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는 새카만 편지봉투를 유진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건넨다면, 유진님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건 간에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이게 뭡니까?”
“보시다 시피 편지봉투입니다.”
“내용을 읽어봐도 됩니까?”
“얼마든지.”
유진은 곧장 편지를 받아서 봉인을 뜯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내용은 필요하지 않죠. 제가 직접 쓴 친서를 유진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중요할 뿐.”
발자크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뜯겨진 봉인이 다시 달라붙는다.
“루하르에서 벌어질지 모를 위협은 제가 감당할 수 없지만, 아멜리아 머윈의 심술은 제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정 나하마에 가실 생각이라면, 부디 이것을 가지고 가십시오.”
“...제게 뭘 원하는 것입니까?”
유진은 발자크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대뜸 찾아 와 루하르에 대한 경고를 전한 것도 그렇고, 이제는 아예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친서까지 줬다. 이렇게 챙겨주는 것을 보니 무언가 바라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흑마법사가 싫으십니까?”
“당연히 싫죠.”
“그 혐오는 어쩔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제게는 조금의 호의를 가져 주십시오.”
“혹시 게이십니까?”
유진은 대뜸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 차분한 발자크도 설마 저런 말은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그는 곧장 답하지 못하고, 입을 반쯤 벌리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예?”
“제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것을 보니 좀 수상해서. 제가 뭐 그쪽에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데, 흑탑주님이 제게 이렇게까지 잘 해주시니 조금은 부담스럽고 걱정됩니다.”
“...걱정?”
“정조나 뭐... 미리 말해두는데, 저는 그쪽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잠시. 조금 당황스러워서.”
발자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고쳐썼다.
“...그런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단지, 유진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을 뿐입니다.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서. 예. 오해는 마시고. 저 뿐만이 아니라 다들 그렇잖습니까? 유진님은 아직 젊으시고,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계신데다...”
“일단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진은 친서를 냉큼 흑암의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주는 만큼 돌려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마음 같아서는 내일 송별회의 초대장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아, 그렇다고 진짜 오지는 마시고.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애매하고 신기한 거예요. 초대는 하고 싶은데... 만약 내일 송별회에서 흑탑주님이 와계신 것을 본다면, 호의는커녕 더 싫어할 것 같습니다.”
“...안 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해주시는 흑탑주님의 도량이 감탄스럽군요.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진은 까딱 고개를 숙여주고서 몸을 돌렸다. 발자크는 멀어진 유진의 등을 보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
2년 동안 적색마탑에서 지내긴 했어도, 유진이 제대로 알고 지낸 것은 로베리안과 헤라 뿐이었다. 덕분에 말만 송별회일 뿐, 거창하지는 않았다.
다만, 참석한 인원과 장소는 거창했다. 적색마탑의 최상층. 그곳에는 로베리안과 헤라 뿐만 아니라, 백탑주인 멜키스와 아롯의 왕세자 호네인, 청탑주인 히리두스도 있었다.
유진을 포함해서 6명. 더 부를 수야 있겠지만, 유진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 극성맞은 궁정마법사단장이나 녹탑주를 부르는 것도 꺼려졌고, 흑탑주는 애당초 논외였다.
“왜 날 부른 건가?”
호네인과 멜키스는 유진과 제법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히리두스와 유진은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가끔 아크리온에서 마주쳤을 때, 가벼운 인사 정도만 나누는 사이였다.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이곳에 오지 않은 마탑주들과도 모르는 사이는 아니잖나?”
“왜 알면서 물어보십니까?”
그 말에 히리두스는 피식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녹탑주나 궁정마법사단장을 너무 꺼려하지는 말게. 그만큼 자네는 욕심나는 인재니까.”
“청탑주님은 욕심이 나지 않으셨나 봅니다.”
“욕심이야 났네만, 나는 적탑주의 제자를 빼앗으려 들 만큼 체면을 모르는 사람은 아닐세.”
“녹탑주님은 빼앗으려고 하시던데.”
“제네릭은 예전부터 욕심이 많았지. 체면 이상으로 자존심과 고집이 강했고. 너무 미워하지는 말게나.”
히리두스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을 홀짝였다. 그는 호네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로베리안을 응시하며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부럽기는 하군.’
히리두스에게도 제자는 있다. 얼굴을 못 본지 3년은 넘었으니, 전에 보았을 때보다 실력은 늘었을 터.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제자라고 생각했는데... 유진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부족하게 느껴진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발자크는 부르지 않았군.”
“예, 뭐. 스승님도 싫어하실 테고요.”
마침 잘 됐다. 유진은 눈을 빛내며 히리두스를 쳐다보았다.
“흑탑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무슨 대답을 듣고 싶나?”
히리두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과거 흑탑주님은 청색마탑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발자크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나? 아니면 지금의?”
“둘이 크게 다릅니까?”
“다르지는 않아. 과거에도 발자크는 묘했고, 속내를 알 수 없었지. 지금도 마찬가지고...”
히리두스는 큭큭 웃으며 와인잔을 흔들었다. 그는 흔들리는 붉은 와인 속에서 수십 년 전을 보았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발자크가 왜 청색마탑을 떠났는가야. 당시의 나는... 발자크보다 부족했네. 지금도 부족하다 생각하고.”
“설마요.”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나는 발자크와 동문이었으니 말이야. 그는 청색마탑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탑주가 될 수 있었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나 보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 인간의 마법이 아무리 대단해 봐야 결국은 인간의 것. 마왕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히리두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 현명한 세냐님이란 예외가 있으니까. 그래서 유진, 자네는 세냐님의 마법을 얼마나 이해했나?”
“이해라니요. 그냥 열심히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는 얻었겠지.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배움을 염탐하고픈 마음은 없으니까.”
히리두스는 잠깐 동안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나하마에 간다고 들었네.”
“예.”
“사막은 불쾌한 곳이야. 덥고, 모래바람도 많이 불어. 대단찮은 조언이니 흘려들어도 좋네만. 정 나하마에 가려거든, 입국한 뒤에는 라이언하트란 것은 숨기도록 하게.”
“스승님께도 그리 말씀하시더군요.”
“시류가 심상치 않아. 최근 들어 나하마의 어쌔신들이 음지가 아닌 양지를 떠돈다는 군. 설마 그들이 키옐제국의 라이언하트 가문을 핍박하지는 않겠지만... 괜히 주목받아 좋을 것은 없잖은가.”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유진은 늙은 마법사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다. 엿 먹으라고 하는 말도 아니고, 걱정해서 해주는 말이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유진은 발자크의 조언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뭔가를 꾸몄다면 모론보다는 아니스지.’
당장 모론은 100년 전까지 루하르의 개국기념행사에 참석했었다.
유진은 모론 그 등신이 자신의 환생에 무언가 관여했으리란 생각은 추호도 할 수가 없었다.
사막
아무리 생각해도, 푹푹 찌는 사막에서 털이 북슬거리는 망토는 눈에 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했다. 흑암의 망토에 내장 된 마법 중에는 간단한 형상변환마법도 있었다. 털을 없애고, 두께를 줄이는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래폭풍이 불고, 밤에는 영하까지 기온이 덜어지는 나하라에는 이런 망토를 입고 다니는 여행자들이 많다.
‘위엄은 줄겠지만.’
그건 유진의 평가가 아니었다. 이 망토의 본래 주인인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형상변환마법에 대해 알려주며, 저런 말을 덧붙였었다.
당연히 유진은 망토의 위엄이 줄어드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아롯과 키옐이 선진국이긴 해.”
유진은 그새 머리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아롯이 마도왕국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다섯 개 마탑과 득실거리는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가 마법에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아롯은 온갖 것들에 마법을 사용한다. 하늘에 떠있는 부유역과 공중마차. 심지어 거리를 밝히는 불빛도 마법으로 만든 가로등이다. 헬무드를 제외하면 이만큼이나 마법에 밀접한 국가는 아롯 뿐이다.
다른 나라들은 아롯처럼 마법에 밀접하지 않다. 그것이 강력하게 부각되는 것이 바로 워프게이트다. 아득한 거리를 연결하는 워프게이트는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관리는 더더욱 힘들다.
아롯이야 뛰어난 마법사들이 득실거리니 수백 개에 달하는 워프게이트를 관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못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것이다. 워프 게이트는 분명 편리하지만, 여러 가지 위험성을 내포하는 시설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일 년에 수십 명은 워프 실패로 죽거나 실종되거나 병신이 된다.
당장 이곳, 사막국가 나하마만 해도 워프게이트의 숫자가 많지 않다. 그 얼마 안 되는 워프게이트도 고위귀족들의 전유물이고, 외국인은 사용이 불가능했다.
물론 라이언하트의 이름이라면 워프게이트의 사용허가를 받을 수 있을 테지만. 스승인 로베리안 뿐만 아니라 청탑주에게도 조언을 받았으니, 유진은 굳이 가문의 이름을 내세울 생각은 없었다.
“퉤.”
유진은 입술에 붙은 모래를 뱉으면서 망토의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런저런 다양한 물건들 중에서 두 장의 종이를 꺼냈다.
하나는 선인장 전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음식점이 정리 된 지도. 유진이 선인장 전갈을 먹으러 나하마에 간다는 것을 들은 헤라가 부랴부랴 준비한 것이다.
마음은 고맙지만 쓸 일은 없을 것이다. 이 푹푹 찌고 모래바람 부는 사막에 온 것은, 고작 전갈 따위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그래도 호의는 감사하니, 차마 버릴 수는 없었다.
다른 한 장은 로베리안에게 받은 나하마의 지도다. 단순한 지도는 아니었다. 이 마법지도는 유진이 서있는 공간의 좌표와 연동되어, 세상 어디에서든 제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
지금 유진은 나하마의 서쪽 끝에 있다. 이곳에서 한참 북으로 올라가다보면 튜라스가 나온다.
본래라면 혹시 모를 무덤을 찾아, 튜라스 변경의 고향에 찾아가려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300년은 긴 시간이다.
나하마의 사막은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곳의 끔찍한 모래폭풍은 수십 년에 한 번 꼴로 돌발적으로 나타나고, 부자연스럽게 진군하여 사막 너머의 대지를 집어 삼킨다. 그렇게 300년. 하멜의 고향이었던 튜라스 변경의 마을은, 사막의 일부가 되었다.
튜라스는 소국이다. 그들은 재앙과 같은 모래폭풍과 사막화 된 영토를 어쩔 수 없이 포기했고, 그렇게 넓어진 사막은 나하마의 새로운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도 침략할 수 있다는 거지.’
꼭 전쟁을 벌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래폭풍으로 인한 사막화가 인위적임을 알 것이다. 나하마의 모래술사들. 그들은 흑마법사만큼은 아니지만, 300년 전에도 악명이 높았다.
마왕이 일어서고 마물들이 진군하고 몬스터가 미쳐 날뛰던 시대. 어떤 나라는 마왕과 맞서기 위해 군대를 모았지만, 어떤 나라는 혼란을 틈타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나하마는 후자였다. 놈들은 전란을 틈타 키옐 제국의 변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만약 베르무트가 키옐에 오지 않았다면, 나하마는 바라던 대로 키옐을 침공해 제국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전생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은 나라였는데. 300년이 흐른 지금도 감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향을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 대해서는 나하마에게 조금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덕분에 국경을 두 번에 걸쳐 넘을 일은 없게 되었다.
*
거슬리는 것이 몇 개 있다.
하나는 사막. 더위야 별 문제가 안 되는데, 쉬지 않고 불어 닥치는 모래바람이 엿 같다.
그나마 유진은 상황이 썩 나쁘지 않았다. 폭풍검 위니드. 유진이 불러들인 바람의 정령은, 굳이 몸을 씻지 않아도 모래를 털어낼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이 사막에서 문제는 모래바람 뿐만이 아니다. 넓고, 아무 것도 없다. 어디를 돌아보든 모래뿐이다. 서쪽 국경의 워프게이트를 지난 후로, 도시는커녕 마을도 보지 못했다.
별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다. 이 넓은 사막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지도는 이미 들고 있고, 식량과 물은 망토의 안에 넉넉하게 쟁여두었다.
노숙? 그거야 뭐, 귀하게 자란 명문 라이언하트의 도련님에게는 고된 일일지 몰라도, 막 구르며 살아 온 하멜에게는 익숙했다. 사막의 지랄맞은 밤추위도, 흑암의 망토를 몸에 두르고 누워있다 보면 옛날 생각이 나서 즐거울 정도였다.
‘별이 잘 보이는 것 정도는 좋네.’
유진은 망토에 휘감겨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키옐이나 아롯의 밤하늘도 꽤 볼만 했지만, 불빛 하나 없는 사막의 밤하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멀찍이서 맴도는 새끼들만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기분으로 밤하늘의 별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며칠 째지?’
서쪽 관문을 넘은지 나흘.
보통 사막을 건널 때에는 절대로 혼자서 건너지 않는다. 외국인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경관문에는 함께 사막을 건널 동반자를 구하는 외국인들이 많다.
그런 식으로 서로를 의지하거나, 잠시 캐러밴에 의탁하거나. 사막에 익숙한 길잡이와 호위를 고용하거나. 방법은 여럿 있는데, 유진은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냥 혼자서 사막을 건너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낙타도 타지 않고, 맨 몸으로 사막을 건넜다. 낙타를 타는 것보다 직접 걷는 것이 빠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도적인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도적치고는 놈들의 행동이 묘했다. 저 놈들은 이틀 전부터 유진의 뒤를 따라붙었는데, 습격해서 약탈을 시도하기는커녕 멀찍한 거리를 고수하며 유진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신분증이 편리하기는 한데, 이럴 때는 좀 좆같단 말이야.’
300년 전에는 호패를 위장하는 것이 흔했다. 대충 어디서 주운 호패와 돈 몇 푼을 함께 내밀면, 웬만한 관문은 그냥 지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제 피를 등록한 신분증이 일상화 되어 있으니, 신분을 위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쉽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걸리기라도 하면 일이 굉장히 귀찮아진다.
‘누구지?’
관문에서 신분증을 제시했었다. 호들갑을 떠는 담당자에게 돈도 꽤 쥐어주었다. 그냥 닥치고 보내달라는 말도 잘 에둘러서 전했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 빌어먹을 새끼는 돈만 꿀꺽 삼키고서 상부에 보고를 올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꼬리가 붙었나. 명문가의 식구라는 것도 마냥 편리하지는 않은 것이다. 유진은 쯧 혀를 차며 지도를 꺼냈다.
나흘 동안 꽤 속도를 내어 움직였다. 이 몸은 잘 지치지도 않고, 마나도 충분하다. 덕분에 낙타를 타는 것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늦어도 사흘 안에는 전생의 고향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귀찮은 꼬리를 달고 귀향할 생각은 없었다.
이틀 동안 의중을 볼 겸 내버려 두었는데, 놈들이 쭉 닥치고 있으니 억지로라도 입을 열게 만들어야겠다.
*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야. 저 놈, 춥지도 않나?”
라만은 혀를 내두르며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이틀 동안 거리를 두고서 따라다니는데, 저 라이언하트의 소년은 명문가의 도련님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소탈하고 무식해 보였다.
놈은 호위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그거야 뭐, 라이언하트는 이름 높은 무가인데다, 상대는 그 라이언하트 중에서도 특출나단 평가를 듣는 놈이다. 방계 출신, 본가의 양자, 혈계식...
뭐 그런 것들. 라만은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라이언하트가 아무리 대단한들, 상대는 고작 19살의 꼬마다. 으레 소문이란 실제 사실보다 과장되기 마련이고, 라만은 먼 타국의 도련님보다는 제 주인의 명령이 더 두려웠다.
“일종의 의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식?”
“내년이면 성인이 될 나이라 했잖습니까. 저희 부족은 성인을 앞둔 소년을 부족 밖으로 내보냅니다.”
“뭘 특별하단 듯이 말하나. 우리 부족의 성인식도 그렇다네. 이 사막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부족들이 그런 성인식을 갖지.”
라만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그래서. 저 소년이 성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사막에 도전하고 있다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행동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불도 피우지 않고, 텐트도 치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사막을 가로지르다가... 마주치는 몬스터를 사냥하고... 몇 번을 보았지만, 저 소년의 행동은 사막 부족의 성인식과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키옐의 라이언하트가 뭐하러 이 사막까지 와서 성인식을 치른단 말인가?”
“이유야 모르죠. 하지만 주인님이 말하시지 않았습니까. 저 소년이 카자니 사막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말입니다.”
주인의 명령은 그것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라만도 알 수가 없었고, 라만은 주인의 명령을 임의로 판단할 생각은 없었다.
“슬슬 우리도 자도록 하지. 저 부지런한 소년은 아침부터 이동을 시작할 테니 말이야.”
“라이언하트가 대단하기는 한가 봅니다. 사막에 익숙하지도 않을 텐데 저렇게 발이 빠를 수 있다니. 누가 보면 사막에서 태어난 줄 알...”
수다 많은 부관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는 입을 헤 벌리고서 라만의 뒤편을 보았다. 라만은 부관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라만의 입도 부관처럼 쩍 벌어졌다.
유진 라이언하트. 이틀 동안 뒤를 쫒으면서 진저리날 만큼 알게 된 것은, 저 소년의 발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것이다. 낙타를 탄 것도 아니고, 사막횡단을 위한 장비를 갖춘 것도 아니다.
고작 망토 하나. 신발도 어디서든 신을 수 있는 평범한 것. 그럼에도 저 소년은 발이 푹푹 들어가는 모래사막을 단단한 평지처럼 뛰어다녔다.
지금도 그랬다. 아니, 저게 뛰는 건가? 라만은 순간 자신이 보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추격을 눈치 채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거리는 충분히 유지했다. 망원경을 쓰지 않고서는 확인할 수도 없는 거리다. 위장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지금만 해도 라만과 부하들은 사구의 능선에 밀착한 상태였다.
그런데.
새하얀 불꽃이 어둠을 가르는 것이 똑똑히 보인다.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으나, 저 유명한 마나의 불꽃에 대해서는 라만도 잘 알았다. 라이언하트의 백염식. 눈부시게 흰 사자의 갈기.
“뒤, 뒤로!”
라만은 버럭 외쳤다. 저 소년과 충돌하는 것은 주인의 명령에 들어있지 않았다.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눈치 챘지? 정확하게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충분한 거리가 충분하지 않을 만큼 좁혀져 온다. 라만은 일단 허리에서 쿠크리를 뽑았다.
‘역시. 어쌔신은 아니고.’
나하마에서 특히나 까다롭고 유명한 집단이 둘 있다. 모래술사와 어쌔신. 은신법의 수준과 복장을 보니 어쌔신은 아닌 것 같다. 복장만 보면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와 별 차이가 없는데. 아마 위장일 것이다.
“멈춰라!”
물러서기는 늦었다. 소년의 접근이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라만은 표정을 굳히며 고함을 질렀다. 멈추라고? 지금 나보고 한 말인가?
왜?
유진은 라만의 외침에 화답하지 않았다. 놈들이 누군지 궁금했다. 무슨 꿍꿍이로 자신을 쫒아 다니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를 텐데. 유진은 그런 방법은 애초에 머리에 두지 않았다.
그럴 거면 몰래 쫒아 다니질 말던가.
라만은 이를 악물었다. 분명 뜻을 전했는데 듣질 않는다. 도적이라고 오해하는 것인가? 저쪽이 덤벼오는 이상, 대화로 오해를 풀기에는 늦었다. 주인은 은밀히 소년의 뒤를 쫒으라고 말했었다. 그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오해를 푸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해를 받는 편이 나을 것이다.
‘도적이라고 생각하도록.’
일단 제압하고, 적당히 금품을 빼앗고 떠나도록 하자. 깔끔하지는 않은 방법이다. 어쩌면 이 약탈로 소년이 왔던 길을 되돌아갈 지도 모른다.
그건 라만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만약 소년이 내일도 방향을 꺾지 않고 나아가려 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라만이 개입해야 했을 것이다.
라만의 마나가 쿠크리를 휘감는다. 회색의 검강. 유진은 그 빛을 보고서 두 눈을 빛냈다. 검기를 넘어 검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상대가 제법 괜찮은 실력자란 뜻이다.
‘꽤 오랜만인데.’
최근 2년 동안은 쇠냄새보다는 먹물냄새를 더 많이 맡았다. 검이나 무기보다는 책과 펜을 더 많이 쥐었다. 몸을 쓰는 것보다는 머리를 더 많이 썼다. 연구동에서 수행은 매일 했었지만,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마법과 논문에 사용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연구동에서의 수행은 언제나 유진 혼자서 하는 것이었다. 라이언하트 본가에서는 시안이나 길레이드, 기온, 혹은 다른 기사들과 대련하곤 했었는데.
이렇게 다른 누군가와 겨루는 것은 2년 만이다.
유진은 그 새삼스런 자각에 즐거움을 느꼈다. 마법을 익히는 것은 분명 재미있긴 했으나,
전생도, 현생도. 유진은 직접 몸을 쓰는 것에 더 재미를 느꼈다.
라만은 검강을 보이되, 그를 휘두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위협으로, 유진을 멈추기 위해 꺼낸 검강이다.
곧, 라만은 자신의 의도가 씨알도 먹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저 19살 먹은 라이언하트의 소년은,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10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있다. 시커먼 밤에서도 그 존재를 확실히 과시하는 검강을 앞에 두고도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무어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입술을 뒤틀며 웃고 있다.
그 미소. 라만은 더 이상 상대가 성인식도 치루지 않은 소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저것은 이미 독립해 제 무리를 이루어야 할 만큼 장성한 수사자였다.
흑암의 망토가 펄럭인다. 유진의 팔은 망토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라만은 발을 뒤로 끌면서 쿠크리를 조금 더 높이 들었다.
ㅡ푸확!
망토가 크게 펄럭거리면서, 백색의 빛이 어둠을 갈랐다. 라만은 기겁하며 쿠크리를 휘둘렀다. 위협삼아 휘두른 헛된 칼질은 아니었다. 라만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고,
그것이 옳았다. 쩌엉! 망토 안쪽에서 튀어나온 은청색의 칼날이 쿠크리와 충돌한다. 충돌한다, 라고. 라만은 그렇게 판단했다. 틀렸다. 충돌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라만의 쿠크리가 위로 높이 튀어 오르고, 손목과 팔이 찌르르 울린다.
“허억...!”
라만은 숨을 삼키며 급히 몸을 뒤로 뺐다. 한 순간의 격돌. 부하들이 움직였다. 조금 뒤쪽에 있던 부관은 이미 쿠크리를 쥐고 있었다. 그는 물러서는 라만을 대신해 급히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들려다가, 잠깐 멈추었다. 유진의 왼손에는 장전 된 석궁이 들려 있었다. 어느 틈에? 방금 전만 해도 왼손은 텅 비어 있었는데.
ㅡ파스스! 사구의 경사면에 떨어진 유진은 겨눈 석궁을 내리지 않았다. 부관은 정확하게 자신의 가슴을 겨눈 화살을 주시했다. 고작해야 화살, 두렵지는 않았다. 부관은 날아오는 화살을 붙잡을 수 있을 실력자였다.
하지만 발아래의 모래가 푹 꺼지는 것에는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마법!’
영창은 없었다. 그냥, 갑자기 마법이 발현되었다. 부관은 급히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유진의 마법은 바닥만 꺼트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마나에 이끌린 모래가 수십 개의 줄기가 되어 부관의 다리를 휘감았다.
“놈!”
다른 부하들이 달려든다. 그제야 유진은 석궁을 쏘았다. 퍼억! 부관은 그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다행스런 점은 가슴이 아니라 어깨에 박혔다는 것이지만, 어딜 맞아도 화살은 아프다.
유진이 쏘아낸 것은 화살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매직미사일이 어둠을 꿰뚫었다.
“너희 누구냐?”
그제야 유진의 입술이 열렸다.
라만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이곳에서 멀쩡히 서있는 것은 유진과 라만 둘 뿐이었다.
사막
저렇게 물어볼 거면 처음에 말부터 하던가. 대뜸 덤벼 놓고서 물어보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인가? 라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질문을 들었지만,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라만은 삐딱하니 서있는 유진에게서 파고들 틈을 찾을 수 없었다. 저 먼 거리를 단숨에 좁히고, 불안정한 자세에서 휘두른 검격으로 라만의 검강을 걷어냈다. 거기에 영창도 하지 않고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말이 안 된다.
라만은 꿀꺽 침을 삼켰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라만은 뛰어난 전사였다. 적어도 이 근방에서 라만보다 뛰어난 전사는 없었다.
그런 자각이 있으니 경계하는 것이다. 라만은 발을 뒤로 끌면서 시야를 넓혔다. 쓰러진 부하들. 죽은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멀쩡하지는 않았다. 매직 미사일에 얻어맞은 부하들은 뼈가 부러졌고, 부관은 어깨에 석궁화살이 박혀 모래촉수에 묶여있었다.
“대답 안 할 거야?”
저렇게 묻는 중에도 모래촉수는 사라지지 않는다. 수십 개의 매직 미사일도 쓰러진 부하들 위를 맴돌고 있다. 복수의 마법을 동시에 유지하면서 검까지? 그것도 빈틈 하나 보이지 않으면서? 라만은 마법을 익히지는 않았으나, 지금 유진이 하고 있는 것이 19살 나이로는 불가능한 기예라는 것은 알았다.
“...도적이다.”
“나하마는 존나 강대국이었군.”
라만이 대답했고, 유진은 입 꼬리를 비틀며 이죽댔다.
“인원이 열 명도 안 되는 좆밥 도적단의 대장이 칼에서 검강까지 뿜고 말이야. 이 정도 규모의 도적단이 그 정도면, 인원이 백 명은 넘을 도적단에서는 검강 뿜는 놈이 열 명은 되겠어.”
“...”
“그런 도적단을 진압하는 병사들은 또 얼마나 강할까? 참 대단하셔. 그 정도 군사력이면 나하마가 대륙을 통일할 수도 있겠는데?”
“우리는... 조금 특별한 도적...”
“어이, 아저씨. 개지랄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란 말이야.”
유진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성큼 발을 뻗었고, 라만은 더 물러서지 않았다.
“사실 꼭 대답할 필요가 없기는 해. 계속해서 닥치고 있어 봐. 내가 알아서 들어 볼 테니까.”
저게 정말로 명문 라이언하트의 도련님이란 말인가? 아직 앳된 얼굴인데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술집 용병처럼 걸걸하다. 게다가 저 시선. 노골적으로 뿜어대는 살기.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가 저런 살기를 뿜어대는 것이 가능한가?
“...너는 누구냐?”
우스운 질문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라만은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의중을 모르겠네. 나 누구인지 알고 쫒아온 거잖아. 안 그래?”
“...유진 라이언하트.”
“잘 아네.”
“정말로 유진 라이언하트가... 맞는 건가?”
“아니면 뭐 다른 사람일까?”
내뱉으면서, 유진은 땅을 박찼다. 사구의 모래가 펑, 하고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라만은 무수한 모래 알갱이 속에서 유진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한 순간 유진의 모습이 사라진다. 속도만으로는 불가능한 움직임. 대기 중의 마나가 요동쳤고, 라만의 기감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급히 몸을 틀어서 옆을 향해 쿠크리를 휘둘렀다.
‘블링크까지?’
쩌엉! 쿠크리와 위니드가 부딪친다. 위니드의 검신에는 얇지만 밀도 높은 마나가 어려 있었다.
검강이다. 처음의 충돌에는 확신을 갖지 못했는데, 이제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검강과의 충돌로 마나가 흩어지지 않으려면 똑같이 검강을 쓸 수밖에 없다.
그 사실에 경악할 틈도 없었다. 눈앞의 유진 외에도 라만이 신경써야 할 것은 더 있었다. 등 뒤에서 섬뜩함이 밀려온다. 폭사한 모래알갱이 속에 감춰둔 매직 미사일이 라만의 등 뒤를 덮친다.
1서클 마법인 매직 미사일. 마법사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마법이고, 서클이 높아져도 그 편리함 덕분에 애용하는 공격마법이다. 매직미사일은 소량의 마나로도 발현할 수 있고, 마나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따라 궤적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그건 유진이 전생부터 잘 하는 것이었다. 유진의 정신은 탄환 하나하나에 감응했고, 환염식은 탄환의 위력을 증폭시킨다. 라만은 그 탄환을 무시할 수 없었다.
라만의 코어가 마나를 내뿜는다. 회백색의 마나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마나실드. 가진 마나로 몸을 휘감는 것뿐이니, 이 방어기술은 마법사와 전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그 방어력은 경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본래 라만 급의 전사가 펼치는 마나실드라면 1서클의 공격마법은 우습게 막아내야 했다. 하지만 라만은 몸을 뒤흔드는 둔중한 충격을 느꼈다. 그렇게 자세가 휘청거리고, 유진의 검이 틈을 파고든다.
“헉!”
베인다.
베이지 않았다. 유진의 검은 라만이 두른 마나실드의 표면만 살짝 스칠 뿐이었다. 빗나간 것이 아니다. 라만의 눈이 부릅떠졌다.
“모욕을!”
봐준 것이다. 라만은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쿠크리를 난폭하게 휘둘렀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쿠크리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독특한 파공음이 난다.
그렇게 수십 번을 휘둘렀지만, 유진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는 발을 살짝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라만의 검에서 벗어났다. 고작 이 정도 검을 휘둘렀다고 지칠 리가 없다. 하지만 라만의 호흡은 점점 가빠져왔다.
압박감 때문이다.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는데도 닿지가 않는다. 저 라이언하트의 소년은 아까처럼 웃고 있지도 않았다. 동요 한 점 없이 차분한 눈. 스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참격을 상대하면서도 저만큼이나 차분하다.
그것이 라만을 압박했다. 게다가 유진만 신경쓸 수도 없었다. 언제 또 등 뒤에서 마법이 날아올지 모른다. 부관처럼 발밑이 푹 꺼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질 지도 모른다.
공격법이 다양한 만큼 경계는 늘어난다. 그것이 행동을 제한한다. 과감하게 덤빌 수 없었다.
“마법 안 쓸게.”
라만의 호흡이 턱 끝까지 올라왔을 때.
유진은 놀리듯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라만의 머리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이만큼이나 모욕을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크어어어!”
가쁜 호흡을 괴성으로 터트린다. 쿠크리를 휘감은 검강이 한층 더 부풀었다. 죽인다. 라만의 주인은 그런 것은 명령하지 않았지만, 모욕당한 전사의 자존심이 주인의 명령보다 앞섰다.
‘이제야 좀 낫네.’
몇 년 만에 몸을 쓰는 것이기도 하고, 저렇게 검강을 줄줄 내뿜는 상대와 싸우는 것도 환생한 몸으로는 처음이다. 본가의 길레이드와 기온, 다른 기사들과 대련할 적에는 혹시 모를 부상을 염려해 검기나 검강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좀 보고 싶었는데. 저 아저씨는 도적이라 말한 주제에 너무 조신했다. 살의 없는 공격은 아무리 휘둘러 봐야 가벼울 뿐이다.
이제는 무게가 더해졌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어깨와 팔을 움직였다.
ㅡ파바박!
물러서는 발걸음이 모래알갱이를 치솟게 만들고, 베인 상처에서 튀어나간 핏방울이 모래알갱이와 섞인다. 그를 직접 보고 있지만, 라만은 자신이 보는 것과 제 몸에 벌어진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였다.’
몇 번이나? 전신이 아리다. 깊이 베이지는 않았다. 피부만 스쳤을 뿐. 뼈는커녕 근육도 끊어지지 않았다. 얕았나? 아니, 봐준 것이다. 라만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크어어!”
라만은 다시 괴성을 지르며 유진에게 덤볐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만이 한 걸음 나아갔을 때 위니드는 수십 번의 참격을 만들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쾌검. 더욱이 놀라운 것은, 검에 베인 상처들 중 그 무엇도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소년은 무턱대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제 검이 어디로 흐르고 어디를 벨 지를 정확히 의도하고 있었다.
‘마나의 지배력. 마법. 거기에... 검술까지... 세상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라만은 하늘을 원망했다. 그는 전신에서 피를 줄줄 쏟으면서도 또다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유진은 라만의 용맹함에 콧방귀를 뀌었다.
콰아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래먼지. 라만은 그 한가운데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일순 검강을 증폭시켰고, 터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닿지 못했다.
“부하들은 챙겨야 할 것 아냐.”
목소리는 등뒤에서 들려왔다. 라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홱 뒤를 돌아보았다.
부관이나 다른 병사들이 공중에 떠있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그들을 대충 던져두면서 위니드를 망토의 안에 집어넣었다.
“지금... 뭐하는... 거냐?”
“보면 몰라? 칼 넣잖아.”
“나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알아.”
뚜둑. 유진은 손가락을 꺾으며 라만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패배시키려고.”
“크아아아!”
라만이 괴성과 함께 달려든다. 유진은 날아오는 참격 밑으로 파고들며 주먹을 쥐었다. 빠각! 마나가 휘감긴 주먹이 라만의 마나실드를 으깨고, 옆구리에 박혔다.
“끄윽!”
숨이 턱 막힌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진은 능숙하게 몸을 꺾으며 라만의 반대편 옆구리에도 공평히 주먹을 꽂아주었다. 그 뒤에는 라만의 배에 한 방. 그가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직접 다리를 휘둘러 허벅지를 차주었다.
그렇게 한 주제에 라만이 쓰러지게 두지 않았다. 유진은 라만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그렇게 놈의 명치에 주먹을 두어 번 꽂았다. 라만이 구토를 하려 하자, 턱을 위로 처갈기는 것으로 입을 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꺼으...”
의식이 뚝뚝 끊어진다. 라만은 아직 쿠크리를 쥐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 쿠크리를 휘두르지만, 잘 되지 않았다. 유진의 라만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반대편 손으로는 라만의 머리를 붙잡았다. 먼저 검을 썼다가 굳이 집어넣었다. 죽이지 않기 위한 배려는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마음을 꺾기 위해서다. 너 따위는 맨손으로도 줘팰 수 있다는 과시.
실제로 그러고 있었고, 라만의 마음은 진즉에 꺾였다. 검에 수십 번 베인 것보다, 19살 소년의 맨손에 처맞는 것이 훨씬 아프고 서러웠다.
“잠...”
깐, 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유진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콰앙! 라만의 머리가 모래밭에 처박힌다. 단단한 지면도 아니니 머리가 박살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롯에서 흑마법사를 상대했을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이곳은 유진의 뒤를 봐줄 로베리안도 없는 타국이다. 만약 이 아저씨의 뒤에 나하마의 귀족이라도 있는 것이라면, 이 일이 정치적인 문제로 번질 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심란하고 바쁜 길레이드의 얼굴에 주름을 늘려주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자비를 과하게 베푸는 것은 또 아니었다. 쾅, 쾅! 유진은 라만의 머리를 연달아 모래밭에 처박았다. 이미 꺾인 마음이 완벽하게 으스러진다. 눈, 코, 입에 들어 온 모래의 텁텁한 맛. 눈물과 피가 모래를 진흙으로 바꿔간다.
“그... 만...”
진짜 죽는다. 명예롭게 싸워 죽는 것도 아니고, 사막 귀퉁이에서 도적 행세를 하다가 죽는다. 그것도 끔찍했고, 아픔도 끔찍했다. 라만은 떠는 목소리로 간신히 뱉었고, 그제야 유진의 손이 멈췄다.
“너 누구냐?”
“난...”
라만이 머뭇거리며 대답하려는 순간. 유진은 한 번 더 라만의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대답이 늦어.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 물어보기 전에 답하면 더 좋고.”
물어보기 전에 답하란 말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라만은 반문하지 않았다.
“내, 내 이름은 라만 슐호브다.”
“다? 이 씨발놈이.”
쾅! 라만의 머리가 다시 모래밭에 처박혔다.
“제, 제 이름은 라만 슐호브입니다.”
쾅!
“다, 당신은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당신? 이 씨발놈이.”
쾅!
“그만해주십시오!”
그렇게 몇 번을 내리 처박으니, 공중에 떠있던 부관이 몸을 뒤틀며 악을 썼다. 라만은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쏟으며 부관을 올려다 보았다.
“우, 우리의 주인은 타이리 알 마다니...”
쾅! 대답은 부관이 했는데, 라만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그 짧은 순간에 유진은 라만과 부관의 관계를 이해했다. 이 우직한 아저씨는 몇 번을 처박아도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쾅!
“그게 누군데.”
한 번 더 내리 찍고 물어보았다. 유진의 눈은 라만이 아닌 부관에게 향해 있었다. 라만은 어지러워 희미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아무 말도 하지 말...”
“주인님... 타이리 알 마다니님은 카지탄의 에미르이십니다!”
부관은 라만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멀리 있는 주인보다, 눈앞에서 라만의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는 유진에게 더한 두려움을 느꼈다.
유진이 입국한 서쪽 관문 바로 앞의 도시가 카지탄이다. 즉, 이 라만이란 놈은 카지탄 영주의 부하라는 것이었다.
쾅!
“주... 인님은... 당신을...”
“당신? 이 씨발놈이.”
쾅!
“유진... 공자님을... 은밀히 추격하라...”
쾅!
“이유는 저도 잘... 다만...”
쾅!
“제발 대장님의 머리를 놓아주십시오! 자세한... 이유는 정말 모릅니다. 다, 다만.”
쾅!
“카자니에 들어가지 못하게끔 하란... 말을 하셨습니다...!”
그제야 유진은 라만의 머리를 내리찍는 것을 멈추었다.
“왜?”
“그... 이유는 저도 잘...”
쾅!
“정말...”
쾅!
“정말입니다. 정말,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드립니다. 정말 모릅니다. 정말.”
부관이 눈물을 줄줄 쏟으며 애걸했다. 잠시 그를 보고 있던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라만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그렇다고 라만을 편히 두지는 않았다. 유진은 라만의 등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턱을 어루만졌다.
카자니. 이대로 쭉 가면 들어가게 되는 사막의 지명이다.
유진의 고향. 300년 전 튜라스의 변경은, 카자니의 한 복판에 있다.
“왜 들어가지 말라는 거지?”
“그,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막에는 원래 아무 것도 없지.”
“카자니에는... 짐승도, 몬스터도 살지 않습니다. 오아시스도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카자니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사막이었고, 튜라스의 영토를 조금씩 갉아먹는 모래폭풍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오아시스도 없고, 드문 비도 내리지 않는다. 카자니는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혹독한 땅이다.
그 넓은 사막을 개발하기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카자니에는 인공적인 오아시스와 그를 중심으로 한 마을이 있었다.
다만... 돌발적으로 발생한 모래폭풍이 오아시스와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켰고,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면서 카자니는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지가 되었다.
‘모래술사의 근거지인가?’
일단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하마가 사막화를 이용해 튜라스를 갉아먹는다는 것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 그것도 명망 높은 라이언하트의 도련님을 카자니에 들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멜리아 머윈은...’
이 나하마에서 유진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아멜리아 머윈이다. 유폐의 마왕과 계약하고, 나하마에 의탁하고 있는 흑마법사.
그녀는 성격도 고약하고, 재해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지라 나하마도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 그녀의 던전이 자리한 아슈르 사막은 관광객은 물론이고 나하마 국민의 출입도 엄격히 금해져 있다.
아슈르는 이곳에서 한참이나 먼 곳이고, 가볼 일도 없었다. 아니스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다는 곳과도 멀다.
“...흠.”
유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모래바닥에 처박혀 있는 라만의 부하들을 보았다. 놈들은 라만이 처맞는 동안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유진을 덮치려 하기에, 유진은 마법을 써서 놈들을 모래에 파묻고 머리만 빼꼼 나오게 만들었다.
“너희는 돌아가고.”
유진은 그들에게 손을 휘휘 저은 뒤, 라만의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넌 나랑 같이 간다.”
“...예?”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카자니에 들어가야겠거든? 그건 상관없는데, 거기서 괜한 시비가 걸리면 귀찮단 말이지.”
“그것과... 제가 같이 가는 것이 무슨 상관...”
“누군지 모를 놈이 지랄하면 난 널 앞세울 거야.”
“...”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내가 널 앞세우면, 넌 네 주인 이름을 팔아. 네 주인이 카지탄의 에미르라며? 어지간한 시비는 그 이름으로 해결 될 것 아니냐?”
“...그... 그건...”
“여기서 나한테 죽을래? 물론 너 말고 부하들도 같이 뒈져.”
“...”
“아니면 네 주인한테 돌아가서, 추격은 실패하고 나한테 죽기 직전까지 처맞고 왔다고 보고할래? 물론 나도 입을 닥치고 있지는 않을 거야. 너희 나한테 처음에 도적이라고 개구라쳤잖아. 카지탄의 에미르가 자기 부하를 도적으로 위장해서, 라이언하트의 보물을 빼앗으려 했다... 어때?”
“그, 그런...! 저는 그런 의도가 없었...”
“사람들이 네 말을 믿을까 내 말을 믿을까. 일단 이건 확실하지. 라이언하트 본가는 무조건 내 말을 믿어. 마침 나는 도적질 당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말야.”
유진은 씩 웃으면서 망토 안쪽에서 위니드의 칼자루를 꺼내 보였다.
“이게 뭔지 알아? 라이언하트의 선조, 위대한 베르무트가 직접 사용한 폭풍검 위니드야. 누구나 탐낼 만한 물건이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걸? 카지탄의 에미르가 위니드를 탐내 개지랄을 벌였다고.”
라만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라만이 유진을 겪은 시간은 잠깐이었으나, 도저히 유진의 말을 단순한 위협일 뿐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유진이 저렇게 떠들고 다닌다면? 라만의 모가지도 날아갈 것이고, 부하들의 모가지도 날아갈 것이다. 어쩌면 주인인 타이리 알 마다니의 목도 날아갈 지도 모른다.
“아, 알겠습니다.”
라만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막
라만의 부하들은 돌아가기 싫어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제들끼리 말을 맞추었다.
은밀히 추격하는 중에 유진 라이언하트가 카자니 사막에 진입하려 했고, 그를 막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이언하트 도련님의 고집을 꺾는 것도,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대장인 라만이 혼자서 유진과 함께 가기로 했다. 일단 카자니 사막에 들어가 보고, 위험하거나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함께 발을 돌리기로 약속하고서 말이다.
카지탄의 에미르, 타이리 알 마다니가 그 말을 과연 믿어줄 지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유진에게 얻어맞은 상처는 포션이나 회복마법으로 어떻게 낫게 할 수 있겠지만... 주인의 명령은 유진이 카자니 사막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지, 호위가 되어주어서 함께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라만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심란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포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모조리 비명을 지르고, 이름을 말해버린 자기자신에게 크나 큰 수치심을 느꼈다. 주인에 대한 충의와 더불어 입이 무거워야 하는 것이 전사의 미덕이다.
만약 라만이 입을 닫고 전사답게 행동했다면, 부관이 입을 열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만은 주인을 배신했다. 무거워야 할 입을 가볍게 놀렸다.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부하들의 처우도 걱정된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유진에게 죽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라만에게 있어서 더더욱 두려운 것은 자신과 주인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위안은 해봤지만, 라만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유진에게 베인 상처와 얻어맞은 몸, 특히 연거푸 모래바닥에 내리 찍힌 얼굴이 아파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반면에 유진은 잘 잤다. 라만이 육신과 정신의 고통에 밤을 지새울 때, 유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흑암의 망토를 몸에 돌돌 두르고 꿀잠을 즐겼다.
라만은 그런 유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비록 패배했다고는 하나, 라만의 사지는 멀쩡했다. 손발이 묶이지도 않았고, 무기를 빼앗기지도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유진을 습격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하게 대범... 아니, 아니로군.’
뒤척이지도 않고, 코를 고는 것도 아니다. 유진은 평온한 얼굴로 쌕쌕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들어 있다. 그런데도 다가가지 못하겠다. 짧은 시간에 라만의 몸에 새겨진 폭력은 마음을 꺾어 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틈이 보이지 않는다.
자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숨소리나 맥박, 다른 모든 것들. 자는 척? 그럴 이유가 어디 있나. 라만의 패배는 결코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저 19살 먹은 라이언하트의 소년에게 패배했다. 그건 우연이 아닌, 압도적인 기량 차이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다.
‘...익숙하다는 건가?’
언제 어떤 식의 위험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휴식하는 것이 익숙한 것이다. 정신은 잠이 들었는데 육체는 위험에 대비하고 있다. 시험해 볼까? 내가 무슨 자격으로. 라만은 헛웃음을 흘리며 몸에 붕대를 감았다. 애당초 시험이라 말하는 것도 우습다.
괜히 다가갔다가는 목이 베일 것이다.
“슬슬 갈까.”
사막의 아침은 빠르다. 유진은 하늘 저편에서 여명이 번져올 때쯤 즉시 몸을 일으켰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두 눈이 말똥말똥했다.
“...예.”
결국 라만은 한 숨도 자지 못했다. 그렇다고 피로를 드러내진 않았다. 라만도 고된 상황에는 익숙했고, 마나를 능숙하게 다루는 전사는 잠이 부족해도 한 줌의 마나로 피로를 회복할 수 있다.
“혹시 내가 반말한다고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아닙니다.”
“그럼 내가 네 명예를 짓밟아서 기분 나쁜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대답이 빨랐는데 방금은 대답이 조금 늦네. 아, 괜찮아.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고, 기분 나쁘라고 때린 거거든.”
유진은 망토의 모래를 툭툭 털며 앞으로 걸었다.
“근데 그건 어제잖아. 새벽도 지나고 해가 떠서 아침이니,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자고.”
저 새끼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카자니 사막에 모래술사들이 있나?”
의문을 떨치지 못한 와중에 대뜸 질문이 들어온다. 라만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유진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저, 정말 모릅니다.”
“나랑 또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아닙니다...! 정말, 정말 모릅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진심이었다. 카자니에 모래술사들이 있냐니? 왕가에만 충성하는 모래술사들이 왜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카자니 사막에 있겠는가.
“너 직위가 어떻게 되냐?”
“...예?”
“네 주인이 카지탄의 에미르라며. 네게 딸린 부하들도 있는 것 보면, 너도 어느 정도 직위가 있을 것 아냐.”
“저는... 주인님의 직속 호위대인 붉은 모래 전사단의 2번대 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직속 호위대. 귀족 산하 기사단과 다르지 않다. 2번대 대장이라는 것은 꽤 위치가 높다는 말. 어제 보았던 실력이면 대장 자리가 아깝지는 않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라만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당황과 두려움. 거짓은 느껴지지 않는다. 유진은 왜 대장이나 되는 라만이 이 임무에 투입되었는지를 알았다.
라만은 우직하고 충성스럽다. 하지만 충성심은 절대적일 수 없다. 하지만 무지는 절대적이다. 아무리 겁을 주고 협박하고 고문해도, 모르는 것은 떠들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라만은 제격이었다.
“아저씨 병신이야?”
“...예...?”
“카자니 사막. 거기 원래 튜라스 왕국의 영토였잖아.”
“대체 언제적 얘기를... 그곳이 튜라스의 영토였던 것은 100년도 전의 일입니다.”
“그렇지. 갑자기 불어 닥치는 모래폭풍이 멀쩡한 땅과 숲을 사막으로 바꾸었어. 국경선마저 사막이 되어버렸으니, 튜라스는 어쩔 수 없이 나하마에게 영토를 양도했지.”
말이 양도지, 그건 강탈이었다. 나하마의 술탄은 사막이 번지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일이라며, 제 전사들을 사막에 주둔시켜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약소국인 튜라스는 도저히 나하마와 대적할 수 없었고, 대륙에는 약소국의 사정이 안타까워 제 살을 깎아가며 나서 줄 만한 정의로운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막화는 지금도 조금씩 진행 중이지. 안 그래? 키옐 제국을 상대로 그런 개수작을 벌일 수는 없으니, 만만한 튜라스에 공사치는 거잖아.”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이 아저씨가 생긴 것과 다르게 많이 순진하네. 아니면 순진한 척 하는 건가?”
“설령 공자님의 말이 사실일 지라도... 저희 주인님은 그런 비열한 일에 관여하실 분이 아니...”
“정체 숨기고 애새끼 꽁무니 따라다니란 명령은 비열한 일이 아니고?”
“그, 그건... 공자님이 험준한 사막에서 위험에 처할까봐 걱정을...”
“진짜 아무 것도 모르나 보네. 뭐 됐어. 네가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유진은 그렇게 이죽대며 몸을 돌렸다.
“이것만 잘 알아 둬. 나도 타국까지 와서, 감당하지 못할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거든? 네 주인이 왜 날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는 대강 짐작이 돼. 모래술사의 근거지에 외국인이, 그것도 라이언하트 본가의 도련님이 들어가면 이래저래 골치가 아파질 것 아냐?”
어지간한 상대라면 신경 쓸 것 없이 묻어버리면 된다. 이 광활한 사막에서 여행객이 실종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라이언하트의 도련님이 실종되는 것은 그 무게가 다르다. 만약 유진이 사막에서 실종된다면, 가주인 길레이드는 그를 절대로 가만 넘기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라만은 시선을 떨구며 대답했다.
“만약... 그곳에 공자님이 말하신 것처럼 모래술사들이 있다면... 그들이 공자님을 해하기 전에, 제가 나서서 공자님을 보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술탄 직속의 모래술사들이라도, 제 주인이신 카지탄의 에미르에 대해서는 최소의 존중을 보일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헌데 공자님은... 왜 카자니 사막에 가시려는 겁니까? 그곳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건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해.”
하멜의 무덤이 있을 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곤 해도 확인은 해 봐야 했다. 유진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사막을 뛰었다.
‘빨라.’
라만은 즉시 유진의 뒤를 따랐다. 어젯밤에 된통 얻어맞기는 했지만, 다행히 뼈가 부러진 곳은 없었다. 잠을 자지 않고 마나를 운용한 덕에 달리는 것에도 별 무리는 없었다.
그럴 텐데도 힘들다. 작정하고 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유진이 발을 뻗을 때마다 몸이 앞으로 쭉쭉 나아간다.
‘...정말로... 그 모래폭풍이 모래술사들의 소행인가?’
타국을 침략하는 것.
전사인 라만은 그것이 악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것이 무어가 잘못이란 말인가. 이 사막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약육강식이다.
모래폭풍을 이용한 침략은... 악한 일인가? 라만은 기왕 전쟁을 할 것이라면 전사의 피를 쏟는 ‘진짜’ 전쟁이 옳다고 생각했다. 다만, 위대한 술탄이 전사들의 피를 귀중히 여겨 아끼는 것이라면. 그렇게 보존한 피로 언젠가 위대한 정복 전쟁을 벌일 것이라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그것은 전사의 바람이었다.
전사가 아닌 라만 슐호브는, 가슴 깊은 곳에서 불경한 마음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라만은 그 마음을 애써 무시했다.
*
“...오아시스...?”
라만과 동행한지 하루가 지났고, 카자니 사막에 진입했다. 라만과 부관이 떠들었던 대로 이 사막은 척박하고,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는 사막. 하지만 그것 뿐, 사막을 진입하고서 반나절 동안은 별다른 위험과 마주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돌연 오아시스를 보았다. 라만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서 멀리 보이는 오아시스를 응시했다.
카자니에 오아시스는 없다. 그러니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 라만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아시스라니. 그 끔찍한 모래폭풍이 지면을 뒤집다가 암반수가 터지게 만들었나? 아니면 비가 몰래 쏟아져서 땅에 고였나. 어느 쪽이든, 라만은 저 멀리 보이는 오아시스를 사막의 기적이라고 느꼈다.
“가짜야.”
라만은 황홀한 눈으로 오아시스를 보았지만, 유진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예?”
“가짜라고.”
“저게 신기루란 말입니까?”
“신기루로 오아시스가 보인다면 저 멀리 어딘가에 진짜 오아시스가 있겠지. 그런데 아니라고. 저건 환영 마법이야.”
유진은 그를 확신했다. 저곳에서부터 마나의 밀도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허나 라만은 유진처럼 저것이 환영마법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나를 느끼는 감각이 유진보다 월등히 떨어진 데다, 유진처럼 마법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군.”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웃었다.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신기루를 보여줘서 엉뚱한 곳으로 가게 하는 건가. 이러면 더 수상쩍지.”
“저게 마법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야, 라만. 현실도피는 네 머릿속에서만 해. 괜히 입 밖으로 내뱉어서 나 빡치게 하지 말고.”
“...”
“네가 네 주인한테 충의 지키고 그러는 건 좋은데. 네 주인이 내 주인이냐? 아니지?”
“...주인님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내가 언제 네 주인보고 개새끼라고 했어? 모욕은 뭔 모욕이야. 요즘 것들은 뭐이리 예민해? 별 것도 아닌 걸로 자꾸 모욕을 팔아대네.”
요즘 것들은 또 뭔가? 라만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서 시선을 내리 깔았다.
“...저게 환영마법이면 뭐 어떻다는 겁니까. 다른 곳으로 가면 위험하니까... 저렇게 마법까지 써가면서 발길을 돌리려는...”
“그건 봐야 알지.”
유진은 히죽 웃으며 멀리 있는 오아시스를 향해 걸어갔다.
“방금 환영마법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왜 이쪽으로 가는 겁니까?”
“발길을 돌려 안전한 곳으로 내보내려는 것인지 확인하러.”
“...예?”
“사막 여행자들에게 오아시스는 아주 귀중한 곳이지. 일단 오아시스가 보이면 한 번은 들르고 싶을 만큼 말이야.”
“...설마. 저곳에 매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나라면 그랬을 거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침입자를 얌전히 내보내는 것보다는, 이리 오게끔 두고서 목을 따는 것이 압도적으로 편하고 효율적이잖아.”
라만은 떨리는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이치적으로는 맞는 말이나, 저러한 판단이 19살의 소년에게 나온 것이라고는 잘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 그렇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이유가...?”
“확인해 두는 것이 좋잖아.”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망토에서 지도를 꺼냈다. 300년 전의 고향으로 일직선으로 가려면, 저 오아시스를 지나야 한다. 위험할 지도 모르니 피해가는 것도 방법 중 하나기는 했다.
다만. 그럴 경우 뭔지 모를 함정을 그대로 두게 되는 것 아닌가.
300년 전의 하멜은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도 일단 들어가서 직접 확인하는 성격이었다. 하멜은 그를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있으니까, 해본 것뿐이다. 만약 함정이라면? 박살내면 된다. 함정이 아니라면? 보다 편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된다.
유진은 저 오아시스가 함정이기를 바랐다. 저곳에 누군가가 매복해 있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앞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조금 더 쉬워질 것이다.
이 사막 어딘가에 무덤이 있다는 것도.
나하마의 모래술사가 있다는 것도 의혹일 뿐이다.
저 앞의 오아시스는 환영 마법에 의한 것. 그러한 사실은 유진의 의혹을 확신 쪽으로 기울인다.
저게 여행자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기 위함이 아닌, 여행자를 사막에 파묻기 위한 함정이라면.
‘확신할 수밖에.’
판단은 그때 다시 해야 한다. 있는지도 모를 무덤을 홀로 탐색할지. 아니면 제대로 허가를 구할지.
‘카지탄의 에미르. 호위대 2번대장 라만 슐호브. 최소한의 보험은 있고... 정 안 되면 라이언하트의 이름도 보험으론 쓸 수 있어.’
전부 다 무시당한다면. 라이언하트를 적으로 돌릴 만큼의 무언가가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인데.
‘그게 뭐지?’
전쟁.
‘그게 온전히 나하마의 결정인가?’
나하마에는 아멜리아 머윈이 있다.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한 흑마법사. 그녀가 나하마의 전력에 크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 나하마가 정말로 전쟁을 의도하고 있다면... 그건 헬무드의 뜻인가? 아니면 나하마가 헬무드의 눈을 속이고 탐욕을 키우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유진은 마왕과 헬무드가 관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시해선 안 된다.
“씨팔, 무덤 찾기 존나 힘드네.”
“...무덤이요? 카자니에 성묘를 오신 겁니까?”
“어.”
“그럴 수가... 왜 미리 알려주시지 않은 겁니까.”
“알면 네가 뭐 어쩔 건데?”
“카자니에는 공동묘지가 따로 있습니다. 당장 그곳까지 안내를...”
“공동묘지 아냐. 내가 찾는 무덤은 따로 있어.”
“어떤 무덤을 찾으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넓은 사막에 묻힌 시체는 수백 수천 구에 달합니다.”
“그러겠지. 너 카자니 출신이지?”
유진은 라만을 돌아보지 않고 내뱉었다. 라만은 뭐라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까 오아시스보고 눈 떠는 것도 그렇고. 흔한 모래바람에 흠칫거리는 것도 그래. 또, 내가 모래술사 운운했을 때 네 분위기가 바뀌었어.”
“...그건...”
“개척민 출신인가? 모래폭풍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서, 어찌어찌 카지탄으로 들어 왔고... 네 주인에게 거두어졌어? 그러니 주인과 모래폭풍을 연관 짓고 싶지는 않고, 의심은 조금씩 들고...”
“...”
“야, 라만. 내가 하나 조언해줄게. 세상일이라는 것은 말야,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들이 대부분은 맞아. 특히 그 중에서도 좆같은 의혹은 거의 사실이라고.”
라만은 이를 악물었다.
“네가 주인에게 은혜를 입은 것도 맞겠지만, 네 주인이 모래폭풍의 근원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도 맞을 걸. 타이리 알 마다니가 생각하지 못한 건, 내가 너나 부하들을 손쉽게 처바를 만큼이나 강하단 사실. 그리고 위협과 경고를 무시하고 카자니에 들어갈 만큼 고집불통일지 몰랐다는 거야.”
“...그럴 리 없습니다.”
“현실도피는 네 머릿속에서만 하랬지? 뭐 마음대로 해. 네가 뭘 믿을 지는 네 마음이니까.”
유진은 그렇게 비웃으면서 앞으로 발을 뻗었다. 그 순간, 라만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땅을 박차고서 유진의 등에 달려들었다.
“위험!”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만은 기겁하며 유진의 등을 떠밀었고, 유진의 발아래의 모래에서 시커먼 칼날이 치솟았다.
라만의 손은 유진의 등을 밀지 못했다. 유진은 훌쩍 뛰어 올라 공중에서 몸을 회전했다.
“네가 눈치 챘는데 내가 몰랐겠냐?”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바람의 정령을 불러들였다.
ㅡ푸확! 지면의 모래가 격한 바람에 터져나갔다.
사막
바람의 중급 정령, 게일. 실프가 산들바람을 일으킨다면 게일은 강풍을 일으킨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사막이지만, 게일을 불러들인 순간 매선 강풍이 모래바닥을 들춘다.
아니, 들추는 정도가 아니었다. 유진의 역량은 게일의 힘을 증폭시켰다.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굉음. 주변의 모래가 일제히 튀어나갔고, 유진을 밀치려 했던 라만도 덩달아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허업!”
라만이 당황한 소리를 질렀지만, 공중에 뜬 유진은 아래를 노려보았다. 터트린 바닥 깊은 곳에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시커먼 복면. 귀 부분이 유독 색이 짙다. 갑작스런 폭발로 귀에서 피가 터진 것이다.
‘어쌔신.’
한 명이 아니다. 유진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바람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모래가 조금씩 들썩거리는 것이 보인다.
유진의 의식이 게일에게 닿는다. 형상 없는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며 포효를 지른다. 콰르르르! 이 일대의 모래가 통째로 들리고, 유진의 마법이 이어졌다.
‘쓸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건 좋은 거야.’
수십 개로 뭉친 모래 덩어리가 다시 폭발한다. 그렇게 터져나간 모래가 매복하고 있던 어쌔신들을 덮쳤다. 놈들은 급히 마나실드를 일으키며 몸을 날렸지만, 광범위를 포착한 모래알들을 전부 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기저기서 피가 튀긴다. 제일 처음 유진을 기습했던 어쌔신은 불행하고 끔찍한 몰골이 되었다. 놈은 반격과 너무 가까웠고, 먼저 부상을 입어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했다. 놈은 수백의 모래탄환에 꿰뚫려 벌집이 되었다.
