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적으로 무리거나, 부상을 입은 상태라면 굳이 다음 상대를 지목하지 않고 빠져도 상관없습니다. 이건 목숨을 건 결투도 아니고...”
헤자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위기만 보면, 화목하기 짝이 없는 친선전처럼 되어버렸으니 말입니다.”
“먼저 시비를 걸었던 주제에 말이지.”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망토의 버클을 풀었다. 그러자 망토 안에서 대뜸 메르가 고개를 내밀었다.
“망토를 벗고 싸우실 건가요?”
“검 한 자루만 쓸 거야. 그럼 굳이 망토를 하고 있을 필요가 없잖아.”
“그럼 제가 유진님을 도울 수 없어요.”
“마법도 안 써. 그냥 검만 쓴다니까?”
“정말로요? 그럼 망토 밖에 나와서 구경해도 되나요?”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그런 허락을 구했냐?”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망토를 옆에 벗었다. 그러자 뒤편에 서있던 라만이 후다닥 달려와 유진의 망토를 받았다.
“공자님이 직접 나서실 것 없이, 제가...”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서? 그냥 저기 가서 아버지나 챙겨드려.”
유진은 손을 휘휘 저으면서 제하드 쪽을 힐긋 보았다. 그는 말위에서 감격에 차오른 눈으로 유진을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하드는 아들이 지금처럼 모두의 주목을 받는 전장에 선 것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버지 감격해서 눈물 쏟으시면 손수건도 챙겨드리고.”
“예.”
“나 싸우는 거 잘 안 보인다고 하시면 목마라도 태워드리고. 알겠지?”
“목마...?”
별 생각이 없었는데, 제하드가 저렇게 감격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니 예정보다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알체스터경의 흥미를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기도 하니.’
유진은 미리 꺼내 둔 장검을 허리에 걸치고서, 대결에 참가하는 백사자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제가 제일 먼저 나가겠습니다.”
“예?”
헤자르와 다른 기사들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처음은 제가 나가겠습니다. 그 편이 저들의 전력을 파악하고 순번을 정하는데 도움이...”
“아뇨. 제가 나갑니다.”
유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참관인들은 유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소문이 무성한 본가의 양자. 아크리온의 최연소 출입자이자, 현명한 세냐의 인정을 받은 아카샤의 주인... 그 파격적인 소문들은 무성했으나, 유진은 단 한 번도 사교회나 무도회 따위에 출현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만 알아보지 못했지, 곧 참관인들은 유진을 알아보았다. 라이언하트의 제복. 왼쪽 가슴의 사자 문양. 덥수룩한 잿빛머리와 금색눈동자.
“...유진 라이언하트?”
설마 인사나 할 생각으로 나온 것은 아닐 테고. 참관인들은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현재 라이언하트에서 가장 유명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청년. 소문은 무성하지만, 키옐 귀족들의 사교회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 없는 풍운아. 그렇다보니 유진을 쳐다보는 참관인들의 눈에는 커다란 기대가 깃들 수밖에 없었다.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은 백룡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단장인 알체스터는 크게 당황하여 유진 뒤편의 카르멘과 길레이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카르멘은 그렇게 웃는 대신, 보란 듯이 듀퐁라이터를 앞으로 내밀며 뚜껑을 열고 닫았다.
“...이거 참...”
알체스터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출전하는 기사들의 명단은 서로가 밝히지 않았다. 설마 본가의 도련님이, 특히 그 유진 라이언하트가 직접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내가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인데.’
알체스터가 그런 고민을 할 때.
곁에 있던 에볼트가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고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에볼트?”
“제가 가겠습니다.”
에볼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대항전
에볼트 마기우스.
그도 유진에 대한 소문은 잘 알고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불리는 천재. 본가의 정통한 핏줄이 아닌 양자.
즉, 유진 라이언하트의 뒤를 따르는 행적들은 마나에 입문한지 7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쌓인 것들이란 말이다.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마법사... 일 뿐만이 아니라, 무예에 대한 자질마저 그 고지식한 라이언하트를 납득시킬 만큼 뛰어나기에 양자로 받아졌지.’
에볼트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유진과의 간극을 재면서, 그 얼굴을 응시했다. 20살... 젊다. 대륙에 이름을 떨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다.
“...대결을 위해 나온 것이겠지?”
“그렇죠.”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유진은 에볼트가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액면가부터가 자신보다 어려보이지는 않았기에, 먼저 고개를 꾸벅 숙여주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라고 합니다.”
“에볼트 마기우스라고 하네. 백룡기사단의 4번대 대장을 맡고 있지.”
내비치는 기세에서 짐작은 했다만, 역시 대장이었나. 유진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에볼트는 유진이 이곳에 선 자격 같은 것은 물을 생각이 없었다. 그따위 질문은 지금 기대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는 참관인들을 좋지 않은 쪽으로 자극하게 될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볼트는 보란 듯이 몇 걸음 물러 선 뒤, 허리춤의 칼자루를 두드렸다.
“...그 유명한 라이언하트의 도련님과 대결하게 되다니. 나도 참 운이 좋군.”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일까.
유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뻔하지 않은가. 백룡기사단의 대장. 제 실력에 자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위치. 아마 나이도 유진의 2배는 될 것이며, 유진보다 많은 경험을 쌓고, 유진보다 많은 수행을 해왔을 거다.
그래서 에볼트는 제 승기를 섣부르게 착각하고 있다. 키예르이 사교회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지만, 유진에 대한 정보는 이미 충분하리만큼 세상에 퍼져 있었다.
‘망토가 없군.’
유진 라이언하트의 소문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것은, 20살이란 어린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다양성. 그를 세상에 크게 알린 것이 아롯에 벌였던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과의 대결이다. 망토 안에 여러 종류의 무기를 보관하고, 상황에 따라 무기를 바꾸는 전법.
‘...폭풍검 위니드. 포식검 아스펠...’
정보국이 모은 정보에 따르면, 사마르 대수림에서 야만족들을 돌파할 때에는 ‘번개’와 ‘포격’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뇌광궁 페르노아와 용격창 카르보스까지 망토 안에 있다는 것이다.
역대 라이언하트의 가주 중에서도 가문의 보물을 4개나 독점하던 인물은 없었다. 거기에 현명한 세냐의 지팡이, 아카샤까지... 하나하나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해야 할 아티펙트들이다.
망토를 벗었다는 것은, 그 아티펙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지금 유진의 무장은 허리에 찬 검 한 자루 뿐.
...이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유진 라이언하트. 그의 천재성을 의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의 ‘힘’은 저 대단한 아티펙트들을 자유롭게 다루어 증폭된다. 가진 무기를 모두 사용하지 않고, 검 한 자루만을 쥐고 나온 것은 젊은이다운 만용이다.
스릉.
허리춤의 검이 뽑혀나왔다. 선공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폐하께서는 백룡기사단의 승리를 바란다. 그 유진 라이언하트를 처음부터 꺾어 놓는다면, 백사자기사단의 사기가 떨어질 것은 물론이고 라이언하트의 이름에도 커다란 흠집을 남길 수 있을 거다.
결심하고, 한 걸음 나아갔다. 상대를 얕잡아보지는 않았다. 검을 뽑는 순간부터 에볼트는 임전태세였다. 수십 년 동안 단련해 온 코어가 즉시 전신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예리하게 깨운 감각은 바람의 흐름을 읽고, 제복 위에 떨어지는 실오라기의 무게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았다.
에볼트가 한 걸음 걸었을 때, 유진은 이미 사이의 간극을 완전히 좁히고서 에볼트의 앞에 있었다. 그만한 속도라면 이미 간극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유진은 검을 뽑지 않았다. 단순히 에볼트의 몇 걸음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잠자코 응시하기만 했다.
뒤늦게 에볼트가 상황을 깨달았다. 저 차분한 금색의 시선과, 뒤따르는 바람과, 파직거리며 튀는 번갯불과, 흩날리는 새하얀 불씨와,
칼자루에 얹어져 있을 뿐인 손.
“...웃...!”
에볼트는 꽉 눌린 신음을 토하며 발을 뒤로 끌었다. 동시에 에볼트와 유진 사이의 공간이 참격으로 가득 찼다. 그것은 참관인들로 하여금 제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쾌검의 난무였다.
그들보다 눈을 의심하고 싶은 것은 에볼트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칼자루에 얹어져있을 뿐이던 손. 대체 언제 발검했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의 손은 이미 칼자루를 쥐고 있었고, 검은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화려하진 않다. 언뜻 보면 뚝뚝 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눈을 의심하는 것이다. 에볼트의 눈이, 유진의 검을 완전히 쫒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저쪽으로 휘둘렀다 싶으면 어느새 반대편에 가있고, 그곳에 있다 생각하여 검을 ‘움직이려고’ 하면 이번에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찔러 온다.
뚝뚝 끊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에볼트가 휘두르는 검로마저 끊어지기 시작했다. 유진의 검은 에볼트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끼어들며, 검이 더 베거나 찔러오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 잘라냈다.
‘...이게... 무슨...’
이건 에볼트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의식하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에볼트의 발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눈으로 쫒을 수 없는 검은 에볼트가 평생을 들여 날을 세워 온 감각을 위협했다. 베일 것 같다. 베인다. 그러한 경각심이 무의식적으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를 알아차렸을 때. 이미 에볼트는 10걸음이나 뒤에 물러서 있었다. 만약 유진이 검을 계속해서 휘둘렀다면, 10걸음이 아니라 수십 수백 걸음 물러났을 것이다.
“...우웃...”
ㅡ모르겠다. 지금 내가 무엇을 당한 거지? 머리가 혼란스럽고, 손아귀가 욱신거렸다. 수십 수백 번 부딪쳤다. 밀어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밀려났고, 휘둘러졌다...
이건... 마법인가? 환각을 보여주고, 감각을 어지럽히는 정신공격 계열의...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에볼트도 잘 알았다.
‘...빠르다. 그리고 정교해. 나보다 훨씬 더...’
인정했다. 물러서기만 했던 발이 다시 앞으로 나왔다. ㅡ쿠웅! 지면이 크게 흔들렸다. 코어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에볼트의 전신을 뒤덮고, 공간에 스며들어 대기 중의 마나에 밀도를 더했다. 그 ‘무게’가 유진에게는 압박이 되었고, 에볼트가 휘두르는 검에 힘을 실었다.
공간을 통째로 둘로 갈라버릴 것만 같은 참격. 유진의 손아귀에서 검이 빙글 돌았다.
검이 흔들렸다.
가해지는 압박 속에서 유진의 검은 붙드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자유로웠다. 그 검은 여전히 빨랐으나, 아까와는 달리 참격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초고속으로 흐르는 마나. 완벽하게끔 단련하고, 완성한 몸뚱이가 검이 흐르는 궤적을 터무니없게 바꾸었다.
너무 현란하다. 휘둘러서 만들어낸 참격은 한 번. 그 한 번의 휘두름에 섞인 변화를 모조리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한 번으로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는 것처럼 참격이 연결된다. 시작은 쾌검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흐름은 완만해졌고, 가볍다 느꼈던 것과는 달리 거대한 압박감이 역으로 에볼트를 짓눌러왔다.
마치 거대한, 안개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피할 수가 없다. 뚫고 나갈 수는 있나? 안개를 돌파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가르고 나간들 이미 몸은 안개에 휩싸이는데.
화아악!
에볼트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몸을 멈췄다. 베인 곳은... 없다. 검도 멀쩡하다. 검강이 파괴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저히, 이 이상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
안개의 파도 같던 ‘검’이 바로 앞에 멈춰서 있다. 만약 저것에... 아주 약간의 의지를 실었다면. 몸을 휘감는 안개가 모조리 칼날이 되어, 에볼트의 몸을 도륙 냈으리라. 수십, 수백 조각으로 나뉘어져 바닥에 흩어졌으리라.
“...우웩!”
에볼트는 참지 못하고 몸을 숙여 피를 토했다. 몸은... 베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난도질당했다. 에볼트가 유진의 검에서 느낀 것이라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뿐이었다.
“...졌... 다...”
“수고하셨습니다.”
유진은 방긋 웃으며 에볼트에게 손을 뻗었다. 악수를 위해 뻗은 손이었지만, 에볼트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가슴 깊이 새겨진 두려움 때문이었다.
“...미친놈이군.”
카르멘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함께 나찰공주와 싸웠으니, 유진의 실력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흐른 시간이, 정말로 한 달이 맞나? 성장속도가 터무니없다. 그때도 믿기지 않을 만큼 실력이 뛰어났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몇 걸음은 앞서있다.
“...하하...!”
경악한 것은 길레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에볼트와는 달리 유진의 검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거리에서 관조했기 때문이다. 만약... 만약 유진의 검이 직접 파고들어오는 거리에서 상대하게 된다면... 방금처럼 놓치는 일없이 볼 수 있었을까.
“...멋지군.”
알체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항전. 두 기사단의 대결. 그따위 것들을 떠나, 방금 유진이 보여준 솜씨는 알체스터가 가진 무인의 혼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알체스터는 꽉 쥐고 있던 고삐를 놓았다.
4번대 대장인 에볼트는 약자가 아니었다. 백사자기사단의 누가 나올 지라도 훌륭히 상대할 만한 실력을 갖춘 고수였다.
그 에볼트가, 마음껏 검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인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말에서 내려, 저 청년과 검을 맞대보고 싶다. 하지만 알체스터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장님.”
“알고 있네.”
알체스터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승패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인식시키기 위해 참관인들 사이사이에 바람잡이를 심었다. 하지만 백룡기사단의 단장인 알체스터가 나서는 순간, 이 대항전이 갖는 무게가 크게 바뀌어버린다.
이런 대결이라고는 해도, 격은 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알체스터가 나선다면 저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격을 갖춘 기사가 나와야 한다. 백사자기사단의 단장은 그리우스 마일즈. 수십 년 동안이나 라이언하트를 섬겨 온 기사지만, 제국제일이라 불리는 알체스터에 비해서는 격이 조금 떨어진다.
그렇다 하여 가주가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일. 알체스터가 나간다면 라이언하트 쪽에서는 카르멘이 나설 것이 분명한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알체스터는 자신의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카르멘님이 나서지 않을지라도... 단장이 직접 나가 대결을 벌일 자리가 아니다.’
애당초 황제로부터 출전해도 좋다는 허락은 얻지 못했다. 알체스터는 아쉬움을 억지로 떨치며 다시 고삐를 쥐었다.
그 후로.
유진은 물러서는 일 없이. 백룡기사 3명을 더 쓰러트렸다. 대결의 양상은 에볼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3명 중에는 창을 쓰는 기사도 있었지만, 그는 장병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유진의 검에 압도되었다.
3명 모두가 그렇게 패배했다. 승복할 수밖에 없을 만큼, 손쓸 도리 없이 패배해버렸다.
“어휴 힘들어.”
4번의 승리를 거둔 후, 유진은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은 이마를 벅벅 문질러 닦는 시늉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 더 싸울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렇게 해버렸다는 백룡기사단 쪽에서 발작이 일어날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런 기미가 보이기는 했다. 알체스터의 곁에 있는 기사들. 아마 에볼트와 같은 대장들로 보이는데, 그 중에 눈여겨 볼만한 기사가 2명 있었다.
“와아아아!”
유진이 물러서자, 나름의 지위와 품위를 갖춘 참관인들이 원초적인 환호성을 내질렀다. 쏟아지는 박수갈채에 제하드는 뚝뚝 눈물을 쏟았고, 라만은 가슴 깊이 뿌듯함을 느끼며 제하드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저들은 누굽니까?”
유진은 아버지의 열렬한 시선에 손을 흔드는 것으로 호응해 주었다. 그러면서 백사자 기사들에게 돌아와, 단장인 그리우스에게 물어보았다.
“백룡기사단의 1번대 대장인 카리안 디아크. 2번대 대장인 데어리 디아크입니다.”
같은 성씨. 생김새는 그리 닮지 않았다만 형제인 모양이다.
유진은 아직까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둘에게 방긋 미소를 날려주었다.
*
“아들아!”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제하드는 몇 번이나 유진을 부르짖으며 끌어안으려 했다. 물론 유지는 눈물로 흠뻑 젖은 제하드의 수염에 닿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아버지를 바람을 일으켜 계속해서 밀어냈다.
그것은 제하드로 하여금 복잡한 서글픔을 느끼게 만들었다. 분명 성인이 되기 전에는 곧잘 품에 안겨주었던 것 같은데... 사실 흔쾌히 안겼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제하드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과도한 추억으로 보정하고 있었다.
‘이제는 손도 쓰지 않고 바람으로 밀어내는 구나...!’
바람이 딱 좋을 만큼 시원해서 좋기는 했다.
“전승을 바랐건만.”
카르멘은 혀를 차면서 시가를 입에 물었다. 대항전의 결과는 7대 3으로 백사자기사단의 승리였지만, 유진이 4번의 승리를 거뒀으니 양 기사단의 대결은 3대 3이었다.
“너무 언짢아하지 마십시오. 상대는 그 백룡기사단이잖습니까.”
“가주. 무른 소리는 하지 마. 처음 나온 에볼트 말고 대장이 출전한 것도 아니었다고.”
“백사자기사단도 헤자르경 외의 대장은 출전하지 않았잖습니까. 그 헤자르경은 승리했고 말입니다.”
“그렇다 해서 일반 기사의 패배를 가벼이 생각해선 안 되는 일이지. 아무래도 훈련을 늘려야 할 것 같아. 그리우스, 너는 늙었으니 빠져도 좋다.”
퐁. 듀퐁라이터 소리와 함께 들려 온 말에 그리우스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 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라이언하트를 섬겨왔고, 백발이 희끗한 노장이긴 했다.
하지만 카르멘보다는 조금 어렸다.
“...아닙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훌륭한 대답이군. 우리는 내일부터 아침점심저녁을 지옥에서 먹게 될 거다.”
카르멘은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여태까지의 행동거지에서 드러나듯, 카르멘은 주변의 호응과 관심을 즐기는 성격이다. 대항전 내내 쏟아진 박수갈채. 라이언하트의 영광. 명예의 회복. 모두가 카르멘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야.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거냐?”
뚱한 얼굴로 있던 시안이 슬금슬금 말을 몰아 유진의 곁까지 다가왔다.
“내가 너한테 줬던 책. 그거대로 열심히 하다보면 돼.”
그 대답에 시안의 얼굴이 참혹히 구겨졌다. 유진에게 받았던 책... 그 안의 끔찍한 수련법은 계속해서 따르고 있다.
지독하리만큼 코어를 괴롭히는 방법들. 시안의 자질도 제법 뛰어난 편이고,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에 슬슬 효과가 오고 있기는 했다. 코어를 심장처럼, 마나를 피처럼.
어느 정도 가능해지긴 했다. 하지만 근력을 대신해 마나만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은 어렵기 그지없었고, 코어를 사용하지 않고, 움직임에 마나가 따르게 하는 경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애당초 마나를 끌어내라고 있는 기관이 코어인데, 그걸 멈추고서 마나를 끌어내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제노스경이랑 다른 대장들한테도 이거저거 배웠을 거 아냐?”
“배우기는 했는데... 어... 이... 개새끼야.”
“너는 왜 갑자기 욕을 하니?”
“열심히 한 거 같은데 별로 열심히 한 것 같지가 않아서 막 화가 나네...”
“응, 그럼 더 열심히 하면 돼.”
유진은 킬킬 웃으며 시안의 등을 철썩 때렸다.
대항전
본가 숲의 중앙.
이곳에는 몇 주 전에 완공한 인공호수가 있다. 엘프 마을의 근처. 세계수의 묘목과도 가깝다. 유진은 엘프들의 환영을 뒤로하고 호수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어.”
히죽 웃음이 섞인 인사가 날아왔다.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는 호수 중앙에 앉아서 유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멜키스는 사흘 전부터 엘프들의 교육을 핑계로 이 숲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진은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멜키스를 향해 두눈을 얇게 떴다. 아까 카르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내심 각오를 했는데, 참으로 다행히도 멜키스는 멀쩡히 옷을 입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리 죽상이야? 설마 대항전에서 처발린 거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응, 그렇겠지. 엘프들이 말해줬거든. 백룡기사단과의 대항전, 너도 참가했다며? 백사자기사단이 패배할 수는 있겠지만, 네가 패배했을 리는 없지.”
멜키스는 히히덕거리면서 호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맑은 호수가 멜키스의 걸음마다 자그마한 파문을 만들어냈다.
“대항전에서도 승리한 것 같고, 라이언하트에 기쁜 일만 가득한데... 잘난 도련님의 표정은 왜 그리 썩어계실...”
“왜 알몸으로 호수에 앉아있던 겁니까?”
불쑥 내뱉은 말.
멜키스는 자연스럽게 입술을 닫았다. 그리곤 잠시 동안 유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의 자그마한 혼란.... 수치심! 그를 드러내지 않았다. 수치심이란 것은 겉으로 드러내어 남에게 알려질 때야말로 머리채를 쥐어뜯을 만큼의 부끄럼이 되는 법이다.
“...수행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수행이 어디 있습니까?”
“얘, 꼬마야. 너는 정령술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정령과 보다 깊이 교감하기 위해서는...”
“그거 아무 효과 없는 미신이라고 했잖아요.”
“...너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구나? 언젠가 아롯의 마법학회에 아주 흥미로운 논문이 출품된 적이 있어.”
“갑자기 뭐라는 겁니까?”
“끝까지 들어 봐. 논문의 내용은 이래. 어떤 연금술사가, 마법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임상실험을 진행했거든? 그는 자신이 만든 신약이 어떤 것인지 상세하게 실험자들에게 전달한 뒤에 약을 투여했어.”
“그래서요?”
“일정 기간 동안 투여가 끝난 후. 실험자들은 마법약물을 통해 분명한 효과를 보았다고 대답했지.”
“뭐 약을 먹었으면 당연히 약빨이 들겠죠.”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사실 그 연금술사가 투약한 약들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미묘한 맛과 마법약물다운 색만 가진 맹물이었던 거야.”
“...”
“즉, 실제로 아무 효과가 없을 지라도, 여러 가지 심리적인 요인과 믿음이 더해지면 분명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지. 그게 바로 플라시보 효과야! 신기하지? 최면마법을 건 것도 아닌데, 마음가짐에 따라 변화가 일어난다니... 너도 몇 번쯤은 강렬한 자기암시의 효과를 본 적이 있지 않아?”
“예... 뭐...”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아무 효과가 없을 지라도, 믿음이 중요한 거야.”
“예...”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멜키스는 그 아무 효과도 없는 미신을... 플라시보니 뭐니 하는 것을 이유삼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인데... 미신이라는 것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도 저 뭐시기 효과가 드는 것인가?
“...그래서 효과는 좀 보셨습니까?”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금 떠올려줬으면 해. 내 이름은 멜키스 엘하이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령사야.”
“예. 백색마탑의 정령공주님.”
“끼아악!”
유진의 대답에 멜키스가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한창 젊은 시절의 별명만큼은 수치심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다음에도 알몸으로 명상을 하실 거면... 그...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신 뒤에 해주세요.”
“겨... 경계는 항상 하고 있거든? 그래서 대체 누가 내 명상을 봤다는 건데?”
“카르멘님이요.”
“하필...!”
“남자한테 보이는 것보단 낫죠.”
“그 여자가 날 비웃었을 것이 분명해...! 날 보고 뭐라고 했어?”
“별 말씀은 안 하셨는데요. 그냥, 굉장히... 어... 난감해 하셨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법을 일으켜 제 몸을 투명한 공기방울로 감쌌다. 그 모습에 멜키스의 눈이 얇아졌다.
“차암, 신기하단 말이야.”
“뭐가요?”
“나도 이 숲을 드나들면서, 파릇파릇하던 시절처럼 정령술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말이야. 너처럼 세계수의 정령이 깃들진 않더란 말이지.”
그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중얼거림에 굳이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유진도 제 몸에 세계수의 정령이 깃든 이유는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백염식이 특별해서? 아니면 유진이 마나를 조작하는데에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서? 이터널서클을 접목시킨 환염식의 의외성? 드래곤하트를 소재로 삼은 아카샤. 그것에서 비롯된 마법에 대한 이해?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와 계약하며 갖게 된 정령적성?
모두가 그럴 듯하기는 했다. 번개불꽃이 세계수의 정령과 하나가 되어, 유진의 마나게 녹아든 것은 저러한 요인들이 맞물려 일어난 특혜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특별한 가호일 수도 있지.’
유진은 그것도 요인 중 하나라고 여겼다. 그는 사마르 대수림 깊은 곳에 있는 엘프의 영지를 방문했다. 텅 비어버린 엘프의 마을을 보았고, 호수 중앙에 우뚝 선 세계수를 보았으며, 그 내부에 잠들어있을 엘프들과ㅡ 죽어 마땅할 상처를 입고 봉인 된. 세계수와 연결되어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세냐를 보았다.
그곳에서 유진은 분명한 기적을 체험했다. 8장의 날개를 펼치고서, 크리스티나와 연결되어 있던 아니스. 그녀가 일으킨 기적 덕에 유진은 의식의 세계에서 세냐와 만났다.
‘...정령의 가호... 아니스가 준 것인지, 아니면 세계수가 준 것인지.’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마나에 번개불꽃이 녹아든 것은 특혜라 할 만 했다.
“따라오지 마세요.”
“안 따라가. 괜히 가봤자 내 속만 끓는데 뭐하러 따라가?”
멜키스는 그렇게 쏘아붙이고서 뒤로 물러섰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 망토는 내 망토야. 앞으로 6년 남았어. 물에 젖기라도 하면 콱...!”
보란 듯이 두 주먹을 꽉 쥐어흔드는 멜키스를 뒤로했다. 유진은 주변을 살핀 뒤, 성큼성큼 호수로 걸어 나갔다. 수면 위를 걷는 발은 자그마한 파문도 만들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은 호수의 정중앙 쯤에 서게 되었다.
“유진님은 수영을 할 줄 아시나요?”
망토 속에 있던 메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유진은 메르의 심술궂은 표정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고 피식 웃었다.
-헬무드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아주아주 험난했답니다. 그 바다의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차서 태양도 보이지 않았고, 격한 파도와 폭풍이 끊이질 알았어요.
이제 막 동료가 된 하멜은, 용병 중에서도 성격이 고약하고 사납기로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멜조차도 그 험난한 바다에서는 성격대로 날뛸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하멜은 수영을 할 줄 몰랐거든요. 매일같이 습격해 오는 마물과의 싸움! 으악! 하멜은 비명을 지르면서 바다에 떨어졌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그때의 하멜은 도저히 용사의 동료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약하고 무능했거든요!
도와줘, 세냐!
하멜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현명한 세냐의 이름을 불렀어요...
“나 수영 잘해.”
“부끄러워서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아니 진짜로. 그 동화책의 내용은... 그...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은 것들이 대부분이야. 바다에 빠졌던 건 내가 아니라 세냐라고.”
“...네?”
메르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바다 위를 날아다니면서 깝죽거리다가, 아래에 숨어있던 흑마법사의 공격을 받고 마나가 역류했어. 그렇게 바다에 풍덩 빠져서... 하멜, 하멜! 나 좀 구해줘! 하고 멍청하게 비명을 질러댔지.”
사실 그런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바다에 빠진 순간, 세냐의 의식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만약 근처에 있던 하멜이 몸을 날리지 않았다면, 세냐의 몸뚱이는 바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진실은 그렇지만, 유진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읊었다. 세냐 그 망할 것이 먼저 자기가 당한 망신을 애꿎은 하멜에게 뒤집어씌웠으니, 하멜의 환생인 유진은 세냐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었다.
“잘 생각해 봐. 바다에서 한참 떨어진 숲에서 자란 세냐가 수영을 할 줄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냐?”
“...세... 세냐님은 못하는 것이 없으세요.”
“응, 아니야. 세냐 못하는 거 엄청 많았어. 수영도 못하고, 바느질 같은 것도 못하고, 요리에도 별 재주가 없었지. 그거 알아? 그 베르무트조차도 세냐의 요리에는 몇 번인가 정색을 했었다고.”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일행 중에서 제일 못했던 것은 맞지만, 세냐의 요리도 그럭저럭 먹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멜이 없는 동안 세냐가 멋대로 동화책을 써다가 세상에 뿌려놓았으니, 이 모든 것은 세냐가 응당 받아들여야 할 업보였다.
“바다에서 건져냈을 때, 세냐 꼴이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온몸이 짠 바닷물에 흠뻑 젖어서...”
“이...”
메르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이인... 인공... 인공호흡을 하셨나욧?”
“얘가 뭐래...”
“바다에 빠졌으니... 무, 물도 먹었을 거고, 숨도 멎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인공호흡을...”
메르의 뺨이 발갛게 물들였다.
“...인공호흡은 안했고... 철철 쏟던 쌍코피는 닦아줬지.”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인공호흡이라니...! 그것까지는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거짓말을 해서 대체 무슨 이득을 얻는단 말인가? 그런 면에서 유진은 세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냐. 난 널 좋아했어.
왜 동화책의 말미에 그딴 개구라를 적어 놓은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 대사를 적은 것은 아니스일 지도 모른다. 유진은 그 빌어먹을 동화책이 세냐와 아니스의 공동 집필작이라 확신했다.
메르가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꺄꺄거리는 동안. 유진을 휘감은 공기방울이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진은 호수 아래로 잠수했다.
이 호수는 멜키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본래 있던 호수를 더 넓게, 더 깊게 만들었다. 호수 공사는 예전부터 기획되던 본가 숲의 개발계획에 더해져 있던 것인데, 땅의 정령왕과 계약한 멜키스의 도움 덕에 숲의 개발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끝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호수. 유진은 물속에서 헤엄치는 여러 물고기들을 지나, 계속해서 아래로 잠수했다.
호수의 밑바닥.
그곳에는 어디론가 이어진 자그마한 수중동굴이 있다. 멜키스가 만든 동굴은 아니다. 땅의 정령왕의 도움으로 호수 밑바닥을 파 내리고, 땅을 다져 호수를 완공했을 때.
ㅡ숲의 지하까지 파고 내려온 ‘뿌리’가 호수바닥과 맞닿았다.
유진은 얽혀있는 뿌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직! 공기방울 안에서 유진의 마나가 불씨를 일으켰다. 유진이 의도할 것 없이, 마나에 스며든 번개불꽃이 공기방울 밖으로 흘러나갔다.
...뿌리가 꿈틀거리며 열렸다. 사람이 통과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입구가 열렸다.
이곳의 존재는 본가 사람들도 알지 못한다. 애당초 이 동굴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유진뿐이었다. 동굴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멜키스였지만, 그녀조차도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했다.
“...벌써 여러 번 왔지만. 참 신비로운 곳이에요.”
메르는 망토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위를 쳐다보았다. 물이 가득 찬 통로. 바로 위의 천장은 흙이나 바위가 아닌 나무뿌리로 이뤄져 있다. 그렇게 계속 이동하다 보면, 호수 아래를 완전히 지나 ‘숲’으 아래에 도착하게 된다.
지면에 올라선 후, 공기방울을 터트렸다. 여러 종류의 뿌리와 흙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공간. 숲의 밑바닥까지 내려 온 세계수의 뿌리가 만든 장소.
...이곳은 라이언하트의 영맥과도 닿아있다. 언젠가 템페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세계수의 뿌리가 베르무트가 만든 인조영맥과도 연결되었다. 덕분에 라이언하트의 영맥은 이전보다 거대한 마나를 품게 되었고, 숲 전체에도 영맥처럼 느껴질 만큼 짙은 마나가 떠돌고 있다.
이 지하 동굴은 숲이나 라이언하트의 영맥보다 짙고 순수한 마나가 가득 차있다. 동시에 세계수의 정령들이 마나와 어우러져 있다. 유진이 뿌리를 열고, 이 동굴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그의 마나에 녹은 번개불꽃, 세계수의 정령이 다른 정령들과 호응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될 것 같으세요?”
“아마 안 될 걸.”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동굴의 중앙에 앉았다. 백염식을 운용한 것도 아닌데, 마나와 어우러진 세계수의 정령들이 유진에게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숲을 떠도는 녀석들처럼 짓궂고 고약한 정령들. 다가오라고 손을 뻗고 불러대도 오지 않는 주제에, 마치 어느 정도 여지를 두는 것처럼 항상 주변을 기웃댄다.
‘세계수의 정령이라 해 봤자 자아는 없을 원시정령인데 말이야.’
즉, 저 정령들의 움직임은 장난기 따위가 아니다.
그렇다면.
‘뜻대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지.’
전생부터 마나를 조작하는 것에 크게 막혔던 적은 없다.
정령은 마나의 또 다른 형태라 여겨진다. 그 중에서도 세계수는 엘프가 신앙할 만큼 영적으로 강력한 존재이며, 그런 세계수에 깃든 정령은 다른 정령왕들조차 지배할 수 없는 독립된 존재들이다.
정령왕조차 지배할 수 없는 정령들을 유진이 지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단 말이다. 하지만 지배가 아니라, 도움을 받는다면?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합과 융화를 바란다면.
화륵.
은은한 불꽃이 유진을 휘감았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세계수의 정령과 마나를 함께 느꼈다. 베르무트가 만든 영맥...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나. 숲에 뿌리내린 세계수에 깃든 정령들.
현재 유진의 백염식은 5성이다.
‘오늘은 안 되겠지만.’
유진은 조만간 5성을 넘어, 6성에 도달할 것을 확신했다.
리우 드라고닉
수도 세이리스의 중심구, 하이렌.
유서 깊은 전통을 가진 고위귀족과, 선대부터 부를 축적해 온 자본가들이 모여 사는 부촌(富村). 수도 세이리스에서 가장 발달되고, 황궁과 가까운 도시.
라이언하트 본가의 저택은 수도의 외곽에 있지만, 드라고닉 가문의 저택은 하이렌에서도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300년 전. 라이언하트의 시조인 위대한 베르무트는 키옐제국에 귀화하여 대공을 지냈다. 당시 키옐의 황제였던 스트라우트 1세는 그 영웅이 부디 자신의 호위기사가 되어, 황궁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베르무트는 황제의 간청을 거절하고, 삶의 대부분을 키옐 최남단인 우클라스산의 성에서 지냈다.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 대공의 작위를 반납하고 지금의 라이언하트 본가가 있는 숲의 저택에 머무르고,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오릭스 드라고닉. 그는 베르무트와 달리 한창 마왕과의 전면전을 벌이는 중에도 헬무드로 떠나지 않고, 키엘에 온 순간부터 쭉 스트라우트 1세의 곁을 지키며, 백룡기사단의 단장을 지냈다.
그 후로 300년. 드라고닉 가문은 키옐에서 명망 높은 귀족가이자 기사가문의 명맥을 이어왔다. 역대 가주 모두가 황제의 호위기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대륙에서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기사를 핏줄에서 배출해왔다. 그 중에서 특출한 몇몇은 제국의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호하는 호위기사의 영예를 누렸다.
현 가주인 알체스터 드라고닉은, 시조인 오릭스 드라고닉에 버금가는 자질을 타고난 천재라고 불린다. 제국제일의 기사. 그 위명에 과장은 없다. 알체스터는 20살이 되기 전에 검강을 발현하고, 대륙의 온갖 실력자가 참가하는 제국무술대회에 참전해 우승했을 때의 나이는 고작해야 21살이었단다.
그 실력을 인정받아 곧장 백룡기사단에 입단하고, 단장의 자리에 올랐을 때의 나이가 30살. 그리곤 새로이 즉위한 스트라우트 2세에게 간탁되어 호위기사까지 맡은 인물. 그것이 드라고닉 가문 당대의 가주, 알체스터 드라고닉이다.
‘5살 때는 코딱지를 파서 제 입에 넣었다지만.’
굳이 알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였지만, 이미 들어버린 것을 어떡하나. 유진은 마차에서 내려, 드라고닉 가문의 대문을 응시했다.
크다. 그리고 높다. 저택의 부지만을 따지자면 숲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는 라이언하트의 본가가 훨씬 넓겠지만, 드라고닉의 저택은 이 땅값 비싼 부촌에서도 압도적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라이언하트의 저택에 비하자면 초라합니다만.”
“아주 멋진 저택이라 생각합니다.”
이곳가지 함께 온 드라고닉 가문의 기사. 그는 유진보다 먼저 대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ㅡ쿠구궁! 그러자 대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고작 사람 2명 들어갈 뿐인데 과한 환영이었다. 유진은 대문 너머에서 도열을 맞춰 선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드라고닉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 그 수는 라이언하트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적었다.
‘겨우 30명인가.’
그건 라이언하트와 드라고닉의 가풍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내며, 제국에 충성해 온 드라고닉 가문에게 있어 기사단의 규모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국의 주인은 황제이며, 귀족들이 보유한 기사단은 필요할 때에 황명으로 끌어낼 수 있는 예비전력 취급을 받는다.
그에 있어 유일하게 예외로 취급받는 귀족은 라이언하트 뿐이다. 방계 가문의 기사단이라면 모를까. 본가의 백사자 기사단과 흑사자 기사단은 황명으로도 징집할 수가 없다. 그것이 300년 전에 위대한 베르무트와 키옐의 황제가 맺은 계약이었다.
라이언하트는 키옐을 떠나지 않는다.
라이언하트는 키옐을 배신하지 않는다.
키옐은 라이언하트를 존중한다.
키옐은 라이언하트의 자유를 인정한다.
...그렇게 이어져 온 300년. 길고긴 평화의 끝이 아른거리는 시대. 황제는 제국의 귀족이면서도 황명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라이언하트에 부담과 탐욕을 느끼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라이언하트가 내부의 변혁을 거치며 본가 기사단의 규모를 키우고 있으니 더더욱 거슬려하는 것이다.
‘시선이 맵네.’
도열해 있는 기사들. 이유는 뻔했다. 일주일 전에 있던 백룡기사단과 백사자기사단의 대항전. ...백룡기사단의 패배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유진의 출전이었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로 끝났었는데 말이야. 깔끔하게, 서로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인사도 나누고.’
물론 백룡기사단은 애초에 약조되었던 대로, 라이언하트와 있었던 시비에 있어 무조건적인 사과와 보상을 지급했다.
그 보상이 황궁의 국고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백룡기사단의 예산에서 삭감되었는지, 아니면 단장인 알체스터의 사비로 지급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만. 마차 수십 대를 통해 보내 온 보상에 가모인 애니실라는 함박웃음을 지었었다.
‘...대항전의 문제가 아니라면... 흠, 그런가.’
외인에게.
불과 며칠 전에 가주에게 굴욕을 안겨 주었던 라이언하트에게.
그것도 고작 20살 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에게, 차기 가주가 될 도련님의 교육을 맡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유진은 피식 웃으며 기사들 사이를 걸었다. 시선은 따갑지만, 기사들이 은근히 발해오는 기세는 유진에게 아무런 압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은 여유 가득 한 얼굴로 저택의 널따랗고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았다.
“...가주님은 저택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택의 안으로 안내를 받았다. ...도중에 유진은 최선을 다해 웃음을 참도록 노력했다. 정원의 한가운데. 그곳에는 우뚝 선 오릭스의 동상이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보인 홀에도 오릭스의 동상이 있었고, 벽면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본판보다 훨씬 잘생기게 그려놨군. 오릭스 그 새끼, 설마 베르무트에게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릭스 초상화의 구도는 라이언하트의 저택마다 있는 베르무트 초상화의 구도와 똑같았다.
“나도 저택 바깥까지 마중을 나가고 싶었는데 말일세.”
저택 최상층의 집무실.
유진이 방에 들어 온 즉시, 알체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었다.
“주변에서 하도 만류를 해서 말일세. 집사장부터 해서 휘하 기사들, 심지어는 내 아내까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여겼는데, 그들은 가주인 내가 자네를 마중 나가는 것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나 봐.”
“어쩐지, 기사들의 시선이 따끔따끔했습니다.”
유진은 너스레를 떨며 알체스터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과해도 너무 과했던 카르멘의 집무실과는 달리, 알체스터의 집무실은 소박하다 여겨질만큼 깔끔했다.
“그렇게 여겼다면... 드라고닉의 손님으로 찾아 온 자네에게 커다란 결례를 범해버렸군. 내 직접 사과할 테니, 부디 언짢아하지는 말아주게.”
“언짢아하다니요?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체스터는 처음의 미소를 지우지 않고서 유진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그 미소는 유진이 느끼기에도 다른 속내없이 자연스럽고 즐거워보였다.
“...설마 자네가 이런 청을 해올 줄은 몰랐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흘 전. 라이언하트에서 2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하나는 가주인 길레이드 라이언하트가 보낸 편지. 끝난 대항전의 결과나 원인이었던 시비는 깔끔하게 잊고, 양 기사단 뿐만 아니라 양가(兩家)가 앞으로는 서로 친밀하게 교류하도록 하자며 손을 내밀어왔다.
다른 하나는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보낸 편지. 그녀는 머나먼 과거 자신이 드라고닉 가문에서 머물렀던 시절을 언급하며, 이번에 유진 라이언하트를 드라고닉에게서 수행시켜줄 수 있냐는 부탁을 편지에 적었다.
그 뿐만 아니라, 길레이드의 편지와 상응하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내게는 올해로 10살이 된 아들이 있네.”
“예.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리우 드라고닉.
“아들은... 리우는, 내 아들이라 하는 말은 아니지만 자질이 꽤 뛰어난 아이지. 마나의 수련은 4년 전부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검기를 조금은 쓸 줄 알거든.”
알체스터는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다가 눈앞에 있는 것이 그 라이언하트에서 역대 최고의 자질을 가진 청년이란 것을 자각하고, 민망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해해 주게. 나는 자식을 늦게 본 편이라서... 아무래도 어린 아들이 귀여워 견딜 수가 없더군.”
“예에...”
“유진. 자네의 실력은 불과 일주일 전에 이 눈으로 직접 보았지. 드라고닉 가문에도 뛰어난 기사는 많지만... 난 말일세.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수십 년 전에 카르멘님에게 지도를 받은 덕분이라고 생각하네.”
알체스터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눈을 감았다. 한 순간, 그는 수십 년을 뛰어넘어 5살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 내 나이는 5살이었지만...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해. ...그때 날 지도하러 오셨던 카르멘님의 나이는 17살이셨는데,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으셨어.”
“...”
그건 좋은 뜻일까.
유진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카르멘님의 지도는 엄하고... 굉장히... 독특하고, 괴짜 같은 면이 있었지.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이 내 밑바탕이 되었던 것은 사실일세. 부디 자네도 리우에게 그런 은사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나도 자네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가르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네. ...지금의 자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칠 수 있을 지가 의문이지만.”
알체스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일주일 전, 대항전에서 보았던 유진의 모습. 백룡기사단의 대장 중 하나인 에볼트가 어린아이처럼 농락되었다. 필살을 각오한 결투가 아닐 지라도, 그 대결을 통해 유진의 기량은 충분히 확인했다.
완숙, 아니, 완성되어 있다. 하나하나 뜯어보아도 결여된 것을 찾기가 힘들었다. 보이는 것 중에서 뒤떨어지는 것도 없었다. 기술과 센스. 그를 담는 육체와, 움직이게 만드는 의지. 기본적인 마나조작과 심화된 통제와 조율. 그 모두가 20살의 청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마법으로도 이미 대가에 근접해 있을 터. 그야말로 천재... 하늘이 내린 기재.’
...어쭙잖은 마음가짐으로는 아무 것도 가르칠 수가 없을 거다. 저 부조리할 만큼의 천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알체스터도 밑천을 드러내야 한다.
알체스터는 기꺼이 그러고자 했다. 황제는 라이언하트 가문도, 한창 주목받는 유진에게도 불만을 가진 모양이지만. 알체스터는 한 명의 기사이자 선배로서, 유진을 지도하며 교류하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 뿐인 아들이 저 청년을 동경하고 닮아가길 바랐다.
“...나찰공주가 국외로 나간 것이 확인되어 다행이야.”
알체스터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그녀가... 짐마차의 뒷칸을 옮겨 다니며 이동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상대는 300년 전부터 살아 온 전설. 광란의 수양딸. 근원의 다크엘프이자, 세상에서 유일하게 엘프르르 타락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존재. 나찰공주 아이리스다.
...그만한 존재가, 제 소유도 아닌 허름한 짐마차의 뒤에 숨어 이동할 것이라곤...
“...허를 찔렀다는 점에서는... 예...”
아이리스의 이야기를 듣고서 당황했던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도시의 워프게이트라도 빼앗던가... 아니면 뭔가 더 그럴 듯한, 위명다운 품위와 격을 갖춘 방법을 쓸 것이라 생각했는데. 짐마차 뒤에 숨어서 마찻길로 이동하고, 항구도시의 상선에 몰래 숨어들려다가 짐 검사에서 걸려버렸다니.
“...그래도 결국은 성공했잖습니까? 배 하나를 통째로 뺏고서 출항했으니 말입니다.”
아이리스가 무슨 목적으로 출항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헬무드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해들었다. 아이리스가 수도 세이리스에서 벌인 소란. 그것에 대해 헬무드에게 문제를 제기하기도 전에, 헬무드 측에서 아이리스가 영지전에서 패배해 추방당했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진짜 추방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리스의 문제로 책임을 지기 싫다는 거지.’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유진은 그 망할 서큐버스를 떠올렸다. 아이리스가 300년이 지나 더 강해진 만큼, 누아르 제벨라도 강해졌을 거다.
유진은.
전생의 도달점까지는 빠르게 좁혀가고 있다. 그것으론 부족하단 것을 알기에, 전생에 손에 넣지 못했던 것들을 보완했다. 그러니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뿌려둔 씨앗은 이미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그것이 완전히 피어났을 때.
유진은 하멜을 초월할 것이라 확신했다.
*
드라고닉 가문에 온 것은, 수십 년 전에 카르멘이 인연을 맺었을 드래곤과 접촉해 보기 위해서다. 그 드래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드래곤은 마법의 조종이라 불릴 만큼 고등한 종족이다.
그들의 용언마법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마법조차 ‘창조한다.’ 언어로 내뱉는 즉시 현상으로 일어나는 것이 용언마법이다. 그 마법은 일반적인 마법체계를 따르지 않으며, 술식도 필요 없다. 세상에서 오직 드래곤만이 펼칠 수 있는 마법이다.
...그렇다면, 드래곤이 아닌 마법사는 절대로 그들을 뛰어넘을 수 없는가? 아니다. 유진은 인간이면서 드래곤을 뛰어넘은 마법사를 알고 있다.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죽어가는 몸으로도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를 차원의 틈으로 추방시켰다.
‘...내 수준의 마법으로 차원의 틈을 탐색하는 건 무리야.’
헬무드의 용마성에 쳐들어가, 라이자키아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위험성이 너무 크다.
그래서 유진은 드래곤에게 볼 일이 있었다. 차원의 틈새를 탐색하는 건 적색마탑주인 로베리안에게도 불가능했다. 애당초 그런 마법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드래곤이라면, 차원의 틈에서 라이자키아를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드래곤이 과연 협조해 줄까요?]
메르는 망토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는 않았다. 직접 걷는 것도 꽤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망토의 틈 사이로 바깥구경이나 하며 편히 이동하는 것도 좋았다. 메르는 유진의 손가락을 괜히 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세냐님은 드래곤에 대해서는 많이 얘기하신 적이 없지만, 저도 드래곤에 대해서는 꽤 잘 알고 있어요. 그들은 탐욕스럽고, 오만한 종족이잖아요?]
‘드래곤이 오만한 것은, 자기들이 위대한 종족이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것뿐이라면 재수 없는 도마뱀 새끼들일 뿐이지만... 드래곤이 드래곤이라 경외 받는 이유는, 나서야 할 때를 피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뭔지 알아?’
[절 무시하지 마세요. 오히려 유진님이 그런 단어를 쓰는 것에 경악하고 있다고요.]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유진은 제 손가락을 조물거리는 메르의 손등을 꼬집었다.
‘나도 어려서부터 교육 많이 받았단 말이야. 어쨌든, 드래곤은 평소엔 인간이나 다른 종족을 자기네보다 하찮다고 무시하지만, 세상이 좆되려는 순간에는 무조건 먼저 나선단 말이지.’
300년 전에도 그랬다. 갑작스런 침공에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할 때. 드래곤들은 가장 먼저 헬무드로 날아가, 마왕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드래곤과 마왕은... 상성이 굉장히 나쁘지.’
엘프가 마기에 타락하듯, 드래곤도 마기에 악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드래곤들은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했고, 멸망의 마왕에게 참살당했다.
‘드래곤들은 자기들 종족이 마왕과 싸워 이기기 힘들단 것을 학습했어. 그래서 300년 전의 전쟁에서 드래곤은 주역이 되지 못했지. 하지만, 마왕과의 문제로 도움을 청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어떻게 접촉할 지를 모르잖아요?]
문제는 이것이다. 카르멘이 드라고닉의 저택에서 드래곤을 만난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만났는지까지는 듣지 못했다.
드라고닉 저택의 어딘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
용언의 약속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들은 정보는 고작해야 이 정도다. 단순한 방문객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장소라 했으니... 드라고닉의 저택에도 라이언하트의 영맥처럼 특별한 장소가 있는 걸까.
탐색이 자신없지는 않았다. 유진은 아카샤를 가지고 있다. 이 지팡이는 드러나지 않은 마법들조차 보여주고, 이해하게 만든다. 거기에 탐색마법까지 동원한다면, 저택의 숨겨진 장소쯤은 쉽사리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사실 드래곤을 불러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카샤를 박살내는 건데 말이야.’
아카샤는 드래곤이 직접 죽은 동족의 심장으로 만든 지팡이다. 드래곤들은 엘프의 영지를 찾아와, 세냐에게 직접 지팡이를 선물했었다.
그런 아카샤의 드래곤하트가 박살난다면. 분노한 드래곤이 찾아올 지도 모른다.
‘...드래곤을 불러내겠다고 박살내기에도 아깝단 말이지... 꼭 찾아오리란 보장도 없고, 찾아와서 협조해줄 지도 모를 일이고.’
“이곳일세.”
알체스터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닫힌 방문을 가리키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리우는 안에 있을 걸세.”
“함께 들어가지 않으실 겁니까?”
“ ...리우는 아무래도 내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라서... 내가 함께 들어갔다가는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을 걸세.”
알체스터는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 나는 이만 집무실로 돌아가 보겠네.”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야단 정도는 쳐도 되겠죠?”
“그건 걱정하지 말게. 리우는 야단칠 구석이 없는 만큼 착한 아이거든.”
“예에...”
“그래도 만에 하나, 야단이 필요하다면... 날 신경 쓰지 말고, 따끔하게 혼을 내도 좋네.”
과연.
유진은 알체스터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 리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다. 조용하다. 하지만 안에서 기척이 꼬물대는 것이 느껴졌다. 한 번 더 두드려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유진은 쯧 혀를 차고서 문을 열었다.
그렇게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깔끔하게 정돈 된 커다란 방. 10살 남자애가 쓰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침대 아래.
물줄기가 유진에게 쏘아졌다.
“썩을 애새끼로군.”
유진은 빠르게 리우 드라고닉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리우 드라고닉
촤악!
물줄기가 콧등을 때렸다. 물방울이 눈에 튀고,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 턱에서부터 뚝뚝 떨어졌다. 덕분에 옷깃과 망토의 털이 축축하게 젖었지만, 유진은 일단은 내버려두었다.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맞아주었다. 망토 안에 있던 메르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유진님?’
뚝, 뚝.
유진은 잠자코 서서, 입술 사이에 스며 든 물의 맛을 보았다. 시큼한 맛... 저 썩을 애새끼. 물에 식초라도 섞은 모양이다. 입안에 남는 시큼함과 얼굴의 축축함! 유진은 고개를 돌려 침을 퉤 뱉었다.
“아하하하!”
침대 밑에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유진은 얼굴의 물을 닦지도 않고, 침대에서 기어 나오는 꼬마를 쳐다보았다.
리우 드라고닉.
올해 10살이라는 그 꼬마는 아버지를 닮은 붉은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몸은 어리아이답지 않게 쫙 빠졌는데, 얼굴은 어쩔 도리 없는 젖살이 남아있다.
그, 둥그런 얼굴 한복판에 장난기 그득한 미소를 담고. 한 손에 들고 있는 물총을 유진에게 겨누고 있다.
“...허허.”
당연히 리우는 사과따위는 해오지 않았다. 사과를 할 만큼의 개념이 있다면 대뜸 물총을, 그것도 식초물을 쏴대지 않았겠지.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음을 흘렸고.
피융~
리우는 한 번 더 물총을 쐈다. 이번에도 유진은 물줄기를 피하지 않았다. 촤악! 처음 맞았을 때보다 조금은 강렬해진 물줄기아 유진의 입술을 때렸다. 저 갈아 마실 애새끼는, 정확하게 다문 입술 사이를 노려서 입안에 식초물을 밀어넣었다.
“아저씨는 그것도 못 피해?”
리우는 물총을 흔들며 낄낄 웃었다. 뒷일에 대한 걱정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얼굴. 하긴 그렇겠지. 이곳은 드라고닉의 저택이고, 가주는 알체스터 드라고닉이며, 눈앞에서 물총을 쏴갈기는 저 때려죽일 애새끼는 리우 드라고닉이다. 이 저택에서 리우에게 뭐라 꾸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 뿐일 텐데, 알체스터는 늦은 나이에 본 아들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 하고 있다.
유진은 허허 웃으면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포옹! 유진의 얼굴과 옷을 적시고, 바닥에 떨어졌던 물방울들이 하나하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와!”
리우는 그 모습에 순진무구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거 마법이지? 나도, 나도 아저씨 얘기 많이 들었어. 아저씨는 대단한 기사이면서, 엄청난 마법사라며?”
그렇게 외치고서, 리우는 물총을 아래로 내렸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스스로도 영 미덥지 못하다는 얼굴이었다. 리우는 내린 물총과, 유진과, 그 앞에 떠있는 물방울을 번갈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이런 물총 하나 피하지 못하는 거야?”
“허허...”
유진은 방긋 웃으며 리우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이러려고, 개새끼야.”
퍼엉! 순식간에 날아 든 물방울이 리우의 얼굴에 부딪쳐 터졌다. 단순히 터진 것도 아니다. 유진은 정교하게 마나를 조작해, 흩어지는 물방울들을 모조리 리우의 코와 입으로 밀어넣었다.
“케헥!”
10살짜리 어린애가 이런 공격에 대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리우는 콧구멍과 입안을 가득 채운 시큼함에 땅을 뒹굴었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물방울이 입으로 흘러가고, 리우는 버둥거리며 켁켁 숨을 토했다.
“우웩! 케헤헥!”
유진은 버둥거리는 리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코를 벅벅 문지르고 퉤퉤 물을 뱉어내던 리우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린 눈망울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아저씨 미쳤어?!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너는 미쳐서 나한테 그런 짓을 했니?”
“나... 나는 아저씨가 피할 줄 알았단 말이야...!”
“피할 줄 알았으면서 초면에 물총을 쏴갈겨도 되는 거니? 그리고 난 피하지 않고 물줄기를 처맞았으니, 내가 너한테 이러는 것도 정당방위 아니니?”
“그건... 그건... 아저씨는 어른이잖아...!”
“제 행동에 책임을 지고, 등신같은 짓을 하지 않는 것에는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난 마음 같아서 이 일을 모욕으로 물어 널 칼로 확 베어버리고 싶은데.”
말을 이으며, 살기를 슬쩍 흘려주었다. 그러자 리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더 이상 뭐라 따지지 못하고, 두 눈을 내리깔고 어깨를 움츠렸다.
“...네 아버지이신 알체스터경을 보아, 검을 뽑지는 않겠다.”
“...”
“대답 안 해?”
“네, 네에...”
“죄송하다는 말은?”
“죄송... 합니다...”
리우는 울먹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메르는 망토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메르는 고작 10살짜리 꼬마를 상대로 이렇게나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압박하는 유진을... 300년 전의 대영웅인 하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를 고민했다.
[...유진님은 참... 철저하시네요.]
‘애새끼 버르장머리는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뜯어 고쳐야 돼. 지금 시안이랑 시엘이 번듯하게 사람구실하고 있는 것도, 내가 걔들 어렸을 때 갈궈서 그런 거야.’
[...네... 참 대단하세요.]
메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유진은 근처의 의자를 끌어다가 리우의 앞에 앉았다. 리우는 아직까지 겁에 질려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두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던 주제에, 아래로 쏟지 않고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말이다.
“알체스터경이 내게 물총을 갈기라 한 거냐?”
“...아뇨...”
“그럼? 저택의 다른 사람이, 그 띠꺼운 유진 라이언하트의 낯짝에 식초물을 쏴갈기라 했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아저씨에게 쏘고 싶었어요.”
“너 한 번 만 더 날 아저씨라 부르면.”
유진은 끝까지 말을 잇지 않고 다리를 꼬았다. 그 동작에 리우는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 네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짓을 할 거야.”
“네, 네, 형.”
“그래서. 왜 나한테 물총을 쏘고 싶었는데?”
“...형이 대단한 기사라고 해서... 피할 줄 알고...”
“물론 나는 피할 수 있었지. 일부러 안 피한 거야.”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움츠려져 있던 리우의 몸이 활짝 펴졌다. 리우는 크게 당황해서 제 몸과 유진을 번갈아 보았다.
“바, 방금 뭐예요? 마나? 마나로 절 움직이게 한 거죠?”
어쭈. 유진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리우를 응시했다. 아들이 자질이 꽤 뛰어나다던 알체스터의 말은 솔직히 흘려들었는데... 제국제일의 기사가 자랑스러워 할 만큼의 자질은 있는 모양이다.
“...와아... 우와...!”
리우는 제 몸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마나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명문무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린나이부터 마나에 입문하는 것은 흔한 일이고, 그 어린나이부터 마나를 느끼는 것도 흔한 일이다. 당장 시엘과 시안도 리우보다 어린 나이에 마나에 입문했었다.
하지만. 리우는 유진이 생각한 것보다 마나를 훨씬 잘 느끼고 있었다. 지금 리우를 건드리는 마나는 왠만한 기사도 확실하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데, 리우는 그를 완벽하지는 못해도 조금씩 인지하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 재밌네.’
드래곤과 접촉해 보려고 온 것인데, 리우의 자질이 꽤 흥미로웠다. 유진은 망토 안에서 아카샤를 쥐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마법의 술식을 떠올렸다. 입 밖으로 영창할 필요도 없이, 의지가 마법의 시동이 되었다.
화악.
유진이 보는 시야가 조금 바뀌었다. 유진은 의식을 집중해 리우를 바라보았다. 고위서클의 간파마법. 유진은 그를 통해 리우의 코어와 마나의 흐름을 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간파마법은 펼쳤는데, 코어와 마나의 흐름이 보이지가 않는다.
[어라?]
메르도 그것에 의문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린 나이에 뛰어난 마나 적성을 가지는 것이야, 명문무가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아 온 기재라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법에 대한 저항력은 이야기가 다르다. 유진이 사용한 간파안은 6서클의 마법이다. 마법사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 기사 가문에서 태어난 꼬마가. 저항마법이 깃든 아티펙트도 없고, 그와 같은 종류의 마법을 왼 것도 아니면서 간파안을 거부한다고?
[...이건... 마법저항력이 아니에요.]
‘나도 알아.’
그런 것이라면 아까 콧구멍과 입안에 물을 밀어 넣었을 때 저항했겠지. 유진은 다시 술식을 떠올렸고, 이번에는 메르도 보조에 나섰다.
ㅡ키이잉! 시야가 다시 집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우의 코어는 보이지 않았다. 메르가 말한 대로다. 아무리 마법저항력이 강하다고 해도, 흐릿하게나마도 보이지 않는 것. 어떠한 마법이 보호하고 있나? 그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하는 것은... 아냐. 10살에 이런 식으로 마법을 속일 수 있다면, 이 새끼가 베르무트의 환생이겠지.’
“너 베르무트님이 좋냐, 하멜님이 좋냐?”
“네?”
“둘 중 누가 좋냐고.”
“...저... 저는 오릭스 드라고닉님이 좋아요.”
베르무트가 저런 헛소리를 할 리가 없지.
“너 이리 와 봐.”
대뜸 해오는 손짓에 리우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유진은 홱 손을 뻗어 리우의 손목을 낚아챘다.
“뭐, 뭐에요?”
“가만히 있어 봐. 널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래.”
그렇게 둘러대고, 손목을 통해 마나를 흘려보냈다. 마나는 막힘없이 리우의 몸안을 돌았다.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리우의 얼굴을 들여 보았다. 리우는 지금 유진이 무엇을 하는 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손목에서... 팔에서 뭔가 올라와요. 형이 하는 거죠?”
간파마법으론 보이지 않은 주제에, 몸안에 마나를 흘려보내는 것에는 아무런 저항이 없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터무니없을 정도의 마법저항력을 타고났을 뿐인가? 유진은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다시 한 번 간파마법을 사용했다.
그 순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리우의 손을 놓았다. 갑작스레 덮쳐 온 오싹거림이 유진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언젠가 느껴 보았던. 어디서였지? 유진은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꺅!”
그걸 느낀 것은 유진 뿐만이 아니었다. 망토 안에서 유진과 함께 리우의 특이점을 살피고 있던 메르가 비명을 질렀다. 메르는 낯설고도 이질적인 위압감에 겁에 질려, 망토 안에서 몸을 움직여 유진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공포.’
마왕의 잔재와, 아이리스가 내뿜던 적의에서도 메르는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제야 유진은 방금 느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이건 적의나 살의가 아니다. 근육을 경련시키는 맹수의 울부짖음과 같은, 마나를 경직시키고 흩트리는 존재감.
‘...드래곤피어.’
라이자키아가 내뿜던 드래곤 특유의 존재감. 그 오만한 종족은 기세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마법을 흩트리고, 마나를 경직시킨다.
“왜... 왜 그러세요?”
리우는 당황하여 유진을 쳐다보았다. 리우는 유진의 망토가 크게 꿈틀거린 것과, 망토사이에 살짝 튀어나온 보라색머리카락을 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의 자그마한 비명. 리우는 그것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유진의 표정이 워낙에 심각하여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무의식적으로 드래곤피어를 내뿜고, 그걸 스스로도 느끼지 못한다고?’
유진은 무엇이 트리거가 되어 드래곤피어가 흘러나왔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몸 안에 흘려보낸 다른 종류의 마나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건가?
대체 어떻게?
*
“아들은 어떤가?”
“알체스터님이 자랑이라 여길 만도 하더군요.”
드라고닉 가문의 훈련실. 이곳은 저택과 떨어진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는 돔 형식의 건물이다. 유진은 건물이 벽면마다 깃든 마법들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특히 마나의 적성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과연 드래곤의 혈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은 알체스터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뭔가 드러나지 않을까 했는데, 알체스터는 아들의 칭찬에 함박웃음만 지었다.
“...그렇다보니 여러 호기심이 들더군요.”
“어떤 호기심 말인가?”
“드라고닉 가문의 시조이신 오릭스 드라고닉님이 반인반룡이었다는 것은 키엘의 제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 중에서도 당대에 제국제일의 기사라 불리시는 알체스터님과... 아들인 리우는 그 피를 ‘짙게’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유진은 알체스터의 반응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고맙고 기쁜 말을 해주는 군.”
알체스터는 크게 감격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조님 이후로 300년. 우리 드라고닉 가문은 라이언하트와 똑같은 시대에 태어나, 지금까지 이름을 이어왔네. 내 스스로 자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나는 전란에서 키옐을 수호했던, 시조님처럼 되고자 노력해왔지.”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닌데.
“그러한 마음가짐을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역대 드라고닉의 가주님들 모두가 키옐을 수호하고자 했으니 말이야. 라이언하트도 그렇잖은가? 대영웅, 위대한 베르무트님을 존경하고, 후손들은 베르무트님처럼 되고자 수행하였겠지...”
“...”
“나는 내 아들도 그렇게 자라기를 바라네. 기사도를 따르며, 황제폐하를 유일한 주군으로 섬기며, 제국을 수호하길 바라네. 언젠가... 아들이 내 뒤를 이어 폐하의 수호기사가 되었을 때. 자네의 라이언하트와 친밀한 관계를...”
“저는 가주 후보가 아닙니다.”
“...으음, 그랬었지. 내가 실언을 하였군. 하지만 그때도 자네는 라이언하트일 것 아닌가? 그러니 미래에, 내 아들과 키옐을 함께 수호해...”
“가주님은 드래곤피어를 쓸 수 있으십니까?”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응?”
“드래곤피어 말입니다.”
오릭스는 반인반룡이 아니다.
운 좋게 드래곤하트를 취했을 뿐이다.
오릭스의 후손들은 드래곤의 피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드래곤피어를 어떻게 쓴단 말인가? 아니, 만에 하나 쓸 수 있다고 해도, 10살짜리 꼬마가 드래곤피어를 내뿜는 것이 가능한가?
“드래곤피어라면... 그... 드래곤이 내뿜는 위압감을 말하는 것이지?”
“예.”
“사람이 드래곤피어를 어떻게 내뿜는단 말인가?”
“...하지만 알체스터님은... 반인반룡인 오릭스님의 후손이시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나를 비롯해 역대 가주님들 중에서 드래곤피어를 내뿜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네.”
“...”
“자네는... 음... 카르멘님과 조금 닮은 구석이 있군.”
“예?”
“아니아니, 오해는 하지 말게. 자네가 카르멘님과 혈연관계가 아니고, 촌수를 따지면 남남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단지 그... 성격적인 면이 닮은 것 같아.”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 한 욕설을 참았다. 그 나잇값 못하고, 부끄러움 모르는 사춘기 시절에나 즐길 법 한 해괴망측한 취미와 센스를 가진 여자와 닮았다니?
“...오래전에 카르멘님도... 이 저택에서 내게 그런 것을 물어보셨었지.”
“...뭘 말입니까?”
“브레스를 뿜을 수 있냐고 물어보셨었지.”
“...”
“등 뒤에서 드래곤의 날개를, 엉덩이에 꼬리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오른팔에는 흑염룡이...”
“제가 말하기에는 굉장히 무례한 말이지만, 카르멘님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나는 그 분이 굉장히 일관적인 분이라 생각하네.”
알체스터는 헛기침을 하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기사로서, 무인으로서 존경하고 있지.”
“...어쨌든 드래곤피어는 쓰지 못하시는 겁니까?”
“쓸 줄 모르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애당초 그런 재주가 있다면 주변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드래곤피어 같은 이야기는 그만하고, 자네를 이곳에 부른 이유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알체스터는 헛기침을 하고서 자세를 바로 세웠다.
“...라이언하트의 백염식과 적염식은 아주 유명하지만, 가문의 외인에게 전승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네.”
“예.”
“물론 나도 자네가 리우에게 백염식이나 적염식을 가르쳐주길 바라지는 않아. 자네가 보여주었던 검술은 탐이 나지만, 그것을 지금의 리우가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겠지.”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아니아니. 리우를 가르치는 것을 너무 의식할 필요가 없단 말일세.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자네가 먼 미래까지 리우와... 드라고닉 가문과 친분을 유지하길 바라는 것이니.”
