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라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손가락을 뻗었다. 시안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래도 저 멍청한 계집애는 본가의 차기가주님이 아직도 귀신을 무서워하는 구나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건 진즉에...’
가리킨 방향을 보고서.
시안의 표정이 굳었다. 함께 돌아 본 가르기스의 눈도 부릅 뜨였다. 가르기스는 홱 손을 뻗어 시안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시안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빨랐다.
“도련님!”
가르기스가 고함을 지른다.
시안의 귀에는 그러한 고함이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폭발적으로 치솟은 백색 불꽃이 시안의 몸을 휘감고, 갈기를 흩날렸다.
‘시엘.’
하나 뿐인 동생. 시안의 금색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그 동생이, 시커먼 어둠 한복판에 매달려 있다. 몸은 보이지 않고 머리만 쏙 내밀고서,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에 눈을 감고 있다.
그 광경은 시안으로 하여금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을 잡아먹는 마물은 드물지 않다. 아니, 모든 마물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개들 중에는 잡아먹은 인간의 시체를 걸어놔 영역을 표시하는 끔찍한 놈들도 있다.
머리만 남기고 잡아먹혔나.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시안은 고함을 지르며 시엘을 향해 뛰어올랐다.
ㅡ콰앙!
이성은 잃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시안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그래서 징조없던 기습에서 대응이 가능했다.
‘뭐야?’
시안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휘둘렀던 검을 보았다. 검은 점액 같은 것이 검신에 달라붙어 있었다. 공격은 그것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전면의 어둠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시안을 향해 쏘아졌다.
베어선 안 된다. 시안은 즉시 판단하고서 왼팔을 들었다. ㅡ철컥! 왼쪽 팔뚝을 감싼 견갑이 갈라지며 방패가 되었다.
게돈의 방패. 이 방패는 부딪친 모든 공격을 허무공간으로 보내버린다. 사기적인 성능을 가진 방패지만 만능은 아니다. 가진 마나로 감당할 수 없는 공격은 완전히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
ㅡ우우우!
공간이 일그러진다. 마나가 꽤 빠져나가긴 했지만, 정체모를 공격을 허무공간에 보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시안은 땅에 내려서고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살아있어.’
시안은 시엘 쪽을 힐긋 보았다. 얼굴에 핏기가 없긴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숨은 쉬고 있다. ...그러면 되었다. 시안은 다시금 이성을 다잡고서, 앞을 노려보았다.
“...누구냐? 마물? 아니면... 사람이냐?”
“나야.”
돌아 온 대답에 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오드 형님?”
“응.”
목소리는 들리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왜 시엘이 저렇게 매달려 있고, 이오드가 공격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시안은 자신의 감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그 분노에 동조하듯이, 시안을 휘감던 불꽃이 그 크기를 부풀렸다.
“라이언하트의 적자인 네가... 정말 미쳐버렸구나! 아버지가 널 얼마나 변호하였는데...!”
“쌍둥이는 쌍둥이구나. 어쩜 시엘과 그리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이오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쿡쿡 웃었다.
“이오드...! 네가 저지른 죄에 스스로 떳떳하다 느낀다면, 숨어있지 말고 나와! 이 빌어먹을 개자식아!”
“내가 나갈 필요가 없어.”
끼긱... 끼기긱. 이오드는 붉은 피로 바닥에 문양을 새기면서 중얼거렸다.
“난 싸움을 좋아하지 않거든.”
“개소리 집어 치...”
쿠웅.
등 뒤에서 들린 소리. 시안은 움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디자이라의 모습이었다.
그 옆에. 가르기스의 거구가 쓰러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시안은 칼자루를 꽉 쥐고서 내뱉었다.
시엘을 구하고 도망칠 수 있나? 그럼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는 버려야 하나? 아니, 애당초 지금 상황에서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당장 급한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지 않은가. 그러니 일단은 혼자 도망치는 것을...
길게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시안은 억지로 생각을 끊어내고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시엘, 가르기스, 디자이라. 셋을 한꺼번에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차기 가주가 동생을, 가솔을 버리고 도망친다고?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니 이 돌진은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헥토르!”
시안은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헥토르 라이언하트.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들었다.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하는 것은 훨씬 힘든데.”
그래도 해야 한다. 헥토르의 몸이 확하고 낮아졌다. 시안이 휘두른 일검, 그 아래를 헥토르가 파고든다. 검의 궤적이 도중에 뒤틀렸다. 헥토르는 제 어깨로 떨어지는 검을 쫒으며 눈을 빛냈다.
파앙! 헥토르의 양손이 검신을 붙잡았다.
‘검강을 잡았다고?’
시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박수치듯 모은 손, 잡힌 검은 단단히 물려서 빠지질 않는다. 시안은 급히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헥토르는 시안을 놓치지 않았다. 시안이 두 걸음 물러서니 헥토르는 네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시안과 헥토르의 몸이 겹쳐졌다. ㅡ쩌엉! 시안이 몸에 두르고 있던 오러실드가 박살났다.
“커윽...!”
시안의 몸이 앞으로 굽혀졌다. 쩌적... 쩌저적! 명치에 박힌 주먹이 갑옷을 으스러트린다. 뻐억! 왼쪽 팔꿈치로 시안의 등을 한 번 내리 찍으니, 시안의 눈이 뒤로 넘어갔다.
“휴우.”
헥토르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앞으로 쓰러진 시안을 어깨에 둘러메는데 양손이 쓰렸다. 힐긋 본 양손이 피에 흠뻑 젖어있었다.
“과연, 본가의 도련님.”
헥토르는 빙긋 웃으며 피범벅인 손을 쥐었다 폈다. 빠르게 제압하기 위해 무식하게 나선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이렇게 손이 다칠 줄이야. 피를 흘린 것이 얼마만이더라? 헥토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둠을 향해 다가갔다.
“아직 오래 걸리나?”
“오래까지는 아니지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흠... 그걸 자네 역량으로 조절하는 것은 무리겠지?”
“하하... 제게 그것이 가능했다면... 당신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겠죠.”
“그도 그렇군. 기도라도 간절히 해보는 건 어떤가? 그럼 보다 간단한 방법을 일러줄 수도 있잖아.”
“기도는 신이나 마왕에게 하는 것이죠.”
“끙...”
헥토르는 고개를 저으며 시안을 내려 놓았다.
“그럼, 다녀오지.”
“어디에?”
“유진 도련님이 오고 있어.”
끼긱... 끼익.
문양을 새기던 이오드의 손이 멈췄다.
“제압할 수 있습니까?”
“죽이는 것이 쉽지.”
“가능하면 제압을.”
“노력은 해보지. 시안 도련님은 여기서도 제압이 가능했지만, 유진 도련님을 여기서 제압하는 건 힘들 거야. 자칫하면 너도 휘말릴 수 있거든.”
“제가 도와드릴 것은?”
“기도... 아니, 부탁이나 해.”
헥토르는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다른 대장들이 방해하지 않도록 말이야.”
사냥
“헥토르님?”
유진은 땅에 내려서며 앞을 보았다. 헥토르 라이언하트. 그가 어둠 속을 배회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진?”
뒤에서 말을 거니, 헥토르가 놀란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그의 표정에 어린 당혹감을 읽었다. 무슨 일인가 묻기 전에, 먼저 헥토르를 살펴보았다.
헥토르는 혼자였다. 그건 신경 써야 할 문제였다. 데콘 라이언하트.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왜 혼자 계십니까?”
“내 불찰이야.”
헥토르는 빠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붙잡아야 했는데... 데콘은 숲이 깊어지고, 마물이 난동을 부리는 것에 겁먹고 도망쳐 버렸어.”
있을 법한 일이다. 고작해야 18살 꼬마 아닌가. 마물 사냥은 처음일 거고, 주눅이 잔뜩 들어있던 모습을 보건데 실전경험도 많지 않을 거다. 실력은 말할 것 없이 부족할 거고.
짙은 마기는 정신의 착란을 일으킨다. 정신력이 약한 놈일수록 착란은 빠르고 격렬하다. 공포, 그를 이겨내지 못하고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은 애송이에게 어울릴 결말이다.
“도와줄 수 있겠나?”
헥토르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유진은 곧장 답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어둡다. 짙은 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촘촘한 어둠은 정령의 농간이리라.
“...그 정도야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
“고맙네. 숲이 원체 넓으니, 나 혼자 찾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말이야.”
헥토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이 숲, 무언가 이상해. 나도 루하르에서 지내면서 마기가 짙은 곳에는 몇 번인가 가봤지만... 내가 가보았던 곳 중에 이곳만큼 불길하고 어두운 곳은 없었어.”
“뭔가 더해져 있나 보죠.”
“더해져 있다고? 누군가 농간을 부리고 있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하...! 그거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대체 누가, 라이언하트의 최정예인 흑사자 기사단의 소굴에서 농간을 부릴까?”
“간이 부은 놈.”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정신머리가 돌아버린 놈.”
“그도 그렇군. 제정신이 아니고서는 시도도 하지 않을 테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자아, 이제 어쩐다... 정면에서 싸우고 싶지는 않다. 상대는 유진 라이언하트.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로 라이언하트 최고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 놈이다.
헥토르도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는 숱하게 들었지만, 저만큼의 극찬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유진에 대한 흥미는 있다. 허나 그 흥미가 헥토르가 해야 할 일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이상적인 것은 기습. 오래 끌지 않고, 기왕이면 일격으로. 그 편이 서로 좋아. 힘도 별로 안 들고.’
같은 기습이라도 제압하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 섣불리 공격할 수도 없는 노릇. 헥토르는 유진보다 조금 뒤쪽에서 걸으며, 유진의 등을 노려보았다.
‘...허...’
놀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헥토르가 보기에, 유진에게는 정말 아무런 빈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걸음을 멈춰서 제자리에 서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앞을 걷고 있을 뿐인데... 마치 정면에서 검을 빼들고 있는 것과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만약... 정말로 누군가가 농간을 저지르고 있다면. 누구일 거라고 생각하나?”
“누가 간이 붓고, 정신머리가 나갔을 지를 추측해 보란 겁니까?”
“그렇지. 역시 헬무드의 마족들일까? 아니면 흑마법사거나... 흐음, 사마르의 야만족들일 수도 있겠어. 어쩌면 나하마의 어쌔신. 자네도 알지? 키옐과 나하마의 정세가 그리 좋지 않아.”
“흐음, 어느 쪽이든 저지를 법한 놈들인데... 아니겠죠.”
“아니라고? 그럼 누구라고 생각하나?”
“너요.”
방금 뭐라고 한 거지? 헥토르는 유진이 내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데다 너무 짧기도 했고,
목소리가 들려 온 순간.
헥토르의 발밑이 폭발했다. 오히려 목소리보다 저 폭발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헥토르는 즉시 위로 뛰어오르며 오러실드를 일으켰다.
어느새 유진은 몸을 돌리고 헥토르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 시선. 뒤늦게 ‘말’을 이해한 헥토르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 제 행동에 단 한 점의 의심없이 확신을 갖고, 대화하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쓰러트려 굴복부터 시키려는 눈.
“...좋은데.”
헥토르는 뒤로 몸을 젖히며 웃었다. 대화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주제, 재미난 성격, 그런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이곳이 카페나 주점이라면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 평생 유진과 그러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눌 일은 없겠지. 헥토르는 그 사실에 작은 아쉬움을 느꼈다.
‘흥미가 있다는 것은 진심이었는데 말이지.’
ㅡ화륵.
새빨간 색의, 불꽃 같은 마나가 헥토르의 몸을 휘감는다.
“...일단 물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알았지? 살의나 적의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는데.”
“냄새.”
유진이 대답했다.
“피냄새에 금속기름 냄새가 섞였다.”
“고작 그것 뿐?”
“충분하지. 그 기름 냄새는 본가에서 매일 맡던 것이거든.”
맙소사. 헥토르는 웃음을 흘리며 제 양손을 힐긋 쳐다보았다. 시안의 검을 붙잡았을 때의 상처. 피는 이미 멎어있고... 기름냄새? 헥토르도 감각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지만, 피냄새에 섞인 기름냄새까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이거 참... 깨끗하게 닦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본가를 등신으로 보지 마.”
유진은 손가락을 들면서 말했다.
“라이언하트는 무가(武家)고, 본가는 그 중심이다. 무기를 손질할 때 바르는 기름조차도 최고급에, 배합해 넣은 향은 맞춰제작한 세정제를 쓰지 않고선 지워지지 않아.”
상처 입히고 놓친 사냥감을 쫒기 위해, 암살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본가의 일원은 그 향부터 기억한다.
“...그것 뿐?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을 텐데? 누구한테, 왜 베였는지...”
“괜찮아.”
...파직! 유진의 손끝에서 전류가 튀었다.
“널 반 죽여 놓고 물어볼 거니까.”
마나가 번쩍였다.
꽈지직! 뒤틀리며 쏘아진 빛이 헥토르가 서있던 곳을 꿰뚫었다. 저게 대체 뭐지? 마법? 급히 피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저런 식의 공격은 처음 보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영창도 하지 않고 마법을... 아니, 마법이 맞기는 한가? 마나를 검강으로 만들고, 그냥 쏴댔을 뿐인 것 같은데?’
그런데 저렇게 빠르고 강하다고? 어쨌건, 직격당해서는 안 된 다. 판단을 끝내고 움직였다. 허리를 훑어 내려간 양손이 각각 검을 쥔다.
‘쌍검.’
한손으로 검 하나를 휘두르는 것과 양 손에 검 하나씩 잡고서 휘두르는 것은 비교할 바가 안 된다. 뛰어난 실력의 검사라 해서 쌍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지간한 숙련도와 센스가 아니고서는 다룰 수 없는 무기지만. 잘만 다뤄낸다면 두 자루의 검이 아니라 수십, 수백 자루의 검을 상대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무기가 된다.
‘길이가 달라.’
오른손의 검은 반신만큼이나 길고, 왼손의 검은 그보다 훨씬 짧다. 균형도 맞지 않을 무기... 유진은 입가가 일그러졌다.
‘제 맘대로 거리를 가지고 놀겠다. 이기적인 새끼.’
누굴 상대로?
유진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헥토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쌍검을 휘두르며 응수했다.
망토 안에서 뽑혀나온 위니드가 은빛을 터트렸다. 쩌엉! 충돌에 마나와 바람이 폭발했다. 헥토르는 미끄러지듯 발을 움직이며 왼손의 검을 휘둘렀다. 장검을 휘두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거리지만, 그보다 짧은 단검은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다.
“허.”
가로막혔다. 헥토르의 눈이 얇게 떠졌다. 어느새 유진도 왼손에 검을 쥐고 있었다.
쌍검과 쌍검.
“흥미로워.”
헥토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양팔을 들썩였다. 물결치듯 휘몰아친 검격,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부릅뜬 두 눈이 헥토르의 검로를 읽는다. 그득 섞어 놓은 허초, 같잖다. 무엇이 가짜고 진짜인지 구분하는 것은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말도 안 돼.’
검이 뚝뚝 끊어지고 있다. 흘러가야 할 곳에는 이미 유진의 검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공격의 허리가 끊긴다. 달리 이으려 하면 역으로 닥쳐온다. 공격과 반격을 번갈아 나눈다. 그건 헥토르의 의도가 아니었다. 고작 몇 번 검을 나눴을 뿐인데, 헥토르의 검은 유진에게 완전히 끌려 다니고 있었다.
‘이 정도라고?’
난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만큼 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리하면 제압할 수 있고, 죽이는 것이라면 보다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준비가 부족해. 죽이는 것도 힘들어.’
그렇게 판단한 순간, 헥토르의 공격이 바뀌었다. 작정하고 덤벼도 죽이는 것이 힘들단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제압을 목적으로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더욱 빠르고, 날카로우며, 치명적으로. 감탄해 줄 만한 기교이긴 했다. 전생에도 이만큼 쌍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검사는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쌍검이 비주류 무기이기 때문이다. 쌍검이라는 특징이 없다면?
‘강하긴 해.’
불과 몇 달 전이라면 고전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고전할 이유가 없었다. 기술의 완성도? 비교하는 것이 모욕이다. 유진의, 하멜의 기술은 300년 전에도 베르무트 외에 견줄 상대가 없었다. 경험? 노련함? 그것 또한 마찬가지.
지금으로서는 아직 하멜의 모든 것을 사용할 수는 없다. 백염식은 뛰어난 마나수련법이지만, 고작 5성의 경지로 전생의 힘을 재현해낸다면... 솔직히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하지만.
백염식이 5성이 되면서, 4성일 적보다 크게 힘이 늘었다. 헥토르 정도의 상대는 이그니션을 쓸 필요도 없다.
격의 차이. 헥토르는 빠르게 그것을 인정했다. 기술로 앞서지 않는다. 힘으로 앞서는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지.’
저쪽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는데. 혼자 힘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헥토르는 숨을 훅 몰아쉬며 왼손의 검을 놓았다.
키이잉! 헥토르의 손을 벗어난 검이 새빨간 불꽃에 휘감겼다. 그리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스스로 움직여, 유진에게 쏘아졌다.
마나를 정밀하게 조작해서, 손을 대지 않고 검을 움직이는 것이다. 유진의 입장에서는 의표를 찌르는 것 외에는 딱히 기능적이지도 않은 잡기술일 뿐이었다. 저 지랄을 하느니 손으로 직접 검을 휘두르는게 훨씬 빠르고 강하다.
이렇게.
꽈앙! 위니드가 단검을 박살내고, 담겼던 마나가 눈부신 빛이 되어 터졌다. 헥토르는 유진의 눈이 잠시 멀어졌길 바라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ㅡ화아악! 돌풍과 함께 유진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등뒤에서 그를 느낀 헥토르는 혀를 차며 몸을 낮췄다.
유진은 새빨간 불씨를 흘리며 달려가는 헥토르의 등을 노려보았다.
파직! 번개불꽃이 퍼져나갔다. 유진은 망토 속에서 아카샤를 쥐었다. 무수히 많은 마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에어로블래스트.]
망토 안에 들어가 있던 메르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동시에 유진의 손이 앞으로 나아갔고, 술식이 완성되었다.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 그가 일으킨 바람이 마법에 섞였다.
6서클의 공격마법.
하지만 그 위력은 정해진 서클을 아득하게 웃돌았다. ㅡ꽈아앙! 압축된 공기와 바람이 일점에서 터진다. 헥토르는 시뻘건 검강을 휘둘러 마법을 양단하려 했지만, 마법의 위력은 헥토르의 상상을 아득하게 웃돌았다.
콰르르릉! 어둠이 요동쳤다. 한참 뒤로 날아간 헥토르는 어질거리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맙소사... 이 정도 되는 공격마법까지 무영창으로...?’
방어는 했다. 하지만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저리다. 바람 계열의 공격마법이었을 텐데? ...맙소사. 헥토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목을 더듬었다.
“아티펙트군.”
망토가 바람에 펄럭거린다. 유진은 높은 곳에서 헥토르를 내려보며 아카샤를 뻗었다.
“디스펠 계열 마법이 2, 카운터 계열 마법이 3, 강화계열 버프 마법이 5... 방어 계열 마법은 7? 사치스럽기도 하군.”
17개의 마법이 내장된 아티펙트라니.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보물이다.
“저번에 봤을 때는 없었는데... 비장의 한수인가 봐?”
“날 몇 번이고 구해 줄 생명줄이지.”
“몇 번이고 구해주지는 않을 거야.”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카샤에 마나를 집중했다. 빠직... 빠지직...! 번개불꽃이 한 점에 모인다. ...착각이 아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마나에는 번개가 실려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헥토르는 저린 몸을 일으켰다.
“...괜히 왔어.”
헥토르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오른손의 검을 힐긋 보았다. 방금 마법과 충돌한 여파로, 검은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그 순간, 유진의 마법이 쏘아졌다. 수십 다발의 빛줄기가 공간을 꿰뚫는다. 그건 단어 그대로였다. 공열난광(空裂亂光). 이 마법은 공간에 구멍을 관통하며 궤적을 속이고 덮친다.
콰콰쾅! 헥토르는 발을 뒤로 끌면서 박살난 검을 휘둘렀다. 미처 막지 못하는 마법은 목걸이의 방어에 맡긴다. 일단 직격당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렇게 방어에 열중하며,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공간을 관통해 튀어나오는 빛을 상대하는 것은 까다롭지만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진이 개입하니 끔찍해졌다. 유진은 빛의 사이사이를 누비면서 헥토르에게 검을 쑤셔넣었다. 헥토르가 할 수 있는 것은, 치명상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피투성이가 되는 것뿐이었다.
[어떤가?]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헥토르는 감정을 표정에 내색하지 않고서, 왼쪽 손목의 팔찌에 집중했다.
‘죽겠습니다.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요. 20살이 아니라 200년 수행한 고수와 싸우는 것 같다고요.’
[그러게 말했잖아. 그 녀석은 제노스 라이언하트와의 대련에서 기술로 우위를 점했다고.]
‘대체 누가 그 말을 사실이라 믿겠습니까? 제노스 경이 후배를 상대로 적당히 양보해줬다고 생각하지...’
[흠, 거짓말을 하는 군. 네가 그리 알아듣지는 않았을 것 아냐? 그냥, 네 흥미를 겸해 한 번 싸워보고 싶었던 거겠지.]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좀 도와주면 안 됩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여기서 죽을 겁니다.’
[왼쪽으로 여섯 걸음. 뒤로 아홉 걸음 물러서라.]
‘...그 뒤에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뒤로도, 옆으로도 더 물러서지 말고 정확히 그 자리.]
헥토르는 지시대로 행동했다. 어차피 걸음은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으니, 조금 옆으로 움직이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지정한 위치. 헥토르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자 그럼... 으음... 마음속으로 열을 세고, 뛰어 올라라.]
그 지시를 이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는 유진의 공격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죽겠...’
1, 2...
‘정교해. 하얀 송곳니에서도 이만큼이나 검을 쓰는 놈은 드물...’
5, 6...
‘아니, 없다. 검이 무겁고, 빠른 놈은 있어도. 이만큼 정교한 놈은 없었어. 마치 이쪽의 생각을 읽는... 수를 앞서고 있다. 어떻게?’
8, 9...
헥토르는 즉시 뒤로 뛰어 올랐다. 유진은 그런 헥토르를 쫒아 고개를 들었다.
바닥이 시커멓게 물들어간다.
[유진님?]
겁에 질린 메르의 목소리.
유진의 머리카락이 위로 곤두섰다.
“개자식이.”
미치광이 같은 분노와 살의를 느끼며, 유진은 욕설을 내뱉었다.
검은 송곳들이 바닥에서 치솟아 올랐다.
사냥
헥토르는 멀찍이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무 것도 없던 땅에서 수백, 수천이 넘는 송곳이 치솟았다. 그 송곳은 시커먼 색이었지만, 어둠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송곳의 몸뚱이는 검은 각질에 뒤덮인 살덩이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지는 마.]
머릿속에 전해지는 목소리는 들뜸이 가득했다.
[아무리 너라도 저것에 가까이 가선, 몸이 썩어 문드러져 죽어버릴 테니.]
“...생사는 확인하는 것이?”
[볼 것도 없겠지만, 정 확인하고 싶으면 가서 해 봐. 다만 헥토르. 아무리 너라도 맨몸으로 저것에 가까이 가면 몸이 썩어 문드러져 죽을 거다.]
그 말에 헥토르의 얼굴이 구겨졌다.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도 아닐테고 그럴 이유도 없겠지만, 일단 확인은 해봐야 했다. 헥토르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서 앞으로 던져보았다.
ㅡ파사삭! 가시에 닿는 순간, 돌멩이가 검은색으로 물들더니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걸 직접 보고 나니 가까이 갈 생각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헥토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죽었겠군.”
[어차피 제물은 충분하잖아. 저 녀석에게 집착하는 것은 이오드의 사심 아닌가?]
“뭐... 집착할 만한 인연이긴 하니까. 아니면 제물로서의 가치 때문인가?”
[흠. 부모나 형제같은 혈육이 제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는 들었지만... 유진 라이언하트는 엄밀히 말해서 이오드의 혈육은 아니잖아?]
헥토르는 그 목소리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몸을 돌렸다. 생포해서 데려오지 못한 것에 이오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를 낼까? 아쉬워할까. 헥토르는 이오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텅 비어서 결여된, 아니, 그러한 빈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채워 넣은 존재. 헥토르는 이오드란 존재에 흥미가 있었지만, 그를 이해하고 정상적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헥토르가 자리를 떠나고.
그 후로도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님...?]
메르는 불안과 걱정을 가득 느끼며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침묵에 메르는 몸을 덜덜 떨었다.
[괜... 괜찮으신 것, 맞죠?]
다시 한 번 더 묻지만, 이번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똑같았다. 망토 밖으로 고개라도 내밀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 ‘가시’는 직접 닿지 않고 범위에만 있어도 존재를 부식시킨다.
하지만.
유진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월광검.
이 강렬한 부식저주도 월광검을 침범하지는 못한다. 유진은 몸에 바짝 붙인 월광검과, 은은한 달빛을 노려보았다.
왼손의 팔찌. 그건 부서져 있었다. 땅 아래에서 가시가 솟구치는 순간ㅡ 유진은 고민하지 않고 즉시 팔찌를 부수고, 월광검을 뽑았다.
그렇게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은.
유진이 이 공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격이 포착하는 거리는 아득히 멀다. 위치와 좌표만 파악하고 있다면, 수십 킬로 밖에서도 가시를 일으키게 만들 수 있다.
‘...그만큼 잘 사용하지는 못하겠지.’
몸에 부상은 없다. 머릿속에서 메르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메르도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계속 괜찮느냐고 묻고 있다.
이유는 안다. 메르가 염려하는 것은 육체가 아닌 정신이다. 유진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다. 반대로 머리는 얼음을 처넣은 것처럼 차갑다. 왼손이 욱신거리기에 힐긋 보니, 꽉 말아쥔 손톱이 손바닥을 찢어 피를 내고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래.”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손바닥의 피를 털었다.
‘양단하지 못했다.’
본래 하려 했던 것은, 월광검을 써서 치솟는 가시를 모조리 베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것까지는 무리였다. 완전한 힘을 가진 월광검이라면 모를까, 지금 유진이 지닌 월광검은 칼자루에 파편 하나 더해진 힘이었다.
‘...힘이 부족한 것은 서로 똑같았단 말이지.’
몸이 다치지 않을 만큼의 범위는 벨 수 있었다. 추가로 들어 온 공격도 없었다. 지금 천천히 살펴보니, 가시의 형태나 연계도 조악하다.
‘하긴.’
유진은 월광검을 들었다.
‘마왕도, 마족도 아닌 인간은 이 정도가 한계겠지.’
참혹의 마왕이 마창 루인토스를 내리 찍었을 때.
마왕성 전체가 가시밭이 되었다. 그 갑작스런 공격은 몇 번이고 유진을, 하멜을 죽일 뻔 했었다.
참혹의 마왕이 죽고, 베르무트도 사라진 지금.
마창 루인토스의 주인은, 원로원주 도이네스 라이언하트.
유진은 빠득 이를 갈면서 월광검을 휘둘렀다. ㅡ파아앙! 월광검이 흩뿌린 빛이 수많은 가시를 지워버렸다. 유진은 몇 번 더 월광검을 휘두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팔찌는 부쉈으니, 더 이상 내 위치에 정확히 가시를 세울 수는 없을 거야.’
참혹의 마왕은 가진 마안의 힘으로 좌표지정 없이 가시를 세워댔지만, 도이네스는 그러지 못할 거다.
‘...제물로서의 가치.’
헥토르가 중얼거렸던 말.
‘뭔 짓거리를 하길래 제물이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무조건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란 거지.’
솔직히 도이네스가 마창의 권능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애당초 마왕의 무구를 자유롭게 쓰던 것은 베르무트뿐이었고...’
유진도 전생에 마왕의 무구를 쥐어본 적이 있었다.
손으로 잡은 순간, 피가 시커멓게 물들고, 정신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연속해서 쓸 수 있는 힘이 아니야.’
자기합리화일 뿐. 유진은 자신이 신중하지 못했단 것을 인정했다. 도이네스가 흉수라고 의심은 했지만, 놈을 ‘마창의 주인’이 아니라 ‘원로원주’로만 상정했다. 설마 베르무트의 까마득한 후손이 마창의 권능까지 끌어낼 줄이야.
[...어떡하실 건가요?]
메르가 불안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둠의 정령술사에 원로원주까지... 이 숲은 너무 위험해요. 유진님이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적의 진영에서 싸우는 건...]
“제물이라고 했어.”
메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헥토르는 시안을 붙잡았다고.”
[...]
“시안뿐만이 아니지. 어쩌면 시엘도 붙잡았을 지도 몰라. ...가르기스나... 다른 사람들도 잡혔을 지도 모르고.”
유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시안과 시엘만 멀쩡하면 괜찮다... 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진님은 입도 더럽고, 태도도 얄미운데 말이에요. 심성은 악독하지 않으시네요.]
“조용히 해.”
[하긴, 심성이 악독한 사람이었다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마왕과 싸우지도 않겠죠. 300년 전이 끔찍한 세상이었다고 해도, 유진님의 실력이라면 그런 세상에서도 앞가림이나 하며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거예요.]
“그 말은 틀렸어.”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 세상에서 살아남고,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런 세상에서 내 한 몸 편하게 살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뿐만이 아니지. 세냐도, 아니스도, 모론도... 베르무트도. 다 그런 성격이었다고.”
그 말은 유진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당연한 말이었다. 내 한 몸 편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그럴 기회가 있었다.
몬스터에 의해 마을이 몰살당하고, 혼자만 살아남았을 때. 그 기적에 감사하며 조용히 살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 하멜은 복수를 바랐다. 그래서 용병이 되었다. 용병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도 편히 살아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명성이 높아졌을 때. 하멜은 오히려 헬무드로 향하려 했다.
세냐도, 아니스도, 모론도, 베르무트도 그랬다. 놈들은 하려고 든다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거다.
일행의 중심은 베르무트였지만, 그 누구도 돌아가고 싶다, 싸우고 싶지 않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그만하자,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오직 미래를 상상하고 갈망했다. 마왕을 모두 쓰러트리고,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아갈지.
[용사니까요.]
메르는 유진을 설득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이름이 무거워서 싫지만.”
[하지만 유진님. 지금부터 모두를 구하러 가실 거잖아요?]
“구하러 가다니. 그건 조금 틀려.”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대답했다.
“내버려 두면 기분이 나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내가 열이 받아. 난 가만히 있었거든? 그런데 씨발 도이네스 그 늙은이 새끼가 날 조지려고 했잖아, 그치? 먼저 시비를 처걸었다고. 헥토르 그 새끼도 입발린 개구라 쳐대면서 내 뒤통수에 칼 꽂으려고 했잖아.”
[...뭐 그렇긴 한데... 결국 시엘 아가씨랑 다른 분들을 구하러 가는 거잖아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개빡쳐도 맞는 상황이지 않느냐고. 응? 메르 너도 알겠지만, 나는 성격이 좀 좆같고 무식해. 개버릇 남 못준다고, 전생 성격이 남아 있단 말이야. 원로원주? 마창? 씨발 난 월광검도 있고 성검도 있어. 폭풍검에 용격창에 뇌광궁 다 쓰면서 이그니션까지 켜면 내가 못 조질 것 같아?”
유진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월광검을 망토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 유진님은, 솔직하지 못 하시네요.]
“뭐? 나만큼 솔직한 놈이 어디있어? 좆같게 구니까 좆같아서 죽이러 가겠다는데, 불만 없지?”
[제가 뭐라고 유진님에게 불만을 말하겠어요?]
“그럼 괜한 말 하지 말고 얌전히 망토 안에 앉아있어.”
유진은 그렇게 내뱉으며 어둠을 노려보았다. 메르는 유진의 생각을 읽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역시... 이오드님일까요?]
아카샤를 쥐고서 이오드를 보았었다. 놈은 흑마법을 익히지도 않았고, 다른 마법적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아카샤로 볼 수 있는 것은 ‘마법’ 뿐이다.
만약 이오드가 어둠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면, 그건 아카샤로도 간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제물 운운하는 것을 보면 흑마법에 관련 된 무언가를 하려는 거 같은데. 누군지도 모를 제3자가 끼어든 것이 아니라면... 이오드가 관련되어 있겠지.’
혼자서 흑마법에 입문하려 들었을 때와 비교되지 않을 죄다. 제 형제와 방계의 친척을 다수 휘말리게 만들었으니, 가주인 길레이드도 이 문제에서는 이오드를 변호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오드를 죽인다고 해도.’
고맙다며 웃던 이오드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유진은 그때 이오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말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하나 늘었군.”
헥토르는 눈썹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어둠이 꾸물거리는 무. 기괴한 모습으로 뻗어나간 가지에는 ‘제물’이 과실처럼 매달려 있다.
본가의 쌍둥이. 방계의 가르기스, 디자이라. 헥토르가 이곳을 떠날 적만 해도 제물은 전부 4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니아까지 더해져서 5명이었다. 헥토르는 의식을 잃고서 축 늘어져 있는 제니아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데려 온 것은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이오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이곳을 발견하고 덤벼왔어요.”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너잖아.”
“당신과 저 아가씨가 친밀한 관계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헥토르, 당신은 데려오기로 한 제물을 데려오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제가 임의로 제물을 하나 더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도련님.”
헥토르는 제니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뭐... 그럭저럭 친했던 사이인 건 맞지. 꽤 재미난 상대기도 했고. 하지만 그 뭐냐... 저 녀석을 제물로 삼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만큼 친한 건 아니고... 으음...”
헥토르는 잠시 내뱉을 말을 고민했다. 이 복잡한 기분에 어떤 단어가 적절할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미묘한 기분... 음... 그렇군. 죽여도 상관은 없지만, 저렇게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런가.”
“그래서. 제물로 삼지 말아달라는 겁니까?”
“아니, 상관없다니까. 지금 중요한 건 내 기분이 아니라, 도련님이 마법을 ‘잘’ 완성하는 거잖아. 제물이 더해지면 그만큼 마법이 잘 되는 거 아냐?”
헥토르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어둠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완전히 다가갈 수는 없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이 정신을 좀 먹는 느낌이다.
그 기분이 낯설지는 않았다. 북방 루하르. 5년 전부터 헬무드에 문호를 개방한 그 나라에서, 몇 번인가 고위 마족을 만난 적이 있다.
‘...낯설지는 않지만... 접할 때마다 기분이 더럽단 말이지.’
헥토르는 두눈을 얇게 뜨고 어둠 너머를 보았다.
바닥은 붉은 피로 그린 마법진이 빼곡하다. 바닥 뿐만이 아니었다. 벽이 없는 허공에도, 번져가는 피가 마법진을 연결하고 있다.
헥토르는 마법을 익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고위아티펙트를 지니고 다닐 만큼, ‘마법’과의 인연은 있다. 때문에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오드가 그리고 있는 마법진은, 절대로 평범한 마법이 아니다. 4서클인 이오드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저러한 마법진을 구동할 수 없다. 애당초 마법진이라는 것은 깔끔하게 그려낸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위 마법진이라면 그에 합당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구동이 불가능하다.
“멋지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헥토르는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왔군요.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었던 겁니까?”
“길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니 말이지.”
도미닉은 벙긋 웃으며 말했다.
“어둠의 정령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편리하더군. 설마 가문의 치욕이라 불리던 적자가... 저런 고위 어둠의 정령과 계약을 맺다니.”
“계약의 주선은 당신도 알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알고는 있었지. 하지만 난 고작해야 하위 정령과 계약할 줄 알았거든? 설마 무도와 마법에 재능이 없던 적자가... 어둠의 정령과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건 다릅니다.”
어둠 속에서 이오드가 대답했다.
“저는 정령과의 친화력이란 것도 없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정령이 제게 직접 말해준 겁니다. 특별한... 하하... 예,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저 따위 존재와 계약을 맺지 않았을 거라면서요.”
“...특별한 경우?”
“그러니까... 제 경우에는, 혈통의 덕을 꽤 봤다는 겁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제가 버리고 싶다 갈망하는, 이 ‘라이언하트’의 적자란 혈통이... 아무 것도 없는 제가 가진 유일한 특별함이었단 거죠.”
이오드는 그렇게 말하며 앞을 보았다.
가슴이 갈라진 데콘 라이언하트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보고 있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다. 이오드에게 있어서 저 18살 소년은 첫 번째 제물이자, 마법진을 그리는데 필요한 ‘피’를 담은 물감통에 지나지 않았다.
죽은 데콘의 곁에는,
분쇄추 지골라스가 떠있었다. 데콘의 피로 그린 마법진은 분쇄추를 중심으로 퍼져있다. 어둠의 정령의 힘을 증폭시키고, 제물들을 이곳에 오게끔 인도한 ‘주물’이 바로 분쇄추였다.
“...원로원주는 어떻게 된 겁니까?”
“뒤에서.”
도미닉은 태연히 웃으며 답했다.
“가슴을 꿰뚫었지. 아무리 늙었어도, 정면에서 싸우는 건 자신이 없었거든. 분쇄추도 여기 두고 간 상황이고.”
“...죽였습니까?”
“하하... 내 할아버지가 불사의 백사자라 불리기는 하지만, 가슴이 꿰뚫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도미닉은 그렇게 대답하며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그곳에는 시커멓게 말라비틀어진 오른손과, 마창 루인토스가 붙들려 있었다. 도미닉은 마창에 들러붙은 손을 잡아 뜯으며 투덜거렸다.
“할아버지의 손으로 창림(槍林)을 쓰긴 했는데, 한 번 더 쓰는 건 무리야. 난 외팔이 병신이 되고 싶지 않다고.”
“지금처럼 다른 사람의 팔을 잘라서, 그 팔을 통해 쓸 수는 없는 겁니까?”
헥토르는 순수한 호기심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도미닉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헥토르. 반 백 년 마창을 사용해 온 할아버지의 팔이니까 버틴 거지, 다른 팔로는 마창에 닿는 것만으로도 썩어버릴 거다. 내 아버지나 전대 가주도, 마창과 분쇄추를 쥐었던 후유증으로 죽었단 말이야.”
“아하... 역시 그랬던 겁니까. 하지만 원로원주는 50년이 넘도록 마창의 주인이었잖습니까? 도미닉 경도 분쇄추의 주인이고.”
“그래서 나와 할아버지가 특별한 거지. 이제는 할아버지가 죽었으니, 나 혼자만 특별하게 되었지만.”
도미닉은 즐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마창에 들러붙은 원로원주의 손가락을 모조리 뜯어낸 뒤, 깨끗해진 창을 한 바퀴 돌려보았다.
“그래서 도련님. 마법은 언제 완성되는 거지? 정령의 지도는 확실한 거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도미닉 경, 당신이 그를 의심하는 겁니까.”
“나야...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말이지.”
“마법진은 완벽합니다. 이제 시작만 하...”
이오드의 목소리가 멎었다.
“...죽였다고 했잖습니까?”
어둠이 흔들렸다.
“뭐?”
“유진 라이언하트 말입니다.”
“대체 무슨 말이야? 설마 녀석이 살아있다는 건가?”
도미닉도 당황해서 헥토르를 쳐다보았다.
“...시체는 확인하지 못했... 아니, 확인할 수가 없었죠.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요?”
“당연히 확인할 필요가 없지. 대체 누가 창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
도미닉의 외침이 끝나기 전.
겹겹이 중첩 된 어둠에 구멍이 뚫렸다.
잔재
아래로 떨어지면서 두 눈은 앞을 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시커멓고 꿈틀대는 나무에 과실처럼 매달린 사람들.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진은 그들의 얼굴 모두를 확인했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매달려 있다는 것만으로 분노를 느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 꾸물거리는 어둠에 삼켜진 몸뚱이.
제물 운운하던 말을 들었다. 저들 모두가 제물이 되기 위해 저렇게 매달린 것일 터.
나무의 아래.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헥토르와... 흑사자 기사단의 1번대 대장, 도미닉 라이언하트. 유진은 그의 손에 마창 루인토스가 쥐어진 것과, 조금 떨어진 곳에 널브러진 비쩍 마른 팔을 보았다.
그리고 뒤쪽.
이오드 라인언하트. 바닥과 허공에 이어진, 피로 그린 마법진. 죽은 사람은 없다? 틀렸다. 한 명 죽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산채로 가슴이 갈라진 것이리라. 옆에 꺼내놓은 심장과, 피범벅의 단검과, 피비린내와 섞이지 않는 약냄새...
데콘 라이언하트.
유진은 그 18살 꼬마와 친분이랄 것은 없었다. 멀어도 너무 먼 친척. 똑같이 어렸던 혈계식 때에도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며칠 전, 흑사자 성에서 재회했을 때. 대화랄 것도 없는 ‘말’을 서로 주고받은 적은 있다.
그때, 유진은 데콘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읽었다.
대단치도 않은 실력과 별 볼 일 없는 가문. 의욕은 있던 꼬마. 왜 이 사냥에 참가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바꾸거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데콘 라이언하트 본인은 이 숲에서 저런 식으로 죽는 미래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건 뭐지?’
이오드의 뒤편에 떠있는 마법진을 본다. 아카샤의 권능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쇄추 지골라스.’
마법진의 중앙, 살육의 마왕의 무구였던 분쇄추가 떠있다. 아카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고등한 마법에... 분쇄추는 촉매인가? 거기에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유진의 잿빛 머리카락이 위로 곤두섰다. ㅡ화륵! 몸을 휘감았던 불꽃이 더욱 그 크기를 키웠다. 그렇게 푸르게 물들고, 번개가 섞인다.
상황을 이해했다. 자세한 사정 따위는 모른다. 저 셋이 어떤 관계이며, 무엇을 바라고,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 그딴 것은 지금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지금 유진이 해야 할 것은.
저 셋을 병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만 해놓으면 이 복잡하고 엿 같은 상황은 대부분 해결 된다.
‘이그니션은 안 돼.’
이그니션은 뒤가 없는 기술이다. 증원이 더 숨어 있을 지도 모르는데다, 쓰러졌을 때 돌봐 줄 우군이 없는 상황에서는 사용을 주의해야 한다.
“...진짜 살아있었군.”
도미닉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팔찌로 알아낸 좌표에 정확히 창림을 썼다. 거리를 무시하고, 징조 없이 튀어나온 공격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다고?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죽이는 것보다는 제압하는 것이 낫겠지?”
도미닉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창을 들었다. 이오드에게 향한 질문이다. 이오드는 불꽃에 휘감긴 유진을 멍한 눈으로 보았다.
저 불꽃. 라이언하트 본가의 백염식... 일 텐데. 이오드는 저런 형태의 불꽃을 알지 못했다. 파르스름한 빛의 불꽃과 번개. 이오드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오래 전에 보았던 아버지의 불꽃. 그리고 오늘, 조금 전에 보았던 시안과 시엘의 불꽃.
그 불꽃들과 다르다.
“...예.”
이오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유진은 이오드의 눈에 어린 감정을 느꼈다.
선망과 동경.
탐욕.
역겨움을 느꼈다. 양손을 망토 안에 감췄다. 메르는 이미 유진의 정신과 공명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렇게 태세를 갖춘 것은 템페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이 바람의 정령왕은, 이러한 상황뿐만이 아니라 ‘적’이 마창과 분쇄추라는 것에 거대한 적의를 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도미닉이었다.
흑사자 기사단의 1번대 대장. 그 자리가 흑사자 기사단 최강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미닉은 제 자신의 힘이 흑사자 최강이라 자부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나 제노스 라이언하트의 강함은 인정한다. 순수한 실력이라면 그 둘을 압도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도미닉은 제 자신의 특별함을 안다. 위대한 시조님만이 완벽하게 다뤄냈다는 마왕의 무구.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마왕의 무구를 다루는 것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다. 전대가주도, 도미닉의 아버지도 마왕의 무구가 품은 저주를 이겨내지 못하고 단명했다.
도미닉은 그 불길한 무기를 수십 년 동안 다뤄왔다. 그리고 지금도 마창을 손에 쥐고 있다. 긴 시간 애용해 온 분쇄추만큼 익숙하고 완벽하게 다뤄낼 자신은 없지만, ‘창’을 다루는 것은 꽤 자신이 있다.
‘네 실력은 얼추 알지.’
제노스 라이언하트와의 대련뿐만이 아니다.
“바랑을 죽였지?”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시커먼 창이 유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도미닉은 내지른 창에 회전을 넣으며 빙긋 웃었다.
“제법 불쌍한 친구였는데 말이야.”
콰아아! 창과 함께 회전한 기류가 검은색으로 물들고, 터졌다. 마나와는 다른 불길하기 짝이 없는 힘. 마기다. 마왕의 무구는 그 자체가 끝없는 마기를 품고 있다.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토 안으로 감췄던 양손이 뽑혀 나왔다.
오른손은 위니드를 쥐고, 왼손은 성검을 쥐었다. ㅡ화아악! 성검이 내뿜는 빛이 마기를 밀어냈다. 그 광경에 도미닉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성검?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네 할애비가 입을 털었나 보지?”
“전부는 아니었나 보군.”
도미닉은 껄껄 웃으며 마창을 휘둘렀다. 쩌엉! 마창과 위니드가 충돌했다. 유진은 위니드의 검신이 마기에 침식되는 것을 힐긋 보면서 환염식을 운용했다. 몸을 휘감은 바람이 부풀어 올랐다. 분노한 템페스트가 몸을 일으켰다.
폭발한 바람에 불꽃과 번개가 섞인다. 이건 마법인가? 아니, 단순히 마나를 터트릴 뿐.
‘그럴 뿐인데 이 정도 위력이라고?’
마나와 마기가 한데 섞인다. 그렇게 구축한 방어는 지근거리의 폭발에서 도미닉을 완벽하게 보호해 주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고서는 방어가 힘들단 말이다. 도미닉은 마창에 전해지는 떨림을 느끼며 눈을 찡그렸다.
‘괴물이군.’
유진의 실력은 얼추 짐작했다. 바랑은 강했다. 욕심이 많았고, 도미닉은 바랑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도미닉에게 있어서, 바랑은 사용이 편리한 도구였다.
바랑의 힘은 도미닉도 쉽사리 여길 수 없을 만큼 강하다. 바랑이 도중에 배신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니, 그가 돌아오지 않고 유진이 멀쩡히 돌아왔다는 것은... 바랑이 죽었다는 것.
‘마나의 운용도 정교하고, 몸의 움직임도 훌륭해.’
그것뿐만이 아니다.
도미닉이 서있던 땅이 송곳이 되어 치솟았다. 도미닉은 펄쩍 뒤로 물러서면서 아래를 살펴보았다. 눈에 보이는 땅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져가고 있다.
콰르르르!
땅거죽이 뒤집힌다. 흙과 돌멩이, 그따위 것들이 여러 개로 나뉘어져 한데 뭉친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천 개의 탄환이 허공에 뜬 도미닉에게 쏘아졌다.
전투에 돌입한 것은 도미닉 뿐만이 아니었다. 헥토르. 그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까 전에 싸워봤고,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했다.
이길 수 없다. 지금 싸우면 진다. 그건 알지만, 헥토르는 물러설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포격을 꿰뚫던 도미닉과 헥토르의 시선이 맞닿았다. 곧, 둘은 당연하단 듯이 합을 맞춰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유진은 부릅 뜬 눈으로 둘의 움직임을 쫒았다.
여유를 부릴 만큼 마음이 평온하지는 않았다. 흑암의 망토가 크게 펄럭였다. 망토 안쪽의 어둠에서 붉은 빛에 휘감긴 아카샤가 천천히 뽑혀 나왔다. 직접 손에 쥘 필요는 없었다. 유진의 의식은 아카샤에 연결되었고, 메르가 그를 보조했다. 붉은 빛으로 이어진 아카샤가 유진의 앞에 떠올랐다.
“작열난무(灼熱亂舞).”
7서클의 화염마법이 펼쳐졌다. 유진을 휘감고 일렁거리던 마나가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의 칼날이 되었다. 그 모습은 수십 개의 칼날을 몸에 두른 것처럼 보였다.
이 불꽃의 칼날은 의식과 이어져 명령에 따른다. 이러한 마법은 유진과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메르가 유진의 심상을 읽고서 명령을 대신해 주었다.
불꽃과 검이 먼저 충돌했다.
난무하는 칼날이 헥토르를 파고든다. 헥토르는 최대한 불꽃에 베이지 않도록 흘려내면서, 왼손으론 허리춤의 포켓을 더듬었다. 아티펙트의 버프만으론 부족하다. 그러니 따로 더할 수밖에.
꺼낸 물약을 들이키니 움직임이 달라졌다. 헥토르의 두 눈은 더 많은 것을 정확히 보게 되었고, 움직임은 ‘느리게’ 보이는 세상과는 반대로 빨라졌다.
‘미치겠군.’
...느리게 보이는 것이 맞나? 헥토르는 목덜미에 다가오는 불꽃을 보며 오싹함을 느꼈다. 천천히... 분명 천천히 다가오는데, 깔끔하게 피해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새 퇴로는 막혔고, 그나마 피해를 덜 당할 것은 앞으로 파고드는 것 뿐.
‘이제 막 시작했잖아. 그런데 바로 이렇게 끌어들여졌다고? 대체 몇 수 앞을 보는 거냐?’
전투나 수 싸움은 헥토르도 자신이 있었다. ...그게 얼마나 하찮은 자신감이었는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헥토르는 몸을 낮추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불길을 뚫고, 한 걸음 전진했을 때.
헥토르는 거대한 불꽃을 보았다. 그를 두르고 선 유진의 두눈은 불꽃보다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번개가 파직하고 튀었을 때. 헥토르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후회했다. 느리게 보이는 세상에서,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닥쳐올 지는 너무나도 잔인하게 인지되었다. 뒤로 물러선다, 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괜히 왔다니까.’
오른손을 뻗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촤악! 번개가 헥토르의 왼팔을 절단했다. 헥토르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으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의 손에서 날아간 검이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닿지 않았다. 불꽃의 곁을 맴도는 바람이 검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허.’
그 헥토르를 어린아이 다루듯 간단하게 제압했다. 도미닉은 그 사실에 감탄하며 마창을 내리 찍었다. 꽈아앙! 그저 위에서 아래로 찍었을 뿐이지만, 공간이 흔들리며 지면이 주저앉았다.
‘역시 성검은 성검인가.’
성검이 마창을 가로막고 있다. 도미닉이 마기를 끌어내는 만큼, 성검은 더욱 강한 빛을 발하면서 어둠을 밀어냈다.
‘창림은 쓸 수 없지만, 순간적인 출력은 마창이 위다.’
도미닉의 마나가 거대한 불꽃이 되었다. 그렇게 마창과 공명하여, 시커먼 어둠이 도미닉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유진은 그 광경을 노려보며 입술을 뒤틀었다. 이제 무엇이 벌어질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송곳들이 쏘아졌다. 먼저 나간 작열난무는 송곳을 베어내진 못했다. 닿는 순간, 불꽃이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망토 안의 메르가 놀란 비명을 지르면서 유진에게 외쳤다.
[유진님! 물러서야 해요!]
오래 전, 저 공격을 직접 당해 본 적 있는 유진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바람이 요동친다. 템페스트는 유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를 알았다. 그건이 바람의 정령왕이 가진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협력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템페스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계약자의 명령은 정령왕이라 해서 거스를 수는 없다. 템페스트가 일으킨 바람이 유진의 뒤에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창을 내지르면서.
도미닉은 유진이 ‘왜’ 벽을 세우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벽은 마창의 공격을 막기 위한 벽이 아니다. 마치 공격이, 힘이 다른 곳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막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람의 벽은 유진의 등 뿐만이 아니라 옆까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대체 뭘 하려는...’
섬뜩함.
왜인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길게 늘어진 것만 같다. 무인으로 평생을 살아오며 키워 온 직감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경고하고 있다. 대체 왜? 어느새 성검과 위니드는 유진의 양손에서 떨어져 있었다. 공중에 뜬 아카샤가 일으킨 마법은, 공격이 아닌 결계 마법이었다.
바람과 마법이 만들어낸 벽이 도미닉과 유진을 일직선으로 잇는다.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마창의 송곳은 유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이제 와서 막거나 피하는 것은 늦었다. 분명 그럴 텐데, 도미닉이 느끼는 섬뜩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강해졌다. 그 떨림은ㅡ 도미닉 혼자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창대가 바르르 떤다. 마창이 떨고 있다. 이 오래 된 무기는 300년 전을 알았다.
활짝 열린 망토의 안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
‘...저게 뭐지?’
창백하다 느껴질 만큼 시린 빛. 희미하다. 점점이 늘어난다. 그렇게 하나로 모이고서.
길게 뽑혀져 나온 빛은, 초승달이 되었다.
마창이 쏘아낸 송곳이 모조리 분쇄됐다. 도미닉은 눈앞의 저 달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이것만큼은 알았다. 닿으면 안 된다. 닿으면 죽는다. 분쇄된 송곳의 마기를 한 곳에 모은다. 그렇게 방벽을 만들지만, 잠시도 막히지가 않았다. 저 끔찍한 달빛은 어둠이 퍼지는 족족 밝혀버린다.
‘피해야...’
도미닉은 뒤늦게 깨달았다. 유진이 만든 벽은, 공격이 퍼지지 않는 것은 의도한 벽이 아니었다. 도미닉이 옆으로 피하지 못하도록 세운 벽이다. 도미닉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앞으로 전진해서 달빛에 찢겨 죽던가,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다가 힘이 다하던가.
“월광검.”
그 이름을 내뱉은 것은 도미닉이 아니었다.
이오드 라이언하트. 그는 두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서 유진이 쥔 검을 보았다. 칼자루에서부터 이어진 달빛의 검신.
이오드는 저 검을 모른다. 월광검은 라이언하트의, 세상의 역사에 남지 못했다.
하지만.
이오드의 정신과 연결 된 존재는, 저 검을 알았다. 우우우우! 이오드의 주변에 퍼져있던 어둠의 정령이 한곳에 모인다. 이오드의 금색눈동자에 먹물 같은 어둠이 번져가고,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그 검은 눈동자 한복판에 붉은 점이 떠올랐다. 형체를 이루지 못한 어둠의 정령이 이오드의 몸을 휘감았다. 이오드는 그 어둠에 이끌려, 마법진 중앙의 분쇄추를 쥐었다.
이오드가 분쇄추를 쥐었을 때.
유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이오드를 보았다.
[...맙소사.]
이오드를 휘감은 어둠의 정령. 템페스트는 저 정령에게서 절망적인 존재감을 느꼈다.
“...내 착각 아니지?”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왼쪽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도 너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꽈드득.
유진의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고, 심장을 쥐었다.
[저 정령은 마왕의 잔재다.]
잔재
가슴을 파고든 손끝에서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분쇄추는 살육의 마왕의 무기.’
서열 5위. 300년 전에 가장 먼저 죽었던 마왕.
살육의 마왕은 월광검을 모른다. 그때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성검이 살육의 마왕의 목을 베었었다.
마왕성 근처의 평야. 밤새도록 이어진 격전은 주변의 땅을 모조리 붕괴시켰고, 그렇게 평야가 구릉지가 되었다. 그 밑바닥의 던전.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를 고대의 유적지에서, 월광검을 발견했다.
‘마왕의 잔재. 하지만 살육의 마왕은 월광검을 몰라.’
그에 공명하는 것 같은 이오드는 정확하게 월광검을 알아보았다. 월광검의 존재는 라이언하트에도 전해 내려오지 않았다. 지금의 시대에서 월광검을 기억하는 것은, 그 시대부터 살아 온 장생족이나 환생한 하멜 뿐이다.
“이거 참.”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면서 손가락을 굽혀, 심장을 움켜쥐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빠르다. 분노와 증오와 뒤섞여 살의가 되었다.
“다시 봐서 존나 반갑다, 이 씹새끼야.”
살육의 마왕은 월광검을 모른다.
하지만 참혹의 마왕은 월광검을 알고 있다. 당연히 알 수밖에. 참혹의 마왕은 월광검의 빛에 갈기갈기 찢겨 죽었었다.
이오드의 몸을 휘감은 어둠의 정령. 템페스트는 저 존재의 본질이 마왕의 잔재라고 했다. 그건 유진도 느끼고 있다. 그는 300년 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그때 싸웠던 마왕들이 얼마나 역겹고 불길하며 끔찍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기억한다.
유진은 저 어둠의 정령에게서 살육의 마왕과 참혹의 마왕을 느꼈다. 그 존재감은 마왕 2명분이라 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았으나,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저건 300년 전에 뒈진 마왕들의 비참한 말로다.
“추하군.”
유진은 들끓는 살의를 숨기지 않았다.
“뒈졌으면 얌전히 소멸할 것이지. 제 무기에 찌꺼기를 남겨서 연명했나? 이제 슬슬 괜찮을 것 같아서 서로 손잡고 부활이라도 꿈꾸는 거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계속해서 뛴다. 유진은 제 심장을 진정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마나를 일으켜 심장을 더욱 빨리 뛰게 만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그니션.
유진의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았다. 불꽃이, 번개가,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다.
“내가 여기 없었다면 말이야.”
이미 월광검도 꺼냈고, 성검도 꺼냈다. 이그니션은 뒤가 없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뒤가 없는 것이 걱정된다면, 걱정할 필요없이 모조리 쓸어버리면 된다. 게다가 저 추악한 존재들을 눈앞에 두고서 제 안위를 걱정할 수는 없었다.
저 마법진. 제물.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둠의 정령이 마왕 2명의 잔재가 섞여 태어난 놈이라면, 마법진과 제물이 무엇에 쓰일 지는 뻔한 일 아닌가.
여기서 막지 않으면.
아니,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300년 전에 기껏 2명으로 줄여놓은 마왕이 1명 더 늘어 3명이 될 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잘린 팔을 지혈하고 물러서던 헥토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어둠과 함께 허공에 떠오른 이오드와, 믿을 수 없을 만큼 격렬한 불꽃을 몸에 두른 유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헥토르는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다.
흑사자 기사단의 1번대 대장. 도미닉 라이언하트는 흑사자와 라이언하트에 아무런 자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제 자신을 특별하다 여기는 심리는 마땅한 선민의식을 만들지만, ‘라이언하트’는 도미닉을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조부가 라이언하트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던 불사의 백사자일 지라도, 그 조부가 가주가 되지 못한 이상 도미닉의 가문은 방계였다.
그로 인한 불만은.
방계인 유진이 본가의 양자가 되면서 더욱 커다랗게 일그러졌다.
“...넌... 대체 뭐냐?”
도미닉은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방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힘. 도미닉이 살아 온 평생, 이만큼이나 죽음을 가까이 느낀 적은 없었다. 도미닉이 느낀 죽음의 형태는 달빛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지?”
치미는 핏물을 삼켰다. 마창은 그 끔찍하던 달빛에서도 부서지지 않았지만, 그를 쥐었던 도미닉의 몸은 부상을 피하지 못했다. 역류한 마나가 코어에 손상을 주었고,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 늦었던 왼쪽다리가 짓이겨졌다.
“지금은 또 뭐고?”
라이언하트의 방계 중에는 도미닉과 같은 불만을 품는 자들이 여럿 있다. 물론 그들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집회를 가지며 라이언하트의 미래에 대해서 멋대로 떠들며, 어떻게 해야 방계가, 아니, 자기들이 다음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을 지를 몽상한다.
도미닉은 그들의 존재를 잘 알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흑사자 기사단의 존재 목적 중 하나가 저들처럼 가문의 안쪽을 좀먹는, 가치 없는 벌레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가가는 것은 쉬웠다.
흑사자인 도미닉이 보기에, 가문의 벌레들은 조악하기 짝이 없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버러지로 취급 받으며 본가에서 쫓겨난 장남을 써먹자는 계획은 마음에 들었다.
“다 됐었는데.”
모든 것은 우연.
아니, 운명이었다.
어둠의 정령은 그 이름처럼 어둠에 깃들어 있다. 그 어둠은 빛이 꺼져 시커먼 것만을 의미하진 않다. 밝음과 어둠을 명확히 구분 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불을 켜도 밝혀지지 않기에, 인간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 어두워지기도 한다.
도미닉은 정령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떠한 충동을 느꼈다.
친가에 구금 된 이오드에게 남몰래 접근하는 것에 ‘흑사자’의 지위는 아주 편리했다. 이오드를 감시하는 흑사자의 눈을 돌리고 만난 밤. 충동적인 만남이었지만, 도미닉은 제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쓰레기 취급받는 장남. 도미닉이 느끼기에도 이오드는 쓰레기였다. 하지만, 도미닉은 이오드의 눈동자 깊은 곳에 도사린 시커먼 어둠을 보았다. 제 어미와, 외조부와, 보사르 백작가의 수많은 식솔을 향한 살의 아닌 악의를 느꼈다.
애당초의 계획은 이오드에게 흑마법의 촉매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오드가 흑마법사가 되면, 라이언하트의 위상은 정말 나락까지 떨어져 버린다. 흑마법사가 되어 날뛰어 주면 더욱이 좋다.
어차피 도미닉은 가문에 더 이상의 미련도 없었기에, 제 손으로 본가를 망치고서 분쇄추를 가지고 헬무드나 다른 외국에 망명할 생각이었다.
이오드의 눈을 보았을 때. 도미닉은 흑마법의 촉매가 아닌, 분쇄추를 건넸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에 어둠이 깃들었을 때부터, 도미닉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유진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그니션으로 폭주하는 코어. 통제 불능이라 느껴질 만큼 거대하게 부푸는 마나. 그 모든 힘이 아카샤에 집중되었다.
아카샤가 빛을 뿜었다. 거대한 마법진이 먼저 나타나고, 그보다 작은 마법진 수십 개가 겹쳐졌다. 유진은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퍼부을 수 있을 만한 강력하고 파괴적인 마법을 바랐다.
그렇게 펼치는 마법을 메르가 보조했다.
수십 개의 마법이 동시에 펼쳐졌다. 무엇이 먼저고, 어떻게 연결되는지. 도미닉과 헥토르는 그를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다만, 눈앞에서 터져 이 덮쳐오는 공격을 마법적 재해라고 느꼈다.
“아아아!”
도미닉은 고함을 지르며 마창을 내질렀다. 마법이 현상시킨 빛속에서도 마창의 어둠은 번져나갔다. 하지만 그 어둠과는 별개로, 도미닉의 육체가 버텨내지 못했다. 헥토르도 도미닉의 곁에 붙어서 어떻게든 공격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아카샤.”
시커멓고 붉은 눈을 뜨고 있던 이오드가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더니, 길쭉한 손가락으로 눈앞을 톡하고 두드렸다. ㅡ파앙! 어둠에 넓게 번져가던 물결이 터졌다. 덮쳐오는 마법이 어둠에 먹혀 사라졌다.
“위니드와 성검, 월광검, 거기에 아카샤까지.”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이오드의 얼굴을 보았다. 검고 붉은 눈.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 감정 없던 입술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유진, 너는... 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구나.”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웃어주었다.
저 말을 통해, 유진은 눈앞의 이오드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다.
어둠의 정령. 마왕의 잔재. 놈의 영향을 받으며, 기억의 일부를 받아먹었다. 하지만 이오드의 정신에 군림하는 것은 마왕이 아니다. 단지, 300년 전에 뒈진 두 마왕의 찌꺼기를 소화하려 애쓰는 분수를 모르는 애새끼일 뿐.
[...우습게보아선 안 된다, 하멜. 방금 저 얼간이는 네 마법을 손가락 하나로 흩트렸다.]
‘알아.’
무너진 마법. 흩어지는 마나가 모조리 유진에게 되돌아왔다. 이그니션으로 날뛰는 코어가 마나를 되삼켰다. ㅡ키이잉! 아카샤 유진의 주변에 겹겹이 방어결계를 구축했다.
‘마왕 본인이 아니라 해도, 그 비슷한 존재에게 마법으로 승부를 거는 것은 과한 오만이지.’