그럼에도 놈은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나하마의 어쌔신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하지만 비명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에 무감한 것도 아니고, 죽지 않는 것도 아니다. 놈은 더 서있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다른 어쌔신들은 상황이 조금 나았다. 몸 곳곳이 관통되어 피를 흘리기는 해도,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놈들은 훌쩍 뒤로 물러서서 유진을 노려 보았다.
복면에 가려지지 않은 두 눈. 바로 앞에서 동료가 죽어나갔는데, 놈들의 눈에 공포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분노를 담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감정은 어쌔신에게 필요하지 않다.
“정당방위였어.”
유진은 일단 그렇게 말해주었다.
“먼저 기습한 것은 너희들이야. 만약 내가 안 피했으면, 내 가랑이가 반으로 쪼개졌을 거라고.”
“무, 무기를 내리시오!”
멀찍이 떨어졌던 라만이 뛰어오며 고함을 지른다.
“나는... 카지탄의 에미르, 타이리 알 마다니님을 섬기는 전사, 라만 슐호브요. 지금 그대들이 적대하는 이는 내 주인님의 손님이란 말이오!”
이곳에 정말로 어쌔신이 매복해 있었다는 사실은 라만의 정신을 뒤흔들었지만, 라만은 자신이 왜 이곳까지 끌려왔는지를 망각하진 않았다.
“그러니 당장 무기를 내려 놓고 물러서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내 주인, 카지탄의 에미르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도록 하겠소.”
그렇게 외치기는 하였으나.
라만의 눈동자는 암담한 빛으로 젖어갔다.
어쌔신들은 물러서지도, 그럴 기미를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칙칙한 살기를 내뿜으면서 전투태세를 가다듬었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모래가 꿈틀거리더니, 십수 명의 어쌔신들이 몸을 일으킨다. 결국 유진과 라만은 스무 명에 달하는 어쌔신들에게 포위당하는 꼴이 되었다.
“대체... 그대들은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이오?”
라만은 다시 한 번 말했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쌔신들은 날빛이 거무튀튀하게 물든 무기들을 겨누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나누었다.
“이, 이 분은 카지탄 에미르의 손님이란 말이오. 또, 키옐 제국 라이언하트 본가의 공자님이기도 하오.”
“소용없어.”
유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이죽거렸다.
“라만. 네 말은 저 꼭두각시들의 의욕을 돋구고 판단을 쉽게 해 줄 뿐이야.”
“그게 무슨...?”
“이미 공격했으니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이지. 아 그래도, 나는 안 죽어도 너는 무조건 죽일 생각일 걸.”
“왜 유진 공자님을 죽이지 않는다는 겁니까?”
“죽이면 귀찮아지니까.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는 거지. 저 새끼들은 떠들지 말아야 할 말들을 닥치게 할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을 걸?”
독과 약. 혹은 마법일지도 모른다.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목적은 하나 뿐. 목격자가 자신이 겪은 일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하게 하는 것.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냥 죽여버리는 것이다.
시체는 말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상대가 라이언하트 본가의 사람인 이상, 무턱대고 죽일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죽이지 않고 입만 닥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유진을 제압해야 했다.
“그렇게까지...? 어째서...”
“모르지.”
유진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의욕이 돋궈지고 판단이 쉬워진 것은 어쌔신들 뿐만이 아니다. 놈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유진도 똑같이 상대하면 된다.
이 싸움은 유진이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갈까?”
유진은 망토의 안에 감춰진 손을 쥐었다 펴며 물었다.
그렇게 묻는 순간, 어쌔신들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서 죽어가던 어쌔신이었다.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을 텐데, 놈은 짐승처럼 바닥을 손으로 박차며 유진에게 뛰어들었다.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300년이나 흘렀어도 어쌔신은 어쌔신. 놈들은 제 안위보다 명령과 임무를 우선하는 지독한 놈들이다. 팔다리를 분지르고 끊어놓아도, 벌레처럼 몸을 꿈틀대며 덤벼온다.
용병생활을 하는 중에 몇 번인가 충돌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유진은 어쌔신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잘 알았고, 명령 외에 놈들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잘 알았다.
써억.
지면의 모래가 칼날이 되었다. 맹목적으로 달려 든 어쌔신의 몸이 반으로 쪼개진다. 죽었다. 유진은 시체에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쌔신들이 덤벼온다. 은신은 그만두었지만, 놈들의 움직임은 은신이 필요없을 만큼 쾌속하고 은밀했다. 서로가 서로를 엄폐물로 쓰고 있다. 그렇게 시야를 가리며 서로가 다른 공격을 준비한다. 하나가 쓰러지면 그 다음이, 그마저도 쓰러지면 그 다음이 유진의 목에 칼을 들이밀 것이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몸을 낮추었다.
ㅡ파앗! 망토가 크게 펄럭이고, 여섯 자루의 비수가 앞으로 쏘아졌다. 한 손에 세 개씩. 한 번에 던진 것인데 각자 다른 방향으로 비수가 쏘아진다. 비수의 끝에는 여섯 명의 어쌔신이 있었다.
단순히 던진 것도 아니다. 쩌엉! 마나실드와 함께 방어동작을 취했지만, 어쌔신들의 몸이 휘청거린다. 유진이 던진 비수는 그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렇게 휘청거리는 어쌔신들의 발밑에서 모래의 칼날이 치솟는다. 그 공격은 이미 보았다. 그래서 대응하려 했으나, 공격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일순간, 어쌔신들의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공기가 무거워져, 그들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게 행동이 잠시나마 굼떠진다. 바닥에서 치솟은 모래의 칼날이 어쌔신들의 발목과 오금을 베었다.
이번에도 비명은 없다. 마찬가지로 놈들은 기합도 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단검을 집어 던진다.
유진은 제 자리에 서있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게일에게 의지를 보냈다. 마나가 더해진 바람이 비수의 궤적을 바꾼다. 완전히 추격시킬 필요도 없었다. 살짝 비틀린 궤적이 만들어낸 틈. 유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꽈직!
텅 비었던 유진의 양손이 두 명의 어쌔신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뒤로 넘겨 바닥에 찍어버린다. 펄럭였던 망토가 아래로 내려왔을 때. 유진의 양 손은 큼직한 도끼를 쥐었다. 콰드득! 몸 전체를 회전시키며 휘두른 도끼가 가까운 어쌔신들의 몸을 양단했다.
피가 뿜어지고, 내장이 쏟아졌다. 유진은 한 번 휘두른 도끼에 더 미련을 갖지 않았다. 양단이 끝난 뒤에 도끼를 놓아버렸고, 붕붕 회전하며 날아간 도끼가 다른 어쌔신의 가슴에 처박혔다.
그 외에도 무기는 많았다. 나하마에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몰랐으니 준비는 철저하게 했다. 몇 달은 버틸 식량과 식수. 갈아입을 속옷. 그따위 것들부터 해서, 온갖 무기를 망토 안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챙겨 온 무기 중, 도끼만 해도 스무 자루가 넘는다.
‘하멜. 당신은 왜 맨날 쓰지도 않을 무기들을 들고 다니는 겁니까?’
‘있으면 언젠가 쓰겠지.’
‘냅둬, 아니스. 저 새끼는 말해도 들어 처먹지를 않는단 말이야. 그리고 뭐... 준비성이 좋아서 나쁠 것은 없잖아.’
‘하지만 세냐. 하멜의 행동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저 쓸데없이 많은 무기들은 모두가 하멜의 것인데, 왜 모론이 수레를 끌어야 하는 겁니까?’
‘가위바위보에서 내가 이겼어.’
‘그것도 공정하지 않은 겁니다. 왜 당신의 짐을 챙기는 것에 모론과 가위바위보를 하는 겁니까?’
‘너 자꾸 사람 양아치로 만들래? 저기 내 짐만 있냐? 너 좋아하는 성수도 존나게 많잖아! 모론 저 새끼 도끼도 있고! 그게 제일 무겁다고!’
‘제 성수가 온전히 저만의 것이라면 제가 직접 짊어 메고 다녔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잖습니까? 제 성수를 가장 많이 탐하는 세냐와 하멜, 너희들 두 새끼입니다. 그리고 모론 저 등신은 가위바위보에서 무조건 주먹부터 내지 않습니까? 그런 등신과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이 공정한 일입니까?’
‘세냐 이 쌍것아. 내가 아니스 성수 작작 마시라고 했지? 애당초 네가 소환마법으로 저것들 쟁여놨으면 수레 끌 일도 없잖아!’
‘필요할 때 바로 꺼내기 힘드니까 직접 들고 다니겠다고 했으면서 왜 나한테 지랄이야?’
‘베르무트! 이 씨발아,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 왜 너는 수레 안 끌어?’
‘내 무기는 저기 들어있지 않다.’
‘참 좋겠다. 아공간 마법 존나 편리하네 쓰벌...’
‘편리해 보이지? 그러니까 나한테 마법 배우라니까? 내가 남을 가르쳐 본 적은 없는데, 아마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애. 네가 무릎 꿇고 애걸하면... 흐, 흐흠. 내가 밤잠 줄여가며 친절히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전생에는 무기를 많이 들고 다닌다고 툭하면 아니스에게 갈굼을 들었었다.
‘전생에도 이런 망토 하나 있었으면 욕을 덜 먹었을 텐데 말이야.’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길쭉한 두 자루의 창이 끌려 나온다.
압도적이다.
라만은 유진을 돕기 위해 나섰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 우두커니 서버렸다.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스무 명에 달하는 어쌔신들이 늑대를 만난 양떼, 아니, 사람에게 짓밟히는 개미처럼 보인다.
그 라이언하트의 보검이라는 폭풍검 위니드는 나오지도 않았다. 적극적으로 공격마법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간간히 펼치는 블링크, 적재적소에 사용되는 마법의 보조...
라만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쌔신들의 시체 한 가운데. 유진이 서있었다. 그는 뺨에 튄 피를 문질러 닦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아있는 어쌔신은 한 명도 없었다.
“...전부 다 죽일 필요는... 없지 않았습니까?”
“나는 어쌔신들 아가리를 열게 할 재주는 없어.”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바람을 움직였다. 그가 사용하고, 던졌던 무기들이 붕 떠올라 유진에게 돌아왔다. 바람은 무기를 적신 피와 살점을 깔끔히 날려주었다.
“심문할 필요도 없고.”
“...”
“시체를 뒤져 볼 필요도 없지. 어쌔신들은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무기들을 망토 안에 집어넣고, 유진은 라만을 돌아보았다.
“더 갈 거냐?”
“...예?”
“네 주인 덕을 보려고 데려온 건데 말이야. 얘들은 카지탄의 에미르도 존나 우습게 알잖아. 나로서는 널 더 데려갈 이유가 없어졌다고.”
“...그, 렇지만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날 걱정해서는 아닐 테고. 왜? 저 앞에서 무엇이 벌어지는 것인지 직접 확인이라도 하고 싶냐?”
“...”
“넌 별 도움이 안 되는데...”
“...공자님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셔. 설마 내가 널 도와줄 거란 의리를 기대하진 말...”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시체를 지나쳤다.
그 순간이었다.
ㅡ콰르르르! 사막이 뒤흔들렸다. 대기의 마나가 요동친다. 유진은 지하 깊은 곳에서 막대한 마나가 마법으로 빚어지는 것을 느꼈다. 유진은 즉시 블링크로 그 자리를 이탈하고, 바람에 몸을 실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발아래의 사막이 부글부글 끓는다. 어쌔신들의 시체가 붉은 빛에 휘감기고, 얼음처럼 녹는 것이 보인다. 제물. 유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공자님!”
사막이 늪으로 바뀐다. 아까만 해도 바람을 터트려도 멀쩡했는데, 순식간에 유사지대가 만들어졌다. 라만은 몸을 빨아들이는 힘에 저항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외쳤다.
“도망치십시오!”
살려달라고 외치는 줄 알았는데. 라만은 그렇게 외쳤다. 유진은 그 외침이 어이없었지만, 라만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바람이 소란스럽다. 정령이 일으킨 바람과는 다른, 인위적인 바람이 저 아래에서 회오리친다. 이윽고 그것은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되어갔다. 카자니의 돌발적인 모래폭풍. 아무리 돌발적이라고 해도, 저렇게 갑작스레 생성되어 크기가 부푸는 모래회오리는 비정상적이다.
“마, 마법...!”
라만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까 전 유진이 말한 대로였다.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들은 대부분이 맞다. 특히 그 중에서도 좆같은 의혹은 거의 사실이다. 라만은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카자니의 모래폭풍은 모래술사에 의한 것. 라만이 살던 마을을 집어 삼킨 모래폭풍도 모래술사에 의한 것이었다.
“크아아아!”
라만은 고함을 지르며 쿠크리를 뽑았다. 그리고는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회오리를 향해 미친 듯이 쿠크리를 휘둘러댔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라만의 실력으로는 저 거대한 모래회오리를 베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시도하지는 않았다. 불가능한 것에 쓸데없이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유진은 모래바람에 끌려가지 않도록 공중에서 몸을 고정했다. 게일의 바람으로는 모래회오리의 흐름에서 탈출할 수 없다. 이렇게 버티는 것이 고작. 그럼 블링크로 빠져나갈까?
시도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유사의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다. 유진은 공중에서 조금씩 위치를 바꾸었다. 힐긋 본 라만은 칼을 연거푸 휘둘러대면서도 유사의 아래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유진은 혀를 쯧 차면서 라만에게 바람을 보냈다.
“흐억!”
아래로 빨려들어가던 라만이 바람에 끌려 나온다. 그는 공중에뜬 발을 허둥거리면서 유진을 올려다 보았다. 라만에게 바람을 보낸 만큼, 유진의 몸이 점점 회오리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고, 공자님!”
“튀어, 병신아!”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고서 라만에게 시선을 때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하려는 것에는 바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유진은 남은 바람을 한 점에 모아, 회오리에 끌려가지 않도록 버텼다. 그러면서 천천히 아래로 추락했다.
‘하나, 둘, 셋, 넷... 지금.’
콰아아아!
유사의 한복판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그것은 입을 쩍 벌린 샌드웜이었다. 그냥 샌드웜은 아니고, 그 크기만 수십 미터는 될 자이언트 샌드 웜. 사막을 걸어다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청소부.
“공자님!”
라만이 울부짖는다.
“작작 불러, 새끼야.”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샌드웜의 아가리를 들여 보았다. 수천 개는 될 법한 자그마한 이빨들이 보인다. 그 이빨 너머에는 벌건 속살이 구불구불한 통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어휴.”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흑암의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양 손을 망토의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런 짓은 다시는 안 하고 싶었는데.”
유진은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은 전생의 끔찍한 추억들을 떠올렸다. 헬무드의 사막. 그곳의 샌드웜은 나하마의 샌드웜보다 크고 포악했다.
‘모론, 이 등신 새끼야!’
그 새끼는 정말 등신이었다. 끌고 다니던 수레가 샌드웜에게 통째로 먹히자, 그걸 찾아오겠다며 직접 샌드웜의 아가리로 뛰어들었었다.
다들 어이가 없고 경악해 멈칫거렸을 때, 하멜은 등신을 구하기 위해 뒤따라 샌드웜의 아가리로 뛰어들었었다.
그 이후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낫지. 모론 그 등신을 구하러 가는 건 아니니까.’
게일의 바람이 사라진다.
유사 밖으로 던져 진 라만은 두눈을 부릅 떴다.
지하 깊은 곳에서 일어선 샌드웜, 쩍 벌린 아가리.
유진이 샌드웜의 아가리에 삼켜진다. 아니, 뛰어들었다. 라만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공자니이임!”
날 구하기 위해! 라만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구명의 은혜를 입은 전사의 눈물! 라만은 결의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모래를 박찼다.
기껏 유진이 유사 밖으로 던져 주었는데, 라만은 쿠크리를 쥐고서 샌드웜에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 라만의 적은 모래폭풍이 아니었다. 그는 샌드웜의 몸통을 베고, 유진을 구출하는 것에 사명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유진은 그러한 결의를 알지 못했다.
“냄새가 씨발.”
가르기스의 암내보다 지독하다. 유진은 코로 호흡하는 것을 멈추고서 몸을 웅크렸다. 견고한 마나실드와 흑암의 망토는 샌드웜의 이빨을 지나서 구불구불한 식도로 유진을 안내했다. 그제야 유진은 다시 게일을 불러들여, 추락하는 몸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었다.
이 길쭉하고 거대한 샌드웜은 살아있는 통로가 되어 유진을 저 아래로 인도해 주었다. 다행히 나하마의 샌드웜도 헬무드의 샌드웜과 구조가 똑같았다.
샌드웜은 사막의 위를 지나는 대부분의 것을 잡아먹는다. 가장 먼저, 아가리 안쪽에 원형으로 난 이빨이 꼬물거리며 잘게 씹어 분해한다.
그렇게 식도를 지나고, 내장에서 마저 분해되고, 장으로 들어가서, 구불구불구불구불... 역겨운 길을 지나며 똥도 되지 못하고 분해된다. 이 빌어먹을 몬스터는 항문이 없어서 똥도 싸지 않는다. 처먹은 것을 완전히 분해하고 에너지로 삼는 고연비 몬스터인 것이다.
그러니까.
들어가면 나올 길이 없다는 말이다.
마나실드와 흑암의 망토가 용해액에 저항한다. 유진은 여전히 코로 숨을 쉬지 않으며 위치를 가늠했다. 이 역겨운 통로도 슬슬 끝에 도달하고 있었다.
“썩을.”
유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위니드를 꺼내 쥐었다. ㅡ화르륵! 극한으로 운용되는 백염식이 회전하고, 환염식이 되었다. 별이 그리는 원 속에서 무수히 많은 별이 탄생하고 폭발한다. 그렇게 증폭시키는 마나가 유진이 두른 불길을 거세게 만들었다. 새하얀 불꽃. 백염식의 상징. 마나의 밀도가 계속해서 높아진다.
그럴수록 유진이 두른 불꽃은 흰색이 아닌 다른 색에 가까워진다. 창백한 푸른 빛. 그 형상은 더 이상 백염식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유진은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위니드를 들었다. 마나의 불꽃이 위니드를 휘감는다. 위니드로 일으킨 바람에 불꽃이 섞인다. 유진은 푸른 빛에 휘감긴 위니드를 아래로 겨누었다.
푸슉!
커다란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샌드웜의 거대한 몸이 요동쳤다.
유진은 항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가련한 몬스터에게 친히 항문을 만들어주었다.
사막
ㅡㅡㅡ.
기다랗게 끌리고, 울리는 소리. 펑, 터트린 폭발에 바람이 흩어진다. 유진은 내동댕이쳐지려는 몸을 붙들었다.
주변이 어둡다. 그럴 수밖에. 그 길고 구불구불한 샌드웜의 체내를 지나, 말단 부분을 찢고서 밖으로 나온 것이다. 놈은 유사 한복판에서 몸을 끄집어냈으니, 탈출해서 도착하는 곳은 당연히 지하 깊숙한 곳이었다.
“어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제법 멀리 날아왔다. 날아오는 중에 벽이나 모래와는 부딪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모래에 파묻힐 수도 있겠다고 각오는 했지만,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환마법이 불러들인 것은 유사 지대와 모래폭풍 뿐. 샌드웜 자체는 소환된 것이 아니다. 유도는 했겠지만, 샌드웜은 본래 이 일대 지하에서 서식하는 놈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지하 깊은 곳에는 샌드웜의 둥지가 있을 터. 지금 유진이 서있는 곳이 바로 샌드웜의 둥지인 것이다. 유진은 질색이라는 얼굴을 하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위. 움찔움찔 경련하는 샌드웜의 꽁무니가 보인다. 친히 항문을 뚫어주었는데, 저것으로 죽을까? 잘은 모르겠다. 그래도 뭐, 놈 덕분에 바라던 대로 지하에 내려오기는 했다.
지하는... 넓다. 그것도 예상한 대로였다. 샌드웜은 저 커다란 몸으로 사막 지하를 누빈다. 지렁이는 토양을 기름지게 만든다지만, 샌드웜은 그런 좋은 일은 하지 않는다.
놈들은 사막 지하의 수원을 먹어치우고, 오아시스를 고갈시킨다. 놈들이 몸에서 내뿜는 체액은 모래를 응고시켜 사막 깊은 곳에 복잡하고 쓸데없는 길을 만든다.
하등 쓸모없는 악랄한 몬스터란 말이다. 이 둥지도 어쩌면 예전에는 오아시스가 될 수 있는 수원이 있던 곳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물기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사막에는 이 쓸모없는 샌드웜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족속들이 있다.
마법사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여기저기서 대마법사란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차별성을 과시하고 싶은 것인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연구에 심취하고 싶은 것인지는 몰라도... ‘던전’이라는 것을 만들곤 한다.
그 던전이란 것은 마법사 특유의 아웃사이더 기질이 강렬하게 발현된 것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궁.’ 특히 넓고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은, 마법사들이 환장하는 던전과 미궁을 콜라보하기에 제격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던전 메이커.’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유해몬스터지만, 샌드웜은 사막에 정착하는 마법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 던전 메이커라는 별명도 마법사들이 붙인 것이다.
‘일단 소환해두면 알아서 사막 밑으로 파고들어서 미궁을 만들어 준다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야. 한 열흘? 쯤 내버려두면 지하 깊은 곳에 복잡한 미궁을 만들어준대.
가까운 곳에 수맥이 있어도 알아서 치워주고, 지면과 지층도 청소해주니 얼마나 편하겠어? 그렇게 내버려뒀다가,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아래로 내려가서 샌드웜만 치워두면 되는 거야. 그 뒤에 마법으로 미궁을 튼튼하게 보수하고...’
‘그래서. 너도 나중에 사막에다가 던전 만들어 놓고 살게?’
‘미쳤냐? 내가 뭐 부끄러운 것이 있어서 사막의 지하에 처박혀 살아?’
오래 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면서, 거리를 가늠했다. 그러면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지하 깊은 곳으로 떨어졌지만, 지도에는 유진이 선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길은... 있네.’
운이 좋군.
아니, 그럴 리가. 유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도를 보건데, 지하의 길은 과거 하멜의 고향 부근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걸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이라 퉁 쳐야 하나? 뭐 사막은 넓고, 당장 저 길이 고향까지 이어져 있는 지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소환마법은 지하 깊은 곳. 이 근처에서 발현되었다. 나하마의 모래술사들이 이 둥지를 던전으로 삼고 있다면, 저 앞 어딘가에서 모래술사나 어쌔신과 맞닥트리게 될 것이다.
그것까지는 문제없다.
다만 저 앞이 하멜의 고향이라는 것.
하멜의 무덤은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 하멜의 시체에 관한 기록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세냐의 전당에서 보았던 동화책에도 하멜의 시체가 남았는지, 동료들이 그를 어찌 하였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무덤이 있단다. 세상 어딘가에 하멜의 무덤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게 존재할 만한 곳은 하멜의 고향뿐이었다. 세냐, 아니스, 모론, 베르무트. 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무덤을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설마 죽은 동료의 무덤을 헬무드 어딘가에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향.
평범하던 꼬마가 가족과 모든 것을 잃고, 몬스터를 준동시킨 마왕에게 증오를 품은 곳. 그때부터 하멜은 농기구가 아닌 무기를 들었다. 무턱대고 검을 휘둘렀고, 잡일꾼을 필요로 하던 용병단에 들어갔다.
그곳은 하멜이 태어난 곳이다.
‘수백 년 동안 드러나지 않았으니 숨겨져 있을 거고.’
지하는 숨기기에 제격이다.
‘억측이지만, 아니스가 순례를 핑계로 나하마까지 온 것도... 뭐... 내 무덤에 추모나 하러 온 것일 지도 모르지.’
그 아니스가?
‘카자니 사막은 200년 전쯤부터 만들어졌어. 끼워 맞추면 시기도 대강 맞아. 나하마의 모래술사들이 개수작을 부리다가, 내 무덤을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세냐의 사역마를 죽인 것이라면?’
그렇다면 세냐의 은거에 나하마가 관여했나? 아니면 그 옛날부터 나하마의 뒤에는 헬무드가 있었나.
모르겠다. 그러니까, 직접 봐야 하는 것이다. 유진은 망토 안에 넣어 둔 손을 꺼내지 않고서 앞으로 향했다.
*
“라만 슐호브.”
라만은 몽롱한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흐릿한 시야에서 몇몇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잘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를 붙잡은 놈들은 회색의 복면으로 하관을 가리고 머리 위에는 터번을 쓰고 있었다.
모래술사들이다.
“그 잘난 라이언하트의 도련님이 왜 여기까지 온 거지? 그리고 왜, 카지탄 에미르의 전사인 네가 라이언하트의 길잡이를 하고 있는 거냐?”
“...”
라만은 꾹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는 샌드웜에게 잡아먹힌 유진을 구하기 위해 유사로 뛰어들었다. 라만이 바랐던 것은, 유사를 가로질러 샌드웜의 몸통을 베는 것이었다. 저만큼이나 거대한 샌드웜은 검강을 내뿜는 전사일지라도 상대가 버겁다.
그럼에도 라만은 유진을 구하고자 했다. 유사에 빨려 들어가던 라만을 구한 것은 유진이 다루던 바람이었다. 라만의 망막에는 그 순간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유진의 몸을 띄우던 바람이 라만에게 향했을 때. 유진은 더 이상 공중에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근처에는 모래회오리가 점점 크기를 키우고 있었고... 그렇게 운신이 자유롭지 못할 때.
아래에서 샌드웜이 치솟았다.
‘날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유진은 샌드웜에게 삼켜진 것이 아니라 제발로 뛰어는 것이다. 하지만 라만은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샌드웜의 아가리로 직접 뛰어들 리가 없지 않은가.
즉, 유진 라이언하트는 날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버린 것이다. 왜? 라만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구명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뿐이었다.
“타이리 알 마다니가 나하마를 배신하려는 건가?”
모래술사가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오지 말아야 할 자들의 발길을 막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지 않고, 오히려 길잡이까지 붙인 것이라면...”
“그대들은 이 지하 깊은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라만은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 오아시스. 환영이었지. 모래폭풍도 마법에 의한 것이었어. 그대들이 벌인 일 아니오?”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이군.”
모래술사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콰드득! 라만의 팔다리를 묶고 있던 압력이 거세진다.
“끄으...!”
“질문은 우리가 한다. 네 주인의 명예를 위해 입을 닫으려는 건가? 무의미한 일이다. 라만 슐호브. 어찌 됐든 넌 죽겠지만, 기왕 죽을 거면 고통스런 죽음보다 안락한 죽음이 낫지 않은가?”
“죽여라...!”
“유진 라이언하트는 왜 카자니에 온 거냐. 놈은 나하마에 입국한 순간부터 확실한 목적을 갖고 움직였다. 우리로서는 카지탄 에미르가 나하마를 배신하려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
“배신...?”
라만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배신. 그 말은 라만으로 하여금 많은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카자니에는 모래술사들이 있다. 그들이 모래폭풍을 일으켜 사막을 강제적으로 넓히고 있다. 그리고 카지탄의 에미르는 그 사실을 알고 협력하고 있다...
“이런 치졸한 방법으로 타국의 영토를 침략하는가!”
라만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갑작스런 외침, 입에서 튀긴 침. 모래술사는 눈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섰다.
“침략?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왕가를 수호해야 할 그대들이 왜 이곳에 있는가?! 그 모래폭풍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군. 라만 슐호브. 고작 이 정도 전력으로 사막화를 진행시킬 수 있다고 보나?”
모래술사는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전사가 무식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만큼이나 무식한 이야기를 들으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군. 사막화를 벌일 만한 규모의 모래폭풍을 일으키려면 모래술사 수백 명은 족히 필요하다.”
드드득! 몸을 옭아 죄는 모래의 힘이 계속해서 강해진다.
“끄으으... 그... 그렇다면... 왜 그대들은... 이곳에...?”
“대답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죽일 것이라면 이유라도 알려 달란 말이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왜 카자니에 온 거냐.”
“그 이유가 무어가 중요하다고! 유진 공자님은 이미 죽었잖은가! 너희가, 너희가 죽인 것이다!”
“그건 아니지.”
다른 모래술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죽는다면, 그건 사고다. 들어와선 안 될, 위험한 사막에 들어와서 어쩔 수 없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타이리 알 마다니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바로 네가 길잡이를 해주었으니 말이지. 가주의 총애를 받는다지만 결국은 방계에서 들인 양자. 대도시 에미르의 목을 건넨다면, 라이언하트도 분노를 누그러트리겠지.”
“이 개자식들!”
“네 주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아는 것을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유에 따라 이 사태를 보다 부드럽게 무마할 수 있을 테니.”
“무마할 수 있다고...? 자, 잠깐. ‘죽는다면?’ 유진 공자님은 살아계신 건가?”
라만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들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우선순위로 둬야 할 것은 카지탄의 에미르가 아닌 유진이었다.
“네 주인의 목보다 유진 라이언하트를 우선하는 건가?”
“뻔한 수작을 부리는 군. 유진 라이언하트를 인도한 것이 타이리 알 마다니의 명령이 아닌, 네 개인의 뜻이라 주장하는 건가.”
“공자님은 어디에 있는 거냐!”
“말이 안 통하는 군.”
“그냥 죽이는 편이 낫지 않나? 어차피 무가치한 목숨인데.”
“아니. 인질로 쓸 수 있을 지도 몰라.”
이유는 모르지만, 유진 라이언하트는 라만 슐호브를 구하려 들었다. 모래술사들은 더 이상 라만에게 질문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였다.
“어떻게 된 거지?”
“자이언트 샌드웜에게 통째로 먹혔는데... 그러고 살아남는 것이 가능한가?”
“꽁무니에 구멍이 났어.”
“그러니까, 샌드웜에게 먹혀서 꽁무니를 뚫고 나왔다고?”
사실을 확인해 볼수록 이해가 안 된다. 모래술사들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멋대로 들쑤시게 둬서는 안 돼.”
“...어쌔신들이 둥지를 탐색하고 있다. 머잖아 사로잡겠지.”
“그 뒤에는 어쩌지?”
“...라이언하트와 마찰을 빚는 것은 좋지 않아. 기억을 지우고, 카자니의 바깥에 던져두면 될 터. 아니, 차라리 우리 측에서 유진 라이언하트를 보호하는 것이 낫겠군. 베푼 은혜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그 분이 없기에 망정이지, 만약 계셨다면...”
“쉿.”
기겁한 모래술사가 입술을 오므리고 그렇게 말한 순간.
ㅡ쿠우웅! 커다란 굉음이 지하를 흔든다. 모래술사들은 흠칫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마나를 공명시켜, 이 굉음이 무엇에 의한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암전된 시야에서 같은 광경이 보인다. 머지 않은 곳. 시커먼 망토를 두른 유진 라이언하트가 다가오고 있다. 그가 은청색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접근을 차단하는 마법 결계가 부서지고 있다.
‘어쌔신들은?’
시야가 확장된다. 유진이 지나 온 길. 그 곳곳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어쌔신과 모래술사.
‘이렇게 빨리?’
이곳에 남아있는 어쌔신들. 그 하나하나가 무시 받지 않을 만큼 훈련되어 있다. 모래술사들도 마찬가지다. 고작 한 명에게 도륙 날 만큼의 전력이 아니란 말이다.
하물며 이곳은 어쌔신과 모래술사들에게 유리한 전장이다. 샌드웜이 만들어놓은 둥지. 그것만으로도 복잡한 미로인데, 수십 년 전 이곳을 사용했던 모래술사들은 이 미로를 더더욱 복잡하게 가꾸어놓았다.
이곳에 배치 된 어쌔신들은 눈과 귀를 감고도 미로를 탐색할 수 있을 만큼 미로의 지리에 밝다. 그런 상황에서 펼치는 은신술은 뛰어난 전사들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고, 불시에 가하는 기습은 반드시 전사의 목을 벨 수 있을 정도다.
이점을 갖는 것은 모래술사들도 마찬가지다. 지상에서처럼 거대한 모래바람은 불가능할 지라도, 사방은 물론이고 지면과 천장까지 모래인 이곳에서 펼치는 모래마법은 본래의 경지보다 위력적인 힘을 갖는다.
상대가 좋지 않았다.
카자니에 들어가는 것을 강행한다면 어떻게든 모래술사나 어쌔신과 충돌하게 된다. 그것은 오아시스에서 어쌔신들의 습격을 받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렇게 지하로 들어왔다. 이곳 어딘가에 모래술사들이 있고, 어쌔신들이 숨어 있다는 것도 확신했다.
제 한 몸 지킬 자신이 없다면 전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미궁에서 이점을 갖는 것은 어쌔신과 모래술사들 뿐만이 아니다. 유진은, 하멜은, 온갖 전장에 익숙했다.
어쌔신과 싸운 적도 있다.
고된 훈련으로 암살기술을 익히는 어쌔신들과는 달리, 헬무드의 마물과 마족들 중에는 타고난 암살자들도 많았다. 그림자와 그림자를 오가는 마물들. 조금의 기척도 흘리지 않고서 배후를 노리던 마족들.
불리한 상황에서 기습을 받는 것은 이골이 나있다.
그럼에도 살아남았다. 좆같은 기습을 받을 때마다 하멜의 몸에는 상처가 하나씩 늘어갔다. 상처가 늘 때마다 기습에 익숙해졌고,
언젠가부터 상처가 늘지 않게 되었다.
‘여기 어쌔신의 수준은 대단할 정도는 아냐. 은신이래 봐야 기술의 영역이고... 마나를 다루는 것에도 능숙하지도 않아.’
나하마의 악명 높은 어쌔신들은 고작 저 정도가 아니다. 최상위급의 어쌔신은 마물이나 마족에 버금가는 은신력을 가지면서,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고 끈질기다.
여태까지 유진이 상대한 어쌔신들은 끈질기긴 했지만 지독하진 않았다.
‘이곳이 나하마에게 중요한 장소라면, 이딴 놈들보다 제대로 된 어쌔신들이 있을 터.’
병력이 너무 하찮다.
모래술사들도 많긴 했지만, 실력이 대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이 정말로 타국을 침략하기 위한 요충지라면 보다 많고, 잘 훈련 된 병력이 주둔해 있어야 한다.
침략이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다른 목적이건 그것이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마땅한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곳의 대비는 너무 조잡하다.
‘나하마가... 술탄이 관여하고 있지 않은 건가?’
날 선 감각이 주변을 감지한다. 은신에서 공격이 발해지는 순간. 육체는 여유롭게 반응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은신은 유진도 할 줄 알았다. 이 미로는 어쌔신들 뿐만이 아니라 유진에게도 편한 전장이었다.
그리고 마법.
환염식은 유진이 지배하는 마나를 증폭시킨다. 그렇게 만들어 낸 마나실드. 흑암의 망토만으로도 5서클의 마법까지는 무난하게 막아내는데, 그것에 마나실드까지 더해졌다.
어지간한 마법은 정면에서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꼭 무시할 필요는 없었다. 유진은 무식하게 맞고 버티는 것보다는 피하고 반격하는 것을 좋아했다.
“크악!”
정면에서 쇄도하는 마법. 날카로이 벼려낸 모래의 탄환. 유진은 망토를 들춰 마법을 삼키고, 다시 돌려보냈다. 노리는 곳의 공간좌표는 진즉에 게산을 끝냈다.
돌아 온 마법이 모래술사의 가슴에 처박힌다. 기습. 꽤 많이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어쌔신들이 많다. 유진은 굳이 몸을 움직여 대응하지 않았다. 몸을 휘감은 바람이 어쌔신의 칼날을 가로막고, 몸을 찢는다.
‘점점 늘어나는데.’
넓게 확장된 감각. 지하미로 곳곳에 퍼져있던 어쌔신과 모래술사들이 이곳에 모여들고 있다.
‘길도 이어져 있고.’
유진은 한 손에 든 지도를 확인했다.
고향이 가깝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많이 이상하네.”
감정이 꿈틀댄다.
“살아서 내 무덤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환염식이 마나를 증폭시킨다. 별의 회전이 가속될 때마다 유진이 두른 불꽃의 색이 변한다.
“도굴꾼을 만나게 될 것이란 생각도 못 해봤고.”
“침입자!”
천장에서 떨어지는 어쌔신이 단검을 찌른다. 뻔한 기습이었지만, 놈이 외친 말이 유진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했다.
“침이이이입? 이 씨발놈아!”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마법을 펼쳤다. 화르르! 시퍼런 불꽃이 어쌔신의 몸을 휘감았다. 산체로 불태워 죽일 생각이었는데, 환염식으로 증폭된 화염마법은 화력이 너무 강했다. 놈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잿더미가 되었다.
“이 씨발 도둑놈의 새끼들!”
유진은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사막
“저 자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 모래술사들은 당황해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도둑? 엄밀히 따지자면 남의 구역을 멋대로 쳐들어 온 것은 유진 라이언하트다. 도둑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저 겁 없고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란 말이다.
“공자님...!”
라만도 유진의 외침을 들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꿈틀거렸다.
인질. 아까 모래술사들이 말하지 않았나. 라만은 유진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구속 된 팔다리를 자력으로 빼내려 했지만, 모래술사들은 눈뜬 장님이 아니었다.
“허튼 짓 하지 마라.”
콰르르! 지면의 모래가 라만의 몸을 휘감는다. 모래술사들은 라만을 향해 으름장을 놓고서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떡하지?”
“이곳까지 오게 해선 안 돼.”
“그건 당연히 아는데... 보고는?”
조심스런 질문. 목소리에는 떨쳐낼 수 없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모래술사들은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우리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
불편한 침묵 끝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고, 다른 모래술사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해 윗선에 보고를 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무마할 수 없을 만큼의 피해가 나긴 했다만...
‘그 분이 이런 피해를 신경 쓸 리가 없지.’
이곳의 모든 모래술사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짧은 시간에 꽤 많은 어쌔신과 모래술사들이 죽었지만, 그 분은 이런 피해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더 이상 일이 커져서는 안 된다. 이곳의 모두가 죽을지언정, 침입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그 분이 돌아오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만약 해결하지 못하고, 이 난리 통을 그 분이 보게 된다면. 해결하지 못하고 그 분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도 살지 않는 끔찍한 처지가 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모래술사들 중 그를 뚜렷하게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ㅡ아아악!
끄아아아...
멀리서부터 비명이 들려온다. 점점 가까워진다. 어쌔신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 지금 저기서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것은 모래술사들인 것이다.
“날 놔라!”
모래가 꾸물거리면서 라만을 앞에 내세운다. 라만은 숨을 헐떡거리며 발버둥쳤다. 하지만 모래술사들은 라만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나와 공명한 정신이 미로 곳곳에 퍼진 모래술사들에게 의지를 전한다.
이 미로에 들어와 있는 모래술사들의 수는 50명.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절반이 넘는 모래술사들이 죽었다. 조직된 군대도 아닌, 고작 19살의 소년에게 수십 명의 모래술사와 어쌔신이 도륙이 났단 말이다.
생존한 모래술사들이 한 곳에 모인다.
유진도 그 사실을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마법공격의 빈도가 확 줄었다. 이쪽으로 접근하던 기척들이 멀어져 희미해진다.
저 앞에서는 대량의 마나가 꿈틀거리고 있다. 유진은 그 한복판에서 알고 있는 존재감을 느꼈다.
라만 슐호브.
‘도망치라고 기껏 손을 써줬더니, 왜 저기 잡혀 있는 거야?’
뻐억! 유진은 발치에서 기습을 시도하던 어쌔신의 골통을 걷어찼다. 모래술사들은 저쪽으로 모여드는데, 소수의 어쌔신들은 아직 길 곳곳에 은신하고 있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거대한 마나가 요동친다. 유진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을 때.
통로의 모래가 휘몰아쳤다. 길이 한없이 좁아지면서 모래가 유진을 덮친다. 모래감옥. 아무리 유진이라도 이만한 규모의 마법을 마법으로 돌파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유진은 망토에 넣어 둔 상자를 꺼냈다. 월광검의 파편. 수 년 동안 마나 훈련에 사용했던 그 파편은 고급스런 상자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상자를 앞으로 집어 던졌다. 살아있는 것처럼 꾸물거리던 모래가 상자를 집어 삼킨다.
“쾅.”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망토의 후드를 뒤집어 썼다. ㅡ콰아앙! 유진이 뱉은 소리와 비교도 안 될 커다란 소리가 났다. 수십 명의 모래술사들이 펼친 모래감옥은 저 자그마한 파편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대량의 마나를 사용해 마법의 위력은 키울 수 있어도, 결속은 약하다. 마나의 통제에서 벗어난 모래가 흩어지고 무너져 내린다.
유진은 쏟아지는 모래 속을 나아갔다. 수천 수만 개의 모래 알갱이와 먼지가 시야를 가리지만, 유진의 감각은 앞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주변에 벌어지는 일을 정확하게 감지했다.
아래, 천장. 모래와 함께 딸려 나온 어쌔신들이 기습을 가한다. 일순간에 뿜어내는 검기. 살기는 전혀 흘러나오지 않고, 마나의 흐름마저도 공격 순간에만 집중시켰다.
“너무 많이 봤어.”
유진의 발이 땅을 딛는다. 콰드득! 흘러내리던 모래들이 송곳이 되어 어쌔신들을 꿰뚫었다.
월광검의 파편은 마법을 무너트리고 마나를 흩트린다.
유진은 2년 동안 파편을 상대로 마나의 결속력을 단련했다. 그렇게 제련해 낸 마나는, 유진이 도달한 경지 이상으로 강하고 빠르다.
‘뭘 한 거지?’
어쌔신들의 죽음보다 모래술사들을 당황시킨 것은, 모래감옥을 파훼시킨 수법이었다. 디스펠? 아니, 다르다. 디스펠의 마법을 이루고 있는 마나에 인위적으로 간섭하는 것. 방금의 유진은 모래감옥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 마나가 소멸해 버렸다. 마도왕국으로 이름 높은 아롯에도 저런 식의 디스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이언하트 비전의 마법인가?
“온다!”
계속 당황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모래술사들은 입술을 달싹대며 주문을 외우고, 가슴 앞에 모은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공자님!”
라만이 고함을 지른다. 그는 맨 앞에서 모래에 묶여 있었다.
“오, 오지 마십시오! 도망치십시오!”
“네가 뭐라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절 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널 왜 구하냐?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네.”
유진은 바닥에 떨어진 월광검의 파편을 들며 중얼거렸다. 마나가 다시 몰리고 있다.
‘시간을 끌기는 싫고.’
지도로 확인 된 장소는 저 앞. 모래술사들의 뒤로 길이 이어져 있다. 유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는다. 그는 손에 쥔 월광검의 파편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흠.”
콰아아! 모래가 일어서서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유진의 발밑이 파도에 끌리는 물결처럼 요동친다. 유진은 최소한의 저항만 하며, 모래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먼저 끌려간 시체들이 파도에 삼켜져서 으깨진다. 황백색의 파도가 시뻘건 빛으로 물들어간다.
유진의 팔이 머리 위로 들린다. 그는 상체를 뒤로 젖혀가며 투척을 위한 힘을 끌어냈다.
파도가 코앞까지 왔을 때. 유진은 월광검의 파편을 앞으로 던져버렸다. 마법을 무너트리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월광검의 파편은 파도를 관통하고도 던진 힘이 줄어들지 않았다.
“커헉!”
라만의 곁에 있던 모래술사의 목젖이 파편에 관통되었다. 놈이 두른 마나실드는 월광검의 권능에 저항하지 못했다. 유진은 그를 확인하지 않고 몸을 낮추었다.
환염식.
폭발은 아까부터 연쇄되고 있었다. 유진의 몸이 시퍼런 불길에 휘감긴다. ㅡ꽈아앙! 유진이 땅을 박찼을 때, 시퍼런 불꽃이 기다란 꼬리를 남겼다.
그렇게 유진은 순식간에 모래술사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모래술사들은 기겁하면서도 대응했다. 사방의 모래가 꾸물거리며 모래술사들에게 몰려든다.
대놓고 보이는 움직임. 진짜는 머리 위, 천장. 망토에 넣어두었던 손이 빠져나왔다.
콰르르르! 시커먼 채찍이 천장을 훑고, 주변을 휩쓴다. 즐겨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채찍의 사용에도 능숙했다.
“크륵!”
낭창거리는 채찍이 모래술사의 목을 휘감는다. 유진이 채찍을 확 끌어당기자, 모래술사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고 유진의 몸은 아래로 떨어졌다.
라만은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즉시 다시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비명과 피. 허리 위부터 난무하는 바람이 모래와 사람을 벤다. 그 사이사이를 누비는 마나의 탄환. 흩날리는 푸른 불꽃. 모래술사들이 외는 주문은 비명소리에 잡아먹히고, 수십 명이 펼치는 모래마법이 바람에 흩어진다.
그 사이를 노니는 유진은, 흡사 유령처럼 보였다. 마법이 접근하면 블링크로 이탈한다. 그러다가 망토를 펄럭여 마법을 삼키고, 전혀 다른 궤도로 돌려 보내 버린다.
무기가 계속해서 바뀐다. 무기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마법을 사용하고, 맨 주먹과 다리를 휘두르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라만은 저런 식의 싸움을 알지 못했다.
전사인 라만도 그러한데, 모래술사들의 대응이 유연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마법이...’
영창도 뱉지 않는다. 술식에 마나가 더해지고, 마법이 발현되는 과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대뜸 마법이 펼쳐진다. 하나가 아닌 동시에, 연속적으로. 그렇게 펼치는 마법의 위력도 터무니없다. 서클은? 모르겠다. 펼치는 마법의 서클이 그리 높은 것도 아닌데, 위력과 속도가 이해를 한참 벗어난다.
모래술사들은 끝까지 유진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더 이상 피가 튀지도 않았고, 비명소리도 맴돌지 않았다.
다만, 지린내는 풍겼다.
“너희 여기서 뭐하고 있던 거냐.”
수십 명의 모래술사들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유진을 올려다 보았다. 이해를 한참 벗어난 상황. 피할 수 없이 맞닥트린 현실이 거대한 공포가 된다. 모래술사는 오줌으로 축축히 젖은 가랑이를 오므리면서 몸을 떨었다.
“대... 대체... 당신은...?”
“너희 여기서 뭐하냐고.”
유진은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움직였다. 퍼억! 빠르게 던진 단검이 모래술사의 허벅지에 박혔다.
“끄으...!”
“술탄의 행사라 치기에는 병력이 너무 허접해. 술탄 몰래 뭘 하는 거냐?”
“자, 잠깐, 대체 무슨 말을...”
“너 따위를 심문하는 것에 공들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잘 들어. 죽을래, 말할래?”
“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술탄의 주관이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 설마 카지탄의 에미르냐? 그 씨발것이 땅속에서 개수작을 벌이는 거냐?”
“아... 아닙니다. 놈에게 협력은 구하고 있지만...”
유진은 다시 단검을 던졌다. 퍼억! 단검은 반대쪽 허벅지에 꽂혔다.
“아, 아멜리아 머윈.”
모래술사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대답했다.
“이곳은 아멜리아 머윈님의 던전입니다.”
“...구라 치지마. 아멜리아 머윈의 던전은 아슈르 사막에 있잖아.”
“그, 그 분은 6년 전부터 이곳에 와 계십니다.”
“6년?”
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머릿속을 맴도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무시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왜 아멜리아 머윈이 이곳에 온 거지?”
“...”
“아멜리아 머윈이 두려워? 그렇다면 내가 네 고민을 편하게 해주지. 나는 널 죽이겠지만, 그냥 죽일 거야. 아주 편하고 간단하게.”
모래술사의 눈이 요동친다. 그는 가쁜 호흡을 뱉으며 가슴을 억눌렀다.
“...이... 이 미궁은 사막화를 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카자니 사막에는 이곳 말고 다른 미궁들이 많은데, 이 미궁은... 10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6년 전, 미궁이 확장되었습니다. 불안정한 지하가 무너져 내린 것이라 추측되는데, 그 지하 깊은 곳에 커다란 문이 발견되었습니다.”
“...문?”
“예... 저희는 그 문을 열려 했으나, 도저히 열리지가 않았고... 그래서... 아멜리아 머윈님께 도움을 청한 겁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단검을 들었다. 그를 본 모래술사는 공포가 아닌 안도를 느꼈다.
“부디...”
퍼억! 유진이 던진 단검이 모래술사의 미간을 꿰뚫는다. 모래술사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서 죽어버렸다. 유진은 앞서 말했던 대로, 모래술사를 그냥 죽여 주었다.
모래술사가 바란 안식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멜리아 머윈의 분노는 피할 수 없다. 그 지독한 흑마법사는 존재를 죽이지 않고 노예로 삼아 버린다. 언젠가의 죽음을 바라며, 존재해 갈 평생을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언데드로 사는 것보단 그냥 편히 죽는 것이 안식이다.
“어쩐지. 병력이 너무 허접하다 했어.”
아멜리아 머윈.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특별하다 꼽히는 존재. 아롯의 흑색마탑주인 발자크 루드베스, 헬무드의 에드몬드 코드렛 백작은 마왕과 계약한 것으로 흑마법사가 되었다.
하지만 아멜리아 머윈은, 마왕이나 마족과 계약을 맺기 전부터 강력한 흑마법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건 마족과의 계약에서 크나 큰 권리를 주장하게 만든다. 물론 아멜리아 머윈의 ‘자유’는 유폐의 마왕이 양보해 준 것이겠지만, 그녀가 다른 흑마법사들보다 크나 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정도 급의 흑마법사가 있다면, 병력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지.’
이곳에 모래술사와 어쌔신들이 있는 이유. 아멜리아 머윈의 수발을 들고, 가까이 다가오는 여행객을 처단하기 위해서다. 죽은 모래술사의 이야기나, 아멜리아 머윈의 ‘진짜’ 던전이 아슈르 사막에 있는 것을 볼 때... 아멜리아 머윈이 이 던전에 머무르는 시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 공자님.”
라만이 덜덜 떠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곳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이, 이곳이 정말 아멜리아 머윈의... ‘검은 가시’의 던전이라면...”
“여기까지 와서?”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발을 때었다.
“다행히 아멜리아 머윈은 이곳에 없어.”
“지, 지금이라도 돌아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나가면? 아멜리아 머윈이 날 추적하지 않을까? 아마 추적할 걸. 나는 그녀를 모르지만, 나라면 아마 그럴 거야. 내 별장에 침입해서 개판을 친 놈은 당연히 잡아 죽일 거라고.”
“...”
“어차피 좋지 않게 맞닥트리게 된단 말이지.”
아멜리아 머윈과의 충돌은 상정하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충돌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을 확인해야 한다.
유진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는 라만을 돌아보지 않고, 시체를 지나서 앞으로 나아갔다.
“넌 안 도망치고 왜 따라 오냐?”
“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그야 그런데, 왜 안 도망 치냐고.”
“공자님에게 두 번이나 구명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만약... 만약 아멜리아 머윈이 돌아와, 공자님을 죽이려 한다면. 제가... 목숨을 바쳐 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나를? 허...”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라만을 돌아보았다.
“무슨 재주로?”
“...재주가 없어도 목숨은 바칠 수 있습니다.”
“괜한 짓 하지 말고 그냥 도망치지?”
“공자님을 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뭘 버리고 가. 내가 가라는데...”
유지는 혀를 차며 손을 들었다.
라만의 정신은 거기서 끊어졌다. 유진은 굳이 라만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저 앞까지 데려갈 수도 없으니, 그냥 기절시켜서 구석에 던져두었다.
‘...문?’
6년 전.
그리 오래 전은 아니다. 6년 전.
유진의 나이가 13살이었을 때.
‘혈계식.’
라이언하트의 보물고.
그 안에서 발견한 하멜의 유품.
유진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꽉 쥐었다.
‘이 미궁은 10년 전부터 있었다지만, 미궁의 끝이 무너진 것은 6년 전이야.’
만약.
유진이 이 목걸이를 취해서, ‘무덤’을 봉인하던 마법이 사라진 것이라면.
그렇게 ‘문’이 나타난 것이라면.
“도굴꾼은 따로 있었군.”
이 정도로 의식이 싸늘하고, 살의를 떠올리는 것은 환생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유진은 지하로 이어지는 깊은 구멍을 내려다 보았다. 지금 이곳도 사막에서 한참이나 깊은 지하인데, 눈앞의 구멍은 끝이 가늠되지 않을 만큼 깊은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깊이도 묻어놨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무덤
뛰어들긴 했지만, 바닥에 무방비로 처박히는 것은 사양이었다. 유진은 정령의 바람으로 몸을 휘감고서, 바닥 깊은 곳을 노려보았다.
‘과연.’
문, 같은 것이 보이기는 했다. 저 아래. 재질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문이 바닥을 대신하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지는 않았다. 사람이 넉넉히 오갈 수 있을 만한 틈이 열려 있다. 그걸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유진의 머리털은 분노와 살의로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6년 전. 저 아래의 문이 발견됐고, 나하마의 모래술사들의 능력으로는 문을 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멜리아 머윈이 이곳에 왔고,
문을 열었다.
“빠득.”
이빨이 갈린다. 유진은 추락을 가속시켜서 문의 바로 앞까지 떨어졌다. 바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유진은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끓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아직 저 안이 하멜의 무덤이란 것은 확인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무덤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고대의 던전 같은 것일지도 모르잖은가. 괜히 헛다리를 짚어서 허탈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리는 없지만.”
문에는 특별한 문양이나 각인은 새겨져 있지 않다. 마법이 남아있다면 술식에서 드러나는 버릇이나 마법의 수준으로 짐작이나 해 볼 텐데, 문의 마법은 이미 돌파되어 있다.
그렇다면 직접 들어가 볼 수밖에. 유진은 문의 틈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문 너머는 다시 길이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길. 주변은 더 이상 흙이 아닌, 문과 같은 재질의 금속으로 이뤄져 있다.
‘합성금속 같은데.’
툭. 유진은 힘을 준 주먹으로 벽을 두드려 보았다. 힘이 꽂히지도 않고, 마나는 빨아 먹힌다. 유진은 잠시 벽을 보다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드래곤이 날개를 접고 기어가기라도 한 것일까.
벽 곳곳이 움푹 파이고, 깨지고, 으깨지고. 참격인지 발톱자국인지 모를 흔적들이 어지러이 얽혀 있다.
‘이건...’
유진은 흔적들을 살피며 아래로 내려갔다.
‘전투의 흔적이야.’
어쩌면.
여기가 드래곤의 레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이는 흔적들은 드래곤의 잠꼬대 치고는 너무 격렬하지 않은가.
‘무기... 는 뭔지 모르겠어. 휘둘러서 베었나? 찌른 것 같기도 하고... 애당초 이만한 크기의 마나를 사용한 공격이라면...’
흔적을 읽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투의 흔적이라곤 확신하지만, 몇 명이, 왜,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는 추측이 되지 않는다.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흔적이지만, 더 보고 있어봤자 성과는 없을 것 같다. 유진은 벽에서 신경을 때고서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이 통로에는 본래 수십, 어쩌면 수백에 달하는 함정들이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휘말린 것인지, 아니면 아멜리아 머윈이 돌파해 낸 것인지. 함정들은 죄다 파괴되어 있었다.
‘...내가 무슨 황제도 아니고. 무덤에 이만큼의 함정을 설치하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판단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이곳은 누군가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드래곤의 레어에 걸맞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통로를 지나고, 바닥에 도달했을 때에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유진은 넋을 잃고서 앞을 보았다.
중앙에 선 동상. 모를 리가 없었다. 전생의, 하멜의 동상이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동상을 향해 나아갔다. 뚜렷하게 기억하고,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저 동상이 전생의 모습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진은 저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아롯의 왕립도서관, 아크리온. 세냐의 전당.
세냐는 그곳에 과거 동료들의 모습을 남겨두었다.
위대한 베르무트.
용감한 모론.
신실한 아니스.
우둔한 하멜.
“...하하.”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 동상은, 세냐의 전당에서 보았던 모습과 똑같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 삐딱한 자세. 아직은 많지 않던 흉터.
“기왕 남길 거면 웃는 얼굴로 만들라고 좀.”
하멜 다이너스.
(성력 421~459.)
개새끼, 바보, 병신, 얼간이, 쓰레기.
그렇지만 용감하고, 신실하고, 현명하고, 위대하던.
모두를 위해 희생하고, 먼저 떠나 우둔한 너를 기리며.
동상의 아래에는 추모석이 있었다.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추모석을 보았다. 알고 있는 필적이다.
모론의 큼직한 필적, 용감하고.
아니스의 반듯한 필적, 신실하고.
세냐의 삐뚤삐뚤한 필적, 현명하고.
베르무트의 날카로운 필적, 위대하던.
“...아 시발.”
눈앞이 흐릿하고, 코가 시큰거린다. 유진은 괜히 욕설을 내뱉으며 코를 부여잡았다. 눈을 문질러야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겠지만, 저 동상과 추모석 앞에서 눈물을 쏟고, 닦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딴 말은 나 살아 있을 때 할 것이지. 나 뒈지고 비석에다 적어두면 무슨 소용이냐? 내가 못 보잖아, 씨발.”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석에 손을 얹었다.
마냥 감상에 취해있을 수는 없었다.
‘이상해.’
동상과 비석은 아주 멀쩡하다. 어디 부서진 곳도 없고, 수백 년은 흘렀을 텐데 노화된 곳도 보이지 않는다.
그거야 뭐 이상하다 할 것은 아니다. 마법은 편리하다. 보존마법만 잘 걸어두면 수백 년은 노화 없이 유지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부수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진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무시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폐허.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다. 통로부터 남아있던 전투의 흔적.
이 폐허를 보고 있자니, 통로의 흔적들이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진다. 바닥은 박살나거나 뒤집히고, 기둥 같은 것들은 마치 창처럼 바닥과 벽에 처박혀 있다.
이곳에서 부서지지 않고 멀쩡한 것은, 하멜의 동상과 추모석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백 년 전. 세냐는 사역마의 죽음을 감지하고, 아롯을 떠나 하멜의 무덤에 왔다.
그 즉시 싸움이 벌어졌나? 일단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지 모를 도굴꾼과 맞닥트리고...
‘세냐는 강해.’
원래도 강했지만, 하멜이 죽고 나서는 더더욱 강해졌다. 유진은 그 시절의 세냐는 모르지만, 위치 크래프트로 엿본 ‘현명한 세냐’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세냐와 이만큼이나 싸울 수 있다면.
‘...세냐는... 이기지 못했어.’
만약 세냐가 싸움에서 이겼다면. 그녀가 이 처참한 폐허를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세냐는 여기서 죽은 건가?
“그럴 리가 없어.”
아롯에서 세냐의 환영을 보았다. 착각일 리가 없다. 은행 앞의 광장에서 마주쳤을 때. 세냐의 환영은 분명하게 뜻을 전해왔었다.
찾았다.
‘이곳에서의 싸움으로 부상을 입고... 은거했다.’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유진은 복잡한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체 누가 세냐를 그만큼이나 몰아붙였다는 건가. 역시 마족? 마왕이 배후에 있나? 유폐의 마왕, 멸망의 마왕. 둘 중 누가?
그럴 이유가 있나? 하멜은 죽었다. 유폐의 마왕성을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죽어버렸단 말이다. 그 뭔지도 모를 ‘약속’은 헬무드의 두 마왕을 300년 동안 침묵시켰다.
그 침묵을 깨고 마왕이 움직일 이유가 어디에 있나. 죽은 하멜의 무덤에 추모라도 하러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이곳에 마왕이 올 이유가 어디에 있지?
유진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듯한 추측은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방법은 하나 뿐이다. 세상 어딘가에 은거했을 세냐를 찾는 것.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수백 년 전의 진상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당사자를 찾아내는 것이 제일이다.
‘여길 조금 더 뒤져보고.’
이 폐허. 동상과 추모석 외에는 흔적이랄 것이 보이지 않는다. 널찍한 공간과 부서진 구조물들을 보면, 폐허가 되기 전에는 이것저것 많았던 것 같은데... 유진은 일단 폐허를 돌아다녀 보았다.
