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지지직! 바다에 구멍을 뚫은 불꽃에서 유진이 튀어나왔다. 핏발 선 눈. 격앙된 호흡. 흠뻑 젖은 머리. 누아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레반테인이 누아르의 머리로 날아갔다.
“하멜.”
목소리가 바뀌었다.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방금까지 고개를 흔들던 누아르는 누아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었다. 세냐가 유진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나를 죽이려는…….”
불꽃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레반테인은 멈추지 않았다. 유진은 즉시 세냐의 머리를 잘랐다. 코부터 썩둑, 반으로 잘린 머리가 날아갔다.
“하멜,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바로 뒤에서 또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이건 아니스다.
프로미넌스와 함께 유진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새하얀 성직복을 입은, 뼈만 남은 아니스가 턱관절을 딱딱 부딪치며 앙상한 뼈다귀 손을 모아 기도했다.
“이미 죽은 나를 한 번 더 죽이려는…….”
“어, 죽일 거야.”
퍼억! 레반테인이 아니스의 머리뼈를 정수리부터 쪼개버렸다. 꽈드드득! 아니스의 늑골이 열리더니 크리스티나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며 유진의 팔에 매달렸다.
“제발, 제발, 유진 님, 구원을……!”
“X까.”
유진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으며 레반테인을 더 아래로 찍어눌렀다.
“꺄아아악!”
아니스의 늑골을 열고 나온 크리스티나의 온몸이 불에 탔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유진의 코를 찌르고, 불 속에서 크리스티나가 발광했다.
“유진 님! 사, 살려주세요!”
아래에서 나타난 메르가 유진의 다리에 매달렸다. 콰직! 레반테인으로 창림을 펼쳤다. 불꽃의 창이 메르를 꼬챙이로 만들었다.
“은자여, 아악! 아, 아프니라!”
라이미르아는 나타난 순간에 몸을 양단했다. 오른쪽, 왼쪽, 둘로 나눈 몸이 각자 다른 것으로 변했다.
“유진, 너야말로 라이언하트의 가주에…….”
“나는 네 목숨을 구했어, 알아? 내가 널 구하지 않았다면…….”
시안과 시엘. 둘은 실제로 할 법한 말을 지껄이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뿌득. 반복되는 촌극에 유진은 입술을 씹었다. 콰르르르! 레반테인을 휘감은 불꽃이 커다랗게 모이더니 망치의 형상이 되었다. 그대로 분쇄추의 권능, 프레셔를 구현했다.
때려서 부순다. 터트린다. 폭발시킨다. 단순무식한 권능이 시엘과 시안을 때렸다.
아니, 때리지 못했다. 바로 앞에서 멈췄다. 꽈아아앙! 억지로 틀어막힌 권능의 여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하멜. 네 손으로 직접, 베르무트의 후손을 죽이려 하는가?”
서늘한 안광이 빛났다. 덥수룩한 수염이 흔들렸다. 뚜둑. 모론의 도끼가 불꽃의 망치를 밀어냈다. 어느새 꿈이 바뀌어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바다였는데…… 아니, 정말로 바다였나? 시안과 시엘이 나타났을 때는 라이언하트의 저택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레헤인야르다.
“씨X.”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이런 ‘꿈’은 익숙하다. 300년 전 누아르가 즐겨 사용하던 고전적인 악몽. 동료에 관한 악몽을 반복해 보여주면서 현실과 악몽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악몽에서의 악의를 현실로 끌고 오면서 내분을 야기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멜과 동료들에게는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아르의 악몽이 아무리 정교한들, 유진의 감정은 지배되지 않는다. 지금 느끼는 것은 공포가 아닌 짜증과 분노다.
“이딴 게 내게 무슨 소용이지?”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모론을 도끼와 함께 사이좋게 쪼개주었다.
“300년 전에도 이딴 악몽으로 미치지 않았는데, 지금의 내가 미칠 것 같냐?”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모론의 시체를 넘었다. 붉게 물드는 설원에 발을 뻗었다. 꿈이 끝나고, 새로이 시작된다.
“미칠 리가 없죠.”
누아르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도 이런 꿈이 당신을 미치게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그걸 바라지도 않고요.”
“그럼 뭐 하자는…….”
“하지만. 미치지는 않아도, 당신은 이런 꿈을 싫어하잖아요?”
특히나 이번 꿈은 싫다.
“싫은 꿈이 악몽인 법이니까.”
빛이 흔들렸다. 거무스름한 세계에서 그림자가 번졌다. 휩쓸리고 파헤쳐진 전장. 유진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300년 전의 유폐의 마왕성, 바벨이다.
“전지전능한 빛의 신이시여, 부디…… 부디 이 우둔한 어린양을 보호하고 살펴주소서. 안식 뒤의 험난한 여정…… 을…… 흑…… 자비와 사…… 사랑으로, 이끄시고, 어린 양이 가는 길에…….”
더듬더듬 이어지는 아니스의 기도문. 결국에는 낭송하지 못하고 오열해 버렸다.
쾅, 쾅! 방금 유진이 죽였던 모론이 다시 나타나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주먹을 내리찍었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가, 가면 안 돼. 나, 날 두고 가지 마……!”
세냐가 시체의 얼굴에 뺨을 문지르며 울부짖었다. 그 옆에 베르무트가 무릎을 꿇고 있다. 놈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멜이 죽을 적에는 시야가 흐릿해서 잘 볼 수 없었는데. 베르무트도 울었던 모양이다.
“…….”
유진은 잠시 입을 닫고 가만히 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꿈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세냐가 비명을 지르며 아니스의 멱살을 틀어쥐고 천국에 대해서 물었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세냐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처박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스도 입을 틀어막고, 로사리오를 더듬으며 울었다.
“아직 끝은 아니다.”
베르무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유진은 놈의 얼굴이 저렇게 일그러진 것과, 뺨이 눈물 자국으로 지저분한 것을 처음 보았다.
여태까지의 꿈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겁고, 음울하다. 방금의 꿈이 있을 리 없는 가공품이었다면, 지금의 꿈은 다르다. 유진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꿈이야말로 악몽에 가까웠다.
“이것에는 아무런 가공이 들어있지 않아요.”
하멜의 시체 옆에 선 누아르가 속삭였다.
“300년 전의 나는 지금과는 달라서, 당신들의 정면에는 서지 않았죠. 애당초 이때의 바벨에 배치된 마족은 유폐의 권속뿐이었고.”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하멜의 시체 옆에 살포시 앉았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약속이 맺어진 뒤. 나는 유폐의 마왕에게 간청해서 이곳의 기억을 받았답니다. 사랑하는…… 후후, 나의 하멜의 마지막을 어떻게든 보고 싶어서.”
“…….”
“아, 물론 나도 울었어요. 세냐 메르데인처럼, 아니스 슬리우드처럼, 모론 루하르처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처럼. 나의 하멜의 죽음이 슬프고 안타까워 울었죠.”
누아르는 더 이상 수영복 차림이 아니었다. 지금의 누아르는 새카만 드레스를 입고,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울었어요, 정말로. 당신의 동료 중 누구보다 서럽게 울었어요. 식음을 전폐했죠. 아무도 내게 가까이 올 수 없게, 홀로 방안에 틀어박혔어요. 마경이 헬무드가 되는 순간까지 말이에요. 모든 마족들이 유폐의 승리를 찬양하고 축제를 벌일 때, 오직 나만이 당신을 애도했어요.”
누아르가 고개를 들어 유진을 보았다.
“환생한 당신과 이렇게 다시 만나기는 했지만, 저 순간에 제가 느꼈던 슬픔은 진짜였어요. 하멜. 당신이 그걸 이해할 수 있나요?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당신이,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나요? 당신은 저렇게 죽을 때, 남겨진 자들이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갈지를 생각했나요?”
유진은 말없이 누아르를 바라보았다. 병신같이 죽은 하멜의 시체를, 그 옆에 무릎 꿇은 세냐와, 오열하는 아니스와, 머리를 처박는 모론과, 우두커니 선 베르무트를 보았다.
“아니.”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어.”
레반테인을 쥐었다.
“생각하지 않았어.”
이번 악몽은 진하게 유진의 감정을 흔들었다.
“근데 어쩌라고.”
꿈이 흔들렸다.
“남겨진 사람? 감정? 그게 뭔 상관이냐.”
유진은 성큼 앞으로 걸었다. 화르륵! 퍼져 나간 불꽃이 모론과 아니스를 불태웠다.
“당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죽기 싫었는데 죽을 수밖에,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고. 그런 상황에 남 생각할 겨를이 있었을 것 같냐.”
한 걸음 더 걸었다. 불꽃이 베르무트와 세냐를 불태웠다.
“네 감정? 알 바냐, 누아르 제벨라. 내가 왜 네 감정을 이해해야 하지? 네가 슬퍼한 것이 뭐 어쨌다는 거야?”
한 걸음 더 걸었지만 불꽃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불꽃이 유진의 바람을 거역했다. 하멜의 시체와 누아르는 불길에 덮이지 않았다.
“하멜.”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하멜의 시체를 어루만졌다.
“굉장히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군요. 당신의 죽음에 울었던 내게,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
누아르가 불꽃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구멍이 나서 죽은 하멜의 시체가 누아르의 손길에 함께 일어섰다. 누아르는 하멜의 시체를 안아 들고서 불꽃 속에서 빙글 돌았다.
“뭐, 나는 그런 쓰레기 같은 면도 좋았지만. 그거 알아요? 하멜. 나는 지금도, 당신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 사랑이 깊어지고 있단 말이에요. 왜일 것 같아요?”
“내가.”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더, 더, 너를 죽이고 싶다 생각하니까.”
“맞아요.”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에요. 나는 말이에요, 서로의 끝으로 향해가는…… 이 모든 과정을,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워. 당신과 꿈을 반복할수록 더더욱 당신이 사랑스러워져.”
“너는.”
유진은 레반테인을 높이 들었다.
ㅡ빠지지직! 이그니션에 프로미넌스. 동시에 레반테인이 증식하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불꽃이 유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모순적이야.”
불꽃이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하나 된 흐름이 점점 퍼져나가며 바벨의 꿈을 부숴갔다.
“내게 악몽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진짜 악몽은 보여주질 않아.”
“…….”
“내가 정말로 보고 싶지 않은 악몽은 보여주질 않고 있어.”
바벨이 모조리 불타서 사라졌다. 본래라면 이 순간에 다음 꿈이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꿈은 시작하지 않고, 불꽃만이 남았다. 불타 버린, 계속해서 불이 타오르는 세계에서 유진과 누아르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너도 마찬가지라서 그런가?”
누아르는 아직 하멜의 시체를 안고 있다. 그녀는 차갑게 굳은 시체를 어루만지다가, 조용히 시체를 불꽃을 향해 밀었다. 화르륵! 하멜의 시체가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무슨 말일까.”
얼굴의 베일은 걷지 않았다. 덕분에 유진이 볼 수 있는 것은 누아르의 입술뿐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이 보았던 미소.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곡선.
“그 황야.”
유진은 누아르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아가로트와 아리아의 마지막.”
여태까지 누아르는 유진에게 수많은 꿈을 보여주었다. 악몽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노골적이면서 가장 깊이 파고들 꿈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 황야야말로 유진과 누아르의 진짜 악몽이다. 둘이 이미 한 번 겪어 보았던 서로의 마지막이다.
“…….”
누아르는 말없이 미소를 유지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녀의 저 가장 된 미소에서 조금의 웃음기도 느낄 수 없었다.
“하멜.”
짧은 침묵 뒤에 누아르의 입술이 열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당신도, 그 황야를 악몽으로 여기는 건가요?”
“즐거운 꿈은 아니지.”
돌아온 대답에 누아르는 조용히 웃었다.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곡선이 바뀌었다.
“맞아요.”
텅 비어버린 세계에 새빨갛게 노을지는 하늘이 나타났다. 탁 트인 황야에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졌다.
붉은 황혼을 등진 누아르의 모습이 바뀌었다.
“즐거울 수가 없죠.”
전쟁신의 성녀. 황혼의 마녀.
아리아가 유진을 향해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빌어먹을 환생 558화
본신인 블랙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이미르아의 머리 위. 세냐는 눈을 감고 양손으로 메리를 들었다.
유진이 혼자서 제벨라 시티에 들어가고서 흐른 시간은 1시간 남짓. 세냐는 그때부터 쭉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눈을 뜨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정신을 집중한다고 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냐를 머리 위에 올린 라이미르아는, 이 주변의 모든 마나가 세냐를 중심으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벨라 시티 바깥의 모든 마나가 세냐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그런 세냐의 곁에 성녀가 무릎을 꿇고 있다. 크리스티나는 소리 없이 기도를 올리며 유진의 신력을 느꼈고, 아니스는 그를 토대로 크리스티나의 안에서 유진의 상태와 위치를 찾았다.
미리 언질이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셋은 유진이 바랐던 것을 당연하단 듯이 행동했다.
제벨라 시티에 들어가기 직전만 해도, 성녀들은 유진의 존재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유진이 세상 어디에 있든, 공명하는 신력을 통해 유진과 대화가 가능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뿌연 안개를 노려보는 것만 같다. 안개 속 어딘가에 유진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정확한 위치와 상태는 알 수가 없었다.
육체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유진의 ‘정신’이다. 육체야 성벽 근처, 다른 곳이라 봤자 도시 안에 있겠지만…… 꿈에 끌려간 정신이 어떤지가 급선무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한들 닿지 않고, 유진에게서의 계시도 느낄 수 없었다.
[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스가 말했다. 눈을 감고 기도를 이어가던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제벨라 시티와 성벽을 보고 있지 않다. 그녀는, 흐릿하게 깜빡이는 ‘빛’을 보고 있다.
유진의, 레반테인의 불꽃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뿌연 안개 속에서도. 깊고 깊은 악몽의 한가운데서도 저 불꽃은 꺼지지 않고 있다. 저 불꽃이 빛을 발한다는 것은 유진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다.
몇 번인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똑같은 통증을 느꼈다. 가슴 안쪽이 뻐근하고 온몸이 저릿거리는 통증. 육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타버릴 것만 같은 열기. 그리고 양손의, 성흔의 통증.
통증에서 그치지 않았다. 흉터로 남은 성흔이 스스로 갈라지고 피를 뚝뚝 흘렸다.
이 정도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과거 아니스는 전투를 겪을 때마다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을 고통을 항상 달고 살았다. 크리스티나의 경우에는 이런 종류의 고통이 익숙하지 않지만. 이 모든 고통이 유진을 위한 것이란 생각만으로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이런 고통이 나타나는 이유는 알고 있다. 레반테인 때문이다. 아직 유진은 악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악몽 속의 전투조차도 레반테인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유진이 완전히 악몽에 삼켜져서 누아르에게 지배되지 않게끔, 현실의 레반테인과 유진에 대한 신앙이 중심을 잡고 있다…….
“흠.”
쭉 침묵하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세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살짝 뜨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들어가지 않기를 잘했네.”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권능은 위신의 마안의 것. 거기에 누아르가 평생에 걸쳐 모은 마력과 정기가 더해졌다. 아무리 세냐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돌입했어도, 저곳에 들어가 버린 순간에 세냐의 정신은 누아르의 꿈에 끌려갔을 것이다.
“무언가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크리스티나는 피에 흠뻑 젖은 손을 가리면서 세냐를 올려다보았다. 가린들 감출 수는 없었다. 피의 냄새. 붉게 물드는 소매와 성직복. 세냐는 300년 전의 아니스가 얼마나 주의를 들여 성흔을 감추었는지를 느끼며 울적한 기분을 느꼈다.
“방법이야 처음부터 알았지.”
“예?”
“뭘 놀라는 거야? 나는 꿈속에서는 몰라도 현실에서는 진짜 마법의 여신이란 말이야. 그런 내가 정말로 아무 방법도 없어 할 줄 알았어?”
네.
크리스티나는 저 대답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니스도 내심 저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크리스티나의 입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1년 만에 돌아와서 마법의 여신이 되었노라 거들먹거렸지만, 정작 세냐는 마법의 여신다운 위엄찬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먼 거리를 훌쩍 뛰어넘는 것은 마법적으로 꽤 훌륭하기는 했다만, 그런 것은 사실 암전의 마안을 가진 시엘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거기에 마법의 여신이라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 주제에 누아르 제벨라의 초대장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꿈속으로 끌려가기도 했으니, 성녀들이 못 미더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세냐 님이십니다. 어떤 방법을 가지고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꿈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예?”
“잠에서 깨어나는 거야.”
세냐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크리스티나도 똑같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스도 섣불리 반응을 보이지 않고 세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에서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
“깨게 만들어야지. 흔들거나, 물을 뿌리거나, 한 대 때리거나.”
“지금 그걸 방법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멍청이가 저걸 말이라고……!]
저 깊이 없고 단순한 대답에 이제는 진지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아니스도 버럭 짜증을 냈다.
“왜 화를 내는 거야?”
“저로서는 세냐 님이 그런 의문을 말하시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잠을 깨기 위해서는 깨게 만들어야 한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저희로서는 도시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유진 님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유진을 직접 깨울 필요는 없지.”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메리를 높이 들었다.
“도시 전체를 깨울 거야.”
“……설마…… 메테오를 처박으시려는 것은 아니겠죠?”
세냐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메리의 꽃잎이 바르르 떨렸다. 세냐를 중심으로 흐르던 마나가 메리가 만들어내는 마법의 영향을 받았다.
-화아악! 가시화 된 마나의 흐름이 수백 수천 장의 꽃잎이 되었다. 순식간에 라이미르아의 주변이 꽃잎들로 가득 찼다.
“자.”
떠도는 꽃잎의 중심에 선 세냐가 크리스티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묻지는 않았다. 세냐의 눈동자에서 조금의 장난기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꿀꺽 침을 삼키면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갈라진 성흔, 피로 흠뻑 젖은 손이 세냐의 손에 다가갔다.
“괜찮아.”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주저를 느꼈다. 피에 흠뻑 젖은 손을 뻗어 누군가와 마주 잡는다는 것은 당연히 거북할 것이다. 하지만 세냐는 개의치 않고 크리스티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성흔에서 흘러나온 피가 먼저 세냐의 손과 닿았다. 세냐가 지배하는 마나가 성녀들을 품었다.
그리고 마법이 되었다. 거대한 흔들림을 느꼈다. 성녀들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금까지 보고 있던 제벨라 시티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저 거대한 도시 전체가- 복잡하게 얽힌 넝쿨에 휘감겨 있었다.
“저건……?”
“마법이야.”
세냐가 대답했다.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가 말했다. 인간의 마법은 열등하다. 지금이나 신대나 다르지 않다. 인간은 마나에 기원하여 답을 구할 수 없다. 난해하고 무한해야 할 마법을, 그를 이끌어내는 마나를, 술식이란 하찮은 설계에 가두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세냐는 저 한계을 크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극한에 도달했고, 그 이상을 넘보려 했지만 좀처럼 도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세냐 메르데인은 인간을, 인간의 마법을 초월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세냐에게 ‘술식’은 필요하지 않다. 그녀의 마법은 기적에 도달했다. 기적이 내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냐의 바람 자체가 기적이 된다.
그럴지라도.
“저 꿈을 무너트리는 것은 불가능해.”
세냐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지금 누아르 제벨라의 ‘꿈’은 신위의 마법으로도 무너트릴 수 없다.
하지만 ‘흔들 수는’ 있다. 대마법사 수십 명이 모여서 재앙급의 대마법을 쏟아부어도 꿈은 흔들지 못하겠지만, 세냐의 마법은 저 꿈을 흔들 수 있다.
“저기구나.”
무턱대고 흔든들, 깊은 잠 속에서 이어지는 꿈을. 악몽을 떠도는 유진을 깨우기 힘들다. 세냐는 저 도시에서 유진의 존재를 희미하게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성녀들이 세냐만이 볼 수 있는 마법을 보듯, 세냐 역시 성녀들만이 볼 수 있는 ‘빛’을 보았다. 손을 마주 잡는 것으로 연결된 감각이, 세냐로 하여금 유진과 레반테인의 빛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위신의 마안으로 만들어낸 사슬의 벽. 관측할 수 없는 불가해의 환상. 그 속을 떠도는 유진의 정신을 찾았다.
시야를 좀 더 확대해서 유진의 육체를 찾았다. 성문을 지나고 곧장 꿈속으로 끌려갔으니 성문 안쪽에 엎어져서 잠들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지금 유진은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도시를 배회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배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유진을 인도하고 있다. 유진이 도시에 들어간 지 1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유진은 벌써 도시의 중심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녀는 뿌득 입술을 씹으며 메리를 강하게 쥐었다. 휘몰아치던 꽃잎이 세냐의 적의에 따라 피처럼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제벨라 시티의 중심. 낮과 밤의 구분 없이 매일 관광객들이 미어터지던 카지노가 지금은 적막에 잠겨 있다. 화려하던 조명은 모두 꺼져 칙칙한 빛깔이 된 건물의 위, 관광객을 현혹하며 꿈을 보여주던 제벨라 페이스 중 2대가 장식물처럼 놓여 있다.
그보다 높은 곳.
구름 한 점 없이 시커먼 밤하늘에, 1대의 제벨라 페이스가 날고 있다. 세냐는 제벨라 페이스의 머리 위를 노려보며 입술을 씹었다.
화려한 의자에 누운 여자가 보였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세냐는, 저 감은 눈꺼풀마저 꿰뚫는 강렬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세냐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누아르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꺼풀이 천천히 들리고 보라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눈동자는 자수정처럼 아름답지만, 세냐는 저 눈동자에서 ‘아름다움’이란 감상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세냐는 저 눈동자에서 소름 끼치는 섬뜩함과 역겨움을 느꼈다.
한참이나 떨어진 거리지만, 세냐는 누아르의 ‘시선’을 확실하게 느꼈다. 붉은 입술이 씰룩거리며 곡선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거리가 무의미했다. 시선이 닿았다는 것. 그것은 환상의 마안에 포착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콰르르르! 세냐를 둘러싼 꽃잎들이 거세게 요동쳤다. 외곽을 흐르던 꽃잎들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변색 되더니 재가 되어 흩어졌다.
초대장을 통해 굴욕을 당하고, 세냐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환상의 마안과 강제수면을 버텨낼 마법을 준비했다. 덕분에 방어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위력이 얕아.’
초대장보다 훨씬 강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지금의 방어 마법으로 버틸 수 있다. 이 정도 위력에 그친 것에 대해서는 추측이 어렵지 않았다. 저 괴물 같은 갈보에게도, 지금 유진을 붙잡은 꿈을 유지하는 것에 많은 심력을 쏟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틈을 노릴 수 있다. 세냐는 마법의 다음을 준비했다. 성녀들의 기도로 유진을 부른다.
지금 유진도 마냥 꿈속에서 헤매는 것은 아닐 터. 내부에서 꿈을 부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냐는 바깥에서 꿈을, 도시를 흔들어야 한다. 그리고 저 누아르 제벨라에게 계속해서 압박을 가할 생각이다.
‘……압박?’
세냐는 오싹 소름이 돋은 팔뚝을 힐긋 보며 생각했다. 어느새 흐른 식은땀에 등골이 서늘하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피가 닿았던 손바닥은 진즉에 차게 식어있다. 세냐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오히려 압박을 느끼는 것은 세냐 쪽이다.
누아르는 의자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제벨라 페이스와 함께 이곳으로 날아오지도 않았다. 누아르는 여전히 도시의 중심, 카지노의 하늘에 있다. 시선에 적의와 살의를 담고, 짜증과 분노로 입술을 비틀어 미소를 짓고 있다. 죄어오는 환상의 마안에 의해 마나를 변형시킨 꽃잎은 계속해서 타들어 가고 있다.
“아니스, 크리스티나.”
세냐는 압박감을 떨쳐내며 조용히 내뱉었다.
“네 신이 깨어날 수 있게 기도해 줘.”
아무리 서로의 감각을 연결했어도, 세냐는 유진의 성녀가 아니다. 세냐가 아무리 기도하고 불러도 그녀의 목소리는 결코 유진에게 닿지 않는다.
하지만 성녀들의 기도는 유진에게 닿는다. 너무 작아 들리지 않고 희미할지라도, 꿈을 계속해 흔든다면 목소리는 더욱 확실하게 유진에게 닿을 것이다.
“작작 자고 일어나라고 말이야.”
* * *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황야는, 아가로트의 기억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곳이다. 유진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이 황야를 떠올렸고, 간접적인 체험도 여러 번 해보았다.
하지만 몇 번으로 보아도 이곳에서 느끼는 감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희미하던 감상과 체험과는 달리 지금의 ‘꿈’은 현실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체들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가 아가로트의 기억에 존재하던 얼굴이다. 깊이 생각을 더듬으면, 이름까지도 떠올릴 수 있었다.
유진은 시체들의 얼굴에 남은 공포와 절망을 보았다. 워낙 순식간에 이뤄진 죽음들이라 고통은 없어 보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유진의 가슴을 긁어댔다.
아가로트의 신군은 멸망의 마왕에게 죽었다.
아가로트가 신군에게 그렇게 죽으라고 명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진이라면 다른 수단을 강구했을지 몰라도, 아가로트는 ‘저런’ 명령을 내리는 남자였다.
“이번 꿈에서는 하멜, 당신과 내가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겠죠.”
누아르가 입을 열었다. 모습이 달라졌듯, 목소리도 달라졌다. 지금의 그녀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가 아니다. 전쟁신의 성녀, 황혼의 마녀, 아리아의 모습과 목소리를 내고 있다.
“즐거운 감정은 느낄 수가 없어.”
누아르 제벨라의 머리카락은 밤처럼 검다.
아리아의 머리카락은 노을처럼 붉다.
“최후에 당신의 품에 안겨서 죽었을지라도, 그 죽음 자체는 아리아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으니.”
누아르 제벨라의 눈동자는 자수정을 닮았다.
아리아의 눈동자는 루비를 닮았다.
“이곳은 우리 둘에게 있어 똑같은 악몽이에요.”
아리아가 한 걸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아리아가 입술을 열었다.
“이 악몽조차도, 당신과 함께라면 사랑할 수 있어.”
유진은.
아리아의 목을 보았다. 아가로트가 부러트렸던 목. 지금, 부러지지 않은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다. ‘누아르 제벨라’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엮은 목걸이. ‘하멜 다이너스’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는 지금 아리아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다.
“…….”
저 반지를 맞추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누아르는-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하멜을 죽일 때. 자신의 품에 안겨, 절망 속에 죽어가는 하멜의 손가락에 직접 반지를 끼워주겠다고 말했었다.
“나는.”
하우리아의 전쟁이 끝난 후에, 아리아의 기억을 떠올린 누아르와 이야기를 나눴다.
달라진 것은 없다. 서로가 서로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지금 누아르가 하는 말은- 그리고, 여태까지의 행동은.
“……그럴 수 없어.”
유진은 조용히 말했다.
“절대로.”
빌어먹을 환생 559화
이 꿈속에 들어와서, 유진은 쭉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처음의 꿈. 아늑하고 평온한 가정집.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부엌. 그 꿈은 하멜이 마경에서 꿈꾸던 이상적인 미래였다. 모든 마왕을 죽이고 전쟁이 끝난 뒤에, 멀쩡히 살아서 돌아간다면- 이렇게 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도발이라고 생각했다. 기만과 조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라면 누아르의 노림수는 훌륭했다. 그녀가 꿈이랍시고 보여준 것은 하멜이 그리던 미래였고, 세냐와, 아니스가 그리던 미래였다.
정말 도발뿐인가? 점점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가 만든 꿈은, 언제나 그녀와 유진이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세냐와 아니스, 크리스티나, 혹은 다른 누군가. 누아르가 만드는 꿈에 그녀와 유진을 제외한 다른 인물의 비중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진과 누아르, 둘이 함께하는 꿈. 유진이 그것을 거부하여 꿈을 부숴버려도, 누아르는 금세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은 다르지 않은 꿈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질문했다. 지금의 꿈은 마음에 드냐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유진이 품은 의문을 강하게 만들었다.
누아르 제벨라는.
마치, 죽음을 바라지 않는 것만 같다.
다른 결말을 바라는 것 같다.
“…….”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결심을 흔들기 때문이다.
하우리아에서 누아르에게 밀어 넘어트려져 당한 입맞춤을 기억한다. 침실의 장막처럼 내려온 날개의 안에서, 누아르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
그때 누아르는 절망했었다. 그녀가 품은 감정에, 사랑에, ‘누아르 제벨라’의 것이 아닌 ‘아리아’의 감정이 섞여 버려서.
그때 유진은 절망했었다. 전생을 깨친 누아르를 도저히 예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최후의 최후에, 누아르를 죽이는 것에 있어선 안 될 망설임을 느낄 것 같아서.
서로의 혼란과 동요는 그때 결론을 내렸다. 서로가, 잠시 사로잡혔던 미몽에서 깨어났다.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있어서 누아르 제벨라는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다.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멜과 유진의 삶이 근간부터 부정되는 것이다.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온 삶이, 까마득한 전생인 ‘아가로트’에 잡아먹혀 버리는 것이다.
누아르 제벨라에게 있어서 유진 라이언하트는 적이라곤 할 수 없다. 누아르는 비정상적인 이유로 유진을, 하멜을 사랑한다.
그것은 사랑 외에 다른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광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감정이다.
누아르는 죽음의 실감을 원한다. 상실을 원한다. 후회와 비탄을 원한다. 그 모든 것을 어설프게 만들, 그녀 자신을 파괴하고 망가트릴 격정을 원한다.
하지만 지금의 누아르는, 그녀 자신이 바라던 것과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어떻게든 ‘끝’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유진을 죽이고 싶지 않고, 자신이 죽고 싶지 않은 것처럼.
몇 번이나 꿈을 반복해 보여준, 서로가 함께하는 미래를- 유진에게 애원하고 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왜.”
뿌득.
유진은 짓이겨 씹은 입술을 열었다. 코끝을 감도는 피와 시체의 냄새가 그러하듯, 입술을 씹어 뭉개어 느끼는 통증까지도 현실과 똑같았다.
그런 주제에 피범벅이 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분명 유진 자신의 목소리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하는 거냐.”
지금 누아르는 아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가로트와 유진이 용모가 닮지 않았듯, 누아르 역시 아리아와 닮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누아르는 아리아의 모습이 되었다. 목소리도, 옷차림도. 아가로트의 기억에 있는 아리아의 모습이었다.
저런 모습을 취하는 것 자체가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모순이다. 누아르가 절망했던 것은, 그녀의 감정이 온전히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아르는 과감하고 과격하게 아리아를 부정했다. 유진의 목을 틀어쥐고 대뜸 입술을 맞췄다. 짓뭉개고, 입술을 열어, 혀를 얽었다. 달콤함이나 낭만, 풋풋함, 아리아의 마지막과는 거리가 한참 먼 입맞춤을 했다.
“왤까.”
아리아의 표정은 이 악몽의 시작과 달라지지 않았다. 쓸쓸하고 서글픈,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은 미소.
유진은 ‘저’ 표정을 안다. 아가로트를 감싸고, 얼굴의 절반이 찢어졌던 아리아가 짓던 미소. 지금 누아르의 모든 것이 아리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의식해서, 일부러, 감정을, 정신을 흔들기 위해.
정말로?
흐르는 생각의 마지막을 의문이 끝맺었다. 이건 안 된다. 의식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감정이 요동친다. 뺨이 씰룩거린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 알 수가 없었다.
누아르는 자신의 도시에 유진을 초대했다. 성문을 지난 즉시 꿈으로 빨려들어 갔다. 행복한, 행복할 수 있을, 그런 가능성이 있는 꿈을 꾸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그것은 절대로 악몽이 아니었다.
고집을 꺾으면 된다. 누아르에 대한 살의를, 버리면 된다. 자신을 포기하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오히려 지금보다 많은 것이 매끄러워질 것이다.
누아르는 강하다. 유폐의 마왕이라도 지금의 누아르를 쉽사리 대할 수 없을 것이다. 누아르를 죽이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고, 전생의 감정을 받아들여서.
“우리는 비극으로 끝났죠.”
아리아의 말대로다. 아가로트의 죽음도, 아리아의 죽음도, 모두가 비극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입맞춤. 서로에 대한 감정을 알면서도 목을 부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진군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아가로트마저 죽었다. 그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는데, 멸망의 마왕을 며칠 멈춘 것이 고작이었다.
“비극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잖아요.”
아가로트는 저 목소리를 좋아했다.
전투가 끝나고 돌아왔을 때.
-승리를 축하드리옵니다, 나의 신이시여.
얇은 펜으로 그린 것만 같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연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홀로 술을 몇 잔 더 마시려고 할 때.
언제나 그랬던, 노크 없이 문이 열리는 것을 기대했다. 그저 그런 맛과 품질의 포도주를 품에 안고 들어오는 아리아를 보며, 오늘은 과연 저 술에 신에게조차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독이나 저주가 깃들어 있을지를 생각했다.
-너는 마시지 않을 거냐?
-나의 신이시여, 그 말씀은 제게는 너무나 과중하고 가혹하옵니다. 어찌 성녀가 신과 대작하겠나이까?
-마시지 않겠다는 것을 보니 독이라도 탄 모양이구나.
-예, 아주 치명적인 독을 부었나이다. 그러니 저는 결코 그 술에 입을 대지 않겠나이다. 나의 신이시여, 이 하찮은 것의 독이 두려우시다면 술잔을 거두소서.
성녀의 복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얇은 옷. 흔들거리는 불빛 아래의 나른한 목소리와 교태 섞인 미소를 좋아했다. 결국에는 단 한 번도 독도, 저주도 깃든 적이 없는, 그저 그런 술의 맛을 좋아했다.
-나의 신이시여, 해는 진즉에 떴사옵니다. 어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소서.
내색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질색하며 밀쳐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저 요사스런 것이 짓궂게 웃으며 유혹해댈 테니.
하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뺨을 간질이는 달콤하고 뜨거운 숨결을 좋아했다.
“하멜.”
아리아가 한 걸음 더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등 뒤에서 황혼이 흔들렸다. 아리아의 미소가, 루비 같은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촉촉이 젖어가는 눈동자에서 눈물이 또륵 흘러내렸다.
“안아주세요.”
아리아가 팔을 펼쳤다.
“안아주고, 입을 맞춰주세요. 내 귀에, 이름을 속삭여 주세요.”
유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전히 유진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갈기갈기 찢긴 가슴에 온갖 감정들이 사무쳤다. 아가로트가 최후에 느꼈던 절망과 후회가, ‘지금’이라면 다른 결말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가. 유진의 정신과 감정을 흔들었다.
“하멜.”
아리아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유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움직이고 싶었다. 아리아가 바라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유진 본인조차도 그것을 바랐다. 바라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꿈은.
“…….”
너무나도 깊다.
콰득!
유리의 칼날을 목에 내리찍었다. 불꽃은 일으키지 않았다. 사선으로 깊이 파고든 칼날이 목을 지나 쇄골에 걸렸다.
“크륵.”
감정에 꽉 막혀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목. 안에서 끓어오른 피가 ‘소리’가 되어 유진의 입술을 열었다.
흔들리던 감정이 씻겨져 나간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생각들이, 직관적인 죽음에 의해 깔끔하게 정지했다.
“…….”
아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유진을 보았다.
뿌득, 뿌드득……! 불꽃을 뿜지 않는 유리의 칼날은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서 유진의 몸을 가르고 있다. 사선으로 베인 목은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끊어져서 떨어질 것이다. 기어코 쇄골을 지난 칼날이 심장의 끄트머리를 자르고 폐를 절단하고 있다.
칼날의 움직임은 느리다. 유진은 느리게, 자신의 몸을 베어가고 있다. 불꽃을 일으킨다면 한순간에 몸이 타서 재가 될 것이다.
아니, 불꽃을 일으킬 필요도 없다. 저 아름다운 유리의 칼날은 닿는 것을 모조리 베어 가를 만큼 예리하다. 그런데도 천천히, 힘을 거의 주지 않고, 조금씩…… 칼날을 밀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리아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눈물과 함께 미소가 사라졌다. 아리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쿠웅.
꿈이 흔들렸다. 하늘이 일그러졌다. 이 흔들림은 누아르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누아르는 뻗던 손을 멈추고서 혀를 찼다.
“……너무 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걸.”
도시 전체를 감싼 꿈. ‘인간’이라면 수백만이건 수천만이건 받아낼 수 있다. 단 하나의 세계에서 수백 수천만의 꿈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이다. 그들이 바라는 모든 욕망과 환상을 즉석에서 만들어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유진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유진을 꿈속에 가두고 꿈을 만드는 것은 수천만 인간의 꿈을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누아르로서도 많은 심력을 소모하고 있고, 유진의 정신을 꿈에 최대한 동화시키기 위해 누아르 본인까지도 꿈에 ‘깊이’ 들어왔다. 기억을, 감정을, 깊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누아르는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거짓말은 아니었는데.”
그 소리는 유진에게 들리지 않았다. 지금 유진은 전혀 다른 소리를 듣고 있다. 칼날이 살을 가르고 뼈를 자르는 소리. 뿜어지는 피가 칼날에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기도 소리. 이름을, 부르는 소리. 지금 들리는 소리는, 아가로트가 좋아하던 아리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리아의 신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칼날이 멈췄다.
“개운해졌어.”
피거품이 끓던 입술이 열렸다. 유진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아리아를 보았다.
지금 악몽은 너무나도 깊었다. 유진이 가진 신성으로도, 성역으로도, 이만큼 깊은 악몽에는 저항이 쉽지 않았다. 목을 베어 정신을 죽여 버리는 판단이 늦었다면. 만약, 아리아의 애원에 넘어가 그녀를 끌어안았다면.
“누아르 제벨라.”
유진은 아리아가 아닌 그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구분했다. 지금 유진의 앞에 있는 것은 황혼의 마녀 아리아가 아니다. 전쟁신 아가로트의 성녀도 아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다.
“그 거죽을 뒤집어쓴 것은, 나를 혼란시키기 위해서냐.”
몸에 박아 넣은 레반테인을 뽑았다. 피는 뿜어지지 않았다. 피를 대신해 치솟은 불꽃이 상처를 메웠다.
“비극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날 이 악몽에 완전히 삼켜지게 만들기 위해서냐.”
오히려 그런 것이기를 바랐다. 누아르가 철저한 기만과 조롱만을 갖고서 이 촌극을 꾸민 것이기를 바랐다. 그런 것이라면, 누아르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살의와 분노 외에 다른 감정을 허용치 않는 존재가 된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먼 곳에서 들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 둘의 목소리를. 아가로트의 성녀가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의 성녀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는 왜, 저런 말을 한 거냐.”
꿈의 흔들림을 느꼈다. 세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꿈의 바깥에서 흔들림을 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세냐뿐이다.
“너는, 어떤 이름으로, 누구에게 안기기를 바라는 거냐.”
“어느 쪽이든 나고, 어느 쪽이든 당신이죠.”
누아르는 웃음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저 대답은 유진에게 말장난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존재라면 모를까. 유진과 누아르, 둘에게 ‘이름’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유진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누아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로 꿈이 끝나길 원하나요?”
황혼이 흔들린다.
“정말로, 현실에 나가서.”
하늘의 붉은빛이 점점 더 짙어졌다.
“진짜 나와 마주하길 바라나요?”
그 질문에서 유진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
꿈에 들어온 이래로 누아르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꿈속에서 보여준 모든 모습. 모든 모순이, 누아르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누아르는 망설이고 있다.
“솔직히 말할게요, 하멜.”
악몽이 흔들리고 있다.
“나는 이 꿈이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어요.”
“…….”
“당신과 계속, 꿈속에 있고 싶어요.”
빌어먹을 환생 560화
흔들리는 황혼 앞에 선 누아르의 얼굴을 보았다. 저무는 석양을 등진 누아르의 얼굴은 그늘이 져서 어두웠지만,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표정은 그늘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누아르의 입가에 미소는 없다. 지금 누아르에게는 조금의 장난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꿈에서라면 우리는 영원히 죽고 죽일 수 있어요.”
누아르가 속삭였다.
“이곳에서의 죽음이 내가 평생 바라고. 알고 싶던 죽음과는 다르겠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나는 그런 것쯤은 포기할 수 있어요.”
누아르의 손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약지의 반지가 황혼에 물들며 엷은 빛을 발했다. 누아르는 왼손으로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죽고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많은 것을 할 수 있죠. 이 꿈에서, 우리는 악몽 말고도 많은 꿈을 꿀 수 있을 거예요. 하멜, 몇 번의 꿈을 겪어 본 당신이라면 제 말이 거짓이나 허세가 아니란 것을 알겠죠.”
당연히 안다. ‘꿈’이라는 자각이 없다면 이 세계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현실보다 훌륭하다. 악몽을 바라지 않는다면. 즐겁고 행복한 꿈을 바란다면. 이 세계는, 유진이 바라는 모든 환상을 실현해 줄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꾸욱.
누아르의 손이 목을 감쌌다. 그녀는 울렁이는 맥박을 느끼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꿈을 꿀 수 있어요. 바란다면, 아하하, 하멜, 당신이 정말로 바란다면. 나는 기꺼이 아리아가 되어주죠. 아리아의 얼굴로, 아리아의 목소리로, 당신을, 나의 신이라고 섬기겠어요.”
“…….”
“하지만 기왕이면 아리아가 아닌 ‘나’를 원했으면 좋겠어요.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나를 수백 수천 번 죽여도 좋아. 당신이 ‘나’를 원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해요.”
유진은 말없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누아르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감싸 쥔 목을, 목걸이를, 반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멜.”
누아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유진을 응시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영원’을 말했어요. 그건 거짓이 아니에요.”
꿈속에서 흐르는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다르다. 누아르가 원한다면, 그녀는 꿈속의 일 년을 현실의 하루로도 바꿀 수 있다.
“물론 이 영원은 나 혼자서는 이룰 수 없죠. 이곳은 나와 당신, 우리 둘의 꿈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꿈에서 정말로 영원을 얻을 수 있어요.”
화아악! 흔들리던 꿈의 형태가 바뀌었다.
시체가 즐비하던 황야에 초록의 풀과 가지각색의 꽃이 피어났다. 수면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호수가 나타났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에 자그마한 저택이 우뚝 섰다.
“그 영원에서 우리는 한시도 지루하지 않을 거예요. 매일매일 새로운 나날을 즐길 수 있어요.”
풀밭이 벽돌이 깔린 인도가 되었다. 호수가 거대한 성이 되고, 꽃들이 건물이 되었다. 어느새 유진과 누아르는 자그마한 도시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한가로운 나날이 질린다면 화려한 도시를 만들어주죠. 알아요, 하멜. 인간의 욕망은 점점 더 큰 욕망을 바라죠. 아무 문제 없어요. 나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예요. 나는 수백만의 욕망을 보고 수백만의 꿈을 만들었어요.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영원을 다채롭게 해줄 거예요.”
감았던 눈을 떴다.
“……알아요, 하멜.”
누아르가 속삭였다.
“당신에게는 사명과 운명이 있죠. 당신이 바란 것.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맡긴 것.”
자발적으로 거신의 입안으로 들어간 고신들. 모든 신을 잡아먹고 빛이 된 거신. 세계수가 된 현자. 하멜을 환생시킨 베르무트. 세상을 구하길 바란 망령.
“나는, 당신이 사명과 운명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알아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당신은 결국 기대와 바람을 저버리지 않죠. 저버릴 수가 없어.”
“…….”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그것이 가능한지는 신경 쓰지 않겠죠.”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목을 감싼 손을 놓았다.
“하지만 하멜. 모두가 당신 같을 수는 없을 거예요. 모두가, 당신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누군가는 명예롭고 숭고한 죽음보다는 가늘고 긴 일상을 바랄 거예요. 누군가는 승패를 알 수 없는 전쟁보다, 멸망 전까지의 행복을 바랄 거예요.”
나지막이 이어지던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러한 나약함마저도 나는 품을 수 있어요. 당신이 알고 있는,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든 이들을 행복한 꿈에 초대해 주죠.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 우리는 꿈속에서 영원을 누릴 수 있을 거예요.”
누아르의 말이 잠시 멈추었다. 그녀는 짧은 침묵을 통해 감정을 정리하고, 뒤흔들리는 꿈의 중심을 붙잡았다.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세냐 메르데인과, 아니스 슬리우드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도. 하멜, 당신이 바란다면…… 꿈속에 초대해 주죠. 필요하다면, 그들의 감정을 통제하지 않겠다는 맹세도 하겠어요. 자유를 보장해 주겠다는 말이에요.”
목에서 내려온 손이 가슴에 올라갔다. 누아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나는 그녀들이 싫어요. 당연히 그녀들도 나를 싫어하겠죠.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하멜, 당신과 영원한 꿈을 꾸기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양보하겠어요. 어쩌면, 아하하, 혹시 모르죠. 꿈속에서의 영원을 보내며, 우리가 조금은 친해질 수도 있잖아요?”
스스로 말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셋이 주제를 알고서 조용히 분수대로 행동한다면. 누아르는 기꺼이 하멜을 사랑할 권리를 허용해 줄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우리끼리 제법 친해져서, 한가로이 수다를 떨며, 응, 하멜, 당신과 함께. 꿈을 여행할 수도 있겠죠.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같은 욕조에 들어가고, 같은 침대에 누워서. 아하하, 나조차도 상상하기 힘들지만, 의외로 막상 해보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리고…….”
“누아르.”
“그리고, 그리고. 가끔은 꿈이 아닌 현실의 문제도 이야기할지도 몰라요. 바깥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어쩌면 유폐의 마왕이 우리의 행복한 영원을 방해할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누아르 제벨라.”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누아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게 너의 이름이지.”
유진이 말했다.
점점 거세어지는 흔들림을 느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멀리서 느껴지던 흔들림은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다.
“네가 말하는 달콤한 꿈은 결코 이뤄질 수 없어.”
목소리를 들었다. 희미하고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것은 속삭임이 아니다. 성녀들은 필사적으로 유진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하멜.”
누아르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정말로 이 꿈을 끝내고 싶나요?”
알고 있다.
꿈은 꿈일 뿐이다. 누아르가 말한 모든 것들은,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는 환상이다. 누아르와 유진의 관계와 감정을 근간부터 부정하는, 모순 가득한 망상이다.
저 달콤하고 행복한 꿈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누아르와 유진, 모두가 많은 감정을 버려야 한다.
유진은 누아르에 대한 살의를 버려야 한다. 그녀를 누아르 제벨라가 아닌 아리아의 환생으로만 보아야 한다.
누아르는 하멜을 사랑하게 된 모든 이유를 잊어야 한다. 그녀가 평생 바랐던 죽음에 대한 갈망을 버려야 한다.
“정말로, 꿈이 아니라 현실에 나가고 싶나요?”
그 모든 것을 앎에도 누아르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
그 모든 것을 알고서 유진은 대답했다. 저것 외에 다른 대답은 존재해선 안 된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용하며 흔들림이 없는 대답이었다.
몇 번이나 반복된 꿈에서, 몇 번이나 들은 애원과 호소에서, 많은 혼란과, 동요와, 망설임을 거쳐.
유진은 분명한 결론을 말했다.
“영원한 꿈이란 것은 없어.”
나직하지만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 유진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유진은 자신의 피로 흠뻑 젖은 레반테인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꿈이란 언젠가 깨어나게 마련이지.”
피범벅의 칼날 안쪽에서 불꽃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타오른 불꽃이 피를 증발시켰다.
ㅡ화르르륵! 그 불꽃은 여태까지의 꿈에서 일으켰던 모든 불꽃 중에서 가장 선명하고 밝았다. 몇 번이고 풍경이 바뀌었던 꿈. 유일하게 바뀌지 않았던 황혼의 붉은빛이, 레반테인의 불꽃이 발하는 빛에 밀려 나갔다.
“아.”
누아르가 짧은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탄성처럼 들리기도 했고, 탄식처럼 들리기도 했다.
누아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더욱 강하게 억눌렀다. 설렘에, 슬픔에, 즐거움에, 사랑에,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의 고동을, 반지를 낀 왼손으로 느꼈다.
누아르의 미소가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리아처럼 웃지 않았다. 처연하게 웃지 않았다. 애달프게 웃지 않았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유진이 300년 전부터 보아왔던, ‘몽마의 여왕’다운 미소를 지었다.
“멋져.”
콰득! 손가락이 옷감을 뚫고 가슴을 파고들었다. 새빨간 피가 누아르의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반지가 피로 얼룩졌다. 더욱 생생한 고동을 느꼈다.
“나는, 이 순간이 괴로웠어. 당신과 나 자신의 존재성을 혼동했어. 나의 것이 아닌 기억과 감정에 흔들렸어. 애증을 느꼈어. 모순에 헤매었어.”
누아르가 성큼 앞으로 걸었다. 당장에라도 세상에 떨어져,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황혼의 붉은색이 누아르의 뒤를 따랐다.
“맹세할 수 있어요, 하멜. 꿈에서 내가 속삭였던 모든 말은 진실이야. 당신이, 나와 함께 원했다면. 나는 애원했던 대로 당신과 함께했을 거예요.”
“알아.”
프로미넌스가 높이 치솟았다. 꿈을 가득 채운 황혼의 붉은색에서 유진의 신화가 찬란히 빛났다.
누아르는 저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몇 번이고 무너지려 한 것을 결국에는 일으켜 세워 굳힌, 상처투성이의 살의를 느꼈다.
사랑을 느꼈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와요, 하멜.”
누아르가 속삭였다.
“와서, 꿈속의 나를 죽여봐요. 당신의 그 검으로. 우리가 영원할 수 있을 꿈을 모조리 불태워줘요.”
유진은 말없이 발을 뻗었다.
ㅡ화아악! 신화가 유진의 몸을 떠밀었다. 불꽃에 휘감긴 레반테인이 꿈의 세상을 휩쓸었다.
누아르는 여태까지 레반테인에게 직접 베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무리 꿈속이라고 해도, 저 검에 직접 베여 죽는 것은 꿈을 유지하는 데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을 때는 직접 꿈을 끝내고, 새로운 꿈을 시작했다.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누아르는 환히 웃으며 가슴에 박아 넣은 손을 뽑았다. 피범벅의 왼손을 유진을 향해 뻗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뿜어진 피와, 손에서 흩날린 피가 꽃잎이 되어 나부꼈다.
“ㅡ하멜.”
엷은 미소를 지은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와 함께 피가 주륵 흘렀다. 반지 낀 왼손이 천천히 움직여 유진의 뺨에 닿았다.
“이것으로 꿈은 끝이에요.”
누아르는 레반테인에 저항하지 않았다. 기꺼이 가슴을 열어, 레반테인이 몸을 꿰뚫게 내버려 두었다.
심장이 터졌다. 하지만 누아르는 여전한 고동을 들었다. 몸속 가득 퍼지는 환희의 희열을 느꼈다.
“황혼이 지났어요.”
뺨을 더듬는 손에서 열기를 느꼈다. 반지를 느꼈다. 유진은 말없이 누아르의 눈을 보았다. 거리가 가깝다. 뜨거운 숨결을 느꼈다. 짙은 피의 냄새를 느꼈다.
“하지만.”
누아르가 속삭였다.
ㅡ콰르르르르! 붉게 젖은 하늘이 녹아내렸다. 레반테인의 불꽃이 꿈에 스며들어 모든 것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성녀들의 기도가 확실하고 가깝게 들렸다. 깊은 꿈에 쐐기가 처박혔다. 세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레반테인의 불꽃이 꿈속을 불태우고, 세냐의 마법이 꿈의 바깥을 흔들어 무너트렸다.
“여명은 오지 않을 거야.”
피에 젖은 입술이 짙은 곡선을 그렸다.
모든 것이 붕괴했다. 레반테인에 꿰뚫렸던 누아르가, 불꽃에 삼켜져 재가 되었다. 발밑마저 무너지고 유진은 아득한 심연으로 추락했다.
프로미넌스를 펼쳐 날아오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비행이란 개념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딘지 모를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멀리서 나타난 자그마한 빛이 어둠을 밝혔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멀었던 빛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자그마했던 빛이 형상을 갖추었다.
-하멜.
-유진 님.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빛이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맞잡았다.
눈을 떴다.
실감이 희미했다. 지금 이곳은 현실인가? 방금의 꿈이 끝나고, 새로운 꿈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얼마나 꿈속에 있었지?
머릿속에 번지는 의문들. 동시에 찾아온 짧은 무력감. 탈진.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입안에서는 피의 맛이 났다.
현실이다. 그 모든 것이 유진에게 현실을 실감시켰다.
꿈은, 끝났다. 잠에서 깨어났다. 더 이상 성녀들의 목소리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지 않았다. 유진의 안에서 들렸다. 그녀들의 빛을 느꼈다.
-쿠르르르릉! 거대한 지진이 몸을 흔들었다. 유진은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식하게도 하는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이 커다란 제벨라 시티의 공간을 들쑤시는 넝쿨을, 세냐의 마법을 보았다.
‘그래도 메테오보다는 덜 무식한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잘 잤어요?”
먼 위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 아니지. 좋은 밤…… 후후, 이것도 아니야.”
커다랗고 화려한 카지노 건물이 보였다. 유진의 시선이 건물을 타고 올라, 불 꺼진 네온사인의 간판을 지났다. 지붕에 내려앉은 2대의 제벨라페이스와 눈이 맞닿았다. 하지만 그곳에 누아르는 없었다.
밤하늘.
달과 별조차 보이지 않은 시커먼 밤하늘에 제벨라페이스가 떠 있다.
그 기괴한 비행체의 머리 위. 누아르 제벨라는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의자에 앉아 유진을 내려보았다.
“멋진 밤이에요, 하멜.”
새카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둔 누아르는 마치 밤의 여신처럼 보였다. 그녀는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바라던 현실에 돌아온 것을 환영해요.”
누아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펼쳤다.
촤라라라락! 시커멓던 도시에 빛이 돌아왔다. 네온사인 간판이 알록달록 빛을 발하고, 도시 전체가 잠에서 깨어났다.
“나의 도시에, 제벨라 시티에 온 것을 환영해요.”
누아르 제벨라, 이 도시의 주인이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 돌아왔다. 세냐의 마법은 더 이상 제벨라 시티를 흔들지 못했다.
“하지만 하멜, 그거 알아요?”
누아르는.
“이 현실조차도 당신에게는 악몽이 될 거예요.”
웃으며 살의를 말했다.
빌어먹을 환생 561화
밤불 켜진 도시가 발하는 알록달록한 빛. 곳곳에서 들리는 흥겨운 음악. 하지만 도시의 모든 조명이 켜졌음에도 하늘의 어둠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아르의 선언에 호응하듯, 끈적거리는 어둠이 바다의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황혼은 끝났다.
지금은 밤이다.
“하멜, 나는 여명이 싫어요.”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이 싫다.
누아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도시에서 유진과 보낸 밤을 떠올렸다.
함께 쇼핑을 하고, 술을 마시고, 도시를 거닐었던 날. 그때 누아르는 이 밤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다. 찾아오는 여명이 싫었다. 그때 그 순간은 틀림없는 현실이었지만, 누아르는- 마치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었다.
꿈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 여명이 오지 않게 할 거야.”
하지만 꿈은 끝났다. 유진이 바라지 않았고, 누아르도 받아들였다. 꿈에서 깨어나고, 현실로 돌아왔다.
누아르는 웃으며 제벨라 페이스에서 뛰어내렸다. 날개를 펼치지 않고 떨어진 누아르가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왔다. 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누아르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환히 웃는 누아르와 시선을 맞대었다.
ㅡ꽈아아앙!
도시가 흔들렸다. 지면이 크게 주저앉으며 거미줄 같은 균열이 퍼졌다. 유진은 뿌득 이를 씹으며 무릎에 힘을 주었다.
무릎을 주저앉히는 수준이 아닌, 몸을 통째로 으스러트릴 만한 거대한 충격. 몇 번이나 중첩시킨 방어 결계는 저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프로미넌스가 구축한 성역. 신에 대한 불가침을 법칙으로 두었지만 무의미했다.
“아하하.”
유진의 머리 위에서 누아르가 웃었다. 대단한 공격은 아니었다. 누아르는 단지, 하늘에서 떨어지며, 유진의 머리 위에 발을 내리찍었을 뿐이다.
고작 그것뿐이다.
“공주님 안듯 받아주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하멜, 당신의 그런 표정은-”
꾸구구국…… 굽 높은 구두가 성역의 결계 위를 강하게 짓눌렀다.
뿌득, 뿌드드득……! 도로의 균열이 더욱 퍼져갔다. 이윽고 압력을 견디지 못한 도로가 뒤집히고, 지반이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성역을 유지하면서 레반테인을 쥐었다.
“마치 내가 무거운 것 같잖아.”
누아르가 웃으며 속삭였다.
푸확! 성역의 결계 안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그 폭발을 추진력 삼아 가속한 신화의 칼날이 성역을 가르고 누아르를 노렸다.
길쭉하게 뻗은 다리가 움직였다. 꽈앙! 새카만 구두가 불꽃과 칼날을 걷어찼다.
아무리 강한 충격을 받아도 레반테인은 부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걷어차인 것뿐인데도 유진은 팔이 뜯어져 날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하하!”
누아르는 소리높여 웃으며 양손을 치켜들었다. 콰르르르! 보라색 마력이 양 손바닥 사이에서 회오리쳤다. 치켜든 손을 아래로 내리찍자, 마력이 폭포수처럼 유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단순한 마력이 아니다. 독이다. 독이 성역 결계의 표면을 타고 흘러내려, 유진이 선 바닥을 녹이기 시작했다. 흐물거리며 녹아가는 도로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그 또한 독이었다.
‘독?’
유진의 몸에 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독기는 유진조차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만들었다.
꿈은 끝났다. 이곳은 현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누아르와 환상의 마안은 현실조차 개변한다. 꿈처럼 세상을 통째로 새로 만들 수는 없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독기는 누아르가 만들어낼 수 있는 환상의 범주 안에 있었다.
본래라면 독무를 맡은 순간 중독되어서 바닥처럼 융해되어야 하는데, 유진이 가진 신성이 독기에 저항했다. 그렇다고 해서 중독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순식간에 이뤄진 중독에 정신이 흔들리고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술에 취한 것 같아.”
누아르가 속삭였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보라색 마력이 손끝에 집중되었다. 시야가 뒤흔들렸지만 저 빛은 강렬했다. 강렬한 살의에 유진의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맞으면 죽을까? 일격에 죽지는 않을지라도 잠시 동안은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지금의 누아르 제벨라에게서 그 잠깐의 틈은 곧장 죽음으로 이어진다.
손끝의 빛이 쏘아진 순간. 유진은 입술을 뿌득 씹었다.
아직까지 뜻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몸, 지배를 아예 포기했다. 생각해서 움직이는 대신에 본능과 직관에 모든 것을 맡겼다.
육체가 죽음에 저항했다. 본능과 직관이 필살을 거스르기 위해 움직였다. 멋대로 움직인 몸이 아슬아슬하게 마력을 피해냈다.
-꽈아앙!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누아르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빛을 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감히.”
주제와 분수를 알고 멀리서 기도나 하고 있을 것이지. 관람 정도는 자비롭게 허락해 주었을 텐데. 누아르는 짜증을 담아서 손가락을 튕겼다.
-꽈앙! 빛이 밤하늘에서 폭발했다. 부서진 파편이 불꽃놀이처럼 사방에 흩어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주제와 분수를 알라고? 누아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충분히 주제와 분수를 알고 있다. 그녀들로서는 누아르 제벨라를 죽일 수 없다. 죽이기는커녕 상처 하나 입히는 것도 힘들다.
애초에 그런 역할은 맡지 않았다.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녀가 서는 자리는 용사의 앞도, 옆도 아니다. 뒤다. 몇 걸음 떨어진 뒤에서, 용사의 등을 보아야 한다. 용사가 비틀거릴 때,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자리.
‘닿았다.’
흩어진 파편이 유진에게 닿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현기증이 사라지고 육체의 통제권이 돌아왔다. 치료와 정화에 몰두한 기적이 유진의 정신과 몸을 씻어냈다.
“후욱.”
돌아온 호흡을 내쉬었다. 누아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히죽 웃으며 유진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ㅡ꽈르르릉!
밤하늘에 돌연 번개가 나타났다. 커다란 번개가 누아르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깜짝이야!”
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번개가 마치 장난감처럼 누아르의 손에 잡혔다. 누아르는 손에 쥔 번개를 창처럼 던져 버렸다. 푸확! 공간을 관통하며 날아간 번개가 순식간에 라이미르아의 앞에 도달했다.
“끼아악!”
라이미르아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브레스를 쏴 갈기기 전에 세냐가 대응에 나섰다. 저 번개는 세냐의 마법이다.
하지만 누아르의 손에 잡힌 순간에 세냐의 마법이 아니게 되었다. 세냐는 역으로 이쪽을 공격하는 번개를 마법으로 소멸시켰다.
까득. 세냐는 이를 갈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순식간에 공간을 도약하여 도시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도시 바깥에서 초장거리 마법으로 공격.
방금의 시도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누아르에게 그런 종류의 공격은 무의미하다. 머나먼 거리에서 발한 마법은 누아르에게 역으로 빼앗겨 버린다.
“내가 경고했을 텐데.”
누아르는 세냐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속삭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오지 말라고.”
콰르르르! 거대한 마력이 누아르를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그녀는 박쥐의 날개를 활짝 펴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 했지만,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커먼 불꽃. 신화를 중첩시킨 공검이 공간을 갈랐다.
“멋져.”
모든 색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어둠. 살짝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폐부터 재가 될 것 같은 열기. 그리고, 너무나도 강렬한 살의. 저 모든 것이 누아르에게 하멜을 느끼게 해주었다. 하멜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현실을, 다시금 자각하게 해주었다.
“나는 지금.”
누아르의 손이 움직였다. 살며시 펼친 손바닥에 마력이 모였다.
“꿈꾸던 미래의 중심에 있어.”
하멜에게 죽고 싶다. 하멜을 죽이고 싶다. 어떤 결말에 도달할지는 모른다. 이 과정부터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 씁쓸하고 서글픈 꿈이 있었기에 더더욱.
지금이 기쁘다. 꿈이 그렇게 끝나버렸기에 하멜을 더욱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누아르는 최선을 다해 대응해 주었다. 자그맣던 마력이 크게 부풀었다. 환상의 마안과 위신의 마안이 동시에 발동되었다.
-촤라라락! 허공에 나타난 사슬이 공검의 앞을 가로막았다. 곧이어 손바닥의 마력에 환상이 깃들었다.
마력이 불꽃이 되었다. 불꽃이 불꽃에 덮이며 중첩되었다. 누아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유진의 공검을 바랐고, 환상의 마안이 바람을 현실로 바꾸었다. 레반테인을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누아르가 지닌 끝없는 마력이 공검의 묘리로 증폭되었다.
압도적인 힘이 만들어졌다. 위신의 마안이 불러온 유폐의 사슬. 지금 유진이 만들어내는 공검은 유폐의 사슬마저 부순다. 하지만 사슬의 저편에서 덮쳐온 누아르의 공검은 부수지 못했다.
충돌한 순간, 오히려 밀려 버렸다. 꽈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유진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방금의 충돌로 레반테인의 불꽃이 꺼져버렸다. 너무 강한 힘이 신화를 소멸시킨 것이다.
‘미친.’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것만 같은, 아니, 실제로 으스러졌다. 회복은 빠르다. 성녀들의 기도도 기도지만, 신위에 도달한 육체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불사력을 갖고 있다.
‘공격이 닿지 않아.’
현실로 돌아왔지만 꿈과 똑같다. 유진의 공격은 누아르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현실조차도 악몽이었다.
‘아니, 달라. 지금의 누아르는 죽일 수 있다.’
신성월광검 레반테인. 이 검은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 빛이 직접 제련한 검이다. 죽여도 죽지 않는 마왕에게 레반테인의 불꽃은 치명적이다. 지금의 누아르 제벨라라도 레반테인으로 직접 신화를 처박아 불태운다면 소생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누아르에게 닿는 것이다. 유진은 내심 착각하고 있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는 직접 전투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을 것이다. 꿈속이 아니라면 누아르를 몰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조금 나아진 것은 맞다. 현실의 누아르는 꿈속에서처럼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투에 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누아르는 직접 전투만으로 유진을 압도하고 있었다.
활짝 펼친 프로미넌스가 날아가는 몸에 제동을 걸었다. 미리 살포한 깃털이 유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즉시 도약했다. 누아르의 사각을 파고들 생각이었지만, 도약 한순간에 직감했다.
실패다. 이런 종류의 공격은 누아르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 도시 전체가 누아르의 지배를 받는다. 유진이 어떻게 움직이건 누아르의 감각을 속일 수 없다. 그녀에게 사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하하. 즐겁게 웃는 소리가 유진의 귓가를 간질였다. 거대한 무언가가 순식간에 유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카지노 지붕에 앉아 있던 제벨라 페이스였다. 그 기괴한 비행체가 유진에게 돌진해 왔다. 문제는 속도였다. 유진이 피하기도 전에 제벨라 페이스와 충돌해 버렸다.
속도만 빠른 것이 아니라 무겁기까지 했다. 유진의 몸이 다시 뒤로 밀려났다. 째깍째깍…… 제벨라 페이스 안에서 시계침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인위적이고 노골적인 신호.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지 않나. 유진은 상상했고, 상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ㅡ꽈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유진을 밀어내던 제벨라 페이스가 자폭해 버린 것이다. 단순한 폭발이라면 유진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하지만 이 폭발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성역 결계를 지나서 온 충격에 유진은 쿨럭 피를 뿜었다.
“공격이 너무 기발한데.”
이런 식의 전투에는 익숙하지 않다. 지금도 그렇다. 등 뒤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ㅡ빌딩이다. 제벨라 시티의 커다란 빌딩 중 하나가, 있어서는 안 될 다리를 달고서 쿵, 쿵, 유진에게 다가왔다.