“하지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요령.”
알체스터는 짧은 단어를 내뱉으며 빙긋 웃었다.
“나는, 자네가 내 아들에게 마나를 다루는 요령을 가르쳐 주길 바라네.”
그 말에 유진은 내심 알체스터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카르멘이 말했던 것처럼, 알체스터의 유약하고 점잖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국제일의 기사라 불릴 만큼의 통찰력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가령, 검기를 구성하는데 마나의 배분을 어찌 하는 것이 최적인지. 검기를 검강으로 바꾸는 데에 마나를 어떤 식으로 결속시키는지. 코어를 통한 마나의 순환에서 어떤 흐름을 의도하며, 육체에 마나를 흘려보낼 때에 어느 길을 우선하는지.”
리우의 마나적성은 천재적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유진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닮은 재능. 유진은 그를 만개시켰고, 알체스터는 그 요령을 원하는 것이다.
“...요령을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물론 그냥 가르쳐 달라는 것은 아니야.”
알체스터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었다.
“나도 자네에게 드라고닉의 무예, 그 오묘한 무리를 전수하도록 하지.”
-나는 알체스터의 무술교관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선호하지 않아서, 알체스터에게 가르친 것은 주먹과 발길질 따위의 체술이었지. 당시의 드라고닉 가주는, 내게 가문의 무예들을 전수해줬다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음...”
유진은 카르멘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배우지는 않았지만, 왠지 손해를 보는 기분이었다.
...알체스터가 검을 뽑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리아르텔
느릿하게 뽑혀 나온 검. 자세는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유진은 알체스터에게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느꼈다. 지금 유진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의 기세는 여전히 차분하였으나, 평소와 같은 유약함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오롯이 예리했다. 이만큼이나 검과 어우러진 존재감은 전생에도 보기 드물었다.
‘...예리함만을 따지자면 길레이드보다 더해.’
검이란 것은 으레 타고난 천성에 따라 기질이 바뀌는 법. 그래서 알체스터가 보이는 예리함이 더욱 의외였다.
“...위대한 베르무트님은 올마스터라 불렸던 만큼 다양한 무기와 마법을 다루셨지. 하지만 오릭스 드라고닉님은 오직 검 하나만을 다루셨네.”
알체스터는 뽑은 검신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후 300년. 드라고닉 가문은 시조님이 남기신 검술을 발전시켜왔지. ...내 비록 머나먼 후예일 뿐이나, 선대들의 고충이 심각했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네.”
“무슨 고충 말입니까?”
“오릭스 드라고닉님이 가지셨던 반인반룡의 힘. 그것은 후대들에게 유전되지 않았거든.”
알체스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릭스님은 산봉우리만큼이나 높고 성벽만큼이나 넓은 검강을 뿜으셨다지만, 후대들은 그럴 수가 없었네. 날 비롯한 선대들은 오릭스님처럼 거대한 마나를 갖지 못했고, 반인반룡다운 마나적성도 갖지 못했어.”
당연한 일이다. 오릭스는 반인반룡이 아니고, 그 힘은 놈이 드래곤하트 하나를 통째로 취하여 얻어낸 힘이다. 유진도 전생에 드래곤하트를 동료들과 나눠서 취했었기에, 드래곤하트에 얼마나 거대한 마나가 깃들어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대들은 포기하지 않았지.”
알체스터가 검을 앞으로 뻗었다. ㅡ화악! 푸른빛의 검강이 검을 휘감았다. 그것까지는 특별한 것이 없었으나, 이후에 나타난 변화가 유진을 놀라게 만들었다.
검강이 크게 부풀었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알체스터의 검강을 살피다가,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하.”
추구하던 것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였는지를 알겠다. 지금 알체스터가 일으킨 검강은 효율의 극치라 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마나로 검강을 일으켜서, 대기 중의 마나를 검강과 결합시킨다.
그렇게 한다면 적은 마나를 들여 검강의 힘을 증폭시킬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코어를 거치지 않은 원초의 마나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지배력과 결속력이 떨어진단 말이다.
즉, 저 검강은 보는 것만큼 위력이 대단하지는 않단 것이다. 당장 백염식을 통해 형성한 검강과 충돌시킨다면, 몇 번 부딪치는 것만으로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것처럼 대단하지는 않아.”
알체스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움직였다.
“그래서 이름도 공검(空劍)이라 하지. 이 공검의 가장 큰 문제는, 안전성과 지속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거야. 마나가 옅은 곳에서는 제대로 써지지도 않고, 오래 끌수록 위력이 너무 약해져.”
“...예.”
“선대들은 그 단점을 줄이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내었네.”
“어떻게 말입니까?”
유진은 흥미를 느끼고서 물었다. 유진도 전생부터 마나조작에는 능했고, 가진 마나로 최대한의 위력을 뽑아내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것이 코어를 의도적으로 폭주시키는 이그니션이다.
그 이그니션은 백염식을 통해 코어를 형성하고, 마나를 쌓은 지금도 사용이 가능했다.
‘오히려 전생보다 나아졌지.’
육체와 코어의 성능, 백염식. 전생보다 압도적으로 조건들이 조으니, 백염식의 안정성과 출력도 크게 늘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 저 공검이라는 것도 백염식을 통해 응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렇게.”
알체스터가 다시 마나를 일으켰다. 불안정한 검강 위에 마나가 더해진다. 검강과 마나는 섞이지 않는다. 단지 표면을 얇게 덮을 뿐. 그렇게 점점 죄여들어, 불안정한 검강을 응축시킨다. 그리고 다시 표면에 마나가 달라붙었다.
그것이 반복되었다. 유진은 순수하게 감탄을 느꼈다. 알체스터는 실재하는 검신 위에 마나와 검강을 겹겹이 쌓아 코팅하고 있었다.
“...난해하군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저건 어렵다. 코팅이 반복될수록 위력은 증폭되고 안정되지만, 코팅 자체에 어마어마할 정도로 고등한 마나조작력을 요구한다.
“쌓을수록 어렵지.”
알체스터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짙은 푸른색의 검강. 검신의 형태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나조차도 8번 중첩하는 것이 한계일세. ...처음 중첩에 성공했던 것은 21살 때였고.”
알체스터가 제국무술대회에 참전해 우승했던 나이다. 알체스터는 빙긋 웃으며 공검을 흩트렸다. 결속되었던 마나가 허공에 흘러갔다.
“아마 자네는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자네 나이 때에는... 하하. 자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했으니.”
“...공검은 드라고닉의 기술이잖습니까? 그걸 라이언하트인 제게 가르쳐도 괜찮으신 겁니까?”
“드라고닉의 무예는 공검뿐만이 아닐세.”
검이 다시 칼집으로 돌아갔다.
“라이언하트의 중심이 될 자네에게, 드라고닉의 무예가 더해진다는 것은 가주인 나로서도 즐거운 일이야. 물론, 자네가 배우기를 원한다면 말일세.”
“거절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환생하고, 백염식을 익힌 후로 마나의 부족함을 절감했던 적은 없다.
‘월광검. 그 무식한 검을 쓸 때 빼고.’
이터널홀을 접목시킨 환염식은 코어의 위력을 한계까지 증폭시킨다. 거기에 공검까지 더해진다면? 몇날며칠 검강을 뿜어댄들 마나가 고갈되는 일은 없을 거다. 검강을 중첩시킨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
유진이 드라고닉의 저택에 머무르는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오전부터 낮동안은 리우를 지도하고, 저녁부터는 드라고닉의 수련장에서 알체스터에게 공검의 묘리를 지도받았다.
‘미쳤군.’
알체스터는 경악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 유진의 검은 회백색의 불꽃에 휘감겨 있었다. 순수하게 백염식으로 만들어낸 검강이 아니다. 공검의 묘리를 더해, 대기중의 마나를 검강의 연료로 넣고서 그 표면을 다시 검강으로 덮었다.
탁한 빛깔의 검강. 하지만 조금씩 색이 맑아지고 있다. 고출력으로 마나를 불태우는 백염식이, 정제되지 않은 마나의 불순물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백염식의 위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검을 형성했다.’
기존에 쌓인 바탕이 있다고는 해도, 고작 일주일 만에 형성에 성공하다니. 그걸 두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니, 가진 상식의 일부가 붕괴되는 것 같았다.
“...만약 자네가 여자였다면, 나는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네를 리우와 약혼시켰을 거야.”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유진은 몸서리를 치면서 공검을 응시했다. 밸런스를 잡는 것이 어렵다. 백염식의 출력을 포기하면 위력이 줄고, 출력을 유지하면 안정성이 떨어진다.
아무리 유진이 전생부터 마나조작에 도가 텄다고 해도, 이만큼 난해한 기술에 곧장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이런류의 기술은 가진 센스와 자질과 더불어, 어마어마한 숙련도를 요구한다.
‘...현재로서는 이 밸런스가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이군.’
그렇다면 중첩은? 유진은 환염식을 통해 코어를 연결했다. 다섯 개의 별이 함께 회전하고, 마나를 증폭시켰다. ㅡ화륵! 공검이 크게 흔들렸다.
‘무너진... 아니, 무너지지 않는다. 더해진 출력에 곧장 적응하여 조율하고 있어.’
불꽃에 달라붙는 마나는 난수다. 하지만 유진은 그를 곧장 해석하고, 조율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번 더 공검이 더해진다. 2중첩. 회백색의 불꽃이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다가 점점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ㅡ쩌적!
공간이 으스러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알체스터는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훈련장의 마나가 저 불꽃에 빨려 들어간다.
‘고작해야 2중첩인데?’
점점 격렬해지는 불꽃에 번개까지 섞여간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유진의 두눈은 흔들림없이 마나를 관조했다. 메르도 망토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불꽃을 지켜보았다.
불꽃에 흑점이 나타났다.
파아앗! 공검이 흩어졌다. 유진은 크게 숨을 내뱉고서 검을 떨어트렸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검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검신 전체에 실금이 번졌고, 아래로 내린 순간 박살나 버렸다.
“...하하하...!”
알체스터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작해야 2중첩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의 힘을 느꼈다. 중첩이 더 되지 않았던 것은 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기교를 떠난 순수한 ‘힘.’ 그래서 알체스터는 오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강자들 중, 저 검을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어휴.”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칼자루를 놓았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코어의 마나는 크게 사용하지 않았다. 공검이 흩어졌을 때의 반동도 대단하지는 않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는 것은, 단순히 희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닿았다.’
착각이 아니다. 공검에 흑점이 섞인 순간. 그때 손에 쥐어졌던 힘은 하멜의 전성기와 닿아있었다. 그것이 유진에게 커다란 희열을 주었다. 머잖아 백염식의 6성에 도달할 거라 생각하지만, 아직 유진은 백염식의 5성에 머물러있다.
그런데도 전성기에 맞닿는 힘을 손에 쥐었다. 완벽하게 다룰 수 없다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당장 다루지 못할 힘은 나중에는 다룰 수 있게 된다. 숙련도가 노력에 기반 한다면, 자유롭고 완벽하게 펼칠 수 있을 만큼 수행하면 된다.
‘밸런스의 기준을 낮추면 중첩은 늘릴 수 있어. 하지만 방금처럼 위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킬 수 없다. 일단은 이게 최적이고, 세세한 건 수행하면서 조율할 수밖에 없나...’
유진은 생각을 정리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아직까지 감탄해 있는 알체스터의 얼굴이 보였다. 드래곤에 대한 실마리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공검을 얻은 것만으로도 드라고닉 가문에 온 가치를 과할 만큼 거두었다.
“감사합니다.”
아까의 흑점.
그 강렬한 색이 알체스터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눈앞의 젊은 천재에게 시기와 질투심을 느끼는 대신, 유진이 보여주었던 것을 자신이 응용할 수 있을 지를 고민했다.
‘...놀랍군. 수십 년 동안 공검을 수행했는데... 설마 내 눈이 뜨이게 될 줄이야.’
그래서 더 기묘하단 생각이 든다. 방금 유진이 보여주었던 기예는 천재란 것은 감안해도 20살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고등했다. 알체스터는 유진에게서 마치 수십 년 동안 수련해 온 전사의 노련함을 느꼈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 해야겠어.”
알체스터는 뒤늦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 덕에 나도 늦은 나이에 무언가를 더 깨칠 수 있을 것 같아.”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터무니없는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알체스터는 면전의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자네의 검을 봐줄 필요는 없겠어.”
“과찬이십니다.”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애당초 자네의 검은... 내가 뭐라 조언할 수 없을 만큼 완성되어 있었지. 그나마 조언할 것이라고는 공검의 요령 정도였고.”
처음 생각하기를, 못해도 한 달은 요령에 대해 조언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은 고작 이틀 만에 조언이 필요 없을 만큼 능숙해졌고, 일주일이 흐른 지금은 2중첩까지 스스로 해냈다.
“...리우에게도 자네의 이야기를 들었네. 리우는 자네의 지도가 아주 마음에 든 듯 하더군.”
“말을 잘 들어준 덕분이죠.”
기강은 첫만남에 잡아놨고, 그 전부터 마나를 수련해 온 꼬마다. 자질도 굉장히 뛰어난 편이기도 해서, 리우는 유진이 조언하는 요령을 곧잘 알아먹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아마 1년 안팎이면 검기 정도는 발현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자네에게 더 가르칠만한 것이 없는데, 이 이상 자네를 이 저택에 잡아두는 것도 미안한 일이야. 원한다면 언제든지 라이언하트로 돌아가도 좋네.”
알체스터가 생각하기엔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 아들은 유진에게서 마나의 요령을 배웠고, 나흘 전부터는 바깥에 나와 체술의 지도도 받고 있다. 가솔인 기사들은 하나뿐인 도련님이 라이언하트에게 지도를 받는다는 것을 처음에는 불만스러워했지만, 유진이 리우를 지도하는 것을 직접 보고서는 더 이상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지도하는 것이라지만, 유진에게서 은연중에 묻어나오는 몸놀림을 인정한 것이다. 아무리 유진에 대한 소문이 무성한들, 남의 입에서 듣는 것보다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납득이 빠른 법이다.
리우는 어린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만, 알체스터는 더 이상 유진에게 가르칠 만한 것이 없었다. 공검 외의 비기를 전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저만큼 완성 된 아이에게 기본기에 대해 떠들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내일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진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훈련장을 나왔다. 어느새 밤이 깊었고, 공기는 선선하여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유진은 훈련장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으로 향했다.
[아직 특정은 되지 않았잖아요?]
‘감이 잡히는 것은 몇 개 있어.’
메르가 의아하다는 투로 물어오자, 유진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드라고닉 저택에서 보낸 일주일. 유진은 밤잠을 줄여가며 새벽동안 저택을 살폈다. 많은 시종과 기사들의 눈을 피하고, 알체스터가 있는 층에는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 층의 탐색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운 대낮 중에는 최상층에 장식 된 미술품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탐색에 전념했다.
드래곤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이 저택에 라이언하트의 영맥과 같은 특별한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항을 겪는 중에,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드래곤피어.’
10살짜리 꼬마가 무의식적으로 드래곤피어를 내뿜어댄다면, 주변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간파마법을 썼을 때, 리우의 몸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리우의 몸이 마법저항력을 가져 간파를 거절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의 저항력을 가졌다면, 리우가 쏴갈긴 물줄기를 놈의 입과 코에 역류시킬 수도 없었을 거다.
처음 드래곤피어를 느꼈을 때. 리우의 손목을 잡은 상태에서 간파마법을 썼다. 그래서 리우가 무의식중에 마법에 저항하여, 드래곤피어를 내뿜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다. 드래곤피어는 단순한 경고였을 뿐이다. 무엇에 대한?
유진은 일주일 동안 얻은 것들을 머리에 정리하고서, 걸음을 멈췄다.
리우의 방. 문은 닫혀있다. 주변에 다른 기척은 없다. 저택에 온 순간부터 투명마법을 썼고, 기척도 최대한 숨겼다. 유진은 문고리에 손을 얹고 즉시 마법을 사용했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유진은 미끄러지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 위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리우의 모습이 보였다. 유진은 투명화 마법을 풀고, 리우에게 다가갔다.
간파마법. 여전히 리우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유진은 마법을 유지하고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유진은 그를 확인하고서,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작은 단검.
그걸 리우의 목에 가까이 내밀었다. 살기는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행동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리우의 목에 닿는 순간.
ㅡ오싹.
그때와 같은 드래곤피어가 유진을 덮쳤다.
[유진님...!]
굳지 마. 유진은 즉시 몸을 틀었다. 어디지? 그때는 한순간이고 얕았지만, 지금은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길었다. 유진의 눈이 빠르게 방안을 훑는다.
닫혀있는 창문.
파직! 번개가 튀어 올랐고, 유진의 몸이 폭발적으로 가속했다.
“...응?”
리우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분명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
발이 지면에 닿지 않는 부유감. 몸을 쭉 늘리고, 그대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
‘워프?’
부유감은 순식간에 끝났다. 갑작스레 지면이 나타났지만, 유진은 뒹구는 일 없이 두 발로 내려섰다. 그리곤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 존재를 찢어발길 듯이 난폭한 드래곤피어가 정면에서 쏟아지고 있다. 유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다.
“...넌 대체 뭐지?”
벽난로의 앞. 장작불보다 강렬한 붉은 머리의 여인이 유진을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 독서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의 무릎위에는 두꺼운 책이 놓여있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유진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요즘 드래곤은 관음증이라도 있는 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한쪽 벽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데, 스테인글라스처럼 수십 개로 나누어진 면면마다 다른 화면이 비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리우의 방도 있었고, 저택의 복도와, 정원과, 수련장도 있었다.
“...어떻게 안 거냐?”
드래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마법으로는 문을 찾아낼 수 없었어. 네 거슬리는 간파마법으로 엿볼 수 없게끔 용언 자체를 바꿨단 말이다.”
“첫날에는 안 그랬던 거잖아?”
“...설마 아카샤의 주인이 찾아와서, 간파마법을 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드래곤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역시. 처음 리우에게 느꼈던 용언은, 리우 본인이 간파마법에 저항한 것이 아니었다. 유리창을 통해 지켜보고 있던 드래곤이, 간파마법에 제 시선이 노출될까봐 경고를 보냈던 것이다. 그 후에 다시 경고를 보내지 않았던 것은, 유진의 간파마법에 맞춰 용언을 바꿨기 때문이다.
“...나는 드라고닉 가문의 피에 드래곤의 피 따위는 섞여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
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과거 드래곤피어를 직접 느껴본 적이 있지. 네가 처음 드래곤피어로 경고를 보냈을 때, 나는 드래곤의 존재를 확신했다.”
“...드래곤피어를 느껴보았다...”
전신을 짓누르던 드래곤피어가 사라졌다. 드래곤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서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 라이언하트의 후예. 카르멘 라이언하트에게 내 이야기를 들었나?”
“아니.”
“그렇겠지.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이었고, 용언으로도 약속했었으니까.”
설마 카르멘이 드래곤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티를 내고 싶어 안달을 낼 줄이라곤 드래곤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드래곤피어에 대해 안다는 것은, 드래곤을 만나보았다는 것.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드래곤을 알 리가 없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드래곤을...”
“아니. 너는 드래곤을 만난 적이 없다.”
드래곤의 눈이 얇아졌다.
“내 이름은 아리아르텔. 레드드래곤의 일족이자, 현재 눈을 뜨고 있는 유일한 드래곤이다.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없으니, 드래곤을 만나보았다는 네 말은 거짓...”
“나는 하멜이다.”
아리아르텔은 입을 벌린 채로 굳었다.
아리아르텔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아리아르텔은 입을 벌린 상태로 굳어버렸다. 그러다가 뒤늦게 입을 닫고, 머릿속에서 생각을 이어갔다.
하멜.
뜬금없는 이름이지만, 아리아르텔은 저것이 누구의 이름인지는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우둔한 하멜?”
“우둔한은 좀 빼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후예,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그 우둔한 하멜이라고?”
“우둔한은 좀 빼자니까.”
“...인간이여. 설마 나를 희롱하려는 건가?”
아리아르텔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유진을 응시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피어는 뿜어지지 않았지만, 굳이 그를 내뿜지 않아도 아리아르텔이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은 유진도 잘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 지를 고민하다가, 간단한 방법이 떠올랐다. 유진은 즉시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리아르텔은 그 행동에 살짝 움찔했지만, 이내 차분한 눈으로 유진을 지켜보았다.
유진은 망토에 넣은 손을 곧바로 빼내지는 못했다. 안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던 메르가 유진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유진은 손에서 전해지는 떨림에 눈가를 찡그렸다. 메르 때문에 찡그린 것이 아니었고, 대뜸 드래곤피어를 갈겼던 아리아르텔을 노려보았다.
“너 때문에 애가 놀랐잖아.”
“...뭐라고?”
아리아르텔은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지만, 유진은 망토 속에서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떨림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드래곤피어는 마나를 흩트린다. 사역마인 메르는 사람보다 드래곤피어에 민감했고, 특히 그녀는 존재가 소멸당하는 것에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결국 유진은 망토 안에서 메르를 끄집어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몸을 파들거리면서 떠는 주제에 메르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래. 유진은 그렇게 말해주면서 메르를 한손으로 안아들었다. 메르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들고 나왔던 위니드를 유진에게 건넸다.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유진님이 위니드를 찾으셨으니까, 제가 가지고 나온 거예요.”
“그래, 그래.”
“망토 안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지금은 이렇게 유진님이랑 같이 있을래요.”
“그래, 그래.”
...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아리아르텔은 눈을 찡그리고서 메르를 흘겨보았다. 인간과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저것은 고등한 마법으로 구성된 사역마다. 아리아르텔이라도 저만큼 완성도 높은 사역마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사역마를 자식마냥 품에 안고서...’
“눈 좀 착하게 뜨고 있으면 안 되나?”
“...나보고 하는 말이겠지?”
아리아르텔의 뺨이 씰룩거렸다. 유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위니드를 뽑았다.
은청색의 검신을 바람이 감쌌다. 이윽고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가 부름을 받고 이 자리에 강림했다. 상황은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템페스트는 평소와 같은 폭풍의 모습이 아닌 자그마한 회오리의 모습으로 유진의 앞에 나타났다.
“...바람의 정령왕...”
아리아르텔은 템페스트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템페스트와 유진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설마, 나와 싸워볼 생각으로 정령왕을 불러낸 것은 아니겠지?”
“템페스트. 쟤한테 내가 하멜이 맞다고 좀 말해 줘.”
유진은 아리아르텔, 드래곤과 정면에서 싸울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냥 보증이 필요해서 템페스트를 불러낸 것뿐이다.
[...어린 드래곤이여. 그는 300년 전에 이름을 떨쳤던 하멜 다이너스가 맞다. 지금의 시대에는 우둔한 하멜로 알려져 있지.]
“...”
[혼란스러운 것은 이해하나, 유진 라이언하트가 하멜의 환생이라는 것은 나 템페스트가 보증하겠다. 그대도 알다시피, 정령왕은 이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환생이라고?”
아리아르텔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령왕이 직접 보증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300년 전의 영웅이 현대에 환생했다. 그것도 동료였던 용사의 후손으로? 혼이 윤회하는 것이야 특별할 것 없는 일이다. 모든 존재는 언젠가 죽고, 다른 존재로 환생한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환생한다는 것은, 아리아르텔이 생각하기엔 우연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환생을 의도했나? 그것이 마법으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믿도록 하지.”
아리아르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유진의 환생에 마땅한 의구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왜 유진이 이곳을 찾아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느꼈다.
“...네가 하멜이라면, 드라고닉의 시조가 반인반룡이 아니란 것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너는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을 테니 말이야.”
“드래곤이 왜 드라고닉 가문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
유진은 고개를 돌려 뒤편을 바라보았다. 이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아르텔이 꽤 오랫동안 드라고닉 가문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유희의 일종이라 해두지.”
아리아르텔은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벽면을 가득 채웠던 화면들이 일제히 꺼져버렸다.
“시조 오릭스 드라고닉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밝혔던 이름. 팔라스케스는 내 아버지다. ...오릭스는 내 아버지의 드래곤하트를 취하고, 자신이 팔라스케스를 아버지로 둔 반인반룡이라며 세상에 거짓말을 했지.”
“...그것이 네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라 여겼다면, 드라고닉 가문을 지워버리면 되었잖아?”
“아니. 나는 그를 모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알이었을 적에 죽었고, 드래곤은 부모에게 큰 애정은 느끼지 않는다.”
어린 드래곤.
템페스트는 아리아르텔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유진은 드래곤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고, ‘어리다’고 말할 정도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르겠다.
“...너 몇 살인데?”
그래서 대놓고 물어보았다.
“...200살은 넘었...”
“나보다 어리군.”
“?”
템페스트는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유진을 돌아봤고,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메르도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것은 아리아르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처음 드래곤피어를 쐈던 것은 몰라도, 아까 나한테 드래곤피어를 쐈던 것은 내가 리우를 죽일 줄 알고 그랬던 거잖아? 단순히 유희삼아 지켜보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뻔히 보고 있는데 죽게 내버려두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
삐딱한 대답. 유진은 메르의 등을 쓸어내려주면서 코웃음을 쳤다.
“사실 그 이유가 엄청 궁금한 것은 아니야. 나로서는 몰라도 별 상관없는 일이고.”
드래곤의 가족애가 어떤 식인지는 짐작도 안 간다. 그래도 저렇게 지켜보는 것을 보면, 아리아르텔이 드라고닉 가문에 나름대로 애착 같은 것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유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공검을 배운 것으로 알체스터에게 경의의 감정은 생겼다만, 아리아르텔과 드라고닉 가문의 인연은 유진과 알체스터의 인연보다 몇 배는 깊고 짙은 것이다.
그런 문제보다는, 아리아르텔이 아까 했던 말이 더 신경 쓰였다.
“...네가 현재 눈을 뜨고 있는 유일한 드래곤이라고?”
드래곤은 300년 전에 유폐의 마왕, 멸망의 마왕과 싸움을 벌였다. 유폐의 마왕은 대여섯 마리의 드래곤을 죽인 뒤 전선에서 물러섰고, 멸망의 마왕이 절반의 드래곤을 몰살시켰다.
그 싸움에서.
라이자키아가 동족을 배신했다. 놈은 전선을 이끌던 로드를 배후에서 기습해 죽이고, 로드의 드래곤하트를 취하고서 전선을 이탈했다.
“...우둔한 하멜. 너도 300년 전, 드래곤이 어떤 전투를 벌였는지 알 거다. 멸망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절반의 드래곤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무사하지는 않았다.”
헬무드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드래곤을 보았다.
“죽음이 머지않은 드래곤들은 남은 목숨을 가치 있게 사용할 방법을 궁리했다.”
“...”
“죽은 드래곤은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뼈도, 비늘도, 피도, 심장도, 모든 것이 마나로 돌아갈 뿐. 몇몇 드래곤들은 제 심장을 세상에 남기고자 했고, 내 아버지인 팔라스케스도 그 중 하나였다.”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던전을 만들고, 그 끝에 드래곤하트를 봉인했다. 던전을 돌파해 온 뛰어난 모험가가 드래곤하트를 취하고, 그 끔찍하던 세상에서 활약하길 바란 것이다.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오릭스 드라고닉도 그렇게 던전을 돌파해 드래곤하트를 손에 넣었다.
전생에 하멜과 동료들도 그렇게 드래곤하트를 손에 넣었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던 드래곤들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고, 그보다 사정이 나은 드래곤들은 상처를 돌보는 것에 전념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이 회복하고 다시 전선에 복귀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버린 거다.”
위대한 베르무트와 유폐의 마왕이 맺은 약속.
“...나는 그 약속의 내용은 모른다. 하지만 그 약속이 맺어진 후, 드래곤들은 일제히 수면기에 들어갔다. 당시에 갓 태어난 헤츨링이던 나는, 홀로 세상에 남아 ‘요람’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약속.
유진은 템페스트를 힐긋 쳐다보았다. 하지만 템페스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이 수면기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겠지만, 그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상처의 회복은 잠을 자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왜 다른 드래곤들이 일제히 수면기에 들어간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의문에 충분히 답은 되었겠지. 그래서 우둔한 하멜이여. 드래곤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지?”
아리아르텔은 보란 듯이 힘을 풀어내며 물었다. 상대가 300년 전의 영웅의 환생이란 것은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아리아르텔이 고개를 숙여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힘을 빌리고 싶다.”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말에 아리아르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게 됐군. 우둔한 하멜. 너는 내 힘을 빌어 300년 전에 해내지 못했던 마왕 토벌을 끝내고 싶은 모양이지만, 나는 세상의 일에 크게 관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
“뭔 소리야. 200살 조금 넘었다는 드래곤이 세봤자 얼마나 세다고 힘을 합쳐서 마왕을 토벌해?”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찾아온 것이냐?”
“용언마법이 필요해.”
아리아르텔은 눈가를 찌푸린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 거지?”
“차원의 틈을 탐색하는 마법.”
유진은 근처의 의자를 멋대로 끌어와서 아리아르텔의 앞에 앉았다.
“정확한 좌표는 모른다. 대체 어떤 차원의 틈에 있는 지도 몰라.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이 속한 차원과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 나도 마법사니까 내 나름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아마 우리 차원과 걸쳐져 있는 틈새 어딘가가 아닐까 싶어.”
“...”
“외차원으로의 강제추방이 불완전한 형태로 집행되어서, 이 차원의 틈에 걸쳐버린 거다. 그러면서도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는 않았어. 권속들과 계약은 조금이나마 유지되고 있는 모양...”
“잠깐... 잠깐.”
아리아르텔은 혼란을 숨기지 못하고 양손을 들어보였다.
“외차원의 강제추방?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마법에 의해 외차원으로 추방되었다는 것이냐?”
“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세상에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를 강제로 추방하는 것은 용언마법으로도 불가능해. 대체 누가...”
“세냐 메르데인.”
유진이 뱉은 이름에 메르가 귀를 쫑긋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가슴도 활짝 펴서 으스대고 싶었지만, 메르는 아리아르텔이 내뿜는 드래곤피어가 두려웠다.
“...현명한 세냐...”
“세상에 그런 마법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내 알 바 아니야. 세냐가 그렇게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차원의 틈을 떠돌고 있다는 존재는... 대체 누구지?”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아리아르텔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흔들리고, 두 눈에는 거대한 살의가 담겼다.
그렇게 퍼부어대는 드래곤피어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유진은 덜덜 몸을 떠는 메르를 보다 강하게 안으면서 아리아르텔을 노려보았다.
“아 시발 그거 하지 말라니까!”
“라이자키아...! 그 블랙드래곤! 용마성의 라이자키아라고?! 우둔 하멜! 너는 차원의 틈을 헤매고 있다는 라이자키아를 구하려는 것이냐?!”
왜 자꾸 멀쩡한 이름 두고 우둔한 하멜이라고 부르는 걸까... 설마 저렇게 부르는 것이 드래곤다운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라 착각하는 걸까..
“내가 걔를 왜 구하니? 그 새끼 찾아서 죽여버리려 하는데, 내 능력으론 찾기가 힘들어. 그래서 네 도움을...”
“그 라이자키아를 네 손으로 죽이겠다고?! 우둔한 하멜, 네가 과거의 영웅이란 것은 알지만 네 힘으로는 라이자키아를 죽일 수 없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진정하고, 드래곤피어도 거두고, 자리에 좀 앉아 봐. 그리고 나보고 우둔하다는 말 좀 그만해.”
“내가... 내가 도와주지. 라이자키아는 드래곤의 배신자다. 놈의 악행은 드래곤의 손으로 끝내야... 아니...”
아리아르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서 신음을 흘리더니,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럴 수... 없군. 나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다...”
“아니. 같이 싸워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자꾸 혼자 난리법석이야? 나는 그냥, 네가 차원의 틈 어딘가에서 라이자키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나 알려주면 충분하다고.”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
아리아르텔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차원의 틈... 권속과의 주종계약이 남아있다면... 세상과의 연결이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그런 계약은 주인이 관장하는 것이고, 계약자 쪽에서는 거스를 수도, 관여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아리아르텔은 한참 동안 혼자서 중얼거렸다. 유진은 그런 아리아르텔을 내버려 두고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유진은 아직도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창가에 다가가서 밖을 보았는데, 한적한 시골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키옐인 것 같기는 한데... 어디지?’
당장 이 집은 귀족이나 자산가의 저택이 아니다. 어느 마을에나 있을 법한 작고 평범한 집. 아리아르텔 외에 다른 사람이 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추적마법을 극대화시켜서... 공간과 차원의 너머까지 포착할 수 있도록... 아니... 공간단위에서 벗어나 차원에 다다른다면 영역과 좌표는 무의미... 일단 포착만 한다면... 그래.”
한참동안 중얼거리던 아리아르텔이 고개를 들었다.
“...협력하지.”
“그래서 어떻게?”
“라이자키아를 추적할 용언마법을 아티펙트에 담아주마. 하지만 이것으로 바로 라이자키아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이자키아와 연결 된 것이 필요해.”
“연결?”
“라이자키아가 오랫동안 다뤘던 물건 같은 것이 제일 좋다. 물건이란 것도 오래 될수록 영기(靈氣)가 닮기고, 그러한 영기는 주인의 기질이 새겨져 있기 마련이지.”
“...물건이라... 피는?”
두눈을 반짝 빛내며 질문했다. 피? 아리아르텔이 되묻자, 유진은 지금 용마성에 있는 라이자키아가 본인이 아니라 헤츨링일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해주었다.
“...계약과는 달리 혈연은 쌍방에 주도적이다. 만약 정말로 라이자키아의 헤츨링이라면, 그를 통해 라이자키아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
유진은 거기까지 듣고서 품에서 아카샤를 꺼냈다. 끝에서 빛을 발하는 붉은 보석에 아리아르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드래곤하트와 세계수의 가지를 사용해 만든 지팡이. 아리아르텔은 그 강력한 지팡이에 매료되어 꿀꺽 침을 삼켰다.
“...뭐지?”
“용언마법은 아카샤와도 잘 맞을 것 아니냐? 효과도 증폭될 거고.”
“...그렇기는 하겠지만, 용언을 새기는 것 자체가 지금 바로는 되지 않아.”
“맡기고 가면 되지.”
유진은 태연히 대답하고서 아리아르텔에게 아카샤를 쥐어주었다.
“일주일 뒤에 찾으러 오면 되나?”
“...그 정도면... 충분하기는 할 거다.”
태도가 혼란스럽다. 나는 드래곤인데, 저 인간은 드래곤에게 보여야 마땅할 공경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와서는 대장장이나 재봉사에게 물건을 맡기는 것처럼 편하게 대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야. 너 카르멘님한테 그... 헤븐 제노사이드는 왜 만들어 준거냐?”
“헤븐 제노사이드가 뭐지?”
모르는 척 하는 건가?
“...그, 있잖아. 평소에는 회중시계인데, 폼체인지를 외치면 이상하게 변신하는...”
“...연금장갑을 말하는 건가?”
아리아르텔이 중얼거렸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수십 년 전.
아리아르텔은 매일 그러하듯, 드라고닉 저택의 풍경을 벽면에 띄워놓고 일상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며칠 전에 저택을 찾아 온 라이언하트의 영애. 성격이 조금 해괴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외모는 물론 무예의 실력도 빼어난 것이 내심 아리아르텔의 마음에 들었다.
당시 5살의 알체스터는 나이는 한참 어렸지만, 재주없는 아버지와는 달리 굉장히 영특했다. 저 아이가 가주가 된다면 드라고닉 가문은 이전보다 큰 권세를 누리게 될 것이다. 거기에 만약 라이언하트의 영애와 혼약이라도 맺는다면?
“...드래곤의 일상은 지루하지. 그래서 드래곤은 다양한 유희를 통해 삶의 지루함을 달랜다. 내가 드라고닉 가문을 지켜보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짧은 삶을 격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그것도 하나의 가문을 지켜본다는 것은 드래곤에게 있어서도 꽤 몰두할 만한 유희다. 인간이 오페라나 연극 같은 창작물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
아리아르텔이 내심 바라던 것과는 달리, 카르멘은 알체스터에게 아무런 연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건 알체스터도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그때 카르멘의 나이는 17살이었고, 알체스터의 나이는 5살이었다.
관계의 진척은 없었지만, 아리아르텔은 카르멘 라이언하트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카르멘은, 아리아르텔이 여태까지 보았던 그 어떤 인간보다 괴상했기 때문이다.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그녀는 방에 혼자 있을 적에 바닥에 이상한 마법진을 그리고서 혼자 주문을 외곤 했었다. 그건 아무런 마법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낙서였고, 외는 주문은...”
“굳이 알고 싶지는...”
“나도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방심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는 재미가 있어서 너무 가까이 보았던 탓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아리아르텔은 카르멘이 그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를 못했다.
“...어느 날. 훈련에서 돌아 온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몸을 씻기 전,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에 심취했다.”
“뭐?”
“가끔 인간은 그럴 때가 있지 않나? 물에 젖어 흘러내린 머리카락, 물기 찬 눈동자, 거친 호흡.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그런 제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데, 갑자기 거울을 주먹으로 때렸다.”
“...아니... 뭐?”
“...그 거울을 통해 카르멘 라인어하트는 이곳에 넘어왔지.”
아리아르텔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때 내지른 주먹에 아리아르텔은 눈자위를 정통으로 얻어맞았었지만, 그녀는 그런 말까지는 굳이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연금장갑은 내 어머니의 레어에 있던 것으로, 주인의 피에 감응해 원하는 형태로 모습을 바꾸는 전투아티펙트다. 나는 그 만남을 비밀로 할 것과,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인간에 대한 경의로서 연금장갑을 주었다.”
내심 그 선물을 받고서 알체스터와 좋은 관계가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드라고닉의 뒤에는 드래곤이 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끔 용언으로 약속을 맺었지만, 카르멘 본인이 알고 잇다면 상관없는 일 아닌가. 드래곤이 배후에서 지켜보는 가문이라면 12살 어린 소년과의 혼약을 생각해 볼 만큼 파격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바람과는 달리, 카르멘은 알체스터와 혼약을 맺지 않았다. 알체스터 본인도 카르멘에게 아무 연심을 갖지 않았다. 결국 그 귀중한 연금장갑만이 카르멘에 의해 헤븐제노사이드로 다시 태어나 버렸다.
“...거울을 왜 때린 거지?”
목욕을 마치고 나온 순간,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섹시하다고 느끼는 것.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대체 거울은 왜 때렸던 걸까.
유진은 다른 무엇보다 그 사실을 제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리아르텔
아리아르텔이 사는 마을은 키옐 변경의 시골의 볼라뇨 지방이다. 이곳은 유진의 고향인 기돌과 좋은 승부를 벌일 수 있을 만큼의 시골지방이었는데, 그제야 유진은 과거 시안과 시엘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똥냄새가 나는 군.”
그때 시안과 시엘이 했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 한적한 시골의 풍경에는 소똥냄새와 말똥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기왕 살 거면 이런 시골보다 도심지가 낫지 않나?”
“요란스러워서 싫다.”
바깥까지 따라 나온 아리아르텔이 두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하루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드라고닉의 대저택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 하는 일도 없어 보이는데 바깥이 요란스럽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라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직접 찾으러오지는 마라.”
아리아르텔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수도 직통의 워프게이트가 가동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을 전체가 소란스러워지는 곳이지. 하물며 수도에서 건너 온 것이 그 라이언하트의 후예라면, 마을사람들은 눈을 뒤집고서 축제를 벌이려 할 거다.”
“...그건 좀 오바 아닌가?”
“옆집 강아지가 대소변을 처음 가렸다는 것만으로도 축제를 벌이는 마을이다. 나는 마을을 시끄럽게 하고 싶지도 않고, 너로 인해 괜히 주목을 받고 싶지도 않아.”
정말로 주목받고 싶지 않다면 이런 마을이 아닌 어디 산골짜기에라도 틀어박혀 살아야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저토록 강렬한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다니?
...그에 대한 의문도 굳이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그럼 어떡하자고?”
“어떡하기는. 지팡이만 보내도록 하마. 나는 괜히 더 너랑 엮이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아리아르텔은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을 흘겨보았다.
“...우둔한 하멜.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네 갑작스런 방문이 몹시나 불쾌하다. 만약 네가 라이언하트가 아니고,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 아니었다면. 나는 네 무례함의 대가를 목숨으로 치르게 했을 거다.”
“라이언하트는 뭔 상관이래.”
“위대한 베르무트가 맺은 약속에 의해 세상이 평화를 얻은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드래곤이지만, 위대한 베르무트에게는 경의심을 갖는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경의심을 안 가지냐? 나도 시발 베르무트랑 같이 마왕 목을 3번이나 땄는데.”
“...갑작스런 방문을 용서했고, 네 무례한 언동도 용서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경의라 할 수 있지 않나?”
“내가 생각하기엔 한참 부족해 보이는데. 까놓고 말해서, 나는 너랑 다른 드래곤들을 대신해 일족의 호로새끼인 라이자키아를 족쳐 줄 거야. 그리고 꿀잠자고 있는 드래곤들이 300년 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완전히 끝낼 거고.”
“...끝낸다고? 어떻게?”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나는 라이자키아를 죽이고,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일 거다. 그 과정에서 아마 다른 고위마족도 싹 다 족칠 거고, 제국이랍시며 뻗대는 헬무드도 쓸어버리겠지.”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아리아르텔이 생각하기에 유진이 뱉은 모든 말은 절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유진의 두 눈은 고요했고,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배가 고프다. 목이 마르다.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뱉은 것만 같았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면 된다. 그래, 저 모든 것들이 아무 어려움이 없는, 그냥 하면 되는 것들이다.
라이자키아를 죽이고,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헬무드를 쓸어버리겠다는 말.
유진은 그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은 그냥 하면 된다는 투로 말했다. 아리아르텔은 그것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갓 헤츨링을 벗어난 어린 드래곤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30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베르무트가 약속을 맺고 세상이 평화로워진 후에야 알에서 깨어났다.
전쟁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안다. 드래곤은 영겁의 세월을 산다. 멸망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드래곤들은, 자신이 살아 온 영겁에서 가장 두렵고 끔찍한 존재가 바로 멸망의 마왕이고, 그 다음이 유폐의 마왕이라고 말했다.
멸망과는 싸울 수 없다.
하멜이 들었던 드래곤의 유언. 그것은 모든 드래곤들이 처참한 고통으로 가슴에 새긴 교훈이기도 했다. 아리아르텔도 수면기에 들어가기 전의 어머니에게 직접 그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짓이겨진 비늘과 그 아래의 상처를 보여주며 아리아르텔에게 경고했다.
결코 헬무드에 가서는 안 된다.
라이자키아에게 일족의 원수를 갚으려 들지 마라.
유폐의 마왕과 맞서지 마라.
멸망의 앞에 서지 마라.
“...하멜.”
아리아르텔은 더 이상 ‘우둔한’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았다. 이제야 실감이 든다. 눈앞에 있는 것은 20살의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니다. 300년 전에, 모든 드래곤의 날개를 꺾었던 마왕들에게 싸움을 걸었던 용사. 3명의 마왕을 죽이는 여정을 함께 했던 전란의 주역.
“...요람의 관리자이자, 현재 눈을 뜨고 있는 유일한 드래곤, 아리아르텔이 네게 묻고 싶다. 하멜 다이너스. 너는... 정말로 모든 마왕을 죽일 셈인가.”
“그럼 내가 걔들이랑 손가락 걸고 약속이나 할까.”
유진은 코웃을 치며 대답했다.
“나는 약속보다 주먹을, 검을 휘두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야.”
“...그런가.”
맹세를 권할 필요도 없었다.
아리아르텔은 저 차분하게 가라앉은 금색 눈의 밑바닥에서 시간에 가라앉지도, 휩쓸려 사그라지지도 않은 증오와 살의를 보았다.
하멜,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는 모든 마왕을 죽일 것이다. 설령 힘이 부쳐 그를 이루지 못할 지라도, 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마왕을 죽이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 망토.”
아리아르텔은 유진이 두른 흑암의 망토를 눈여겨보았다. 저것은 더 이상 손댈 것 없는 훌륭한 아티펙트다. 내부의 마감은 최상위의 공간마법을 새겼고, 외장은 형태변환과 물리, 마법에 대한 방어술식이 가득하다.
“...충분히 훌륭하지만, 네가 상대해야 할 적들을 생각하면 방어가 부족하군.”
아리아르텔이 손을 들었다. 아무 것도 없던 허공이 갈라지고, 아리아르텔의 손이 공간의 틈으로 들어갔다.
“...나는 수면기에 들어간 드래곤들의 재화를 관리하고 있다. 보석이나 금화 따위는 명문 라이언하트의 후예인 네게 그리 필요하지 않을 터.”
아리아르텔이 틈새에서 꺼낸 것은 평범해 보이는 금색의 반지였다.
“이것이 네 여정에 도움이 되길 바라지.”
하지만 유진은 저 반지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깥과는 달리 새카만 안쪽. 집중해서 보아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의 작은 글자들이 안쪽에 빼곡하게 적혀 술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건?”
“아가로트의 반지. 그 이름을 알고 있나?”
“몰라. 그게 누군데?”
“...빛의 신을 중심으로 한 신화에 스러져 사라진 고대 신 중 하나지. 너도 명문귀족가에서 태어났다면 여러 교육을 받았을 텐데.”
지금의 세상에서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신앙. 신성제국 유라스가 섬기는 빛의 신. 그 종교는 유라스 뿐만이 아니라 대륙에 널리 퍼져있다.
빛의 신이 유일신인 것은 아니다. 유라스는 빛의 신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유라스를 제외한 다른 국가들은 국교를 두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래서 국가나 민족마다 섬기는 신은 여럿 있었다. 나하마는 사막과 모래의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기사도로 유명한 시무인은 기사와 명예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키옐에도 여러 신앙이 있지만, 빛의 신 다음으로 지명도가 높은 것은 풍요와 번화의 신이다.
그렇게나마 전해져 오는 신들 외에, 아득한 고대에는 이보다 더 많은 신앙이 존재했다고 한다.
“아가로트는 고대의 전쟁신이다. 그 시대는 억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드래곤들조차도 회고하지 못하는 아득한 옛날이지. 이 반지는 그 신화시대부터 내려 온 아티펙트다.”
아리아르텔의 손을 떠난 반지가 유진에게 날아왔다. 유진이 반지를 향해 왼손을 뻗자, 비어있는 5개 손가락 중 약지에 반지가 끼워졌다.
“왜 약지야?”
“계약, 결합, 약속. 약지의 반지는 고대부터 다양한 의미를 가졌다.”
따끔하는 통증. 반지가 유진의 약지에 맞게 줄어들며 피를 빨았다. 그 직후,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제복 아래에서 유진의 몸을 뒤덮었다.
무언가가 피부를 덮은 것은 분명한데,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살을 쓸어보면 여전히 피부결이 느껴진다. 팔뚝에 난 솜털도 손끝으로 잡아 뽑을 수 있었고, 꼬집어 보면 얕은 통증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반지는 치명적인 위협에서 널 보호해 줄 것이다.”
아리아르텔이 말을 이었다.
“절대적으로 보호해주진 못하겠지만. 네 적과의 싸움에서는 큰 도움이 되겠지.”
“아카샤 좀 줘봐.”
아리아르텔에게 아카샤를 넘겨받고 반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반지에 새겨진 마법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고대의 마법... 굳이 더 분류하자면 신성마법에 속할까.
‘...해석은 불가능해. 마나를 동력으로 삼는 것 같지도 않고.’
마법을 보고 있지만, 따로 추출해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성마법은 모두 다 그렇다. 마법이되 마법이 아니다. 그래서 성직자와 성기사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힘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방어결계에... 이건... 치유마법? 육체의 재생력을 강제로 활성화시키는 종류야. 그것도 극한까지... 다행인 것은 나 자신의 의지로 발동된다는 점인가.’
이해했다. 아가로트의 반지. 이것에 새겨진 치유마법은 당장 병신이 된 몸을 강제로 치유하는 대신, 수명을 갉아먹는다. 미래를 빼앗아 간다. 유진은 이 반지가 왜 약지를 통해 계약을 맺고, 피를 빨아 마셨는지. 왜 이 반지의 주인인 아가로트가 전쟁신인지도 이해했다.
전장에서, 죽어야 할 몸을 몇 번이고 일으켜서 싸우라는 것이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설령 어쩔 수 없이 회복을 사용하더라도, 그 후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빨아 먹힌 원기를 보충해야 한다. 전투에서 재생을 남용할 수는 없다. 상처의 경중에 따라 다르겠지만, 치명상을 1번 이상 회복하면 다음은 없을 거다.
‘이그니션과 병행해서 쓰는 건... 불가능하군. 차라리 반동을 견디고 말지.’
이그니션을 더, 더 폭주시켜 심장을 터트리고, 그걸 아가로트의 반지로 치유하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인데, 상상한 만큼의 효율도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등신짓에 걸맞게 자멸해 버릴 거다.
‘부상은 따로 치료하는 것이 베스트. 정 어쩔 수 없을 때를 위한 보험인가... 내가 직접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참 다행이야. 완치할 필요없이 몸이 버텨줄 선까지만 치유하고, 일단 살아남으면 깎인 수명을 더 채우면 되니까.’
아카샤로 이해하지 않았다면, 전장에서 뭣도 모르고 남용하다가 돌연사 했겠지. 유진은 전쟁신의 짓궂음과 악랄함에 코웃음을 취며 주먹을 쥐었다.
“무기는 뭐 안 주나?”
“...무기는 네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거다.”
폭풍검 위니드만 하더라도 대륙사에 손이 꼽힐 만큼 강력한 무기다. 그 외에도 라이언하트는 여러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드래곤이 눈을 뒤집고 달려들 만큼의 강력한 무기들. 300년 전의 베르무트는 대륙 곳곳에 숨겨져 있던 신화시대의 무기들을 찾아내고 독점했다. 수면기에 들어간 드래곤들의 재화를 통틀어도, 라이언하트가 가진 것 이상의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없고 말고는 내가 정하고 싶은데... 재화를 관리하기도 귀찮고 번거로워 보이는데, 그냥 다 나한테 맡기면 안 되남? 잘 쓰고서 말끔히 갖다놓고, 돈이랑 보석도 조금...”
“거실의 전신거울을 지나면 드라고닉의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아리아르텔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유진에게서 아카샤를 빼앗았다.
“용언마법을 새긴 뒤, 라이언하트의 저택으로 지팡이를 보내도록 하겠다. 더는 찾아오지 마라.”
드래곤의 재화를 통째로 맡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
드라고닉 가문에서의 일주일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얻었다. 알체스터에게 공검을 배웠고, 드래곤인 아리아르텔을 만났으며, 그녀를 제외한 드래곤이 모두 수면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 보험이 되어 줄 아가로트도 얻었다.
가장 큰 성과는 아카샤에 새겨질 용언마법으로 라이자키아의 행방을 추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라이자키아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물건이나, 놈이 낳은 헤츨링의 피가 필요하다는 조건이 붙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이, 찾아 헤매던 때와는 달리 확실한 방법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
‘이래나저래나 결국 용마성에 가야 하는 군.’
그것이 가장 정확하겠지만, 바로 출발할 수는 없었다. 용마성에 정면으로 쳐들어갈지, 아니면 숨어들어갈지. 어느쪽이든, ‘용마성’에 간다는 것은 헬무드에 간다는 것. 특히 용마성은 헬무드에서 제일이라 할 만큼 인간혐오가 만연한 곳이다.
‘...라이자키아 뿐만이 아니라...’
아카샤에 새겨질 용언마법은, 술식은 복잡하겠지만 용도는 심플하다.
추적마법.
‘...어쩌면 그 마법을 통해 월광검의 파편을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몰라.’
죽여야 할 놈들이 너무 많고 강하다. 월광검이 300년 전만큼의 힘을 수복한다면, 놈들을 죽일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베르무트.’
200년 동안 죽음을 숨기고.
세냐의 가슴에 구멍을 뚫고.
‘내 관짝을 열어서, 월광검을 두고.’
세야가 지니고 있던 목걸이를 빼앗아 환생에 관여하고, 그 목걸이를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가져다 둔 놈.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자식을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으흑...”
‘...어쩌면 아니스나 모론도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라. 아니스는... 음... 천사가 되었지만... 그렇다면 천국으로라도 안내해 주는건가?’
“흑... 흐흑...”
‘모론은 아직 살아있을 것 같은데. 100년 전만 해도 멀쩡했다며? 설마 그 사이에 죽은 것은 아니겠지. 루하르의 왕성에 가면 모론의 애장품이 남아있을 거고...’
“흐잉...”
“너는 왜 자꾸 질질 짜니?”
유진은 표정을 콱 찡그리고서 앞을 보았다. 리우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보였다.
“...형은 슬프지도 않아요?”
“내가 죽으러가니? 어? 아니면 네가 죽는 거니?”
“흐윽...”
“아니 왜 우냐고. 나 내 집에 돌아가는게 뭐가 그리 슬퍼?”
“형한테 더 배울 수 없잖아요...”
“가르칠 만큼 가르쳤다. 리우 드라고닉. 너는 더 이상 내게 배울 것이 없다.”
어쭙잖게 달래는 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낫다. 방금 전까지 짜증을 부렸던 주제에, 유진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리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땀을 흘려라, 소년이여. 네가 흘리는 땀만큼 너는 강해질 거다. 그 수행에서 내 가르침을 잊지 마라.”
“...네, 네.”
“알체스터 경 말씀 잘 듣고. 괜히 아버지 권세 믿고 깝죽대지도 말고. 세상 넓은 줄 모르고 깝죽대다간 나보다 무서운 사람한테 뒤질 지도 모르는 거야.”
“네...”
“내가 너를 일주일 가르치긴 했는데, 그렇다고 나랑 엄청난 인연을 맺었다 착각해서 멋대로 라이언하트에 찾아오지도 말고.”
“네?”
리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10살 어린애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다시 말해주었다.
“오고 싶으면 가도 되나요? 하고 먼저 물어봐. 안 돼, 라고 말하면 오지 마. 알겠어?”
“네!”
리우는 유진을 만나러 라이언하트로 찾아가는 것을 상상하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유진은 리우가 온다고 하면 무슨 이유에서건 안 돼, 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7년 전에도 애들이랑 놀았는데, 이 나이 먹고 또다시 애랑 놀아댈 수는 없지.’
사실 지금의 시안이나 시엘도 전생을 생각한다면 애들 아닌가?
그럼 나는? 늙은 건가?
유진은 문득 떠오른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늙은 것보다는 젊은 것이 낫지.’
유진은 전생부터 남 일은 남 일로 두고, 자기 자신에게는 여러 가지로 관대했다.
아리아르텔
돌아 온 저택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고작해야 일주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리우 드라고닉. 어땠나?”
가주의 집무실. 유진에게 이야기를 듣던 길레이드가 돌연 입을 열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천재긴 했습니다.”
유진이 그렇게 대답한 순간, 길레이드의 옆에 앉아있던 카르멘이 듀퐁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저건 언제까지 하려는 걸까...’
유지은 그런 의문을 느꼈지만, 카르멘에게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무시하려고 했는데... 퐁! 카르멘은 한 번 더 라이터를 튕겼다. 유진은 목구멍 안쪽에서 기어 올라오는 한숨을 참으며, 눈동자를 움직여 듀퐁라이터를 봐주었다.
“멋지군요.”
“천재라. 나는 그 말을 쉽게 입에 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치익. 라이터를 튕긴 손가락이 불꽃을 피워냈다.
“네 입으로 천재라 말하는 것은, 차기 드라고닉의 가주가 너 이상의, 혹은 너에 버금가는 천재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죠. 자질만 따지자면 시안보다 조금 나은 정도?”
“즐거운 소식은 아니군.”
“자질만 따졌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시안과 리우는 타고난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리우는... 음... 만족이 빠릅니다. 하지만 시안은 만족을 모르죠.”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리우를 보았던 것은 겨우 일주일이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타고난 본성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리우 드라고닉. 타고난 자질은 굉장히 뛰어나다. 무언가를 익히고 수련하는 것에도 열정을 가지고 있다. 제 몸에 흐르는 피와 태어난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그 말은 즉, 가진 환경이 좋다는 말이다.
좋아도 너무 좋다.
드라고닉 가문의 정통 후계자는 리우뿐이다. 이대로 20년 쯤 흐르면, 리우는 무조건 드라고닉의 가주가 된다.
리우 본인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 아버지이자 제국제일의 기사라는 알체스터 드라고닉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고 있다.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들이 언젠가 자신에게도 똑같이 충성을 맹세할 것이라고도 믿고 있다.
“전 사람이 강해지는 것에는 자질이나 노력 같은 것 말고도 독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우의 환경에서는 독기를 품기가 힘들다.
시안은 어떤가? 명문 라이언하트의 후계자.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애니실라는 정실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안이 장남이었던 것도 아니다.
“시안은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어요. 환경이 그랬고, 자기보다 잘나도 너무 잘난 제 존재가 시안을 더 궁지로 몰았습니다. 하지만 망가지지는 않았잖아요? 시안은 잘 컸습니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뭐, 저는 가주가 되지 않을 거니까요. 어쨌든 시안은 리우보다 독기를 품기 좋은 환경이었고, 가진 천성도 그랬습니다. 그건 카르멘님도 잘 아실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카르멘은 빙긋 웃었다. 가주를 무조건 힘으로 결정해야 한다면, 당연히 차기 가주는 유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시안 본인도 인지하고 있다.
포기하지는 않았다.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격을 얻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계승권이 확실시 되었으니 조금은 풀어질 법도 한데, 시안은 여전하게 매일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한 모습에 가솔들도 시안을 지지하고 있다. 으레 사람이란 무결점의 완벽한 사람보다는 어딘가 부족하고, 독기를 품고 노력하는 사람을 응원하게 되는 법이다.
“리우는 시안을 못 이깁니다.”
청춘과 우정, 그리고 믿음. 모두가 카르멘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녀는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을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름다운 말이군.”
카르멘은 손안의 불씨를 응시하다가 뚜껑을 닫았다. 길레이드도 흐뭇한 얼굴이었다. 7년 전. 처음 유진을 양자로 데려올 때만 해도 이런저런 염려가 많았었지만, 이제는 그런 염려 따위는 머릿속에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최근 들어서 길레이드는 제 자신이 부족하다 느끼고 있었다.
저번 대항전에서 유진의 검을 본 이후로 더더욱 절감했다. 그때 유진의 검은 라이언하트 모두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함께 산책이라도 할까.”
집무실을 나오고, 카르멘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뜬금없이? 이유야 뻔했다. 유진은 카르멘이 입술을 우물거리는 것을 보며 픽 웃었다.
직접 묻고 싶은데,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다. 카르멘은 답답하단 표정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닫는 것을 반복했다.
“거울은 왜 때린 겁니까?”
유진은 정말 궁금했던 것을 대놓고 물어보았다.
카르멘은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머나먼 과거의 부끄러운 기억. 다른 사람이라면 얼굴을 붉히면서 모르는 척을 하거나 변명을 할 텐데, 카르멘은 그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카르멘은 그때의 자신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를 깨부수고 싶었다.”
“예?”
“알은 하나의 세계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깨부숴야 하는 거야.”
“...알이 아니라 거울...”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 거울에 담긴 나. 정반대의 또 다른 현실. 그것도 알이라고 할 수 있겠지. 거울 앞에서 주먹을 뻗으면 어떻게 되지?”
카르멘의 주먹이 들렸다.
“거울에 닿을 때, 나와 나의 주먹이 만난다... 그렇게 깨부순다. 나는 그렇게 태어나길 갈망했다.”
“예...”
“그리고 실제로 새로 태어났지. 그 우연한 만남은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했으니 말이야. 유진. 네가 그 이야기를 아는 것은... 너도 만난 것이로군?”
“말할 수 없습니다.”
아리아르텔과의 만남. 용언의 약속 따위는 맺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약속을 맺은 척 하기로 했다. 카르멘과 이 주제로 대화를 더 나누었다가는 정신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피차 약속을 맺은 몸. 깊이 이야기를 나누며 그 신비로운 체험에 대해 교류하고 싶었지만, 약속을 어기는 것이 불가능하단 것은 카르멘도 이해하고 있다. 카르멘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고,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야.”
카르멘이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유진은 고개를 내려 아래를 노려보았다.
“좋냐?”
아래층에서 헉하는 소리가 들렸다. 코웃음을 치면서 계단 쪽으로 다가가니, 후다닥 뛰어 올라온 시안이 유진의 앞에서 멈춰 섰다.
“뭐, 뭐가 좋냐는 건데?”
“부랴부랴 뛰어올라온 주제에 뭘 또 모르는 척이야?”
“아니... 어... 그냥 좀 놀라서...”
“새끼가 어려서부터 좀 음흉한 구석이 있다니까. 네가 그래봤자 꼴값밖에 안 돼.”
“형제한테 말이 좀 심하네...”
“좋은 말 해주는 거 훔쳐들었으면 이 정도 나쁜 말은 달게 받아야지. 그래서, 좋냐?”
시안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헛기침만 뱉었다. 당연히 좋았다. 없는 자리에서 자기 칭찬하는 것을 들어 기분 나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 오해할까봐 말하는 건데, 훔쳐들은 것이 아니라 들린 거야.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 집무실이 내 방 바로 위라고.”
“방음이 잘 안되나...”“음, 아무래도 그렇지. 저택의 증축을 워낙 부랴부랴 끝냈으니까...”
“애니실라님한테 말해야겠네. 건설업자 그 개자식들이 돈은 돈대로 받아 처먹고 공사는 개떡같이 해놨다고 말이야.”
그 말에 시안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 뭐... 어머니한테 말할 필요까지야... 그냥 오늘 따라 너랑 아버지 목소리가 잘 들려서... 내 귀가 평소보다 잘 들린 것도 있고...”
유진은 뭐라 답하는 대신 얇게 뜬 눈으로 시안을 응시했다. 뚫어져라 보는 시선. 바늘로 피부를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시안은 이리저리 몸을 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좀, 궁금하니까 들을 수도 있지...”
“음흉한 새끼.”
“내가 뭐 나쁜 얘기, 듣지 말아야 할 얘기 훔쳐들은 것도 아니고... 야, 이제부터 뭐할 거냐?”
“매일 하던 거.”
“그럴 줄 알았어. 오랜만에 내 검이나 좀 봐주지?”
시안은 화제를 돌리면서 손에 든 칼을 흔들었다. 위에서 들린 칭찬에 몸이 달은 모양이었다.
“좋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저택에 딸린 연무장도 대대적으로 증축되었지만, 훈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이 너무 많았다. 유진과 시안은 기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저택 부지를 벗어나, 숲으로 향했다.
“엘프가 살아서 그런가? 숲에서 마나수련을 하면 평소보다 더 잘되는 느낌이란 말이지.”
“그거 느낌 아니야, 병신아. 진짜 더 잘되는 거야. 그리고 엘프가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니 뭐... 엘프는 숲에 사는 요정이 기원이라고들 하잖아. 그러니까 엘프가 있으면 숲이 조금 더 특별해지고...”
“미리 말해두는데, 너 괜히 엘프들한테 껄떡대면서 네 취향 강요하지 마.”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시안은 질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어릴 적부터 시안이 탐닉하던 외설스런 서적들과, 그 표지를 장식하던 토끼 귀 머리띠의 선정적인 복장을 한 여성들을 떠올렸다.
“그랬다가는 확.”
유진은 노골적으로 시안의 가랑이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워낙 매서워서 오한이 들 정도였다. 시안은 괜히 다리를 움츠리면서 표정을 찌푸렸다.
“억울해 죽겠네 정말...”
숲 안쪽의 연무장은 저택보다 훨씬 한산했지만,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앞서 걷던 걸음을 멈추고 연무장쪽을 쳐다보았다.
매끈하게 생긴 와이번의 위에서 용을 쓰는 디자이라의 모습이 보였다. 고삐를 잡은 양손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는데, 와이번의 기승법을 연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엘은 디자이라의 앞에서 한심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이번을 타고 있는 것은 시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고삐를 쥐지 않고도 와이번의 위에 편히 앉아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와이번은 말이랑 전혀 다르다고. 얘들은 발로 뛰지도 않고 날아다니잖아.”
“저는 날개가 없어서 나는 감각을 몰라요.”
“그, 러, 니, 까! 상상을 하란 말이야. 봐, 앉은 자세부터 틀려먹었어. 네가 거기 앉으면 날개를 움직이기 거슬리잖아. 조금 더 앞으로... 일체감이 중요해, 일체감. 디자이라! 네 쓸데없이 큰 엉덩이가 와이번의 비늘에 찰싹 붙어야 한다고!”
“제, 제 엉덩이는 크지 않아요...!”
“지금 그걸 신경 쓸 때야? 일체감! 너는, 너는 정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거야? 좀 더 붙여! 몸은 숙이고, 고삐 그만 당기고! 착 감기듯이 손에 쥐란 말이야.”
시엘은 숨도 쉬지 않고 구박을 쏟아냈다. 말이 이어질수록 디자이라의 어깨가 파들거리며 떨렸지만, 시엘의 구박은 멈추지 않았다.
“네 한 몸 편한 걸 생각하지 말고, 지금 네 커다란 엉덩이에 깔려있는 와이번을 생각하란 말이야. 이렇게 날씨 화창한 날에 어디 놀러가지도 쉬지도 못하고, 널 가르치기 위해 나온 내 생각도 하고! 네게 시범을 보이고자 계속 날개를 펼쳤다 접고 있는 용용이 생각도 해!”
“우... 우우...”
“울지 마! 울면 어쩔 건데? 울면 다 끝나? 또! 또 몸이 떨어졌잖아! 무슨 말을 듣건 자세를 유지하란 말이야! 비행 중에 칼을 맞고 내장이 쏟아져도 고삐를...”
“어휴...”
건너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였다. 시안은 움츠린 디자이라의 어깨를 안쓰럽단 눈으로 쳐다보았다. 혈계식 때나 흑사자성의 숲에서는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며 성질을 부렸던 주제에, 시엘의 앞에서는 꼬리만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것이 불쌍하게 보였다.
“아니 거... 동생아, 적당히 하는 것이...”
“오빠는 조용히 해. 내가 지금 틀린 말 하는 것도 아니잖아! 배울 때 제대로 배워야 나중에 단원들한테 민폐 안 끼치는 거야.”
시안과 유진이 보고 있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사수는 후배를 엄하고 확실하게 지도해야 한다. 기마전에서의 실수는 말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공중전에서의 실수는 까마득한 아래까지 추락하게 된다. 그랬다가는 디자이라 본인도 죽는 것이고, 대열이 크게 흐트러져 다른 기사들에게도 피해를 주게 된다.
“다 맞는 말인데 뭐.”
“...아니 그래도 조금 더 상냥하게...”
“나도 너를 여러 번 가르쳐봐서 느낀 건데, 너무 착하게 하는 것보다는 혼낼 때 확실하게 혼내는 편이 나아.”
“내가 뭘 했다고...”
괜히 지목당한 시안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유진이 제 편을 들어주니 시엘의 입가에는 방긋 미소가 걸렸다.