바닥에 처박힌 기둥을 살핀다. 균열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는데, 자세히 보니 깨알 같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마법에 관한 술식. 드문드문 있어서 원형은 알아볼 수 없다.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세냐의 갈겨 쓸 술식 말고, 다른 것들도 적혀있다.
전지전능하신 빛의 신이시여, 부디 이 우둔한 어린양을 보호하고 살펴주소서. 안식 뒤의 험난한 여정을 자비와 사랑으로 이끄시고, 어린양이 가는 길에 어둠이 드리워도 빛으로 길을 열어주소서.
“아니스 씨발아, 난 신따위 안 믿는다고.”
생전의 업을 성화로 태워주소서. 고통과 절망이 기다리는 문이 아닌,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천국의 문을 열어주소서. 천국에 들기에 부족한 선행은 부디 제 어깨에 올려주시고, 언젠가의 재회를 같은 곳에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소서.
“...썩을 년.”
한숨을 푹 내쉬며 기둥을 어루만졌다.
유진은 이 폐허가, 폐허가 되기 전의 광경을 떠올렸다. 그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동료들이 어떤 놈들이었는지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모론, 그 등신은 덩치에 안 맞게 눈물과 콧물을 질질 짜며 기둥을 세웠을 것이다. 마법으로 하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모론은 굳이 자기가 직접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어쩌면 이 깊은 지하를 모론이 직접 파 내렸을 지도 모른다.
세냐. 그 계집애도 울었을 것이다. 하멜이 죽기 전에 가장 많이 울었던 것이 세냐였다. 모론은 직접 동상을 만들려고 했겠지만, 세냐는 개지랄하지 말라면서 모론을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리고는 제 기억 속에 있는 하멜의 모습대로 동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스는 기둥에 기도문을 새기다가, 동상을 보고서 하지 않아도 될 지적을 했을 것이다. 하멜은 그것보다 못생겼던 것 같은데요? 아니스는 은은한 술냄새를 풍기면서 눈물을 참았을 것이다. 하멜이 죽어가던 때에도. 아니스는 그랬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술을 성수랍시고 홀짝거리다가, 마지막으로 신은(神恩)을 입으라며... 술을 입술에 적셔 주었었다.
베르무트는.
울었을까. 유진은 베르무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놈은 이곳에 와서도 하멜을 탓했을 지도 모른다. 네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모든 것을 탓했을 지도 모른다. 유진이, 하멜이 기억하는 베르무트는 그런 녀석이었다. 헬무드에 진입하기 전부터, 그리고 진입한 후에도. 마물과 마족, 몬스터 따위에게 죽은... 자기와 아무 관련 없는 시체들을 보면서.
구할 수 있었다.
구해야 했다.
그들이 죽을 필요는 없었다.
이런 말을 하곤 했었다. 그건 베르무트의 입버릇이었다. 여정에서 동료들이 어쩔 수 없는 부상을 입을 때. 그러고도 살아남고, 강력한 적을 쓰러트렸을 때. 그렇게 모두가 부상으로 인한 고통이 아닌, 성취감과 기쁨에 취할 때.
너희가 다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더 잘 해야 했다.
베르무트만이 그런 자조를 중얼거리곤 했었다.
‘븅신, 또 지랄이네. 뭐만 하면 그럴 필요가 없고, 자기가 잘해야 했대. 야, 네가 신이냐? 너도 똑같은 인간이잖아. 어떻게 너 혼자서 다 해? 그럴 거면 시팔, 왜 우리랑 같이 가는데?’
‘하멜. 베르무트님에게 지랄하지 마십시오.’
‘개수작 부리지 마, 아니스. 너도 방금 혀 찼잖아. 내심 저 새끼 지랄 꼴값이라고 떠는거 내가 모를 것 같아?’
‘저는 베르무트님에게 혀를 찬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랄 할 것을 예지하고서 혀를 찬 겁니다.’
‘쌍으로 꼴값을 떠는 군.’
그때의.
다시는 나눌 수 없을 대화를 떠올렸다. 동상과 추모석을 보고 조금 울었는데, 빌어먹을 눈물이 다시 흐른다. 유진은 이번에도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냥, 흐르게 내버려 두었다. 멈추려 하지도, 참지도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울겠나.
‘...죄다 부숴졌는데.’
단 하나.
부서지지 않은 곳이 있다. 동상의 뒤편. 벽에 나있는 문. 유진은 그곳을 노려보았다. 상처 하나 없는 동상과 추모석과는 달리, 문은 상처가 꽤 많았다.
하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유진은 문을 향해 다가갔다. 겉으로 보이기는 멀쩡한데, 안은 박살이 나있을 지도 몰라. 일단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기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끼이익.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유진은 숨을 삼키며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안은 개판이 나 있었다. 천장도, 벽도, 멀쩡한 곳이 없다.
하지만. 기다란 복도 끝의 문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고.
그 밑에 누군가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긴장은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놈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 놈에게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놈이 몸을 일으킨다. 전신을 가린 시커먼 갑옷. 얼굴을 가리고 있는 투구. 그 안에서 시뻘건 안광이 번뜩거린다.
“...너 뭐냐?”
유진은 일어선 놈을 보며 내뱉었다.
“뭔데 거기 앉아서 문을 막고 있어?”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휘청거리며 걸어온다. 전신의 털이 곤두선다. 유진은 저 앞에서 다가 오는 갑옷에게서 포악하고 강렬한 마기를 느꼈다.
‘마족?’
아니, 느낌이 다르다. 마족과 계약한 인간인가? 모습이나 분위기를 보면 흑마법사는 아니고. 그렇다면 흑기사? 마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힘을 받은 타락한 기사.
‘아니... 아니야.’
놈에게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물도 아니고, 마족도 아니고, 계약한 인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언데드.’
설마, 아니겠지.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망토에 손을 넣었다.
“너 뭐냐고 씨발.”
“...도둑...”
투구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 대답하는 것을 보면 이성은 남아있는 모양인데...
“...이름.”
유진은 섬뜩한 불안과, 분노와, 살의를 느꼈다. 그를 감추지 않았다. 망토가 펄럭거리며 푸른 불꽃이 유진을 휘감는다.
“이름 말하라고. 개자식아.”
“나는...”
언데드.
데스나이트가 검을 뽑는다. 시커먼 색의, 길쭉한 검.
유진이 모르는 검이다.
“나는... 우둔한 하멜이다.”
“뭐라는 거야 씨발놈아.”
그 대답이 유진의 이성을 끊었다.
“하멜? 네가? 그것도 우둔한 하멜?”
콰드득! 유진이 밟은 바닥이 으스러졌다.
하멜은 나다.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유진은 눈앞의 데스나이트와 누가 진짜 하멜인지 겨룰 생각이 없었다. 하멜은 바로 그였고, 그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눈앞의 데스나이트는 가짜였다.
“하멜은 씨발 제 입으로 그딴 말 안해.”
저건 자신이 하멜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정신병자다.
정신이 맛탱이가 간 데스나이트란 말이다.
다만. 저 육체는.
어쩌면.
“투구 벗어, 개새끼야.”
유진은 고함을 지르며 땅을 박찼다.
무덤
내뱉긴 했지만, 데스나이트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놈은 흉흉하고 불길한 안광을 내뿜었고, 유진은 그에 부족하지 않을 분노와 살의를 내뿜었다.
그렇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불길하고 좆같은 상상. 아니, 상상은 아니다. 저렇게 눈앞에 있지 않은가.
이곳은 하멜의 무덤이다.
데스나이트는 죽은 전사의 시체로 만든다. 미련, 분노, 증오. 그따위 감정에 찌든 혼은, 죽어도 이승을 떠나지 않고 시체에 어린다.
대부분의 언데드는 그런 혼을 꼬드겨서 만든다. 네가 바라는 것을 이뤄줄 테니, 혼을 바치고 노예가 되어라. 떠나지 못하는 혼들은 그런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다. 지독한 원한은 평생토록 윤회하지 못하고 노예가 되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리치는 미치광이 마법사가 제 자신을 스스로 언데드로 만드는 것이지만, 데스나이트는 죽어서도 남아버린 혼이 타락한 것. 살아있는 존재가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복수 따위를 위해 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것이 데스나이트다.
그러니 강할 수밖에 없다. 혼을 담보로 얻은 힘이 얼마나 끔찍하고 지독한지, 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뭐 어쩌라는 거냐.
‘하멜?’
제 이름이 하멜이란다.
‘네가 하멜이라고?’
미친 새끼. 뒈져서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렸나.
유진은 자기 자신이 하멜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애당초 할 필요가 없는 의심이었다. 유진의 혼이 하멜이라는 것은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가 확인했었다.
템페스트의 확인이 없었어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가 하멜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냔 말인가. 기억, 경험, 모든 것이 뚜렷하다.
하지만.
혼은 하멜의 것이어도, 육체는 아니잖은가.
‘체격은...’
하멜과 같다.
‘버릇은... 없어. 내가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잖아.’
전투에서 버릇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전생의 하멜은 의도적으로 제 버릇들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고착된 버릇을 붙들고서는 성장할 수 없다. 헬무드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베르무트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한 강박으로, 제 자신에게 도움되지 않는 버릇은 모조리 지워버렸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는 놈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데스나이트라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얼굴. 얼굴을 봐야 한다.
‘내 시체로 언데드를 만들어서, 다른 혼을 집어 넣은 것이라면.’
그렇다 해서 분노와 살의가 사그라지진 않는다. 저건, 내 몸이다. 전생의 몸. 세냐와, 아니스와, 모론과, 베르무트가. 공들여 무덤을 만들고, 안치해 놓은 육신.
“어떤 씨발 새끼가.”
ㅡ파악! 유진은 공중으로 튀어오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 몸에.”
망토가 펄럭거린다. 안쪽의 공간이 열리면서 무수히 많은 무기의 손잡이가 튀어나온다. 유진은 그 중 두 자루의 칼자루를 쥐었다.
“널 처넣은 거냐?”
슈왁! 양 손으로 잡은 두 개의 검을 아래로 내리찌른다. 순식간에 머리 위를 빼앗겼지만, 데스나이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놈은 능숙하게 몸을 뒤틀며 검의 궤적에서 벗어나고,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커먼 건틀릿에 감싸인 손이 가까이 온다. 유진은 빠득 이를 갈면서 양손을 움직였다. 꽈앙! 유진의 손을 휘감은 푸른 불꽃이 폭발했다.
‘마나실드.’
엄밀히 말하자면 데스나이트나 흑마법사 따위가 사용하는 것은 마나가 아니라 마기다. 하지만 용도는 다르지 않다. 저 농밀한 마기는 몸을 휘감은 방패가 된다.
밀렸다.
유진은 뻐근한 양손을 뒤로 뺐다. 힘의 출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진이 마나를 잘 다루고 환염식으로 가진 마나를 효율적으로 증폭시켜 본들, 유진이 마나에 입문한 지는 겨우 6년 밖에 안 된다.
눈앞의 데스나이트와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놈에 대해서 몰라.’
저 데스나이트는 얼마나 오래 묵었을까.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저 데스나이트를 만든 것은 아멜리아 머윈이다. 6년 전 무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서... 하멜의 시체로 데스나이트를 만들었다. 혼은 남아있지 않으니, 다른 혼을 집어넣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더더욱 유진은 데스나이트를 이길 수 없다. 아멜리아 머윈 급의 흑마법사가 만든 데스나이트라면, 라이언하트의 가주인 길레이드나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급만큼 강할 지도 모른다.
이성은 그리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뭐 어쩌라고.
콰르르! 유진을 휘감은 불꽃이 더더욱 강렬해진다. 그는 아낌없이 마나를 폭발시키며 망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화악! 데스나이트의 손이 유진을 잡으려 든다. 유진은 즉시 블링크로 그 자리를 벗어나, 데스나이트의 배후로 이동했다.
꺼낸 것은 커다란 도끼. 유진은 망토의 안에서 도끼를 뽑으며 몸을 회전시켰다.
날려버리지는 못했다. 도끼가 몸에 닿는 순간, 데스나이트의 검이 움직였다. ㅡ쉭! 그 커다란 도끼가 중간부터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진다. 유진은 즉시 도끼를 놓고서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은 이미 망토의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어서 꺼낸 것은 도끼보다 커다란 대검. 유진은 그걸 머리 위로 치켜들고,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향해 내리 찍었다.
유진은 물러섰지만, 데스나이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놈은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둘렀다. 콰직! 대검이 산산조각난다. 유진은 제 공격과 무기가 박살나는 것을 보지 않았다.
데스나이트가 검을 어떻게 휘두르는지를 보았다. 버릇은 의도해서 지워버렸다지만, 검을 휘두르는 모양. 마나의 배분. 검강의 출력... 그런 것들은 버릇이 아닌, 기본기의 영역이다. 버릴래야 버릴 수 없고, 버려서도 안 될 것들.
‘...닮았어.’
부정할 수가 없었다.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은 하멜과 닮았다.
움직임만 그랬다.
놈은 하멜이 아니다.
유진은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망토가 크게 펄럭인다. 유진은 그 중심에서 몸을 낮췄다. 접근하던 데스나이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고, 검을 들었다.
뻐억! 망토의 틈에서 쏘아진 공격이 충격이 된다. 허나 데스나이트의 마기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안광을 빛내며, 곧추 세운 검의 너머를 보았다.
창.
양손으로 쥔 창이 데스나이트를 겨눈다.
“소년. 여러 무기에 능하군.”
데스나이트가 입을 열었다. 소년?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무릎을 낮추었다.
“흉내를 내고 싶으면 제대로 내.”
하멜은 그딴 말 안 해.
“투구, 안 벗냐?”
“그럴 이유가 없다.”
"넌 그냥 아가리 닥치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제 이름이 하멜이라 주장할 거면, 그딴 말투부터 집어 치워야지. 하멜은 어릴 적에도, 나이 먹고서도, 뒈지기 직전까지도 그딴 말투는 안 썼어.
쉭.
창이 쏘아진다. 아니, 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흔들리는 창끝, 빼고, 당기는 움직임. 단순히 눈속임에만 의의를 두지 않았다. 노골적인 기세는 가짜를 진짜라 착각시킨다.
데스나이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물러서서 창과 거리를 두었다.
그렇게 거리가 벌어졌을 때.
유진의 몸이 가속했다. 창을 휘감은 불꽃이 강렬한 빛을 발한다. 창이 흔들릴 때마다 불씨가 흩날린다. 환염식은 그 모든 불씨를 마법으로 바꾸었다. 불꽃의 사슬이 창과 함께 허공을 꿰뚫는다.
푸확! 몸을 휘감으려는 사슬이 시커먼 빛에 양단된다. 창과는 닿지 않았다. 충돌의 순간, 창의 궤적이 꺾였다. 일직선의 창대는 유진에 의해 유연하고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렇게 창은 한 마리의 독사가 된다.
쩍 벌린 아가리. 독니가 데스나이트를 물어뜯는다. 파앙! 데스나이트의 마나실드가 요동친다. 허나 물러서게 만들지는 못했다. 제대로 파고들어도 얕다. 쑤셔 박을 힘이 부족하다.
보다 확신하기 위해서였다. 무기를 다루는 기술은 하멜의 것. 자신이 하멜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이딴 기술은 읽고 간파해야 한다.
“소년의 기술이 놀랍군.”
“아가리 닥치라니까.”
마냥 당한 것은 아니다. 물어뜯기는 순간 물러섰고, 더 파고들지 못하게 걷어냈다. 놈의 기술도 정교하고 훌륭했다. 다만, 하멜을 주장하기에는 부족할 뿐. 그냥 걷힌 것인데도 뼈가 찌르르 울린다.
그리고 부숴진다.
유진은 산산조각나는 창을 보았다. 데스나이트의 검. 기교랄 것도 없는 단순한 찌르기. 하지만 강하고 빠르다. 놈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포악한 마기가 공간을 뒤덮는다. 유진은 전신을 옭아 죄는 압박감을 떨쳐내며 손을 망토의 안에 쑤셔 넣었다.
“안타깝군.”
데스나이트가 중얼거린다. 어느새 놈은 코앞까지 와서, 시커먼 참격을 들이밀고 있었다.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안광. 하지만 저 쉰 목소리가 뱉은 말이 노골적이다.
유진은 더 이상 얼굴을 일그러트리지 않았다. 분노와 살의가 끓는 점을 아득히 넘어 차갑게 굳는다.
검광이 어둠을 갈랐다.
순간. 데스나이트는 무엇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럴 수밖에. 놈의 참격은 목젖까지 접근했었다.
그런데 베지 못했다. 검이 옆으로 꺾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유진의 힘은 데스나이트의 검을 쳐낼 만큼 강하지 않다.
“...뭘 한 거지?”
“몰라?”
유진은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네가 하멜이 아니란 증거야.”
대마법사, 세냐가 경악할 정도의 마나의 운용. 친화력도 뛰어났지만, 하멜이 특히 뛰어났던 것은 마나의 지배력이다. 마법에 정통한 것도 아닌데, 전생의 하멜은 마나를 굉장히 잘 다뤘었다.
하멜의 육체는 모론처럼 강하지 않았다. 베르무트처럼 완벽하지도 않았다. 마법은 물론 신성력도 쓸 줄 몰랐다.
그럼에도 하멜이 전장에서 날뛸 수 있었던 것은. 그 거대한 카마쉬의 공격을 정면에서 쳐내고,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은.
“패링?”
데스나이트는 빗겨간 검의 위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단순한 패링은 아니다. 공격과 공격이 닿는 순간. 그 찰나에 검강을 이룬 마나의 파장을 공격과 동조시킨다. 그렇게 닿아서, 흘려낸다.
‘무거워.’
유진은 욱신거리는 팔의 통증을 무시했다. 목구멍에서도 피 맛이 난다. 타이밍은 확실하게 맞았는데, 저만큼의 공격을 무탈하게 흘려낼 수는 없는가. 유진은 그를 내색하지 않으며 심장에 어린 별을 더욱 회전시켰다.
쾅, 쾅, 쾅.
별이 그리는 원 안에서 무수히 많은 별이 폭발하고, 만들어진다.
꽈앙!
푸른 불꽃에 휘감긴 검이 어둠과 충돌한다. 오래 끌 수가 없는 싸움이다. 유진은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데스나이트에게 연거푸 공격을 퍼부었다. 데스나이트는 반격을 노리며 대응했지만, 그의 검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유진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놈이 검을 휘두르려 하면 아래로 찌른다. 찌르면 위에서 찍는다. 찍으면 옆으로 벤다. 유진은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읽고, 먼저 움직였다.
뼈가 뜯기고, 근육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이 잘난 몸뚱이도 이만큼의 혹사는 견뎌내지 못하나? 상관없다. 이보다 훨씬 못난 몸뚱이로도 잘 싸워 왔다. 정신만, 멀쩡하면. 움직일 수 있다. 싸울 수 있다.
투구를 벗겨서 얼굴을 볼 것이다. 놈이 벗지 않는다면 투구를 부숴버릴 것이다. 그렇게 보게 된 얼굴이
하멜이 아닐 지라도.
죽인다. 그것은 바뀌지 않는다. 놈이 데스나이트라는 것만으로도 죽일 이유는 충분하다. 게다가 이, 무덤에, 감히, 틀어박혀서, 주인이라는 되는 것처럼, 통로의, 문 앞에 앉아서, 자기 이름을 하멜이라고, 네가?
너 따위가?
“음...!”
밀린다.
데스나이트의 몸이, 발이,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다. 원하는 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검은 방해가 될 뿐이었다.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은 완전히 유진의 통제 하에 있었다. 그가 아무리 유진보다 힘이 강해도, 유진의 기술은 놈의 힘을 웃돌았고, 힘을 과시하지 못하도록 휘두르고 있었다.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연거푸 공격을 퍼부어대지만 데스나이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다. 애당초 언데드에게 부상은 무의미한 것. 놈이 보유한 마기라면 어지간한 상처는 즉각 치료해 낼 것이다.
‘확실하게.’
호흡을 의식하지 않는다. 모든 의식을 공격에 몰두했다. 반격, 검, 상체를 뒤로 젖힌다. 몸에 두른 마나실드가 희미하다. 환염식으로 폭발시키는 모든 마나를 검에 실었다.
폭풍검 위니드.
바람이 불꽃과 얽힌다.
카가각! 검이 갑옷을 긁는다. 데스나이트가 기겁하며 물러선다.
넌 하멜이 아니다. 기술도 빈약하고, 전투감각도 부족하다. 비대한 힘을 과시하면서도 그를 완벽하게 다루지 못한다.
‘애당초 너는.’
유진의 몸이 미끄러진다. 단순하고 정직한 찌르기. 그냥 일직선으로 찌를 뿐. 충분한 속도가 커다란 위력을 만들지만, 그것 뿐. 검에 어린 마기가 폭발하며 유진을 휘감는다.
블링크. 그 직전에 발로 땅을 찍는다. 푸확! 지면이 융해되고, 끈적이는 아교가 데스나이트의 발을 휘감는다. 그리 보일 뿐, 놈의 마기와 닿는 순간 아교가 흩어져 버린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놈이 잠시 신경 쓰게 만드는 정도면 된다.
‘검사도 아니잖아.’
꽤 잘 다루기는 하지만, 데스나이트가 될 정도의 실력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검술이 조잡해. 어딜 가서도 대우받을 검술이란 건 인정해준다. 하지만 이깟 검술로 베르무트의 곁에 설 수 있을 리가 없잖나. 300년 전. 놈을 추종하는 기사들 중에서 데스나이트보다 검술이 부족한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놈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자세를 바로 잡았다. 오른손으로 휘두르면서 왼손을, 어깨를, 무릎을 움찔댔다. 시선은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조금 늦게 따랐다.
놈은 검사가 아니다.
공격.
데스나이트가 몸을 뒤튼다. 콰르르르! 휘두른 검에서 뿜어져 나간 마기가 복도를 뒤덮는다. 무언가가 박살나고, 바닥에 떨어진다.
수많은 무기들.
‘그 짧은 시간에 연속적으로... 블링크를 펼쳤다고?’
데스나이트의 안광이 요동친다. 뒤. 몸을 돌리는 것보다 마기를 내뿜는 것이 빠르다. 불꽃이 마기와 얽히고, 터졌다. 의도한 폭발. 고밀도의 마나가 감각을 뒤덮는다. 거기서 하나, 둘, 수십, 수백 개의 점이 나타난다. 모두 다 공격이었고, 난사되었다.
콰콰쾅! 수백 다발의 매직미사일이 흔들리는 마기를 관통한다. 그 한복판에서 유진이 몸을 틀었다.
“낯짝 좀 보자고.”
거친 호흡으로 내뱉는 말.
위니드의 검광이 어둠을 갈랐다.
데스나이트의 투구가 반으로 쪼개졌다.
툭.
떨어지는 소리는 하나. 유진은 데스나이트의 뒤편으로 떨어져, 고개를 돌렸다.
데스나이트는 쪼개진 투구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서 멈춰있었다. 유진은 헐떡거리는 호흡을 가다듬고서 놈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짧은 머리카락. 잘린 왼쪽 귓불. 흉터가 얽힌 뒷목.
“날 봐.”
유진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데스나이트가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턱 끝에서부터 눈과 이마를 가로지르는 흉터. 잘 아는 흉터다. 진짜로 죽기 전에, 가장 죽음에 가까웠던 흉터가 바로 저것이었다. 헬무드에 진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폐의 칼과 싸워서 입은 흉터.
‘귀는... 참혹의 마왕에게 뚫렸었지.’
마창 루인토스.
갑옷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오른족 어깨에는 살육의 마왕과의 싸움에서 입은 흉터도 남아있을 것이다. 놈의 무기, 분쇄추 지골라스. 물러서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몸이 반토막 났을 거다.
그때보다 유폐의 칼에게 얼굴을 썰렸을 때가 더 죽음에 가까웠다. 저 흉터를 보고 있자니,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한 지금의 얼굴이 왠지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새끼. 잘생겼네.”
유진은 하멜의 얼굴을 보며 이죽거렸다. 수백 년이 흘렀는데도 저 얼굴은 썩지도 않고, 전생의 그대로였다.
다만. 생기는 없었다. 피부는 핏기 없이 창백하고, 두 눈은 썩은 피처럼 칙칙한 붉은 색이다.
“혼은 존나 못생겼는데, 얼굴은 잘생겼단 말이지.”
데스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놈은 멍한 눈으로 양 손에 든 투구를 내려 보고 있었다.
“...크으... 우우...”
놈의 몸이 덜덜 떨린다. 콰직! 손아귀에 들린 투구가 박살난다.
“크어어어!”
데스나이트가 괴성을 지르며 검을 집어 던졌다.
무덤
콰아아앙!
데스나이트가 던진 검이 복도를 관통하고, 폐허에 처박혔다. 피하긴 했는데, 안도할 수는 없었다. 데스나이트가 유진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썩을.’
덥지는 않은데, 몸을 너무 격렬히 움직여서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오래간만의 피로감. 육체 뿐만이 아니었다. 코어의 마나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다. 무모한 패링을 연속적으로 펼쳤고, 방어를 뚫기 위해 힘을 과용해 버렸다. 환염식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마나가 고갈되어 바닥에 엎어졌을 것이다.
‘이제 어쩐다.’
얼굴은 봤다. 저 몸뚱이가 하멜의 시체라는 것을 확인했다. 싸우면서, 저 몸에 들어간 혼이 누군지 모를 새끼의 혼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그것으론 부족했다. 유진은 저 데스나이트를 죽여버리고 싶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환염식을 운용했다.
인간의 급소는 심장.
데스나이트는 심장이 뛰지도 않고, 피가 흐르지도 않는다. 죽이기 위해서는 더 재생하지 못하도록 갈기갈기 찢어버려야 한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을까? 못해도 해야지, 뭔 당연한 생각을 하는 거냐. 유진은 스스로를 재촉하며 검신에 바람을 휘감았다. 운용할 수 있는 마나의 여력이 줄어든 만큼, 정령이 불러일으킨 바람을 더해 넣었다.
ㅡ꽈앙!
유진의 몸이 치솟는다. 터져 나오는 핏물을 삼키고, 아래를 보았다. 폭발이라도 터진 것처럼 깊이 파인 지면에서 데스나이트가 몸을 일으킨다. 검을 버렸을 뿐인데, 놈은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했다.
저게 본래의 실력인 것이다. 능하지도 않을 검을 쥐고,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고 어쭙잖은 기술을 우선하려고 드니 무디고 단순했다.
지금은.
‘씨팔.’
공격을 받을 때마다 뼈가 뽑히는 것 같다. 패링은 하고 있는데, 흘려낼 때마다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간다. 그렇게나마 흘려내는 것이 기적인 것이다. 월광검의 파편을 상대로 마나의 장악력을 늘렸기에 망정이지, 그마저 하지 않았다면 패링만으로 마나가 바닥을 보였을 것이다.
‘스펙이 너무 딸려.’
놈이 검을 쥐었을 때에는 상대가 쉬웠는데. 검을 놓고 맨손으로 싸우니 상대가 버겁다. 게다가 데스나이트의 전투방식은 읽어내고, 흘려내고, 대처하기 버거울 만큼 난잡했다.
흡사 짐승이나 몬스터와 싸우는 것 같다.
맨 손. 건틀릿을 끼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주먹으로 패는 것도 아니다. 시커먼 마기를 손에 두르고, 그것을 손톱이나 발톱처럼 휘두르고 있다.
‘클로? 아니, 달라. 손가락을 꺾고, 손아귀의 힘도 사용하고 있어.’
손등에 칼날을 달거나, 손끝에 칼날을 달거나. 그런 류의 무기는 베고 할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놈은 아니다. 악력과 관절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양팔만 쓰는 것도 아니다.
자세.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양 팔은 바닥에 닿을 듯이 가깝다. 두발로 서는 것보다 저렇게 선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그만큼 민첩하다.
‘씨발. 기껏 몸에 처넣을 거면 인간을 처넣어야지. 뭔 몬스터를 처넣어 놓은 거야?’
몬스터... 아니, 정말 그런가? 대화를 나누는 이성. 난잡하면서 야만스런 전투방식. 주된 무기는 양 팔, 손톱. 엉거주춤해 보이지만 중심은 확실히 잡힌 하체. 이성을 상실한 광란.
이런 걸 본 적이 있는데.
“...라이칸스로프?”
그렇게 내뱉은 순간. 콰드득! 데스나이트의 손톱이 위니드를 긁는다. 유진은 꺾이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함께 몸을 돌렸다. 그렇게 팽그르 돌아서 뒤로 떨어졌다.
“크르륵!”
데스나이트가 짐승의 울음소리를 낸다. 꽈득, 꽈드득! 부딪히고 갈리는 이빨. 힐끗 본 발은 금속의 부츠를 신고 있었지만, 그곳에도 시커먼 마기가 발톱이 되어 튀어나와 있다.
“맞네 씨발. 그게 무슨 조합이야? 왜 인간의 시체에 라이칸스로프의 혼을 처넣어놨어. 너 대체 뭐냐?”
“크어어어!”
말이 안 통한다. 유진은 입에 고인 피를 퉤 뱉으며 데스나이트를 노려보았다.
“...별에 별 짓을 다 하는 군.”
유진은 그렇게 내뱉고서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커어어! 데스나이트가 포효하며 덤벼든다. 아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쓸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써야 했다.
자그마한 상자가 유진의 손아귀에서 박살난다.
베어오는 손톱에 파편을 집어 던졌다.
‘파편 하나로 전부 다 흩트릴 수는 없나.’
하지만 위력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줄였다. 흔들리는 마기에 위니드의 참격이 파고든다. 카캉! 위력이 준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 진짜 월광검이라면 모를까, 고작해야 파편은 사용하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해낸다. 유진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데스나이트의 손톱을 밀어냈다. 그러다가 떨어지는 파편을 낚아채고, 다시 놈에게 집어 던졌다.
그걸 반복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어지러운 궤적을 읽고,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파편을 잡고, 던지고, 공격하고, 잡고. 온갖 싸움에 익숙했지만, 전생에도 이렇게 골치아픈 싸움을 해본 적은 없었다.
숨이 가빠져 온다. 스펙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피차 힘을 소모하고 있을 텐데, 데스나이트의 마기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을 받을 때마다 더욱 흉폭하게 날뛴다.
흑암의 망토. 5서클의 마법까지는 무리없이 막아내는 아티펙트지만, 데스나이트의 공격에서 유진의 몸을 완벽하게 보호해주지는 못했다. 얕은 상처들이 싸인다. 유진의 몸이 피에 범벅이 되간다. 그만큼 눈앞은 흐릿해진다.
하지만 정신은 날카로이 벼려진다. 슬슬 코어의 마나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물러서야 하나? 스펙이 부족해. 앞으로 몇 년 만 지나면 처바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물러서자고? 내가? 내 시체를 가지고 장난친 걸 앞에 두고서?
몇 번이나 파고들었다. 그런데 갑옷이 너무 단단하다. 관절부에 칼날을 쑤셔 박았는데, 베어지는 느낌이 안 든다. 시체도 강화했다는 거겠지. 데스나이트는 최상위 언데드다. 고작 파편 하나로 무력화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점점.
유진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파편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분전하고 있지만, 유진의 육체는 아직 하멜의 전력을 끌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피지컬은 충분하지만 마나의 용량이 부족하다.
“크륵!”
유진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피를 삼키며 과감히 몸을 들이밀었다. 푸확! 스쳐지나간 손톱이 옆구리를 베지만, 그것도 무시했다.
그렇게 데스나이트의 가슴에 월광검의 파편을 처박았다. 요동치는 마기가 유진의 팔과 몸을 할퀸다. 유진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파편을 강하게 밀었다. 그렇게 방어가 희미해졌을 때.
마법을 난사했다. 폭발과 탄환이 데스나이트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월광검의 파편은 마법을 무로 되돌린다. 그건 유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닿지만 않으면 된다. 유진은 핏발 선 눈으로 마법의 궤적을 모조리 통제했다. 연쇄적으로 터진 폭발이 파편의 주변을 집어 삼킨다.
“크어어어!”
광기에 찬 울부짖음과 함께 데스나이트의 몸이 뒤로 밀려난다. 유진은 떨어지는 파편을 손으로 잡지 못했다.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는 피를 컥컥 토하며 시커먼 연기를 노려보았다.
물러섰을 뿐. 데스나이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놈이 입은 흉갑을 박살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크... 크큭!”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데스나이트의 터프함에 웃은 것이 아니었다. 박살난 흉갑. 드러난 가슴.
아무 것도 없다. 뻥 뚫린 구멍만 보인다. 전생에 하멜을 죽게 만든 상처는 수백 년이 흘러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구멍의 중심. 시뻘건 색의 구슬이 들어있었다. 노골적이다. 저게 놈의 ‘심장’인 모양이다.
“보... 지마!”
자기 자신을 하멜이라고 착각하는 미치광이 데스나이트가 고함을 지른다. 유진은 낄낄 웃으면서 구멍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게 하멜이냐?”
“크아아아!”
도발은 해야 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해야 하는데. 지금은 하지 말아야 할 때였다. 유진도 그걸 알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저걸 직접 봐버렸는데 어떻게 비웃지 않을 수 있나.
대가는 혹독했다. ㅡ꽈앙! 유진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흑암의 망토가 보호해주긴 했지만, 벽이 박살이 날 만큼의 힘으로 처박혔으니 몸속이 쑤신다. 뼈는 물론이고 내장까지 다친 것 같다.
“병신... 새끼! 네가 뭔 하멜이냐. 넌 그냥 데스나이트야. 인간도 아니고... 라이칸슬로프라고.”
유진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피를 컥컥 토하며 웃었다.
“움직이는 꼴을 보니 고양이과 맹수인 것 같은데... 크크! 호랑이냐? 아니면 사자? 아니, 아니지. 하는 꼴이 존나 귀여운 걸 보니, 그냥 고양일 수도 있겠어.”
“죽, 여 버린다...!”
“해 봐, 씨발 새끼야. 19살 애새끼 하나 농락 못하면서 뭐? 난 하멜이다? 하멜이 우습냐?”
유진은 비웃음을 흘리면서 몸을 일으키려했다. 콰직! 다크나이트는 유진이 일어서게 두지 않았다. 그는 양 손으로 유진의 어깨를 짓누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나는 하멜이다.”
“좆까, 병신아.”
유진은 입에서 흐르는 피를 놈의 면상에 퉤 뱉어주었다.
“그리고 가까이 오지도 마. 시체 썩은내 나니까. 뒈졌으면... 그냥 자빠져 누워있어야지. 어디서 시체가 돌아다니고, 산 사람이랑 맞먹으려 들어?”
“크르르...!”
콰드득.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유진은 신음을 참으며 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졌다. 죽는 건가? 이렇게? 아니, 끝나지 않았다. 기껏 환생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뒈질 생각은 없었다. 뒈질 것 같았으면 진즉에 도망쳤을 것이다.
도망치지 않은 건.
면상을 확인하고 싶어서.
검을 들었을 때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은?
‘이거 쓰다 좆 되면 몇 년은 고생해야 하는데.’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전생의 하멜도 숨겨둔 필살기 하나 쯤은 있었다. 사실 필살기랄 것도 없는 단순한 것이지만. 그래도.
쓰면 이긴다. 무조건 이긴다. 이따위 정신병자 다크나이트는 찢어죽이다 못해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낼 수 있다. 그만큼의 반동이 있을 뿐이다. 지금의 스펙으로는 데스나이트를 죽일 수 없지만,
이그니션을 쓰면 무조건 죽일 수 있다.
“도련님!”
쓸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 목소리가 들렸다.
‘또 뭐야.’
라만 슐호브! 그 병신, 기껏 도망치라고 기절시켜놨는데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유진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데스나이트는 아직 유진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이 괴물아! 물러서라!”
라만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데스나이트에게 덤벼들었다. 라만을 돌아보지 않은 것은 데스나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유진을 한 손으로 들더니, 라만의 반대편 천장을 향해 집어 던졌다.
“커윽!”
쾅, 콰당탕! 던져진 몸이 천방에 부딪치고, 바닥에 떨어지고, 굴렀다. 환생하고 이만큼 몸이 망가지는 것은 처음이다. 유진은 피를 컥컥 토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혹시?
잠시 그런 기대를 했다. 기세 좋게 달려 든 라만이 돌연 각성이라도 해서, 미증유의 힘으로 데스나이트를 쓰려트릴 수 있지도 않을까?
그저 꿈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라만의 검강은 데스나이트에게 쉽사리 박살났고, 쿠크리는 산산조각났다.
“커억!”
그러고 뒤로 몸을 빼지도 못했다. 데스나이트는 라만의 목을 틀어쥐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네... 부하인가?”
“아니.”
“도련님...! 도, 도망치십시오. 제가 놈을 붙잡는 동안...!”
네가 붙잡혀있으면서 뭔 개소리냐.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토했다.
그리고 라만은 그런 유진에게 감탄했다. 저만큼 부상을 입고, 이 정체모를 괴물과 싸워 궁지에 몰린 와중에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대단한 분이시다.’
그는 멋대로 유진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는 피식거리며 웃는 유진을 노려보다가, 그에게 라만을 집어 던졌다.
“크악!”
비명은 라만이 질렀다. 유진은 던져진 라만에게 얻어 맞고 땅을 뒹굴었다.
“무엇이... 크륵... 우습지?”
“네가 병신 같아서 웃기네.”
유진은 라만을 떠밀고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덩달아 일어선 라만이 급히 유진을 부축했다.
“도련님. 제가 뛰어들어 틈을 만들테니, 무조건 도망치십시오. 더 이상... 더 이상 절 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우습다고?”
“어. 존나 우스워.”
등 뒤에는 굳게 닫힌 문이 있다.
데스나이트가 가로막고 있던 문이다. 놈은 여기 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구가 아닌 이쪽으로 유진을 던졌다.
열려도 상관없던가. 아니면 열리지 않던가.
‘확인해보고.’
유진은 발을 뒤로 끌었다. 유진을 부축하는 라만도 함께 뒤로 끌려갔다. 그 모습에 데스나이트는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도망치는... 크르르...! 도망치는 곳은 그쪽이 아니다.”
“여기도 문은 있는데?”
“내가 두렵나?”
“아니, 우습다니까.”
“그런데... 왜 문을 열려 하지?”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그 문은 열리지 않는다. 누구도, 그 문을 열 수가 없다.”
“그래?”
문에 손이 닿는다. 라만은 다급한 표정으로 유진과 데스나이트를 돌아보았다. 열리지 않는다는 문에 가까이 갈 이유가 있나? 설마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여 적을 방심시키려는 것인가.
‘과연, 대단한 분이시다.’
유진이 문을 열려고 하면, 그때 적에게 달려들도록 하자. 라만은 그것을 직접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유진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열렬히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왜 윙크하고 지랄이야?’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그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 말을 들으니까 더 열어보고 싶네.”
이그니션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쓸 수밖에. 다만, 그 전에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겠다. 만약 이곳이 하멜의 무덤이고. 내가 하멜이고. 내 환생을 세냐나, 다른 누군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절대 열리지 않는다는 문은, 무덤의 주인을 위한 것일 터.
‘어쩌면 아멜리아 머윈이 진즉에 열어보고 닫은 걸수도 있고.’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밀었다.
열리지 않는다. 한 번 막힌다. 그 직후, 유진의 목걸이가 작은 빛을 발했다. 유진은 목걸이의 열기를 느꼈다.
“열리네.”
데스나이트의 표정이 바뀐다. 그는 급히 땅을 박차고 유진에게 달려들었고, 유진은 라만을 끌고서 문을 완전히 열어버렸다. 아니, 그건 문을 ‘여는 것’과는 달랐다.
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헉.”
라만이 땅에 쓰러진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려했지만, 유진은 놈이 일어서지 못하도록 뒷목을 뻑 쳐버렸다.
“아무 도움도 안 됐지만, 날 구하려고 했으니까.”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기절한 라만의 등 위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봐본다. 굳게 닫힌 문. 데스나이트가 문을 열려고 용을 쓰고 있을 텐데, 문이 흔들리기는커녕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일단 여기는 안전한 곳인 듯 싶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앞을 보았다.
“...미친새끼.”
유진은 널따란 공간 한복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왜 여기다 둔 거야?”
어두운 방을 밝히는 조명은 마법에 의한 불빛이 아니었다.
창백한 달빛.
어둠의 한복판.
새하얀 관 위에 초승달이 떠있었다.
무덤
300년 전, 헬무드. 살육의 마왕성 근처.
본래는 평원이었던 곳이지만, 살육의 마왕과의 전투로 주변 일대가 모조리 뒤집어졌었다. 전투가 끝난 후, 마왕성에서 도망치거나 숨은 잔당이 있지 않을까 주변을 탐색하던 중에.
뒤집어진 땅 어딘가. 지하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했다. 살육의 졸개들이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으로 길을 내려갔지만, 그곳에는 마족이나 마물,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해 왔는지 알 수 없는, 지하 깊은 곳의 유적. 세냐는 벽에 새겨진 고어(古語)들을 보고서, 이곳이 신화시대의 유적일 것이라 추측했다.
세냐와 아니스는 고어를 해석할 수 있었지만, 유적에 새겨진 고어는 해석이 불가능했다. 결국 드러난 정보로는 유적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니, 끝까지 내려가볼 수밖에 없었다.
유적의 가장 깊은 곳.
빛 한 점 들지 않아 시커먼 방. 그 한 복판에는 창백한 빛을 발하는 보름달이 떠있었다.
‘저건 내가 갖는다.’
보름달 아래에 꽂힌 ‘검’을 보았을 때. 하멜은 즉시 선점에 나섰었다. 동료들은 불만을 갖진 않았다. 살육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하멜의 무기들이 대부분 박살나고 깨져버려서, 멀쩡히 남은 것은 검 한 자루 뿐이었다.
분쇄추 지골라스. 살육의 마왕이 다루던 무기. 하멜과 모론은 그것을 탐냈지만, 둘은 분쇄추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마왕의 무기는 인간이 멀쩡히 다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를 피해 없이 다룰 수 있는 것은 베르무트 뿐이었다.
모론은 검보다는 무겁고 커다란 도끼를 좋아했다. 베르무트는 그때부터 위니드와 성검, 게돈의 방패 등 여러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분쇄추까지 손에 넣었으니 유적의 검은 하멜에게 양보해주었다.
하지만.
하멜은 검을 쥐지 못했다. 검을 드리운 달빛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어 버렸다. 그 정체모를 달빛은 하멜의 마나를 흩트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검도 베르무트의 것이 되었다. 일행 중에서 멀쩡히 달빛에 접근해, 검을 뽑을 수 있던 것은 베르무트뿐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사실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베르무트의 특별함은 동료들 모두가 알았다.
‘씨발, 왜 너만 다 갖냐?’
‘양보하려고 했다.’
‘누가 뭐래?’
‘지금이라도 가질 텐가?’
‘안 가져 미친놈아. 누구 약올리냐?’
월광검.
유적의 검에는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단순하고 직설적이지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검은 보름달 아래에 꽂혀 있었다. 검집에서 뽑으면 나타나는 탁색의 칼날은 달빛을 닮았으며, 검을 휘두를 때마다 달빛을 뿌리는 것과 같은 현상을 일으켰다.
모습만 그러했을 뿐이다.
그건 검이 아니었다. 그 감상은 유진 뿐만 아니라, 동료들 전원이 동의했다. 무언가를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 무기의 본질이라면, 월광검은 세상에 존재하는 ‘무기’들 중에서 가장 무기의 본질에 알맞았다.
월광검은 검의 형상을 한 파멸이다.
참혹의 마왕이 자랑하는 마창 루인토스. 그 창도 만만찮게 끔찍했지만, 월광검의 빛을 꿰뚫지는 못했다.
베르무트가 월광검을 손에 넣은 후부터, 성검은 활약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찬란한 빛을 내뿜는 아름다운 성검보다, 단순하게 생긴 월광검이 훨씬, 훨씬 더 강했다.
유진은 멍하니 서서 달을 응시했다.
처음 발견했던 유적에서 본 것은 보름달이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것은 초승달. 유진은 월광검의 파편을 꺼내려다가, 파 하고 웃어버렸다.
“주워오는 걸 깜빡했네.”
데스나이트의 가슴에 처박고, 바닥에 떨어졌던 파편. 주울 겨를이 없었다. 꺼내고서 반응을 살펴보고 싶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베르무트.”
유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걸 왜 내 무덤에 둔 거냐.”
월광검.
300년 전과는 달리 바닥에 꽂혀 있지도 않고, 공중에 떠있다. 유진은 공중에 뜬 월광검을 응시했다.
월광검의 파편은 카자드 구릉지에서 발견됐다.
너무 위험한 검이니까, 베르무트가 직접 산산조각내고 봉인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그 월광검이 이곳에 있냔 말이다. 다른 곳도 아닌 하멜의 무덤에 월광검이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나.
“나에 대한 애도냐?”
하멜은 월광검을 갖고 싶어 했지만 가지지 못했다. 미련을 가진 적은 없다만... 베르무트다운 애도라고는 생각했다. 놈은 눈물범벅 된 친서나 감정 그득한 말을 건네는 것보다, 이렇게 동료가 바라던 것을 불쑥 내미는 놈이었다.
유진은 월광검의 아래를 보았다. 새하얀 관이 보인다. 아마, 저것이 시체가 안치되었을 관이겠지.
“죽은 뒤에 주면 무슨 소용이냐.”
살아서도 가질 수 없었겠지만. 유진은 툴툴 웃으며 머리를 털었다.
감상에 젖을 때는 아니었다. 이 방. 월광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바깥처럼 동상이나 추모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문은 들어올 때 사용한 입구 하나. 출구도 그것 뿐이다. 이곳에서 나가면, 그 빌어먹을 미치광이 데스나이트와 다시 맞닥트려야 한다.
신경써야 할 것은 데스나이트 뿐만이 아니다. 이 무덤에 발을 들인 것은 아멜리아 머윈. 흑마법사. 이 안에 데스나이트가 있다면, 당연히 아멜리아가 만든 것일 터. 그 개같은 흑마법사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끝내고,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이 꼬이고 있다. 유진은 표정을 구기면서 월광검을 향해 다가갔다. 상처투성이의 몸. 격전에 시달린 심장이 쿵쿵거리며 뛴다. 왜 월광검이 이곳에 있는지, 베르무트가 어떤 마음으로 월광검을 가져다 놓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 있다는 것은... 저 검을 하멜에게 바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 내가 가져도 되는 거지.”
유진은 피식 웃으며 달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즐겁거나 기대보다 우려가 앞섰다. 전생의 하멜은 월광검을 손에 쥐는 것도 불가능했었다.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월광검을 쥘 수 있을까.
“쥐어야지.”
유진은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 새끼가 날 위해 바친 검인데.”
달빛에 손이 닿는다. 전신의 털이 오싹하고 곤두선다. 그저 빛일 뿐인데도 호흡이 가빠져 온다. 몸안의 마나가 요동치고 있다. 그래도 두면 마나가 폭주해 버릴 것이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 백염식을 운용해, 마나를 통제했다.
그렇게 몸을 앞으로 더 전진시켰다. 생각보다 버틸 만 하다. 착각? 아니면 베르무트의 후손이라? 놈과 같은 백염식을 익혀서?
아니.
‘약해져 있어.’
유진은 그를 확신했다. 눈앞의 월광검은 유적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약해져 있다. 월광검이 산산조각 났던 것은 틀림없다 생각했다.
손이 칼자루에 닿는다.
ㅡ파직! 탁색의 전류가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통제하고 있던 마나가 크게 요동치고, 이윽고 잠잠히 가라앉는다. 유진은 크게 숨을 헐떡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쥐었다. 전생에는 쥐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확실하게 손에 쥐었다. 유진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월광검을 살펴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검. 과하게 화려했던 성검은 제쳐놓고, 위니드조차도 폼멜과 가드에 멋들어진 장식이 달려있는데, 월광검에는 그런 것도 없다.
칼집도 마찬가지다. 문양도, 보석도 없다. 그따위의 치장이 중요한 검이 아니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칼집을 잡았다.
“...없군.”
떨리는 마음으로 뽑아봤지만, 탁색의 검신은 보이지 않았다. 칼집에 꽂혀 있기는 한데, 월광검의 검신은 슴베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하긴. 산산조각 났을 테니.’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공중에 떠있던 초승달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밝히고 있던 달빛이 월광검으로 모여든다. 유진은 부릅 뜬 눈으로 월광검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았다.
“...하핫.”
몰려든 빛이 쭉 뻗은 검신이 되었다. 유진은 엷게 빛을 발하는 검을 내려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금속으로 이뤄지지 않은 빛의 검. 유진이 알고 있는 월광검과는 다르지만, 이 빛은 틀림없는 달빛이었다.
유진은 천천히 검을 들었다. 그러면서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모든 마법과 마나를 무너트리는 월광검이지만, 유진의 마나는 흩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의 마나를 삼켜버린다.
ㅡ화륵.
달빛이 불꽃처럼 흔들린다. 백염식으로 일으킨 불꽃이 월광검과 공명하고, 하나가 되었다. 유진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좆같은 검이네.”
내뱉은 감상은 마냥 기쁨에 취해있지 않았다. 그는 월광검이 어떤 검인지를 이해했다. 빛으로 이뤄진 검신. 백염식과의 공명. 이 검은 유진의 마나를 극심히 낭비시킨다. 물론 그 손해를 메꾸고도 한참 남을 위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유진에게는 다루기 버거운 검이었다.
“하지만 훌륭해.”
산산조각 났는데도 이만큼의 힘. 마나를 게걸스레 잡아먹긴 하지만, 잘만 쓰면 ‘마나’를 사용하는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성능을 보일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포식검을 가질 걸 그랬나.’
라이언하트 본가의 보물고. 그곳에는 베르무트가 사용했던 포식검 아스펠이 있다. 마법을 베고, 마나를 포식하는 검. 마법을 베는 것은 월광검과 비슷하지만, 성능의 면에서는 월광검이 월등하다.
하지만 둘을 동시에 사용한다면 단점이 상당히 보완될 것이다. 월광검이 잡아먹는 마나를 아스펠의 포식으로 보완하고, 아스펠의 부족한 힘을 월광검으로 보완한다.
‘설마 월광검을 얻게 될 줄은 몰랐으니 어쩔 수 없지.’
게다가 편의성에 있어서는 위니드가 압도적이다. 언젠가 템페스트를 소환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유진이 굳이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폭풍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애교라도 부리며 졸라대면 아스펠을 주지 않을까?”
길레이드라면 해줄 지도 모른다.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월광검을 집어넣었다. 물론 생각만 그리 할 뿐, 유진은 길레이드에게 절대로 애교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어쩐다.”
유진은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 여기서 농성해 시간이라도 끌까? 아니, 안 된다. 그러다가 아멜리아가 오면 곤란해진다.
‘발자크의 친서가 있기는 한데.’
설마 아멜리아의 영역도 아닌 곳에서 그녀와 맞닥트리게 될 줄은 몰랐다. 받아두긴 했지만, 발자크의 호의에 의지하고 싶지 않았는데... 최악의 경우에는 사용할 수밖에.
‘꼴랑 편지 하나로 물러서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친서를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다면 직접 해결해야 한다. 유진은 쓰러져있는 라만을 힐긋 보았다. 일단 놈은 여기 내버려 두고. 밖에 있을 데스나이트부터 치워야겠다.
‘이그니션은... 쓸 필요 없겠어.’
월광검의 위력도 시험해 볼 겸.
그 전에. 유진은 새하얀 관부터 열어보았다. 역시 그 안에 시체는 없었다.
“...”
관 안에는 시체 말고 다른 것이 있었다.
관의 뚜겅 뒤편에 적힌 글자가 보인다. 악필. 세냐의 글씨였다.
언젠가, 네가 바라던 세상에서 만날 수 있기를.
유진은 그 글씨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시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
“크르르...!”
데스나이트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문을 노려보았다. 침입자가 저 문으로 들어가고서 시간은 그리 많이 흐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데스나이트는 수십 수백 번 문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문을 부수지는 못했다. 이전에도 수백 번이나 문을 부수려 했었지만, 저 문은 부서지기는커녕 상처 하나 난 적이 없었다.
‘어떻게 들어간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데스나이트는 제 머리를 붙잡고서 신음을 토했다.
이곳은 우둔한 하멜의 무덤이고.
그는 우둔한 하멜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이 몸뚱이가 하멜의 것이니, 이 몸에 들어 온 혼도 하멜이어야 한다. 그것은 강렬한 암시였다. 데스나이트의 주인은, 그 암시를 통해 라이칸스로프의 혼을 하멜의 시체와 동조시켰다.
필요한 일이었다. 혼이 남지 않은 시체지만, 이 시체에는 생전의 경험이 녹아있다. 완벽하게 동조하고 감응해낸다면, 무의식적으로 하멜의 경험을 끌어낼 수 있다.
그렇게 체현해 낼 기술은 진짜 하멜과 비교도 안 되겠지만, 주인은 그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둔한 하멜. 그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이며, 베르무트를 포함한 동료들 중에서 ‘시체’를 남긴 것은 하멜 뿐이다.
이 시체는 데스나이트를 제작하는 것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소재다.
소모품인 혼과는 다르다.
“나는... 나는 하멜이다.”
데스나이트는 암시를 중얼거리며 머리를 뜯었다. 그 이전에도 이 육체에 깃든 혼은 여럿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몇 번째 하멜인지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걸 의식해 버리면 가뜩이나 불안정한 자아가 흔들릴 뿐이다.
‘폐기.’
데스나이트의 눈동자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투구가 깨지고, 흉갑이 부서졌다. 부서트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주인이 분노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폐기뿐이다. 쓸모가 없다고 판단 된 혼은 폐기되고, 다른 혼이 데스나이트의 소재가 될 것이다.
그를 피하려면, 폐기되어야 할 폐품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야 한다. 침입자를 죽이고 바쳐서... 아니, 죽여서는 안 된다. 사로잡아야 한다. 주인이 그토록 열려고 했던 문을 쉽사리 열었던 놈이니, 산체로 주인에게 바쳐야 한다.
‘빨리.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간절한 바람에 답해준 것일까.
문이 흔들린다. 데스나이트는 흠칫 몸을 떨면서 손톱을 꺼냈다. 이것도 주인이 분노할 일이었다. 주인은 인간이 아닌 혼을 고집했다. 손톱과 발톱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육체의 기억만 의존해 사용할 것을 강요했다.
손톱을 꺼낸 것은 주인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승리할 만큼 녹록한 상대가 아니잖은가.
“나 기다렸냐?”
대뜸 공격해 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데스나이트는 그러지 않았다. 놈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몸을 웅크리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안으로 들어갔지?”
“그냥 들어가지던데?”
“...안에서... 무엇을 봤나?”
“비밀이야.”
“넌 대체 누구냐?”
꽈득! 데스나이트의 발이 지면을 짓누른다. 유진은 킬킬 웃으며 허리에 찬 검을 손으로 쥐었다.
“누굴까?”
“크아아앙!”
끝까지 약 올리는 말에 데스나이트가 땅을 박찼다.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데스나이트는 살의를 억누르며 유진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유진의 자세가 낮춰진다. 데스나이트의 손톱이 가까이 왔을 때.
월광이 뽑혀 나왔다.
무덤
발검술(拔劍術). 간단히 말해서, 칼을 칼집에서 뽑는 것과 베는 것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고, 잘만 하면 최단거리로 베어내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 위력적이지는 않다. 칼집에서 아무리 칼을 빨리 뽑아낸들, 제대로 자세를 잡고서 팔을 휘둘러 베는 것이 훨씬 빠르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검의 이야기다.
월광검은 검신이 없다. 달빛이 검을 대신하고 있다. 칼집에서 검을 뽑는 것. 단순히 뽑는 것이 아니라, 즉시 베기 위해 뽑는 것은 칼날을 망가트린다.
월광검은 그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냥, 뽑아서 휘두르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속도를 극한까지 올릴 수 있다. 위력은?
우문이다.
월광검은 검의 형상을 한 파멸이다.
초승달을 뽑았다.
유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칼집에서 검이 빠져나온 순간, 그 안의 빛이 달이 된다. 달빛이 어둠을 밝힌다. 아니, 밝히는 것이 아니다.
어둠을 부순다.
ㅡ파아앗!
데스나이트가 휘둘렀던 손톱이 달빛에 부서져 사라진다. 데스나이트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후욱.”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몸을 앞으로 밀었다. 한 번 휘두른 것뿐인데 숨이 턱 막히고 시야가 흐려진다. 마나고갈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완전히 바닥을 보이면 극심한 탈진 상태가 되어 쓰러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두 번...’
힘 조절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해보지 않고 내세운 추측은 불확실한가. 그래도 위력은 만족스럽다.
한 번 휘두른 것뿐인데, 눈앞의 공격을 모조리 분쇄해 버렸다.
데스나이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틀림없이 손톱을 휘둘렀다. 지칠 대로 지친 침입자가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양 팔을 잘라놓고, 무릎 꿇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러지 못했다. 분명 휘둘렀던 손톱은 창백한 빛에 부서져버렸고, 데스나이트의 건틀릿도 산산조각 나버렸다.
“팔을 자르려 했는데.”
유진의 목적도 데스나이트와 똑같았다. 피차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도 똑같았다. 데스나이트는 유진의 팔을 자르지 못했고, 유진도 데스나이트의 팔을 자르지 못했다.
‘조절한 출력으로는 무리인가? 아니면... 산산조각 나서 약해진 힘으로는 무리인가?’
마나에 여유가 없으니 시도해 볼 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힘으로는 데스나이트의 몸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까도 몇 번은 베었는데, 상처를 입히지 못했어.’
남의 시체에 뭔 짓을 한 거냐. 유진은 까득 이를 갈며 데스나이트에게 다가갔다.
“크아아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상은 분명했다. 저 불길한 빛이 마기를 분쇄했다. 마기는 흑마법의 원천. 최상위 언데드인 데스나이트는 마기를 모두 사용한다고 해서 소멸하진 않지만, 힘의 원천은 저깟 상대에게 소모한다는 것은 주인의 분노를 더더욱 활활 타오르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하지 않은가. 마기를 쓸 필요도 없다. 저 침입자를 보라. 눈빛은 탁해지고, 안색은 창백하다. 걷는 것도 힘에 부치는 지 비틀거리고 있다.
이 육체. 아주 가끔, 제대로 검술을 배운 적도 없는데 검을 휘두르는 것이 익숙하단 느낌은 있었지만, 데스나이트는 그것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했다. 평생을 손톱과 발톱으로 싸워 온 그는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제 손톱과 발톱으로 싸우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
지금부터 할 것은, 데스나이트가 생전부터 좋아하고, 잘하던 것이다. 진짜 손톱은 꺼낼 수 없지만, 강화된 데스나이트의 손아귀 힘은 단단한 금속도 종이처럼 찢는다. 상대가 인간의 몸이라면? 찢고, 뜯지 못할 리 없잖은가.
“그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은데.”
데스나이트가 맨 몸으로 덤벼든다. 유진은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도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을 보았다. 월광검을 견제하고서 마기를 쓰지 않는 건가. 그래서, 맨 몸으로 싸우겠다고? 무기도 들지 않고?
나랑?
“시건방진 새끼.”
유진은 킬킬 웃으면서 월광검을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위니드를 쥐었다. 월광검의 빛은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나를 잡아먹는다.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
‘베르무트 그 새끼는 이걸 평범한 검처럼 휘둘러 댔는데.’
괴물 같은 자식.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여기까지. 지금, 진짜 괴물이 유진을 향해 덤벼들었다.
파악! 휘두르는 손, 난잡하지만 마기가 없어서인지, 아까처럼 상대가 버겁지는 않다. 유진은 위니드로 놈의 손을 흘려내면서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월광검을 살짝 들어보이자, 데스나이트가 움찔하며 뒤로 펄쩍 뛴다.
‘안 휘둘렀어.’