와르르르! 주변의 건물이 분해되고 재구성되어 달라붙었다. 커다란 콘크리트의 주먹이 위로 들렸다.
“맙소사.”
저런 무식하고 커다란 공격은 유진에게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건물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조악한 팔다리를 달아놓은 골렘처럼 보이지만, 저것 자체에 누아르가 바라는 환상이 깃들어 있다.
꽈아아앙! 건물의 커다란 주먹이 유진에게 내리꽂혔다. 유진도 즉시 레반테인을 휘두르며 분쇄추의 권능을 발동했다. 충돌한 순간에 건물은 폭파했다.
“아하하하!”
누아르는 하늘에서 그 광경을 보며 깔깔 웃고 박수를 쳤다. 박수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의 양손이 부딪칠 때마다 도시가 뒤흔들리고 마력이 폭풍이 몰아쳤다. 숨을 씨근거리던 유진의 등 뒤에 마력의 폭풍이 처박혔다.
“크륵……!”
유진의 몸이 앞으로 휘청 기울였다. 쓰러지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비현실적인 광경이 보였다. 주변의 건물이 모조리 뽑혀서 누아르의 주변에 떠오르고 있었다. 누아르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파사사삭! 커다란 건물들이 분해되고, 셀 수 없이 많은 돌덩이가 되었다. 그 광경은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꿈속의 누아르는 별과 달을 유진에게 때려 박았다. 현실의 누아르는 건물을 부쉈다.
때려 박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자비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하나하나에 마력이 깃든 돌덩이는 꿈속과 다를 것 없이 강력했다.
화르르륵! 레반테인이 다시 불꽃을 내뿜었다. 직접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유진 주변의 공간이 갈라지고 활짝 열렸다. 마창의 권능이 펼쳐졌다. 수천 개에 달하는 불꽃이 창이 되어 쏘아졌다.
거듭된 요격. 마력과 불꽃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살짝 닿기만 해도 휩쓸려서 재가 되어 죽겠지만, 누아르에게 있어서 저 모든 것이 아름다운 불꽃놀이처럼 보였다.
누아르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름다워.”
진심으로 감상을 말했다. 단순한 폭죽이 아니다. 서로 간에 존재하는 모든 인연과 감정을 비장하고 서글픈 살의로 승화시켜 폭발시키는 순간이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오직 유진과 누아르만의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감히.
“내 경고를 무시했구나.”
아까 했어야 할 공격이다. 유진에게 가로막혀서 하지 못했던 공격. 하지만 이제는 방해받지 않는다.
누아르의 마력이 회오리쳤다. 보라색 마력에 끔찍한 살의가 깃들어 날을 세웠다. 누아르는 옆에 만들어낸 송곳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냈다.
날려 보내지 않았다. 송곳이 마법처럼 도약해 사라졌다. 고속으로 다가오던 세냐의 앞에 송곳이 나타났다.
세냐는 당황하지 않고 메리를 앞으로 뻗었다. 아멜리아 머윈에게서 뽑아내는 마력과 세냐의 마나가 영력으로 화했다. ㅡ쩌엉! 영력으로 일으킨 마법이 송곳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꺼져.”
속삭이는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소멸하는 마력의 사이에서 누아르가 나타났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번뜩 빛을 뿜었다. 강제수면. 근접거리에서의 권능이 세냐의 정신을 압박했다. 세냐의 눈동자가 몽롱히 풀렸다.
“?”
오히려 누아르의 표정에 짧은 당황이 스쳤다. 잠에 재운 것은 틀림없는데, 세냐의 정신을 악몽에 밀어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헐떡이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세냐의 입에서 들린 것이 아니었다.
[이, 마법의 여신님이. 똑같고 변하지 않는 수법에 몇 번이나 당할 것 같아?]
누아르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홱 시선을 들었다.
시커먼 밤하늘. 육체와 희미한 끈으로 연결된 세냐의 모습이 보였다. 불투명한 존재. 강제수면이 발동되어 잠이 든 순간, 세냐는 자기 영혼을 육체와 분리해 버린 것이다.
“용써서 떠올린 방법이 자살인 거예요?”
누아르는 비웃으며 내뱉었다.
퍼버버벅! 그 비웃음을 징벌하듯이 마법이 누아르의 몸을 관통했다.
빌어먹을 환생 562화
두 눈동자에 화살이 처박혔다. 연이어 나타난 수백 개의 화살이 누아르의 몸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누아르의 몸이 고슴도치처럼 변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평범한 화살이 아니다. 영력으로 만든 마법은 의도하지 않아도 절대률이 부여된다.
오직 살의만을 담았다. 다른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았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의 말살을 바랐다. 그런 화살을 수백 개나 처박았다.
“허억……!”
분리했던 영혼이 육체로 돌아왔다. 그 충격으로 강제수면에서 깨어났다. 이 방법으로도 강제수면은 피할 수 없지만, 절대로 당해서는 안 될 몽중몽은 피할 수 있다. 아무리 세냐라도 잠이 들어 꿈으로 끌려가 버린다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을 스스로 분리했다. 잠이 든 즉시 육체를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누아르라도 죽은 상대에게 꿈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이건 몇 번이고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소생에서의 부담도 부담이지만, 분리가 반복될수록 육체와의 연결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스스로 분리했을지라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그래도, 가능해.’
도시의 악몽을 무너트린 것은 효과가 있었다. 누아르가 도시에 부여한 꿈은 아직 붕괴되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혼을 분리했어도 도시의 꿈에 붙잡혔을 터.
지금 누아르가 보여주는 꿈은, 1명의 의식에서만 작용하는 꿈이다. 반복할수록 정말로 자살이 되어버리는 수단이지만, 그래도 대응할 수는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 번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기왕이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내고 싶다. 방금의 마법은 유효했다. 영력의 화살은 분명히 누아르를 파괴했다. 수백 개의 살의를 동시에 처박았다.
“흠.”
그럴 텐데도 누아르는 움직였다. 뒤로 기울었던 몸이 천천히 일어섰다.
끼긱. 몸에 처박아 넣은 화살들이, 누아르가 움직일 때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쑤욱! 양 눈에 처박힌 화살이 뽑혔다. 안구는 딸려 나오지 않았다. 부서진 눈동자가 세냐의 눈앞에서 복원되었다.
“아프긴 한데.”
뺨과 입술을 꿰뚫은 화살들이 뽑혀 떨어졌다. 누아르는 찢어진 뺨과 입술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히죽 웃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세냐에게 향했다. 세냐는 다시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강제수면이 펼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아르는 움찔 멈춘 세냐를 향해 소리높여 웃었다.
“겁먹었어?”
모욕. 세냐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발끈해 공격할 수는 없었다. 세냐의 공격보다 누아르의 공격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어느새 움직인 발이 허공을 걷어찼다.
그것뿐인데도 세냐의 비행이 끝났다. 그녀는 더 이상 하늘을 날지 못하고 지면에 처박혔다.
“세냐 메르데인. 당신의 마법은 아파요. 그래…… 멋진 살의란 것은 인정해 주겠지만, 날 죽일 수는 없어요.”
누아르는 양팔을 펼치며 노래하듯 속삭였다. 지면에 처박힌 세냐는 욕설을 내뱉으며 양손으로 땅을 디뎠다. 그 순간, 지면에서 치솟은 사슬이 세냐의 손을 휘감았다. 위신의 마안. 유폐의 사슬이다.
“날 죽일 수 있는 살의는 오직 하멜의 것뿐이야. 내가 죽고 싶은 살의는 오직 하멜의 것뿐이라고.”
계속해서 튀어나온 사슬이 세냐의 몸을 결박했다. 누아르는 지면에 찰싹 달라붙는 세냐를 내려다보며 소곤거렸다.
“나는 너 따위의 살의에 죽지 않아. 네가 나를 아무리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해도, 네 살의는 내게 하찮을 뿐이야. 네 존재 자체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너는, 이곳에 오면 안 됐어.”
“미친년……!”
“아하하하! 그건 너무 많이 들은 말인걸, 불쾌하지도 않은 말이야, 그래, 나는 미쳤지. 하멜에 대한 사랑으로 미쳤어!”
누아르가 손가락을 들었다. 흔들리는 손가락이 계속해서 환상을 만들었다. 부엌에나 있을 법한 조리도구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야채를 손질하고 고기를 자를 식칼, 냄비를 휘저을 국, 음식에 꽂을 포크, 스푼, 접시, 컵, 몇몇 개를 제외하고서는 도저히 사람을 해칠 수 없을 것 같은 도구들이 누아르의 앞을 빼곡히 채웠다.
“흠, 당신에게는 이것이 더 좋을까?”
누아르의 미소가 심술궂게 바뀌었다.
촤라라락! 빼곡한 도구들이 모조리 책으로 바뀌었다. 서재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책장과 흔들의자, 심지어 벽난로까지 나타났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보던 세냐의 얼굴이 참혹히 일그러졌다.
그녀는, 지금 누아르가 만들어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모욕이고 기만인지도 알았다.
“죽이지는 않을게요.”
누아르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냥 지금처럼 그렇게 바닥에 처박혀 있으면 돼. 당신이 그리던 재미없고 하찮은 꿈에 파묻히고 짓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도록 해. 내가 하멜을 죽이고, 하멜이 나를 죽이는, 그 모든 것을. 살아서 보기만 해.”
서재의 가구와 책들이 세냐의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 충격만으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누아르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서 풋 하고 웃어버렸다.
만약 그렇게 죽는다면. 그 비웃을 수도 없는 하찮은 죽음이 세냐 메르데인의 마지막이라면.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누아르는 이 공격에 아무런 살의도 담지 않았다. 그냥, 세냐가 꿈꾸던 서재를 쏟아부을 뿐. 만약 이런 것에 세냐가 죽어버린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일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사고를 목격해도 즐거울 것 같다. 누아르는 심술궂게 웃으며 세냐가 서재에 깔리는 것을 보았다.
ㅡ쿠웅. 직전에 모든 것이 멈췄다.
“와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던 누아르가 탄성을 내뱉었다. 말로만 그치지 않고 직접 박수까지. 짝, 짝, 짝. 평범한 박수 소리가 밤하늘을 올렸다. 조롱이나 그런 것을 떠나, 누아르는 솔직하게 지금의 세냐에게 감탄했다.
위신의 마안으로 만들어낸 유폐의 사슬이 모조리 끊어졌다. 당연히 누아르가 끊은 것은 아니다. 세냐가 직접 사슬을 끊고, 몸을 일으킨 것이다. 살의를 담지 않았다고는 해도, 누아르가 바라서 추락시킨 모든 것이 멈춰있다. 그 역시 세냐가 한 일이다.
“제법이네요.”
이 또한 솔직한 감상이었다. 유폐의 사슬은 마나와 마법을 차단한다.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상극이다. 완력으로도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슬을, 마법으로 끊어내고, 늦지 않게 추락마저 멈추다니.
“내가 당신을 너무 하찮게 보았던 걸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나.”
누아르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세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틀비틀 자리에 서서, 씨근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격통. 그리고, 가슴 안쪽과 머릿속을 뜨겁게 달구는 분노. 세냐는 입술을 뿌득 씹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하하!”
세냐의 얼굴을 본 누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핏발이 선 눈동자. 코와 입술, 눈에서 흐르는 피. 사슬의 결박에서 풀려나기 위해 세냐가 많은 무리를 한 것이 훤히 보였다.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요? 흠, 오히려 좋을지도. 세냐 메르데인,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는 발언을 철회하지는 않을게요. 방금의 발악 정도면 체면치레는 했을 테니, 얌전히 앉아서 구경이나 하지 그래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부상을 치료할 수단은 있나요? 어쩜, 보는 내가 다 아파 보이는걸. 미안해요, 위신의 마안을 이렇게 쓰는 것은 영 익숙하지 않아서. 힘조절이 어렵달까?”
피범벅의 팔다리를 보았다.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중에 살이 뭉개지고 뼈가 부러졌다. 누아르는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화악! 세냐의 옆에 커다란 의자가 나타났다.
흔들의자였다.
“자아, 거기 편히 앉아서. 책은 많으니까…… 아하하, 아무거나 집어서 읽고 있어요. 나는 당신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며 빙글 몸을 돌렸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흘렀을 뿐. 유진에게 집중시켰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속해서 쏟아지는 폭격. 저 공격은 누아르가 바라는 한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부수고 베고 불태워서 재로 만들어도, 그 재에서 다시 공격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 참.”
등 돌린 누아르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기껏 배려해서 의자도 만들어주고, 책까지 주었는데. 설마 호수나 강까지 만들어줘야 했던 걸까?
“욕심이 너무 많아.”
누아르는 짜증을 담아 내뱉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피범벅의 손으로 지팡이를 쥐고, 이쪽을 겨누고 있는 세냐가 보였다.
그녀는 충혈되어 붉은 눈으로 누아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배려가 무시당한다면 아무리 나라도 더 화를 낼 수밖에 없어요. 아예 팔다리를 뜯어놓아야 얌전히 있어 줄 건가요?”
여전히 세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계를 한참이나 넘은 분노가, 세냐로 하여금 누아르의 조롱을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신에 다른 소리는 선명히 들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목소리. 둘은 ‘다른 일’로 바쁘면서도, 세냐의 부상을 알고 치료해 주려 했다.
‘됐어.’
세냐가 생각했다. 그녀는 성녀들의 치료를 거부했다.
‘지금이 좋아.’
부러진 팔다리의 부자유와 고통. 그 고통이 지금의 한심한 모습을 더욱 선명히 자각시켰다. 세냐는 한 번 더 입술을 씹었다. ㅡ화악! 영력이 부풀고 세냐의 등 뒤에서 은하가 나타났다.
저 모든 광경이 누아르의 짜증을 유발했다. 그녀는 세냐의 등 뒤에 펼쳐진 거대한 은하를 보았다.
저것은 하우리아에서 보았던 것과는 깊이와 격이 다르다. 누아르는 그렇게 느꼈다. 느낌일 뿐, 저것이 정확히 어떤 깊이와 가능성을 지녔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누아르는 잠시 고민했다. 세냐에게 한 번 더 강제수면을 걸어버릴까? 영혼을 분리시켜 꿈에서 벗어날지라도, 그것은 꿈을 피하는 것일 뿐 누아르에게 치명적인 반격은 가할 수 없다.
아니면.
끝냈던 거대한 꿈을 재구축할까. 도시를 뒤흔들어 깨운 꿈. 그렇다고 해서 다시 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보다는 깨기 쉬운 연약한 꿈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럴지라도 세냐를 가둬서 죽이기에는 충분하다.
-꿈이란 언젠가 깨어나게 마련이지.
그, 목소리를 떠올리고서. 누아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그것만으로 누아르는 도시의 꿈을 재구축하는 것을 포기했다.
“정말이지.”
누아르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촤라락……! 세냐의 주변에 사슬들이 나타났다.
“당신은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해.”
하멜이 꿈이 아닌 현실을 바랐다. 그래서 누아르는 기꺼이 꿈속에서 유진에게 죽었고, 꿈을 포기했다.
무너트린 꿈을 다시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세냐에게 있어서 행운이다. 만약 누아르가 도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세냐의 마법은 결코 누아르를 위협하지 못했을 테니.
“그러니 지금의 행운과 자비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사슬의 머리가 세냐에게 향했다. 세냐는 반응하지 않고 우두커니 섰다.
메리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누아르를 겨누고 움직이지 않았다. 분노로 뜨겁던 가슴이 차갑게 식고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은 침묵 속에서 사슬의 철그럭거리는 소리만이 선명히 들렸다.
더 귀를 기울였다. 사슬의 소리를 지나 자그마한 속삭임들을 들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속삭임들. 세냐가 우화하는 중에 항상 들었던 마나의 목소리. 속삭임을 들으며 바랐다.
유폐의 사슬. 저것은 세냐가 가진 여러 트라우마 중의 하나다. 바벨의 어전에서 저 사슬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곳은 바벨이 아니다. 세냐가 멸시하던 갈X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의 도시다. 인정했다. 누아르는 세냐보다 강하다. 갈X의 여왕이라고는 해도 저 힘은 진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멜과 죽고 죽이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라고?
당연히 싫다. 세냐는, 그녀 자신을 무력함을 비웃는 모든 것이 싫었다. 그 빌어먹을 감정은 300년 전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느꼈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개 같은 사슬부터 넘어야 한다. 유폐의 사슬이 세냐를 향해 움직였다. 그 순간.
세냐의 시간이 멈췄다. 세상의 시간은 멈춤 없이 흐르지만 세냐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혼자만의 영원 속에서 세냐의 의식이 가속했다. 기어코 다가온 사슬이 세냐에게 닿은 순간,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은하가 빛을 발했다.
이것은 가진 끝없는 마나의 현현. 이터널 홀을 직접 현실에 구현한 모습. 세냐가 완성이라고 생각했던 이터널 홀은 마법의 신위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세냐 스스로 붕괴시켰다. 지금의 저것은 말뿐인 무한이 아니다. 무한을 말하는 주제에 유한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무한한 마법이 유폐의 권능을 이해했다. 꽃처럼 피어난 마법에 사슬이 밀려났다.
파사사삭! 마법에 휘감긴 사슬이 부식했다. 이 모든 것이 찰나에 일어났다.
“?”
누아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환상처럼 느껴졌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아르가 마안을 통해 환상을 현실로 바꾸었듯, 세냐는 마나에 기원하여 기적과 환상을 일으켰다. 그것은 마법으로 모방해 낸 사슬. 수백 개의 사슬이 순식간에 누아르를 포박했다.
“아핫…….”
유폐의 사슬이 그러하듯, 세냐의 사슬도 비슷한 권능을 가졌다. 마력이 억제되고 있다. 빠르게 찾아오는 탈력감에 누아르는 유쾌히 웃었다.
‘지금’ 세냐 메르데인의 살의는 꽤 마음에 들었다. 하멜이 없었다면, 저 살의만으로 누아르는 설렘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하멜이 있으니 그럴 수 없다. 사랑하는 남자가 두 눈을 훤히 뜨고 있는데 바람을 피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움직여 보았다.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슬은 굉장히 강력해서, 누아르로서도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한계인가요?”
하지만 누아르는 조금의 위기감도 느끼지 않고 속삭였다. 비틀거리던 세냐가 한쪽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유폐의 사슬을 마법으로 재현하는 것. 누아르 제벨라의 끝없고 흉포한 마력을 억제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세냐에게 커다란 부하를 주었다.
“다시 박수라도 쳐주고 싶지만 손이 묶여서 원. 아니면 찬사를 담아 죽여버릴까…….”
그렇게 말하고서, 누아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것 같아서 너랑 놀고 싶지 않았던 거야.”
누아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내가 이러고 있고, 네가 그러고 있으면. 마치 내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섬뜩함. 깊이 안기고 싶은 살의.
“히로인을 괴롭히는 악녀 같잖아.”
누아르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다.
무한히 반복되는 포격에 갇혀 있어야 할 유진. 그는- 외날개가 아닌, 한 쌍이 된 불꽃의 날개를 펼치고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아르는 유진의 주변에 휘날리는 시커먼 재들을 보았다. 일격에 소멸…… 시킨 것일까? 그럴 리가. 포격이 반복되어야 할 텐데.
‘그렇게 만든 환상 자체를 불태운 거야.’
레반테인을,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가비드 린드먼을 죽였을 때 이상의 화력. 이그니션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저 날개는? 누아르는 잠시 의문을 느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고 울상을 지었다.
마침 온몸이 사슬에 포박되어 있으니, 누아르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울음을 터트렸다.
“도와줘요, 하멜!”
빌어먹을 환생 563화
조금 전.
멈추지 않고 끊이지도 않으면서 반복되는 공격. 이 공격은 단순하고 집요하면서 떨쳐내기 힘들었다. 아무리 레반테인을 휘두르고 마법을 터트려도 공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해답은 간단했다. 화력을 올리면 된다. 환상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시작되지 못하게, 환상 자체를 모조리 불태워 재로 만들면 된다.
간단한 해답이지만 쉽게 시도할 수는 없다. 레반테인의 화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이그니션을 써야 한다.
이그니션을 써버리면 단기 결전이 강요된다. 아무리 이그니션의 지속시간이 늘었다고 해도, 필살을 확신하지 못하는 전투에서 벌써부터 이그니션을 쓰는 것은 유진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검.’
신화를 중첩해 베었다. 이클립스를 함께 터트렸다. 하지만 공격을 일소하지는 못했다. 별것 아니어야 할 건물의 잔해들이 계속해서 복원되고, 유진에게 계속해서 쇄도했다.
닮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형태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 집요하게 연쇄되는 공격의 감옥은, 하멜이 과거 즐겨 쓰던 무한연옥과 닮았다.
우연일 리가 없다. 이 공격을 만든 것은 누아르 제벨라다. 저 미친년이라면 하멜의 공격기를 재현하여 하멜을 죽이겠다는 정신 나간 발상을 떠올릴 법하다.
‘세냐가 왔어.’
도시의 꿈은 붕괴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아르가 약화 된 것은 아니다. 특히 세냐와 아니스에 대한 집념과 분노. 당연히 유진은 불길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된다. 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었다. 지금 이러는 중에도 세냐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유진 님.]
[하멜.]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화아악! 유진의 가슴에 빛이 어렸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한참 떨어진 도시의 바깥. 그렇지만 유진의 눈은 멀고 먼 성벽 근처에서 날고 있는 라이미르아와, 그 머리 위에서 기도 중인 크리스티나를 볼 수 있었다.
[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부디.]
속삭이는 말. 유진은 가슴에 얹으려던 손을 내려놓았다. 대신에 양손으로 레반테인을 쥐었다.
“주저하던 것은 내 쪽이었나.”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숨을 깊이 삼켰다.
ㅡ콰르르르르! 유진과 레반테인이 공명을 시작했다. 이그니션 없이 감당할 수 없던 힘이 유리의 칼날 안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양손이 저릿거리고 심장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 레반테인을 노려보았다.
짧은 신음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기도를 맺은 양손, 성흔에서 피가 철철 흐른다. 뜨겁고 고통스러운 신열이 성녀들의 의식을 흔든다.
지금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곁에 있지 않다. 하지만 유진의 눈은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육신을 갖지 못한 아니스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둘이 신음을 억누르며 기도를 이을수록 빛은 점점 강렬해졌다. 둘의 머리에 떠 있는 빛의 고리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둘의 모습이 빛에 둘러싸였다.
“어, 어, 어머니! 어머니가아!”
라이미르아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던 크리스티나의 육체가 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메르도 기겁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급히 빛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 안에 있어야 할 성녀의 육신을 만질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2명의 목소리를 함께 들었다. 푸확! 빛이 흩어졌다. 성녀들의 모습도 사라졌다.
유진은.
천천히, 레반테인을 머리 위로 들었다.
양손으로 쥔 레반테인이 무겁게 느껴졌다. 짓눌릴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유진은 피범벅의 손을 보았다. 짙고 강력해진 공명이, 성녀들의 존재를 빛으로 바꾸어 유진의 곁으로 이끌었다.
“안 아프냐?”
유진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2쌍의 손이 유진의 손에 겹쳐졌다. 성흔에서 쏟아지는 피가 불꽃에 스며들었다. 화르르륵! 격렬해진 신화가 성녀들의 환영을 휘감았다.
[안 아픕니다.]
[크리스티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멜. 엄청나게 아픕니다. 영혼이 작열하는 것 같습니다.]
정반대의 대답.
“참아.”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아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고, 크리스티나는 조금 더 강하게 유진의 손을 감쌌다.
ㅡ푸확! 불꽃이 성녀들을 집어삼켰다. 모든 것을 짓누를 듯이 무겁던 레반테인에서 무게가 사라졌다. 유진은 잠시 눈을 감고, 떴다. 성녀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등 뒤에서 성녀들의 존재를 느꼈다. 여태껏 느껴본 적이 없는 일체감을 느꼈다.
[이런 형태로 하나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등 뒤에서 탄식과 같은 속삭임을 들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는 않지만, 유진은 못 들은 척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우우우우우! 프로미넌스가 아닌 다른 날개가 빛을 발했다.
콰지지직! 신화의 일검이 모든 것을 재로 만들었다. 무한히 반복되던 공격, 그러도록 부여된 환상이 재가 되었다. 공격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하멜, 세냐가…….]
굳은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세냐. 밤하늘에서 사슬에 묶인 누아르. 유진과 누아르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와줘요! 하멜!”
누아르는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럴 수 있다는 것부터가 저 모든 것이 연기란 증거였다.
저것은 마법으로 재현한 유폐의 사슬. 그렇지만 누아르는 저 사슬에 칭칭 감긴 상태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하늘을 날고 있다. 누아르의 마력이 세냐의 마법을 웃돈다는 것이다.
“이 못된 마녀가! 저를 괴롭힌다구요!”
누아르가 빽빽 비명을 질렀다. 유진은 뿌득 이를 갈면서 시선을 내렸다. 세냐는…….
[괜찮습니다. 세냐 님은 잠시 의식을 잃은 것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팔다리의 부상은 세냐가 바라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하지만 정신이 어지럽지는 않았다. 저 목소리들은 마치 유진이 직접 떠올리는 것처럼 의식에 녹아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시야가 넓다. 레반테인이 가벼워진 만큼 기적의 ‘한계’가 늘었다. 이런 능력을 예상하고서 세례를 한 것은 아닌데. 이건- 기적이다.
‘빛.’
유진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운, 아득하고 거대한 신성. 그것이 빛의 성녀이기도 한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와 나눈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의 한계는 얼마나 늘었지? 어디까지 가능하지? 가늠되지 않는다. 해볼 수밖에. 유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흐응.”
누아르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우고서 아래를 보았다. 방금까지 저쪽에 있던 유진이 어느새 아래에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거나, 마법을 쓰거나. 어느 쪽이건 유진에게는 손쉬운 일. 그런 것이라면 누아르가 놀람을 느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놀랐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누아르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데. 누아르는 지금 유진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아르는, 유진의 등 뒤의 날개를 보았다. 프로미넌스와는 다른 빛의 날개. 누아르의 눈이 얇아졌다. 분명 날개인데. 지금 누아르의 눈에는 날개처럼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그, 둘이, 유진의 등 뒤에 선 것처럼 보였다. 그것에 누아르의 입술이 뒤틀렸다.
“아하하!”
누아르는 뒤틀린 입술을 열어 웃음을 터트렸다. 콰직! 전신을 묶은 사슬이 부서지고 흩어졌다. 누아르는 날개를 활짝 펴고서 밤하늘에 똑바로 섰다.
유진은 세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휘황한 빛이 세냐에게 스며들었다. 으깨진 팔다리가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동시에 누아르의 손가락이 유진에게 향했다.
펑.
터트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바랐다. 아직 구현되지 않은 환상, 그것을 위한 마력이 유진의 눈앞에서 양단됐다. 어느새 들린 레반테인의 끝이 누아르를 겨누었다.
펑! 반대로 누아르의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검붉은 화마가 누아르를 집어삼켰다. 누아르는 소리죽여 웃으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부드럽게 뻗은 손바닥이 불꽃을 밀어냈다. 펼친 손가락을 쥐는 것만으로 불꽃이 소멸했다.
그 짧은 사이에 유진이 누아르의 앞에 도달했다. 가속한 레반테인이 누아르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가로막혔다. 새하얀 손바닥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의 칼날을 받아냈다. 약지의 반지가 불꽃 속에서도 선명한 반짝임을 보였다. 받아내서, 밀어내려고 했다.
후욱.
밀리지 않았다. 유진에게는 깃털처럼 가벼운 검이지만, 누아르에게는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레반테인 안쪽에서 폭발한 불꽃이 공검으로 이어졌다. 푸확! 연달아 터진 폭발이 레반테인을 가속시켰다. 가로막고서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힘에서 밀린 누아르가 뒤로 날아갔다.
“어머나.”
누아르는 짧은 탄성을 지르며 손바닥을 보았다. 화상이 보였다. 기어코 파고들어 왔나.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검이 무겁다. 상처가 뜨겁다. 그 모든 것이 누아르를 흥분시켰다. 그녀는 쓰라린 손을 움켜쥐었다. 대륙 반대편까지 날아갈 것 같던 몸이 허공에서 우뚝 정지했다.
세냐를 일으켜 세우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저 광경은 보기에 조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받아들였다. 누구의 도움을 받을지라도. 누구를 등 뒤에 세우고, 누구를 옆에 세울지라도.
“결국 오늘, 여기서, 당신이 보는 것은 나뿐이잖아.”
설렘과 사랑이 질투란 감정조차 초월했다. 오늘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하였나. 쓰라린 손바닥의 상처로 다시금 실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방금까지는.
누아르는 자신의 패배를 상상하지 않았다. 그토록 기대했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냐의 마법은 누아르를 놀라게 했고, 성녀의 기도에 힘입은 하멜의 검은-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조차도 누아르에게 닿았다.
이건 결투도 뭣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사적으로 죽이려는 것뿐. 정정당당? 애당초 이 전장은 누아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대등해졌을까? 상상되지 않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던 패배가. 죽음이, 조금은 가까워졌을까.
“빌어먹을 년.”
팔다리의 상처는 나았다. 하지만 가슴 안쪽 뻐근함과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안도 없이 마왕의 권능을 재현한 대가다.
“싸울 수 있어?”
“왜. 이제는 직접 도와달라고까지 말하는 거야?”
“아까도 말했는데, 내가 언제 혼자 싸운다고 했냐? 혼자 들어간다고 했지.”
“아무리 봐도 너 혼자 싸우는 분위기였는데?”
“진짜 혼자 싸울 생각이었으면 같이 오지도 않았고, 장소를 여기로 정하지도 않았을 거야. 가비드 때처럼 결투장으로 끌어들이겠지.”
“나는, 진짜, 그게, 마음에 안 들어. 왜 하필 저년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장에서 싸우는 거야?”
“불렀으면 밖으로 나왔겠냐?”
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세냐를 흘겨보았다. 세냐는 호흡을 고르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세냐가 누아르라면…….
“안 나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전지전능할 수 있는 전장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세냐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밖으로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냅다 도망치면.”
“도망치고 싶지 않아.”
“뒈질 뻔한 주제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네 열받는 점이야.”
세냐는 투덜거리면서 메리를 들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다. 오늘 도망, 아니, 후퇴한다고 해서 다음에 승기를 잡기는 힘들다. 오히려 다음이 더 끔찍할 수도 있다.
지금이야 도시의 꿈을 무너트릴 수 있었지만, 과연 다음에도 무너트릴 수 있을까? 그렇다고 누아르 제벨라라는 존재를 배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진이 그녀를 무시한다면, 누아르는 망설이지 않고 유폐의 마왕과 손을 잡고서 영지를 옮길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제벨라 시티가 아닌, 판데모니엄 전체에 누아르의 꿈이 펼쳐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승산이 없다. 바벨에 오르기도 전에, 유폐의 마왕의 조력을 받는 누아르에게 전멸할 것이다. 지금이 아니고서는 누아르를 죽일 기회는 없다.
죽일, 기회.
세냐는 입술을 꾹 닫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꿈을 부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듯, 유진 역시 꿈속에서 끔찍한 악몽을 꾸었을 것이다.
“…….”
묻고 싶었다. 어떤 악몽을 꾸었는지.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정말로 누아르를 죽이고 싶은 것인지. 죽여도, 괜찮은 것인지.
괜찮을 리가 없다. 아무리 결의했어도, 누아르를 죽인다면- 여태까지처럼 승리를 마냥 기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후유증이 남으리라.
하지만 그것조차도 유진은 감내할 것이다.
“……단순한 힘 싸움이라면 네가 우세하겠지.”
그래서 세냐는 저렇게 말했다. 굳이 한 번 더 묻는 것으로 유진의 결의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이 전장에서 세냐가 해야 할 일은, 유진이 이기도록 돕는 것이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너 편한 대로 싸워. 저 엿 같은 마안들은 내가 어떻게든 틀어막아 줄 테니까. 그러니…….”
세냐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유진도 급히 위를 보았다. 지금은 밤. 달도 별도 없어서 하늘은 어둡다만, 그것과는 다른 ‘어둠’이 갑자기 드리웠기 때문이다.
빌딩이다. 거대한 빌딩이 유진과 세냐를 향해 추락하고 있다. 세냐는 표정을 찌푸리면서 메리를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내 곁에 있지 말고 가.”
세냐의 주변에 나타난 마법의 빛이 빌딩을 향해 폭사했다. 수백 개의 광선이 폭음조차 내지 않고 빌딩을 지워 버렸다. 조금 남은 부스러기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환상의 마안이 잔해들을 다른 형태로 바꾸었다.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냐의 마법이 환상을 포착했다.
틀어막아 주겠노라고 말한 것이 불과 방금. 세냐의 무한이 마법을 낳았다. 위신의 마안과는 달리 환상의 마안은 누아르가 타고난 것. 유폐의 권능을 빌려오는 것도 아닌, 누아르 본인의 권능. 빌려온 권능이야 어찌 모방이 가능했지만, 저 환상만큼은 모방으로 대응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마법을 연이어 충돌시킨다. 누아르의 마안이 환상을 현실로 이루듯, 세냐의 마법도 기원을 현실로 만든다. 방식은 다르다. 이것만으로 싸운다면 세냐가 패배할 것이다.
상관없다. 세냐가 맡기로 한 것은 환상을 틀어막는 것뿐이니.
마법으로 길이 열렸다. 유진은 주저 없이 세냐를 놓았다. 부축이 사라졌지만 세냐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저만치 앞으로 날아간 유진의 등을 보았다. 돌아봐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돌아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누아르는.
마법에 가로막히는 환상을 신경 쓰지 않았다. 빠르게 다가오는 유진을 보았다.
레반테인의 불꽃을 보았다. 저 검은 누아르로서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의 화상이 아직까지 쓰라리다. 좀처럼 재생이 되지 않고 있다. 역시 저 검에 베이는 것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검’이라는 형태가 오히려 약점이라고 느꼈다. 검이 할 수 있는 것은 베거나 찌르는 것뿐. 저 불꽃이 제아무리 위력적인들, 검의 형상이란 것이 오히려 하멜을 ‘덜’ 느끼게 해준다. 누아르로서는 그것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가 사랑한 하멜의 무자비한 살의를 표현하기에, 검은 너무나도 정직해서.
“?”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금을 이해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유진이 대뜸 레반테인을 집어 던졌기 때문이다.
신성월광검 레반테인. 빛이 유진을 위해 제련한 검.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한, 유진과 빛의 신검. 그 검이 유진의 손을 떠나 누아르에게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놀라기는 했지만 정직에서 크게 벗어난 공격법은 아니다.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젖혔다. 아슬아슬하다고도 할 수 없이, 레반테인이 넉넉하게 누아르를 비껴갔다.
“잠깐.”
그렇게 움직인 순간에 누아르는 급히 내뱉었다. 하지만 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레반테인을 던져 버리는 것과 동시에 펼친 기적. 누아르조차 간파하지 못한 공간도약이 유진의 몸을 누아르의 코앞으로 옮겼다.
누아르의 안면에 주먹이 처박혔다.
‘이제 와서 칼질을 안 한다고?’
누아르는 코피를 뿜었지만,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빌어먹을 환생 564화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레반테인을 던진 것은 아니다. 유진은 이렇게 되도록 충분히 설계했다고 판단했다. 계속해서 레반테인 위주로 공격하면서, 누아르가 레반테인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누아르가 강할지라도 레반테인의 공격은 유효하다. 특히나 누아르는 강하되 오만하지는 않다.
300년 전에는 단 한 번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자신의 적수가 될 만한 마족들을 추려서 타락시켰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정기를 수급하며 힘을 키웠다.
겉모습과 행동거지와는 달리 굉장히 신중하단 말이다. 그런 누아르가,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레반테인을 의식하지 않을 리가 없다.
유진이 공격할 때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최우선적으로 레반테인을 쫓았다. 다른 마법이나 공격은 허용할지라도, 레반테인은 주시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결국, 누아르의 안면에 주먹을 처박았다. 코뼈를 부수는 감촉을 느꼈다. 더, 강하게. 그렇게 바랐고, 콰직! 주먹이 누아르의 머리를 터트렸다.
머리를 잃은 몸이 기우뚱거렸다. 유진은 멈추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멀리 날아갔던 레반테인은 어느새 유진의 손에 돌아와 있었다. 떨어진 무기를 소환하는 마법 따위 대마법사가 아니어도 쓸 수 있다.
아니, 레반테인에 한해서는 마법을 쓸 필요도 없다. 레반테인 자체가 유진의 신검이다. 바라는 순간 손에 쥐어진단 말이다.
신화에 휘감긴 칼날이 누아르에게 쇄도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머리는 부쉈지만 누아르는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레반테인이 도달하기 전에 누아르의 몸이 반응했다. 꽈앙! 걷어찬 발길질에 유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여자의 얼굴을 때리다니!”
머리는 없지만 누아르의 외침은 똑똑히 들렸다. 쿠르르르! 도시에서 뽑혀 나온 건물 수십개가 일제히 유진에게 날아들었다.
무시했다. 유진은 건물을 공격하지 않고 다시 도약했다. 쾅, 쾅, 쾅! 유진에게 날아들던 건물들이 하늘에서 파괴됐다. 지상에 남은 세냐가 요격한 것이다.
‘아니스, 크리스티나.’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레반테인의 칼날을 녹인 것은 빛이다. 애석하게도 유진은 신성마법과 기적이란 것에 익숙하지 않다만, 성녀들은 다르다. 유진이 바란 터무니없는 요구에 성녀들은 기겁했지만, 그렇다고 주저하지는 않았다. 기적을 내리는 신이 직접 가능하다 여기는데 불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마치 유리공예처럼 칼날이 흐물거렸다.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던 칼날이 유진의 뜻에 따라 형상을 바꾸었다.
도끼, 아니, 망치? 어느새 머리를 복원한 누아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워낙에 형태가 불완전해서, 직전까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지금의 레반테인은 결코 검이 아니었다.
“정답! 도끼!”
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외쳤다. 활짝 펼친 손이 밤하늘을 강타했다.
푸확! 하늘의 어둠이 통째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한 마력이 덮쳤다.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
무식하게 마력을 쏘아대는 중에도 두 개의 마안은 침묵하지 않았다. 공간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유진을 노렸다.
‘뒤집혀라. 떨어져라. 짓눌려라. 꿇어라. 꿇어라.’
환상의 마안의 권능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지의 조작. 여태껏 누아르는 그 권능을 꿈과 결합해서 사용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인지의 조작을 넘어 현실까지 조작하고 있다. 저 직관적인 환상들은 접촉한 순간에 유진에게 작용할 것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내장을 숟가락으로 긁어내는 것 같다. 지금 세냐는 발현되지 않은 환상을 간파하고 틀어막고 있다. 유폐의 사슬을 마법의 사슬로 가로막고 있다.
‘할 수 있어.’
마나의 고갈은 없다. 의식이 버티는 한 무한에서 마법을 끌어낼 수 있다. 세냐는 숨을 헐떡이며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마안의 권능은 최대한 틀어막았다. 하지만 저 무식하게 치닫는 마력까지는 막아줄 수 없다.
“아하하!”
도끼라고 생각했는데. 틀려 버렸다. 지금의 레반테인은 망치였다. 불꽃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칼날 자체가 망치가 되었다.
아까와는 다르다. 무거운 타격이 마력을 깨부쉈다. 마력과 함께 밀려났던 밤하늘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도 절반은 맞은 거 아니에요?”
마력과 하늘을 부수고 온 망치가 도끼가 되었다. 이만큼 거리가 있었는데 어느새 거리는 소멸했다. 누아르는 가슴에 꽂히는 도끼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리며 속삭였다.
콰드드득! 내려 찍힌 도끼는 끝까지 닿지 못했다. 누아르가 두르고 있던 보라색 마력이 수백 개의 손이 되어 도끼를 받아낸 것이다. 태반이 도끼에 으깨졌지만 전진은 가로막혔다.
‘환상의 마안?’
세냐는 핏물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현실 조작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마력에 직접 환상을 부여한 것이다. 저런 것까지 가능할 줄이야. 세냐는 급히 메리를 움직여 누아르를 겨누었다.
퍼억! 이번에는 오히려 세냐의 마법이 먼저 틀어막혔다. 무식한 질량의 마력이 세냐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유진은 붙들린 도끼를 뽑았다. 수백 개의 팔이 뜯겨나갔다. 타오르는 불꽃이 마력을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레반테인을 직접 처박지 못했기에 누아르에게는 타격이 없다. 대량의 마력이 전소된 것? 아무 문제 없다. 불타 버린 마력이야 누아르가 가진 무한대의 마력에 비하자면 티끌조차 되지 않다.
“아래.”
누아르가 속삭였다.
“꽤 세게 때려주었는데, 걱정되지 않아요? 죽었을지도 몰라.”
“안 죽어.”
칼날이 쭉 늘어났다.
“아하하! 세냐 메르데인을 믿는 건가요? 아니면 내 상냥함을 믿는 걸까? 하긴, 죽였다면 진즉에 죽일 수 있었어. 내가 죽이지 않는 거야.”
몇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다. 초대장을 보냈던 시점에서 정신을 제압할 수 있었단 말이다.
죽이지 않은 것은.
하멜이 슬퍼할 것 같아서. 하멜이 화를 낼 것 같아서. 하멜의 살의를, 복수심 따위로 변질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번에는 창이죠? 창일 거야. 당신은 창도 꽤 잘 썼…….”
아니, 틀렸다. 창처럼 길쭉하게 뻗은 칼날이 대뜸 굵어졌기 때문이다.
‘저게 뭐야?’
품을 수밖에 없는 의문. 곧 누아르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포신이 되었다. 단어 그대로 유리로 만들어진 대포가 된 것이다. 유리 대포의 포구에서 불꽃이 일렁거렸다.
불꽃이 방사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자그마한 빛의 구체가 대량으로 포구에서 쏟아져나왔다.
주먹만큼 자그마한 구체. 누아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녀는 주변 가득 떠도는 구체들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공격이 다채로워졌네요.”
수백 개의 이클립스가 동시에 폭발했다. 하늘은 더 이상 밤이 아니게 되었다. 하늘이 한 번 새하얗게 물들었다. 결코 환한 빛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릴 광염이 누아르에게 집중되었다.
“그 날개 때문일까?”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꽈지지지직! 누아르가 펼쳤던 마력 결계가 순식간에 파괴됐다. 광염 속에서 누아르의 몸이 낙엽처럼 떠돌았다. 하지만 불타지 않았다. 누아르는 파괴되는 즉시, 아니, 파괴되기 전에 마력결계를 보강하며 유진을 쫓았다.
하늘을 밝히던 광염이 모조리 유진에게 되돌아갔다. 어느새 다시 검이 된 레반테인의 칼날에 광염이 중첩되었다.
누아르를 상대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공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녀들과 공명하여 합일된 것으로 레반테인의 화력은 크게 늘었다. 거기에 지금의 중첩은-
“이건 위험한걸.”
누아르가 중얼거렸다.
푸확! 공검이 순식간에 누아르를 파고들었다. 여태까지 누아르에게 유효하지 못했던 필중의 기적이 발해졌다. 집중시킨 마력결계가 불꽃에 소멸했다. 잔재한 마력에 환상을 부여했다. 어떤 환상도 공검을 가로막지 못했다. 무기, 방패, 갑옷, 모든 것이 발현되기 전에 불꽃에 베였다.
물러설 수밖에. 생각한 순간.
철걱.
뒤에서 나타난 사슬 하나가 누아르의 발목을 묶었다.
“뭘 노리나 했더니.”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진 하늘의 아래. 부서진 건물의 잔해 속. 세냐의 안광이 보였다. 기절해 처박혀 있으라고 때려주었는데. 의식도 잃지 않았을 줄이야.
발목이 묶였다. 필중의 공검이 다가온다. 어떤 식으로 대응하든 조금은 늦어버린다. 그럼 어쩔 수 없나. 누아르는 풋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마침.”
푸확! 공검의 칼날이 누아르의 가슴을 베었다. 베인 가슴이 쩍 벌어졌다. 불꽃이 상처를 지져버려 피조차 튀지 않았다. 활짝 열린 상처에서 심장이 보였다. 침범하는 불꽃이 심장을 노렸다.
“실감이 부족했어.”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심장으로 전진하던 불씨가 푹 꺼졌다. ㅡ얕았다.
유진은 입술을 씹으며 레반테인을 당겼다. 검에서 형태가 바뀌었다. 지금 이 간극, 불필요한 동작 없이 심장을 가장 빠르게 찌르기 위한 형태. 단검이 누아르의 가슴으로 내리꽂혔다.
누아르의 손이 단검을 가로막았다. 콰직! 손바닥은 뚫었는데 단검은 더 전진하지 못했다. 레반테인이 다시 형태를 바꾸기도 전에 누아르의 손가락이 칼자루와 유진의 손을 함께 움켜쥐었다.
“죽음에 대한 실감.”
누아르의 입술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그것이 좋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피의 맛이. 가슴과 손에서 느껴지는, 두근거림과는 다른, 감정과도 다른, 순수한 고통의 열기.
“서로 필사적으로 되어보자구요, 하멜.”
뿌직! 사슬에 묶인 다리를 끊어냈다. 레반테인을 가로막은 손도 함께 끊어냈다. 그렇게 자유롭게 된 누아르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유진이 다시금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누아르가 하나 남은 손으로 가슴의 상처를 움켜쥐었다.
“아하하하!”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상처가 벌어졌다.
촤라라라락! 신화에 지져버린 상처에서 피 대신 다른 것이 뿜어져 나왔다. 내장이나 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상처에서 뿜어진 것은- 제벨라 코인이었다. 개수를 세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많은 코인이 유진을 덮쳤다.
‘이게 뭐야?’
여태까지 누아르에게서 별별 공격을 다 당해봤지만, 설마 상처에서 코인을 뿜어댈 줄이야. 심지어 이 코인은 무겁고 강했다.
유진은 이를 뿌득 갈면서 공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가지각색의 코인이 불길에 스러졌다.
누아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즉시 감각을 확장해 누아르를 찾았다.
“위!”
아래에서 갈라진 비명을 들었다. 세냐의 목소리다. 유진은 세냐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ㅡ우우우! 커다란 제벨라 페이스가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카지노 지붕 위에 앉아 있던 것 중 하나. 아까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괜히 정면에서 쳐냈다가는 무시할 수 없는 폭발에 휘말릴지도 모를 노릇.
유진은 즉시 반경을 벗어나며 이클립스를 쏘았다. 퍼엉! 제벨라 페이스가 폭죽처럼 터졌다.
‘누아르는?’
이 짧은 순간에 어디로 갔지? 도망쳤나? 아니, 그럴 리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얕은 상처지만 레반테인은 틀림없이 누아르에게 상처를 남겼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심장까지 닿았을 상처. 치명상은 아니라도 무시할 상처는 아닐 터. 다른 상처라면 즉시 회복할 수 있어도 레반테인의 상처는 회복이 힘들다. 기껏 상처를 남겼는데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걱정하지 말아요.”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즉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이 도시에서 누아르와 마주쳤던 곳. 도시의 중심. 완전히 붕괴 해 버린 그곳에 누아르가 있었다. 유일하게 하늘에 떠 있던 제벨라 페이스. 누아르는 그 곁에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하멜. 서로 필사적으로 되어보자고.”
가슴에 남은 상처가 좋다. 살벌하고 뜨거운 열기가 좋다. 누아르는 어느새 재생된 왼손으로 제벨라 페이스를 어루만졌다.
뻔한 돌진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누아르가 항상 거처로 삼던, 왕관을 쓴 제벨라 페이스가 돌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열정적으로.”
빰, 빰, 빰, 빰!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벌어지고 요란한 음악이 쏟아져나왔다. 유리로 된 커다란 눈동자는 미러볼처럼 알록달록한 빛을 내뿜었다. 달도 별도 뜨지 않은 밤하늘이 화려한 색채로 물들었다. 동시에 밤하늘에 녹아든 어둠이 누아르에게 집중되었다.
“즐겁게.”
도시 전체를 아우르던 마력이 누아르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녀는 도시에 남은 꿈의 잔재를 모조리 거두었다. 다시금 꿈을 수복하는 것을 포기한 대신에, 제 영지에 존재하는 모든 힘을 자신에게 집중한 것이다.
ㅡ두근! 벌어진 가슴의 상처에서 커다란 고동이 들렸다. 누아르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아하, 아하하하! 이건, 이건 너무 많아!”
누아르 본인조차도 가늠이 불가능한 마력. 그녀가 평생토록 쌓은 모든 힘이 하나의 육체에 담겼다.
쩌적, 쩌저적! 누아르를 중심으로 하늘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서 누아르를 보았다. 그건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너덜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받치고서 간신히 일어서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신이시여.]
성녀들도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결국은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지는 위압감. 전신에 소름이 돋고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불길한 힘.
퍼억, 퍼억! 도시의 건물들이 하늘에서 짓누르는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붕괴하기 시작했다. ㅡ우우우우우!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누아르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콰아아앙! 고작 날개를 펼친 것뿐이다. 그런데도 도시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그 충격은 도시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겁에 질려 있던 라이미르아가 충격에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급히 결계를 펼친 세냐도 전달된 충격에 왈칵 피를 토했다.
유진은 레반테인을 우뚝 세웠다.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어둠을 갈랐다. 프로미넌스가, 빛의 날개가, 구축한 성역이, 누아르의 압도적인 마력에 저항했다.
“당신은 부족하지 않나요?”
속삭이는 목소리. 들었지만 반응하지 못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진 공격이 유진의 몸을 땅에 처박았다.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버텨서 다음을 노렸다. 검을 휘둘렀지만 닿지 않았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졌다. 꽈앙! 아래로 처박혔는데 이번에는 뒤로 날아갔다. 유진의 입에서 울컥 피가 뿜어졌다.
[하멜!]
[유진 님!]
성녀들의 비명이 들렸다. 멋대로 움직인 빛의 날개가 유진을 감쌌다. 부서진 내장이 재생되었다. 몸속에서 퍼진 충격에 튀어 나가고 터졌던 안구도 재생되었다. 시커멓던 시야에 빛이 돌아왔다.
빰, 빰, 빰, 빰.
제벨라 시티의 클럽에서나 들릴 것만 같은 요란한 음악. 하늘을 어지럽게 수놓는 여러 색의 빛. 그 모든 것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
“씨X.”
유진은 피를 토하며 내뱉었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솔직히 말해서, 신성을 자각하고 신검을 손에 넣은 후로 이렇게나 고전한 것은 처음이다.
망령은 강했다. 가비드도 강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심지어 일대일도 아니고 세냐와 성녀들의 조력까지 받고 있는데, 도저히 승기를 느낄 수가 없다. 얕게나마 닿았을 때. 베었을 때. 그때는, 슬슬 이길 만한가? 라고 생각했다. 아주 조금 안도했다.
그런데 이 꼴이다. 결국 악몽에 들어가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누아르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실감.’
유진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누아르는 더 공격하지 않고 있다. 어지러운 색채 속에서 누아르의 모습이 보였다. 집중되었던 마력은 시커먼 드레스가 되었다. 하지만 움푹 파인 형태가 가슴의 상처는 선명히 보이게 만든다.
상처.
마력을 모조리 거두었음에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의 안쪽은 보이지 않는다. 심장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새카만 어둠만이 남아있다.
시선을 느낀 누아르가 방긋 웃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손을 올려 상처를 더듬었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간 손가락이,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
성녀들에게 세례를 내렸다. 지금의 레반테인은 전에 이그니션을 썼을 때 이상의 화력을 갖는다. 성역 자체도 강화되었다. 할 수 있는 기적의 범위도 커졌다.
그런데도 화력이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전과 같은 전투는 성립되지 않을 거다.
‘몇 번 닿았어.’
간신히 닿았을 때는 얕았다.
‘또 닿을 수 있나?’
이제는 얕게나마 닿지도 못할 것 같다.
‘그래.’
피비린내 감도는 호흡을 깊이 들이마셨다.
‘실감은 충분해.’
부족하지 않다. 누아르는 지금에야 죽음을 느낀 모양이지만, 유진은 이 도시에서 단 한 번도 패배와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 적이 없다.
‘더, 필사적으로.’
지금 유진은 사선에 서 있다. 살짝만 기울어도 죽는다. 아니, 사실은 이미 죽음 쪽에 깊이 기울어져 있다.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의 나는, 누아르 제벨라보다 약하다.’
그렇게 인정한 것으로, 바라야 할 것은 간단해졌다. 결국 부족했던 것은 각오다. 누아르의 말마따나 필사적이지 않았다. 패배를, 죽음을, 사선을,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내가 죽기 전에 누아르 제벨라를 죽인다.’
유진의 왼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환생 565화
빰, 빰, 빰, 빰…….
귓가에 맴도는 요란한 음악 소리.
두근.
하는, 심장의 고동이 음악을 잡아먹었다. 밤하늘을 가지각색으로 바꾸는 제벨라 페이스의 조명이, 그보다 더, 더, 밝은 빛에 잡아먹혔다.
“아아.”
지금부터다. 누아르는 목걸이를 움켜쥐며 웃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란 꿈은 끝났다. 결코 여명이 오지 않을 밤조차도, 어떠한 결말을 맞을 때가 도래했다. 죽음을, 실감했다. 염원했던 대로 필사적이 되었다.
누아르가 그러했듯, 하멜도 그러했다. 이그니션. 누아르는 저것을 아주 좋아했다. 나중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만을 위한 폭주. 제 목숨을 산화하면서 상대를 무조건 죽이려 드는 살의의 정수.
죽인다. 무조건 죽인다. 내가 죽을 지라도 너는 죽인다. 고개를 숙인 하멜에게서 그러한 의지를 느꼈다. 두근거리는 고동이 음악에 어울려 점점 가속되었다.
찌직, 찌지직! 유진을 휘감은 불꽃이 보다 격하게 타오르며 검붉은 전류가 튀었다.
프로미넌스가 높이 치솟았다. 성녀들이 공명하는 빛의 날개도 함께 치솟았다.
[아아아……!]
성녀들이 똑같은 비명을 질렀다. 폭주해서 증폭되는 신력, 끊이질 않는 폭발, 그 모든 것이 성녀들에게 고통이 되었다. 하지만 유진은 성녀들에게 버티란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버텨야…… 합니다……!]
오히려 그 말은 성녀들이 외쳤다. 지금 성녀들은 유진과 깊이 공명하고 있다. 이그니션의 통증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지금 자신들이 느끼는 고통이 극히 일부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의 이그니션은 여태까지와 다르다. 코어를 폭주시키고, 우주를 폭주시키고, 신성을 폭주시키는 범주를 넘었다. 유진이 바라는 염원과 기적은 그 이상을 바랐다.
이그니션을 쓰는 것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봤다.
제 몸을 망가트리는 자살기. 솔직히 말하자면, 유진이 이그니션을 쓰는 것을 좋아한 적은 없다. 이 미치광이 같은 기술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싫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고 차라리 후퇴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몇 번이나 생각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고 후퇴하는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았음을. 쓰지 않는다면 후퇴조차 할 수 없다. 지금 쓰지 않는다면 다시는 이길 수 없다.
지금도, 그렇다. 이그니션이 가속하면서, 성녀들도 점점 ‘실감’하고 있다. 그토록 아득하게 느껴졌던 누아르 제벨라가. 존재감만으로 모두를 압도시키고 가만히 선 것만으로 도시를 붕괴시키며, 작정하고 날아오른다면 대륙조차 멸망시키고 유폐의 마왕과도 겨룰 수 있을지 모를 악신(惡神)이.
점점, 가까이 느껴지고 있다. 아까처럼 아득하지 않다. 아까처럼 압도적이지 않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이 흔들리고 있다. 지금 나아가지 않는다면. 후퇴해 버린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결코 다시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신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기에. 그토록 기도했음에도 세상을 구해주지 않았기에.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심하고 무정하던 빛은 결국 실재했다. 빛은, 자신을 섬기는 신도의 희망을 저버릴지언정 세상 자체의 구원을 추구했다.
어떻게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모든 마왕을 쓰러트리고 이미 결정된 멸망마저 거스르기 위한 존재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신은 이곳에 있다. 지금 성녀들은 그 어느 순간보다 신의 존재를 가깝게 느꼈다.
신성이 폭주한다. 신위가 확장된다. 아직 부족하다. 그릇이 작다. 지금의 그릇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더욱 염원했다. 기적을 갈구하여 기적을 일으켰다. 신력이 감응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신력이 유진의 몸을, 우주를 가득 채웠다.
머나먼 바다를 보았다. 살아 있는 존재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경계선. 그곳에서 길고 긴 세상 동안 존재해 온 빛을. 아득히 먼 옛날에, 벗이라 생각했던 거신을. 멸망의 직전에 스스로 거신에게 잡아먹힌 고신들을. 그들이 이어 온 빛을.
‘부족해.’
유진은 그 신력을 모조리 품지 못했다. 레반테인을 단말 삼아 뽑아낼 뿐. 하지만 그마저도 충분하지 않다. 이 검은 결코 부서지지 않지만, 유진의 몸은 너무 커다란 신력을 견디지 못한다.
지금은 견딜 수 있다.
레반테인을 들었다. 불꽃 속에 유리의 칼날이 있다. 유진은 망설임 없이 레반테인의 칼날을 돌렸다.
화르르륵! 레반테인이 유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유리의 칼날이 불꽃과 빛에 녹아 유진의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완성되었다. 빛의 신성 자체가 유진과 하나가 되었다. 부서지기 직전까지 확장되던 그릇이 기어코 부서졌다. 하지만 그 안을 가득 채웠던 빛은 쏟아지지 않고, 유진에게 뒤섞였다.
“아아아.”
누아르는 목걸이를 움켜쥐며 탄성을 흘렸다. 그녀는 서로의 파멸이 될 수밖에 없는 힘을 느꼈다. 지금 하멜이 바라는 기적은 오직 누아르를 죽이는 것.
누아르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멜을 죽이는 것뿐이다.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는다. 어떤 식으로든 죽게 될 수밖에 없다.
“와요, 하멜.”
목걸이를 어루만지던 손을 뻗었다. 하멜의 이름을 새긴 반지를 끼운 왼손이, 앞을 향했다.
“나를 죽이러 와요.”
유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흐느적거리는 날개가 함께 누웠다. 양손이 주저앉은 대지를 움켜쥐었다.
분쇄추의 단순한 권능. 닿는 것을 밀어내서, 부순다. 폭발시킨다. 그것이 유진의 손을 통해 펼쳐졌다.
ㅡ꽈아앙! 지반이 밀렸다. 부서졌다. 폭발해서 뒤집혔다. 그 모든 것이 난폭한 추진력이 되었다. 그렇게 유진은 한 줄기의 빛이 되었다. 검붉은 선이 어둠을 갈랐다.
콰콰쾅! 누아르와 유진이 충돌했다. 상냥하게 뻗었던 손이 으스러졌다. 마치 세상 전체와 충돌한 것만 같은 충격에 누아르의 입에서 피와 내장 부스러기가 뿜어졌다.
“아하, 아학! 아하하하!”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은 고통. 하지만 누아르는 미친 듯이 웃었다. 그녀는 부서지는 몸을 마력으로 붙들고서 허리를 꺾었다.
“짐, 승 같아!”
누아르가 웃으며 외쳤다.
촤라락! 길게 뻗은 다리를 마력이 휘감았다. 시커먼 마력의 와류가 발길질과 함께 폭사했다. 번쩍이는 빛이 와류의 앞을 가로막았다. 손길과 함께 펼친 권능은 창림. 하지만 창림은 이전처럼 불꽃을 뿜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무기가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불꽃과 빛으로, 신력으로 빚어낸 무기였다. 누아르의 마력이 수많은 신기에 가로막혔다.
누아르는 어둠을 걷어차며 뒤로 훌쩍 뛰어올랐다. 두 개의 마안이 빛을 발했다. 유폐의 사슬이 공간을 붙잡았다. 환상의 마안이 유진의 공격을 재현했다. 콰장창! 뒤엉킨 무기가 부서지고 신력과 마력이 섞였다.
검광이 그 모든 것을 양단했다. 물러섰지만 얕게 베였다. 시커먼 드레스가 갈라지고 누아르의 새하얀 배에 선이 그어졌다. 피는 쏟아지지 않았다. 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드레스를 복원했다.
“아파!”
배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쓰라린 통증에 누아르는 더욱 크게 웃었다. 동시에 높이 든 손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꽈직! 유진의 무릎이 굽어졌다. 여전히 무겁다. 이를 악물고서 피를 삼켰다. 굽었던 무릎을 다시 펼쳤다.
쩌엉! 발에 밟히는 것이 땅인지 하늘인지는 모르겠지만, 밀어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아아!]
성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들이 느끼는 신열의 열기마저 불꽃이 되어 유진의 신력을 증폭시켰다. 유진의 손이 허공을 쓸었다.
촤라라락! 손이 훑고 간 곳마다 어둠이 지워지고 빛과 불꽃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나타난 수백 개의 신검이 일제히 누아르를 향해 쏘아졌다.
땅이, 어둠이, 아니, 공간 자체가 파편이 되어 뒤집혔다. 세상의 일부가 신검의 세례를 모조리 틀어막았다. 유폐의 사슬이 그것을 통째로 묶어버리고, 환상의 마안이 꿈을 흘려보내 세상의 일부를 꿈으로 만들고서 닫아버렸다. 그 일련의 과정은 시선이 움직이는 찰나에 이뤄졌다.
새하얀 손이 우아하게 어둠을 두드렸다. 이어진 일은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무식한 폭력이 유진을 덮쳤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공격인지 유진은 굳이 파악하지 않았다.
시야가 너무 밝다. 머릿속이 너무 밝다. 눈으로 보고 판단하여 답을 낼 필요는 없었다. 예지 그 자체가 된 직관이 공격을 간파했고, 신성이 가득 찬 직관이 틀리지 않게 대응했다.
“…….”
세냐는 비틀거리며 서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신성이라 해서 동등하지 않다. 이 순간 세냐는 그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세냐로서는 절대로 저 전투에 끼어들 수 없다. 그녀의 마법이 아무리 무한한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저곳에서 부딪치는 힘 앞에서는 무한히 스러질 뿐이다.
‘마치…….’
세냐는 꿀꺽 침을 삼키며 유진을 보았다. 지금 유진은 레반테인을 휘두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손짓에서 무수히 많은 검이 만들어졌다. 광란의 마왕이 된 아이리스를, 멸망의 화신이 된 망령을 패배시킨 신검이, 마치 싸구려 검처럼 태어나고 부서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검뿐만이 아니다. 지금 유진은 그가 하멜일 적부터 다뤘던 모든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전쟁 그 자체가 된 것만 같았다.
동시에 유진은 빛이었다. 전쟁이, 빛이, 누아르가 만드는 밤을 밝힌다. 그것은 틀림없는 신화의 전장이었다.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패배감, 무력감, 그것과는 다른 기분을 느꼈다. 지금의 목도 자체가 세냐의 시야를 넓혔다. 세냐가 바라는 마법을, 추구하는 무한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알 것만 같아.”
세냐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찍이 유진이 말한 적 있다. 전쟁은 아가로트의 것이고, 빛은 양도받은 것. 그것과는 별개인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성이 무엇인지.
-만들어가고 있어.
유진은 그렇게 말했을 뿐. 신성이 무엇인지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빛도 전쟁도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성이 무엇인지. 그가 저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자신의 목숨마저 불태우며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까워.’
더 이상 멀지 않다. 얕지도 않다. 가깝다. 손을 뻗으면 닿는다. 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쿠웅! 유진의 왼발이 바닥을 짓눌렀다. 앞으로 뻗은 오른발이 강하게 떨어져 바닥을 부쉈다. 뿌드득. 극한까지 압축된 신력이 몸뚱이를 부술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유진은 허리를 비틀며 양팔을 들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이, 몸을 휘감은 빛과 불꽃을 움켜쥐었다.
‘가까워.’
다시 생각했다. 누아르 제벨라와 가깝다. 동시에 죽음과 가깝다. 어느 쪽의 죽음일까. 어느 쪽이 먼저 죽을까. 아직, 그것에 대해서는 희미하다. 그렇지만 실감만큼은 확연했다.
화아아악! 유진이 움켜쥔 불꽃과 빛이 거대한 검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바라나.
누아르 제벨라의 죽음을 바란다. 길고 긴, 도저히- 악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짙은 인연의 끝을 바란다. 이 꿈의, 밤의, 끝을 바란다. 찬란한 여명을 바란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승리를 바란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 따위 진즉부터 들리지 않았다. 미러볼이 되어버린 제벨라 페이스가 쏟아내는 빛 따위 진즉에 다른 것에 휩쓸려 사라진 상태다. 부딪치고 터지고 부서지는 전장의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유진에게 들리는 것은 성녀들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기도. 그리고.
누아르의 웃음소리뿐이다.
검을 휘둘렀다.
밤이 갈라졌다.
웃음소리가 뚝 끊어졌다. 신음과 비명, 그런 것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단지 웃음이 멈췄을 뿐. 누아르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소리를 내는 것조차 잊을 정도의 충격. 누아르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지만.
피범벅의 입술이 곡선을 그린 것을 보았다. 유진도 똑같이 웃었다.
입술이 피범벅인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상처는 회복하고 있다. 그런데도 피는 계속해서 흐른다.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다. 영혼이 산화되는 것 같다.
목숨과 목숨이 부딪치고 있기에, 서로의 끝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아직이다. 더 할 수 있다. 서로가 똑같이 웃었다. 부딪쳐서 함께 멀어졌지만, 서로가 똑같이 달려들었다.
“하…… 악……!”
가쁜 호흡에 웃음이 섞였다. 멈췄던 웃음을 다시 내뱉었다.
