 현자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만약 아가로트와 신군이 도망쳤다면, 멸망의 마왕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즉시 세상을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고, 붙잡고 있었기에 신들은 다음을 안배할 수 있었다.


“현자는 상아탑의 모든 신도들을 모아 세계수가 되었어. 현자는 윤회의 굴레가 끊어지는 것과, 다음 시대에서도 멸망이 시작될 것을 염려했지.”


하지만 윤회의 굴레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자와 상아탑 마법사들의 최후의 마법은 지금 시대에서 결실을 맺었다. ‘마법’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고, 세계수는 멸망의 때에 최후의 방호가 될 것이며, 마법의 신역은 세냐에게 계승되었다.


“다른 신들도 똑같아. 그들은- 말 그대로, 하나가 되었지. 아주 무식한 방법으로 말이야.”


“……무식한 방법이라니?”


“하멜,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것은…… 신화시대의 어떤 신입니까?”


세냐와 아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진은 여전히 머나먼 바다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고르데온.”


그 이름을 말하고,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신이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유진은 그가 어떤 신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빛으로 이뤄진 거대한 남자. 신화시대의 그는 지금처럼 ‘빛’으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산봉우리조차 우습게 여길 덩치는 여전했다.


“무식한 방법은, 뭐…… 그냥 무식했지. 고르데온은 엄청나게 크거든. 신화시대에 살았던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덩치가 컸어.”


“…….”


“신들은 자발적으로 고르데온의 입 안에 들어갔대.”


심연에서 해후한 빛은, 거신은, 신화시대의 신들이 어떤 식으로 끝을 맞이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주었다.


어차피 지금 세상의 멸망은 결정되었다. 늙은 신들은 유폐의 마왕과 만나 멸망을 막을 방법에 대해서 물었지만, 들은 대답이라고는 ‘다음’을 기약하라는 말뿐이었다.


그래서 신들은 다음을 기약했다. 지금 시대가 멸망할지라도 다음의 시대가 새로이 시작될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 시대가 이번과 똑같은 멸망을 맞닥트리지 않을 방법을 궁리했다.


“두 가지.”


유진이 말했다.


“고신(古神)들은 두 가지 방법을 준비했다. 하나는, 모든 신이 거신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신성과 신력을 하나로 만드는 것.”


“……어째서 그런 방법을?”


“신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 봐야 멸망의 마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신화시대의 종말로 증명됐으니까.”


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저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아가로트가 붙잡고 있던 멸망이 풀려났을 때. 힘에 대해 자신이 넘치던 신들이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겠다고, 아니, 죽이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멸망을 잠시라도 가로막은 신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고신들은 다른 ‘신’이 없는 세상을 선택했다. 거신이 모든 신을 잡아먹고, 그렇게 하나의 거대하고 완전한 신이 되어서, 다음 시대의 주신(主神)이 된다. ‘다음’ 세상에서는 오직 그런 신만이 존재해야 한다.”


세냐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역시. 지금 세상에서 신좌에 오르는 길을 막은 것은…… 빛이었구나.”


고신들은 지금 세상의 신성을 독점했다. 어떤 식으로 숭배받건, 상위의 신앙에 먹혀 버린다.


그것은 현자가 유진에게 했던 경고와 일맥상통했다. 유진이 세계수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잡아먹히듯, 지금 시대의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신앙은 빛과 다른 신앙에 잡아먹혔다.


“하지만 인간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믿기 싫은 것은 믿지 않아.”


“…….”


“그러니까 여러 이름을 갖게 하고, 뚜렷한 자아를 두지 않았다. 무아(無我)의 신성을 갖추었기에 고신들은 지금 시대에서 어떤 신이든 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된 신앙이 ‘빛’이었지. 그것도 나름의 의도였지만.”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망토를 뒤졌다.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잡힌 것은, 가비드가 남긴 술이었다.


“이건 안 되지.”


유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 술은 언젠가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나서 마실 것이다. 하지만 망토 안에는 다른 술이 없었다.


굳이 망토 안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이 손을 뻗자, 아니스가 허리춤의 술병을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평소라면 아니스는 개인 술병에 담은 술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술병을 여니 독한 주향이 확 풍겨왔다.


“네 취향의 술은 아닌데? 이거 증류주 아냐?”


증류주도 주면 먹기야 하겠지만, 본래 아니스는 독한 과실주를 즐긴다.


“그야 제가 담은 술이 아니니까요. 그건 크리스티나의 술입니다.”


“맙소사…….”


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술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1년 전만 해도 술은 잘 마시지 않고, 마셔도 달짝한 와인 정도만 마셨었는데…….


“그래서 하멜. 당신의 말대로…… 모든 신들이 거신에게 먹혀서, 지금의 신이 되었다면…… 빛의 ‘신화’는 대체 뭡니까?”


“어느 정도 이야기가 부풀려졌지만 진짜지. 말했잖아, 무아의 신성에서 주된 신앙으로 ‘빛’을 선택한 것은 나름 의도대로였어.”


“무슨 의도라는 겁니까.”


“노골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빛은 어둠을 밝히지. 그럭저럭 은유를 넣기도 좋고.”


어둠을 밝히는 빛. 밤이 지나고 오는 여명.


“우상화하기에 제격이란 말이야. 유라스의 신화처럼, 빛의 화신이 세상에 밝음을 주고…… 그런 일은 없었지만, 빛이 세상에 성검 알테어를 내린 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알테어가 있었기에 신성제국 유라스가 만들어졌지.”


유진은 독한 증류주를 삼키고, 술병을 내려놓았다.


“고신들의 의도는 성공했어. 덕분에 지금 시대에 빛의 신교가 성세하고, 대부분의 신앙은 구색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


“그렇다면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단 하나의 신을 섬기고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그래서 의도대로 되었다는 거야. 덕분에 ‘그들’은 신화시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신성을 갖게 되었지. 정작 그 신성은 직접 쓸 수 없다만.”


“어째서 직접 쓸 수 없다는 겁니까?”


“그들은 죽은 존재니까.”


아니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거신은 모든 신을 잡아먹고, 스스로 육체를 불살랐다. 그렇게 육신을 죽이고, 혼만을 남겨 지금 시대로 넘어온 거야. 그렇기에 그들은 세상에 직접 강림하거나 개입할 수 없다.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신성력을 내리는 것이 고작일 뿐.”


“…….”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무아의 신성이 가진 거대한 힘을 감당할 수가 없어.”


유진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래서 알테어를 세상에 내린 거다. 신력을 편하게 끌어내기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알테어는…… 용사만이 쥘 수 있는…….”


“두 가지.”


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신들이 다음을 기약하며 준비한 것은 두 가지라고 했지.”


하나는 모든 신들이 거신에게 잡아먹혀, 다음 시대의 유일신이 되는 것.


“남은 하나가 바로 나야.”


“……네?”


“유일하게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고, 놈의 심부(深部)에 상흔을 남긴 존재.”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로트를 다음 시대에 무조건 환생시키는 것이, 고신들의 마지막 안배였다.”


빌어먹을 환생 541화


300년 전. 유폐의 마왕성, 바벨에서 죽은 하멜을 환생시킨 것은 베르무트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아가로트를 하멜로 환생시키는 것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아가로트가 유일했으니까.”


유진은 머나먼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지는 못했어도 심부에 상처는 남겼다. 다른 신들과는 달리 며칠 동안이나 멸망의 마왕을 붙잡았다.”


도전한 신이 많지는 않지만, 도전했던 신 중에서 오직 아가로트만이 저것을 해냈다. -아가로트가 강해서? 유진은 그것은 부정했다. 아가로트가 강한 축에 드는 신이었던 것은 맞다. 몇 명이나 되는 마왕을 살해한 신인 것도 맞다.


하지만. 신화시대의 신 중에서 아가로트가 최강은 아니었다. 전쟁에 나서지 않은 고신들 중에서는 아가로트 이상의 신력을 가진 신들도 여럿 있었다. 아가로트가 특별했던 것은, 신명으로 삼은 ‘전쟁’에 걸맞게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장 가비드 린드먼이 아가로트를 베었었지.’


다만, 그것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다. 어떤 형태든 가비드가 싸운 아가로트는 ‘진짜’가 아니다. 아마 유폐의 마왕이 보고 기억하는 대로 만들어낸 환영 같은 것일 터. 전쟁 신에게 독기와 살의를 거세하고 전투만 가능하게 만든 것이라면, 그건 ‘진짜’ 아가로트와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을 붙들 수 있던 것도 그 독기와 살의 때문이다. 신력의 강함과 격은 진즉부터 멸망의 마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신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모든 신군이 눈앞에서 죽었다. 성녀 아리아의 마지막 소원으로 그녀의 목을 부러트렸다.


그래서 아가로트는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싶다는 독기와 살의로 멸망의 안에서 닷새를 버텼다.


“고신들이 생각하기에, 다음 시대의 사람들을 믿는 것은 너무 근거 없는 모험이었던 거야. 그래, 어쩌면- 다음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완벽하게 성검을 다뤄내고, 신에 버금갈 만큼 강하고, 잘 싸우고, 유폐의 마왕을 넘어 멸망의 마왕에게까지 도달할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기대하느니, 아예 싹수가 있던 아가로트를 환생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거지.”


“…….”


“생각처럼 잘되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신들의 안배는 절반만 성공했다. 유폐의 마왕은 신화시대 때와 마찬가지로 대륙을 침공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쭉 침묵하던 유폐의 마왕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끝’이 당도하고 있는 신호탄 같은 것인 모양이다.


“세냐, 아니스, 모론. 너희는 300년 전의 내가 옛날 옛적 전쟁의 신인지 뭔지 하는 거창한 존재일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냐?”


셋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자연스럽게 하멜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입에 걸레짝을 물고, 찍찍 싸 뱉는 말투는 시비조에, 소문도 별로 좋지 않고, 틈만 나면 베르무트에게 시비를 걸고…….


“전쟁의 신은 모르겠고, 병신이라고는 생각했습니다.”


아니스가 솔직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꼭 동료로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심성이 아주 못된 악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론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나는…… 어…… 네가 병신이고 약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어, 못 봐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첫 만남에서 하멜에게 ‘예쁘다’라는 평가를 들은 세냐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너희들 진짜 나쁜 새끼들이다.”


생각 이상의 저평가. 유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내뱉었다.


“아무튼, 어, 그게 문제였던 거야. 고신들이 기대한 아가로트의 환생은, 환생하자마자 인간 전장을 평정하고 고위 마족과 마왕의 목을 썩둑썩둑 썰어대는 놈이었을 텐데, 정작 환생한 내가 영 아니올시다였던 거지.”


“……그래도 뭐…… 하멜, 당신은 충분히 강하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강한 것으로는 부족했지.”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배의 반을 망가트린 것은 ‘시간’이었지. 지금의 세상이 시작하고, 아가로트가 환생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어.”


성검 알테어는 아가로트를 위한 검이다. 고신들은 지금의 시대가 끝을 맞이하기 전에, 환생한 아가로트가 알테어와 함께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기를 바랐다. 설령 아가로트의 힘이 부족할지라도, 알테어를 매개체 삼아 뽑아내는 신성력은 대륙 전체의 신앙의 정수이니, 멸망의 마왕에게 닿을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너무 긴 시간이 아가로트의 신성을 망각시켰다. ‘하멜’은 인간으로서 강했지만, 고신들이 기대했던 강함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했다. 만약 하멜이 성검 알테어의 주인이 될지라도, 신성이 없는 이상 알테어의 전력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망각한 신성을 깨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했다. 전장을 떠돌고, 전쟁을 반복하고, 마족을 죽이고, 마왕을 죽이고…….


과연 멸망의 마왕이 그것을 기다려 줄까? 아니, 멸망의 마왕뿐만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이미 전쟁을 일으키고 바벨에서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마왕과 마족들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들은 욕망대로 마경을 나와 대륙으로 전진하고, 참살을 반복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멸망의 마왕이 나타나기 전에 마족과 마왕에 의해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누군가.


누군가가 필요했다. 아가로트가 망각한 신성을 깨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줄 누군가가. 다른 마왕과 마족들이 인류를 멸망하지 않도록 가로막아줄 누군가가. 세상에 패배감과 절망이 팽배하도록 두지 않고, 희망이 되어줄 누군가가.


방법은 알고 있다. ‘용사’가 있으면 된다. 인류의 구심점이 되고, ‘승리’에 대한 희망을 만들고, 그 희망의 초석이 되고자 자발적으로 인간들을 전장으로 향하게 할 존재.


그건 용사뿐이다. 계시를 내려 용사를 점지해야 하나? 대체 누구를? 빛은, 무아의 신성에서 희미한 자아가 나타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것이 허무해질 뿐. 아가로트가 각성할 때까지 누군가가 시간을 벌어야 한다면, 대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 절망의 시대에서 대체 누가 용사로서 행동할 수 있나.


성녀는 있다. 그녀를 엄밀히 말해 ‘성녀’라고 할 수 있는지를 제쳐두고, ‘빛’은 성녀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녀에게 용사의 업까지 얹을 수는 없었다. 그건 만들어진 성녀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효율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성기사 중에서 선택해야 하나? 눈에 차는 인물이 없다. 한번 용사가 된 이상, 패배해서는 안 된다. 용사는 희망의 상징이어야 한다. 희망을, 승리를 바랄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한다.


만약 점지한 용사가 유폐의 마왕은커녕 다른 마왕에게 패배해 죽는다면. 어쩌면, 어쩌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 발생해서- 마왕도 아닌 마족 나부랭이에게 죽어버린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을 만든다. 수많은 이름을 가진 ‘빛’은 지금 세상의 유일신이다. 용사가 패배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만약 아가로트가 각성에 성공할지라도, 세상이 절망으로 범벅되어 버리면…… 알테어는 아가로트를 위한 검으로 쓰일 수 없게 된다.


“너희도 알잖아.”


유진은 술병을 들면서 말했다.


“누가 나타나서 성검을 쥐고 용사가 되었는지.”


북쪽 설원.


마경으로 이송되던 포로들이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그들은 흑마법사의 제물이 되거나 마족의 노리개가 되어 죽었을 것이다. 포로들 중에서, 그 누구도 경계하지 않던 소년이, 대뜸 검을 빼앗아서 그 자리의 마족과 흑마법사를 모조리 도륙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베르무트.”


모론이 침음과 함께 대답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모론은 베르무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바야르 부족이 머무르던 설원. 그곳에서 마주친 베르무트는, 이름처럼 ‘사자’가 연상되지는 않았다. 헝클어진 회색 머리. 눈보라 속에서 귀기(鬼氣)를 발하는 금색 눈동자. 첫 만남의 베르무트는, 마치 굶주린 설원 늑대처럼 보였다.


베르무트가 처음부터 성검을 쥐러 간 것은 아니다. 베르무트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는 모론과 바야르 부족과 함께 설원을 평정했다. 마족의 주둔지를 박살 내고, 흑마법사의 던전을 붕괴시키고, 이송되는 포로들을 해방시켰다. 넓고 가혹한 설원에는 마족을 피해 숨은 사람들이 많았다. 베르무트는 그들조차 모두 거두어 보살폈다.


그렇게 되니, 베르무트가 나서지 않아도 소문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설원에 나타난 젊은 영웅에 관한 소문. 성급한 이들은 그 젊은 영웅이야말로 ‘빛’이 세상을 위해 내린 용사일 것이라 떠들었다.


“기억합니다.”


아니스가 중얼거렸다.


“당시 유라스는 어떻게든 성검을 뽑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성검을 뽑으려 했지만 실패했었고, 저 외에도 수많은 성직자와 성기사들. 신도들 중에서 신앙심이 투철하다 알려진 전원이 성검의 앞에 섰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검을 뽑지 못했다. 그런 시점에서 베르무트에 대한 소문이 들려 온 것이다.


그가 빛에 대해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는 용사가, 희망이 필요했다.


“결국 당대의 교황이 직접 성명을 발표했고, 베르무트 님과 모론이 유라스에 왔습니다.”


모론과 마찬가지로 아니스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교황청에 당당히 걸어 들어오던 베르무트의 모습. 잿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내리고, 새하얀 망토를 걸인 그 모습을. 은은한 빛을 발하는 금색 눈동자를. 당시의 아니스는 빛에 대한 원망과 회의감에 젖어 있었지만, 베르무트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저 남자야말로 빛이 세상에 내린 화신이다. 용사일 수밖에 없는 남자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베르무트의 모습은 성스럽고 거룩해 보였다. 저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금색이 마치 희망의 불빛처럼 느껴졌다.


“빛이 말하더라.”


유진은 남은 술을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었다.


“처음에는 베르무트를 용사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고 말이야. 처음 본 순간에 느꼈다더군. 베르무트가 절대로 인간이 아니란 것을.”


“…….”


“하지만 거역할 수 없었다. 베르무트는 성검을 쥐었고, ‘억지로’ 뽑았다.”


유진은 알고 있다. 성검은 단 한 번도 베르무트를 주인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베르무트는 성검을 사용했다. 사용하기 위해 성검의 빛을 봉인했다. 베르무트가 뽑아낸 빛은, 봉인을 거치고 나온 희미한 잔광에 지나지 않았다. 망령과의 전투에서 칼날을 부수었기에 성검은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빛은 끝까지 베르무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닐지라도 적도 아니었으니까. 베르무트는 성검을 들고서 용사처럼 행동했고, 나를 찾아냈으며, 마왕을 죽였다.”


대체 저 남자는 무엇이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가? 대체 무엇을 알고 있기에 ‘하멜’을 발견했는가.


“정체는 모르지만 바라는 것은 똑같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버려 두었다. 언젠가, 언젠가…… 내가 신성을 각성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하멜은 최후까지 신성을 각성하지 못했다. 계기로 쓰일 아가로트의 반지도 얻지 못했고, 살아서 바벨을 오르지도 못했다.


왜?


유진 라이언하트의 삶과, 하멜 다이너스의 삶이 갖는 차이점이 뭘까. 유진은 알고 있다. ‘아가로트의 반지’는 어떤 식으로든 유진에게 주어졌을 운명이다. 유진이 아가로트의 환생인 이상, 신성을 망각했을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아가로트의 반지와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하멜의 삶에서 아가로트의 반지를 만난 적은 없다.


“빛이 말하더군.”


유진은 빈 술병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내가, 베르무트와 만났기에 아가로트로서의 운명이 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빛은 베르무트란 존재를 안배한 적이 없다. 어쩌면 이 세상의 운명이란 것에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베르무트에 의해 유예되었을지라도, 베르무트는 결국 이치에 어긋난 존재였다.


“……빛은 어째서 미리 언질하지 않은 건가?”


모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빛은 결국 너에 얽힌 대부분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무아의 신격이라고 말하지만, 필요한 순간에 최소한의 자아를 띄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너나 아니스에게 진실을 알릴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등신아.”


유진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대뜸 빛이란 새끼가 나한테, 너는 사실 고대 전쟁신의 환생이다~ 라고 말을 하면. 내가 아이고 그렇습니까, 내가 사실 신이었다니! 하고 믿었겠냐?”


“……음…….”


“당연히 개소리로 치부했겠지. 그래, 내가 많이 양보해서 믿었다고 치자. 그런데 믿어서 뭐 어째?”


진실을 미리 알았을지라도 변하는 것은 없다. 아가로트의 반지도 없고, 남해의 심연에 도달하지도 않은 이상- 망각한 신성을 깨칠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별말을 할 수 없었던 거야. 베르무트도, 빛도 말이지. 내가 스스로 신성을 깨칠 때까지.”


하지만 300년 전에는 최후까지 신성을 깨칠 수가 없었다. 운명이 너무 크게 틀어져 버렸다.


그건 베르무트도 알았을 터. 만약, 살아서 바벨의 정상에 올랐더라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결국.”


아니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텅 비어버린 술병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음이 울적하고 쓴 것이 술이 간절했다.


“빛조차도 베르무트 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겁니까.”


“만약 이 세상에서 베르무트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은 유폐의 마왕뿐일 거라더군.”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하는 것 같았어.”


“듣지 못한 겁니까?”


“캐물으면 말해주었을 것 같기는 한데, 안 들었어.”


“어째서?”


“확실하지 않으니까.”


유진도 마찬가지다. 베르무트의 정체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다.


놈은, 월광검을 사용했다. 지금 세상의 것이 아닌 다양한 무구들을 발견했다. 마왕의 무구도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하멜이 아가로트의 환생이란 것을 알았고, 동료가 되어라 권유했다.


“답은 유폐의 마왕에게 들을 거야.”


베르무트에 대해서. 약속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해야 베르무트를 구할 수 있는지. 유폐의 마왕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물어볼 생각이다.


“……하멜, 이것은…… 제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


아니스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기야.”


유진이 손가락을 들어 바다를 가리켰다.


“저곳이야말로 천국 비슷한 곳이지.”


“……예?”


“신을 섬긴 혼은 모두 저곳으로 흘러간다.”


머나먼 바다.


“저곳과 연결된 이차원이 고신들의 무덤이자 신의 성역이고, 천국이야.”


윤회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 멸망의 마왕조차도 윤회의 굴레는 끊을 수 없다. 오직 ‘마왕’만이 혼을 윤회의 굴레에서 빼앗아 구속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하고 유일한 것이 유폐의 마왕이다. 놈은, 자신과 계약을 맺지 않은 영혼조차도 사슬로 묶어 유폐할 수 있다.


“뭐 대단한 곳은 아니지. 윤회하기 전에 잠시 거치는 정도일 뿐이니까. 하지만 천국은 맞아. 이승에서 오염되거나 망가진 영혼은, 저 천국에서 빛에 의해 정화된 뒤에 윤회하거든.”


일종의 선순환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이름을 가진 빛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상에서 거둬들이는 신앙을 통해 신력을 부풀리는 것. 그렇게 배양한 신력을 아가로트를 통해 멸망의 마왕에게 처박게 만드는 것이 고신들의 안배다.


영혼은 죽는 순간에도 잠시 동안 의지를 갖는다. 죽었다고 해서 허무한 존재가 된다면 망령이나 언데드 같은 것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 그렇기에 빛은 천국을 만들었다. 흘러들어 온 영혼에게서 마지막까지 신앙을 뽑아내기 위해서.


“…….”


아니스의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인류애에 의한 천국이 아니어서?


“아아…….”


빛에 정말 인류애가 없다고 말할 수 있나? 빛이 바라는 것은 멸망을 막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 있다. 빛의 신교가 세상에서 별 개짓거리를 하고, 인체실험을 하고, 다른 종교를 핍박하고 사냥할지라도.


그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에 필요하기에, 빛은 묵인했다. 빛이야말로 인류애의 괴물인 것이다.


“천국이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아니스는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방금의 대답으로 아니스는 수백 년 동안 품고 있던 불안과 의심에서 안심을 얻었다. 세상에는, 천국이 있다. 한때 그녀가 섬겼던,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섬기고 있는 ‘빛’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인 것이다.


“뭐…… 나중 가면 거기도 뜯어고쳐야겠지.”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그럴듯한 천국으로 말이야.”


“하멜, 당신이 할 수 있는 겁니까?”


“안 되면 해달라고 조르지 뭐. 설마 싫다고 하겠어? 지들 멋대로 나를 환생시키고, 유폐와 멸망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라는 빡센 업을 주었는데 말이야.”


그래서 과거의 인연을 버릴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지금’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수많은 존재가 있다. 아가로트에게, 하멜에게, 유진에게, 멋대로 기대하며 불씨를 이어 온 자들이 있다.


“이제 슬슬 해볼까.”


유진은 망토에서 레반테인을 뽑으며 모론을 돌아보았다.


“일단 무릎부터 꿇어봐.”


“……꼭 꿇어야 하나?”


모론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이런 자존심을 부릴 줄이야.


“아니…… 꼭 꿇을 필요는 없지.”


유진도 모론의 자존심은 존중해 주었다.


빌어먹을 환생 542화


유진 라이언하트로서의 최초의 기사 서임이지만 무엇 하나 거창하게 차려진 것은 없다. 단상은 당연히 없고, 참석한 존재는 사람 두 명, 죽은 영혼 한 명, 사역마 한 명, 드래곤 한 마리뿐이다.


물론 면면을 따져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 한 명은 이 시대 최고의 마법사이자 최근에는 신위까지 도달한 예비 마법의 여신이고, 다른 한 명은 성녀. 죽은 영혼은 진짜배기 대천사다. 사역마?


‘귀여우면 됐지.’


사실 처음부터 메르는 사역마로 느껴지지 않았다. 드래곤도 그냥 드래곤인 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시대에서 드래곤의 축복을 받으며 서임 된 기사는 없으니까.


“으흠.”


단상은 정 필요하다면 어찌 만들면 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유진은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릎을 꿇지 않고 꼿꼿이 허리를 세운 모론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섰다.


“모론 루하르.”


서임받는 자의 이름. 용감한, 모론 루하르. 일국을 건국한 전설적인 용왕(勇王)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어…… 그러니까…….”


일단 성기사로 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유진은 순간 진지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생 누군가를 기사로 삼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옛날 사막에서 거둔 아만조차도 기사 서임은 하지 않고 그냥 저택에 던져놨을 뿐이다.


“야, 서임 어떻게 하는 거냐?”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모론에게 물었다.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로 기다리던 모론이 옛날처럼 멍청한 표정이 되어 눈을 끔벅거렸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건가?”


“너는 그래도 왕도 해봤으니 옛날에 서임은 잔뜩 해봤을 거 아니냐.”


“그렇다, 하멜. 이 혹독한 설원에 처음으로 마을 만들었을 때가 떠오르는구나. 그 마을이 루하르의 시도, 하멜른이 되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 나라 수도의 이름이 하멜른인 것은, 너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


“최초의 하멜른은 지금처럼 대도시가 아니었다. 나를 따르는 전사들과 그들의 가족. 또, 헬무드에 고향을 잃은 난민들……. 당시에는 물자도 몹시 부족하여 뭉친 눈을 벽돌 삼아 집을 만들었지.”


“…….”


“그렇게 최초로 설원에 마을을 만들고, 나는 그곳을 ‘왕국’으로 선포했다. 이름은 내 이름을 딴 루하르 왕국. 그때 나는, 설원의 한복판에서 전사 수백 명에게 기사의 직위를 내렸다…….”


이 새끼 왜 뜬금없는 자랑질이지? 유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배배 꼬인 유진에게는, 지금 저 말이 ‘나는 수백 명을 기사로 두었다’라는 자랑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대뜸 루하르의 건국 이야기를 지껄이는 건가?


“개소리 말고, 서임 어떻게 하는 거냐니까.”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다.”


“내가 그딴 쉬운 이야기 듣자고 네 개소리를 들어준 것이 아닌데…….”


“서임식은 기사마다 다른 것이다. 두들겨 패거나, 따귀를 몇 대 때리거나, 검을 들고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을 서임식으로 삼곤 한다. 만약 네가 그리하겠다면 하멜, 나는 며칠이곤 네 주먹을 맞아주마.”


“내 주먹이 더 아플 텐데 그런 짓을 왜 하냐?”


“나는 다른 의문을 느낀다, 하멜. 말했듯 루하르 수도의 이름이 하멜른인 것은 너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환생하고, 세상 모두가 환생에 대해 알게 된 너를 더 이상 기릴 필요가 있는가? 하멜른의 이름은 더 이상 하멜른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야! 내가 지금 환생했어도 하멜의 죽음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그런데 뭐 하러 기릴 필요가 없어?”


유진은 빽 쏘아붙이면서 레반테인을 높이 들었다. 화륵! 투명한 유리의 칼날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불꽃에 모론이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왜 칼에 불을 붙이나?”


“이 칼로 네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릴 거다.”


“내 살갗에 성화의 화상을 남기는 것이 네 서임인가?”


“이거 보기만 활활 타지 별로 안 뜨거워.”


그렇게 듣기는 했지만 모론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릴 수밖에 없었다.


레반테인. 저 불꽃의 검이 끔찍한 힘을 토해내며 가비드를 베는 것을 본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용감한 모론’. 그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서 유진의 앞에서 어깨를 활짝 폈다.


“모론 루하르.”


유진도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불꽃에 휘감긴 레반테인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모론의 오른쪽 어깨에 닿았다.


“너를 나의 첫 번째 성기사이자.”


그렇게 말한 순간. 불꽃의 색이 바뀌었다. 검붉고 포악한 색이 찬란한 백색이 되었다.


“가장 신뢰하고 아끼는 대전사로 서임한다.”


다시 움직인 레반테인이 모론의 왼쪽 어깨에 닿았다.


-화아아악! 칼날에서 부풀어 오른 불꽃이 모론의 몸을 한 번 덮었다. 유진이 말한 대로였다. 불꽃이 전신을 휘감았지만 모론은 조금의 뜨거움도 느끼지 않았다.


모론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타오르는 불꽃이 호흡과 함께 모론에게 흘러 들어갔다. 두근, 두근…… 불꽃이 스며든 심장의 박동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모론은 옆에 꽂아 두었던 도끼에 손을 뻗었다. 커다랗고 억센 손이 도낏자루를 잡은 순간.


화르르륵! 유진의 것과 똑같은 불꽃이 도끼를 휘감았다. 모론은 감탄을 내뱉으며 도끼를 위로 들어 올렸다. 모론은 자신에게 깃든 신력을 느끼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믿을 수가 없군.”


모론이 평생을 쌓은 마나에 신력이 더해졌다. 그것뿐인데도 모론은 신화(神火)를 피워낼 수 있게 되었다. 신이 직접 서임한 성기사와 대전사. 심지어 그렇게 서임한 대상은, 인간 중에서 최강인 모론이다.


“힘뿐만이 아니다. 나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구나.”


모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도끼를 내려놓았다.


진즉부터 전설로 여겨지던 루하르의 건국왕. 300년이나 살며 추앙받았으니, 다른 시대였다면 진즉에 신좌 하나는 꿰찼을 위업. 그렇기에 지금의 서임은 모론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늦어도 1년이야.”


유진은 차분한 눈으로 모론을 응시했다.


“1년 안에, 나는 바벨에 도전할 거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


“서두를 수밖에 없지. 유폐의 마왕이 경고했잖아,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약속이 대체 어떤 형태로 끝이 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유진은 그 ‘끝’이란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끝’이란 것이 좋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곳에서도 누르의 수가 많이 늘었다.”


누르는 멸망의 징조다. 지금이야 수가 늘었다고 해도 모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지만, 만약 신화시대의 마지막처럼 누르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와 대륙로 창궐한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가 없다.


“문제는 누아르 제벨라인가.”


모론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유진과 누아르에 얽힌 사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사연은 알지 못해도- 누아르가 강적이란 것은 안다.


“하멜. 제벨라 시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압니까?”


“거기야 뭐 언제나처럼 시끄럽고 맛이 가 있겠지.”


“맛이 가 있기는 합니다만…… 당신이 전에 갔을 적과는 도시의 상황이 다릅니다.”


아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없는 동안 제벨라 시티는 두 달 동안 봉쇄되었었습니다. 도시의 수백만 관광객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새로운 관광객은 도시로 들어갈 수가 없었지요.”