물러서는 놈의 허리를 위니드로 베었다. 금속이 긁히는 소리. 얕게 스쳤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위니드에서 떨어져나간 바람이 데스나이트의 몸을 휘감는다.
질풍.
콰아아! 회오리치는 바람이 데스나이트의 몸을 통째로 삼켜 버린다. 유진은 월광검의 빛을 유지하면서 놈의 좌표를 계산했다. 시퍼런 불꽃이 회오리에 딸려가며 데스나이트의 팔다리를 잡는다.
“크헝!”
데스나이트가 고함을 지르며 팔다리를 휘젓는다. 마기를 사용하지 않는 맨몸. 그럼에도 팔다리를 휘저을 때마다 거센 바람이 일어나, 정령의 바람을 밀어낸다. 유진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천장. 아까의 전투로 거미줄처럼 얇은 균열이 번져있다. 유진은 그 위치를 계산하며 마법을 일으켰다. ㅡ콰르르! 천장이 무너진다. 무수히 많은 금속의 파편이 데스나이트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냥 떨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유진의 마법은 그 파편 하나하나에 깃들어, 뜻대로 움직이는 탄환으로 만들었다. 퍼버벅! 놈의 저항에 맞춰 탄환이 파고든다. 그렇게 데스나이트의 몸을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내가 몸만 멀쩡했어도 널 맨손으로 패 죽였을 텐데.”
뼈도 좀 부러진 것 같고. 움직일 때마다 내장이 쿡쿡 쑤신다. 유진은 아쉬움에 투덜거리면서 발로 지면을 두드렸다. 푸확! 시퍼런 불꽃이 손이 되어 데스나이트에게 쏘아졌다.
“크엉!”
데스나이트가 다급히 몸을 뒤튼다. 불꽃의 손은 놈의 가슴을 아슬하게 스쳐서, 견갑을 뜯어버렸다. 또 갑옷이 부서졌다. 데스나이트의 눈이 뒤집혔다. 다급한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몬스터의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놈은 양 손을 위로 쳐들고서 거대한 손톱을 만들었다.
“아끼면 똥 돼, 병신아.”
손톱이 불꽃의 폭풍을 찢는다. 그렇게 튀어나온 데스나이트가 유진을 향해 양팔을 휘두른다.
“이미 똥 됐다고.”
유진은 몸을 바짝 낮추고 데스나이트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갑옷에 박혀있던 파편의 유진의 뜻대로 움직인다. 데스나이트의 몸이 공중에서 잠깐 움찔거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유진의 마나로는 저 정도 되는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작은 경직.
유진에게는 여유로운 시간이다.
달빛이 쏘아졌다. 월광검이 데스나이트의 가슴을, 시뻘건 핵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데스나이트는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했다. 월광검의 빛이 흩어졌고, 놈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유진은 아래에 깔리지 않도록 재빨리 몸을 빼냈다.
“우웩.”
그리고 헛구역질을 토했다. 힘조절은 잘 한 것 같은데, 마나가 너무 딸린다. 유진은 몇 번 더 헛구역질을 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차라리 이게 나아.’
이그니션을 쓰는 것보단 낫다. 유진은 숨을 헐떡거리며 입가를 벅벅 문질렀다. 힐긋 본 월광검은 더 이상 달빛을 뿜지 못하고, 칼자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좆같은 검.”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월광검을 칼집에 집어 넣었다. 그리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데스나이트에게 다가갔다. 본래부터 생기가 느껴지지 않던 놈이고, 죽은 시체지만... 지금은 완전히 죽었다. 핵을 부수는 감촉이 있었고, 부수는 것도 보았다.
하멜.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시체를 내려 보았다.
이 시체는 평범한 데스나이트가 아니다. 보통의 데스나이트는 혼을 담은 핵이 파괴된 순간, 육체도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아직 눈앞에 시체가 남아 있다.
“...기분 좆같네.”
죽은 자를 모독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남의 무덤의 문을 멋대로 열고 들어와서, 시체를 데스나이트로 만들어? 유진은 이를뿌득 갈면서 위니드를 위로 치켜들었다. 일단 이걸 파괴하고, 문의 안에서 기절해 있을 라만을 데리고서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다.
검을 내리 찍어야.
하는데.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남은 힘과 마나를 모조리 뽑아다가 팔에 힘을 줘보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팔 뿐만이 아니다. 몸 전체가, 의지를 거슬러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씨발.”
유진은 헛웃음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너무 지쳐서 몸이 통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냥,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몸이 통째로 묶여 버린 것이다.
“얼굴이나 보고 얘기하면 안 될까?”
뒤를 돌아보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입을 움직여 목소리를 내는 것 뿐. 그것이나마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입을 열어 말해도 된다고 허락했기 때문이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목소리가 다가온다.
“꽤 많이 떠오르긴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구미가 당기는 것은... 이거네요. 나는 이대로 널 위로 끌고 갈 거예요. 그리고 널 달궈진 모래에 처넣을 거예요. 물론 그대로 죽이진 않아요. 눈, 코, 입을 내밀 구멍은 뚫어줄게요.”
“친절하네.”
“입은 다물지 않고 벌린 채로. 눈은 계속해서 뜨고 있게 만들 거예요. 오래지 않아 안구는 조각조각 깨질 거고, 네 혀는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변하겠죠.”
목소리가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다.
“그것보다 먼저 모래에 구워질 걸.”
“아뇨, 그렇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그 뒤에는... 허수아비, 알고 있어요?”
“알지.”
“넌 사막의 허수아비가 될 거예요. 나는 네 다리를 박살내고, 배배 꼬고서, 네 근육과 혈관으로 다리가 벌어지지 않도록 꽉 묶을 거예요. 그리고 기다란 철심을, 네 손가락 하나하나에 박아 넣을 거예요.”
차가운 손가락이 유진의 손에 닿았다.
“여기서부터... 팔뚝을 타고 올라가... 어깨를 가로질러서, 반대편 손끝까지. 양팔을 활짝 벌릴 수 있도록. 넌 눈이 이미 깨져버렸으니, 자기 몸이 어떻게 되는지 볼 수 없겠지만. 보지 못해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느끼지 못할 만큼 무딘 고통이 아닐 테니까.”
“그 정도면 쇼크로 죽을 걸.”
“안 죽는다니까요. 넌, 네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건 절대로 죽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당신은 사막의 허수아비가 되는 거죠. 아주 오래오래, 언젠가 내가 질려버릴 때까지. 내가 보는 곳에서, 하나 된 다리로 처박혀서, 양 팔을 활짝 벌리고 서서.”
“오...”
“내가 누구인지 알아요?”
팔을 지나서 올라 온 손이 유진의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내뱉는 말의 끔찍함과는 달리, 그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아멜리아 머윈.”
유진은 그 손길에서 혐오를 느꼈다.
“잘 아는 군요. 난 아멜리아 머윈이에요. 사막의 던전마스터. 검은 가시. 데스앤서. 그게 나예요.”
목덜미를 훑는 손이 떠나간다. 유진은 끓는 감정을 진정시키며 앞을 노려보았다.
아멜리아 머윈.
그녀는 갈색의 피부에 새카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모습이었다.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새하얀 천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두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유진은 그 눈동자 깊은 곳에서 끔찍한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넌 내 펫을 망가트렸어요.”
“...펫?”
유진이 되묻자, 아멜리아가 발 아래의 데스나이트를 가리켰다.
“쓸모없는 펫이지만, 내 것이에요. 괴롭히고, 망가트리고, 죽이고, 그런 것들은 주인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지저분한 펫을 키우는 군. 목욕이라도 제때 시켜주지 그랬어? 시체 냄새가 지독...”
유진은 말을 끝까지 뱉지 못했다. 뻐억! 아멜리아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유진의 얼굴을 갈겨 버린 것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주인인 나뿐이에요.”
아멜리아의 지팡이는 산양의 머리를 끝에 달고, 여러 종류의 뼈로 이뤄져 있었다. 유진은 터진 입안에서 흐르는 피를 퉤 뱉었다. 뿔이 구부러져 있기에 입안이 터지는 것에 그쳤지. 잘못 맞았다가는 얼굴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네 펫이 날 물었어.”
유진은 피범벅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 물었다기 보다는 할퀴었지. 잘못하다간 죽었을 거야.”
“그렇게 죽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될 거예요.”
“발자크 루드베스.”
유진은 계속 흐르는 피를 다시 뱉었다.
“누군지 알지?”
아멜리아는 곧장 답하지 않고 유진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귀에 걸린 커다란 금색 귀걸이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왜 네가 그 이름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데. 내가 발자크랑 좀 알거든. 너 만나면 전해주라고 나한테 편지를 써줬거든?”
“...”
아멜리아의 눈이 얇아진다. 그녀는 유진을 응시하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유진의 몸을 잡고 있던 주박도 사라졌다. 유진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예요. 나는 그 이름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도 그 새끼 이름 말하는 것 안 좋아해.”
죽일 수 있나?
망토의 안에 손을 집어넣으면서, 유진은 잠시 고민했다. 상대는 마법사. 아무리 마법을 빠르게 펼쳐도 약간의 틈은 있을 텐데. 그 틈을 노리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못 죽여.’
유진은 즉시 결론을 냈다. 이그니션을 써볼까 싶었지만,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데스나이트와는 급이 다르다. 아멜리아 머윈은 세상에서 손에 꼽힐 힘을 가진 흑마법사다. 지금의 유진으로서는 백 번 시도해 본 들 아멜리아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진은 미련을 접고, 망토의 안에서 발자크의 친서를 꺼냈다. 직접 건넬 필요도 없었다. 유진이 편지를 꺼낸 순간, 편지는 그의 손을 벗어나 아멜리아에게 날아들었다.
“...이 인장.”
아멜리아는 봉투를 봉인한 밀랍도장을 응시했다.
“정말이네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네가 뭐길래 발자크가 편지를 써준 거죠?”
“날 좋아한다던데.”
“넌 이 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요?”
“이걸 가지고 있으면 네가 날 죽이지 않을 거라더군.”
“조금 다르죠.”
아멜리아는 편지를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난 오래 전에 발자크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고, 그 대가로 발자크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했어요.”
“...”
“그건 발자크에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 대가였죠. 나 아멜리아 머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내게 아무 것도 부탁하지 않았어요. 부탁이 필요한 문제를 벌인 적도 없었고.”
ㅡ화륵! 발자크의 친서가 시커먼 불길에 휘감겨 사라진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멜리아의 눈이 다시 유진을 보았다.
“이 친서를 가진 너는, 발자크를 대신해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할 수 있어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말이죠.”
“...이거 참.”
“네가 죽고 싶지 않다면, 나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하세요. 그럼 난 널 죽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널 그냥 보내지는 않을 거예요. 네가 왜, 어떻게 여기 왔고, 여기서 뭘 했는지. 그건 들어야겠어요.”
“자살해라.”
“들어줄 수 있는 선의 부탁이라고 말했을 텐데요.”
면사가 씰룩거린다. 아멜리아는 비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삐딱하니 기울였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에요. 네가 입을 열지 않기로 한다면, 난 그걸 존중할 거예요. 그리고 널 죽일게요. 네가 살고 싶다면, 나는 널 살려 줄 거예요. 대신 네게 들어야 할 것은 모두 들을 거고.”
“...”
“걱정하지 말아요. 죽이지 않고 병신으로 만든다, 그런 말장난은 하지 않을 거니까. 고문? 할 필요가 없죠. 고문 외에 네게서 답을 들을 방법은 아주 많으니까요. 난 네게 흥미가 아주 많아요. 술탄도 모르는 이곳에 어떻게 들어온 거죠?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은, 이곳의 모래술사들 뿐이에요. 놈들 중에 너와 내통하는 버러지가 있었나요? 참 이상하네요. 그럴 리가 없는데...”
빌어먹을 발자크. 이렇게 편지를 써줄 거면 좀 제대로 말이나 하던가. 유진은 그렇게 불만을 느꼈지만, 사실 그것은 발자크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설마 유진이 아멜리아 머윈의 영역에 침범하고, 그녀의 소유물을 박살낼 것이라고 발자크가 어찌 상상했겠는가.
‘어쩌지?’
다른 부탁은 없나? 자살은 안 되고.
“...날 쫓지 말라고 부탁하면?”
“쫓지 않겠죠. 다만 그 부탁은 널 살려달라는 것과는 다르잖아요?”
당장 이 상황에 벗어나도 문제가 많다. 아멜리아는 어떤 수를 써서든 유진에게 답을 들으려 할 것이고, 유진은 그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 여기 왔냐고? 우연히. 아멜리아가 그를 믿을 리가 없다. 애당초 고문을 하지 않고 답을 듣는다는 말을 보면 마법을 쓸 텐데, 그녀 정도의 흑마법사가 펼치는 정신계열 마법은 의지를 무시하고 올바른 답을 끌어낸다.
“고민이 기네요. 네가 고민하는 것을... 부탁으로 알고서 들어줘야 할까요?”
아멜리아는 큭큭 웃으며 유진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시커먼 빛이 그녀의 손 끝에 어린다. 월광검. 유진은 허리에 건 칼자루를 의식했다. 이그니션을 쓰고, 일단 월광검을 한 방 먹인 뒤에 도망치면... 아니, 불가능하다. 이 공간은 이미 아멜리아가 통제하고 있다.
“셋을 세죠.”
아멜리아가 소곤거렸다.
“하나.”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팔면? 아멜리아가 라이언하트를 존중할까? 그 이름이 저 개같은 흑마법사의 의문을 무마시킬까?
“둘.”
그냥 솔직하게 말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무덤에 들어와서, 아멜리아도 열지 못했다는 저 문을 열고서 월광검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말하면 아멜리아는 유진을 살려주겠지만, 월광검은 무조건 빼앗아 갈 것이다.
“...”
아멜리아는 셋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았다.
하멜의 시체.
데스나이트.
놈이 눈을 뜨고 아멜리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설마.”
아멜리아는 몇 걸음 물러서면서 중얼거렸다. 유진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역겨움과,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섬뜩함을 느꼈다.
데스나이트의 두 눈. 흰자까지 완전히 시커멓게 변해버린 두 눈이,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은,
하멜은 그 시선을 알고 있었다.
“당신이 어째서?”
아멜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지만, 고개는 숙이지 않고 데스나이트를 노려보았다.
데스나이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마왕.’
유진은 치미는 토악질을 삼켰다.
< 무덤 >
일어선 데스나이트는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 시커먼 눈동자 깊은 곳에 도사리는 불길함. 그리고 아멜 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는 것만으로도 저 데스나이트가 ‘유폐의 마왕’이라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데스나이트의 입술이 열린다. 놈의 주둥이에서 나온 말은 아까와 같은 쉰 목소리였지만,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힘’이 실려 있었다. 터질 것처럼 빨리 뛰던 심장이, 놈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싸늘하게 식는다.
유진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얼음조각처럼 느꼈다.
“발자크 루드베스의 눈으로 널 보았다.”
데스나이트.
마왕이 중얼거렸다.
“선조의 친우에게 꽃을 바치기 위해 왔는가.”
“...”
“너도 보았으니 알겠지. 이 무덤의 주인은 하멜 다이너스. 세상에는 우둔한 하멜이라 알려졌으나, 결코 우둔하지 않았던. ‘친애하는’ 베르무트의 동료들 중에서 특히나 뛰어나고 강했으며, 베르무트가 곁에 두었던 사내다.”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지껄이는 거냐. 유진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힘을 주어 씹은 입술이 짓이겨져 터지고, 피가 줄줄 흐른다. 유진은 충혈 된 눈으로 마왕을 노려보았다.
“네 적의는 이해하마.”
살의. 그것을 노골적으로 내뿜음에도, 마왕은 아무런 불쾌를 드러내지 않았다.
“나와 베르무트는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우애를 쌓았다. 허나 300년 전의 인연을 아득한 후손에게 강요하는 것은 우스운 일. 나는 ‘라이언하트’를 친우의 후손으로 존중하겠지만, 그렇다 하여 너희에게 존중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유진 라이언하트. 나는 네가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안다. 베르무트 이후 300년. 나는 여러 라이언하트를 보았으나, 그들 중에서 가장 베르무트의 피를 짙게 이은 것은 바로 너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하.”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내뱉었다. 친애하는 베르무트? 존중? 그 모든 이야기도 어처구니없다고 느껴졌는데, 지금 하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라이언하트. 그래, 그렇군.”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아멜리아가 이죽거렸다.
“회색머리, 금색 눈동자. 키옐의 라이언하트.”
아멜리아는 얇게 뜬 눈으로 마왕을 노려보았다.
“설마 이 누추한 곳에, 데스나이트 따위를 그릇으로 삼아 직접 행차하실 줄이야. 유폐의 마왕. 이걸 내가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요?”
“어찌 받아들일 지는 네 자유다.”
“하지만 그 자유의 책임을 져야겠죠. 짓궂은 말은 하지 말아요. 유폐의 마왕.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저 못된 사자를 감싸기 위해서인가요?”
“친우의 후손이니까.”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시커먼 눈을 마주한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그녀는 가빠지는 호흡으로 들썩거리는 면사를 손으로 감추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당신이 존중하고 있는 나의, 자유를, 억압하겠다고?”
“아멜리아 머윈. 나는 널 친애하고 존중하지만, 베르무트만큼 친애하고 존중하고 있지는 않다.”
“베르무트는 죽었어요.”
“허나 그 피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지. 특히 유진 라이언하트. 나는 그에게서 오래 전의 베르무트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 말은 유진의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유진은 여기서 저 개 같은 마왕에게 쌍욕을 처박았을 때, 마왕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지를 상상해 보았다. 존중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은가. 그렇다면 쌍욕을 해도 되는 것 아닌가?
“...300년 전에 뒈진 망령을... 지금, 살아있는 나보다 존중한다고?”
감정이 자극된 것은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을 부릅 뜨고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일어서려던 몸이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아멜리아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음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표독스런 눈으로 마왕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나를...!”
“네 자유는 나에 대한 경의를 초월해선 안 된다.”
마왕이 말했다.
“아멜리아 머윈. 하멜의 무덤에서 무엇을 하건, 나는 네 자유를 존중해 주었다. 하지만 네가 베르무트의 후손을 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은.”
“...적어도?”
유진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치켜뜨고서 마왕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시건방진 꼬마 같으니.”
아멜리아가 눈을 찡그리며 내뱉는다. 유진이 마왕에게 존중을 보이지 않는 것에 불쾌를 느낀 것이다.
“베르무트는 죽었다.”
마왕이 말했다.
“내게는 그리 오래 전이라는 감각이 아니지만... 300년. 인간에게는 충분히 오랜 시간이지. 나는, 그 300년 동안 베르무트의 후손들에게 충분한 호의와 존중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마왕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아멜리아는 더 이상 불쾌를 드러내지 않고,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마왕을 응시했다.
“그들이 내게 호의를 보이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것을 자유라 받아 주었다. 하지만 계속 된 호의를 권리라 착각하는 것은 곤란해. 나는 수많은 마물과 마족 위에 군림하는 자이며, 헬무드의 왕이다.”
마왕이 말을 이을 때마다.
유진의 심장이 죄여졌다. 유진은 턱턱 막히는 호흡을 견뎌내면서 마왕을 노려보았다. 유진은 마왕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 꿇을 이유가 없었고, 꿇고 싶지도 않았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일 뿐. 베르무트의 후손이여. 라이언하트에게, 모두에게 전하거라. 내가 베푸는 호의를 침범하지 말라. 너희가 나를 경의하지 않겠다면, 나도 더 이상 너희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경고.
유진은 그 말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유폐의 마왕은 수백 년 동안 세상을 침략하지 않았고, 타국에게 호의와 존중을 베풀어왔다. 당장 2년 전, 이오드의 때만 해도 그랬다.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 이오드의 문제는 조금도 대단할 것이 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유폐의 마왕은 사태를 ‘평화롭게’ 무마시켰다. 마왕과 직접 계약한 발자크 루드베스가 라이언하트의 가주에게 고개를 숙이고, 이오드와 계약을 맺으려 한 인큐버스의 목은 베어졌다.
라이언하트 뿐만이 아니다. 약속 이후로 300년. 세상에는 헬무드의 마족과 마왕을 경계하는 이들이 무던히도 많았다. 당장 헬무드의 근처에 있는 신성제국과 항마(降魔) 연합국들은 몇 번이나 헬무드를 토벌하고 마왕을 죽이겠다는 의기를 내세웠었다.
물론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으나, 무력시위는 몇 번이나 있었다. 지금도 신성제국의 병력은 헬무드의 변경에 주둔하고 있고, 항마연합국의 병력도 그들과 뜻을 함께하고 있다.
헬무드는, 유폐의 마왕은. 그를 묵과하고 있다. 300년 동안 마족은 이미지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으나, 아직도 대륙 어딘가에서는 마족이 탄압을 받고 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응당 받아야 하는 벌이었다. 그는 300년 전의 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안다.
하지만 헬무드의 마족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유폐의 마왕도.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유진은 가쁜 호흡과 함께 목소리를 내뱉었다. 300년 동안 침묵하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경고를 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
“네 선조는 자유를 대가로 약속을 맺었고, 이제는 그 끝이 다가오고 있다. 멈추었던 수레바퀴가 다시 구를 때가 오게 된다.”
“...”
“언젠가는... 다시 약속을 맺어야겠지. 누가 베르무트를 대신해 약속을 맺고,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을까.”
“...그 약속이 대체 뭔데?”
유진은 다시 내뱉었다. 그러자 마왕은 잠시 대답하지 않다가, ‘하멜’의 입술을 움직여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네게는 그를 알 자격이 없다.”
“...”
“너는 베르무트가 아니기에.”
“...선조는 300년 전에 죽었어.”
“너는 선조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
“우둔한 사자여.”
그 말.
유진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왕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왕은 움찔거리는 유진의 몸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네 존재, 네 혼. 모두가 베르무트가 약속을 맺어 300년이 흐른 지금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아멜리아 머윈.”
마왕은 더 이상 유진을 보지 않았다. 유진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짜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장을 옭아 죄던 힘이 목을 죄고 있다.
“네 던전으로 돌아가라.”
“...아직, 저 꼬마에게 들어야 할 것이 남았어요.”
“그에게는 그 무엇도 들을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펫이 죽었어요. 그리고 저 문도...!”
“저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닫혀 있던 문이 가루가 되어서 사라진다.
라만은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멜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마왕이 다시 말했다. 아멜리아는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응시하는 마왕의 시선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유폐의 마왕. 그 몸, 마음에 든 건가요?”
“돌려주지.”
“그래도 되겠어요? 당신이 그렇게 아끼고 친애하는 베르무트의 벗인데?”
“나는 하멜을 친애하지는 않는다.”
그 대답에 아멜리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선 유진을 노려보았다.
“...운이 좋았네요.”
“...”
“다음은 오늘처럼 운이 좋지 않을 거예요.”
이 장소에 대해 의문이 남아있다. 아멜리아는 혹시나 싶어서 마나의 기억을 읽으려 했지만, 유페의 마왕이 말한 대로였다. 이곳의 마나의 기억은 말소되어 있었고, 아무 일도 없게 만들어져있었다. 그런 일은 유폐의 마왕에게는 수고랄 것도 없는 일일 테지만, 마왕이 이렇게까지 해 가며 저 어린 사자를 비호하는 것에는 의문이 느껴졌다.
‘...다음.’
아멜리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유폐의 마왕은 분명하게 뜻을 내보였다. 약속의 내용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약속보다는 유폐의 마왕이 ‘경고’를 했다는 것에 의의를 가지기로 했다.
당장은 저 꼬마를 어찌 할 수 없지만. 언젠가... 약속이 끝나고, 경고만으로 끝나지 않을 때가 도래할 것이다.
아멜리아 머윈이 떠난다. 데스나이트의 몸에 잠시 강림했던 유폐의 마왕도 떠나갔다.
그럼에도 유진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는 끝까지 유페의 마왕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유페의 마왕은 사라졌지만, 유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쓰러지고 싶지도, 앉고 싶지도 않았다.
“...으아아아!”
한참 동안 그렇게 서서, 감정을 다스리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유진은 발로 땅을 몇 번이나 내리 찍고, 갈라진 벽을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지칠 대로 지친 몸, 부상,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나 악을 쓰며 난동을 부렸다.
“씨발 새끼.”
그렇게 한참을 난동을 부리니, 분노가 조금 사그러졌다. 유진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날 알아.’
우둔한 사자.
그냥 한 말은 아닐 것이다.
‘내 존재와 혼. 모두가 베르무트의 약속 덕에 존재할 수 있는 거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그 베르무트가 내 환생을 대가로 마왕과 약속을 맺었다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쩌면 그 삭막한 놈의 가슴 깊은 곳에도 순정이 있어서, 죽은 동료를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놈이 정말로 하멜을 위했다면, 환생보다는 마왕을 죽이는 것을 우선해야 했다.
‘애당초 그 약속이란 것은 평화조약이야. 내 환생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고.’
유폐의 마왕도 말하지 않았나. 베르무트가 약속을 대가로 얻은 것은 ‘자유’다.
‘약속의 끝... 멈춘 수레바퀴. 유폐 씨발놈의 새끼. 꼴에 마왕이라고 있어 보이는 척 말을 해대?’
생각할수록 속이 끓는다. 뒷일 생각하지 말고 들이박을 걸 그랬나? 놈에게 퍼부을 쌍욕이 수십 수백 개는 되는데, 그냥 쏴 갈길 걸 그랬나.
나는 하멜을 친애하지는 않는다.
“나도 너 싫어해, 개새끼야.”
유진은 그렇게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결국 데스나이트가 된 전생의 시체를 부수지는 못했다. 그건, 그래. 어쩔 수 없지. 이미 뒈진 전생의 시체보다, 환생한 몸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운이 좋다고? 피차 마찬가지야. 다음에는 죽여 버릴 거니까.’
유폐의 마왕은 유진을 죽이지 않았다.
그가 하멜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죽이지 않았다. 저 문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누가 베르무트를 대신해, 약속을 맺고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을까.
‘난 약속 따위 맺을 생각 없어.’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토의 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수레바퀴를 뭐하러 멈춰? 좆같은 곳으로 흘러간다면, 멈추지 말고 부숴야지.’
만약 이 환생에... 세냐나 아니스가 아니라 베르무트가 관여한 것이라면.
‘너라면. 내게 그딴 기대는 하지 않겠지.’
유진은 망토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그곳에는 메마른 나뭇잎이 들려 있었다. 월광검이 봉인 된 방 안에... 있던 나뭇잎이다.
나무는커녕 잡초 하나 없을 지하 깊은 곳에. 왜 나뭇잎이 떨어져 있겠는가.
“...좆같은 생각이 들어.”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200년 전. 베르무트가 죽은 후.
이 무덤에 누군가가 침입했다.
세냐는 무덤의 이상을 깨닫고, 아크리온에서 여기까지 왔다.
그녀는 침입자와 싸움을 벌였고, 사라졌다.
‘세계수의 나뭇잎.’
유진은 이 나뭇잎이 뭔지 안다.
세냐가 아카샤보다 아끼던 보물. 엘프의 신앙인 세계수의 나뭇잎. 이것은 그 어느 곳에서든, 엘프의 숲으로 워프할 수 있게 만든다.
궁지에 몰린 세냐가, 세계수의 나뭇잎을 사용해 엘프의 숲으로 워프한 것이라면.
대체 누가 이 무덤에 침입해서. 그 세냐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까.
‘리치의 저주는 육체와 혼을 말살한다.’
유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아니스? 어쩌면 성검의 힘일 지도. 어쨌든, 나는 말살되지 않았어.’
시체와 혼.
그걸 무덤에 안치하고.
‘방 안의 관에서, 내 시체를 꺼내서... 밖으로 옮기고... 그럴 수 있는 건.’
베르무트.
‘...죽은 척하고...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뭐였던 거냐.’
유진은 이곳에서 세냐와 싸움을 벌인 것이 베르무트라고 생각했고.
그를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무덤
동료들은 사이가 좋았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서로 출신은 다르지만, 마왕을 증오하는 것은 똑같았다.
하멜은 마왕이 광란시킨 몬스터가 습격한 마을의 생존자다. 열 살 남짓한 나이에, 마왕에 의해 부모와 고향을 잃었다.
모론은 북방 바야르 부족 대족장의 아들이다. 그곳의 부족들은 오래 전부터 마족과 터전을 공유해 왔고, 돌연 마왕이 침략해 오면서 수많은 부족민들이 대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모론은 대족장의 아들이었고, 다른 부족들을 위해 제 손으로 마왕을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아니스는 신성제국의 추기경들이 심혈을 들여 키워낸 성녀 후보였다. 그들은 신의 인도를 받는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낼 적격자라 믿었고, 자신들이 키워낸 성녀가 신의 대행자에 알맞다고 생각했다.
아니스는 후보에서 성녀가 되었을 때, 마족의 군세가 창궐했을다. 그녀는 신성제국과, 신의 뜻에 따라 구제를 결심했다.
세냐는 엘프에게 거둬지고, 그들의 숲에서 자라나며 마법을 배웠다.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던 엘프들은 천부적인 마법 재능을 타고난 세냐를 엘프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헬무드의 불길한 힘이 강해질수록 엘프들은 점점 죽어가기 시작했다.
세냐는 엘프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엘프는 어린 자신을 키우고, 마법을 가르친 가족이었다. 그녀는 엘프의 대표로 아카샤의 주인이 되었고, 숲을 떠났다.
베르무트는.
헬무드로 이송되는 노예 중 하나였다. 그의 고향은 헬무드에 인접했던 아샬 왕국. 마족과 마물에게 가장 먼저 멸망했던 나라로, 그 영토는 지금 모론이 세운 루하르 왕국에 속해있다.
대침공에서 베르무트는 가족을 잃었다. 얼마 안 되는 생존자들은 마물에게 사로잡히고, 각각 무리지어 헬무드의 노예로 보내졌다. 그 도중, 베르무트는 마족의 검을 빼앗고 노예들을 구출했다.
베르무트는 노예들을 이끌고 설원을 떠돌다가, 모론의 바야르 부족과 만났다.
이유는 다르지만, 다들 똑같단 말이다. 마족에게 무언가를 잃었다. 더는 잃고 싶지 않아서, 잃은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그래서 마왕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를 도모할 수 있을 만한 힘과, 자질도 가지고 있었다.
베르무트의 첫 번째 동료는 모론이었다. 베르무트는 아직은 미약한 자신들의 힘으로는 마왕과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대군(大軍)보다는 확실하게 마왕과 맞설 수 있는 강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동료를 찾아 떠돌았다.
세 번째 동료는 아니스. 신성제국은 헬무드로 이송되는 수많은 노예를 구출한 베르무트에게 주목했고, 그의 터무니없는 힘과 가능성에 신성제국의 힘을 실어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검증이 필요했다. 신성제국은 베르무트의 인격이 올바른지를 시험하고자, 오래 전 빛의 신이 하사한 성검의 앞으로 데리고 갔다.
베르무트는 성검을 어렵잖게 뽑아냈다. 신성제국은 베르무트의 여정에 축복을 바치며, 아니스에게 베르무트의 힘이 되어라 명했다.
네 번째 동료는 세냐. 그녀는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기 전부터 유명했다. 혼란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이었고, 모두가 영웅을 바라던 시대였다.
몬스터나 마물이 날뛰는 전장이면 돌연 나타나 대마법을 퍼부어대는 젊은 마녀. 여러 국가가 세냐를 포섭하려 했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세상을 떠돌며 마물을 사냥했다.
그런 세냐도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베르무트는 찬란한 존재였다.
‘내가 마지막이었지.’
세냐만큼은 아니어도, 하멜도 제법 유명하긴 했었다. 세냐가 국가 차원에서 주목을 받았다면, 하멜은 용병계와 전장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온갖 무기를 능숙히 다루고, 그 어떤 혹독한 전장에서도 살아 돌아오는 젊은 용병. 소속된 용병단도 없고, 부하를 이끌지도 않고, 높은 보수보단 마물이 그득한 전장을 찾아 헤매는 전장의 귀신.
당시의 하멜은 그런 존재였다.
첫만남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워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바다를 건너라면 무조건 배를 타야만 했다. 튜라스 북쪽의 전쟁이 끝난 후, 하멜은 마왕과 마족의 근거지인 헬무드로 향하기 위해 항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뜸 베르무트 일행이 찾아왔다.
하멜도 용병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소문을 주워들었고, 때문에 베르무트에 대해서도 알았다. 최근 몇 년 동안 바다 건너편에서 이름을 떨친다는 ‘용사.’ 관심은 있었다. 그런데 동료가 되라고?
‘그건 상관없는데, 나는 나보다 좆밥 새끼인 말은 듣고 싶지 않은데?’
“어우 씨발.”
유진은 전생을 떠올리며 제 뺨을 후려쳤다. 미친 새끼. 아마 그때 나이가 20살이 조금 넘었을 때였던 것 같은데. 그 나이를 먹고 저딴 말을 했다고? 유진은 그 사실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을 용병 새끼잖아. 그런데 저 놈을 꼭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어?’
세냐는 첫 만남부터 틱틱 거렸다.
‘품위가 없어도 너무 없어 보입니다. 베르무트님. 저런 들개 같은 용병보다 나은 전사는 셀 수 없이 많을 겁니다. 키옐 제국 기사단장의 외아들이 실력과 더불어 용모와 인품이 훌륭하다 하였는데, 차라리 키옐에 가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니스는 유진을 대놓고 개새끼라고 말했다. 들개라고 돌려 말하긴 했지만, 일단 개 같다고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바다의 해상왕국의 전사들이 굉장히 용맹한 사나이라고 들었다. 나는 그들과 겨뤄보고 싶다.’
모론은 그때부터 등신이었다.
‘아니.’
베르무트는 특이한 놈이었다. 그는 하멜의 이죽거림에 오히려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셋의 의견을 묵살했다.
‘너여야만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하멜은 그리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다. 용병계에서 이름을 떨치긴 했지만, 그래봤자 용병은 용병 아닌가. 그 시절의 하멜은 동료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작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베르무트는 저렇게 말했었다. 대체 무엇을 보고, 느껴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베르무트는 하멜의 요구대로 검을 뽑았고, 대련해 주었다.
처음 검을 쥐고, 용병을 시작했을 때. 하멜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주변의 용병들도 그렇게 말했었다.
너처럼 칼을 잘 쓰는 꼬마는 본 적이 없다.
벌써 마나를 느꼈다고?
검기? 말도 안 돼!
하멜은 주변의 놀람에도, 천재 소리를 듣는 것에도 익숙했다. 오만에 심취하지도 않았었다. 노력을, 수련을, 매일 거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졌다.
그냥 진 것도 아니라 개박살이 났다.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옷깃도 스치지 못한 것은 아니고, 옷깃만 베어내긴 했다. 땅에 얼굴을 처박고 질질 짜지도 않았다. 그래도 땅에 얼굴이 처박히기는 했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진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너보다 강하군.’
‘닥쳐... 씨발, 다시 해. 다시 하자고. 나는 안 졌어!’
베르무트는 하멜이 바란대로 다시 싸워주었다. 세 번 더 대련했고, 세 번 더 졌다. 처음에는 옷깃을 베었는데, 그 후 세 번은 옷깃도 베지 못했다.
‘...난 너보다 훨씬 약한데. 왜 날 동료로 삼겠다는 거냐?’
‘네가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시발 왜 필요하냐고. 네가 나보다 더 세잖아!’
‘이기면 동료가 된다. 그렇게 약속하지 않았나?’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네가 동료가 되라고 말한다면 넙죽 받을 새끼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네가 마지막이다.’
흙투성이가 되어 주저앉아 있는데, 베르무트가 손을 뻗어왔다.
‘함께 가자. 하멜.’
하멜은.
유진은 베르무트를 알고 있다. 동료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의혹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베르무트가, 죽음을 위장하면서 무언가를 저질렀다는 것. 이곳에서 세냐와 전투를 벌였다는 것.
‘...네가 왜?’
그만큼 팔팔하면 네가 마왕과 싸우면 되는 것 아니냐. 왜 죽은 시체를 끌어다가, 혼을 끄집어내서... 마왕과... 손을 잡으면서까지?
‘시체라도 다시 관에 넣어주던가. 개새끼야.’
유진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서 생각했다.
‘아니면... 이유라도... 제대로 남겨주던가.’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목걸이를 남긴 것도 베르무트일 것이다. 놈이라면 아무 문제없이 보물고에 목걸이를 가져다 놓을 수 있다.
찾았다.
‘...세냐.’
엉키는 것은, 세냐가 어떻게 환영을 보낼 수 있었는가. 환생과 목걸이가 세냐의 안배라면 몰라도, 베르무트가 안배한 것이라면...
‘...아니. 베르무트의 독단이라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확신이야.’
언젠가, 네가 바라던 세상에서 만날 수 있기를.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뜻인 줄 알았는데. 환생에 초점을 맞춰보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베르무트가... 세냐를 배신했나? 모르겠다. 유진은 망토 안에 넣어 둔 세계수의 나뭇잎을 어루만졌다.
세냐를 찾아야 한다.
“...공자님, 혹시 화장실이 급하십니까?”
라만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등에 업은 유진이 자꾸 몸을 씰룩대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사막에 화장실은 없습니다. 정 급하시다면, 제가 구덩이를 팔 테니 그곳에 용변을...”
“닥치고 걷기나 해.”
유진은 이를 뿌득 갈며 라만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지하의 무덤과, 미궁을 빠져나왔다.
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너무 무리했다. 그래서 유진은 라만의 등에 업혔다. 제 발로 걷는 것보다는, 등에 업힌 채로 치유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엘릭서가 그립군.’
유진은 빠득 이를 갈았다. 300년 전에도 엘릭서는 진귀한 보물이었지만, 그때 용사 일행은 그 귀한 엘릭서를 항상 달고 살았다. 포션은 넉넉히 챙겼지만, 이만큼의 상처는 포션으로도 바로 치유가 되지 않는다.
‘치유마법은 신성마법이라 익히지도 못했고... 썩을. 신성마법도 익혀야 되나? 그쪽은 신앙심에 좌우되니까 별 성취가 없을 것 같은데.’
세냐는 신성마법에 입문하지도 않은 주제에 고위 치유마법을 잘 사용했었다. 하지만 그건 엘프 고유의 치유마법이었고, 후대에 전파되지는 않았다.
“공자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며칠 뒤에는 카지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의사나 치유사제를 찾아가시면...”
“그 정도는 아니야.”
“그대로 두었다가는 뼈가 잘못 붙을 수도 있습니다.”
라만은 몇 번이나 유진의 덕에 목숨을 부지했고, 진심으로 유진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어쩔 셈이냐?”
“...예?”
“카지탄의 에미르 말이야.”
“제 걱정을 해주시는 겁니까?”
“아니. 네가 눈이 돌아버려서 네 주인 목이라도 베면, 내가 좀 귀찮아질 것 아냐. 할거면 나 떠나고 나서 하라고.”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카지탄의 에미르. 놈은 무덤이나, 아멜리아 머윈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않다. 다만 모래술사들의 요구대로, 카자니 사막에 들어가는 사람을 통제했을 뿐이다.
“...그건...”
라만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의 주인은 카자니 사막의 모래폭풍이 인위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전부터 내려 온 묵인일 것이다. 나하마는 사막화를 통해 튜라스의 영토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고, 돌발적인 모래폭풍은 그에 걸맞는 희생자를 동반해야 한다.
개척민들은 나하마의 영광을 위한 제물이 된 것이다.
허나 라만은 그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대뜸 덮쳐 온 모래폭풍이 친구를, 가족을, 집어 삼켜버렸다. 그게 국가의 영광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생존자 중에 누가 그 일이 옳다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을까.
“...주인님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라만은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이 사막은 100년도 전에 만들어졌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모래폭풍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주인님 전의 에미르도, 나하마를 위해 묵인했습니다.”
“그래서?”
“...호위대는 그만 둘 것입니다. 주인님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만두는 건 내 알 바 아닌데. 먹고 살 재주는 있고?”
“...공자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라만은 고개를 돌려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유진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라만의 뺨을 밀쳤다.
“고개 돌리지 마. 네 수염에서 개 냄새가 나니까.”
“예?”
“그리고 날 왜 따라? 나는 나하마 사람도 아니라고.”
“공자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일단 수염부터 밀어.”
“...예?”
“어디든 따라 올 필요는 없고, 내가 아직 나하마에 볼 일이 있거든. 현지인 가이드가 필요한데, 라만 너 호가니에 가본 적 있냐?”
“호가니라면... 빛의 성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몇 년 전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성지.
호가니는 그렇게 불린다. 성녀 아니스가 순례한 곳. 그곳이 순례의 종착지인지는 모를 일이나, 일단 아니스가 200년 전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던 곳이 바로 호가니다.
호가니는 카지탄의 바로 근처에 있는 도시였다.
‘...어쩌면 정말 날 추모하기 위해 왔던 걸지도 모르겠는데...’
호가니에 아니스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그 넓은 사막 어딘가에?
*
“...”
카지탄의 에미르. 타이리 알 마다니는 눈을 얇게 뜨고 앞을 응시했다.
그의 앞에는 유진이 앉아 있었고, 뒤에는 라만이 서있었다. 이 상황. 타이리는 눈에 보이고, 귀로 들은 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심중에 깔려 있을 다른 무언가를 경계해야 할 지를 고민했다.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겠지?”
타이리는 기가 차서 그렇게 되물었다.
“부하들에게 자네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모두 들었네.”
부관을 비롯한 라만의 부하들이 유진에게 된통 당해 부상을 입었으니, 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타이리에게 솔직히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리의 명령을 은밀히 수행하기 위해 ‘도적’이라고 밝혔던 것은 라만이었고, 부관은 입이 가벼웠다. 그는 주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건을 대장인 라만에게 뒤집어 씌웠다.
“유진 라이언하트. 자네는... 정말로, 내가 몰래 도적질이나 하러 부하들을 보냈다고 생각하나?”
“에미르님이 어떤 의도로 보냈건, 제가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유진으로서는 타이리가 사실을 아는 편이 상대가 쉬웠다.
“자네를 지키려고 한 일일세.”
“왜 절 지키는 일에 도적이란 거짓말이 필요한 겁니까?”
“자네는 키옐 제국의 라이언하트고, 나는 나하마의 에미르니까.”
타이리가 눈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자네는 알까 모르겠지만, 나하마와 키옐의 관계는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아. 키옐의 황제는 나하마의 힘을 경계하고 있고, 술탄께서도 키옐의 트집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계시지.”
“그 일과 에미르님의 거짓말이 무슨 상관입니까?”
“왜 없다고 생각하나? 카자니는 돌발적인 모래폭풍이 잦은 곳일세.”
타이리는 유진의 머릿속을 경계했다. 카자니 사막의 모래술사들. 의도한 모래폭풍. 침략. 물론 다른 나라들은 모래폭풍의 침략을 짐작하고 있겠지만... 저 꼬마가 진짜로 모래술사들과 충돌했다면, 이 일을 가벼이 누를 수는 없게 된다.
‘...전갈은 오지 않았다.’
모래술사들이 웅크린 곳은 사막의 끝쪽이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조금씩 사막을 넓혀가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날개라도 가진 것이 아닌 이상, 그가 이 며칠 사이에 사막의 끝까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정면에서 자네를 보호하는 것은 나하마가 키옐에게 고개를 숙인다고 비칠 수 있는 일이야. 게다가 나로서는 자네의 의중을 파악해야 했어. 자네는 왜, 아무도 살지 않는 카자니 사막으로 향한 것인가?”
“전 추궁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일세. 나는 자네를 추궁할 수 없네. 그러니 부하들을 시켜 자네의 뒤를 쫒게 하고, 혹시 모를 사태에서 자네를 보호하고자 했지. 자네의 뒤에 있는, 라만 슐호브가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다면. 자네와 나는 이렇게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았을 거야.”
타이리는 라만을 힐긋 보며 말했다.
“자네가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할 일이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단 말일세. 그리고 정말 도적질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부하들에게 듣기를, 그들은 충분한 거리를 두고서 자네의 뒤를 따라갔을 뿐이었네. 그러다가 자네가 대뜸 공격해 왔고.”
유진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저 늙은 에미르는 어쌔신이나 모래술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고 있다. 유진이 어쌔신의 습격을 받고, 사막 지하의 모래술사들을 쓸어버렸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유진이 떨어졌던 미궁은, 아멜리아 머윈의 지배를 받는 던전이었다. 그곳에 하멜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은 술탄도 알지 못하는 일. 게다가 아멜리아가 말하지 않았나. 이 던전에 대해 아는 것은, 그곳에 대기 중인 모래술사들 뿐이었다고.
뒈진 모래술사들은 아멜리아 머윈에게 복종하고,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타이리 알 마다니가 유진을 사막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모래폭풍을 경계해서지, 아멜리아 머윈을 경계해서가 아니었다.
‘괜히 들쑤실 필요는 없지.’
그랬다가는 유진의 입장도 곤란해진다. 유진은 이곳에선 적당히 마무리를 짓고 물러설 생각이었다.
“에미르님이 무슨 말을 하시건, 에미르님이 제 신변을 위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습니까?”
“무능한 부하들이 내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 피차 오해가 있었던 게야.”
“그 오해를 제가 가문에 어찌 설명해야 할지 고민되는 군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
“그렇다면 납득시켜드릴 수밖에 없는데. 그럴 경우 에미르께서는 아주 곤란해 질 겁니다. 가벼이 뱉을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고.”
유진은 붕대에 칭칭 감긴 손으로 고급스런 찻잔을 어루만졌다.
“내뱉은 이상, 저도 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애석하게도 저는 아직 어리고, 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가문의 힘을 빌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유진 공자.”
“저도 그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국가 간의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고... 가문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거든요. 에미르께서는 책임을 지실 수 있으십니까?”
타이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수염을 어루만졌다. 유진은 눈앞에 있는 늙은 에미르를 향해 히죽 웃었다.
“...공자. 무엇을 바라는 건가?”
“5억 셀.”
유진은 차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오해로 인해 불편해진 관계를 무마시키기에는 적절하다 못해 헐값이라고 생각합니다.”
“...허허.”
“뭐 에미르님이 의도한 일도 아니고... 서로 어쩔 수 없는 헤프닝이었다고 치죠. 저도 입을 닫을 테니, 에미르님은 지갑만 여십시오.”
“이제 19살이라고 들었는데. 아주 당돌해.”
“그런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날뛰면 곤란해지는 것은 에미르님 아닙니까?”
“나로서는 억울한 감이 있어. 자네를 위하고자 부하를 보낸 것인데, 왜 내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돈을 지불해야 하나? 그 외에 다른 방법은 많을 것 같은데.”
“다른 방법? 어린 저는 에미르님이 하신 말이 두렵군요. 설마 여기서 절 죽이시렵니까? 아니면 어쌔신을 보내시렵니까. 어느 쪽이든 술탄의 뜻은 아닐 텐데. 그 결단이 불러일으킬 책임은 5억 셀의 수십 배는 될 겁니다.”
타이리는 잠시 침묵했다. 5억셀? 유진이 말한 것처럼 과한 금액은 아니다.
다만, 타이리가 말한 것처럼 그는 억울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적질? 말도 안 되는 소리.
‘...5억 셀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만약 사막에서 모래술사들을 만난 것이라면? 아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아야겠지만, 고작 19살의 꼬마가 사막의 모래술사와 어새신과 맞닥트려 살아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운 좋게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그런 일을 겪고서 ‘오해’를 운운하며 5억 셀을 운운하는 것은, 타이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불하도록 하지.”
타이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으로 자네의 화를 누그러트릴 수 있다면 말이야.”
“받아놓고 땡깡을 부릴 만큼 못 배워먹지는 않았습니다.”
“라이언하트 본가는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부유한 가문으로 아는데. 자네는 그 수혜를 보지 못하는 건가?”
은근한, 아니, 노골적인 비꼼이었다.
“가문에 돈이 많기는 한데, 그게 다 제 돈은 아니잖습니까?”
“...허허.”
타이리는 헛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뒤편에 대기중인 시종이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방을 나갔다.
“...오해를 풀게 되었으니, 내 하나 묻지.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자네는 왜 카자니에 들어간 건가?”
“광활한 사막을 보고서 대자연의 웅장함을 느끼고, 용기를 키우고 싶었습니다.”
“...”
“가장 가까운 사막이기도 했고요.”
“정 그런 감상을 원한다면, 내 친히 나하마의 드넓은 사막들을 소개해 주지.”
“아니, 됐습니다. 이미 충분히 느꼈습니다.”
“카자니에서 무엇을 보았나?”
“사막을 보았죠.”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대놓고 물어보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으니 돌려서 묻는 것이 훤히 보인다.
‘거긴 이제 아무 것도 없어.’
하멜의 무덤.
동상과 관, 추모석, 기둥 몇 개... 묻히게 두고 싶지 않은 것들은 죄다 망토 안에 쑤셔 넣었다.
무덤과 이어져 있던 미궁은, 유진의 손으로 무너트렸다.
‘뒤져서 시체라도 캐보던가.’
그 던전을 지배하던 것은 술탄이 아닌 아멜리아 머윈이다. 무덤에 대해서는 술탄이나 다른 모래술사들도 모른다.
아멜리아 머윈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유진이 그곳에서 겪은 일은 알려지지 않는다.
“아 그리고. 라만 슐호브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어째서?”
“절 위협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에미르님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없고요.”
“...허허!”
타이리는 마른 웃음을 터트리며 라만을 힐긋 보았다. 라만은 혹시, 주인이 자신을 두둔하지 않을까 잠시 기대했다.
“정 대가를 원한다면. 라만의 처형을 공자의 눈앞에서 집행해 주지.”
“에이, 저는 이런 일로 사람의 목을 뎅겅 자를 만큼 무자비한 사람이 아닙니다.”
“...”
“그냥 본가에 데려가서, 마구간 똥이나 치우게 시키렵니다.”
타이리는 잠시 동안 라만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휘하 전사단의 2번 대장. 라만은 실력을 인정받은 전사지만,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이상 데리고 있을 가치가 없었다. 당장 직속 호위대라 할 수 있는 1번대에는 라만보다 나은 전사들이 많았다.
‘모래술사에 대해 짐작도 못하는 놈.’
어차피 처형시킬 놈이다. 유진에게 줘봤자
“공자의 뜻대로 하시게.”
타이리는 입가를 비틀며 이죽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큼직한 상자를 들고서 돌아왔다. 타이리가 상자를 열자, 아름다운 보석들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보석을 고를 테니 잠시 기다리게.”
현금뭉치라도 주는 것인가 했는데, 보석으로 주려는 모양이다. 유진은 번쩍이는 보석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5억 셀이라고 해 봐야 거인족 불알 한 짝 밖에 못 사는 군.’
기왕 부를 거 좀 더 부를 걸 그랬나.
돈은 궁하지 않지만, 유진은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5억셀 말고 10억 셀로 하죠.”
“...뭐라고?”
“에미르님의 보석들이 참 아름다워서요.”
타이리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유진을 보다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냥 이 상자를 통째로 갖게.”
“감사합니다.”
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냉큼 받아들였다.
귀환
아니스 슬리우드.
유진이 기억하는 그녀는, 신실함이라는 말이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의 신앙과 믿음은 진실이겠지만, 평소의 행실은 도저히 신실함이나 ‘성녀’란 칭호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스는 세냐 이상으로 술을 좋아했다. 세냐가 술을 마시면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면, 아니스는 그냥 술을 좋아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그마한 술병을 들고 다녔고, 그것에 담긴 액체를 술이 아니라 성수라고 말하곤 했었다.
성녀다운 모습은 있었다.
많은 시체를 앞에 두었을 때. 아니스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곤 했다.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시체에게 기도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하곤 했었다. 부패가 진행 된 시체. 혼은 이미 떠났거나, 마족의 노리개가 되었거나.
그 사실은 누구보다 아니스가 잘 알았을 터. 그럼에도 그녀는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추모 외의 의미는 없을 지라도, 아니스는 사자의 평화와 안식을 기도했다.
아니스는 술이 강했지만.
많은 시체를 지나칠 때면, 평소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다. 취하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텐데. 지독한 시체 썩은 내가 감도는 전장 한가운데에서는, 아니스는 취기를 억누르지 않았다.
‘세상은 평화롭고, 행복해 질까요?’
술 냄새가 시체 썩은내를 가릴 즈음.
아니스는 자주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마왕을 죽이면 평화롭고, 행복해 지겠지.’
‘모든 마왕을 죽인다고 해서, 그들이 죽인 무고한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혼은 구원받을 수 있어.’
‘하멜. 당신은 사후세계를 믿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나?’
‘당신은 신을 믿지 않잖습니까.’
‘그것과 사후세계는 별개지. 지옥은 모르겠고, 천국은 있었으면 해. 네가 나에게 그런 걸 묻는 것도 우습지 않나?’
신성제국 유라스. 그들이 받드는 주신은 빛의 신이다. 대륙에는 무수히 많은 신앙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유라스가 주신으로 섬기는 빛의 신이다.
살아서 선행을 쌓고, 죽음을 맞이하면... 선행이 빛이 되고, 악행은 어둠이 된다. 빛이 모든 어둠을 밝혀낼 만큼 찬란하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
그 천국은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죄업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즉, 빛의 신이 다스리는 천국에는 어둠이 없기에 죄업도 없으며, 죄업이 없기에 고통 받는 사람도 없다.
‘나는 가끔 의심이 됩니다.’
취기에 붉게 물들었던 뺨.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마왕에게, 마족에게, 마물에게, 몬스터에게. 대륙의 기나긴 역사 중에서 그런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제가 섬기는 신은... 그렇게 죽은 모든 혼의 어둠을 밝힐 만큼 전능한지요.’
‘성녀라는 네가 네 신을 의심하는 거냐.’
‘예. 의심하고 있습니다. 허나 제가 섬기는 전능하신 신께서는, 제 의심을 탓하기는커녕 아무런 말씀도 주지 않으시는 군요.’
그런 대화를 나누는 곳은 시체가 그득한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거인족의 두령. 카마쉬, 그 호로새끼의 진군을 막았다. 놈의 시체와, 수많은 거인족들의 시체를 지나쳤다.
모론은 최선을 다해 일반병들을 지켰다. 아니스는 빛의 비를 내리며 부상자를 돌봤다. 세냐의 마법은 병사들이 나서는 일 없이 거인들을 몰아붙였고, 하멜과 베르무트는 카마쉬를 쓰러트렸다.
그럼에도 우군의 피해는 어쩔 수 없었다. 거인족을 따라 온 마물의 대군. 군데군데 섞인 강력한 마족들. 그들이 얽힌 전투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고, 부상을 입었다. 지원을 온 신성제국의 사제들과, 각지에서 찾아 온 의사들이 부상자를 돌보았지만.
죽을 사람은 죽는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신이 진정 전지전능하다면, 그 분의 어린 양이 흘릴 피를 대신 흘려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스.’
‘그 분이 정말로 모든 어둠을 밝힐 빛이라면, 왜 이 험난한 어둠을 직접 밝히지 않으시는 겁니까.’
‘야.’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진득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밤입니다. 곧 찾아 올 여명은 어둠 속에서 저문 목숨을 밝히지 못할 겁니다. 여명이 밝히는 것은... 시체들뿐이죠. 하멜. 오늘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십니까. 이곳뿐만이 아닙니다. 세상 어딘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혹은 빛으로 밝은 곳에서 죽었고, 죽을 겁니다.’
‘너 취했어.’
‘저는 제 신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후에 도달하게 될 천국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세상이 이토록 처참한데. 왜 신께서는 세상에 빛을 내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베르무트가 있다.’
그때의 하멜은.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빛의 신의 교리 따위는 몰라. 다만, 베르무트 저 자식이 말도 안 되는 괴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네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베르무트는, 신이 내린 기적이다.’
‘...’
‘신은 스스로 세상을 돌볼 수 없기에 신의 증명이자 살아 움직이는 기적인 베르무트를 내려보냈다. 그래서 용사인 것이고, 성검이 놈을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지. 아니냐?’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나도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 술주정을 듣는 것도 짜증스럽고, 네가 내게 위로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거든. 나도 위로해 줄 성격은 아니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고. 답을 주지 않는다는 신에게 지랄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 그냥 우리는 모든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면 돼. 그러면 뭐든... 잘 될 거야. 마족에게 붙들려진 혼은 구원받아서 천국으로 갈 거고, 세상은 평화롭고 행복해 지겠지.’
되는 대로 떠들었다. 아니스가 납득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멜로서는 존재할지도 모르는 천국이나,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하는 것보다는 분명한 목적을 원했다.
‘...우리가 그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이룰 수 있어. 베르무트도 있고... 성녀인 너도 있잖아. 세냐도 있고, 모론도 있고. 나도 있지. 우리는 강해. 모든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막연할 지라도 희망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줘 봐. 너만 쪽쪽 빨지 말고.’
‘이것은 술이 아니라 성수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당신에게는 줄 수 없습니다.’
‘나도 오늘부터 빛의 신도 할 테니까 달라고.’
‘거짓된 믿음은 그 어떤 죄보다 무겁습니다. 저는 성녀로 명명된 자로서, 거짓된 믿음에 은혜를 베풀 수 없습니다.’
결국 그 날 아니스는 술 한 방울 베풀어주지 않았다.
뱀 같은 여자.
하멜과 세냐는 아니스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아니스는 성녀답지 않게 성격이 고약하기도 했고, 교리에 충실하면서도 스스로가 교리를 태연스레 어기는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필요할 때에는 성녀라 불리는 만큼 신실했고, 그녀의 신성마법은 그 어떤 사제보다 찬란한 빛을 냈다.
은근히, 아니, 대놓고 사람을 맥이는 구석도 있었다. 베르무트를 제외한 모두가 아니스에게 된통 당한 적이 한두 번은 있었다.
언제나 앞으로 달려 나가던 모론이 다리가 잘렸을 때. 아니스는 모론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놈의 다리를 반대로 붙인 적이 있었다.
잘린 몸뚱이를 붙이는 기적은 수많은 사제들 중에서 오직 아니스만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스는 그 일로 하여금 모론의 버릇이 고쳐지길 기대했지만, 모론은 반대로 붙인 다리로도 굉장히 잘 달렸다.
‘저 새끼 다리 멀쩡히 붙여 놓으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론의 다리를 다시 잘라야 합니다.’
‘나는... 나는 이 다리가 불편하지 않다. 잘 달리고, 싸움도 잘 한다.’
‘지랄하지 마. 네가 가끔 휘청거릴 때마다 내가 대신 처맞는다고. 이리 와 봐, 내가 한 방에 잘라줄게.’
‘싫다...’
‘세냐! 저 새끼 재워!’
결국 세냐의 강력한 수면마법이 모론을 재웠고, 그 사이에 하멜이 모론의 두 다리를 잘랐다.
“고약한 년.”
그만큼은 아니어도, 하멜도 아니스에게 당한 적이 몇 번은 있었다. 아니스의 성수를 세냐와 작당하고 훔쳐 먹었을 때. 아니스는 자신이 식사당번일 때까지 기다리다가, 세냐와 하멜의 스튜가 몬스터의 오줌으로 끓인 것이라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만약 그때 모론이 막지 않았다면 세냐와 하멜, 아니스, 셋 중 하나는 죽었을 것이다.
유진은 그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빛의 성지, 호가니.
도시의 밖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아니스의 동상이 있다.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 쓴 동상의 얼굴은, 유진이 기억하는 아니스의 모습과 그리 많이 닮지는 않았다.
그래도 성스럽다는 느낌이 있긴 했다. 빛의 신도가 아닌 유진도 저 동상에게 성스러움을 느끼는데, 진짜 빛의 신도들은 오죽하겠나.
동상의 주변에는 유라스는 물론이고, 각지에서 찾아 온 빛의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유진은 그들을 물끄러미 보며 몸을 돌렸다.
호가니에 온지 일주일.