무한한 마력, 영원한 악몽이 부정되고 있다. 마력을 불사르는 빛이 무한을 유한으로 끌어내렸다. 악몽도 산산이 조각나서 현실이 되었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멜과 하는 지금 이 행위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이제는 정말로 상상할 수 있다. 너무나 확실하고 가까운 실감이 죽음을 그리게 해주었다.
“하멜.”
길었던 밤에도 끝은 온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베였다. 몇 번이나 불탔다. 그럴수록 점점 죽음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필시.
먼저 죽어버리는 것은.
“당신은, 당신은 어때요?”
싫다.
누아르의 양팔이 활짝 열렸다. 기적이 도달했다. 마력이 폭주했다. 피범벅의 곡선이 일그러졌다. 빛이 누아르를 관통했다. 그렇지만 어둠은 부서지지 않았다.
퍼억! 누아르의 왼쪽 눈동자, 위신의 마안이 스스로 터졌다. 한계를 아득히 넘은 권능에 마안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누아르의 모든 마력이 사슬이 되었다. 환상의 마안이 홀로 빛을 발했다. 사슬로 휘감은 세계가 유진과 누아르, 서로의 똑같은 악몽을 구현했다. 영원할 것 같은 밤이, 그 후에 찾아올 여명이 부정되었다.
최악의 악몽이 재림했다. 시뻘건 황혼의 빛이 세계를 가득 채웠다. 누아르는 보다 가슴을 열었다.
뿌드드득……! 가슴을 꿰뚫은 신검이 비틀렸다. 아슬하게 비껴간 심장. 넘실거리는 불꽃이 심장을 불태우려 하지만,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의 하멜.”
누아르가 소곤거렸다. 유진은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유폐된 공간. 악몽과 같은 황혼. 유진의 신성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았다.
“당신도 나와 같은 죽음을 느끼나요?”
황혼의 빛이 모든 것을 감쌌다.
“유진!”
사슬로 둘러싸인 세계가, 안에서 터져 나온 붉은빛에 녹아내렸다. 세냐는 비명을 지르며 그곳으로 날아갔다. 방금 누아르가 무엇을 했는지는 세냐도 알았다.
위력이 흩어지지 않도록 둘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남은 마력을 모조리 집중했다.
저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을 위해 스스로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터트렸다. 폭주시킨 마력. 저건 자폭이다. 마력의 주인인 누아르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래서, 함께 죽으려고? 서로가 함께 끝나기 위해? 미친년이란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설마 저렇게…….
“……!”
다급히 다가가던 세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녹아내리는 붉은빛 속에 선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ㅡ살아 있다. 죽지 않았다. 하지만 상태는 처참했다. 유진은 피를 왈칵 쏟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ㅡ파스스! 프로미넌스가 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홀로 남은 빛의 날개도 점점 빛이 희미해지고 있다.
유진은 덜덜 떠는 손을 간신히 옆으로 들었다. 빛의 날개가 완전히 사라지고, 정신을 잃은 크리스티나가 나타났다. 간신히 든 손이 크리스티나를 받아냈지만, 유진의 몸이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기껏 받쳤던 팔이 뚝, 끊어졌다.
“팔!”
세냐가 비명을 질렀다. 끊어진 팔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유진은 흐릿한 눈으로 팔을 보았다.
“……팔이 잘린 것이 얼마 만인지.”
유진은 툴툴 웃으며 중얼거렸다.
“잘…… 챙겨놔. 나중에 붙이게.”
“야, 야! 너…… 괘, 괜찮아? 괜찮은 것 맞아?”
“안 괜찮은데…… 살아 있기는 해.”
피를 한 번 쏟아내고, 유진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ㅡ죽을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악몽을 베고 사슬을 불태웠다. 성역과 기적이 없었다면 방금 정말로 죽었을 거다.
“…….”
죽을 뻔했고, 죽지 않은 것은 피차 마찬가지. 유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시커먼 밤하늘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그 어딘가에 있을 누아르를 느꼈다.
“곧이군.”
유진은 툴툴 웃으며 뜯어진 왼팔의 상처를 붙들었다.
빌어먹을 환생 566화
“넌…… 넌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자키아 때 이후로 유진이 이만큼 심하게 다친 것은 처음 본다. 300년 전에야 저것보다 심하게 다친 적이 있지만, 그때야 다들 약하고 미숙하던 시절 아닌가.
세냐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유진에게 다가갔다.
“살아 있어.”
유진은 하늘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유진이 죽지 않은 것처럼 누아르 제벨라도 죽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저 밤하늘의 어딘가에서 유진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몰라? 나도 알아. 그…… 갈X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하지만 네가 더 이상 싸울 필요는 없잖아……!”
세냐는 로브를 움켜쥐며 내뱉었다.
처참한 모습. 잘린 팔뿐만 아니라 내상도 심각해 보인다. 신성을 획득하고서 어지간한 상처는 스스로 재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 유진에게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신성을 폭주시킨 대가. 방금 이그니션의 반동이다.
“너는…… 그냥, 얌전히 여기 앉아 있어. 네 잘린 팔을 가지고서 말이야. 조금, 조금만 있으면 크리스티나건 아니스건 정신을 차릴 거야. 그래, 일단 엘릭서를…….”
“세냐.”
“설마 내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지? 나도 부상을 입긴 했지만, 너와 비교하면 긁힌 상처도 안 돼. 그리고 너만큼 갈X도 부상이 심하잖아! 그러니까…….”
“세냐.”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냥, 그냥 닥치고 쉬고 있으라고. 지금의 누아르 제벨라라면 내가 죽일 수 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세냐는 벌렸던 입술을 꾹 닫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설마,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말을 받아준 것일까. 유진은 더 이상 세냐를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시선은 입술을 열어 전한 말 따위보다 몇 배는 무거웠다.
“……전투는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잖아. 서로 살아 있기는 하지만, 너한테는…… 내가 있어. 내가, 마무리할 수 있다고.”
“안 돼.”
“…….”
“이건 나와 누아르 제벨라의 문제야. 나나 누아르, 둘만이 끝을 맺어야 해. 너는, 안 돼.”
“하……! 내가, 내가 너희 둘의 감상에 어울려주어야 할 이유가 있어? 당장 너는 몸조차 가눌 수 없잖아……! 그런 네가 굳이 싸우겠다는 것을 내가 받아들…….”
“만약 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다면, 나는 평생 널 증오할 거다.”
그런 말을 하면서,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네가 울고불고 매달려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가 죽어버린다면 증오고 뭐고 없잖아.”
“안 죽어.”
이럴 때의 유진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세냐는 어떻게든 유진을 설득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잘 알았어. 저 갈X를 직접 죽이는 것이 네게 그만큼 중요한 것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죽이려고? 지금 너는 싸움은커녕 몸도 움직일 수 없…….”
“싸울 수 있게 만들면 돼.”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세냐는 순간 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유진이 하려는 짓을 눈치 챈 세냐가 기겁을 하며 손을 뻗었다.
“이 미친 새끼!”
마법에 붙들리기 전에 유진의 손가락이 심장을 어루만졌다. ㅡ두근! 희미했던 고동에 묵직한 힘이 실렸다. 꺼져가던 불꽃이 되살아났다.
“야!”
여태까지 유진이 이그니션을 연속으로 사용한 것은 라이자키아 때뿐이다. 그때 유진은 단독으로 라이자키아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직전에 힘이 다해 쓰러졌다.
두 번 연속한 폭주는 심장과 코어를 완전히 망가트려서, 그때 유진은 정말로 죽을 뻔했다. 세계수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그때랑 달라.”
유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의 이그니션은 신성을 폭주시킨 것. 지금의 이그니션은 순수하게 마나를 폭주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라이자키아 때처럼 반동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론만 그럴 뿐. 신성을 폭주시킨 반동은 신력의 봉인. 몸에는 별 부담이 없다. 하지만 지금,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 이그니션의 반동을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았다. 누아르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겠지만, 마나를 폭주시키지 않고서는 승산은 없다.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망토에서 엘릭서를 꺼내 입에 들이붓는 것으로 응급처치를 끝냈다.
“이…… 이…….”
세냐는 할 말을 잃고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유진은 그런 세냐에게 씩 웃어준 뒤,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너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세냐는 밤하늘로 날아가는 유진에게 빽 고함을 질렀다.
“아.”
일렁이는 밤하늘에서 누아르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내 품에 안겨서, 같이 죽는 것도……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었다. 아주, 가까웠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누아르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쿡쿡 웃었다.
사실 하멜의 대응도 훌륭했다. 집중된 마력이 폭발을 일으키려던 순간. 하멜은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결말이, 당신에게는 아름답지 않았나 봐.”
붙드는 힘이 부족했나?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망설여 버렸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방금의 자폭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냥,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열정적이지 못했던 걸까? 최후에 망설여 버렸나?
어느 쪽이든 좋았다. 붙드는 힘이 부족했든가, 아니면 망설여 버렸든가. 모두가 이 순간을 달콤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누아르는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손을 입술 위에 얹었다.
쿨럭.
살며시 다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뜻대로 되지 않은 자폭은 누아르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다. 그녀는 위신의 마안을 잃었다. 상당량의 마력도 방금의 자폭으로 증발해 버렸다. 몸의 부상도 상당하다. 가슴은 베이고, 뚫렸다. 심장 근처가 쓰라리고 아팠다. 너덜거리는 날개는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다.
그렇지만 누아르는 아직 살아 있다. 살아서, 하늘을 날고 있다.
“같은 꿈을 꿀 수 있었는데.”
누아르는 피투성이의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저 아래에서 비틀거리며 선 하멜이 보였다.
상태가 처참한 것은 하멜도 마찬가지였다. 하멜은 왼팔이 잘렸다. 이그니션도 끝났다. 프로미넌스도 힘이 다했다. 성녀들과의 공명도 끝났다. 그 끝없던 신력도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둘 중 누구도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서로가 직감하고 있다. 이제 곧 끝이 온다. 꿈이, 밤이, 끝난다.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아래를 보았다.
-불꽃이 보였다. 하멜이 오고 있다. 저 불꽃은 아까와는 다르다. 신력이나 신성, 그런 것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격렬히 타오르고 있다. 누아르는 유진이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신력을 쓸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이그니션을 한 번 더 쓴 것이다.
“나를 위해 그렇게나!”
신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저 불꽃이 사랑스러웠다. 죽음을 향해 질주하며 제 몸을 파괴하는 저 모습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 목을 어루만졌다.
“하멜.”
피로 물든 붉은 입술로 애틋이 이름을 불렀다.
“나의 하멜.”
신력이 깃들지 않은 저 모습에서 짙게 하멜을 느낀다. 전생 따위는 조금도 끼어들지 않는- 그래, 누아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누아르 제벨라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 사랑할 수밖에 없던 남자.
“아하…….”
누아르는 달콤한 한숨을 내쉬며 제 몸을 보았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가슴은 베이고 구멍이 났고, 몸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다. 예쁘게 차려입었던 옷도 지금은 누더기와 다름없게 보인다. 누아르는 자그마한 손거울을 만들어 얼굴을 비춰보았다.
“못났어.”
충분히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누아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터져서 텅 비어버린 왼쪽 눈도. 피범벅인 얼굴도. 터져버린 입술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얼굴로, 이런 모습으로는 안 된다.
하멜은-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세냐 메르데인이 외친 대로, 마무리는 그녀에게 맡겨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쪽이 이성적으로 옳다. 지금의 누아르는 세냐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도, 하멜이 직접 와주었다. 싸울 수 없는 몸으로 굳이 이그니션을 한 번 더 쓰면서. 제 손으로 직접, 모든 것을 마무리하기 위해 와주었다. 그렇다면 누아르도 최선을 다해 하멜을 맞이해 주어야 한다.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마력을 일으켰다.
재생된 눈동자가 왼쪽을 채웠다. 얼굴의 상처가 사라지고 엷은 화장이 덧칠됐다. 가슴의 상처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다른 상처들은 재생했다.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진 옷도 새로이 바꾸었다. 그렇게 누아르는 마지막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다. 누아르는 거울을 이리저리 돌려 자신의 모습을 살핀 뒤에, 만족스레 웃으며 거울을 놓았다.
“하멜.”
오픈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헬무드, 아니, 대륙 제일의 테마파크. 존재하는 모든 유흥을 즐길 수 있는 환락의 도시. 누아르 제벨라 그녀가 자신의 꿈과 이상을 모조리 담아낸 도시, 제벨라 시티.
폐허에 거울이 떨어졌다.
화악…….
저 아래. 아직 그나마 형상을 유지하는 놀이공원에 불빛이 들어왔다. 회전목마가 삐걱거리며 움직이고, 관람차도 빛을 깜빡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누아르는 그것을 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도시에서 당신과 하고 싶은 것이 많았어요.”
유진은 아직 가슴에 얹고 있던 손을 들었다. 치직. 레반테인이 유진의 손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냈다. 신력이 봉인된 지금의 레반테인은 신검도 뭣도 아니다.
-그럴지라도, 검으로 사용할 수는 있는데. 유진은 레반테인을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대신에 다른 검을 꺼냈다.
평범한, 투박한 검. 아무런 전설도 신비도 없는 검. 화륵. 백염식의 불꽃이 검을 덮었다.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고, 술집에서 술을 먹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수영장에서, 동물원에서, 놀이공원에서.”
불꽃에 휘감긴 칼날이 누아르에게 향했다. ㅡ후욱. 일렁거리던 불꽃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조작한 검강이 불꽃을 한 번 더 감쌌다.
“하고 싶었던 것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정도야. 응, 하지만 괜찮아요.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 하고 있으니까.”
신력은 쓸 수 없다. 필요 없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의 누아르에게, 신력은 필요 없다. 아가로트의 힘도, 신검도, 필요 없다. 손에 무엇을 쥐건 지금의 누아르에게는 닿는다.
닿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아하하.”
누아르는 자신을 겨누는 검을 보았다. 몇 번이나 중첩되었으면서도 차분히 가라앉은 불꽃을 보았다. 그 너머에서 안광을 발하는 금색 눈동자를 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살의로 벼려낸, ‘하멜’이라는 검을 보았다.
“당신도 참 낭만적이야.”
하멜이 왜 레반테인이 아닌 투박하고 평범한 검을 쥐었는지. 굳이 묻고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저 선명하고 아름다운 살의야말로 하멜의 대답이자, 누아르가 간절히 바라며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리고 로맨틱해.”
속삭임의 끝에서 누아르는 앞으로 나아갔다. 반지를 낀 왼손 대신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사랑만큼이나 무거운 살의를 뽑았다. 지금 누아르가 다룰 수 있는 모든 마력이 살의를 따라 움직였다.
하멜.
누아르는 입술을 달싹이며 이름을 속삭였다. 침대에 함께 누운 연인에게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로.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살의가 충천하는 공격과 함께.
베었다.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투박한 철검에 덧씌운 공검의 불꽃은 차분히 가라앉았으나, 살의에 맞서는 칼부림은 살기등등했다. 몸의 삐걱거림, 심장의 부하, 그런 것은 조금도 칼을 주저하게 만들지 않았다.
누아르가 웃었다. 오늘 밤 몇 번이나 들었던 낭랑한 웃음소리가 칼부림의 파공음과 함께 어울렸다. 그 또한 베었다. 몇 번이고 베었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밤을 베었다. 달콤하고 애틋하던 악몽을 베었다.
누아르가 손을 휘둘렀다. 갈기갈기 찢긴 밤이 손톱이 되었다. 전면에서 찢어오는 참격을 흘려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결코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살의의 한가운데에 들어왔다. 미련, 후회, 절망, 허나 검을 무겁게 하지는 않았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하멜 다이너스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마력과 불꽃이 얽혔다. 터지고 흩어졌다. 다시 일으켰다. 몇 번이나 터지고 가로막혔지만 살의는 무뎌지지 않는다.
‘우리는.’
흩어진 마력이 다시금 칼날이 되어 스쳤다. 무시했다. 하나하나 쳐내기도 아깝고, 그럴 여유도 없다. 무리해서 이그니션을 쓴 것이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마나를 불꽃으로 바꾼다. 그 불꽃을 모조리 검에 담는다. 오직, 앞만을 보았다. 누아르 제벨라만을 보았다. 그녀에게 도달하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야.’
전생부터의 인연. 아가로트와 아리아.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그가 하멜이고 그녀가 누아르인 이상, 둘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무뎌지지 마라. 무거워지지 마라. 미련을 갖지 마라. 망설이지 마라. 필연적으로 맞닥트리게 될 모든 감정은 지금 이 순간에 중요치 않다. 그렇기에 유진의 살의는 순수했다. 순수하게 누아르에게 다가갔다.
안다.
느낄 수 있다.
지금 하멜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 저 살의가 얼마나 순수하고 올곧은지. 그러니 웃음이 나왔다.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멜을 사랑하기에 그와 영원한 꿈을 꾸고 싶다. 하멜을 사랑하기에 그를 이 손으로 죽이고 싶다. 하멜을 사랑하기에 그의 손에 직접 죽고 싶다. 죽음을 실감했다. 하멜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은 누아르가 살아온 평생에서 가장 달콤한 꿈이다.
서로가 가깝다.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서고 싶지도 않다. 뻗으면, 닿는다.
서로의 시선이 닿았다. 서로가 치명적인 죽음의 완성을 떠올렸다. 누아르가 손을 뻗었다. 유진이 검을 찔렀다.
‘나야.’
ㅡ콰직!
누아르의 손이 불꽃을 흩트리고, 검을 부수었다. 산산이 조각난 검이 밤하늘에 흩어졌다. 그것을 확인한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유진의 검은 누아르를 꿰뚫지 못했다. 다가와서 닿았으나, 누아르에게 죽음을 주지는 못했다.
‘내가 당신을 죽이는 거야.’
간절히 바라던 끝에 도달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아르는 많은 감정을 느꼈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일찍이 아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황혼의 마녀라고 불렸고, 전쟁신의 성녀로 불렸다.
그 사실을 깨닫고,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됨에 괴로워했다. 나 자신의 존재성을 혼동했다. 나의 것이 아닌 기억과 감정에 흔들렸다. 그래서 더더욱, 애증을 느꼈다. 사랑하는, 하멜, 그에 대한 감정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란 것이 괴로웠다. 전생이란 것이 증오스러웠다.
그렇지만 결국 하멜에 대한 사랑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오늘, 최선을 다해 하멜을 파괴했다. 영원한 꿈을 꾸기를 바랐다. 하멜과 함께 죽는 것을 바랐다.
모든 것을 지나서 도달한 끝. 맹독처럼 치명적이고 달콤한 마지막. 이 모든 것이 끝나서 찾아올 감정은- 그녀가 일찍이 상상했던 후회와 상실감, 비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지도 모른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누아르는 망가지고 말 것이다. 다시는 웃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는 꿈이란 것을 꿀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하멜이 없는 세상이라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황혼이 싫기에, 여명이 싫기에, 오늘 이 달콤한 밤은 영원한 악몽으로 막을 내린다.
“아핫.”
끝?
아니다. 끝나지 않았다.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흩어지는 검의 파편 앞에서 유진이 몸을 비틀었다. 활짝 열린 망토에서 칼자루가 튀어나왔다. 똑같다. 아무런 특색도 없는, 투박하고 평범한 검.
언제나 그랬다.
당신은 무기를 너무 험하게 다루었다. 전투 도중에 무기가 부서지는 것은 당신에게 있어서는 당황할 것도 없는 흔한 일이었다. 손에 쥔 검이 부서지면, 즉시 다른 검을 꺼내서 휘두르면 될 뿐이다.
하멜은 그런 남자였다.
‘만족해 버렸어.’
하멜을 죽일 수 있다는 것에.
지금, 이렇게 죽이는 것에.
‘당신은 아니었어.’
이 순간에도 하멜은 포기하지 않았다. 망설이지 않았다.
‘부족했어.’
하멜은 같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패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순간에 누아르는 하멜을 죽이고 난 다음을 그렸다. 파괴되어 홀로 남아버리는 것에 절망을 느껴버렸다.
하지만 하멜은 아니다.
그는 이 순간에도 누아르를 보고 있다. 흔들림 없는 순수한 살의는 후회와 미련에 망설이지 않았다. 검이 다가온다. 갈망이 불꽃을 새로이 점화했다.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렇게나 나를 죽이고 싶군요.”
서로의 몸이 겹쳐졌다.
검이 심장을 꿰뚫었다.
빌어먹을 환생 567화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정말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달도 별도 뜨지 않은 새카만 밤하늘. 요란하던 음악은 진즉에 멈췄고, 제벨라 페이스도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회전목마도, 관람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요한 밤의 중심에 유진과 누아르가 겹쳐 있다. 유진은 떨리는 눈으로 누아르를 보았다. 그녀는 피가 철철 흐르는 입술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활짝 열린 가슴을 보았다. 베고, 찔렀던 상처에 검이 꽂혀 있다.
이번에는 얕지 않다. 비껴 꽂지도 않았다. 투박한 검은 정확하게 누아르의 심장을 꿰뚫었다.
목걸이를 보았다. 상처에서 뿜어진 피로 목걸이가 붉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눈을, 옆으로 돌리고 싶었다.
누아르의 손이 움직였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유진에게 다가왔다. 아직 누아르에게는 여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만큼 몰아붙이고 심장을 꿰뚫었지만, 그녀는 몽마의 여왕.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아직 낯설고 먼 것일지도 모른다.
“……아하하.”
피범벅의 왼손이 유진의 얼굴에 닿았다. 붉은 피가 유진의 뺨에 얼룩을 그렸다.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천천히 내려온 손이, 유진의 목을 어루만졌다.
“……하하…….”
그만두었다. 누아르는, 유진의 목을 붙들지 않았다. 손톱을 세워 목덜미에 꽂아 넣거나, 찢어버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깨지기 쉬운 공예품을 다루듯이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로 유진의 목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마다 유진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았다. 뺨이 경련하는 것을 보았다. 입술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하멜.”
피로 붉게 물든 입술이 열렸다. 누아르는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서 속삭였다.
“이 멋진 순간에, 왜 당신은 그런 표정인 거예요?”
저 표정을 앞에 두니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더듬거리며 나아간 손이, 칼자루를 쥔 손등에 올라갔다.
“당신답지 않게 마무리가 어설프잖아요.”
흩어지는 힘은 유진을 공격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았다. 누아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손을 당겼다.
-콰드득! 검이 더욱 깊이 찔렸다. 유진과 누아르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열린 입술에서는 울컥 피가 흘렀고, 유진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아.”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 하멜답지 않은 얼굴. 그래도 상관없다. 누아르는 황홀한 만족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더 이상 하늘을 날 수도, 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축 늘어진 누아르의 몸이 추락을 시작했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될 텐데. 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양팔이 있다면 검을 쥐고서도 누아르의 등을 받칠 수 있겠지만, 지금 유진에게는 오른팔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검을 놓았다. 손등에 얹어진 누아르의 손을 쥐고, 품 안으로 당겼다. ㅡ화악! 형태를 바꾼 망토가 둘의 몸을 하나로 감쌌다.
차갑게 식어가는 몸으로 포근한 온기를 느꼈다. 거머쥔 손의 떨림을 느꼈다. 손과 손이 떨어졌다. 깊이 다가온 손이 누아르의 허리를 받쳤다.
천천히.
천천히 추락했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아르는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유진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지금이 좋았다. 정말로,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느긋하던 추락에도 결국에는 지상에 도달해 버린다. 유진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는 잠시 누아르를 안고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누아르를 땅에 눕혔다.
“……아하하.”
검에 심장이 뚫렸다. 긴 칼날은 몸을 관통하고서 등 뒤로 삐죽 나와 있다. 그럴 텐데, 등이 땅에 닿았음에도 검이 밀려나거나 걸리면서 따를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은 보기와는 달리 섬세하고 상냥해요.”
등을 받치는 순간에 칼자루를 미리 부러트린 것이다. 땅에 누웠을 때 더한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더 반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요?”
“……어.”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하려고 했다면 그럴 수 있었어. 나와 함께 자폭하던 때도. 내가 네 심장에 검을 박아넣을 때도.”
“아하하…… 그건, 달라요, 하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폭은…… 후후, 당신의 집념이 내 생각보다 강해서.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거야. 마지막도-”
누아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똑같았죠. 나는 그 순간에 만족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만족하지 않았죠. 하멜, 당신은…… 최후까지 나를 죽이기를 바랐어. 그것뿐이에요. 당신의 갈망이 나보다 강했던 거야. 당신이, 나를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던 거야.”
“…….”
“아하하. 결국 그런 거죠. 나는…… 최후에 망설였어요. 미련을 가졌죠. 그 순간에만 만족해 버렸어요. 흐흥, 결국…… 내가 말했던 대로 됐네요. 안 그래요?”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눈을 떴다.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아까와 달라지지 않았다. 악몽과도 달라지지 않았다. 유진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다. 억지로 감정을 붙잡고 있다. 그토록 바라던 승리를 얻었음에도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좋고, 기뻤다.
“……멋진 밤이야.”
밤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시커멓던 밤하늘의 색이 엷어졌다.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의 색을 점점 바꿔 간다. 황혼이 지나고, 밤마저 지나서, 이제는 여명이 오고 있다.
“하멜.”
누아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영원하기를 바랐던 꿈에서도 깨어났고,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밤도 끝이 나요.”
밤이 물러가고 있다. 유진도 느꼈다. 동시에 누아르의 끝도 다가오고 있다.
유진은 욱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 통증이 연달아 펼친 이그니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감정에 의한 것인지. 유진은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밤,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보았어요.”
손을 뻗었다.
“하멜, 나는 당신의 밑바닥을 핥았어요.”
떨리는 손이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왔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좀처럼 손이 닿지 않았다. 그에게 향하는 모든 과정이 멀게 느껴졌다.
누아르는 죽음을 느꼈다. 평생토록,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녀가 직접 죽음을 내린 적도 많았고, 죽어가는 이를 바라보았던 적도 많았다. 시한부의 인간에게 마지막 꿈을 보여주는 것은 누아르의 취미 중 하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아르는 죽음을 실감한 적이 없다. 바라는 모든 환상을 만들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죽음만큼 만들 수 없었다. 실감한 적이 없어서. 상상도 되지 않아서.
하지만 지금은 상상할 수 있다. 실감하고 있다. 누아르가 오늘 그토록 바랐던 영원한 밤이. 절대 밝혀지지 않을 어둠이.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칙칙하고 차가운 적막이 오고 있다.
“나는.”
죽음을 앞에 두었음에도 누아르는 진심으로 웃었다.
“오늘 밤, 당신을 품었어요.”
쿨럭. 치솟은 피가 잠시 말문을 막았다. 누아르는 몇 번 피를 토했다. 그럴 때마다 몸이 굳고, 식어갔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런데도 누아르는 미소를 흩트리지 않았다. 피를 토해내고, 다시 목소리를 냈다.
“누구보다 짙고, 깊게, 품었어.”
세냐 메르데인도, 아니스 슬리우드도,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도 알지 못하는 유진을 보았다. 그녀들이 절대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렸다. 전력을 다해,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 죽일 뻔했고, 망설였고, 결국은 죽게 되었다.
“아…….”
닿지 않을 것만 같던 손이 닿았다. 유진이 직접 누아르의 손을 잡아주었다.
누아르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실감하던 죽음을 다시금 이해했다. 이것은 결코 칙칙하고 차갑지 않다. 밤처럼 어둡지도 않다.
누아르는 눈을 깜빡이며 유진을 보았다. 꽉 다물고서 일그러진 입술을. 경련하는 뺨을. 울 것 같으면서도 결코 눈물은 흘리지 않는 눈을. 흔들리는 금색 눈동자를. 멀리서 다가오는 빛에 반짝이는 잿빛 머리카락을.
유진이 등진 여명을 보았다.
“따뜻해.”
누아르는 쿡쿡 웃었다.
“만약, 내가 언젠가 당신처럼 환생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
“당신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글쎄.”
“흐흥, 있을 법한 일이라고는 생각하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누아르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말하지 않을래.”
있을지도 모르는 먼 미래를 떠드는 것보다, 지금이 더욱 소중했다.
“하멜.”
“…….”
“나를 사랑하나요?”
속삭이는 말에 유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몇 번 호흡을 고른 뒤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혼동하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유진은 누아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랑할 수가 없다. 그녀가 ‘누아르 제벨라’인 이상, 절대로 그런 감정은 가질 수 없다.
“얄미운 사람. 마지막만큼은 거짓말을 해줘도 좋잖아.”
돌아온 대답에 실망하지 않았다.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유진의 손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하멜, 당신은 망설였죠.”
힘없는 손이지만 살짝 당겨보았다. 그릇 하나 끌어당기지 못할 힘이지만, 바람을 전하기에는 충분했다. 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누아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주었다.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할 뻔은 했잖아. 그렇죠?”
부정할 수 없었다. 누아르가 보여주었던 꿈.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전투. 아니, 그전부터. 누아르가 아리아의 환생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매몰차게 무시하려던 것들에 애원이 더해지면서 감정에 동요가 만들어졌다.
“그러면 됐어요.”
누아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멜이 느꼈던 동요는 순수하지 않다. 누아르만을 보고서 태어난 감정이 아니다. ㅡ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결국 전부 다, 나에 대한 것이니까.”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폐허를 등지고서 다가오는 세냐 메르데인이 보였다.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성녀가 세냐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누아르는 흙먼지투성이인 세냐의 얼굴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심술궂게도 누아르는, 지금 이 상황에서 우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차 머지않았군요.”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
몸의 떨림.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죽음에 근접한 폭주의 대가가 유진에게도 찾아오고 있다. 하지만, 죽을 만큼의 고통을 느낄지언정 유진은 죽지 않을 것이다.
누아르는 다르다. 그녀는 곧 죽는다. 여명이 밝히는 밤처럼 희미해져 사라질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당신이 쓰러져버리면 곤란해. 그러니까.”
간신히 들어 올린 손이 유진의 뺨에 닿았다. 누아르는 죽어가는 몸이 그렇게 움직여준 것에 만족하며 속삭였다.
“유언을 말해도 될까요?”
“…….”
“세냐 메르데인. 당신도 이리 와요. 가까이 와서, 나와 하멜을 보도록 해요.”
죽음이 머지않은 이 순간마저도 장난스레 말하나. 저 지독한 광기와 애정은 세냐를 질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냐는 거절하지 않고, 성녀를 부축한 채로 누아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밤 당신은 나를 꽤 놀라게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요. 결국 당신도, 아니스 슬리우드도,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도, 내 자비로 살아 있는 거니까.”
“……우리에 대한 비웃음이 네 유언이야?”
“맞아요. 나는 이제 죽어버리니까, 유언으로 비웃음 정도는 남겨도 괜찮지 않아요?”
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어버렸다. 그 모습에 누아르가 풋 웃어버렸다.
“그래도 놀란 것은 정말이에요. 나는 여태까지 당신을 좋아했던 적이 없지만, 세냐 메르데인, 오늘의 당신은 꽤 좋았어요. 살의가 꽤 매력적이었거든.”
“……무슨 말을…….”
“하지만 부족해. 그 정도의 살의와 마법으로는 나를 죽일 수 없어. 유폐의 마왕은 더더욱 죽일 수 없어.”
결국 비웃음과 조롱인가. 세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세냐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누아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환상의 마안을 주죠.”
“……뭐?”
“그 잘난 ‘현명한’ 세냐 메르데인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난해한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굳이 한 번 더 말해주기를 바란다면, 말해주죠. 내 환상의 마안을 주겠다구요. 환상의 마안과 함께 내 마력도 주죠.”
그 말에 세냐의 시선은 누아르의 왼쪽 눈에 향할 수밖에 없었다. 위신의 마안은 과용으로 터져 버렸다. 하지만 환상의 마안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건 유폐의 마왕에게 받은 것도 아니니, 내가 넘겨준다면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시엘 라이언하트의 경우처럼 마력을 갖지 않은 인간이 쓸 수 있게끔 요령 있게 넘겨줄 수는 없지만,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쓸 수 있겠죠.”
“…….”
“아, 그래도, 신경 써서 조언해 준다면…… 통째로 당신 눈에 박아넣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요. 어디까지나 당신의 그 잘난 마법으로 사용해 보란 말이에요.”
“왜?”
세냐는 더듬거리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 누아르 제벨라가 저런 유언을 남기는가?
“하멜이 죽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누아르가 웃으며 말했다.
“내 손으로 죽이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잖아요. 그렇다면 유폐의 마왕도. 멸망의 마왕도 하멜을 죽일 수 없어야 해요. 연약한 당신이 하멜의 뒤에 선다면 그 자체가 하멜의 방해일 거예요. 그러니까.”
누아르는 말을 잇지 못하는 세냐를 비웃으며 속삭였다.
“부디, 잘, 사용해서. 하멜이 죽지 않게 해줘요. 당신의 꿈과 아니스 슬리우드,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의 꿈은- 솔직히 내 알 바도 아니고, 절대로 이뤄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잠깐의 침묵. 가쁜 호흡. 그 뒤에 누아르는 비웃음이 아닌 다른 미소를 지었다.
“하멜의 꿈은,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미친년.
세냐는 그 말을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차라리 비웃음과 조롱을 남겼다면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을 텐데. 저런 말을 해버리며, 만족했다는 듯이 유진을 바라보는 모습은 세냐로 하여금 쓰라린 패배감을 느끼게 했다.
“자, 그럼, 하멜.”
누아르는 시선을 돌려 유진을 보았다. 세냐와의 대화 중에도 유진은 말없이 누아르를 보고 있었다. 누아르는 경직된 뺨을 어루만지며 키득거렸다.
“나의 마지막 소원, 들어줄래요?”
“……목이라도 부러트려 주기를 원하냐.”
“아하하. 그건 아리아의 소원이잖아요. 마지막에…… 당신의 손길을 느끼며 죽는 것도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지는 않을래요.”
“…….”
“평생 나를 기억해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유진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누아르 제벨라는 반드시 죽여야 할 상대였다. 그래서 죽였다.
그토록 염원하던 이 순간이 왜 조금도 기쁘고 즐겁지 않은 걸까.
“……아하하. 이건 말할 것도 없지.”
마치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누아르가 속삭였다.
“당신은 평생 나를 기억할 수밖에 없어.”
그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순간 유진은, 아리아를 아닌 누아르 제벨라를 떠올렸다.
유진 라이언하트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스칼리아 공주의 몸으로 설원에서 맞닥트렸을 때. 용마성에 들어가기 전의 호텔에서 그녀가 찾아왔을 때. 추락한 용마성의 잔해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하멜’이라고 불렀을 때. 남해에서, 시무인의 무도회에서, 그리고.
이곳, 제벨라 시티에서.
그녀가 공들인 도시. 자기애가 넘치는 도시. 찾아온 인간들에게 꿈과 환상을 보여주는 대륙 최고의 관광지. 죄책감, 상실감, 후회, 그러한 종류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서 인간을 상대하던 도시.
그날 누아르와 술잔을 나누던 밤을 기억했다. 적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었던 밤을.
만약 그때 누아르가 다른 대답을 했더라면.
설령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더라도, 유진이 다른 답을 바랐더라면.
“가끔, 나에 대한 꿈을 꿀 거야.”
“…….”
“우리가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을 할 거야.”
우리는 언젠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랬나? 다른 결말은 없었던 걸까.
“ㅡ후회하게 될 거야.”
그 말대로다.
지금 유진은 후회를 느끼고 있다.
“하멜. 내가 이 도시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이 작은 목소리.
“당신과 나. 우리의 길고 긴 인연이 종지부를 찍는 그 순간에…… 나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지 않냐고 물었었죠. 그때 당신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없어.
“내가 소원이라고 말해도.”
-네 소원이 내 알 바는 아니지.
“언젠가 내가 당신을 죽일 때. 내 손에 반지를 끼우고. 죽어가는 당신의 손에 반지를 끼우는 거야. 그리고…… 당신이 죽은 뒤에, 약지의 반지를 보며 영원히 당신을 추억하는 거죠.”
“…….”
“만약 당신이 나를 죽인다면, 당신도 나처럼 그랬으면 좋겠어요. 응, 나는 그렇게 말했죠. 그러니까.”
잘그락.
피범벅의 목걸이가 흔들렸다.
“내 반지를, 받아줘요.”
“…….”
“약지가 아니어도 좋아.”
차갑게 식어가는 손과, 더는 뜨겁지 않은 피에 젖은 약지의 반지를 느꼈다.
“받아줘요, 하멜. 내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갖고서 살아줘요. 평생 나를 기억하고, 가끔 나에 대한 꿈을 꾸었을 때. 잠에서 깨어나, 나의 반지를 느끼면서. 오늘을 떠올리고, 후회해 줘요.”
“……지독하고 잔인한 소원이군.”
“맞아요, 지독하고 잔인한. 이건 저주예요. 이상하지는 않잖아요?”
뺨을 더듬던 손이 무거웠다. 아래로 미끄러진 손이 뺨을 지나서 유진의 어깨에 얹어졌다.
ㅡ욕심이 났다. 그래서 바랐다. 떨어질 것 같은 시선과 턱을 간신히 들어 유진을 보았다.
“나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니까.”
더듬는 손이 목을 잡았다. 애원하듯이 손을 당겼다. 떨쳐낼 수 있다. 그러지 않았다.
유언. 소원. 저주. 그 모든 것에 유진은 따라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누아르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서로의, 이마가 가까이 닿았다.
“아하하…….”
닿았던 이마가 살짝 떨어졌다. 붉은 입술이 열렸고, 다시 닫혔다. 직접 속삭일 것 없이 입술이 다가왔다.
짧은 입맞춤이 끝났다.
“……당신도 꽤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다니까.”
추억을 쌓았다.
설원에서, 호텔에서, 바다에서, 무도회에서, 도시에서, 술집에서, 거리에서, 사막에서, 결투장에서, 꿈에서, 폐허에서.
일찍이 말했듯, 누아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이 아무리 거절하고 모욕해도 웃으며 유진을 대했다. 그렇게 추억을 쌓았다. 바라지 않던 하멜의 가슴에, 무언가가 쌓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그 모든 것을 꽃피웠다. 상실감을 느꼈다. 후회, 미련, 슬픔, 모든 것이 누아르에게는 ‘처음’인 감정이었다.
“……나는 여명이 싫었어.”
흐릿한 눈동자가 움직였다. 더 이상 하늘은 어둡지 않았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에 빛이 깃들고 있다.
“밤이 끝나 버리니까.”
마지막으로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유진은 숨을 삼키며 누아르의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그렇지만.”
누아르는 배시시 웃었다.
“당신에 ‘좋은 아침’이라는 말은 하고 싶었어.”
스며드는 여명이 둘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하멜.”
밤이 끝났다.
누아르의 눈이 감겼다.
빌어먹을 환생 568화
감긴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유진은 조용히 누아르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잠이라도 든 것만 같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고통의 기색은 전혀 없고, 미련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온하고 행복하게, 자기 혼자 만족해 버린. 그런 얼굴이었다.
누아르 제벨라는 죽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멀리서 떠오른 태양은 어느새 이쪽의 하늘에도 걸려 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온 것이다. 어스름한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도시를 밝혔다. 이전의 화려한 모습은 거의 남지 않은 폐허. 건물은 대부분 무너졌다.
유진은 우뚝 멎은 관람차를 잠시 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끝났군.”
누아르 제벨라는 죽었다.
다시금 그것을 실감했다. 잘린 팔에서 새삼 통증이 올라왔고, 가슴도 찢어지거나 터질 것처럼 뻐근했다. 전신이 파르르 떨리면서 소름까지 돋았고, 정신이 어지러우면서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건 기절이구만.”
유진은 툴툴 웃으며 내뱉었다. 단순히만 생각해도 이그니션을 2번 연달아 썼다.
사실 이그니션을 제하고도 멀쩡할 수가 없다. 악몽에서 그토록 정신공격을 받았고, 현실에서도 사선을 넘나들며 격하게 싸웠다. 잘린 왼팔 외에도 외상이 한둘이 아니고 내장은 너덜거린다. 골백번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서 억지로 살아 있으니, 골골대는 수준을 훨씬 넘은 반동이 올 것이다.
“세냐.”
유진은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피범벅의 손아귀에는 목걸이가 쥐어져 있다. 누아르의 왼손을, 약지의 반지를 보았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뻗었다.
“괜찮냐.”
주저앉아 있던 세냐는 그 질문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곧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뭐가 괜찮냐는 거야?”
“그냥, 전부. 네 몸이나…….”
“방금의 대화, 네가 느끼는 감정, 그런 것은 솔직히 안 괜찮아.”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명이 만든 유진과 누아르의 그림자를 보았다. 무너진 폐허의 한복판, 가까이 앉은 둘의 그림자는 겹쳐져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할게.”
“안 괜찮다며.”
“사실은 안 괜찮지만 괜찮다고 말하겠다는 거야. 널……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저 갈…….”
평소처럼 ‘갈X’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유진이 그 단어에 반응할 것을 의식한 것은 아니다. 애당초 유진이 반응할 것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누아르의 마지막…… 비웃음과, 유언이, 세냐로 하여금 ‘갈X’라는 멸칭을 내뱉지 못하게 만들었다.
“……누아르 제벨라가, 너를…… 죽이려고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죽으면서, 널 위한 것은 사실이니까.”
“위했다라.”
유진은 툴툴 웃으며 누아르에게 손을 뻗었다.
ㅡ파스스. 그녀의 몸도 조금씩 재가 되어 무너지고 있다. 곧장 재가 되지 않는 것은…… 마무리로 신검을 쓰지 않아서인가.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은 늦고 빠르고의 차이다. 아침이 지나기 전에, 그녀는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유진은 아마 그 광경을 보지 못하리라.
“누아르가 내가 앞으로 죽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날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저주를 남긴 거야. 내가 평생 오늘을 떠올리고, 괴로워 할 것을 바라면서.”
유진은 조심스레 누아르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천천히 약지의 반지를 빼냈다.
세냐는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만약, 유진이, 지금의 감성을 무시하지 못하고 약지에 반지를 끼운다면.
그래도…… 상관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런 행위로 유진의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말이다.
“앞으로 오늘을 괴롭게 여길 거란 말이네.”
“아마 그럴 것 같아.”
“후회해? 누아르 제벨라를 죽인 것.”
“후회는 하지 않아. 죽여야 했고, 누아르 본인도 죽음을 바랐다. 그래서 죽인 것뿐이야. 내가 안 죽였다면 누아르가 나를 죽였겠지.”
세냐는 아직까지 저 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아르 제벨라를 용서할 수 있나? 그건, 솔직히 힘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라며 납득은 할 수 있다. 유진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끝내 이렇게 됐다.
“어쩔 수 없지.”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피차 바란 대로 되었어. 축배라도 들고 싶다만, 그럴 수는 없겠다.”
“……응.”
“나 곧 기절할 거야.”
“응…… 응?”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세냐가 화들짝 놀라서 유진을 보았다. 유진은 피범벅의 반지를 대충 닦고서 안쪽의 각인을 살피고 있었다.
하멜 다이너스, 누아르 제벨라의 이름이 각각 새겨진 한 쌍의 반지. 유진은 묵묵히 줄에 두 개의 반지를 엮고서, 목에 걸었다.
“……손가락에는 안 끼는 거야?”
“어.”
“왜?”
“네가 ‘왜’, 라고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 대단한 이유는 없어. 그냥, 누아르의 바람에 놀아나고 싶지 않은 거야.”
목걸이의 반지 한 쌍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투덜거렸다. 졸지에 두 개의 목걸이를 하게 돼서 어색하게 느껴졌다.
“야, 맞아. 내 왼팔? 왼팔 어딨어?”
“잘 챙겨놨으니 걱정하지 마. 그런데 이거, 정말 붙는 거 맞아?”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에서 큼직한 방울이 나타났다. 세냐는 방울 안에 둥둥 떠 있는, 왼팔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래 흙범벅에 피투성이였던 왼팔은, 지금은 절단면까지도 깔끔히 씻겨져 있었다.
“소독은 했는데, 안 붙으면 어떡해?”
“모론 다리 두 짝도 거꾸로 붙였다가 다시 잘라서 붙였는데, 팔 한 짝 안 붙겠냐. 그리고 내 팔 잘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 음…… 300년 전에 잘린 거랑 지금 잘린 거랑 경우가 좀 다르잖아. 당장 너 뺨에 흉터도 안 나았고. 외팔이가 되어버리면 곤란해. 유폐의 마왕을 팔 하나로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단 말이야.”
“이건 저주 개념의 흉터라서 그렇고. 왼팔은 괜찮아. 이건 저주로 잘린 것이 아니니까.”
누아르와의 전투. 누아르의 공격은 최후까지 그랬다. 살의는 있었으나 저주는 없었다. 그녀가 남긴 저주는, 마지막 유언뿐이다.
“……넌 어쩔 거냐? 환상의 마안. 가져갈 거야?”
“나 쓰라고 주겠다는데 안 받을 이유가 있어? 받을 거야. ……받아야지.”
꾸욱. 세냐는 로브 자락을 움켜쥐며 내뱉었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는 데 필요해.”
“누아르 제벨라의 함정이란 생각은 안 하는 거냐.”
“너도 안 하잖아.”
“하긴.”
유진은 큭큭 웃으며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제야 세냐는 아까의 대화를 깨닫고서 후다닥 유진의 곁에 다가왔다.
“너, 너! 곧 기절한다고 했지? 왜? 어, 어디 아파?”
“보면 모르냐?”
“보면……! 알…… 지. 그런데 기절까지 할 정도야?”
“어. 지금도 억지로 눈 뜨고 있는 거야. 슬슬 눈 뜨고 있기 힘들어. 졸리다.”
“졸리다니…… 괜…… 찮은 것 맞아? 눈 감으면 평생 못 일어나는 것 아냐?”
“불길한 소리 하지 말고, 내 부탁이나 들어주라.”
“부탁! 부탁이라니! 어떻게 불길한 소리를 안 해? 네가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유언이야? 아니지?”
“아니니까 걱정은 말고. 그냥 기절이야. 아마 며칠…… 넉넉히 일주일은 기절할 것 같은데. 나랑 크리스티나, 아니스 데리고, 라이언하트 저택에 돌아가 줘. 사정은 네가 설명하고.”
“야……!”
“너무 늦게 일어난다고 걱정해서 깨우려 들지 말고. 정 걱정되면 내 성기사들이랑 크리스티나, 아니스한테 기도나 하라고 해. 그거면 돼. 그리고.”
잘 움직이지 않아 흐느적거리는 손을 들어, 폐허를 가리켰다.
“이 도시. 지워주라.”
“…….”
“내가 하고 싶은데, 지금 그럴 만한 힘이 없어서 말이야. 부탁해.”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
도시를 지워달라는 것. 이 폐허에 더 이상 옛 도시의 모습 따위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럴지라도 이곳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세냐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체는?”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사라질 거야. 환상의 마안을 취하려면 다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할 거다.”
“무덤…… 이나, 묘비, 그런 것은?”
“미쳤냐. 필요 없어.”
유진은 질색하면서 세냐를 돌아보았다. 금색 눈동자는 이미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흐리멍덩했다. 세냐는 반쯤 내려온 눈꺼풀을 보며 풋 웃었다.
“알았어. ……푹 자.”
“잔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혹시 꿈이라도 꾸는 것은 아닐까. 무거운 눈꺼풀을 감으며 생각했다.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 * *
“그런가.”
판데모니엄의 바벨. 시커먼 어전의 사슬 옥좌. 유폐의 마왕은 감고 있던 눈과 입술을 함께 열었다.
“그녀도 가버렸나.”
누아르 제벨라가 죽었다.
그녀의 영지, 제벨라 시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 그것까지는 볼 수 없었다. 마경 헬무드, 아니, 대륙 어디건 유폐의 마왕이 관측할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다.
존재하지 않았다. 1년 전부터 유폐의 마왕은 제벨라 시티를 관측할 수 없었다. 누아르 제벨라가 만들고서 유지해 온 ‘꿈’은, 유폐의 마왕조차도 쉽사리 들여볼 수 없을 만큼 폐쇄적이었다.
심지어 그 꿈을 구축하는데 사용된 것이 위신의 마안인데도, 정작 그 마안을 하사한 유폐의 마왕은 간섭할 수가 없었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철저할 정도로 위신의 마안과 유폐의 마왕을 통제하며 견제했다. 마안을 통해 권능을 사용하되, 유폐의 마왕의 마력만큼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대의 죽음은 나조차도 상상이 힘들었는데.”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물론, 유폐의 마왕이 거부했다면 누아르라도 위신의 마안은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부하지 않았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가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무엄하게도 황제의, 마왕의 권능을 제멋대로 사용하게 해주었다. 윤허조차 청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헬무드의 최고 납세자라서? 공작이라서? 300년 전에 혁혁한 공을 세워서? 모두가 이유는 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유폐의 마왕이 거부하지 않은 이유는ㅡ 누아르 제벨라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에 걸친 숙원에 기어코 도전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결과에 도달했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그것이 조금은 부러웠다.
“밤을 덮은 것은 하멜을 위해서였나.”
관측할 수 없던 꿈. 결국에 무너졌음에도 도시의 마력은 최후까지 유폐의 마왕의 관측을 거부했다. 때문에 유폐의 마왕은 누아르 제벨라의 ‘꿈’이 무엇을 거쳐 결말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녀 정도의 존재가, 어떻게 죽을 수 있었는지를 모른다. 하멜이 어떻게 그녀에게 죽음을 주었는지를 모른다.
“아니면 그대만의 깊은 꿈을 위해서였나.”
답은 알 수 없다. 누아르 제벨라는 죽어버렸다. 누아르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하지 않았기에, 영혼이 속박되어 유폐의 마왕에게 흘러오지도 않았다. 어쩌면 영혼조차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유진의 신검은, 레반테인은 영혼마저 불태워 소멸시켜 버리니까.
“너는 누아르 제벨라와 제법 친분이 있었지.”
유폐의 마왕은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시커먼 어전에서 흐릿한 인영이 솟구쳤다.
“제벨라 공작은 제 몇 되지 않는 후원자였지요.”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폐의 삼마(三魔). 발자크 루드베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가 흑색마탑주로 있을 적에 매년 막대한 거금을 기부해주셨고, 제가 헬무드에서 유학하던 시절에도 여러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기억한다. 제벨라 공작은 네 이상을 즐겁게 여겼지.”
“비웃지는 않으셨습니다. 웃기는 하셨습니다만…… 조롱은 없으셨습니다. 폐하께서도 그러셨지요.”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하였나.”
유폐의 마왕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발자크를 내려보았다. 당연히 유폐의 마왕도 발자크의 이상은 알고 있다. 발자크 루드베스. 그와의 첫 만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처음 유폐의 마왕에게 발자크를 소개했던 것이 바로 누아르 제벨라였다.
청색마탑주 후보로 거론되던 신예. 그런데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청색마탑을 떠나 헬무드에 찾아와 흑마법사가 되려던 남자. 그 독특한 배경은 당시 헬무드의 여러 고위마족들의 관심을 샀다. 여러 마족이 발자크에게 계약을 권했지만, 정작 발자크는 흑마법사가 되기 위해 헬무드에 온 주제에 그 어느 마족과도 계약을 맺지 않았다.
하지만 마족과 계약을 맺지 않는 인간이 마력을 다루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발자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족과의 계약을 거부하면서도 오롯이 흑마법을 탐했다. 흑마법사 학회에 빈축을 사면서도 얼굴을 비추고, 온갖 논문과 마도서를 탐닉했다.
그런 괴짜 같은 면모가 누아르 제벨라의 관심을 샀다. 파격적인 계약을 이뤄졌다. 누아르는 발자크에게 영혼의 계약을 맺지 않고, 오직 마력만을 후원해 주었다. 그리고 몇 년 뒤, ‘흑마법사’가 된 발자크를 유폐의 마왕에게 소개했다.
“제벨라 공작의 죽음에 애도를 느끼나?”
“아니오.”
발자크는 고개를 저었다.
“제벨라 공작은 제게도 여러 번 말하곤 했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제가 흑색마탑주에 물러서고서 관계가 소원해지긴 했습니다만, 제벨라 공작이 얼마나 죽음을 바라였는지. 그리고 그분이 얼마나 하멜……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집착하였는지는, 저도 잘 압니다.”
발자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염원하던 죽음에 도달하였으며, 심지어 그 죽음을 집행한 상대가 유진 라이언하트라면. 제벨라 공작은 필시 만족하며 죽었을 겁니다. 그런 죽음에는 애도보다는 축복이 어울릴 겁니다.”
“너다운 대답이로군.”
유폐의 마왕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을, 숙원을, 비원을 이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그것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더더욱. 너는 어떤가.”
“제 비원 역시 그러합니다. 달성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하다 여기나.”
“최선은 다하고 있습니다. 필사적…… 으로.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군요.”
“원한다면 계약은 파해주마.”
그 말에 발자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것이 네 비원에 보다 가까울지도 모르지. 머지않아 이곳에 오를 자들을 네가 쓰러트린다면…… 후후, 가히 전설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테니.”
“짓궂은 말을 하십니다.”
발자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씀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제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세냐 메르데인을,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만.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반대라.”
“만약 제가 폐하와의 계약을 파할 수 있다면. 저는 한 명의, 그저 그런 마법사가 되어버릴 겁니다. 그런 제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존경하는 세냐 메르데인과 함게 나를 칠 수도 있겠지.”
“하하…… 폐하. 그래 버린다면, 제가 바라는 ‘이상’은 폐하의 패배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저는 폐하의 패배가 도저히 그려지지 않습니다.”
“마왕을 배신한 흑마법사. 그것은 꽤 전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배신한들 실패해 패배한다면 비웃음과 놀림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차라리, 제 이상을 폐하께 걸도록 하겠습니다.”
발자크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이곳에 침범하는 적들은 제 시체를 넘어야만 어전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도망쳐도 상관없다.”
“섬기는 주군을 버리고 어찌 도망치겠나이까.”
“네가 그토록 내게 충성적이지는 않을 텐데.”
“바람이 있으니 충성하겠나이다.”
“바람이라.”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숙인 발자크를 내려보며 피식 웃었다.
“무엇을 바라나.”
“제가 죽는다면, 부디 제 혼을 거두어 주십시오. 폐하와 함께 끝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소멸을 바라지 않는가.”
“어느 존재가 소멸을 바라겠습니까.”
“어려운 바람은 아니구나.”
어차피 영혼의 계약은 맺었다. 발자크가 죽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유폐의 마왕에게 돌아오게 된다.
예외는 혼까지 불태우는 신검. 하지만 이곳, 마왕성 바벨에 들어온 영혼은 모두가 유폐의 마왕의 것이다. 설령 신검이 발자크의 몸과 영혼을 재로 만들지라도, 바벨은 재마저 거두어낸다.
“윤허하마.”
유폐의 마왕이 눈을 감고서 대답했다.
“발자크 루드베스. 너는 바벨에서 죽도록 해라.”
“예.”
그 대답에 발자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이곳에서 죽겠나이다.”
빌어먹을 환생 569화
교황청
포근한 온기가 감도는 식탁. 평범한 빵, 그저 그런 맛의 수프, 두텁게 겹친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인 찌거나 구운 감자들.
“아.”
빵 위에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를 올리던 중에 깨달았다.
“이건 꿈이구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펑퍼짐한 일상복에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부엌에 서 있다.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직접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리는 것이다.
유진은 저런 번거로운 작업을 동반할 만큼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한적하고 여유로운 일상에서는, 저런 번거로운 작업조차도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
유진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의자를 뒤로 기울이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꿈이 얼마나 되었지? 꽤 오래되었다. 자각하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 꿈에서,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하고 평온한, 그런 삶을 살았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말이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덜컹. 의자가 쓰러졌다.
“설마 네가 보여준 것은 아니겠지?”
정답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물어보았다.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어느새 멈춰있다.
“하긴.”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부엌에 다가갔다. 등 돌린 여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유진은 머뭇거리지 않고 손을 뻗었다.
다른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각몽이 그러하듯, 유진의 바람에 꿈이 따라주었다. 여인이 몸을 돌려 유진을 보았다.
“꾸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흐릿한 미소를 지은 누아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누아르가 만들어낸 꿈이 아니다. 잔재가 되어버린 감정이 멋대로 꿈을 만들었다. 유진은 누아르와 마찬가지로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약지의 반지가 보였다. 웃는 얼굴로 우두커니 선 누아르의 약지에도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 이런, 꿈인 것이다.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뻗은 손을 움켜쥐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그렇게 작게 오그라들어서 완전히 사라졌다. 유진은 검게 변한 꿈의 중심에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꿈은 더 이상 검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빛들이 꿈을 환히 밝혔다. 유진은 그 모든 빛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을, 부르고 있다. 유진은 자신에게 이어진 모든 신앙과 목소리를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밝고 시끄러운데도 꿈을 꿔버렸나.”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빛을 향해 나아갔다.
“저주가 너무 잘 먹힌 모양이야.”
환한 빛이 유진을 삼켰다.
…….
“꺄아아아아악!”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눈 부신 빛을 보았는데, 정작 진짜로 눈을 뜨고 본 빛은 굉장히 흐리고 엷고 은은했다. 조금도 환하지 않은 엷은 주황빛. 마치 침대 옆에 두는 취침등의 불빛 같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굉장히, 굉장히, 시끄러웠다. 한 명이 아니다. 두 명이 꽥꽥 비명을 지르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꿈속이 순간이나마 그립고,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마치 전장 한복판에서 눈을 뜬 것만 같은 시끄러운 소리에 고막이 먹먹할 정도였다.
곧 유진은 깨달았다. 빛이 저토록 엷은데도 눈동자가 쓰리다. 각막에 빛을 일 점 사 한 것처럼 쓰리고 뜨겁다. 반사적으로 눈을 다시 감으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생각처럼 되지 않아 불편했다. 잠깐 눈을 뜬 것뿐인데 안구가 순식간에 말라버려서 눈꺼풀이 뻑뻑하다.
“아…….”
입술과 입안은 충분히 촉촉했지만, 내뱉는 목소리는 갈라지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몸의 감각도 영 더디다. 유진이 몇 번인가 목소리를 내고, 몸을 뒤척거리고, 마른 눈동자를 굴려대는 동안에도 옆에서는 시끄러운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야, 야.”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비명. 흐릿한 조명이지만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침대의 바로 옆, 서로 부둥켜안고서 꽥꽥 비명을 지르는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보였다. 비명만 지르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은 눈물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유진 님이 눈을 뜨셨어요!”
“은, 은자가 살아났느니라!”
슬프고 서러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기뻐서 우는 것인 모양이다. 일단 진정해, 그렇게 말하기 위해 입술을 연 순간- 두 꼬맹이가 동시에 유진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유진 님!”
“은자여!”
“커헉……!”
목소리를 내려던 순간에 정확히 메르의 머리가 명치에 처박혔다. 걱정과 애정에 따른 행동인지, 아니면 명확한 적의를 가지고서 들이박은 공격인지 파악이 힘들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타이밍이 정확하기도 했지만, 이만큼이나 아프고 무겁다고 여기는 것은- 몸의 감각 대부분이 어색하고 둔하기 때문이다. 팔도 아프다. 머리에 뿔을 달고 있는 라이미르아는 메르처럼 머리를 처박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유진의 팔을 끌어안고서 열심히 이마를 비벼대고 있다.
몸이 이토록 무겁고 아픈 이유는 알겠다.
“내가 며칠이나 잠들어 있던 거야?”
흐트러진 호흡을 간신히 붙잡고서 더듬더듬 물어보았다. 명치에 머리를 박고서 격렬하게 머리를 돌리던 메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며칠, 며칠이라구요? 지금 며칠이라고 물어보셨어요?”
“어…… 어어, 음, 며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꽤 오래 잠들어 있던 것 같…….”
“세 달이에요!”
메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세 달! 세 달이라구요! 일로만 따져도 거의 백 일을 자빠져 누워 계셨어요!”
“메, 메르여, 정확히 말하자면 은자는 구십삼 일 만에 눈을 떴느니라.”
“구십삼이나 백이나!”
“일주일이 차이가 나느니라. 그리고 본녀는 구십삼 일 만에 기적적으로 눈을 뜬 은자에게, 지금 같은 커다란 외침은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하느니라.”
“이 비열한 것! 이럴 때를 노리고 유진 님에게 아양을 떨지 말아요! 지금 유진 님은 혼쭐이 나야 한다구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서로의 머리채를 붙들고 다투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 다툼을 중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반쯤 벌리고서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세…… 세 달? 구십삼 일 동안 자고 있었다고?”
꿈을 오래 꿨다는 자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꿈속의 시간이란 현실과는 동떨어진 법. 설마 이토록 오래 잠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마 며칠…… 넉넉히 일주일은 기절할 것 같은데.
-너무 늦게 일어난다고 걱정해서 깨우려 들지 말고.
“왜 안 깨웠어?!”
유진은 쉰 목소리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제벨라 시티에서 기절하기 전, 세냐에게 분명히 저렇게 말한 기억이 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정도가 있는 법이다. 사람이 세 달이나 기절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워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깨우지 말라고 했어도, 이 정도로 오래 기절해 있으면 다른 수라도 써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깨웠습니다.”
다른 쪽에서 칙칙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유진조차도 흠칫 놀라서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는 두려운 것이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깨웠습니다. 매일 유진 님의 귓가에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몸이 망가지지 않을 선을 지키며 흔든 적도 여러 번입니다.”
“…….”
“당연히, 매일 기도도 올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유진 님께 서임 받은 모든 성기사가. 그로도 부족한가 싶어, 서임 받지 않았음에도 유진 님을 섬기는 대륙의 시민들에게 기도해 달라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음…… 으음.”
“보다 적극적인 수단을 써보기도 했지요. 세냐 님께서는 여러 마법을 만들어 유진 님을 깨우려 하셨습니다. 아예 정신에 파고드는 것도 시도하셨지요. 남해에서의 일 때문인지, 시엘은 유진 님의 손을 붙들고서 여러 번 끙끙대기도 했습니다. 그 외 다른 라이언하트의 사람들 전원이 유진 님께 매달렸었죠.”
“……어…… 음, 그래, 그런데, 내가 일어나기 싫어서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압니다.”
더듬거리는 변명이 끝나기 전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으며 유진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왔다. 어깨가, 뺨이,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저와 아니스 님이 가장…… 많이, 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모두가 유진 님을 걱정하였습니다. 유진 님이 무사히 눈을 뜨기를, 모두가 진심으로 바라였습니다.”
“…….”
“눈을 뜨셔서 다행입니다.”
크리스티나가 점점 가까워졌다. 은근한 시선 때문일지 스스로 눈치챈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유진에게 바짝 붙어 있던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재빨리 침대에서 물러났다.
침대에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무너지듯이 유진의 품에 안겼다.
“무사하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세 달이나 기절해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이 누워만 있었다. 심지어 성녀들은 유진이 기절하는 순간에 똑같이 의식을 잃고 있었기에, 더더욱 유진을 걱정했으리라.
“미안해.”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크리스티나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아.”
뒤늦게 깨달았다. 누아르와의 전투에서 잘렸던 왼팔이 멀쩡하게 붙어 있다. 한 번 잘렸다가 붙었음에도 신경은 잘린 적 따위 없다는 듯 매끄럽게 연결되어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아차리는 것이 늦습니다, 하멜.”
호칭이 바뀌었다. 가슴에 파묻은 고개가 들리고 눈동자가 가늘게 뜨였다. 아니스는 양손으로 유진의 갈비뼈를 더듬으며 속삭였다.
“잘린 팔을 붙이는 것은 300년 전에야 흔하고 익숙한 일이었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처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움직임에 불편함은 없습니까?”
“팔은 멀쩡한 것 같은데 몸은 안 멀쩡하네. 눈도 뻑뻑하고 목소리도 잘 안 나와. 특히 내장의 움직임이 너무 잘 느껴져서 소름 끼쳐.”
“최선의 관리는 했습니다만, 세 달 만에 눈을 떴으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배는 고프지 않습니까?”
“고픈 것 같기도 하고 안 고픈 것 같기도 하고…… 체감이 잘 안 되네.”
“당신은 식사를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음식을 씹기는커녕 삼키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요. 제가 씹어서 넘겨주고 삼키게 하는 방법도 쓸 법은 했습니다만.”
갈비뼈를 더듬는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유진의 살결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점점 위로 올라왔다. 그 손놀림이 너무나 음험한지라 간지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고서 두려운 감정을 담아 아니스를 응시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쓸 법했지만 쓰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이 기절한 동안 필요한 양분은 마법과 의술을 접목해, 직접 체내에 흘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대소변은…….”
“설마…….”
“망측한 상상은 하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당신의 바지를 벗기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런 것도 참, 편리하게도, 마법으로 처리했습니다.”
편리하게도, 라고 말할 때 아니스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왜 못내 아쉬워 하는 것 같을까…….
유진은 과거 이그니션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을 때를 떠올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티나는 은근히 유진이 아파서 골골대는 상황을 즐기는 것만 같았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법이 편리하고 훌륭해도 한계는 있는 모양입니다. 세 달이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인지, 하멜, 당신은 조금 마른 것 같군요.”
“팔이 조금 얇아진 것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얇아졌습니다. 뭐, 당신은 원체 건강하니 곧 돌아오겠지요. 육체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신은 어떻습니까?”
메마른 갈비뼈와 조금은 얇아진 가슴 근육을 타고 오르던 손가락이 멈췄다. 달그락. 아니스의 손가락이 목걸이에 매달린 한 쌍의 반지를 어루만졌다.
“정신은 병들지 않았습니까?”
“정신?”
“크리스티나가 말했지요. 하멜. 당신이 잠든 동안, 세냐는 몇 번이고 당신의 정신으로 들어가려 시도했습니다. 물론,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 입고 망가진 정신을 각성시키고 치유하는 것은 신성마법의 영역이기도 하니.”