“…….”


“그런 상태가 두 달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관광객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각국은 정식으로 헬무드에 항의했습니다. 어째서 관광객을 인질로 잡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저 역시 사안이 보통이 아니란 것을 느꼈기에, 직접 제벨라 시티를 방문했었습니다.”


수십 번이나 항의했지만 유폐의 마왕은 제벨라 시티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유폐의 마왕이 직접 누아르 제벨라를 두둔한 것은 아니었다.


유폐의 마왕은 이 문제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성녀들은 그렇게 받아들였고, 행동에 착수했다. 벌써부터 누아르 제벨라와 무력 충돌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곳에 포로로 잡힌 인간의 목숨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수가 많았다.


하멜은 없지만, 하멜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성녀들은 모을 수 있는 전력을 동원했다. 하우리아 해방전에 참전했던 대부분이 성녀들의 부름에 응했다. 교황이 허락했고, 키옐의 황제도 성녀들의 뜻을 지지했다. 심지어 유폐의 마왕조차도 성녀를 필두로 한 군세가 헬무드의 국경을 넘고, 마치 관광이라도 온 것처럼 워프 게이트를 지났음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발작해야 할 마족들도 그러기로 했다는 것처럼 쉽사리 길을 열어주었다.


아니스는 아직도 그때 제벨라 시티의 기묘한 정경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도 예전 유진과 함께 제벨라 시티를, 그 정신 나간 제벨라 파크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밤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 한시도 고요했던 적이 없는 도시.


군세를 뒤에 두고 제벨라 시티의 성문에 섰을 때. 아니스는 도시에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수백만이 사로잡힌 도시는 도저히 그렇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문이 열렸습니다.”


굳게 닫힌 성문을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명령하기도 전에, 먼저 성문이 열렸다.


“두 달의 봉쇄가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성문이 열리고, 포로로 잡혔던 관광객들이 풀려나왔습니다.”


더욱이 기묘했다. 그 자리에는 성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사와 용병과 전사와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문 저편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기척을 느낄 만큼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문 건너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하늘에서 성벽 안쪽을 살피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성벽 안을 보고 있었는데, 모든 눈은 제벨라 시티의 그 무엇도 똑바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은 제벨라 시티의 기묘한 장막을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보았던 도시와, 느꼈던 기척, 그 모든 것이 현실에서 어그러진 환상이었다.


“활짝 열린 성문을 나온 사람들은, 두 달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편안하고…… 개운한 얼굴이었습니다. 마치 길고 깔끔한 단잠을 즐긴 뒤의 얼굴처럼 말입니다.”


성문을 나온 관광객들은 앞을 막아선 성녀의 군세에 어리둥절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저는 함께 온 이들에게 관광객의 인도를 부탁한 뒤, 직접 제벨라 시티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 도시에서 두 달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아르 제벨라, 그 갈X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아야 했으니까요.”


“들어가지 못했군.”


쭉 침묵하던 유진이 중얼거렸다.


“예.”


아니스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꼴사납고 한심하지만, 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목소리.


-만약 네가 들어온다면.


끝까지 이어지지 않은 말. 하지만 그 뒤에 어떤 말이 붙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성녀들의 힘은 마족에게 상극이지만, 상대는 누아르 제벨라. 그 정도 격의 마족, 아니, 누아르는 이미 마왕의 격은 진즉에 넘어선 존재.


성녀가 단독으로 마왕을 토벌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가진 신성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기적을 퍼붓는다 해도 누아르와 전투는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 성녀들의 뒤에는 대륙의 최정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들이 모였다. 하지만 그들을 가호한들 전투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전투가 성립은 되는가?


“당시의 제게는 모두의 목숨을 걸 각오와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게 맞아.”


유진이 대답했다.


“너희는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러 간 것이 아니잖아. 포로를 되찾으러 간 것이고, 성공했으니 굳이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지.”


“제 한심함과 나약함을 위로하는 겁니까.”


“아무렇게나 생각해. 내가 뭐라 한들 그때 네가 느낀 굴욕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스, 나는 네가 죽는 것은 싫다.”


유진은 빙긋 웃으며 아니스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아니스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유진의 강건한 팔은 아니스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사로잡았다.


“아니스, 크리스티나. 내가 없는 동안 너희도 무리가 많고 괴로웠겠지. 이렇게 무사히 만나서 다행이다.”


“어…… 어어…….”


저는 이미 죽은 몸인데 뭘 이제 와서 ‘네가 죽는 것은 싫다’라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원래라면 아니스는 저렇게 이죽대며 유진을 놀려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진의 포옹은 아니스에게 생각의 자유를 앗아갔다.


[시스터, 시스터!]


머릿속에서 들리는 크리스티나의 비명도 무시했다. 그러면서 아니스는 필사적으로 육체의 주도권을 붙잡았다. 부쩍 힘이 강해진 크리스티나지만 지금은 아니스에게서 육체를 되찾을 수가 없었다.


[악령! 이 사악한!]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다. 성녀로 죽어 천사가 된 성령에게 감히 악령이라니! 하지만 아니스는 저 괘씸한 망발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네…… 네에, 다…… 다행입니다, 하멜, 이렇게…… 이렇게 제가 살아 있어서…….”


아니스는 300년 전에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녹아내리는 표정이 되어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으흠, 으흠, 으흠!”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는 모론과는 달리,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던 세냐가 연달아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래서, 그 뒤에 뭐 어떻게 됐는데? 관광객 풀려나고! 너는 누아르한테 도망가고!”


“어쩜 말을 그리 재수 없게 하는 겁니까?”


“내…… 내가 뭐 틀린 말…….”


“사과해, 세냐. 지금은 네가 말이 심했어. 아니스는 신관이잖아. 당연히 우리처럼 마왕과 단독으로 싸울 수 없다고.”


“네…… 저는 가련하고 나약합니다. 요…… 용사의…… 하멜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아니스가 가쁜 숨을 섞어 내뱉었다.


가련하다니! 세냐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300년 전 메이스를 휘둘러 고위마족의 대가리를 쳐부수는 것을 즐기고, 지금만 하더라도 대부분 마족을 피떡으로 만들 수 있는 전투 신관이 가련하다니!


“미…… 미…….”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성녀의 전투력이 대마법사와 용사보다 뒤떨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 세냐는 방금의 발언을 정정하고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좀처럼 말을 끝까지 뱉을 수가 없었다.


“제벨라 시티의 봉쇄는 풀렸지만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아니스는 세냐의 사과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유진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서 양손으로 등까지 더듬었다.


“미…… 미친년아! 뭐 하는 거얏!”


“도시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간 관광객들이 다시 제벨라 시티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국이 그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붙잡아 가둬놓으면, 벽에 머리를 박거나 제 손으로 목을 죄는 등의 자해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세냐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스가 속삭였다. 여전히 그녀는 크리스티나가 육체를 빼앗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저와 신관들은 정신 계열의 흑마법, 혹은 그 갈X의 사악한 최면이라 판단하고 정화를 시도했습니다만…… 불가능했습니다. 관광객들에게 가해진 것은 흑마법도, 최면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추억.”


아니스는 유진의 등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두 달 동안, 그 갈X의 도시에서 맛본 강렬하고 달콤한 추억이- 그들을 자발적으로 제벨라 시티로 향하게 만든 겁니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지우거나, 감정을 말소해야 합니다.”


“방법이 없다는 말이군.”


“네. 자해와 정신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결국 관광객들 대부분이 다시 제벨라 시티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처음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제벨라 시티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다. 누구든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간 사람은 누구든 나올 수 있다.


오히려 그래서 상황이 좋지 않다. 왕국들은 스스로 국민들에게 제벨라 시티의 관광을 금지시켰다. 그 전에 제벨라 시티로 돌아간 관광객들은 스스로 나오지 않고 있다.


“제벨라 시티의 대부분의 놀이시설과 카지노는 여전히 운영 중이지만- 하멜, 우리가 갔을 적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때의 제벨라 시티는 밤이 존재하지 않았지요. 낮과 밤, 모든 시간이 연회로 시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제벨라 시티의 관광객들은, 다른 놀이를 즐기지 않습니다. 오직 잠을 자고, 꿈을 꾸기 위해 도시에 있는 겁니다.”


꿈에서 즐기는 환상. 누아르 제벨라는 수백만의 맹목 위에 서 있다.


“그 갈X는 미쳤습니다.”


본래도 미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알아.”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니스를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더 미치기 전에 죽여야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아니스의 눈을 뒤로하고, 유진은 고개로 돌렸다.


“일단 라이언하트로 돌아갈까.”


“……네.”


아니스가 감정을 가다듬고서 대답했다.


“으흠, 으흠, 으흠……!”


세냐는 계속해서 헛기침만 뱉었다.


“모론.”


유진은 마지막으로 모론을 보았다.


“나는 바벨에서, 내 첫 번째 성기사이자 유일한 대전사인 너를 부를 거다.”


“물론 그래야지.”


모론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준 빛과 함께 그날을 고대하마.”


앞으로 길어야 1년.


모론이 이 산에서 보냈던 지옥 같던 수백 년에 비하자면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다.


“그날이야말로.”


모론은 웃으며 유진에게 주먹을 뻗었다.


“우리는 하멜, 너와 함께,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것이다.”


유진도 씩 웃으며 주먹을 뻗었다.


툭. 서로의 주먹이 가볍게 닿았다.


빌어먹을 환생 543화


1년 만에 돌아온 저택은 유진의 기억 속과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대체 이 저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1년 전에는 그럭저럭 옛 저택의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흔적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 유진을 껄끄럽게 만든 것은, 저택 부지 내의 극심한 부조화였다.


한쪽은 대수림의 따귀를 갈길 수 있을 정도로 울창한 숲. 우뚝 솟은 요정목이 세 그루. 그냥 요정목만 하더라도 엔간한 나무보다 훨씬 크게 자라는데, 심지어 저건 세계수의 묘목이다. 유진은 숲의 하늘 대부분을 덮기 시작하는 무성한 나뭇가지를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이쪽이 활력 넘치는 자연 그 자체인 것과 달리, 반대편에 자연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체 모를 기계장치가 열심히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벨트 위에는 이런저런 물건들이 날라지고 있다. 검, 창, 도끼, 화살, 방패 같은…… 그런 무구들.


다른 쪽에는 이런저런 광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 귀하다는 미스릴이 마치 길바닥 돌멩이처럼 흔하게 보였다.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그곳을 지켜보았다. 굵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어다니는 드워프들…… 거기에 누군지 모를 사람들까지.


“허어…….”


저들이 누군고 하니, 모두가 백색마탑 소속의 정령사들이었다. 그들은 익숙하게 드워프들을 보좌하며, 완성된 장비와 세공품들에 마법을 부여했다. 몇몇은 아예 한편에 공방을 차리고 드워프들과 협업까지 하고 있었다.


당장 현 백탑주인 멜키스 엘하이어가 대정령사이기는 하다만, 애당초 백색마탑은 정령술뿐만 아니라 연금술도 다룬다.


“허어…… 허…….”


1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저택 부지는 난잡했다. 유진이 데려온 엘프들과 세계수의 묘목은 라이언하트의 숲을 너무 과격하게 성장시켰다.


그리고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가공하기 위해 데려온 10명의 드워프들. 그들은 작업 효율을 위해 저택 부지 한편에 공방을 차렸는데, 문제는 공방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것이다.


‘결과가 좋기는 한데…….’


세계수의 묘목들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 덕에 라이언하트의 숲은 대륙 제일의 영맥이 되었다. 그 수혜는 라이언하트가 그대로 독점하고 있고, 단순 효율만 따지자면 백사자, 흑사자들이 평생 수련해 쌓은 마나보다 최근 몇 년 동안 쌓은 마나가 더 질적으로 우월할 정도다.


드워프의 공방도 미관은 해칠지라도 결과는 훌륭하다. 덕분에 라이언하트 전원이 드래곤 소재의 장비로 무장했고, 앞으로도 드워프들의 작품을 독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끝나면.”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가족 모두 같이 이사 갑시다.”


애니실라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을 제쳐두고, 직접, 혼자서, 유진을 마중하겠다고 자처했다. 당연히 극 이유는, 1년 동안 저택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끝이라면, 그것이 언제일까?”


“제가…… 제가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이면 끝이겠죠…….”


“참 힘들겠구나.”


“예…….”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많이 힘들단다.”


애니실라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속삭였다.


유진은, 마중 나온 애니실라를 보자마자 도망쳐 버린 세냐와 성녀들을 떠올렸다. 세냐는 오라버니와 해후해야 한다며 도망쳤고, 성녀들은 미리 와있는 교황에게 볼일이 있다며 가버렸다…….


“이사라, 그것참 좋구나. 어디 생각해둔 장소는 있니?”


“저는 애니실라 님이 원하시는 곳이면 뭐든 좋습니다. 만약 애니실라 님이 성을 원하신다면, 오늘 연회에 와 있는 스트라우트 2세의 멱살을 쥐고서 황궁을 비울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어머…….”


애니실라는 처음과 똑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에도 이런 얘기를 했을 때, 애니실라는 이사 자체가 그리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은 느낄 수 있었다. 저번의 애니실라는 그냥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이유로 이사를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죽는다.’


서늘한 살의를 느꼈다. 폭력과는 동떨어지는 원념의 살의. 유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면 교황청은 어떠십니까? 유라스 거기가 은근히 살기 좋아요. 도시 중심이기도 하고. 워프게이트가 없다고 알려져 있기는 한데,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교황청 지하에도 워프 게이트가 있어요. 없으면 뭐 새로 만들죠.”


“성이라…….”


미소를 유지하며 잠자코 듣고 있던 애니실라가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바벨이 좋겠구나.”


불쑥 내뱉은 말. 곡선을 그리고 있던 눈이 살짝 열리며 눈동자가 보였다. 섬뜩한 시선이 유진의 피부를 핥았다. 그 시선은 유진이 평생 보았던 그 어떤 마안보다도 심부를 파고들었다.


“바…… 바, 뭐요?”


“바벨.”


“그 바벨이 제가 아는 바벨이 맞을까요?”


“네가 아는 바벨이 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아는 바벨은 하나뿐이란다.”


“어…… 음…….”


바벨을 성이라고 할 수 있나? 유진은 저번에 헬무드에 갔을 적에 보았던 바벨을 떠올렸다.


99층에 달하는 고층빌딩…… 하지만 지금의 애니실라에게, 바벨은 성이 아니라는 대답을 했다가는 저 손의 부채가 아작이 날 것이 틀림없었다.


“음…… 바벨은…… 예…… 무너지지 않고 멀쩡히 남아 있다면, 예. 아래층은 기사들 쓰라고 하고, 위층은 저희가 쓰면 되겠네요.”


“최상층의 어전을 가주를 위한 집무실로 쓰면 참 멋진 일일 것이야. 상징적이기도 하고.”


“네…….”


과연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서도 바벨이 멀쩡하게 남아 있을까? 다른 것보다 유진은 그것만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마 전투의 여파를 버티지 못하고 폭삭 주저앉거나…… 심할 경우는 용마성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 전체가 소멸할지도 모른다. 아니, 애당초 지금의 바벨은 유폐의 마왕이 있기에 존재하는데, 유폐의 마왕이 죽는다면 바벨도 통째로 소멸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그럼 새로 지어야지.’


애니실라가 저렇게 말하는 이상, 바벨이 소멸할지라도 그 자리에 똑같이 99층의 빌딩을 세워야 한다. 애니실라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의미도 충분하다. 바벨에서 죽은 하멜이, 그리고 용사의 후손인 라이언하트가- 300년을 넘어 바벨을 정복하고, 그곳을 영지로 삼는다.


‘그건 꽤…….’


생각하면 할수록 괜찮게 느껴졌다.


‘만약 바벨이 소멸해도 새로 지으면 되지. 99층은 너무 높으니까 10층 정도로…… 아니, 10층은 너무 낮은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백색마탑 마법사들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너도 없고 세냐 님도 안 계시면 누가 멜키스 님을 억제할 수 있겠느냐?”


“크리스티나가 있었잖아요.”


“네가 없을 때 성녀님은 몇 주 동안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셨단다. 그 사이에 멜키스 님이 들이닥쳐 이런저런 일들이 진행되었지.”


라이언하트에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큰 이득을 얻었다. 백색마탑과의 적극적인 교류로 숲의 엘프들은 정령술을 익혔고, 기사 중에서도 뒤늦게 정령술에 개화한 자들이 늘었다. 또한 연금술과 마법이 가미 된 드워프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라이언하트의 소유물이 되었다.


“잘됐네요. 제가 엘프들과 드워프를 데리고 온 덕에 가문이 풍족해졌…….”


뿌득.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부채가 부서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애니실라가 이를 악무는 소리였다.


유진은 끝까지 말하지 않고 냉큼 말을 바꾸었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연회장으로 돌아가죠.”


오늘 라이언하트 저택에는 빈객이 많다. 여태까지 유진을 한 번이라도 봤던 왕들은 모두 참석했고, 키옐의 황제와 유라스의 교황까지 왔다. 그리고 며칠 전 라구르야란의 결투장에서 직접 참석했던 관중들에, 유력한 방계 가문의 가주와 자식들까지.


“엘프를 사용인으로 쓴다더니…… 진짜였군.”


키옐의 황제. 스트라우트 2세는 귀빈석에 앉아 엘프들을 보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도심에서 엘프를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나돌아다니는 엘프는 대부분이 노예로서 사냥당해 감금당해 있고, 다른 엘프들은 인적 없는 숲이나 산에 숨어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언하트가 엘프족의 후원자가 된 후로부터는 종족의 사정이 크게 변했다. 국가가 노예법을 금했음에도 음지에서 벌어지던 엘프 사냥이, ‘라이언하트’의 이름 앞에서는 뚝 멎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라이언하트의 이름도 이름이지만, 음지에서 지저분한 일을 도맡는 흑사자 기사단.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 대수림에서 활동하던 사냥꾼들은 유진이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란 것보다, 바야르 부족을 배후에 두고 있다는 것을 껄끄러워해서 사냥을 중지했다.


사실 그 당시로서는 스트라우트 2세는 엘프에 관련된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소수 종족이라고는 해도 일개 가문이 한 종족의 명운을 좌지우지하고, 심지어 일국의 법보다 큰 위력을 행사한다니…… 심지어 대수림의 야만부족과 연을 맺었다고? 알체스터의 만류가 없었다면, 스트라우트 2세는 뭐든 핑계를 붙여서 유진 라이언하트를 한번은 털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당시 알체스터는 유진과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알체스터는 유진을 두둔했다. 알체스터 딴에는 라이언하트에 대한 의리와, 한참 젊은 유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알체스터의 만류는 스트라우트 2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만약 그때 핑계를 대서 유진을 불러 앉혔다면…….


“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스트라우트 2세의 귓가에 목소리가 꽂혔다.


“허억……!”


그는 키옐 황제라는 체면도 잊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느 틈인가 스트라우트 2세의 옆에 유진이 서 있었다.


“유, 유…… 유진 라이언하트…… 경.”


“뭔 경이야, 콱 씨, 님이라고 안 해?”


“무…….”


“너 왜 결투 때 안 왔어? 알체스터 경은 오셨는데, 너는 뭔데 안 와?”


유진은 눈에 힘을 주고서 스트라우트 2세를 쏘아보았다.


저게 상식적으로 올바른 꾸짖음인가? 스트라우트 2세는 황제다. 아무리 그 결투에 대륙의 명운이 걸려 있을지라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결투장에 직접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에 하나 유진이 패배하고, 가비드와 마족들이 관중들 전원을 살해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아…… 아무리 그래도 짐에게도 입장이란 것이…….”


“입장? 알체스터 경은 직접 오셨는데 넌 왜 안 왔냐니까.”


왜 알체스터에게는 존칭을 쓰면서 황제인 나에게 이렇게도 무례하게 구는 것일까.


스트라우트 2세는 그것이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래도 몇 년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나마 황제로 대우해 주었는데…… 하멜의 환생이란 것이 알려진 후로는 그 최소한의 대우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 짐만 안 간 것이 아니라, 유라스의 교황과 시무인, 아롯의 국왕도 안 갔을 텐데…….”


“오세리스는 남쪽 끝에서 오기 힘들 것 아냐. 더운 나라에서 평생 살았으니 북쪽에 왔다가는 얼어 죽었겠지.”


“…….”


“교황은 너무 늙었고. 아롯 다인돌프는 대신 호네인 왕세자라도 보냈지. 넌 뭐야?”


“짐도 알체스터 경을 보냈…….”


“알체스터 경이 왕족이야? 네 아들이냐고.”


유진이 눈에 힘을 주고서 쏘아붙였다. 어깨를 부르르 떨던 스트라우트 2세는, 이 대화에서 자신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왜냐면 이미 유진은 듣고 싶은 대답을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트라우트 2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래, 앞으로는 죄송할 일 없게 잘하자.”


툭툭. 유진은 스트라우트 2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었다. 애니실라에게 받은 갈굼. 그로 인한 울적함이 말끔히 가셨다.


“너무 참으면 병나. 가끔은 분출해야지.”


설령 원인제공을 자신이 직접 했을지라도.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들으라고 하는 건가?’


스트라우트 2세는 모든 것이 억울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유진처럼 묵은 감정의 분출이란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병이 날 때까지 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흠.”


유진은 들으란 듯이 헛기침을 뱉었다. 그러자 연회장의 수많은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세냐와 크리스티나는 먼저 도착했고, 유진만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점. 참석한 모두가 유진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기침 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무도 유진이 도착했음을 몰랐던 것이다.


“자 진정들 하시고.”


왁자지껄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전. 유진이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뿐인데도 모두들 목소리를 멈췄다. 등이 움푹 파인 드레스를 입은 멜키스조차도 깍깍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을 정도다.


자연스러운 위압. 지금의 유진에게는 그런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어휴.”


유진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연회장의 뒤편. 보란 듯이 장식으로 우뚝 선 플래티넘 라이온이 보였다.


유진은 저것을 볼 때마다 그냥 부수거나 녹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길레이드는 저 화려한 플로트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냥 창고에 넣어두시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플래티넘 라이온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디 높은 자리가 없나 찾아봤는데, 애석하게도 연회장에서 가장 높은 곳은 플래티넘 라이온의 위였다.


설마 노린 것일까? 유진은 그만 주먹을 불끈 쥐고 말았다. 라이언하트에서 그런 일을 주도할 만한 위인은 단 한 명뿐. 유진은 즉시 카르멘을 찾았다.


“…….”


눈이 마주친 카르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카르멘에게 한 점의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도저히 뭐라고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결국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플래티넘 라이온의 위에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가기 싫으시면 그냥 하늘에 떠 계시면 되잖아요. 아니면 그냥 땅에서 말씀하시던가. 어차피 모두가 유진 님을 보고, 유진 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꼭 여기 설 이유가 있나요?]


“…….”


[유진 님, 저는 잘 알아요. 지금 유진 님은 자신을 속이고 계세요. 아니, 지금뿐만이 아니죠. 유진 님은 대부분의 일들에서 항상 자신을 속이세요. 하기 싫은데~ 라고 말은 하면서도 내심 즐기고 계시죠. 지금도 그렇잖아요. 어쩔 수 없네, 카르멘 님이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실은 화려하고 높은 곳에서 선망받는 것을 즐기시는 거잖아요.]


마음대로 지껄여라. 유진은 마음을 다스리며 망토 안에 손을 넣어 메르의 뺨을 꼬집었다. 저 당돌한 꼬맹이가 지껄이는 모든 말은 음해일 뿐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보다 은자가 존귀하니, 은자가 당연 화려하고 높은 곳에서 모두의 선망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라.]


[너 이 새끼는 왜 항상 내가 놀리고 나서 유진 님의 편을 드는 건가요? 비겁한 도마뱀 같으니.]


[본녀는 솔직히 말하는 것뿐이니라. 헌데 은자여, 은자의 존귀함을 과시하기에 이 조형물은 너무나 초라하구나. 차라리 드래곤인 본녀의 머리 위에 서는 것이 어떠한가?]


[이 영악한 새끼, 네가 관심받는 것에 유진 님을 이용하지 마세요!]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망토에서 투닥투닥 다투기 시작했다. 유진은 시끄러운 망토의 소음을 무시하고서 플래티넘 라이온의 머리 위에 섰다.


“여기 와 계신 손님들 중 상당수는 라구르야란의 결투장에도 오셨었죠.”


유진은 먼저 그렇게 말했다.


“결투의 중계가 얼마나 잘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결투하던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연회장의 사람들이 눈을 빛내고 귀를 열고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신이라고요.”


유진은 덤덤한 목소리로 먼저 그것을 선언했다. 자연스럽게 유진의 시선은 교황에게 향했다.


혹시 이 선언을 불편하게 생각하고서 나서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 교황과 추기경, 라파엘로의 곁에는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핑계를 대고 도망친 줄 알았는데, 미리 만나서 말해둔 모양이다.


“신?”


“신이라니…… 갑자기 무슨…….”


“비유가 아니라, 진심으로 했던 말인가?”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그렇게 웅성거리는 것은 결투장에서 직접 본 사람들이 아닌, 중계를 통해 결투를 본 사람들이었다. 정작 알체스터처럼 직접 결투를 본 사람들은 유진의 말에 의문을 느끼지 않았다.


그곳의 결투, 유진이 뿜어대던 불꽃과 힘은 신위(神威)라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제가 신이 되었으니, 연회를 즐기기 전에…….”


유진은 흠흠 헛기침을 한 뒤, 망토에서 레반테인을 꺼냈다.


“제게 직접 세례받아 교인이 되고, 성기사가 되고 싶은 분이 있으시다면 이 앞에 줄을 서주십시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부 해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기준을 두고서 선별하여…….”


“허억…….”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숨을 삼키며 손을 번쩍 들었다.


카르멘이었다.


“음…… 그럴 줄 알았습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빌어먹을 환생 544화


카르멘은 연회장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세냐와 함께 1년 만에 대수림에서 귀환한 그녀는, 외견 자체는 대수림에서 헤어졌을 적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1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깊이를 느꼈다. 인간에게 있어서 1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카르멘이 보낸 1년은 수십 배를 넘는 밀도를 가졌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어긋났을지는 모르지만, 카르멘이 겪은 체험은 가비드와 비슷하다. 현자와 세계수의 마법은 시공을 넘어 거신을 불러왔고, 카르멘은 셀 수 없는 죽음을 반복하며 기나긴 시간 동안 거신에게 도전했으리라.


“제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


카르멘이 플로트의 아래로 왔을 때. 유진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제한하며 속삭였다.


“거신을 쓰러트리셨습니까?”


솔직히 그 사실이 굉장히 궁금했다. ‘진짜’와 비교할 수는 없다지만 현자가 불러낸 거신의 기억이다. 당장 가비드만 해도 아가로트의 환영과 전투를 반복해 마족을 초월했는데, 과연 카르멘은 어떨까.


“아니.”


카르멘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 거대하고 위엄찬 남자를 쓰러트리지 못했다.”


당연한 대답이었다. 방법이 비슷할지언정 카르멘과 가비드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 결정적인 것은 가비드는 마족이고, 카르멘은 인간이란 것이다. 아무리 그 수행에서의 죽음이 현실로 이어지지 않고, 카르멘의 정신력이 강한들, 이런 종류의 수행법은 인간이 감당하기 버겁다. 골백번의 죽음을 반복한다면 카르멘이라도 정신이 붕괴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쓰러트리지는 못했어도 많은 것을 얻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위대한 자에게 수십 수백 번 도전하고 패배하면서, 나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초라한 약자에서 거듭날 수 있었다.”


카르멘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직접 체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유진은 카르멘의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느꼈다.


백염식. 카르멘의 백염식은 유진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바뀌어, ‘별’의 숫자로서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깨닫고 말았다. 라이언하트의 백염식. 경지를 구분하는 ‘별’이란 결국 허상이란 것을. 무턱대고 별의 개수를 늘리는 것에만 집착한들, 진정한 강함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카르멘의 힘 있는 목소리는 비단 유진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회에 참석한 모든 라이언하트를 위해 말을 이었다.


“우리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께서 창안한 백염식은- 결국은 그분에서 시작이 되고 완성된 것. 시조께서는 우리 후손들을 위해 백염식과 적염식을 계승시켜주셨다. 당연히 우리는 백염식이야말로 정통하고, 적염식은 급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그 말에 방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라이언하트에는 수많은 방계 가문이 있지만, 연회에 참석한 가문들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유력한 가문들이다. 심지어 함께 참석한 흑사자들은 절대 다수가 방계 출신이고, 가문의 위세와 상관없이 실력을 인정받은 라이언하트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카르멘의 말은 가문의 출신을 가르는 지독하고 쓰린 발언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나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당당히 말하겠다. 실제로 나는 과거에 그렇게 생각했다. 가문을 잇는 본가가 백염식을 계승하며 정통성을 지키고, 가지처럼 뻗어 나간 방계는 적염식을 익혀 본가를 거스르면 안 된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흑사자는 그러한 가문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존재했다.”


그냥 성기사 서임이나 진행하고 싶은데 왜 카르멘의 웅변회가 된 것일까. 유진은 내심 그런 생각을 했지만, 차마 카르멘의 웅변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우화를 통해 깨달았다. 우리가 정통이라 여기던 백염식조차도 극성으로 익힌다 해서 결코 시조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시조께서 가문을 위해 남기신 백염식과 적염식은, 결국 라이언하트의 무(武)가 나아갈 지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카르멘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더 이상 방계는 웅성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카르멘의 웅변을 들었다. 가주인 길레이드와 원로원주 클라인조차도 진지한 얼굴로 카르멘의 웅변에 귀를 기울였다.


“라이언하트의 시조께선 위대한 영웅이셨지만,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조건 시조께서 걸으신 길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은 틀린 것이다! 백염식과 적염식, 두 개의 수련법에만 매달리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별’을 퇴색시키는 일이다!”


카르멘은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에 빛나는 별을 지니고 있기에…….”


“우욱…….”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유진뿐이었다.


방계 중의 최강자, 제노스는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카르멘의 웅변을 듣고 있었다. 길레이드조차도 눈시울을 붉히며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위대한 베르무트가 아닌, 카르멘 라이언하트라는 별을 완성하고 싶다.”


하늘 높이 뻗은 주먹이 펼쳐졌다. 아직 해가 중천이어서 하늘이 맑았지만, 하늘을 향해 뻗는 손가락은 마치 밤하늘의 별을 쥐려는 것처럼 보였다.


“진정 자신의 별을 찾고 싶은 자들은 내게 오라. 본가도, 방계도 상관없다. 백염식과 적염식이란 틀을 떠나, 단 하나의 찬란한 별을 갖는 것이야말로 우리와 라이언하트를 위한 것. 나는,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시조 베르무트께서 꿈꾸던 미래라 믿는다.”