유진은 이곳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니스가 어떠한 흔적을 남겼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롯과 똑같다. 아롯의 마법사들은 세냐를, 유라스의 신도들은 아니스를 찾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만약 둘이 무언가를 남겼다면, 다른 누군가가 진즉에 발견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 혼과 감응해서 흔적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 동상. 수백 년 전의 아니스는 저곳에서 기도를 올리고, 사막의 저편으로 나아갔단다.
아니스의 행적은 거기서 끊어진다. 그 후로 유라스는 몇 번이나 사절단을 보내 아니스의 행적을 추격했지만, 끝내 아니스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왜 하필 나하마일까.’
그것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이야 마법의 발달로 각국에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지만, 수백 년 전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 건너편에 있는 유라스에서 배를 타면, 호가니 위쪽의 항구 도시에 도착하게 된다.
거기서부터 ‘순례’가 시작된다. 아니스는... 아마...
‘내 무덤에 추모를 하러 왔어.’
세냐의 은거와 아니스의 순례.
완전히 겹치지는 않는다. 세냐가 몇 년 빠르게 은거했고, 그 뒤에 유라스에서 성녀라 추앙받던 아니스가 대뜸 순례여행에 나섰다.
‘내 무덤은 봉인되어 있었다.’
무덤이 발견된 것은 6년 전.
아마,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서 하멜의 목걸이를 발견한 후. 그에 감응하여 무덤의 ‘봉인’이 사라진 것일 터.
‘아니스는 내 무덤에 들어가지 못했다.’
만약 들어갔다면, 그 폐허를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유진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아니스의 동상을 응시했다.
‘...베르무트.’
장례식까지 치른 놈이, 멀쩡히 살아서 하멜의 무덤에 침입했다.
세냐와 싸움을 벌였다.
그녀를 물리치고, 월광검과 무덤을 봉인했다.
200년 전의 옛날.
아니스가... 사막을 떠도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발견되지 않는 무덤을 찾아 헤매면서, 아니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스의 실종에도 베르무트가 관여한 건가?’
유진은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스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흔적을 명확히 남긴 것은 세냐 뿐이다. 유진은 망토 안에 넣어 둔 세계수의 나뭇잎을 의식했다.
“공자님.”
유진의 곁에서 잠자코 서있던 라만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아니.”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동상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고, 이 넓은 사막 어딘가에서 수백 년 전의 흔적을 찾아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론의 왕국에 가볼 수도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경고까지 들은 마당에, 헬무드와 인접한 북방에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지금은 안 돼.’
힘이 부족하다.
유진은 그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환생하고서 이만큼이나 힘을 갈구한 적은 없었는데.
이제는 갈구해야 했다.
멀쩡하지도 않은 데스나이트에게 죽을 뻔 했다.
아멜리아 머윈에게도 죽을 뻔 했다.
유폐의 마왕을 앞에 두고서도, 놈을 죽이고자 덤벼들지 못했다.
“키옐로 돌아간다.”
라이언하트 가문을 떠난 지 2년.
슬슬 돌아갈 때였다.
*
키옐의 수도, 세이리스.
수도 외곽의 널따란 숲은 모두가 라이언하트의 영지이며, 수도에도 유일하게 영지 내에 워프 게이트가 설치된 곳이다.
시안 라이언하트. 그는 워프 게이트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곧 20살을 맞아 성인이 될 그는, 라이언하트의 다음 가주라고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하지만 시안은 그 사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가 없었다.
곧 돌아올 유진 때문이었다.
‘...개자식.’
시안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2년 만에 돌아오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에 대한 서운함. 반가움.
그 외에, 여러 가지.
정실인 테오니스와 적자인 이오드가 본가를 떠난 후. 애니실라는 본격적으로 본가의 가솔들을 장악해갔고, 그 모든 것에 아들인 시안을 앞세웠다.
유진이 없는 2년.
시안은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냈다. 매일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아버지와도 대련을 반복했다. 극성맞은 어머니의 후계자 교육과 더불어, 백염식의 수행도 거르지 않았다. 젊은 기사들과 어울렸고, 오랫동안 본가를 섬겨 온 기사들에게는 고개를 숙여가며 베품을 청했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점점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안은 가주가 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항상 하던 말이었고, 시안 본인도 가주 자리에 욕심을 갖고 있었다. 이오드가 자격이 박탈된 이상, 시안의 가주 계승은 확실했다.
다행스럽게도, 쌍둥이 동생인 시엘과 경쟁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시엘은 계승권에서 물러서고, 흑사자 기사단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다.
유진만 없다면.
시안이 가주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썩을.”
시안은 그렇게 여겨지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 병신 같은 이오드라면 모를까. 유진과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경쟁심.
그리고 패배감.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시안은 벌써부터 자신의 ‘패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짜증나고, 유진이 ‘거슬린다’라고 생각되는 것이 싫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놈은 개자식이었다. 6년 전 대뜸 양자가 된 후, 시안은 매일같이 유진에게 시달렸다. 대련을 빙자한 구타. 실컷 처맞은 것에 비해, 시안은 단 한 번도 유진을 패본 적이 없었다.
“시안.”
아들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있던 애니실라가 입을 연다.
“네 형제가 돌아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왔으면 좋겠는데,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시안.”
“녀석이 가주가 되고 싶어 한다면, 저는 아마 양보하려고 할 겁니다.”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놈이 저보다 가주에 어울릴 테니까요.”
“...시엘이 말하길, 유진 그 아이는 가주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했어.”
“그것도 2년 전이죠. 마음이 변했을 지도 몰라요.”
“네가 물러서지 않는다면, 유진이 가주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게 라이언하트에게 옳은 겁니까?”
“시안.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라이언하트의 가주는 본가에서 가장 강한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넌 2년 전에 유진보다 약했겠지만, 지금은...”
“제가 흘린 땀만큼 그 자식도 땀을 흘렸겠죠.”
시안은 빠득 이를 갈며 워프게이트를 노려보았다.
“...어머니. 저는, 피가 땀보다 무조건 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어요. 만약 유진이 저보다 강하고, 놈이 가주가 되려 한다면.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는 가주가 되고 싶잖니.”
애니실라는 아들의 말을 철없는 소리라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당당히 서길 바라고, 위대한 영웅의 피를 이은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되길 바랐다.
“...너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야. 그러니, 결정은 너 스스로 해야 한다. 네가 가주가 되고 싶다면, 가주가 되면 돼. 양보하고 싶다면... 양보하면 되는 거지.”
“...그건 어머니의 바람이 아니잖아요.”
“내가 널 너무 엄하게 키웠구나.”
애니실라는 한숨을 내쉬며 시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테오니스처럼 되고 싶지 않아. 과한 욕심으로 자식을 망치고 싶지 않단 말이야.”
“...저는 이오드와 다릅니다.”
“그래, 다르지. 그러니 너는 올바른 거역을 하렴. 나는... 네가 옳고, 떳떳하다 여긴다면. 네 뜻을 존중하고 싶단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말은 저렇게 했지만, 애니실라는 스스로도 의문을 느꼈다. 라이언하트의 둘째부인이 된 후부터 쭉, 자식을 가주로 만들고자 했다. 테오니스와 이오드의 일이 없었다면... 아들의 무른 말에 분노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미의 주제 넘는 참견과 고집이 아들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보았잖은가.
“...시안. 내 아들. 이걸 명심하렴. 네가 생각하는 것과 바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유진에게도 생각과 바람이 있을 거야.”
“...”
“너는 네 형제의 바람을 알 수 없어. 설마 그 시엘이 흑사자가 될 것이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시엘의 어미인 나도, 쌍둥이인 너도 시엘의 바람을 알지 못했어.”
“...형제.”
“그래. 유진은 네 형제야.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네 형제인 거야. 그러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가주의 계승은... 이야기를 나눈 뒤에도 늦지 않으니까.”
“...네.”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얼마나 세졌는지 보자고.’
워프게이트가 빛을 발한다.
시안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워프게이트에서 나올 유진을 기다렸다.
귀환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유진은, 자신에게 꽂히는 수십 쌍의 시선에 잠시 멈칫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워프게이트의 앞에는 본가의 가솔들과 식구들이 죄다 집합해 있었다.
“...날도 찬데, 왜 다들 나와 계십니까?”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을 하려다가.
뭘 굳이, 라는 생각이 들어서 넉살을 떨었다.
“아들아!”
곧 대답이 돌아왔다. 멀찍이서 어깨를 부르르 떨고 있던 제하드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그 외침, 날렵한 움직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두눈을 부릅 뜨고서, 달려드는 아버지를 응시했다.
‘저게 정말로 아버지란 말인가?’
그렇게 의문이 들 만큼, 제하드의 변화는 놀라웠다. 유진이 기억하는 제하드는,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뱃살이 출렁거리는 중년이었다.
본가에 오고서는 이런저런 행사에 불려 다니고, 스스로 운동도 하면서 체중을 적절히 감량하는데 성공했다만. 2년 만에 다시 본 제하드는, 유진의 기억과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인간승리로군요.”
제하드가 유진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펑펑 쏟는다. 아버지와의 재회가 반갑기는 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유진은 아버지의 다이어트에 감탄했다. 어깨를 얼싸안은 팔뚝은 힘줄이 꿈틀거리고, 꽉 끌어안는 가슴도 물렁거림 없이 탄탄하다.
“...수염이 과하게 자라신 것 같은데. 설마?”
“스테로드 형님 덕분이다.”
스테로드. 가르기스의 아버지다. 형님이라고 부를 만큼 친해졌다는 건가? 유진은 가까운 아버지에게서 가르기스의 체취를 느꼈다... 그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면서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났다.
“제가 그 약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들아! 2년 동안 키가 많이 자랐구나...”
“아버지만큼 크진 않았죠.”
몸은 단단해지고 수염은 덥수룩해졌지만, 성격마저 사나이다워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하드는 눈물과 콧물로 촉촉이 젖은 수염을 털며, 유진을 향해 벙긋 미소를 지었다.
“이 나쁜 녀석아. 어떻게 2년 동안 한 번도 돌아오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냐?”
“편지는 자주 보냈다고 생각하는데...”
“일 년에 두 번이 자주 보내는 것이냐?”
“제 생일, 그리고 아버지 생신. 기념할 일에는 따박따박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한테만 뭐라 하실 일이 아니라, 아버지도 2년 동안 한 번도 절 찾아오지 않으셨잖아요.”
“네가 편지에 항상 추신으로 오지 말라고 적어 보냈잖느냐.”
“그렇긴 하죠.”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가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흑사자 성에.”
대답한 것은 제하드가 아니었다. 시안과 함께 있던 애니실라는 굳었던 표정을 가다듬고서, 유진을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장 내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이야. 성인식. 너도 알고 있잖니?”
“아...”
라이언하트의 전통, 혈계식. 그것은 본가와 방계 전원이 참석하지만, ‘성인식’은 본가의 아이들만 대상으로 삼는다.
본가의 적자인 이오드는 2년 전에 성인이 되었다. 본래라면 이오드가 먼저 성인식을 치렀겠지만, 흑마법에 관여한 일로 본가에서 거의 절연 당하게 된 이오드는 성인식도 치르지 못했다.
“저번 성인식이 걸러지기도 했고. 내년에 성인이 되는 아이가 3명이나 되니, 이전보다는 조금 거창하게 치러지려는 모양이야.”
“그건 가주님의 뜻입니까?”
“원로원의 뜻이란다.”
돌아온 대답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가, 아직 애니실라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작은어머님.”
본가에 있을 적. 유진은 애니실라를 작은어머니라 부르고, 테오니스를 큰어머니라고 불렀었다. 사실은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는데, 유진이 양자가 된 순간부터 애니실라는 은근히 유진에게 ‘어머니’라는 호칭을 강요했다.
애니실라를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는데, 테오니스를 다르게 부르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이잖은가. 2년 만에 뱉은 ‘작은어머니’라는 말은 여전히 입에 잘 맞지 않았다.
“...가족 사이에 딱딱한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잖니.”
테오니스가 본가를 떠나게 되었으니, 작은 어머니라는 호칭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유진은 그리 생각하고 떠본 것이지만, 애니실라에게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친정에 내려가있는 것은 일단은 테오니스의 의지였으니까.’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된 것 뿐.
“가주님은 계시지 않지만, 그래도 축하 파티는 해야지?”
“가족 사이에 뭘 축하 파티까지. 그런 번잡한 일은 괜찮습니다.”
“그리 말할 줄 알았다.”
애니실라도 일단은 권해봤을 뿐이었다. 유진은 예전부터 파티 같은 것을 즐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분은 누구시냐?”
눈물을 벅벅 문질러 닦던 제하드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는 유진의 뒤편에서 쭈뼛거리며 서있는 라만을 힐긋 쳐다보았다. 피부색만 봐도 키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종자입니다.”
“...종자?”
“네. 이름은 라만 슐호브고... 나이가... 어... 라만, 너 몇 살이냐?”
“32살입니다.”
라만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32살이라니. 유진보다 13살이나 많은 나이다.
“나이보다 늙어보이는 군.”
“사막의 바람이 험한 지라...”
“제가 개인적으로 데려 온 사람인데, 신원은 확실합니다. 종자라곤 해도 제가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별채에 데려다놓고 잡일이나 시키려고요.”
애니실라를 비롯한 본가의 가솔들이 라만에게 경계어린 시선을 보낸다. 라만은 그 시선에 움찔거리면서 어깨를 늘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라만은 카지탄 에미르의 전사로서, 이런저런 많은 행사에 불려다니며 뛰어난 전사들을 보아왔다. 하지만 그가 평생 본 전사들 중에서, 이곳 라이언하트 본가의 기사들만큼 뛰어난 전사는 극히 드물었다.
‘개개인의 실력과 숫자만 따지면 카지탄 에미르의 전사단과 비교가 안 되는 군...’
작위도 없는 가문의 기사단이 저만큼이나 뛰어나도 되는 것인가? 라만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당장 보이는 기사단만이 전부가 아니다. 라이언하트의 ‘진짜’ 힘은 흑사자 기사단. 라만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만큼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언제든지 반란을 꾀할 수도 있을 터...’
물론, 수백 년 동안 이어 온 라이언하트는 단 한 번도 키옐 제국에게 반란을 꾀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라만이 느끼기에, 라이언하트의 힘은 일개 가문의 힘치고는 너무 과했다.
‘공자님은 이 대가문의 양자.’
유진을 곁눈질로 보던 라만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는 유진에게 몇 번이나 생명의 은혜를 입었다.
유진이 아니었다면, 라만은 모래폭풍에 휘말려 죽거나 유사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거기서 목숨을 건졌을 지라도 어쌔신과 모래술사들에게 입막음을 당했을 것이다. 아니면 지하 깊은 곳에서 아멜리아 머윈에게 죽었거나, 그녀의 애완동물에게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지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굶어죽었거나.
그 모든 것이 유진과 휘말려서 겪은 일이지만, 라만은 유진의 은혜에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타이리 알 마다니를 떠나, 유진의 수하가 되었다.
비록 하게 될 일이 저택의 잡일꾼일 지라도, 무슨 일을 하게 되건 간에 유진을 위하는 일이라면 은혜를 조금씩 갚게 되는 것 아닌가.
“니나.”
유진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니나에게 손짓했다. 22살의 니나는 2년 전과 같은 앳된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유진은 호리호리한 니나의 체격을 살피며 눈을 찡그렸다.
“나 없다고 밥도 안 챙겨 먹은 거야? 아니면 누가 갈궜어? 왜이리 초췌해 보여?”
“도련님이 갑자기 돌아온다고 하셔서, 제가 좀 많이 바빴어요.”
“별채에 일하는 사람이 너 하나뿐인 것도 아닌데 네가 특별히 바쁘고 힘들게 뭐가 있어? 누가 너한테 혼자 일하라고 시킨 거냐? 시종장 그 아줌마냐?”
유진이 눈을 치켜뜨자, 뒤편에 있던 시종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아, 아닙니다.”
“제가 혼자 하겠다고 했어요. 유진님은 변하지 않으셨군요.”
시종장은 라이언하트에서 일하는 시종들을 총괄하고 있는데, 유진이 머무르는 별채는 시종장도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금역이다.
유진도 그 사실은 알고 있다. 그냥,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혹시 다른 시종들이 니나를 괴롭힌 것이 아닌가 찔러봤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니나, 이 아저씨 데리고 가서 일이나 좀 가르쳐 줘.”
“무슨 일을 가르치면 될까요?”
“마구간이랑 연무장 청소... 그리고 뭐... 네가 하기 싫은, 귀찮고 힘쓰는 일들.”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요? 유진님의 종자 분이신데...”
“내 종자니까 내가 시키는 일을 해야지. 라만, 얘는 니나라고 하는데, 내 전속 시종이야. 굳이 따지면 네 직속 선배라고 할 수 있지.”
“라만 슐호브라고 합니다.”
선배... 라만은 떨떠름한 얼굴로 니나를 바라보았다. 라이언하트 본가에 도착하기 전, 유진에게 라이언하트의 주요 인사들에게 이야기는 들어 두었다. 시종인 니나도 ‘주요 인사’에 속해있었다.
‘10살이나 어린 아가씨를 선배라 모셔야 하는 것인가...’
유진에게 목숨을 바치기로 했지만, 라만의 가슴 깊은 곳에는 아직 거친 사막의 전사다운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 자존심은 가슴 깊은 곳에서 고개를 치켜들지는 않았다.
유진에게 두들겨 맞았던 상처는 이미 나았지만, 라만은 유진의 주먹이 무서웠다.
*
“왜 그렇게 죽상이야?”
형제간의 회포를 풀게끔 해주자며, 애니실라는 가솔들을 데리고서 자리를 떠났다. 본가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눈치를 키워 온 제하드도 자연스레 애니실라와 함께 떠났고, 니나도 라만을 데리고서 별채로 돌아갔다.
덕분에 워프 게이트 앞에 남은 것은 유진과 시안뿐이었다. 유진은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시안에게 히죽거리며 말을 걸었다.
“애니실라님조차도 나보고 오랜만이라며 웃어주셨는데 말이야. 너는 나 보고 싶지도 않았냐? 표정이 왜 그래? 똥마렵냐?”
“...어머님 계실 적에는 작은어머니라고 따박따박 말을 붙이더니.”
“그렇게 말해야 애니실라님 마음이 편할 것 아냐.”
“네가 뭔데 우리 어머님의 마음까지 신경써 주는 거냐?”
“이 새끼 왜 이래? 시엘처럼 늦은 사춘기라도 왔어? 그런 아닐 텐데. 네 사춘기는 열다섯에 이미 지났잖아. 그새 까먹었냐? 기사들 담배 몰래 훔쳐서 피다가...”
“다, 닥쳐.”
시안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서 내뱉었다. 그리고는 유진을 잠시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정체는 뭔 놈의 정체.”
“너 정말... 나랑 동갑인, 19살 맞아?”
“사실대로 말해줘? 나 너랑 동갑 아니고, 환생했어.”
“지랄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줘도 안 믿으면서 정체는 왜 묻는 거야? 유진은 끌끌 혀를 차면서 시안의 어깨를 툭 쳤다.
“왜. 오랜만에 보니까, 네 형제가 얼마나 대단한지 확 체감되고 그래?”
“어.”
이 새끼 왜 이래, 부담스럽게. 유진은 시안의 솔직한 대답에 잠시 눈을 끔벅였다.
“너 2년, 나 2년. 똑같이 2년이 흘렀는데... 너는... 꼭 20년이 흐른 것 같아.”
시안은 끓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는 너무 꽉 쥐어 피가 통하지 않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엄청,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거든. 네가 마법 익히는 동안, 나는... 본가에서 미친놈처럼 검만 휘둘렀어. 그러면서 백염식도 수련하고. 검기를 검강으로 바꾸고, 검강을 지속하면서, 마나를 단련하고...”
“열심히 했네.”
유진은 시안을 위아래로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시안의 마나는 2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고, 정제되어 있었다. 정확히 파악은 안 되지만, 백염식의 3성은 진즉에 넘은 것처럼 보였다.
그건 라이언하트 역사에서 손에 꼽힐 만큼 대단한 일이다. 300년 역사에서 성인이 되기 전에 백염식의 3성에 오른 이는 손에꼽는다.
그렇다 한 들 유진과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진은 이미 백염식의 4성에 올라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환염식까지 만들어냈다.
그 차이는 좁힐 수 없다. 애당초 이건 대등하지 않은 경쟁이다. 하멜이란 전생과 그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유진에게 있어서, 시안이 본가에서 태어나 받은 지원들은 결코 대단할 것이 못 된다.
심지어 유진은 두 번째 삶에 여유를 부리지도 않았다. 혈계식 전까지 마나를 수련하지 않은 이유? 몇 년 늦게 마나에 입문하는 것이 아무런 불리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율을 거스르지 않고 기다린 덕에, 유진은 위대한 베르무트의 백염식과 폭풍검 위니드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것으로 유진의 성장은 폭발적으로 가속되었다.
지금의 유진은 베르무트와 처음 만났을 적의 하멜보다 강하다. 아무리 늦어도, 앞으로 10년이면 전생만큼, 아니, 전생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제법이라니까.’
유진은 자신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시안보다 강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 뭔 일이 벌어진들, 시안이 유진보다 강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그를 알고 있지만, 시안은 그를 모른다. 시안에게 있어서 유진은 하늘이 불공평하다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괴물로 보일 것이다.
좌절하고 마음이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일. 그러나 시안은 좌절하는 대신, 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유진은 그런 시안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시안이 저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유진이 몇 년을 들여 진득하게 두들겨 패고, 정신을 뜯어 고쳤기 때문이지만. 타고난 천성이 비루했다면 아무리 두들겨 팬들 저렇게 고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가 가주가 돼라.”
“쌍둥이는 쌍둥이인가 봐.”
“시엘에게 듣기는 했는데, 널 직접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 나랑 비교도 할 수 없이 뛰어난 너를 두고서, 어떻게 내가 가주가 된단 말이냐?”
“왜 못 돼? 네가 하겠다고 하면 하는 거지.”
“납득할 수 없다고!”
“정 나 가주 시키고 싶거든, 나랑 결투라도 해. 만약 네가 이긴다면 나는 무조건 네 말을 따를 테니까.”
“...결투해서 내가 이기면, 뭐하러 널 가주 시키냐? 널 이긴 내가 가주를 해야지.”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가는 군.”
“뭐야?”
유진은 조금 감탄해서 중얼거렸고, 시안은 두눈에 쌍심지를 켜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가주 시키면 뭐 좋은 꼴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자리는 의욕이 있는 사람이 앉아야 되는 거야. 나는 라이언하트 가주 자리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고.”
“...허울뿐이라도 가주 자리에 앉아. 내가 너 하기 싫은 일들 대신 해 줄 테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평생 결혼 안 하고, 분가 안 하고, 본가에 붙어서 내 수발이나 들겠다고? 자존심 강한 네가?”
“...”
“그리고 말야. 네가 한 말은 그대로 나한테도 돌릴 수 있는 것 알지? 네가 가주 해. 힘 쓰는 일은 내가 대신 해 줄 테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방계라서? 아니, 방계라면 오히려 가주 자리에 욕심을 내야지. 네가 가주가 된다면... 수백 년 이어져 온 라이언하트의 전통이 박살날 거야. 하지만 누구도 네 뜻을 거스를 수는 없을 거다. 흑사자 기사단도, 원로원도. 너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아니, 인정할 걸. 너랑 경쟁해야 하는 나나, 시엘이나, 이오드... 그 병신. 우리 셋은 너랑 비교가 안 돼. 전통이고 뭐고, 라이언하트를 위해서라면 네가 가주가 되어야 옳아.”
“라이언하트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유진은 입꼬리를 비틀며 이죽거렸다. 폐허가 된 하멜의 무덤. 봉인된 월광검. 사라진 세냐. 무덤을 찾아오지 못하고 사막을 떠돌았을 아니스. 그 모든 것과,
베르무트.
그 자식의 얼굴을 떠올렸다.
“네게 있어서 라이언하트는 굉장히 대단할지 몰라도, 내게 있어서는 별로 그렇지도 않아.”
“...말조심해.”
“조심할게 뭐가 있어? 태어난 집안 욕은 누구나 하는 것인데.”
“우리는... 너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본가에서 태어나 수혜를 입었잖아. 네 말도 안 되는 자질도, 선조님의 피를 강하게 이어서 발현된 것임을 부정할 수 있냐?”
“없지.”
유진은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이 몸뚱이는 베르무트의 후손이기 때문에 잘난 것이다.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 쓰레기 같은 몸으로도 강해지긴 했겠지만, 이토록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난 몸이 뛰어난 덕분이다.
예전이라면 그것을 기쁘게 느꼈을 것이다. 하필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하고, 마왕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현실이 이해가 안 되고 좆같긴 해도. 전생을 기억하고 환생했다는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기적이 아니잖은가.
유진의, 하멜의 환생은 의도되었다. 그건 아마 베르무트일 것이고, 이 환생에 대해서는 유폐의 마왕도 알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세냐와 베르무트가 충돌했다.
전생의.
동료들이.
‘날 환생시키기 위해.’
왜 하필 나를.
“마음 바꿀 생각 없어.”
유진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인간 같지 않던, 초인, 용사, 위대한, 올마스터, 무신. 베르무트가.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죽음을 위장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경을 함께 넘어 온 동료와 부딪치면서, 환생을 의도한 것인지.
그만큼이나 팔팔하면 차라리 다시 힘을 합쳐 마왕과 싸우면 되었을 텐데.
“가주가 되는 것은 시안, 너야. 나는 가주 따위 안 해. 정 내 마음 바꾸고 싶으면, 힘으로 바꿔 봐.”
베르무트의 가문, 라이언하트. 유진은 예전부터 이 가문에 대단한 애착이나 자부심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19년을 ‘유진 라이언하트’로 살았지만, 그는 이 가문의 일원임에 애착과 자부심은 가질 수가 없었다.
가주인 길레이드는 좋은 사람이다.
기온? 그도 좋은 사람이다. 본가 적통이면서도, 둘은 유진을 핍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애니실라도 뭐, 확실히 바라는 것이 있기에 표면적적인 호의를 내비치는 것일 테지만, 테오니스와 비교하면 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안과 시엘도, 첫인상은 영 별로였지만 같이 몇 년을 지내다보니, 형제애랄 것 까지는 없어도 정은 들었다.
가르기스... 모론을 연상시키는 그 떡대도, 착한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제하드? 말해 뭐하나. 유진은 자기 아버지를 좋아했다.
그렇다 한들, 가문에 애착과 자부심은 가질 수 없었다.
“...결투는 좀 그렇고.”
시안은 유진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저렇게까지 ‘라이언하트’를 부정하지 않았었는데, 2년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어쩌면 놈도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시안은 씁쓸한 입맛을 느끼며, 허리춤의 검을 붙잡았다.
“오랜만이니 대련이나 해보자.”
“미리 말해두는데, 네가 무슨 수를 써도 날 이길 수는 없을 걸.”
“알아, 개자식아.”
재수 없는 자식. 시안은 유진의 어깨를 툭 밀치고서 지나쳤다.
귀환
대련은 일방적이었다.
시안의 검강은 그 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했지만, 유진을 몰아붙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안은 물러서지 않고 맹렬히 검을 휘둘렀지만, 유진을 물러서게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점점 감상이 바뀌었다. 시안은 끈적거리는 진흙과, 끝 모르게 깊은 늪을 상상했다. 유진의 검은 공격을 흘려내는 것 같으면서도 공격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고, 늪으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원치 않는 곳으로 끌어당겼다.
그 뒤에. 진흙과 늪은 바다가 된다. 거대한 마나의 물결이 시안의 검강을 흔들고, 검을 인도하고 헤매게 만든다.
이렇게 빨리 지칠 리가 없는데...
시안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느끼고,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의 고동을 들었다.
백염식의 3성에 오르면서 시안의 마나 장악력은 크게 진보했다.
예전에는 검기를 뿜는 것조차도 굉장한 집중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검강을 뽑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뽑아낸 검강을 장시간 유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시안 라이언하트. 그는 명문 라이언하트 본가의 일원답게, 어린 나이부터 마나를 수련하고 여러 지원을 받아왔다. 그 나이 대에 시안만큼 방대한 마나를 보유한 이는 대륙 전체에서도 극히 드물 것이다.
시안은 그것을 자각하고, 자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부심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씨발...”
더 이상 검강이 유지되지 않았다. 시안은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욕설을 내뱉고, 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연무장을 떠돌던 모래먼지가 가라앉는다.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은 덕에, 연무장의 지면은 검강에 깊이 파이고, 갈라지고, 뒤집어졌다.
하지만 유진의 주변은 멀쩡했다. 발자국이 어지럽게 남지도 않았다. 유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 자리에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터무니없군...’
일대일의 대련. 처음에는 유진과 시안 단 둘 뿐이었지만, 대련이 시작된 순간 본가의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비공개의 대련도 아니었으니, 기사들은 멀찍이 서서 시안과 유진의 대련을 관람했다.
덕분에 본가의 기사들은, 양자인 유진 라이언하트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2년 전. 유진의 나이가 17살일 때. 그때도 유진은 본가의 기사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냐면, 기사들 사이에서 불문율이 떠돌 정도였다.
유진 도련님과의 대련에서는 절대로 진심을 다하면 안 된다.
아직 어린 도련님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다. 기사들의 자존심을 위한 불문율이었다.
이곳의 기사들은 제 실력에 드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진심으로 덤볐는데도... 압도당해 버린다면. 하물며 그 상대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꼬마라면. 아무리 상대가 라이언하트 본가의 도련님이라고 해도,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년 전에도 강했는데... 지금은...’
‘나라면 이길 수 있을까?’
기사들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수행을 목적으로 한 대련에서는 검강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검강을 사용하며, 진심으로 싸운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나?
모르겠다. 젊은 기사들 대부분은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그보다 완숙한 기사들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헤자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라이언하트 본가에 충성하는 백사자 기사단의 소속으로, 기사들 중에서도 젊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나이가 무조건 실력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헤자르는 여러 기사들을 제치고, 백사자 기사단의 2번대 부대장 자리에 올랐다.
타고난 자질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헤자르는 2번대의 대장이 될 것이다.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면, 백사자 기사단의 단장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헤자르조차도ㅡ 유진과 비교해, 자신의 초라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기사들 중에서, 19살에 유진만큼 뛰어났다고 자부할 수 있는 기사가 과연 존재나 할까?
헤자르는 다른 기사들을 보았다.
본가의 백사자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은 160명.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10명이 1번대. 나머지 150명은 각자 30명씩 나뉘어 5개의 대대를 이끈다.
헤자르는 5명의 대장들을 보았다. 그들의 표정도 헤자르와 다를 것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대륙 어디를 가도 대접받을 실력자들. 그들은 저 방계 출신의 양자에 대한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1번대 기사들도... 다르지 않겠지. 나는 그들에게서 유진님과 같은 압도적인 격을 느끼지 못했다.’
백사자 기사단의 1번대와 그 대장인 기사단장은 길레이드와 함께 흑사자 성에 가있다. 헤자르는 이곳에 없는 최정예들을 떠올리며 침음을 삼켰다.
“...그거 뭐냐?”
주저앉아서 호흡을 고르던 시안이 고개를 든다. 손목을 툭툭 털던 유진은, 시안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뭐가?”
“네가 했던 거 있잖아. 내 공격 막 여기저기 털던 거.”
“패링이잖아. 보면 몰라?”
그걸 누가 모를까? 대련을 지켜보던 모든 기사들도 유진이 쓴 것이 패링이라는 것은 안다. 그건 검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기. 심지어 맨손으로도 쓸 수 있고, 쓸 수 있게끔 수련해야 하는 기술이다.
하지만. 기사들 중에서 유진과 똑같은 패링을 할 수 있노라고 자신할 수 있는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단순한 패링이 아니다.
검강을 튕겨내는 것이 아니라 흘려내는 것. 그것만 해도 고등한 기술인데, 바깥으로 흘려내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흘려내며 자세를 무너트린다.
그것을 섞어가며 시안의 공격을 모조리 상쇄하고, 마나를 과용하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서 말이다.
“...알려줘.”
“뭐어어?”
“알려달라고... 개자식아.”
“지이인짜? 나한테 배우고 싶다 이거야아?”
유진은 실실 웃으면서 주저앉은 시안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를 부들거리며 떨던 시안은, 저 손을 낚아채서 유진의 안면에 주먹을 꽂는 상상을 했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아직 손에 검 있는데... 이걸 확 배때기에...’
“손에 힘 안 푸냐? 안 가르쳐 준다?”
“어? 어어... 어? 가르쳐... 줄 거냐?”
시안은 허둥거리면서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가르쳐 달라며?”
“...어.”
“그럼 가르쳐 주지 뭐.”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가르쳐주는 것이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애당초 이건 가르침보다는 배우는 쪽의 역량과 센스에 달린 기술이다.
“일단 따라 와.”
유진은 시안을 일으키고서 몸을 돌렸다. 시안은 별채로 돌아가는 유진을 멍하니 보다가 급히 뒤를 따라갔다.
연무장을 나와서, 유진은 저택 너머의 숲으로 향했다. 시안은 훅훅 숨을 몰아쉬며,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유진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둘은 인적 없는 숲으로 들어갔다.
“네가 충분히 강해지면, 내가 가주가 될 필요는 없는 거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유진은 시안을 홱 돌아보며 말했다.
“어...?”
“그럼 되는 거잖아. 네가 나보다 강해질 수는 없겠지만, 네가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강해지면 문제없는 것 아냐?”
“...그건...”
“너 말 잘 해야 돼. 네 납득이고 자시고, 내가 싫은 건 싫은 거거든? 네가 아무리 밀어붙여 봐야, 내가 하기 싫다는데 어떻게 가주가 되냐?”
“네 실력이면...”
“실력이 뭐? 가주면 라이언하트의 적통이어야지, 품위도 있어야 하고. 까놓고 내가 수도 한 복판에서 벌거벗고 똥 싸면 어쩔래? 내가 아무리 세도, 벌거벗은 똥싸개가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될 수 있을 것 같냐?”
수도 한 복판에서 벌거벗고 똥을 싸겠다고? 본가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라 온 시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안은 꿀꺽 침을 삼키며 유진을 응시했다.
그는 5년 전, 유진이 처음 라이언하트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유진은 개소리로 치부했지만, 그때 시안은 정말로 유진에게서 소똥냄새를 맡았다. 아니, 어쩌면 그건 소똥냄새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촌구석의 냄새. 키옐 변방의 시골인 기돌에 화장실이 있을까? 시안은 진지하게 그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너... 정말로 똥을 쌀 거냐...?”
“아니 싸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가주가 되느니 똥을 싸겠다고.”
“그건... 안 돼. 이 명문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그런 추잡한 짓을 한다니...”
“그치?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러니까 라이언하트를 위해서는 네가 가주가 되어야 해. 걱정하지 마, 네가 어디 가서 맞고다니지 않을 만큼 내가 잘 가르쳐 줄 테니까.”
시안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래라면 가주 자리를 두고 적자인 이오드와 경쟁해야겠지만, 이오드가 알아서 고꾸라져주지 않았나.
가만히 있으면 시안은 무조건 가주가 될 수 있다. 다만, 유진과의 격차 때문에 스스로 납득하지 못 했을 뿐. 그래서 양보하려고 했지만, 가주가 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크흠. 네가 정 가주가 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몇 번 권했지? 세 번은 넘게 권했다. 그런데도 싫다는데 별 수 없잖은가. 시안은 헛기침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넌 실력은 대단하지만, 가주에 걸맞는 품위가 없어. 후계자 교육도 제대로 안 받았잖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지. 촌구석에서 삶의 절반을 산 네가, 라이언하트 가주에 걸맞는 상류사회의 문화에 익숙할 리가 없...”
유진은 가만히 시안의 말을 듣다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시안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왜, 왜 때리는 거냐?”
“재수 없어서.”
“네가 지껄이던 말들이 훨씬 더 재수 없어...!”
“알아. 꼬우면 너도 나 걷어 차 보던가.”
“...형제끼리 싸우는 거 아냐.”
시안은 얼얼한 정강이를 어루만지며 일어섰다.
“그런데... 어떻게 가르쳐 줄 거냐? 지금 바로?”
“형 바쁜 사람이야.”
“...네가 왜 내 형이야? 우리 동갑이고, 태어난 생일로 따지면 내가 너보다 몇 달은 빨라. 그럼 내가 형이지.”
쌍둥이는 역시 쌍둥이인가. 시안이 하는 말은 시엘과 똑같았다. 유진은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꿈틀댔다.
“...어쨌든. 내가 좀 많이 바쁘니까, 너한테 가르쳐 줄 것들은 따로 적어서 줄게.”
“적어서 준다고? 그것보다 너한테 직접 배우는 것이 훨씬 빨...”
“아니 글쎄, 그거로 안 된다니까. 기초가 안 되어 있는데 어떻게 직접 배워? 네가 뭐 나처럼 천재기라도 해? 너 아까 내가 한 것 흉내라도 낼 수 있어?”
“...없어.”
“그러니까 적어서 준다고. 일단 그거 받고서 열심히 수련하면, 너도 알아서 쓸 수 있을 거다.”
정말 그럴까?
일단 내뱉기는 했는데, 유진도 확신은 가질 수가 없었다. 애당초 그는 전생에서도 다른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없었다. 용병 시절에는 가르쳐 줄 이유가 없었고, 베르무트의 동료가 된 후에는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세냐도, 아니스도, 모론도. 유진이 가르칠 필요가 없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평화롭고 여유롭게 환생을 즐길 수 있다면 재미삼아 해볼 수 있겠지만. 지금 시안에게 귀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다.
“...너 가주되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가주되기 싫은 건 맞는데, 거짓말은 아냐.”
시엘에게도 했던 말이지만, 유진은 시안이 마음에 들었다. 좌절하지 않고 덤비려는 모습이 전생의 하멜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유진은 시안이 느끼고 있을 좌절감과, 분함과, 간절함을 잘 알았다.
‘형제기도 하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시안을 지나쳤다. 시안은 먼저 휭하니 가버리는 유진의 뒤를 따라가며 실실 웃었다.
‘그래. 싫다는데 뭐 어째? 어머니도 바라시는 일이고, 역시 가주는 내가 되어야지.’
그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지금 시안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유진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은 저 녀석에게 배우는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그를 토대로 유진을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시안은 그런 기대를 안고서 아직까지 얼얼한 정강이를 어루만졌다.
*
키옐 남부, 우클라스 산.
이 넓고 험준한 산은, 300년 전부터 라이언하트의 사유지로 지정되어 있다.
그 먼 옛날. 키옐 제국의 마지막 대공, 위대한 베르무트는 이 일대를 영지로 삼고, 산속 깊은 곳의 성에서 머물렀다. 그렇게 수십 년. 베르무트는 작위를 반납하고 수도의 저택으로 이주했으나, 300년이 흐른 지금도 우클라스 산은 라이언하트의 사유지로 남아 있다.
산 깊은 곳의 흑사자 성.
이곳은 위대한 베르무트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며, 대영웅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
흑사자 성의 꼭대기. 넓은 방 중앙에 자리 한 시커먼 원탁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있다.
“...유진. 그 아이가 본가에 돌아왔다는 군요.”
길레이드는 읽던 편지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는 얇게 뜬 눈으로 앞을 보았다.
“조금 늦게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적당한 때라고 보네.”
길레이드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짧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길레이드를 응시했다.
“올해도 이제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잖은가.”
“...꼭 이곳에 부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가 없기도 했고 말입니다.”
“전례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은 가주일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길레이드는 라이언하트의 가주였지만, 이 원탁에 앉은 이들과 비교해 발언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길레이드를 제외한, 원탁에 둘러앉은 열 명의 사람들은 모두가 라이언하트의 원로들이다.
본가와 방계의 구분 없이,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크게 이름을 남긴 거인들.
“방계의 아이가 본가에 양자로 들어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일세.”
남자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 가치는 가주가 보증했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의 본가 아이들은 이런저런 잡음이 많아. 그러니 우리로서도 보다 엄중히 확인을 해야지.”
“가주 뿐만이 아니지.”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원로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현역에서 물러서지 않고서 흑사자 기사단의 3번대 대장을 맡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 꼬마는 나도 직접 봤으니까. 방계 출신이라는 것이 뭐 중요한 문제인가? 중요한 것은 그 꼬마의 가능성이야.”
“방계 출신이라 하여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길레이드는 남자가 거북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불사(不死)의 백사자.
도이네스 라이언하트.
그는 라이언하트의 수많은 식구들 중에서 최고령이자, 길레이드의 조부의 형제다. 100년을 훌쩍 넘은 세월을 살아 온 괴물. 그럼에도 늙어 추레해지지 않고, 흑사자 성에 군림하며 원로원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카르멘. 네 눈은 틀림없겠지만... 네 안목이 흑사자를 대표할 수는 없다.”
“...흥.”
도이네스가 거북한 것은 카르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길레이드의 고모로 만만찮은 연배를 자랑했지만, 도이네스는 카르멘보다 배분이 높은 인물이다.
라이언하트, 아니,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도이네스와 대등한 배분을 가진 인물은 수명에 구애받지 않는 헬무드의 마족 뿐인 것이다.
“그러니 직접 봐서 확인을 해야지. 성인식을 겸해서 말이야.”
도이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도이네스의 말에 반문하는 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길레이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원로원의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은 예상했지만, 막상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편치 않았다.
원로원은 라이언하트의 전통을 지독하게 중시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길레이드가 유진을 양자로 들인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건 길레이드가 열변을 토했던 유진의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제 유진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게 되었다. 도이네스가 말한 것처럼, 앞으로 2달 뒤에 유진은 성인이 된다.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다음 대의 가주가 선출될 것이다.
“그 아이가 나하마에 다녀왔다지.”
“...예.”
“그 전에는 아롯에서 마법을 익혔고. 듣기를 자질이 대단하다던데. 적탑주가 직접 제자로 삼고, 아롯의 왕세자와 교류할 만큼 말이야.”
“...”
“가주. 라이언하트의 성을 가진 우리는 거대한 사자의 무리일세. 가주가 자식들을 자유롭게 키우는 것은 좋지만, 애써 키운 사자가 멋대로 무리를 떠나게 두는 것은 곤란해.”
“...선택은 그 아이의 몫입니다.”
“물론 그렇지. 나는 충분히 그를 존중해 줄 셈이네. 다만, 선택의 폭은 좁혀줘야지. 설마 그 아이를 가주로 내세울 셈인가?”
“...유진이 그를 바란다면,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습니다.”
“바라지 않을 거야.”
카르멘이 대답했다. 그녀는 쓰지도 않는 회중시계를 열었다가 닫으면서 말을 이었다.
“시엘이 그러더군. 유진 그 아이는 지독하리만큼 가주 자리를 거부하고 있다고.”
“그 마음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도이네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환
“흑사자 성?”
유진의 두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 맞은편에서는 시안이 밥을, 아니, 공기를 먹고 있었다. 놈은 입을 반쯤 벌리고서, 텅 빈 허공에 숟가락질을 해대며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이었다.
유진에게 받은 책 때문이다. 본가에 돌아오고서 사흘. 유진은 시안을 위해 직접, 아니, 마법으로 책을 써서 선물해 주었다.
“...그래.”
대답한 것은 애니실라였다. 그녀는 식사 중에 책에 혼이 빠진 아들을 노려보면서도, 차마 나무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로서 아들의 성장을 응원해야 할지, 아니면 밥상머리에서 책이나 처 보며 공기를 퍼먹는 것을 엄히 나무라야 할 지를 고민했다.
“...성인식을 위해 흑사자 성의 원로님들이 오시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희들보고 직접 흑사자 성으로 오라며 초대하셨단다.”
“허... 허어... 흐으음...”
시안이 입술을 뻐끔거리며 대답했다. 그 대답은 애니실라의 말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다. 그는 머리가 핑핑 도는 것을 느끼면서도 책에 푹 빠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할 수는 있는 거야?’
유진이 적은 책은, 시안이 생각했던 것처럼 패링이나 전투기술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지독하리만큼 ‘코어’를 괴롭히는 방법들이 나열되었을 뿐이다. 코어에서 뽑아 낸 마나를 육체 곳곳에 퍼트리고, 순환시킨다. 코어를 심장처럼, 마나를 피처럼. 그것이 무의식 중에도 가능하도록 익숙해지면, 근력을 대신해 마나만으로 몸을 움직인다...
이건 코어와 마나호흡법에 밀려 사라진, 낡아빠진 수련법인 체련과 닮았다. 움직임을 주로 삼아 마나를 수련하는 것. 다만, 본래의 체련이 육체를 움직이는 것으로 마나를 쌓는 것과는 달리, 시안은 이미 백염식으로 코어를 형성한 상태다.
그러니 쌓은 마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적극적이다 못해, 마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오직 마나만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지면, 코어의 가동을 멈춘다. 코어를 사용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 자연스럽게 마나가 따르게끔 육체를 뜯어 고치는 것이다.
‘이 새끼, 그냥 되는 대로 써갈긴 것 아냐?’
시안의 관점에서 이 수행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코어를 가동하지 않고 어떻게 마나를 끌어낸단 말인가? 아니, 그것부터가 문제가 아니다. 코어에서 마나를 피처럼 순환시키고, 움직임에 마나만 사용하라고? 근육도 너무 쓰면 지치고 찢어지는데, 마나는 오죽하겠는가.
애당초 코어의 마나는 무한동력이 아니다. 이 책은 코어의 마나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쥐어짜게끔 만든다. 이를 그대로 따라했다가는 마나가 모조리 고갈되어 쓰러질 것이다.
그것을 반복하다가는 코어가 손상되어 마나가 흩어질 것이고, 그 뒤에는? 평생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폐인이 되어 버린다.
“...너... 진심으로 이걸 하라는 거냐?”
“나는 그렇게 했어.”
“구라치지 마!”
“어허. 어디서 밥상머리에서 험한 말이야? 작은어머니가 너 노려보는 거 안 느껴지냐?”
“헙.”
시안은 기겁하며 책을 덮었다. 과연, 곁에 앉은 애니실라가 두 눈을 살벌하게 뜨고서 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식탁에서 책을 보고, 공기를 떠먹고, 그것까지는 간신히 이해해 주었다. 하지만 가르침에 감사를 모르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의심부터 하는 못된 성미는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시안.”
“네...”
“유진에게... 네 형제에게 사과하렴. 직접, 책까지 써가며, 널 위해준 것이잖니?”
“...미... 미...”
미친놈아! 네가 시발 말도 안 되는 걸 하라며 비웃고 있잖아!
시안의 마음속에서는 그런 울분이 터져 나왔지만, 애니실라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도저히 그리 내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시안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웅얼댔다.
“미안해...”
“알면 됐고. 나 그 방법으로 강해진 것 진짜니까, 도움 하나 안 되는 의심하지 말고 열심히 해. 파이팅.”
거짓말이 아니었다. 전생의 하멜은 베르무트와 세냐가 고쳐주기 전까지는 체련으로 마나를 수련했다. 코어고 뭐고, 그냥 죽기 직전까지 근육을 찢고, 뼈를 삐걱거리게 만들고, 몸을 혹사시키면 마나가 깃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용병들이나 쓰는 싸구려 마나수련법. 어딜 가도 몬스터와, 마물과, 인간과, 가끔은 마족의 시체도 나뒹굴던 시대. 싸움과 전쟁이 끊이질 않던 시대다. 칼밥 먹는 용병이 신세를 펴려면, 남들보다 잘, 많이 싸워야 했다.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당연한 직업이었다.
‘...내 나름대로 뜯어고치긴 했다만.’
싸구려 수련법을 익혀가면서, 더 쓸 만하게 만들었다. 그에 더해서 백염식에 알맞게 개량도 해 주었다.
“새끼가 눈물 흘리며 고맙다고는 하지 못할망정...”
“유진.”
“뭐 미안하다고 하면 됐지. 눈물은 앞으로 흘리면 돼고.”
유진은 애니실라와 다투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싫어도 그거 하다보면 눈물콧물 다 흘릴 걸? 근데 잘 알아둬. 시안, 눈물콧물 흘리는 거로는 부족해. 몸에서 뭐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이야. 눈물콧물도 안 나오게, 똥오줌 지리고 피 토하면서 해야 돼.”
괜히 책의 표지를 어루만지던 시안은, 그 말에 흠칫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해야 내 그림자라도 밟아볼 수 있을 거다.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재수 없는 놈.”
“어우, 달아. 나는 재수 없다는 말이 왜 이리 듣기 좋은가 몰라.”
유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면서 애니실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작은어머니. 그 흑사자 성에는 언제 가면 되는 겁니까?”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오라더구나.”
“그럼 지금 바로 가죠. 필요한 것들은 거기 다 있을 테니, 몸만 가면 되잖아요? 야 시안, 너도 괜찮지?”
“어... 어.”
흑사자 성? 왠 흑사자 성? 책에 푹 빠져있던 지라 오가는 대화를 듣지 못했기에, 시안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다고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으니, 머뭇거리며 대답은 했다.
‘잘 됐네.’
유진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니, 이걸 좋아해야 하나?
식당을 나오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우클라스 산. 그 깊은 곳에 있다는 흑사자 성. 그곳은 라이언하트의 일원이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흑사자 성에 출입하려면, 실력을 인정받고 흑사자 기사단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
그 ‘인정’이라는 것도, 자신이 아무리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가길 바란들 쉬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흑사자가 될 자질은 원로원이 판단한다.
그에 예외를 갖는 것은, 가주 계승권을 포기한 본가의 아이들 뿐. 시엘이 어린 나이부터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가, 카르멘의 종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엘이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흑사자 성이라니... 본가의 성인식이 다른 곳에서 이뤄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야.”
뒤늦게 사정을 들은 시안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품속에 넣어둔 책을 소중히 끌어안으면서 떠들었다.
“뭐 이해는 가. 이오드 그 새끼 덕분에, 아버지의 아들인 우리가 원로원의 주목을 받고 있을 테니까.”
“...그런가?”
“당연히 그렇지. 아버지의 입장은 예전부터 굉장히 곤란했다고. 왠지 알아?”
“이오드. 그리고 나 때문이겠지.”
유진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마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혈계식의 방법을 바꾼 것만 해도 눈총을 살 일인데, 길레이드는 방계 출신의 유진을 즉시 양자로 들이고, 본가의 보물고에서 위니드까지 꺼내 쥐어주었다.
그건 길레이드로서도 막대한 부담과 비난을 감수한 일일 터. 길레이드는 그를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유진은 이 고리타분한 가문의 전통이란 것이 길레이드의 결정을 부드럽게 이해해주지 않으리란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기강을 잡으려는 걸지도 몰라.”
시안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말썽쟁이인 너를 불러다 놓고 경고하려는 거지.”
“너는?”
“난 차기 가주가 될 몸이니까, 미리 축하라도 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어쩌면...”
시안의 호흡이 들뜬다. 그는 흥분으로 두눈을 빛내며,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선조님의 묘에 들어갈 수 있을 지도 몰라.”
유진은 시안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가슴은, 얼음을 들이 부은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우클라스 산.
그곳은 베르무트가 가장 오랫 동안 머문 곳이며, 그를 기리기 위한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허나 베르무트의 묘가 산 어디에 있는 지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 있다. 라이언하트의 가주조차도 선조의 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을 정도다.
‘관짝을 열어 봐야 되는데.’
유진은 베르무트의 묘를 반드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베르무트는 역사에 남은 것처럼, 평온히 죽지 않았다.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베르무트의 시체를 확인해야 한다.
“...어쩌면 나를 마창의 주인으로 임명하려는 것이 아닐까?”
시안은 아직까지 흥분해 있었다.
“아니, 마창이 아니라 분쇄추의 주인으로 임명하려는 것일 지도 몰라. 어느 쪽이든 멋진 일이지...! 아버지도 마창과 분쇄추의 주인이 되지 못했단 말이야.”
마창 루인토스.
분쇄추 지골라스.
각각 참혹의 마왕과, 살육의 마왕이 사용했던 무기들. 그 두 무기는 본가의 보물고가 아니라 흑사자 성에 있다.
마창 루인토스의 주인은 원로원주이자 최고령의 라이언하트, 불사의 백사자 도이네스 라이언하트.
분쇄추 지골라스는 길레이드의 아버지, 오래 전에 죽은 전대 가주가 주인이었다. 전대 가주의 사후, 분쇄추는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본가에서 흑사자 성으로 옮겨졌다.
현재 분쇄추의 주인은 도이네스의 손자, 흑사자 기사단의 1번대 대장인 도미닉 라이언하트다.
“원로원주님은 너무 늙으셨잖아. 은퇴할 나이를 진즉에 넘기셨다고. 아마 은퇴를 겸해서, 내게 마창을 양도해 주시려는 것이 아닐까?”
“내가 어떻게 아냐.”
“나는 창술은 기본밖에 모르는데... 아니, 상관없지. 창술이야 새로 배우면 되는 거고. 내가 마창을 받게 되면, 도이네스님이 내게 직접 창술을 알려주실 거야.”
마창과 분쇄추라.
유진은 그 살벌하고, 끔찍한 무기들을 떠올리며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안에는 칼집에 넣어 둔 월광검이 들어있다.
어쩌면 본가에 돌아오면 뭔가 반응이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월광검은 기대했던 것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흠.”
계속해서 따라오려는 시안을 때어놓고.
유진은 별채의 방으로 돌아 와, 월광검을 뽑아보았다. 여전히 뽑을 때마다 마나가 쭉 빨려들어가는 빌어먹을 마검.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월광검의 검신을 응시했다.
검신의 밑바닥.
자그마한 파편이 떠돌고 있다. 볼레로 거리의 경매장에서 입찰받은 월광검의 파편. 저 작은 파편은 월광검과 공명하고, 검신에 더해져 있다.
‘파편을 모으면... 완전히 수복될 것 같은데.’
파편이 발견된 곳은 헬무드의 카자드 구릉지. 유폐의 마왕이 신경 쓰이니 당장은 가볼 수 없는 곳이다.
‘괜히 조급해 하지 말자고. 천천히, 일단 베르무트의 무덤부터 찾아야 돼.’
당장 그것부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라이언하트의 가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고, 위치조차 모르는 곳이 베르무트의 무덤이다. 길레이드야 유진을 어여뻐하고 있지만, 아마 원로원이라는 놈들은 유진을 어여뻐해주지 않을 것이다.
놈들의 눈을 피해서 베르무트의 무덤을 찾을 수 있을까.
“내 무덤에 이어 베르무트의 무덤이라니.”
누가 보면 도굴꾼이라 생각하겠어.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월광검을 다시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본가에 돌아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떠나게 될 줄이야.’
유진은 망토 안에 넣어둔, 하멜의 동상과 추모석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어쩐다?’
도저히 파묻히게 두고 싶지 않아 들고 오긴 했는데.
놓을 곳이 마땅치 않다. 길레이드가 있다면 어떻게 잘 이야기를 해서, 이걸 본가에 세워놓을 생각이었는데. 길레이드가 없으니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아니, 잠깐.’
유진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히죽 웃었다.
*
유진과는 달리, 시안은 흑사자 성에 가기 위해 반나절 동안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잿빛 머리를 포마드까지 발라가며 잘 쓸어 넘기고, 맵시 있는 제복을 차려 입고서 망토까지 어깨에 둘렀다.
“선 보러 가냐?”
“너는 어디 놀러 가냐?”
시안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유진을 보며 혀를 찼다. 옷은 아까 입고 있던 평상복. 거기에 망토만 두른 것이 전부. 검은 차고 있지도 않다.
‘저 망토...’
흑암의 망토. 그에 대해서는 시안도 들었다. 시안은 내심 유진의 망토가 부러웠다. 망토가 워낙 멋들어지게 생긴지라, 대충 어깨에 둘러도 멋지지 않은가. 거기에 편의를 위한 여러 마법들도 내장되어있고, 아공간까지...
“그렇게 쳐다봐도 안 줄 거야.”
“다,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
시안은 급히 대답하면서 유진을 지나쳤다. 우클라스 산은 수도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마차를 타도 한 달은 족히 걸리는 곳이니, 워프 게이트를 사용해야 한다.
그 워프 게이트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행으로 도착하기 위해서는 흑사자 성에서 워프 게이트를 열어주어야 한다.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워프 게이트를 관리하는 마법사가 뒤로 물러선다. 게이트에 집중 된 마나가 공간을 찢고, 머나먼 우클라스 산과 이어지는 길이 열린다.
“시안.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오렴.”
애니실라가 말했고.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제하드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유진은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제하드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제가 어디 갈 때마다 눈물을 쏟으십니까?”
“돌아온 지 사흘만에 떠나다니...”
“다른 곳 가는 것도 아니고, 가문의 큰어른님들을 만나러 가는 거잖습니까. 가서 재롱떨고 용돈도 넉넉하게 타 올 테니까, 아버지는 제 걱정 마시고 끼니나 제때 챙겨 드세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잘 들었지? 아버지 심심하지 않게 잘 놀아드리고, 밥 안 드시면 억지로 먹여드려.”
“예, 공자님.”
라만은 덥수룩한 수염을 깔끔히 밀고, 집사복을 입었다. 용맹한 사막의 전사인 내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라만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저는 안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내가 널 왜 데려가?”
“그야... 저는 공자님의 심복이니...”
“네가 언제부터 내 심복이야. 굳이 따지면 내 심복은 네가 아니라 니나지.”
“그럼 제가 따라가나요?”
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유진은 그 말에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나랑 시안 둘만 오라는데 왜 자꾸 따라오려고 해? 헛소리 말고, 라만이랑 같이 우리 아버지나 잘 챙겨드려. 나 없는 동안 누가 괴롭히면, 괜히 마음 담아두지 말고 라만한테 말하고.”
“음...!”
라만은 결의로 두 눈을 빛내며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을 흘겨보았다.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애당초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이 한낱 시종을 핍박할까? 라만은 그 사실도 알 수가 없었다.
“가자.”
유진은 시안의 등을 두드리며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조금 긴장해 있던 시안은,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유진의 등을 보고서 급히 걸음을 때었다.
둘의 모습이 워프게이트의 빛에 삼켜진다.
머나먼 거리의 도약. 이미 몇 번을 겪은 일이라,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워프의 부유감을 만끽했다.
“...이게...”
하지만 곧 당황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뭐하자는 거야?”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내뱉었다.
워프는 끝났다.
“으아아아아!”
저 멀리서 시안의 비명이 들린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시안을 찾았다. 저 멀리, 시안이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워프게이트를 통과하면 다른 워프게이트에 도착하는 것이 당연한데. 유진과 시안은 하늘에 도착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여긴...’
유진은 눈을 부릅 뜨고서 앞을 보았다.
거대한 산맥.
“처음부터 맵네.”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망토를 펼쳤다.
흑사자 성
“ㅡ아아으아아아아...”
시안의 비명이 점점 멀어진다. 유진은 까마득한 지상으로 추락하면서도 시안에게 시선을 때지 않았다. 이름 높은 명문 무가, 라이언하트 본가의 도련님. 그런 배경을 가진 시안은 어려서부터 다양한 것을 배워왔겠지만, 지금 같은 자유낙하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워프게이트를 통과했더니, 대뜸 높다란 하늘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안은 하늘에서 허우적거리며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저걸 도와줘야 되나?’
우선, 유진은 제 몸부터 챙기기로 했다. 그는 부유마법으로 추락을 늦추면서 시안 쪽을 쳐다보았다. 시안의 재주로는 이만한 높이의 추락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천운이 따른다고 해도 뼈다귀 몇 개는 박살날 것이다.
‘안 도와줘도 되겠네.’
이건 사고가 아니다. 대뜸 하늘에서 떨어트리는 것이 시작이라면, 만약을 대비한 안전장치는 되어있을 터.
유진의 생각대로였다. 시안은 여전히 비명을 꽥꽥 질러대고 있지만, 그의 추락은 점점 늦춰지고 있었다. 저 아래의 숲, 어딘가에 있는 마법사가 시안에게 마법을 걸어 준 것이다.