“...흠흠, 잘 봐, 디자이라. 와이번을 어떻게 걷게 하는지 보여줄게.”
“네...”
“눈물 뚝! 집중해서 보란 말이야. 우리 용용이의 워킹은 흑사자 기사단의 와이번 중에서도 우아하고 세련되기로 정평이 나있으니까.”
시엘은 턱 끝을 당기고서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고삐를 살짝살짝 이끌었다. 그렇게 용용이와 함께 모델처럼 걷는 모습을 상상하고, 주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용용이는 몇 걸음 걷고서 움직이지 않았다. 저번에 유진에게 된통 처맞고, 비늘이 쥐어뜯기던 것이 아직까지 기억에 선명했던 탓이다. 용용이는 유진에게 가까이 가는 대신, 끽끽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용용아...!”
시엘의 눈에서 불빛이 쏟아졌다. 후배 앞에서 이런 망신을 주다니...!
“...디자이라! 너 때문이야.”
“네?”
“네가 아까부터 멍청히 군 탓에 용용이가 몇 번이나 시범을 반복해야 했어. 그래서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잖아!”
“그건...”
“내 말이 틀려? 네가 멍청하게 굴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다면 증명해 봐. 날아!”
“모, 못해요.”
“멍청한 디자이라!”
시엘은 그렇게 쏘아붙이고서 용용이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사뿐사뿐 걸어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드라고닉의 저택은 어땠...”
방긋 웃으며 묻다가.
시엘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유진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본 것이다.
“...”
“왜 말을 하다 마냐니까?”
시엘의 표정이 점점 변해간다. 눈썹이 위로 들렸다가 아래로 내려오고, 끝이 씰룩대다가 점점 미간이 좁혀진다. 입술은 무어라 말을 뱉으려다가 삼키고, 파들파들 떨다가 일그러진다. 그리고 눈동자는 얼음을 들이 부은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간다.
시안은 여동생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하지만 피에,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여동생의 분노를 이해했다.
어릴 때 그토록 무서워하던 귀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였는지를 실감했다. 진짜 공포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지금 여동생은 귀신보다 무서우면서도 귀신과는 달리 실재해 바로 눈앞에 서있었다.
“...우욱...”
디자이라도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시엘의 등 뒤에 있었고, 제복에 감싸인 시엘의 상완삼두근과 후면삼각근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따귀다. 디자이라는 꿀꺽 침을 삼켰다. 시엘은 지금 전력으로 유진의 뺨따귀를 갈기는 것을 상상하고, 그를 이행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뭐... 뭐야.”
어지간해서는 말을 더듬지 않는 유진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시엘이 쏟아낸 살기는 돌발적이고 강렬했다.
시엘은.
머릿속에서 드라고닉 가문의 가계를 떠올렸다. 가주는 알체스터 드라고닉. 부인은 한 명 뿐이고, 슬하의 자식은 10살의 리우 드라고닉 뿐. 그러니까, 대뜸 드라고닉 가문과 약혼이 진행된 것은 아니란 말. 하지만 남녀사이의 연정은 대부분이 갑자기 일어나기 마련. 유서 깊은 귀족가인 드라고닉 가문의 저택에는 젊은 시종들도 많을 것이다.
...귀족가 도련님과 시녀의 로맨스? 그런 내용을 다룬 로맨스소설이 수요가 높다는 것은 시엘도 잘 알았지만, 저, 칼 휘두르고 몸 움직여 땀 빼고 고기 먹는 것만 열중하는 녀석이? 제 가문도 아닌 다른 가문의 시녀와? 아니면... 아니면 드라고닉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들 중 하나인가? 드라고닉의 기사들 중 여기사가 누가 있었지?
“...너.”
시엘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따귀를 갈기기 위한 타격근도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았다. 애당초 따귀를 때릴 이유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힘이 불끈 들어가기는 했지만, 어쨌든, 시엘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그 반지는 뭐야?”
궁리해봤자 추측이 안 되니,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아리아르텔
반지?
유진은 그 질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지…… 반지?
“아.”
뭔가 했더니. 유진은 왼손을 위로 들어, 약지에 끼워진 아가로트의 반지를 응시했다.
분명 끼워져 있기는 한데, 아무런 이질감도 없고 손을 쥐었다 펴고 움직이는 것이 거슬리지 않았다. 유진은 그 반지와 시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받았…….”
“누구한테?”
곤란한 질문이었다. 이 반지를 준 것은 아리아르텔. 드래곤이다. 그녀에 관해 용언의 약속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입을 열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말할 수 없어.”
유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받았다고 말하지 말걸. 그런 후회를 느낀 순간, 시엘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을 보았다.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꽉 쥐고 있는 두 주먹. 살짝 벌어졌던 입술일 이빨에 짓이겨졌다.
“말할, 수, 없다고? 왜?”
시엘은 크게 흥분할 생각이 없었다. 이성적으로 쿨하고 담백하게, 그렇게 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본래 사람의 마음과 감정이란 것은 이성의 말을 잘 들어 처먹지를 않는다.
그에 더해, 사람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 봐도 화나 보이는데 화나지 않았다 그러는 둥.
사실 그것은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기 싫어서, 부끄러워서, 혹은 스스로 알면서도 타인을 향해 어필하는 것이다.
시엘도 그랬다. 자신이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화낼 이유도 없다. 반지? 그게 뭐?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자연스레 든 생각이 아닌 제 자신을 향해 필사적인 변호일 뿐이었다.
시엘 라이언하트, 나이 20살. 그녀는 놀림 받기보다는 놀리는, 화를 내기보다는 화를 내게 만드는 쪽의 인간이다. 그래서 더욱 이 복잡하면서도 사실은 간단한 짜증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주먹을 떨고, 입술을 빠득빠득 씹었다. 유진을 향한 노골적인 어필이었다.
“……어…… 너 괜찮냐?”
등골이 오싹했다. 유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뻗고 있던 왼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 순간. 시엘이 홱 하고 손을 뻗어 유진의 손목을 낚아챘다.
“……흐응.”
시엘은 눈가를 씰룩거리며 반지를 노려보았다. 평범한 금반지. 값비싼 보석도 박혀 있지 않다. 아니, 금이 맞기는 한가? 어쩌면 도금이나 다른 광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진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의 빛이 바래 보였다.
“……별로 비싸 보이지는 않네?”
“가격은 잘 모르겠는데…….”
“라이언하트 본가의 일원이 싸구려를 끼고 다니는 것도 좀 그렇지 않…….”
시엘의 말이 뚝 끊어졌다. 셔츠의 틈, 유진의 목에 걸린 낡은 목걸이를 본 것이다. 시엘이 기억하기를, 유진은 저 목걸이를 벌써 7년 동안 걸고 있었다.
길레이드는 저 목걸이가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서 나온 것을 알고 있지만, 시엘과 시안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7년 전. 유진은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서 목걸이와 위니드 2개를 가지고 나왔다. 길레이드는 그 문제로 자식들이 유진을 시기하고 어울리지 못하게 될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시엘과 시안은 유진의 목걸이를 두고 나름의 추측을 했었다. 벗어두는 일 없이, 잠잘 때까지 목에 걸고 있는 것을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 아닐까?
‘이 바보……!’
빈말로라도 사치품이라 할 수 없는 싸구려에 낡은 목걸이. 하지만 저 목걸이는 아마도 어머니의 유품일 것이고, 유진에게는 그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일 터이다. 그 존재를 잊고 몸에 싸구려를 둘렀다는 말을 해버렸다…… 시엘은 어쩔 줄 몰라 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유품이 맞기는 했다. 지금이 아니라 전생의, 부모님의 유품. 이제 와서는 별 의미도 없고, 그냥 전생의 물건이라 목에 두르고 있을 뿐.
“……어…….”
동생의 위기. 시안은 지금이야말로 오빠답게 동생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일단 입을 열기는 했다. 덕분에 유진과 시엘의 눈이 시안에게 돌아갔다.
시안은 시엘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몇 초 늦게 태어난 여동생. 항상 장난기와 짓궂음을 담고 있던 눈이 애처로이 떨리고 있다.
“너는…… 너는 검소한 성격이니 말이야.”
하하. 시안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일단 내뱉기는 했는데…… 저것 말고 다른 말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시안은 시엘과 유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 반지도…… 어…… 네가 손에 끼운 것을 보면, 보통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시엘의 눈동자가 조금씩 평소와 같은 빛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흐흥, 하는 코웃음. 의식해서 내뱉은 것이고, 결코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엘은 자신이 동요를 완벽하게 숨기고 감정을 컨트롤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누가 준 건지는 왜 말할 수 없다는 거야?”
“사생활은 존중해야 하는 것 아냐?”
유진은 그렇게 대답했다.
최악의 대답이었다. 시엘의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고, 시안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디자이라는 저 대화에 절대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엉덩이를 안장과 밀착해, 와이번의 등 위에서 불안정한 자세를 유지했다. 망토 안의 메르는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대화를 경청하며 과자를 와작와작 먹었다.
“그 반지!”
시안이 급히 입을 열었다.
“왼손 약지에 끼웠다는 것은 말이야, 그,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거잖아? 그래서 사생활이라 말할 수 없다는 거야?”
“……대체 뭐야? 남 손가락 반지에 뭐들 그리 관심이 많아?”
“다, 당연히 궁금하지. 너는 내 형제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반지 따위는 끼지 않았는데, 갑자기 약지에 반지를 끼우고 있으면 궁금하고 신경 쓰이잖아? 무ㅡ, 물론,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네 자유다만…….”
“아니 뭔가 오해하는데. 이거 그런 반지 아니야.”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손등을 흔들었다.
“멋으로 끼우는 반지도 아니고. 그냥 마법 아티펙트라고. 준 사람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마법!”
시안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는 후다닥 시엘의 곁에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재빨리 팔을 둘렀다.
“과연 그렇군! 마법이라면 어쩔 수 없지. 마법은 그 뭐냐, 굉장히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것이잖아!”
“……뭐?”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 마법이라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야. 네 성격에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걸 테니 말이야.”
“맞아요!”
메르도 더 이상 듣고 있지 않고 망토의 틈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과자부스러기가 묻은 입가를 벅벅 문질러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저 반지는 마법적인 약속이 깃든 반지에요. 마법사가 아닌 당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왼손의 약지는 계약과 약속과 연결을 상징한다고요. 그리고 마법은 그러한 의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죠.”
“……그래?”
시엘의 표정이 한껏 누그러졌다.
“그렇고말고요! 또, 시안 님이 말한 것처럼 마법은 비밀스러워야 해요.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거예요, 네!”
사실 더 지켜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두었다가는 왠지 파국을 맞이할 것만 같았고, 그것은 메르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솔직히 유진의 망토에서 시엘의 풋풋한 어필을 보는 것은 꽤 재미있었다…….
‘……세냐 님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겠지만.’
메르는 벌써부터 승자다운 우월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으래애?”
나도 참.
들끓던 감정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시엘은 아직까지 쥐고 있는 유진의 손을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며 방긋 웃었다.
“마법이라면 어쩔 수 없지. 빨리 말해주지 그랬어?”
바보 같은 일에 흥분해 버렸다. 시엘은 유진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질스러운 오빠는 어린 나이부터 외설스러운 책들을 방에 숨겨두고 몰래몰래 탐닉해 왔지만, 시엘이 알기로 유진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녀석은 오빠와 동갑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금욕적이며, 제 자신을 수행하는 극기에만 맹목적이다.
‘정체를 숨기고 떠도는 마법사라도 마주친 걸까?’
제국제일의 기사라는 알체스터 드라고닉이 가주로 있는 가문이다. 라이언하트보다는 조금 뒤처지는 가문이라지만, 가솔 중에 정체를 숨긴 은둔마법사가 있을 법하긴 했다.
“됐다!”
뒤에서 디자이라가 환호성을 질렀다. 여태까지 좀처럼 움직여 주질 않던 와이번이, 지금은 디자이라가 고삐를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고 날개를 퍼덕거렸다.
“시엘 님, 보세요! 제 와이번이 날개를 펼쳤어요!”
“닥쳐, 디자이라!”
한창 좋을 때 말을 걸다니. 시엘은 디자이라를 흘겨보면서 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
* * *
일주일 후.
유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서 두 눈을 끔벅거렸다.
방 한복판에 아카샤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알아서 가져다준다더니……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아카샤는 그 촌구석의 볼라뇨에서부터 하늘을 날아, 라이언하트 저택의 유진의 방에 도착했다.
“아니…… 거참…… 누가 홀라당 주워가거나 새똥이라도 맞았으면 어떡할라고…….”
물론 투명화 마법은 기본으로 비바람과 먼지에 더럽혀지지 않을 보호결계 등, 혹시 모를 사고에 대한 방비는 철저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아카샤에 손을 뻗었다.
겉으로 보기에 변화는 없다. 하지만 지팡이를 손으로 잡는 순간. 유진의 시야가 한 번 흔들렸다.
‘마나의 순환계가 개선되었군.’
300년은 긴 시간이다. 이 아카샤는 드래곤이 직접 만들어낸 지팡이지만, 현대의 마법관으로 보면 조금은 낡은 구석이 있기는 했다. 드래곤인 아리아르텔은 그 점을 간파하고, 최신에 알맞게 순환계를 개선한 것이다.
‘하긴. 아카샤가 만들어졌을 때에는 서클마법식이 정립되지 않았으니…….’
그렇다 보니 아카샤로 펼치는 서클마법에는 약간의 낭비와 딜레이가 있었다.
“그 드래곤이 세냐 님의 서클마법식을 익혔다는 거죠?”
벗어둔 망토 안에 있던 메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리아르텔이 쏟아내던 살벌한 드래곤피어.
드라고닉의 저택에서 돌아온 후로 일주일이 지났지만, 메르는 그때 느꼈던 공포를 잊지 못하고 매일 밤 망토의 틈으로 기어들어 갔다.
“서클마법식에 맞춰 순환계를 개선했으니까, 아마 그렇겠지.”
“그렇다는 것은! 세냐 님의 서클마법식이 드래곤도 인정할 만큼 뛰어나다는 거네요?”
“뭘 새삼스레…… 어차피 드래곤 말고 마법사들 대부분이 서클마법식을 익히고 있잖아.”
“사람이 익히는 것과 드래곤이 익힌 것은 경우가 전혀 다르잖아요! 마법의 조종인 드래곤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다니! 역시 세냐 님이세요!”
메르는 호들갑을 떨면서 꼬물거리며 망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곤 후다닥 뛰어 유진의 침대 위로 올라왔다. 아무렇지도 않단 얼굴이었지만, 드래곤을 떠올린 것만으로 드래곤피어를 정면에서 받았던 공포가 떠올라버렸다.
유진도 메르의 얕은 떨림을 느꼈다. 그래서 별말 없이 이불을 끌어다가 메르의 몸에 둘러주었다.
“……흠.”
의식을 집중하고, 아카샤와 링크를 시작했다. 이전과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더해졌는지. 곧바로 머릿속에 이해가 되었다.
‘상위서클 마법의 반동이 줄었어. 술식의 구성도 매끄럽고 빨라졌고…….’
현재 유진의 마법경지는 5서클. 메르와 아카샤의 보조를 받는다면 7서클의 마법도 사용은 가능하다. 하지만 솔직히 전투 중에서 사용하기는 여러모로 부담이 컸다.
순환계의 개선으로 상위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때의 부담이 크게 줄고, 마나의 효율이 좋아졌다. 설마 이런 서비스까지 해줄 줄이야. 유진은 히죽 웃으며 아카샤의 끝에 장식된 드래곤하트를 응시했다.
아리아르텔이 새긴 마법이 보였다. 술식으로 구성되지 않은 용언마법. 사용하는 방법은…… 유진은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를 이해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흠.”
주변을 한번 둘러보다가, 목걸이를 떠올렸다. 유진은 목걸이를 벗고서 아카샤와 공명시켜 보았다.
ㅡ화악! 드래곤하트의 빛이 한 번 깜빡였다. 그 순간, 유진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비쳤다.
‘나로군.’
흐릿하게 보이는 전생의 모습. 그에 겹쳐져 지금의 모습이 보였다. 새겨진 혼을 비추는 건가? 장소는…… 조금 더 마나를 불어넣으니, 라이언하트 본가의 풍경이 보였다.
‘좌표는…… 읽히지 않는군. 공간의 투영도 아주 근접하지는 못한 모양이고. 그래, 아리아르텔이 말했었지. 공간단위에 벗어나 차원에 다다르면, 영역과 좌표는 무의미해. 확실한 연결고리를 찾아낸다면…….’
유진은 눈을 감고 용언마법의 실체를 이해했다. 라이자키아와 연결된 것을 찾고, 아카샤를 공명시킨다. 그 물건이 확실하게 라이자키아와 연결되어 있다면, 강제적으로 차원문을 열어 라이자키아가 떠도는 틈새까지 도달할 수 있다.
‘……공간좌표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 항상 조금씩 바뀌지. 그래서 복잡한 계산이 필요해.’
좌표의 계산을 포기하고 차원단위까지 탐색범위를 확장시켰다. 대신 추적하는 존재가 속한 공간을 멀리서나마 투영한다. 충분하다. 유진은 빙긋 웃으면서 흑암의 망토에 손을 뻗었다.
일단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우선 꺼낸 것은 위니드. 아카샤를 들이미니, 곧장 검신이 웅웅 떨리며 템페스트가 반응했다.
[불쾌한 마법이군.]
“협조 좀 해.”
[하멜, 네가 바란다면 나는 거절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하도록 하라. 여태까지 수많은 존재들이 정령계를 특정해 내고, 건너오려 했다. 그중에는 드래곤도 여럿 있었지. 하지만 어떤 존재든, 정령계의 출입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냥 확실하게 말하지그래? 정령계를 찾았다고 건너오면 죽을 줄 알라고.”
유진은 투덜거리며 아카샤를 위니드와 공명시켰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금 전과는 달리 템페스트의 존재와 놈이 속한 공간이 투영되지는 않았다.
[정령계의 문은 억지로 열지 못하는가? 그 마법은 이쪽 차원의 문만 열 수 있는 모양이군. 하긴, 그 어린 드래곤이 그만한 급의 정령계의 법칙을 무시하고, 외차원과 연결되는 문을 열 수 있을 리가 없지.]
“라이자키아가 아예 외차원에 있으면 쓸모없는 마법이잖아.”
[하멜. 그에 대한 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라이자키아가 정말로 외차원 어딘가에 있는 것이라면, 세냐 메르데인과 엘프들에게 라이자키아의 저주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건 그렇지. 유진은 작은 아쉬움을 느끼며 위니드를 내려놓았다.
월광검을 꺼냈다.
[……위험하지 않나?]
템페스트도 월광검의 힘은 잘 안다. 헬무드의 지하유적에서 발견된 정체모를 검. 템페스트도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해 온 바람의 정령왕이지만, 대륙의 그 어떤 신화와 전설에도 월광검과 관련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멜. 너도 알겠지만, 저것은…… 검의 형상을 한 파멸이다. 자칫하다가는 예기치 않은 반동이 올지도 모른다.]
“베르무트와 가장 짙게 연결된 것은 월광검이야.”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월광검을 칼집에서 뽑았다.
ㅡ화아악……! 창백하고 은은한 달빛이 검신 만들어냈다. 메르는 월광검을 본 순간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뇌광궁도, 용격창도, 성검도. 모두가 베르무트 이전의 기원이 있고, 베르무트 외에 다른 주인들을 뒀었지. 하지만 월광검은 베르무트 외의 기원이 알려져 있지 않아. 당장 내가 쥐고 있긴 하다만, 월광검은 나보다 베르무트가 훨씬 더 오래, 많이, 잘 사용했어.”
[……그렇긴 하다만…….]
“별로 기대는 안 해. 그 철저한 자식이 죽은 척 장례까지 치렀을 정도니, 자기 자신과 이어지는 흔적은 모조리 지워뒀겠지. 하지만 만약이란 가능성은 있잖아? 베르무트를 찾는 것이 실패해도, 파편의 위치라도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아카샤를 월광검에 가까이 가져갔다. 월광검이 내뿜는 달빛이 아카샤의 마법을 밀어낸다. 유진은 그 사이에서 즉시 조율에 들어갔다.
3년 전. 맨 처음 월광검의 파편을 얻었을 때에는, 그 파편을 상대로 마나조작을 수행했다. 그리고 사막 무덤에서 칼자루를 얻었다. 파편일 때에는 영 통제가 되지 않았지만, 칼자루가 더해진 후부터는 통제가 가능해졌다.
쉽지는 않았다. 월광검을 쥔 상태로 마법을 일으키고, 검강을 내뿜고.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과정이 정말 죽도록 힘들었다. 그렇게 유진은 월광검을 길들였다.
키잉……!
아카샤에서 일어난 용언마법이 월광검에게 이어졌다.
‘……이건…….’
머릿속에.
무언가가.
‘……나는…….’
나타난다. 번져간다. 그렇게 젖어간다.
‘……뭘 보고 있는 거지?’
빛 한 점 없는 어둠. 저건…… 하늘인가?
‘……저건…….’
모르겠다. 보이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너무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볼 수가 없다…….
‘베르무트?’
절그럭.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소리. ……언제였지?
절그럭.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
어둠이 요동친다. 그 한복판에서 두 개의 붉은빛이 뜨인다.
“보지 마라.”
차분한 속삭임.
‘유폐의 마왕.’
유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렸다.
어둠이 붉게 물들어간다. 유진은 저 붉은색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
…….
……….
[……하멜!]
“유진 님!”
머릿속에서 울리고, 귀에서 파고든 소리에 유진은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시야가 새빨갛다.
“썩을.”
유진은 흐르는 피눈물을 닦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아리아르텔
머릿속이 어지럽고 속은 메스껍다. 동시에 들려오는 2개의 목소리가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리를 쿡쿡 쑤시게 만들었다.
“유진 님, 유진 님!”
메르가 어깨를 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유진은 뺨에 흐르는 피눈물을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벽에 걸린 시계. 월광검과 공명을 시작하고서 10분이 조금 넘게 흘렀다.
10분이나 흘렀던 것이다. 머릿속에 투영된 어둠을 들여다본 것은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까지 흔들고 있을 거야?”
“괜찮은 것 맞아요?”
“괜찮아. 어, 괜찮은 것 같아.”
그렇게 대답해 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순간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 모습을 본 메르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유진을 따라 내려와서, 자기보다 한참이나 큰 유진을 어떻게든 부축해 보려 용을 썼다.
[……그래서 경고한 것인데……!]
“내가 남이 하는 경고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하다가 처맞는 것이 한두 번이냐?”
[하멜……!]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잘못했어. 어떻게든 확인은 무조건 해봐야 했는데, 조금 더 신중해야 했나 봐.”
우선 아카샤를 살펴보았다. 방금의 일로 인해 용언마법이 망가진 것은 아닐까 염려했는데, 다행히 아카샤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월광검도 마찬가지였다. 그 검 같지 않은 검은 여전히 창백한 달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래, 저 검이 내뿜는 것은 빛이다.
하지만 유진의 머릿속에 투영된 것은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는 어둠뿐. 해가 저물어버린 밤, 그림자, 먹물…… 유진이 떠올리는 그 무엇보다, 방금 보았던 어둠이 짙고 불길했었다.
그리고.
절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 어둠의 한복판에서 뜨여진 붉은 쌍안. 전생에 딱 한 번 대면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을 존재감.
유폐의 마왕.
‘……놈이 왜?’
-보지 마라.
방금 유폐의 마왕이 속삭였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놈이 월광검에 관련되어 있나? 아니, 유폐의 마왕은 아카샤의 마법으로 투영된 것이 아니라, 직접 간섭한 것이다. 보지 말라는 것은…… 그 어둠을? 왜?
‘……역시……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의 은거와 관련되어 있다는 거지.’
이제 와서 놀라거나, 분노를 느낄 일은 아니었다. 세냐는 베르무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 개자식에게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죽을 뻔한 주제에. 그래도 한때의 동료이자 친구랍시고 베르무트를 두둔했다.
애당초 ‘약속’이란 것부터가 베르무트와 유폐의 마왕 사이에 모종의 무언가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 300년 전, 유폐의 마왕은 제 앞에 도달한 모두를 죽일 수 있었다. 아니, 그러기 전부터 ‘마왕’들은 대륙 전체를 짓밟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잖은가. 300년 전에 전쟁이 성립되었던 것은, 유폐의 마왕과 다른 마왕들이 헬무드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놈들은 마물과 마족과 흑마법사를 부릴지언정, 자신들이 직접 헬무드 밖으로 행차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때 마왕들이 직접 나섰다면. 각자 진영을 나누지 않고, 다른 마왕과 협력이라도 했다면…… 3명은커녕 1명의 마왕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다.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를 붙잡고 있나?’
처음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베르무트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했다. 왜 놈이 여러 부인을 두어 자식을 낳고, 세냐를 죽일 뻔하고, 마왕과 화친을 맺고, 왜 하멜을 환생시켰는가에 대해.
유진이 기억하는 베르무트는ㅡ 다른 녀석들처럼 속내를 모두 드러내는 녀석은 아니었다. 항구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녀석이었다.
-헬무드에서…… 뭘 할 거냐?
-마왕을 죽인다.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살육의 마왕을 죽인다. 그다음에는 참혹의 마왕을, 그다음에는 광란의 마왕을 죽인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인다.
베르무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유진은, 하멜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하멜뿐만이 아니었다. 세냐도, 아니스도, 모론도. 모두가 베르무트의 결의를 믿었고, 그와 같은 결의를 품었다.
출생도, 성별도, 배경도, 능력도 달랐다. 모두 다 어디 한 구석이 뒤틀려 있었다. 누군가의 밑에 서서 따르는 것보다는, 혼자 알아서 하거나 남을 이끄는 위치에 서야 할 녀석들이었다.
300년 전에 5명이 하나 모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베르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무트가 저렇게 말했기에 모두가 의심 없이 수십 년 동안 헬무드를 떠돌았다. 살육을, 참혹을, 광란을 죽였다.
‘……그런 네가 약속을 맺었던 것은, 그럴 수밖에 없어서.’
유진은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았다. 피눈물은 멈췄지만, 뺨에는 아직 피의 얼룩이 남아 있었다.
-나는 널 먼저 보내고 싶지 않았어, 하멜.
-너는 네 죽음에 만족했어? 만약 그랬다면, 너는 개자식이야. 누구 마음대로 만족하고 죽는 건데? 나도, 아니스도, 모론도, 베르무트도. 그 누구도. 네 죽음을 바라지 않았어. 우리는 네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죽어버린 널 먼저 보내고 싶지 않았어.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마.
세냐와.
-하멜.
-왜 베르무트가 동료들을 저버려야 하는가.
-그는 네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세냐의 죽음도, 아니스의 죽음도, 모론의 죽음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쓰러졌을 때,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거두었다.
-유폐의 마왕은 그 순간에 베르무트를 제외한 모두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와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을 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함께 있던 동료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고, 말살되었어야 할 네 혼을 되찾는 것이기도 했다.
템페스트와.
-고맙다.
-아무도 죽지 않고, 나와 함께 와주어서…… 고맙다.
마왕의 시체에서 성검을 뽑고, 휘광을 여명처럼 등진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차라리.”
유진은 긴 한숨을 쉬며 뺨의 얼룩을 닦았다.
“베르무트가 정말 어쩔 수 없어 약속을 맺고. 내 환생을 안배한 뒤에, 유폐의 마왕에게 사로잡힌 것이라면 좋겠다.”
[…….]
“알아. 그 생각이 얼마나 웃긴지. 말이 안 되잖아. 마왕이 병신이야? 베르무트를 안 죽이고, 뭐하러 잡아만 둬? 자기 죽이려고 환생한 나는 왜 살려두는 거고.”
[……약속이니까.]
“무엇을 위한 약속? 모르겠다, 난. 진짜 모르겠어. 왜 방금 베르무트가 아닌 유폐의 마왕이 간섭해서, 보지 못하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만약 그 어둠을 계속해서 들여다봤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진은 아직 손에 쥐고 있는 월광검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달빛. 아름다우면서도 불길한 빛. 검의 형상을 한 파멸.
……아카샤가 월광검에서 투영해낸 어둠은…… 대체 뭐였을까. 그 어둠 너머에 베르무트가 있었나? 보지 마라, 라고 한 것은…….
‘……마치.’
유폐의 마왕이 간섭했기에 유진은 어둠을 계속해서 들여보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놈이 간섭하지 않았다면,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을 들여다보았을까.
보는 것으로 끝났을까.
“……엿같네.”
사막의 밑바닥에서, 아멜리아 머윈과 맞닥트렸을 때.
그때 유진은 아멜리아를 이길 수 없었다. 이그니션에 월광검을 사용한다 해도, 그 깊은 지하에서 아멜리아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때도 유폐의 마왕이 간섭했다. 놈이 강림해서, 아멜리아 머윈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저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유진은 입술을 씹으며 침대로 돌아왔다. 쓰러지듯 털썩 누워 눈을 감으니, 구석에 앉아 있던 메르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한 물에 적셔진 물수건이 뺨 위에 올라갔다. 메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뺨에 조금 남은 핏자국을 닦아내고, 눈꼬리에 굳은 피딱지도 닦아주었다.
그다음에는 따뜻한 바람이 물기를 말리기 시작했다. 템페스트였다. 둘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유진의 곁에 머물렀다.
“고맙다.”
“……같이 자드릴까요? 손도 잡아드릴게요.”
“너 어차피 잠 못 자잖아.”
“하지만 유진 님이 잠들고 일어나실 때까지 곁에 있어드릴 수는 있다구요.”
“그냥 네가 망토 안에서 혼자 있기 무서운 건 아니고?”
“설마요. 저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 ……음…… 아무것도는 아니에요. 세냐 님이나, 유진 님이나, 애니실라 님이나…… 제게 잘해주시는 다른 분들이 잘못되는 것은 무서워요.”
메르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면서 이불까지 끌어다가 유진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불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가, 유진의 몸쪽에 가까이 웅크렸다.
“그러니까. 유진 님도 화내지 말고, 슬퍼하지도 마세요. 위험한 일도 적당히 하시고, 아파하지도 마세요. 세냐 님이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나는 멀쩡해.”
“거짓말. 피눈물을 흘렸잖아요. 감정도, 조금은 제게 전해졌다고요.”
괴로움과, 간절함과, 고독함과…… 분노. 메르는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어떠한 감정이 되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나는 자장가를 불러줄 수 있다.]
“꺼져 템페스트.”
저 걸걸한 목소리로 불러대는 자장가를 들으면 끔찍한 악몽을 꿀 것이 틀림없었다.
* * *
“하멜.”
언제였던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다.
헬무드에 들어오기 전에도 전투는 잦았지만, 헬무드에 들어온 후부터는 정말 매일매일이 전투였다. 적습은 시간을 가리지 않았고, 방식은 매번 다양했다.
그 끔찍한 지옥에서의 나날은 일행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전투가 간단해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강해지는 만큼, 적은 더 많아지고 강해졌다.
그 끊이질 않는 전투의 나날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5명 중 3명이 치유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의 차이는 있었다.
베르무트의 치유마법은 제 자신에게는 강력했지만,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당초 치유마법이란 것은 신앙심을 가진 사제만이 펼칠 수 있는 것이라, 베르무트가 쓰는 치유마법은 용사의 가호 같은 것이었다.
세냐는 신성마법은 쓸 줄 몰랐지만, 엘프 고유의 치유마법을 쓸 줄 알았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엘프의 마을에서 자란 덕분에 익힐 수 있던 마법이다. 세냐 본인이 독보적인 실력의 마법사였기에, 그녀가 펼치는 치유마법도 고위성직자만큼이나 강력했다.
하지만 아니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빛의 성녀. 신실한 아니스.
“괜찮냐?”
아니스 슬리우드.
그녀가 펼치는 치유마법은, 마법이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의미 그대로의 기적이었다. 잘린 팔다리를 멀쩡하게 붙인다. 단순히 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뼈와 근육과 신경과 혈관 모든 것을 연결해 버린다. 후유증도, 재활도 필요하지 않다. ‘기적’이 펼쳐진 순간, 잘렸던 팔다리가 멀쩡하게 움직인다.
온몸의 뼈가 박살 나고, 내장이 터지고, 심장이 파열되어도. 당장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아니스의 기적은 곧바로 상처를 없애 버린다. 그 가공할 기적이 일으키지 못했던 것은 이미 죽은 시체와, 리치 베리알의 저주로 혼이 사멸해가던 하멜뿐이었다.
“괜찮지 않습니다.”
어느 전장이었던가.
살육을 죽이고 난 뒤? 아니면 참혹이었나, 광란이었나. 카마쉬와 거인족의 전장? 라이자키아의 폭격? 뱀파이어의 자살특공…… 유폐의 칼이 이끌던 마족군?
모르겠다. 300년 전에는 너무 많이 싸웠다. 몸 멀쩡하게 싸움을 끝냈던 적이 손에 꼽는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항상 부상을 치료했다. 아니, 전투 중에도 부상을 치료했다. 그 시대의 전장에서 죽음은 흔했고, 부상은 당연했다.
그렇게 발버둥 치던 사람들도 많았다. 몬스터에게, 마물에게, 마족에게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 세상을 구하겠다는 멋들어진 신념보다는 증오와 복수에 눈이 먼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약해빠진 주제에 전장을 헤맨다. 제 증오를 식히고, 복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그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전장에서 실감한다.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내심 알기에, 차라리 싸우다 죽기를 바란다.
아니스는.
성녀는 그들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았다. 아니스는 성녀답지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그래야 할 때에는 그 누구보다 신실하며 성녀다웠다.
유폐의 마왕성에 도달했을 때.
5명 모두가 살아 있었다. 불구가 된 사람도 없었다. 위기는 몇 번이나 있었다. 전신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았다. ‘겨우’ 그것뿐이었다. 수십 년 동안 매일매일 전장을 거쳤는데, 5명은 처음에서 변하지 않았다.
아니스의 기적 덕분이었다.
“……너 무리했어.”
하멜은 아니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전장. 피비린내…… 멀리서 시체가 썩고, 타는 냄새가 흘러왔다.
“……난 말이야. 네 고집이 지독하단 것을 알아. 말려도 들어 처먹지를 않다는 것도 알지.”
“당신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왜? 나도 고집불통에 말 안 들어 처먹는 새끼라서? 뭐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아니스, 나는 너랑 달리 구분은 해.”
아니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찰칵.
대신에 사제복의 단추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하멜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아니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죽고 싶어서 발악하는 놈들이야. 굳이 살리는 것보다는,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놈들에게는 구원일 거라고. 그런데 왜…… 굳이 구해서 손해를 보는 거냐?”
“성직자가 사람을 구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아니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제게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저는 그들을 구할 수 있고, 그래서 구했습니다. 구할 수 있는데 구하지 않는 것은 제가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찰칵, 찰칵. 단추가 계속해서 풀렸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지 않을 겁니다. 왜 손해를 보느냐고요? 아니오, 하멜. 저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많은 이들을 구하고, 그렇게 선행을 쌓아 천국에 갈 겁니다.”
사제복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물론 저는 이미 천국에 가기 충분한 선행을 쌓았습니다. 신께서는 제 선행을 모두 지켜보고 계실 테니, 제가 쌓은 선행만큼의 빛을 내려주실 겁니다.”
죽음을 맞이하면 생전의 선행이 빛이 되고, 악행은 어둠이 된다. 빛이 모든 어둠을 밝혀낼 만큼 찬란하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
그 천국은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죄업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빛의 신이 다스리는 천국에는 어둠이 없기에 죄업도 없으며, 죄업이 없기에 고통받는 사람도 없다.
그게 유라스의 신앙이다.
“……신께서는 어린 양이 흘릴 피를 대신 흘려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어둠을 밝힐 찬란한 빛이시지만, 지금의 세상을 삼키려는 어둠은 밝히지 않고 계십니다.”
치렁치렁한 금발이 헐벗은 등을 가리고 있다. 아니스는 양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들추었다.
“……저는 빛의 성녀입니다. 신께서 하지 않고 계신다면, 그분의 성녀인 제가 해야 합니다. 신을 대신해 성혈을 흘리고, 신을 대신해 빛으로 어둠을 밝혀야 합니다. 하멜. 저는…… 이 끔찍한 시대를 살다가 죽은 모두가 천국에 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스의 등.
피범벅인 등이다. 몇 번이나 보아 익숙했다. 신성력을 너무 많이 쓰고, 너무 큰 기적을 연달아 일으키면. 아니스의 등은 언제나 피로 흠뻑 젖었다.
그때마다 아니스는 하멜을 불렀다. 처음에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래전. 전투가 끝나고, 베르무트와 세냐, 모론이 주변의 잔당을 마무리하러 떠났을 때.
부상이 심했던 하멜과 지친 아니스가 자리에 남았다. 하멜은 이미 지쳐있는 아니스에게 치유마법을 부탁하는 대신, 혼자 응급처치를 시도했다.
그러던 중에 아니스가 쓰러져 버렸다.
“……저는 제가 섬기는 신 다음으로 찬란한 빛이 될 겁니다.”
하멜은 아니스에게 건네받은 물수건을 손에 들었다. 그러곤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니스의 등을, 피를 닦아주었다.
“그렇게 천국에 들지 못하는 자들의 어둠까지 제 빛으로 밝혀줄 겁니다. 이 시대에서 죽은 사람들이 모두 천국에는 들지 못하겠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피를 닦아내면 상처가 드러난다.
아니, 그건 상처가 아니다. 등 전체에 새긴 법문. 아니스가 커다란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저 법문이 살갗을 깊이 파고들어 피를 흘리게 만든다.
그렇게 점점 커져간다. 처음 아니스의 등을 보았을 때, 법문은 날개뼈 부근에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기적을 일으킬수록 법문이 길고 커져간다. 지금 법문은 아니스의 등허리까지 내려와 있다.
“……온갖 기적을 쓰는 네가 제 등은 치료할 수 없다는 것도 신기해.”
“그건 성흔입니다. 그 자체가 기적의 증명인데, 기적으로 치료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않습니까?”
아니스는 하멜이 피를 닦기 쉽도록 자리에 앉아주었다. 그러고는 허리춤의 성수를 꺼내 입가에 가져갔다.
평소의 하멜은 아니스의 성수를 호시탐탐 노렸지만, 이럴 때에는 성수를 달라고 청하지 않았다. 아니스가 전투 때마다 성수를 쉬지 않고 마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면 말해.”
“아프지 않습니다.”
아니스는 표정을 감추는 것에 능숙했다. 속내를 숨기고, 전혀 다른 말을 하며 언제나 웃는 얼굴이다. 지금도 그랬다. 아니스는 언제나와 같은 목소리로, 성수를 마시면서 웃었다.
피를 모두 닦고. 깊이 파인 문신에 연고를 발라준다. 기적으로는 치유가 되지 않는 상처다. 연고를 바른다고 해서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고를 바르면 피가 덜 흐른다.
“……당신이라 다행입니다.”
아니스는 성수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베르무트 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론은…… 제 등이 이렇고, 피를 흘린다는 것을 알면 자신의 강점을 죽이고 소극적으로 싸울 겁니다. 그리고 세냐는 제가 괜한 짓을 하지 않도록 힘으로 붙들겠죠.”
“나는?”
“당신은 저를 이해해 주려 하고 있습니다.”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 고집을 이해하면서, 하지 말라고 말은 하지만 강제로 막지는 않죠. 당신이 무식한 싸움을 할수록 제가 피를 흘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항상 똑같이 싸웁니다.”
“그편이 네게 더 좋을 테니까.”
피를 닦고, 연고를 바르고. 그다음에는 붕대를 감는다.
“내가 뭐라고 해봤자 너는 안 들을 거잖아. 그렇다고 내가 소극적으로 들어가면 전투가 길어져. 차라리 위험하더라도, 빠르게 끝내는 편이 전체적인 피해가 줄지.”
“그리고 당신은 상처에 대한 처치가 능숙합니다. 붕대도 불편하지 않게 잘 갈고, 제 벗은 등을 보고 육욕을 느끼지도 않죠.”
“피범벅에 상처투성이의 등을 보고 누가 그딴 생각을 해?”
“동료를 동료답게 여겨주시는 것은 좋지만, 가끔은 다른 생각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뭔 생각?”
“당신 때문에 제가 피범벅이 되어 아플 거란 생각.”
“방금 말했잖아. 소극적으로 싸우는 것보단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이…….”
“그렇게 싸우는 것은 모론 하나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멜, 당신과 모론이 조금만 덜 다쳤어도 제가 흘린 피가 반절은 줄었을 겁니다.”
“……음…….”
하멜은 뭐라 답하지 못하고 붕대를 고정했다.
“……노력은 해볼게.”
유진은.
그 먼 옛날의 대화를 떠올리며, 8장의 날개를 펼치던 아니스를 그렸다.
“……날개가 적네.”
신성제국의 수도, 유레시아.
한 쌍의 날개를 펼친 아니스의 성상이 보였다.
유레시아
기나긴 역사를 자랑하는 신성제국 유라스. 그 수도 유레시아의 남쪽 워프게이트를 지나면, 유라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곳이라 칭송되는 ‘태양의 광장’이 나온다.
이곳에는 역대 유라스에서 추앙된 성인들의 성상이 세워져 있다.
4월 13일은 유라스의 축일 중 하나다.
‘……아니스의 탄생일.’
유라스에서 시조인 빛의 화신 다음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유명한 성인으로 신실한 아니스가 꼽힌다. 까마득한 옛날에 유라스를 건국했다는 시조보다는, 300년 전에 용사와 함께 3명의 마왕을 쓰러트렸다는 성녀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매년 4월 13일에는 대륙 각지에서 빛의 신도들이 몰려온다. 올해도 그랬다. 아직 아니스의 탄생일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남아 있는데, 벌써부터 워프게이트와 태양의 광장에는 빛의 신도들이 가득 몰려있다.
유진은 그 인파에 섞여 아니스의 성상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의 광장, 그 중앙.
아니스의 성상은 한 쌍의 날개를 펼치고서 하늘에 떠 있다. 다양한 마법광물과 황금, 보석 따위를 아낌없이 사용해 만든 사치스러운 성상이다. 그 다양한 색채는 태양빛을 받으며 더욱 반짝이고, 태양이 저문 어두운 밤에는 스스로 빛을 발해 광장을 밝힌다.
이 광장에서 저렇게 하늘에 떠 있고, 저만큼의 공과 비용을 들여 만든 것은 아니스의 성상뿐이다. 저 성상은 매일같이 저렇게 하늘에 떠서 신도들이 우러러보아야 하지만, 4월 13일의 탄생일에만 유일하게 지상에 내려와, 신도들이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유진은 꽤 오랫동안 아니스의 성상을 올려다보았다.
전생에 신성제국에 와봤던 적은 없다. 전생에 동료가 되었을 때 이미 베르무트는 성검의 주인이었고, 곁에는 성녀 아니스가 있었다.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얘기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고.’
유라스 출신의 아니스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고향에 관해 입을 열면, 아니스는 멀찍이서 관망할 뿐 단 한 번도 직접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눈치 없고 등신인 모론조차도 아니스가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진도 아니스가 신성제국에 품었던 감정이 혐오에 가깝다는 것은 알았다.
그 이유를 모를 뿐.
아니스의 성상. 활짝 펼쳐진 아름다운 날개.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날개다. 가지각색의 색깔이 수백 수천 개로 나뉘어 날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저 높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빛이 날개의 안쪽에서 부서져 쏟아진다.
“……아름다워요.”
메르는 유진의 곁에서 멍한 눈으로 아니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말 대로였다. 이 광장의 여러 성상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성상. 거기에 하늘에 떠 있고, 저렇게 빛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없던 신앙심도 깃들어버리는 것 같다. 저 성상은 유라스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선전도구인 것이다.
“……바라던 대로인가?”
“네?”
유진의 중얼거림에 메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아니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니스는 선행을 쌓고 또 쌓아 거대한 빛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나의 태양이 되어, 그 시대를 살다 죽어간 이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길 바랐다.
아니스가 죽어서 정말 그런 빛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천사는 되었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기적을 일으키며, 죽기를 바란 사람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으킨 것에 대한 보상은 얻었다. 그리고 지상에는 저 아름다운 성상으로 남아, 수많은 불신자들을 빛의 신교에 귀의하게 만들었다.
‘……너는 저 성상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아니스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기가 힘들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아니스의 탄생일을 축하하고, 유레시아의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 이 나라에 온 것은 아니다.
‘기일이라면 모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챙겨 줄 용의는 충분히 있다. 전생의 추억이라도 회상하며 술을 마시거나, 술을 바치거나, 떠올릴 추억의 내용에 따라 눈물까지도 조금은 흘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사막 밑바닥의 무덤. 성검을 통해 그때의 기억을 보았다. 세냐도, 아니스도, 모론도 하멜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 그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것은 베르무트뿐이었다.
‘……네가 날 위해 울었으니까, 나도 널 위해 울어줄 수는 있지.’
탄생일? 그게 뭐 어쨌다고. 동료들끼리 생일을 축하한 적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300년이나 지난 지금 생일을 축하하는 것도 우습지 않나.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광장을 떠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 오래 걷지는 못했다. 조금 떨어진 뒤편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깊이 눌러쓴 로브 아래에서 푸른 눈동자가 얇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로브 쓴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이곳에서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서둘러 뒤쫓지는 않았다. 유진은 느긋하게 여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성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계셨던 겁니까?”
광장을 떠나니 인파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곳까지 오고 나서야 여인은 걸음을 늦춰, 유진의 바로 곁까지 다가왔다.
“좀 과할 정도로 반짝거리던데. 너무 사치스러운 것 아냐?”
“신실한 아니스 님은 미래영겁 어둠을 밝히고자 하셨습니다. 저 성상은 아니스 님의 소망을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는 눌러쓴 로브를 젖히지 않고서 대답했다. 이유는 알 만했다. 아니스의 탄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광장 근처에 모인 신도들은 그 축일을 기념하고 예배를 올리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다.
아니스의 성상은 태양의 광장뿐만 아니라, 유라스 각지에 세워져 있다. 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신도들이 아니스의 모습을 모를 리가 없으니, 아니스와 닮아도 너무 닮은 크리스티나를 직접 보기라도 한다면ㅡ 나이 많고 심약한 신도들은 그대로 졸도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몇 달 만이지? 반갑다는 인사는 없나?”
웃으며 건넨 말에 크리스티나가 머리를 들었다. 그녀는 유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입니다, 유진 님. 이렇게 무사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무사한 모습?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뭐 무사하지 않을 일이라도…….”
“흑사자 성에서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큰 유진을 올려다보며, 눈동자의 반짝임을 가라앉혔다.
“큰일이 있었다더군요. 저는 ‘그런’ 문제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기에 흑사자 성에는 가지 않았지만, 아타락스 심문관과 헤모리아 심문관을 통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자세히 들었습니다.”
“……난 또 뭐라고. 걔들이 뭐라고 전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음…… 큰일이기는 했지만, 나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히…….”
“며칠을 쉬셨다는 데도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다더군요.”
“어…….”
“그 흑사자 성에 치료포션이 부족했을 리도 없고. 만약 요구하셨다면, 성녀인 제가 직접 찾아가서 유진 님의 상처를 돌봐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요구도 없었죠.”
“……치료포션이 만능이 아니란 것은 너도 잘 알 것 아냐? 엘릭서조차도 만능이 아닌데. 그리고 사제를 요구할 만큼의 상처도 아니었…….”
“며칠 동안 침대 신세를 지셨다더군요.”
“그게 뭐 어쨌…….”
“그걸 쓰셨던 겁니까? 이름이…… 분명 이그니션이었죠? 제 몸을, 심장을 망가트리며 수명을 깎아 먹는 자살기.”
“자살기는 너무 심하지 않나 싶네.”
“아뇨. 심한 것은 그런 무식한 기술로 제 몸을 학대하는 유진 님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사마르에서도 그 기술에 대해서는 제가 경고를 드렸을 겁니다. 한번 사용하고 나면 며칠은 누워 있어야 하는 기술이라니. 심지어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은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서,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그 목소리는 나긋나긋하면서도 날카롭게 찔러오는 면이 있었다.
나하마에서의 일은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그니션을 써서 바랑을 죽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환생하고서 처음 맞닥트린 반동에 너무 추한 꼴을 보여 버렸다. 제 발로 직접 걷지도 못해 크리스티나의 등에 업히고, 그 후 사흘 동안 크리스티나가 떠먹이는 밥을 먹고, 흘려보내는 물을 마시고…….
뭔가…… 뭔가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은 것은 아닌데. 과하다 싶을 만큼 존중을 받았는데…… 뭔가…… 왠지 모르게 사람으로서의 존엄이 깎여진 것만 같은…….
“제가 곁에 있는 상황이라면 괜찮습니다. 저라면 유진 님의 부상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고, 탈진해 버린 몸을 돌보는 것도 익숙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없는 상황에서 그런 기술을 쓰는 것은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그 뭐냐……. 어쩔 수 없이 썼던 건데…… 나도 별로 쓰고 싶지는…….”
“키옐에서 나찰공주와 싸우셨단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왜 그 자리에 제가 함께 있지 않았을까 탄식했습니다. 성녀인 제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유진 님을 도와서 그 사악한 다크엘프의 수괴를 징벌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얘기하지 말…….”
크리스티나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뭔가 싶어서 유진도 걸음을 멈추고 크리스티나를 돌아봤다. 대뜸 뻗어 온 손이 유진의 양손을 붙잡았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손을 잡아올려 하나로 마주 잡았다. 그녀는 유진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부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 주십시오. 유진 님은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입니다. 저는 성녀로서 유진 님을 위해 대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유진 님이 부상을 입으신다면 제 모든 힘을 다해서 기적을 일으킬 겁니다.”
“…….”
“용사라면 그에 마땅한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의 세상에서 용사가 이뤄야 할 사명이라면, 남은 2명의 마왕을 토벌하는 것뿐이겠지요. 그러니 부디…….”
“뭔 일 있냐?”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손을 힐긋 보았다. 떨림은 없다. 땀이 찬 것도 아니다. 은근하게 전해져 오는 맥박조차도 평온하다. 하지만 유진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크리스티나가 짓고 있는 미소. 낯설지는 않다. 보았던 적이 있는 미소다. 그래, 크리스티나와 처음 만났을 때. 베르무트의 무덤에 들어가기 전. 아니스와 외모가 닮은 것과, 친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때의 크리스티나는 저런 미소를 지었다. 평온해 보이면서도 속내는 그렇지 않은.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가꿔낸, 무의식적으로도 지을 수 있게 된, 가식적이면서도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 미소. 언뜻 보면 저 미소는 성녀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애로워 보인다.
만약 크리스티나와 처음 만나고, 그녀와 얕은 관계를 지속했다면 저 미소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사마르에서 몇 달 동안 크리스티나와 함께 지냈다. 그 누구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엘프의 영지에도 들어가 보았고, 바랑과 만나 사이좋게 죽을 뻔했던 적도 있다.
고작해야 몇 달. 하지만 전생까지 더한다면 그렇지도 않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와 닮아도 너무 닮았다.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떼어놓는다면 아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쌍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닮았다.
그러니 읽을 수 있다. 당장 라이언하트의 저택에서 헤어지기 직전만 해도 크리스티나는 저렇게 웃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미소는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미소였지만, 사마르에서 궂은일을 겪으면서 서서히 본심이 드러나기 시작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답이 늦었다. 크리스티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린 뒤,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표정을 바꾸었다. 미소가 엷어지고, 표정에 의아함이 물들었다.
“표정이 이상해서.”
“제 얼굴이 이상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굉장히 억지로 웃고 있는 것 같거든.”
“그렇지 않습니다…… 만. 유진 님이 정말로 그렇게 느끼신다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유진 님과 이렇게 재회한 것이 몇 달 만이기도 해서, 표정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을 움직여, 유진의 곁에서 눈을 말똥거리고 있는 메르를 쳐다보았다.
“……어쩜. 이 자그마한 소녀가, 현명한 세냐 님이 직접 만들어내셨다는 사역마로군요.”
“메르 메르데인이라고 해요.”
이제야 이쪽을 보는구나. 메르는 여태까지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크리스티나에게서는 존재한 후로 처음 느껴보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꺼림칙한 무언가를 느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역마 소녀님. 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례입니까?”
“음…… 아뇨, 저는 괜찮아요. 제가 만들어진 지 200년이 넘기는 했지만, 외형은 세냐 님을 쏙 빼닮은 귀엽고 깜찍한 소녀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저런 것을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군.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메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유진도 전생의 하멜을 두고서 얼굴이 나쁘지 않고 길들지 않은 야생마 같은 매력이 있다는 둥의 소리를 하긴 했지만, 자신이 하멜인 것을 밝히지 않고 내뱉는 소리와 제 얼굴을 두고 직접 하는 말은 뻔뻔함과 각오가 다른 법이다.
“후후, 정말 그렇군요. 저도 세냐 님의 초상화와 동상은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만. 메르 님은 정말 세냐 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졌군요.”
크리스티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메르의 두 눈을 응시했다. 메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크리스티나에게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작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오라고 해서 오기는 했는데 말이야.”
그 짧은 침묵을 깬 것은 유진이었다.
“무슨 이유로 오라고 한 거야? 나도 널 만나야 할 이유가 있기는 했는데. 설마 네 쪽에서 먼저 오라고 할 줄은 몰랐거든.”
“유진 님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랑 날 죽이라고 사주했던 것은 교황과 추기경이 아니었어.”
유진은 대수롭지 않단 듯이 말했다. 하지만 주변의 경계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종교국가에는 멀쩡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광신도들이 썩어나도록 많다. 신은 당연하고, 교황과 추기경에 대한 험담을 길거리에서 늘어놓았다가는 눈 까뒤집은 칼침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은 국가다.
“……아.”
크리스티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그렇군요. 처음부터 의혹은 있되, 그럴 리가 없다고는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그랬던 것입니까.”
교황과 추기경을 믿을 수 있나?
과거에 크리스티나에게 저렇게 물어보았었다. 그때의 대답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니오.
두 분은 절 이런 일로 죽이고 싶지 않을 겁니다.
“저는 이 일로 하여 유진 님이 절 완전히 신뢰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널 믿는다고 했었잖아.”
“예. 그 대답도 그때 들었지요. 하지만 제게는 보다 확실한 증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신성제국에 돌아와, 교황예하와 로게리스 추기경의 의혹을 파헤쳤지요. ……큰 성과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쿡쿡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편지조차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암호문까지 사용하며, 몇 없는 벗을 이용해 편지를 위탁했습니다. 제가 유진 님의 신뢰를 얻고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는지, 부디 유진 님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널 믿는다니까.”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리 말하는 것은, 유진 님이 저에 관해 조금은 더 부담을 갖고, 저를 조금 더…….”
크리스티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유진은 그 잠깐 동안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살짝 바뀐 것을 보았다.
가식의 미소가 사라지고,
아니스에게서 보았던 미소가 어렸다.
“……조금 더…… 쿡쿡…… 유진 님은 우습게 들으실지도 모르지만, 네. 저를 더 믿고, 소중하게 여겨주시면 좋겠군요.”
“……소중하게?”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성녀로서 유진 님의 여정에 함께 할 몸입니다. 하지만 저와 유진 님 사이에 동료다운 유대는 아직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표정이 엷어져 간다.
“그러니 유대를 차곡차곡 쌓아야 하겠죠.”
“……성격이 참 고약하셔. 그래서. 너는 무슨 볼일로 나를 유라스까지 오라고 한 건데?”
“며칠 후. 아니스 님의 탄생일에 맞춰, 저는 성녀의 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증명? 네가 성녀후보가 아닌 정식성녀라는 것은 이미 인정된 것 아니었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극소수입니다. 유라스에서도 제가 정식 성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건 3명의 추기경과 교황예하뿐입니다.”
말레피카룸 소속의 이단심문관. 아타락스와 헤모리아도 크리스티나를 ‘성녀 후보’라고 불렀었다.
“물론 정식으로 성녀에 오르고, 그를 증명받고 공표되는 것은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축복과 세례를 받는 것도 그렇지요. 하지만 그 아니스 님의 축일에, 태양의 광장에서, 그것도 아니스 님의 성상 앞에서 기도를 읊는 것은…… 부담감에 짓눌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해버리면, 마치 저따위가 신실한 아니스 님의 재림이라 여겨질 것 아닙니까.”
“…….”
“하지만 제게 거부권은 없습니다. 저 개인의 부담감으로 거부할 문제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 증명에 내가 필요하단 거냐.”
유진은 망토를 들추며 물었다.
“아니면 역시 성검이 필요한가?”
“……유진 님이 용사라는 것은 밝혀지지 않을 겁니다.”
크리스티나가 답했다.
“용사의 존재는 성녀보다 훨씬 무거우니 말입니다. 저에 대한 증명은 교황청의 가장 깊숙한, 은밀한 곳에서 이뤄질 겁니다. 유진 님은 그곳에서…… 제가 성녀임을 증명하는 것을 지켜봐 주십시오.”
“그건 상관없는데.”
유진은 망토 자락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성녀로 공표된다 해서 새삼스레 그런 걸 의식하는 건 좀 별로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날 걱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성녀가 용사에게 헌신해야 하는 것을 과하게 의식하지 말란 거지.”
크리스티나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진은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엷어지고,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특히 대신 죽을 수도 있다는 말.”
전생에 그렇게 뒈져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나는 그런 말이 존나 싫거든.”
그렇게 뒈졌기 때문에, 세상 누구보다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레시아
심장의 껍질이 벗겨진 것만 같았다.
지금 가슴 안에서 쿵쾅거리는 심장에 껍질 따위는 없겠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느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속살이 드러나고, 자기 자신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감정의 표면이 훑어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표정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찰나의 흔들림을 아주 길다고 느꼈다.
‘어떤 표정이었지?’
모르겠다. 웃는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다. 크리스티나는 괜히 손을 들어 뺨을 어루만져 보았다. 언제나 지어온, 당연하도록 만들어온 미소가 느껴졌다.
‘……지금과는 달랐는데, 모르겠어.’
교황은 이 거대한 신성제국에서 그 누구보다 강한 신앙심을 가진 사제 중에서 선출된다.
전임 교황이 선종에 들어간 후. 그 혼은 천국에 이르기 전, 모든 주교들의 꿈에 나타난다. 그렇게 교황은 주교들의 혼과 신앙을 들여다보고, 후임을 맡기기에 충분하다 싶을 만큼의 신앙심을 가진 주교의 몸에 성흔을 새긴다.
그렇게 성흔을 갖게 된 주교들은 교황청 깊은 곳의 ‘알현실’에 들어가, 빛의 선택을 받게 된다. 선택을 받은 주교는 교황에 오르고, 선택을 받지 못한 주교들은 추기경이 된다.
현재 유라스의 교황, 에우리우스도 30년 전에 알현실에서 빛의 선택을 받았다. 그렇게 선출된 교황은 유라스에서 빛의 대리자로 여겨진다.
성녀는 교황이나 추기경들과는 다르다. 그들이 주교 중에서도 신앙심으로 선택된다면, 성녀는 내림받는다. 이번 대에는 크리스티나 한 명만이 성녀 후보였지만, 전대에는 서너 명의 성녀 후보가 존재했다.
‘빛내림’에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부모를 여의거나 버려진, 수도원에서 자란 소녀. 그러한 배경을 가진 소녀 중에서 몇몇이 돌연 빛내림을 받고, 어린아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내림받은 빛은 성장할수록 점점 줄어드는데, 그것은 후보로서의 자격이 박탈된다는 뜻이다. 그런 후보들 중에서 빛이 줄기는커녕 더욱 찬란하게 발하는 후보가 정식으로 성녀라 인정받는다. 그렇게 성녀는 빛의 사도가 된다.
용사.
ㅡ아주 오래전. 마왕이 존재하지 않고, 마족과 마물, 몬스터의 경계마저 구분되지 않던 시절.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신은 제 피와 살로 검을 만들어 어둠을 밝혔다. 그 검이 바로 성검 알테어. 빛의 신의 첫 번째 자식이자, 신이 이 세상을 위해 남긴 가장 찬란한 횃불.
신이 지상을 떠나고 하늘에 올라 빛이 된 후. 신성제국의 그 누구도 알테어를 뽑아 빛을 밝히지 못했다. 알테어를 뽑아 빛을 밝혔던 것은 300년 전의 위대한 베르무트와, 그 후손인 유진 라이언하트뿐이다.
그렇기에 용사는 특별한 것이다. 용사는 빛의 대리자도, 사도도 아니다.
빛의 화신(化身).
……성녀가 용사에게 헌신하는 것이 무어가 이상한가?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크리스티나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오고, 그때 크리스티나가 성녀라면. 그녀는 기꺼이 용사를 위해, 유진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칠 것이다.
성녀 후보가 되었던 날부터 쭉, 그래야만 한다고 배워왔다. 성녀의 책무가 얼마나 고결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가슴에 새겼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얼굴과, 추기경에게 거둬진 것과, 빛내림. 그 모든 것에 적합한, 300년 전 신실한 아니스의 재림이라 나설 수 있는 성녀가 되기 위해.
휘어진 입가의 곡선, 입꼬리의 위치, 목소리의 높낮이, 시선의 처리와 눈웃음. 그렇게 표정을 만들고, 속내를 감추었다. 드러낼 필요도 없었고, 드러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성녀라 하여 용사에게 헌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자신이 용사라는 것을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그럼 나는?’
유라스에는 어느 시대에나 성녀가 존재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특별한 것은, 그녀가 300년 전의 신실한 아니스처럼 용사와 같은 시대를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그 아니스 님처럼, 용사와 함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이 아니스 님과 닮은 모습으로 태어나고, 라이언하트에 또다시 용사가 태어난 모든 것이 연결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이 용사이길 거절하고, 사명을 다하지 않으려 한다면.
성녀로 인정받기 위해 살아온 삶에 의미가 있을까.
‘……반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신경 써서는 안 될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히고 머릿속을 떠돌았다. 크리스티나는 아까 마주 잡았던 유진의 손을 떠올렸다. 왼손의 약지. 사마르에 있을 적에는 끼워져 있지 않던 금색 반지가 있었다.
왼손 약지의 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크리스티나도 잘 알았다. 그 반지는 평생 순결해야 할 빛의 반려인 성녀에게는 평생토록 인연이 없을 물건이었다.
‘……3달쯤…… 흘렀나? 그사이에…… 하긴, 귀족은 성인이 되기 전에도 약혼을 맺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게다가 유진은 그 위세 높은 라이언하트에서 시조 이후 제일의 기재라고 평가받는다. 크리스티나가 보기에 성격에는 심각한 하자가 있고, 입은 걸레를 물린 것처럼 지저분한 주제에 외모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빼어나다.
실력? 그것을 굳이 짚고 넘어갈 이유가 있나? 굳이 하자를 더 찾자면 본가의 정통 핏줄이 아닌 양자라는 점과, 스스로 가주계승권을 포기했다는 것 정도인데…… 유진이 가진 것들을 생각하면 저 정도 단점쯤은 신경 쓰지 않고 혼약을 맺을 귀족가는 얼마든지 있을 거다.
고작 20살. 아직은 젊다는 말보단 어리다는 말이 더 어울릴 나이. 명문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되지 못할지라도, 저 젊은 유진 라이언하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다. 아롯의 마탑주? 궁정마법사단장? 키옐의 제국기사단장이 될 수도 있을 거고, 아예 다른 나라에 투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는…… 누구지? 라이언하트와 급이 맞을 대귀족…… 어쩌면 왕족일 수도 있어.’
크리스티나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이 좀처럼 따라주질 않았다.
……그런데…… 약혼반지치고는 너무 수수하지 않았나? 대귀족 사이의 약혼이라면, 기념과 더불어 다른 귀족가에 과시하기 위해 값비싼 반지를 하는 것이 보통일 텐데.
다시 한번 봐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런 충동을 억눌렀다. 불필요한 충동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괜한 혼란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혹시라도 유진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 아닐까 경계했다.
그래서 서둘러 걸었다. 유진은 대뜸 걸음이 빨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따라오고 있는 메르가 보였다.
“유진 님도 이제야 절 보시는군요.”
메르가 실눈을 뜨고서 쏘아붙였다. 멋쩍은 표정을 하고서 망토를 열어주자, 메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망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전 기차는 처음 타봐요. 유진 님은 타본 적 있으신가요?’
‘나도 처음 타봐. 300년 전에는 기차란 것도 없었거든.’
키옐에도 기차는 있다. 귀족들은 장거리 여행에 워프게이트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비싼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서민들은 장거리 여행에 기차를 이용한다.
기차는 기계장치의 대부분에 마법공학이 더해졌기 때문에, 아직까지 말과 마차를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레일만 깔아주면 달릴 수 있는 데다 워프게이트보다 압도적으로 관리가 편하고 사고의 위험성이 덜하기 때문에, 마법기차의 도입과 노선의 추가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렇게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여러 가지 개발이 더해지고 있다. 멜키스에게 듣기를, 최근 백색마탑의 연금술사들은 말과 마차까지 대신해서 도로를 달리는 마법자동차란 것을 개발하고 있단다.
‘너무 노골적이라 웃겨요.’
망토 안에 편히 누운 메르가 키득키득 웃었다.
신성제국 유라스는 제국다운 넓은 땅덩이를 가진 주제에, 워프게이트의 보급률이 굉장히 낮다.
신앙심에서 비롯된 신성마법과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은 체계가 완전히 다르다. 고지식한 유라스의 고위신관들은 신앙심 한 줌 없이 기적과 흡사한 마법을 펼치는 마법사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것은 오랫동안 유라스에서 마법사를 차별해 왔다.
물론 먼 옛날의 일이다. 마왕과의 전쟁을 거치고, 흑마법사가 마법학회에 받아들여질 만큼 세상이 바뀌었다. 사실 그런 이유보다는, 마법이 신성마법보다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다는 것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모든 신도가 신성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건 마법도 마찬가지지만, 마법은 신성마법과는 달리 비(非) 마법사도 혜택을 누릴 수 있어요. 돈만 있다면 말이죠.’
하늘을 날 수 없는 사람도 돈만 있다면 아롯의 공중마차를 이용할 수 있다. 말과 마차, 기차를 타고 몇 날 며칠을 이동해야 할 머나먼 거리도 돈만 있다면 워프게이트를 써서 단숨에 도착할 수 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겨울에도 마법보일러를 설치하고 비용만 꼬박꼬박 낸다면 뜨거운 물을 양껏 쓸 수 있다.
당장 유진이 전생과 달리 묵직한 전대와 호패를 들고 다니지 않게 된 것도 마법의 혜택이다. 피와 연동된 마법신분증. 현금을 들고 다닐 필요 없이 은행의 계좌와 연동한 마법카드. 모두가 마도왕국 아롯이 보급하고 정착시킨 생활마법이다.
