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Ch5

 “네가 뭐?”


“저들이 이 별채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저는 다시 전사가 되어 공자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까?”


“자꾸 헛소리 하네.”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라만을 쳐다보았다.


“나 따라오고 싶다 그래서 데려왔잖아. 그거로 끝이지 뭐.”


“공자님은 제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셨습니다. 저는 전사로서 그 은혜를 갚고자...”


“지금 네 실력으로는 나한테 아무 도움도 안 돼. 그러니까, 은혜 갚으려면 여기서 일이나 열심히 해.”


라만은 그 말에 모멸감은 느끼지 않았다.


‘공자님의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라만은 집사 업무에 충실하면서, 전사로서의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고자 결의를 다졌다.


아카샤


니나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눈동자만 깜박였다.


제하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홀쭉 들어가 버린 배를 쓸면서, 몇 달 만에 재회한 아들을 쳐다봤다.


재회.


반가움에 눈물을 펑펑 흘리지는 않았다. 유진은 이제 성인이었고, 제하드는 더 이상 아들이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내 살다 살다... 엘프의 시중을 받는 날이 올 줄은...”


니나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하드와 다를 것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엘프를 교육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꼭 별채의 시종으로 삼아야 하나요?”


“얘들은 본가에서는 일하기 싫대.”


별채에는 이미 시종이 충분했다.


애당초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은 유진과 제하드 둘 뿐. 그마저도 유진이 본가를 떠난 시간이 대부분이라, 사실상 별채는 제하드 혼자서 사용하고 있었다.


가르쳐야 할 것도 산더미고, 대체 언제쯤부터 실무에 투입될 지도 의문이었지만... 뭐 어쩌겠나. 유진이 시종으로 들이겠다는데, 니나가 반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몇 달 만에 돌아온 직후에 말씀드리는 것도 눈치 보이지만...”


“또 어딜 가려고?”


제하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잠시 아롯에 다녀오려 합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미리 알려주고 가는 구나.”


“아버지. 설마 삐지신 겁니까?”


“삐지기는, 이 녀석아. 네가 마음대로 쏘다니는 것뿐인데, 내가 삐질 일이 무어가 있느냐?”


흑사자 성에서 언질 한 번 주지 않고 떠난 것도 서운한데, 그 위험하다는 사마르에 훌쩍 다녀왔다니.


“위험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닙니다. 아마 오래 걸리지 않아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크흠.”


“그렇게 돌아오고 나선, 당분간은 떠나는 일없이 얌전히 지낼 겁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네 친아비로서 아들을 걱정하는 것뿐이니.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이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것을 즐겁게 여기겠느냐.”


“없지는 않을 텐데요.”


“...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유진, 너는 네 아비가 자식의 위험과 불행을 즐길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에이, 그럴 리가요. 아버지가 절 너무 걱정하고, 사랑해 주신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아들인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제하드의 입가가 씰룩댔다.


“그러니까, 저도 아버지가 걱정하시고 슬퍼하실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겁니다.”


“...고마운 말이지만... 괜히 날 위한답시고 네 뜻을 억누르지는 말거라.”


제하드는 표정을 완전히 풀고서, 유진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흑사자성에서 성인식도 이미 치렀잖느냐. 너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고, 네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책임져야 할 어른이 되었다.”


그 후로는 제법 긴 훈화가 이어졌다. 유진은 굳이 제하드의 말을 끊지 않고, 도중에 꼬박꼬박 대답까지 해가면서 끝까지 들어주었다.


“설마 끝까지 들으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유진의 그러한 모습이 크리스티나에게는 의외로 느껴졌다. 그녀는 유진의 뒤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끝까지 안 들으면 뭐. 그만 지껄이시라고 쏘아붙이기라도 할 줄 알았냐?”


“그렇게까지는 아닙니다만, 말씨를 그것보다는 순화하시며 이야기를 끊지 않으실까 생각했습니다.”


“너는 나를 무슨 호로새끼로 생각하나 보다.”


“아닙니다. 단지, 제가 보아 왔던 유지님은... 저런 겉치레나 훈화를 겸허히 듣는 분이 아니셨기에.”


“제대로 봤네. 맞아. 나는 겉치레도 싫어하고, 날 가르치며 지도하려는 말도 싫어해. 하지만 그것도 상대에 따라 다르다고.”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친아버지가, 아들인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


“그럼 처음부터 여정에 대해 말씀드렸다면...”


“말하면? 이유를 알았으니 걱정도 하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잖아. 내 아버지는... 음... 굉장히 인간적인 분이셔. 내가 어릴 적에는 눈물을 흘리는 일도 많았...”


얼레리꼴레리.


세냐가 놀리던 말이 머릿속을 떠돈다.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전생의 하멜은 어지간해서는 울지 않았다. 죽을 만큼 아파도, 죽기 직전에도 울지 않았다.


‘이 몸으로는 왜 이리 많이 우나 했더니.’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가. 유진은 환생하고, 여러 번 눈물을 쏟았던 것을 제하드의 유전자 탓으로 돌려버렸다.


“...어쨌든. 날 위하시는 것을 아는데, 나도 아들로서 아버지 말씀은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말씀대로 살 수는 없겠지만, 말씀하실 때 예, 예하고 듣기는 해야 한다고.”


“...그렇습니까?”


특이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진이 가진 상식에서, 저것은 꽤 당연한 축에 속했다. 사실 세상 어느 아들내미가 부모님 말을 우직하게 따르겠나? 그래도 대답 정도는 하는 것이 도리인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그녀는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유진을 쳐다보며 입술을 닫았다.


“...내가 뭐 이상한 말 했냐?”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네 표정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유진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갓난아기일 적에 친부모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 후로는 수도원에서 자랐고, 열 살부터 로게시르 추기경께 거두어져, 양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저는 친부모자식의 관계라는 것을 겪어 본 적이 없습니다.”


꼭 겪어봐야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한 것은 아니라 생각은 했지만, 그를 직접 내뱉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즐겁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란 것은 있는 법이다.


-그런 이야기를 흔쾌히 나눌 수 있을 만큼, 저와 유진님의 사이는 아직 깊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뒤틀린 미소로 그었던 선. 유진은 그 선을 멋대로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아롯에는 언제쯤 출발하시려는 겁니까?”


“지금 당장.”


“...그런데 왜 방으로 오신 겁니까?”


“너랑 얘기하려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몇 달 만에 돌아 온 방. 그 전에는 몇 년 동안 떠나있던 방이다. 그래도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롯에는 나 혼자 간다.”


크리스티나는 뭐라 답하지 않고 유진을 응시했다. 유지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빛의 성녀로서, 용사인 유진님의 여정을 함께 해야...”


“누군가가 너와 내 정보를 흘렸어.”


“교황예하와 로게리스 추기경은 아닙니다. 그것도 말씀드렸잖습니까. 두 분은 저를 이런 일로 죽이고 싶지 않...”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어쩌면 둘과 연결 된 다른 놈이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고.”


“...그럴 수는 있겠지만, 무조건 신성제국을 의심하는 것에 저는 불쾌를 느낍니다. 라이언하트에서 정보가 흘려졌을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지. 나도 경계하고 있어. 그래서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볼 거다. 라이언하트가, 원로원주가 내 존재를 거슬려 해서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실패에 대한 액션을 취할 테니까.”


“...”


“개수작을 부린 것이 신성제국일 지도 모르고, 굳이 널 휘말리게 하고 싶지도 않아.”


크리스티나는 말없이 유진을 응시했다. 그녀는 경직 된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고서는, 몇 번인가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는 평소다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유진님.”


“뭐.”


“저를 의심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안 해.”


유진은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바랑은 나와 너, 둘 다 죽인다고 했다. 말만 그렇게 했을 뿐이고, 나만 죽이려 했을 지도 모르지.”


“...”


“하지만 굳이? 네가 이런 식으로 날 좆되게 만들려 할 이유가 있나? 뭐 이유야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방식이 너무 번거로워. 너는 나와 직접 영지에 갔었고, 그곳에 세냐님이 있다는 것을 봤어. 그 전에는 나와 쭉 같이 다녔고. 내가 며칠 동안 꼼짝도 못할 때도, 날 간호해 줬지.”


“...그래서 절 의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왜. 해줄까? 내가 믿는다는 말이 그렇게 안 믿겨?”


“...아닙니다.”


크리스티나는 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지, 조금 신기하게 느껴져서.”


“별게 다 신기하대. 어쨌든, 아롯에는 나 혼자 갈 거야.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려도 같이 안 간다.”


“...그럼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곳에 남아, 유진님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유진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크리스티나를 가까이서 보았다.


“나는 신성제국의 사정을 몰라. 파고들기도 힘들고. 하지만 넌 나보다는 편하겠지.”


“...후훗.”


크리스티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과연. 유진님은 정말로 저를 믿으시는 군요.”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을 만큼, 크리스티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는 유진이 선을 긋는 것을 이해했다. 그 선을 넘지 않고서는, 서로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확실하게 선택하라는 말이다. 신성제국에 속해 있는 성녀로 남을지. 신의 계시에 따라, 용사와 함께 할지.


“유진님이 기대하시는 만큼의 성과는 얻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아.”


“그렇다면, 적은 기대만큼은 충족시켜드릴 수 있도록 해야겠군요.”


테이블 한쪽에 마련 된 종이와 펜이 크리스티나 쪽으로 움직였다.


“...로한나 셀리스? 이건 누구야?”


“제가 수도원에서 지낼 적에 사귀었던 친구입니다.”


유진은 종이에 적힌 이름과, 아래의 주소지를 확인했다.


“저는 도중부터 로게리스 추기경께 거두어졌고, 로한나는 수도원에 남았지요. 그 후로도 편지는 쭉 주고받으면서, 여러 번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믿을 수 있다는 거지?”


“네. 연락은 제 쪽에서, 늦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 안 오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아롯.


이 마도왕국의 풍경은, 유진에게 있어서는 태어나고 자란 기돌보다도 친숙하고 반갑게 느껴졌다.


‘그야 뭐. 본가의 양자가 된 후로 기돌에 돌아간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유진의 고향인 기돌은 키옐에서도 시골 중의 시골이다. 들판과 산, 논밭. 그런 것들밖에 없다. 도시는 있지만, 까놓고 말해서 사마르의 초라한 무역도시와 비견될 만큼 낙후된 도시다.


“관광객이십니까? 아롯의 수도, 펜타곤에 오신 것을 환영합...”


3년 전, 펜타곤에 처음 왔을 때처럼 가이드들이 다가왔다.


곧 가이드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유진의 잿빛 머리카락과, 몸에 두른 털이 풍성한 망토를 알아 본 것이다. 알아보지 못 할 리가 없었다. 유진이 아롯을 떠난 것은 불과 몇 개월 전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아롯에서 가이드 일을 하려면 도시의 온갖 이야기를 숙지해야 한다. 관광객의 귀를 즐겁게 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유진에 관한 이야기는 시시콜콜하다는 범주에는 절대로 들지 않는, 굵직한 이야기였다.


대영웅의 후손. 그 명문 라이언하트 본가에 전례가 없는 양자. 적통이 아니면서도 가주 자리를 위협하기 부족함 없는 실력. 13살부터 무예에 대한 자질은 본가의 적자들을 오시했고, 심지어 무예 뿐만 아니라 마법에 대한 자질마저 타고난 ‘천재.’


왕립도서관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최연소로 획득하고, 그 적색마탑주 로베리안 서피스의 제자가 된 풍운아. 소문에 따르면 19살 적에 이미 5서클에 도달했단다.


그것만해도 관광객들이 관심을 갖기 충분한 이야기들이다. 거기에 약간의 양념을 쳐서, 볼레로 거리에서의 난동까지 들려주면 관광객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 팁을 쥐어준다.


“유진님! 제, 제가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춤했던 가이드들이 달려든다. 당연히, 그들은 유명한 유진을 모실 수 있는 영광만을 바라지는 않았다. 단지 이후 가이드 일을 하며, 관광객에게 들려줄 수 있는 유니크한 이야기를 바랄 뿐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펜타곤에 처음 왔을 적에 붙었던 가이드가 최근 수도에 건물을 하나 구매했다지?’


그 성공신화가 가이드들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이 새끼들 왜 이래?’


알아서 접근을 삼가주길 바랐는데. 오히려 더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것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유진은 기겁하면서 그 자리에서 도약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유진님! 제, 제 마차를 타십시오!”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공중마차의 마부들도 꽥꽥 고함을 질렀다.


“유진님...! 펜타곤의 상공에서 허가 없이 부유마법을 쓰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동은 공중마차와 부유역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건 유진도 잘 알았다. 이 마도왕국에는 마법사가 너무 많았고, 그 많은 마법사들이 자기 편의를 위해 마법을 남발했다간 도시의 질서가 개판이 되어 버린다. 때문에 수도 펜타곤에서는 부유마법과 블링크 따위의 개인공간도약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한 편의가 허락된 것은 마탑주를 비롯해, 아롯의 최고위 마법사들뿐이다.


“까짓 거 벌금 내지 뭐.”


유진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막대한 벌금을 내게 될 지라도, 유진은 돈이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벌금이 부여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당장 유진의 스승이 적색 마탑주인 로베리안이고, 그 외에도 유진은 아롯의 최고위 마법사들 여럿과 친분이 깊었다.


‘정 내기 싫으면 호네인 왕세자한테 봐 달라고 하던가. ...아니. 왕세자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망신스럽지. 궁정마법사단장 이름 좀 팔면 될 것 같은데?’


사실.


이런 하찮은 생각들에 매달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지금 유진이 하려는 일은, 수도 상공을 날아다니는 것 따위와 비교되지 않을 커다란 사건이 될 테니까.


아롯에 오는 것에 대해, 로베리안에게 미리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게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진은, 로베리안이 과연 허락하고 지지해 줄 것인지. 아니면 ‘아롯’에 소속된 적색마탑의 주인으로서, 유진의 행동을 유보시킬 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아마 허락은 해줄 것 같은데.’


로베리안은 진심으로 세냐를 대스승으로 섬기고 있다.


‘괜히 허락부터 구하고 해버렸다간, 나중에 로베리안이 난감해질 거야.’


그래서.


일단 저질러보기로 했다.


유진은 하늘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서는 호수에 떠있는 아롯의 왕성, 아브람이 보인다.


바로 아래엔 왕립도서관 아크리온이 있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아롯의 보물이자, 아크리온에 보관 중인 마법지팡이.


드래곤하트를 통째로 사용한, 현명한 세냐가 직접 사용한 마법지팡이.


아카샤를 갖기 위해.


아카샤


아크리온에는 많은 사역마들이 있다. 그 사역마들은 제대로 된 대화도 불가능하다. 입력된 대로 전당을 관리하고, 전당을 방문한 마법사들의 간단한 명령 정도만을 수행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메르는 다르다. 그녀는 마법으로 만들어졌으면서도, 진짜 인간이라 생각될 만큼 정교한 사역마다.


메르 본인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굉장히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메르는 다른 사역마와 똑같이 지내는 것이 싫었다.


무언가를 먹고 마실 필요가 없는 몸이지만. 진짜 인간처럼 먹고, 마셔보고 싶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감정을 느끼고, 표출하고 싶다.


이 왕립도서관 아크리온은 메르에게 있어서 지루한 감옥과 똑같다. 메르는 절대로 아크리온의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장장 수백 년을 멍하니 존재하고 있다가...


그마저도 싫을 때. 기계장치의 전원을 끄듯이, 위치크래프트의 링크를 꺼버려 의식을 정지시켜 버린다. 사역마인 메르는 잠에 들 수도, 잠을 잘 필요도 없지만. 의식을 정지시키는 것은 잠과 비슷하긴 했다.


비슷할 뿐, 잠이 아니다. 꿈을 꿀 수 없다. 결국 지루함을 환기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지루해.’


메르는 책상에 엎드려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곳이 지루한 곳이라는 것은 이미 백 년도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지만, 최근 몇 달은 메르에게 있어서 특히나 지루하고 괴로웠다.


‘전부 다 유진님 때문이야.’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세냐의 전당을 드나들었던 것은 고작해야 2년쯤. 메르가 존재해 온 시간에 비하자면 터무니없을 만큼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아주 오래 전, 그녀의 창조주인 세냐와 둘이서 지내던 시간을 떠올릴 만큼이나 즐거웠다. 유진 전에도 세냐의 전당을 드나들던 마법사는 여럿 있었지만, 고리타분하고 유머감각이 말살 된 늙은 마법사들과의 대화가 즐겁다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곳에 드나드는 마법사들 대부분은, 생애 대부분을 천재 소리를 들으며 제 자신이 천재라는 ‘착각’에 빠진 머저리들이다. 즉, 같잖은 자만과 자애에 찌들어 있단 말이다.


그런 마법사들은 사역마인 메르를 존중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사역마란 귀찮은 잡일을 대신 해 주는 노예로 여긴다. 인간이나 아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대륙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마법사가 사역마를 노예로 부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유진은 달랐다.


그는 메르와의 대화를 귀찮아하지 않았고, 메르가 사역마라고 해서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배움을 탐닉했다.


거들먹거리는 마법사들 대부분은 위치크래프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절망해 도망치듯 세냐의 전당을 떠나곤 했다. 하지만 유진은 2년 동안 매일 세냐의 전당을 찾아 와서 위치크래프트를 이해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체득하려 했다.


“심심해 죽겠네.”


메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책상을 두드렸다.


“오는 마법사는 아무도 없고.”


유진이 떠난 지 고작 몇 달 밖에 지나지 않았다. 메르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체감으론 못해도 일 년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겨우 몇 달?


‘...아니. 인간에게는 몇 달도 꽤 긴 시간이잖아. 그 정도 지났으면, 심심해서라도 한 번은 놀러올 만도...’


찌릿.


노곤한 의식이 깨워졌다. 메르는 고개를 들고서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곧 메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옆에 두었던 커다란 모자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내리누르고, 그 위에 모자를 눌러썼다. 창가에 비친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메르는 다시 모자를 벗고서, 양손으로 빠르게 머리를 헤집었다.


단정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만 같은 모습으로 마중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평범하게. 언제나 그런 것처럼. 메르는 그를 의식하며, 총총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말을 하지?’


왜 돌아오셨나요? 역시, 깨달아 버리신 건가요? 유진님의 마법논문, 꽤 훌륭하기는 했지만 완벽하진 않았어요. 네, 그야 당연하죠. 유진님은 마법에 입문한지 고작 2년 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서둘러 떠나서는 안 된다니까요? 마법은 마음에 여유를 갖고서 수행해야 해요. 뭐, 유진님이 남의 조언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 처먹는다는 것은, 동화책에서도 수십 번이나 나왔었지만! 전생을 그렇게 사셨으면, 환생한 지금은 다르게 사셔야죠.


‘너무 길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 고작 몇 초. 메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 양손은 허리에 얹었다.


“세냐의 전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메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뱉고서 아차 싶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높게 나왔다. 목소리 뿐만이 아니라 미소도 너무 과했던 것 같다. 메르는 즉시 표정을 가다듬고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라? 유진님이시네요? 몇 달 전에 아롯을 떠나셨는데, 무슨 일로 돌아오신 거예요?”


이것도 내뱉고서 아차 싶었다. 메르는 아크리온의 관리시스템과도 연동되어 있다. 어느 마법사가 아크리온에 출입증을 제시하고 들어왔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단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유진도 알고 있을 터. 내려보던 유진이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오늘 아침부터 아크리온의 관리시스템이 점검 중이거든요. 유진님도 알다시피, 마법이란 굉장히 섬세한 것이라 주기적으로 점검을 해 줘야 해요. 특히 이곳, 아크리온에는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들마저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들 보물들이 많잖아요?”


“어. 그래?”


“네! 세냐님이 펼치신 마법은, 수백 년이 지나도 점검이 필요가 없을 만큼 완벽하지만! 아크리온의 관리시스템은 세냐님이 만든 것이 아니니까요! 이거 참, 곤란하다니까요? 드나드는 마법사가 적어서 망정이지...”


완벽하게 수습했다. 메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유진님.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역시, 배움이 부족하다 깨달으신 건가요?”


“음.”


유진은 메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세냐의 어린 모습. 초상화와는 다르게 장난기가 가득 담긴 미소. 유진은 피식 웃으며 메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와... 만나자마자 가볍게 선을 넘으시네요.”


뿌리쳐야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바로 뿌리치지는 않았다. 메르는 방긋 웃으며 유진을 올려다 보았다.


“잘 지냈어?”


“흐흥. 제가 잘 지내고 말 것이 뭐가 있나요? 언제나 똑같았죠.”


“잘 지내지 않았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니거든요.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냥 평소랑 똑같았다니까요? 어지간해서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조용한 평온 속에서... 음... 사색에 잠기고, 청소도 좀 하고, 책장에 꽂힌 마도서의 배치를 바꾸고...”


메르는 호들갑을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단조로운 어조로 말을 이으면서, 메르는 아직 머리 위에 얹어진 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흠흠. 일단은요, 더 서있지 마시고 들어오세요. 여기, 익숙하시잖아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유진님이 항상 앉던 자리는 그대로 남아있어요. 물론, 유진님 전용 방석도 남아있고요.”


“자리에 앉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네?”


유진은 웃으며 말했지만, 메르는 웃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왜요?”


메르의 얼굴이 콱하고 구겨졌다.


“설마. 짧은 인사만 하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마법을 더 수행하러 오신게 아니라요?”


“마법수행은 뭐,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지.”


“건방진!”


메르는 뾰족한 목소리로 외치며 유진의 손목을 꼬집었다.


“유진님의 그 발언! 저는 용납할 수가 없어요.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다고요? 이 아크리온에 들어오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는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솔직히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잖아.”


“그건... 그건! 그렇지만요! 어쨌든 말이에요! 유진님이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서 수행하는 것보다는 아크리온에서 수행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낫다고요.”


“뭐 그럴 수도 있고.”


“진짜... 진짜 얄밉다.”


메르는 어깨를 파르르 떨면서, 꼬집은 살갗을 비틀어주었다.


“네, 유진님은 잘났으니까요. 그래서 뭐에요? 여긴 왜 오신 건데요. 인사하려고? 전 유진님 인사 안 받아 줄 거예요. 이유는 없어요, 굳이 말하라면 그냥이에요, 그냥. 뭐에요? 어? 뭐하시는 거예요? 왜 안으로 들어가세요?”


유진은 아직도 손목을 꼬집고 있는 메르의 손을 떨쳐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메르는 다다다 말을 내뱉으면서 유진의 뒤를 따라갔다.


“자리에 앉을 필요 없다면서요? 그런데 왜 들어오시냐고요! 거 봐, 결국 앉으려고 가시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왜 아닌 척 해?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안 앉아.”


“그럼 뭐하려는...”


메르의 말이 멈췄다. 그녀는 눈썹을 확 구기고서, 유진의 손을 놓았다.


“...트렘펠 위자도르가 왔어요.”


“뭐?”


“그새 까먹으셨어요? 아롯의 궁정마법사단장. 안 어울리는 꼬부랑 수염을 기르고 다니는 아저씨 있잖아요.”


“아니, 누구인지는 아는데. 왔는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기는...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 앗.”


메르는 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관리시스템의 점검이 끝난 모양이에요.”


“타이밍 오지네.”


“...세상 일이라는 것이 가끔은 그렇잖아요. 음... 뭐야? 트렘펠 위자도르가 이 전당으로 올라오고 있는데요. 유진님 때문인가요?”


“아마 그럴 걸.”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왔다. 하긴 뭐, 비행 금지 구역에서 날아다녔으니... 수도의 치안을 일차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경비대지만, 결국 그 경비대의 최고 윗선은 궁정마법사단이다.


“유진 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트렘펠은 양 팔을 활짝 벌리고서 문을 걸어나왔다.


“아롯에 올 거라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면 좋았을 것을!”


솔직히 짜증이 좀 났다. 법을 어기고 수도의 하늘을 날아다닌 것도. 고작 그따위 일에 궁정마법사단장인 자신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흔해빠진 마법사라면, 그냥 법대로 처리하면 된다.


흔해빠진 마법사가 아니지 않은가. 트렘펠은 유진에게 많은 욕심을 갖고 있었고, 어떻게든 구슬려 궁정마법사단에 들이고 싶었다. 허가 없는 비행? 그딴 것쯤 얼마든지 묵인해 줄 수 있다. 정 바란다면 앞으로의 자유비행권을 보장해 줄 생각도 있었다.


“저를 문책하러 오신 것 아닙니까?”


“으응? 응... 하하! 난 또 뭐라고. 수도 하늘에서 비행한 것은 뭐, 보통의 마법사에게는 문제삼아야 할 일이지만... 유진 공은 괜찮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하하! 너무 신경쓰지 말게나. 그, 유진 공은 아직 어리잖은가? 나이가 나이다 보니, 하하! 가벼운 비행쯤은 저질러도 괜찮고, 저지를 수도 있는 걸세. 그러니까, 유진 공은 비행소년이로군?”


트렘펠은 호탕하게 웃으며 회심의 개그를 날렸다.


메르는 참지 못하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움찔 몸을 떨면서 고개를 돌려, 트렘펠의 얼굴을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꼬부랑 수염... 보이는 것보다 나이는 훨씬 많겠지만, 적절하게 주름이 배치 된 중년의 얼굴.


‘미친 거 아냐?’


비행소녀라고 말했을 때. 시엘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내뱉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래, 이런 기분이로군. 유진은 그때 내뱉었던 말에 지금 와서 후회를 느꼈다.


“...예, 그렇군요.”


유진은 의례적으로 답해주고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트렘펠은 저 건조한 반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궁정마법사단장. 그 자리는 아롯에서 전투 마법사가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위직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마탑주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단 말이다. 그런 자신이 친히 찾아와서, 친애의 의미로 농담까지 건넸는데...


‘궁정마법사들은 내가 입만 열면 달아난 배꼽을 찾는다며 웃어대는데 말이야.’


“...으흠... 헌데 유진 공. 아크리온에는 무슨 일로 온 건가?”


“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볼 일이라 함은? 아, 아아. 유진 공이 아롯에 있을 적에, 위치크래프트에 흠뻑 빠져 지낸 것은 유명한 일이지... 하하! 역시 유진 공도 천성이 마법사로군. 저 위대한 마법이 계속 눈에 아른거려 참지 못한 게지?”


트렘펠은 이해한다는 듯이 웃으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런 것이라면, 아예 아롯에서 사는 것이 어떤가? 아, 아아. 나도 유진 공의 이야기는 들었네. 사마르에서 백 명이 넘는 엘프들을 데리고 왔다지? 라이언하트 본가의 숲이 넓고 아름답다고는 들었네만, 그곳은 엄밀히 말해 유진 공의 영지는 아니잖나.”


“예, 뭐.”


“유진 공도 성인이기도 하고... 언제까지 본가에서만 지내기도 여러 눈치가 보일 텐데. 유진 공이 바란다면, 내 친히 수도의 호화로운 저택을 알아 봐 주지. 유진 공이 거둔 엘프들은 왕궁의 사유지인 숲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어... 지금 뭐하는 건가?”


트렘펠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전당 중앙에 떠있는 위치크래트의 뒤편, 벽에 걸려있는 아카샤의 앞에 서있었다.


“...으하하! 그렇구만! 유진 공은 아직 지팡이를 가지고 있지 않지? 내가 처음 아크리온의, 세냐님의 전당에 왔을 적이 생각나는 군. 저... 위대하고, 아름다운 지팡이를 처음 봤을 때. 나도 유진 공처럼 매료되어 버렸지... 그간 쓰던 지팡이가 도저히 눈에 차지 않아서, 요정목을 쓴 지팡이를 구하려 얼마나 고생했는지...”


나이답게 귀여운 구석도 있군. 트렘펠은 흐뭇히 웃으면서 유진에게 다가갔다.


“구하기도 힘들고, 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네만. 유진 공이 궁정마법사단에 들어온다면...”


유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아카샤에게 손을 뻗었다. 트렘펠은 그것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이 전당에서 아카샤를 직접 쥐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다. 쥐어 본 들 의미도 없다. 아카샤는 현명한 세냐 외의 누구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진님?”


메르는 트렘펠과는 달리, 유진의 바로 곁에 있었다. 그녀는 유진의 얼굴에 번진 미소에서 뭔가를 느꼈다.


“...지금 뭐하시려는 거예요?”


“뭐기는. 보면 알잖아.”


유진은 킥킥 웃으며 아카샤에 손을 뻗었다.


“저번처럼, 그냥 잡아보는 거야.”


“...잠깐만요.”


메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나가 움직인다. 단순히 마나를 불어넣는 것이라면 몰라도, 마나가 술식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트렘펠의 미소가 소멸했다. 아크리온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것은, 수도 상공을 날아다니는 것따위와는 비교될 수 없는 강력한 금기다.


아크리온에 보관중인 것은 아롯의, 아니, 마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위대한 마법들이다. 그렇기에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


그 누구도. 아크리온에서는 마법을 사용해선 안 된다. 궁정마법사단장도, 마탑주도, 심지어 아롯의 왕족도.


“유진 공!”


트렘펠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금기가 눈앞에서 침범되고 있다. 메르는 급히 손을 뻗어, 유진의 옷깃을 붙잡았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유진님도 아시잖아요! 아크리온에서 마법을 쓰는 것은...”


“알지.”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카샤를 가까이 당겼다.


“하지만, 쓰지 않고서는 가져갈 수 없는 걸 어떡해?”


메르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ㅡ파아앗!


아카샤의 끝에 장식 된 드래곤하트가 빛을 터트렸다.


아카샤


유진을 중심으로 요동치던 마나가 아카샤에 집중된다. 가시화 되지 않았던 마나가, 드래곤하트에서 터져 나온 빛과 어우러져 다양한 색의 빛이 되었다.


그 아름답고 찬란한 빛이 유진을 휘감는다. 트렘페과 메르는 눈앞의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둘은 지금 무엇이 일어나려는지 알았다.


아카샤.


현명한 세냐 이후로, 그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었던 지팡이가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이고 있다.


“...말도 안 돼...!”


트렘펠은 믿을 수가 없어 내뱉고 말았다.


아카샤가 아크리온에 보관되고 200년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아크리온에 출입하던 여러 마법사들은 아카샤의 새로운 주인이 되고자 많은 시도를 해왔었다.


트렘펠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카샤는 그 어떤 마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법을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마법을 쓸 수 없는 마법지팡이. 정 쓰고 싶거든 둔기로는 쓸 수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빛이 잦아든다. 유진은 주변의 경악을 무시하고, 아카샤에 의식을 집중했다.


“...허어.”


유진은 감정대로 솔직하게, 일단 감탄부터 토했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생각했다.


‘이건 아카샤의 기능인가?’


이게 정확한 표현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거대한 정보가 의식에 스며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스며 든 정보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했다는 냥 기존의 정보들에 더해진다.


‘마법에 대한 이해가 변하고 있어.’


유진이 쓸 수 있는 마법은 여럿 있다. 백염식이 5성의 경지에 올랐고, 유진은 5서클까지의 마법은 영창 없이 즉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유진이 이터널 홀과 접목시켜 만들어낸 환염식의 능력이다. 이터널 홀은 스크롤이 아니라, ‘의식’에 마법 술식을 기록한다.


적새마탑에 지내면서 익혔던 기초마법들. 아크리온의 각 전당에서 익힌 마법들.


그 중 가장 많은 용량을 차지하는 것이, 세냐의 전당에서 익힌 마법들이다. 거기에 환염식을 완성한 뒤부터는, 로베리안의 도움을 받아 기존의 서클 마법을 환염식에 알맞게 변형해 다시 익혔다.


‘...신기하네.’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아카샤를 응시했다.


아카샤가 환염식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원리만 따졌을 때, 환염식은 이터널 홀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똑같지는 않다. 서클과 코어는 결국 전혀 다른 기관이다.


‘내 의식에 연동되어 보조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환염식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아카샤는 유진의 의식 속에 남은 여러 마법들을 환염식에 알맞게 변형해 주었다. 그것은 로베리안이 변형해 준 마법들을 기초로 삼고 있다.


즉, 아카샤가 유진의 마법과 술식의 패턴을 알아서 분석하고, 기존의 마법 술식은 유진에게 알맞은 최적의 술식으로 변형하고 있는 것이다.


“흐으음...”


유진은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다가, 대뜸 걸음을 옮겨 책장에 다가갔다. 메르는 멍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뒤를 따라갔지만, 트렘펠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카샤는 아롯의 보물이다. 그 아카샤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했다. 그렇다는 건... 더 이상 아크리온에 아카샤를 보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유진 공...?”


“예.”


유진은 책장에서 마도서를 꺼내면서 부름에 답해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그 아카샤...”


“보시다시피, 제가 새로 주인이 된 겁니다.”


“...어떻게?”


“트렘펠님에게만 납득시킬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유진은 근처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으려는데, 메르가 급히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메르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자로저었다. 그리곤 자그마한 발로 유진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


“그래, 그래.”


유진은 피식 웃으며 의자를 다시 집어넣었다. 오른쪽 창가. 유진이 세냐의 전당에서 항상 이용하던 자리다. 이 자리를 애용했던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위치크래프트와 가깝다. 창밖의 풍경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다. 위치크래프트 뒤편에 걸린 세냐의 초상화도 그대로 보인다.


...마지막은 유진이 고른 이유가 아니었다. 언제나 유진의 맞은편에 앉던 메르가 고른 이유다. 그녀는 유진이 마도서에 집중하고 있을 때면, 창밖이나 세냐의 초상화를 보곤 했다.


“...흐흥.”


유진이 항상 앉던 자리에 앉은 것이 메르를 방긋방긋 웃었다.


“...날 납득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트렘펠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방금 유진이 한 말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어마어마한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저는 트렘펠님을 마법사로서 존경하고 있는데, 어찌 그런 뜻으로 말했겠습니까?”


유진은 마도서를 펼치며 말했다.


“트렘펠님. 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압니다. 그것을 납득시켜드리지 못 한다면 제가 얼마나 곤란해 질 지도 압니다.”


“...잘 알고 있군, 유진 공. 나는 지금 자네를 연행할 수도 있어. 자네가 그를 바라지 않을 지라도 말이야.”


“연행이라뇨. 수도 상공을 날아다닌 죄로 말입니까?”


“그따위 것은 지금 문제로 여길 수도 없네. 자네가 멋대로 아카샤를...”


“아카샤가 아롯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유진은 웃으며 물었다.


“아크리온에서 보관 중이기는 했지만, 아카샤의 주인은 현명한 세냐님입니다.”


“...”


“저는 현명한 세냐님으로부터 아카샤의 소유권을 양도받았습니다.”


“뭣...?!”


트렘펠은 두 눈을 부릅 떴다. 그는 무언가를 더 묻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유진이 말한 대로였다. 아카샤의 주인은 오직 현명한 세냐 뿐. 아니, 아카샤 뿐만이 아니다. 이 전당에 보관 중인 모든 것이 세냐의 것이다.


“이 문제를 납득시키려면... 아마 청문회라도 열려야 하겠죠. 저는 당분간 아롯에 머무를 터이니, 청문회가 열린다면 출석해서 사정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도망치려는 것은 아니겠지?”


트렘펠은 유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그 말에 유진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저는 라이언하트 본가의 일원이고, 현명한 세냐님의 제자입니다. 그런 제가 무엇이 두려워 도망칩니까? 그리고 저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맡겨뒀던 물건을, 정당한 주인이 되찾은 것이 죄입니까?”


“...끄응...”


트렘펠은 그 정론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몇 걸음 물러서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지만... 아카샤의 주인을 감히 이 자리에서 심문하는 것도 세냐님에 대한 모욕이겠지...”


트렘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유진에게 호의를 베풀고, 궁정마법사단으로 꼬드기겠단 생각에 부랴부랴 왔건만.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하고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


‘청문회... 청문회라... 꼭 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건이 주인에게 되돌아 간 것 뿐인데...’


생각만 그리 할 뿐. 트렘펠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샤를 단순히 물건으로만 취급할 수는 없다...


200년 전의 은거 이후, 현명한 세냐의 이름은 아롯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대륙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세냐의 전설에 매료되어 아롯에 오고, 그녀의 이름을 딴 메르데인 광장과 세냐의 저택에는 매일매일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


아캬샤는 어떤 의미에선 위치크래프트 이상으로 세냐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트렘펠은 그 아카샤가, 아크리온과 아롯을 떠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한숨을 푹푹 내쉬던 트렘펠이 엘리베이터를 내려간 뒤. 메르는 후다닥 유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진님이 어떻게 아카샤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거죠? 아카샤는 세냐님 외에는 누구도 사용할 수 없게끔 봉인이 되어 있는데...!”


“그렇지.”


유진은 덮어두었던 마도서를 펼쳤다. 이해하기 난해한 문장들. 하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읽는 대로 곧장 머리가 이해하고 있다.


“저기, 유진님. 제대로 대답부터 해주시죠?”


메르가 책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세냐님을 찾으신 건가요? 그런 거죠? 아카샤의 봉인은 세냐님 외의 그 어떤 마법사도 풀 수가 없어요. 세냐님은... 살아계셨던 거죠?”


“너무 서두르지 마.”


“서두르지 말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유진님은 언제든지 이곳을 나가실 수 있지만, 저는 그럴 수 없단 말이에요!”


“아.”


유진은 짧막한 소리를 내뱉으며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거 봐요! 대답하기 곤란하고 귀찮으니까 도망치려고 하잖아! 이, 이익! 저는 유진님을 붙잡을 수도 없다고요! 그렇게 도망쳐서, 또 언제 올 줄 알고...”


“잊고 있었네.”


“잊기는 뭘 잊었다는 거예요!”


메르는 빽빽 쏘아붙이며 유진의 뒤를 따라왔다. 그냥 따라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양 손을 붕붕 휘둘러대며 유진의 등을 때렸다. 그 솜방망이 같은 주먹질은 조금도 아프지가 않았다.


“유진님은 언제나 그런 식이에요! 자기 마음대로 굴고, 남 속은 박박 긁고! 동화책의 내용이 전부 다 맞아요. 유진님은 쓰레기에, 개새끼라고요!”


“미안한데 동화책에 그렇게 적힌 건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니라 우둔한 하멜이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유진님이 그 하멜이잖아요!”


“그것도 그래.”


“저 놀리고 있는 거죠? 이, 이 개새끼야! 세냐님이 어디에 계시고, 어떻게 되었는지 말하란 말이야!”


“거참 서두르지 말라니까.”


“왜 자꾸 서두르지 말래! 나는 서둘러야 한다니까요!”


“좀 기다려 봐.”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홱 몸을 돌렸다. 유진은 메르의 허리를 잡아 들고서,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꺄악!”


메르는 공중에 떠서 두발을 휘저었다. 유진은 메르를 오르락 내리락 흔들면서, 가까운 책상의 위에 올려놓았다.


“이... 이이... 이 나쁜...!”


메르의 어휘는 세냐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세냐는 개새끼부터 해서 온갖 욕설에 통달하지만, 메르의 욕은 세냐만큼 험악하지는 않았다. 그야, 메르는 세냐 본인이 아니라 그녀의 어린 시절을 투영해 만들어진 사역마기 때문이다.


“잠깐 그러고 있어. 나 집중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고.”


유진은 빙긋 웃으며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위치크래프트에 다가갔다. 메르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유진을 지켜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고, 지금 유진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은 왼손에 아카샤를 들고, 오른손은 위치크래프트로 뻗었다. 그러자 위치크래프트가 움직인다. 수십, 수백 번을 해왔던 것. 유진은 눈을 감고서 위치크래프에 접속했다.


이터널 홀.


그 서클 마법의 궁극점은, 이미 수백 번을 보았는데도 경이로웠다. 유진은 잠시 동안 이터널 홀을 응시했다. 무한한 서클의 움직임. 그것은 이미 이해하고 있다. 이해했기에 환염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카샤가 의식을 보조하고 있다. 그렇다 하여 이터널 홀에 대한 이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무한히 증식하는 서클이 연쇄되며, 그렇게 증폭되는 마나가 수치로 이해되기는 했다.


별 소용없는 이해였다.


‘...내가 이해한 것이 올바르단 것이겠지.’


그러니 아카샤의 보조로 이해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유진은 그 사실이 만족스러워 피식 웃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위치 크래프트에 접속한 것은 아니다. 유진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눈을 뜬다. 더 이상 이터널 홀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여러 개의 고리에 휘감긴 구체가 보였다. 위치크래프트. 유진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서 이터널 홀에 다가갔다.


엘프의 영지, 세계수.


세냐에게 아카샤의 봉인을 풀 술식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 더.


유진은 의식을 집중하며 아카샤를 앞으로 뻗었다. 아카샤의 드래곤하트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위치크래프트가 빛에 호응했다.


“...어...?”


뾰로통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있던 메르의 두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멈추는 일 없던 위치크래프트이 고리가 하나씩 멈추고 있다. 고리가 멈출 때마다 위치크래프트의 구체를 감싸는 빛이 줄어든다.


끼릭, 끼리릭... 고리가 완전히 정지하고, 구체가 갈라진다. 거대한 마나의 결정. 그 누구도 이해하고, 분석하지 못한 위치크래프트의 술식. 유진은 그것을 향해 아카샤를 밀어넣었다.


“ㅡ꺄아악!”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던 메르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허둥거리면서 책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즉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책상에서 내려 온 순간, 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메르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시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이번에는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육체의 구성이 변화하고 있다. 이전에 몇 번이나 마법사들에게 해부당한 적이 있다. 그것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육체가 아무리 해부되어도, 메르의 근원은 위치크래프트의 안에 있다. 그것만 멀쩡하다면, 메르의 육체는 부숴지지 않는다.


위치크래프트가 아크리온에 보관 된지 수백 년. 여러 마법사들이 위치크래프를 파헤치는 것을 시도했지만, 그 누구도 위치크래프트의 외장을 열어 내부의 술식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위치크래프트의 외장을 열어버렸다. 메르는 겁에 질린 눈으로 유진의 등을 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메르에게 더욱 큰 공포를 주었다.


죽는다. 아니, 정지한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다. 왜? 세냐님이 그걸 바란 걸까? 대체 왜?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도저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여러 생각들이 메르의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우아아앙!”


메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아아앙! 아아! 흐... 흐에엥!”


“...”


“훌쩍... 흐윽...! 흐에엑! 히잉... 힉... 아아앙!”


그렇게 울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울음소리가 입밖으로 나오고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명을 지르려 해도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는데! 메르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왜 우는 거야?”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서 메르를 바라보았다. 메르는 입술을 파들파들 떨면서, 훌쩍하고 코를 삼켰다.


“얼레리꼴레리~”


잠시 메르를 지켜보던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놀려댔다.


“얼레리꼴레리~”


“...”


“얼레리...”


“다... 닥치세욧.”


메르는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대체 뭘 하신 거예요? 어떻게 위치크래프트를... 제, 제게 뭘 하신 거죠?”


“네 구성술식을 위치크래프트에서 나로 옮겼어.”


“...네?”


“아카샤에 옮기는 편이 나을까 싶었는데, 세냐가 그것보다는 내게 옮기는 편이 나을 거래. 아카샤에 네 구성 술식을 더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고, 내가 가진 마나 정도면 널 충분히 유지시킬 수 있을 거라면서.”


메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아카샤를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세냐가 네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더라.”


“...흑...”


“그리고 나보고 너 좀 챙겨 달래. 수백 년 동안 여기 처박혀 있었으니,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좋은 것도 보여주고, 맛있는 것도 먹이고...”


“흐윽...”


“일단 옷부터 바꿔 입히고... 아니... 흠... 바로 할 필요는 없지? 일단 적색마탑에도 가야지. 스승님께 사정을 설명해야...”


“으아앙!”


메르는 울음을 터트리며 유진의 품에 안겼다.


==


아카샤


적색마탑.


로베리안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자신이 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며, 앞으로의 일을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숨은 너무 많이 쉬었다. 그렇다고 화를 내자니, 화를 내야 할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짜증을 내야 하나? 난감한 문제라는 점에서는 짜증을 내도 괜찮을 것이다.


“...일단...”


그렇다고 짜증은 내지 않았다. 로베리안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앞을 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적색마탑주인 로베리안이 처음으로 거둔 제자. 동시에, 오랜 벗인 길레이드 라이언하트의 양자이기도 하다. 친구의 아들이란 것이 무조건적인 편애의 이유는 될 수 없다. 로베리안이 유진을 제자로 삼은 것은, 친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떠나 유진의 재능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베리안은 유진에게 화를 내기가 힘들었다.


“...대체 어찌 하여 이렇게 된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로베리안은 책상에 올려진 지팡이를 내려다 보았다. 아카샤... 현명한 세냐의 지팡이. 로베리안은 자신이 현명한 세냐의 계보를 이은 제자라 생각하며, 그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건 어려서부터 주입받은 자부심이었다. 로베리안의 스승의 스승이 세냐의 제자였다. 로베리안은 마법에 처음 입문했을 적부터, 제 스승과 스승의 스승에게 현명한 세냐를 대스승으로 섬기며 경의를 갖추라는 말을 매일 같이 들어왔다.


‘...신기한 기분이군...’


그 세냐의 지팡이. 로베리안 본인은 물론이고, 그의 스승과 스승의 스승도 끝내 주인이 될 수 없던 지팡이.


‘...설마 내 제자가... 아카샤의 인정을 받게 될 줄 이야.’


그리 생각하니, 도저히 화나 짜증을 낼 수가 없었다.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냥, 유진이 기특하고, 그가 자신의 제자라는 것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로베리안은 유진의 대답을 기다리며, 앞에 두었던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래. 이유 같은 것이 무어가 중요한가.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 뿐인 제자가 아카샤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그로 인해 아롯의 왕가가 청문회까지 열어가며, 제자를 핍박할 지도 모른다는 것.


만약 그렇게 된다면... 로베리안은 적색마탑주라는 지위와, 대마법사로 이뤄낸 자신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유진을 보호할 것이다...


“저기요.”


“푸흡.”


결의를 다지며 뜨끈한 차를 입에 담는 순간.


로베리안은 차를 뿜어버렸다. 그 순간에도 로베리안은 대마법사에 걸맞았다. 그는 자신이 뿜은 차가 유진에게 닿기 전에 마법으로 증발시켜버리고, 쓰린 목을 부여잡고서 콜록콜록 기침을 뱉었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 괜찮습니다.”


로베리안은 손을 허우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리고선 황망히 눈을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진의 망토 안쪽에서 빼꼼히 얼굴만 내밀고 있는 메르를.


“왜 허락도 없이 나오는 거야?”


“저는 언제까지 여기 숨어 있어야 하는 건데요? 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네가 튀어나오면 저렇게 놀라시잖아. 그러니까, 이야기가 다 끝난 뒤에 천천히...”


“나중에 놀라나 지금 놀라나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요. 유진님은 제게 자유를 주시겠다며 데리고 나온 주제에, 왜 아크리온을 나오자마자 절 망토 안에 처박으신 거죠?”


메르는 뺨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망토의 안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용을 쓴들, 망토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 좀 빼주시면 안 되나요? 유진님은 절대로 모르시겠지만, 여기 안은 너무 외롭고 쓸쓸해요.”


“그야 그렇겠지.”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고선 로베리안의 눈치를 보았다. 로베리안은 입을 반쯤 벌리고서 메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흠흠.”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망토를 열어주었다. 냉큼 밖으로 나온 메르는, 나름대로 우아한 예법을 흉내 내며 로베리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로베리안님. 저번 달이 이후로는 처음 뵙네요.”


“...어... 어어... 어...”


로베리안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체... 대체 어떻게 아크리온 밖으로? 아니,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메르님은 위치 크래프트의 사역마 아니었습니까?”


“세냐님이 부탁하셨습니다.”


그 말에 로베리안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그는 벌렸던 입을 다물고, 차분해지려 노력했다.


“...역시... 세냐님을 만나신 겁니까?”


“예.”


“유진님이 사마르 대수림에 다녀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백 명이 넘는 엘프들을 데리고, 라이언하트의 본가에 돌아오셨다고요. 그 엘프들은... 세계수가 있다는 엘프의 영지에서 데려오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영지에 들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살고 있던 엘프들을 데리고 온 것 뿐입니다.”


“...믿기지가 않는군요.”


로베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냐님이 은거하셨다는 엘프의 영지... 200년 전, 세냐님이 처음 은거하셨을 때. 제 스승의 스승을 비롯한 세냐님의 제자들과, 아롯의 수많은 마법사들, 심지어 왕가의 궁정마법사단까지 사마르에 건너가서 세냐님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냐는커녕, 엘프의 영지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가 나하마에 갔을 적에 말입니다.”


유진은 로베리안을 납득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찌 말해야 할 지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나하마에서 우연히 하멜의 무덤을 발견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흑사자성에서 했던 것과 똑같았다. 데스나이트의 공격, 아멜리아 머윈과의 조우. 하멜의 관에 있던 세계수의 나뭇잎.


사마르에 건너가, 나뭇잎의 인도를 받았다. 그렇게 엘프의 영지에 들어가서, 봉인 된 세냐와 만났다...


‘내가 하멜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로베리안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유진은 제하드와 길레이드에게도 자신이 하멜이라 밝힌 적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을 제외하고서 유진이 하멜이라는 것을 아는 건 오직 메르 뿐이다.


그건 간단한 이유였다. 메르는 세냐가 만든 사역마다. 절대로 배신하지도 않을 것이고, 배신할 수도 없으며, 그 누구도 메르를 추궁하며 진실을 말하게 할 수 없다.


“...세냐님이... 봉인을...”


로베리안은 떨리는 입술을 뿌득 씹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세계수의 힘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니. 그 사실은 세냐의 계보를 잇는 제자이자, 그녀는 경의하는 한 사람의 마법사인 로베리안에게 지극히 당연한 분노를 느끼게 만들었다.


“...세냐님은 제게 아카샤의 소유권을 양도하시면서, 메르를 부탁하셨습니다.”


“...”


“봉인을 풀 방법에 대해서도 일러주셨지요. 차원의 틈새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라이자키아를 죽이면, 세냐님의 저주도 사라지실...”


“유진님.”


로베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청문회에서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럴 생각입니다.”


현명한 세냐가 치명상을 입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수많은 마법사들이 광분할 것이다. 이 사실이 공표되었을 때, 대체 얼마나 많은 마법사가 세냐를 찾아 사마르로 갈 것이고, 복수를 대행하게다며 헬무드에 적의를 드러낼 것인가?


게다가. 청문회에는 흑색마탑주인 발자크 루드베스도 참석할 것이다. 라이자키아는 유폐의 마왕과 아무런 계약도 맺지 않았지만, 그렇다 하여 유폐의 마왕이 세냐의 봉인과 관계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해선 안 된다.


‘200년이나 지났다. 유폐의 마왕이나 놈과 계약한 마족들은 세냐를 찾지 않았어.’


하지만. 세냐가 치명상을 입고 봉인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


“...저는 발자크 루드베스를 믿지 않습니다.”


로베리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그를 불신하는 것과는 별개로, 발자크 루드베스는 헬무드의 ‘진짜’ 마족이나, 그곳의 다른 흑마법사들에 비하자면 아주 상식적이며 신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발자크 루드베스를 불신하되,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뭐...”


“유진님도 그 사실은 부정하실 수 없을 겁니다.”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는 3명. 헬무드에 있는 에드몬드 코드렛 백작은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멜리아 머윈과 비교했을 때 발자크가 압도적으로 상식적이고 신사적인 인물인 것은 사실이었다.


“발자크가 그러지 않더라도, 청문회에서 유진님이 세냐님의 상태를 언급한다면... 결국 이야기는 멀리 퍼지게 될 겁니다. 유진님. 헬무드에는 명성을 바라는 마족들이 아주 많습니다. 당장 헬무드의 삼공이 다음 마왕의 자리에 가깝지만, 그 밑의 수많은 마족들도 높은 작위와 마왕의 자리를 탐냅니다.”


나찰공주 아이리스. 그 외의 여러 마족들. 현명한 세냐의 목은 명예를 바라는 마족이라면 탐낼 수밖에 없다.


“청문회에서는 세냐님의 봉인에 대한 사실은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평온과 수행을 위해 은거하셨다는 말만 할 생각입니다.”


“예. 제 생각에도 그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카샤와 메르님을 양도한 것도... 상대가 유진님이라면, 청문회의 모두도 납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위대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후손.


현명한 세냐의 계보를 이은 머나먼 제자. 당장 대륙에서 유진만큼 세냐의 적통과, 인연을 주장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녹색마탑주는 발작하겠군.’


제네릭 오스먼. 그는 세냐가 지냈던 녹색마탑의 탑주이며, 그의 스승의 스승도 세냐의 제자였다.


“...하지만 로베리안님. 청문회에서 제게 맹세를 강요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마법사는 마나의 맹세를 기만할 수 없다. 진실을 맹세하고 거짓을 말해 버리면, 마나는 거짓을 읊은 마법사를 더 이상 따르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로베리안은 정색하고 내뱉었다.


“유진님. 마나의 맹세는 마법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만큼, 그 사용을 멋대로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죄인에게도 묵비권이 있는데, 죄를 짓지도 않은 유진님에게 어찌 맹세를 강요한단 말입니까?”


“뭐 사안이 사안이니...”


“예. 세냐님에 관련 된 문제는 결코 가볍게 논할 수 없지요. 하지만 유진님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고, 세냐님도 자신에 대한 진실을 밝혀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로베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유진의 양손을 덥썩 잡았다.


“만약 청문회의 인사들이 유진님을 핍박하며, 맹세를 강요한다면. 저는 세냐님의 제자이자, 유진님의 스승으로, 또 라이언하트의 벗으로서 유진님을 보호할 것입니다. 물론 유진님도 가진 모든 것들을 이용해,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하십시오. 제 아무리 아롯의 왕가라도, 키옐의 영웅인 라이언하트를 함부로 핍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랬다. 정말로 유진을 핍박하려 했다면, 트렘펠은 아크리온에서 즉시 유진을 연행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트렘펠도 한 명의 마법사로 세냐를 존경하고 있기에. 또, 라이언하트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에 관련해서는, 제가 가진 인맥과 정보망을 동원해 수소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랑에 관한 것도 부탁드립니다.”


유진은 냉큼 말을 붙였다. 여러 번 생각해 보았지만, 유진이 직접 발로 뛰어 모으는 정보보다는 로베리안이 모으는 정보가 질적으로 우월할 것이 분명했다.


“예, 물론 그래야지요. 유진님 노출되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로베리안은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


메르는 둘이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슬금슬금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서 움직였다. 중앙에 놓인 쿠키와 초콜렛, 사탕 따위의 다과. 메르에게 있어서는 수백 년 만에 접하는 과자였다.


먹어도 되는 걸까? 먹으라고 둔 것이겠지? 차는 따로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과자는 먹어도 되는 거겠지?


“뭐 그리 낑낑대냐?”


유진은 피식 웃으며 다과 바구니를 끌어서 메르의 앞에 놔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로베리안도, 마법을 통해 메르에게 찻잔을 밀어주었다.


“...호... 홍차는 200년 만이네요. 저는 유카르 지방의 찻잎을 좋아해요.”


메르는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뜨겁다. 그 온기가 메르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녀는 홍차를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꼭 감고 몸을 떨었다. ...메르는 홍차보다는 달달한 밀크티를 더 선호했으나, 200년 만에 마시는 차는 쓰디 쓴 블랙커피라도 달콤하게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진님은 제게 진실을 밝히지 않으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로베리안의 침묵이 끝났다.


“하지만 밝히셨죠. 그건... 제가 유진님의 스승이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겠지만, 로베리안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사실 모든 것을 밝힌 것도 아닙니다. 도저히 밝힐 수 없는 이야기도 있어요.”


“물론 그럴 테죠. 하지만 저는 유진님을 추궁하지 않을 겁니다. 말하지 않아도 될 비밀을 언급하신 것은, 결국 제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시니.”


로베리안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저는 유진님의 비밀을 들을 날을 즐겁게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뭐... 언젠가는 말할 수도 있겠죠.”


유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힐긋 돌아 본 메르는 납작한 쿠키에 초콜릿을 얹어서 먹고 있었다. 먹을 때마다 눈을 꼭 감고 양 주먹을 쥐는 것이 세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세냐는 술을 좋아했지만, 그만큼 달콤한 디저트도 좋아했다.


‘...메르한테 위스키봉봉을 먹여도 되는 건가?’


세냐가 좋아 죽던 디저트가, 술이 들어간 위스키봉봉이었다.


메르의 겉모습은 열 살 남짓.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존재한 데다, 사역마를 인간의 나이로 취급하는 것도 우습지 않나?


“...저녁이나 함께?”


“아뇨. 두 분이서 즐기고 오시죠.”


로베리안은 웃으며 거절했다. 저녁, 이라는 말에 메르의 눈이 반짝 뜨였다. 메르는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훔쳐 닦으면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저는 케이크가 좋아요.”“케이크는 밥이 아니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먹어서 배가 부르면 밥이죠.”


“...그렇다면 너에겐 더더욱 밥이 아니지. 너는 배부름이라는 것이 없잖아.”


그 말에 메르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사역마인 그녀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몸속마저 인간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먹은 음식들은 체내의 마나로 완전하게 분해되어 소멸한다. 즉, 먹어도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이다.


“...맛있으면 밥이에요.”


메르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유진은 메르와 함께 일어서서, 로베리안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적탑주에게는 유진님의 전생을 알리지 않으실 건가요?”


“아직은.”


“그럼, 유진님이 하멜이라는 것을 아는 건. 저랑 세냐님 뿐인 거네요?”


“유폐의 마왕도 아마 알고 있을 걸.”


“마왕은 별개죠. 유진님이 ‘직접’ 밝힌, 특별한 상대가 저랑 세냐님 뿐이라는 건 맞잖아요.”


메르는 방긋방긋 웃으며 유진의 옆을 따라붙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기쁘네요.”


“아양떨어봤자 케이크 안 먹을 거야.”


“...유진님은 쓰레기에요.”


“그런데 너. 술은 마실 줄 알아? 세냐는 술이라면 환장했는데.”


“...환장이라니. 세냐님을 모욕하지 말아주실래요? 세냐님은 우아하게 와인을 ‘즐기셨지’, 환장하지는 않으셨어요.”


“웃기네. 네가 나보다 세냐를 잘 아냐?”


“...으으윽... 그건... 아닐 수도 있지만. 저도 세냐님에 대해서는 엄청 잘 알아요.”


“그래서 술 마실 줄 아냐니까.”


“...세냐님이 마시실 때, 한 잔 달라고 해본 적은 있어요. 세냐님은 저는 너무 어려서 마시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요.”


“그럼 안 되겠군.”


“안 될 건 또 뭐예요? 그때의 저는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됐다고요. 지금은 200년이나 흘렀으니까, 유진님보다도 나이가 많아요. 술도 마실 수 있어요.”“그래도 안 돼. 네 엄마가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엄마...?”


메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말은 남들 앞에서 하지 마세요. 세냐님이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사실인데 뭐. 세냐가 널 만들었으니, 세냐가 네 엄마인 거지.”


“하지만 전 인간이 아니라 사역마라고요. 대체 누가 사역마를 자식으로 여기나요? 사역마도 창조주를 부모라 여기지는 않아요. 굳이 말하자면, 주인으로 여기죠.”“인간이고 사역마고 뭐가 중요한지. 애당초 넌 평범한 사역마와 다르잖아.”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전 자식이라기보다는, 세냐님의 사역마고... 으음... 분신에 가까워요. 그 분의 어린시절을 투영해 만들어졌으니까...”