사실 카르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백염식을 극성으로 익힌들 베르무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후손들에게 전해진 백염식과 베르무트가 직접 쓰던 백염식은 큰 차이를 갖고, 인간은 결코 진짜 백염식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백염식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유진도 그랬다. 본래 7성이었던 유진의 백염식은 다양한 전투를 거친 뒤에 별의 개수가 무의미해졌다. 지금 유진의 안에서 백염식의 별이 있던 자리에는 무한히 펼쳐진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유진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백염식만 익히지 않았고 이터널홀을 이해했으며, 하멜로서의 경험과 아가로트의 신력까지 녹여낸 것으로 우주를 만들었다.


다른 라이언하트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하지만- 카르멘의 경우를 보건대, 저런 형태로 백염식을 진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베르무트가 의도한 것은 옳을 것이다.


‘당장 6성에 이르러 들어가는 암실만 하더라도 백염식을 자기 자신에게 특화시키는 것이니까…….’


적염식에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결과물에 따라 다르겠지만 본가와 방계의 간극이 크게 줄어들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된다면 본가가 가진 백염식의 우월성은 경지가 낮을 때에 방계와 커다란 격차를 낳게 된다는 것뿐.


“ㅡ라이언하트여.”


카르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라이언하트의 영광, 대륙의 미래, 계승되는 의지. 그 모든 것을 담아, 카르멘은 힘을 주어 외쳤다.


“각성하라!”


외침과 함께 하늘을 향했던 손이 주먹이 되었다. 지금, 카르멘은 그녀의 ‘별’을 거머쥐었다.


“각성하라!”


카르멘은 다시 외쳤다. 그 뜨거운 외침이 모두를 움직였다. 제노스가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부전여전이라고 옆의 제니아도 똑같이 주먹을 뻗었다.


“각성하라!”


그렇게 연회장의 모든 라이언하트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유진의 귀환과 결투의 승리를 축복하기 위해 도모된 연회가 졸지에 라이언하트의 단합장이 되었다.


“각성하라!”


모두가 똑같은 뜻으로 외치는 말. 라이언하트 자체가 환생한 하멜을 위한 가문. 이후 성장한 라이언하트는 자연스레 하멜을 위한 선봉이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베르무트가 그렸던 미래일지도 모른다.


“…….”


설령 그럴지라도.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플래티넘 라이온의 위에서, 카르멘에게 감화된 라이언하트의 뜨거운 외침을 듣고 있는 유진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진심으로 말하자면, 유진은 그냥 귀를 막고 도망이나 치고 싶었다.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를 위해! 대륙의 미래를 위해!”


카르멘의 외침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격정을 담아 사명을 외치며, 타오르는 금색 눈동자로 유진을 보았다.


“각성하라!”


그 시선에서 무언의 압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저항이 불가능했다. 라이언하트뿐만 아니라, 연회장에 모인 모두가 유진의 결의를 듣고 싶다는 듯이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결국 유진은 머뭇거리다가 주먹을, 아니, 레반테인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가…… 각성하라.”


“오오오오!”


모든 라이언하트가 열광했다. 유진은 두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열의에 찬 환호가 멈추고서야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럼, 서임을.”


방금까지 피를 토할 듯 격렬히 외쳤던 카르멘이지만 지금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유진은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임 자체는 모론에게 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때처럼 첫 번째 성기사이자 대전사를 운운하지는 않았지만, 얇게 타오르는 검신으로 어깨를 두드리는 방식이다. 그렇게 서임을 하면 레반테인의 불꽃이 상대에게 스며들었다.


그렇게 신화(神火)를 옮기지만, 정작 유진의 신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서임을 통해 신화를 옮길 때마다, 유진의 신력은 충만히 차올랐다.


카르멘 다음으로도 서임은 계속됐다. 백사자 기사단과 흑사자 기사단, 다로 기사단 소속이 아닌 방계의 가주들에게 서임을 내렸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서임은 라이언하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야수왕 아만을 필두로 루하르의 하얀 송곳니 정예에게 서임을 내렸다. 아이빅과 용병들에게도 서임을 내렸다. 오르투스와 격랑 기사단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었지만, 서임받은 자들이 몸 안에 자리 잡은 신화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선 결국 유진의 앞에 섰다.


알체스터와 백룡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라우트 2세는 정말 서임까지 묵인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했다. 오직 황제만을 섬기기로 맹세하고, 황제가 직접 서임 받은 알체스터와 백룡 기사단이 유진에게 통째로 빼앗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을지라도 스트라우트 2세는 서임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유진에게 한 소리 듣는 것도 두려웠고, 세상을 위해서도 서임은 묵인해야만 했다.


의외로 망설인 것은 이바타와 조란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대수림과 세계수다. 아무리 유진에게 경의를 느낀들, 평생 다른 종교와 연을 맺지 않은 대수림의 부족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신에게 서임 받는 것은 여러모로 낯선 일이었다.


“괜찮아.”


유진은 이바타가 어떤 이유로 망설이는지 짐작하고 먼저 말했다.


“내가 세계수랑 직접 만나본 사이인데, 세계수도 괜찮대.”


“뭐라고?”


“거짓말 아니라 진짜야. 내가 뭐 너희 주신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필요하고 좋으니까 잠깐 계약 비슷한 것 하는 거잖아. 그러다가 나중에 전쟁 끝나고 만족스러우면, 부족 전체의 신앙에 대해 다시 논해보자고.”


유진은 그리 아쉬울 것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실제로 아쉽지는 않았다. 예전에야 이바타를 통해 조란 전체를 종교국가로 개조해서 신앙을 수급할까 생각했지만, 지금의 유진은 빛뿐만 아니라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알았다.”


이바타는 그런 사정까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사로서 유진을 존경했고, 서임 받은 기사들에게 스며드는 신화도 탐이 났다. 결국에는 이바타를 시작해서 조란 전사들 정예가 유진에게 서임받았다.


라파엘로와 혈십자 기사단에게는 따로 서임을 내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빛의 성기사. 유진이 서임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신력을 공유하고 있다.


‘화신…….’


에우리우스 교황과 라파엘로는 미리 성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들은 모든 진실까지는 듣지 못했다. 성녀들은 애초에 저 완고한 광신도들을 설득하려 들지 않고, 적당히 거짓을 꾸미는 것을 선택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빛을 직접 만났다. 빛의 화신이 되었다. 유진과 빛은 한 몸이 되었으며, 빛은 유진이 시대를 밝히는 새로운 신이 되도록 신명을 주었다……. 사실 무조건 거짓뿐인 말도 아니었고, ‘진짜’ 성녀가 저렇게 말하는 이상 교황이라고 해서 의문을 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왜 안돼?”


기사와 용병, 전사들의 서임이 끝난 뒤. 서임을 받기 위해 나왔다가 거절당한 멜키스가 울상을 지었다.


“너 지금 마법사 차별하는 거야? 무기 휘두르는 놈들은 성기사가 될 수 있는데 마법사는 성기사, 아니, 성마법사가 될 수 없다는 거야?”


“이 세상에 성마법사라는 이름이 존재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생각이 활짝 열린 사람이야. 성마법사가 없다면 내가 최초의 성마법사가 되어주지.”


“개소리 말고 들어가 계세요. 저는 마법사한테 서임 못 합니다.”


“그러는 너도 마법 쓰잖아! 유진이 너 그러면 안 돼, 네가 귀여운 꼬마였을 때 이 누나가 얼마나 잘 챙겨주었는데. 당장 네 시그니처, 그거 뭐야, 편익의 프로미넌스! 그거 만드는 걸 도와준 사람이 이 멜키스 엘하이어 누나인데, 어쩜 누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멜키스는 사탕 달라 떼를 쓰는 아이처럼 졸라댔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마법사 서임은 제가 아니라 세냐가 할 겁니다. 멜키스 님도 저한테 서임받는 것보다 세냐한테 서임받는 것이 좋잖아요?”


“언니!”


즉시 멜키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유진의 앞에서 후다닥 물러나, 한가로이 차를 마시던 세냐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아니! 마법의 여신님!”


마법의 여신이 되겠다는 것이 세냐의 바람. 그것은 금세기 대마법사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하우리아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신격에 이르지 못했을 텐데, 1년의 은거를 통해 결국은 신격에 이르른 것인가. 로베리안과 다른 대마법사들도 감격하여 세냐를 둘러쌌다.


“어…… 어어…….”


오늘은 유진의 망신을 음미할 생각이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폭탄을 돌릴 줄이야. 세냐는 유진을 흘겨보면서 말을 더듬었다.


“서임을!”


아롯의 국왕 다인돌프와 왕세자 호네인까지 세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여…… 여기서 말고. 다음에 아롯에서 해줄게.”


세냐는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고서 대답했다. 유진이야 아가로트일 적의 경험도 있고 빛의 도움도 있지만, 세냐는 갓 신격에 오른 몸. 서임 자체야 가능은 하겠지만, 해본 적이 없었기에 연습해 볼 필요를 느꼈다. 만약 이 자리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임했다가 실패하기라도 하면?


‘현명한 마법의 여신’ 세냐 메르데인의 신화의 첫 단추부터 잘못되는 꼴이다. 세냐는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충분하군.”


대륙의 주역이라 하기에 충분한 자들에게 서임을 내렸다. 그 이상 서임을 통해 성기사를 양산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유진은 그렇게 판단했다. 저들이야 단련하며 갖춘 바가 있기에 신화와 어우러진 것이지, 괜한 어중이떠중이에게 서임을 내리는 것은 낭비나 다름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의 서임은 모두 끝이 났지만, 연회가 끝난 뒤에 따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크리스티나, 시엘.”


유진은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목소리를 제한하여 둘을 불렀다. 그 부름에 시엘이 후다닥 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본가 모든 사람들과 백사자, 흑사자, 방계까지 서임을 받았다. 오직 시엘만이 아직 서임을 받지 않았다.


-넌 이따가 해줄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뒤로 물러섰었다. 굳이 마지막까지 미룬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일 터.


“드디어 내 차례인 거야?”


시엘은 눈을 빛내면서 배시시 웃었다. 사뿐사뿐 다가온 크리스티나도 시엘의 곁에 섰다.


“너희 둘.”


유진은 최대한 오해를 사지 않게 차분한 얼굴로, 그리고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회가 끝나면 내 방으로 와라.”


열심히 노력했지만, 오해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빌어먹을 환생 545화


“왜 말을 해도 그딴 식으로 하는 거야?”


시엘은 저택 복도를 걸으며 투덜거렸다.


연회가 끝나고 난 뒤의 새벽. 이 늦은 시간에 방에 찾아오라니, 오해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는 말 아닌가.


만약 저 말을 한 사람이 비교적 멀쩡하고 평범한 남자라면, 시엘도 혹시, 싶은 오해를 조금이라도 강하게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유진이다.


시엘은 유진에 대해 이런저런 아는 것이 많았고, 이전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매몰찬 거절까지 들어본 몸. 그렇기에 도저히 오해할 수도, 기대를 품을 수도 없었다.


‘그 새끼는 마왕을 죄다 죽이기 전까지는 고자처럼 굴 거야.’


직접 물어보고 대답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시엘은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유가 뭘까?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어서? 오히려 그러니까 더 활활 불태워야 하는 것 아닌가? 죽을 때는 죽더라도 죽기 전에 후회 없이 불꽃을 태워야…….


“…….”


어차피 유진이 죽는다면 유폐의 마왕에게건 멸망의 마왕에게건 세상이 끝장난다. 남은 사람들이 무슨 수를 쓰건 저 마왕들을 막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모든 것이 허무히 끝나기 전에 미련이라도 남지 않도록 활활 타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으흠.”


끝없이 이어지려는 엄한 상상을 억지로 멈췄다.


물론 시엘은 유진이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은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냥…… 절대로 멸망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검의 날을 세우고 멸망을 막으러 나설 것이다.


그런 녀석이다.


‘……애초에 유진 그 녀석이 정말로 사적인 이유로 방에 부른 것이라면, 나 혼자만 불렀겠지.’


애당초 나를 부르기나 할까? 울적한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시엘은 필사적으로 그쪽을 무시했다.


‘나만 부른 것이 아니잖아. 크리스티나 성녀 언니도 같이 불렀으니, 뭐…… 나름 중요한 일이겠지.’


다른 장소도 아니고, 방 안에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일단, 오해는 하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만약에, 만약에, 만약이란 것이 있으니까. 그래서 시엘은 연회가 끝나자마자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향수도 살짝 뿌렸다.


“…….”


시엘은 더 이상 걷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굳게 닫힌 유진의 방문 앞.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제 뺨을 꼬집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둥 이상한 짓을 하는 크리스티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인지. 직접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쪽으로 흐르는 바람에서 술 냄새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은은하고 산뜻한 비누 향기. 저쪽도 만약에 만약을 대비해 목욕 재개를 한 것은 틀림없었고, 지금은 ‘누가’ 방문을 열고 들어갈지를 두고서 두 개의 인격이 한창 다투는 모양이었다.


“흠흠.”


그 다툼이 얼마나 격렬한지 자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엘은 더는 보기가 괴로워서 몇 번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러자 성녀는 쥐어뜯던 머리를 조용히 놓더니, 손가락을 빗 삼아 헝클어진 머리를 몇 번 쓸어내렸다.


“뭡니까? 옷을 새로 갈아입고, 향수까지 뿌리고. 대체 무슨 발칙한 기대를 하는 겁니까?”


홱 돌아본 시선이 예리하다. 아니스다. 시엘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회가 꽤 길어졌잖아요? 씻고, 옷을 새로 입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죠.”


“나이치고 꽤 묵은 향을 즐기는군요. 취향입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쓰는 겁니까?”


“요즘 유행인 향이에요. 성녀님은 아무래도 옛날 사람이셔서 그런가, 아니면 성직자라서 그러신가요? 촌스러운 향이 나네요. 좋게 말하면 풋풋한 향이랄까.”


아니스의 표독스러운 말에도 시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 동안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흥.”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꼬마 아가씨. 당신이 어떤 발칙한 기대를 품은 것인지는 뻔하지만, 기대처럼 되지는 않을 겁니다. 애당초 그럴 것이라면 하멜이 저와 당신을 같이 불렀을 리가 없죠.”


“네? 저는 아무 기대도 안 했어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시엘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아니스는 영 고깝단 눈으로 시엘을 흘겨보았지만,


더 이상 쏘아붙일 수는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건 결국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니스의 경우에는 얼마든지 변명할 여지가 있긴 했다. 기대와 흥분으로 몸을 씻은 것도, 새 옷을 꺼내 입은 것도, 점잖지 않은 뛴 걸음으로 방문 앞에 선 것은 크리스티나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라며 당연히 나서려던 아니스에게 꽥 소리를 지르며 머리채를 잡은 것도 크리스티나다……. 아니스가 생각하기에, 그녀 자신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다.


“일단 들어갑시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서러운 울음은 애써 무시했다. 아니스는 단 한 점의 기대도 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았다.


“……같이 들어갈 겁니까?”


“저희 둘을 같이 불렀잖아요.”


“그렇지만. 일단 제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보겠습니다.”


“아니, 저희 둘이 같이 불렀잖아요.”


시엘은 물러서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더 이상 말했다가는 추해지기만 할 뿐. 아니스는 쯧 혀를 차면서 문을 열었다.


“…….”


“…….”


역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방안의 풍경은 셋의 얕은 기대와는 판이했다. 로맨틱한 조명도 없었고, 가볍게 즐길 와인 같은 술도 없었다. 유진도 목욕가운 따위는 걸치고 있지 않았다.


“문 앞에서 뭐 그리 오래 있던 거냐?”


유진은 편해도 너무 편해 보였다. 그는 답답한 예복은 벗고 헐렁한 반팔 상의를 입었고, 한 손에는 큼직한 고기의 뼈를 들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유진은 연회 내내 고기만 먹었다.


길레이드는 결투가 끝난 뒤 유진이 부탁했던 말을 그대로 니나에게 전해주었고, 오늘 연회에는 오직 유진만을 위한 식탁이 따로 준비되었다. 많아도 너무 많은 고기의 산…… 유진은 그곳에서 챙겨둔 고깃덩어리를 한 입 더 크게 베어 물었다.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시엘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더듬더듬 물었다.


지금 유진의 양 손목에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직접 손목을 베은 것이다. 저렇게 많이 흐르는 피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으니 반팔을 입은 것이다.


“성혈(聖血).”


아니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유라스에도 성혈에 관련된 성유물은 있다. 화신, 혹은 성녀의 피. 그 피를 담았다는 술잔이나…… 물론 아니스는 그런 성유물 대부분이 가짜라는 것을 안다. 드물게 존재하는 ‘진짜’도 도저히 성유물이라곤 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하지만 지금 저것은 다르다. 유진은 ‘진짜’ 신이고, 저것은 틀림없는 신의 피. 성혈이다.


[아……]


크리스티나도 더 이상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긴 탄식을 흘리며, 유진의 등 뒤를 보았다.


자그마한 욕조. 안쪽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그 안을 채운 것이 단순한 물이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직접 파괴했던 샘을 이제 와서 다시 만든 겁니까?”


“다르지.”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가짜고, 이건 진짜잖아.”


유라스에서 파괴했던 빛의 샘. 그것은 역대 성녀들의 성유물을 여과기로 삼아 정제한 성수를 담아서 만들었다. 성녀가 태어나고 죽는 것이 반복될수록 빛의 샘의 ‘성능’은 강해졌고, 역대 성녀들은 전신에 상처를 내고 빛의 샘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성수’를 받아들였다. 유라스는 그런 방법으로 성녀를 신성병기로 육성해 왔다.


하지만 지금 유진이 만든 것은 ‘다르다’. 저 자그마한 욕조는 성녀의 유해 따위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한 방울로도 용혈(龍血)이나 엘릭서보다 값진 성혈을 아낌없이 사용한 ‘진짜’ 빛의 샘이다.


“성기사의 서임은 대충 끝냈다.”


으적. 유진은 달라붙은 고기를 뼈채로 씹어 삼켰다.


아무리 그가 신다운 불사력을 갖게 되었어도, 신력의 정수와 성혈을 왕창 쏟아낸 것은 피로가 극심했다. 먹어도 먹어도 아직 배가 고프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성녀를 새로 세례하지는 않았잖아. 그렇지?”


“…….”


“너희도 느끼고 있잖아.”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나나 세냐와는 다를 수밖에 없어. 그리고 모론과도 다르지.”


“압니다.”


아니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희의 능력과 힘은 신에 따른 것. 아무리 기도하고 신앙한들, 저희는 당신들처럼 강해질 수는 없죠.”


전사라면, 마법사라면 몰라도 성직자는 홀로 강해지기 힘들다. 결국 성직자가 사용하는 힘은 신성력이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스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당신이 먼저 권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예. 저희의 자존심을 배려해 준 겁니까?”


“네가 직접 찾아와 청하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준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했나?”


“지금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저희에 대한 배려인 것을 압니다. 당신은 항상 그랬죠, 하멜. 내지 않아도 될 생색을 내면서, 내 마음을 배려했습니다.”


빛이 아닌 유진의 성녀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크리스티나의 육체에는 성흔이 늘었다. 그리고 이제는 유진이 빛의 신성마저 갖게 되었으니, 당연히 둘의 ‘성녀’의 능력도 커졌다.


느끼고 있다. 이제 두 성녀는 한 번의 기도로 수십, 수백 명의 병자를 일으킬 수 있다. 잘린 팔다리와 부서진 내장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재생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성녀의 능력이 커졌을지라도, 그 힘은 결국 유진에게서 받는 것이다.


신이 성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부터가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앞으로의 전투에서, 성녀들은 유진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없다.


“하멜. 우리가 당신에게 새로 세례를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나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지.”


유진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너희도 봐서 알겠지만, 나는- 빛의 모든 신력까지는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워.”


모든 ‘빛’을 담아내기 위해 제련한 것이 레반테인이다. 하지만 그렇게 불사르는 레반테인의 불꽃은 너무나도 강해서, 유진조차도 전력을 끌어내기가 힘들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고서는 제대로 쓰는 것이 힘들다. 극한까지 뽑아내는 것은 이그니션을 쓰고서도 부담이 크다.


“모론으로는 부족한 겁니까?”


“성기사와 성녀는 역할이 다르지.”


아니스는 성흔의 욱신거림을 느꼈다. 이 성흔은 ‘진짜’다. 예전처럼, 빛의 샘에서처럼, 교황이나 추기경의 것처럼 억지로 새긴 것이 아니다. 신실하고 신앙하여 절로 새겨진 것이다.


모론은 강하다. 그는 빛과 전쟁신의 첫 번째 성기사가 되었고, 신의 대전사가 되었다. 하지만 유진이 말한 것처럼 성기사와 성녀는 역할이 다르다. 결국 모론에게는 성녀와 같은 ‘신앙’이 없기에, 성흔은 새겨지지 않았다.


“그렇군요.”


아니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멜, 당신은- 나를 새로운 천사로. 크리스티나를 새로운 성녀로. 그렇게 우리 둘을 화신으로 삼으려는 것이군요.”


“맞아.”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빛의 신력은 너무 거대해서, 신성을 얻은 나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워. 나는, 내가 쓸 수 없는 신력을 너희에게 연결할 거다. 그리고 양손의 성흔을 문으로 삼아 신력을 뽑아낼 거다.”


“…….”


“아니스, 너는…… 300년 전에 겪어봤으니 알겠지. 세례를 받으면, 기적을 쓸 때 아플 거야. 피를 흘릴지도 모르고.”


“하멜. 당신은 300년 전 제가 성흔에서 피를 쏟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실 때마다 찾아와 상처를 돌봐주었지요. 그럼에도 당신은 제게, 크리스티나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겁니까?”


돌아온 질문에 유진은 한 번 눈을 감았다.


“그래.”


눈을 뜨고 대답했다.


“피도 닦아주고 상처에 연고도 발라줄 테니까. 마왕을 다 죽일 때까지만 참아라.”


“아하핫.”


그 말에 아니스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옛날처럼 직접 상처를 돌봐준다면 얼마든지 고통은 감내하겠습니다. 애초에 이번 생에서, 당신은 항상 죽기 직전까지 고생했죠. 그런데도 성녀인 저희는 큰 고통 없이, 뒤에서 기도만 했습니다.”


아니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저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것이 성녀의 역할일지라도, 유진 님만을 가혹한 사선에 세우는 것이 싫었습니다. 저도 유진 님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함께 싸우고 싶었습니다.”


크리스티나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러니 저희는 이 세례를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신이여, 감히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마왕을 죽일 때까지라고 하셨지요. 아니, 부족합니다. 모든 마왕을 죽이고, 베르무트 님과 세상을 구할 때까지. 저희는 웃으며 피를 흘리겠습니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길을 비켜주었다. 욕실에서 뜯어 온 욕조에는 금색의 물이 고요히 담겨 있었다.


“핏물일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물이랑 섞으니 저렇게 되더라.”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성녀들을 빤히 보았다. 욕조 앞에 선 성녀들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 쯧 혀를 찼다.


“계속 보고 있을 겁니까?”


“어?”


“욕조에 들어가는데, 옷은 벗고 들어가야 할 것 아닙니까.”


“어…… 입고 들어가도 상관없지 않나…….”


“찝찝해서 싫습니다.”


“아니 근데…… 몸만 담그고 끝은 아니란 말이야. 내가 너희 성흔을 좀 만지면서 조율도 해야 하는데…….”


그 대답에 아니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300년 전에야 등만 보여주고 말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하멜에게 알몸을 선뜻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크리스티나는 그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이건 굉장히 성스럽고 순결한 의식입니다……! 시스터께서는 대체 무슨 음탕하고 마귀스러운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크리스티나가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니스는 이제는 익숙한 음해를 무시하고서 욕조에 발부터 밀어 넣었다. 찰랑거리는 금색 물결이 발목을 지나 종아리를 적셨을 때. 아니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뜨거워.’


피부를 가르고 불길이 스며드는 것만 같다. 아니스는 한 번 호흡을 고르고서 욕조에 들어갔다.


“읏…….”


“괜찮냐?”


유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대신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크리스티나도 똑같았다. 분담하기에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이리라.


“…….”


시엘은 우두커니 서서 그 모든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일단, 몸을 씻고, 향수를 뿌리고, 옷을 새로 입은 것이 멍청한 짓이란 것은 받아들였다. 지금 성녀들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쁜 호흡을 이어가고 있고, 유진은 그런 성녀를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다…….


“어…… 음.”


시엘은 슬며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 나는 갈게.”


이럴 거면 나는 왜 부른 거야? 시엘은 내심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이 그럴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란 것은 코흘리개도 알 것이다.


“가긴 어딜 가?”


닫힌 문으로 물러가던 시엘의 몸이 멈췄다.


“이리 가까이 와봐.”


“왜…… 왜?”


“빨리 와.”


평소답지 않은 고압적인 태도.


시엘은 알 수 없는 설렘을 느끼며 슬금슬금 유진에게 다가갔다.


빌어먹을 환생 546화


둥실 떠오른 의자가 유진의 앞에 놓였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시엘은 침을 꼴깍 삼키며 의자에 앉았다.


무릎과 무릎이 맞닿는 거리. 시엘은 코앞에 있는 유진의 얼굴을 보며 콩닥거리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


불과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시엘은 땀이 찬 손을 꾹 쥐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시엘의 눈에 유진의 오른쪽 뺨에 사선으로 그인 흉터가 보였다.


“그…… 그 흉터.”


가비드 린드먼과의 결투에서 남은 흉터다. 결투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팔다리는 순식간에 복원한 주제에, 저 뺨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작 유진은 뺨의 흉터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멜일 적에는 얼굴과 전신에 흉터를 가득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조금, 아주 조금, 흉터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이런 흉터는 전사로서의 관록을 더해주기도 하고, 본판이 잘나도 너무 잘난 탓에 흉터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시엘의 감상도 유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년 전에 비해 덥수룩해진 머리와, 오른쪽 뺨에 사선으로 그인 흉터와, 조금 더 날카로워진 눈매와, 오똑한 콧날…….


13살 적부터 셀 수 없이 많이 봐온 얼굴이지만,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서 보고 있으니 묘한 감흥이 들었다.


“……안 아파?”


하지만 흉터를 두고서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시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이미 다 아물었는데 왜 아파?”


“그…… 환상통이라는 게 있잖아.”


“아무렇지도 않아. 간지럽지도 않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었다. 가뜩이나 가까운 거리가 더욱 좁혀지고, 시엘의 시야는 유진의 얼굴로 가득 찼다. 훅 다가오는 숨결.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뒤로 몸을 당겼다.


“가만히 있어.”


큼직한 손이 시엘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거리를 벌릴 수가 없었다. 이 상황. 시엘의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설마, 설마? 이 묘하게 강압적인 태도. 진지한 표정. 어깨를 잡은 손아귀의 악력. 이렇게 사로잡혀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시엘에게 간질거리고 알 수 없는 설렘을 주었다.


‘서…… 설마…….’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입술이 찰싹 닿는다. 설마, 설마. 수백 수천 번 품었던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일까? 시엘은 혹시 모를 기대를 느끼고서 입술을 슬며시 내밀었다.


“으으…….”


유진의 뒤에 놓인 욕조에서는 성녀들이 성수에 잠겨 고통을 참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서 흘러나온 신음은 시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 시엘의 눈에는 오직 유진만이 보였고, 귀는 유진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


“……응?”


“눈 크게 떠봐.”


“누…… 눈은 갑자기 왜?”


“왜긴 왜야, 마안 좀 보게.”


하긴.


‘이 새끼가 그럴 리가 없지…….’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엘은 은근히 내밀고 있던 입술을 집어넣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유진이 시킨 대로 왼쪽 눈을 크게 떴다.


“마안 검사는 저번에도 했잖아. 이제 와서 또 하는 이유가 뭐야?”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다르잖아.”


“아, 그러셔. 참 잘 나셨네. 그런데 네가 하는 거야? 세냐 님은 어디 가셨어?”


“걔는 숲의 엘프들한테 갔어. 1년 만에 다시 보는 것이기도 하고, 세계수에서 겪은 일들도 보고할 겸.”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현재 라이언하트의 숲에 사는 엘프들 중에는 마병(魔病)에 걸린 엘프들이 많다. 당장 엘프들의 대표 역할을 맡은 시크나드도 마병에 걸렸다. 그들은 자의와 상관없이 이 숲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당연히 세냐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300년 전 전쟁이 끝났음에도 마병은 사라지지 않았고, 유폐의 마왕도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손을 뗐다. 과연 그것이 진실일지 아닐지는 모를 일이지만, 엘프를 가족으로 여기는 세냐로서는 마병만큼은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예전에도 몇 번이나 치료를 시도했지만 성공한 적은 없다. 마법으로도, 신성마법으로도 엘프의 마병은 고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법의 신성에 도달한 지금이라면 혹시 모를 일. 그래서 세냐는 지금 엘프의 마을에 간 것이다.


“눈 좀 더 크게 떠봐.”


“이 이상 어떻게 더 크게 떠? 이거보다 크게 뜨려면 눈 찢어야 돼.”


“은근히 눈이 작네……. 어릴 때는 되게 컸던 것 같은데.”


중얼거리는 말에 시엘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는 참지 않고 발끝을 세워 유진의 다리를 걷어찼다. 효과는 없었다. 유진의 다리는 고목처럼 단단해서, 걷어찬 시엘의 발만 아팠다.


“가만히 있어.”


의자가 덜컹, 흔들렸다. 유진은 시엘의 어깨를 조금 더 강하게 쥐면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러자 둘은 정말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또다시 시엘의 시야에 유진의 얼굴이 가득 찼다.


‘피부…… 피부 괜찮나?’


매일 땀 흘려 수행하는 몸. 굳이 관리하지 않아도 탱글탱글하고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지만, 시엘은 괜한 걱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유진은 시엘의 피부 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집중해서 시엘의 왼쪽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화륵. 유진의 오른손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엷은 불꽃에 휘감긴 손이 시엘의 뺨을 지나, 왼쪽 눈동자로 향했다. 시엘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그대로 있어.”


유진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시엘의 왼쪽 눈동자에 닿았다. 홍채에 불꽃이 닿았음에도 화끈거림은 없었다. 오히려 눈을 씻는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파직.


불꽃을 이룬 신력이 시엘의 눈동자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이리스 전 이후로 시엘의 눈동자에는 2개의 마안이 깃들었다. 아이리스가 가졌던 암전의 마안과, 누아르가 이름 붙인 부동의 마안.


저 마안들이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시엘에게 문제없이 깃들었다는 것은 그때 확인했다. 그러니 치료할 필요는 없다. 그러고 싶어도 치료할 수가 없다.


시엘이 마안을 갖게 된 경위.


그때 유진은 월광검의 폭주에 휘말렸다. 의식은 어딘지 모를 허무로 날아갔고, 육체는 월광검과 동화되었다.


그때 유진을 구한 것이 시엘이다. 라이언하트의 피가 월광검에 감응했고, 시엘의 의식은 유진과 마찬가지로 허무로 날아갔다. 그렇게 시엘은 베르무트와 잠시 만났고, 유진과 함께 허무를 빠져나왔다…….