유진은 더 이상 시안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산의 정상 근처에 세워진 고성이 보인다. 유진은 첨탑 꼭대기에서 흔들리는 깃발을 보았다.
송곳니와 이빨이 부각 된 사자문양. 저곳이 본래 도착했어야 할 흑사자 성이다. 여기서 날아가도 되는 건가?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떨어트리지도 않았겠지.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유진은 이 상황을 일단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베르무트의 무덤이 흑사자 성의 부지 안에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쩌면 이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르잖은가.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둘 것 같지도 않고.’
일단은 성을 찾아가면서 신경 쓰이는 곳을 둘러보아야겠다. 유진은 그렇게 마음먹고 낙하를 가속시켰다. 주변에 맴도는 바람이 유진을 밀어냈다.
“저것도 위니드의 힘인가?”
“아뇨. 바람의 정령을 불러들이기 전에, 부유 마법을 먼저 썼습니다.”
“당황한 기색도 없었고... 과연. 마법도 능숙하게 다루는 군.”
뒷짐을 지고 서있던 도이네스가 빙긋 웃었다. 그를 비롯한 원로들은 성벽에 서서 유진과 시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망원경 따위를 쓰지 않아도, 그들은 저 멀리 있는 유진과 시안을 코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보고 있었다.
“마법의 조예는 어떤가?”
“...부유마법은 가장 급이 낮은 마법도 4서클에 속합니다. 저만한 높이에서 추락하는데도 속도가 일정한데다... 균형도 잘 잡고 있어요.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 5서클은 되어 보입니다.”
도이네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큼직한 안경을 쓴 원로였다. 그는 라이언하트의 방계 중에서도 마법으로 이름 높은 가문 출신이다.
그렇기에 그는 유진의 마법에 내심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 5서클이라니. 유진 라이언하트는 19살이다. 듣기를 백염식의 진전도 전례가 없을 만큼 대단하다고 했는데. 마법에 입문한지 2년 만에 5서클에 올랐단 말인가?
“...가주. 유진 라이언하트가 백염식의 몇 성에 올랐는지 알고 계시오?”
원로는 놀람을 가다듬고서 길레이드를 쳐다보았다. 살짝 굳은 얼굴로 유진과 시안을 보고 있던 길레이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롯에 가기 전에는 3성에 올랐었고, 작년 즈음에는 4성에 올랐다고 편지를 받았습니다.”
“허허!”
웃음으로 대답한 것은 도이네스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턱을 어루만졌다.
“19살에 4성이라...! 어쩌면 1년이 흘렀으니 경지가 더 올랐을 수도 있겠어.”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답한 것은 깔끔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10명의 원로들 중에서 백염식을 익힌 본가 출신은 3명뿐.
본가의 최고 어른이자 원로원주, 도이네스 라이언하트.
전대 가주의 형제, 카르멘 라이언하트.
불가능하다 내뱉은 것은 전대 가주의 형제이자, 카르멘의 동생인 클라인 라이언하트였다. 그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본가에서 분가하고 자신의 가문을 이룬데다, 10년 전부터는 현역에서 물러나 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현역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클라인은 평생 동안 백염식을 수련해 왔다.
그런 클라인조차도 7성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현존하는 라이언하트 중에서 7성의 벽을 넘은 것은 도이네스와 카르멘, 둘 뿐이다. 당장 가주인 길레이드와 동생인 기온도 아직까지 7성의 벽을 넘지 못해, 6성의 끝에 머무르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꼬마가, 백염식의 5성에 올랐을 지도 모른다니. 클라인은 도저히 그 가능성을 인지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무능하다고 해서 다른 모두가 무능한 것은 아니지.”
카르멘은 멋들어진 케이스에서 시가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클라인은 발끈하여 카르멘을 돌아보았다.
“아, 누님!”
“그 낯짝을 하고서 누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내 낯짝이 뭐가 어떻다는 거요?”
“다른 사람이 보면 네가 내 아버지나 할아버지로 보일 거다.”
“그건 누님이 나잇값 못하고 젊은 얼굴을 고집하기 때문이지...! 대체 언제까지 그 젊은 용모를 고집하려는 거요?”
“늙어 보이는 것보다는 젊어 보이는 것이 압도적으로 낫다.”
“품위가 없단 말이요, 품위가! 원로 소리를 듣기 시작했으면 그에 걸맞는 중후한 품위를 갖춰야지, 누님은 나이가 예순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자기가 이십대 처녀인 줄 아는...”
빠직. 카르멘의 이빨이 시가를 분질렀고, 클라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이를 이만큼 먹고도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클라인은 누나의 주먹이 두려웠다.
하지만 원로에 걸맞는 품위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0명의 원로들 중에서 아직까지 현역을 고집하는 것은 카르멘 뿐이다.
지금만 해도 보라. 카르멘은 피우지도 않는 시가를 입에 물고, 망토와 별 차이가 없을 만큼 커다란 코트를 어깨에 두르고 있다. 그러면서 부츠 신은 발을 난간에 올리고, 몰아치는 바람을 정면에서 받으며 한껏 자세를 잡고 있었다.
‘조카가 보는 앞에서까지...’
원로들끼리 있을 때에는 상관없다만, 조카인 길레이드가 보는 앞에서 저러는 것은 조금 자중해 주었으면 싶었다. 하물며 이제 곧 조카손주들까지 올 텐데...
‘...이미 늦었지.’
클라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수염을 어루만졌다. 이미 카르멘은 조카손녀인 시엘을 2년 전부터 종자로 삼았지 않은가. 그를 떠올릴 때마다, 클라인은 아직까지도 철없는 누님을 대신해 침대의 이불을 걷어차곤 했다.
“내려왔군.”
시안과 유진이 숲으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도이네스가 몸을 돌렸다. 그의 뒤편에는 원로들과, 흑사자 기사단을 이끄는 10명의 대장들이 있었다.
“클라인.”
턱. 카르멘은 난간에 올려두었던 부츠 발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클라인은 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저 철없는 누님은 라이언하트 중에서도 도이네스 다음의 관록을 자랑하면서도, 아직까지 현역에서 물러서지 않고 흑사자 기사단을 이끌고 있다.
“난 안 갈 거요.”
카르멘이 대놓고 자신을 호명하니, 클라인은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원로까지 되었는데 뭐 하러 몸을 굴리나? 돌아 온 대답에 카르멘은 눈살을 찌푸렸다.
클라인이 누나를 철없다고 생각하듯, 카르멘도 동생을 철없다 생각했다. 후손들에게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나이를 먹었다고 몸 편한 것만 생각하다니...
‘그러니 경지가 늘지 않지.’
카르멘은 동생의 한심함에 고개를 저으며 성벽에서 물러섰다. 그렇게 물러서는 것은 카르멘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포함한 6명의 대장들도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미닉.”
도이네스는 물러서는 대장들 중에서 손자의 이름을 불렀다. 1번대 대장. 도미닉 라이언하트는 부름에 대답하는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선 성으로 부른 뒤에 시험하는 것도 늦지 않을 텐데...”
“그래서는 시험이 되지 않을 걸세. 가주. 자식들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이건 혈계식과는 달라. 아이들의 나이와 경험에 사정을 맞춰주어선 의미가 없지. 특히... 가주의 자식들은... 하하. 가주가 듣기엔 불쾌할 지도 모르겠지만, 가주가 저 나이일 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성인식을 치룰 거라면, 이오드를 불러와도 괜찮지 않았나 싶습니다.”
길레이드는 표정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으며 내뱉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치미는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이네스는 길레이드의 불쾌를 짐작하면서,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도 장남에게 미련을 두고 있나?”
“...”
“아들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가주. 이오드에 대한 미련은 내려놓게. 그 아이는 자네의 미련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자네도 들어서 알지 않나? 이오드는 처가에서 평온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
“...그렇지만. 이오드는 제 아들이고, 본가의 장남입니다. 가주의 계승은 불가능하겠지만, 성인식을 치를 권리는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미 성인이 되었어.”
도이네스는 씁쓸히 웃으며 길레이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길레이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도저히 도이네스의 말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테오니스와 이오드가 처가로 내려간 지 2년 째. 길레이드는 단 한 번도 둘을 만나볼 수가 없었다.
도이네스를 필두로 한 원로원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들이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만남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니. 때문에 이오드는 성인식도 치르지 못했고, 길레이드도 아들의 성인식을 위해 처가를 방문하지도 못했다.
본가의 장남이 흑마법에 입문하려 한 것은, 300년 동안 이어져 온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땅에 처박는 크나 큰 죄였다. 본래라면 절연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문제란 말이다.
‘...사실상 절연이라고 봐야 할 일.’
절연까지 가지 않았다면, 아들의 죄를 포용하고 얼러주어야 하지 않은가. 길레이드는 몇 번이나 원로원에 의문을 표했지만, 도이네스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도이네스와 원로원은, 이오드가 혹시 다른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흑마법에 입문하려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오드는, 길레이드를 포함한 본가의 이목이 멀어진 틈을 타서 또다시 흑마법에 입문하려 들지도 모른다...
원로원은 이오드를, 내적이나 외적을 끌어내기 위한 덫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길레이드는 그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원로원에게 짙은 불만과 슬픔을, 분노를 느꼈다. 본가의 가주라지만, 아들이 그런 죄를 지은 이상 길레이드는 원로원의 뜻에 정면으로 반할 수가 없었다.
‘...이오드.’
길레이드는 긴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는 아들인 이오드를 믿었지만, 원로원은 이오드를 믿어주지 않는다.
*
파스락.
유진은 발 아래에서 부서지는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힐긋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보았지만, 나뭇가지가 워낙 무성한지라 하늘은 잘 보이지 않았다.
“...흠.”
유진은 턱을 어루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 기둥에 새겨 놓은 흔적들이 몇 개 눈에 들어온다.
‘결계.’
예상은 진즉에 했지만, 확실하게 알았다. 방향감각을 어그러트리고, 같은 곳을 빙빙 돌게 만들고 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몇 개 주워, 손안에서 부서트렸다.
그리곤 파편을 하나씩 떨어트리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떨어트리기만 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휙휙 던지기도 했다. 월광검으로 결계를 통째로 부서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뒷일이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다.
월광검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본가에 내려오는 서적에도, 월광검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애당초 이만한 규모의 결계를 지금의 월광검으로 부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대뜸 숲에 떨궈놓고, 흑사자 성으로 찾아오라는 건가. 일단은 그렇게 생각되는데, 단순한 길찾기는 아니었다.
이 숲은 제법 위험했다. 숲에 떨어지고서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당장 유진은 머리 둘 달린 트윈헤드 오우거를 두 마리나 맞닥트렸다.
‘본래라면 두 마리가 같은 구역에 있을 리가 없는데.’
오우거는 중대형 몬스터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강력한 놈이고, 머리 둘 달린 놈은 특히나 강력하다. 놈들은 숲 하나를 통째로 제 영역으로 삼고서 활동한다. 무리도 짓지 않고 단독생활을 하는 오우거를 이 짧은 시간에 두 마리나 맞닥트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생하고, 사육하고 있는 것이다. 오우거 뿐만이 아니라, 이 숲 전체가 몬스터를 방목하는 거대한 사육장이다.
‘애들을 시험 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나?’
그거야 평범한 애들일 때의 이야기고. 본가의 아이들이라면 이 정도는 가뿐히 통과할 것이라 믿는 걸까.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히려 너무 쉽다. 오우거가 아무리 위험하단들, 검강을 능숙히 다룬다면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상대다.
‘혈계식처럼 마나를 제한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거슬리는 것이라곤, 길을 찾지 못하고 숲을 헤매게 만드는 결계 뿐. 고작 이런 것을 하자고 대뜸 하늘에서 떨어트렸을 리는 없었다.
“과연.”
바람이 요동친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무릎을 굽혔다. ㅡ콰지직! 높다란 곳에서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유진을 덮쳤다. 유진은 그것에 깔리지 않도록 뒤로 뛰어오르며, 위를 쳐다보았다.
“허.”
이번에는 솔직히 놀랐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커다란 와이번이었다. 저만한 몬스터가 바로 위에서 떨어졌는데도, 결계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와이번의 습격도 놀랄 일인데. 와이번의 등에 안장을 놓고서 타고 있는 인물이 유진을 더 놀라게 만들었다.
“언제부터 와이번을 타고 다닌 거냐?”
시엘 라이언하트. 그녀는 고삐를 홱 당기면서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안 거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숲 전체에 펼쳐 놓은 결계는, 흑사자 기사단에서도 전투 마법사들로 이뤄진 6번대의 작품이다.
이 결계는 습격자의 기척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그런데도 유진은 결계 속에서 당황하지 않았고, 예고 없는 습격에 대응했다. 시엘은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바람이 소란스럽더라.”
“그게 뭔 미친 소리야?”
시엘은 그렇게 되물으면서 와이번을 이끌었다. 화아악! 와이번이 크게 날갯짓을 하자, 지면이 통째로 뒤집어지며 유진을 덮쳤다. 유진은 다시 뒤로 훌쩍 물러서면서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어쩐지. 몬스터뿐이라면 너무 쉽다고 생각했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할 말은 그것뿐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인사 한 마디 안하고 공격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냐?”
“...머리 안 아파?”
시엘이 대뜸 물었다. 유진은 망토 안에서 채찍을 꺼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 왜?”
“이 결계. 정신의 혼탁을... 유도하고 있을 텐데...”
“어쩐지. 처음 들어왔을 때 현기증이 좀 있더라.”
“...그것뿐이야?”
“내가 멘탈이 좀 튼튼해서.”
시엘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저 망토. 5서클까지의 마법은 막아낸다고 했지? 아무리 그래도... 이 결계에 가해지는 마법은 5서클은 웃돌 텐데?’
이 결계는 표적의 공포를 환영으로 비추며 정신을 무너트린다. 당장 시안은 처참한 귀신의 환영을 보면서 아직도 꽥꽥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그런데 유진은 환영을 보기는커녕, 가벼운 현기증만 느꼈단다.
시엘은 유진을 노려보았다. 본래라면 이렇게 빨리 습격하지 않고, 맞닥트린 공포에 어찌 대응하는지부터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시안과는 달리 결계를 헤매지 않았다. 그러니 예정과는 빠르게 습격할 수밖에 없었다.
“...너 무서운 거 없어?”
“없어.”
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현기증을 통해 정신공격은 염두에 뒀다만... 무서운 것? 고약한 결계다. 마음속의 공포를 구현하는 건가.
‘고약하긴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정신공격은 지긋지긋할 만큼 당해봤단 말이지.’
환생으로 몸이 바뀌었다지만, 혼은 그대로다. 기억도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유진의 정신력만큼은 하멜로 살았을 때와 똑같았다.
당장 전생에서는 이것보다 지독하고 끔찍한 정신공격을 셀 수 없이 많이 당해 보았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 빌어먹을 년은 시도 때도 없이 몽마를 보내며 정신을 무너트리려 했었다.
누아르 제벨라 뿐만이 아니다. 3개의 마왕성에서도 뭐만 하면 정신공격을 당했었다.
애당초 이 숲의 결계는 작정하고 정신을 박살내려는 것이 아닌데다, 흑암의 망토까지 더해진 유진의 정신내성은 공포의 형상을 보기는커녕 가벼운 현기증만 느끼는 것이 고작이었다.
“계속 그거 타고 있을 거냐?”
와이번의 날갯짓이 광풍을 이끌지만, 유진에게는 거센 바람이 침범하지 못했다. 위니드를 통해 불러들인 바람의 정령들이 와이번의 바람을 상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너도 타고 싶어?”
“난 그거 안타고 하늘 날 수 있어.”
유진은 히죽 웃으며 몸을 공중에 띄웠다. 그러자 시엘은 즉시 와이번의 등을 박차고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뽑혀나온 레이피어가 송곳처럼 찔러 온다. 유진은 가볍게 위니드를 휘둘러, 시엘의 몸을 밀어냈다.
“언제부터 그런 비행소녀가 된 거냐?”
“미친!”
유진의 중얼거림에 시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나무 기둥을 발판 삼아 다시 도약하면서, 구겨진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그딴 농담은 어디서 배워 온 거야?!”
“크흠...”
유진은 민망함을 감추려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말이 어쩌다 이렇게 나왔...”
“하나도 안 웃겨!”
“나도 웃기라고 한 말 아니라고!”
아주, 아주 약간 웃을 것을 기대하긴 했다만. 유진은 그를 내색하지 않고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흑사자 성
설마 대뜸 시엘과 싸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봐 줄 생각은 없었다.
기껏 던져 본 농담에 시엘이 정색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로. 유진은 민망함에 화끈거리려는 귓불의 온기를 무시하면서, 시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나가 요동친다. 시엘은 순식간에 사방을 포위하는 매직미사일을 살피면서, 혀를 차는 것으로 와이번에게 신호를 보냈다.
“키에엑!”
와이번이 높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퍼덕거린다. 드래곤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저 날개달린 도마뱀들은, 스스로 마법을 펼칠 수는 없지만 그와 비슷한 것은 할 수 있다. 강력한 항마력을 가진 와이번은 날갯짓은 마법을 무너트린다.
시엘에게 쇄도하던 매직미사일들의 궤적이 이리저리 바뀐다.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활처럼 젖히며 바람을 제 힘으로 삼았다. 그렇게 한층 더 가속한 시엘이 레이피어를 찔러왔다.
“어쭈.”
땅에 발을 대고 얍얍 검만 휘둘러대는 고지식한 싸움이 아니다. 유진은 그것에 작은 즐거움을 느끼며 위니드를 고쳐 잡았다. 카앙! 아래에서 위로 쳐올린 검격이 레이피어를 튕겨낸다.
그와 동시에, 왼손에 들고 있던 채찍이 홱 쏘아졌다. 시엘은 채찍의 움직임에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휘두른 것도 아니고, 마치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쏘아졌기 때문이다.
“윽!”
어깨를 관통할 것처럼 쏘아진 채찍. 시엘은 공중에서 급히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채찍은 쥔 손목이 꺾인다. 그 움직임이 채찍의 궤도를 바꾸었다.
휘어진 채찍이 시엘의 허리를 감는다. 유진은 그대로 팔을 당겨, 시엘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시엘은 잔뜩 표정을 구기고서 고개를 들었다.
유진은 아직까지 하늘에 떠있었다. 유진은 히죽 웃으며 채찍을 당겼다. 허리를 감은 채찍의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작정하고 죈다면 허리를 으스러트릴 수 있겠지만, 유진은 시엘을 불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잡았다.”
“아직 아냐.”
시엘이 내뱉었다. 키에엑! 커다란 와이번이 달려든다. 쩍 벌린 이빨이 매섭다. 유진은 위니드를 휘둘러 와이번을 통째로 베어버리려 했지만, 시엘이 빽 비명을 질렀다.
“용용이 죽이면 안 돼!”
“용용... 뭐?”
“죽이면 안 된다고!”
저 뻔뻔한 것. 먼저 기습까지 해놓고서 바라는 것도 많아요.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위니드를 거두었다. 시엘의 외침을 무시하고 와이번을 반 토막 내버릴까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시엘이 펑펑 울며 평생토록 이 일을 원망할 지도 모른다.
“운 좋은 줄 알아, 도마뱀 새끼야.”
위니드는 거두었지만, 바람의 정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은 공중에서 몸을 꺾으며 다리를 움직였다.
빠각! 유진의 발길질이 와이번의 턱을 갈겨버렸다. 와이번이 쩍 벌렸던 입을 다물고서 공중에서 휘청거린다. 유진은 곧장 와이번에게 달려들어, 놈의 주둥이에 주먹을 내리 찍었다.
꽈직! 와이번의 몸이 땅에 처박히고, 지면이 뒤흔들렸다. 그 사이에 시엘은 몸을 휘감던 채찍을 끊고서 재차 유진에게 덤벼들었다.
“나쁜 자식!”
유진은 그 비난이 억울했다. 기습을 받은 것은 유진이었다. 죽이지 말라기에 와이번도 안 죽였다. 대신 턱주가리를 박살내고, 당분간 고기를 씹지 못하도록 만들어줬을 뿐이다. 이 정도면 형제에 대한 배려는 충분히 해 준 것 아닌가?
“또 덤벼?”
그래도 근성이 좋은 건 마음에 든다. 시안도 그렇고. 애니실라의 자식 교육이 훌륭한 건가?
‘테오니스보다는 훨씬 훌륭하지.’
유진은 끊어진 채찍을 던져버리고, 찔러오는 레이피어를 향해 과감하게 손을 뻗었다. 시엘은 검강을 상대로 맨손을 뻗는 유진에게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거 아냐?’
유진이 시엘을 병신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듯, 시엘도 유진을 병신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이 숲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본가의 자제들을 시험하는 것이지, 재기불능의 병신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시엘은 급히 레이피어의 궤적을 틀었다. 유지는 그 광경을 비웃으며 몸을 당겼다.
“은근히 착하다니까.”
어쩔 수 없이 궤적은 틀었다만. 시엘은 그 판단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저 터무니없는 녀석이 제 살을 깎아먹는 모험을 할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후회는 늦었다. 유진의 손이 시엘의 손목을 잡았고, 그대로 비틀어 버렸다.
“윽!”
시엘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레이피어를 놓았다. 유진은 여전히 잡은 손목을 놓지 않고, 시엘의 팔을 등 뒤로 꺾고서 그녀의 오금을 무릎으로 찍어 눌렀다.
“살살 좀 하지 그래?”
시엘은 제압되어 바닥에 엎어지면서도 투덜거렸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더 이상 덤비지 않는다면.”
“...결판은 났잖아. 애당초 무리였던 거야. 나로서는 널 시험할 수가 없어.”
시엘은 그렇게 내뱉고서, 잠시 입술을 우물거렸다.
“...내가 레이피어를 꺾을 것을 예상한 거야?”
“그건 반반이지.”
“꺾지 않았으면 네 손이 날아갔을 거야.”
“날아가지 않을 것을 확신했으니 손을 뻗은 거야.”
“개자식.”
재수 없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한층 더 진화해 버렸나. 유진은 낄낄 웃으며 시엘의 손을 놓아주었다.
“여기 도착하고서 당황의 연속이라서 말이야. 기왕 이렇게 잡힌 것, 설명이라도 해주는 것이 어때?”
“...흑사자 성으로 찾아가면 돼.”
“그건 나도 알아.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과정에서 날 얼마나 귀찮게 할 거냐고.”
“...흑사자 기사단 60명.”
시엘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몸을 틀었다.
“대장님들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들 전원이 이 산에 흩어져서, 너랑 오빠를 습격할 거야.”
“성인식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나?”
“원로원주님이 널 높이 평가하고 있거든. 경계도 하고 있는 모양이고. 불쌍한 오빠는 네게 휘말려 버린 거야.”
“높이 평가 받는 것이야 당연하고. 경계는 왜 한 대?”
“그걸 몰라서 물어? 너, 아롯을 떠나서 나하마에 들렸다가 왔잖아.”
“어딜 가든 내 자유지.”
“원로원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던데? 최근 나하마의 정세가 수상쩍어. 그런 중에 네가 멋대로 나하마에 갔다 와버린 거야.”
“그럴 거면 처음부터 가지 말라고 하던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시엘의 등을 찰싹 때렸다.
“그러니까. 내가 본가를 떠나있는 동안, 가문을 곤란하게 할 헛바람이 들지 않았나 경계한다는 거지?”
“...시험도 겸해서 말이야.”
시엘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언제까지 깔아뭉개고 있을 거야?”
“얘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언제 널 깔아뭉갰니?”
“지금 그러고 있잖아.”
“이건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라 제압하고 있는 거야.”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시엘은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제복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뼈 부러질 뻔 했어.”
“안 부러졌으면 됐지.”
바닥에 처박힌 와이번이 낑낑거리며 고개를 든다. 그러자 시엘은 냉큼 일어서서 와이번에게 다가가, 놈의 비늘을 털 쓸어주듯 어루만져 주었다.
“60명이라...”
유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고작 2명 습격하는 것치고는 너무 많은데.”
“...산이 넓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습격 뿐만이 아니라 너랑 오빠가 엄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도 하고 있어.”
“엄한 곳?”
유진은 눈을 반짝 빛내며 시엘을 쳐다보았다.
“어디?”
“...그야 위험한 곳을 말하는 거지. 너도 여기까지 오면서 몬스터를 맞닥트렸을 것 아냐? 이 산은 몬스터가 아주 많아.”
“그러니까. 위험한 몬스터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그게 전부야?”
이 산 어딘가에 베르무트의 무덤이 있을 지도 모른다. 유진은 그걸 기대하고서 시엘을 쳐다보았다.
“이 주변은 오우거가 고작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오우거는 우습게 사냥하는 위험한 놈들이 있어.”
“놈?”
“마물.”
시엘의 표정이 구겨졌다.
유진의 두 눈은 싸늘히 식었다.
“마물이라고? 마물이 왜 여기 있어?”
“...흑사자 기사단의 실전 경험을 늘리기 위해서 사육 중이래.”
“인간이 마물을 사육한다고?”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 볼레로 거리에서, 인간이 마족을 은밀히 노예로 사들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때도 어이가 없었지만, 마물을 사육한다는 말은 그보다 더 어이가 없었다.
마물은 가축도 아니고, 몬스터도 아니다. 놈들을 사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이 사육이지, 그냥 산 깊은 곳에 풀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마물의 위험성에 비해, 놈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환마법에 능한 마법사라면 별다른 제물 없이 마물을 불러들일 수 있다.
그래서 300년 전에는 세상 곳곳에 마물이 득실거렸다. 개같은 마왕들은 까마득한 거리에서 펼쳐지는 온갖 소환마법진들에 간섭해, 마법사가 원하는 소환물 대신에 마물이 소환되게끔 농간을 부렸다. 그렇게 세상에 퍼진 마물들은 자기들끼리 번식하고, 새끼를 가고, 무리를 짓고, 사람들을 습격했다.
“별로 위험하지는 않아.”
시엘은 유진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매주 마물의 영역을 살피며 소탕하고 있거든. 그 과정에서 기사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도록 하고...”
“마물 뿐이냐?”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시엘을 노려보았다.
“이 산에 선조님의 묘가 있을 텐데.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거든. 선조님의 묘산에, 다른 것도 아니고 마물을 풀어 놔?”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본가의 일원으로서 발끈할 수밖에 없는 일이잖아.”
“언제부터 네가 가문에 그리 열성적이었다고.”
시엘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다.
“내가 알기론, 마물의 영역 근처에 선조님의 묘는 없어. 원로원이 미친 것도 아니고, 선조님의 묘 근처에 마물을 풀어놨겠어?”
“그럼 어디 있는 건데?”
“내가 어떻게 알아? 분명한 것은, 마물의 영역에는 없다는 거야. 나도 몇 번이나 마물 소탕에 나갔었는데, 선조님의 묘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마물이 없는 곳. 어디지? 산이 원체 넓으니...’
원로원주가 대놓고 경계하고 있다는 말. 그것이 거슬린다. 흑사자 성으로 향하는 척 하면서 산을 샅샅이 뒤져보려고 했는데.
‘가뜩이나 시선을 받고 있는데. 괜한 짓을 했다가는 더 지랄을 들을게 뻔하잖아.’
이렇게 된 이상, 생각해 두었던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유진은 일단은 얌전히 흑사자 성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나하마에 들른 것도 해명해야 한다. 로베리안에게는 선인장 전갈을 먹으러 간다며 핑계를 댔지만, 원로원의 늙은이들에게는 그런 핑계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너 어디 가냐?”
유진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시엘을 쳐다보았다. 시엘은 끙끙거리며 신음소리를 내는 와이번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봐? 돌아가야지.”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왜?”
“널 인질로 잡고, 네 와이번을 타고서 돌아갈까 생각 중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시엘은 투덜거리면서 고삐를 당겼다.
“가기 전에 충고 하나 해 줄게. 가급적이면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거야.”
“왜?”
“나야 처음부터 널 목표로 했었으니 가장 빨리 올 수 있었던 건데. 곧 다른 기사들도 올 거야.”
“누구?”
“몰라. 그래도 대장님들은 조금 늦을 걸? 다들 성벽 쪽에 계셨었...”
시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유진은 냅다 달려들어 시엘을 덮쳤다. 갑작스런 공격에 시엘은 기겁하며 고삐를 놓고 뒤로 뛰어올랐다.
화악! 유진이 날린 바람이 시엘의 몸을 저만큼 뒤로 밀어낸다. 그 사이에 유진은 와이번의 고삐를 틀어 쥐었다.
“키에엑!”
와이번은 높은 비명을 지르며 유진을 떨어트리려 했다. 그러자 유진은 고삐를 놓고, 놈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뒤질래?”
와이번은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사람을 등에 태우고 날아다니고, 안장과 고삐까지 달고 있다는 것은 사람의 손에서 키워지고 사육되었다는 것이다. 와이번은 유진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목덜미를 움켜쥐는 힘과 살기는 느꼈다.
심지어 두들겨 맞기도 했지 않은가. 와이번은 더 이상 울부짖지 않고, 즉시 날개를 펼쳤다. 때로는 언어의 대화보다는 육체의 대화가 빠른 법이다. 유진은 비죽 웃으며 와이번의 고삐를 잡았다.
“와이번은 처음 타보는데.”
그래도 뭐, 미리 패둔 덕에 말은 잘 들었다. 와이번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 개자식아!”
땅에 떨어진 시엘이 고함을 질렀다.
“용용아! 돌아 와!”
“가면 뒤진다.”
유진은 내리 깐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고삐를 흔들었다. 끼에에엑! 와이번은 시엘의 외침을 무시하며 높이 부상했다.
그렇게 한참 높이 날아오르자, 숲의 전체를 내려 볼 수 있었다. 유진은 잠시 숲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저 멀리 흑사자 성이 보였다.
“어휴.”
보이는 것은 성 뿐만이 아니었다. 십여 마리의 와이번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와이번의 기수들을 확인했다. 카르멘은 안 보인다. 다른 대장들의 얼굴은 모르지만, 대장으로 짐작되는 강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저할 것은 없었다.
“이랴!”
유진은 고삐를 흔들며 외쳤다. 와이번이 퍼덕거리며 앞으로 날아간다. 유진은 정면에서 부딪치는 바람을 받으며, 망토의 형태를 바꾸었다. 펄럭거리던 망토가 얇게 변하고, 유진의 몸에 달라붙는다.
“당돌한 녀석...!”
선두에서 와이번을 타던 기사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와이번을 강탈하고서 하늘로 치솟을 줄이야. 성에 빠르게 도착하려면 그게 제격이긴 하다만, 그것도 방해가 없을 때의 이야기 아닌가.
저렇게 하늘로 날아오른다면 모두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다. 실제로 숲의 상공을 맴돌던 기사들이 죄다 유진에게 몰려가고 있었다.
“조심하도록.”
“알고 있습니다.”
다른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시험이 목적이니, 공격이 너무 엄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아주 자비를 베풀어서도 안 된다. 기사들은 그에 주의하며 무기를 꺼냈다.
적의도, 살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와이번의 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살펴 본 바, 흑사자 기사단의 실력은 꽤 대단했다. 전생에서도 저만큼 뛰어난 실력자들로 이뤄진 기사단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작정하고 덤비는 것도 아니잖은가. 적의도, 살의도 없다면. 저들로서는 유진을 시험할 수가 없었다.
‘한 번 볼까.’
오히려 유진이 흑사자 기사단을 시험하게 될 뿐이다. 유진은 주저없이 와이번의 등에서 뛰어 올랐다. 뒤따르던 바람이 유진의 몸을 앞으로 날려버렸다.
그 돌발적인 행동에 기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는 일이지만, 설마 방향을 틀지 않고 정면에서 달려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아!”
기사들이 흩어진다. 그 중에서 활을 든 기사들이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일제히 쏘아낸다. 그들이 쏘아낸 화살은 바람을 거스르는데도 위력이 줄지 않았다. 유진은 순식간에 다가 온 화살들을 굳이 요격하지 않고,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순식간에 펼쳐진 망토가 화살들을 삼킨다. 그리고 곧장 왔던 방향 그대로 화살이 쏘아진다.
‘화살촉도 뭉툭하고. 참 상냥한 공격이야.’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저만큼 빠른 화살에 맞는다면 꿰뚫리지 않아도 뼈가 부러질 것이다. 유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되돌려낸 화살에게 바람을 실었다. 그러자 화살은 더욱 빨라지고, 바람에 끌려 궤적을 어지러이 바꾸었다.
화살에 얻어맞은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능숙히 무기를 휘둘러 화살을 걷어내고, 유진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없다.
‘블링크!’
옆이다. 기사는 주저없이 옆으로 검을 찔렀다. 그곳에 나타났던 유진은 몸을 비틀며 손을 휘둘렀다. 카앙! 짤막한 단검이 기사의 검과 부딪친다.
ㅡ카가각! 유진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그는 기사의 검을 타고 올라가며 순식간에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펑.”
유진과 기사 사이에서 바람이 터졌다. 기사는 급히 마나 실드를 일으켰지만, 바람은 기사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유진은 와이번의 등을 발판으로 삼고 다시 뛰어 올랐다.
“하하!”
가까이 있던 기사가 웃음을 터트리며 창을 찌른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네이션 라이언하트. 저번에 아롯에서 봤던, 3번대의 부대장.
“시엘 아가씨는 어디에 두고 오신 겁니까?!”
“저 아래에.”
유진은 외침에 답해주면서 망토에서 창을 꺼냈다. 파바박! 두 개의 창이 허공에서 얽히고, 부딪치고, 뽑힌다. 짧은 교전. 네이션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밀렸다?’
저 불안정한 자세에서 내지른 창을 뚫지 못했다. 오히려 밀린 것은 네이션이었다. 마나를 제대로 실지 않았다지만, 네이션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음...!”
네이션은 표정을 굳히고서 다시 창을 휘둘렀다. 유진은 그에 맞서는 대신, 바람에 몸을 싣고서 높이 솟아올랐다. 굳이 무기를 맞대며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유진은 주변의 와이번들의 좌표를 포착하고, 바람에 마나를 실었다.
그렇게 바람은 마력의 칼날이 되었다. 사방으로 몰아 친 칼날이 와이번들을 덮친다. 와이번은 강한 항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유진의 마나지배력을 흩트릴 수 없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전신이 난자될 것이 뻔하니, 와이번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성질 급한 기사들은 와이번의 고삐를 놓고서 몸을 일으켰다. 아예 공중으로 뛰어들어 유진을 잡기 위해서였다. 상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기사들은 공중전에 대한 대비도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기사들이 뛰어들기 전.
ㅡ콰아아!
지면에서 무언가가 쏘아졌다. 포탄. 유진은 즉시 몸을 뒤틀며 망토를 활짝 열었다. 하지만 흑암의 망토는 이전처럼 공격을 삼켜내지 못했다. 망토의 뒷부분이 크게 부풀고, 유진의 몸이 팽그르 돌았다.
삼키지 못한 포탄이 하늘을 관통했다. 유진은 멀어지는 포탄의 꽁무니를 힐긋 보았다.
‘돌?’
마법이 아니다. 그냥 힘으로 집어 던진 돌이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아래를 내려 보았다.
시선은 다시 위로 들 수밖에 없었다.
“안녕.”
카르멘 라이언하트.
어느새 정면까지 날아 든 그녀가, 높이 들어 올린 발꿈치로 유진을 내리 찍었다.
흑사자 성
건조한 인사말. 유진은 화답해주지 못했다. 검으로 받아냈는데도 카르멘의 발은 굉장히 무거워서, 유진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과연.’
당황하지는 않았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흑사자 기사단의 3번대 대장. 그녀는 길레이드의 고모로, 유진이 아는 기사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인물이다. 본가 출신에 백염식까지 익혔을 테니, 저만큼 강하지 않다면 오히려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콰앙! 유진을 휘감은 바람이 넓게 퍼져간다. 유진은 땅 위에서 자세를 바로잡으며, 뻐근한 양팔을 힐긋 보았다.
‘힘은 한참 밀리는 군.’
그냥 집어 던졌을 뿐인 돌멩이도 흑암의 망토를 꿰뚫을 뻔 했다. 나하마에서 보았던 데스나이트도 카르멘보다 힘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유진의 자존심을 은근히 건드렸다. 물론 그곳에 있던 데스나이트 허접한 놈이었다. 전생에서 보았던 데스나이트들. 특히 유폐의 지팡이였던 베리알이 거느리던 데스나이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조잡했단 말이다.
‘내 시체로 만든 데스나이트가 그렇게 좆밥이라니...’
시체로 데스나이트를 만든 것은 당연히 치가 떨릴 만큼 분노할 일이지만, 그 데스나이트가 약해빠졌다는 것도 유진을 분노하게 만들 거리로는 충분했다. 최대한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는데, 이런 상황에서 떠올리게 되니 이가 뿌득뿌득 갈린다.
“...인사가 너무 거칠었나?”
천천히 떨어지던 카르멘은,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보고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펄럭거리는 코트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카르멘님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유진은 격앙 된 호흡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저 위에서 와이번을 탄 기사들이 몰려들고 있다. 하늘 뿐만이 아니었다. 숲 전역에 퍼진 기사들이 이쪽으로 집결 중이다.
“저만 너무 편애하시는 것 아닙니까?”
“네가 생각보다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지. 시안은 아직까지 제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거든.”
카르멘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다가오는 기사들을 손짓으로 물리더니,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그만큼 주목받는 것이고, 내가 직접 나선 이상 시험은 빠르게 끝날 테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3분.”
딸깍. 카르멘이 회중시계를 열었다.
“네가 내 공격을 3분 동안 버텨낸다면, 널 곧장 흑사자 성으로 데리고 가도록 하지.”
“...3부우운...?”
“그게 가능하다면 더 이상 시험을 계속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니까. 왜. 자신 없나? 너무 길다고 생각한다면, 1분으로 줄여주지.”
“...하하...”
당연한 자신감이다. 그건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진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저 할머니한테 나는 까마득한 손주조카잖아.’
이해는 했지만,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카르멘을 ‘할머니’라 칭하고 있었다.
“저야 나이도 어리고 팔팔하니 괜찮겠지만, 고모할머님의 연배에 3분이나 몸을 움직이는 것은 너무 힘든 일 아닐까요?”
생각에만 그치지 않았다. 유진은 대놓고 그렇게 물어보았고, 회중시계를 들고 있던 카르멘의 손이 움찔 떨렸다. 주변의 기사들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유진을 응시했다.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카르멘은 열어둔 회중시계를 부관인 네이션에게 휙 던져주었다.
“1분.”
카르멘은 그렇게 내뱉으며 발을 뻗었다.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군.”
내뱉은 말을 증명하듯, 새하얀 불꽃이 카르멘을 휘감았다. 백염식. 마나의 불꽃은 과용 없이 카르멘의 몸에 달라붙고, 사자의 갈기처럼 불티가 흩날린다.
‘오...’
유진은 카르멘의 마나운용에 솔직히 감탄했다. 작정하고 내뿜은 것이 아니기에 마나의 용량은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응축시킨 마나의 힘은 대단했다.
카르멘은 선공을 양보해주지 않았다. 유진이 보는 앞에서 카르멘이 사라졌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랬지만, 유진은 카르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쩌엉! 유진의 몸이 옆으로 휘청거린다. 카르멘의 부츠가 위니드의 검신을 밀어낸다. 유진은 휘청거리는 몸을 붙잡지 않고, 아예 통째로 회전시켰다. 부츠에서 미끄러진 검이 카르멘의 허리를 파고든다. 가죽장갑을 낀 손이 검의 궤적을 따라 움직인다. 카르멘은 검격을 손으로 흘려내며, 반대편 손으로 유진을 타격했다.
“호오.”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은 것에 대한 분노. 그것이 놀람으로 사그라진다. 유진은 어느새 꺼내 쥔 검으로 카르멘의 주먹을 흘려내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늑골 하나는 부러트리려 했는데.’
그럴 생각으로 뻗은 주먹이었는데, 몸에 제대로 꽂아 넣지도 못했다. 카르멘은 더 이상 정색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카르멘의 공세가 더욱 매서워진다. 이전에 파악했던 것처럼, 카르멘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라이언하트 중에서도 유별난 존재였다. 어려서부터 무기를 들지 않고, 맨몸으로 벌이는 격투를 수행해 왔다.
그렇게 수십 년. 내지르는 주먹을 창보다 빠르고, 휘둘러 차는 다리는 검보다 날카롭다. 그를 상대하는 유진은 카르멘의 실력에 솔직한 감탄을 느꼈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그 끔찍하던 300년 전에도 충분히 명성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쉽다.
‘제대로 싸워보고 싶은데.’
죽이지 않을 정도로 힘을 조절하지 않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싸워보고 싶다. 생각은 그랬지만, 정말로 그럴 수는 없었다. 피차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금은 내가 질 것 같고.’
이그니션을 써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유진은 아직 전생의 실력을 온전히 펼쳐낼 수 없다. 물론 해 봐야 아는 것이겠지만, 굳이 그렇게 시험해 볼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위압감만 따진다면 아멜리아 머윈과 동등... 아니, 속단할 수는 없지. 아멜리아 머윈은 작정하고 나를 죽이려 했었으니.’
카르멘과의 전투. 흑사자 기사단의 실력은 얼추 알 수 있었다.
6명의 대장이 모두 카르멘과 비슷한 급의 강자라면, 흑사자 기사단은 유진이 알고 있는 기사단 중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유진이 기억하는 300년 전에, 이만큼의 강자가 집중된 기사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300년 전에 이런 기사단이 존재했으면 우리가 좀 덜 피곤했을 텐데 말이야.’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도 감안해야 한다. 뭐든지 그만큼 시간이 흐른다면 발전하기 마련. 마법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300년 전의 마법사들도 뛰어났지만, 지금 시대의 마법사들은 그 옛날보다 훨씬 발전 된 마법을 익히고 있다.
전투기술은 전쟁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평화로운 300년 동안 퇴보하거나 제자리걸음을 했을 리 없잖은가.
‘그래도 참 다행이야.’
몰아치는 공격들. 유진은 전신의 뻐근함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퇴물이 아니라서.’
실제로 유진의 ‘기술’은 카르멘을 상대로도 먹히고 있었다. 유진 스스로 느끼기에는 깔끔하지 못했지만, 그는 카르멘의 공격을 모조리 흘려내며 그녀의 틈을 찾았다.
하지만 카르멘에게 파고 들 틈은 보이지 않았다. 힘이 충분하다면 억지로 틈을 열 수 있을 것이고, 보다 과감히 허초를 섞는다면 틈을 유도할 수도 있겠지만. 유진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3분.”
카가각! 유진은 카르멘의 주먹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위니드는 멀쩡했지만, 왼손에 들었던 검은 칼날의 이가 빠지고 균열이 번져서 더는 쓸 수 없게 되었다.
“지났잖습니까?”
유진은 망가진 검을 망토 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카르멘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유진을 쳐다 볼 뿐, 더 이상 덤비지 않았다.
‘정타를 꽂지 못했어.’
카르멘은 자신의 양손을 힐긋 바라보았다. 장갑의 가죽이 거칠어져 있고, 미세한 흠도 여러 개 보인다. 아무리 힘을 조절했다지만... 저만큼이나 어린 녀석을 압도하지도 못했다.
“...아직 1분 남지 않았나?”
“남기는요. 진즉에 지났다니까요.”
“그럴 리가 없다.”
“제가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날 상대하면서 숫자까지 셌다고?”
“그거야 뭐, 카르멘님이 손속에 사정을 두신 덕분이죠.”
사실이기도 했고, 유진은 더 이상 카르멘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카르멘보다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대를 보았기 때문이다.
멀쩡한 몸이 욱씬거리다 으스러지는 느낌. 유진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통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불길함은 노골적으로 흘러나오지는 않았으나, 유진의 예민한 감각은 확실하게 그 ‘힘’을 느끼고 있었다.
‘...분쇄추 지골라스.’
카르멘과의 전투를 구경하는 기사들 중에, 유독 키가 큰 사내가 보인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유진은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분쇄추 지골라스의 주인. 1번대 대장, 도미닉 라이언하트. 그는 유진과 눈이 마주치고서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훌륭하군.”
도미닉이 입을 열었다. 그는 기사들을 해치고 앞으로 나와, 유진과 카르멘에게 다가왔다.
“19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어. 유진 라이언하트. 자네가 뛰어나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솔직히 소문이라는 것은 과장되기 마련이라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오히려 소문이 자네를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유진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도미닉이 허리에 걸친 망치. 혈관이 돋아난 것처럼 울퉁불퉁한 먹색의 손잡이. 모양부터가 평범한 망치와는 거리가 멀다.
“카르멘 경. 더 시험이 필요합니까?”
“...아니.”
카르멘은 찌푸렸던 눈매를 펴며 고개를 저었다.
“더 시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네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까지 나서서 시험할 필요는 없겠죠.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미닉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론이 없다면 곧장 성으로 가지.”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걸음을 때었다. 그녀가 이끄는 3번대의 기사들이 곧장 카르멘의 뒤를 따른다. 유진은 기사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온님은 이곳에 안 계신 겁니까?”
“그는 지금은 5번 대의 부관을 맡고 있네.”
도미닉이 대답했다.
“실력만 본다면 대장에 올라도 충분하지만. 5번대 대장의 은퇴가 머지않았으니, 매끄러운 인계를 위해서 5번대로 소속을 옮겼지.”
도미닉은 유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곁을 지나쳤다.
“시안 도련님의 시험이 끝나지 않았으니 당장은 만날 수 없겠지만, 늦어도 사흘 후에는 흑사자 성에서 만날 수 있을 걸세.”
사흘.
유진은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즉, 이 갑작스런 시험은 늦어도 사흘은 걸릴 것이라고 상정되었단 말이다. 유진이야 정신공격에 내성이 강해 숲을 헤매지 않았지만, 시안은 앞으로 며칠은 숲을 헤매며 환영과 몬스터와 다퉈야 할 것이다.
‘그 뒤에는 흑사자 기사단의 포위를 돌파해야 하고.’
유진은 숲 어딘가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을 시안에게 애도를 보내며 기사들의 뒤를 따랐다.
“나쁜 자식!”
그렇게 자리를 떠나려는데, 빽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시엘이었다. 그녀는 턱주가리가 박살난 와이번의 등에서 숨을 씩씩대며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그렇게 두고 가면 어떡해?!”
“잘 찾아 왔구만 뭘. 네 와이번이 참 똘똘하네. 주인도 알아서 찾아가고.”
마침 잘 됐다. 정상에 있는 흑사자 성까지 와이번을 타고 날아가야 하는데, 누군지 모를 기사와 함께 와이번을 타는 것보다는 시엘과 함께 타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은가.
“...같이 타자고?”
“왜. 싫어?”
“...싫지는 않아. 네가 앞에 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네 와이번인데 왜 내가 앞에 타? 군소리 말고 당겨 앉아. 뒤에 앉게.”
“지금도 충분해. 뭐해? 뒤에 앉지 않고.”
시엘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등 히죽 웃으며 제 엉덩이 뒤를 톡톡 두드렸다.
“더 바짝 붙어. 하늘에서 떨어질 지도 몰라.”
“난 떨어져도 안 죽어.”
“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 조금 더 가까이... 손은 어디다 둔 거야? 용용이 비늘 잡지 마, 아파하잖아.”
“비늘 좀 잡힌다고 아파하면 그게 와이번이냐? 허접한 도마뱀 새끼지.”
“용용이는 와이번이지만 예민하단 말이야.”
다른 기사들은 이미 와이번을 타고 날아갔는데, 시엘과 유진은 아직도 땅에 남아서 티격태격했다. 유진은 시엘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에 양 손을 얹었다.
“뭐 그렇게 불편하게 잡아? 그냥 확 끌어안으라고.”
“어.”
귀찮게 하기는.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양 팔로 시엘의 허리를 꽉 쥐었다.
“커읍.”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내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것만 같다. 시엘은 숨을 삼키며 몸을 뒤틀었다.
“조, 좀 살살...”
“살살 잡았다가 떨어지면 어떡해.”
“그냥... 허리만 잡아. 그거면 될 것 같...”
요망한 것. 유진은 피식 웃으며 팔에 힘을 풀고, 양 손을 살포시 시엘의 허리에 얹었다. 그제야 시엘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뭐라 쏘아붙일 말이 없어서, 결국 입을 다물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하늘을 날고 있지만, 정상의 흑사자 성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시엘의 와이번은 나는 속도가 유독 느렸다. 게다가 곧장 성으로 향하지 않고, 살짝 살짝 방향까지 틀어댄다.
“너 뭐하냐?”
“기왕 나는 거, 산책이라도 하고 가면 개운하고 좋잖아.”
“나는 산책보다는 성에 가서 밥 먹고 목욕하는게 훨씬 더 개운하다고 생각하는데.”
“가면 좋은 소리 못 들을 거라니까.”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내가 뭐 죄라도 지었냐? 난 떳떳해. 그러니까 괜한 배려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속 편한 녀석.”
기껏 배려해줬는데. 시엘이 투덜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린다. 유진은 그녀의 뺨이 부푼 것을 보며 옆구리를 꼬집었다.
“고맙다.”
“...꼬집지 마.”
“꼬집을 것도 없는데 뭐.”
“살가죽 꼬집고 있잖아.”
투덜거리긴 하지만, 시엘은 더 이상 뺨을 부풀리지 않았다.
*
흑사자 성.
기대하지도 않긴 했다만, 환영은 없었다. 유진은 성에 도착하자마자 카르멘과 함께 성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향했다.
“흑사자 기사단에는 인력이 부족하다.”
탑으로 향하는 길. 대뜸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300년의 역사를 가진, 위대한 라이언하트 가문. 그를 수호하는 기사단치고는 수가 너무 적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숲에서 맞닥트린 기사들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본가의 백사자 기사단과는 달리, 흑사자 기사단은 라이언하트 출신만으로 이뤄져 있으니까요.”
라이언하트는 철저하게 적통만을 본가에 남긴다. 가주가 되지 못한 형제들은 모조리 분가하고, 그렇게 계속해서 방계를 늘리고 있다.
덕분에 라이언하트 가문은 넓게 퍼졌지만, 그들 모두가 뛰어난 실력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 혈연으로 이뤄진 흑사자 기사단이 인력난에 빠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그건 어쩔 수 없지. 흑사자 기사단은 라이언하트의 지저분한 문제들까지 수습해야 하니까.”
카르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진을 힐긋 돌아보았다.
“네 형제. 이오드의 문제 외에도, 흑사자 기사단은 라이언하트의 여러 문제들에 개입하고 있다. 대부분은 가문의 위신에 관한 문제지.”
방계가 너무 많다. 그건 베르무트와, 가문의 전통이 뿌린 씨앗들이다.
“피는 진즉에 묽어져서, 더 이상 라이언하트라 주장해선 안 될 것들. 하지만 그들도 라이언하트지. 문제는... 놈들이 묽은 피를 앞세워,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는 것이야.”
유진은 그 말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었다. 흑사자 기사단은 가문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자체적으로 집행하는 것이 흑사자 기사단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외인을 섞을 수는 없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전에도 했던 말.”
아득하게 높은 탑에는 아크리온처럼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카르멘은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의 문 안으로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와라.”
“그 제안은 거절했잖습니까.”
“그때는 네 실력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 오늘은 제대로 봤고. 아직 2번대 대장의 종자 자리가 비어있다.”
“그 분은 2년 동안 종자도 안 구하고 뭐하셨답니까?”
“구하기는 했는데, 놈의 성격이 워낙 거칠어서 다들 버티지 못했던 거다.”
“그 힘든 자리에 제가 왜 들어가야 합니까?”
“네 기술은 2번대 대장인 제노스와 닮았어.”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며 유진을 빤히 보았다.
“제노스의 제자라고 생각될 만큼 말이지.”
“저는 그 분을 오늘 처음 봤는데요.”
“네가 종자가 된다면, 제노스와 죽이 잘 맞을 거다. 또, 흑사자 기사단은 가문의 영광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자리다.”
“저는 가문의 영광도 좋지만, 일단은 제 영광을 우선하고 싶은데요.”
여기저기 오라는 곳이 참 많았다.
‘종자가 되느니 차라리 아롯에 가고 말지.’
아롯의 왕세자는 유진에게 궁정마법사단장 자리를 약속했었다. 흑사자 기사단에도 흥미는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흑사자와 아롯의 궁정마법사단장을 병행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둘을 저울에 올린다면, 당연히 마음이 기우는 것은 아롯 쪽이다.
“...그런 것보다. 멀리서 온 저를 왜 대뜸 이런 곳에 부르는 겁니까?”
“왜라고 생각하나?”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려는 것은 아닐 것 같은데요.”
“흑사자 기사단의 일원이 되겠다고 약속한다면 알려주지.”
“카르멘님이 말해주지 않으셔도 곧 알게 될 텐데요.”
“네 행적.”
카르멘은 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내며 말했다.
“네가 왜 나하마에 갔는지. 나하마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설마 제가 나하마의 모래쟁이들이랑 음모라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가능성은 굉장히 낮지만, 그것도 염두에 두긴 해야지. 그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흑마법에 입문을 시도했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며 유진을 힐긋 보았다.
“특히 넌 여러 가지 제안을 받기 좋은 위치에 있어. 뛰어난 실력. 하지만 방계 출신이기에 혈통의 한계가 있지. 네게 가주 자리를 보장하고서 누군가가 힘을 보태준다고 제안했다면?”
“저는 가주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르게 생각하면 돼. 너 정도 되는 실력이라면 어디서든 영입을 시도할 테니까. 나하마의 술탄이 네게 부와 명예를 약속했나?”
“술탄은 만난 적도 없고요. 지금 절 심문하시는 겁니까?”
“맞아.”
카르멘은 솔직하게 대답했고, 유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다면 대답은 카르멘님에게 해선 안 되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유진은 카르멘을 지나쳐, 복도 끝의 방으로 향했다.
“당장 대답한 들, 어차피 저 안의 어르신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유진이 손을 뻗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방 안.
유진은 원탁에 둘러앉은 원로들을 응시했다. 가주인 길레이드도 그곳에 앉아 있었고, 원로들의 뒤편에는 먼저 갔던 도미닉 라이언하트와,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서있었다. 그가 2번대 대장이라는 제노스 라이언하트인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진은 방 안으로 들어가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럽지만.”
숙였던 고개를 들며, 유진은 망토를 펼쳤다. 갑작스런 행동이었지만 원로들은 유진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제 몸을 돌보기에 차고 넘치는 실력을 가진 데다, 유진의 행동에 적의가 한 점도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걸 봐주십시오.”
유진은 머뭇거리지 않고 망토에서 물건을 뽑아냈다.
커다란 동상과 추모석이 유진의 앞에 우뚝 섰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원탁에 둘러앉은 원로들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유진이 꺼낸 동상과 추모석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발에 가까운 잿빛머리를 뒤로 넘긴 중년인. 불사의 라이언하트. 원로원주인 도이네스였다. 그는 뒷짐을 지고서 천천히 동상과 추모석에 다가왔다.
“...흠...”
도이네스는 파손된 곳 없이 멀쩡한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동상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완성도. 도이네스는 흉터까지 뚜렷하게 구현해 낸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그 아래에 놓인 추모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멜 다이너스.”
“우둔한 하멜?”
원로들이 웅성거린다. 길레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하멜의 동상 앞에 다가왔다. 그는 놀람 가득 한 눈으로 동상의 얼굴과, 추모석의 문구를 번갈아 보았다.
“...이 동상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낸 건가?”
도이네스가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
그 빌어먹을 동화책에는 하멜이 우둔하다며 온갖 음해와 날조를 써갈겨져 있었지만, 이렇게 추모석을 꺼내 보인 이상 동화책이 시궁창에 처박은 하멜의 명예도 회복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유진은 원로들의 웅성거림과, 추모석에 집중 된 시선들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이네스의 질문을 들었고, 미리 생각해둔 대답을 읊었다.
“원로님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지난 2년 동안 아롯에서 마법을 공부했습니다.”
유진이 생각해 놓은 변명은 이러했다.
아롯의 왕립도서관, 아크리온. 그 중에서 현명한 세냐의 전당에서 마법에 몰두하던 중, 위치크래프트를 통해 ‘하멜의 무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떻게?”
“라이온하트의 인물이 위치크래프트를 접한 것은 처음이니까요. 아마 세냐님의 안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않고 추측 뿐으로 대답했다.
어쨌든, 그렇게 ‘하멜의 무덤’에 대해 알게 되고. 나하마로 떠나 무덤을 찾아갔다.
“하멜님은 선조님의 오랜 벗입니다. 다른 분들과는 달리 헬무드에서 돌아오지도 못하셨고, 동료들을 위해 제 한 몸을 숭고히 희생하셨죠...”
숭고한 희생이라니. 유진은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민망하다고 느꼈지만, 그런 심상과는 별개로 유진의 혓바닥은 아주 잘 돌아갔다.
“저는 나하마의 사막을 떠돌며 무덤을 탐색했고, 기어코 무덤을 발견해냈습니다. 물론 순탄하지는 않았죠. 하멜님의 무덤의 입구, 그곳에는 나하마의 어쌔신과 모래술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으음...”
“다들 아시잖습니까? 나하마가 모래폭풍을 이용해 튜라스의 영토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하멜님의 무덤이 있던 지하 던전, 그곳은 사막에 여럿 존재하는 모래술사들의 근거지였던 겁니다!”
거기서부터는 굳이 거짓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모두 다 사실이잖은가.
“저는 모래술사들의 공격과 어쌔신들의 기습을 돌파하고, 하멜님의 무덤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동상과 추모석을 발견했지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서 들었다.
“그 무덤은 누군가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멀쩡하게 남은 것은 이 동상과 추모석 뿐...”
그곳의 일을 설명하려면 하멜의 시체와 데스나이트에 대해서도 말해야만 했다. 유진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그에 대해 담담히 풀어냈지만, 듣는 원로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간신히 데스나이트를 쓰러트리고, 저는 동상과 추모석을 수습했습니다. 그러다가... 악명 높은 사막의 던전마스터... 아멜리아 머윈과 맞닥트렸습니다.”
“허억.”
마법을 익힌 원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데스앤서와 맞닥트렸다고?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자네가 살아돌아올 수 있었던 건가?”
“그것은... 유폐의 마왕이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원로들의 반응을 훑었다. 유폐의 마왕이란 이름이 나왔을 때. 더 이상 자리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로들은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유진을 응시했다.
“...유폐의 마왕이?”
“헬무드의 지배자가, 그 자리에 직접 강림했다고?”
“예. 그는 절 죽이려는 아멜리아 머윈을 가로막고, 약속과 호의를 운운하며 저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경고를 전하라고 말했죠.”
“경고?”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일 뿐이라며. 자신의 호의와 헬무드의 침묵이 앞으로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경고였습니다.”
이 경고는 전해두어야 했다. 유진은 베르무트의 약속이 대체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평화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투로 경고했다.
그렇게 경고를 들은 이상, 평화의 종말을 대비해야 한다.
“...허어...”
도이네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만.”
유진의 행적에 대해 심문하기 위해 불렀다. 하지만 이제 유진의 심문은 대단찮은 문제가 되어버렸다.
“헬무드가 나하마를 선두로 세워 전쟁을 준비하는 것인가?”
“속단은 이르오. 마왕이 정말로 평화를 깨고 싶었다면, 굳이 경고를 하지도 않았을 테니.”
도이네스는 웅성거리는 원로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이라... 유폐의 마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나?”
“그만한 존재와 맞닥트리고 직접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잊을 수가 없지. 유진은 그때의 살의와 분노를 기억하며 입술을 뒤틀었다.
-베르무트의 후손들에게 충분한 호의와 존중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내게 호의를 보이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것을 자유라 받아주었다. 하지만 계속 된 호의를 권리라 착각하는 것은 곤란해. 나는 수많은 마물과 마족 위에 군림하는 자이며, 헬무드의 왕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일 뿐. 베르무트의 후손이여. 라이언하트에게, 모두에게 전하거라. 내가 베푸는 호의를 침범하지 말라. 너희가 나를 경의하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너희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네 선조는 자유를 대가로 약속을 맺었고, 이제는 그 끝이 다가오고 있다. 멈추었던 수레바퀴가 다시 구를 때가 오게 된다.