“그래서. 넌 세냐의 딸이 되기 싫다는 거냐?”


유진은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메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제 바람은 중요하지 않아요. 세냐님이 저를 어찌 생각하시느냐가 중요하죠. 아마, 세냐님은 저를 딸로는 생각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럼 나중에 물어 봐.”


유진은 기울어진 모자를 바로 씌워주며 웃었다.


“세냐는 널 걱정했어. 널 방치한 것을 미안하다 여겼고. 그래서 나한테 맡긴 거야. 적어도, 내가 아는 세냐 메르데인은 널 단순한 사역마로 여길 인간은 아니야. 그런 단순한 사역마라면 널 자신의 모습으로 닮게 만들지도 않았을 거고.”


세냐의 소원은.


평범하게, 남들처럼 결혼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살다가 할머니가 되고 싶은 것.


하지만 세냐는 아롯에서 결혼하지도, 연애를 하지도 않았다. 자식도 낳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어린 시절과 쏙 빼닮게 만든 사역마를 하나 만들었다.


“세냐는 널 딸로 여길 거야.”


메르는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양 손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감추었다. 그렇지만 ‘훌쩍’거리는 소리는 숨겨지지 않았다.


“또 우냐?”


“...우우...”


“케이크 먹여줄 테니까 울지 마. 바로는 안 갈 거야. 나 밥부터 먹고 케이크를...”


“...유진님은... 세냐님을 좋아하시는 거죠?”“얘가 미쳤나. 갑자기 왜 개소리야?”


“좋아하시는게 틀림없어요. 사, 사랑이죠? 저도 알아요. 동화책에서 하멜은 세냐님을 사랑했다고...”


“내가 시발 그거 거짓말이라고 했지? 내가 미쳤다고 그 왈가닥을 좋아... 좋... 사랑? 우욱...!”


유진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격렬한 반응에 메르는 고개를 빼꼼 들었다.


“...남자는 어릴수록,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솔직하지 못하고 괴롭힌대요.”


“...뭐 어쩌라고? 난 안 어려.”


“그건 육체의 나이보다는 정신의 나이죠.”


“그러니 더더욱 난 어리지 않지. 전생에 내 나이가 몇이었는데!”


“세냐님은 하멜님의 이야기를 할 때 즐거워하셨어요.”


“헛소리말고 가자.”


“세냐님이 유진님과 맺어지신다면, 저는 유진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되는 건가요?”


“토나오는 얘기하지 마.”


유진은 얼굴을 확 찌푸리고서 걸음을 빨리 했다.


청문회


“그러니까. 저는 유진님이 쓰는 마법의 보조장치 같은 거죠.”


메르는 의자에 앉아서 똘망똘망 눈을 빛냈다.


지금 메르의 구성술식은 위치 크래프트가 아니라 유진에게 옮겨져 있다. 그렇다 보니, 위치 크래프트에 연동되었을 적에 쓸 수 있었던 다양한 마법들은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으음... 유진님은 공간마법을 선호하셨잖아요? 그런 마법은 술식만큼 좌표계산이 난해하죠. 유진님이 아무리 잘나셨다 해도, 마나가 요동치는 상황에서 공간좌표를 완벽하게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예요.”


블링크는 마법전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블링크를 얼마나 빠르고 적절하게 사용하느냐가 마법전투의 우위를 가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계산을 제가 대신 해드리는 거죠. 물론 그 외의 기능도 있고요. 지금의 유진님은 5서클까지의 마법을 환염식으로 기록하고, 사용할 수 있으시잖아요?”


“그렇지.”


“본래 자신의 경지보다 상위의 마법은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유진님은 1서클 위의 마법까지 사용이 가능하시잖아요? 제가 보조해 드리면 2서클 위, 그러니까 7서클의 마법까지 사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무영창은 택도 없고 당연히 영창과 술식의 전개가 필요하지만, 쌩으로 들이 박는 것보다는 훨씬 편할 거예요.”


메르가 으스대며 말했다.


“특히 서로 다른 마법을 동시에 펼치면서, 마법간의 융화... 으음,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해보시는 것이 낫겠네요.”


메르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유진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열어주세요.”


“꼭 안에 들어가서 해야 하냐?”


“유진님. 보시다시피, 저는 전투용 사역마가 아니에요. 망가져도 수복되기는 하지만, 저는 직접 마법전투를 펼치거나 육탄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지진 않았다고요.”


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흑암의 망토를 들췄다.


“어디까지나 마법 보조용 사역마란 말이죠. 그게 불만이시라면, 유진님이 직접 전투용 바디를 만들어 주세요.”


“...으음...”


유진은 잠시 메르를 응시했다. 전투용 바디라... 마법이야 메르가 알아서 쓸 테니, 전투에 알맞은 스펙을 가진 육체를 새로 만들어달라는 건가.


...유진은 가르기스와 이바타의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을 떠올렸다. 일단, 둘의 그 근육질 몸은 전투에 알맞기는 했다. 그 울퉁불퉁한 몸에 메르의 얼굴을...


“우욱...”


역겨운 상상을 해버렸다. 유진은 입을 틀어막고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고, 망토를 오르락내리락 들추던 메르가 눈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끔찍한 상상을 했어.”


“참 뜬금없으시네요. 어쨌든, 망토나 열어주세요.”


메르가 바란 대로 흑암의 망토를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본래 이 망토의 안에는 살아있는 생명은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사역마인 메르에게는 그러한 제한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마법을 쓰실 건가요?”


“폭염마탄.”


아크리온의 8층. 폭염의 전당에는 아롯 역사상 가장 강력하던 화염술사의 마법이 보관되어 있다. 지금 유진이 펼치려는 폭염마탄도 그 중 하나인, 7서클의 마법이다.


술식은 머릿속에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떻게 마나를 흘려보내 전개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도 알고 있다. 다만, 실제로 써본 적은 없었다. 7서클의 마법은 그 위력이 재해에 버금가는 만큼, 난이도가 어마어마하게 높다.


마나가 요동친다. 메르는 망토 사이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유진이 떠올리는 술식이 메르에게 공유되었다.


유진이 타고난 연산력과 마나지배력. 2서클이나 높은 마법이지만, 마나의 흐름은 막히지 않았다. 가뜩이나 빠른 연산이 메르의 보조로 순식간에 이뤄진다. 달싹거리는 입술이 영창을 잇는다.


ㅡ화륵!


유진의 앞에 자그마한 불씨가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는 대단찮아 보이는 불씨. 크기만 보면 파이어볼보다 작다. 하지만. 불씨가 출현한 순간, 이 공간의 온도가 아득하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후우!”


메르가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두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유진의 앞을 떠도는 불씨를 응시했다.


“...성공했네요.”


코어의 마나가 상당량 빠져나갔다. 유진은 불씨에 의식을 집중했다. 불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느릿한 움직임, 불씨가 폭발적으로 그 크기를 키운다.


폭염마탄. 화염구 계열의 마법 중에서 헬파이어 다음의 위력을 자랑하는 공격마법이다. 조금 나아갔던 불씨는 어느새 연구동의 반절을 채울 만큼 거대해져서, 이글이글 불꽃을 피워냈다.


“그럼 다음은... 상극 속성의 마법과 융화를 시도해 보죠. 유진님, 빙결의 전당의 마법도 알고 계시죠?”


“잠깐.”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연구동 문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닫힌 문 너머에는 궁정마법사단장, 트렘펠 위자도르가 서있었다. 그는 알아서 문이 열린 것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구동을 가득 채운 불꽃을 보고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하 연구동은 문을 닫은 상태에서는 바깥에서 내부의 상황을 확인할 수도, 마나를 느낄 수도 없다. 그래서, 트렘펠은 문이 닫혔을 때에는 유진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폭염마탄?”


트렘펠은 입을 쩍 벌리고서 내뱉었다.


“...폭염의 전당의? 7서클? 마법...?”


믿기지가 않았다. 트렘펠의 두 눈이 혼란으로 파들파들 떨렸다. 다섯 마탑주와 트렘펠의 경지는 8서클. 마법 역사상, 현명한 세냐를 제외하고서는 9서클에 도달한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시대건 8서클은 대마법사라 인정받는다.


7서클과 8서클. 고작 1서클 차이일 뿐이지만, 그 간극은 아득하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트렘펠이 알기로, 유진은 이제 겨우 20살이었다. 마법 역사상 20살에 7서클에 오른 마법사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륙에서 가장 마법사다운 피를 갖는다는 아롯의 왕족들 중에서도 저 나이에 7서클에 오른 이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다.


“...유진 공... 대체... 어떻게... 아니, 언제 7서클에 오른 것이오...?”


트렘펠은 덜덜 떨며 물었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그 또한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그런 트렘펠도 20살에는 4서클에 오른 것이 고작이었다...


“7서클에 오른 건 아닙니다. 제 경지는 아직 5서클입니다.”


폭염마탄의 열기가 풍경을 일그러트린다. 유진은 손을 휘휘 저어, 폭염마탄을 구성하는 술식을 흩트렸다.


“...5서클... 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2서클 위의 마법을...”


트렘펠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눈을 부릅 떴다. 술식이 흩트러지며 분해 된 마나가, 소멸하지 않고 유진에게로 되돌아간다.


그 모든 것이 트렘펠의 이해를 아득히 벗어나있었다. 상위서클, 그것도 2서클 위의 마법을 펼쳤다. 마법을 디스펠하면서도 마나를 낭비 없이 회수한다... 그게 가능한 일이던가?


트렘펠에게는 불가능했다. 8서클인 그는 절대로, 무슨 수를 써도 9서클의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마법을 도중에 디스펠했을 때, 들인 마나의 일부는 회수할 수 있다. 하지만 유진처럼 대부분을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상위서클의 마법을? 트렘펠은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5서클이 7서클의 마법을 쓴다면... 그걸 더 이상 5서클이라고 할 수 있나? 쓰는 마법에 따라 서클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안녕하세요.”


트렘펠의 혼란이 더욱 커졌다. 그는 유진의 망토 사이에서 얼굴을 쏙 내민 메르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허... 허허...”


“트렘펠 님. 놀라는 것도 이해하지만, 유진님이 7서클의 마법을 쓰신 것은 세냐님의 사역마인 제가 보조해 드렸기 때문이에요.”


메르는 우쭐대며 턱을 높이 들었다.


“제가 보조하지 않는다면 쓸 수 없는 거예요. 대단하죠?”


“허... 허허허허...”


“청문회 때문에 오신 겁니까?”


유진은 흥흥 콧노래를 부르는 메르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트렘펠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몸을 일으켰다.


“...음... 그래. 유진 공. 자네의 청문회가 오늘 열릴 걸세.”


“오늘? 생각보다 빠르네요. 며칠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사안이 사안이니까.”


본래는 근엄하고 위압적인 태도를 고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위축시켜서, 청문회까지 데려가려 했건만...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청문회는 어디서 합니까? 역시, 왕궁 아브람에서 하는 겁니까?”


“...본래는 그럴 생각이었네만. 적탑주가 맹렬히 반대했네.”


트렘펠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연구동의 복도를 걸었다.


“유진 공도 알다시피, 왕궁 아브람에서는 왕족과 궁정마법사단을 제외하고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네. 그건 마탑주들도 마찬가지지.”


“그렇다더군요.”


“...적탑주가 주장하기를, 유진 공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왜 청문회가 열리는 것이냐더군. 그것도 마법이 금지 된 아브람에서 말이야. ...크흠! 적탑주도 참, 사람이 의심이 많다니까... 설마 왕족과 궁정마법사단이, 마법을 쓸 수 없는 것을 기회삼아 자네를 핍박이라도 하겠나?”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소.”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일렁거리던 공간이 열리고, 로베리안이 걸어 나왔다.


“다만, 이치에 옳지 않다고 여겼을 뿐이오. 트렘펠. 나는 당신이 정의로운 사람이라 믿고, 왕가가 공정하다 믿소.”


“...끄응...”


“내 제자는, 유진님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소. 헌데 왜 유진님이 청문회에 불려가야 하는 것이고, 왜 그 청문회가 마법사를 무력하게 하는 아브람에서 열려야 하오?”


“거 그만하시오. 로베리안. 그대가 하도 반대하여, 청문회를 아브람이 아닌 호수 바깥의 별궁에서 치르기로 했잖소?”


“법원의 재판장에서 열겠다는 것을 내가 반대했기에 별궁으로 바뀐 것이지.”


“거참... 왜 쓸데없는 말을 하는지 원. 유진 공, 오해하지는 말게. 나는 청문회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야. 아브람에서 여는 것도, 법원에서 여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고.”


“예.”


“재상이 하도 고집을 부려 대서 말이야... 그... 유진 공도 알다시피, 아카샤는 아롯에 여러 의미를 가진 보물이라서 말일세.”


“아롯의 보물이 아니라 세냐님의 보물이오.”


로베리안이 눈을 부릅뜨며 쏘아붙였다.


“아 거참. 왜 나한테 그러는 거요? 내가 그랬소? 어? 이 빌어먹을, 궁정마법사단장인 내가 심부름꾼을 하는 것도 속이 쓰리는데...!”


“너무 노하지 마시오. 그만큼 아롯의 왕가가 그대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잖소.”


“...어흠... 그건 그렇지.”


트렘펠은 금세 분노를 추스르며 수염을 어루만졌다.


*


청문회에 다섯 마탑주와 마법사 길드장, 궁정마법사단장이 참석했다. 그 일곱 명은 아롯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마법사들이다.


“...내가 뭘 봤는지 아나?”


트렘펠은 자리에 앉으면서 표정을 구겼다.


“유진 공이 7서클의 폭염마탄을 펼치더군.”


“...그게 사실입니까?”


마법사 길드장. 에트가드 기론이 두 눈을 부릅뜨고 트렘펠을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유진 라이언하트의 나이는 20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7서클에...?”


“...실제 경지는 5서클이라는데...”


“5서클이 어떻게 7서클의 마법을 씁니까?”


“내가 어찌 아나?”


트렘펠은 표정을 구기며 내뱉었다. 에트가드는 떨리는 눈동자를 돌려, 건너편에 앉은 로베리안을 응시했다. 하지만 로베리안은 에트가드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단지, 뿌듯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자리가 참 불편하시겠어.”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가 에트가드를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넌 아직도 7서클이잖아? 네 나이가 저 꼬마의 세배는 될 텐데...”


“...얇은 벽을 앞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 말 5년 전에도 하지 않았니? 5년 동안 용을 쓰고도 넘지 못한 주제에. 물어 볼 때마다 얇은 벽이래.”


“작은 깨달음만 더해진다면 넘을 수 있습니다. 백탑주님, 저를 너무 모욕하지 마십시오. 지금 저 어린 것과 저를 비교하시는 겁니까?”


“에이, 모욕이랄 것까지야... 으응, 비교는 맞겠다.”


멜키스는 낄낄 웃으며 박수를 쳐댔고, 에트가드의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쳤다. 입안에는 온갖 험악한 욕설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걸 멜키스에게 쏟아낼 수는 없었다. 저 얄밉고 가벼운 여자는 8서클에 오른 대마법사이자, 역사상 유일하게 두 명의 정령왕과 계약한 대정령술사다.


“...7서클이라. 그건 아카샤 덕분인가?”


일곱 명의 마법사 중 가장 표정이 살벌한 자는 녹탑주인 제네릭 오스먼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있는 유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아카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 나이에 7서클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마음대로 재단하지 마시오.”


로베리안이 입을 열었다.


“유진님은 아카샤의 주인이 되기 전부터 상위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줄 아셨소.”


“흥... 자기 제자라고 너무 감싸고도는 군. 로베리안 서피스. 아니, 제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라이언하트의 자식이기 때문인가?”


제네릭의 매선 시선이 로베리안에게 향했다.


“싸고 돌만 하지. 그 머저리 같은 장남을 먼저 보았으니 뭔들 어여쁘지 않을까? 하지만 도가 지나쳐, 적탑주. 아카샤는 아롯의 보물이다. 그걸 라이언하트에게, 키옐에게 빼앗기는 것은...”


“그대에게는 이오드 님을 모욕할 자격이 없소.”


로베리안의 눈동자에서 붉은 기류가 회오리쳤다.


“또, 그대의 분노는 아카샤가 유진님에게 빼앗기기 때문이 아니잖소? 그대가 애타게 바라던 아카샤가,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인정했기에 분노하는 것이지.”


“...제자사랑이 지독하군. 그 말. 내가 절대로 웃으며 받을 수 없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알다마다. 나와 그대가 몇 년을 알고 지냈소? 40년은 훌쩍 넘지. 그대가 ‘현명한 세냐의 제자’라는 것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도 알고, 녹색마탑만이 세냐님의 정통한 후계자라며 나와 적색마탑을 무시하는 것도 알고 있소.”


로베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제네릭. 세냐님이 녹탑주를 지낸 것은 300년 전이오. 그에 매달려 녹색마탑만이 세냐님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것은 우습지 않소? 또 그대가 아무리 주장하며 고집을 피운 들, 아카샤는 그대가 아닌 유진님을 인정했소.”


“네놈...!”


제네릭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서 일어섰다. 그러자 멜키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싸워라! 싸워!”


청탑주, 히리두스 우즐렌은 그런 멜키스를 흘겨보면서 혀를 찼다.


“지금 대체 뭐하자는 건가? 젊은이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 건가?”


“난 싸울 생각이 없소.”


로베리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죽였다.


“단지, 녹탑주가 자리를 분간 못하고 감정에 휩쓸린 것 뿐이지.”


“으득!”


거대한 마나가 녹탑주를 중심으로 몰려든다. 로베리안은 비웃으면서도 녹탑주에 대항해 마나를 움직였다. ㅡ쿠구궁...! 둘이 일으키는 거대한 마나에 별궁 전체가 뒤흔들렸다.


‘생각보다 터프하다니까.’


유진은 자리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스승인 로베리안은 유진에게는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13살 때 보았던 로베리안은 아이들에게 유쾌하면서 친절했고, 스승으로서는 자애로웠다.


하지만 유약한 인물은 아니었다. 적색마탑의 마법사들에게는 굉장히 엄격한 인물이다. 마법 실험 중에 자그마한 실수라도 한다면 어느새 나타나서 신랄히 꾸짖는다. 지금만 해도 제네릭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허투루 넘기지 않고 언쟁을 벌인다.


‘...저 새끼는 왜 자꾸 쳐다 봐? 부담스럽게.’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


그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로 근처에서 로베리안과 제네릭이 마나 싸움을 벌이는데, 발자크는 주변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유진만 빤히 보고 있었다.


“호네인 왕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별궁 밖에서 대기 중인 근위기사들이 외쳤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 크기를 키워가던 마나가 단번에 가라앉고, 유진을 포함해 모든 마법사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들어오고 싶지 않았소.”


호네인 아브람.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별궁의 홀 안으로 들어왔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도 느껴질 만큼 마나가 요동쳐서 말이오. 차라리 조금 더 늦게 오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구려.”


“가벼운 말다툼이었을 뿐입니다.”


로베리안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음. 그렇소. 폐하께서는 이 일을 나와, 재상에게 전담하셨소.”


호네인은 뒤따라 들어 온 노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폐하는 이 일을 그리 즐겁게 여기지 않으시오. 허나 이 문제는, 왕가가 사감을 앞세워 공정하지 않게 다룰 수 없는 일이지. 또한 일국의 국왕이 직접 자리한다면 그것만으로 유진 공이 난처해질 것 아니오.”


배려를 해줬다는 건가? 유진은 숙이고 있는 고개를 들지 않고서 생각했다.


‘...책임을 지기 싫은 것이겠지.’


그 생각을 차마 호네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음... 다들 고개를 들고, 자리에 앉아주시오.”


호네인은 중앙에 마련 된 자리에 앉았다.


“우선. 이 청문회의 성격을 명확히 하고 싶소. 이건 아롯과 키옐의 문제가 아니며, 일국의 권세를 앞세워 일가를 핍박하는 것도 아니오.”


호네인은 유진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핍박해서도 아니 될 일이며, 핍박할 이유도 없소. 적탑주가 주장했던 것처럼, 유진 공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니 말이오.”


“...전하.”


곁에 앉은 재상이 소곤거렸다.


“아카샤는 200년 전부터 아크리온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아크리온은 아롯의 왕립도서관이며, 아크리온의 모든 것은 아롯 왕가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호네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유진 공이 아카샤를 훔친 것은 아니잖소. 비록 아카샤가 아롯에 귀속되어 있다지만, 그 주인은 현명한 세냐님이오. 그리고 유진 공은 세냐님에게 직접 아카샤를 양도받았다고 하였소.”


“그를 신문하기 위해 청문회를 연 것입니다.”


재상이 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냐님이 은거한지 장장 2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헌데 이제 와서, 세냐님이 ‘살아계시며’ 아카샤의 소유권을 타인에게 양도했다니. 그 말을 무조건 믿기는 어렵습니다.”


“믿지 못한다고?”


로베리안이 눈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콘렐 재상. 그 말은, 내 제자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것이오?”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말할 뿐일세.”


콘렐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200년은 긴 시간 아닌가. 그토록 찾아 헤매도 흔적을 찾을 수 없던 세냐님이, 지금 와서 아카샤의 소유권을 양도했다니?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아카샤는 200년 동안이나 아크리온에, 아롯에 귀속되어 있었네. 그러니 현재 아카샤의 주인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롯 왕가여야 옳지 않은가?”


“쓰지도 못하는 것을?”


멜키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 그래. 아카샤가 200년 동안 아롯에 귀속되었던 것은 사실이지. 그렇다고 아롯이 아카샤의 주인이라 주장하는 것은... 좀 웃기지 않나?”


“백탑주.”


“왜. 내 말이 틀려? 200년 동안 그 누구도 아카샤의 주인이 되지 못했어. 전대 국왕들은 물론, 아크리온에 드나들었던 그 어떤 마법사도 아카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나는 마법사가 아닐세.”


콘렐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내게 있어서 아카샤는, 위대한 마법사의 지팡이라고는 알지만 그리 큰 실감은 없네. 하지만 왕가의 ‘보물’이라고는 실감은 있지. 아크리온의 모든 것은 왕가의 것. 그 누구도 아카샤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지만, 그럼에도 아카샤는 왕가의 것일세. 200년 전의 은자가 이제 와서 소유권을 주장한다니... 나는 그게 참 뻔뻔하다 느껴지는 군.”


그 말에 로베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부릅 뜬 눈으로 콘렐을 노려보았다. 허나 콘렐은 그 매선 시선에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다.


“너무 노려보지 말게. 나는 왕가를 섬기고, 아롯의 국정을 책임지는 자로서 아롯을 위한...”


“저도 말 좀 해도 됩니까?”


유진은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발언하게.”


콘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낮게 헛기침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세냐님은 살아 계십니다.”


유진은 콘렐을 빤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세냐님이 제게 말하시길, 나중에 아롯에 돌아와서 이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 버리시겠답니다.”


“...뭐?”


“마나에 맹세컨대, 방금 제가 한 말은 모두가 진실입니다. 세냐님은 살아 계시고, 아롯에 분노하고 계십니다.”


호네인의 입이 벌어졌다.


“그 분의 분노가 어떻게 이뤄질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음... 제가 알기로, 왕궁 아브람이 세냐님이 선물하신 것으로 아는데... 왕궁을 감싼 호수도 세냐님이 만드신 거고, 왕궁의 봉마진도 세냐님의 것 아닙니까? 그러니 아마 왕궁을 통째로 수장(水葬)시키지 않을까...”


“...”


“아니면... 유성우를 쏟아 부을 지도 모르죠. 제가 알 바는 아닙니다만...”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로베리안님.”


“...응... 으응?”


“제가 세냐님에게 잘 말씀드려서, 로베리안님과 적색마탑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대체 뭐라 대답해야 하나? 로베리안은 입술을 몇 번 열었다 닫다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맙습니다.”


청문회


솔직히 욱했다.


그래서 내뱉어버린 말이다. 상황이 어쨌건, 맹세를 할 생각도 없었는데...


‘아니. 이 정도면 괜찮나?’


오히려 이쪽에서 선수를 쳐버렸기에, 저쪽이 맹세를 언급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것도 저지르고 난 뒤의 합리화일 뿐이다. 대뜸 진실을 맹세하고, 세냐에 대해 말한 것은. 콘렐이 지껄이는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서일 뿐이다.


감정대로 저질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현명한 세냐의 이름은 아롯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게다가 이 청문회에 자리한 마법사들은 모두가 아크리온의 출입증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위치크래프트를 접했던 대마법사들이다.


때문에 그들은 세냐를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다. 이곳의 모두가 대마법사지만, 그들 중에서 위치크래프트에 버금가는 독자적인 마법을 창안한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마법사 길드장 에트가드를 제외한 여섯이 8서클. 그들은 9서클의 벽이 얼마나 높고 견고한지를 안다. 자신들의 남은 생을 모조리 바칠 지라도 9서클에 도달하리란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현명한 세냐는 9서클을 초월했을 지도 모른다...


즉,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세냐는 미지의 존재였다. 도저히 같은 마법사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없는, 자신들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존재. 그렇기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갖게 된다.


“...수장이라...”


발자크가 입을 열었다. 그는 큭큭 웃으면서 턱을 어루만졌다.


“세냐님이라면 아주 쉽게 할 수 있을 겁니다.”


“...흑탑주.”


콘렐은 창백한 얼굴로 발자크를 돌아보았다.


“과장이 아니란 겁니다. 사실, 세냐님의 수준에 갈 것도 없이... 저만 해도 왕궁 아브람을 호수 밑바닥으로 침몰시킬 수는 있습니다.”


“...”


“제가 가능하다면, 다른 마탑주들 모두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냐님은 저희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마법사시죠. 그 분이 은거하신 200년 전을 기준으로 해도, 당대의 마탑주 그 누구도 세냐님보다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발자크는 그것에 대해서는 여지를 두지 않고 확언했다.


“세냐님이 아롯에 돌아와, 왕궁 아브람을 수장시키려 한다면... 하하. 대체 누가 세냐님의 행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일단 저는 막지 못합니다.”


발자크는 보란 듯이 두손을 들어올렸다.


“...마탑주 전원이 힘을 합쳐도 불가능할 것이오.”


청탑주, 히리두스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흑탑주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단 말이오. 나는 청색마탑의 주인이기 전에 한 명의 마법사이며, 코흘리개 시절부터 세냐님의 전설을 듣고 자랐소. 지금도 가슴 깊이 세냐님을 존경하고 있지.”


“...”


“나는 세냐님의 분노에 저항하고 싶지 않소. 그 분이 분노하셔 나타난다면, 나는 즉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 것이오.”


“...그 무슨...”


콘렐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마법사가 아니다. 그래서 마탑주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거야, 콘렐.”


멜키스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까다롭고 귀찮지. 당신이 목수 일에 소양이 있을 지는 모르지만, 만약 당신이 의자나... 책상 같은 것을 만든다고 치자고.”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오?”


“잠자코 들어 봐. 네가 의자와 책상을 만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거야.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으레 귀찮고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하지만 부수는 건? 아주 쉬워. 집어 던지거나, 망치로 때려 부수거나. 만드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건, 이미 만들어진 것을 부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단 말이야.”


콘렐은 멜키스가 무슨 말을 하는 지를 이해했다.


“200년 전, 세냐님은 왕궁 아브람을 만드는데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리셨다지? 지면을 통째로 붕괴시키고, 호수를 만들고, 그 위에 왕궁을 옮기고, 여러 마법을 설치하셨지. 하지만 부수는 것에는 그만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야. 넉넉 잡아서 한 시간?”


콘렐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다. 이제야 콘렐은 마탑주들이 느꼈던 미지의 공포를 이해했다.


“쾅.”


멜키스가 들으란 듯이 입술을 오므리며 소리를 냈다. 그 작은 목소리에 콘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렇게 침몰해 버리는 거지.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어? 나도 흑탑주나 청탑주와 같은 의견이야. 세냐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나는 막아서지 않을 거야. 멀찍이 도망쳐서 구경이나 하다가, 세냐님의 분노가 조금 풀렸다 싶으면... 흐흐. 스리슬쩍 다가가서, 세냐님한테 차가운 음료수나 한 잔 드려야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정 세냐님을 막고 싶다면, 우리한테 말하지 말고 궁정마법사단보고 막으라고 해.”


멜키스가 놀리듯 말했고, 콘렐은 슬며시 시선을 돌려 트렘펠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트렘펠의 얼굴이 콱 구겨졌다.


“...크흠...”


호네인은 혼란스런 감정을 추슬렀다. 그는 마른 침을 몇 번 삼키며 심호흡을 하고, 유진을 응시했다.


“...세냐님이 정말 그리 말씀하셨단 말인가?”


“맹세도 했잖습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 말씀하신 이유가 무언가?”


“이유는 여럿 있는데,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아롯의 마법사들은 세냐님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존중?”


콘렐이 급히 말을 받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아롯은 200년 동안 세냐님을 위인으로 모셔왔네! 그 분의 이름을 딴 광장을 만들었고, 저택을 관리했으며, 수많은 동상을 세웠어! 그 뿐인 줄 아는가? 아롯의 아이들이 배우는 모든 교과과정에서 세냐님을 존경하도록...”


“광장이랑 저택은 관광상품으로 써먹고 있잖습니까.”


“...그건...”


“게다가 아롯의 마법사들은 오래 전부터, 세냐님이 남기신 사역마를 학대했지요. 설마 사역마를 해부한 것을 학대가 아니라고 주장하실 셈입니까?”


“그... 건... 마법의 발전과, 세냐님의 행적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예. 그러한 변명은 나중에 분노해 나타나실 세냐님에게 직접 하시죠. 어쨌든 저는 세냐님에게 아카샤를 양도받았고, 그 분의 부탁으로 사역마를 거두었습니다.”


“...뭐라고?”


로베리안과 트렘펠 외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진은 보란 듯이 망토를 들췄다.


“정말 세냐님이 저 때문에 분노하셔서, 아브람을 수장시킨다고 하신 거예요?”


기다렸다는 듯이 메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감격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유진을 올려다 보았다.


“응. 내가 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세냐님이 얼마나 화를 내셨는지 알아? 난 진짜 구라 안치고, 무서워서 도망칠 뻔 했어.”


“날조를!”


콘렐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외침에 메르가 홱 고개를 돌렸다.


“날조라고요? 이 늙은이가! 날조는 당신이 하고 있죠! 여기 직접 학대당한 산증인이 있는데,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거야?!”


“크흠...!”


“위치크래프트의 사역마를 데리고 나온 건가? 어떻게? 아니, 그래도 되는 건가?”


호네인이 급히 물었다. 위치크래프트는 세냐의 전당의 핵심이고, 더 나아가 아크리온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보물이다. 사용할 수 없는 지팡이인 아카샤라면 몰라도, 위치크래프트가 소실되는 것은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예. 그래도 됩니다. 데리고 나온 것은 메르뿐이고, 위치크래프트는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사역마를...”


“어차피 메르가 세냐님의 전당에서 하는 일이라곤, 엘리베이터 문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현명한 세냐의 전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외치는 것 뿐이잖습니까?”


유진은 대수롭지 않단 듯이 말했고, 메르의 뺨이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망토 사이에서 몸을 꼼질대며, 유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니거든요. 저 그거 말고 하는 일 많아요. 청소도 하고, 책장 정리도 하고...”


“그건 너 말고 다른 무지성 사역마도 할 수 있잖아. 괜히 방해하지 말고 다시 들어가 있어.”


“유진님은 쓰레기에요.”


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다시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제가 아카샤와 메르를 가지고 나온 건 세냐님이 그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냐님이 저보고 아카샤를 가지라는데, 제가 어떻게 싫다고 거절하겠습니까? 그렇게 받은 것을 세냐님의 허락 없이 넘기는 것도 세냐님을 존중하지 않는 일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유진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자리에 앉은 모두가 알았다.


무슨 이유를 붙이건, 아카샤를 빼앗는 것은 현명한 세냐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


“...세냐님이 살아계신다니, 참으로 다행이로군요.”


발자크가 입을 열었다. 화자가 화자인 만큼, 모두의 시선이 발자크에게 향했다. 발자크는 그 노골적인 시선에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저 또한 한 명의 마법사로서 세냐님을 존경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직도 세냐님의 갑작스런 은거에 관해, 흑마법사와 유폐의 마왕님을 의심하는 자들이 여럿 있는데... 유진님. 이 자리에서 부디, 은거에 관한 진실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어쭈.


유진은 발자크를 빤히 보았다.


은거할 수밖에 없던 상처는 베르무트가 낸 것이고, 200년 동안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것은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의 습격 때문이다.


어쩌면 그 배후에 유폐의 마왕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냐는 배후에 대한 언급은 따로 하지 않았다. 역으로 발자크를 추궁할 수 있나? 그건 위험부담이 크다.


“...세냐님의 은거는 수행 때문이십니다.”


적당히.


“또, 헬무드가 책임지지 않고 있는 마병에서 엘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하...”


발자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마병에 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 사실은 알아주십시오. 유폐의 마왕님은 마병에 대한 책임으로, 헬무드에 귀화하는 엘프들에게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그건 제 알바가 아니죠.”


유진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사정은 알겠네.”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호네인이 입을 열었다.


“우선, 세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이 마도왕국 아롯의 모두가 기쁨을 누려야 할 일이라 생각하네. 설령 세냐님이 아롯에 분노하고 계실 지라도... 나는... 아롯의 왕세자로서, 세냐님의 생환을 기쁘게 맞이할 걸세.”


“세냐님이 왕궁을 수장시키려 들어도 말인가요?”


멜키스는 짓궂은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콘렐은 어깨를 흠칫 떨며 두눈을 부릅떴으나, 호네인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냐님의 분노는 타당하다 생각하네. 비록 수백 년 전의 마법사들이 저지른 일일 지라도, 아롯의 마법사들이 세냐님의 사역마를 학대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하지만... 왕자 전하. 아무리 세냐님이 아롯의 위인일 지라도, 왕궁을 위협하는 것은...”


“책임은 져야 하네.”


호네인은 콘렐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면. 궁정마법사단을 총 동원하여 세냐님과 맞서겠나? 만약 그리 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마법사들이 세냐님의 편에 설 것 같은가? 당장 다섯 마탑주들만 해도 세 명이 참전하지 않겠다 하였는데?”


“네 명입니다.”


잠자코 듣던 로베리안이 입을 열었다.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만. 저는 세냐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몸이니, 절대로 세냐님과 맞서지 않을 겁니다. 그건 녹탑주도 마찬가지일 터.”


제네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불꽃 같은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기만 했다. 유지는 그 눈에서 노골적이고 격한 질투를 느꼈다.


“...그렇다면 마탑 전원은 전력에서 제외해야 하겠군. 에트가드 공. 마법사 길드는 어떻소?”


“...왕가의 바람이라면... 저는 힘을 보탤 것입니다. 하지만 길드에 소속 된 마법사들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 부디 그를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해하다마다. 길드는 군대가 아니니 말이오.”


“아롯의 백성이 어찌...!”


콘렐은 주먹을 떨며 분노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콘렐의 말에 마음을 바꾸려 들진 않았다.


“...착각하지 마시오, 재상. 아롯은 세냐님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소. 세냐님도 그를 바라지는 않으실 거요.”


호네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부디, 세냐님이 왕가의 사죄로 분노를 누그러트리셨으면 좋겠군. ...유진 공의 생각은 어떻소? 세냐님이 정말로, 아브람을 수장시키실 것 같소?”


유진은 세냐의 성격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긴 했다.


“제가 잘 말씀드리면, 왕궁을 수장시키시진 않을 겁니다. 그냥 성벽을 조금 무너트리는 선에서 그치실 수도...”


“아롯은 아카샤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도록 하겠네.”


호네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세냐님의 사역마의 자유도 보장할 걸세. 그에 대한 증표로... 아롯의 시민증을 발급하도록 하지.”


“이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네요.”


멜키스가 킬킬 웃으며 말을 받았다.


“사역마가 시민증을 갖다니... 아,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고. 그냥 전례가 없는 일이니, 신기한 거야.”


“따로 바라는 것은 더 없는가?”


기분이 복잡했다.


호네인이 생각하기에, 유진에게 아카샤를 빼앗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억지를 부린다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럴 경우 유진과의 관계가 아예 틀어져 버린다.


호네인은 유진에게 많은 욕심을 갖고 있다. 10년 후, 왕위에 올랐을 때. 유진에게 궁정마법사단장 자리를 주겠다고도 약속했다. 구두로 한 약속이었지만, 그 약속에 거짓은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롯의 왕가가 보관 중인 위치크래프트의 후반 2권을 유진에게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아롯의 왕이 마법사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우다.


‘...잘 무마하여 아카샤를 넘겨주어 환심을 사려 했는데.’


현명한 세냐가 거론된 순간부터, 이 청문회는 유진을 신문하는 자리가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이쪽이 유진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아니. 세냐님에게서 아카샤를 양도받은 이상... 애초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


다만, 세냐가 직접 아롯을 뒤집어엎겠다는 말을 내뱉었단 것이 상황을 일방적으로 바꾸어버렸다.


호네인은 진심으로 이 자리에 부왕이 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결국 이 자리에서 확실히 된 것은,


마도왕국 아롯은 현명한 세냐와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


일국이 한 명의 마법사의 눈치를 본다는 것.


그건 왕이 직접 인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호네인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콘렐은 복잡한 기분을 넘어, 표정을 처참히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청문회도 아니고, 신문도 아니다. 으레 이런 자리라면 보다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이해를 따지고 국가의 실익을 우선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재상인 자신이 직접 온 것이다.


대체 뭔가? 어린애 말싸움도 아니고, 저쪽의 목소리가 더 크고 힘이 더 세니까 물러서는...


‘...정치의 본질이 그것이긴 하지.’


콘렐은 구겨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가 아닌 그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0년 전에 은거한 현명한 세냐.


그녀가 아직 살아있고, 그 시절보다 더욱 초월적인 마법사가 되었다면... 일국의 전력으론 감당할 수가 없다.


‘...신기하네.’


일이 쉽게 풀린 것은 좋지만,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뭐... 세냐 정도면 저렇게 대접 받을 만 하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 300년 전, 3명의 마왕을 쓰러트린 5명 중 하나. 유진이야 세냐에 대해서 너무 잘 아니까 쉽게 대하지만, 후대의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현명한 세냐’는 맞서는 것을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전설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럼 나는?’


우둔한 하멜.


‘이게 다 앞에 우둔한이 붙어 있어서 그래. 빌어먹을 세냐, 기왕 붙일 거면 우둔한 말고 좋은 말 많잖아? 최강의 하멜, 절대의 하멜, 수라의 하멜...’


하멜이 수라광살이라고 외치며 검을 휘두를 때, 하멜은 정말로 수라가 되어버린다.


모론의 평가가 떠올랐다. 제노스가 알려준 하멜식의 기술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최강의 하멜의 라이트닝카운터.


절대의 하멜의 데드엔드.


수라의 하멜의 수라광살...


유진은 더 참지 못하고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청문회


“시민증에는 이름말고 성도 적어야 하잖아. 그럼 네 이름은 메르 메르데인이 되는 거냐?”


놀림거리를 잡았다. 유진은 저것이 머리에 떠오른 즉시, 메르를 돌아보며 이죽댔다.


“메르메르메르데인.”


“...유진님은 참 대단하셔요.”


메르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중얼거렸다.


“전생에서 하멜님은 38살에 사망하셨죠? 지금 유진님은 20살이고요.”


“뭐 그렇지.”


“그럼 유진님의 나이는 전생을 합해 58살. 예순이 가까운데, 어쩜 그렇게 유치하고 어린애처럼 구실 수 있는 건가요?”


“트렘펠 위자도르는 나이가 일흔이 가까운데 나보고 하늘을 비행했으니 비행소년이라는 말을 해댔잖아.”


대답은 했는데, 속이 쓰렸다. 시엘을 향해 비행소녀라 말하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을 때가 떠올랐다. 유진은 언젠가 시엘과 다시 만나면, 그때의 실언을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씨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업지만, 메르 메르데인이 되어도 저는 아무 상관없어요. 메르는 세냐님이 직접 붙여주신 이름이고, 메르데인은 제가 정말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세냐님의 성씨잖아요.”


“네 이름인 메르가 메르데인에서 따온 이름일 걸.”


“...그럴 리가 없어요. 세냐님은 유진님이 아시는 것보다 훨씬 현명하고 사려 깊은 분이셔요. 제 이름이 메르인 것은, 분명 다른 의미가 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유진님이 세냐님의 생각을 어떻게 아실 수 있겠어요? 저는 메르 메르데인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유진님의 성을 따서, 메르 라이언하트가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니. 그것도 꽤 괜찮지 않은가? 메르는 잠시 입술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메르는 동화책의 내용을 신봉하고 있다. 그녀는 절대로 동화책의 저자가 세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화책... 그것도 초판본의 내용은, 메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과한 구석이 있었다.


아름다운 세냐. 귀여운 세냐...


‘...그 동화책은 세냐님의 추종자가 쓴 것이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것이 정답으로 합당했다. 드문 일도 아니잖은가.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와 동료들을 추종하는 사람은 지금 시대에도 아주 많았으니, 300년 전이라면 대륙 사람들 전체가 용사와 동료들을 추종했을 터.


‘유진님도, 세냐님도 동화책의 내용 자체가 완전한 허구라고는 하지 않으셨어.’


세냐, 난 널 좋아했어.


‘설령 유진님이 진짜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하멜님이 그런 유언을 남기도록 창작되었다면... 그런 기류가 흘렀다는 거겠지?’


메르는 세냐가 아롯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마법을 가르쳤던 3명의 제자. 제자들은 세냐가 고독하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했고, 세냐도 제자들에게는 마음을 열었었다.


세냐가 사적으로 교류한 것은 제자와 메르 뿐. 메르는 텅 빈 저택에서 몇날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마법 연구에 몰두하던 세냐를 기억한다. 달마다 파티의 초대장은 수십 통 씩 왔지만, 세냐는 초대에 응하기는커녕 초대장을 뜯어 본 적도 없었다...


‘...유진님은, 세냐님이 날 딸로 여길 거라고 말하셨어.’


메르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녀가 혼인할 때, 성씨는 가문의 위세로 선택된다. 현명한 세냐의 메르데인. 대륙 굴지의 명문가 라이언하트...


메르 메르데인이 되어버리면,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메르 라이언하트가 된다면? 그 이름을 갖고 세냐를 맞이한다면...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유진은 메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메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네, 네네네, 네에?”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멍 때리고 있냐고. 입에서 침까지 흘려대며.”


“아, 안 흘렸어욧.”


메르는 후다닥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정말로 침은 흐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건데. 정말 메르 메르데인으로 할 거야?”


“...메르 라이언하트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안 돼.”


“왜요!”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내가 본가에서 많은 예쁨을 받고 있긴 한데, 그렇다고 내 멋대로 네 성씨를 라이언하트로 할 수는 없다고.”


“유진님이 가주가 된다면 문제없지 않을까요?”


“내가 널 메르 라이언하트로 만들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가주를 해야 하냐?”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메르의 앞에 놓인 신분 등록 서류를 쳐다보았다. 메르의 이름은 아직 공백이었다.


“...아니면 로베리안님의 성은 어때? 로베리안님도 상관없다고 하셨잖아.”


“적탑주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성씨를 갖고 싶지는 않네요. 그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적탑주에게 미안한 일이고요.”


결국 메르는 메르 메르데인이 되었다. 상부에서 미리 연락이 된 덕에, 메르의 신분증은 바로 발급되었다. 메르는 두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의 신분증을 양손으로 들어올렸다.


“...인간이 된 기분이에요.”


“솔직히 나는 아무 차이도 모르겠다니까.”


“그건 유진님이 외면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다른 누구보다 유진님이 잘 아시잖아요. 저는 인간이 아닌 사역마에요. 제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유진님의 안에 제 구성술식이 새겨졌기 때문이라고요.”


메르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냐님을 제외한 그 어떤 마법사도 저만큼 인간다운 사역마는 만들 수 없겠지만, 저는 절대로 인간은 아니에요. 저는... 골렘과 비슷하죠.”


“...골렘?”


몇 년 전, 헤라가 만들었던 골렘을 떠올려 본다. 카브륨 광석을 써서 만들었다는 골렘. 그건 절대로 인간이라 할 수는 없었다.


“마법에서 ‘생명’을 만드는 것은 크나 큰 금기에요. 세냐님은 그 누구보다 마법사다우셨고, 오만했지만... 금기를 범하지는 않으셨어요.”


메르에게 피는 흐르지 않는다. 심장이나 다른 장기도 없다.


“움직인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니죠. 생명이란 곧 영혼이에요. 살아있는 모두가 가진 것. 제게는 영혼이 없어요. 제 인격은 세냐님의 유년기 인격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것.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 유진님은 제 구성술식을 몸에 담으셔서, 제게 자유를 주셨지만... 제 근원은 아직 위치크래프트에 남아있어요.”


유진은 메르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신분증만 해도 그래요. 진짜 신분증은 피와 연동되어 있죠. 피는, 살아있는 생명만이 흘릴 수 있는 거예요. 똑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기계장치에서 흐르는 기름을 피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넌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해.”


유진은 투덜거리며 메르의 머리를 헤집었다.


“인공지능?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너는 입력된 명령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 네 몸에 피와 기름은 흐르지 않지만, 대신에 마나가 흐르지.”


“...그게 뭐 어쨌다는 거예요?”


“아카샤의 주인이 되어 얻은 것.”


유진은 망토를 들춰, 아카샤를 보여주었다.


“내 의식과 연동해, 나 자신을 분석하고 익힌 마법들을 최적의 형태로 변형한다... 그건 쉽게 말하자면 이런 거야. 마법의 ‘이해.’”


“...”


“아카샤는 주인의 마법 이해도를 증폭시킨다. 절대적이지는 않아. 지금의 나로서는 널 구성하는 모든 술식을 이해할 수는 없어. 하지만 이건 이해할 수 있지. 마나는 생명의 근원이다.”


“...근원?”


“그래. 그렇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오직 살아있는 생명만이 피를 흘릴 수 있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네 몸에는 피 대신 마나가 흘러. 뼈와 살이 아니라 완벽할 정도로 결속되고 빚어진 마나가 네 몸을 이루고 있지.”


“...저는 그런 말로는 설득되지 않아요.”


“말했잖아. 아카샤 덕분에 마법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나는 네 술식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네 몸이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이해하고 있어. 그야, 보이고 있으니까.”


유진은 저릿거리는 눈을 얇게 뜨고서 메르를 응시했다.


“메르. 네 말대로 세냐는 누구보다 마법사답고 오만해. 하지만 금기는 범하지 않았지. 세냐의 유년기 인격을 베이스로 삼은 네가 엄격하듯이, 세냐는 마법에 관해서는 엄격하고 원칙을 중시했거든. 그러면서도 짓궂고, 어딘가 뒤틀려 있었지.”


그건 세냐 뿐만이 아니다. 마법사라면, 그 중에서도 대마법사라 불리며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려면 필연적으로 광기를 갖게 된다.


“세냐는 금기를 범하지 않는다. 금기를 기만하지. 넌 원칙적으로는 인간은 아니지만, 세냐는 널 금기를 침범하지 않고 기만하며 인간으로 만들었어.”


“...우윽...”


“메르 메르데인. 넌 그 사실과, 네 존재에 자부심을 가져야 해.”


“우우...”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떨린다. 메르의 눈동자에 촉촉하게 젖어간다. 유진은 그걸 빤히 보면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또 우냐?”


“...안 울어요.”“네 인격은 세냐의 유년기를 베이스로 한 거잖아. 네가 울보라는 건, 세냐도 울보였다는 거지?”


“그, 그건 아니에요. 저도 울보가 아니고, 세냐님도 울보가 아니세요.”


“에이, 울보 맞던데? 세냐는 나 죽던 순간에도 엄청 울었어. 나 죽은 뒤에도 엄청 울고. 나랑 재회했을 때도 울었다고.”


“...세냐님은 감수성이 예민하신 거예요. 마음이 너무 착하고 예쁘셔서, 눈물을 흘려야 할 때에 눈물을 흘리시는 거라고요.”


“그게 울보지 뭐.”


유진은 그렇게 놀려대면서 메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제야 나오셨군.”


커다란 선글라스는 얼굴의 절반은 가리고, 센스를 알 수 없는 털모자까지 썼다. 저기 삐죽 튀어나온 것은 여우 꼬리인가? 모피 코트. 목 언저리에서 풍성한 털이 고집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모자 아래에서 구불거리는 머리락을 배배 꼬았다.


“널 기다리고 있었지.”


멜키스의 눈은 유진이 걸친 흑암의 망토를 보았다. 본래 그녀가 소유했던 아티펙트. 너무 아끼던 것이라 좀처럼 입지 않았는데... 멜키스는 크게 숨을 들이키며 성큼성큼 유진에게 다가왔다.


“좀 헤진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전 주인이셨던 멜키스님도 아시다시피, 흑암의 망토에는 외형 수복 마법이 걸려 있잖습니까.”


“...전 주인? 그 망토는 내 거야!”


“아, 그랬었죠. 제가 3년이나 쓰고있다보니 그만.”


“...앞으로 6년 남았어.”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설마!”


멜키스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청문회가 끝난 것은 어제. 기회다 싶어서 유진에게 가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청문회가 끝나자마자 로베리안이 유진을 데리고 돌아 가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게 가버린 것이 잘됐다 생각됐다.


유진이 아롯에 온 지 벌써 며칠. 멜키스는 나름대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롯에 왔다는 소식은 첫날부터 알았고, 당장 찾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한껏 억눌렀다.


‘...내쪽이 아쉽다는 인상을 줄 순 없지.’


며칠을 참았으니, 이제는 슬슬 괜찮다고 생각했다.


“위니드는 잘 지내고 있겠지?”


“그럼 잘 못 지내고 있을까요.”


“얘도 참... 말을 얄밉게 받아치네.”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더 이상 멜키스님께 위니드를 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서로 귀찮고 피곤하잖아요? 저희 둘만 그런 것도 아니고, 위니드를 빌려드리려면 또 흑사자성에 보고하고, 그쪽이 참관인을 보내도록 해야 해요.”


“...얘, 꼬마야. 원칙적인 것은 좋지만, 마법사는 가끔은 원칙을 기만하고 조롱해야 해. 너는 라이언하트지만, 마법사이기도 하잖아?”


“푸흡.”


얌전히 멜키스의 말을 듣던 메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멜키스는 그 웃음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웃는 거야?”


“방금 전에 백탑주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들었거든요.”


“...아마 네가 한 말이겠지? 훌륭해. 마법사의 본질을 꿰뚫고 있구나.”


멜키스는 으스대는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꼬마야. 마법사는 영악해야 해. 원칙을 위반하지 않고, 원칙을 기만하며 제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네가 나한테 고작 며칠 위니드를 빌려주고, 서로가 입을 닫는다면.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거야.”


“뭔 말을 하시건 저는 위니드 안 빌려줍니다. 멜키스님의 말대로 저는 마법사지만, 라이언하트의 일원이니까요.”


“...설득은 안 되겠군.”


멜키스의 눈썹이 구겨졌다.


“뭐 좋아. 나도 일단 말해봤을 뿐이고, 확실히 말해두는데 별로 미련은 없거든?”


“다행이네요.”


거짓말이다. 엄청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고집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멜키스는 유진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대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마법사인데다 마탑주를 지내고 있는 만큼, 진귀한 아티펙트는 많이 가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흑암의 망토 이상의 아티펙트는 손에 꼽는다. 그건 멜키스의 마법무장이고, 혼에 귀속시킨 물건이라 빌려줄 수도 없다.


‘그 아래의 물건은 급이 안 맞아. 흑암의 망토를 빌려준 이상, 그에 상응하는 아티펙트가 아니면 흥미도 갖지 않겠지.’


미련은 남지만... 더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건 차선이다. 멜키스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럼 이건 어때?”


멜키스는 양손으로 유진의 어깨를 짚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금세기... 아니, 역사상 최고의 정령술사야. 장담하는데, 내가 죽어도 앞으로 최소 200년은 나에 버금갈 정령술사는 태어나지 않을 거야.”


“왜 하필 200년입니까? 의외로 구체적이네요. 긴 것 같으면서도 막연하진 않고.”


“얘는... 그걸 몰라서 묻니? 위대한 베르무트가 300년 전에 태어났잖아? 그 후 약 200년이 지나서 내가 태어났지.”


그러고 보니. 멜키스는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한 베르무트를 동경했었다.


“...아, 예. 그래서요?”


재수없는 꼬마 같으니. 너무 얄미워서, 잡고 있는 어깨를 짓이길 뻔 했다. 멜키스는 가까스로 힘에 제동을 걸며 웃었다.


“그런 내가 네게 정령술을 가르쳐주지. 너도 알겠지만, 이건 대단한 기회야. 네 스승인 로베리안이 대단한 마법사긴 하지만, 마법을 배우는 것과 정령술을 배우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자부할 만 했다. 멜키스는 두 명의 정령왕과 계약하면서, 마법사로서도 8서클에 오른 대마법사다.


“...정령술은 결국 자질이 전부 아닙니까?”


유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갖는 정령친화력. 거기에 마법적 자질이 더해진다면, 마나를 느끼기 시작한 순간부터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죠.”


“원래 천재란 재능으로 만들어지는 괴물이야.”


멜키스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네 말대로, 정령술은 자질이 전부야. 그건 부정 안 해. 내가 두 명의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번개와 땅의 정령에게 사랑받았기 때문이지. 그게 뭐? 너도 천재라 불리는 인간이잖아.”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천재는 범재를 이해할 수 없어요. 멜키스님은 태어나서 당연하게 정령을 다뤘지만, 저는 아닙니다. 그런 멜키스님이 제게 정령술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한 겁니까?”


멜키스는 유진의 어깨를 놓고서 물러섰다.


“...마법사로서의 실력을 따진다면... 그래. 나는 네 스승인 로베리안보다는 몇 수 처져. 그야 어쩔 수 없지. 내가 8서클의 벽을 넘은 것은, 정령술과 마법을 융화시킨 덕이거든. 하지만 꼬마야. 그렇기에 나는 유니크해. 네 스승보다 마법사로서 뛰어나지 않아도, 네 스승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어.”


“그러시겠죠.”


“너도 마찬가지지. 무가로 이름 높은 라이언하트의 천재. 뿐만 아니라 마법 자질까지 타고나서, 20살이란 나이에 5서클에 도달했어. 위니드 덕분에 바람의 정령도 부리고 있고.”


보란 듯이 세운 검지가 좌우로 흔들렸다.


“타고난 자질이란 것은 꽤 절대적이야. 노력이 천재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 순 있어도, 노력으로 천재가 될 순 없어. 그건 너도 이해하겠지, 꼬마야. 너는 무나 마법에 상응할 만한 정령 친화력은 타고나진 않았지만, 네가 이미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이상 정령친화력은 더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의 너는 마법을 쓰고, 정령을 다룬다. 그거면 충분해.”


유진은 답하지 않고 멜키스를 쳐다보았다. 멜키스는 방긋 웃으며 팔짱을 꼈다.


“정령술은 정령을 사용하는 것이지, 마법은 아니야. 무턱대고 칼을 휘두르는 것을 검술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주겠다는 거야. 이 세상에서 나 이상으로 정령마법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심은 있다. 멜키스는 유진에게 정령마법을 가르치며, 틈틈이 기회를 보아 위니드를 촉매로 써서 바람의 정령왕을 불러낼 심산이었다.


그 속내가 훤히 보였다.


[...하멜.]


유진의 머릿속에서 템페스트가 말을 걸었다.


[나는 저 여자가 싫다.]


‘왜?’


[너는 모르겠지만, 저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네가 내 동의도 구하지 않고 위니드를 빌려주었을 때. 저 여자가 위니드를 들고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몰라.’


[알몸으로 검에 몸을 비벼댔다! 설마 아직까지 그런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미신을 따르는 자가 있을 줄이야...!]


템페스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 미신?’


[촉매와 육(肉)을 가까이 하는 것이 영적인 감응을 촉발시킨다는 미신이다! 대정령사라는 것이 그런 미신을 믿을 줄은!]


그건 템페스트가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수십 수백 번 불렀는데도 답을 주지 않으니, 멜키스도 무식한 방법을 쓴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날 불러내겠다고, 탑의 꼭대기에서 알몸으로! 위니드를 휘둘러대며, 바람을 맞았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성을 꽥꽥 질러대면서 말이다!]


‘...’


[나는 저 여자가 싫다. 만약 또다시 저 여자가 위니드를 쥐려 든다면, 나는 다시는 네 부름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어디서 협박질이야? 응하지 않으면 뭐 어쩔 건데. 내가 아쉬워 할 것 같아?’


[...부름에는 응하겠지만... 저 여자는 싫다.]


템페스트는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대답은?”


멜키스는 자신만만하게 물었고,


“싫대요.”


유진은 곧장 대답했다.


멜키스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왜 싫어? 아니... 싫대요? 누가 네게 싫다는데?”


“템페스트가요.”


“...뭐?”


“말하는 것이 늦었는데, 저 바람의 정령왕이랑 계약했어요.”


유진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멜키스를 지나쳤다. 메르도 킥킥 웃으면서 유진의 뒤를 따라갔다.


멜키스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어느새 저만치 가버린 유진과 메르의 등이 보였다.


“어디가악!”


멜키스는 꽥 고함을 지르면서 유진의 뒤를 쫒아갔다.


청문회


마녀의 단잠.


적색마탑의 헤라가 펜타곤 제일의 디저트 맛집이라며 추천해준 곳이다. 예약은 받지 않는지라, 줄은 가게 밖까지 늘어서 있다만... 지위와 명성, 그리고 돈은 안 받는 예약도 받게 만드는 법이다.


“너무... 너무 예뻐요!”


전망 좋은 3층 창가. 메르는 각기 다른 접시에 올려 져 나온, 알록달록한 디저트들을 보며 눈을 별하늘처럼 반짝반짝 빛냈다.


“엄청 맛있어요!”


크림이 과할만큼 들어간 마카롱. 보는 것만으로도 달아보이는 크림에는 초콜렛 칩까지 잔뜩 박혔고, 매끈한 표면은 디저트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색깔이 화려하다.


메르는 그 두꺼운 마카롱을 야금야금 먹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안 뺏어 먹으니 좀 천천히 먹어라.”


“왜 천천히 먹어야 해요? 저는 빨리 먹어도 목에 걸리지도 않고, 체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입의 크기는 어쩔 수 없었다. 자그마한 메르가 입을 아무리 크게 벌린들, 그 입 안에 우겨넣을 수 있는 마카롱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빨리 씹고, 삼키고, 다시 먹는다. 메르에게 배부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먹는 모든 음식은 식도를 지나는 순간 마나에 분해되어 사라진다.


메르는 그렇게 만들어진 육체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맛있고 달콤한 것을 무한정 먹을 수 있고, 살도 찌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다양한 케이크를 눈앞에 두고 즐거운 고민을 하던 중. 메르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안 돼요.”


찰싹. 날파리를 쫒듯 매섭게 휘두른 손이 멜키스의 손등을 때렸다.


“이건 제가 주문한 거예요.”