‘이 마안은…… 아마 베르무트가 준 거야.’


당시 베르무트는 유진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상황 자체는 인지하고 있던 모양이다. 마왕과의 전투. 고전을 면치 못하던 전황.


왼쪽 눈동자를 부수고 들어 온 어둠이 눈동자에 녹아들어 암전의 마안이 되었다. 그렇다면 부동의 마안은? 그때 판단하기에, 저 부동의 마안은- 시엘의, 정확히 말하자면 시엘이 가진 라이언하트의 피에 처음부터 깃들어 있던 것이리라.


‘라이언하트는 인간이다.’


하지만 허무 속에 앉은 베르무트와, 라이언하트의 시조와 만난 것으로 시엘의 마안이 발현했다.


당장 시엘의 마안을 없앨 수는 없다. 부동의 마안은 몰라도, 암전의 마안은 바벨에서 모론을 불러올 때 필요하다. 만약 시엘을 성기사로 서임한다면 마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유진은 우선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마안을 통해 다시 한번 베르무트와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


유진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베르무트와 만났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상태로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다.


“아프면 말해.”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시엘의 눈동자를 더듬었다.


아프지는 않다. 화끈거림도 없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처음에야 눈이 시원했지만, 불꽃이 스며들수록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응.”


참을 만했다. 시엘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무릎을 움켜쥐었다. 유진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유진의 의식이 불꽃에 녹았다. 그는 육신을 떠나 시엘의 마안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마안의, 시엘의 심부로 잠수했다.


그 과정에서 첫 번째 목적은 달성했다. 성기사로 서임할지라도 이 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애초에 이것은 마족의 마안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 시엘만의 권능이 되어 있다. 설령 그 근원이 마(魔)에 의한 것이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불안정해.’


느낄 수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피에 존재하는 인자는 300년이 지났는데도 희석되지 않았다.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떠올랐다. 가문의 수치. 마왕의 잔재에 홀려, 형제와 친척을 제물로 바쳐 마왕이 되려 했던 병신. 이오드가 극히 적은 제물로 의식의 완성을 목전에 둘 수 있었던 것은, 마왕의 잔재의 도움 때문만은 아니다.


이오드가 라이언하트기 때문이다. 놈이 제물로 고른 것이 라이언하트였기 때문이다. 용사의 후손이라는 라이언하트의 피는 역설적이게도 마왕과 가깝다.


‘멸망의 마왕.’


당황하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근원이 멸망의 마왕과 밀접하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 하지만 라이언하트의 피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유진에게 여러 경각심을 주었다.


베르무트는 세상을 구하기를 원했다. 그런 것쯤은 300년 전부터 알았다. 놈은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았지만, 당시의 동료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 모두도 알고 있었다. 빛이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 베르무트는 용사다. 끝까지 성검은 놈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베르무트는 성검을 쥐고 마왕을 죽였다.


그런 놈이 왜…… 이렇게나 불안한 피를 남겼는가. 왜 어울리지 않게 열중하여 후손을 늘렸는가. 답은 알고 있다. 하멜을 후손으로 환생시키기 위해서다.


왜?


백염식을 계승시키기 위해? 가문을 통째로 넘겨주고 싶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육신이라는 시작을 주기 위해? 그런 이유도 있겟지만, 유진은 더욱 본질적인 이유에 주목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라이언하트의 피가 필요하다. 그래서 베르무트는 피를 남겼다. 3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그릇에 ‘아가로트’라는 내용물을 담았다.


“편법이군.”


예상했던 목소리가 들렸다.


철그럭거리는, 익숙한 사슬 소리. 유진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이런 식으로 만난들 그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슬의 옥좌에 앉은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 옥좌의 뒤. 마찬가지로 사슬에 칭칭 감긴 ‘문’이 보였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에는 유폐의 마왕과, 옥좌와, 문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곳은 유진의 방도 아니고, 시엘도, 성녀들도 없다.


“의식만이 날아왔나.”


“네가 그것을 바라였지.”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


“너는 참으로 집요하구나. 네가 ‘편법’으로 베르무트를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기억하고 있나?”


“월광검에 용언 마법을 썼을 때.”


“그때도 내가 너를 가로막았지. 그리고…… 월광검이 폭주했을 때. 생각해 보면 너에게 감사를 듣지 못했군.”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때 내가 너를 붙들지 않았다면, 너의 혼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너의 아집과 실수에 의해 모든 것이 실패했겠지.”


“정작 너는 내 실패를 바라지 않잖아.”


유진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러니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나를 죽이지 않았지.”


“약속이니까.”


유폐의 마왕이 대답했다.


“이 약속에 공을 들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니. 이렇게나 공을 들였으니…… 기왕이면 나도 만족을 얻고 싶거든.”


“그렇다면 자살이라도 하지 그러냐. 네가 혼자 죽어준다면 좋을 텐데.”


“하하.”


유폐의 마왕이 조금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내 만족이 무엇인지 홀로 짐작하는 모양이군.”


“대충 생각은 해봤지. 남들은 다 뒈지는데 혼자만 뒈지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세상을 정복해도 군림하지 못하고 멸망에 죄다 휩쓸리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네가, 왜, 베르무트와 약속을 맺어 300년이란 유예를 주었는지. 그로 인해 네가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지.”


유폐의 마왕은 말없이 웃었다. 유진은 그 미소를 마주하고서 입술을 비틀었다.


“넌 멸망을 끝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네가 아무리 강한 대마왕이라고 해도 멸망은 끝낼 수 없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모든 것이 사라진 바다에서 혼자 남는 것뿐이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 앞으로 걸었다.


“나는 그런 경험은 해본 적 없지만, 상상 정도는 할 수 있지. 아주 끔찍한 기분일 거야. 수십 년 주기로 겪는 것도 아니고 수백 수천 년을 반복해 왔으니.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너에 대한 경외가 들더라.”


유진은 멈추지 않고 유폐의 마왕 앞에 섰다.


“너. 대체 얼마나 죽고 싶어 했던 거냐?”


유폐의 마왕은 말없이 유진을 응시했다.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허무히 죽을 수는 없는 몸.”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내 갈망을 섣불리 결정하지 마라, 유진 라이언하트. 나는 네게 많은 자비를 베풀었지만…… 내가 평생에 걸쳐 품은 갈망을 속단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지나친 모독이구나.”


“자살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로군.”


“그럴 수 있다면 아주 오래전에 그러했겠지.”


유폐의 마왕은 마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에 대해 말하고, 너의 감상을 끌어내고, 이해시키는 것은 내가 살아온 영겁에서도 손에 꼽을 즐거움이겠지만…… 지금의 네게는 그리 해 줄 이유가 없구나. 이곳은 바벨도 아니고, 너는 내 앞에 설 자격을 얻지 못했으니.”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는 것이 자격이냐?”


“그녀를 죽이고서 바벨에 오르겠다 결정한 것은 너다.”


“좋아. 널 이해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바벨에서 널 죽이기 전에 사연 정도는 들어주지.”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유폐의 마왕을 지났다.


지나치려고 했지만, 치솟은 사슬이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으로 들어가길 원하나.”


“그러기 위해 여기 온 거야.”


“지금 만난들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아.”


“대화가 가능할지도 확실하지 않다.”


“알아.”


유진은 사슬에 감긴 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그 새끼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온 거다.”


“…….”


“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끝낼 거니까.”


앞을 가로막았던 사슬이 천천히 내려왔다.


“마지막이다.”


유폐의 마왕이 속삭였다.


“이 만남이, 내가 너에게 베푸는 마지막 온정이다. 동시에 이건, 나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에게 갖는 동정이기도 하다.”


“어, 그래.”


문을 감은 사슬의 일부가 풀렸다. 그렇게 문이 살짝 열렸고, 유진은 그 틈을 향해 발을 뻗었다.


“수고하고.”


유폐의 마왕의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들어가고.


눈을 한 번 감고, 떴다.


전에도 보았던 곳.


허무를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삭막한 세계.


깊게 파인 상처의 중심.


사슬에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베르무트가 보였다.


빌어먹을 환생 547화


여러 감정이 북받쳤다.


몇 번이나 지금의 베르무트를 보았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진짜’ 베르무트와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너무 늦게 만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저 새끼와는 진즉에, 어떻게 해서든 한 번은 만났어야 했다. 한 번이라도, 잠깐이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아니.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상태일지라도. 환영이나 남의 기억에서가 아닌, 직접 한 번은 봐야 했다.


“어이.”


유진은 허무로 나아갔다. 이곳은 그 무엇도 살 수 없는 세계다. 라이자키아가 처박히고 망령과의 전투에서 빨려 들어간 차원의 틈새와는 다르다. 이곳은 살아 있는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허무를 만든 멸망뿐이다.


그렇지만 베르무트는 이곳에 있다. 유진도 의식일 뿐이지만 이곳에 도달했다. 유진은 그 사실을 굳이 해석하려 들지 않았다. 이미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는 일이고, 그리고.


300년 만에 이룬 해후를 잡스러운 생각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야.”


유진은 다시 한번 베르무트를 불렀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의식이 뒤흔들렸다.


도달은 했다지만 중심까지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멸망의 마왕을 처음 보았을 때와 똑같다. 놈이 그저 바라만 본 것으로 절망과 광기를 끌어냈듯이, 이곳은-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절망과 광기가 치민다.


하지만 유진은 억누를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 생전 처음 와본 것이 아니니까. 머나먼 과거. 유진이 유진이 아니고, 하멜이 하멜이 아니던 옛날.


전쟁신 아가로트는 이곳에 왔었다. 신군에게 죽음을 명령하고, 그 모든 죽음을 본 뒤에, 아가로트 본인도 죽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죽었다.


“살아 있냐?”


유진은 이곳이 어디인지 확신했다. 이곳은 아가로트가 죽었던 멸망의 마왕의 배 속. 멸망의 중심이다.


유진은 베르무트가 앉은 곳을 주목했다. 움푹 파인 상처. 먼 옛날, 아가로트가 베었던 곳. 베르무트는 그 중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니면 죽었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말을 잇기가 힘들어진다. 걸음걸이도 무겁다. 간신히 쥐어 짜낸 목소리가 과연 베르무트에게 닿았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무 말이라도 해야 했다. 베르무트가 듣고 있는 것인지, 대답할 수 있는 것인지는 당장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 개새끼야.”


기왕이면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놈이 정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라면 어쩔 수 없는 일. 그렇다면 유진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베르무트에게 욕을 퍼붓는 것이다.


“이 X새끼야. 내가 씨X, 너 때문에 얼마나 X같이 힘들었는지 아냐? 아오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이 개새야, 네가 진즉에 뭐라도 말했으면 지금 이 꼴도 안 났을 것 아냐?”


베르무트에게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저 새끼는 그 계획을 정말로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꼭꼭 숨기고 있었다. 바벨에 오르기 전. 베르무트가 최소한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씹새야, 그때 네가 나한테, 절대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뒤에서 얌전히 숨이나 쉬라고 했으면 됐잖아. 어? 괜히 자살하려 들지 말고! 그냥 얌전히! 따라만 와서! 그냥! 같이 올라가자고만 하면! 됐잖아!”


생각하고 말을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당연히 유진은 화를 참지 않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그랬으면! 나도 병신처럼 자살하려고 들지 않았…….”


“정말 그랬을 것 같나?”


갈라지고, 쉬어버리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쏘아붙이던 외침을 뚝 멈췄다. 사슬에 묶인 의자. 어깨와 머리를 축 늘어트리고 있던 베르무트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하멜.”


감고 있던 눈동자가 뜨였다. 탁하고 바랜 금색 눈동자가 유진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유진의 숨이 멎었다.


유진이, 하멜이 기억하는 베르무트의 눈동자는 저렇게 탁하지도, 바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눈동자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300년 동안 베르무트가 보낸 시간이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 고문이었는지를.


“만약 내가, 그때, 네게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하멜. 너는 정말로…….”


“아니.”


유진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 나는, 그때 네가 무슨 말을 했어도 듣지 않았겠지.”


욱해서 쏘아붙이기는 했다만, 사실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바벨에 오르기 전 베르무트에게 언질을 들었다면. 가령, 바벨에서 무리하지 말라거나…… 반드시 살아서 유폐의 어전에 올라가야 한다거나…… 이런 말을 들었다면.


아주, 아주 조금. 듣는 시늉은 했을 거다. 그리고 베르무트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멋대로 해석했을 거다.


무리하지 말라고? 그런 얘기는 항상 들었던 말. 반드시 살아서 유폐의 어전에 올라가야 한다고? 그래, 뭐, 여기까지 5명이 영차, 영차 힘내서 왔으니까.


“나는 결국 거기서 죽었을 거야.”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거다. 당시 하멜은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몸뚱어리로 더 이상 바벨을 오를 수는 없다. 동료들의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 남들이 다 괜찮다고 말해도, 하멜 본인이 그런 처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하멜은 자살했다.


“거 봐라.”


베르무트의 입술이 움직였다. 메말라 갈라져 색이 없는 입술이 엷은 곡선을 그렸다.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어도…… 너는 듣지 않았을 거다.”


“아니, 새끼야. 그럼 말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했으면 됐잖아. 그때 내 몸 상태도 병신이라 저항도 할 수 없었는데, 네가 나를 억지로 끌고 갔으면…….”


“생각해 봐라. 하멜.”


베르무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때…… 모든 것의 결말을, 추구하던 끝의 완성을 목전에 두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아주 조금이었지. 아주 조금. 유폐의 방패는 죽였고, 유폐의 지팡이도 죽이기 직전. 남은 것이라고는 유폐의 칼뿐.”


“…….”


“유폐의 칼은 강하지만, 그는 정통적인 검사였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온갖 함정과 저주를 퍼붓던 유폐의 지팡이보다는 덜 까다로웠지.”


“…….”


유진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베르무트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짓고서 유진을 향해 속삭였다.


“나는 매사 철저했다고 생각한다만, 그 순간에는 아주 조금 긴장이 풀렸다. 이제 정말로 머지않았다고. 정말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는 생각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어…… 음…….”


“유폐의 지팡이가 발악처럼 남긴 저주가 나에게 쇄도했을 때. 나는, 반응이 조금 느렸다. 하지만 피하거나 방어하지 못할 만큼 늦은 것은 아니었지.”


“…….”


“그 순간에 네가 움직인 거다. 하멜.”


“크흠…….”


“나는 바벨에서부터 쭉 너의 움직임을 주목했다. 네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유폐의 지팡이와 싸웠을 때의 이그니션에 네 마지막 전투가 되리란 것도 알았다. 그래서 더욱, 그 순간에 너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내 판단으론 너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커흠…….”


“설마 그 순간, 그 상태의 네가 움직여서 내 앞을 막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지. 그것이 300년 전, 내 두 번째 실수였다.”


베르무트는 그렇게 말하고서 눈을 감았다. 유진은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괜히 입술만 우물거렸다.


베르무트의 말은 대부분 옳았다. 유폐의 지팡이, 베리알과의 전투에서 하멜의 몸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부축이 없다면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움직였다. 베리알의 저주가 베르무트에게 쇄도했을 때. 더는 움직일 수 없을 몸뚱이가 움직였다. 베르무트는 저 저주에서 죽지 않을 거다. 상처도 입지 않을 거다.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계속, 이 병신같은 몸뚱이로, 모두의 등을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무트가, 모론이, 세냐가, 아니스가, 가비드 린드먼과 싸우고,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곳은 마왕성 바벨. 제 몸도 가누지 못할 병신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병신이 가만히 후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방해가 된다. 동료들은 절대로 하멜을 버리려 들지 않을 거다. 아무리 치열한 전투에서도, 하멜이 휘말리지 않도록 후방을 신경쓸 거다.


하멜은 도저히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병신같은 몸뚱이를 들고서 동료들의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음…… 미안.”


결국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알겠지, 베르무트. 그때 내가 몸을 던진 것은- 너를 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야. 그냥, 나는…… 죽고 싶었던 거다. 너를 구하고 죽는다는, 그런 등신 같은 만족을 얻고서 죽으려 했다.”


“하멜.”


베르무트가 감았던 눈을 뜨며 대답했다.


“이것은 네가 사과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너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순히 나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된 자신의 삶을 끝내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 너는…… 그런 성격이었지. 내가 방심했고, 판단이 느렸을 뿐이다. 최후에 네게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래.”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했다. 그 뻔뻔한 대답에 베르무트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베르무트는 마른 웃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변하지 않은 것 같군.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오히려 300년 전보다 뻔뻔해진 것 같다.”


“대뜸 한 살배기 애새끼로 환생해서 맨정신으로 코흘리개들이랑 어울리려면 뻔뻔해져야지.”


“하하. 네 환생을 안배할 때. 네가 아직 어린 나이에, 많은 것들을 참지 못하고 날뛰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가장 걱정되기는 했지.”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내가 마지막에 감정적으로 자살하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꽤 냉정한 사람이야. 내가 300년이나 흘러서 네 후손으로, 멀쩡히 전생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겠지.”


아직도 생생하다. 하멜로 죽고, ‘응애’ 소리를 내며 깨어났을 때. 멋대로 울음이 터져 나오는 목과, 뜻대로 가눌 수 없는 갓난아기의 몸뚱이. 그러던 중에 들었던 목소리.


-건강한 아들입니다.


-이름은……


-유진.


출산을 갓 마친 어머니의 목소리.


-유진 라이언하트.


그 이름을 들었을 때의 감정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하멜 다이너스의 삶이 끝나고, 유진 라이언하트의 삶이 시작된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때는 있었지.”


빠르게 걸음마를 떼고, 그럭저럭 생각한 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위대한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어 전쟁을 끝냈고, 아직 세상에 2명의 마왕이 살아 있으며, 마경은 헬무드 제국이 되었고, 베르무트와 아니스는 죽었고, 세냐와 모론은 은거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목이 쉴 때까지 오열했다. 방에 있는 모든 것을 때려 부쉈다.


“베르무트.”


유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베르무트를 불렀다.


“나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너를 만났을 때. 너와 대화하게 되었을 때. 대체 무엇을 물어볼지.”


“…….”


“대체 왜 약속을 맺은 거냐. 약속이란 대체 뭐냐. 왜 너는 나를 환생시킨 거냐.”


“하멜.”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너는 약속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네가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 가능하고 불가능하고와 상관없이, 네가 그렸던 결말에는 무조건 내가 필요했다.”


베르무트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약속의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추측뿐이지. 이 세상은 300년 전에 멸망해야 했다. 하지만 네가 약속을 맺어서, 멸망이 지금까지 미뤄졌다. 유폐의 마왕은…… 전쟁을 멈췄고, 너는 멸망의 마왕을 붙잡았다.”


“…….”


“왜, 나를 환생시켰나. 그 이유도 안다. 너는 내가 아가로트의 환생이란 것을 처음부터 알았지. 그래서 나를 동료로 만들었어. 하지만 내가 병신같이 뒈져 버렸으니, 나를 다시 환생시킬 수밖에.”


“하멜.”


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한 것들은 옳다. 네가 가졌던 의문들. 너는 이제 대부분의 답을 알고 있지.”


“그래.”


“하지만 네가 아직 묻지 않은 것이 있다. 너는, 지금, 물어볼 수 있다. 내가 네 앞에 있으니까.”


“…….”


“내가 누구인지.”


베르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사슬에 묶인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손을 움직였다. 손목에 걸린 사슬 족쇄가 철그럭 소리를 냈고, 베르무트의 손이 가슴에 얹어졌다.


“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대체 누구인지. 정말로 인간이 맞는지. 너는 내가 인간이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내 본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돼.”


유진이 내뱉었다.


“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잖아. 그거로 충분해. 모론도, 아니스도. 심지어 너한테 가슴에 바람 구멍이 나서 뒈질 뻔한 세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


“우리한테는 그것으로 충분해. 네가 베르무트라면, 우리도 너를 베르무트라고 여기는게 당연한 거다.”


“하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심했단 말이야. 너 세냐한테 뭐 악감정이라도 있었냐? 왜 애 가슴에 구멍을 뚫어, 구멍을. 그래서 세냐가 뒈질 뻔…… 아니, 아니지. 세냐가 말하길, 자길 공격했을 때의 너는 많이 이상한 상태라고 했어. 네가 아닌, 다른 존재 같았다고.”


꾸욱. 베르무트는 가슴을 움켜쥐며 입술을 씹었다. 유진은 그것을 못 본 척하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뭐,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것은 아니야. 지금도 그렇지만 300년 전의 세냐는 진짜 한 대,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을 때가 많았거든.”


그렇다고 가슴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만.


“그리고 나도 가끔, 화가 너무 머리끝까지 나면 이성을 잃고 날뛴 기억이 있고…… 월광검이 폭주했을 때도, 내가 싸우는 것인데 내가 아닌 것 같았지. 뭐, 너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


“하멜.”


베르무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네가 지금 하는 말은 결국 나를 억지로 외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게 씨X 뭐 어쨌다는 거냐.”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


“우리한테는 그걸로 됐다는 거다. 우리는 네가 뭐하는 새끼인지 굳이 네 입으로 듣고 싶은 생각은 없다.”


“외면하여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듣지. 나중에, 나중에…… 전부 다 끝나고. 너를 그 개 같은 의자에서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우리가, 전부 다 같이, 널 둘러싸고서, 흠씬 두들겨 팬 뒤에.”


“…….”


“그때 들을 거다.”


베르무트는 입술을 닫고 침묵했다. 저 말이 진심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건 하멜은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변하지 않았구나.”


닫혔던 입술이 열렸다.


“나는, 너와…… 세냐와, 아니스와, 모론에게…… 내가 누구인지. 약속이 무엇인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전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전할 수 있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전하지 못했던 것은, 나의 함구(緘口)조차 약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 하멜, 네가 나의 정체에 대해 물을지라도……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대답해서는 안 된다.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유폐의 마왕뿐이다.”


“그 새끼는 왜 그딴 약속을 건 거야?”


“유폐의 마왕은 몇 번이나 운명의 시작과 끝을 보았고, 셀 수없이 많은 인과를 사슬에 묶어 유폐했다. 그에게 있어서 멸망이 유예된 300년은 존재해서는 안 될 이상(異常)이며, 그 자체를 관측하길 원하는 거다.”


“정작 유폐 그 새끼는 은근슬쩍 이런저런 일에 간섭하던데.”


“운명에 어긋난 가능성마저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서지. 나와 약속을 맺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베르무트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처절하고 피폐한 자는 수많은 인과를 매었기에 운명에 애증을 갖고 있다. 어떻게든 운명의 바뀜과 결말을 원하면서,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절망하고 있지. 동시에 그는 존재의 의지가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본인이 그러지 못하기에, 더더욱, 운명을 벗어난 존재의 자유를 사랑한다.”


“…….”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내 입을 틀어막았다. 멸망이 유예된 300년. 나는 함구했고, 세냐는 마법에 매진했다. 모론은 왕국을 세웠고, 아니스는 죽음을 택했다. 그 모든 것이 지금에 도달하는 흐름이 되었다. 만약 내가, 함구하지 않았다면. 모두에게 내가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 말했다면.”


베르무트는 유진을 똑바로 보며 속삭였다.


“과연 지금의 네가 있을 수 있을까. 어모든 진실을 미리 알고 철저하게 준비된 네가 지금의 너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나? 너는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것을 얻었으며, 지금 여기에 있다.”


철그럭. 족쇄에 붙들린 손이 가슴을 떠났다. 베르무트는 의자에 팔을 걸치며 말을 이었다.


“내 존재. 약속. 300년 전의 목적. 그 모든 것은 바벨의 어전에서 유폐의 마왕이 말할 거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난 뒤에 네가 결정하는 것이 ‘마왕’이 내리는 마지막 시련이다.”


“허.”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새끼 아주 변태 새끼네.”


사슬을 칭칭 감고 다닐 때부터 예상해야 했는데.


빌어먹을 환생 548화


유진의 투덜거림에 베르무트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의 진지한 분위기의 대화에서 튀어나온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붕 뜨고 저렴했기 때문이다.


“큭큭.”


조금 뒤, 베르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을 때마다 팔다리를 구속하고 의자까지 붙들어 맨 사슬이 흔들리며 철걱 소리를 냈다.


“듣고 보니 그렇군. 유폐의 마왕의 성격은 변태 같은 구석이 있지.”


물론 유폐의 마왕은 취향적인 이유 때문에 사슬을 두르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유폐의 마왕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사슬이 연결되고, 그를 상징하는 권능이 사슬인 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멜.”


베르무트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나는 내 본질과, 약속에 대한 모든 진실을 네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뭐.”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으로 끝나서 이어지는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베르무트는 ‘함구’라는 약속을 피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안 해도 돼.”


“내가 아까 했던 말을 기억하나.”


“말 더 안 해도 된다고.”


“네 죽음을 가로막지 못한 것이 내 두 번째 실수였다는 말.”


“…….”


“내 첫 번째 실수는.”


듣고 싶지 않다. 유진은 주먹을 꽉 쥐고서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


“이 세상에 태어난 거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결국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


“내가 태어났기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야.”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개소리하지 마.”


유진은 참지 못하고 걸음을 떼었다. 그렇지만 베르무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더 이상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거 안 치워?”


“불가침의 봉인이다. 아무리 너라도 육신 없이는 이 봉인을 지날 수 없다. 그러니 하멜, 너는 그 자리에 서서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아가리 닥쳐.”


이러는 것 자체가 유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베르무트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놈이 멸망의 마왕과 관련된 존재라는 것은 진즉부터 알았다.


베르무트의 정체? 그게 뭐가 중요한가. 유진에게, 세냐에게, 아니스에게, 모론에게는, 베르무트의 정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저 녀석은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 인간이건 무엇이건,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란 말이다.


놈은 300년 전에 용사였다. 비록 빛이 베르무트를 인정하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에게, 모두에게, 베르무트는 용사였다.


유진은 ‘우둔한’ 하멜이라는 별명을 싫어한다. 신실한 아니스니, 현명한 세냐니, 용감한 모론이니, 그런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어린 나이의 유진은 배를 잡고 웃었다.


유진이 아는 세냐는 현명한 구석보다는 감정적이고 멍청했다. 아니스는 마냥 신실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매일 술을 마셨고, 세상을 구하지 않는 빛에 애증을 가졌다. 모론? 놈이 용감하게 굴었던 것은 그냥 등신이었기 때문이다. 우둔한 하멜? 그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음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다르다. 그리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베르무트는, 녀석은, 정말로 위대했다. 위대한, 용사였다. 300년이 흘렀다. 지금 시대의 용사는 유진이다.


그렇다고 해서 베르무트가 용사가 아니게 되는가? 300년 전 용사였고, 약속으로 전쟁을 끝냈으며, 그때 왔어야 할 멸망을 300년이나 유예시킨 것은 베르무트다.


“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고, 용사다.”


여전히 침묵하는 베르무트를 향해 내뱉었다.


“그리고 우리의 동료지. 낯 간지러운 얘기라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하고 싶지 않다만, 넌 이런 것을 두고 놀릴 성격도 아니니 직접 말해줄게. 넌, 친구야. 우리들의 친구. 내 친구.”


베르무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유진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우우우우…… 세상이 흔들렸다. 베르무트를 중심으로 한 불가침의 봉인이 유진을 뒤로 밀어냈다. 하지만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악물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치미는 분노에 유진의 이마에 혈관이 불룩 솟았다.


“우리가.”


뚜둑. 유진과 베르무트의 거리가 좁혀졌다. 불가침의 결계는 결국 유진을 밀어내지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유진은 억지로 다가가, 베르무트의 앞까지 갔다.


“널 반드시 구하겠다고.”


베르무트는 고개를 들어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잿빛 머리카락 아래, 핏발 선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똑같이 유진도 베르무트를 보았다. ‘라이언하트’라는 성이 어울리던, 사자와 같던 위용은 지금의 베르무트에게는 희미했다. 녀석은 마모되고 피폐했다.


유진은 그런 베르무트에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언젠가, 반드시, 베르무트를 만나면. 꼭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 베르무트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버리겠다는 다짐.


하지만 정작 베르무트의 앞에 오니 그럴 수가 없었다. 색이 바래고 탁해진 눈동자를 보았다. 핏기없는 얼굴을 보았다. 유진은 입술을 뿌득 씹었다.


“개새끼. 한 대 때리면 그대로 죽을 것 같은 낯짝이네.”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주먹을 내렸다. 툭. 힘을 뺀 주먹이 베르무트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차마 얼굴은 때리지 못하고 어깨를 두드린 것인데, 막상 두들겨 보니 아차 싶었다. 한 대 때리면 그대로 죽을 것 같은 것은 낯짝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찬찬히 살펴보니, 초췌한 것은 몸뚱이도 마찬가지였다. 어깨도 푹 꺼져 있고, 팔다리도 비실비실해서 앙상했다.


“……혹시 방금 그거로 뼈 부러진 건 아니지?”


유진은 어깨에 얹었던 손을 슬며시 들어 올리며 물었다. 베르무트는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유진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날…….”


잠깐의 침묵 뒤에 베르무트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는 손을 떨림을 주먹을 쥐는 것으로 감추었다.


“구하겠다고?”


손의 떨림은 감출 수 있었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감추지 못했다.


저 말 자체는 망령에게도 들었었다. 베르무트가 이용했고, 그래서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하멜에서 태어나 하멜이 아닌 존재. 그는 자신이 죽는 순간에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무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


언젠가 동료들이 구하러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베르무트는 망령에게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저 말에 대한 대답조차도 베르무트에게는 금제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베르무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 입술을 열어서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아무리 바라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끼긱.


사슬이 점점 강하게 죄어왔다. 베르무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바라는 목소리 대신에 가쁜 호흡이 뱉어졌다. 베르무트는 이를 꽉 물고서 주먹을 쥐었다.


쿠구구궁……


갑작스레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뜩이나 괴롭던 멸망의 마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마치 그에 동조하듯이 베르무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야, 너…….”


“그만.”


베르무트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저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갑자기 뭐야? 유폐의 마왕이냐? 그 새끼가 널…….”


“아니, 아니다.”


베르무트는 갈라진 목소리로 답하며 숨을 헐떡였다.


“눈을 뜨려는 거다.”


“……뭐?”


“멸망의 마왕이…… 눈을 뜨려는 거다.”


우우우……


정체 모를 짐승이 울부짖는 것만 같은 소리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소리만 들린 것뿐인데 전신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300년 전에 하멜이 처음으로 멸망의 마왕을 보았을 때. 그리고 먼 과거 아가로트가 처음으로 멸망의 마왕을 보았을 때. 그때와 같은, 감당하기 버거운 공포가 유진의 심지를 흔들었다.


“잘…… 들어라. 하멜.”


베르무트가 고개를 들어 유진을 보았다.


방금 전과 눈빛이 달랐다. 보다 탁하고 초점이 없는 눈동자는, 도저히 베르무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유진은, 저 ‘눈’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몇 년 전. 세냐가 자신의 기억을 마법으로 보여주었을 때. 200년 전의 무덤에서, 베르무트에게 공격받았을 때.