아카샤가 있기도 하고, 유진 본인도 제 마법실력에 꽤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마왕 비슷한 존재와 마법전투를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300년 전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세냐와 베르무트 둘 뿐이었고, 유진은 아직 그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
“커으으으...!”
휩쓸린 잔해 속에서 도미닉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입에서 피를 쏟으며 제 양팔을 바라보았다. 기괴하게 뒤틀린 양팔에 마창이 걸쳐져 있었다.
헥토르는 그 곁에 실신해 쓰러져 있었지만, 도미닉에게 헥토르를 신경 쓸 의리와 여유는 없었다. 그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너덜거리는 팔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만...”
이렇게 무식한 싸움은 바라지 않았다. 출력에서 밀린다면 다른 공략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창’은 도미닉의 뜻을 듣지 않았다.
마법의 재해에서 도미닉을 보호해 주었던 어둠.
그것이 몽글몽글 솟아나더니, 도미닉의 팔을 휘감았다. 도미닉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뚜둑.
뚜두둑.
너덜거리던 양팔, 찢어진 살과 근육, 으스러진 뼈가 하나로 엉킨다. 그렇게 새로이 만들어진 팔은, 사람의 팔이라기보다는 비늘이 달라붙은 울퉁불퉁한 살덩어리 보였다.
“...하하...”
도미닉은 멍한 눈으로 제 팔을 쳐다보았다. 기괴하게 변한 팔, 손가락은 창에 달라붙어 있다. 그렇게 연결되었고, 도미닉의 머리는 마창에 남은 사악한 기억들에 침식되었다.
끼릭...
도미닉은 실실 웃으면서 창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양팔 모두를 들고서 창을 받치고 있는 그 자세는, 유진의 머릿속에도 있는 자세였다. ...뚜둑... 뚜둑! 팔에서 번져나간 비늘이 도미닉의 어깨와 가슴, 등을 뒤덮었다. 이윽고 도미닉의 등 뒤에서 한 쌍의 팔이 더 돋아났다.
“놀라지 않는 구나.”
이오드는 제 키만큼이나 거대한 분쇄추를 쥐고서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넌... 참 신기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시엘도, 시안도, 이곳에 온 모두가 두려움을 느꼈는데.”
유진은 그쪽을 의식했다. 다행히 나무에 매달린 이들의 신변에 문제는 없었다. 아직, 제물로 사용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군.’
유진은 천천히 몸을 낮췄다.
‘저건... 마왕의 잔재가 폭주한 거야.’
월광검에 대한 기억. 300년 전의 패배. 굴욕감과 분노, 증오... 그런 여러 요인이 잔재를 폭주시켰다. 유진은 일단 그렇게 판단했다.
“...지금의 난...”
이오드는 벙긋 웃으며 분쇄추를 쳐다보았다.
“유진, 널 쓰러트리고... 이 숲의 모두를 제물로 삼을 수 있다.”
“그래?”
유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몰라.”
유진은 그러한 전말까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깊이 관여하고, 알게 될 것이다.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건 간에,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죽인다.
“네가 뭔 생각을 하는지. 왜 이렇게 됐는지. 하나하나 따져 묻고 싶은 생각은 없어.”
시야가 일그러지다가 확장된다. 유진은 제 양손에서 미쳐 날뛰고 싶어 하는 폭력과 파괴를 느꼈다.
“그냥 죽이면 끝이잖아. 도미닉도, 헥토르도, 이오드, 너도, 정령도, 찌꺼기도. 그렇게 죽이면 다 끝나. 이유? 정 필요하다면 내가 너희 죽이고서 붙여줄게.”
유진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그니션으로 폭주하는 코어. 통제 불능이라 느껴질 만큼 거대하게 부푸는 마나. 그 모든 힘이 위니드와 월광검에 집중되었다.
“너희는 병신이라 이런 일을 벌인 거고.”
메르는 이만큼이나 격렬한 살의는 알지 못했다. 일말의 인정도 자비도 없는, 상대의 존재를 죽여 말살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살의. 메르는 그 포악한 감정에 몸을 떨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메르는 그를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아는 유진은, 하멜은. 이만큼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다.
말릴 수는 없었다. 지금 저 분노와 증오와 살의는 타당했다. 단순한 흑마법사나 마족이라면 저렇게 분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눈앞의 저것은 마왕이 아니다. 하지만 마왕이었던, 마왕이 될 지도 모르는 잔재기에. 300년 전에 제 손으로 죽였던, 직접 목은 베지 못했어도 수십 수백 번 가슴을 찌르고 팔다리를 썰었던 마왕이.
“등신이라서 뒈지는 거야.”
소멸하지 않고 남아, 이오드 라이언하트의 몸을 그릇삼아 눈앞에 나타났다.
폭풍이 터졌다.
미쳐날뛰는 바람이 땅을 뒤집고 어둠을 밀어냈다. 전진하는 폭풍에 맞서 도미닉이 몸을 날렸다. 그는 알 수 없는 희열과 증오를 느끼면서 머리 위의 마창을 4개의 팔로 잡았다.
생김새도, 덩치도 다르지만. 유진은 그 모습에게서 300년 전에 죽인 참혹의 마왕을 떠올렸다. 마왕성의 정상, 놈은 4개의 팔로 마창을 현란하게 다루며 용사들을 밀어붙였었다.
“역겹다.”
흉내일 뿐. 마왕과 같은 끔찍한 힘은 없다. 하지만 마창이 내뿜는 시커먼 마기가 유진으로 하여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니, 그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아니다. 결국 그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참혹의 마왕이었으니. 유진에게 있어서 그때의 기억은, 우쭐대며 회상할 수 있는 영광스런 무용담이었다.
이렇게 다시 맞닥트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오오오오!”
콰르르르! 4개의 팔이 창대를 회전시킨다. 시커먼 어둠이 창을 집어 삼킨다. 그보다 조금 뒤에서, 분쇄추를 쥔 이오드가 앞으로 전진했다.
많은 것이 보인다. 많은 것이 느껴진다. 많은 것을 깨닫는다. 이오드는 강렬한 전능감에 몸을 떨었다. 머릿속에 새겨지는 정보. 그건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될 흑마법의 진리.
라이언하트의 피가 더 필요하다. 진리를 통해 판단한 바, 마법을 완성하고 정령을 ‘정령왕’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보다 많은 라이언하트의 피가 필요했다. 그 중에서도 진한 피. 본가의 젊은 쌍둥이로는 부족하다.
눈앞의 저것.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 300년, 그 어떤 라이언하트보다 진한 피를 가진 후손. 이오드는 300년 전의 시조님은 본가의 초상화나 동상으로밖에 만나본 적이 없었으나, 신기하게도 지금 머릿속에서 ‘위대한 베르무트’의 모습을 생생히 보았다.
새하얀 불꽃을 두르고. 대군과 마왕의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창백히 빛나는 달빛을 손에 쥐고서 전진하는ㅡ
“...그래...”
유진을 보았다.
도미닉이 내지른 마창이 달빛에 걷혔다. 이어 휘두른 폭풍이 어둠을 분쇄했다. 도미닉은 비명인지 탄성인지 기합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4개의 팔을 자유로이 다루는 기괴한 창술. 하지만 압박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휘두른 달빛은 도미닉의 팔을 종잇장처럼 쉽게 찢었고, 어느새 손에 들린 성검은 어둠을 밝히며 도미닉의 몸을 꿰뚫었다.
“...너처럼.”
그 광경에 이오드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그는 저 불꽃을 동경한다. 성실하게, 평생토록 백염식을 수련해 봤자 이오드는 저러한 불꽃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탐이 난다. 아버지가, 라이언하트의 모두가 인정하던 저 재능이 부럽다.
그래서 이오드는 머릿속의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정령이 정령왕이 되기 위한 제물에 유진 라이언하트가 필요하다고? 필요하지 않다 해도 이오드는 유진을 제물로 바치고 싶었다. 3년 전. 기분 좋던 꿈을 억지로 깨운 것이 바로 유진이었다. 그날 이오드는 꿈에서 깨어나 지독한 현실을 마주했고, 그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바꾸었다.
그것이 유년기의 끝이라면,
이제는 성인식을 바란다. 아직 치루지 못한 성인식. 꿈에서 깨운 유진을 제물로 삼아, 정령을 완성하는 것으로 성인식을 마치리라.
분쇄추가 하늘 높이 들렸다.
잔재
분쇄추 지골라스.
이 무기는 거대한 망치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지닌 권능도 형태에 걸맞았다.
망치를 아래로 찍으면.
하늘이 주저앉는다.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 헬무드의 하늘은 태양이 희미한 밤인데, 그 밤하늘의 어둠은 짙은 마기의 농도 때문이다. 분쇄추는 하늘의 마기를 지배하고, 휘두르는 것으로 마기를 이끈다.
위로 들어서 아래로 찍으면.
밤이, 어둠이 추락한다. 살육의 마왕은 서열 5위였지만, 그 단순무식한 힘은 상위서열의 마왕보다도 강했다.
비록 여기 있는 것이 마왕 본인이 아닌, 사념 뿐인 잔재일 지라도.
이오드가 휘두르는 분쇄추는 어둠을 이끌었다. 숲의 하늘을 떠도는 어둠이 일제히 아래로 추락했다.
팔이 으스러지고, 몸뚱이에 구멍이 난 도미닉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상처가 빠르게 회복됐다. 팔이 다시 비늘에 덮이고, 몸에 뚫린 구멍도 비늘로 채워졌다. 도미닉은 기괴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마창을 아래로 내리 찍었다.
창림.
발아래의 어둠이 확장됐다. 그렇게 수백 개의 송곳이 치솟았다. 아까 전, 원로원주에게서 뜯어낸 팔로 사용했을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정밀한 공격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어둠. 발아래의 송곳.
그 중 무엇도 유진을 당황시키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오른손에는 월광검을, 왼손에는 성검을 쥐었다.
함께 휘둘렀다. 창백한 월광과 찬란한 성화(聖火)가 뒤섞였다. 분쇄추가 추락시킨 하늘이 찢기고, 발아래의 송곳이 으깨졌다.
이그니션.
폭주하는 코어가 원을 만들었다. 메르는 망토의 안에서 코어의 회전과, 증폭되는 마나를 느꼈다.
환염식에 대해서는 메르도 알고 있다.
하지만. 코어를 의도적으로 폭주시키고, 그만큼 격렬해지는 마나를 따라가기 위해 심장을 가속시키며, 근섬유 하나하나에 마나를 깃들게 만들어 육체마저 각성시키는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기술까지는 알지 못했다.
‘...무식... 한가?’
메르는 몸을 떨면서 폭주해 날뛰는 마나의 흐름을 보았다. 제대로 된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기술은 쓰지 않을 것이다. 그야, 저 기술은 수명을 극단적으로 줄인다. 폭주를 겪을수록 코어는 불안정하고 약해진다. 가속시킨 심장은 언제 멈추게 될지 모른다. 마나의 격류를 따르기 위해 각성시킨 육체도 마모될 것이다.
그래야 하는데.
‘...완벽하게 조율하고 있어.’
번개불꽃.
유진에게 녹아든 세계수의 정령은, 단순하게 유진의 마나에 번개를 섞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정령은 아주 자연스럽게 유진의 육체에 녹아들고, 코어를 강화하며, 증폭된 폭발을 하나의 ‘원’ 안에 가두었다.
그것은 번개불꽃의 힘만은 아니었다. 300년 전부터 마나의 이해와 장악력은 그 세냐조차 경악하던 것이다. 유진은 제게 깃든 번개불꽃을 이해하고, 환염식과 이그니션을 보다 완전하게 바꾸었다.
뇌광.
이그니션 없이는 통제가 잘 안 되는 기술. 그 이유는 단순히, 육체가 뇌광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그니션을 쓴다면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다. 애초부터 뇌광은 이그니션 대신 써먹기 위해 위험부담을 완전히 덜어낸 각성기다.
“방어는 맡긴다.”
유진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몸을 낮췄다. 그 말은 메르에게만 한 것이 아니었다. 템페스트. 그는 유진의 등 뒤에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메르는 차마 망토 밖으로 머리를 내밀 수는 없었지만,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쥐었다.
수십 겹으로 구축한 방어결계. 그 모든 것이 메르에게 이어졌다. 템페스트는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어둠을 밀어냈다. 이 전장은 템페스트에게 있어서는 최악이라 해도 좋을 전장이었다. 이미 장악 된 숲. 어둠이 바람을 막는다. 그렇다 해서 템페스트는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다. 그는 바람의 정령왕이었고, 잔재만 남아 어둠에 깃든 증오스런 적에게 위압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그건.
템페스트의 앞에 선 것이, 300년 전의 용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를 우둔한 하멜이라 기억하지만, 템페스트는 ‘하멜’이라 불렸던 인간이 마족에게 있어서 얼마나 끔찍한 악몽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그 시대의 전장에서, 마족들은 성검의 주인인 베르무트보다 하멜을 더 두려워했다.
하멜은 용서가 없었다. 그가 하는 것은 전쟁도 아니고 결투도 아니다. 그 전장에서, 베르무트보다 많은 몬스터와 마물과 마족을 죽였던 것이 하멜이다. 그는 전장에서 학살을 벌이고, 적을 도륙냈다.
[너라면.]
템페스트의 바람이 유진의 등을 떠밀었다.
[환생한 너라면, 베르무트도 이루지 못한 숙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
폭풍은 여전히 북상을 바란다. 그렇기에 이런 곳에서 저물 수 없는 것이다. 유진은 템페스트의 강렬한 의지를 느꼈다.
베르무트도 이루지 못한 숙원.
그 말이 유진을 웃게 만들었다. 그를 숙원으로 하고, 이루지 못했던 것은 베르무트 뿐만이 아니다. 놈과 함께 마경을 떠돌았던 모두가 그를 바랐다.
“...너희는.”
오른손의 달빛이 빛을 발한다. 이 불완전한 월광검은 부족한 힘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어마어마한 마나를 잡아 먹는다. 나하마의 무덤에서 처음 월광검을 쥐었을 때. 그때 유진은 월광검을 두세 번 휘두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이미 지나쳐왔어.”
달빛이 더욱이 빛을 발했다. 그렇게 휘두른 검은, 구부러진 초승달에 충만하게 차올라 반월이 되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유진은 한 바퀴 몸을 돌리며 월광검을 휘둘렀고, 검이 그리는 궤적은 만월이 되었다.
“그러니까 못 막아.”
차오른 만월이 흩어졌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빛이 쇄도했다. 월광검의 정체는 모른다. 헬무드 지하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었으나, 마왕도 그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던 검의 형상을 한 파멸이다.
콰아아아!
도미닉이 이끄는 마창의 송곳이 모조리 분쇄되었다. 월광이 깃들 때마다 도미닉의 몸은 파괴되었고, 파괴되는 만큼 비늘이 늘어났다. 그것이 반복 될수록, 도미닉의 의식은 희미해졌다.
희미해지지만 쓰러지는 것은 아니다.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몸뚱이는 더욱 날카롭고 정교하게 움직였다. 도미닉 라이언하트가 익힌 기술이 아닌, 마창에 깃든 잔재가 몸을 이끄는 것이다.
‘...나는...’
도미닉은 멍한 눈으로 앞을 보았다. 번쩍이는 빛. 무어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몸이 크게 흔들리는데, 아픔은 없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할아버지의 가슴에 검을 찔렀던 것은 생각났다. 찌르고, 비틀고, 쓰러지는 몸을 붙잡았다. 반격을 위해 뽑았던 마창.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 단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돌아보기만 했다.
그 표정이 즐거웠다. 얌전히 뒤를 이을 줄 알았겠지. 원로원주?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원로원주가 가문 전체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도미닉도 언젠가 원로원주가 될 것을 꿈꾸고, 그에 만족했을 것이다. 원로원이 본가 이상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원로원주인 도이네스 라이언하트가 본가의 누구보다도 항렬이 높고, 라이언하트의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 실력자이기 때문이다.
도미닉은 그럴 수 없다. 그가 원로원주의 자리를 노릴 만큼 늙을 때, 할아버지처럼 라이언하트의 최고어른이자 고수로 대접받을 수 있단 자신이 없었다.
‘...왜...’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도미닉은 강한 의문만을 느꼈다.
‘...왜 내가 죽는 거지?’
의문 그대로였다.
유진의 검은 도미닉을 죽였다. 4개의 팔이 아무리 기괴하고 현란한 창술을 구사하건, 그 ‘창’은 유진의 머릿속에 있었다.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사념. 기억에만 의존해 재현되는 기술을 상대하는 것이 무어가 어렵나. 참혹의 마왕과의 전투는 사흘 밤낮을 이어졌었고, 그때 하멜은 베르무트와 함께 최전선에서 마왕의 창을 받아냈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단 말이다. 그러니 창이 어떻게 움직일 지를 안다. 어디로 흘려내고, 어디를 파고들어야 벨 수 있는지 안다. 월광검의 힘이 부족하다면, 힘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잘’ 쓰면 된다.
도미닉의 팔을 모조리 썰고, 배를 가르기까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 모두가 한 순간에 벌어졌다. 이오드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분쇄추를 아래로 내리 찍고, 그 직후에 도미닉의 정신이 파괴되었다.
그렇게 유진은 도미닉을 지나쳤다. 허나 등 뒤에서 죽은 도미닉이 몸을 일으킨다. 그 정신은 이미 잔재에 잠식되어 파괴당하고, 육체도 회생이 불가능할 만큼 망가졌다. 하지만 박살 난 몸을 비늘이 잇고 살덩이로 메웠다.
이오드는 그 모습을 내려 보며 웃었다. 시체를 조작하는 것은 흑마법 중에서도 경원시된다. 허나 이오드는 그 침범하지 말아야 할 금기를 침범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어머니.’
테오니스와, 보사르 백작가의 모두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모두 다 썩었을까. 그럴 수밖에. 그때의 이오드는 흑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시체를 제대로 된 언데드로 만들지 못했다. 상처 없이 죽이고... 어둠을 깃들게 해 조금씩, 망가지지 않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한계였다.
“마법은...”
이오드는 희열로 어깨를 떨며 손을 움직였다.
“...이렇게나 멋지고, 즐겁구나.”
어둠의 정령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에 공명한 어둠이 이오드에게 몰려든다. 이오드가 손가락을 움직였을 때. 피처럼 붉은 빛이 어둠을 떠돌며 술식을 그렸다.
유진의 주변을 떠돌던 어둠이 무수히 많은 손이 되었다. 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유진을 붙잡으려 했다. 유진은 손에 잡히지 않도록 몸을 빼면서 월광검과 성검을 함께 휘둘렀다.
다시 한 번 발 아래에 어둠이 번진다. 도미닉, 아니, 얼굴이 비늘에 뒤덮인 괴물이 끽끽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마창으로 땅을 찍었다. 콰드드드득! 송곳이 치솟는다. 지면이 창의 숲이 되었다.
유진은 상처하나 없이 그 중앙에 섰다. ㅡ파앗! 만월이 송곳을 분쇄했다. 유진은 망토를 들추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오드의 ‘흑마법’이 공간을 압박하며 유진의 숨통을 죄려고 했다.
[윽...!]
머릿속에서 메르가 신음을 터트렸다. 저주처럼 끈질기며 불길한 마법. 그를 방어결계로 가로막고, 술식을 분석해서 디스펠을 건다.
방어는 맡기겠다고 했다. 휘청휘청 걷는 도미닉이 보였다. 꽤 여러 번 죽였는데도 일어서는데, 흔적도 없이 재로 만들어야 뒈지는 건가? 마나에 여유는 있다만 그만큼의 출력으로 월광검을 휘두르는 것은 낭비다.
‘시체 따위.’
망토의 안쪽에서 꺼낸 것은 뇌광궁 페르노아. 이 녀석도 만만찮게 마나를 잡아 처먹는 놈이지만, 번개불꽃을 얻은 뒤로는 마나의 낭비가 크게 줄어서, 적은 마나로도 연사가 가능해 졌다.
파직!
굳이 손으로 잡고, 시위를 당길 필요도 없었다. 일렁거리는 불꽃이 뇌광궁을 붙들고, 불꽃에서 퍼져나간 번개가 화살이 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다발의 번개가 시위에 걸렸다.
그리고 일제히 발사되었다.
꽈과광! 폭음과 전광 속에서 도미닉의 몸이 으스러지고, 흩어졌다. 유진은 앞으로 나아가며 성검을 휘둘렀다. 성화가 더해지니, 도미닉의 몸은 파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하지만 마창은 남았다. 유진은 바닥에 떨어지는 마창을 무시하고서 땅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다. 거대한 마법진을 등진 이오드가 분쇄추를 높이 들고 있었다.
“...하하하!”
이오드는 웃음을 터트리며 분쇄추를 아래로 내리 찍었다. ㅡ쿠우우우! 거대한 힘이 유진에게 쏟아졌다.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유진의 몸을 잡으려 들었다. 이오드가 등진 마법진이 일렁거린다. 그곳에서 튀어나온 것은 한 쌍의 거대한 손이었다. 그 손은 마치 날개처럼 이오드의 등 뒤에서 펼쳐진 뒤, 움켜쥐듯이 이오드의 몸을 덮었다.
“반갑다.”
저 손을 안다. 살육의 마왕이 쓰던 흑마법이다. 전력을 다해 퍼붓던 공격이 손가락 하나를 뚫기 힘들었다. 도합 열 개의 손가락은 각각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으로 대마법을 퍼붓는다.
분쇄추가 이끄는 힘이 몸을 짓누르고 있다. 그대로 아래로 내리 찍어, 짓뭉개 버릴 듯이. 메르가 통제하는 방어결계가 하나 둘 부서진다. 템페스트는 유진의 몸을 받치면서 분쇄추의 힘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가 일으키는 폭풍에도 어둠이 섞여 흩어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뇌광궁을 집어넣었다.
짓누르던 힘은 강했지만, 허리를 굽히진 않았다. 거대한 손을 몸에 감싸고서 이쪽을 내려 보는 이오드가 보였다. 놈은 승리를 확신하듯 웃고 있었다.
같잖게도 말이다.
전투가 시작되고서, 이오드가 대체 무엇을 했나? 이 공간을 어둠으로 격리하고, 흑사자의 지원을 막은 것. 그건 꽤 훌륭했다. 시안과 시엘 등을 먼저 끌어들여 인질로 삼은 것도 훌륭했다.
이오드가 ‘잘’ 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마왕의 잔재, 어둠의 정령과 계약했다. 놈은 이 공간의 어둠을 지배하며, 분쇄추의 권능을 다루고, 잔재와 감응하여 고등한 흑마법도 사용하게 되었다.
그만큼 쓸 수 있는 것이 많은 주제에.
‘고작.’
분쇄추를 내리 찍고. 손으로 잡고. 마창으로 송곳을 만들고... 그 외에도 여러 마법을 쓰긴 했다만. 갖게 된 능력에 비해 사용이 어설프다.
파직.
번개가 흐르고, 갈기가 흩날렸다.
분쇄추가 짓누르는 힘이 관통되었다. 검게 물든 이오드의 눈은, 앞에서 벌어진 일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월광검이 빛을 뿜었을 때, 분쇄추의 힘이 관통되었다. 그 궤도로 가속해 온 유진이 바로 앞에서 몸을 비틀었다. 망토 안에서 뽑혀 나온 성검이 먼저 ‘손가락’을 베었다. 그렇게 약해진 손가락에 월광검이 더해졌다.
“...아...”
몸을 감싸 쥔 손가락이 갈라졌다. 몽글몽글 치솟은 어둠이 피처럼 흐른다. 이오드는 기우뚱 무너지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보이는 각도가 이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속 된 참격이 이오드의 몸을 둘로 잘라버렸다.
“아아아아아!”
끔찍한 고통에 이오드는 비명을 내질렀다. 어둠이 펑, 펑 터졌다. 마법진이 일그러졌다. 아파, 왜? 베였다. 가슴 아래부터 잘렸다. 죽는 건가? 죽지 않는다. 어둠이 몸을 잇는다. 피 대신 어둠이 몸 안을 채운다. 그렇게 더해진다. 손가락이 꿈틀댄다. 죽여, 죽여버린다. 이오드는 덜덜 떨면서 내뱉었다.
활짝 펼쳐진 손가락이 유진을 향해 마법을 퍼부었다. 그 공격은 방금 전과 동일인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난폭하고 매서웠다. 유진은 마나실드를 일으키며 마법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날뛰는 바람이 마법을 밀어내고, 메르가 마법을 요격했다.
“카아악!”
양손에 분쇄추를 쥔 이오드가 달려든다. 놈의 등 뒤에 일렁거리는 손이 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ㅡ쿠우웅! 유진의 움직임에 강력한 부하가 걸렸다. 유진은 내색하지 않고 발을 뻗었다. 몸 안에서의 폭발, 유진은 처지지 않고 월광검을 휘둘렀다.
꽈아앙! 분쇄추와 월광검이 충돌했다. 베어낼 수는 없었다. 역시 힘이 부족하다. 오히려 정면으로 힘을 겨루면 이쪽이 밀린다. 유진은 그 힘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흘러 몸을 회전시켰다. 망토 틈에서 뽑아낸 성검이 이오드를 감싼 손가락의 틈을 파고든다.
“아아악!”
목이 베였다. 완전히 자르지는 못했다. 아슬하게 반 정도. 역시 피는 튀기지 않고, 이오드의 목소리도 흔들리지 않았다. 놈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면서 분쇄추를 휘두르고 마법을 난사했다.
쿠우웅!
이그니션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슬슬 반동이 오고 있다. 꽉 다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고, 몸놀림이 잠깐 굳어졌다. 템페스트와 메르가 방어에 열중했지만, 분쇄추의 힘은 그 방어를 뚫고서 유진의 왼팔을 짓눌렀다.
“하... 하하하!”
이오드는 유진의 왼팔에서 피가 터지는 것을 보았다. 힘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왼팔이 통째로 뜯겨져 나갔을 것이다. 그만큼은 아니어도 저 부상은 ‘아프다.’ 게다가 유진은 이오드처럼 상처를 회복할 수도 없다.
“아프지? 응?! 참지 말고 울어도 돼. 비명도 지르고!”
“꼬추 떼.”
“...뭐?”
“이 정도로 아파서 비명 지르는거면 꼬추 떼라고 씨발아.”
유진은 그렇게 이죽거리며, 오히려 이오드에게 바짝 다가갔다.
오른손에 쥔 칼자루.
그 섬뜩한 달빛은 보이지 않았다. ...저게 뭐지? 이오드는 유진이 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든 상관없다. 이 거리라면 무조건 맞는다. 방심은 하지 않는다. 아픈 것은 싫다. 손가락이 이오드의 몸을 감싸고, 등 뒤의 마법진에서 다른 마법이 나타났다.
‘...왜?’
어둠이 몸을 당겼다.
‘...피하라니... 저건 그냥... 막대기잖아.’
희미한 정령의 목소리가 경고를 전했다.
‘내게... 명령하지 마. 난, 나 스스로 할 수 있어. 날 믿으라고. 알아서 저 녀석을 제물로 먹여 줄 테니까.’
길게 늘어지는 것만 같던 시간이 정지한 것은.
월광검의 칼자루가 이오드의 몸을 보호하는 ‘손’에 닿은 순간.
달빛이 폭사했다.
잔재
꽉 죄인 손가락의 틈새에 월광이 스며든다. 신화적 존재인 마왕. 그런 마왕이 펼치는 마법은 존재에 마땅한 격을 갖는다.
300년 전의 월광검도 마왕을 정면부터 무참히 찢어발기지는 못했다. 그때에 비해 압도적으로 힘이 부족한 월광검이, 살육의 마왕의 마법을 정면으로 찢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 마법을 쓴 것이 살육의 마왕 본인이었다면 말이다.
“아...”
이오드는 부릅뜬 눈으로 앞을 보았다. 뇌의 표면에 수백 수천 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행진하던 개미들이 일제히 뇌의 안쪽으로 파고들고, 이오드의 정신을 희롱했다.
알고 있지 않은, 다른 존재의 기억이 이오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갑작스런 불꽃의 폭주. 라이언하트의 백염식엔 저런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미닉의 공격을 흘려내며 유린하던 기법. 그 고등한 기법은 ‘천재적 자질’만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다.
이오드는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을 보았다. 하얀 불꽃을 흩날리며 성검을 휘두르는 남자. 남자가 휘두르는 검은 성검이었다가 월광검으로 바뀌고, 복장과 움직임은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곁에서 함께 싸우는 남자. 불꽃은 두르지 않았으나, 무참한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고 덤벼온다. 다루는 무기가 부서질 때마다 다른 무기로 바꿔들며,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공격을 흘려내고 반격하던 흉터투성이의 남자.
머나먼 과거의 기억과 눈앞의 현실이 겹쳐진다.
유진 라이언하트.
“아아아아악!”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에 대한 실감은, 고통 가득한 비명을 앞서지 못했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든 월광이 마법을 파괴했다. 빛에 직면한 이오드의 몸뚱이가 으스러져갔다. 이오드의 마법은 마왕의 것이되 마왕이 펼친 것과 같은 격은 갖지 못했다.
“아프냐?”
유진은 월광검의 칼자루를 바짝 붙이며 내뱉었다. 왼팔이 으스러졌다. 설마 그 상황에서 반동이 밀려올 줄은. 하지만 재수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왕의 잔재를 치우는 것에 팔 하나. 그마저도 잘린 것도 아니고,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뭉개진 정도. 이 정도 부상은 흉터 하나 없이 낫는다.
고통은 느끼지만, 비명을 지를 만큼 아프진 않았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 죽었을 때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었는데, 이깟 부상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
“가주님 가슴이 더 아플 걸?”
유진은.
길레이드가 훌륭한 가주나, 훌륭한 아버지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며,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길레이드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이오드가 저렇게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길레이드는 어설픈 아버지였고, 테오니스는 욕심 많은 어머니였다.
“...너만...”
고통스런 비명을 더듬더듬 끊겼다. 이오드는 시커멓고 붉은 눈을 부릅뜨고서 월광을 노려보았다. 이오드의 나약한 정신으론 결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정신을 침식하고 있는 정령의 악의가 이오드의 몸을 이끌었다.
“너만 없었으면...!”
몸을 감싸막던 손이 활짝 열렸다. 빛에 찢기는 손가락들이 유진을 향해 쇄도했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손가락이 아니었다. 번져가는 달빛에 부서지는 어둠에 살의가 가득 실려 유진을 덮쳤다.
유진은 저 악에 받친 외침에 답해 주지 않았다. 가슴이 뻐근하고, 심장이 욱신거린다. 이그니션을 펼치고서 제법 시간이 흘렀다. 고전하지는 않았지만, 바랑과 싸웠을 때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힘을 사용했다.
“지치는 군.”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이그니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란 순간, 전신에 깃든 마나가 번개처럼 내달렸다. 그렇게 유진은 앞으로 질주했다. 덮쳐오는 어둠은 닿음과 동시에 몸을 분쇄할 만큼 불길했지만, 유진을 휘감은 불꽃은 그러한 어둠마저 밀어냈다.
“너만...!”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이오드의 머릿속에는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에 쓸 수 있을 수많은 마법들이 떠올랐다. 그래, 아직 이오드는 쓰지 않은 마법이 잔뜩 있었다. 어려서부터 갈망하던 마법이 머릿속 가득 있다. 유진을 제물로 바친다면, 지금보다 훨씬 위대한 마법을 알게 될 것이다.
‘...뭘 해야 하지?’
지금의 이오드에게 압도적으로 결여된 것은 전투상황에서의 판단력. 힘으로 짓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펼칠 수 있는 것을 무작정 펼치기만 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다.
허나 이오드는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할 줄 몰랐다. 어려서부터 마법을 갈망해 온 그에게 실제 마법의 재능은 없었으며, 부족한 재능을 채우기 위한 다른 노력은 깊이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늦었다.
월광검의 칼자루가 이오드의 가슴에 처박혔다. 반쯤 벌린 입술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기도 전, 월광검이 빛을 내뿜었다. 창백한 달빛이 이오드의 몸 안을 밝혔다.
이오드의 입은 크게 벌어졌지만, 비명은 내지르지 못했다. 존재의 밑바닥까지 스며 든 어둠이 밝혀지고 말살되는 것은 유약한 청년의 정신을 파괴하기 마땅한 고통이었다.
ㅡ화아아악!
이오드의 팔다리가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싸늘한 눈으로 이오드가 소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유언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실제로 들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오드가 죽는 것을 보았다. 검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본래의 색으로 돌아온다. 얼굴은 이미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오드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입술을 끔뻑거렸고, 유진은 으스러진 왼팔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 팔로 성검을 꺼내 쥐었다. 푸욱! 이미 월광검의 빛이 이오드를 죽이고 있지만, 유진은 보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기 위해 성검마저 가슴에 처박아 넣었다.
ㅡ화아악...
빛이 잦아든다. 유진은 막힌 호흡을 몰아쉬며 월광검과 성검을 내려놓았다. ㅡ쿠웅! 이오드가 쥐고 있었던 분쇄추가 땅에 떨어졌다.
이오드는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유진은 잠시 동안 하늘에 떠서 호흡을 골랐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온몸이 뻐근했다. 아직 쉴 수 없었다.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본래 저 아래는 분쇄추와 마창이 불러들인 어둠이 가득했었고, 그 밑바닥에는 울퉁불퉁한 숲의 지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 아래에 남은 것은 거대한 구멍 뿐이었다.
유진은 무심한 눈으로 격전의 흔적을 살피며, 찾아야 할 것을 탐색했다. 먼저 추락했던 마창은 구멍의 밑바닥에 있었고, 분쇄추는 구멍의 옆에 있었다.
“...헥토르.”
유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헥토르 라이언하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도미닉의 뒤편에서 실신해 쓰러졌던 모습. 격전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소멸했나?
‘아니면 도망쳤나?’
기묘하고 강력한 아티펙트를 지니고 있던 놈이다. 어쩌면 이 어둠에서 탈출하게 해주는 방책도 지니고 있었을 수도 있다. 유진은 혀를 차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하멜. 아무래도 직접 만지는 것은...]
“그 병신들도 잡아대던 것인데 내가 못 버틸까.”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마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전생, 300년 전. 하멜과 모론은 분쇄추와 마창의 주인이 되길 원했고, 몇 번이나 손으로 쥐어 보았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광증을 느꼈고, 결국에는 주인이 되는 것을 포기했다.
자격이 부족한가?
전생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마창도, 분쇄추도, 월광검도. 베르무트 외의 다른 주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 터무니없이 강력한 무기들은 오직 베르무트만 쥘 수 있었다.
하멜도, 모론도 강했다. 하지만 베르무트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만약 저 초월적인 무구의 주인이 되는 것에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면, 그 자격을 지닌 것은 오직 베르무트 뿐일 것이다.
300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창의 주인이었던 원로원주. 분쇄추의 주인이었던 도미닉. 그들이 하멜과 모론보다 특별한가? 자격이 자질을 말하는 것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잖은가. 그 둘이 하멜과 모론보다 특별한 것은, 베르무트의 후손이라는 것 뿐이다.
‘...월광검도.’
그 끔찍한 검을 아무렇지 않게 쥐고, 휘두를 수 있는 것도 환생한 몸뚱이가 베르무트의 후손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창의 앞에 섰다. 그 불길한 창은 꾸역꾸역 어둠을 내뿜으며 땅을 시커멓게 물들이고 있었다. 유진은 잠시 마창을 노려보다가, 과감히 손을 뻗어 마창을 쥐었다.
우우우우!
손에 쥔 마창이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 머리가 핑 돌고, 정신이 흔들렸다. 이오드의 공격에 왼팔이 으스러졌던 것보다 지금이 더 고통스럽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으면서, 땅에 처박힌 마창을 뽑아버렸다.
구멍에서 올라와 분쇄추에게 다가갔다.
[유진님...? 괜찮으신거 맞죠?]
메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으스러진 손을 분쇄추를 향해 뻗었다.
손으로 잡고.
유진이 보는 세상이 더욱 시커멓게 변했다. 유진은 놀라지 않고 어둠을 노려보았다.
한 걸음 걸었을 때.
어둠이 뒤흔들렸다. 한데 모인 어둠은 명확한 형상을 갖추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존재를 공포에 떨게 하는 불길함을 내뿜었다. 그 불길함은 유진에게도 낯이 익었다. 마창과 분쇄추, 그 둘에 깃들어서 하나가 된 ‘어둠의 정령’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살육과 참혹. 두 마왕의 잔재.
그를 의식하자, 유진의 정신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유진은 휘청거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오드를 환희에 떨게 만든 흑마법의 진리가 유진의 정신에 새겨지려 했다. 그건 단순히 지식어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저것이 정신에 남는 순간, 유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령이 깃들어 버린다.
증오해 마다않는 마왕, 그것도 300년 전에 뒈진 마왕과 계약하고, 대리자가 된다는 뜻이다.
“꺼져.”
사나운 목소리로 내뱉으며 한걸음을 더 뻗는다. ㅡ화악! 새하얀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계속해서 뻗는 걸음에 불꽃의 갈기가 흩날렸다.
분쇄추와 마창이 유진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 유진은 망토의 안에서 성검과 월광검을 꺼냈다. 유진은 저 불길하고 끔찍한 존재를 용납하지 않고, 저것의 힘을 이용할 생각도 없었다.
빛이 어둠을 밝힌다.
시엘 라이언하트. 그녀는 약에 취했으나, 환각에 빠지지는 않았다. 흑사자가 되어 훈련한지 3년. 약물을 상대하는 훈련도 거른 적이 없었고, 쌓인 내성도 충분했으며, 정신력이 나약하지도 않았다.
다만, 몸은 무기력했고 정신은 혼미했다. 어둠의 정령은 시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제물의 육체를 구속하고, 정신을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들였다.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꿈이 아니란 것을 안다. 현실감이 없고, 간섭할 수도 없고, 지켜볼 수밖에 없지만. 시엘은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보았다.
“...유진... 은요?”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고, 입술도 파들파들 떨려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제물로 붙잡힌 이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시엘이었다.
“...괜찮은... 거죠?”
걱정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 보는 외삼촌에게 답을 재촉했다. 기온 라이언하트. 그는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숲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깨달았다. 숲의 중추 외에 다른 곳에 거대한 마기가 밀집된 것을 알고, 흑사자 전원이 그곳으로 진군했다.
도미닉은 흑사자 기사단을 잘 안다. 혈통에만 집착한 결과, 흑사자 기사단에는 단 한 명의 사제도 성기사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준비한 결계는 치밀하고 강력했다. 성검도, 월광검도 없는 이상 마왕의 잔재가 깃든 결계를 쉽사리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감시역으로 빠져있던 대장들까지 한 곳에 모여 결계를 힘으로 돌파하려 했지만, 이런 종류의 결계는 힘으로 뚫는 것이 쉽지 않다.
기온을 포함한 흑사자들이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결계를 돌파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둠이 밝혀지고, 결계가 소멸했기 때문이다.
“...부상은 입었지만...”
기온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대답에 시엘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유진을 찾았다.
바닥에 앉아 있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초췌한 얼굴에, 왼팔은 피투성이가 되어 너덜거리고 있다. 그 모습은 시엘이 혼미한 정신으로나마 보았던 광경과 똑같았다.
“...괜찮아?”
시엘은 떨리는 목소리를 짜냈다. 작은 소리였지만 유진에게 닿았다. 유진은 시엘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괜찮아 보이냐?”
빈 말로라도 괜찮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왼팔의 부상. 이그니션의 반동. 크리스티나도 없으니, 최소 일주일은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억지로 깨있지 말고 눈 감고 자.”
“...난, 난 괜찮아.”
“안 괜찮은거 알아. 다 끝났으니까 깨있을 필요도 없다고.”
“...네게... 해야 할, 하고 싶은 말이 있단 말이야.”
시엘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고, 감정이 북받쳐 차오른다.
무서웠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누군가 구해주기를 바랐다. 동시에 아무도 오지 않기를 바랐다. 간절히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시안이 왔고, 가르기스가 왔고, 디자이라가 왔고, 제니아가 왔다. 모두가 제압당해 어둠에 붙들렸다.
유진은 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망쳐서 바깥에 도움을 청하기를. 이오드가 마법진을 그릴 때마다 풍기는 피 냄새. 흐릿해지는 정신. 그리고.
불꽃.
“...네가 구해줬잖아.”
“지금 말하지 마.”
“왜?”
“감사인사는 나중에, 너 멀쩡하고 나 멀쩡할 때 들을 거야. 아주 정중하게 말이지.”
“...안 돼. 싫어. 지금 들어...!”
“응 안 들어. 지금 고맙다고 백 번 말해도 안 받아 줄 거야.”
유진은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잔재
이만큼이나 아프면 차라리 그냥 죽는게 낫지 않을까?
침대에 누운 유진은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해보았다. 콧속을 뻥 뚫는 약냄새. 붕대에 칭칭 감긴 전신은 답답했고, 손가락 하나 까딱 할 때마다 어금니를 꽉 깨물 수밖에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이그니션을 쓴 반동. 그 고통은 전생부터 몇 번이나 느껴보았지만, 단언컨대 지금의 고통이 제일이었다. 아니, 전생을 포함해서 지금 이상으로 아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으으... 으으...”
유진은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이를 악물었다. 손가락 하나 꼼질거린 것만으로도 전신 뼈가 잘근잘근 끊어지는 것만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이렇게까지 아픈 이유는.
빌어먹을 번개불꽃 때문이다. 그 덕에 이그니션의 위력은 올랐지만, 올라간 위력만큼 반동도 지독해졌다. 즉, 지금의 통증은 극한에 달한 근육통과 비슷한 것이다. 단련할 만큼 단련한 몸뚱이도 번개불꽃을 더한 이그니션에는 버티지 못했다.
“이그니션과 번개불꽃이 섞이면, 이름은 썬더 이그니션인가요?”
침대 옆에 흔들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은 메르가 물었다.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아니면 라이트닝 이그니션?”
“너 그러다가 진짜 나한테 죽어.”
“이그니션이란 기술명은 멋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제부터 유진님이 쓰는 이그니션은 기존의 이그니션과는 다른, 한차원 진보한 이그니션이잖아요. 그러니 다른 이름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에요?”
“메르메르메르데인, 진짜 죽는다고.”
“제 이름은 메르메르메르메르데인이 아니에요.”
“이 시팔, 내가 쓰는 기술 이름인데 왜 네가 자꾸 한마디 거들면서 약올리는 거야?”
“해야 할 조언이라고 생각해요.”
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의자에서 내려왔다.
“...엄청 부끄러운 이름을 붙이면, 부끄러워서 앞으론 그 무식한 기술을 쓰지 않을 지도 모르잖아요.”
“쓰지 말라고 하는 것도 세냐랑 똑같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눈썹을 구겼다.
“써야 할 상황이었어. 지금 죽을만큼 아프긴 해도, 쓴 건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써야 할 상황에는 써야 돼.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저는 아픔이란 건 잘 모르지만요. 아프단 것을 알면, 주저할 수밖에 없잖아요.”
“난 주저하지 않아. 한다면 무조건, 바로 하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다음에는 지금처럼 아프진 않을 거야. 뇌광에 몸이 적응하는 만큼, 반동은 평범하게 돌아갈...”
“그래서 뇌광 이그니션인가요?”
“난 아파서 못 움직이겠으니까. 네 손으로 네 머리 한 대만 때리면 안 되냐?”
“저는 유진님처럼 제 몸을 혹사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변태적인 취미는 없어요.”
메르는 뺨을 부풀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잠시 동안 유진을 안쓰럽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후유증이 남는 상처는 아니다. 흑사자 성에는 엘릭서까지는 아니어도 값비싸고 효과 좋은 포션이 많았고, 유진의 회복력이 워낙 뛰어난데다 응급처치도 깔끔하게 해둔 덕에 으스러졌던 왼팔도 일주일 정도 지나면 멀쩡하게 돌아올 것이다. 죽는 것이 나을 것만 같은 이 고통도, 며칠 동안 침대에서 끙끙 앓다 보면 깨끗이 사라진다.
그 사실은 메르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진의 부상을 태연하게 여길 수는 없었다. 만약 유진이 평생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번처럼 무리한 싸움을 하다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재수없는 생각하지 마.”
“...어어...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제 마음을 읽으시는 거예요?”
“너는 표정에서 다 드러나.”
“...걱정되니까 걱정하는 거예요. 저는 유진님이 아픈 것도 싫고, 죽는 것은 더더욱 싫어요.”
“얘가 사람을 미친놈으로 보네. 누군 좋아하는 줄 알아? 그만 쫑알대고, 와서 저기 저, 사과나 하나 깎아서 먹여줘 봐.”
“...저는 사과 깎을 줄 몰라요.”
“모른다고 해서 평생 안 할 거야? 모르고 못하는 것도 일단 해 보고 열심히 해야 잘하게 되는 거야.”
“유진님은 꼭 꼰대처럼 말하시네요.”
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과일바구니를 쳐다보았다. 유진이 기절해 있는 동안 제노스와 기온이 가져다 둔 것이었다.
꼰대라니. 유진은 차마 그 말에는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심 기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전생까지 포함해 유진의 나이는 예순이 훌쩍 넘는다. 몸은 바뀌었어도 정신체는 그대로니까, 꼰대인 것이 무어가 이상한가? 그리고 자신을 보고 꼰대라 하는 저 십대 소녀는 외견만 그럴뿐이지 내용물은 200년 묵은 사역마가 아닌가?
“제 정신체는 파릇파릇한 소녀의 것이와요.”
“말투 뭐야...”
유진은 질색이란 얼굴로 중얼거렸고, 메르는 보란 듯이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러고선 큼직한 사과 한 알을 들고, 제 손바닥만한 과도로 용을 써대며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똑똑.
메르가 사과 하나를 제대로 깎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중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제노스였다. 대답을 듣고 들어온 그는, 과도를 들고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메르와, 그 아래에 과육을 뭉텅 달고서 썩둑썩둑 뜯겨져서 떨어진 사과껍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가 하죠.”
“세상을 사는 것에 사과 껍질을 말끔하게 깎는 재주는 아무 쓸모도 없어요. 왜냐면, 저는 사과를 먹지 않아도 되는 몸이니까요. 그리고 사과파이나 사과주스는 껍질을 깎지 않고 넣어도 상관이 없다고요.”
메르는 변명인지 헛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과도를 넘겨받은 제노스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사과를 깎아가며 입을 열었다.
“...원로원주... 아니, 도이네스 경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다행인가?”
“...흑사자와 원로원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도이네스 경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한 말이, ‘왜 살렸나?’였으니까요.”
제노스는 씁쓸히 웃으며 과도를 내려놓았다. 메르는 토끼모양으로 잘린 사과를 냉큼 집어들어 입에 밀어넣었다.
“어차피 회생은 불가능하잖아.”
“...예. 도이네스 경 본인이 그를 바라지 않으니 말입니다. 허나... 사형에게 직접, 전말을 듣고 사죄를 하고 싶다 말씀하시더군요.”
사죄라.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바랑을 끌어들인 것은 원로원주가 아닌, 손자 도미닉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주가 무고한 입장인 것은 아니었다. 원로원주는 제 손자에게 너무 많은 말을 전했다.
물론 이 사태는 원로원주가 입을 닫고 있어도 일어났을 것이다. 도미닉과 헥토르, 이오드의 결탁은 바랑이 유진을 암살하려는 것과 별개인 일이다.
“...언제?”
“사형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당장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나야 상관은 없는데. 가슴에 구멍이 나고, 조만간 죽을 할아버지를 오라는 것보단 내가 가는 편이 낫지 않은가?”
“사형의 부상도 심각하잖습니까. 그리고 원로원주님은 자신이 꼭 찾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굳이?”
제노스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는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문 밖에 엿듣는 자가 없음을 살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추측은 하고 있습니다.”
“추측?”
“...이번 사태의 전말은 사형이 먼저 말씀해 주셨죠.”
반동으로 의식을 잃기 전.
유진은 필사적으로 버티며, 제노스에게 전말을 알려주었다. 마왕의 잔재가 깃든 어둠의 정령. 이오드의 폭주. 도미닉과 헥토르의 배신.
“...사형이 강하단 것은 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아직 어린 사형이... 도미닉과 헥토르, 거기에 마왕의 잔재가 깃든 이오드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쓰러트렸잖아.”
“예, 쓰러트리셨죠. 심지어 분쇄추와 마창까지 사용하는 적을 상대로, 사형이 입은 부상은 왼팔의 골절이 전부였습니다. 지금 사형이 침대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은, 적과의 싸움에 의한 부상이 아닌 이그니션의 반동 때문이죠.”
제노스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는 꿀꺽 침을 삼키며 유진을 응시했다.
“...사형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음...”
“사형은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하멜님의 무덤을 찾아냈습니다. 그곳에서 하멜님의 비전서를 습득하였다고 말하셨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형의 강함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게... 이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저는 사형과 싸워보았잖습니까. 그때 사형이 펼친 하멜 식의 기술, 수라광살과 라이트닝카운터의 숙련도는...”
“그만.”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들었다. 다른 것보다, 제노스의 입으로 수라광살이니 라이트닝카운터니 하는 말을 듣는 것은 괴로웠다. 혼자서 사과를 절반 넘게 먹어치운 메르가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는 것도 얄밉게 보였다.
“...사제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겠군. 그래, 원로원주도 그렇게 생각할 만 해.”
핑계를 대며 부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유진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진은 최대한 자세를 바로 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픈 몸뚱이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유진은 침대에 누워서, 머리만 한계까지 치켜든 상태로 제노스를 쳐다보았다.
근엄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하멜이다.”
기왕 밝히는 것이면 조금 더 분위기를 잡고, 300년 전의 영웅에게 어울릴 만한 상황과 자세여야 하지 않은가. 유진은 내심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밝히지 않고 나중으로 미뤄 옷을 제대로 입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며 말하는 것도 꼴사나운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역시...!”
메르가 보내는 무언의 재촉에 사과를 깎아가던 제노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즉시 과도와 사과를 내려놓고, 유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의심은 없었다. 오히려 유진의 말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상쾌함을 느꼈다. 20살 청년이 저렇게 말도 안 되게 강하다고? 그 강함이 타고난 재능만으로 이룩되었다는 것이 저 선언보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유진이 300년 전 영웅의 환생이나 빙의라면ㅡ 제노스도 일말의 부끄럼이나 불만없이, 유진을 사형이라 섬기고 존경할 수 있었다. 물론 제노스는 그 전에도 유진을 사형이라 하는 것에 별 불만은 없었지만, 내심 부끄럽기는 했다.
‘사형이 하멜님이라면, 섬기고 존경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제노스라도 딸보다 어린 청년에게 경의란 감정을 갖는 것은 괴로웠다.
‘...아니... 사형이 하멜님이라면 사형이라 부르는 것도 옳지 않은 일 아닌가?’
머릿속을 스친 생각. 제노스는 거대한 감격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스승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하멜 식의 계승자로서, 저 위대한 영웅을 직접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영광이었다.
“내가 왜 네 스승이냐?”
“가문의 모두가 하멜님을 스승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니... 뭐... 엄밀히 말하면 내가 너희를 제자로 받은 적이 없는데 왜 너희가 마음대로 날 스승이라고...”
“스승님은 제게 하멜식을 새로이 가르쳐주셨잖습니까...! 저를 사제로 받아들이고, 사형이라 부르라 하셨으면서 스승이란 말은 듣지 않으시겠단 겁니까?”
“알았으니까 화내지 말고...”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서 원로원주나 오라고 해. 아니면 내가 갈까?”
“아닙니다. 이곳에 계십시오.”
제노스는 눈물을 깔끔하게 닦고서 몸을 일으켰다. 제노스가 방을 나가고, 메르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흑암의 망토를 들췄다.
“전 안에 들어가 있을 게요.”
“들어가 있으려면 좀 일찍 들어가지. 왜 사과를 다 처먹은 뒤에 들어가는 거니?”
“유진님이 먹지 않아서 먹은 거예요. 유진님은 알고 계시나요? 사과는 말이에요, 깎아두고 시간이 지나면 과육이 갈색으로 변해서 보기 흉해져요. 그걸 갈변이라고 하죠.”
“어... 그래.”
“그 갈변을 막으려면, 사과를 소금물이나 설탕물에 넣어야 한 대요. 신기하죠? 애니실라님이 알려주셨는데, 저는 소금물보다는 설탕물이 좋을 것 같아요. 소금물은 짜잖아요.”
“안 들어가냐?”
메르는 배시시 웃으며 망토 안으로 꼬물꼬물 들어갔다.
다시 문이 두드려질 때까지, 유진은 침대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오드의 폭주 이후로 이틀이 지났다.
제물로 붙잡혔던 이들도 유진처럼 침대 신세를 지고 있는데, 기온이 전해주길 늦어도 내일이면 몸 상태가 돌아올 것이란다.
...이오드와 도미닉, 헥토르의 시체는 수습되지 않았다. 파편이랄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숲에서 수습된 시체는 데콘 라이언하트 뿐. 카르멘의 남동생, 클라인 라이언하트가 그 시체를 담은 관과 함께 데콘의 가문을 방문했다.
황궁에 가있는 길레이드에게 소식은 전했다. 당장이라도 돌아오고 싶겠지만, 길레이드는 아직 황궁에 있었다.
보사르 백작가에 파견되었던 흑사자는, 백작가 저택의 창고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는 그 한 명이 끝이 아니었다. 저택 안은 테오니스와 보사르 백작, 그 외의 가솔 일백여 명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저택을 수색하며, 이오드의 방에서 일기장이 발견되었다. 그 일기장의 내용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본가를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카르멘이, 일기장을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이오드의 아버지이자 가주인 길레이드여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개판이 났군.’
머리가 지끈거린다.
‘원로원주는 회생이 불가. 원로들에게 유언은 이미 전했을 테고... 내가 사과나 한 뒤에 죽겠지.’
이오드도, 도미닉도 죽었다. 헥토르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수습은 진행 중이다. 도미닉과 헥토르의 가문은 이미 흑사자들에게 사로잡혔다. 그들을 심문해 봤자 뭐가 더 나올 지는 모르겠다만, 이번 일로 라이언하트의 위상은 시궁창에 처박혔다. 그 이상의 똥통에 처박힌 것이 바로 흑사자다. 그들은 이번 사태에서 너무나도 무력했다.
‘...차기 원로원주는 아마...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가 될 것 같은데.’
도이네스 라이언하트의 사후, 가장 배분이 높은 원로는 카르멘 라이언하트다.
‘...하지만 그 여자 성격으론 절대로 원로원주를 하려들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싶어하는 무투파니까... 그럼 동생인 클라인 라이언하트가 차기 원로원주인가?’
위엄은 떨어지지만, 사람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본가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마 가주도 아들을 병신으로 키운 것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설 것 같은데... 그럼 시안이 바로 가주가 되는 건가? 아니면 기온이? 이미 방계로 나간 둘째를 가주로 세우진 않을 텐데.’
기온도 가주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표정을 구겼다.
곤란한 것은, 이번 일로 유진에게 너무 포커스가 쏠렸다는 것이다. 당장 제노스만 하더라도 유진의 정체를 의심했고, 원로원주도 아마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다.
‘...가주한테는 성검의 힘 덕분이라고 둘러대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
대답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휠체어라도 타거나, 다른 사람의 부축이라도 받고 올 줄 알았는데. 도이네스는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억지로 뜨고 있는 것만 같은 눈동자에는 죽음이 감돌았고, 핏기 없이 새하얀 얼굴에서 뺨은 움푹 들어갔다.
가슴에 뚫렸다는 구멍은 제복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걸어도 되는 겁니까?”
비틀거리는 걸음이지만 도이네스는 스스로 걸었다. 그는 문을 닫고, 유진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영웅, 하멜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멜이냐고 묻지도 않는 군.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나도... 내... 어... 친구의... 후손을 만나서 반갑네.”
병문안
이 참을 수 없는 어색함.
몸이라도 멀쩡하면 고개라도 돌리던가, 자세라도 바꿀 텐데. 지금의 유진에겐 목 아래부터 움직이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래서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도이네스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그...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그러고 있지 말고, 좀 앉지?”
“괜찮습니다.”
“아니,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가슴에 구멍 뚫렸다며? 나도 말이야, 그, 가슴에 구멍 뚫려 본 적 있어서 그게 무슨 기분인지 아주 잘 알거든.”
유진은 전생을 떠올리면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거 아주 좆같고 휑한 기분이잖아. 으으음... 음... 뭐... 내게 뚫렸던 구멍이 더 컸겠지만 말이야. 나는 너처럼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누워서 죽기만 기다렸었거든?”
“대단하십니다.”
돌아 온 맞장구. 유진은 내뱉은 말이 민망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음... 가슴 구멍 자랑을 하려던 건 아니고...”
유진은 머릿속을 맴도는 ‘구멍’이란 화제를 떨쳐내려 노력했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유진에게 있어서 가슴의 구멍은 이래저래 인연이 많은 상처였다. 전생의 죽음도 가슴의 구멍 때문이었고, 세계수에 봉인되어 있는 세냐도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다...
“...서있지 말고 좀 앉으라니까? 내 몸도 성치 않아서, 너 서있는 거 쳐다보기 좀 힘들어.”
“예.”
도이네스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침대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유진은 도이네스에게 감도는 ‘죽음’을 보다 명확하게 느꼈다.
“얼마나 남았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도이네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성제국의 고위사제를 부른다면 소생할 가능성도 있잖아. 성녀라던가.”
“제 몸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녀의 축복으로도 제 몸을 소생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말을 잇는 도이네스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번 사태는... 라이언하트가, 아니, 흑사자가 얼마나 무능했는가에 대한 사례가 될 겁니다. 저희는 오만했고, 대영웅의 후손이라는 명예에 흠뻑 취해 내실을 제대로 다지지 못했습니다.”
“늦은 깨달음이야.”
“세상이 너무 평화로웠기 때문입니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란 놈들이 평화에 취해있었던 것도 우스워. 내가 몸만 멀쩡하고 힘만 예전 같았어도, 흑사자라 목에 힘주고 다니는 너희 새끼들 엎드려뻗쳐 시키고 몸둥이 찜질을 했을 거다.”
“죄송합니다.”
도이네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죄는 제가 끌어안고 가겠습니다. 비웃음은 젊은 세대의 불만을 촉진시킬 겁니다. 부디, 그 사실을 양해하고 저희를 돌봐주십시오.”
“흑사자에 오라는 말은 아니지?”
“하멜님을 담기에 흑사자는 너무나도 작습니다. 허나 흑사자에 하멜님의 인연이 이어져 있으니,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나마 흑사자의 변화를 지켜봐주십시오.”
“변화라.”
유진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기울였다.
“애매한 말은 하지말고, 뭘 어떻게 변하겠다는 건데?”
“흑사자 성의 문을 열겠습니다.”
“문?”
“하멜님도 아시다시피, 흑사자는 바란다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가에는 그 제한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방계가 흑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저희쪽에서 먼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렇지.”
“...앞으로는 혈계식을 치른 방계의 아이들 중에서 흑사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아이가 있다면, 곧장 성에 불러들여 훈련을...”
“그 혈계식부터가 문제야.”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며 말했다.
“네가 말한 변화는 결국, 다음 세대 흑사자의 머릿수를 늘리는 거잖아. 뭐 그건 전력증원의 면에서는 좋은 일이지. 특별함은 좀 떨어져도 머릿수는 늘어나고, 머저리도 어려서부터 가르치면 쓸 만해 진다고.”
하지만. 혈계식이란 전통이 남아있는 한 변화는 미비하다.
“사건이 벌어지고 방계 중에서 동시에 잠적한 가문이 몇 개 있다며? 그렇다는 건, 이번 사태가 본가에 불만을 품은 방계들의 반역이란 건데. 그 불만이 왜 생긴 거냐? 등신같은 혈계식 때문이잖아.”
“...하지만... 혈계식은 시조님의...”
“베르무트 그 새끼는 노망이 난 거야.”
유진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려 했다. 물론 몸에 힘을 준 순간, 전신에 퍼져 나간 끔찍한 격통에 비명을 참아야만 했다.
...아주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베르무트는 열 명이 넘는 부인을 두고, 수십 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 많은 자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자식이 차기 가주가 되었다.
그 뒤에는? 가주가 되지 못한 수많은 형제들. 아예 숙청이라도 했다면 깔끔하겠지만, 영웅의 자식이란 놈들이 제 형제끼리 물어뜯고 죽이는 것도 우스운 일. 결국 1세대는 어영부영 지나가고, 수많은 형제들이 다시 자식을 낳았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베르무트는 죽었고, ‘위대한 영웅의 라이언하트’ 가문만이 남았다. 본가가 되지 못한 가문들은 그 이름을 이어 영광을 얻길 바랐다.
“...혈계식은 필요했습니다.”
도이네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혈계식은 본가를 특별하게 만들고, 방계가 본가를 넘볼 수 없게 만듭니다. 혈계식이 없었다면, 본가는 오래 전에 내분으로 흔적을 남기지 못했을 겁니다.”
“알아.”
유진은 구겨진 표정을 펼치지 않았다.
“...베르무트 그 새끼가 혈계식을 만든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 이유.
유진의 머릿속에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이 이어졌다. 본가의 백염식과 더불어, 강압적인 전통인 혈계식은 본가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300년 동안 본가는 방계가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축적했고, 방계는 점점 그 수를 늘려갔다. 만약 혈계식이 없고, 백염식이 라이언하트 전원에게 이어졌다면...
과연 라이언하트가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 모두가 똑같은 것을 받았는데, 누구 하나만 ‘본가’라며 특별히 취급 된다면. 본가가 아닌 다른 가문들이 본가를 인정했을까. 어쩌면 도이네스가 말한 것처럼, 진즉에 내분을 겪고서 ‘라이언하트’가 흩어졌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떤가? 독보적인 본가의 존재. 월광검을 제외한 유산들은 본가의 보물고에 있고, 백염식도 본가에서 완전한 형태로 계승되고 있으며, 영맥까지 사용한 본가의 성장은 방계가 거스를 수 없다.
저 모든 것은 본가를 300년 동안 존재하게 만들었고, 수가 늘어난 방계를 통제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위해?
‘...가문의 영광?’
하멜의 환생에는 베르무트가 관여되어 있다.
그건 세냐와의 만남으로 확신을 얻었다. 세냐가 평생 지니고 있던 하멜의 유품. 목걸이. 그것에는 하멜의 혼이 봉인되어 있었다. 베르무트는 세냐에게서 그 목걸이를 빼앗았다.
‘...베르무트가... 날 라이언하트에 환생시키고 싶었다면...’
유진은 이 환생이 어떤 식으로 이뤄진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환생한 몸뚱이는 전생의 몸, 아니, 라이언하트 중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만큼 뛰어나다. ㅡ이만큼 뛰어난 육체를 태어나게 하려면, 일단 후손을 늘리는 것이 편한 방법일 거다.
‘...억측일 뿐이지만... 사실이라면?’
베르무트는 하멜에게 최고의 육체를 주기 위해 후손을 늘렸다.
라이언하트의 힘을 온존하기 위해 본가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하멜이 방계에서 환생한다면?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기반으로 삼을 육체만 뛰어나다면, 전생의 ‘기억’은 본가를 찍어 누를 만큼 하멜을 성장시킬 거다. 어찌 일이 잘 풀려 본가의 양자가 되고, 백염식까지 전수받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하멜은 얼마든지 본가를 짓밟고서 본가가 온존한 힘을 빼앗을 수 있었다.
“...혈계식을 없애라.”
유진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더 필요가 없어. 이번 일도 문제고. 혈계식만 없애도 방계의 불만은 대부분 사라질 거야.”
“...하지만...”
“가슴에 구멍이 나고서도 고집을 부리려는 거냐. 네가 말했듯, 세상이 너무 평화로워 라이언하트가 무능한 병신이 된 거다. 하지만 이제는 평화롭지 않게 되었어. 언제 헬무드가 전쟁을 벌일지 모르는데다, 본가에 불만을 품는 방계들도 잠적해 버렸지.”