“쪼잔하기는!”


멜키스는 눈을 부릅뜨고 메르를 노려보았다.


“쪼잔하지 않아요. 백탑주, 당신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에요. 저와 유진님은 당신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시는 뻔뻔하게도, 고집을 부리며 따라와 기어코 이 자리에 앉으셨죠.”


“...나는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야. 이 마법사의 나라에서, 내가 가지 못하는 장소는 아무데도 없...”


“참으로 뻔뻔하시군요. 그 백탑주라는 지위가 당신의 무례함을 책임져 줄 수 있다고 믿는 건가요? 설령 그럴지라도,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건 당신이 직접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이에요.”


메르는 초콜릿 크림이 층층이 쌓인 케이크를 포크로 베어냈다.


“물론, 저는 백탑주가 뻔뻔하다는 것은 28년 전부터 알고 있었죠.”


“...28년 전?”


“잊으신 건가요? 28년 전의 여름. 당신이 백탑주에 오르기 직전의, 처음으로 아크리온에 들어왔을 때.”


멜키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테이블에서의 대화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공간의 마나를 조작했다.


“호기롭게 위치크래프트에 다가간 당신은, 정확히 6분 21초가 지난 뒤에 코피와 소변을 지리면서 자리에 쓰러지셨죠.”


“...10분은 버텼어.”


“아뇨. 6분 21초였어요. 정확해요. 당대의 마탑주 중에서 위치크래프트를 접하고 소변을 지린 것은 백탑주 당신과, 청탑주 히리두스 우즐렌 둘 뿐이었어요. 그나마 청탑주는 11분을 버텼고요.”


“...”


“전 세냐님의 사역마로서, 요즘 시대의 대마법사들이 위치크래프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변을 지려버리느 것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자신이 흘린 분비물은 스스로 치워야죠. 그렇지 않아요? 청탑주는 치웠어요. 하지만 백탑주, 당신은 치우지 않고 도망가 버렸죠. 뻔뻔하게도!”


메르는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그 폭력적인 달콤함에 어쩔 줄 몰라 어깨를 바들바들 떨면서 멜키스를 몰아붙였다.


“내가... 백탑주인 내가...!”


멜키스의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았다.


“고작 케이크 하나! 먹으려 했다고! 이런 망신을 들어야 하는 거냐!”


“시끄러워서 원. 하나 드릴 테니 조용히 해주세요.”


메르는 표정을 콱 구기면서 먹던 케이크를 멜키스에게 밀어주었다.


“끼애애액!”


멜키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여러 번 들어 본 비명이었다.


“...거참. 밥상머리 앞에서 소변이니 분비물이니 하는 지저분한 이야기를...”


“유진님은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아요. 유진님은 백탑주보다 20년은 어린 나이에 아크리온에 들어왔고, 위치크래프트 앞에서 소변을 지리지 않으셨잖아요.”


“넌 그런 더러운 얘기를 하면서 케이크가 넘어가니?”


“이 케이크, 엄청나요. 달콤한데 달지 않아요. 혀 위에서 끈적거리지 않고 산뜻하게 사라져요. 여기, 이 층층이 쌓인 영롱한 크림을 보세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마법이야. 이 가게의 파티시에르는 제빵 마법의 특허권을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다고. 언뜻 같아 보이는 크림이지만, 그 하나하나가 마법이 가미되어 다른 맛을 내는 거지.”


멜키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설명해 주었다.


“...어쩐지.”


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을 힐긋 보았다.


“그래서 유진님이 저렇게 죽일 듯한 눈으로 케이크를 노려보고 계시는 거군요.”


“...그냥 먹고 싶어서 노려보는 거 아니야?”


아니다. 유진은 메르가 감탄하는 디저트의 단맛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전생부터 달콤한 디저트보다는 느끼하고 짜고 매운 음식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노려보는 것은.


“...흐음...”


유진은 눈을 찡그리면서 손을 망토 안으로 넣어, 아카샤를 쥐었다.


“흐으음...”


마나가 움직인다. 멜키스는 유진이 하려는 짓을 깨닫고, 흥미를 느꼈다. 특허로까지 등록된 마법. 이런 종류의 마법은 남과 공유되지 않는다. 마녀의 단잠이 펜타곤 제일이라 불리는 것은, 다른 경쟁자들이 이 가게의 맛을 따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술식은 알려져 있지 않아. 애당초 맛의 변형 마법은 업계 종사자가 아니고서는 접하지도 않닌 비주류 마법이고.’


그리고 어렵다. 굳이 분류를 나눈다면 인챈트 쪽에 속하는데, 흔히 인챈트를 사용하는 도구나 무기완 달리 음식은 너무 약한 소재다. 마나의 조절과 술식이 살짝만 틀어져도 형태가 붕괴하거나 썩고, 맛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실용적이라면 실용적이지만, 들이는 노력에 비해 마법의 한계가 명확하지. 결국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뿐... 저 녀석, 그런 마법도 익혀둔 건가?’


역시. 젊어서 그런지 혈기가 넘치나. 멜키스는 피식 웃으며 홍차를 홀짝였다. 탐구와 실험은 마법사가 갖춰야 할 덕목. 설마 이 가게의 마법 술식을 알고 있을 리는 없고, 다른 술식을 더해보고 싶은 모양인데...


‘비웃어주지.’


당연히 실패할 것이다. 그토록 쉽게 되는 마법이라면 이 가게가 장장 십 년 동안 정점에 군림하지도 못했을 터. 멜키스는 유진을 위한 비웃음을 가득 장전했다.


“...흠.”


유진의 손가락이 케이크를 어루만진다. 자그마한 반짝임. 멜키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다른 마법술식이 더해진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서로 다른 술식이 충동해, 케이크가 붕괴했을 것이다.


‘같은 술식이 더해졌어?’


멜키스는 급히 뻗은 손가락으로 케이크를 푹 찔렀다. 그걸 보던 메르의 얼굴이 처참히 구겨졌다.


“더럽게!”


멜키스는 그 지적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붕괴되지 않아. 맛은?’


손가락으로 퍼 올린 크림을 입에 넣어 본다. 맛은 극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약간의 부조화... 그럴 지라도 놀라운 일이다. 대체 어떻게? 멜키스는 입안에 남은 ‘맛’이 아까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분석하며 유진을 응시했다.


“이 가게. 단골이야?”


“처음 왔어요.”


“방금 마법은?”


“보고 따라한 거죠 뭐.”


“...그 말이 마법사로서 얼마나 터무니없이 들리는지 알고 있지?”


“생각만큼 쉽지는 않네요.”


유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고작 케이크 하나에 걸리는 마법이라고 무시했는데.”


“...너나 내 관점에서는 도저히 대단한 마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 그렇지만 하찮은 마법은 아니야. 이런 종류의 마법은, 서클 자체는 낮더라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깊은 숙련도를 요구하니까.”


멜키스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서 턱을 당겼다.


“...보고 따라했다. 미리 술식을 봐뒀을 리는 없고... 아카샤의 능력인가?”


“대부분의 마법은 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유진은 제 눈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몇 번 확인해 봤는데, 5서클까지는 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6서클부터는 잘 안되고.”


“...잘 안된다라.”


멜키스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렇다는 건, 일단 마법을 느낄 수 있다는 거잖아. 그게 설령 네 서클보다 상위 마법이라 해도 말이지.”


“그렇죠.”


“...간단하게 대답할 일이 아니야, 꼬마. 마법전투에서 상위 마법의 기척을 간파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이점인지 몰라서 그래?”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히죽 웃기만 했다. 멜키스는 그 웃음에 꺼림칙한 두려움을 느꼈다.


유진 라이언하트. 저 꼬마는 지금 당장은 멜키스의 적수가 아니다. 멜키스가 아무리 위엄 없이 군들, 그녀는 두 명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대정령사이자, 8서클에 오른 대마법사다.


‘...이제 고작 20살.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할 만한 무재에, 적탑주의 제자이자 고작 3년 만에 5서클에 오른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


아카샤의 주인까지 되었으니, 유진의 마법 경지는 더욱 빠르게 오를 것이다. 멜키스는 당장 1년 뒤의 유진이 몇 서클의 마법사가 되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저 녀석은 자기보다 상위서클의 마법까지 펼칠 수 있어. 내 급은 무리겠지만... 어쩌면... 마법뿐만이 아니라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하면, 7서클 까지는 상대할 수 있을 지도 몰라.’


라이언하트의 인물에게는 실례되는 표현일 지도 모르지만, 멜키스는 유진의 재능이 악마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와 재능... 솔직히 탐이 난다. 누구나 저만한 재목을 보면 매료될 것이다. 멜키스는 입맛을 다시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적탑주의 제자만 아니었어도 확.’


남의 제자를 뺏을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돈독한 관계가 되어 나쁠 것은 없다. 멜키스는 재능 넘치는 후배를 짓밟는 고약한 취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재능에 조금 도움을 주어, 언젠가 유진의 덕을 보고 싶었다.


“정령마법을 가르쳐줄게.”


멜키스는 고민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계속 거절했잖아요. 템페스트는 멜키스님을 싫어해요.”


“...그건... 굉장히...! 가슴이! 아프지만!”


멜키스는 뿌득 이를 갈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대가없이! 정령마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야. 나도 싫다는 정령왕한테 억지를 부려 계약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약속할게. 위니드에 손을 대지도, 네가 불러낸 템페스트에게 껄떡대지도 않을 거야.”


“...껄떡댄다는 표현은 참 그렇네요.”


“아 어쨌든! 이 멜키스 엘하이어가, 네게 아무 대가없이 정령마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저는 대가없는 호의는 잘 믿지 않는데.”


유진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얄미운 꼬마 같으니. 멜키스는 마주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사실 대가를 아주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 내가 네게 베푸는 만큼, 우리의 관계가 보다 친밀해지기를 바라.”


“저는 멜키스님과 지금도 아주 친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정령마법 안 배울 거야?”


“가르쳐 주신다면 감사히 배워야죠.”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유진의 대답에 멜키스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당장은 무리고, 내가 조만간 널 찾아가도록 할게.”


“왜 당장은 무리인데요?”


“내 정령마법은 번개와 땅의 정령을 다루는 것이고, 너는 그 정령과 계약하지 않았잖아. 아마 너는 땅의 정령보다는 번개의 정령과 계약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네게 번개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은 없어.”


“그래서요?”


“아까도 말했지?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한 이상, 정령친화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나처럼 번개의 정령왕과 계약하는 건 무리지만, 번개의 중급 정령까지는 계약할 수 있어. 내가 촉매를 마련하고, 계약을 주선한다면 말이지.”


유진은 당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번개의 정령은 강력하지. 중급이라고는 해도, 네 능력과 조합한다면 탁월할 거다.]


템페스트가 머릿속에서 거들고 나섰다.


[특히, 네가 가진 무기인 뇌광궁 페르노아. 번개의 정령이 더해진다면, 위력은 증폭되면서 마나의 소모도 줄일 수 있을 거다.]


‘그렇겠지.’


[하멜. 당장 네 기술 중에 라이트닝카운터도 있지 않은가? 그 기술에 번개가 더해진다면, 말뿐인 라이트닝이 아니라 진짜 번쩍이는 라이트닝카운터가 완성될 것...]


‘아가리 닥치지 못해?’


유진은 얼굴을 확 일그러트리며 망토 안으로 위니드를 처박았다.


“...저도 마냥 아롯에 있지는 않을 거거든요. 청문회도 끝났고, 오늘이나 내일쯤 돌아가려 했는데.”


“돌아가면 되지,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 라이언하트 본가에 있을 것 아냐? 마침 잘 됐어. 나도 너희 본가에 있다는 엘프들에 대해서는 흥미가 있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엘프보다는 엘프와 함께 데리고 왔다는 나무들에게 흥미가 있다. 대수림 깊은 곳에서부터 가지고 왔다는 것을 보면, 엘프의 영지 근처에서만 자란다는 요정목이 틀림없으리라.


‘매달려서 조르다 보면 가지 하나쯤은 꺾어 줄 지도 몰라.’


요정목의 가지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소재다. 현재 유통되는 것도 극히 드물고, 그마저도 이미 1차 가공이 끝난 것이 대부분이다.


“유진님.”


유진과 멜키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메르는 그 많던 디저트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냅킨으로 톡톡 두드려 닦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저 더 먹어도 되나요?”


“...안 질리냐?”


“유진님. 저는 200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어요. 그런 제가 고작 케이크 몇 개 먹었다고 맛에 질릴 것 같으세요?”


“고작 케이크 몇 개가 아닌데...”


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빈 접시들을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먹지 말라고는 할 수 없었다. 유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메르는 방긋 웃으며 유진의 팔에 매달렸다.


“감사해요!”


멜키스는 뚱한 눈으로 메르를 응시했다. 현명한 세냐의 사역마. 멜키스가 기억하는 메르는, 저렇게 활발하고 깜찍하지 않았다. 사실 그건 멜키스가 세냐의 전당에서 오줌을 지린 탓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멜키스는 자신을 대하는 것과 천차만별인 메르의 태도에 심통한 기분을 느꼈다.


‘...사역마도 여성체니까... 잘생기고 어린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아니, 저 태도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딸이 아빠한테 아양을 떠는 것만 같은...


‘...아니... 저 사역마, 존재한 햇수로 따지면 200년이 훌쩍 넘잖아.’


유년기 인격을 베이스로 한 만큼 정신연령이 고정되어 있긴 하다만... 멜키스는 복잡한 의문을 느끼며 뺨을 긁적였다.


“여기 있었군.”


추가 주문을 위해 점원을 부르려는데, 누군가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한가로운 모습이 보기 좋군. 유진 라이언하트.”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멜키스는 눈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녹탑주. 내가 지금, 당신에 대해 꽤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


“무례하다 꾸짖지 않겠네. 자네의 생각이 아마 맞을 테니까.”


“...하! 진심이야? 청문회도 끝났고, 아롯의 왕가가 인정한 마당에...”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제네릭은 유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설령 세냐님이 자네를 인정하고, 아카샤의 소유권을 넘겼다고 해도. 오스먼의 가주이자, 녹색마탑의 주인인 나는 자네를 직접 확인해야 하네.”


“추해.”


멜키스가 비웃음을 토했다.


“나는 당신의 자부심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제네릭 오스먼.”


현명한 세냐는 3명의 제자를 두었다.


그 중 1명은 로베리안의 대스승이자, 전전대 적색마탑주를 지지냈다.


나머지 2명은 녹색마탑에 남아, 서로 혼인하여 자식을 낳았다. 그것이 오스먼 가문이다. 둘의 자식은 전대 녹탑주를 지냈고, 그 아들이 당대의 녹탑주인 제네릭 오스먼이다.


즉, 제네릭은 아롯에서 가장 현명한 세냐에게 가까운 혈통의 주인이었다. 그래서 제네릭은 로베리안을 적대했다. 로베리안만 없다면 이 아롯에서 현명한 세냐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스먼 가문 뿐이다.


...유진이 아카샤의 주인이 되고, 세냐의 후계자가 되어버렸으니, 오스먼 가문은 더 이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세냐님을 거스를 셈입니까?”


유진은 자리에 일어서지 않고 제네릭을 응시했다. 허나 제네릭은 물러서지 않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나는.”


제네릭이 입을 열었다.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라면,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여야 한다고 생각하네.”


“추해.”


멜키스가 내뱉었다.


“그리고 오만하군.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 설마, 네가 그런 마법사라고 자신하는 건가?”


ㅡ파직.


멜키스의 주변에서 전류가 흘렀다.


“이 날 앞에 두고?”


그녀는 적의를 숨기지 않고 제네릭을 노려보았다. 매서운 시선이었지만 제네릭은 위축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당장은 무리지만, 자네가 바란다면 언제든지 서열잡이를 해주지. 멜키스 엘하이어. 나는 자네가 존경받아 마땅한 마법사라고 생각하지만, 나보다 위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아하하! 너무 늙어 노망이라도 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ㅡ 당장 밖으로 나왓!”


“말했을 텐데. 당장은 무리라고.”


제네릭의 눈이 싸늘히 얼어붙었다.


“오늘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자네와 나의 우위가 아닐세. 유진 라이언하트와 나. 둘 중 누가 더 세냐님의 후계자에 어울리는가?”


“당신에겐 그를 주장할 자격이 없어요. 녹탑주.”


아까만 해도 방긋방긋 웃었지만, 메르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녀는 차갑게 경직된 얼굴로 제네릭을 마주했다.


“애당초 당신이 자격을 걸고넘어지는 것도 오만하고 우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아무런 자격도 없기 때문이죠.”


“...뭣이?”


“당신도, 당신의 부친도. 세냐님의 후계자를 자처할 자격이 없단 말입니다. 당신의 조부인 바이스 오스먼과 조모인 프릴라 헬렌은 세냐님의 제자였지만, 그렇다 해서 둘의 자식이 세냐님의 후계자를 자처할 수는 없단 겁니다.”


“...”


“차라리 저는 적탑주 로베리안 서피스가 세냐님의 후계자를 자처해도 옳다 생각합니다. 적어도 로베리안과 그 스승은 세냐님의 사역마인 저를 존중해 주었으니까요.”


“한낱 사역마 따위가...!”


“예. 저는 한낱 사역마입니다. 그게 사실일지언정, 당신이 세냐님의 후계자를 자처한다면 저를 그렇게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겁니다. 저는 120년 전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절 어떻게 해체했는지. 위치크래프트의 근원을 파헤치겠다며 얼마나 주제넘게 굴었는지.”


제네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아버지는 세냐님을 위해 그런 것이다. 그 분이 남긴 위치크래프트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세냐님을 위한 애도였을 테니!”


“애도? 세냐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살아서, 유진님을 후계자로 인정하셨지요.”


“그만.”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녹탑주님이 하시는 말은... 제가 아카샤의 주인으로도, 세냐님의 후계자로도 어울리지 않다... 이거 아닙니까?”


유진은 의자를 젖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그러한 주장은 달게 받겠습니다. 정통성이고 뭐고, 일단 제가 녹탑주님보다 ‘당장은’ 부족한 마법사인 것이 사실이니까요.”


“...당장은?”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보다 못해도 오십 년은 사신 분이, 이 어린놈의 자격을 묻는 것도 추하고 부끄러운 일이잖습니까.”


유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솔직히 저는 녹탑주님이 뭐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가 녹탑주님보다 부족한 마법사니까, 아카샤를 넘기라 이겁니까? 진심으로 그게 옳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아니면 욕심과 질투에 눈이 멀어, 존경한다는 세냐님께 반기까지 들어대며 아카샤를 빼앗고 싶으신 겁니까?”


유진은 그렇게 물으며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그 고집이 정말 녹탑주님이 생각하기에 옳은 겁니까? 녹탑주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모두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당장 아롯의 왕가는 어떻게 납득시키실 겁니까? 그들은 세냐님이 아브람을 수장시키는 것이 아닐까 근심하고 있을 텐데?”


“...세냐님도 마법사.”


제네릭은 부릅 뜬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세냐님은 자네를 만났지만, 나를 만나지는 못하셨지. 내 능력이 자네보다 출중하다면, 그래도 세냐님이 자네를 후계자로 삼았을까?”


“그래서 뭐 어쩌자고요?”


“대결을 하지.”


제네릭은 들춰진 망토 안을 보았다. 아카샤. 그 지팡이가 유진의 손에 닿아 있었다.


“물론, 자네와 내 실력에 큰 차이가 나니 대결은 정당할 수 없지. 그러니 나 자신에게 제한을 걸어, 6서클까지의 마법만 사용하겠네.”


“그럼 저는?”


“자네는 가진 모든 능력을 사용하게. 라이언하트의 무술도 좋고, 마법도 좋아.”


8서클의 마법사가 6서클까지의 마법을 사용한다 해서, 그 실력이 6서클이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위 서클의 마법이라도 쓰기에 따라 상위서클의 마법에 준할 수 있다. 애당초 8서클은 강력하고 많은 마법을 구사하여 도달하는 위치가 아니다.


마법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느냐. 그래서 8서클의 벽은 높고, 그 벽을 넘은 자가 대마법사라 불리는 것이다.


“제가 거절한다면?”


“거절할 건가?”


“설마요.”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테이블 위에 구겨진 냅킨을 들었다.


“제가 패배한다면, 아카샤는 아크리온에 두고 가겠습니다.”


“...나한테 양도하게.”


“아뇨. 그럴 순 없습니다. 이건 세냐님의 것이고, 제가 맡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 말에 제네릭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무어라 더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를 내진 못했다.


메르가 입가를 닦았던, 생크림에 얼룩진 냅킨이 제네릭의 가슴팍에 던져졌다.


“녹탑주님의 억지에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가슴에 맞은 냅킨이 아래로 떨어진다.


“만약 제가 이기면, 메르한테 사과하십시오.”


“...이...”


“무릎을 꿇고. 고개도 숙이고. 아주 정중하게.”


제네릭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녹탑주


널찍한 공중마차의 안. 메르는 유진의 곁에 앉아 괜히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상황 자체가 메르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카샤는 세냐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치크래프트도, 세냐의 전당에 있는 모든 것도 세냐의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왕립도서관 아크리온에 있다지만, 아롯의 왕가는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아롯은 세냐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마도왕국 아롯의 역사는 길다. 아롯의 시조 마법왕은 고대마법의 극에 달한, 인류 최초의 ‘대마법사’라 불린다. 그 이후로 아롯에는 여러 위대한 마법사가 배출되었다.


허나 그 어떤 마법사도, 세냐처럼 ‘마법’이라는 학문 전체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세냐처럼 인간의 몸으로 마왕을 쓰러트리지도 못했다. 아롯이 마도왕국이란 이름을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헬무드에서 돌아 온 세냐가 아롯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 후 300년. 수많은 마법사와 마법사를 꿈꾸는 이들이 세냐를 동경해 아롯에 정착했다. 그것은 세냐가 은거한 후로도 쭉,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왕가는 납득했어.’


메르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물론 그 납득은, 아브람을 통째로 수장시킨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납득은 한 것이 중요하다.


‘애당초 호네인 왕세자는 아카샤를 넘길 생각이었던 모양이고. 재상 그 늙은이가 붙들고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보다 매끄럽게 인계되었겠지.’


그렇게 끝났어야 할 일이다.


“...유진님.”


메르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유진님은 굳이 녹탑주의 고집에 어울릴 필요가 없었어요.”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 그는 선민의식에 찌든 마법사다.


그건 제네릭의 아버지인 전대 녹탑주도 그랬다. 메르는 그가 얼마나 고약하고 끔찍한 마법사였는지를 기억한다. 그는 마법과 세냐님을 위한 것이라며 왕가의 동의를 얻고, 철저하게 메르를 사역마로, 아니, ‘물건’으로 대했다.


아롯은 아카샤의 인계를 인정했지만, 제네릭은 인정하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주입받은 ‘혈통’에 관한 자부심이, 제네릭으로 하여금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제네릭은 자신이야말로 현명한 세냐의 정통한 후계자라 믿고, 주장해 왔다. 자신이 사용할 수도 없는 아카샤가, 언젠가 자신이 쥐어야 할 마법지팡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녹탑주가 아무리 짜증을 내고 분노한들, 그에게는 아카샤의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없었다고요. 강제로 빼앗을 방법도 없고요.”


“그렇겠지.”


“애당초 결투라는 것부터가 부조리하고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유진님이 거절한다 해도, 누구도 유진님을 겁쟁이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한참 어린 후배에게 결투를 강요한 녹탑주를 한심하다 여기겠죠.”


“응.”


“...도저히 녹탑주가 물러서지 않으려 했어도, 결투할 필요가 없었단 말이에요. 적탑주가, 아니, 녹탑주를 제외한 마탑주 전원이 유진님을 지지할 테니 말이에요. 참 우습게도, 세냐님의 정통한 후계자를 자처하는 녹탑주보다 다른 마탑주들이 세냐님을 더 존중하는 거죠.”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기만 했다. 그 맞은편에 앉은 메르는 불안 가득한 눈으로 유진을 보며,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메르는 유진의 태도가 돌변했던 순간을 기억했다. 제네릭이 갑작스레 나타탔을 때. 유진은 대화를 주도하지 않았다. 제네릭과 설전을 벌였던 것은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와 메르였다.


‘한낱 사역마 따위가...!’


제네릭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그렇게 내뱉었을 때. 유진의 표정이 바뀌었다. 제네릭의 아버지가 메르를 해체하고, 위치크래프트의 근원을 파헤친 것을 말했을 때.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저 때문인가요?”


메르는 머뭇거리며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설 필요가 없던 일이다. 메르는 유진을 움직이고 싶어서 저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한낱 사역마 따위? 그딴 말,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유진은 메르를 사역마 따위가 아니라 말해주었지만, 메르는 이미 저런 말과 취급을 질릴 만큼 들어왔다.


그러니까. 한 번 더 들어도 상관없는, 하찮은 말이란 말이다. 세냐가 정말로 자신을 딸로 여겼다면. 그리고 유진이 자신을 단순한 사역마가 아니라 인간이라 말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냥.”


유진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녹탑주 그 새끼가 꼴 받게 하잖아.”


유진은,


하멜은 이런 성격이다. 일단은 참으려 해 봐도,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선’을 상대가 넘어버리면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다. 욱하고 치민 성미가 무언가를 저질러 버리고 만다.


7년 전에도 그랬다. 혈계식 때문에 처음 라이언하트의 본가에 갔을 때. 그때의 유진은 본가의 쌍둥이와 불필요한 시비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이 제하드를, 아버지를 운운했을 때. 참지 못하고 결투를 받아들였다.


“...푸흡!”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멜키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배를 잡고 낄낄대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네 말대로 녹탑주 그 새끼가 널 꼴 받게 했지.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 놈이 왜 하필 오늘 찾아왔을 것 같아?”


“로베리안님이 부재중이시니까요.”


“맞아. 아마 적탑주가 마탑에 남아있었다면, 녹탑주가 널 찾아와 결투하자는 둥 헛소리를 해댔을 것 같아? 그 새끼, 아마 내가 너랑 있는 것 보고도 내심 갈등을 엄청 했을 거야.”


“그래도 결국 다가와서 헛소리를 해댔잖아요. 아, 그건 백탑주님을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해서인가?”


“...흐흐! 만약 그런 것이라면, 제네릭 그 새끼는 진짜 병신이야. 장담컨대, 당대의 마탑주들 중에서 제네릭보다 못한 마법사는 아무도 없어. 마탑주 뿐만이 아니지. 트렘펠 위자도르, 그 양반은 제네릭을 10분 안에 족칠 수 있을 걸?”


유진은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유진이 느낀 트렘펠의 인상은 그만큼 대단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예전부터 유진공, 유진공 하면서 뒤따라 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재미라곤 쥐뿔도 없는 농담을 던지는 늙은 마법사. 그런 사람이었다.


“...음. 꼬마, 네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데. 트렘펠 그 늙은이는 보기완 달리 꽤 대단한 사람이야. 애당초 궁정마법사단, 그 정점에 선 사단장이라는 건 아롯 제일의 전투마법사라고.”


“보기완 다르군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그 분야에서 더 올라갈 자리도 없고, 전시상황도 아니니 유해진 거지. 어쨌든, 제네릭이 내가 동석한 상황에서 들이밀고 온 건 너와 내 관계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테지.”


“만약 제가 거절하고, 녹탑주가 계속 강요했다면. 백탑주님은 제 편을 드셨을 겁니까?”


“물어볼 가치도 없는 질문이지. 하지만 넌 거절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내가 여기 함께 있는 거고.”


멜키스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


“마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 그런 마법을 익혀, 대마법사의 자리를 꿰찬 마법사라면 각자 유니크한, ‘시그니처(Signature)’라 할 만한 마법이 있어. 너도 알지? 적탑주의 ‘판테온(Pantheon).’”


“알죠. 배우지는 못했지만요.”


“네가 그 마법을 계승받으려면 진짜 8서클에 올라야 할 걸. 그건 적탑주의 판테온 뿐만이 아니야. 대마법사의 시그니처는 죄다 8서클이 아니고서는, 아니, 8서클에 올라도 흉내 내기 불가능한 초고난이도의 마법들이지.”


적색마탑이 대표하는 것은 소환마법. 그 탑주인 로베리안은 현존하는 마법사 중 제일의 소환술사다. 그의 시그니처인 판테온은, 그 하나하나가 재해에 준하는 소환물을 모아놓은 만신전이다.


“제네릭의 시그니처는 ‘위그드라실(Yggdrasil).’ 자기 몸을 거대한 나무로 바꾸는 마법... 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아니, 꽃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까. 안 어울리지?”


“네.”


“그래도 우습게 볼 마법은 아니야. 위그드라실이 지속되는 순간의 제네릭은 굉장히 상대가 까다롭거든. 고속과 다중영창. 그건 당연한 거고... 특히 까다로워지는 건, 제네릭이 뿌리박은 땅 전체가 놈의 지배 하에 떨어진다는 거야.”


멜키스는 히죽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어림잡아서 펜타곤의 절반은 제네릭의 지배 하에 떨어질 걸? 터무니없지? 8서클 대마법사란 그런 존재야. 네가 지금 결투하는 것이 그 대마법사 제네릭 오스먼이고.”


“하지만 저와의 결투에서 그 잘난 시그니처는 못 쓸 것 아닙니까?”


“그렇지. 위그드라실은 8서클, 제네릭의 오리지널 마법이니까. 하지만 그 하위마법까지 제한되는 것은 아니잖아?”


멜키스는 의도적으로 미소를 지우고, 유진을 응시했다.


“제네릭은 여러 가지 오리지널 마법들로 위그드라실을 완성했어. 그렇게 완성 된 위그드라실은 8서클. 직전의 마법이 6서클인 디바인트리. 아마 제네릭은 시작부터 그 마법을 사용할 거야.”


“치사하긴. 그래서 6서클로 제한을 건 건가?”


“그렇겠지. 적당히 양보해주면서도 마법사로서의 격을 내세워, 널 찍어누르고 싶을 테니까.”


“디바인트리가 어떤 마법인데요?”


“위그드라실의 축소판이지. 고위 마법을 난사할 순 없겠지만, 결투 장소의 땅은 제네릭의 지배를 받게 돼.”


“뭐. 하늘을 날면 되겠네요.”


“...그거 농담이지? 너보다 고위 마법사를 상대로 하늘을 날겠다고? 날아오른 순간 디스펠 당해서 땅에 처박힐 걸.”


“그건 해 봐야 아는 거고. 거 용기를 북돋아주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겁을 주시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포기하란 말이야.”


멜키스는 몸을 기울여 유진을 가까이서 보았다.


“꼬마. 난 네 혈기가 마음에 들어. 녹탑주 그 새끼가 고깝게 굴었으니, 놈에게 발끈해도 돼. 하지만 진짜 결투를 해서 네가 얻을 게 뭐지? 너보다 뛰어난 마법사에게 겁먹지 않고 대결에 응했다는 명예? 그 명예가 아카샤만큼 가치 있나?”


메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이 결투가 성사된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네가 지금이라도 결투를 무른다 할 지라도 널 비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야. 넌 아직 어리니까 말이지. 제네릭이 그거로 지랄하면? 내가 막아줄게. 왜? 내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어차피 제네릭 그 새끼는 진심으로 나와 싸우려 들지 않을 걸. 나도 마찬가지고.”


멜키스는 피식 웃으면서 제 뒤편을 가리켰다. 저 앞의 공중마차에는 제네릭이 타고 있다.


“내가 그 새끼랑 마주서서 말싸움이나 하고 있으면, 아브람에 가있던 적탑주가 눈깔을 뒤집고 달려올 거야. 다른 마탑주들도 그럴 거고. 상황이 그렇게 되면 제네릭도 더 고집을 부릴 수는...”


“혈기 때문에 결투에 응한 건 아닙니다.”


유진이 입을 열었다.


“납득하지 못한다기에 납득시키고 싶은 겁니다. 메르한테 사과도 시키고 싶고.”


“...유진님, 저는 괜찮...”


“내가 안 괜찮아. 그러니까 조용히 있어. 메르, 넌 ‘날’ 알잖아. 나 성격 개같아. 고집도 세고. 남이 하는 말 귓등으로도 안 처먹는 쓰레기 맞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유진은 히죽 웃으며 메르의 머리를 헤집었다.


“명예와 아카샤?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아카샤가 더 가치 있죠. 그렇다고 명예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전 명예 운운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나 자신한테 말이에요.”


“...그런데 왜 결투를 받아들인 거야?”


“빼앗기지 않을 거니까.”


유진은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사용하는 마법은 6서클까지. ‘마법만.’ 그렇죠? 저는 마법에 속하지 않는 여러 가지를 할 줄 압니다. 당장 내가 바람의 정령왕을 불러낸다면. 그 존재의 격을 서클로 정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정령은 정령이고, 서클은 서클인데 어떻게 정해요?”


“...흠.”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있는데. 질 것 같았으면 그 조건의 결투에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멜키스가 저리 말하는 것은 이해한다. 유진이 잘났듯이,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도 충분히 잘난 사람이다. ‘마법’ 대결이라면 유진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네릭을 이길 수 없다. 솔직히, 제네릭이 6서클이 아니라 5서클의 마법만 쓴다 해도 마법대결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건 마법대결이 아니다. 결투. 심지어 제네릭은 유진에게, 가진 모든 능력을 사용해도 좋다고 말했다.


라이언하트 본가. 그곳에서 인정받는 무재. 그래봤자 20살. 경험이란 나이에 구애받는다. 특히 ‘싸움’은 그렇다.


제네릭이 보았던 유진은 어떤가?


아롯에서 지낸 3년. 유진은 아크리온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나하마에서 어쌔신과 모래술사를 몰살시킨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사마르에서 바랑과 싸운 것도 알려지지 않았고, 엘프들을 데리고 탈출하는 것에는 조란 부족의 도움을 받았다.


제네릭은 유진을 모른다.


그가 300년 전, 위대한 베르무트의 동료였던 우둔한 하멜이라는 것을 모른다. 지금의 유진에게 마법은 중심이 아니다. 그는 전생부터 전사였고, 지금도 그렇다. 마법은 어디까지나 수단 중 하나일 뿐. 제네릭이 유진보다 우월한 마법사라고 해도.


6서클이라는 제한은 무지하고 오만한 것이다.


“결투다.”


공중마차에서 내린 제네릭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는 마중 나온 녹색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재빨리 명령을 전했다.


“결투는 관중이 많아야 흥이 나는 법이지. 메르데인 광장의 관광객들에게 소식을 전해라. 녹색마탑의 광장을 개방한다고 말이야.”


제네릭이 지정한 결투장소는 녹색마탑의 뒤쪽에 있는 광장. 그 땅은 녹색마탑의 사유지다. 그리고 아롯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메르데인 광장과도 가깝다.


‘관중들이 몰려온 이상, 다른 마탑주도 결투를 무르기 힘들 터.’


결투. 그것도 한창 유명세를 떨치는 유진 라이언하트와, 녹색마탑주 제네릭 오스먼이 벌이는 결투다. 관중들은 복권이라도 당첨 된 기분으로 결투를 관람하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결투를 물린다면, 제네릭이 나설 것도 없이 관중들이 격분해 제네릭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유진의 공중마차가 내려앉을 즈음. 이 넓은 광장은 외곽은 관중들로 가득 차버렸다.


“고약한 새끼.”


멜키스는 창밖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결투장소로 녹색마탑의 광장을 지정한 순간부터 예상하긴 했다. 그래서 빠르게 포기했어야 하는데...


‘...아직 늦진 않았어. 불만? 뭐 어쩌라고?’


대중의 분노 따위, 그 이상의 공포와 힘을 보여주면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과격한 방법은 나중에 욕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멜키스는 그런 것을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이구. 고작 몇 분 사이에 많이들 오셨네.”


“부담스러운가?”


제네릭이 웃으며 물었다. 보이기는 예스러웠지만, 속내가 훤히 보이니 역겹게 느껴진다. 유진은 킬킬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저는 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신이 나는 타입이라서.”


시건방진 꼬마 같으니. 제네릭은 입가의 미소를 유지하며 눈에는 차디 찬 얼음을 담았다.


“...그 ‘사역마.’”


제네릭은 유진의 곁에 선 메르를 노려보았다. 지저분한 냅킨을 가슴팍에 던졌던 것을 기억한다. 너무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워서, 날아오는 냅킨을 막지 못한 것이 실책이다. 그 뒤에 이어진 말도 가관이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도 숙이고, 아주 정중하게?


사역마 따위에게 사과를?


“고기방패로라도 쓸 셈인가? 제법 훌륭한 전략이라고 말해주겠네. 자네도 알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역마는 아주 튼튼하거든. 부숴도, 부숴도 마나만 부어주면 수복하니 말이야.”


“...하하.”


유진은 메마른 웃음소리를 토하며 망토를 들췄다.


“제 모든 능력을 사용하라고 하셨지요. 솔직히 듣기 좋은 말은 아닙니다. 전 메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을 거라서.”


“...도움?”


“뭐 어쨌든. 메르의 존재도 제가 가진 능력 중 하나니, 제네릭님의 말씀대로 도움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찮은 고집이라 여겼다. 젊은 혈기에서 비롯 된 자존심인가? 제네릭은 코웃음을 치며 로브 안쪽에서 기다란 지팡이를 꺼냈다.


“마음대로 하게.”


제네릭은 메르가 유진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모른다. 설령 알았을 지라도, 메르를 ‘사용’하는 것에 제한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현명한 세냐의 정통한 후계자이며, 8서클에 오른 대마법사란 사실에 마땅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작하지.”


충분히 시간을 들여 가지고 노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저항도 할 수 없게끔 순식간에 끝내는 편이 나을까. 어느 쪽이든 결투의 결과는 제네릭의 승리로 끝날 터. 이건 꽤 즐거운 고민이었다. 분수에 맞지도 않는 물건을 탐내며 재능을 과신하는 어린 것에게는 알맞은 훈육이 필요한 법이다.


‘일단 격의 차이부터 보여줘야겠어.’


제네릭은 느긋이 웃으며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어떤 마법으로 시작할 지는, 제한을 6서클로 한 순간부터 정해두었다.


디바인트리.


거대한 마나가 지팡이에 인도되고, 지표면이 들썩거렸다. 끌려나온 흙이 제네릭의 다리를 휘감아 올랐다.


백색 갈기가 흩날렸다.


녹탑주


영창도 없던 디바인트리. 광장의 흙이 제네릭에게 모여 들고, 서로 단단히 결속된 뿌리가 되어 다리를 휘감기까지 고작 몇 초.


대마법사가 펼치는 마법은 빠르다. 제 수준보다 하위서클의 마법이라면, 그 발현 속도는 가히 신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법만 빠른 것이 아니다. 제네릭이 디바인트리를 펼쳤을 때. 유진은 곧장 환염식을 운용했다. 속도? 그건 유진도 자신이 있었다. 전생부터 지니고 있던 마나장악력은 그 세냐마저도 혀를 내둘렀던 재주다.


망토에 넣어두었던 양 손. 왼손은 아카샤를 쥐었고, 오른손은 단검 몇 자루를 쥐었다. 극한으로 운용된 환염식이 백색의 갈기를 만든다.


‘메르.’


유진은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망토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메르는 육성이 되지 못한 목소리에 반응했다.


굳이 머리를 망토 밖으로 뺄 필요는 없었다. 메르는 망토의 안에서, 유진이 보는 시야를 함께 보았다. 메르의 구성술식을 아카샤가 아닌 유진에게 새긴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세냐는 자신이 직접 만들고, 아꼈던 사역마가 유진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아직 봉인에서 풀려나지 못한 자신을 대신해서.


‘연쇄 도약.’


아직 파악하지 못한 공간좌표를 메르가 대신 계산한다. 디바인트리의 뿌리가 제네릭을 들어 올렸을 때. 메르는 공간좌표의 계산을 끝냈다. 그렇게 계산 된 좌표는 곧장 유진의 머리에 새겨졌다.


망토에서 빼낸 오른손. 쥐었던 단검이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유진의 몸도 사라졌다.


빠직!


각자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제네릭의 마나와 충돌했다. 제네릭은 그에 시선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디바인트리를 운용했다. 땅에서 솟구친 뿌리가 허공의 한 점을 꿰뚫었다.


‘잔재주의 그릇이 얕아.’


단검을 먼저 블링크 시키는 것으로 공간을 현혹시키고, 그 뒤를 노리고 싶었던 모양이지. 제네릭은 코웃음을 치며 뿌리의 끝을 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뭐?’


제네릭은 분명히 저 위치에 유진이 블링크 할 것을 간파했다. 잘못 느꼈다고? 아니 그럴 리가.


‘도중에 블링크를 디스펠, 다시 블링크를?’


유진의 수준에서 쓸 만한 페이크가 아니다. 애당초 블링크 같은 도약마법은 편리한 만큼 위험부담이 크다. 직전에 디스펠하고 다시 좌표를 골라 도약한다니. 그건 잔뼈 굵은 전투마법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착각해주길 원했다.


‘전부 사용하라고 한 건 너잖아.’


직전에 블링크를 취소한 것은 맞다. 그로 인한 마나의 역류? 대수롭지 않았다. 역류한다면 바로잡으면 된다. 대마법사인 제네릭이 그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것은, 디스펠 된 마법이 티끌만큼도 흘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기가 흩날린다. 새하얀 불꽃에 푸른빛이 섞인다. 널따란 광장. 관중들이 내지르는 소음. 뒤흔들리는 마나. 오른손은 아카샤를 쥐고 있다. 유진은 디바인트리가 얼마나 수준높은 마법이며, 제네릭이 지배하는 마나가 얼마나 농밀한지를 이해했다.


‘은밀히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해. 접근한 순간 놈의 마나와 닿는다.’


거기서부터는 반응속도의 차이. 접근을 알아차렸다 해도, 걷어내는 것이 이쪽이 좁혀오는 것보다 빠를지.


푸확!


발로 차낸 지면이 터졌다. 그보다 조금 늦게, 제네릭의 몸을 휘감고 있던 뿌리가 움직였다. 그건 대지 전체가 덮쳐오는 것처럼 보였다.


‘닿는다.’


종이 한 장 차이라 해도 좋았다. 뿌리가 유진을 휘둘러 치기 전.


활짝 열린 망토에서 톱날처럼 삐죽삐죽한 검이 튀어나왔다. 포식검 아스펠. 마법을 베는 검. 유진은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며 아스펠을 휘둘렀다.


콰가각! 제네릭을 휘감고 있던 뿌리가 베어졌다. 제네릭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렇게 간단히 베어질 것이 아니다. 마나로 결속시킨 흙이다. 이 흙은 상위의 결계마법에 준할 만큼 단단하다.


‘마나가... 아니, 술식이 베였다.’


하지만 얕다. 베이기는 했지만, 깊이 베이지는 않았다. 베어진 술식 따위 다시 엮어 구성하면 된다. 제네릭은 입술을 달싹이며 영창을 이었다. 쓸 수 있는 마법에는 제한이 있다. 제네릭은 그를 경시하지 않았다. 애당초 위기랄 것도 없는 상황. 가볍게 놀랐을 뿐이다.


‘얕군.’


유진도 느꼈다. 역시. 아직은 저만한 마법을 보는 즉시 이해하고 중추를 베는 것은 무리인가. 유진은 미련없이 아카샤를 당겼다.


‘메르.’


유진이 원하는 마법이 최적의 형태로 펼쳐졌다. 화악! 유진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직전까지 날아왔던 뿌리가 아슬하게 유진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진님.]


‘알아.’


공격은 뿌리뿐만이 아니다. 멜키스가 경고한 대로였다. 대지가 제네릭의 통제를 받는다고 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은 무지한 패착이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마법사의 전투에선, 발을 묶거나 땅에 내리꽂는 마법의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했다.


통제된 마나가 ‘무게’가 되어 몸을 짓누른다. 그에 호응하듯 지면이 들썩거린다. 콰드득! 치솟은 뿌리가 이빨 가득 돋은 아가리가 되어 유진을 삼키려 했다.


힘으로 벗어날 수 있나?


‘굳이?’


마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힘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카샤의 드래곤하트가 붉은 빛을 발했다. 메르가 술식을 가속하고, 아카샤가 마법을 증폭했다.


‘블래스트.’


유진의 두눈이 머리 위를 보았다. 무게가 되어 짓누르던 마나, 그와 함께 하는 공기에 마법이 깃들었다.


‘서리밭.’


빙결의 전당에서 외워둔 6서클의 얼음마법이 뿌리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든다. 처음만 그랬다. 빠르게 번져나간 서리가 뿌리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환염식의 불꽃이 유진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이건 마법이랄 것도 없는 재주다. 검강을 몸에 두르는 것 뿐. 전사의 방어기술인 오러실드를 보다 전투적으로 바꾼, 하멜 식의...


[...유진님? 파멸신기가 뭐예요?]


“닥쳐.”


유진은 얼굴을 콱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 꽈앙! 찍어 누른 발이 얼어붙은 땅을 박살냈다.


하지만. 곧장 뿌리가 다시 연결된다. 제네릭은 찡그린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방금 유진이 쓴 마법은 죄다 6서클의 마법들. 그런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연계가 매끄럽다.


‘마법을 벤 검은 포식검 아스펠... 저건 라이언하트의 불꽃. 그래. 너무 허무히 끝내도 재미가 없지.’


제네릭의 의식이 활짝 열린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마법이 펼쳐졌다. 이어진 뿌리가 일제히 유진을 덮친다. 뿌리의 밑에도 땅은 있다. 흙알갱이 하나하나가 끈적하게 유진의 발바닥에 달라붙었다.


불꽃이 부풀었다. 콰르르! 폭발한 불꽃이 땅을 밀어냈다. 유진은 위를 확인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마나의 탄환이 유진을 노리고 있었다.


단순한 탄환이 아니다. 닿지 않아도 이해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배치 된 탄환이 서로 이어지며 감옥을 만든다.


‘블링크.’


[아뇨. 공간이 장악됐어요.]


‘열면 돼.’


메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마법사가 장악한 공간을 어떻게 연단 말인가?


곧 이해했다. 동시에 메르는 자신이 유진을 너무 얕잡아 보았음을 실감했다.


[너무 무식하잖아요?!]


‘뭐 어때?’


뜨드득! 발바닥에 달라붙은 흙 알갱이들. 유진은 속박 통째로 발을 들어올렸다. 환염식이 마나를 증폭시켰고, 불꽃의 색이 보다 푸르게 변했다.


ㅡ꽈앙!


발이 땅을 찍는다. 5서클의 어스퀘이크. 하지만 그 위력은 도저히 5서클의 마법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밀어내는 마나의 크기와 정밀함에 제네릭의 뺨이 움찔 떨렸다. 허나 디바인트리의 통제를 받는 땅은 더 이상 부서지지 않는다.


다만, 어스퀘이크의 파장이 공간의 마나를 한 순간 흔들었다. 어지간한 마법사는 그 틈을 잡기는커녕 흔들림조차 느끼지 못하겠지만, 유진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틈에 재빨리 블링크의 술식을 끼워 넣었다.


그렇게 도약했다. 제네릭도 이 돌발적인 블링크의 좌표를 파악하는 것이 늦었다.


‘얼음송곳.’


휘몰아친 냉기가 길쭉한 송곳다발을 만들고, 일제히 쏘아졌다. 배후에서 쏘아진 공격. 제네릭은 혀를 차며 마법을 이끌었다. 콰드득! 들어낸 뿌리에 송곳들이 처박혔다.


얼음송곳과 함께 질주한 유진의 몸이 꺾였다. 그는 뿌리에 처박힌 얼음송곳을 두 발로 깊이 박아 넣었다. 곧, 뿌리 전체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뭐지?’


제네릭은 유진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법은 매끄럽다. 위력도 강해. 하지만 내게는 닿지 않아.’


차라리 아까처럼 아스펠을 휘두르거나, 체술을 쓰는 편이 더 위력적이지 않은가.


‘...마법을 고집... 이 애송이가...!’


마법사와 결투하는 것이니 마법을 고집하는 건가. 제네릭의 눈에 핏발이 섰다. 파직! 뿌리에 번지던 서리가 터져나갔다.


콰르르! 광장 전체가 꿈틀거렸다. 제네릭이 통제하는 흙이 전부 뿌리가 되어 뱀처럼 머리를 들었다. 동시에 온갖 종류의 마법이 허공을 수놓았다. 6서클의 제한을 넘지 않는 공격마법들. 그만한 마법을 동시에 발현했는데도 제네릭의 마나에는 한참 여유가 남았고, 저 마법들은 제네릭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았다.


뱀이, 뿌리가 춤을 추었다.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난무. 유진은 비행과 도약과 질주를 섞으며 뿌리 사이를 누볐다.


마냥 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진이 발을 딛는 곳마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족적이 남았다.


‘염인(炎印).’


그 마법은 제네릭도 안다. 폭염의 전당에 보관 된 6서클의 화염마법. 발자국 하나하나에 불씨를 새겨 넣어, 일제히 공명시켜 광범위를 불태우는 마법. 염인은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남기느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발상이 일차원적이야.’


상대가 크니까 염인을 쓴다. 그런 발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뿌리’라서 ‘불’을? 설마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터. 디바인트리는 나무이되 나무가 아니다. 즉, 마른가지처럼 쉽게 불타지 않는단 말이다.


‘쥐새끼처럼 빠르구나. 언제까지 뛰어다닐 셈이지? 내가 널 잡지 못한다고 착각하고 있나?’


제네릭은 비웃음을 참았다. 공중에 배치한 마법으로 일정 높이 이상 도약하지 못하게 막았다. 휘둘러 치는 뿌리는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것 같으면서도 여러 방향으로 움직임을 유도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깊이 오는 순간, 빠져나갈 틈 없이 잡아낼 수 있다.


‘차라리 뭉개죽일까. 그럼 더 편하련만.’


진즉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제네릭도 그 정도의 분간은 할 줄 알았다.


‘아니면. 깊이 들어 와 아스펠로 길을 열 테냐. 이미 한 번 본 것에 또 당해줄 듯 싶나?’


전투는 결국 눈치싸움이다. 서로의 수를 얼마나 파악하고, 몇 수 앞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그 중요함은 제네릭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유진의 수를 제대로 파악하고, 충분히 앞선 수를 보고 있다 믿었다.


‘놈은 아직 정령을 부르지 않았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위니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일. 거기에 아스펠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어쩌면 라이언하트의 다른 보물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다른 것들은 난폭하고 커다랗지. 마음처럼 쓸 수 없어. 그 좁은 틈에서 억지로 사용했다가는 제 공격에 휘말린다.’


제네릭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의 몸은 견고한 나무의 중심에 있다. 위그드라실. 아니, 디바인트리가 가진 큰 묘용은, 굳이 방어마법을 쓸 필요가 없는 방어력에 있다. 그렇다고 마냥 거대한 표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제네릭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든지 다른 뿌리로 이동해 나무가 될 수 있었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아쉽구나. 7서클로 제한했다면 널 보다 재미나게 농락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느꼈을 때.


유진이 ‘덫’에 들어왔다. 제네릭은 비죽 웃으며 디바인트리를 움직였다. 뿌리가 된 지면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유진을 덮쳤다. 또, 허공에 배치한 마법들이 포격이 되어 유진에게 쏟아졌다.


‘메르.’


그 순간에도 유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네.]


메르는 유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녀는 알아서 망토의 깊은 곳에 들어가고, 공간좌표를 계산했다.


흑암의 망토가 활짝 열린다.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뿌리가 망토에 삼켜졌고,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빠드득! 뿌리와 뿌리가 서로 충돌해 뒤틀린다.


머리 위에서 다양한 마법이 쏟아지고 있다. 얽히고 설킨 뿌리의 중심에서, 유진은 그것을 보았다. 그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 블링크는 못쓰고... 아스펠로 벨까? 아니면 파멸신기로 돌파할까.


어느 쪽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유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ㅡ찌잉. 아찔한 두통. 뇌에 불이 붙는 것 같다. 망토 안에서 메르가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지금?!]


외치기는 했지만, 메르도 의식을 집중했다. 서로의 의식이 공명되었다.


메르는 이 결투에 책임감을 느낀다.


자신이 괜히 나서지 않았다면 사역마 따위라고 모욕 받지 않았을 터. 그러면 유진도 굳이 결투에 응하지 않았을 거다.


메르에게도 불만은 있다.


세냐님을 존중하지 않은 녹탑주의 콧대를 눌러, 아니, 으깨버리고 싶었다. 이곳에 없는 세냐님을 대신해 유진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유진에게 승리를 주고 싶었다.


환염식으로 증폭된 마나가 쭉 빠져나갔다. 부릅뜬 눈에서 피가 흘렀다. 유진은 핏발 선 눈으로 쏟아지는 마법을, 그 술식을, 마법이 존재하는 공간의 복잡한 좌표를 이해했다.


아크리온의 6층. 공간의 전당. 7서클 공간마법의 극치.


“전위반전(轉位反轉).”


유진이 존재한 공간이 도려내졌다. 그의 시야에 잡힌, 마법이 추락하고 있는 공간도 함께 도려내졌다. 그렇게 잘려진 공간이 서로 이어지고.


뒤집혔다.


콰르르릉!


디바인트리의 뿌리, 그 사이에서 마법들이 서로 뒤엉켜 폭주했다. 제네릭은 유진이 무슨 마법을 펼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를 거부했다. 분명히 영창을 들었다.


전위반전. 7서클, 그 중에서도 극악한 난이도를 가진 마법이다. 어떻게? 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아니, 트렘펠 위자도르가 한 말은 들었다. 7서클의 폭염마탄을 사용했다고...


“격... 격이 다른 마법이야!”


제네릭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고함을 질렀다. 연쇄적으로 터진 마법이 뿌리를 붕괴시키고 있다. 제네릭은 이를 악물고서 마법을 통제했다.


유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서있었다. 전위반전으로 뒤집은 공간. 시야에 담는 전체를 뒤집고 싶었는데, 이 정도가 한계인가. 주변의 마법들이 어정쩡하게 멈춰있다. 유진은 그를 힐긋 보면서 아스펠을 뽑았다.


제네릭이 그를 알아차린 것은 조금 늦었다. 이해불가의 경악은 대마법사의 판단마저 늦게 한다. 급히 이끌어낸 마법이 유진을 덮치지만, 유진은 흐느적거리며 아스펠을 휘둘렀다.


힘이라곤 없어 보이는 칼부림. 그럼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리하고 빨랐다. 선제한 마법들이 양단된다. 흩어진 마나가 아스펠에게 잡아먹힌다. 유진의 몸을 덮은 불꽃이 더욱 강맹해진다.


전투가 결국 눈치싸움이라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유진이 잘 알고 있다. 제 자신이 강자라 자신하는 놈은 오히려 상대하기 쉽다. 자부심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오만함과 승리에 대한 확신은, 이쪽이 어떻게 어울려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올가미로 엮어낼 수 있다.


아스펠? 한 번 보여줬다. 이후로는 쓰지 않았다. 그렇게 경계하게 만들었다. 제네릭은 자신이 6서클까지의 마법만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유진에겐 그런 제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6서클 마법만 사용했다. 장기인 체술보다 마법에 중점을 두었다.


제네릭은 그런 유진을 오만하다고 여겼다. 바로 보았다. 그렇게 여겨주길 바랐다. 결국 날뛰다가 덫에 잡혀서, 압도적인 기량차로 패배시키는 것이 제네릭이 그린 그림이었을 것이다.


유진은 다른 그림을 그렸다.


폭주에 출렁거리는 뿌리 표면에는 불타는 발자국들이 남아있다. 그 발자국이 유진이 원한대로 불타올랐다. 어지럽게 이어지는 붉은 선이 열기를 발했다. 이윽고, 불꽃이 터졌다.


꽈과광!


전위반전으로 뿌리 깊은 곳에서 터진 마법. 거기에 염인의 폭발까지 더해졌다. 나부끼는 열풍에 관중들이 비명과 감탄을 내질렀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카샤를 앞으로 뻗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괜찮아.”


유진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폭염마탄. 자그마한 불씨가 아카샤의 보석 앞에 생성되었다. 유진은 가볍게 불씨를 밀어냈다. 염인으로 터트렸던 불꽃의 열기가 폭염마탄에 달라붙었다. 천천히 나아가는 폭염마탄이 미친 듯이 그 크기를 부풀렸다.


“저, 저, 저 미친놈...!”


멍하니 결투를 지켜보던 멜키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급히 공중으로 튀어오른 멜키스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았다. ㅡ쿠르르릉! 관중들이 서있던 땅이 뒤흔들렸다.


대지의 정령왕이 강림했다. 의지로 전해진 명령이 대지의 정령왕을 움직였다. 콰드드득! 관중들의 앞에 거대한 땅의 장벽이 치솟았다.


‘부족한가?’


관중을 보호하기 위해 나선 것은 멜키스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와있던 것인지, 청탑주 히리두스 우즐렌과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둘은 서로 한 번 시선을 마주치곤, 멜키스가 만들어낸 땅의 장벽에 결계마법을 덧씌웠다.


“으득...!”


마나의 흐름이 격하다. 제네릭은 점점 크기를 키워가며 다가오는 폭염마탄을 노려보았다. 디스펠이 가능한가? 아니, 늦다. 저만큼 커진 마법. 터트린들 의미가 없다. 역으로 밀어내는 수밖에. 제네릭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직 움직이는 뿌리가 위로 치솟고, 추가적으로 마법을...


“템페스트.”


유진의 왼손이 망토에서 빠져나왔다. 그 손에 쥐어진 은청색의 아름다운 검과, 유진이 내뱉은 이름에 제네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와서 밀어.”


담담한 명령.


열풍이 미쳐 날뛰었다.


바람의 정령왕이 강림했다. 템페스트는 모두에게 과시하듯이 위엄찬 모습으로 유진과 함께 섰다. 유진은 뺨에 닿는 열풍에 눈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폼 잡지 말고 밀라고.”


[크흠...]


템페스트는 무안함에 헛기침을 하며, 폭염마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으로 엮인 손가락이 거대한 불꽃에 닿았다.


그걸 본 순간.


제네릭은 디바인트리로 저항이 불가능하단 것을 절감했다.


불꽃과 폭풍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녹탑주


“왜 막는 거예요?!”


“우리한테도 보여줘!”


관중들이 아우성친다. 평소라면 구해준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라며 일갈했겠지만, 지금 멜키스는 관중들의 꽥꽥거리는 소리를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멜키스 뿐만이 아니다.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던 마탑주 3명의 이목은,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기둥에 향해 있었다.


천천히 불꽃이 걷힌다. 휘몰아치던 열풍이 잦아든다. 계절은 차디 찬 초봄이지만, 관중들은 한여름 같은 무더위를 느끼며 외투를 벗었다.


유진은 가빠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앞을 보았다. 일렁거리며 뒤섞이는 아지랑이 너머.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에 호응하여 움직인 템페스트의 바람이, 아직 남은 열풍을 모조리 위로 휩쓸어서 터트렸다.


확실히 보였다. 꿈틀거리던 것은 굵직한 뿌리. 엘프의 영지에서 목격한 세계수만큼은 아니지만, 그를 연상시킬 만큼 거대한 나무. 차이점이라면 뿌리와 나뭇가지마다 꽃봉오리 같은 것이 달려있다는 것인데, 어쨌건 기괴하게 생긴 나무였다.