그때 베르무트의 눈동자가 저랬다. 분명히 베르무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도저히 베르무트가 아닌 것만 같은. 유진은 그때 세냐가 했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저렇게’ 되어버린 베르무트에게는 이성이 희미하다. 그렇게 희미해진 이성의 공백을 멸망의 광기가 채워버린다.


“길어야 1년이다.”


베르무트가 핏발 선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멸망은, 즉시 세상을 멸망시킬 거다. 그때는 누구도 멸망을 막을 수 없다.”


“…….”


“내가…… 내가, 잡고 있는 사이에. 끝내야 한다. 모든 것이 늦기 전에, 바벨을…….”


“알았어.”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는 말하지 마라, 베르무트. 그냥 듣기만 해. 우리는 늦기 전에 바벨을 오르고, 유폐의 마왕을 죽일 거다. 그리고 너를 구하러 간다.”


“……하멜.”


“절대로 그걸 잊지 마. 정 버티기 힘들고 X같을 때, 지금 내가 한 말을 떠올려라. 우리는 반드시, 널 구할 거다.”


우우우우……! 소리가 더욱 강해졌고, 세상의 흔들림이 거세어졌다. 지면이 들썩거리며 요동쳤지만, 베르무트가 앉은 의자와 오래전의 흉터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저곳만이 들끓는 멸망 속에서도 고요했다.


정말 그런가? 베르무트의 얼굴을 보았다. 덜덜 떨리는 몸. 점점 충혈되어 붉어지는 눈동자. 그 안에 스멀스멀 번지는 광기. 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었다. 저 흉터와 의자가 고요할지라도, 베르무트는 고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유진은, 베르무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 공간의 폭주에 휘말리지 않도록 물러서려 했지만, 도저히 지금의 베르무트를 외면하고 물러설 수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나? 당장 멸망의 마왕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베르무트의 괴로움을 덜어 줄 방법이라도.


‘……없다.’


광기에 시달리던 모론을 떠올렸다. 그때는 월광검을 통해 모론의 광기와, 레헤인야르 이면의 마력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월광검이 멸망의 검이고, 유진이 완벽하게 월광검을 다뤄냈기 때문이다.


이곳의 마력과 광기는 레헤인야르의 이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월광검 대신 레반테인을 꺼낸들 이곳의 마력은 지워낼 수 없다.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칫하다가는 그러한 시도가 자극이 되어 멸망의 마왕이 깨어날지도 모른다.


“……가라.”


베르무트는 유진의 눈동자에 어린 미련을 읽었다. 그것이 지금 당장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직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베르무트는 매몰찬 어조로 내뱉었다. 그는 간신히 손을 들어서 유진을 향해 펼쳤다.


화악!


유진의 의식이 뒤로 밀려났다. 과거 누아르의 꿈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유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베르무트가 바란 대로 그곳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거대한 흉터 위에 앉은 베르무트의 모습이 멀어졌다. 유진은 부릅뜬 눈으로 베르무트를 보았다. 아직 하고 싶은 욕도 많았고, 나누고 싶은 대화도 많았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음.’


다음이 있다. 이 짧은 해후를 아쉽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유진이 떠났다. 다시 이곳에는 베르무트 혼자만 남았다. 베르무트는 자신의 텅 빈 안을 채워가는 광기와 마력을 느꼈다.


점점,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300년의 긴 잠은 진즉에 선잠으로 바뀌었다. 언제고 멸망의 마왕이 눈을 떠도 이상하지 않다.


‘아직은 아니다.’


그 유폐의 마왕조차도 멸망의 마왕이 완전히 눈을 뜨는 것이 언제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흐려지는 이성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멜이 남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체이니 본질이니 하는 것이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인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늘 하멜에게 들은 대부분의 이야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날 구한다니.”


베르무트는 자조적으로 뇌까렸다.


“그건 불가능해.”


우우우우……! 또다시 세상이 흔들렸다.


방금의 대화에서 미련이나 희망 같은 것을 갖고 싶지 않다. 그러한 감정으로 과거 얼마나 큰 후회를 했던가. 유진은 진심으로 분노하며 베르무트의 말을 부정했지만, 도저히 베르무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는, 이 세상에 태어나 버린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미련과 희망이란 것을 가진 것이다.


차라리.


차라리 태어나지 않고, 이곳에 있었더라면.


베르무트는 팔걸이를 움켜쥐고서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환생 549화


-돌아왔다.


헉하고 숨을 삼키면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시엘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전신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반쯤 녹아 있었다.


유진은 기겁하고서 시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의도했던 대로 베르무트에게 도달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 자체가 시엘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휴.”


다행히 시엘은 탈진했을 뿐. 후유증이 남을 내상 같은 것은 입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유진은 가까이 다가가서 시엘의 얼굴을 붙잡았다. 마안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되어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눈동자가 뒤집혀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면 다시 뒤집을 수밖에.


유진의 손끝에서 화륵 불꽃이 올랐다. 유진은 조심스레 시엘의 눈동자를 어루만졌다. 데굴 구른 눈동자가 본래 위치로 돌아왔다. 유진은 초점 없는 눈동자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문제는 없었다. 마안도 멀쩡했다. 그냥 정신을 잃었을 뿐인가.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동자에서 손가락을 땠다.


그러던 차에 시엘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시야가 흐릿하긴 했지만, 시엘은 정신을 차렸다.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유진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으흠.”


당황하고 민망해서 헛기침을 내뱉었는데, 곧장 후회감이 들었다. 비몽사몽을 핑계로 삼아 입술이라도 내밀었다면, 살짝이라도 닿지 않았을까? 거리는 그만큼 가까웠으니 충분히 닿기는 했을 것이다.


“…….”


다시 생각하니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 가까이 있는 유진의 얼굴을 보니 생각이 휙휙 바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진의 눈동자는-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시엘은 저 모든 감정을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저것들이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란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너…… 왜 그래?”


저런 표정과 눈빛은 유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엘은 더듬거리며 물어보았다.


“나? 내가 뭘.”


“표정이 슬퍼 보여.”


“얼씨구.”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슬퍼 보인다니. 유진은 쯧 혀를 차면서 괜히 뺨을 어루만졌다.


조금 경직되기는 했다. 코끝도 시큰한 것 같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뚱이는 싸움 관련된 재능 외에는 문제가 많다. 특히 눈물샘 쪽에는 뭔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졸려서 그래.”


“뭐?”


“시간이 늦었잖아. 나는 진즉에 잘 시간이라고.”


유진은 투덜거리다 말고 보란 듯이 하품을 했다. 그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시엘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해서는 안 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한테 뭐 했어?”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바다에서와는 달랐다. 그때 시엘은 유진과 함께 베르무트를 보았지만, 이번에는 보지 못했다. 몸 안에 불꽃이 스며들고, 그런데도 뜨겁기보단 시리고, 허한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 시엘의 기억은 거기서 뚝 끊어져 있다.


“너무 깊이 들어갔지.”


베르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시엘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베르무트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가 감당하기 힘들다. 그리고 앞으로는 시엘의 눈을 문으로 삼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서임은 했어. 네가 기절한 사이에.”


“나, 나는 칼로 어깨 두드리고 그런 것 안 해?”


“대신 네 눈동자를 어루만졌잖아.”


모론이 말하길, 서임이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유진이 그러고자 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서임은 이뤄진다.


“…….”


시엘은 잠시 머뭇거리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방금 말을 들으니 서임이 끝났다는 것은 체감할 수 있었다.


지금 시엘의 안에는 백염식의 마나 외에 다른 빛이 깃들어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유진이 보는 앞에서 신성력을 꺼내 보이며 시시덕대겠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왜 자꾸 눈치를 봐?”


“그럼 눈치 보지 말고 뻔뻔하게 굴까?”


“어릴 때는 그랬잖아.”


“대체 네가 기억하는 어릴 때의 나는 뭐였던 거야?”


“재수 없고 건방지고 자기 예쁜 거 잘 써먹는 그런 꼬마였지. 남 눈치 안 보는 대신 남이 자기 눈치 보게 만들고.”


막힘없이 이어지는 말에 시엘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모두가 시엘이 반박할 수 없는 옳은 말이었다.


“그…… 그래도 네 눈치는 많이 봤던 것 같은데.”


“그래? 너 본 지 10년이 넘었는데 오늘 처음 알았네.”


“아무튼, 나는 네 눈치 많이 봤어. 지금도 보고 있고. 그런 표정 짓고 있는데 어떻게 눈치를 안 봐?”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니까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갈 거야. 지금 네 표정이 너무 울적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나와 이야기라도 하면서 풀 수 있는 감정도 아닌 것 같으니까. 알겠어? 내가 널 배려해 주는 거야.”


“얼씨구.”


“왜, 싫어?”


시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아니, 좋아.”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그제야 시엘은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 웃었다.


“성녀 언…… 으흠, 성녀님들은 언제까지 저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글쎄. 나도 이런 경험은 없어서. 그래도 하루는 꼬박 걸리지 않을까.”


“온종일 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어야 하는 거야? 춥겠다.”


“그냥 물도 아니고 성수인데 춥지는 않을걸.”


“나 없는 사이에 뭐 이상한 일 하는 것은 아니지?”


“이상한? 이상한 일이 뭔데?”


“남녀가 같은 방에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잖아.”


시엘이 키득키득 웃으며 이죽댔다. 유진은 그 말에 눈을 껌벅거리다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미친 소리를 하는구나. 이건 신성한 의식이야. 세례라고. 이거 신성모독인 거 알아?”


“모독이랄 것까지야.”


“신인 내가 모독이라 느끼면 모독인 거지.”


“그래, 좋겠다, 신이라서.”


시엘은 혀를 베 내밀고서 몸을 돌렸다.


장난삼아 말했을 뿐, 시엘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성녀들은 내심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랄지도 모르지만- 유진 본인은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진짜 고자일지도.’


시엘은 마지막으로 유진을 힐긋 돌아보았다. 여전히 울적하고 심각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턱을 괴고 있던 유진은 시선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시엘은 다시 몸을 돌려 방문을 열고나갔다. 그렇게 방 안에는 유진과 성녀들만이 남았다. 유진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뒤편에 있는 욕조 앞으로 다가갔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성수. 욕조에 몸을 담근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 보였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양손에 새겨진 성흔에 주목했다. 욕조를 채운 성수의 빛이 조금씩 성흔으로 옮겨지고 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모론을 성기사이자 대전사로 삼았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기사와 전사들도 서임했다. 이것으로 유진 고유의 성기사단은 완성되었다. 바벨로 진군할 때, 그들은 유진의 신군(神軍)이 되어 판데모니엄의 마족과 싸울 것이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바벨을 정복하고 나면.


그다음은 멸망의 마왕이다. 라비스타에 은둔하던 멸망의 권속들은 하우리아에서 대부분이 죽었다. 라비스타에 권속이 조금 남아 있기야 하겠지만, 그들은 전력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일 터.


그렇다고 해서 변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당장 하우리아 때만 하더라도, 망령은 인간과 마족을 사용해 수백 수천 마리의 누르를 만들었다. 바벨 정복 이후 신군이 해야 할 것은, 만약의 경우에 쏟아져 나올 누르를 막는 것이다.


‘어디서 나올까.’


라구르야란이나 레헤인야르? 멸망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도 모론의 도움은 필요하다. 세냐의 마법으로 누르의 출현을 잠시 억누를 수 있는 것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그것을 맹신할 수는 없다. 그곳에 출현하는 누르는 어디까지나 ‘징조’일 뿐이다.


‘멸망의 징조.’


멸망의 마왕은 현재 봉인된 상태다. 하지만 그 봉인이 불완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게 될 것은 방금 베르무트와의 만남에서 확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길어야 1년.


‘죽이려고 덤비는 중에도 얌전히 자고 있을 리는 없지. 자극하면 깨어날 거야.’


그렇게 되면 세냐의 마법으로도 라구르야란과 레헤인야르의 누르를 억누를 수 없으리라. 그러니 신군의 일부는 그쪽에 배치하여 누르의 창궐을 막아야 한다.


‘그쪽은 루하르 왕국군에게 맡기면 될 거고.’


당장 연회에서 아만과 정예 기사단에게도 서임을 내렸다.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겠지만, 루하르 왕국군만으로 부족하다면 시무인 왕국군이나 슬라드 용병단까지 동원하면 될 터.


그렇게 생각하고서,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지금 유진이 가볍게 떠올리는 전력들은 모두가 일국의 정예군이다. 거기에 유진이 바란다면 정예군에 그치지 않고 징집병들까지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컸군.”


유진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300년 전의 하멜이 아무리 명성이 높았어도 일국의 왕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유진은 할 수 있다. 유진이 진심으로 바란다면, 일개 국가 정도가 아니라 대륙 전체의 병력이 집결하고 움직일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고작 10년도 되지 않아 그만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존재여야만 했다. 신성과는 관계없이, 지금 유진에게는 세상의 결말이란 것이 달려 있다.


멸망할 것인지, 살아남을 것인지. 살아남는다면 어떤 형태의 미래를 갖게 될 것인지.


“역시 무거워.”


유진은 툴툴 웃으면서 망토에서 술을 꺼냈다. 연회에서 몇 병 챙겨둔 술을 테이블에 가득 올려두었다.


술이라면 좋아죽는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침묵하고 있다. 그녀들만큼은 아니어도 술은 꽤 좋아하는 세냐는 숲에 가 있고, 모론은 머나먼 북쪽 끝에 있다.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미 신성을 얻었으니 더 이상 신앙을 늘릴 필요는 없다. 애당초 빛이 유진에게 깃든 순간부터, 신대(神代)부터 안배하여 축적한 모든 신력은 유진의 것과 다름없이 되었다.


준비는 끝냈고, 남은 것은- 각오뿐이다. 각오를 마치고, 도전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을 먹고 저질러 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고, 시간도 많지 않다. 실패하면? 죽는다면? 죽을 자리도 잘 찾아야겠지.


망령이 떠올랐다. 최후에, 놈의 손을 거머쥐면서 했던 말.


-가자.


그때 말했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겠다고. 세상을 구하겠다고. 유폐의 마왕에게 죽는다면 영혼이 붙들린다. 다음 시대는 볼 수도 없게 된다.


사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폐의 마왕에게 죽건, 멸망의 마왕에게 죽건,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는 것은, 고신들이 아가로트를 환생시켰기 때문이다.


모든 고신들은 거신에게 잡아먹혀 하나의 신이 되었고, 그들이 준비한 힘은 레반테인에 이어졌다.


만약 지금 세상이 멸망하고, 다음 세상이 열린다면. 그때는 지금과 같은 희망조차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반복될 뿐. 이후로 세상은 몇 번이나 멸망할까. 그때도 유폐의 마왕은 홀로 살아남을까.


각오.


유진은 술병을 채운 술을 노려보았다. 사실은 유진도 알고 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각오는, 유폐의 마왕이나 멸망의 마왕과 싸우는 것에 대한 각오가 아니다. 그 둘을 죽이는 것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유진이 간절히 바라는 것. 각오야 진즉에 끝냈다.


지금 유진에게 필요한 각오는,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는 것이다. 살의는 있다. 죽이고 싶다. 죽여야 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 정말로 나는 그녀를 죽일 수 있을까. 아무리 각오하고, 살의를 품고, 죽이기 직전까지 간다고 해도.


나는- 그 순간에 정말로 누아르를, 아리아를 죽일 수 있나? 유진 라이언하트는 할 수 있다. 하멜 다이너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가로트는?


‘억지로 해야겠지.’


그리고 죽인 뒤에 많이 후회하고,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남을 것이다.


유진은 술잔을 드는 대신, 오른쪽 뺨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가비드 린드먼이 남긴 흉터다. 이 흉터는 앞으로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누아르의 죽음은 유진이 몸이 아닌 마음에 흉터를 남길 것이다. 유진은 그녀의 죽음에서 미련을 갖고,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될 것이 두렵고 싫었다.


“해야 해.”


그것을 알면서도 내뱉었다. 다시 결의했다. 더 이상 할 준비는 없다. 각오만 다지면 된다. 지금, 유진은 다시 각오했다. 그러니 오랜 시간은 필요 없다.


성녀들이 눈을 뜨고, 세냐의 준비가 끝난다면.


제벨라 시티에 간다.


신군은 대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아르 제벨라와의 전투에서 신군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지금의 누아르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 병력의 우위는 무의미하다. 어쩌면 데려간 병력이 오히려 누아르의 힘이 될지도 모른다.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누아르 제벨라는 이미 마왕의 규격마저 넘었다. 도시 전체를 공장 삼아 정기를 수급할 때도 무한히 강해지고 있었는데, 지금의 누아르는- 정기가 아닌 환상 그 자체를 수급하고 있다.


누아르 제벨라는 신대에 아리아가 바랐던 신성에 도달하고 있다.


그녀는 악신(惡神)이고, 제벨라 파크는 악신의 영지다.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술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날 밤.


술을 마시는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조용히 가라앉은 도시. 밤이 존재하지 않던 이 도시는 며칠 전부터 밤이 돌아왔다.


오랜 벗을 추모하고자, 도시를 통째로 소등했기 때문이다.


“아하.”


누아르는 휘황한 보름달 아래에 누웠다. 그녀는 불 꺼진 도시를 요람 삼아 누워서 다리를 까딱거렸다.


“내 생각을 하고 있군요.”


누아르는 빙긋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찰랑거리는 술의 경계에 보름달이 걸렸다.


고요한 도시에서 잠든 수백만의 염원 어린 환상. 그 모든 것보다, 머나먼 곳에서 전해지는 살의와 갈망이 누아르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살의. 그리고-


“초대장을 보내야겠어.”


누아르는 보름달에 걸친 술을 흔들어 웃었다.


빌어먹을 환생 550화


초대


짹짹…….


이른 아침. 창가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크리스티나의 정신을 깨웠다. 그녀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만 같은 상쾌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아.”


찰랑거리는 물소리. 크리스티나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기억났다. 유진의 세례. 욕조에 잠긴 물은 아직도 따스했지만, 처음과 같은 ‘빛’은 없었다.


[일어났습니까?]


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나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먼저 깨어나 계셨던 겁니까?’


[저도 방금 깨어났습니다.]


정신은 나른하지 않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는 것이 껄끄러울 뿐, 그 외에 불편함은 없었다. 없는 수준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좋았다. 평소에도 몸이 무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정도를 넘어 마치 깃털처럼 느껴졌다.


[지금이 아침이기는 합니다만, 저희는 한 번의 새벽을 지낸 것이 아닙니다. 아마 며칠은 의식을 잃고 있었겠죠.]


하지만 공복감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몸 안을 가득 채운 충만함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촤악!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욕조를 채우고 있던 물이 모조리 증발하여 사라졌다.


‘유진 님은 보지 못하셨습니까?’


[제가 당신보다 먼저 깨어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래 봤자 간극은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하멜은 방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아니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그것이 불안하군요. 하멜의 성격상, 이런 저희를 방 안에 홀로 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하멜이 방에 없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마 유진 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지요? 저희를 위해 피를 많이 흘리셨는데…….’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크리스티나, 저는 더 이상 하멜이 과다출혈로 정신을 잃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스터께서는 지금 유진 님의 신변을 걱정하시는…….’


[네, 걱정하고 있지요. 저희가 정신을 잃은 시간 동안 간악한 것들이 하멜을 꾀어낸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크리스티나, 세례를 받기 전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이 방에 있던 것은 저희와 하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크리스티나의 표정도 굳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나 지났을지는 모르지만, 그때 이 방에는 시엘도 있었다. 말끔하게 목욕하고 향수까지 뿌린 시엘이.


[시엘만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1년 만에 만났는데도 자신에게 아무런 행위도 해주지 않았으니, 세냐 그 계집애도 마음에 독기를 품었을 겁니다.]


‘허억…….’


[저희가 잠든 것을 기회로 삼아 뭔가 개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는 일. 싫다는 하멜을 억지로…….]


“감히 하멜 님의 동정을!”


크리스티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외침에 아니스는 순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생각한 ‘억지로’의 다음으로 이어질 행위는 데이트나 포옹 정도였는데, 크리스티나의 발언 수위에 너무 큰 비약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저 외침에서 아니스는 잠시 복잡한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멜에게 동정이란 말이 과연 옳은가? 아니스가 알기로 하멜은 용병 시절 성적인 경험이 제법 있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야 용병은 대개 그런 법이라 아니스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아무튼 하멜이 동정은 아니지 않은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시스터. 지금 유진 님은 하멜 님이 아니라 유진 님이잖습니까.’


[예?]


‘육체가 다르고 이름이 다릅니다. 그리고 용병 시절의 불장난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예……?]


‘유진 님의 정신과 육신은 순결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가치 있고 지켜야만 합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내뱉고서 대뜸 옷을 벗어 던졌다.


왜 옷을 벗는가? 옷이 젖었기 때문이다. 갈아입을 옷은 있는가? 있다. 말끔히 이불이 깔린 침대의 위, 성녀들을 위한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언젠가 정신을 차릴 때를 위해 갈아입을 옷을 미리 준비한 것이리라.


“…….”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옷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의를 다지고서 알몸으로 방을 가로질렀다. 이곳은 유진의 방이다. 넓은 방 한쪽에는 드레스룸으로 이어지는 문이 따로 있다.


[맙소사, 맙소사……!]


아니스는 지금 크리스티나가 떠올린 악마적이고 파렴치한 생각과, 그에 대한 망설임을 빠르게 덜어낸 과감한 행동력에 경악했다.


지금 크리스티나는 세냐도, 그리고 10년 전부터 유진과 같은 저택에 살았던 시엘조차 발을 들이지 못한 금단의 장소. 유진이 어린 시절부터 아무것도 입지 않은 원초적 모습으로 드나들던 드레스룸에 침입하고 있다. 이 방에 침입한 여자는 성녀들이 처음…….


‘…….’


아마 처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시종이라면 몰라도, 유진이 어렸을 때부터 전속으로 두었던 니나는 몇 번이고 드나들었을 터. 하지만 그녀는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드나들었던 것이니, 크리스티나는 빠르게 니나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아니스가 숨을 헐떡거렸다. 젖은 옷을 미련 없이 벗은 크리스티나는, 새하얀 나신에 유진의 셔츠를 걸쳤다. 신장의 차이가 제법 되었기에 셔츠의 끝단이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설마, 설마……!]


아니스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 아니스는 성직자라면 절대, 성녀라면 더더욱 해서는 안 될 음란하고 악마적인 상상을 하고 있었다. 이 상스러운 복장에서 인간의 도리란 것을 한 꺼풀 더 내려놓는다면 다른 의미로 성스러운 모습이 되어버린다. 성녀가 성녀가 아닌 다른 성녀가 될 것이다.


“…….”


다행히 크리스티나에게는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을 떠돌던 엄한 생각을 떨쳐내고, 얌전히 셔츠 단추만 채우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침대 위에 잘 접힌 속옷과 바지를 입었다.


[자…… 잘했습니다.]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니스는 그중 하나로 의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정말로 이성과 도리를 저버려 타락하였다면. 그리고 그 모습을 하멜이 보았다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아주 조금 궁금했다.


“유진 님을 찾으러 갑시다.”


크리스티나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은, 이곳이 라이언하트의 저택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이 유진과 크리스티나만의 보금자리였다면, 크리스티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건 이성과 도리와 관계없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라이언하트의 저택. 유진 외에 다른 사람들도 살고 있다. 유진에게만 보여주는 것이라면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다.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유진은 자신의 방에서 성녀들이 깨어나는 것을 기다렸지만, 지금은 라이언하트의 회의실에 있었다.


크리스티나의 판단은 지극히 옳았다. 똑똑 문을 두드린 뒤에 들어간 회의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의 복장으로 회의실에 들어왔다면 처지가 무척 난감해졌을 것이다.


“일어났…….”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던 유진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크리스티나가 정신을 차린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성녀다. 기척을 느낄 필요 없이 알 수 있다.


말문이 막힌 것은, 우선 크리스티나의 ‘변화’ 때문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한층 더 깊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크리스티나에게는 그런 것보다 노골적인 변화가 존재했다.


지금 크리스티나의 주변에는 은은한 빛의 아우라가 감돌았다. 그리고 머리 위. 처음으로 아니스가 천사로 현신했을 때처럼 빛의 고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고리는 희미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


유진의 말문이 막힌 것은 아우라와 빛의 고리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침대 위에 갈아입으라고 옷을 올려두었다. 하의를 입은 것을 보면 옷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상의로 저런 셔츠를 입고 있는가?


“옷 꼬라지가 그게 뭐야?”


유진의 옆에 앉아 있던 세냐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당연히 세냐는 저 셔츠가 유진의 것임을 알았다.


“준비해 주신 옷이 제게는 조금 작더군요.”


크리스티나는 손가락 아래로 내려오는 소매를 접어 올리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작다고? 작을 리가 없는데?”


“작았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작았다는 거야?”


“세냐 님은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제 입으로 부끄러운 대답을 하기를 강요하시다니.”


그 당돌한 대답에 세냐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제가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겁니까?”


크리스티나는 세냐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재빨리 선수를 친 질문에 유진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사흘.”


“맙소사. 오래도 잠들어 있었군요.”


“잠든 게 아니라 기절해 있던 거지.”


세냐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숲의 엘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차도는 있었어.”


“완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군요.”


“마병의 병원은 마력이야.”


세냐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마력이 유폐의 마왕의 것이 아니란 것은 확인했어. 그러니 유폐의 마왕도 마병을 거둘 수 없던 것이겠지. 마병의 병원은 멸망의 마력이야. 아마…… 마병도 누르와 마찬가지로 멸망의 징조라고 생각해.”


300년 전에 전쟁이 시작하고서 엘프에게 마병이 발병했다. 당시에는 전쟁 자체가 유폐의 마왕의 야욕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전쟁의 진실을 안다. 애초에 세상은 그 즈음에 멸망해야 했다. 전쟁 자체가 멸망의 효시였던 것이다.


“뭐, 멸망의 마왕을 죽이면 마병도 사라진다는 거지.”


유진이 중얼거렸다. 크리스티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의 옆에 앉았다. 반대쪽에 앉은 세냐는, 유진에게 바짝 붙어 앉은 크리스티나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좀 떨어져 앉…….”


“차도가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어떤 식의 차도가 있던 겁니까. 마병의 진행 자체는 진즉에 막았을 텐데요.”


이번에도 크리스티나는 세냐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질문을 먼저 했다.


“어…… 어어, 음, 마병에 걸린 엘프들에게서 멸망의 마력을 뽑아냈어.”


“마력을 뽑아냈는데도 완치는 불가능한 겁니까.”


“그래도 몸 가누기 힘든 중환자를 거의 멀쩡하게 만들 정도는 돼. 밖에 나가면 다시 마병이 진행하겠지만. 그런데 너, 너무 가까이 앉…….”


“그런데 왜 두 분은 회의실에 계신 겁니까? 제가 들어오고서 느낀 분위기가 몹시 무거웠는데, 혹 두 분이서 싸움이라도 하신 겁니까.”


“내가 얘랑 싸울 일이 뭐 있어?”


거리감을 두고서 따지는 것을 포기한 세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초대장이 왔어.”


유진이 대답했다. 그는 혀를 쯧 차면서 품 안에서 편지봉투를 하나 꺼냈다.


“……누아르 제벨라.”


밀랍 봉인은 뜯어졌지만, 편지봉투에 적힌 글자는 선명했다. 누아르 제벨라의 이름…… 크리스티나의 표정도 똑같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초대장이라면…….”


“직접 보는 게 빠르지.”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편지지는 단 한 장. 내용이 빼곡히 적힌 것도 아니었다.


“……?”


크리스티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녀들은 편지지 중심에 새겨진, 매혹적인 붉은색의 키스마크를 보았다. 누아르 제벨라가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남긴 키스마크. 그것에 대한 역겨움을 말할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


크리스티나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행위 자체가 무의미했다. 애당초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공간마저 뒤바뀌었다. 키스마크를 보기 직전까지만 해도 크리스티나는 라이언하트의 저택 안의 회의실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티나가 선 곳은-


붉은 황혼의 앞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움찔 놀라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발아래에서 ‘찰박’하는 물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뒤에 펼쳐진 광경은, 크리스티나가 잘 아는 것이었다. 빛의 샘. 유라스에서 유진이 직접 파괴했던 그 빛의 샘이, 멀쩡한 모습으로 크리스티나의 뒤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샘은 크리스티나의 기억과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끔찍했다. 은은한 빛을 발하던 샘물의 색이 변했다. 점점, 점점 붉은 핏빛으로 바뀌었다.


크리스티나는 샘 밑에 있는 것들을 보았다. 그건- 무수히 많은 백골이었다. 빛을 샘을 위한 성유물. 역대 성녀들의 유해. 그 새하얀 백골은 모두가 크리스티나를 보고 있었다.


딱딱딱.


백골들이 턱관절을 까딱대고 이빨을 부딪쳤다. 눈동자가 없어 움푹 파인 눈구멍들에서 희미한 귀기가 번득였다.


-왜.


-왜 너만…….


절망과 원독으로 점칠 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오싹 돋은 소름에 심부가 시렸다. 샘에 가라앉은 백골 무더기가 들썩거렸다. 꼬륵거리는 물거품 아래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들었다.


-크…… 크리스…… 티…… 나…….


썩어 문드러진 얼굴.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저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했다. 세르지오 로게리스. 크리스티나의 양부.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


크리스티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양부를 보았다.


그를 아비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세르지오 역시 크리스티나에게 부성애를 가진 적은 없다. 크리스티나에게 있어서 양부는 원망의 대상이자 억압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세르지오에게 있어서 크리스티나는 잘 만들어 완성해야 할 성녀일 뿐이었다.


-네가…… 네가…… 없었다면…….


그것뿐인데, 저 모습은 크리스티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완전히 떨쳐냈을 양부에 대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가슴 밑바닥을 기어올랐다.


평소라면 이럴 리가 없었다. 세르지오의 죽음은 크리스티나에게 정말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절망적인 유년기와 성녀로 만들어지면서 심어진 여러 감정과 의무들은, 유진과 함께 보았던 불꽃놀이와 이후의 여정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털어냈어도 크리스티나는 인간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아주 조금의 감정이 다시 만들어진다.


역대 성녀들의 유골이 토해내는 절망과 원독. 썩어 문드러진 양부의 저주. 그로 인한 작은 감정이, 크리스티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증폭되었다. 그렇게 크리스티나의 정신은 찰나의 악몽에 사로잡혔다.


“어머나.”


황혼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모습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당신의 악몽은 참 뻔하고 재미없네요.”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나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누아르 제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황혼을 등지고 선 누아르는 팔짱을 끼고 서서 방긋 웃었다.


“아. 너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마요. 악몽을 꾼 것은 당신만이 아니니까요. 먼저 초대장을 보았던 나의 하멜도, 세냐 메르데인도, 그리고…….”


누아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당신과 섞여 있는 아니스 슬리우드도 악몽을 꾸었어요. 모두가 다른 악몽을요.”


“이.”