“...”
“변하기 좋은 시기야.”
유진은 도이네스를 노려보았다.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유언을 남기고 죽어라. 불사의 백사자. 명예롭지 못한 죽음이지만, 네 이름은 원로들을 휘어잡고 있잖아. 그런 네가 유언으로 혈계식을 폐지한다면, 원로들도 거세게 반발은 하지 않을 거다. 모두가 먼저 말하기 싫어할 뿐, 이 사태가 가문의 썩어문드러진 전통에서 비롯된 것을 알 테니.”
도이네스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자, 유진은 큭큭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뭐라고 너한테 이런 강요를 하겠냐? 싫으면 유언 남기지 마. 너 죽은 뒤에, 내가 알아서 뜯어 고칠 테니까. 물론 그건 불사의 백사자의 유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친 방법일 테지만, 어쩌겠어?”
“...하하...”
그 노골적인 협박에 도이네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300년 전의 영웅의 조언인데... 예, 알겠습니다. 유언을... 남기도록 하죠.”
300년 간 이어져 온 전통이다. 120년을 산 도이네스는 라이언하트 역사의 산증인이었고, 본가 출신으로서 혈계식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그를 부정하는 것은 평생을 자부해 온 라이언하트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도이네스는 이번 사건이 얼마나 불명예스런 것인지 인정했고, 제 가슴을 꿰뚫은 손자에게 자신과 같은 자긍이 없었단 것을 받아들였다...
“...손자는... 도미닉은, 후회하며 죽었습니까?”
“후회할 겨를도 없었을 걸.”
“그건 아쉽군요.”
도이네스는 큭큭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선택과 행동이 틀렸음을 후회하며 죽기를 바랐는데. 그럴 겨를도 없이 죽었다면, 그리 고통스런 죽음이 아니었단 것 아닙니까.”
“끔찍한 죽음이긴 했어.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하고, 마(魔)에 잡아먹힌 놈들의 죽음은 항상 끔찍하지.”
“하멜님께 큰 빚을 졌습니다.”
도이네스는 다시 몸을 일으켜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만약 거기서 하멜님이 막지 않으셨다면, 본가의 후손은 모두 제물로 바쳐지고... 이오드가 마왕의 잔재를 완성했겠지요. 마왕을 죽인 라이언하트의 후예가 마왕을 새로이 태어나게 하다니...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흠... 마왕이 새로 태어나는 정도는 아니고... 그래봤자 잔재라서 말이야. 별 거 아니더라고. 허접 조무래기였어.”
유진은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지만, 너무 힘을 준 목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참 이상하게도, 소파에 올려 둔 망토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망토 안에서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는 메르의 모습을 상상했다.
“...크흠... 그런데 말이야. 내가 하멜인지 어떻게 알아차린 거냐?”
유진은 말을 돌릴 겸 그렇게 물어보았다.
“...꿈을 꾸었습니다.”
“꿈?”
의외의 대답이었다.
“도미닉의 기습을 받고 쓰러진 후... 제 의식이 마창과 조금 연결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수십 년을 손에 쥐었고, 원체 불길하고 신비한 무기니까요. 저는 그 꿈에서, 하멜님이 ‘어떻게’ 도미닉을 죽음으로 몰아가는지를 보았습니다.”
도이네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 손을 힐긋 보았다. 하나 남은 손은 꿈에서의 광경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힘. 그 기술. 그것은 절대로 20살 청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유진님이 시조님의 무덤에서 보이셨던 분노는, 경외하던 시조에 대한 것보다는 친구로서의 배신감에 가깝다 느꼈습니다.”
“...과연.”
베르무트의 관이 텅 비었던 것을 보았을 때.
유진은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베르무트에 대한 배신감이 이성의 멱살을 잡고서 흔들어댔다.
“...마창과 분쇄추는...”
“메르야.”
유진은 도이네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메르를 불렀다. 그러자 망토 사이에서 메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네, 허접 조무래기와의 싸움으로 거동도 하지 못할 만큼 부상을 입으신 유진님.”
“...말은 바로 하자. 이건 부상이 아니라 근육통이야.”
“네, 허접 조무래기와의 싸움으로 거동도 하지 못할 만큼 극심한 근육통에 시달리시는 유진님.”
“너 진짜 몸 다 나으면 죽을 줄 알어.”
“절 부른 용건이 뭔가요? 입만 산 유진님.”
“...망토 안에서... 마창이란 분쇄추 꺼내.”
유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내뱉었다. 그러자 메르는 혀를 삐죽 내밀고서 다시 망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웃었냐?”
“아닙니다.”
“웃은 것 같은데?”
“아닙니다.”
“마음속으로 웃었지?”
“아닙니다.”
오늘 죽을 노인을 심문하는 짧은 시간이 지나고. 망토 안에 들어갔던 메르가 제 몸보다 훨씬 큰 마창과 분쇄추를 낑낑거리며 끌고 나왔다.
“저건 내가 갖는다. 불만 없지?”
유진은 턱 끝으로 마창과 분쇄추를 가리켰다.
그것은 더 이상 마왕의 무구가 아니었다. 형태는 변하지 않았지만, 무구의 근간을 이루던 마기는 깔끔하게 소멸했다.
대신에, 유진의 몸에 흐르던 번개불꽃의 일부가 마창과 분쇄추에 흘러들어갔다. 그것에서 유진은 어떠한 가능성을 느꼈다. 몸이 성치 않아 당장 시험해 볼 수는 없었지만, 마기와 함께 소멸한 어둠의 정령 대신 번개불꽃이 깃들었다는 건ㅡ 위력까지는 재현할 수 없겠지만, 마창과 분쇄추를 무구로서 사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멜님 말고 누가 저 무기들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도이네스는 유진의 말에 더 이상 반발하지 않기로 했다.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만, 저 300년 전의 대영웅은 동화책이나 역사에 전해지는 만큼 화끈한 성격이었다.
“슬슬 돌아가 봐.”
도이네스에게 감도는 죽음은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짙어졌다.
“...네 후손은 도미닉 뿐이었다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원로들과 작별은 나눠야 할 것 아니냐.”
“유언도 전해야지요.”
도이네스는 큭큭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멜님. ...당신과 이렇게 만난 것에 기사로서 큰 영광을 느낍니다. 만약 제게 시간이 충분했다면, 하멜님께 청해 과거의 무용담을 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난 민망해서 싫어.”
유진은 질색이란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차기 원로원주는 누가 되는 거지?”
“카르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하려들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동생이 원로원주가 되겠군.”
“예.”
“부탁 하나 해도 되나?”
“편히 하십시오.”
“본가는 내버려 둬.”
물러서던 도이네스가 고개를 들어 유진을 보았다.
“괜히 이 문제로 가주를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남이 괴롭힐 것 없이 본인 마음이 제일 괴로울 테니까.”
“...허허.”
도이네스는 그 말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멜님이 본가를 아껴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래봤자 가주는 안 할 거다.”
“하지만 하멜님이 그 쌍둥이와 본가를 아끼시니, 스스로 가주에 오르지 않으셔도 본가는 유례없는 영광을 갖겠지요.”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것이 도이네스의 가슴에 남은 미련이었다. 하지만 생을 연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누군가는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하며, 그와 함께 가문의 개혁에 불씨를 피워야만 했다.
‘...불명예스런 죽음이지만...’
도이네스는 씁쓸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가문을 위한 죽음이구나.’
불사의 백사자라 불리며 살아온 120년.
설마 이런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이네스는 이렇게 죽는 것에 울분은 느끼지 않았다. 모든 것은 불찰. 손자에 대한 믿음과, 모든 것이 가문을 위한 것이라 착각했던 오만함이 이런 묫자리를 만들었다.
추하고 불명예스런 죽음이지만, 300년 전의 전설이 라이언하트에 깃든 것을 알았다.
도이네스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문 밖에는 제노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노스가 부축을 위해 다가왔지만, 도이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가지.”
원로원의 회의가 진행되는 원탁.
도이네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 위해, 제 발로 원탁의 탑을 향해 걸어 나갔다.
병문안
도이네스의 장례는 120년을 살아 온 원로의 장례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조용히 치러졌다.
본래 도이네스같은 거인의 장례라면, 라이언하트의 모든 방계와 외국의 저명한 인사, 키옐의 황제가 직접 조문객으로 방문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도이네스는 그를 바라지 않는다 유언을 남겼기에, 장례식은 흑사자성의 일원들로만 치러졌다.
유진은 몸이 회복되지 않아 장례에 참석하진 못했지만, 창가 쪽에 누워서 장례행렬은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새카만 제복과, 깃발의 행렬. 비록 영광스런 죽음은 아닐 지라도, 원로들과 흑사자 전원은 수십 년 동안 이 성에 군림했던 불사의 백사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들이 새카만 관을 짊어지고 있다. 도이네스의 관은, 성 뒤편에 있는 흑사자의 묘지에 묻힐 것이다.
행렬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유진도 도이네스에 대한 애도는 느꼈다. 자초한 일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결국은 자식... 아니, 손자를 잘못 키워서 죽은 것 아닌가.
“...자식 교육이란 건 참 마음처럼 안되나 봐.”
장례는 끝났지만, 뚱한 얼굴로 창밖을 보던 유진은 대뜸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는 교육이 필요 없어요.”
맞은편에서 사과깎기에 열중하고 있던 메르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제노스가 깎아주었던 토끼모양 사과를 재현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애써 만든 토끼, 몸뚱이의 과육은 뭉개져 울퉁불퉁하고, 귀는 뭉툭하고 두껍다. 메르는 제노스가 깎은 것처럼 날렵하고 매끄러운 토끼를 만들고 싶었다...
“왜냐하면, 저는 교육이 필요없을 만큼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죠. 베이스도 아주 훌륭해요. 세냐님은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자애로운 인격자셨어요.”
“다른 건 몰라도 사과깎기의 교육은 필요해 보이는데.”
“세냐님도 단검... 과도는 잘 다루지 못하셨을 거예요. 저는 마법에 대한 이론은 빠삭하지만, 이런 잡기(雜技)에는 능하지 않아요. 하지만 교육은 필요 없어요. 저 혼자서 학습하고 있다구요.”
“너는 모르겠지만, 세냐는 칼도 꽤 잘 다뤘어.”
그 말에 메르의 손에서 과도가 떨어졌다. 그녀는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헤?”
“마법사라고 지팡이만 휘두르는 것도 웃기잖아. 후방에 처박혀서 마법만 외는 역할이면 모를까, 당시의 전장은 존나게 개판이었다고.”
유진은 300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스는 메이스로 대가리를 참 잘 깨부쉈고... 세냐는 품안에 숨길 수 있는 단검을 애용했지.”
“...아카샤를 두고 단검을 썼다고요?”
“그 왜, 너도 많이 봐서 알겠지만. 아카샤가 마법지팡이 말고 무기로 쓰기에는 디자인이 좀 그렇잖아. 잘못 휘둘렀다가 드래곤하트가 깨지기라도 하면?”
제안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드래곤하트가 깨지는 것이 걱정이면, 강화마법이라도 걸면 되잖아.’
‘내가 지팡이 안 휘두르고 단검 찌르겠다는데 왜 지랄이야?’
‘아니 시발 넌 마법사잖아. 그냥 뒤에서 얌전히 마법이나 외던가. 왜 굳이 앞에 나와서 마법 쓰다말고 단검질인데?’
‘나도 상대를 가리고 단검 찌르는 거니까 걱정하... 하멜, 너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걱정이 아니라 이해가 안 돼서...’
‘내가 안전한 곳이 아니라 앞에 나와서 싸우는 것이 걱정되는 거잖아, 그렇지?’
‘마법사면 좀 주제를 알고서 뒤에 찌그러져 있으란 뜻...’
‘흥... 흐흥.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맙, 아니, 아무렇지도 않지만, 응, 너... 너 따위가 나를 걱정해? 너야말로 주제를 알아!’
‘아니 걱정 안 했다니까...’
직접 단검을 찌르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긴 했다. ‘저주’는 흑마법 뿐만 아니라 일반 마법에도 존재하는, 유서깊은 마법 중 하나다. 흑마법의 저주는 그 강력한 위력에 비해 조건이 간단하지만, 통상의 저주를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피와 살점이다. 세냐가 선두에서 저주의 단검을 휘두를 때마다, 전투 중인 마물들이 약해졌다.
하지만 굳이? 유진은 전생에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대군과의 전투에서 세냐가 거는 저주의 덕을 꽤 보긴 했지만, 앞으로 나와 단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뒤에서 대규모 마법을 때려박는 것이 더 위력적인데? 저주는 아니어도 디버프 계열의 신성마법은 아니스로 충분했고...
‘앞으로 나오지 말라고!’
‘내 마음이야!’
‘정 나올 거면 내 옆 말고 모론 쪽으로 가란 말이야! 왜 자꾸 내 근처에서 알짱대는 거야?’
‘아... 알... 알짱? 이 개자식아!’
‘방해되니까 좀 짜져있어!’
‘쓰레기 같은 말 하지 마십시오, 하멜.’
‘말이 너무 심하다.’
‘너희는 왜 세냐 편을 드는 거냐? 얘가 자꾸 내 간격에서 알짱거리잖아!’
‘그건... 그건 세냐 딴에는 당신의 등을 지키...’
‘저저저저 새끼 등에 단검을 처박기 위해서야!’
“...음... 어쨌든 말이야. 세냐는 네 생각과는 달리 단검도 잘 썼다고.”
“...저도... 저도 단검으로 무언가를 찌르는 것은 잘 할 수 있어요.”
메르는 두눈을 부릅 뜨고서 양손으로 과도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보란 듯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푹푹 찔러대기 시작했다.
마침 한가하기도 했고, 어린애 재롱잔치라도 보는 기분으로 메르가 단검을 찌르는 것을 감상했다.
“그렇게 찌르면 칼날 박히지도 않아. 각도를 조금 더, 그렇지, 체중을 싫어서...”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몸이 근질거린다. 침대 신세를 진지 벌써 사흘. 고통은 여전해서 몸도 움직일 수 없으니 지루하기만 했다. 그 지루함이 어느정도였냐면, 신성제국에 가있는 크리스티나가 그리울 정도였다.
‘...아니스만큼은 아니어도 기적은 잘 썼는데. 크리스티나가 여기 있었으면 진즉에 몸이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메르에게 단검술을 가르치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이 성에서 유진의 방문을 저렇게 마음대로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몸 아프다고 지금 개기는 거지?”
유진은 문앞에서 선 시안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노크는 하고 들어와야지 썩을 자식아. 내가 몸만 멀쩡했어도 네게 예의범절이라는 걸 다시 가르쳤을 거다.”
“형제끼리 무슨...”
시안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슬쩍 뒤로 물러서며 다시 문을 닫았다. 똑똑. 노크 소리에 메르는 단검질을 멈추고서 킥킥 웃었다.
“...사역마를 암살자로 키우려는 거냐?”
시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메르를 쳐다보았다. 자그마한 손에 쥐어진 단검... 시안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 꽤 좋은 생각같기는 한데, 왠만하면 하지 말지? 어머니도 싫어하실 거고... 나도 그리 보기 좋지는 않네.”
“헛소리말고. 몸은 어떠냐?”
“멀쩡하지.”
시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부끄럽게도 말이야. 전투 중에 입은 부상도 대수롭지 않았고...”
“정신 쪽은 어때?”
“내가 느끼기에 별 문제가 없기는 해.”
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방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를 쳐다보았다.
“너희는 또 뭐야?”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왔다.”
가르기스는 우람한 가슴 근육을 내밀며 대답했다. 그 곁에서 쭈뼛거리며 서있던 디자이라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그곳에서 죽었을 테니까...”
“언제부터 감사인사를 빈손으로 하게 됐지?”
유진은 삐딱하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장난삼아 내뱉은 말이었지만, 가르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품안에서 두툼한 주머니와 포션을 꺼냈다.
“우리 가문 비전의...”
“어, 그래. 나중에 아껴 먹을 테니까 대충 책상 위에 올려 놔.”
“나... 나는 따로 준비한 것은 없지만...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거야.”
디자이라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금전으로라도 지불해야 하나? 목숨 값이면 대체 얼마를 줘야 하지? 돈이 썩어 넘치게 많을 본가에 돈을 주는 것이 의미가 있나? 아니면 다른 가치있는 보물로 보답을 해야 하나?
“으흠.”
디자이라가 고민에 잠겼을 때. 시안이 헛기침을 뱉었다.
“감사인사가 끝났으면 좀 나가 있지? 나는 이번 일에 대해 형제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야겠는데.”
“유진. 그 약은 정확한 용법으로 먹어야 한다. 욕심내서 혼자 먹지 말고, 내 보조를 받도록 해라.”
“나중에 먹는다니까...”
가르기스와 디자이라가 나간 후. 시안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침대 근처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몸. 정말 괜찮은 것 맞지?”
“괜찮다니까. 앞으로 며칠만 지나면 멀쩡해질 걸?”
유진은 대수롭지 않단 얼굴로 대답하면서 시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저 자존심과 자긍심이 강한 형제는, 마음 속에 남은 여러 가지 감정을 채 소화하지 못하고 입술만 삐죽 내밀고 있었다. 유진은 시안이 느끼고 있을 혼란과 불안에 공감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편린 하나 쯤은 거들어주고자 입을 열었다.
“뭐 어때.”
“...”
“형제잖아. 평생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내가 너처럼 꼴사납게 잡혀 있으면... 너도 나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구하려 들었을 걸 아니냐?”
“...꼴사납지는 않았어.”
시안은 어깨를 바르르 떨며 내뱉었다.
“방심, 했을 뿐이다. ...너무 흥분하기도 했고. 동생이, 시엘이 잡혀 있었단 말이야.”
“그렇겠지.”
“...이오드가 그만큼 미쳤을 줄은 몰랐어. 나는... 나는 본가의 후계자다운 일을 하려고 했다. 시엘을 구하고, 타락해 미쳐버린 이오드를 단죄하고 싶었어. 그런데 설마 헥토르까지 이오드와 한패였을 줄은...! 헥토르의 공격에 당황하지만 않았어도, 네 도움없이 시엘을 구할 수 있었을 거야.”
“진짜?”
유진은 입꼬리를 씰룩대며 웃었다. 그 표정으로 시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니, 시안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나 혼자서는 무슨 수를 쓰든 시엘을 구하고, 이오드를 막을 수 없었겠지. 방심하고 흥분했던 것은 맞지만... 결국 다 핑계야.”
“알면 됐어.”
유진은 흐뭇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 병신이 된 것도 아니고. 무사히 살아남았잖아. 그럼 된 거지. 인정한 건 인정하고,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잘 하면 돼.”
“...나도 알아.”
“앞으론 네가 많이 힘들 거다. 본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만큼, 차기 가주인 네가 잘 해내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수련 열심히 하고, 어디서 처맞고 다니지 않을 만큼 강해지란 말이야.”
시안은 그 이야기를 얌전히 들으면서, 내심 복잡한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반박할 수 없는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저 조언이 동갑인 20살 형제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잖은가?
“...새끼. 맞는 말인 건 알겠는데, 꼭 늙다리처럼 말하네...”
“내 정신이 너보다 훨씬 성숙해서 그런 건 아닐까? 형제야, 네 정신연령이 아직 13살에 머물러서는 아닐까?”
시안은 대꾸하지 않고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잠시 소파에 앉아 손을 쥐었다 펴다가, 슬며시 유진에게 시선을 올렸다.
“...이번 일도 있고 하니, 그냥 네가 가주를...”
“뒤질래?”
“크흠... 알았으니까 화내지 마.”
시안은 즉시 꼬리를 말고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원로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아버지는 늦어도 이틀 후에는 흑사자성에 오실 거다. 그에 맞춰서 아롯에서는 적탑주님과 백탑주님이 오실 거야.”
왜?
유진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물어보려 했지만, 질문을 꿀꺽 삼켰다. 추론하기 어려운 이유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진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오드는 죽었고, 놈이 그렸던 마법진은 격전에 휩쓸려 사라졌다.
하지만 유진은 그 마법진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아카샤가 유진의 머릿속에 마법진을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유진 뿐만 아니라 메르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둠의 정령.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는 당대 최고의 정령술사다. 어둠의 정령과는 계약을 맺지 않았지만, ‘정령’에 관해서는 멜키스 이상의 전문가는 없다.
‘사실 흑탑주를 부르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흑사자성은 그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이 흑마법에 연관된 이상, 다른 흑마법사를 더 끌어들이고 싶을 리가 없었다.
“신성제국에서는?”
유진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적탑주에 백탑주. 마법과 정령술의 전문가는 충분하지만, 유진이 생각하기에 흑마법의 흔적을 파헤치기엔 신성제국의 도움도 필요했다.
“...크리스티나 보좌주교의 방문을 요청했지만, 바쁘다고 거절당한 모양이야. 대신에 이단심문관이 한 명 방문한다더군.”
“흠.”
이단심문관이라. 유진은 300년 전의 이단심문관들을 떠올렸다. 흑마법을 척살하는 사냥꾼들. 신성제국의 그 누구보다 신을 맹신하는 광신도. 흑마법사를 사냥하면서 흑마법사 이상으로 잔인한 족속.
“...전문가긴 하군.”
그들이 크리스티나만큼 강력한 기적을 펼칠 수는 없겠지만, 흑마법을 추격하는 것에 있어서는 크리스티나보다 유능할 것이다.
“그런데 시엘은 왜 같이 안 온 거냐?”
유진은 뒤늦게 시엘의 부재를 깨닫고서 물었다. 아까 장례행렬에 함께 있던 모습은 봤었는데, 가르기스와 디자이라도 병문안을 온 마당에 시엘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 의문스러웠다.
“같이 가자고 말은 했는데 말이야.”
시안은 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시엘은 이따 혼자 오겠대.”
“왜?”
“나야 모르지.”
*
시엘은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노려보았다. 위아래로 검은 제복. 흑사자의 제복이지만, 안에 받쳐 입은 셔츠의 단추가 모두 채워진 것이 답답해 보였다.
장례식은 끝났다. 옷은 갈아입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바로 갈아입을 수는 없었다.
각오가 필요했다.
생전 처음 가는 병문안이다. 그 무식할 만큼 강한 녀석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병문안이야.’
시엘의 옷장에는 제복과 무복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 외에도 입은 적이 없는 옷들이 여럿 있었다. 대부분이 생일선물로 받은 옷들이다. 어디 파티에 참석할 때나 입을 생각이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일 병문안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입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너 미쳤냐?’
물론 그 재수 없는 자식은 보자마자 그렇게 쏴댈 것이다. 상관없었다. 시엘은 그런 식으로 유진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었고, 이 칙칙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농담이나 주고받고 싶었다.
“...좋아.”
시엘은 각오를 다졌다. 그리곤 과감히 제복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그렇게 옷을 벗어 던지고, 성큼성큼 걸어 옷장 앞에 섰다.
그리고 한참 동안 옷을 골랐다. 너무 과하지는 않은. 이 드레스는 뭔데 가슴이랑 등이 이렇게 파여 있지?
‘...이걸 입으면...’
똥 씹은 것처럼 구겨지는 유진의 얼굴을 떠올리고, 시엘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런 표정을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만, 그 표정 하나 보자고 이 미친 드레스를 입고 싶지는 않았다.
“넌 나중에.”
시엘은 그 드레스를 기억하고, 다시 옷장을 뒤졌다. 결국 시엘이 고른 것은 너무 과하지 않은, 무난하며 깔끔한 예복이었다. 시엘은 치맛단의 주름을 손으로 톡톡 치며,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쳐다보았다.
치마를 입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텅 빈 쇄골부근에 시선이 갔다.
‘그 녀석. 항상 이상한 목걸이를 하고다녔지.’
낡아빠진 목걸이. 뭔가 사연이 있어 보여서, 어릴 적부터 물어봤었지만 한 번도 대답을 해준 적이 없었다.
‘너 그 목걸이 뭐냐?’
‘예쁘지?’
‘...음, 잘 어울리네.’
‘너도 목걸이 하나 줄까?
나랑 똑 같 은 걸 로.’
시엘은 머릿속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상상하며 악세사리함을 뒤졌다. 선물받은 목걸이는 여럿. 그 중에서도 너무 과하지 않고, 유진의 목걸이와 비슷한... 작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골라, 제 목에 걸었다.
“...귀걸이랑 팔찌는 너무 과하지? 파티 가는 것도 아니고.”
장례식이 끝났긴 하지만, 너무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옷을 입을 수는 없다. 당장 시엘이 고심하며 고른 옷도 검은색의 원피스였다.
“좋아.”
머리모양을 몇 번 만졌다. 뒷머리는 풀까? 아니면 묶고 있을까. 앞으로 넘길까? 자연스러운 것이 낫겠지. 은은한 향수도 뿌렸고, 준비는 끝났다. 시엘은 흐뭇한 얼굴로 방을 떠나, 유진이 머무르는 별궁으로 향했다.
“시엘. 너 그게 무슨...”
“더 말하면 죽일 거야.”
도중에 만난 시안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지만, 시엘은 시안을 상대하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
시엘은 복도 중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진의 방문 앞.
커다란 꽃다발을 끌어안은 제니아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병문안
품에 안긴 꽃다발을 본 순간.
시엘은 성큼성큼 뒷걸음질 치다가, 홱 몸을 돌렸다.
“깜짝이야.”
막 방에 돌아왔던 시안은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시엘은 오빠의 놀란 기분은 무시하고, 얇게 뜬 눈으로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있다. 시엘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탁자 위의 꽃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빠는 어울리지 않게 소녀다운 면이 있어서, 본가의 방에도 항상 꽃을 장식해 둔다.
“너 뭐하는 거야?”
시안은 꽃병의 꽃들이 죄다 뽑혀나가는 것을 보고서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시엘은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꽃줄기의 물기를 털어내고, 끝을 대충 뜯어낸 뒤에 방안을 둘러보았다.
“잠깐...”
시엘은 과감히 옷장을 벌컥 열었다. 그를 본 시안의 눈동자가 불안을 가득 담고서 좌우로 흔들렸다. 시안은 어릴 적부터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제 취향 가득한 외설스런 서적들을 침대 밑이나 옷장 깊은 곳에 숨겨두곤 했다...
“그... 시엘. 대체 왜 그러는...”
“오빠.”
옷장을 홱홱 뒤지던 시엘의 손이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나 이거 줘.”
시엘이 꺼낸 것은 예복과 세트로 묶인 고풍스런 실크스카프였다. 대륙에서 최고로 꼽히는 패션디자이너가 시안이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며 선물했던 것이다. 다만, 시안은 성인이 된 후로 흑사자 성을 떠난 적이 없어서 아직 저 예복과 스카프를 착용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건 좀...”
“옷 달라는 것도 아니고 스카프만 달라고.”
“그게, 어, 그 옷은 스카프랑 함께 세트인...”
“자꾸 그러면 저 밑에 숨겨진 책들 꺼내서 낭독할 거야. 어머니한테도 이를 거고, 흑사자 성에도 소문을 낼 거야.”
“너... 너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 나도 어른이야! 그 문제에 관해선 더 이상 어머니도 날 꾸짖을 수 없어!”
“응, 알아. 꾸짖지는 않으시겠지. 대신 아주, 아주 복잡한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시겠지. 나도 그럴 거고.”
시엘은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려 시안을 응시했다. 시안은 무언가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많은 감정이 회오리치는 여동생의 눈동자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만약 여기서 거절한다면, 저 고약한 여동생은 앞으로 최소 10년은 저런 눈동자로 오빠를 대할 것이 분명했다.
“...가... 가져가라.”
“고마워.”
시엘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쫘악!
시안이 보는 앞에서 스카프가 두갈래로 찢어졌다. 여동생의 과감한 손길에 시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시엘은 스카프를 몇 번 더 찢고서 꽃줄기를 하나로 묶었다. 넓게 찢은 면으로는 꽃다발을 만들고, 남은 것으론 꽃다발을 휘감고 리본을 만들었다.
모든 작업이 끝났을 때. 시엘의 손에는 최고급 실크스카프를 통째로 사용한 맵시있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시엘은 자신의 손재주와 미적감각에 내심 감탄하며 꽃다발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고작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서... 내 성인 기념 선물을...”
“이거도 가져간다.”
시엘은 악세사리함에 들어있던 큼직한 보석 브로치를 하나 꺼냈다.
“오빠는 브로치 안 어울려.”
“한 적도 없어...!”
“오빠의 미적감각은 어려서부터 엉망이야. 이렇게 커다란 보석브로치를 어디에 쓰려고 그래?”
시안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어깨만 파들파들 떨었다. 시엘은 꽃다발의 리본 중앙에 브로치를 장식하고서,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니아가 들고 있던 꽃다발보다는 크기가 훨씬 작기는 하지만, 꽃다발에 쏟은 정성과 값어치에서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내가 직접 만든 거니까 말이야.’
시엘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서 시안의 방을 나갔다.
...제니아는 아직도 유진의 방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기억은 희미했다. 마기에 이끌려 숲의 깊은 곳에 들어온 순간... 등 뒤의 어둠이 덮쳐왔다. 갑작스런 기습. 훌륭히 대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도중부터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리고, 이틀 동안 침대 신세를 졌다. 사건의 전말은 그때 들었다. 이오드 라이언하트. 본가의 장남이 마왕의 잔재가 깃든 어둠의 정령을 어쩌고... 제니아는 마법에 아무 관심이 없었기에, 그 전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간단하게 생각했다. 본가의 장남이 미쳤다. 흑사자의 1번대 대장인 도미닉도 미쳤다.
...헥토르도 미쳤다.
“...어휴...”
제니아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손의 꽃다발을 노려보았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쳐서 사건을 벌인 3명은 죽었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건, 3명을 죽이고 인질을 구출한 것이 그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것이다.
‘...아니... 정말로?’
흑사자 기사단이 자신들의 무능함을 인정하면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날 구한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아니란다.
제노스는 존경하는 하멜이 유진으로 환생하고, 자신의 하나 뿐인 딸을 위기에서 구한 것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리고 딸도 자신과 같은 감사와 대스승 하멜님에 대한 경외를 함께 느끼길 바랐다.
...하지만 딸에게 유진의 정체는 알릴 수 없었다. 알려서는 안 된다. 유진이 하멜이라는 것은 제노스가 평생을 지켜야 할 비밀이다. 하지만, 하지만 알리고 싶다. 입이 근질거린다. 하멜을 존경하는 것은 제니아도 마찬가지. 모든 진실을 깨우친 딸과 진솔한 마음으로 함께 스승을 섬기고 싶다...
그래서 제니아가 여기 있는 것이다. 그녀의 손에 들린 꽃다발은 제노스가 직접 쥐어준 것이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오라며 등을 떠밀기도 했다.
제니아는 그 사정을 모른다. 여러 가지 마음이 복잡했다. 어려서부터 친했고, 라이벌이었던 헥토르가... 라이언하트를 배신했다. 그리고 죽어버렸다.
헥토르의 원수?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제니아는 유진이 껄끄러웠다. 실력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총애를 받는 모습에 질투를 느꼈다.
“먼저 들어가도 될까요?”
성큼성큼 다가 온 시엘이 제니아의 옆에 섰다. 어떤 표정으로 보고, 어떻게 감사인사를 전해야 할 지를 고민하던 제니아는 화들짝 놀라서 시엘을 쳐다보았다.
“들어가지 않을 거라면 말이죠.”
시엘은 뒷머리를 우아한 손짓으로 털며 웃었다. 그러면서 제니아의 모습과, 꽃다발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오해였군.’
혼자 따로 와서, 거기에 꽃다발까지 들고 왔기에 흑심이라도 품고 있는 것인가 견제했는데, 표정에서 싫은 티가 팍팍 묻어나는 것을 보니 제노스에게 등떠밀려 온 것이 분명했다.
“혼자 들어가기 부담스러웠나 보죠?”
시엘은 문고리에 손을 올리며 살풋 웃었다.
“그렇다면 저와 함께 들어가도록 해요. 저도 혼자 들어가는 것이 내심 민망했거든요.”
“아... 그러십니까?”
제니아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표정을 풀었다. 시엘의 제안은 여러 계산을 깔고 있었다. 제니아의 나이는 27살. 시엘의 나이는 20살. 제니아도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7살이란 나이 차이는 크다.
‘외모도 뭐... 내가 낫지.’
어려서부터 인정받아 온 외모. 시엘은 자신이 상큼하고 귀엽고 예쁘단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칙칙한 제복. 나는? 갈아입고 오길 잘했네. 같이 있으면 딱 비교가 되잖아.’
향수도 뿌렸고, 목걸이도 했다. 시엘은 방긋 웃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제가 이겼어요!”
문을 연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메르가 폴짝 뛰어내렸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침대의 유진에게 다가가더니, 척하고 손을 내밀었다.
“한참을 밖에 서있더니. 들어올 거면 1분만 더 있다가 들어오지 그랬냐?”
유진은 얼굴을 잔뜩 구기고서 시엘과 제니아를 노려보았다.
“일찍 들어와서 내가 졌잖아!”
“제가 말했죠? 슬슬 들어올 거라고. 유진님은 조금 더 있다가 들어올 거라고 말했지만, 제가 이겼어요. 그건 즉 유진님이 틀렸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빨리하기나 해.”
“패배를 인정해 주세요.”
“어, 내가 졌다, 빨리 해!”
메르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이불 아래에 축 늘어진 유진의 손목을 들고서, 소매를 걷어 올렸다.
“봐주지 않을 거예요.”
“누가 봐달래?”
“유진님의 몸이 아픈 것은 알지만, 내기는 내기니까요.”
후, 후. 메르는 하나로 모은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넣고, 유진의 손목에 무자비한 일격을 날렸다. 짜악! 찰지게 달라붙는 소리. 평소라면 따갑지도 않을 공격이지만, 지금의 유진에게 저 일격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영혼까지 닿았다.
“크으읍...!”
유진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그 격렬한 반응에 오히려 메르가 놀라버렸다. 그녀는 움찔 어깨를 움츠리고서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괘, 괜찮으세요?”
“아무렇지...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정말이죠? 나중에 이거로 저한테 화내시는 거 아니죠?”
“아니라고!”
“손가락 걸고 약속해 주세요.”
기어코 약속까지 하고 나서야 메르는 웃으며 물러섰다. 유진은 아직까지 가시지 않은 손목의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대체 뭐하는 거지?
유진과의 대화를 여러 번 상정했던 시엘이지만, 설마 들어오자마자 저런 상황을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으흠.”
제니아는 헛기침을 하며 품에 안은 꽃다발을 유진에게 내밀었다.
“...감사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그러시겠죠.”
“...이 꽃다발은 저 뿐만 아니라, 저희 아버지의 마음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부담스럽다.
유진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제노스를 떠올렸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내거도 받아.”
시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리본과 보석브로치가 정면으로 잘 보이는 각도였다.
“예쁘지? 꽃다발도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이 보석은 뭐야?”
“브로치. 가슴에 장식하는 거야. 한 번 달아볼래?”
“나중에.”
대답하며 시엘의 옷차림을 흘겨보았다.
“옷은 또 왜 그래?”
“...어?”
“목걸이는 또 뭐야? 네가 언제부터 그런 목걸이를 하고 다녔어?”
대비했던 질문이다.
“예쁘지?”
시엘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곡선을 부각시키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뭐?”
“너랑 별로 안 어울려.”
어떻게 사람 면전에 대고 저렇게 재수 없게 말할 수 있지?
“너는 그런 반짝반짝한 목걸이 말고 다른 목걸이가 어울릴 것 같아.”
“어... 어? 정말?”
“옷은 예쁘네. 너 그렇게 입은 거 처음 보는 거 같다 야.”
“...그렇지?”
예상치 못한 대화에 흔들린 마음을 다잡았다. 시엘은 훗 웃으며 우아한 손짓으로 뒷머리를 털었다.
“네가 말했잖아? 감사인사는 나중에, 나 멀쩡할 때, 아주 정중하게 듣겠다며?”
시엘은 보란 듯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였다. 몸에 뿌린 은은한 향수가 회전에 실려 유진에게 날아갔다.
“구해줘서 고마워.”
치맛자락을 살짝 올리고, 무릎과 허리를 낮추었다. 고개는 완전히 숙이지 않고,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내 목숨을 구해준 은혜.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까?”
“정중한 감사는 아닌 것 같은데?”
“...”
“뭐 무릎이라도 꿇던가... 고개를 더 숙이던가. 그게 정중한 감사 아닐까?”
“차암 누나한테 짓궂은 동생이라니까.”
시엘은 표정을 왈칵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성큼성큼 다가와, 유진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럼 이건 어때? 네 몸이 회복되는 동안, 내가 매일 병수발을 들어줄게.”
“병수발은 제가 들 수 있어요.”
메르가 고개를 쳐들고 말하자,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과일 하나 제대로 깎지 못하는 네가 병수발을 어떻게 들어?”
“병수발에 사과깎기는 중요하지 않잖아요.”
“그럼 뭘 해야 하는데?”
“유진님의 붕대를 갈고, 몸의 땀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속옷도 갈아입히고, 근육이 굳지 않도록 주물러주고, 똥오줌을 받아줘야 해요.”
시엘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유진을 쳐다보았고, 유진도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 메르를 쳐다보았다.
“너 미쳤니?”
“병수발은 그런 것 아닌가요?”
“내가 언제 너한테 똥오줌 받아달라고 했어?”
“전 준비가 되어있어요.”
“필요없어!”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하네요. 침대 신세를 지신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단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않을 수 있는 거죠? 땀도 안 흘리시고.”
메르는 두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똥오줌이라니...”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제니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꺼림칙하단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힐긋거리며 보았다.
“...본가 분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만한 주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오해는 풀어야 할 거 아닙니까. 저는 똥오줌 받아달라 한 적도 없고, 옷 갈아입혀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 기저귀를?”
제니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무의식적으로 유진의 하반신을 힐긋 보았다. 물론 그 하반신은 이불에 덮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거... 마법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옷도 갈아입을 필요 없이 청결하게. 됐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요.”
“꺼져 좀.”
유진은 괜한 소리를 한 메르에게 눈을 흘겼다. 그리곤 이쪽을 쳐다보는 시엘과 제니아를 홱 돌아보았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아무 생각 안 해.”
시엘은 주춤 물러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음... 나는 네 붕대까지는 갈아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좀 그래.”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언제 해달라고 했습니까? 환자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십쇼.”
유진은 구겨진 얼굴로 쏘아붙이며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바람이 유진의 뜻에 호응해, 닫힌 문을 벌컥 열었다.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래?”
“환자는 안정이 최우선이야.”
“나랑 있는 게 안정되지 않단 뜻이야?”
“당연한 걸 묻냐?”
“어째서? 심리적인 이유야? 지금 이렇게 차려입은 내가, 너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널 심리적으로 자극하는 거야?”
“네 옷차림은 자극이 안 되는데 네 헛소리는 자극이 되네. 무슨 자극인줄 알아? 분노야. 맞기 싫으면 꺼져!”
유진은 빽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시엘은 혀를 삐죽 내밀고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제니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 안에서 호루라기가 매달린 목걸이를 꺼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호루라기를 불도록 하십시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저항이 불가능했다. 유진은 제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노려보다가, 바람을 일으켜서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삐이익!
눈앞에서 호루라기를 부는 모습에 제니아가 눈을 끔벅거렸다. 유진은 물고 있던 호루라기를 퉤 뱉고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시엘 데리고 나가세요.”
“독하다 독해.”
“네가 병문안이랍시고 와서 사람 복장 터지게 하잖아!”
“목청 큰 거 보니 걱정 안해도 되겠네.”
시엘은 방긋 웃으며 제니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자, 방해하지 말고 나가 있도록 하죠. 언니.”
“...언니?”
“저보다 나이가 무려 7살이나 많으시잖아요. 혹시 언니라 부르는 것이 불편하신가요?”
이게 뭘까... 별 뜻 없고, 상황적으로 이상하지 않은 말인데... 제니아는 은근한 언짢음을 느꼈다. 물론 그 티끌만한 감정으로 본가의 아가씨에게 짜증을 쏟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다.”
“푹 쉬어. 도움이 필요하거나 심심하면 부르고. 그리고 화장실은, 기왕이면 참지 말고 부축이라도 받으며 다녀오도록 해.”
“꺼져!”
시엘은 마지막까지 얄미운 미소를 보여주며 방을 떠나갔다. 유진이 숨을 씩씩 내쉬는 동안, 메르는 유진이 받은 꽃다발의 꽃을 꽃병에 옮겼다.
“그래도 다들 유진님을 걱정하고 고마워들 하시네요.”
“내가 다 구해줬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뿌듯하거나 보람차진 않으세요?”
“걔들이 나한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나도 당연한 일을 한 건데 뭘 굳이 뿌듯하고 보람차야 하냐?”
유진은 별 생각없이 대답했지만, 메르는 그 대답에 방긋 웃었다.
“유진님은 좋은 분이세요.”
“그럼 나쁜 놈인 줄 알았냐?”
“제가 동화책을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분이란 뜻이에요.”
유진은 별 대꾸를 하지 않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메르는 그런 유진의 곁에 앉아,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사과가 불쌍하다.”
“네?”
“아무 말도 안 했어.”
사과껍질이 뭉텅뭉텅 떨어졌다.
심문
이틀이 더 지나고, 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닷새 동안 침대 신세를 졌던 몸은 이제는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부축해드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필요 없어.”
메르가 다가와 물었지만,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거울 앞에 서서 젖은 머리를 털었다.
“닷새만에 하는 샤워는 어떠세요?”
“평소랑 똑같은데?”
“닷새 동안 머리가 떡 져 있었잖아요.”
“아닌데? 마법으로 매일 관리했거든?”
“그러면서 왜 굳이 샤워를 하신 건가요?”
“내 마음인데?”
“네, 네.”
메르는 킥킥 웃으며 유진의 뒤에 의자를 끌어왔다. 그리곤 의자 위에 서서, 유진의 머리를 빗어주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젖어있던 머리카락은 근처를 감도는 온풍에 의해 이미 말라 있었다.
“빗질은 필요없는데.”
“제가 심심해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필요 없다뇨? 유진님은 아무렇게나 뜬 머리가 어울린다 생각하시는 모양이지만, 제가 보기엔 유진님은 단정히 빗어 내린 머리가 나아요.”
“왠지 알아? 내 얼굴이 잘생겨서 그래.”
“참 뻔뻔하셔라...”
메르가 투덜거리며 빗질을 하는 동안, 유진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라이언하트의 검은 제복. 구겨진 곳 없이 깔끔했지만, 유진은 굳이 단추를 한 번 풀고서 다시 채우며 차림새에 신경썼다.
“망토는요?”
“상관없겠지.”
메르는 샐쭉 웃으며 유진의 어깨에 흑암의 망토를 둘러주었다. 그 뒤에 다시 거울을 보니, 반듯하게 빗긴 머리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으로 대충 털어주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욧!”
메르는 불만을 가득 담아 뺨을 부풀렸다. 하지만 더 빗질을 하겠다고 고집하진 않고, 유진이 들춘 망토의 틈으로 쏙 들어갔다.
“오늘은 부르기 전에는 나오지 마.”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저는 유진님이 걱정할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다고요.”
흑사자 성의 워프게이트.
기이할 정도로 사람이 없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진 다음으로 자리에 도착했던 제노스와, 제물 중에서 그나마 의식을 유지하고 있던 시엘.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원로원주 자리에 오른 클라인. 그리고 워프게이트의 관리를 직접 도맡은 6번 대의 대장, 디아드 뿐이었다.
“아롯에서 먼저 올 겁니다.”
시간을 확인하고, 디아드가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ㅡ파앗! 연결이 끝난 워프게이트가 빛을 발했다.
조금 뒤, 워프게이트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걸어 나온 것은 검은 예복을 입은 로베리안이었다. 그는 먼저 눈을 마주친 유진보다, 신임 원로원주인 클라인에게 다가가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뵙는 군요.”
“좋은 일로 재회했다면 좋았을 것을.”
클라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로베리안과 악수를 나눴다.
뒤따라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멜키스의 옷차림은 의외로 평범했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검은색의 밍크코트. 하지만,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부츠는 굽이 너무 높아서 걸을 때마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녕!”
불과 며칠 전에 장례를 치르고, 사건이 사건인지라 성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있지만... 멜키스는 그를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유진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도 오랜만이네? 나 기억하지?”
“...네.”
“그 나잇값 못하는 대장은 어디 갔어? 손목시계 차고서 회중시계로 시간 확인하던 이상한 여자 말이야.”
“...카르멘 대장님은 본가에 가계세요.”
누가 누구보고 나잇값을 못한다는 거야? 시엘은 방긋방긋 웃는 멜키스에게 부담을 느끼며 대답했다.
“나 흑사자 성은 처음 와 봐. 구경 좀 해도 될까?”
“나중에 하시죠. 곧 가주님도 오실 텐데.”
“음, 그도 그렇네. 표정관리 좀 하고 있을게.”
왜 당연하단 듯이 저 녀석의 옆에 붙는 거야? 시엘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유진과 멜키스를 힐긋거리며 보았다. 모성애 비슷한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지. 유진은 어머니의 사랑을 모른다. 그렇기에 어머니 빨의, 나이가 많은, 모성 가득한 여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라기보다는 할머니뻘 아닌가?’
외모는 아리따운 20대지만... 시엘은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정면에서 의식해 버린 순간, 강인하고 아름다우며 존경할 수밖에 없는 3번 대의 대장. 직속상관인 카르멘 라이언하트에 대한 무례한 생각을 갖게 될 것만 같았다...
“유라스와 연결되었습니다.”
디아드가 말했다. 그 말에 멜키스는 유진에게 바짝 붙어서 소곤거렸다.
“이단심문관이 온다며? 만나본 적 있어?”
“없습니다.”
“난 말이야, 신성제국도 싫고 이단심문관은 더더욱 싫어. 왜인줄 알아?”
“알죠. 먼 옛날에 신성제국은 정령의 이단의 존재로 정의하며 정령술사를 박해했다면서요?”
“어머, 꽤 잘 알고 있네? 마법사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했나 봐?”
“그거 엄청 옛날 아닙니까?”
“뭐 그렇긴 한데. 지금도 남모르게 정령술사를 박해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거잖아?”
말은 그렇게 하는 주제에, 멜키스의 두눈은 즐거운 장난기로 가득했다. 유진은 그 눈을 빤히 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꼭 어린애한테 무서운 이야기 들려주며 겁주는 할머니 같...”
“응? 뭐라고? 잘 안 들려.”
멜키스가 귀를 틀어막고 아아아 소리를 내는 동안, 워프게이트가 빛을 발했다.
걸어 나온 것은 두 명이었다. 피처럼 붉은 로브. 그 안의 제복은 빛의 신의 사제가 꺼려하는 칠흑색의 제복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색의 군모를 썼다. 워커발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둘의 모습은 성직자라기 보단 군인처럼 보였다.
“말레피카룸 소속의 아타락스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자인 헤모리아입니다.”
아타락스는 금발을 길게 기른 남자였는데, 여자인 헤모리아는 오히려 아타락스보다 머리가 짧았고 검은 금속재질의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헤모리아는 칼로 자른 것처럼 반듯한 단발을 찰랑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헤모리아는 소개 외의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지만, 아타락스는 그녀를 대신하듯 입을 열었다.
“가주는 아직 오지 않은 겁니까?”
“곧 도착할 거요. 키옐과 연결되었으니까.”
말레피카룸. 유진은 아타락스와 헤모리아를 빤히 보았다. 저 난폭하고 무자비한 이단심문국은 300년 전에도 존재했다. 솔직히 유진은 그들에게 별 악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흑마법사와 마족에 대한 무자비함? 그건 전생의 하멜도 똑같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300년 전의 세상에서 말레피카룸은 하멜의, 용사의 우군세력 중 하나였다.
‘...지금 시대에는 너무 낡은 조직 아닌가?’
흑마법사를 무차별적으로 사냥할 수도, 마족을 적대할 수도 없게 된 세상. 오직 그것만을 목적으로 한 이단심문국이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단 것이 의외로 느껴졌다.
워프게이트가 흔들린다.
유진은 자세를 바로하고서 워프게이트를 응시했다. 조금 뒤, 라이언하트의 가주인 길레이드가 워프게이트를 통과했다. 몇 개월 만에 만난 길레이드는, 그때와는 인상이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움푹 들어간 뺨과, 다크서클이 짙은 눈. 수염은 말끔하게 정돈된 상태였지만, 유진은 길레이드의 뺨과 턱에 남은 베인 상처들을 보았다.
‘...저 정도의 실력자가 면도칼에 베이다니.’
몇 달 사이에 체격도 쪼그라든 것 같고. 이오드의 일로 멘탈이 조각조각 박살난 모양이다.
“...가주.”
“죄송합니다.”
클라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오니, 길레이드는 곧장 무릎부터 꿇었다. 그 모습에 클라인은 화들짝 놀라 길레이드를 일으켜 세웠다.
“어허... 그런 모습 보이지 말게.”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모두가 제가 어리석어 벌어진 일입니다. 이, 이 문제를... 어찌 책임져야 할지...”
“...그에 관한 논의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부디 일어서게. ...자식들이 보고 있지 않나.”
클라인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길레이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탁하게 물들어 있던 길레이드의 눈동자에 뒤늦게 빛이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엘과 유진을 보았다.
평소라면 웃으며 아버지를 맞이했겠지만, 지금의 시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치미는 울음을 참으며 길레이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아...!”
길레이드는 탄식을 흘리며 유진과 시엘에게 다가왔다. 그는 시엘과 유진을 함께 끌어안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야기는 들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아버님...”
시엘은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금 울었다. 유진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어깨를 감싸고 있는 길레이드의 팔을 힐긋 보았다. 체격이 작아졌다고 느꼈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길레이드의 팔은 실제로 몇 달 전보다 얇아져 있었다. 이오드가 사건을 벌인지 고작 닷새. 그 사이에 뺨이 움푹 들어가고, 팔근육이 쪼그라들 만큼 마음고생을 했단 것이다.
“...고맙다, 유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네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늦어버렸겠지.”
“...운이 좋았습니다. 저만의 힘도 아니었고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말레피카룸의 두 이단심문관을 힐긋 보았다. 아타락스와 헤모리아. 둘은 유진의 텅 빈 허리춤을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성검은 무사합니다.”
“다행이군요.”
아타락스는 빙긋 웃으며 벗어두었던 군모를 머리 위에 얹었다.
“자아, 그럼...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이오드 라이언하트. 그 악마가 금단과 패륜과 재앙의 의식을 벌인 곳으로 말입니다.”
악마.
그 말에 길레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반발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길레이드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유진과 시엘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따라오시오.”
제노스는 말레피카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아타락스의 이름은 지저분한 의미로 유명하여 잘 알고 있었다.
‘...징벌자 아타락스에... 단두대 헤모리아.’
사건이 사건인 만큼 거물이 올 줄은 알았다만. 설마 그 징벌자가 올 줄이야. 제자인 헤모리아도 아타락스만큼이나 위명이 높은 인물이다.
“생존자들은?”
“모두 무사하네.”
“정신오염은 일으키지 않은 겁니까?”
“다행히도.”
“오염은 자그마한 점으로도 크게 번져갑니다. 의식의 현장을 살핀 뒤, 생존자들을 개별적으로 면담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락을 구하는 말투는 아니로군.”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 가문에 타락자를 늘리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아타락스의 말에 클라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눈에 적의를 담고서 아타락스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헤모리아가 반응했다. 그녀는 입을 덮은 마스크에 손가락을 얹으며 클라인을 노려보았다.
“저희는 라이언하트의 불행한 사고를 애도하거나, 진상의 파악에 협력하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아타락스가 손을 들어 헤모리아의 어깨를 잡았다.
“이 사건은 300년 전에 토벌 된 마왕의 잔재가 폭주한 것으로, 전례가 없는 기묘한 사건입니다. 지금의 말레피카룸은 흑마법사도, 마족도 사냥하지 못하고 있지만... 금기, 그것도 인간을 ‘사용’하는 죄를 범했다면. 그를 범한 것이 누구건, 말레피카룸은 사냥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러 왔단 겁니다. 그러니 허락을 구하지 않는 겁니다. 원로원주. 가문의 치욕을 감싸고 싶은 것은 이해하지만... 제물의 머리에 마(魔)의 씨앗이 남아있다면? 그로 인한 광기로, 그들이 언젠가 이오드와 같은 악마적 의식을 벌이려 한다면?”
“알겠네.”
클라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정정하게나. 나는 가문의 치욕을 감싸고 싶은 생각은 없어. 무턱대고 숨기다간 곪아 썩을 뿐이니까. 다만, 자네들의 면담이 너무 거칠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지.”
“면담은 신사적이고 정중할 것입니다.”
“참관하도록 하지.”
“예, 얼마든지.”
숲의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의식이 벌어진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물에게 장소가 훼손되지 않도록, 흑사자 여럿이 숲에서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멜키스는 숲에 들어온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여 손으로 흙을 어루만졌다.
“...흠.”
멜키스의 눈이 얇아졌다. 그녀가 손으로 쓸어낸 흙이 들썩거리고, 손가락만한 토인(土人)들이 꼬물꼬물 몸을 일으켰다.
“...과연, 어둠의 정령... 은 사실인 것 같은데... 이건 아주 색다르네.”
멜키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토인들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이 땅의 정령들은... 이 토지와 제대로 융화하지 못했어. 다른 토지에서 이 토지로 밀려난 거야. 거기에... 흐음... 원시정령의 수도 과할 만큼 적네.”
멜키스는 손으로 흙을 듬뿍 퍼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펼치니, 흙이 마치 모래알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마 계절이 지날 때 즈음이면 이 일대에는 풀한 포기 남지 않게 될 걸? 참 신기해... 이건... 땅이 죽었다기 보다는... 흐음, 그래... 그렇군. 땅의 원시정령이 어둠의 정령으로 변질되었던 건가?”
“그게 가능한 거요?”
“가능하냐고? 불가능하지. 난 어둠의 정령과는 계약하지 않았고, 계약하고 싶지도 않지만 말이야. 그래도 어둠의 정령에 대해서는 꽤 잘 안단 말이지? 어느 정령이건 전혀 다른 속성의 정령에게 간섭하고, 차단하는 건 불가능해. 정령왕일 지라도 말이야.”
멜키스는 킥킥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일반적인 어둠의 정령에게 다른 속성의 원시정령을 강제로 동화시키는 힘은 없어. 게다가... 그 위명 높은 흑사자 기사단의 눈과 귀를 차단했다며? 하하! 그거야말로 불가능하지.”
“단순한 정령이 아니었으니.”
“응, 그래서 신비롭고... 흥미가 샘솟네. 300년 전 토벌 된 마왕의 잔재가 무기에 깃들었다...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잔재가 정령이 되다니? 마나와 정령의 밀접한 관계성에 대해서는 이미 논문이 여럿 존재하지만, 마왕이 정령이 된다는 것은...”
“정령이 이단의 존재란 뜻일 수도 있지.”
아타락스가 중얼거렸다.
“개소리를 하시는 군.”
멜키스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들었다. 토인들이 흙으로 돌아가고, 지면이 꾸물거리며 치솟았다. 라이언하트의 숲에서 보았던 흙의 파도였다.
“그런 개소리를 지껄인 당신에겐 이 멋진 흙의 파도를 탈 자격이 없어.”
“부끄러운 짓 하지 말고 그냥 가기나 하시오.”
로베리안이 꾸짖었다.
“이곳입니다.”
의식이 벌어졌던 장소에 도착했다.
“저기... 저곳에서 의식이 진행되었죠. 조금 남았으려나?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고... 공중에도 그렸었는데, 그건 없네요.”
“...”
“그리고 저쪽에는 시커먼 나무가... 있었죠. 그걸 나무라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무처럼 생겼었습니다. 촉수처럼 꾸물거리는 가지에는 제물들이 매달려 있었어요. 검은 어둠에 삼켜져서 말입니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시엘을 힐긋 보았다.
“전 제물로 잡히진 않았으니, 제물이 되었던 감상은 저 말고 시엘에게 물어보십시오. 얘는 그 상황에서도 제법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요.”
“...이거 참...”
주변을 둘러보던 로베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과격하군요.”
“좀 징글맞은 의식이긴 했죠.”
“아니,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베리안은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무고한 사상자가 1명뿐이라는 것이 천운이라 생각될 정도입니다.”
전투의 흔적. 로베리안은 지면의 밑바닥까지 뚫린 것만 같은 커다란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멜키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엄청나네. 땅에 아무 정령도 없잖아?”
“지독하군.”
아타락스는 눈을 찡그리면서 손을 들었다. 그는 새하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허공을 ‘붙잡고’ 문질렀다. 그러자 장갑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마경도 아닌 곳에서 이만큼 지독하고, 불길한 마기를 볼 줄이야...”
“닷새 전에는 지금보다 심했습니다.”
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가, 움찔 놀라서 망토를 들췄다.
“...성검과 아카샤의 힘이 없었다면 저도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만, 유진은 그 이상으로 주목받아 의심까지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성검과 아카샤를 꺼내보였다. 아카샤는 별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유진의 손에 쥐어진 성검에 모두가 눈을 빛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성검은 위대한 베르무트의 신화를 함께 하며, 3명의 마왕을 베어낸 전설적인 검이다. 베르무트 이후로 라이언하트의 가주들만이 가문의 예식에 성검을 패용했을 뿐,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오...”
아프락스도 감격어린 눈으로 성검을 보았다. 여태까지 단 한마디도 뱉지 않은 헤모리아도 놀란 눈으로 성검을 응시했다.
“...알테어...!”
“예.”
“처음에는 보고가 잘못된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로 알테어의 주인이 탄생했을 줄은...!”
“숨겨서 죄송...”
“당신이 그리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프락스는 고개를 저으며 유진의 말을 끊었다.
“성검의 주인을 공표하지 못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크리스티나 성녀후보와 교황예하는 당신이 성검의 주인이란 것을 알고 계셨잖습니까?”
아프락스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헤모리아! 성검의 주인에게 박수를!”
헤모리아는 말없이 양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아프락스가 치는 박수소리는 헤모리아의 박수소리보다 훨씬 컸다.
“그만.”
아프락스의 박수소리가 우뚝 멎었다.
“자, 성검의 주인이여. 이곳에 강림하려 했던 악마와 맞선 영웅담을 들려주시오!”
“성검 휘두르니까 죽던데?”
“...”
“끄악~하고 말입니다.”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법진이 남은 제단으로 걸어갔다.
심문
색은 연해졌지만, 마법진 자체는 바닥에 남아 있었다. 마탑주인 로베리안과 멜키스는 두눈을 빛내며 마법진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거. 고대문자 맞지?”
“얼핏 보면 겔스어(語) 같은데.”
“꼬불거리는 건 닮았네.”
“체계적으로 유사성은 있소만.”
“고대문자도 한둘이 아니니까...”
“마족의 고대문자일 수도 있지.”
“하긴, 마왕의 잔재가 전한 지식이라며? 이거... 발자크가 왔어야 하는 거 아냐?”
“그 수상쩍은 위인을 부를 수는 없잖소. 고대문자라면 나도 꽤 조예가 깊은 편이니, 일단 조금 더 봐보지.”
로베리안과 멜키스는 둘만의 대화를 나누며 마법진을 찬찬히 살폈다. 유진은 그런 둘을 잠시 쳐다보다가, 왼손에 들고 있던 아카샤를 들어올렸다.
“이게 제가 기억하는 나머지 부분입니다.”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은 마법진이 허공에 옮겨졌다. 마나를 부은 것도 아니니 마법진은 기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행동에 대뜸 헤모리아가 움직였다.
허공에 그린 마법진. 헤모리아는 그 앞을 가로막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 얇게 뜬 눈.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 유진은 그 눈동자 깊은 곳에서 끓는 적의를 느꼈다.
“...뭡니까?”
기묘한 여자다. 입가를 통째로 뒤덮은 검은 금속마스크. 그건 마치 맹견의 입에 채우는 구속구처럼 느껴졌다. 입에 저런 걸 달고 있는데 안 불편한가? 불편하겠지.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일일이 빼야 할 테니.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말을 하세요.”
헤모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금속마스크 안쪽에서 ‘까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빨을 가는 건가? 아니면 마스크 안쪽에 진짜 재갈이라도 물려 있나? 그러고 보니, 헤모리아는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실례.”
아타락스가 헤모리아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유진은 아타락스의 손가락이 한 순간 헤모리아의 어깨를 움켜쥐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헤모리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방금처럼 유진을 노려보기만 했다.
“제자는 어떤 면에서 저보다 엄격해서 말입니다.”
아타락스는 빙긋 웃으며 헤모리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성검의 선택을 받은 용사...”
“그렇게 부르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요.”
“예, 저도 일일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불편하구나 싶었습니다.”
아타락스는 고개를 돌려, 마법진을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압니다만... 이 끔찍한 마법진이 아롯의 마탑주 2명에게 공유되는 것. 그리고 유진님의 머릿속에 마법진이 존재한다는 것... 이 모두가 저희로서는 받아넘기기 힘든 일이어서 말입니다.”
“들었어? 적탑주. 저 심문관 나으리는 당신이랑 내가 이 뭣 같은 마법진을 연구해 못된 짓이라도 꾸밀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야.”
“있을 법한 일이잖습니까. 내가 아는 마법사란 족속은 제 흥미와 탐구욕을 위해서라면 미친짓을 벌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긴 한데, 마탑주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이미 진즉에 미쳐있단 말이야. 내 광기는 이깟 외도(外道)의 마법에 한눈 팔 여유가 없다고.”
멜키스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흔들었다.
“내 옆에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적탑주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응? 뭔가 느껴지지 않아? 으으음...! 내 전신 털이 살기와 공포에 곤두서려 움찔거리고 있어...! 왠지 알아?”
멜키스는 과장을 가득 섞어 몸을 떨어댔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살기. 유진도 그를 느꼈다. 어금니가 으스러질 만큼 꽉 씹은 로베리안이 내뿜는 살기였다.
“적탑주가 화를 내고 있기 때문이지! 저 점잖고 핸섬한 마스크의 뒷면에, 흑마법에 대한 얼마나 커다란 증오가 꿈틀거리는지 당신들이 알기나 해? 적탑주 로베리안 서피스! 나이를 먹고 유순해지긴 했지만, 그는 한 30년 전까지만 해도 적색마탑의 광견이라 불리며 성질머리가 고약했단 말이야.”
“부끄러운 과거사는 꺼내지 맙시다. 백색마탑의 정령공주.”
“끼애아아악!”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젊은 시절의 별명. 멜키스는 두귀를 틀어막고 까마귀처럼 우짖었다.
“...하지만 분노가 치미는 것도 사실이군. 아타락스 심문관. 나는 절대로 이 마법진을 사욕을 위해 연구하지도, 사용하지 않을 거요. 원한다면 마나에 맹세라도 해드리지.”
“신성제국은 아롯의 우군입니다.”
아타락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심문관의 입장 상 경고를 했을 뿐. 맹세까지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적탑주, 당신이 왜 흑마법을 증오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고...”
까득.
헤모리아의 마스크 안쪽에서 다시 한 번 그 소리가 들렸다.
“...라이언하트.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들... 그 피의 순수함과 정의로움을 믿는 것은... 이런 사례가 생겨버렸으니 어리석은 일일 테지만. 성검의 인정을 받은 유진님이 흑마법에 침식되진 않겠지요.”
톡, 톡. 아직 헤모리아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더 이상 헤모리아의 마스크 안쪽에서 까득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도 적의가 사라졌다. 헤모리아는 유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아프락스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헤모리아.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이곳에 서서 마탑주님들이 마법진을 파악하는 것을 지켜봐라.”
헤모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감시역으로 두는 걸까?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길레이드를 힐긋 보았다. 이곳에 도착한 후부터 길레이드의 안색은 더더욱 창백해졌고, 파들파들 떠는 입술은 너무 씹어 피가 맺혀 있었다.