나무기둥의 중심이 갈라졌다. 그곳에서 걸어 나온 제네릭은 피가 흐를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씹고 있었다. 직전에 폭염마탄과 템페스트의 폭풍에 얻어맞았는데도, 제네릭의 몸에는 그슬린 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솔직히 감탄했다.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의 시그니처인 위그드라실. 화염폭풍이 터지는 순간, 6서클의 디바인트리가 곧장 위그드라실로 변화했다. 찰나에 펼친 연속방어마법과 겹겹이 쌓은 뿌리가 폭발을 가로막았다.


“그거.”


유진은 템페스트를 물리지 않았다. 그는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제네릭을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6서클 마법은 아닌데요.”


“...”


“직접 내뱉으신 제약을 어기셨네요. 아. 설마 제가 7서클의 마법을 쓴 것과, 정령왕을 불러낸 것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시겠죠?”


제네릭은 뭐라 답하지 않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잘근잘근 씹어댄 입술은 쓰라리지 않았지만, 입안을 감도는 피의 맛이 제네릭의 정신을 달구었다.


이 무슨 굴욕이란 말인가. 내뱉은 제약을 어겼다. 디바인트리, 그 외의 6서클 마법들로는 그 순간의 폭발을 가로막기 힘들었다. 폭염마탄 하나로도 버거운데, 템페스트의 폭풍이 더해진 순간부터 그 공격은 6서클로는 절대로 막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니 위그드라실을 쓸 수밖에 없었다. 쓰지 않았다면? 죽지는 않았겠지만, 그에 버금가는 치욕을 당했으리라.


‘...아니. 오히려 이것이 더 치욕...!’


유진은 제네릭의 들끓는 시선을 마주보았다. 굴욕과 분노와 적의가 뒤섞여 살의로 바뀌어가고 있다.


‘에이, 설마. 이 정도로 날뛸 만큼 수양이 부족하겠어?’


시선만 보면 당장이라도 죽이려 달려들 것 같다만. 유진은 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보는 관중이 많아서? 바로 근처에 청, 백, 흑탑주가 있어서?


유진은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ㅡ쿠웅!


거대한 문이 떨어져, 땅에 우뚝 섰다. 복잡한 문양이 빼곡이 음각된 문. 그걸 본 제네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끝난 것 같군.”


조금 뒤에 내려 온 로베리안이 문 위에 걸터앉았다. 치렁치렁한 금발 사이의 두눈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면, 더 할 생각인가?”


“...적탑주.”


제네릭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는 살심을 억누르며, 잘 움직이지 않는 입가를 비틀어 미소지었다.


“제자가, 아주, 훌륭하더군.”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걸세.”


유진은 반짝이는 눈으로 로베리안이 걸터앉아 있는 문을 보았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아카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법의 깊이, 술식의 난해함이 저 문이 무엇인지를 일러주었다.


적탑주 로베리안의 시그니처, 판테온. 대뜸 그것부터 꺼내고서 내려온 것은, 제네릭이 아직 위그드라실을 펼치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시선에 어린 은근한 살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녹탑주.”


로베리안은 장갑 낀 손을 문틀에 걸쳤다.


“자네의 시선이 너무 과한 것 같네. 무언가 언짢은 일이라도 있는가?”


“...설마 그럴 리가. 재기 넘치는 후배에게 경탄을 느끼고 있을 뿐.”


로베리안은 말없이 제네릭을 응시했다. ...까득. 까드득... 문틈을 잡은 손가락이 문을 긁는 소리. 제네릭은 아직 피가 배어나오는 아랫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정말 훌륭해.”


파스스스... 위그드라실이 사라진다. 요동치던 지면도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설마 이렇게까지 뛰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7서클의 폭염마탄을 펼쳤다는 것은 들었지만, 설마... 전이반전까지 펼쳐낼 줄이야. 게다가 바람의 정령왕까지!”


제네릭은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키우며, 껄껄 웃어댔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내비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몇 마디 더 이죽거려 성미를 긁고 싶다만. 유진은 그러는 대신에 흑암의 망토를 들췄다.


“메르 덕분입니다.”


...기껏 망토를 열었는데 메르가 나오지 않았다. 전이반전에 폭염마탄. 유진이 아직 감당할 수 없는 마법을 연속으로 펼쳤고, 그 부담은 메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음... 정말로요.”


유진은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어, 깊은 곳에 널브러져 있는 메르의 후드를 잡았다. 그렇게 끌어 낸 메르는 축 늘어져서 헤롱거리고 있었다.


“으우... 우우우...”


“수고했어.”


“끝난... 끝난 거죠? 저 이제 쉬어도 되는 거죠?”


“어차피 너 잠도 안 자잖아.”


“그래도 휴식은 필요해요오... 제가 존재한 후로... 이만큼 부하를 느낀 적은 처음이라고요...”


메르는 칭얼거리면서 망토 안으로 꿈틀꿈틀 들어가려했다. 하지만 유진은 메르를 들여보내지 않고, 그녀의 후드를 단단히 붙잡았다.


“조금만 기다려.”


“왜애요...”


“들어야 할 말이 있잖아.”


그 말에 제네릭의 어깨가 떨렸다. 메르는 헤롱헤롱 풀렸던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를 젖히고, 메르는 제네릭을 응시했다.


“...아... 맞아요.”


메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유진님이 이겼죠. 유진님이,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과의 결투에서 이겼다고요!”


“네가 도와줘서 그래.”


“흥, 흐흥, 으흐흥, 그건 아니에요, 유진님은 제가 없었어도 충분히 이길... 흐흥, 아닌가? 네, 맞아요. 제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유진님은 이길 수 없었을 거예요. 그렇죠? 제 말이 맞죠?”


메르는 헤헤 웃으며 유진을 올려다 보았다.


“유진님은 제가 돕지 않아도 강하지만, 제가 도와서 더 강했어요. 덕분에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진짜, 구성술식에 부하가 걸려 타버리는 것 같았다고요.”


“그건 엄살이 심하네.”


“으으응... 네, 맞아요, 이건 엄살이죠. 아무리 부하가 걸려도 구성술식이 타버리진 않아요. 그 술식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세냐님이 만드신 거니까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쓰다듬었을 때에는 선 넘지 말라며 매섭게 쳐낸 주제에, 언제부터인가 메르는 유진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설마 잊으신 겁니까?”


우두커니 선 제네릭을 보았다. 그는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떨면서,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잊었냐고? 물론 기억하고 있다. 패배한다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아주 정중하게 사과하라는.


“보는 관중이 많아 부담스러우십니까?”


높이 치솟았던 땅의 장벽은 이미 내려와 있다. 결정적인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관중들은 유진과 제네릭 둘 중 누가 승자인지는 알아차렸다. 경악한 시선. 수군거리는 목소리. 제네릭은 그 모든 것이 미칠 것만 같았다.


“흠.”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로베리안을 지나쳐, 제네릭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제네릭의 앞에 섰을 때. 유진의 발이 가볍게 땅을 두드렸다. ㅡ쿠르릉! 새롭게 치솟은 흙의 장벽이 유진과 제네릭을 감쌌다.


“이러면 아무도 보지 못하겠죠. 이 정도 배려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크... 크크크...!”


멍하니 주변을 보던 제네릭은 주먹을 꽉 쥐며 웃음을 흘렸다.


“배려... 배려라...! 정말이지... 날 비참하게 만드는 구나...!”


“이것으로도 부족하십니까?”


유진의 미소가 갈라졌다.


“녹탑주님. 전 당신과 결투해서 이겼습니다. 스스로에게 제한을 건 것도 녹탑주님이시고, 제게 제한을 걸지 않은 것도 녹탑주님이십니다. 설마 자신이 무조건 이길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


“만약 그런 것이라면, 녹탑주님은 절 너무 우습게 보신 겁니다. 모욕한 것이란 말입니다. 저는 라이언하트고, 적탑주 로베리안 서피스의 제자이며, 현명한 세냐님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몸입니다.”


“...제한을... 걸지 않았다면...!”


“누가 그걸 모릅니까? 저도 압니다. 녹탑주님이 6서클이 아니라 7서클로 제한을 걸었다면, 저는 지금처럼 ‘쉽게’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뭐?”


제네릭은 눈을 부릅 뜨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쉽게? 쉽게 이겼다고? 이 나를?”


“그럼 어렵게 이긴 것처럼 보입니까? 녹탑주님. 당신은 결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제 의도대로 움직여 주셨습니다.”


“...”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녹탑주님은 스스로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하신 겁니다. 녹탑주님이 아무 제한 없이 결투에 나서셔서, 제가 이겼다면? 하하! 그럼 제가 녹탑주가 되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제네릭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유진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고, 그에 반론을 붙이는 것은 제네릭 스스로를 모독하는 것이었다.


“...무릎을...”


내뱉어버린 말. 취해버린 오만. 스스로에 대한 과신. 승리에 대한 확신.


“...꿇지.”


상대에 대한 무시. 지닌 것에 대한 무지. 수 싸움에 앞서며, 상대를 컨트롤하고 있다는 확신.


“...사과하겠네.”


명예란 무언가.


“...자네를... 아니, 현명한 세냐님의 창조물인 그대를. 사역마 따위라고 말한 것. 그대의 존재를 무시하고, 내 아버지가 그대를 실험을 명목삼아 해부한 것.”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다.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다. 무릎은 당연히 꿇기 싫다. 사과? 그걸 왜 해야 하나.


하지만 해야 한다. 어떤 변명을 붙이건, 결투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 이미 한참 어린 것에게 패배해 버렸지 않나. 오히려 그건 결투에 걸었던 제한으로 어느 정도는 무마할 수 있다. 제한이 없었다면 당연히 이겼다.


그나마 남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결과에 승복하고, 내뱉은 말을 지켜야 한다.


“...모두 다 사과합니다.”


“알았어요.”


메르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유진의 망토 안에서 걸어나와, 무릎 꿇은 제네릭의 앞에 섰다.


“나, 메르 메르데인. 녹탑주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어요.”


메르는 가슴을 활짝 펴고, 허리에 손을 양손을 얹고서 제네릭을 내려 보았다. 푹 숙이고 있는 머리가 아주 잘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우쭐거리는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메르는 흥흥 웃으며 몸을 돌려, 유진에게 돌아갔다.


“유진님, 우리가 해냈어요!”


“그래, 우리가 해냈지.”


유진은 망토를 활짝 열어주었지만, 메르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유진의 팔에 매달려 히히 웃었다. 그런 주제에 몸에 힘이 풀린 것이지, 잘 걷지 못하고 발을 끌어댔다.


결국 유진은 메르를 안아 올려 어깨 위에 앉혔다. 메르는 화들짝 놀란 소리를 냈지만, 곧장 유진의 어깨에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망토 안보다는 불편하네요.”


“당연히 불편하겠지.”


“이럴 때를 대비해서 방석이라도 준비해야겠어요. 아니면, 으음, 유진님. 이 망토 형태변환도 되잖아요? 이 북슬북슬한 털, 폭신한 방석으로는 못 바꾸는 건가요?”


“바꿀 수는 있겠지만, 내가 싫어. 뭐야 그게? 어느 미친놈이 망토의 어깨에 방석을 달고 다녀?”


“피곤한 저를 위해서 그 정도도 못해주시는 거예요?”


“어, 못해줘. 불편하고 싫으면 망토 안으로 들어가던가.”


“유진님이 여기 올려놨잖아요!”


“팔에 널 매달고 다니는 것보단 나으니까.”


유진은 끝까지 망토를 변형하지 않았고, 메르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치솟앗던 흙의 장벽이 다시 돌아간다. 그 사이에 제네릭은 자리에 일어서서, 무릎에 묻은 흙을 말끔히 털어냈다. 하지만 일그러진 표정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그는 등돌리고 선 유진을 노려본 뒤, 장벽이 사라진 순간 블링크를 펼쳐 광장을 벗어났다.


“왜 가린 거야?”


멜키스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나도 녹탑주 저 새끼가 무릎 꿇고 질질 짜는 거 보고 싶었단 말이야!”


“무릎은 꿇었지만 질질 짜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제인 거야. 으레 사과란 눈물이 더해져야 완전해진다고. 내가 함께 있었으면 녹탑주, 그 뻔뻔한 늙은이가 눈물 콧물을 죄다 짜게 만들었을 텐데!”


멜키스는 진심으로 아쉬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로베리안은 그 곁에서 유진을 보고 있었다. ...로베리안이 저런 표정으로, 저런 눈으로 유진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소환한 판테온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로베리안의 등 뒤에 우뚝 서있었다.


“...으음... 저어...”


유진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나셨어요?”


“예.”


로베리안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화났습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유진님. 제가 오늘 어디에, 왜 다녀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으음... 예. 아브람에 다녀오셨죠.”


“예. 아브람에 다녀왔습니다. 유진님. 저는 아브람이 싫습니다. 정말로 싫습니다. 궁정마법사단의 소속이 아니고서야 아브람을 좋아하는 마법사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곳은 마법사를 무력하게 만드니까요.”


로베리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우뚝 서있던 판테온이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청문회는 끝났습니다. 아롯의 왕가는 아카샤가 유진님이 소유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허나 그 자리에 아롯의 국왕은 없었고, 누군가는 그를 상세하게 보고하며, 유진님의 가치와 아롯과의 관계에 대해 보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베리안이 불려갔다. 그는 아롯에 소속된 적색마탑의 주인이며, 수십 년 동안 아롯의 일각을 담당해 온 대마법사다.


“폐하와의 대화는 제법 즐거웠습니다. 폐하도 상황을 납득하셨고요. 하지만, 아브람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절 불쾌하게 했단 말입니다. 그래도, 제자인 유진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 저어... 죄송합...”


“사과하지 마십시오.”


로베리안은 유진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화나셨다면서요?”


“화는 났지만! 그건 유진님이 무모한 결투를 벌이셔서 화가 난 겁니다. 녹탑주가 결투를 청했다면, 거절하지 않더라도 보류는 해야 했습니다. 녹탑주와의 결투, 그 조건이 ‘정당한지’에 대해 저와 논의해야 했단 말입니다!”


“이봐, 적탑주. 그 자리에는 나도 있었어. 조건은 꽤 정당하다고 생각...”


“조용히 하시오, 백탑주. 당신은 유진님의 스승이 아닙니다.”


괜히 끼어들었어. 멜키스는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으음... 제가 멋대로 굴어서 화가 나셨다는 거죠?”


“신중하지 못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이겼잖아요.”


“그러니 사과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중하지 못한 결투였다고 해도, 유진님은... 녹색마탑의 주인. 대마법사. 제네릭 오스먼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신 겁니다.”


로베리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훌륭하십니다.”


“제 덕분이에요.”


유진의 어깨에 앉아있던 메르가 냉큼 대답했다.


“예. 메르님도 정말 훌륭하십니다.”


“...그... 음. 내가 적절하게 막아내지 못했다면, 관중들 대부분이 불타 죽었을 거야.”


잠자코 듣던 멜키스가 끼어들었다. 로베리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멜키스를 돌아보았다.


“...훌륭하오.”


“어흠... 그냥 그렇다고.”


멜키스는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녹탑주


그날. 의외의 손님이 적색마탑을 찾아왔다.


“제가 초대했다면 거절하셨을 것 아닙니까.”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검은 중절모를 벗으며 미소지었다.


유진과 로베리안은 웃지 않았다. 로베리안은 입가를 꿈틀거렸고, 유진은 그보다 노골적으로 불편하단 표정을 지었다. 심할 만큼의 푸대접이었지만, 발자크는 이런 취급이 익숙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걷는 것이 좋으십니까?”


“...날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하하.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적탑주님만 괜찮으시다면, 언제든 찾아 와 말동무가 되어들리 테니.”


발자크가 웃으며 건넨 말에 로베리안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유진이 그런 것처럼, 로베리안도 흑마법사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흑마법사나 마족이 절대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절대로 친구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거절은 없는 겁니까?”


“오늘 거절하신다면 내일 찾아오도록 하죠.”


“내일은 본가로 돌아가려 했는데요.”


“그렇다면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되겠군요. 혹시 지금 바쁜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렇다면 새벽 중도 좋습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빼앗겠단 말이다.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로베리안을 힐긋 보았다.


“...밤이 차니, 정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면 안에서 하시죠.”


적색마탑은 로베리안의 영지다. 탑의 안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개입이 가능하다. 설마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가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벌이겠냐만, 로베리안은 저 속내를 알 수 없는 흑마법사를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들어오시죠.”


유진도 발자크가 껄끄럽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 되는 흑마법사가 직접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특히 발자크는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한 흑마법사다. 어쩌면 유폐의 마왕의 전언을 가지고 왔을 지도 모른다.


“살다보니 적색마탑에 들어올 수 있는 날도 오는 군요.”


발자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널따란 유진의 방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유진님도 알다시피, 적탑주님은 저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도 아시잖습니까?”


“예. 그래서 억울함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적탑주님의 혐오는 흑마법사란 족속에 대한 혐오. 그건 흑마법사라면 짊어질 수밖에 없는 업입니다.”


유진도 로베리안이 왜 흑마법사를 혐오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고 있다.


로베리안은 흑마법사의 인체실험에 가족을 잃었다. 눈앞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여동생이 키메라가 되어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던전의 흑마법사를 토벌하기 위해 찾아 온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로베리안도 한 마리의 키메라가 되었을 것이다.


“흑마법사의 존재가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다.”


발자크는 빈 의자에 앉았다.


“죄를 짓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인간의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죄를 짓는 흑마법사가 있고, 선량한 흑마법사도 있다... 뭐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흑마법사 자체가 죄입니다만.”


“하하... 그런 논쟁을 하려고 꺼낸 말은 아닙니다만.”


얼마든지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 하지만 발자크는 그에 대한 불쾌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유진을 응시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군요. 유진님도 아시겠지만, 인체실험을 벌이는 것은 흑마법사 뿐만이 아닙니다. 역사에서 수많은 마법사들이 죄를, 금기를 범했고, 그를 통해 이색적인 깨침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왕과 계약하지는 않았죠.”


“작금의 시대에서 마왕은 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유진은 그 말이 불쾌했다.


“이건 신성모독이라 꾸짖음을 들어도 항변할 수 없겠지만... 제가 느끼기에, 오히려 마왕이 신보다 낫습니다.”


“어째서?”


“신은 존재부터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왕은 이미 존재하고 있죠. 막연한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헬무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불쾌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은 아니었다.


“물론 신의 기적은 존재하지만... 그 애매한 기적보다는, 직접 모습을 보이고 군림하는 마왕이 더욱 신보다 낫지 않습니까? 또, 마왕은 합리적입니다. 믿음, 신앙. 그런 것보다는 영혼을 담보 삼아 맺는 계약이 확실하고 가치 있죠.”


“가치라...”


“보다 쉽게 말하자면, 흑마법사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실리주의자라는 겁니다. 유진님도 알다시피, 마법은 가혹하고 짓궂으며, 부조리한 학문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갈망해 보아도, 재능이 없다면 마법사로 대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서.


유진은 이오드를 떠올렸다.


“그런 이들에게 마족과의 계약은 아주 매력적이라 느껴질 수밖에 없죠. 영혼을 팔고, 원하는 마법을 얻는다... 그 부담은 순전히 자기 자신이 짊어지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죠. 그로 만족하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될 뿐.”


“흑마법사들이 유독 죄를 많이 짓는 것도, 그들이 실리주의자라서 그런 겁니까?”


“인간의 도리를 저버려 얻는 이익이 분명하다면, 그를 범해 실리를 추구할 수도 있겠죠. 대부분의 마법사도 그렇겠지만.”


예전에 발자크가 말한 적이 있다.


‘마법사란 족속은 제 호기심과 욕망을 위해 도리 따위는 쉽사리 저버립니다. 단순 비율로 따지자면, 도리를 벗어난 흑마법사보다 도리를 벗어난 마법사가 몇 배는 될 겁니다.’


“발자크님도 실리를 위해 마왕과 계약하신 겁니까?”


“흠.”


발자크는 얇은 미소를 짓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청탑주님과 동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스승을 모셨던 것은 아닙니다만... 예. 저도 한 때 청색마탑에 있었습니다.”


“청탑주님이 말하시길, 흑탑주님이 청색마탑에 있을 때에 그 실력이 대단하셨다는데.”


“하하... 제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지만, 예. 그건 사실입니다. 청색마탑에 있을 적에, 저는 지금의 청탑주... 히리두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대로 몇 년만 지났으면, 히리두스를 대신해 제가 청탑주가 되었겠죠.”


발자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다만... 저는 자연스레 손에 들어오는 것보다, 그 이상을 바랐을 뿐입니다.”


“그 이상?”


“저는 현명한 세냐가 아닙니다.”


갑작스레 나온 이름. 유진이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찌푸리자, 발자크는 큭큭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현명한 세냐는 마법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냐님은 마왕을 위협할 수 있는 마법사였고, 세냐님 이후로 그런 마법사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아... 물론 제가 마왕을 위협하고 싶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만큼 뛰어난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있었습니다.”


“...”


“그건 저 뿐만이 아닙니다. 아멜리아 머윈, 에드몬드 코드렛. 저를 포함한 그 셋은, 굳이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하지 않아도 ‘대마법사’는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상을 바란 것뿐이죠. 제 자신이 천재라 자부하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마법의 ‘끝’을 보고 싶어 할 겁니다. 하지만 그 끝이란 것은 대마법사가 도달하기에는 아득하게 멀죠.”


“...끝이라...”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흑탑주님은 마왕과 계약해, 끝을 보셨습니까?”


“조금씩 끝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실감은 있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 유진님이 저를 조금 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군요.”


“굳이 제 이해를 바라시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악인 취급을 받는 것은 조금, 아니, 많이 서럽거든요.”


농담하는 건가? 유진은 그 진의를 알 수가 없었고, 그냥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자 발자크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제가 아멜리아 머윈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아하.”


유진은 그제야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찾아오셨나 했더니. 아멜리아 머윈에게 제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제가 드린 친서를 가치 있게 사용하셨더군요. 설마 그렇게 빨리 사용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연한 조우였다고는 들었습니다. 그건 저도 꽤 의외였습니다. 설마 그녀가 다른 던전을 만들어뒀고, 설마 거기서 유진님과 맞닥트릴 줄은.”


“사정은 알고 계십니까?”


“듣지 못했습니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아멜리아 머윈이 이야기해주지 않더군요.”


“아하. 오늘 절 찾아오신 건, 그 사정에 대해 묻기 위해서시군요?”


“답해주실 겁니까?”


“아뇨.”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정 궁금하시다면, 제게 묻지 말고 흑탑주님이 섬기는 유폐의 마왕에게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유폐의 마왕님은 답을 주지 않으실 겁니다. 유폐의 마왕님께 총애를 받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니니까요.”


발자크는 짐짓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유진님께 사정을 듣고 싶었지만, 알려주실 생각이 없다니 저도 더 고집을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시렵니까?”


“아직 볼 일이 남았습니다.”


“어떤 볼 일?”


“나찰공주.”


발자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이리스. 그녀를 알고 계십니까?”


“...헬무드 다크엘프의 수장이라는 건 알죠.”


“유진님이 사마르에서 100명이 넘는 엘프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나찰공주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찰공주가 교섭을 위해 라이언하트를 찾아갈 겁니다.”


유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교섭?”


“예. 그녀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요. 사마르에서 다크엘프를 보신 적은 없는 겁니까?”


“...그들에 관한 소문과, 엘프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빠르시겠군요. 헬무드에서 나찰공주의 입지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순혈마족들은 나찰공주와 다크엘프를 잡종이라 여기고, 나찰공주는 마왕이 되기 위해 고위 마족들과 경쟁하고 있죠.”


“경쟁이 되기는 합니까?”


“안 되죠.”


발자크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다크엘프는 특별한 아종입니다. 유폐의 마왕님도 종족을 타락시켜, 새로이 만드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특별한 권능을 가지고 있던 것은 300년 전 죽은 광란의 마왕과, 그 수양딸로서 다크엘프를 지휘했던 나찰공주 둘 뿐.”


광란의 마왕은 죽었다. 지금 세상에서 엘프를 다크엘프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이리스 뿐이다.


“청문회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폐의 마왕님은 마병을 앓고 헬무드로 귀화하는 엘프에게 많은 자비를 베풀고 계십니다. 정기(精氣) 세금의 완전한 면제. 영혼을 팔지 않아도 매달 풍족한 연금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크엘프를 위한, 그들의 숫자에 비해 과할만큼 큰 숲을 나찰공주의 영지로 내리셨습니다.”


발자크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 연금은 대부분이 나찰공주의 군자금으로 쓰입니다만... 문제는 나찰공주의 이상이 너무 크고, 그의 독립군은 이상을 이루기 불가능할 정도로 빈약하다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나찰공주가 이끌고 있는 다크엘프는 그 숫자가 1000명이 조금 안 됩니다.”


300년 전보다 적을 수밖에. 그때 아이리스가 이끌었던 다크엘프들은 절 반 이상이 광란의 마왕을 토벌할 적에 세냐에게 죽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엘프들은 다크엘프가 되느니, 차라리 마병으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유진님은 나찰공주가 가진 전력의 10%를 라이언하트의 본가에 두고 계신 겁니다. 전력증강에 눈이 먼 나찰공주가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는 것이죠.”


“찾아오면 꺼지라고 할 겁니다.”


유진은 싸늘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면... 제게 나찰공주와 교섭해 보라고 말하시는 겁니까?”


“제가 무슨 권리로 유진님을 설득하겠습니까? 저는 나찰공주의 우군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유폐의 마왕님은 헬무드를 지배하고 계시지만, 모든 마족을 통제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공작.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공작은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을 맺지 않았고, 그 외에도 수많은 마족들이 유폐의 마왕님의 통제에 벗어나 있습니다.”


유진은 말없이 발자크를 노려보았다. 그가 대체 무엇을 경고하고 싶은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마족들도 유폐의 마왕님이 정한 ‘법’을 어기고, 누리는 자유에 책임을 져야 할 때에는 제재를 받습니다. 이오드님을 꼬드겼던 올페르 남작의 목을 베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왕이란 결국 가장 강력한 마족일 뿐이다. 일국의 왕이 모든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없듯, 마왕도 그렇다. 마왕이 영혼을 틀어쥐고 통제하는 것은 자신과 계약한 마족 뿐이다.


다만, 그럼에도 마왕의 힘은 절대적이다. 유폐의 마왕이 죽으라 명한다면, 그보다 약한 마족은 계약을 맺지 않았어도 목을 내놔야 한다.


“...헬무드에는 유폐의 마왕님도 도저히 제재할 수 없는 마족들이 있습니다.”


“...멸망의 마왕을 따르는 놈들?”


“예. 그 중에서도 수인족.”


유진은 느끼는 감정을 표정에 내색하지 않으려 의도했다. 오보론의 아들. 사마르에서 싸웠던 바랑의 의형제.


“나찰공주는 최근에 들어서야 현실을 절감했습니다. 1000명도 안 되는 다크엘프. 동족만을 고집한다면 마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수인족과 손을 잡았다는 겁니까? 지금 수인족의 수장, 야곤이 죽였던 아버지는 나찰공주의 형제라고 아는데.”


“아뇨. 나찰공주는 야곤과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대신, 야곤 휘하의 수인족들 일부를 용병으로 끌어들였죠.”


용병?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야곤은 오로지 힘만으로 군림한 짐승입니다. 그는 자신의 눈에 차지 않는 약자를 멸시합니다. 야곤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을 쌓을 수밖에 없죠.”


“...”


“때문에 헬무드에는 용병으로 활동하는 수인족이 많습니다. 중소귀족의 영지전에 참전해 전투경험을 쌓고, 마족을 포식하면서 힘을 키우는 겁니다. 그렇게 강해지지 않고서는 야곤의 총애를 받을 수 없으니까요.”


바랑은 엘프의 영지를 찾는 것이 야곤의 명령이 아니라고 했다.


‘놈도 어느 마족의 용병이었고, 그래서 명령을 받고 온 건가?’


바랑에 대해서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다. 당장은 로베리안이 수집할 정보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 대화는 로베리안님도 듣고 있어.’


로베리안도 용병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였을 거고, 그것을 단초삼아 바랑에 대한 정보를 모을 것이다. 유진은 조급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야곤이라는 놈. 성격이 아주 지랄맞은가 봅니다.”


“제 아버지를 물어 죽인 놈이니까요. 나찰공주도 그런 무법자와 섣불리 손을 잡지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유진님이 말하신 것처럼, 야곤이 물어 죽인 아버지가 나찰공주의 형제기도 하고요.”


오보론이 이끌던 맹수족은 광란의 마왕을 따랐었다. 비록 지금은 멸망의 마왕에게 의탁했다지만, 과거의 전우이자 형제인 오보론을 죽인 야곤과는 손을 잡고 싶지 않을 것이다.


“유진님이 교섭을 거절한다면, 나찰공주는 물러설 겁니다. 그녀는 라이언하트의 본가를 습격해 엘프들을 빼앗으려 들만큼 과격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수인족들을 보내 습격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발자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켰다.


“야곤이 직접 올 리는 없지만, 수인족을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제게 이런 경고를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는 제가 유진님에게 호의를 갖고 있어서... 입니다만...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갖는 호의는, 그, 성애의 종류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저번에 게이냐고 물어본 것이 가슴 깊이 박힌 모양이었다.


“다른 하나는, 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가뜩이나 흑마법사라고 미움을 받는데, 헬무드의 수인족들이 라이언하트를 습격해서... 불상사라도 벌어진다면.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제게 얼마나 많은 비난이 쏟아질지 두렵군요.”


“괜히 아롯에 계셔서 더 욕을 먹는 것 아닙니까? 헬무드로 가신다면 욕먹을 일이 훨씬 줄어들 텐데.”


“하하... 그도 그렇겠지만, 저는 헬무드가 싫습니다.”


발자크는 벗어두었던 중절모를 머리에 쓰며 웃었다.


*


크리스티나는 굳어있는 뺨을 어루만졌다.


거울에 비춰지는 모습이 어딘가 낯설다. 특히 표정. 크리스티나는 눈썹을 찌푸리고, 펴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 끝에 닿는 살결은 부드럽지만, 살짝만 눌러도 안면근육이 경직된 것이 느껴졌다.


본래는 이것이 자연스러웠다. 낯선 것이 아니다. 이런 표정이야말로 크리스티나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몇 번 입술을 우물거리고서, 의식해 미소를 지어보았다.


‘...고작 몇 달.’


몇 번 더 미소를 바꾸어본다. 하지만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마르에서도 이렇게 웃었나? 몇 번, 이렇게 웃은 적은 있었다. 크리스티나에게 있어서 미소는 습관이었다. 별 이유는 없었다. 어릴 적부터, 수도원에 있을 적부터 그렇게 교육 받았다. 무표정과 일그러트린 얼굴보다는 미소가 자애로워 보이는 법이다.


‘고작 몇 달 뿐인데, 내가 본래 어떤 표정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어.’


크리스티나는 양쪽 검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이렇게 보란 듯이 억지로 짓는 미소가 가식보다 나은가. 손가락이 떨어지고, 올라갔던 입꼬리는 다시 내려갔다.


“...가족이라...”


라이언하트를 떠나기 전.


유진과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돈다.


‘친아버지가 아들인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


‘날 위하시는 것을 아는데, 나도 아들로서 아버지 말씀은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별 것 없는 대화. 그런데도 며칠 동안이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다. 크리스티나도 저 말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다만, 저 말은 제대로 된 ‘가족’ 사이에서나 평범한 것이다.


그렇기에 크리스티나는 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태어난 후로 단 한 번도 가족이라는 것에 속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문을 두드리는 소리.


크리스티나는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가식을 얼굴에 담았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지만.’


당장은 어색하지만, 곧 익숙해 질 것이다.


‘당신이 날 죽이려 했던 것이면 좋겠어.’


로게리스 추기경.


아버지를 만난다면, 의식하지 않아도 이런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이곳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있을 테니.’


크리스티나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번개불꽃


유진님, 유진님...


“유진님, 안 일어나실 거예요?”


“일어났어.”


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는 본래부터 잠을 오래 자지 않는다. 야영을 할 때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 된 익숙한 잠자리라면 항상 동트기 전의 새벽에 눈을 뜬다.


사실 누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나지만.


며칠 전부터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깨우는 사람이 생겨 버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유진은 뻑뻑한 눈자위를 부비면서 고개를 돌렸다. 메르는 침대 옆에 서있었다. 유진은 길쭉한 벽시계를 한 번 힐긋 거린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굳이 깨울 필요 없다니까. 그리고 넌 너무 일찍 깨운다고.”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잠도 잘 수 없는 몸이라, 새벽이 지루하고 심심하단 말이에요.”


“수백 년을 그렇게 살았으면서 뭘 새삼스레.”


“그렇게 살다가 간신히 자유를 얻었으니,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거예요.”


메르는 베실베실 웃으며 유진의 뒤를 따라왔다. 이제 메르는 커다란 모자도 쓰지 않고, 낡은 로브도 입지 않았다. 대신에 열 살배기 소녀에게 썩 어울리는, 그렇다 해서 평범하지는 않은 고가의 의류를 입고 있었다.


...유진이 사다 입힌 옷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 생활이 아크리온보다는 훨씬 낫긴 해요. 유진님이 주무시는 동안, 저와 얘기해주는 상대도 많고요.”


메르는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다니며 재잘거렸다. 유진은 그 활기 찬 목소리를 들으며 거울 앞에 섰다. 뜬 머리를 대충 쓸어서 뒤로 넘긴 뒤, 메르를 향해 휘휘 손짓을 했다.


“저리 가있어.”


“네에.”


멀리 가지는 않았다. 메르는 가까운 벽에 착 붙어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그 동안 유진은 잠옷의 단추를 풀며 옷장을 열었다.


널찍한 옷장 안에 든 것은 죄다 비슷한 무복 뿐. 그 외의 옷들은 따로 마련 된 드레스룸에 있다. 유진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무복을 꺼내 입고서, 벗어 놓은 잠옷은 발로 툭 차서 문 근처의 바구니에 던져 놓았다.


“다 되셨어요?”


“어.”


처음 메르를 데리고 나왔던 날. 신경쓰지 않고 옷을 갈아입자, 메르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빽빽 비명을 질렀다. 그 후로 유진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이런 번잡한 과정이 끼어들게 되었다.


그건 적색마탑이 아닌 라이언하트의 본가, 별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문 밖에는 니나와 시종들이 서있었다. 유진이 건성으로 인사를 받는 동안, 고개 숙여 낮춘 시선을 메르와 맞추었다. 니나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 메르는 방긋 웃었다.


“애니실라님이 본가에서 함께 아침식사를 하지 않겠느냐 권하셨습니다.”


“어제 저녁도, 점심도, 아침도 함께 먹었잖아.”


“가족이 같은 식탁에 앉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렇지.”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메르와 함께 본가에 돌아온 지 오늘로서 일주일.


처음에는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다. 100명에 달하는 엘프들을 데리고 왔을 때, 애니실라는 부채를 으스러트렸다. 결국 엘프를 숲에 살게 하는 것은 허락해 주었지만, 예고도 없이 본가의 식솔을 늘리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안주인’ 자리에 앉은 애니실라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권위에 도전한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한 명을 더 데리고 돌아왔다. 솔직히 쓴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애니실라님은 좋은 분이세요.”


메르는 방긋 웃으며 유진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이 옷도 애니실라님이 선물해주신 거라구요.”


지금 입은 옷뿐만이 아니다. 애니실라는 텅 비었던 별채의 방 하나를 메르를 위한 드레스룸으로 만들었고, 고작 하루만에 방의 옷장들을 가득 채웠다.


“유진님이 수련하시는 동안, 심심하면 언제든지 본가에 찾아오라고 말씀하셨어요. 유진님도 아시죠? 본가의 서재. 물론 그곳은 마도서도 없고, 서재로서의 가치도 아크리온과 비할 바가 아니지만. 아크리온에서는 읽을 수 없는 다양하고 재미난 책들이 많더라구요.”


...쓴 소리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애니실라는 유진과 메르를 환영해 주었다. 그녀도 본가에서 아롯의 소식은 들은 것이다. 제한이 걸린 결투였다고는 해도, 아롯이 자랑하는 마탑주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것.


그 승리는 온전히 유진의 것이 아니다. 유진이 위업을 세우는 만큼, 라이언하트의 위상이 높아진다. 솔직히 그 승리만으로도 애니실라는 엘프에 대한 불만은 얼마든지 삭일 수 있었다.


거기에 아주 작고.


아주 귀여운 소녀 하나가 더해지는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애니실라는 정실이 아니다.


그러한 조건에서 자식들을 가주로 만들고자 했다. 덕분에 시안과 시엘. 둘은 어려서부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둘은 걸음마를 땐 순간부터 마나에 입문하고, 무기를 쥐었다.


애니실라는 자신의 육아방침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가끔 도가 지나쳐 체벌이 과한 적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식들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 믿었다. 마냥 회초리만 든 것도 아니었다. 회초리를 든 다음에는 항상 자식들이 바라는 달콤한 선물을 주었다.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엄격한 가풍 같은 것은 잠시 내려놓고, 순수히 자식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 잘못을 회초리로 꾸짖지 않고, 오로지 사랑으로만 달래주며 끌어안고, 다독이고 싶다는 마음.


특히 그것은 딸인 시엘을 볼 때마다 강하게 생각되곤 했다. 딸은 어렸을 때부터 귀엽고 앙증맞았다. 그 모습에 어울리는 깜찍한 옷을 입혀보고 싶다. 예쁘게 꾸민 딸에게 검이 아닌 인형 따위 장난감을 선물하고 싶다. 딸과 단둘이 외출하여 쇼핑도 해보고 싶고, 사교회 같은 곳에 데리고 나가 자랑도 하고 싶다...


‘...시엘과는 그러지 못했었지.’


시엘은 딸이고 소녀이기 전에 라이언하트의 후예. 애당초 시엘 본인이 인형보다는 검을 선호했고, 쇼핑과 사교회보다는 검술훈련을 바랐다.


애니실라는 그 사실을 뿌듯이 여겼다. 사교회에서 깔깔거리며 남 욕과 가십이나 씹어대는 골빈 귀족모녀보다, 훗날의 영광을 위해 매일 땀방울을 흘리는 딸이 자랑스러웠다.


‘...그래도 한 번쯤은...’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 시엘이 바란다면 언제고 응할 생각이었지만, 딸은 애니실라가 바란 것 이상으로 다부졌다. 설마... 설마 함께 드레스를 입고, 수도 귀족이 주최하는 파티에 가보기도 전에... 제 미래를 다짐하고, 흑사자성에 가버릴 줄이야.


“조금 더 빨리 갈 수 없어?”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다. 초봄의 날씨는 한 겨울와 비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춥다. 애니실라는 두터운 모피코트의 자락을 여미며 창밖을 보았다.


“최대한 빨리 가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수행원으로 대동 된 것은 백사자 기사단 2번대 부대장인 헤자르. 그는 안주인의 성격이 얼마나 까칠한지를 잘 안다.


“...아가씨가 굉장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본가를 섬겨온 지 어느덧 20년. 농담쯤은 대수롭지 않게 나누어도 될 만큼 충성해 왔다. 물론, 저 까칠한 안주인은 농담을 제대로 받아준 적이 없다. 본래의 애니실라라면 헛소릴랑 하지 말라며 쏘아붙이겠지만.


“...애가 귀엽더라고.”


자식들이 모두 본가를 떠나있던 탓인지. 애니실라는 열 살 배기의 모습을 한 메르에게 푹 빠져버렸다. 메르는 애니실라의 이루지 못하고 지나친 욕망을 그대로 실현해 놓은 것만 같은 존재였다.


달콤한 과자를 주면 공손히 인사를 하고, 사랑스런 표정으로 야금야금 먹는다. 케이크라도 주면 보는 이의 가슴이 욱신거릴 만큼 귀엽게 웃는다. 하늘하늘한 치마를 질색하던 시엘과는 달리, 메르는 무슨 옷을 주건 기뻐한다.


“...굳이 별채에서 지내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아?”


“유진님이 데리고 오셨잖습니까. 메르 아가씨도 별채에서의 생활을 원하시고...”


“요즘 들어 생각하는 건데, 별채가 본가와 너무 멀어. 건물도 연식이 되어 낡았는데, 슬슬 보수를 해야 하지 않나?”


그 동안 별채의 식구들은 어쩔 수 없이 본가에 지내야 한다.


“아니. 보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허물고 새로 짓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본가의 바로 옆에 말이지.”


그렇게 한다면 이른 아침부터 마차를 타고서 별채로 갈 일도 없겠지. 끼니때마다 별채의 식구들을 본가의 식탁에 부르지 않아도 될 거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췄다. 애니실라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 문은 바깥에서 열어주는 것. 안에서 허겁지겁 여는 것은 애니실라가 지향하는 품위에 어긋난다.


고작해야 몇 초. 단 한 번도 그 시간이 더디다며 짜증을 낸 적이 없는데.


‘잠이 부족했나? 오늘따라 왜이리 느린 것 같지?’


곧 문이 열렸다. 애니실라의 짜증을 읽은 헤자르는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 애니실라가 내리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공기가 차다.


“...어쩜...”


애니실라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 코트자락을 움켜쥐었다.


‘너무 귀엽잖아...!’


별채의 수련장. 그 한 켠에 폭신한 외투를 입은 메르가 보였다. 바로 앞에는 유진이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옷까지 벗고 앉아 있었다.


“...쟤 지금 뭐하는 거야?”


“명상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건 나도 봐서 알아. 왜 이 추운 날씨에 밖에 나와, 옷까지 벗어두고 앉아서 명상하는 거지?”


애니실라의 가문도 제법 유서 깊은 무가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여러 무예를 익혔지만, 이렇게 추운 날씨에 굳이 저러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 거면 혼자서 하던가. 저 어린 애를 밖에다 데려다 놓고...!”


애니실라는 분노로 몸을 떨며 주먹을 쥐었다.


“애니실라님!”


어느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메르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 애니실라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오래 전, 시엘과 시안이 처음으로 ‘엄마’라고 말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으흠.”


애니실라는 곧장 표정을 관리했다. 이쪽을 올려보는 메르의 얼굴이 희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애니실라도 안다. 저 앙증맞고 귀여운 소녀가, 사실은 존재한지 수백 년이 넘은. 인간이 아닌 사역마라는 것. 아무리 추워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러한 점들이 애니실라의 모성애를 자극한다.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지금 애니실라가 느끼는 바람이 차가운 것이 중요할 뿐. 애니실라는 헛기침을 하면서, 목에 두르고 있는 최고급 원단의 목도리를 메르의 목에 둘러주었다.


“...오늘 유진의 중요한 손님이 찾아온다니, 어찌 맞이할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이란다.”


“중요한 손님은 아닙니다.”


유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애니실라님이 신경쓰실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제 개인적인 손님이고...”


“네 손님이 라이언하트의 손님이지.”


애니실라는 유진을 흘겨보았다. 그러는 중에도, 애니실라의 양손은 메르의 목에 감은 목도리를 뺨과 귀까지 단단히 싸매고 있었다.


“게다가 중요한 손님이 아니라니? 나는 그 말은 동의할 수 없구나. 상대는 아롯의 백색마탑주잖니?”


멜키스 엘하이어.


어젯밤. 아롯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준비’가 되었으니, 내일 라이언하트의 본가를 방문하겠다는 편지.


“...뭐 그렇기는 한데... 사적인 방문이니까 워프게이트만 열어주시면...”


“그럴 수는 없어. 찾아 온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인 내 몫이야.”


애니실라는 그것에 대해서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마탑주 정도 되는 명사와의 인연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적탑주 로베리안이야 길레이드의 지인이고, 혈계식 이후로는 해마다 방문하곤 했다. 그에 더해, 백탑주와도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 설령 그 인연이 양자인 유진에 의해 이어진 것이라 해도, 어찌 엮느냐에 따라 라이언하트와의 인연이 될 수도 있다.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다섯 마탑주 중 유일한 여자.’


나이가 몇이더라? 애니실라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기억이 맞다면, 예순은 이미 넘었다.


‘...하지만 외모는 아름답다고 들었어.’


적탑주 로베리안도 본래라면 꼬부랑 할아버지일 나이인데 이십 대 청년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나도 관리에는 자신이 있지만, 아무래도 마법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 앞으로 십 년은 거뜬하겠지만, 그 이후부터는 마법이라도 더해야...’


“애니실라님?”


메르의 목소리가 애니실라의 정신을 깨웠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메르를 내려다보았다. 목도리에 꽁꽁 싸매진 메르가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고 있었다.


“...으흠.”


끌어안을 뻔 했다. 애니실라는 스스로의 자제력에 감탄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슬슬 아침 수련도 끝난 것 같은데. 이대로 같이 본가로 가서, 아침식사나 하자꾸나.”


“저희 아버지는 아직 침대에 계실 걸요.”


“...무리해서 깨울 필요는 없단다. 제하드님은 이 시간에 아침을 드시는 것보다 정오까지 주무시는 것을 더 좋아하실 테니.”


“뭐 그건 사실이죠.”


애니실라는 아침은 언제나 조촐하다.


채식 위주의 밸런스 잡힌 식단과 설탕없는 커피. 혼자라면 그렇겠지만, 메르와 유진이 더해진 이상 식탁은 아침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과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기, 고기, 고기, 고기.


식탁은 그야말로 고기의 향연이었다. 돼지, 소, 닭 등등. 여러 짐승의 여러 부위가 여러 방식으로 요리되어 식탁을 채우고 있다.


유진은 끼니마다 항상 고기를 먹는다.


메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달콤하고 폭신한 디저트 외에도, 그냥 맛있는 요리를 좋아했다. 애니실라는 냄새만 맡아도 속이 부대낄 정도였고, 실제로 고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흐뭇한 얼굴로 메르가 음식을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요리사를 늘려야겠어.’


본가의 요리사들은 지금도 충분히 많다. 그들 모두가 키옐 최상위에 드는 전문가들이다.


‘키엘 만으로는 안 돼. 저 아이, 수백 년 동안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고 했잖아? 그렇게 보낸 시간을 모조리 덮어씌울 정도의 많은 요리를 먹여줄 거야.’


애니실라는 그렇게 다짐했다.


*


멜키스가 도착한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난 후였다.


“안녕!”


워프게이트를 걸어 나온 멜키스는 쾌활히 인사를 건네며 손을 흔들었다. 발목에 닿을 정도의 길이에, 덩치를 족히 두 배는 크게 만들어주는 털이 풍성한 코트. 그 모습과 경박한 인사는, 애니실라가 상상했던 근엄한 마탑주와는 전혀 달랐다.


“라이언하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애니실라는 당황으로 품위를 잃지 않았다. 멜키스는 호피문양이 들어간 선글라스를 위로 들추며 애니실라를 쳐다보았다.


“누구?”


“...본가의 안주인을 맡고 있는 애니실라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아하! 이렇게 마중을 나올 필요는 없는데. 부인에 대해서는 적탑주에게 들었어요.”


멜키스는 방긋 웃으며 애니실라에게 다가갔다.


“그 명망높은 라이언하트 본가에 찾아가는데, 빈 손으로 오는 것도 좀 뭐하잖아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부인에게 어울릴 것 같은 선물도 가져왔죠.”


“선물이라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에헤, 그렇게 말하지 마시고. 선물이 뭔지 알면 부인도 제게 감사할 걸요?”


멜키스는 슬쩍 몸을 기울여 애니실라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애니실라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선물을 가지고 오신 거예요?”


유진은 기사들과 돌아가는 애니실라의 등을 쳐다보며 물었다.


“회춘약.”


“예?”


“백색마탑은 정령술 말고 연금술도 다루거든. 나야 연금술은 잘 모르지만, 내 밑에는 아롯 최상위 연금술사들이 많다는 말이지.”


멜키스는 거들먹대며 팔짱을 꼈다.


“사실 회춘약이라기보다는 피부미용에 특화된 것이지만... 그래도 이거 엄청 비싼 거다? 아롯의 왕가에만 납품되는 약이라고.”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던 것이다. 애니실라가 백탑주와의 인연을 바랐듯이, 멜키스도 라이언하트와의 인연을 바랐다.


“오늘 널 위해 가져온 것도, 연금술사들을 들들 볶아서 만들어낸 거야.”


“대체 뭔데 그래요?”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멜키스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실실 웃기만 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곧 보게 될 테니까.”


사실 지금 당장 꺼내서 보여주고 싶다만. 멜키스는 고개를 들어, 라이언하트의 숲을 돌아보았다.


“일단... 별채로 안내해 드리죠.”


“별채?”


멜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령사인 나보고, 이 숲을 두고서 재미없는 별채에나 가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멜키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싹거림에 몸을 떨었다.


추운 계절이라고 믿을 수 없는 초록의 숲. 넘쳐흐르는 마나. 대정령사인 멜키스는 이 숲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곳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정령이 많은 숲은 처음 봐.”


멜키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낮추었다. 그녀는 번개의 정령왕 뿐만이 아니라 땅의 정령왕과도 계약을 맺었다.


그렇기에,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정령들이 숨쉬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 여기서 살면 안 돼?”


“안 됩니다.”


유진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번개불꽃


멜키스의 감탄은 숲을 걷는 내내 이어졌다. 이 계절이라 믿을 수 없는 초목이 우거진 숲. 풍경마다 녹아있는 원시정령과 그 외의 여러 정령들.


“이 숲은 정령술사들이 바라는 천국이야!”


멜키스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진짜, 과장이 아니라니까? 나도 수십 년 정령술을 익히면서, 정령이 많다는 스팟은 수십 수백 곳은 가 봤어. 그런데 여기만큼 정령이 많고 활기찬 곳은 처음이라고!”


“아, 예.”


“이 숲이라면, 최소한의 친화력만 있어도 곧바로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거야. 이미 맺은 상태여도, 이곳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정령술의 진전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아니, 아니! 정령술 뿐만이 아니라! 대체 뭐야? 이렇게 마나가 넘치는 게 말이 돼?”


너무 흥분한 나머지 멜키스는 양손을 새처럼 퍼덕거렸다. 그러면서 대뜸 유진에게 달려들더니, 멱살을 틀어쥐었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건 범죄야!”


멜키스가 빽 고함을 질렀다.


“이만큼 마나와 정령이 넘치는 스팟이 일개 가문의 사유지라니!”


“어... 음... 라이언하트가 일개 가문이라 불릴 급은 아니지 않나...”


“얌마, 마도왕국인 아롯도 이만한 규모의 마나스팟은 안 가지고 있어! 아롯 뿐만이 아니라, 대륙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일걸?!”


“헬무드에는 있을 걸요.”


“...그으거언... 그럴 수도... 있겠다. 아 어쨌든, 이곳은 단순하 마나스팟도 아니잖아! 헬무드에도 이만 한 급의 정령 스팟은 없... 으음... 어둠의 정령의 스팟은 넘치겠지만...”


멜키스는 내뱉는 말을 정리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하지만 결론에는 곧 도달할 수 있었다.


“...나 진짜 여기서 살면 안 돼?”


“거 안 된다니까요.”


“그럼, 사는 거 말고 일주일에 이틀 정도...”


“안 됩니다.”


“진짜 치사하다. 따지고 보면 이 숲, 네 거도 아니잖아. 라이언하트 부인께서 내 선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시던데... 그녀와 교섭하면 되는 것 아냐?”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뚱한 표정으로 멜키스를 응시했다. 사실 무조건 거절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다만, 템페스트에게 들은 멜키스의 기행이 가슴에 걸릴 뿐이다. 만약 멜키스가 위니드를 들고 그랬던 것처럼, 밤중에 이 숲을 알몸으로 뛰어다니기라도 한다면? 유진은 그 모습은 도저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치사한 자식. 그렇게 노려볼 것은 없잖아. 진짜, 진짜 치사해서 나도 더 안 졸라. 사실 난 아쉬울 것 하나 없거든? 난 이미 정령술사로서 정점에 서있다고.”


“훌륭하십니다.”


멜키스는 뿌득뿌득 이를 갈면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홱 몸을 틀어, 다시 숲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메르는 어디 있는 거야?”


“여기 있어요.”


유진의 망토가 들춰지고, 메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멜키스는 잠깐 동안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애장품이던 흑암의 망토가, 저 조그마한 소녀의 집으로 쓰이다니...


‘...저런 용도로 쓰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아주 요긴하게 잘 쓰고 있구나.”


“6년 뒤에 멀쩡히 잘 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셔요.”


“당연히 그래야지. 어디 흠집이라도 났다간, 이 숲을 통째로...”


“...”


“농담이야, 농담. 얘도 진짜, 어른에 대한 공경이 뭐 이리 없나 몰라? 아주 내가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이 누나는 아주 무서워 죽겠어.”


“누나는 좀...”


“조용히 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녹탑주, 그 개자식이 추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멜키스는 녹탑주가 결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지만, 유진이 탑주에 대한 공경을 져버린 것이 녹탑주의 추태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정령과 마나가 가득 찬 곳.”


“이 숲 어딜 가도 그럴 텐데.”


“그 중에서도 특히나 밀집된 곳이 있잖아. 안내해 줄 필요는 없어. 나는 이미 느끼고, 안내를 받고 있으니까.”


마침 좋은 기회다 싶었다. 멜키스는 빙긋 웃으며 보란 듯이 코트자락을 펄럭였다. 그러자 멜키스가 딛고 있던 땅이 파도처럼 치솟아 올랐다.


“이 땅의 정령들이, 나를 인도해주고 있단 말씀이야.”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멜키스를 올려다보았다. 멜키스는 유진의 감탄을 기다리며, 아직까지 땅의 파도 위에서 양팔을 펼치고 있었다.


“...갈까요?”


“너도 탈래?”


“아뇨...”


“거절할 필요없어. 이거 타는 거 꽤 재미있단다!”


멜키스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유진이 서있던 땅이 꿈틀거렸다. ...솔직히 놀랍기는 했다. 땅의 움직임은 마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정령에 의한 것이었다.


‘하긴, 땅의 정령왕과 계약했으니.’


유진은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섰고, 멜키스는 아직까지도 파도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움직이는 땅 위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 있으니, 망토 안에 있던 메르도 꼬물거리며 나와 유진의 곁에 섰다.


“서핑 해 본 적 있어?”


“아뇨.”


“마음에 들면 언제든지 말해. 바다에 갈 필요 없이, 내가 널 위한 파도를 만들어 줄 테니까.”


“좀 부담스럽네요...”


“왜? 이 누나의 말에 설렌 거니?”


“징그러운 말 하지 마세요.”


유진은 질색이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메르는 그 말이 제법 마음에 든 것인지, 아니면 요동치는 땅을 타는 것이 즐거운 것인지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오...”


숲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얼마 전에 완공이 끝난 엘프의 마을이었다. 마침 오늘이 물자의 보급 날인 것인지 마차가 마을 입구부터 줄을 서고 있었다.


“유진 주인님. 무슨 일이십니까?”


마차의 앞에 서서 내리는 물자를 체크하고 있는 것은 나리사와 레베라였다.


“네... 취향이 참... 독특하고... 어... 음... 충격적이구나.”


멜키스는 더듬더듬 말을 이으며 나리사와 레베라를 쳐다보았다.


라이언하트의 메이드복을 입은 두 엘프. 한 명은 다리에 의족을 차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다...


엘프를 시종으로 쓰는 것이야 드문 일은 아니다만. 두 엘프 모두가 신체 어딘가가 훼손되었다는 것은 멜키스로 하여금 음습하며 퇴폐적인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모든 취향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야. 너무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어... 너도 내 부끄러운 비밀들에 대해서는 꽤 알잖아.”


“오해 살 말도 하지 마시고.”


꾸벅 인사를 전했던 나리사와 레베라가 이쪽을 빤히 보고 있다. 별채의 견습시종인 저 둘은, 유진이 없는 동안 니나의 완전한 측근이 되었다. 멜키스가 지껄인 헛소리가 니나에게 전해지고, 거기서 또 아버지인 제하드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래서 정령과 마나가 가득한 곳이 여기에요?”


“으흠... 으흐흠...”


“아 진짜 이상한 생각하지 마시라고.”


“알았어,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멜키스는 헛기침을 하면서 손가락을 들었다.


“저곳이야.”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엘프의 마을 뒤편. 세계수의 묘목을 심어놓은 곳이었다. 심은지 아직 몇 주도 지나지 않았지만, 저 묘목들은 사마르에서 뽑아왔을 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저게 네가 사마르에서 가져왔다는 요정목이지?”


“네.”


“살아있는 요정목을 보는 건 나도 처음이야. 선물로 나뭇가지 실한 녀석으로 하나만 꺾어가도 될까?”


“멜키스님 하는 거 봐서요.”


유진은 투덜거리며 요정목에게 다가갔다. 멜키스는 그 뒤를 따르면서, 요정목과 조금 떨어진 뒤편에 있는 오두막을 보았다.


‘저곳이 숲의 중심이군.’


라이언하트의 영맥.


‘요정목의 뿌리가 영맥과 연결 된 건가? 그래서 영맥의 힘이 증폭되어서 마나가... 아니... 잠깐... 이곳의 정령, 뭔가 다른데...?’


자아를 갖지 못한 원시정령. 그건 익숙하지만, 이곳의 원시정령은 숲의 다른 정령들과 무언가 달랐다.


“...착각인가?”


“뭐가요?”


“이곳의 원시정령들... 뭔가 달... 맙소사! 이거 요정목이 아니라 세계수야?!”


멜키스는 꺅 비명을 지르며 묘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곤 펄쩍 뛰어오르더니 고목나무에 붙는 매미마냥 나무기둥을 팔다리로 휘감았다.


“내가 살아서 세계수를 보게 되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수는 아니고, 거기서 갈라져 나온 묘목인데...”


“맙소사, 맙소사!”


“어떻게 아신 거예요?”


“레빈과 야노스가 말해줬어!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일개 가문의 숲에 세계수의 묘목이! 세 그루나 존재하다니!”


“레빈과 야노스는 또 누구야?”


“번개의 정령왕과 땅의 정령왕!”


“계속 그러고 계실 거예요?”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멜키스가 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달라고 해도 안 줄 거지?”


“절대로 안 줘요.”


“끄으윽... 얼추 사정을 알 것 같아서 더 조를 수도 없는 게 서러워. 내 안에 남은 인간성에 감사하도록.”


사마르에서 데리고 온 엘프들. 세냐가 은거 중이라는 엘프의 영지. 세계수의 묘목이 이곳에 있는 것은, 세냐의 뜻임과 더불어 엘프들을 위해서일 것이다. 멜키스는 미련이 그득 남은 눈으로 세계수의 묘목을 올려다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백색마탑에 한 그루 두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다. 멜키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나무 밑에 털썩 앉았다.


“이리 와 봐.”


“저랑 뭐 협상이라도 하시려고?”


“그런 거 아니야. 이곳에 온 목적대로, 너와 정령의 계약을 시작하려는 거야.”


멜키스는 코트를 활짝 열더니, 그 안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 유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뒤에는 자리에 앉은 체로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에서 뻗어나간 빛이 주변의 땅에 술식을 적고, 마법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것을 보면서 멜키스의 앞에 앉았다.


“저도 앉아야 하나요?”


메르의 질문에 멜키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밖에 나가 있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네 섬세한 술식이 침범될 수도 있으니.”


“...위험한 거예요?”