“…….”
“하지만 저와 크리스티나도, 세냐도, 당신의 정신을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기절한 당신의 무의식이 다른 누군가의 침범을 강하게 거부한 겁니다.”
아니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유진과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꿈을 꾼 겁니까.”
“응.”
“그 꿈에 흠뻑 빠져서, 깨어나지 않았던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뭡니까, 그 애매한 대답은.”
“꿈이란 것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유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니스의 손을 감싸 쥐었다.
“너도 살면서 몇 번은 꿈을 꿔봤을 것 아냐. 내가 바라던 것이 꿈에 나올 때도 있고, 바라지 않은, 싫어하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을 꿀 때도 있지.”
“…….”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야. 그냥, 정신을 차리는 것이 늦었던 거지. 이래저래 몸이 안 좋기도 했고.”
“……으흠. 확실히 말해두겠습니다, 하멜. 당신의 상태는 아주 끔찍했습니다. 팔은 잘리고, 뼈도 성한 곳이 드물었고, 내장도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정신도.”
“하지만 지금은 멀쩡하지.”
“예, 저와 크리스티나가 열심히 당신의 몸을 회복했습니다. 신력이 남았더라면 당신 스스로 알아서 회복할 수 있었겠지만, 세 달 전의 당신은 신력이 봉인된 상태였죠. 성녀인 저희가 없었다면, 당신의 팔은 치료할 시기를 놓쳐 평생 붙지 않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아주 곤란했을걸. 의수라도 붙여야 하나…… 아니면 레반테인을 팔처럼 달고 다녀야 했나.”
“나리사의 의족을 보면 그럭저럭 생활은 가능하겠지만, 전투가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지. 크리스티나, 아니스, 너희가 있어서 내 팔이 멀쩡히 붙은 거야.”
곧바로 넉살을 떨어대니 아니스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 손을 덮은 유진의 손을 가볍게 떨쳐내고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야? 내 방은 아닌데.”
“유라스입니다.”
“유…… 유라? 유라스?”
“정확히 말하자며 유라스 수도, 유레시아의 교황청입니다.”
유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왜 여기 있어?”
“하멜 당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서임한 모든 성기사를 포함한 ‘신군(神軍)’의 수뇌부 전원이 교황청에 머물고 있습니다.”
“……뭐?”
“신군의 전 병력은 현재 유라스와 헬무드의 국경지대에서 주둔 중입니다.”
유진은 뭐라 답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왜?”
도저히 정리되지도 이해되지도 않아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니스가 혀를 차며 눈썹을 찡그렸다.
“당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것이 무려 세 달입니다. 하멜.”
“……정확히 말하자면 구십삼…….”
“그 세 달 사이에 헬무드- 아니, 판데모니엄은 전시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누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빌어먹을 환생 570화
베르무트가 예고했던 기한은 1년.
당연히 유진은 그 1년을 꼬박 채울 생각은 없다. 기한이 확실한 것도 아니거니와, 베르무트의 예고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것.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1년 내에 베르무트가 붙들고 있는 멸망의 마왕이 깨어난다는 것이다.
그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화시대와 마찬가지로 누르가 대대적으로 창궐할까. 아니면- 그때의 종말처럼, 멸망의 마왕이 직접 강림하여 세상을 쓸어버릴까.
전자이기를 바랐다. 멸망의 마왕이 직접 강림한다면 시간이 촉박해도 너무 촉박하다. 전자라면, 조금 더 시간을 끌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바벨을 올라야 한다.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려야 한다. 베르무트를 구하고, 멸망의 마왕을 죽인다는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유폐의 마왕을 먼저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폐의 마왕이 서둘렀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3개월이나 기절해 있던 것이 문제다.
“전시 태세…….”
유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서 신음했다.
아니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이 전시 태세를 선언한 것은 한 달 전.
예전이라면 유폐의 마왕 대신 가비드 린드먼이 대공으로서 발표했겠지만, 가비드 린드먼은 죽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폐의 마왕이 직접 모습을 비추지는 않았다. 전 흑색마탑주. 아멜리아 머윈이 재기불능이 되었기에 현시점 멀쩡하게 살아있는 유일한 유폐의 삼마.
발자크 루드베스 유폐의 마왕의 대리인으로 나섰다. 헬무드에 존재하는 모든 스크린이 제멋대로 켜져서, 발자크의 모습을 송출했다.
300년 전의 약속은 깨졌다. 머지않아 대륙 모든 국가의 정예가 헬무드를 침공할 것이다. 전쟁을 바라는 모든 마족은 바벨에 집결하라.
헬무드는 전쟁을 피하지 않는다. 자비를 배신한 인간들은, 스스로 판데모니엄에 찾아와 바벨에 도전할 것이다.
그리고 바벨에서 죽을 것이다.
대리인으로서 선언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저러했다. 선언이 있고서 가장 먼저 행해진 것은, 판데모니엄에 거주하는 마족이 아닌 이민자의 대대적인 피난이었다.
‘인질로 잡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하긴, 유폐의 마왕이 헬무드의 이민자들을 인질로 삼을 것 같지는 않다. 극단적인 피난 정책이 시행되고서 얼마 되지 않아 판데모니엄은 그 이름처럼 복마전이 되었다. 전쟁을 바라는 호전적인 마족만 득실거리게 되었단 말이다.
그리고 일주일 전. 판데모니엄이 헬무드의 변경으로 이동했다…….
“헬무드가 전시 태세를 선언한 뒤, 대륙의 국가들도 즉시 전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각 국가마다 정예군을 차출하고 용병을 모집했한 뒤에, 판데모니엄과 가까운 유라스의 국경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성기사들은 이곳 교황청에 모여서…….”
“잠깐, 잠깐.”
끝까지 들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유진은 급히 손을 들어 아니스의 말을 제지했다.
“그, 내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판데모니엄이 헬무드의 변경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군대를 유라스의 국경에 배치했다고?”
“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판데모니엄이…… 대체 어떻게 이동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판데모니엄은 헬무드의 중심에 있다. 애당초 헬무드 ‘제국’은 300년 전의 바벨과, 그 앞에 있던 붉은 평원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지금의 판데모니엄이야 다른 국가들의 수도와 비교가 안 될 만큼 최첨단의 도시가 되었지만, 300년 전에는 결사대가 죽음을 불사하며 진군하던 붉은 평원이었단 말이다.
“말 그대로입니다.”
유진이 당황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는 아니스 본인조차도 일주일 전에 판데모니엄의 이동을 목격하고서 기함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빠를 겁니다.”
아니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창가에 다가갔다. 백 일 가까이 기절한 유진이 눈을 떴을 때. 너무 환한 빛은 안구를 다치게 할 우려가 있다. 그렇기에 유진의 방은 흐릿하고 엷은 조명만을 두었다.
하지만 창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스는 두꺼운 커튼을 젖히고, 그로도 부족하여 창문을 막고 있는 가림막마저 걷었다.
“눈부셔.”
“시력을 잃는다면 제가 당신의 눈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냥 치료하면 되잖아.”
“이 낭만적인 속삭임을 듣고서 그딴 반응이라니.”
아니스는 투덜거리며 창문까지 활짝 열었다. 환한 빛이 순식간에 방안을 밝혔다.
눈이 찡하고 쓰라렸지만, 몇 번 눈을 깜빡이니 곧 익숙해졌다. 해의 기울기를 보니 정오는 진즉에 지났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뭐야?”
목소리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휘청거리는 걸음을 붙잡고서 창가에 다가갔다. 그러곤 창틀을 손으로 붙잡고서 머리까지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이제 제 말이 이해가 갑니까?”
거리는 한참 멀다. 이곳은 유라스 수도의 교황청. 변경까지는 한참 멀다. 그러나 ‘저것’은 이 먼 거리에서도 희미한 점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찌 저 모습을 잊을 수 있을까. 300년 전. 몇 번이나 노려보던 ‘성’.
붉은 평원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바벨에 돌입하기 위해 전장을 질주하던 순간을. 가비드가 이끄는 검은 안개와 격돌하면서. 평원이 결사대와 마족의 피로 물들어 정말로 붉은 평원이 되던 순간에.
모두가 저 성을 노려보았다.
“……바벨.”
하늘 저편에 바벨이 떠 있다. 그 모습은 ‘판데모니엄’의 바벨과는 다르다. 99층의 빌딩 따위가 아니다. 300년 전의 모습이다. ‘마왕성’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표현한 것만 같은, 시커멓고 음침해 보이는 고성.
마룡 라이자키아의 영지, 용마성이 하늘에 떠 있던 것처럼. 바벨이 머나먼 하늘에 떠 있다.
“……일주일 전. 유폐의 마왕은 판데모니엄을 통째로 저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아니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건…… 눈으로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죠. 말 그대로 판데모니엄이 ‘하늘’을 날아서, 저곳까지 이동한 겁니다.”
“……위치는?”
“알카르트 교구의 바로 앞입니다.”
유라스와 헬무드의 국경이 맞닿는 곳.
“현재 하늘에 떠 있는 것은 바벨뿐입니다. 판데모니엄은 일주일 전에 지상에 내려왔습니다.”
유진도 몇 번 알카르트에 가보았기에 기억하고 있다. 유라스의 북쪽 끝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은 네란. 그곳의 성문을 지나서 펼쳐진 평원을 며칠에 걸쳐 가로지르면, 헬무드의 영토인 알카르트에 도착한다. 현재 판데모니엄은 그 국경 평원에 내려와 있다.
“미친 새끼.”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헬무드를 가로지를 수고를 줄여주었다고 여겨야 하나? 아니면…… 저, 헬무드의 최전방에서부터 전쟁을 바로 끝내버리겠단 생각인가? 어느 쪽이든 유폐의 마왕이 할 법한 일이다.
어차피 유진이 바벨에서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한다면, 유폐의 마왕은- 3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곧바로 대륙을 침공할 것이다. 그렇기에 판데모니엄 자체를 최전방으로 옮긴 것이리라.
“……선언은 있었지만, 모든 마족이 판데모니엄에 집결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스가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어린 마족들은 전쟁을 모릅니다. 꽤 나이가 있는 마족 중에서도 전쟁보다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이가 꽤 되는 모양이더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겠지. 안 그래?”
멀리서 보이는 판데모니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당장이야 ‘전쟁’이란 것이 실감이 되지 않을 테니, 굳이 직접 전장에 향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마족의 흉포함은 천성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판데모니엄에 집결하는 마족의 수는 늘어날 것이다.
“그럴지라도 병력의 우위는 저희 쪽에 있습니다. 순수 마족의 출산율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요.”
헬무드는 대륙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제국이지만, 영토에 비해 순수 마족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그것은 마족이 너무 오래 살고, 부모 자식에 대한 개념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인간 이민자의 수가 마족의 수를 넘어섰다.
물론 순수 마족의 수가 아무리 적다고 해도, 마족과 인간의 힘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헬무드의 군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쪽에 대륙 모든 국가의 정예병이 모였다고 해도 헬무드와 힘싸움에서는 크게 우위를 점할 수는 없으리라.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유폐의 마왕이다. 우군의 숫자가 몇이고 헬무드 군의 숫자가 몇이건, 그 모든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는 무의미하다.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이 전쟁은 유폐의 마왕을 ‘언제’ 쓰러트리느냐에 달려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헬무드 각지에서 마족들이 움직일 것이다. 참전하지 않은 마족들이 피 냄새에 이끌려 본능을 해방할 것이다.
“전선이 코앞까지 온 것은 다행이야.”
유진은 창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판데모니엄과 바벨이 본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부터가 골치 아팠을 것이다. 전시 상황에서 워프게이트는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할 테니까.
“그런데.”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아니스를 돌아보았다.
“발자크, 그 새끼가 유폐의 마왕 대리로 나섰다고?”
“예.”
“왜?”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공석인 유폐의 지팡이 자리를 꿰찼나 보지요.”
“이제 와서?”
“그 수상쩍은 흑마법사를 아군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하멜 당신 아니었습니까?”
“그건 그런데, 진짜로 유폐의 마왕에게 붙어먹을 줄이야.”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발자크가 관여했을 때, 그는 모든 경우에서 유진의 아군이었다. 그리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배신을 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혹시 모른다는 생가을 하기도 했었다. 어쩌면 발자크가 유폐의 마왕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하긴, 배신하고 싶어도 배신할 수 없는 입장이기는 하지.”
사마르와 나하마에서 발자크는 다른 유폐의 지팡이를 적으로 삼았다. 유폐의 마왕 본인도 그것에 대해서는 발자크에게 징벌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발자크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 계약 상대가 하위 마족이라면 흑마법사가 기지를 부려 계약을 찬탈하는 것이 가능할 법도 하지만, 마왕을 상대로 그런 수작이 먹힐 리가 없다. 발자크는 절대로 유페의 마왕을 배신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유폐의 마왕의 대리까지 맡을 줄이야.’
가비드가 죽고 누아르도 죽었다. 다른 유폐의 삼마도 모두 죽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발자크가 유폐의 마왕의 유일한 측근이 되어버렸다.
‘그걸 노렸나?’
다른 흑마법사들을 죽이는 것에 일조한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유진이 봐왔던 발자크는 권력 같은 것에 야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고위 마족처럼 적극적으로 전쟁을 바란 것도 아니다. 발자크가 추구한 것은 그 자신의 이상이었다.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마법사가 되는 것.
“설마 나나 세냐를 죽여서 전설이 되겠다는 심보는 아니겠지.”
만약 그런 것이라면 발자크는 병신이다.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발자크가 무슨 수를 쓰건 유진과 세냐를 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놈에게 대체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꿍꿍이가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만약, 바벨에서 발자크를 만난다면. 발자크가 적으로서 앞을 가로막는다면.
유진은 전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세냐도 그럴 것이다. 바벨에서 만나건, 전장에서 만나건, ‘적’이라면 무조건 죽인다. 전설적인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이상을 허무하게 부숴버릴 것이다.
“그런데 세냐는 어디 있어?”
“지금 시간이라면 신군의 마법병단을 지도하고 있을 겁니다.”
“그…… 내가 아까 물어보려다가 관뒀는데 말이야. 도저히 모르겠어서 그냥 물어볼게. 왜 하필 신군이야?”
“그야 당연히, 하멜, 당신이 총대장으로 이끄는 군대니까요.”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대답에 유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멜. 당신은 신성제국 유라스의 신황(神皇)이자 연합국의 대표이며 신군의 총대장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연합의 모든 지도자들이 동의했습니다. 그러게 누가 3개월이나 나자빠져 있으랍니까?”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잖아……! 그리고 신황은 또 뭐야?”
“유라스는 빛을 섬기는 종교국가고, 교황은 종교적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하멜 당신은 빛에게 신성을 위임받았죠. 아닙니까?”
“…….”
“당신이 곧 빛이기도 한데, 신황이 뭐 어떻습니까?”
“나는…… 나는 왕 같은 거 하기 싫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름만 그럴 뿐이지 국정은 여태까지처럼 교황이 알아서 할 겁니다. 그리고 연합의 대표이자 신군의 총대장이라고 해도, 그 누구도 당신에게 연합과 신군의 운영을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기 싫다고는 말했지만, 대놓고 저런 말을 들으니 조금 발끈하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나에게 나도 모르는 왕의 자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맙소사, 하멜,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당신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에게 왕의 재능이랄 것은 없습니다.”
“…….”
“툭하면 단독으로 행동하고 제 목숨을 돌보지 않으며 혼자서 선두로 달려 나가는 당신이 왕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하멜, 당신이 왕이 된다면, 당신을 섬기는 모든 신하와 기사들은 스트레스로 정신에 병이 들어버릴 겁니다.”
차마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지만, 대놓고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쿡쿡 쑤실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용맹하면 됐지.”
“꼭 모론이나 할 법한 말을 하는군요.”
“말이 너무 심하다.”
“정정하겠습니다. 방금 그 말은 모론에게 실례되는군요. 모론은 그래도 나라를 세우고 잘 운영했으니 말입니다.”
유진은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어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혹시 모를 기대를 품고서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둘도 이 건에 대해서는 도저히 유진을 두둔할 수가 없어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저 싹퉁머리 없는 메르가 저러는 것이야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편을 들어주던 라이미르아까지 시선을 피할 줄이야……! 유진은 억울하고 서러워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야!”
기껏 닫았던 창문이 벌컥 열렸다. 불쑥 머리를 들이민 것은 마법병단을 지도하고 있다던 세냐였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찬 눈동자로 유진을 보았다.
“너, 너……! 드디어 깨어났…….”
“야, 나랑 모론 중에서 누가 더 낫냐?”
눈물 젖은 해후를 나누기 전에, 유진은 일단 그것부터 물어보았다.
“……뭐?”
“나랑 모론 중에서 누가 더 낫…….”
“너, 지금, 세 달 만에 일어나서, 나한테 하는 말이, 그게 맞다고 생각해?”
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유진은 저런 말을 하면 안 됐다.
“……음…….”
눈물 그렁그렁하던 눈동자가 분노에 잡아먹히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쩌억!
세냐의 주먹이 유진의 뺨을 후려쳤다.
빌어먹을 환생 571화
“부탁대로 했어.”
창문을 닫던 세냐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던 유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부탁. 기절하기 전에, 몽롱한 정신으로 간신히 전했던 부탁.
“알아? 그 도시는 원래 아이리스의 영지였고, 다크 엘프만 살던 숲 지대였다더라. 웃기는 일이지? 엘프가 아니게 된 주제에, 숲에 집착하다니.”
“…….”
“아이리스 그년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릴 만큼 증오스러워. 하지만 그년을 따랐던 다크엘프들. 뭐…… 다크엘프가 되고 나서는 똑같이 정신상태가 맛이 가버렸지만, 그래도, 개중에는 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혹은 아이리스에게 납치되어서 강제로 타락 당한 엘프도 있을 것 아냐?”
“뭐……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아이리스에게 죽은 엘프들도 많고.”
세냐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주저하며 유진의 표정을 힐긋 보았다. 불과 몇 분 전에는, 세 달 만에 눈을 뜨고서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따귀까지 갈긴 주제에. 지금의 세냐는 마치 나쁜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처럼 유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유진은 아무 말 없이 세냐의 얼굴을 보았다. 세냐는, 저 침묵이 조금은 두려웠다. 평소에는 얼빠지고 모자란 언동을 보이는 유진이, 진지해지거나 화가 날 때는 얼마나 냉엄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 도시를, 숲으로 만들었어.”
“…….”
“넌…… 너는 도시를 지워달라고 했지만. 그래도, 생각해 봐. 그 넓은 땅덩어리가 휑하게 텅 비어버리면,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잖아? 오히려 그게 더 튈 거야. 그래서, 그냥 숲으로 만들었어.”
“…….”
“그, 음, 무덤이나 묘비, 그런 거는 당연히 없고. 그냥 평범한 숲이야. 사마르 같은. 제벨라 시티의 흔적은 하나도 없…….”
“잘했어.”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순간. 피식거리는 웃음이 말을 끊었다. 유진은 뺨을 더듬던 손을 대충 흔들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편이 좋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아. 너한테 맡기고 세 달이나 자빠져 있던 것은 나니까.”
“…….”
“배려해 줘서 고맙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짤랑. 작은 소리다. 하지만 세냐는 두 개의 반지가 부딪쳐서 나는 그 작은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세냐는, 얇은 환자복 안에 있을 목걸이를 흘겨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당연한 말이지만, 그 배려 말이야. 나는 누아르 제벨라를 배려한 것이 아니야. 그 못된 년이 어디서 어떻게 무슨 감정으로 죽건, 솔직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당연히 그렇겠지.”
“이 배려는 이 세냐 메르데인 님이 너,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베푸는 거야.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동의했어. 우리는- 네가, 그 도시의 ‘꿈’에 매몰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앞으로 네가 살아갈 시간에서 뒈진 년의 초상이 남기를 바라지 않아.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굉장히…… 굉장히 깊고, 짙었으니까.”
“응.”
“어쩔 수 없이 돌아볼 때가 가끔은 있을 거야. 미련 때문이건 감정 때문이건, 꿈에서건. 그럴 때…….”
세냐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스레 옆머리를 배배 꼬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양팔을 활짝 벌려 유진을 끌어안았다.
“텅 빈 폐허만 보이면 너무 삭막하잖아. 그래서, 숲으로 만든 거야. 내가 숲을 좋아하기도 하고. 숲은, 음, 활력이 넘치잖아. 안 그래?”
“그런가?”
“그래, 숲에는 좋은 기운이 가득해. 숲에서 나고 자란 이 세냐 님이 훌륭한 대마법사가 된 것이 바로 증거지. 그리고 유진, 너도 300년 전에는 그, 어디야? 튜라스 변경 숲에서 자랐다며?”
“그…… 랬지.”
“과거의 우울한 기억은 미래의 좋은 기억으로 덮으면 돼.”
꾸욱.
세냐의 손이 보다 강하게 유진을 끌어안았다.
“……나중에, 전부 다 끝나면. 나는, 그 숲에서 살 거야. 당연히 너도.”
“……숲에 강은 흐르냐?”
불쑥 건넨 질문에 세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고서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이윽고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망할 년이 별의별 꿈을 다 보여줬구나? 강? 아직 안 흘러. 나중에 흐르게 만들 거야. 별도 왕창 띄우고서 말이지. 그리고…… 그리고, 숲의 좋은 기운을 통해 아이를…….”
“뭐?”
되묻는 질문. 세냐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 광경을 꼴사납다는 듯이 보던 아니스가 똑같이 혀를 ‘쯧’ 차고서 투덜거렸다.
“사람 한 명 없는 숲에 들어가서 살겠다니, 나무꾼 가문이라도 세우려는 겁니까? 아니면 숲지기? 세냐, 그 땅덩어리에 숲을 만든 것은 저와 크리스티나도 동의는 했습니다만, 그곳에서 평생을 사는 것은 싫습니다. 별장이라면 모를까.”
“숲이 뭐 어때서?”
“자고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공허한 숲에서 자란 당신과 하멜을 보십시오, 성격에 하자가 있지 않습니까?”
“난 엘프랑 살았어!”
“엘프가 사람은 아니죠.”
“그러는 아니스 넌, 사람이랑 부대끼고 살아서 성격이 그 모양이야?”
“아뇨, 제 성격에도 여러모로 문제점이 많지요. 유년 시절 제 주변에는 사람이 아닌 쓰레기들뿐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미래의 아이에게는 저희와 같은 절차를 밟게 해선 안 됩니다.”
미래의 아이라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에 유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유진은 차마 아니스의 말이 틀렸다 반박할 수는 없었다.
튜라스 변경에서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하멜의 성격이 개차반이란 것은 유진 본인도 인정하는 바다. 반면에 ‘유진 라이언하트’는 어떤가? 한적하지만 평화롭던 키옐의 시골 영지 기돌에서, 아버지 제하드의 어여쁨을 받고 자란 유진의 성격은 썩 괜찮지 않은가? 하멜의 지랄 맞던 성격이 유진으로 자라면서 제법 완화되지 않았나?
“맞아, 아버지는?”
제하드를 떠올리니 불쑥 걱정이 들었다. 제벨라 시티로 출발하기 전에 얼추 사정은 설명하고 갔지만, 아들이 세 달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당연히 걱정하고 있을 터.
“일어나지 않는 너 대신에 나랑 크리스티나가 열심히 납득시켜 드렸지.”
“저도 했습니다. 제하드 님은 크리스티나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제하드 님은 본가에 남아 계셔. 의욕적이기는 하셨지만, 이제 와서 검을 들고 전장에 서기는 좀 그렇잖아?”
현재 본가에는 애니실라와 제하드, 아일라 공주. 마병에 걸린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남아 있다. 그 외에 전투가 가능하고 참전의사를 보인 본가의 총병력은 모두가 네란의 전초기지에 집결해 있다.
국경방위로 일개 부대와 견습만을 남겼을 뿐, 흑사자 기사단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방계에서도 자발적으로 지원했기에, 현재 네란 전초기지에는 라이언하트의 총전력이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라이언하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륙 각국에서 엄선 된 정예들이 모두 네란에 모여 있다. 덕분에 지금의 네란은 대륙에서 가장 북적거리는 군사도시가 된 상태다.
“간부들을 제외한 대부분 병력은 모두 네란에 가 있어. 나는 마법병단 교육 때문에 방금 네란에 있었고.”
대체 누가 간부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라이언하트에서 서임한 성기사 중 단장급과 8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 간부가 굳이 교황청에 남았다는 것이 유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전선이 코앞인 네란에 배치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유진 님을 위해서입니다.”
어느새 바뀐 크리스티나가 공손히 손을 모으며 대답했다.
“의식을 되찾지 못하신 유진 님을 누군가가 암살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유폐의 마왕이 그것을 명령하지는 않겠지만, 전시태세는 선언되었고 마족들은 이미 움직였습니다. 공명심에 눈이 먼 마족들이 스스로 판단하여 유진 님을 암살하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죠.”
“교황청의 방비는 삼엄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그래서 간부들을 교황청에 남긴 거야.”
“그래서, 시도는 있었냐?”
“여섯 번이었나?”
세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네.”
“그중에는 서열 50위 내의 고위 마족도 있었어. 그야, 널 죽인다면 굳이 전쟁을 할 것도 없을 테니. 어쩌면 암살 시도를 반복하면서 연합이 대응하기를 바란 걸지도.”
“실제로 세냐 님은 첫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을 적에, 가시권에 들어온 판데모니엄에 메테오를 처박으려고 하셨습니다.”
“살짝 겁만 준 거야. 처박지는 않았어.”
세냐가 억울하단 표정으로 항변했다. 그 꼴을 보고서 유진은 안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교황청이 아니라 전선의 임시 막사에서 눈을 떴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 정신도 차렸으니 이제 네란으로 가면 되겠네?”
“가긴 어딜 가?”
세냐가 홱 고개를 돌리고서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 유진은 눈을 끔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신도 차렸고 몸도 멀쩡한데, 교황청에 남을 이유가 어디에 있나?
“애초에 널 왜 교황청에 눕혀놨겠어? 네란이나 라이언하트 본가에 눕혔으면 됐지.”
“어…… 그러게……. 왜 교황청에 날…….”
“이곳은 빛에 대한 신앙의 중심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사뿐사뿐 걸어서 다른 방향으로 난 창문에 다가갔다.
“긴 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하시는 유진 님의 눈을 뜨이게 하기 위해서는, 치료와 간호와 더불어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진은 눈을 뜨기 직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빛과, 유진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설마 싶은 생각에 유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크리스티나가 반대쪽 창문을 덮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
교황청 앞의 거대한 광장. 그곳에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모두가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아 쥐고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기도다.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앉아 기도를 올리는데,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용히, 입술을 닫고, 마음속으로 외는 것이다.
“저들 모두가 유진 님의 신도입니다.”
크리스티나가 뿌듯한 얼굴로 속삭였다.
“물론 저들이 전부가 아닙니다. 유진 님의 부활을 기도하는 신도들은 대륙 전역에 있지요.”
“…….”
“이렇게 눈을 뜨셨으니, 네란에 가시기 전에 신실한 신도들 앞에 직접 행차하시어 짧은 연설이라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진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는 절망에 의해 벌어진 입술을 간신히 닫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구…… 굳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에 돌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신앙을 폭발시킬 기회입니다.”
“신앙이 폭탄이냐? 폭발시키게.”
질색하며 대답하기는 했지만, 크리스티나의 의견 자체가 틀리지는 않았다.
대륙에 중계된 가비드와의 결투. 그리고 하룻밤 만에 무너트린 제벨라 시티. ‘빛’이 아닌 유진에 대한 신앙은 의식을 잃은 세 달 동안 끝없이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돌입하기 전 신도들에 대한 연설로 신앙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어차피 지금의 유진에게 더 이상 ‘수련’이란 것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명상을 해봤자 힘 자체는 더 이상 늘기 힘들다. 누아르 제벨라와의 사투에서 신앙을 받아들일 그릇을 넓혔다. 더 이상 레반테인의 형태에 구애받지도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빛의 신력은 너무나 크다. 성녀들과 공명하고 이그니션을 쓰며 레반테인과 일체화할지라도 빛의 모든 신력을 다루기는 버겁다.
그러니 뺏어야 한다.
지금의 유진에게 필요한 것은, 빛에 대한 신앙을 빼앗는 것이다. 긴 세월 축적되어 온 빛의, 아니, 그 외에 수많은 이름으로 축적된 신앙과 거기서 태어난 신력을 ‘유진 라이언하트’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누아르와의 전투에서는 쓸 수 없던 방법이다. 하지만 전시 태세를 선포하고 최전선을 구축한 유폐의 마왕에게는 쓸 수 있다. 대륙 전체를 위협하는 전쟁. 300년 전 시대의 재림. 패배하면 대륙이 끝장나는 상황.
세상을 구한다. 세상을 위한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훌륭한 명분이었다. 유진이 앞에 나선다면. 승리를 염원해 달라 외친다면. 빛이나 다른 신의 신도들조차도 전쟁의 승리를, 유진 라이언하트가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을 더욱 간절히 염원할 것이다.
“…….”
그렇게 되면 유진의 신성도 확장되고, 빛의 신력을 받아들일 그릇도 함께 커질 것이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아도 그 거대한 신력을 능히 다룰 수 있을 것이며, 이그니션까지 쓴다면 유폐의 마왕에게도 죽음을 논할 수 있을지 모른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허어어…….”
이해는 하는데 연설이라니, 그런 끔찍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저 많은 사람 앞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하멜이라는 것을 밝히고 난 뒤에 기자회견을 할 때도 그냥 전부 죽이거나 죽어버리고 싶었는데, 그 미치도록 민망한 짓을 또 하란 말인가?
“뭔 걱정이야? 저기 사람들은 다 너나 빛의 신도야. 네가 갑자기 똥을 싸도 기적이라며 눈물을 줄줄 흘릴걸.”
“유진 님은 똥을 싸지 않으십니다.”
“뭔…… 뭔 개소리야? 어떻게 사람이 똥을 안 싸? 이슬만 먹어도 똥은 나오겠다.”
“제발, 세냐 님, 지저분하고 모자라 보이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 말은, 유진 님이 신도들 앞에서 신어를 읊으실 때 결코 그런 행위는 하지 않으시리란 말입니다.”
“왜 내가 하겠다고 말도 안 했는데 당연히 연설을 할 거라고 정해졌다는 듯이 구는 거냐.”
“하지 않으실 겁니까?”
“아니…… 해야 되면…… 어…… 아니…… 해야 하니까…… 할 건데…….”
“안 하면 유서 읽어버릴 거야.”
세냐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유진의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유서? 제벨라 시티로 떠나기 전에 라만에게 남겼던 유서들. 생환한다면 무조건 불태우라고 말했었는데…….
“라만 이 개새끼가!”
“어허, 진정해, 그가 널 배신한 것은 아니야.”
“그런데 왜!”
“네가 그토록 오래 자빠져 있으니, 언제 가버릴지 모른다고 판단했던 거지! 네가 만약에 죽어버리면 유서를 전해야 할 것 아냐!”
“그래서 내가 죽지도 않았는데 후다닥 유서를 전해줬단 거냐?!”
“아니? 라이언하트에 있을 적에, 혼자서 네 손을 붙들고 ‘유서는 어찌해야 합니까…….’하고 탄식을 흘리던 걸 우연히 들었지. 그래서 뺏었어.”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건가? 유진은 믿을 수 없어서 눈동자를 덜덜 떨며 세냐를 쳐다보았다.
“읽으면 목을 베어 자살해 버리겠다고 해서 읽지는 않았어, 걱정하지 마.”
“스스로 유서까지 적으신 유진 님의 결의를 희롱하지 마십시오.”
“네게 남긴 유서를 조금이라도 읽어보려고 끙끙거린 주제에.”
“빛께 맹세코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세냐 님이 보신 것은 제가 아니라 아니스 님이십니다.”
“……연설…….”
뿌득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
“할 테니까…… 유서, 내놔, 당장 태워 버리게.”
“필요하면 연설문도 있어.”
세냐가 방긋 웃으며 로브의 안쪽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직접 쓴 연설문이야. 어때?”
“넌 진짜 악마냐?”
“세 달이나 자빠져서 사람을 걱정시켰는데, 이 정도의 화풀이는 애교 아니야?”
그렇게 말해버리니 유진은 무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애꿎은 주먹만 꽉 쥐고서 화를 삭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설문 필요 없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짧게 몇 마디만 할 테니.”
“마음대로 해.”
“그런데.”
유진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세냐가 걸친 로브의 안쪽을 응시했다.
“환상의 마안은?”
세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빌어먹을 환생 572화
당연히 물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타이밍에 물어올 줄이야. 방금까지만 해도 짓궂게 웃으며 약을 올리던 세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도 말했잖아. 가져갈 거라고.”
“어디에 있냐고 묻는 거야.”
짧은 한숨 뒤에 세냐가 로브를 열었다.
“…….”
세냐의 목에 걸린 목걸이. 보랏빛의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 유진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설마 진짜 눈동자의 형태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보석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있을 줄이야. 특히나 유진이 놀람을 느낀 것은, 바로 앞에 ‘환상의 마안’이 있는데도 특별한 기운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봉인하고 있어.”
“봉인?”
“응. 다루기가 힘들거든. 마력도 철철 흐르고.”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목걸이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그렇게 봉인이 잠시 해제되었다.
왜 봉인을 했는지. 왜 다루기 힘들고, 마력이 철철 흐른다고 하는지. 곧장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세냐의 마법 봉인이 해제된 순간에 보석이 요염한 빛을 발했다.
ㅡ화아악!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마력이 보석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제멋대로 발동된 환상의 마안이 마력과 동조했다.
쿠르르르……! 방이 통째로 진동하더니 흐물거리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환상의 마안이 마력을 받아먹고 폭주하고 있을 뿐이다.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크리스티나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저 ‘환상의 마안’은 누아르 제벨라와는 달리 상대의 정신을 제압하고 강제로 꿈속으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그것은 환상의 마안이 아닌 누아르 본인의 권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제 없이 마구잡이로 마력을 받아먹으며 일으키는 폭주는, 오히려 노골적인 정신 공격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크리스티나도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사라졌다. 환상의 마안이 유진이 기억하는 누아르의 모습을 멋대로 투영한 것이다. 누아르가 유진을 돌아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 미소 또한 유진이 기억하는 미소였다.
-하멜.
그리고 목소리. 유진은 혀를 차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것만으로 환상이 깨졌다. 누아르의 얼굴이 사라지고, 크리스티나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왜 봉인했는지 알겠지?”
세냐가 한숨을 푹 내쉬며 보석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쏟아져 나온 마력이 모조리 되돌아가고 환상의 마안의 권능도 사라졌다.
“너희가 어떤 환상을 봤는지는 몰라. 그 정도로 이건 까다롭단 말이야.”
“아예 다룰 수 없는 거냐?”
“날 뭐로 보는 거야? 다룰 수 있어. 굉장히 피곤하고 짜증이 나지만. 심력도 소모되고. 그래서 평소에는 이렇게 봉인하고 있는 거야.”
세냐는 투덜거리면서 열었던 로브를 다시 닫았다.
“그래도, 음, 이 정도로 양질의, 순수하고 끝없는 마력을 얻은 것은 좋아. 아멜리아 머윈이 가진 마력보다 훨씬 강하니까, 이 세냐 님이 잘 사용할 수 있지.”
“…….”
“사실 환상의 마안을 통제하지 않아도, 이 마력과 내 마나를 결합해 영력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세냐.”
혹시 모를 가능성. 유진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는 잠시 세냐를 응시하고서 다시 입술을 열었다.
“혹시 환상의 마안에 누아르 제벨라의 영혼이나…… 사념이 남아 있냐?”
방금 폭주에서 나타난 누아르의 얼굴과 목소리. 만약 그것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면? 환상의 마안에 누아르의 잔재가 남아 있다면?
유진은 그것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를 죽일 때 신력을, 신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누아르의 혼은 소멸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언젠가 당신처럼 환생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죽기 전 누아르가 속삭였던 말이 유진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신력을 쓸 수 없어서 신검도 쓰지 못했지만. 레반테인에 녹아든 월광검의 불길한 빛은 쓸 수 있었다.
쓰지 않은 것은.
결국 유진도, 누아르가 말한 ‘언젠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마 누아르의 혼을 소멸시킬 수 없어서. 소멸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냥…… 죽이기만 했다.
“……없어.”
세냐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누아르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죽었잖아. 영혼은…… 가야 할 곳으로 갔겠지.”
“너 전례가 있잖아.”
유진은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내가 300년 전에 죽었을 때. 내 혼을 이 목걸이에 담아서 간직했던 것이 누구더라?”
“그건! 이유가 있어서 간직한 거잖아. 어? 네가 유언으로까지 바랐던! 마왕이 모두 죽은 세상에서! 네가 환생하기를 바라서!”
“예, 예.”
“아무튼! 그 망할 몽마는 죽었단 말이야. 언젠가 남자로 환생하건 여자로 환생하건 동물로 환생하건! 그건 내 알 바도 아니고, 환상의 마안에 잔재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아!”
“그런데 왜 폭주하는 거야?”
“월광검은 자아가 있어서 폭주했냐? 형편에 맞지 않는 힘을 억지로 다루니까 날뛰는 거지!”
월광검을 예로 들어버리니 유진도 더 이상 캐물을 수는 없었다.
하긴, 세냐가 누아르의 영혼을 거둘 이유가 어디에 있고, 환상의 마안에 잔재랄 것이 있다면 그걸 숨길 이유가 어디에 있나. 오히려 그런 잔재가 남아 있다면, 세냐라면 진즉에 잔재를 영멸시켰을 것이다.
“너,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옷이나 제대로 입어. 연설해야 할 것 아냐!”
“오늘 바로 하는 거냐……?”
“그럼 내일 할래? 응? 아니면 모레? 세 달이나 자빠져 있었으면서 더 시간을 끌겠다 이거야?”
조금 떠봤다고 이렇게나 사람을 갈구다니. 유진은 서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환자복의 아랫단을 잡았다. 그러곤 보란 듯이 위로 들어 올렸다.
“꺄아악!”
메말랐기에 더욱이 선명해진 복근에 세냐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꺄아아악!”
[꺄아아!]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성녀들은 고개를 돌리지는 않고, 손으로 눈만 살짝 가렸다. 손가락을 충분히 벌리고서 말이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세냐가 얼굴을 붉히며 쏘아붙였다.
“옷 갈아입으라며.”
솔직히 유진은 저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론만 하더라도 300년 전부터 윗옷을 벗고 다녔고, 보급이 부족하던 전장에서는 하멜도 벗은 것과 다름없는 누더기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지금 생에서 전투를 벌이고 난 뒤에도 옷이 제 꼴이 아니었던 적이 꽤 많지 않았나?
“누가 보는 앞에서 갈아입으래?!”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세냐도 억울했다. 어쩔 수 없을 때와 그러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은 당연히 그러지 않을 때였다.
“따지는 것도 많네, 그럼 뭐 어쩌라고?”
“등…… 등 돌리고 있을게. 갈아입어.”
“차라리 방을 나가는 편이 낫지 않냐?”
“네가 연설하기 싫다고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안 돼.”
“내가 애야? 하기 싫다고 도망치게.”
“아무튼 안 돼. 얌전히 갈아입…….”
ㅡ포옹.
방구석의 그림자가 돌연 치솟았다. 유진은 순간 그것이 뭔가 싶어서 눈을 끔벅였다. 적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방금의 시시껄렁한 대화가 유진의 판단을 흩트렸다.
“유진!”
그림자에 깃든 어둠에서 시엘이 불쑥 튀어나왔다. 시엘뿐만이 아니었다. 길레이드와 기온, 시안, 카르멘. 알체스터와 이바타, 오르투스, 아이빅, 라파엘로, 호네인과 대마법사들. 신군의 간부들이 죄다 시엘과 함께 어둠에서 튀어나왔다.
“…….”
매일 유진이 정신을 차리기를 기도하고, 상태를 확인하기 용이하도록 그림자에 침식시킨 암전의 마안의 권능.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유진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냥 걷어 올렸던 웃옷의 밑단을 아래로 내렸다.
“…….”
모두가 침묵했다. 네란에서 급하게 복귀한 세냐가 유진의 방에 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간부진 전원이 시엘의 마안으로 유진의 방에 왔다. 왜, 세 달만에 눈을 뜬 유진이, 크리스티나와 세냐의 앞에서 옷을 벗으려 했는지.
“어머, 어머머…….”
멜키스가 혼자서 얼굴을 붉히며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녀는 방금 걸어 나온 어둠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속삭였다.
“뭐 해요? 눈치 없이 굴지 말고. 다들 돌아가자고요, 죽다 살아났으니 감동의 역사는 쓰게 해줘야 할 것 아니에요?”
템페스트의 말이 옳았다. 진즉에 멜키스 엘하이어를 죽여야 했다.
유진은 뿌득 이를 갈면서 멜키스를 노려보았다.
“그런 것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정말 아니어도 그렇게 대놓고 아니라고 하면 세냐 님과 크리스티나 성녀가 서운해할 거야.”
“아니라니까 씨.”
“씨? 너 방금 나한테 씨라고 했어? 신 됐다고 옛날 어렸을 적 까맣게 잊은 거야? 네가 귀여운 인간 꼬마였을 때 이 누나가 얼마나 잘해줬는지 기억 안 나?”
“아 씨…….”
“또 씨? 그래, 계속 해봐. 씨 뒤에 뭐야? 발이야 팔이야? 어?”
멜키스는 보란 듯이 팔과 다리를 흔들었다. 그 얄미운 모습에 유진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죽이면 안 되나? 안 된다. 저 언동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멜키스는 대륙 최강을 논할 수 있는 인간이다. 당장 앞에 보이는 간부 중에서도 멜키스의 전력과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은 카르멘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
멜키스 같은 광인이 대륙 최강의 인간을 논해야 하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멸망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저런 미치광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령사라고? 유진은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멜키스 엘하이어는 나쁘지 않은 정령사다.]
불쑥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얼빠진 새끼. 그새 저 여자한테 감화된 거냐……!’
[착각하지 마라, 하멜. 나는 멜키스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내가 처음에 편견을 가졌을 때처럼 끔찍하기만 한 인간은 아니라고, 그렇게 냉정히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심연을 너무 깊이 들여다본 것이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분을 삭이기 위해 숨을 씨근댔다.
“몸을 괜찮느냐?”
길레이드가 급히 유진에게 다가왔다.
“호흡이 고르지 않구나. 조금 더 안정을 취하는 편이 좋겠다.”
그냥 화가 나서 호흡이 거칠어진 것이다. 길레이드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만, 그는 이 상황을 최대한 빠르게 수습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찬란한 사자여, 네 후광은 이전보다 더욱 찬란하나 몸은 초라하게 메말랐구나.”
단순히 ‘찬란한 사자’라고 말하고 싶었던 카르멘도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정말 그런 거 아닌 거야?”
시엘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길레이드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양팔을 활짝 벌리고 유진을 끌어안았다.
“무사히 눈을 떠서 다행이다.”
역시 형제뿐인가. 유진은 은근한 감동을 느끼면서 똑같이 시안을 끌어안았다.
“나 기절했던 동안 결혼한 건 아니지?”
조용한 질문에 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이 수습된 뒤에 카르멘과 멜키스에게 강제로 맹세를 받아냈다.
절대로, 절대로 연설에 난입하지 말 것. 목소리를 내지 말 것. 군중 속에 섞여 연호를 유도하지 말 것. 비명을 내지 말 것. 절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듣고만 있을 것.
사실은 듣지도 말고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카르멘이 정색까지 하며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하기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유레시아의 교황청. 일 년에 한 번, 성황의 탄신제마다 교황이 집전하는 예배가 있다. 그때 교황은 백원궁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광장을 내려본다.
“이쪽입니다.”
갑작스러운 요구였지만 교황 에우리우스에게는 전혀 갑작스럽지 않았다. 그 또한 당연히 유진이 연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고, 교황청 앞 대광장에 신도들을 불러모아 기도하게 한 것도 에우리우스의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우리우스는 기꺼이 백원궁 옥상을 열어주었다.
“성관(聖冠)은 정말로 쓰지 않으실 겁니까?”
교황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금과 보석들로 장식된 화려한 오 층의 왕관이 들려 있었다. 교황이 대외적인 자리에서 착용하는 삼층관과도 비교할 수 없이 화려한, 오직 유진을 위해 만들었다는 왕관이다.
“그렇게 무거워 보이는 걸 어떻게 써? 목 부러지겠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연설에서는…….”
“죽어도 안 써. 사실 이런 망토도 입기 싫다고.”
“유진 님께서는 유라스의 신황이십니다.”
“누가 한다고 했나…….”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옷을 내려다보았다. 흰색과 금색이 조화를 이룬 화려한 옷에 붉은 망토. 이것도 교황이 준비한 유라스 신황의 옷이다.
“지금 유진 님은 라이언하트의 일원으로 연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군의 총대장이자 유라스의 성황으로, 헬무드와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에 나서기 전 연설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라이언하트 제복 대신에 이거 입은 거잖아. 하지만 성관은 안 돼. 싫어.”
유진은 질색하고서 교황의 말을 끊었다. 은근히 드러내는 위압감에 교황도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설 전에…… 몇 가지 약속을 해다오.”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길레이드가 다가왔다.
“부디, 그 연설에서…… 음…… 비속어는 쓰지 말아다오.”
“당연히 안 할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협박하는 말도 하지 말아다오.”
“예?”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전황이 불리하면, 민간인이라도 강제로 징집할 수밖에 없다…….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승리를 기도해라……. 이런 투의 협박 말이다.”
“…….”
어떻게 알았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마치 마음을 읽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진은 표정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저런 요지의 연설을 하고서 빨리 돌아오려고 했는데. 대놓고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그럼 어떤 연설을 해야 하나? 유진의 머리가 하얘졌을 때.
-와아아아!
열린 문을 통해서 함성이 들렸다. 눈을 뜬 유진이 곧장 연설을 한다는 말에 대광장에서 묵언 기도를 올리던 모든 신도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
시간을 늦출수록 신도들은 기대를 품을 것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감동적인 연설을 하려 들기에 이토록 뜸을 들이는가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유진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감한 결단과 행동력. 유진은 숨을 삼키고서 앞으로 나섰다.
“아아…….”
크리스티나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의 망토 끝자락을 들었다. 그녀는 빛과 유진의 성녀로서 고개를 깊이 숙이며 유진이 가는 길을 뒤따랐다.
옥상으로 나왔다. 광장을 내려다보는 난간으로 향할수록 함성이 더욱 커진다. 그와 함께 유진은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끝없이 커지는 신앙을 실감했다. 크리스티나의 말은 옳았다. 지금 이곳에서 연설하는 행위 자체가 유진의 그릇을 넓히고 있다.
“…….”
머리로는 인지하고 몸으로도 실감하지만, 생각은 제대로 돌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난간 앞에 도착했다. 대광장을 빼곡히 채운 것도 모자라 도로에도 사람들이 나와 있다. 건물의 창문이며 옥상까지에도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일단 입을 열었다. 작게 말했는데도 목소리가 멋대로 증폭되었다. 유레시아뿐만이 아니다. 유진이 눈을 뜨기 전부터 이곳에는 연설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유진의 연설은 가비드와의 결투 때와 마찬가지로 대륙 전역에 송출되고 있다.
‘빌어먹을.’
카르멘의 연설문이라도 사용할 걸 그랬나. 차마 내용은 읽지 않았지만, 맨정신으로 말하기는 버거워도 그럴듯한 내용이기는 할 텐데. 하지만 후회도 늦다. 유진은 일단 계속해서 말했다.
“하멜의 환생…… 유진 라이언하트입니다.”
이름만 말했는데도 함성이 즉각 호응했다.
“찬란한 사자.”
뒤편에서 보고 있던 카르멘이 함성 속에서 속삭였다.
“신황.”
라파엘로도 중얼거렸다.
“신군 총대장.”
심지어 알체스터까지 중얼거렸다. 유진은 그 칭호들을 도저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폐의 마왕과 판데모니엄이 전쟁을 위해 국경선에 내려앉았고, 마왕성 바벨은 하늘에 떠올랐습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아니면 전장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300년을 이어온 약속의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세상을 위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세상보다는 그냥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싶습니다. 3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똑같습니다.”
그럴듯한 말보다는 대놓고 말하는 편이 낫다.
“칼 한 번 쥐어본 적 없는 당신들에게 칼을 쥐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것보다는 세상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게 더 도움이 됩니다.”
이건 협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합의 승리를.”
조용했다.
“내가 유폐의 마왕을 죽이는 것을.”
함성은 어느새 멈췄다.
“내 승리를 기도하십시오.”
유진은 홱 몸을 돌렸다. 망토를 놓고 입술을 벌리고 있던 크리스티나와 눈이 마주쳤다. 못 본 척했다. 도망치듯 후다닥 난간에서 멀어졌다.
연설이라고도 할 수 없을 기도 권유가 끝났다.
ㅡ와아아아아!
하지만 함성과 함께 신앙이 폭발했다.
빌어먹을 환생 573화
신군
“연설에서 협박하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내가 언제 협박했어?”
옥상을 떠난 즉시 아니스가 핀잔을 줬지만, 유진은 진심으로 억울함을 느꼈다. 연설의 내용을 지적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결코 ‘협박’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칼을 쥐기 싫다면 승리를 기도하란 말이 협박이 아니면 뭡니까?”
“그건 네가 너무 부정적으로 들어서 그런 거야. 나는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그리고 승리를 기도하란 말이 대체 뭐가 잘못됐단 거냐?”
“태도가 너무 재수 없어.”
가만히 듣고 있던 세냐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승리를 ‘기도하십시오’가 뭐야? ‘해주십시오’라고 말해야지.”
“뭐가 다르단 거냐?”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야. 무릎 꿇고 청해도 모자랄 판에.”
“내가 뭐가 아쉽고 못나서 무릎을 꿇고서 청해? 어? 너는 내가 저 많은 신도들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이라도 뚝뚝 흘리면서, 제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외치길 바랐던 거냐?”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네 말을 들으니 살면서 한번은 보고 싶은 광경이기는 하네.”
“절대 안 해.”
유진은 걸치고 있던 붉은 망토를 벗으며 투덜거렸다.
“신성은 애걸해서 얻는 것이 아니야. 업적, 신화, 전설, 그런 것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신도들이 날 떠올리면서 곧장 연상할 수 있어야 신성이 깃든…….”
“그런 것치고는 승리를 기도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말했잖아.”
“그럼 패배를 기도해 달라고 하냐니까? 전쟁을, 싸움을 시작했으면 이겨야 할 것 아냐!”
벗은 망토를 둘둘 말아서 세냐의 얼굴에 집어 던졌지만, 당연히 세냐는 망토를 덮어쓰지 않았다. 그녀는 공중에 멈춘 망토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며 혀를 찼다.
“느려.”
“진짜 패고 싶네.”
“네가 자빠진 세 달 동안 이 세냐 님의 마법은 보다 완전해졌단 말씀이야.”
“언제까지 그놈의 세 달을 들먹일 셈이냐.”
“내가 들먹이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세 달이나 자빠진 사실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정말, 다시 생각해도 속이 쓰릴 정도라니까.”
마냥 놀리는 말은 아니었다. 유진이 기절한 세 달은 모두에게 있어서 불안과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모두 다 듣지 않았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눈치를 받고 있으니 유진도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연설이 될지도 모르는데, 조금 더 멋지고 웅장한…… 그런 연설은 할 수 없었던 겁니까?”
“최후의 연설은 무슨, 왜 재수 없는 말을 하고 그래? 내 성녀라면 나를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 아니냐?”
“무조건 고개만 끄덕거리며 찬송하고 찬배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요. 저는 당신의 성녀인 만큼 누구보다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연설 반응 좋았잖아. 안 그래?”
사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폭주하는 것처럼 확장되는 신앙과 신성은 유진 본인이 직접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그니션으로 강제로 그릇을 넓히는 것과는 다른 감각. 유진의 존재에 깃든 신성 자체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이 세상의 시작과 동시에 축적되어 온 신앙들이 유진에게 녹아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300년 전과 달리 세상의 ‘상식’ 자체가 달라졌다.
지금 세상에서 마족은, 마왕은, 헬무드는, 결코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 시대를 아는 유진과는 달리,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마족에 대한 적의와 증오는 결코 크지 않다.
300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인간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유폐의 마왕의 치정. 당장 전시 태세가 선포되었음에도, 헬무드의 이민자들은 거의 이탈하지 않았을 정도다.
오히려 대륙에 사는 인간 중에서는 헬무드가 전쟁에 승리하기를 바라는 자들도 적지 않을 정도다. 아예 헬무드가 대륙 전체를 정복하기를 바라며, 인간이 유폐의 마왕 휘하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멸망의 마왕에 대한 사정을, 약속의 끝을 모르는 그들 딴에는, 인간에게 있어 이상향과 다름없던 헬무드의 생활을 누리고 싶은 모양이다.
‘시간이 많지 않아.’
연합과 신군이 빠르게 조직될 수 있던 것은 유진 라이언하트란 구심점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헬무드가 먼저 전시 태세를 선포하고, 판데모니엄과 바벨이 통째로 날아와 최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유폐의 마왕이 ‘침략자’가 되었기에, 침략을 바라지 않는 대륙이 연합이 될 수 있었다.
최전선에서 긴장이 지속될수록 급조된 연합에서 삐걱거림이 나타날 것이다. 간부들이 유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따르는 것과 상관없이, 민중은 불안을 품게 될 것이다.
지금의 연합과 신군은 반전(反戰)에 대한 여론을 묵살하고 있다. 반전 여론이 전국적으로 퍼져 버리면 전면전을 벌이기도 전에 신군의 전력이 약화 된다.
‘또 기절할지도 모르고.’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이그니션은 몇 번이고 쓸 것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누아르 때처럼 연달아 이그니션을 써서 간신히 승리할지라도, 몇 달이나 정신을 잃어버리면- 자칫하다가는 기절한 사이에 멸망의 마왕이 눈을 뜰 것이다.
“어쩔 수 없나.”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먼 하늘에 떠 있는 마왕성 바벨이 창문으로 보였다.
* * *
네란의 성벽의 망루에서 국경지대의 최전선을 보았다. 마차를 타고도 며칠은 걸리는 대평원. 본래 저 너머에는 알카르트 교구가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정말 그런가?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먼 거리지만 유진의 눈은 판데모니엄의 정경이 똑바로 보인다.
판데모니엄에는 예전에도 가보았다. 다른 왕국의 수도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된 도시. 수십 층에 달하는 콘크리트 빌딩. 도시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모두를 감시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마력을 에너지로 삼는 기계 물고기. 마차 대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거리를 청소하는 골렘 등, 몇 년 전 보았던 판데모니엄은 제벨라 시티 이상으로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도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진의 상식은 저 판데모니엄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99층에 달하는 마왕성 바벨은 300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하늘에 떠 있다. 마찬가지로 판데모니엄 또한 몇 년 전에 보았던 모습에서 변모했다.
하지만 300년 전과는 다르다.
시커멓고 높은 성벽의 위를 빼곡하게 채운 장치들이 보인다. 대포와는 다르다. 커다란…… 금속제 막대기 같은 것이 이쪽을 겨누고 있다. 그 위의 하늘에는 도시를 감시하던 에어로 피쉬들이 조용히 날고 있다.
성벽의 안쪽을 들여보았다. 몇 년 전 보았던 도시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빌딩은 다른 건물이 되었다. 마력 자동차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금속의 장갑을 두르고 길쭉한 포신 같은 것을 달고 있는, 이형(異形)의 탈것들이 잔뜩 있었다.
“전차?”
저런 형태의 전차는 처음 본다. 전차만 있는 것도 아니다. 뭔지 모를 기묘한 탈것들. 거리에는 마물과 마족이 득실거린다. 라비스타에 처박혀 있던 초대형 마물들을 나하마에서 몰살시켜놓지 않았다면, 그 마물들까지도 판데모니엄에 결집했을 것이다.
‘총전력.’
본래 수도에서 살던 이민자들이나 참전을 거부한 마족들은 죄다 피난시켰다. 지금 저 거대한 도시에는 전쟁을 위한 것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족과 마물은 당연히 모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와 탈 것들은…… 대체 뭔가?
모른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유진이 가진 신성의 하나인 ‘전쟁’이, 저 모든 것들에서 짙은 피비린내와 흉악함을 느꼈다. 저것들 모두가 전쟁을 위한 병기다.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저 모든 것을 만들어낸 것은 유폐의 마왕일 것이다. 헬무드가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이 발전을 이룬 것은 유폐의 마왕의 존재 때문이다. 헬무드 자체가 유폐의 마왕이 홀로 일으키고 이끌었으며 유지하는 제국이다.
‘신화시대에 저딴 것은 없었어.’
그렇다면 저 병기들은 ‘다른’ 시대의 것. 유폐의 마왕이 거쳐 온- 진즉에 멸망한, 아득한 고대의 병기. 헬무드의 문명 자체가 유폐의 마왕이 경험하고, 결국은 멸망해 버린 기술들로 이룩된 것이리라.
전쟁 시대에는 저런 병기가 없었다. 기껏해야 냉병기가 주류였고, 전투 마법사에 의한 포격을 기대하기 힘들다면 대포나 발리스타 따위나 동원하곤 했다.
왜, 300년 전에는 저런 병기를 동원하지 않았나. 그 이유는 유진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유폐의 마왕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멸망의 마왕이 존재하는 이상 대륙을 정복해 봤자 세상은 끝나 버린다. 애당초 정복과 군림은 유폐의 마왕의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폐의 마왕의 목적은 뭔가?
“야.”
곁에 선 세냐가 목소리를 냈다. 유진은 판데모니엄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서 세냐를 돌아보았다.
“위를 봐.”
세냐가 경직된 얼굴로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굳이 위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무언의 시선. 하지만 절대 고요하지 않은, 살벌하고 거대한 존재감.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 미동도 하지 않고서 떠 있는 마왕성 바벨. 성벽 위에 선 유폐의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다. 지금, 유폐의 마왕은, 유진을 보고 있다.
“하.”
저 시선에 유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유폐의 마왕의 시선은 결코 무감정하지 않았다. 지금 유폐의 마왕은, 확실한 ‘감정’을 가지고서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기대.
지금, 유폐의 마왕은, 무언가를 기대하듯이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전해지는 것은 시선뿐. 하지만 유진은, 조금의 권태와 무료가 존재하지 않는, 기대뿐인 시선에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유진과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잠시 서로를 보았다. 곧 유폐의 마왕이 빙글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망토처럼 이어진 사슬들이 유폐의 마왕의 몸을 감쌌고, 곧 유폐의 마왕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유폐의 마왕을 대신해 그림자가 치솟았다. 흔들리는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전 흑색 마탑주이자 현 유폐의 지팡이,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성벽 난간에 올라서서 아래를 보았다. 투명한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빙그레 곡선을 그렸다.
발자크가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추락하지 않고 하늘을 날았다. 판데모니엄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발자크는, 지금 유진과 세냐가 있는 네란의 성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새끼 뭐야?”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내뱉고 말았다. 대체 무슨 낯짝과 자신감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건가?
그런 반응은 오히려 평화로웠다. 유진의 옆에 서 있던 세냐는, 발자크가 이곳으로 날아오는 것을 확인한 즉시 검지 손가락을 뻗었다. 파직! 세냐의 손끝에서 마나가 맺혔다. 순식간에 압축된 거대한 마나가 손끝에서 번쩍였다.
ㅡ꽈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세냐의 손끝에서 빛이 쏘아졌다. 설마 세냐가 대뜸 마법을 쏘아댈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유진은, 입을 쩍 벌리고서 옆을 돌아보았다.
“왜?”
세냐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너 뭐야?”
“보면 알잖아. 발자크 저 새끼한테 마법을 쐈어.”
“왜?”
“이쪽으로 오려고 하는데 그냥 냅둬?”
“아니…… 그렇기는 한데…….”
“난 확실히 말했었어.”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세냐는 찡그린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발자크가 아크리온에서 나랑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연구할 때 말이야. 그대 확실히 경고해 뒀다고. 언젠가, 만약에, 적이 되어서 내게 싸움을 건다면. 그때는 무조건 죽인다고 말이야.”
발자크 루드베스가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인 이상, 언젠가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세냐는 발자크를 죽이지 않았다. 그때의 발자크는 적이라기보다는 아군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고, 한 명의 마법사로서 세냐를 열렬히 추종했다.
“꽤 훌륭한 마법사였지. 흑마법사가 아니라면 더 좋았겠지만, 흑마법사여도 뭐, 내 앞에서 흑마법사다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내버려 둬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훌륭한 마법사였어. 비원도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연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세냐의 시그니처인 ‘절대률’은 현존하는 모든 대마법사들의 마법의 집대성이고, 그중에는 발자크의 연구도 들어 있다.
“날 적으로 돌렸다면 그만한 이유와 자신감이 있어서일 것 아냐? 이 거리에서, 고작 이 정도 마법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라면 ‘적’으로 취급할 가치도 없지.”
방금 쏘아낸 마법은 세냐가 생각하기에는 가볍고 나약했다. 물론 그것은 세냐의 기준이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세냐가 쏘아낸 빛은 이미 하늘을 가로질러 발자크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판데모니엄의 성벽에 설치된 병기가 움직였다.
ㅡ꽈과광! 굉음과 함께 금속제 막대기가 쏘아졌다. 발리스타가 화살을 쏘아대듯. 저것은 도저히 ‘화살’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꽃의 꼬리를 그리며 쏘아진 금속 막대가 하늘을 갈랐다.
“저게 뭐야?”
세냐조차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놀란 소리를 냈다. 뒤편에서의 굉음에 당황한 것은 발자크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움찔하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급속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성벽에서 사출된 금속 막대가 발자크가 있던 곳을 지났다.
빠르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어지간한 마법보다 훨씬 빠르다. 위력은? 유진은 하늘로 부상한 발자크보다 저 고대의 병기가 가진 위력에 더 궁금증을 느꼈다.
“세냐, 발자크를 추격하지 말고 저거랑 부딪쳐 봐.”
기왕 쏘아진 것 위력을 파악해 두고 싶었다. 세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법에 부여한 절대률을 거두었다. 발자크를 추격하기 위해 요동치던 빛이 가라앉고, 그대로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격돌했다. 꽈아아앙! 하늘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아래의 지면이 뒤집히고, 이곳에까지 미미한 진동이 전해질 정도의 큰 폭발이었다.
“마법은?”
“건재해.”
세냐가 미간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폭발의 위력은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냐의 마법을 상쇄하고 소멸시킬 정도는 아니다. 저 폭발에는 세냐의 마법을 소멸시킬 정도의 격이나 신비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위력과 숫자다. 성벽을 빼곡히 채운 병기는 그 수가 수백 개는 넘어 보인다. 저것들이 일제히 쏘아진다면? 신군의 간부들은 저만한 위력의 폭발에도 보신이 가능하겠지만, 일반 병사들은 그럴 수가 없다.
“마법은 일단 거둬. 발자크를 공격하지 말라는 것 같으니까.”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발자크를 쫓았다. 그는 폭발의 반경을 벗어난 높이까지 부상하고서 다시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처음과 다른 점은, 발자크가 머리 위로 든 양팔을 열심히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공격하지 말라는 노골적인 수신호였다.
“여기 불러서 죽이자는 거야?”
“너 되게 죽이고 싶나 보다.”
“너는 안 죽이고 싶어?”
“나도 죽이고 싶기는 해. 하지만 죽이기 전에 얘기나 들어보자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쏘지 마십시오!”
팔을 흔드는 것으론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발자크는 그답지 않게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환생 574화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
네란의 성벽 앞에 도착한 발자크가 넉살을 떨었다. 그는 흐트러진 로브 자락을 가다듬은 뒤, 양팔을 공손히 두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유진 님, 세냐 님, 크리스티나 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셋은 물론이고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네란의 성벽 아래에는 신군의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다. 은광과 다른 신관들을 지도하던 중에 폭음을 듣고 급히 올라왔던 크리스티나는, 적의를 숨기지 않고서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인사나 하러 온 것입니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발자크에 대해 조금의 우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유진은 과거 아롯에서부터 발자크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다. 세냐는 ‘마법사’로서 발자크를 인정했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성녀들에게 있어서 발자크 루드베스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이자 당대의 유폐의 지팡이이며, 유폐의 마왕의 대리인. 그뿐이었다.
“하하, 그럴 리가 없지요. 인사라면 바벨의 성벽에서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발자크는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높은 하늘의 마왕성 바벨은 마치 일식처럼 태양을 가리고 있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거대한 그림자가 지상에 불길한 땅거미를 그렸다.
“제가 직접 이곳…….”
발자크는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성벽 아래를 보았다. 하우리아 해방전 때 같이 싸웠던 이들 모두가 저곳에 있다. 그때 유진을 따랐던 이들 중에서 신군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오직 발자크뿐이다.
“……저를 절대로 환영하지 않을, ‘적진’에 홀로 온 것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발자크는 ‘적진’이라고 말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 선언에 한때 발자크와 함께 청색마탑에서 수학했던 청탑주, 히리두스가 긴 탄식을 흘렸다. 히리두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아롯의 마탑주들은 짙은 감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적진이라.”
적탑주 로베리안이 뺨을 씰룩이며 내뱉었다.
그는 아롯에 있을 적부터 발자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발자크가 흑마법사인 이상, 둘은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하지만 흑마법사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떠나, 발자크가 가진 마법적인 열정만큼은 존중하고 경의를 가졌었다.
“대화? 대화 좋아하네! 너 싫어하는 적진에서 뭔 놈의 대화!”
백탑주 멜키스도 참지 않고서 꽥 고함을 질렀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오메가 포스를 펼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당장에라도 발자크를 때려죽일 것처럼 적의를 내뿜었다.