“...가주.”
그 모습을 안쓰럽단 눈으로 보던 클라인이 다가왔다.
“...보사르 백작 저택의, 이오드의 방에서 찾아낸 일기장이다.”
클라인은 품안에서 가죽을 표지로 쓴 고급스런 일기장을 꺼냈다.
“...저택을 탐색한 흑사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일기장은, 마치 찾아내 달란 듯이 이오드의 책상서랍 첫 번째 칸에 있었다는 군.”
“귀엽지 않습니까?”
아타락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머릿속으론 꽤 멋진 미래를 상상했겠죠. 이곳에서 의식을 끝마치고... 자신을 비웃고, 무시하던 이들을 제물로 삼고... 그렇게 힘을 얻어, 유유히 탈출하는 모습. 하지만 그렇게 해 버리면 자신이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알릴 수 없으니, 직접 일기장을 남기고 간 겁니다.”
남길 이유가 없는 일기장을 남겼다. 유진도 아타락스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오드, 그 얼간이는 자신이 ‘왜’,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인지를 떠벌리고 싶었던 것이다.
길레이드는 말없이 일기장을 받고, 펼쳐보았다. 유진은 아타락스가 일기장을 보는 것에 간섭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아타락스는 아무 간섭없이 길레이드가 일기장을 읽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아아...”
길레이드가 일기장을 모두 읽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긴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몇 번 저었다. 그러다가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님...”
시엘은 침울한 목소리를 내며 길레이드의 팔을 끌어안았다. 길레이드는 잠시 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들고 있던 일기장을 유진에게 넘겨주었다.
“제가 읽어도 되는 겁니까?”
“...그 아이의 마지막이 너였으니, 너도 읽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유진도 이 사건의 내막이란 것은 제법 궁금했다.
‘...얼씨구...’
일기장의 초중반은 읽을 가치가 없는 내용이었다. 한탄과 증오. 그리고 자기혐오. 그것이 지리멸렬한 문장도 되지 못해, 단어로 더듬더듬 나열되어 있을 뿐. 보사르 백작가에서 얼마나 멸시를 받았고, 어머니 테오니스에게 얼마나 꾸중을 들었는지에 대한 내용들.
아버지인 길레이드로서는 크나 큰 비탄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내용이지만, 유진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런 것은 관심없다. 유진은 계속해서 일기장을 넘겼다.
내용이 급변한 것은.
‘도미닉 라이언하트가 찾아왔다.’
거기부터였다.
왜 도미닉이 이오드를 찾아왔던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는 도미닉 스스로도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충동. 도미닉에겐 그것 뿐이었지만, 이오드는 보다 정확히 이유를 받아들였다.
마왕의 잔재가.
어둠의 정령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 존재는 도미닉이 가진 분쇄추에 깃들어 있었고, 이오드의 몸에 흐르는 ‘본가의 피’에 관심을 가졌다.
‘정령은 내가 특별하다고 말했다. 정령이 된 후로 여러 사람들이 자신을 쥐었지만, 목소리를 들은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네가 언제부터 존재했느냐 물으니, 정령이 된지는 100년이라고 했다. 어둠의 정령. 너는 마왕인가? 소멸한 마왕의 잔류사념... 그것 뿐, 마왕은 아니다. 하찮은 존재는 아니다. 정령은 내가 특별하다 말했고, 정령 또한 나와 어울리게 특별하다.’
‘나는 정령술사가 아니라 위대한 마법사가 되고 싶다.’
‘정령은 정령으로 남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지? 정령이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의식에 필요한 것은 원수의 피. 시엘과 시안? 그 쌍둥이라면 훌륭한 제물이 될 거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피는 엷어졌겠지만, 정령은 특별한 내가 그릇이 되고 형제의 피를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역시 마법은 대단하다.’
‘제물은 많을수록 좋다.’
‘내일이면 나는 이 집을 떠난다. 어머니와 할아버지, 모두가 내 미래를 축복해준다. 의식이 완성되면, 나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대마법사가 된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어디로 갈 지는 정하지 않았다. 프라이드는 날 본가 몰락의 상징으로 내세워, 신생 라이언하트를 만들고 싶다는데... 도미닉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라이언하트가 싫다.’
일기는 그렇게 끝났다. 유진은 일기장을 덮고, 기다리고 있는 아타락스에게 넘겨주었다.
“...싸울 때에도 제정신이 아니란 것은 알았는데, 저 일기를 쓸 적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오드가 저택을 떠나기 전날. 백작 저택에서 살아있던 인간은 이오드 뿐이었다. 보사르 백작도, 테오니스도, 가솔들도, 모두가 진즉부터 이오드에게 살해당했다.
“흑마법의 의식은 금기의 내용에 따라 위력이 증폭됩니다.”
아타락스는 일기장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위대한 베르무트. 300년 전 토벌당한 마왕의 원수. 그 피를 이은 본가... 그곳의 적자가... 제 형제를 제물로 바치는 것. 흑마법의 의식에서 이보다 멋진 조건은 없을 겁니다. 거기에 이오드의 ‘피’가 제법 특별했던 것도 사실인 모양이고.”
원수의 피.
이오드는 의식을 억지로라도 강행하지 않고, 유진에게 집착했다.
‘이오드뿐만의 고집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마왕의 원수인 것은 베르무트뿐만이 아니다. 어둠의 정령에게 있어서, 유진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훌륭한 제물이었으리라.
“이 일기장에 두서없이 언급되는 ‘프라이드’ 말입니다. 이건 라이언하트의 종양입니까?”
“이번 사건이 벌어진 직후, 대륙에 퍼진 라이언하트의 방계 중 잠적한 가문이 네 개. 그 외의 가문에도 일원 몇몇이 모습을 감추었소.”
클라인이 대답했다.
“그들이 도미닉을 끌어들이고, 이오드를 이용하고자 한 라이언하트의 종양이겠지.”
“위험합니까?”
“전혀.”
클라인은 일말의 고민없이 대답했다.
“도미닉이 마창과 분쇄추를 빼돌렸다면 위험한 조직이 되었겠지. 이오드가... 의식을 완성했다면 끔찍한 조직이 되었을 거고. 하지만 그 무엇도 이뤄지지 않았어. 프라이드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지만, 그들을 제 목숨을 보전하고자 가진 것을 버리고 도망친 패배자에 지나지 않네.”
“하지만 그들이 헬무드에 귀화한다면, 라이언하트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겁니다.”
“더 떨어질 위신이 남았나?”
클라인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 헬무드에 귀화한다면 오히려 고맙지. 헬무드는 위대한 영웅의 가문이 자기네 품안에 제 발로 걸어온 것을 떠벌리고 싶어 할 테니... 그렇게 해준다면, 이후는 흑사자의 일일세.”
“어쩌면 나하마에 귀화하거나, 사마르 대수림에 숨어들지도 모르죠.”
아타락스는 일기장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마법진의 해석도 얼추 끝났소.”
로베리안은 낮췄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흑마법사나 헬무드 고위 마족의 도움을 배제한다면 지금의 해석이 최선일 거요.”
“의견을 말씀해 주시지요.”
“혼의 재구성, 육신의 창조.”
로베리안의 표정이 구겨졌다.
“술식의 기초골자는 소환마법과 닮았더군.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말이오.”
“육신의 창조라 하였는데?”
“제물이 정상적으로 바쳐졌다면, 이 마법진은 헬무드에서 대량의 마물을 불러들였을 거요. 그리고 마물들을 뒤섞어 사용해 새로운 육신을 구성했겠지.”
“...혼의 재구성은?”
“말 그대로. 이곳에 존재했던 것은 마왕의 잔재가 깃든 어둠의 정령이었지, 마왕은 아니었어. 하지만 의식이 완성되었다면... 보다 격이 높은 ‘정령왕’이 되었을 거야.”
멜키스는 말을 도중에 멈추고 웃음을 터트렸다.
“놀랍게도 말이지! 그 어둠의 정령은, 독자적이고 인위적인 수단으로 스스로 위계를 높이려 했어. 과연 마왕의 잔재라 해야 할지. 일반적인 정령은 절대로 못 쓸 방법을 시도한 거야.”
“...육신을 가진 정령왕이라...”
“곧장 마왕의 격에 다다르진 못하겠지만, 언제 마왕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가 탄생할 뻔 했던 거요.”
로베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오.”
“성검과 용사에 축복 있으라.”
아타락스는 껄껄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아타락스의 박수가 뚝 멎었다.
까득.
헤로니아의 마스크에서 금속음이 흘러나왔다.
“이곳의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ㅡ쿠웅!
아타락스의 발이 지면을 두드렸다. 그의 몸이 은은한 휘광에 감싸이고, 검게 죽은 흙이 일제히 떠올랐다. ㅡ파사삭! 떠오른 흙이 진동했다. 천천히, 천천히. 흙이 움직였다. 격전으로 만들어졌던 거대한 구멍. 그 입구의 근처. 거기까지 움직인 흙이 회오리쳤다.
“...으음...!”
로베리안도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곳에 마법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아카샤를 쥔 유진이 보기에도 그랬다.
하지만. 신성제국의 이단심문국, 말레피카룸의 심문관들은 수백 년 전부터 흑마법과 마족을 추격하는 것만을 단련해 온 사냥꾼들이다.
아타락스는 그 말레피카룸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 그는 이 공간에 잔존한 마기를 더듬어 올라, 닷새 전에 펼쳐졌던 흑마법의 흔적을 찾아냈다.
“술식까지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아타락스는 공중에서 흔들리는 흙을 거머쥐며 말을 이었다.
“...이건... 공간이동이군요. 블링크는 아니고 장거리의... 게이트를 거치지 않은 텔레포트...”
“헥토르.”
유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놈이 도망친 모양입니다.”
“도망치게 내버려둔 것이 아니고요?”
아타락스는 빙긋 웃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그 서글서글한 눈매를 노려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놈을 도망치게 할 이유가 있습니까?”
“남모를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죠.”
“성검의 인정을 받은 제가?”
“모든 가능성을 살피고 싶을 뿐입니다. 성검이 무조건 결백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망쳤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재주가 훨씬 뛰어난 놈이었네요.”
“왜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했겠어요?”
“유진님의 방심이 쥐새끼를 도망치게 한 겁니다. 그 쥐새끼가 어느 곳간에 숨어들어 곡식을 좀먹고, 질병을 옮겨댈지 모르는...”
“아니 씨팔 어이가 없네.”
유진은 대꾸하려다가 발끈해버렸다.
“내가 시발 일부러 도망치게 해? 나 조지려고 한 그 새끼를? 아 몰랐다고! 눈앞에서 마창은 찌르고 분쇄추는 대가리 깨부수려 하고, 형님이란 놈은 정신머리가 돌아서 어둠의 정령이랑 손잡고 날 산제물 삼겠다고 하는데! 내가 시발 나자빠져있던 새끼가 도망쳤는지 휩쓸려 뒈졌는지 어떻게 일일이 확인을 하느냐고.”
“흥분하지 마십시오.”
“흥분 안 했습니다. 그냥 발끈하는 겁니다. 생각하니 어이가 없고 열 받잖아. 성검이 시팔 우스워? 당신 성검 쥘 수 있어?”
“까득.”
“쟤는 벙어리야 뭐야? 왜 아까부터 까득까득 소리만 내고 말을 안 해? 내 말이 꼽고 내가 엿 같으면 까득거리지 말고 말을 해 시발. 불만 없는 척 굴면서 까득까득 갈아대지 말고!”
유진이 버럭 외치자 아타락스는 입을 다물었고, 헤로니아도 더 까득소리를 내지 않고 눈을 끔벅거렸다.
“이상입니다.”
유진은 크게 숨을 내뱉고서, 손에 쥔 성검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더 불만이 있거나 저한테 지랄을 하고 싶으시면, 일단 와서 이 성검부터 뽑아보고 말해주세요.”
유진은 팔짱을 끼며 성검에서 물러섰다.
“저는 성검도 못 뽑으면서 신실한 척 하는 찐따새끼한테는 구박을 처 듣고 싶지 않습니다.”
심문
꽈드득.
헤모리아의 마스크, 그 안쪽에서 이전보다 훨씬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처음보다 훨씬 더 진한 붉은색이 되었는데, 피가 몰려 충혈 된 것보다는 끓는 것처럼 느껴졌다.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헤모리아와는 달리, 아타락스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는 바닥에 꽂힌 성검과, 팔짱을 끼고 선 유진을 번갈아 보다가 웃음을 흘렸다.
“...신실한 척이라니... 하하!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유진님, 당신뿐일 겁니다.”
“성검의 인정을 받은 주인을 의심하는 것도 당신뿐일 걸요.”
“가능성을 살피고 싶을 뿐입니다.”
“아까는 성검의 주인인 내가 흑마법에 빠질 리가 없다면서요?”
“헥토르를 탈출시키는 것은 흑마법에 빠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래서야 끝이 안 나는데. 나한테 고해성사라도 시키고 싶어서 억지를 부리는 건가?”
유진은 히죽 웃으면서 아타락스를 노려보았다.
“좋은 건수를 문 것처럼 달려드는데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타락스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헥토르 라이언하트의 탈출... 그것에 유진님이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은 믿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실은 결백을 확실히 증명받고 싶습니다만...”
“고해성사 시키고 싶은 것 맞네.”
“알고 계십니까?”
“정신을 주물러 망가트리는 과격한 심문이라는 것을 알죠.”
“하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레피카룸은 신성제국의 그 누구보다도 ‘심문’의 전문가들이니까요. 심층을 헤집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닷새 전의 진상을 파헤치는 것에는 아무런 후유증도 남지 않습니다.”
“그새 까먹으셨나?”
유진은 턱 끝을 들어, 앞에 꽂힌 성검을 가리켰다.
“나한테 불만 있거나 뭐라 지랄을 하고 싶으면, 일단 와서 성검부터 뽑아보라니까요.”
“...그거야말로 흥미로운 일이군요.”
아타락스의 시선이 헤모리아에게 향했다. 살벌한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던 헤모리아가 성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손이 뻗으면 닿는 거리. 유진은 헤모리아의 강렬한 시선을 받으며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까득.”
입안에서 들리는 소리. 이빨을 가는 소리치고는 너무 크고 날카롭다... 유진은 삐딱하니 고개를 기울이고서 헤모리아를 응시했다.
“수인은 아닌 것 같은데. 치열이 짐승처럼 나쁘신가?”
“제자는 묵언수행 중이라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아타락스가 헤모리아를 대신해 말했다. 묵언수행이라.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헤모리아의 손이 성검을 향해 뻗어졌다. 검은 장갑에 감싸인 손. 기다란 손가락이 성검의 칼자루를 거머쥐려는 순간. ㅡ화륵! 성검의 성화가 헤모리아의 손을 휘감았다.
하지만 헤모리아는 당황하지도, 신음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손을 물리고, 장갑을 휘감은 성화를 털어냈다. 성화에 타버린 가죽의 틈새로 헤모리아의 피부가 보였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헤모리아는 유진의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보란 듯이 장갑을 벗고서 맨손을 드러냈다. 피부가 희다 뿐이지, 특별할 것은 없는 피부였다.
“까득.”
다시 한 번 들리는 쇳소리. 헤모리아는 유진을 향해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수화?”
“뱀파이어인 줄 알았느냐고 묻는군요.”
해석해 준 것은 로베리안이었다. 유진은 자신을 노려보는 헤모리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알아차려달란 듯이 이빨을 갈아대는데, 소리가 워낙 날카로워서 말이지. 눈동자는 붉고, 피부는 희고, 모자에 망토, 장갑까지. 의심할 만도 하지 않나?”
“이단심문관이 뱀파이어라니. 안타깝게도 말레피카룸은 유진님 생각 이상으로 보수적인 조직이라, 뱀파이어 같은 마족은 심문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심문관 말고는 있나 봅니다?”
“마족에게도 종교의 자유는 있으니까요. 그들이 빛의 신을 섬기고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면, 빛의 전도자로서 그들에게 세례를 해주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타락스는 웃으면서 헤모리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신앙심 가득한 헤모리아가 성검을 쥐지도 못하다니... 과연 성검이군요.”
“당신은?”
“괜히 손을 뻗었다 제 손마저 불타버릴 지도 모르잖습니까. 저는 그런 망신을 당하고 싶지는 않군요.”
아타락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헥토르가 사라졌던 자리로 다가갔다. 그는 아직까지 허공에 떠있는 흙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헥토르 라이언하트는 죽지 않고 이곳에서 탈출했다는 겁니다.”
“장거리 텔레포트라... 그것이 가능한 것은 대마법사들 뿐인데.”
로베리안의 눈이 얇아졌다.
“블링크는 시야에 들어오는 도달점의 좌표를 계산하고 도약합니다. 그 계산만 깔끔하게 해낸다면, 블링크는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장거리 텔레포트는 격이 달라요.”
“워프는 쌍방의 게이트를 연결하는 거지. 텔레포트와는 달라.”
텔레포트에 필요한 것은 이정표다. 세계수가 이정표라면, 나뭇잎을 매개로 하여 세상 어디서건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텔레포트할 수 있다.
“헥토르가 가지고 있던 매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상, 그가 어디로 텔레포트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텔레포트가 가능한 마법사는 세상에 몇 명 없거든?”
멜키스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우선... 아롯의 마탑주 5명. 궁정마법사단장 트렘펠 위자도르. 내가 아는 한 타국의 마법사 중에서 8서클에 오른 마법사는 아직 없을 텐데?”
“...나는 불과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키옐의 황궁에 있었소. 키옐은 8서클 대마법사를 아직 보유하지 못하고 있소.”
그 대답에 멜키스의 광대가 쭈욱 올라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롯이 마도왕국인 것은 사실이라니까? 마탑주까지 포함해 6명의 대마법사를 보유한 왕국이라니! 전쟁이라도 벌이면 아롯이 대륙을 통일할 수도 있는 것 아냐?”
“마탑은 아롯의 정복전쟁에까지 참여할 의무는 없소. 아마 아롯이 전쟁을 벌인다면, 날 포함한 적색마탑 전원은 아롯을 떠날 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멜키스는 킬킬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롯을 제외하면... 텔레포트가 가능한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는 건 헬무드 뿐이지. 유폐의 지팡이, 에드몬드 코드렛. 그리고 몇몇 고위마족들.”
“몽마의 여왕과 블랙드래곤... 일단 가장 유명한 것은 둘입니다만.”
블랙드래곤. 그를 언급하며, 로베리안은 유진에게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유진을 대신해 라이자키아를 조사한 것이 로베리안이다. 그는 헬무드 용마성에 군림하고 있는 라이자키아가 본인이 아닐 것이란 가능성을 알고 있다.
“고위마족 중에서는 저 둘 외에도 텔레포트가 가능한 대마법사가 더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마족은 인간보다 몇 배나 되는 세월을 살고, 인간보다 우월한 흑마법을 펼치니 말입니다.”
“나하마에도 대마법사는 한 명 있지 않습니까?”
아타락스의 눈이 얇아졌다.
“사막의 던전마스터, 아멜리아 머윈. 키옐과 나하마의 정세가 몇 년 째 불안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키옐의 라이언하트를 내부 분열시키고, 키옐의 전력을 약화시킨다... 모래폭풍의 탓을 하며 튜라스를 집어삼킨 나하마가 할 법한 일이긴 하군요. 그 아멜리아 머윈도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지만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유폐의 마왕이 헥토르의 뒤에 선 자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진 않았을 걸요.”
유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수작은 마왕에게는 너무 하찮은 일이니 말이지. 애당초 유폐의 마왕에게 300년 전 죽은 마왕을 소생시킬 의리가 있을까?”
“무조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타락스님. 나도 어려서부터 역사 공부는 열심히 했단 말이죠. 마왕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아요. 300년 전부터 그들은 누가 더 많은 국가를 침몰시키고, 영토와 권속을 늘릴 지를 경쟁해 왔다고.”
물론 유진은 역사 공부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 역사의 중심에 직접 살았으니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다.
3명의 마왕이 죽는 동안, 마왕들은 단 한 번도 서로 협력하지 않았다. 똑같이 마왕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그들에게 동료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폐의 마왕이 직접 나서가며, 이런 수작을 벌여서, 죽은 마왕을 소생시키고, 라이언하트를 분열시킨다? 마왕이 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죠? 그건 이단심문관인 당신이나 말레피카룸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마왕은 그럴 필요가 없는 존재잖아요.”
유폐의 마왕이 라이언하트를 분열시킬 이유가 있을까? 거슬린다면 그냥 정면에서 찢어발길 수 있을 텐데? 마찬가지로 죽은 마왕을 소생시키기 위해 은밀하게 의식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방해하는 자를 모조리 쓸어버리고서 대놓고 진행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마왕은 이 일에 관련이 없다고 봅니다.”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3명의 흑마법사. 아롯의 대마법사들. 고위마족. 당장 의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다.
“...이번 사건에서 탈출한 이상, 헥토르 라이언하트는 대륙 어디든 편히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타락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법지대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대륙 전역에 퍼진 빛의 눈도, 무법지대인 사마르를 완전히 포착하지는 못하니까요.”
“...헥토르가 사마르로 도망쳤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유진님은 사마르의 대부족인 조라 부족과 인연을 맺으셨다고 들었는데... 그들의 조력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타락스는 빙긋 웃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조란 부족. 유진은 사마르를 떠나는 길을 배웅해 주었던 부족의 후계자, 이바타를 떠올렸다.
“...숲이 워낙 넓으니, 사람 찾기는 힘들 텐데.”
“그를 요청하는 것은 유진님의 자유입니다. 도주한 헥토르 라이언하트를 잡아 죽이길 바라신다면 말입니다.”
“말레피카룸은 어떻게 할 겁니까?”
“헥토르 라이언하트가 이 의식의 관계자인 이상, 물론 저희도 최선을 다해 헥토르 라이언하트를 추격할 겁니다. 대륙 전역에 퍼진 빛의 눈을 사용해서 말입니다.”
빛의 신은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
“유감입니다.”
아타락스는 쓰고 있던 군모를 벗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은 없군요. 하지만, 이곳에서 벌어진 불행한 참극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합니다.”
“...치욕스런 일이지.”
클라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곳에서 더 알아낼 것이 없고, 확인도 했다면... 이제 그만 성으로 돌아들 갑시다. 이번 일에 휘말린 아이들과의 면담도 해야 할 테니.”
“이해해 주셔서 감사...”
아타락스는 말을 하다 멈추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헤모리아를 빤히 보면서, 낮게 웃음을 흘렸다.
“...흠... 과연.”
“무슨 일입니까?”
유진은 능청스런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사실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헤모리아는 계속해서 유진과 성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아까처럼 적의가 가득하진 않았으나, 유진은 헤모리아에게서 익숙한 호승심과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
“유진님이 성검의 주인인 이유를 확인해 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내심 아타락스님도 그를 바라신 듯 한데?”
“하하...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성검 알테어와, 그 인정을 받은 용사에 대한 이야기는 신성제국 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두가 어려서부터 들어 온 옛날이야기잖습니까.”
아타락스는 낮게 웃으면서 헤모리아에게 다가갔다.
“물론 불만도 있죠.”
“...불만?”
“라이언하트는 300년 동안 성검을 소유하고, 신성제국에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로 라이언하트의 그 누구도 성검의 주인이 되진 못했죠. 하지만, 만약 성검이 신성제국에 돌아와 있었다면? 신실하고 뛰어난 젊은이 중 누군가가 성검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그 신실하고 뛰어난 젊은이가 당신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내가 성검의 주인이란 것은 유라스의 교황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진님은 빛의 신도도 아니고, 유라스의 신민도 아닙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지?”
“성검을 빼앗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능하지도 않을 거고.”
“...단지, 제자의 의욕에 어울려주시길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타락스의 손이 헤모리아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가볍게 대련을.”
“성검을 사용해서?”
“필요하시다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유진은 웃으며 흑암의 망토를 벗었다. 그러자 급히 메르가 망토 사이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유진님! 아직 유진님의 몸은...”
“괜찮아, 괜찮아. 그냥 가볍게 대련할 뿐인데 뭐.”
유진은 하하 웃으며 벗은 망토를 바닥에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멜키스가 꽥 비명을 지르며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땅에 두지 마! 흙 묻잖아!”
돌려받기까지 앞으로 몇 년은 남았지만, 멜키스는 자신의 망토를 이 지저분한 흙밭에 내려놓게 두고 싶지 않았다.
“무기는?”
“헤모리아는 따로 무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하... 전신이 무기라던가, 뭐 그런 뻔한 건가 보죠? 음, 그래요. 단련은 훌륭히 되어 있는 것 같네요.”
“...제자를 너무 무시하지 말아주시길.”
“무시는 당신들이 하는 것 아닌가?”
유진은 활짝 웃으며 손목을 풀었다.
“잘 체감이 안 되는 모양이신데, 지금 당신들이 자격을 묻는 사람이 누구냐면. 시조님 제외 라이언하트 역사 제일의 천재이자, 성검과 아카샤의 주인에, 마왕의 잔재를 쓰러트린 장본인이라고요.”
“...흠, 유진님이 대단하단 것은 알겠지만... 방금 사역마가 말한 것처럼, 유진님의 몸은 아직 완벽하게 회복이 안 되신 것 아닙니까?”
“가벼운 대련. 무기 쓰는 것도 아니고, 손만 살짝 섞는 정도인데 뭐 어떻습니까?”
“...부상을 입는다면 치료해드리겠습니다. 크리스티나 성녀후보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치유마법에는 꽤 능한 편이라서 말입니다.”
까득.
헤모리아의 마스크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모자와 망토를 벗고, 양 주먹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반면에 유진은 양 팔을 편히 늘어트리고서 헤모리아를 쳐다보았다.
“마스크는 안 벗어?”
“...”
“음... 얼굴은 때리지 말라는 건가?”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금속 마스크 한 상태로 턱주가리 맞으면... 네 턱이 아플까, 내 주먹이 아플까...”
계속 노려보면서, 적의와 불만을 흘리고, 마스크 안쪽에서는 뭔지 모를 씹는 소리가 나고.
‘먼저 시비도 걸고 말이야.’
유진은 제복 셔츠의 윗 단추를 풀어 내리며 헤모리아를 노려보았다.
심문
잠깐의 대치. 정적. 까득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헤모리아는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다가, 쥐고 있던 주먹을 슬쩍 펴보였다.
수화?
유진은 피식 웃어버렸다. 헤모리아가 손으로 보인 것은 수화가 맞긴 했다. 다만, 그 뜻을 해석하는 것에 로베리안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그만큼 노골적이고 쉬운 수화였기 때문이다. 쭉 뻗은 검지를 까딱거리는 것.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발을 앞으로 뻗었다.
“심문관도 결국은 성직자라서인지, 참 자비로우셔.”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검의 주인. 그 실력을 알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이단심문관을 하는 만큼 전투에도 자신이 있을 거고.
설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머리에 심각한 장애가 있는 것이리라. 보아 하니 자존심과 고집이 꽤 강해 보이는데, 마음에 드는 구석도 없고 제 스스로 납득도 되지 않아 시비나 건 것일 터.
물론 유진은 그러한 시비는 환영이었다. 헤모리아가, 아니, 이단심문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성검의 주인이라며 대놓고 추켜세우는 것도. 되도 않는 꼬투리를 잡아대는 것도.
“얼굴.”
유진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헤모리아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발을 크게 앞으로 뻗었다. 단순한 걸음은 아니었다. 가속 된 마나가 유진의 몸을 앞으로 밀어냈다. 유진은 그 한 걸음으로 넉넉하던 거리를 제 간격으로 만들었다.
그 뒤에는 경고했던 대로 휘둘렀다. 쐐액! 헤모리아의 단발이 바람에 찰랑거렸다. 직접 닿지는 않았다. 유진의 발은 말 그대로 헤모리아의 코앞에서 지나갔다.
탁, 타탁.
그렇게 발길질을 한 번 하고서, 유진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히죽거리며 웃는 얼굴. 아직까지 까딱거리던 손가락이 다시 주먹으로 쥐어졌다.
헤모리아가 움직였다. 그녀는 과감히 앞으로 파고들며 주먹을 짧게 끊어서 내질렀다. 터억! 옆구리를 쑤셔박으려던 주먹이 유진의 손에 잡힌다. 그 순간, 헤모리아의 주먹이 활짝 펴져 유진의 손가락에 얽혀왔다.
손가락을 뒤로 젖히는 강렬한 힘. 유진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얽혀있는 손가락. 유진은 그곳에서 마나의 움직임은 느끼지 못했다. 단순하고 무식한, 마나의 사용 없이 그냥 힘이 센 것이다.
‘저 체격에 이 정도의 힘. 몬스터 같은 특이체질인가?’
단련으로 얻을 수 있는 힘은 아니다. 유진은 가동범위의 한계까지 꺾이는 손가락을 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가면 뼈가 부러질 것이다.
바보처럼 가만히 있다면 말이다. 파악! 유진의 발이 지면 위를 훑었다. 걷어차인 발목, 헤모리아가 움찔하고 물러섰다.
‘단단해.’
유진은 다시 한 번 의아함을 느꼈다. 발목을 박살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꺾을 생각으로 찼다. 그런데 흔들림이 없다. 관절이 없는 통짜 쇳덩어리를 걷어 찬 느낌이다.
‘밀도 자체가 인간과 다르군.’
약물? 아니면 마법을 섞은 수술? 어느 쪽이든 헤모리아의 몸은 인간답지 않았다. 유진은 꺾일뻔 했던 손을 쥐었다 펴며 헤모리아를 쳐다보았다.
“까득.”
마스크 안의 소리. 물러섰던 몸이 다시 앞으로 향했다. 어깨가 움찔거리고, 팔이 들춰진 순간.
유진은 헤모리아의 주먹이 궤도에 올라 뻗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퍼억! 유진의 주먹이 헤모리아의 명치에 꽂혔다. 양발이 붕 떠오를 만큼의 무거운 충격이지만, 헤모리아의 입에서 비명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표정에도 고통은 번지지 않았다.
다만, 의문 가득한 눈으로 유진을 쳐다 볼 뿐이었다. 아래로 파고 든 주먹. 위력도 위력이지만 빨라서 대응이 불가능했다. 처음의 발길질도 그랬다. 모션은 읽었는데, 대응하기 힘들 만큼 빨랐다.
방금 전도 그랬다. 오히려 읽히고 막힌 것은 헤모리아 쪽이었다. 독특한 가속... 신체능력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헤모리아가 압도될 리가 없었다.
대련을 지켜보던 아타락스의 두 눈이 얇아졌다. 저 헤모리아가 근접격투에서 압도되고 있다. 헤모리아의 노림수는 모조리 다 직전에 차단당하고, 헤모리아가 대응할 수 없는 순간에 정확하게 공격이 꽂힌다.
‘뭔가 섞여 있군.’
마나의 가속이 단순하면서 독특하다. 무언가 섞여 있는데... 라이언하트의 백염식? 아니, 다르다. 섞인 것은 기술이 아닌 마나 쪽이다.
퍼억!
헤모리아의 양발이 다시 한 번 더 위로 떠올랐다. 이번에도 신음은 없다. 벌써 몇 번이나 명치에 주먹을 꽂았는데, 헤모리아는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대응해 왔다. 지금도 그랬다. 유진은 제 몸을 붙잡기 위해 다가온 양팔을 힐긋 보고서, 반대편 손으로 헤모리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곧장 헤모리아의 팔을 꺾어서 등에 올려붙였다. 분명 관절을 꺾는데, 헤모리아의 팔은 힘이 줄지가 않았다. 그녀는 꺾인 팔을 뒤틀며 유진의 몸을 통째로 휘두르려고 했다.
그래서 미련 없이 팔을 놓아주었다. 팔을 휘두르며 텅 빈 옆구리에 파고들어 주먹을 처박았다. 벌써 몇 번을 두드렸지만, 인간 같지 않게 단단한 늑골에서는 삐걱거리는 느낌도 전해져 오지 않았다.
‘확실하군.’
유진의 눈썹이 구겨졌다. 유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그야, 코어에서 끌어낸 마나를 낭비 없이 완벽하게 회수하는 것은 전생부터 유진이 가진 특별함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진은 타격 하나하나에서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마나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우연이 아니라 헤모리아가 의도하는 것이다. 검강이나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유진의 몸 안을 흐르는 마나가 헤모리아의 몸과 접촉 할 때마다 그녀에게 스며들고 있다.
‘드레인 계열의 마법? 그런 것치고는 너무 은밀한데.’
빼앗은 마나가 헤모리아의 힘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쓰임새는 있기에 빼앗는 것이겠지만, 당장 헤모리아는 빼앗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건방지게.’
가벼운 대련. 그렇기에 서로가 손속에 여지를 두고 있다. 두들겨 팬만큼 헤모리아가 아파했다면 진즉에 주먹을 거뒀을 거다.
그런데 아픈 소리도 내지 않고, 찔끔찔끔 마나를 빼앗아 가면서, 무언가를 노리려 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두대의 헤모리아. 유진은 그녀가 왜 단두대라고 불리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고, 그 이유를 아는 것보단 저 마스크 안쪽에서 까득거리는 소리 말고 신음과 비명소리를 듣고 싶었다.
ㅡ파직.
유진의 주변에서 번개와 불씨가 튀었다. 그 폭발적인 가속에 아타락스의 눈매가 움찔 떨렸다. 놀란 것은 아타락스 뿐만이 아니었다. 길레이드와 클라인도 유진의 움직임에 놀랐다. 오직 제노스만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유진을 보며 가슴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꼈다.
‘과연 하멜님이시다.’
이 장소에서 유진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은 제노스와 메르 뿐. 유진이 그 하멜이라는 것은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제노스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헤모리아는.
관전하는 사람들과 같은 놀람을 느끼지도 못했다. 너무 가깝고, 느끼기 전에 겪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빠르고, 무거운 공격이 옆구리에 꽂혔다.
헤모리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녀는 몸을 제대로 붙들지 않고, 양팔을 휘둘러 반격을 꾀했다. 유진은 그 손을 차분히 걷어낸 뒤, 텅 빈 가슴 중앙에 주먹을 처박았다.
“커흡.”
비명은 참아도 숨이 턱 막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헤모리아는 비틀거리며 물러서려 했지만, 유진은 헤모리아의 멱살을 틀어쥐고서 가까이 끌어왔다. 콰직! 올려 찬 무릎이 헤모리아의 몸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연달아 꽂은 공격. 유진은 그를 통해 스며드는 마나가 어디로 모이는지를 확인했다. 심장 근처의 코어가 아니다. 헤모리아의 몸에 스며든 마나는 배꼽 아래의 단전에 모이고 있다.
‘단전?’
저곳에 마나를 모으는 수련법도 있다고는 들었는데... 유진은 헤모리아의 몸을 살폈다. 헤모리아는 심장 근처에 코어를 두고, 단전에는 유진에게서 은밀히 빼앗은 마나를 축적하고 있었다.
“허락은 받아야지.”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헤모리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뻐억! 유진은 정확하게 단전을 노리고서 주먹을 처박았다. 단 한 번도 신음을 흘리지 않았던 헤모리아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유진은 금속 마스크 안쪽에서 헤모리아의 헐떡거리는 신음을 들었다.
반응도 격했다. 헤모리아의 몸이 크게 뒤틀렸다. 관절의 가동범위를 한참 벗어난 움직임. 지면을 훑으며 올라 온 주먹이 유진의 얼굴을 노렸다. 제대로 맞는다면 머리가 바늘 찔린 풍선처럼 펑하고 터질 만한 위력이었다.
‘화났군.’
아까보다 강한 힘. 속도도 올랐다. 그렇다고 유진과 헤모리아의 차이가 메워지진 않았다. 유진은 이 조건의 근접전에서 패배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분노가 헤모리아의 등을 떠민다. 그러나 느끼는 분노를 온전히 유진에게 때려 박지는 못했다. 헤모리아의 움직임은 완전히 유진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유진은 집요하게 한 곳만을 노렸다. 빼앗은 마나가 모여드는 단전. 그곳에 공격을 꽂을 때마다, 마스크 안쪽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커헉!”
몇 번째인지 모를 주먹이 한 번 더 단전에 처박혔을 때. 헤모리아는 더 버티지 못했다. 단전에 모였던 마나가 완전히 흩어졌다. 쿨럭거리는 기침에 금속마스크마저 벗겨졌다. 헤모리아는 비틀거리며 물러서려 했지만, 유진은 그렇게 두지 않고 헤모리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단전에 주먹을 처박았다. 정확히 꽂힌 일격에 헤모리아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녀는 깊이 몸을 숙이고서 고통스런 신음을 토했다. 유진은 헤모리아의 다리가 파들파들 떨리며 오므려지는 것을 보고, 한 번 더 주먹을 꽂아 넣었다.
결국 헤모리아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유진은 더 때리지 않고, 보란 듯이 양손을 들고서 뒤로 물러섰다. 헤모리아는 제 배를 양손으로 감싸고서 쿨럭쿨럭 기침을 토했다. 벗겨진 금속마스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흠.”
유진은 들었던 주먹을 흔들며 헤모리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왜 그리 까득거리는 소리가 나나 했더니. 헤모리아의 이빨은 도저히 인간이라 여길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헤모리아는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다가, 마스크가 벗겨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순간. 헤모리아의 두 눈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정적으로 타올랐다. 그녀는 헐떡거리다가 말고 대뜸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쩍 벌린 입,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유진의 몸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물론 유진은 헤모리아의 바람대로 살을 내주지 않았다. 그는 즉시 뒤로 물러서면서 손바닥을 휘둘러 쳤다. 쩌억! 헤모리아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땅에 나뒹군 헤모리아는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터진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손가락으로 땅을 움켜쥐었다. 눈동자가 더욱 붉게 물든다. 뚝뚝 떨어지던 피가 끓어오르고, 상처가 재생되었다. 달싹거리는 입술의 앞에 붉은 핏방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만.”
아타락스가 외쳤다. 포옹! 헤모리아의 입술 앞에 모여들던 핏방울이 터져서 사라졌다.
그 외침은 유진도 들었다. 하지만 유진은 못들은 척 하기로 했다. 헤모리아의 입술 앞에 핏방울이 모였을 때, 유진은 이미 헤모리아의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뻐어억!
걷어 찬 발이 헤모리아의 배에 꽂혔다.
“카학!”
헤모리아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발길질의 충격에 헤모리아의 몸이 날아간다. 유진은 휘둘러 찬 발을 천천히 땅에 내리고서 하하 웃었다.
“조금만 더 빨리 말해주시지.”
“하악...! 카학! 케흑!”
멀찍이 날아간 헤모리아는 배를 감싸 쥐고서 고통스런 신음을 토했다. 쩍 벌어져 떨리는 입술에서 피와 침이 뚝뚝 떨어졌다.
“...제자가 고집이 워낙 강해서 말입니다. 승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이겨보려 애를 쓰곤 하죠.”
“패배를 납득하는 표정이 아닌데.”
유진은 헤모리아를 힐긋 보며 말했다.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입가의 피를 벅먹 문질러 닦으며, 땅바닥에 떨어진 금속 마스크를 주워들고 있었다.
“아타락스님이 제지할 것 없이, 저는 더 해도 상관없는데요.”
“아뇨, 그랬다간 저희가 곤란해 질 겁니다.”
“왜?”
“유진님은 충분히 여유가 있으시겠지만, 헤모리아에게는 여유가 없으니까요. 더 해버렸다간 헤모리아가 대련의 선을 넘어버릴 겁니다.”
“제 걱정을 해주시는 겁니까?”
“설마요. 제자를 걱정하는 겁니다.”
아타락스는 그렇게 말하며 헤모리아에게 다가가, 망토를 어깨에 둘러주었다.
“과연 유진님. 가벼운 대련이었다고는 하나, 유진님의 체술에는 결점이랄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이만큼 압도당한 것도 당연하고, 설령 저일 지라도 속절없이 당했을 겁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제 얼마 없는 장점 중 하나가 솔직함이죠.”
아타락스는 농담처럼 말하며 웃었다.
“방금 그건 혈마법 아닙니까?”
로베리안은 웃지 않았다. 그는 헤모리아의 입을 덮은 금속 마스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오래 전에 사장 된 고대마법의 하나. 아롯에도 제대로 된 원전이 남지 않은 마법인데...?”
“과연 적탑주님. 설마 이 오랜 마법을 알아보실 줄은.”
아타락스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로베리안을 돌아보았다.
“말레피카룸은 빛의 신앙이 존재했을 적부터 교의 적과 맞서 온 조직입니다. 저희는 성직자이자 사냥꾼이고, 성기사이자 도살자입니다. 그런 저희가 신성마법 외에 다른 마법을 쓰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렇지만, 의외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혈마법은 아롯에서도 복원에 실패한 고대의 마법. 작금에 이르러 원전조차 남지 않은 것은, 신성제국이 오래 전에 혈마법을 이단이라 선언하고 박해했기 때문이잖습니까.”
그건 오래 전에 신성제국이 일으킨 마법 사냥이다. 그때의 신성제국은 신성력 외의 여러 마법을 이단으로 선언하고, 흑마법으로 취급해 사냥했었다. 그 무차별적이고 독선적인 사냥은 마법뿐만 아니라 정령술사들에게도 가해져서, 수많은 정령술사와 마법사들이 신성제국의 이단심문관에게 살해당했었다.
“...오래 전의 일이죠.”
아타락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성제국은 이미 그 죗값을 치렀습니다. 전 대륙에 세운 빛의 신전. 부모 없는 아이들과 괴롭고 힘든 이들을 보살피는 시설, 무상의 복지 등. 마법사냥 이후 긴 세월 동안 신성제국은...”
아타락스가 떠벌리는 말은 귀 기울일 가치가 없었다. 피해를 준 것보다 많은 보상을 했다는 것인데, 유진이 듣기에 저 주장은 유폐의 마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당장 유폐의 마왕도 300년 전의 전쟁의 보상이랍시고 각국에 전쟁보상금을 쥐어주었잖은가.
“혈마법은 이단이 아닙니다.”
아타락스는 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피를 매개로 쓰는 것에 오해가 있었던 것이죠. 신성제국은 오래 전에 혈마법을 분석하고, 흑마법처럼 사악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독점하고, 사용하고 있다?”
“독점이라는 말은 듣기 괴롭군요. 아롯만 하더라도 여러 위대한 마법들을 독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보호하고 있는 거지. 오래 전에 어떤 놈들이 마법사냥이란 미친 짓을 벌였으니 말이지.”
멜키스가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아타락스는 그런 멜키스를 힐긋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죠. 누구나 성숙하지 못한 어린 시절이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이 혈마법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말레피카룸의 본사를 찾아와 주십시오. 저희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에 많은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빛의 세례를 받는다면 말이지.”
“신을 섬기는 것에 어려운 결심이 필요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아타락스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까득.
헤모리아의 마스크 안쪽에서 다시 이빨 소리가 흘러나왔다.
*
“성급했습니다.”
아타락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군모를 벗었다.
“이빨을 드러내도 된다고는 말한 적이 없잖습니까.”
헤모리아는 양손을 등허리에 얹은 자세로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타락스는 주눅 든 제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 단전을 집요하게 노리던 것을 보면, 진즉에 간파했던 모양입니다만... 아무리 분노했어도 제 허락 없이 이빨을 드러내선 안됐습니다. 아, 항변하고 싶다면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헤모리아가 양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수화로 전해진 사과. 아타락스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많이 참았고, 많이 맞았으니 따로 징벌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남지 않은 겁니까?”
‘네.’
“아무리 단전을 공격당했다지만... 조금도 남지 않은 것은 이상한데?”
‘유진 라이언하트의 마나는 이상합니다.’
‘알아차린 것도 너무 빨랐습니다.’
‘빼앗은 마나는 모두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계속되는 수화에 아타락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마나에 무언가가 섞여 있다. 그건 보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백염식의 불꽃... 이질적인 번개.
‘헤모리아가 마나를 담아왔다면 해석할 수 있었을 텐데.’
아타락스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 인성은 모르겠지만, 그 자질과 실력은 진짜였다. 피차 제한이 있던 상태에서 헤모리아가 완벽하게 압도당했다.
‘...피를 빼앗았다면.’
“라이언하트의 영지에서?”
아타락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친 방법으로 확인하려 했지만, 헤모리아. 성검의 용사는 우리의 적이 아니란다.”
‘스승님은 그 자가 용사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성검을 쥔 것은 사실이지. 그리고 용사다운 일도 하지 않았느냐? 찌꺼기일 뿐이라도 마왕의 잔재를 해치웠으니 말이야.”
아타락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또 라이언하트라니... 신께서도 참으로 짓궂으시지. 수많은 신도를 내버려 두고, 또 라이언하트... 그것도 마왕의 잔재에 유혹된 타락자와 같은 세대에 성검의 주인을 내리시다니.”
‘성검만이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헤모리아가 수화를 이어갔다.
‘신성제국에는 찬란한 빛의 성녀가 계십니다. 아직은 후보이지만, 그 신실한 아니스님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크리스티나 보좌주교가.’
“...아아... 그렇죠. 저희에겐 성녀후보가 계시죠.”
아타락스는 믿음으로 반짝이는 헤모리아의 눈을 들여 보며 웃었다.
‘제가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까득. 헤모리아는 이빨을 갈면서 수화를 이었다.
“어쩔 수 없죠.”
화륵.
손가락에 들린 성냥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아타락스는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성냥을 흔들어 불을 껐다.
“신실함만으로는 성검의 주인이 될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심문
“퇴임 의사는 받지 않겠네.”
흑사자 성의 원탁.
새로이 원로원주가 된 클라인은 서두부터 그렇게 내뱉었다. 그 말에 길레이드는 당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알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으로 가주직에서 물러선다면, 라이언하트는 더욱 큰 혼란에 빠질 걸세.”
클라인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만약 자네가 가주에서 물러선다면, 대체 누구에게 가주를 맡겨야겠나? 흑사자가 된 기온? 아니면 방계로 나간 길포드? 그렇게되면, 자네의 처와 자식들은 어떻게 하고?”
“...그건...”
“아주 곤란해 질 거야. 가주에서 물러선 자네를 본가에 계속 두어야 하나? 아니면 방계로 내보내야 하나? 차기 가주는 어떻게 하고? 이래저래 매끄럽지 않고 곤란하단 말일세. 그러니, 망신과 굴욕을 감내하고 가주 자리에 계속 앉아있도록 하게.”
원탁에는 유진도 불려 와 앉아있었다. 유진은 내심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클라인의 말을 들었다.
‘이제 와서 가주에서 물러나면 애니실라의 눈이 뒤집힐 걸.’
애니실라의 성격이 평화로워진 것은 본가에서의 입지가 굳건해진 것과, 시안이 차기 가주로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본가를 떠나거나, 차기 가주 건으로 잡음이 생긴다면? 애니실라가 폭주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제가 아버지로서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제 모자람으로 가문에 누를 끼친 이상, 그를 책임져야...”
“책임은 자네 혼자 지는 것이 아니라 라이언하트가 져야 하는 것일세.”
클라인은 손을 휘휘 저으며 내뱉었다.
“이 문제는 자네의 아들인 이오드 라이언하트 뿐만이 아니라, 라이언하트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문제가 곪아서 터진 것이니 말이야.”
“...”
“그에 관해서는 죽은 전대 원로원주가 확실하게 유언을 남겼네. 나는 신임 원로원주이자 라이언하트의 오랜 어른으로서, 가문이 앞으로 이와 같은 문제를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걸세.”
“유언이라 함은...?”
길레이드는 머뭇거리며 물었고, 클라인은 헛기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지는 말은, 유진이 도이네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그대로 담은 것이었다. 흑사자의 대대적인 증원과 교육. 혈계식의 폐지. 당장 올해부터 방계는 본가와 마찬가지로 마나와 진검수련이 자유로워 진다.
“...백염식은 본가에 남겠지만, 혈계식의 폐지만으로도 모든 방계가 라이언하트의 변화를 체감할 걸세.”
“...그것이... 전대 원로원주님의 유언입니까?”
“의외라 생각하나? 나도 그래. 하지만 그 분은 정말로 저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으셨지.”
클라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갑작스럽기도 하고...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날 포함한 원로들은 저 유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네. 이번 사태는 방계의 불만에서 촉발된 것이고, 그 불만은 혈계식이란 악습에서 쌓이고 썩은 것은 인정해야 해.”
길레이드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혈계식이 제대로 된 전통이 아니란 것은 길레이드도 이미 느끼던 바였다. 하지만 전통이란 것은 올바르지 않단 것을 앎에도 쉬이 고칠 수 없는 것이다.
“...라이언하트가... 변하는 군요.”
“변해야지.”
클라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즉에 변했어야 하는데... 아니, 아니군.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았다면 변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
“...흑사자의 전력증원은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길레이드는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전하는 것이 늦었습니다만. 키옐의 황제는 헬무드의 준동에 대비해, 각국 기사단의 단합을 추진하겠다고 하십니다.”
“단합?”
길레이드가 꺼낸 말에 모인 원로들이 관심을 보였다. 길레이드는 집중되는 시선에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예. 키옐의 우방국들. 또 참가하고자 하는 소국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아직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기사단에 준하는 용병단의 참가도 허하시려는 모양입니다.”
“과연.”
클라인의 눈썹이 구겨졌다.
“단합을 명목으로 힘겨루기를 하고 싶으신 모양이군. 타국의 기사나 용병도 빼내고 말이야.”
대륙에는 유명한 기사단이 여럿 있다. 신성제국 유라스의 혈십자 기사단. 해상왕국 시무인의 격랑 기사단. 키옐 제국의 백룡 기사단. 루하르의 하얀 송곳니. 나하마의 모래전갈... 그리고 라이언하트의 흑사자, 백사자 기사단.
저들 중에서 어느 기사단이 가장 뛰어난가? 그건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물론 키옐의 황제는 자신의 백룡기사단이 가장 뛰어나다 여기겠지만, 그를 확인할 만한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단합회를 통해 각 기사단이 손발을 맞추고, 친목을 도모한다...”
“제국과 왕국의 전력이 한 곳에 모인다면 헬무드의 마왕도 조금은 긴장할 지도 모르지.”
“하하하... 항마연합과 혈십자기사단이 헬무드의 변경에 주둔했음에도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황제께서 단합회의 장소는 어디로 하고 싶으시다 하였는지는 들었나?”
“당연히 키옐의 국토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길레이드는 눈썹을 구기며 대답했다.
“될 리가 없지.”
클라인은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키옐의 행사도 아니잖나.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곳은... 루하르로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유진은 원로들과 가주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으면서 쭉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클라인의 뒤에 선 제노스에게 힐긋힐긋 눈짓을 주었다.
“...으흠... 루하르가 단합회의 장소로 가능성이 높은 것은... 루하르의 왕가가 가진 정통성 때문일세.”
“정통성?”
“루하르의 왕가는 그 용감한 모론님의 직계 후예니 말이야. 물론 우리 라이언하트도 위대한 베르무트님의 후예이고, 아롯에는 세냐님의 제자들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지.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모론님은 루하르의 건국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셨잖느냐?”
길레이드가 말을 받았다.
“그 이후 다시 모습을 감추셨지만, 아직 세상에는 모론님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았다. 루하르 왕가도 모론님의 행방을 ‘은거’라고만 말할 뿐이지.”
“...아하. 모론님이 그 단합회에서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는 것이군요?”
유진은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지. 유폐의 마왕이 경고를 전하고, 언제 헬무드가 악심을 드러낼지 모르는 시대다. 이 불온한 시대에 300년 전 마왕과 직접 맞서신 영웅이 전력에 더해진다면...”
“으흐흠...”
“...제노스 경? 무슨 일이십니까? 어딘가 불편하신지...?”
“아무... 흐흠...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호흡이 걸린... 으흠... 저는 가끔 이렇게 참을 수 없이 기침이 올라오곤 합니다...”
한순간 유진은 제노스는 째릿 노려보았고, 제노스는 급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단합회는 언제쯤 열릴 것 같은가?”
“황제폐하가 무척 의욕을 보이고 계시니, 아마 올해 안에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 노골적이시군... 이번 일도 있고 하니, 라이언하트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싶으신 모양이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역대 키옐의 황제들은 항상 자국의 백룡기사단이 흑사자나 백사자보다 우월하단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고, 라이언하트의 힘을 소유하고 싶어 하셨죠.”
“한심하고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게 되겠군. 불사의 백사자도 죽었고, 후계자인 도미닉도...”
원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마창과 분쇄추가 소멸한 것도 커.”
“그래도 아직 카르멘님이 건재하시잖습니까. 제노스도 있고, 흑사자 기사단의 전력은...”
“전성기에 비해서 절반가량 떨어졌다고 봐야 옳아.”
“꼭 그렇지도 않지.”
클라인은 무릎을 착 치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 마창과 분쇄추를 소멸시킨 장본인이 여기 있지 않은가?”
모든 원로들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유진은 멀뚱히 눈을 끔벅거리다가, 뺨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도 거절을 해댄 덕인지, 흑사자 기사단에 들어오라는 권유는 듣지 않았다.
‘그 담합회란 것이 루하르에서 열린다면 나야 좋지.’
언제고 한 번 가봐야 할 곳인데, 워낙 멀리 있는 곳이라 혼자 가기 부담스럽던 곳이다. 만약 모론이 살아있다면... 모두가 의도했던 것처럼, 담합회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 분명하긴 했다.
‘300년 사이에 성격이 엄청 바뀐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모론은 그 옛날부터 연회를 좋아하고, 다른 이들과 겨루는 것을 좋아했다. 제 왕국 한복판에서 타국의 기사단과 강자들이 대거 모인다면, 모론 그 등신은 자신이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강한 전사임을 증명하겠다며 튀어나올 것이 분명했다.
‘살아있다면.’
모론을 떠올려 본다. 어눌한 공용어. 10년이 넘게 함께 떠돌았는데, 모론의 말투는 어눌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놈은 단순하면서도 정직했고, 기교에도 능한 주제에 그를 발휘하기보단 정면에서 힘으로 찍어 누르고 겨루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적을 맞닥트리건, 모론이 가장 먼저 앞으로 뛰어나갔다. 모론이 먼저 얻어맞고 오면, 그를 확인하고 다음과 대처를 생각하는 것이 하나의 약속이었다.
신뢰했다.
그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모론이라면 버틴다. 모론이라면 뚫는다. 모론이라면 괜찮다.
그러한 믿음이 향한 것은 모론 뿐만이 아니었다.
하멜, 세냐, 모론, 아니스, 베르무트. 그 다섯 명 모두가 서로를 믿었다.
서로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그 끔찍하던 헬무드의 어둠을 가르고 나갈 수 있었다.
서로가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같은 전의(戰意)를 갖고 싸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마왕과 사투를 벌일 수 있었다.
‘...모론.’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곱씹었다. 아주 오래 전이지만, 유진은 모론의 모습과 목소리를 방금 본 것처럼 뚜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모론 뿐만이 아니다. 세냐도, 아니스도, 베르무트도. 같은 뜻을 가지고, 서로가 등을 맞대며 싸웠던 모두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난 네가 뒈지거나 늙은 모습은 도저히 상상 못하겠다.’
유진은 오랜 벗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
회의가 끝난 다음날.
유진은 흑사자성의 워프게이트 앞으로 나왔다. 더 이상 흑사자성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으니, 일찍 본가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신성제국에서 온 이단심문관들은 이른 새벽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들은 배웅도 바라지 않고, 왔을 때와는 달리 조용히 성을 떠나갔다.
‘크리스티나에게 안부나 전해 달라 할 걸 그랬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괜한 말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은근히 사람 속을 긁어대던 아타락스나, 대놓고 짐승처럼 으릉대며 까득까득 이빨을 갈아대던 헤모리아. 유진이 어찌 생각하던, 그 둘은 유진에게 친애란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으리리라.
“...이번 달까지는 성에 있어야 할 것 같구나.”
길레이드는 씁쓸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건을 제대로 수습해야 하고, 죽은 전대 원로원주의 묘도 찾아가야 하니 말이야.”
도이네스의 묘 뿐만이 아니다. 이오드는 테오니스를 포함해 보사르 백작가의 전원을 몰살시켰다. 그들의 장례는 이미 치러졌고, 보사르 백작 영지에는 이미 다른 영주가 부임했다. 친족들의 분노에는 클라인과 다른 원로들이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와는 별개로, 길레이드도 사죄를 해야 한다. 길레이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사르 가문의 묘지를 찾아가고, 그곳에서의 일이 끝나면 제물로 죽은 데콘의 가문에도 찾아가야 한다.
그 뒤에는? 혈계식의 폐지를 공표하고, 흑사자 성을 찾아 올 방계의 유력가들을 상대해야 한다. 본래 회담은 본가에서 치르지만, 라이언하트의 오랜 전통의 폐지와 변화를 공표하는 이상 원로들이 머무르는 흑사자성에서 회담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번 달 안에는 못 돌아오실 것 같은데요.”
“내 생각도 그렇구나.”
길레이드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늦어도 다음 달까지는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시안은 내가 돌아갈 때까지 성에 남아서 수련하겠다고 하니... 그때까지 본가는 네게 맡겨야겠구나.”
“애니실라님도 계시고, 카르멘님도 계시는 걸요.”
“제하드고 있고 말이야.”
“저희 아버지는 있어봤자 별 도움이 안 되는데...”
유진은 농담 삼아 말했고, 길레이드는 움푹 들어간 뺨을 억지로 움직여 미소 지었다. 그걸 보니 괜한 농담을 했단 생각이 들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병자의 미소가 애처로워 보였다.
“...그리고 시엘도 조만간 돌아오는 것 아닙니까?”
유진은 길레이드의 뒤편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엘 라이언하트. 그녀는 성벽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더니 유진에게 눈을 흘겼다.
“카르멘님에게 배우러 가는 거야.”
“누가 뭐래?”
“내가 내 집에 언제 돌아가건 내 마음이야.”
“누가 뭐랬냐고.”
대답이 얄밉다. 며칠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가자고 말할 법도 한데, 시엘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흑사자 성에 조금 더 남기로 한 것은, 괴로움에 시달릴 아버지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마침 수행원도 필요할 테니, 시엘은 길레이드와 함께 행동하며 보사르 가문이나 데콘 가문의 묘비에도 찾아갈 생각이었다.
“...어머니에게 꼭 전해 줘야해. 나랑 오빠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고 말이야.”
“응.”
그렇게 대답해주고서 길레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음에는 본가에서 뵙죠. 큰아버지.”
길레이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진의 손을 보고서 낮게 웃었다.
“...고맙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의 손. 처음 양자로 들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마주잡힌 손에는 더 이상 앳된 티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이 길레이드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양자의 손은 이토록 선명히 기억나는데... 장남의, 이오드의, 그 아이의 손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길레이드는 죄책감과 후회를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큰아버지?’
시엘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 저 큰아버지란 말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는 명확한데, 왜 큰아버지인가? 저번만 하더라도 ‘길레이드님’이라고 꼬박꼬박 선을 지켰는데.
‘큰아버지... 나쁘진... 않은데...’
“누나라고 불러.”
“아침부터 술먹었니?”
“왜 아버지는 큰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나는 누나라고 안 부르는 거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워프게이트는 아까부터 연결되어 있고, 그를 담당하는 6번대 대장 디아드가 눈총을 보내고 있다.
“말썽부리지 말고, 큰아버지 어깨나 좀 주물러 드려.”
“...또또 늙다리처럼 말하네.”
유진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본가에 돌아가면.
우선, 애니실라와 카르멘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 그 뒤에는 엘프들이 머무르는 숲에서 마창과 분쇄추를 시험해 봐야 한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본가의 영맥에 슬쩍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용서해 주겠지.’
분쇄추와 마창의 정비가 끝난 뒤에는.
유진도 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리스.’
나찰공주가 올 때까지.
수도
라이언하트의 숲.
유진은 그 심부에서 정좌를 하고 앉았다. 쫑알쫑알 말이 많은 메르는 지금은 곁에 있지 않았다.
본가의 안주인인 애니실라는 키옐 수도 사교회의 배후에 선 거인이다. 그녀는 가주인 길레이드처럼 많은 기사들에게 존경받고 있지는 않으나, 사교회에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귀족 정세의 대부분을 전해 듣고 간섭하기에 살롱의 암사자라 불리고 있다.
이오드의 문제로 시궁창에 처박힌 가문의 위신.
지금까지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사교회에 군림하며 귀족가를 주름잡기 위해서는 애니실라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친밀한 귀족들에게 자필로 편지를 쓰고, 잘 참석하지 않던 파티에도 참석하고, 주제도 모르고 파티나 다과회에서 험담을 흘리는 잡것들에게 협박성 선물을 보내고, 자극적으로 과장 섞은 기사를 낸 언론사에도 경고를 전해야 한다.
즉, 스트레스가 넘치고 있단 말이다. 본래라면 침대에 눕기 전에 와인이나 몇 잔 마시거나, 동트기 전 운동복을 입고 나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조깅을 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겠지만.
마침 지금 본가에는 메르가 있었다. 애니실라는 자신의 로망과 육아의 미련을 그대로 실현해 놓은 것만 같은 자그마한 소녀를 꾸미고, 먹이고, 귀여워하며 즐기는 것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에 탁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메르는 애니실라에게 붙들려 있었다. 사실 애니실라가 바라지 않았더라도, 지금 하려는 일에 메르를 곁에 둘 수는 없었다.
‘괜히 휘말리게 될 지도 모르니까.’
처음 번개불꽃을 접할 때. 멜키스는 번개불꽃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메르의 술식이 침범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었다. 만약 메르의 구성술식이 훼손되기라도 한다면, 지금의 유진으로서는 술식을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흠.”
유진은 정좌해 앉은 몸을 살짝살짝 뒤틀며 생각에 잠겼다.
라이언하트의 숲.
이곳에 옮겨진 세계수의 묘목은 땅속 밑에 뿌리를 뻗어, 수백 년 전에 베르무트가 만든 영맥과 닿았다.
고작해야 한 달 남짓 흘렀을 뿐.
이 숲은 템페스트와 멜키스가 말했던 것처럼, 사시사철 울창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숲이 되었다. 아직 요정목은 더 늘어나지 않았고, 세계수의 묘목도 더 커지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이 숲에서 엘프의 영지에 진입했을 때와 같은 세계수의 정령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을 드럽게 안 처 듣는다니까.”
느낄 수만 있을 뿐. 세계수의 정령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번개불꽃이 처음 몸에 녹아들었을 때에도 시도하던 것들이지만, 여전히 저 정령들은 유진의 부름에 호응해 주지 않았다.
‘기대도 안 했지만.’
망토 안쪽에서 꺼낸 무기는 마창과 분쇄추. 흑사자 성에서 격전을 겪었지만, 다행히 이 두 무기는 박살나지도 않고 금 간 곳도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마창은 창대는 혈관 돋은 것처럼 꿈틀거리고, 물결치듯 구불거리는 창날은 어지간한 칼날만큼이나 길고 날카롭다.
분쇄추는 거대한 망치의 형상을 하고 있다. 과할만큼 기다란 마창은 유진보다 훨씬 긴데, 그나마 분쇄추는 유진의 키와 엇비슷했다.
하지만 무겁다. 막대 끝에 매달린 거대한 해머는 무기로 쓰기보단 광산의 바위나 깨는데 사용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분쇄추와 마창은 기괴하게 생기고 다루기도 힘든, 생김새 그대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쇳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성검과 월광검에 의해 마왕의 잔재와 마기가 완전히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다. 유진은 양손에 각각 마창과 분쇄추를 들고서 두눈을 얇게 떴다.
이 자체만으로 무기로 쓸 수는 있다. 확인해 본 바, 어떤 금속인지는 몰라도 이 두 무기는 마나를 아주 잘 받아먹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별 메리트가 없다. 마나는 위니드나 아스펠도 잘 받아먹는다.
마나를 불어넣는 과정에서, 마나에 섞인 번개불꽃의 일부가 마창과 분쇄추에 스며드는 것을 확인했다.