“정령과의 계약은 무드가 중요해. 특히 번개의 정령은 성미가 거칠거든? 술자가 아닌 사역마가 괜히 같이 있다가, 괜히 번갯불을 튀길 수도 있단 말이야.”


멜키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옷 벗을래?”


“...계약하는데 옷을 벗어야 합니까?”


“나는 그 편을 선호하지. 불필요한 치장을 벗어던진, 원초의 모습으로 다가가야 정령과의 감응이 훌륭해져.”


“템페스트가 그거 미신이라던데?”


“...정령마다 선호하는 취향이 다른 법이지. 어쨌든, 내 조언은 옷을 벗는 거야. 웃옷 정도는 벗어두는 편이 좋을 걸? 계약 도중에 타버릴 수도 있거든.”


유진은 눈썹을 콱 구겼다. 그래도 조언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동생 몸 좋네?”


멜키스는 상의를 벗고 돌아 온 유진을 보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유진은 지긋지긋하단 눈으로 멜키스를 노려보며 앞에 털썩 앉았다.


“상자나 열어 봐요. 대체 뭔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시는지 궁금하네.”


“으흐흐!”


멜키스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상자가 열렸다.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상자의 안을 쳐다보았고, 그 순간.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것이 ‘번쩍’ 빛을 내며 튀어올랐다.


“이게 뭐에요?”


파치치칙! 멜키스가 만든 결계의 안에서 번갯불이 미쳐 날뛰었다. 눈으로 쫒기 버거울 만큼의 속도. 결계의 벽과 부딪치면서 이리저리 반사된 빛이 잔상을 남긴다. 놈이 번갯불을 튀어낼 때마다, 옷을 벗은 상체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번개불꽃.”


멜키스는 요리조리 날뛰는 번개불꽃을 사랑스럽단 눈으로 보았다.


“마법소재 중에 말이야, 번개를 머금는 뇌정석이라는 것이 있어. 보통은 아티펙트의 소재로 쓰이는 귀중한 원석인데, 수준높은 정령사라면 뇌정석을 가공해 번개의 정령 자체를 담을 수도 있지.”


따악! 멜키스의 엄지와 검지가 부딪쳐 소리를 발했다. 그러자 날뛰던 번개불꽃이 움찔 멈추더니,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이건, 그 뇌정석을 연금술로 가공한 거야. 원석이되 원석이 아니라 불꽃으로 제련한 거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있지. 원석은 결국 돌이야. 돌은 아무리 가공한들 애초부터 가진 크기보다 커질 수는 없어. 깎고, 부수고, 그렇게 ‘작게’ 만들지. 하지만 불꽃은?”


멜키스는 방긋 웃으며 유진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불꽃은 다루는 방법에 따라 변화가 자유롭지. 물은 담을 그릇이 필요하지만, 불꽃은 그릇조차 필요 없어. 커지고, 작아지고... 그러면서 난폭하지. 즉, 아주 호전적이면서 편리한 소재라는 거야.”


“아하...”


“물론 이건 단순한 불꽃이 아니야. 불꽃처럼 타오르지만, 구성 자체는 번개의 원시정령을 담았어. 즉, 자아는 없고 성질만 지독한 놈이란 말씀이지. 어때? 매력적인 소재라 생각하지 않아?”


“그렇기는 한데...”


“반응이 싱거워! 이거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 불꽃을 만드는데 들어간 뇌정석만 몇 톤이야. 그걸 불꽃으로 바꾸고, 내가 번개의 정령왕을 직접! 불러들여서! 고출력의 번개를 푸지게 담았다고!”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번개불꽃을 응시했다. 웅크리고 있는 번개불꽃은 모닥불 정도의 크기... 하지만 유진은 그 안에 응축된 거대한 마나를 느꼈다.


“상성은 걱정하지 마.”


멜키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굳이 형상을 ‘불꽃’으로 잡은 것은, 라이언하트의 백염식. 그를 통해 운용한 마나가 불꽃을 띄기 때문이야. 별 의미가 없어 보여도, 그건 꽤 중요한 거거든. 이미 완성 되어 걸친 옷에 색을 더하는 거랄까... 친화력이 부족한 만큼 ‘익숙하게’ 만드는 거야.”


“...계약은 어떻게 하는 거죠?”


“번개불꽃을 잡고.”


멜키스는 유진의 앞에서 활짝 손을 펼치더니, 꽉 주먹을 쥐었다.


“네 마나와 감응시켜. 백염식을 쓰면서 말이야. 요령은... 그래. 너의 마나... 너의 힘. 존재. 너 자신. 그렇게 번개불꽃의 형태를 바꾸어 봐. 그러다보면 자연히 번개불꽃이 외부의 마나에 저항할 거야.”


“굴복시키라는 건가요?”


“정령사인 내 입장에서는 굴복이란 말보다 화합과 융화란 말이 좋다고 생각한다만. 뭐 그건 너 자신이 타협할 일이니. 일단 직접 해보는 것이 빠를 걸?”


확실히.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번개불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새끼 봐라?’


뻗은 손이 가까이 갔을 때. 번개불꽃이 움찔하더니 크기를 키웠다. 마치 유진의 손을 통째로 삼키려는 것처럼 말이다. 유진은 픽 웃으면서 환염식을 운용했다.


화아악! 새하얀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곧 불꽃은 푸르스름하게 물들었다. 유진은 불꽃에 휘감긴 손으로 번개불꽃을 잡았다.


ㅡ빠지직!


번개가 튄다. 양팔이 저릿거렸다. 이빨이 따닥, 하고 부딪쳤다. 양팔 근육이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고,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팔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유진은 번개불꽃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제 몸에 가까이 끌어당겼다.


“음... 조금 상냥하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굴복이든 화합이든, 그건 제가 타협하면 될 일이라면서요.”


유진은 뺨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저항이 거센 것이 꽤 재미있었다. 빠지직...! 유진이 압박하는 대로 번개불꽃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 음... 그건... 그렇지. 일단, 그렇게 계속 하다보면... 번개불꽃에 끌려 나온 정령을 느낄 수 있을 거야.”


하급일리는 없고. 못해도 중급 정령과 계약할 수 있을 거다.


‘상급까지는 안 되겠지.’


사실 정령의 급수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계약을 맺어두면, 정령을 어찌 다루느냐에 따라서 친화력은 후천적으로 오르게 된다. 당장 번개의 하급 정령과 계약한다면, 나중에라도 윗등급의 번개정령과 계약이 가능하단 말이다.


‘아니면 레빈. 네가 조금 더 도와주는 게 어때? 아예 처음부터 번개의 상급정령을 불러와서...’


[계약은 공정해야한다.]


멜키스의 머릿속에서 번개의 정령왕, 레빈이 대답했다.


[나로서는 저 번개불꽃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멜키스, 네가 고집을 부리며 졸라대어 양보해주었던 것. 저만큼이나 편의를 봐주었으니, 계약 자체는 스스로 해야 한다.]


‘쪼잔하기는...’


[정 상급정령을 쓰게 해주고 싶었다면, 아예 정령이 깃든 아티펙트를 만들지 그랬나?]


‘그건 결국 무기에 깃든 정령을 사용하는 것이지, 계약이 아니잖아.’


그래서 위니드가 터무니없는 보물인 것이다. 저 검은 단순한 정령을 ‘담은’ 것이 아니라, 바람의 정령왕과 직접 계약을 맺게 해준다.


“...음...”


번개불꽃을 주무르던 유진의 표정이 바뀌었다. 번개불꽃이 뿜어대는 번갯불. 그 중에서 이질적인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번개친화력을 가진 멜키스가 그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멜키스는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정령이 깃들고 있어.”


“...하급?”


“아니, 중급이야.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자, 이제 그 정령을 의식해서 계약을...”


“너무 약한데?”


유진은 표정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당장 느껴지는 정령의 ‘힘’은 번개불꽃보다 못했고, 뇌광궁으로 쏘아대는 번개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일단 계약부터...”


“조금 더 주물러 보죠.”


아직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다. 근거 없는 추측이 아니었다. 유진의 마나장악력은 세냐조차 인정했을 만큼 천재적이다. 번개불꽃에 깃든 번개는 원시정령이고, 원시정령은 곧 마나의 다른 모습이다.


유진은 원시정령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가공’되어 붙잡힌 원시정령이라면, 얼마든지 마나처럼 느끼고 조율하는 것이 가능했다.


환염식. 코어의 회전이 빨라진다. 내부의 폭발이 거듭되는 만큼 유진의 마나가 증폭되었다. 몸을 휘감은 불꽃이 완전한 푸른빛으로 변했다. 파직, 파지직! 불꽃을 주무를 때마다, 푸른불꽃과 번개가 뒤섞였다.


그렇게 불씨가 튄다. 마나가 흩어진다. 그걸 다시 환염식으로 끌어당긴다. 낭비 없이, 코어로 인도한다.


...마나에 번개가 섞인다. 몸 안에, 코어에 번개가 흘러들어온다.


“어... 어어...”


멜키스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래도 되는 건가? ...모르겠다. 멜키스는 저런 일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시도를 해본 적도 없었다. 애당초 저렇게 쓰라고 번개불꽃을 만들어 가져온 것도 아니다.


“너... 괜찮아? 안 아파?”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를 빠득빠득 갈고, 부릅뜬 눈으로 번개불꽃을 노려보기만 했다. 시야가 번쩍거렸다. 주무를 때마다 번개불꽃은 작아졌고, 환염식이 ‘폭발’을 일으킬 때마다 번개불꽃은 다시 부풀어 올랐다.


[...멜키스?]


레빈은 멜키스의 눈을 통해 유진을 보았다.


[...저 녀석 대체 뭐지?]


‘...몰라.’


[저런 식으로 원시정령을 조율할 수 있단 말인가...?]


레빈의 경악은 당연했다. 원시정령은 정령의 순수한 본질이다. 하급정령보다 나약하지만, 하급정령의 힘에서도 제 존재를 잃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정령은 모두가 한때 원시정령이었고, 그건 정령왕도 마찬가지였다.


[...멜키스.]


‘나도 모르니까 그만 좀 불러!’


[아니... 물어보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집중했다.]


‘뭐?’


[결계가 부서지고 있다.]


멜키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빈의 말대로였다. 번개불꽃이 날뛰지 못하도록 펼쳤던 결계가, 이 공간에서 움직이는 힘을 견디지 못해 균열이 가고 있었다.


‘난 또 뭐라고... 다시 결계를 만들면 되는 거잖아?’


[...아니. 잠시 내버려 두어라.]


멜키스가 마법을 펼치려는 순간, 레빈은 즉시 만류에 나섰다.


‘왜?’


[...저 균열을 봐라.]


레빈의 목소리가 떨렸다. 멜키스는 그 떨림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균열을 쳐다보았다.


곧, 멜키스의 눈도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세계수의 정령이 번개에 감화하고 있다.]


번개가 균열 사이사이로 흘러들어온다. 그렇게 번개불꽃에 더해지고, 환염식을 통해 유진에게 인도되었다.


“...대체 무슨...”


멜키스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은 순간.


ㅡ꽈지직!


번개가 폭발했다.


번개불꽃


정령의 번개는 멜키스를 위협할 수 없고, 폭발의 징조도 있었다. 그래서 멜키스는 폭발에 휘말렸음에도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경악은 느꼈다. 이 폭발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결계의 균열. 바깥을 떠돌던 세계수의 정령들이, 그 균열을 통해 내부로 들어와서.


번개가 되었다. 갑작스런 증식에 번개불꽃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멜키스는 폭발에 밀려난 몸을 바로잡고, 몸을 휘감는 전류를 털어냈다. 그 모습은 달라붙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불가능하지.]


대답한 것은 레빈이 아니었다. 과묵한 땅의 정령왕, 야노스가 드물게도 멜키스에게 목소리를 건넨 것이다.


[정령은 그 본질을 탈피할 수 없다.]


바람과 불, 땅 등에는 원시정령이 깃들어 있다. 그들은 자아도 갖추지 못한, 마나의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마나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땅에 깃든 원시정령은 결국 ‘땅의 정령’이다.


그건 멜키스도 잘 알고 있었다.


정령술의 기본은, 정령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비록 정령이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바람의 정령은 절대로 땅의 정령이 될 수 없다. 땅의 정령은 절대로 불꽃의 정령이 될 수 없다. 불꽃의 정령은 절대로 물의 정령이 될 수 없다...


“...세계수의 정령.”


멜키스는 굳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런 폭발에도세계수의 묘목은 다친 곳 하나 없었다. 멜키스는 나뭇가지 사이를 맴도는 세계수의 정령을 느꼈다.


나무에도 정령은 깃든다. 정령술사들에게 있어서 그리 선호받는 정령은 아니다. 다른 정령에 비해 압도적으로 제약이 크기 때문이다. 숲 같은 곳이라면 나무의 정령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하지만, 나무가 가득한 곳이 아니라면 별 쓸모가 없다.


세계수라 해도 결국은 거대한 나무. 하지만... 저 정령들은 나무의 정령과 다르다.


멜키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앞을 보았다.


유진은 아까처럼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손에 더 이상 번개불꽃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유진이 몸에 두른 환염식의 불꽃에 번개가 깃들어 있었다.


단순한 번개가 아니다. 정령의 번개... 아니, 세계수의 정령들이 번개가 된 것이다. 그 번개는 마나의 불꽃과 따로 놀지 않고, 마치 한 몸처럼 섞여서 흩날리는 불씨에 번개를 흐르게 만들었다.


[...번개의 정령이 아니군.]


레빈이 중얼거렸다.


[나는 저러한 번개를 모른다. 내 힘으로도 간섭할 수가 없어.]


‘그럼 저게 대체 뭐야?’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 소년은... 제 힘으로 새로운 정령을 탄생시킨 거다.]


놀람을 느낀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폭발에도 놀랐고, 번개불꽃이 사라진 것에도 놀랐으며, 세계수의 정령이 번개에 깃든 것에도 놀랐다.


[믿을 수 없군!]


가뜩이나 놀라있는데. 머릿속에서는 템페스트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하멜! 나는 이러한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너는 그 어떤 정령사와 정령왕도 해내지 못한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유진은 그 목소리에 굳이 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깊이 의식했다.


‘...사라진 것이 아니군.’


유진은 텅 빈 양손을 내려 보았다.


‘번개불꽃이 마나에 완전히 녹아들었어.’


[네가 주무르던 것은 단순한 원시정령의 덩어리였다...! 하지만 세계수의 정령이 인도되면서, 새로운 정령이 된 것이다!]


‘나도 아니까 조용히 좀 해 봐.’


유진은 심호흡을 하면서 마나를 조작했다. ㅡ파직! 불꽃이 격해지는 만큼 번개가 강해진다.


‘번개불꽃이 특별한 소재여서?’


그건 아닐 것이다. 이 변화는 세계수의 정령이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계속해서 마나와 세계수의 정령을 의식해 보지만, 떠도는 정령들은 더 이상 번개에 섞이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특별해서?’


죽어 환생했다는 것은 특별함을 자부하기 충분하다. 유진이 아는 바, 이 세상에 자기 이외에 환생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환생하고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걸 수도 있겠지만.’


환생뿐만이 아니다. 특별한 것은 전생도 마찬가지.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였을 지라도, 유진은 전생에 3명의 마왕을 쓰러트렸던 우둔한 하멜이다.


‘...마나장악력. 번개불꽃. 세계수의 정령.’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터널홀.’


번개불꽃을 굴복시킨 힘.


‘환염식.’


템페스트는 기적이라 떠들었지만, 모든 요인이 맞물려 일어난 이것은 기적이 아닌 필연이다. 유진은 고민을 끝내고 멜키스를 돌아보았다.


“멜키스님. 부탁이 있습니다.”


“어... 어어. 뭐?”


“번개불꽃. 한 번 만 더 만들어주세요.”


왜 저런 요구를 하는 지 안다. 한 번 더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겠지.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끝까지 듣지 않았다. 유진은 자리에서 붕 떠올라, 힘있게 뻗은 묘목의 가지에 다가갔다. 신기하게도 어떤 가지를 잘라도 괜찮은지 알 수 있었다.


‘...보이는 군.’


원래는 안 보였는데. 지금은 세계수의 정령들이 보이고 있다. 그들은 불투명한 연기뭉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들 중에서 정령들이 맴돌지 않는 가지가 몇 있었다.


즉, 잘라도 되는 가지인 것이다. 유진은 굵직한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서 아래로 내려왔다.


그걸 본 멜키스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아무리 탑주가 권위 높은 자리라 해도, 요정목의 가지는 구하기 어려운 소재다. 하물며 단순한 요정목이 아니라 세계수의 가지는 드래곤하트에 필적할 만큼 귀중한 소재인 것이다.


“이거 드릴 게요.”


유진은 선심 쓰듯 말했고, 멜키스는 양손을 넙죽 뻗어 세계수의 가지를 건내받았다.


“으... 으흐... 흐흐흐... 으흐흐!”


멜키스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지팡이도 오래 묵은 요정목의 가지로 만든 것이지만, 이만한 굵기의 가지라면 통째로 써서 마법지팡이를 하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만들어 줄게. 암, 만들어줘야지! 내일이라도 아롯에 돌아가서...”


“지금 당장이요.”


“...애니실라 부인이 파티를 준비하신다고...”


“싫으면 돌려주세요.”


“누, 누가 싫대?! 난 사실 파티 별로 안 좋아해. 파티... 좋아하는 마법사는 별로 없어. 응. 나도 마법사라서, 시끌벅적한 파티보다는 조용한 곳에서 혼자 연구나 하는 것이 좋아.”


거짓말이다. 멜키스는 파티라면 환장한다. 하지만 당장 손에 쥐고 있는 세계수의 가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멜키스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소중히 품에 안고, 라이언하트의 워프게이트로 돌아갔다.


아롯에 돌아간 멜키스가 다시 돌아온 것은 열흘이 지난 후였다.


본래부터 뇌정석은 희귀한 소재고, 백색마탑이 보유하고 있던 뇌정석은 첫 번째 번개불꽃을 만들며 전부 사용해 버렸다.


그러니 멜키스는 볼레로 거리의 암시장까지 뒤져가면서, 제 사비를 털어 대량의 뇌정석을 새로 구매했다. 번개불꽃을 만드느라 며칠 내내 철야한 휘하 연금술사들에게 애걸하고 선물까지 쥐어주며 다시 작업하게 만들었다.


“전보다 사이즈가 커.”


사실이었다. 열흘 뒤에 다시 방문한 멜키스는, 저번보다 커다란 번개불꽃을 보여주었다.


라이언하트의 본가, 숲, 엘프의 마을, 3그루의 묘목. 유진은 열흘 전과 마찬가지로 그 앞에 앉아서, 번개불꽃을 양손으로 잡았다.


조건도 똑같았다. 멜키스가 결계를 만들고, 유진은 환염식을 사용해 번개불꽃을 주물렀다.


“...흠.”


그렇게 주무르기를 한참.


“안 되네요.”


유진은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번개불꽃을 내려놓았다.


“...그래 보이네.”


주무르는 내내 ‘반응’은 있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마나가 번개불꽃을 작게 응축하고, 크게 부풀렸다. 하지만 저번처럼 유진의 마나에 번개불꽃은 스며들지 않았고, 세계수의 정령이 끌려나오지도 않았다.


“실망한 기색은 없는데?”


“이럴 줄 알았거든요.”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번개불꽃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변화는 한 번. 그렇게 저한테 깃들었죠. 그것뿐인 거예요.”


“...네게 일어난 변화. 정령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야. 이 대정령사 멜키스 엘하이어가, 그리고 나와 계약한 두 명의 정령왕이 보증해.”


“템페스트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툭. 튕긴 손가락이 번개불꽃을 밀어낸다. 그러자 번개불꽃이 파르르 떨더니, 나왔던 상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열흘 동안 여러 가지를 시험해 봤어요.”


유진은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에 의해 새로이 태어났다는 정령. 형질은 번개. 하지만 번개의 정령은 아니죠.”


숲을 걸었다.


“조금씩 커질까? 아니면 더해질까. 열흘 동안 이 숲에서 살면서, 쉬는 시간 없이 정령을 의식해 봤는데... 세계수의 정령이 더해지지는 않더라고요.”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숲의 나무들을 보았다. 그 사이사이를 맴돌며,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이 날아다니는 세계수의 정령들이 보였다.


“날 약 올리는 것 같아.”


“...약 올린다고? 정령이?”


“네. 와보라고 손짓하는데 오질 않아. 그렇다고 제가 가까이 갔을 때 도망치는 것도 아니에요. 분명 가까이 있는데, 손을 뻗어도 만져지지 않아요.”


“...정령은 물질적인 실체를 가진 것은 아니니까.”


“네. 저 빌어먹을 자식들은,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요.”


유진은 킬킬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ㅡ파직.


손끝에서 번개가 쏘아졌다. 멜키스는 입을 반쯤 벌리고서 번개가 쏘아진 방향을 보았다. 지져진 땅에 전류가 맴돌고 있었다.


“...놀라워.”


멜키스는 놀람을 가다듬고 중얼거렸다.


“번개의 정령... 이 아니지. 네 마나 자체에 번개가 깃든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정령술이나 마법과는 아예 다르다는 거죠.”


“체술과도 다르지! 마나는 그냥 마나야. 그걸 다르게 만들기 위해서는, 술식을 통해 마법으로 바꿔야 해.”


원시정령에게 자아는 없다. 세계수의 정령도 마찬가지다. 그건 원시정령이 세계수에 깃든 것 뿐이다.


“...원시정령은... 모든 정령의 본질. 마나의 또다른 형태. 정령이 존재하는 어디에나 섞여 있지만, 급수 높은 정령에게 삼켜지지 않아.”


멜키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번개불꽃을 사용한 것은, 유진이 직접 번개의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게끔 해주기 위해서였다.


번개의 정령과 계약은 맺지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제 몸에, 마나에 번개가 깃들었는데 정령과 계약을 맺을 필요가 어디에 있나.


“...네게 섞였음에도, 그 특질은 변하지 않았어. 솔직히 말할까? 나는 말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널 잡아 쓰러트리고서 해부하고 싶어. 정령술사, 아니, 마법사라면 누구나 그러고 싶을 걸?”


“생각만 해주세요. 직접 하려고 들진 마시고.”


“궁금해.”


멜키스는 몸이 오싹거리는 것을 느끼며 두눈을 빛냈다.


“그 독특한 힘으로 뭘 할 수 있지?”


“실험은 여러 가지 하고 있는데...”


열흘 동안 여러 가지를 해보았다. 몸에 깃든 번개에 세계수의 정령은 이 이상 더해지지 않는다. 두 번째 번개불꽃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이 번개는 마나와 완전히 녹아들었다. 그렇다고 소모되어 고갈되는 것은 아니다. 마나가 회복되듯, 번개도 회복된다. 백염식의 성취가 오를 때마다 번개도 강해질 것이다.


그를 확인하고서, 유진은 번개를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령이 깃들었건 뭐건, 그냥 찌릿찌릿하고 파직거리는 마나가 되었을 뿐. 마나를 ‘쏘듯이’ 번개를 쏘아낼 수 있게 되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검강에도 번개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위력의 증폭.


그건 환염식도 마찬가지였다. 이터널홀을 접목시킨 백염식. 지닌 코어를 회전시켜 하나의 원을 만들고, 그 안에서 코어를 분열, 폭발한다.


폭발에 번개가 더해졌다. 그만큼 폭발은 강해지고, 마나의 흐름은 격해진다. 이그니션을 쓸 때만큼은 코어에 부담이 간다.


하지만 폭주는 아니다.


“적응은 아직 안 됐어요.”


유진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쉬었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호흡을 반복했다. 멜키스는 두 눈에 기대를 가득 담고서 유진을 보았다.


곧, 멜키스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호흡할수록 유진의 표정이 굳어간다. 변화는 표정뿐만이 아니다. 경직되어가는 몸. 멜키스는 체술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알았다.


‘...긴장?’


의아하단 생각이 들었다. 멜키스는 유진과 녹탑주의 결투하던 자리에도 있었고, 결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유진과 함께 있었다. 녹색마탑의 광장으로 향하던 마차. 멜키스도, 메르도 이후의 결투를 생각하며 유진을 걱정했었지만.


유진은 단 한 번도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차 안에서부터, 긴장은커녕 여유를 보였다. 8서클 대마법사를 상대로도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단 말이다.


그건 마차에서 내린 후에도 똑같았다. 결투가 시작되는 순간조차도 유진은 긴장하지 않았다. 보였던 여유만큼이나 당연하단 듯이 움직였고, 결투에서 승리했다.


“...저기... 뭔가 착각하는 건 아니지?”


멜키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힘으로 뭘 할 수 있냐고 물어보기는 했는데... 그게 나랑 뭐 대결이라도 하자는 뜻은 아니었거든?”


저 꼬마가 말을 잘못 알아듣고서 대뜸 덤벼오는 것은 아닐까? 젊은 혈기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유진은 멜키스의 질문에 대꾸는 해주지 않았다. 그냥, 찌푸린 눈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긴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쪽팔리고 싶지는 않은데...’


멜키스에게 덤빌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이 긴장은 순전히 제 자신에 의한, 심리적인 것이다. 유진은 몇 번 더 심호흡을 하고서, 환염식을 운용했다.


발을 앞으로 뻗고.


전류가 파직하고 튀었다.


ㅡ콰앙!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멜키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번개처럼... 그래, 방금 그것은 ‘번개처럼.’ 아니, 처럼이 아니라, 유진은 실제로 번개가 되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빠르고, 폭발적이었다.


...문제는 그 터무니없는 가속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


“...너 괜찮니?”


멜키스는 더듬더듬 물으며 유진에게 다가갔다. 번개가 되어 튀어나갔던 유진은, 몇 그루의 나무를 박살내고서 멈춰서 있었다. ...깔끔하게 멈춘 것은 아니었다. 지면에는 발이 끌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고, 멈춘 자세도 불안정했다.


“...크흠.”


이래서 긴장한 것이다.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유진은, 제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끌려가 버린 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 이게... 참... 어우...”


“...괜찮냐니까?”


“당연히, 당연히 괜찮죠. 아프지도 않거든요? 백탑주님도 봤잖아요.”


“...봤지. 너 엄청 빠르더라. 아주 번개돌이 같았어.”


부상은 없었다. 그야, 몸에 오러실드를 두르고 뛰어나갔으니 당연한 것이다. 단지, 몸은 아프지 않아도 마음이 아팠다.


‘속도 자체는 이그니션보다 느려.’


이그니션은 코어를 폭주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도 각성시킨다. 그렇기에 그 미쳐 날뛰는 힘을 제대로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번개’는, 순수하게 마나만을 폭발시킨다. 유진의 마나장악력은 터무니없는 수준이지만, 제동을 거는 것이 잘 되지 않았다. 순간순간에 섞어 공격 자체의 위력은 증폭하는 것이 쉽지만, 이 맹렬한 마나를 전신에 잡아두고서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흠.”


멜키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마나가 아니게 되었으니... 차라리 체술에 섞지 말고, 마법에만 쓰는 건 어때?”


“그럼 아깝잖아요.”


마법은 매력적이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체술로는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진은 체술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마법에 응용하는 것도 쉽지는 않던데요.”


“마나의 성질이 변했으니... 이건 전례가 없는 일이라, 나도 뭐라 조언할 수가 없겠는 걸.”


“어쩔 수 없죠. 뇌광(雷光)에 익숙해지는 수밖...”


“뇌광?”


유진이 내뱉은 말. 멜키스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네가 붙인 이름이야?”


“...”


“그러니까. 방금 네가 쓴 것은 백염식 뇌광... 뭐 이런 거야?”


“...”


“아니면 뇌광식? 뇌광백염식? 뇌광염식? 백염뇌광식?”


“조용히 하세요.”


“너 얼굴이 좀 붉다? 자기가 직접 기술 이름을 붙인 것이 부끄러워서 그래? 에이, 뭘 걱정하고 그러니? 만든 기술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기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야.”


멜키스의 입꼬리가 쭈욱 올라갔다.


“모든 마법사는 그런 딜레마를 가지고 있지... 멋진 마법을 만들었는데, 그 마법에 어울리는 멋진 이름을 짓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거든. 그리고 그, 이름이란 것은 말이야. 자기 딴에는 멋지다고 붙였는데, 남은 좀 민망하고 구리게 들릴 수도 있는 거거든?”


“...”


“그렇다고 무난한 이름을 붙이자니 자기가 만든 기술을 폄하하는 것 같고... 너무 과한 이름을 붙이면 남한테 말하기 부끄러운... 음, 나도 잘 알고 있어. 말했잖아? 마법사라면 누구나 그런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니까?”


“알았으니까 좀...”


“나는 뇌광, 괜찮다고 생각해. 아니, 오히려 좀 무난하지. 차라리 파이어썬더는 어때? 아니면 썬더파이어. 좀 그런가? 파이어볼트... 썬더플레임...”


“마법!”


유진은 버럭 외쳤다. 멜키스는 실실 웃어대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마법. 뭐?”


“보여 드린다고요.”


유진은 표정을 구기면서 망토를 들췄다. 그렇게 아카샤를 꺼냈는데, 망토 안에서 딸려나온 것은 아카샤 뿐만이 아니었다.


“...”


아카샤를 끌어안고 있던 메르가 딸려나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세냐가 비웃어대는 것 같아서,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메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왜 때리시는 거에욧!”


“네가 웃는 얼굴이 재수 없어서.”


“저는, 뇌광이라는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 간단하면서도 직관적인 이름을 듣고있자면, 유진님의 센스가 굉장히 발전했다는 것이 실감되거든요.”


“센스?”


멜키스가 중얼거렸다. 메르는 머리를 쥐어박힌 것에 대한 복수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수라광살이나 파멸신기, 데드엔드, 만뢰, 라이트닝카운터. 이런 이름에 비하면 아주 괜찮은 이름이잖아요?”


“대체 어느 머저리가 그런 쪽팔린 이름을 붙여? 아, 그래도 만뢰나 라이트닝카운터는 꽤 괜찮네. 번개같잖아.”


“닥치세요.”


유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히며 아카샤를 들었다. 그러면서 아카샤에 매달린 메르를 망토 안으로 쑤셔넣었다.


“들어가 있어!”


“유진님, 라이트닝 수라는 어때요?”


“닥치라고!”


유진은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무념, 집중. 유진은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고서 술식을 떠올렸다.


구성된 술식이 마법을 일으킨다. 파직거리는 번개불꽃이 유진의 전신을 휘감고, 천천히 땅으로 내려온다. 동시에 유진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땅에서 퍼져나간 번개가 흔들거리며 춤을 춘다.


“...이...”


오늘 대체 몇 번을 놀라게 되는지. 멜키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흔들었다.


“괴물 같으니...!”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멜키스는 저 모습이... 아니, 유진이 펼친 마법이 무엇인지는 알아보았다.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이 시그니처를 만드는 과정에서 창안했던 마법.


디바인트리.


‘그걸 보고 따라했다고?’


케이크에 새겨진 마법을 따라하는 것의 연장선... 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마법의 술식을 간파하고,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뭐 겉핥기 수준이기는 한데...”


디바인트리는 6서클에 속하지만, 그 술식의 난이도는 도저히 6서클의 수준에서는 따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겉핥기로나마 펼칠 수 있는 것은 아카샤로 디바인트리라는 마법을 이해하고, 메르의 보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거... 안 쓰는 것이 좋을 거야.”


멜키스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만약 네가 디바인트리를 훔쳐 배웠다는 것을 녹탑주가 알게 되면, 체면이고 뭐고 널 반드시 죽이려 들 테니까.”


“당연히 그러겠죠.”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술식을 흩트렸다.


“그냥 한 번 보시라고 쓴 겁니다. 저는 이딴 마법 쓸 생각 없어요.”


디바인트리를 보여준 덕에 멜키스의 놀림을 닥치게 할 수 있었다.


“...이딴 마법이라니...”


멜키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 번개불꽃 >


한 달.


신성제국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로한나 셀리스. 크리스티나와 함께 수도원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친구.


내용은 별 것 없었다. 몇 달 동안 사마르를 떠돌며 고생했는데, 고향에 돌아와 쉬고 있으니 한가롭고 편안하다는 말... 유진은 편지를 대충 읽어내린 뒤에, 아카샤를 손에 쥐었다.


“까먹지는 않은 모양이야.”


흘려 적은 글자의 나열. 그것이 마법의 술식을 만들고 있다. 마법사 집단이라면 이런 암호 마법은 한두가지 가지고 있는 법이고, 그건 적색마탑도 마찬가지다.


그 중에서도, 유진이 크리스티나에게 전했던 암호마법은 로베리안에게 직접 배운 것. 적색마탑 내에서도 이 암호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헤라를 비롯한 로베리안의 심복들뿐이다.


로한나 셀리스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데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보내는 편지가 감시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암호마법을 가르쳐 주었다. 언뜻 보기에는 간단해 보인다. 실제로 간단하다. 하지만, 얽힌 술식의 곳곳에 함정이 깔려 있다.


함정에 걸린다고 해서, 암호 마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암호 마법은 걸린다.


그렇기에 편지를 받는 쪽에서 ‘함정’을 눈치 챌 수 있는 것이다. 유진은 암호 마법의 술식대로 마나를 불어넣고, 암호를 해제했다.


편지지에 적힌 문장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내용이 되었다.


교황과 추기경을 직접 추궁할 수는 없다. 정면돌파로 그들의 반응을 보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그들이 습격을 사주했다면, 크리스티나가 생환한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을 터. 크리스티나는 그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습격을 추궁한다면, 교황과 추기경은 그 위치에 마땅한 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가 헬무드의 ‘마족’에게 습격당한 것이다. 비록 미수에 그쳤다지만,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신성제국과 헬무드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유폐의 마왕은 표면적으로는 평화주의자야.’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항마연합이라는 것이 있다. 신성제국을 필두로 해서, 북쪽의 소국들이 뭉친 국제연합이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헬무드의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변경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벌이지 않았지만, 교역로를 틀어막거나 성문 근처에서 군사훈련은 주기적으로 벌이고 있단 말이다.


유폐의 마왕은 그를 묵인하고 있다. 쓸어버리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마족들은 무력시위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충돌은 벌이지 않고 있다.


마족이 신성제국의 성녀를 죽이려고 했다. 이건 꼬리만 댕겅 자르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공론화라도 된다면 얼마든지 전쟁의 불씨로 키워질 것이다.


...전쟁은 아직 이르다.


‘당장의 내용은 이게 전부.’


조사는 해보겠다는 말.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편지를 옆으로 치워뒀다.


편지는 한 장 더 있다. 신성제국이 아닌 아롯에서 온 편지. 로베리안이 보낸, 라이자키아와 바랑에 대한 정보.


블랙드래곤 라이자이카의 영지, 용마성.


그 성은 헬무드에서도 이색적인 성이다.


용마성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아롯의 명물인 부유역의 수십 배에 달하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성. 그 용마성은 라이자이카의 영지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다.


라이자키아는 지독한 인간혐오자다. 인간에게 친화적인 헬무드지만, 라이자키아의 영지에는 단 한 명의 인간도 살고 있지 않다. 그의 영지에 살고 있는 것은 마족과 마물, 아인 정도 뿐.


인구는 곧 병력이다. 라이자키아의 병력은 영지의 크기와 다른 공작들에 비해 압도적이랄 만큼 빈약하다. 헬무드에 귀화한 인간은 병력으로 쓸 수 있을 만큼 강인하지 않지만, 그들이 납부하는 정기 세금은 마족의 힘을 키운다.


인간혐오자인 라이자키아는 그것마저 거부한다. 수많은 마족들 중에서도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특별하고, 라이자키아는 드래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오만하다.


‘...과연.’


유진은 수북한 편지를 읽어 내리면서 눈을 찡그렸다.


‘본인이 아니야.’


라이자키아의 영지에는 다른 영지에 비해서 특별하리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종족이 있다.


드워프.


드래곤은 보석과 세공품 따위에 환장한다. 제 자신이 위대한 종족이라 여기는 만큼, 그 존재의 품위에 알맞은 것들을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머나먼 옛날부터 드워프를 부려왔고, 라이자키아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타락하기 전부터 수많은 드워프를 거느렸는데, 마기에 타락하고서도 자신이 거느린 드워프를 해방시키거나 몰살하지 않고, 그 전원을 데리고서 헬무드로 날아가 버렸다.


300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드워프들의 후손들은 아직까지도 라이자키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라이자키아의 영지에는 거대한 광산이 있다. 드워프들은 그 광산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광산에서 노역한다. 그들이 채굴하고, 두드리고 세공한 온갖 물건들은 모조리 라이자키아의 보물창고로 들어간다.


‘...드워프들이 만든 물건이 빼돌려지고 있다.’


정식으로 수출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명의 브로커를 걸쳐, 은밀하게 암시장에 풀리고 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절대로 자신의 물건을 ‘팔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라이자키아의 눈을 속이고서 물건을 빼돌리는 건가?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라이자키아의 영지에는 놈을 섬기며 계약까지 맺은 고위 마족이 여럿 있는데, 계약의 조항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어기면서 물건을 빼돌리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드워프들이 그럴 리도 없고.’


이 문제만으로도 라이자키아를 의심하기는 충분하지만, 몇 가지 심증이 더 있다.


최근 200년 동안, 라이자키아는 권속을 늘리지 않았다.


헬무드에 공작은 셋뿐이다.


그 중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는 권속을 따로 늘릴 필요가 없을 만큼 막강한 군세를 갖추고 있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사실상 놈이 가진 직위는 명예직에 가깝다. 놈은 300년 전부터 유폐의 마왕의 제일가는 심복이었다. 놈은 스스로 계약의 주인이 되어 권속을 늘리는 대신, 유폐의 마왕의 다른 권속들을 거느리고 있다.


라이자키아는 다른 공작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세력이 작다. 흑마법사만이 힘과 명예를 바라고 마족과 계약을 맺는 것은 아니다. 마족들도 힘과 명예를 위해 고위 마족과 계약을 맺는다.


즉, 마족들 중에서 라이자키아의 권속 자리를 노리는 놈들은 제법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00년 전의 전쟁이 끝난 직후. 라이자키아는 권속이 되고자 찾아 온 마족들을 엄선하고 계약을 맺어, 권속을 조금 늘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200년 동안은 일절 권속을 늘리지 않았다...


‘...게다가 이건 또 뭐야? 카라드 백작?’


놈은 헬무드의 신흥 귀족이다. 300년 전에는 존재감도 없던 놈인데, 평화의 시대 동안 힘을 불리고서 헬무드의 ‘중앙’ 진출을 노리는 야심 넘치는 젊은 마족.


카라드 백작의 영지는 용마성의 바로 근처. 그것까지는 신경쓸 일이 아닌데, 놈이 올해부터 슬금슬금 용마성의 영지 변경을 침범하고 있단다.


‘확실하군. 지금 용마성의 라이자키아는 본인이 아니야. 분신도 아닌 것 같고...’


헤츨링.


‘태어난 지 고작 수백 년... 그렇다면 앞뒤가 맞아떨어져.’


드래곤은 태어난 직후부터 강력한 종족이지만, 드래곤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은 놈들의 압도적으로 긴 수명 때문이다.


오래 산 드래곤일수록 강하다.


‘권속과 계약을 맺고, 드워프를 거느린 것은 라이자키아 본인. 헤츨링은 그 계약의 주인이 될 수 없어.’


만약 라이자키아가 죽었다면, 계약은 끊어지고 권속들이 반란이라도 일으켰겠지만. 용마성은 삐걱거릴 지언정 존속되고 있다.


‘계약은 남아있는 모양이고...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주인의 애새끼에게 충성하고 있나.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인 모양이지.’


다음은 바랑.


놈은 제 입으로 소개했던 대로 야곤의 의형제는 맞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의형제’라는 것에 뒤따라오는 형제애는 없었던 모양이다.


과거에 야곤은 오보론을 물어 죽였다. 그 뒤에는 ‘물갈이’라는 명목으로 오보론의 심복이던 장로들까지도 죄다 죽여 버렸다. 지금의 수인족에서 주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야곤과 같은 세대의 비교적 젊은 수인들이다.


하지만 야곤은 제 세대와도 끈끈한 단합은 맺지 않았다. 놈은 제 막강한 힘으로 수인들을 찍어 눌렀다. 야곤의 곁에 설 수 있는 것은 그 위압을 뚫고 나온 걸출한 강자들 뿐.


의형제라던 바랑은 야곤의 곁에 서지 못했다.


‘...하긴, 으스댄 것에 비해 약하긴 했어.’


야곤 휘하의 수인들이 힘을 키우기 위해 용병으로 떠돈다는 것은 발자크에게 들었다.


로베리안이 보낸 편지에 따르면, 바랑도 용병으로 떠돌았단다. 수십 번의 영지전에 참전하고, 나름대로 헬무드의 용병계에서는 유명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바랑이 누구의 의뢰를 받고 헬무드를 떠난 것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편지의 말미에는 최대한 알아보겠다고는 적혀 있었지만,


솔직히 유진은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전생에 용병이었다. 하급 용병의 의뢰는 언제 배신당하거나 의뢰의 내용이 누설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용병으로서의 ‘급’이 오를수록,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마냥 ‘돈’만 우선했던 시절과는 달리, 용병으로서의 ‘명예’란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예는 신뢰를 낳는다. 어차피 상위급의 용병에게 있어서 돈은 더 이상 매력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의뢰의 재미, 길드와의 신뢰, 그따위 것들.


‘용병길드는 대륙 어디에나 있지만, 그 중에서도 헬무드의 용병길드는 특별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헬무드는 의뢰의 급이 굉장히 높다. 호위나 토벌 같은 임무는 대륙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지만, 헬무드의 의뢰는 그 격이 다르다. 게다가 헬무드의 호전적인 마족들은 끊임없이 영지전을 벌이기에, 다른 국가에 비해 용병들의 대우가 압도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의뢰 내용이 누설될 리가 없지. 애당초 길드를 통해 수주한 의뢰도 아닐 것 같고.’


라이언하트와 성녀의 암살. 용병길드가 주선할 만한 의뢰가 아니다.


유진은 한데 모은 편지를 불태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도 가시는 거죠?”


메르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사탕을 핥고 있었다. 평범한 사탕은 아니다. 최근 본가에 대거 고용된 요리사들 중, 유명한 파티시에가 메르를 위해 공들여서 만든 사탕이다.


아이스크림과 사탕, 그 중간의 어디쯤. 혀로 핥을 때마다 듬뿍 묻혀 나오는 주제에 크기는 좀처럼 줄지 않고, 그렇게 부드러운 주제에 이로 씹으려면 아작아작 씹힌다. 메르는 저 사탕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쳐다 볼 때마다 사탕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애니실라님도 참 극성이셔.”


“아름답고 좋은 분이세요.”


“나 어릴 적에는 그런 사탕 주신 적 없어. 날 위해 수십 명의 요리사를 고용한 적도 없으시고.”


“설마... 유진님, 지금 저에게 질투하고 계시는 건가요? 저는 유진님보다 작고, 귀엽잖아요.”


“나도 한때 작고 귀엽던 시절이 있었어. 한 7년 전쯤에 말이야.”


“하지만 저처럼 착하고, 애니실라님과 사이가 좋지는 않았겠죠. 저도 애니실라님에게 유진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몇 번 들었어요. 유진님은 그때부터 대단하셨더군요!”


메르는 히죽 웃으면서 소파에서 깡총 내려왔다.


“첫날부터 애니실라님의 아들을 두들겨 패버리고. 양자가 된 후로도 틈만 나면 괴롭혔다면서요?”


“...그... 애니실라님이 자기 아들이라고 과장이 좀 심하셨네. 두들겨 팬 것이 아니라 한 번만 때렸고, 그런 정정당당하고 명예로운 결투였어. 괴롭힘? 오히려 내가 괴롭힘 받았지! 너는 모르겠지만, 그 쌍둥이들이 날 얼마나 귀찮게 했는지 알아?”


“저는 유진님 말 안 믿을 거예요. 유진님은 저한테 사탕도, 과자도, 케이크도 안 주시잖아요.”


“억울해 죽겠네 진짜. 아롯에서 내가 널 데리고 갔던 디저트 가게가 몇 개였는지 그새 까먹었냐?”


“애니실라님은 그때보다 많은 가게에 데려가 주셨어요.”


“그래, 그렇게 애니실라님이 좋으면 가서 애니실라님보고 엄마 해 달라고 해. 이름도 메르 라이언하트, 아니, 메르 카이네스로 바꾸고 애니실라님 딸 해.”


“삐지지 마세요, 유진님. 그래도 제가 귀여운 덕에, 유진님도 여러 가지 덕을 보고 계시잖아요?”


메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유진의 뒤를 따라왔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기는 했다. 애니실라가 새로 고용한 요리사들을 하나같이 실력이 빼어나서, 유진이 먹는 식사의 수준도 덩달아 크게 올라갔다.


“메르야!”


윗층에서 내려와 별채의 홀로 내려가는 도중, 아래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우렁찬 목소리에 1층을 청소하던 시종들이 죄다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디에 가느냐? 꼭 가야하는 게냐? 오늘 별 예정이 없다면, 나와 함께 도시에 외출이라도 다녀오는 것이 어떠냐?”


제하드였다. 유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아버지를 보고서 표정을 콱 구겼다.


“어제 다녀오셨잖습니까.”


“어제 다녀왔으니 오늘 가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느냐?”


“오늘은 라만에게 검술 훈련을 받기로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건 다음으로 미뤘다. 내가 그러고 싶어 하니, 라만도 아주 좋아하더구나.”


과연, 라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갔는지는 뻔했다.


‘본가 쪽 기사들의 훈련에 참가했겠지.’


라만이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유진은 라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를 심복이라 여기지 않았지만, 라이언하트가 아닌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시크나드도 있지만, 놈은 숲 쪽에 있으니까.’


하지만 라만은 하루 내내 별채에서 생활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본가를 습격한다면, 사람이 적은 별채를 우선해서 노릴 것이다. 그때 라만은 본가 기사들의 지원이 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제하드나 니나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질 없이 에미르의 호위무사가 되었던 놈이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라만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백사자 기사단의 대장급은 절대로 아니지만, 저 정도 실력이면 어느 영지를 가도 대접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그 실력에 안주하지 않고, 본가 기사들과 적극 교류하며 훈련에도 참가하고 있다.


“메르는 오늘 저랑 갈 겁니다.”


“...메르는 네 훈련에 동참하는 것보다는, 나와 함께 도시의 맛난 가게들을 순회하는 것을 좋아할 게야.”


“열심히 빼신 살이 아깝지도 않으십니까?”


“약 먹으면 금방 빠진다.”


“아버지! 제가 그 약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스테로드 자작이 직접 선물한 것이야. 그 호의를 어찌 거절한단 말이냐?”


“스테로드 자작도 자신의 선물이 다이어트 보조제로 쓰이기는 원하지 않을 겁니다. 약 먹고 열심히 운동해서 강해지라고 준 것이겠죠.”


“크흠... 그야 그렇겠지만... 나는 스테로드 자작처럼 우락부락한 덩치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니 약에 의존하지 말고, 건강하게 운동이나 하십시오. 칼도 여러 번 휘두르시고. 자꾸 그러시면 제가 직접 아버지 훈련을 지도 할 겁니다.”


그 엄포에 제하드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훈련에 있어 얼마나 엄격하고 무자비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훈련에는 부모자식도 없을 것이다.


“훈련의 필요성에는 저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유진님께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셨지만, 제하드님은 최근 예복의 치수를 늘려 새로 주문하셨거든요.”


제하드의 뒤에 서있던 니나가 냉큼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제하드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흠!”


“주방을 보조하고 있는 나리사에게 듣길, 제하드님이 새벽마다 은밀히 야식을 주문하신답니다.”


“...”


“그 접시를 치우는 것은 레베라의 주된 업무 중 하나죠. 제하드님은 견습시종들이 다른 시종들이나 제 눈에서 벗어나있다고 여기신 모양이지만, 제하드님의 과식은 언제나 제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이런식으로 배신을 당하다니...!”


“모두가 제하드님의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 저랑 가서 일단 열 바퀴만, 아니, 스무 바퀴만 뜁시다.”


“그렇게 뛰면 내 무릎이 아작나 버린다!”


“사람 무릎은 그렇게 쉽게 안 아작납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늘어나는 체중이 무릎을 더 쉽게 아작내겠죠. 자, 군말 마시고 당장 저랑 나가시죠.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저와 함께 달린 적이라고는 제가 8살 이후로 없지 않습니까?”


“...뛰지 않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그때는 제하드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단련에 매진하는 아들이 기특해서, 한 번은 유진과 함께 벌판을 달린적이 있었다.


...서로 대결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 제하드는 처참한 패배감을 느꼈다. 자기보다 한참 작은 8살 아이를, 전력질주를 했는데도 따라잡지 못했다. 그건 어른이기 전에, 아버지로서 다시는 뛸 수 없는 굴욕감을 주었다.


“제하드님이 뛰신다면 저도 같이 뛸게요.”


다 먹은 사탕 막대를 물고 있던 메르가 말했다.


“아가씨. 그거 물고 계시면 치열이 나빠집니다.”


슬며시 다가 온 니나가 메르가 물고 있는 사탕막대를 빼앗았다.


제하드는 사별한 아내를 기리며 평생 재혼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가끔은 가진 적 없는 딸에 대한 소망이 떠오르곤 했다.


아들과 함께 달린 기억은 비참함 뿐이라 꺼려지지만, 메르가 함께라면 뭔가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만 같았다. 제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달리기 시작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추억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유진은 서두르지 않고 제하드와 보폭을 맞춰주었고, 메르도 그 곁에서 열심히 뛰었다.


문제는 제하드의 체력이었다. 스테로드 자작 덕분에 체력은 꽤 붙었지만, 이 추운날씨에 달리는 것은 제하드를 빠르게 지치게 만들었다.


사역마인 메르는 지치지 않는다.


유진은 20바퀴가 아니라 200바퀴를 뛰어도 지치지 않는다.


10바퀴를 뛰었을 때. 제하드는 더 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뒤따르던 유진은, 제하드의 곁에 잠깐 멈춰 섰다.


“하루에 한 바퀴씩 늘려갑시다.”


제하드는 대답 대신 바닥에 벌러덩 누워 손만 휘저었다. 유진은 그런 제하드를 억지로 일으킨 뒤, 제하드의 옷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털어주었다.


“가자.”


“네.”


메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유진은 망토를 열어서 메르가 들어갈 수 있게 해준 뒤에, 제자리에 서서 몇 번 심호흡을 했다.


“뇌광이다.”


“유진님이 뇌광을 쓰신다!”


별채 시종들의 수군거림. 그 중 청각이 예민한 엘프들이 귀를 틀어막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태연하려 애를 썼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에 대한 강렬한 살의를 느꼈다. 뇌광. 유진의 머릿속에만 있던 그 이름은 멜키스에게 전해졌고, 멜키스는 그날 저녁에 있던 본가의 파티에서 입방정을 떨어댔다.


‘라이언하트의 미래가 참 밝아요. 부인도 알고 계시나요? 유진, 저 아이의 새로운 기술! 그 이름이 뇌광이라고 하는데, 이름만큼이나 멋지고 현란한 기술이죠. 글쎄, 사람이 진짜 번개가 되어 쓩 하고 날아간다니까요?’


...유진은 모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만두는 것이 더 망신스러울 것 같았다.


파직.


백염식으로 운용된 마나에 번개가 담긴다. 멜키스의 앞에서 선보이고 일주일. 뇌광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지만, 그때처럼 제동을 걸지 못하고 나무에 처박는 수준은 벗어났다.


발을 한걸음 앞으로 뻗고.


그렇게 튀어나가려 했는데, 유진은 급히 몸에 제동을 걸었다.


“...뭐야?”


목적지로 삼았던 숲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언제 오신 겁니까?”


카르멘 라이언하트와 시엘 라이언하트.


흑사자성에 있어야 할 둘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냥준비


갑작스레 본가에 돌아 온 것은 카르멘과 시엘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대장으로 있는 흑사자 기사단 3번대 전원이 본가에 도착했다.


‘그래봤자 10명이지만.’


흑사자 기사단은 라이언하트의 핏줄만을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대륙의 다른 명문 기사단에 비해서는 숫자가 압도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사단의 힘을 결정하는 것이 무작정 불린 머릿수가 아니라는 것쯤은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3명이나 되는 마왕을 죽였던 용사 일행은 하멜을 포함해서 5명밖에 되지 않았다.


“대륙 제일의 기사단이 어디인가를 꼽을 때, 항상 언급되는 기사단은 여섯이다.”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유라스의 혈십자 기사단. 시무인의 격랑 기사단. 키옐의 백룡 기사단. 루하르의 하얀 송곳니. 나하마의 모래전갈.”


저 기사단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왕가 직속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흑사자 기사단.”


예외인 것은 라이언하트의 흑사자 기사단 뿐. 유진은 갑자기 카르멘이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뭣도 모르는 머저리들은 흑사자 기사단이 다른 왕가 직속의 기사단보다 처진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들이 우리보다 머릿수는 많을지언정, 실력만큼은 흑사자 기사단이 최강이다.”


“...예... 뭐...”


“그 최강의 기사단에 입단하지 않겠나.”


“싫습니다.”


유진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몇 번이고 거절했는데도 카르멘은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저도 카르멘님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 제가 싫다고 몇 번을 말해야 포기하시렵니까?”


“너야말로 내가 몇 번을 권해야 받아들일 셈이지? 나도 자존심을 상당히 접어두고 네게 권하는 것이다.”


“카르멘님이 얼마나 라이언하트를 사랑하고, 흑사자 기사단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저는 제 삶을 흑사자 기사단에 바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고집불통 같으니.”


카르멘은 눈을 찡그리면서 잔을 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쓰디 쓴 블랙커피지만, 저 커피에는 몇 스푼이나 되는 설탕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네 뇌광에 관심이 있다.”


“커읍.”


유진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네 뇌광이 아주 대단하다지. 펼칠 때마다 번개가 파직거리면서...”


“어디서 듣고 오신 겁니까?”


“숲의 엘프들에게 너에 대해 물어보니, 흔쾌히 알려주더군.”


유진은 수치심에 주먹을 떨었다. 사실, 그가 생각하기에 뇌광이라는 이름이 부끄럼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수라광살이니 파멸신기니 하는 이름에 비해서 뇌광은 얼마나 심플한가.


하지만. 멜키스가 놀림을 듣고 나니 뇌광이라는 이름이 부끄럽다. 그냥 아무 이름도 붙이지 말 걸. 그런 후회를 느끼면서도, 지금 와서 뇌광이란 이름을 바꾸자니 멜키스에게 희롱당한 것 같아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자존심이다.


“내게도 너의 뇌광과 비슷한 기술이 있지... 이름 하여 뇌광일섬.”


“...”


“서로 똑같이 뇌광이구나. 누구의 뇌광이 우위인지 겨뤄보지 않겠나.”


“...싫습니다.”


카르멘의 뇌광일섬에 대해서는 일전에 제노스에게 들은 적이 있다.


‘카르멘 경의 필살오의는 데스티니 브레이커입니다.’


‘철권연쇄를 시작으로 이클립스, 패왕각, 뇌광일섬, 데스티니 브레이커로 마무리되는 콤비네이션은 흑사자 기사단에서도 지독하고 강력하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유진은 뇌광일섬이 어떤 기술인지 모른다. 철권연쇄도, 이클립스도, 패왕각도, 데스티니 브레이커도 당최 어떤 형을 가진 기술인지 모르겠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지금 겨뤄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오신 것은 아닐 텐데요.”


3번대의 방문은 갑작스러웠다. 듣자하니 불과 한 시간 전에 본가의 워프게이트를 가동하라고 통보하고서 곧장 넘어왔단다.


“이런 목적도 있긴 했다만. 주된 목적은 둘이다.”


“둘?”


“하나는 본가의 수호.”


카르멘은 달달한 블랙커피를 홀짝거렸다.


“흑사자성의 원로들은 네가 멋대로 엘프를 데리고 온 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나중에야 들었지만, 네가 크리스티나 보좌주교와 함께 사마르에 간 것은 원로원주에게 직접 허락을 구한 일이었다더군.”


원로원주.


그 말이 나왔을 때, 유진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라이언하트의 시조는 위대한 베르무트. 이 가문은 300년, 아니, 3000년이 흐를 지라도 현명한 세냐의 맹우(盟友)인 것이다. 현명한 세냐가 엘프의 보호를 요청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할 것이다.”


맹우라. 유진은 입꼬리가 뒤틀리지 않도록 붙잡았다. 그 세냐의 가슴에 커다란 바람구멍을 뚫은 것이 베르무트다. 게다가 엘프가 핍박 받은 지는 이미 수백 년이 지났다.


...그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엘프는 하나의 종족이며, 300년은 긴 시간이다.


“내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본가의 숲보다는 우클라스 산에 이주시키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데, 엘프들에게 직접 물으니 본가의 숲에 남겠다 하더군.”


“이곳의 숲이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마음에 들게 만든 것이겠지. 나도 오래 전에 본가에서 살았지만, 내가 아는 숲과 지금의 숲은 전혀 달라.”


카르멘은 큭큭 웃으며 시가케이스를 꺼냈다.


“그 이유를 캐물을 생각은 없다. 숲의 변화는 나로서도 아주 즐거운 것이거든. 이번 출장은 내게 있어서도 좋은 수양이 될 것 같아.”


“수호도 그렇습니까?”


“가급적이면 수호할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지.”


카르멘은 다리를 꼬며 시가의 끝을 잘랐다. 그 뒤에는 두 눈을 감고, 시가를 코 끝에 스치며 향을 음미했다.


...유진은 그 순간에 카르멘의 눈썹이 살짝 구겨지는 것을 보았다.


‘퀴퀴한 모양이군.’


“...나찰공주를 알고 있나.”


“아롯에서 들었습니다. 나찰공주가 본가와 교섭하러 올 지도 모른다더군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군. 당연한 말이지만, 라이언하트는 나찰공주 따위와 교섭할 생각이 없다.”


카르멘은 이빨로 시가를 물었다.


“그러나 문전박대할 수는 없어. 만약 찾아온다면, 맞이는 해 줄 거다.”


“본가의 전력이 나찰공주를 맞이하기에 버겁다 여기십니까.”


“설마. 이곳에는 백사자 기사단이 있다. 흑사자 만큼은 아니지만, 그들도 뛰어난 기사들이야.”


카르멘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지금의 본가는 가주도, 백사자 기사단의 최고정예인 1번대도 없다. 그러니 내가 온 것이지.”


“이런 상황에서 가주님이 돌아오지 않고 계시는 것이 의아합니다만.”


“가주는 황궁에 가 있다.”


“예?”


처음 듣는 말이었다. 유진이 놀란 표정을 짓자, 카르멘은 피지도 않는 시가를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는 보름 전부터 황궁에 가 있다. 파티 따위의 행사는 당연히 아니고, 황제와 대담을 나누기 위해서.”


“보름이 넘도록 말입니까?”


“300년 동안 침묵하던 유폐의 마왕이 경고를 전해 온 것이다. 그에 대한 논의를 나누기엔 보름으로도 턱없이 부족하지.”


과연. 마냥 시간만 때우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원로원주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건 또 뭡니까?”


“곧 흑사자의 사냥철이다.”


사냥철?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르멘이 말을 이었다.