“그만.”
모두를 진정시킨 것은 세냐였다. 그녀가 입을 열자 대기 중의 모든 마나가 정지했다. 멜키스가 은근히 펼치려던 마법도 마나가 정지한 세계에서는 발현되지 않았다. 멜키스는 화들짝 놀라고서 세냐의 눈치를 살폈다.
“여, 여신 언니, 언니가 나설 필요도 없어요. 제가 당장 저 배은망덕한 개놈을 땅에 처박…….”
“대화를 하러 왔다잖아.”
세냐는 멜키스를 돌아보지 않고서 말했다. 저 발언에 멜키스는 굉장히 억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바벨에서 내려오던 발자크에게 대뜸 선공을 갈긴 것은 세냐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발자크가 말한 ‘대화’에 어울려 줄 셈인가?
“좋아, 발자크 루드베스. 네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온 것이라면, 대화를 해주지. 하지만 네가 나와 대화할 자격이 있나?”
멜키스를 가로막은 주제에 정작 세냐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발자크는 사방에서 옭아 죄는 마나를 느꼈다. 이 공간의 모든 마나가 세냐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며 따르고 있다.
발자크는 그 경이로운 마법에 전율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미천한 흑마법사이자 미력한 마법사인 제게는 세냐 님과 대화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냐 님을 배신한…….”
“배신? 그건 틀려, 너와 내 사이에 ‘배신’을 논할 만큼의 관계는 없었으니까.”
“예, 세냐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세냐 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선을 그으셨었죠. 하지만 제 행동에 실망하신 것은 사실이시지 않습니까?”
“응, 맞아.”
세냐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발자크 루드베스. 나는 네 비원이 마음에 들었어. 그 비원은 굉장히 노골적이고 욕망적이지만 숭고하고 존엄하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네 비원이 인간으로서, 마법사로서 추구하던 것이었기 때문이야. 설령 네가 유폐의 마왕의 힘을 빌었을지라도, 네 열망은 순수하다고 생각했어.”
파직. 세냐의 주변에서 자색의 전류가 흘렀다.
“하지만. 네가 인간과 마법사가 아닌, ‘흑마법사’로서 비원을 추구한다면. 나는 널 좋아할 수가 없어. 내가 실망한 것은 그 때문이야. 결국 너는 추구하던 비원을 포기하고 유폐의 마왕의 수족 노릇을 하겠다는 건가?”
“저는 처음부터 타협했었지요.”
싸늘한 질책에도 발자크의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즉부터 자신의 한계는 절감했었습니다. 저 혼자만으로는 추구하던 비원을 이룰 수 없기에, 세냐 님의 말씀대로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후로 평생을 추구했고…….”
숙이고 있던 머리가 들렸다. 발자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바라던 비원에 비해 저 자신은 초라하고 나약합니다. 저는 결코 세냐 님처럼 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타협했습니다.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타협?”
“저는 세냐 님과 같은 신화를 쓸 수 없습니다. 전설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세냐 님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하하…… 전설적인 마법사는 될 수 없어도, 전설적인 흑마법사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설적인 흑마법사. 그 노골적인 선언에 좌중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세냐의 입장과 기분을 헤아려 침묵하던 유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분노와 적의를 드러내던 간부들은 이제는 세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발자크의 발언이 세냐의 뜻을 정면에서 반하는 것을 넘어서 모욕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세냐는 무어라 반응하지 않고 발자크를 뚫어져라 보았다. 에메랄드를 연상시키는 녹색 눈동자에는 보석이 그러하듯 감정이란 것이 말살되었다.
“그래?”
이윽고 세냐가 대답했다. ㅡ화악! 방금까지 세냐의 주변에서 파직거리던 전류가 사라졌다.
“그럼 너는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와서 대화를 청하는 거지?”
세냐가 웃으며 물었다. 표정만 그러할 뿐 세냐의 목소리와 감정에는 웃음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발자크는 무기체와 다름없는 건조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유폐의 마왕님의 대리인이자, 헬무드의 사절로 대화하기 위해 왔습니다.”
“내가 착각했네.”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네가 그런 자격으로 이곳에 왔다면, 나는 너와 대화할 이유가 없어. 널 공격할 이유도 없고. 그럴 가치가 없으니 말이야.”
“그 말씀은 세냐 님을 존경하는 저로서는 무척이나 괴롭군요.”
“네가 날 존경한다는 말은 가증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러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너를 존중하지 않아. 만약 네가 바벨에서 내 앞에 선다면. 나는, 존중과 예우 없이 치워 버릴 거야.”
“바벨에서?”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서 발자크를 노려보며 이죽댔다.
“굳이 바벨에서 치울 필요가 있나? 그냥 지금 치워도 될 것 같은데.”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만…….”
발자크는 난감하단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올렸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유폐의 마왕님의 대리인이자 헬무드의 사절로 찾아온 것입니다. 물론 제 모든 자격은 유폐의 마왕님의 인정이 있으십니다. 만약 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글쎄. 내가 지금 널 죽인다고 해서 유폐의 마왕이 화를 내진 않을 것 같은데.”
“사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제가 죽어도 유폐의 마왕님은 조금의 분노도 느끼지 않으시겠지요.”
“그럼 죽여도 되겠네?”
“유진 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저로서는 피할 방법이 없지요. 하지만 우선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좋아. 유언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유진은 흔쾌히 대답했다. ‘유언’이라는 말에 발자크의 표정은 더욱 난감함을 담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성벽을 가리켰다.
“제게 주실 의자 따위는 없으실 것 같으니, 어떻습니까? 조금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아. 마지막 부탁 정도는 들어줘야지.”
이번에도 유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발자크의 표정이 더더욱 난감해졌다. 발자크는 짧게 헛기침을 한 뒤에 몸을 돌리더니, 먼저 성벽을 걷기 시작했다.
“유진 님.”
“혼자면 돼.”
크리스티나와 다른 간부들이 따라붙으려는 것을 가볍게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걸음을 떼기 전. 유진은 세냐를 힐긋 쳐다보았다.
“마음대로 해.”
세냐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노와 짜증, 실망. 그런 감정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 대답을 듣고서 유진은 발자크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둘이서 걸었다. 발자크의 걸음은 은근히 빨라서, 조금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어느새 꽤 먼 곳을 걷게 되었다. 힐긋 뒤를 돌아보니 간부들의 모습이 작게 보일 정도였다. 물론 이 정도 거리는 문제 되지 않는다. 간부들의 실력이라면 전원이 순식간에 이곳에 도달할 수 있다.
“언제까지 걸을 생각이냐? 설마 쟤들이 아예 안 보일 때까지 걸으려는 거야?”
유진은 발자크의 뒤통수를 보며 이죽댔다.
사실 간부를 부를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발자크는 유진의 간격 안에 있다. 발자크가 어떤 수작을 부리건, 유진은 순식간에 발자크를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유진과 발자크의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실력과 격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유진은 더 이해되지 않았다. 유진의 ‘힘’은 발자크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굳이 유폐의 마왕에게 붙어먹은 것인지 말이다.
유폐의 마왕의 성격상, 발자크가 참전을 거부한다면 결코 강요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발자크는 바벨에 들어갔다. 유폐의 마왕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나? 그럴 리가 없다. 유폐의 마왕은 결코 어전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상 발자크는 바벨의 선봉으로, 용사를 가로막다 죽을 운명이다.
“유진 님.”
앞서 걷고 있던 발자크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는 걸음을 늦춰 유진의 옆까지 다가왔다. 이 새끼가 대체 뭔 수작일까?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살려주십시오.”
“……뭐?”
불쑥 튀어나온 말에 유진의 뺨이 씰룩거렸다.
발자크의 말을 잘못 듣지는 않았다. 똑바로 들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온 것이다. 유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발자크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말한 거냐?”
“살려달라고 말했습니다.”
발자크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는 유진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를 이곳에서 죽이지 말고, 살려서 돌려보내 주십시오.”
“……내가 왜?”
진지한 얼굴, 흔들림 없는 목소리. 그래서 유진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헛웃음을 지으며 묻자 발자크가 말을 이었다.
“유진 님이 작은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제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세냐 님은 저를 오늘, 이곳에서 죽일 생각이 없으시니까요.”
“그건 세냐의 생각이지 내 생각은 아니지. 그리고 간부들 전원이 널 오늘 여기서 죽이고 싶어 할걸. 그래, 뭣하면 투표라도 해볼까? 다수결로 네 처분을 결정하자고. 아마 만장일치로 네 처형이 나올 거다.”
“물론 그렇겠죠.”
“알면서 왜 온 거냐? 무슨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온 건데?”
“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씀드렸듯이 유폐의 마왕님께서 제게 사절의 역할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에 유폐의 마왕님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무슨 뜻?”
“개전의 시기에 대해.”
“허허…….”
머뭇거림 없이 돌아온 대답. 유진은 짧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꽈득. 감정을 따라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 주먹에 핏줄이 돋았다.
“개전이라. 그래, 지금은 대치하고 있을 뿐이니까. 유폐의 마왕은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나 보지?”
“애당초 유진 님과 유폐의 마왕님이 나눈 약속이 그것이지 않습니까? 유진 님이 바벨에 오르시기 전까지, 유폐의 마왕님은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실 겁니다.”
발자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바벨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유진 님이 저곳에 도달한 순간, 전쟁은 벌어집니다. 현재 판데모니엄에 집결한 전 병력이 대륙을 침공하겠지요.”
“그러겠지.”
“지금으로서는 병력의 대부분은 마족입니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헬무드의 여론도 바뀌겠지요. 전쟁을 거부하는 마족들도 멀리서 풍기는 피의 냄새에 본능적으로 기울게 될 겁니다. 카마쉬의 죽음 이후로 은둔한 거인들도 참전할지도 모르죠. 신군 간부들의 실력은 저도 잘 압니다만, 일반병의 질은 마군이 압도적일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마족과 인간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발자크의 발언은 전쟁이 길어졌을 때의 경우다. 유진은 전쟁을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이 전쟁은 길어야 하루나 이틀이면 끝날 것이다.
“유진 님.”
발자크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저는 어느 쪽이건 희생을 최대한 줄이면 좋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발자크는 손을 들어 판데모니엄의 성벽을 가리켰다.
“아까 세냐 님이 저를 공격하셨을 때. 판데모니엄의 대응은…… 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유폐의 마왕님의 의도도 물론 아니었죠. 성벽의 병사가, 저를 보호하기 위해 발사한 것입니다. 저 미사일의 위력은 유진 님도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미사일?”
“예. 앞에 여러 이름이 붙기는 합니다만, 저것은 미사일이라고 합니다.”
유진은 기초 공격 마법 중에 하나인 ‘매직미사일’을 떠올리면서, 판데모니엄에 설치된 ‘미사일’을 돌아보았다. 도저히 같은 이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저 미사일은 신군과의 전면전에서는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위력이 너무 강하니까요. 하지만. 유진 님이…… 유폐의 마왕님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순간. 판데모니엄의 모든 미사일은, 대륙 모든 국가를 향해 발사될 겁니다.”
“뭐?”
“유진 님이 패배한 순간에 저 모든 미사일은 대륙을 불태울 겁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국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수도를 노리고, 순차적으로 인구수가 많은 도시까지 발사될 겁니다. 거리는 문제가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땅이 저것의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으니까요.”
“…….”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죽인다…… 그것은 불가능하지요. 인간의 말살은 목적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피해가 나오겠지만, 인간은 살아남을 겁니다. 거기서 다시 인간은 선택해야 할 겁니다. 헬무드에 투항하든지, 증오와 복수심으로 맞서 싸우다가 죽을 것인지.”
발자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너무나 잔혹한 일이지요. 저는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만약 신군이 항복한다면, 대륙이 불바다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헬무드는 투항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유진이 입을 열었다.
“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항복을 권유하는 겁니다.”
돌아온 대답에 유진은 눈을 끔벅거렸다.
“하하하!”
결국 웃음이 나왔다.
항복이라니! 당연히 저것은 유폐의 마왕과 상관없는, 발자크 개인의 권유다. 유폐의 마왕이 항복을 권할 이유 따위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유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한참을 그렇게 웃자,
“가라.”
한참을 웃던 유진이 손을 뻗었다. 발자크는 움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유진의 손은 발자크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 높이 뜬 바벨을 가리키며, 낄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 죽일 테니까 가라고. 바벨로 가건, 다른 곳으로 도망치건.”
“……유진 님.”
“내가 널 살려주는 것은, 네가 너 나름대로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그것이 내게 죽을 각오를 하고서 내려와- 항복을 권하는, 머저리 같은 방식일지라도 말이지.”
“…….”
“그러니까 살려서 보내주마. 이번에만, 말이야.”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는다. 살려서 보내준다. 이번만이다. 이렇게 살려줬는데도 바벨에서 만난다면, 그때는, 유진이 나서기 전에 세냐가 발자크를 죽일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발자크가 다시 물었다.
“유진 님의 성격상 항복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래도 다른 이들과 상의 정도는 할 수 있는 안건이지 않습니까?”
“무의미해서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항복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어. 유폐의 마왕이 저 미사일인지 뭔지를 쏴갈기건, 쏴갈기지 않건, 내가…… 유폐의 마왕을 넘지 못하는 이상. 전부 다 끝나 버릴 테니.”
“…….”
“아, 그래. 개전의 시기……를 물어봤지. 그래, 한 달 뒤.”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한참을 웃다가, 의미를 모를 말을 하고, 별 고민도 없이 개전의 날을 정했다.
발자크는 당황하여 유진을 보았다. 하지만 유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
의미를 모를 대답. 하지만 발자크는 저 대답을 통해 무언가를 유추할 수 있었다.
하우리아에서 글러트니로 포식했던 괴물. 불길한 마력. 멸망의 마왕. 위대한 베르무트가 맺었던 약속.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유폐의 마왕.
“한 달 뒤에, 바벨에서 뵙겠습니다.”
항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항복할 수 없는 것이다.
유폐의 마왕을 넘지 못하면 세상이 멸망한다.
그것을 이해하고, 발자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늘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빌어먹을 환생 575화
“왜 보내준 겁니까?”
“한 달?”
동시에 질문들이 날아왔다. 무엇부터 먼저 대답해야 하나? 유진은 순간 말문이 막혀서 눈동자만 끔벅거렸다.
“왜 보내준 것이냐 물었습니다.”
“한 달이라니! 너무 빠르잖아!”
눈을 끔벅이는 동안 재촉이 이어졌다. 간부들도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표정에는 의문과 당황이 그득했다.
“일단 진정들 해봐.”
유진은 일단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만류에 나섰다. 그러지 않고서는 가까이 다가온 세냐와 아니스에게 한 대씩 얻어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씩 설명할 테니까, 세냐, 일단 마나는 가라앉혀. 그리고…… 크리스티나 너도, 플레일은 내려놓자. 응?”
눈을 얇게 뜨고서 노려보는 것은 크리스티나가 아닌 아니스지만, 시엘을 제외한 간부들은 아니스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예.”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아니스는 일단 플레일을 내려놓았다. 세냐도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마나를 가라앉혔다. 그러고 나서야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보내준 이유는 보내줘도 될 것 같아서다.”
“저도 하…… 유진 님을 때려도 될 것 같은데, 때려도 되겠습니까?”
내려놓았던 플레일에 다신 손이 올라갔다. 유진은 움찔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정말로. 보내줘도 될 것 같아서 보내줬어.”
“그렇게 판단한 이유에 대해 묻는 겁니다.”
“발자크는 놈 나름대로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거든. 놈이 유폐의 마왕에게 붙은 것은 상황이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그 위치에서 전쟁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래서. 발자크 루드베스를 죽이지 않겠다는 겁니까?”
“아니.”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자비를 베풀어 기회를 준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도 해주었는데, 만약 발자크가 바벨에서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때는 내가 죽일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냐가 내뱉었다.
“어차피 나는 오늘은 살려서 돌려보낼 생각이었어. 발자크에게 인의가 있고 말고는 상관없어. 녀석이 유폐의 지팡이가 되어서, 유폐의 마왕을 위해 바벨에 있겠다면. 마법사로서의 비원을 포기하고 유폐의 지팡이에 몰두하겠다면. 나는, 마법의 주관자로서 저 빌어먹을 바벨에서 녀석을 죽여버릴 거야.”
마나는 가라앉았지만 목소리는 살벌했다. 저 발언에 간부에 포함이 된 대마법사들이 선망 어린 눈으로 세냐를 보았다. 세냐가 폴폴 흘리는 살기를 떠나, ‘마법의 주관자’라는 말에 홀린 모양이었다.
“언니, 저도 함께하겠어요. 저도 언니와 함께 바벨에서! 유폐의 마왕에게! 고금 최강의 정령사의 힘을 보여주겠어요!”
멜키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의욕은 훌륭했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바벨에는 저와 세냐, 크리스티나만 갈 겁니다.”
“어째서!”
“멜키스 님이 고금 최강의 정령사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만, 바벨에서는 그 잘난 정령술을 뜻대로 쓸 수 없을 테니까요.”
바벨은 유폐의 마왕의 권능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는 장소다. 물론 유진은 300년 전에 어전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때의 전투가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세냐와 아니스, 모론에게 들어두었다. 당시의 세냐는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대부분의 마법이 봉인 당했었고, 템페스트도 거의 활약하지 못했었다.
“멜키스 님은 지상을 맡아주세요. 가능하다면 판데모니엄 성벽 좀 치워주시고.”
“성벽?”
돌아온 질문에 성벽에 설치된 미사일에 대해 설명했다. 대륙 모든 국가를 겨누고 있다는 말에 간부들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다, 당장 피난령을……!”
호네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군의 간부 중에서 전투에 참전하는 왕족은 호네인과 아만뿐. 직접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만의 표정도 굉장히 어두웠다.
“의미가 있소? 유진의 말대로라면 저 미사일이란 병기는 대륙 전역을 폭격할 수 있다는데.”
이바타의 말에 아만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지라도 시민들을 도시에 남겨둘 수는 없네.”
“정 피난해야 한다면 사마르로 보내시오. 대수림의 땅은 굉장히 넓고, 라이언하트의 본가를 제외한다면 대륙에서 가장 마나가 풍부한 곳이오. 대수림을 주요 피난처로 삼고, 대마법사님들이 나서서 방어 결계를 구축하면 될 것 같소.”
이바타의 말에 모두가 의외란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바타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들의 의미를 깨닫고서 눈썹을 찡그렸다.
“굉장히 모욕적인 시선이로군……. 숲에 사는 원주민이라고 해서 야만적이고 무식한 것은 아니오.”
“그 정도로 심한 생각은 안 했네.”
“아무튼, 그래야 한다면 대수림으로 오도록 하시오. 다만 피난령을 내릴 때 폭격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괜히 불안과 혼란을 증폭시킬 테니.”
원주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성적인 발언에 유진은 짝짝 박수를 쳤다.
“무슨 의미지?”
“오~ 이바타, 똑똑한데~”
순수한 뜻의 칭찬. 이바타는 무어라 반응할지 알 수가 없어서 눈썹을 씰룩였다. 그도 성격이라면 어디서 꿀리지 않을 불같은 사내였지만, 그렇다고 유진을 상대로 불같은 성격을 작렬시킬 수는 없었다.
“성벽을 치우라는 건 뭐야? 이 고금 제일이자 최강의 정령사, 멜키스 엘하이어 님에게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것이지?”
사안의 심각성과 무거움을 알게 된 멜키스가 으스대기 시작했다.
“멜키스 님의 그 잘나고 대단한 인피니티 포스…….”
“그건 정령왕 세 명일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오메가 포스야.”
“예…… 오메가 포스로 성벽의 미사일을 전부 파괴해 달라는 겁니다. 기왕이면 아예 판데모니엄에 쳐들어가서 쓸어버리시든가.”
“이 멜키스 님보고 적의 본거지에 쳐들어가서 날뛰라는 거야?”
“두려우십니까?”
“기뻐서 그래……!”
멜키스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다.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고 명예욕도 넘치는 멜키스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가 결정적이란 것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대수림이 넓기는 하지만, 대륙 모든 피난민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해. 각국에도 피난처는 마련해야 한다고.”
“그건 왕들이 알아서 하겠지.”
“넌 좋겠다, 대충 말하면 남들이 알아서 해주잖아.”
“누가 나보고 성황에 총대장 자리 앉히래? 마왕 잡으라고 앉힌 자리잖아, 마왕만 잡으면 되지 뭘.”
세냐가 눈을 흘겼지만 유진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각자 잘하는 것과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정무 같은 것은 유진이 절대로 잘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계 만드는 것도 나는 잘 못 하니까, 세냐 네가 대마법사들 데리고 가서 알아서 해.”
“너도 대마법사잖아.”
“나는 요즘 내가 마법사가 맞기는 한가 싶거든. 내가 어딜 봐서 마법사냐? 시그니처 있으면 마법사야? 그 외 마법은 거의 쓰지도 않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하던 유진은 움찔하고서 로베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 스승인 로베리안 앞에서 자신의 마법을 부정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사람에게는 각자 맞는 옷이 있는 법이지요. 유진 님의 전투 방식이 순수 마법사에 어울리지 않을 뿐입니다.”
“그…… 래도 시그니처는 항상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예. 사실 제가 칼 휘둘러서 하는 것이 마법과 큰 차이가 없기도 하고요. 그냥,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계 같은 것은 잘 못 한다~ 이 말입니다.”
열심히 달래듯 말하니, 시무룩했던 로베리안의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모론 님은 어떡해? 안 불러도 되는 거야?”
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백염식의 성취와 더불어 유진에게 세례도 받았기에, 지금의 시엘은 대륙 최북단까지 암전의 마안을 연결하는 것이 가능했다.
“불러야지. 내가 바벨에 들어간 뒤에 신호를 보낼 테니까, 그때 맞춰서 불러와.”
유폐의 마왕과의 결전에서는 가진 패를 아껴서는 안 된다. 혼자 싸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지금의 모론은 유진의 화신이자 대전사.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전력이다.
“한 달은 너무 촉박하지 않아?”
세냐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물론 우리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한 달보다는 여유가 있잖아.”
“한 달보다 늦어도 변할 것이 없잖아. 오히려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불안이 커질 거다. 나한테 그건 좋지 않아.”
“한 달…….”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찬란한 사자여. 나는, 우리에게…… 아니, 세상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의미는 얼추 이해하고 있다. 함께 대수림에 다녀왔으니 말이다.”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와 만났을 때. 카르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모든 대화는 듣지 않았지만, 하나의 시대가 멸망을 맞아 지금의 시대에 도달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간부 중에서 나를 제외하고서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없다. 나조차도 완전한 진실은 알고 있지 않다. 나는, 우리에게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음…….”
“우리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원이다. 우리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이곳에 있다.”
카르멘의 눈에 강한 결의가 담겼다. 다른 간부들도 똑같은 열망을 담아 유진을 보았다.
“하긴, 숨겨서는 안 될 일인가.”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라이언하트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이 갖는 의미와- 약속의 끝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다.
언젠가는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숨겨서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하면 세상이 멸망합니다.”
유진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승리한다고 해서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패배한다면 유폐의 마왕이 먼저 멸망시킬 것이고, 승리한다면…… 멸망의 마왕이, 그 이름처럼 세상을 멸망시킬 겁니다.”
좌중은 침묵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내뱉는 어조에는 조금의 격정도 없었다. 그는 당연히 일어날 일을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유진은 몇 달 내에 반드시 찾아올 멸망에 대해 말했다. 이전의 세계가 몇 번이나 멸망한 것에 대해 말했다. 자신이 고대의, 신화시대에 살았던 전쟁신 아가로트의 환생이란 것도 말했다. 300년 전에 멸망했어야 할 세상이 지금까지 유예를 얻은 것이,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란 것도 말했다.
“왜 유폐의 마왕이 내 패배와 동시에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 개자식의 의중은 파악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놈은 굳이 갈라서 말한다면, 멸망을 거부하는 쪽입니다.”
그렇지만 유폐의 마왕 본인은 멸망의 마왕과 맞서지 않는다. 아마 맞설 수가 없는 것이라고,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폐의 마왕은 몇 번이나 세상의 멸망을 보았고, 다음 세상으로 넘어왔다.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멸망의 마왕에게 맞서다가 자칫해서 자신이 죽기라도 하면…….
……죽기라도 하면? 유폐의 마왕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 오직 그것을 바라고 영원을 살아오고 있다면, 대체 무엇이 유폐의 마왕을 살게 하는가? 왜 유폐의 마왕은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을, 멸망의 마왕의 소멸을 바라는가?
“나는 유폐의 마왕이 아군이라고 생각은 안 합니다. 그 자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왕이었고, 가장 먼저 세상을 침략했습니다. 이번만 해도 그렇고. 놈이 어떤 미련과 이유가 있어서 그 지랄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 달 뒤에 바벨을 오를 거고, 그 빌어먹을 어전에서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겁니다. 그다음에 멸망의 마왕을 죽일 거고.”
유진은 짧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한 달인 겁니다. 유폐의 마왕만 죽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대치가 길어질수록 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릴 테니.”
“세상을 구한다.”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멸망을 막는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함께 떨리는 손을 움직여, 품 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냈다. 점점 격해지는 떨림에도 간신히 케이스를 열어 시가를 잡았지만, 결국 손가락 사이에 끼운 시가가 부러져 버렸다.
“멋지구나…….”
카르멘은 부러진 시가를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카르멘은 자리에 벌떡 일어서고서 자켓을 어깨에 걸쳤다.
“가자.”
카르멘이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카르멘을 돌아보았다.
“어, 어디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으나, 해야 할 일들은 많다. 세상을 구한다. 멸망을 막는다. 위대한, 베르무트를, 라이언하트의 시조를 구한다.”
파스스! 카르멘의 손에 쥐고 있던 부서진 시가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곳에서 진실에 짓눌리거나 겁을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찬란한 사자가 그리는 찬란한 미래를 위한 초석이자 전쟁과 빛과 영광과 승리의 선봉이다. 우리는!”
카르멘은 불끈 쥔 주먹을 모든 간부의 앞에 들어 올렸다.
“전쟁을, 승리를 위한 불꽃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앉아 있을 셈인가? 알체스터.”
“예…… 예?”
“검을 들고나와라. 대련이다. 그다음은 오르투스 경, 그대의 차례요.”
“왜 갑자기 대련을……?”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군, 오르투스 경. 우리 같은 기사에게 대련 외에 무슨 훈련이 필요하겠나?”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고서 홱 몸을 돌렸다. 그녀가 먼저 회의실을 나가버리자, 직접 지목받은 알체스터와 오르투스도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하나둘 간부들이 회의실을 떠났다. 카르멘의 웅장한 연설에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한다. 멸망을 막는다. 원래부터 ‘반드시’ 승리한다는 결의가 있었지만, 저 사명들은 결의를 더욱 필사적으로 바꾸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린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몇 번이나 세상을 끝내 온 멸망의 마왕마저 쓰러트려야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총대장은 나보다 카르멘 님이 하는 편이 낫지 않냐?”
모두가 떠나고 회의실에는 유진과 세냐, 성녀들만 남았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둘을 돌아보았다. 그녀들도 유진의 말에는 적극 동감했지만, 차마 고개를 끄덕거릴 수는 없었다.
“나도 간다.”
세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를 가?”
“잘나신 신군 총대장님께서 결계를 치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래서 결계 치러 간다!”
“다녀오고.”
유진은 주눅 들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너희는 왜? 결계 치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지금 시대의 신관들은 마족과의 전쟁 경험이 한참 부족합니다. 그에 관한 교육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알기나 합니까?”
아니스가 유진을 쏘아보며 내뱉었다.
“그리고 성수도 양산해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아십니까?”
“음…… 필요하면 말만 해. 내가 손목 몇 번 긋지 뭐.”
“차라리 팔다리를 자르고 호수에라도 들어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며칠 그러고 있으면 호수 전체를 성수로 바꿀 수도 있을 겁니다.”
“필…… 요하다면.”
더듬거리는 대답에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뇨, 그만두겠습니다. 하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한 달 동안 최대한 힘을 온존하는 것. 유폐의 마왕을 반드시 쓰러트릴 방법을 생각하는 겁니다.”
“음……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한 달을 말한 것이겠죠?”
“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
대답을 들은 아니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내뱉을 뻔한 심한 말을 간신히 참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 말은 간부들이나 신군의 앞에서는 말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안 하지. 전쟁에서 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나도 알아.”
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아니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는 가끔, 세상의 운명이란 것이 당신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 절망스럽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하기는. 나 믿잖아, 안 그래?”
“입이라도 닫고 있으면 나을 텐데…….”
히죽 웃는 얼굴을 본 아니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회의실을 떠났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야 유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한 달이라.”
창밖의 바벨을 노려보았다. ……이길 자신? 그런 것 따위, 가비드 때부터 희미했다. 무조건, 반드시, 이긴다, 그런 확신은 진즉부터 없었다. 이겨야 하니까. 그래야 하니까 싸워왔다.
이번에도 똑같다.
이겨야 한다.
그래야 한다.
이기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겨야 돼.”
유진은 바벨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한 달이 지났다.
빌어먹을 환생 576화
개전
“신이시여.”
경건한 부름.
유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일부러 의식하여 깊은 잠을 잤다. 심신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방금 눈을 떴는데도 눈꺼풀은 무겁지 않고, 정신도 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눈을 뜬 유진은, 정신이나 육체로나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나의, 신이시여.”
자그마한 속삭임.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바로 곁에서 들려 온 나직한 부름. 그 부름은, 유진은 먼 옛날을 떠올렸다.
“일부러야?”
불쑥 묻는 질문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 스스로도 방금은 우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억’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알지 못한다. 유진은 아련한 잔재를 지우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나 싶어서.”
“오늘의 유진 님은 그 어느 때보다 신이시어야 하니까요.”
크리스티나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 유진은 저 대답이 갖는 의미와 무게를 알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비단 저만 그리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유진 님. 나의, 신이시여. 신군의 모두가 그렇게 되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유진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의식한 것만으로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한 달, 목소리는 줄어드는 일 없이 계속해서 커져 갔다. 대륙 각지에서, 그리고 이곳에 모인 신군들에게서 전해지는 기도와 신앙.
오늘이 가까워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 달 동안 대륙은 바쁘게 준동했다. 미사일과 폭격에 대해 알리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의한 피난 자체가 시민들에게 공포를 주었다. 네란에 모인 신군은 개전이 머지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꼈다.
공포를 잊기 위해 신을 찾았다. 이 세상에서 신은 더 이상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세상에는 신이 굉장히 가깝다. 기도를 들어주고, 마왕과 맞서며,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줄 신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것을 알기에 기도는 끊이질 않았다.
“개전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속삭였다. 그녀는 목에 건 로사리오를 움켜쥐면서 고개를 낮추었다.
“모두가 유진 님의 호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오늘 같은 날은 흔쾌히 하겠다고 하십시오, 신이시여.”
낮췄던 고개가 다시 들렸다. 어느새 바뀐 아니스가 유진을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총대장인 당신이 개전을 선언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합니까?”
“자격이라면 세냐도 충분하고, 인망이라면 카르멘 님도…….”
“제발, 신이시여!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스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을 쏘아붙였다.
“그래.”
유진은 피식 웃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돌변한 분위기에 아니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침대에서 내려온 유진은, 아니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지. 이 시대의 끝이 될 수도 있는 날. 아니면, 끝을 바꿀 수도 있는 분기점.”
“……신이시여.”
“그렇지만 너무 경건하게 굴지 말자고.”
돌아온 말에 아니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설마, 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한심하게 군 겁니까?”
“긴장을 풀어주려고 한 것은 맞는데, 하기 싫은 것은 진짜이긴 해.”
“당신은 정말……!”
“내가 너의 신인 것도 맞고, 네가 내 성녀인 것도 맞아. 오늘이 중요하고 특별한 날인 것도 맞지. 하지만 그렇다고 각별하게 굴지 말자고.”
유진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자, 근처의 큼직한 항아리가 둥실 떠올랐다. 아니스는 유진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눈동자를 몇 번 깜빡였다.
“물러서 있어.”
“예?”
“물러서라고. 튈 수도 있으니까.”
대체 무엇이? 아니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유진이 시키는 대로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러는 동안에 떠올랐던 항아리가 앞으로 다가왔다.
유진은 즉시 손을 뻗어 항아리를 잡았다. 텅 비었던 항아리에 순식간에 물이 가득 차올랐다.
“뭘 하…….”
아니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진이 항아리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ㅡ촤아아악! 항아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냉수가 쏟아졌다.
“대체…… 대체 뭐 하는 겁니까?”
아니스가 기겁하며 물었다. 유진은 찬물에 젖어 푹 가라앉은 머리를 몇 번 털어낸 뒤에, 옷걸이에 걸친 흑암의 망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촤라락! 날아온 망토가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냉수마찰.”
“예?”
“정신도 새로 무장할 겸.”
찬물에 흠뻑 젖었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보송보송하게 말랐다. 유진은 양손으로 뺨을 찰싹 한 번 친 뒤에 아니스를 지나쳤다.
“가자.”
아니스는 문으로 향하는 유진을 쫓으며 눈을 깜박였다. 곧 그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하멜.”
“신이라고 추켜세우는 것보다 훨씬 듣기 좋구만.”
“정말이지, 저와 크리스티나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은 것이라면, 흐흠,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터인데.”
“나 방금 자다 일어났잖아. 씻을 겸 한 거야.”
유진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문을 열었다.
길게 이어진 복도에는 세냐와 대마법사들을 제외한 간부들이 도열해 있었다. 마법과는 관련이 없는 기사와 전사들. 유진은 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카르멘과 길레이드, 기온을 보았다.
“다들 잘 주무셨습니까?”
유진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잘 자려고 노력은 했지.”
길레이드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이 가까워질수록 긴장과 흥분으로 인해 잠을 못 자는 이들이 많았다. 신군 대부분이 그러했고,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대는 아득한 세월 동안 군림해 온 유폐의 마왕. 넘어온 세계들까지 생각한다면, 유폐의 마왕이 마왕으로서 군림한 시간은 가히 영원마저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잘 잔 것 같구나.”
“잘 자려고 노력했죠.”
넉살 떠는 대답에 기온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다른 간부들은 좀처럼 웃지를 못했다.
오늘로 전쟁이 시작된다.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는 바벨에 오를 것이고- 남은 신군은 지상에서 헬무드의 공세를 가로막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상의 전투는 두렵지 않다. 마족과 마물과의 싸움은 이미 하우리아에서 겪어보았다. 카르멘과 오르투스, 아이빅은 ‘마왕’과의 전투에서의 절망도 느껴본 경험이 있다. 지상에서의 전투가 아무리 험악할지라도, 여태까지의 전투보다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바벨이다. 바벨에 돌입한 유진 일행이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한다면- 지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그것만큼은 간부들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간부들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상대는 유폐의 마왕이다. 그 영원한 대마왕의 패배를, 간부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믿음이 부족하구만.”
전해지는 불안은 유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간부들 사이를 지나면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화륵. 심장 부근에서 신화(神火)가 피어올랐다. 그것만으로 복도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불안과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공기에 불꽃이 스며들었다.
“아……!”
이바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유진의 등을 보았다. 어느새 간부들을 지나친 유진의 존재가 어두운 밤바다의 등불처럼 느껴졌다. 유진이 앞을 걷고, 그 등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에 가라앉은 불안과 긴장이 사라졌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바타는, 유진의 등에서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그리고 유진이 다른 누군가의 등이 된 것만 같은. 기묘하게도 이바타는 그 감각을 낯설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하…….”
알체스터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쥐었다. 식은땀이 고여 있던 손은 어느새 메말라 있었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맞는 말이다. 유진의 패배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승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알체스터는 웃음을 삼키며 유진의 등을 보았다. 몇 년 전에 처음 보았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대한 등.
“찬란하구나.”
카르멘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곳의 간부들 중에서 오직 카르멘만이 태연했다. 그녀는 긴장과 불안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유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유폐와 멸망을 넘어 찬란한 미래에 도달하는 것에 자신의 드래곤 클로가 일조할 것을 확신했다.
“부족합니까?”
유진이 힐긋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에 있던 모든 간부들은 이미 동요 없는 얼굴로 유진의 뒤에 서 있었다.
“괜히 물어봤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복도의 끝에 있는 문이 저절로 열렸다.
이 건물은 네란의 성벽 위에 있다. 문을 열고 나온 유진은 곧장 성벽의 위를 걸었다. 뿌연 하늘.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먹구름에 태양이 보이지 않아, 하늘이 거무죽죽하다. 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힐긋 시선을 들었다. 저 구름 같은 것은 구름이 아니다. 이 일대의 하늘이, 유폐의 마왕의 마력에 뒤덮인 것뿐이다.
“날씨 엿같네.”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서 몸을 돌렸다.
ㅡ와아아아아!
시선을 내린 순간에 쩌렁쩌렁한 함성이 이어졌다. 이곳은 아직 전장이 되지 않았으나, 개전의 함성은 바로 앞에 있어 가깝다.
높은 성벽의 아래. 판데모니엄을 사이에 둔 평원에서 대치하고 있던, 대륙 전역에서 모인 신군 전원이 유진을 보고서 함성을 내질렀다.
“빨리도 온다.”
평원을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 속에서도 세냐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징조 없이 옆에 나타난 세냐가 유진을 흘겨보면서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괜찮다는데 잠이나 푹 자라고 들여보낸 것은 너였잖아.”
“이렇게 늦게까지 잘 줄은 몰랐지.”
“아직 정오야. 이 정도면 늦게 잔 것도 아니지. 그래서, 어때?”
유진은 세냐의 옆에 내려서는 대마법사들을 시야에 함께 담으며 물었다.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어.”
이 한 달 동안 가장 바쁘게 움직인 것은 세냐와 대마법사들을 필두로 한 마법병단이다.
그들은 사마르 대수림 전역을 세계수와 연결하여 강력한 방어결계를 구축했고, 각 왕국의 주요 도시에도 방어결계를 구축했다. 동시에 전장이 될 이곳 평원에 다양한 마법을 설치했고, 신군을 보조할 만한 마법 스크롤도 양산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신관들도 성수 양산과 신성마법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그 고생은 세냐와 마법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밤 중에 레헤인야르도 다녀왔고.”
모론을 불러내면 레헤인야르가 비어버린다. 누르의 출현을 인위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세냐의 마법이 필요하다. 덕분에 세냐는 아까까지만 해도 레헤인야르에 있었다.
“판데모니엄은?”
“텅 비었지. 후발대는 없는 것 같아. 우리 후방을 타격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허.”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앞을 보았다.
판데모니엄은 보이지 않았다. 평원의 끝도 안 보인다. 신군의 너머에 있는 것은, 마족과 마물로 이뤄진 대군이었다. 헬무드에서 사육하는 모든 마물이 이 평원에 모인 것만 같았다. 마족만 있는 것도 아니다. 군데군데 인간이 섞여 있다. 많지는 않지만 거인도 있었고, 수인도 몇몇 보였다.
“총전력으로 서로 꽝, 부딪치자, 이건가?”
“……유폐의 마왕에게 지상의 전투는 큰 의미를 갖지 않을 테니까.”
세냐는 시커먼 하늘의 바벨을 노려보았다. 만약 지상의 마군이 전멸할지라도. 유폐의 마왕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대륙을 휩쓸어버릴 수 있는 대마왕이다.
“나는 아니야.”
유진의 왼손은 아직 가슴에 얹어져 있다. 신화가 점점 더 거센 빛을 내뿜었다.
“이것이 전쟁이라면 나는 승리를 원해.”
가슴의 왼손이 떨어졌다. 유진은 모든 신군이 보는 앞에서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ㅡ화르륵! 왼손을 감싸고 있던 신화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유진은 씩 웃으며 불꽃을 하늘 위로 가볍게 던졌다.
화아아악! 높이 치솟은 불꽃이 폭발하듯 부풀었다. 마력에 뒤덮여 거무죽죽하던 하늘에서 검붉은 태양이 만들어졌다. 신화시대에 아가로트가 그러했듯, 유진은 자신의 신력을 빚어 태양이란 기적을 만들어냈다.
“아아아…….”
신군들은 함성을 내지르는 것을 잊고서 홀린 듯이 하늘의 태양을 보았다.
모두가 알고 있다. 저것은 태양처럼 보이지만 진짜 태양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의, 전장의 신군들에게 있어서 저 인조 태양은 진짜 태양보다 찬란했다. 가슴의 공포와 두려움을 잊기 위해 함성을 내질렀건만, 이제는 그런 함성을 내지르지 않아도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과 용기 같은 감정이 넘쳐 흘렀다.
“성역…….”
아니스가 감탄하여 유진을 돌아보았다.
누아르와 전투를 치를 때만 해도 유진의 성역은 이렇게 광범위를 덮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프로미넌스를 펼치지도 않고서, 평원 전체를 성역으로 만들어버렸다. 성역 내에서 신도들의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다. 부상은 빠르게 치유되고, 마나에도 신력이 더해진다. 저 태양이 떠오른 것만으로 신군의 전력은 몇 배나 상승하는 것이다.
“내 성격상 거창한 말은 못 하겠고.”
유진은 모든 신군의 시선을 받으며 손을 뻗었다. -화악! 네란의 성벽에 꽂혀 있던 라이언하트의 깃발이 유진의 손으로 날아왔다. 유진은, 하우리아에서의 진군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전군.”
끼릭, 끼리릭…… 손에 쥔 깃대가 불길한 소리를 발했다. 가득 불어넣은 마나가 불꽃이 되어 깃대를 휘감았다.
-꽈아앙!
유진의 손에서 깃대가 쏘아졌다. 공간을 관통하고 날아간 깃대는, 마군의 전열에서 가장 큰 거인의 몸을 관통했다. 관통한 순간에 터져 나온 불꽃이 거인의 몸을 폭발시키고, 그 주변의 마족과 마물이 폭발에 휘말려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살아서 봅시다.”
웃으며 건넨 말.
적진의 한복판에서 라이언하트의 깃발이 펄럭였다.
빌어먹을 환생 577화
ㅡ와아아아아!
신군이 함성을 내질렀다. 살아서 보자는 말. 유진은 거창하고 대단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신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군은 자신들의 총대장이 300년 전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안다. 그는 과거 위대한 베르무트와 함께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마왕과 맞선 대영웅이며, 지금 시대에서 환생하여 성검의 선택받은 용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용사마저 넘어서 신좌에 올랐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자리하고 가호하는 이 전장은 신화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늘에 떠오른 검붉은 태양을 보라. 살아서 보자는 말과 더불어, 전장을 밝히는 저 태양은 기적이자 신의 가호다.
“가장 필요한 말을 해주는군.”
카르멘이 앞으로 나섰다.
폼체인지. 나직이 내뱉은 중얼거림은 신군뿐만 아니라 반대편의 마군에게도 들렸다. 그들은 대뜸 날아와서 진영에 구멍을 뚫고서 처박힌 라이언하트 깃발에 악을 쓰다가, 뜬금없이 들려 온 ‘폼체인지’라는 말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촤라락! 걸치고 있던 코트가 휘날렸다. 제복 안에 입은 전용 엑시드가 가변하며 카르멘의 몸을 감쌌다. 본래 엑시드의 착용, 카르멘에게 있어서 ‘변신’인 이 과정은 3초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카르멘은 일부러 변신의 과정을 늦췄다. ‘필요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진의 발언이 신군의 사기를 충전시킨 것처럼, 카르멘도 자신의 변신이 신군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이 소름 돋을 만큼 멋진 변신을 모두에게 천천히 보여주고 싶었다. 곧 으깨 죽일 저 많은 마군에게도, 그들에게 최후를 줄 잔혹한 사신(死神)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사신…….”
카르멘은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철컥, 철컥……! 몸통부터 시작된 변신이 팔다리로 뻗어갔다. ㅡ부족하다. 카르멘은 자신의 팔다리를 뒤덮는 엑시드의 형태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 전용 엑시드의 이름은 백염룡(白炎龍).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이름.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는 백염식의 별을 합일하여 새로이 우화했다. 라이언하트의 은사자이자 백염룡이라 불리었던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더 이상 없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그림 리퍼.”
엑시드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밤처럼 죽음처럼 완전히 검게 물든 엑시드가 카르멘의 전신을 덮었다. 카르멘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난간 위에 올라섰다.
“가라.”
카르멘은 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틀리군.”
그림 리퍼의 낫처럼 날카로운 손가락이 시가를 들었다. 카르멘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시가를 들었던 손가락으로 하늘을, 유폐의 마왕성, 바벨을 가리켰다.
“다녀와라.”
살아서 보자는 말의 화답으로 이 이상의 말은 없을 것이다. 가기만 해서는 안 된다. 가서, 돌아와야 한다. 평소라면 카르멘의 언동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버렸겠지만, 지금의 유진은 그럴 수 없었다. 저 말에 담긴 의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예.”
그래서 유진은 그렇게 대답했다.
ㅡ화륵! 유진의 등 뒤에서 프로미넌스가 치솟았다. 아직 공명하지 않은 크리스티나도 똑같이 빛의 날개를 펼쳤다.
“부탁할게.”
세냐는 곧장 날아오르지 않고 대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멜키스가 앞에 나섰다.
“걱정 말아요, 이 멜키스 엘하이어가 훌륭히 역할을 해낼 테니까요.”
“만에 하나 교신이 끊어진다면, 예정대로 돌입하겠습니다.”
로베리안이 바벨을 힐긋 보면서 말했다. 당장 간부들은 지상을 책임지기로 했지만- 최악의 경우엔 그들도 바벨에 돌입하기로 했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세냐가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그녀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올려보는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보고서 씩 미소 지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알았지?”
“네……!”
두 꼬마는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지상 전투에는 메르와 라이미르아도 참가한다. 꼬마의 모습이라고 논외 하기에는 둘의 전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드래곤인 라이미르아는 마이스의 시그니처와 합일하여 공중전의 주요 전력이 될 것이고, 메르는 세냐와의 교신을 도맡으면서 전장을 해석하며 마법병단을 보조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뭔 일 날까 봐 걱정되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우리가 겪을 일보다는 나을 걸.”
괜히 지상을 힐긋거리는 유징네게 세냐가 핀잔을 주었다.
“하긴, 그렇겠지.”
그렇게 대답하고서 마군 쪽을 살폈다.
판데모니엄 성벽에 설치된 미사일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성벽 안쪽에 있던 뭔지 모를 탈것과 병기들은 마군의 뒤에 배치되어 있다. 혹시 먼저 진군해 오지 않을까 싶어서 깃발을 던졌던 것인데, 진영에 만들어 준 커다란 구멍도 어느새 다른 부대로 메워져 있었다.
놈들은- 아직 진군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살벌한 시선으로 유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진이 바벨에 돌입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진한 살의를 흘리는 것이 선봉의 검은 안개다. 대장인 가비드는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검은 안개를 두르고서 마군 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마력이 더 커졌군. 유폐의 마왕인가.’
상위 서열의 마족들이 유폐의 마왕에게 직접 마력을 부여받은 것이 몇 년 전. 서열에 소속되지 않은 검은 안개는 당시에 제외되었다고 들었는데, 전쟁을 준비하면서 새로 마력을 부여한 모양이다.
그것은 꽤 까다롭다. 만약 검은 안개가 마족 서열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현재 최상위 마족들은 죄다 검은 안개로 채워졌을 테니. 본래부터 전투에 특화된 놈들이 유폐의 마력까지 얻은 것이다.
“300년 전보다는 낫네. 그렇지 않아?”
함께 지상을 살피던 세냐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300년 전. 바벨을 목전에 두고서 붉은 평원에 모였던 결사대. 지칠 대로 지쳐서 목숨 말고는 내걸 것이 없던 것이 결사대였다.
결사대는 이름처럼 대부분이 붉은 평원에서 죽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유진은 싸늘히 식은 눈으로 바벨을 노려보았다.
그래, 300년 전과는 달라야 한다. 그때 유진은, 하멜은, 바벨에서 죽었다. 끝내 어전에 오르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바벨이 점점 가까워진다. ㅡ화악! 등 뒤의 프로미넌스가 크게 펄럭이더니 불꽃의 깃털이 저만치 앞으로 쏘아졌다. 공간도약이 펼쳐졌다. 유진은 바벨의 정면을 지나서 보다 높은 곳까지 이동했다.
“꼭 정문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냐?”
위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세냐가 헛웃음을 흘렸다. 크리스티나의 곁에 바짝 붙여 펼친 마법이 둘을 유진의 곁으로 이동시켰다.
“300년 전에도 시도했었잖아.”
“그때는 바벨을 덮은 결계를 돌파할 수 없었으니 입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벨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 사슬이 보인다. 300년 전에는 저 사슬을 뚫지 못했기에 외곽 정문부터 돌파해야 했다.
“지금 바벨에는 발자크를 제외하고 방해꾼은 없을 겁니다.”
유폐의 방패는 300년 동안 공석이고, 가비드의 죽음 이후로 유폐의 칼은 임명되지 않았다. 친위대인 검은 안개도 지상에 나와 있으니, 어전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발자크 혼자뿐이다.
어쩌면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함정이나 마물, 언데드 따위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그런 것들은 지금의 전력에 있어 방해로도 취급되지 않는다. 무엇이 앞을 가로막건, 나타난 즉시 치우고 갈 수 있단 말이다.
“그렇긴 하겠지만.”
시커먼 불꽃이 타올랐다. 유진은 레반테인을 쥐고서 결계를 노려보았다.
“일단 저건 부숴 버리고 싶은데.”
콰르르르ㅡ! 유리의 칼날에서 불꽃이 뿜어졌다. 그 단순한 말에 세냐도 피식 웃어버렸다. 그녀는 로브의 안쪽에서 메리를 꺼내더니 레반테인 쪽으로 가까이 기울였다.
“부수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유폐의 사슬. 그리고 바벨은 과거 세냐가 평생을 넘고자 한 벽이다.
메리의 끝에서 빛이 반짝였다. 흩날린 꽃잎이 레반테인의 불꽃으로 흘러가더니 불타서 재가 되었다. 하지만 마법은 사라지지 않고 레반테인에 더해졌다. 찌직, 찌지지직! 번뜩이는 전류가 불꽃에 더해졌다. 유진은 보다 무거워진 레반테인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뜻대로 하시지요.”
당연히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아니스도 마찬가지였기에 굳이 몸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레반테인이 하늘을 갈랐다. 검붉은 불꽃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처럼 바벨에 내리꽂혔다. 꽈아아아! 바벨이 존재하는 공간을 겹겹이 두르고 있던 사슬이 불꽃에 분쇄되었다. 바벨이 추락할 것처럼 진동했다.
ㅡ와아아아! 지상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하늘을 노려보던 마군이 일제히 진격을 시작하는 소리였다.
무시했다. 유진은 다시 한번 레반테인을 치켜들었다. 바벨의 결계는 방금의 일검으로 모조리 베어냈다. 지금의 바벨은 아무런 결계도 두르지 않고 그저 하늘을 떠는 불길한 마왕성일 뿐이다. 유진은 바벨의 중심을 보았다. 넓고 높은 본성. 300년 전에 하멜은 저곳을 오르다 죽었다.
뺨이 씰룩거리며 미소가 만들어졌다. 유진은 다시 한번 레반테인을 높이 쳐들었다. 불꽃은 피어오른 즉시 참격이 되어 쏘아졌다. 신화가 바벨의 본성에 처박혔다.
폭음과 함께 성이 무너졌다. 그렇게 보였다. 무너지는가 싶던 성이 크게 일렁거리더니 시커먼 안개가 되었다. 마치 구름처럼 커다랗게 부푼 안개가 성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저건…….”
유진은 안개를 노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마력에 의한, 흑마법에 의한 안개. 유진은 저 안개가 띄고 있는 어둠이 무엇인지를 안다. 유진이 무어라 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세냐가 대뜸 앞으로 성큼 나섰다.
“레반테인 집어넣고 물러서.”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 시키는 대로 레반테인을 집어넣고 뒤로 물러섰다. 대신에 세냐가 메리를 뻗어 들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성을 통째로 휘감은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요동쳤지만, 이곳에서 저 안개를 경계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에 분노와 살의를 느꼈다. 세냐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안개를 노려보았다.
밖에서부터 파훼하거나 부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세냐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직접 들어가서 부숴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정면에서, 압도해 주겠다고 생각했다.
세냐는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없이 안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유진과 크리스티나도 세냐를 제지하지 않았다. 세냐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럴 때의 세냐를 말리는 것은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들어간 세냐가 안개에 삼켜졌다. 유진도 크리스티나를 곁에 가깝게 두고서 안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시야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너무 짙은 안개에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안개가 시각 자체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블라인드. 발자크 루드베스의 시그니처다.
“아래에서 사용할 줄 알았는데.”
유진은 보이지 않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블라인드가 대규모 전투에서 치명적인 위력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 사마르에서의 전투로 실감했었다. 수백만 신군에게 동시에 시각이 차단되어 버린다면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경계하고서 대비는 했다. 만약 발자크가 지상에 블라인드의 장막을 내렸다면, 유진이 만들어놓은 태양이 즉시 장막을 찢어발겼을 것이다.
“흠.”
유진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시각은 차단되었지만, 그것은 유진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감각은 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감각을 의지하려 들 필요도 없다. 몇 번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 차단되었던 시각이 돌아왔다.
“지금 내게 이런 마법이 통할 리가 없잖아.”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력으로 시각을 되찾은 것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 그녀는 유진의 바로 곁에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 님의 충고를 듣지 않았군요.”
죽이지 않고 살려서 돌려보냈다. 도망치라고 충고도 해주었다. 크리스티나는 얇게 뜬 눈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굳게 닫힌 성문의 앞.
발자크는 성문 앞에 있었다.
“설마 대뜸 어전으로 진입하려 하실 줄이야. 그래 버리시면 문지기를 맡은 제 입장이 우스워지지 않습니까.”
발자크는 언제나 쓰던 안경을 살짝 올리면서 웃었다.
“문지기?”
발자크를 노려보던 세냐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블라인드는 건재하다. 하지만 세냐는 처음부터 시각을 잃지 않았다. 세냐의 시그니처 중 하나인 엠프레스 룰은 그녀보다 수준이 낮은 마법을 지배할 수 있다. 본래 엠프레스 룰은 ‘흑마법’에는 여러 제한을 지니지만, ‘절대률’을 더한다면 흑마법조차 지배할 수 있다.
“이미 문은 열려 있는데, 문지기가 필요한가?”
싸늘한 목소리가 담은 말에 발자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하하…….”
즉시 뒤를 돌아본 발자크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닫혀 있던 문. 절대 열리지 않게끔 여러 마법을 담았던 문이, 발자크가 알아차릴 새도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은…… 열렸지만. 들여보내지 않는다면, 닫힌 것과 같지 않습니까?”
발자크큰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앞을 보았다.
“발자크 루드베스.”
세냐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메리를 앞으로 뻗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뭐야?”
“…….”
“전 흑색마탑주? 마법사? 흑마법사? 바벨의 문지기?”
“전부 다입니다.”
발자크가 대답했다. 떠도는 안개 속에서 시커먼 지팡이가 나타났다. 발자크는 왼손으로 지팡이를 쥐고, 오른손은 세냐를 향해 뻗었다.
“그리고 유폐의 지팡이이기도 하지요.”
쩌억. 오른손바닥이 갈라지고 자그마한 입이 나타났다.
“좋아.”
세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죽어.”
메리가 번쩍 빛을 발했다.
빌어먹을 환생 578화
ㅡ키이잉…….
메리의 끝. 마나가 주입된 꽃봉오리가 개화했다. 활짝 펼쳐진 꽃잎에서 얇은 빛이 선이 되어 쏘아졌다.
발자크는 즉시 오른손의 글러트니를 발동했다. 포식의 입이 손바닥을 넘어 팔뚝까지 이어졌다. 발자크의 팔은 마치 파충류의 입처럼 위아래로 벌어졌다.
다가온 빛이 글러트니의 간격에 들어왔다. 글러트니가 즉시 빛을 집어삼켰다.
처억.
벌어졌던 입이 닫히고, 빛이 사라졌다. 동시에 발자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이 뒤집히고 입에서는 피가 뿜어졌다. 방금 집어삼킨 마법을 소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커흑……!”
발자크는 피를 토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뚜둑, 뚜두둑! 왼팔이 들썩거리며 기포가 올라왔다. 소화되지 않은 마법이 글러트니를 내부부터 찢어발기기 시작한 것이다. 발자크는 연신 토해지는 피를 억지로 삼키며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다.
꽈앙! 시커먼 마력 덩어리가 세냐에게 쏘아졌다. 동시에 오른손에서는 글러트니가 다시 열렸다. 도저히 소화하지 못한 마법이 토해졌다. 결국 토해버렸지만, 발자크는 그 짧은 순간에 어느 정도는 마법을 해석하고 지배권을 빼앗았다.
쏘아진 마력 덩어리와 돌아오는 마법. 둘 모두가 세냐에 대한 공격이 되었다. 하지만 세냐는 저것에서 조금의 위기감도 느끼지 않았다. 어느새 앞으로 뻗은 손가락이 쓱 선을 그었다.
두 개의 마법이 동시에 소멸했다. 마냥 힘으로 덮은 것이 아니다. 마법을 구성하는 술식 자체에 간섭해서 마법을 무로 돌려버렸다.
“아름…… 답군요.”
발자크는 입에 번진 피를 닦으면서 감탄했다. 저만큼 깔끔한 디스펠은 본 적이 없다. 최초의 공격에서도 느꼈지만, 저 디스펠에서 더욱 절감했다.
모든 것이 압도적이다. 발자크는, 자신과 세냐 사이에 절대로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느꼈다. 격이 다르단 말이다. 발자크가 어떤 마법을 쓰고 어떤 수단을 시도하건, 세냐에게 상처 하나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엠프레스 룰을 거두신 것은…… 저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맞아.”
세냐는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엠프레스 룰을 쓰지 않아도 네 마법은 나에게 닿지 않을 테니까.”
“하하…… 그래 보이는군요.”
“한 번이야.”
세냐의 왼손이 활짝 펼쳐졌다.
“이 한 번의 마법으로, 너는 죽을 거야.”
무덤덤이 고해진 선고. 세냐는 확신했고, 발자크도 확신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저는, 아무쪼록 죽지 않도록……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 되도록 노력해야겠군요.”
“아니, 그건 불가능해. 네게 두 번은 없어. 한 번, 단 한 번이야.”
지지직…….
세냐의 왼손에 보라색의 빛이 모여들었다. 그것을 본 발자크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보라색 빛은 ‘마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냐 메르데인의 것이라 믿을 수 없는 요악한 빛. 발자크는 저 빛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건…… 제벨라 공작의…….”
“맞아. 누아르 제벨라의 마력이야.”
환상의 마안과 함께 거둬들인 누아르의 마력. 본래 누아르가 지니고 있던 마력과 비교하면 편린 정도지만, 그럴 텐데도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다.
발자크 짧은 웃음을 흘리며 지팡이를 놓았다.
“감사합니다.”
죽음이 선고된 상황. 그렇지만 발자크는 감사를 말했다. 세냐는 온갖 방법으로 발자크를 죽일 수 있다. 처음에 쏘았던 빛만 난사해도 발자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하지만 세냐는 ‘단 한 번’이라고 말한 만큼, 그녀는 진심으로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에 발자크는 감사를 느꼈다. 엠프레스 룰을 거둔 것. 세냐는 ‘무시’라고 했지만, 발자크는 단순히 무시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배려’라고 느꼈다.
‘내게 미련이 남지 않도록.’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문지기로서 이곳에 서 있지만, 발자크는 절대로 문을 지킬 수 없다. 저들이 여태까지 넘어온 난관과 비교하자면 발자크는 너무나 하찮고 초라하다. 발자크가 아무리 발악해도, 그는 난관이 될 수가 없다. 발이 걸려 넘어지게 할 돌멩이도 되지 못한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알고서 여기 서 있는 것이다. 난관이 되고 싶었다면 훨씬 일찍 ‘적’이 되어야 했다. 애초부터 발자크는 난관이 될 생각이 없었다.
“……마법의 신역.”
발자크가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견식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왼손이 지팡이를 놓았다. 하지만 지팡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발자크는 가슴 앞에 지팡이를 세워놓고서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찌지지직…… 오른손이 다시 갈라지며 글러트니가 입을 벌렸다. 발자크는 피비린내 어린 숨을 삼키며 왼손을 글러트니에 가까이 두었다.
쿠르르르……! 글러트니의 안쪽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렸다. 이윽고 회백색의 마력이 글러트니의 안쪽에서 토해져 나왔다.
‘멸망의 마력이군.’
뒤로 물러서서 전투를 지켜보던 유진은 쯧 혀를 찼다. 저 마력의 근원이 뭔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하우리아에서 쏟아져 나왔던 누르의 군세. 발자크는 그 전장에서 적극 활약하며 누르를 포식했다. 그를 통해 얻어낸 마력이리라.
‘멸망의 마력은 존재를 붕괴시킨다. 화신조차도 예외는 아니야. 저만한 마력을 인간이 품었다면…….’
왜 발자크가 도망치지 않았는지. 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바벨에 남았는지.
조금은 이해했다. 애초부터 발자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어찌 몸뚱이는 유지하고 있지만, 멸망의 마력을 저만큼 포식한 이상 발자크는 머잖아 죽을 시한부인 것이다.
“후우우우…….”
발자크는 길게 숨을 내쉬며 멸망의 마력을 집중했다. 동시에 왼손에서 유폐의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오른손의 글러트니는 모든 멸망의 마력을 쏟아낸 뒤에 다음의 마력을 토해냈다. 마족과 마물을 포식하며 얻은 마력. 그리고 발자크가 가진 모든 마나.
서로 다른 종류의 마력과 마나가 뒤엉키면서 압축되었다. 세냐는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면서 메리를 움직였다.
ㅡ치지지지직! 인도된 마력이 메리의 꽃잎을 휘감았다. 동시에 발현한 마나가 마력과 섞이기 시작했다.
세냐와 발자크는 똑같이 마나와 마력의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지 않았다. 발자크가 섞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붙들고 있다면, 세냐의 마나와 마력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영력. 다르게 변질한 마나와 마력의 교집합에서 끌어낸 순수한 정수.
“아아…….”
발자크는 치미는 피를 삼키며 감탄을 흘렸다. 하우리아 때만 하더라도 세냐에게 저런 힘은 없었다.
이보다 일찍 견식 했다면, 내게도 가능했을까? 떠오른 의문에 발자크는 다시 웃고 말했다. 가능할 리가 없다. 저것이야말로 마법의 신역. 전설을 넘어 신화에 도달한, 마법의 여신만이 다룰 수 있는 힘.
“감사합니다.”
발자크는 다시 한번 감사를 말했다. 죽기 전에 저런 것을 볼 수 있다니. 저것에, 죽을 수 있다니. 백 번 감사를 말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생각했다.
마법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법에 대한 재능은 중요치 않다. 사랑은 재능이 부족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고 사랑해 왔다.
저 경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되었습니다.”
준비가 끝났다. 발자크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쥐었다.
쿠르르릉……!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진동했다. 감당하기 버거운 힘을 조율하며 지팡이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발자크의 육신도 마찬가지였다. 본래부터 핏기가 없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졌고, 글러트니의 이빨은 딱딱 부딪쳐 소리를 냈다.
“후회는?”
세냐가 물었다.
“없습니다.”
돌아온 대답에 세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회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면 오히려 더 실망했을 것이다. 스스로 마법사이자 흑마법사이며 유폐의 지팡이라 말했으니, 그 하찮은 지조를 갖고서 죽는 것이 그나마 명예로울 테니.
“그럼.”
메리의 끝에 모인 영력은 고작해야 주먹만 한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발자크가 끌어모은 힘과 크기로 비교하자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작았다. 하지만 격이 다르다. 발자크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았고,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크리스티나의 앞을 가로막고 몇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저 힘에 휘말려 버리면 그냥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잘 가, 발자크 루드베스.”
내뱉은 말에는 조금의 아쉬움이나 미련이 없었다. 세냐가 발자크에게 그런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 평생을 마법에 바치고, 마법에 열망하고, 마법의 끝을 염원했던 어리석은 흑마법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이 마법에는 그러한 존중을 담았을 뿐. 흑마법사로서 앞을 가로막은 발자크에 대한 살의는 견고하다.
영력이 움직였다. 주먹만 한 크기의 빛이 발자크를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발자크는 부릅뜬 눈으로 빛을 보았다. 저 빛이 생의 마지막을 결정할 것을 알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그리고 발자크도 마법을 쏘았다. 지팡이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빛이 폭사했다. 발자크가 쏘아낸 마법은 세냐의 것과 달리 흉포하고 야만적이었다. 두 개의 마법이 서로 충돌하기 전. 유진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프로미넌스로 성역을 만들고서 크리스티나와 자신을 감쌌다.
두 개의 마법이 충돌했다.
폭발하거나, 부서지거나. 그런 것과 관련된 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충돌은 저러한 현상을 동반하지 않았다.
닿는 순간에 발자크의 마법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발자크가 수명을 깎아가며 끌어모은 멸망의 마력도. 존재를 변질시켜 가며 포식해서 얻은 마나와 마력도. 모두가 세냐의 마법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오히려 소멸한 마법이 세냐의 마법에 흘러 들어가며 영력의 힘을 키웠다.
“아아…….”
당황하지도 경악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저렇게 될 것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자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은 발자크가 평생 갈구해 온 형상을 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조금 더.
그렇게 생각하며 글러트니를 열었다. 활짝 열린 입이 다가오는 죽음을 집어삼켰다.
“…….”
세냐의 마법이 글러트니에 먹혀 사라졌다. 발자크는 잠시 동안 왼팔을 뻗고 우두커니 섰다. 잠시 후, 발자크는 푸들거리며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감사합니다.”