신성마법에도 편의를 위한 기적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기적들은 대기 중의 마나나 연금술로 만든 마나전지를 사용해 지속되는 마법과는 달리, 지속성이 한참 떨어진다. 게다가 신성마법이란 것은 마나가 아닌 ‘신앙심’이라는 모호한 힘을 사용하며, 단계와 위력조차도 신앙심에 따라 결정된다.
‘유라스는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잖아요. 아마 키옐보다 국고에 많은 재물을 쌓아놨을걸요?’
‘그렇겠지. 이 나라의 백성들은 세금과는 별개로 다니는 성당에 십일조에 헌금까지 내잖아. 그 십일조는 성당을 거쳐 교황청에 흘러가고…… 거기에 외국의 성당이 거둬들인 돈까지 받아먹지.’
‘그렇게 돈이 많은 주제에 워프게이트의 보급률은 키옐보다 못하죠. 당장 키옐은 유진 님의 고향이라는 기돌이나, 그 소똥 냄새 나던 볼라뇨에도 워프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잖아요.’
설치는 되었지만, 사용은 잘되지 않는다. 요양 삼아 시골에 내려가는 귀족이나 부호 정도만 사용하는 워프게이트다. 그런 시골에 사는 평민들은 기차나 마차,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 나라는 신민들을 조련하고 있어요. 마법의 편안함에 취하고, 멀리 떠나게 두지 않고, 한가하면 동네 성당이나 다닐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예요. 신민들에게 그런 환경을 만든 주제에, 아마 고위 성직자들은 숨겨진 전용 워프게이트를 이용할걸요?’
‘네가 요즘 보는 소설에 그런 음모가 나오디?’
‘어떻게 아셨어요? 유라스라고 이름이 딱 나오는 것은 아닌데, 누가 읽든 유라스를 떠올릴 종교국가가 나오기는 해요. 그 소설의 고위성직자들은 도시의 지하 깊은 곳에서 향락을 즐겨요.’
메르는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며 유진의 손가락을 흔들었다.
‘틀림없이 유라스의 고위성직자들도 그럴 거예요. 돈 많고 권력도 있는데 어떻게 사람이 금욕적으로 살 수 있겠어요? 겉으로는 금욕적인 척하면서, 자기들끼리는 즐길 것 다 즐기고 편하게 살 게 틀림없어요.’
‘……음…… 그 얘기는 크리스티나한테는 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거든요? 그런데 유진 님, 되게 신기하지 않아요?’
‘뭐가?’
‘제가 세냐 님을 닮은 것은, 세냐 님이 자신의 유년기 모습 그대로 절 사역마로 만드셨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아니스 님은 마법사가 아니시잖아요?’
‘크리스티나는 사역마가 아니잖아. 아마 아니스의 먼 후손일걸.’
단순한 후손은 아닐 거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등에서 8장의 날개를 펼치며 일어선 아니스를 떠올렸다. 성녀 후보들에게 찾아온다는 빛내림…… 아마 그것에 아니스가 연결되어, 후손의 몸에 깃든 것이 아닐까.
‘……음…… 그런가요?’
메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메르는 크리스티나에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트레치아 교구까지는 기차로 얼마나 걸리지?”
“중간에 사고라도 나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 밤중에 도착할 겁니다.”
트레치아 교구. 로게리스 추기경의 저택이 있는 곳이다. 추기경 정도 되는 고위성직자의 교구라면 워프게이트가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생각되지만, 다른 추기경의 교구에도 워프게이트는 설치되지 않았다.
추기경들뿐만이 아니다. 유라스에 존재하는 오랜 성지나 유적지 중에서 워프게이트가 설치된 곳이 오히려 드물었다.
“워프게이트로 편하게 오고 가면 순례의 의미가 가벼워지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불만을 물으니, 크리스티나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순례란 어느 정도의 고난이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이란 몸이 힘들도 어렵고 귀찮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법이죠. 그러한 고난을 이겨내고, 오랜 시간을 들여 떠돌고 방문하는 것. 그렇게 신앙으로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참된 순례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 푹푹 찌고 흙투성이의 밀림에서 사제복을 고집한 것도 순례 같은 거냐?”
“아아, 이제야 알아주시는군요!”
“욕망을 이겨내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너 옷 더러워지면 바로바로 세탁했잖아. 밥도 많이 먹었고.”
“……식사는 순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제복을 항상 청결히 하는 것이 욕망과 무슨 상관입니까?”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유진을 돌아보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
“저도 워프게이트가 편리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몸의 편안함을 쫓다가는 정신이 게을러지는 법입니다. 특히 트레치아 교구처럼 추기경들께서 다스리는 교구는, 다른 교구의 신도들마저도 주기적으로 방문해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그래?”
“네, 그렇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추기경들께서는 직접 성당에 나오셔서 예배를 집전하십니다. 그런 날이면 예배에 참가하려는 타 교구의 신도들로 기차역이 가득 차버리고, 너무 늦어버리면 표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니…… 모르겠는데.”
“남들보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고서는 예배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열렬한 신도들 중에서는 기차를 타는 것조차도 거부하고 도보로 걸어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고행을 자처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유진은 전생부터 신앙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몸을 고생시켜 순례를 하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란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진 님도 땀 흘려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고통을 느끼시잖습니까?”
“……그렇지.”
“흘린 피와 땀이 유진 님의 강함을 만들었듯, 고난의 순례는 신자의 신앙을 보다 단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음…… 그래…….”
표정에서는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의 대화에서는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제멋대로 밀어붙이는 논리지만, 유진은 그것이 반갑다고 생각했다.
“유진 님. 기차는 타보셨는지요?”
“아니.”
“타보면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몇 걸음으로 이동하는 워프게이트나 흔들리는 마차와는 달리, 기차는 안락하면서도 풍류가 있거든요.”
크리스티나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정차된 기차를 가리켰다.
“저것이 유라스의 순례기차. 써니사이드 아니스 트레인입니다.”
“……뭐?”
“써니사이드 아니스 트레인입니다.”
유진은 떨리는 눈을 들어 기차의 앞을 보았다. 마치 배의 선수상처럼, 선두 기차의 머리에는 두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는 천사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장식은 태양의 광장에서 보았던 아니스의 축소판이었다.
“……왜 이름에 아니스 님이 들어가는 것이지?”
“아니스 님뿐만이 아닙니다. 교구를 도는 순례기차는 다른 성인들의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저건 일종의 고인모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진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후손은 낳지 않았지만…… 만약 후손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기차를 만들고서 그 이름을 써니사이드 하멜 트레인이라고 짓는다면.
무덤을 박차고 나와 후손의 멱살을 틀어쥘 것만 같았다.
“……하!”
망토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메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삐뚤어진 입가. 써니사이드 아니스 트레인이 우스워서 뱉은 웃음이 아니다. 사실 유진도 저 이름만 아니었다면 메르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마법의 편안함에 취하지 않도록, 그리고 순례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도록 워프게이트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주제에. 저 기차는 온갖 마법이 더해진 마법공학의 결정체였다.
연료부터가 연금술로 만들어낸 마나전지를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다. 느껴지는 출력량을 보건대 최신식의 전지가 틀림없었다. 거기에 온갖 종류의 마법이 덧칠해 무게는 줄이고 속도는 올렸으며, 흔들림을 잡고 안정성마저 챙겼다.
“표는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탑승하시죠.”
크리스티나가 앞장서서 기차에 올라탔다.
“……뭐…… 넓고 편해 보이기는 하네요. 이딴 식으로 타협할 바에는 워프게이트를 쓰는 것이 수백 배는 편하겠지만요.”
메르는 망토 밖으로 내민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차의 내부를 살폈다. 배정된 자리는 특등석. 바로 뒤의 일반석들에서 중얼거리는 기도 소리와 찬송가가 흘러나오는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더 이상 잡다한 소음을 들려오지 않았다.
“기차는 워프게이트와는 다른 매력이 있답니다, 사역마 소녀님.”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한적하며 고급스러운 내부를 가로질러, 배정된 자리로 다가갔다.
“특히 창가에 앉아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평화롭고 즐겁죠.”
“……창가요?”
메르가 곧바로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뚱한 표정을 치우고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창가 자리를 선점했다.
“제가 여기 앉을 거예요.”
“마음대로 해.”
가져온 짐은 모두 망토 안에 있으니, 따로 짐을 수납할 필요도 없었다. 유진은 메르의 옆, 넓고 푹신한 자리에 앉고서 고개를 들었다.
“안 앉고 뭐 해?”
“……아…….”
크리스티나는 뒤늦게 대답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다른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유진은 의아하단 얼굴을 하고서 크리스티나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
“네?”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 되잖아.”
마주 보는 4인석을 고른 주제에 왜 굳이 다른 자리에 앉으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유진 님! 이 버튼을 누르고 뒤로 누우면 의자가 기울어요!”
“그래, 그래.”
“저 여기 오기 전에 알아봤는데, 기차 안에는 주기적으로 판매대가 돌아다닌다고 해요. 과자, 사탕 같은 간식류도 팔고, 도시락도 판대요. 유진 님도 드실 거죠?”
“그래, 그래.”
유진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의자 옆에 비치된 잡지를 꺼냈다.
관광명소가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아롯과 다르지는 않았지만, 이 책자는 유라스의 성소들이 중점적으로 적혀 있었다.
한 달을 통째로 사용하는 기차 순례 패키지…… 불신자 계도전문의 성당들도 따로 정리되어 있고, 맨 뒷장에는 빛의 기도문과 성경구절들이 적혀 있다.
“……참 열성적이시군.”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동자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두 눈을 살짝 낮추고서, 유진의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이 순례 패키지라는 것 팔리기는 하냐?”
“……타국의 노인들에게 큰 인기입니다.”
“얼씨구…… 늦은 나이에 천국행 티켓을 발권받고 싶은 분들이신가?”
“그들의 신앙이 순수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렇다 하여 유진 님이 그들의 신앙을 우습게 여길 자격은 없으십니다.”
“화났어?”
“아니요. 화나지 않았습니다. 유진 님이 명문귀족가의 도련님, 그리고 용사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례하고 짓궂은 분이시란 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화난 것 같은데.”
“제가 유진 님께 화가 날 이유가 무어가 있습니까? 애당초 성녀인 제가 용사에게…….”
“몇 달 전에 비해 성녀랑 용사 운운하는 말이 많이 늘었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잡지를 덮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기 싫은 것 같은데. 그냥 X같아서 못하겠다고 해. 아, X같은 정도는 아닌가?”
“……언동을 주의해 주십시오. 그런 품행은 유진 님이란 사람을 저열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하멜, 당신은 자세만 나쁜 것이 아니라 품행 자체가 나쁩니다. 저열합니다.
“난 그렇게 느껴도 상관없어.”
언동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입을 닥치고 있으면 사람들은 당신의 입에 어떤 걸레가 물려 있는지 판단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게 맞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교정하는 것보다,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속 편하다는 걸 알거든.”
유진은 피식 웃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너는 모르나 봐?”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눈 내리깔고 있을 거야? 뭐가 문제인데?”
“…….”
“궁금해?”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사마르에서 크리스티나의 등에 업혀 엉덩이를 움켜잡혔을 때의 굴욕감이 떠올랐다.
“이 반지.”
반지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유레시아
크리스티나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벌어지려는 입술을 붙잡고, 이전의 표정을 유지했다. 그를 멋대로 풀어놓았을 때 자신이 어떤 표정이 될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런 얼굴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액세서리가 느셨군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고, 이제야 발견했다는 투로 대답했다. 속내를 숨기고 표정을 감추는 것은 크리스티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제대로 유진의 손가락을 쳐다보며 맑은 미소를 지었다.
“왼손의 약지. 누군가와 약혼이라도 맺으신 겁니까?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리 이른 나이도 아니고, 드문 일도 아니지요. 하지만 그 유진 라이언하트가 누군가와 약혼을 맺었다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나긋나긋한 말투. 기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고, 메르는 즉시 양손을 창문에 갖다 대고서 얼굴을 찰싹 붙였다. 은은한 흔들림 속에서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그런가요. 약혼 자체가 비밀스러운 것입니까? 하긴 귀족들 사이에서는 약혼이란 것도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섞여 있고, 양가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약혼은 쉽사리 파기되곤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파혼이란 꼬리표는 서로에게 달갑지 않은 것이죠.”
방긋 휘어진 눈웃음이 시선을 감춘다. 하지만 유지는 짙은 속눈썹 사이의 푸른 눈동자가 손가락을 빤히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비밀스럽게. 체면을 신경 쓴다는 것은 당연히 지체 높은 귀족이란 것이겠고,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계신 유진 님과 약혼을 맺을 상대라면…… 라이언하트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의 이름을 가진 가문이란 것이겠죠? 왕족과 약혼이라도 맺으신 겁니까?”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히죽 웃기만 했다. 크리스티나는 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놓고 사람을 약 올리는 얼굴. 저 반지가 무어라고 놀리는 데에 써먹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를 바랄 상대가 아니다. 유진 라이언하트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사마르 대수림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명문 라이언하트의 후손이자 빛의 신이 선택한 용사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난폭하고, 뻔뻔하고, 짜증 나고, 유치한 사람이다.
“마침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단 생각이 듭니다. 저와 헤어진 후, 유진 님은 아롯에서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셨죠. 그리고 최근 키옐에서는 나찰공주에게서 살아남고, 백룡 기사단과의 대항전에서 4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셨습니다. 그 모든 행적이 유진 님의 명성을 드높였으니, 여러 나라의 왕족들이 유진 님과 맺어지길 바라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가?”
“예. ……왕족과의 약혼을 기념하기에는 반지가 너무 초라하다 생각됩니다만, 화려한 반지는 너무 눈에 띄기에 비밀스러운 약혼에는 어울리지 않죠.”
크리스티나는 유진과 약혼을 맺은 상대가 왕족이라고 확신했다. 누굴까? 키옐에 공주가 있던가? 당장 떠오르는 것은 시무인의 공주기사. 외모도 출중하다 하고, 마침 나이도 유진과 동갑이다.
“……만약 유진 님이 혼인식을 올린다면, 제가 직접 참석해 축복을 내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유진 님, 이 사실은 잊지 말아주십시오. 혼인은 유진 님의 자유임을 존중해 드리고 싶지만, 유진 님은 빛의 신께서 계시를 내린 용사이십니다. 부디 그 사명을 먼저 생각해 주…….”
“약혼반지 아닌데?”
“……예?”
“내가 언제 약혼반지라고 말이라도 했나 쩝…….”
유진은 실실 웃으며 손가락의 반지를 들어 보였다.
“그냥 마법반지야.”
“……그런 반지를…… 왜 하필 왼쪽 약지에 끼고 계신 겁니까?”
“내가 여기 끼고 싶어서 낀 것은 아닌데, 여기 껴야지 계약이 어쩌고 하면서 알아서 끼워지더라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것입니까?”
“그럼 말하지 말걸 그랬나?”
크리스티나의 눈썹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다가, 화들짝 놀라고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치미는 울분을 눌러 삼키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기도를 올렸다.
“……제 말은, 왜 그걸 처음에 말하지 않고 나중에 말하셨냐는 것입니다.”
“아니 뭐…… 처음 말하고 늦게 말하고는 내 자유 아닌가?”
“유진 님이 늦게 말하신 탓에 제가 마음대로 오해하고 떠들어 버렸지 않습니까.”
“그게 재밌어서 늦게 말한 거지.”
“유진 님은…… 유진 님은 성격이 참 짓궂으십니다. 눈앞에서 사람을 조롱하고 그러는 것이 무어가 즐겁단 말입니까? 무릇 용사라면 성인(聖人)이라 추앙되기 마땅한 인품을 갖춰야 하는 법입니다. 유진 님이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고, 언젠가 마왕을 토벌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들! 유진 님의 인품은 결코 본받아선 안 될 만큼 추악합니다.”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추악하다는 건 말이 너무 심하네…….”
“유진 님은 쓰레기가 맞으니까 달게 받으셔야 해요.”
창문에 달라붙어 있던 메르가 말했다. 그 말에 크리스티나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유진은 뭐라 항변하는 대신 쩝 입맛을 다시며 창가를 쳐다보았다.
워프게이트와 다른 매력이 있다는 말에는 유진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의 안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어긋나는 일 없이 기계적으로 들려오는 덜컹거림. 특히 유진은 창문이 커다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새 기차는 도심을 벗어나 한가로운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 떠나 온 백색의 도시가 보였다. 사실 별 볼거리도 없는 풍경인데, 메르는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서 풍경에 홀려 있었다.
판매대가 서너 번 지나갔을 때쯤.
“……이유는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옆에 앉은 메르는 벌써 도시락 2개를 먹어치우고 한 아름의 과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서 까먹고 있었다.
“무슨 이유?”
크리스티나는 너무 읽어 낡아버린 성경을 닫았다. 그 성경은 유진도 눈에 익었다. 사마르에서도 매일 같이 보았던 성경이다. 특히 크리스티나는 막 잠에서 깬 아침과 밤마다 성경을 펼쳐서 읽곤 했었다.
“저는 유진 님께 보낸 편지에 자세한 사정은 적지 않았습니다. 성녀의 증명 같은 것은 편지에 담을 만한 이야기가 아닌 탓이기도 했지만, 그 편지와 지금 제 행동이 유진 님께서 큰 불쾌를 전해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흠.”
유진은 고개를 까닥 기울이고서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그 성녀의 증명이란 것은 교황청에서 하는 거라며? 그런데 왜 트레치아까지 가는 거야? 그냥 유레치아에 남아 있으면 편하잖아.”
“제게도 여러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유를 물어보니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트레치아 교구에는 아득한 옛날에 신이 남기셨다는 빛의 샘이 있습니다. 저는 내일부터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샘에 몸을 담그게 될 겁니다.”
빛의 샘…… 유진은 기억을 더듬었다. 과거에 들은 적이 있었다. 다들 어느 정도 술을 마시고, 고향의 신비한 풍경에 대해 떠들던 중이었다.
-그게 뭐가 신비해? 내가 살았던 엘프의 영지에는 세계수가 있단 말이야. 야, 하멜! 너 세계수가 뭔지 알아?
-그냥 존나 큰 나무 아니냐? 나 어릴 적 살던 집 뒤에도 큼직한 사과나무가 있긴 했어.
-너 지금 사과나무랑 세계수를 비교하는 거야? 그러니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어쩔…… 어쩔 수 없네. 내가 나중에, 응, 전부 다 끝나고, 이 빌어먹을 곳을 떠나게 되면 말이야. 네 견문도 넓혀줄 겸 엘프의 영지에 데려다줄게.
-아니…… 나는 별로 가기 싫은데…… 거기 가면 시크나드 그 새끼도 있을 거고, 그 새끼랑 비슷한 상판에 성격 엿 같은 엘프들이 잔뜩 있을 것 아냐.
-……시크나드 오빠가 뭐 어떻다는 거야? 그리고…… 그리고 이 개자식아. 내가 널 위해서 데려가 주겠다는데 잠자코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아! 그렇구나? 엘프들이랑 같이 서 있으면 네 낯짝은 찌그러진 쓰레기통 뚜껑처럼 보일 테니, 그걸 걱정하는 거지?
-죽일까.
-걱정하지 마, 엘프들과 같이 서 있어서 얼굴이 꿀리지 않는 것은 저기 저 베르무트랑 아니스…… 흠…… 흐흠…… 나 정도니까.
-설원 바야르 부족 근처에는 뜨거운 강이 흐른다.
-야 모론. 뭐라도 말하고 싶은 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시X아 없는 걸 지어내면 안 되지. 너희 부족은 저기 저 북쪽 끝에 있잖아. 눈이 산처럼 쌓이고 매일 눈보라가 치는 곳에서 뭔 놈의 뜨거운 강?
-내버려 둬, 하멜. 모론은 너 이상의 시골촌뜨기라서 이런 얘기를 할 때 할 말이 궁하잖아. 여기도 눈밭이고 저기도 눈밭이고 보이는 게 죄다 눈뿐이니까, 뭐라도 지어내고 싶을 수도 있는 거야.
-……바야르의 전사이자 설원의 아들인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 부족 근처에는 정말로 뜨거운 강이 흐른다.
-아니 그러니까 설원에 뜨거운 강이 왜 흐르냐고. 뭐 불꽃이 강이라도 돼서 흐르나? 그게 말이 되냐 새끼야?
-불꽃은 아니지만 불꽃과 같은 연기가 강과 함께 흐르는 곳이다. 못 믿겠다면 베르무트에게 물어봐라. 베르무트는 나와 함께 그 뜨거운 강에서 자주 목욕을 했었다.
-……지열로 뜨거워진 물이 솟구치는 곳이었지. 그 뜨거운 물이 고이고, 흐르는 강이다. 모론에게 이끌려 몇 번 들어간 적이 있는데, 꽤 괜찮은 곳이었다. 몸만 담그고 있을 뿐인데 피로가 상당히 풀리거든.
-피로뿐만이 아니다. 그 뜨거운 강은 병과 상처를 돌보는 약수가 흘러서, 몸을 담근 것만으로도 병이 낫고 상처가 치유된다. 특히 피부에도 좋아서 여자들이 좋아했다.
-아니스, 들었지? 그렇대. 갈 거지? 응? 난 갈 거야. 그러니까 너도 가야 해.
-전쟁이 끝나고 모두 같이 가면 된다. 그때는 내가 바야르의 족장일 거다. 내가 친구를 위해 강을 비우라 하면 부족원들은 기꺼이 강을 내어줄 것이다. 그 넓은 강에서 우리 다섯 명 모두가 함께 목욕을…….
-이 미친 자식아. 뭘 같이 목욕을 해? 난 아니스랑 둘이서 할 거니까 너희는 너희끼리 해. 하멜, 훔쳐보면 죽여 버릴 거야.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 싸움이 끝나고, 헬무드를 떠나면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떠들던 중이었다. 이런 주제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아니스가, 그 날은 제법 흥이 올랐던 것인지 술을 마시다 말고 입을 열었다.
-……신비한 곳이라…… 유라스에도 그런 곳이 몇 곳 있죠.
-뭐?
-다들, 다들 조용히 해. 모론 이 등신아! 입 막고 있어. 지금 아니스가 말하려고 하잖아! 세냐! 아니스 잔 채워!
-…….
-미안해, 아니스. 나부터 입 닥치고 있을 테니까 계속 말해봐.
-……지금 생각나는 것은…… 빛의 샘이군요.
-빛의 샘? 그건 또 뭐야?
-이름처럼 빛을 발하는 샘입니다. 얼핏 보면 물이 아니라 빛이 고여 있다고 느껴질 정도죠. 물은…… 흠. 모론이 말한 뜨거운 강만큼은 아니겠지만, 꽤 따뜻하긴 합니다.
-그래? 신기하네. 거기도 나중에 다 같이 가보면 되겠다, 그치? 거기에 몸 담그면 모론 고향에 있다는 강처럼 피부가 좋아지고 그러나?
-평범하게 들어간다면 그런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죠.
아니스는 그 이상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같이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세계수는 봤네.’
모론이 말했던 뜨거운 강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 강도 지금은 루하르의 관광명소로 유명했다.
유진은 과거를 떠올리며 씁쓸히 웃었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때 떠들던 얘기처럼 함께 여러 곳을 여행했을까. 그 당시에는 이미 십수 년을 같이 다녔으면서 뭘 또 여행이냐고 투덜거렸었는데.
“……식음을 전폐할 필요까지 있나? 뭐 속 비우고 목욕해야 몸이 더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단순히 몸을 씻는 것이 아닙니다. 성녀…… 아니, 성녀 후보가 빛의 샘에 몸을 담그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한 의식입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이미 몇 번이나 그 샘에 들어갔었습니다.”
“평범하게?”
유진은 불쑥 그렇게 물었다.
ㅡ쏴아아! 돌연 기차 실내에 새카만 어둠이 드리웠다. 여전히 홀린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던 메르가 화들짝 놀라서 창문에서 손을 뗐다. 기차가 터널에 들어선 것이었다.
드리운 어둠에 천장의 마법이 반응해 은은한 조명을 밝혔다.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 엷은 빛의 선이 천장에 얽혀서 성화(聖畫)를 그려냈다.
기차의 이름이 이름이기 때문인지, 천장의 성화는 두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아니스의 모습이었다. 아니스를 그린 여러 성화 중에서도 가장 흔한 구도였지만, 터널이 만든 어두운 하늘에서 빛의 선으로 그려진 아니스의 모습이 마치 별자리처럼 보였다.
크리스티나는 어둠이 자신의 표정을 감춰주기를 바랐다. 아니, 사실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떨려버린 것을 느꼈다. 지금은? 입꼬리가 경직된 것만 같았다.
한 번 눈을 감고 떴다. 움찔하고 놀라버렸던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나? 그럴 리가 없었다. 당대에 성녀 후보는 크리스티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성녀 후보가 주기적으로 빛의 샘에 가서 받는 세례는 이번 대에는 크리스티나만 독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새어나갈 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 세례가 얼마나 비밀스럽고 철저한지는 다른 누구보다 크리스티나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유진 님의 질문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샘에 몸을 담그는 것에 평범하지 않은 방법이 따로 있습니까?”
“이름부터가 빛의 샘이잖아. 그리고 넌 성녀 후보고. 의식처럼 몸을 담가왔다면, 뭔가 의식다운 특별한 것이 있지 않나 묻는 거다.”
그런 뜻이었나. 크리스티나의 동요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덜컹, 덜컹. 기차가 계속해서 달린다. 화아악! 터널을 빠져나오고, 어둠이 걷혔다.
“……백의를 입고 한답니다.”
“백의?”
“네. 사제복과는 다른, 위아래 모두가 하얗기만 한 백의를 입고 샘에 들어가죠. 사흘 동안 갈아입지도 않고, 샘에서 나올 수도 없습니다.”
“도중에 배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그를 견디는 과정까지 의식입니다.”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떡해요?”
창밖을 보던 메르가 홱 고개를 돌렸다.
“설마 조금씩 흘려보내는 건 아니죠?”
그 말에 유진은 얼굴을 콱 구기고서 메르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티나도 이번에는 표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 메르를 쏘아보았고, 메르는 어깨를 움츠리고서 순진한 척 미소를 흘렸다.
“죄송해요.”
“……어쨌든, 저는 그 의식을 위해서 트레치아에 돌아가 있어야 합니다.”
“좋아. 그래야 할 만한,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거지. 그럼…… 왜 날 오늘 오라고 한 거야? 그냥 사흘 뒤에, 네가 교황청에 들어갈 때에 맞춰서 오라고 하면 됐잖아.”
크리스티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로게리스 추기경께서 유진 님과의 만남을 바라십니다.”
“왜?”
“자세한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만. 교의 추기경이 용사와의 만남을 바라는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어쩌면 너에 관한 일일 수도 있지.”
“……그럴지도 모르죠.”
“짐작 가는 건?”
“솔직히 없습니다. 제가 로한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감시당했을 것이고, 내용도 확인되었을 겁니다.”
“편지의 암호마법이 해제되었던 적은 없어.”
적색마탑에서도 유진과 로베리안, 헤라 외의 몇 명밖에 알지 못하는 최상위급 보안레벨의 마법이다. 이 마법은 암호를 해제하고 다시 감추는 과정에서 ‘반드시’ 흔적을 남기게 만든다.
크리스티나에게 암호의 해제술식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가 편지의 마법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표면에 드러난 술식의 일부를 통해 해제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걸려든다. 한 번 해제하고, 그 과정에서 파악한 술식으로 다시 암호를 걸어버리면 유진 쪽에서 반드시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여태까지 크리스티나가 보냈던 편지에서 암호마법이 바뀌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편지가 로한나를 거쳐 유진 님에게 보내진 것까지 추기경이 파악하지 못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신뢰하는 친구라고 말하지 않았나?”
“제가 수도원을 나와 유일하게 교류하는 친구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추기경은 로한나까지 감시했을지도 모릅니다.”
“양부가 집착이 심하시네.”
“……보시다시피 저는 어려서부터 특별했으니까요.”
아니스와 닮은 외모만으로도 관심을 사기 충분한데, 성녀 후보까지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추기경은 그러한 미래까지 상정하고서 크리스티나를 양녀로 삼은 걸지도 모른다. 당대에 성녀 후보가 크리스티나 한 명뿐이라는 것과, 그녀의 외모가 너무나도 아니스를 닮았다는 것은 유진으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자세한 방법까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티나도 내가 용사라는 것도 계시를 받아서 알았다고 했잖아.’
성흔을 받은 교황이나 추기경이 성녀의 탄생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이 신성제국에서는 있을 법한 일이긴 했다.
“……불쾌하십니까?”
“뭐가.”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정말로 불쾌했다면 처음부터 이 기차에 타지도 않았겠지. 난 등신이 아니라서, 대뜸 트레치아 교구에 가자고 할 때부터 대충 짐작은 했어.”
“……하지만…….”
“왜? 이제라도 기차에서 뛰어내릴까? 아니면 다음 역에서 내릴까. 그편이 네 마음이 더 편한가?”
빙긋 웃으며 건넨 질문에 크리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옳은지를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로게리스 추기경을 떠올렸다.
“……만약 유진 님이 다음 역에서 내리겠다고 하신다면, 저는 유진 님을 붙잡지 않을 겁니다. 제 모든 행동이 무례했고, 유진 님을 강압적으로 데려가는 식이었으니까요.”
“너는 가만 보다 보면 사람이 참 피곤해.”
“……네?”
“그런 변명이 필요해서 닥치고 있다가 지금 입을 연 것 아니야? 사정을 미리 듣고서 내가 이 기차에 타버렸다면, 네가 더 이상 변명할 거리가 없어지니까.”
크리스티나는 대답을 잊고서 멍한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이유를 듣고 가지 않겠다고 했다면, 그것도 별수 없는 일이지. 싫다는 걸 뭐 어째? 하지만 추기경 쪽에서는 날 썩을 자식이라 생각하겠지. 사람이 기껏, 그것도 추기경이나 되는 양반이 직접 만나고 싶다 청한 건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싫다고 걷어찬 꼴이 되니까.”
“……그건…….”
“이래서 네가 피곤하다는 거야. 네 변명은 널 위한 것이 아니라 날 위한 거지. 네가 실수해서, 무례하게 굴어서, 그래서 중간에 내가 떠나버렸다……. 이래 버리면 내 입장도 보호하고, 네 잘못만 부각되는 거지.”
가끔.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앞에 앉은 저 청년이, 자신보다 3살은 어린 연하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날 위해 그렇게까지 변명을 준비할 필요가 있나? 내가 네 양부와 만나면 뭐가 어떻게 되기라도 해? 로게리스 추기경이 날 족치고 성검을 빼앗으려는 흉계라도 꾸미고 있나?”
“……그건…… 그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건 단지, 제…… 개인적인, 기분에 관련되어서…….”
“뭔데?”
크리스티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표정을 흩트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두렵습니다.”
“뭐가?”
“……로게리스 추기경이…… 유진 님에게 저에 대한……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유진은 그렇게 되묻지도 못하고 눈을 끔벅거렸다. 그만큼 크리스티나의 대답이 의외였다.
“……뭐…… 네가 어릴 적에 이불에 오줌을 쌌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닙니다. 제가 싫고 두려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유진 님과 맺고자 하는 유대를, 로게리스 추기경이 강요하고 변질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랑 맺고 싶어 하는 유대는 용사와 성녀의 유대겠지?”
“그 외에 무엇이 있습니까?”
“로게리스 추기경이 바라는 유대란 것도 결국 그런 유대일 것 아냐?”
“……성녀는 저입니다. 용사와, 유진 님과 유대를 맺는 것도 저입니다. 저와 유진 님의 첫 만남은 신의 계시였고, 그렇게 저는 성녀가 되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하는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의식에 잠재된 공포와 혐오가 감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로게리스 추기경과 유진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 유대가 훼손되는 것이 싫다.
……그것뿐인가? 결국은 실망하고 싶지 않을 뿐 아닌가? 어려서부터 용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빛의 신교에서 용사는 빛의 화신이기에, 용사가 존재하는 곳은 언제나 밝음 뿐이다.
트레치아 교구. 양녀가 되어 수도원을 떠나고, 알카르트의 보좌주교가 되기 전까지의 10년을 살았던 곳. 그곳은 추기경이 다스리는 교구답게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에게는 아니었다. 계시를 통해 신의 존재를 느꼈다. 유진이 눈앞에서 성검을 뽑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용사의 존재마저 실감했다.
그 용사가.
트레치아 교구에서.
내가 빛의 샘에 잠겨 있는 동안.
“……저는…….”
유진이 내건 의혹에 대해 추기경의 행적을 감시하고, 교황청에 오갈 때마다 주의 깊게 둘러보기도 했었다.
그 모든 것이 크리스티나로 하여금 비틀린 충족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자그마한 반항. 별 성과는 없을지언정, 그렇게 한다는 것 자체로 크리스티나는 만족감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위한 변명을 준비하며, 그가 다음 역에서 내리기를 바랐다. 만약 유진이 정말로 내려 버린다면 로게리스 추기경은 크리스티나에게 실망할 것이고, 그것에 크리스티나는 약간의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래, 그것뿐이다. 크리스티나는 무의식에서 번져가는 감정을 무시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잠시 이성이 흐려졌던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 주십시오.”
메르가 창문을 통해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힐긋힐긋 보았다.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은 그토록이나 노골적이었다.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드러내듯이 접었던 성경까지 다시 펼쳐 읽기 시작했다.
“……유대라.”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턱을 괴었다.
“나는 성녀랑 용사로 맺어지는 유대보다는 사람과 사람으로 맺어지는 유대가 좋은데 말이야.”
“…….”
“그편이 훨씬 더 깊고 진하거든.”
베르무트는 용사였지만, 하멜에게는 그냥 재수 없는 베르무트였다.
세냐는 대마법사였지만, 하멜에게는 그냥 폭력적인 욕쟁이 세냐였다.
모론은 바야르의 대전사였지만, 하멜에게는 그냥 등신 같은 모론이었다.
아니스는 성녀였지만, 하멜에게는 그냥 주정뱅이에 음험해서 뱀 같은 아니스였다.
그들 모두에게 하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머저리, 개새끼, 병신, 그 여러 가지 잡다한 형용을 더 해,
그냥 하멜.
300년 전의 다섯 명은 그런 유대로 맺어져 있었다.
유진은, 하멜은 그를 확신했다.
* * *
기차가 밤이 되고서야 트레치아 교구에 도착했다.
밤이기는 했지만 하늘은 어둠이 엷었고, 지상은 빛으로 환했다. 도착하기 전, 먼 곳에서부터 창문으로 보며 느끼기도 했지만…… 이 도시는 빛이 너무 많다. 건물도 대부분이 백색이라, 길마다 세워놓은 가로등이 발하는 빛이 더욱 환하게 느껴진다.
“마중이 과하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창밖을 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검은 군모와 붉은 로브, 검은 제복. 유라스에서 저런 복장을 한 것은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뿐이다.
마중을 나온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말레피카룸과 상반되는 새하얀 제복을 맞춰 입은 성기사들.
제복 상의 중앙을 붉은 십자가가 가로지르고 있다. 교황청 직속의 혈십자 기사단이다. 유라스에서 무력적으로 가장 강력한 2개 조직의 정예가 역부터 마중을 나와 있는 것이다.
이윽고 기차가 완전히 멈추고ㅡ 문이 열렸다. 미리 차출되어 있던 심문관과 기사가 한 명씩 기차로 올라왔다.
“미리 말해두는데.”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통로를 쳐다보며 다리를 꼬았다.
“까득 소리 내면 처맞을 줄 알아.”
군모. 그 아래의 가지런한 검정 단발. 금속제 마스크.
헤모리아는 붉은 눈을 찡그리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대성당
유진은 시선을 삐딱하니 기울이고서 헤모리아를 쳐다보았다. 헤모리아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식했다. ㅡ쿵! 그녀가 신고 있던 두꺼운 굽의 워커가 큼직한 발소리를 냈다.
그 후 침묵. 헤모리아와 함께 들어 온 혈십자의 기사마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헤모리아의 뒤편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만 보면 헤모리아가 기사보다 직위가 높은 것처럼 보였다.
‘소속은 다르지만 크게 묶으면 그러지도 않다는 건가.’
아직까지 묵언수행 중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크리스티나가 몸을 일으켰다.
“……헤모리아 심문관. 마중을 나온단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그제야 헤모리아가 반응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는 대신, 양손을 움직여 수화를 전했다.
유진은 수화는 할 줄 모른다. 배울 생각도 없었다. 다른 상대한테 쓰는 것이라면 모를까. 당장 배워봤자 써먹을 상대라곤 까득까득 이를 갈아대는 헤모리아뿐인 데다, 그녀와 만남이 잦은 것도, 인연이 깊은 것도 아닌데 귀한 시간 들여 수화까지 배울 필요가 어디에 있나?
“너 수화 할 줄 알아?”
“……할 줄 압니다.”
“쟤가 뭐래?”
“로게리스 추기경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고 하는군요. 오늘 바로 결정된 일이어서 전달이 불가능했으니 양해해 달라고 합니다.”
“흠.”
성녀 후보. 며칠 후에는 정식 성녀가 될 크리스티나를 성기사들이 마중 나와 호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이단심문관까지 섞여 있는 것이 왠지 수상쩍었다.
“……좋아.”
유진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네 까득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안 들고, 저번에 나한테 먼저 시비를 걸고 지랄하던 것이 좀 많이 엿 같았거든. 그건 뭐, 내가 네 배때기에 주먹 여러 번 꽂고, 귀싸대기도 갈기고, 발로 까버리기도 했잖아? 그러니까, 그때 서로 엿 같다고 생각한 감정은 사이좋게 덜어내도록 하자고.”
이건 또 무슨 말이야? 크리스티나는 놀란 표정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헤모리아와 아타락스 심문관이 흑사자 성에서 유진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둘이 싸웠다는 이야기는 지금 처음 들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헤모리아가 생각하기에, 그때 자신은 유진에게 시비를 건 적이 없었다. 이단심문관이 해야 마땅한 일을 했을 뿐이다.
말레피카룸은 빛의 충실한 종이며, 모든 이단과 어둠을 심판하는 신의 망치다. 말레피카룸의 심판대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애당초 지금의 시대에서 이단심문관이 주로 사냥하는 것은 흑마법사가 아닌, 변절한 신도들이 대부분이었다.
용사도 말레피카룸의 심판대에 오르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용사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엄격한 잣대를 두고 시험해야 한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과연 성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가? 당장 그가 성검을 쥐고 빛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시조부터 내려온 피가 특별했을 뿐 아닌가?
의혹이 있기에 시험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인정했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괴물이 맞았고, 용사라 불리기에도 적합했다.
이 통로에 들어온 순간 유진이 대뜸 건넨 말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맞는 것이 무서워서 까득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포? 그런 것은 심문관이 되기 전의 견습 때 진즉에 극복했다. 유진에게 맞은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고, 끔찍한 것을 보았었다.
시비를 걸고 싸울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헤모리아는 까득 이를 갈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신에 유진을 향해 수화를 보냈다.
“해석해 주지 마.”
곁에 있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려고 했다. 유진은 그보다 한발 앞서 크리스티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헤모리아의 복잡한 수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아.”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수화는 잘 모르지만, 대답 정도는 할 수 있지.”
다시 말하지만, 유진은 수화를 할 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유진도 전생부터 잘 알고, 요긴하게 써왔던 수화가 하나 있기는 했다.
“…….”
헤모리아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그녀는 우뚝 솟은 두 개의 가운뎃손가락을 보고서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를 고민했다. 평소 같았으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까득이라도 갈았을 텐데…….
“이거면 대답이 되었겠지?”
유진은 히죽 웃으며 만족을 느꼈다. 이 수화는 그 어떤 상황과 대화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 높은 수화였다. 손가락 하나만 세우면 되는 것이라 아주 간단하고, 뜻도 포괄적이다.
결국 헤모리아는 더 수화를 이어가지 않고 크리스티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창밖에 집결해 있는 혈십자의 기사들과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들. 크리스티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헤모리아와 성기사가 몸을 돌렸다.
“……유진 님. 저는 먼저 빛의 샘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 가는 것 아니었나?”
“……의식이 의식이다 보니 준비과정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여유를 부려 늦는 것보다는 이르게 준비해서 끝내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크리스티나.”
유진은 그 이름을 불렀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는 것 아냐?”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크리스티나는 태연히 웃었다.
“성녀 후보에 지나지 않는 제가, 정식 성녀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를 증명하고, 그것을 세상에 공표하고, 모두에게 성녀라 인정을 얻는 겁니다. ……제가 이 일에 느끼는 것은 중압감뿐입니다. 싫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발을 떼, 유진을 지나쳤다. 유진은 앞서 걸어가는 크리스티나의 등을 보았다. 어깨가 떨리거나, 주먹을 쥐었다거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티나의 등은 의연했다.
그렇게 보였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도 기억하는 목소리였다.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 헤모리아의 스승인 아타락스가 군모를 벗으며 유진과 크리스티나에게 다가왔다.
“제자가 이야기를 잘 전해드렸는지 모르겠군요.”
“정말 제대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면 말 못 하고 수화만 해대는 쟤 말고 다른 사람을 보냈겠죠.”
“아…… 그것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크리스티나 성녀 후보님이 수화에 능숙하다는 것만 생각해 버렸습니다.”
아타락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금이라도 다시 전해 드리겠습니다. 크리스티나 성녀 후보님. 당신은 혈십자 기사단과 말레피카룸의 호위를 받으며 빛의 샘으로 가실 겁니다.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 님. 당신은 저와 헤모리아와 함께 트레치아 대성당으로 가실 겁니다.”
“제가 빛의 샘에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격식과 전통…… 그런 것이죠. 유진 님도 라이언하트시니까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별로 이해는 안 되는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라이언하트의 전통들은 죄다 쓰레기라고 생각해서.”
하하. 아타락스는 그렇게 웃으며 다시 머리 위에 군모를 썼다. 내뱉어본들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다. 격식과 전통으로 선을 그은 이상, 외인인 유진이 간섭할 여지는 없었다. 상대는 길고 긴 시간 동안 그렇게 존속해 온 신성제국이다.
“모셔드리겠습니다.”
혈십자 기사들이 크리스티나에게 다가왔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돌아보는 일 없이 곧장 혈십자 기사들에게 향했다.
멀어지는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사들이 움직인다. 수십 명이었지만 걸음 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유라스의 혈십자 기사단은 대륙 제일의 기사단을 논할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기사단이다. 기사단장인 크루세이더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혈십자 기사단의 절도있는 움직임에는 키옐의 백룡 기사단과는 다른 고결함과 굳건함이 깃들어 있었다.
둘러싸서 만든 원에 말레피카룸의 심문관들이 섞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리가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저희도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아타락스가 웃으며 물어왔다.
역 밖에는 한 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밝은 도시가 보였다. 추기경이 다스리는 교구라는 것을 그토록 주장하고 싶은지, 역사와 그 앞의 광장, 심지어 도시 곳곳에도 성상이 서 있었다.
트레치아 대성당은 이 먼 곳에서부터 보일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유진은 높이 세워진 십자가와, 그 주변을 에워싸듯 서 있는 첨탑을 보았다. 그건 성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성처럼 보였다.
“바로 성당으로 갑니까?”
“따로 들르고 싶은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맞은편에 앉은 아타락스가 물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것은 유진과 메르, 아타락스 셋뿐. 헤모리아는 바깥의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유라스에 온 것은 처음이니까요. 이 도시에서 볼만한 관광지라도 추천해 주시렵니까?”
“빛의 신도가 아닌 유진 님께 어떤 곳을 추천해야 할지 난감하군요. 그래, 이번 기회에 빛의 신교에 귀의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양하겠습니다.”
“용사가 신앙이 없다는 것도 우스운데…….”
“안타깝게도 제가 사는 키옐 제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거든요. 위대한 시조님이 유라스에 가문을 세웠다면 저도 빛의 신을 숭배했겠지만…… 아, 오해는 마십시오. 그렇다고 제가 빛의 신께 불경한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유진은 창문에서 시선을 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곁에 앉은 메르가 유진과 아타락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혹시 난폭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신앙이 꼭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올리고, 신을 숭배하고. 그 외 모든 것들이 신앙의 연장일 뿐. 유진 님이 마음속에서 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부터가 자그마한 신앙인 것입니다.”
“저는 그런 말씀이나 듣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유진은 태도를 모호하게 굴 생각이 없었다. 신앙이니 그런 이야기는 지긋지긋하고 귀찮기만 하다. 특히 빛의 신도들은 300년 전부터 집요하고 끈질긴 데다 논리가 막무가내였다.
“제게 소개하고 싶은 관광지가 종교에 관련된 것뿐이라면 그냥 가던 길이나 쭉 갑시다. 솔직히 저는 저 아름다운 대성당보다는 그냥 거리의 여관에나 묵고 싶지만요.”
그렇게 대화가 단절되었다. 아타락스는 유진에게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타락스와 헤모리아에게 주어진 지령은 유진을 트레치아 대성당의 로게리스 추기경에게 데려가는 것. 그 이후에 둘은 곧장 빛의 샘으로 가서 그곳의 전력과 합류할 것이다.
답답한 의문이 머릿속을 떠돈다. 유진은 이런 상황이 질색이었다. 상황뿐만이 아니다. 신성제국 자체가 300년 전부터 답답하고 수상쩍다. 전생에는 신성제국과 직접적으로 엮일 일이 없었지만, 이번 생은 상황이 달랐다.
모든 게 이 빌어먹을 성검과 용사라는 감투 때문이다. 유진은 망토 안의 성검을 의식하며 표정을 구겼다.
‘……아니. 써먹기 나름인가.’
빛의 샘에 대해서는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유진은 트레치아 교구에 빛의 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300년 전에 아니스가 빛의 샘에서 주기적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트레치아 대성당은 300년 전부터 존재한 오래된 건물이다. 어쩌면 그곳에 아니스와 관련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걸 발견한다면. 아카샤의 용언마법을 사용해 아니스에 관한 무언가를 알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성검을 상대로 시험해 본 적은 있었다.
잘되지는 않았다. 월광검이 정신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뒤흔드는 어둠을 투영했다면, 성검은 눈부신 빛만을 투영했다. 월광검의 때처럼 정신이 붕괴되는 것만 같은 혼란은 느껴지지 않았고, 유폐의 마왕처럼 다른 누군가가 간섭하지도 않았다.
그냥, 눈이 부셨다. 한참 동안 마법을 일으켜 보아도 느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스가 그토록 말하던 천국이나…… 빛의 신, 아니, 어쩌면 베르무트. 그도 아니면 수백 년 동안 보관되었던 라이언하트의 보물고나, 그 이전에 꽂혀 있었다는 교황청 심부의 모습이라도 투영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성검은 유진에게 환한 빛만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실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보았던 빛은 한 점의 어둠도 존재할 수 없을 만큼 밝았고, 신앙 따위는 쥐꼬리만큼도 갖고 있지 않은 유진도 무언가를 느낄 만큼 성스럽게 느껴지긴 했었다.
트레치아 대성당.
이곳도 섬기는 신을 본떠 빛이 가득했다.
중심의 신랑(身廊)은 드넓고 웅장했다. 정면의 벽은 유리세공의 극한을 쏟아부어 화려했고, 그곳에서는 찬란한 빛이 거대한 기둥처럼 바닥과 연결되어 있다.
빛을 쏟아내는 유리벽의 높은 곳에는 백색의 십자가가 매달려 있다. 그 새하얀 십자가는 환한 빛 속에서도 모습을 잃지 않았다.
십자가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조금 낮은 곳에, 빛에 번지지도, 그림자를 만들지도 않는 다양한 형상들이 존재했다. 날개를 펼치고 노래하며 춤추는 천사들. 그 아래에 날개가 돋아나 천사가 되어 오르는 성인들.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
유진은 잠시 동안 빛의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신실한 신자라면 저 빛과, 신도가 성인으로, 성인이 천사로 승화하는 모습에 벅찬 감격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유진은 감격까지는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저것이 신도를 홀리기 위한 연출이라면 아주 훌륭하다고는 생각했다.
“신앙심이 벅차오르는 얼굴은 아니군요.”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조금 놀라웠다. 감각은 충분히 예민했고, 무디게 둘 이유도 없었다. 수만 명은 족히 들어올 만큼 예배당은 넓었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유진뿐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유진은 놀람을 가다듬고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색 수단 위에 걸친 백의. 목에 걸친 하얀 십자가 목걸이는 받쳐 입은 검은 수단의 중심에서 흔들리지 않고, 왼쪽 어깨에 걸쳐 가슴아래까지 늘어트린 붉은 천에는 빛의 신교 추기경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세르지오 로게리스. 그는 인자한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하지만 성직자다운 부드러움은 희미했다. 성직복에 감춰진 몸은 날렵하고 탄탄해 보였고, 눈웃음 사이의 안광도 빛을 빼닮아 흐림이 없었다.
유진이 그런 느낌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성직자라고 해서 후방에서 기도나 외거나 치료마법만 쓴다는 것은 편견이다. 당장 아니스도 전장에서 메이스를 휘둘러 마족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것에 능했고, 크리스티나도 플레일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고 했다.
성직자도 성직자 나름. 특히 세르지오 로게리스는 추기경에 오르기 전에는 이단심문국인 말레피카룸 소속의 고위 심문관으로, 성기사 서임을 받지 않은 수도자였다. 만약 세르지오가 추기경에 오르지 않았다면 말레피카룸의 국장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 만남에 감사합니다.”
세르지오는 예배당의 끝에 서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까이 들었다. 유라스의 추기경이라면 그 수많은 성직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강력한 신성력의 소유자다. 거기에 차기 심문국장에 거론되었을 정도면 전투도 익숙할 터.
‘지저분한 일에도 익숙할 테고.’
세르지오의 얼굴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가득했으나, 그와는 별개로 세르지오가 지나온 자리가 유진에게는 그리 좋은 인상을 전해주지 못했다. 이번 의식에 성기사뿐만 아니라 심문관들까지 동원된 것은…… 의식이 특별해서일까? 아니면 세르지오가 개인적으로 불러낸 건가?
“무엇에 감사하단 겁니까?”
“저는 제 삶에서 용사와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 당신이 나타나기 전의 용사는 300년 전의 위대한 베르무트 님이었고, 그 이전에는 용사란 거시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천천히.
세르지오가 다가왔다. 그에게는 강자 특유의 압박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그렇게 드러내지 않는 고요한 존재감이야말로 상대하기 껄끄러울 만큼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평온한 걸음조차도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기가 힘들었다.
‘강해. 거기에 수도사의 특별성을 생각하면…… 껄끄럽군. 아주 껄끄러워.’
신성마법과 싸운 적은 없지만, 그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마법인지는 유진도 잘 알았다. 마법처럼 술식과 마나가 확실한 것도 아니다. 신앙과 신성력이라는 애매모호한 힘은 의외성의 폭이 너무 넓다.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세르지오는 유진과의 거리를 완전히 좁히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진 님이 용사가 맞다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입으로 대답하는 대신 망토를 들췄다. 유진은 그 안에서 성검 알테어의 칼자루를 쥐고, 천천히 뽑아냈다. 확실하게 유진의 손에 쥐어진 성검의 모습에 세르지오의 눈이 감격에 젖었다. 그는 양손을 하나로 모으고서 유진이 들어 올린 성검을 보았다.
손아귀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유진은 움찔 놀라서 알테어의 검신을 보았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알테어의 검신이 가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빛을 발했다.
“……오오……!”
세르지오는 눈동자를 떨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벽과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의 기둥이 유진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알테어가 발하는 빛과, 예배당의 빛의 기둥이 만났다.
ㅡ화아악!
알테어의 빛이 크게 부풀었다. 만나고, 연결된 것이 아니다. 알테어가 빛의 기둥의 근원이 되었다. 벽과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알테어의 빛에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졌다.
그렇게 빛의 폭풍이 몰아쳤다. 세르지오의 어깨에 걸친 붉은 천이 빛 속에서 펄럭였다. 그는 눈을 감지 않고 빛의 중심에서 유진과, 그 손에 쥐어진 성검을 보았다.
유진은 세르지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를 에워싸고 흩날리는 빛은 너무나도 환하고 강렬했다. 세르지오의 모습은커녕 제 몸조차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 빛 속에서.
유진은 영문 모를 피비린내를 맡았다.
아직은 미성숙한, 어린 소녀의 등이 보였다.
‘……아니스?’
유진은 그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고서 한 걸음 나아갔다. 그 순간, 빛이 잦아들었다.
더 이상 피비린내도, 소녀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진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성검을 내려놓았다.
“……신이시여. 이 기적에 감사드립니다.”
세르지오는 무릎 꿇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기도를 올렸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성검의 검신을 응시했다. 검신의 떨림은 멎었다. 빛도 내뿜고 있지 않다. 유진을 감쌌던 빛의 기둥마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기적?’
피비린내.
상처투성이의 등.
‘이딴 게?’
유진은 자신이 방금 본 것이 기적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대성당
“저도 아침부터는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트레치아 대성당은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하지만 이 대성당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중앙 예배당은 물론이고, 주변의 부속건물과 지금 걷고 있는 복도마저도 노후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라고 부르셨으면서 다른 곳으로 떠나신단 말입니까?”
유진은 세르지오의 등을 보며 물었다. 그 말에 세르지오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유진 님을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기에…….”
“어차피 닷새 후에 교황청에서 만나 뵈었을 텐데요.”
“예,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자리에는 저와 유진 님, 단둘만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여전히 세르지오는 웃었다. 그 웃음과 내뱉는 말은 참 노골적이었다. 유진은 소리 없이 입꼬리만 움직여 빙긋 웃었다.
“로게리스 추기경께서는 저를 시험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대답에는 찰나의 침묵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유진은 흔들림 없는 세르지오의 어깨와, 왼쪽에 걸쳐 가슴까지 흘러내리고 있는 붉은 천을 보았다.
저 성직복에는 확실한 의미가 있다. 안에 받쳐 입은 검은색 수단은 보이는 것 그대로의 어둠을, 목에 건 백색 십자가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존재함을, 수단 위에 걸친 백의는 어둠을 빛으로 감싸며, 어둠이 결코 빛의 위에 존재할 수 없음을 상징한다.
왼쪽 어깨에서 늘어트린 붉은 천은 신앙의 현양을 위해서, 그리고 빛의 신과 종교와 교황과 신도들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려 순교에 임하겠다는 각오를 상징한다.
“어떻게 시험하고 싶으셨던 겁니까?”
“유진 님이 틀림없는 용사라는 것은 이미 보았습니다.”
세르지오는 성검을 뽑아 든 유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결코 움직이는 일이 없어야 할, 예배당을 밝히는 빛의 기둥이 스스로 유진에게 향했다.
성검이 빛과 공명하고, 예배당 전체를 빛으로 밝혔다. 그 찬란하던 빛의 폭풍은 틀림없는 기적이었으며, 그 중심에서 성검을 높이 들었던 유진이야말로 빛의 용사였다.
“……하지만…….”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용사라는 것에 더 이상의 시험은 없다. 다른 추기경들은 물론이고 교황 에우리우스도 아까와 같은 빛의 폭풍을 본다면, 유진을 용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용사는 빛의 화신. 한낱 빛의 종일 뿐인 제가 어찌 용사를 시험할 수 있겠습니까?”
“아하.”
유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로게리스 추기경. 당신은 제가 용사라는 것이 아니라, 나란 인간 자체를 시험하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너무 언짢아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당신이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이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벌써 30년 전의 일입니다.”
“시간이 사람의 성질을 바꿔놓는 것은 아니죠. 이번 일에 이단심문관들이 대거 동원된 것도, 아직 당신의 입김이 말레피카룸에 닿아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가 없겠군요. 하나 그 조직을 사적인 이유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번 의식이 예전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 절 감시하고 있는 것은 사적인 이유에는 속하지 않는 겁니까?”
세르지오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놀람을 가다듬으면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유진은 젊은 나이다운 순수한 미소를 짓고서 세르지오를 쳐다보고 있었다.
“절 이곳까지 안내한 이단심문관은 2명이었죠. 징벌자 아타락스와 단두대 헤모리아. 그런데…… 참 신기하네요. 지금 절 보고 있는 심문관의 숫자는 2명보다 훨씬 많은데?”
신기하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떠났던 이단심문관들을 다 더해보아도, 지금 유진을 감시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숨어 있는 심문관의 숫자는 대충 세어 봐도 100명은 된다.
“……하하.”
세르지오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감시하며 숨어 있던 기척들이 하나둘 멀어져 갔다.
“용사인 유진 님도 성녀 후보님의 의식만큼이나 중요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심문관들 일부를 크리스티나와 함께 떠나게 만들어 제 주의를 속이고, 제가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성당 곳곳에 심문관을 배치한 겁니까?”
유진은 세르지오의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날카로운 예기를 흘려냈다.
“저로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군요. 만약 제가 용사임을 증명하지 못했거나, 설령 증명해냈을지라도 추기경님의 기준에 차지 않았다면…… 절 어쩌시려 했던 겁니까?”
“…….”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들이 지저분한 일에 능숙하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그러니까, 다들 후다닥 뛰쳐나와 내 몸에 칼이라도 꽂았을까요? 죽이기 좀 그러면 팔 하나 썩둑 잘라놓고 성검을 빼앗았을까?”
“아니오.”
세르지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유진 님이 독실한 신자가 아니라는 것과, 신앙심이 희미하다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어쩌실 겁니까?”
“저는 사람은 교정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유진 님이 당장은 빛의 신도가 아니실지라도, 언젠가는 신은에 감사하며 신교에 귀의하실 것을 믿습니다.”
세르지오의 손이 품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 유진 님이 그만큼이나 찬란한 빛을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유진 님이 신교에 귀의하도록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 그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이단심문관들이 불신자나 배교자와 이교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300년 전부터 유명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심문은 고문과 동의어이며, 교의 선전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가하는 강제개종에 대해서도 여러 소문이 존재했다.
“……하지만 저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만큼 찬란한 빛을 발하신 유진 님의 마음속에 신앙이 존재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유진 님. 알고 계십니까? 용사란 빛의 화신입니다. 유진 님은 그런 의식이 희미하신 모양이지만, 유진 님은 빛 그 자체인 것입니다.”
세르지오가 품에서 꺼낸 것은 두꺼운 성경이었다. 그는 양손으로 성경을 쥐고서 공손히 유진에게 건넸다.
“가슴에 품은 빛을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부디, 이 성경을 받으셔서 스스로 교에 귀의해 주십시오.”
유진은 그 성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뻗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 성경으로 세르지오의 정수리를 내리찍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일이 굉장히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이것뿐입니까?”
받은 성경을 망토 안에 던져넣고서 물어보았다. 세르지오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서 유진을 보다가, 다시 몸을 돌리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성녀 후보님에 대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몇 가지 있습니다.”
기차에서 내내 표정을 의식하던 크리스티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유진이 로게리스 추기경을, 자신의 양부를 만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굳이 변명거리까지 준비해 가며 유진이 기차에서 내리게끔 의도했다.
“……계시에 따라 유진 님과 만나고, 몇 달 동안 대수림에 다녀오신 후로…… 성녀 후보님이 조금 변하신 것 같더군요.”
“그 변화가 달갑지 않으신가 봅니다?”
“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성녀 후보님을 가르쳐왔습니다. ……성녀 후보가 되기 전에는, 그분의 양부로서 올바른 빛의 신도로 자랄 수 있도록 교육했습니다. 이후 성녀 후보가 된 후에는, 성녀로 거듭나기에 부족한 점이 없도록 교육했습니다.”
“흠…… 저는 추기경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는데요. 추기경님이 느끼신 크리스티나의 변화가 무엇이기에 달갑지 않으시다는 겁니까?”
“로한나 셀리스를 거쳐 보내지던 편지를 말하는 겁니다.”
역시 그쪽인가. 유진은 동요하지 않고 웃었다.
“내용을 보신 것 같지는 않던데?”
“그렇게까지 침범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떳떳한 내용을 적었다면 암호마법을 쓰고, 외부인을 거쳐 보낼 필요도 없었겠지요.”
“외부인도 아니잖습니까?”
“예. 로한나 셀리스는 성녀 후보님의 지친 마음을 달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세르지오는 그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로한나 셀리스뿐만이 아닙니다. 저를 비롯해 이 대성당에서 머무르는 모든 성직자들. 자처해서 대성당의 일들을 맡고 있는 신도들과, 교구에서 살아가는 신도들. 성녀 후보님이 보좌주교로 계시는 알카르트 교구의 대주교와 그 외 성직자들…… 아주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성녀 후보님과 관련되어 여러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과하다.
아니, 정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말대로라면 크리스티나의 주변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그녀가 가진 성녀 후보라는 특수성에 연관된 배우이자 감시자란 것이다.
“저는 10년이 넘도록 성녀 후보님이 올바르게 자라 성녀로 거듭나기를 가르치며 바라왔습니다. 무척이나 감사하게도 후보님은 곧 성녀가 되실 것이고, 300년 만에 출현한 용사를 보필하여 세상에 빛을 밝힐 것입니다.”
세르지오의 말이 잠시 멈췄다.
“……부디 언짢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유진 라이언하트 님. 당신은 용사가 틀림없지만, 용사다운 신앙은 현저히 부족하십니다. 저는 성녀 후보님이 용사님을 계도하여 독실한 신자로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오히려 성녀 후보님이 유진 님의 영향을 받으신 것 같더군요.”
“속 시원하게 말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빙빙 둘러서 말하시는 것도 짜증 날 것 같은데요. 저도 들으면서, 이거 참…….”
유진은 들으란 듯이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X같네?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용사가 이런 욕을 하는 것도 불쾌하시겠죠? 저도 욕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 제가 느끼는 기분을 표현하기에는 저 말이 참 적절하다 생각해서…….”
“괜찮습니다.”
감정을 흔들어보려 던진 말인데, 세르지오에게는 일말의 동요도 전해져오지 않았다. 과연 수십 년 동안 기도해 온 성직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녀 후보님이 유진 님을 계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향을 받아버린 것은 제 교육이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크리스티나와 손잡고 성당이나 다니는 것을 바라시나 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기쁘고 은혜로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유진 님은 그래 주지 않으실 것 같으니…… 성녀 후보님께는 함께 기도라도 할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은 강요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열 살배기 꼬마도 아니고, 이제는 후보에서 정식 성녀가 될 텐데. 아무리 추기경님이 크리스티나의 양부라 한들, 그렇게 간섭하는 것은 주제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녀 후보님이 흔들림 없고 완전한 신앙을 갖고 계신다면. 제가 간섭할 필요도 없겠지요.”
기다란 복도의 끝이 가까워졌다.
“……유진 님. 부디 성녀 후보님의 신앙을 시험하지 말아주십시오. 유진 님은 이미 훌륭한 빛을 품으신 용사시지만, 성녀 후보님은 빛내림을 받은 신의 사도입니다. 만약 유진 님이 계속해서 성녀 후보님의 신앙을 시험하시고, 흔들리게 만들어…… 성녀 후보님이 제 신앙을 완전하게 의심해 버린다면.”
세르지오는 닫힌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쩌면 신께서는 성녀 후보님께 내리신 빛을 거두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성녀 후보님은 평범한 인간이 되어, 용사인 유진 님의 곁에는 설 수 없게 되겠지요.”
“제 곁에 설 사람을 고르는 것은 신이 아니라 접니다.”
유진은 세르지오를 지나쳐서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꼭 성녀여야만 제 곁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티나가 성녀의 힘을 잃고, 만약 그게 제 잘못이라면? 저는 신이 참 쪼잔하다고 생각하며,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갈 겁니다.”
“……하하…….”
힐긋 본 세르지오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유진은 웃음으로 휘어진 눈가에서 섬뜩한 빛을 발하는 안광을 보았다.
“……유진 님이 그렇게 생각하실지라도, 성녀 후보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분은 성녀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오셨고, 성녀가 되지 못한…… 성녀가 아닌 자기 자신을 상상하지 못하실 겁니다. 특히…… 이번 시대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특별?”
“300년 동안 용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실한 아니스 님 이후로 존재했던 모든 성녀들은 유라스의 상징으로, 죽어서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시대에 용사가 나타나면서, 드디어 성녀가 성녀답게, 용사와 함께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문을 열자 널찍한 방이 보였다. 유진은 벽 높은 곳에 걸린 십자가와, 벽과 선반 등지를 장식하고 있는 종교적 조형물들에 눈길을 주었다.
“……아침부터 떠난다고 하셨지요? 묻는 것이 늦었는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유진은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물었다. 몇 걸음 물러섰던 세르지오의 얼굴에는 아까와 같은 섬뜩한 안광은 존재하지 않았다.
“빛의 샘에 갑니다. 신성한 의식인 만큼 고위성직자가 주관하며 조율해야 하니까요.”
“신성한 의식이라! 제가 그 자리에 참관할 수 있다면 제 마음속 깊은 곳에도 신앙이 깃들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 유진 님. 빛의 샘에서의 의식은 특수한 것이라서, 신도 중에서도 이전부터 의식을 준비해 온 자만이 참관이 가능합니다.”
세르지오에 의해 문이 닫힌다. 그는 문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까지 유진을 향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니 부디. 의식이 끝나고 저와 성녀 후보님이 돌아올 때까지, 이 성당에서 신을 느껴주십시오.”
문이 닫혔다. 세르지오는 닫힌 문을 향해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 후 몸을 돌렸다. 처음 올 때와는 다른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고, 예배당마저 지났을 때.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들이 세르지오의 뒤를 따랐다. 세르지오는 곁으로 다가오는 아타락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빛의 샘은?”
“혈십자 기사들이 샘 주변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미 물은 솟아 있고, 성녀 후보님은 예배동(禮拜洞)에서 성사(聖事)를 준비 중이십니다.”
“스스로 하는 성사는 충분하지 못하지. 내일부터 시작될 의식은 이전과는 달리 특별해야 하네. 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것이야.”
“예.”
“성사가 완전하고 결함 된 곳이 없도록 도와드려야 하니, 나도 서둘러야겠군. 내 준비는 이미 되었으니, 곧장 샘으로 향하도록 하지.”
“유진 님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분이 용사인 것은 틀림없네. 신앙이 희미하다는 것이 흠이지만, 그것이야 앞으로 깃들게 하면 되겠지. 당장 중요한 것은 성녀 후보님의 의식이야. 시간은 충분하다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빛이 더 깃들어 버리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질 수도 있으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대성당에 남아, 유진 님을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닐지……?”
“물론 그래야지. 본래는 자네들 중 하나를 머무르게 하려 했는데…… 유진 님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훨씬 예리하시더군. 자네들 중에서 고른다면 유진 님은 굉장히 불쾌해하실 걸세. 그러니 시중은 내 종자 중 한 명에게 맡기도록 하지.”
“예.”
보폭을 맞추는 것이 벅차다. 아타락스는 조금씩 앞서가는 세르지오에게 경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문국의 현역에서 물러선 지 어언 30년. 현장에 나가는 일 없이 여러 성당과 교황청, 오가며 미사를 집전하고 종교연구에 매진했다고 들었는데…… 70대를 훌쩍 넘긴 추기경의 걸음을 제대로 쫓는 심문관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저분은 추기경이 되기 전에는 멸절자(滅絶者)라 불리며 차기 국장에 가까우셨던 분이다. 추기경이 되어 성흔까지 받으셨으니…… 심문관으로 활동하던 현역보다 지금이 전성기라 할 수 있겠지.’