“흑사자의 사냥철은 신년 봄에 맞이한다. 당연히, 짐승 따위를 사냥하는 것은 아니야. 흑사자가 사냥하는 것은 우클라스 산에 방목 중인 마물과 몬스터다.”


“...”


“너와 시안이 겪었던 이른 성인식은, 의도적으로 마물의 둥지를 피하게 만들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아직 어른도 되지 못한 아이들에게, 마물의 둥지는 너무 위험하거든.”


유진은 말없이 카르멘을 응시했다. 카르멘은 그 시선을 통해 유진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느꼈다. 그녀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시가를 내려놓았다.


“...네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말이야.”


“흠, 흠...”


“자존심이 참 강한 꼬마로군.”


“꼬마는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다만.”


“성인식은 이미 끝났는데. 흑사자의 사냥철이 저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사자는 절벽에 새끼를 밀어 떨어트리지.”


카르멘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쓰디 쓴 시가를 더 이상 물고 싶지 않았기에, 팔짱을 끼고서 근엄한 얼굴로 유진을 응시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사자가 새끼를 절벽에 밀어 떨어트린다는 말은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대체 어느 짐승이 제 자식을 절벽에 떨어트립니까?”


“...그 말의 의미는... 맹수는... 음... 어린 자식을 맹수로 키우기 위해... 마땅한 고난을 부여한다는 의미다.”


사자가 절벽에 새끼를 밀어 떨어트리지 않는다고? 정말로? 평생을 그 이야기를 믿었던 카르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근엄함을 유지하기 위해, 이 혼란스런 의문을 유진에게 캐묻지는 않았다.


“...유폐의 마왕이 경고를 전했다. 우리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 대륙 굴지의 명문 무가 라이언하트다. 앞으로의 시국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피’에 마땅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


“아하.”


이쯤 들으면 카르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젊은 세대를 단련하기 위해, 사냥철에 참가 시키겠다?”


“...사자가 어린 새끼를 밀어 떨어트리는 마음으로.”


그 이야기가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카르멘은 저 이야기를 좋아했다. 현실이 어쨌건, 카르멘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사자는 어린 새끼를 맹수로 키우기 위해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린다. 그래야만 한다.


“무조건 참가해야 하는 겁니까?”


“강제는 없다. 스스로 맹수가 되고자 한다면, 자율적으로 참가를...”


“그럼 전 안 가렵니다.”


유진은 냉큼 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카르멘은 급히 손을 뻗어 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강제는 없지만... 너는 이야기가 다르지.”


“다를건 뭡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절벽에서 안 떨어져도 이미 훌륭한 사자라고 생각되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다른 사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에이, 빙빙 돌려 말하시기는. 솔직히 이런 것 아닙니까? 그 사냥에는 방계도 꽤 참가할 것 같은데... 양자인 제가 본가의 위신도 세우고, 방계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길 바라는 거죠?”


카르멘은 대답하지 않고 뚱한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겁니다. 제 참가를 바라는 것은 카르멘 님이십니까, 아니면 원로원주입니까?”


“...널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받긴 했지.”


역시. 유진은 빙긋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슬슬 접촉해 올 것이라곤 생각했는데, 이런 식인가?’


확신은 없지만, 바랑을 사주한 것이 원로원주가 아닐까 하는 심증은 있다. 만약 정말로 원로원주가 흉수라면, 멀쩡히 살아 돌아 온 유진에게 어떤 식으로든 접촉해 올 것이다.


‘우클라스 산은 넓어. 거기에 마물의 둥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


암살?


“...뭐... 흥미롭기는 하네요. 일단 자세히 더 들어보죠.”


참가 자격이 있는 것은 7년 전과 17년 전의 혈계식에 참가했던 젊은 사자들.


17년 전의 혈계식은 본가의 아이들 없이 방계로만 이뤄졌었다.


“그때 두각을 드러냈던 이들 중 몇몇은 흑사자 기사단에 입단했지만, 솔직히 내가 탐냈던 것은 둘이다.”


“누굽니까?”


“제노스 경의 딸인 제니아 라이언하트.”


이름은 처음 들었지만, 제노스에게 자식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올해 나이가 27살일 거다.


“제니아는 수행을 위해 시무인에 가있었는데, 이번 사냥에 참가하기 위해 돌아온다더군. 그리고 다른 하나는... 헥토르 라이언하트다.”


“아.”


유진도 그 이름은 알고 있었다. 오래 전, 혈계식을 앞뒀을 때 아버지에게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들어 본 적이 있나 보군.”


“네.”


“그렇겠지.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라이언하트의 방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것이 헥토르였으니 말이다.”


17년 전의 혈계식.


그때 헥토르의 나이는, 유진이 혈계식에 참가했을 때와 같은 13살이었다. 그래서인지 제하드는 헥토르의 이야기를 여러 번 했었다.


“혈계식은 공정하지도 않고,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전통이지.”


“...그렇다고 없앨 수도 없잖습니까.”


“전통이란 그런 것이지. 고리타분하지만, 300년을 그리 해왔으니 대뜸 없앨 수도 없어.”


카르멘은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10년 주기로 열리는 혈계식. 참가할 수 있는 것은 10살에서 15살까지... 그러니 혈계식의 시기에 맞춰서 아이를 낳아야만 하지. 게다가 본가의 아이들과는 달리, 방계의 아이들은 마나도, 진검도 접하지 못하고서 혈계식에 참가해야 해.”


방계에만 가해지는 제한.


그렇기에 17년 전의 혈계식은 순수했다. 앞서 나간 본가의 아이들 없이, 오직 방계만이 참가해 실력을 겨루었다.


“헥토르의 가문은 방계 중에서도 평범했고, 17년 전의 혈계식은 열흘 동안 숲을 떠돌게 했지. 우승으로 점쳤던 것은 제니아 라이언하트... 실제로 둘은 열흘 동안 숲에서 아주 ‘잘’ 지냈다. 억지로 버티면서 피폐해진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말이야.”


“마지막 날에 대결했다죠?”


“그래. 제니아는 승리의 영광을 원하고, 헥토르에게 대결을 청했지. 결과는 헥토르의 압도적인 승리였지만.”


제노스의 가문은 라이언하트 중에서도 특별하다.


시조 베르무트에게 직접 ‘하멜식’을 교육받은 라이언하트의 사냥개. 최초의 흑사자.


방계라고는 하지만, 무가(武家)의 정통성은 본가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무(武)는 당시 10살이었던 제니아에게도 깃들었다. 마나를 쓰지 못한다고 해도, 진검을 쥔 적이 없다고 해도. 제니아의 실력은 어린아이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패배했다. 똑같이 마나를 쓰지 못하고, 진검을 쥔 적이 없던 헥토르는 제니아와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고 혈계식에서 우승했다.


“제니아가 시무인에서 수행한 것처럼, 헥토르는 루하르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사냥에 참가한다더군. 어때, 마음이 동하지 않나?”


“별로요.”


“서로 겨뤄보고 싶지 않는 거냐. 헥토르는 네가 나타나기 전에 방계 제일의 천재라고 불렸다.”


“거기서부터 이미 결정된 것 아닙니까. 제가 헥토르보다 못했다면, 여전히 헥토르가 방계 제일의 천재라 불리고 있겠죠.”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저보다 뛰어났다면, 헥토르가 저 대신에 본가의 양자가 됐을 거고요.”


“...하하!”


카르멘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멋진 오만함이야. 그래, 네 말이 맞지.”


“그 둘 말고 더 참가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네 동기로는 가르기스 라이언하트와 디자이라 라이언하트가 참가하기로 했다. 물론, 본가의 쌍둥이도 말이지.”


“시엘도? 어차피 참가할 건데, 왜 굳이 본가에 온 겁니까?”


“어떻게든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더군. 이유야 하나뿐이지 않나? 오랜만에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나 보지.”


실제로 시엘은 이 자리에 함께 하지 않고, 애니실라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메르와 함께.


“...그리고 한 명 더.”


카르멘은 잠시 머뭇거렸다. 유진은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곤혹스러움’을 읽었다.


“또 있습니까?”


유진은 7년 전의 혈계식을 떠올렸다. 시안과 시엘, 가르기스, 디자이라. 그 외에도 몇몇의 떨거지가 있긴 했지만, 놈들은 이름을 기억할 가치도 없는 하찮은 존재들이었다.


설마. 그런 떨거지들 중 누군가가 7년 동안 실력을 키워, 흑사자성의 사냥에 참가하겠다고 나선 건가.


“데콘 라이언하트.”


...혈계식의 동기였던 것 같은데... 별 인상은 없다. 고작 그 이름을 말하는 것에 곤혹스러워하는 건가?


“그리고 이오드 라이언하트.”


유진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사냥준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이 있다.


시엘 라이언하트, 20살.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런 취급을 받은 적 없는, 명문 라이언하트의 영애.


13살의 나이에 유진이 양자로 들어오긴 했지만, 시엘에게 있어서 유진은 굴러온 돌도 아니었다. 물론, 시엘 본인도 박힌 돌은 아니었다.


그녀는 본가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시안은 유진에게 위기감을 느꼈던 모양이지만, 어린 시엘에게 있어서 그러한 위기감은 우습기만 했다.


시엘은 귀엽고, 사랑스럽게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나이부터 자신이 타고난 무기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았다.


바보 같고 둔한 오빠는 그를 다룰 줄 몰라, 어머니에게 엄한 꾸중을 듣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시엘은 아니었다. 그녀는 교묘하게 꾸짖음의 선을 벗어날 줄 알았고, 꾸중을 들어야 할 때에 어떻게 행동해야 그를 피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그러한 처세는 나이를 먹고서도 계속 되었다. 동시에, 어릴 때는 하지 않았던 노력들을 하나 둘 더해갔다.


시엘은 그냥 예쁘고 귀엽기만 한 꽃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라이언하트는 명문의 무가. 그곳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귀엽고 사랑스럽게 웃기만 해서는 안 된다. 라이언하트에 마땅한 실력을 갖춰야 한다.


검을 쥐고, 휘둘렀다. 스스로 그렇게 하니, 애교를 떨지 않아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들은 시엘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기 위해 시간을 할애했다.


‘...틀리지 않았어.’


어렸을 때부터 눈치는 빨랐다. 어머니가 은근히 귀엽기고 사랑스런 딸을 바라신 것은 알았다. 검이 아니라 찻잔을 쥐고, 제복과 무복이 아닌 드레스를 입으며 귀족 모녀다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신 것도 알았다.


알지만, 해주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바람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저 바람은 한순간의 충동일 뿐. 시엘이 알고 있는 어머니, 애니실라는 꽃처럼 화사한 귀족 영애가 아닌, 라이언하트에 걸맞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사자를 바라시는 분이기에.


‘틀리지는 않았지만...’


이건 반칙이다.


시엘은 주먹을 바르르 떨면서 앞을 보았다.


애니실라의 무릎 위. 열 살 배기 소녀가 앉아 있다.


시엘도 저만한 나이에는 애니실라의 무릎에 앉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혈계식이 끝난 후로는 앉지 않았다. 혈계식을 치렀다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것. 그때부터는 어린아이가 아닌, 어린사자가 되어야 한다.


그를 가르친 것이 다름 아닌 애니실라였다.


‘...거긴 내 자리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혈계식 이후로 앉은 적은 없을 지라도, 시엘은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애니실라의 무릎에 앉을 수 있었다. 저곳은 라이언하트에서 오직 시엘에게만 허락 된 자리였다.


그럴 텐데. 웬 어린 소녀가 시엘의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더욱이 시엘의 감정을 흔드는 것은, 소녀를 보는 애니실라의 눈이었다. 어린 딸을 보는 것만 같은, 사랑과 기쁨이 듬뿍 담긴 눈!


‘이해는... 이해는 가. 어머니도 외로우셨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딸을 두고 저런 눈을 하다니! 시엘은 굉장히 오랜만에 질투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저 소녀를 밀쳐버리고서 애니실라의 무릎 위에 앉아버리고 싶었다.


“귀엽지 않니?”


그 조용한 분노를 읽었을 리는 없지만, 애니실라는 실로 적절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마치 네 어렸을 때가 떠오르는 구나, 시엘.”


“...제가 더 귀여웠던 것 같은데요?”


시엘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분히 도전적인 어투였다. 시엘은 웃는 눈으로 소녀, 메르를 응시했다.


“오늘 처음 뵙지만, 시엘님의 이야기는 애니실라님에게 여러 번 들었어요.”


메르는 쿠키를 야금야금 먹으며 대답했다.


“자신을 쏙 빼닮은, 아주 아름다운 딸이 있다면서...”


“어머, 얘는... 부끄러운 이야기는 하지 마렴.”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시엘님은 정말 아름다우세요!”


메르는 쿠키를 내려놓고 환히 웃었다.


그 미소가 시엘의 가슴 깊이 펀치를 날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고르며 턱을 당겼다.


‘어머니가 매료될 만도 해...’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덜어낸 것.


어린아이의 순수(純粹).


눈앞의 소녀는 시엘이 덜어냈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또한, 그녀는 라이언하트가 아니다. 꽃이 아닌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야욕이 없다. 그렇기에, 더욱이 순수하게 애니실라의 모정에 불을 붙일 수 있다.


바라는 대로 예쁜 옷을 입고, 신체의 밸런스를 신경쓰지 않고서 주는대로 달콤한 과자를 먹는다. 모두가 언젠가부터 시엘이 거리를 두었던 것들이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질투라니. 나도 참...’


시엘은 뒤늦게 감정을 추스르며 홍차를 홀짝거렸다.


‘...응?’


조금 늦게, 시엘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제가 더 귀여웠던 것 같은데요?’


먼저 던진 도발.


메르는 그 도발을 긍정하지 않았다. ‘귀여움’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응수했을 뿐이다. 그건,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귀여움과 아름다움은 다르다. 10살배기 소녀에게 아름답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설마.’


과한 생각이다. 시엘은 웃음을 유지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맞은 편의 메르는 새로운 쿠키를 들어, 애니실라의 입에 쏙 밀어넣고 있었다.


‘...그럴 리가...’


아니.


틀리지 않았다. 한 순간이지만, 시엘과 메르의 눈이 마주쳤다. 시엘은 방긋 웃는 메르의 눈에서, 자신과 비슷한 요망함을 간파했다.


시엘 라이언하트, 20세. 소녀를 지난 나이.


그렇기에 소녀에게 패배했다.


“...으흠.”


시엘은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애니실라의 곁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애니실라의 팔에 팔짱을 끼고, 어깨에 고개를 기울였다.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어머...”


“애니실라님, 이것도 드셔보세요. 너무 맛있어요!”


“어머... 어머...”


애니실라는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인 것에 감사했다.


“제법이야.”


다과회가 끝나고, 시엘은 메르와 함께 방을 나왔다.


“설마 고작 며칠 사이에 어머니를 그토록 매료시키다니.”


“저는 매료라는 것을 한 적이 없는 걸요.”


메르는 시엘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그냥, 애니실라님이 저를 너무 귀여워해주시는 것 뿐이죠.”


수백 년 동안 아크리온에서 살았다. 그곳에 찾아오는 것은 고리타분한 마법사들 뿐. 그들은 메르를 겉모습다운 귀여운 소녀로 여기지 않고, 잘 만들어진 사역마로만 대했다.


그래서 메르는 자신의 귀여움이란 것을 제대로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크리온을 나온 후로는 자각하고 싶지 않아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바깥’은 메르가 알지 못하는 미지가 가득했다.


“...너. 겉모습은 어린아이지만, 사실은 만들어진지 수백 년은 되었다면서.”


“하지만 정신연령이 늙지는 않았어요. 제 인격은 현명한 세냐님의 유년기로 맞춰져 있거든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처음에는 그렇게 만들어졌어도, 수백 년이나 흘렀으면 정신도 늙는 거지.”


“저 스스로 늙지 않았거든요. 애당초 정신이라는 것은 경험과 육체 나이에 맞춰가는 것 아닌가요? 전 수백 년 존재했지만, 시엘님만큼의 경험은 하지 않았어요. 물론 몸도 성장하지 않았죠.”


“...나도 경험을 많이 한 것은 아니거든?”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희 왜 싸우고 있냐?”


카르멘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온 유진이 끼어들었다. 그는 복도 한복판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시엘과 메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님!”


메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폴짝 뛰어 올라 유진의 팔에 매달리는 메르를 보면서, 시엘은 복잡한 질투를 느꼈다.


“...싸움? 무슨 싸움? 내가 꼬마랑 싸울 이유가 뭐가 있어?”


시엘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유진의 앞에 섰다. 그녀는 팔에 매달려 있는 메르를 가소롭다는 듯이 보곤,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유진의 곁에 섰다.


동등한 자리에, 눈을 맞추고. 슬쩍 뻗은 팔로 유진에게 팔짱을 꼈다.


“흑사자 성. 갈 거지?”


“얘가 왜 이래.”


“저번보다 팔이 굵어진 것 같은데? 그 무식한 수행, 아직도 하는 거야?”


시엘은 눈웃음을 치며 유진을, 아니, 메르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깨달았다. 메르는 시엘의 행동에 그 어떤 질투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메르는 어린 소녀였고, 시엘처럼 유진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윽...!’


그를 깨달으니 새삼 부끄럼이 밀려온다. 유진에게 팔짱을 낀 것이야 부끄러울 일도 아니다만, 저 어린 꼬마에게 우롱당하는 것만 같았다.


“...흠흠.”


시엘은 기껏 꼈던 팔짱을 풀고서 한 걸음 물러섰다.


“늑장 부릴 것도 없는 일이잖아? 네 성격이라면 거절하지도 않을 테고. ...그런데, 크리스티나 보좌주교와의 여행은 즐거웠어?”


“즐겁다면 즐거웠지.”


“그래? 단 둘이서, 단, 둘이서. 험난한 오지를 떠도는 여행이... 즐거웠다라. 나는 잘 모르겠네. 그게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지?”


시엘은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사마르 대수림은 도시도 아니잖아? 마을도 변변찮고. 어딜 가든 나무와 흙 뿐. 숙소는 어떻게 했어? 야영했겠지. 그게 당연하니까. 설마 같은 텐트를 쓴 거야?”


“까불지 마.”


유진은 쏘아붙이는 시엘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 밀었다.


“애당초 네가 왜 캐묻는 거냐? 시엘.”


“...나는 네 누나니까. 동생의 ‘비행’을 알아야 할 자격이 있어.”


시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유진의 얼굴은 구겨졌다.


“설마 너, 비행소년이 된 건 아니지?”


“내가...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왜애? 저 토 쏠리는 말장난을 알려준 건 너잖아.”


“그러니까 잘못했다고.”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시엘은 도망치듯 서둘러 걷는 유진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어디 가? 워프게이트로 가려는 거야?”


“사냥이 시작되는 건 보름 후라며? 그런데 뭐하러 벌써 가냐?”


“간다는 거지?”


“응.”


원로원주가 암살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그냥 가지 않고 본가에 틀어박히는 것이 낫다.


그랬다가는 진상을 알 수 없다.


‘제노스도 있고.’


사냥에는 흑사자 기사단도 참가한다. 원로원은 믿을 수 없지만, 제노스는 믿을 수 있다.


“너도 기왕 온 거, 며칠 동안은 여유를 갖고 애니실라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잖아. 저번에 왔을 때는 곧바로 돌아가 버렸다며?”


유진은 투덜거리며 시엘의 허리춤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형의 검이 있었다. 비환검 자벨. 내심 탐냈지만 손에 넣지 못한, 베르무트의 무기다.


“멋지지?”


시엘은 유진의 눈이 자벨에 머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벨의 칼자루를 두드렸다.


“아직 제대로 다룰 수는 없지만, 제법 손에는 익었어.”


“...다루기 힘든 무기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크흠... 보면 알지. 생긴 것부터가 지랄 맞게 생겼잖아.”


자벨은 검이지만 채찍과 같다. 검신을 이루고 있는 수백 개의 칼날은, 휘두를 때마다 늘어나며 휘몰아친다.


“시안은 잘 지내냐?”


“잘은 지내지. 몸은 힘들어 보이지만.”


시안은 흑사자성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매일 대장님들에게 훈련받고 있거든. 오늘만 해도 제노스님한테 엄청 시달리고 있었어. 아, 오빠가 너한테 꼭 전해주라는 말이 있었는데.”


“뭐래냐?”


“사냥에 참가하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래.”


“걔가 날 어떻게 죽여?”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시엘은 킥킥 웃으며 유진의 곁에 달라붙었다. 팔에 매달려 있던 메르는 몸을 꼬물대면서, 유진의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쟤 뭐하는 거야?’


시엘은 메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흘겼다. 곧, 메르가 망토 안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시엘은 놀란 소리를 내며 유진의 망토를 들췄다.


“어디에 갔...”


“여기있어요.”


메르는 망토 안쪽에서 머리만 쏙 내밀며 대답했다.


“시엘님도 들어오실래요?”


“얘는 못 들어가.”


“여기 되게 좋은데.”


메르는 얄밉게 웃었고, 시엘은 눈썹을 구기며 망토를 덮어버렸다.


“...이오드 오빠가 온다는 말. 들었지?”


“용케 허락해 줬네.”


유진은 씁쓸히 웃었다.


“성인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었잖아.”


“...가주님이 엄청 설득했거든.”


시엘은 한숨으로 대답했다.


“3년이야. 그 시간 동안, 이오드 오빠는 테오니스님의 친가에 틀어박혀 있었어. 자숙은 할 만큼 했고... ‘장남’을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거지.”


“노골적이라 웃겨.”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안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차기 가주는 시안이다.


이오드가 자숙을 끝내고 나올 지라도, 차기 가주의 자리는 변치 않는다. 이오드의 계승권은 박탈 된 그대로다.


“사냥은 방계도 여럿 참가하지. 원로들은, 그 자리를 통해서 차기 가주를 확실시 하고 싶은 거야.”


가주가 될 수 없을 만큼의 사고를 쳤다지만, 정통성에서 앞선 것은 이오드다.


“자숙하는 동안에도 마법 수련은 계속 했나 봐. 하지만... 네가 가장 잘 알잖아?”


“3년 동안 죽도록 수련해봤자, 이오드 형님은 시안을 못 이겨.”


유진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너야 양자인데다, 실력은 이미 유명하지만... 이오드 오빠는 아니야. 장남이고, 실력은 알려져 있지 않지. 그렇기에 검증이 필요한 거야. 이오드 오빠가 시안 오빠보다 압도적으로 부족하다는 검증이.”


“...사냥에 참가하겠다고 표명해 온 것은 형님이잖아.”


“이오드 오빠가 정말로 그를 바랐겠어? 그 성격에? 테오니스님이 몰아붙인 거겠지.”


그 생각은 유진도 동의했다.


처음 만난 것은 그보다 7년 전. 15살의 이오드는... 유약했다. 로베리안의 마법에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마법에 흠뻑 빠져버린 어린 소년이었다.


3년 전, 아롯의 볼레로 거리.


유진은 이오드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인지를 보았다. 그때 놈의 나이는, 유진보다 2살 많은 19살이었다.


“...3년은 변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라 생각하지만.”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형님은 변할 성격이 아니야. 주변 환경도 그렇고.”


“...테오니스님이 극성이니까.”


“그렇지. 형님이 정말 변하려면, 테오니스님의 치마폭에서 나와야 해. 하지만 그러지 못했잖아? 형님은 3년 동안, 테오니스님의 친정에서, 그 분의 지배를 받았다고.”


시엘은 테오니스의 사나운 눈초리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끔찍하네.”


이오드의 일이 없었다면, 애니실라도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 어디 가는 거야?”


“숲.”


“왜?”


“훈련시간이야.”


유진은 태연하게 대답했고, 시엘은 헤하고 입을 벌렸다.


“...나랑 안 놀 거야?”


“훈련하면서 놀지 뭐.”


시엘은 혀를 내두르며 유진의 뒤를 따라갔다.


*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머니는 사랑이 너무 많은 분이시다.


“저 스스로 결심한 일인 걸요. 예, 알고 있어요. 그들은 저를 좋아하지 않겠죠.”


이해하고 있다.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 비록 못난 아들이라도,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저는 그곳에서, 저를 증명하고 싶어요.”


이오드는 활짝 웃으며 식기를 내려 놓았다.


어머니, 테오니스는 그 맞은편에서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이오드는 어머니가 저렇게 웃는 것이 좋았다.


어린 시절.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저렇게 웃지 않으셨다.


항상 꾸짖는 눈으로 자신을 보았고, 미소 대신에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칭찬을 속삭이지 않고, 바라지도 않는 미래의 이야기를 하며 꾸짖기만 하셨다.


그 모두가 이오드가 부족해서, 잘못해서 벌어진 일. 그를 깨닫고 난 뒤로는 모든 것이 간단해졌다.


스스로가 변하면, 어머니의 표정은 아주 쉽게 바꿀 수 있었다.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이오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내 아들이니까. 사랑스런 아들, 이오드. 라이언하트의 장남.”


“예. 저는 어머니의 아들이죠.”


“가주가 되지 못할 지라도, 너는 내 아들이란다.”


“예, 맞아요. 그건 당연한 거죠.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바란 대로 가주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제발, 이오드. 그걸 ‘실수’라고 말하지 마렴. 네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가 내 잘못이니까. 내가 널 더 사랑하고, 네 마음을 알아주었다면...”


“저는 괜찮아요.”


이오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의 꾸짖음 덕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걸요.”


“아아... 그리 말해주다니... 너무 고맙구나...”


“어머니가 제가 싫어서 그러신 것이 아니잖아요. 모두가, 저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 것이죠.”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네.”


“넌 뛰어난 아이야, 이오드.”


이오드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사로운 식탁. 창가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아름답다. 이오드는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들을 향해 미소지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오드는 창가의 커튼을 닫으며 말했다. 그는 이 햇빛을 좋아하지만, 어머니는 햇빛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마중은 나오지 마셔요.”


“함께 가지 않아도 괜찮겠니?”


“네, 물론이죠. 이곳에 남아 저를 응원해주세요.”


“내 사랑이 너와 함께 할 거야.”


식탁을 떠난다. 문을 열고 나가니, 복도에 선 시종들이 보였다.


“도련님, 오늘 떠나시는 거죠?”


“도련님은 잘 할 수 있으실 거예요.”


시종들의 응원을 지나, 저택의 홀로 나갔다. 그곳에는 이오드의 외할아버지인 보사르 백작이 서있었다.


“오, 이오드. 이제 떠나는 것이냐?”


“외할아버지도 참... 마중은 괜찮다고 했잖아요?”


“하하!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사랑스런 손자가 드디어 세상에 나가는 것인데!”


이오드는 민망하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보사르 백작에게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외할아버지.”


“라이언하트의 가주? 그게 뭐가 중요하겠느냐?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란다. 이오드. 나는 전적으로 네 뜻을 존중한단다.”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요.”


외할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오드는 닫힌 문앞에 섰다. 이오드는 그 문을 잠시 동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마중을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곁에 서서 이오드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저택의 시종 수십 명도, 다들 하던 일을 내려놓고서 이오드를 응원하기 위해 나와 있다.


“안녕히 계세요.”


이오드는 감동해 나온 눈물을 훔쳐 닦으며 말했다.


사냥준비


“...이번에도 대뜸 하늘에서 떨어트리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제복의 옷깃을 세우던 시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너 혼자라면 몰라도, 나랑 같이 가는데 하늘에서 떨어트리지는 않을 거야.”


“무슨 상관이야?”


“흑사자 성의 기사들과 원로님들이 나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알아?”


시엘은 가슴을 활짝 펴며 으스댔다. 그러면서, 망토의 틈에서 얼굴만 쏙 내밀고 있는 메르를 힐긋 보았다.


‘요망한 사역마 같으니.’


본가에서 지낸 일주일.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엘은 자신이 떠났던 시간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떠받들던 시종과 기사들은 이제는 메르를 시엘처럼 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본가를 떠난 시간이 길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성인이 되기도 했으니, 어렸을 때와 같은 취급을 바라는 것도 너무한 고집이지 않나.


“따라갈 필요는 없지 않나?”


뒤에서 말을 건 것은 시크나드였다. 물론, 그 말은 유진의 망토 안에 있는 메르에게 건넨 것이었다.


시크나드는 세냐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메르에 대해 품는 마음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메르의 모습은 시크나드가 기억하는 세냐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하지만. 각별히 여기는 것과 별개로, 시크나드는 솔직한 성격이 아니었다. 애니실라처럼 메르를 노골적으로 귀여워하지도, 끌어안을 수도 없었다.


그 대신에.


가끔, 메르가 숲을 거닐고 있으면. 슬며시 다가가 꽃을 몇 송이 주었다. 세냐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꽃이었다. 이런 계절에는 피지 않는 꽃이지만, 세계수의 가호를 받는 숲에서는 꽃도 아름답게 피어났다.


‘고맙습니다!’


꽃을 받을 때면 메르는 항상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해주었다.


“...그래.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잖니? 이따 오후에 새로 주문한 옷들이 도착할 텐데...”


애니실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시크나드의 말에 호응했고, 제하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뇨. 저는 유진님과 함께 가야해요.”


메르는 단호히 대답했다.


“이곳에서 애니실라님과 예쁜 옷을 입고, 제하드님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시크나드님과 숲을 산책하는 것도 즐겁지만. 제 존재는 유진님에게 도움이 되어야 해요.”


“어쩜... 그렇게 기특한 말도 할 줄 아는 구나...!”


‘어머니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시엘은 떨떠름한 얼굴로 애니실라를 힐긋 보았다.


‘생긴 것만 어린 꼬마지, 내용물은 수백 년 묵은 사역마잖아.’


아니.


그렇기에 좋은 것이다. 애니실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니실라는 쌍둥이를 직접 키워냈기에, 귀엽고 사랑스런 어린아이의 머릿속에 가공할 악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워프게이트가 연결되었습니다.”


흑사자 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유진은 빠져나와있는 메르의 머리를 망토 안으로 밀어넣었다.


“들어가 있어. 워프 도중 떨어지면 골치 아프니까.”


“네에.”


“잠깐.”


시엘이 다가왔다. 뻗은 손이 유진의 망토자락을 잡더니, 어깨 뒤로 넘겨 버렸다.


“문양이 안보이잖아.”


쿡. 시엘의 손가락이 유진의 왼쪽가슴을 찔렀다. 라이언하트의 제복, 왼쪽 가슴에 새겨진 사자문양. 오직 본가만이 가슴에 새길 수 있는 상징.


“아마 입구부터 마중이 나와 있을 텐데. 당당하게 보여줘야 할 것 아냐?”


“처음 가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오랜만이잖아.”


“그래봤자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아냐? 데콘... 음, 얼굴도 기억 안 나.”


“한 명 더 있잖아.”


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유진의 팔을 끌어당겼다.


“이오드 오빠.”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성격은 고약하구만. 이오드 형님에게 이 사자문양을 보여주면서 압박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걸 어찌 받아들일지는 이오드 오빠에게 달려있지.”


시엘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이오드 오빠는 해선 안 될 짓을 했어.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고. 유진, 난 말이야. 이오드 오빠가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 사냥에 참가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가.”


“...테오니스님이...”


“이오드 오빠도 더 이상 애가 아니잖아? 테오니스님이 아무리 엄하다고 해도, 아직까지 휘둘리는 것은 이오드 오빠에게도 문제가 있는 거야.”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가슴의 사자문양을 쓸어내렸다.


“...형님은 이미 와 있는 건가?”


“응.”


“솔직히 난 얼굴 보기가 껄끄러운데. 너도 들었겠지만, 내가 3년 전에 형님을 너무 심하게 두들겨 팼거든.”


“껄끄러워 해야 하는 것은 이오드 오빠지. 그러니까,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가자는 거야. 오빠가 죄책감에 고개도 들 수 없을 만큼 말이야.”


시엘은 유진을 찌릿 노려보며 발을 뻗었다.


“먼저 갈 테니까, 당당히 들어 와.”


당당히 들어오라는 건 또 뭐야?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뭐 죄지은 것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은 이오드다.


‘어쩌면 원로원주도.’


설마 그 산전수전 다 겪었을 늙은이가, 제발 저려서 눈도 못 마주쳐 오진 않겠지만.


오히려 여행은 즐거웠냐며 웃음을 건네지 않을까. 유진은 원로원주의 색 바랜 금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발을 뻗었다.


움츠릴 이유 없는 어깨는 활짝 펴고, 등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렇게 유진은 앞으로 걸어나갔다.


워프하는 순간의 부유감. 거리가 거리인 만큼, 부유감은 꽤 길었다.


‘저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발이 지면에 붙는다. 탁, 타닥. 유진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면서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흠.”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몇 달 전에 보았던 흑사자 성의 풍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져 있다.


성벽마다 우뚝 솟은 흑사자의 깃발. 그 수십 개의 깃발 아래에, 몇몇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왔냐?”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시안이 몸을 일으킨다. 녀석은 반가움에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유진은 워프 중에 헝클어진 머리를 내리누르면서 시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고작 몇 달 만이라곤 해도, 오랜만에 본 형제의 얼굴이 반가운 거냐?”


“...”


“하긴. 네가 떠나기 전, 우리는 함께 술잔을 나누며 어른의 의식을 마쳤으니 말이야. 나 또한 네가 느끼는 감정에 공감한다, 형제.”


시안은 말을 할 때마다 보란 듯이 인중을 씰룩거렸다.


“...너.”


유진은 표정을 구기면서 시안에게 다가갔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봐라. 너... 그 수염. 스스로에게 어울린다고 생각 하냐?”


“...”


“형제로서 말하는 건데, 진짜 하나도 안 어울리거든. 성인이 되었으니 흥분한 것도 이해하는데, 왜 그딴 수염을 처 기르는 거야?”


“...멋지지 않냐?”


“하나도 안 멋져. 나는 지금... 네 인중의 그 꼴사나운 털을 모조리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다.”


유진은 꽉 쥔 주먹을 시안의 앞에 들어보였다.


“그래... 멍청한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잘못이 있다면, 시엘, 바로 너야. 왜 네 멍청한 오빠가, 저 병신같은 콧수염을 기르도록 내버려 둔 거지?”


“...나도 엄청 놀라고 있거든?”


조금 먼저 도착했던 시엘이 발끈하며 외쳤다.


“일주일 전만 해도 오빠는 저런 이상한 콧수염은 달고 있지 않았어.”


“...그럼 저 수염이 며칠 사이에 자랐단 거냐?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시안, 너 털이 많이 안자라는 체질이잖아.”


“...발모제를 발랐다.”


시안은 눈동자를 옆으로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성인이라면 수염 정도는 길러도 되는 거잖아. 어떤 나라에서는 수염을 기르는 것이 성인 남자의 권리...”


“안 어울린다고.”


“...어울린다고 했는데...”


“대체 어떤 미친놈이 네 수염을 어울린다고 칭찬한 거냐? 애당초 발모제는 어디서 구했...”


터억.


묵직한 발걸음. 유진은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높다란 첨탑의 뒤, 거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굳이 첨탑 위에 올라가 있는가? 왜 이 추운, 바람이 쌩쌩 부는 산꼭대기에서 가슴과 겨드랑이가 푹 파인 민소매만 입고 있는가?


응당 느껴야 할 의문들. 하지만 유진은 그 의문들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거인의 불알을 구매하는 것에 3억 셀을 태운 놈에게 이러한 상식적인 질문은 무용했다.


“나다.”


ㅡ쿠웅.


첨탑에서 떨어진 거한이 몸을 일으킨다. 놈이 일어설 때마다, 유진의 시선도 함께 위로 올라갔다. ...크다. 3년 전에도 컸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졌다. 덩치만 보면 조란 부족의 이바타와 버금갈 정도다.


“...커졌구나.”


“네 덕분이다, 유진.”


가르기스 라이언하트.


놈은 22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풍성한 수염 너머로 건치를 드러내며 웃었다.


“보이나?”


꿈틀.


기르가스가 양 팔을 들 때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민소매의 틈새로 대흉근이 꿈틀거렸다.


“너와 함께 구매했던 거인의 고환이, 내 몸을 더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아름답지는 않은데...”


“너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구나. 멋진 제복을 입고있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네가 얼마나 충실하게 몸을 단련했는지 말이다.”


“...너도 그... 멋진 제복이라도 입지 그러냐. 어... 그리고 일단, 양팔은 더 들지 말고 내려줬으면 좋겠어.”


유진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기르가스의 겨드랑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왜 시안에게 발모제를 준 거냐?”


“도련님이 내 수염을 부럽다는 듯이 보았기 때문이다.”


기르가스는 제 풍성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이런 수염을 동경하지. 물론, 이 수염이 내게 어울리는 것은 나의 육체가 훌륭하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시안, 미리 말해두는데. 너 이 새끼한테 근육성장제라는 거 받아서 먹으면 내 손에 죽는다.”


“...왜? 나는 기르가스의 몸이 꽤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멋지긴 뭐가 멋져? 징그럽기만 한데.”


시엘은 흉물이라도 보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오빠는 이상한 헛바람에 너무 쉽게 흔들린다니까. 저 돼지처럼 몸 우락부락 키우고 수염 기르면, 난 오빠를 오빠라고 여기지 않을 거야.”


“아가씨. 나는 돼지가 아닙니다.”


어릴 때의 기억 때문인지, 기르가스는 시안과 시엘에게는 태도가 무척 정중했다. 유진은 은근히 가까이 다가와서 근육을 과시하는 기르가스를 무시하고 앞을 보았다.


“쟤가 디자이라야?”


유진은 벽에 몸을 기울여서 삐딱하니 서있는 장신의 여자를 가리켰다. 건강한 빛깔의 그슬린 피부.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 7년 전 보았던 특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음.”


기르가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염을 어루만졌다.


“무어가 부끄러운지, 다가오지도 않고 서있군.”


“부끄러워서 여기 있는 거 아니야, 멍청아!”


기르가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디자이라가 빽 고함을 질렀다.


“경계하고 있는 거라고!”


“본인 입으로 경계한다고 말하는데, 그걸 경계라고 할 수 있나?”


“쟤는 어릴 때부터 멍청하지 않은 척 하면서 멍청했지. 그러면서 속이 아주 음험해...”


시안은 혈계식 때의 굴욕을 잊지 않았다. 그때, 디자이라는 귀신인 척 접근해서 자신을 기습하려 했었다. 덕분에 시안은 동생 앞에서 꼴사나운 비명을 내질러야만 했다.


“...도련님은 아직도 오해하고 계신 건가요?”


“오해라니...! 그때 날 기습하려 한 것은 사실이잖아!”


“그건... 맞지만...”


“맞다고?! 그때는 아니라며?!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해!”


시안은 콧수염을 떨며 고함을 질렀다. 유진은 그 멍청한 말다툼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앞을 보았다.


건너편의 성벽. 그곳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듬성듬성 자란 수염과, 정돈되지 않은 더벅머리. 느슨해 보이는 눈매.


하지만, 그 털털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몸은 단단하다. 기도는 흐트러짐이 없고, 잘 벼린 칼날처럼 올곧으며 날카롭다.


“...저게 헥토르인가.”


“어떻게 안 거냐?”


디자이라를 갈구던 시안이 놀라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만난 적이 있었던 거냐?”


“아니. 이름만 들어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저만한 실력자라면 알아볼 수밖에.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헥토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렇게 시선을 맞대니, 헥토르는 빙긋 웃으며 유진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방계 중에서도 유명한 녀석이지.”


시안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10년도 넘게 루하르 왕국에서 수행하던 놈이야.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기사단, 루하르의 하얀 송곳니. 헥토르는 루하르 국민도 아닌 주제에 송곳니의 명예기사가 된 놈이라고.”


“대단한 친척이잖아.”


“...넌 마음 편해서 좋겠다.”


“왜 약한 척이냐? 병신 같은 수염을 기르고 다닐 만큼의 담력은 붙은 거 아니었어?”


유진은 시안의 등을 철썩 때리며 웃었다.


“왜. 이번 사냥에서 헥토르보다 두각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별로.”


“별로는 무슨. 얼굴부터 부담이 뚝뚝 묻어나오는 구만.”


“왜 헥토르 형님을 부담스러워 하는 거지?”


기르가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도련님은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 군. 헥토르 형님은 같은 라이언하트. 하물며 이번 사냥은 혈계식처럼 방계와 본가가 경쟁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넌 뇌까지 근육이라서 좋겠다.”


시안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사냥은 말이야. 어떤 의미에서 차기 가주인 나에 대한 시험인 거야. 사냥에 참가한 라이언하트의 방계... 비록 그 수는 적지만, 자의로 참가한 그들은 방계의 다음 세대를 이끌 주역이라고 할 수 있지.”


“과연...”


“나는 차기 가주로서 방계의 존경을 받아야 해. 내가 사냥에서 헥토르보다 부족한 모습이라도 보여 봐. 너나 디자이라 같은 젊은 방계가 날 더 존경할까, 헥토르를 더 존경할까?”


“나는 헥토르 형님과 도련님, 둘 모두 존경할 거요.”


가르기스는 가슴근육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시안은 그 울룩불룩한 근육의 움직임을 멍하니 보다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고맙다...”


“시안.”


유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오드 형님은 어디 있는 거냐? 이미 도착해 있다고 들었는데.”


이오드의 이름이 나온 순간.


시안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형님은 사흘 전에 도착했다. 첫날은 원로원에게 불려갔고, 그 후론 쭉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어.”


“얼굴은 봤냐?”


“...인사도 했지. 나는 별로 인사하고 싶지 않았는데, 형님 쪽이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시안의 말이 멈췄다. 그는 노골적으로 꺼려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시안 뿐만이 아니었다. 시엘도,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디자이라와 가르기스도 굳은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큼직한 로브를 두른 청년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목뒤로 묶어 내린 잿빛 머리카락. 가지런한 앞머리 아래에서 빛나는 금색 눈동자.


이오드 라이언하트.


“오랜만이구나.”


이오드는 유진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


아니, 많이 변했다. 그렇게 느꼈다. 3년 전, 아롯에서 보았던 이오드는 단 한 번도 유진에게 저런 미소를 지은 적이 없었다. 그때의 놈은 서큐버스에게 정기가 잔득 빨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폐인과 같은 몰골이었다.


유진이 기억하는 이오드의 미소는.


서큐버스가 만든 꿈속을 헤매던, 공허한 미소뿐이었다. 그 뒤의 표정에는 어떠한 웃음기도 없었다. 코피를 철철 쏟으면서 울고, 절규하고.


‘네가 대체 뭘 안다고 나를 비난하는 것이냐?’


‘너는 모른다. 4년 전부터, 모두의 주목을 받고 본가의 양자가 되어서, 가주님의 지원을 듬뿍 받은 너는...!’


‘타고난 재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흑마법사가 되어서 헬무드로 갈 것이다. 그 자유로운 곳에서 내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나는 가주가 되고 싶지도, 본가의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아...”


얼굴을 빤히 보고 있자, 이오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제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너무... 친한 척 다가왔나? 미안하구나. 내가 부끄럽겠지... 그럴 테지만, 네게는 꼭 인사를 하고 싶어서...”


이오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팔을 움직일 때, 한 순간 로브가 들춰졌다.


이오드의 왼쪽 가슴에는 라이언하트의 문양이 없었다.


“...시엘... 그래, 너도 참 오랜만이지. 아롯으로 떠난 이후로 보지 않았으니... 하하. 7년 만이구나. 참 많이 컸어...”


“...오빠도 많이 변했네요.”


이오드가 본가의 문양을 새기지 않은 것은 시엘도 보았다. 그래서인지 시엘은 찌푸린 눈을 조금 누그러트리며, 이오드의 말에 굳이 대답해주었다.


“음... 그래. 많이 변했지. 변할 수밖에... 7년은 긴 시간이니 말이야.”


이오드는 헛기침을 하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인사라니.”


유진의 입이 열렸다.


“오히려 제가 먼저 인사를 건네야죠, 형님. 제가 동생이지 않습니까.”


“인사의 순서에 형과 동생이 중요한 것은 아니잖느냐.”


이오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 덕분이지.”


비꼬는 건 아닌 것 같고. 유진이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이오드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롯에서의 일로 널 원망하지는 않아. 오히려 유진, 네게 감사하고 있지.”


“...감사?”


“네가 그때 나를 바로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까지 아롯에서 향락에 빠져 있을 지도 모르니 말이야. 네 주먹은... 하하... 아프기는 했지만, 그만큼 내게 뼈저린 교훈이 되었다.”


목소리는 더듬거렸지만, 이오드는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열심히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지. 모두가 네 덕분이야.”


3년 전.


이오드의 마법은 고작해야 3서클이었다. 나쁜 수준은 아니지만, 적탑주와 고명한 마법사들에게 직접 지도받은 것. 그리고 라이언하트 본가의 장남이란 것을 생각하면, 절대로 흡족하지 않을 성취였다.


‘...마냥 놀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지금 이오드의 마법은 4서클.


‘진전은 있었지만, 여전히... 아니, 내 눈이 너무 높은 거지.’


유진은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그래.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이오드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바람이... 차구나. 하하... 나는 먼저 들어가도록 하마. 오랜만에... 형제들과 만나니 아주 즐거워.”


이오드가 멀어진다.


“...양심은 있네.”


시엘은 멀어지는 이오드의 등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만약 이오드 오빠가 본가의 문양을 새기고 왔다면, 나는 오빠에게 못된 말을 했을 거야. 설마 시안 오빠가 미리 언질해 준 건 아니지?”


“내가 뭐하러 그러냐?”


시안은 투덜거리면서 제 콧수염을 어루만졌다.


“...형님은 흑사자 성에 처음 왔을 때부터 본가의 문양을 새기지 않고 있었어. 그 정도 눈치는 있다는 거겠지.”


“넌 눈치가 없고.”


“내가 뭐?”


“가서 콧수염이나 밀고와.”


유진은 픽 웃으며 시안의 등을 후려쳤다.


사냥준비

“...누구십니까?”


흑사자 기사단의 2번대. 


일단 제노스와 만날 생각으로 이곳에 왔는데, 처음 보는 여자와 맞닥트렸다. 일전에 제노스와 교류하면서 몇 번이나 이곳을 드나들었는데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제니아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얇게 뜬 눈이 유진을 훑는다. 제니아는 하나로 땋아놓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유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주 살짝.


“아... 제노스 님의 따님이시라는?”

“예.”


쳐다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제노스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것일까.


‘설마 내가 사형이라는 말을 했을 리는 없고.’


흑사자 성을 떠나기 전, 사형제 관계를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제노스에게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었다. 게다가 제노스에게도 이 사형제 관계는 떠벌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하나 뿐인 딸이라면 더더욱.


“...아버지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예.”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제가 답할 의무는 없을 텐데요?”

 

그 대답에 제니아의 눈이 더욱 얇아졌다. 그녀는 잠시 유진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유진님.”


제니아의 곁을 지나친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는 유진님에게 지지 않을 겁니다.”

“...예?”

“절대로.”


제니아는 그 말을 남기고서 홱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등. 흰 장갑에 감싸인 주먹이 꽉 쥐어져 떨리는 것이 보였다.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가던 길을 마저 갔다. 닫힌 문이 보였다. 대뜸 열고 들어가는 것은 무례한 일. 게다가 이곳은 보는 눈이 여럿 있다. 유진은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사형이라고 으스댈 생각은 없었다.


똑똑.


“들어오게.”


누군지는 묻지 않았다. 정체 따위는 기척을 통해 알아차렸을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제노스가 몸을 일으킨다. 유진은 그를 저지하면서, 일단 문을 닫았다.


“...왜 그러십니까?”

“잠깐.”


유진은 망토를 들췄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메르가 고개를 내밀었고, 제노스의 놀란 걸음에 의자가 넘어졌다. 


“그, 그 아이는 대체?”

“들어가 있어.”


유진은 빼꼼 나오는 메르의 머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곤 망토 안을 뒤져서 아카샤를 꺼냈다.


“아... 그 지팡이가...!”


유진은 제노스의 감탄을 흘려들으며 아카샤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부릅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단한 보안마법. 침입자 대비의 알람... 벽의 내구력 보존, 청결 유지... 도청 종류는 없군.’


아카샤는 마법을 이해하게 만든다. 드러나지 않은 마법이라도, 술식이 새겨져 있다면 볼 수 있다. 그 마법이 설령 유진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도, 아카샤를 쥐고 있는 순간에는 이해할 수 있다. 


“...잘 지낸 모양이지?”

“사형보다는 잘 지냈을 겁니다.”


유진이 경계를 풀고서 말을 거니, 제노스도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유진은 제노스의 딸인 제니아보다 7살이나 어리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유진은 하멜의 무덤을 찾아내고 비전을 계승했다. 제노스는 하멜 식을 계승받은 가문의 가주이면서, 하멜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아들 뻘의 어린나이라지만, 제노스에게 있어서 유진은 수백 년 동안 바르지 않게 변형 된 하멜 식을 올바르게 고쳐 준 은인이었다. 


“오는 길에 사제의 따님을 만났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날... 되게... 적대하는 것 같던데. 설마 따님한테 내 이야기를 한 건 아니겠지?”


사제의 따님. 이렇게 부르는 것이 입에 잘 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 부르는 것도 뭔가 껄끄럽다. 애당초 이 사형제 관계는 유진과 제노스 둘만의 것이고, 딸인 제니아가 휘말려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제노스는 질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형제 관계를 비밀로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사형이셨습니다. 같은 하멜 식을 배우셨다는 시안 도련님에게도 사실을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 하멜 식이라는 이름 아직도 쓰는 구나.”

“물론 제니아에게도 말한 적 없습니다. ...말하고 싶지도 않고요. 딸아이가 사형에게 적대하는 시선을 보냈다면, 그건 단순한 질투일 겁니다.”

“...질투?”

“제가 유진님을 총애한다는 소문에 질투하는 거죠.”


유진이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니, 제노스가 말을 이었다. 


“사형이 몇 달 전, 흑사자 성에 왔을 때. 저와 여러 번 만남을 갖고, 대련까지 했잖습니까. 그건 흑사자 성의 모든 기사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

“특히 저와 대련했을 때. 사형과 저는 똑같은 하멜 식을 사용했습니다.”


저 하멜 식이라는 말은 수십 수백 번을 들어도 가슴 속이 간질거린다...


“하멜 식은 저희 가문 비전의 기술. 아무리 본가라곤 해도, 사형은 저희 가문 입장에서는 외인입니다. 그런 하멜 식을 사형이 사용한 것에... 딸아이가 질투를 느껴버린 것이죠.”

“내가 사제의 제자라도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아니라고 부정은 했습니다. 자질이 너무 훌륭하여, 가문 비전희 기술을 몇 가지 전해주었다고...”

“따님의 성격으론 오히려 그 말에 더 발끈할 걸.”


제노스는 난감하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유진님에게 지지 않을 겁니다.’ 


“따님이 승부욕이 대단하시군.”

“자랑은 아닙니다만, 딸아이는 기사도로 유명한 시무인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시무인 국적이 아닌 탓에 십이걸에 이름은 올리지 못했지만...”


자랑이 아니라고 했지만 누가 들어도 딸 자랑이었다.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빈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사마르에서 겪은 일입니까?”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노스는 믿고 있다. 하지만, 엘프의 영지와 세냐에 관해서 사실대로 말할 만큼 믿는 것은 아니다. 제노스에 관한 믿음은, 어디까지나 ‘하멜’로 엮인 사형제의 것이다. 


때문에 유진은 말을 이어가며, 제노스의 반응을 주시했다. 


“...원로원주가 유진님을... 죽이려 했단 겁니까?”


특히 지금. 

유진은 제노스가 일으키는 ‘감정’에 집중했다.


“확신은 없어.”


유진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나와 크리스티나 보좌주교가 사마르에 간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라이언하트에서는 가주님과 사제, 원로원주. 셋 뿐이지.”

“...”

“신성제국 쪽에서 정보가 흘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파악할 수 없어. 그래서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를 보냈다.”

“...저를 의심하진 않는 겁니까?”

“사제가 날 팔아 무엇을 얻지?”

“원로원주는 무엇을 얻습니까?”


대답을 조심해야 한다. 제노스는 시조의 무덤이 텅 비었다는 것도, 유진이 성검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도 모른다. 


“모르지.”


굳이 이유를 쥐어짜낼 필요는 없었다.


“몰라서 심증인 거야.”


제노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모두 다 의심했다가는 누구도 믿을 수 없어. 무조건 믿을 수 있는 가주님은 황궁에 가 계시지. 그러니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나와 사형제로 맺어진 사제뿐이야.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사제가 어찌 여길지는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 하멜님이 맺어주신 사형제 관계가 원로원주와의 관계보다는 단단하거든.”


흑사자 기사단은 원로원의 명령을 따르는 집단이다. 특히 원로원주는 100년을 넘게 할아 온 불사의 백사자. 제노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흑사자 성에 군림한 괴물이다. 


“...사형의 의심이 사실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노스가 알고 있는 원로원주는, 라이언하트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허나. 사형의 의심은 옳습니다.” 


존경해 마땅한 가문의 어른. 또, 무인으로 존경해 마땅한 강자. 


“사형이 절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저는... 이번 사냥에서 원로원주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원로원주가 사형을 암살하려 든다면.”


뿌득. 

제노스의 이빨이 갈렸다. 그는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에 걸맞지 않은 자들을 단죄하던 최초의 흑사자. 그 후예로서, 원로원주를 단죄할 것입니다.”


제노스가 하멜을 존경하는 것은, 그 피에 자긍심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멜의 동상을 앞에 두었을 때. 제노스는 눈물을 흘렸다. 결막염 때문이라는 변명을 했지만, 그때 제노스가 흘렸던 눈물은 뜨겁고 진실 된 것이었다. 


대련을 끝냈을 때도.

제노스는 눈물을 흘렸다. 아들 뻘인 사형에게, 하멜 식의 완성도에서 밀렸다는 굴욕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그때 제노스가 쏟았던 눈물은 하멜의 진정한 계승자에 대한 경의의 눈물이었다. 


그러니 유진은 제노스를 의심하지 않는다.


“...사형.”

“알아.”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청마법은 없다. 이 방의 대화가 바깥에 들리지 않도록 마법도 미리 펼쳐 두었다. 


나눠야 할 대화는 이미 끝냈고, 대답도 들었다. 그러니 더는 위험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 


걸음이 가까이 다가온다. 유진은 아직 들고 있던 아카샤를 망토 안에 집어 넣었다.


노크소리.


“나 도미닉일세. 제노스 경, 그리고 유진. 안에 있는가?”


흑사자 기사단의 1번대 대장. 분쇄추 지골라스의 주인. 

원로원주, 도이네스 라이언하트의 손자.

 

“아, 역시 안에 있었군.”


유진이 문을 열어주자, 도미닉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자네가 사마르에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가벼운 악수를 나눈 뒤, 도미닉은 제노스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내가 둘의 대화를 방해한 건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사과하겠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거든. 원로원주님이 유진을 데려오라고 얼마나 극성이신지...”

“...지금 바로 말입니까?”

“그래, 바로. 미뤄야 할 이유가 있나?”


도미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화법. 미뤄야 할 이유가 있냐고는 묻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도미닉은 열린 문이 닫히지 않도록 서서, 유진이 방에서 나올 수 있도록 자세를 옆으로 두고 있다.


도미닉이 기다리는 대답은, 지금 당장 문을 나와서 함께 가는 것 뿐이었다. 


“가죠.”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제노스는 유진과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따라가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제노스도 ‘암살’이 무엇인지는 이해하고 있다. 흑사자 기사단의 드문 일 중에는 암살도 있다. 암살은 그 이름처럼 은밀하고,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것. 흉수를 알 수 없게끔 살해하는 것이다. 


사냥 중에 유진이 죽는다면, 흉수는 몬스터나 마물에게 덮어 씌우면 된다. 하지만 이곳은 몬스터나 마물이 없는 흑사자 성. 암살은 불가능하다. 절대로 벌어져선 안 된다. 


“제노스 경과 사이가 좋군.”

 

앞장서서 걷던 도미닉이 흥얼거렸다. 


“제노스 경은 자네를 제자로 삼은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던데 말일세.”

“무도의 선배로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베풀어주고 계실 뿐입니다.”

“선배... 가르침이라... 하하! 자네가 제노스 경에게 배울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도미닉은 껄껄 웃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물론 진짜 싸운다면 제노스 경이 승리하겠지만. 그때의 대결에서, 기술로 우위를 점했던 것은 자네였잖은가.”

“공정하지 않은 대결이었습니다. 도미닉 님 정도 되는 고수라면 눈치채셨을 텐데요?”


도발적인 말. 도미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를 높게 봐주어서 고맙군.”

“도미닉 경은 흑사자 기사단의 1번대 대장이시잖습니까.”

“대장의 실력은 숫자로 세운 것이 아닐세. 즉, 나는 제노스 경과 카르멘 경보다 뛰어나서 1번대 대장이 된 것이 아니란 말이지.”


도미닉은 웃음을 가다듬고서 다시 앞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의 대결이 기묘했다는 것은 알고 있네.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대결... 철저한 친선 대결. 제노스 경이 사용하는 기술도 실전처럼 매섭지 않고, 이론에만 충실한 고지식한 것이었어.”


제노스가 하멜 식으로만 겨루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럴 지라도 자네는 제노스 경보다 완성 된 기술을 사용했다. ...제노스 경의 기술, 그 뿌리가 어디인지. 자네도 알고 있겠지?”

“...”

“위대한 시조님의 벗, 우둔한 하멜. 그 분의 기술이 제노스 경의 뿌리라네. 그리고 자네는... 하멜님의 무덤을 최초로 발견한 장본인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300년을 넘어, 하멜님의 기술이 후대와 이어진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세. 멋지지 않나?”

“제가 하멜님의 계승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자네가 부정하고 싶어 한다면 굳이 캐묻지는 않겠네. 헌데 부정할 이유가 있나? 하멜님의 기술을 계승한 것이 어디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제노스 경도 자네를 인정했는데?”


도미닉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유진을 돌아보았다.


“유진. 자네는 너무 많은 비밀을 가지려 하는 군.”

“...비밀?”

“나는 자네가 사마르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라. 하지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 아마 세냐님을 찾으러 간 것이겠지? 그만큼 중요하고 위험한 일을 왜 크리스티나 보좌주교와 둘이서만 간 것인지, 도통 이해가 안 돼. 자네가 바랐다면, 원로원주께서는 흔쾌히 흑사자의 정예들을 호위로 붙였을 텐데 말이야.”

“...저는 사람이라면 비밀 한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 편이 즐거우니까요.” 


도미닉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두눈을 끔벅거리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으하하!”


그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의 말이 맞아. 그래, 남 몰래 숨긴 비밀은 은근한 즐거움을 주지.”


원탁의 방.

그 앞에서 도미닉의 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원로원주 앞에서 비밀은 두지 말게”


도미닉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 분은 소년의 장난기 가득한 비밀이라도 불순한 위협으로 받아들이시거든. 자네도 느끼겠지만, 원로원주께서는 자네의 존재를 처음 인지한 순간부터 쭉 경계해왔어.”

“...예.”

“그렇기에 더더욱, 자네는 원로원주에게 비밀을 가져선 안 돼.”

“새겨듣겠습니다.”


무시할 경고는 아니었다. 유진은 고개를 까딱 숙이고, 도미닉이 열어 준 문의 안으로 들어갔다.



널따란 원탁. 