세냐는 대꾸하지 않고 메리를 아래로 내렸다.
“마법은…….”
발자크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느릿하게 이었다.
“이토록 경이롭고…… 위대하군요.”
찌직, 찌지직.
발자크의 오른손이 갈라지더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호흡을 할 때마다 내부의 장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글러트니로 포식한 존재는 한 권의 책이 되어 발자크의 안에 있는 책장에 꽂힌다. 마법도 마찬가지다. 아카샤가 마법을 이해하듯, 발자크의 글러트니도 포식한 마법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방금 포식한 마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처음으로 위치크래프트를 보았을 때. 이터널 홀을 보았을 때와 같은 감각. 답안지를 보고 있는데도 도저히 이해는 할 수 없는 막연함. 이것이 마법의 신역인가.
발자크는 큭큭 웃으며 간신히 남은 왼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마지막으로 이런 마법을 견식하고 죽을 수 있다니. 저 같은 마법사에게 이 이상의 죽음은 없겠지요.”
“죽을 때는 유폐의 지팡이로 죽는 것이 아닌 모양이지.”
“저는 처음부터 마법사였으니까요.”
발자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서지 못하고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해봐.”
“이것이 마법의 끝입니까?”
발자크는 간절함을 담아서 물었다. 세냐는 발자크가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 것인지 모른다.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겨우 이딴 것이 마법의 끝일 리가 없잖아.”
그래서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이 마법의 여신님도 아직 마법의 ‘끝’은 가늠할 수가 없어. 나조차도, 끝을 탐구하고 있지. 사실 이제는 이런 생각마저 하고 있어. 마법에 끝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까?”
“나란 존재에 끝이 있을지언정 마법에는 끝이 존재하지 않아. 마법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끝이란 존재해서는 안 돼.”
“아아…….”
발자크는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감사합니다.”
발자크는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로 마지막 감사를 말했다. 그는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아래로 떨구었다.
“이조차도…… 마법의…… 도중. 후후…… 그렇군요.”
내부의 장기가 모조리 소멸했다. 그리고 육신마저도 소멸하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지기에 눈을 감았다. 끊어지려는 의식을 굳이 붙들지 않았다. 육체는 소멸하지만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다. 발자크는, 계약으로 묶인 자신의 영혼을 느꼈다. 이렇게 소멸하고 있음에도 계약은 견고하며, 육신의 소멸 후에 발자크의 영혼은 유폐의 마왕에게 돌아갈 것이다.
“마법사가 되기를 잘했어.”
발자크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진즉에 죽음이 결정되었던 목숨. 살 생각 따위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유진에게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가능하다면 세냐에게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존경하던 세냐의 마법에, 죽고 싶었다.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아니, 바라던 것 이상의 최고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 황홀한 여운과 함께, 발자크의 혼은 유폐의 마왕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것으로 됐다.
발자크는 만족했고, 웃으며 죽었다.
부서진 육체가 재가 되어서 사라졌다. 활짝 개화했던 메리가 다시 닫혔다. 세냐는 마나와 마력을 갈무리하고서 앞을 보았다.
문은 열려 있고, 문지기는 없다.
“가자.”
세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진도 결계를 거두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간단했네.”
“그럼, 내가 고전이라도 할 줄 알았어?”
“문지기라고 거창하게 앞을 가로막았으니, 비장의 한 수라도 있을 줄 알았지.”
전대 흑색마탑주. 아롯에서부터 쭉 수상쩍게 굴었던 흑마법사. 발자크 루드베스.
“여태까지 수상하게 군 것치고는 허무하게 죽었네.”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빌어먹을 환생 579화
바벨의 성문을 지나, 본성으로 향하는 길.
기억하고 있다. 300년 전의 이곳에는 마물과 마족부터 언데드, 키메라가 득실거렸고 함정도 잔뜩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다. 문지기로 앞을 막아서고 죽은 발자크와 어전에 있을 유폐의 마왕을 제외하고, 바벨에는 다른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무의미하니까.’
유진은 삭막한 정원을 지나며 생각했다.
꽃 한 송이는커녕 잡초 하나 존재하지 않는 정원. 사실 이곳을 정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군데군데 방치된 조형물들을 보면 한때는 ‘정원’으로 쓰였던 것 같기는 했다.
‘300년 전의 것들을 재현해 봤자 지금의 나를 막는 것은 불가능해.’
시간이 너무 흘렀다. 당시에는 바벨을 돌파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의문이 남는다. ‘베르무트’라면 그때에도 혼자서 정원을 돌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바벨에서도 제법 고전했었다. 바벨 전에도, 살육과 참혹과 광란의 마왕과 싸울 때. 베르무트는 항상 ‘전력’을 다했다. 그것을, 연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베르무트는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다.
‘…….’
짐작은 하고 있다. 확신도, 있다. 인정하고도 있다. 하지만 의식하고 싶지는 않았다.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베르무트가 말하지 않았나. 베르무트의 정체. 약속. 300년 전의 목적. 유폐의 마왕이 갈구하는 것.
그 모든 진실을 알고 난 뒤에, 유진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가. 그것이 유폐의 마왕이 내리는 마지막 시련이다. 기어코 유진은 바벨에 도달했다. 지금, 어전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외면할 수도 없다. 유진은, 유폐의 마왕에게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결정.
무엇을 결정하는가?
-모든 진실을 알고 난 뒤에 네가 결정하는 것이, ‘마왕’이 내리는 마지막 시련이다.
모르겠다. 그것만큼은 짐작할 수가 없다. 유진은 힐긋 아래를 보았다. 긴장으로 떨리는 손이 보였다. 은근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는, 솔직히 두렵다. 그 터무니없는 대마왕을 정말로 쓰러트릴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패배해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이 두렵다. ‘나’라는 존재를 위해 아득히 이어온 염원이 허무해지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진실이 두렵다.
“옛날 생각나네.”
정원을 지나 본성에 도달했을 때. 세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여기 지난 뒤에 유폐의 방패가 가로막았었지.”
“맞아.”
“그 뒤에 하멜, 당신이 죽었지요.”
아니스가 말했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이 기억하는 바벨은 거기서 끝이다. 이, 문을 열기 위해- 얼마큼의 희생을 치렀던가. 유진은 굳게 닫힌 본성의 문을 보았다.
더 이상 문지기는 없다. 닫힌 문은 그냥 열면 된다. 유진은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연다.”
세냐와 성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편에서 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혹시 모를 일. 유진은 망토 안의 레반테인을 의식하며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끼이익…….
하지만 긴장했던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문은 쉽게 열렸다. 안은 텅 비어 있다. 300년 전에 그토록 힘들게 지났던 복도가 보였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먼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철그럭.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곳 바벨에서는 절대로 쇠사슬 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유진이 바벨에 침입한 순간부터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테니.
유진은 흠칫 놀라며 레반테인을 뽑았다.
“……?”
동시에 성녀들과 세냐를 챙기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공격인가? 그런 것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징조를 느꼈을 터. 유진이 느끼지 못했을지라도 세냐는 대응했을 것이다.
‘공격…… 아니, 이건 공격이 아니야. 적의가 전혀 없다. 마법인가? 아니면 권능?’
바벨은 유폐의 마왕의 영지.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유폐의 마왕이 주관하는 것. 유진은 긴장을 덜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일렁거리는 것들이 보였다.
쇠사슬이다. 어둠 속에서 무수히 많은 쇠사슬이 녹아 있다. 쇠사슬이 이 공간을 통째로 휘감고 있다. 조금씩 어둠이 희미해지면서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유진은 깨달을 수 있었다.
기억이다. 이 공간에서 벌어졌던, 사슬에 유폐되어 있던 ‘기억’이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 쓰러졌나.”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유진은 움찔 놀라서 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 그 순간에 어둠이 확 하고 걷혔다.
쿠릉…….
쿠르릉…….
마왕성 바벨의 최상층, 유폐의 마왕이 머무르는 어전. 300년 전에 하멜이 도달하지 못했던 장소.
그곳의 풍경이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벽은 모조리 무너졌다. 천장조차도 없다. 그래서 먹구름에 의해 뿌연 회색의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붉은 번개가 쿠릉거리며 울리는 하늘의 아래. 유폐의 마왕이 서 있다.
“그대는 쓰러질 생각이 없는가?”
유폐의 마왕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모습. 복장. 300년 전, 붉은 평원에서 보았던 모습과 똑같다. 지금 이것은 300년 전의 기억인 것이다.
“…….”
질문을 들은 것은 베르무트다. 상처투성이인 베르무트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너덜거렸다. 그렇게나마 베르무트는 서 있었고, 가장 형편이 나았다.
“모론 루하르는 쓰러졌다.”
베르무트의 앞에 모론이 쓰러져 있다. 모론은 시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처참했다. 팔다리가 죄다 뜯어지고, 옆구리도 찢어져서 내장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럼에도 모론은 아직 살아 있었다. 희미한 빛이…… 모론의 상처를 덮어준 덕분이다.
“세냐 메르데인도 쓰러졌다.”
베르무트의 옆에 세냐가 쓰러져 있다. 그녀의 손에는 길쭉한 검이 쥐어져 있었다. 마법을 뜻대로 쓰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런 상황임에도 세냐는 물러서지 않고, 검을 들고서 덤볐던 것이다. 그렇기에 세냐가 입은 부상은 마법사답지 않았다. 모론만큼은 아니지만, 세냐 또한 전사의 것과 같은 부상을 당하고서 쓰러져 있다.
“아니스 슬리우드도 쓰러졌다.”
베르무트의 뒤에 아니스가 쓰러져 있다. 그녀의 전신은 피로 흠뻑 물들어 있었다.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린 것이 아니다. 신성마법과 기적을 남발한 대가. 새하얀 로브를 붉은 로브로 물들인 만큼 성흔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런데도 아니스는 마지막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스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정신을 잃었다. 덕분에 모론과 세냐가 심각한 치명상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유폐의 마왕이 말을 이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운명에 존재하지 않던 네가, 운명에 개입하여 바꾸려 했던 모든 것이 무의미다. 혹한의 대지에서 태어난 강건한 무의 화신이 자랑하던 도끼는 내게 닿지 못했다. 이 시대가 낳은 마법의 총아는 내 앞에서 마법을 뽐내지 못했다. 스스로 신성 제국이라 떠드는 광신자들이 만들어낸 성녀의 모조품도 내 마력을 밝히지 못했다.”
베르무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늘에 떠있던 유폐의 마왕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는 진심으로 애석하다는 듯이 괴로운 미소를 지었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고서 거신의 뱃속에 뛰어든 신화의 주인들. 그들은 자신을 섬기는 신도와 살았던 시대를 포기하고서 ‘다음’의 멸망에 거역하려 했지만, 그조차도 무의미했다. 운명에 거역하는 것은 어려운 법이지.”
“…….”
“그들은 희망과 염원을 담았겠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하지만 비웃고 싶지는 않다. 영원을 살아본 적 없는 자들이 어찌 영원을 가늠하겠나. 하멜 다이너스. 아가로트의 환생자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멸망은 그가 신성을 자각하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
“어쩌면 이 모든 뒤틀림은 너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
베르무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말은 베르무트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일 것이다. 혹시,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셀 수 없도록 많이 떠올리고서.
‘그럴 리가 없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회피하던 말일 것이다.
“네가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안다.”
유폐의 마왕이 말했다.
“갑작스레 태어난 너는, 자기 자신이란 존재와 의의를 확신했다. 구도자가 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신이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기어코 용사가 되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너는, 혹한에 머무를 모론 루하르를 밖으로 데려갔다. 신의 뜻을 의심하며 남몰래 종말을 고대하던 아니스 슬리우드에게 신이 존재함을 확인시켰다. 세상을 모르고 복수만을 바라던 세냐 메르데인에게 무엇이 대의인지를 알려주었다.”
유폐의 마왕의 손바닥 위에 철그럭거리는 사슬 뭉치가 나타났다. 뭉쳤던 사슬이 풀리면서 반짝이는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너는 하멜 다이너스를 만났다. 전장을 떠도는 용병. 당시로서는 위명도 실력도 부족하던 하멜을, 너는 동료로 끌어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네게 가장 필요한 동료는 바로 하멜이었을 테니.”
“…….”
“이해한다. 최초의 너는 미숙하고 나약했을 테니. 함께 싸워줄 동료가 필요했겠지. 모론 루하르와 아니스 슬리우드, 세냐 메르데인은 동료로 훌륭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부족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하멜 다이너스다.”
유폐의 마왕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손바닥에 어린 빛이 일렁거렸다. 그건, 영혼이었다. 저주에 의해 죽은 하멜의 영혼.
“그러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네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멸망의 마왕은 여태까지와 달리 포악하게 날뛰고, 하멜을 위한 검이던 신검 알테어는 네 손에 들어갔지. 그리고- 월광검.”
베르무트의 손에는 월광검이 쥐어져 있다. 베르무트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월광검을 노려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네가 인간의 흉내를 내기 위해 뜯어냈던 멸망의 일부. 하지만 너는- 결국, 스스로 파묻었던 일부를 다시 거머쥐었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 조급했음이라. 너의 모든 여정이 그러했지.”
“…….”
“뒤틀렸기 때문이다. 너도 몇 번이나 생각했을 것이다. 네가, 태어나서,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네가 하멜의 운명을 선점했기에. 하하…… 결국 어쩔 수 없던 것이기도 하지. 멸망은 하멜의 자각을 기다려주지 않았으니.”
“아직.”
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났다.”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파편에 지나지 않는 너는 나를 쓰러트릴 수 없다. 네가 해야 했던 것은, 용사로 나를 찾아와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다. 미숙한 하멜과 함께 내 앞에 서는 것이었다.”
“네가, 길을…… 열어주었다면…….”
“나는 마왕이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너는 마왕에게 너무나 많은 자비를 구하는구나.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었는데 말이다.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하던 멸망의 마왕을 진정시켰다. 너와, 동료들이, 다른 마왕을 먼저 쓰러트리고 내게 올 때까지 이곳에 기다려 주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하멜이 신성을 자각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끼리릭. 사슬이 다시 하멜의 영혼을 휘감았다.
“나는 운명에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운명을 거역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자격과 힘을 갖춰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너는 최후의 최후에 자격이 부족했다. 하멜은 끝내 신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인간으로 죽었으니 말이다.”
“…….”
“네가 만약 하멜과 함께 내 앞에 도달했다면. 몇 번이나 절망했던 나조차도…… 가능성에 대해 받아들였겠지. 설령 그것에 확신이 없을지라도, 실낱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에 기대했을 것이다. 기꺼이 너와 하멜을 멸망의 배 속으로 인도했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베르무트가 다시 말했다. 그는 손에 쥔 월광검을 거꾸로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유폐의 마왕. 내가 너를 쓰러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렇겠지.”
유폐의 마왕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멸망의 마왕을 죽일 수 없듯, 멸망의 마왕 또한 나를 죽일 수 없다. 우리는…… 그렇게 결속되어 있지. 영원히.”
“하지만 네 손에서 하멜의 영혼은 빼앗을 수 있을 거다. 네가, 모론을, 세냐를, 아니스를, 죽이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을 거다.”
“하하……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묻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내게서 하멜의 영혼을 빼앗아 무엇을 할 텐가? 죽은 자를 당장 되살리는 것은 언데드로 만드는 것뿐. 하지만 그 방법이 하멜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신성을 박탈하는 것은 너도 알 텐데.”
“당장 되살리지 않아.”
콰악! 월광검이 베르무트의 가슴을 꿰뚫었다. 베르무트는 자신의 손으로 월광검을 몸에 박아넣었다.
“지금에 또다시 절망한 네가,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을 안다.”
가슴이 꿰뚫렸는데도 베르무트의 입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너는 저번과 똑같이, 그리고 여태까지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하겠지. 네 몸에 엮은 무수한 인과와 함께, 네 사슬로 결박한 모든 것과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겠지.”
“그것이 내게는 옳으니까.”
“내게는 옳지 않아.”
베르무트의 금색 눈동자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내게는 이번 시대가 마지막이다. 내게는 지금 이러는 것이 옳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달라 청하지 않겠다. 네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
돌아온 대답에 유폐의 마왕의 미소가 바뀌었다. 그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면서 입술을 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고? 어떻게?”
“네가 영원의 저주를 받아들이며 끌어온 사슬을 끊겠다.”
불길한 마력이 베르무트의 몸을 휘감았다. 일렁거리는 마력은 마치 불꽃이자 갈기처럼 보였다. 베르무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유폐의 마왕을 가리켰다.
“네 존재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네 무수한 사슬을 끊어갈 수는 있겠지.”
“자신을 너무 과신하는군. 파편에 지나지 않는 네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베르무트가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ㅡ푸확! 불꽃처럼 일렁거리던 멸망의 마력에 다른 색이 더해졌다. 무수히 많은 색이 불꽃에 섞여 일렁거렸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를 휘감은 마력을 직시하며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파편인 것은 아니구나.”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베르무트를 잘못 재단했음을 깨달았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너는…… 무엇을 바라나?”
“지금 세상의 멸망을 막는다.”
“그건 용사로서의 갈망인가? 아니면…… 멸망의 분신으로서의 갈망인가?”
“나는 용사가 아니야.”
베르무트가 대답했다.
“이건, 나와, 모두의 갈망이다.”
베르무트는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잠시 침묵했고, 이윽고 짧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절망하지 않았는가.”
만약 자비를 구걸했다면 상대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최악의 사태에서도, 용사가 아니면서도 용사라 추앙받던,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구하던 존재는 지극히 용사답고 인간다운 행동을 선택했다.
그것에 유폐의 마왕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저러한 모습은 아득한 옛날에 절망하여 져버렸던 것.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속삭였다.
“그렇다면 내게 증명해 봐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뒤엉키는 색을 두른 베르무트가 앞으로 나아갔다.
빌어먹을 환생 580화
유폐의 마왕
“나는 베르무트를 죽일 수 없고, 베르무트도 나를 죽일 수 없다.”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극도의 고통으로 정신을 마모시키는 것 정도였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게 있어 고통이란 오래전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익숙해졌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고통은 나를 결코 마모시킬 수 없다. 애초에 내게는 마모될 만한 정신조차도 거의 남지 않아 있으니.”
철그럭거리는 사슬 소리가 들렸다.
“베르무트는 나와 다르다, 고…… 생각했다. 베르무트의 근원과 달리, ‘그’라는 인격은 취한 모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흡사하니까.”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모든 소리를 들었다. 소리와 함께 나타난 유폐의 마왕은, 유진과 세냐, 성녀들의 시선 속에서 계단을 올랐다.
“실제로 그곳에선 베르무트는 몇 번이나 좌절하고 쓰러지려 하였지. 하지만 기어코 다시 일어서서, 내게 덤벼들었다.”
이곳은 바벨의 중심이자 최정상. 어전.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베르무트는, 스스로 말했던 대로…… 나의 사슬을 끊어내고 있었으니. 죽지 않고, 죽일 수 없고, 좌절하지 않고.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나.”
계단 높은 곳에 선 유폐의 마왕이 몸을 돌렸다. 그는 이곳에 도달한 모두를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약속을 맺었다.”
등에 짊어진 수많은 사슬이 옥좌가 되었다. 유폐의 마왕은 스스로 만든 사슬 옥좌에 앉았다.
“하멜 다이너스의 혼을 돌려주었다. 모론 루하르와 세냐 메르데인, 아니스 슬리우드를 죽이지 않았다. 전쟁을 멈췄다. 베르무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을 이 세상의 유예로 삼았다.”
유진은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성녀가 입술을 열었다.
“왜 그런 약속을 맺은 겁니까? 그 약속으로 당신은…… 무엇을 얻는 겁니까?”
질문한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이 시대에 태어났다. 300년 전의 약속이 없었다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희망.”
유페의 마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은- 영원을 군림해 온 대마왕의 입에서 나온 대답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약속으로 얻은 것은 희망이다. 지금의 세상이 끝나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갈 필요가 없으며, 멸망의 마왕이 사라지는 것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지.”
“세상을…… 전쟁을 일으킨 것은…… 당신이잖습니까……!”
“필요에 의한 일이다. 언제나 그러했지.”
유폐의 마왕은 잠시 눈을 감았다.
“……설령 지금 세상이 멸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전의 세상이 그랬듯이 스러진다고 해도. 그럴지라도, ‘약속’에서 얻는 것은 있다. 바로 가능성과 기억이다. 이번 시대는 특별했으니까. 내가, 다음으로 간다면. ‘전’ 시대를 회상하며 새로운 흐름을 유도할 수 있겠지.”
“……너는.”
유진이 입을 열었다.
“베르무트를, 알고 있었다.”
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으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아니, 당연히, 알았겠지. 하지만…… 방금 봤던 네 태도. 마치, 베르무트와 이전부터…….”
“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
감겼던 눈이 뜨였다. 칙칙한 눈동자가 옥좌에서부터 유진에게 내리 꽂혔다.
“300년 전. 이곳, 바벨의 어전에서 맺은 약속은 ‘두 번째’다.”
꽈득.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직접 듣고서 확정되었을 때의 충격은 가볍지 않았다. 너무 강하게 씹은 어금니가 박살 나고 잇몸에서 피가 터졌다. 꽉 말아 쥔 주먹에서도 피가 뚝뚝 흘렀다.
“첫 번째 약속은- 카자드였지. 베르무트가, 인간의 흉내를 내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최초로 뜯어냈던 곳. 나는 그곳에서 베르무트를 만났다.”
살육의 마왕이 토벌당하지 않은 시점이다. 북쪽 설원에서부터 이곳 알카르타까지, 마경의 최전방이 살육의 마왕의 영지였다. 그는 마왕 중에서 가장 서열이 낮았기에 침공의 첨병으로 쓰였고, 대륙의 반발에 가장 먼저 얻어맞았으며, 마왕 중에서 가장 먼저 죽었다.
카자드는 그 살육의 마왕의 영지로, 마왕성과 가까운 곳이다. 다른 마왕이 영지를 침범하는 것. 그런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는 거리낄 일이 아니었다. 살육과 참혹과 광란은, 마왕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마왕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비로운 존재였지. 마왕이 아니고, 마족이 아니고, 인간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렇기에 인간이 되기를 바라던 존재.”
유폐의 마왕은 그 순간의 전율을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살아온 영원. 몇 번이나 반복한 세상에서, 베르무트 같은 이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시대에서만 존재하는 커다란 변수고, 가능성이었다.
세상이 흔들렸다. 공간에 녹아든 사슬이 움직였다. 마나조차 기억할 수 없도록 유폐한, 최초의 약속이 드러났다.
어전의 풍경이 바뀌었다. 탁한 공기, 칙칙한 시야, 깊숙한 지하의 풍경.
유폐의 마왕은 이 장소를 알고 있다. 그가 지나왔던, 이전에 멸망했던 시대. 멸망의 마왕을 숭배하던 이들이 세운 제단. 시대가 멸망하고, 바다에 휩쓸리고, 다시 떠올라 조립되면서 지하에 파묻힌 것인가.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 제단은 조금의 의미도 신비도 갖고 있지 않다. 아무리 숭배한들 멸망의 마왕과 이어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금에 이르러서 이 제단은 그저 오래된 유적일 뿐이다. 아무리 제물을 바치고 기도해도 ‘이런’ 일은, ‘저런’ 존재는 나타날 수 없다.
“넌 뭐냐.”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존재에게는 의문을 품을 가치가 있다. 아니. 최근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의문을 품을 가치가 있다. 유폐의 마왕이 반복한 영원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멸망의 마왕이 너무 많이 날뛴다.
여태까지는 이런 적이 없었다. 아주 날뛰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번 시대는 특히나 난동이 잦다. 그렇다고 난동을 지속하는 것도 아니다. 단발적으로 날뛸 뿐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그 일대를 휩쓸고서 사라져 버린다.
난동뿐만이 아니다. 이번 시대에서 멸망의 마왕은 ‘계약’을 맺고 있다.
본래 멸망의 마왕은 권속 따위를 두지 않았다. 머나먼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에 이르러서 그 존재에게는 권속을 두고자 하는 의지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을 텐데. 기묘하게도 이번 시대, 아니, 최근 들어서는 계약을 남발하고 있다.
“……나는.”
존재가 입을 열었다. 방금의 그것은 불길한 기운이 뭉쳐진 탁한 안개처럼 보였지만, 목소리를 내뱉은 순간에 다른 형상으로 되었다.
“베르무트.”
잿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유폐의 마왕은 그 이름을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 알던 이름이고, 다시는 들을 일이 없을 이름. 그렇기에 드물게도 유폐의 마왕은 격정을 내비쳤다.
-끼리릭! 공간에서 튀어나온 사슬들이, 자신을 ‘베르무트’라 말한 소년의 사지를 결박했다.
“그 이름.”
유폐의 마왕이 내뱉었다. 그의 표정엔 온갖 감정들이 나타나 뒤섞였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듬거리며 이어지던 말이 뚝 끊겼다.
사슬로 묶은 존재. 마주해서 느끼는 존재감. 아니,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곳에 올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부터, 유폐의 마왕은 저 존재가 무엇인지를 짐작했다. 다만- 저렇게 인격 비슷한 것을 가지고서, 저 ‘이름’을 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
“……그런가.”
유폐의 마왕은 긴 한숨을 내쉬며 사슬을 거두었다. 그는 다시 소년을 보았다.
고작해야 열댓 살 정도 되었을까. 잿빛의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가 발하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유폐의 마왕은 먼 옛날을 생각했다. 물론 유폐의 마왕이 기억하는 ‘그’는 소년의 모습 따위는 아니었지만, 그가 어릴 적이라면 저것과 똑같은 모습이리라.
“왜…… 멸망의 마왕이 이전과 다르게 움직이나 했거늘. 네가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로군. 하긴, 이러한 일은 그가 겪어 온 영원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 떨어져 나온 만큼 채워 넣어야 하는가.”
그 중얼거림에 자신을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 말한 소년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유폐의 마왕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베르무트를 응시했다.
“너는 무엇을 바라나.”
“멸망의 끝.”
“모순이군. 네가 떨어져 나온 것으로 멸망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현상처럼 나타나던 멸망은 이제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날뛰고 있다. 아마 머잖아 멸망이 강림하겠지.”
“너라면 막을 수 있을 텐데.”
베르무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유폐의 마왕과 마주했다.
“날뛰는 멸망에 사슬을 묶고 억누르는 것이 네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유폐의 마왕이 되물었다.
“파편인 너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멸망의 마왕과…… 대적할 생각이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지.”
끝까지 듣지 않고서 돌아온 대답.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불쾌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저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더욱 베르무트에게 흥미를 가졌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멸망 후에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너는 그것을 바라겠지만, 그것이 이상은 아닐 텐데?”
“내 이상을 이뤄줄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나는, 멸망을 끝낼 방법을 알고 있다.”
베르무트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당장 그 방법을 실행할 수는 없다.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유폐의 마왕이 중얼거렸다.
“네 이야기는, 네 존재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흥미롭다. 하지만 무턱대고 시간을 달라는 말은 곤란하군. 내가 왜, 네게 시간을 주어야 하나? 그 시간을 너는…….”
유폐의 마왕은 하던 말을 멈췄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무엇을…… 할지는, 묻지 않으마. 무지로 관망할 필요가 있으니.”
“시간이 있다면 멸망을 끝낼 수 있다.”
앵무새처럼 말이 반복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베르무트의 의지는 강력히 멸망의 끝을 바라고 있었다.
유폐의 마왕은 다시 침묵했다. 멸망의 끝. 저 말은 유폐의 마왕에게도 무척이나 달콤하게 들렸다. 무수한 반복을 보아온 그는 이러한 변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한가?”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질문했다. 이런 주제의 이야기.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설령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할지라도, 이러한 경험 자체가 유폐의 마왕의 영원을 가꿀 것이니.
“살육과 참혹과 광란을 죽이고, 너를 찾아갈 때까지의 시간.”
“하하…… 네가 타고난 본성과 힘이라면 당장에라도 그럴 수 있을 텐데.”
“이건 버린다.”
들고 있던 손이 가슴에 가까이 다가갔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가 무엇을 하려는 일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이윽고 베르무트의 손이 제 가슴으로 쑤욱 들어갔다.
“가지고…… 싶지 않아.”
존재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하지만 거짓은 없었다. 베르무트는 진심의 혐오를 담아서, 몸속에 존재하는 ‘멸망’을 뽑아냈다.
가슴에서 뽑아낸 멸망은- 투박한 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색 없는 평범한 검. 누구나 쓸 수 있을 법한, 어느 전장에건 있을 검. 하지만 그 투박한 생김새와는 달리, 검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불길하면서 파멸적이었다.
“나는.”
뽑아낸 멸망을 제단에 꽂고서. 베르무트는 숨을 헐떡거리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인간으로, 마왕들을…… 죽이고, 널 찾아가겠다.”
“…….”
“이건 약속이다. 내가…… 너를 찾아간다면. 유폐의 마왕. 너는…….”
“멸망의 끝을 보는 것에 협력이라도 하라는 것인가?”
유폐의 마왕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마왕인 내게 너무 많은 자비를 구하는군. 멸망을 사슬로 묶고, 네가 바라는 만큼의 시간을 준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네가 처음부터 마왕이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립고 덧없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래, 처음부터 마왕인 것은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다.”
마왕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속삭였다.
“바라는 시간은 주마. 하지만 무조건 협력은 하지 않는다. 시간을, 줄 뿐. 다음의 협상은…… 하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네가 살육과 참혹과 광란을 쓰러트린 뒤. 바벨에 도달할 때 하도록 하지.”
“그 후에.”
목소리가 겹쳤다.
카자드 지하가 사라지고 바벨의 어전으로 돌아왔다. 계단 위의 사슬 옥좌에 앉은 유폐의 마왕이 말을 이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북쪽 설원으로 향했다. 그가 설원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너희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마경으로 옮겨지던 노예들.
“어린 소년이 마족과 흑마법사를 죽이고 노예를 해방한다. 세상은 그러한 영웅담에 목말라 있었지.”
당시의 설원은 노예를 비롯한 약탈한 물자를 운송하는 주요 교역로로 쓰였다. 바야르를 비롯한 부족들은 최대한 마족과 맞섰지만, 일통되지 않고 각자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설원 부족들은 마족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러한 시점에서 베르무트가 나타났다. 노예를 해방하고, 바야르와, 모론과 결탁했다.
소년이 청년이 될 정도의 짧은 시간. 베르무트는 바야르와 다른 부족들의 힘을 하나로 모았고, 북쪽의 노예들을 해방했다. 그리고 용사의 ‘후보’가 되어, 유라스에 초빙되었다.
“……전부 다 베르무트의 의도였다는 거냐.”
“예상하지 않았나?”
유폐의 마왕이 되물었다.
“그는 많은 것을 설계했지. 3명의 마왕을 죽이고 내게 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될지. 누구를 동료로 삼아야 할지.”
“…….”
“갈라져 나오기 전부터 안배했을 거다. 멸망의 속에서, 세상을 보면서…… 누구에게 가능성이 있는지. 누구를 동료로 삼아야 할지.”
“……멸망의 분신, 이라고 했지.”
세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300년 전 이 자리에 있었다. 패배를 겪고 절망했다. 진실을 알리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 베르무트를 원망했던 적도 있다. 베르무트에게,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베르무트와 멸망의 마왕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을 것임은 진즉부터 알았다. 하지만 세냐는 ‘어떻게’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에게서 떨어져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직감했다. 베르무트와 멸망의 마왕이 분리된 것. 그것은 멸망의 마왕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될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굳이 약속을 맺어준 것은, 그 또한 베르무트를 통해 멸망을 끝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상처다.”
대답을 들은 순간.
모두가 유진을 쳐다보았다. 세냐는 드디어 이해했다. 크리스티나도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아니스는 탄식을 흘렸다. 그제야 그녀는, 왜 유진이 베르무트의 존재에 대한 추측을 그토록 피해왔는지를 알았다.
“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에게 새긴 상처.”
유폐의 마왕이 말을 이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그 상처에서 태어났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유진은 피범벅의 주먹을 쥐었다.
빌어먹을 환생 581화
알고 있었다.
멸망의 중심. 아가로트가 베었던 자국. 베르무트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알 수 있었다.
시엘의 마안을 통해 베르무트와 마주했을 때. 베르무트는 자신의 정체를 직접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 베르무트와 만났을 때. 그 시점에서부터 유진은 이미, 자신이 상상하는 것이 모두가 진실임을 확신했다.
그렇지만 외면했다.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베르무트에게 정체를 들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놈의 정체를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베르무트가 어떤 존재건, 어떻게 태어났건, 놈은 베르무트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
“…….”
피범벅의 주먹을 열었다.
그때, 베르무트에게 말했었다. 정 모든 것을 알리고 싶다면. 나중에,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 빌어먹을 의자에서 베르무트를 일으켜 세우고, 다 같이 흠씬 두들겨 팬 뒤에 듣겠노라고.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은 알았다. 베르무트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유폐의 마왕을 넘어야 한다. 이곳 바벨의 어전에서 모든 진실을 말하고, 유진이 결정하는 것이 마왕의 마지막 시련이다.
“첫 번째 약속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
유폐의 마왕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베르무트와 함께 왔다면…… 멸망의 끝을 위한 협상을 할 수 있었겠지. 베르무트가 바랐던 대로 너희를 멸망의 뱃속으로 인도해 주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도박일지라도, 나는…… 본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도박수를 걸었겠지.”
하멜이 죽었다.
“베르무트와 두 번째 약속을 맺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멸망의 안으로 돌아갔다. 멸망에 뒤섞여가면서 멸망을 붙들었다. 그리고 나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멸망을 늦추며 얻은 유예. 설령 최후에 멸망할지라도, 지켜볼 가치는 있으니.”
유폐의 마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짧은 웃음을 흘렸다.
“시간을…… 준다. 버는 것은 베르무트고, 나는 전쟁을 멈추기만 하면 될 뿐. 그렇게 주어진 시간은 의미가 있었다. 세상은 300년 전보다 성장했다. 전쟁시대 이상으로 대륙의 의지는 강건하다. 그리고 하멜, 환생한 너는 신성을 쥐고서 바벨을 올라, 내 앞에 도달했다.”
300년 전이라면 이것만으로 조건이 충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베르무트가 이곳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겠지요.”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적의를 숨기지 않는 눈동자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와 싸우고 싶나?”
“우리 중에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것은 유진 라이언하트의 선택에 달려 있지.”
모두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너를 위한 것이니 말이다. 멸망에 깊은 상처를 남긴 아가로트의 환생. 모든 고신의 염원을 잇는 존재. 베르무트가 자신을 갈아 넣으면서 이룬 하멜의 환생. 빛과 모든 신의 대행자.”
전쟁시대 이후 300년은 오직 유진을 위해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앞으로 영원을 더 살아갈지라도, 지금의 너 같은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나는 의심해야 한다. 네가 정말로 멸망을 끝낼 수 있는가? 베르무트가 곁에 없는 네가,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
“네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할지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유폐의 마왕이 턱을 괴었다. 높은 곳의 옥좌에서 아래를 오시하는 모습은 지극히 마왕다웠다.
“자결해라.”
“……뭐?”
“자결해서, 내게 혼을 바쳐라. 너희도 마찬가지다.”
마왕의 시선이 세냐와 성녀들에게 향했다.
“세냐 메르데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리고, 아니스 슬리우드. 너희의 혼은 무척이나 가치가 있지. ‘다음’으로 데려가기에 차고 남아.”
“너…….”
“너희가 자발적으로 혼을 바친다면 그만큼의 대우는 해줄 것이다. 기억을 보존하고 싶나? 그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지, 알고 있지 않나? 광란의 마왕은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다.”
“…….”
“물론 너희가 자결하지 않아도…… 나는 너희 모두를 죽일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내가 너희의 기억을 보존해 줄 이유는 없지. 그리고 너희를 직접 죽이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아. 그래 버리면 영혼의 순도가 조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그것을 피하고 싶다. 가치가 높은, 다시는 없을 영혼들이니 말이다.”
유폐의 마왕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고?”
“우리를 마족으로 환생시키겠다는 말입니까?”
세냐와 크리스티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내뱉었다.
“아니.”
돌아온 대답에 둘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무조건 마족으로 환생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거느린 영혼을 언제나 다음으로 데려가 왔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족은 선택하지 않는다. 그냥, 데리고 갈 뿐이다. 몇 번이나 그것을 반복해 왔지. 버려도 되는 것은 버리고, 새로이 채우고.”
“…….”
“이건 약속할 수 있겠구나. 내가 살아갈 영원에서, 너희의 혼은 결코 버릴 일이 없을 것이다. 바란다면 무수한 윤회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마. 만약 그 영원이 버겁다면- 기억을 잊게 해줄 수도 있다.”
이제는 유폐의 마왕을 제외한 모두가 침묵했다. 마왕은 침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속삭임을 계속했다.
“운명은 반복되게 마련이다. 기억을 보존하지 못한 아이리스가 운명에 이끌려 광란의 마왕이 되었듯, 유진 라이언하트, 네게 아가로트의 반지가 흘러갔듯, 이바타 자하부가 네게 호감을 가졌듯, 누아르 제벨라가 네게 집착하였듯.”
유폐의 마왕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공간이 쩌억 갈라지며 다른 풍경을 비추었다. 바벨 아래의 전장. 신군과 마군의 전투가 모두에게 보였다.
“저곳의 존재 중에서 너희와 각별한 인연을 가진 자들이 있겠지. 전장에 없는 자 중에도. 그래, 유진 라이언하트. 네 친부는 어떠한가? 널 가문에서 돌봐 온 시종은? 너를 섬기는 숲의 엘프들은? 그 외, 너를 우러르는 수많은 신도들은?”
“…….”
“그러한 인연은 다음 시대에서도 엷게나마 이어지게 마련이다. 스쳐 지나갈 뿐이라도, 지금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유폐의 마왕의 눈동자가 빙글 휘었다.
“하지만 만약, 너희가 자결하면서 바란다면. 나는 기꺼이 너희와 인연을 맺은 존재들도 거두어 줄 것이다. 너희의 혼에는 그럴 가치가 있고, 너희와 인연을 맺은 영웅들에게도 그럴 가치가 있다.”
노골적인 유혹이다. 지금의 세상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자는 말. 모두와 똑같이 과거를 기억하고, 다음 시대를 살아가며, 죽고, 또다시 다음으로. 그것을 반복하자는 것이다.
“영원.”
유진이 입을 열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너는, 멸망을 끝내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럴 수 없으니까.”
유폐의 마왕이 대답했다.
“베르무트와의 대화로 알았을 텐데. 나는 멸망의 마왕을 죽일 수 없고, 멸망의 마왕은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영원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렇군.”
-너라는 희망을 유폐의 마왕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
하우리아에서 맞닥트린 망령은 그렇게 말했다.
“네게 죽으면, 나는, 절대로 멸망의 마왕을 죽일 수 없다.”
망령에게, 미련을 느끼면 그냥 두고 가라고 말했다.
“네게 죽으면, 나는, 절대로 베르무트를 구할 수 없다.”
내가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에,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베르무트를 구한다고?”
유폐의 마왕이 웃음을 흘렸다.
“너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멸망의 파편 정도가 아닌 분신이다. 그리고 지금은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면서 동화되어버렸지. 멸망의 마왕을 죽인다는 것은, 베르무트를 죽인다는 것이다.”
알고 있다.
“이번이 아니라면 도전조차 할 수 없어.”
세냐가 대답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씹고서 메리를 쥐었다. -화아아악……! 메리의 꽃잎이 열렸다.
“저는 베르무트 님과 재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한 번은 얼굴을 보아야겠습니다. 그 고귀한 낯짝을 제 손으로 구겨버리고 말겠다고, 추하게 코피를 쏟게 만들겠다고 오래전부터 결심했습니다.”
아니스의 머리에 떠오른 천사의 고리가 빛을 발했다. 등에서는 여덟 장의 날개가 펼쳐졌다.
“베르무트를 위한다면 멸망을 쓰러트릴 수 없다.”
“제게 있어서 유진 님과의 만남은 기적입니다. 이 찬란한 기적을 당신의 사슬에 바쳐 다음으로 잇는 것? 제가 태어나고, 유진 님과 만난 세상을 버리는 것?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티나도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유폐의 마왕은 돌아오는 대답들에 웃으며 옥좌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베르무트를 구하고, 멸망을 죽이고, 세상까지 구하겠다는 건가? 욕심이 과하군. 불가능하다. 인연의 결속과 미래를 포기할 가치가 있나? 영원에는 여러 변수가 나타나곤 하지. 너희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어쩌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멸망을 끝낼지도 모르지. 어쩌면 멸망이 스스로 사라질지도 모르고.”
“아니.”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왔으니까. 내가 그를 해내기를 염원한 자들이 있으니까.”
“그를 해내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넘어야 한다.”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끼릭, 끼리릭…… 짊어진 인과의 사슬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다시 망토가 되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유진은 당장 대답하지 않고 옆을 돌아보았다.
세냐와 눈이 마주쳤다. 세냐는 뭘 굳이 쳐다보냔 듯이 눈을 찡그리더니, 로브를 살짝 들춰서 왼손을 보여주었다. 보란 듯이 가운뎃손가락이 올라갔다.
성녀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스는 세냐와 마찬가지로 확인을 구하는 시선이 언짢았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언짢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유진의 시선에 더욱 큰 믿음을 느꼈다.
“우리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유진은 레반테인을 옆으로 들었다. ㅡ화륵. 유리의 칼날 안쪽에서 흘러나온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그 질문은 유폐의 마왕에게 향하지 않았다.
“모론.”
ㅡ콰직.
어전에 내려앉은 어둠에 커다란 균열이 갔다. 순식간에 번져나간 균열이 떨어져 내리더니, 이윽고 와장창 부서졌다.
“어리석은 질문이다, 하멜.”
덥수룩한 수염에 장발. 거구의 사내가 어둠에 뛰어들었다.
“세상과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한가?”
모론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유진을 통해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쿠웅. 유진의 옆에 내려선 모론은 고개를 들어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그를 이루기 위해 유폐의 마왕과 싸워야 한다면, 당연히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끄트머리가 조금 잘린 거대한 도끼가 모론의 어깨에 걸쳐졌다.
“그러니 가능하다.”
모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옥좌는 더 이상 없다. 유폐의 마왕은 텅 빈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보았다.
공포의 모론 루하르. 재앙의 세냐 메르데인. 지옥의 아니스 슬리우드가 저곳에 있다. 모조화신을 넘어, 참된 성녀에 도달한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저곳에 있다. 전쟁신 아가로트이자 몰살의 하멜이었던 유진 라이언하트가 저곳에 있다.
“……그런가.”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끼긱, 끼기긱…… 사슬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전을 감싼 어둠이 흔들렸다. 공간에 녹아든 모든 사슬이 유폐의 마왕에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헬무드의 마력이 유폐의 마왕에게 집중되었다. 헬무드 전역에 퍼져나가며 제국을 움직이던 모든 마력이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ㅡ쿠궁.
유폐의 마왕이 한걸음 계단을 내려왔다. 터무니없는 위압감이 모두를 압박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움찔거리지 않았다. 상대는 영원을 살아온 대마왕이자 헬무드의 황제. 저만한 존재감은 당연한 것이다.
“300년 전과는 다르군.”
그때 어전에 도달한 이들은 별 볼 일 없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아득한 강자였지만, 유폐의 마왕의 시선에서는 하찮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사명감은 봐줄 만했다. 신념은 좋았다. 증오는 훌륭했다. 독기는 멋졌다.
지금은 어떤가? 사명감도, 신념도, 증오도, 독기도, 모든 것이 과거보다 대단하다.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결말마저 바꿀 수 있을까.”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항상 그래 왔듯. 모론이 앞장서서 나아갔다. 그는 훅 숨을 내뱉으며 도끼를 양손으로 쥐었다.
ㅡ꽈드득……! 도끼의 자루를 으스러트릴 듯이 강하게 쥐어 온 힘. 도끼가 덜덜 떨리면서 빛을 발했다. 유진의 신력이 모론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모론이 유폐의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환생 582화
[시엘.]
그 목소리는 귀에서 들리는 아우성과는 달리 머릿속에 새겨졌다. 검은 안개의 목에 박힌 자벨의 칼날을 회수하던 시엘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움찔 놀라면서 하늘을 보았다.
거무죽죽한 하늘의 중심에 뜬 마왕성 바벨. 이 목소리는 시엘에게 있어서 계시 그 자체다. 바벨에 돌입했던 유진이, 신이, 시엘에게 계시를 내린 것이다. 이 계시에서 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 시엘은 당황하지 않고서 즉시 뒤로 물러섰다.
“유진이냐?”
근처의 시안이 즉시 다가왔다. 시엘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두 눈을 감았다. 시안은 뺨에 묻은 핏자국을 손등을 닦으면서 시엘의 근처에서 엄호를 섰다.
그렇게 움직인 것은 시안만이 아니었다. 길레이드와 휘하 백사자 기사단이 즉시 시엘을 중심으로 한 원진을 구성했다.
지직.
닫힌 왼쪽 눈의 주변에서 검은 전류가 흘렀다. 시엘은 몇 번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감은 눈을 다시 떴다. ㅡ화아악! 시엘의 시선이 닿은 상공에 시커먼 구체가 나타났다.
투박하고 큼지막한 손이 구체의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 몇 번인가 허공을 휘저었다. 이윽고 나무 기둥처럼 굵은 팔과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 그리고.
봉두난발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머나먼 북쪽의 레헤인야르, 용감한 모론이 이곳에 왔다. 그는 조금의 당황과 긴장도 없는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굳이 살필 필요도 없었다. 먼저 뻗었던 손끝에서 느꼈던 대기의 진동. 온갖 아우성과 소음이 뒤섞인 전쟁의 소리. 모론의 수염이 푸들거리며 떨렸다. 암흑의 문을 빠져나온 모론이 전장에 섰다.
시엘은 욱신거리는 눈자위를 감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실패의 가능성은 없었다. 몇 번 시험도 거쳤다. 하지만 계시의 순간에 정확하게 모론을 불러냈다는 것이 시엘을 안도시켰다. 그녀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마나가 새로이 채워지는 것을 느끼며 모론에게 다가갔다.
“모…….”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모론의 주변, 그의 영역에 진입한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시엘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수염. 모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모론이, 과거 몇 번이나 보았을 때처럼 호탕한 표정이 아닐 것임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가.”
푸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한 수염 안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곳은 진짜 전장이다. 목숨과 목숨이 부딪치는 곳이다. 모론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거무죽죽한 하늘의 중심. 300년 전에 정복하지 못한 마왕성 바벨이 보였다. 바벨을 눈에 담은 순간, 모론의 육체가 전율했다. 덜덜 떨리는 상체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우아아아아아아ㅡ!”
쩌렁쩌렁한 함성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모론의 근처에서 머뭇거리던 시엘과 시안은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전장이 멈췄다. 신군과 마군 모두가 모론을 쳐다보았다.
“나는.”
쿠웅! 커다란 발이 대지를 한 번 밟았다. 그 발구름은 지진이 되어 전장을 흔들었다. 모론은 다시 한번 전장을 둘러보았다. 마군의 거인들을 가로막는 바야르의 후손들이 보였다. 나이트마치에서 보았던 세대의 영웅들은 전장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마군과 맞서고 있다.
“모론 루하르다.”
힘이 담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전쟁시대를 겪었던 마족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두려움이 번졌다. 그들은 용감한 모론보다 공포의 모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이름이 과거의 전장에서 얼마나 공포스런 이름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어…… 어쩌라는 거야?”
이 전쟁을 통해서 시대의 패권에 가까이 가려 하는 패기 넘치는 젊은 마족들은 공포에 떨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론 루하르란 수백 년 틀어박힌 은둔자일 뿐이다. 세냐나 유진과 달리 최근에 활약을 보인 적도 없다. 지금만 해도 저 목소리는 커다랗기만 할 뿐 그 외에는 특별함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전대의 퇴물이라고 해도 모론 루하르의 목은 가치가 높다. 달려들기 전에 먼저 살의가 모론에게 닿았다. 그 깜찍한 살의에 모론은 친히 도끼를 쥐어 호응했다.
우득, 우드드득……! 도낏자루를 쥔 손가락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도끼가 움직였다. 푸확! 휘두른 참격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살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모론에게 살의를 품은 마족 백 명의 목이 일제히 하늘로 떠올랐다.
“나를 불러내 주어 고맙다.”
전장의 한복판이지만 모론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뒤를 돌아 시엘을 보았다. 엉거주춤 선 시엘을 향해 모론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도 거하게 날뛰어보고 싶다만, 내 전장은 이곳이 아니구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론의 머릿속에서는 바벨의 상황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모론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모론은- 베르무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해방한 포로들 앞에서 검을 들고 있던, 사자라기보다는 늑대를 닮은 시절의 베르무트를.
변하는 것은 없다. 베르무트의 본질이 어떻건, 모론에게 있어서 베르무트는 베르무트일 뿐이다. 모론은 묵묵히 시선을 거두어 하늘을 보았다. 마왕성 바벨. 모론은, 오늘 저곳에서 살아서 물러설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모론이 다짐한 것은 승리뿐이다.
“하멜이 나를 부르는구나.”
우둑, 우두둑……! 모론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시엘과 주변인들은 이후 벌어질 일을 직감하고서 즉시 뒤로 물러섰다. 그 행동은 옳았다.
꽈아앙! 폭음과 함께 대지가 움푹 가라앉고, 모론의 거구가 바벨까지 도약했다.
“…….”
콰앙! 모론은 바벨의 벽을 부수고 침입했다. 그제야 시엘은 벌리고 있던 입을 가까스로 다물을 수 있었다. 잠시 멈췄던 전장은 모론이 도약한 직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엘도 다시 자벨을 휘둘렀다.
더 이상 유진의 계시는 들리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모론 님이 불려졌다는 것은, 유폐의 마왕과 전투가 시작된다는 뜻이니까. 위대한 베르무트를 제외한, 과거에 패퇴했던 영웅들이 시간을 넘어 다시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이길 수 있을까……?’
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간부들 대부분이 그렇듯, 시엘 또한 유폐의 마왕의 패배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큼 유진의 패배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불안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유폐의 마왕과 싸우는 것은 유진 혼자뿐인 것도 아니다. 현명한 세냐와 신실한 아니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리고 이제는 용감한 모론까지 바벨에 향했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전장을 맡은 간부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바벨에 향할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패배가 아닌 승리를 믿어야 한다. 이곳의 전투에 집중해야 한다. 간부들의 역량 차이는 압도하고 있다만, 마물과 흑마법사, 언데드 등까지 동원한 마군의 전력은 전황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ㅡ후욱.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하늘이 시커멓게 바뀌었다. 바벨을 휘감은 어둠이 마치 먹물처럼 번져가고 있다. 유진이 만든 태양은 건재하여 신군에게 힘을 내리고 있다. 바벨도 마찬가지였다. 유폐의 마왕이 거둬들인 제국을 움직이던 마력이, 전장의 마군들에게 부여되었다.
“아아아……!”
끝이 없는 힘에 마족은 희열에 몸을 떨었다. 마물들은 마치 진화를 거듭한 것처럼 몸뚱이부터 변화했다. 흑마법사들도 오직 힘만으로 벽을 뚫었으며, 그들이 일으켜 세운 언데드들도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심지어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 인간이나 용병들마저 마력의 은혜를 받았다.
힘의 크기가 다르다. 유폐의 마왕의 마력은 수백만에 달하는 마군에게도 당연하단 듯이 마력을 퍼줄 수 있다. 간부진의 역량 차이가 단순히 힘만으로 좁혀질 정도였다.
“이럴……!”
길레이드가 당황하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력의 태양 근처, 마이스의 배틀쉽을 두른 라이미르아가 보였다. 몇 번씩이나 브레스와 마법을 폭격한 라이미르아는 광명사제단의 정예인 은광을 태우고서 전장에 기적을 내리고 있었으나, 지금 퍼져 나가는 마력에 의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꽈아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벨이 흔들렸다. 라이미르아는 놀란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고도를 유지한 라이미르아와 그 위에 탄 사람들이 바벨을 쳐다보았다.
바벨을 부수고 들어갔던 모론이, 다시 바벨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길레이드는 그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벨의 영역 바깥까지 날아갔던 모론을 추격하듯, 부서진 벽 안쪽에서 쇠사슬이 쏘아져 나왔다.
모론이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꽈지직! 내지른 주먹이 사슬을 정면에서 으스러트렸다. 발 디딜 곳 없는 하늘이지만 모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모론은 주먹으로 부수어 튕겨낸 사슬을 스스로 붙잡아 당기는 것으로 다시 바벨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 등신아!”
바벨의 어전. 유진은 한심하단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기세 좋게 달려든 주제에 설마 일격에 나가떨어질 줄이야……!
“그러게 왜 무식하게 달려들어?”
메리를 활짝 펼친 세냐도 핀잔을 주었다. 그녀는 로브의 안쪽에서 환상의 마안을 준비했다.
“나는 등신이 아니다.”
모론은 손에 움켜쥔 사슬을 단단히 잡으며 대답했다. 얻어맞은 일격.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날아갈 정도였지만 상처는 없다.
뿌득. 모론의 손등과 팔에 굵은 혈관이 돋고 근육이 꿈틀거렸다. 모론은 계단의 중간에 멈춰 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끌어내리고 싶나?”
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공간마저 붙잡아 구겨버리는 모론의 힘은, 붙잡은 사슬과 이어진 유폐의 마왕은 미동조차 시킬 수 없었다.
끼릭, 끼릭.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모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끼기긱……! 모론의 발이, 유폐의 마왕 쪽으로 끌리기 시작했다. 모론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사슬을 단단히 붙잡았다. 뚜두둑……! 사슬에 쓸리는 손아귀에서 불꽃마저 튀었다.
쿠웅! 모론의 발이 바닥을 짓눌렀다. 앞으로 기울었던 몸이 뒤로 젖혀지고, 쭉 뻗었던 팔이 접혔다. 끌려가던 사슬이 순식간에 모론 쪽으로 당겨졌다.
그것과 동시에 유폐의 마왕이 계단에서 날아올랐다. 그는 사슬의 망토를 날개처럼 펼치면서 어전의 중심으로 떨어졌다. 모론의 도끼가 떨어지는 유폐의 마왕을 노렸다.
도끼를 휘둘렀다. 닿았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정작 모론의 ‘손’은 닿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모론의 도끼는, 유폐의 마왕의 주변을 휘감은 사슬의 앞에서 멈췄을 뿐이다.
사슬의 한가운데에서 유폐의 마왕이 손가락을 들었다. 길게 세운 검지가 모론에게 향했다. 검은색 빛이 반짝였다.
작은 반짝임에서 사슬이 튀어나왔다. 일직선의 사슬에 얻어맞은 모론이 뒤로 날아갔다. 아찔한 충격이 내장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모론은 이를 악물고서 버텼다. 그는 날아가는 몸에 제동을 걸면서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슬이 마치 창처럼 모론에게 쇄도했고, 내리찍은 도끼가 사슬을 처박았다.
“등신같이 굴지 말라니까……!”
유진은 몸을 낮추며 내뱉었다.
화륵. 가슴 부근에서 태어난 신화가 전신을 뒤덮었다. 마력이 가득한 어전에서 유진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 불빛에 공명하여 성녀들이 양팔을 펼쳤다.
화아악! 마력의 한복판에서 밝은 빛이 태어났다. 아니스가 기도문을 읊고 크리스티나가 펼친 양팔을 한곳에 모아 기도를 올렸다. 태어난 빛이 무수한 고리가 되어 마력을 밀어냈다.
[빛이……!]
아니스는 감탄하여 중얼거렸다. 300년 전 그녀는 이 어전에서 희미한 빛을 불러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불편 없이 빛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신력 그 자체인 유진이 이곳에 있으니 당연했다.
조용히 바닥에 내려선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밝구나.”
유폐의 마왕의 손가락이 성녀들에게 향했다. 그 즉시 유진의 발이 바닥을 박차 성녀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면을 가로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환한 빛 속에서 마력은 존재하고 있다. 검게 번진 마력이 성녀들을 덮쳤다. 그 순간 프로미넌스의 불꽃이 성녀들을 휘감았다.
“허.”
성녀가 빛이 되어 유진과 공명했다. 유폐의 마왕은 환한 빛과 함께 펼쳐지는 날개에 감탄했다.
그는 유진이 ‘어떻게’ 싸우는지 목격한 적이 없다. 제벨라 시티에서의 전투는 누아르의 방해로 관측할 수 없었고, 문지기로 나선 발자크는 유진이 아닌 세냐에게 죽었기 때문이다. 만약 발자크가 세냐가 아닌 유진에게 죽었을지라도, 발자크로서는 유진의 진심을 조금도 끌어내지 못했으리라.
“가비드 린드먼과 결투할 때보다 성장했나.”
멀지 않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유폐의 마왕은 당연히 유진이 레반테인을 휘두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간극이 좁혀지는 순간에도 유진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곧 유폐의 마왕은 빙그레 웃었다. 빛과 이어진 촉매인 레반테인은, 지금은 검의 형상을 취하지 않고서 유진의 가슴에 깃들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훌륭하군.”
건조한 평가에 화답하듯 유진의 손이 들렸다. 손을 감싼 불꽃이 검이 되었다. 최초의 일격부터 닿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일단 유진은 손에 쥔 검을 그 목적에 걸맞게 휘둘렀다.
빠직!
놀람에 크게 뜬 눈앞에서 불꽃이 흩어졌다. 신화를 부순 것은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었다. 유폐의 마왕의 발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유진은 잠깐이나마 유폐의 마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직감이 대응하게 만들었다. 유진은 직감에 따라 손을 휘둘렀다. 흩날린 불씨가 무수한 칼날이 되어 공간을 찢어발겼다. 유폐의 마왕은 물러서거나, 결계를 만들어 방어하지 않았다. 천천히 뻗은 손이 쇄도하는 칼날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것만으로 칼날의 궤적이 바뀌었다. 신력과 마력이 닿은 것인데도 반발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닿았는데 닿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유폐의 마왕의 수법은 유연했다. 궤적이 뒤틀린 덕에 유진과 유폐의 마왕 사이가 활짝 열렸다.
“의외인가?”
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유진은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에 즉시 주먹을 날렸다. 그것과 동시에 모론은 유폐의 마왕을 등 뒤에서부터 덮쳤다.
늦게 출발한 손이 유진의 주먹과 만났다. 정면에서부터 단단히 가로막는가 싶더니, 활짝 펼친 손은 조금의 강건함도 없이 유진의 주먹을 감싸고서 뱀처럼 팔뚝을 휘감았다. 등 뒤에서 떨어지는 도끼. 사슬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손이 도끼를 받아냈다.
유폐의 마왕의 전법은 근접전을 허락하지 않는 마법사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혹은 대부분의 마족과 마왕이 그런 것처럼, 압도적인 마력을 바탕으로 한 고화력 중심의 전법을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 300년 전에 유폐의 마왕과 직접 싸웠던 세냐와 아니스, 모론도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다르다. 유폐의 마왕이 말한 것처럼 이건 너무 의외였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초근접전. 무한한 마력을 바탕으로 한 압도적인 힘이 아닌, 상대의 힘을 이용하거나 모조리 흘려내는 무(武).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되돌아온 힘에 모론의 무릎이 굽혀졌다. 유진은 얽힌 팔을 즉시 빼내려고 했지만, 그러기 전에 유폐의 마왕의 손이 먼저 유진의 가슴에 도달했다.
투웅.
활짝 핀 손바닥이 유진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고, 유진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환생 583화
“쿨럭.”
내부에서 퍼진 묵직한 충격. 입에서 내장 조각이 섞인 피가 흘러내렸다. 유진은 목에 끈적히 달라붙은 피를 퉤 뱉어내고서 벽에 처박힌 몸을 뽑아냈다.
“진짜 의외네.”
설마 유폐의 마왕이 근접전을 걸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러한 전투 방식은 그간 보았던 유폐의 마왕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냐와 모론, 아니스에게 들었던 300년 전의 전투에서도 유폐의 마왕은 저런 식으로 싸운 적이 없었다.
“너와 다를 것도 없다.”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그의 등 뒤. 모론은 제압당했던 도끼를 놓고서 맨손으로 유폐의 마왕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유폐의 마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손을 들었다.
파악! 모론의 주먹이 마치 기름에 미끄러진 것처럼 유폐의 마왕을 스쳤다. 유폐의 마왕은 스쳐 지나가는 주먹의 팔뚝을 덥석 붙잡더니,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모론을 바닥에 메쳐버렸다.
“네가 검도, 창도, 도끼도, 활도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몸이 자신의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닿는 순간에 힘이 쭉 빠져나가서 제멋대로 휘둘려 버린다. 그것은 육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모론에게 있어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선 감각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모론은 팔뚝부터 붙잡힌 오른팔이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관절과 근육이 멀쩡할 텐데도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힘이 들어가기는커녕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할 줄 아는 것이 많지. 무기는 모두 다룰 수 있다. 마법도 마찬가지.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으니.”
천천히 움직인 시선이 세냐에게 향했다. 유폐의 마왕은 활짝 펼쳐진 메리와,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치는 영력을 보고서 빙긋 웃었다.
“에테르가 마력과 마나로 나누어지기 전부터 마법을 다뤘으니. 물론, 마족…… 마왕으로서의 권능에도 익숙하지.”
“극한까지 익히지는 않은 모양이지?”
세냐는 당황하지 않고 내뱉었다.
찌직, 찌지직…… 회오리치는 영력에 확실한 살의가 깃들었다. 동시에 발현시킨 절대률이 유폐의 마왕을 포착했다.
“그만큼 긴 시간 마법을 다뤘다고 자부한 주제에, 너는 현자를 간파하지 못했어.”
“극한이라, 부정할 수는 없군. 내가 도달했다고 생각한 극한이란 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미 구시대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마왕으로 영원을 살기 위해 여러 가지를 포기하고 바칠 수밖에 없었지.”
유폐의 마왕은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무엇을 포기했다는 것인지.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세냐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영력과 마나가 유폐의 마왕에게 강하게 반발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 존재는 ‘마왕’이라는 이름답게 오직 마력만을 지배한다. 마나도, 영력도 다룰 수가 없다. 아득히 옛날은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유폐의 마왕에게 마나는 다룰 수 없는 힘이다.
“하지만 이건 포기하지 않았다.”
펼쳐져 있던 손이 천천히 쥐어져 주먹이 되었다.
끼릭, 끼리릭…… 주먹에 힘이 들어갈수록, 기묘하게도 유폐의 마왕과 연결된 사슬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마치 유폐의 마왕의 힘이, 육체가, 사슬에게 묶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처음으로 존재했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 내게 영광과 절망을 주었던 것.”
ㅡ뿌드득! 지면에 처박혀 있던 모론의 몸이 홱 돌아갔다. 그는 붙잡힌 팔을 빼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어깨를 으스러트리는 것으로 속박에서 탈출한 것이다. 그래 봤자 위치는 바닥. 하지만 모론은 그 불편한 자세에서도 극한의 위력을 뽑아내서 주먹을 갈겼다.
“내가.”
꽈직!
모론의 주먹이 닿기도 전에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떨어졌다. 명치에 처박힌 일권. 모론의 입이 쩍 벌어지며 피가 뿜어졌다. 유폐의 마왕은 처박은 주먹을 뽑아내며, 숙인 몸을 일으켰다.
“가장…… 잘하는 것.”
유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폐의 마왕의 분위기가 돌변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료함과 권태를 두르고 있던 저 마왕이, 지금은 마치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공간을 전율시킬 정도의 투기(鬪氣). 유폐의 마왕이라고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인 살기(殺氣). 유폐의 마왕은 아직까지 붙잡고 있던 모론의 팔을 내팽개치면서 성큼 발을 뻗었다.
“……야, 모론.”
유진은 바닥에 처박힌 모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살아 있냐?”
모론에게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론이 간신히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유진은 느낄 수 있었다.
죽지만 않았으면 됐다. 300년 전에도 모론이 저만큼 죽기 직전이 되어 쓰러진 적은 여러 번 있었으니. 그래서 놈이 등신인 것이다. 무턱대고 달려들어서 처맞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언제 쓰러졌냐는 듯이 덤벼드니까.
유폐의 마왕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곱절이 된 압박감이 유진을 덮쳤다. 하지만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짓누르는 압박감이 강할수록 유진을 휘감은 불꽃은 더욱 밝게 타올랐다.
ㅡ콰앙! 유진이 땅을 박찼다. 서로의 거리가 사라졌다. 불쑥 나타난 검이 유폐의 마왕을 베려고 들어갔다. 동시에 유폐의 마왕의 왼손이 움직였다. 활짝 펼친 왼손이 측면을 베는 검을 가로막았다.
꽈직! 손에 붙잡힌 칼이 부러졌다. 개의치 않았다. 유진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단창(短槍)이 쥐어져 있었다.
찌르는 창. 유폐의 마왕의 오른손이 창을 따라 움직였다. 발과 허리도 함께 움직여 몸을 옆으로 세웠다. 후욱! 허리에서 아슬하게 빗겨나간 창이 오른손에 붙잡혔다.
“참혹의 권능.”
유폐의 마왕이 속삭였다. 발밑과 등, 머리 위, 양옆에서 나타나려던 창은 생성되기도 전에 사슬에 묶였다.
“내게 쓰기에는 우습군. 대체 누가 참혹의 마왕에게 루인토스를 주었을 것 같나?”
꽈지직! 사슬에 묶인 창과, 직접 붙잡힌 창이 부러졌다. 유진은 미련을 갖지 않고 허공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끼긱, 끼기긱……! 유폐의 마왕이 주먹을 쥐었고, 어깨를 젖히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 모든 움직임에 사슬의 비명이 따랐다.