‘술식을 해석하는 건 불가능해.’
아카샤를 통해 먼저 확인은 해두었다. 마창과 분쇄추에는 마왕의 권능을 체현하기 위한 술식이 있는데, 그건 새겨져 있다기 보단 무구 자체에 녹아들어,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보니 분리하거나 술식을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해조차 하지 못했는데 무슨.’
단순한 마나로는 마창과 분쇄추가 소실한 권능을 재현해낼 수 없다. 마기를 쓰면 다를까? 아마 그렇겠지만, 정신이 돌아버리지 않고서야 유진 자신이 직접 마기를 다룰 일은 없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마나에 녹아든 번개불꽃을 통해 마창과 분쇄추의 권능을 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다는 것과.
마창과 분쇄추는 촉매로서 훌륭하단 것이다.
ㅡ화륵!
새하얀 불꽃이 피어오른다. 유진은 양 손에 마창과 분쇄추를 나눠쥐고서 의식을 집중했다. 코어가 연결되고, 회전이 하나가 되었을 때. 불꽃이 거세지며 번갯불이 튀었다.
우우우우!
환염식에 호응하듯이 마창과 분쇄추가 울음을 토했다. 유진은 피부가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두 무구를 노려보았다. 마나는 빨려먹히는 것이 아니라, 유진이 억지로 쑤셔 넣고 있다. 지금 유진이 가진 마나는 고작 7년 수련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대하고 순수했다.
그 마나를, 코어의 바닥을 긁을 만큼 쑤셔 넣는다. 마창과 분쇄추를 휘감은 검강은 더 이상 부풀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맹렬한 불꽃이 되었고, 유진의 지배에 따라 점점 응축되었다.
그렇게 한계까지 퍼부으니,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놀랍지도 않았다. 유진은 벌써 닷새 동안 매일, 마나가 회복될 때마다 이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영맥도 가깝고, 세계수의 묘목이 심어진 이 숲은 마나가 가득하다. 고갈직전까지 마나를 사용해도, 성능 뛰어난 백염식은 반나절도 걸리지 않고 마나를 회복시킨다.
‘슬슬 될 것 같...’
고갈되어가는 코어에서 뻐근한 통증을 느낄 즈음. ㅡ빠직! 마창과 분쇄추에서 이전과는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본래 시커먼 색이었던 두 무기는 환염식의 불꽃 속에서 하얗게 변해 갔다. 그 직후, 얇은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빠직... 빠지직! 유진의 마나에 섞여있던 번개불꽃이 균열을 통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반응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태껏 몇 번이고 부르고 청해도 다가오지 않던 세계수의 정령들. 연기처럼 희끄무레한 것들이 마치 이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파직거리며 튀는 번개불꽃에 세계수의 정령들이 몸을 들이민다. 그들은 번개불꽃에 섞여, 유진이 지배하는 마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마창과 분쇄추의 균열에 스며들었다.
유진은 아찔하게 고양되는 의식 속에서 그것들을 지켜보았다. 슬슬 그만둬야 하나? 세계수의 정령이 더해졌지만 마나의 총량이 극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코어는 고갈되기 직전. 이대로 계속 마나를 뽑아냈다간 탈진해 쓰러지거나, 자칫하다간 코어에 심각한 장애가 남아버릴 수도 있다.
‘이거 좆 되는거 아닌...’
퍼어어엉!
유진이 들고 있던 마창과 분쇄추에서 폭발이 터져나왔다. 갑작스런 폭발이긴 했지만, 유진은 당황하지도 않았고 분쇄추와 마창을 놓치지도 않았다. 마나의 흐름이 뒤틀리고 터지기 직전, 그 징조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우.”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고서 제 팔을 쳐다보았다. 뼈와 근육은 다치지 않았지만, 경도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쓰렸다.
불꽃은 폭발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번갯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멸된 것은 아니다. 유진은 히죽 웃으며 마창과 분쇄추를 들어올렸다.
얇게 퍼졌던 실금은 어느새 메워져 있었다. 유진의 마나에 녹아든 번개불꽃. 그것이 마창과 분쇄추에 더해져, 하나가 되었다. 즉, 마창과 분쇄추는 유진과 완전히 연결된 것이다.
“...흐음.”
유진은 웃음을 참지 않고 마나를 일으켰다. ㅡ파지직! 얼마 되지 않은 마나로도 마창과 분쇄추에 검강이 어렸다. 유진은 튀어오르는 번개불꽃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
아니, 벌써 만족해선 안 된다. 우선 분쇄추부터. 유진은 마창을 내려놓고, 분쇄추를 양손으로 잡고서 들어올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 그걸 확인하고, 분쇄추를 아래로 내리 찍었다.
ㅡ콰지직!
거대한 힘이 영역을 짓눌렀다. 성공이다. 마왕이 쓰던 위력은 물론, 이오드가 썼던 위력과도 턱없이 비교가 안 된다만. 마기를 쓰지 않고 분쇄추의 권능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현기증이 조금 느껴지긴 했다. 각오는 했다만, 권능을 쓰는 것에는 마나가 쭈욱 빨려나간다.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야.’
코어에 마나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위력도... 약화되긴 했어도 실전에서 충분히 사용할 만 했다.
‘위력이야 점점 강해질 거고.’
유진은 분쇄추를 내려놓고 마창을 들었다.
가시를 일으킬 좌표를 계산하고, 창을 아래로 찔렀다. 파바박! 분쇄추와 마찬가지로 노렸던 영역에 정확히 창날이 치솟았다. 역시, 도미닉이 썼던 창림보다 범위도 작고 창날의 배열도 나쁘다.
실망하지는 않았다. 마창과 분쇄추에 번개불꽃이 깃든 이상, 권능의 위력은 유진과 함께 성장할 것이다.
“...음...”
분쇄추와 마창을 다시 망토 안에 넣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망토에 반쯤 넣었을 때, 강렬한 시선이 유진의 몸을 푹푹 찔러댔기 때문이다. 무시하고 더 집어넣으니 시선이 더, 더 매서워졌다. 뭔가 싶어서 무기를 조금 빼내니, 시선이 누그러졌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유진은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보이는 나무의 뒤편.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얼굴을 반쯤 내밀고 있었다. 얇게 뜬 눈동자가 칙칙한 빛으로 물들어 있다...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제 와서 제가 마창과 분쇄추를 가진 것을 탓하시려는 건 아니죠?”
마창과 분쇄추를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미리 카르멘에게 말해두었다. 이 숲에서 무구를 길들여야 하는데, 카르멘의 눈을 속이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흑사자성에서 벌어진 사고를 수습한 것에 대한 감사도 느끼고 있고, 티끌만큼의 마기도 남지 않은 것도 확인했다. 그래서 카르멘은 그 건에 대해서는 쉽사리 수긍해 주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쳐다보고 있는 건가? 유진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리자, 카르멘은 헛기침을 하며 나무 밖으로 걸어나왔다.
“...폭발소리가 들렸다.”
“예... 뭐... 저 때문이죠.”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마나를 느꼈다.”
“그것도 뭐...”
“방금 네가 펼친 것은, 분쇄추의 ‘프레셔’와 마창의 ‘창림’... 맞나?”
“그... 저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쓸 수 있도록 길들이겠다는...”
유진의 말이 끝나기 전. 카르멘이 대뜸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 갑작스런 행동에 유진은 움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진이 보는 앞에서 카르멘은 오른손을 뒤집어 앞으로 보여주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은색의 회중시계가 들려있었다.
“폼체인지.”
ㅡ철컥! 회중시계의 안에서 묵직한 기계장치의 소리가 울렸다. 회중시계가 열리고, 안쪽의 시계바늘이 회전했다.
회중시계의 뚜껑이 갈라졌다.
유진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았다. 저것은 가히 연금술의 최첨단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손바닥 크기의 회중시계가 철컥철컥 갈라지고, 금속이 쭈욱 늘어나는가 싶더니 카르멘의 오른손과 팔뚝을 감쌌다.
“헤븐 제노사이드, 데스티니 폼.”
“...”
“이 팔을 보는 순간...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제가 죽어야 합니까?”
“너와 내가 운명의 장난을 시작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나는 죽을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끼릭.
카르멘은 은색의 금속에 덮인 날카로운 손가락을 쥐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가족과 사투를 벌이지 않는다.”
“...예...”
“서로에게 다행인 일이지. 라이언하트에 새로운 비극이 더해질 일은 없게 되었으니 말이야.”
끼릭, 끼릭. 카르멘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유진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카르멘의 손을 덮은 헤븐 제노사이드 데스티니 폼을 쳐다보았다. 오른팔을 감싼 금속의 건틀렛... 그 모습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흥분 같은 것을 치밀어 오르게 만들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예?”
“내 데스티니 폼 말이다.”
“...멋지네요.”
“네게는 아직 보여주지 않은, 아니, 보여줄 수 없는. 데스티니 브레이커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 데스티니 폼으로 펼쳐야만 한다.”
“그렇군요...”
“이 헤븐 제노사이드에는 데스티니 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폼이 존재한다. 더 보고 싶지 않나?”
“...괜찮습...”
“블래스터 폼이라면 네가 방금 사용한 분쇄추의 프레셔와 좋은 승부가 될 것 같군. 실제로 겨뤄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카르멘은 진심으로 아쉽단 표정을 지으며 손을 옆으로 들어올렸다. ㅡ철컥! 기계장치의 소리. 헤븐 제노사이드가 다시 회중시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나?”
“방금 전에 물어보셨잖습니까?”
“진실 된 감상이 아니라고 느꼈다.”
“...진짜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가지고 싶나?”
“아뇨...”
“가지고 싶어 해도 어쩔 수 없지. 이건 실제로 멋진 아티펙트니까 말이야. 하지만 빌려주지 않을 거고,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려주지 않을 거다.”
“예...”
“궁금하지 않나?”
카르멘은 우쭐대는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힐긋힐긋 시선을 던지고, 가슴을 활짝 펴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이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궁금합니다.”
“우연한 만남, 기적... 벌써 수십 년 전, 내가 어릴 때의 신비로운 체험. 여기까지만 말해주지.”
“기왕 말하시는거 끝까지 말해주시죠?”
“그럴 수 없다. 약속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어길 수 없는 것이니.”
찰칵! 카르멘은 회중시계의 뚜껑을 닫고 품안에 집어넣었다.
“네 새로운 무장이 내 안의 열광을 깨웠구나.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러한 열광에 익숙하고,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다.”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만 폭발은 다루는데 주의하도록. 이곳으로 달려오는 동안 폭발음에 놀라 주저앉은 엘프를 몇 명 보았다. 시크나드 경이 습격인 줄 알고 뛰어오는 것을 내가 가로막았지.”
“...감사합니다.”
“팔의 부상은 괜찮나?”
“따끔거리는 정도입니다. 내버려둬도 내일이면 나을 겁니다.”
“어설프군. 자그마한 부상도 처치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리고 라이언하트는 무가다. 치료약은 종류별로 넘치도록 있으니, 부담갖지 말고 약을 바르도록.”
“예... 알겠습니다.”
“돌아가자.”
카르멘은 당연하단 듯이 숲을 빠져나가는 것에 앞장섰다. 마창과 분쇄추를 길들이는 것도 끝났으니, 유진도 더 숲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마창과 분쇄추는 더 이상 마창과 분쇄추가 아니게 되었는데 계속 마창과 분쇄추라 불러야 하나?”
“예... 예?”
“그 불길하던 마기도 사라졌으니 더 이상 마왕의 무구라 할 것도 없지 않나. 그러니 마창, 분쇄추라 부를 이유도 없을 텐데?”
“헷갈리니 그대로 두는 게...”
“가이아 크래셔와 롱기누스는 어떻게 생각하나?”
가이아 크래셔, 지골라스.
롱기누스, 루인토스.
“분쇄추와 마창이 좋습니다.”
“흠... 장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주인의 권리지. 나는 보다 나은 제안을 할 뿐, 그를 침범하지 않으마.”
가이아 크래셔와 롱기누스란 이름이 낫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심으로?
“유진님.”
숲을 빠져나가기 직전.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나리사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있던 레베라와 만났다. 둘을 본 순간, 카르멘은 보란 듯이 눈짓을 보내며 팔짱을 껴보였다.
폭발음에 놀라 주저앉은 엘프.
그를 직접 보여주려고 이쪽 길로 온 것일까? 유진은 카르멘 라이언하트의 속내를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찾아뵙기 전에 만나게 되었군요.”
“무슨 일이야?”
나리사와 레베라는 별채에서 견습시종으로 일하고 있다. 이미 교대시간은 지났을 텐데, 둘은 아직까지 옷을 갈아입지 않고 라이언하트의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내일 외출의 허락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외출?”
“네. 마침 내일이 휴무일이라.”
레베라는 나리사의 치맛단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며 말을 이었다. 팡, 팡 하고 치마가 두드려질 때마다 나리사의 몸이 휘청거렸다. 최근에 맞춘 의족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외출하는 건지 물어봐도 돼?”
“의안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나리사는 왼쪽눈을 덮은 안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로 외출하는데?”
“수도 도시입니다.” “저번에 외출한 적은 있나?”
“없습니다.”
엘프는 아무래도 이목을 끈다. 물론 키옐 수도의 치안은 훌륭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엘프들의 외출에는 본가 기사가 무조건 한 명 호위로 붙기로 정해두었다.
“희망하는 호위는 있고?”
“없습니다.”
레베라는 건조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나리사는 유진에게 눈을 힐긋거리며 레베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하지만 몇 번을 찔러대도 레베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 나랑 함께 가지.”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리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유진 쪽에서 저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저, 저도 함께...”
“너는 내일 휴무가 아니잖아.”
“교대를 부탁하면...”
“니나 시종장은 사적인 이유로 업무시간을 바꾸는 것을 싫어하셔.”
매끄러운 대답에 나리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일 몇 시에 나가면 돼?”
“시간은 상관없습니다.”
“그럼 나가서 점심이나 먹을까. 나도 수도는 몇 번 안 가보긴 했는데, 메르가 맛집은 잘 알거든.”
애니실라와 제하드가 날마다 메르를 데리고 외출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레베라는 동요하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수도
라이언하트의 본가는 수도 세이리스의 외곽이라, 마차를 타고 번화가에 가려면 몇 시간은 족히 걸린다.
레베라가 호위만을 데리고 외출했다면 당연히 마차를 탔겠지만, 유진이 함께 가기로 한 이상 마차가 쓰일 일은 없었다.
뭐 하러 마차를 타나? 워프게이트를 쓰면 되는데. 본가의 워프게이트는 중요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가동되지 않지만, 지금의 유진은 제 사적인 이유로 워프게이트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의안이라면, 특별 주문한 아티펙트인가요?”
메르는 평소처럼 망토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본가에 오고서 몇 번이나 수도에 외출을 나간 적은 있었지만, 유진과 함께 외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메르는 이른 아침부터 애니실라에게 엄격한 코디를 받았다.
“시신경에 직접 연결하는 의안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가격이 굉장히 비싸다고 들었습니다.”
레베라는 메이드복이 아닌 단정한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녀는 왼쪽 눈가를 덮은 안대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돈이야 뭐 문제되나? 필요하면 사야지. 눈알 하나 없는 것도 불편할 것 아냐.”
“견습시종의 봉급도 과분할 만큼 많지만...”
“아니 당연히 네 월급으로는 못 사겠지. 그냥 내가 사주면 되는 것 아냐?”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사양할 것 없는데.”
“저는 그런 의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레베라가 안대를 살짝 들춰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자위는 화상과 칼자국이 얽혀 있었다.
“눈 안쪽이 인두에 지져졌으니, 아무리 비싼 의안을 껴도 이쪽 눈이 다시 보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으윽...”
메르는 안대 안쪽의 상처를 보고서 몸서리를 쳤다.
“...그럼... 음... 보석이라도 박아 넣은 의안을 끼면 보기 좋지 않을까요?”
“너는 그냥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제 나름대로 레베라님을 신경 써서 말하는 거예요.”
“애꾸눈한테 눈에 보석박고 다니라고 하는 게 신경 써서 하는 말이니?”
“애꾸눈보고 애꾸눈이라고 하는 유진님의 인간성이 절망스러워요.”
“뭐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배려심없는 대화. 레베라는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나름대로 신경 써서 하는 말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애꾸눈이니 보석눈이니 하는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그냥 평범한 의안이 좋습니다.”
끼어들지 않으려 했는데, 옥신각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의안 중에는 호신용으로 도움이 되는 의안도 있어요.”
“눈에서 뭐 파괴광선 같은 것도 쏴대는 건가?”
“그런... 의안도 없지는 않겠죠.”
“나도 옛날에 본 적이 있...”
유진은 별 생각 없이 말을 잇다가, 레베라의 존재를 의식하고 헛기침을 뱉었다.
“...나하마에 갔을 적에 말이야. 거기 사막 어쌔신이랑 모래술사들 중에서, 눈깔에 마법술식을 새긴 의안을 박은 놈이 있었거든.”
“제가 말한 것도 그런 종류의 의안이에요.”
메르가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300년 전의 시대에는 팔다리 하나 없고 눈에 화살이 박힌 놈이 드물지 않았고, 그러한 장애를 커버하기 위해 특수제작한 아티펙트를 쓰는 미치광이도 몇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의안에는 결국 한계가 있다. 진귀한 마법광물과 뛰어난 장인, 연금술사, 마법사가 제아무리 공을 들인 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의안은 마안(魔眼)보다는 압도적으로 저열하다.
물론 그러한 마안은 흔하지 않다. 마족, 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위마족 몇몇만이 터무니없는 권능이 새겨진 마안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한 마안은 일부 마족들의 고대부터 이어지고 강화된, 순혈가가 가진 권위의 상징이다.
[몽마의 여왕이 환상의 마안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사실이긴 한데, 이름처럼 거창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어.’
[전승에 따르면 몽마의 여왕이 단독으로 튜라스 왕국의 정예군 3만 명을 전멸시켰다던데요?]
‘당시 고위마족 중에서 그만한 일을 벌일 수 있는 힘을 가진 놈이 누아르 제벨라 뿐이었던 건 아니지.’
[물 한 방울 없는 평원에서 3만 명을 통째로 수장시켰잖아요. 눈을 빛내니까 땅이 바다가 되고, 파도가 군대를 덮쳤다던데...]
‘3만 명이 익사한 건 사실이지만 평원이 바다가 된 건 아니야.’
[그게 무슨 차이에요?]
‘누아르 제벨라의 마안은... 그러니까...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거거든. 그 평원에서 죽은 3만 명은 모두가 파도를 보고, 바다에 빠져 죽은 거지만... 실제로 바다에 빠져 죽은 건 아니란 말이지.’
[음... 강력한 환각을 보여주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지. 누아르 제벨라의 마안이 환상의 마안이라 불리는 것은, 누아르 제벨라와 마안의 상성이 역겨울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야.’
누아르 제벨라는 몽마의 여왕이다. 그녀는 수많은 몽마 중에서도 정점으로 군림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녀가 만들어내는 꿈은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정교하다. 특히 누아르 제벨라가 다른 몽마와 비교가 안 되는 것은, 그녀가 인간의 정신을 너무나도 간단히 파고들고 무너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상의 마안은ㅡ 잠에 들지도 않았는데 꿈을 꾸게 만든다. 마안에 포착 된 순간, 현실이 꿈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거창히 불릴 만큼은 아니라니. 유진님의 이야기만 들으면, 몽마의 여왕의 마왕은 신의 권능과도 겨룰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도 않다니까? 이래저래 용써 봐야 결국은 현실이 아닌 환상이고, 정신줄만 꽉 잡고 있으면 현혹될 일도 없어. 솔직히 나는 누아르 제벨라의 환상의 마안보다는... 가비드 린드먼의 위신의 마안이나 아이리스의 암전의 마안이 훨씬 더 까다로웠어.’
누아르 제벨라 덕에 헬무드에서 온갖 고생을 하긴 했지만, 당시 일행 중에서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미쳐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유진님이 잘났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나만 잘난 것이 아니지. 아니스가 신성결계를 유지하고, 세냐가 간섭을 상시차단해서 현혹되지 않았던 거니까.’
[역시 세냐님은 훌륭하세요.]
메르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레베라가 소외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으며 길을 걷는 것에 집중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몸에 익어버린 버릇이었다.
키옐의 수도, 세이리스는 레베라가 평생 가보았던 그 어떤 도시보다 화려했고,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도로는 울퉁불퉁한 곳 없이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고, 마차와 말이 다니는 도로도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옷차림과 표정에 여유가 묻어나오고, 몇 블록마다 위병이 배치되어 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레베라와 유진이 걷고 있는 곳은 수도의 중심에 있는 번화가로, 평민은 평생을 노력해도 자그마한 쪽방 하나 구하기 힘든 곳이다.
레베라는 과거 나하마에서 살았다. 그녀의 주인은 무역업으로 부를 일군 상인이었는데, 도덕적으로 그리 올바른 인물은 아니었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나하마는 빈부격차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녀의 주인은 거대한 저택에서 향락을 즐겼지만, 저택의 밖에는 사막의 추위를 견디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낡은 집들이 가득했다.
가끔, 주인은 레베라에게 목줄을 걸고서 도시를 산책하곤 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나하마의 귀족과 거상들은 서로가 키우는 진귀한 애완동물을 과시하는 것이 잦았고, 엘프인 레베라는 주인의 어깨를 으쓱거리게 만드는 훌륭한 애완동물이었다.
빈민들의 수군거림. 질시와 적의와 탐욕이 뒤섞인 악랄한 시선들. 레베라는 그러한 시선에 익숙했다.
짓궂고 가학적인 주인은 산책이 지루하다 싶으면, 목줄을 슬그머니 놓고서 레베라를 혼자 걷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레베라는 최대한 몸을 숙이고,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면 주인은 사라지고, 악랄한 시선을 가진 이들이 레베라에게 가까이 다가오곤 했다.
그들을 피해 도망치고, 숨고, 비명을 지르다 보면 주인이 거느린 전사들이 나타나 레베라를 구해주었다. 레베라에게 있어선 절대로 즐겁지 않은 외출이었지만, 나중에 당한 짓을 더듬어 떠올려 보면 저런 외출이 차라리 나았다.
아픔이 남아있지 않을 눈자위가 욱신거렸다. 머릿속에 끔찍한 기억들이 번져갔다. 레베라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가, 평화롭기 짝이 없는 주변을 살피고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도시는... 나하마의 도시와는 다르다. 제 몸에 꽂히는 시선들에 악랄한 감정은 없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레베라는 라이언하트의 문양을 등에 새긴 망토를 걸치고 있고, 그녀의 바로 옆에는 유진과 메르가 함께 걷고 있다.
“왜 그래?”
유진은 레베라의 걸음이 흐트러진 것을 느꼈다.
“...옛날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좋은 기억은 아니겠지. 괜히 지난 일 떠올리며 궁상떨지 말고, 곧 먹게 될 점심밥이나 생각하고 있어.”
“무엇을 먹는 겁니까?”
“제하르님이 단골이신 식당이에요. 거기 송아지 코스가 엄청 맛있어요!”
메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식당의 추천은 메르가 했고, 예약은 애니실라가 직접 해주었다. 최소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구석자리에라도 앉을 수 있는 유명한 식당이지만, 라이언하트 본가의 안주인은 당일 아침에 연락해 전망 좋은 창가 자리를 선점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나는 솔직히 본가에서 나오는 저녁밥이 더 맛있는 것 같은데.”
줄지어 나온 화려한 요리. 생김새만큼 맛도 훌륭했다만, 라이언하트 본가의 식탁에 올라오는 요리만큼 훌륭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아주 잘 드시네요.”
“밥 먹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왜 밥을 남기냐? 맛없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안 드시면 더 먹지 말고 저 주세요. 아니면 레베라님을 주시던가요.”
“내가 먹고 있는 걸 왜 남한테 줘? 차라리 하나 더 시키고 말지.”
유진은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썰어대며 투덜거렸다. 레베라는 그 맞은편에서 조금씩 고기를 썰다가, 힐긋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다.
안 줄 것처럼 투덜거린 주제에, 유진은 방금 썰어낸 고기를 메르의 앞접시에 덜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메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방긋방긋 웃으며 큼직한 고기를 제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두 분은 꼭 아버지와 딸 같군요.”
“너 미쳤니?”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상반된 반응이 돌아왔다. 메르는 활짝 웃으며 제 접시의 고기 한 점을 레베라의 접시로 옮겨주었다.
“결혼한 적도 없는 사람을 뭔 애아빠 취급을 하고 있어?”
“유진님은 혼인 계획이 있으십니까?”
“없다.”
“시종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 있습니다. 저택에 몇 번 방문하신 백탑주님이 유진님과 특별한 관계라는...”
“너 진짜 미쳤냐? 내가? 백탑주님과? 그, 멜키스 엘하이어랑?”
끼애액! 유진은 멜키스가 내지르는 괴성을 떠올리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나이차이도 너무하지 않냐? 내 나이가 올해 스물이고...”
“푸흣...”
옆에서 메르가 웃음을 흘렸다. 유진은 메르에게 사나운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백탑주님의 나이는 일흔이 다 되가시잖아. 결혼만 일찍했어도 내 나이의 손자가 있을 나이라고.”
“50살이 많은 차이입니까?”
“...그래. 넌 엘프였지...”
“백탑주님이 인간의 나이로 노년에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녀는 대마법사가 되어 인간을 초월한 수명을 얻지 않았습니까? 장생족에 있어 70이란 나이는 굉장히 젊은 편에 속합니다.”
“그럼 나는 젖비린내 나는 갓난아기겠네.”
“백탑주님은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도 순수하고 젊으시죠.”
“나잇값을 못한단 말도 그리 말하니 칭찬처럼 들리는 구나.”
“혼인상대로 나이많은 상대는 싫으십니까.”
그 질문에 메르도 두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유진을 보았다.
“...음... 너무 어린 것보다는... 나이가 좀 있는 편이 낫지 않나...”
“백탑주님 외에 따로 마음을 두신 여인이 계시는 겁니까?”
“너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데, 아버지나 니나한테 밀명이라도 받은 거냐?”
레베라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유진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도 주책이라니까. 나 성인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혼사를 고민신대?”
“애니실라님도 혼사를 고민하고 계셔요. 시안 도련님과 타국의 공주님을 혼인시키고 싶으시대요. 유진님도 공주가 좋으신가요?”
“아니 뭔 공주야... 나는 혼인 생각 없어.”
“그래도 나이 많고 친하고 마음 잘 맞는 상대면 결혼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쵸?”
메르는 메르 메르데인이 메르 라이언하트로 바뀌는 미래를 상상하며 히히 웃었다.
유진은 그런 미래는 상상하지 않았다. 혼인?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뭔 놈의 혼사를 벌써부터 생각하나?
‘그래도... 음...’
전생에 핏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번 생에는 결혼도 하고 자식도 여럿 낫고 싶다는 마음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전생에 해내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야 생각할 일이다. 마족을 죄다 죽이는 것은 힘들겠지만,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도 죽이고...
유진은 새삼 자신이 알고 지내는 여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세냐 메르데인.
시엘 라이언하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멜키스 엘하이어.
그 외에도 몇몇 있기는 하지만, 여러번 만나며 인연이 깊어진 이성은 저 4명 정도.
세냐? 그 막돼먹은 계집애랑 혼인을? 뭔 짓만 하면 개새끼니 씨발놈이니 욕을 쏘아붙이는 욕쟁이랑? 매일매일 얼굴을 보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일어나서, 아니, 그런 것은 헬무드에서도 하던 것 아닌가?
‘하멜.’
‘정말로... 돌아왔구나.’
세계수의 안. 세냐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웃으며, 이 몸을 끌어안아주었을 때가 떠올랐다. 유진은 더 이상 세냐에 대한 생각을 잇지 못했다.
시엘...?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을 그 꼬마랑? 애당초 혼인이 가능하기는 한가? 안 될 것도 없다. 형제라고는 해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양자로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혼인을 위해서라면 길레이드는 얼마든지 유진을 파양시킬 것이다. 오히려 길레이드는 유진에게 큰아버지 소리를 듣는 것보다 장인어른 소리를 듣는 것을 더 바랄지도 모른다...
‘일단 애니실라님은 그걸 바랄 것 같기는 해.’
가문 입장에서 나쁜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유진은 도저히 시엘과 혼담을 나누는 미래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외모도 아니스랑 닮았고, 이유는 몰라도 천사가 된 아니스와 연결되어 있는 신성제국의 성녀.
혼담?
성녀와?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빛의 신교는 성직자에게 비혼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직자 중에서도 수녀나 수사는 독신이어야 하고, 그건 성녀도 마찬가지다. 유진이야 크리스티나와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만에 하나 크리스티나가 정신이 반쯤 나가서, 유진과 혼사를 맺고자 한다면 우선 빛의 신교에서 파계부터 해야 한다.
그 뒤에는? 일이 아주 귀찮고 난감해 질 것이다. 흑사자 성에서 보았던 이단심문관들은 독선적이고 제 입장만 고수하는 이기주의자들이었다. 아마 놈들은 파계한 크리스티나를 이단이니 타락이니 하면서 사냥하려 들 것이 틀림없었다.
‘...멜키스님은...’
끼애액!
끼아악!
유진은 그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애당초 이런 생각을 하며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를 상상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의안의 제작을 맡긴 공방은 세이리스 서쪽의 알카드 거리에 있습니다.”
황궁이 가깝고, 부촌이 형성 된 중앙지구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다.
서쪽 알카드 거리는 국외로 통하는 워프게이트와 근접한 지역이다. 그렇다보니 관광객도 많고, 몬스터 토벌이나 탐험 등의 의뢰를 업으로 삼는 모험가와 용병 길드도 자리해 있다.
그런 직종이 녹아들어 있기에, 알카드 거리에는 중앙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가게들이 많다. 기사나 귀족이 아닌, 용병과 모험가들이 애용하는 가게. 모양새보다는 목적에 충실한 무기를 생산하는 공방. 수상쩍지만 성능은 확실한 포션을 판매하는 연금술사 등.
“여기는 처음 와 봐요.”
메르는 가슴 콩닥거리는 흥분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워프게이트로 도착한 알카드 거리는, 방금 지나 온 중앙지구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풍겼다. 실제로 이곳은 수도 세이리스에서 가장 거친 거리다.
하지만 치안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 거리에도 주기적으로 순찰하는 위병들은 존재한다. 다만, 위병들은 길드 소속의 용병이나 모험가들의 다툼에는 어지간해서는 끼어들지 않았다. 하나하나 중재하며 해결하고 연행하는 것보다는, 자기들끼리 주먹다툼이라도 벌이라 두는 것이 피차 편하단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거슬리는 눈깔들이 많네.”
주변을 굳이 둘러보진 않았지만, 유진은 사방에서 스멀스멀 적셔오는 시선들을 느꼈다. 애꾸눈의 엘프. 라이언하트의 문양. 왼쪽 가슴에 사자를 새긴 제복. 회색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 ...앙증맞은 외출복을 입은 보라색 머리의 소녀.
“너도 귀찮겠어. 어딜 가든 엘프랍시고 쳐다보고 그러잖아. 막 가까이 와서 시비거는 것은 아니지?”
“이 거리에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만,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저번엔 누구랑 나갔더라?”
“백사자 기사단의 네인 경이 호위를 맡아주셨습니다.”
“흠, 그 아저씨는 덩치도 크고 인상도 사나우니까 말이야.”
“이 거리의 행인들이 거친 것은 사실이지만,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우습게보고 가까이 오는 사람은 없을...”
레베라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더벅머리에 주근깨를 단 사내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님이십니까?”
남자는 혼자였다. 유진이 대꾸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고 있자,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스카스 신문사에서 기사를 쓰고 있는 테피르라고 합니다.”
“그게 뭐야?”
“시답잖고 자극적이기만 한 가십을 과장으로 잔뜩 포장해서 발행하는 똥쓰레기같은 신문 있어요.”
“어어...”
“신문사라기 보다는 소설편집부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는 곳이죠. 수도의 새벽을 거니는 정체불명의 살인귀, 그 정체는 모 후작가의 사생아?! 그의 비극적인 과거를 다룬 단독인터뷰... 이딴 기사를 써갈기는 곳이에요.”
“수도의 새벽에 살인귀가 떠돌고 있었나?”
“아뇨, 떠돌지 않아요. 그래서 말했잖아요? 신문이 아니라 소설이라고요.”
메르의 평가에 테피르의 얼굴이 구겨졌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인터뷰 안 합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최근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치욕스럽고 곤란한 문제가 생긴 것을 들었는데...”
“배짱 참 두둑하네. 내 이름이 라이언하트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딴 말을 해대는 거야?”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개소리하지 말고 꺼져. 평생 손 말고 주둥이에 펜 물고 기사 쓰고 싶으면 계속 깝죽거려 보던가.”
설마 그 명문가 도련님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테피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렸다.
“꺼지라고.”
두 번 말했다. 테피르는 쭈뼛거리기만 할 뿐 물러서지 않았다. 유진은 쯧 혀를 차면서 테피르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파앙! 쏘아진 공기가 테피르의 이마 중앙에서 터졌다. 테피르는 끄악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말을 해도 안 들어처먹어요. 이건 기사로 써도 돼. 본가의 유진 라이언하트는 성격이 개차반에 미친개처럼 사나우니, 그 앞에서 괜히 깝죽거렸다가는 호되게 처맞을 수가 있다. 하고 말이야. 알았지?”
정말로 저런 기사를 내버렸다간, 최근 언론사들을 압박하고 있는 애니실라가 눈을 뒤집고서 스카스 신문사를 갈기갈기 찢어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벌써부터 혼담 들어오지 않도록 작업하시는 거예요?”
“조용히 해.”
“맞죠? 그렇죠? 다른 귀족영애나 공주들한테 혼담 들어오는 일 없도록, 인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광고하시는 거죠?”
“내 인성은 문제없어. 예의 없는 새끼들한테 예의 없게 구는 게 당연한 거지. 원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거야.”
[세냐님이 유진님한테 고운 말을 하면 유진님도 세냐님한테 고운 말을 하실 건가요?]
‘그 계집애는... 나한테 고운 말을 한 적이 없...’
나는 널 알아.
하멜.
환생해 몸이 바뀌고, 얼굴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어도... 넌 내가 아는 하멜 그대로야.
[왜 말을 하다 마세요?]
“날이 좀 덥네.”
유진은 주저앉은 테피르를 지나치며 투덜거렸다.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서늘한 봄바람이 유진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도
레베라가 앞장서서 골목길을 안내했다. 이 거리의 가게들은 중앙지구와는 면적부터가 다르다. 중앙지구의 가게들은 건물 하나를 일층부터 통째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거리의 가게들은 건물 하나에 2,3개는 기본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문도 두지 않고, 1층 전면의 벽은 통째로 허물어서 판매하는 물건을 좌르륵 펼쳐놓은 가게들. 그런 모습이 메르의 흥미를 이끌었다.
이 노점거리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대부분이 용병이나 모험가들이다. 그렇다 보니 어디선가 노획한 수상쩍은 무기와 감정되지 않는 아티펙트들도 여럿 있었다.
“소설 같은 곳에 자주 나오지 않나요? 저런 곳에서 헐값에 파는 낡은 무기들에 대단한 힘이 숨겨져 있다는 내용.”
“내 생각에는 말이야, 그건 이런 곳에서 장사하는 노점상들이 작가한테 뒷돈 찔러 주면서 광고한 거야.”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서 노점에 진열 된 장비들을 훑어보았다. 용병으로 이름을 떨쳤던 300년 전.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노점에서 판매되는 장비들의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성비 좋은 무기.
“물건 파는 놈이 등신도 아니고, 판매품 가치도 모르고 헐값에 판...”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유진은 볼레로 거리의 경매장에서 월광검의 파편을 헐값에 구매했던 것을 떠올렸다.
“왜 말을 하다 마세요?”
“...쓰레기더미 속에 다이아몬드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법.”
“다이아몬드?”
“제 아무리 비싼 보석이라도 똥 오물 묻어 악취 풍기면 그게 비싼지 똥 쓰레기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니?”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더러운 얘기 하지 말아주세요.”
“똥.”
즉시 돌아오는 대답. 메르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저것이 정녕 300년 전 영웅의 입에서 나올 말이란 말인가? 메르의 생각과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앞서 걷고 있던 레베라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귀족답지 않으셔.’
본가의 안주인인 애니실라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족부인이다. 별채의 제하드도, 애니실라만큼 성골느낌은 아니지만 귀족다운 품위가 몸에 배어 있다.
하지만 유진은, 그 누구보다 라이언하트의 이름에 걸맞는다는 평가를 받지만, 귀족다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레베라는 엘프다. 하지만 엘프다운 의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학대로 점칠 된 노예생활은 레베라에게서 엘프다운 자의식을 말살해 버렸다. 그건 레베라 뿐만이 아니었다. 별채에서 함께 견습시종을 수행하는 나리사나, 라이언하트의 숲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엘프들이 엘프다운 자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런 레베라에게 있어, 유진은 섬기고 싶은 주인이었다. 귀족답지 않은 것이 무슨 상관인가? 레베라는 유진에게서 귀족다운 위엄이 아닌, 절대적 강자의 위엄을 느꼈었다. 사마르 대수림. 노예시장을 빠져나와 마주쳤던, 뻔하고 흔한 귀족과 야만인.
그때의 기억은 몇 번을 떠올려도 레베라를 오싹거리게 만들었다.
엘프가 그 밀림에서 절대로 마주쳐선 안 될 야만인. 레베라가 보았던 그 어떤 야만인보다 흉폭하고, 강해보이던 야만인은 유진에게 갓난아기 취급을 받으며 하늘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엘프를 추잡한 눈으로 보며, 당연하단 듯이 물건 취급하고, 좋을 대로 가지고 놀다가 망가트리겠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던. 레베라가 잘 알고 있는 귀족다운 귀족이, 유진의 앞에서는 추하기 짝이 없이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이쪽입니다.”
레베라는 가슴 안쪽에서 스멀거리는 열기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가게는 골목길의 안쪽에 있었다. 너무 깊은 곳은 아니지만, 대로변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가게. 상관없이 구경이나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들어오는 손님이 없도록, 마땅한 손님이 대로를 지나는 행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게끔 정해진 위치였다.
낡은 간판 아래의 쪽문을 여니, 여러 가지가 섞인 냄새가 흘러나왔다. 유진은 뒤섞인 냄새에서 진통제와 기름과 염료의 냄새를 느꼈다.
“나리사의 의족도 여기서 만들었나 보지?”
“네. 본가의 기사님에게 소개받은 가게입니다. 이곳의 주인은 용병과 모험가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다더군요.”
그래 보였다. 유진은 선반에 장식품처럼 진열 된 의수와 의족 등을 훑어보았다. 손가락이 활짝 펼쳐진 의수. 그를 빤히 보고 있으니 마음 속에서 어떠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만져 봐도 되나? 저 펼쳐진 손가락을 전부 접고, 가운데 손가락만 하나 세워두고 싶은...
“애도 아니고...”
“크흠...”
유진의 심상을 읽은 메르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때 찾으러 왔군.”
안쪽 공방의 문이 열리고, 덥수룩한 수염에 두꺼운 안경을 쓴 노인이 걸어나왔다. 그는 유진이 입은 라이언하트의 제복을 보고서 안경 너머로 눈을 빛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진은 부담갖지 말라는 뜻으로 양손을 들어보였다. 꾸벅 고개를 숙였던 노인은 유진의 곁에 선 메르까지 힐긋 보고서 입을 열었다.
“볼거리가 적은 가게이긴 하지만, 편히 봐주십시오.”
“만져봐도 됩니까?”
“선반의 물건들은 견본으로 둔 것이니, 예. 만지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서 레베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딱 들어맞겠지만, 안으로 들어와서 확인해 보게. 대칭이나 색감도 다시 살펴야 하니...”
“네.”
레베라와 노인이 공방으로 들어간 뒤.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의수 쪽에 손을 뻗었다.
“하지 마세요.”
“안 해. 그냥 만져만 보는 거야.”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의수를 만지작거렸다. 팔다리 잃은 용병과 모험가가 쓰는 것들이라 그런지, 해괴한 기믹이 숨겨진 의수나 의족이 몇 개 있었다. 손목을 꺾으면 화살이 쏘아지거나, 손가락에서 칼날이 튀어나오거나, 무릎에 대포를 달거나...
선반에는 의안도 몇 개 견본으로 놓여 있었다. 시신경을 연결하는 최고급의 의안은 아니지만, 진짜 눈알을 뽑아 놓은 것처럼 리얼한 의안들.
그것들을 살피고 있다가.
유진은 즉시 몸을 날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모른다. 공방의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기척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던, 공방에서의 기척 두 개가 사라졌다.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몇 걸음 거리에 있던 공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노인도, 레베라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둘 뿐만이 아니다. 유진이 들어 온 공방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게... 대체 뭐죠?”
메르가 더듬거리며 묻는다.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방안을 살폈다. 벽지에 스며든 기름때와 염료. 아직까지 떠돌고 있는 공방다운 냄새. 본래 이곳은 지금처럼 아무 것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진은 흑암의 망토에서 아카샤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공방을 살펴보았다. 방음과 방진과 습도조절 따위의 마법들이 보인다. 허름한 건물인데다 주변에 다른 가게들도 있으니, 공방에는 이런 마법들이 준비된 것이 당연했다.
“...침범된 마법은 없어요.”
메르는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벽과 바닥에 새겨진 마법. 침범되지도, 훼손되지도 않았다. 벽이 무너진 것도 아니다. 새로운 마법이 더해진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블링크로 들어와서 데리고 간 것도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유진이나 메르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공간도약은 어쩔 수 없는 공간의 어그러짐을 발생시킨다.
공방에 창문은 없다. 문은 유진이 들어 온 문뿐이다. 이곳은 물리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완벽한 밀실이었다. 그런 밀실에서, 한 명의 엘프와 한 명의 인간과 공방의 물건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아니.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진은 다시 한 번 공방을 살폈다. 벽에 걸린 선반과 장식들. 다양한 공구가 벽에 걸려있다... 벽에 걸린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공방에서 사라진 것은, 바닥을 딛고 있던 것들뿐이다.
유진은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먼지 하나 없는 바닥. 남은 것은 스며든 기름때와 염료 뿐.
“...바닥에 무언가가... 나타나서...?”
“겹쳐진 거야.”
유진은 몸을 숙여 바닥을 어루만졌다.
“그림자처럼 말이지.”
천장에 달린 전등이 유진의 몸에서 그림자를 잇고 있다. 유진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제 몸에서 번지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이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는데.”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 공방에서 더 얻을 정보는 없다. 사라진 레베라와 노인의 행방을 탐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어떤 대마법사도 이 실종에 쓰인 마법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곳에서 쓰인 것은 마법이되 마법이 아니다.
‘300년은 길군.’
유진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진의 심상을 읽은 메르가 굳은 표정으로 유진에게 다가와, 들춘 망토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외출이 될 줄은 몰랐는데.”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공방의 문을 열었다.
의수와 의족, 의안 따위로 진열되어 있는 가게. 어느새 그곳에는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 있었다. 큼직한 후드를 뒤집어 쓴 3명.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그들을 응시했다.
“따라와 주시오.”
후드의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ㅡ화악! 창문이 열린 것도 아닌데 바람이 휘몰아쳤다. 손님들이 쓰고 있던 후드가 바람에 쓸려 넘어갔다.
“용건을 말하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하지?”
3명의 다크엘프가 유진을 노려보았다. 제일 먼저 입을 열었던 다크엘프 남자가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우리는 광란의 독립군이오.”
“알아.”
왼쪽 가슴 쇄골에 새긴, 뒤집힌 산양의 두개골 문신. 300년 전부터 광란의 군대가 몸에 새겼던 문신.
“이곳에서 거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소.”
“거친 방법을 서서 끌고 갈 자신은 있고?”
“건방진 인간 새끼.”
입을 다물고 있던 다른 다크엘프가 내뱉었다. 유진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종족의 정체성도 져버린 타락한 깜둥이 새끼가 어디서 아가리를 털지?”
쏘아붙인 험악한 말에 다크엘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둘. 먼저 말했던 남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대가 거절하거나 저항한다면, 인질의 신변은 보장할 수 없소.”
“나와 대화를 하고 싶었으면 먼저 악수를 청했어야지.”
“그건 죄송하게 됐소. 그래서 어쩔 셈이오? 우리를 따라 오시겠소? 아니면 끌려가시겠소?”
“위치를 알려주면 나 혼자 찾아가면 안 돼? 너희는 다 죽여 버리고 말이야.”
“성격이 참 거치시군.”
“즐겁게 끝나던 외출에 너희가 개 같은 짓을 벌였으니 말이야.”
마냥 감정대로 떠드는 말은 아니었다. 유진은 대화를 이어가며 계속해서 이곳을 살폈다. 다크엘프는 3명. 다른 다크엘프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바닥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곳을 살피고 있을 텐데. 직접 간섭해 올 생각은 없는 건가? 부하를 처죽여도? 쓰잘데 없이 종족애가 뛰어나 보이는데. 부하를 도륙내면 나타나지 않을까?
누가 먼저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어간다. 혈기왕성해 보이는 젊은 다크엘프 둘이 도약을 준비한다. 남자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유진을 노려본다.
“그만두지.”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희를 죽여 봤자 납치 된 시종이 돌아올 것도 아니고.”
“죽일 자신은 있냐?”
젊은 다크엘프가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없을까?”
유진은 웃지 않고 다크엘프를 응시했다. 몸서리 칠 만큼 강렬한 살기가 다크엘프에게 집중되었다. 그건, 고작해야 수십 년 살아왔을 뿐인 인간이 내뿜을 수 있을 만한 살기가 아니었다. 다크엘프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떨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내해.”
유진은 어깨 뒤로 젖혔던 망토를 앞으로 넘겨, 양팔을 감쌌다. 언제든지 필요한 무기를 뽑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흑암의 망토는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방어구다.
“...걸어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직접 걷지. 다른 방법은 쓰지 않는다. 너희가 섬기는 공주님이 개수작을 벌일 지도 모르니.”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다크엘프들이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가게를 나왔다. 다크엘프들은 앞장 서서 깊숙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유진은 서두르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의아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아이리스를 필두로 한 다크엘프들이 접촉해 올 것은 라이언하트도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 카르멘과 흑사자 기사단 3번대가 본가에 와있는 것이다.
접촉의 대비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본가에는 필요한 여러 정보들이 모인다. 그 중에는 다크엘프의 정보도 있다. 그들이 접촉해 올 것을 대비해, 동향을 살피고 있단 말이다.
키옐에 다크엘프가 입국한 적은 없다. 특히 이곳은 황도인 수도 세이리스. 입국자의 신원파악이 철저한 곳이다.
‘밀입국했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단 말이다.
아이리스는 라이언하트에게 정당한 방법으로 엘프를 양도받을 생각이 없다.
‘300년 전에는 이만큼 무식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이리스가 헬무드에서 궁지에 몰렸다는 것은 들었다. 그녀는 새로운 마왕이 되어 광란의 마왕을 계승하길 바란다. 하지만 헬무드에는 아이리스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 아이리스보다 훨씬 ‘다음’ 마왕에 근접한 고위마족들이 있다.
헬무드의 삼공.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가 본인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아이리스보다 뛰어난 공작이 둘이나 있단 말이다.
‘아이리스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은 지지세력.’
아이리스는 철저하게 다크엘프만을 세력으로 고집하고 있다. 그나마 최근에는 고집이 꺾였다지만, 그마저도 제 세력을 키우는 것이 아닌 수인족 용병을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아이리스는 다크엘프를 늘리는 것에 혈안이 된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턱대고 빼앗으려고 해?’
난폭하기 짝이 없는 폭거. 유진은 들끓는 살의를 느끼며 앞서 걷는 다크엘프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쪽입니다.”
허름한 건물. 지하로 이어지는 철문. 다크엘프는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불샷 용병단.
철문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용병단 사무실을 점거하고 있는 건가.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열어.”
문이 열렸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조명도 없어, 바로 발밑을 보기 힘들다. 마법으로 불을 켜면? 아니, 소용없다.
아이리스의 어둠은 불빛으로도 밝혀지지 않는다.
암전(暗轉)의 마안. 그것이 만들어내는 어둠은, 어둠이되 어둠이 아니다. 그 어떤 빛으로도 밝혀지지 않는다.
계단의 아래.
넓기만 할 뿐, 허름하기 짝이 없는 사무실의 한복판.
붉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뻗고 있는 다크엘프가 보였다.
“꼬마.”
광란의 독립군의 수장.
나찰공주.
아이리스는 테이블의 양주를 발끝으로 툭 치며 웃었다.
“술은 마실 줄 아냐?”
300년 전과 비교해서 변한 것은, 옷차림과 머리모양 정도였다.
치렁치렁 길었던 새하얀 백발은 어깨에 맞춰 잘랐다. 가죽갑옷 대신에 붉은 정장을 입고, 셔츠의 가슴팍은 편하게 풀어 내렸다. 목에 건 금목걸이와 손가락에 낀 반지. 손목의 화려한 시계.
“...공주라기보다는 마피아 보스 같군.”
유진은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고, 아이리스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수도
솔직히 모르고 왔다면 곧장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아이리스의 변신은 파격적이었다.
본래 아이리스는 레인저 출신의 엘프로, 위장용 판초와 기동성 좋은 가죽갑옷을 입었다. 야전에서 다크엘프를 지휘할 때도 아이리스의 무장은 바뀌지 않았다.
아이리스는 엘프 레인저를 어떻게 해야 사냥할 수 있는지를 잘 알았고, 휘하 다크엘프들을 사냥꾼을 잡는 사냥꾼으로 조련했다.
전장이 야전에서 광란의 마왕성으로 옮겨졌을 때. 아이리스는 판초와 가죽갑옷 대신에 거무튀튀한 사슬갑옷을 입고, 활과 석궁 대신에 구부러진 곡도를 들고서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고 종족도 다른 광란의 자식들. 그들은 헬무드에서 맞닥트린 적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강력했다.
‘죽여야 했는데.’
죽이지 못했다. 광란의 마왕은 마왕답지 않게, 제 목숨을 버리고 남은 자식들을 탈출시키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다크엘프 아이리스와 수인 오보론이 탈출했다.
그때 죽이지 못했던 아이리스가,
300년의 시간을 넘어, 유진의 앞에 앉아 있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말이다.
“꼬마.”
터억. 아이리스는 테이블에 올린 발을 바꾸며 고개를 삐딱하니 기울였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무릎을 꿇지 않아?”
“불샷 용병단의 대장은 아닌 것 같고. 이 거리에 새로 자리 잡은 마피아 두목이신가?”
“두려움을 내색하기 싫어 헛소리를 하는 건가?”
아이리스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살짝 들었다. 아이리스가 앉은 소파의 뒤. 열 명의 다크엘프들이 서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아이리스처럼 붉은 정장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300년 동안 조직의 이미지에 대격변이 일어난 모양이군.’
뒤편에 선 다크엘프들 중 유진이 기억하는 얼굴이 몇 있었다. 옛날부터 아이리스의 심복이었던 다크엘프들. 산과 숲과 어둠에 숨어 기습해 오던 다크엘프 레인저.
‘하긴. 이런 도시에서 판초를 두르고 다니면 미친놈 취급이나 받지.’
붉은 정장을 똑같이 빼입은 다크엘프들도 미친 취급을 받을 것 같기는 하다만.
“어디에 있지?”
“네 저택의 숲에 100명이 넘는 엘프가 있다고 들었는데. 엘프 1명의 목숨도 아까운가?”
“쓸데없는 대화는 말지.”
유진은 성큼성큼 걸어 아이리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게 거리를 좁히는데도 아이리스 등 뒤의 다크엘프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뒤틀린 미소를 유지하고서 유진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경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찰공주 아이리스. 그녀는 300년 전의 전장을 체험하고, 광란의 마왕에게 직접 힘을 계승받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만약 아이리스가 제 자신을 광란의 재림이라 고집하지 않고, 마왕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했다면. 아니, 제 세력의 순수성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헬무드의 공작은 3명이 아닌 4명이었을 것이다.
‘과연.’
유진은 아이리스에게서 절대적인 자신감과 여유를 느꼈다. 오만함. 허나 방심은 없다. 아이리스의 눈은 사냥감을 보는 포식자의 것처럼 예리했으며, 유진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은 무리군.’
유진은 깔끔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정면에서 아이리스와 싸운다면 무조건 진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도망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지만, 그게 한계다. 300년은 길었고, 아이리스가 변한 것은 겉모습 뿐만이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 아닌가?”
유진은 아이리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꼬마.”
아이리스의 미소가 진해졌다.
“너, 방금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지?”
시선이 훑은 것은 아주 잠깐.
허나 아이리스는 유진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녀는 붉은 눈동자를 초승달처럼 휘며 웃었다.
“납득이 빠른 것은 마음에 들어. 너에 대한 소문은 여럿 들어보았는데... 흠. 소문은 으레 과장되기 마련이나, 네 경우에는 오히려 소문이 겸손했군.”
아이리스는 뒤로 젖히고 있던 몸을 앞으로 당겼다. 투웅! 구둣발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자, 놓여 있던 양주가 붕 떠올랐다. 아이리스는 그걸 허공에서 낚아채며 큭큭 웃었다.
“엘프는 무사해.”
천장의 조명이 깜빡거린다.
아니, 사실 조명은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 순간 방안의 빛이 줄어들었다. 어둠이 늘어난 것이다. 어둠과 섞이지 않는 어둠. 보다 어둡고 끈적한, 어둠의 형상을 한 덩어리.
아이리스가 가진 암전의 마안으로 불러들인 암흑물질.
“보다시피, 타락시키지도 않았어.”
아이리스는 꾸물거리는 암흑에 손을 쑤셔 넣었다. 얼핏 보기엔 흑사자성에서 보았던 어둠의 정령과 닮았다. 하지만 저건 정령이 아니다. 마나도 아니고 마기도 아니다.
“나는 아무나 다크엘프로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 일단 의견을 묻고, 거절한다면 설득하고...”
의식을 잃은 레베라가 아이리스의 손에 끌려나왔다. 아이리스는 축 늘어진 레베라를 유진에게 물건처럼 던져 버렸다.
ㅡ화아악! 불어 닥친 바람이 레베라의 몸을 받아냈다. 다친 곳은 없다. 유진은 그 사실에 안도하며, 레베라를 곁에 내려놓았다.
그러는 사이 아이리스는 양주의 뚜껑을 열었다. 그녀는 주변을 떠도는 암흑에서 얼음바구니와 잔을 꺼낸 뒤, 눈썹을 찡그렸다.
“아, 이거도 있었지.”
대수롭지 않단 얼굴로 뽑아낸 것은 레베라와 함께 사라졌던 노인이었다. 노인의 목이 아이리스의 손에 붙들렸고, 유진은 망토에서 단검을 꺼내 테이블에 내리 찍었다.
“진정해, 꼬마.”
아이리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화악...! 아이리스의 오른쪽 눈동자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테이블에 박혀있던 단검이 암흑에 삼켜졌다. 암흑이 사라진 뒤, 테이블에 단검은 더 이상 박혀있지 않았다.
“불쌍하게 휘말린 늙은이를 죽이겠다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거든.”
“아무 생각 없이 죽이려 하지 않았나?”
“그야,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지. 인간인 네가 인간의 목숨을 지키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나는 인간이 아니니 네 입장을 헤아리지 못한 거야. 이해했나?”
아이리스는 킬킬 웃으며 잔에 큼직한 얼음을 하나씩 넣었다.
“그리고. 엘프인 내가 엘프를 지키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엘프가 아니라 다크엘프잖아?”
“어쨌든 엘프잖아, 그렇지? 선입견은 내려놓자고.”
“넌 대뜸 내 시종을 납치했어.”
“대화를 나누고 싶었거든.”
각자의 잔에 양주가 채워졌다. 아이리스는 손끝으로 잔을 밀며 웃었다.
“설마 네가 엮여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유진 라이언하트.”
“...라이언하트 본가에 들어오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나 보지?”
유진은 태연히 웃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라이언하트가 보호 중인 엘프가 의안을 예약하고, 찾으러 오기로 했다. 아이리스가 언제부터 이 거리에 터를 잡았는지는 모를 일이나, 그 정도 소식은 어렵잖게 구할 수 있을 터.
“맞아.”
아이리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부담스럽기는 했지. 300년 전의 영광이 아직까지 건재하다 믿는 머저리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말이야.”
양주잔이 위로 올라갔다.
“너희 가문의 영지를 방문하고, 저택의 응접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하하호호 웃으며, 부디 보호 중인 엘프들을 내게 양도해줄 수 있겠습니까? 물어보는 것은 내게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라이언하트, 너희는 어떻지?”
잔을 가득 채운 양주가 아이리스의 입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나는 다크엘프이며, 광란의 독립군을 이끄는 수장이자, 나찰공주라 불리고 있거든. 그런 내가 찾아가서 양도해 달라 부탁한다면, 분수를 깨닫지 못하고 권위에 취한 너희들이... 과연 내 부탁을 들어줄까? 난 아니라고 봐. 너희는 등신 같은 자존심을 내세우며, 다크엘프와 타협하지 않는다... 광란의 재림에 도움을 줄 생각이 없다, 하면서... 나를 쫓아내겠지?”
부정하지 않았다. 유진이 나설 것도 없다. 라이언하트의 그 누구도 아이리스와 거래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이리스가 얼마나 저자세로 나오건, 그녀가 다크엘프고 광란의 재림을 꿈꾸며, 새로이 마왕이 되겠다는 야욕을 품은 이상.
라이언하트는 절대로 아이리스와 협상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너희 등신들을 배려해 주기로 한 거다.”
아이리스는 술 방울이 맺힌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꼬마, 네가 엘프와 함께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 냄새나는 공방의 그림자에 친히 길을 열어두었지.”
“미안한데, 라이언하트의 가주는 따로 있어.”
“라이언하트의 미래라 불리는 네가 지금 내 앞에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이해가 잘 안 되는 건가?”
아이리스는 큭큭 웃으며 암흑에 손을 집어넣었다.
철컥.
그녀가 꺼낸 것은 묵직한 쇳덩어리였는데, 유진에게는 그 모양새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총. 화약의 힘으로 금속의 탄환을 발사하는 휴대용 대포.
다루기는 편리하지만, 마나의 사용에 능한 무인들에게는 그리 애용 받지 못하는 무기다. 이유는 간단했다. 화약을 터트려 탄환을 쏴갈기는 것보다, 검강을 일으켜 무기를 휘두르거나 특수제작한 활시위를 당겨 화살에 마나를 담아 쏘는 것이 총보다 빠르고 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총이라는 물건은 짐승을 잡는 것에는 제법 쓸 만하다지만, 몬스터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난 널 당장 죽일 수 있어.”
아이리스는 묵직한 리볼버를 들어 유진에게 겨누었다.
“이렇게 말하면 알기 쉽지? 꼬마. 죽고 싶지 않다면, 네 저택의 숲에 보호하고 있는 엘프들을 내게 넘겨라.”
“...그들은 다크엘프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텐데?”
“바랄 수밖에 없게끔 설득해 주지. 나는 그런 설득에 아주 자신이 있거든.”
거대한 리볼버가 아이리스의 손 안에서 빙글 돌았다.
“넌 어떻지? 네가 강하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날 죽일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하지. 절대로 불가능해.”
“...라이언하트를 상대로 협박이라.”
“아하하! 꼬마답게 순진하긴. 아까 말했을 텐데? 내게 있어서 라이언하트는 300년 전의 영광이 건재하단 착각에 빠진 등신들이야. 너희의 시조 베르무트는 악몽처럼 강했지. 하지만 베르무트 이후, 그놈만큼 강했던 놈이 라이언하트에 태어났던가?”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없어. 태어날 리가 없어. 그건, 불가능해. 놈은 진짜 괴물이었거든. 라이언하트를 상대로 협박... 하하... 아하하! 뭐 어떻다는 거야? 오히려 너희는 나한테 감사해야 해. 내가 너희의 영지에서, 그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너희를 존중하지 않고, 대가리를 바닥에 처박아버리지 않았으니까!”
아이리스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암흑이 요동치고, 거대한 존재감이 유진을 압박했다. 유진은 전신 털이 곤두서고 피부가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술을 입이 부었다. 불을 삼킨 것처럼 뜨겁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술이 몸속을 뜨겁게 데웠다.
‘그때 죽였어야 했어.’
몇 번을 돌이키는 후회. 유진은 혀를 차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300년 전에 죽였다면 저 지랄 맞은 년과 이렇게 다시 맞닥트릴 일도 없었을 텐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건 네가 여기 들어 온 처음부터 주고 있어, 꼬마. 난 널 죽이지 않고, 앞에 앉게 하고, 술을 줬지. 그 모든 것이 네게 준 시간이야.”
유진은 대답 대신에 내적갈등을 겪었다. 그냥 들이박아? 승산은? 저딴 개소리에 어울리는 것보다는, 일단 해보고 안되겠다 싶으면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낫지 않나?
레베라와 공방의 노인이 없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다. 바로 옆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둘이 유진의 행동을 구속했다. 그래서 답답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직인가?
유진은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레베라와 노인을 괜히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시크나드라는 이름. 기억하나?”
일단 시간을 끌어보기로 했다.
“놈도 라이언하트의 숲에 있거든. 널 언젠가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갈고 있던데...”
“기억하지. 약해빠졌으면서 복수심만 넘치는 놈. 꼬마. 나는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도 시크나드에게 네 이야기를 꽤 들었지. 엘프의 배신자. 엘프를 가장 많이 죽인 엘프. 전장에서 사로잡은 엘프는 무릎을 꿇려놓고, 배를 갈라서 창자를 길게 뽑아서 죽게 내버려뒀다던데?”
“옛날이야기지. 네 애비애비도 태어나지 않았을, 너란 존재의 기원이 베르무트의 불알에 처박혀 있던 시절의 이야기.”
아이리스의 입술이 뒤틀렸다.
“물론 그 시절은 후회하고 있어. 너무 과했지. 그러니 후회만큼 엘프를 위하고 싶은 거야.”
“다크엘프의 세력을 늘리고 싶은 거겠지.”
“언제 마병으로 뒈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것보단 다크엘프가 되어 자유를 얻는 것이 낫지? 난 언젠가 마왕이 될 거고, 내가 마왕이 된다면 모든 다크엘프는 존귀한 존재가 될 거야.”
끼릭.
리볼버의 실린더가 돌아갔다.
“나와 옛날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은 거냐? 나와 친구가 된다면 바라는 만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지.”
“베르무트랑 하멜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대뜸 뱉은 말.
낄낄거리며 웃던 아이리스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질문을 해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쭙잖은 광기가 이성과 뒤섞였다.
“...뭐라고?”
“베르무트 대 하멜.”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군. 당연히 베르무트가 이기겠지.”
“하멜이 이기지 않을까?”
“하멜... 하하! 후대에 이르러선 우둔하단 소리를 들어먹는 병신. 그 새끼가 베르무트를 이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멜한테 말이 너무 심하네... 이길 수도 있지...”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양주병을 들어올렸다.
“그럼 다른 것을 묻지. 하멜과 베르무트, 누가 더 잘생겼지?”
“...넌 미친 건가?”
“궁금해서 그래, 궁금해서.”
“대답할 가치가 없어.”
“대답하기 힘들단 뜻이겠지? 그렇다는 건 하멜과 베르무트의 외모가 박빙이었다는...”
“하멜은 누더기 헝겊처럼 낯짝을 기워댄 새끼였다.”
말이 너무 심하다.
유진은 발끈하고 치미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아이리스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그래도 하멜이 모론보다는 잘생겼지?”
“...지금 무슨 수작이지?”
“친구가 되어볼까 노력중이야. 그러니 친구야, 다음에 만나서 놀고 오늘은 이만 집에 가면 안 될까.”
ㅡ쿠웅!