자리에 앉은 것은 원로원주, 도이네스 라이언하트 뿐이었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콧잔등에 걸친 안경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이군.”


도이네스는 인자한 미소로 유진을 응시했다. 


“여행은 즐거웠나?”

“꽤 즐거웠습니다.”


원로원주의 앞에서 비밀을 갖지 말라.

그 경고는 새겨들었다.

지킬 생각은 없었다.


“꽤나 이색적인 여행이었죠. 원로원주님도 이곳의 생활이 무료하시다면, 한 번 사마르로 떠나보십시오. 지루할 틈은 없을 겁니다.”

“허허... 멋진 제안이지만, 나는 그런 오지를 헤매기에는 너무 늙어서 말일세.”


도이네스는 큭큭 웃으며 탁자를 두드렸다.


“원하는 바는 이루었나?”

“어떤?”

“이곳은 키옐 남부의 산중이지만, 세상의 소문은 아주 잘 들려오지. 자네가 엘프를 데리고 온 것... 그리고 아롯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아.”


아카샤.


“세냐님은 왜 함께 오지 않은 건가?”

“그 분이 남기를 바라셨습니다.”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 절 찾아오겠다고 말씀하셨죠.”

“엘프의 영지는 실재한 것이었군.”


도이네스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 삶을 살아 온 나조차도 엘프와 비교하면 어린애일 거야. 그런 엘프들의 낙원. 세계수가 있는 숲... 후후. 가능하다면 내 눈으로 꼭 한 번 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말일세.”

“원로원주님이 바라신다면, 언젠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양하겠네. 아까도 말했듯, 나는 너무 늙었거든. 이 성과 숲이야 내 집 같은 곳이라 괜찮지만... 다른 노인들이 그렇듯, 나도 정든 집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 관절도 쑤시고 말이야.”


도이네스의 걸음이 가까이 다가온다. 늙음을 토로하는 주제에 걸음걸이는 가볍기 그지없다. 불사의 백사자. 1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 온 노물. 도이네스는 그 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정한 모습으로 유진의 앞에 섰다. 


“그 즐겁고 이색적인 여행에 위험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유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원주민들과 여러 번 충돌하긴 했지만, 위험이라 할 수준은 아니었죠.”

“그렇다면 다행이군.”


도이네스는 빙그레 웃으며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 많았네. 자네가 무사히 돌아와서 참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이리 불러서 미안하네. 어떻게든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어. 만약 가주가 있었다면, 보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허허. 나는 아무래도 한참 어린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버겁거든.”


두어 번 어깨를 두드린 뒤, 도이네스가 뒤로 물러섰다. 


“이만 돌아가도 좋네. 이틀 뒤에는 사냥이 시작 될 테니, 푹 쉬도록 하게.” 

“사냥에는 원로원주님도 참가하십니까?”

“이곳은 내 집일세.”


도이네스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젊은이들이 헤매거나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연장자인 내가 길을 일러주어야지.”


사냥 준비


“유명해서 그런지 만나는 것도 힘들군.”


아성으로 돌아오는 길. 해는 슬슬 저물어가고, 노을 진 하늘은 붉다. 높다란 라이언하트의 깃발, 그 아래. 성벽에서 이어지는 그림자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유진이 아무 말 없이 그림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그 안에 서있던 남자는 털털한 미소를 지으며 그림자에서 걸어 나왔다.


“헥토르 라이언하트.”


천천히 다가 온 헥토르가 유진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내 행동이 본가의 자제에게 무례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무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진은 헥토르의 손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짧은 악수를 나누며 헥토르는 벙긋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까 전, 자네가 도착했을 때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때 헥토르는 건너편 성벽에 앉아있었다. 시선을 나누고, 웃고, 손을 흔들고. 헥토르와의 첫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보다 어린 청년들 앞에서, 고작 몇 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서있고 싶진 않았거든. 게다가 아까 자네를 마중하러 간 것은, 모두가 자네와 같은 세대의 동기들이잖나. 내가 그곳에 있었으면 굉장히 민망했을 거야.”


“제게 관심이 있으신가봅니다?”


“모두가 그렇지.”


악수를 마친 손이 서로 떨어진다. 그 짧은 접촉동안, 유진은 헥토르에 대한 여러 가지를 간파할 수 있었다.


‘강해.’


무인의 손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다부진 손, 안쪽의 굳은살, 뼈마디의 굵기. 어느 무기를 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손의 형태가 고정된다.


“우리는 조금 닮은 것 같군.”


헥토르가 웃으며 말을 건넸고, 유진도 그 말에는 동감했다. 헥토르의 손은 검수의 손 같기도 했고, 창수의 손 같기도 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진의 손과 닮아 있었다.


‘쓸 수 있는 무기는 다 쓰는 모양이야. 주먹질도 능한 것 같고.’


특히 유진의 흥미를 끈 것은, 깔끔하게 정제 된 마나였다. 방계 제일의 천재였다더니... 그 말은 과장이 아닌 모양이었다. 유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헥토르는 지금까지도 방계 제일의 천재라고 불렸을 것이다.


“천재라 불렸던 점에서 말입니까?”


“그것도 그렇지.”


헥토르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 말한 것처럼, 모두가 자네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을 거야. 라이언하트가 아니어도 그럴 거고, 라이언하트라면, 그 중에서 방계라면 더더욱 자네에게 흥미를 갖겠지.”


“헥토르님의 흥미는 어떤 의미의 흥미입니까?”


“음, 호승심도 있고... 단순한 호기심도 있지.”


“질투는?”


툭 던진 질문. 헥토르가 속내에 무엇을 숨기고 있나 싶어서 대놓고 물은 것인데, 헥토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내가 왜 자네를 질투하나?”


“헥토르님도 천재라 불렸고, 혈계식에서 우승도 하셨잖습니까.”


“아... 그렇지. 나는 자네와 걸어 온 길이 꽤 비슷해. 하지만 난 본가의 양자가 되지 못했고, 자네는 양자가 되었지.”


헥토르는 뒤늦게 이해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건으로 내가 자네를 질투한다라... 음,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겠군.”


“제 질문이 너무 무례했던 점은 사과드립니다.”


유진은 한 걸음 물러서서, 헥토르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오히려 헥토르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사과하지는 마. 나도 자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음...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한 말이지만, 나도 자네와 같은 질투는 많이 받았었거든.”


그럴 수밖에. 천재라 불리는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의 질투를 받게 된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나는 자네를 질투하고 있지는 않아. 경외는 하고 있지만.”


“경외?”


“그래. 자네는 참 대단한 사람이지 않나? 나와 비슷하다고는 말했지만, 솔직히 자네와 나는 비교가 안 되지. 내가 참가했던 혈계식에 본가는 참가하지 않았었어. 하지만 자네는? 본가의 아이들, 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경쟁해서 우승을 차지했지.”


헥토르의 눈이 빛났다.


“나라면 그럴 수는 없었을 거야. 양자가 된 이후의 행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기에 나는 자네를 경외하는 거야.”


조금 걸을까. 헥토르는 덧붙이며 웃었다.


“어디 앉아서, 술이나 차를 마시며 나눌 만큼의 대화주제는 없거든. 어차피 나나 자네나 똑같이 아성에서 묵으니, 가는 길은 같지 않나?”


“대화야 뭐든 주제로 삼을 수 있죠.”


“글쎄... 나는 굳이 대화를 이어가려 화젯거리를 끌어내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더 불편하게 할 뿐이라 생각하거든. 아니면, 자네는 나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나?”


“헥토르님은 더 없으십니까?”


“없어.”


“절 기다리고 계셨으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가진 흥미의 ‘크기’를 전하는 것에 꼭 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 이 추운 날씨에, 굳이 여기까지 나와서 자네를 기다리고, 함께 걸어서 돌아간다...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닌, 시답잖은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말이야.”


헥토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야 원. 내 입으로 말하긴 했지만, 상당히 민망하구만. 설마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익숙합니다.”


유진은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를 떠올렸다.


“그렇게 제게 흥미가 있으시다면, 가볍게 대련이라도 해보시는 것이?”


“아니, 그건 거절하지. 나는 사서 망신을 당하고 싶진 않거든.”


“그렇게 말하실 실력은 아니신 듯 합니다만.”


“하하! 그리 말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자네에 비하면 대단치도 않아.”


“헥토르님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하얀 송곳니의 명예기사라면서요?”


“그것이야말로 대단치도 않은 훈장이지. 루하르의 하얀 송곳니가 몇 명인 줄은 아나? 족히 오백 명은 되지. 하지만 자네가 가진 아크리온의 출입증은 어떻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열 명은 되나?”


헥토르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애당초 명예기사라는 것은, 그 이름처럼 명예직이야. 하얀 송곳니에 이름은 올렸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송곳니인 것은 아니라고. 자네 실력이라면 나보다 빠르게 송곳니의 명예 기사가 될 수 있을 걸?”


유진은 루하르 왕국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왕립기사단인 하얀 송곳니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모론을 캐려면 송곳니가 되는 편이 나은가?’


루하르 국민이 아니고서는 명예기사가 되는 것이 고작. 헥토르의 말마따나 명예직일 뿐인데, 그 말단에서 어느 세월에 루하르 왕가까지 기어 올라가나?


‘차라리 시안이 루하르의 공주와 혼인이라도 맺으면 좋겠군.’


본가가 고려중인 시안의 혼인 상대 중 루하르의 공주가 있긴 하다. 문제는, 그 공주의 나이가 올해 10살이라는 것이다.


“헥토르씨!”


아성의 상층 창문이 벌컥 열렸다. 대뜸 이름을 외친 것은 제노스의 딸, 제니아 라이언하트였다. 그녀는 몸을 쑥 내밀고서 유진과 헥토르가 같이 있는 것을 노려보았다.


“친하신 모양입니다.”


“몇 년 만에 만난 것이지만, 친한 편이지.”


제니아가 난간에 발을 걸쳤다. 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것이지만, 제니아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헥토르에게 다가왔다.


“...둘이 왜 함께 오는 거죠?”


“도중에 만났거든.”


제니아는 헥토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매서운 눈으로 유진과 헥토르를 번갈아 보다가, 쯧 혀를 차면서 허리춤의 검을 어루만졌다.


“...가죠.”


“응? 어디를?”


“저와 대련하기로 약속했잖습니까!”


제니아는 헥토르의 손목을 움켜쥐고서 쏘아붙였다. 헥토르는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제니아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자네도 함께 갈 텐가?”


끌려가던 중에 헥토르가 유진을 돌아보았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니아가 얼굴을 콱 구기면서 헥토르를 더욱 세게 잡아끌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뭘?”


“대련하는 모습... 그러니까, 제 실력을 보여주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제니아는 목소리를 한껏 죽여서 말했지만, 예민한 감각을 가진 유진에게는 둘의 대화가 너무나도 잘 들렸다. 유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둘을 쳐다보며, 내심 갈등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다. 둘의 대련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제니아가 보여주기 싫다 하니 억지로라도 보고 싶다.


‘제노스의 딸만 아니었어도.’


어느 정도는 제니아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었다. 여기서 괜히 더 제니아의 미움을 샀다간, 아버지인 제노스의 입장도 난감해 질 것이다. 결국 유진은 선심이라도 쓰는 마음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주었다.


“권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오늘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 불려간 터라, 조금 피곤하군요.”


“...불려가다니요?”


제니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버지는 당신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멋대로 아버지를 찾아 온 것이죠.”


제니아는 그렇게 쏘아붙인 뒤에, 다시 헥토르의 팔을 잡아끌며 떠나버렸다.


‘아버지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모양이군.’


유진은 멀어지는 등에서 고개를 돌려, 아성으로 돌아갔다.


사냥이 시작되는 것은 이틀 뒤. 혈계식처럼 강제성도 없고, 갑작스런 행사라지만 방계에서 참가한 사람은 꽤 많았다.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그리고 데콘.


‘아무 기억도 없는 놈이군.’


7년 전의 혈계식. 방계 중에서 유진이 조금이나마 주목했던 것은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둘 뿐이었다. 그 외에 방계 출신이 서넛인가 있긴 했는데, 이름을 기억할 가치가 없는 떨거지들이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새끼.’


이름이 한센이었나, 그랬던 것 같다.


“아...”


그때 데콘의 나이는 11살. 가르기스와 디자이라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혈계식에서는 제법 활약을 했단다. 스스로 포기하지도 않고 몸에 화살이 박힌 채로도 전진해서... 결국 슬라임에게 삼켜졌고, 구조 받았다지만.


‘다른 떨거지들보다 낫긴 하군.’


유진은 복도에서 맞닥트린 데콘을 멀뚱거리며 바라보았다. 7년이 지났어도 희미한 인상. 체격은 꽤 키웠지만, 18살 나이답게 얼굴은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 있다.


“아, 안녕하세요...”


데콘은 머뭇머뭇 인사를 전한 뒤,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후다닥 유진을 지나쳤다.


유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지만, 등 뒤에서 데콘의 시선을 느꼈다. 힐긋 눈길을 주니, 멀찍이서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데콘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할 말이라도?”


“아, 아닙니다.”


데콘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패기가 없네요.”


망토 안에 있던 메르가 머리를 빼꼼 내민다. 그녀는 멀리 간 데콘의 등을 힐긋 본 뒤, 깡총거리는 걸음으로 유진의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나마 신경 쓸 것은 헥토르와 제니아? 둘 정도라고 생각해요. 유진님 생각은 어때요?”


“왜 신경을 써야 하는데?”


“어쩌면 그 둘이 원로원주의 사주를 받아서, 유진님을 공격할 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메르는 방안에 들어가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만한 위치에 선 인물이 직접 나설 리는 없다고 봐요. 애당초 그 흑사자 기사단이라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지저분한 일을 도맡는 기사들이잖아요? 원로원주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자기 대신에 손을 더럽힐 부하들은 얼마든지 데리고 있을 거라고요.”


“그럴 지도 모르지.”


유진은 심드렁히 말하면서 창가에 다가갔다.


“메르, 네 말대로 헥토르나 제니아가 원로원수의 비수일 지도 몰라. 어쩌면 예상을 깨고, 데콘이 내 등에 칼을 찌르려 할 지도 모르지.”


“...음... 그 패기 없는 꼬마가요?”


“암살에는 예상하지 못한 패를 쓰는 것이 효과적일 테니까.”


데콘 뿐만이 아니다. 메르의 말처럼, 원로원주가 하려고 든다면 그를 대신해 손을 더럽힐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게 흑사자일지, 아니면 이번 사냥에 참가하는 라이언하트의 누군가일지는 모르겠지만...


‘...가르기스일 리는 없고.’


섣부른 신뢰일지도 모르지만, 유진은 그 가르기스가 원로원주의 사주를 받아 등 뒤에서 칼을 드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디자이라일 지도 모르지.’


유진은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연무장, 그 구석에서 디자이라와 가르기스가 서있었다. 가르기스는 아까 보았던, 가슴팍과 겨드랑이가 민망하게 파인 옷을 입고서 근력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디자이라는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창을 휙휙 찔러대고 있었다.


“...열심히 하고 있네요. 가르기스 저 분은 근육으로 싸우는 건가요?”


“아니... 내가 기억하기는 대검을 썼던 것 같은데...”


“근데 왜 대검은 휘두르지 않고 근육 운동만 하고 있는 거죠?”


“음... 글쎄...”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에 나와있는 것은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둘 뿐. 데콘은 제 방으로 돌아갔고, 이오드는... 아까 인사를 나눈 뒤로 보지 못했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던데?”


마음대로 방안에 들어 온 시엘이 알려주었다. 그녀는 푹신한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메르를 힐긋힐긋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식사도 방에서 해결하는 모양이야. 너한테 먼저 인사해 오기에 조금은 외향적으로 바뀌었나 했더니, 성격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닌가 봐.”


“그래도 아롯에 있을 적보다는 나아지긴 한 것 같은데.”


“난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보면 꽤 좋아하실 것 같네.”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오드 오빠도 그걸 기대하고 온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테오니스님의 목적이 그걸 지도 모르지. 이제 와서 본가로 돌아가고 싶다고 직접 말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니, 이오드 오빠의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은근히 어필하는 걸지도.”


“정작 가주님은 이번 사냥에 못 오시잖아.”


“응, 그렇지. 아버지는 황궁에 가계시니까... 나 솔직히 말해도 돼?”


“네가 언제 나한테 물어보고 솔직히 굴었니?”


“난 아버지가 흑사자성에 안 계시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 넌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이오드 오빠 때문에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는지 알아? 원로원의 정기 회의, 거기 꼬박꼬박 참석하시면서 이오드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고.”


시엘은 17살부터 흑사자 성에서 지냈다. 그렇기에 3년 동안 길레이드가 얼마나 자주 흑사자 성에 방문하고, 회의에 참석하며 이오드를 변호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원래는 말이야. 이오드 오빠는 의절당해야 했어. 본가의 장남이면서도 흑마법에 입문하려 했으니, 의절이 당연한 거지. 하지만 아버지가 장남을 버릴 수 없다며 사정사정을 해서, 의절까지는 안 당한 거라고.”


그래서 시엘은 이오드가 싫었다.


“아버지를 그렇게나 곤란하게 만든 주제에... 테오니스님은 오히려 아버지를 탓했다며? 웃기지도 않아, 아버지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이오드 오빠가 병신으로 자란 것이 아버지 잘못이야?”


“...음... 잘못이 아주 없지는 않지.”


유진이 그렇게 대답하자, 시엘은 부릅 뜬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아니 뭐... 가주님이 너희 어릴 적에 본가를 자주 비우신 것은 사실이고...”


“그건 맞지만, 나와 시안 오빠는 이오드 오빠처럼 병신으로 자라지 않았어. 어머니는 우리를 잘 키워주셨다고. 이오드 오빠가 병신이 된 건, 테오니스님이 잘못 키워서야.”


“음... 솔직히 내가 본가에 안 왔으면 너랑 시안도 지금처럼 의젓하게 자라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시안 오빠는 그랬겠지! 난 아니야!”


“그래 그래...”


“어쨌든, 난 용납이 안 돼. 정 본가에 돌아오고 싶은 거라면, 이오드 오빠뿐만 아니라 테오니스님도 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사과해야 해.”


“그렇게 사과하면 돌아와도 된다는 거야?”


“안 될 것이 뭐가 있어?”


“애니실라님이 싫어하실 수도 있잖아.”


“하!”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와서 테오니스님이 본가에 들어온다고 해서, 어머니와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해? 이미 가솔들은 어머니를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으로 생각하고 충성하고 있어. 넌 모르겠지만, 그건 예전부터 그랬다고. 테오니스님이 정실이라서 상전 취급을 받았을 뿐, 가문을 이끄는 능력은 둘째인 어머니가 훨씬 더 뛰어났단 말이야.”


“난 잘 모르지.”


“모르니까 내 말이 옳아. 테오니스님은 무슨 수를 써도 예전과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어.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아. 이오드 오빠가 모레의 사냥에서 무슨 수를 쓰던.”


시엘의 눈이 얇아졌다.


“그래봤자 이오드 오빠잖아. 물론, 방심하지는 않아. 그래서 시안 오빠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훈련을 받는 거고. 나도 이오드 오빠를 압도할 만한 성과를 낼 거야.”


“넌 꽤 유리하겠네. 이곳에서 지내면서 마물 사냥은 몇 번 해봤을 것 아냐?”


“...숲 깊이 들어간 적은 아직 없지만...”


시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경험. 시엘은 자신이 가진 그 강력한 어드밴티지를 새로이 실감했다. 아롯과 나하마 사막, 사마르 대수림. 그 어느 곳에도 마물은 없다.


“...흐흥.”


시엘은 방긋 웃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너도 여러 몬스터는 만나봤겠지만, 마물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지? 이거 알아? 몬스터와 마물은 비슷하지만 전혀 달라. 몬스터는 마기의 영향으로 흉포해지지만, 마물은 마기에서 태어난...”


“푸흡...”


“...그 때문에 존재 자체가 불길하고, 몬스터와는 달리 하급마물조차도 마법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


“히히...”


“...그러니까... 혼자 쏘다니면 위험할 거야. 아무리 흑사자들과 함께 간다지만, 본가의 자제인 이상 자력으로 사냥에 성공하고 성과를 올려야 돼.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이 ‘누나’는 너와는 달리 마물 사냥 경험이 풍부하니, 나랑 같이 다니면...”


“아핫... 아하하!”


“너 왜 자꾸 웃는 거야?”


시엘은 표정을 콱 구기면서 메르를 돌아보았다. 메르는 배게에 얼굴을 파묻고서, 붕붕 휘두르는 다리로 침대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무...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메르는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시엘이 으스대는 모습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마물 사냥? 전 대륙을 통틀어, 그 분야에서 유진 이상 가는 전문가가 드물 것이다.


‘...뭐야?’


그러한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시엘은 메르의 비웃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메르만큼은 노골적으로 소리를 흘린 것은 아니지만, 유진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넌 또 뭐야?!”


시엘은 얄밉게 씰룩거리는 유진의 뺨을 보고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니... 아무 것도... 음... 귀엽네. 아주 귀여워. 그래, 너만 믿을게 시엘. 나는 마물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나보다... 나보... 나보다 잘 아는 널 믿고...”


“대체 뭐냐고!”


이유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지만, 시엘은 자신이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느꼈다.


사냥준비


이틀 뒤.


아직 동이 틀 시간도 아니었지만, 흑사자 성은 전체적으로 분주했다.


마물 사냥은 신년마다 거치는, 행사라고 할 것도 없는 일과다.


하지만 이번 사냥은 전례에 비해 특별했다. 흑사자가 아닌 이들이 참가하고, 심지어 그 중에는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 사자가 둘이나 껴있다.


“원로원은 적색바위에서 주둔할 겁니다.”


제노스는 새벽녘부터 찾아와서 사냥에 대해 일러주었다.


“마물사냥에 원로원이 성을 떠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적어도 제가 흑사자에 입단한 후로, 원로원이 사냥에 나선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직접 뛰어다니지는 않을 것 아냐?”


“예.”


제노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도를 가리켰다.


“이번 사냥은 전년도와는 달리, 라이언하트의 젊은이들에 대한 시험을 겸하고 있습니다.”


우클라스 산은 넓지만, 그 중에서 마물이 서식하는 곳은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시엘이 말한 것처럼, 마물은 몬스터와 다르다.


몬스터의 기원은 이미 오래 전에 마법사들에 대해 해명되었고, 요즘 시대에도 간간히 다뤄지는 단골주제다.


몬스터는 마나의 영향을 받은 돌연변이 짐승을 시초로 두고 있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그 모습부터가 기초가 된 짐승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다. 즉,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야생늑대나 몬스터울프나 결국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오크나 고블린, 오우거, 트롤 따위의 인간형 몬스터도 마찬가지다. 신성제국 같은 곳에서는 도저히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아롯의 마법학회는 저러한 인간형 몬스터와 인간이 같은 조상을 가졌을 거라 주장한다.


그래봤자 수천, 어쩌면 그보다도 오래 전의 문제다. 이제 와서 오크나 고블린이 인간의 친척이라고 한들, 누가 그렇구나 하겠는가?


하지만. 몬스터가 짐승이나 인간과 연결고리를 가진 것과는 달리, 마물은 그 어떤 짐승과 몬스터와도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이 짐승과 몬스터, 인간과 닮아있을 지라도, 본질은 절대로 같지 않다.


마물은 마기에서 태어난다. 이종교배도 안 된다. 오직 마물만이 마물을 낳을 수 있다. 그 불길한 태생은, 놈들로 하여금 몬스터와 견줄 수 없는 흉포한 ‘힘’을 갖게 만든다.


그러한 힘은 마법과 닮았다. 하지만 마물은 술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마법의 술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 힘을 소모하며 마법과 같은 힘을 일으킨다.


“적색바위 너머부터가 마물의 영역. 깊이 들어갈수록 마물의 수는 많아지고, 힘도 강해집니다. 시험은 엄격해야 의미가 있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젊은이들을 죽일 수는 없는 일.”


제노스는 펜을 꺼내서 지도 곳곳에 원을 그렸다.


“이번 사냥이 기획된 직후, 6번대가 철야를 해가며 숲에 ‘눈’을 풀어놓았습니다.”


마법의 눈은 숲에서 벌어지는 일을 곧장 주둔지로 전송할 것이다.


“저를 비롯한 대장들은 주둔지의 지시를 받아, 젊은 사자들이 정도가 지나친 위험을 맞닥트리지 못하도록 길을 닦을 겁니다.”


“흑사자의 일반 기사들은?”


“그들은 매년 하는 대로 똑같은 사냥을 할 겁니다. 특별한 손님이 더해졌고, 방식이 번거로워졌을 뿐. 사냥 자체는 매년 하던 것이니까요.”


펜이 움직인다.


“흑사자 기사단은 숲의 중추를 향해 최단거리로 진군할 겁니다. 자잘한 마물은 상대하지 않고, 작정하고 길을 막는 놈들만 우선적으로 치우면서 말입니다. ...사형은 마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알지.”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롯에서 배운 것일까. 아니면 본가에서? 제노스는 배움의 까닭과 깊이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마굴이란... 마물의 둥지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기를 발생시키며 마물을 머무르게 하는 근원입니다.”


“그곳에 뭐가 있지?”


유진은 지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산의 숲에 마물을 방목시키고 있다는 말은 저번에도 들었지만... 지도를 통해 보니, 이야기로 들은 것 이상으로 체감이 된다.


“괴석(怪石)? 주물(呪物)? 아니면, 화끈하게 흑마법진이라도 그려놨나?”


마나가 고이거나, 몬스터의 체내 등지에서 발견되는 마나의 응어리. 그것을 마석이라고 한다. 괴석은 마석과 비슷한 개념인 마기의 응어리다. 마석이 마나 수행에 사용되듯, 괴석은 흑마법의 수행에 사용된다.


주물은 괴석과는 다르다. 마기가 듬뿍 배인, 저주 받은 물건... 저급한 주물은 별 가치가 없지만, 급수 높은 주물은 자체적으로 마기를 발생시킨다. 유폐의 지팡이, 베리알이 사용했던 ‘블러드 메리’나 마창, 분쇄추 같은 마왕의 무구도 주물에 속한다.


‘범위가 터무니없어.’


유진은 찡그린 눈으로 지도를 노려보았다. 헬무드라면 모를까. 키옐의 남부, 생기가 가득한 산 속의 숲에... 저만큼 넓은 범위로 마물이 서식한다고?


“셋 다입니다.”


제노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마굴 깊은 곳에 주물과 괴석을 촉매삼아 흑마법진을 새겼습니다. 이 사냥은 마물의 수가 너무 늘어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과 더불어, 중추의 마법진을 관리하기 위해서기도 합니다.”


위험하다.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유진은 그 말을 굳이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은 흑사자 성.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기사단이 머무르는 곳이다. 만에 하나, 마법진이 폭주라도 해서 대량의 마기가 유입된다 해도. 흑사자 성의 전력이라면 마물이 창궐하기도 전에 혼란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긴 했구만.’


유진은 혀를 차며 의자를 기울였다. 흑사자 성의 숲에 마물을 풀어 놓은 것은,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기사들의 훈련에 사용하기 위해서다. 전생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300년이 흐른 지금은, 아주 특별하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실제로 흑사자 기사단 뿐만 아니라, 다른 유명 기사단들도 마물을 상대로 한 훈련을 곧잘 벌이고 있단다.


실전성은 충분하고, 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사마르의 일부 부족은 아예 마물을 사역하고 있다는 모양이고.’


그 뿐만 아니라, 아롯의 볼레로 거리 같은 곳에는 마족이 노예로 팔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유진은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그러니까... 팔찌를 찬다고?”


“예.”


“마물을 하나씩 잡을 때마다, 그 숫자가 팔찌에 기록되어서... 주둔지에서 체크되고?”


“기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내기가 걸렸습니다.”


제노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누가 마물을 가장 많이 잡을까... 그거야 뭐... 대부분의 기사들은 사형을 꼽습니다만, 몇몇은 헥토르를 꼽더군요. 어쨌든, 사형의 배당이 너무 압도적이라 일등을 맞추는 내기는 성립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2위가 누구일지 주목하고 있죠.”


“...사제는 누구한테 걸었는데?”


“누구겠습니까?”


“따님?”


“예. ...아, 이 이야기는 제니아에게는 비밀입니다. 왜 1등에 걸지 않았느냐면서 화를 낼 것이 뻔하니까요.”


“...그런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하지도 않아.”


팔찌를 차고서, 마물의 사냥을 겨룬다니... 유진은 불편한 속내를 숨기며 헛기침을 이었다.


‘...요즘 것들은 마물사냥을 너무 장난처럼 여기는 것 아냐...?’


아니 뭐... 헬무드도 아니니까. 유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오드 형님한테 거는 사람도 있겠지?”


“역배를 노리는 정신 나간 젊은이들이 몇 있기는 합니다만... 음... 대부분은 이오드 도련님이나 데콘이 꼴찌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죠.”


본가의 장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처참한 평가. 하지만 유진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는 않았다.


사냥에 참가하는 라이언하트는 모두 아홉 명. 그 중 헥토르는 하얀 송곳니의 명예기사 위를 딴 강자에, 제니아도 시무인 십이걸에 비할 정도의 실력자다.


‘시안과 시엘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하위권일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도, 저 라인업이라 처지는 것이지. 실력만 놓고 보면 어디서도 꿇리진 않는단 말이야.’


압도적으로 처지는 것이 데콘.


‘오히려 이오드는... 실력만 보면 엄청 부족한 것은 또 아니란 말이지.’


이오드가 도달한 4서클은 어디서 푸대접 받을 만한 실력은 아니다.


유진의 눈이 너무 높을 뿐이다. 이오드의 나이는 22살. 당장 유진은 4서클 따위는 18살 즈음에 돌파했다.


‘...서클의 높낮이와는 별개로... 이오드가 실전 경험이 있을 리가 없으니.’


오히려 데콘이 실전에 있어서는 이오드보다 나을 지도 모른다.


“지급되는 팔찌에는 위치추적 마법도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 위치는 실시간으로 저와 다른 대장들에게 전해질 겁니다.”


“옛날 생각나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13살 때 했던 혈계식에서도 그런 팔찌를 찼었다.


“...저는 사형과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만약 사형의 신변에 어떠한 위험이 생긴다면, 곧장 개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노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원로원주가... 아니, 다른 누군가가 사형을 암살할 것이란 생각은 못하겠습니다만...”


“오히려 이런 조건이라 쉬울 수도 있지.”


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냥 ‘놀이’를 통해, 내가 숲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잖아.”


암살하기에 저보다 좋은 조건은 없을 것이다.


“...놀이라...”


제노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번 사냥은 놀이적인 요소가 강했다.


‘...가진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그렇겠지.’


언제 암살당할 지도 모르는 상황. 흉수의 근거지에 와있으면서도 여유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제노스는 도저히 유진이 갓 성인이 된 20살 젊은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생각은.


동년배의 젊은이들과 같이 세워놓으니, 더욱 강렬하게 대비되었다.


‘...긴장했군.’


적색바위. 이곳에는 이미 주둔지로 기능하기 위한 시설들이 완공되어 있다.


제노스는 얇게 뜬 눈으로 앞을 보았다.


유진을 포함한 9명이 일렬로 서있다. 그들은 각자 왼팔에 백색의 팔찌를 감고서, 아직 햇빛이 들지 않아 시커먼 숲을 쳐다보았다.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게.”


원로원주, 도이네스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물이라고 해봤자 조금 귀찮은 몬스터일 뿐이고...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잇는 자라면, 마물 따위에게 공포를 느껴선 안 되지. 우리의 시조는 그 위대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님이시니.”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노골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는 것은 데콘이었다. 그 곁에 선 이오드의 표정은 의외로 차분했지만,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둘 뿐만이 아니었다. 가르기스는 꿀꺽 침을 삼켰고, 디자이라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했다.


“간단한 걸세.”


도이네스는 시안의 손목을 가리켰다. 평정심을 유지하려던 시안은, 대뜸 지목을 받은 것에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자네들은, 틀림없이 이번 세대의 주역이라 생각하네. 그러한 신인들이 모였는데... 기왕 하는 것이라면, 경쟁과 놀이를 섞는 편이 즐겁지 않은가.”


도이네스의 눈은 시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시안은 그 시선이, 차기 가주에 대한 주목으로 받아들였다.


“미리 말해두지만, 포상은 없네.”


도이네스는 농담이라도 건네는 것처럼 웃었다.


“정말일세. 아무리 많은 마물을 쓰러트린들, 포상으로 줄 만한 보물은 없거든. 애당초 이 사냥은 매년 하는 것이고... 자네들은 자율적으로 참가한 것이잖나?”


“포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대답한 것은 제노스의 딸인 제니아였다. 그녀와 헥토르는 아무런 긴장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갈고 닦은 실력에 대한 증명. 사냥에 참가하기로 한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제니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분히 노골적인 시선을 유진에게 향했다.


“명예를 바라는가. 그도 좋지.”


도이네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명예.


그 말에 이오드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그의 손끝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자.”


도이네스는 몇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준비, 시작, 이라는 말은 필요 없지 않나? 길은 이미 열려있고... 조금만 들어가면 굶주린 사냥감과 맞닥트릴 수 있을 걸세. 노파심에 하는 말이네만, 자네들이 사냥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규칙이랄 것은 없다. 경쟁하고 싶다면 경쟁하고, 그러고 싶지 않다면 다른 누군가와 힘을 합치면 된다.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


“같이 갈 텐가?”


“설마요.”


헥토르가 권했지만, 제니아는 차가운 태도로 거절했다. 그녀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지지 않을 겁니다.”


저번에도 했던 말. 제니아는 그렇게 내뱉은 뒤, 땅을 박차고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헥토르는 그런 제니아의 등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자아... 그럼... 나와 함께 가고 싶은 사람, 없습니까? 난 기왕 갈 거, 외롭지 않게 말동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헥토르의 제안에 반응을 보인 것은 데콘이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결국에는 헥토르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무리를 지은 것은 헥토르와 데콘 뿐. 나머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제니아가 말한 것처럼, 이번 사냥에서 제 실력을 증명하고 싶다는 젊은 혈기가 모두의 발을 앞으로 이끌었다.


“...괜찮겠습니까?”


시안은 이오드를 향해 물었다.


“형님 실력으로는 버거울 듯 한데.”


“하하...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이오드는 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괜찮을 거야. 저 숲은 필시 위험하겠지만...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을 테니.”


이오드는 원로원주에게 힐긋 시선을 주었지만, 원로원주는 엷은 미소만 지을 뿐 무어라 대답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사냥은, 내게 있어서는 치르지 못한 성인식 같은 거야. 그러니 아우인 네 도움을 받을 수는 없지. 이건, 내가 해내야 해.”


그 중얼거림에는 강렬한 결의가 실려 있었다. 설마 이오드가 저렇게 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시안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지.’


시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대장을 제외한 흑사자들은 진즉에 숲에 들어가 있다. 저곳에 남은 것은, 본가에 가있는 3번 대를 제외한 대장 5명. 그 중 6번 대의 대장은 마법의 송출을 관리하기 위해 주둔지에 남는다지만, 그래도 4명이나 되는 대장들이 팔찌의 신호를 받으며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할 것이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아직 출발도 하지 않고, 여유롭게 서있는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헥토르는 짐짝을 굳이 부담했어.’


시안은 이 사냥에 많은 무게를 걸고 있다. ‘가주’는 무엇에든 무게를 느껴야 할 자리다.


‘...갈고 닦은 실력에 대한 증명? 잘난 듯 지껄이기는... 그리고 뭐? 지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은, 저 새끼가 아닌 나한테 했어야 해.’


시안은 뿌득 이를 갈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알려줄게 있어.”


아직 떠나지 않은 시엘은 목소리를 낮추며 유진에게 몸을 기댔다.


“사실은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오빠한테는 알려줬는데, 너한테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려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출발하기 전, 유진이 마음을 고쳐먹고 동행하자고 할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다.


‘...네가 그럴 리가 없지.’


유진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저 얄미운 녀석은 절대로 동행해 주지 않을 것이다.


“잘 들어. 내가, 널 걱정해서 말해주는 거니까. 저래도 들어갔다가는...”


“어지럼발이군.”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어지럼발이라고. 아냐?”


“...어... 어어... 맞아...”


“인력으로 구역을 나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어지럼발이를 풀어놓는다면 인력의 부담은 줄겠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숲의 어둠으로 향했다. 어지럼발이. 마물의 이름이다. 놈들은 저러한 숲의 어둠에 스며들어, 시야를 어지럽히고 감각을 뒤튼다. 그렇게 숲을 헤매게 하여 힘을 빼놓고, 먹잇감을 쩍 벌린 어둠 속 아가리로 인도한다.


“...어떻게 알았어?”


시엘은 유진의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보면 알지.”


어둠의 밀도도 제각각이고, 끄트머리가 물결처럼 요동치고 있다. 숲의 풋내 속에서 미묘하게 다른 냄새가 섞여있는 것도 간파할 거리가 된다.


“...보면 안다고?”


시엘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사냥


거무죽죽한 숲에서는 비릿하면서 그리운 냄새가 떠돌았다. 뒤따라 오던 시엘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고, 먼저 들어갔던 사람들의 등도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적색바위를 지나쳐, 숲에 들어오고서 10분 정도 흘렀나. 하지만 그리 믿을 수 없을 만큼 주변의 나무는 울창해서, 한참 동안 숲 깊이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숲에서는 그러한 착란을 경계해야 한다. 유진은 호흡 할 때 마다 기관지에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것만 같은, 공기 속의 이질감을 느꼈다. 마나도, 원시정령도 아니다.


“...그립구만.”


300년 전의 헬무드는 끔찍한 곳이었다.


하지만, ‘하멜’의 추억 대부분은 그 끔찍한 지옥에서 만들어졌다.


전생의 삶은 절반 가까이 헬무드에서 보냈다. 몬스터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무턱대고 복수를 하겠다며 용병으로 살았던 소년기.


용병으로 떠돌던 시절에는... 별로 추억이라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억지로 꼽아보자면, 처음 살인을 한 것이나... 단독으로 의뢰를 달성한 것 정도.


‘...추억이라 할 것은 아니군.’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발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발밑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징조는 노골적이었다. 이렇게 뻔한 기습은 피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퍼억! 유진은 뻗었던 발을 그대로 걷어 차버렸다. 발목을 잡고, 그림자 속으로 끌어당기려 했던 것은 빼빼 말라 앙상한 검은 손이었다.


“이야...”


유진은 빙긋 웃으며 몸을 낮췄다. ‘손’은 허둥거리며 어둠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지만, 유진이 손을 뻗는 것이 놈이 도망치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진짜 옛날 생각나네.”


완전히 끌어낸 마물은, 도저히 ‘짐승’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생김새였다. 빼빼마른 팔의 끝에는 울룩불룩한 살덩어리만 매달려 있을 뿐. 공중에 들고 한 번 흔들어주니, 살덩어리가 쩍 벌어지더니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우엑.”


망토 속에 들어가 있던 메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유진이 들고 흔드는 마물, 어지럼발이를 보고서 표정을 콱 구겼다.


“징그럽게 생겼어요. 그걸 어떻게 맨 손으로 잡고 흔드는 거예요?”


“바퀴벌레 잡는 거랑 비슷한 거지.”


“그 비유가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대체 왜 바퀴벌레를 맨 손으로 잡아야 하는 건데요? 도구를 쓰거나, 마법을 쓰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 애당초 눈앞에 바퀴벌레가 나타난다는 상황이 잘못된 거예요.”


메르는 질색이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징그러운 것을 혐오하는 것은 메르의 외견과 정신연령에서는 자연스런 것이지만, 지금 메르가 느끼는 혐오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마물’에 대한 것이다.


“...잡아먹을 건 아니죠?”


“굳이?”


“사냥은 나흘 동안 이뤄진다고 했잖아요.”


“나흘이 아니라 몇 달 동안 지속되어도, 마물 따위는 안 먹어. 애당초 마물의 고기는 고위 성직자가 없고서는 입에 댈 수도 없는 독물이라고.”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어지럼발이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ㅡ파직! 마법을 펼치거나 검강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번개가 스며든 마나는 그냥 흘려보낸 것만으로도 어지럼발이를 죽이고, 몸을 뒤틀게 만들었다.


“그리고 망토 안에 먹을 것은 넘치잖아. 맛도 더럽게 없는 마물 고기를 입에 댈 필요가 없다고.”


“...그럼 다행이네요. 저는 이, 혐오스럽고... 증오스런, 생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은, 괴기스런 쓰레기가 유진님의 입을 통해 위장으로 들어가, 유진님의 일부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고 싶지 않아요.”


메르는 꽉 쥔 주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마물에 대한 혐오는 세냐의 인격인가? 아니면 마법으로 만들어지고, 마나로 구성된 사역마기에 마기(魔氣)로 이뤄진 마물을 혐오하는 건가.


“후자예요.”


직접 물어보니, 메르는 얼굴을 콱 구기며 대답했다.


“제 인격이 세냐님의 유년기 인격을 베이스로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기억마저 공유하는 것은 아니라고요. 물론... 물론, 생리적인 혐오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로도 혐오는 하고 있어요. 마물은, 아니, 마에 비롯된 존재가 세냐님을 괴롭게 만들었으니까요.”


말을 이을 때마다, 메르는 밖으로 내밀고 있던 고개를 슬금슬금 뒤로 당겼다. 평소에는 틈만 나면 망토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치는데, 지금은 이쪽에서 먼저 망토를 열어주는데도 나오려 들지 않았다.


“...저는 이 숲이 싫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망토를 닫아주었다.


“그립고, 옛날 생각이 난다고 해서 좋다는 것은 아니라고.”


나흘.


마물을 많이 사냥하는 것을 권장하듯 팔찌를 채웠지만,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생존이다.


마물의 고기는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입에 대지 말아야 할 독물이니, 나흘 동안 숲에서 버티려면 오염되지 않은 식량자원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욕심이 없다면 굳이 숲속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중추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마기의 농도가 옅고, 식량은 구하기 쉬워진다.


‘욕심이 없을 리가 없지.’


자율적으로 사냥에 참가했으니 그럴 듯한 성과를 내고 싶을 것이다. 별 것도 아닌 조무래기들로만 그득히 잡아봤자 어디서 자랑할 수도 없을 테니, 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유의미한 전과를 내고 싶을 터.


‘...그럴 텐데...’


유진은 손끝을 비비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이 정도 수준의 마물은 떼거지로 몰려 온 들, 유진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기습? 조금만 신경써도 당할 일은 없고, 설령 기습당한다고 해도 피해는 없다. 흑암의 망토만으로도 대부분의 공격은 방어된다.


사냥? 아니, 이건 그냥 산책이다. 유진은 사냥감을 쫒지 않는다. 그냥 걸음가는대로 걸을 뿐. 그러고 있으면, 숲 곳곳에 숨은 마물들이 유진에게 다가온다.


다가와서 죽는다.


“훌륭한 파멸신기.”


“닥쳐.”


메르가 망토 속에서 키득거렸고, 유진은 질색하며 쏘아붙였다.


...파멸신기가 맞기는 했다. 가시화되지 않을 만큼 마나를 일으켜서, 몸에 두른다. 그렇게 하면 굳이 공격을 뻗을 것 없이, 다가오는 마물을 요격할 수 있다.


‘...쟤는 먼저 간 주제에, 왜 아직도 이쪽에 있는 거야?’


괜히 의식하고 싶지 않아서, 시선은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이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저쪽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다.


제니아 라이온하트.


그녀는 한껏 기척을 죽이고서 유진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먼저 숲에 들어갔던 것은 사실이다. 어지럼발이가 도사린 어둠은, 숲의 초입부터 길을 헤매게 만든다. 그 때문에 시간차를 두고서 진입해 버리면, 모두가 엉뚱한 곳으로 흩어져 버린다.


숲은 넓고, 어지럼발이의 농간까지 더해지면 다른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다. 그렇게 헤매다가, 저항하지도 못할만큼 지치게 되면 잡아먹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제니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녀는 숲에 진입한 즉시 길을 찾았고, 마물 수십 마리를 썰어 죽였다. 그것은 제니아에게 있어서는 긴장이라곤 없는 지루한 노동일 뿐이었다.


그대로 숲의 중추로 향하려고 했는데.


‘...왜 아버지는... 저 녀석 근처에만 있는 거야?’


젊은 사자를 보호하기 위해 후발대로 들어온 대장은 4명. 그들은 각자 능동적으로 판단하여, 9명의 젊은 사자들을 숲의 위협에서 보호하기로 했다.


하지만. 2번대 대장인 제노스는,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고 유진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진의 사냥을 방해하지 않고, 마물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혹시 모를 위험이 발생했을 때, 늦지 않게 개입할 수 있는 거리.


노골적인 편애였다. 딸인 제니아는 그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 사냥에서 만약 제노스의 편애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친딸인 자신이어야만 했다.


그런 불만으로 유진의 뒤를 쫒았다. 나름대로 제노스에게 시위한 것이지만, 제노스는 유진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노스는 원로원주의 비수가 유진을 노릴 상황을 경계하고 있다. 사정을 전해들은 이상, 유진을 떠나서 위험을 발생시킬 수는 없었다.


‘...저건...’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흑사자인 제노스는 가택을 떠나 흑사자 성에서 머무르고 있다. 물론 휴가를 받아 가택에 돌아올 때는 여러 번 있지만, 최근 7년 동안 제니아는 시무인에서의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즉, 5년 만에 아버지와 재회했단 말이다. 제니아는 당연히 아버지가 자신을 따라다니며, 수행의 성과를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여겼다.


제니아는 꿀꺽 침을 삼켰다.


마나의 형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의식을 집중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의 흐름을 연상할 수 있다. 제니아는 유진의 몸을 휘감은 ‘불꽃’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불꽃이라기보다는 삐죽삐죽한 가시처럼 느껴졌다.


무방비하게 걷고 있을 뿐. 하지만 삐죽 튀어나온 가시가 ‘스멀’거리면서, 주변을 향해 퍼져나간다. 먹잇감이라 판단한 마물이 다가와 가시에 닿는 순간. ‘독’이 마물을 절명시킨다...


‘...아니, 독이 아니야.’


믿을 수 없지만.


‘저건... 파멸신기야.’


300년이란 시간 동안 전승되어 온 가문의 비기. 존경해 마땅한 대영웅, 하멜의 기술.


‘...저게...?’


알아보기는 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제니아도 파멸신기는 쓸 줄 안다. 하지만 제니아의 파멸신기는 저렇게 투명하지는 않았다.


‘검강이 아니야... 마나를 아슬아슬한 수준에서 머무르게 하고 있어. ...그것뿐인데 어떻게 마물을 죽이는 거지?’


처음 봤을 때에는 치졸하게 독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뒤를 쫒아 다니며 지켜본 바, 독이 아니란 확신은 얻었다. 하지만 검강도 아닌 마나가 마물을 죽인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제니아는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제니아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고, 유진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저만한 거리라면 단숨에 치고 들어갈 수 있다.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터.


공격하면 개입해 올까?


‘그럴 리가 없지.’


마물 사냥. 목적은 그것이지만, 서로 싸우지 말라는 경고는 없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제니아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제니아가 7년 동안 수행했던 시무인은 기사간의 결투가 굉장히 자연스런 곳이었다.


한 번 더 거리를 가늠하고.


제니아의 발이 땅을 박찼다. 거리가 빠르게 좁혀진다. 멀찍이 보였던 유진의 뒤통수가 점점 커진다. 검을 뽑을까? 그건 너무 과하지. 굳이 공격하기보다는, 깔끔하게 뒤를 잡는 것으로도 충분...


“잇...”


?


입술이 멋대로 떨렸다.


“으이이이익...!”


단순한 마나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겠지만, 유진은 배후를 치고 들어오는 습격에 아주 정직하게 대응해 주었다.


보이지 않을 만큼 엷었던 마나가 불꽃이 되었고.


ㅡ파지직!


불꽃에 녹아든 번개가 제니아에게 작렬했다.


“이이... 이이익! 이잇...!”


머리털이 곤두선다. 몸이 멋대로 뒤틀린다. 그 정도로 그친 것은, 유진이 번개의 출력을 제한했기 때문과 더불어 제니아가 지닌 마나가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기 때문이다.


“...이익!”


코어가 일으킨 마나가 번개를 떨쳐낸다. 제니아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서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떨쳐내기는 했지만, 몸에는 아직 감전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제니아는 저린 손발에 힘을 주고서 숨을 헐떡거렸다.


“바... 방금? 무슨?”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흘리는 발음으로 우스꽝스런 말을 내뱉고 싶지 않아서, 제니아는 최대한 짧게 물어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제 쪽입니다. 갑자기 뭡니까? 왜 제게 덤빈 거죠?”


“...음... 으흠. 으으흠...”


제니아는 당장 대답을 피하고서 헛기침을 이었다. 아, 아. 목소리를 가다듬고, 혀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야 제니아는 두눈에 힘을 주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마물인 줄 알았습니다.”


“뭐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 숲에는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내는 마물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그래서 확인하러 다가 온 것 뿐입니다. 공격할 의사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검도 뽑지 않았고, 단순히 가까이 다가왔을 뿐이었습니다.”


“왜 절 따라다니는 겁니까?”


“...따라다니다니... 그 말은 잘못되었군요. 저는 당신을 따라다닌 적이 없습니다.”


“뻔히 보였는데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시네.”


“...보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는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고 있었..”


“거봐요. 따라다닌 것 맞잖아.”


이죽대는 말에 제니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잠시 유진을 노려보다가, 땋은 머리를 뒤로 홱 넘기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을 텐데요? 저는 당신에게는 지지 않을 겁니다.”


“예, 그래서 왜 저를 따라다니는 거냐고요.”


“...유진님. 당신은 제게 있어서 미지의 적수입니다.”


제니아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쥐어짰다.


“그러한 당신과 겨뤄, 승리를 거머쥐려면. 제가 모르는 당신을 알아가야 합니다. 탐색은 전법의 기본입니다. 몽매한 당신은 제 탐색을 미행이라 여긴 모양이지만.”


“...”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사냥이 시작되고서 몇 시간은 족히 지났는데, 왜 아직도 초입을 어슬렁거리는 겁니까. 설마... 위험을 피해 ‘안전한 곳’에서만 시간을 때울 셈입니까?”


제니아는 눈을 얇게 뜨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유진님...! 당신이 아버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본가의, 아니,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시조님에 비견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멜식의 전승자로서, 당신에게 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당신이 위험을 피하는 것에만 치중하는 겁쟁이라면, 더더욱...!”


“내가 하멜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는 것입니까?”


하멜식의 전승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아서 슬쩍 말해보았는데. 당연히 제니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경멸하는 것만 같은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각자 갈 길 갑시다.”


유진은 손을 휘휘 저으며 몸을 돌렸다.


“...숲에서의 생존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까?”


“저에 대한 소문은 들었다면서요. 전 최근까지 사마르 대수림을 떠돌았습니다.”


“그곳도 위험한 곳은 맞지만, 마기에 오염된 숲은 아니잖습니까. 고작 나흘뿐이라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론 이 숲에서 마물을 사냥하면서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망토 안에서 메르가 키득거리는 웃음을 참았다.


“...도움을 청한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상대가 미울 지라도, 도리를 져버리지 않는 것이 저의 기사도입니다.”


“그렇다면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일단 들어는 보죠.”


“진짜 괜찮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좀 가십시오.”


유진은 그렇게 내뱉고서 무릎을 낮췄다. ...귀찮게 하지 말라고? 사람이 기껏 생각해서 권해주었는데? 그러한 흐름을 거친 뒤, 제니아의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고...”


파치칙!


새하얀 번개가 튀었다. 무턱대고 접근했다가 감전 당해버렸기에, 제니아는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물러선 것이 고작 몇 걸음. ㅡ화악! 갑작스런 돌풍이 제니아의 머리를 흩날리게 만들었다. 제니아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았다.


바람이 등을 떠민 순간.


번개가 앞으로 쏘아졌다. 그렇게 보였다. 제니아는 순식간에 멀어진 유진의 등을 보고서 반쯤 입을 벌렸다.


“...저게 뭐야?”


마법? 아니, 모르겠다. 저렇게 고속으로 이동하는 마법이 있던가? 제니아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시무인 십이걸 중 하나인 신속의 람쥬르였다.


‘...방금 속도는... 람쥬르 경보다 더...’


그만한 속도를 가속과정도 없이 즉시 낼 수 있다고? 제니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유진의 뒤를 쫒았다.


*


“헥토르는?”


[짐짝을 데리고서 계속 이동 중이다.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녀석 답다고 해야 할지... 아예 중추까지 가버릴 생각인가? 명예에 목마른 것도 아닐 텐데.]


“하하... 헥토르는 명예보다는... 흥미로 움직일 겁니다. 전에도 그랬잖습니까?”


도미닉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흑사자에 입단하라고 찾아갔을 때. 녀석은 흥미가 없다면서 거절하고, 도망치듯이 루하르로 떠나버렸죠.”


[그때 입단했다면 지금쯤은 대장 자리에 앉았을 텐데 말이야.]


“뭐, 지금도 늦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사냥이 무사히 끝나면, 느긋하게 설득해 보죠.”


[...녀석이 변절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변절이라. 도미닉은 귓가에 들리는 원로원주의 목소리에 턱을 긁적거렸다.


“...지금 다른 누가 듣고 있습니까?”


[아니. 나뿐이다.]


“할아버지. 저는 헥토르가 변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말한 것처럼, 헥토르는 제 흥미를 우선해서 따르는 놈이야. 그러한 성격은 변절조차 가볍지. 아니, 어쩌면 변절이란 자각도 없을 게다.]


“...그렇지만 놈은 라이언하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부심이 정통한 피를 가진 본가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대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나도 헥토르를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원로원주의 말이 잠시 멈췄다.


도미닉은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고 앞을 보았다.


[...헥토르가 수행했던 루하르는... 헬무드와 너무 가깝다. 특히 5년 전부터는, 왕가가 고집을 꺾고 마족에게 문호를 개방했어.]


“...음...”


[헥토르만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모두를 의심한다. 나는 그래야만 하는 자니까. 시안과 시엘, 본가의 적법한 계승자를 제외한 모두를 의심한다.]


이오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었다.


[...그러니 도미닉. 내가 그러하듯, 너도 모두를 의심하고 주시하도록 해라. 언젠가... 너도 지금의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야 할 테니.]


“할아버지의 그 말은 너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입니다.”


도미닉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저 도련님은... 하하. 의심할 가치가 있나 싶군요.”


[...전례가 있는 아이야.]


“그거 압니다만, 제 방구석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제 목을 따버릴 사자들이 그득한 여기서, 뭔가 수작을 부릴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차라리 수작을 부려줬으면 좋겠구나.]


원로원주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마침 지금은 가주도 없으니. 지금 이오드가 뭔가를 저지르면, 즉시 처형해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게야.]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다. 원로원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배짱은 없어 보입니다.”


도미닉은 그렇게 말하면서 앞을 보았다.


“...할아버지도 파악하고 계시겠지만, 저 도련님은 마물과의 싸움을 최대한 피하고 있어요. 맞닥트린 마물을 마법으로 간신히 쓰러트리고는 있지만, 솔직히 솜씨가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이제 겨우 열 마리 남짓이군...]


“의심하라기에 보고 있기는 한데... 차라리 저도 헥토르에게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놈은 해리스가 보고 있잖느냐.]


“아니면... 유진 도련님은?”


[...그 아이는 제노스가 주시하고 있지. 도미닉. 네가 지루해 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이오드를 계속해서 주시하도록 해라. 만약 놈이 수상쩍은 일을 한다면, 즉시 죽여 버리도록 하고.]


손자를 이오드에게 붙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원로원주는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먹칠을 한 이오드를 아직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회가 있다면 죽음으로 그 죗값을 물리고 싶었다.


“예.”


도미닉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주둔지와의 통신은 끊어졌다. 도미닉은 쩝 입맛을 다시며 멀리서 움직이는 이오드를 지켜보았다.


“...지루하긴 하군.”


도미닉은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쉬워서 지루해.”


사냥


아카샤는 유진이 펼칠 수 있는 결계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


사역마인 메르는 잠을 잘 필요가 없는데다, 유진와 연결되어 있다. 만약 누군가가 결계에 간섭하거나 침범하려 한다면, 메르는 즉시 그를 알아차리고서 유진에게 알릴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불침번을 설 필요는 없겠지만, 유진은 이러한 문제에서는 과하다 싶을 만큼 고지식했다.


모닥불은 피우지 않았다. 숲의 어둠은 짙지만, 유진의 눈은 이러한 어둠쯤은 간단하게 꿰뚫어 볼 수 있다. 습격자에게 곤란할 지형을 골랐고, 편히 자리를 깔지도 않았다.


유진은 커다란 망토로 몸을 감싸고서 바닥에 앉았다. 잠은 얕고 짧게, 끊어서 자면 된다. 당연히 주변에는 여러 마법을 준비했지만, 유진은 편히 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쫒아 온 제니아는 그 모습에 내심 합격점을 주었다. 이 사냥에 심사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존재할 지라도, 제니아는 심사관이 아니다.


어쨌든, 제니아는 유진에 대한 판단을 수정했다. 재능이야 뭐 여기저기서 인정받는 것이고... 나이다운 어수룩함을 보이면 즉시 지적하려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은 합격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팔자 좋군요.”


그래도 제니아는 한마디 쏘아붙였다. 그녀는 양손 가득 쥔 풀뿌리의 흙을 털면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오염되지 않은 풀뿌리를 직접 뽑아 온 제니아와는 달리, 유진은 망토 안에 가득 넣어둔 빵에 과일잼을 듬뿍 바르고 있었다.


“준비성이 좋다고 해주시죠.”


“...준비는 저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이죠. 왜냐? 이 사냥은 사냥꾼다운 생존력을 시험하는...”


“이게 언제부터 시험이었습니까?”


“...유진님과 제 손목에 사냥기록을 측정하는 팔찌가 감기기로 한 순간부터, 이것은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시험도 더해진 겁니다.”


“설령 그럴 지라도 전 신경 안 쓰렵니다. 점수 많이 받는다고 보상 주는 것도 아니고... 꼴찌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일 거 아니에요? 만에 하나 내가 꼴찌 해 봐야 좀 부끄러운 게 전부고.”


“...유진님은... 자기 실력을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다는, 그런 야심이 없는 겁니까?”


“난 여태까지 계속 증명해 왔는데?”


유진은 낄낄 웃으면서 빵을 입에 물었다. 제니아는 잼이 듬뿍 발린 빵과, 제 손에 들린 풀뿌리를 번갈아 보았다. ...제니아는 입술을 꾹 다물고서 풀뿌리에 묻은 흙을 마저 털었다.


“드시렵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캐온, 이 풀뿌리를 먹을 겁니다.”


“칼리즈의 뿌리네요. 그거 생으로 먹으면 많이 쓴데?”


“...아십니까?”


“알죠. 마기에 오염도 잘 안 되고, 한 번 데치고 말리면 은근히 달잖아요.”


“...그리고 오래 씹을 수 있죠.”


“뭐, 그거 열 개 씹느니 잼 바른 빵 하나가 훨씬 달고 맛있지만.”


유진의 중얼거림에 제니아의 입술은 더욱 삐죽하니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것도 충분히 먹을 만 합니다.”