유폐의 마왕이 주먹을 내질렀을 때. 사슬이 가장 큰 비명을 내질렀다. 유폐의 마왕과 연결된 사슬의 망토가 크게 요동쳤다. 쏘아진 주먹이 마력을 흩뿌렸다.
그 심상찮은 위력에 유진도 즉시 대응했다. 프로미넌스가 성역 결계를 구축했다. 빛에 동화된 성녀들도 동시에 기도를 외웠다. 유진 본인도 거대한 망치를 만들어 주먹에 내리 찍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의 주먹은, 정면을 가로막는 모든 방해를 철저하게 부숴버렸다. 분쇄추의 권능은 망치 채로 꿰뚫었고, 중첩된 성역 결계를 으스러트렸으며, 성녀들의 기도마저 사슬의 비명으로 지워 버렸다.
그 순간. 세냐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사방에서 자라난 넝쿨이 유폐의 마왕을 포위했다. 사슬이 넝쿨에 대응하려 했지만, 넝쿨은 사슬을 부식시키고서 기어코 유폐의 마왕의 팔과 양다리를 붙잡았다.
“신위의 마법.”
유폐의 마왕은 넝쿨에 붙잡힌 양다리와 왼팔을 힐긋 보았다. 던졌던 주먹이 노린 장소에 유진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이 짧은 사이에 도약해낸 것이다.
“놀랍지만, 부족하군.”
ㅡ꽈아앙! 메리의 마법이 유폐의 마왕을 덮쳤다. 마왕마저 위협할 포격이지만, 유폐의 마왕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뻗을 뿐이었다.
“오른팔은 묶지 못했잖나.”
느슨히 펼친 손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세계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 흐름은 세냐의 절대률마저 거역했다. 유폐의 마왕에게 닿았어야 할 포격이, 뒤틀린 흐름에 따라 텅 빈 허공을 꿰뚫었다. 번쩍하는 빛, 어전의 천장이 날아갔다.
“사지가 묶였어도 별 차이는 없었을 테지만.”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넝쿨을 뜯어냈다. 세냐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유폐의 마왕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것은 마법도 권능도 아니다. 모론이 무식한 힘으로 공간을 잡아끌고 쥐어뜯는 것처럼, 유폐의 마왕도 비슷한 짓을 했을 뿐이다. 다만, 유폐의 마왕이 한 것은 절대률을 거역할 만큼 터무니없이 격이 높다.
……마법도 권능도 아니라고? 저러한 현상을 일으키는데, 저것이 마법과 권능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야,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
유진은 경악으로 벙찐 세냐의 옆에 내려서며 투덜거렸다.
“유폐의 마왕은 근접전에 능숙하지 않은 것 같다며? 거리를 좁히게 두지 않고 마력을 퍼붓고 사슬로 봉인한다며?”
“……300년 전에는 그렇게 싸웠단 말이야.”
세냐는 진심으로 억울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 그러셔? 그럼 300년 전에는 저 새끼가 너희를 엄청 봐줬나 보네. 아니면 전력을 다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거나.”
화르륵…… 등 뒤의 날개 주변에 흩날리는 신화의 불씨가 모여 천사가 되었다. 아니스는 혀를 쯧 차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모론에게 손을 뻗었다.
[그전에 뒈진 새끼가 참 입만 살았군요.]
“내가 뒈지지 않고 살아서 왔으면 안 싸웠대잖아.”
유진은 뻔뻔하게도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스의 손길을 받은 모론이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잠깐 졸았다.”
“등신.”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손을 들었다. 아니스와 마찬가지로 천사의 모습을 한 크리스티나는 공손히 유진의 손에 검을 올려주었다.
유폐의 마왕은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저러한 결속에- 마왕에게 많은 감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훌륭하다.”
마력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내 앞에 용사라는 이름과 사명으로 선 자들은 그리 많지 않지. 지금의 너희는, 내가 평생 보았던 ‘용사’라는 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오른손을 쥐었다.
“힘과 기술. 사명에 대한 절실함.”
왼손을 쥐었다.
“서로 중 누구도 배신을 상상하지 않는, 결속된 신뢰.”
특히 저 신뢰가 유폐의 마왕에게 많은 감상을 주었다. 인간에게 있어 300년은 길다. 그 긴 시간도 저들의 신뢰를 마모시키지 못했다.
아니스는 자신이 죽은 뒤에 세상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죽은 하멜의 바람과, 동료들을 위해 결국은 성녀로 죽었다.
세냐는 하멜의 복수를 하기 위해 평생을 마법에 바쳤다. 베르무트의 폭주로 죽음까지 몰렸으면서도, 끝까지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않았다.
모론은 꿈에 나타난 베르무트의 부탁 하나로 100년이 넘도록 누르를 죽였다.
하멜은. 갑작스러운 환생에도 과거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다. 동료의 변절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이름, 다른 육체로도 결국에는 이곳에 도달했다.
유폐의 마왕은.
저 결속된 신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안다. 너무나도 커다란 절망 앞에서는 제아무리 단단한 결속조차도 무르고 약해진다. 신뢰는 절망 앞에서 배신으로 흩어지고, 신념은 공포 앞에서 손바닥처럼 쉽게 뒤집히게 마련이다. 그 누구보다, 유폐의 마왕은 잘 알고 있다. 그는 대부분 경우에서 절망이자 공포였고.
한때는 절망과 공포 앞에 섰던 적도 있다. 굽히지 않고 맞서며, 신뢰와 신념을 부르짖었던 적도 있다. 물러진 결속에서 배신의 칼날을 맞은 적도 있다. 믿었던 동료의 배신을 보았던 적도 있다. 그 동료가, 걷잡을 수 없던 절망과 공포 자체가 되어가는 것도 목격했다.
“그렇기에.”
ㅡ쿠웅.
거대한 존재감이 어전을 압박했다. 유폐의 마왕이 보란 듯이 발을 들어 올렸다.
“나는, 마왕이란 시련이 되도록 하마.”
모론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유진도 함께 달려 나갔다. 둘의 합공은 300년 만이지만, 둘 중 누구도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다. 300년이란 시간으로 망각할 만큼 얕지 않기 때문이다. 모론은 유폐의 마왕의 왼쪽을, 유진은 오른쪽을 맡았다. 모론은 도끼를 들고, 유진은 검을 들었다.
과거의 경험에 그치지 않았다. 유진의 신력이 모론에게 이어졌다. 그렇게 둘의 사고가 연결되었다. 모론의 밝은 눈과, 유진의 직관이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최선의 공격을 만들었지만, 유폐의 마왕은 물러서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양팔이 움직였다.
꽈과광! 양쪽에서 덮친 도끼와 검이 주먹에 가로막혔다. 어느 하나 부서지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무수한 잔영을 남기며 움직였고, 도끼와 칼도 참격과 폭력을 난무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기도를 시작했다. 둘은 마력을 기도로 밀어내고, 모론과 유진의 상처를 돌보며 가호를 부여했다. 유진과 모론이 온전히 전투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300년 전부터 성녀의 역할이었다.
눈이 어지러운 난전. 세냐는 의식을 집중해서 유폐의 마왕의 움직임을 보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유폐의 마왕을 멈춰서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다. 동시에, 그녀는 로브에 덮인 환상의 마안을 준비했다.
꺼내는 것만으로 주변에 막무가내로 환상을 난사하는 일이 없도록 봉인은 해두었지만,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역시 봉인을 풀어야 한다. 세냐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목걸이를 뜯었다. 보라색 보석이 세냐의 왼손에 휘감겼다.
‘폭주할 일은 없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사용하는 것이 꺼림칙하다. 가능하다면 사용하고 싶지도 않다.
후회는 없다.
[하멜에게 거짓말을 했는데도?]
자신의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기적인 사람.]
평생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다.
[내게는 잔인한 일인걸.]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
[아하하.]
세냐의 머릿속에서 낭랑한 웃음이 울렸다.
빌어먹을 환생 584화
우우우…….
보라색 마력이 안개처럼 나타나 일렁거렸다. 세냐는 보다 정신을 집중하며 환상의 마안을 조율했다.
찌직거리는 노이즈. 집중한 정신이 조금 흔들리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더욱 마법을 조정했다. 안개가 되어 퍼져나가는 마력이 세냐의 마나와 만나서 영력이 되었다. 환상의 마안이 그 거대한 영력을 받아먹으면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로 이기적이고 잔인한 여자예요, 세냐 메르데인.]
메아리치는 웃음 안에서 보다 확실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새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세냐의 뺨을 더듬었다.
[나는 하멜의 영원한 악몽이 되고 싶었어요. 하멜이 영원토록 악몽을 두려워하고, 또, 내심 악몽을 다시 꾸기를 바라게 만들고 싶었죠. 세냐 메르데인보다, 아니스 슬리우드보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보다, 나를, 더, 강하게 새기고 싶었어요. 나를 떠올리며 후회하고 슬퍼하기를 바랐어요.]
더듬으며 올라온 손이 세냐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세냐는 대답하지 않고서 입술을 씹었다.
이건, 환상의 마안의 폭주가 아니다. 마안의 출력과 권능은 완벽하게 세냐의 통제하에 있다. 하지만- 이 ‘목소리’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 터무니없는 마안을 다루기 위해서는 세냐의 정신 또한 환상과 악몽에 침식되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멜이 평생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다고? 아하하, 결국 질투한 것 아니에요? 하멜이, 당신보다, 나를 더 추억하는 것을 말이에요.]
다른 헛소리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지만. 저것만큼은 세냐도 참을 수가 없었다. 뿌득……!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착각하지 마. 나는 그딴 감정으로 너를 붙잡은 것이 아니야. 추억? 하! 나는, 유진이, 너 따위보다 나를 더 생각하게 만들 자신이 있어.’
[정말로?]
‘넌 결국 뒈졌으니까, 누아르 제벨라. 하지만 난 살아 있지. 안 그래?’
돌아온 대답에 누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널 거둔 것은 같잖은 패배감 때문이 아니야.’
[아하하! 발끈하는 것이 꽤나 귀여운걸, 좋아요, 세냐 메르데인. 이건…… ‘거래’니까.]
필요하니까.
그래서 제벨라 시티에서 누아르의 혼을 거두었다. 소멸하지 않은 영혼을 거두어서, 환상의 마안 깊은 곳에 처박았다.
이 빌어먹을 마안은 통제하고 다룰 수 있지만, 본래 주인인 누아르보다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세냐가 누아르의 영혼을 거둔 것은 오늘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아하하…… 나를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비웃을 수밖에 없었죠. 이 누아르 제벨라 님을? 그건 굉장히 오만한 말이었으니까요. 세냐 메르데인, 당신이 아주 훌륭한 마법사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지만, 나를 도구로 사용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세냐의 눈동자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세냐는 혼이 희롱당하는 오싹함을 느끼면서도 환상의 마안과 메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건 거래다.
‘너는 유진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이 순간에도 유진과 모론은 유폐의 마왕을 상대하고 있다. 사방에서 덮치는 공격에도 유폐의 마왕은 조금도 불리해 보이지 않았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양팔은 온갖 공격을 가로막거나 흘려내고, 도중부터 끊어냈다. 그러면서도 틈이 보인다면, 아니, 틈 따위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의 공격은 유진과 모론의 방어를 관통했다.
‘너 따위의 도움은 가능하다면 바라고 싶지 않았지만, 유폐의 마왕은ㅡ 강해. 저 자식을 쓰러트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나는 뭐든지 할 거야. 엿 같은 네 손조차도 빌릴 거야.’
[당신의 패배와 죽음은 내 알 바가 아니지만, 하멜의 패배와 죽음은 바라지 않아요. 그는, 나를 죽였으니까. 나한테 이겼으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살아가야 해.]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세냐의 눈을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내 혼의 자유를 당신이 속박하는 것은……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당신을 이기적이고 잔인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세냐 메르데인.]
‘네 뜻대로 하게 두지 않아.’
[망자에게 안식조차 주지 않고, 윤회의 자유마저 빼앗겠다니. 정말…… 잔인하다니까. 하지만, 뭐, 좋아. 이것까지도 달콤한 여흥으로 삼도록 하죠. 하멜의 후회와 악몽을 바라지 않는 당신은-]
누아르의 손이 환상의 마안으로 향했다. 키이잉…… 영력에 휘감겼던 보석이 바르르 떨렸다.
[내 혼을 풀어놓을 수밖에 없을 테니.]
환상의 마안이 열렸다.
쿠궁.
간섭해 오는 거대한 파장에 유폐의 마왕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활짝 꽃을 피운 메리와 공명하는 보라색 보석. 유폐의 마왕은, 그 보석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ㅡ환상의 마안. 유폐의 마왕은 즉시 물러서려고 했지만, 마안이 내뿜은 요사스러운 빛은 물러설 틈도 주지 않고서 유폐의 마왕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이건…….’
시야가 뒤흔들렸다. 유폐의 마왕이 살아온 영원이 침식되기 시작했다.
정신에 간섭하는 환상의 마안. 본래 이만큼의 격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마안이지만, 누아르 제벨라는 환상의 마안의 한계를 몇 번이나 초월하여 불가해의 영역에 도달했다.
‘……깊다.’
저지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유진과 모론의 공격이 방해다. 두 명의 성녀도 보조를 맞추어 유폐의 마왕의 마력을 붙들고 거슬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환상의 마안은 제법 치명적으로 유폐의 마왕의 정신을 관통했다.
‘세냐 메르데인. 이 정도의 마법…… 아니, 이건 온전히 그녀만의 마법이 아니다.’
뒤틀려 어지러운 시야에서 세냐의 모습을 보았다. 이쪽을 향해 뻗은 메리. 유폐의 마왕은 그 오래된 지팡이에서 현자의 존재감을 느꼈다.
‘그런가.’
단순히 메리를 넘기고 그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저 지팡이에는 현자의, 비슈르 라비올라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메리의 마법이 환상의 마안과 어우러져 더욱 확실하고 깊게 유폐의 마왕의 정신을 흔들었다.
“…….”
유폐의 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깊은 어둠.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서 유폐의 마왕을 보고 있었다.
저것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저것을 보게 될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환상의 마안은 느끼지 않는 감상조차 억지로 끌어낸다. 억지로 만들어낸 동요가 유폐의 마왕의 정신을 흔들고, 그러한 혼란에서 마력과 공세가 흐트러진다.
“하하…….”
결국 유폐의 마왕은 짧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제법, 그립다는 감정이 들었다. 어둠 속에 선 환상은, 베르무트의 모습을 하고 있되 베르무트가 아닌 환상이 유폐의 마왕을 향해 무어라 속삭였다.
“의외로 증오는 느껴지지 않는군.”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
ㅡ푸확! 흐트러진 마력이 끊어졌다. 검붉게 타오르는 신화의 검이 유폐의 마왕의 목으로 날아왔다. 마차가지로 신화에 휘감긴 거대한 도끼가 유폐의 마왕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콰드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멈췄다. 목을 가른 검은 끝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도중에서 멈춰버렸다. 도끼도 똑같았다. 모론은 눈을 부릅뜨고서 도끼에 힘을 주었지만, 도끼는 유폐의 마왕의 몸을 반쯤 가른 상태에서 멈추어 더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이야.”
목과 허리가 반쯤 잘렸지만 유폐의 마왕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고통은 느끼고 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고통은 결코 평온을 깨지 않는다.
실제로 이런 고통은 유폐의 마왕이 언제나 안고 있는 고통보다 훨씬 미약하다. 수천, 수만 개의 사슬이 영혼을 관통하는 감각. 그렇게 관통한 사슬이 제멋대로 맞물리며 영혼을 갈아대는 감각. 절대 아물지 않고 느슨해지지도 않는 저주에 비하자면, 이 정토의 고통은 간지러울 뿐이다.
“너무…… 오래전이라서, 오히려 반가울 정도로군.”
세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환상의 마안을 통해 만들고자 했던 것은 ‘공포’다. 하지만 환상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에게 동요는 주었지만, 공포까지는 주지 못했다. 심지어 억지로 짜낸 동요조차도 유폐의 마왕을 더 이상 흔들지 못하고 있다.
유폐의 마왕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서.”
유진과 모론이 동시에 직감했다. 둘은 유폐의 마왕의 몸을 파고든 무기를 뽑아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폐의 마왕이 주도한 거대한 흐름이 둘이 벗어나지 못하게 끌어당겼다.
“내 심연을 보았나?”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우우우우…… 조각조각 끊어졌던 마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이어졌다. 두 주먹에 모이는 힘. 유진과 모론의 직관이 겹쳐졌다. 유진은 즉시 검을 놓고서 양손을 유폐의 마왕을 향해 뻗었다. 모론도 도끼를 놓고서 텅 빈 허공을 붙잡았다.
최대 출력의 이클립스가 즉시 완성되었다. 그 직전에 모론은 전력을 다해서 공간을 붙든 마력의 흐름을 뽑아냈다.
ㅡ꽈아앙! 이클립스의 폭발이 유폐의 마왕을 덮치고, 그와 동시에 모론은 유진을 끌어안고서 뒤로 도약했다.
화르르르…….
나부끼다 사라지는 불꽃. 유진은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면서 모론을 흘겨보았다.
“새끼, 좀 살살하지.”
“살살했다가는 저 주먹에 맞았을 거다.”
만약 얻어맞았다가는 뻐근한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진은 더 핀잔을 주지 않았다.
대신에, 유진은 세냐를 쳐다보았다. 그는 세냐가 들고 있는 환상의 마안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확신은…… 없다. 하지만 유진은, 환상의 마안에서 무언가 꺼림칙한 기척을 느꼈다.
“야, 너…… 설마…….”
이전에 물어보았을 때도 혹시나 했지만, 지금의 환상의 마안을 보니까 불안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냐는 유진에게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을 반쯤 벌리고 있다가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누아르도 마찬가지였다. 세냐에게만 보이는 누아르의 영혼은, 환상의 마안으로 파고들었던 심연에 경악을 느꼈다.
“보았구나.”
나부끼는 신화가 걷히고서 유폐의 마왕이 걸어 나왔다. 목을 반쯤 갈랐던 검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지만, 그의 허리에는 아직 모론의 도끼가 박혀 있었다.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도끼를 뽑아서 모론을 향해 던져 버렸다.
ㅡ꽈앙! 순식간에 날아든 도끼가 모론에게 처박혔다. 아슬하게 붙잡아서 막아내기는 했지만, 큼직한 도끼의 날은 모론의 가슴팍을 조금 파고들고 말았다. 하지만 모론은 신음 대신에 괴성을 내지르며 유폐의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유진도 세냐를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세냐가 저지른 일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저런 일을 남몰래 준비했다는 것에 분노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세냐를 질책할 상황도 아니거니와, 유진이 판단하기에도 ‘저것’은 필요했다. 실제로 환상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에게 순간적이나마 틈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렇기에 유진은 모론과 함께 유폐의 마왕에게 덤볐다. 휘감긴 불꽃이 길쭉한 검이 되었다.
단순한 참격으로는 얕은 공격조차 되지 않는다. 코앞에서 이클립스를 터트리고 목과 허리를 베었는데도 유폐의 마왕에게는 경상 취급조차 안 되는 것 같다. 마왕과 같은 불사력을 지닌 괴물들에게 치명적인 신력의 불꽃인데도, 유폐의 마왕에게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더 깊이 베어야만 한다.
신화가 중첩되기 시작했다.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이 중첩이 거듭되며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아직 화력이 부족하다. 극한을 넘어 중첩된 불꽃은 이제는 검의 형상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상관없다. 이것을 휘둘러서 일으키는 것은 참격이 아닌 무식한 폭력일 뿐이다.
‘모론……!’
육성으로 내뱉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모론은 그 목소리를, 유진의 바람을 들었다. 그것은 잔인하고 무모한 요구였지만, 모론에게 망설임과 주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친……!]
유진의 바람을 알아차린 것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도 욕설만 뱉었을 뿐, 유진의 뜻을 거역하지는 않았다. 성녀들의 가호가 모론에게 집중되었다.
“아아아아아!”
모론은 괴성과 함께 도끼를 던졌다. 무지막지한 힘이 담긴 도끼가 공간을 찢어발기며 유폐의 마왕에게 날아갔다. 그런 공격은 유폐의 마왕에게는 어설프고 느렸다. 뻗은 손은 도끼에 닿기도 전에 파장을 만들어 도끼의 궤적을 바꿨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 모론의 손이 공간을 붙들었다.
우드드득! 찢어졌던 공간이 모론의 악력에 의해 잡아끌렸다. 그로 인해 유폐의 마왕도 모론에게 조금 가까워졌다. 우악스러운 주먹이 날아들었고, 유폐의 마왕은 빙긋 웃었다.
순식간에 끝났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은 순식간에 모론의 의식을 앗아갔다. 찰나에 퍼부어진 연타가 모론의 육체를 파괴했다.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모론의 육체는 멈추지 않았다. 파괴된 육체는 즉시 재생했다. 부러지고 터졌던 손이 유폐의 마왕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세냐의 마법이 발현되었다. 환상의 마안이 마안과 어우러져 현실을 개변했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마법의 주박이 잠깐이나마 유폐의 마왕의 시야를 가렸다.
거대한 살의가 머리 위에서 내리꽂혔다.
유폐의 마왕의 무릎이 굽혀졌다. 내리찍은 시커먼 신검은 유폐의 마왕의 손에 가로막혔지만, 그 거대한 충격은 손으로 막는다고 해서 흘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훌륭하군.”
유폐의 마왕은 진심을 담아서 찬사했다.
꽈드드득! 신검이 유폐의 마왕의 손을 잘랐다. 그리고 어깨를 베었다. 하지만 양단하지 못했다. 검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조금 파고들고서 멈춰버렸다.
“……크르륵…….”
유폐의 마왕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모론이 피를 토하며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와 반대로, 유폐의 마왕은 굽혀졌던 무릎을 세웠다. 유진은 늑골쯤에서 멈춘 신검을 놓지 않고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너…… 죽일 수 없는 거냐?”
유진은 결국 그렇게 묻고 말았다. 그 질문에 유폐의 마왕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주이니 말이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것이다.
빌어먹을 환생 585화
죽여도 죽질 않는다.
여태까지 그런 적은 세기 힘들 만큼 많이 만나봤다. 중위 마족만 해도 어쭙잖은 불사력을 가지고 있고, 고위 마족은 더욱 죽이기 힘들다. 마왕쯤 되면 저 새끼가 정말로 죽기는 하는 건가 의문이 들 정도다.
하지만 죽이다 보면 결국에는 죽일 수 있다. 여태까지, 유진은 몇 번이고 그렇게 적을 죽여왔다. 살육의 마왕도, 참혹의 마왕도, 광란의 마왕도, 아이리스도, 라이자키아도, 가비드 린드먼도- 누아르 제벨라도.
결국에는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폐의 마왕은…….
“……씨X.”
유폐의 마왕의 답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사실 저렇게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몸을 파고들었지만 끝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신검에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목숨을 느꼈다.
몇 번을 더.
수십 번을, 수백 번을, 수천 번을 베어도. 유폐의 마왕은 죽일 수 없다. 저 지독한 불사는 저주와 같아서, 아무리 공격해도 죽일 수가 없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제아무리 저주와 같은 불사일지라도, 저주 이상의 공격을 퍼붓는다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유진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한 혼란은 절망을 낳는다.
유진은 절망할 생각이 없었다.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을 죽일 수 없다. 멸망의 마력으로는 절대로 유폐의 마왕을 죽일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멸망의 마력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월광검의 힘은 의도적으로 차단했다.
-화륵. 신검의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몸에 파고든 신검이 불길을 발하는데도 유폐의 마왕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소를 머금고서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포기할 생각은 없나?”
마력이 시야를 덮었다. 동시에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빛을 발했다. 퍼엉! 마력이 폭발한 순간, 유진은 모론을 붙들고서 뒤로 도약했다.
“크륵…….”
정신을 차린 모론은 피범벅의 입술을 문질러 닦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실패했나?”
“아니, 내가 실패했지.”
죽음을 각오하고 붙들어서 틈을 만들라고 했는데, 정작 유진의 공격이 제대로 박히지 못했다.
유진은 뻐근한 손을 쥐었다 펴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몸에 처박아 놓은 신검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지만, 유폐의 마왕이 한걸음 걸은 순간에 불이 푹 꺼져버렸다.
철그럭…….
사슬이 요동친다. 뚜둑. 유폐의 마왕이 가볍게 목을 꺾었다. 쩍 갈라졌던 몸은 어느새 달라붙어 있다. 고소조차 사라진 평온한 얼굴에 유진과 모론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대마왕.
존재감이 다르다. 이렇게 마주 선 것만으로도 압박감에 짓눌릴 것만 같다. 유진과 모론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푸핫.”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함께 싸우는 것은 300년 만이다. 설마 300년 만에 이런 상황에 처해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돌연 웃어대는 둘을 아니스는 질렸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세냐도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크리스티나만이 이 상황에 다른 이들과 같은 기분을 느끼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크리스티나, 지금부터는……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예?]
[옛날이라면 베르무트 님이 중심을 잡으면서 전투를 조율했을 텐데. 지금은 베르무트 님이 없으니까요.]
[시스터, 무슨 말씀을……?]
[저 둘은 전투에서 죽이 잘 맞습니다.]
아니스는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저 둘은 부상을 신경 쓰지 않고 싸울 겁니다.]
[예……?]
[사선임을 알면서도 달려들 겁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300년 전에는 저 혼자 저 등신들이 죽지 않게 붙들어야 했는데…… 지금은 크리스티나, 당신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성녀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진과 모론의 몸이 점점 낮아졌다. 지면에 닿을 정도로 내려온 유진의 양손에는 두 자루의 신검이 쥐어졌다. 하지만 모론은 무기를 쥐지 않았다. 그의 도끼는 아까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ㅡ푸확! 검붉은 폭발 속에서 프로미넌스가 불꽃을 흩뿌렸다. 수천 개의 불티는 마치 암기처럼 유폐의 마왕에게 폭사했다. 그렇게 쏘아진 불티 중 일부가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유진은 한 줄기의 번개가 되어 불꽃을 관통했다.
두 자루의 검이 엇박으로 움직였다. 유폐의 마왕의 눈은 검의 궤적을 굳이 쫓지 않았다.
꽈과광! 공간이 울리면서 검이 튀어 올랐다. 시야에 잡히지도 않고 고속으로 끊어 친 연타. 유폐의 마왕은 주먹을 거두는 대신에 무릎을 곧추세웠다.
발끝이 창처럼 쏘아졌다. 뻐어억!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모론의 팔이 뜯어져 날아갔다. 순식간에 왼팔이 사라졌지만, 모론은 작은 신음 하나 내뱉지 않고서 더욱 유폐의 마왕에게 파고들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에게서 빛이 반짝였다. 날아가던 팔이 빛과 이어지더니, 즉시 절단면에 달라붙었다. 부족한 살점과 뼈 등은 초고속으로 이어진 재생이 더해졌다. 모론은 깔끔하게 붙은 팔을 주먹으로 만들었다.
양팔은 쌍검의 난무를 막고 있다. 한 번 걷어찼던 무릎은 내려오지 않고 여전히 곧추서 있다. 모론은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쩌억.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발끝이 모론의 턱을 갈겼다. 목뼈가 그대로 뽑히고 머리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타격이지만 그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론의 의지가 죽음을 거부했고, 육체가 의지를 따랐으며, 화신이 되어 얻은 신력 또한 결의에 호응했다. 그렇지만 턱 끝에서 쳐들어온 충격은 모론의 의식을 뚝 끊었다.
잠시 의식이 끊겼지만 육체는 멈추지 않았다.
-꽈앙! 기어코 날아온 주먹이 유폐의 마왕의 몸을 밀어냈다. 크륵. 유폐의 마왕의 입에서 처음으로 피가 흘렀다. 그는 인간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힘과 무게에 피식 웃어버렸다.
“과연.”
300년 전 베르무트가 선택한 동료들은 모두가 특별하다. 하멜은 물론이고 아니스와 세냐, 모론도 그렇다. 모두가 기적과 같은 존재란 말이다.
그중에서 모론은 세상 모든 존재 중 으뜸이라고 할 만한 힘을 타고났다. 애석하게도 인간으로 태어나 버린 것이 모론의 제약이었다. 모론이 타고난 힘을 인간의 육체는 감당할 수 없다. 만약 모론이 인간이 아니라 거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는 진즉에 마왕조차 우그러트릴 힘에 도달했을 것이다.
“화신의 격은 네가 타고난 힘에 잘 어울리는구나. 육체가 힘을 감당해내고 있어.”
성녀들의 가호가 의식을 밝혔다. 찌릿, 하는 전율과 함께 모론의 의식이 돌아왔다.
짧게나마 기절해서 깨어난 것인데도 모론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땅을 박찼다. 주먹이 들어갔다. 주먹에 타격의 감촉이 남아 있다.
꽈르르! 어둠 저편으로 날아갔던 도끼가 모론의 부름에 따라 마력을 갈기갈기 찢으며 돌아왔다. 모론은 날아온 도끼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유진은 너덜거리는 쌍검을 불꽃으로 바꾸었다. 다시 한번 타오른 불꽃이 형상을 바꾸어 거대한 망치가 되었다.
도끼와 망치가 동시에 휘둘렸다. 가속이 붙은 어마어마한 힘이 유폐의 마왕에게 집중되었다.
끼리릭……! 유폐의 마왕의 등에 이어진 사슬들이 일제히 공간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존재를 고정시킨 후, 양팔을 들어 앞으로 뻗었다.
처박힌 공격, 밀려나지는 않앗지만 어전에 녹아든 시커먼 마력이 소멸했다. 성녀들의 기도가 불러온 빛이 어전을 환하게 밝혔다. 동시에 세냐의 메리가 일으킨 마법이 환상의 마안에 깃들어 현실을 개변했다.
사슬이 묶은 공간이 바뀌었고, 유폐의 마왕은 탄성을 내뱉었다. 공간이 바뀌어버려 사슬이 겉돈다. 그 순간에 다시 도끼와 망치가 움직였다. 다시금 존재를 고정하기에는 공격이 가깝다.
쿠우우웅!
유폐의 마왕이 날아갔다. 그는 울컥 피를 토하면서 눈을 번득였다.
유진은 망치를 놓고 창을 양손으로 잡았다. 모론은 도끼를 머리 위로 들었다. 끼리릭.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인 사슬이 유폐의 마왕의 앞으로 향했다.
‘절대로 죽지 않는 것은 아니야.’
생각했다. 정말로 불사라면 굳이 공격을 막을 필요가 없을 터.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계속해서 공격에 대응하려 하고 있다. 죽이다 보면 죽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사슬.’
유폐의 마왕에게 이어진 수많은 사슬. 아까 보았던 300년 전의 기억. 유폐의 마왕을 절대로 죽일 수 없던 베르무트는, 저 사슬을 끊어가겠다며 유폐의 마왕을 압박하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사슬들이 끊어지는 것이 유폐의 마왕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란 것일 터.
‘조금…… 줄었나?’
제법 유의미한 타격을 줬다. 여전히 유폐의 마왕을 죽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간의 공격이 소용이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높이 든 도끼가 먼저 떨어졌다. 공간과 함께 통째로 양단하는 무거운 참격이 유폐의 마왕을 덮쳤다.
[아하하.]
대응하려는 순간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덮쳐오는 참격의 옆, 희미한 존재를 보았다. 동시에 세상의 시간이 멈췄다. 멈췄다고 느꼈다. 마주친 순간에 환상이 정신을 침범한 것이다.
“누아르 제벨라.”
멈춰버린,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유폐의 마왕은 입을 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도끼를 향해 팔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버린 상황. 유폐의 마왕은 다시 한번 웃었다.
“죽었을 텐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세상에 남아 있나?”
[미련이라, 그런 것은 남기지 않았어요. 나는 아주, 아주 만족하며 죽었거든. 내 죽음에 미련과 후회는 없었어.]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하늘에서 누웠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치며 유폐의 마왕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렇게 남아버린 것은, 지독하고 고약한 마녀 할망구의 심술 때문이죠. 정말, 망자를 모독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지금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거두어주지. 어떤가?”
[흐흥, 꽤 상냥한 제안이지만…… 거절하겠어요. 이렇게 되어버리기도 했고. 저는 하멜이 살아남는 것을. 바람을 이루는 것을. 당신에게서 승리하는 것을 바라거든요.]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누아르의 미소가 조금 흔들렸다.
“그대는 세냐 메르데인과 함께 내 심연을 들여보았지. 그렇기에 알 수 있을 거야.”
[……당신의 심연은…….]
짧은 탄식 후에 누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의외…… 였죠. 정말로 의외였어. 나는…… 아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겠죠.]
환상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의 동요를 끌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영겁의 시간을 살아온 대마왕. 그의 심연에 잠든 트라우마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환상으로 보여주었다.
트라우마에 유폐의 마왕이 공포를 느끼지 않은 것? 그것 자체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누아르가 최후를 맞닥트리기 전까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지 못했듯, 그녀는 유폐의 마왕이 공포를 느끼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자그마한 동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이 느낀 동요 이상으로 누아르는, 세냐는 동요를 느꼈다. 그만큼 유폐의 마왕의 심연은 깊었고, 그 밑바닥의 어둠은 짙다. 절망하고 절망해서 이제는 절망조차 벗으로 둔,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저 대마왕을 상대로- 승리라는 것을 거머쥘 수 있을까.
“나를 동정하나?”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물었다. 누아르는 대답을 미루고 착잡한 시선을 전했다. 곧 그녀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유폐의 마왕. 동정을 느끼는 것은 당신에 대한 모욕이겠죠. 나는 당신을 동정하지 않아요. 대신, 경외를 느끼고 있어요.]
진심이다. 누아르는 평생 유폐의 마왕에게 진심 어린 경외를 바친 적은 없지만, 그의 심연을 들여다본 지금에는 경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경외라.”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눈을 감았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면서 분리되었던 의식이 육체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론의 도끼가 유폐의 마왕에게 내리꽂혔다.
꽈드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유폐의 마왕의 몸이 꺾였다. 힘을 제대로 버텨내지 못한 무릎이 주저앉혔다. 아슬하게 머리가 찍히는 것은 피했지만, 모론의 도끼는 유폐의 마왕의 왼쪽 어깨를 찢어버리고 허리까지 갈라 버렸다. 처음으로 유폐의 마왕의 몸이 양단된 것이다.
그 뒤를 따라 유진은 창을 쏘았다.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 창끝이 유폐의 마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확! 마력과 함께 피가 뿜어졌다. 유진의 창이, 유폐의 마왕의 가슴을 관통했다.
“……후우…….”
유폐의 마왕이 긴 숨을 내뱉었다. 울컥거리며 쏟아지는 피가 입술을 넘어 턱과 가슴을 붉게 물들였다.
……뚜두둑. 가슴을 관통한 창이 늑골을 부수면서 회전했다. 회전과 함께 타오르는 신화가 유폐의 마왕을 중심부터 불태우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묻지.”
도끼에 잘린 하반신이 털썩 무너졌다. 너덜거리는 상반신은 창에 관통되어 불타고 있다. 입술은 계속해서 피를 토했지만, 유폐의 마왕의 얼굴에 괴로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포기할 생각은 없나?”
지금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
타오르는 신화 속에서 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점점 격렬해지는 불꽃 속에서 사슬이 흔들렸다.
“뒈져.”
유진은 창을 놓지 않고서 내뱉었다. 그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군.”
유폐의 마왕이 눈을 감았다.
세상이 어둠에 덮였다.
빌어먹을 환생 586화
‘뭐야?’
시야를 뒤덮은 어둠. 유진은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모론과 세냐, 성녀들의 모습은커녕, 자신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곧장 연상한 것은 발자크의 시그니처인 블라인드. 발자크는 허무하게 죽었지만, 놈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에게 돌아갔다. 하려고 든다면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의 시그니처를 충분히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유진은 우선 동요를 가라앉혔다. 이 어둠은…… 블라인드와 다르다. 오감을 차단해 나가는 종류의 마법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단순한, 마법이나 권능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마력이다. 유폐의 마왕이 지닌, 어전을 떠돌던 마력의 성질이 바뀌었을 뿐이다. 너무나도 짙고 빽빽하며 결속된 마력이, 공간을- 세상을 침식해서 바꿔버린 것이다. 이 말도 안 될 만큼 농밀하고 결속된 마력은, 유진이 불사른 신화의 빛조차도 덮어서 지워버렸다.
‘성역은…….’
무너지지 않았다. 유진이 이곳에 존재하기에 성역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그 성역을 바깥에서부터 감싼 마력은, 유진이 구축한 성역의 이점까지도 모조리 뒤덮고 있다. 유진은 감각을 곤두세우고 눈을 감았다. 동료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탐색이 되지 않았다. 세냐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납득할 수 있지만, 모론과 아니스, 크리스티나마저 느낄 수 없다는 것에 유진을 적잖게 당황시켰다.
둘은 유진의 화신이고 성녀다. 그런데도 느낄 수 없다. 마치 이 세상의 법칙이 달라진 것만 같다. 제벨라 시티에서 악몽에 들어갔을 때도 이 정도로 강하게 구속받지는 않았는데, 이 어둠은- 유진을 철저하기 고립시켰다.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여전히 자신의 몸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지만, 손에서 검이 쥐어지는 감촉은 있었다.
“……뭐야?”
모론이나 세냐, 성녀들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만큼 신중하게 판단하고자 검은 휘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것은 동료가 아니었다.
유폐의 마왕.
하지만 다르다. 발소리와 함께 나타난 유폐의 마왕은, 아까 보았던 모습과는 너무 다르게 보였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보다 젊은 외모인데도…… ‘저’ 유폐의 마왕에게는 젊음 특유의 혈기나 패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과 같은 권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젊은 모습의 유폐의 마왕에게는.
끔찍할 비관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에 피범벅인 모습도 아니지만, 저 유폐의 마왕에게는 당장이라도 쓰러져 오열할 것만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한 격정은, 유진이 알고 있는 유폐의 마왕에게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애당초 저것은 유진이 아는 유폐의 마왕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느낄 수 있었다.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다. 뇌에 파이프가 연결된 것처럼, 유진의 것이 아닌 감정들이 밀려오고 있다. 끔찍하고 거대한 절망감과 분노, 허무함, 그리고.
‘배신감?’
밀어닥치는 감정들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여전히 어둠에 잡아먹혀 보이지 않는 다리가 비틀거리고,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다.
유진은 이 감정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버거웠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저런 감정을 느낀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절망과 분노와 허무함은- 배신감에서 태어났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에 배신당했기에 저런 감정을 느끼나. 대체 누가 유폐의 마왕을 배신할 수 있었던 것인가.
유진은 다시 유폐의 마왕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유진에게 향해 있지 않다. 저것은 결국 이 농밀한 마력에 깃든 기억의 잔재일 뿐이다.
유폐의 마왕이, 이 끔찍한 마력과 함께 자신의 심연에 처박고서 사슬로 걸어 잠근 무의식. 유진은- 보이지 않는 머리를 붙잡았다. 아득한 옛날의 잔재일 뿐이라도, 유진은 ‘저것’에서 무언가를 간파할 수 있었다.
마력에 깃든 기억의 잔재인 주제에, 정작 저 시절의 유폐의 마왕에게서는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유진은 간파한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단순하다. 저 때의 유폐의 마왕은, 마왕이 아니었다.
“그립지는 않군.”
철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목소리. 유진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누구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은 있게 마련이지. 안 그런가?”
유폐의 마왕은 먼 과거의 환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떠올린들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쓰지 않는 것들과 함께 깊이 넣어두었지.”
“……너…….”
“하지만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더는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을 때. 그럴 때 꺼내서 보면.”
유폐의 마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깔끔하게 사라져 버리지. 더 할 수 있다…… 더 해야 한다. 그런 의욕이 든다.”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배신감에서 태어난 감정들에서 의욕을 얻는다는 말은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러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끌어낸 독기라면 유진에게도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건 대체 뭐냐.”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에 유폐의 마왕은 잠시 침묵했다.
“왜 저 때의 네게 신성력이 느껴지는 거냐.”
침묵에서 답을 재촉했다. 이것으로 인해 유진은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저, 머나먼 과거의 유폐의 마왕에게는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충만한 신성력이 느껴지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마왕에게 신성력이라니? 심지어 저 신성력은 신관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성인이나…… 화신.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신성력’을 자각하니, 지금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에서도 마력 외에 다른 것이 느껴졌다. 마치, 마력에 신성력이…… 신성력이었던 것이 녹아 있는 것만 같다.
“저 때의 나는 마왕이 아니었다.”
침묵이 끝났다. 유폐의 마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용사였지.”
“……뭐?”
“용사였단 말이다.”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들었다. 천장이나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모든 곳에 시커먼 어둠만 가득하다. 유폐의 마왕은 그 어둠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나…… 베르무트가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을 했었지. 비슷한 것을 바랐다.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 세상을 구하는 것.”
“…….”
“결과적으로 나는 성공했지만, 직후에 실패해 버렸다. 바라던 대로 마왕을 쓰러트렸지만…… 함께했던 동료들에게 배신당했다. 누군가는 죽어가는 마왕의 유혹에 넘어갔다. 누군가는 마왕의 저주에 정신이 무너졌다. 그리고 누군가는.”
유폐의 마왕의 눈이 감겼다.
“……친애하는 벗은, 마왕의 옥좌를 탐냈다. 세상을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힘에 욕심을 가졌다. 나는 그를 벗이라고 여겼지만, 그는 나를 벗으로 여기지 않았다.”
친애하는.
“벗은 내 힘을, 내 위치를, 앞으로 내가 누리게 될 영광과, 내가 받게 될 칭송을 질투했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그가 중심이 되어 나를 배신했다. 내 등에 칼을 꽂았다. 유혹에 넘어간, 저주에 무너져버린 동료들은 앞다투어 옥좌로 향했지만, 결국 마의 옥좌에 앉은 것은- 내게 칼을 꽂은 벗이었다.”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욕심은 끝이 없었다. 옥좌에 앉은 ‘마왕’은 더 큰 것을 바랐다. 영원불멸한 힘을 바랐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지.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삼켜서, 결국에는.”
감겼던 눈이 뜨였다.
“멸망이 되었다.”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모습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에서 크게 동요했다.
베르무트는- 아가로트가 만든 상처에서 태어난 멸망의 분신이다. 그 모습과 이름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베르무트가 가지고서 태어난 것이다.
멸망의 마왕의 본질 또한 베르무트의 모습과 닮았을 것이다.
“……너는 왜…… 마왕이 된 거냐?”
유진은 비틀비틀 물러서며 물었다.
“용사였던. 배신당했던…… 네가, 왜, 마왕이 된 거냐.”
“저만한 배신을 겪으면 용사라도 타락하게 마련 아닌가?”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답했다.
“타락하는 것이 저 상황에서…… 그리고 내게는 더 편하고 좋았던 것이지. 결과적으로 나는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끼리릭.
다시 어둠 속에서 사슬 소리가 들렸다. 유진의 눈은 시커먼 어둠을 흐르는 무수한 사슬을 보았다. 그 사슬은 하나의 거대한 사슬에 결속되어 유폐의 마왕의 가슴에 연결되어 있었다. 유폐의 마왕은 가슴에 연결된 사슬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오래 살았다. 몇 번이나 멸망을 지켜보았다. 그 기나긴 시간에서 쌓인 것들은, 나조차도 감당하기 버겁게 되었다. 그래서 사슬로 묶어 유폐했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충분하였지. 하지만.”
끼릭.
유폐의 마왕의 손이 사슬을 붙잡았다.
“지금은 필요하구나. 훌륭하다,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내가 평생 보았던, 먼 과거의 나조차도 포함해서 가장 뛰어나고 강한 용사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저주에 무너지지 않으며, 더 커다란 힘을 탐내지도 않는 네 동료들도 훌륭하다. 그렇기에 마왕인 나는, 더욱 커다란 시련이 되어 줄 수밖에 없구나.”
뚜두둑.
사슬이 천천히 뽑히기 시작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무수한 시간과 세계를 관측했다. 인정하마. 내가 관측해 온 무수한 시간과 세계에서 지금이 가장 멸망의 끝에 가깝다는 것을. 그렇기에 나는 더욱 커다란 절망이 되어 용사를 시험해야 한다. 너희가, 정말로, 멸망을 끝낼 수 있을지. ‘마왕’인 나를 쓰러트린다면…….”
사슬이 뽑혀나가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멸망의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결속된 어둠에 깃든 모든 ‘힘’이 해방되어 간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타락과 함께 묶어버린 신성력. 그리고- 유폐의 마왕이 거쳐 온 세계에서 거둔 것들. 그가 죽이고 거느렸던 것. ‘다음’으로 가져가지 않고 유폐했던 영혼들.
사슬이 뽑혔다.
-콰아아아!
세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일그러지고 뒤엉킨 데스마스크가 어둠을 떠다녔다. 그 광경은 마치 지옥으로 흐르는 시커먼 강이 유폐의 마왕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둠이 빠르게 걷혀갔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던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론과 세냐, 성녀들이 보였다. 다행히 그들에게 부상은 없었지만, 방금의 대화를 똑같이 들은 것인지 표정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유진은 무어라 입을 열어 전하기 전에 자신의 손을 보았다. 아까 만들어서 손에 쥐었던 신검.
신검에서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화가 타오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둠은 사라져가지만, 그 사악함과 불길함이 끈적하게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유진은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뿌득 입술을 씹었다. 사슬을 뽑아낸 유폐의 마왕은 가벼운 현기증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유진과 동료들의 시선이 맞닿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위험하다.
유진은 즉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전투를 결정짓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모자라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그니션이라도 쓰지 않는다면 저것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직감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모론과 세냐, 성녀들도 이해했다. 성녀들이 즉시 빛이 되어 유진에게 돌아왔다. 이그니션의 부담을 덜면서 위력을 증폭시키기 위해서였다.
세냐도 환상의 마안을 다시 발동하며 메리를 치켜들었다. 모론은 저 모든 준비 시간을 벌기 위해 유폐의 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떻게 움직였는지 볼 수 없었다.
유폐의 마왕이 무언가를 했고, 모론은 달려 나가던 기세를 죽이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한참이나 뒹구는 모론에게서 뿜어진 피가 시커먼 바닥을 붉게 적셨다. 그 순간에도 유폐의 마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가 뿜어지는 것은 목.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모론의 목은 살점이 큼지막하게 뜯겨 있었다.
아직 이그니션은 발동되지 않았다. 유진의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드는 순간에 모론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냐의 마법도 발현되지 않았다. 세냐가 지배하는 영력이 메리와 환상의 마안에 깃들기 시작할 때.
세냐의 무릎이 꺾였다. 입술을 벌리기도 전에 다문 틈 사이로 피가 왈칵 뿜어졌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자신을 지나고 간 공격을 쫓지 못했던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묻지.”
심장을 붙잡으려던 손가락이 억지로 뽑혔다. 어느새 앞에 다가온 유폐의 마왕의 손이, 유진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포기할 생각은 없나?”
뚜둑, 뚜두두둑…… 억지로 손이 뽑혔다. 바로 앞에 선 유폐의 마왕의 눈동자는 차분하고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말도 안 될 정도로 짙은 죽음이 느껴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
이그니션이 제지당했다. 유진은 붙잡힌 손을 억지로 빼는 대신, 반대쪽 손에 쥐고 있던 신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저 엿 같은 제안에 대한 대답이었다.
“역시 그런가.”
빠직! 신검은 휘두르는 도중에 시커먼 재가 되어서 박살 났다.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손을 펼쳐서 유진의 가슴을 향해 뻗었다.
“그렇다면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시킬 수밖에.”
쿠웅.
가볍게 두드린 손길.
유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빌어먹을 환생 587화
“쿨럭.”
벌어진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계속해서 공격할 수 있을 텐데, 유폐의 마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망을 주기 위해서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과 동료들을 죽이는 것보다 ‘절망’을 주는 것을 우선하고 있다. 먼 과거 절망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서, 똑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절망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혼을 바치기를 원하는 것일까.
“…….”
떨리는 입술을 뿌득 씹었다. 목에서 넘어오는 피를 억지로 되삼켰다.
절망? 유진은 그딴 감정을 느끼고 싶지도, 느낄 생각도 없었다. 유폐의 마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다고 해도. 절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유폐의 마왕이 말하는 ‘다음’으로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싶다.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싶다. 세상을 구하고 싶다.
그러한 갈망은 ‘지금’의 것이다. 유진이 죽이고 싶은 유폐의 마왕은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이고, 멸망의 마왕은 지금, 베르무트가 붙들고 있는 놈이며, 구하고 싶은 세상도- 지금의 세상이다. ‘다음’ 세상 따위 솔직히 말하자면 유진이 알 바가 아니다.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 세상을 구하고 싶다. 빛이 밝혀온 세상을 구하고 싶다. 지금 저 아래의 전장에서, 승리를 기다리며 싸우고 있는 신군을 구하고 싶다. 전쟁의 승리를 기도하고 있는 대륙의 신도들을 구하고 싶다. 미쳐가고 마모되면서도 멸망을 미뤄낸 베르무트를 구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망해서는 안 된다. 절망할 수는 없다.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무릎에 힘을 주었다. 부서진 내장이 삐걱거리며 맞춰졌다. 불사에 근접한 재생력을 손에 넣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처를 재생하지 못한다면 더는 싸우지 못할 테니.
“일어서나?”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꽈직! 이번 공격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맞고 나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된다. 휘둘러 찬 발길질. 유진의 양다리가 부러지고 몸이 땅을 뒹굴었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 않나.”
몇 번을 뒹굴고서 땅을 손으로 짚었다 너무 강하게 씹은 어금니에서 피의 맛이 진하게 났다. 유진은 핏발 선 눈으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네가 몇 번을 일어선들 무의미다.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아무런 바람도 이룰 수 없다. 나라는, 마왕이라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용사에게 무슨 의의가 있나.”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유폐의 마왕이 천천히 걸어왔다.
“너는 이 전투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절망하지 않으려고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에 결국은 절망해 버리겠지.”
뚜둑, 뚜두둑. 유폐의 마왕의 오른손이 주먹이 되었다.
“애당초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불가능한 것을 욕심내고 있다. 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시켜 온 ‘그것’은 이제는 마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재앙이자 시대의 죽음이다. 인간이 나이를 먹어 언젠가 죽어버리듯, 그것은 세상의 수명을 결정짓는 죽음이 되었지.”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유폐의 마왕의 주먹을 보았다. 그 주먹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태초의 그것은 과분한 탐욕에 잡아먹혔지. 마왕의 옥좌로도 부족하여 더 큰 힘을, 모든 것을 탐내서 잡아먹다가- 자신의 자아마저 잡아먹고 만 우인. 그렇게 완성된 것이 멸망이다. 그것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먹이 움직였다.
“나라고 해서 멸망을 끝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나? 그 누구보다 멸망을 증오하고 끝내기를 갈망한 것이 바로 나다. 내가 용사로서 마무리를 완벽하게 했었다면. 동료가 배신하게 두지 않았다면. 유혹에 홀리고, 저주에 미치고, 질투에 눈이 먼 동료를 내 손으로 먼저 죽였더라면.”
꽈직.
가슴이 움푹 들어갔다. 숨이 턱 막히고 시야가 뒤흔들렸다.
“새로운 마왕 따위는 태어나지 않았겠지. 옥좌에는 그 누구도 앉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 후로 살아온 영겁에서, 몇 번이나…… 내 실패를 후회했는지. 너는 상상할 수 있나?”
유진은 몸을 웅크리고서 컥컥 숨을 몰아쉬었다. 성녀들이 외는 비명 같은 기도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처는 고속으로 재생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유폐의 마왕의 공격은 무겁고 빠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후회하고 증오하면서, 내 실패로 태어난 멸망을 끝내기를 갈망했지. 하지만 끝낼 수 없었다. 내 세상은 멸망하기 시작했고, 신은 세상을 구할 수 없었다.”
유폐의 마왕이 다시 유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뾰족한 비명과 함께 유진의 오른쪽 날개가 빛을 발했다. 천사가 되어 튀어나간 아니스가 유폐의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멸망하는 나의 세상에서 천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지. 지금 아니스 슬리우드, 너처럼 말이다.”
아니스의 몸이 공중에서 멈췄다. 시커먼 사기(死氣)가 손의 모습이 되어 아니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아니스는 목을 죄는 손을 붙잡고서 버둥거렸다.
“나는, 멸망을 멈추지도, 세상을 구하지도 못하는 신을 부정하고 타락했다. 먹어도 먹어도 굶주리는, 멸망이 되어 가는 우인과 옥좌에 사슬을 묶고, 나 자신도 옥좌에 앉았다.”
콰득! 사기의 손이 아니스를 땅에 처박았다.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기도를 외지 못했다. 그녀는 비명과 함께 천사가 되어 유진의 앞에서 날개를 펼쳤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나, 유폐의 마왕이다. 내가…… 왜, 마왕이 되었을 것 같나? 도저히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실패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멸망의 다음을 만들기 위해서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멸망하고 난 뒤. 그 무엇도 살아남지 못한 세상에서…… 나는, 혼자서, 처음을 시작해 왔다.”
바닥에 처박힌 아니스가 덜덜 떠는 손을 뻗어 유폐의 마왕의 발목을 붙잡았다. 퍼억! 걷어찬 발길질에 아니스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뒤덮인 바다에서 대지를 건져내고 산을 깎았다. 유폐한 혼을 풀어놓아 생명을 순환시켰다. 그렇게 세상에 존재와 문명과 태동하기 시작하면, 다시 마왕이 되어 어둠에 앉았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나는 그것을 반복해 왔다. 세상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다음을 만들어왔다.”
유진의 앞을 막아선 크리스티나의 눈이 덜덜 떨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유폐의 마왕은, 마왕이면서도 신과 같은 일을 해왔던 것이다.
“시대와 멸망이 연속되면서 ‘그것’은 멸망이란 현상이 되었지만, 최초에 묶어 놓은 나의 사슬은 건재하다. 그렇기에 나는 절대로 멸망에게 죽지 않고, 나 자신도 멸망을 죽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타협했다. 멸망을 끝내지 않고, 멸망을…… 받아들이면서, 다음을 향하는 것으로.”
-우어어어!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모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뜯어져 나간 목에서는 아직도 피가 철철 흘렀지만, 모론은 상처를 감싸 쥐는 대신에 유폐의 마왕의 뒤를 덮쳤다.
“그래서 말하는 거다. 불가능한 것을 욕심낸다고. 때로는…… 불가능을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뒤에서 감싸오는 양팔이 유폐의 마왕의 손에 붙잡혔다. 모론의 굵은 팔에 비해 유폐의 마왕의 손은 아주 작았지만, 그가 손가락을 쥐기 시작하자 모론의 근육과 뼈가 악력에 말려 들어갔다. 그렇게 양팔을 부숴버리고 난 뒤에 모론을 옆으로 패대기쳤다.
“멸망을 죽이겠다고? 그러면서 베르무트를 구하고 싶다고? 양립할 수 없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를 죽이겠다고? 그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세상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세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냐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는 구멍 난 배를 감싸 상처를 메우면서, 피범벅의 입술을 잘근 씹었다.
덜덜 떨리는 메리가 유폐의 마왕에게 향했다. 응집된 영력이 마법을 터트렸다. ㅡ꽈앙! 하지만 그 마법조차도 유폐의 마왕의 손짓에 흩어져 버렸다. 사기가 검은 번개가 되어 세냐를 꿰뚫었다. 세냐의 몸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메리와 환상의 마안이 바닥에 떨어졌다.
“너희의 결의와 결속에는 찬사를 주겠지만, 주장하는 희망이 내게는 아집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더.”
유진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크리스티나의 앞으로 나섰다. 흠칫 놀란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자신의 뒤편으로 밀어 넣었다.
“얼마나 더……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무지한 저항을 할 셈이냐. 얼마나 더 욕심을, 아집을 부릴 셈이냐.”
“널 이길 때까지.”
유진이 대답했다. 그 말에 유폐의 마왕의 뺨이 씰룩거렸다. 한순간이나마 유폐의 마왕은 짜증과 분노를 느꼈다.
“절망시키기도 힘들군. 다소 망가질 것을 감안하더라도 죽일 수밖에 없나.”
다리가 앞으로 향한다. 팔이 움직인다. 여태까지는 유폐의 마왕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보지 못한다면 대응할 수 없다. 막을 수 없다. 피할 수 없다. 잡을 수 없다. 공격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아니스와 모론이 바닥에 처박혀 있다. 세냐도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쓰러져 있다. 하멜이 오지 못했던, 300년 전의 어전과 똑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300년 전과는 달리 유폐의 마왕은 멈춰주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는 베르무트가 없고,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약속을 맺지 않을 것이다. 유진도 약속 따위를 맺을 생각이 없었다.
베르무트를 위해. 세냐를 위해. 모론을 위해. 아니스를 위해. 크리스티나를 위해. 빛이 된 거신과 고신들을 위해. 세계수가 된 현자를 위해. 가족을, 라이언하트를 위해. 세상을 위해.
유진이 이곳에서 바라는 것은 오직 승리뿐이다.
‘나는.’
기적을 바라야 한다.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염원을 들었다. 기도를 찾았다. 쓰러져서는 안 된다. 패배해서는 안 된다. 절망해서도 안 된다.
‘반드시.’
유폐의 마왕이 ‘움직였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졌다. 공격이, 주먹이, 가슴을 부수고 들어와서 심장을 으깨버리는 ‘결과’가 보였다. 찰나 후에 일어날 미래를 관측했다. 이번에는 보았다.
그래서 움직였다.
퍼벅! 유폐의 마왕의 손이 위로 튀어 올랐다. 짜증과 분노가 스쳤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설마 유진이 지금의 공격을 쳐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듯이.
그럴 수밖에. 지금 유폐의 마왕은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사슬을 풀어 내린 상태다. 제한을 풀어버리고 꺼내 온 힘. 300년 전 베르무트가 끊어버리겠다고 내뱉었던, 영겁을 살아온 불사력과 다음 세상을 위해 비축한 마력을 소모하고 있다.
그 대신에 유폐의 마왕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얻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그러한 확신이 방금 일부 부정당했다. 절대로 빗나갈 일 없던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멈춰 버린 시간에서 유폐의 마왕과 유진의 눈이 맞닿았다. 충혈된 눈동자 깊은 곳에서 빛이 반짝였다. 절망은 절대로 띄지 못하는 빛이었다.
“……드디어 보였다.”
눈동자에 깃든 빛이 신화가 되었다. 꺼졌던 불씨가 다시 흩날리며 불꽃이 타올랐다. 끈적한 어둠은 더 이상 불빛을 덮어 삼키지 못했다. 저벅. 유진은 앞으로 한 걸음 걸었다.
ㅡ화아악……! 희미해졌던 날개에도 빛이 타올랐다. 활짝 펼쳐진 날개가 후광이 되어 어둠을 비추었다. 퍼져 나가는 빛이 모론과 아니스에게 닿았다. 부러진 뼈와 터진 근육이 다시 연결되었다. 감겼던 눈이 뜨였다. 둘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였다?”
유폐의 마왕의 얼굴에서 놀람이 사라졌다. 그는 튀어 오른손을 다시 쥐면서 말을 이었다.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나?”
질문이 시작함과 동시에 주먹이 사라졌다. 그 순간에 유진의 시야가 아득히 확장되었다. 유폐의 마왕의 공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았던 쾌속의 공격이 지금은 끄트머리나마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격이 꽂히기 전에 유진의 신성이 타격점을 간파했다.
궤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타격점을 간파했다면 아까처럼 무력하게 처맞는 일 없이 최소한의 대응은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움직여서.
“씨X.”
바로 후회감을 느끼며 욕설을 내뱉었다. 보이기는 하는데 받아내는 것은 지나친 오만이었다. 타격점을 가로막은 신검은 빛을 발하는 상태에서 터져나갔고, 뒤늦게 갖다 붙인 팔도 부러지고 찢어졌다. 유진이 훌쩍 뒤로 뛰어오르자 유폐의 마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보이는 것은 틀림없군.”
보인다고 해서 완벽하게 대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보인다’는 것에 유폐의 마왕은 조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은-
‘유진 라이언하트는 지금 이 전투에서 성장하고 있다.’
연속된 공격에 익숙해졌나? 몇 번이고 본다면 익숙해질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좁혀질 일 없다고 생각했던 격차가 있었다. 그러한 격차를 스스로 성장해서 좁혀왔다는 것에 유폐의 마왕은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가진 압도적인 강점은 성장력이다. 불과 몇 년 만에 저만큼의 격에 도달한 것은, 그가 단순히 아가로트와 하멜의 환생이기 때문은 아니다.
‘사선을 넘을 때마다 강해지나.’
유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전투에서 유폐의 마왕과 싸우는 것은 유진 혼자가 아니다.
모론의 포효가 어둠을 뒤흔들었다. 몇 번이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는 마치 언데드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일어나서 유폐의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죽지 않았다고 해도 죽기 직전까지 간 순간의 공포와 고통은 있을 텐데, 모론의 눈동자에는 그런 종류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유폐의 마왕에 대한 적의와 살의뿐이었다.
유진이 도달한 감각은 그의 대전사이자 화신인 모론에게도 연결되었다.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던 모론은 감각이 확장되면서 시간이 느려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이 착각이나 현혹이 아니란 것을 직감했다. 느려진 시간에서도 유폐의 마왕의 공격은 빨랐지만, 날카로이 곤두선 감각이 공격의 도달점을 예고했다.
모론은 피하지 않았다. 방어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공격에 공격으로 대응했다. 도끼를 휘두르지 않고, 무식하게도 주먹을 내질렀다.
ㅡ꽈지지직!
세상이 부서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모론의 팔 근육이 부풀었다가 터지고 주먹이 으스러졌다. 그렇지만 모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부수었음에도 유폐의 마왕의 주먹도 더 앞으로는 전진할 수 없었다. ‘가로막혔다’는 기분이 확실하게 들었다.
[하멜,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빛으로 되돌아온 아니스가 놀라서 물었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유진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세냐를 쳐다보았다. 상처를 회복하고 선 세냐와 유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부터 뭐라도 더 해야지.”
미끄러져 내려간 시선이 환상의 마안과 맞닿았다.
-아하하.
악몽에서나 들었던 웃음소리가 유진의 머릿속에 울렸다.
빌어먹을 환생 588화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환상의 마안을 열었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이 어그러졌다. 유폐의 마왕이 잠시간 현실이 아닌 꿈속에 끌려 들어갔듯, 유진과 세냐도 환상의 마안의 권능에 의해 똑같은 꿈을 꾸었다.
잠시 멈춘 시간의 틈. 현실과 동떨어진 꿈의 한복판. 유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세냐를 노려보았다.
“너 미쳤냐?”
우선 유진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날카롭게 선 어투지만 세냐는 발끈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어쩌면, 혹시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설마 진짜로 이랬을 줄은 몰랐다. 너 뭐 네크로맨서라도 될 생각이야?”
“그…… 그건 말이 좀 심하잖아. 내가 흑마법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얼씨구,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흑마법은 꽤 관심 있게 연구했잖아?”
“그건! 흑마법도 결국 마법이니까 그런 거야. 그리고 흑마법에도 종류가 다양한 건 유진 너도 알잖아. 내가 미쳤다고 네크로맨시를 익히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왜!”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다. 300년 전 하멜이 죽고, 유폐의 마왕이 혼을 돌려주었을 때. 세냐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멜의 혼을 목걸이에 봉인했다. 언젠가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인 뒤에, 하멜이 자연스럽게 윤회하여 환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것은 베르무트가 바란 ‘환생’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결국 목걸이를 빼앗기고 말았지만- 어쨌든 세냐가 과거 ‘영혼’을 붙잡았던 것은 사실이다.
“자, 자, 진정들 하시고.”
웃음 섞인 목소리.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왜 그런 거야?”
유진은 감은 눈을 뜨지 않고서 내뱉었다. 그런 유진을 마주 보는 세냐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짜증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코흘리개가 보아도 지금 유진이 어마어마하게 동요하고 감정적인 혼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 나는 환상의 마안을 완벽하게 다룰 자신이 없었어. 사용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극한까지 다룰 만큼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어.”
“……다른 하나는?”
“네가 평생 후회하고 악몽을 꾸는 것이 싫었어.”
“…….”
“너는 괜찮다고 말할 거고, 앞으로도 익숙해질 거야. 그리고 나도,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네 안에 남은 미련을 지울 자신이 있어.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깔끔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영혼이라도 박제해 놓겠다는 거냐? 가끔 내가 후회를 떠올리면 잠깐 만날 수 있게, 뭐, 그런 거야? 그딴 짓을 할 거면 애초에 죽이지도 않았…….”
“달라!”
세냐가 빽 고함을 질렀다.
“넌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세냐 님이 뒈지고 남은 영혼 따위와 놀아나게 해주려고 영혼을 거둔 줄 알아?! 나는!”
세냐는 숨을 씨근거리면서 발을 쿵쿵 굴렀다.
“전부 다, 끝난 뒤에, 너와 결혼할 거야.”
“……뭐?”
“너와 결혼하고!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뭐…… 걔들이 하고 싶다고 하면…… 같이 해줄 용의가 있어.”
“무…… 무슨 말을…….”
“그 뒤에 나는 이 영혼을 사역마에 처박아 버릴 거야.”
유진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엿같이 못생긴, 흉물스러운 사역마의 몸뚱이에 이 영혼을 처박아 넣겠다고. 그리고 목줄을 묶어서 너와 나의 신혼집의 정원에 묶어서 번견으로 삼을 거야.”
제정신인가?
“그럼 너도 앞으로 악몽 따위는 꾸지 않겠지! 너와 나의 신혼집 정원에 묶인 개새끼의 낯짝을 보면 절대로 악몽을 꿀 수 없을 거야.”
“흉물스러운 사역마가 될지라도 나는 나예요.”