“과연. 경고가 틀림없군.”
도이네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원탁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고서,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허나, 유폐의 마왕은 분명히 여지를 두었소. 호의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300년 전의 끔찍한 시대가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오.”
“경고까지 한 이상, 평화는 언젠가 깨질 겁니다.”
길레이드가 굳은 얼굴을 하고서 도이네스를 노려보았다.
“당장 나하마가 수백 년에 걸쳐 튜라스를 침략하고 있잖습니까. 그들의 패악의 뒤편에 헬무드가 있고, 유폐의 마왕이 그를 종용하지 않았다고 그 누가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가주가 유폐의 마왕을 찾아가서 그에 대해 물을 텐가.”
도이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길레이드를 돌아보았다.
“장장 300년일세. 선조님이 약속을 맺고 돌아온 후,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은 더 이상 세상을 위협하지 않고 평화를 고집해 왔지. 가주, 난 아주 오래 살았고... 지금의 평화가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하네.”
“...”
“물론 이 평화는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아. 가장 강력하던 두 명의 마왕이 건재하고, 그 수족인 마족과 흑마법사들이 대륙 곳곳에 퍼져 있어. 하지만 평화는 지속되고 있네.”
“원로원주님.”
“위대한 베르무트께서도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하셨네. 이곳의 라이언하트들 중, 대체 누가 마왕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늙은 내가? 아니면 내 손자? 가주, 자네가 할 텐가?”
도이네스의 목소리에 격정이 어린다. 그는 길레이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라이언하트의 모든 병력을 모은들, 300년 전의 선조님과 그 동료들보다 강하고 뛰어나다 자부할 수 있을까? 나는 절대로 그러진 못할 것이라 생각하네. 선조님은 고작 4명의 동료들만을 데리고서 살육과, 참혹과, 광란의 마왕을 쓰러트렸네. 지금 세상에 대체 누가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보는가?”
“...이 일은 라이언하트만의 위협이 아닙니다. 유폐의 마왕의 경고는 세상 모두를 겨냥했습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일세. 헬무드와 맞선다면 반드시 우리가 선봉에 서야 해. 가주. 자네가 생각하기에, 우리에게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는가?”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뚱거리며 서있었다. 경고를 전하기로 한 순간, 이런 논쟁은 예상했다.
그리고 그건 유진이 알 바가 아니기도 했다. 저들이 탁상공론을 다툰들, 유진이 하기로 한 일은 변하지 않는다.
유진은 하멜의 환생이다. 베르무트가 왜, 무슨 생각으로 하멜을 환생시켰는지는 모르지만.
하멜은 모든 마왕을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당시 하멜과 함께 싸웠던 세냐의, 모론의, 아니스의 결심이기도 했다.
“...그 경고. 마왕의 호의를 침범하는 것은 라이언하트도, 키옐도 아닐세. 신성제국과 항마연합국들이지. 그들은 아직까지 헬무드의 변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으니.”
“그 지독한 마왕 혐오자들은, 경고를 전한다면 즉시 병력을 일으켜 헬무드를 침공하려 들 겁니다.”
클라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도이네스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까지 열성적이었다면 배치한 병력들을 진즉부터 써먹겠지. 신성제국과 항마연합국은 헬무드와 정면에서 맞서려는 것이 아니야. 노골적인 퍼포먼스일 뿐이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즉시 병력을 뒤로 물릴 걸세.”
“...헬무드의 마왕은 유폐의 마왕 뿐만이 아닙니다.”
길레이드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멸망의 마왕은 유폐의 마왕과 뜻이 다를 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유폐의 마왕은 약속의 끝에 대해 경고했네. 또 여지를 주었어. 세상이 그를 존중한다면, 유폐의 마왕은... 다시금 약속을 맺을 지도 모르지.”
“내용도 알지 못하는 약속을?”
“물론 마왕들이 300년 전처럼 미쳐 날뛸 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장은 아니잖은가?”
“이거. 다시 가져가도 됩니까?”
유진은 지지부진한 이야기들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말부터 내뱉었지만, 유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망토 안에 동상과 추모석을 집어 넣었다.
“...자네가 수습해 온 것이니, 다시 가져가도 상관없지. 그것들을 어쩔 셈인가?”
“선조님의 영묘에 가져다 둘까 합니다.”
“...그곳에?”
“하멜님의 무덤은 이미 무너졌으니까요. 이 추모석을 보십시오.”
하멜 다이너스.
개새끼, 바보, 병신, 얼간이, 쓰레기.
“...욕은 보지 마시고. 그 아래.”
그렇지만 용감하고, 신실하고, 현명하고, 위대하던.
모두를 위해 희생하고, 먼저 떠나 우둔한 너를 기리며.
“선조님은 하멜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셨습니다. 그런 무덤이 어느 못되 처먹은 놈에게 훼손되고, 지금은 폭삭 무너져 버렸습니다. 오래 전에 죽은 하멜님을 위해서... 그리고 선조님을 위해서도, 이 동상과 추모석은 선조님의 영묘에 안치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도이네스를 비롯한 원로들은 곧장 답하지 못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그들의 고민으로 인한 침묵을 틈타 말을 덧붙였다.
“저는 세냐님에게 직접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 분이 남기신 걸작 위치크래프트를 접하고, 조금은 이해했습니다. 제 스승이신 로베리안님은 세냐님을 계보를 이으신 분이니, 로베리안님의 제자인 저도 세냐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죠.”
하다하다 세냐의 제자를 자칭할 날이 올 줄이야.
“즉, 저는 세냐님의 제자이면서 선조님의 후손. 그리고 하멜님의 묘비에 마지막으로 추모를 올린 인물입니다.”
“...”
“그러니 제가 직접, 이 추모석과 동상을 선조님의 영묘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도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선조님의 영묘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일세. 쉬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네만...”
도이네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하멜님의 추모석이라면, 선조님의 영묘에 안치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길레이드가 유진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카르멘도 고개를 끄덕거렸고, 다른 원로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례적으로 영묘로 통하는 길을 여는 수밖에 없겠군.”
유진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것으로 눈치를 봐가며 베르무트의 무덤을 탐색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관짝을 열어 볼 수는 없겠지만,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두는 것이 중요하지.’
당장은 확인할 수 없어도,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관짝을 열어보면 된다. 그때는 흑사자 기사단과 원로원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 무엄하다 가로막는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길을 열면 되지 않은가.
“길을 여는 것에 시간이 필요하니, 우선은 자네가 보관해 주게.”
“예.”
시간이 필요하다고? 마법으로 봉인이라도 되어 있는 건가?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유진은 더 묻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제노스. 자네가 유진을 방으로 데려다 주게. 가주는 양자와의 회포를 조금 뒤로 미루도록 하고. 아직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
“예.”
제노스는 고개를 까딱 숙이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유진은 원로들과 가주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려 제노스와 함께 방을 나갔다.
‘꼴을 보아하니 헬무드에게 선전포고를 할 리는 없겠군.’
키옐 황제에게 마왕의 경고를 전하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향후의 대책을 논할 것이다. 의미 있는 대책이 나올 것 같진 않으나, 대책을 논하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경고를 전한 의미는 충분히 있었다.
“...꼬마야.”
제노스와 복도를 함께 걷는 중에, 그가 대뜸 입을 열었다.
“저 아래에 가서... 그 동상과 추모석을 다시 보여다오.”
“그건 어렵지 않은데. 왜 그런 부탁을 하시는 겁니까?”
“꽃을 바치고 싶다.”
갑자기 무슨 꽃?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제노스를 돌아보고, 움찔 굳어 버렸다.
제노스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어... 갑자기... 왜 우시는 겁니까?”
“울지 않아.”
제노스는 눈을 부릅뜨고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결막염이 있어서, 가끔 이렇게... 내 의중과는 관계없이 눈물이 흐르곤 한다.”
미친놈인가?
유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걸음을 빨리했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제노스는 유진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간 뒤,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 온 제노스의 양 손에는 들꽃다발과 술병이 들려있었다. 유진은 놈이 대체 뭘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노스를 쳐다보았다.
“동상은?”
“...아, 예.”
유진은 일단 망토에서 동상과 추모석을 꺼냈다. 그러자 벌겋게 물들어 있던 제노스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그 눈물은 아무리 봐도 결막염에 의한 눈물은 아니었다.
제노스는 한참 동안 동상과 추모석을 응시하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조심스런 손길로 추모석의 앞에 꽃다발과 술병을 내려놓았다.
술을 그득 채운 잔이 추모석 앞에 놓인다. 그 뒤에 제노스는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유진은 그 광경을 보면서 진지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 설마 내 후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놈은 흑사자 기사단의 2번대 대장이고, 베르무트의 후손이다.
‘나도 모르는 후손이... 베르무트의 후손과 혼인해서 자식을...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자식을 낳은 적이 없다고.’
여자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후손을 낳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베르무트의 동료가 된 후로는 여자를 안은 적도 없었다. 바로 곁에서 세냐와 아니스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고, 베르무트와 모론은 밤놀이에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데다, 하멜도 나서서 유흥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후손을 낳을 건덕지가 없단 말이다. 그런데 저 새끼는 지가 뭐라고, 하멜의 동상과 추모석 앞에서 눈물을 질질 짜며 꽃과 술을 바치는 건가?
“...크흠.”
잠시 동안 제노스를 보던 유진은 낮게 헛기침을 뱉었다. 그 짧은 시간에 제노스는 커다란 술병의 술을 모조리 비워 둔 상태였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나한테는 꼴랑 술 한 잔 바쳤으면서, 남은 건 지가 다 처먹어?’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유징는 씰룩거리려는 뺨에 힘을 주고서 제노스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제노스님은... 그... 하멜님과 어떤 인연이라고 가지고 계신 겁니까?”
“...”
흐느끼는 소리 없이 조용히 눈물을 쏟던 제노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닦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하멜님의 제자다.”
그게 뭔 미친 소리냐?
유진은 턱 끝까지 올라 온 외침을 간신히 삼켰다. 그리곤 전생의 기억을 모조리 되짚어 보았다.
제자? 전생에서 누군가를 가르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용병으로 명성을 떨치던 시절. 칼 쓰는 법이나 전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오는 놈들은 제법 있었지만, 당시의 하멜은 제 잘난 맛에 흠뻑 취해 있어서 자기보다 못난 놈을 곁에 두거나, 가르치려들지 않았었다.
“...음... 제노스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멜님은 300년 전의 인물이시잖습니까? 후손도 남기지 않으셨고, 제자도 두지 않으신 것으로 아는데요.”
“엄밀히 말하자면 하멜님에게 직접 배운 것은 아니지.”
그런데 왜 제자라고 지껄이는 건데.
“...모든 방계가 그러하겠지만, 내 가문도 본가에서 갈라져 나왔지. 내 까마득한 선조는 베르무트님의 둘째 아들이었다.”
300년 전.
위대한 베르무트는 열 명이 넘는 부인을 두고, 많은 자식을 낳았다. 그것이 라이언하트 가문의 시작이다. 베르무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때부터 혈통과 직계를 중시했고, 다행히 그의 많은 자식들 중에서 장남이 가장 뛰어났다.
사실 뛰어나지 않았어도 문제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베르무트가 작정하고 장남을 지도한다면, 병신으로 태어났어도 다른 형제들보다 독보적인 실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
어쨌건 장남이 베르무트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되었고, 수많은 형제들이 본가를 떠나 방계의 시조가 되었다.
“내 선조님은 가주가 되지 못했지만, 위대하신 시조님은 내 선조님을 어여삐 여기셨나 보더군. 전통에 의해 백염식은 내게 계승되지 않았지만, 대신 다른 것을 계승받을 수 있었다.”
“...그게 하멜님의 제자를 자칭하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시조님은 내 선조에게 하멜님의 기술을 가르쳐 주셨다.”
제노스는 축축하게 젖은 눈시울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유진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입술만 끔벅거렸다.
“...하멜님의 기술?”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제노스는 빈 술병을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멜님의 묘에서, 혹시 그 분의 비전서를 발견한 것이냐?”
“...예?”
“아까 전. 너와 카르멘 경의 대결을 보았다. 사실 그건 대결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네 기묘한 기술을 엿보기에는 충분하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카르멘 경의 주먹을 흘려내던 기술.”
제노스는 크게 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건... 내 가문의 선조님이 시조님께 가르침 받은, 하멜님의 기술이다. 수많은 라이언하트의 가문 중에서, 하멜님의 기술을 전승받은 것은 우리 가문 뿐이다.”
“...”
“그것은 마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배력, 천재적인 전투감각이 없고서는 흉내 낼 수 없는 기술이야. 아까 보았을 때에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지만, 네가 하멜님의 묘에 다녀왔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지. 네가 그곳에서 하멜님의 비전서를 취했다면 말이다.”
유진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러니까, 베르무트 그 자식이 300년 전에 멋대로 하멜의 기술을 자기 후손에게 가르쳤다는 것 아닌가.
‘씨발놈이. 가르칠 거면 본가에게 가르치던가, 왜 가주도 못된 둘째에게 가르친 거야?’
허락도 없이 가르친 것에 대해서는 지금 와서는 따질 수 없는 일. 유진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가다듬고서, 제노스를 빤히 보았다.
“...대답은 어렵지 않지만,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시조님은 가주가 되지 못한 둘째에게 하멜님의 기술을 가르친 겁니까?”
불만과 의문은 그냥 묻어두지 않았다. 까마득한 후손인 제노스가 대답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단 물어보고 봤다.
“본가에는 필요 없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하멜님의 기술이 백염식보다 허접해서요?”
“역시. 너는 하멜님의 비전서를 취한 것이로군.”
말이 왜 그렇게 되는가?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제노스를 노려보았지만, 제노스는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지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이 문제에 대해 분노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건 개새끼야, 내가 그 하멜 본인이라서 그런 거고. 유진은 목젖까지 올라 온 외침을 간신히 삼켰다.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유진은 제노스가 멋대로 오해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지금이야 흑사자 기사단이 존재하고 있지만, 300년 전에는 누가 그 역할을 맡았을 것 같으냐?”
“...예?”
“가문의 세가 커지고, 일원이 많아지는 만큼 불순분자도 많아질 수밖에 없지. 위대한 시조님의 후손이기에 걸맞지 않은 자들. 선조님은 그런 자들을 단죄하던 최초의 흑사자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그러니까, 베르무트는 가주가 되지 못한 둘째 아들을... 본가와 다른 가문들을 견제하는 사냥개로 키워낸 것이다.
기사단이니 뭐니 해도 사냥개가 흑사자 기사단의 본질이다. 유진은 그 사실을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내 기술로 본가의 백염식과 방계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거잖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리 생각할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고작 사냥개 따위에게 친구의 기술을 계승시켰다는 것 아닌가.
‘썩을 새끼. 그런 식으로 굴 거면 저 자식 가문에 내 동상이나 하나 세워놓던가.’
유진은 부글거리며 끓는 속을 삭혔다. 제노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유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제노스님의 가문에 계승되었다는 하멜님의 기술 말입니다. 패링이 전부입니까?”
“이그니션.”
제노스가 대뜸 말했다. 유진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겠지만, 유진은 놀람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베르무트, 개새끼.’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머릿속으로 베르무트를 씹었다.
“...그게 뭡니까?”
“코어의 마나를 의도적으로 폭주시키는 기술이지. 그 위험성 때문에 거의 사용된 적은 없다.”
“...비전서에 대해서는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만약 네가 비전서를 가지고 있다면 내게 양도해 다오.”
“양도받아서 뭐 어쩌려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하멜님의 기술은 배우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이론을 파악해도 몸으로는 흉내 내기 어려운 것들이지. 쉽게 가르칠 수도 없고. 하지만 만약 비전서가 있다면...”
“우선 족보부터 정리합시다.”
유진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저는 하멜님의 직계라고 할 수 있으니, 족보를 따지면 제가 제노스님보다 위쪽 항렬 아닙니까?”
“...뭐라고?”
“제가 사형이고, 제노스님이 사제가 되는 거죠. 제노스님이 저보다 몇 십 년 빨리 태어나긴 했지만, 당신이 하멜님의 제자를 자처한다면 절 사형으로 섬겨야 합니다.”
“갑자기 무슨... 잠깐. 그 말은, 역시 하멜님의 묘에 비전서가 있었던 것인가?”
“외우고 태워버렸습니다.”
“어째서!”
“아니 그럼 그걸 뭐하러 들고 있습니까? 아까 제가 한 말 못 들었어요? 저는 그 무덤에서 죽을 뻔 했다고요. 숨겨진 비전서...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데스나이트가 덤볐다니까요?”
그 말에 제노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잠깐. 그렇다는 것은, 너는 하멜님의 비전서를 발견하고서 며칠도 되지 않아서 패링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냐?”
“저는 예전부터 패링 잘 썼습니다.”
“말도 안 돼. 하멜님의 패링은 일반적인 패링과는 완전히 다른 기술...”
“저에 대해 잘 모르시나 본데, 저는 본가의 양자가 될 만큼 뛰어나고, 최연소로 아크리온의 입장을 허가 받은 천재 중의 천재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도 낯 뜨거운 말이지만, 전부 다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제노스님이 저를 사형으로 섬기시겠다면, 제노스님의 가문에 계승된다는 하멜님의 기술. 그것과 제 머릿속에 있는 비전서를 비교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드리죠.”
제노스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거둔 적도 없는 제자를 자처하는 놈. 그렇기는 해도, 유진은 제노스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멜의 맥을 이은 인물 아닌가?
‘나한테 꽃도 바치고, 눈물도 흘렸지.’
하멜을 스승으로 여기며 존경하는 것은 사실인 듯 했다. 그 빌어먹을 동화책 때문에 우둔한 하멜이라고 불리며 무시 받는데, 그럼에도 하멜의 제자를 자처한다는 점은 어여삐 여길 점이었다.
“...정말로 네 머릿속에 비전서가 있는 겁니까?”
“존대할건지 반말할건지 둘 중 하나만 하시죠.”
아멜리아 머윈. 그 빌어먹을 년의 말투가 생각나서 확 짜증이 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사형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제노스는 머뭇거리며 물어보았다. 그것은 제노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흑사자 기사단 중에서도 엄격하고 어렵기로 유명했고, 한 가문을 책임지는 가주이기도 했다.
“그랬다가는 제 입장도 귀찮아질 거고, 관계에 대해 납득도 시켜야 할 테니... 사형 소리는 둘만 있을 때만으로 봐드리죠.”
“...으음...”
제노스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형.”
“그래, 사제야. 날 언제까지 여기 세워둘 셈이냐? 방으로 안내해주기로 했으면서 내 방은 대체 언제 보여 주려는 거냐?”
유진은 즉시 말을 받으며 동상과 추모석을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쾌속한 태세전환에 제노스의 뺨이 씰룩거린다. 하지만 그는 유진에게 뭐라 쏘아붙이지 못하고 이만 뿌득 갈았다.
“너 지금 이 간 거니? 내 태도가 불만이니? 사형에 대한 예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죄송...”
“당황스럽고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이해하는데, 사제야. 기왕이면 빨리 익숙해지면 좋겠구나.”
“...”
“그래서 방에는 언제 데려다 줄 거냐니까?”
유진의 방은 흑사자기사단과 원로원이 머무는 곳과 조금 떨어진 아성 전부였다. 시안이 흑사자성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며칠은 더 걸릴 테니, 그때까지 이 성에 머무르는 것은 유진과 성에 배치된 시종들뿐이었다.
“우선 사제의 가문에 계승된다는 기술들에 대해서 읊어 봐.”
성 안의 방. 유진은 푹신한 의자에 앉고서 대뜸 그렇게 말했다.
“...시조님이 전하신 기술은 전부 10개입니다.”
10개나 돼? 유진은 내심 놀랐지만,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뭔데?”
“...사형도 비전서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하멜님의 기술은 무기술이 아니라 마나의 사용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어떤 무기를 들어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알겠으니까. 10개가 뭔지 말해 보라니까?”
내 기술이 10개나 되던가? 유진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전생에서 기술이랍시고 거창하게 이름 붙인 것은 이그니션 하나뿐이었고, 나머지는 그냥 손 가는 대로 상황에 맞게 싸웠던 것인데. 뭔 놈의 기술이 10개나 되어 계승되었단 말인가?
“...하멜 식(式) 오의. 이그니션.”
“하멜 식...? 그게 대체 뭐냐?”
“모르시는 겁니까? 위대한 시조님이 저희 선조님에게 가르치신 것들이 바로 하멜 식입니다.”
“그 이름... 시조님이 직접 붙인 건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저희 가문에는 하멜 식이라고 명명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유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베르무트... 베르무트 이 개새끼야. 기왕 붙일 거면 잘 붙이던가. 하멜 식...? 너 미친 놈이냐?’
“하멜 식 제 일, 마나패링.”
“...”
“하멜 식 제 이, 만뢰(萬雷).”
“이 씨팔.”
유진은 더 듣지 못하고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제노스는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형?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이... 씨... 아... 계... 계속 말해 봐.”
만뢰? 마안뢰에?
‘내가 언제 그딴 기술을 썼어?’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만뢰라고 외치며 무기를 휘두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하멜 식 오의, 이그니션.
제 일 형, 마나패링.
제 이 형, 만뢰.
제 삼 형, 라이트닝카운터.
제 사 형, 수라광살(修羅狂殺).
제 오 형, 드래곤버스트.
제 육 형, 사이클론.
제 칠 형, 데드엔드.
제 팔 형, 파멸신기(破滅神氣).
제 구 형, 무한연옥(無限煉獄).
“...”
유진은 당장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자살하고 싶었다. 전생에 저런 기술명을 외치며 싸운 적이 있었나?
있었다. 도저히 떠올리고 싶지 않아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이지만, 제노스가 진지한 얼굴로 기술명을 읊어대는 것을 듣고 있으니 머나먼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부끄러운 기억들이 하나둘 머리를 든다.
‘수라광살!’
‘저 새끼 왜 지랄이야?’
‘자의식과잉이겠죠.’
‘마구잡이로 칼 휘두르는 것이랑 수라광살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
‘너도 씨발 그냥 불꽃 펑 터트리는 것 가지고 파이어블라스트니 뭐니 지껄이잖아!’
‘그건... 그건 마법 이름이 파이어블라스트인 거야.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니라고...! 마법은 영창을 해야 현상이 되는 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아니스 너도, 그냥 빛을 내뿜는 것 가지고 홀리크로스라고 외치잖아!’
‘적어도 저는 빛으로 십자가는 만듭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러는데, 무기 휘두르는 것도 마법이랑 똑같아. 똑같이 마나를 사용하는데 다를게 대체 뭐 있냐?’
‘그래서. 수라광살이라고 외치면 당신의 기술이 더 강해지고 그러는 겁니까?’
‘당연하지. 기합을 내질러야 힘을 더 낼 수 있다고.’
세냐와 아니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했지만, 모론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나는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멜이 수라광살이라고 외치며 검을 휘두를 때, 하멜은 정말로 수라가 되어버린다.’
‘뭘 좀 아는 군.’
뭘 좀 알기는. 유진은 먼 과거를 떠올리며 덜덜 몸을 떨었다. 그 시절의 하멜은 어려도 너무 어렸다.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때니 충분히 어린 나이 아닌가.
그렇게 이름 붙이고 외치던 기술이 10개. 나중 가서는 일일이 기술명을 외치지는 않았다. 부끄러워서. 그리고 필요도 없어서. 유진이 기억하기에, 저 병신 같은 기술명을 외치며 싸우던 것은 고작해야 몇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보다 압도적으로 긴 시간을 기술명을 외치지 않고 싸웠단 말이다.
그런데 베르무트. 그 개자식은 그 열 개의 병신 같은 이름들을 모두 다 기억하고, 그걸 자기 아들에게 가르친 것이다.
유진은 벌겋게 달아오른 고개를 푹 숙이고서 어깨를 떨었다. 환생이 아니라 회귀를 해야 했다. 그렇다면 저 병신 같은 기술명을 외치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내 손으로 과거의 하멜을 죽여 버리던가.
‘베르무트 그 개자식도 죽여 버렸을 거고.’
그 빌어먹을 동화책도 그렇고. 전생의 동료들은 먼저 죽은 하멜에 대한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죽은 하멜을 추억하기 위해서, 라는 이유로는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다만.
‘그럴 거면 환생을 시키질 말던가.’
왜 죽은 사람을 환생시켜서 그 빌어먹을 동화책을 읽게 하고, 생판 남에게 저 부끄러운 기술들을 다시 듣게 하냔 말이다. 유진은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서 고개를 들었다.
제노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유진은 다시 한 번 격렬한 자살충동을 느꼈다.
“...그... 10개가 전부?”
“예. 사형이 발견했다는 비전서에는 이것보다 많은 기술들이 있었던 겁니까?”
“그건... 아니야. 거기도 어... 10개... 아니, 저런 기술들은 아예 적혀 있지도 않았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노스의 두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유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죽은 하멜의 명예를 수습하고, 저 병신 같은 기술들이 더 이상 후대에 전해지지 않게끔 할 수 있을까.
“...그... 저 기술들은 말이야. 하멜님이 어리고 철없을 때 만드신 것들이야.”
“그걸 사형이 어떻게 아십니까.”
“어... 왜냐하면 내가 발견한 비전서에는 저런 기술들이 없었으니 말이지. 위대한 시조님의 가르침이 틀렸을 리는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시조님은 하멜님이 예전에 쓰신 기술들을 기억하고, 사제네 가문 선조님에게 가르친 것이 아닐까 싶어.”
“과연... 그렇다는 것은, 하멜님이 어릴 적에 사용하던 기술이 워낙 훌륭하여, 시조님의 기억에 뚜렷이 남았다는 말이로군요.”
말을 왜 그렇게 알아 처듣는 거냐. 유진은 불끈 쥔 주먹을 떨면서 말을 이었다.
“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시조님의 휘광에 가려지긴 했지만, 하멜님도 굉장히 뛰어나고 훌륭하신 분이었으니 말이야.”
이제는 이런 말을 해도 낯이 간지럽지는 않았다.
“어쨌든, 내가 발견한 비전서에는 저런 병신같... 아니, 부끄러운 기술들이 적혀있지 않았단 말이야. 하멜님은 시조님과 여행하고, 많은 경험을 쌓아가며 저 부끄러운 기술들을 졸업하신 거야.”
“부끄러운 기술...”
제노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눈을 부릅 뜨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당신이 제 사형이라지만, 저 기술들을 폄하하는 발언은 가만 듣고 넘기지 못하겠습니다.”
“어... 왜?”
“저희 가문은 3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멜님의 기술을 계승해왔고, 그를 수행해 왔습니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나신 제 아버지와, 이 흑사자 성에 없는 제 자식도 하멜님의 기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제노스는 은근히 ‘자식’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비록 유진과 사형제가 되기는 했지만, 자신이 자식도 두고 있는 연배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제 자식은 16년 전의 혈계식에도 참가했었죠. 올해 나이가 26살입니다.”
“어 그래.”
뭐 어쩌라는 건가. 유진은 제노스의 말을 흘려들었다.
“사제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데. 나도 하멜님 존경해. 비전서 발견하기 전에도 하멜님을 굉장히 존경했다고. 그리고 내가 부끄럽다고 말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이름이야.”
“...이름...”
“사제. 솔직히 말해 봐.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말해보자고. 만뢰? 수라광살? 데드엔드? 드래곤버스트? 파멸... 신기? 무한연옥...? 그 이름이 정말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해?”
“...으음...”
제노스도 그 말에는 곧장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괜히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카르멘 경의 필살오의는 데스티니 브레이커입니다.”
“...대단하군.”
“철권연쇄를 시작으로 이클립스, 패왕각, 뇌광일섬, 데스티니 브레이커로 마무리되는 콤비네이션은 흑사자 기사단에서도 지독하고 강력하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그걸 모두 다 외운 네가 레전드다.”
유진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불붙이지도 않은 시가를 입에 물고 다닐 때도 느꼈지만, 고모할머니인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카르멘님은 카르멘님이고. 그래서 사제는 어떤데? 사제도 싸울 때 수라광살! 이렇게 외치고 싸워?”
“...머릿속으로는...”
“입밖으로 외칠 수 있어? 사제가 거느린 2번대 대원들 앞에서, 파멸신기! 라고 외칠 수 있냐고.”
“...굳이 입 밖으로 외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거봐. 사제도 부끄러워서 못 외치는 거잖아! 하멜님은 오죽하겠어? 그러니까 마지막 비전서에는 기술명이 적혀있지 않는 거야. 완전히 체득한다면, 기술명을 외치지 않고서도 쓸 수 있는 법이라고.”
제노스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기술명은 됐고. 한 번 보여줘봐.”
“지금 말입니까?”
“보여주기 좀 그러면 글로 적어보던가. 기술마다 마나운용이 다를 것 아냐?”
“그건... 으음...”
제노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형에게 보여드리는 것은 상관없습니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하멜님의 기술은 배우는 것이 어렵고 난해합니다. 그래서... 300년이 흐른 지금은, 시조님의 가르침이 온전히 재현되지 못했습니다.”
그건 이해갈 만한 일이었다. 베르무트가 가르친 둘째 아들은 가르침을 몸으로 체득할 만큼 뛰어났을지 몰라도, 놈의 후손이 그만큼 뛰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발전의 여지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훼손되었겠지. 유진은 그 사실에 조금의 씁쓸함을 느꼈다. 자신의 기술이 온전히 이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씁쓸함은 아니었다.
‘차라리 아예 사장되어야 했는데. 그러면 내가 저 기술들을 다시 들을 일도 없었을 것 아냐.’
유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식혔다. 그러는 동안, 제노스는 바깥의 시종에게 종이와 펜을 받아서 책상에 앉았다.
“...사제는 시조님의 영묘에 들어가 본 적 있나?”
유진은 창가를 노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제노스는 바쁘게 펜을 움직이면서, 유진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대장이 되었을 때 한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
“저 뿐만이 아니라, 흑사자기사단의 대장으로 임명되는 자들은 모두가 한 번 씩 시조님의 영묘에 들어가서, 목숨을 바쳐 가문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해야합니다.”
“...그곳은 어떤 곳이지?”
“너무 거창한 상상은 하지 마십시오. 워낙 비밀스런 곳이라 저도 자세한 이야기는 해드리지 못하지만, 하멜님의 묘처럼 동상과 추모석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제노스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침묵했다.
“...굳이 말하자면... 신전과 닮은 곳이죠.”
“신전?”
“세상에 신전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곳에서 신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구하신 시조님의 영묘는 신전과 닮아 있습니다. 어쩌면... 시조님은 죽어서 신이 되신 걸지도 모릅니다. 그를 바라신 것일 수도 있고.”
신.
유진은 창밖을 보던 눈을 찡그렸다. 전생에도 그랬지만, 유진은 신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사제들이 펼치는 신성마법이야말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 것과, 신을 섬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유진에게 있어서는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모를 신보다, 제 손에 쥐고 있는 검이나 창 따위의 무기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베르무트가... 신이라...’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놈은 몰라도, 베르무트는 죽어서 신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만약 놈이 신이 되었다면, 죽은 동료를 환생시키는 기적도 가능할 테니까.
‘...정말 신이 된 것이라면 세냐와 싸웠을 리가 없지.’
어쩌면 무덤에 침입한 것이 베르무트가 아닌 생판 다른 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진은 도저히 그쪽으로는 생각의 저울추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대체 누가, 봉인 된 무덤을 찾아와서, 관짝을 열어서 하멜의 시체를 빼내고, 월광검을 봉인하고, 그를 막으러 온 세냐를 패퇴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다 적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제노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진은 수북한 종이를 넘겨받고, 첫장부터 표정을 왈칵 찡그렸다.
하멜 식(式).
‘아 씨팔.’
괜히 제노스를 한 번 노려 본 뒤, 유진은 그 빌어먹을 하멜 식에 대해서 읽어내려갔다. 몇 시간에 걸쳐 쓴 덕인지, 하멜 식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자세했다. 마나를 다루는 것에 능숙하다면, 당장 이걸 가지고서 하멜 식을 수련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유진이 그것을 모두 다 읽는 것에는 몇 시간은커녕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끝까지 읽은 뒤, 유진은 다시 종이를 첫 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구려.’
마나의 운용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맨 처음 하멜 식을 익힌 제노스의 선조는 백염식을 익혔겠지만, 그 후의 후손들은 백염식을 익히지 못했다. 그러나 하멜 식은 백염식과 적염식을 구분하지 않고, 단순하게 마나를 운용하는 요령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이걸 백염식과 적염식에 맞춰 개량한 것은 베르무트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만큼 깔끔하게 정립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마나의 운용과 기술의 연계가 따로 논다.
몇 번을 보고서 확인한 바, 하멜 식의 마나운용법은 까다롭고 고된 체련의 과정이 덜어져 있었다. 그렇다 보니 마나운용이 매끄럽지 못하다.
‘구리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개판이잖아.’
마나 운용이 매끄럽지 않으니 기술의 연계가 따로 놀 수밖에. 유진은 그 이유를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하멜 식을 계승받은 등신들이, 나름대로 불편한 점들을 개선하겠답시고 이리저리 손을 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체련이 한참부터 낡아빠진 수행으로 밀려났기 때문일 터. 백염식과는 비교가 안 되도, 적염식은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마나운용법이다. 그 탁월한 적염식을 익혔는데, 낡아빠진 체련을 병행하라니 영 미덥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래도 나름 연계하겠답시고 용은 썼구만.’
딴에는 개량이라고 했지만, 유진이 보기에는 퇴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보완하려 든 것인지, 기술을 쓰는 것은 가능했다.
“...비전서에 적힌 것과는 한참 다르군.”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상에 가서 앉았다. 그는 펜을 들고서 제노스를 돌아보았다.
“사제가 익힌 적염식도 코어가 분열하나?”
“5개의 별을 갖습니다.”
“사제는 몇 개 가지고 있는데?”
“5개 가지고 있습니다.”
제노스는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자부할 만한 일이지만, 유진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그 가르기스의 가문도 적염식의 코어를 5개로 늘렸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별의 개수가 똑같아도 위력은 다를 터지만, 유진이 느끼기에 제노스의 적염식은 암내 나는 가르기스의 적염식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지금 와서 쟤한테 체련을 병행하라는 것은 무리고...’
시안과는 경우가 다르다. 시안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백염식도 한창 성장하는 중이니 체련을 더해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제노스는 나이도 이미 잔뜩 먹었고, 적염식을 극성까지 익힌 상태. 지금 와서 체련을 병행한 들, 진즉에 적응 된 방식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이렇게 고민할 것 없이, 그냥 대충 알려주어도 되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접 제자로 들인 적은 없다지만, 제노스는 하멜의 제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승 된 자로서 올바르게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나.
유진은 고심하다가 펜을 들었다. 우선, 그는 맨 위에 적힌 하멜 식이라는 글자를 북북 그어서 지워버렸다.
“그건 왜 지우시는 겁니까?”
“조용히 해.”
그 뒤에는, 열 개로 나누어진 기술들도 이그니션을 제외하곤 다 지워버렸다. 다른 기술들은 나이를 먹고서 쓰지 않았지만, 이그니션은 마지막까지 사용했었으니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마나의 연계 부분을 뜯어고치고... 만뢰? 이거 그냥 검강 좌라라락 뿜는 거잖아. 등신들. 이렇게 펼쳐서 낭비되는 마나가 우습냐?’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기술의 운용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제노스는 그 뒤에 서서 곁눈질로 유진이 써내려가는 것들을 훔쳐보았다.
곧, 제노스의 눈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천재라고 자처하더니, 과연 그 말 대로였다. 아무리 비전서를 외웠다고 해도, 저렇게 하멜 식을 수정하는 것은 유진 본인이 비전서의 내용과 마나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제노스는 삐딱하니 서있던 자세를 바꾸었다. 한참 어린 사형. 비전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형으로 대해주어야 한다고 결심했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에 경외가 더해졌다.
“...음... 그러고 보니, 사제.”
“예, 사형.”
“내가 말하는 것을 잊었는데. 시안한테도 그... 하멜님의 비전서에 대해 조금은 가르쳐 줬거든?”
“...예?”
“그렇다고 시안을 사형이라고 부르란 말은 아니야. 오히려 부르지 말고, 모른 척 하라고.”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내가 사정을 설명하기 귀찮기도 하고. 걔한테 하멜님의 기술까지 가르친 것은 아니거든. 그냥 마나운용하는 법만 좀 가르쳐줬지.”
만뢰니, 수라광살이니, 무한연옥이니 하는 부끄러운 기술들을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시안이 시키는 것들을 착실히 수행한다면... 기술을 가르치지 않아도, 제 몸에 알맞은 기술들을 알아서 개발해 낼 것이다.
“제대로 가르친 것이 아니니까, 시안은 하멜님의 제자가 아닌 거잖아. 그러니까 사형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 거지. 그리고 사제도 명심해. 이 개 같은... 하멜 식의 기술이라는 것은, 사실 이름까지 가질 만큼 대단한 기술들이 아니라고. 오히려 기술에 구애받는다면 할 줄 아는 것이 제한된단 말이야.”
제노스는 뭐라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제 겨우 19살 먹은 사형이 기술의 한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건 오랫동안 수련하고, 많은 싸움을 해 온 제노스가 우습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제노스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타당한 지적이라고 받아들였다.
“사제도 지금부터라도 하멜 식의 기술을 벗어나려 노력하도록.”
“사형의 말씀은 타당하십니다. 헌데 사형은 하멜 식의 기술을 온전히 펼칠 수 있으십니까?”
“내가 펼치지 못하면 이걸 어떻게 뜯어고치고 있겠니?”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주십시오. 단지, 사형이 하멜님의 기술을 얼마나 이해하고 계신지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어휴.”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섰다. 다행히 이 방은 어지간한 연무장에 비견될 만큼 넓었다. 유진은 주변에 다른 기척이 있는지를 확인하고서, 망토에서 위니드를 뽑았다.
“잘 봐.”
심장의 별이 빛을 발하고, 회전한다. 환염식이 마나를 증폭시킨다. 청백색의 검강이 위니드의 검신을 휘감는다. 제노스는 그 빛과,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은 마나의 밀도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그 놀람을 무시하고서 위니드를 앞으로 들었다. 흔들리던 검강이 격렬한 불꽃이 된다. 꿈틀거리는 불꽃이 검의 끝으로 응집되고, 커다란 구체가 되어 부푼다. 유진은 마나의 흐름을 조율하며 손목을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둥그렇게 모였던 검강이 터지며,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집어 삼켰다. 청백색의 불꽃이 허공에서 회오리치며 다시 모여든다.
“...무한연옥...!”
“닥쳐 제발.”
“어마어마한 마나를 소모하는 무한연옥을 이렇게 간단하게 펼치시다니...!”
제대로 쓴다면 산 하나를 집어 삼킬 수도 있지만, 그 정도의 출력을 내는 것은 지금의 유진에게는 무리였다. 그리고 제노스의 하멜 식에도 무한연옥은 고작해야 이 정도 크기가 한계였다. 그만큼 원전보다 못한 것이다.
“이제 됐니?”
“파멸신기도 보여주십시오.”
“이걸 몸에 휘감으면 그게 파멸신기인데 뭘 또 보여 달래. 괜히 힘 빼게 하지 말고, 이거나 가지고 가.”
유진은 수정을 끝낸 종이를 넘겨주며 내뱉었다.
“그리고 사제. 만약 카르멘님이나 다른 사람이 날 사제의 종자로 삼으라고 말하면, 단칼에 거절해. 알겠어?”
“...꼭 그래야 합니까?”
“왜? 사형인 날 종자로 부려먹고 싶냐?”
“그런 뜻이 아니라, 사형 같은 분이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온다면...”
“이거 안 준다.”
“단칼에 거절하겠습니다.”
제노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양손으로 하멜 식을 받았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하루 종일 나오지도 않고 뭐하는 거야?’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아성을 노려보았다. 몇 년 만에 재회한 것이니 함께 밥도 먹고, 성 안을 함께 산책하거나 산속을 사이좋게 거닐고 싶었는데. 유진은 진즉에 아성에 들어갔으면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방 안에 처박혀 있지 않고, 연무장에 내려와서 수련이라도 할 텐데. 그새 습관이 바뀌기라도 한 것인지, 유진은 연무장에도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직접 찾아가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시엘은 애꿎은 지면만 퍽퍽 걷어차면서 성을 노려보았다.
‘...제노스 경과 같이 들어갔다고 했는데...’
설마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오라고 설득하고 있는 건가? 문득 든 생각에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히죽 웃어버렸다.
2번대 대장인 제노스 라이언하트. 대부분의 어른들과 살갑게 지내는 시엘이지만, 제노스는 시엘에게도 어려운 상대였다.
그건 시엘 뿐만이 아니었다. 제노스는 흑사자 기사단 안에서도 도미닉, 카르멘과 함께 손에 꼽히는 실력자다.
그래서 시엘은 제노스와 친분을 쌓기 위해 여러 번 시도를 했었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 친분을 쌓지는 못했다. 제노스는 삭막한 성격이었고, 그가 이끄는 2번대의 기사들도 대장을 닮아서인지 다른 부대와 교류하려 들지 않았다.
‘...기왕이면 2번대 말고 3번대로 들어오는 것이 좋은데.’
카르멘은 유진을 처음 봤을 때부터, 2번대 대장의 종자 자리를 권했었다. 그건 시엘이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대장의 종자가 된다는 것. 그것도 다른 대장이 아닌, 흑사자 기사단에서도 굴지의 실력을 가진 제노스의 종자 자리 아닌가.
‘2번대는 흑사자 성에 머무는 일이 적으니까...’
부대마다 훈련의 내용은 다르지만, 2번대의 훈련은 다른 부대들에 비해 특히나 혹독하며 실전성을 추구한다. 지금이야 성인식을 위해 성에 머무르고 있지만, 평소의 2번대는 대륙의 오지를 떠도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니 기왕이면. 시엘은 유진이 2번대가 아니라, 3번대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나쁠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같은 부대에 소속된다면 어딜 가도 함께일 것이다. 매일 밥을 같이 먹고, 같은 제복을 입고, 같은 훈련을 받을 수 있다...
시엘은 우두커니 서서 유진이 흑사자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혼자 히쭉히쭉 웃다가, 시엘은 미련을 두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오래 걸리는 것을 보니 제노스 경의 설득이 먹히고 있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방해할 수는 없다. 그 메마른 제노스 경이라면 유진의 언변에 휘둘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만한 실력과 인격을 갖추고 있으니 유진도 제노스 경을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그럼 카르멘은?
‘...카르멘님은... 물론 좋은 분이기는 하시지만...’
어쨌든. 유진이 흑사자에 입단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은 시엘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일단 제노스의 종자가 될 지라도, 잘 구슬려서 빼오면 되는 것 아닌가.
시엘은 그런 것에는 넘치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앙큼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이 머무는 아성에서 멀어졌다.
이 요망한 소녀의 머릿속에 쌍둥이 오빠에 대한 생각은 남아 있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해서, 18년을 함께 산 오빠를 생각해 줄 이유가 어디 있나? 이오드처럼 아주 못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련히 잘 극복하고 성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부랴부랴 아침을 먹은 시엘은 곧장 아성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카르멘의 주도 하에 훈련을 받아야겠지만, 카르멘은 전날부터 원로원의 회의에 참여한 상태였다.
‘하루 넘도록 회의할 사안이 있나?’
시엘이 알기로는 최근의 라이언하트는 평화로웠다. 많은 방계들 중에서 처신을 잘못하는 가문도 없었고, 남쪽 국경 너머의 야만족들도 몇 년 동안 얌전했다.
그런 상황에, 꾸준히 흑사자 기사단의 주목을 받는 것은 이오드 뿐이었다. 지금도 6번대의 부대장은 흑사자 성을 떠나, 보사르 영지에서 이오드를 전담마크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당장 시엘이 알 바가 아니기는 했다. 오늘은 내려왔을까? 시엘은 부푼 기대를 안고서 아성에 도착했다.
시엘은 두 눈을 끔벅거리며 앞을 보았다.
넓은 연무장. 그 한 복판에서 제노스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유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제노스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단 그것을 보았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곧 시엘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제노스와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제노스는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서, 먼저 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왜 왔냐?”
유진은 인사 대신에 그렇게 물어보았다.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시엘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서 배시시 웃기만 했다.
“제노스 경의 종자가 되기로 한 거지?”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둘이 이른아침부터 연무장에 나와있을 리가 없잖은가. 게다가 제노스는 유진에게 검술의 시범을 보이는 것 같았다.
“잘 생각했어. 제노스 경은 흑사자 기사단에서도 제일 뛰어난 실력자시거든.”
시엘은 유진을 위해 제노스를 한껏 띄워주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도미닉은 분쇄추 지골라스를 가지고 있고, 카르멘은 백염식을 익혔잖은가. 반면에 제노스에게는 그런 특별함이 없으니, 순수한 실력으로는 흑사자 기사단에서 제일이라고 봐도 무방하긴 했다.
“...음... 시엘.”
제노스는 유진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서 입을 열었다. 똑같은 흑사자 기사단이니, 제노스는 시엘을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네?”
“나는 유진 도련님을 종자로 삼지 않았다.”
그 말에 시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지워지려는 미소를 붙들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제 오랫동안 유진과 이야기를 나누셨잖아요.”
“그건...”
“지금도 유진에게 검술을 지도하고 계시잖아요. 종자로 삼는 것도 아니면서 왜 검술을 지도하고 계시는 거죠?”
지도를 받는 것은 내 쪽이다.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나를 끌어내지는 않았지만, 제노스가 펼친 것은 하멜 식에 포함 된 데드엔드였다.
데드엔드! 이 기술은 수라광살과 연계하여, 상대를 반드시 죽음으로 몰아가는 필살의 기술이다. 촘촘한 검강을 거미줄처럼 뿜어내며, 화려한 검술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종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검술 지도는 받을 수 있는 거지.”
유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만 이렇게 할 뿐이다. 제노스가 펼친 데드엔드에 배울 점은 아무 것도 없었다. 유진의 머릿속에는 저것보다 깔끔하고 필살을 목적으로 한 기술들이 무수히 많았다.
물론, 그것이 제노스의 실력을 폄하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전생의 관점으로 보아도 제노스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제노스가 하멜 식을 근간으로 둔 이상, 전투에 있어서 유진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왜?”
시엘의 뺨이 부풀어 오른다.
“왜기는 뭘 왜야. 밥 먹고 왔냐?”
“...먹었어.”“나는 아직 안 먹었는데.”
“여태 안 먹고 뭐했어?”
“슬슬 먹으려고 했지. 제노스님. 이쯤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식사나 하시죠. 아니면 본성에 돌아가서 드시렵니까?”
“...돌아가서 먹겠네.”
제노스는 헛기침을 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식사에 시엘도 참석할 것 같은데, 제노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혹여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만약 시엘이 듣는 중에 사형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라도 한다면? 제노스는 시엘 라이언하트가 얼마나 요망하고 영악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온 지 2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헤실거리는 미소와 처세술로 제 위치를 확고히 잡아놓았다.
그런 시엘 앞에서 사형 소리를 내뱉는다면, 가벼운 말실수로 넘기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제노스는 저 어린 아가씨에게 약점을 붙들려서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 혼자 먹어야겠네요.”
“나도 먹을 거야.”
“너 방금 밥 먹고 왔다며?”
“조금 먹었으니까 괜찮아.”
“많이 먹으면 살 쪄.”
“내가 살찐 것처럼 보여?”
시엘은 눈을 얇게 뜨며 물었다.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제노스는 조심스런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조금?”
“키가 크고 근육이 붙은 거야.”
시엘은 그렇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지나쳤다.
하지만. 신경이 쓰였다. 같이 밥을 먹겠다며 식당에 오기는 했지만, 시엘은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않고서 양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괴었다. 유진은 시엘의 노골적이고 부담스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맛있어?”
“여기 밥 잘하네.”
“흑사자 기사단이 되면 매일 그 맛있는 밥 먹을 수 있어.”
“너 되게 끈질기다.”
“내가 이렇게 까지 조르면 못 이기는 척 저줘도 되지 않아?”
“나는 지는 것보다 이기는 것이 좋아.”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어?”
시엘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내심 포기해서, 더 이상 유진에게 조르지는 않았다. 시엘은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고집이 강하지만, 고집이 강한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아롯에서 뭐하고 지냈어?”
“빨리도 물어 본다.”
“어제는 물어 볼 상황이 아니었잖아.”
“내가 뭐라고 대답할 것 같냐?”
“마법 수련하느라 바빴다고.”
“잘 아네.”
“그거 말고 다른 거로 바쁜 적 없어? 너 아롯의 왕세자랑도 친하게 지냈잖아.”
“그거랑 나 바쁜 거랑 무슨 상관이야?”
“왕가가 주최하는 사교회나 파티에 불려간 적 없어? 아니면... 로베리안님의 소개로 전도유망한 젊은 마법사를 소개받은 적은?”
유진은 밥을 먹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런거 좋아할 것 같냐?”
“아니.”
시엘은 유진의 대답이 만족스러워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슬슬 경험을 쌓아놔야 하는 것 아닐까?”
“왜.”
“너랑 나도 곧 성인이 되잖아. 파티나 사교회를 즐길 나이가 되는 거지.”
“얘 말하는 것 좀 봐. 여태까지 얌전히 지냈으니, 성인이 되면 실컷 놀아보겠다 이거야?”
“그건 아니지만. 너랑 같이 놀면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 같아.”
“왜 네 오빠는 쏙 빼?”
“오빠는 나랑 너 말고도 놀아줄 사람이 잔뜩 있잖아. 아마 내년부터 오빠는 엄청 바빠질 걸? 여러 명문 귀족들, 타국의 왕족들까지 오빠를 소개받으려고 할 테니까.”
시엘은 그렇게 말하며 유진에게 몸을 기울였다.
“어쩌면 우리 중에서 가장 빨리 혼인할 지도 몰라. 이건 비밀인데, 해상왕국 시무인에 어린 공주가 있거든. 왕위계승은 한참 멀지만, 그래도 왕족이라고.”
“그게 뭐?”
“시안 오빠와 혼인할 지도 모른다는 거야. 뭐 확정된 것은 아니고, 원로님들이 추진하는 것뿐이지만 말이야.”
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시무인 뿌만이 아니야. 루하르 왕국 알지? 그곳의 공주도 시안 오빠의 결혼 상대 중 하나야.”
루하르 왕국... 공주라는 말을 들은 순간, 유진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모론의 후손. 모론을 닮은 공주... 유진은 머리를 기르고,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모론을 떠올렸다. 동시에 치렁치렁한 프릴 달린 예복을 입은 가르기스도 함께 떠올렸다.
“끔찍하군...”
“뭐가 끔찍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서, 그 공주님들이 몇 살인데?”
“시무인의 공주는 우리랑 동갑이고... 루하르의 공주는 이제 9살일 걸?”
“너 지금 9살 꼬마아가씨랑 시안이 결혼할 거라고 말하는 거냐?”
“당장 9살인 것이 무슨 상관이야? 영원히 9살인 것도 아닌데.”
“나는 그 꼴 못 본다. 시안 10살이나 어린 상대랑 결혼? 그건 하늘도 용서 못할 도둑질이지.”
“넌 나이 어린 상대는 싫어?”
시엘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비슷해야 좋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말하고서. 유진은 강렬한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환생하기는 했지만, 전생을 기준으로 한다면 유진의 나이가 300살이 넘는다.
‘나랑 나이가 비슷하려면... 엘프이거나... 드래곤...’
아니. 300년 전의 인물이라고 해서 나이를 300살로 생각해서는 안 될 노릇. 전생의 하멜은 38살에 죽었다. 그렇다면 50살 전후의 상대... 카르멘, 테오니스, 애니실라, 멜키스.
유진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이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
“왜 말을 바꿔?”
“사람 마음은 원래 갈대 같은 거야.”
“그래도, 처음에 말할 정도면 너도 어린 상대보다는 엇비슷한 상대가 좋다는 거지?”
“뭐 중요한 문제냐?”
“넌 언제 결혼할 거야?”
“할 생각 없는데.”
시엘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왜 안 해? 결혼은 축복받을 일이잖아.”
“...벌써부터 결혼을 논하기에는 우리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냐?”
“시안 오빠가 너보다 먼저 결혼하면, 네가 시안 오빠에게 지는꼴이잖아.”
“왜 시안보다 결혼을 늦게 하는 것이 놈한테 지는 거냐?”
“내가 왜 결혼을 해?”
식당의 문이 벌컥 열린다. 유진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시안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엘은 그러지 못했기에, 놀란 표정을 하고서 시안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왜 이리 빨리 와?”
“내가 빨리 오는게 불만이야?”
거친 호흡을 내뱉는 시안은 거지꼴이었다. 하루 꼬박 숲을 헤매며 환영과, 몬스터와, 기사들과 싸웠다. 잠은커녕 식사도, 물도 마시지 못했다.
“...며칠은 헤맬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시안은 빽 고함을 지르며 비틀비틀 걸어왔다. 온갖 고생을 하며 흑사자 성에 도착했는데, 축하의 말 한 마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가주와 원로들은 아직까지 원탁에 모여 회의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다만, 유진이 전날 일찍 성에 도착했다는 말이 시안의 가슴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자신만큼은 고생스럽지는 않아도, 빨라봤자 새벽쯤에 도착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숲에 떨어진 지 한시간도 되지 않아 성에 도착했다니...!
“귀신 많이 봤냐?”
“...귀신 얘기 하지 마.”
“그래서. 귀신 극복했어?”
“...검으로 사람과 몬스터와 마물을 베어 죽일 수는 있지만, 귀신은 베어죽일 수 없어.”
“귀신은 굳이 말하면 언데드잖아. 몬스터라고. 왜 못 죽여? 네가 약해서 못 죽이는 것 아냐?”
“...언데드랑 귀신은 달라. 내가 무서워하는... 아니, 무섭지는 않고, 싫어하는 귀신은 언데드랑은 다른 귀신이야.”
시안은 그렇게 얼버무리며 유진의 옆에 앉았다. 유진은 시안에게 풍기는, 여러 가지가 뒤섞인 복잡하고도 고약한 냄새에 코를 붙잡았다.
“네 몸에서 썩은내 난다.”
“나도 아니까 조용히 해. 밥 먹고 씻고 잘 거야.”
시안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식기를 잡았다.
하지만. 시안은 바라는 것처럼 씻고, 잠들지 못했다. 부랴부랴 식사를 마칠 즈음, 대뜸 시종이 전갈을 들고 왔기 때문이다.
“곧 손님이 도착하실 예정이니, 준비를 갖추고 워프게이트로 나와주십시오.”
“...마중까지 나가야 할 손님인가?”
시안은 절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손님이 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시엘도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그 말에 시종은 살짝 표정을 굳히고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희도 손님에 대한 전달은 따로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 원탁에서의 회의로 내방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인데?”
시엘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신성제국의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이십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신성제국 유라스는 헬무드의 변경인 알카르트를 교구(敎區)로 삼고 있다. 그곳은 마왕의 양보로 성립된, 유라스와 헬무드를 잇는 다리다.
마족을 신앙으로 교화시킬 수 있는가?
유진이 생각하기에,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당초 신성과 반발하는 마족에게 신앙을 들이미는 것은 어리석고 무용한 일이다.
하지만 헬무드에 사는 것은 마족뿐만이 아니다. 흑마법사나 아인을 거르고서도, 헬무드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마족과의 계약, 마왕의 숭배. 그따위 이유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헬무드는 인간에게 친화적인 나라다.
그곳의 시민들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생활권을 보장받는다. 마왕에게 사역되는 수많은 마물들이 시민의 노동을 대신해 준다.
마물 뿐만이 아니다. 고위 마족과 흑마법사들이 일으킨 오래 된 언데드들. 인간이 아닌 괴물들이 인간이 해야 할 일들을 대신해주는 것이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간이 적어도, 헬무드의 넓은 토지는 계절의 구분 없이 황금색으로 물든다.
헬무드의 시민들은 화페로 세금을 상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달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의 정기(精氣)를 세금으로 상납하고 있다. 바란다면 영혼을 저당 잡히는 것으로 헬무드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누릴 수도 있다. 죽기 전까지 영혼을 대신할 대가를 지불한다면, 저당 잡힌 영혼을 되찾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되찾지 못한다면? 생전에 누렸던 자유의 대가를 죽은 뒤에 갚게 된다. 즉, 언데드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데드 노동자가 될 지라도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머저리들이 득실거린다. 헬무드는 머저리들의 이민을 거부하지 않는다.
10년.
유폐의 마왕이 자국의 시민들에게 내세운 사후노동의 기간은 고작해야 10년이다. 수십 년 헬무드에서 행복하게 산 뒤, 죽고서 10년 노동하는 것. 이민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 꽤 크긴 하지만, 간절하다면 내지 못할 정도도 아니다.
알카르트 교구는 마족이 아니라, 헬무드에 정착한 인간들을 교화시키는 곳이다.
비록 마왕과 마족에게 혼을 팔았다지만, 굳건한 신앙을 갖는다면 사후 노동이 끝난 후에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생전의 부귀영화를 사후의 노동으로 대신한 머저리들이 바라는 ‘안심’을 파는 곳이 알카르트 교구다.
그곳을 책임지는 교구장을 보좌하는 것이 보좌주교.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는 유라스에 세 명 있는 추기경 중 한 명의 양녀이며, 아니스의 계보를 이은 성녀 후보다.
당장 ‘성녀’라 불리고 있지는 않지만, 유라스가 성녀로 내세운 후보가 크리스티나 한 명 뿐이니, 향후 몇 년 후에는 정식으로 성녀의 이름을 잇게 될 것이다.
‘...뭔가...’
유진은 멀찍이 서서 눈을 얇게 떴다.
유진과 시안은 하늘에서 떨어졌지만, 흑사자 성에도 워프 게이트는 있다. 지금 유진은 시안, 시엘과 함께 나와서 워프 게이트 앞에 서있었다.
마중을 나온 것은 유진 뿐만이 아니었다. 흑사자 성의 모든 기사들. 전날부터 원탁을 떠나지 않았던 원로들과 가주도 워프 게이트 앞에 나와 있다.
그만큼 이 갑작스런 방문이 특별하단 것이다. 힐긋 보니 원로들의 얼굴에도 동요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유진은 원로들을 힐긋 본 뒤, 다시 워프게이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닮았어.’
방금 전.
크리스티나 보좌주교가 워프게이트를 통과했다. 세 명의 호위기사와 함께 온 크리스티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렸다.
“성대한 환영에 감사합니다.”
새하얀 면사포를 티아라로 고정해놓았지만, 얼굴을 확인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었다. 유진은 여전히 두 눈을 얇게 뜨고서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니스 슬리우드.
유진은 크리스티나에게서 300년 전 동료의 모습을 보았다. 성격까지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아니스의 후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설마 그대가 직접 올 줄은 몰랐네만.”
“필요한 부름이라면 당연히 응해야지요.”
도이네스가 다가가서 말을 건네니, 크리스티나는 살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그녀의 허리에 걸린 짧은 완드에 주목했다. 금색으로 빛나는 완드의 끝에는 빛의 신의 상징인 십자가가 달려 있었는데, 대충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이었다.
“...필요한 부름이라. 그대가 직접 올 이유가 있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이곳에서 나눌 이야기도 아닐 테니,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이윽고 도이네스를 필두로 한 원로들과 길레이드가 몸을 돌렸다. 크리스티나는 성기사들을 대동하고 원로들의 뒤를 따르다가, 무슨 일인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유진과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닿는다. 크리스티나는 잠시 유진을 응시하다가, 얇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곡선을 그리는 눈매. 그것까지도 아니스와 닮았다. 유진은 잠시 우두커니 서서 크리스티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만난 적 있어?”
크리스티나가 멀어진다. 시엘은 유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자그마한 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널 보고 눈웃음쳐?”