제니아는 보란 듯이 입을 벌리고, 칼리즈의 뿌리를 크게 베어 물었다. ...이빨로 끊고, 혀에 닿은 순간. 감전이라도 된 것 같은 쓴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제니아는 그를 내색하지 않았다.


“...잼이라도 바르는 게?”


“괜찮습니다.”


뱉고 싶다. 유진이 보고 있지만 않았어도 뱉었을 거다. 아니, 최소한 불이라도 피웠으면 구울 수라도 있을 텐데. 제니아는 는 일그러지는 입 꼬리를 붙잡고서, 억지로 풀뿌리를 씹어 삼켰다.


“나흘 내내 절 따라다닐 겁니까?”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


유진은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제니아는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식사만 끝내고 일어날 겁니다.”


제니아는 표정을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유진님의 실력은... 단편적으로나마 보았습니다. 과연, 아버지가 총애할 만도 하더군요. 소문으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제 눈으로 직접 본 이상. 유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인정할 수가 없어서 절 따라다닌 겁니까?”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니아는 그렇게 쏘아붙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충분히 보았죠. 제가 이번 사냥에서 유진님보다 많은 마물을 잡을 지라도... 당신은 그를 패배라 생각하지 않겠죠?”


“예.”


“그래도 저는 당신보다 많은 마물을 잡을 겁니다.”


“열심히 하세요.”


호승심을 자극해 보려 한 말일 테지만, 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제니아는 저 태연한 얼굴이 얄밉게 느껴져서, 잠시 동안 유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딸아이를 너무 미워하지는 마십시오.”


제니아가 떠난 후, 제노스가 다가왔다. 유진은 멀찍이서 멈춘 제노스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아예 곁에 다가오지 않는 것은, 사제 나름의 고집인가?”


“...저는 어디까지나 보호역으로 있는 것이니까요.”


“내 주변만 맴도는 것이 따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만스런 듯한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사형이 암살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사형의 근처에만 머무르진 않았을 겁니다.”


“원로원주는?”


“적색바위에 남아있습니다.”


제노스는 귓가에 매단 단말기를 의식하며 말을 이었다.


“...딱히 지시가 내려온 적은 없습니다. 무언가 사고가 벌어진 적도 없고요.”


“시안과 시엘은?”


“도련님은 마굴의 중추를 노리고 계신 모양입니다. 아가씨는...”


제노스는 곧장 말을 잇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이오드 도련님의 뒤를 따르고 계십니다.”


“...형님의?”


“예.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셨던 모양입니다만...”


숲에서 우연히 마주쳤거나, 목격했거나. 어쨌건 지금은 이오드를 따라다니고 있다는 말이다.


‘...설마 시엘 녀석, 이 사냥을 기회삼아 형님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겠지?’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시엘이 이오드를 싫어하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정말 죽여버릴 만큼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게다가 시엘은... 자기 손을 더럽힐 성격은 아니지. 정말로 죽이려고 한다면 차라리 어쌔신을 고용하거나, 칼이 아닌 독으로 죽일 성격이야.’


전례도 있으니, 이오드가 혹시 모를 개짓거리를 할까봐 경계하는 것뿐이겠지. 물론 유진도 그것은 경계하고 있다.


마기가 가득한 숲. 마굴의 중추에는 흑마법진도 있고, 마기를 내포한 괴석과 상급의 주물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이만한 환경이라면, 굳이 마족과 계약할 필요 없이 흑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다.


‘네 주먹은... 하하... 아프기는 했지만, 그만큼 내게 뼈저린 교훈이 되었다.’


‘덕분에 나도 열심히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지. 모두가 네 덕분이야.’


애써 웃던 이오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이라면.”


유진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바닥에 앉았다.


“또 저지를 리가 없지.”


이 숲은 흑마법을 받아들이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하지만 조건이 너무 나쁘다. 간단하게 흑마법사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 뒤에 살아나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숲의 중추에는 흑사자 기사단 수십 명이 도사리고 있다. 대장들이 나설 것도 없이, 이오드가 흑마법사가 된 순간 흑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이오드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이오드의 마법은 겨우 4서클. 나쁜 수준은 아니지만, 살아나가는 건 불가능해.’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여기서 그런 수작을 부릴 리가 없다.


‘...제대로 박히지 않아서 흑마법에 입문하려 했던 것이지만... 설마 그 정도로 병신은 아니겠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둠을 노려보았다. 제노스는 그 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제노스가 멀어진다. 그렇게 유진 혼자만 남게 되었다. 망토 안의 메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유진의 침묵과, 가라앉는 감정의 표면을 읽었다.


‘...무거워.’


언동은 가벼웠다. 제니아와 나누던 대화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낸 감정만 그러했다. 메르는 새삼 유진이 20살 청년이 아닌, 300년 전에 지옥을 떠돌았던 결사대의 일원임을 자각했다.


우둔한 하멜.


그는 이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들끓는 충동을 억누르고 있다. 호흡할 때마다 기관지에 달라붙는 마기에, 주제도 모르고 덤비려는 마물에 분노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 공간의 모든 것이 용납할 수 없는 악이며, 당장 도륙내야 마땅했다.


그러지 않는 것은.


‘...참는 거야.’


흑암의 망토 안.


메르는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어둠은 흔들림이 없지만, 고요하지는 않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가끔은 사념이 목소리가 되어, 메아리칠 때도 있다. 유진에게 새겨진 사역마의 존재술식은, 감정이 강해질 때마다 메르의 정신에 공명을 일으켰다.


‘...300년 후의 세상이니까.’


유진은 마왕과 마물과 마족을 모조리 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마땅한 세상을 보았고, 그곳에서 살아남았으며, 그러한 세상을 끝내기 위해 떠돌았다.


300년은 긴 시간이다. 유진에게 당연한 상식은, 지금 세상에서는 당연하지 않다. 마왕과는 평화조약을 맺었고, 무조건적으로 악이어야 할 흑마법사는 ‘실리주의자’일 뿐이며, 마물은 형편 좋게 모의훈련을 하게 해주는 움직이는 허수아비 취급에, 마족은 노예로 부리거나 지저분한 가게에서 가드로 고용할 수 있을 만큼 씀씀이가 다양하게 되었다...


세상이 그렇게 되었으니, 언제까지고 300년 전의 상식만을 가질 수는 없다. 유진은 그렇게 판단하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 그립고도 엿같은 공기를 마시며, 좆도 아닌 마물이 꿈틀대며 먹잇감이라고 덤비는 꼴을 보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분노가 치민다. 그래서 발에 걸리는 마물을 모조리 죽이며 전진했다. 하지만 들끓는 속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제니아만 하더라도, 제노스의 딸만 아니었다면 감전시키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괜히 엉겨 붙지 못하도록 두들겨 패버렸을 것이다.


‘올까.’


망토를 어깨에 고정하는 휘장에는 라이언하트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끼긱.


유진은 손톱으로 문양을 긁으며 어둠을 노려보았다.


‘오늘은 오지 않겠지.’


그렇게 깊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암살을 사고로 위장하고 싶다면, 이곳은 너무 이르다.


‘앞으로 나흘. 서두르지 않아. 암살? 요령 좋은 사냥이지. 익숙해.’


원로원주가 흉수라면.


정말 저지를까? 용병을 쓰는 것과 다르다. 이 흑사자 성에서, 양자라고는 해도 본가의 자제를 죽이는 것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의도는 알 바가 아니다.


원로원주와 대면했을 때, 살의는 읽지 못했다.


‘백 년을 넘게 살아 온 늙은이. 살의를 지녔을 지라도 어설프게 흘리진 않겠지.’


암살을 사주한 것은 원로원주.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섣불리 움직여줄까.


‘일단 꾀어는 보겠지만.’


원로원주는 적색바위에 남아있다. ...도미닉 라이언하트. 손자를 사용하려나? 아니면 흑사자 중 하나를? 그렇게 기대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이렇게 어설프게 암살을 기도할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를 계속 신경 쓸 수도 없어.’


나찰공주가 온다.


‘사냥이 무탈하게 끝난다면.’


차원의 틈새에 갇혔다는 라이자키아도 찾아야 한다.


‘대놓고 들이박아 볼까.’


네가 짐승 새끼한테 사주해서 날 조지려고 했냐?


유진은 쯧 혀를 차며 주먹을 쥐었다.


*


정면에서 마주치진 않았다.


멀리서, 이오드가 숲을 걷는 것을 보았다.


숲의 밤은 빠르다. 해가 조금 기운 것만으로도 숲은 밤처럼 어두워진다. 하지만 이오드는 횃불을 들지도, 마법으로 빛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 어둠을 가로질렀다.


신경 쓰였다. 궁금하기도 했다.


시엘이 기억하는 이오드는 7년 전의 15살 모습에 머물러 있다.


이오드가 아롯에서 흑마법에 입문하려 했다고 들었을 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오드 오빠’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본가에서의 이오드는, 그런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음울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엘이 기억하기에, 적어도 10살까지는 이오드도 꽤 평범했다.


그 나이다웠단 말이다. 어린아이답게 장난기도 있고... 시엘과 시안이 배다른 동생이라고 꺼려하는 일 없이, 가끔씩은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10살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의 시엘은 7살이었지만, 큰오빠가 ‘왜’ 변하기 시작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10살.


라이언하트의 전통, 혈계식에 참가할 수 있는 나이.


그때부터 이오드는 쌍둥이와 거리를 두었다. 함께 시답잖은 놀이를 하는 것보다는, 두눈을 부릅뜬 테오니스의 참관 하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윽박을 들어가며 정좌해 마나를 수련하고, 해가 저물면 서재에 틀어박혀 검술이론과 다양한 전술책을 읽었다.


언젠가부터.


이오드가 읽는 책에 마도서가 더해졌다. 테오니스의 바람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아들이 마도서를 읽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 시점에서는 테오니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오드 라이언하트에게 무예의 재능은 없다.


그렇기에 마법에 눈을 돌렸다. 이오드 본인이 그를 바라기도 했다. 어머니의 꾸중을 들어가며 잘 하지도 못하는 검술에 매진하는 것보다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마법의 ‘재능’을 상상하며 마도서를 읽는 것이 즐거웠다...


시엘은 그때의 이오드를 기억한다.


두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서재에 틀어박혀 마도서를 넘기던 모습을. 얼마 되지도 않고, 잘 다루지도 못하는 마나를 일으키며 마법 ‘흉내’를 내던 모습.


그래.


결국 그것은 흉내였다. 진짜 마법이 아니었다. 마도서를 탐닉했지만, 이오드는 제대로 된 마법을 펼치지 못했다. 그렇기에 마법을 갈망했다. 빛이 들지 않도록 커튼을 친 방에 틀어박혀, 마도서를 읽고, 잘 하지도 못하는 검을 휘두르고, 마법 흉내를 내고, 마법에 눈을 빛내고.


‘...이건...’


뭔가 이상하다.


시엘은 자리에 웅크리고서 시체를 노려보았다. 마물의 시체. ...시체가 맞나? 시엘은 눈을 찡그리고서 단검을 뻗었다. 푹, 하고 찌르니 피가 흐른다. 경련은 없다. 호흡도 느껴지지 않는다.


확실하다. 눈앞의 마물은 죽었다. 그런데... 죽은 시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평온한 모습.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만 같다.


‘...대체 뭐지?’


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소속은 흑사자 기사단의 3번대. 대장인 카르멘은 흑사자 중에서도 제일의 실력자라 꼽히고, 그녀가 이끄는 3번대는 대장의 위명에 걸맞도록 훈련을 거쳐 왔다.


숲에서의 훈련. 몬스터는 셀 수 없이 죽였고, 마물과 싸운 경험도 많다. 마굴 중추의 마물은 위험하지만, 이곳의 마물은 충분히 경계한다면 위험하진 않다.


시엘의 실력이라면 말이다.


‘...어떻게 한 거야?’


마법은 익히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에 대해서는 충분하리만큼 알고 있다. 당장 그녀가 소속 된 3번 대에도 마법사가 있다.


시엘은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서 몸을 일으켰다.


잠든 것처럼 죽은 마물들이 길을 만들고 있다. 마법에 의한 공격... 독인가? 아니, 독에 죽은 흔적은 없다. 게다가 이 정도 숫자의 마물을 연속적으로, 그것도 저항할 틈도 없이 죽이는 건 어지간한 수준의 마법사에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걸... 이오드 오빠가 했다고?”


“신기하지?”


목소리.


시엘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직였다. 짧은 도약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고, 뛰어오른 순간 검을 뽑았다.


“...이오드 오빠?”


말도 안 돼.


머릿속에서 생각이 회오리친다. 이오드는 저 앞으로 향하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뒤에서 튀어나올 수 있는 거지? 블링크? 그래, 그걸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블링크라면 징조가 있었을 거다. 하위 서클의 블링크는 대기중의 마나를 일그러트린다. 4서클의 블링크를 시엘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상해.’


시엘은 발을 뒤로 끌면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눈앞에 있는데... 이오드 오빠에게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그 칼.”


이오드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엘이 쥔 검을 가리켰다.


“비환검 자벨이구나.”


“...”


“시안은 게돈의 방패를 받았지.”


나직한 목소리.


“유진은... 폭풍검 위니드.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를 받았지.”


“...오빠.”


“나는 아무 것도 받지 못했는데.”


이오드는 낮게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 가주님...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떻게 뒤에서 나온 거야?”


시엘은 꿀꺽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질문에 이오드는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네 뒤로 걸어왔을 뿐이야.”


“...그건... 불가능해. 이오드 오빠는 저 앞에 있었어. 나는, 이오드 오빠의 뒤를 쫒았다고.”


“왜 날 쫒아온 거지?”


“...”


“알아. 내가 나쁜 짓을...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만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서 날 쫒아온 거잖아.”


너는 가문의 수치야.


너 때문에 나는.


“시엘. 나는 널 알아.”


왜 네가... 내 아들인 거지?


너 같은 놈이 내 손자라고?


“너는... 내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를 것을 기대했겠지.”


널 잘 키우고 싶었어.


그 양자처럼.


하다 못해, 쌍둥이처럼.


“넌 어려서부터 그랬잖아. 내가 무언가 실수를 하거나... 내 어머니가 싫어할 짓을 하거나... 비웃음 당할 짓을 하면. 네 재미난 즐거움을 위해, 네 어머니에게 일러바치고, 시종들에게 소문을 퍼트렸지.”


대체 왜 그런 거야? 네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잖아. 그런데 왜?


너 때문에 나는 엉망이 되어버렸어. 평생, 평생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었다고.


“네가 그렇게 입을 놀릴 때마다... 하하... 우리 어머니는, 날 방에 불러 회초리를 드셨지.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셨고... 가솔들은 어머니의 교육을 막지 않았으니.”


하나뿐인 손자가 그 따위인데, 백작 작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비웃더구나!


“어머니의 회초리야 그리 아프지도 않았지만 말이야... 음... 너는 매를 맞아 본 적이 있던가? 시안이 맞는 것은 몇 번 보았는데... 아마 없겠지. 넌 어려서부터, 매를 맞지 않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하하... 나도 얼마 전에 알게 되었거든. 매를 맞지 않으려면, 나 스스로 변하면 돼. 그렇게 변하면 어머니를 웃게 할 수 있어.”


“...오빠.”


끼릭.


손가락에 힘을 줬다. 자벨의 검신에 미세한 실금이 번지기 시작했다.


“...지금 오빠가 하는 말, 굉장히 이상하게 들려.”


“이상하다고?”


이오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상하지 않아.”


시엘은 영문 모를 오싹거림을 느꼈다. 마법... 이 아니다. 그럼 대체 뭐지? 이 느낌.


‘하려는 거야.’


믿기지 않지만.


‘날, 공격하려는 거야.’


이오드 오빠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려 한다.


“...오빠. 그만 둬.”


시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이러는 것을 기대했잖아.”


이오드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시엘.”


어둠이 출렁거렸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기로 했어.”


사냥


이틀째.


가르기스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새벽부터 고인 이슬이 갑옷의 표면에 맺혀 있었는데, 그 색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이었다.


독이 섞여있다.


가르기스는 태연한 얼굴로 이슬을 털어냈다. 손 끝에 조금 남아있기에, 인중에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다. 엷지만 계란 썩은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입을 쩍 벌리고, 손가락을 밀어 넣는 행동에는 주저랄 것이 없었다. 이정도 독 따위, 맥주잔 그득 채워 마셔도 이 단련된 몸을 해치지 못한다.


“...하지만 역시 독. 몸은 기뻐하지 않는군...”


독이 닿았던 혀와 목젖, 식도가 쓰리다. 육체의 단련은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근육의 안쪽은 단련할 도리가 있다. 찾아 보면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아직 가르기스는 ‘안’을 단련하는 비책은 알지 못했다.


“깨울 필요도 없었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디자이라가 입을 열었다.


“별 일 없었어. 마물이 다가오긴 했지만, 널 깨우거나 자리를 피할 정도도 아니었고.”


“음.”


가르기스는 고개를 끄덕거린 뒤, 대뜸 그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서는 것을 반복했다. 디자이라는 그 행동의 이유를 캐묻는 대신, 품을 뒤져서 육포를 꺼내 씹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이상한 녀석이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으니까, 운이 좋아.’


넓은 숲. 사람은 고작해야 9명. 어지럼발이에 의해 길이 갈라지고,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운이 좋은 것이다.


어제, 해가 저물며 숲이 시커먼 어둠에 가라앉았을 때. 날이 밝을 때까지 이동할지, 안전한 곳을 엄선해 야영을 할지 고민하던 중에 가르기스와 만났다.


혼자가 둘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여러 가지가 편해진다. 서로 번갈아 잠들어 피로를 필 수도 있고, 눈과 귀가 늘어난 만큼 탐색도 용이해 진다.


‘...평가는 혼자일 때보다 박하겠지만.’


그 정도는 각오했다. 본가의 괴물이나 헥토르를 제치고서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리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흑사자성의 어른들 머릿속에 ‘디자이라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을 기억시킬 만큼.


‘...나도 흑사자가 되고 싶은데...’


3번대가 되고 싶다. 라이언하트에서 태어난 여자, 아니, 무(武)에 야망을 품은 여기사라면, 반드시 ‘카르멘 라이언하트’에 대한 선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라이언하트의 여걸. 철혈의 흑사자...


‘...하필 카르멘님이 부재중이시라니...’


본가의 호위임무로 떠나있다는 말은 들었다. 그렇지만 이 숲에서 성과를 보이면, 자연스럽게 흑사자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다 했어?”


“앞으로 3세트.”


“아침부터 과한 것 아냐? 밥도 안 먹었잖아.”


“보충은 트레이닝이 끝난 후다.”


가르기스는 아래에서 대검을 짊어지고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먹을래?”


“아니. 이거면 충분하다.”


큼직한 수통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걸쭉한 죽 같은 것이 잔을 가득 채운다. 가르기스는 제 몸에 대한 감사와 성장에 대한 기원을 담아, 가문 비전의 근육성장제를 단숨에 들이켰다. 전신에 퍼져가는 활력, 묵직하게 차오르는 포만감...


“가자.”


가르기스는 상쾌한 얼굴을 하고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디자이라는 흑사자 기사단을 꿈꾸지만, 가르기스는 그렇지 않았다. 흑사자 기사단이 되어버리면, 태어난 가문과는 결국 거리를 두게 되어버린다.


그런 문제에서 예외에 속하는 것은, 마치 세습하듯이 일가 전원이 흑사자에 입단하는 제노스의 가문이나, 원로원주의 가문 정도뿐이다.


가르기스는 아버지를 존경하며, 가문과 다스리는 영지를 사랑했다. 흑사자가 되어 라이언하트에 이바지하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영지를 평화롭게 다스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제 실력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 같이 땀 흘리며 단련한 이 몸뚱이가 이 사냥에서 얼마나 빛을 발할지 보고 싶었다.


‘...무식하지만...’


제 덩치만큼 커다란 대검.


‘힘으로만 휘두르는 것은 아니야. 제법 정교해.’


주변의 나무에 걸리지 않도록 궤적을 다양하게 틀어낸다. 그렇게 휘두르고 내리찍을 수 있는 것은 무식하게 단련한 몸뚱이 덕분이다. 대검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발로 내리찍고, 주먹으로 때려갈기고, 어깨로 밀친다. 가르기스의 덩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물을 분쇄하는 무기였다.


디자이라는 배후를 맡았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쭉 창을 단련해 왔다. 마물은 어디서든 튀어나온다. 그림자 속에서 나오는 놈도 있고, 나무나 바위,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놈도 있다.


마나를 조작하는 몬스터는 드물다. 하지만 마물에게는 그렇지 않다. 놈들은 제 몸을 채운 마기를 자유로이 다루며, 마법이나 검강과 비슷한 힘을 펼쳐낸다.


위협적이지는 않다.


시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흑사자성에서 몇 달 동안 거쳐 온 훈련. 마물과 싸운 적은 없다. 시안이 해 온 훈련은 모두 다 대장과 기사들과 해 온 일대일 대련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상대가 마물이 아닌 인간이라 해도, 결국 중요한 것은 ‘싸움’이란 것이다. 싸움에 익숙해질수록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난다. 상황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가 몸에 녹아든다. 그것이 쌓이다 보면, 겪은 적 없는 상황이라도 절대 최악이 아닌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된다.


숲에 들어 온 후, 시안에게 있어서 최악에 근접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게돈의 방패는 쓴 적도 없었다. 이 정도 수준의 마물 뿐이라면 검 한 자루만으로도 여유롭게 돌파할 자신이 있었다.


‘...헥토르는 더 깊이 들어갔겠지?’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유진. 그 녀석도 깊이 들어갔을 거야.’


시안의 바람도 같았다. 숲속 깊이 들어가고 싶다.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가 얼마나 용감하고 뛰어난지를 증명하고 싶다.


“...이건 의외인데.”


시안은 놀란 기색을 감추며 중얼거렸다.


“설마... 너희가 나보다 깊이 들어와 있다니.”


가르기스와 디자이라.


‘...방계 중에서도 실력은 뛰어난 녀석들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시안은 괜히 움츠려지는 어깨를 활짝 폈다. 조건이 똑같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안은 혼자였고, 저쪽은 둘이잖은가. 아무리 밤잠까지 줄여가며 이동한들, 어둠 속에서 맞닥트릴 마물을 경계하다 보면 이동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저 녀석들은 둘이니까, 서로가 보지 못하는 곳을 경계하면서... 지치면 몸도 기대고, 어쨌든 둘이니까 훨씬 편했을 것이다. 시안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흠. 하지만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보니, 저 안에서 된통 고생한 모양이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디자이라는 표정을 왈칵 구기고서 대답했다. 11살 때의 혈계식, 시안과의 추격전은 아직까지 디자이라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덕분에 디자이라는 시안에 대해서 은근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를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키우고 두눈을 치켜떴다.


“돌아가다니요? 저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돌아갈 생각 따위는 없다고요.”


“...뭔 개소리야? 그리고 너 표정이 왜 그래? 나한테 지금 개기는 거냐?”


“...수염 미셨네요.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도련님은 수염이 없는 것이 더 멋지세요.”


“...흠, 알면 됐어.”


시안은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품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여간... 바보는 바보인 이유가 있다니까. 너희, 이 넓은 숲에 들어오면서 길 찾기의 기본적인 방비도 하지 않은 거냐?”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시안은 쯧쯧 혀를 차면서 품안에 넣어두었던 나침반을 꺼냈다.


“자, 봐라. 이건 나침반처럼 보이지만, 평범한 나침반이 아니야. 마법으로 제련한 이 침은, 마기의 농도가 깊은 곳을 가리킨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 침과 나침을 확인하면, 숲 어디에서든 중추로 향할 수 있단 말이지.”


흑사자들이 사용하는 특제 나침반이다. 시안은 이 나침반은 5번대 부대장인 삼촌, 기온에게 졸라서 받아두었다.


“...나침반이라면 저희도 있어요.”


디자이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자신의 나침반을 꺼냈다.


“도련님의 것처럼 마기를 가리켜주지는 않지만, 저희 나침반도 꽤 좋은 거라고요. 이 숲의 중추는 서쪽이죠? 저희는 어제부터 쭉 서쪽으로...”


“망가졌구만.”


시안은 디자이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봐라. 지금 네 나침반은 서쪽을 가리키고 있지? 내가 온 방향 말이야. 하지만 내 나침반이 가리키는 서쪽은 너희가 온 방향이야.”


“...도련님의 나침반이 망가진 걸 수도 있잖아요.”


“하! 이래서 바보는... 내가 한 말을 콧구멍으로 들은 거냐? 이 나침반은 마기가 짙은 곳을 가리킨다니까?”


“...하지만 저는... 들어온 즉시 서쪽으로 향했는데...”


“어지럼발이 때문에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거겠지! 그렇게 빙빙 헤매다가 나와 맞닥트리고... 나참,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최근 우월감을 느낄만한 상황이 드물었다. 시안은 이 기회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숲에서 제 감각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주 멍청한 짓이야. 네가 일직선으로 걷고 있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조금씩 옆으로 틀어지며 엉뚱한 방향으로 걷는 중일 지도 모른다고. 하물며 이 숲에서 마냥 걷기만 한 것도 아닐 거 아냐?”


“...예...”


“도중에 마물도 만났을 거고, 잠깐 멈춰 쉬었을 거고, 잠도 잤겠지? 그렇게 멈추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네가 ‘똑바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은 너무 오만한 것 아니냐?”


“...우으...”


“여기서 나와 만나지 않았다면, 너는 저 돼지와 함께 나흘 내내 엉뚱한 곳만 떠돌았을 거다! 디자이라 라이언하트, 너는 겨우 그따위 일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냐?”


“우으... 우...”


디자이라가 혈계식 때의 기억으로 시안에게 적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듯, 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피에 흠뻑 젖어 갑자기 튀어나왔던 디자이라의 모습은 아직도 가끔 악몽에 나온다.


그래서 시안은 디자이라를 몰아붙였다. 마음 속에 남은 어린 시절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가르기스에게 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저번에 받은 발모제에 대한 의리였다.


“너희가 바란다면.”


시안은 헛기침을 하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 숲 어딘가에서 대장들이 지켜보고 있을 거다. 아랫것을 다스리는 카리스마는 방금의 질책으로 보여주었고... 이제는 포용하고 이끄는 리더쉽을 보여 줄 차례다.


“날 따라와라. 함께 싸우자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가 갈고 닦은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전장’으로 인도해 주마.”


시안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멋진 표정을 지었다. 내뱉은 대사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도련님을 따르겠습니다.”


디자이라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가르기스는 묵직한 가슴의 울림을 느끼고서 제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도련님은 시엘 아가씨와 함께인 것 아니었나요?”


“쌍둥이라고 항상 붙어다닐 것 같냐?”


시안은 코웃음을 앞으로 걸어나갔다.


“시엘은 혼자서도 잘 하는 녀석이야. 너희보다 훨씬 뛰어난데다, 이 숲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아마 지금이면 누구보다도 마굴에 가까이 가있을 걸?”


*


시엘은 어지러운 정신을 유지하려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로 꽉 씹었고, 입가의 아픔은 선명했다. 입 안 가득 피의 맛이 퍼지는 것도 느껴졌다.


하지만 몸 쪽의 감각은 없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해보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러한 감각이 없다.


‘...머리가... 무거워. 나른함... 피로? 졸린... 건가? 이런 상황에서? 독은 아냐...’


“...어디로 가는 거야?”


시엘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앞서 걷고 있던 이오드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대단해.”


“...뭐?”


“네게 쓴 약은 말이야, 가사말의 열매와 파휴르의 뿌리를 정제한 거야.”


“...마약이네.”


시엘은 피에 젖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이제는 약을 사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제도 하고 그러나 봐?”


“나는 쓰지 않아.”


이오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3년 동안... 으음... 실험으로 몇 번 써본 적은 있지만, 즐긴 적은 없어.”


“...좋아했잖아?”


“응, 좋아했지. 3년 전에는 말이야. 하지만 그걸 내 손으로 만들기 시작했을 때에는... 더 좋아하지 않게 되었거든. 그거 알아? 시엘. 약에 취해서 꾸는 꿈은 굉장히 기분 좋아. 내가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을 모조리 실현해 주거든.”


이오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깨어버리면 아주 허무하지. 꿈이란 그런 거잖아. 다시 꾸고 싶어도 좀처럼 이어서 꿀 수 없고... 깨어나면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결국 꿈은 현실이 아니니까... 그래서 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서큐버스를 저택에 데려오는 것까지는 불가능하기도 했고... 현실을 꿈처럼 하면 되는 구나, 라고 깨달았거든.”


“...”


“어쨌든 시엘, 넌 대단해. 그 정도 약이라면 아예 정신을 잃거나, 환각을 봐야 하는데... 너는 정신을 유지하면서, 약기운을 떨치려고 저항하고 있잖아?”


“...난 오빠와는 달리, 열심히 훈련을 받았거든.”


한 번 더. 시엘은 입술을 씹었다.


“오빠는 날 어릴 때 모습만으로 기억하는... 모양이지만. 나도 나이를 먹었어. 많이 변했다고. 시안 오빠가 그런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열심히 했어.”


“나도 그래.”


이오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변했고, 열심히 했지. 네 변화는 기특하지만... 하하... 시엘. 부디, 내가 네게 ‘기특하다’라는 말을 한 것에 분노하지 말아줘.”


“...”


“나는 말이야. 네게 차라리 약에 취해서, 보고 싶은 환각이라도 보고 있으면 좋겠어.”


“...나와의 대화가 즐겁지 않은가 봐?”


“즐겁지. 너와는 이렇게 대화한 적이 많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 즐거움을 위한 대화보다는... 동생인 널 위해주고 싶거든.”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만 둬. 대체 뭐하려는 거야? 아니. 내게 대체 뭘 한 거야?”


코어의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내게 처먹인 약에 마나를 흩트리는 효과는 없어. 마법...? 흑마법이야? 어떻게 숨겼지?”


이해가 안 된다. 이오드가 흑마법사가 되었다면, 흑사자들이 그를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오드가 죽인 마물들. 그 독특한 사체를 감시하는 대장들이 보고 넘겼을 리가 없다. 이오드에게 제압당하고 끌려다니고서 시간이 꽤 지났는데... 누구도 간섭해 오지 않고 있다.


‘...감시를 벗어났나? 어떻게?’


전례가 있는 만큼 감시당하고 있었을 텐데?


“흑마법이 아니야.”


이오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이게... 흑마법이 아니라고?”


시엘은 저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틀어 보지만, 여전히 목 아래로 감각이 없다... 시엘은 피를 꿀꺽 삼키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목 아래의 몸은 시커먼 어둠에 삼켜져 있다. 나는 지금 두 발로 걷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하늘을 날고 있는 걸까... 그도 아니면, 머리만 남고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걸까.


시엘은 오싹한 공포를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두렵지?”


이오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횃불도, 마법의 불빛도 없이 어둠을 가로질러 걸을 뿐이다. ...시간이 꽤 흘렀다. 이미 밤과 새벽은 지나고 해가 떴을 것이다. 하지만 이오드의 주변에 빛은 들지 않는다.


애당초 여기는 어디지? 숲이 맞나? 정신이 흐리다. 감각을 믿을 수가 없다. 언젠가부터는 숲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주변은... 너무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난 네가 두려워 떠는 것을 보고 즐길 생각은 없어. 약을 먼저 먹인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거든. 네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내가 약에 취해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하려고?”


시엘은 목소리의 떨림을 감추며 내뱉었다.


“난, 말이야. 오빠가 상종 못할 쓰레기인 건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사람이라고 생각해. 오빠가 아무리 뒤틀린 인간이어도, 나는 오빠의 동생이라고.”


“...아... 그 착각은... 곤란하고 불쾌한걸.”


이오드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시엘. 오해하지 않도록 말해두겠는데, 나는 네 몸을 더럽힐 생각은 없어.”


“...”


“절대로. 더럽혀선 의미가 없거든. 너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물’에 대해서는 알지? 이건... 음... 흑마법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야. 지금이야 터부시되고 있지만, 고대의 마법과 주술에는 ‘제물’을 써서 마법을 강하게 완성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거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제물 중에서도 ‘동족’을 제물로 하는 것은 특별하지. 신기한 것은 말이야, 그렇게 선택한 제물이 자신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에 따라 제물로서의 격이 상승한다는 거야.”


이오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웃음을 터트렸다.


“시엘. 너는 나와 배다른 남매지.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제물의 격은 높아. 이제부터는 ‘관계’가 아니라, 너가 가진 가치에 따라 다시금 격이 결정되지. 은발과 금안은 인간 중에서도 희귀해. 게다가 시엘, 너는 솔직히 아름다워. 갓 소녀에서 벗어난 젊고 생기 넘치는 육체. 동년배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기량과 마나. 한 번도 더렵혀지지 않은 순결성.”


“...역겨워.”


“내 개인적인 평가는... 음... 네가 아름답다는 정도 뿐인 걸. 나머지는 모두가 사실이잖아? 저러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나와 같은 혈통이기까지 해. 시엘. 너는 내가 구할 수 있는 제물 중 최고라고.”


“...”


“하지만 너 하나로는 부족하지. 시안은... 먼저 만날 수 없었지만, 곧 오게 될 거야. 그거 알아? 순결한 처녀가 제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처럼, 동정남도 제물로서의 가치가 높아. 그 외에는 갓 태어난 태아, 미숙아, 임산부... 나는... 그들은 별로 선호하고 싶지 않지만.”


“...미쳤어.”


시엘은 몸을 떨며 내뱉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랑, 시안 오빠를 제물로 삼겠다는 거야? 대체 무엇을 위해?”


“제물은 많을수록 좋아. 물론 지금 내 기량으로 다룰 수 있는 제물은 한계가 있고, 흑사자들을 감당하는 건 무리지.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미쳤다고! 어떻게 감당할 셈이야? 오빠는, 오빠는 여기서 죽을 거야. 오빠 뿐만이 아니야...! 오빠를 데리고 있던 테오니스님도, 보사르 백작도...!”


“그 분들은 괜찮아.”


이오드의 걸음이 멈췄다.


“그 분들은 나를 응원해주고 계셔. 내가 뭘 하던, 나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이제는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않는구나. 응, 그럴 수밖에 없지. 너는 아까부터 두려워하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속내를 숨기는 것은 능했지만, 공포를 숨긴 적은 없었잖아.”


이오드의 손가락이 시엘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편히 있어. 눈을 감고, 저항하지 마. 그거면 될 거야.”


눈앞이 흐려진다. 정신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싫다. 잠들고 싶지 않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다. ...오빠는? 오빠는 어떡하지? 이곳에 오게 될 거라고 했는데... 오빠까지? 어머니, 아버지, 카르멘님.


‘...유진.’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너도 오빠처럼, 이곳에 오게 되는 거야?


‘...도와줘.’


*


“...이상한데.”


유진은 눈을 찡그리고서 걸음을 멈췄다.


마물의 숲에 들어오기 전, 제노스에게 나침반을 받았다. ...꺼낸 적은 없었다. 유진은 이 숲의 꺼림칙한 마기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고, 어느 쪽으로 가야 마기가 짙은지 쯤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구분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제 감각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제,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때 느꼈던 숲의 중추. 하지만 지금은? 유진은 감각의 혼선을 의식하면서 나침반을 꺼냈다.


“...다른가?”


나침반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나도 모르게 숲을 헤매게 된 건가?”


다른 나침반을 꺼낸다. 이쪽은 평범한 나침반이다. 유진은 그 두 개의 나침반을 양손에 들고서, 땅을 박차고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두개가 동시에 망가진 것은 아니고.’


일직선으로 나아갔을 뿐인데, 나침은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다.


‘망가진 건 숲인가.’


망토 안의 아카샤를 꺼내 쥔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지만, 숲을 바꾸고 있는 마법은 보이지 않았다.


‘마기의 영향? 그럴 수도 있지.’


헬무드라면 신기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헬무드가 아니다. 애당초 이렇게 망가져 버리는 숲이라면, 나침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길을 찾아야 한다.


‘...제노스는...’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던 기척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흠.”


유진은 양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망토 안에 집어 넣었다.


“...우으...”


축 늘어져 있던 메르가 고개를 앞으로 뺐다.


“...무슨 일이에요? 유진님...”


“계속 얼굴 빼고 있어.”


“...네?”


“길을 찾을 건데.”


툭. 유진은 메르의 머리를 두드렸다.


“지금부터 넌 방향표다.”


“네에에...?”


“나도 느낌대로 찾긴 하겠지만, 너도 나만큼은 마기를 느낄 것 아냐? 지독한 곳으로 안내하도록.”


“토할 지도 몰라요...”


“너 그런거 할 줄 모르잖아. 위장도 없으면서 무슨...”


“...하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죠. 망토 안에 토해버릴 거야...”


“혼난다.”


꽁.


유진은 메르의 머리를 쥐어박고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사냥


무언가 변했다. 그에 대한 이질감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감각을 침범해 왔다.


하지만 그게 당최 무엇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아카샤로 확인해 보았지만, 마법은 아니다. 마기의 영향? 그런 종류라면 유진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유진님.”


모래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로 앞을 보고 있던 메르가 입을 열었다.


“정말 마법이 아닌 거죠?”


“어.”


유진은 손에 쥔 아카샤를 힐긋 보면서 대답했다. 아카샤의 권능인 마법에 대한 이해. 그것은 드러나지 않은 마법을 간파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숲에는 그 어떠한 마법의 영향도 받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상한 걸요.”


메르는 얇게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인도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유진님 뿐만이 아니라, 마나와 마기... 이 숲에 머무른 ‘힘’이요.”


유진은 아직 손에 들고 있는 나침반을 힐긋 보았다. 마기가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을 가리키는 나침반. 지금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숲의 중추가 아니다. 이 나침반에만 의존해 버리면, 생각하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해 버릴 거다.


나침반이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길을 찾아야하겠지만, 무인은 단련한 제 몸뚱이와 감각을 과신하는 경우가 잦다. 그 방법은 보통의 경우에는 오답까지는 아니다. 몇 번의 실패를 거치면, 예민한 감각은 사방이 나무뿐인 숲에서도 올바른 길을 찾게 해준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위적으로 ‘얽힌’ 숲에서는, 감각마저 인도된다.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하지만, 상황을 얼추 파악한 유진에게 있어선 이 모든 것이 노골적인 함정으로 느껴졌다.


‘...문제는 나 하나만 포착하고 있는게 아니란 거야.’


마법은 아니지만, 이 ‘수작’은 광범위를 포착하고 있다.


‘숲에 들어 온 전원... 중추 쪽에 가있는 흑사자 기사단은 배제했나? 보호역인 대장들은?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싸움을 걸지도 못할 텐데?’


미지는 상상을 만들어낸다. 우클라스 산을 넘으면 바로 키옐의 국경이 있고, 그 너머에는 사마르 대수림이 있다. 그곳의 무법자들이 키옐로 밀입국을 시도할 때, 보편적으로 쓰는 경로가 바로 우클라스 산을 넘는 것이다.


흑사자 기사단의 주된 임무 중 하나가 밀입국하는 무법자들을 처단하는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딴 놈들이 흑사자 기사단에 싸움을 걸 리가 없지.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다크엘프.


‘사마르에는 아이리스의 다크엘프들이 있다.’


나찰공주는 본가의 엘프들의 신변을 양도받길 원할 것이다.


‘...설마 역으로 인질을 잡아서 교환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아이리스 그 년이 미친년이기는 한데, 300년 지났다고 이만큼 미쳐버린 건가?’


추측해 봤자 아직은 답을 알 수가 없다. 유진은 의식을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템페스트.”


힘을 담은 부름이 정령계에 닿았다. 주변의 바람이 흔들리면서 유진의 머리카락이 붕 떠올랐다.


[무슨 일인가?]


“주변 탐색 좀 시키려고. 제노스 라이언하트, 얼굴 알지?”


[...바람의 정령왕을 그런 하찮은 심부름에 부려먹는 것은 하멜, 너밖에 없을...]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꺅.”


망토 안의 메르가 발버둥쳤다. 그녀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다가, 표정을 콱 찡그리면서 망토 깊은 곳에 있던 위니드를 꺼냈다.


메르의 양손에 잡힌 위니드가 웅웅거리며 몸을 떨었다. 유진은 위니드를 건네받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그래?”


[으음...!]


위니드가 몸을 떨 듯, 템페스트도 목소리를 떨었다. 유진이 위니드를 손에 쥔지 시간이 꽤 되었지만, 템페스트가 이렇게까지 동요를 보인 적은 드물었다.


ㅡ화악! 바람이 한 곳에 모인다. 그를 몸체 삼아 현신한 템페스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곳 저곳에 손을 뻗어 더듬었다. 그럴 때마다 흘러나온 바람이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었다.


유진은 템페스트가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좋은 일로 저러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템페스트가 입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


[...믿을 수가 없군.]


“뭔데.”


[바람의 정령, 땅의 정령... 아니, 이 숲의 모든 정령이 잠들어 있다.]


“...왜?”


[어둠이다.]


템페스트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떨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존재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잠들고,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 지를 상상하며 두려워한다. ...하멜. 어둠이란 예부터 불온함이 준동하고, 불길한 자들이 배회한다 여겨졌다.]


“...그래서?”


[...그러한 어둠에도 정령은 깃든다. 어둠의 정령이 바로 그것이지. 그 어느 정령보다 계약하기 힘들지. 어둠의 정령은 인간에게 무관심하거든. 게다가 어둠의 정령은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


“...”


[...이 숲의 어둠은 정령의 어둠이다. 이만한 범위를 침식하고, 다른 정령까지 강제적인 잠에 들게 만들었어. 어둠의 정령은 불길하며 강하지만, 이만큼 영향력이 강한 것은...]


“정령왕?”


[...아니, 그건 아니다. 어둠의 정령왕은 존재하지 않아. 이곳을 침식한 것은 아마 어둠의 고위정령이겠지. 하멜, 네 실력은 알고 있지만, 얕잡아 볼 상대는 아니다.]


템페스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흩트렸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그는 아마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만한 실력자를 잠재우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길을 꼬아 헤매게 만드는 것은 어둠의 정령에게는 장난만큼 쉬운 일이니.]


“정령사를 찾는다.”


유진은 무릎을 낮추며 내뱉었다. 마나에 녹아든 번개불꽃 덕분에 세계수의 정령은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정령의 기척까지 느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어둠의 정령의 기척을 쫒는 것은 템페스트에게 맡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메르는 더 이상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망토자락을 단단히 붙잡았다. 유진은 마기가 짙은 곳을 감지한 뒤, 땅을 박차고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


“...도련님?”


줄곧 침묵하던 디자이라는 불안한 표정을 하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희 제대로 가는 것 맞나요?”


어느 순간부터 주변이 ‘숲’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분명 해가 떠있는 시간일 텐데,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해는 보이지 않는다.


숲이 깊어서? 나뭇잎이 무성해서?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어두울 수 있나?


“마물이 강해졌어.”


시안은 갑옷에 튄 피를 벅벅 문질러 닦으며 내뱉었다.


“네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건 느끼고 있을 것 아니냐? 방금만 해도 그래. 송곳갈퀴 무리가 습격했을 때, 넌 시발 제대로 찔러 죽이지도 못하고 뒷걸음질 쳤잖아!”


“그건...”


“대체 뭐야? 그따위 실력밖에 안 되면서 이 사냥에는 왜 참가한 거야? 약하면, 약하면 노력이라도 더 하던가. 도움도 안 되는...”


뭔가 이상하다.


이렇게 화를 낼 문제가 아닌데, 감정이 이상하게 격앙된다. 이상함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짜증을 참을 수가 없다. 애초에 참아야 할 이유가 있나?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건데, 그걸 왜 참아야 하나? 나는 라이언하트 본가의, 차기 가주인데?


왜 내가 여기서 저런, 쓸모없는 것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 거지? 왜 미래의 가주인 내가 앞장서서 검을 휘두르며 길을 열어야 하는 거지? 왜 저 약해빠진 멍청이의 실수를 내가 해결해야 하는 거지?


‘...미래의 가주니까.’


희미하게 떠오른 결의가 일련의 사고를 멎게 만들었다. 시안은 크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시커먼 숲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아마, 너무 깊이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짙어진 마기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


“저는... 저는 약하지 않아요. 아무 도움이 안 된다니...! 저는 열심히 했다고요. 도련님이 뒤를 신경 쓰지 못하셨을 때, 제가 막아줬잖아요. 제가 도련님의 적을 창으로 꿰어 죽였다고요!”


디자이라는 울먹거리며 외쳤다. 감정의 격앙을 느끼는 것은 시안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진짜 이상하잖아요. 이상, 이상하다고요!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계신다면, 그거야말로 도련님이 멍청한 바보란 뜻이에요. 주변을 보세요, 아무 것도 안, 안 보이잖아요. 숲인데 나무도 안 보이고, 벌레 소리도 안 들리고, 밟히는 땅도 이상해!”


디자이라는 빽 외치고서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리곤 쿵, 쿵 하고 발로 땅을 찍었다.


“숲은 흙이잖아요! 흙인데, 발에 흙이 없다고요! 도, 돌도 없고. 우리 지금 뭔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지 않아요? 이게 대체 뭐에요?”


“정신 똑바로 차려, 마기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착란은 드물지도 않단 말이야...! 너는, 너는! 이 숲에 올 걸 알면서, 기본적인 학습도 하지 않고 온 거냐...!”


“도련님이 이상한 곳으로 안내한 거라고!”


짜증을 참는다.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디자이라가 저렇게 외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댄다. 게다가 방금 반말한 것 같은데? 시안은 디자이라보다 2살이나 많다.


“이 빌어먹을...”


“그만.”


가만히 듣고 있던 가르기스가 입을 열었다. 그 묵직한 저음은 시안이 내뱉으려던 험한 말을 가차없이 끊어버렸다.


“도련님이 말한 것처럼, 다들 마기에 의한 착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로를 헐뜯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가르기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디자이라를 한 팔로 안아 들었다. 갑작스레 공중에 뜬 디자이라는 비명을 지르면서 두발을 허둥거렸다.


“놔, 놔!”


“신발을 신어라.”


디자이라가 휘두른 손이 가르기스의 뺨을 갈겼지만, 가르기스의 얼굴은 조금도 옆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르기스는 친절하게도 디자이라를 그녀가 벗어던진 신발의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너는... 괜찮은 거냐?”


시안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물어보았다. 착란으로 감정이 널뛰기하는 시안과 디자이라완 달리, 가르기스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근엄하기마 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가르기스는 보란 듯이 팔뚝에 힘을 줘보이며 답했다.


“도련님도 저처럼 건강한 몸을 만드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안을 느끼지 않을 평정심을 가질 수 있으실 겁니다.”


“으음...”


시안은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르기스가 도중에 개입한 덕에, 시안과 디자이라는 더 이상 서로를 헐뜯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었다.


“마물은 괜찮아. 감당할 수 있어.”


시안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이만큼 영향이 강해진 것을 보면, 중추가 머지 않았을 거야. 그쪽은 어제부터 흑사자 기사단이 사냥을 벌이고 있으니... 생각보다 마물이 많지 않을 거다.”


섵부른 추측은 아니었다. 실제로, 주변의 어둠이 깊어질수록 마물과 맞닥트리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만에 하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마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상 때문이겠지. 예를 들어... 디자이라. 네가 혈계식 때처럼 내 등을 노린다거나. 네가 쥔 창으로 말이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세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시안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물론 난 널, 너희를 믿을 거야. 어쨌든 여기까지 함께 왔으니 말이지. 마물에 위험해질 걱정은 마라. 난 너희보다 강하고, 너희를 지켜줄 수 있어. 그러니 너희만 잘 하면 돼.”


“...저만, 잘하면 되는 거겠죠.”


디자이라는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가르기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디자이라의 등을 철썩 때렸다.


“악!”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펴라. 그 불안정하고 나쁜 자세가 정신을 피로하게 만드는 거다.”


“윽...”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자신감이란 그런 것이다.”


가르기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렇게 먼저 길을 열어가니, 시안도 별 말을 하지 않고 따라 나섰다.


“나보다 약하면서 내 앞에 서지 마.”


“예, 도련님.”


가르기스는 시안에게 깍듯이 대답했다.


그렇게 꽤 긴 시간 걸었다. 이 이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주변은 어두웠고, 밟는 지면은 흙인지 땅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디자이라가 질렀던 비명처럼, 왠지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기도 했다.


느껴질 뿐이다. 주변에 나무는 확실히 있다. 눈앞에 무언가가 아른거려서 만져보면 나무였다. ...오히려 그것이 시안 일행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숲인데 숲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만져보지 않으면 정체를 알 수 없다...


“...조금 쉴까?”


시안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면서 내뱉었다. 가르기스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디자이라는 그것은 편히 내색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주변을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어...”


디자이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지금... 저거. 저만 보이는 건 아니죠?”


“너 지금 나 놀려먹으려고 그러는 거지?”


“아니... 아니에요. 저, 저기, 저기를 보세요.”


Comments

Popular posts from this blog

ACER ASPIRE 3 Laptop GTA V Game Test

Acer Aspire 3  Grand Theft Auto V   game test and Review My Acer Aspire 3 Laptop Specification RAM :-   4gb ddr4 usable ram 3.5gb CPU:-     Ryzen 5 2500u mobile GPU:-  Radeon Vega 8 mobile 512 Mb OS:-      Window 10 Usable ram   (1.2-1.5)GB around 2gb take window from ram  Grand Theft Auto v system requirements Minimum RAM:- 4gb ddr4 CPU:- Intel Core 2 Quad CPU Q6600 @ 2.40GHz (4 CPUs) / AMD Phenom 9850 Quad-Core Processor (4 CPUs) @ 2.5GHz GPU:-   NVIDIA 9800 GT 1GB / AMD HD 4870 1GB  OS:-     window 8/8.1/7 64 bit Recommended  RAM: =   8gb ddr4 CPU:=  Intel Core i5 3470 @ 3.2GHZ (4 CPUs) / AMD X8 FX-8350 @ 4GHZ (8 CPUs)  GPU:= NVIDIA GTX 660 2GB / AMD HD7870 2GBon  OS:=   window 8/8.1/7/10 64 bit   Review:- I played Grand Theft Auto V game on my laptop, I found this game, you will know by this post my laptop model no. Acer Aspire 3 A315-41-R95S First of a...
    chapter 237 Lee Mer stood up calmly and brushed the dust off his clothes. kneeling down on one of his knees, he hit the ground with his fist and bowed his head. "Gwangpung Danju, I obey the lord's order." it is unimaginable that he was beaten while playing a prank.   The wave formed concentric circles and covered reality. There was a seriousness in the green eyes, were always playful, but Glenn and Do-goe were not at all surprised. As if he was originally such a person, he accepted it naturally,  "The mission hasn't been finalized yet." "Hey, you should have said that sooner! I don't want to strain my     eyes!"  Lee Mer sighed heavily and stood up he mumbled that it was a loss and scratched her head. "um......." Glenn frowned and flicked his fingers holding the armrest. He seemed to be wondering whether or not to strike a thunderbolt.  ...

Ch2

 살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진이 17살이란 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숙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나이다운 어설픔은 있는 것 같다.  “...유진님. 무도에 쓰이는 마나운용과 마법의 마나운용은 그 궤가 달라요. 저는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을 모르지만, 혹시 그 마나운용법에 영창과 술식이란 개념이 있나요?” “없어요.” “그렇다면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으로 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해요. 마법을 일으킬 마나는 끌어낼 수 있겠지만, 술식으로 마법의 형태를 잡고 영창으로 구동하지 않는다면 마법은 현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험해 보려고요.” 유진은 헤라의 조언을 달게 받았다.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말 될까? 할 수 있을까. 그를 파악하기 위해 도서관의 입문 마도서를 죄다 읽은 것이다.  “별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으음... 일단은 해보세요. 다만, 마나의 흐름이 위험하다면 즉시 개입할 겁니다. 유진님이 부상이라도 입으시면 저는 물론이고 탑주님의 입장도 난처해질 거예요.” “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문 앞에 섰다. 마탑의 깊은 지하에는 수많은 연구동들이 있다. 유진은 한 달 동안 사용해 온 연구동의 문을 열었다. 안은 제법 넓다. 지하에 이 정도 크기의 연구동이 수십 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고등한 공간왜곡 마법 덕분이다. 놀람은 첫날에 많이 느꼈으니, 유진은 태연히 연구동의 중앙에 섰다.  “할게요.” “네.” 헤라는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슬며시 자기 지팡이를 소환해 양손으로 쥐었다. 만약의 사태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유진은 평온했다.  ‘백염식과 비슷해.’ 세냐의 마법이라기에 유진도 당연히 관심을 가졌다. 서클. 방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백염식은 심장의 별로 마나를 다스린다.  서클은 고리로 마나를 다스린다.  백염식은 경지가 오를 때마다 별이 분열한다. 서클은 경지에...

Ch20

  더는, 유진 일행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유폐의 마왕이 ‘다음’을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세상에 희망을 걸 때. “……하하.” 드디어 뜻대로 웃음이 나왔다. 유폐의 마왕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에 대한 시험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유진과 동료들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비록 이렇게 된 것이 유폐의 마왕이 상정하지 못한 변수, 발자크 루드베스의 배신과…… 누아르 제벨라의 잔재의 도움이 있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변수를 사랑한다. 그가 보내온 억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변수를. 멸망으로 수렴할 뿐인 운명을 흔드는 변수를 사랑한다. 변수는 유폐의 마왕에게 치명적일수록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지금의 시대는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마왕에 맞서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충천해 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절망하지 않고, 반항 의지를 박탈할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꿋꿋이 나아갔다. 몇 번이나 권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힘을 보여주며 절망을 강요했다. 포기할 것을,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 영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도 말해주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죽음이 두려워 망설이거나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다. 바라던 절망을 줄 수 없다. 힘을 확인했다. 저들은 기어코 베르무트마저 구하고 말겠다는 욕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끝을 내도 좋지 않은가. “폐하!” 엎드린 유폐의 마왕에게 마족들이 다가왔다. 판데모니엄에 잔류한 마군의 후발대다. 그 목소리와 발걸음에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유폐의 마왕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전쟁 승리 후 대륙을 무차별로 폭격하기 위해 개조한 전투 요새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유폐의 마왕을 추락시킨 공격이 판데모니엄을 휩쓸어버리기도 ...

Ch11

 “헛소리 말고 가서 자라.” “이익…… 본녀가 친히 널 걱정해주는 것인데……!” “네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잖아.” “보, 본녀가 왜 무서워한다는 거냐? 본녀가 흑룡공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다. 구, 굳이 무서운 것을 꼽자면…… 그…… 흑룡공이 널 한입에 잡아먹는 것이 무섭구나.” 악몽에 대한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산 채로 무언가에게 삼켜지는 악몽. 라이미르아는 떨리는 몸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음…… 만약…… 만약에 말이니라. 흑룡공이 널 꿀꺽 삼키려 한다면, 본녀가 용기를 내서…… 음…… 흑룡공에게 널 삼키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겠노라.” “이상한 말 하네 또.” “계속 들어라……! 그러니까, 음, 흑룡공을 죽이려 드는 네가 죽지 않게끔, 이 용공녀가 직접 간청하겠단 말이니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너를 본녀의 시종으로나마 목숨을 부지하게끔 해줄 것이니라.” 평소라면 라이미르아의 헛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고 홍옥을 한 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과,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만약에 말이니라. 보, 본녀가…… 무언가에게 삼켜지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널 그 무언가의 아가리에서 끄집어 내주마.”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로서는 그 무언가가 대체 무언지를 모르겠지만.” “보…… 본녀도 그런 것은 모른다.” “네가 와작와작 씹혀서 죽으면 어떡하고?” “끔찍한 말은 하지 말거라!” 라이미르아가 빽 고함을 질렀다. “어쨌든, 이건 너와 본녀의 약속이니라. 알겠느냐?” “그래, 그래.” 별것 아닌 대답이지만 라이미르아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라이미르아가 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자, 유진의 망토 틈 사이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메르와 눈이 마주쳤다. “흠. 저렇게 부르니 거절할 수가 없느니라.” 라이미르아는 총총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망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악!” 들어간 즉시 망토 사이에서 라이미르아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 건방진 애새끼. 네가...

Ch1

 프롤로그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쪽팔려 미칠 것 같은 일이지만. 나는 정말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그렇게 착각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남들보다 실력이 느는 것도 빨랐다. 하지만 쉬운 것은 처음까지. 처음에는 남들보다 빠르게 늘었어도, 도중부터는 남들처럼 늘어져 버린다.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럴 수도 있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잖아.  나는 할 수 있어. 천재니까. 결국에는 알고 싶지 않던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철부지의 우스운 착각을 깨부숴준 것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천재와 만난 덕분이었다. 자기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던 우물 안 개구리. 내가 나의 작은 우물 안에서 우월감에 취했을 때. 진짜 천재는 이미 넓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천재가 싫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남도 당연히 할 수 있단 듯이 지껄이는 얘기를 듣다보면 살의가 치솟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건, 지보다 못난 놈을 무시하려 뻗대는 것이건.  여하튼, 들으면 좆같은 기분이 든다. ‘질투하는 건가?’ 질투는 씨발아. 네가 말을 좆같이 했잖아. 그래서 나도 좆같이 굴었는데 뭔 놈의 질투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냥... 네가 안타까워서.’ 안타까워? 뭐가?  ‘조금 더 노력하면...’ 네가 뭘 안다고 노력 운운하는 거냐.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야, 나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네 기준이 존나게 높은 거야. 어떻게 모든 사람이 너처럼 할 수 있겠냐? 네가 천재라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너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알겠냐?  난 너처럼은 못해. * “꺼져.”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가슴에 뚫린 구멍. 그 귀한 엘릭서를 들이 ...

Ch13

 오르투스의 위치를 특정했다. 거기서부터는 모든 것이 간단했다. 일행은 관측병과 경계병의 눈을 속이고서 오르투스가 있는 방의 문 앞에 도착했다. 셋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문을 열었다. 오르투스 하이만. 그는 집무용 책상 너머에 앉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손에 쥔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적고 있던 모양이다. “음?” 예고 없이 문이 열린 것이다. 오르투스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3명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3명. 누구인지는 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다른 배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이곳에? 아니, 무언가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예고는커녕 노크조차 하지 않고 들어온 이유는 대체? 문을 닫는 남자…… 도 알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 잠깐, 유진 라이언하트? 키옐에 있다던 그가 왜 이곳에, 카르멘과 함께 있는 것인가? 사흘 전에 승선한 라이언하트는 3명뿐.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 그 외에 3명의 몸종이 더 있기는 했지만 그중에 남자는 없었다. 그리고…… 저 여자는 누구지? 평범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보라색 머리카락. 방긋방긋 웃고 있는 녹색 눈동자. 손에 든 마법지팡이…… 마법사? 현명한 세냐? “대체 무슨……?” 여전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키옐에 있을 유진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가 이곳에 있는 것. 그리고 카르멘이 저들을 데리고서, 이 늦은 밤에 말도 없이 찾아온 것. ㅡ잠깐. 말도 없이 찾아왔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이 배, 라베르시아는 마법결계가 씌워져 있다. 결계에 누군가가 접촉한다면, 무조건 오르투스와 마이스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다.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결계가 돌파되었다. 그로도 모자라서, 방문 앞에 올 때까지. 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저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었다 한들, 저만한 존재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