크리스티나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아니스가 크리스티나의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똑바로 서서,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갈X가……!”


“직접 들으니 반갑고 각별하네요. 오랜만이에요, 아니스.”


“이게…… 대체 뭐 하는 수작이지? 왜 하멜은…….”


“굳이 초대장을 보여준 것이냐구요?”


누아르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은 크리스티나가 차마 뱉지 않은 말이었다. 이 불쾌한 악몽은 초대장에 의한 것.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던 것이다.


“설마 내가 당신들을 몰랐으리라 생각했어요?”


누아르가 쿡쿡 웃으며 물었다.


“아, 그래요. 솔직히 말해주죠. 결투장에서 당신들을 보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어요. 어느 정도 심증은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어. 하지만 결투장에서는 보고서 바로 알았어요. 당신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


“그리고 이 초대장이 이런 형태인 것은, 흐흥, 나의 상냥한 배려심 때문이죠.”


“배려?”


아니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맞아요, 배려.”


방금까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누아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300년 전과는 달라요, 아니스 슬리우드. 그때 나는 하찮고 나약했어요. 나는 몇 번이나 악몽을 보여줬지만, 당신들을 절망시키고 정신을 부수지는 못했죠.”


누아르가 한 걸음 걸었다. 우우우……! 그녀가 등진 황혼에서 불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나는, 당신들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악몽을 보여줄 수 있어요. 당신과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성녀로서 얼마나 완성되었건, 세냐 메르데인이 인간을 초월했건,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간단해요.”


황혼이 일그러졌다. 흘러넘친 붉은색이 하늘을 뒤덮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내 영지에 오지 마.”


누아르의 모습이 붉은 배경과 뒤섞였다.


“나와 하멜의 마지막을 방해하러 오지 마.”


빌어먹을 환생 551화


방해라니.


그 말에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말은 결코 장난도 허세도 아니다. 누아르 제벨라는 ‘진심’으로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악몽은 누아르 제벨라가 직접 앞에 나타나서 만든 것이 아니다. 편지지에 담은 마력에 노출된 것만으로 이렇게 악몽이 만들어졌다. 시야에 포착하고 바란 순간에 상대를 강제로 잠들게 만드는 ‘강제수면’, 그리고 한 번 잠에 빠진 순간 거듭되고 무한한 꿈의 세계로 끌고 가는 ‘몽중몽’.


고위 몽마라면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권능. 당연히 몽마의 여왕인 누아르는 저 두 개의 권능에도 통달하여, 시야에 포착만 한다면 수백, 수천, 수만이건 즉시 잠에 빠트릴 수 있다.


이제는 그 범주마저 아득히 초월했다. 시야에 포착할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이제 마력의 잔향만으로 상대의 의식을 파고들어, 깊은 곳의 트라우마를 발굴하고, 지독한 악몽을 만들어낼 수 있다.


방금 아니스도 ‘악몽’을 꾸었다. 그녀의 악몽은-


300년 전의 전장. 그녀가 구하지 못했던 이들이, 아니스에게 원망을 쏟아내던 것이었다.


하멜이 눈앞에서 죽던 것. 그 순간에 성녀로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것. 죽어가는 하멜을 소생시키지 못했던 것. 그런 모든 것들이 뒤섞이고 증폭되어 거대한 절망이 되었다.


그리고 아니스가 맞이했던 최후. 역대 유라스의 모든 성녀는, 다음 성녀를 위해 성유물이 되었다. 아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역대 성녀 중 가장 완전에 가까웠던 아니스야말로 반드시 성유물이 되어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아니스에게는 모론과 세냐와 같은 장생은 허락되지 않았다. 완전에 가깝다는 것은 결국 완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인간인 아니스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결함이 여러 개 존재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니스는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려 했다. 평생을 성녀로 살았다. 평생을, 빛을 위해 살았다. 그러니 마지막 정도는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다. 평생을 섬긴 빛에 대한 최후의 반항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멜의 무덤을 봐볼 겸 갔던 사막에서- 홀연히 깨달아 버렸다. 숭고하다고는 할 수 없을 추한 죽음이지만, 그래도 하멜은 세상을 구하는 것을 원했다. 모든 마왕을 죽여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결국 아니스는 바라던 대로 은둔하여 홀로 죽겠다는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스는 자신을 찾아온 성기사와 성직자들과 함께 유라스로 돌아가, 다음 성녀를 위한 성유물이 되었다.


그 최후가 악몽과 연결되었다. 성유물이 되기 직전에 가졌던 ‘공포’.


이러한 행위가 결국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냥 허무하게 죽는 것은 아닐까. 그 공포는 ‘지금’ 아니스의 존재로 모순되는 것이나, 누아르가 만들어낸 악몽에 인과관계란 무의미했다.


아주 조금의 공포. 심지어 그 공포가 이미 극복해 낸 과거의 것일지라도. 약간의 빌미만 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된다.


공포란 으레 그런 법이다. 불 꺼진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도, ‘무섭다’라고 생각해 버리면 있을 리 없는 것을 제멋대로 상상해 버린다. 한번 악몽을 꾸다 깨어나면 다시 악몽을 꿀까 두려워 잠을 설쳐 버린다.


‘공상.’


지금 누아르의 악몽은 존재가 갖는 공상을 부풀린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렇기에 누아르의 저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잘 안다. 지금은 이 정도에서 끝났지만, 만약 누아르가 ‘직접’ 앞에서 공상을 악몽으로 바꾼다면.


지금처럼 입을 틀어막고, 몸을 떨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악몽. 공포란 감정을 가질 때마다 커지는 악몽은 결국 정신을 붕괴시키리라.


“오지 말라고?”


아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너와, 하멜의 마지막을, 방해하지 말라고?”


지금 아니스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누아르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다. 악몽과, 정신의 붕괴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다.


“감히.”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입술을 뿌득 씹으며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지금 두 성녀는 똑같은 분노를 느꼈다. 이건 모독이다. 감히, 감히 공포 따위로 성녀를 억압하는가? 이 경고로 성녀가 두려움에 떨어 오지 않기를 종용하는가?


“흐응.”


일그러졌던 황혼과 흘러넘쳤던 붉은 색은 어느새 사라졌다. 성녀들의 분노에 누아르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그녀는 처음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기울였다.


“이것도 뻔한 반응이네요. 하지만 세냐 메르데인보다는 점잖아.”


“…….”


“아, 그래. 세냐 메르데인이 어떤 악몽을 꾸었는지 알아요? 아마 당신들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하멜의 죽음. 베르무트의 배신. 엘프들의 몰살…….”


누아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하지만 저항은 격렬했죠. 당신들보다는 훨씬 격렬했어. 그녀는 스스로 악몽을 부수고 나를 찾아 죽이려 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곳의 나는 악몽 속의 환상일 뿐인걸. 아하하, 그거 알아요? 오히려 세냐 메르데인은 그 사실에 더욱 절망하고 공포를 느꼈어요.”


누아르는 입가를 가리며 키득거렸다.


“환상뿐인 나에게도 정신적으로 잠깐이나마 몰린 것에 대해. 지금이 세냐 메르데인은 너무 뛰어난 마법사이기에, 내가 만든 악몽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끔찍한지를 이해한 거죠.”


“……그래서.”


아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세냐가 말하던가? 무서우니까, 가지 않겠다고?”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누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과 똑같이 반응했어요. 나를 모욕하지 말라면서 화를 냈죠. 이거 참, 내가 기껏 배려해 줬는데 말이야. 설마 질투인가요? 나와 하멜의 마지막을 질투해서 방해하고 싶어요?”


“질투?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우리가 당신을 질투할 이유가 어디…….”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누아르의 눈매와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얇게 뜬 눈매 사이에서 보라색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발했다.


“나는 당신이나 아니스 슬리우드, 세냐 메르데인이 절대로 할 수 없는,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어요. 그것만으로 당신들이 나를 질투할 이유는 충분하죠.”


“헛소리를……!”


“아하하! 헛소리라니, 나는 진심이에요. 아, 그래. 질투라는 단어가 자존심이 상하는 걸까? 그렇다면 다르게 말해주죠.”


누아르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성녀들의 매서운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는 말이에요, 하멜과 서로 죽이고, 서로의 마지막이 될 수 있어요.”


그 말을 너무나 당연해서 어이없게 느껴졌다.


서로 죽일 수 있다고? 크리스티나와 세냐, 아니스는 당연히 저런 일을 하지 않는다. 대체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누아르는 장난이나 농담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하멜과 그럴 수 있어요. 이것은 오직 나만이 가진 특혜에요. 나는 하멜과 서로 죽고, 죽이고, 서로의 마지막이 되어서, 서로의 감정을 밑바닥까지 핥을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누아르의 목소리에는 가느다란 떨림이 있었다. 그것은 광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희열에 의한 떨림이었다.


“당신들이 그럴 수 있나요? 아니, 그럴 수 없어요. 당신들에게는 사정도 명분도 감정도 없으니까.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멜의 등 뒤나 옆에 서서 바라보는 것뿐. 그래, 조금 더 말해주죠. 함께 가거나, 사는 것뿐이야.”


떨리는 목소리에 질척질척한 감정이 더해졌다.


“하지만 나는 달라요. 나와 하멜, 둘 중 누가 죽고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확신할 수 있어요. 우리는 죽거나 죽이는 순간의 후회와 미련과 망설임, 그 외 모든 감정을 독점하고, 결국 서로의 기억에 영원히 남게 될 거야.”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격정 가득한 목소리가 악몽을 뒤흔들고 있다. 질척하고 무거운 감정이 성녀들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나뿐이에요.”


누아르가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우우우우……! 뒤흔들리는 황혼이 또다시 악몽을 잠식했다. 황혼을 등진 누아르에게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성녀들에게 밀어닥쳤다.


“하멜이 반복한 삶 중에서 오직 나만이 유일해.”


누아르의 말투가 또다시 바뀌었다. 그녀는 성녀들에 대한 존중을 집어치웠다. 순수한, 정말로 순수한 감정만을 남겼다.


“너희가 가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사랑과는 달라.”


황혼의 형상을 한 거대한 악의를 등진 누아르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다. 그 시커먼 얼굴에서 눈매와 입술의 곡선만이 확연한 색을 띠었다. 붉은 입술. 그리고 보라색 눈동자.


“너희에게는.”


지금의 누아르가 드러내는 감정. 경멸, 멸시, 분노.


“자격이 없어.”


이건 질투가 아니다. 응당 주장해야 할 권리다. 누아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우리의 마지막을 방해하겠다고?”


그림자가 넘실거리며 춤을 췄다. 밀어닥친 그림자는 성녀들의 앞에서 멈춰서, 더는 나아가지 않고 있다.


“감히 침범하겠다고?”


성녀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악몽에서, 저 그림자에 침식당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저 질척질척한 광기와 희열에 삼켜져 버리면, 정신의 오염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웃기지 마. 너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그래서 내가 친히 경고해 주는 거야.”


그 지독한 감정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강하게 압박했다.


“너희는 하멜과 뒤나 옆에 설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는 하멜의 앞에 설 수 있지. 만약 내가 하멜에게 죽게 된다면, 하멜은 일평생, 그 손으로 직접 죽인 ‘누아르 제벨라’를 생각하며 살게 될 거야. 나도 똑같아. 내가 하멜을 죽이게 된다면, 평생 하멜을 그리며 살겠지.”


감정이 잦아들었다.


“너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해. 그를 허용하는 것조차도 내 자비야.”


스멀거리던 그림자가 다시 누아르에게 돌아왔다. 누아르는 조금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내 진심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라요.”


누아르의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잠식하던 황혼도 돌아갔으며, 누아르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도 사라졌다. 그녀는 더 이상 섬뜩한 미소를 짓지 않았다. 지금 누아르의 얼굴에 있는 것은, 성녀들이 예전에 몇 번이나 보았던- 그런, ‘평범’의 범주에 들어가는 미소였다.


“나는 말이에요. 당신들이 제법 상식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방금은 일부러 과격하게 경고했어요.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죠?”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 누아르의 경고는 쉽고 노골적으로 힘과 격의 차이를 보여준 것이다.


“세냐한테도 전해줘요. 아,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겠죠? 아마 설득해야 할 거야.”


누아르는 속삭임을 남기고서 몸을 돌렸다.


-와르르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이윽고 그 진동은 땅을 넘어 하늘까지 흔들었고, 그렇게 세상을 통째로 흔들었다. 새빨간 황혼의 빛이 누아르를 집어삼켰다.


황혼이 사라지고, 세상이 밤이 되었다. 악몽은 끝났고 꿈이 무너졌다.


“아.”


-덜컹!


의자가 흔들렸다. 그대로 뒤로 넘어가려는 찰나, 유진의 손이 크리스티나의 등을 받쳤다.


“아…… 아.”


크리스티나는 지금이 과연 현실인지 꿈인지 명확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한 번 꼬집었다.


통증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통증이 현실의 것이라 확신할 수 있나? 평범한 꿈이나 악몽이라면 이 정도로 분간이 되겠지만, 누아르 제벨라가 직접 만드는 꿈에는 통증도 실재할 것이다.


“이건…… 이건, 현실입니까?”


[예.]


아니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지금의 감정은 저희의 것입니다. 악몽에 의해 증폭되지도, 그 씹어 죽일 갈X에게 지배되고 있지도 않습니다.]


“아…….”


크리스티나는 탄식을 흘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의자와 함께 성녀의 등을 받치고 있던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습니까?”


물어본 순간에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스였다. 그녀는 짜증과 분노, 굴욕으로 눈썹을 찡그리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누아르 제벨라가 왜, 이런 초대장을 보낸 것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래.”


“이건, 이건…… 아주, 끔찍하더군요. 저와 크리스티나가 보았던 악몽. 우리가 직접 꾸는 꿈이라면 악몽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하찮은 것인데…….”


“나도 그랬어.”


세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까놓고 말해서, 그년이 보여준 악몽은 내가 300년 전에 질리도록 꾸었던 악몽이야. 뭐 그때보다 몇 개 더 생겨나기는 했지만, 아무튼. 진짜 나한테는 악몽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들이라고.”


누아르가 세냐에게 보여주었던 악몽은 하멜의 죽음이다. 엘프의 멸족이다. 베르무트의 배신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세냐에게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끌어낼 수 없다. 세냐는 베르무트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하멜이 죽지 않고 환생한 것을 안다. 엘프가 마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누아르의 ‘악몽’에서는 현실처럼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악몽은 감정까지 지배해 버린다.


“이 마법의 여신님조차도 처음에는 압도당했어. 도중에 어찌어찌 떨쳐내기는 했지만…… 저항은 불가능했지.”


“그 얘기는 갈X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세냐. 당신이 누아르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도.”


“그년이 뭐라고 했는데?”


“당신이 절망과 공포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 대답에 세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무어라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지만, 무어라 말을 토해내지 못하고 입술만 몇 번 뻐끔거렸다.


“맞아.”


이윽고 세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나는 절망과 공포를 느꼈어. 나로서는 악몽을 파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거든.”


“지금은 어떻습니까? 세냐. 악몽에서의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갈X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악몽을 빠져나온 지금이라면…….”


“똑같아.”


세냐가 표정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악몽에 들어가 버리면 그년과 싸움이 성립되지 않아. 그년을 죽이기 위해서는, 악몽이 아닌 현실에서 싸워야 해.”


“불가능하지.”


유진이 대답했다. 그는 아직까지 손으로 받치고 있던, 성녀들의 기울어진 의자를 조심스레 바로 세웠다.


“편지에 담은 마력만으로 정신을 악몽으로 끌고 갔어.”


“야! 불가능하다는 말은…….”


“인정할 건 인정한다고. 정신계열의 공격에서 누아르는 압도적이다. 아무리 네가 마법의 여신이고,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정신 결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누아르가 ‘직접’ 간섭하려고 든다면 허무히 뚫릴 거다.”


아니스는 반박하지 않고 입술을 씹었다.


300년 전에도 그랬다. 세냐와 아니스가 아무리 결계를 만들어도, 누아르는 기어코 꿈을 파고들었다. 그때의 꿈은 지금처럼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전투와는 전혀 다른 피로감을 축적 시키며 일행의 정신을 깎아내렸다.


“……하멜.”


아니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신이 왜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여준 것인지. 왜 우리에게 굳이, 갈X의 경고를 전한 것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군요.”


처음 회의실에서 들어왔을 때 분위기가 왜 그리도 무거웠는지. 세냐가 왜 그토록 분노와 짜증을 보였는지도 알았다.


“하멜.”


아니스의 울적한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당신은 혼자 갈 생각이군요.”


“맞아.”


유진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벨라 시티에는 나 혼자 들어간다.”


빌어먹을 환생 552화


빠득.


유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냐가 이를 갈았다. 쿵! 자그마한 주먹이 책상을 두드렸다.


“저 고집 좀 꺾어봐!”


세냐가 유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아니스는 자신이 깨어나기 전에 이미 이 문제로 얼마나 많은 설전이 오갔을지를 예상했다.


“저 고집을 제가 대체 어떻게 꺾습니까?”


아니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하멜이 고집불통이란 것은 300년 전부터 알았다.


“남이 말해서 꺾일 고집이라면 하멜이 그렇게 뒈지지도 않았겠죠.”


“아 거 참, 대체 300년 전 얘기를 얼마나 우려먹는 거야?”


“이 얘기는 당신이 300살이 될 때까지 우려먹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이야기입니다.”


유진은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고 쩝 입맛을 다셨다.


“그래, 뭐, 내가 고집이 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너희가 가장 잘 알지. 그러니까, 너희가 무슨 말을 하건 나는…….”


“일단 이유부터 들어봅시다.”


“야! 아니스!”


세냐가 빽 고함을 질렀다.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니스가 마치 유진의 편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그 자체가 세냐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세냐. 다른 사람이 놀라서 들어오기라도 하면 무슨 변명을 할 생각입니까?”


물론 이 방에서 어떤 난장판이 벌어져도 밖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테지만, 아니스는 눈을 흘기며 세냐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하멜은 고집불통에 병신이고 감정적이며 무모하지만, 그래도 정도란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 편을 들어주는 거냐, 욕을 하는 거냐?”


“하멜, 닥치고 듣기나 하십시오.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아무튼, 저는 하멜이 고집을 부리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스의 싸늘한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그 시선만으로 대답에 대한 압박이 밀려왔지만, 아니스는 직접 입술을 열어 쐐기까지 박아주었다.


“그렇겠지요?”


유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아니스를 마주 보았다. 그런 구도가 되어버리니,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던 세냐만 괜히 어색하고 민망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냐는 어흠 헛기침 소리를 내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이유야 있지.”


유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 혼자 가는 편이 낫다.”


그 깔끔한 대답에 세냐의 시선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아니스도 입술을 꾹 닫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너무 그렇게들 보지 마. 나 혼자 가는 편이 나은 이유는 더 있어. 우선, 나는 누아르의 꿈에서 저항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내가 가진 신성 때문이겠지.”


“나는 안 되던데?”


세냐가 억울하단 표정으로 내뱉었다.


“아주 저항할 수 없던 것은 아니라며?”


“간신히 정신만 차린 것을 저항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뭐 그렇긴 하지.”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건데?”


“오히려 이게 당연하지 않냐? 내 신성은 아가로트와 빛이야. 세냐 네가 마법사들한테 숭배받는 건 알겠는데, 나에 비할 것은 아니지.”


맞는 말인데 왜 이리도 재수 없게 들리는 것일까. 세냐는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확실합니까?”


아니스의 시선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녀는 차분한 눈으로 유진을 응시하며 물었다.


“확실해. 당장 내가 신성을 자각하기 전에도 누아르의 꿈에서 벗어났었어.”


누아르가 라비스타에서의 경험을 꿈으로 보여주었을 때. 유진은 그 꿈속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누아르가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악몽에 휘말리지 않았지.”


감정을 감추고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대답했는데도 세냐와 아니스는 유진의 속내를 간파했다.


“하지만 동요는 있던 모양이군요.”


아니스가 중얼거렸다. 세냐도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슨 꿈을 꾼 거야?”


“당신도 듣지 못한 겁니까?”


“물어봤는데 대답 안 해줬어.”


세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아니스도 유진에게 바짝 몸을 기울이며 눈매를 치켜올렸다.


“저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꿈을 꾼 겁니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꿈이기는 해.”


“무슨 꿈인데 그래?”


“아가로트의 마지막.”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몇 번이나 떠올렸던, 시체가 그득한 황야.


“내가 보았던 꿈은, 아가로트가 느꼈던 절망의 반복이었지. 그때 아가로트는, 자신을 따르는 신군 전원에게 죽음을 명령했다. 그리고 명령대로 모든 신군이 죽었지. 아가로트 본인도 죽었고.”


죽기 전, 아가로트는 성녀의 목을 스스로 부러트렸다.


“그런 꿈이었어. 가공은 전혀 없었지.”


세냐와 아니스, 크리스티나가 꾸었던 꿈과는 다르다. 그녀들의 악몽은 추가적인 가공이 있었다. 감정조차도 누아르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유진이 꾸었던 꿈은 다르다. 그 꿈은, 지독한 현실만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 뿐이다.


아가로트의 실패. 절망. 패배. 그 모든 것이 반복되었다.


“내 감정은 지배되지 않았어. 누아르가 그럴 의도였을 지는 모르지만, 나는 강압을 느끼지는 않았다. 벗어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쉽게 벗어날 수도 있었어.”


“…….”


“하지 않았을 뿐이지.”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그는 넘어질 듯 기울인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왜? 왜 하지 않았는데?”


“그냥.”


“고통을 느끼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절망을?”


“별로 고통을 느끼고 싶었던 것은 아니야. 받아들이려고 했던 거지.”


“의미는 있었습니까?”


“어.”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동요는 있었다. 하지만 그 동요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고, 내가 통제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도 전부 다 나의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어.”


“…….”


“그래서 나 혼자 간다는 거다.”


세냐와 성녀들과 달리 꿈에 저항할 수 있다. 누아르가 보여주는 악몽은 유진의 감정을 지배할 수 없다.


“누아르 제벨라를 상대로 머릿수의 우위는 무의미해. 우리는 이미 300년 전에 그것을 학습했잖아.”


함께 가봤자 꿈으로 끌려간다면 각개격파 당할 뿐이다. 당연히 이 전투에는 유진의 성기사단도 대동할 수 없다. 오히려 악몽에 끌려간 그들의 공포가 누아르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이거야. 나는 누아르의 꿈에서 멀쩡히 싸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너희는 다르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거야.”


“……하멜. 저와 크리스티나는 당신의 성녀입니다. 이번에는 ‘따로’ 악몽에 삼켜졌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저항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확신할 수 있나?”


“아뇨, 확신은 없습니다. 당신의 말은 잘 알겠습니다. 신이 그렇게 명하시는데, 성녀가 어찌 저항하오리까. 얌전히 따를 수밖에 없지요.”


“비꼬라고 한 말은 아닌데.”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멜. 저는 비꼬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저희는 당신의 방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누가 보면 진짜 나 혼자 싸우는 줄 알겠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의자를 똑바로 세웠다. 그 대답에 세냐가 눈을 깜빡였다.


“혼자 싸운다며?”


“내가 언제 혼자 싸운다고 했냐? 도시 안에 나 혼자 들어가겠다고 했지.”


“어…… 어어, 그게 그 뜻 아니야?”


“너 진짜 마법의 여신 맞아? 하긴, 현명한 세냐라는 이름도 네가 직접 붙인 거였는데. 어쩌면 넌 마법의 여신이 아니라 빡…….”


유진은 하려던 말을 끝까지 내뱉지 않고 일단 입을 다물었다. 세냐가 눈에 불을 켜고서 유진을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빡, 뭐?”


“아무것도 아니야.”


“빡 다음에 뭔데. 뭐냐니까?”


“나는 빡빡이라고.”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지만 유진은 저 말만을 반복했다. 여기서 사실 넌 빡대가리의 여신 아니냐는 말을 내뱉어버렸다간, 어쩌면 오늘 유진과 세냐 둘 중 한 명은 죽게 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저는 도시 밖에서 당신을 지원할 겁니다.”


세냐를 한심하단 듯이 흘겨본 아니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멜,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레반테인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저와 크리스티나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비록 저는 당신과 함께 도시에 들어가서 악몽과 맞설 수는 없지만, 도시 밖에서 당신의 승리를 기도하겠습니다.”


“나…… 나는…….”


세냐도 일단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떠한 묘수를 떠올렸다.


“그 엿 같은 도시에 메테오를 처박는 것은 어때?”


“…….”


“옛날에야 마법사 수백 명을 모아서 메테오를 떨궜지만, 이 마법의 여신님에게 더 이상 그런 사전작업은 필요 없다는 말이야.”


“그 메테오, 유폐의 마왕 손짓 한 번에 막히지 않았냐.”


“으흠! 손짓 한 번은 아니야. 사슬로 막았다고. 유폐 그 자식도 메테오가 바벨 위로 떨어질 때는 식겁했을걸? 그러니까 부랴부랴 튀어나와서 막은 거지.”


“나는 그 메테오라는 거 영 믿음이 안 가. 요란하기만 하고 위력은 별로 같은데…….”


“네가 메테오의 뭘 알아?”


“알만큼은 알지, 나도 대마법사야 임마. 아무리 생각해도 메테오 떨구는 것보다 내가 칼 휘두르는 게 더 셀 것 같은데?”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메테오에는 로망이 있어.”


세냐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유진은 헛웃음을 뱉을 뿐이었다.


“로망은 개뿔.”


“메테오에서 로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는 결국 마법사가 아닌 거야. 모든 마법사는 메테오에 로망이 있어. 어떻게든 메테오를 한번 떨어트리고 싶어 한다고. 나는,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당장 아롯 마탑주들 전원 불러놓고 물어보면, 다들 메테오를 떨어트리고 싶어 할걸.”


“왜 하필 메테오입니까?”


“멋있잖아! 우주에서 운석을 떨어트린다! 단 한 명의 마법사가! 마법으로! 그래서 메테오는 로망 그 자체인 거야.”


“하긴. 다른 마법이라면 몰라도 그런 마법을 해보고 싶어도 좀처럼 할 기회가 없으니.”


“그치? 이해할 수 있지? 그리고 메테오는 바다나 황야 같은 곳에 떨어트리면 안 돼. 도시에 떨어트려야 한다고. 그, 무지막지한 질량체가 도시에 처박히면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 우주적 에너지 앞에서는 허무히 소멸하는…… 그런 종말적인 로망이야.”


세냐의 눈이 몽롱히 젖었다.


유진은 저 종말적 로망이란 것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무지막지한 질량체를 처박는다는 것에는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용마성을 통째로 추락시켰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튼. 메테오, 어때?”


“막힐걸.”


“그건 해 봐야 아는 거야.”


“만약에 효과가 있어도, 그 안에 있는 나는 어떡하고?”


“하멜. 왜 당신 생각만 하는 겁니까? 제벨라 시티에는 자발적으로 찾아간 인질 수백만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은 모두 다 제벨라 시티를 떠났을걸.”


예전 제벨라 시티에서 유진과 누아르는 그런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그때 누아르는, 유진이 올 때는 도시의 모든 관광객을 내보내겠다고 말했었다.


“과연.”


아니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미친 갈보는 하멜, 당신과 ‘단둘’인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포로는 그 순간에 있어서 방해일 뿐이겠죠.”


“그럼 메테오 처박아도 되는 것 아냐? 유진 네가 메테오 맞고 죽지는 않을 텐데.”


“이상한 짓 말고 다른 마법으로 해. 도시 밖에서 누아르의 권능을 방해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렇게 말하니 세냐도 더 이상 의견을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적잖이 아쉬운 것인지 입술은 삐죽 내밀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언제쯤 제벨라 시티에 갈 생각입니까?”


“오늘 당장도 상관없기는 한데, 마지막 조정은 해야지.”


성녀의 세례는 끝났다. 레반테인의 힘도 안정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조정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이건 나 혼자 하면 돼.”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표정과 감정을 능숙하게 감출 수 있었기에, 성녀들과 세냐에게 들키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 호수 밑의 영맥에 간다.”


세계수 묘목의 뿌리와 이어진 곳. 유진이 백염식의 수행과 명상을 위한 장소로 애용하던 곳이다. 지금의 유진에게 더 이상 백염식의 수행이나 명상은 필요 없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몰두할 수 있는 장소는 라이언하트에서 저곳이 제일이다.


‘유서는 쓰고 싶지는 않은데.’


정확히 말하자면 유서로 쓰일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준비는 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누아르는 강하다.


아이리스, 망령, 가비드, 그들과의 전투에서 ‘죽음’까지는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라이자키아 때 이상으로 죽음에 대한 실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유서는 적어 둘 생각이다. 만약, 패배해서 죽을 지라도. 어떻게든 다음을 도모하기 위해.


[시스터.]


먼저 회의실을 떠나는 유진의 등을 보고 있던 아니스에게 크리스티나가 말을 걸었다.


[……세냐 님께는, 누아르 제벨라의 망언을 전하지 않으실 겁니까?]


‘질문에서 이미 답이 있습니다. 그 갈보의 지껄임은 망언일 뿐. 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질투?


망언이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는, 세냐는, 누아르에게 질투란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 자격? 그것도 우습다. 누아르에게는 성녀들과 세냐에게 자격을 물을 자격이란 것이 없다.


‘…….’


하지만.


누아르의 망언 중에서, 유일하게 아니스에게 파고들었던 말이 있다.


만약 누아르가 죽는다면, 하멜은 평생 누아르를 추억할 것이다. 누아르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비웃던 것이다.


‘지독해.’


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환생 553화


악몽


유진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최근 1년 동안 자발적으로 제벨라 시티를 찾아갔던 관광객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은 저번과는 달리, 꿈과 추억에 흠뻑 빠진 폐인이 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제벨라 시티에서 보낸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철창에 가두면 머리를 들이박는 등의 자해까지 했던 주제에, 이제는 자신들이 ‘왜’ 제벨라 시티에 찾아간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도시에서의 기억이 통째로 도려내어져 있긴 합니다만, 그에 대한 후유증은 없습니다.”


유진은 건물의 옥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보았다. 널따란 공터에 많은 사람이 모여 앉아 웅성거렸다.


이 격리소에 격리된 사람들은 모두가 키옐의 제국민으로, 제벨라 시티에서 돌아온 관광객들이다. 그들은 검사를 받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격리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이런 대대적인 조치는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키옐은 제국인 만큼 인구수가 많고, 당연히 제벨라 시티에서 돌아온 관광객 중에서도 키옐의 제국민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유진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제와 제국 관료들은 관광객들이 세뇌를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례도 있지 않습니까.”


저들은 한 번 제벨라 시티에서 나왔었고, 그곳에서의 꿈을 잊지 못해 다시 제벨라 시티로 돌아가겠다고 발광했던 사람들이다.


“그걸 세뇌라고 할 수 있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기는 했죠.”


“후유증은 없다며?”


“이전에 돌아왔을 때도 처음에는 이상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갑자기 변할 수도 있죠. 이만큼의 사람들이 폭주한다면 골치 아플 겁니다.”