유진의 앞에서 뺨을 부풀리고 있던 누아르가 냉큼 대답했다.
“애당초 나를 그렇게 묶어 놓는 것 자체가, 당신이 나를 두려워하는 증거 아닌가요?”
“뭐가 어쩌고저째?”
“내 혼은 소멸하지 않았고, 언젠가 환생하고 말 거예요. 그때 내 기억이 온전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아하하, 나와 하멜 사이에는…… 아주 진한 운명의 끈이 존재하죠. 언젠가 환생한 나는, 반드시, 하멜을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누아르는 유진의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서 유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를 흉물스러운 사역마로 만든다는 것은…… 나와 하멜을 엮은 운명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세냐는 대답하지 않고서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당연히 세냐는 그딴 두려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누아르를 임시로나마 사역마로 삼을 생각은 했지만, 꼭 못생긴 똥개의 모습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머잖아 유진이 완전히 악몽을 극복하고 감정의 잔재를 떨쳐낸다면, 그때는 깔끔하게 누아르의 혼을 놓아줄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뜻을 주장한다면 결국 누아르의 망언에 놀아나게 되는 꼴이 아닌가?
“……사역마는 필요 없어.”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네가 오늘 전투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은 이해할게. 하지만, 정말로 사역마는 필요 없어. 그냥…… 모든 것이 끝나면, 혼은 해방해라.”
“……알았어.”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대답했다. 그쯤에서 타협하는 것이 자존심을 세우기도 좋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나를 무시하고 있을 거예요?”
누아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유진은 다가오는 손길을 느끼고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하멜. 나예요, 누아르 제벨라예요. 당신이 심장을 찌른, 입맞춤을 한, 울 것 같은 얼굴로 떠나보낸 누아르 제벨라.”
“…….”
“이 재회가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그런가요? 그때 맛본 내 입술의 감촉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나요? 아하하, 목걸이, 계속해 주고 있구나.”
“좀 꺼져.”
“결국 대답할 거면서 왜 자꾸 눈을 감고 무시하려고 용을 쓰나요? 그리고 하멜, 저는 꺼지고 싶어도 꺼질 수 없는 입장이에요. 나라고 해서 이렇게 당신과 재회하기를 바랐을 것 같아요?”
누아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세냐를 한번 흘겨보았다.
“당신도 알겠지만, 난 말이에요, 내 죽음에 굉장히 만족했어요. 그것은 내가 바랐던 완벽한 죽음이었죠. 우리는 서로를 파괴했고, 나는 당신에게 깊은 감정을 새기고 죽었으니까.”
“…….”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됐잖아요? 저 심술궂은 마녀가 멋대로 내 영혼을 도구로 삼은 것이 잘못이죠. 그러니까.”
누아르의 손이 다시 다가왔다.
“눈을 뜨고 날 봐줘요, 하멜.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짧은 악몽일 뿐이니까.”
천천히 다가온 손이 유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떴다. 살아 있을 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을 한 누아르가 보였다. 그렇게 봐버리니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소리를 냈다.
ㅡ쿠구궁…… 악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냐는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누아르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유진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꿈이 무너지고 있군요. 내 영지라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꿈을 꿀 수 없어요.”
“……그렇겠지.”
“유폐의 마왕에게도 악몽을 보여주려 시도했었지만…… 잘되지 않았죠. 그의 심연은 깊고, 그가 살았던 현실은 그 어떤 악몽보다 끔찍하고 절망적이었기에. 환상의 마안은 그에게서 공포를 일으킬 수 없어요.”
“그렇겠지.”
유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환상의 마안이 몇 번이나 발동했지만 유폐의 마왕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유폐의 마왕의 심연을 들여 본 세냐의 감정이 역으로 흔들리고 말았다.
“이미 죽은 내가 말하기도 우스운 일이지만, 상황은 절망적이라고 봐요, 하멜. 유폐의 마왕에게는 한참이나 여력이 있죠. 하멜, 당신은 유폐의 마왕에게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로서는 유폐의 마왕의 패배를 상상할 수 없어요.”
“너는 네 죽음도 상상하지 못했었지. 하지만 결국 죽었어. 내가, 너를 죽였지.”
“황홀한 죽음이었죠.”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가슴을 어루만졌다. 죽은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네가 상상하건 하지 못하건,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알아. 하지만 나는 절망을 느끼지 않아.”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확신은 한참 부족하다. 그것이 절망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유진이 해야 할 것은, 가진 모든 힘을 쏟아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쓰러트릴 수 있도록 싸우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바람이라면.”
누아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보라색 보석, 환상의 마안이 그녀의 손 위에 나타났다.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보석을 눈으로 들어 올렸다.
“망자가 되어버린 이 몽마의 여왕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바람이 실현되도록 도와드리죠.”
보석의 빛이 누아르의 눈동자에 녹아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악몽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찰나의 꿈에 빠져들었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돌아온 현실, 모론과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맞닿아 있다. ‘가로막혔다는 기분.’ 유폐의 마왕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을 잠시 즐기다가 빙긋 웃었다.
“악몽을 꾼 것 같지는 않구나.”
속삭이는 질문은 모론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유진은 대답 대신에 날개를 펼치고 도약했다.
ㅡ두근.
유폐의 마왕에게 다가가는 순간 신성의 고동을 느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메리를 들고 있는 세냐 또한 당황한 얼굴이었다.
환상의 마안이 홀로 공중에 떠올라 있다. 흐릿한 ‘환상’에 세냐의 영력이 더해져 점점 실체를 갖추어갔다.
[맙소사……!]
아니스가 비명을 질렀다. 저 모습을 잊을 리가 없잖은가. 누아르 제벨라. 죽었을 그녀가 세냐의 옆에서 나타났다. 심지어 저 모습은-
“뭐 하는 거야?!”
[천사가 된 거예요.]
누아르가 속삭였다.
[마법의 여신을 주장한다면 천사 하나쯤은 둬야 하지 않겠어요?]
‘누구 마음대로……!’
[나를 도구로 사용하겠다고 한 것은 당신이에요, 세냐 메르데인.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아요. 이렇게 당신과 공명하는 편이 지금은 더 도움이 될 테니.]
누아르의 눈동자에서 환상의 마안이 빛을 발했다. 동시에 세냐도 이해했다. 한때 악신의 권좌에 도전하고 몽마로서 마왕마저 아득히 넘어서 신성을 침범했던 누아르와의 공명은, 세냐의 신격을 더욱이 드높였다. 그것으로 환상의 마안은 세냐의 기적이 되었다.
ㅡ쿠구구궁! 어전이 뒤흔들렸다. 어둠을 몰아냈던 유진의 빛에 세냐의 의지가 더해졌다. 그녀가 지배하는 영력에 신성이 깃들었다. 두 개의 신력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졌다. 성역과 성역이 뒤섞이며 유폐의 마왕을 짓눌렀다.
이 감각.
알고 있다. 유진은 경악하면서도 즉시 신검을 들었다. 성역과 성역이 섞여서 하나가 되었다. 환상의 마안은 세냐의 기적이 되어 현실을 개변했다. 이곳은 유폐의 마왕의 어전이자 유진의 성역이며 세냐의 성역이고, 현실이면서도 환상과 꿈에 걸쳐져 있다.
신화가 피어올랐다. 유리의 칼날이 허공에 나타났다. -틀림없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계속해서 불꽃을 일으켰다.
신성월광검 레반테인. 유진의 가슴에 박아넣었던 그 검이 새로이 나타났다. 하나로 멈추지 않았다. 유진은 바랐고, 환상의 마안이 더해진 성역은 바람을 기적으로 실현했다.
레반테인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부족하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입안에서는 피의 맛이 났다. 코에서도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공명 중인 성녀들도 유진의 부하를 떠안아 신음을 삼켰다. 제벨라 시티에서 겪었던 악몽에서 구현했던 것보다 더 많게, 더 강하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수십 개의 레반테인. 거기서 유진은 ‘더’ 갈망했다.
ㅡ화륵. 모든 유리의 칼날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불꽃에 불꽃이 중첩되었다. 몇 번이나 중첩된 공검의 화력은 유리의 칼날마저 일그러트릴 정도였다.
“……하하.”
그 광경에 유폐의 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수십 자루의 레반테인이 결코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저것 모두가 이 공간에서는 실재하고 있다. 유폐의 마왕을 가로막은 모론조차도 저 터무니없는 광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훌쩍 뛰어 유진의 옆에 내려섰다.
“멋지군.”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모든 레반테인이 유폐의 마왕을 덮쳤다. 세상을 몇 번이나 멸망시켜도 이상하지 않을 힘이 유폐의 마왕에게 집중됐다.
유폐의 마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레반테인의 폭격을 향해 나아갔다.
세상을 몇 번이나 멸망시킬 힘? 그런 것은 유폐의 마왕이 물러서야 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저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멸망을 알고 있다.
몇 번이나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보아왔다.
주먹이 불꽃을 부쉈다.
빌어먹을 환생 589화
폭발이 폭발을 덮는다. 연달아 퍼부어지는 공격에 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직접 길을 만들었다. 그의 주먹은 쇄도하는 레반테인을 가로막고, 공검을 흩트리고, 불꽃을 꺼트리고, 유리의 칼날을 깨부쉈다.
한 걸음 발이 나아갈 때마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은 수십 번의 움직임을 만들었다. 실체를 부수어도 공격은 끝나지 않는다. 흩트린 공검이 다시 결합하고, 꺼진 불꽃이 재점화되고, 깨부순 칼날이 복원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수십 개의 레반테인. 하지만 이 폭격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 수십 배는 될 밀도를 가지고 있다.
오싹하는 감각을 느꼈다. 팔에도 소름이 돋았다. 이만한 공격을 상대하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최초에 후회를 견디지 못하고 멸망의 마왕에게 덤볐을 때. 멸망의 마왕과 자멸하고자 했을 때를 제외하고서는, 이만한 공격을 겪은 적은 없었다.
경시할 수 없다. 이 공격을 대응하지 못하고 당해 버린다면,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죽음조차도 가까이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응하지 못하고 당해버렸을 때의 이야기다. 이 세계는 세냐 메르데인이 환상의 마안과 누아르 제벨라의 잔류사념을 통해 일으킨 기적이다.
이 기적에서 유진과 세냐의 성역은 하나가 되어, 유폐의 마왕을 철저하게 ‘적’이라 규명하고 몰아붙이고 있다. 지금의 세계에서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이점도 가질 수 없다.
이점을 갖지 못하듯, 단점 또한 갖지 않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유폐의 마왕의 사정은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조작되는 현실이 유폐의 마왕을 침범하고 있지만, 유폐의 마왕이 갖는 격과 힘에 대한 지배권은 이 세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압도적 이점을 갖는 것은 유진과 동료들뿐. 즉, 유진과 동료들은 이 세계에서야 겨우 유폐의 마왕과 맞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유진이 전투에서 성장한 것으로 아주 조금 확신을 부정당했지만, 그것도 결국 오늘의 결과는 바꾸지 못할 작은 이변일 뿐이리라. 비록 이 이변이, 아니, 지금의 시대가 유폐의 마왕이 살아온 영겁 중에서 가장 많은 이변이 있었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이 하기로 한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수십 개의 레반테인을 부수며 나아갔다. 부수고 부숴도 다시 복원되는 칼날을 깨트리고 몇 번이고 다시 타오르는 신화를 손으로 꺼트렸다.
그 모습은 유진을 섬뜩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꿈과 현실이 연결된 성역. ‘꿈’의 이점은 유폐의 마왕은 누릴 수 없다. 과거 누아르 제벨라는 레반테인의 폭격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꿈을 끝내고 다음 꿈을 여는 것으로 파훼했었다.
유폐의 마왕은 그런 방법을 쓸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마 정면에서 돌파해 올 줄이야. 심지어 레반테인을 깨부수며 전진하는 유페의 마왕의 공세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차분하게 가까운 공격을 걷어내면서 천천히 유진과의 거리를 좁혔다.
“읽었다.”
거듭해서 터지는 폭발음 속에서 유폐의 마왕의 중얼거림이 울렸다. 그와 함께 유폐의 마왕의 자세가 바뀌었다. 몸을 옆으로 세우고 왼손을 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단단히 주먹을 쥐어 허리에 갖다 붙였다.
활짝 펼친 왼손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터졌다. 미세하면서도 견고하게 조정한 마력이 마치 거미줄처럼 폭발의 틈바구니에 나부꼈다. 그 마력의 거미줄은 수천, 수만 가닥으로 분열하여, 부서지는 레반테인의 파편 사이로 들어갔다.
유폐의 마왕이 왼손을 쥐었다. 가느다란 거미줄이 그 순간에 쇠사슬로 바뀌었다.
ㅡ빠지지직! 셀 수 없이 많은 파편과 타오르는 불씨 하나하나가 사슬에 묶였다. 유폐의 마왕이 왼손을 당겼다. 그에게 이어진 수만 개의 사슬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잡아끌렸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의 몸이 조금 뒤로 기울었다. 허리에 붙었던 주먹이 몸과 함께 기울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아졌다. 그 모든 동작이 유진의 눈에는 한없이 느리게 보였다. 꿈과 현실이 겹친 이 세계에서 유폐의 마왕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곧 유진은 직감했다.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의 마력과 힘, 그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성역을 정면에서 침범하는 것이다. 이 성역의 법칙에 환상이 깃들어 바뀌듯, 유폐의 마왕은 오직 자신의 존재만으로 현실을 다시 바꾸고 있었다.
쿵.
움켜쥔 주먹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발을 뒤로 끌었다. 발이 생각했던 만큼 뒤편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격발했다. 쿵, 쿵, 쿵. 주먹이 앞으로 밀고 나갈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마왕의 주먹이 끝까지 뻗어졌다. 사슬에 붙잡혀 있던 모든 레반테인이 소멸하고, 겁화처럼 타오르던 신화가 모조리 꺼졌다.
“하하.”
유폐의 마왕은 나직이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전력을 다해 내질렀던 주먹이 검은 재가 되어서 무너졌다.
심연에 유폐한 이 힘은 유폐의 마왕 자신조차 베어버리는 양날의 검이다. 문제없다. 이 양날이 아무리 날카로울지라도 그 칼날은 결코 유폐의 마왕의 목숨에는 닿지 않는다.
“너희는 닿을 수 있을까.”
재가 되어 무너진 팔의 단면에서 사슬이 튀어나왔다. 서로 엉킨 사슬이 다시 팔이 되었다.
설마 방금의 공격을 정면에서 분쇄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황과 경악은 짧았다. 다시금 유진은 정신을 무장했다.
‘흐름을 읽는 능력이 끔찍할 정도야.’
읽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주먹으로 부수고 전진하면서 동시에 공격의 모든 흐름을 읽고 계산했다. 레반테인의 폭격에 딱히 패턴을 두지는 않았지만, 유폐의 마왕은 그 난수마저도 순식간에 읽어냈다. 유진도 평생 전투 감각에 대해서는 어디서 꿀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규격 외의 괴물이다. 최초에 용사였고, 멸망을 막기 위해 마왕이 되어서, 억겁의 세월을 살며 시대의 끝을 몇 번이나 보아 온 대마왕. 이만큼 판이 깔리고 나서야 간신히 대등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기적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지?’
머릿속으로 떠올린 질문은 세냐와 누아르에게 전해졌다. 질문과 함께 전달 된 구상에 세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누아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하멜, 진심이에요?]
‘너 미쳤어?!’
돌아온 반응에 유진은 손으로 가슴을 쥐었다.
ㅡ화륵. 손끝에서 타오른 불꽃이 가슴을 감쌌다. 유진은 바로 옆에 있는 모론을 보았다. 드물게도 굳은 얼굴이던 모론은 유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
“미친 짓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넘을 수 없는가.”
“마왕과의 전투는 항상 그랬었지.”
유진도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쿵, 쿵, 쿵. 겁화를 지워낸 유폐의 마왕이 다가오고 있다. 유진의 생각을 전달받은 성녀들은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직감한 것이다. 방금 시도한 레반테인의 폭격은 유폐의 마왕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여태까지 유폐의 마왕에게 유효한 피해를 주었던 것은 쉬지 않고 몰아치는 연계. 그것을 파악했다면 공격의 성질을 바꿔야 한다.
[그때도 말했지만 하멜, ‘꿈’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너무 과격한 꿈은…… 현실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죠. 지금도 그래요.]
‘네가…… 그것이 유일한 답이라고 선택했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네가 바라는 꿈을, 기적을 만들어줄 거야. 하지만…… 솔직히 두려워. 정말 가능한 거야?’
떨리는 목소리. 유진은 피식 웃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기서 ‘가능하냐’는 질문을 무의미해.”
불가능하더라도 시도해야 한다. 계속해서 시도해서 부딪치지 않는다면 저 괴물을, 대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다. 그래서 유진은 세냐와 누아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손가락이 가슴을, 심장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믿었다. 믿음은 곧 신앙이고 신앙은 기적을 만든다. 신이 기적을 바란다. 유진의 신력이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이그니션.
전투를 결정짓기에는 아직 멀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그니션에 시간제한은 없다. 세냐의 기적이 환상을 현실로 바꾼다. 신력이 깃든 우주가 폭주했다. 그 폭주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폭발이 연속해서 터지고 끝없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육체가 덜덜 떨렸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실은 힘을 견디지 못해 재가 된 것처럼, 유진의 육체도 내부의 폭발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피부에 쩌적 금이 갔다. 가슴에서 번지는 균열은 내부에서 펑 터질 것처럼 부풀고 줄어들었다.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유진과 동화된 성녀들은 혼이 불태우는 것 같은 신열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벌어지는 균열이 점점 달라붙었다. 폭주로 미쳐 날뛰는 힘이 조율되기 시작했다.
감당하는 것은 성녀들과 유진만이 아니었다. 대전사이자 화신인 모론도 똑같이 이 미친 폭주를 부담했다. 모론은 꽉 다문 이빨 사이로 피를 흘리면서 무릎을 굽혔다.
[아하핫! 아하하하!]
누아르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빛을 철철 쏟아내는 환상의 마안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세냐도 진동하는 메리를 간신히 붙들고서 신음을 흘렸다.
기적을 구현하는 것이 버겁다. -공감했다. 이 정도의 힘이 아니고서는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음을.
“…….”
유폐의 마왕은 다가가던 걸음을 멈췄다. 저 앞에서 집중되는 ‘힘’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경이롭군.”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유폐의 마왕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그가 몇 번의 세계를 넘어서 연명을 바란 것이 광기라면, 지금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연명이 아닌 종결을 갈망하는 광기였다. 가진 모든 것을 불사르고 세상을 밝히는 광염이었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은 직감했다.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웃었다. 빛에 대항하듯 시커먼 마력이 몸을 덮었다. 강렬한 빛에 그림자가 짙어지듯이 지금의 유폐의 마왕의 존재감은 짙었다. 철그럭, 철그럭. 평생 들어 온 사슬 소리가 마왕의 움직임을 따랐다.
마왕이 전진했다. 유진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아아아!”
모론이 괴성과 함께 땅을 박찼다. 손에 쥔 도끼의 날이 박살 났다. 대신에 찬란히 타오르는 불꽃이 도끼날이 되었다. 콰르르르! 도끼가 빛을 이끌었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도끼의 앞을 가로막았다.
번쩍 터진 빛에 세상이 뒤흔들렸다. 꿈과 현실에 침식된 바벨의 외곽이 소멸했다. 유폐의 마왕은 날아간 팔을 추스르는 대신에 몸을 비틀었다. 주먹을 쥐는 오른팔에 사슬이 휘감겼다. 상대의 공격을 버티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공격에 팔이 부서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꽈아앙! 정면에서 밀고 들어오는 타격에 모론의 우반신이 터졌다. 휘청거리며 밀려나는 모론의 머리 위, 유진이 도약했다. 높이 치켜든 신검에 불꽃이 뒤덮였다. 울룩불룩 부풀어오르는 불꽃이 수십 개의 태양을 만들었다. 이클립스가 유성우처럼 쏟아졌다.
유폐의 마왕의 양손이 전방을 휩쓸었다. 찰나에 이클립스의 흐름을 읽고 통제했다. 연계되어야 할 폭발은 유폐의 마왕을 덮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당황하지 않았다. 유진의 손에는 아직 신검이 있다. 유진의 눈과 입에서 피가 흘렀다. 수십 자루의 레반테인을 만드는 대신에 그 모든 힘을 신검에 집중했다. 이그니션도 몇 번이 중첩했다.
꿈일 지라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유진의 손에서 떨어졌다. 추락한 신검이 마왕을 내리찍었다.
꽈지지직! 유폐의 마왕이 무릎을 꿇었다. 무수히 많은 사슬이 유폐의 마왕의 몸을 지탱하고 신검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런데도 힘은 무거웠다. 유폐의 마왕은 피를 토하면서도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마왕은 피범벅의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신검의 위. 흩트렸던 태양들이 다시 모이고 있다. 어느새 세냐가 하늘에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우주가 현실로 구현되었다. 천사의 모습을 한 누아르가 천사답지 않은 웃음을 터트렸다. 펑, 펑, 펑! 태양이 작게 줄어 수백 수천 개의 별이 되었다.
밤하늘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밤하늘을 밝히는 모든 별이 유폐의 마왕을 향해 추락했다. 이건 정면에서 돌파할 수 없다. 유폐의 마왕은 빠르게 확신했다. 온갖 혼란을 간파하는 마왕의 감각은 이 공세에서 활로를 찾지 못했다.
끼리릭! 수만 개의 사슬이 마왕의 손에 잡혔다. 유페의 마왕은 그 모든 사슬을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서 별들을 부수었다. 그렇게 만든 작은 틈에서 뒤로 도약했다.
당연히 유진과 모론은 유폐의 마왕이 물러서는 것을 지켜보지 않았다. 모론은 양손에 쥔 두 자루의 도끼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쏟아지던 별이 도끼에 맞아 부서졌다. 그 모든 파편이 유폐의 마왕을 덮쳤다.
움직임을 제한했다. 유폐의 마왕이 저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모든 가능성이 유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읽고 보는 것은 유폐의 마왕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유진 역시 이 전투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기 자신을 죽일 만큼 몰아붙인 폭주는 유진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극한까지 열었다.
유폐의 마왕이 움직이기 전에 유진이 먼저 움직였다. 유폐의 마왕이 팔과 사슬을 휘둘러 길을 열기 전에 유진이 먼저 그 길을 가로막았다. 사슬의 앞에는 이미 신검이 있었다. 대신에 주먹을 휘두를 때 유진은 이미 사슬을 끊고 신검을 놓았다.
품을 파고들었다. 유진의 손이 유폐의 마왕의 가슴으로 향했다. 지금 유폐의 마왕은 길을 보지 못했고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유진에게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쿠웅.
손바닥에서 전해진 힘이 유폐의 마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왕의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계속해서 공격을 이었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주먹이 유폐의 마왕의 머리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휘청거리는 마왕의 옆구리에 모론의 도끼가 꽂혔다. 허리가 끊어졌지만 마왕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이 이어지는 순간에 유폐의 마왕은 다시금 활로를 찾았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모론의 팔다리를 잡아 뜯어버렸다. 어느새 가까이 온 신검에는 오히려 목을 내주었다. 신검이 목을 파고들었을 때. 유폐의 마왕은 가까이 온 유진의 가슴을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그 충격에 유진은 신검을 놓치고 물러섰고, 유폐의 마왕의 몸도 땅을 뒹굴었다.
뒹굴었다. 유진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대마왕이 몸도 추스르지 못하고 땅을 뒹군 것이다.
‘조금만 더.’
울컥 나오는 피를 삼키며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환생 590화
나뒹굴던 유폐의 마왕의 손이 땅을 긁었다. 추태라고 할 모습이지만 정작 유폐의 마왕은 수치스러운 기분은 느끼지 않았다. 지금 그가 느끼는 것은 이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적들에 대한 찬사뿐이었다.
‘훌륭하다.’
이번 세계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슨 의미가 있나? 허무하게 죽었던 아가로트의 환생은 결국 모든 운명을 짊어지고서 이곳에 왔거늘.
시련에, 시험에, 전력으로 부응하고 있다.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폐의 마왕은 만족했다. 이 정도의 집념과 광기. 전력을 다해 부딪쳐 오는 기도는 마왕이 정했던 기준을 진즉에 넘었다.
하지만 유진과 동료들이 포기하지 않듯, 유폐의 마왕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만족했다고 해서 져줄 수는 없다. 유진이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듯, 유폐의 마왕도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망령을 떠올렸다. 그는 모든 진실을 알지 못했지만, 멸망이 반복되고 유폐의 마왕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것을 안 뒤에 스스로 선택했다.
‘네가 그렇게 죽어 가치를 증명했듯, 나도 다르지 않구나.’
피범벅의 입술로 웃으며 생각했다. 이 시험은 만족하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낼 수 없다. 상대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려야만 끝이 난다.
유폐의 마왕의 의지는 어떤가? 몇 번이나 절망하고서 누더기처럼 기워내고서 남긴 답은, 멸망과의 공존이다. 죽일 수 없는 이상 공존할 수밖에 없다. 죽일 수 없는 존재를 죽이겠다고 날뛰다가 모든 것이 끝나게 둘 수는 없다.
앞으로의 영원을 마왕으로 군림해야 할지라도. 모든 망자의 혼을 짊어지고, 결국 공허하게 될 뿐인 처음과 끝을 반복할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누가 욕심을 부리는 것이지?”
바닥을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벌겋게 충혈된 안광이 번득였다.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래성을 고집하는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인가?”
해가 저물고 밤이 되어 다시 해가 떠오르듯이, 멸망이란 파도는 당연히 찾아올 수밖에 없다. 그 멸망의 탄생에 빌미를 주고 목도할 수밖에 없던 남자는 스스로 마왕이 되어 세계를 모래성으로 만들었다. 몇 번이나 밀려오는 파도에 모래성이 결국 무너져 버려도, 파도가 물러가고 나면 흙투성이의 손으로 다시 모래성을 세웠다.
“모르겠구나, 정말로 모르겠어. 유진 라이언하트, 나는 네가 주장하는 희망을 여전히 아집이라고 느낀다. 네 욕심을 도저히 긍정할 수가 없다.”
멸망의 마왕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한 몸이다. 갈라져 나왔다고 해도 베르무트의 본질은 멸망과 이어져 있다. 멸망의 마왕을 없애고 베르무트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유진과 동료들이 베르무트를 포기했다면. 멸망의 마왕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를 모두 죽이고, 온전히 세상을 구하는 것만을 바랐다면.
유폐의 마왕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가능을 해내겠다고 말하면서 인정을 남기니, 유폐의 마왕은 도저히 저 아집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절망시키고자 한 것이다.
“네 긍정은 필요 없어.”
신검이 가로막혔다. 유폐의 마왕은 너덜거리는 손을 당기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싸움을 거는 것은 유진만이 아니다. 뒤에서는 모론이, 위에서는 세냐가 있다. 그들이 온전히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끔 성녀들이 받치고 있다.
“널 이기면, 내가 옳은 거다.”
지금 내거는 신념에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순하게 오늘 승리하는 쪽이 옳은 것이다. 최후에 멸망을 넘지 못할지라도, 오늘의 패자는 결과를 논할 수 없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고, 유폐의 마왕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저 발언을 이기적이거나 독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유폐의 마왕도 마찬가지다.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을 주장한다면, 결국 둘 중 하나가 꺾일 때까지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다르다. 유폐의 마왕은 주먹을 쥐며 생각했다.
유진은 혼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동료가 있다. 승리를 기도하는 신도가 있다. 사정을 모르는 자들일지라도 지금 시대에서 죽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용사가, 신이, 빛이, 마왕을 쓰러트려 승리하고 평화를 열기를 바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어떤가. 이 전쟁에 참전한 마군은 유폐의 마왕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패자를 유린하고, 영원불멸 대륙에 군림하는 것이다.
그들은 멸망을 모르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들 영원불멸한 군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승리 후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유폐의 마왕에게, 혹은 멸망의 마왕에게 몰살당할 것을 알지 못한다.
이 시대의 모든 기억을 잃고서 다음 시대로 넘어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유폐의 마왕이 사슬에 이은 셀 수없이 많은 영혼으로 있다가, 선별을 거쳐 다음 시대에 태어날 것을 알지 못한다.
선택받지 못한 영혼 중 일부는 융해되어 마력의 소자가 되고, 원시의 정령이 되고, 세상의 마나가 될 것을 알지 못한다.
그마저도 되지 못한 영혼들은 하나로 뒤섞이고 사악한 힘이 되어, 유폐의 마왕의 깊숙한 곳에 봉인이 될 것을 알지 못한다.
항상 그래 왔다. 다른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 푸념한 적도 없다. 토로한 적도 없다. 이전 시대에 그랬고, 이번 시대도 그랬다. 제법 오래 곁에 두었고, 스스로 이례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꼈던 측근, 가비드 린드먼도 최후까지 유폐의 마왕이 품은 진실은 알지 못했다.
-폐하의 비원이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가비드는 최후의 순간에는 조금은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비드가 아닌 다른 마족들은 유폐의 마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제가 죽는다면, 부디 제 혼을 거두어주십시오. 폐하와 함께 끝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반드시 바벨에서 죽겠다는 말과 함께, 문 앞에서 허무하게 죽은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유폐의 마왕이 보려는 ‘끝’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타개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막막한 절망, 그런 절망에서 존재는 원망할 존재를 찾게 마련이다.
유폐의 마왕에게 평생 충성한 마족들도, 마왕이 내리는 은혜를 고혈처럼 빨아먹어 온 헬무드의 이민자들도, 생전의 특혜를 갚기 위해 저당 잡힌 혼들도, 멸망에 수긍하고 받아들인 유폐의 마왕을 원망할 것이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은 저 모든 원망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다.
쿠웅.
세계가 흔들렸다. 지금도 유폐의 마왕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일 초를 끝없이 늘린 것만 같은 기나긴 찰나. 그 순간의 순간의 순간에서 유폐의 마왕은 계속 공격하고 방어하며 탐색했다. 서로의 심상이 이어졌기에 공격에는 틈이 없다. 최소한의 피해를 내주면서 깨부수고 흩트려 보아도 공격은 점점 격해지고 있다.
모론은 압도적인 힘으로 우직하게 덤벼온다. 화신이 되어 더욱이 증폭된 힘은, 이 세계에서는 일격 일격이 유폐의 마왕의 존재를 울리고 있다.
세냐의 마법은 상상하는 모든 불가능을 실현하고 있다. 몇 번이나 밤하늘이 쏟아졌다. 세냐의 마법은 이 세계를 몇 번이나 숲으로 만들고 다시 뒤집어 작열하는 지옥으로 만들고 불타서 삭막한 사막으로 바꾸었으며 다시 차가운 동토로 얼렸다. 그 모든 재앙은 온전히 유폐의 마왕에게만 향할 뿐 동료들은 해하지 않았다.
그 위에 유진의 태양이 추락하고 다시 떠올랐다. 유진의 손에 쥔 무기는 과거의 전쟁신이었음을 증명하듯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보아도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공격이 유폐의 마왕을 깎아가고 있다.
하지만 죽이지는 못하고 있다. 이 세계도 유폐의 마왕의 힘은 억제하지 못하고 있다. 제아무리 잘 만든 꿈이라도 결국은 현실에 녹아든 것일 뿐. 현실을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유진과 그에게 이어진 빛, 그리고 세냐의 신력이 환상의 마안을 극한까지 활용하고 있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세계가 영원할 수는 없다.
탐색하면 간파할 수 있다. 부술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부서서 무너트릴 수 있다.
부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야 뻔하지 않은가. 느긋하게 구조를 파악해서 무너트리려 할 필요가 없다. 그것보다 쉬운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것은 환상의 마안. 그리고 그 환상의 마안을 사용하는 것은 영혼만 남아 천사가 된 누아르 제벨라다.
철그럭.
유폐의 마왕의 심연에서 한 번 더 사슬이 풀렸다. 그러자 유폐의 마왕의 팔이 본래의 형태를 잃고 시커먼 마력 자체가 되어서 요동쳤다. 동시에 유폐의 마왕의 눈동자가 먹물이 녹아들 듯 검은색에 덮였다.
풀려나온 광기가 이성을 흔들었다. 억겁의 세월을 버틸 수 있게끔 봉인한 광기가 힘과 함께 풀려나왔다.
“크륵.”
입술에서는 피가 아닌 독기가 흘러넘쳤다. 이 이상 독을 해방하는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도 위험하다. 자칫하다가는 자아가 붕괴해서, 멸망의 마왕과 다름없이 미쳐 날뛰는 재앙이 될 것이다. 당연히 유폐의 마왕은 그러한 몰락을 바라지 않는다. 똑같은 재앙이 되어버려도 멸망과 공존할 수는 있겠지만, 앞으로의 세계는 만들 수 없을 테니까.
‘이 정도로 몰아붙이다니.’
검게 변한 눈동자가 안광을 발했다. 조금 더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이려던 유진과 모론, 세냐는 저 안광에서 원초적인 공포와 섬뜩함을 느꼈다. 마치 멸망의 마왕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아.]
누아르는 저 ‘독’이 자신을 겨냥하는 것을 느꼈다. 독이 풀려나오는 것만으로 꿈이 뒤흔들린다. 누아르는 왼쪽 눈동자에서 생으로 지져지는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지만, 결코 눈은 감지 않았다. 지금이 분수령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지금 더 몰아붙이지 않는다면 유폐의 마왕에게서 승기를 잡을 수 없다. 저 독은 유폐의 마왕에게도 치명적이다.
‘집착이란 감정은 나도 잘 알지.’
누아르는 일그러지는 입술을 붙잡으며 억지로 웃었다. 유폐의 마왕은 ‘다음’에 집착하고 있다. 저 치명적인 독의 대가로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으리라.
‘애당초 그 독이라도 당신은 죽지 않겠지.’
목숨에 닿지 않는 독. 그럼에도 사용하지 않고 봉인하는 것은, 고통이 싫어서? 아니, 고작 그런 이유일 리가 없다.
유폐의 마왕이 저만큼의 독을 억제했던 것은. 저 검게 물든 눈동자에 감긴 광기가 가리키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 결코 바라지 않는 것은.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
잘, 안다. 누아르도 그랬다. 지금의 내가,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ㅡ즉, 유폐의 마왕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기 전에 독을 다시 사슬로 묶어 유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코 죽일 수 없는 저주를 안은 마왕이라도, 가진 모든 수단이 가로막혀 버리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절대로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유폐의 마왕이 버티지 못하고 독기를 수습할 때까지 버틴다면 누아르의, 아니, 하멜의 승리다.
‘당신의 승리는 나도 바라고 있지만, 하멜.’
환상의 마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유폐의 마왕이 풀어낸 어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진과 모론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런 유진의 등을 보며 누아르는 이를 꽉 물었다.
‘그 승리는 나에게 가혹한걸.’
유폐의 마왕이 독기를 수습할 때까지 버티면 된다고?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저 독기는 몇 번의 시대의 죽음과 억만의 시체와 영혼이 녹아서 쌓인 시독(屍毒)이다. 살아 있을 적의 누아르가 군림했던 제벨라 시티라도 저 시독에 오래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어서 간신히 영혼만 남은 누아르가, 저 시독을 상대로 유폐의 마왕보다 오래 버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누아르는 그것을 확신했다. 유폐의 마왕이 시독을 수습하기 전에,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오염되어 버릴 것을. 그렇게 오염되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소멸해 버릴까? 아니면, 오염되어서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다시 환생해서 하멜과는 만나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하하.]
이제 와서 그것을 두려워할까? 아니, 두렵지 않다. 애당초 누아르가 바랐던 죽음에서 환생이란 다음은 없었으니.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하멜이 승리하는 것이다. 최후에 자신이 어떻게 되건, 그것은 상관없다. 이 꿈이 완전히 무너져서 나란 존재가 사라지게 될지라도, 자신의 모든 것이 하멜의 승리에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누아르는 환상의 마안을 감지 않고 독기를 노려보았다. 결국 꿈은 무너지게 되겠지만, 그때까지 최대한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이기를 바라면서.
‘뭐야 이건?’
유진과 모론은 그 독기를 느끼지 못했다. 유폐의 마왕이 새로이 풀어내 어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느꼈어도, 그것이 독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누아르가 저 독기를 온전히 자신에게 억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아르와 연결된 세냐는 저 독기를 어느 정도 간파하고서, 경악한 눈으로 누아르를 보았다.
[쉿.]
누아르가 속삭였다. 전해진 감정에 세냐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멈추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누아르가 결심한 것이고, 이것 외에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방법이 없다는 것은 세냐도 이해했다.
‘먼저 끝내면 돼.’
이딴 식으로 누아르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것은 세냐의 이상과 어긋난다. 그렇기에 세냐는, 누아르가 소멸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고자 했다.
그럴 줄 알았다. 더 이상 팔의 형상도 아닌 시커먼 어둠을 휘둘렀다.
꽈지지직! 궤적을 따라 번진 독기는 세상을 흔들었지만, 그 영향을 받지 않는 유진과 모론은 독기를 베고 부수면서 유폐의 마왕에게 들이닥쳤다.
“얕잡아 보였나.”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
치명적인 독일지라도 유폐의 마왕을 완전히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유진과 모론, 세냐의 공격이 유폐의 마왕을 소모할지라도, 중독의 사선에 도달하는 것보다 누아르가 중독되어 소멸하거나 미치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
‘누아르 제벨라, 네가 하멜을 그토록 위할 줄은 알았지만, 결국 네 소멸이 더…….’
이성이 크게 흔들렸다.
“크륵.”
독기에 범벅된 피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변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뭐지?’
곧 유폐의 마왕은 이변의 정체를 이해했다.
독기와는 다른 오염이 유폐의 마왕의 심연을 갉아먹고 있다.
‘이건…….’
유폐의 마왕이 머릿속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발자크 루드베스?’
빌어먹을 환생 591화
왜 이 순간에 발자크 루드베스의 얼굴이 떠오른 것인지는 모른다.
……발자크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나? 만약 그랬다면 유폐의 마왕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발자크가 아무리 용의주도할지라도 그는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한 흑마법사. 계약자의 심상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
물론 유폐의 마왕은 휘하의 반기조차도 자유로이 내버려 두어 왔다. 그 생각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실천하고서 실패하면, 언제나 그 책임을 물어왔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인간 흑마법사에게 단 한 번도 반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발자크는 언제나 유폐의 마왕에게 충성했고, 바벨에서 와서도, 그리고 죽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순간에 발자크는 세냐의 마법에 감탄하고, 그러면서도 유폐의 마왕의 승리를 바라며 죽었다.
‘발자크 루드베스.’
알고 있다. 유폐의 마왕이 알고 있는 발자크 루드베스에게 이런 재주는 없다. 발자크는 단 한 번도 유폐의 마왕에 대한 배신을 떠올린 적이 없다.
그런데도 유폐의 마왕은 머릿속에 떠오른 발자크의 얼굴과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근거 따위는 없지만, 유폐의 마왕은, 자신에게 찾아온 불편하고 끔찍한 이변의 근원이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건 직감이고 본능이었기에 근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으며, 유폐의 마왕은- 지금 이것이 평생에 걸쳐 썩히고 쌓아 온 시독보다도 더 치명적인 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건…… 뭐지……?’
감각이 엉클어진다. 의지를 떠나서 멋대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지금 정말로 서 있는 것인지 누워있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어떻게든 이성의 날을 세워보지만 육체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에 독기는 더욱 짙게 느껴졌다. 심연에서 치솟은 독기가, 유폐의 마왕의 뜻과는 달리 날뛰면서 마력을 갉아먹고 있다.
이건 폭주다. 독기가 멋대로 폭주하고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는데, 유폐의 마왕이 평생 지배하던 것들이 계속해서 통제에 벗어나고 있다.
‘위험하다.’
이것만큼은 유폐의 마왕조차도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폐의 마왕의 심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 그 어떤 최악에도 유폐의 마왕이 지켜야 할 것은, 멸망의 마왕과 연결한 사슬이다. 그것이 끊어져 버린다면 유폐의 마왕은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시간을 느리게 느끼는 것은 유폐의 마왕뿐. 그를 공격하는 적들에게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유진과 모론은 유폐의 마왕에게 생긴 이상을 눈치챘다. 그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되 꺾이지 않고 대응하던 유폐의 마왕이, 갑자기 대응하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무언가에 대한 노림수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틈을 열고서 깊이 들어오라 손짓하는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깊이 들어가도 유폐의 마왕이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흘려내지도, 막아내지도, 반격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 새끼 뭐야?’
경직된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가까이서 보고 있지만 유폐의 마왕의 눈동자에는 유진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추어질 뿐이었다. 마치 눈을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발자크 루드베스.”
실제로 그랬다. 홀로 동떨어진 시간의 골. 심연의 한복판에 선 유폐의 마왕의 정신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검게 출렁거리는 바다에서 거품이 부글거리며 끓었다.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이지?”
이 바다는 유폐의 마왕의 심연이다. 그가 살아온 억겁에서 쌓인 광기와 영혼들이 이곳에 녹아 있다. ‘오늘’ 죽은 발자크의 영혼은 결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의 영혼을 심연에 처박은 적이 없었다.
“내 힘과 격을 찬탈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헛수고다, 발자크 루드베스. 네 비수가 치명적인 것은 인정하지만, 이미 죽은 너로서는 절대로…….”
“찬탈?”
부글부글 끓는 거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심연에는 무수히 많은 영혼이 녹아 있고, 지금 발자크도 그중 하나가 되어 있다. 만약 발자크의 노림수가 저 심연에서부터 기어올라 유폐의 마왕의 영혼을 역으로 잡아먹고 마왕의 힘과 격을 빼앗는 것이라면, 발자크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큰 착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폐하. 저는 마왕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육체도 없다. 심연에서 홀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울 수도 없다. 발자크의 영혼은 바다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이 기묘한 것이다. 이 넓고 깊은 바다의 일부가 되었는데도 발자크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고작 100년도 되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그가, 저 수많은 영혼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
“폐하께서도 제 비원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품이 점점 번지고 바다가 흔들렸다.
비원. 당연히 알고 있다. 전설적인 마법사가 되는 것. 마법을 동경하고, 갓 마법사가 된 어린이나 가질 법한 비원.
“마왕의 충성한 흑마법사로서 유진 라이언하트를, 세냐 메르데인을 쓰러트린다. 하하…… 그것도 충분히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폐하.”
육체가 없어 목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지만, 발자크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즐거움과 만족이 느껴졌다.
“저는 흑마법사가 아닌 마법사로 전설이 되고 싶습니다. 전설이 되어 두고두고 회자 된다면, 마족이 아닌 인간에게 회자 되고 싶습니다. 마왕이 되고 싶냐니요? 하하, 폐하께서는 저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것을 몹시나 싫어합니다.”
알고 있다. 인간을 버리고 마왕이 되기를 바랐던 에드몬드 코드렛과는 달리, 발자크는 단 한 번도 인간을 버리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알고 있던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인간에 대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모든 것이 발자크의 심상에서는 읽을 수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십시오, 폐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가…… 결정적인 순간에 마왕을 배신하면, 과연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 흑마법사의 배신이 마왕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그 부상을 통해서 용사가, 인간이 승리한다면?”
“…….”
“제 간절한 바람은 그것입니다. 비원이 가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살아서 충분히 준비는 했습니다만, 죽어버리고 난 뒤에는 더는 준비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가.”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발자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품은 영혼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심연에 보내지 않았던 발자크의 영혼이 이곳에 있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납득했다. 왜, 발자크가 바벨에서 죽겠다고 한 것인지도 납득했다. 저 남자는 죽음을 이용한 것이다. 죽고서 영혼이 거둬지는 순간에 혼을 나누었다. 그것은 유폐의 마왕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교했고, 결국 노렸던 대로 분리한 혼은 아무것도 아닌 찌꺼기가 되어 심연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나를 속일 줄이야.”
유폐의 마왕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속임수는 제 얼마 되지 않는 특기 중 하나지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유폐의 마왕은 지금 발자크가 어떤 얼굴일지는 또렷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네 시그니처도 오늘을 위한 포석이었나?”
“글러트니가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발자크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발자크의 시그니처는 살아 있는 것을 먹는다면 그 힘과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소멸하지 않고 발자크에게 더해진다. 그렇게 발자크는 자신의 혼을 은밀히 부풀려 왔다. 그렇게 부풀린 뒤, 유폐의 마왕에게 심상이 읽히지 않도록 자신을 둘로 나누었다.
결국 발자크의 노림수는 성공했다.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가 죽는 순간까지 배신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죽은 영혼이 나누어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훌륭하구나.”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발자크 루드베스. 나는 네가 비원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네 죽음이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구나. 너는 최후까지 비원을 추구했고, 허무하게 죽지도 않았다. 자신의 죽음마저 이용해, 나를 파고드는 비수가 되었다.”
“만약 저 혼자 죽었다면.”
발자크가 대답했다.
“저는 폐하를 노리는 비수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발자크라고 해서 모든 것을 계획할 수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결정적으로 유폐의 마왕이란 존재에 대해 무지했다. 혼을 나누어 심부까지 파고드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유폐의 마왕을 위협하는 극독이 되리란 자신은 없었다.
만약 자신을 독으로 바꿨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에게 여유가 있었다면…… 발자크는 비수가 되기도 전에 역으로 소멸당했을 것이다.
“제가 이렇게 비수가 되었다는 것은, 폐하께서…… 여유가 없으시다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폐하는 밑바닥에 고인 힘마저 끌어내셨을 겁니다.”
유폐의 마왕은 대답하지 않고서 빙그레 웃었다.
“지금 저는 독이 되어 폐하의 심연에 증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만으로는 폐하를 쓰러트릴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아무리 증식한들, 폐하께서는 저를 통째로 잘라버릴 수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저를 잘라낸 만큼 폐하께서는 약해지실 겁니다.”
바다가 요동치고 있다. 지금 순간에도 발자크의 영혼은 심연에 잠긴 것들을 잡아먹으며 덩치를 불리고 있다. 덩치가 커질수록 포식의 속도가 빨라졌다.
“그것으로 됐습니다. 결국 저는 폐하의 패배와, 다음이 아닌 ‘지금’을 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ㅡ쿠웅.
커다란 진동이 세상을 흔들었다.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시야가 바뀌었다. 유폐의 마왕은 심연이 아닌 현실을 보았다.
현실의 유폐의 마왕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죽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재생이 더디고 정신이 혼미하다. 감각은 여전히 엉클어져 있다. 중독이 가속되고 있다.
“……하하…….”
유폐의 마왕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서 웃음을 흘렸다.
“훌륭하다, 발자크 루드베스.”
다시금 유폐의 마왕은 그것을 인정했다. 그는 큭큭 웃으며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확실히 이것은 치명적이구나. 너뿐만이 아니지. 지금 모든 것이 내게 치명적이다.”
갑작스레 나온 발자크의 이름에 유진과 세냐가 멈칫했다. 하지만 왜 그 이름을 내뱉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물을 수가 없었다.
휘청거리며 일어서는 유폐의 마왕의 그림자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일어선 유폐의 마왕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이런 씨.”
유진은 기겁하며 신검을 휘둘렀다. 길게 뻗어간 참격이 유폐의 마왕의 목을 잘랐다.
하지만 머리를 떨어트렸는데도 유진이 느끼는 직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똑같이 느낀 모론은 즉시 공간을 휘어잡아 유진을 당겼다. 그리고 펄쩍 뒤로 뛰어오르면서 다시 손을 휘둘렀다.
ㅡ콰르르르! 억지로 밀려 나간 공간이 유폐의 마왕과의 거기를 벌렸다.
“세냐!”
모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세냐도 주저하지 않고 메리를 치켜들었다. 그러면서 근처에 떠 있는 환상의 마안을 손으로 붙잡았다.
[잠깐, 나는……!]
“넌 내 도구니까, 멋대로 굴지 마!”
누아르가 소멸을 각오했다는 것은 안다. 아까는 그 각오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폭주하는 독기는 이미 꿈을 무너트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유폐의 마왕이 하려는 것은, 이 세계를 고집하다가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왜?’
이 정도로 몰렸나? 내뱉었던 이름, 발자크 루드베스가 무언가를 했나?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저 유폐의 마왕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몰린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부풀어 오르는 그림자, 유폐의 마왕에게 집중되는 흉악한 마력.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기도가 눈부신 빛을 일으켰다. 성역의 결계가 유진과 모론, 세냐를 감쌌다. 그리고 메리가 마법을 일으켰다. ㅡ빠지지직! 공간이 찢어지며 길을 만드는 순간.
유폐의 마왕의 잘린 목에서 어둠이 솟구쳤다. 심연의 독기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환상의 마안을 거두는 것으로 꿈이 끝나 버렸기 때문에 유진과 모론도 독기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연거푸 뿜어져 나오는 독기와 마력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유진 일행에게 밀려왔다.
-하하하…… 하하하하!
그 시커먼 격류에서 웃음소리가 울렸다. 발자크의 웃음소리였다. 유폐의 마왕이 발자크와 바다를 통째로 뽑아낸 것이다. 그것으로 발자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지만, 발자크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전설의 일부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선명한 목소리가 세냐와 유진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그 순간에 유진과 세냐는 발자크가 무엇을 의도하고 죽었는지를 이해했다. 세냐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를 위한 동화책을 써주고 싶을 정도야.”
세냐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발자크가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이다.
아쉬움은 느끼지 않았다. 최후에 발자크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만족하며 죽었다. 마왕을 배신한 흑마법사. 마왕의 패배에 일조한 흑마법사.
하지만 그 비원은 아직 전부 이뤄지지 않았다.
ㅡ콰르르르르! 유폐의 마왕에게서 뿜어져 나온 독기와 마력이 바벨을 침식하고 무너트렸다. 그 무식한 파괴에 휘말리기 전에, 세냐의 마법은 공간을 찢어 만든 길에 문을 열어 바벨을 탈출했다.
짧은 부유감 뒤에 유진 일행은 전장의 하늘에 도달했다.
바벨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환생 592화
전장의 하늘을 부유하던 바벨이 무너진다. 300년 전부터 군림해 온 마왕성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붕괴하고 있다. 그 광경에 전장의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신군과 마군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경악을 느꼈다.
유폐의 마왕에게 충성하는 마군은 설마 자기들 머리 위에서 바벨이 붕괴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왕에게 맞서는 적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힘은 유폐의 마왕 앞에서는 대단치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바벨은 붕괴했지만, 마왕은 패배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바벨이 붕괴하면서 퍼져나가는 힘. 사악하고 불길한, 시커먼 마력. 유진이 띄웠던 신력의 태양이 바벨이 내뿜는 어둠에 뒤덮였다. 저렇게 붕괴하고는 있지만, 오히려 붕괴했기에 하늘은 밤이 되었다.
“유진……!”
마족의 피에 흠뻑 젖어 숨을 몰아쉬던 시엘은 놀라서 그 이름을 외쳤다. 너무나도 짙은 어둠이 빛을 가리고 있지만, 시엘의 감각은 저 시커먼 밤 너머의 빛을 느꼈다.
“저건…….”
주먹에 엉겨 붙은 살점을 털어내던 카르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바벨이 붕괴하며 퍼졌던 어둠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지상으로 쏟아지던 바벨의 잔해가 우뚝 멈췄다.
그 중심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이었다. 그는 붕괴하다가 정지한 바벨의 중심에서 긴 숨을 내뱉었다. 유폐의 마왕이 호흡하자 바벨의 잔해와 어둠이 두근거리며 공명했다.
“쿨럭.”
마력의 중심에 떠 있지만 유폐의 마왕은 피를 토했다. 발자크와 함께 잘라낸 것은 독기뿐만이 아니다. 발자크의 속임수는 유폐의 마왕에게 치명적이었다. 잘라내지 않았다면 절대로 끊어져서는 안 될, 멸망과 연결한 사슬마저 끊어졌을 것이다.
“처참하군.”
잠시 호흡을 고른 뒤, 유폐의 마왕은 메마른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ㅡ콰르르르! 정지했던 바벨의 잔해가 모조리 마력으로 바뀌어서 흩어졌다.
“그리고 치명적이야.”
잘라낸 것이 너무 많다.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다가 다시 피를 토했다.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죽지는 않는다. 죽지만 않을 뿐이다. 더는 싸울 수 없게 된다면, 죽지 않아도 패배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유폐의 마왕은 피범벅의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면서 고개를 들었다.
회오리치는 어둠 저편에서 유진을 보았다.
“처참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인가.”
유폐의 마왕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대가. 환상의 마안을 촉매로 삼아 연결한 꿈과 현실. 몇 번이나 중첩한 이그니션. 수십 개로 늘린 레반테인과 공검.
그 힘의 반동은 꿈이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사용한 힘의 반동은 꿈에서 깨어난 뒤에 찾아온다.
“…….”
떨리는 손을 쥐며 곁을 보았다.
호흡을 가다듬지 못하고 거칠게 내쉬는 모론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씹는 세냐가 보였다. 성녀들은 아직 유진과 공명하고 있다. 하지만 둘의 상태도 나쁘면 나빴지 결코 좋지는 않았다. 그나마 유진이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 있는 것은, 성녀들이 유진이 감당해야 할 대가를 일부 부담하면서 치료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의 마안은 감겼다. 완전히 부서지지 않고, 누아르의 영혼도 소멸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전투에서는 더 이상 환상의 마안을 뜰 수 없을 것이다.
“싸울 수 있냐?”
상태는 좋지 않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분이다. 하지만 싸울 수 있다. 꿈에서의 반동은 심신을 지칠대로 지치게 만들었지만, 결국 현실은 아니었기에 신력은 쓸 수 있다. 불꽃은 사그라지고 빛은 희미해졌지만, 유진은 검을 쥐었다.
“아직 유폐의 마왕은 쓰러지지 않았다.”
모론이 내뱉었다. 그가 손을 뻗자 어둠 속을 떠돌던 도끼가 모론의 손으로 날아왔다. 평생 휘둘렀던 도끼는 자루가 끊어질 것처럼 너덜거리고 날에도 이곳저곳 금이 갔다. 하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모론은 씩 웃으며 도끼를 양손으로 잡았다.
“느껴진다, 하멜.”
어둠이 준동하고 있다. 모론의 눈은 짙은 어둠을 꿰뚫어 유폐의 마왕을 보았다.
“그토록 멀었던 유폐의 마왕이, 지금은…… 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있을 것 같다가 아니야.”
전장의 소리는 멈춰있다. 모두가 하늘을 보고 있다. 유진은 왼손을 가슴에 얹으며 내뱉었다.
“닿는다.”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칠 대로 지친 심장에 불꽃이 깃들었다. 혹사당한 우주가 폭발하며 신력이 폭주했다. 사그라졌던 불꽃이 다시 타올랐다. 유진을 중심으로 몰아친 빛이 어둠을 밝혔다.
“그래.”
세냐는 유진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지금이 아니고서는 유폐의 마왕에게 닿을 수 없음을 절감했다. 환상의 마안과 누아르 제벨라를 이용했다. 발자크가 죽으면서 감춘 노림수가 적중했다.
그 결과, 간신히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였다. 여기서 보신 따위를 생각하며 물러섰다가는 절대로 유폐의 마왕에게 닿지 못한다.
세냐의 눈동자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메말랐던 메리의 꽃잎이 다시 펼쳐졌다.
ㅡ화아아아악! 영력의 폭풍이 엷어진 어둠을 완전히 밀어냈다. 홀로 선 유폐의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번쩍 터진 빛이 하늘에 선을 그었다. 한줄기 번개가 돼서 도달한 유진의 신검이 유폐의 마왕에게 쇄도했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던 유폐의 마왕의 손이 참격을 가로막았다.
꽈지지직! 강제로 꺾인 참격이 판데모니엄의 성벽에 꽂혔다. 굉음과 함께 성벽과 도시가 갈라졌다.
“끼아악!”
도시에서 날뛰던 멜키스가 비명을 질렀다. 파괴에 눈이 멀었던 멜키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연달아 터지는 빛이 어둠을 부수고 있다. 유진이 퍼붓는 참격은 당장에라도 유폐의 마왕을 도륙을 낼 것처럼 보이나, 유폐의 마왕은 물러서지 않고 그 모든 참격을 손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유폐의 마왕!]
템페스트가 고함을 질렀다. 하멜의 결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물러서 주었지만, 템페스트 역시 바벨과 유폐의 마왕에게 원념을 품고 있다. 폭풍은 300년 전의 패배와 굴욕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300년 동안 북상을 바라왔다.
“잠깐, 잠깐, 잠깐!”
오메가 포스가 멜키스의 제어를 벗어났다. 템페스트가 일으키는 폭풍이 오메가 포스의 팔을 멋대로 움직였다.
쿠르르릉! 제어에 벗어나 폭주하는 것은 템페스트뿐만이 아니었다. 마왕을 쓰러트리겠다는 의지는 그들도 똑같았기에, 다른 3명의 정령왕도 템페스트의 의지를 따라주었다.
“끼아아악!”
멜키스의 비명과 함께 오메가 포스가 주먹을 내질렀다. 멜키스의 의지와는 다른 전력이 하늘을 꿰뚫었다.
“이러면 나는 어떡해?!”
4명의 정령왕이 쏟아낸 전력이 오메가 포스를 소멸시켰다. 멜키스는 추락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 전력은 지금의 유폐의 마왕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강력했다. 꽈아앙! 손을 휘둘러 궤적을 바꾸기는 했다만, 폭풍에 찢긴 팔에서 피가 뿜어졌다.
그런 팔 위로 모론의 도끼가 떨어졌다. ㅡ콰직! 너덜거리던 팔이 완전히 잘렸다. 찍혀온 힘에 휘청거리던 유폐의 마왕은 입술을 뿌득 씹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꽈앙! 내지른 발길질에 모론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이후에 벌어질 일은 안다. 계속 그래왔다. 모론이 제 몸을 아끼지 않고서 틈을 만들면 즉시 유진의 공격이 파고든다. 이번에도 그랬다. 모론은 팔을 자르고 발길질을 유도했다. 그리고 신검이 온다.
알고는 있다. 눈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간신히 피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마저도 완벽하지 않다. 신검이 스친 허리에서 피가 뿜어졌다.
‘아까보다는 느리다.’
몇 번이나 폭주시킨 이그니션에 비하자면 지금은 당연히 느리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유폐의 마왕이 느렸다. 누적되었던 피해를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하…….”
허리가 베였는데도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었다. 떨리는 손이 주먹이 되었다. 꽈직!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때렸다. 신검이 부서지고 주먹에서 피가 뿜어졌다.
흩날리는 핏방울 너머에서 빛이 번쩍였다. 세냐가 일으킨 마법이 무수한 별이 되어 유폐의 마왕에게 처박혔다. 꽈과과광! 거대한 폭발이 유폐의 마왕을 집어삼켰다.
[하멜!]
머릿속에서 들린 외침. 유진은 머뭇거리지 않고 망토에 손을 넣었다. 멜키스와 계약한 이후로 꺼낸 적이 없던, 폭풍검 위니드가 망토에서 뽑혀 나왔다. 이그니션으로 과열된 신화가 위니드를 감쌌다.
[아아아아!]
강림하는 폭풍에 신화가 더해졌다. 거대한 바람이 폭발과 유폐의 마왕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아까라면 템페스트의 바람은 유폐의 마왕을 침범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폐의 마왕은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제 몸을 가누기조차 쉽지 않았다.
‘아니.’
멀쩡한 상태라고 해도 쉽사리 떨쳐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전신을 베어 가르는 폭풍 속에서 유폐의 마왕은 감탄을 섞어 웃었다.
300년 전에 바람은 미약했다. 모두가 그 바람을 폭풍이라고 말했지만 유폐의 마왕에게는 산들바람보다 못했다. 멸망을 앞둔 세계. 처참하게 짓밟히고 마병이 창궐하던 그 세계에서, 정령의 힘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유폐의 마왕이 베풀었던 300년이란 시간은 세상을 바꾸었다.
평화에 익숙해져서 약해졌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령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300년 동안 병들었던 세계수는 회복했고, 세계수가 된 비슈르 라비올라의 의지가 템페스트가 이끄는 바람과 원시의 정령에 힘을 보탰다.
[하멜!]
템페스트가 재차 고함을 질렀다. 거센 폭풍의 힘은 유진도 느꼈다. 등을 떠미는 바람, 머나먼 세계수에서 현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과거 유진에게 깃들어 일부가 되었던 세계수의 정령들이 몸을 일으켰다. 푸확! 이그니션으로 폭주하던 신화가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다.
정령에게만 힘이 실리는 것이 아니다. 유진과 하나가 된 레반테인에 더욱 강한 빛이 깃들었다.
세계수의 반대편. 머나먼 바다에 앉은 빛이 몸을 일으켰다. 일렁거리는 빛이 거대한 남자가 되어 손을 뻗었다. 유진의 눈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 광경을 보았다. 빛이 입을 열었다.
“아가로트.”
가득 찬 빛이 손에 모이더니 거대한 검이 되었다. 빛은, 아니, 거신은 그 검을 천천히 뻗으며 속삭였다.
“검을 쥐어라.”
유진이 쥐고 있던 신검이 산화하고, 거인이나 휘두를 법한 거대한 검이 새로이 손에 쥐어졌다. 유진은 의심하지 않고 검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왼손에 쥐고 있던 위니드를 거신의, 빛의 신검에 가까이 가져갔다.
[아아아아!]
템페스트가 고함을 질렀다.
콰르르르! 폭풍을 휘감은 위니드의 검신이 덜덜 떨리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검의 파편이 빛이 되어 폭풍과 함께 나부꼈다.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성녀들의 기도에 힘이 실렸다. 그것은 더 이상 속삭이는 기도가 아닌 경배의 찬가였다.
나부끼는 빛이 거대한 형상을 갖추었다. 바람의 정령왕이 완전히 세상에 강림했다. 이 강림은 계약자에게 힘을 빌려주는 형태도, 온갖 제약을 덕지덕지 붙인 불완전한 강림도 아니었다. 빛이 문을 열었고, 정령왕의 본신이 세상에 강림했다.
“하하하……!”
눈으로 직접 보아도 믿기지 않는 광경.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광경에 유폐의 마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시커먼 마력이 마왕의 손에 모였다.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폭력을 향해 유폐의 마왕도 공격을 준비했다.
“크아아아아!”
모론이 달려들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화신이자 대전사인 모론이 해야 할 것은, 하멜의, 유진의 공격이 방해받지 않도록 길을 활짝 여는 것이다. 세냐 역시 자신의 역할을 이해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메리가 모론을 포착했다.
모론의 시간이 가속했다. 그는 순식간에 공간을 관통하고서 유폐의 마왕과의 거리를 좁혔다.
뚜둑, 뚜두둑……! 모론의 양팔에 핏줄이 울룩불룩 돋고 근육이 부풀었다. 고스란히 전달되는 악력은 도낏자루를 부수는 대신 도끼날을 진동시켰다.
모론의 위치와 이어질 공격은 유폐의 마왕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쳐내며 대응할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막아낼 것인가. 어느 쪽이든 저 거대한 신검에 전력으로 맞설 수는 없게 된다.
“죽을 셈인가?”
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몸을 들이밀어 길을 열었다. 그 대가는 절대 가볍지 않으리라. 모론은 피범벅의 입술을 열어 히죽 웃었다.
“믿는다.”
자신의 강인함을? 은혜로운 기적을? 아니면, 목숨을 바쳐 열은 길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어느 쪽이든 좋다.
유폐의 마왕은 경의를 담아 대답했다.
“훌륭하구나.”
오래전 유폐의 마왕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저러한 믿음이었다. 그는 경외 뒤의 씁쓸한 감정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쿠르르르릉! 마력과 도끼가 만났다. 그 사이에서 끓어오르는 격류에 유폐의 마왕의 양팔이 위로 들렸고, 도끼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모론은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유진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모론이 유폐의 마왕과 이어지는 길을 연 순간에 신검을 휘둘렀다. 유진의 뒤에 강림한 템페스트도 빛에 휘감긴 주먹을 내질렀다.
하늘을 덮은 어둠이 소멸했다. 하늘에는 한 점의 어둠도 얼룩도 남지 않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이 참격에 갈라졌다. 템페스트의 주먹이 일으킨 폭풍이 갈라진 빛마저 모조리 날려버렸다. 그 폭풍 속에서 유폐의 마왕은 저항하지 못하고 피를 뿜었다.
그리고 마왕이 추락했다.
판데모니엄이 뒤흔들렸다.
빌어먹을 환생 593화
일어서려고 했지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 도중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서 다시 주저앉았다. 시야는 제멋대로 흔들리고 균형감각도 제대로 맞지 않는다.
뇌가 망가졌나? 아니면 다른 기관이? 이성은 아직 남아 있지만…….
‘곤란하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마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유폐의 마왕은 잠시 바닥에 엎드려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다듬는다고? 그렇게 생각할 뿐, 멋대로 날뛰는 호흡은 뜻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숨을 쉬려고 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 벌린 입술에서는 숨결 대신에 죽은 피와 부스러진 내장 조각만이 뚝뚝 떨어질 뿐.
‘정말 곤란해.’
가슴에 구멍이 났나? 박살 난 늑골이 폐를 찢어발겼나. 심장은 멀쩡한가? 지금 상태의 부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도출한 결과는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간신히 살아만 있나.’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 유폐의 마왕이 만든 최초의 사슬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멸망과 묶은 사슬은…… 부서지지 않았다. 이것이 남아 있는 한,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즉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간신히 사슬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
이 정도면 충분한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전투에서 유폐의 마왕은 죽지 않는다. 유진과 동료들이 아무리 죽음을 부르짖어도 유폐의 마왕이 죽는 일은 없다. 이 싸움에서 죽음이 패배로 끝나는 것은 유진과 동료들뿐. 유폐의 마왕의 패배는.
마음이 꺾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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