아타락스는 이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의식에 부름을 받게 된 것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아타락스뿐만이 아니었다. 세르지오에게 부름을 받은 100명의 심문관들. 그들 모두가 예전부터 세르지오에게 감화된 심복들이다. 그들은 세르지오가 이 의식에 자신들을 불러준 것을 커다란 은혜라고 생각했다.
“문은?”
“열려 있습니다.”
빛의 샘은 이 대성당과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 직접 뛰거나 마차를 타고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역에서 내린 크리스티나를 그 먼 빛의 샘까지 데려가고, 함께 갔던 심문관들이 이토록 빨리 대성당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워프게이트가 대성당 지하와 역사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마 유진 님도 문의 존재를 눈치채셨겠지.”
크리스티나와 떠났던 심문관들이 자신보다 빠르게 돌아와, 성당에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우리가 지나간 즉시 문을 닫고, 성당을 떠나 있도록 하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조심을 기해 나쁠 것은 없지 않나. 설마 유진 님이 이 문을 찾아내고, 멋대로 빛의 샘에 도달하려고까지는 하지 않으시겠지만…… 유진 님은 꽤나 의외성이 있으신 분 같더군.”
세르지오는 그렇게 말하며 워프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만에 하나 유진 님이 의식을 목도하신다면…… 이해하려 들지 않으실 거야. 그리고 방해하려 드시겠지. 그래서는 곤란해. 이번 의식은 아주, 아주 중요하니까…….”
중요하고말고.
세르지오의 두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교황청에서 거칠 성녀의 증명. 그것이 끝난 후, 신실한 아니스 님의 축일에 맞춰 태양의 광장에서 새로운 성녀의 공표가 있을 것이다.
그 신실한 아니스 님의 유지를 계승하는 성녀가, 정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이번 성녀는 유라스의 상징이자, 용사와 함께할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빛의 샘에서의 의식이 중요하다.
세르지오는 자신이 그 의식을 주관하게 된 것에 무한한 영광을 느꼈다.
* * *
“이곳에서 유진 님의 시중을 맡게 된 렌솔이라고 합니다. 부디 편하게 지내주…….”
“이 성당은 성유물이나 그런 것은 없습니까?”
유진은 노크하고 들어온 렌솔에게 대뜸 그렇게 물어보았다. 감시역인 것이 뻔한 성직자와 불필요한 대화나 관계를 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성유물…… 말입니까?”
“이 트레치아 대성당은 유라스에서도 오래된 곳이잖습니까. 그렇게 오래되었으면 과거의 성인들과 관련된 성유물이 한둘쯤 있을 법도 한데?”
“……어…… 으음…… 예…… 없지는 않습니다.”
“설마 외부인이라고 성유물마저 구경할 수 없는 건 아니겠죠?”
“성유물은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렌솔이 정색하고서 말했다. 그러자 유지는 즉시 태도를 바꾸어 말을 이었다.
“제 말이 헛나갔군요. 저는 최근 들어 제 운명을 깨닫고, 진지한 마음으로 빛의 신교에 귀의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옛 성인들의 성유물을 직접 접한다면, 그분들의 신실함을 전해 받아 제 마음속에도 신앙이 깃들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만…….”
“……아아…….”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멀리서라도 좋으니, 성유물이란 것을 직접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게 구슬린 덕에 성유물까지 안내받았다.
성유물도 종류가 다양하다. 성인의 유해, 성인의 유품, 혹은 살아생전 성인의 몸에 닿았거나 시신에 닿은 물건. 당연한 말이지만 성유물 중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은 성인의 유해고. 그다음이 성인의 유품이다.
예배당의 제단, 그 아래에는 수백 년 전의 성녀의 턱뼈가 성유물로 안치되어 있다. 그 외에도 대성당의 심부에는 옛 성인의 다리뼈와 늑골, 목에 걸었다는 십자가, 성직복, 수의, 반지 등 여러 성유물이 존재했다.
죽은 성인의 유해와 유품을 성유물이랍시고 보관하는 것은 솔직히 유진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를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렌솔이 안내해 보여주는 성유물들을 감격한 눈으로 보았다.
“저것이 트레치아 대성당에 보관하는 성유물 중의 마지막입니다. 무려 900년 전에 교황을 지내셨던 테오도어 성인의 두개골입니다.”
“…….”
유진은 유리관에 안치된 새하얀 두개골을 보고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를 고민했다. 제단 아래에 있던 성녀의 턱뼈나 성인의 늑골, 다리뼈도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이제는 통째로 된 두개골이라니.
“……신실한 아니스 님의 성유물은 없는 겁니까?”
“예?”
렌솔이 눈을 끔벅거렸다.
“신실한 아니스 님의 성유물이라뇨? 그분은 머나먼 순례를 떠나시고 모습을 감추셨기에, 한 조각의 유해조차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성유물이 꼭 유해여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아니스 님의 성직복이나…… 목걸이나…….”
“아아…… 확실히 그렇지요. 하지만 저는 아니스 님의 성유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성당에도 보관되어 있지 않고요. 만약 아니스 님의 성유물이 존재한다면…… 교황청의 특급 유물고에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급 유물고?”
“예. 신실한 아니스 님이라면 유라스의 시조이신 빛의 성자 다음가는 대성인이시니 말입니다. 그런 아니스 님의 성유물이 존재한다면 특급일 테니, 교황청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겠지요.”
렌솔과 헤어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성유물을 보고 다닌 것에 대해 세르지오에게 보고되겠지만 상관없었다.
‘특급 유물고라…….’
어쩌면 그곳에 아니스의 성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 며칠 후에 크리스티나와 함께 교황청에 가게 될 테니, 용사라는 위치를 잘 사용하면 특급 유물고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까의 그건…… 뭐였지?’
빛의 기둥.
피비린내.
상처투성이의 등.
세르지오는 그곳에서 있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말했지만, 유진은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망토에서 성검을 꺼내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네가 보여준 거겠지?”
사마르 대수림.
성검은 멋대로 유진의 꿈에 간섭해, 과거를 보여주었다.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등 돌려 서 있던 소녀…… 아니스였나? 어쩌면 크리스티나였을 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계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유진 님?”
망토 안에 들어가 있던 메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유진은 메르가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망토를 살짝 들춰주었다.
“……음.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아무 말도 하지 마.”
“하지만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걸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메르는 성검을 끌어안고서 눈 감고 잠을 청하는 중인 유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유진 님이 그렇게 주무시면, 제가 옆에서 잘 수가 없잖아요.”
“어차피 잠도 안 자면서 무슨 상관이야? 그래, 메르 너는 옆에서…… 내가 잠결에 성검을 놓치지 않도록 보고 있어.”
“저보고 밤 내내 유진 님을 지켜보며 잠꼬대를 듣고 있으라는 말인가요?”
“하루 이틀이니? 뭘 새삼스레.”
유진의 투덜거림에 메르를 샐쭉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어와서 유진의 곁에 앉았다.
“뭐 그건 그래요. 제가 유진 님이 멍청한 잠꼬대를 하는 것을 확실하게 듣고 있을게요.”
“내 얼굴 말고 성검이나 잘 보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왜 그러고 주무시는 거예요? 성검이 끌어안고 자면 시원한가요?”
“꿈을 꾸기 위해서야.”
“꿈?”
메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은 더 대답하지 않고, 품에 안은 성검을 의식하며 잠들었다.
대성당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새하얀 방.
크리스티나는 그 방의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 방은 창문도 없고, 조명도 없다. 그럼에도 어둡지 않다. 이 방이 하얀 것은, 벽 자체가 그런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의 샘의 근처, 예배동. 크리스티나는 이 방이 익숙했다. 하나 편안하지는 않았다. 빛내림을 받고, 빛이 몸에 깃든 날. 크리스티나는 처음으로 빛의 샘에 왔고, 이 방에 들어왔다.
그렇게 10년. 이 방은 익숙하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은은히 빛을 발하는 벽도, 그 한가운데에 앉아 성사를 준비하는 과정도. 그 무엇도 거스르지 않고, 이곳에 앉아서 마음을 다잡게 되는 것도.
반복이다.
변하지 않는다. 10년 전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 꼭 해야 하는 건가? 왜? 이런 것에 의미가 있, 아니, 의미는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옳은가? 이것이 정말로 신의 뜻인가?
성녀는 이런 존재였던 건가?
“…….”
그런 생각을 반복하고, 수십 수백 번을 고민하지만, 결국에는 이 방에 남게 된다. 스스로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성사에 비하자면 티끌만큼이나 하찮은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렇게 자랐다. 성녀의 역할을 듣고, 성녀의 의의를 알았다. 그것은 크리스티나가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성녀가 되기 위해 살았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의 삶은 성녀라는 이름에 바쳐졌다. 10년 동안 견뎌온 모든 것이, 이제는 손이 닿는 곳까지 다가왔다. 심지어 이번 시대에는 용사까지 출현하지 않았나. 용사의 존재가 크리스티나의 삶에 더욱 가치를 부여했다.
머지않았다.
크리스티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꿇은 무릎 앞에 놓은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이상은 없을 만큼 날카로이 벼린 칼날. 이미 충분히 주저하고, 각오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곧장 손을 뻗어 칼자루를 쥐었다. 섬뜩한 날붙이가 위로 들렸다. 이 방이 익숙하지만 불편한 것처럼, 손아귀에 감기는 칼자루도 익숙하지만 불편했다.
깨끗하게 연마된 검신에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비쳤다. 한눈에 알아볼 만큼 경직된 얼굴. 웃음기 하나 없이, 일자를 그리고 있는 입꼬리.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그런 얼굴이 크리스티나의 본질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크리스티나는 그다지 웃고 싶지가 않았다.
‘……당신은 눈치챘을까.’
아마 그렇겠지. 크리스티나는 단검을 살짝 기울여서 자신의 얼굴이 더 이상 비치지 않게 만들었다. 사마르에서 함께 떠돈 몇 달 동안에도 느꼈고, 이번에 함께 기차를 탄 잠깐 동안에도 느꼈다.
‘뭔 일 있냐?’
‘표정이 이상해서.’
‘굉장히 억지로 웃고 있는 것만 같거든.’
‘몇 달 전에 비해 성녀랑 용사 운운하는 말이 많이 늘었네.’
크리스티나는 기울인 단검에서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심술궂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 도저히 용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짓궂은 미소.
‘난 그렇게 느껴도 상관없어.’
머릿속에 번지는 목소리. 크리스티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나는 성녀랑 용사로 맺어지는 유대보다는 사람과 사람으로 맺어지는 유대가 좋은데 말이야.’
‘그편이 훨씬 더 깊고 진하거든.’
“아니야.”
크리스티나는 단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람과 사람으로 맺어지는 유대가 성녀와 용사의 유대보다 깊고 진할 리가 없다. 크리스티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는 사람과 사람의 유대를 모른다. 그녀가 맺은 모든 유대는, 성녀후보로서 맺은 유대였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가 성녀후보를 주연으로 한 연극의 배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사람과 사람의 유대란 가볍고도 얇아 하찮은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기를 바랐다.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단검에서 유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비치는 것은 새하얀 수의를 입은 나 자신뿐. 크리스티나는 주저하지 않고 단검을 손목으로 가져갔다.
성녀로 거듭나기 위해.
용사와 성녀로서 유대를 쌓기 위해.
10년 전부터 바라고 그려왔던 미래를 이제 곧 맞이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무감정한 눈으로 제 손목을 그었다.
* * *
밤 내내 성검을 끌어안고 잤는데, 꿈은 꾸지 못했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
“씨X.”
유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빌어먹을 방은 일광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창문에서 들어 온 햇빛이 아플 만큼 눈을 찔러온다. 그것만으로도 짜증스러운데, 창문에는 햇빛을 가릴 커튼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좋은 꿈을 꾸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네요.”
침대 옆에 앉아서 성경을 읽던 메르가 키득키득 웃었다. 유진은 꽤 두껍게 쌓인 성경의 페이지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재밌냐?”
“생각했던 것보다는 재밌어요. 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요.”
“세냐가 쓴 동화책보다 재밌어?”
“……그렇게 은근슬쩍 절 떠보지 마세요. 유진 님이 뭐라 말하시건, 저는 그 동화책을 쓴 것이 세냐 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메르가 발끈해 내뱉는 말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옆에 둔 성검을 한 번 노려보았다. 멋대로 꿈을 침범해서 과거를 보여주고, 이번에는 혼자 발광까지 해대며 뭔가를 보여준 주제에. 얼마든지 보여 달라고 판을 깔아주니 이번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확 분질러 버릴까.”
“만약 그렇게 하면 유라스의 광신도들이 유진 님을 잡아 죽일 거예요.”
메르는 의자에서 내려와 눈가에 힘을 주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신벌! 이라고 외치면서 말이에요. 유진 님이 강한 것은 알지만, 순교를 각오한 광신도들 수백 수천 명이 덤벼오면 무섭지 않을까요?”
“무서울지는 모르겠지만 귀찮기는 하겠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문 쪽을 힐긋 보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한 2시간 전부터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쓸데없이 성실한 사람이네.”
“유진 님을 감시하기 위해서겠죠.”
문밖에는 렌솔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유진이 문을 열자마자 활짝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유진 님. 좋은 밤 보내셨습니까?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한다면 방까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만, 기왕이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음……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면 뭐가 좀 다릅니까? 메뉴의 구성이라거나…….”
“그건 아닙니다! 성당의 다른 성직자들이 어떻게든 유진 님을 영접하길 바라서…….”
“……절요? 저에 대한 것은 일반 성직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 아니었습니까?”
“아…… 그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성당의 다른 성직자들은, 라이언하트 가문의 그 유진 님이 크리스티나 성녀후보님의 벗으로서 함께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렌솔은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소곤거렸다.
“단지,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이 워낙 유명해서 말입니다. 젊은 성직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유진 님과 만나서, 은혜로운 빛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과연.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성직자들은 정말로 유진을 전도하고 싶어서 만나려는 것이 아니다. 성당의 재정과 성직자의 주머니는 신도와 후원자의 헌금으로 채워진다. 라이언하트라면 대륙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이니, 든든한 인맥을 터놔 풍족한 헌금을 거두고 싶은 것이리라.
“……식사는 방에서 하겠습니다. 따로 밖에 나갈 일도 없으니, 식사만 제때 가져다주십시오.”
“아…… 그건 참으로 애석하군요. 해가 가장 밝고 높이 뜨는 정오의 예배당이 굉장히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예배당도 성직자와 신도들도 북적일 것 아닙니까?”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창밖을 보았다. 예배를 올리기 위해 찾아온 신도들이 대성당 밖부터 줄을 서 있었다. 유진은 다른 신관이나 신도들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쥐뿔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방에 틀어박혔다. 아침, 점심, 저녁마다 렌솔이 가져다준 식사를 몇 번이나 리필하고. 깨 있는 내내 성검을 잡고서 정신을 집중하고, 감응하려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전에 사용했던 것처럼 성검에 빛을 일으키는 것은 가능했지만, 어제 보았던 소녀의 등은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성검에 빛을 일으켰지만,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잤다. 성검을 끌어안고, 아침까지 푹 잤다. 꿈을 꾸기를 간절히 바랐던 덕분인지…… 꿈은 꿀 수 있었다.
꿈속에서.
유진은 폭신폭신한 구름 위를 달렸다……. 왜 달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뛰고 있는 구름이 사실은 구름이 아니라 달콤한 솜사탕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렇게 솜사탕 위를 발랄하게 뛰어다니다가…… 어느 순간 솜사탕이 초콜렛의 호수가 되었다. 그 호수의 한복판에, 오리의 형상을 딴 배를 모는 메르가 있었다. 메르는 양손에 든 마시멜로를 잔뜩 꽂은 노를 들고서 초콜렛 호수를 가로질렀다. 그러다가 촉촉하게 젖은 마시멜로를 뜯어 먹고, 초콜렛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유진을 구출해 주었다.
유진 님! 유진 님이 초콜렛이 되었어요!
“……이게 뭔 꿈이야?”
개꿈.
유진은 벅벅 머리를 긁다 말고 성검을 집어 던졌다. 예리한 검신이 바닥을 푹 찔렀지만, 그건 유진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유진 님은 성격이 참 더러우시네요.”
침대 곁에서 와작와작 초콜렛을 씹던 메르가 말했다. 유진은 메르의 곁에서 솜사탕 꼬치와 마시멜로의 포장지를 보았다.
“……내 망토가 네 저장고냐?”
“저장고라기보다는 제 집이죠. 집에 뭘 보관하든 그건 제 마음이잖아요.”
“엄밀히 말하자면 네가 집주인은 아니잖아. 집주인은 나고, 너는 세입자라고 할 수 있지. 세는 안 내지만.”
“내고 있어요. 제 존재가 유진 님에게 많은 보탬이 되잖아요? 상상해 보세요, 유진 님. 만약 제가 유진 님의 곁에 없었다면? 유진 님은 굉장히 외롭고 심심하셨을 거예요. 지금만 해도, 제가 유진 님의 곁에서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잖아요?”
“……음…….”
유진은 그 말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진 님. 아무 꿈도 꾸지 못하신 건가요?”
“꾸긴 꿨지.”
“무슨 꿈이요?”
“개꿈.”
유진은 투덜거리며 바닥에 박힌 성검을 뽑았다.
방에서 칩거한 이틀.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성검을 하도 붙들어댄 덕에 몇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바란들 빛 속에서 나타나지도 않고, 꿈에도 간섭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배당이란 장소가 특별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빛의 기둥과 성검. 거기서 무언가가 성검을 감응시킨 거라면?
이틀이나 검증했으니, 이제는 예배당을 볼 수밖에. 마침 로게리스 추기경도 자리를 비웠고, 감시하는 심문관들도 없다.
‘……이틀째.’
크리스티나를 떠올렸다.
빛의 샘에서 벌어지는 의식은 사흘 동안 진행된다 했으니, 내일이면 의식이 끝나버린다. 유진은 빛의 샘에서 벌어지는 의식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크리스티나에게 샘에서의 의식은 그런 것이지 않을까.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면, 유진은 크리스티나가 샘에 가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샘에서의 의식이 중요하고, 크리스티나 본인이 성녀에게 많은 의미를 두고 있기에. 결국 크리스티나는 빛의 샘으로 향했다. 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필사적으로 숨기면서, 의연하게, 의연하게 보이도록. 그렇게 유진을 떠났다.
유진은.
그러한 결정을 존중하고 싶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정식 성녀가 되어, 용사와 유대를 쌓는 것이다.
성녀와 용사…… 유진은 도저히 그런 관계에 이입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지만, 크리스티나의 바람이 간절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 * *
밤.
해 질 녘까지 예배당을 채웠던 신도들도 집으로 돌아가고, 성직자들도 숙소로 돌아갔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드넓은 예배당은 사람 한 명 없이 고요해졌다.
이 예배당은 어두운 곳이 드물다. 상관없었다. 은신마법을 쓰고 기척까지 차단했다. 그렇게 몰래 방을 빠져나와,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빛의 기둥을 보았다. 벽과 천장의 유리에서 쏟아지는 빛. 성검은 꺼내지 않고 망토 안에 두었다. 괜히 꺼내서 쥐고 있다가, 그제처럼 멋대로 빛을 내뿜으며 폭주했다가는 일이 귀찮아진다.
[눈도 안 부시세요?]
메르는 빛의 기둥을 똑바로 보고 있는 유진이 신기해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도저히 저 빛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너무 환해서 잘 보이지도 않고, 눈동자가 희고 빨갛게 달궈지는 것만 같았다.
‘잘은 안 보여.’
유진의 눈은 어둠조차 꿰뚫어 본다. 아무리 날이 밝은 날에도 똑바로 태양을 쳐다볼 수 있다. 하지만 저 빛은 도저히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중심을 가까이 보려 할수록, 눈동자가 아려오며 시야가 흔들린다.
멀리서 잘 보이지 않는다면.
가까이 가면 되는 것이다. 유진은 빛의 기둥에서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렇게 단숨에 천장까지 날아가려 했는데, 몸은 생각처럼 가볍게 날아오르지 않았다. 빛이 무게를 가진 것처럼 유진의 몸을 짓눌렀다.
‘별.’
유진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마나를 일으켰다. 그렇게 천천히 빛을 거슬러 올랐다.
천장이 상당히 높기는 했지만…… 이만큼 높지는 않았는데? 유진은 도중에 무언가를 깨닫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빛뿐이다. 아래는 무한하게 낮게 보였고, 위는 무한하게 높아 보인다. 몸을 짓누르던 빛이…… 어느 순간부터 유진을 이끌었다.
승천(昇天)이 이런 걸까.
유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세르지오가 주었던 성경에는 승천해 빛의 곁으로 간 성인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어쩌면 아니스도 그렇게 승천해서 천사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저건…….’
무한하게도 먼 것만 같던 빛의 끝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너무 환해서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두 눈을 얇게 뜨고서 빛의 저편을 보았다.
……큼직한…… 밥그릇이 보였다.
300년 전. 동료들과 여행하면서, 거의 매일을 노숙하고 먹을거리를 직접 구해 밥을 해 먹었다. 식사 당번은 항상 바뀌었고, 각자 전용의 식기도 따로 두었다.
모론의 밥그릇이 가장 컸고, 그다음이 베르무트였다. 의외로 베르무트는 밥을 많이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멜이 3번째.
아니스는.
자신 전용의 밥그릇에 음식을 담지 않았다. 그녀는 그 큼직한 사발을 성수를 담는 데 애용했다. 가끔 쟁여놨던 큼직한 술통의 뚜껑을 따면, 아니스가 가장 먼저 달려와 사발로 술을 퍼마셨다.
아니스는 그 밥그릇을 성배(聖杯)라고 불렀다.
빛의 끝에는 밥그릇이, 아니, 성배가 있었다. 유진은 반쯤 기울어진 성배를 멍한 눈으로 보았다. 여기저기 갈라지고, 이가 빠져 있기는 한데…… 틀림없었다. 저건 아니스의 성배다. 그 성배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다.
‘……저게 왜…… 아니, 그것보다는.’
유진은 성배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걸 억지로 뽑아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달이 일어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래서 유진은 성배에 손을 뻗지 않고, 망토의 안에서 아카샤를 꺼냈다.
즉시 용언마법을 통해 아니스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아카샤의 드래곤하트에서 엷은 빛이 뿜어졌다. 펼쳐진 용언마법이 아니스의 성배와 연결되었다.
조금 더.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가까이.
시야가 빛에 잡아먹혔다.
새하얀 옷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녀가 보였다.
저번에 보았을 때처럼 등을 돌리고 서 있지는 않았다. 나이는…… 많아봐야 10살을 조금 넘었을까. 치렁치렁한 금발에 푸른 눈.
피비린내.
조금씩 냄새가 진해진다. 그럴수록 소녀의 옷에 피가 번져간다. 양 손목에서 흐르는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손목뿐만이 아니다.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와, 배와, 옆구리와, 가슴과…… 몸 전체에 혈선(血線)이 그어지며 피가 흐른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은 의연했다. 소녀는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표정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피범벅인 모습으로 섰다.
소녀가 쏟은 피가 바닥에 고인다. 그러고는 강이 흐르듯이 피가 흐른다.
또 다른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옆의 소녀와 굉장히 닮았지만, 다른 점이 몇 군데 있었다.
눈 밑의 점. 그리고 표정. 소녀의 몸에 혈선이 하나둘 그어지지만, 옆의 소녀처럼 의연하게 서 있지 못했다. 고통을 참으며 입술을 씹고, 눈을 찡그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뚝뚝 눈물을 흘렸다. 소녀가 흘린 눈물이 피와 함께 흘렀다.
옆의 소녀는 우는 소녀를 쳐다보지 않는다. 소녀가 쏟은 피는 바닥을 흘러 우는 소녀의 발밑에 고인다. 우는 소녀가 쏟아내는 피가 피 웅덩이에 섞인다. 그리고…… 그리고 피가 다시 거슬러 올라와, 소녀의 상처에 스며든다.
유진은 그걸 멍한 눈으로 보았다. 당연히, 알아보았다. 의연한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스였고, 옆에서 울고 있는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뭐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으려는 순간. 아니스와 크리스티나 사이의 거리가 아득하리만큼 멀어졌다. 그리고 그사이에 수많은 소녀들이 섰다. 새로이 나타난 소녀들은 크리스티나처럼 아니스를 빼닮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니스에게서 시작된 피의 강의 도중에서 함께 피를 흘렸고, 그렇게 만들어진 피의 강이 크리스티나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똑똑히 보십시오, 하멜.”
소녀가.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소녀의 모습이었다.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처럼 날개를 펼치지도 않았다. 대신,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들어 유진에게 뻗었다.
“이 가증스러운 유대를.”
아니스.
유진이 그 이름을 부른 순간.
ㅡ파아아앙!
빛이 터졌다. 기둥을 쏟아내던 예배당의 벽과 천장이 박살 났다. 무수히 많은 유리파편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 유진은 그 한복판에서, 떨어지는 성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성배를 움켜쥔 순간. 유진의 머릿속에 강렬한 기억이 새겨졌다. 이 성유물이 아니스의 흔적을 추적했다.
“…….”
유진은 머릿속에 비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진 님?!”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수백 년 동안 위용을 과시해 온, 트레치아 대성당 빛의 기둥이 박살 났다. 빛과 유리의 파편이 한데 섞여 쏟아지고 있다. 유진은 그 한복판에서 멍한 눈으로 성배와 아카샤를 내려다보았다.
보았다.
하지만 그걸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이 깃든 물건. 성유물. 그중에서도 유해는 다른 성유물보다 진귀하며, 성인과 가까운 것을 넘어 성인의 일부인 것.
그래서인지 목걸이를 두고 시험했을 때보다 가까이 보였다. 흐릿하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트레치아 대성당.
빛의 기둥.
그 아래에 존재하는 제단.
아카샤의 용언마법은, 아니스의 성배를 통해서 제단 아래의 성유물을 가리켰다.
400년 전 성녀의 턱뼈.
아니스의 성유물과, 아카샤의 용언마법이 왜 저 턱뼈를 가리켰는지.
유진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대성당
떨어진 유리파편들이 바닥과 충돌하고 박살 났다. 그 요란한 소리의 한복판에 유진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리와 어깨에 파편이 쌓이고, 튀고, 귀가 먹먹할 만큼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지금 유진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깟 유리파편은 수천수만 개가 쏘아져도 피부에 박히지도 않고 피도 흐르지 않을 텐데, 예리한 칼로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렇게 느껴졌다. 유진은 왼손에 들고 있는 아니스의 성배를 응시했다. 아직까지 머릿속에는 잔상이 남아 있었다.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소녀들. 무표정한 아니스와, 울고 있는 크리스티나와, 그사이에 존재하던 수많은 소녀들.
유진은 그 소녀들의 표정까지는 보지 못했다. 구역질이 났다. 느껴질리 없는 피비린내가 아직까지 코끝에 감돌아서 떠나질 않았다.
“……유진 님?”
렌솔과 여러 성직자들이 머뭇거리며 유진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수백 년 동안 이 대성당의 자랑거리였던 빛의 기둥이 박살 난 것만으로도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그 중심에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다는 것이 더욱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모습만 보면…… 유진이 빛의 기둥을 박살 낸 것처럼 보인다.
대체 왜?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유진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성직자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유진이 용사라는 것을 아는 렌솔은 더욱 유진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괜찮…… 으십니까? 이, 일단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벽이 더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너무 위험…….”
뭐라고 주절대는 목소리.
그것보다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텅 빈 오른손은 제 뼈를 으스러트릴 만큼 강하게 쥐었다. 쿵쾅거리는 소리에 따라 호흡이 달렸다. 유진은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예배당의 제단이 보였다. 위에서 쏟아져 내린 유리파편 덕에 제단과 그 주변에도 깨진 유리가 가득했다.
그를 향해 걸음을 뻗자, 발아래에서 유리파편이 바스러졌다. 유진이 제단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자 렌솔과 성직자들의 표정에 더한 당황이 어렸다. 그들은 유진의 의중은 읽어내지 못했지만, 내비치는 분위기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유진 님.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렌솔이 굳은 얼굴로 유진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고작 몇 걸음 걷고서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렌솔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을 말리려 한 모든 성직자들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 멈춰 움직이지 못했다.
[유진 님…….]
망토 속에서 메르가 말을 걸어왔다. 대답해 줄 여유가 없었다. 유진은 흘러넘치는 살기를 대충 눌러 담고, 제단을 발로 걷어찼다.
콰앙! 제단은 넘어지지도, 날아가지도 못했다. 유진이 걷어찬 즉시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그렇게 제단을 치우고, 파인 바닥에 안치되어 성녀의 턱뼈를 들어 올렸다.
“유…… 유진 님…….”
렌솔이 더듬거리며 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저것은 400년 전 성녀의 턱뼈. 프레치아 대성당에 안치된 성유물 중에서도 테오도어 성인의 두개골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진귀한 1급 성유물이다.
“내…… 내려놔 주십시오. 유진 님이 대체 왜 그러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될…….”
듣지 않았다. 유진은 아니스의 성배에 턱뼈를 던져 넣고서 몸을 돌렸다. 성직자들은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유진의 뒤를 쫓지 못했다.
[……유진 님. 괜찮으세요? 괜찮으신 것 맞죠?]
“괜찮아.”
예배당을 빠져나오면서 대답해 주었다.
거짓말이다. 유진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금의 자신은 그다지 괜찮지가 않았다. 이 정도로 감정이 끓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사막의 무덤에서 하멜의 시체로 만든 데스나이트를 보았을 때. 대수림에서 바랑이 시크나드와 엘프들을 습격했을 때.
흑사자 성에서 이오드가 의식의 제물을 잡고, 마왕의 잔재와 마주했을 때.
하지만 그때 끓던 감정은 노골적이고 확실했다. 분노, 증오, 그런 감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그때처럼 격렬하지만, 이것이 분노인지 증오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알아.’
유진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았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유진은 입술을 꽉 씹으며 아카샤를 꺼내기 위해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메르가 유진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망토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불안한 표정으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세냐를 빼닮은 녹색 눈동자가 불안으로 떨렸다.
유진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메르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괜찮아.”
유진은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해주었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메르도 그 마음을 느꼈다. 메르는 지금 자신이 유진을 붙잡거나 진정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과,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 유진은 메르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아카샤를 들어올렸다.
이 성녀의 턱뼈는 400년 전의 것이다.
아니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300년 전이다. 유진은 그 100년의 간극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똑같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게끔 알아야 했다.
여전히 귓가에는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의 소리가 컸다. 가쁜 호흡을 삼키고, 아카샤의 용언마법을 펼쳤다.
ㅡ지직.
머릿속에 무언가가 흘러들어 온다. 수백 년 전의 성유물. 그와 연결된 것이 유진의 머릿속에 투영됐다.
깔끔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 오래전이라서ㅡ 아니면, 너무 훼손되어서?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섞인 영상이 보였다.
가증스러운 유대.
흐르는 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소녀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와, 그 외의 여러 소녀들. 그 선두에 선 것은 아니스가 아니었다.
아니스의 전에도 피를 흘리는 소녀가, 아니, 소녀들이 있었다. 얼굴은 없었다. 저 많은 소녀들 중에서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 둘뿐이었다. 다른 소녀들의 얼굴은,
없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얼굴이 없었다. 뿌연 안개 같은 것에 가려진 것도 아니다. 눈, 코, 입, 아무것도 없다. 텅 빈 얼굴의 소녀들이 피를 흘리며 일렬로 선 것은 기괴하고 소름 끼쳤다.
아니스보다 앞쪽에 서 있는 소녀 중 한 명에게 눈이 갔다. 그 소녀도 다른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없었지만, 결여된 것은 눈, 코, 입뿐만이 아니었다.
턱이 없다. 그래서 얼굴이 반으로 잘려 있다. 숨을 쉬기가 괴로웠다. 유진은 저 소녀가 400년 전의 성녀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옆에 선 소녀들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 사이에 선 소년들은? 그들이 누구인지쯤은 이미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더.
유진은 제 목을 움켜쥐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성배와 턱뼈가 함께 빛에 삼켜졌다.
더 보여줄 것이 있을 거다. 나는 괜찮아. 문제없어. 볼 준비가 되었어.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렸고, 무표정한 얼굴의 아니스가 두 눈을 감았다.
하나씩.
무너져서 사라진다. 서 있던 모든 ‘성녀’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려, 자신들이 쏟은 피에 섞여 흐름의 일부가 되었다. 그 붉은 흐름은 유진이 보는 시야의 중심에서 회오리치는 나선이 되었다.
지직.
노이즈가 일그러짐을 만들었다. 그 섬뜩하리만큼 붉은 나선은 고요히 가라앉은 수면이 되었다. 은은히 빛나며 아름다운…… 샘.
꽈득.
그 소리는 유진의 발밑에서 흘러나왔다. 바닥이 너무 강하게 뻗은 발걸음을 견디지 못하고 으스러져 족적을 남기는 소리였다. 유진은 격앙되는 감정을 추스르려 애쓰며 상황을, 아니, 알아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빛의 샘.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을 것을 보면 이 트레치아에서도 은밀한 곳에 있으리라. 투영된 모습…… 건물의 안은 아니었다. 어둡던 밤하늘. 노후 된 기둥…… 유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낡은 신전으로 보였다. 어디지? 대성당에 저런 장소는 없었다.
크리스티나.
지금 크리스티나가 그곳에 있다. 유진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 샘이 뭔지는 모른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의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크리스티나가 그 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그녀 본인이 바란다면. 그것이 제아무리 수상쩍은 의식일지라도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다.
보십시오, 하멜.
이 가증스러운 유대를.
피범벅인 손을 들어 올리던 소녀의 모습을 한 아니스.
마찬가지로 소녀의 모습이었던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곁에서 울고 있었다. 유레시아에서 만나고서 쭉 태도가 이상했다. 존중, 이라. 유진은 경직된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나 남을 배려해 주었지?’
그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을 때. 유진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ㅡ콰앙! 유진의 두 발이 딛고 있던 지면이 박살 나며 주저앉았다.
유진은 너무 밝은 도시의 보라색 밤하늘을 등졌다. 의지해서 일으킨 바람이 유진의 몸을 받쳤다. 저 거대한 트레치아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의 높이까지 날아오른 후, 아카샤를 들어 올렸다.
드래곤하트가 빛을 내뿜었다. 유진은 부릅뜬 눈으로 대성당이 담고 있는 무수히 많은 마법들을 보았다. 대부분은 건물의 유지와 미관에 관한 마법이었다. 그딴 것을 보기 위해 아카샤를 쓰는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저 수많은 마법들을 하나하나 걷어냈다. 메르가 보조하고 있기는 했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마법의 정보량이 워낙에 많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그래서 머리가 아픈 것이 나았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생각을 어지럽히기는커녕 오히려 날을 세워주었다. 깊이, 더 깊이. 이 악물고 끌어낸 집중에 서서히 눈동자가 충혈되어 갔다.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대성당 지하 깊은 곳을 간파했다. 찾았다. 유진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유라스에 온 첫날, 메르가 떠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향락에 쓰이는지는 모르겠다만, 정말로 성당 지하 깊은 곳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워프게이트가 존재하고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길까지 찾아냈다. 그러니 더 이상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유진은 곧장 아래로 내려와, 시계탑과 이어진 지하문을 향해 나아갔다.
“유진 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렌솔이었다. 그는 몇몇 성직자들과 함께 시계탑의 입구를 가로막았다.
“바, 방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왜…… 왜 성유물을…….”
“비켜.”
내뱉는 목소리가 낯설다. 유진은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빛의 기둥을 무너트린 것도 유진 님이 하신 겁니까? 대체 왜? 서, 설명을 해주십시오.”
말로 비켜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유진은 즉시 바람을 일으켰다. 그저 앞만 막아설 뿐인 렌솔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더 귀찮게 굴지 않도록 옆으로 비키게 만들 뿐. 설명을 해달라고?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과, 머릿속에 투영된 것들을 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애당초 설명을 갈구하고 싶은 것은 유진이었다. 그래서 유진은 입을 닫고, 바람을 휘둘렀다.
ㅡ화아악! 렌솔과 성직자들이 기겁하고서 빛을 일으켰다. 신성력의 결계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 찬란한 빛. 보는 것만으로도 아까 느꼈던 피비린내가 다시 감도는 것만 같았다.
콰아앙! 바람이 성직자들을 옆으로 날려 버렸다. 바람은 흩어지지 않고 한데 모여, 시계탑의 문마저 박살 냈다. 그렇게 길이 열리고, 유진의 발이 붕 떠올랐다.
그렇게 유진은 시계탑의 안까지 단숨에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미리 찾아두었던 지하문을 찾아 바람을 휘둘렀다.
콰앙! 벽을 따라 서 있던 성상들이 모조리 박살 났다. 정교한 조작을 거쳐야 열리는 비밀스러운 지하문. 유진은 그딴 짓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문을 아예 박살 내버렸다.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지나, 워프게이트가 있는 지하실에 도착했다. 마법의 빛은 켜져 있지 않았다. 문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워프게이트에는 항상 문의 연결을 조율하는 마법사가 붙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유진 외에 아무도 없었다.
생각할 것도 없는 뻔한 일이었다. 로게리스 추기경이 심문관들과 함께 떠난 후, 워프게이트의 문을 아예 닫아버린 것이다.
“……하.”
유진은 메마른 웃음을 토하면서 워프게이트를 향해 나아갔다. 그 심상을 읽은 메르가 기겁하며 망토 밖으로 몸을 빼, 유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식하고 위험한 짓이에요!”
“놔, 메르.”
“유, 유진 님, 진정해 주세요. 워프게이트는 최상위 등급의 공간마법이라고요! 게이트를 생성하는 것만으로도 6서클에, 연결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5서클의 마법사가 상시 붙어 있어야 해요.”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아시겠죠! 그래서 지금 제가 말리는 거예요! 알면서도 이렇게 하시려 드는 것 자체가 유진 님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니까요!”
메르의 말이 맞다. 장거리를 연결하는 워프게이트는 최상위 등급의 공간마법이다. 유진의 마법사로서의 경지는 5서클. 아카샤와 메르의 보조로 7서클까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는 하지만, 장거리의 좌표를 연결하는 워프게이트는 유진이 억지로 문을 열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워프게이트는 연결되는 문마다 특유의 파동을 갖는다. 그 파동을 서로 공명시켜 문을 열고,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파동을 만드는 술식은 워프게이트를 관리하는 마법사만이 알고 있다. 빛의 샘의 공간좌표도 모르고, 공명에 필요한 파동도 알지 못하는 이상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 연산장치로 사용하고, 아카샤까지 사용한다면 파동을 억지로 맞출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연결해 버리면 불안전할 수밖에 없다는 건 유진 님도 아시잖아요? 공간마법, 그중에서도 워프처럼 장거리를 이동하는 마법은 실패할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요. 만약 연결이 잘못되면…….”
“실패 안 해.”
“……네?”
“불안전하게나마 연결하면 돼. 그 뒤의 파동은 중간에서 바로 조율할 수 있어. 절대로 어긋나지 않도록, 무조건 연결되도록.”
“그……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출구의 좌표도 모르면서 실시간으로 파동을 조율해서 끼워 맞추겠다니……! 아무리 저라도 그런 계산은 불가능해요. 그건 계산의 영역이 아니라고요!”
“너한테 시킬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마.”
유진은 어깨를 잡고 있는 메르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메르의 머리를 꾹 눌러서 망토 안으로 밀어 넣었다.
“꺅!”
“나오지 말고 안에서 얌전히 있어.”
아예 망토의 틈이 열리지도 않도록 단단히 동여맸다.
아카샤를 움직여 워프게이트를 가리켰다.
6서클. 처음 아카샤를 쥐었을 때에는 이해가 힘들었지만, 흑사자 성의 내란을 겪고 본가 호수의 지하에서 수련을 계속하면서 마법의 경지도 높아졌다. 그래서인지 술식 자체는 곧바로 읽어낼 수 있었다.
백염식으로 끌어낸 마나가 워프게이트에 흘러갔다. ㅡ화악! 마주 보고 있는 기둥 사이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빛을 발했다. 공간이 열릴 준비는 되었지만, 이어지는 문의 파동과 공명은 되지 않는다.
단순히 술식을 읽을 뿐이라면 이 이상 해볼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아카샤는 술식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법을 이해하게 해준다. 눈동자가 욱신거렸다. 유진은 입술까지 달싹거리며 고속영창을 보탰다.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망토 안의 메르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유진의 의식과 동조했다.
그리고 유진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하려는지를 깨달았다.
아카샤로 이해한 워프게이트. 거기에 용언마법의 탐색마법까지 사용해 가며 반대편 문과의 연결을 훑고 있다. 닫힌 워프게이트에 미세하게 남은 반대편의 발자취로 마법 자체를 역산하고, 저쪽의 공간좌표의 예측하고 있다. 그렇게 도출해 낸 무수히 많은 좌표마다 워프게이트에 마나를 주입해 찰나의 파동을 일으키고, 그를 반복하여 좌표마다 파동을 맞춰본다.
미쳤다. 이건 마법의 탈을 쓴 단순무식한 노동이었다. 한 명의 마법사가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대마법사라도 이만큼의 계산을 병행하면서 워프게이트를 몇 번이고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이런 짓을 하면 진즉에 마나가 고갈되어 버린다.
하지만 유진은 할 수 있다. 아카샤가 마법에 사용되는 마나를 압축한다. 메르가 좌표의 계산을 분담한다. 낭비되지 않도록 환염식을 더해 마나를 회수한다. 극한까지 곤두세운 감각이 파동의 변화를 감지한다. 일치하는 것이 찰나라도 상관없다. 일치한 순간만 있다면 놓치지 않는다.
부릅뜬 눈에서 흐른 피눈물이 턱 끝에 맺힐 때.
아카샤를 앞으로 밀어 넣었다. 일그러진 공간에서 파문이 일었다. 유진은 더 이상 마나를 회수하지 않고 쏟아부었다. 파문이 점점 커져간다. 연결된 길로 밀어 넣은 마나가 닫힌 문을 두드렸다.
화아악!
일그러진 공간이 빛으로 차올랐다. 워프게이트가 연결된 것이다. 망토 안의 메르는 기진맥진하여 널브러졌다. 지금 같아서는 그토록 싫어했던 기능의 일시 정지마저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 돼.’
메르는 머리를 흔들었다.
유진은 천천히 워프게이트로 걸어갔다. 이 문은 빛의 샘과 연결되어 있다. 그곳에서 보게 될 것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곧 보게 될 것이다.
유진은 뻐근한 눈을 감고서 워프게이트를 지났다.
* * *
빛의 샘.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신의 은총이 머무르는 성역이다. 유라스의 수많은 성직자들 중에서도 빛의 샘의 존재를 아는 것은 신앙을 검증받은 소수의 성직자들뿐이다.
그들 중에서도 빛의 샘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지휘관에 해당되는 극소수뿐이지만, 이 임무에 동원된 성기사들과 심문관들은 자신들이 이곳에서 샘과 성녀후보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영광과 감격을 느꼈다.
고된 임무도 아니었다. 산속 깊은 곳의 신전. 이곳은 여러 기적과 마법으로 보호되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곳이다. 우연이라도 산짐승이나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해 며칠 동안 경계하고는 있지만, 의식이 시작되고서 이틀 동안 사람은커녕 토끼 한 마리도 신전의 근처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하나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이 거룩한 성사에 동원된 성기사와 심문관들이 임무가 고되지 않다며 느슨한 마음을 품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융통성이 있었다면 이 의식에 부름을 받지도 못했으리라.
빛의 방패라 불리는 혈십자 기사단.
빛의 망치라 불리는 이단심문국 말레피카룸.
그곳에서 차출된 성기사와 심문관들이 동시에 느꼈다. 닫혀 있을 워프게이트가 열렸다. 누군가가 워프게이트를 지나서 신전의 근처에 도착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벌어진 이상,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추기경 전하.]
[알고 있네.]
육성을 쓰지 않고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부름.
세르지오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꿇은 무릎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지금의 세르지오는 직접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세르지오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2명. 혈십자 기사단의 대장 중 하나인 조반니와 심문관 아타락스. 본래 이 의식은 세르지오 혼자서 집전하던 것이지만, 이번의 의식은 특별하다. 그래서 동원된 성기사와 심문관 중에서 신성력이 강한 저 2명이 세르지오를 보조하고 있었다.
[……유진 님이 워프게이트를 여신 모양입니다.]
[사로잡아야 합니까?]
아타락스가 세르지오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정중하게.]
세르지오는 당장 치솟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능하면 스스로 돌아가시게끔.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이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자네들도 잘 알 터이니……. 유진 님이 당장 불쾌해하실지라도, 돌려보내 드려야지.]
[예.]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온 것이지? 워프게이트는 분명 닫았는데. 유진 라이언하트가 마법사의 적성도 뛰어나단 말은 들었지만, 멋대로 워프게이트를 연결하는 것은 대마법사에게도 불가능한 일 아닌가?
[……놀랍군.]
감정을 가라앉히고.
덤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불가능하다, 믿을 수 없다, 놀랍다. 그래 봤자 인간이 벌이는 일. 신이 일으키는 기적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세르지오는 다시금 기도를 위해 손을 하나로 모으고, 앞을 보았다.
은은한 빛이 고여 있다.
깊은 지하에서부터 샘솟는 물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물은 엷은 온기를 띈다.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 단순히 빛나기만 하는 물이 아니다. 저 물은 고위 성직자가 직접 세례한 성수보다 훨씬 진한 신성력을 띄고 있다.
그 샘의 한가운데.
수의(壽衣)처럼 새하얀 옷을 입은 크리스티나가 빛에 잠겨 있다.
몸에 그은 무수히 많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크리스티나가 흘린 피가 샘물과 섞이지만, 샘은 붉은빛으로 물들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세르지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샘에 잠겨 있는 단검을 꺼내 쥐고 크리스티나에게 다가갔다. 신성력이 가득한 정수(淨水). 그어도, 그어도 상처는 빛에 녹아든 은총에 치유된다.
이 광경이야말로 기적이다. 세르지오는 기도를 읊조리면서 눈을 감은 크리스티나를 내려 보았다.
“성녀후보님.”
입을 열어 불러보지만, 크리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 의식은 깨어 있지만,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감고 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감각은 희미했지만, 어떤 감각은 평소의 수십 배에 달할 만큼 예민했다.
“견디셔야 합니다.”
이전의 의식에서.
크리스티나는 이 샘에 앉아, 며칠에 걸쳐 스스로 몸을 칼로 그었다. 빛이 치유하는 상처를 계속, 계속, 의식이 끝날 때까지 그어 피를 쏟게 만든다. 평소보다 수십 배 예민해진 감각이 미치거나 죽는 것이 나을 만큼 통증을 전하지만, 이 샘은 결코 수도자의 정신을 미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를 새기는 것이 반복될 만큼 의식을 환히 깨웠다.
이번의 의식에서 크리스티나가 스스로 몸을 그은 것은 첫날뿐. 둘째 날부터는 세르지오가 대신 크리스티나의 몸에 성흔을 그었다.
적응은 되지 않았다. 고통도 이전보다 강하다. 어느 곳을 그을지 모른다. 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빛은 따스하고 포근하다. 그러한 생각을 반복하고, 마음속으로 기도문을 외었다.
‘……전지전능하신 빛의 신이시여. 부디 제 영혼을 살펴주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혼을 밝히고 제 피를 씻으소서. 빛으로 번뇌를 태우시고 그 빛을 제게 새겨 남기소서.’
칼날이 피부에 닿는다. 그 순간부터 섬뜩한 예기가 전해지지만, 크리스티나는 몸을 떨지 않았다.
‘고통과 절망을 잊게 하시며 양들을 보살펴주소서. 빛으로 그들을 안식케 하소서. 빛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제가 존재하고 걷는 곳마다 당신의 빛을 내려주소서. 당신의 사도는 어둠을 밝힐 등불이요 성화일지니, 이 몸을 장작으로 하셔 세상을 찬란히 밝혀주소서.’
칼날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정신을 무너트릴 것만 같은 고통이 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감은 눈은 떨리지 않았다. 신음도 내지 않았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시는 빛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이 기도를 들어주소서. 찬란하고 거룩하신 빛이시여, 세상을 최초로 밝힌 불꽃이시여, 당신의 종인 제게 깃드소서.’
감고 있는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카만 어둠만이 가득했다.
빛의 샘
유진은 굽힌 등을 천천히 일으켰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아직 눈동자가 뻐근했다. 할 수만 있다면 눈동자를 통째로 뽑아서 물에 씻어버리고 싶었다.
“……많군.”
유진은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멀리서부터 준동하는 기척이 대략 200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성기사들과 심문관들이다. 연결되지 않았어야 할 워프게이트가 연결되고, 유진이 넘어온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다가오는 속도가 빠르다. 유진은 벌써부터 괜한 충돌은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들은 유진의 그런 바람을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다. 보자마자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짜증 나는 말을 지껄이며 돌려보낼 것이 뻔했다.
‘……어디지?’
산속 어딘가라는 것은 알겠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근처에 성기사들과 심문관들이 있다. 이곳 어딘가에 빛의 샘이 있다. 성배와 턱뼈로 투영했던 영상…… 오래된 신전. 주변을 둘러보지만, 그런 신전은 보이지 않았다.
뻔한 일이었다. 빛의 샘에 대한 소문은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으니, 신전부터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유진은 쥐고 있던 아카샤를 들어 올렸다.
공간 곳곳에 깃들어 있는 마법이 보인다. 그중 대부분은 신성마법이라 아카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법과 신성마법, 두 종류의 마법을 결합시킨 복잡한 결계. 순수한 마법으로는 돌파가 힘들다.
그렇다면 부수면 되는 것 아닌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지만, 유진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트레치아 대성당 빛의 기둥을 무너트리고, 성배와 턱뼈를 들고 나왔다. 닫혔던 워프게이트를 연결해서 금지(禁地)일 것이 뻔한 이곳에 도착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이미 몇 개나 한참 넘었단 말이다. 이제 와서 방법이 무식하다고 주저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월광검을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망토 안에서 손에 감겨온 칼자루는 월광검이 아니었다. 성검 알테어. 그것이 멋대로 움직여 유진의 손에 제 몸을 맡겼다. 유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내가 그토록 바랐을 때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주제에. 이제 와서 뭐하자는 거냐?”
이 성검을 움직이는 것은 누구일까? 빛의 신? 만약 그런 것이라면.
유진은 알테어를 박살 내고 싶었다. 이게 얼마큼의 가치를 지니고, 어떠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다. 그러니까 산산조각 내고 싶다.
아니스의 성배와, 성녀의 턱뼈가 보여주었던 것들.
대체 언제였을지 모르는 과거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한 피의 강. 무표정한 얼굴의 아니스와, 울고 있던 크리스티나. 그 외에 존재했을 무수히 많은 소녀들.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엷었던 존재들.
가증스러운 유대.
“……신?”
유진은 빠득 이를 갈면서 성검을 뽑았다. 그렇게, 바닥에 내리찍어서 박살 내려고 했다. 그것으로 박살 나지 않는다면, 그래. 이 끔찍한 존재를 신이랍시고 숭배하는 광신도들의 피로 검신을 흠뻑 적시고 싶었다.
성검을 바닥에 내리찍으려는 순간.
엷은 빛이 검신을 휘감았다. 유진은 그 갑작스러운 빛에 움찔 놀라서 멈췄다. 천천히 번져온 빛이 유진의 몸을 감쌌다.
그렇게 빛을 발하는 것은 성검뿐만이 아니었다.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성배와 턱뼈. 그 두 개의 성유물이 성검이 발하는 빛에 호응하듯이 각각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유진은 잠시 동안 빛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걷기 시작했다.
워프게이트 근처에도 경계 중인 성기사와 심문관은 있었다. 소속은 달랐지만 임무는 같다. 하지만 부여받은 명령은 각자가 달랐다.
혈십자 기사단의 조반니. 그는 휘하 기사들에게 유진을 ‘정중히’ 설득하여 돌아갈 수 있게끔 하라고 명령했다.
말레피카룸의 아타락스는 다른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오랫동안 세르지오 로게리스 추기경을 섬겨왔고, 그가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지를 꿰고 있다. 그리고 조반니와 달리, 유진을 직접 겪어본 경험도 있었다.
정중한 설득? 그 유진 라이언하트가 설득에 따라줄 리가 없었다. 용사다운 자질은 더할 나위 없지만, 신앙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거기에 성격까지 거칠고 난폭하니, 이쪽이 아무리 정중하게 돌아가 달라고 청해도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타락스는 처음부터 무력을 동원할 것을 명령했다. 빠르게 제압하고 잡아두든지, 아니면 왔던 워프게이트로 돌려보내든지. 거칠기 짝이 없는 방법이지만, 아타락스가 생각하기에는 그편이 옳았다.
유진이 성검을 들고 걷기 시작했을 때.
수풀 속에서 6명이 튀어나왔다. 혈십자 제복을 입은 성기사 3명과, 붉은 로브를 두르고 군모를 쓴 심문관 3명. 그들 중에서 유진이 알고 있는 얼굴은 없었지만, 6명은 당연히 유진을 알아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
성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유진의 손에 들려 빛을 발하고 있는 성검에서 잠깐의 경외를 느꼈다. 그리고 반대편 손에서 함께 빛을 발하는 사발을 보고서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유진의 앞을 가로막은 6명은 저 사발이 아니스가 사용하던 성배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곳에 함부로 침입하셔서는 안 됩니다.”
“부디 이대로 돌아가 주십…….”
성기사들의 말이 이어지는 도중, 심문관들이 땅을 박찼다. 휘날리는 붉은 망토의 안쪽에서 빛이 번쩍였다. 서로 논의되지 않았던 기습이다. 게다가 저들의 움직임은 제압을 위한 것 치고는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먼저 덤벼주는 것이 좋았다.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심문관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지만,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딴 것은 유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ㅡ콰직!
성기사들이 보기에, 저것은 무식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폭력이었다. 기교 따위는 일절 없이, 흉악할 정도로 뭉쳐낸 마나를 휘두르고, 내리찍었다. 그것뿐이었다.
고작 그런 공격인데, 심문관들 누구도 저항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 명은 바닥에 처박히고, 다른 한 명은 옆으로 날아가 나무를 박살 내고 땅을 뒹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몸을 던졌던 방향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성기사들은 등골이 오싹거리는 것을 느끼며 태세를 바꾸었다. 머릿속으로 외는 기도가 신성력을 일으켰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밤이 어두웠지만, 성기사들의 몸을 감싸는 신성한 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들이 일으키는 빛은 유진이 두른 빛과 비교하자면 하찮고 엷었다.
성기사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빛의 밝기에서 차이가 나서? 아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서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으킨 신성력은 용기를 북돋고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주지만,
다가오는 유진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순간.
그 얼굴.
일그러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요하리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성기사들은 유진에게서 도저히 용사라고 믿을 수 없을 끔찍한 살의와 분노를 느꼈다.
몸에 두른 빛은 인간으로서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했다. 본능이, 지금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울부짖었다.
단순히 말하자면 각오가 부족했던 것이다. 성기사들은 유진과 싸우기보다는, 대화로 설득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너무 물렀다. 그래서 직면했을 때, 마음이 버티지 못하고 꺾여 버렸다.
다른 기사도 아니고, 굳건한 신앙심을 자랑하는 혈십자 기사단의 성기사들의 본능을 통제하고 짓밟을 만큼. 지금 유진이 발하는 살의가 흉포하고 폭발적이었다.
……꿀꺽.
3명의 성기사들은 포식자 앞의 피식자처럼 굳어서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침을 삼키고, 그렇게…… 유진이 자신들을 지나칠 때까지 서 있었다.
결계에 둘러싸인 숲을 나아갔다. 월광검을 써서 결계째로 박살 내버릴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 없이, 성검의 빛이 결계의 길을 밝혀주었다.
왼손에 든 2개의 성유물도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 여러 종류의 결계가 복합적으로 섞여 앞을 가로막고 있다. 유진의 감각으로도 당장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뿌연 안개 속을 걷는 것만 같은…… 아니, 느낌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유진은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오르막길인지, 내리막길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정말로 맞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진도 여태까지 여러 마법과 결계를 접해 보았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결계는 처음이었다.
“……역시 통째로 부수는 것이 나았어.”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월광검을 뽑지는 않았다. 만약 성검 혼자서만 빛을 내며 길을 밝히려 했다면,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월광검을 뽑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길을 밝히는 것은 성검뿐만이 아니었다.
성배. ……뭔가…… 기묘한 느낌이었다. 오른손에 든 성검이 발하는 빛이 횃불이라면, 왼손의 성배와 턱뼈는…… 마치, 그 자체가 손을 잡아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렇게 길을 안내하는 것만 같았다.
“……이건…….”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앞을 보았다.
“기적인가?”
유진은.
기적이라는 말이 싫었다. 옛날부터 그랬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일으킬 수 없는, 그런 비상식적이고 신기한 일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전장에서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대부분이 비슷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싸움에서 승리하거나.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을 쓰러트리거나. 죽었어야 할 상황에서 살아남거나. 유진이, 하멜이 전생에 겪은 기적은 대부분이 그런 것이었다.
하멜은 그런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길 수 없을 싸움에서 승리한 것?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강한 적을 쓰러트린 것? 잘 싸웠기 때문이다. 죽었어야 할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 생사를 확인하지 않은 적이 병신이라서.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날 구하려 발악해서.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냐.
-하멜. 제가 지금 당신을 치료하고 있는 것은, 제게 당신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다름 아닌 빛의 신께서 주신 것이니, 제 존재 자체가 기적의 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야. 씨X 고생은 우리가 하고 싸움도 우리가 하고 치료는 네가 하는데, 왜 그걸 전부 신이 일으킨 기적이라며 떠받들어야 하는데?
-……신앙의 문제로 당신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멜. 당신이 버러지처럼 끈질기고 지긋지긋하며 고집이 센 새끼라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너 방금 나한테 새끼라고 하지 않았냐?
-하멜. 당신은 결국 자신이 잘났고 노력해서 해낸 것이 은혜로운 빛의 신께서 기적을 내린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 싫다는 것이잖습니까? 그거야말로 오만한…….
-나 말고 우리.
-……네?
-우리가 잘났고 노력해서 해낸 거야. 이길 수 없던 싸움에서 이긴 건 우리가 잘 싸워서. 지금 네가 날 치료하는 건 그냥 네가 여기 있어서야. 네가 기적의 증명이라고? 그게 시X 뭔 개소리야? 너는 기적이 아니라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잖아. 안 그래?
-……하……!
-뭐 불만 있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서 시X 네가 모시는 그 잘난 신 데리고 와봐. 못 하잖아? 어? 근데 뭔 놈의 빌어먹을 기적 타령…….
-그럼 이렇게 합시다.
그때 아니스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기억한다.
-……이 모든 것이, 신의 기적은 아닙니다. 하멜. 당신이 말한 것처럼…… 당신이, 아니, 우리가…… 후후. 그것도 사실은 오만하죠. 그냥, 모두가…… 네. 모두가 이뤄낸 것입니다. 그것에 아주…… 아주 약간. 신의 뜻이…… 자그마한 기적이 더해진 것입니다.
아니스는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아니스가 신앙과 기적에 관해서 제 뜻을 밀어붙이지 않고 조금이나마 물러서고, 인정하며, 납득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자그마한 기적.
유진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자리에 멈췄다.
아니스는 언제나 신과, 빛과, 기적에 대해 말했다. 항상 똑같은 얼굴로 웃으면서 자신이 섬기는 신께 기도를 올렸다.
아니스는 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렇게 보였다. 다른 누구보다 아니스가 신의 존재에 대해 간절했다. 그래야만 했다.
아니스는 그 시대에 죽은 모든 이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을 대신해 성혈을 흘리고, 신을 대신해 빛으로 어둠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신 다음으로 찬란한 빛이 되어, 천국에 들지 못하는 이들까지 대신해 밝혀주고 천국에 인도하겠다고 말했다.
……가끔은 신과 천국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시대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너무 많이 죽었다. 어딜 가도 전장이었다. 마물이 사람을 죽이고 몬스터가 사람을 죽이고 마족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였다.
그래서 아니스는 신의 존재를 의심했다. 전지전능한 신은 세상을 구하고자 강림하지 않았다. 신은 자신의 어린 양이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려주지 않았다. 모든 어둠을 밝힐 빛이어야 할 신은 그 시커먼 시대는 밝혀주지 않았다.
매일같이 해가 저물어 황혼을 지나 밤이 되고, 동트기 전 여명에 세상이 차츰 밝아가지만. 그렇게 밝음을 맞이한 세상은 지난밤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변치 않는 매일에 절망하고.
취기를 이기려 들지 않고, 오히려 무너지려 할 때.
하멜은 처음으로 신이란 작자의 기적을 인정했다. 베르무트. 놈의 존재야말로 신이 내린 기적이라고. 신은 정말로 세상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베르무트를 내려 세상을 구하려 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아니스.”
전투가 격렬하고 길 때면 항상 술을 마셨다.
지옥이라 해도 좋을 싸움이 끝나면. 아니스는 언제나 등에서 피를 쏟았다. 다행히 아니스가 흘리는 피의 냄새는 사방 가득한 피 냄새에 가려졌다.
아니스가 수도복을 벗고 피에 흠뻑 젖은 등을 보여줄 때. 하멜은 그녀의 성흔이 이전과 비교해 얼마큼이나 더 번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성흔에서 흐르는 피를 닦고, 연고를 바를 때에도 아니스는 술을 마셨다.
“술이라도 가져와야 했을까.”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얗고 자그마한 손이 유진의 왼손을 잡아 이끌었다. 소녀에게서 피의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피로 흠뻑 젖었던 흰옷도, 지금은 새하얗고 말끔했다.
그래서 유진은 울고 싶었다. 잡아끄는 손에 온기는 없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고 있다. 지금 보이는 저 등. 찰랑거리는 금발. 바로 코앞에 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면서 눈에만 보이는 저 소녀가.
결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이…… 잔혹하고 자그마한 기적이. 신이 베푼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너는…….”
어린 소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해서 걸어나가며, 유진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천천히 안개가 걷혀간다. 하나 유진은 그딴 것에 시선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왼손을 잡아끄는 소녀의 손과, 팔과, 등과, 머리카락을 보았다.
“……천국에…… 갔겠지?”
이 배덕을 부디 눈감아 주소서. 감아주지 못하신다면 천국에 들기 위한 과업을 당신의 종인 제 어깨에 더욱 올려주소서. 언젠가의 재회를 같은 곳에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소서.
“천국에서…… 천사가 된 거겠지?”
어느새 유진은 숲이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성검이 보여주었던 꿈. 아니스가 외던 기도문.
-우리가 갈 수 없다면 대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다른 누구보다 아니스, 네가 천국에 가야 한다.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진은 전생의 아니스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안다.
아니스를 위해서도 천국은 실재해야 했다.
아니스는 바라던 대로 신 다음으로 찬란한 빛이 되어, 천국을 밝히고 있어야 했다.
-우리는 분명히, 낙원에서 재회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떨그렁.
성배가 손에서 떨어졌다. 성배와 안에 담겨 있던 턱뼈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녀가 이끌고 온 곳은 어딘가의 지하였다.
결계가 만들어내는 환각이 아니다.
유진은 눈앞에 있는 것을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았다. 저것을, 어떤 감정으로, 어떤 얼굴로, 어떤 생각으로 보아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맡고 싶지 않은 피의 냄새. 다행히도 지금 코끝을 감도는 피 냄새는 유진의 것이었다. 꽉 씹은 입술에서, 부릅뜬 눈에서 피가 흘렀다.
봐야 해.
머릿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 유진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벽을 메운 여러 개의 파이프가…… 물웅덩이와 닿아 있다. 파이프가 물을 끌어 올린다. 파이프를 지난 물이, 여과장치를 거쳐서…… 다시 샘으로 떨어진다. 유진이 들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리였다.
많은 여과장치.
많은 파이프.
그렇게 정수를 반복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중앙파이프가 샘에서 물을 끌어올려, 어딘가를 향해 흘려보낸다.
그건 기괴하면서 끔찍한 파이프오르간을 연상시켰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파이프와 연결된 여과장치‘들’. 유진은 허공에 열매처럼 매달린 새하얀 구체들을 보았다.
그 구체들의 안에.
“…….”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내 손에 뭐가 쥐어져 있는 거지.
발밑에 굴러다니는 것.
내 앞에 있는 것.
저 위에 있는 것.
파이프가 연결된 어딘가에서.
또옥.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유진은 한 번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샘 위에 수많은 소녀들이 서 있었다. 여전히 소녀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똑바로 선 아니스와,
울고 있는 크리스티나가 보였다.
“가엾게도.”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저 지독한 여자는, 지금 유진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유진도 답을 갈구하지 않았다.
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아프고 힘들었을 겁니다. 지금도 그럴 테죠.”
울고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아니스가 가까이 다가갔다. 수많은 소녀들이 아니스와 함께 걸었다. 하나씩, 하나씩 소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눈처럼 녹아내려, 샘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녹아내리지 않고 여전히 존재했다.
“하멜.”
아니스는 울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뒤편에 섰다. 그러고는 양팔을 벌려, 크리스티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겁니까?”
그 지독한 질문을 남기고,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진은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땅에 떨어트렸던 성배와 턱뼈는 어느새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스러져 있었다.
“…….”
무엇을 할 거냐니.
아니스다운 질문이었다. ‘무엇’을 바라는 것은 바로 자신인 주제에, 그걸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는데.
유진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살의뿐인 불꽃이 눈동자를 집어삼켰다.
빛의 샘
유진 라이언하트가 워프 게이트를 통해 건너오고, 신전의 결계를 침범했다. 그 사실은 성기사와 심문관들의 머릿속에 빠르게 전해졌다.
최초에 조우했던 심문관 3명이 한순간에 제압당했다. 성기사 3명은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유진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으니, 혈십자 기사단의 대장인 조반니도 더 이상 대원들에게 손속의 사정을 두라고 명령할 수가 없었다.
혈십자 기사단이 지금 이 신전에 와있는 것에는 기사단장의 허락은 구하지 않았다. 조반니는 이 의식이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라 믿었고, 신을 섬기는 기사로서 이 의식에 함께하고 힘을 더할 수 있게 된 것에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그러한 올곧은 신앙을 품고 있는 것은 조반니뿐만이 아니었다. 조반니와 함께 온 성기사들 전원이 성사(聖事)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이자 기쁨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이 기사단장이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일은 신이 주관하는 것. 빛의 신도에게 이보다 중요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침입자가 성검의 선택을 받은 용사일지라도.
용사의 독단과 폭주는 결코 신의 뜻을 앞서선 안 된다. 그래, 유진 라이언하트가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이곳을 침범하고, 같은 신도인 심문관들에게 피를 흘리게 한 것은 절대 있어선 안 될 폭주였다.