테이블에 올라가있던 발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테이블이 박살나고, 양주병과 술잔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유진은 쏟아지는 술을 피해 슬쩍 고개를 뒤로 빼냈다.
“대단해.”
아이리스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태어난 지 20년 밖에 안 되는 인간새끼가, 내 앞에서 이렇게 뻔뻔할 수 있다니. 베르무트의 핏줄에서 너 같은 새끼가 나올 수도 있는 군.”
“300년은 기니까.”
“그렇지. 인간에겐 아주 긴 시간이야. 너와 베르무트 사이에는 수십 세대는 존재하겠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나는 널 베르무트가 아닌 하멜의 후손이라 생각했을 거다.”
아이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리볼버의 실린더를 열었다.
“네가 선택하기 힘들어하고 있으니,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재미있는 내기를 하자고.”
실린더에 들어있던 탄환들이 떨어진다. 아이리스는 탄환 하나를 실린더에 넣고서, 유진이 보는 앞에서 실린더를 회전시켰다.
“간단한 룰렛 게임이야. 너랑 나, 번갈아 총구를 머리에 대고 한 발씩 쏘는 거지. 네 머리에 총알이 박히면, 나는 라이언하트를 배려하지 않을 거야. 네 시체를 들고 당장 본가에 가서, 엘프를 모조리 데리고 나올 거다.”
“네 머리에 총알이 박히면?”
“그럼 돌아가게 해주지. 나도 더 이 문제로 라이언하트와 교섭하지 않을 거고.”
아이리스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그녀는 총구를 제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두렵다면 포기해도 좋아. 단, 처음에 말한 대로 엘프를 넘기도록 하고. 어때? 굳이 내기를 해서 네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쏴.”
유진은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너 한 번, 나 한 번. 이렇게 하는 거잖아?”
철컥!
유진의 말이 끝난 순간. 아이리스는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는 방긋 웃으며 유진에게 리볼버를 넘겼다.
“착각하지 마, 꼬마야.”
“뭘?”
“납으로 만든 탄환이 네 머리를 꿰뚫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런 착각을 하지 말란 거야. 그 탄환은 내 마안으로 만들어낸 거다. 네 마나가 아무리 강해도, 머리에 총알이 처박히는 걸 막을 수는 없을 거란 말이야.”
“그럼 너는?”
“난 총에 맞지 않아.”
“아하... 애당초 공정한 내기가 아니란 말이지?”
유진은 피식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공이치기의 소리가 허무히 울렸다. 유진은 들고 있던 리볼버를 다시 아이리스에게 돌려주었다.
“쏴.”
“미쳤구나?”
“난 죽고 넌 안 죽어도, 일단 네 머리에서 총알이 나가면 되는 것 아냐?”
“그래서 너 혼자 목숨을 걸겠다고?”
“쏘기나 해.”
아이리스의 말이 맞다. 이건 간단하기 짝이 없는 룰렛이다. 탄환을 넣고, 실린더를 회전시키고. 보통의 사람은 어디에 탄환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유진은 알았다. 실린더가 몇 바퀴 돌았는지를 봤다. 손에 리볼버를 쥐었을 때, 미세한 무게가 어느 칸에 더해져 있는지도 느꼈다. 마안으로 만들어낸 탄환. 아이리스의 암흑은 물질처럼 분명하게 존재하고, 무게를 가지고 있다.
이번 차례에서 리볼버에서 탄환이 쏘아진다.
“...흠.”
아이리스는 고개를 삐딱하니 기울이며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허무한 소리가 났다. 탄환은 쏘아지지 않았다. 유진은 그 광경을 보고서 놀람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어휴, 그렇게까지 하고 싶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이리스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리볼버를 건넸다.
탄환의 위치가 바뀌었다. 간단한 것이다. 탄환은 아이리스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다. 없애는 것도, 다시 만드는 것도 아이리스의 자유다.
이번에 방아쇠를 당기면. 유진의 머리에 탄환이 박힐 것이다.
아이리스는 킬킬 웃으며 손을 뒤로 흔들었다. 그러자 다크엘프 중 하나가 아이리스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주었다.
퐁.
아이리스는 금장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이 연기를 빨아들였다.
“지금이라도 포기해도 상관없어.”
아이리스는 입안에서 담배연기를 굴리며 말했다.
“네 머리가 터져 뇌수가 쏟아지는 모습도 보고싶긴...”
그 말이 끝나기 전.
ㅡ꽈아앙!
계단과 이어진 문이 박살났다.
수도
문짝이 방안으로 날아들어 올 때. 유진은 망토의 안쪽에서 아카샤를 쥐었다. 키이잉! 순식간에 완성 된 마법이 레베라와 노인을 휘감았다.
타인에게 사용하는 블링크는 본인에게 직접 쓰는 것보다 까다롭고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지만, 유진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간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술식을 각기 다른 좌표와 마나의 흐름대로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이다.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전생부터 능했고, 이 잘난 몸뚱이는 이론대로 계산하는 속도도 빨랐다. 거기에 메르의 보조까지 있으니, 유진의 공간마법은 빠르고 정확한 것이 당연했다.
사실 그런 이유보다 마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문이 부서졌다. 덕분에 아이리스가 장악하고 있던 공간에 틈이 생겼다. 아이리스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마법을 가로막는 것보다, 바깥에서 문을 걷어 차고 들어 온 존재에게 관심을 보였다.
저벅거리는 구둣발소리.
어두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카르멘 라이언하트였다. 그녀는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물고, 피어오른 먼지 사이를 가로질렀다. 묶지 않은 회색 머리카락과 어깨에 걸친 코트가 펄럭였다.
“...흠.”
카르멘은 방안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기립해 있는 10명의 다크엘프. 그 앞의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아이리스. 그 맞은편에서 아카샤를 쥔 유진.
이 장소를 알려준 것은 메르였다.
과할 정도로 넓은 라이언하트의 저택. 유진이 그 저택에서 하는 일이라곤 수행 정도가 고작이지만, 메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본가의 안주인인 애니실라와 별채의 제하드 뿐만이 아니라, 라만이나 니나 같은 사용인이나 백사자 기사단에게도 예쁨을 받고 있다.
그렇다보니 여기저기 불려가는 일이 많은데, 유진이 일일이 메르와 동행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유진은 제 방 안에 마법단말을 설치하고, 사역마인 메르와 연결해 주었다.
수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메르가 보이지 않는다던가. 아니면 메르가 널따란 숲 안에 들어간 유진을 찾을 때 사용하는 단말이다.
단말과의 링크를 역행한다면, 메르 쪽에서 단말에 연락을 취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게 방을 청소하던 니나에게 연락을 취하고, 본가의 카르멘을 이곳에 불러왔다.
“...흠.”
아이리스는 물고 있던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뿌연 연기가 그녀의 얼굴 주변을 맴돈다. 호흡 한 번으로 담배를 필터까지 태운 뒤.
잘근 씹는 이빨 사이에서 필터가 끊어졌다. 그렇게 담배가 아래로 떨어진다. 뿌연 연기가 흩어진다. 빨간 불씨가 연기의 한복판에서 아래로 추락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서로를 의식한 셋은, 지금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실행했다.
아이리스의 눈동자에 시커먼 빛이 번뜩였다. 아직 유진의 손에 들려있던 리볼버.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았는데 총구에서 검은 탄환이 쏘아졌다.
이어서, 아이리스의 양손이 소파를 짚었다. 그녀는 허리를 튕기면서 두 다리를 휘둘렀다. 칼날, 아니, 채찍처럼 휘몰아친 다리가 유진의 몸을 찢을 듯 다가왔다.
총구에서 탄환이 쏘아졌을 때. 유진의 눈동자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는 탄환의 궤적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암전의 마안으로 만들어낸 탄환. 리볼버는 어디까지나 아이리스의 취향일 뿐, 저 탄환에는 사출구 따위는 필요없다.
격발의 과정도 없이 발사되고,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것도 아니다. 암전의 마안으로 만들어낸 암흑은 아이리스의 뜻대로 움직인다.
탄환이 머리카락에 닿는 순간.
유진의 몸에 전류가 흘렀다. 번개가 녹아든 마나가 유진의 몸을 인간의 움직임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결국 탄환은 유진의 머리를 꿰뚫지 못하고 허공을 관통했다.
몸으로 날아오는 다리. 유진의 양발이 땅을 찍었다. ㅡ쿠웅! 소파가 박살나고, 바닥이 움푹 주저앉았고, 유진의 몸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카르멘이 물고 있던 시가가 풍압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졌다. 그만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걸쳤던 코트가 펄럭거리며 날아갔다. 왼쪽주먹은 가슴에 당겨 붙이고, 오른쪽주먹은 어깨가 뒤로 뽑힐 만큼 바짝 붙여서 젖혔다.
쭉 뻗은 발이 땅을 딛는 순간. 발목과 허리가 함께 회전했다. 그건 주먹을 내지른다기보단, 몸을 대포삼아 포탄이 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일직선으로 뻗은 주먹이 공간을 꿰뚫었다.
또다시 아이리스의 눈이 번뜩였다. 암전의 마안이 암흑을 생성했다. 화아악! 회오리친 암흑이 카르멘이 날린 권격을 통째로 삼켰다.
허공에서 한바퀴 회전한 몸. 흑암의 망토가 유진의 몸을 통째로 삼켰다. 끼리릭...! 유진은 망토 사이에서 활시위를 당겼다. 뇌광궁 페르노아. 당겨진 시위에 5개의 번개가 걸렸다.
빠지지직! 연쇄적으로 흐르는 번개가 아이리스를 덮쳤다. 투웅! 휘둘렀던 양발, 아이리스의 발꿈치가 바닥에 굴러다니던 술병을 걷어찼다. 콰지직! 번개가 술병을 박살내고 술을 태웠다.
일권을 내지른 후. 카르멘은 더욱 아이리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이빨 사이에 물고 있던 시가를 뱉었다. 증발하는 술의 냄새.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담배연기. 모두가 카르멘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다.
상황 자체가 불쾌하고, 더더욱 불쾌할 거리가 많았다. 뚜둑. 카르멘은 아직 가슴에 붙이고 있던 왼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뜯어버렸다.
꽈아악.
주먹의 악력을 이기지 못한 가죽장갑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회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가속한 카르멘이 아이리스를 덮쳤다.
“쯧.”
포탄처럼 쏘아지던 주먹에 제동이 걸렸다.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 실제로 몸이 추락하려 했다. 바닥에 번져나간 암흑이 카르멘을 지저 밑바닥으로 초대했다. 카르멘은 더 나아가지 않고 허리를 뒤로 젖히며 뒤로 도약했다.
여기서 죽일 수 있나?
유진은 뇌광궁을 놓았다. 흑암의 망토가 날개처럼 크게 펼쳐졌다. 상대는 나찰공주 아이리스. 300년 전부터 악명을 떨쳤던 전설적인 다크엘프. 지금의 유진은 아이리스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절대로 불가능했다. 이그니션을 써도, 월광검을 써도, 성검을 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마왕의 잔재에게 힘을 빌렸던 이오드도 아이리스같은 ‘진짜’ 괴물 앞에서는 하찮다. 300년 전에도 그만큼 강했는데, 지금의 아이리스는 그때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특히. 암전의 마안을 다루는 것에 완전하게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300년 전의 아이리스는 가진 마안을 지금처럼 빠르고 익숙하게 다뤄내지 못했다.
공방에서 레베라와 노인이 사라졌을 때. 곧장 아이리스르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아이리스가 이만큼 마안을 다뤄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광검은.’
꺼내지 않았다. 불완전하고 약해진 월광검으로 아이리스를 베어 죽일 자신이 없었다. 성검도 마찬가지. 오히려 성검은 아이리스와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안 된다. 저 단순무식한 마안은 신성력으로도 정화가 쉽지 않다.
아이리스가 손을 뻗어왔다. 이 돌발적인 전투상황에서도 아이리스의 입가에는 일그러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꺾이고, 눈동자가 검은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유진의 양 옆에 암흑물질이 출현했다. 그 2개의 덩어리가 양쪽에서 유진을 짓뭉개려 들었다.
파앗! 흑암의 망토가 팽그르르 돌았다. 망토의 안쪽에서 뽑아낸 위니드가 암흑을 베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손맛이 허탈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 베었는데 벤 것 같지가 않은. 실제로 그랬다. 칼날에 갈라진 순간, 암흑은 이미 서로 달라붙고 있었다.
검격에 섞은 술식에 마나가 흐른다. 공간확장. ㅡ후우욱! 달라붙던 암흑이, 누군가가 위아래를 잡고 늘린 것처럼 쭉 늘어났다. 암흑 자체에 마법을 쑤셔 넣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물리적으로 베어내고서 그 사이에 마법을 더하는 것은 가능한가.
‘까다로워.’
300년 전에도 그랬다. 누아르 제벨라는 아이리스보다 훨씬 강하다. 하지만 유진은 누아르 제벨라보다 아이리스를 상대하는 것이 더 까다로웠다.
간단한 이유였다. 누아르 제벨라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은 세냐와 아니스가 철저하게 역할을 분담했었다. 반면에 아이리스는 대부분 하멜 혼자 상대했었다.
‘그때는 체술에 별로 능하지 않았는데.’
ㅡ쩌엉!
아이리스가 차올린 발이 유진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충돌순간에 17겹의 방어결계를 구축하고, 오러실드까지 일으켰다. 하지만, 소파에 앉아서 휘두른 발길질 한 번에 방어결계가 모조리 박살나고 유진의 몸은 뒤로 날아갔다.
“...아하하!”
아이리스는 휘둘러 찬 발을 그대로 돌려 다리를 꼬고 앉았다.
끼익... 끼익...
밀치는 힘에 소파가 뒤로 삐걱거렸다. 그녀는 양팔을 등받이에 걸치고서 고개를 위로 들었다.
“네가 라이언하트의 그 은사자로군. 그렇지?”
카르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장에 박아넣었던 손가락이 뽑혀 나왔다. 땅과의 거리는 멀지 않다.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은 찰나.
그렇게 짧은 시간이라곤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카르멘의 몸놀림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손이 천장에 뽑혀 나오고, 추락을 시작한 순간. 카르멘의 다리는 수백 개의 잔영을 그리며 아이리스에게 파고들고 있었다.
허나 아이리스는 당황하지 않는다. 크게 뜬 눈동자가 카르멘의 공격을 하나하나 쫒고, 암흑을 불러냈다. 끝없이 이어지는 타격. 암흑은 흩어지지만 소멸하지는 않는다. 차이고 차이는 것에 흩어진 암흑이 다시 엉겨 붙었다.
카르멘의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아이리스는 아직 소파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뒤로 날아가던 유진의 몸이 멈췄다.
카르멘이 진입한지 고작해야 몇 분.
뒤늦게 도착한 흑사자 기사단의 3번대. 그들이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모두가 어느 국가에서도 인정받을 실력을 가진 기사들.
“들어오지 마라.”
카르멘의 입이 열렸다. 소파의 삐걱거림에 몸을 싣고 있던 아이리스도 씨익 웃었다.
“간섭하지 말고 보기만 해.”
아이리스가 내뱉은 말은 소파 뒤에 있던 다크엘프들에게 한 말이었다.
유진의 몸이 아래로 내려왔다.
찌익. 카르멘은 장갑을 입으로 물고서 손가락에 바짝 감았다.
뚜둑. 아이리스의 손가락이 꺾이며 소리를 발했다.
두근.
유진의 심장이 뛰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가 똑같이 움직였다. 아이리스가 증식시킨 암흑이 공간에 먹물처럼 번진다. 바닥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어진 문이 되었고, 넓게 퍼져 다가오는 암흑은 다른 암흑과 연결 된 통로인지, 아니면 단순한 힘의 덩어리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이리스와의 전투가 까다로운 것이다. 저 암흑물질의 실체는 일단 닿지 않고서는 간파할 수가 없다. 아카샤를 통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힘.
‘나는 여러번 겪어 보아 안다만.’
카르멘은 확실하게 알고 있을까. 전해줄 시간 따위는 없다. 카르멘은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손발을 나누는 초근접전. 이 거리는 유진에게도 익숙했다. 철컥. 왼손은 허리띠의 안쪽에 숨겨 둔 카람빗을 뽑았다.
링에 검지손가락을 끼우고, 그립을 손으로 감아 주먹을 쥐었다. 응축해서 얇게 두른 검강이 칼날을 휘감았다.
파직. 번개가 흘렀다. 유진의 몸이 앞으로 가속했다. 조금 앞섰던 카르멘은 지면에 번진 암흑을 뛰어넘어, 눈앞에 나타난 장막에 주먹을 뻗고 있었다. 암흑에 주먹이 닿는 순간. 카르멘의 주먹에 제동이 걸렸다. 예지의 영역에 닿을 만큼 단련한 감각. 그것이 암흑과 닿는 순간의 위화감을 간파했다.
더 뻗었다면. 주먹이 암흑에 삼켜졌을 거다. 아이리스가 만드는 암흑은 서로 결속되고 공간을 잇는다. 주먹이 삼켜진 상태에서 암흑이 사라진다면, 제 아무리 단련하고 방어를 갖춘 주먹이라도 허무하게 절단되어 버린다.
멈췄던 주먹이 되돌아간다. 카르멘은 유연하게 몸을 틀어가며 암흑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꺾어 친 주먹이 암흑과 근접해 폭발을 일으켰다. 터지고, 흩어졌다.
유진의 순간 가속력은 카르멘보다 빨랐다. 그녀가 암흑을 터트렸을 때. 유진은 이미 그를 지나쳐, 아이리스의 간격에 진입했다.
300년 전보다 압도적으로 나은 것은, 하멜일 적보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바람이 그랬다. 유진이 몸에 두르고, 앞서 나아가는 바람은 피륙을 뻗기 전에 먼저 암흑과 닿았다. 삼켜져 다른 곳으로 흐르는지, 아니면 가로막히는지. 그것만으로도 유진은 암흑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300년 전에는 2개가 전부였어.’
그 2개의 조작력이 완전하다 할 만큼 늘었다. 어쩌면 그 외에 다른 능력도 생겼을지 모른다만, 우선은 확실한 것부터 경계한다.
ㅡ키이잉!
카람빗의 구부러진 칼날에서 검강이 뿜어졌다.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따른 참격이 지면을 갈랐다. 아직 소파에 앉아있던 아이리스의 눈이 어둠으로 물든 순간.
암흑이 참격을 삼켰다.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 여러 무기 중에서 카람빗을 쥔 것은, 아무래도 무기보단 맨몸을 움직이는 것이 간단하기 때문이다.
‘망가져도 상관없고.’
위력은 줄겠지만. 암흑이 요동쳤다. 분열한 암흑이 덮쳐 왔다. 암흑이 늘어난 만큼 바람은 격렬해 졌다. 검강이 몇 번이고 불씨를 흩뿌렸다. 어느새 카르멘이 유진의 곁에 있었다.
순식간에 돌파 된 거리. 아이리스도 더 이상 소파에 앉을 수는 없었다. 마안이 불러들인 암흑이 아이리스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위에서 당겨지듯이 불안정한 자세로 소파에서 일어서곤, 제 뒤의 다크엘프들이 침범당하지 않도록 암흑의 장막을 일으켰다.
아이리스의 양손이 들렸다. 그 순간에 이미 수십 형(形)의 공격이 아이리스에게 파고들었다. 카르멘과 유진의 손이 아이리스를 때리고, 밀치고, 잡고, 비틀고, 으깨고, 꺾고, 부수려 했다. 그 형을 다르며 역수로 쥔 카람빗은 찌르고, 베고, 뽑고, 연이어 쑤시고, 난도질하려 했다. 사실 형용이 무의미했다. 유진과 카르멘은 이 거리에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아이리스에게 쏟아낼 수 있는 모든 형식의 공격을 처박았다.
그리고 아이리스는.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두팔을 움직였다. 번져나가는 암흑이 공격로르 차단한다. 막고 막고 막는 만큼 공격의 형은 제한된다. 수십 개의 형을 펼쳐도 유효한 것은 많아봐야 한둘. 그것이 전무(全無)하도록 길을 막는다.
결코 가볍지 않은 공격인데, 이 전설적인 다크엘프의 앞에서는 모두가 가볍게 막혀졌다. 전투가 시작되고서 아직 채 10분이 흐르지 않았다. 허나 그 짧은 시간에 수백이 넘는 공방이 교환되고, 그보다 많은 숫자의 공격이 이뤄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만큼 많은 공격이 오가는데. 건물은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 지하공간은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방에서 부서진 것은 아이리스가 내리찍었던 테이블이나 소파, 카르멘이 걷어 찬 문짝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3명의 공방은 절제되고 정교했고, 흘리는 힘은 일절 없이 타격점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폼체인지.”
카르멘의 몸이 옆으로 돈다.
“헤븐 제노사이드.”
너덜너덜해진 가죽장갑이 회중시계를 쥐었다.
“알라스토르 폼.”
이름만 들어서는 도저히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없었다.
수도
회중시계를 품에서 꺼내서, 쥔 손을 옆으로 뻗고... 굳이 저 대사를 입 밖으로 내뱉을 필요가 있는 건가? 알라스토르 폼이라니. 이름만 들어서는 대체 뭔지 알 수가 없다만, 저 모든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실전성은 제로에 수렴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다만, 직접 보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 어제 카르멘이 처음 보여주었던 데스티니 폼. 그 변형속도는 유진의 눈으로도 변형과정을 쫒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지금의 속도는 그때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알라스토르 폼, 이라고 읊조린 순간. 이미 카르멘의 오른손은 은색의 건틀렛에 감싸여 있었다. 즉, 어제 보여주었던 데스티니폼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대단하군...’
카르멘의 오른손. 데스티니폼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이었다면, 알라스토르폼은 주먹에 착 달라붙는 금속의 장갑이었다. 주먹마디가 울퉁불퉁하게 돌출된 것이, 타격에 집중된 형태 같았다.
일그러진 미소를 띠우고, 여유 가득히 공격을 흘려내던 아이리스의 얼굴에도 잠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크게 뜬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카르멘의 오른손을 보았다.
“...뭘 한...”
방금 읊조리던 웃기지도 않은 이름은 뭐지? 저 주먹은 뭐고? 이 수백 년 살아 온 다크엘프는 와일드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외견과 언동을 가졌지만, 카르멘의 기이한 취향은 이해하지 못했다.
카르멘도 아이리스의 공감을 바라진 않았다. 쭉 뻗은 발이 바닥을 딛을 때, 그것에 소리는 따르지 않았다. 누군가가 등을 떠민 것처럼 카르멘의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허리에 붙인 주먹. 팔꿈치에서 ‘끼릭’하는 기계장치의 소리.
ㅡ쉭.
아이리스는 제때 마안을 빛내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가 상황을 인지하기 전, 카르멘의 주먹이 아이리스에게 상황을 때려 박았다. 아이리스의 두발이 붕 떠올랐다. 소리는 없다. 아이리스의 몸이 꺾이고, 몸속 깊이 처박힌 충격이 기도를 넘어 호흡을 터트리기까지의 찰나. 그것이 순차적으로 이뤄지기기도 전에 ‘반응’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만큼 빠르고, 연속적인 주먹이 아이리스의 몸에 처박혔다.
그 터무니없는 속도는 유진의 눈으로도 완전히 쫒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두 다리는 전진하던 자세 그대로, 허리를 비롯해 상체의 반동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허리에 붙여 뻗은 주먹을 뼈 없는 연체동물의 다리처럼 낭창거리며, 접고 다시 뻗는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더더욱 가속하는...
저 공격이 오른팔의 움직임만으로 가능한 건가?
“ㅡ머신건 블로.”
무호흡의 연타가 끝났다. 이만큼의 공격을 내질렀는데도 카르멘의 호흡은 조금도 거칠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뒤늦은 타격음이 겹쳐졌다.
“커흑!”
뒤로 날아가던 아이리스의 몸이 암흑에 붙들렸다. 찰나에 꽂아 넣은 연타. 피와 내장조각을 내뱉긴 하지만, 아이리스의 몸은 파괴되지 않았다.
밀려난 아이리스에게 유진이 덤벼들었다. 주먹을 위로 쳐내며 베는 카람빗. 아이리스는 피범벅인 입술을 씹으며 암흑을 불러냈다.
칼날이 가로막히려는 순간. 유진의 검강이 폭발했다. 신기에 가까운 마나조작이 검강을 변형시켰다. 손가락만한 길이의 검이 무차별적인 난무를 구현해냈다. 아이리스의 눈앞에서 암흑이 갈기갈기 찢겼다. 베인다 하여 소멸하진 않으나, 서로 달라붙기엔 유진의 참격이 너무 빨랐다.
몸안이 욱신거린다.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연타를 너무 허용했다. 아이리스는 급히 발을 뒤로 끌면서 태세를 정비하려 했지만, 멈추지 않는 참격의 연속이 먼 옛날의 기억을 끌어냈다.
이 참격. 형태. 몸 전체를 휘두르며 베어내는 빠르고 무거운 검. 막무가내인 것 같지만 틈을 파고들기 쉽지 않은, 간신히 파고든 틈마저 함정으로 이용하는 난무.
‘...수라광살?’
암흑이 달라붙지 않는다. 짧은 카람빗으로 저만한 난무를 펼치면서, 유진의 의식은 마법까지 병행했다. 암흑이 쉽사리 엉키지 않도록 참격 사이사이의 공간을 늘린다. 거기에 실처럼 얇게 늘어트린 검강을 잔류시킨다.
단순히 검과 마법을 동시에 쓰는 것이 아니다. 저게 가능한 건가?
아이리스에게는 불가능했다.
‘검강의 실...’
ㅡ알고 있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 300년 전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을 때. 빌어먹을 베르무트가 아버지의 몸을 끔찍하고 절망적인 검으로 난도질할 때. 아이리스는 제 몸을 던져 아버지를 구하고 싶었다. 파멸을 형상화 한 것만 같은 빛을 내뿜어대는 창백한 검광에 제 몸을 불사를 지라도 아버지를 위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빌어먹을 베르무트만큼의 개자식이 아이리스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우둔한 하멜.
암전의 마안이 없었다면 일방적으로 당했을 만큼, 아이리스와 하멜 사이에는 크나 큰 실력차이가 존재했다. 최강의 다크엘프라 불리고, 광란의 딸로 삼아지며, 나찰이라는 이명을 얻었지만.
300년 전, 광란의 마왕성에서 가장 약했던 것은 아이리스였다.
암흑 사이를 파고 든 검강의 실이 서로 이어진다. 유진은 카람빗을 앞으로 밀어내고, 왼쪽 손가락에는 검강의 실을 엮었다. 미세한 조작. 순풍. 파직하고 튀는 번갯불. 왼손가락이 실뜨기를 하듯 움직였다.
‘...데드엔드!’
어느덧 다가온 검강의 실이 아이리스의 몸을 옭아죈다. 약해보이고 가느다란 실이지만, 닿는 즉시 피륙을 절단낼 만큼 예리하다. 아이리스가 ‘평범한’ 다크엘프였다면, 이 공격으로 몸이 토막났을 것이다.
ㅡ뚜두둑!
아이리스의 붉은 정장에 수십 줄기의 선이 그어졌다. 검강에 베인 옷감의 틈으로 피부가 드러난다. 잡티나 굳은살 진 곳 없이 부드러운 피부. 검강이 직접 닿았는데도 핏방울이 조금 맺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전히 질겨.’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광란의 자식들. 마왕은 제 수양자식들에게 피 대신에 여러 권능을 부여했다. 아이리스가 가진 암전의 마왕도 광란의 마왕이 가지고 있던 것이고, 도저히 엘프라 생각되지 않는 강인한 내구성 또한 광란의 마왕이 부여한 권능이다.
“네놈...!”
아이리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뒤틀었다. ㅡ파지지직! 검강에 섞인 번개불꽃이 아이리스의 몸을 통째로 삼켰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의식은 그 전류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라이언하트의 사냥개였구나...!”
300년 전에 죽은 하멜이,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환생했다.
당연히 아이리스는 그러한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아이리스는 증오스런 베르무트가 죽은 하멜의 기술을 아들에게 전승시킨 것을 알았고, 그 아들의 후손이 아직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해해 줘서 고맙네.’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아이리스에게 홱 손을 뻗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몸을 태우고 있던 번개불꽃이 유진의 뜻에 따라 응축되고, 아이리스의 몸을 압박했다.
카르멘이 유진의 등 뒤에서 튀어나갔다. 유진은 더 이상 헤븐제노사이드의 실전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오른손은 폼체인지를 읊조리지도 않았는데, 아까의 알라스토르 폼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ㅡ그건 더 이상 손도, 주먹도 아니었다. 묵직한 철포가 팔뚝부터 이어져있을 뿐이었다. 고오오오...! 코어를 거쳐 정제되지 않은, 대기중의 마나가 카르멘의 오른팔에 집중되었다.
화륵.
극한으로 운용된 백염식.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로 도달한 자가 몇 없는 백염식의 7성. 도이네스 라이언하트가 죽은 이상, 라이언하트에서 백염식의 7성에 오른 자는 카르멘 라이언하트 뿐이다.
즉, 현재 라이언하트의 최강자는 바로 카르멘이란 말이다.
‘번개불꽃까지?’
아이리스의 몸을 옭죄고 있던 번개불꽃의 일부마저 카르멘의 철포에 집중되었다. 철포의 표면에 새겨진 회로가 빛을 발했다. 아이리스의 눈에서 시커먼 빛이 번뜩였다.
ㅡ쿠우웅!
아까와는 다른, 거대한 충격. 방어로 만들었던 암흑이 터졌다. 통로로 흘려 분산시켰는데도 이만한 위력이다. 몸안 전체에서 퍼지는 충격에 아이리스의 이빨이 박살나고, 눈동자가 터졌다.
그렇게 아이리스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만들어낸 자그마한 틈. 유진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망토의 안. 유진은 월광검의 칼자루를 쥐었다. 아이리스의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흔들흔들 날아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월광검을 휘둘러 죽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300년 전, 무수히 많은 전장을 헤치며 승리하고 살아남았다.
섣부른 확신은 제 목을 옭아 죈다. 유진은 손에 쥐었던 월광검 대신, 아카샤를 쥐었다.
카르멘은 예지의 영역에 닿을 정도로 직감을 단련했으나, 유진만큼 사선을 넘어 온 경험은 부족했다. 카르멘이 이뤄낸 강함은 경외할 만 하나, 그녀가 살아 온 시대는 마왕과 인간이 진심으로 서로를 멸절하려 들지 않는 평화의 시대였다.
그래서 느끼지 못했고, 앞으로 나아갔다. 블라스트 폼, 기간트임팩트. 분명하게 때려박았다. 여러 방어를 뚫고, 다른 곳으로 흘려져 위력은 조금 줄었다만. 그래도 아이리스의 몸을 내부부터 박살내는 것엔 성공했다.
카르멘은 승기를 보았다. 앞으로 몇 걸음. 더 버텨줄 지는 모르겠다만,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그 나찰공주를 죽일 수 있다. 후환은? 걱정할 것 없다. 라이언하트에 먼저 싸움을 걸어 온 것은 나찰공주. 또한 나찰공주와 광란의 독립군은 헬무드에 있어서도 골칫거리인 존재. 여기서 나찰공주를 죽여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이언하트의 영광.’
짓밟힌 명예. 그를 다시 일으킬 초석에, 나찰공주의 목숨은 최상의 제물이다. 끼릭. 카르멘의 오른팔이 변화했다. 당장이라도 내뱉고 싶어 입술이 근질거린다만, 그를 말할 틈은 없었다.
폼체인지.
데스티니 폼.
데스티니브레잌...
ㅡ화악!
좁혀져야 할 거리가 벌어진다. 발은 뻗고 있는데? 뒤엉키는 거리감. 간파가 늦었다? 그것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마 공조 중인 유진이 공간마법을 펼치고, 그로도 부족해 뒷덜미를 잡고서 끌어당길 것이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었을까.
“왜ㅡ”
카르멘이 내뱉은 말이 문장이 되기 전.
ㅡ콰드드득!
카르멘이 전진하려 했던 공간에 시커먼 암흑이 출현했다. 이전까지 아이리스가 불러낸 암흑 모두가 갑작스레 나타났지만, ‘마안이 빛을 발한다,’라는 징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암흑은 정말 아무 징조없이 나타났다. 게다가 여태까지 나타났던 암흑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직접 닿지 않았어도 느낄 수 있었다.
멈추지 않았다면.
아니, 당겨지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나아갔다면. 이유도 깨닫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거다.
“...쯧.”
날아가던 아이리스의 몸이 멈췄다. 뒤로 젖혀졌던 몸이 삐걱거리며 앞으로 기울었다. 터진 눈동자. 텅 비어버린 눈구멍은 시뻘건 피와 어둠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감이?”
말할 때마다 아이리스의 입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이리스는 큭큭 웃으며 암흑에 등을 기대었다.
“아쉽게 됐어. 조금만 빨랐어도 짓이길 수 있었는데 말이야.”
간극에 출현했던 암흑의 구체가 퐁, 하고 터져서 사라졌다. 아이리스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며 카르멘과 유진을 응시했다.
“공주님.”
배후의 암흑, 그 저편에 서있던 다크엘프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너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닌데. 고작 10분이잖아?”
“이미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치안이 좋은 나라야.”
아이리스는 혀를 차면서 두발로 땅에 섰다. 선 순간, 다리에 힘이 살짝 풀리는 것을 느꼈다. 허나 비틀거리지 않고,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바로 섰다.
‘제법이야.’
야곤, 그 호로새끼나 유폐의 삼마(三魔)보다 어린 인간에게 이만큼이나 당했다고? 아이리스는 그 사실에 굴욕보다 희열을 느꼈다. 그녀는 킬킬 웃으면서 뻑뻑한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터졌던 눈동자가 재생되고, 박살났던 이빨도 빼곡하게 돋아났다.
“협상은 결렬이겠지?”
유진은 아이리스의 살의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고서 뒤를 향해 손짓했다. 다가 온 다크엘프가 아이리스에게 담배를 물려주고, 금장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주었다.
“다시 한 번 테이블에 앉을까.”
아이리스는 훅 연기를 뿜으며 대답했다.
“네가 여기서 죽어준다면, 네 후임자와 얘기 정도는 나눠주지.”
“그건 곤란한데. 광란의 독립군은 아버지의 정통한 계승자인 내가 존재하기에 의미가 있는 거거든.”
아이리스의 주변에 다크엘프들이 모인다. 어떤 다크엘프는 제 정장 자켓을 벗어, 누더기나 다름없게 된 아이리스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카르멘 라이언하트.”
아이리스는 순식간에 타들어간 담배를 손가락에 걸치고서 연기를 혀로 굴렸다.
“다음에는 퀴퀴한 지하가 아니라, 태양 아래에서 보지.”
손가락에 걸친 담배가 떨어졌다.
아이리스와 10명의 다크엘프도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발밑의 암흑이 통로가 되어, 다크엘프 전원이 이 지하에서 사라진 것 이다.
‘...아까의 능력은 300년 전에는 없었다.’
바닥의 암흑은 아이리스의 것이 아닌 그림자로 돌아왔다. 유진은 그림자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파격적인 변신이야, 아이리스. 300년 전의 너는 활솜씨과 민첩한 몸놀림만 봐줄 만 했는데, 이제는 근접전도 꽤 잘하게 됐어. 거기에 마안의 능력까지 발전시켰고.’
마왕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거겠지. 유진은 큭큭 웃으며 손가락에 끼웠던 카람빗을 뽑았다.
“운이 좋군.”
여기서 아이리스를 죽이지 못한 것은 아쉬워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아쉬워해야 할 것은 아이리스 쪽이다. 그녀는 아마, 외부의 간섭만 없었다면 여기서 유진과 카르멘을 모두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확신은 유진도 가지고 있었다. 싸울수록 확신은 강해졌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도 아이리스를 죽일 수 없다. 계속해서 싸웠다면 진지하게 도망칠 궁리를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칠 궁리를 하기도 전에, 아이리스가 물러서 주었다. 짧은 싸움이었지만, 300년 전에 본 적 없는 마안의 힘도 확실히 봐두었다.
유진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아이리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유진에 대해 모른다. 월광검을, 마창을, 분쇄추를 뽑지 않기를 잘했다. 이건 다음에 아이리스를 죽일 때 압도적인 이점이 될 것이다.
“...후우.”
카르멘은 긴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의 헤븐제노사이드를 해제했다.
“...괜찮으십니까?”
유진은 피범벅인 카르멘의 오른팔을 보았다. 카르멘은 대꾸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처음 진입했을 때. 움직임을 따르지 못하고 떨어졌던 코트가 카르멘에게 날아왔다.
“...도움을 받았군.”
“신경쓰지 마십시오.”
“네가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 거다.”
“제가 카르멘님보다 뒤에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더 넓게 봤을 뿐입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알아차렸다고? 카르멘은 내심 납득할 수 없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축 늘어진 오른팔에 감각이 거의 없다. 카르멘은 왼손으로 코트 주머니의 시가를 꺼내고, 입에 물었다.
“...라이터.”
“예?”
“아까. 다크엘프가 쓴, 퐁 소리가 나고, 금으로 만든 라이터 말이다.”
“...아, 예.”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카르멘님은 시가에 불을 붙이지도 않으시잖습니까?”
“언젠가는 붙이고 싶을 수도 있지.”
카르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수도
“괜찮으십니까?”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 그곳에는 카르멘을 따르는 흑사자 기사단 3번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부대장인 네이션은 피범벅인 카르멘의 오른팔을 보고서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긁힌 상처다.”
네이션은 벌써 수십 년 동안 카르멘을 보좌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 카르멘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녀의 저 과할 만큼 쿨한 대답의 진의를 해석할 수 있었다.
‘아파 죽을 것 같다는 뜻이군.’
치명적이진 않다. 뼈가 부러진 것도, 근육이 파열된 것도 아니다. 내버려 두면 멀쩡하게 낫는다. 하지만 지금은 눈물 날 만큼 아프다. 사실 그렇잖은가. 소매 전체가 시뻘겋게 물들 만큼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진통제라도 주어야 하나? 네이션은 카르멘의 얼굴을 살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 내비치는 반응은 그것뿐... 만약 이곳에 유진이 없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진통제를 건네겠지만, 네이션은 까마득한 후배 앞에서 멋지고 강인한 무인으로 남고 싶어 할 카르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깥에 백룡기사단이 와있습니다.”
“그렇겠지. 알체스터 꼬마도 와있나?”
“예.”
알체스터. 그 이름은 유진도 알고 있다.
대륙 최강의 기사가 누구인가?
호사가들의 담론에서 빠지지 않는 이름들이 있다. 역대 라이언하트의 가주들. 불사의 백사자, 도이네스 라이언하트. 은사자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 외 유명 기사단의 단장들.
키옐 백룡기사단의 단장, 알체스터 드라고닉도 ‘대륙 최강의 기사’ 명단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인물이다.
작위는 공작. 하지만 사교계에도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고, 정치활동도 하지 않는 인물. 사실상 알체스터가 가진 공작 작위는, 황제가 오랜 벗이자 호위기사인 알체스터에게 보이는 최고의 친애이자, ‘키옐 제일의 기사’에 대한 상징이다.
건물의 바깥.
구경꾼은 없었다. 건물 전체를 둘러 싼 기사들의 위용과 기세가 구경꾼들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입니다.”
흉갑에 드래곤의 형상을 새긴 적발의 남자가 카르멘에게 다가왔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유진은 한 눈에 그가 알체스터 드라고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키옐 제일의 기사.’
현 키옐의 황제, 스트라우트 2세는 알체스터 드라고닉 공작이야말로 키옐 제일이자 최강의 기사며 공공연연하게 떠들곤 했다.
그건 라이언하트가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황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양한 방법을 써가며 라이언하트를 손에 넣길 바랐다.
욕심이 날 만도 했다. 라이언하트가 가진 상징성과, 일개 가문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세력 등...
당장 흑사자기사단만 해도 백룡기사단과 동격으로 취급되는데다, 기사다운 낭만에 흠뻑 취한 젊은 기사들은 키옐의 제국기사단이나 백룡기사단에 입단하는 것보다 백사자기사단에 입단하는 것을 바란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낭만에 취한 젊은 기사들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보다, 마왕과 맞서고 세상을 구해낸 위대한 베르무트를 더 존경했다.
“...오른팔. 괜찮은 겁니까?”
그 황제의 최측근이자 호위기사가 알체스터 드라고닉. 그는 적발에 푸른눈을 가진 미남이었다. 알체스터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카르멘의 오른팔을 보며 말을 걸었다.
“살짝 긁혔을 뿐이다.”
“치료가 필요해 보입니다만.”
“네 용건이 끝난다면 저택에 돌아가 치료하도록 하지.”
카르멘은 그렇게 대답하며 건물을 돌아보았다. 지하에서 그만한 싸움이 벌어졌는데도 저택의 외관은 멀쩡했다. 카르멘은 저택 내부에서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휘말려 피해 입은 민간인은 없나?”
“없습니다.”
“상황은 전해 들었고?”
“당신의 부관에게 대충 전해 들었습니다. 저 아래 용병단 사무실을 나찰공주와 일당이 점거하고 있었다던데?”
“우선, 이 소란에서 라이언하트는 무조건적인 피해자라는 것부터 확실히 하고 싶은데.”
카르멘은 피범벅의 손을 바짓단에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당신네 가문의 엘프 시종과, 제작공방의 장인 한 명이 납치당했다고는 들었습니다. 그를 되찾기 위해...”
알체스터의 눈이 유진에게 향했다.
“...그 유명한 유진 라이언하트가 단독으로 나찰공주와 일당의 근거지로 쳐들어갔다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쳐들어간 것이 아니라 안내받은 겁니다.”
“젊어서 그런지 아주 무모해.”
알체스터는 푸른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유진은 그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저와 함께 외출한, 제가 보호하고 있던 엘프가 제 눈앞에서 납치당한 겁니다. 저는 그 책임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신념이 확실한 기사도로군. 하지만 청년, 자네가 무사히 목숨을 건진 것은 천운이 따랐음이길 알아두게.”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카르멘은 물고 있던 시가를 손가락에 걸쳤다.
“알체스터 꼬마. 백룡기사단의 단장이니 일이 아주 바쁠 텐데 말이야.”
“...꼬마라 부르는 것은 그만두십시오.”
“네가 아무리 덩치가 커졌건 내게 있어선 여전히 꼬마야. 난 아직도 네가 코 훌쩍 거리며 목검을 휘두르던 코흘리개 시절을 기억하거든.”
“시답잖은 이야기는 그만두십시오.”
“그렇다면 보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백룡기사단장. 난 키옐의 군벌도 아니고, 작위에도 욕심이 없지만 말이야. 키옐을 사랑하고 수도에서 태어난 시민으로서, 백룡기사단장이자 공작이나 황제폐하의 측근인 자네에게 간언을 올릴까 해.”
카르멘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지금의 그녀에게 평소 같은 의식적인 근엄함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 다크엘프가 이곳에 있는 거지?”
“...”
“다른 누구도 아니고, 광란의 독립군을 이끄는 나찰공주야. 그녀의 입국여부에 관해서는 이미 몇 주 전에 정보를 공유해달라 부탁하고, 관련된 서류까지 나눴었는데 말이야.”
“...그건...”
“이런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본가의 며늘아기는 나찰공주에 대비하기 위해 입국관리국의 여러 귀족들에게 합당한 금품을 쥐어주었거든. 설마 뇌물 문제를 운운하려 들지는 않겠지?”
며늘아기?
애니실라를 말하는 건가?
‘...고모할머니였지.’
유진은 카르멘의 연배를 다시금 떠올렸다.
“우리 라이언하트는 수도에서 살아가는 국민이고, 수도의 치안이 대륙제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 당연히 그래야지. 라이언하트가 매해 납부하는 세금과 기부금이 얼마인데? 그런데 왜 우리가, 이 수도에서, 가문의 사용인을 납치하는 범죄자와 대치해야 하지?”
카르멘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유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
“대체 왜 그 문제로 네게 무모하단 소리를 들어야 하고?”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알체스터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라이언하트가 무조건적인 피해자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나찰공주의 문제는... 예, 솔직히 말씀드리죠. 키옐의 입국관리국은 나찰공주와 휘하 다크엘프들의 입국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납치범이기 전에 밀입국자라는 것이지?”
“...예.”
오가는 대화. 유진은 알체스터의 반응을 의외라고 느꼈다. 백룡기사단의 단장, 제국 제일의 기사... 그러한 위명 때문에 강직하고 고풍스런 성격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체스터가 드러내는 성격은 유약하고 점잖았기 때문이다.
“...또, 수도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한 치안국의 대비가 미흡했다는 점도 사과드립니다. 카르멘님이 원하신다면, 추후 이 문제를 누가 어떤 식으로 책임졌는지를 따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구역을 관리하는 위병조장과 출입국의 담당관은 교체가 필요하겠어.”
“그리 지시하겠습니다.”
“섣불리 말해도 되는 건가? 알체스터 꼬마. 황제 폐하는 그러한 처리를 기쁘게 여기지 않으실 텐데?”
“라이언하트 여러분이 오늘의 문제를 불문에 부쳐주신다면.”
알체스터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건물을 에워싸고 있던 백룡기사단 전원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처억. 하나 된 발소리. 유진은 이 거리에 백룡기사단을 제외하고서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군. 우리만 입을 닫고 있으면 된다, 이건가?”
“괜한 이야기가 떠돌아, 수도의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덮는 것으로는 아무런 해결이 안 돼.”
“덮지 않을 겁니다. 치안국은 수도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충분한 설명과 양해를 더해 정식으로 발표할 겁니다.”
“라이언하트에는 사죄만으로 끝낼 생각인가?”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카르멘은 곧장 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진은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주도권을 놓지 않는 카르멘에게 내심 감탄했다. 지금의 카르메는 피우지도 않는 시가를 입에 물고, 회중시계에 헤븐제노사이드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을 가진 무장을 숨겨 둔 정신 나간 할머니가 아니었다. 연배와 위치에 알맞은 노련함을 가진 라이언하트의 어른이었다.
“나찰공주가 다시 습격해 올 경우를 대비해, 백룡기사단을 본가의 담장 너머에 배치해 줬으면 하는데.”
“언제까지 말입니까?”
“그건 네가 파악해야지. 나찰공주는 이곳에서 물러났다.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
“...흠.”
알체스터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알겠습니다. 나찰공주가 키옐을 떠난 것이 확실해 질 때까지는, 제가 ‘직접’ 저택의 호위를 담당하도록 하죠.”
“네가 직접?”
“예.”
힐긋 돌린 시선이 유진과 닿았다. 알체스터는 상처가 없는 유진의 몸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제 개인적인 흥미도 있는 일이니... 폐하의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카르멘은 곧장 대꾸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알체스터의 개인적인 흥미. 사실 그것 뿐만은 아닐 것이다. 제국 제일의 기사에 백룡기사단의 단장. 알체스터는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는 황제의 검이다. 그런 알체스터가 황제의 곁을 떠나, 라이언하트의 호위를 담당하겠다고 하는 것은...
‘욕심 많은 폐하가 또 굶주림을 호소하는 모양이군.’
당장 며칠 전만 하더라도, 가주인 길레이드가 황궁에 직접 찾아가 황제와 대담을 나누었다. 유폐의 마왕의 경고. 그에 대한 단합회는 올해부터 준비를 갖출 것이다.
사실 대륙 전체가 힘을 합쳐, 헬무드나 마왕과 맞선다는 이상적인 생각은 누구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단합회를 명목으로 국력을 겨루고,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하는 것이 목적일 터.
스트라우트 2세는 이미 제국인 키옐을 더욱 크게 만들고 싶어 한다. 헬무드를 경계하느라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황제는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사막왕국 나하마를 정벌하겠다는 야심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라이언하트는 내란을 겪었다. 힘은 약해졌고, 꾀한 변화는 아직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고 있어.’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그러한 역사가 라이언하트의 상징이다. 본가의 백사자 기사단은 흑사자 기사단과 같은 라이언하트의 힘이지만, 그들에게 라이언하트의 피는 흐르지 않는다.
백사자 기사단을 결속시키는 것은 가문에 대한 충성심. ‘라이언하트’를 섬긴다는 낭만이다. 하지만 내란을 겪고 약해지며 굴욕을 당한 라이언하트에게 기사들의 마음을 이끌 낭만은 남았는가?
‘...남지.’
카르멘의 머릿속에 낸 결론은 흔들리지 않았다. 불사의 백사자가 손주의 패륜으로 죽고, 본가의 장남이 마왕의 힘에 눈이 멀어 반란을 일으키고, 그 배후에는 본가를 따르지 않는 방계가 있었다. 이 내란은 라이언하트에 있어 전례 없는 대굴욕이다.
하지만 라이언하트는 무너지지 않는다. 도이네스 라이언하트는 죽었지만,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건재하다. 장남이 패륜을 저질렀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카르멘은 유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20살. 아직 어린 나이. 하지만 머지않아, 저 아이는 라이언하트 뿐만 아니라 대륙 모든 기사가 경외할 존재가 될 것이다. 나찰공주와의 싸움에서 카르멘은 그러한 확신을 얻었다.
“...네가 와준다면 안심할 수 있겠군.”
“본가는 어차피 카르멘님도 계속 머무르실 것 아닙니까.”
“나와 너. 그리고 이 녀석까지 셋.”
카르멘은 유진에게 시선을 때지 않고 말했다. 셋이라... 알체스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아래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찰공주와 싸웠다.”
“두 분이서 함께 말입니까?”
“그래. 죽였다면 좋았겠지만, 차기 마왕을 노리는 수백 년 묵은 다크엘프는 과연 그만한 존재더군.”
카르멘이 알체스터에게 상황을 전하는 동안, 유진은 생각에 잠겼다.
아이리스가 물러선 것은, 백룡기사단의 개입을 염려한 것일 터. 유진과 카르멘, 거기에 알체스터까지 더해지는 상황은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억지스런 면이 있어.’
아이리스는 애초부터 엘프에 대해 협상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상식적인 행동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녀는 키옐에 밀입국했고, 용병들을 죽이고서 사무실을 점령했다. 그리고는 레베라를 납치해서 유진을 끌어들였다.
‘라이언하트를 존중해서.’
아이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라이언하트는 절대로 다크엘프와 협상하지 않는다. 아이리스는 그 사실을 잘 알았고, 그래서 레베라로 끌어들인 유진을 인질로 삼으려 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아이리스가 가진 암전의 마안. 300년 전보다 훨씬 개발되어 있었다. 당장 아이리스는 유진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레베라를 납치했고, 유진이 보는 앞에서 제 부하들을 데리고서 사라졌다.
납치하고 인질로 삼을 만큼 막나가기로 했다면. 아이리스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았을 것이다. 그녀가 작정하고 본가에 숨어들어, 엘프들을 암전의 마안으로 빼돌리려 했다면... 그걸 어떻게 막아낸단 말인가?
‘...하지 않은 것 이 아니라... 하지 못했다?’
본가의 숲.
그곳은 이미 세계수가 뿌리를 박았고, 엘프들을 보호하는 결계를 구축했다.
‘침입할 수 없는 거야.’
유진의 입 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렇다면 굳이 백룡기사단으로 본가를 지킬 필요가... 아니, 그건 아니지. 숲으로 침입하지 못해도 아이리스라면 다른 무식한 짓을 벌일지도 모르니.’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유진은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키옐 제국에서, 그것도 라이언하트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막나간다면.
아무리 아이리스가 광란의 딸로 유폐의 마왕에게 존중받고 있다 해도, 더 이상 헬무드에 아이리스의 자리는 남지 않을 텐데.
‘...헬무드를 떠날 셈이군.’
유진은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헬무드에서 아이리스와 다크엘프에 관한 여론은 단 한 번도 좋은 적이 없었다. 제 아무리 아이리스가 마왕다운 힘을 갖게 될 지라도, 헬무드의 마족들은 아이리스를 마왕이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음, 소개가 늦었군.”
유진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알체스터와 카르멘의 대화가 끝났다. 알체스터는 유진에게 다가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권했다.
“알체스터 드라고닉이라고 하네.”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닮은 구석은 머리랑 눈깔 색 뿐이군.’
유진은 전생에 보았던 ‘드라고닉’을 떠올렸다.
알체스터 드라고닉이란 이름을 알고,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가 키옐 제일의 기사라 불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300년 전.
유진은 알체스터의 선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지가 드래곤과의 혼혈인 반인반룡이라며 지껄이던...’
본래의 성씨를 버리고, 제 성씨를 드라고닉으로 바꾼 미친놈이 있었다.
수도
300년 전.
오릭스 드라고닉이라는 놈이 있었다.
베르무트가 그랬던 것처럼, 놈은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다. 혼란한 전장. 밀려드는 마물의 군세가 키옐 국경을 넘어오던 때. 군대를 이끌던 장군이 승기가 없다고 판단하고, 퇴각을 결심할 때.
오릭스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나타난 놈은, 수십 미터는 될 법한 검강을 뿜어대며 마물의 군세를 양단했다. 오릭스의 등장으로 키옐 군은 승기를 되찾고, 마물의 군세를 몰아내어 국경을 지킬 수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영웅들에게는 대부분 그러한 일화가 한둘쯤은 있었다. 세상 어디에서든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인간의 힘은 나약했으며, 적은 항상 강하고 숫자가 많았다. 300년 전은 난세였고, 영웅을 꿈꾸는 자들은 많았다.
검을 어디서 배웠냐는 말에, 오릭스는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답했다. 그 가공할 마나는 어떻게 쌓은 것이냐 물으니, 오릭스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답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질문을 아버지의 덕이라 돌리니, 장군은 답답하고 궁금하여 아버지가 누군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 아버지의 존함은 팔라스케스. 드래곤입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하멜은 오릭스 드라고닉이 반인반룡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놈의 이름은 비노스 알렌. 하멜과 같은 용병 출신이다. 한때는 같은 용병단에 있었고, 같은 전장에서 싸웠던 적도 있다.
친구는 아니었다.
비노스는 옹졸하기 짝이 없는 새끼였다. 어린 하멜이 용병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하멜보다 1살 많던 비노스가 사수가 되었다. 막내가 궂은일을 도맡는 것은 그 엿 같던 시대에도 변치 않는 전통이어서, 하멜은 비노스가 시키는 대로 똥오줌통을 비우고 선배들의 냄새나는 옷들을 세탁했다.
당시 하멜은 나이는 어렸지만, 타고난 천성대로 성격이 괴팍하게 형성되어가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잘 따랐지만, 점점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저 새끼는 나보다 잘난 것이라고는 1살 더 처먹은 것밖에 없으면서, 사수랍시고 명령질만 해댄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비노스 뿐만이 아니었다. 존경할 가치도, 배울 것도 없어 보이는 용병들. 특히 몇몇은 어린 하멜의 엉덩이를 음흉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봐댔는데, 그 시대의 전장에서는 드문 일은 아니었다.
물론 하멜은 자신이 그러한 추행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그리고 결국 사단이 나버렸다. 용병단 선배 중 하나가 하멜의 침낭에 손을 뻗었고, 하멜은 눈을 뒤집고서 선배를 두들겨 패버렸다.
그 문제로 비노스가 눈을 까뒤집고 욕을 해대길래 비노스도 패버렸다.
용병단장은 막내가 미친 거냐고, 하극상을 범했으니 팔을 자르겠다며 덤벼들었다. 그래서 용병단장까지 패버렸다.
그만한 일을 저질렀으니, 더 이상 그 용병단에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어린 하멜은 재빨리 짐을 챙기고, 쓰러진 비노스와 그 외 용병들의 품을 뒤져 금품까지 빼앗고서 용병단을 떠났다.
...그렇게 끝날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비노스가 오릭스가 되어 국경을 지켰을 때. 하멜은 이미 베르무트의 동료였고, 키옐 황제의 구원요청을 따라 키옐로 향하고 있었다. 도착해 보니 전투는 이미 끝났고, 국경을 수호하던 장군은 호들갑을 떨며 오릭스를 소개해 주었다.
붉은 머리, 푸른 눈동자. 얼굴도 조금 변했다. 시간도 많이 흘렀어서, 외견으로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하멜은 비노스의 마나를 기억했다.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비노스가 사수랍시고 하멜의 마나수련법을 가지고 온갖 트집을 잡아댔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랄을 하는 주제에, 비노스의 코어와 마나는 쥐똥보다 못했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너무 쳐다본 모양이다. 알체스터가 제 뺨을 어루만지며 물어왔고, 유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유명한 반룡의 후손을 직접 본 것이 신기해서요.”
“아...”
알체스터는 납득했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위대한 베르무트님의 후손, 라이언하트 가문 앞에서 자랑스러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 선조이신 오릭스 드라고닉님도 전설적인 영웅이셨지.”
유진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선조님께서는 당시 황제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키옐에 남아, 제국의 영토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으셨다. 하지만... 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선조님은 헬무드에 가지 못한 것을 항상 후회하셨다더군...”
허벅지를 꼬집고, 비틀었다. 메르도 유진의 심상을 느꼈다. 그녀는 아무런 사심 없이, 유진의 웃음이 터지는 것을 막겠다는 일념에 따랐다.
메르는 자그마한 손으로 유진의 옆구리와 팔뚝을 꼬집고 비틀었다.
‘너 비노스냐?’
‘...사람 잘못 보았소. 나는 오릭스 드라고닉이라 하오. 내 아버지는 드래곤인 팔라스케스...’
‘티끌 만큼이긴 하지만 비노스의 마나가 남아 있는데?’
‘...나는 비노스가 누구인지 모르오.’
모른다, 모른다고 하기에.
사실을 말하도록 만들었다. 나름의 근거는 있었다.
‘너 시발 마왕의 첩자지?’
‘말도 안 되는...’
‘아니 그렇잖아. 내가 아는 비노스는 길바닥에 차이는 돌멩이만도 못한 새끼였는데, 그런 새끼가 십수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 강해져?’
‘...하멜 공도... 예전에는 평범한 용병이었다고 들었...’
‘나는 용병일 적부터 괴물소리 들었던 놈이고. 비노스 너는 아니었잖아. 그런 놈이 이만큼 강해져서 나타났는데 어떻게 안 수상해? 솔직히 말해 이 개자식아. 너 마왕의 첩자지? 마왕이 시발 너보고 이 제국에 잠입해서 황제 암살하라고 시킨 거지?’
‘그게 무슨...’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었다.
하멜은 오릭스에게 덤벼들었다. 당황하던 오릭스는 곧장 저항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릭스는 쌍코피를 줄줄 흘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솔직히 말해 개자식아. 너 마왕의 첩자 맞지?’
‘아니, 아니라고 했... 아아악!’
한참을 더 두들겨 팬 뒤에. 오릭스의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하멜의 난동으로 용병단은 해산되었고, 비노스는 여러 용병단을 전전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 시대에서 용병의 주업은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 임무가 없던 것은 아니다.
‘의뢰로 지하 던전을 탐색했는데, 그곳이 드래곤의 무덤이었고... 거기 있던 드래곤하트를 손에 대니, 몸에 드래곤의 힘이 깃들었다고? 너 지금 그걸 말이랍시고 하는 거냐?’
‘왜, 왜 자꾸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냐...?!’
‘믿을 만한 소리를 해야 믿지...’
눈물과 코피를 줄줄 쏟으며 서럽게 울어대던 오릭스의 얼굴.
바로 앞에 앉아있는 알체스터의 얼굴과 오릭스의 얼굴이 겹쳐졌다.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망토 안의 메르는 아직까지 유진과 옆구리를 꼬집어 비틀고 있었다.
“만약 선조님이 함께 헬무드에 가셨다면... 위대한 베르무트님의 업적도 조금은 더 늘었을 지도 모르지.”
알체스터가 그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마차의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릭스를 알고 있는 유진은 저 한마디 한마디가 듣기 괴로웠다. 300년 전. 오릭스는 기를 쓰고 헬무드에 가지 않으려 들었다. 놈은 싸움이 끊이질 않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헬무드에서 싸우는 것보단, 키옐에서 극빈한 대접을 받으며 침략하는 마물이나 토벌하는 삶을 바랐다.
사실 필요가 없기도 했다. 세냐는 오릭스와 결합했다는 드래곤하트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런 것 치고는 오릭스의 마나가 대단치 않다는 것에 실망했다.
‘하멜,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말 알아?’
‘돼지가 목에 진주를 왜 거냐?’
‘네 머리가 돼지보다 못하단 것은 알겠어.’
강자와의 대련을 좋아하던 모론은 처음에는 오릭스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오릭스가 기대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금세 흥미를 접어버렸다.
아니스와 베르무트는, 세냐나 모론처럼 일말의 흥미조차 느끼지 않았다. 아니스는 지금의 파티야말로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누구 하나가 더해지는 것은 오히려 균형을 무너트릴 뿐이고, 오릭스에게는 일각을 지탱할 가치마저 없다고 평가했다.
베르무트도 그렇게 말했다. 더 이상은 필요 없다. 우리 5명으로 충분하다.
언제나 그랬었다. 헬무드를 떠돌면서, 여러 영웅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동료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도 여럿 있었고, 유진이 보기에도 동료로 삼고 싶은 자들도 몇몇 있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은.
5명이서 헬무드의 최전선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일행 중 가장 약했던 것은 하멜이었다. 최전선에서 이름을 떨치던 영웅들 중에는, 하멜보다 강자가 몇 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그들에게 동료가 되어 달라 권하지 않았다. 그들이 동료가 되기를 바라며 다가왔을 때에는 단호히 거절했다. 전장에서 잠시 싸우는 것은 좋으나, 항상 함께 싸우고, 여정을 함께 하는 것은 지금의 동료들이어야 한다면서.
당시의 하멜은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어, 아직도 옆구리를 꼬집어대던 메르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선조님을 많이 존경하시나 봅니다.”
“자네가 위대한 베르무트님을 존경하듯.”
알체스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조님은 헬무드에서 마왕과 맞서 싸우지는 못하셨지만, 키옐에 남아 수많은 백성들을 지키고 국경을 수호하셨네. 마왕과 맞서 세상을 구한 것은 베르무트님의 위업이나, 드라고닉 가문의 선조님도 키옐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지.”
알체스터는 제복의 가슴에 새겨진 백룡기사단의 문장을 내려다 보았다.
“...키옐의 시조이신 초대 황제는 드래곤과 우정을 나누었다지.”
키옐의 건국신화다.
“키옐은 뿌리부터 드래곤과 인연을 맺은 나라. 비록 오랜 시간이 흘러 제국의 수호룡이었던 드래곤도 사멸하고, 더 이상 제국과 드래곤의 인연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300년 전. 반인반룡이신 선조님이 키옐에 오신 것으로, 제국은 다시 드래곤과 인연을...”
“크흑...”
“갑자기 왜 그러나?”
“...나... 나찰공주와의 전투로 입은 부상이 갑자기 쑤셔 와서 말입니다.”
유진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부상은 당연하지. 나찰공주는 강했다.”
창밖을 보고 있던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붕대에 감긴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강했지. 꼬마... 아니, 더 이상 꼬마라 부를 수는 없겠군. 유진.”
“...저는 왜 꼬마라고 부르는...”
“조용히 해라, 알체스터 꼬마. 너는 나와 함께 사선을 넘은 적이 없으니, 내게는 계속해서 꼬마인 것이다.”
알체스터는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더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드래곤이라...”
카르멘은 붕대에 감긴 손가락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카르멘은 피식 웃으며 손을 코트자락 안에 넣었다. 헤븐제노사이드... 본모습을 감춘 회중시계. 카르멘은 그 회중시계를 응시하면서, 슬쩍 유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드래곤이라...”
“...”
반복되는 말. 노골적인 어필. 유진은 어제 카르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연한 만남, 기적... 벌써 수십 년 전, 내가 어릴 때의 신비로운 체험. 여기까지 말해주지.’
‘기왕 말하시는 거 끝까지 말해주시죠?’