“내가 어떻게 아냐?”
“날 보고 웃은 걸지도 몰라.”
시안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괜히 제 몸에 대고서 코를 킁킁대며, 불안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소곤거렸다.
“혹시 나한테 냄새 나냐?”
“어. 비 쫄딱 맞은 똥개 같은 냄새가 나.”
“냄새 때문에 쳐다 본 건가...?”
“그런 거면 왜 웃으면서 봤겠냐?”
“차마 눈살 찌푸릴 수는 없어서 웃은 걸지도 모르잖아.”
유진은 그 중얼거림에 굳이 답해주지 않았다.
그날 저녁. 유진은 곯아떨어진 시안을 내버려두고, 혼자서 저녁식사를 마쳤다.
“도련님.”
입가심으로 나온 차를 홀짝거리는데, 시종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 제노스 경인가?”
유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뜸 찾아 올 손님은 제노스 외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종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흔들었다.
“아뇨.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이십니다.”
“...뭐?”
유진은 자신을 보며 눈웃음을 쳤던 성녀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라고 합니다.”
아성의 홀에는 이미 크리스티나가 들어 와 있었다. 유진은 얇은 미소를 지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여주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갑작스레 무슨 일이십니까?”
크리스티나는 호위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였다. 하지만 유진은 성 바깥에서의 노골적인 기척을 느꼈다. 유라스의 성기사들. 그들은 일반적인 기사들과는 달리, 마나와 신성력을 동시에 다룬다.
‘성녀 후보의 호위로 따라 올 정도니 실력은 꽤 대단할 테고.’
평소라면 성기사에게 흥미를 가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진은 자신을 빤히 보는 크리스티나를 마주 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에도 느꼈지만,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아니스와 너무 많이 닮았다.
‘아니스의 후손일지도 몰라.’
세상에 알려지길, 아니스는 후손을 두지 않았다. 그건 아니스가 성녀로 불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진이 아는 아니스는 교리를 무조건 따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술을 성수랍시고 마셔댔으니, 남들 몰래 후손을 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렇다고 초면인 크리스티나에게 대뜸 선조에 대해 물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유진은 일단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잠시 실례.”
유진은 초면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예의를 차렸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대뜸 뻗은 손으로 유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뭐하자는 거야?’
유진은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움직임이야 미리 간파했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곧. 잡힌 손목에서 찌릿하고 전류가 흘렀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면서도 크리스티나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방긋 웃는 얼굴로 유진을 보고 있었다.
“...다 하셨습니까?”
잠시 뒤. 손목에서는 더 이상 찌릿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크리스티나는 아직까지 유진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그녀는 유진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다가, 과감하게 유진의 팔뚝을 훑었다.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팔뚝이 참 단단하십니다.”
“그걸 느끼고 싶으셔서 만진 것은 아니실 텐데.”
“유폐의 마왕과 마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의 손목을 놓았다.
“마왕과 직접 마주할 경우, 정신과 혼이 마기에 오염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정신과 혼이 마왕에게 오염되었습니까?”
“아뇨. 오염된 곳 하나 없이 아주 깨끗하십니다.”
유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유폐의 마왕은 데스나이트의 몸을 그릇으로 삼았다. 유폐의 마왕이 작정하고 나섰다면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마주친 것으로 오염당할 만큼 유진의 혼은 나약하지 않았다.
“절 걱정하셔서 오신 겁니까?”
“그것도 있지만, 당신이 궁금했습니다.”
“제 소문이 신성제국까지 퍼졌나 보군요.”
“소문도 소문이지만. 계시를 받았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계시?”
“네.”
“무슨 계시?”
“그것은 교에 귀의하지 않으신 유진님에게 알리기는 어려운 일입니다만.”
“알려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궁금하게 만드시는 겁니까?”
“이 만남을 신이 점지해 주신 것이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신? 유진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하긴. 성녀에게 계시를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유라스가 숭배하는 빛의 신 뿐이다.
하지만 유진은 저 말을 도저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아니스조차도 단 한 번도 신의 계시란 것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아니스가 베르무트의 여정에 동참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성제국의 뜻이었지, 신의 뜻이 아니었단 말이다.
“...볼 일은 이것으로 끝이신지요.”
“아닙니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다시 손을 뻗어, 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원탁에서의 회의가 끝났습니다. 원로원주가 영묘의 문을 열기로 하였으니, 저와 함께 가십시다.”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예. 그러기 위해 제가 직접 온 것입니다.”
“그것도 그 계시 때문입니까?”
“예.”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유진은 도저히 크리스티나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고, 그녀에게서 다시 한 번 아니스를 느꼈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먼저 무례히 행동한 것은 크리스티나였으니, 유진도 굳이 그녀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기로 했다. 그는 크리스티나가 이끄는 대로 홀을 떠나며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은 당대에 유일한 성녀 후보라고 들었습니다. 그 ‘성녀’의 계보는, 피로 이어지는 것입니까?”
“질문이 갑작스러우십니다.”
“저는 아크리온에서 2년 동안 마법을 배웠습니다.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은 모르시겠지만, 그곳에 있는 세냐님의 전당에는 300년 전의 동료들의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그 말에 크리스티나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녀는 얇은 눈웃음을 지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유진은 그녀의 미소에 화답하듯 히죽 웃어주었다.
“제 선조님이신 위대한 베르무트님은 물론이고, 용감한 모론, 우둔한... 하멜. 그리고 신실한 아니스님의 모습을 보았지요.”
“은혜로운 일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아니스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어찌 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은 아니스님과 닮으셨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감사한 말씀이십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손을 놓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직 후보에 지나지 않는, 미천한 종복인 제게 오래 전 성녀님의 모습을 보셨다니... 어쩌면 이 또한 신의 기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적이 얼굴까지 닮게 하는 겁니까?”
“어쩌면 아니스님에 제 선조님일지도 모르지요.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아니스님은 후손을 남기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아니스님도 성녀를 떠나 한 명의 인간이셨으니, 후손을 바라셨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유진님은 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로게리스 추기경님의 양녀라고는 알고 있습니다.”
“예. 저는 본래의 부모에게 갓난아기일 적 버림받았습니다. 누군지 모를 제 부모는, 빛의 신이 저를 보살피길 바라시며 절 바구니에 담아, 수도원의 문 앞에 버리셨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다시 손을 뻗어 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그렇다 보니 저는 제 피와, 선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유진님이 제게서 신실한 아니스님의 모습을 보았다 하시니, 그 분이 제 선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은혜롭고 멋진 일이지만,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유진님의 말처럼, 제가 정말로 아니스님의 후손이라면... 제 부모는 성녀의 후손이면서도, 친자식을 돌보지 않았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유진은 뭐라 말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크리스티나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스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여러 번 들어본 것처럼.
생각해 보면 신성제국에 아니스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유진이 크리스티나를 보고 느꼈듯, 신성제국의 사제들도 크리스티나에게서 아니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수도원에 버려지는 아이가 일 년에 몇 명이나 될까. 그렇게 버려져서 추기경의 눈에 들 정도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진은 더 이상 아니스에 대해서 묻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그 뱀 같은 여자는 성녀로 지내면서 남몰래 가정을 꾸렸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순례로 떠도는 중에 가정을 꾸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니스가 선택한 일. 분명한 것은, 확실치도 않은 선조에 대해 따지는 것이 크리스티나에게는 절대로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
“...밤공기가 찹니다.”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흑암의 망토 안에서 두툼한 로브를 꺼내, 크리스티나에게 건네주었다.
밤공기가 아무리 찬들, 크리스티나에게 추위에 대한 대비가 없을 리 없었다.
그건 유진도 알았지만, 대비가 어쨌건 호의를 건넨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크리스티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로브를 받아, 몸에 둘렀다. 그녀는 유진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원탁의 탑으로 갑니까?”
“아뇨.”
닫힌 문을 열자, 성기사들이 크리스티나를 향해 목례를 전했다. 그들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유진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것뿐이었다. 성기사들은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성의 뒤편으로 갑니다.”
크리스티나는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쓰고서 앞장섰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금색 머리카락이 후드 너머로 흔들린다. 유진은 달밤 아래를 지나는 크리스티나의 등을 응시했다.
역린(逆鱗).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아까 전 아니스를 언급했을 때. 크리스티나의 웃음이 살짝 흔들렸었다. 유진은 가슴이 뒤숭숭한 것을 느끼며 쩝 입맛을 다셨다.
“거, 미안합니다.”
유진은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앞서 걷던 크리스티나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사과가 갑작스러우십니다.”
“그냥, 뭐. 제 질문에 조심성이 부족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유진님은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아니스님의 모습을 보셨다니, 저에 대해서 의문을 품으시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돌려 유진을 보았다.
“...그리고... 유진님은 300년 전의 영웅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유진님의 의문은 더더욱 타당한 것이지요.”
“많은 관심이라.”
“유진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유진님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본가의 양자... 그것만으로도 특출난 일인데, 유진님의 자질은 아롯의 콧대 높은 마탑주들도 인정하였잖습니까.”
크리스티나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늦췄던 걸음을 재촉하며 말을 이었다.
“...호가니는 나하마의 영토이지만, 신성제국의 성지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많은 신도들이 성지로 순례를 떠나지요. 당연히, 성지에는 신성제국의 눈들이 많습니다.”
“...”
“불쾌하게 들으실 지도 모르지만, 유진님이 호가니에서 무엇을 하였는지는 저도 미리 들어 알고 있습니다.”
“불쾌할 것까지야. 호가니에서 많은 시선을 받았다는 것은 저도 느꼈습니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유진이 라만과 함께 호가니에 머문 것은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유진은 아주 많은 시선들을 느꼈다.
적의는 없었다. 그래서 굳이 간섭하지 않았다. 아멜리아 머윈의 일도 있었으니, 괜한 소동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버려 두었지만, 파악한 시선들은 쭉 경계했다.
아니스의 동상을 향해 기도를 올리던 사제들. 빛의 신의 상징인 십자가를 목이나 손목에 건 신도들. 칼을 찬 나하마의 전사들...
“신성제국이 저를 주목하는 것도, 그 계시 때문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교인이 아닌 유진님께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데요.”
“부디 의식해 주시기를 바라며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격이 나쁘군.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생각했다. 얼굴만 닮았을 뿐만 아니라, 저 못되 처먹은 성격도 아니스와 닮았다. 정말로 아니스의 후손인가?
‘...얼굴과 성격이 닮았다고 해서 아니스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지. 애당초 300년 뒤의 후손이 아니스와 저렇게 닮은 것도 이상한 일이잖아.’
당장 라이언하트 본가에는 베르무트와 얼굴이 닮은 후손이 없었다. 그나마 닮은 것은 잿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 뿐이다.
어쩌면,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와 ‘우연히’ 얼굴이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금발과 푸른 눈은 흔하다. 사실 이목구비와 생김새가 아니스와 판박이인 것도 아니다. 단순히, ‘성녀’라는 특징과 분위기가 아니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점도 적지는 않다.
하지만. 닮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추기경에게 거둬졌다. 성녀로 키워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은 복잡해졌다.
아니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실 그건 아니스 뿐만이 아니었다. 모론과 세냐를 제외하고, 하멜과 베르무트도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사에 대한 아니스의 태도는, 하멜과 베르무트와는 달랐다.
아니스는 자신의 과거를 혐오했다.
직접 그리 말한 적은 없지만. 유진은, 하멜은 그렇게 느꼈었다.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다녔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추억’은 간단하게 시간을 때울 수 있고, 술안주로서 만만한 이야깃거리다. 세냐는 자신이 유년기를 보냈던 엘프의 숲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었다. 그럴 때면 모론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자기 부족이 살아가던 북방의 설원이 얼마나 웅장한지를 떠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 베르무트와 하멜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맞장구를 치는 쪽이었다. 하멜도 그랬지만, 베르무트도 마족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
아니스는.
고향을 잃지는 않았다. 그녀가 태어난 고향은 신성제국 유라스. 300년이 흐른 지금도,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강대국이다.
그럼에도 아니스는 이상하리만큼 신성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빛의 신에 대해서는 말했으나, 자신을 키워준 신성제국의 추기경들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었다.
하멜은 아니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침묵과, 평소와는 다르게 뒤틀린 미소와.
아니스가 ‘어떻게’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성녀라는 것이 얼마나 좆같은 입장인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스가 베르무트의 동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성제국이 그러라 명령했기 때문이다.
아니스가 베르무트의 여정에 동참하여, 세상을 구하기로 한 것은.
그것이 신성제국과 신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길은 저 아래에 있습니다.”
크리스티나의 걸음이 멈춘다. 둘은 흑사자 성의 뒤편, 아득한 낭떠러지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곁에 서서, 낭떠러지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숲. 저 너머의 능선에서는 와이번과 다른 비행 몬스터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얼마나 아래에?”
“저도 자세한 위치는 알지 못합니다만. 떨어지다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허참.”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안전장치 하나 없이, 일단 저 아래로 떨어지라 이 말이죠?”
“유진님 혼자 떨어지시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은 비행마법을 쓸 줄 아십니까?”
“물론 쓸 줄 압니다.”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유진은 그 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얇게 떴다.
“뭡니까?”
“어차피 똑같은 곳에 가야 하는데, 따로 떨어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참나.”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크리스티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는 곧장 유진을 잡아 끌면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유진은 그 과감함에 혀를 내두르면서, 추락으로 펄럭거리는 망토를 몸에 바짝 둘러멨다.
이대로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될 만큼, 추락은 길었다. 어느새 크리스티나는 유진에게 안기다 시피 가까이 와 있었다. 유진은 아직은 멀리 보이는 지면을 응시하다가,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티나는 지면이 아닌, 유진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크리스티나가 눈웃음을 짓는다. 그녀는 손가락을 길게 뻗어 유진의 가슴을 쿡 찔렀다.
“이대로 떨어져 죽으면, 우리는 천국에 가는 걸까요?”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떨어지신 겁니까?”
“유진님은 천국에 가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나중에는 가고 싶겠지만, 벌써부터 천국에 가기는 싫습니다.”
“그렇다면 유진님과 동행할 수는 없겠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쿡쿡 웃으며 허리에 매단 완드를 꺼내 쥐었다. 십자가의 중앙에 박힌 푸른 보석이 영롱한 빛을 뿜는다. 이윽고 찬란한 빛이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휘감더니, 커다란 날개가 되었다.
‘이건...’
유진은 주변을 감싼 빛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이 빛... 신성력. 신성마법, 빛의 날개. 아니스가 즐겨 사용하던 신성마법이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
한순간.
유진은 날개를 펼친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은 신을 믿지 않는 유진을 놀라게 할 만큼 장엄하고 성스러웠다. 동시에 강렬한 기시감을 전해주었다.
천사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300년 전. 아니스는 고위 신성마법을 통해 여러 번 천사를 불러냈었다. 하지만 그때 보았던 천사와... 지금 보이는 천사의 모습이 다르다.
두 눈을 감고, 자애로운 미소를 띤 천사의 얼굴.
그 얼굴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니스와 똑같았다.
천사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장엄한 빛의 날개가 추락을 늦추고,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휘감는다. 유진은 잠시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방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천사가...”
그 중얼거림에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사? 유진님. 환각제라도 복용하시는 겁니까?”
“...”
“이 신성마법의 이름은 빛의 날개. 천사를 현신시킬 만큼 고등한 신성마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높이에서의 추락에서 저희 둘을 안전히 보호할 테니, 죽음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추락사를 걱정해 천사의 환영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유진은 더 따져 묻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물어 볼 상황도 아니었다.
공간이 일그러진다. 빛의 날개가 일으키는 현상은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는 이변을 느끼고서 빛의 날개를 펼쳤다. 산산이 흩날리는 깃털이 빛이 되어 산화한다.
ㅡ화악.
유진과 크리스티나의 발이 땅에 닿는다. 유진은 놀람을 가다듬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벽은커녕 산과 숲도 보이지 않는다.
기묘한 공간이다.
녹색의 벌판. 푸른 하늘. 태양은 떠있지 않은데 하늘은 푸르고 밝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 벌판의 풀이 흔들린다. 유진은 천천히 몸을 낮추어 풀을 어루만져 보았다. 만져지는 느낌은 진짜 풀과 다를 것 없는데, 풀에 생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흙도 마찬가지였다.
“...공간마법이군요.”
크리스티나가 중얼거리고, 유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이만한 규모의 아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법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크리온의 한 층을 차지하던 공간의 전당. 유진은 그곳에서 최상위 공간마법들을 접해 보았지만, 그곳의 마법들 중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아공간을 만들어내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냐가... 아니. 베르무트인가?’
베르무트도 세냐와 버금 갈 만한 대마법사였으니, 이만한 규모의 아공간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 싶다. 유진은 몸을 일으키고서 앞을 보았다.
벌판의 끝. 아름다운 꽃밭. 그 한복판에 새하얀 신전이 보인다. 신전뿐만이 아니다. 그 앞에는 우뚝 선 베르무트의 석상이 있었다. 유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신전을 향해 발을 옮겼다.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신전에 가까워지는 도중. 그 안에서 도이네스와 길레이드가 걸어 나왔다. 도이네스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응시했다.
“수호해야 할 영묘가 아니었다면, 모든 라이언하트가 경배할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을 텐데 말이야.”
“...시조님도 많은 후손들에게 추모와 경배를 받는 것을 바라실 겁니다.”
“하하. 자네는 그리 생각하나 보군. 하지만 이곳을 만드신 것은 다름 아닌 시조님일세. 후손들의 추모와 경배를 바라셨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곳에 영묘를 만드셨을 리 없잖은가.”
도이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흠... 하멜님의 동상은... 이 반대편에 두면 괜찮을 것 같군.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어디든 하멜님은 만족하실 겁니다.”
“시조님이 만족하실 지는 의문이지만 말일세. 뭐... 나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이곳은 300년 동안 시조님의 석상 밖에 없었으니, 오랜 벗의 동상을 함께 세워두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싶어.”
도이네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침묵하는 길레이드를 대신해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고, 이제는 그 시선이 크리스티나에게 향했다.
“...이 공간과 이어지는 길을 열기 위해서는... 가주의 인장과, 원로원주의 인장이 필요하네. 그 두 개의 열쇠 또한 시조님이 만드신 것이고, 본가를 이끌 가주의 계승과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 임명식 외에는 출입을 금하도록 하란 말씀도 남기셨었지.”
“전례가 없는 일이란 말씀이시군요.”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발아래에서 흔들리는 꽃들을 힐긋 보았다. 벌판의 풀들과 마찬가지로, 아래의 꽃들 역시 겉보기에만 그럴 듯하고 생기는 없는 조화들이었다.
“제 무례함을 꾸짖고 싶으신 것도 이해합니다만. 오랜 전통을 양보하실 만큼, 제가 이곳에 들어 온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시기가 적절하지 못하다 생각하는 거요.”
길레이드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님이 신성제국의 뜻을 품으신 이상, 한낱 가문에 지나지 않는 라이언하트가 어찌 신의(神意)를 거역할 수 있겠소?”
길레이드의 시선은 크리스티나를 떠나 유진에게 향했다. 그 시선은 유진을 꾸짖거나, 이 상황에 대한 불쾌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안타까움과 걱정이 있을 뿐이었다. 길레이드는 이 유래 없는 방문에 자신의 아들이 휘말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님. 당신은 굳이 이런 시기에 방문하셨고, 영묘의 출입에 내 아들과 무조건 동행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셨소. 나는 라이언하트의 가주로서 그 고집을 묵살할 수 있었으나, 신성제국과 키옐제국의 오랜 동맹과 시조님부터 이어져 온 친애를 생각해 묵살하지 않았소.”
“나 또한.”
도이네스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길레이드의 말에 화답했다.
“크리스티나님. 당신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시겠다며 말씀하셨소. 당신은 ‘계시’에 대해 말씀하셨고, 유폐의 마왕은 오랜 평화를 깨며 세상에 경고를 전했지. 그런 상황에서의 계시...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러니 이제는 부디, 무겁게 다물고 계시는 입술을 열어주시오.”
“감히 말씀드립니다.”
크리스티나가 유진을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아직 들고 있는 완드를 가슴 앞으로 들며, 반대편 손으로는 느릿히 성호를 그었다.
“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미하엘 로게리스 추기경의 양녀이자, 알카르트 교구의 보좌주교이며, 신성제국 유라스의 하나 뿐인 성녀 후보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교황예하의 뜻을 대변하며, 빛의 신의 계시를 받은 정식 성녀로서 이 자리에 서도록 하겠습니다.”
그 담담한 선언에 도이네스와 길레이드의 눈이 크게 뜨인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들의 놀람을 돌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영웅의 관을 열어주십시오.”
“...대체 무슨 말을...?”
“위대한 베르무트.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고, 참혹하던 시대를 끝낸 용사. 올마스터. 대영웅. 라이언하트의 시조인 그는 영웅이라 칭송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만한 대업을 이룬 영웅이라면 그 누구보다 먼저 천국에 들 수 있겠지요.”
유진은 일단 입을 다물고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길레이드와 도이네스는 경악을 넘어 분노를 드러내고 있지만, 유진이 그럴 이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은 유진에게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단순히 마법으로 봉인된 것도 아니고, 가주와 원로원주가 나눠가진 인장이 없다면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베르무트의 영묘는 결계가 아닌, 아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억지로 여는 것을 지금의 유진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가능할까? 유진은 그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크리스티나가 알아서 베르무트의 관을 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도이네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시조님의 묘에 대해서는 이미 300년 전에 논의가 끝난 일이오. 신성제국은 시조님을 성인으로 임명하고, 그에 대한 친애와 상징으로서 성검을 라이언하트에게 양도하였지. 그것으로 신성제국과 라이언하트의 연결은 굳건하고 성스러워졌소.”
“예, 그랬지요. 평화의 시대라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겁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이 경고를 전한 이상, 세상은 언제까지고 평화롭지 않을 겁니다.”
“그것과 시조님의 관을 여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천국을 운운한 것은 또 뭐고?”
“위대한 베르무트의 혼은 천국에 들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손을 들어 베르무트의 석상을 가리켰다.
“계시에 이르기를, 영웅의 혼은 안식에 들지 않고 떠돌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성녀로서 영웅의 마지막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그 말이... 라이언하트에게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인지하고 있소?”
길레이드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새하얀 갈기를 일으키며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고, 도이네스도 얇게 뜬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진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웅의 위업을 훼손할 마음은 없습니다.”
“...”
“오히려 영웅을 칭송하기에, 그 마지막을 다시금 확인해야 한다는 겁니다. 300년 뒤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시대의 일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위대했던 영웅이 왜 그리 빨리 눈을 감아야 했는지. 현명한 세냐가 왜 그리 갑작스레 은거하였고, 신실한 아니스님이 순례 중에 행방불명되었는지. 용감한 모론이 왜 100년 전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지.”
크리스티나가 발걸음을 땐다. 그녀는 꽃밭을 가로질러, 도이네스와 길레이드에게 다가갔다.
“왜 영웅들이 남은 마왕을 쓰러트리지 않았는지. 유폐의 마왕과 위대한 베르무트가 어떤 약속을 나누었는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신조차도 그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십니다. 그 분이 내린 말씀은, 영웅의 혼이 천국에 들지 않았다는 것. 그렇기에 확인하고,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거절하는 것이 신의 뜻에 반한다는 것인가?”
“그 분을 신앙하지 않는 자들에게 신의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 신을 믿는 저로서는 거절에 커다란 안타까움을 느끼겠지요.”
아니스의 때에도 여러 번 생각했지만, 저 신의 뜻이라는 것은 빌어먹을 논리였다. 무슨 말을 해대건, 신의 뜻을 앞세운 이상 다른 이유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직자에게 신의 뜻은 절대적이다. 신을 믿지 않는 입장에서는 저 말이 한낱 개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도 힘들다.
‘아주 좋아.’
물론 유진이 난감함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는 흥미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표정을 굳히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확인’에 내 아들이 동참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요.”
“그 또한 계시이며,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크리스티나 ‘성녀님.’ 당신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고약한 짓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계시오?”
“허나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며, 교황 예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말싸움은 절대 안 지겠군.’
아니스가 그랬던 것처럼. 유진은 혀를 내두르면서 크리스티나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확인이라.”
도이네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손을 쥐었다 펴다가, 길레이드를 힐긋 돌아보았다.
“가주의 뜻에 따르겠네.”
“...진심이십니까?”
“내 비록 원로원을 이끄는 입장이지만, 이런 문제를 가주를 대신해 결정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나는 원로원주로서 가주가 내린 결정에 무조건적으로 따를 것이며, 결코 문제로 삼지 않을 걸세.”
길레이드는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툴툴 웃었다.
“설마 내 손으로 시조님의 관을 열게 될 줄이야.”
길레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따라 오시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도이네스는 신전에 함께 들어가지 않았다.
“가주도 아닌 내가 어찌 감히 시조님의 유해를 확인할 수 있겠나.”
그는 긴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고, 크리스티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별 말을 하지 않고, 얌전히 크리스티나의 곁에 붙어 있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나보곤 들어가지 말라는 개소리를 하진 않겠지.’
이렇게까지 상황이 잘 풀렸는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내쫓기게 된다면 신을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게 될 것이다.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길레이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마음고생이 참 심하겠어.’
아까 길레이드가 아들이라 힘을 주어 말하던 것이 머릿속을 맴돈다. 유진은 제하드도 있고 하니 도저히 길레이드를 아버지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길레이드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그에게서 여러 배려와 부성애를 느꼈다. 그렇기에 길레이드의 입장이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남이라고 있는 놈은 애비와 가문 얼굴에 똥칠을 해대고, 이제는 성녀가 찾아와서 시조의 관을 열라고 생떼를 쓴다.
‘가주? 절대 안 하지. 절대.’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한 번 더 결심을 다지게 된다. 차라리 흑사자 기사단이 되었으면 되었지, 가주는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흑사자 기사단도 싫다. 유진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다.
“신비한 곳이군요.”
말없이 길레이드를 따르던 중,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이만한 규모의 아공간. 하늘과 들판, 꽃, 신전...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보기에만 그럴 뿐. 정작 신전의 안에는 아무 것도 없군요.”
“...시조님의 유언이었소.”
길레이드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묘에 후손이 가꾸고, 라이언하트의 장식을 두지 말 것. 숭배하지 말 것. 상징으로 삼지 말 것.”
“...숭배와 상징이라... 우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본래라면 하멜님의 동상도 이곳에 들이지 말아야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후손이 가꾼 것도, 라이언하트의 것도 아니니.”
길레이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유진을 돌아보았다.
“...현명한 세냐님의 제자이자, 선조님의 후손. 그리고 하멜님의 묘비에 마지막으로 추모를 올린 내 아들이 그를 간절히 바라기도 하였고. 나와 원로원의 뜻도 그 문제에 관해서는 일치하였소.”
“아름다운 일입니다.”
크리스티나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분위기는 싸늘했지만, 그녀는 미소를 주저하지 않았다.
“300년 전의 우애가 맺어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하멜님의 묘... 그곳에 유진님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분명 신의 뜻일 것입니다.”
“...하멜님의 무덤이 훼손되고, 시체가 데스나이트로 모욕당한 것도 신의 뜻입니까?”
유진은 고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건 신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진님을 한줄기 빛으로 삼아 깊은 지하의 어둠을 밝히신 것이겠죠.”
참으로 대단한 논리로군. 유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만큼 노골적으로 신을 팔아대지는 않았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말싸움에서 이긴 적이 없단 말이야.’
성직자는 개똥같은 논리와 언변이 기본소양인가? 일단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를 보면 그런 것 같았다.
‘...초라하긴 하군.’
유진은 두눈을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리스티나가 말한 것처럼, 이 신전은 겉으로 보기엔 웅장하지만 내부는 아주 초라했다. 벽에는 흔한 벽화나 초상화도 없고, 기둥에도 문양 같은 것은 일절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런 면이 더더욱 베르무트의 성격답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진즉에 폐허로 변했던, 하멜의 무덤을 떠올렸다. 아마 폐허가 되기 전에는 그럴 듯한 무덤이었을 것이다. 동상도 있고, 추모석도 있고. 기둥과 벽에는 아니스의 기도문과 세냐의 마법술식이 가득했었잖은가.
하지만 이 신전에는 아무 것도 없다. 기도문도 적혀 있지 않고, 추모석도 없었다. 신전 앞에 있는 베르무트의 석상에도 건조한 필체로 이름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 이름을 적은 필적은, 유진이 기억하는 베르무트의 필적이었다. 제 무덤에 두는 석상에... 제 손으로 이름을 쓰는 것. 유진은 그게 대체 무슨 기분일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잠시.”
길레이드의 걸음이 멈춘다.
신전의 중앙. 그 한복판에 새하얀 관이 놓여있다. 길레이드는 잠시 동안 그 관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따로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유진도 무릎은 꿇었다.
시조가 아닌, 죽은 동료이자... 친구에 대한 애도로서.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두 무릎을 얌전히 꿇고, 양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기도를 올렸다. 잠깐 동안 셋은 그렇게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이윽고 길레이드가 먼저 몸을 일으킨다. 그는 들끓는 감정을 삭히도록 노력하며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오시오.”
유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서 앞을 보았다. 길레이드와 크리스티나가 관에 다가가고 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뛴다. 설마 이렇게 빨리 베르무트의 관을 확인하게 될 줄이야.
‘...제발.’
유진은.
진심으로 바랐다.
‘그냥, 관 속에 누워 있어라. 멀쩡한 시체건, 미라건, 썩어문드러졌건, 뼈만 남았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냥 죽은 체로... 누워있어.’
만약 그렇게 누워있다면.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의심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월광검을 하멜의 무덤에 가져다 둔 것.
그 과정에서 세냐와 충돌한 것.
...유폐의 마왕과... 병신 같은 약속을 한 것.
“열겠습니다.”
네가 정말로 죽어서 누워있는 것이라면. 그것만으로 나는 안심할 수 있다.
네가 내 환생에 관여했다는 것. 이것은 내가 널 탓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온갖 개고생을 함께 했던 세냐와 싸운 것은.
그로 인해 세냐가 강제적으로 은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유폐 그 씨발놈이 친애를 운운하며, 너를 언급하고. 마치 너와 긴밀한 사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가리를 털어댄 것은.
‘나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납득하고 싶지도 않다.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해해선 안 될 일이다.
너는 그래서는 안 됐다. 다른 녀석들도 안 될 일이지만, 베르무트, 너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마왕살해자. 용사. 대영웅. 무신. 올마스터.
위대한 베르무트.
너는 절대로.
“...역시.”
크리스티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고.
길레이드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고.
유진은 부릅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으스러지도록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흐른다. 유진은 주먹을 한 번 펼치고, 다시 쥐어 피가 떨어지지 않도록 감추었다.
“아무 것도 없군요.”
꽈득.
어금니가 박살날 것 같다. 박살나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이고 예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서 신전을 박살내고 싶었다.
아니.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300년이나 흘렀으니... 시신이 남지 않았을 수도...”
길레이드는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본인부터가 그 말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성인의 유해가 승화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어서 알고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텅 빈 관을 내려다보면서 뇌까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위대한 베르무트의 혼이 천국에 들었겠지요.”
“...”
“적어도 확실한 것은, 베르무트님은 이곳에서 안식에 들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길레이드의 두 눈이 흔들린다. 그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며, 텅 빈 관과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시조님이... 죽지 않으시고, 모습을 감추었다는 말이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고서 잠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벌어진 입술이 유진의 이름을 고했다. 유진은 피범벅인 주먹을 쥐었다 펴다가, 고개를 들어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짐작했던 일이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베르무트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유진과 얽혀 있다.
본가의 보물고에 하멜의 유품을 가져다 둔 것. 세냐를 패퇴시킨 것. 월광검을 하멜의 무덤에 가져다 둔 것. 그 모든 것들이 베르무트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왜’ 그런 짓을 벌였냐는 것이다. 하멜을 환생시키는 것이 순수한 목적이었다면. 베르무트가 그를 은밀히 진행할 이유가 없지 않나. 세냐도, 아니스도, 모론도. 베르무트가 사정을 설명했다면, 이해하지 않아도 납득은 했을 것이다.
베르무트는 그러지 않았다. 더욱 빌어먹을 사실은, 동료들도 짐작하지 못한 환생을 유폐의 마왕이 알고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유진의 기분을 좆같게 만든다. 유진은 최대한 노력하여 감정을 다스리고, 살기가 흘러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표정까지 어찌 할 수는 없었다. 마치 가면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얼굴이 거북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뺨을 어루만져 보았다. 아직 온기가 채 식지 않은 피가, 유진의 뺨에 얼룩졌다.
“...계시를 고합니다.”
크리스티나가 말을 잇는다.
“유진 라이언하트.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을 위대한 베르무트의 뒤를 잇는 용사로 선언합니다.”
지금.
“그 인정은 계시를 내린 빛의 신의 뜻이며, 교황 예하가 인정합니다. 아직 유폐의 마왕이 경고 외에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으니 세상에 공표할 수는 없지만, 저는 신성제국의 성녀이자 빛의 증인으로서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길레이드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번갈아 보았다.
“...용사? 그게 대체 무슨...”
“유폐의 마왕이 경고를 전한 지금. 유진님의 존재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 말은 길레이드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만들었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길레이드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유진 라이언하트. 6년 전에 들인 양자는... 300년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이것은 신의 계시가 아닙니다만. 저는... 유진님이 위대한 베르무트의 환생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십자 모양의 완드를 가슴 앞에 들고서 말을 이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위대한 영웅의 혼이 천국에 들지 않은 것도 납득이 갑니다. 머지않아 닥쳐 올 세상의 위기에 맞서기 위해, 영웅의 혼이 후손의 몸으로 환생한 것입니다.”
“...하하...”
듣자듣자하니.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유진은 그 운명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있을 것이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운명이고 소용돌이고, 휘감겼다고 하여 무턱대로 딸려가야 하는 건가. 유진은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저 계시를 내렸다는 빛의 신의 낯짝을 한 번 보고 싶다고 소망했다. 저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늘어 놓을 것이라면.
“허락이라도 받고 하던가. 씨발놈이 뭐? 용사? 지랄을 하네 아주.”
그 말은 마음속에 남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뱉고서 화들짝 놀라지는... 않았다. 대놓고 들으라고 한 말이다. 길레이드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의 유진은 양부의 입장까지 헤아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위대한... 하하! 위대한 베르무트의 환생? 내가? 이봐요,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 아니, 성녀님.”
“...”
“지랄 좀 하지 마십시오. 댁이 뭐라고 나를 누군가의 환생이라 정의합니까? 그리고 댁이 섬기는 신은 또 얼마나 잘났기에,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날 두고서 용사니 뭐니, 내 동의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선언합니까?”
“...유진님을 영웅의 환생이라 한 것은 제 생각일 뿐입니다. 그를 탓할지언정, 신의 계시마저 우습게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아니. 나는 어차피 빛의 신을 믿지도 않고, 앞으로도 믿을 생각 없고, 천국에 갈 생각일랑 없으니까 그냥 내 마음대로 하렵니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손에 묻은 피를 털었다.
“나는 그냥 나입니다. 유진 라이언하트. 위대한 시조님을 대신할 용사가 필요하다면 다른 놈한테 시키십시오. 득실거리는 신도들 중 한 명을 골라 용사라 하시던가. 영 눈에 차지 않는다면, 전능하고 잘난 신께서 직접 강림하시던가.”
“유진님.”
“아직 내 말 안 끝났습니다. 댁이 뭐라 한 들, 나는 이 병신 같은 용사 공인을 넙죽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영광스럽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다고요. 나는 나고, 이건 내 인생이니까.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겁니다.”
유진은 그렇게 내뱉고서 길레이드를 돌아보았다.
“험한 말 해서 죄송합니다만, 가주님. 제 입장은 분명하니 그렇게 알아주십시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저는 시안 대신 가주가 될 생각도 없고, 흑사자 기사단에서 구르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디서 가문을 욕되게 하거나 가주님의 체면을 부끄럽게 할 일은 하지 않을 테니, 여태까지처럼 절 믿고 지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물론... 네 뜻을 존중해 줄 것이다.”
길레이드는 경악을 가다듬고서 대답했다. 유진은 그 말에 빙긋 웃으면서, 뺨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러니까 크리스티나 성녀님. 부디 전능하신 빛의 신께 이것을 전해 주십시오.”
“...무엇을 전해달란..”
“이거.”
유진은 아직 피가 채 닦이지 않은 손을 앞으로 뻗어,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좆까라는 말도 좀 전해주시고.”
간신히 경악을 가다듬은 길레이드의 입이 쩍하고 벌어진다. 크리스티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진은 쭉 뻗고 있는 가운데 손가락을 접고서, 빙글 몸을 돌렸다.
“할 말은 다 했고, 밤도 깊었으니 저는 이만 자러 가렵니다.”
“...동상은?”
길레이드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유진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하멜님은 벗이 잠들지도 않은 곳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겁니다.”
동상도, 추모석도.
이딴 곳에 두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유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곧장 신전을 빠져나와서, 베르무트의 석상 앞에 서있는 도이네스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뜸 내뱉은 말에 도이네스가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다. 그는 아직 나오지 않은 길레이드와 크리스티나를 찾아 신전 쪽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유진을 돌아보았다.
“...하멜님의 동상은?”
“여기에 둘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허...”
도이네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고 표정을 굳혔다. 그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들판을 가로지르게. 그러다보면 자연히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거야.”
“예,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자네는 왜 그리 화가 나 있는가?”
관에 시조의 유해는 남아있지 않다. 도이네스는 그 사실은 짐작했지만, 유진의 분노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적당히 말을 받아주겠지만, 지금의 유진은 그렇게 할 만큼 감정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다.
“제 분노의 이유에 대해서까지 설명해 드릴 의무는 없지 않습니까?”
대답은 듣지 않았다. 유진은 곧장 도이네스를 지나쳐서 꽃밭을 걸었다. 도이네스는 두 눈을 끔벅거리며 유진의 등을 보다가, 긴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개같은 기분이다.
요즘 들어서 기분이 개 같아지는 일이 잦았다. 나하마의 지하 무덤에서, 하멜의 시체가 데스나이트가 된 것을 보았을 때. 아멜리아 머윈에게 죽을 뻔 했을 때. 유폐의 마왕이 강림했을 때.
놈이 베르무트에 대한 친애와, 우둔한 사자를 운운했을 때.
지금의 기분도 그때와 비교해서 뒤처지지 않을 만큼 개같고, 좆같았다. 유진은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의 맛이 난다. 아릿한 통증. 개같고 좆같은 기분을 떨쳐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미치광이처럼 날뛰고 싶었다. 몬스터나, 마물이나, 아니, 아무라도 좋다. 흠씬 두들겨 패고 죽이다 보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아니.’
그딴 짓을 해봐야 조금도 즐겁지 않고,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결국은 잠깐의 화풀이일 뿐. 감정을 썩어버리게 만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지 않는 한, 이 빌어먹을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무턱대고 걸었다. 환생한 몸뚱이는 아직 19살이지만, 유진은 온갖 경험을 거쳐 온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무의미할 화풀이를 바라지 않고, 끓는 감정을 스스로 다스렸다.
도이네스가 말한 대로였다.
꽃밭을 지나고, 들판을 지나서 걷다 보니.
어느 틈엔가 유진은 어두운 숲의 한 복판에 서게 되었다. 부는 바람이 차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밤하늘이 보인다. 우클라스 산의 밤하늘은 별이 참 많았다.
엿 같은 기분으로 보기 아까울 만큼 멋진 밤하늘이었다. 유진은 하늘을 노려보면서 끓는 기분을 식혔다. 하지만 호흡은 영 가라앉지 않았다.
“썩을.”
목이 터져라 고함이나 질러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들었다. 피범벅의 주먹. 손가락을 펼쳐보니, 너덜거리는 손바닥이 보였다. 유진은 피부에 눌러 붙은 피딱지를 뜯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조금 걷다가. 숲에 나무가 너무 많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숲이니 나무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의 유진은 그 당연한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피범벅인 주먹으로 나무를 후려쳤다. 마나를 쓰지 않고, 단순히 힘으로 때린 것이지만 나무가 우지끈 부러진다. 유진은 뻐근한 주먹을 힐긋 보았다. 기껏 멎었던 피가 다시 철철 쏟아지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를 뛰어넘고서, 유진은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 숲은 몬스터가 득실거린다. 하지만 이 숲에 사는 몬스터들은 감히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유진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하멜의 것이었고, 몬스터들은 감히 그 살기를 침범하지 못했다.
한참을 걸은 뒤.
유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의 한복판인데도 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벌레조차도 유진의 살기에 입을 닥치고 있었다. 유진은 주변의 침묵을 넘어, 조금 더 먼 곳까지 감지했다.
주변에 몬스터 뿐이다. 마법의 기척도 없다. 유진은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망토에 부벼 닦은 뒤, 위니드를 뽑았다.
“템페스트.”
차디 찬 바람이 가라앉는다. 유진은 환염식을 운용하며 위니드를 노려보았다.
“내 말 듣고 있는 것 알아. 내가 지금, 화가 좀 많이 났거든. 이 분노를 당장은 어찌 할 줄 모르겠는데, 마침 내 손에 부러트리기 참 쉬운 검이 들려있단 말이야.”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위니드의 검신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내가 6년 전에는 마나가 후달렸어서, 정령을 간단하게 불러들이는 이 위니드가 참 간절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내가 위니드에 간절할 이유가 없거든? 나 6년 동안 마나 존나 쌓았어. 위니드 없어도 검강 만들 수 있다고.”
바람이 완전히 사라진다. 유진은 가늘게 떨리는 위니드의 검신을 피범벅인 손가락으로 훑었다.
“물론 위니드는 좋은 검이지. 이만한 성능을 가진 마법검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아. 그런데 어떡하냐? 내 기분이 지금 굉장히 좆같고, 위니드가 참 부러트리기 좋게 생겨먹었는데.”
우우웅... 검신이 흔들리면서 바람이 흘러나온다. 유진이 불러일으킨 바람은 아니었다. 발칙하게도 위니드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은 훈훈한 온풍이었다.
유진은 꽉 쥔 주먹으로 위니드의 검신을 후려쳤다. 까앙! 위니드의 검신이 찌르르 울리고, 바람이 뚝 멎는다.
“너도 봐서 알겠지만, 지금 나한테는 위니드 말고 월광검도 있어. 이걸 부러트려봤자 내가 아쉬울 것은 없다는 말이야. 하지만 템페스트, 너는 아쉽잖아. 날 아니까, 내 성격도 잘 알 테고. 그렇지? 나 좆같은 놈이야. 셋 센다.”
말만 앞선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환염식을 운용하고서 다시 주먹을 들었다. 새하얀 불꽃이 주먹을 휘감는다.
“하나, 둘.”
[잠깐.]
셋,을 말한 즉시 주먹을 내지르려 했는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화아악! 공명하고 회전하는 코어에서 마나가 쭈욱빠져 나간다.
6년 전에는 템페스트를 잠깐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완전히 고갈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정신이 한 순간 아찔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갑작스레 마나가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흐트러지는 마나를 진정시키며 위니드를 노려보았다.
“씨발놈이. 꼭 주먹을 들어야 나와요.”
[너는 여전히 무식하군...!]
“근본이 이따위인데 뭘 새삼스레.”
바람이 미쳐 날뛴다. 주변의 나무들이 바람에 휩쓸려 쓰러질 듯이 흔들리고, 대지가 진동한다. 유진은 눈을 확 찡그리며 내뱉었다.
“잠깐 나오는데 이렇게 티를 내야 하냐?”
[...내 존재가 거대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의 정령왕이라는 새끼가 바람 하나 진정 못 시켜?”
유진이 다시 주먹을 들어올리자, 회오리치던 바람이 얌전히 가라앉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템페스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무리 그가 바람의 정령왕이라지만, 계약을 맺지 않고 유진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물며 촉매인 위니드도 흑암의 망토 안에 넣어 둔 상태였으니, 베르무트의 신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베르무트의 관짝을 열었다.”
[...]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역시 그런가...]
그 넋두리 같은 말에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짐작하고 있었겠지?”
[...베르무트 정도 되는 인물이 그렇게 빨리 죽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내가 느낀 베르무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수명이라는 것에도 자유로울 인물이었다.]
“베르무트가 왜 죽음을 위장했는지 말해.”
[하멜. 너는 네 의문을 내가 답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겠지만, 나는 정말로 베르무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지랄하지 말고 말하라고.”
[내 존재를 걸고 맹세할 수 있다. 나는 베르무트가 맺은 약속도, 베르무트가 죽음을 위장한 이유도, 네 환생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유진은 머릿속에 울리는 템페스트의 목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존재를 걸고 한 맹세. 하물며 그 맹세를 한 것이 바람의 정령왕이다.
[베르무트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오직 베르무트 본인 뿐일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유폐의 마왕도 베르무트를 이해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템페스트는 유진의 침묵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세냐와 모론, 아니스는 베르무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베르무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했다는 것이다.]
“...원망?”
[네가 베르무트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결정에 의문과 원망을 품었듯이. 300년 전의 그들 모두가 베르무트의 독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유진은 입을 꾹 다물고 위니드를 노려보았다. 잔잔한 바람 속에서 템페스트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이어졌다.
[...유폐의 마왕과의 싸움은... 격렬했지. 그것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리에 베르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유폐의 마왕. 그 서열 2위의 대마왕은, 하멜, 네가 경험하고 넘어 온 3명의 마왕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끔찍한 존재였다. 그는 가진 이름처럼 모든 희망과 승산을 깊은 나락까지 처박았다.]
“...”
[세냐의 마법은 유폐의 마왕을 꿰뚫지 못했다. 아니스의 신성력은 유폐의 마왕이 불러들인 어둠을 밝히지 못했다. 모론의 돌진은 유폐의 마왕에게 닿지 못했다.]
유진은 전생에 유폐의 마왕과 딱 한 번 마주했던 적이 있었다. 요동치는 어둠. 절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 붉은 쌍안. 직접 마주한 유폐의 마왕은, 데스나이트의 몸을 그릇삼아서 강림했을 때와는 존재감부터가 달랐다.
[그곳에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세냐와 아니스, 모론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무트가 있었기에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가 성립됐다. 베르무트가 있었기에 세냐의 마법은 유폐의 마왕을 꿰뚫고, 아니스의 신성력이 어둠을 밝히고, 모론의 돌진이 닿았다.]
템페스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부족했다. 격렬했던 싸움이 한 순간에 허무해진 것은, 베르무트를 제외 한 모두가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순간에 하멜, 네가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 지도 모르지.]
그 말에 유진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씨발. 내가 죽은 것부터가 잘못이었네. 괜히 내가 나대서, 죽지 않아도 되는데 죽어버려서. 그래서 이 개같은 꼴을 보게 된 거지. 거기서 안 죽고, 유폐랑 멸망의 모가지를 따고 죽었으면 이 꼴 안 봐도 됐을 텐데 말이야.”
[하멜.]
다시,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울린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다. 그것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 네 환생에 베르무트가 관여했다면, 그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 순간에서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은 것은, 그때의 전력으로는 유폐와 멸망을 쓰러트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뭐.”
[네 동료들은 베르무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베르무트는 동료들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그 알 수 없는 남자는, 사선을 함께 넘어 온 동료들의 이해까지 져버리면서 네 환생을 의도했다. 내가 아는 베르무트는 최후까지 고독했으며, 영웅이라 칭송받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병신들.”
유진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세냐도 그랬다. 메르가 말하길, 세냐는 평생 동안 고독하게 살았다고 했다. 연인도 만들지 않고, 혼인도 하지 않고, 파티에 나가지도 않고, 오직 서재에만 처박혀 위치 크래프트를 만들었다고 했다.
[...유폐의 마왕이 약속을 맺은 것과, 네 환생을 아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하멜. 네가 베르무트에게 원망을 느끼는 것은...]
“원망이 아니야.”
유진은 위니드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그러니까... 배신감이지. 응. 배신감. 네가 말한 것처럼 그 새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새끼였어. 그래서는 안 됐다고. 놈이 얼마나 대단한 사명을 가졌든, 나는... 우리는. 베르무트와 함께 세상을 떠돌았다. 헬무드를 가로질렀다. 세 명의 마왕을 죽였다.”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베르무트를 위해 죽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베르무트는 위험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베르무트를 위해 죽었다. 그렇게 죽는 것이, 내게는 만족스런 죽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가슴에 구멍이 뚫리기 전에도 몸은 죽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함께 가봤자 짐짝밖에 되지 않는다. 모두가 하멜을 두고서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하멜은 그러지 않았다. 돌아간들 망가진 몸은 멀쩡해지지 않을 것이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유폐의 마왕성까지 왔다. 험난한 길을 뚫고서 유폐의 마왕과 대면하는 것을 코앞까지 뒀다. 그곳에서 물러서고, 다음에 유폐의 마왕과 맞닥트릴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아니. 설령 다음에도 유폐의 마왕에게까지 도달할 지라도, 그곳에 하멜은 함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몸을 날렸고, 베르무트를 대신해 죽었다. 하멜에게는 그런 영광이 필요했다. 영웅을 위해, 베르무트를 위해, 친구를 위해 죽었다는 영광.
병신 같은 자기만족.
“...나 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의 모두가, 베르무트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망설이지 않았을 거다. 그곳까지 오면서 모두 다 이해했으니까. 자존심만 더럽게 강하던 나조차 이해했단 말이다. 내가 죽을 지라도, 베르무트는 죽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죽어도 베르무트만 살아있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떨리고 있다. 위니드를 쥔 손가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템페스트. 네 말대로... 세냐가, 아니스가, 모론이, 베르무트를 원망했다면. 그건 절대로 베르무트의 독단 때문이 아니야. 자기들이 무능해서, 베르무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녀석들은, 그런 녀석들이다. 무능한 자기자신을 원망하고, 왜 자기들을 버리지 않았느냐고 베르무트를 원망할 놈들이다.”
[...하멜.]
템페스트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베르무트가 동료들을 져버려야 하는가.]
“...”
[그는 네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 죽을 필요는 없었다.
[세냐의 죽음도, 아니스의 죽음도, 모론의 죽음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쓰러졌을 때,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거두었다. 유폐의 마왕은 그 순간에 베르무트를 제외한 모두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와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다.]
“...”
[그 약속은 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함께 있던 동료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고, 말살되었어야 할 네 혼을 되찾는 것이기도 했다.]
“알아.”
배신감.
분노.
원망.
그 복잡한 감정들 속에서, 유진은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처음 마왕을 쓰러트렸을 때.
‘이... 이겼다. 이겼다고! 하멜, 이 개자식아! 우리가 마왕을 죽였어!’
‘진짜 죽은 것 맞아? 저 씨발새끼, 그냥 죽은 척 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일어나서 우리 조지는 거 아니냐고.’
‘마왕이나 되는 자가 그런 치졸한 술수를 쓰겠습니까?’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적수였다. 나 모론 루하르, 한 명의 전사로서 마왕을 평생토록 기억할 호적수로 인정...’
‘훌륭한 적수는 씨발아. 지랄하지 말고 옆구리나 틀어막아. 내장 줄줄 흐르고 있잖아!’
‘하멜, 십새야! 우리가 마왕을 죽였다고!’
‘세냐, 너는 왜 가만히 있는 날 자꾸 부르면서 욕을 해대는 거냐?’
서열 5위, 살육의 마왕. 놈의 가슴에 처박은 성검을 뽑아낼 때. 분명 해가 저물어가는 황혼이었는데, 베르무트의 휘광은 여명처럼 찬란히 빛을 발했었다. 마왕을 쓰러트렸다는 사실에 모두가 흥분했지만, 빛을 등지고 선 베르무트의 모습에 잠시 동안은 말을 잇지 못하고 경건함을 느꼈었다.
‘...너 시발... 네가... 어... 잘 싸운 것은 알겠고... 어. 네 덕분에 저 개새끼를 쓰러트린 것도 알겠는데 말이야. 꼭 그렇게 서서 폼을 잡아야겠냐?’
‘나 뿐만이 아니다.’
베르무트는 그렇게 말하며 모두를 내려보았다.
‘우리... 모두가... 잘 싸워서. 모두가 함께 싸운 덕분에, 마왕을쓰러트릴 수 있었다.’
‘...알긴 아네. 나도 존나 잘 싸웠지.’
‘고맙다.’
베르무트는 웃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그때는, 평소의 베르무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죽지 않고, 나와 함께 와주어서... 고맙다.’
“안다고.”
유진은 쓰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알아서 더 모르겠어.”
[...어쩌면 베르무트는 아직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진짜 죽여버릴 거다.”
[북쪽으로 가자, 하멜.]
기껏 감상에 취해 있는데. 이 새끼는 또 뭐라는 거냐.
[300년 전에 이루지 못한 사명. 환생한 너라면 이룰 수 있을 거다. 6년 전의 너는 부족하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와 함께 북쪽으로 가자. 베르무트도,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북쪽의 마경을 너와 내가 함께 정복...]
“개소리하지 말고 들어가 있어.”
[하멜. 네 바람도 그러할 텐데?]
“아직은 안 돼.”
유진은 그렇게 내뱉으며 망토를 열었다.
“언젠가는 가겠지만, 그건 내가 결정해.”
[...]
“그러니 날 휘두르려고 하지 마.”
[...후후. 그것도 좋지. 하멜.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네 여정의 순풍이 될 것이며, 때로는 폭풍이 되어 널 수호하겠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지 말고, 마나 좀 덜 처먹으면 안 되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령왕을 현현시키려면 그만한 마나가 필요...]
“알았으니까 들어가 있어.”
위니드를 망토 안에 넣으니, 더 이상 템페스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포션을 부은 손에 붕대를 감았다. 아성으로 돌아가려면 까마득한 절벽을 다시 올라야 했지만, 그건 유진에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절벽을 올라서 아성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시엘을 마주쳤다.
“너 손 뭐야!”
시엘은 놀란 표정으로 외치며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붕대에 감긴 유진의 손을 빼앗더니, 조심스레 손등을 어루만졌다.
“싸웠어?”
“누구랑?”
“...아버님이랑?”
“내가 미쳤니?”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시엘은 유진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붕대에 번진 피를 힐긋거리며 보았다.
“그럼 원로원주님이랑 싸운 거야?”
“꼭 싸워야 손에 피가 나냐?”
“...왜 피가 나는 건데?”
“그냥 어쩌다 보니까.”
주먹을 너무 꽉 쥐어서. 화풀이로 나무를 후려 갈겨서. 그래서 피가 나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말꼬리를 흐리자 시엘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의 붕대를 풀었다. 포션 덕에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고, 벌써부터 아물어가고 있었다. 유진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는 상처였다.
하지만 시엘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손에 남은 상처를 보고서, 어쩌다 이런 상처가 생긴 것인지를 짐작했다. 손바닥에 깊이 박힌 손톱자국. 까진 주먹.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던 거야?”
“꼭 대답해야 되냐?”
“네가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거지. 너 내가 졸라도 말하기 싫은 건 절대로 말 안 할 거잖아.”
유진은 대답 대신에 웃었다. 시엘은 그런 유진을 얄밉다는 듯이 흘겨보며, 품안에서 자그마한 약통을 꺼냈다.
“내버려 둬. 내일이면 말끔히 나을 테니까.”
“그야 그렇겠지. 넌 옛날부터 이상하리만큼 회복력이 좋았으니까. 그거 알아? 나랑 오빠는, 네가 트롤의 혼혈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하던 때가 있어.”
“나야 그렇다 치고. 우리 아버지한테 너무한 것 아니냐?”
유진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멀쩡한 인간이었다. 유진이 걸음마를 채 때기 전에 돌아가신 터라 추억이랄 것도 없지만, 절대로 트롤은 아니었다.
“뭐 어린 나이였으니까, 말도 안 되는 생각 한 둘쯤은 할 수 있는 거지.”
시엘은 연고를 손끝에 듬뿍 발라, 유진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 해줄 거야?”
“말하기도 싫고, 내가 함부로 말할 내용도 아니야.”
“그럼 어쩔 수 없네.”
영묘에 관한 이야기는 비밀스런 것이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건, 시엘에게는 들을 자격이 없었다. 유진은 연고가 치덕치덕 발린 손을 빼냈다.
“밤도 깊었는데, 넌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냐?”
“산책.”
“그럼 하던 산책 마저 해. 난 들어가서 잘 테니까.”
시엘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당연히, 산책은 핑계였다. 크리스티나가 유진을 데리고 나갔다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성내를 떠돌던 것 뿐이다.
평소라면 끈질기게 캐물으며 달라붙을 텐데. 시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유진이 평소보다 날이 바짝 서있다는 것을 느꼈다.
“잘 자.”
그래서. 시엘은 방긋 웃으며 유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유진은 그 배려 아닌 배려에게 픽 웃으며 시엘을 지나쳤다.
“너 어디 갔다 오냐?”
곯아떨어졌던 시안이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꼴을 보니, 유진이 주었던 책대로 수련하고 있던 모양이다. 평소라면 그런 시안에게 흐뭇한 마음으로 훈수라도 주었을 텐데. 유진은 시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지나쳤다.
“...이 새끼 왜 이래?”
시안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시엘과 마찬가지로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그는 성으로 들어가는 유진의 등을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은 씻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흑암의 망토를 대충 던져둔 뒤, 침대에 앉아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직은 안 돼.’
북쪽의 마경. 헬무드. 템페스트는 그곳을 정복하길 바란다. 그를 바라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바람이 아무리 간절하든,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당장 유진은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아멜리아 머윈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존심이고 뭐고, 유진은 그것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헬무드에 기어들어가서 힘을 키우는 것도 불가능하지. 날 벼르는 새끼들이 한 둘이 아닐 테니까.’
발자크 루드베스가 경고했었다. 헬무드에는 마족이 너무 많은데다, 그곳을 지배하는 마왕은 유폐의 마왕 뿐만이 아니다. 멸망의 마왕. 놈을 숭배하는 마족들은 유폐의 마왕조차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할 것이다.
그 뿐인가? 마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고위마족들. 놈들에게 있어서 라이언하트의 새끼 사자는 매력적인 사냥감일 것이다.
어지간한 위험에서는 한 몸 지킬 자신이 있다. 하지만 헬무드에서 겪게 될 위험은 어지간함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을 것이다. 300년 전에도 끔찍하던 곳이다.
‘하멜을.’
유진은 연고가 치덕치덕 발린 손을 들어올렸다.
‘나를 뛰어넘어야 해.’
300년은 긴 시간이다. 하멜이 죽어있는 동안, 헬무드의 마족들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나 혼자서는 안 돼.’
세냐.
유진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세계수의 나뭇잎을 꺼냈다.
*
아침.
유진은 망토를 몸에 둘렀다.
기분은 말끔했다. 꿈도 안 꿨고, 잠도 푹 잤다.
배는 고팠다.
“다 나았네.”
유진은 딱지도 남지 않은 손을 힐긋 보며 웃었다. 그는 뻗친 머리를 대충 누르고서 방을 나왔다.
“유진 도련님. 식사는...”
“필요 없어.”
시종이 따라붙는다. 유진은 멈추지 않고 복도를 걸었다.
“...아래층에 손님들이 와 계십니다.”
“알아.”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1층으로 내려가서, 닫혀있는 응접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푹 주무셨습니까?”
역시. 손님은 크리스티나였다. 길레이드와 도이네스도 안에 있었다. 유진은 그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크리스티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용사 따위 안 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계시로 내려 온 사명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찻잔을 들어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유진님이 의사와는 상관없이, 저는 성녀로서 유진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다른 건 없나?”
유진은 고개를 삐딱하니 기울이며 물었다.
“나는 인정 같은 것보다 물질적인 것이 좋아. 신성제국이 내게 뭘 줄 수 있지?”
“성검으로는 부족하십니까?”
“그건 어차피 라이언하트의 것이잖아.”
“엄밀히 말하자면 라이언하트에 보관중인, 신성제국의 물건이죠. 빛의 신이 유진님을 지목하였으니, 유진님은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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