그러니 멈추게 해야 한다. 설령 그 과정에서 용사를 상처 입히게 될 지라도, 빛의 화신이어야 할 용사가 빛의 성사를 망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몸의 상처는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지만, 죄를 지어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다.
특히 그 죄가 신의 뜻을 부정하고, 신의 성사를 모욕하는 것이라면. 그 죄를 범하는 것이 누구보다 고결하며 빛의 뜻을 따라야 할 용사라면.
‘반드시 막아야 한다.’
조반니의 간절하고 올곧은 바람이 성기사들에게 전해졌다. 성기사들은 애절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조반니의 바람에 공감했다. 상대가 용사일지라도. 아니, 용사이기에 반드시 막아야 한다. 용사에 의해 의식이 망쳐지는 일은 절대로 벌어져선 안 된다.
아타락스의 뜻도 조반니와 같았다. 그는 진즉부터 유진을 그렇게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계에 들어오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그런 아쉬움을 느끼며 심문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손속에 사정을 둘 상대가 아니다. 상대가 용사라는 사실은 잊어라…….
신전을 휘감은 뿌연 안개. 성기사와 심문관들은 이 결계 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들의 눈은 안개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러니 탐색이 쉬워야 할 텐데…… 난항을 겪고 있다. 분명 결계 속에 들어왔을 유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수백에 달하는 성기사와 심문관들이 유적과 주변의 숲까지 탐색범위에 두었으나, 그들 중 누구도 유진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결계 안으로 들어왔을 유진이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간 거야?’
상관의 명령이 내려지고서 자연히 무리가 갈렸다. 성기사는 성기사끼리, 심문관은 심문관끼리 뭉쳤다. 그들은 결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집단이라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을 수색하고 있는 것은 10명의 성기사로 구성된 분대였다. 신전과는 한참 떨어진 외곽. 결계의 바깥과 맞닿은 곳.
이 결계에서 현혹되지 않고 바른길을 찾기 위해서는, 빛의 샘을 관리하고 있는 로게리스 추기경에게서 은총을 받아야 한다. 은총이 없다면 샘의 근처는커녕 신전에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아무리 안개 속을 떠돌건 외곽만 빙빙 돌 뿐이다.
그래서 외곽에 배치된 인원이 많았는데, 그 대부분이 성기사였다.
유진도 그 사실을 알았다.
“……어?”
최고태세의 경계.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니, 침식해 왔다. 스멀거리며 밀려오는 이건…… 성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달싹거린 입술로 기도를 외고, 서로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성기사들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그들이 갑옷을 입을 때는 빛의 대리자인 교황이 성전(聖戰)을 준비하라 명할 때뿐이다. 이 의식은 전쟁이 아니었다. 빛에 의한 성스러운 행사. 그런 행사에 갑옷을 입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갑옷이 필요했다. 10명의 성기사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그들의 감각을 침식하는 적의는 그만큼이나 불길하고 강렬했다.
기도가 더욱 강한 빛을 일으켰다. 그 빛은 성기사들의 몸을 휘감아 갑옷을 만들었다. 유라스의 성기사라면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신성마법, 빛의 갑옷. 저 신성력의 갑옷은 가진 신앙의 크기에 따라 형태와 힘이 바뀐다.
혈십자 기사단의 성기사라면 빛으로 만든 갑옷으로 검강을 막는다. 빛으로 만든 방패를 세운다면 그보다 강한 공격과 마법도 막아낼 수 있다. 그 견고함이야말로 유라스 성기사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었다.
빛의 갑옷을 두른 10명의 성기사들이 일제히 투구를 내려썼다. 그리고 방패를 앞으로 들어 세우고, 검을 뽑았다. 성기사들이 뽑은 검은 빛에 휘감겨 기다란 창이 되었다.
방패로 몸을 가리고 연결했다. 틈마다 창이 뾰족하니 나왔다. 일말의 주저함 없이 일으킨 빛의 방패벽. 초대형의 몬스터나 마물, 그에 준하는 위험도를 가진 적에게 사용하도록 훈련해 왔지만…….
지금 성기사들의 앞에 선 것은 몬스터도, 마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적인가?
……모르겠다. 성기사들은 저 앞에 선 청년을 도저히 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저 청년이 성검의 인정을 받은, 300년 만에 출현한 용사라서?
그 때문이 아니었다. 적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싸울 수밖에 없다. 싸우고 싶지 않다. 싸워서는 안 된다. 결연하게끔 단련한 의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타들어 가는 촛불처럼 쉽게 흔들리고 연약했다. 성기사들은 저 앞에 선 청년과,
유진 라이언하트와 싸우는 것이 두려웠다.
“…….”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성기사들을 보았다.
……빛의 샘. 그 근원에서 나왔다. 아예 부숴 버리고, 위로 올라가 볼까 싶었는데. 복잡하게 연결된 파이프가 대체 어디로 통해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아예 부숴 버렸을 때, 샘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다.
아직은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샘의 근원에서 나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이 장소에 와버렸다.
마법사다운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이 결계는 공간을 구역마다 나누고 꼬아서 연결하고 있다. 절대적인 심부이자 치부일 샘의 근원은 보통은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적이.
그 빌어먹을 기적이 인도해 주지 않는 한.
“……막을 거냐?”
유진은 손에 든 성검을 힐긋 보았다. 성검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유진은 그 빛을 노려보며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
성기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저 뻔한 질문에 당연히 해야 할 대답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막고 싶지 않다. 그냥 길을 열어주고 싶다. 아니,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이마와 등골과 손아귀에 식은땀이 차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공포가 성기사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그들이 쥐고 있는 창이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 방패가 한층 더 가까이 붙어 결속되었다. 성기사들은 이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공포를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냈다.
유진은 그것을 느꼈다. 성기사들의 경직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방패가 결속되는 만큼 빛이 더 밝아졌다. 흔들리던 창끝이 믿음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이.
유진의 감정을 폭주시켰다. 잿빛 머리카락이 위로 곤두섰다. 비키라는 말은 했다. 그런데 비키지 않고 저렇게 서 있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뿐 아닌가.
백염식이 일으킨 불꽃이 몸을 감쌌다. 앞으로 한걸음.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 번 일어난 불꽃은 꺼지고 멈추는 일 없이 유진을 불살랐다.
ㅡ꽈아아앙!
빛이 산산조각 났다. 일직선으로 쏘아지고, 터졌던 불꽃이 빛의 파편을 집어삼켰다. 유진은 긴 숨을 토하면서 계속해서 나아갔다. 성기사들의 방패벽은 유진을 막지 못했다. 믿음으로 결속시킨 빛의 벽은 광분하는 불꽃에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결의를 담아 들었던 창은 내지르지도 못하고 뭉개졌다. 신앙으로 만들어낸 갑옷은 으스러지고 박살 나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게 해주었다.
성검이 그렇게 만들었다. 칼날이 발하는 빛보다 유진이 일으킨 불꽃이 더욱 컸다. 빛으로 칼날을 감싸고 밝히는 대신 백염식으로 응축하고 순환시킨 검강으로 칼날을 감쌌다. 사실 굳이 성검을 쓸 필요는 없었다. 이 쓰잘데없이 아름다운 예식용 검은, 무기로서의 실용성은 굉장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성검을 휘둘렀다. 그러고 싶었다. 저들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믿는, 그 개 같은 ‘빛의 신’이 세상에 남겼다는 이 성검 알테어로. 저들이 일으키는 빛을 박살 내고 싶었다.
‘……뜨거워.’
이그니션을 쓴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가 너무 빠르게 돌고 있다. 피와 함께 도는 마나가 몸을 식히기는커녕 열기를 더했다.
안개가 몰아쳤다.
태고의 결계가 신전을 위협하는 적을 인지했다. 결계 안의 모든 신도들이 유진의 존재를 느꼈다. 샘에서 의식을 집행하는 3명을 제외한 모든 신도들이 유진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미리 알았어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유진은 오늘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부순다. 쓰러져서도 막는다면 짓밟는다. 발목을 잡는다면 손을 자른다.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안개가 흔들거렸다. 바람은ㅡ 불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멀리서 소녀들의 웃음소리와 비명소리와 신음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었다.
대체 뭐가 전지전능한 빛이고 신이라는 거냐.
성검을 감싼 불꽃이 더욱 크게 부풀었다. 안개 저편에서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쳐다보지 않았다. 그냥 검을 휘둘렀다. 창백한 검광이 안개를 갈랐다. 조금 늦게 불꽃이 번졌다. 빛보다 희고 강렬한 불꽃이 안개를 찢어발겼다.
비명을 지나쳤다. 방금 참격으로 몇 명을 어떻게 베었는지, 그건 유진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적의가 느꼈다. 그들은 공포 이상으로 분노했다. 과열되는 감정이 적의를 살의로 바꾸었다.
용사가 빛의 성사를 부정하고 있다. 지키고 이끌어야 할 신도들을 공격했다. 저 칼부림에는 일말의 망설임과 자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성검.
성검으로 신도를 베었다. 있을 수 없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신앙심 강한 성기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이교도를 처단하는 심문관들은 씹은 입술에서 피를 흘렸다.
그렇게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안개가 흔들린다. 너무 짙었기에, 유진은 저들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안개 저편에서 피비린내를 맡았다. 외어대는 기도문과, 흐느낌을 들었다.
“왜 너희가 우는 거냐.”
유진은 쓸 수 있는 것이 많다.
세냐에게 받은 아카샤.
라이언하트의 보물. 폭풍검 위니드, 뇌광궁 페르노아, 용격창 카르보스, 포식검 아스펠.
월광검.
하지만 다른 것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성검만 사용한다. 저들이 흐느끼면서 부르짖는 신이 세상에 남긴 검으로 이곳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불꽃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유진은 살벌하고 불길한 안광을 쏟아내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안개가 흔들릴 때마다 검이 움직였다. 비명이 들리고 피가 튀거나 쏟아졌다. 몇몇은 휘두른 검을 피하고 달려들었다. 쓰러지는 것이 조금 늦을 뿐이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섣불리 다가가면 베인다. 경계하고 각오하고 다가가도 베인다. 조바심에 등이 떠밀렸다. 직감했던 참격이 몸에 꽂혔다.
끊이질 않고 이어지는 참극에 성기사들의 진형이 달라졌다. 무작정 막는 것은 이쪽의 숫자만 줄 뿐이다. 더 이상 앞으로 가게 둘 수는 없었다.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똑같은 기도문을 외웠다. 그들의 몸을 보호하던 빛의 갑옷이 흩어지더니, 성기사들이 이룬 진형을 통째로 감쌌다.
화아악! 거대한 빛의 날개가 펼쳐져 안개를 흩트렸다. 유진은 그 광경을 똑바로 보았다.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결속시킨 신성력. 믿음이 더해지고 기도가 이어지니 빛이 끝없이 부풀었다. 해는 진즉에 저물어서 하늘이 어두웠지만, 성기사들이 발하는 빛은 지상에 내려 온 태양처럼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거대한 빛의 날개가 하늘 높이 솟았다. 성기사들의 외는 기도가 높아졌다. 그 웅장한 외침이 찬송가처럼 들렸다.
밤하늘을 꿰뚫을 만큼 높이 솟았던 날개가 아래로 추락했다. 무수히 많은 빛의 깃털이 유성우처럼 유진에게 쏟아졌다.
유진은 그를 노려보며 성검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콰드득! 무형의 힘이 유진의 몸을 압박해 왔다. 성기사들이 참마복음을 펼치는 동안, 심문관들도 서로 기도를 모아 힘을 일으킨 것이다.
지금 몸을 압박하는 힘은 유진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마법들과는 궤가 달랐다. 그렇다고 신성마법 특유의 기질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혈마법과 같은 고대마법 중 하나일 것이다. 수백 년 전 신성제국이 주도했던 마법사냥.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들은 과거에 이단으로 몰아붙여 거두어들인 마법들을 독점해 사용하고 있다.
몸을 붙잡는 압박이 계속해서 강해진다. 단순히 죄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나의 흐름에 간섭하며 저항하지 못하게끔 무력화시키고 있다.
“하.”
유진은 비웃음을 흘리며 코어를 회전시켰다. 환염식. 코어가 쏟아내는 마나의 출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키이잉! 왼쪽 약지에 끼워진 아가로트의 반지가 유진이 쏟아내는 폭발적인 마나에 반응했다.
아득한 옛날에 사멸했을 고대의 전쟁신이 남긴 반지. 지금 이 반지에는 아가로트의 의지는 남아 있지 않지만, 긴 세월 존재해 온 이 반지는 주인의 기질을 닮은 영기가 새겨져 있었다.
아가로트의 반지는 높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깃털을 보며 신화의 전장을 회고했다. 반지는 이럴 때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콰르르르르!
아가로트의 반지가 유진이 쏟아내는 마나를 어루만졌다. 반지에 깃든 신력(神力)이 마나를 더욱 강맹하게 가꾸었다. 번개불꽃이 마나의 흐름에 섞였다.
심문관들은 더 이상 통제주박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존재를 붙잡는 것에 있어 이것 이상의 마법은 드물 것이다. 한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심문관이 동시에 통제주박을 펼쳤는데도 아주 잠깐 동안 유진을 붙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통제주박이 깨진 순간. 쏟아지는 깃털은 이미 유진과 닿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을 해하지는 못했다. 폭주하며 솟구친 불꽃이 역으로 깃털을 불태웠다. 무수히 많은 깃털이 불씨가 되어 흩날렸다.
그 한복판에서 유진은 성검을 들었다. 환염식으로 통제하는 마나에 무언가가 섞였다. 번개불꽃과는 다르다. 낯선 느낌이지만 통제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반지에 잔재 된 아가로트의 신력은, 유진이 지배하는 마나와 따로 돌기는커녕 하나로 섞이며 흘렀다.
라이언하트 백염식.
드라고닉 류(流) 공검(空劍).
ㅡ파직.
성검을 뒤덮은 불꽃에 번개가 더해졌다. 번개가 대기 중의 마나를 불꽃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검강이, 불꽃이 부풀었다. 그리고 다시 줄어든다. 공검은 불완전하게 부풀린 검강을 마나로 결속하고, 그를 반복해서 검강을 코팅한다.
한 번.
꽈르르릉! 성기사들의 참마복음이 형태를 바꾸었다. 하나로 모은 날개가 빛으로 이뤄진 거대한 검이 되었다.
참마복음의 이형(二形)에 섣불리 간섭했다가는 함께 휩쓸려 버린다. 심문관들은 성기사들의 근처까지 물러선 뒤, 함께 기도를 외며 신성력을 보탰다.
심판의 검이 더욱더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유진은 그 검을 올려다보며 성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아가로트의 반지가 스산한 빛을 발했다. 찌직, 찌지직! 보다 날카로워진 번개가 불꽃에 스며들었다.
두 번.
응축된 공검. 희고 푸른 불꽃에 흑점(黑點)이 번졌다.
심판의 검이 유진을 향해 떨어졌다.
불꽃이 빛을 집어삼켰다.
빛의 샘
메르는 망토의 안에서 두 귀를 틀어막았다. 밖에서는 세상이 찢어지고 무너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렸다. 비명. 흐느끼는 소리. 모두가 메르가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런 소리와, 유진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이 메르를 괴롭게 했다. 그래서 메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유진을 말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메르가 느끼기에도 지금 유진의 분노는 타당했다.
‘……마법은 쓰지 않고 계셔.’
유진이 마법을 사용하면, 어떤 식으로는 메르가 개입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유진이 마법으로 날뛴다면. 메르는 기꺼이 유진을 위해 보조를 맡을 것이다. 유진의 펼치는 마법이 보다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빗나가는 일 없이 심장을 뚫고 머리를 박살 낼 수 있도록 방향을 계산해 주었을 것이다.
만약, 만약에라도 도중에 유진의 마나가 고갈되어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게 된다면. 메르는 기꺼이 사역마의 육체를 구성하는 마나마저 유진에게 양보해 주었을 것이다.
‘……나를…… 배려해 주고 계셔.’
그것을 알기에 메르는 더욱 괴로움을 느꼈다. 마법을 쓰면 메르가 간섭할 것을 아니까, 마법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메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망토 안의 깊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바깥의 폭풍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으…….”
헤모리아는.
갈라지는 신음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합류가 조금 늦었다. 그녀는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부하 심문관들을 데리고서 이동하는 중에, 참마복음의 빛을 보았다. 혈십자 기사단의 참마복음은 백작급의 마족과 전면전을 상정하고 만든 성진(聖陳)이다. 설마 유진 라이언하트 하나를 제압하겠다고 참마복음까지 펼쳤다는 건가?
그런 의문. 빛의 날개가 불꽃에 산화되는 것을 보았다. 검푸른 불꽃이 심판의 검과 충돌하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부터 기억이 끊어졌다. 충돌로 터져나간 폭풍에 휩쓸렸나? 헤모리아는 더듬더듬 기억을 이어가며 입에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우웩……!”
입을 열자마자 검붉은 토혈이 쏟아졌다. 직격당한 것도 아니고, 후폭풍에 휩쓸린 것뿐인데도 장기의 일부가 망가져 버렸다. 헤모리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함께 이동하던 심문관들 중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은 아예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헤모리아는 커다란 혼란을 느끼며 흐트러진 망토를 다시 여몄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다가.
더 걷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 앞은 분명 평지였는데…… 땅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만 같은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100명은 훌쩍 넘을 성기사와 심문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몇몇은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했다.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자들마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헤모리아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혈십자 기사단. 대륙 제일의 기사단을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는 기사단이다. 저곳에 소속된 성기사들은 유라스에서도 실력이 뛰어나고 신앙이 깊은 기사들뿐이다.
말레피카룸. 수백 년 동안 빛의 신교를 위해 충성해 온 이단심문관. 오래전에는 마족과 사악한 마법사들과 맞섰고, 지금 시대에는 변절한 배교도들과 사특한 이교도들을 사냥하는 사냥꾼.
유라스에서 쌍벽을 이루는 무력집단이란 말이다. 아무리 대장급 인물이 속해 있지 않았다고 해도, 100명이 넘는 성기사와 심문관들이…… 유진 라이언하트 하나를 가로막지 못하고 저렇게 당해 버렸단 건가?
“…….”
헤모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입을 닫고, 숨조차 참았다. 손끝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손에 낀 장갑은 떨림을 숨겨주지 못했다. 그 떨림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면으로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다.
발걸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구덩이 아래에서 유진 라이언하트가 올라오고 있다. 그는 옅은 불꽃을 날름거리는 성검을 들고, 가파른 경사를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표정은…… 무덤덤했다.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어떠한 감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헤모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냥 제자리에 서서, 유진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거리가 점점 줄어든다. 헤모리아의 시선은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졌다. 깊이 파인 구덩이를 보았다. 짓뭉개진 성기사들을 보았다. 그 근처에 심문관의 시체도 여럿 보였다. 말레피카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붉은 망토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헤모리아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용사가 신도를 죽였다? 아니. 헤모리아는 그것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유진을 보았다.
저 눈동자.
도저히 용사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금 유진의 손에 쥐어진 성검은 그 특유의 신성한 빛을 내뿜지 않고 있었다. 저 검을 감싸고 있는 것은 일렁거리는 불꽃뿐. 유진 라이언하트에게는 신앙이 없다. 저 눈동자는 도저히 빛의 화신인 용사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저러한 눈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절대로 계도되지 않는 불신자의 눈. 빛을 믿기는커녕 부정하고 증오하는 이교도의 눈.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질 타락자의 눈.
그렇게 느낀 순간, 헤모리아의 몸은 느끼고 있는 본능을 뛰어넘었다. 그녀는 공포를 극복하고 발을 뻗었다. 입술이 벌어졌다. 그 즉시 헤모리아의 양 뺨에 붉은 문양이 나타났다.
헤모리아가 가진 심문관으로서의 이명은 단두대. 4년 전, 그녀가 고작 17살일 때에 얻은 이명이다.
긴 세월 동안 종교국가로 군림해 온 신성제국. 종교에 광신한 사람이 얼마나 다루기 쉽고 편리한지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신성제국에서는 꾸준하게 신흥종교가 태어나곤 했다. 빛의 신교에서 파생시켜서, 교리를 살짝 바꾸고, 신도의 편의에 맞춰주며 듣기 좋은 말들만 속삭이며 빛의 신도를 조금씩 조금씩 빨아가려는 거머리들.
4년 전에도 그런 신흥종교가 있었다. 상위서클의 마법사가 교주에 앉아, 자신이 일으킨 마법을 신의 기적이라는 둥 헛소리를 해댔다. 교주의 휘하에는 범죄에 연루된 마법사나 용병, 기사 등 꽤 그럴듯한 사조직까지 있었다. 당시 그 신흥종교에 홀린 이교도의 숫자만 해도 수백 명이 넘었다.
그 신흥종교는 고작 하룻밤 만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징벌자 아타락스가 데리고 다니던 어린 소녀가 저들 모두의 머리를 날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얻은 이명이 단두대. 뺨에 나타난 문양이 귀밑까지 번졌다. 헤모리아는 양 뺨의 열기를 느끼며 입을 벌렸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유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헤모리아는 자신이 이교도와 배교도를 처단하는 심문관이라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헤모리아의 눈에 비치는 유진은 악마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악마 그 자체였다. 저만큼의 살의와 증오가 용사의 눈에 머무를 리가 없다. 용사가 빛을 부정할 리가 없다.
유진은 헤모리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안중에도 없었다. 막는다면 베고, 도망치면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뭔가 기묘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수십 수백 번의 사선을 넘으며 녹아든 본능이 유진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헤모리아가 입을 열고, 허공을 물어뜯었다. 그 순간. 유진은 본능대로 움직였다. 너무 많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그냥 몇 걸음 옆으로 움직이기만 했다.
콰삭.
유진이 몸에 둘렀던 불꽃의 일부가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명확했다. 헤모리아는 저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입을 벌려 물어뜯었다.
‘시선.’
간파했다. 시선이 향한 곳을 물어 뜯어버리는 건가. 그런 점에서는 아이리스가 가진 암전의 마안과 닮았다만…… 솔직히 위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생에도 아이리스와 싸웠다. 불과 몇 달 전에도 싸웠다. 사실 그런 경험이 없어도, 시선이 향하는 곳을 의식하며 싸우는 것은 유진에게 있어서 결코 힘든 일이 아니었다. 유진은 옆으로 기울였던 몸을 앞으로 당겼다.
“ㅡ아.”
헤모리아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멈, 춰.”
한 글자씩 끊어 뱉는 목소리.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마치 용언처럼, 내뱉은 말에 마법적인 힘이 깃들었다.
끼이이이! 대기 중에 녹아 있던 마나가 진동하더니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헤모리아가 내뱉는 명령은 용언처럼 술식까지는 만들어내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를 강제로 움직여, 단순한 명령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마나가 유진의 몸을 붙든다. 헤모리아가 명령한 것처럼 유진의 몸이 멈췄다. 그 즉시 헤모리아가 입을 크게 벌렸다.
다시 한번 이해했다. 저 기괴한 언령. 돌발적이지만 제대로 된 마법만큼의 위력은 없다. 이쪽의 능력이 출중하다면 단순하게 힘으로 떨쳐낼 수 있다.
헤모리아의 입이 한 번 더 허공을 물어뜯었을 때.
멈춰 있어야 할 유진의 몸이 가속했다. 그는 몸을 붙잡는 마나를 힘으로 떨쳐내고 헤모리아에게 달려들었다. 그 광경이 헤모리아를 경악시켰다. 하지만 계속 경악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쓰, 러, 져!”
마나가 위에서 짓눌러 왔다. 그만큼 유진이 운용하는 환염식이 강해졌다.
“뒤, 틀, 려!”
마나가 몸을 통째로 뒤틀려고 했다. 그 힘을 흩트리는 것에는 고작 한 걸음으로 충분했다.
“죽, 어!”
마나가 목을 죄어왔다. 이번에는 떨쳐낼 필요도 없었다. 이미 유진이 휘두른 성검은 헤모리아의 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죽…….”
헤모리아는 다시 한번 외쳤지만, 그 언령은 완성되지 않았다. 성검이 헤모리아의 두 다리를 잘랐다. 몸이 아래로 쓰러지기 전, 성검은 다시 움직여 헤모리아의 양팔을 잘랐다.
콰당! 다리와 팔이 모두 잘린 헤모리아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헤모리아는 미칠 것만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원독에 찬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뺨의 문신이 씰룩거리고 입술이 열렸다. 그 어떤 언령도 먹히지 않았다. 주먹은…… 휘두르지 못하고 잘려 버렸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리가 잘려 버렸다.
“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물어뜯었다.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유진은 쓰러진 헤모리아의 몸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무감정한 눈으로 헤모리아를 힐긋 본 뒤, 그녀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뻐억! 사지가 잘린 헤모리아가 그 발길질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냥 걷어찬 것도 아니었다. 꽂힌 순간에 침투해 온 마나가 헤모리아의 내장을 으스러트렸다.
헤모리아의 몸이 구덩이 깊은 곳으로 굴러떨어졌다. 유진은 잠시 동안 자신이 직접 만든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이 몇 명 보였다.
통째로 파묻어 버릴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직접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곳에서 운이 좋아 목숨을 건진 놈이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평생 자신이 믿어 온 신앙에 의심을 품기를 바랐다. 그러한 의심을 제 가슴 속에 두고 함께 썩어가든가. 다른 이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떠들기를 바랐다.
유진은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짙었던 안개와 결계는 아까 전에 유진이 일으켰던 불꽃의 폭풍에 휩쓸려 사라졌다.
덕분에 저 멀리 있는 신전의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신전에 도달할 때까지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방해하고, 막아야 할 성기사와 심문관들은 대부분 구덩이에 쓰러져 있다. 그 외에는 헤모리아가 데려온 심문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심판의 검이 박살 난 후폭풍에 휩쓸려 버렸다.
신전은.
굉장히 오래되어 보였다. 최소 300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겠지. 유진은 아니스 전에 존재했던 소녀들과, 400년 전의 성녀와, 이, 샘에, 물을 흘려보내는. 존재해서는 안 될 장치들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성녀가 대체 무엇이며.
아니스의 성배가 400년 성녀의 턱뼈와 공명했던 이유.
유진은 그 진상을 얼추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하나하나 연결하고 싶지 않았고, 근원적인 의문에 대해서는 답을 유추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까지?
……크리스티나는?
“……유진 님.”
걸음을 멈췄다.
기둥과 기둥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서, 신전의 중앙까지 왔다. 제단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커다란 샘이 있었다.
빛의 샘.
크리스티나는 그 중앙에 눈을 감고, 마치 기도하는 것만 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잔잔한 샘물이 마치 이불처럼 크리스티나의 몸을 감싸고 있다. ……황금색의 샘. 빛의 샘은 그 이름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서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가증스럽게 보였다.
샘에 잠긴 크리스티나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저토록 많은 피를 흘리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 얼굴과.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울던 소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태양의 광장에서부터 쭉 가면을 쓴 것처럼 느껴지던 미소가 겹쳐졌다.
기차에서 나눈 시답잖은 이야기들에 흔들리고, 의식하지 않고 짓던 미소가 겹쳐졌다.
크리스티나는.
어려서부터 몇 번씩 샘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평범하게 들어갔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몇 호흡 늦게 대답했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썼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그렇게 가면을 썼을까.
“유진 님.”
이제는 크리스티나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안다. 그녀는 성녀에 집착했다. 성녀와 용사의 유대에 대해 말하며, 용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고도 말했다.
저 의식은 정상이 아니다. 흑마법이라 오해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성녀에 그토록 집착하는 크리스티나는, 용사인 유진에게 이 모습은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용사다운 자각이 희미한 것을 안다. 빛의 신에 대한 아무런 신앙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더더욱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진을 트레치아에 데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유진을 위한 변명거리까지 준비해 주었다.
사실.
사실 그냥, 오지 말라고 했으면 됐을 거다. 광장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함께 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유진은 트레치아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며. 크리스티나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서, 성녀에 대해서, 샘에 대해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제에. 자신이 어려서부터 저렇게 교육받고 로게리스 추기경의 의도대로 자라난 성녀후보라는 것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은 주제에.
유진과 함께 기차를 탔다.
자신의 가면을 드러내고, 불편함과, 두려움을 보였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는 것 아냐?
유진은 그때 그렇게 물어본 것을 후회했다.
질문이 잘못됐다. 질문을 해서는 안 됐다.
-제가 이 일에 느끼는 것은 중압감뿐입니다.
-싫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크리스티나가 품은 결의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유진에게 그딴 배려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날, 기차에서 크리스티나에게 해야 했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가지 마.
그냥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이미 늦었을까. 아니, 늦지 않았다. 유진은 계속해서 샘을 향해 다가갔다. 성녀고 용사고, 그딴 것은 유진에게 아무 상관도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성녀가 아닐지라도.
그녀가 유대를 바란다면, 유대를 맺어 줄 것이다. 피와 피로 이어지는 그 가증스러운 유대가 아닌, 인간과 인간의, 동료의 유대를.
-만약 세상에 용사가 있다면, 그도 분명 정의롭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티나가 유진에게 용사를 바란다면.
유진은 지금만큼은 기꺼이 용사가 되어줄 수 있었다.
“……유진 님.”
세르지오 로게리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기도를 맺고 있던 손을 풀었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마십시오. 지금이라면 불문에 부칠 수 있습니다.”
“…….”
“유진 님은…… 너무 많은 죄를 범하셨습니다. 아무리 유진 님이 빛의 선택을 받은 용사일지라도, 신이 직접 주관하는 의식을 침범하는 것은 너무나도 불경한 짓입니다. 유진 님은…… 이끌어야 할 신도들을 죽이셨습니다. 이 성스러워야 할 의식을 피와 흙 묻은 발로 더럽히셨습니다.”
세르지오가 주먹을 쥐었다. 부하들의 죽음에 피눈물을 흘리던 조반니도 몸을 일으켰다. 아타락스도 핏발 선 눈으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십시오. 대성당에 죄를 고해하는 방이 있으니, 그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기꺼이 유진 님의 고해를 듣고…….”
“신벌.”
유진이 입을 열었다.
손에 쥔 성검을 옆으로 들었다.
“난.”
살의가 불꽃이 되어 눈동자를 삼켰다.
“너희를 전부 죽일 거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빨리 뛰었다.
“용사는 빛의 화신이라고 했지.”
불길하고 흉험한 불꽃이 성검을 휘감았다.
“내가 이 개 같은 검으로 너희를 도륙 내는 건. 너희가 그토록 숭배하는 빛의 뜻인 거야.”
저 미치광이들을 도륙 내는 것이 정말 빛의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살육에서 성검의 빛이 유진의 살의를 넘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빛은 이곳을 밝히지 못했다.
빛의 샘
신벌이라는 말이 유진의 입에서 나왔을 때.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3명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올바르고 신실한 빛의 신도라면 지금 유진의 말에 격노하는 것이 당연했다.
신벌이란다. 아무리 유진이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일지라도, 저러한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되었다.
유라스에서 용사는 빛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빛 자체는 될 수가 없다.
유진은 빛의 신도가 아니다. 300년 전의 위대한 베르무트처럼 셀 수 없이 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까다로운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이 3명은 유진이 성검을 쥐었다는 것은 인정하여도, 용사라고는 진심으로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의식에 난입한 것도 모자라, 빛을 섬기는 충실한 신도를 학살했다. 그 용납되지 못할 일을 신벌이라고 포장했다.
“……감히!”
혈십자 기사단의 성기사. 조반니의 눈이 뒤집혔다. 그는 거구를 이끌어 앞으로 향하면서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가 수백 명에 달하는 혈십자 기사단 중에서 대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항상 빛을 쫓으며 신앙했기 때문이다. 이 한 몸과 평생을 빛에 바치고자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 숭고한 신앙심이 찬란한 빛이 되었다. 조반니는 거구를 빛의 갑옷으로 감싸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ㅡ후우욱! 벽에 기대어 놓았던 커다란 해머가 조반니의 손으로 날아왔다.
“……유진 님.”
세르지오도 차갑게 식은 눈으로 유진을 보았다. 그는 성직복의 널찍한 소매를 걷어 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였습니다.”
유진은 저 말의 대답으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주었다.
해서는 안 될 말?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는 주제에 저딴 말을 해대나. 아니, 저들의 입장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해서는 안 될 짓, 이라는 자각이 없다. 저 미치광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벌이는 의식이 신성하고 올바른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용사인 유진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저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사정이 어쨌건 유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피를 흘리며 샘에 누운 크리스티나가 보였다.
용언마법이 투영했던 수많은 소녀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인형처럼 무감정한 얼굴과 빛 한 점 없는 눈동자로 이쪽을 빤히 보던 아니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진은 격정으로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나아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이 나타났다. 조반니가 땅을 박찼다. 그가 휘두른 해머는 그 형태와 크기답게 무거웠지만, 느리지는 않았다. 조반니는 거구라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다가와 유진에게 해머를 휘둘렀다.
꽈아앙!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 유진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조반니는 양손에 전해지는 느낌에 확신을 가졌다. 피하지 못했다. 막지도 못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지친 것이 분명했다. 부하 성기사들의 죽음은 결코 하찮지 않았다.
“오오오!”
조반니는 커다란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얻어맞고 날아가 버린 유진을 쫓는 것이다. 아타락스와 세르지오도 조반니를 따라서 몸을 날렸다.
의식을 오랫동안 멈추고 있을 수는 없다. 성녀후보에게 새겼던 상처는 이미 거의 다 치유되었으니, 다시 상처를 새겨 샘물을 상처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유진은.
살의가 스멀거리는 눈으로 셋을 보았다. 해머에 얻어맞고 날아가기는 했지만, 아무 부상도 입지 않았다. 조반니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미세하게 충격을 흘려냈고, 일부러 몸이 뒤로 날아가게끔 내버려 두었다.
샘에 잠겨 있는 크리스티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타악! 한참 날아갔던 유진은 바닥을 발로 딛고서 조금 더 뒤로 뛰어올랐다. 맹렬히 추격하던 3명은 이미 유진의 근처까지 와있었다.
저 거구의 성기사. 누군지는 모르겠다. 내비치는 투기(鬪氣)가 범상치 않다. 아마 대장 중 하나겠지. 아타락스의 몸놀림도 훌륭했다. 그는 마치 나하마의 어쌔신처럼 기척을 감추고서 유진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실력적인 면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세르지오. 성흔을 받고 추기경에 올랐으니 신성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몸놀림만으로도 무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후욱.
해머가 공기를 찢으며 거리를 좁혀왔다. 유진의 눈은 해머의 궤적을 좇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벌어진 거리를 가늠했다. 이 정도라면. 그렇게 판단하고.
유진의 팔이 움직였다. 느슨히 쥐고 있던 성검이 뱀처럼 꿈틀대며 치솟았다. 조반니가 휘두르는 해머에 비해 성검은 꼬챙이라 느껴질 만큼 얇고 연약했다. 그러한 것은 중요치 않았다. 무인과 기사들이 떠들어대는 극한이 유진에게는 우스웠다. 수백 수천 번의 싸움에서 단련하고 사선을 극복해 온 기예(技藝)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조반니의 공격을 잘랐다.
쩌엉! 해머가 위로 튀어 오르고, 조반니의 손아귀에서 피가 뿜어졌다. 조금만 악력이 부족했어도 해머를 놓쳤을 것이다. 조반니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불안정한 자세에서 휘두른 검이 이토록 빠르고 무거울 수 있단 말인가?
‘빛이시여……!’
머릿속에 읊는 기도에 따라 조반니가 두른 빛의 갑옷이 변화했다. 신성마법이 용기를 북돋웠다. 찢어진 상처는 즉시 치유되었다. 하사 된 은혜가 조반니의 육체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다.
위로 튀어 올랐던 해머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조반니는 그렇게 움직였다.
유진은 조반니의 공세에 어울려주지 않았다. 그는 뒤로 젖혀졌던 몸을 앞으로 당기며, 발을 크게 앞으로 뻗었다. 파직. 번개가 빛을 발했다. 유진에게는 고작 한 걸음이었지만, 조반니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보이지 않았다. 해머가 땅에 닿기도 전. 유진은 이미 조반니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 움직임조차 보지 못했는데, 그보다 빠르게 움직인 검을 좇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새하얀 불꽃이 흐늘거리는 선처럼 보였다. 그 선이 조반니가 두른 빛의 갑옷과 닿아 있다. ㅡ카가각! 빛이 깎여나갔다. 믿음만큼 견고해지는 빛의 갑옷이 너무나도 쉽게 박살 났다.
그를 지켜보던 아타락스가 양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푸확! 그의 양 손목의 피부가 터지더니 시뻘건 피가 쏟아졌다.
혈마법. 오래전에 신성제국이 일으킨 마법사냥에서 흑마법이라 취급되어 사장되었던 고대의 마법이다. 신성제국은 그 마법사냥에서 거둬들인 마법을 분석하고, 흑마법이 아니라 판단 된 마법들을 이단심문관에게 전승시켰다.
혈마법은 전투에 특화된 마법이다. 마법은 서클이나 코어를 통해 마나를 이끌고, 술식으로 마법을 구현하는 마법들과는 체계부터가 다르다. 혈마법은 피 자체에 술식을 녹여내고 피를 매개로 하여 마법을 일으킨다.
쏟아진 피가 증식했다. 사람 한 명이 쏟아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량의 피가 아타락스의 발밑에서 일어섰다. 넘실거리는 피의 파도가 유진을 덮쳤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피의 파도. 저 붉은색은 오히려 유진에게 더한 격앙을 전해주었다. 유진이 일으킨 불꽃이 회오리치며 성검을 휘감았다.
콰아아아! 파도가 박살 났다. 흩어지는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 모든 것이 유진을 위협하는 공격이었다. 방울 하나하나가 탄환처럼 유진을 꿰뚫으려 했다.
그 한복판에서 조반니가 급히 태세를 가다듬었다. 그의 손에 더 이상 해머는 없었다. 유진의 검이, 성검이 해머를 산산조각냈기 때문이다. 조반니는 그 사실에 강렬한 분노를 느끼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다.
조반니의 신성력이 바닥에 거대한 십자가를 그렸다. 아타락스는 저 신성마법을 알아차리고 즉시 자신의 신성력을 일으켜 허공에 빛을 흩뿌렸다.
성호결계.
화아악! 하늘과 땅에 그려진 십자가가 빛줄기를 이었다. 유진은 그 한복판에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오…… 오오..!”
조반니의 몸이 덜덜 떨렸다. 공간을 환하게 밝히는 빛이 조반니에게 깃들었다.
유진은 이 마법을 알고 있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유진은 신성마법에 결코 무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지간한 고위성직자보다 신성마법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었다.
300년 전.
신실한 아니스와 십수 년을 함께 싸웠다. 그 시대의 굵직한 전장에는 온갖 기사단이 참여했고, 그중에는 유라스의 성기사단도 있었다.
성호결계. 마나의 흐름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성직자의 힘인 신성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키는 결계다. 하지만 이치를 초월하는 기적에는 반동이 존재하게 마련.
성호결계의 안에서 싸우는 성기사는 증폭된 힘의 대가를 수명으로 지불한다. 유진이 아는 한, 저러한 기적을 큰 부담 없이 펼치던 것은 아니스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부담하던 대가는 등의 성흔이 깊어지고, 홀로 피를 흘리는 것뿐이었다.
“……하.”
유진의 입술이 열어 웃음을 내뱉었다. 왼쪽 약지의 반지가 욱신거렸다. 아가로트의 신력이 성호결계를 느끼고 저항했다. 마나의 흐름을 통제하는 성호결계의 안에서도 유진이 일으킨 불꽃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이 조반니와 아타락스를 결의시켰다. 성호결계 안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저 불꽃. 무언지 알 수 없는 껄끄러운 힘. 빛의 신과는 다른…….
“……이교의 힘……!”
이단심문관인 아타락스는 당연하게도 저 힘이 이교도의 것임을 간파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타락스는 부릅 뜬 눈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성호결계 안으로 뛰어들었다.
“조반니 경! 유진 라이언하트는 이교도요! 그는 이교의 신을 신앙하고 있소!”
“오오오오!”
조반니도 피눈물을 쏟았다. 성검의 주인이 이교도라니! 분노와 한탄이 성호결계를 통해 힘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유진에게는 썩어빠진 촌극처럼 보였다. 단죄!(斷罪) 조반니가 외치는 말에 칼자루를 쥔 손가락에 힘을 밀어 넣었다. 징벌(懲罰)! 아타락스가 외치는 말에 성검을 옆으로 들었다.
둘은 함께 덤볐다. 소속된 곳은 달랐지만 진심으로 빛을 섬긴다는 신앙은 같았다. 용사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빛을 기만한 저 끔찍한 이교도를 반드시 처단해야 했다. 설령 그 과정에서 순교하게 될지라도, 빛의 광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타락스가 양팔에서 피를 뿜으며 달려들었다. 조반니는 제 거구에 빛을 휘감고서 우직하게 돌진해 왔다.
그 사이에서 유진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세르지오는 성호결계에 들어가지 않았다. 몇 걸음 밖에서, 성호결계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보았다.
유진의 몸이 흔들린 순간. 성검이 수십 개로 나뉘었다. 라이언하트의 상징인 백염식. 독특하게 정제해 낸 마나는 새하얀 불꽃으로 발현되며, 수련을 거쳐 그 불꽃을 전신에 두르게 되면. 가문의 이름처럼 사자의 갈기 같은 모습으로 흩날린다.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유진은 불꽃을 갈기처럼 흩날리며 난무를 펼쳤다. 하지만 그 색은 하얗고 아름답지는 않았다. 응축을 거듭하고 덧칠된 마나의 색은 여명이 오기 전의 새벽녘처럼 검푸른 색이었다.
“……이 어찌나…….”
세르지오는 탄식을 흘리며 모자를 벗었다.
“불길한 빛이란 말인가.”
피가 쏟아졌다.
아타락스는 혈마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는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피는 마법이 되기 전에 증발했고, 뻗었던 양팔은 수십 개로 나누어져 떨어졌다. 그로도 부족해, 저 검푸른 불꽃은 아타락스의 가슴과 배를 난도질했다.
직접 돌진했던 조반니는 일어서 있지도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단죄’ 뿐이었다. 몸이 넷으로 나뉘고, 마지막으로 머리가 떨어졌다.
“……이 무슨…….”
아타락스는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강하다는 것은 알았다. 흑사자 성의 내란을 하룻밤 만에 진압한 주역이라는 것도 알았다. 멀쩡하지도 않은 몸으로 헤모리아를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노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었다. 나찰공주와 조우해서 살아남고, 백룡 기사단과의 대항전에서도 터무니없는 검술을 보였다는 것도 들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강함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라이언하트의 다른 보물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빛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성검을, 사특한 힘으로 무장시키고서…….
휘둘렀다. 그냥 휘둘렀을 뿐이다. 아타락스는 그 검무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조반니도 그랬다. 막는다. 피한다. 그런 생각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베였다.
혈십자 기사단의 대장에 오르기까지의 수련. 고위 심문관에 오르기까지 겪어 온 전투. 모든 것이 방금 검무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격이…… 다르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오직 빛만을 섬기는 종이, 무언지도 알 수 없는 이교의 신앙을 가진 타락자에게 이만큼이나 희롱당하다니…….
“……악마…….”
격이 달라도 한참을 다른 검무에서 지독한 살의와 증오를 느꼈다.
성검의 불꽃은 너무나 쉽게 아타락스의 혈마법을 증발시켰고, 칼날이 살과 뼈를 갈랐다. 그 섬뜩함. 아타락스가 평생을 섬겨 왔던 빛에는 존재한 적 없던 살의와 증오가 예기(銳氣)에 깃들어 있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왜 성검은 저 이교도의 손을 불태우지 않는 것인가.
성검 알테어.
위대한 베르무트 이후 300년 동안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잠들어 있던 검이다. 시조 이후의 라이언하트 가주들 중 성검에서 빛을 끌어낸 가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라이언하트는 성검을 ‘쥐는 것’은 가능했다. 신성제국이 300년 동안 성검을 라이언하트에서 회수하지 못한 것은, 그 누구보다 빛을 섬기던 성직자들이 성검을 쥐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의식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타락스는 헐떡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성검은 왜 저 악마의 손을 불태우지 않는가. 왜 성검은 악마의 손에서 빛의 신도를 도륙 내는가. 아타락스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그는 자신이 여태껏 해왔던 수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빛을 위해, 신을 위해 해왔던 일. 보다 충실한 종이 되기 위해, 보다 확실하게 이단을 사냥하기 위해 해왔던 일. 배교자 사냥. 이교도 사냥. 고대마법과 흑마법의 연구. 심문국 지하의 배양실…….
‘신벌?’
유진이 내뱉었던 그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같은 분노는 느낄 수가 없었다. 아타락스는 제 존재와 평생이 부정당하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사실은 옳지 않았던 건가? 어째서? 예배를 빠트린 적은 없다. 빛을 위해 흘리는 피였다. 모두가 옳았다. 신은 그를 봐주며 언제나 따스한 빛을 내리셨다. 수도 유레시아의 하늘을 언제나 맑고 푸르게 하는 태양이 신이 존재와 보살핌의 증명이었다…….
그럴 텐데. 지금은 하늘이 너무 어둡다…….
“부정하지 말게.”
목소리가 다가왔다.
추기경 세르지오 로게리스. 그는 더 이상 온화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멸절자라 불리던 심문관 시절 때처럼 차가운 눈을 빛내며 성호결계의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빛은 자네의 순교에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걸세. 자네도, 조반니 경도, 이곳에서 저 악마와 맞서다 순교한 모든 신도들도. 빛이 가득한 천국으로 인도받게 될 걸세.”
“……추기경 전하…….”
“이곳의 모두가 유라스의 추모비에 이름을 올릴 걸세. 마지막까지 악마를 막으려 한 자네는 성인으로 기억되겠지.”
“……아아……!”
“그러니 부디.”
세르지오가 손을 들었다. 걷어 올린 오른팔 소매에서 ‘성흔’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아타락스는 등 뒤에서부터 시작되어 전신으로 번져가는 신열(神熱)에 눈을 감고 환희했다.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ㅡ꽈아아앙!
아타락스가 쓰러지는 방향부터 빛의 폭풍이 일어났다. 신성력이 일으킨 거대한 폭발이었다. 아타락스를 기폭제 삼아 터진 폭발은, 그 몸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며 어둠을 찢고 유진을 덮쳤다.
공검이 중첩되었다. 성검이 다시 한 번 검푸른 불꽃에 휘감겼다. 유진이 휘두른 참격이 빛의 폭풍을 양단했다.
그 강렬한 빛의 너머에 세르지오가 서 있었다. 그는 역광을 받으며 오른손을 유진에게 뻗었다.
팔뚝에 새겨진 성흔이 낯이 익었다. 기억 속에 있는 성흔보다는 엷고 문자가 적었지만, 세르지오의 오른팔에 새겨진 성흔은 아니스의 등에 새겨졌던 성흔과 닮아 있었다.
“……너희…….”
세르지오가 펼쳤던 손을 쥐었다.
성호결계로 증폭되고, ‘순교’로 폭발했던 신성력이 모조리 세르지오의 손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의 성흔은 핏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신성력을 모조리 흡수했다.
“대체 뭐냐?”
세르지오는 대답 대신 어깨에 걸친 붉은 천으로 왼팔을 감쌌다. 그리고 피 흘리는 성흔이 새겨진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넌 악마다.”
유진은 그 말에 소리 없이 웃었다.
빛의 샘
“양심도 없는 새끼. 누가 누굴 보고 악마래?”
유진은 그렇게 내뱉으며 성검의 칼끝을 들어 올렸다. 빛의 샘의 근원을 보았다. 세르지오가 저 샘의 진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의식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크리스티나는 대체 몇 살 때부터 저 의식을 받았을까. 언제부터 저 의식에서 울지 않게 되었을까. 유진은 피범벅이 되어 울던 소녀를 떠올렸다.
10살을 갓 넘겼을 소녀의 몸을 칼로 그어댔다. 기존의 인격을 말살시키듯이 성녀다운 품성을 교육했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제 부하를, 아타락스를 신성력의 폭탄으로 만들어 자폭시켰다.
세르지오는 유진의 비난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방금 죽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르지오도 유진을 악마라고 정의했다. 저 존재를 악마 외에 무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더 이상 저 악마가 성검을 희롱하게 둘 수는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죽여서라도 성검을 빼앗아야 한다. 더 이상 발악하지 못하도록 제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빛에 입교시키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솔직히 세르지오는 눈앞의 악마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죽여야 한다.
쿠우웅! 세르지오의 등 뒤에서 빛의 십자가가 치솟았다. 세르지오는 그 찬란한 후광의 앞에 서서 두 주먹을 내밀었다.
흔해 빠진 권투의 자세였다. 하지만 그 경지가 범상치 않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 지금 세르지오가 등진 후광은, 아까 성기사들과 심문관들이 신성력을 모아 펼쳤던 심판의 검보다 훨씬 밝고 강렬했다.
유진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성흔에 주목했다. 저만큼의 신성력을 혼자서 다뤄내는 성직자는 전생에도 아니스 혼자뿐이었다. 지금 세르지오가 보여주는 신성력이 아니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성직자로서의 격이 다르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후광에 대항하며 유진도 환염식을 운용했다. 코어의 회전이 더욱 격렬해지고, 마나가 증폭되었다. 화아악! 불꽃이 타올랐다.
드라고닉 가문의 공검을 오러실드에 응용하는 것은 부담이 크다. 아무리 유진이 마나조작에 능하다고 해도, 그만큼의 정교한 조작과 중첩은 검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기에 유진의 불꽃은 둘로 나뉘었다. 환염식으로 증폭시킨 희푸른 불꽃. 그 불꽃을 공검으로 중첩시켜, 흑점이 번져가는 검푸른 불꽃.
아직 환염식으로 낼 수 있는 순수한 출력은 300년 전의 전성기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공검의 2중첩, 흑점을 출현하게 되면 ‘검강’의 힘은 전성기와 닿는다. 어지간한 명검으로는 그 무식하고 난폭한 마나를 감당할 수 없지만.
성검은 명검 수준이 아니다. 쓸데없고 과한 형태지만 검신 자체는 절대로 유진의 마나에 부러지지 않는다. 유진은 번져가는 흑점을 의식하며 검 끝을 들었다.
2중첩.
충분한가?
‘가늠해 보지.’
유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세르지오의 주먹도 앞으로 나왔다.
서로의 거리가 사라졌다. 마치 시간을 억지로 잘라놓고 붙인 것처럼, 둘은 ‘움직임’을 연결하지 않고 충돌했다. 그 터무니없는 가속에는 소리도 따르지 못했다.
붉은 천에 휘감겼던 세르지오의 주먹이 으스러졌다. 가공할 밀도의 불꽃은 피조차 튀게 만들지 못했다. 힘은 단연 유진이 우위였다. 하지만 밀어내는 검은 의도했던 대로 세르지오의 팔을 완전히 잘라 버리지는 못했다.
기괴할 정도의 저항감. 검이 더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성흔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고, 강렬한 후광이 세르지오의 몸과 연결되었다. 그 거대한 빛이 성검을 역으로 밀어냈다.
밀어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마치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상처가 회복되는 것이 보였다. 팔뚝 중간까지 썰렸던 상처가 금세 달라붙고 주먹이 되었다.
놀랄 것도 없었다. 오른팔에 새긴 성흔의 능력. 그 피 흘리는 성흔이 유진의 피를 더, 더 끓게 만들었다. 술을 곁에 두고 피 흘리는 등을 내보이던 아니스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세르지오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붉은 천에 휘감긴 주먹이 지면을 훑으며 위로 치솟았다. 주먹보다 조금 늦게 빛이 뒤를 따랐다.
그 빛은 성호결계의 능력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빛에 닿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흩어진다. 본래라면 저 빛 앞에서 검강을 유지할 수가 없어,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저 빛을 직면하면서도 마나의 통제가 가능했다. 세르지오의 빛이 아무리 강렬한들 월광검의 빛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월광검을 대상으로 마나의 통제력을 늘렸으니, 저딴 빛에 유진의 마나가 흩어질 리가 없었다.
오히려 빛이 강해지는 만큼 유진의 마나는, 불꽃은 격렬하게 타올랐다. 아가로트의 반지가 저 빛에 멋대로 저항하는 덕분이었다.
콰아앙! 다시 한번 불꽃과 주먹이 충돌했다. 이번에도 밀린 것은 세르지오였다. 아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세르지오는 다시 상처를 회복하며 양팔을 치켜들었다.
치솟은 빛의 십자가가 밤하늘을 꿰뚫었다. 높은 곳에서부터 터져나간 빛이 하늘을 밝혔다. 아아아! 밝은 하늘에서 하나 된 노래가 울렸다.
유진은 몇 걸음 물러서면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날개를 활짝 펼친 3명의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전생에 아니스가 소환하던 천사들이다.
천사와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도의 부름을 받아 이 세상에 강림하고, 신도가 바치는 신앙으로 기적을 대행한다. 300년 전, 아니스는 저렇게 천사를 소환하여 전장 전체를 포착하고 필요한 곳에 기적을 일으키곤 했었다.
하지만 세르지오는 천사들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강림한 3명의 천사를 뒤로하고서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천사들이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하늘을 꿰뚫었던 빛이 세르지오에게 집중되었다. 최상위 신성마법들이 세르지오를 가호했다. 전투계열의 가호. 세르지오의 속도가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그리고 공격은 무거워졌다. 늦지 않게 검을 움직였지만, 아까처럼 밀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유진의 팔이 튀어 올랐다. 유진은 그 반동에 거스르기는커녕 흐름을 따랐다.
그렇게 검로가 연결되었다. 성검은 잔상을 이으며 세르지오의 틈을 파고들었다. 콰콰쾅! 폭발하는 불꽃이 세르지오의 몸을 집어삼켰다.
몸이 박살 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흩어지는 단계에서 고속의 재생이 시작되었다. 이만큼의 가호를 둘렀는데도…… 단순 근접전에서 밀린다고? 세르지오는 그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심문관 시절부터 근접전은 세르지오의 특기였다. 전투에 특화 도니 성기사들조차도 세르지오의 상대가 아니었다. 심문국에서 물러나고, 추기경이 된 후로도 수행을 게을리한 적은 없었다. 그는 성직자이면서 무인이었다.
그렇게 일궈낸 힘이다. 천사들을 통해 일으키는 최고 수준의 가호까지 겹겹이 둘렀다. 육체의 스펙만을 따지면 세르지오가 유진보다 앞서고 있다. 그런데도…… 밀린다. 대체 무엇이 부족하기에?
‘……시야가 다르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보고 있는 것이 다르다. 세르지오가 고작 몇 수 앞을 본다면 유진은 수십 수 앞을 내다봤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밀하게 움직임을 통제하고, 그를 통해 세르지오가 할 수 있는 공격을 도출하고 대응한다.
“……허어어…….”
세르지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재생한 몸을 추스르고, 걷어 올린 소매를 아래로 내려 성흔을 감추었다. 유진도 세르지오에게 더 덤비지 않았다. 그는 성검을 움켜쥐고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돌아가십시오.”
찰박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격전으로 폐허가 된 신전. 그 안쪽에서 크리스티나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잠에서 덜 깬 것 같은 몽롱한 얼굴이었고, 눈에도 빛이 희미했다.
“……대체…… 무슨……?”
약에 취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움직여 더듬더듬 물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늘은……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데, 주변은 밝다. 크리스티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리다가 벽을 짚었다.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크리스티나는 날개를 펼친 3명의 천사와, 세르지오의 등을 보았다. 경원(敬遠)의 대상이던 양부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양부와 함께 의식을 집전하던 아타락스과 조반니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신전은 더 이상 신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반파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을 보았다.
성검을 든 유진이 보였다. 그는 무뚝뚝한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또다시, 심장이 핥아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주춤 물러서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가십시오.”
세르지오가 다시 내뱉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대체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의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녀후보님, 이 의식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 왜 샘에서 나오신 겁니까……!”
세르지오가 뱉는 모든 말이 비수가 되어 크리스티나를 꿰뚫었다. 양부가 저토록 분노하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12년 전이다. 크리스티나의 나이가 11살이었을 때. 빛내림을 받아 성녀후보가 되고, 처음으로 이 신전에 왔을 때.
양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린 크리스티나의 손에 단검을 쥐여주었다. 스스로 몸을 베고, 샘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크리스티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양부가 고약한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담 따위가 아니었다. 크리스티나가 손목을 긋지 못하자, 양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폭력은 휘두르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기도를 맺었다. 그때 양부의 눈동자는 크리스티나가 손에 쥐고 있던 단검보다 예리하고 차가웠다.
11살의 소녀가 그 시선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역했을 때 무엇을 잃게 될지, 상상하는 것이 두려웠다.
크리스티나는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로게리스 추기경에게 거둬졌다는 것이 신의 보살핌이라고 생각했다. 신실한 아니스 님의 얼굴을 빼닮은 것과, 빛내림을 받아 이 시대에서 유일한 성녀가 된 것도 신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양부는 샘에서의 의식이 신은(神恩)을 몸에 담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검으로 제 몸을 베는 것은 이 불완전한 육(肉)을 빛께 공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처에서 쏟는 피는 샘과 섞이고, 성혈(聖血)이 몸으로 흘러들어와 성녀로서의 자질을 가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의식을 거듭할수록 크리스티나의 신성력을 배로 늘었다.
하지만 11살의 소녀가 제 몸을 스스로 단검으로 긋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베고, 베고, 계속 베었다. 아무리 손목을 그어도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피를 쏟아냈는데도 정신은 혼미해지기는커녕 갈수록 또렷해졌다.
그래서 울었다. 아프다고, 하고 싶지 않다고 울었다. 그렇게 애걸하며 샘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양부는 언제나 기도를 맺던 손으로 우악스레 크리스티나를 밀치고, 샘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언제나 기도를 읊던 입을 열어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돌아가십시오.”
지금처럼.
“성녀후보님. 당신은 빛의 선택을 받은 사도입니다. 300년 전의 신실한 아니스 님의 재림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아니스 님을 이어 참된 성녀가 될 수 있으십니다.”
“…….”
“이번 의식에는…… 많은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그렇다 하여 의식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아직,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시오. 가서, 샘에 몸을 담그고 스스로 몸을 베십시오.”
세르지오의 낮은 목소리가 크리스티나의 심장을 떨게 만들었다. 13년 동안 새겨온 양부의, 신앙이 크리스티나의 생각을 제한했다. 그녀는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 공포를 느꼈다.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는 타락했습니다. 빛은 그를 용사로 선택했지만, 저 악마는 용사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니 처단해야 합니다. 그 업은 제가 짊어질 터이니, 성녀후보님은 성녀의 업을 따라주십시오.”
크리스티나는 몇 번인가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13년 동안 짓눌려 온 저주가 가슴 깊은 곳에서 내뱉고 싶은 말들보다 무거웠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유진의 입이 열렸다.
세르지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지 마.”
이번에는 확실하게 말했다.
“거기 그냥 있어.”
크리스티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진은 보란 듯이 성검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용사고 성녀고 그딴 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날 알아. 나도 널 알고. 그거면 된 거지.”
“……감히…… 성녀마저 부정하는 것인가……!”
세르지오는 분노하며 일갈했다. 하지만 유진은 세르지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가기 싫잖아.”
“닥쳐라!”
“뒷일이 걱정돼?”
유진은 성검을 움직여 세르지오를 가리켰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네가 바란다면, 나는 저 개 같은 새끼를 죽여줄 거니까.”
“…….”
“사실 네가 바라지 않아도 상관없어. 네가 죽이지 말라고 말해도 나는 저 새끼를 죽일 거다.”
크리스티나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유진 라이언하트는 그런 사람이었다. 절대로 용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 성검을 자유롭게 다루는 주제에 빛에 대한 신앙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유진이 성검에서 내뿜었던 빛은 찬란하고 따스했다.
올곧은 신앙으로 추기경에 오른 양부는ㅡ 크리스티나에게 그런 빛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양부의 빛은 언제나 차가웠다. 대성당에서 예배를 집전할 때마다 양부는 빛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말했다. 크리스티나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양부에게서 빛의 은혜와 사랑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가족다운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양부는 크리스티나를 딸로 여기지 않았다. 당연히 성녀가 되어야 할, 그런 존재로 여겼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티나도 양부를 아버지라 여기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저 하나뿐인 가족은 언제나 두렵기만 한 경원의 대상이었다. 소녀를 벗어나며 시도했던 저항은 언제나 가볍고 하찮았으며, 조악한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결국 크리스티나는 스스로 양부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래야 할 계기가 크리스티나에게는 주어진 적이 없었다. 13년 동안 저주처럼 반복되었던 기도와 성녀의 운명.
‘……아…….’
크리스티나는.
지금 자신이 갈림길에 서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았다. 괴롭고 견디기 힘들 적에는…… 언제나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높은 하늘 어디선가 모두를 내리쬐며 지켜보신다는 빛을 머릿속에 그렸다.
햇살이 따사로운 아침이 좋았다. 어렸을 적부터 매일 같이 기도를 올렸던 트레치아 대성당 빛의 기둥보다, 텅 빈 방의 창문에서 내려오는 햇살이 좋았다. 신성력이 녹아들어 빛을 발하는 샘보다 불 꺼진 방을 밝히는 자그마한 촛불의 빛에 안락함을 느꼈다.
“……유진 님.”
지금도 그랬다.
세르지오의 뒤에 선 천사.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 십자가. 저 찬란한 후광.
그 모든 것보다, 유진이 몸에 두른 불꽃이 더 밝게 느껴졌다. 저 희고 푸른 불꽃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크리스티나는 기도를 맺는 대신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헐떡거리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당신은…… 제가…… 성녀가 아니어도, 정말 괜찮은 겁니까?”
“크리스티나!”
세르지오가 고함을 지르며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격렬한 분노가 세르지오로 하여금 ‘성녀후보’라는 말을 뱉지 못하게 만들었다.
“감히, 감히 네가! 네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냐!”
분노가 살의가 되었다. 그 소름 끼치는 살의가 크리스티나의 몸을 더욱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억지로 눈을 뜨고서 앞을 보았다. 세르지오의 살의에서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르지오의 뒤편에 유진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울먹거리면서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세르지오가 성큼거리며 발을 뻗었다.
“……당신은…….”
크리스티나라는 이름 뒤에 로게리스의 성씨가 붙고, 빛내림을 받아 성녀후보가 되었다.
그때부터 크리스티나의 삶은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되었다. 왜 성녀가 되기 위해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빛의 사도라 불리는 성녀가, 왜, 이 기괴한 의식에서 제 몸을 칼로 그어야 하는 것인지. 고통에 눈물을 흘리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비명을 지르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왜 매일같이 고해실에 감금되어 성경을 암송해야 하는 것인지.
왜 나는 아니스 님과 닮았고, 성녀후보로 선택받은 것인지.
왜 자비로운 신께 고통과 절망을 토로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왜 증오를 내비치지 못하고 예쁘게 웃어야 하는 것인지.
왜 빛은 내게 드리운 어둠을 비추지는 않는 것인지.
“……용사가 아니어도…… 저를…… 구해주시는 겁니까?”
신이 존재하심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마저 의심해 버리면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신이 자신을 보살피지 않는 것을, 성녀가 되기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크리스티나에게는 최선이었다.
당장은 고통과 절망뿐이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에는 언제나 절망과 고통이 존재한다. 빛은 틀림없이 세상을 밝히고 있지만, 모든 이를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지만.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생전이 얼마나 끔찍한들, 올바르게 살아가며 신을 섬기면 틀림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
용사의 이야기를 읽었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모험. 그 유명한 동화책부터, 빛의 성경에 거론되는 용사의 이야기를 탐닉했다. 용사는 빛의 화신이다. 빛을 대신해 세상의 어둠을 밝힌다. 절망에 빠진 인간을 돕고 구원하며, 세상을 구한다…….
크리스티나는 그 이야기가 좋았다. 여태까지 빛이 자신을 비추지 않은 것은, 빛의 화신인 용사가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용사의 계시를 받았을 때.
크리스티나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기도했음에도 한 번도 자신을 비춰주지 않았던 빛이, 대뜸 용사가 태어났다는 계시를 준 것이다.
-이대로 떨어져 죽으면, 우리는 천국에 가는 걸까요?
크리스티나는 ‘성녀’가 되기 위한 의식이 끔찍하단 것을 안다.
성녀가 되기 위해 이런 짓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안다.
“제가…… 성녀가 아니어도, 저를 구해주시는 겁니까?”
모든 것이 두려웠다.
용사가, 유진이, 빛의 샘에서의 의식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언제나 절망을 느끼고 있는데. 트레치아에 돌아온 것과, 이 샘에 있는 것과, 성녀를 강요하는 운명과, 지금 저 앞에 선 양부의 시선이 두려운데. 성녀가 되기 위해 살아온 모든 삶이 어두컴컴했는데.
빛을 대신해 어둠을 밝히고, 사람을 구한다는 용사가 정작 나는 구하지 않는 것이 두려웠다.
“용사가 아니야.”
유진의 입이 열렸다.
그 순간, 세르지오가 크리스티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크리스티나의 목에 손을 뻗었다. 그렇게 목을 틀어쥐고, 빛의 샘에 집어 던지려고 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불꽃이 빛을 꿰뚫었다.
크리스티나의 금발이 뒤로 나부꼈다. 거대한 바람을 몰고 온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앞에 서서, 세르지오를 가로막았다. 그가 뻗었던 손은 성검에 가로막혀 있었다.
“성녀가 아닌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널 구하러 온 거다.”
크리스티나는 빛을 가로막아 선 유진의 등을 보며 울었다.
빛의 샘
ㅡ촤악! 세르지오의 손이 둘로 갈라졌다. 피는 흐르지 않았고, 갈라진 손이 즉시 달라붙었다.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세르지오는 가슴이 대못으로 후벼 파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방금 크리스티나가 내뱉던 말. 세르지오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네가…… 네가 감히!”
세르지오의 두 눈이 지독한 살의로 빛났다.
그는 용사가 타락했다는 것보다, 크리스티나가 성녀를 부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을 부정하는 일이다. 사람이,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꼴이란 말이다.
“비켜라!”
세르지오는 유진을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연히 유진은 비켜설 생각이 없었다. 등 뒤의 크리스티나가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물러서지 않고, 가쁜 호흡을 골라가며 신성마법을 쓰려고 했다.
유진을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성검을 들어 올렸다. 툭. 그는 가볍게 손을 뒤로 밀었고, 자그마한 힘이 크리스티나의 몸을 뒤로 떠밀었다.
“네 몸이나 지키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유진 님……!”
크리스티나는 당황하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든 유진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건 학습 된 두려움의 일환이었다. 유진에게 상관없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성녀가 아니게 된 자신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되어버린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직면하기 괴로웠다.
그래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자신이 무가치하지 않고, 지금 유진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무리하지 마.”
“……아…….”
“거기서 보기나 해.”