‘그럴 수 없다. 약속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어길 수 없는 것이니.’
...헤븐제노사이드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카르멘의 노골적인 어필 덕에 대강 짐작이 갔다.
“...함께 가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아니. 너희는 마차를 타고 와라.”
“비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만...”
“너와 백룡기사단에게 한 부탁은, 본가의 외곽을 수호해 달라는 것이었지. 외인인 너희를 본가의 영지 안으로 들이고 싶지 않다.”
그 단호한 태도에 알체스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물러섰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저희는 수도 외곽의 워프게이트로 이동하고, 거기서부터 라이언하트의 본가로 향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지 경비 루트는 추후 논의하도록 하지. 우리 쪽에서 먼저 찾아갈 테니, 너희는 담장 밖에서 진지라도 설치하고 있도록.”
카르멘은 그렇게 내뱉고서 먼저 워프게이트를 통과했다.
“숲 때문입니까?”
뒤따라 워프게이트를 통과하니 익숙한 숲이 보였다. 유진은 시가를 꺼내서 입에 무는 카르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그렇지.”
카르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체스터는 속이 구린 녀석은 아니다. 나는 녀석이 콧물을 질질 흘리던 시절부터 봐왔고, 한때는 라이언하트와 드라고닉가문의 우애를 위해 녀석의 가문에서 배움을 나눴던 적도 있지.”
“배움?”
“나는 라이언하트의 무예를 알체스터에게 가르쳤고, 알체스터의 아버지... 드라고닉의 전대 가주는 나에게 알체스터의 무예를 가르쳤다. 내가 생각하기엔 라이언하트의 일방적인 손해였지만 말이다.”
카르멘은 시가 끝을 씹고, 입술에서 느껴지는 쓰디쓴 맛에 눈가를 찡그렸다.
“...즉, 나는 알체스터의 훈련교관이었단 말이지. 그래서 알체스터가 어떤 놈인지 잘 알아. 심성은 유약하지만, 주군에 대한 충의는 타고난 유약함을 가린다.”
키옐의 황제.
“이 숲은 가진 가치가 너무 커. 시조님이 만드신 영맥 뿐만이 아니라, 네가 가져 온 나무들이 숲을 보물로 바꾸었지. 알체스터가 이 숲을 겪는다면... 틀림없이 황제에게 보고할 거다. 영지를 직접 빼앗지는 않겠지만, 백룡 기사단의 훈련에 협력하라며 공문이라도 내렸다가는 숲이 시끄러워질 거다.”
다른 흑사자들이 워프게이트를 통과했다. 카르멘은 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나찰공주는 물러났지만, 안심하지는 마라. 이만큼 과격한 일을 벌인 이상, 나찰공주가 언제 다시 습격해 올지 모른다.”
카르멘이 흑사자들을 데리고 앞으로의 경계태세를 논의하는 동안.
유진은 창백한 얼굴로 서있는 레베라에게 다가갔다.
“...유진님.”
“몸은 좀 어때?”
“괜찮... 습니다. 유진님이야말로...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레베라의 앞에 섰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 봐.”
“...네?”
“움직이지 말고.”
유진은 양손을 뻗어 레베라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레베라는 화들짝 놀랐지만, 유진이 방금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징벌이다.
레베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입술을 꽉 씹었다. 레베라의 뜻은 아니었다지만, 함께 외출하게 된 탓에 유진의 신변에 위험이 생겼다. 주인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노예가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으음...”
유진은 어깨부터 시작해 레베라의 몸을 더듬었다. 양손이 겨드랑이를 더듬고, 쇄골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온다. 레베라는 수치스러움은 느끼지 않았지만, 선망을 품었던 유진이 이런 짓을 한다는 것에 서글픔을 느꼈다.
“...”
흑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카르멘도 크나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놀람에 벌어진 입에서 시가가 툭 떨어진다. 저 녀석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지? 카르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왜 이 자리에서. 단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엘프 시종의 몸을 더듬고 있는 건가?
“으으음...”
마치 품평이라도 하는 것 같은 섬세한 손길. 가슴을 타고 내려 온 유진의 손이 레베라의 옆구리와 배를 더듬었다. 카르멘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붉어진 얼굴을 홱 돌렸다.
“...음... 그... 런 짓은 나중에...”
“찾았다.”
뭘?
카르멘이 뭐라 말을 잇기 전.
유진의 손이 레베라의 옆구리를 철썩 때렸다.
“우읍...!”
속에서 퍼지는 충격. 레베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유진은 레베라의 옆구리에 손을 대고서 마나를 불어넣었다.
“입 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꾸물꾸물 올라와, 레베라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웨엑!”
레베라의 입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쏟아졌다.
수도
쏟아진 덩어리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흙 위에 퍼졌다. 바로 앞에서 그걸 본 레베라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녀는 제 입을 틀어막으며 엉덩방아를 찧곤,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유... 유, 유진님. 이건...?”
“몸은 어때?”
“네...?”
“숲에 돌아오고서부터 이상한 기분 들고 그러지 않았어?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프고...”
레베라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바닥에 고인 암흑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네 몸에 이런 게 들어가 있었거든.”
아이리스는 너무 쉽게 레베라를 돌려주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레베라의 몸속을 살폈는데, 역시 아이리스의 암흑이 깃들어 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 했군.”
카르멘은 표정을 왈칵 구기면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이리스가 저 암흑을 얼마나 다채롭게 사용하는지를 보았다. 만약 아이리스가 저 암흑을 통해, 자신의 군세를 이끌고 라이언하트 본가에 침입한다면? 외부의 조력을 요청하지 못하도록 워프게이트를 부수고, 숲을 점령하고서 저택을 급습한다면?
“...뭐하는 거지?”
카르멘은 암흑을 짓이기려 다가갔지만, 유진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유진은 카르멘의 주먹을 힐긋 보며 말을 이었다.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유진은 아이리스가 이 숲에 다가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심증에 대해 말했다. 카르멘은 잠시 두눈을 깜빡거리다가, 으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사실 나도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숲에 심은 세계수로 인해 아이리스가 다가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듯 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막 지른다면, 인질극을 벌이는 것보다는 직접 쳐들어오는 것이 간단했을 터.
‘과연.’
유진은 암흑을 바람으로 들어 올린 뒤, 숲의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반응은 확실하게 보였다. 외곽에서 중심으로 가까이 갈수록, 암흑은 경련하듯이 요동쳤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암전의 마안이 생성한 암흑. 저것은 마나도 마기도 아니지만, 다크엘프인 아이리스의 영향을 받는다.
엘프가 마기를 받아들이고, 타락하면 다크엘프가 된다.
세계수는 엘프를 수호한다. 마병은 엘프를 죽이지만, 세계수의 영지에서 엘프는 마병에 걸리지 않는다. 이미 마병에 걸려있다고 해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다.
“나찰공주는 이 숲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마 부하 다크엘프들도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흐음...”
카르멘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백룡기사단을 물리는 것이 나은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돈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알아서 저택을 지켜주는 것인데.”
“그건 그렇다만...”
“애당초 제국의 치안에 빈틈이 없었다면 저희가 이런 불상사를 겪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나찰공주가 자신이 들어오지 못하는 대신 다른 수단을 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카르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의 깊은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이제 와 말하기도 우습다만, 네 실력이 대단하더군.”
사실 그러한 생각은 유진의 머릿속에도 있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는 유진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다. 라이언하트 최강이라던 도이네스의 실력은 제대로 본 적도 없었지만, 아까 나찰공주와의 싸움에서 보았던 카르멘의 실력은 라이언하트 최강을 자처할 만큼은 되었다.
‘첫 전투치고는 아이리스의 마안도 굉장히 잘 상대했고.’
만약 아이리스가 300년 전에 비해서 그리 성장하지 않았다면, 카르멘과 합공 중에 월광검을 사용해 아이리스를 죽여버렸을 수도 있을 텐데. 유진은 300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체감하며 혀를 찼다.
‘...아이리스뿐만이 아니지.’
라이자키아는 반쯤 뒈져서 차원의 틈을 떠돌고 있지만, 다른 2명의 공작. 몽마의 여왕과 유폐의 칼은 건재하다.
특히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시커먼 칼날과, 절그럭거리는 사슬 소리. 유진은 등골의 오싹함을 내색하지 않으며 카르멘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흑사자성에서 헥토르가 도주했다고 했지?”
“예.”
“나찰공주와 헥토르가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없나? 나찰공주의 마안이라면 헥토르를 도주시키는 것도 간단했을 텐데.”
“그건 아닙니다.”
헥토르에 도주에 사용된 것은 마법이다. 그래서 도주의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마안을 사용해 도주한다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
게다가 이 암흑을 통로로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이리스 뿐이다. 헥토르에게 아이리스의 암흑이 깃들었다고 해서, 그를 마음대로 사용해 도망칠 수는 없단 말이다.
아이리스가 그 장소에 나타나서, 헥토르를 데리고 도망칠 이유가 있나? 자신이 간섭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굳이 마법의 흔적을 따로 남겨가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이유는 없었다.
“...너는 나찰공주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군.”
카르멘이 눈을 끔벅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유진은 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생각해 보니, 카르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드러냈다.
“보기와는 다르군?”
“...예?”
“알체스터 꼬마의 재미없는 옛날이야기에도 관심을 보였고, 흑사자성에서는 제노스경과 자주 어울렸지. 심지어 나찰공주는 널 라이언하트의 사냥개라고 착각했어.”
“...어... 예, 뭐 그렇죠.”
“너도 알겠지만, 제노스경의 가문은 라이언하트에서도 유서 깊은 가문이다. 이리 말하는 것은 크나큰 결례일 지도 모르지만... 시조께서는 제노스경의 가문을 라이언하트를 위한 사냥개로 삼고, 죽은 벗인 하멜님의 기술을 계승시켰지. 그게 바로 흑사자의 뿌리다.”
“예에...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제노스경이 널 어여삐 여겨 가문의 비전을 전승시켰나... 과연, 너와 제노스경은 잘 어울리는 구나. 옛날이야기를 무척 좋아하는 점도 그렇고 말이야.”
멋대로 납득을 끝낸 카르멘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제노스나 도이엔스가 그랬던 것처럼, 카르멘이 자신의 정체를 짐작한 것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저 흐뭇한 미소를 보고 있으니, 괜한 걱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으음... 예... 저는 하멜님을 존경하니까요...”
“그래 보이더군. 네가 쓰던 기술은, 단순히 자질로만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력. 땀 대신 피가 흐를 만큼의 고통스런 수행을 겪지 않고서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겠지.”
카르멘은 진지한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그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솔직히 부담스러웠지만, 이렇게 대놓고 인정받는 것은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멜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애정. 그것이 있었기에, 지금의 네가 있는 것이다.”
카르멘은 자신이 굉장히 멋진 말을 했다고 생각했고, 제 자신에게 만족하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유진의 어깨에 손을 척 얹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성인식은 이미 작년에 치루었고, 그때 너와 대련했던 것은 다름아닌 나였지. 그렇지만 다시금 인정하도록 하마.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라이언하트의 성을 갖기에 넘치는 자격을 갖춘, 아니, 라이언하트 가문의 미래를 밝힐 거대한 불꽃이다.”
“...예에...”
“그러니 난, 라이언하트의 큰 어른이자 너보다 앞서 무도를 걷는 선배로서 네게 마땅한 이름을 내리고자 한다.”
“예?”
“번개를 감싼 푸르고 흰 불꽃의 사자...”
“잠깐...”
“뇌광청백화염신...”
생각했던 것만큼 입안에서 달라붙지 않았다. 카르멘은 눈가를 찡그리고서 고민하다가, 붕대에 감긴 오른손을 보았다.
피에 젖은 붕대.
“...그래. 너는 지금부터 혈사자, 유진 라이언하트다.”
“이보세요.”
“가문의 적을 멸하는 혈사자. 비록 그 길에는 무수히 많은 피가 흐를 터이나, 언제나 고고하고 아름다우며 강인할 지니.”
더 듣기가 괴로웠다. 유진은 주춤거리며 물러서려 했지만, 카르멘은 유진의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짝짝짝.
잠자코 듣고 있던 흑사자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카르멘을 대장으로 따르는 3번대. 그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들은 진심으로 감격했다는 표정까지 지어가며 유진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유진도 전생에는 남한테 내세우기 민망할 기술 명을 짓곤 했지만, 유진이 생각하기에 수라광살이니 파멸신기니 하는 센스는 카르멘과 비교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박수소리...! 제정신이 아니고서는 저런 대장을 존경하고 따를 수 없으니, 다들 카르멘처럼 미쳐버린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시엘도...’
얄밉게 웃어대는 시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엘은 카르멘을 존경하고 따르고 있으며, 벌써 3년 동안이나 카르멘의 종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고 있다... 유진은 시엘의 머릿속이 저들처럼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진지한 걱정을 느꼈다.
*
“공주님.”
“멀쩡해.”
걱정이 깃든 목소리가 다가왔지만, 아이리스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번 공격에 맞은 것은 사실이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상대가 강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과연 라이언하트. 대륙 제일의 무가를 자처할 만큼은 되나. 아이리스는 쿡쿡 웃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은사자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 그 둘의 존재만으로 대륙 제일의 무가를 자처할 만큼은 되겠어.”
아이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셔츠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만큼의 공격을 허용했는데, 그녀의 몸에는 작은 멍도 들어있지 않았다. 이곳까지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회복을 끝낸 것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인질로 끌고 올 것을 그랬나.’
유진과 카르멘. 둘을 인질로 삼았다면, 라이언하트와 교섭하여 100명의 엘프를 넘겨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마음속에 남는 미련을 못내 지웠다. 애당초 그녀는 제대로 된 교섭을 바라고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키옐에 밀입국하고, 수도에서 소란을 벌이고, 라이언하트를 공격함으로서 협상의 여지를 아예 없애버렸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덜컹거림.
마차가 출발했다. 사람을 태워 나르는 것이 아닌, 거대한 짐마차. 지금 아이리스와 다크엘프들은 그 짐마차의 뒤에 있었다. 크고 두꺼운 천막이 위를 덮고,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리스는 소파에 반쯤 누워서 제 배를 쓸어내렸다.
“...300년이나 고집을 부렸으니 말이야.”
다크엘프에게 생식기능은 없다. 마기를 받아들이고 타락해버린 순간, 그 무슨 수단을 쓰건 다크엘프는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된다.
즉, 다크엘프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엘프를 타락시키는 수밖에 없단 말이다.
“...100명의 엘프. 다크엘프를 늘리는 것에는 탐나는 숫자지만... 전력으로서의 가치는 없어.”
그들의 존재가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그 빌어먹을 베르무트의 후손들이, 엘프를 보호하고 있단다. 마음 같아서는 처들어가서 빼앗아 오고 싶었다. 엘프들이 그를 바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아이리스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정찰 삼아 라이언하트의 영지에 가까이 가보았지만, 다가갈수록 가슴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아파왔다. 아이리스가 가진 힘 중 가장 강력한 암전의 마안마저도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물러서고.
현실을 직시했다. 100명의 다크엘프가 더해진다 한 들, 그 중에서 당장 전력으로 쓸 수 있는 엘프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엘프는 긴 세월을 산다. 하지만 엘프는 제 수명을 ‘힘’을 위해 사용하지는 않는다... 아이리스는 한때 엘프였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엘프는 잘못 만들어진 종족이다.
아이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백 년이라는 긴 시간을 아무 의미없이 보내는 종족. 마법과 정령에 대한 강력한 친화력을 갖는 주제에, 그를 수련하는 것에 매진하는 것보다는 숲을 가꾸고 꽃을 심고 과일을 따는 일에만 열중하는 종족. 모든 면에서 인간따위보다 우월한 주제에, 종족을 늘리려 들지 않고 폐쇄사회에서 자기들끼리만 살아가는 종족.
그게 엘프다. 라이언하트가 보호 중인 엘프도 대부분이 그러할 터.
‘...다크엘프가 되어서 바로 전력이 될 수 있던 건... 고작해야 시크나드 뿐. 나머지는 칼을 쥐어본 적이나 있을지 의문이고.’
동족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아이리스에게 필요한 것은 무능한 동족이 아닌 대업에 도움이 될 전력이다. 100명의 엘프가 모두 다크엘프가 된들, 지금의 아이리스에겐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짐짝만 될 것이다.
암전의 마안의 이동능력은 만능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짐마차를 타고 있는 것이다. 100명으로 늘어난 동족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마차가 몇 대는 더 필요할 것이다.
“...썩을.”
아이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군자금이 부족하다.
결국은 이것이다. 헬무드를 박차고 나온 이상, 더 이상 다크엘프 지원금을 받아낼 수는 없게 됐다. 수백 년 동안 모아놓았던 돈들은 여러 정책을 논의하는 마족 관료들의 뒷구멍으로 들어갔고, 그 외에 다양한 헛짓으로 설탕덩어리처럼 녹아버렸다...
“...항구까지 얼마나 걸리지?”
“마차를 타고가면 열흘은 걸립니다.”
워프게이트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아이리스는 혀를 차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희는... 정말 괜찮은 거냐?”
담배연기를 혀 위에서 굴리며. 아이리스는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다크엘프라고는 해도 한때는 엘프. 우리는 종족적으로 숲에서 평안을 느끼지. ...하지만 바다에는 숲이 없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공주님.”
오래 전부터 아이리스를 섬겨 온 다크엘프가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공주님의 대업에 함께 하기로 혼을 바친 몸입니다.”
“...그건... 알지만...”
“이미 많은 동족과 용병들이 시무인에서 공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리스는 답하지 않고 담배연기를 뿜었다.
“...너희들... 배는 타본 적 있냐?”
“저는 없습니다.”
“몰아본 적은?”
“필요하면 배우면 됩니다.”
“그것보다는 배 하나를 통째로 점령하는 편이 빠를 것 같습니다. 저희가 배울 필요 없이, 이미 몰 줄 아는 인간을 시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게 낫겠군. 기왕 해적이 되기로 한 거.”
아이리스는 담배연기와 한숨을 함께 내쉬었다. 워프게이트가 발달하면서 세상의 무역은 대격변을 겪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해상무역의 씨가 마른 것은 아니었다. 워프게이트는 그 편리함만큼 어마어마한 설치비용이 들고,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관리비용이 꾸준히 나간다.
그렇다 보니 워프게이트의 설치 유무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척도라 할 수 있는데, 바다의 자그마한 섬나라나 도시들에 워프게이트가 있을 리 없잖은가.
그래서 아이리스는 해적이 되기로 했다. 해상왕국 시무인. 그곳은 누구나 인정하는 선진국이지만, 시무인 주변의 수많은 섬들에는 워프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시무인은 사마르 대수림과도 교역하고 있다. 사마르로 들어가는 엘프들의 보편적인 루트가 시무인의 무역선에 타는 것일 정도다.
“...군자금을 모으고... 동족도 늘릴 수 있어... 그래. 나쁠 건 하나 없지. 바다란 것을 빼면 말이야.”
“...아니면... 차라리 사마르에 들어가는 편이 어떠신지? 먼저 자리 잡은 동지들에게도 보고에 따르면, 척박하긴 해도 대업의 초석으로 삼기엔 나쁘지 않은 곳이라고...”
“헬무드의 간섭을 받는 부족이 너무 많아.”
뿌득.
아이리스는 필터를 씹으며 내뱉었다.
“...신세가 처량해졌군.”
다 피운 담배를 지져 끄고서, 아이리스는 풀어헤친 셔츠의 단추를 다시 잠겄다.
“...누아르 제벨라. 그년과 영지전에서만 승리했어도...”
몽마의 여왕.
아이리스는 헬무드를 등질 수 밖에 없던 이유를 떠올리며 입술을 씹었다.
몽마의 여왕
마경 헬무드. 이 제국은 인간이나 마족에게나 살기 좋은 국가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생활권을 보장받는다.
고위마족과 흑마법사들이 일으킨 오래된 언데드들. 그리고 마왕이 직접 상겨하는 수많은 마물들이 시민의 노동을 대신 해 준다. 덕분에 헬무드의 광활한 농경지는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황금색으로 물든다.
헬무드의 시민들은 화폐로 세금을 납세하지 않는다. 납세해야 할 것은 정기(精氣). 즉,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도 헬무드에서는 정기를 납세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단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욕심은 끝이 없는 법. 헬무드에 이주한 인간들은 사후 10년의 노동 조건으로 영혼을 저당잡히고, 헬무드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누린다.
마족들은?
그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마족들의 경우에는 인간처럼 쉽사리 영혼을 거래하진 않는다. 영혼의 계약과 가까운 마족들은, 영혼의 거래가 얼마나 위험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족들은 제 몸을 써서 직접 노동하는 것을 선호한다. 언데드와 마물 노동자가 편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헬무드는 의지를 가진 노동자를 박해하지 않는다. 노동을 바라는 자가 있다면 우선적으로, 반드시 일거리를 제공한다.
헬무드의 고용노동부는 그만큼이나 유능하며, 이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위대한 마왕폐하는 제 백성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해주신다.
그렇기에 이 건설현장은 언데드 노동자들 외에도 최하급의 마족들이 많았다. 그들은 오늘 노동의 일당으로 탁한 정기와 10만 셀을 받기로 했다. 물론, 최하급마족들이 바라는 것은 현금보다는 정기였다.
마족에게 있어서 정기는 힘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최하급 마족 따위와 계약을 맺고, 영혼과 정기를 제공하겠나?
그렇기에 고용노동부는 최하급마족의 노동일당으로 최저치의 정기를 제공할 것을 법으로 제정했다. 오오, 위대한 유폐의 마왕이시여!
“여엉차! 여엉차!”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노란 안전모를 쓰고, 작업용 점프슈트를 입은 여인. 낭랑한 기합을 노래하듯 외치며, 관망대 위에 올라 양손의 안전봉을 치어리더의 수술처럼 흔들며 춤추고 있는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이다.
“힘내라 힘! 힘내... 잠깐, 잠깐! 거기! 노닥거리지 말라구요! 아직 휴식시간이 아니라니까요!”
삐이익! 여인은 목에 걸고 있는 호루라기를 빽 불었다. 현장 구석에 주저앉아 한숨 돌리고 있던 최하급 마족이 몸을 일으켰다.
“...저 아가씨는 대체 누구야?”
“모르, 쉭, 모른다.”
“건설현장에 치어리더가 왜 있는 거지...?”
“인, 퀵, 간?”
“코무씨, 이상한 생각하는 것 아니지? 여기는 뒷골목 슬럼가도 아니고 하수구도 아니야... 인간한테 군침이라도 흘렸다간 고발당해서 영혼의 규제를 당한다고.”
“퀴익...”
“알지, 알아. 코무씨는 경험자잖아.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 거야. 가뜩이나 규제로 대화가 힘들어졌는데... 다음 규제로 아예 금언(禁言)을 당하면 얼마나 힘들겠어?”
“퀴이이...”
외눈박이 마족 가르갈씨의 말에 오물 슬라임 마족 코무씨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최하급 마족들은 그들처럼 인형(人形)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것이, 최하급마족은 저급마물이 자아(自我)를 가져 진화한 존재기 때문이다.
“여엉차, 여엉차!”
최하급마족들이 엉거주춤 일어나서, 다시 노동을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 뒤. 여인은 다시 안전봉을 붕붕 휘두르며 격려의 응원을 외쳤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에요!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점심은 오늘 아침 여러분들이 적어 제출한 설문지대로 준비될 거예요! 합법적인 선에서 말이죠!”
가끔 그런 마족이 있다. 못배워먹고 무식한 탓인지, 점심 메뉴 설문에 인육을 적는 머저리들.
그래서 여인은 ‘합법적인 선’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외쳤다.
“여러분의 바람대로 모든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이 현장의 의뢰주이자, 저희 드리밍 건설기업의 CEO이신 누아르 제벨라 공작님의 은덕 때문이죠! 자아, 노동자 여러분! 제벨라 공작님, 감사합니다! 한 마음으로 외쳐주세요!”
“...”
“제벨라 공작님!”
“감사합니다!”
숲 곳곳에서 퍼져 나오는 쩌렁쩌렁한 외침. 여인은 그 우렁찬 함성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곤 까마득하게 높은 관망대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참 대단하시군.”
관망대의 아래엔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넘긴,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서있었다.
어깨에는 금색의 견장.
가슴팍에는 화려한 훈장.
허나 이곳의 그 누구도 남자를 의식하지 않고 있다. 남자 뿐만이 아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노동자들은, 저 높은 관망대에서 뛰어내린 여자에게 아무런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무슨 말이죠?”
“낯짝이 두껍다는 말.”
“아하, 제벨라 공작님, 감사합니다. 이 외침이 듣기 거슬리셨나?”
여인은 머리에 쓴 안전모를 벗으며 말했다. 그러자 안전모에 도저히 들어가지 않을 것만 같은,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쏟아져 내렸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당신의 이름도 넣어줄 게요. 제벨라 공작님, 감사합니다. 린드먼 공작님, 사랑합니다. 이건 어때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 맑은 미소에 가비드 린드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걸 두고 한 말은 아니오. 당신이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그럼 무엇이 우리 린드먼 공작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이곳에 배식되는 식사는 영양만 맞추고 맛은 일절 신경쓰지 않은 죽으로 아는데?”
“입에 들어갈 때 행복하고, 맛을 느끼면 상관없는 것 아니겠어요?”
누아르 제벨라는 별들을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이는 눈을 빙그레 휘며 웃었다.
“그리고 영양은 확실하게 맞추고 있으니, 당신의 지적은 주제넘다 생각해요. 어쨌든 그들은 먹고 싶은 음식을 볼 것이고, 그 맛을 느끼며 먹을 테니까.”
환상의 마안.
현실과 꿈을 오가며 존재를 희롱하는 몽마들 사이에서도 전설처럼 내려오던 마안. 누아르 제벨라의 본래부터 강력한 몽마였지만, 오래 전에 돌연 두 눈에 환상의 마안이 깃들었다.
그때부터 누아르 제벨라는 몽마의 여왕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 수백 년. 그녀는 이 마경 헬무드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강력한 대마족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설마, 당신 정도 되는 인물이 노동자의 배식 문제를 따지자고 온 것은 아닐 텐데요? 애당초 나는 지엄하신 마왕님의 법을 어긴 적이 없단 말이야.”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을 찾아 온 것에 별 이유는 없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개인적인 호기심이지.”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그는 차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끄러운 소리들. 이 거대한 숲은, 누아르 제벨라의 뜻에 의해 벌목되고 있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허가는 진즉에 받았어요.”
“알고 있소. 이 숲은 얼마 전부터 당신의 사유지가 되었고, 이 숲에서 뭘 하든 그건 당신의 자유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가비드는 고개를 돌려 누아르를 응시했다.
“...그런데, 이 숲에서 대체 뭘 하려는 거요?”
“카지노를 세울 거예요.”
“...카지노 하나 세우기에는 부지가 너무 넓은데?”
“계속 숲으로 둬봤자 쓸 데도 없고. 그러니 아예 밀어버리려는 거죠. 일단은 카지노랑 호텔... 그 외에도 뭐 다양한 것을 세우려 해요.”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나를 대표하는 거대한 관광시설을 만든다는 거예요. 몽마들을 직원으로 배치하고서요.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도 배치하고, 날 소개하는 박물관도 세워볼까? 동상도 몇 개 세워놓고요... 아, 당신도 넣어줄까요? 아무래도 나 하나만으로는 구색 맞추기가 힘들 것 같은데.”
“...유폐의 마왕님이나 해드리는 것이 어떻소?”
“뭐하러 그래요? 유폐의 마왕님은 이미 헬무드 곳곳에 동상이 세워져있고, 공립도서관마다 마왕님의 업적을 기리는 위인전이 가득 꽂혀있는데.”
“숭배와 경외는 많아 넘쳐도 부족한 것이오.”
“그러니 나도 좀 갖겠다 이거예요. 어차피 내 땅에 날 위한 것을 만드는 건데, 문제없잖아요? 그리고 이 ‘제벨라 파크’는 장담하는데, 헬무드 제일의 관광지가 될 거예요.”
이미 이름까지 정한 건가.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이 작정하고 한다면 그렇겠지. 엄선한 기술의 몽마들만으로 직원을 배치한다면... 흠. 관광객들에게서 뽑아내는 정기의 양이 가늠조차 안 되는 군.”
“탈세는 안 할 테니 걱정마요.”
“그 문제에서 당신이 굉장히 깔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다만, 휘하 몽마들의 욕심이 과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제 밑의 아이들이 정기의 표준흡기량을 어겨 고발당한 적이 있던가요?”
“그 외에 욕심을 말하는 거요.”
가비드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누아르를 응시했다.
“...아하.”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3년 전에도 말했었지만, 올페르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않겠어요. 남작이나 됐으니 도가 지나쳐 버린 거죠.”
호인 올페르.
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던 인큐버스. 그는 3년 전에 이오드 라이언하트와 계약을 시도했었다.
사실 마족이 인간과 계약을 맺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라이언하트 본가의 장남. 라이언하트가 그를 문제삼아 발끈하니, 유폐의 마왕은 ‘친애하는’ 베르무트으 가문에 불쾌를 안겨준 것을 사과한다며 직접 올페르의 목을 베었다.
“설마, 얼마 전에 흑사자 성에서 있었다는 내분에 제가 관여했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죠?”
“전례가 있으니 말이오.”
“정말 억울하다니까. 전 올페르에게 라이언하트의 도련님과 계약하라 말한 적 없어요.”
누아르는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흑사자 성의 내란에 관여하지도 않았고요.”
흑사자 성의 내란에 대해 모든 것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본가의 장남, 이오드 라이언하트와 흑사자기사단의 도미닉 라이언하트, 방계의 헥토르 라이언하트. 그 3명과 방계 중에서 본가에 불만을 가진 가문의 종양, ‘프라이드’라는 조직이 흑사자성에서 사악한 의식을 벌이려 했다.
그 과정에서 방계의 데콘 라이언하트와 원로원주 도이네스 라이언하트가 사망했고, 일을 주동했던 이오드와 도미닉도 사망했다.
헥토르 라이언하트는 도주했고, 프라이드에 속한 가문들도 모습을 감췄다.
알려진 전말은 그게 전부다. 어둠의 정령과 마왕의 잔재, 그를 통한 마왕의 재림은 알려지지 않았다.
“애당초 제가 관여할 이유가 있나요?”
하지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이 긴 세월 살아 온 마족들은 이오드가 벌이려 했다는 끔찍한 의식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이네스가 죽고 도미닉이 가담했다. 그렇다는 건 분쇄추와 마창이 의식에 함께 했다는 것인데, 마법과 의식과 제물에 지식다운 지식도 갖지 못한 기사들이 어떻게 의식을 주동한단 말인가?
‘무언가’가 저 3명이서 의식을 벌일 수 있게 도왔다.
분쇄추와 마창이 그 장소에 있었다면, 의식을 이끈 존재가 무엇인지는 뻔하게 유추할 수 있다.
“300년 전 죽은 살육과 참혹의 마왕이 부활하는 것을, 제가 바랄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요?”
모든 마족은 언젠가 마왕의 좌에 오르는 것을 꿈꾼다.
그리고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는 수많은 마족 중에서도 마왕의 좌에 가장 가까운 마족 중 하나였다.
“300년 전부터 살아온, 살육과 참혹의 권속이라면 바랄 지도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충절을 버리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가비드 린드먼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자도 아니고, 누아르 제벨라의 입에서 저러한 말이 나온다는 것이 우습게 들렸다.
그녀의 말대로, 3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살아 있는 참혹과 살육의 권속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이 과거의 전장에서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힘을 잃었다. 300년이란 긴 시간동안, 달콤한 향락에 빠져 망가지고, 무너졌다.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누아르 제벨라였다. 그녀는 휘하 몽마들을 대거 보내 살아남은 전쟁영웅들을 위로하게 만들었고, 누아르 제벨라가 작정하고 간섭하니 마족들은 가진 힘을 담보로 계약까지 맺을 만큼 망가져버렸다.
“...확실히. 당신이 관여할 리는 없군.”
“정 의심할 대상이 필요하다면, 나 말고 용마성에라도 찾아가 보는 건 어때요?”
누아르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잘난 맛에 취한 드래곤께서 문을 열어 줄 것 같지는 않지만.”
“...용마성은 신경쓰지 마시오.”
“언제까지 내버려 둬야 할지. 나는 굉장히 자비를 베풀고 있는 거라구요? 마음 같아서는 그쪽도 확 먹어버리고 싶은데.”
“헬무드의 삼공은 3명이기에 의미가 있는 거요. 몽마의 여왕인 당신. 유폐의 칼인 나. 그리고 최초로 타락한 드래곤. 마왕폐하는 그 균형이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고 계시오.”
“아쉽네에, 참... 평생 드래곤을 맛볼 기회는 없을 것 같은데.”
누아르는 아랫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이 숲을 먹은 것으로도 부족한 거요?”
가비드는 숲을 둘러보며 말했다.
“설마 그녀가 가엾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본래 이 숲은 나찰공주 아이리스의 영지였다. 그녀는 300년 동안 이 숲에서 휘하 다크엘프들과 함께 생활하며, 광란의 독립군의 부흥과 광란의 재림을 위해 힘써왔다.
하지만. 얼마 전, 몽마의 여왕과 나찰공주는 서로의 영지를 걸고서 영지전을 벌였다.
“내 쪽에서 살살 긁었던 것은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저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아이리스, 그녀는 제 종족이 떳떳하지도 않은 주제에... 날 보고 갈보들의 여왕이니 하면서 비웃었다니까요?”
마족 간의 영지전이나 서열잡이 같은 결투는 흔하게 일어난다.
300년 전만 하더라도 마족들은 무차별적으로 대륙을 찢어발기려던 정복자들이다. 지금이야 다른 종족과 어울려 지내고 있지만, 마족들은 다툼이란 누군가의 중재를 받는 것보다는 힘과 힘으로 부딪쳐 해결하는 것이 간단하고 올바르다 생각한다.
그래서 누아르 제벨라와 아이리스도 영지전을 벌였다. 300년 간의 앙금이 결국은 터져버렸다? 그것도 있지만, 누아르 제벨라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아이리스는 최근부터 수인들 용병을 거느리기 시작했고, 다크엘프에 대한 집착도 버리기 시작했다.
사실 아이리스 딴에도 시도해 볼 법한 일이긴 했다. 아이리스가 가진 영지는 이 숲이 전부. 반면에 누아르 제벨라의 공작령은 헬무드에서도 크고 부유하기로 손에 꼽힌다. 만약 영지전에서 승리한다면 아이리스가 그 공작령을 통째로 갖게 되니, 모험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내게 평생 감사해야 할 거예요.”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압승이었다고 들었소.”
“구경꾼은 따로 두지 않았었지만... 당신이 바랐다면 예외로 참관을 허락했을 텐데.”
“뻔한 승부를 보는 것에 무슨 재미가 있겠소?”
“그래도 약하지는 않았어요. 300년 동안 꽤 열심히 한 것 같기는 하더군요. 마왕의 좌를 넘볼 정도는 아니지만.”
“...헬무드를 떠난 아이리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들었소?”
영지전에서 패배한다고 하여 헬무드를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리스는 다크엘프들을 데리고서 헬무드를 떠났다. 굴욕감? 아마 그것도 있겠지만, 하나 뿐인 영지를 통째로 빼앗겨버렸으니 당장 헬무드에서 생활이 힘들다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헬무드에서 다크엘프의 인식은 그리 좋지 않다. 나찰공주 본인이 자존심이 강하여 적이 많기도 했다. 영지를 잃었으니 다른 마족의 영지에 의탁해야 할 텐데, 아이리스의 성격으론 죽어도 머리 숙여 들어가기 싫었던 것이다.
“키옐에 밀입국해서 라이언하트를 상대로 인질극을 시도했다는 군.”
“제정신이 아니네요.”
누아르는 풋 웃으며 안전모를 다시 머리에 눌러썼다.
“인질극이라면... 그 유진 라이언하트?”
“당신도 이름을 기억하는 모양이군.”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하찮은 이름은 아니잖아요? 아크리온의 출입자격을 최연소로 획득하고, 그 세냐에게 아카샤의 소유권을 양도받았다던데.”
“...세냐 메르데인. 그녀가 정말로 살아있다 생각하오?”
“수백 년 동안 주인이 없던 아카샤가 양도되었으니, 살아있다 생각해야겠죠.”
내려놓았던 안전봉마저 집어 들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닌 것 같죠? 만약 몸이 멀쩡했다면, 수백 년 동안 침묵하지도 않았을 거고... 진즉에 헬무드에 처 들어와서 마왕님의 암살이라도 시도했을 것 같은데.”
“불경한 말은 마시오.”
“그렇잖아요? 세냐 메르데인. 그녀가 얼마나 강하고 마족을 증오했는지는 당신이나 나나 직접 겪어보아 잘 아는데. 특히 전 몇 번이나 세냐 메르데인의 마법에 위기를 겪었다고요.”
작업용 점프슈트 위에 안전조끼까지 걸치고,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가비드를 돌아보았다.
“하긴. 당신은 세냐보다 하멜 다이너스를 더 기억하려나?”
“...사자를 모독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죽음은 다행스런 일이었지.”
가비드는 오랜 기억을 더듬었다. 하멜 다이너스와의 첫 만남. 그 자리에는 세냐 메르데인도 있었다. 둘은 정찰을 위해 일행보다 앞선 곳을 탐색하고 있었고, 우연히 가비드와 만났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이려 했지만, 죽이지 못했다.
다행히 그때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할 일은 없게 되었다. 유폐의 마왕성. ...하멜 다이너스는 그 꼭대기에 오르지 못하고, 도중에 쓰러졌다.
“...만약 그 하멜이 살아남았다면... 약속이 맺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지. 그는 베르무트의 동료 중에서도 유일하게, 베르무트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성격이 더럽기는 했죠. 그래서인지 일찍 죽었고.”
가비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누아르는 사라지려는 가비드를 빤히 보다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리스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상대로 인질극을 시도했다고 했죠?”
“그렇다는 군.”
“미수로 끝났다는 건,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이리스를 밀어냈다는 뜻?”
“...아마 그렇겠지.”
“라이언하트의 장남에게는 별 욕심이 안 났는데... 후후. 그 유진 라이언하트에게는 꽤 욕심이 드는 걸요. 언제 한 번 헬무드에 놀러와 주지 않으려나? 아니면 서큐버스 업소라도 들르던가.”
“...허튼 짓은 마시오.”
가비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외전, 만남
“시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 그게... 몇 번이나 말하고 있지만, 고집 부려서 될 일이 아니...”
“항구에 배가 이렇게 많이 있는데, 출항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콰앙! 목제테이블이 부서질 듯이 흔들렸다. 그 폭력적인 시위에 접수원의 몸이 덜덜 떨렸다.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강렬한 압박감. 접수원은 눈앞의 남자가 테이블을 부수지 못한 것이 아닌, 부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아무리 억지를 부리셔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억지? 진짜 억지가 뭔지 보여줘? 시팔 내가 여기 오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냥 가서 마음에 드는 배 올라타서 닻줄 끊어버리고 출항하는 수가 있어.”
“제발... 상황의 이해를...”
필사적으로 잇던 말이 뚝 멈춘다. 바로 앞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살벌한 안광이 심장을 꽉 옭죄는 듯 했다. 접수원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예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그만큼 세상이 끔찍해졌다는 거겠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죽거림.
접수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남자는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어디서 개새끼가 짖나 했는데.”
남자는 웃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흉터 하나 없이 말쑥한 얼굴의 젊은 기사들. 열심히 닦고 기름까지 칠한 갑옷이 빛을 발했다.
“개새끼가 아니라 귀여운 강아지들이었네?”
“...뭐라고?”
저속하기 짝이 없는 비웃음에 기사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가슴에 새겨진 기사단의 문양. 튜라스의 실버윙 기사단이다. 그 문양에 남자는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딱 보니까 최근에 간신히 견습 딱지 땐 허접들 같은데, 너희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냐? 너희 단장 저번에 다리가 썩둑 잘렸잖아.”
“...무슨 말을...”
“가서 평생 휠체어 신세 질 단장 똥오줌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남자는 킬킬 웃으며 접수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며칠 전의 전투에서 용병길드 건물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탓에, 의뢰의 임시 접수대가 노상에 설치되어 버렸다. 덕분에 이런 시비가 걸린 것이다.
“용병 새끼가 미쳐가지고...!”
거듭 된 모욕. 젊은 기사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 모습에 접수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주변을 지나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관중이 되어갔다. 불과 며칠 전에 대규모 전투를 겪었지만, 그 끔찍한 전장에서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봐도봐도 즐거운 법이다.
“칼 뽑았네? 이제 다음은 뭐, 손수건이라도 던질래? 아니면 장갑?”
남자는 킬킬 웃으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대뜸 제 코를 부여잡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킁킁... 어휴, 젖비린내... 애기들아, 칼 그렇게 쥐는 거 맞니? 응? 칼로 사람 썰어본 적은 있고? 애당초 너희들, 나 조지려고 칼 뽑은 거 맞기는 해? 응? 대충 기사랍시고 폼 잡고서 칼 뽑으면, 용병 새끼는 알아서 설설 기지 않을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검을 뽑아라!”
일행의 리더 격으로 보이는 젊은 기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외침에 남자는 킬킬 웃으면서 접수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멈춰 선 구경꾼들 중에서는 용병과 기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고, 저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 기사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용병들은 이후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몸을 떨었고, 기사들은 괜히 휘말려 시비의 대상이 되거나 불똥이 튀기기 싫어 몇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검?”
남자는 실실 웃으며, 몸에 걸치고 있는 헤진 망토 안으로 양손을 집어넣었다. ...애당초 검사가 맞기는 한가? 남자를 에워싼 기사들의 머릿속에는 그런 의문이 오갔다.
철컥.
망토 안에서의 쇳소리. 작은 소리였지만 기사들은 움찔하고서 뒤로 물러섰다. ...의도치 않은 반응이었다.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검을 휘둘러야 했다. 분명 그러고자 했는데, 몸이 멋대로 뒷걸음질을 쳐버렸다.
“골라라.”
쿵.
남자가 망토를 들췄다. 그러자 몸에 차고 있던 다양한 무기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길이가 각각 다르고 종류가 다른 검만 해도 서넛에, 묵직한 손도끼와 한 손으로 다룰 수 있는 단창, 채찍, 플레일... 그 외에도 무기가 다양했다. 저만큼 많은 무기를 몸에 차고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보다시피 나는 검 말고 쓰는 것들이 많거든. 뭐 원하는 무기라도 있으신가?”
“...같잖은 허세를...!”
“허세? 으으음, 그래. 직접 고를 생각은 없다는 거지? 그렇다면 내가 적당히 골라주지.”
아직 꺼내지 않은 무기가 있는 것인지, 남자는 활짝 핀 양손을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그를 지켜보는 기사들의 눈동자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오싹거림이 피부를 저릿거리게 만들었다.
“이건 어떠냐?”
남자는 뺨의 칼자국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망토에서 뽑아낸 양손. 기사들은 헉하고 숨을 삼키며 다시 뒤로 물러섰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우뚝 솟은 가운데 손가락.
남자는 양손의 엿을 흔들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 하나씩도 너무 과한가?”
“이...”
관중들이 웃음을 터트렸고, 기사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른 굴욕과 분노가 영문 모를 공포를 밀어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정말 저 녀석이야?”
먼 건물의 옥상.
큼직한 모자를 쓰고, 로브로 몸을 감싼 마법사가 눈가를 콱 찡그렸다.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로부터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저 광경을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가까이 보며, 오가는 대화마저 똑똑히 들었다.
“저는 마음에 안 듭니다.”
남자를 지켜보는 것은 마법사 뿐만이 아니었다. 흑백의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도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실력은 둘째 치고 사람이 너무 저속합니다. 신께 맹세하건데, 저 남자는 제가 평생 보았던 용병 중에서 제일로 꼽을 만큼 예의가 없습니다.”
“...애당초 실력도 그냥 그렇지 않아?”
마법사가 성직자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난간 위에 올라가서 바람을 맞고 있던 거구의 전사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사내의 실력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너는 왜 거기 올라가 있는 거야?”
“그의 움직임이 내 피를 달구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내가 가진 전사의 혼이 저 사내와 겨루고 싶다 외치고 있다.”
“개소릴랑 하지 말고 내려오십시오. 당신의 거구를 받치고 있는 난간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성직자는 찌릿 눈을 흘기며 전사의 등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전사는 대꾸하는 대신 감탄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력이 뛰어나단 것은... 음... 알겠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마법사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저 용병. 강한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 강함이란 것은 마법사가 가진 상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부족합니다.”
성직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몸을 삐딱하게 기울여 난간에 걸치고, 허리에 걸고 있던 자그마한 성수병을 들어올렸다.
“베르무트님. 저는 왜, 당신이 저 용병을 동료로 받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는 일행보다 몇 걸음은 뒤에 있었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잿빛 머리카락. 황금을 세공한 것처럼 반짝거리는 금색 눈동자. 그의 용모는 남자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으나, 유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저희는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스 슬리우드.
그녀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성수를 입술로 가져갔다. 한 모금만으로도 속을 불태우는 것만 같은 독한 성수을 몇 모금이나 들이킨 뒤, 아니스는 얇게 뜬 눈으로 베르무트를 돌아보았다.
“전위(前衛)는 모론 하나로 충분합니다. 베르무트님. 당신은 저 용병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까? 저 용병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동료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나도 아니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앞으로 기울어진 모자를 위로 들추며 말을 이었다.
“나야 체술에는 별 재주가 없지만, 저 용병이 모론보다 든든해 보이지는 않아. 모론보다 무식한 것 같기는 한데... 등신이 한 명 더 늘어서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지?”
“나는 등신이 아니다.”
“저 용병이 모론만큼 앞에서 잘 막지 않는다면, 놈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건데? 전투? 베르무트 네가 있는데, 우리한테 전투원이 더 필요하긴 해? 아니면 저 용병이 보기완 다르게 신실한 성직자라도 되나?”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아니스가 난간에 내려놓은 성수병에 슬며시 손을 뻗었다.
“우리 성수중독자 성녀님보다 신실하며, 더 멋진 기적을 일으키는 성직자라면... 흐흥, 받아주는 것도 괜찮...”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찰싹! 아니스의 손이 세냐의 손등을 매섭게 후려쳤다.
“저는 빛의 성녀. 이 세상에 저와 조금이라도 근접하는 믿음을 가진 성직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베르무트님의 여정에 함께하는 것이죠.”
“한 모금만 주면 안 돼?”
“안 됩니다.”
그 단호한 거절에 세냐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무시할 사내는 아니다.”
모론 루하르.
그가 난간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저 사내. 공격과 언동은 투박해 보이지만, 몸놀림은 물흐르는 것처럼 매끄럽고 유연하게 이어진다.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 낼만큼의 무수한 사선을 넘어 완성시킨 무예... 그것뿐만이 아니군.”
“뭐가 아니라는 건데?”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저 사내의 기술은 무언가 독특한 기질이 섞여 있다.”
“모론 너, 베르무트한테 미리 부탁받은 거지? 응? 베르무트가 자기 편 좀 들어달라고 그런 거야?”
“베르무트는 그런 부탁은 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렇겠지. 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베르무트를 힐긋 돌아보았다. ...그 베르무트가 이런 납득 안 되는 고집을 부린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여러 영웅들을 보았고, 그들 중에서는 베르무트에게 감화되어서 동료로 받아 달라 청했던 인물도 있었다.
‘... 왜 고작 용병 나부랭이를 동료로 삼으려는 거야?’
저 용병도 용병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긴 했다. 온갖 무기를 능숙히 다루고, 그 어떤 혹독한 전장에서도 살아 돌아오는 젊은 용병. 소속된 용병단도 없고, 부하를 이끌지도 않고, 높은 보수보단 마물이 그득한 전장만을 찾아 헤매는 전장의 귀신.
하멜 다이너스.
“...내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베르무트의 입술이 열렸다. 그는 난간에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너희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을 거다.”
“...베르무트님.”
“아니스. 네가 말했지. 저 용병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내가 그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저곳에서의 싸움은 이미 끝나있다.
하멜을 에워싼 7명의 기사들은 각각 팔다리가 하나씩 부러져서 바닥에 널브러졌고, 하멜은 그들이 떨어트린 검을 챙겨들고서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대놓고 무기를 빼앗고 있는데, 구경꾼들은 누구 하나 하멜을 저지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나도 잘은 몰라. 하지만, 바라는 것은 확실히 있지.”
“...네?”
“나는 그가 우리와 함께 싸우길 바란다.”
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에 아니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스 뿐만이 아니었다. 슬금슬금 아니스의 성수병을 노리던 세냐도 행동을 멈췄고, 가장 오랫동안 베르무트와 함께 떠돌았던 모론은 입을 쩍 벌렸다.
“당장은 그의 실력이 못미더울 지도 몰라. 하지만, 그는 빠르게 우리의 뒤를 쫒아올 거다.”
“...뒤를 쫒아오는 것으론 부족해. 베르무트,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는 헬무드에 갈 거고, 거기서 마왕을 죽일 거야.”
세냐는 놀람을 가다듬으며 손을 뻗어 하멜을 가리켰다.
“고작 애송이 기사 몇 명 쓰러트리고, 검이나 강탈하는 놈이... 우리와 함께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싸울 수 있다. 그는 순식간에 우리의 곁에 설 수 있게 될 거다.”
“...베르무트님. 그건... 신탁입니까?”
아니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베르무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신탁은 아니다. 내... 억지일 뿐이지.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동료로 삼을 거고, 최선을 다해 너희를 납득시킬 생각이다.”
“...으으!”
세냐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그래서 뭐야? 계속 여기서 보고만 있을 거야? 동료로 삼을 거면, 가서 말이라도 걸어야 할 것 아니냐고!”
“가서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고, 힘을 겨룬다. 쓰러진 상대를 일으키고 술을 마신다. 그렇게 하면 친구가 될 수 있다.”
“...저는 더 이상 무식한 등신 친구를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스는 여전히 납득도 되지 않고,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베르무트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싫다고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건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일행 중에서 베르무트의 억지를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모론 뿐이었다.
‘...뭐가 있다는 거야?’
저 등신같은 모론이 무언가를 느꼈단다. 전사의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긴 하다는 건가? 하지만 세냐와 아니스는 하멜에게서 그 무엇도 느낄 수가 없었다. 행동거지가 거치고 저질스런 용병. 둘이 보는 하멜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희는 또 뭐야?”
멀리서 보았을 때도 그랬는데,
가까이 와서 본들 무어가 달라질까. 세냐는 미덥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하멜을 내려다보았다.
“왜 갑자기 날아와서 사람을 내려 보고 지랄이시냐고.”
초면인 사람들에게 너무 건방진 것 아닌가? 세냐는 눈가를 씰룩거리며 하멜을 노려보았다. 왼쪽 뺨에 새겨진 커다란 흉터. 그 외에도 얼굴에는 자잘한 흉터들이 여럿 있었다. 치켜 뜬 눈은 척 보기에도 성격의 더러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나웠다.
“하멜 다이너스.”
하늘에 떠있던 베르무트가 먼저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바람에 흔들린 잿빛머리를 손으로 누르면서 하멜에게 다가왔다.
“밥은 먹었나?”
“...뭐?”
대뜸 베르무트가 던진 말에 하멜과 모두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직 먹지 않은 것 같은데, 함께 식사라도 하지.”
베르무트는 그렇게 말하며 빙글 몸을 돌렸다.
만남
식사?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가버린다. 하멜의 성격이라면 저 뺀질거리며 무례한 뒤통수를 한 대 갈겨도 이상하지 않을 터이나, 베르무트에게서 전해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하멜의 폭력성을 억눌렀다.
하멜은 그것이 어떤 감각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싸우면 무조건 패배할. 가급적이면 엮이지 말아야 할.
“씨발.”
그리고 하멜은 자기 자신이 그딴 것에 휘둘린다는 것에 짜증을 느꼈다. 적의를 내비친 것도 아니고, 전장에서 만난 것도 아니다. 그냥 길거리에서, 아니, 저 놈이 일방적으로 찾아왔다. 그리곤 대뜸 밥을 먹으러 가잰다.
아니.
그래서 네가 누군데? 하멜 다이너스. 어, 그래. 내 이름 그거 맞는데. 왜 시발 자기소개는 안 하는데? 너희 둘은 뭔데 하늘에서 내려와서, 존나 띠껍고 꼽다는 눈으로 날 꼬라보는 거고, 저 덩치 크고 근육 우락부락한 새끼는 왜 낯짝에 안 어울리게 눈망울을 반짝거리는 건데?
툭.
하멜의 발에 돌멩이가 걸렸다. 마치 하늘이 점지해준 것처럼, 돌멩이는 걷어차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이런 곳에 돌멩이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하멜은 천천히 멀어지고 있는 베르무트의 뒤통수와, 못마땅하다는 분위기를 폴폴 풍기면서 뒤따라가는 세냐와 아니스의 등을 노려보았다.
모론은 아직 하멜의 곁에 있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하멜을 내려다보았고, 그 몸뚱이가 오롯이 투쟁으로만 개발되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이 몸뚱이가 얼마나 유연하고 변칙적인 움직임을 보일지를 상상했고, 그 상상은 자연히 모론의 머릿속에서 ‘대결’이 되었다.
‘강하지만 내가 이겼다.’
이긴다가 아니라 이겼다. 모론은 이미 머릿속에서 결론을 냈고,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북방 바야르 부족의 용맹한 전사, 설원의 아들. 그는 새로이 동료가 될 하멜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함께 가자.”
갑작스럽기도 하니 당황한 모양이다. 모론은 앞으로 동료가 될 하멜과 사나이다운 멋진 우정을 쌓고 싶었고, 그래서 조금 이른 친애를 담아 하멜의 어깨를 두드리려 했다.
그 순간.
하멜은 냅다 돌멩이를 걷어 차 버렸다. 노리는 것은 당연히 베르무트의 뒤통수였다. 얻어맞는다면 머리가 퍽, 하고 터질 만큼 강하게 찼다.
맞을 리가 없다.
걷어차기 직전에도, 걷어 찬 후에도. 하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하멜이 걷어 찬 돌멩이는ㅡ 고작 한걸음 거리를 날아간 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허.”
하멜은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날아가던 돌멩이가, 정교하게 조작 된 마나에 휘감겨 소멸해 버렸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빨랐기에, 돌멩이는 처음부터 날아간 적 없는 것처럼 보였을 정도다.
“...허허.”
저만큼 앞서 걸으면서, 아무런 전조 없이 마나를 조작했다. 고작 돌멩이 하나 막는 것에는 사치스런 기예. 짓궂은 장난이 시도한 즉시 가로막혔지만, 하멜은 굴욕보다는 흥미를 느꼈다. 하멜도 마나의 조작은 예전부터 자신이 있었지만, 방금 베르무트가 보여준 것처럼 은밀하고 정교하게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대뜸 식사나 하자던 말은 따르고 싶지 않았다만, 저걸 해놓고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꼴이 하멜로 하여금 걸음을 뻗게 만들었다.
“세냐.”
베르무트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벌려 자그마한 소리로 세냐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 마.”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세냐는 쯧 혀를 차며 마법을 흩트렸다. 그러자 눈앞에 있던 날카로운 칼날이 마나로 변해 사라졌다.
“용병이 무식하단 것은 알지만, 저 새끼는 그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무식한 것 같은데? 베르무트, 알기는 해? 저 새끼가 네 머리를 깨부수려 했단 말이야.”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
“너 잘났다. 내가 뭐 할 것도 없이 알아서 척척 잘 막더라. 그런데? 난 저 새끼가 마음에 안 드니까 일단 땅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데. 그건 내 자유지?”
“세냐.”
“알았어, 알았다고.”
세냐는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대신에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그러면서 곁을 걷는 아니스를 힐긋 보았다. 아니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지만, 세냐는 아니스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거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상인은 나 뿐이라니까.’
평소 아니스는 베르무트에게 꼬박꼬박 님 자를 붙이며 섬기고 있지만, 내심 하멜이 걷어 찬 돌멩이에 베르무트가 한 대 얻어맞기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베르무트가 하멜을 안내한 곳은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식당이었다. 으레 이런 거리의 식당에는 낮부터 술을 빨아대는 용병들이 몇몇 있는 법이고, 실제로 식당 안에는 험상궂은 용병들이 모여앉아 시끄러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식당은 그 용병 일행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왜 굳이 이런 식당을? 세냐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베르무트를 힐긋 보았지만, 곧 이 식당을 고른 이유를 깨달았다.
음흉한 눈초리로 세냐와 아니스를 보며 휘파람을 불어대던 용병들은, 뒤따라 들어 온 하멜의 얼굴을 본 순간 악마라도 맞닥트린 것처럼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하멜은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시선조차도 건네지 않았지만, 용병들은 들고 마시던 술병을 조용히 내려놓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은 하고 가라.”
하멜은 식당을 나가려던 용병들에게 툭 말을 던졌다.
“너희 때문에 대낮 장사 조진 주인장한테 팁도 두둑하게 얹어 드리고.”
“예, 예에...”
“기왕 돈 더 주는 거 내가 지금부터 먹을 밥값도 미리 계산들 해주면 참 고맙겠네.”
“알겠습니다...”
결국 용병들은 어쩔 수 없이 가진 돈주머니를 통째로 계산대에 올려놓고 떠났다. 하멜은 베르무트가 앉기 전에 먼저 빈 자리를 골라 엉덩이를 걸쳤다.
“너 쓰레기구나?”
세냐는 여전히 하멜이 못마땅했다. 그녀는 삐딱하니 고개를 기울이고서 하멜을 쏘아보았다.
“너도 용병이고 쟤들도 용병이니까, 같은 동업자 아냐?”
“동업자끼리 정이 있으니까 서로 밥값도 내주고 그러는 거지. 언젠가 나도 저 새끼들 밥값 내주면 되는 것 아냐?”
“퍽이나 그러시겠네.”
“오늘, 아니, 방금 처음 만난 사람한테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아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머리카락은 왜 보라색으로 물들인 거냐? 전장에서 잘 좀 알아봐 달란 뜻인가?”
“물들인 것 아냐!”
세냐는 눈가를 콱 찡그리면서 모자를 벗었다. 그녀는 홱 고개를 숙여서 정수리의 모근까지 보여주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보라색이었어! 멍청한 용병인 넌 모르겠지만, 나처럼 마나와 마법에 사랑받는 존재는 그 은혜가 체질에 녹아드는 법이라고!”
“마나의 은혜가 머리카락이 보라색이 되는 거라니... 참 하찮은 은혜로군.”
죽일까? 세냐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하멜을 노려보았다.
“입이 참 험한 분이시군요.”
아니스는 두 눈을 얇게 뜨고 하멜을 응시했다. 낡고 헤진 망토. 얼굴의 흉터. ‘깔끔함’이라고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 외견에, 내뱉는 말씨마저 험악하다.
“베르무트님. 정말로 저 용병이어야만 하는 겁니까?”
“아까도 말했을 텐데.”
“하멜은 나보다 약하지만 강하다. 직접 겨뤄보는 것이 확실하겠지만, 나는 아직은 어색해 할 하멜과 겨뤄, 그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전사는 같은 전사를 존중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하멜의 옆에 앉은 모론이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그 뜬금없는 말에 모두가 모론을 쳐다보았다.
“...이 무식하게 생긴 놈은 갑자기 왜 등신 같은 말을 하는 거야?”
“야! 네가 뭔데 모론보고 등신이라고 하는 거야?”
세냐는 기회를 잡았다 싶어 곧장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마나를 드러내어 하멜을 압박하고, 로브 아래에선 마법지팡이 아카샤까지 쥐었다. 만약 하멜이 아까처럼 돌발적인 공격을 한다면,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상하관계를 깨닫게 해 줄 생각이었다.
“등신처럼 굴기에 등신이라 하는 것이 무슨 상관... 아니, 잠깐. 모론? 베르무트?”
하멜은 뒤늦게 그 이름을 깨닫고서 홱 고개를 돌렸다. 등신 소리를 여러 번 듣기는 했지만, 모론은 불쾌해하지 않고 주방을 빤히 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주문한 요리가 언제쯤 나올까 뿐이었다.
“...모론 루하르. 설원의 아들.”
“내 용맹을 아는가?”
하멜의 중얼거림에 모론은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하멜은 이미 모론에게서 시선을 때어, 맞은편의 베르무트를 보고 있었다.
“...거기에 베르무트...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성검의 주인, 빛의 용사?”
“그렇게 불리고 있지.”
베르무트는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쯤 되니 하멜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왜 알아보지 못했지? 이 4명. 한 명 한 명만 뜯어보아도 독특하기 짝이 없는 모습들 아닌가.
아름답고 풍성한 금발의 사제. 언제나 웃고 있는 것만 같은 자애로운 얼굴. 그런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허리에는 묵직한 메이스를 매달고 있다. 이런 시대다 보니 무장한 성직자는 드물지 않으나, 갑옷은 입지 않고 사제복을 고집하며 보란 듯이 메이스를 패용한 성직자는 흔하지 않다.
‘...빛의 성녀, 아니스 슬리우드.’
아까부터 틱틱 시비를 걸어대는 마녀. 마음에 안 든다는 속내를 숨길 생각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시건방진 얼굴. 염색으로 물들인 것이 아닌, 강대한 마나에 의해 변해버린 보라색 머리카락. 숲을 연상시키는 녹색 눈동자.
‘대마법사, 세냐 메르데인.’
하나같이 유명한 인물들이다.
모론 루하르. 북쪽 혹한의 땅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 중에서도 전투부족으로 이름 높은 바아르 부족 대족장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근방 마물과 마족들의 머리를 으깨고 다니던 바야르의 대전사다.
아니스 슬리우드. 신성제국 유라스가 세간에 드러내지 않던 빛의 성녀. 성직자 수십 명이 모여 내뿜는 빛보다 아니스 혼자서 내뿜는 빛이 더욱 강렬하며 환하다고 했다. 그녀가 일으키는 신성마법은 기적의 실현이라 불리며,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맹인의 눈을 밝게 하며, 떨어져나간 팔다리마저도 순식간에 붙여낸다.
세냐 메르데인. 인간이되 엘프들의 손에서 키워진 젊은 마녀. 그녀는 돌연 사마르 대수림을 떠나, 몬스터와 마물이 날뛰는 전장에 강림했다. 그녀는 천재(天災)의 화신과 같았고, 지팡이가 빛을 뿜을 때마다 벼락과 폭풍과 불꽃이 지면을 휩쓸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북쪽 아샬왕국의 생존자. 열다섯의 나이에 마족의 포로가 되어, 마경 헬무드로 이송되던 중... 검 한 자루로 노예들을 구출하고, 모론과 함께 근방의 마족들을 멸절시킨 괴물. 그 후에 신성제국으로 건너가, 성검의 인정을 받은 빛의 용사.
“...이거 참.”
하멜은 입가를 씰룩거리며 웃었다. 모두가 몇 번이나 들어보았던 유명한 영웅들. 소문은 무성했지만,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유명한 빛의 용사님과 동료들이... 이 보잘 것 없는 용병새끼는 왜 찾아오셨대?”
“주제파악은 확실히 하는 구나. 난 네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데, 주제를 알고 숙일 줄 아는 면은 조금 마음에 들 것 같아.”
세냐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한 대 때릴까... 때려도 되나? 하멜은 식탁 아래의 주먹을 쥐었다 펴며 세냐를 노려보았다.
“서로를 헐뜯는 것은 그만두지.”
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끓어오르려던 식탁의 분위기를 한 순간에 가라앉혔다.
“슬슬 음식이 나오고 있으니.”
“오오.”
모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대뜸 식탁을 통째로 잡아들더니, 뛰는 걸음으로 주방으로 가버렸다. 일일이 접시를 들고 와 식탁에 옮기는 것보단... 식탁을 통째로 쟁반삼아 옮기는 것이 편하긴 할 것이다.
“미친놈이군...”