몇 년 전. 나이트마치에 참석하기 위해 설원을 가로질렀을 때. 시무인의 공주 기사, 스칼리아와 부관인 디오르와 마주쳤었다.


지금이야 스칼리아는 유진의 열렬한 신도가 되어 시무인에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설원에서 만난 스칼리아는, 누아르에 의한 불면증과 악몽 등으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 그녀는 설원에서 마주친 용병단을 몰살했고, 그 후에는 환각까지 보며 유진 일행을 공격했었다.


“……뭐, 저들이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멜. 가끔 보면, 당신은 누아르 제벨라를 너무 과하게 신용합니다.”


아니스가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악몽에서 보았던 누아르의 망언이 자꾸 머리를 떠돌았다. 그래서인지 아니스는, 누아르에 대한 옹호를 듣는 것에 짜증이 났다.


“내게 죽기 전 발악 삼아, 돌려보낸 관광객들을 폭주시킨다. 그게 누아르의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뿐이야.”


“……반대는 어떻습니까?”


“반대?”


“당신이 누아르 제벨라에게 패배해 죽으면. 그 갈X는…… 아마…… 세상에 대한 흥미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저는 당신이 패배해 죽는다면 이번 세상은 ‘실패’라고 생각합니다만.”


유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패배해 죽었을 때를 대비한 유서는 이미 적어놓았다. 그리고 그 유서는, 지금은 제하드의 호위역을 맡고 있는 라만에게 맡겨 놓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라만은 유진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다. 만약 유진이 누아르 제벨라에게 패배해 죽는다면, 라만은 당부했던 대로 행동할 것이다. 5개의 유서는 모론에게, 길레이드에게, 제하드에게, 세냐에게, 아니스에게 보내질 것이다.


“세상에 대한 흥미가 없어진 갈X가, 꿈으로 접촉했던 이들을 사용해 폭동을 일으킨다. 그것도 있을 법한 일이죠. 하멜, 저는 당신과는 달리 누아르 제벨라에게 신용이란 것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 갈X는…… 제가 여태껏 보았던 마족 중에서 가장 괴짜이며,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입니다.”


“나도 별로 신용하는 것은 아니야.”


거짓말. 아니스는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굳이 뱉지 않고 삼켰다. 그녀는 잠시 유진을 응시하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슬슬 세냐도 도착했겠죠. 갑시다.”


아니스의 말대로 워프 게이트에는 이미 세냐가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메리를 한 손에 쥐고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세냐의 주변에 검은 기류가 떠돌고 있었다.


“잘 된 모양이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세냐에게 다가갔다. 세냐는 마력을 조작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한쪽 눈만 살짝 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잘 됐지. 이 마법의 여신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잘난 마법의 여신님도 마력은 만들 수 없나 보지?”


“당연히 못 만들지. 마족도 아니고 흑마법사도 아닌 내가 어떻게 마력을 만들어?”


하지만 영력을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마력이 필요하다. 세냐가 선택한 방법은 아멜리아를 마력 배터리로 삼는 것. 대수림에 갔을 적만 해도 인형이나 다름없게 된 아멜리아를 직접 데리고 다녀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멜리아 머윈은 흑색 마탑에 처박아 놨어. 어차피 그곳은 더 이상 쓰이지 않으니까. 봉인도 잘해놨고. 멜키스가 매일 밥도 줄 거야.”


아크리온에 흑마법 교본으로 박제해 두는 것도 후보 중 하나였지만, 아직 아멜리아의 마력은 필요한 곳이 많다. 흑색 마탑에 봉인된 아멜리아는 앞으로 세냐가 바랄 때 마력을 뽑아서 메리로 전송할 것이다.


“발자크 루드베스는 역시 없었나?”


“흔적도 없던걸.”


세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우리아 해방전 이후로 발자크는 다시 종적을 감췄다. 이전에야 아멜리아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유진과 세냐가 은둔한 1년 동안 발자크도 똑같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어쩌면 바벨에서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발자크가 정말로 유폐의 마왕과 함께 우리를 가로막을 거라고 생각해?”


“세냐, 당신 설마 그 흑마법사에 정이라도 들은 겁니까? 발자크 루드베스가 당신을 굉장히 존경한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만. 결국 발자크 루드베스는 흑마법사입니다. 그것도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 우리가 바벨을 오르려는 이상, 발자크 루드베스는 무조건 저희의 앞을 막을 겁니다.”


“발자크의 비원은 마법사로 역사에 남을 만한 위업을 남겨 전설이 되는 거였지. 세냐 너를 죽인다면 뭐, 전설이 되기야 하겠네.”


“나를 죽이는 것보다, 흑마법사로 마왕을 죽이는 것이 훨씬 더 전설적인 위업 아니야?”


세냐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그 말에 유진과 아니스는 똑같이 헛웃음을 흘렸다.


“적어도 가능한 범주의 이야기를 하십시오. 다른 마왕과 계약한 것도 아니고,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발자크 루드베스가 어떻게 주인을 배신하겠습니까?”


“유폐의 마왕이 직접 손쓸 것도 없이 ‘생각’만 해도 발자크는 피를 토하며 죽을걸. 그리고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의 생각을 전부 읽을 수 있잖아. 그런데 배신을 어떻게 해?”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그게 될 리가 없지.”


아주 조금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세냐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아무튼. 나는 준비 다 끝났어.”


“저와 크리스티나의 준비도 끝났습니다.”


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유진에게 향했다.


“그럼 가면 되겠네.”


유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현시점에 살아 있는, 헬무드의 유일한 공작. 영지 드리무어와 제벨라 시티의 주인.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마족.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유폐의 마왕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마족이지만, 그런 누아르를 토벌하러 가는 인원은 고작 3명뿐. 대군은 끌고 가지 않는다. 성기사단도, 대마법사들도 없다. 누아르 제벨라 토벌에 참전하는 것은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 아니스뿐이다. 심지어 누아르 제벨라와 ‘직접’ 싸우는 것은 유진 혼자다.


‘충분하지.’


앞을 보았다.


높다란 성벽에 둘러싸인 대도시. 성문은 굳게 닫혀 있다. 예전에 유진이 처음으로 제벨라 시티에 왔을 때. 워프 게이트에서 성문까지 길고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 대륙 각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저 환상적인 유흥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었다.


지금 성문까지의 길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워프게이트 시설 안에는 몇 명의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길드 소속의 게이트 관리 마법사들이다.


“괜히 휘말리기 싫으면 도망…….”


세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법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몇 번 깜빡거리더니,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고 일렬로 줄을 서서 워프 게이트를 통과했다.


이곳의 마법사들도 진즉에 누아르의 꿈에 사로잡힌 것이다. 유진은 빛이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꺼져 버린 워프 게이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마지막이니까.”


“누가 더 넘어올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 시설은 부서지면 안 됩니다. 저는 걸어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유진은 먼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는 굳게 닫힌 성문을 노려보며 망토 안에 양손을 넣었다. 유진은 덩달아 긴장해서 경직된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손을 잡았다.


다른 전투라면 망토 안까지 피해는 들어오지 않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메르와 라이미르아도 그것에 대해서는 미리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였기에, 얌전히 유진의 손을 잡고 망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걸어 나온 둘의 눈동자는 유진에 대한 걱정과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당장이라도 펑펑 울어버릴 것 같은 둘의 얼굴을 보니,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풋 웃고 말았다.


“내가 뭐 죽으러 가냐?”


“그, 그런 불길한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느니라……!”


기겁하는 두 꼬마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면서 세냐와 성녀들을 보았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세냐는 손톱까지 잘근잘근 씹어대며 유진과 제벨라 시티의 성문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기분은 굉장히 오랜만이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라이자키아도, 아이리스도, 망령도, 가비드 린드먼도 이런 느낌은 주지 않았었는데. 저 굳게 닫힌 성문 너머에 있을 도시가, 세냐에게는 전혀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저 너머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나, 세냐는 저 너머를 지옥이자 마경으로 느꼈다.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도망치십시오.”


아니스가 로사리오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래야만 한다면 언제든지 저희께 도움을 청해주십시오.”


크리스티나는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유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 크리스티나가 말하는 ‘도움’이 어떤 것인지 느꼈기 때문이다.


“성녀에게 나 대신 죽으라고 말하는 신이 어디 있냐?”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렸다.


“갔다 올게.”


그 외에 다른 말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호흡과 표정을 가다듬고서 제벨라 시티의 성문을 향해 걸었다. 뒤는 더 돌아보지 않았다.


성문에 가까이 갈 때까지 누아르 제벨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 제벨라페이스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유진은 성문 앞에서 일단 걸음을 멈췄다. 알아서 문이 열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레반테인으로 일단 문부터 박살 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품 안에서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품속에서 진동하는 편지 봉투를 꺼냈다. 며칠 전 받았던 초대장. 뭔가 싶어서 봉투를 열어보니, 키스마크뿐이던 편지지 대신 전혀 다른 물건이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열쇠였다.


“미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고,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큼직한 성문이 어느새 평범한 문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미 꿈으로 끌려 온 건가? 순간 유진은 그런 의문을 느꼈고, 스스로 부정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누아르가 현실을 꿈처럼 주무르고 있을 뿐이다.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문은 바뀌었지만 닫혀 있다는 것은 똑같다. 유진은 문손잡이를 노려보았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유진은 일단 손잡이를 돌리고, 밀고, 당겨보았다.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열쇠를 써서 들어오라는, 노골적이고 뻔한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유진은 누아르의 농간에 어울려 주고 싶지 않았다.


화륵!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발을 들어 올렸다.


ㅡ꽈앙! 일직선으로 뻗어 찬 발길질이 문을 박살 냈다. 박살 난 문은 뒤로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불타서 재가 되었다.


“……허.”


유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문을 발로 차서 부쉈는데 도시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고약하고 짜증스럽게도, 부순 문의 안쪽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이러면 내 각오와 결의가 병신같아지잖아.”


한 번 더 발로 차버릴까, 아니면 그냥 레반테인으로 베어버릴까. 둘 모두 소용은 없을 것 같다. 이 열쇠를 쓰지 않고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힘 싸움을 벌여야 할 것 같다.


유진은 혀를 차며 문손잡이를 향해 열쇠를 가져갔다.


딸칵.


손잡이를 돌리는데 더 이상 저항감은 없었다. 유진은 그대로 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한걸음 걸어 들어갔다.


한 걸음 더.


다시 한 걸음 더.


“…….”


벽난로. 장작. 따스한 주황색의 불꽃.


널찍한 식탁. 벽 한쪽에 걸린 커다란 초상화. 아니, 사진.


식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보글보글 끓는 소리.


“일찍 왔네요?”


부엌에 선 누아르의 등이 보였다. 그녀는 요리를 잠시 멈추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욕조에 물은 받아놨는데, 목욕 먼저 할 건가요? 아니면 식사부터? 아니면…….”


앞치마를 두른 누아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 기울였다.


“나?”


빌어먹을 환생 554화


나?


유진은 저 말을 곧장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오늘 유진은, 많은 각오와 결의를 다지고 이곳에 왔다. 며칠에 걸쳐 감정을 가다듬고,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여 손수 유서까지 적었다.


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들어버리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유진은 지금 이 상황, 누아르의 저러한 태도 자체가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너라면, 뭘 말하는 거냐?”


“어머 어머, 아이, 부끄럽게 참. 하멜. 나한테 직접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짓궂지 않아요?”


누아르는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후후 웃었다. 그녀는 골반을 살랑살랑 흔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곁눈질로 유진을 힐긋힐긋 보았다.


“정말로 궁금해요? 내 입으로 직접, 대답하기를 바라나요?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흐흥, 나는 기왕이면 당신이 직접 말했으면 좋겠어.”


누아르의 옷차림이 살짝 바뀌었다. 평상복에 두른 앞치마에서 알몸의 앞치마로 바뀌었다.


“저녁 식사.”


누아르는 허리에 두른 앞치마의 매듭을 풀어 내리며, 사뿐사뿐 걸어 부엌에서 멀어졌다.


“생각해 보니, 나는 당신이 어떤 식사를 좋아하는지는 잘 몰라요. 흔하고 평범하지만 따스한, 그런 가정식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호쾌할 정도로 재료를 통째로 구워 버린 바비큐? 특별한 재료와 조리 기술이 필요한 고급 요리? 후후, 요리란 것은 종류가 워낙 다양하니까요.”


누아르는 풋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요리는 당신 취향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왜냐면, 이 배경과 상황에는 가정식이 어울리거든요.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


보글보글. 냄비에서 스튜가 끓었다. 탁탁탁. 진즉에 손을 떠난 식칼이 제멋대로 도마를 두드리며 야채를 손질했다. 치이익. 충분히 열이 오른 팬에 올라간 고기가 기름에 끓었다.


“목욕.”


펑!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 옆에 욕조가 나타났다. 서너 명은 거뜬히 들어갈 것 같은 욕조, 출렁 차오르는 온수 위에 풍성한 거품이 얹어졌다.


“음, 나는 거품 목욕을 좋아하는데. 당신 취향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이쪽이 더 로맨틱할까?”


누아르가 한쪽 눈을 찡긋였다. 그러자 욕조의 거품이 가라앉고, 물의 색깔이 바뀌었다. 엷은 금색의 물 위에 장미의 꽃잎이 가득 떠올랐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욕조 옆에 자그마한 탁자와 아이스 버켓, 와인이 나타났다.


“사실 나는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하멜, 당신과 함께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떡해, 살짝 상상해 봤는데 너무 즐거울 것 같아. 당신은 어때요?”


누아르의 옷차림이 다시 바뀌었다. 큼직한 목욕가운이 누아르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가운의 매듭을 어루만지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와, 저 커다란 욕조에, 함께 알몸으로 들어가서. 내가 당신의 얼굴에 먼저 거품을 묻힐 거야. 아니면 장미꽃잎을 끼얹던가. 그럼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널 죽이겠지.”


“아하하! 그것도 멋지고 사랑스러워. 아무튼, 이건 ‘목욕’의 이야기고.”


누아르가 한 걸음 걸었다. 또다시 옷차림이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가운을 두르지도, 알몸에 앞치마를 두르지도 않았다. 처음 이 ‘부엌’에서 보았던- 평소의 누아르라면 입지 않을, 화려함과 노출은 일절 배제한 평상복.


“당신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말이에요.”


벽난로의 불꽃이 발하는 따스한 주황빛이 누아르의 얼굴을 비추었다.


“역시 나를 선택해 줬으면 좋겠어.”


방긋 웃는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잠시 동안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벽난로에서 타들어 가는 장작의 소리. 흔들리는 불꽃과 주황색 빛깔의 온기. 보글보글 끓고,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식욕을 돋우는 요리의 냄새. 욕조의 장미향.


그 한가운데에 선 누아르 제벨라. 느낄 수 있었다. 알 수 있었다. 화려함이라곤 없는, 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은 오래전 하멜이 그렸던 ‘미래’다. 언젠가 모든 마왕을 죽이고, 마경을 떠나게 된다면- 이렇게 살고 싶었다. 그것이 당시 하멜이 바라던 ‘꿈’이었다.


“…….”


그 시절 하멜이 그리던 꿈에 ‘누아르 제벨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해서는 안 됐다. 그러니 지금의 꿈은 악몽이다.


하멜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악몽을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하멜과 달리 아주, 아주 잠깐 망설임을 가졌다.


-콰르르르!


잠깐일 뿐이었다. 망설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유진의 몸에서 치솟은 불꽃이 사방을 휩쓸었다.


가까운 곳에 있던 욕조가 박살 나고 물이 증발하고 장미꽃잎이 재가 되었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던 따스하고 작은 불꽃이 열화에 삼켜졌다. 서로를 마주 보던 의자와, 반짝이는 접시와 깔끔한 식기가 놓인 식탁이 불길에 뒤덮였다.


누아르는 그 너머에 있다. 저녁 식사를 앞두어 평화롭던 부엌이 겁화(劫火)에 휩쓸리고 있지만 누아르의 얼굴은 태연했다. 넘실거리는 불꽃이 누아르를 삼키려는 순간.


꿈이 바뀌었다. 불꽃도 사라졌다. 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더 이상 이곳은 평범한 가정집의 부엌이 아니었다.


널따란 홀. 나선 형태의 계단. 붉은 카페트. 화려한 대저택의 중심.


유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보였다.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이 보였다. 배경이 바뀌었다. 사진도 조금 바뀌었다. 유진은 무뚝뚝한 얼굴로 사진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환히 웃고 있는 유진과 누아르가 있었다. 방금의 꿈에서 둘은 소박한 차림었지만, 지금 꿈의 사진은 달랐다. 사진 속의 유진은 말끔한 턱시도를 입었고, 누아르는 아름다운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


유진은 잠시 사진 속의 누아르를 보았다. 저 흰색 드레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웨딩드레스. 커다란 부케를 가슴에 안은 누아르의 미소는 ‘행복’이란 단어를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진 속의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내 개인적인 취향은.”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선의 계단에서 누아르가 걸어 내려왔다. 방금의 꿈과 옷차림이 달랐다. 역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누아르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런 대저택이나 성에서 사는 거예요. 여태까지 나는 항상 그랬었고, 이러한 곳이 내게 어울려.”


느긋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누아르가 유진을 향해 웃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아까와 같은 초라하고 작은 집도 좋아.”


“내 의견은 듣지 않는 거냐?”


“아하하. 당신의 의견이라니, 그건 아까의 꿈으로 보여주었잖아요? 설마 나한테 거짓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죠?”


촥. 누아르는 화려한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아까의 꿈. 그 풍경은 하멜, 당신이 바라던 것이에요. 나는 그것을 300년 전부터 알았죠. 기억하죠? 하멜. 내가 처음으로 당신의 꿈에 파고들었을 때. 당신이 얼마나…… 후후, 설마 몰살의 하멜이라고 불리며 마족에게 두려움을 받던 자가, 이렇게나 평화롭고 귀여운 꿈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


“…….”


“그렇게 화난 표정은 짓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꿈을 보여주었을 뿐이에요. 아, 혹시, 내가 마음대로 꿈을 바꾼 것이 불쾌해서 그런 거예요?”


탁. 펼쳤던 부채가 접혔다. 곧게 세운 부채가 누아르의 얼굴을 둘로 갈랐다. 행복해 보이던 미소가 얼음 같은 냉소로 바뀌었다.


“당연히 바꿔야죠.”


누아르는 하멜이 바랐던 ‘꿈’에서의 반려가 누구인지를 안다. 그 평화롭고 작은 집에서, 누가 자신을 기다리기를 바랐는지를 안다.


“당신의 꿈도, 내 꿈도 싫다면. 이런 꿈은 어때요?”


누아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


화아악! 또다시 꿈이 바뀌었다. 화려한 저택이 무너져내렸다.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소를 짓던 사진이 사라졌다.


배경이 바뀌었다.


“자그마한 집은 싫어요.”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저택이 좋아요.”


와르르르! 텅 비었던 세계에서 저택이 세워졌다. 유진은 조금 떨어진 하늘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숲이 많고 공기가 좋은, 하늘이 높고 푸르른 곳.”


우뚝 선 저택의 주변에 나무들이 돋아나 숲이 되었다. 텅 비었던 하늘에 그림처럼 예쁜 구름이 나타나고 빈자리를 푸른색이 칠했다.


“밤이 되면 별이 잔뜩 뜨는 곳.”


구름이 사라졌다. 푸른색 위에 검은색이 덧칠되었다. 콕콕 점을 찍은 것만 같은 별이 잔뜩 나타났다.


“짠 바람 부는 바다보다는 완만한 강줄기가 흐르는 곳.”


쿠르르르! 숲이 통째로 흔들리더니 지면이 쩍쩍 갈라졌다. 그렇게 강이 만들어졌다. 숲을 구불구불 가르는 강줄기가 저택의 뒤를 지났다.


“별채 하나는 통째로 서재로 삼고 싶어요.”


커다란 저택 옆에 별채가 불쑥 나타났다. 그것을 본 순간, 유진은 어느새 별채의 안으로 이동해 있었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누아르의 의지를 따르고 있다. 그녀가 ‘서재’를 말했기에, 꿈속의 별채에는 즉시 서재가 생겨났다.


“해가 저물면 벽난로를 피워, 따스한 주황 불로 서재를 밝힐 거에요.”


아무것도 없던 벽에 벽난로가 나타났다. 최초의 꿈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불꽃이 서재를 밝혔다.


“그곳에서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목소리를 제외하고서 모습을 보이지 않던 누아르가 나타났다. 그녀는 커다란 담요를 몸에 두르고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끼익, 끼익. 의자와 누아르가 함께 흔들렸다.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흔들면서 웃었다.


“무언가를…… 적을까요? 내가? 아하하,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책이 사라졌다. 누아르는 책 대신 나타난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 꿈에서, 당신은 어떨까요? 하멜. 여러 무기나 휘두르고 땀을 잔뜩 흘리고 와서. 혼자서 마음대로 씻고, 젖은 머리를 털며 서재에 들어올까요?”


“…….”


“하지만 나는 당신의 태도를 문제 삼아 핀잔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대신 조금 투덜거리기는 하겠죠. 하멜, 설마 혼자 씻은 거예요? 목욕은 언제 어느 때건 함께! 둘이서 같이 하기로 했잖아요! 하면서.”


누아르가 깔깔 웃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즐거움’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표정도 마찬가지다. 그저 곡선일 뿐인 웃음이 섬뜩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가끔 옛날 추억을 떠올리는 거죠. 야외에서 캠핑? 싫어, 나는 당신과 함께 침대에 누워서 속삭일 거야. 아니스? 모론? 베르무트? 내가 왜?”


“…….”


“당연히 내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에요. 하지만 하멜, 당신은 내 곁에 있어야 돼. 나도 당신의 곁에 있을 거고. 우리는 그렇게…….”


“세냐의 꿈이냐.”


유진이 말했다.


“이게, 세냐의 꿈이냐.”


“아하하!”


흔들의자가 삐걱거렸다. 누아르는 의자와 함께 몸을 젖히면 배를 잡고 웃었다.


“맞아요! 이 풋풋하고 귀여운 꿈은 세냐 메르데인의 꿈이에요. 왜요? 이것도 싫어요? 그렇다면 아니스의 꿈을 보여주죠. 그거 알아요? 하멜. 그 뱀 같던 성녀가, 당신과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


“…….”


“그 여자는 말이에요, 전쟁이 끝난 후에! 당신과 세냐의 결혼을 축복하고, 홀로 사라질 생각이었어요. 표면은 그랬죠. 하지만 심부는 그렇지 않았어. 성녀니 뭐니 해도 결국은 여자니까! 그 여자는 말이에요, 사실은 세냐에게 당신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 했어요. 어디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서, 술과 음식을 파는 여관이라도 세워서! 당신과 살다가 죽고 싶어 했다고요!”


뚝.


누아르의 목소리가 멈췄다. 저만큼 감정을 담아 외쳤지만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아르는 굳이 한 번의 침묵을 가졌다.


“안 돼.”


흔들의자에서 내려왔다.


“300년 전이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하멜, 당신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한 이유는 보통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이니까.”


또각. 높은 구두굽이 바닥을 밟는 소리. 그것뿐인데도 ‘소리’는 굉장히 커다랗게 유진을 울렸다.


“몇 년 전의 나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예요. 죽었던 당신이 환생하고, 다시 만나게 된 것에 운명적인 설렘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랑은 내가 일방적이었잖아요? 응, 그러니까, 당신이 누구를 가슴에 품고, 누구를 사랑하는지,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죠.”


쿵. 이번의 발소리는 울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서재가, 별채가, 아니, 꿈 전체가 천근이 되어 유진을 짓눌렀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오늘은 안 돼. 당신의 꿈, 나의 꿈, 세냐의 꿈, 아니스의 꿈, 그 어떤 꿈이건 상관없어. 오늘, 지금 이 순간은 오직 우리 둘만의 것이야. 당신이 꾸는 모든 꿈에는 오직 나, 누아르 제벨라만이 존재하고 내가 중심이어야 해.”


“지독하군.”


유진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내 바람과 꿈을 물었던 주제에, 결국 네 멋대로 하는 거냐, 누아르 제벨라.”


망토가 열렸다. 투명한 유리의 칼날을 가진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월광검 레반테인. 누아르는, 오랜 벗의 목숨을 끊은 검을 향해 쓸쓸한 미소를 보였다.


“이건 꿈이니까요.”


콰르르르……! 별채는 이미 무너졌다. 숲이 흔들리고 강줄기가 치솟았다. 높은 밤하늘에 떠오른 달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별들은 모두가 눈동자로 바뀌어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당신도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라지 않아요?”


대답하지 않았다. 옆으로 들어 올린 레반테인. 유리의 칼날 안쪽에서 불씨가 피어났다. 빠지지직! 검붉은 불꽃이 칼날을 집어삼켰다. 그것만으로도 꿈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역시.”


일그러진 달 아래에서 누아르가 몸을 기울였다.


“식사나 목욕이 아닌 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레반테인의 불꽃이 밤을 갈랐다.


빌어먹을 환생 555화


연속된 꿈에서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감정은 유진의 것이다. 지금 이곳이 누아르가 지배하는 꿈의 한가운데라고 해도, 유진의 감정은 누아르에게 지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유진의 존재는, 꿈속에 존재할지라도 누아르에게 지배되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은 배경과 상황으로 존재할 뿐. 유진 본인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


‘하지만 꿈 자체를 내 간섭은 받지 않아.’


몇 번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꿈을 꿈이라 자각해도, 꿈 자체는 누아르가 쥐고 있다. 꿈에 대한 지배력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결국 지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무식한 것부터 시도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답이란 확신은 없지만, 지금 유진이 할 수 있는 방법 중 최선은 꿈 자체를 부숴 버리는 것이다.


콰르르르! 유리의 칼날을 휘감은 불꽃이 격렬히 몸을 떨었다. 유진은 칼자루를 거머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뒤흔들리는 밤하늘. 일그러진 달을 등진 누아르가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말이에요. 나도 정말 궁금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누아르의 모습은 아까의 대저택에서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투’에는 도저히 맞지 않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는 풍성한 프릴이 달렸다. 양팔은 팔뚝까지 올라오는 길고 하얀 장갑을 꼈고, 왼손에는 접힌 부채를 들었다.


“하멜.”


천천히 들린 부채가 누아르의 얼굴 앞에 섰다.


“정말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촤악. 부채가 펼쳐졌다. 드레스만큼이나 화려한 부채가 누아르의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눈동자는 가리지 않았다. 빙그레 곡선을 그린 눈동자가 등진 달이 만든 그늘에서 빛을 발했다.


“정말로, 이 꿈에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유진은 옆으로 든 레반테인을 당겼다. 칼날이 하늘을 향하고, 넘실거리는 불꽃이 달을 삼킬 듯 혀를 날름댔다. 찌직, 찌지직…… 백염식의 불꽃이 레반테인과 공명했다.


“이길 수 있냐고?”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지만. 유진은 입을 열어 대답해 주었다.


“몰라.”


솔직한 대답이었다.


“나는 네게 패배하고 죽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네 미쳐 버린 집착에 어울려 주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야. 나는.”


점점 번져가는 불꽃이 꿈의 흔들림을 보다 격렬히 바꾸었다. 레반테인과 백염식의 공명은 확실하게 꿈의 영향을 주었다.


-화륵. 흩날리는 불티가 유진의 등에 모이더니 불꽃의 날개가 되었다. 꿈속 밤의 어둠에서 프로미넌스의 검은 불꽃은 확연히 다른 색을 띠었다.


“너를 죽이러 온 거다.”


그 말을 내뱉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됐다. 누아르는 오싹한 희열을 느꼈다. 그녀는 바르르 떨리는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면서, 부채에 가려진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응, 알아요.”


저 표정, 감정, 대답, 모든 것에서 하멜의 의지를 느꼈다. 저 의지는 의연하고 필사적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감정이 매몰되어 있다.


누아르는, 지금의 하멜이 레반테인과 닮았다고 느꼈다. 저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의 칼날은 살짝 두드리기만 해도 깨질 것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그렇게 보이되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연약해 보이는 유리의 칼날에는 세상을 모조리 불사르고도 남을 겁화가 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각오를 하고 이곳에 왔는지, 나는 알아.”


쩌저적……! 일그러진 보름달에 균열이 일어났다.


“하멜. 당신은 나를 죽이러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뿐만이 아니죠. 당신은 나에게 죽을 각오도 하고 왔어.”


보름달의 균열이 점점 크게 번져갔다. 균열에서 갈라져 나온 파편과 부스러기가 누아르의 뒤에서 흩날렸다.


“이곳은 내가 만들어 지배하는 꿈. 인정하죠, 하멜. 나는 이 꿈에서 당신의 존재와 감정만큼은 지배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감정과 기억은 볼 수 있어요. 나의 하멜. 당신은, 유서를 남겼군요.”


보름달의 붕괴가 가속되었다. 이제 누아르의 뒤에 있는 것은 더 이상 보름달이 아니었다. 산산조각이 난 달의 파편들이 누아르의 뒤에서 원을 그렸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유언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멜,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이 죽은 뒤에, 과연 모론 루하르가 당신을 대신해 그 레반테인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유폐의 마왕이 ‘특별하게’ 여기며 기회를 주는 것은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이 아니라면 유폐의 마왕은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거예요.”


넓게 펼쳐지는 달의 파편에 별들이 호응했다. 출렁거리는 밤의 어둠에서 벗어난 하늘의 모든 별이 누아르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과연, 당신을 대신해서 라이언하트가 멸망의 마왕 앞에 설 수 있을까? 길레이드 라이언하트? 기온 라이언하트? 카르멘 라이언하트? 아하하, 설마 어리고 나약한 쌍둥이가 멸망의 마왕과 대적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몰라.”


유진인 내뱉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할 거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허무히 끝날 만큼, 나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이 하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믿고 유서를 적은 거다. 내가 죽으면, 모론이, 세냐가, 아니스가, 나 대신에 유폐의 마왕을 죽일 거다. 멸망의 마왕의 앞에 서는 자격이 라이언하트의 피라면.”


투욱.


유진의 발이 가볍게 지면을 밀었다. 그렇게 유진은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행히도 라이언하트는 식구가 굉장히 많아서 말이야. 필요한 자격을 충족하는 식구는 넘치도록 있지.”


“아하하!”


누아르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하멜, 당신도 알잖아요? 지금 그 말이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지.”


“당연히 알지.”


하지만 그런 유서라도 남겨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 생각이다.”


“쉽지 않을 거예요.”


“아니, 쉽고 간단해. 내가 죽기 전에, 누아르 제벨라, 너를 죽이면 어떻게든 된다.”


무모하다. 가능성이 적다. 그래서 필사적이다. 프로미넌스가 더욱 활활 타올랐다. 저 불꽃의 외날개는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유진에게 성역을 두른다. -키이잉! 누아르가 만든 꿈속에서 유진의 성역이 존재했다.


성역과 꿈이 충돌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깨를 감싸안은 왼손이 움직였다. 새하얀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며 빙글 원을 그렸다.