크리스티나는 아릿한 가슴을 움켜쥐며 유진의 등을 보았다. 그 등은 세르지오가 일으키는 빛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았다. 그러나 저 거대하고 찬란한 빛은 유진을 넘어서지 못했다. 역광에 크게 번지는 그림자를 보며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진이 일으킨 불꽃이 빛을 침식했다. ㅡ꽈아앙! 걷어찬 지면이 박살 나고, 유진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머지않은 거리에 서 있던 세르지오는 괴성을 지르며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전진을 가로막을 생각이었지만 실패했다. 굉음과 함께 세르지오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세르지오는 부릅뜬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며 왼손을 뻗었다. 충돌에 박살 났던 몸은 이미 재생 중이었다. 촤라락! 뼈가 분쇄되어 흐느적거리는 왼팔에서 붉은 천이 풀려나갔다. 그렇게 쏘아진 천이 성검을 휘감았다.
“빛이여!”
세르지오가 고함을 질렀다. 그와 함께 비행하던 천사들이 바람에 호응하며 양손을 뻗었다. 찬란한 빛이 천과 연결되고, 성검에 두른 불꽃이 천에 억눌려갔다.
[유진 님! 워, 월광검을 꺼내세요!]
망토 안의 메르가 기겁하며 유진에게 외쳤다. 그녀는 저 천이 드높은 봉마력을 가진 아티펙트이며, 지금 세르지오가 펼친 신성마법이 강력한 봉인계열의 신성마법임을 알았다.
세르지오의 봉인이 아무리 강력한들, 월광검이라면 봉인 통째로 부숴버릴 수 있다. 유진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알면서 쓰지 않는 것이다. 나중에 무식하다 욕을 먹을 것이 뻔했지만, 유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 싸움에서는 성검만 쓴다.
그렇게 결심했다. 머나먼 뒤편에서 지켜보던 크리스티나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토록 강렬하던 불꽃은 칭칭 감긴 천을 넘어서지 못했다. 세르지오는 불꽃이 봉(封)해졌음을 확인하고 유진에게 뛰어들었다.
오른팔의 성흔은 이미 피에 흠뻑 젖었다. 배어 나오는 피는 이제는 방울 져 떨어지는 수준을 넘어 줄줄 흐르고 있다. 세르지오는 피범벅의 손을 움켜쥐었다.
화악! 그의 손에서 터져 나온 빛이 수백 개의 검이 되어 유진을 에워쌌다.
[유진 님!]
메르가 비명을 질렀다. 유진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성검은 천에 휘감겼고, 불꽃은 봉인되었다.
하지만 유진은 불꽃이 꺼지지 않았음을 느꼈다. 환염식이 만들어낸 검강은 사그라지지 않고 천의 아래에서 꿈틀대고 있다.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집중’했다.
수백 개의 성검이 유진을 향해 쇄도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세르지오는 섣불리 승리를 확신하지 않았다. 천사들이 입을 열어 찬송가를 불렀다. 지면과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손이 나타났다. 그렇게 나타난 4개의 손이 쇄도하는 검을 따르며 유진을 감싸 쥐었다.
빠직.
그 소리는 아주 작았다. 하지만 세르지오는 그 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 뒤따르는 강렬한 예감. 전신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불길한 공포. 예기치 않게 도달한 사선(死線)이 세르지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이대로 나아가면 죽는다.’
세르지오는 그 예감을 묵살하지 않았다. 급히 걸음을 물렸을 때.
번개가 사방으로 폭사했다. 그 사이사이에 불씨가 나부꼈다. 세르지오는 크게 뜬 눈으로 빛과 불꽃의 저편을 보았다.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봉인력을 가진 천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그 아래에 억눌려 있던 불꽃의 색채는 아까보다 훨씬 짙고 불길했다.
유진에게 쇄도하는 수백 개의 검들이 불꽃에 포착되었다. 불꽃이 빛을 집어삼켰다. 뒤따르던 4개의 손. 활짝 펼쳐 유진이 서 있는 공간을 통째로 붙잡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불꽃이 터지고 손이 흩어졌다.
꽉 다문 입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불꽃을 억누르던 봉인을 역으로 이용해 검강을 구성하는 마나를 응축했다. 그 위에 검강을 한 번 더 중첩했다.
3중첩의 공검. 더욱 늘어난 흑점이 점점 번지고 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한 출력에 성검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유진은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며 성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아……!”
크리스티나는 멍한 눈으로 성검을 보았다.
불꽃을 정면에서 보고 있던 세르지오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성검을…… 성검을 어디까지 모욕할 셈인가……!”
저 불꽃을 보라. 빛의 화신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불길한 빛이다. 세르지오가 보기에 저 불꽃은 끔찍하고 추악했다. 빛과 성검이 가져야 할 따스함과 찬란함이 모조리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세르지오는 덜덜 몸을 떨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날개를 펼친 천사들이 세르지오의 뒤에 섰다.
ㅡ화아악! 피범벅의 오른팔에서 빛줄기가 엮이더니, 거대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후광이 찬란한 화살을 만들었다. 신성마법 중에서도 최상위의 위력을 자랑하는 빛의 활. 저 활에서 쏘아내는 빛은 마법결계와 오러실드를 무시하고 존재를 관통해 버린다.
성검을 들고 선 유진과, 뒤편의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이대로 화살을 쏴버리면 크리스티나까지 휘말릴 것이다. ㅡ도망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세르지오는 번쩍이는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정화되어라!”
콰르르르!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빛이 일점에 모였다.
크리스티나는 그 거대한 힘을 느꼈다. 세르지오는 크리스티나가 겁에 질려 도망칠 것을 예상했지만, 크리스티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기겁하며 유진에게 달려 나갔다. 저 포악한 공격에서 유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를 본 순간, 세르지오는 미칠 것만 같은 분노를 느끼며 화살을 쏘았다.
뒤편에서 크리스티나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기는 늦었다. 사실 꼭 말로 전할 필요는 없었다.
쇄도하는 화살. 두 눈을 불태우는 것만 같은 빛.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머리 위에 든 성검을 내리찍었다.
3중첩의 공검. 점점 번져가던 흑점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 순간 검강을 구성하던 불꽃이 완전하게 검은색에 침식되었다.
화살이 분쇄되었다. 빛은 파편을 남기지 못하고 소멸당했다. 역광이 세르지오를 덮쳤다. 천사들이 날개를 뻗어 세르지오를 감쌌다. 그 날개마저 불탔다. 3명의 천사들이 차례대로 소멸했다.
새카만 선이 공간을 그었다.
크리스티나는 더 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순간……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빛이 이쪽을 덮쳐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밤이 되었다.
그 한복판에 유진이 서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지금 벌어진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꿀꺽 침을 삼켰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세르지오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에…… 휩쓸렸다. 몸의 절반이 소멸했다. 간신히 상반신만이 남았다. 그조차도 성흔의 기적이었다. 성흔이 내뿜는 빛이 세르지오의 오른팔과 몸의 반절을 가호하고 있었다.
“……크륵…….”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숨을 쉬니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르지오는 가까스로 고개만 들어 앞을 보았다.
상처 하나 없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 홀린 눈동자는 유진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세르지오는 이를 악물었다.
저 얼굴.
신실한 아니스 님과 똑같은 얼굴로, 감히.
빛에 휘감긴 오른팔을 보았다.
성흔이 발하는 빛은 저 어둠을 밝히기에는 너무나도 작았다…….
빛을 내지 않는 성검을 보았다.
그 모든 것에 절망을 느꼈다.
동시에 강렬한 사명감을 느꼈다.
성녀후보의 의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았다. 애당초 ‘저것’은 더 이상 후보라고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저만한 적성과 일체감과 완성도를 가진 성녀후보를 또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성품에 크나큰 결함이 있지 않은가?
기적과 같은…… 존재.
크리스티나가 처음 탄생했을 때, 세르지오는 빛이 기적을 내리셨노라 확신했다. 섣부른 확신이었다. 용사가 스스로 타락했듯, 성녀후보도 스스로 타락해 버렸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할 수밖에. 타락한 용사를 죽이고, 성검을 회수한다. 타락한 성녀후보를 폐기한다. 그를 이루면, 빛은 반드시 다시 기적을 내려주시리라.
‘……정화해야 한다.’
저 악마들을 죽이지 못하고 세상에 풀어놓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세르지오는 그 확신에 일말의 의심을 갖지 않았다.
‘……성령이여…….’
세르지오는 삐걱거리는 오른팔을 움직여 제 가슴에 얹었다.
‘제 영(靈)과 육(肉)에 깃드소서.’
피범벅의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꿈틀대는 성흔이 손가락을 타고서 세르지오의 가슴으로 옮겨갔다. 이건, 최후의 기적이다. 성흔으로도 대가를 대신할 수가 없다. 오히려 존재의 모든 것을 성흔에게 바치어야만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이다.
그 결과 자아 없이 빛을 밝히는 횃불이 되겠지만, 세르지오는 기쁜 마음으로 이 순교를 받아들였다.
ㅡ어둠 속에서 빛이 피어났다.
자그마한 빛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세르지오의 몸 전체에 성흔이 번져갔다. 성흔이 전신을 뒤덮었을 때. 육체가 빛으로 화했다. 그 모습은 마치 빛의 화신처럼 보였다.
빛줄기가 어둠을 관통했다.
유진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고통을 느꼈다. 직전에 몸을 틀었다고 생각했는데, 빛에 휩쓸린 왼팔이 너덜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가로트의 반지가 가호하지 않았다면 왼팔이 통째로 뜯겨나가거나 소멸당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유진은 혀를 차며 흑암의 망토를 몸에 둘렀다. 왼팔을 휩쓸었던 빛. 세르지오는 인간의 형태를 한 발광체가 되어, 하늘 높은 곳에 서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 하늘은 밤이 아닌 것처럼 밝았다.
“……보아라.”
세르지오는 지상에 선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전능한 빛이다. 모든 세상을 밝히는 신의 힘이다. 너희 타락한 악마들은, 절대로 이 빛을 더럽힐 수 없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유진은 세르지오가 내뿜는 빛을 가늠해보았다.
3중첩.
일검에 소멸시킬 수 있나? 성흔의 가호를 관통하기 충분한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저 썩을 기적은 이치를 벗어나도 너무 벗어나 있었다.
똑같이 이치를 벗어난 월광검을 꺼낸다면.
‘하멜.’
……월광검을 써버리면 의미가 없다.
마법을 쓰지 않고, 다른 무기를 쓰지 않고, 성검만을 고집하는 것은.
진혼(鎭魂)이었다.
‘당신은 고집이 너무 셉니다. 왜 굳이 그렇게 싸우는 겁니까?’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너랑 달리 구분은 해.”
유진은 피식 웃으며 너덜거리는 왼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지금은 이렇게 해야 돼.”
세르지오의 손이 그랬던 것처럼, 피범벅의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유진은 신앙이나 빛에 기도하고 의존하며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바쳐 불꽃을 일으켰다.
ㅡ두근.
이그니션이 코어를 폭주시켰다. 유진은 날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나를 통제했다.
미쳐 날뛰던 마나가 유진의 조율을 떠나 6번째의 별을 만들었다. 유진은 전신이 오싹거리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백염식의 6성. 그로 인한 변화를 느긋이 관조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급격하게 불어난 마나가 유진의 의지에 따라 성검에 집중되었다.
‘뭐지?’
공기의 무게가 달라진 것만 같았다. 지금 세르지오는 빛 그 자체가 되어 하늘을 밝히고 있었으나, 점점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착각이다. 그럴 리가 없다. 세르지오는 제 몸에 깃든 성령의 전능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빛이 아래로 떨어졌다. 눈부신 하늘이 통째로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유진은 그 경이적인 광경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빛이 저만큼이나 환한데, 유진의 눈은 모든 것을 또렷하게 보았다. 눈으로 쫒을 수 없을 만큼 빠르던 저 빛이 지금은 아주 잘 보였다.
오히려 조금 느리게 보였다.
백염식의 6성 단계에서 펼친 이그니션은 유진에게 아득한 시야를 비추었다.
“……하.”
유진은 마른 웃음을 토하며 오른팔을 들었다.
“반갑네.”
낯설지 않았다.
검푸른 불꽃에 휘감긴 성검이 하늘을 베었다.
가공할 힘이 세르지오의 의식을 흔들었다. 몸은 박살 나지 않았다. 뒤로 날아가지도 않았다. 이만큼이나 거대한 힘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참격은 오직 ‘빛’만을 지워버렸다.
그렇게 세르지오의 몸만이 하늘에 덩그러니 남았다. 그는 지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유진이 땅을 박차는 것은 보았다. 빠르게 다가오는 안광이 세르지오에게 거대한 공포를 전해주었다. 그는 뒤늦게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고, 유진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격렬한 불꽃이 세르지오의 뒤를 가로막고 있었다. 세르지오가 등진 하늘에는 더 이상 태양도 빛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유진이 일으킨 불꽃뿐이었다.
유진은 무덤덤한 얼굴로 성검을 들었다.
칼날에 불꽃은 없었다. 지금 유진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름답고,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예식용 검이었다. 그뿐이었다.
유진은 빛나지 않는 ‘검’으로 세르지오의 가슴을 꿰뚫었다.
푸욱.
심장이 관통당했다. 세르지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입을 쩍 벌리고서 가슴을 꿰뚫은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관통당한 심장이 박동하고 있다.
세르지오는 그를 깨닫고서 얼굴 한복판에 미소를 지었다. 죽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다가온 것이 역으로 기회가 되었다.
세르지오는 활짝 벌린 양팔을 유진에게 뻗었다. 그렇게 다시금 빛을 일으켜, 유진을 통째로 정화하려고 했다.
자그마한 빛이 일어났다.
ㅡ쩌적.
그 빛은 세르지오가 일으킨 빛이 아니었다. 심장을 꿰뚫고 있는 검이 발하는 빛이었다.
“아……!”
세르지오의 급히 성흔을 의식했지만, 성흔은 이전과 같은 빛을 일으켜주지 않았다.
성검의 빛이 점점 강해졌다. 그럴수록 세르지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이럴 리가 없었다. 왜 성흔이? 왜, 성검이, 저 악마의 손에서…… 저토록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한단 말인가?
“비, 빛이…….”
더듬거리며 이어지는 말. 들어주지 않았다. 유진은 심장을 관통하고 있는 성검을 비틀며 뽑았다. 세르지오는 비틀비틀 물러서며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유진을 보다가,
아래를 보았다.
주저앉은 크리스티나가 크게 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럴…….”
뻔한 말.
휘두른 검이 세르지오의 목을 베었다. 그 머리가, 빛에 삼켜졌다. 번져나간 빛이 세르지오의 몸까지 삼켰다.
ㅡ퍼어엉!
마치 축제의 불꽃놀이처럼.
세르지오의 몸이 무수한 불씨를 그리며 폭발했다. 유진은 흩어지며 쏟아지는 불씨를 등지고서 아래로 떨어졌다.
유진은 흩어지는 빛을 뒤로하고 천천히 크리스티나의 곁으로 떨어졌다.
다시 밤이 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앞에 벌어진 것들이ㅡ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크리스티나에게는 하나의 꿈처럼 느껴졌다.
결코 악몽은 아니다.
“말했지?”
유진은 가슴에 얹었던 손을 떼며 크리스티나에게 다가왔다.
크리스티나는 밤하늘에서 눈을 떼어 유진을 돌아보았다.
“구하러 왔다고.”
유진은 보란 듯이 히죽 웃어주었다. 몸이 멀쩡하지는 않았다. 왼팔은 너덜거리고, 머리가 아프다. 심장도 아프다.
그래도 몸은 움직였다.
“……아…….”
크리스티나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하늘은 어둡다. 밤이니까, 어두운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지금 하늘이 참 밝다고 느꼈다.
“……아아…….”
크리스티나는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마주 웃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우는 얼굴 외에 다른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항상 써왔던 가면들이 지금은 하나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그냥 울었다. 감추지 않고, 솟구치는 감정대로 눈물을 쏟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부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어릴 때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울었다.
울어도 너무 울길래 유진은 슬며시 크리스티나에게 손을 뻗었다.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난감한 일이라 대충 눈물이라도 닦아주려 했던 것이지만, 앙앙거리며 울던 크리스티나가 대뜸 유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았다.
“……음…….”
몸이 아프다…….
아무리 짧게 끝냈다지만 이그니션의 반동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크리스티나가 울면서 얼굴을 가슴에 비빌 때마다, 유진은 근육이 찢어지고 늑골이 부서지고 심장이 쑤시는 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렇다고 이렇게나 서럽게 우는 것을 밀쳐낼 수는 없지 않은가.
“……뿌득…….”
유진은 신음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크리스티나의 눈물을 받아주었다.
빛의 샘
“……흠…… 흠흠…….”
크리스티나는 어색한 기침을 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너무 많이 울고 오열한 탓에 눈가는 쓰리고 목소리도 조금 쉬었다. 크리스티나는 축축하게 젖은 유진의 가슴팍을 힐긋거리면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 어떻게 이곳에 오실 수 있었던 겁니까?”
물어보기에는 한참 늦은 질문이었지만, 그렇다고 물어보지 않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아직 이 모든 것이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빛의 샘. 신성제국에서도 존재를 아는 성직자가 드물다. 사실 크리스티나도 이 빛의 샘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고 가는 것은 무조건 워프게이트만 사용하고, 그 워프게이트는 세르지오 추기경의 심복 중의 심복이 관리하고 있다.
“기적.”
유진은 눈물로 젖은 앞가슴을 손으로 털며 대답했다. 그렇게 손을 털 때마다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길게 울면서 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지를 실감했다.
“……기…… 기적.”
크리스티나는 더듬더듬 내뱉었다.
……기적?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저 기적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성녀후보로서 겪었던 일은 끔찍했지만, 신의 존재는 믿었다. 사실 크리스티나로서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지만, 어쨌든 크리스티나에게 있어서 ‘기적’은 신이 일으키는 것이었다.
“……유진 님은…… 기적 같은 것을 믿지 않으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유진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눈앞에서 이런 일을 보기도 했으니, 유진은 앞으로도 평생 신은 믿지 않을 것만 같았다. 크리스티나는 그런 유진이 ‘기적’을 말한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작은 기적 정도는 믿지.”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스스로 걸으려고 했는데…… 발을 뻗은 순간, 몸 전체가 휘청거렸다. 이그니션의 반동 때문이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급히 다가와 유진을 부축해 주었다.
“괘…… 괜찮으신 겁니까?”
“별로 괜찮지는 않은 것 같은데. 다른 것보다 왼팔이 좀 아프네.”
세르지오의 빛에 휩쓸렸던 왼팔. 뼈가 뒤틀리고 살이 뭉개져 있다. 유진으로서는 팔이 아예 뜯겨나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 치, 치료.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허둥거리며 기도를 맺으려 했다. 하지만 유진은 고개를 저어 거절하며 휘청휘청 앞으로 걸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샘.”
그 대답에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번 심호흡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저 샘에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아예 부숴 버릴 생각이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 샘이 신성제국 유라스에서 어떤 가치를 지녔든, 그건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애당초 이곳에 침범해서, 수백에 달하는 성기사와 심문관을 죽였다. 교황 다음의 위치에 있는 세르지오 로게리스 추기경을 죽였다.
이제 와서 유라스의 눈치를 보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유진은 누가 뭐라건 간에 저 끔찍한 샘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아니, 저 샘만 지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저 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그 지하와, 파이프와, 그 전부를 지워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해 교황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뭔지 모르겠어.’
유진은 아직 손에 쥐고 있는 성검을 힐긋 보았다.
샘을 부순다. 그것을 바라는 것은 유진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성검 알테어. 지금만 해도 이 알 수 없는 검이 유진을 샘에 가까이 가도록 이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유진이 빛의 샘의 근원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성검의 인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르지오의 목을 베었을 때.
유진은 성검의 빛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었다. 성검이 멋대로 빛을 일으키며 세르지오의 목을 베고, 놈의 몸을 빛으로 집어삼켜 터트렸다.
진짜 신벌(神罰)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빛의 신? 아니면…….’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빛의 샘 앞에 섰다. 부축하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경직된 얼굴을 힐긋 보며 말했다.
“힘들면 뒤에서 기다리는 것이 어때?”
“……제가 아무리 힘이 든들, 지금의 유진 님보다는 잘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며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제가…… 이곳에서 물러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유진 님. 제가 이 샘을 부수고, 지워 버리고 싶다고. 얼마나 많이, 간절히 바라왔겠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니다.
크리스티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떠한 열망을 느꼈다. 샘을 부수고 싶다. 지우고 싶다……. 그런 종류의 열망은 아니었다.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고, 왜 그런 것인지도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크리스티나는 지금 자신이 물러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천천히 성검을 앞으로 뻗었다.
부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다양하게 있다. 공검까지 쓸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냥 검강을 쏟아부어 휘두른다면 이 샘을 통째로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진동하는 성검에게 의식을 집중했다.
성검은 안개 속을 떠돌았을 때처럼 유진의 손을 이끌었다. 칼날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유진은 그것을 노려보며, 성검이 이끄는 대로 앞으로 발을 뻗었다.
찰박.
빛의 샘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럴수록 성검의 떨림이 강해졌다.
크리스티나는 설마 다시 샘에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진과 함께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지 않고 샘의 중앙까지 계속해서 걸어갔다.
“……읏……!”
크리스티나는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몇 번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유진의 뒤를 따르기 위해 조심스레 발을 뻗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샘과 닿은 순간.
과거에 이 샘에서 겪어왔던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몸에 상처는 없다. 칼로 긋지도 않았다. 피가 흐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에게 있어서 이 샘 자체가 거대한 트라우마였다. 평생 그녀에게 성녀로서의 운명을 강요해 온 양부는 죽었지만, 그렇다 하여 크리스티나의 모든 트라우마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티나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오랫동안 주저하는 대신, 계속해서 발을 뻗었다. 크리스티나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저 끔찍한 기억들에 속박되어 주저앉거나 멈춰 버리면, 이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직접 마주해야 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샘 중심에 선 유진이 보였다. 그는 더 나아가지 않고,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차분한 금색 눈동자를 본 순간.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움켜쥐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용사와 성녀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용사가 아니어도 유진 라이언하트는 찬란한 사람이었다.
ㅡ가슴의 떨림이 멈췄다. 크리스티나는 평온히 가라앉은 얼굴로 유진을 향해 다가왔다.
성검의 빛이 강해졌다.
유진은 빛의 인도를 느끼며 성검을 거꾸로 돌렸다. 그러고는 성검을 샘의 중앙에 내리꽂았다.
샘의 수면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샘 전체가 부글부글 끓고, 물에 녹아든 신성력이 성검의 빛에 이끌리듯이 부풀어 올랐다.
갑작스러운 빛이 눈이 부셔, 크리스티나는 두 눈을 한 번 감았다.
눈을 떴을 때.
자그마한 소녀가 유진과 크리스티나의 앞에 서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소녀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나?”
크리스티나가 보기에 저 어린 소녀는 자신의 과거였다.
“아니스.”
유진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스. 그 이름에 크리스티나는 흠칫 어깨를 떨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다시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스’라는 이름을 듣고 나니, 저 얼굴이 자신의 어릴 적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점이라고 해봐야 분위기나 눈매 정도뿐이다.
유라스에는 ‘신실한 아니스’의 동상과 초상화가 셀 수 없이 많다. 크리스티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아니스의 모습을 보아왔다. 자신의 얼굴이 아니스와 닮았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림이나 동상을 보아 ‘닮았다’고 느끼는 것과, 진짜로 똑같이 생긴 사람을 앞에 두고서 느끼는 기분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흠.”
소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는 무표정한 뺨을 한 번 어루만진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샘…… 소녀는 샘 전체를 둘러본 뒤에, 자신의 앞에 선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높이가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껴버렸다. 소녀는 아무 감정 없는 뺨을 어루만지다가, 방긋 웃었다. 그 미소에 크리스티나는 섬뜩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소 지은 소녀의 얼굴. 크리스티나가 어릴 적부터 거울을 보며 연습하던, 이상적인 성녀의 미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유진은 소녀를 향해 웃어줄 수가 없었다.
“……너는 고약한 여자야.”
소녀는 여전히 방긋 웃고 있었다. 포옹! 소녀가 한 걸음 걷자, 샘을 뒤덮은 빛이 소녀의 몸을 감쌌다. 그렇게 소녀의 모습이 바뀌었다. 아니, 성장했다. 10살을 남짓했던 몸이 자라나고, 유진이 잘 알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아…….”
크리스티나는 너무 놀라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전성기의 모습으로 성장한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에게는 거울을 마주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곧,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그것이 단순한 우연일 리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치솟는 구역질에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상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을.”
아니스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여덟 장의 날개를 펼치며 크리스티나에게 다가왔다.
“혐오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니스는 몸을 낮춰 크리스티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까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 크리스티나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만큼 크리스티나가 떠올린 상상은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당신은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몸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크리스티나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해서 흐느꼈다.
여덟 장의 날개가 천천히 내려앉으며 크리스티나의 몸을 감쌌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눈을 감았다.
“……아…….”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머릿속에 전해지는 또렷한 심상을 이해하려 했으나, 그것은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지며 크리스티나의 두 눈이 멍하니 풀렸다.
아니스는 맞대었던 이마를 떨어트리고서 크리스티나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크리스티나를 샘에 눕혀 놓았다.
“……하멜.”
아니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여전한 미소를 짓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당신에게 그런 표정은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전생보다 얼굴이 달라서인지…… 그런 표정도 꽤나 어울리는군요.”
유진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한 번 만져보았다. 일그러진 얼굴. 뺨이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유진은 애써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뭘 한 거냐?”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아니스는 눈을 감은 크리스티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가련한 아이는, 저와 똑같으니까요.”
“……대체 뭐야?”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이, 빌어먹을 샘의 근원을 봤다. 네가 나를 그곳으로 인도한 거겠지.”
“사실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스의 미소가 살짝 흔들렸다.
“하멜. 당신도 보았으니 알겠지만, 그…… 것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옛날부터 끔찍한 것은 셀 수 없이 많이 봤었지.”
300년 전은 그런 시대였다. 마족에게 혼을 팔아넘긴 흑마법사들이, 도덕적 관념 따위는 갖지 않고 도리를 벗어난 온갖 끔찍한 실험을 해댔었다. 헬무드 인근에는 흑마법사들의 마법공방이 여럿 있었는데, 그런 공방에서 가장 흔하게 벌어지던 것이 사로잡은 노예를 사용한 인체실험이었다.
유진은 전생에 몇 번이나 그런 공방을 봐왔다. 쓸어버렸다.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아니스도, 그렇게 했었다. 그녀는 붙잡혔던 노예들을 풀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실험을 벌이던 흑마법사들을 신성마법으로 태우고, 직접 메이스를 휘둘러 머리를 박살 냈었다.
도저히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너무 실험이 ‘진행’되어 버린 사람들.
흑마법사들은 전쟁에서 사용하기 위한 마법생물체나 병기를 만드는 것에 몰두하곤 했는데, 그런 류의 실험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어 버린다. 인간과 몬스터와 마물과 다른 이것저것을 섞어 만든 키메라. 흑마법의 위력을 높이기 위한 산 제물. 새로운 마법을 만들고 시험하는 데 쓰인 노예들도 많았다.
아니스는 자처해서 그들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었다. 그녀는 망가지고 죽어가는 사람이나, 인간이 아니게 된 존재들을 빛으로 감싸며 안락사시켰다. 그때마다 항상 슬픈 얼굴로 기도를 읊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떠나, 부디 천국에 들기를.
“……이 샘의 근원은.”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전생에 봤던 흑마법사의 공방보다 끔찍했다. 도저히…… 빛의 신을 섬기는 성직자들이 할 짓거리가 아니었어.”
파이프와 연결된 여과장치.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성유물’이었다. 말이 성유물이지, 오래전에 죽은 성녀들의 유골이었다. 빛의 샘은 그 유골을 거치고, 신성력을 강제적으로 샘에 ‘녹여낸다’. 그리고 중앙 파이프를 통해 샘으로 흘려보낸다.
“필요했던 것이지요.”
아니스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녀란 결국 그렇게 만들어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가련한 아이도 그렇고, 이 아이 전에 존재했던 모든 성녀후보가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지요. 그리고 저 이전의 수많은 성녀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와 크리스티나는 특별해 보이던데.”
유진은 샘의 근원에서 보았던 환영을 떠올렸다.
수많은 소녀들. 얼굴이…… 보이지 않던, 소녀들. 그들의 존재는 환영 속에서도 옅었으나,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존재는 또렷했다.
지금도 그랬다. 아니스는 이 ‘기적’에서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세계수에서 강림했던 것처럼 여덟 장의 날개를 펼치고, 정말로 실재하는 것처럼 유진의 앞에 있었다.
“예.”
아니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와 이 아이는 특별합니다. 이전의 성녀와 후보들 중에서도 압도적이라 할 만큼의 적성과 일체감과 완성도를 타고났죠.”
적성, 일체감, 완성도.
유진은 그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상냥해요, 하멜.”
아니스는 엷은 미소를 짓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저는 당신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이미 저와 이 아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겠지요. 그럼에도 직접 말하지 않는 것은, 혹시라도 당신의 추측이 틀렸을 때, 제가 불쾌해하지 않을까 배려하는 것이겠죠.”
“……너한테 한 대 처맞고 싶지 않을 뿐이야.”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사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아. 확인하고 싶지도 않고. 성녀가 무엇이건, 나한테는 아무 상관 없다고. 너는 그냥 아니스고, 저 녀석은 크리스티나야. 그 외에 무어가 중요하지?”
“……하멜.”
아니스가 유진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굳이 외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어 하며 저와 이 아이를 이해해 주지만. 저는 당신에게 그런 동정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당신답게, 똑바로 절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저 아이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동정이라.
유진은 씁쓸히 웃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너는 뭐지?”
그래서.
아니스가 바라는 대로, 똑바로 물어보았다.
“너와 크리스티나. 아니, 성녀는…… 대체, 뭐냐? 이 샘에서 왜 그런 짓이 일어나는 거지?”
아니스는 맑은 미소를 머금고서 유진의 앞에 섰다.
“머나먼 고대. 이 땅에 처음 강림하신 빛의 신. 그는 자신의 피와 살로 성검 알테어를 만들고, 세상에 빛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종교를 만들고 유라스를 건국했습니다.”
유라스의 건국신화. 신성제국을 처음으로 일으켜 세운 성황(聖皇)의 이야기.
“그 태고의 화신은 오랫동안 유라스에 군림하며, 혼란스러운 고대에 등불이 되셨습니다. 그를 필두로 하여 세상에 신앙이 전해지고, 여러 신들이 태어났으며, 사라졌습니다. ……성황께서는 긴 세월 군림하시며 유라스와 신민을 지키셨지만, 영생하지는 못하셨지요. 그분은 결국 화신으로서 세상에 강림하신 것이라, 언젠가는 내려오셨던 하늘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아니스는 떨리는 유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성황이 떠나가고, 많은 교인들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빛이 하늘에 올랐으니, 다시 세상이 어둠에 잠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들은 빛께서 다시금 화신을 내려주시길 바랐지만, 유라스에 새로운 빛의 화신이 태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빛을 바랐다.
“갈망은 새로운 숭배의 대상을 원했습니다. 빛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섬기기에는 추상적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보다 확실한 숭배의 대상이, 빛의 화신이 필요했습니다.”
“…….”
“고대의 유라스에는 교황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상징이 필요했습니다. 광신을 위한 상징들. 교황과 추기경의 몸에 깃든다는 성흔. 그것은 빛이 이 세상을 돌보고, 제 대리자를 ‘직접’ 선택하는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교인들이 교황과 추기경을 신처럼 숭배하게 되었죠.”
“……성녀는…….”
“교황과 추기경과 같은, 숭배의 상징이죠.”
아니스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최초의 성녀는 성황의 유골을 사용한 모조화신(模造化身)이었습니다.”
“…….”
“어린 소녀의 몸에 성황의 유골을 박아 넣은, 기적을 일으키는 신성병기. 숭배를 위해 만들어진 우상.”
고대의 광신도들은 그렇게 빛을 직접 만들어냈다.
빛의 샘
성황의 유골을 사용해 만들었다.
유진은 그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를 너무나도 벗어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이해를 하지 못할 것도 없기는 했다.
유진은 마법사다. 마도왕국이라 불리는 아롯에서 마법을 배우며, 온갖 논문을 섭렵하고 마법적 지식을 쌓았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마법실험이 가장 많이 벌어졌다고 알려지는 시대는 300년 전이다. 그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흑마법사들은 망설임 없이 인체실험을 벌였다.
하지만 빈도가 저 시대에 많았을 뿐.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어느 시대건 꾸준히 존재해 왔다. 그러한 실험을 벌이는 마법사가 무조건 흑마법사였던 것도 아니다.
마법사 중에는 미치광이가 많다. 그런 마법사는 자신의 궁금증이나 마법적 영감 따위를 위해 도리쯤은 가볍게 무시하곤 한다. 아니, 사실 ‘구상’에는 미치광이다운 광기나 도리를 무시할 비인간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유진만 하더라도 구상 자체는 간단하게 할 수 있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마법실험은 금기지만,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마법실험은 금기가 아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구역질과 망설임을 무시할 수 있다면, 마법사는 간단하게 몬스터의 몸을 가르고 존재를 농락한다.
구상은 간단하다. 실험 자체는 내버려 두고, 몬스터를 사람으로 바꿔 넣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유진은 아니스가 말하는 모든 것을 너무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최초의 성녀는 성황의 유골을 사용했다. 그 드높은 가치를 지닌, 유라스가 보유한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의 성유물을 미성숙한 소녀의 몸에 이식했다.
최초의 성녀에게 이식된 것은, 성황의 늑골이었다.
성황의 유해에는 살아 있는 성직자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막대한 신력이 깃들어 있었다. 성직자가 아무리 빛을 섬기고 기도해 끌어내는 신성력과, 성유물에 직접적으로 녹아 있는 신력은 비교가 불가능한 힘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녀는 모조화신이라고 할 만했다. 동시에 간단하게 기적을 일으키는 신성병기이기도 했다. 성녀는 그 존재만으로 유라스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다른 종교, 이단을 박해할 수 있었다. 성녀에 매료된 수많은 불신자들이 유라스로 개종했다.
“오래 살지는 못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아무런 특별함도 없던 소녀의 몸에 화신이, 신의 빛을 박아 넣은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녀는 여러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살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초대성녀는 고대의 광신도들이 벌인 미친 짓에 많은 의의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화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열광했고, 그렇게 만들어낸 성녀의 몸에 성흔이 깃든 것에 감격했죠.”
불완전한 존재. 성녀가 기적을 사용할 때마다 그 작은 몸에는 새긴 적 없는 성흔이 나타났다. 성흔은 고작 한 뼘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지만, 광신도들은 그 성흔이야말로 빛이 자신들을 보살피며, 이 행위가 결코 배덕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믿었다.
“초대 성녀 이후로 수많은 성녀들이 만들어졌고, 죽었습니다. 그들의 유해는 성유물이 되어 빛을 담는 그릇으로 쓰이고…… 후대 성녀후보에게 이식되었지요.”
성황의 성유물은 워낙 귀중한 것이라 초대 성녀 이후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성녀의 성유물이 사용되었다. 오히려 ‘성녀’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에는 성황보다는 성녀를 사용하는 편이 나았다.
다만, 성녀를 사용해 만들어낸 성녀는 초대성녀만큼의 기적을 펼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보충했다.
유라스는 오래전의 마법사냥에서 여러 마법들을 손에 넣었다. 그 사냥에서 거둬들인 전리품은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유라스의 이단심문관들은 흑마법사와 마법사를 마구잡이로 사냥하면서 그들의 연구성과를 취했고, 몇몇 마법사들은 죽이지 않고 생포하여 고문하고 노예로 부렸다.
그를 거려 모조화신에 대한 연구는 커다란 진전을 얻게 되었다. 마법사냥에서 얻은 전리품 중 가장 가치가 높았던 것은 피를 매개로 사용하던 혈마법이다. 유라스는 혈마법과 여러 연구를 결합하여, 만들어낸 성녀에게 추가적으로 신성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탄생시켰다.
빛의 샘.
성녀가 태어나는 이상, 이 샘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결국은 모두가 거짓말인 겁니다.”
아니스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교황과 추기경의 몸에 깃드는 성흔조차도, 신이 직접 내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빛을 광신하고 강직하여 결코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성직자들을 엄선해, 성녀의 몸에 나타났던 성흔을 인위적으로 새긴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새긴 성흔에는 사실 아무런 힘도 깃들지 않았습니다만…….”
유진은.
과거에 보았던 아니스의 등을 떠올렸다. 거대한 기적을 사용할 때마다 깊어지고, 크게 번져가던 성흔을. 아니스의 존재는 유라스에서도 특별했다. 머나먼 과거부터 존재했던 성녀들 중에서도 아니스의 존재와, 그녀가 일으키는 기적은 단연 으뜸이었다.
“저는 특별했죠.”
목소리는 경쾌했지만, 아니스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그 시대에는 저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후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뛰어났습니다.”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빛의 샘이 만들어지고, 성녀에게 힘을 깃들게 하는 방법의 실패율은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성녀가 가진 그릇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녀를 제대로 된 모조화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성황의 성유물을 사용해야 하는데, 초대 성녀 이후로 몇 번이나 시도는 했었지만 제대로 성공한 적은 없었다.
방법을 바꾸었다.
모조화신은 임신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미숙한 태아를 아예 뱃속에 이식해버렸다. 꽤 많은 실패를 거치고, 온갖 신성마법과 마법 등을 사용한 끝에 처음으로 모조화신에게서 갓난아이가 태어났다.
그 갓난아이는 어려서부터 끔찍한 실험을 거쳤다.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빛의 샘을 요람으로 사용했다. 버티지 못해 죽어가는 목숨을 그렇게 연명시켰다. 얼마 남지 않은 성황의 성유물의 아이에게 조금씩 이식시켰다. 뼈를 갈아서, 상처에 스며들게 만들었다. 혈마법으로 배양한 피를 아이의 심장에 흘려보냈다.
그렇게 유라스에서 완벽에 가까운 모조화신이 태어났다. 그 모조화신은 최초의 성녀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성흔을 타고났고, 기적을 사용할수록 성흔의 크기는 늘어나며 더 강력해졌다. 더욱이 그 존재를 기적의 증명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성흔을 고위성직자에게 새기며 일부나마 기적을 대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이 나라를 증오했습니다.”
아니스가 중얼거렸다.
“결코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마왕과 마족이 이 나라를 완전히 쓸어버리기를 바랐습니다.”
“…….”
“만약 제가 유라스에만 있었다면, 평생을 그런 증오를 품고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유라스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베르무트 님이 성검을 뽑았고, 저는 성녀로서 베르무트 님의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하멜. 제가 그 여정에서 무엇을 느꼈을 것 같습니까?”
유진은 아니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고요히 가라앉은 푸른 눈에서 감정을 읽는 것은 힘들었다. 전생부터 그랬다. 아니스는,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면처럼 두껍고 성녀다운 미소로 본심을 감췄다.
“……유라스가 끔찍한 것과는 상관없이, 신이 실재함을 느꼈습니다. 결국 기적은 존재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존재와 모든 것이 경멸스럽고 처참했지만, 세상은 그 이상으로 처참하단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그 시대에서 우리는 기적이었습니다. 베르무트 님도, 저도, 세냐도, 모론도, 하멜, 당신도. 우리 모두가 기적이었던 겁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었고, 부족하게나마 구해냈습니다. ……우리가…… 구하지 못했던 것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하멜, 당신 정도였습니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그랬을 겁니다. 다들, 그 여정에서 무언가를 느꼈고……. 변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던 신을 믿고 의존했습니다. 천국을 바라고, 모든 이를 천국에 인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화.
유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여정의 목적이 바뀌었다. 하멜은 처음부터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복수를 바랐다. 세상이 X같이 변했고, 내가 X같은 일을 겪었으니, 그를 벌인 마족과 마왕들에게도 X같은 일을 해주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그것 이상으로 세상을 어떻게 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했지만, 기왕이면…… 사람이 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복수심과 증오로 마왕을 죽이고 싶었는데, 마왕이 죽은 뒤에 세상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게 되었다.
“……너는…….”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천국에 가지 못했어.”
“……너무 일렀던 것이죠.”
아니스는 다시금 웃었다.
“사실은, 천국에 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지금 제 등에 돋은 날개가…… 그것에 대한 증명인 것입니다. 하멜. 그러니 당신은 저를 안타깝게 여기고,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스스로 천국에 가지 않은 것입니다.”
“……어째서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니스는 강했다. 신성제국이 무슨 수단을 쓰건, 저항하는 아니스를 사로잡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넌 오랫동안 신성제국에서 살았어. 그리고 돌연 순례를 떠났지. 그런 네가…… 왜, 그런 모습이 되어버린 건데? 크리스티나는…….”
아니스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깊었던 밤하늘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사라지려고 했습니다.”
아니스가 방긋 웃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무덤에 가서 기도를 올리고, 사라지려고 했습니다. 교황과 추기경은 제게 ‘다음’ 모조화신을 위해 희생할 것을 말했지만, 그들은 저를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스가 사라지려고 마음먹는다면 유라스의 누구도 아니스를 막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니스는 아무런 제지 없이 유라스를 떠났고, 나하마의 사막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너는…….”
“마음이 바뀐 것뿐입니다.”
아니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희생이란 것도 싫고, 제가 경멸하던 유라스를 위해 제 몸을 바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막에서, 당신의 무덤을 찾아가던 도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버린 겁니다.”
“…….”
“하멜. 당신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당신은 그 행동이 희생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그 장소에서 당신의 죽음을 보았던 모두가, 당신이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전부터 그랬습니다. 제 몸이 망가지는 것을 알면서도, 마왕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제 몸을 선두에 세웠죠.”
듣는 것이 괴로웠다.
유진은 시선을 떨구며 주먹을 쥐었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으니까.”
머뭇거리다가 내뱉은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못난 말이었다.
“……유폐의 마왕성은 지독했었지. 베르무트가 선두에 서면 안 되는 곳이었다. 모론도, 그랬다. 놈은 등신에 무식하니까. 누군가가 선두에서 길을 열어야 했다면, 내가…… 적임자였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아. 그때 모두가 동의했었잖아.”
“예. 그랬죠. 하멜, 당신의 말대로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앞에서 길을 열어야 했고, 당신이 적임자였던 것도 맞습니다. 그 결과 당신은 죽었습니다.”
“나는 내 죽음에 너희를 원망한 적 없어. 너희는, 도중에 몇 번이나 말했지. 더 올라가면 위험하다고. 일단은 물러서서 태세를 정비하자고. 그를 거절하고 계속 가기로 한 것은 내가 선택한 거고, 마지막에 뒈진 것도 내가 멋대로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들 우리가 당신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유진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멀리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결국 당신은 자신을 희생한 겁니다. 저는, 희생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던 중이었고 말입니다. 하멜. 저는 변덕이 꽤 심합니다. 별다른 계기랄 것은…… 없었죠. 사막의 태양은 참으로 환하고 뜨겁더군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당신의 무덤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세냐는 은거했고…… 아니, 은거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머나먼 기억을 더듬으며 사막을 헤매야 했죠.”
아니스는 그때를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헤매며,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이대로 내가 사라져 버리면? 제가 경멸하던 유라스에게는 고약한 선물이 되었겠죠. 하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합니까? 저는 기적적인 존재였습니다. 제가 사라지건 사라지지 않았건, 유라스는 여태까지 그랬듯이 성녀를 만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만큼 훌륭한 성녀는 만들 수 없었겠죠.”
세상이 완전히 평화를 얻었다면.
아니스가 자신이 사라지고 난 다음의 미래를 생각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제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제 삶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완전에 가깝지만 정말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머지않아 죽고, 사라져서, 천국에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죠.”
죽음이 머지않았다면 아니스가 고민할 이유도, 신성제국이 아니스의 후대 성녀에 대해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아니스는 머지않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신성제국은 후대의 성녀를 필요로 했고, 아니스는 그에 협조해 주고 싶지 않았다. 3명의 마왕을 죽였으니, 뒤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죽은 동료의 무덤으로 향하면서.
모든 마왕을 죽이겠다며 날뛰던 난폭한 동료를 떠올렸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무식한 용병을 떠올렸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동료들에게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멜은, 남은 동료들이 당연히 모든 마왕을 죽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바라던 대로 세상에 평화라는 것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세상에는 2명의 마왕이 남아 있었고.
아니스는 머지않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막을 떠돌던 저를 설득하기 위해 유라스의 성직자들이 왔습니다.”
여명이 밝아온다. 아니스는 동트는 하늘을 등지고서 말했다.
“그때…… 변덕을 부린 것뿐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유라스로 돌아갔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저는 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바라지도 않는 아이를 잉태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자살은 제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 추잡한 나라에 대한 반항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천사가 된 거냐.”
유진은 아니스의 등에 돋은 날개를 보았다.
“네.”
아니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제 육체는 죽었지만, 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절 비추는 빛은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저는 천국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남아서.”
천천히 돌아간 시선이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저 아이에게 깃들 수 있었습니다.”
그 태연한 대답에 유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이윽고, 유진은 낮게 웃음을 토해버렸다.
“너는 뱀 같은 여자야. 알아? 나랑 세냐는 널 두고서 항상 그렇게 숙덕거렸는데.”
“하멜. 당신이야말로 알고 계십니까? 뱀은 재생과 영생의 상징이기도 하답니다.”
아니스는 불쾌감 하나 없는 미소를 유지하고서 대답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제 의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천국에 오르지 않은 것은, 아직 제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으니 말입니다. 제가…… 저 아이에게 깃들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아니스는 그런 크리스티나의 곁에 다가가 몸을 낮추었다. 그러고는 애달픈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보며, 뺨을 손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제가 특별했듯, 이 아이가 특별했던 것이죠.”
신성제국은 아니스의 시체로 성유물을 만들었다. 그것을 후대 성녀에게 이식하기보다, 완전에 가깝던 성녀를 복제하고자 했다.
300년 동안 많은 실패를 거쳤다. 복제품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혼이라면 뽑아내어 이식하면 된다. 가장 치명적이고 극복해야 할 문제는, 그렇게 배치한 혼과 복제해 낸 육체의 적합성이었다.
실패한 복제품들은 성녀후보도 되지 못하고 빛의 샘에 보내졌다. 그동안에도 성녀는 존재해야 했기에, 복제품을 이식한 불완전한 성녀들을 내세웠다. 그들도 결국에는 죽어 빛의 샘의 일부가 되었다.
수많은 실패를 거쳐.
완벽에 가까운 복제품이 탄생했다.
수도원에 버려진 갓난아기. 그 아이의 혼은 복제한 육체에 처음 이식한 단계에서부터 기존의 실험체들 이상의 적성과 일체감을 보였다.
극비로 보관 중이던 아니스의 성유물이 복제품에 더해졌다. 망가지지 않았다. 아니스를 복제해 만든 아이의 몸은, 깃든 성유물과도 완벽에 가까운 일체감을 보였다.
그 복제품에게는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이 붙었고, 10살이 될 때까지 수도원에서 여러 감시를 받았다. 도중에 발작을 일으켰다면 폐기되었겠지만, 크리스티나는 단 한 번도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게 크리스티나는 로게리스 추기경의 양녀가 되었고.
당대 유일의 성녀후보가 되었다.
“완성도만 본다면 이 아이가 저보다 뛰어납니다. 이 아이는…… 저처럼 죽음을 각오할 필요가 없을 거고, 세냐가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살 수 있을 겁니다. ……이 아이에게 아직 성흔은 깃들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이 아이는 저처럼 성흔에서 피를 쏟는 일 없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게 될 겁니다.”
“아니스.”
“……기적의 끝이 머지않았습니다.”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곧 저는 이 아이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크게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아이는 변함없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고, 저는…… 영적인 존재로, 이 아이에게 녹아 있을 뿐이죠.”
“…….”
“하멜. 그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이곳은 천국이 아니지만, 당신과 저는 이렇게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도울 수는 없겠지만, 저는…… 이 아이의 일부로서, 당신의 여정을 가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스.”
“저는 이 모든 것이 빛의 인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섬기는 신도들은 추악하게 변질되었으나, 그분은 여전히 모든 신도를 사랑하시며 빛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 저를 당신에게 인도하였습니다. 당신이…… 성검의 주인이 된 것. 이곳에서 성검이 빛을 잃지 않은 것. 그 모두가 빛의 뜻입니다. 당신은 300년 전에 우리가 해내지 못했던 사명을 이룰…….”
“동화책 너랑 세냐가 같이 쓴 거지?”
아니스의 말이 멈췄다.
그녀는 크리스티나의 뺨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지금의 대화와 분위기, 상황에서 묻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럼 울까?”
“……당신이 우는 얼굴은 그리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조금 그렇잖아. 화는 이미 아까 전에 많이 냈고…… 우는 건 싫다며. 나도 별로 울고 싶지는 않아.”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아니스에게 다가갔다.
“신성제국에 X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300년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 실제로는 내 상상 이상보다 X같았지만. 뭐 어쩌겠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을.”
아니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결국 너는 죽었고, 천사가 되었다. 천국에 가지 않은 것은 네 선택이다. 신은 결국 있고, 천국도 있었다. 그럼…… 된 거야. 크리스티나가 네 복제품이고, 네가 크리스티나에게 깃든 것도…… 지금의 내가 어쩔 수는 없는 거지.”
“…….”
“그건 이미 지난 일이니까.”
유진은 아니스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다. 내가 남은 마왕을 모두 죽이면 신성제국에 더 이상 성녀는 필요 없겠지. 그런 세상에서 성녀를 더 만들려고 한다면, 나는 내 손으로 이 세상에서 빛의 신도라는 놈들을 몰살시킬 거다.”
“……풋.”
“지금 내가 고민해야 할 건, 이 모든 것을 저지른 교황과 다른 추기경의 목을 따느냐 마느냐. 아마, 그래서는 안 되겠지. 신성제국은 너무 크고, 병력을 무시할 수는 없어. 놈들은 결국 앞으로의 전쟁에 필요해. 하지만, 엿 같은 짓은 더 벌이지 못하게 만들 거다.”
“후훗.”
아니스는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당신답군요, 하멜.”
“그래서 뭐냐고. 동화책 너랑 세냐가 같이 쓴 거지? 어? 왜 나만 그렇게 병신같이 쓴 건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아니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아니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답을 재촉했다.
“왜 나한테 우둔한 하멜이라는 개 같은 별명을 붙여서, 300년 지난 지금까지 사람을 괴롭히는 거냐? 내가 왜 우둔한데?”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그럼 아는데 몰라서 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그래. 굳이 우둔하다는 말을 붙이고 싶으면 나 말고 모론한테 했어야지.”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용감한 하멜, 우둔한 모론. 서로에게 딱 어울리지 않은가.
“……흐응.”
아니스는 유진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당신이 여전하다는 것은 알겠군요.”
“뭐가 여전하다는…….”
내뱉는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대뜸 다가온 입술이 유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놀라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어느새 목을 감싼 양팔이 유진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고 억눌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유진은 크게 뜬 눈으로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바로 앞에 있는 아니스는 눈가를 방긋 휘며 웃고 있었다.
“……후우.”
맞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아니스는 유진의 목에서 팔을 풀어내며, 가슴을 밀어냈다.
“이래서 당신이 우둔하다는 겁니다.”
“……어…….”
“세냐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이해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저는 이미 죽었는데.”
“어…… 어? 어어…….”
“우둔한 하멜.”
아니스는 젖은 입술을 살짝 핥으며 웃었다.
“당신은 어떤 면에서는 모론보다 등신입니다.”
아니스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유진의 눈이 부릅뜨였다.
도망치는 거다. 평범하게 사라졌다면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느끼며 눈물이라도 흘릴 텐데, 지금의 유진은 도저히 슬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야, 야!”
“이별이 아닙니다, 하멜. 저는 이 아이의 안에서 당신을 가호하겠…….”
“알았으니까 사과하고 가!”
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아니스의 손을 붙잡았다.
“모론보다 등신이라는 거 사과하라고! 그리고…… 그리고, 방금 그거, 이 몸으로는 처음이었…….”
“저런…….”
아니스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만 처음이겠습니까?”
“……어…….”
“세냐한테 꼭 전해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다고 말입니다.”
그게 아니스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유진은 멍한 얼굴로 서서, 아니스가 빛으로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사라지지 않고 크리스티나에게 깃들었다. 아니스뿐만이 아니었다. 빛의 샘과, 이곳과 이어져 있는 샘의 근원. 그곳의 모든 것이 빛으로 흩어졌다.
그 빛은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로 치솟았다. 검푸르던 하늘이 완전히 밝아졌다.
그건 무척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유진은 하늘을 쳐다보는 대신, 자기 입술을 어루만졌다.
“……허…… 허허…… 허허허…….”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빛의 샘
파이프는 더 이상 샘물을 끌어 올리지 못했다. 빛의 샘도, 근원지의 정수도. 모두 다 사라졌다. 샘물뿐만이 아니었다. 파이프와 연결되어 있던 구체들. 그 안에 들어 있던 성유물도ㅡ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있었다.
유진은 바람이 띄우고 있는 크리스티나를 힐긋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직 정신을 잃어,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편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은 깔끔하게 사라졌지만, 유진은 저 낡아빠진 파이프조차도 크리스티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
적당히 쓸어버릴 생각으로 망토 안에 손을 넣었는데. 메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그녀는 월광검을 꺼내는 유진의 손을 붙들고서 함께 밖으로 나왔다.
“개새끼.”
“뭐어?”
“넌…… 너는…… 유진 님은…… 개새끼에요.”
메르는 파들파들 몸을 떨며 유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일을 할 수가 있어요? 그것도 제가 보는 앞에서!”
“아니…… 뭐…… 따지고 보면 내가 한 것도 아니고…….”
“거짓말! 유진 님은 거짓말쟁이야! 유진 님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피하지 않았죠! 피하기는커녕, 이…… 입술이! 입술이 닿고, 혀…… 혀가 들어오는 순간까지 가만히 계셨잖아요!”
“그게…… 그러니까…… 어…… 메르야. 사람은 말이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몸이 말을 잘 안 듣게 돼. 생각이 뚝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린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이그니션의 반동으로 몸이…….”
“거짓말! 지금은 잘 움직이고 있잖아요!”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은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템페스트의 바람이…….”
“악!”
메르가 꽥 비명을 질렀다.
“어쨌든! 아까의 유진 님은 저조차도 단검으로 푹푹 찔러 죽일 수 있을 만큼 허술했어요!”
“내가 그런 일을 평생 상상이라도 해봤겠니?”
유진은 격렬하게 분노하는 메르를 필사적으로 달래주었다. 메르는 씩씩거리며 바닥을 발로 쿵쿵 밟았다.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지금의 유진 님은 얼굴이 잘생겼어요. 하지만 전생은 아니잖아요! 저도 아크리온에서 하멜 님의 얼굴은 매일 봐왔지만, 단 한 번도 잘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건 너무하네……. 솔직히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얼굴은 아니지 않나…….”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할 때마다 느꼈지만, 유진 님의 자신감은 참 오만하고 근거가 없어요. 옆에 위대한 베르무트 님을 두고서 어떻게 자기 얼굴에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는 거예요?”
“음…… 내가 베르무트보다 조금 못생겼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모론보다는 훨씬 잘생겼었잖아. 그리고 잘생김이라는 것은 꼭 얼굴이 잘나야 하는 것이 아니야. 나는 잘생긴 분위기가 있었다고.”
“미친…….”
“아크리온에 있던 영상에는 내 잘생긴 분위기가 잘 묻어나오지 않았을 뿐인 거야. 아니, 거기서도 내…… 그…… 뭐시냐……. 비율이 꽤 좋지 않았나? 얼굴은 그럭저럭 작고, 어깨는 넓고, 몸은 근육질에…….”
“개새끼.”
“얼굴의 흉터도 꽤 멋지게 그어져 있었잖아. 내가 괜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야. 전생에 내 앞에 서서 나보고 못생겼다고 하던 새끼는 한 명도 없었다고.”
“그런 말을 한 사람은 하나도 남김없이 유진 님에게 죽었기 때문이겠죠. 어쨌든 유진 님은 나빠요. 어떻게 제가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쿵, 쿵. 메르가 다시 발을 구르며 쏘아붙였다. 유진은 굉장히, 진심으로 억울함을 느끼며 월광검을 칼집에서 뽑았다.
“야! 내가 했냐? 어? 난 당한 거라고! 나도 피해자야. 그런데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
“당하다니! 참으로 뻔뻔한…… 유진 님도 내심 즐겼던 거잖아요!”
“안 즐겼어……. 진짜로. 놀라서 움직일 수가 없던 것뿐이야. 그리고 어…… 슬프기도 했지. 결국 내 동료, 아니스는 죽은 거잖아. 다시는 살아서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유진은 침울한 얼굴로 말하며 월광검을 옆으로 뉘었다. 메르는 축 처진 유진의 어깨를 보고서 잠시 머뭇거렸다. 화를 참지 못하고서 날뛰어버린 것이 후회됐다……. 메르는 유진에게서 달랠 수 없는 고독을 느꼈다.
‘……그래도 세냐 님은 살아 계시잖아.’
메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흠흠 헛기침을 뱉었다.
“……나중에 세냐 님한테 이를 거예요.”
“그래, 그래.”
월광검이 빛을 뿜었다. 스멀스멀 밀려가는 달빛이 지하의 기계장치를 모조리 지워버렸다. 유진은 텅 비게 된 방을 확인하고서 몸을 돌렸다.
폐허가 되어버린 신전을 거닐었다. 죽은 시체들은 수습하지 않고 지나쳤다. 몇몇 이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지만, 그들의 생사는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머리에 열이 뻗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그렇게 실컷 날뛴 주제에, 다 끝나버린 지금 와서 손을 뻗는 것도 병 주고 약 주는 꼴 아닌가.
‘X됐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부 다 끝났고, 치밀었던 분노와 증오와 살의도 사그라졌다. 그러니 슬슬 이성적인 생각이 돌아갔다.
……이걸 어쩐다? 흔해 빠진 말단 성직자도 아니고, 추기경을 죽여 버렸다. 혈십자 기사단의 대장 1명과 심문국의 고위심문관도 죽여 버렸다. 그 외에도 오늘 유진이 죽인 사람이 100명은 훌쩍 넘었다.
……과하긴 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하멜답게’ 날뛰어 버렸다. 막지 말라고 경고는 해주었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물러서지 않고 덤비면서…… 자기들이 절대적으로 옳고, 이유 불문하고 막고 돌려보내려는 것에 짜증이 났다.
‘나 혼자뿐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는데, 문제는 라이언하트란 말이지.’
키옐의 황제가 라이언하트가 가진 것에 탐욕을 갖고 있다. 유라스가 이 일을 대두시키면서 제국 간의 분쟁이 벌어진다면? 황제는 당연히 그 책임을 라이언하트에 물리려고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부드럽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진은 이 미친 문제에 관해 입을 닥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신성제국의 의견은 성검으로 묵살할 수 있다. 놈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부터가 섬겨 온 빛에 대한 부정이 될 것이다.
300년 동안 라이언하트가 축적해 온 힘은 상당하다. 키옐이 라이언하트라는 거대한 가문을 통째로 제국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잘 합의를 본다면…….
‘날 감옥에 처박거나, 아니면 나 하나를 추방시키거나.’
추방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문제로 죄를 물어 추방하기에는 유진은 너무 잘난 사람이었다. 키옐이 유진을 추방시켜서 얻을 게 뭔가? 없다. 유진이 추방된 순간, 온갖 나라에서 유진을 포섭하려고 들 것이다.
‘감옥에 처박고 잘 구슬리기는 할 것 같은데…… 아니. 그것도 유라스가 반발했을 때의 경우지. 교황이 이 일을 통째로 묻으려고 한다면 키옐이 어쩔 방도는 없어.’
교황의 입을 닥치게 한다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된다.
어떻게? 유진은 이 신전에서 빛의 광신을 직면했다. 그들은 유진의 행동을 타락이라고 말했다. 빛의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능력은 용사에 알맞다. 하지만 유진 라이언하트의 인격이 타락해 버렸다…….
무적의 논리였다. 빛의 참뜻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자기들의 행동은 신앙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기사과 심문관들부터가 그랬는데, 저 광신도들의 꼭대기에 선 교황과 제대로 된 대화가 통할지가 의문이었다.
‘……내가 하멜이라는 것을 밝히면…….’
여태까지는 전생을 밝히는 것으로 대충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신성제국의 교황. 하멜이라는 것을 밝힌다고 해결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성검에서 빛을 뿜으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조금 더 뭔가…… 확실한 기적 같은…….
“깼으면 내려오지?”
유진은 뒤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바람에 실려서 축 처져 있던 크리스티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내가 지금 몸도 정신도 만신창이라…… 정령을 소환하는 것도 힘들거든?”
“……으흠…….”
크리스티나는 헛기침을 하며 바람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샘물에 흠뻑 젖었던 옷은 이미 말라 있었지만, 크리스티나는 뭐가 그리 거북한 것인지 옷깃을 당기고 털어댔다.
“……너…….”
헝클어진 금발. 그 아래에 있는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뭘 아는 거야?”
“흠…… 흐흠…… 으으흠…….”
크리스티나는 연거푸 기침을 하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빨갰다. 시선이 마주치고, 다시 후다닥 고개를 숙였다. 그 노골적인 반응에 유진의 표정이 보다 복잡하게 변했다.
“야…….”
“하…… 하멜 님.”
크리스티나는 더듬더듬 목소리를 냈다.
“아…… 아니, 아닙니다. 그건 전생이니까……. 저는…… 저는 그냥 유진 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게 저에게는 옳은 일입니다.”
“뭘 아는 거냐고.”
“그게…… 그게 말입니다. 아, 아니스 님의…… 기억이 제게 들어왔는데…… 아니…… 기억뿐만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제 일부가 된 것만 같은…….”
크리스티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잡고서 횡설수설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스의 혼이 크리스티나에게 깃들었다. 오래전부터 그랬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아니스의 혼이 깨어나 버렸다. 그렇게 의식이 공유되고, 기억이 더해졌다.
덕분에 크리스티나는 성녀가 무엇이며, 이 샘에서 어떤 의식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모두가 크리스티나에게는 잔혹한 진실이었다. 그녀가 평생 진실이라고 믿어오던 대부분의 것이 부정되었다. 그 모든 것이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것은 알지만, 솔직히 바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300년 전의 인물인 우둔한 하멜의 환생이란다.
“이해해 주십시오, 하멜. 모든 것이 이 아이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니, 당분간은 지켜봐 주십…… 흡.”
크리스티나는 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유진은 놀라 주저앉아 버린 크리스티나를 내려보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아니스?”
“아니…… 아닙, 아닙니다. 저는 아니스 님이 아닙니다.”
크리스티나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방금 뭐지? 생각하지도 않은 말이 멋대로 나와 버렸다. 머릿속은…… 혼란스럽다. 이해하기 싫고 힘든 것들. 그 마지막에…….
가까워도 너무 가깝던 얼굴.
떨리는 눈동자.
맞닿은 입술의 감촉과, 밀어 넣은 혀가 휘감던…….
“……아아아아!”
크리스티나는 탄식과 같은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기도를 맺었다.
[설마 그 기억까지 전해질 줄은 몰랐습니다.]
“예?”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크리스티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의도치 않게 당신을 놀라게 해버렸군요.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사실 당신을 떠나 천국에 오르는 것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당신과 하멜을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유진은 아니스의 목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표정과,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것처럼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모습에 대충 사정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이 목소리는…….”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녀가 최초로 들었던 계시.
유진 라이언하트는 빛이 점지한 용사다.
베르무트의 혼은 천국에 들지 않았다.
……그 계시를 전했던, ‘빛’의 목소리.
[제가 사자(使者)가 되었을 뿐. 계시는 거짓이 아닙니다. 빛의 신은 당신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지는 않습니다만, 실존하고 계십니다. 다만, 이 세상에 직접 관여하지 못하실 뿐입니다.]
아니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크리스티나의 몸에서 서서히 떨림이 멎어갔다.
[그러니 빛의 존재마저 부정하지는 마십시오. 당신은…… 후후. 성녀라 주장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의 존재와 힘이 기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당신이 가진 기적을 하멜을……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를 위해 쓰고 싶다면, 제가 당신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스 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과 똑같은 일을 겪었고, 당신이 어려서부터 겪은 일을 항상 지켜보아 왔습니다. 그런 당신이 모든 것을 깨치게 된 지금, 빛을 불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크리스티나.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빛을 불신한들, 당신의 존재가 기적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또, 당신을 보살피는 빛이 불신에 실망하여 떠나는 일도 없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말없이 기도를 이었다.
조금씩 이해가 진행되었다.
빛의 샘에서의 끔찍한 의식이 완성되었다면, 크리스티나의 피가 샘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이후의 모든 것이 예정대로 흘러갔다면, 크리스티나는 교황청의 ‘알현실’에서 성황의 성유물에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등에는 아니스와 같은 성흔이 깃들었을 것이다.
[저는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보다 완전하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억지로 새겨 넣은 성흔은 수명을 갉아먹습니다.]
“…….”
[그러니 제가 아직 당신을 떠날 수 없는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당혹스러웠지만, 이해했다. 아니스는 당분간 크리스티나의 안에 존재하며, 크리스티나가 일으키는 기적을 자신의 신성력으로 받쳐줄 것이다. 스스로의 혼으로 성흔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천국에 들기를 거부했다. 먼저 죽은 동료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세상에 남았다. 그렇게 동료와 재회했으나, 여전히 천국에 드는 것을 거부했다.
300년 전 이루지 못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안에서, 크리스티나가 짊어져야 할 고통을 대신 부담하며 기적을 함께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크리스티나가 아니스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의 존재가 되면, 그제야 접었던 날개를 펼치고 천국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감았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죽어서까지 안식을 거부하고, 혼의 고통을 느끼며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숭고함. 신성제국이 내세운 성녀는 모두가 거짓된 존재였지만, 크리스티나는 도저히 이전의 모든 성녀가 거짓된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비록 그 존재가 인위적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가 성녀였다…….
[당신은 성수를 마시지 않는 겁니까?]
‘……예?’
[즐기지 않는 것 같은데…… 제가 정 가여우시거든, 앞으로는 저를 위해서라도 성수를 즐겨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당신이 하멜에게 곤란하고도 부끄러운 충동을 느끼게 된다면, 제가 대신 해드리겠…….]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꽤나 순수하다는 것이 참으로 즐겁습니다. 놀리는 재미가 있을 것 같군요.]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크리스티나는 더 대꾸하지 않고 짧은 기도문을 외었다.
“……다 했냐?”
“……으흠…… 흐흐흠…….”
“아니스한테 전해. 당장은 안 되겠고, 나중에 죽어서 천국이란 곳에서 만나면 패버리겠다고.”