“모론은 친절한 겁니다.”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성수의 뚜껑을 열고서 가볍게 흔든 뒤, 마개에서 올라오는 향에 코를 가져갔다.
“그가 정말로 등신이라서 당신의 등신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습니까? 모론이 당신처럼 야만스런 성격이라면, 등신이란 욕을 들어먹었을 때 가만히 웃기만 했을 것 같습니까?”
“그럼? 내 머리라도 박살냈을까?”
“대답은 스스로 구해보십시오. 당신도 바보가 아니라면 알고 있을...”
콰득! 뒤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보니, 식탁이 모론의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진 소리였다. 그렇게 식탁에 올라갔던 요리들이 아래로 떨어지는데, 모론은 그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접시들을 하나하나 받아내고, 던져버렸다.
허공을 날아 온 접시들이 옆자리의 식탁에 올라간다. ...쿠웅! 그리고 건물이 가볍게 흔들렸다. 모론이 선보인 격렬한 움직임이 바닥에 몇 개나 되는 깊은 발자국을 남겨버렸다.
“수... 수리비는 베르무트가 준다.”
“...등신 같으니...!”
아니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로 등신이라서 등신 소리를 듣는 것 같은데.”
“...설령 그럴 지라도, 하멜, 당신에게 모론을 등신이라고 할 자격은 없습니다. 모론을 등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론의 친구와 동료뿐입니다.”
“맞아! 네가 뭔데 자꾸 모론보고 등신이라고 해? 모론이 등신이 맞다고 해도, 네가 모론을 등신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야. 알겠어?”
“너희 대체 뭘 하고 싶어서 날 여기로 데려 온 거냐?”
하멜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그렇게 물었다. 오가는 대화를 잠자코 듣던 베르무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모론이 옆자리의 식탁을 앞으로 옮겨왔을 때.
“하멜 다이너스. 내 동료가 되어 줄 수 있겠나?”
갑작스런 말.
모론은 대화에 관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일행의 중앙에 식탁을 내려놓고, 즉시 테이블의 큼직한 돼지뒷다리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세냐가 모론의 손등을 철썩 때렸다.
모론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론의 큼직한 양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그러자 세냐는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어 원을 그렸고, 모론의 양손이 보글거리는 거품과 물에 감싸였다.
그렇게 손을 씻은 뒤, 모론은 다시 돼지뒷다리에 손을 뻗었다. 짜악! 이번엔 아니스가 모론의 뺨을 후려쳤다. 그 갑작스런 일격은 모론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아니스는 부릅 뜬 눈으로 모론을 노려보며, 냅킨을 촥, 펼쳐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어 모론에게 펼쳐보였다.
“...음...!”
모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니스가 했던 것처럼 냅킨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모론의 허벅지가 워낙 두꺼워, 냅킨은 다리 한 짝마저도 가리지 못했다. 그리고 커다란 양손이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든다. 도저히 손으로 잡힐 크기가 아니라, 손가락을 집게처럼 사용해 포크와 나이프를 쥐어야만 했다.
끼익, 끼이익...
모론은 울적한 눈으로 고기를 나이프로 썰기 시작했다. 그가 나이프를 움직일 때마다 낡은 테이블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이프질. 모론에게 ‘매너’를 가르치는데 전념하는 세냐와 아니스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셋이 그러는 동안.
하멜은 베르무트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동료가... 되어달라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고 있다. 베르무트, 세냐, 아니스, 모론. 저 넷은 현재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들이며, 마족의 대군과도 일전을 벌일 전투력을 가진 파티였다.
하멜은.
이 항구를 통해, 헬무드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튜라스 국토에서의 전쟁은 대부분이 종결되었다. 마족과 마물은 헬무드까지 물러났고, 몬스터들은 더 이상 군을 꾸리지 못할 만큼 말살되었다. 이 땅에서 더 이상 하멜이 참가할 전장은 없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하멜은 더 많은 몬스터와, 마물과, 마족을 죽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말살해 버리고 싶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그딴 멋들어진 사명감은 없었다. 그냥, 싫어서. 죽이고 싶어서. 꼴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 마물도 마족도 마왕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다.
그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하멜의 마음을 헬무드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곳에는 매일 전투가 끊이질 않는다. 대륙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고 있지만, 헬무드의 군세는 매일매일 인간으로 시체의 산을 쌓는단다.
하멜은 여태까지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그냥 강해서. 다른 하나는 천재라서. 다른 하나는, 운이 좋아서. 어쩌면 헬무드에 가면 더 이상 운이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강하고, 천재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죽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오래 전에 죽었어야 할 목숨. 운 좋게 살아남았고, 그것에 감사하고 사는 것보다는 복수와 증오에 눈을 뒤집고 욕망대로 살고 싶었다. 설령 헬무드에서 죽을 지라도, 하나라도 많은 마족과 마물을 죽이고 간다면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료라.”
하멜은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그 유명한 용사, 베르무트의 동료가 된다면.
헬무드에서 보다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하멜은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어 줄 용의가 있었다.
“그건 상관없는데. 나는 나보다 좆밥 새끼의 말은 듣고 싶지 않은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눈앞의 4명, 모두가 내비치는 태도다. 마치 너 따위는 아무 필요도 없다는 것만 같은. 그 모론마저도 자신이 하멜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세냐와 아니스는 하멜이 왜 동료가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멜은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희가 잘나봤자 얼마나 잘났는데? 내가 좆밥으로 보이나?
‘뒤질라고.’
“...푸하하!”
고기를 썰던 세냐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저 새끼 뭐라고 한 거야? 조, 조조, 좆밥? 베르무트, 너보고 한 말이지? 그치? 아, 아하하, 아하학!”
“세... 세냐, 웃지, 너무 웃지 말아주세, 푸흡, 말아주세욧. 면전에서 그렇게 웃는... 우후... 우후훗, 우흐흣...! 웃는 것은...! 크나큰, 시, 시시히힉... 실례입니닷...”
“역시 너는 전사로구나!”
모론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멜을 쳐다보았다.
ㅡ쿠웅! 하멜은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가, 두 발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세냐와 아니스의 웃음이 뚝 멎었다.
“...베르무트.”
화륵.
세냐의 주변에 자그마한 불씨들이 나타났다.
“어디에나 있을 용병 새끼잖아. 그런데 저 놈을 꼭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어?”
“...품위가 없어도 너무 없어 보입니다. 베르무트님. 저런 들개같은 용병보다 나은 전사는 셀 수 없이 많을 겁니다. 키옐 제국 기사단장의 외아들이 실력과 더불어 용모와 인품이 훌륭하다 하였는데... 차라리 키옐에 가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바다 해상왕국의 전사들이 굉장히 용맹한 사나이들이라고 들었다. 나는 그들과 겨뤄보고 싶다.”
모론은 싸늘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홀로 다른 말을 했다.
“...이봐. 너 말고는 다 내가 싫은 모양인데? 나도 나 싫다는 새끼들이랑 다니고 싶지는 않거든? 저기 저 성깔 드러운 성녀님이 한 말처럼, 다른 새끼라도 구해서 데리고 다니시지?”
“아니.”
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
세냐가 일으켰던 불꽃이 꺼졌다. 아니스의 발밑에서 맴돌던 빛이 사라졌다. 베르무트는 우아한 손동작으로 제 잔에 술을 부으며 말을 이었다.
“너여야만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 실력에 확인이 필요하다면. 우선 식사를 마저 하는 게 어떤가.”
“...뭐?”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고, 그렇게 배를 채우고서, 적당히 배가 꺼져갈 즈음.”
베르무트는 술잔을 흔들며 빙그레 웃었다.
“그때 겨뤄보도록 하지.”
만남
식당의 뒤뜰을 빌리고 싶다 청하니, 주인은 흔쾌히 뜰을 내주었다. 구석에는 잡동사니가 쌓였고 바닥은 잡초가 무성했지만, 검을 겨루는 것에는 충분한 넓이였다.
하멜과 베르무트가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하멜은 긴장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은 것처럼 평온한 베르무트의 얼굴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빛의 용사.
그 위명은 여러 번 들어보았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하멜은 쯧 혀를 차면서 망토를 벗었다.
크게 무겁지도 않고, 움직임에 걸리적거리지도 않는 얇은 가죽갑옷. 그 위에 관절부위를 피해 사슬갑옷을 덧입었고, 여러 종류의 무기를 패용했다. 하멜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사슬갑옷마저 벗었다.
“그거 벗어서 얼마나 더 가벼워진다고?”
벽에 등을 기대어 지켜보고 있던 세냐가 이죽거렸다. 마법사인 그녀의 눈에는 저 모든 것들이 다 무식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몸과 장비가 무거우면, 굳이 벗을 필요 없이 마법으로 가볍게 만들면 된다.
“주둥이 좀 여물고 있으면 안 되나?”
“나보고 하는 말 맞지?”
“지금 주둥이 놀리고 있는 게 너밖에 없는데. 당연히 너한테 하는 말 아닐까?”
“베르무트, 그냥 내가 대신 싸우면 안 돼?”
돌아오는 이죽거림에 세냐는 눈을 부릅뜨고서 베르무트를 돌아보았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세냐 너였잖나.”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느냐가 꼭 그렇게 중요한 거야? 나는저 자식이 마음에 안 들고, 그래서 패버리고 싶어.”
“말 잘 했네. 내가 여기저기서 쓰레기 소리를 좀 많이 들어 처먹고 다니거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나는 시발 여자도 그냥 존나 잘 팬다는 말이야. 자신 있으면 나와, 그 예쁜 얼굴 땅에 처박고서 불쌍한 낯짝으로 만들어 줄 테니.”
하멜은 사나운 표정을 짓고서 내뱉었다. 그는 세냐가 발끈하고 달려드는 것을 예상했지만, 세냐는 생각처럼 반응하지 않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하멜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몇 번 끔뻑거리다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그... 음... 너도 뭐... 얼굴이 못생기진 않았네.”
“갑자기 뭐라는 거야?”
“아니... 어... 예쁘다고 해서 고맙다고. 보기완 다르게 안목은 꽤 제... 제대로 됐네. 뭐 당연한 거지만. 그, 러니까 봐줄게.”
아까 술 좀 마시더니 그새 취한 건가? 하멜은 그렇게 생각하며 세냐를 힐긋 보았다. 물론 세냐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날마다 아니스의 성수를 몰래 훔쳐 마시고, 가끔 아니스와 아침까지 술판을 벌이며 단련해왔다. 고작 술 몇 잔에 취할 리가 없는 것이다.
세냐는 외모에 대한 칭찬이 익숙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 그녀는 갓난아기 때에 사마르 대수림에 버려졌고, 엘프들에게서 키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종족이 세냐의 가족이고 이웃이었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러니 서로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일 따위도 없었다.
‘...역시. 나 정도면 예쁜 것 맞지?’
세냐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괜히 제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어려서부터 수백 명에 달하는 엘프들을 봐온지라, 외모에 자신감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먼저 오겠나?”
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 그는 검을 뽑지도 않은 맨손으로 편하게 서있었다. 그러고서 저런 말을 던지니, 하멜의 얼굴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성검, 안 뽑냐?”
“자네는 마족도, 마물도 아니잖나.”
“그럼 다른 검이라도 뽑아. 검이 싫으면 다른 무기라도 뽑던가.”
하멜은 베르무트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는 마법 또한 대마법사에 견줄만큼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다. 성검의 주인이지만 성검 외에도 여러 가지 무기를 다루며, 그 무기들은 공간마법으로 만들어낸 아공간에 보관하고 다닌다.
“...흠.”
베르무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공간이 일렁거리고, 허공에서 칼자루가 불쑥 튀어나왔다.
...평범한 검이다. 수상쩍은 기질도 느껴지지 않고, 생김새가 독특한 것도 아니다. 그냥 길게 쭉 뻗은 검.
뿌득.
하멜은 이를 꽉 물고서 몸을 낮췄다. 베르무트의 짧은 고민. 하멜은 그것이 무엇에 의한 고민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무기를 쥘 필요도 없다는.
그런 자신감. 하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로 뽑아든 검.
‘참 친절도 하셔라.’
모두가 칭송하는 용사. 당연한 자신감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하멜은 주눅들지 않았다. 아까 베르무트가 보여주었던 마나조작은 대단하긴 했다. 하멜은 몸에서 한참 떨어진 공간을 대상으로 정교한 마나조작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한다면.
코어에서 마나가 흘러넘쳤다. 마나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하멜은 이미 땅을 박차고 베르무트에게 파고들었다.
‘...어쭈.’
세냐의 눈이 반짝였다. 이 젊은 대마법사는 저 한 순간에 하멜이 조작한 마나가 얼마나 폭발적으로 쏘아졌는지, 그것이 무식하기는커녕 얼마나 세련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마나의 총량은 대단하지 않아. 정순한 것도 아니야. 고작 마나를 일으킨 것뿐인데 코어가 삐걱거리고 있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확실했다. 마나수련법 자체의 열악함. 대체 언제부터 마나를 수련했는지는 몰라도, 저 용병녀석이 마나를 수련한 방법은 기예만큼 세련되지 않았다.
‘...어설프게 개발 된 코어... 그런데 어떻게 저만한 경지에 도달한 거지?’
쓰레기 같은 수련을 아무리 열심히 한들 조금 나은 쓰레기가 될 뿐. 하지만... 세냐는 저 용병의 움직임을 도저히 쓰레기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용병일 뿐인데, 저 움직임과 마나의 컨트롤은 여태까지 보았던 그 어떤 기사들보다 매끄러웠다.
아니스도 정신을 집중하고서 하멜과 베르무트의 격돌을 응시했다. 왜 베르무트가 하멜을 동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이제는 이해가 가능했다.
‘...가능성.’
하멜에게는 세냐와 아니스, 모론과는 다른 가능성이 있었다. 저 용병은 제대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수많은 전장을 거치며 살아남고, 그렇게 제 자신을 단련해 왔다. 불완전한 마나의 흐름. 그 탁류를 천부적인 감각만으로 조율해내고, 검강을 일으키는 대신 몸의 움직임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
저 불완전함을 바로잡아 준다면?
하멜은 몸을 크게 비틀며 검을 휘둘렀다. 참격이 옆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다가간 순간, 검이 흔들렸다. 하나의 참격이 수십 개로 나뉘어지고, 베르무트의 몸을 난도질 할 듯 덮쳐왔다.
참격에 대응하기 위해 베르무트의 몸이 움직였다. 물 흐르듯 다가 온 검이 하멜의 검과 닿았다. ㅡ쩌엉! 서로의 마나가 먼저 격돌하고, 소리를 터트렸다.
마나가 역류했다. 한 번의 충돌. 그것만으로 검강이 파괴되었다. 하멜은 저릿거리는 손에 힘을 불어넣고, 흩트러져 역류된 마나를 붙잡았다. 그렇게 다시 검강을 일으켰다. 검을 뒤덮은 마나의 칼날이 변화를 보였다.
칼날이 불꽃이 되었다.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불꽃이 폭주했다. 한 순간에 거대해진 불꽃이 베르무트를 삼키려 들었다.
그걸 본 순간. 세냐는 고개를 흔들었다.
‘끝났어.’
아니스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회복마법을 준비했다. 모론은, 우뚝 서서 크게 뜬 눈으로 끝까지 지켜보았다.
‘...불꽃?’
극도의 집중이 의식을 길게 늘어트린다.
새하얀 불꽃이 베르무트의 몸을 휘감는 것을 보았다. 흩날리는 불씨가 사자의 갈기처럼 베르무트의 어깨에서 나부꼈다. 베르무트의 검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가 일으킨 새하얀 불꽃이 하멜의 불꽃을 전소시켰다.
끝?
하멜은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았다. 마나는 역류하지도 않았다. 그냥,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하멜의 몸은 움직였다. 수백 번의 전장을 거치고 그 이상의 사투에서 살아남으며 무수히 많은 사선을 넘어왔다. 그 모든 투쟁에 함께했던 몸이 덮쳐오는 패배에 저항했다.
손목 아래에 숨겼던 비수. 검으로 승부가 안 된다면, 파고든 거리에서 쑤셔 박아 줄 생각이었는데...
ㅡ콰아앙!
불꽃이 지면을 휩쓸었다. 하멜은 그 충격에 뒤로 날아가서, 낙법도 펼치지 못하고 얼굴부터 땅에 처박혔다.
“...조금... 심한 것 아냐?”
세냐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치유마법을 쓸 정도는 아닌가. 아니스는 그렇게 판단하고서 뻗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확실한 격차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저 용병은 몇 번이고 덤비려 할 겁니다.”
“훌륭하다!”
모론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바로 옆에서 터져나온 외침에 세냐와 아니스는 화들짝 놀라서 모론을 돌아보았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정신, 실로 전사다웠다!”
불꽃에 휩쓸려 날아가기 전. 하멜이 비수를 던진 것을 보았다. 베르무트는 승리를 확신했고, 저 자그마한 비수가 자신의 불꽃을 뚫고 다가올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실제로 비수는 베르무트의 몸에는 아무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완전히 타버리기 직전에 옷깃을 살짝 스쳐버렸다.
베르무트는 칼자국이 난 소맷자락을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설마 베일 줄이야. 몸에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이만큼의 격차가 있는 상대에게 소맷자락이나마 베인 것이 베르무트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내가 너보다 강하군.”
그 동요가 베르무트를 웃게 만들었다.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하멜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얼굴이 아팠다. 코뼈에 금이 간 것 같았고, 입 안에서는 흙이 씹힌다. 불꽃에 얻어맞은 몸뚱이도 삐걱거리고 있다.
졌다. 뭐라 변명할 수도 없는 압도적인 패배였다. 이만큼 무력하게 패배한 적이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이런 놈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대체 어떻게?
“...닥쳐.”
다시 싸운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을 터. 하지만 하멜은 도저히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멜은 어지러운 의식을 붙들고서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
잿빛머리에 금색 눈. 놈은 아직 새하얀 불꽃을 두르고서 하멜의 앞에 있었다. 다가온 손은... 뭐, 악수라도 하자는 건가? 하멜은 악수하는 대신, 손을 들어 제 코를 부여잡았다. 뿌득! 코를 잡아 비틀어 코피를 멎게 만들었다.
오른손의 검... 칼날이 사라져있다. 저 하얀 불꽃이 검을 박살내 버린 것이다. 마나가 저렇게 한 순간에 폭발할 수 있는 건가? 아니, 마나뿐만이 아니라. 처음 검이 서로 충돌했을 때. 하멜의 검술은 닿기 직전부터 간파 당했고, 파훼되었다.
격이 다르다.
하멜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자신과 베르무트 사이에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백 수천 번 다시 싸워도 하멜은 베르무트에게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멜은 그 사실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를 인정해버리는 순간, 자신이 결코 베르무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납득하게 될 것만 같았다.
“...씨발. 다시 해. 다시 하자고. 나는 안 졌어...!”
하멜은 패배가 싫다. 어려서부터 그에게 패배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쌓인들 익숙해지지 않는 역겹고 불쾌한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잃고, 용병으로 살았다. 살기 위해서는 싸움을 잘해야만 했다. 처음부터 싸움을 잘하지는 않았다. 패배가 쌓였고, 언젠가부터는 승리가 더 많이 쌓였다.
패배에 익숙해져선 안 된다. 어려서부터 하멜은 그것을 맹신해 왔다.
“네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베르무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그렇게 몇 걸음 물러나, 하멜을 응시했다. 하멜은 부서진 검을 땅에 내려놓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검이 아니라면... 주먹질? 자신있다. 용병이 되기 전부터 마을 아이들과 주먹다툼은 꽤 했었고, 용병이 된 후에는 더 많이 주먹을 휘둘렀었다.
하멜은.
자기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럴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남들보다 실력이 느는 것도 빨랐다.
용병이 된 후로도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 외의 확신이 쌓였다.
너처럼 칼을 잘 쓰는 꼬마는 본 적이 없다.
벌써 마나를 느꼈다고?
검기? 말도 안 돼!
어린 하멜을 보았던 용병들은 모두가 경악했다. 몇몇 놈들은 하멜의 재능을 시기해서 망가트리려 하기도 했었다. 천재에 대한 질시. 하멜은 항상 질시를 받는 쪽이었다 .
주변의 놀람과... 천재 소리를 듣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오만에 심취하지는 않았다. 노력과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꿔낸 실력이다. 상대는 용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래, 질 수도 있다. 사실 이기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져서는 안 된다. 제대로 공격조차 하지 못하고, 이렇게 압도적인 격차를 느끼면서 져서는 안 된다. 비등한 싸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번의 공격은 나누어야만 한다. 수백 번 싸워 수백 번 질 지라도, 한두 번은 이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야.”
몸을 일으킬 힘도 없었다.
2번 다시 싸웠고, 2번 모두 졌다. 처음처럼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그 새하얀 불꽃에 당한 것도 아니다. 체술로도 완벽하게 패배했다. 하멜이 자신하고 확신했던 기술은, 베르무트에게 그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난 너보다 훨씬 약한데. 왜 날 동료로 삼겠다는 거냐.”
하멜은 도저히 그 이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격의 차이가 난다. 동료가 된들, 발목을 붙잡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멜은 마법을 쓸 줄 모른다. 신성마법은 당연히 쓸 줄 모른다. 모론처럼 무식하리만큼 덩치가 큰 것도 아니다.
그래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강한가? 약하다. 천재인가? 아니다. 나는 뭘 할 수 있지? 왜 이 괴물 같은 녀석은, 동료가 되어달라며 날 찾아와서 3번이나 싸워주는 거지?
“네가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시발 왜 필요하냐고...! 네가 나보다 더 세잖아!”
베르무트의 대답이 놀림처럼 들었다. 하멜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땅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졌다. 절대 못 이긴다. 3번 싸워서 그를 절감했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분노가 되었다.
“이기면 동료가 된다. 그렇게 약속하지 않았나?”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네가 동료가 되라고 말한다면, 넙죽 받을 새끼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대체 왜 나한테 그러는 거냐?!”
하멜은 고개를 치켜들고서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
베르무트는 곧장 답하지 않고, 차분한 눈으로 하멜을 응시했다. 그 시선. 하멜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저 금색으로 빛나는 눈은 흔들림 없이 차분했지만, 보는 모든 것을 관통하고 마음을 들추는 것처럼 강렬했다.
“네가 마지막이다.”
베르무트의 입술이 열렸다.
“함께 가자. 하멜.”
베르무트의 손이 다가왔다.
하멜은 그 손을 곧장 잡을 수가 없었다. 졌으니까, 따라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할 텐데, 하멜은 그렇게 하기에 다른 이유를 필요로 했다.
“...썩을 자식.”
으스러진 자존심을 주워 모았다. 나는 천재가 아니란 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 난 다음, 베르무트를 바라보았다.
“...너... 뭘 할 생각이냐.”
“바다를 건너, 헬무드에 간다.”
“...이 항구에서 헬무드로 가는 배는 출항하지 않아.”
“내가 함께 간다고 하면 출항할 거다.”
그렇겠지. 하멜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헬무드로 가는 상선이 출발하지 않는 것은, 바다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바다 속에는 난폭한 몬스터와 마물이 득실거리고, 바다위에는 흑마법사와 언데드의 유령선이 떠돈다.
호위전력이 충분하다면 출발할 수 있겠지만, 이 도시는 불과 며칠 전에 큰 전투를 치렀다. 기력이 넘치는 놈들이라곤 사망자의 빈자리를 채우는 어설픈 기사들 정도고, 살아남은 기사나 용병 중에서 그 지옥 같은 헬무드로 가겠다고 자처하는 건 하멜 정도 뿐이다.
하지만. 베르무트와 동료들이 배에 오른다고 하면. 그 대단한 용사의 신화에 눈이 먼 기사들도 함께 오를 것이다. 그들이 더해지지 않을 지라도, 베르무트가 배에 타겠다고 한다면 상선은 헬무드로 출항할 것이다.
“...헬무드에서... 뭘 할거냐?”
“마왕을 죽인다.”
베르무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가장 먼저 살육의 마왕을 죽인다. 그 다음에는 참혹의 마왕을, 그 다음에는 광란의 마왕을 죽인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인다.”
베르무트는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모든 마왕을 죽이는 것에 네 힘이 필요하다. 하멜 다이너스. 네가 없다면, 나는... 우리는, 모든 마왕을 죽일 수가 없다.”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모든 마왕을 죽이겠다고?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님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멜이 없다고 해서 마왕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패자를 달래주는 건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하멜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제 마음만 아프다.
“...나도 마침 바다를 건너고 싶었거든.”
하멜은 그렇게 변명하며 베르무트의 손을 잡았다.
“꼴에 자존심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세냐가 들으란 듯이 내뱉었다. 그녀의 곁에 선 모론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멜과 베르무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양 팔을 활짝 벌리고 베르무트와 하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 다른 전사가 같은 뜻을 품고 함께 걷는다! 우리는 이제 동료이며, 태어난 날은 다를 지라도 대의를 이루는 날은 같을 것이다!”
모론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멜과 베르무트를 얼싸안았다.
“...다 끝났습니까?”
아니스는 진즉에 빈 성수병을 거꾸로 들어, 남은 성수방울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하멜, 당신의 고집에 어울리느라 오늘 저녁 예배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를 어찌 책임지실 겁니까?”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내가 알려줄게. 아니스는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거야. 무슨 소린지 알겠어? 가서 술이나 사란 말이야.”
세냐는 킬킬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휙 불어 온 바람이 하멜의 몸에 묻은 흙먼지를 깔끔하게 털어냈다.
“흠. 새로 맞이한 동료를 세례 해주어야 하니... 신께서도 오늘 예배를 거른 것은 용서해 주실 겁니다.”
“...너희... 뭐야? 왜 갑자기 친하게 굴어? 나 좆같고 싫다매?”
“하멜, 저는 당신이 싫다고 한 적은 있어도 좆같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엿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의 누가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인 이상 다른 사람을 엿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그건 성녀인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얇게 뜬 눈으로 하멜을 응시했다.
“그러니 사람은 서로를 엿같아 하면서, 조금은 덜 엿같을 수 있도록 알아가며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저희는 앞으로 함께 싸우며 생사를 함께 할 터이니, 남들보다 더욱 깊이 서로를 알아야 합니다.”
“어... 어어.”
“서로를 진솔하게 이해하는 것에는 술만한 것이 없지요.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은 남을 속이지 않고 제 자신을 진실 되게 드러내기 위함이고, 취함으로서 서로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에 술은 성수인 것입니다.”
“비싸고 좋은 술을 사라는 거야.”
세냐가 옆에서 거들었다.
“...아니면. 우리랑 술 마시기 싫어? 아까처럼 너 싫어하고 그럴까?”
“태도가 휙휙 바뀐 것이 수상쩍잖아.”
“네가 실력 없고 입만 산 허접인 줄 알았는데, 베르무트랑 싸우는 것 보니 꽤 마음에 들었단 말이지.”
“끈질기게 덤비는 것도 좋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뜨겁게 타오르는 눈이 아주 전사다웠다.”
이상한 놈들.
하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모론의 팔에서 벗어났다.
“...너는 술 좋아하냐?”
베르무트를 힐긋 보았다. 그는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아까부터 웃는 얼굴이었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군.”
“저렇게 말씀하시지만, 베르무트님은 주는 술을 거절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럼 가서 술이나 마시지.”
밥은 먹었나?
함께 식사라도 하지.
베르무트가 아까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하멜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베르무트가 그랬던 것처럼 빙글 몸을 돌려, 앞장 서서 걸어나갔다.
‘...저 새끼. 돌멩이 차는 것은 아니겠지?’
뒤통수에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베르무트는 하멜처럼 대뜸 돌멩이를 걷어차진 않았다.
“...하하.”
대신,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항전
라이언하트의 본가는 자잘한 변화를 거쳤다.
우선, 몇 년 동안 본가를 비웠던 가주가 돌아왔다. 길레이드는 흑사자성에서 헤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윈 모습이었고, 애니실라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품위를 잊고 엉엉 울었다.
길레이드와 함께 여러 장례식에 참여했던 시엘도 돌아왔고, 흑사자성의 대장들에게 수행을 받던 시안도 함께 돌아왔다. 애니실라가 펑펑 울어버린 것은, 남편만 돌아와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품을 벗어나 있던 자식들이 돌아와서기도 했다.
카르멘이 이끄는 흑사자 기사단 3번대.
그들은 예정대로 본가를 떠나지는 않았다. 길레이드와 새로 원로원주가 된 클라인의 부탁 때문이었다.
부탁의 요지는 간단했다.
본가 백사자 기사단의 교련.
이미 백사자 기사단은 대륙 제일을 논할 만큼 뛰어난 기사단이기는 하지만, 이오드가 일으킨 내란은 ‘라이언하트’를 섬긴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있던 백사자들의 충성심에 동요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러니 다시 위엄을 세워야 할 텐데... 기사들에게 경의를 이끌어내고 라이언하트를 우러러보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뛰어난 기사. 순혈 특유의 선민의식도 없고, 아랫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베푸는 것에 아낌이 없는 기사.
...그 역할에 걸맞다 지목된 것이 라이언하트의 최강자라 불리는 카르멘 라이언하트였다. 덕분에 그녀는 흑사자 성에 돌아가지 않고, 본가에 남아 백사자 기사단의 멘토를 맡아주었다.
그 결과, 본가 연무장 옆에 있던 백사자기사단의 숙소는 대거 증축되었다. 1층 백사자 기사단장 집무실의 옆에는 카르멘의 집무실이 들어섰고, 전체적으로 시설이 전보다 훨씬 고급스러워졌다. 그 모두가 기사들의 마음을 감사와 자부심으로 채우기 위한 애니실라의 계책이었다. 본래부터 백사자 기사단의 환경은 불만의 여지가 없을 만큼 뛰어났으나, 애니실라가 추진한 대대적인 공사는 백사자 기사단의 주머니마저 흘러 넘칠만큼 채워버렸다.
기사단 숙소를 증축하는 과정에서 별채도 허물어졌다. 애니실라는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도, 가족은 가족이어야 한다면서 유진이 생활하던 별채를 본가의 옆에 붙여버렸다. 건물 자체는 분리되어 있지만, 층별로 연결 된 통로로 간편하게 본가 저택과 별채를 오고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연무장의 훈련기구가 대거 추가되고, 세계수의 묘목이 완전히 자리 잡은 숲도 개발이 이뤄졌다.
혹시라도 엘프들이 개발을 반대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엘프들은 자신들이 라이언하트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현실을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엘프들은 자신들이 직접 삽과 도끼 따위를 들고, 숲의 개발에 도움을 보탰다.
“...조금 과하다고 생각한다만.”
카르멘의 집무실.
그녀는 이 공간을 자신의 취향으로 가득 채웠다.
한쪽 벽면의 위스키 진열장. 물론 카르멘은 위스키의 향도, 맛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쌉쌀하고 나무를 빤 것 같은 술을 마시느니, 달달한 음료나 따뜻하게 데운 우유, 마음을 차분히 해주는 차를 마시는 것이 좋았다.
그 옆에는 와인진열장.
위스키 진열장도 그렇지만, 카르멘이 ‘인테리어’로 둔 술 진열장은 모두가 최고급품이다. 최고급의 나무와 광석을 사용하고, 보석을 세공해 장식하고, 각 주류마다 보관에 있어 최적의 온도와 습도 따위의 환경을 부여하는 아티펙트. 돈이 썩어 넘치는 부유한 애주가들이나 갖는 진열장들인데, 카르멘은 자신의 취향에 있어선 돈을 아끼지 않았다.
때문에 와인 진열장에 들어 찬 와인들도 모두가 최고가의 호사스런 술들이었다. 위스키와 와인은 오래 묵을수록 비싸지기 마련이고, 지금 카르멘의 진열장에 있는 술들의 나이를 합산한다면 하멜의 나이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고위마족의 나이에도 필적할 것이다.
물론 카르멘은 와인도 마시지 않는다. 아주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달한 아이스와인이나 스위트와인, 시원한 스파클링와인은 제법 즐기는 편이었다. 그 외의 와인? 레드고 화이트고 나발이고, 그런 걸 마시느니 포도주스나 사과주스를 마시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하지만, 술이 들어 찬 진열장이라는 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의 품격과 위엄을 상승시킨다. 카르멘은 그렇게 생각했고, 와인이나 위스키는 좋아하지 않지만 와인잔과 위스키잔을 들고 있는 자기 모습은 아주 좋아했다.
시가도 마찬가지였다. 집무실의 웅장한 책상, 그 서랍에는 피우지도 않는 시가가 정리되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가 보유한 시가는 모두가 유명산지의 장인이 하나하나 말아낸 명품이며, 케이스와 커터도 검은 사자와 은색 사자를 새긴 오더메이드다.
그 외에, 서재에는 읽지도 않지만 있어 보이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책상 바로 뒷면의 벽에는 라이언하트와 흑사자의 문양이 커다랗게 박혀 있고, 창가에는 깃발과 입지도 않는 갑옷도 장식품처럼 세워져 있다...
...이 방은 유진이 들어와 보았던 그 어느 방보다 과했다. 그렇게 직접 꾸미고, 의자에 앉아서, 책상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카르멘에게 ‘과하다’는 말을 들으니 머릿속의 인지가 붕괴되는 느낌이었다.
“...어... 음... 그렇습니까?”
“그래. 엘프까지 훈련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뭐 제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그러고 싶다는데요 뭘.”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숲에 사는 엘프들이 훈련을 시작했다. 레베라가 아이리스에게 무력하게 납치당한 것이 엘프들의 경각심을 일깨웠고, 아이리스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시크나드를 자극한 것이다.
자발적인 훈련. 숲의 개발에 엘프들의 바람도 더해져, 훈련시설도 여럿 추가되었다. 시크나드는 직접 검을 들어 엘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백사자와 흑사자 기사단도 엘프들의 지도에 힘을 보태고 있다.
“...과하다는 것은... 그러니까...”
카르멘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재떨이에 시가를 걸쳐놓았다. 저 아름다운 재떨이는 만들어진 후로 단 한 번도 담뱃재를 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항.”
유진은 카르멘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깨달았다.
“백탑주님 때문이죠?”
“...음.”
카르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이 보기에는 나잇값을 못하고 주접스럽다는 면에서 참 닮은 둘인데, 의외로 카르멘과 멜키스는 서로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유진이 느끼기에, 그것은 일종의 동질감과 자기혐오였다. 비슷한 구석이 있는 만큼 서로를 의식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비치는 모습이 참으로 꼴사나워서...
‘...아니... 혐오라기보다는... 경쟁심인가...?’
멜키스가 밍크코트를 입었을 때.
카르멘은 그보다 풍성한 밍크자켓을 입었다.
카르멘이 가죽자켓을 입었을 때.
멜키스는 그보다 광이 번들거리는 가죽코트를 입었다.
“...엘프가 정령에 있어 대단한 적성을 가진 것은 안다만. 외인인 백탑주가 라이언하트의 식솔을 가르치는 것은 과한 일이다.”
“뭐... 그거도 자기들이 배우고 싶다고 한 것 아닙니까. 검이나 체술이 내키지 않다면 정령술을 배우는 것이 좋죠. 게다가 가르치는 스승이 역대 제일의 정령술사라 불리는 분이잖습니까.”
번개불꽃의 건으로 멜키스는 라이언하트의 숲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점차 반복되니 꽤 눈치가 보인 것인지, 숲의 엘프들을 꼬드겨 정령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멜키스는 ‘교육’을 핑계 삼아 숲에서 며칠 씩 거주까지 하곤 했다.
“...라이언하트의 전력증강에 있어서는 훌륭한 일이나... 그... 사람의 품위란 것에 있어, 백탑주의 행동은 과하지 않은가...”
“예?”
“...그... 음... 어제 밤 산책을 하던 중에, 숲의 인공호수에서... 음...”
카르멘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민망하다는 듯 손가락을 꼼질거리고 시선까지 살짝 돌렸다.
“...백탑주가 알몸으로 호수 중앙에 앉아 있더군.”
“...예?”
“보는 사람은, 아니, 엘프는 없었다. 백탑주는 그런 것에 있어서는 꽤 철저한 모양이야. 인식을 차단하는 결계... 나만큼의 간파력을 갖지 않고서는 백탑주의 기행을 바라보지도 못했겠지, 만, 어쨌든, 실제로 보니 굉장히... 품위가 떨어져.”
“예...”
“물론... 음... 그녀가 이상한 일을 한 것은 아니야. 얼핏 보고, 당황해 자리를 피하긴 했다만. 백탑주의 표정은 진지했고, 그녀를 중심으로 한 마나의 흐름은 실로 아름다웠다. 무아도취의 명상... 아마 정령술의 수행을 하던 것이겠지.”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헛기침을 뱉었다.
“...하지만... 그... 보통의 사람은... 백탑주가 보통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수치심이란 걸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카르멘의 입에서 수치심이 뱉어지는 것이 도리적으로 옳은가?
“달빛 휘황한 밤하늘 아래의 호수에서... 헐벗고 정좌해 앉아 수행하는 것은... 하지 않는 일 아닌가? 아니면, 내가 마법사도 정령사도 아닌 기사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
“마법사와 정령사에게 있어서 저런 수련은 보편적인 것인가? 유진. 마법사와 정령사인 너도 남몰래 저런 수련을 즐기는가?”
[하멜.]
“만약... 만약 그런 것이라면, 백탑주에게 정령술을 배우는 엘프들도 저런 수행을 하는 것인가? 라이언하트의 숲에서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만약 본가에 손님이 왔을 때 저런 수행을... 특히... 음... 유진, 네게 그 정도의 사리분별력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네가 수행 중에 무아도취에 빠져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본다면...”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를 죽여야 한다.]
머리속에서 템페스트가 속삭였다.
[그녀는 정령술사에 대한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존재다. 지금만 해도 보라. 저 해괴망측한 여자마저도 상식과의 괴리감을 느끼며 혼란을 겪고 있다.]
“...”
[저번에도 말했지만, 알몸으로 정령과 교감할 때에 더 높은 성취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근거 없는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저런, 미신에 취한 여자가 정령술사로서 그만큼의 경지에 올랐는지 통탄할 따름이다...]
“...저는...”
[애당초 땅과 번개의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술사가, 왜 호수 표면에서 정령술을 수행하고 있는가? 설마 부적성의 정령과 강제로 교감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적성이 보다 증폭된다는 미신을 따르던 것인가...?]
“...알몸으로 수행한 적도, 그러고 싶다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그만큼의 대정령사가 어찌 그런... 아니...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존재들은 모두가 마땅한 광기를 갖지...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가 그러하듯... 멜키스 엘하이어도 광기를...]
“백탑주님이 이상한 겁니다. 다른 마법사와 정령술사는 그런 미친짓을 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엘프들에게 각별히 주의하고, 백탑주님에게도 경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카르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대뜸 책상의 서랍장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포옹.
흑색과 금색이 섞인 듀퐁라이터가 카르멘의 손끝에서 튕겨 맑은 소리를 발했다.
“...”
포옹.
“...”
포옹.
“멋지군요.”
유진은 카르멘의 의중을 이해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포옹.
“아이리스의 것보다 소리가 더 맑은 것 같습니다.”
“오더메이드니까.”
그제야 카르멘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붙들었다. 이딴 대화나 나누고자 이른아침부터 카르멘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슬슬 못이기는 척 말해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나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몇 번을 모르는 척하셔도 계속 물어볼 겁니다.”
“...어린 혈사자.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
“감당이고 자시고. 저는 그 빌어먹을 혈사자란 말도 이미 익숙해졌고, 남들이 혈사자라고 부르는 것에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으니, 카르멘님이 혈사자를 운운해도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엘프는 귀가 밝다.
카르멘이 워프게이트의 앞에서 유진에게 혈사자라는 이명을 내렸을 때. 그 주변에는 흑사자들과 레베라 뿐이었지만, 카르멘의 목소리는 숲의 모든 엘프들에게 전해졌다.
그래서 유진은 엘프들의 입에서 혈사자라는 이명을 다시 들었고, 그 이명은 시종들에게도 퍼지고, 백사자기사단에게도 퍼졌다.
유진이 아무리 듣기 괴로워해도, 라이언하트의 모두에게 있어 유진의 이명은 혈사자가 되었다.
‘...우둔한 하멜보다는 혈사자 유진이 낫지.’
유진은 닭살 돋은 손을 꽉 말아쥐며 카르멘을 노려보았다.
“애당초 카르멘님이 제발 알아달라는 듯이 신호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나는... 나는 그런 적이 없어.”
“수십 년 전, 카르멘님이 어린 시절에 겪은 신비로운 체험이 뭡니까.”
“...”
“돌아오는 마차에서도, 알체스터경이 드래곤을 운운 할 때 마다 알아차려달라는 듯이 회중시계를 딸깍거렸잖아요.”
“...알아차려달라고 하는 것과 진짜로 알아차려버리는 것은 미묘하게 다르다.”
“전 그 미묘함을 모르겠으니, 카르멘님에게 꼭 들어야겠습니다.”
“몇 번이나 말하는 것이지만, 내가 겪은 체험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직접 말할 수가 없다. 그건... 중요한 약속이거든.”
카르멘은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좀처럼 떠올릴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듀퐁라이터를 늦게 꺼내는 것인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듀퐁라이터를 꺼내, 퐁퐁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머릿속에 저런 의문보다는 듀퐁라이터를 갖고 싶다는 탐욕만 가득 차올랐을 것을...
“나참.”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벌써 며칠 동안 카르멘을 찾아오고, 따라다니며 드래곤에 대해 묻고 있는데... 카르멘은 좀처럼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저쯤 되면 어쩔 수 없이 카르멘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용언(龍言)의 약속. 카르멘이 드래곤에게 그... 헤븐제노사이드를 받은 것은 확실할 텐데, 스스로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흘리는 것을 보면 드래곤과 약속을 나눈 것이 분명했다.
“...직접 말할 수 없다면 힌트라도 주시는 것이?”
“...그 만남은...”
카르멘은 한참을 머뭇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뱉어도 되는 말인지, 아닌지. 그것을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눈썹을 찡그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막히는 모양이군.’
[드래곤과 용언으로 나눈 약속은 절대적이니 말이다.]
‘너는 시발 바람의 정령왕이란 놈이 알고지내는 드래곤이 하나도 없냐?’
[...드래곤은 알고 있지만, 계약자에 대한 정보는 정령왕이라도 함부로 누설할 수 없다. 그러니 내게 드래곤의 탐색에 대한 도움은 바라지 마라, 하멜.]
템페스트의 변명은 궁상맞게 들렸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바람은 세상 어디나 존재하니, 만약 템페스트의 도움으로 바람의 하급정령부터 탐색이 가능했다면... 유진은 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는 어릴 적에 드라고닉 가문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지.”
한참을 머뭇거리던 카르멘의 입술이 열렸다.
“그때도 했던 말이지만, 나는 알체스터의 무술교관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선호하지 않아서, 알체스터에게 가르친 것은 주먹과 발길질 따위의 체술이었지. 당시의 드라고닉 가주는, 내게 가문의 무예들을 전수해줬다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저번에 마차에서도 들었던 말.
“...알체스터는 배우는 것이 빨랐지. 당시에 놈은 갓 5살이 된 꼬마였는데, 그 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숙하여 내 가르침에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드라고닉 가문에서 드래곤을 만났다?”
“다만... 조숙하긴 해도 애다운 면이 있기는 했지. 5살의 알체스터는 제가 파낸 코딱지를 입에 넣곤 하는 끔찍한 녀석이었다...”
제국 제일의 기사에 관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들어버렸다.
“그렇다면 드라고닉 가문의 저택에도 가봐야 하나...?”
“...혈사자 유진. 너는 왜 드래곤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
“세상에 드래곤에 관심없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
300년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환상종. 유진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드래곤들은 300년 전, 마왕과의 전쟁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종족의 절반에 달하는 드래곤이 마왕에게 죽었다. 그 위대한 종족의 학살에 관여한 것이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멸망의 마왕이 단독으로 학살을 벌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충돌에서 유폐의 마왕이 몇 마리의 드래곤을 죽이긴 했다만, 이후 유폐의 마왕은 드래곤과의 전선에서 물러섰다.
그 빈자리를 메우듯, 멸망의 마왕이 강림했고.
절반의 드래곤이 죽었다. 유진은 그 전장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헬무드를 떠돌던 중에... 죽어가는 드래곤을 만났다. 멸망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도망친 드래곤. 헬무드 바깥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조악하게 만든 던전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드래곤.
그 드래곤은 베르무트와 동료들에게 자신의 드래곤하트를 뽑아 준 후, 유언을 남겼다.
‘멸망과는 싸울 수 없다.’
멀리서 멸망의 마왕을 보았을 때.
그 경고가 얼마나 진실 되고 무거운지를 실감했다. 드래곤의 유언대로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떠올릴 수가 없다. ‘색’의 움직임. 저것이 멸망의 마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것 외에 무엇이 멸망이라 불릴 수 있을까 하던 의문. 항거할 수 없게 만드는 압도적인 공포와 절망.
그 멸망의 마왕과 싸우려 했던 것이 드래곤이다. 전선에서 살아남은 드래곤들은 깊은 상처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돌보기 위해서인지 대거 은둔에 들어갔고, 300년 동안 세상에 모습을 비춘 적이 없었다.
‘...오릭스 그 새끼는 반인반룡이 아니었는데. 왜 드라고닉 저택에 드래곤이 있었던 거지?’
왠 미친놈이 반인반룡을 자칭하고, 300년 동안 드래곤의 핏줄이라며 대접받았으니 뭔가 싶어서 보러 왔던 것인가. 그럴 듯 하기는 했다.
“...드라고닉 가문에 들어갈 방법이나 조언해 주시는 것이?”
“네가 찾아가서 저택 구경을 시켜달라고 하면 알체스터 꼬마는 거절하지 않을 거다.”
“그것만으로 드래곤을 만날 수 있습니까?”
“...나는... 으으음... 훈련교관으로... 알체스터의 저택에 머무르며...”
“예, 일반적인 손님은 안 된다 이거지요. 그럼 어떻게 할까... 카르멘님처럼 훈련교관이나 잠깐 해볼까...”
“...알체스터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다. 아마 올해 10살이 되었을 거다.”
카르멘은 표정을 가다듬고 유진을 응시했다.
“...오늘 네가 알체스터의 앞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면, 내가 길레이드에게 부탁해 양가의 화합을 위해 교류할 수 있게끔 주선하도록 하마.”
“허.”
유진은 피식 웃으며 카르멘을 돌아보았다.
“오늘 대항전에는 절대 참가하지 않겠다 했었는데... 그리 말씀하시는 것은 카르멘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가주님의 뜻도 더해져 있나?”
“라이언하트의 뜻이라고 해두지.”
카르멘은 훗 웃으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시작은 사소한 시비였다. 알체스터가 단장으로 있는 백룡기사단은 한 달 동안 라이언하트의 본가를 담벽 너머에서부터 수호하고 있는데, 그 문제로 백룡기사단과 백사자기사단 사이에서 시비가 붙어버렸다.
간단히 말하자면 백룡기사단의 말단 측이 라이언하트에 대한 험담을 하다가 들킨 것이다. 그들은 라이언하트의 위세가 예전만치 못하고, 내부부터 썩어 곪아가고 있다며 떠들었다. 위대한 영웅의 핏줄이라 으스대는 주제에, 헬무드에서 낙향한 나찰공주에게 겁을 먹어 제국 기사단의 보호를 받는 신세라며 비웃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백사자 기사단원들은 참지 못하고 결투를 청했고, 결과는 반반. 그렇게 일단락되지 않고, 다른 기사들까지 더해지며 결투의 규모가 커져 버렸다.
알체스터는 그 일을 적당히 무마하고 싶어 했지만, 백룡기사단이 충성하는 것은 알체스터가 아닌 키옐의 황제다. 황제에게 모종의 명을 받은 것인지, 라이언하트 저택 수호에 투입되지 않은 백룡기사단원들까지 몰려들어 연거푸 결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만큼 일이 진행되니, 가주인 길레이드도 더 이상 일을 두고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직접 나서서 백사자기사단과 백룡기사단의 정식 대항전을 제안했다. 결과에 따라 승자는 패자에게 무조건적인 사과를 하고 마땅한 보상을 지급하도록 조건이 맞춰졌고, 오늘 정오 넘어 각 기사단에서 10명이 차출되어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저는 백사자기사단 소속이 아닌데요.”
“가주와 그 자식은 백사자 기사단의 지휘관에 속한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본가의 혈족이 직접 참여하는 건 좀... 백사자기사단 쪽에서도 영 꺼림칙해 할 것 아닙니까. 자기들의 문제에 섬기는 주군이 나서는 것인데.”
“정식 후계자인 시안이 나선다면 그렇게 여기겠지. 하지만 너는 후계자도 아니고, 계승권도 포기한 입장 아닌가? 게다가 넌 백사자기사단의 젊은 기사들에게 경외 받는 입장이니, 네가 대항전에 참가한다면 기사들의 사기도 크게 오를 거다.”
내뱉는 말이 막히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설득할 생각이었나 보다.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기울였다.
“참 비겁하십니다.”
“책략이라 하도록.”
카르멘은 흐뭇하게 웃으며 시가를 손에 걸치고 흔들었다.
< 대항전 >
닫힌 문을 열기 위해 다가가는데, 소리죽인 발걸음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유진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동안 기다려 보았다. 그렇게 문을 열지 않고 있으니, 다시 슬금슬금 기척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즉시 문을 열었다.
“햑.”
“흐익!”
멍청하게 들리는 비명이 둘. 유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앞을 보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몇 걸음 물러서있는 디자이라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는 듯이 뻔뻔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시엘이 보였다.
햑이 시엘이고, 흐익이 디자이라였다.
“너희 여기서 뭐하냐?”
“뭐하냐니? 나는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야.”
놀라서 콩닥콩닥 뛰는 가슴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시엘은 물러서있는 디자이라에게 두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었다.
“멍청한 디자이라. 왜 그런 꼴사나운 소리를 낸 것이지?”
“네에?”
“방금 네가 바보같은 소리를 냈잖아. 햑, 흐익, 하고 말이야. 아무리 놀랐어도 비명을 2번 연달아 내는 것은 너무하지 않아?”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2번이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제가 방금 내지른 소리는 비명이라기는 좀...”
“아냐. 너는 2번 비명을 질렀어. 덕분에 나도 놀라서 굳어버렸잖아!”
시엘은 자신이 비명을 질렀다는 것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동시에 마음 한 귀퉁이가 삐죽하니 튀어나왔다.
‘기척은 분명하게 읽고 있었는데?’
유진도 시엘이 기척을 읽고 있다는 것쯤은 간파했다. 그래서 시엘을 골려먹을 겸, 문앞에서 기척을 죽이고 기다렸다. 시엘의 감각이 아무리 예리한들, 유진이 작정하고 기척을 죽이면 시엘이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는 1번 밖에 안 질렀다구요!”
“디자이라! 종자인 네가 사수인 내게 감히 반항하는 거야?”
시엘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디자이라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흑사자기사단의 대대적인 증원. 디자이라는 스스로 희망하여, 동경하는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대장으로 있는 흑사자기사단 3번대에 입단했다.
그렇게 흑사자의 제복을 입게 된 것까지는 좋았지만, 애석하게도 디자이라의 실력은 흑사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다. 결국 디자이라는 견습기사가 되어, 카르멘의 제자인 시엘의 부사수가 되었다.
“...이건... 이건 부조리에요. 아무리 시엘님이 제 사수라고 해도, 저는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인정할 수가 없어요.”
“자꾸 그러면 다음에 같이 외출했을 때 너를 챙겨주지 않을 거야.”
시엘은 얇게 뜬 눈으로 디자이라를 응시했다. 그 말에 디자이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말만 듣기에는 시엘이 부조리의 화신이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시엘은 흑사자가 된 디자이라를 여러 가지로 챙겨주고 있었다. 다음 외출 때만 해도 함께 나가서, 피눈물이 흐를 만큼 비싼 무구점에서 원하는 창을 하나 선물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맞아요. 사실은 제가 2번 비명을 질렀어요.”
“들었지?”
디자이라는 겸연쩍다는 표정을 하고서 인정했고, 시엘은 보란 듯이 히죽 웃으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뭐 어쩌라는 거야?”
“너는 왜 요즘 자꾸 카르멘님의 집무실을 들락거리는 거야?”
방금 전까지 걸려있던 미소가 빠르게 사라졌다. 시엘은 수상쩍다는 얼굴을 하고서 유진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설마 카르멘님의 제자가 될 생각은 아니지?”
“안 될 것 있나?”
“안 돼. 너는 제노스님에게 특별히 배우고 있잖아. 그런데 카르멘님의 지도까지 받는 것은 너무 치사하고 불공평해.”
“맞아... 요. 카르멘님은 3번대를 지도하시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바쁘다고... 요.”
본래 디자이라는 유진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과 시엘에게는 꼬박꼬박 경어를 붙이면서, 유진에게만 경어를 쓰지 않는 것도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이라, 3번대가 되어 본가에 온 후로는 의식해 경어를 쓰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사랑받으셔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유진은 테이블에 다리를 걸친 카르멘을 힐긋 돌아보며 말했다. 퐁, 퐁. 카르멘은 듀퐁라이터를 튕기며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아내고 있었다.
“슬슬 대항전의 시간이 되어가는데, 너희는 여기서 뭐하냐? 참가는 하지 않더라도, 기사단 전원이 참관하기로 한 것 아니었어?”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야. 카르멘님과 널 데리러 말이지.”
“미안한데 난 너희랑 같이 마음편히 참관 못해.”
“왜?”
“대항전에 참가하기로 했거든.”
아무런 긴장도 걱정도 없이 대꾸해주었다.
시엘과 디자이라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
300년 전부터 라이언하트는 수도 세이리스 서쪽 변경의 널따란 숲을 통째로 영지로 삼았고, 본가 주변에 다른 귀족의 영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이 들판은 라이언하트의 사유지가 아니다. 키옐의 국토, 황제의 땅.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된 대항전. 허나 필요이상의 피는 흘려선 안 된다. 이 대항전은 어디까지나 서로의 명예를 존중하고, 기사도에 국한되어야 한다.
...요지는 그러했지만, 모인 참관인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이 대항전이 서로에게 명예롭고, 기사도에 어긋나지 않으며, 과한 피를 흘리지 않게끔 지켜보는 눈이 수백여 쌍. 모두가 키옐에서 나름의 위세를 갖춘 귀족들이며, 작위가 없을 지라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재력을 갖춘 자본가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의 눈은 명예나 기사도 같은 희미한 것보다, 곧 벌어질 기사간의 대결에 대한 흥미로 가득 차있었다.
그 황실 산하의 백룡기사단과, 300년 전부터 위명을 떨친 라이언하트의 기사단이 정면에서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여태까지 키옐에서 제국기사단과 귀족가 산하의 기사단이 정면대결을 벌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통은 전면전이 이뤄지기도 전에 무마되지.’
제국기사단과 귀족기사단 뿐만이 아니다. 귀족기사단끼리도 대항전은 벌이지 않는다. 기사단의 직접적인 충돌은 영지전으로 발달할 여지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들끼리의 시비는 언제나 명분부터 따져야 하고, 결투는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깔끔해야 하며, 패자에게 너무 큰 굴욕을 새기지 않도록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그렇게 이뤄진 결투는 일대일에서 마무리하고, 주군인 귀족이 개입한 들 기사단 전체를 동원해선 안 된다...
“시비 자체는 백룡기사들이 먼저 건 것이고, 명분은 처음부터 라이언하트에게 있었소.”
“허나 황제폐하를 섬기는 백룡기사단이 먼저 고개를 숙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소.”
“그도 그렇소만...”
“이건 황궁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오만, 폐하께서 이번 일이 전면전까지 번지도록 의도하셨다 하오.”
“그 무슨...?”
“알다시피, 얼마 전에 라이언하트의 영지인 우클라스산에서 혈족간의 내분이 일어났잖소. 사상자는 많지 않지만, 대륙제일의 무가라 자부하던 라이언하트의 명예가 나락까지 떨어졌지. 그를 수습하고, 가문의 힘을 재정비하고자 오랜 전통들마저 폐하였고.”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블레지코 후작. 그는 사교회에서도 발이 넓기로 유명한 귀족이다. 그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듯이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댔다.
“라이언하트는 키옐의 큰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명문귀족가. 그들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님은 대륙사에 영원토록 이름을 남기실 대영웅이시오. ...그런 가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니... 폐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울적하셨겠소?”
“아...!”
“폐하는 이 대항전을 통해 라이언하트의 위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참관하는 모두가 확인할 수 있게 의도하신 거요. 설령 이 대항전에서 백사자기사단이 백룡기사단을 꺾는다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이오.”
...그런 내용의 대화가 참관인들의 무리 곳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폐하의 의중을 이해하기 어렵군.”
“지고하신 뜻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지요.”
알체스터가 중얼거렸고, 곁에 있는 남자가 말을 받았다.
“라이언하트가 최근 여러 풍파를 겪은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시비에서 비롯된 대항전이지만, 이렇게 전면대결을 벌여 라이언하트의 힘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풍파에 시달린 것은 흑사자 기사단이지. 본가의 백사자 기사단은 아무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부부터 삐걱거리는 가문에 충성서약을 맺은 기사들이... 과연 전통과 함께 내려온 이름만큼이나 뛰어날지...?”
남자는 얇은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을 보았다. 펄럭이는 라이언하트의 깃발들. 회색의 제복을 입은 백사자 기사단과 검은 제복을 입은 흑사자 기사단. 가주인 길레이드 라이언하트는 검은 말을 타고 그 중심에 서있었다.
“라이언하트를 무시하지는 마라. 그들은 300년 간 군림해 온 무가고, 그 이름에 매료된 기사들 중에서 특출한 실력자만을 엄선한 것이 저 백사자 기사단이다.”
알체스터는 남자가 대놓고 라이언하트를 무시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백룡기사단의 단장으로서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기는 했지만, 한 명의 기사로서 ‘위대한 베르무트’에게 매료되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로 저들을 무시했다면 제가 대결에 참가하지도 않았겠죠.”
백룡기사단의 대장 중 하나. 에볼트 마기우스.
“대항전의 승패를 떠나, 라이언하트의 전력을 보다 면밀히 파악해두는 것은 내년에 예정된 단합회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입니다.”
이유가 그것 뿐은 아니다. 알체스터도 이 대항전에 관해 황제에게 따로 이야기를 들어두었다.
아무리 영웅의 핏줄이라 해도, 라이언하트는 일개 귀족가문. 그러한 가문이 160명의 기사단과 60명의 기사단을 따로 운용하고 있는 것은 과잉전력 아닌가. 당장 군림하고 있는 황제보다 300년 전의 영웅과 그 위상을 더 존경하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가?
그러니 찍어 누르고 싶은 거다. 만에 하나 대항전에서 패배할 지라도 크게 잃는 것은 없다. 그 패배조차 황제의 보살핌. 그러한 이야기는 이미 참관인들 사이에 퍼져있다.
하지만 이긴다면? 라이언하트의 가세가 정말로 기울었고, 영웅의 피가 엷어졌다는 것이 세상 모두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로 인해 백사자 기사단에서 이탈자가 발생한다면, 황제는 너그럽게 그들을 포용하여 휘하 기사단에 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다.
“후회하나?”
카르멘 또한 검은 말에 타고 있었다. 그녀는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대항전을 제안한 것 말이다.”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너무 노골적이셨습니다.”
“평화가 너무 길었기 때문이지.”
퐁. 카르멘은 라이터를 튕기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힘은 점점 쌓이지만 발산할 곳은 없고. 그렇다고 전쟁을 벌이자니 이래저래 신경 쓸 것은 많고. 나하마의 술탄도 배때기에 기름이 차서 여기저기 군침을 흘려대는데, 우리 존엄하신 황제폐하도 만만찮게 군침을 흘려대시지.”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내 말이 틀렸나? 제국의 황제나 됐으면 적당히 만족을 할 줄 알아야지... 우리 시조님이 300년 전에 키옐에 뿌리를 내리기로 하지 않으셨다면, 과연 키옐이 그 난세에서 제국의 위상을 유지했을 것 같나?”
“...국토가 조금은 줄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합니다.”
“그래. 키옐은 적이 많으니 말이야. 당장 우리가 남쪽 밀림의 야만족들을 가로막지 않아줬다면, 폐하께서 자랑스레 여기시는 제국기사단이 우리의 역할을 대신했겠지. 가주, 무슨 말인지 알겠나?”
“...”
“라이언하트는 300년 동안 키옐을 수호했단 말이다. 작위와 상관없이! 하지만 배때기에 기름이 그득 찬 폐하는 우리의 노고를 알아주지 못할망정, 우리가 나약해졌을 때를 노리고 가문의 이름을 짓밟고 힘을 빼앗으려 들어.”
카르멘은 싸늘한 분노를 내비쳤다. 20대의 외모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카르멘은 길레이드의 고모다.
“그러니 가주. 만약 대항전을 제안한 것을 후회하지 마. 가주는 마땅한 결단을 내린 것이야. 우리 몸에 흐르는 위대한 영웅의 피는 결코 엷어지지 않았으며, 모진 풍파를 겪었을지언정 라이언하트 가문은 꺾이지 않는다. 그래, 마치 폭풍을 견디는 소나무처럼...!”
소나무가 무슨 상관일까.
길레이드는 그런 의문을 느꼈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기에, 카르멘과 대화할 때에 가장 유효한 수단은 긍정과 침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고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은 가주인 제가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고모라고는 부르지 마.”
“...예, 카르멘님. 애초에 후회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라이언하트에 충성하는 기사들을 믿습니다. 비록 그들의 성이 라이언하트가 아니고, 몸에 라이언하트의 피가 흐르지 않을 지라도. 그들은 라이언하트에 충성을 맹세한, 라이언하트의 기사입니다.”
제국최고라 불리는 백룡기사단. 그 위명은 길레이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백사자기사단이 그들보다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앞을 보았다.
“...저는 솔직히, 저 아이가 패배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대항전에 참가하는 백사자기사 9명.
유진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너무 부담주지 마세요.”
뚜둑. 손목관절을 천천히 돌려서 풀며, 반대편 손은 망토 안에 넣어 무장을 살폈다.
“상대는 그 제국제일의 기사단이잖아요.”
되는대로 내뱉는 말이었다.
다른 기사들도 그렇게 들었다.
백사자기사들은 이 젊은 도련님이 부조리하고 터무니없는 괴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기와 질시조차 품을 수 없는 격의 차이. 타고난 자질과 더불어 단 하루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도달한 성취. 올해 20살 밖에 안 되는 젊은 도련님은, 이미 기사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나도 나갈까.”
“비교될 게 뻔하잖아.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오빠.”
시안은 뚱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저 자식은 인간미가 없어, 인간미가. 사람이 잘난 것은 알겠는데 너무 과하잖아.”
“질투는 추한 거야.”
“하루 이틀 보냐? 어? 내가 저 새끼 질투한 게 벌써 햇수로 7년째야. 뭘 새삼스레 그래?”
“오빠는 인정하는 모습도 추하네.”
“어쨌든, 너무 잘나기만 한 것도 인간미가 없다고. 날 봐. 적당히 잘났으니 인간미가 넘치잖아. 그거 알아? 백사자기사들은 유진보다 날 더 좋아해.”
시안은 은근히 으스대며 시엘보고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약간 못난 구석이 있으면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그런 거지.”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했어.”
확실히. 본가 기사들이 유진과 시안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는 했다. 그것은 유진이 몇 번이고 가주에 대한 욕심이 없다며 선언한 것과, 애니실라가 십 수 년 전부터 가솔들에게 퍼부은 노력, 그리고 시안 본인이 유진에게 무조건 열등감을 갖지 않고 어떻게든 극복하려 발버둥 친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승리하면 다음 상대를 지목해 가며 연달아 싸울 수도 있다, 이겁니까?”
“예.”
백사자 기사단의 2번대 대장. 헤자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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