“하멜, 당신이 하는 말은 조금도 쉽고 간단하지 않아. 나를 죽인다고?”


우우우우! 밤이 울부짖었다. 본격적으로 붕괴가 시작되었다. 산산조각이 난 달과 별이 밤의 어둠을 갈기갈기 찢으며 추락했다.


“그건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야.”


끝없이 펼쳐지고 높고 먼 밤하늘. 그곳에 뜬 달과 별은 손바닥으로 가리고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만큼 작다. 하지만 추락하여 가까이 다가오니 더 이상 작지 않았다.


세냐가 ‘로망’이라며 떠들었던 메테오. 그 압도적 질량의 대마법을 메테오 ‘따위’라고 취급할 수 있을 폭력이 유진에게 집중되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절대로 현실일 수가 없다. 현실에서 이렇게나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산산조각이 난 달이 추락한다면 세상이 통째로 멸망해 버릴 것이다.


그러니 저런 말도 안 되는 폭력이 가능하다. 모든 것은 악몽의 한순간일 뿐. 세상을 통째로 멸망시킬 별과 달의 폭격에서도 누아르의 꿈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은 죽을 것이다. 유진의 신성과 직관이 그러한 경고를 느꼈다.


‘로망이라.’


꿈이기에, 현실에서 불가능한 폭력이 가능하다. 그것이 무조건 누아르에게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존재라면 꿈에 끌려들어 온 순간 저항이 불가능하겠지만, 유진은 저항이 가능하다.


그래서 프로미넌스를 펼친 것이다. 확장시키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방어와 강화로서 몸에 두른 성역. 꿈과 충돌하며 섞여 들어간 성역이, 유진이 바라는 ‘꿈’을 실현했다.


콰르르르! 레반테인의 칼날이 덜덜 떨렸다. 유진은 호흡을 삼키며 왼손을 들었다. 칼날에서 옮겨간 신화(神火)가 왼손을 감쌌다.


이곳이 현실이라면 절대로 벌써 이그니션은 쓰지 않는다. 전투를 결정지을 국면도 아니고, 한번 써버리면 신력이 봉인되어 버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맙소사.”


설마 역으로 꿈을 이용할 줄이야! 누아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렇지만 감탄과 상관없이 달과 별은 추락하고 있다. 기어코 찾아온 대재앙적인 폭력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 비현실의 광경은 하늘이 완전히 무너져서 지면과 하나가 되는 것만 같았다.


이그니션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꿈에 녹아든 성역이 계속해서 유진의 바람을 실현했다.


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잠깐.”


누아르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란 감정이 나타났다.


“하멜.”


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아무리 이곳이 꿈이라지만.”


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 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환상의 마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거기에 지금의 나는 위신의 마안까지 가지고 있죠.”


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 꿈의 지배자는 나예요.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감당할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뒤에 식은땀을 흘리고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끼는 것처럼. 꿈속에서 추락하여 현실에서도 똑같은 추락감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는 것처럼.”


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이 꿈에서 벌어지는 일은 현실의 당신에게도 영향이 갈 거예요. 이그니션은 괜찮아. 그건, 당신이 몇 번이고 겪어서 익숙하니까. 하지만 이건 달라요. 이건, 현실의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


“아니.”


유진이 내뱉었다.


“나는 감당할 수 있다. 과부하에 뇌가 터져버린다면, 내 성녀가 어떻게든 해 줄 거다. 꿈에 정신이 박제된다면 세냐가 어떻게든 해줄 거다.”


레반테인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리고, 현실의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그게 지금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냐. 이 꿈에서 죽어버린다면 현실이 무슨 소용이야?”


수십 개로 늘어난 레반테인의 불꽃이 하늘과 지면의 사이를 가득 채웠다.


“당신의 정신이 버티지 못할 거야.”


누아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버틸 수 있어.”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멸망의 마왕, 그 중심에서도 버텼던 정신이다. 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꼴사납고, 가능성 희박한 이야기만 적은 유서가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란다.


유진은 숨을 삼키며 ‘진짜’ 레반테인을 쥐었다. 수십 자루의 레반테인이 똑같이 불을 뿜었다. 세상을 통째로 멸망시킬 대재앙에 맞서 겁화가 피어올랐다.


소리조차 소멸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레반테인에 재가 되었다. 추락하던 달의 파편이 모조리 불탔다. 더 이상 꿈속 하늘은 밤이 아니었다. 레반테인의 불꽃은 밤의 어둠마저 소멸시켰다.


시커멓던 밤에 불꽃이 녹아든다. 그렇게 세상이 황혼과 같은 빛으로 바뀌었다. 누아르는 여전히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있다. 이 어마어마한 파괴에도 누아르는 휩쓸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 황혼의 빛깔은 누아르에게 작은 동요를 만들었다.


“……멋져.”


누아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멜이 역으로 꿈에 간섭하여 저지른 터무니없는 짓. 그건 확실하게 누아르를 당황시켰다. 설마 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장을 이점으로 삼을 줄이야.


“하지만 부족해.”


지상과 하늘을 모조리 지워 버린 겁화가 누아르를 노렸다.


“나는 이 정도로 죽음을 느낄 수 없게 됐어.”


입가를 가리던 부채가 접혔다.


그렇게 하나의 꿈이 접혔다. 하지만 꿈은 끝나지 않는다. 다음의 꿈으로 바뀔 뿐이다. 끝나고 바뀌어 시작하는 것에 간극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십 자루의 레반테인. 유진의 성역으로 존재하던 꿈이, 보다 커다란 꿈에 잡아먹혔다.


펑, 펑, 펑, 펑! 끔찍하던 겁화가 흔들어 열은 샴페인의 거품이 되어 흩어졌다. 날아간 코르크가 천장에 부딪히고 떨어졌다. 유진의 몸이 한 번 휘청거렸다.


갑작스레 세상이 바뀌었고, 어느새 유진은 땅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이곳은 세냐가 꿈꾸던 저택이 아니다. 공기가 좋고, 하늘이 높고 푸르고, 완만한 강줄기가 흐르는 숲이 아니다.


세상 어딘지 모를 한적한 곳. 워프게이트 대신에 마차와 수레가 다니는 곳. 가을에는 논밭이 황금색으로 물드는 시골 마을. 여행자를 상대하는 자그마한 여관.


“어머, 당신.”


개방된 부엌에서 걸어 나온 누아르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양손에 든 맥주를 흔들며 방긋 웃었다.


“카운터에 서 있지 않고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이건 아니스의 꿈이다.


“아무리 우리 여관이 장사가 잘되지 않아도, 주인이라면 손님을 기다려야…….”


끝까지 듣지 않았다. 유진은 앞으로 달려들어 누아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퍼벅! 누아르의 머리가 토마토처럼 펑 터졌다. 아니, 비유로 끝나지 않았다. 누아르의 머리는 정말로 토마토가 되었다. 터진 토마토의 과육이 철푸덕 아래로 떨어졌다.


“말했잖아요, 하멜.”


누아르는 바닥의 과육을 밟아 으깨면서, 양손에 들고 있던 맥주 한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굉장히 어렵고 힘들 거라고.”


다시 이그니션이 켜졌다. 콰르르르! 불꽃의 폭풍이 여관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맥주를 홀짝거리던 누아르도 불꽃에 휩쓸렸다.


격렬하던 불꽃이 모조리 찻잔 속 태풍이 되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어느새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룰렛. 건너편에서 딜러를 보던 누아르가 수북하게 쌓인 칩에 눈짓을 보내며 배시시 웃었다.


“베팅?”


콰직! 유진의 발이 룰렛을 찍어 부쉈다. 그대로 누아르의 멱살을 쥐고 레반테인을 처박으려는 찰나. 다시 지금의 꿈이 접히고 새로운 꿈이 되었다.


무도회다. 이번 꿈에는 누아르와 유진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남녀가 서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춤을 추는 모든 여자가 누아르다. 남자는- 얼굴만이 깔끔하게 지워진 유진이었다.


“춤도 괜찮지 않아요?”


수십 명의 누아르가 유진에게 속삭였다.


“시무인이 생각나네요. 나는 그때 당신과 춤을 추고 싶었는데.”


파트너가 없는 진짜 누아르가 유진을 향해 사뿐사뿐 다가왔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보내고 세냐 메르데인과 춤을 추었지.”


부채를 펼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낀 하얀 장갑을 천천히 벗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화가 나.”


누아르는 벗은 장갑을 유진의 얼굴에 던졌다.


“그러니 결투를 하죠.”


웃음기 가득한 속삭임.


그냥 던졌을 뿐인 얇은 장갑이 유진의 머리를 박살 냈다.


빌어먹을 환생 556화


유진은 전생과 현생을 살며 이런저런 일을 겪고, 다양한 부상도 입어봤다.


그런 유진조차도 머리가 통째로 박살이 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족의 머리는 셀 수 없이 많이 부숴보았지만, 유진 본인의 머리가 부서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머리가 부서지면 죽는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존재는 머리가 부서지면 죽어버린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죽지 않았다. 이곳이 현실이 아닌 꿈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기묘하고 역겨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진은 박살 나서 흩어지는 머리뼈와 뇌의 파편을 보고 있다. 피인지 뇌수인지 모를 액체가 촥, 터지는 것을 보고 있다.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 눈동자에 따라 시야가 엉망으로 뒤흔들렸다.


머리가 부서진 것에 대한 통증. 어지럽게 섞이는 시야. 그 모든 것이 유진에게는 기묘하고, 역겹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이 아닐지라도, 지금 유진이 느끼는 감각은 현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현실에서도 머리가 부서진다면 지금 같은 감각을 느낄 것 같았다.


이윽고 몸이 휘청거렸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통제를 벗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고,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촥, 촥! 지저분한 목의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런 광경은 유진에게 익숙했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해자의 입장에서였다. 유진 본인이 이런 꼴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신성을 얻었다고 해도 근본이 인간인 이상, 머리가 날아가면 죽는다.


‘살아 있다.’


빠르게 생각했다. 머리가 부서졌지만 사고는 이어지고 있다. 복합적이고 끔찍한 통증이 이성을 날려버리려 하고 있지만, 유진은 고통에 휘말리지 않고 차분히 버텨냈다.


‘휘둘리지 마.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마.’


자기암시처럼 되뇌었다. 머리가 부서진 것은 사실이지만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휘둘려 매몰되어 버리면, 곧장 누아르 제벨라의 악몽으로 이어질 것이다.


머리를 잃은 몸이 자리에 주저앉아 피를 분수처럼 뿜어대고 있지만, 프로미넌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의 성역은 여전히 이 터무니없는 꿈속에서 유진을 지키고 있다.


‘다시.’


생각했다.


-촤라라락! 흩어진 뇌수가 돌아가고, 뇌가 모이고, 머리뼈가 달라붙고, 데굴데굴 구르던 눈동자가 본래 있던 구멍으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유진의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유진은 헉하고 숨을 삼키며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지면을 밀어서 일어서려는 순간.


“아하하.”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아르의 웃음소리. 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나도 커서 무도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결투하자며?”


유진은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춤을 추던 수십 명의 누아르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널따란 무도회장에는 오직 유진만이 서 있다.


그리고 누아르는 높은 곳에서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유진은, 보름달만큼이나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를 보았다. 무도회장에서 유진이 볼 수 있는 것은 누아르의 ‘눈동자’뿐이었다.


“장난이에요, 장난. 하멜, 제가 당신과 결투하고 싶을 리가 없잖아요?”


누아르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쿠르르르! 눈동자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거대한 ‘손’이 유진을 향해 내려왔다.


“결투 말고, 인형 놀이는 어때요?”


거대한 손가락이 유진을 잡으려고 들었다.


누아르가 커진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모든 것이 작아진 것일까?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콰르르! 레반테인의 불꽃이 누아르의 손가락을 덮쳤다.


“음.”


커다란 손가락이 불꽃을 피했다. 움직임 자체는 가볍고 동작도 크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일그러지고 멀어지는 공간 때문에 불꽃은 손가락에 닿지 못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저는 그 불꽃이 싫어요.”


찌지지지직! 멀어졌던 공간이 구겨지면서 유진을 압박했다. 아주 잠깐 유진의 움직임이 멈췄고, 누아르의 엄지손가락이 검지손가락을 구부렸다.


“닿고 싶지 않아.”


뻐어억! 튕겨 나간 손가락이 허공을 강타했다. 구겨지며 압박하던 공간이 유진과 함께 통째로 뜯겨 날아갔다. 유진은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삼켰다.


모든 공간이 누아르의 지배를 받는 이상 프로미넌스의 공간도약을 사용이 불가능하다. 성역의 권능도 꿈속에서 유진을 보호하는 것이 한계다.


반면에 누아르는 모든 것이 자유롭다. 현실에서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한데, 이곳 꿈속에서 누아르는 전지전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레반테인의 불꽃은 유효한가.’


누아르 본인이 방금 내뱉은 것과는 관계없이, 유진이 판단하기에도 레반테인은 누아르에게 유효하다. 애당초 레반테인마저 무효한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 신성월광검은 신대의 마지막과 지금의 시작부터 존재한 모든 신들의 염원을 녹여낸 검이다.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한 결전병기란 말이다. 아무리 누아르 제벨라가 악신이 되었다고 해도, 레반테인이 무효할 리가 없다.


문제는, 레반테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직접 닿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가비드와의 결투에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베르무트도 말했듯이, 가비드는 정통적인 검사다. 위신의 마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가비드의 전법은 정면승부다.


하지만 누아르는 다르다. 애당초 그녀는 ‘정면승부’라는 것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레반테인을 아무리 휘두른들 누아르에게는 닿지 않는다.


-화륵. 레반테인이 다시 증식하기 시작했다. 구겨지고 펴지는 것이 반복되던 공간에 수십 자루의 불꽃이 나타났다.


“아까는 놀랐지만.”


먼 천장 위에서 누아르가 코웃음을 쳤다.


“위력 자체는 복제되어도 신성은 복제할 수 없어요. 이곳은 내가 만든 꿈이니까요.”


우직, 우지지직! 불꽃에 휩쓸리던 무도회장이 뒤흔들렸다. 공간 자체가 종이로 만든 인형의 집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붉은 커튼에 가려져 있던 창문이 박살이 났다. 휑하니 뚫린 창문에서 누아르의 눈동자가 보였다. 요악한 빛을 발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인형의 집을 들여다보았다.


“뭐, 신성이 없다고 해도 위력은 대단하지만. 하지만 나를 죽일 정도는 아니야. 지금 꿈이 모조리 불타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콰사삭! 무도회장과 저택이 사라졌다. 그 즉시 프로미넌스가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아까는 꿈이 끝나고 새로 열리는 것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포착할 수 있었다. 지금껏 펼쳐졌던 꿈이 말끔하게 소멸하고 새로이 구성되었다.


ㅡ촤아아아악! 거대한 파도가 유진을 덮쳤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파도였다. 짭짤한 소금기 어린 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갈매기의 우짖음. 유진은 일단 레반테인을 휘둘러 파도를 베었다.


“불타 버린 꿈을 뒤로하고, 새로운 꿈을 꾸면 돼.”


파도를 베자마자 평온히 가라앉은 바다가 나타났다. 육지라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광활한 바다의 한가운데. 거대한 플라밍고 튜브 위. 커다란 파라솔 아래의 썬베드에 누아르가 누워 있었다.


그녀는 얼굴의 절반을 가릴 만큼 커다란 선글라스를 위로 올리며 방긋 웃었다.


“기왕 바다에 왔는데, 일단 여유를 즐기는 것은 어떨까요?”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오일 병을 내밀며 속삭였다.


“서로 오일이나 바르면서.”


“허.”


이쯤 되니 유진도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드넓은 바다의 끝을 헤아려보며 중얼거렸다.


“너, 대체 어디까지 가능한 거냐?”


“꿈에서라면.”


누아르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불가능한 것이 없죠. 당신이 생각한 대로에요, 하멜. 저는 꿈속에서는 전지전능하다고요.”


여유는 허세가 아니다. 지금의 꿈은 여태까지보다 훨씬 넓다. 오두막, 숲, 저택, 무도회장, 그렇게 배경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이곳은 정말로 무한히 펼쳐진 바다다. ‘끝’까지 보다도 육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진이 관측하려 하면 오히려 바다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그런 꿈이다. 꿰뚫어 보려 할수록 오히려 압도되어 버린다. 이 무한히 펼쳐진 몽중에서 유진의 성역은 너무나도 작아 초라할 정도다.


‘상상 이상이야.’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가늠되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유진을 납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누아르가 300년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최적의 효율을 추구하여 정기를 모았다고 해도. 최근 몇 년 동안 제벨라 파크를 만들어서 어마어마한 정기와 욕망을 수급했다고 해도, 이건…… 납득이 되지 않을 만큼 과하다.


“…….”


찌릿. 유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누아르의 왼쪽 눈동자.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는 마안. 가비드에게 직접 넘겨받은 위신의 마안. 다시 생각하고 꿈을 보았다. 이윽고 유진은 납득할 수 있었다.


누아르는 위신의 마안을 사용해 ‘꿈’을 통째로 유폐해 버렸다. 바깥 세상과, 현실과 완전히 단절하고 그 안을 환상으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구성한 ‘꿈’에 현실의 구분은 없다. 이 세계에서 누아르가 바라는 모든 환상이 현실이 된다.


“이해했나요?”


누아르는 왼손에 오일을 듬뿍 짜냈다.


“당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알겠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예요. 꿈속에서의 나는 300년 전부터 무적에 준했어요. 지금은? 아하하, 말할 필요가 있나요?”


사락. 어깨에 두르고 있던 비치타월이 흘러내렸다. 살랑거리던 꼬리가 누아르의 등 뒤로 올라가더니, 가슴을 가린 비키니 수영복의 끈을 당겼다.


“당신의 발악과 저항은 즐겁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얼마든지 즐길 수 있어. 그러니 지금은…… 다른 것을 즐겨보자고요. 서로 오일을 바르고, 함께 누워 일광욕을 하고.”


유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아…… 오해는 말아요, 하멜. 나는 당신과 ‘다른’ 결말을 바라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죽일 거고, 당신도 나를 죽여야 해.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과정인 거야.”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잠깐은 즐기는 것이 어때요? 여태까지 많이 힘들었잖아요. 하멜. 원치도 않는 환생을 반복하고. 수많은 기대에 따르면서. 아, 물론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은 누구의 기대가 없었어도 지금처럼 했을 거야.”


이 완전한 세계를 어떻게 해야 끝낼 수 있을까.


“아가로트를 몰랐어도. 하멜의 환생인 이상, 당신은 지금처럼 했을 거야. 라이언하트가 아닌 평범한, 아니, 그만도 못한 비루한 가문에 태어났어도. 당신은…… 어떻게든 내 앞에 왔을 거야.”


위신의 마안으로 유폐해 버린 세계. 환상의 마안으로 구축한 꿈. 이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연료는 누아르가 여태까지 쌓아 올린 모든 힘. 거기에 제벨라 시티의 염원을 꿈으로 이뤄준 것으로 얻어 낸 숭배와 신앙. 이 꿈은 누아르 제벨라의 성역이다. 아가로트와 빛의 신성을 지녔다고 해도 휩쓸리지 않는 것이 고작이다.


“이런 말은 잔혹하게 들리겠지만, 하멜. 이곳이 당신의 종착지예요.”


꿈속에서 누아르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반테인은 닿지 않는다. 꿈 자체를 파괴하는 것을 반복하더라도 누아르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꿈을 다시 시작해 버린다.


“당신은 나를 이길 수 없어요. 당신이 나를 죽이기 위해 준비했듯, 나도 당신을 죽이기 위해 준비했어요. 당신은 여유를 부리지 않고 나를 죽이러 왔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늦었던 거예요. 나는 언제고 하멜, 당신을 죽일 수 있었으니까.”


꿈을 부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부수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 의미가 있나?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해 버리는데.


알고는 있다. 이그니션을 반복하고, 레반테인을 증식하고, 휘둘러도, 지치지는 않는다. 그건 누아르도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면 이 싸움은 누군가의 정신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는지. 누가 끝나지 않을 반복에 마모되어 포기하는지로 승패가 갈려 버린다.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하멜. 끝나기 전에 잠깐 즐기면, 서로 미련이 덜할지도 모르잖아요?”


사라락. 끈이 풀린 수영복이 내려왔다. 누아르는 투명한 오일을 양손으로 받치며 배시시 웃었다.


유진은 감은 눈을 떴다. 동요라곤 없는 금색 눈동자. 굳게 다물린 입술. 그 얼굴을 보고서, 누아르는 눈썹을 찌푸렸다.


“바다가 싫어요?”


결론은 내렸다. 유진 혼자서 꿈을 파괴하고 현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 수백 수천 번, 얼마든지 시도해 볼 수는 있다. 꿈을 깎아가며 누아르에게 도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유진은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진이 취할 방법은 저것만이 유일하지 않다. 유진은 꿈속에 있지만, 꿈 밖의 현실에는 세냐와 성녀들이 있다.


‘목소리는 닿지 않나.’


하지만 성녀와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유진이 성녀들과의 연결을 느끼듯, 성녀들도 유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자체가 좌표가 된다. 누아르가 아무리 꿈을 재창조해도 유진은 지울 수 없으니, 이 좌표는 불변이다.


“무의미해.”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제벨라 시티의 밖. 세냐 메르데인과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아니스 슬리우드가 있다.


“들어왔다면 죽였을 텐데.”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오일에 젖어 미끌거리는 손가락을 문질렀다.


“하멜, 당신이 안에서 부수고. 세냐 메르데인과 아니스 슬리우드,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밖에서 꿈을 부순다. 좋아요, 멋지네요, 생각대로 된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죽다 살아난 마법사의 송장과, 정말로 죽어서 추하게 이승에 달라붙은 망령과, 그 망령의 시체를 누덕누덕 기워 만든 썩은 인형 따위가.”


치직, 치지직……! 문지르는 손가락이 점점 빠르고 강해졌다.


“내 꿈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어.”


유진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유 따위는 말하지 않았다. 믿는 것에 이유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유진의 대답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아, 그래요?”


누아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풀려 내려간 수영복의 끈이 다시 묶였다. 오일에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매끈하게 돌아왔다.


“짜증 나네.”


ㅡ퍼어어엉! 누아르를 태우고 있던 플라밍고 튜브가 폭발했다. 그와 함께 바다가 폭발했다. 하늘까지 치솟은 파도가 사방에서 유진을 덮쳤다.


“그 믿음이 짜증 나.”


비처럼 쏟아지는 물방울 아래에서 누아르가 속삭였다.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넘기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나는 하멜, 당신과 좋은 꿈을 꾸고 싶었는데.”


촤아아악! 불꽃이 유진을 중심으로 원이 되어 퍼져 나갔다. 양단된 파도가 모조리 증발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누아르는 손가락을 들어 유진을 가리켰다.


“당신이 좋은 꿈을 원하지 않는다면.”


콰지지직! 손가락에서 뻗어 나간 마력이 안개를 꿰뚫었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레반테인을 들어 앞을 막았지만, 누아르의 마력을 베거나 튕겨내지는 못했다. 마력은 레반테인과 함께 유진을 날려 버렸다.


마력과 충돌해 뒤로 날아갔다. 그렇게 두었다. 대신 누아르는 세상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발아래에 있던 바다가 통째로 유진의 뒤로 옮겨졌다.


“악몽을 보여줄 수밖에 없잖아.”


멀어야 할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목소리와 함께 물거품이 끓는 소리가 유진의 귀를 가득 채웠다.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바다가 유진을 집어삼켰다.


빌어먹을 환생 557화


300년 전. 누아르 제벨라가 ‘환상의 마안’의 위력을 가장 정확하게 과시한 전투, 아니, 학살은, 튜라스 왕국군 정예 3만 명을 평원에서 익사시킨 것이다. 정신 공격에 내성이 없던 그들은 물 한 방울 없는 평원에서 바다를 보았고, 지면에서 허우적댔다. 있지도 않은 바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거운 갑옷을 벗고 무기마저 집어 던졌다.


그렇게까지 했지만, 3만 명은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 평원에서 익사했다.


지금 유진이 처한 상황은 300년 전보다 지독했다. 이 바다는 환상이되 환상이 아니다. 꿈속이지만 현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진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익사가 반복된단 말이다.


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씹었다.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작정한다면 숨을 쉬지 않고 수십 분은 버틸 수 있지만, 그 이상 멈출 수는 없다. 그리고 숨을 오래 멈추고 있다면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이 끊어질 것이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마저 잘되지 않았다. 무한대의 바다가 모조리 유진을 향해 흐르고 있다. 그 어마어마한 무게가 유진의 전신을 짓눌렀다.


쉬리릭…….


격류 속에 다른 흐름이 나타났다. 꽈배기처럼 꼬인 물이 송곳이 되어 유진에게 쏘아졌다. 진즉에 알아채고 피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바다가, 꿈 자체가 유진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퍼억! 유진의 몸이 뒤틀렸다.


‘폐.’


송곳에 관통당했다. 기껏 멈추고 있던 호흡이 말을 듣지 않는다. 순식간에 의식이 멀어졌다. 구멍 난 폐에 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폐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다. 온몸이 뻥 터질 것만 같다.


‘이건 못 버티겠네.’


멀어진 의식이 흐려지고 끊어지려는 순간. 유진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일단 숨을 참으면서 기회를 볼까 했는데 이건 안 되겠다. 현실의 바다라면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꿈속의 바다에서 지금 같은 꼴이 되어버리면 이것이 최선이다.


온몸이 뻥 터질 것 같은 기분.


실제로 뻥 터트렸다. 백염식이 폭주하고, 우주가 폭발했다. 유진이 가진 모든 마나가 불꽃이 되어 튀어 나갔다.


“…….”


바다 위에서 그걸 보던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유진이 한 것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폭이다. 다른 수단을 강구하지 않고 그냥 자포자기로 몸을 터트려 버렸다.


하지만 그 위력은 터무니없을 정도였다. 공검, 이클립스, 그런 것보다 훨씬 커다란 위력이 무한한 바다에 뻥 구멍을 뚫었다. 목숨을 모조리 터트린 것이니 다른 기술보다 위력이 월등할 수밖에 없었다.


“하멜, 이건 굉장히……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방금까지 분노와 짜증을 드러낸 주제에. 누아르는 휘둥그레 뜬 눈을 깜빡거리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참, 무식하게 미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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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는, 유진 일행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유폐의 마왕이 ‘다음’을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세상에 희망을 걸 때. “……하하.” 드디어 뜻대로 웃음이 나왔다. 유폐의 마왕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에 대한 시험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유진과 동료들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비록 이렇게 된 것이 유폐의 마왕이 상정하지 못한 변수, 발자크 루드베스의 배신과…… 누아르 제벨라의 잔재의 도움이 있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변수를 사랑한다. 그가 보내온 억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변수를. 멸망으로 수렴할 뿐인 운명을 흔드는 변수를 사랑한다. 변수는 유폐의 마왕에게 치명적일수록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지금의 시대는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마왕에 맞서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충천해 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절망하지 않고, 반항 의지를 박탈할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꿋꿋이 나아갔다. 몇 번이나 권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힘을 보여주며 절망을 강요했다. 포기할 것을,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 영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도 말해주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죽음이 두려워 망설이거나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다. 바라던 절망을 줄 수 없다. 힘을 확인했다. 저들은 기어코 베르무트마저 구하고 말겠다는 욕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끝을 내도 좋지 않은가. “폐하!” 엎드린 유폐의 마왕에게 마족들이 다가왔다. 판데모니엄에 잔류한 마군의 후발대다. 그 목소리와 발걸음에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유폐의 마왕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전쟁 승리 후 대륙을 무차별로 폭격하기 위해 개조한 전투 요새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유폐의 마왕을 추락시킨 공격이 판데모니엄을 휩쓸어버리기도 ...

Ch1

 프롤로그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쪽팔려 미칠 것 같은 일이지만. 나는 정말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그렇게 착각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남들보다 실력이 느는 것도 빨랐다. 하지만 쉬운 것은 처음까지. 처음에는 남들보다 빠르게 늘었어도, 도중부터는 남들처럼 늘어져 버린다.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럴 수도 있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잖아.  나는 할 수 있어. 천재니까. 결국에는 알고 싶지 않던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철부지의 우스운 착각을 깨부숴준 것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천재와 만난 덕분이었다. 자기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던 우물 안 개구리. 내가 나의 작은 우물 안에서 우월감에 취했을 때. 진짜 천재는 이미 넓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천재가 싫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남도 당연히 할 수 있단 듯이 지껄이는 얘기를 듣다보면 살의가 치솟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건, 지보다 못난 놈을 무시하려 뻗대는 것이건.  여하튼, 들으면 좆같은 기분이 든다. ‘질투하는 건가?’ 질투는 씨발아. 네가 말을 좆같이 했잖아. 그래서 나도 좆같이 굴었는데 뭔 놈의 질투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냥... 네가 안타까워서.’ 안타까워? 뭐가?  ‘조금 더 노력하면...’ 네가 뭘 안다고 노력 운운하는 거냐.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야, 나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네 기준이 존나게 높은 거야. 어떻게 모든 사람이 너처럼 할 수 있겠냐? 네가 천재라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너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알겠냐?  난 너처럼은 못해. * “꺼져.”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가슴에 뚫린 구멍. 그 귀한 엘릭서를 들이 ...

Ch13

 오르투스의 위치를 특정했다. 거기서부터는 모든 것이 간단했다. 일행은 관측병과 경계병의 눈을 속이고서 오르투스가 있는 방의 문 앞에 도착했다. 셋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문을 열었다. 오르투스 하이만. 그는 집무용 책상 너머에 앉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손에 쥔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적고 있던 모양이다. “음?” 예고 없이 문이 열린 것이다. 오르투스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3명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3명. 누구인지는 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다른 배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이곳에? 아니, 무언가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예고는커녕 노크조차 하지 않고 들어온 이유는 대체? 문을 닫는 남자…… 도 알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 잠깐, 유진 라이언하트? 키옐에 있다던 그가 왜 이곳에, 카르멘과 함께 있는 것인가? 사흘 전에 승선한 라이언하트는 3명뿐.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 그 외에 3명의 몸종이 더 있기는 했지만 그중에 남자는 없었다. 그리고…… 저 여자는 누구지? 평범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보라색 머리카락. 방긋방긋 웃고 있는 녹색 눈동자. 손에 든 마법지팡이…… 마법사? 현명한 세냐? “대체 무슨……?” 여전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키옐에 있을 유진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가 이곳에 있는 것. 그리고 카르멘이 저들을 데리고서, 이 늦은 밤에 말도 없이 찾아온 것. ㅡ잠깐. 말도 없이 찾아왔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이 배, 라베르시아는 마법결계가 씌워져 있다. 결계에 누군가가 접촉한다면, 무조건 오르투스와 마이스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다.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결계가 돌파되었다. 그로도 모자라서, 방문 앞에 올 때까지. 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저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었다 한들, 저만한 존재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