사실 지금도 패버리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정작 두들겨 맞는 것은 크리스티나가 되어버리지 않나. 유진은 혀를 쯧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별이 아닙니다, 하멜. 저는 이 아이의 안에서 당신을 가호하겠…….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만. 설마 이런 의미였을 줄이야.
유진은 아니스와의 이별에 눈물을 쏟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눈물을 쏟았다면, 아니스가 크리스티나의 입을 빌려 어떤 놀림을 퍼부었을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헷갈리지 않도록 확실히 구분하자고. 크리스티나 너는…… 어…… 날 유진이라고 불러. 알았지? 아니스는 어차피 날 하멜이라고 부를 테니까.”
“……네, 하진 님.”
“뭐?”
“아니…… 아닙니다, 유멜 님.”
“지금 뭐 하니?”
크리스티나는 자기 입술을 몇 번 찰싹찰싹 때렸다.
“……아니스 님은 참으로 짓궂으시군요. 전승에 따르면 아침 햇살처럼 따사로운 분이라 하였는데 말입니다.”
“원래 옛날이야기는 믿을 게 못 돼. 나만 봐도 그렇지 않냐? 동화책에서는 우둔하다고 뭐라 하는데, 내가 어딜 봐서 우둔해?”
그 투덜거림에 크리스티나는 실눈을 뜨고 유진을 흘겨보았다. 왠지 머릿속에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성당에 돌아가는 건 무리지.”
돌아가서 좋은 꼴을 겪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유진의 몸상태가 멀쩡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넉넉히 이삼일 정도는 쉬어두어야 몸이 회복될 것이다.
“……여기로 이어진 워프게이트를 부숴놓고, 어디 틀어박혀서 몸을 회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 뒤에는 뭐…… 사실 마음 같아서는 괜히 수습하려 들지 않고 튀고 싶은데 말이야.”
“진심이십니까?”
“그럼 거짓말이겠니? 내가 눈깔 뒤집혀서 날뛰기는 했는데, 원래 그렇게 날뛸 때는 수습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날뛰는 법이야. 하지만 어떡해? 그렇다고 진짜 튀어버리면 가뜩이나 여기저기서 스트레스받는 우리 가주님의 머리가 홀라당 벗겨져 버릴 텐데.”
유진은 휘청휘청 걸으며 중얼거렸다. 뒤늦게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유진의 몸을 부축해 주었다.
“어쨌든. 수습하는 시늉이라도 해보려면 몸이라도 멀쩡해야지.”
“……괜히 저 때문에…….”
“너 때문만은 아니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그리고 너 때문이면 뭐? 네가 뭐하러 죄책감 갖고 눈치를 봐? X같은 일 당한 건 넌데.”
그 거친 말에 크리스티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메르는 그런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번뜩이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너무 달라붙지 마세요.”
“예?”
“달라붙지 마시라고요.”
“부축하는 것뿐입니다만…… 아.”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힘없는 유진의 몸을 번쩍 들더니, 등 뒤에 업었다.
“야, 야!”
“사마르 숲이 생각나는군요.”
크리스티나의 양손이 유진의 엉덩이를 받쳤다. 치솟는 굴욕감에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과감한 행동에 메르는 뭐라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메르는 입술을 헤 벌리며 굳어버렸고,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따스했다.
크루세이더
완전히 폐허가 된 신전의 근처. 주변 지형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구멍이 있다. 며칠 전 유진이 만들어낸 구멍이다.
그 입구에 큰 키의 여인이 서 있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안쪽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반쪽의 달이 밤하늘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지만, 여인의 등을 기점으로 스멀스멀 어둠이 번지기 시작했다.
여인이 만들어낸 어둠은 마치 안개처럼 이 주변을 감싸고, 깊은 구멍의 안쪽까지 내려앉았다. 그렇게 어둠을 펼쳐낸 뒤. 여인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로 구멍의 끝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조금만 걸어 내려가도 시체를 볼 수가 있었다. 필사적으로 구멍을 기어 나오려 한 것 같은 모습. 하지만 박살 난 몸으로 이만한 깊이의 구멍을 빠져나오는 것은 무리였는지, 죽은 시체의 대부분은 뱀이 기어간 것만 같은 자국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 시체의 대부분은 손끝이 피와 흙이 엉겨 붙고, 으깨져 있었다. 죽은 지 며칠 되어서 몸은 진즉에 경직되어 있지만,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인은 그런 얼굴에 하나하나 시선을 맞추고서 점점 더 깊은 아래로 내려갔다.
입가를 가리고 있는 얇은 면사가 씰룩거렸다.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불쾌한 악취가 공간을 무겁게 짓눌러왔다.
피와 내장의 냄새. 죽어 며칠이 지나 시작된 부패의 냄새. 수많은 시체가 농축된 죽음의 냄새. 여인은 그 냄새에 작은 흥분을 느꼈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다. 이만큼이나 많은 시체가 한 곳에 매몰된 장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이 시체들. 신분이 낮거나 없는, 몇 명이 죽건 아무 탈도 없을 무가치한 시체가 아니다. 여인은 시체들이 입은 제복을 보았다. 가슴의 붉은 십자가는 혈십자 기사단의 상징. 그리고 저 붉은 망토는 이단심문국 말레피카룸의 상징이다.
시체가 100명은 훌쩍 넘는다. 모두가 즉사한 것도 아니다. 꽤 많은 수가 목숨을 부지했었겠지만, 극심한 부상과 피로로 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아주 끈질겨서, 아직 숨이 붙은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꺼져가는 목소리를 웅얼거리며 기도를 외거나, 신을 찾았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중 몇몇은 이미 정신이 무너져버려서,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댔다.
여인은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살릴 이유가 없었다. 발걸음마다 번지는 어둠이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렇게 거둬들인 혼은 하늘에 오르지 않고 어둠에 녹아들었다.
구멍의 밑바닥.
여인의 걸음이 멈췄다. 여인이 어둠을 일으킬 것도 없이, 이곳은 어두컴컴했다. 극한까지 농축된 죽음의 냄새가 호흡을 즐겁게 만들었다. 여인은 면사를 살짝 들추며 악취를 맡았다. 그러고는 즐거운 눈으로 조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바닥에는 땅이 있지 않았다. 시체가 쌓여 있지도 않았다. 시뻘건 피. 마치 빗물이 고인 것처럼 밑바닥에 고여 있다.
그 피 웅덩이에 시체의 ‘파편’이 떠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물려 있던 여인의 입술이 얇은 미소를 만들었다. 그녀는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피 웅덩이를 향해 발을 뻗었다.
ㅡ포옹!
걸음으로 피 웅덩이에 파문이 번졌다. 수면이 얇게 걷히고, 아래층이 드러났다. 마치 갉아 먹힌 것만 같은 시체들. 그들이 쏟아낸 것 치고는 너무나도 많고 맑은 피.
“아타락스가 죽었기에 뭔가 싶었는데 말이에요.”
징벌자 아타락스.
여인이 생각하기에, 그는 드물게도 깨어 있는 성직자였다.
지금의 시대는 흑마법을 무조건 박해하지 않는다. 마족도 주교급의 위치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 바란다면 빛의 신교에 입문하여 성직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이. 흑마법에 큰 편견을 갖는 대신,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하는 경우는 웬만해서는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다.
여인은 과거 은밀히 접촉해 온 아타락스와 만남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아타락스는 강직한 태도를 보이며, 자기네 집단의 주적(主敵)인 흑마법에 대한 조언을 요구했었다. 아니, 그때 아타락스의 태도는 협박에 가까웠다.
우리 이단심문국은 언제고 널 잡아 죽일 수 있다. 그러니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요구에 협력해라.
여인은 그 요구가 그럴듯한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진즉부터 알았다. 아타락스가 조언을 바라던 흑마법은, 적으로서 상대하는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타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저지르는 모든 부정을 빛께서 용서하고 묵인할 것이라는 오만한 착각이 박살 난 순간을 보고 싶었다. 저만큼의 경지에 이른 성직자가 타락한다면, 그 혼에 얼마나 독특한 맛이 배어들까. 그러한 흥미와 탐욕이 여인으로 하여금 젊었던 아타락스에게 은밀한 낙인을 찍게 만들었다.
“……아타락스의 시체는 흔적도 없더군요. 영혼도 남아 있지 않았어. 그는 바라고 집착하던 대로 천국에 올랐을까요? 아니면 혼 자체가 소멸해 버린 걸까요……. 후후.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마지막을 굉장히 보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혼잣말이 아니었다.
여인은 피 웅덩이의 중앙에 떠 있는 존재를 응시했다. 팔다리가 모두 잘리고, 몸통과 머리만 남아 있다. 당연히 죽어야 할 상처인데도 죽지 않았다.
“혈마법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언데드에 버금가는 불사력을 손에 넣게 만들죠.”
여인이 속삭였다.
“알고 있나요? 당신들은 혈마법이 흑마법에 속하지 않는다고 구분했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아요. 혈마법의 원전은 피 빨아 마시던 뱀파이어들에게서 비롯되었거든요.”
헤모리아는 끊어질 것만 같은 호흡을 이어 붙였다.
“뱀파이어는 마족 중에서도 특히나 높은 불사력을 가지고 있죠. 그들은 피 한 방울만 있으면 소생할 수 있거든요. 혈마법도 그렇죠? 뱀파이어처럼 무조건적인 흡혈이 필요한 대신, 마나와 마법으로 자신의 피를 증식해서…… 후후. 네 경우에는 그런 일반적인 혈마법도 넘어선 모양이지만.”
“……넌…….”
헤모리아의 입술이 열렸다. 그녀는 쉰 목소리를 쥐어짜며 여인을 노려보았다.
“……아멜리아 머윈…….”
유폐의 삼마(三魔).
사막의 던전마스터. 검은 가시. 데스앤서. 아멜리아 머윈은 유폐의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특히나 괴팍하고 강력했기에, 불리는 이명이 많았다. 그녀가 지배하는 아슈르 사막은 나하마 왕국이 금지(禁地)로 지정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을 정도다.
“왜…… 네가…… 여기에?”
“말했잖아요? 나는 아타락스의 시체를 보러왔어요. 살아서 타락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시체가 남아 있다면 언데드로 만들어줄 생각이었죠. 아, 너는 잘 모르나요? 시체가 남아 있고, 죽은 지 며칠 안 된 상태라면 죽은 혼을 강령시킬 수 있거든요.”
아멜리아는 방긋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산양의 머리와 여러 뼈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차르르륵! 지팡이에서 풀려나온 마력(魔力)이 피를 증발시켰다.
“하지만 아타락스의 시체는 없더군요. 다른 시체들은 많았지만 죄다 쓸모없고 무가치했어. 이 깊은 바닥까지 내려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길바닥에서 보석을 주운 기분이야.”
“……놔……!”
아멜리아의 마력이 헤모리아를 휘감았다. 헤모리아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을 뒤틀었지만, 팔다리가 잘린 몸을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등허리를 젖히고 고개를 흔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니. 사실 헤모리아에게는 다른 저항이 가능했다. 혈마법은 아멜리아의 마력에 통제받고 있다. 조금 더 확실하게, 거리를 좁혀서…… 아멜리아의 마력이 헤모리아의 몸을 가까이 끌어당기려는 순간.
헤모리아의 양 뺨에 문양이 나타났다.
“멈, 춰!”
언령은 단순할수록 위력이 강하다. 오랫동안 붙잡을 필요도 없다. 잠깐이라도 멈추게 만들면 된다.
헤모리아의 입이 쩍 벌어지고, 허공을 물어뜯었다.
ㅡ콰직!
아멜리아의 머리가 옆으로 기울었다. 목의 절반 이상이 물어뜯겨 사라졌다. 치솟은 피가 아멜리아의 면사와 옷을 붉게 물들였다. 인간이라면 죽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죽지 않았다.
기울었던 머리가 바로 세워졌다. 뿜어지던 피가 멎었다. 아멜리아는 사라진 목을 어루만지며 쿡쿡거리며 웃었다.
“혈마법에 언령주술. 모두 다 신성제국이 사냥했던 마법이네요. 그리고 그 이빨…….”
아멜리아는 헤모리아의 날카로운 이빨을 보았다.
단순한 이빨이 아니다. 흑마법에 가까운 저주. 그걸 모조리 농축하여 만들어낸 이빨. 그렇게 만든 이빨을 잇몸에 박아넣는다는 발상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몸 자체가 가진 마법을 최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었네요. 이른 나이에 아무리 마법을 수련한들, 너처럼 최적화를 이루기에는 힘들죠. 애당초 그런 재능이 있다면 다른 면에서도 드러나기 마련인데, 너는 혈마법과 언령주술에만 특화되었지 다른 것은 영 대단치 않아.”
헤모리아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솔직히 놀랐어요. 신성제국…… 아니, 이단심문국이 이만큼이나 마법과 흑마법을 이해하고 있을 줄이야.”
“다…… 닥쳐…….”
“아. 너는 잘 모르나 보죠? 아타락스뿐만이 아니에요. 너희 이단심문국은 시대마다 흑마법사와 접선했었어요. 나 이전에는 누구와 접선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타락스 전에도 2명의 심문관에게 흑마법의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고요.”
헤모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왜요? 실망했어요? 네가 소속해 있는 이단심문국이 사실은 흑마법사, 그것도 나 아멜리아 머윈과 인연이 있다는 것이 가증스럽나요? 뭘 이제 와서. 저는 오히려 그들에게 감탄했는걸요. 섬기는 신을 위해 흑마법까지 이해하려는 탐구욕은 마법사에게도 흔치 않아요.”
아멜리아는 킥킥 웃으며 상처를 훑었다. 손길이 지나간 곳에 새살이 돋아나고 상처가 연결되었다.
“아, 그들 중에서도 아타락스는 꽤 재밌는 사람이었어요. 주제도 모르고 날 협박하며, 빛이 무조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참 재미있…….”
“스승…… 스승님을……!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
헤모리아는 몸을 비틀며 악을 썼다.
아버지! 그 말에 아멜리아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가 헤모리아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그렇게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한 뒤, 얼굴을 바짝 붙여 헤모리아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오싹한.
기분이 밀려왔다. 마주 댄 눈동자의 저편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헤모리아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었다. 더 이상 붙들지 못한 언령저주의 문양이 뺨에서 사라졌다.
“……아버지이?”
아멜리아는 킥킥 웃으며 반대편 손으로 헤모리아의 턱을 붙잡았다. 그렇게 입을 벌리게 한 뒤, 손가락을 밀어 넣어 날카로운 이빨 중 하나를 붙잡았다.
뿌드득! 억지로 뽑아낸 이빨에서 피가 솟았다. 하지만 헤모리아는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아멜리아는 뽑아 든 이빨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너 인간을 먹었죠?”
헤모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기 있는 시체들. 시체가 아닌 놈들. 모두가 네 동료 아닌가요? 넌 이 밑바닥에서 버티기 위해서 동료를 잡아먹었어요.”
“아, 아냐. 나는…….”
“직접 먹지 않았다고 변명할 건가요? 그게 얼마나 웃기는 말인지 알고 있어요? 너는 혈마법을 사용해, 여기 시체와 반송장의 몸에서 피를 뽑아냈어요. 그걸 네 피로 삼고, 상처를 회복하려고 했죠. 며칠 더 있었으면 아마 너는 자력으로 이 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회복됐을 거예요.”
아멜리아의 손이 머리채를 놓았다. 철벅! 팔다리 없는 헤모리아의 몸이 피 웅덩이에 떨어졌다. 그녀는 웅덩이에 잠긴 시체들을 보았다.
사실 그건 인간의 시체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저들을 죽인 건, 헤모리아가 아니었다. 헤모리아는 단지, 죽은 시체들에게서 피를 연결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런 것이 좋아요. 무조건적으로 빛을 섬기던 이단심문관이 사실은 몰래 흑마법사와 접선하고, 흑마법을 연구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남에게 알리지 않고 딸을 두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심지어 그 딸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성기사를, 다른 심문관의 고혈(膏血)을 빨아먹었다는 이야기.”
“아니…… 아니야. 나는…….”
“심지어 그 딸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닌 키메라의 일종이라니? 네 애비의 시체나 주워보려고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아하핫! 너는 네 애비 이상으로 즐거운 존재로군요.”
헤모리아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아멜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가 섬뜩했다. 헤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빛에 대한 기도를 외었다.
“그런 꼴이 되고서도 빛을 찾나요? 나는 빛의 신도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빛이 개병신도 아니고, 당신 같은 짓을 저지른 존재를 돌보겠어요?”
“나는…… 나는 빛을 위해…….”
“네 애비도 그렇게 말했었죠. 아마 그렇게 말하고 죽지 않았을까요? 빛이 정말 너희를 돌봤다면 넌 팔다리가 잘리지도 않았을 거고, 네 애비도 죽지 않았을걸요. 아니, 아니죠. 애당초 빛이 정말 세상을 돌보고 있다면 네 애비가 널 만들지도 않았겠죠. 네 존재 자체가 빛에 대한 모독이니까요!”
퍼억! 휘두른 지팡이가 헤모리아의 등을 내리찍었다.
“병신인 너는 네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알려줄게요. 너는 멀쩡한 인간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인간과 다른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들어낸 키메라라고요.”
헤모리아의 떨림이 멎었다.
“네 애비가 아타락스라고요? 그건 아마 네 유전자의 일부가 아타락스가 뽑아낸 정액과 피로 빚어냈다는 걸 텐데, 흑마법사이자 마법사인 내 관점에서는 말이에요. 네가 아타락스와 혈연적으로 겹치는 것은 모래 한 줌 정도예요. 너 스스로도 그렇다 생각하지 않아요? 당장 네가 요 며칠 동안 연명하기 위해 뽑아내고, 네 몸에 돌려낸 피가 아타락스에게 물려받은 피보다 진할걸요?”
“아냐…… 아,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왜 이 당연한 것을 부정하죠? 아, 그럴 수도 있죠. 너희 광신도들은 빛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일단 부정하고 보니까. 괜찮아요, 이해해 줄게요. 나는 네 인격과 신념이 기왕이면 아주, 아주 단단했으면 좋겠거든요.”
아멜리아의 마력이 헤모리아의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래야 조교하는 재미가 있단 말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널 죽이지 않을 거고, 오히려 네가 바라는 걸 줄 거예요. 팔다리가 잘렸으면? 팔다리가 다시 있어야겠죠? 아……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뭐죠?”
헤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멜리아가 낄낄 웃으며 쏟아낸 말들. 아멜리아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놀리는 것처럼 내뱉은 진실들이 헤모리아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말 안 해요? 그럼 다음에 들을 수밖에 없네요. 자, 우선 이것부터 이해하자고요. 빛은 널 지켜주지 않았어요. 죽어가는 널 돌보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었다고? 네, 맞아요. 빛이 널 돌봤다면, 당신이 동료의 피를 빨아 마실 필요는 없었겠죠.”
아멜리아는 즐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헤모리아를 끌고 갔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네가 섬기는 빛은 기도처럼 자상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그럼 너는 무엇을 원망해야 할까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헤모리아는 흔들리는 시야에서 자그마한 빛을 보았다.
그 빛은.
악마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악마는 이 세상의 존재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공포적인 살의와 증오를 흘리며 헤모리아에게 다가왔다.
헤모리아를, 다른 신도들을 돌봐야 할 빛은 그 악마의 손에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악마와 함께 춤을 추었다.
“……까득.”
꽉 다문 입에서 이빨이 갈렸다.
* * *
빛의 샘에서의 의식이 끝나고 이틀.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넓은 숲 깊은 곳에 세워놓은 텐트에서 머물렀다. 사마르 대수림을 떠돌 적부터 애용해 온 마법 아티펙트였다.
반동이 얕기는 했지만, 유진은 이틀 동안 무리하지 않고 침상에 누워서 지냈다. 크리스티나는 그런 유진을 간호하다가, 식사 시간에 맞춰서 텐트 밖으로 나가 작은 동물을 사냥하거나 풀잎 따위를 뜯어 왔다.
가끔 메르가 간호를 대신하겠다고 나서면, 크리스티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녀는 더 이상 기도문을 입술 밖으로 읊지는 않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빛을 의식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목소리를 듣고 있을 때면, 은은한 빛이 크리스티나의 몸을 감쌌다.
“밤에 불을 켤 필요가 없겠네요.”
크리스티나를 감싼 휘광은 적당히 밝았다. 마법으로 켠 불빛이나 하늘에 뜬 태양과는 달리,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눈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닥불만큼은 아니지만 꽤 따스했는데, 아무리 손을 가까이 대어도 뜨겁기는커녕 적당하게 몸을 훈훈하게 해준다는 점이 메르의 마음에 쏙 들었다.
“독서할 때 참 좋을 거 같아요. 추운 겨울에 끌어안고 자도 좋…….”
메르는 하던 말을 멈추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물론 유진 님은 그러시면 안 돼요.”
“내가 언제 그렇게 하겠다고 말이나 했니?”
“가끔 아니스 님이 저 몸을 빼앗아 유진 님을 안으려고 한다면, 단호하게 말씀하셔야 해요. 안 돼, 라고요. 아셨죠?”
“내가 애니?”
“유진 님은 가끔 애처럼 구실 때가 있어요.”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너나 걔한테 좀 떨어져. 기도하는데 왜 자꾸 방해하는 거야?”
메르는 무릎 꿇은 크리스티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말랑말랑하고 푹신해서 좋아요. 유진 님은 평생 알 수 없는 감촉이겠지만요. 아,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저 몰래 감촉을 알아보려 하셨다가는…….”
“그만 좀 해 인마.”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왼손에 감은 붕대를 풀어 내렸다.
이틀 전 으스러졌던 손이지만, 크리스티나의 기적 덕에 멀쩡히 나았다. 조각조각 났던 뼈도 붕대를 감고 있는 동안 완전히 고정되었고, 신경도 끊어진 곳이 없었다.
‘……확실히. 예전보다 기적의 힘이 강해지긴 했어.’
이전에도 크리스티나의 기적은 다른 성직자와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사마르 대수림에서 썼던 치료마법은 이만큼의 경지에 도달해 있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에게 깃든 아니스 덕분이다. 언젠가는 크리스티나도 아니스처럼 잘린 팔다리를 재생시키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유진은 그러한 때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염려를 느꼈다. 결국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니스를 이승에 붙잡고 고생시키는 꼴 아닌가?
‘……아니…… 잠깐. 그렇게 생각하면 나부터가 불쌍하잖아. 300년 전에 죽은 사람을 환생시켜서 이런 고생을…… 베르무트 이 씨X새끼.’
아니스는 베르무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베르무트가 세냐의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는 것은 유진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헬무드에서 돌아온 후, 아니스는 베르무트와 따로 접촉한 적이 없었다.
마왕과의 약속.
그런 식으로 끝나버린 싸움에 실망한 것은 세냐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흠.”
유진은 붕대를 풀고서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티나도 기도를 멈추고 눈을 떴다. 그녀는 작은 불안을 담은 눈으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뭘 놀라고 그래? 누군가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했잖아.”
“……하지만…….”
“괜찮아.”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텐트의 입구를 열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고자 한다면 기척을 감추고서 몰래 다가올 수 있을 텐데, 오히려 기척을 노골적으로 과시하며 다가오고 있다. 이쪽에서 알아차리고, 대응할 것을 유도하는 것이다.
“매너 있는 놈일세.”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망토 안에서 성검을 꺼냈다.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유라스의 고위 성직자일 것은 분명하다. 다른 추기경? 아니…… 이 날 선 존재감은 기사의 것에 가깝다. 최소 혈십자 기사단의 대장급.
‘아니, 아니군.’
그 이상. 거리는 충분히 멀 텐데, 느껴지는 존재감은 굉장히 무겁다. 백룡 기사단의 단장인 알체스터에 버금갈 강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혈십자 기사단의 단장인가.’
크루세이더.
유진은 마중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크루세이더
신성 유라스제국, 혈십자 기사단장.
크루세이더, 라파엘로 마르티네스.
유진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보았다.
대륙 제일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들.
흑사자성의 원로원주.
백룡기사단의 단장.
시무인 십이걸의 퍼스트.
북방 루하르의 국왕.
혈십자 기사단의 단장.
유진은 숲의 저편에서부터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살아온 세월은 카르멘이나 알체스터조차 넘어, 죽은 도미닉 라이언하트에 버금간다. 하지만 이쪽에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은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장년조차 아닌 외모. 청년이라는 말도 과한, 소년의 외모다.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의 소년…… 하나 그 큼직한 푸른 눈동자에는 소년다운 순수함은 조금도 담겨 있지가 않았다. 오히려 삭막하고 칙칙한 안광이 저 소년의 외모와 맞물려 기괴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기괴하군.’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살아온 세월과는 다른 외모. 그거야 저만한 경지에 이른 존재에게는 특별한 것도 아니다.
늙은 육체보다는 젊은 육체가 무조건 좋은 법이다. 그러니 마법사와 기사, 무인들은 마나로 육체를 컨트롤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즉시 노구(老軀)에서 젊은 육체를 재구성한다.
몸뚱이를 젊게 만든 후. ‘얼굴’을 어떻게 할지는 취향과 지위에 따라 갈린다. 연륜에 걸맞게 관록 있는 얼굴로 둘지. 아니면 육체에 따라 아예 젊은 얼굴로 만들지.
주변의 이목과 앉은 지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카르멘처럼 아예 젊은 몸과 얼굴을. 지위로 인한 시선을 신경 쓴다면, 현 원로원주인 클라인이나 가주인 길레이드처럼 관록이 묻어나는 중년의 얼굴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과하다. 유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린 소년의 얼굴과, 그에 걸맞은 미숙한 몸. 키는 160 중반 정도인가? 아주 작은 키는 아니다.
‘……소년기에서 성장이 멈췄다더니.’
라파엘로는 기사들 중에서도 특히나 체구가 작다. 나이가 어릴 때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십 대 중반을 넘어 육체의 성장이 가속되는 시점. 다른 기사들은 키가 무럭무럭 자라고 근육이 붙어 체격이 커졌지만, 라파엘로의 몸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라파엘로는 혈십자 기사단의 단장까지 올랐다. 완벽한 마나컨트롤로 육체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라파엘로의 몸은 여전히 작다. 장장 반백 년 동안 저 크루세이더는 대륙에서 가장 작으며 강한 기사로 이름을 떨쳐왔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던 라파엘로가 유진을 불렀다.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자리에 멈췄다. 유진은 당장 대답하는 대신, 라파엘로를 응시했다.
확실히 작다. 소년의 얼굴과 온갖 것을 보아온 늙은 기사의 눈은 티끌만큼의 조화도 이루지 않아서, 얼핏 보면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느껴진다.
목과 가슴에 붉은 십자가가 새겨진 혈십자 기사단의 제복.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무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라파엘로의 머리 뒤에는 그의 키보다 큰, 십자가 형태의 대검이 있었다.
라파엘로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왔다. 유진은 그 노골적인 시선이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망토를 들춰, 손에 쥐고 있는 성검의 칼자루를 보여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라파엘로가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저 소년의 탈을 쓴 노물의 속내를 쉽사리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혈십자 기사단의 단장에 앉을 정도라면 빛의 광신도일 텐데, 유진은 이번 일을 통해서 빛의 광신도는 이해가 불가능한 존재라고 마음속에서 결론을 내려놓았다.
“크리스티나 성녀후보님은 함께 계시겠지요?”
숙였던 고개가 위로 들렸다. 라파엘로는 여전히 칙칙한 눈으로 성검을 보고 있었다. 유진은 등 뒤의 텐트를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있기는 한데.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실 텐데요.”
“잘 알죠. 그래서 지금 당신의 태도가 참 아리송합니다. 제가 저지른 짓이 아마…… 그…… 당신네들의 관점에서는 절대 납득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혼자 오신 데다, 태도도 얌전해 보여서요.”
그 말에 라파엘로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는 얇은 미소를 지으면서 유진이 손을 올려두고 있는 성검을 가리켰다.
“유진 님은 성검의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유진 님이 하신 일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지금도 유진 님은 성검에 손을 얹고 계시니, 성검을 만드신 빛의 신께서도 유진 님의 행동을 긍정하는 것이라……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흠.”
“또, 크리스티나 성녀후보님이 유진 님과 함께 계십니다. 저는 그분과 자주 만난 적은 없지만, 성녀후보님이 아주 신실하시며 선한 분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렇습니까?”
“예. 만약 유진 님이 그분을 억지로 납치하셨다면, 성녀후보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을 겁니다.”
유진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성검의 칼자루를 손가락으로 감쌌다.
“저는 그 말이 참 싫게 들립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라파엘로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로게리스 추기경이 키워낸, 제가 알고, 보아왔던 성녀후보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 성녀후보님이…… 신성한 의식을 도중에 그만두고 유진 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저는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신전은 보고 오셨습니까?”
“처참하더군요.”
표정이 한 꺼풀 벗겨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 확인하는 것이 늦었군요. 사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는 일인가 싶습니다만…… 모두 다 유진 님이 하신 겁니까?”
“성기사와 심문관을 100명 넘게 죽이고, 징벌자 아타락스와…… 또…… 누구지?”
“혈십자 기사단의 대장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친구의 이름은 조반니입니다.”
“아, 예. 조반니…… 경과, 세르지오 추기경. 전부 다 제가 죽인 겁니다.”
이 모든 대화에서 라파엘로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처음과 같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고,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는 마치 이 모든 것을 지극히도 사무적인 보고처럼 대하는 것만 같았다.
“큰일을 하셨군요.”
라파엘로가 말했고.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유진이 대답했다. 그러고서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런 대화가 맞는 건가? 유진은 내심 그런 의문을 느꼈다. 라파엘로의 반응이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도 일국을 대표하는 성기사이니, 제국과 종교에 대한 충성심과 빛에 대한 신앙이 드높을 텐데.
라파엘로의 얼굴은 정말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유진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생부터 경험한바, 저런 속내를 알 수 없고 태도가 기괴한 놈일수록 터무니없는 광기를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아, 크리스티나 성녀후보님.”
텐트에서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밖으로 나왔다. 텐트와는 제법 거리가 멀었지만, 라파엘로는 크리스티나가 나온 것을 보고서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상처 없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자주 만난 적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데면데면한 사이인 것은 아닙니다. 성녀후보님이 다루시는 플레일도 제가 가르친 것입니다.”
크리스티나가 다가오려고 했다. 유진은 그녀가 다가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손을 들려고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라파엘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성녀후보님. 아직 다가오지 마십시오.”
“라파엘로 경…….”
“아직 저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유진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라파엘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엇을 고민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유진 님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왜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그야…… 신전을 보고 왔으니 말입니다. 세르지오 추기경은 강했고, 조반니 그 친구도 대장에 오를 정도였으니 실력이 썩 괜찮았습니다. 말레피카룸의 아타락스도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죠. 거기에 성기사와 심문관의 사망자가 약 170명쯤.”
라파엘로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저만한 참극을 벌였으니, 유진 님은 엄청나게 강할 겁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솔직히 저는 유진 님과 별로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안 싸우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 있다면 제가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유진 님도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역시 그렇죠?”
“예. 유진 님은 너무나도 엄청난 일을 벌이신 겁니다. 제가 싸우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드러난 사실만 보고 생각했을 때에. 저는 무조건 유진 님과 싸우고, 죽여야 합니다.”
“혼자 오시지 않고 다른 성기사들을 데리고 왔다면 일이 손쉬웠을 텐데 말입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곳의 신전과 빛의 샘은 교단 내에서도 비밀스러운 것이고…… 제가 온 것은, 이곳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군요.”
“솔직히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유진 님이 죽인 시체들을 보았는데, 아주…… 대단하더군요. 그만큼 무자비한 칼부림은 지금 같은 시대에서는 보기 힘들 겁니다.”
다시 침묵.
“절 이곳에 파견한 것은 교황성하입니다. 그분께서는 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한 뒤, 유진 님을 완전히 제압하고 교황청에 데려오거나…… 목을 가져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런…… 라파엘로 경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까?”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교황성하가 가진 기사들 중 저만큼 강하고, 신실하고, 진실하며 충성스러운 기사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그 대검. 뽑으시렵니까?”
“아직 고민 중입니다…… 만. 차라리 유진 님, 도망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예?”
“그편이 저로서도 의욕을 끌어내기 편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기왕이면…… 성녀후보님은 이 자리에 두고. 유진 님 혼자 도망쳐 주십시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나름 많은 생각을 하고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성녀후보님이 보는 앞에서 칼부림을 벌이고 싶지는 않고…… 유진 님이 그렇게 당당히 계시는 모습을 보니, 제 믿음도 조금 흔들려 버립니다.”
“과연.”
“아,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군요. 그…… 서로 검을 맞대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나누는 대화에서 분노나 적의, 살의는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금속 특유의 냄새를 느꼈다. 마치 입이 달린 검과 대화하는 것만 같았다. 유진도 마찬가지지만, 라파엘로에게도 예열(豫熱)이란 과정은 필요가 없었다.
저 소년의 거죽을 뒤집어쓴 성기사는 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즉시 미치광이 같은 살의를 쏟아낼 것이다. 필요하다면 부하 성기사와 추기경과 심문국 소속 신도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증오하며,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모든 감정을 살의로 연마하고 저 대검에 실어낼 것이다.
그런 방식의 전투와 살인을 지저분하다 생각하는 쪽이라면. 여태까지의 대화와 시선과 태도에서 보인 것처럼, 지극히도 사무적이게 검을 휘두를 것이다.
“성검을 뽑아주십시오.”
라파엘로가 입을 열었다.
“제 앞에서 성검의 빛을 보여주십시오.”
“라파엘로 경! 유진 님은…….”
“감히 말씀드립니다, 크리스티나 성녀후보님. 저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지금의 제게 필요한 것은 판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확인입니다.”
라파엘로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진은 여전히 탁한 라파엘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검을 뽑고, 빛을 보여 달라는 요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유진이 성검을 뽑아서 빛을 일으켰을 때.
빛의 신도들은 모두 다 감탄하며 유진을 용사라 추앙했다. 그런 주제에, 유진이 자기들의 관점에서 어긋났다는 것을 알고서는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유진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다.
“이러면 되었습니까?”
망토의 안에서 뽑아 든 성검의 검신이 빛을 뿜었다. 성검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유진에게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검을 쥐고서. 빛을 의식하면 되었다.
이러한 ‘빛’은 유진 스스로도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신전에서 유진이 신도들을 죽일 때. 성검은 유진이 바라던 대로 빛을 내뿜지는 않았다. 유진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손을 불태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유진이 신전의 안개 속에서 바른길을 찾아내도록 인도해 주었으며, 세르지오 추기경을 죽이는 마지막 순간에는 유진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찬란한 빛을 터트렸다.
마치 유진이 말했던 신벌(神罰)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주제에, ‘빛’은 신전의 성직자들 모두에게도 힘을 빌려주었다. 심지어 세르지오는 고위 신성마법을 사용해 천사를 불러냈고, 성흔을 사용하기도 했다.
유진의 손에서.
빛의 신이 정말로 성녀라는 모조화신과 그를 완성하는 의식을 경멸하여 신벌을 일으켰다.
동시에 다른 신도들에게도 빛을 빌려주었다.
아니스는 빛의 신은 모든 신도를 사랑하며 빛을 내려준다고 말했다.
차라리 빛의 신이 유진의 뜻에 호응하여 눈앞의 성직자들에게 빛을 거두었다면. 유진은 용사란 위치를 사용해서 아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빛의 신은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빛의 신은 자비롭다기보다는 무심했다. 그는 제 화신의 시체를 사용해 성녀라는 모조화신을 만드는 것을 내버려 두고, 그 모조화신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유라스가 수백 년 동안 벌여온 비인도적인 실험에도 침묵하며 빛을 내려주었다.
그렇게 수백 년.
유진이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인 것은 사실이나, 유라스의 광신도들ㅡ 특히 이 모든 내막을 알고, 스스로 새긴 성흔을 빛이 내린 것이라 거짓말을 해대는 교황과 추기경은. 유진이 참극의 진상을 들이밀어도 후회하거나 참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이곳에 라파엘로 마르티네스 혼자 온 것도 그들의 생각을 짐작하게끔 해주었다.
교황과 추기경들은 이 일을 완전히 묻어버릴 것이다.
“…….”
라파엘로는 잠시 동안 빛을 발하는 성검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머리 뒤의 칼자루를 잡았다.
일직선으로 세운 대검을 등 뒤에서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대검의 칼자루를 어깨 쪽으로 당겼다. 가슴에 감고 있던 벨트가 함께 움직이고, 대검이 어깨에 걸쳐졌다.
스르릉.
십자가 형상의 대검이 천천히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라파엘로는 뽑은 대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유진은 성검의 빛을 꺼트리지 않고 라파엘로를 응시했다.
화악.
라파엘로의 대검에서 빛이 일어났다. 간단하게 일으킨 저 빛은, 며칠 전 보았던 성기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찬란하며 짙었다.
“…….”
라파엘로는 말없이 빛을 견주어보았다.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빛이 담겼다. 그는 웃음이 하나 없는 얼굴로 자신의 대검을 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검이 빙글 돌았다. 라파엘로는 옆으로 뉜 대검을 양손으로 받치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용사에게 경의를.”
라파엘로가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아직 라파엘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라파엘로는 양손으로 받친 대검을 머리 높이 들어 올렸다.
“빛에 경배를.”
라파엘로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찬란한 빛 너머의 유진을 올려다보며, 머리 위로 들었던 대검을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뭐 하는 겁니까?”
“성검은 당신을 인정했습니다. 많은 신도를 죽였음에도 그 빛은 바래지 않았고, 지금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라파엘로가 고개를 낮추었다.
“……여전히 당신의 손에서 빛은 밝으니, 유진 님이 벌인 짓은 신도의 대량학살이 아닌, 빛이 함께한 신벌이라는 것일 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신도인 저는 그 모든 진실을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찬란한 빛을 따를 뿐입니다.”
“당신은 내가 타락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타락자의 손에서 그만큼의 빛이 일어난다면 타락이 올바른 것이겠죠.”
라파엘로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저는 오랫동안 빛을 믿고, 교단에 충성을 다해왔습니다. 그동안 아주 많은 것을 보고, 제 자신에게 믿음을 강요했습니다. 비밀스러운 신전. 학대와 다름없는 의식. 유실된 선대 성녀들의 유해. 교황과 추기경들의 밀담.”
“…….”
“하나 빛은 자비롭게도 그들에게 누구보다 찬란한 빛을 주셨으며, 그 모든 것을 짐작하고 괴로워하며 불신을 상상하는 제게도 빛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결국 ‘이쪽’이 옳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유진 님의 빛을 보니, 이쪽이 무조건 옳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라파엘로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교황의 목을 베러 갑시다.”
“……예?”
“교황 에우리우스는 교황청의 알현실에서 제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샤라 추기경과 피에트로 추기경도 에우리우스와 함께 있습니다.”
“…….”
“3명이 함께 있느니 한꺼번에 목을 벨 수 있습니다. 교황청에 배치된 성기사들이 꽤 많기는 합니다만, 제가 앞장선다면 알현실까지는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잠깐.”
“에우리우스가 개인적으로 대동한 호위기사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놈들의 숫자는 10명에 실력은 유진 님이 죽인 조반니와 비슷합니다.”
“잠깐만.”
“진짜 문제는 에우리우스와 베샤라, 피에트로라고 생각합니다. 유진 님은 세르지오를 죽였다고 하셨는데, 그는 빛을 사용했습니까?”
“사용하기는 했는데…….”
“과연. 자비로운 빛께서는 믿음 있는 모든 존재를 비추시는군요. 덕분에 우리는 교황과 추기경을 죽이는 것이 아주 곤란할 겁니다.”
라파엘로는 당연하단 듯이 자신을 유진에게 더해 ‘우리’라고 묶었다.
“제가 추천드리는 것은 역시 기습입니다만. 그것에는 유진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일단 제게 제압당한 척하시고 함께 알현실에 들어가시면, 기습적으로 추기경은 죽일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에우리우스가 남기는 하는데…… 흠…… 문제는 이겁니다. 에우리우스를 일검에 죽이지 못한다면 성기사와 심문관과 성직자들이 몰려올 거고, 만약 죽이는 데 성공해도…….”
“잠깐, 잠깐!”
유진은 급히 외치며 라파엘로의 말을 끊었다.
“저는 그들을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여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들도 유진 님을 죽이고 싶어 할 겁니다.”
“정말로?”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듣자니 특급 유물고에서 보관하던 성유물의 대부분이 사라졌다더군요.”
“……예?”
“저야 그 이유는 모릅니다만. 유진 님이 관련된 것 아닙니까?”
유진은 빛의 샘과, 기계장치의 안에서 여과와 정수의 역할을 하던 성유물들을 떠올렸다. 그 모든 것들은 유진이 보는 앞에서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교황청의 성유물도 사라졌다는 건가?’
그 성유물이라는 것은 결국 전대 성녀의 유해일 것이다.
“유라스의 시초부터 보관해 온 특급성유물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신지(神地)라 여겨지던 빛의 샘도 사라졌고, 로게리스 추기경이 죽었고, 성기사와 심문관도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황과 다른 추기경들은 유진 님을 죽이거나, 그 책임을 물으려 할 겁니다.”
“그들도 결국은 성직자인데. 라파엘로 경처럼 성검의 빛을 보고 개심할 수도 있잖습니까?”
“저는 개심이 아니라 환멸(幻滅)한 겁니다.”
라파엘로는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진즉부터 환멸했는데, 다른 계기가 더 필요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교황과 추기경은 저와 다를 겁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진 님은 갑자기 나타난 용사, 빛의 변덕입니다. 그들은 유진 님을 기적이라 추앙하겠지만, 그래야만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유진 님을 타락자이자 악마라고 말할 겁니다.”
세르지오가 그랬던 것처럼.
“유진 님이 바라셔야 할 것은 그들의 개심이 아닌 납득입니다. 그들은 너무 높은 곳에 있고, 많은 것을 보았으며, 많은 것에 각오를 다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유진 님에 의해 잃은 것을 유진 님에게 요구할 것인데, 제가 판단하기로는 그들의 요구를 이뤄주는 것은 불가능하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습니다.”
“무엇을 요구할 것 같습니까?”
“용사임을 증명하기 위해 저 헬무드의 삼공 중 하나를 암살하라고 시킬 수도 있겠고…… 흠, 그건 유폐의 마왕을 너무 자극하는 일이군요. 유라스에 완전 귀화는 너무 가벼운데…… 아. 좋은 요구 거리가 있군요. 에우리우스 교황은 아마 유진 님보고 루하르의 국왕을 암살하라고 할 겁니다.”
“……예?”
“루하르의 국왕, 야수왕(野獸王) 아만 루하르. 그 나라는 신성제국이 이끄는 항마연합의 가입을 몇 번이고 번번이 거절한 데다, 최근 몇 년부터 헬무드와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아만 국왕 본인의 힘도 대륙 제일을 논할 만하니, 교황의 눈엣가시라 할 수 있지요.”
“그걸 왜 나한테?”
“아무리 거슬려도 교황 본인이 나설 수는 없고, 유라스가 루하르와 전쟁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러니 유진 님을 사용하는 겁니다. 만약 실패할 때를 대비해 정신에 금제를 걸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실패해도 유라스와의 연결고리는 드러나지 않고, 키옐이나 라이언하트가 알아서 수습할 겁니다.”
“허.”
“아니면 유진 님의 팔다리를 잘라서 성유물로 삼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요구사항은 됐고, 그들을 납득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
“불가능할 것 같은데…….”
라파엘로는 무덤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유진은 그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티나가 멀찍이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이리 와봐.”
“예?”
“그냥 오지 말고, 그거 하면서.”
그거는 또 뭔지. 크리스티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유진이 하는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낮은 헛기침을 하면서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크리스티나가 걸음을 뗐을 때.
ㅡ화아악!
그녀의 등 뒤에서 8장의 날개가 치솟았다.
“저거 보여주면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유진은 날개를 펼치고 다가오는 크리스티나를 가리키며 라파엘로를 돌아보았다.
라파엘로의 가면이 박살 나 있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소년의 얼굴에 어울리는 순수한 감탄과 감격을 표정에 담았다.
알현실
강대국이라 불릴 만큼의 국력을 가진 나라라면, 병력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비행병대 하나쯤은 운용하고 있다.
키옐 제국에는 그리핀 병대가 있고, 라이언하트 가문의 흑사자들은 전용 와이번을 한 마리씩 데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루하르 왕국도 와이번의 아종인 아이스 와이번 병대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 여러 비행병대 중에서 독특한 것이 둘. 마도왕국 아롯의 마법병단은 따로 비행 몬스터를 사육하는 것보다는, 소환수나 사역마를 통해 비행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사막왕국 나하마는 대형 몬스터인 스핑크스를 공중전함처럼 운용하고 있다.
비행병대에서 쓰이는 몬스터 중에서 가장 고전적이라 할 것은, 바로 날개 달린 말이 페가수스다. 그 페가수스를 사육해 비행병대로 운용하는 곳이 해상왕국 시무인과 신성제국 유라스, 둘이다.
혈십자 기사단의 단장, 라파엘로 마르티네스의 상징은 거대한 십자가 대검뿐만이 아니다.
이 거대한 신성제국에서도 한 마리밖에 존재하지 않는 신마(神馬). 빛을 내림받았다고 전해지는 태양의 말. 아폴로.
“선전입니다.”
라파엘로는 아폴로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금색 갈기를 가진 그 거대한 말은 신마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기는 했다. 덩치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군마의 2배는 넘을 것 같은데, 백금색의 마갑(馬甲)까지 입혀놓으니 가뜩이나 큰 덩치가 더욱 부풀었다. 거기에 보통의 페가수스와는 다른 2쌍의 날개까지.
“……엄청 크네.”
묵직한 발굽 소리를 내며 다가온 아폴로가 4장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 모습에는 페가수스 하면 떠오르는 날렵한 이미지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우거나 트롤 같은 어지간한 중대형 몬스터도 저 아폴로의 앞에 서면 어깨를 움츠릴 것이다.
“당연히 클 수밖에요. 교황청은 아폴로가 빛내림을 받은 페가수스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저 녀석은 이종교배와 마법생물학, 신성마법을 섞어 만들어낸 신성잡종입니다.”
“……신성…… 뭐?”
“신성잡종. 아포로뿐만이 아니라, 유라스의 성마기병대(聖馬騎兵隊)의 페가수스들 모두가 그런 신성잡종입니다. 그중에서도 아폴로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사실이긴 합니다만.”
다가온 아폴로가 투레질을 하며 라파엘로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라파엘로는 칙칙한 눈을 깜빡이며 아폴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유진 님에게도 낯설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샘을 부수고 신벌을 내리신 것 아닙니까?”
“라파엘로 경은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고 말입니다. 수백 년 동안 거대종교로 군림했던 빛의 신교의 추악한 진실…… 뭐 그런 것들은 제가 알 바가 아닙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교단이 아무리 추악할지라도 빛께서는 존재하신다는 것. 그뿐입니다.”
라파엘로는 아폴로의 등에 오르기 전,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크리스티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는 머뭇거리다가 라파엘로의 무릎을 발로 밟았다. 라파엘로는 조심스레 크리스티나의 등을 받치고 몸을 일으켜, 그녀를 안장 위에 올려주었다.
“유진 님도.”
“전 필요 없습니다.”
사실 크리스티나도 저런 배려는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소년기부터 성장이 멈춘 라파엘로가 어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라파엘로보다 키가 컸다…….
“그럼 제가 앞에 앉도록 하겠습니다.”
아폴로는 그 덩치만큼 등도, 안장도 넓었다. 3명의 사람이 올라탔음에도 안장은 자리가 여유로웠고, 다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선두에 앉아 고삐를 쥐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황청으로 하강을 시작하면…… 유진 님은 기절한 척해주십시오. 유진 님 경지의 고수라면 기절 연기도 뛰어날 것이라 믿습니다.”
“기절한 척보다는 죽은 척을 원하는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교황청을 수호하는 성기사들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들켜 버리면 일이 굉장히 번거로워진다. 유진도 그 사실은 이해했고, 죽은 척이라면 꽤 자신이 있기도 했다. 갓 용병이 되었을 때에는 험난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체 틈바구니에 몸을 들이밀고, 기척과 호흡을 죽이곤 했었다.
“가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저는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는데, 트레치아 대성당과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아닙니까?”
“평범한 말이나 마차를 탄다면…… 흠. 이 숲에서 트레치아 기차역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걸릴 겁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기차를 타고 수도 유레시아까지 가는 데 6시간쯤 걸릴 겁니다. 하지만 아폴로의 속도라면 늦어도 4, 5시간 안에는 대성당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유진을 돌아보았다.
“유진 님이 워프게이트를 부수지 않으셨다면 훨씬 빠르고 간단하게 교황청까지 갈 수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그걸 부숴놓은 덕에 라파엘로 경이 사흘이 흐르고서야 오실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예, 그렇지요. 만약 워프게이트가 남아있었다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입니다.”
“결국 제가 신중했던 것이 다행이었다는 말이네요.”
“예. 아주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라파엘로 경.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저야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인데, 라파엘로 경은 다른 방법도 많고 성국 내에서 잃을 것도 많지 않습니까?”
다시 던진 질문에 라파엘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게 허락되는 다른 방법이래 봐야, 유진 님과 성녀후보님을 억지로 끌고 가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고 말입니다. 유진 님 말씀처럼 제가 잃을 것이 많기는 한데, 제가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잃는 것이 낫습니다.”
“오…….”
“그리고 저는 빛의 신도로서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용사인 유진 님과, 4쌍의 날개를 얻으신 성녀후보님. 그 둘을 앞에 두고서도 교황과 추기경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기들의 신앙이 무조건 옳으며 높다고 주장한다면.”
라파엘로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한순간이지만, 유진은 저 소년의 얼굴 너머에서 뱀처럼 꿈틀거리는 살의를 보았다.
“……그거야말로 신성모독이며, 신벌을 내려야 할 일입니다. 저는 교단에서 가장 뛰어난 성기사라 추앙되는 몸. 저 스스로도 이 시대에서 빛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 앞에서…… 틀림없는 빛을 모독한다면. 어찌 제가 그를 두고 넘길 수 있겠습니까?”
아폴로가 날개를 펼쳤다. 그러자 은은한 빛이 아폴로를 휘감더니, 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유진은 망토 안에서 아카샤를 쥐고 아폴로의 날개를 쳐다보았다.
왜 라파엘로가 ‘신성잡종’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폴로의 날개. 마법을 인챈트해 넣은 아티펙트처럼 여러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그 날개는 신체의 일부로 돋아난 것보다는, 골렘 같은 마법공학품이나 아티펙트를 몸통에 이식한 것처럼 보였다.
[끔찍해라…….]
메르가 중얼거렸다. 아롯의 마탑에서도 저런 실험은 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롯은 유라스처럼 저러한 실험의 산물을 빛의 은혜니 기적의 증명이니 하면서 선전하지는 않는다.
“…….”
크리스티나는 착잡한 눈으로 아폴로의 날개를 보았다.
그녀도 어렸을 때 아폴로를 본 적이 있었다. 4장의 날개를 가진 신마. 소녀 시절의 크리스티나는 아폴로가 내뿜는 빛을 보며 벅찬 감동을 느끼고 신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빛은 확실히 존재하시니, 이 시대에 성녀로 선택된 것은 은혜로운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크리스티나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과정과 존재의 목적은 다르지만, 빛의 선전으로 만들어진 아폴로와…… 모조화신인 성녀후보. 결국 근본적으로는 다르지도 않지 않은가.
크리스티나는 아폴로가 펼친 날개를 이룬 깃털을 보았다.
태양빛이 하나하나 깃든 것만 같은 깃털…… 하지만 저 깃털의 빛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마법에 대한 지식이 얕은 크리스티나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만 해도 보라. 아폴로의 비행은 지상의 풍경이 휙휙 바뀔 만큼 빠르지만, 정면에서 바람은 날아오지 않는다. 이토록 빠르게 날고 있는데 안장에 앉은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허리나 끌어안으십시오.]
“예?”
돌연 머릿속에서 질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제가 요 며칠 동안 당신의 기도 속에서 몇 번이나 훈계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불우한 존재인 것이 사실이듯, 기적적인 존재인 것도 사실입니다.]
‘……네…….’
[그리고 당신은 아주 운이 좋습니다. 이 또한 기적이라고 할 만큼의 행운을 손에 넣었단 말입니다. 당신은 제가 그랬던 것처럼 끔찍한 시대, 끔찍한 전장에서 십수 년을 떠돌지 않을 겁니다. 신의 존재증명에 대한 고민과 불안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과, 당신에게 깃든 제가 바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크리스티나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도 논쟁에는 상당한 자신이 있었지만, 저 300년 전의 위대한 성녀는 크리스티나에게 반발의 여지를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것에 아주 능숙했다.
[어쨌거나 당신은 나름의 구원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는 고통스러운 의식을 받을 필요도 없고, 제가 그랬듯이 성흔의 고통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이 느낄 고통의 대부분은 제가 부담할 테니 말입니다.]
‘저…… 저는 그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니스 님.’
[당신이 바라지 않아도 저는 그렇게 할 거고, 당신은 대가로 술이나 마시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크리스티나. 저를 시스터라고 부르라고 했을 텐데요?]
‘어찌 감히…….’
[아니면 언니라고 부르겠습니까? 사실 저는 시스터와 언니를 구분하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니스 님으로는 안 되는 겁니까?’
[싫습니다. 저와 당신은 영적인 분신입니다. 300년이라는 시간이 있기는 합니다만, 자매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당신과의 유대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데, 당신이 저를 시스터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저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퍼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
[이건 제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미련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저는 세냐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건방진 세냐는 절 단 한 번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무시하고 우습게 보며, 하멜과 작당하여 제 귀한 성수를 훔쳐 마셨지요.]
‘그렇…… 습니까?’
[예. 그러니 저는 언니 소리를 듣지 못한 것에 한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끄럼쟁이인 당신이 저를 언니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니, 시스터라 부르는 선에서 양보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대체 무어가 문제입니까? 수녀들 사이에서 시스터라는 호칭은 평범한 것 아닙니까?]
‘아, 알겠습니다. 시스터 아니스.’
[이름은 굳이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예…… 시스터…… 한데…… 제가 미숙하여 처음의 꾸짖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시스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크리스티나! 대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는데, 당신은 아주 영악한 면이 있습니다. 뻔히 들어놓고서 못 들은 척, 제가 등을 떠밀어주기를 바라는 겁니까? 참으로 망측한 사람!]
‘아, 아닙니다. 저는 정말, 정말로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잘 들으십시오. 크리스티나. 제가 죽기 전에 가장 후회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 크리스티나는 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했다. 그 신실한 아니스가 남긴 후회…… 사실 고민이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크리스티나는 한 번 심호흡을 한 뒤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지 못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럼…… 하멜…… 아니, 유진 님이나 다른 여러 사람들을…… 아! 세상을 구해내지 못한 것?’
[아닙니다. 제가 가장 후회한 것은, 인생을 즐기지 못한 것입니다.]
‘…….’
그 단호한 대답에 크리스티나의 사고가 정지했다.
[잘 들으십시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저희는 존재한 순간부터 불행했습니다. 인정합니까?]
‘……예…… 예에…….’
[불행을 거쳐, 저희는 간신히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저희는 이런 존재로 태어나고 온갖 고난을 겪었기에, 이 세상의 다른 누구보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습니다. 특히 저는! 그 끔찍하던 마경에서 십수 년을 떠돌고, 거의 매일같이 성흔의 고통을 느끼면서까지 수많은 사람을 구하려 했습니다.]
‘시스터의 미담은 모든 빛의 성직자들의 귀감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저는 수많은 사람을 구하려 했고, 구했지만, 정작 제 인생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유폐의 마왕이 자비롭게 던져 준 평화에서 제가 어떻게 살았을 것 같습니까? 마경에서 돌아오고 죽기까지의 약 70년. 저는 동정받아 얻은 평화도, 인생도 즐기지 못했습니다.]
‘…….’
[어떻게든 먼 미래를 대비해 보고자 시골의 수도원에 틀어박혀,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들을 교육했습니다. 가끔 찾아와 피를 좀 내어달라는 교황과 추기경의 귀싸대기를 후리는 것이 제 유일하다시피 한 즐거움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후대를 양성하고, 저 자신을 완전무결한 빛의 화신으로 만들고자 기도를 거듭했지요. 그마저도 실패했지요! 저는 살아서 완벽한 화신이 되지 못했습니다. 교단을 엿 먹이고자 몸을 감추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저 빌어먹을 하멜 때문에 하지 못했지요.]
그게 하멜의 잘못인가?
크리스티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지만, 답하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결국 성녀인 제 인생은 후회와 실패만 가득했단 겁니다. 하지만 자비로운 빛께서는 제 혼을 강제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천사로 보듬으셨지요. 그렇게 저는 세상에 남을 수 있었고, 당신에게 깃들 수 있었습니다.]
‘예…… 예에. 참으로 은혜로운 일입니다.’
[예, 맞습니다. 은혜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뭐 하는 겁니까? 이만큼의 신은(神恩)을 입었으면서, 당신은 웬 말 새끼의 처지를 동정하고 자신을 대입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불행하게 살았던 제가 왜, 저 자신도 아닌 당신의 울적함에 휘둘려야 합니까?]
‘그…… 것은…….’
[똑똑히 들으십시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저희는 불행했고, 행복해질 자격이 있습니다. 성녀란 결국 허상이고 육(肉)의 순결함은 성녀의 기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 그런 망측한……! 시스터는 그 사실을 어찌 아십니까? 설마…….’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평생을 성녀답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죽고 천사가 되어보니, 빛과 기적에 있어서 육체란 별 가치가 없는 하찮은 것임을 깨치게 된 것뿐입니다.]
‘그런…… 그런…….’
[왜 지금 와서 내숭을 떠는 겁니까? 크리스티나, 당신은 음험한 욕망을 안고서 하멜의 엉덩이를 실컷 주물러 대지 않았습니까?]
‘아아, 아아아! 시스터,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상처 입은 유진 님을 돌보고자…….’
[예, 예, 알겠습니다. 음험한 당신을 위해 제가 다시 양보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티나! 지금 당신의 자세가 몹시 불안정하여, 당신의 안에 있는 제가 더 불안스럽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자세를 살폈다. 그녀는 아폴로의 맨 뒤편에 앉아서, 두 다리로 몸뚱이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리고 양손은 아래로 내려 안장을 잡고 있었다. ……그리 불안정한 자세는 아니었다.
만에 하나 떨어질지라도 문제는 없었다. 아폴로에 새겨진 기적은 기수의 추락을 완벽하게 방지한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날개를 펼칠 수 있었기에, 떨어진들 날개를 펼쳐 날면 되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제 날개는 겉치레일 뿐입니다. 실제로 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크리스티나! 어서 하멜의 허리를 끌어안도록 하십시오.]
‘굳이…… 굳이 그럴 필요가…….’
[싫다고 한다면 제가 억지로라도 당신의 몸을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육체의 주도권을 빼앗고,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안에서 지켜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시스터!’
[저는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의 행동을 할 겁니다. 음험한 당신은 오히려 그편을 바라는 것 아닙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위안하며, 마음 편히 관음이나 하려는…….]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아니스의 말을 듣지 않고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유진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군살이라곤 없는 단단한 옆구리가 손에 감겨왔다.
“……으흠…… 으흐흠!”
크리스티나는 괜히 민망하여 헛기침을 뱉었다. 그녀는 유진이 고개를 돌려 뭐라 한마디 이죽대는 걸 상상했지만, 유진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해?”
“흠흠…… 잠시 명상과 기도를 하였습니다.”
라파엘로가 앞에 있으니 아니스를 운운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이죽대지 않는 것에 안심하며, 조심스레 팔을 조금 더 앞으로 뻗었다. 그렇게 유진의 허리를 단단히 안고, 몸을 더 기울이려는 순간…….
찰싹!
망토 안에서 튀어나온 손이 크리스티나의 손등을 매콤하게 후려쳤다.
“선 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선을 넘었다는 겁니까? 메르 님, 이상한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낙마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쏙 내민 메르는 말없이 크리스티나를 흘겨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제 변명이 궁색하다는 것을 알고 슬쩍 시선을 피하며, 유진의 허리를 안은 손을 풀려 했다.
“눈 까십시오.”
크리스티나의 입이 멋대로 열렸다.
“확 혼쭐을 내버릴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굳이 닫지 않았다. 대신, 메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몸을 빼서 유진의 품에 와락 안겼다.
“유, 유, 유진 님!”
“알아…… 아는데…… 내가 뭐라고 하기 좀 난감하네…….”
“유진 님!”
“저기…… 음…… 얘한테 너무 심술부리지 말고…….”
“저 사역마 아가씨가 절 배려한다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메르는 더 이상 크리스티나에게 핀잔을 주지 못했다. 덕분에 크리스티나는 비행 동안 유진의 허리를 안았고, 메르는 유진의 품에 반쯤 안겨서 하늘을 날았다.
“……하아…….”
유진은 그사이에 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언하트.
그 평온한 저택이 그리웠다.
* * *
유라스의 수도, 유레시아. 그 거대한 수도의 중심부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백색 궁전이 있다.
교황청.
그 상공에 4장의 날개를 펼친 페가수스가 선회하고 있다. 혈십자 기사단장인 라파엘로 마르티스의 애마이자, 빛이 은혜를 내린 신마, 아폴로다.
교황청을 지키는 기사들은 상공에서 회선하는 ‘빛’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교황청의 상공에서부터 직접 중앙의 백원궁(白圓宮)으로 내려올 수 있는 특혜를 가진 것은, 교황청에 배속된 수백 명의 성기사 중에서도 오직 크루세이더와 신마 아폴로뿐이다.
“많군. 몇 명이나 되는 겁니까?”
“성기사만 해도 500명은 됩니다. 그중 200명 정도가 혈십자 기사단이고, 나머지는 다른 부대 소속의 성기사들입니다. 그리고 신병(神兵)까지 더하면 수천은 됩니다. 유라스는 워낙에 거대하고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해와서…… 적이 많습니다.”
“그야 그렇겠죠.”
“사실 적보다는…… 흠, 이 말은 유진 님이 우습게 여기실 수도 있지만. 교황청의 경비가 많은 것은 광신도들 때문입니다.”
“푸핫!”
“웃으실 줄 알았습니다. 유레시아에서 살아가는 신도들은 그렇지 않지만…… 가끔, 시골에서 상경한 신도들은 어떻게든 교황을 만나고 옷깃이라도 만져보고자 무턱대고 교황청에 쳐들어오곤 합니다.”
라파엘로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내렸다.
지금 유진은 라파엘로의 앞쪽에 있었는데,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안장에 몸을 걸쳐 축 늘어져 있었다. 라파엘로에게 제압당해 이곳까지 연행되었다는 설정인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라파엘로의 뒤편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설정상으로, 크리스티나는 타락한 용사의 폭주에 휘말렸다. 그렇게 납치되는 중에, 라파엘로에게 구출된 것이다.
“저들은 유진 님을 보지 못합니다.”
라파엘로가 말했다.
“저들의 눈에는 아폴로가 거대한 빛으로만 보일 겁니다. 그래서 이 아폴로가 신마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저 주면 안 됩니까?”
유진은 대뜸 그렇게 물었고, 라파엘로의 말문이 막혔다.
“……백원궁의 천장이 열리는군요. 이렇게 하늘에서 직접 백원궁으로 내려가는 것도 저와 아폴로에게만 허락된 특혜입니다.”
무시당했다.
“천장에서 일직선으로 내려가면, 백원궁 지하의 알현실 앞으로 도착할 수 있습니다. 교황과 추기경은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들은 라파엘로 경의 배신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예. 저는 수십 년 동안 충직한 기사이자 빛의 숭배자로 살았습니다. 제가 배신할 것을 생각했다면 그들이 저를 유진 님에게 보냈겠습니까?”
라파엘로는 큭큭 웃으며 아폴로의 고삐를 당겼다.
“저는 그것도 아주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이 신성모독이란 자각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무조건 옳으며, 빛의 뜻을 이행한다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주 틀리지는 않지요. 자비로운 빛은 언제나 그들을 찬란하게 밝혔으니 말입니다.”
백원궁의 원형 천장이 열리고,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입구가 나타났다. 아폴로는 4개의 날개를 접고서 천천히 통로로 하강했다.
거기서부터 유진은 죽은 척을 시작했다. 더 이상 라파엘로와 대화를 나누지 않고, 기척과 호흡을 죽였다. 크리스티나도 표정을 가다듬고 익숙한 가면을 만들어 얼굴에 덮어썼다.
유진은.
라파엘로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함께 오기는 했다만, 라파엘로가 내뱉은 말이 모두 다 거짓말이고 연기일 수도 있다고 가정했다. 알현실에서의 기습. 라파엘로의 검은 추기경이나 교황이 아닌 유진의 목에 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유진은 오른손을 망토 안에 감췄다. 그 손은 성검을 쥐는 대신, 월광검을 쥐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월광검의 빛을 뿌린다면 일단 타개는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믿었다. 라파엘로는 배신할지도 모르지만, 그 둘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좋은 기분이야.’
유진은 가슴 안쪽에서 간질거리는 희열을 느꼈다. 상황이 어찌 흐를지 모른다는 긴장감. 그럼에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동료가 함께 있다는 것. 300년 전의 전장에서는 당연하던 동료의 존재가, 환생하고서는 참 의식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궁지에서는 더더욱.
백원궁의 지하. ‘알현실.’ 이곳은 교황의 어전이 아니다. 드높은 하늘에 존재하는 빛을 알현하는 곳. 계시가 내려지는 곳. 빛이, 성흔을 받은 성직자들 중에서 교황을 선택하는 곳.
본래라면 크리스티나는 이곳에서 다른 성유물들을 이식받아, 성녀후보에서 성녀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끝난 뒤, 유진과 성검은 교황과 추기경 앞에서 용사임을 증명받았을 것이다.
결국 그 모든 예식은.
빛이 ‘선택’한 용사가, 교황과 추기경에게 다시 한번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긴장한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저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크리스티나는 두 발로 땅에 섰다.
[오히려 저들이 당신에게 신앙을 증명받아야 할 것입니다.]
라파엘로는 축 늘어진 유진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알현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널따란 방. 마치 재판장을 연상시켰다. 상석에는 길쭉한 백색의 테이블이 있고, 그 너머에 3명의 중년인이 앉아 있다.
세르지오 로게리스가 앉았어야 할 자리는 공석이다. 그 옆에 성직복을 입고, 어깨에 붉은 천을 걸친 2명의 추기경이 앉아 있다.
머리 위에 삼중관을 쓰고, 백금 반지를 낀 손으로 지팡이를 쥔 중년인이 중앙에 앉아 있다.
그가 바로 수십 년 동안 빛의 신교를 이끌어온 교황, 에우리우스였다.
“수고가 많았네, 라파엘로 경.”
에우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아래에 선 라파엘로와, 의식을 잃고 있는 유진을 보았다.
“그대가 무엇을 보았는지, 또 무엇을 하였는지를 듣고 싶군.”
“물론 저는 한 점의 거짓 없이 고하겠나이다, 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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