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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8

 라파엘로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만 그전에, 이 타락자를 어찌해야 할지를 먼저 일러주시옵소서.”


“이리 가까이 오도록 하게.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그는 신분이 있는 자이며, 빛의 선택을 받은 용사일지니…….”


에우리우스가 지팡이를 들며 말했다. 검지에 자리한 백금 반지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지팡이와 공명하듯이 빛이 번져나갔다. 라파엘로는 숙였던 고개를 들지 않고, 유진을 받치고 있는 양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툭.


라파엘로는 따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유진의 허리를 살짝 두드렸다. 그러면서 천천히 상단을 향해 다가갔다. 라파엘로가 다가오자 에우리우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추기경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유진이 아닌 크리스티나에게 향해 있었다. 많은 것을 묻고 싶어 하는 눈. 죽은 세르지오에 대한 애도가 아닌, ‘의식’의 진행과 성녀의 완성도만을 생각하는 눈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에우리우스가 천천히 지팡이를 내밀었다.


라파엘로는 마치 제물이라도 바치는 것처럼 유진을 더욱 위로 들어 올렸다.


한 번 더 라파엘로의 손가락이 유진의 허리를 두드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힘이 더 강했다. 손가락이 두드린 유진의 몸이 살짝 위로 띄워졌다.


ㅡ파직!


번개가 움직였다. 유진은 허리를 크게 튕기며 허공에서 쏘아져 나갔다. 기겁한 에우리우스가 지팡이를 앞으로 찔렀다. 푸확! 터져나간 빛이 유진의 몸을 집어삼켰다.


망토에서 뽑아낸 월광검이 빛을 양단했다. 그렇게 길을 열고, 왼손은 성검을 뽑았다. 발검과 동시에 그은 참격. 지팡이를 잡고 있던 에우리우스의 오른팔이 잘려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허억!”


급히 대응하려던 추기경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순식간에 달려든 라파엘로의 대검이 그들의 목 앞에서 멈췄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대검을 바짝 붙여, 그들의 목을 얇게 베었다.


“……뭘 하고 싶은 건가?”


오른팔이 팔뚝부터 썩둑 잘렸는데 에우리우스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싸늘한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며 물었다.


성검과 월광검을 교차시켰다. 두 검은 마치 가위처럼 에우리우스의 목을 좌우로 옭아 죄었다.


“크리스티나.”


그 부름에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ㅡ화아악!


8장의 날개가 내뿜은 빛이 알현실에 존재하던 모든 빛을 뒤덮었다.


알현실


활짝 펼친 날개가 알현실의 문과 벽을 가로막았다. 에우리우스는 잘린 손목을 재생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날개는 격의 상징이다. 빛의 성경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빛의 화신인 성황이 이 땅에 강림했을 때, 성황이 불러내고 가장 총애했던 천사가 6장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하였다.


유라스는.


그러한 기적을 재현하는 것에 집착해 왔다. 하지만 신성마법으로 펼칠 수 있는 날개는 겨우 2장. 강력한 신앙과 신성력에 따라 날개를 더 크게, 더 밝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ㅡ 정말로 재현하고 싶은 날개의 숫자는 늘릴 수가 없었다.


인위적으로 날개를 늘리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봤다. 잘되지는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날개를 가진 페가수스에게 날개 몇 장을 더 다는 것은 기적이라 할 것도 없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날개가 없는 인간에게 인위적으로 날개를 붙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사실 평범한 날개로 만족했다면 6장이 아니라 수십 장도 등에 붙일 수 있었을 거다.


평범한 날개를 바라지 않았다. 빛의 날개. 빛으로 만들어진 날개. 기적으로, 펼쳐내는 날개. 인위적으로 성흔을 새긴 교황과 추기경이라고 해도, 빛의 날개는 2장을 펼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3명은 크리스티나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 찬란하게 빛나는 8장의 날개를 보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날개가 아니다. 저 날개는 틀림없는 기적이요 신위(神威)였다. 이 3명도 커다랗고 찬란한 날개는 펼칠 수 있지만, 동시에 날개를 펼칠지라도 저 8장의 날개가 내뿜는 빛은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저토록 찬란하게 빛이 나는데…… 정면으로 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다. 빛은 상냥하게 안구를 어루만지고 스며들어, 혼을 동요시켰다.


“……아……!”


추기경 베샤라는 나지막한 탄성을 뱉으며 두 눈을 감았다.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곁에 있던 추기경 피에트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소매 안에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대검으로 둘의 목을 누르고 있던 라파엘로는 피에트로의 눈동자를 보았다. 스멀스멀 번져가는 감정은 경외도, 경배도 아니었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망설이지 않았다. 콰득! 밀어붙여 기울인 칼날이 피에트로의 목을 단두대처럼 참수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목을 벨 것이라고는 피에트로 본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팔뚝에는 성흔을 지녔으며, 신성제국에서 3명뿐인 추기경 중 하나였다.


라파엘로는 그딴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인정해야 마땅한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인정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벌해야만 했다.


피에트로는 빛을 일으킬 새도 없이 목이 잘렸다. 라파엘로는 칼날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피에트로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ㅡ촤악! 뒤늦게 치솟은 피가 알현실의 벽과 천장을 붉게 적셨다.


“……어…….”


바로 곁에 있던 베샤라의 뺨에 피가 튀었다. 그는 당황하여 옆을 보았다. 머리가 잘린 피에트로의 몸뚱이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당황한 것은 베샤라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도, 유진도 당황했다. 교황 에우리우스는 거듭된 놀람에 입을 쩍 벌렸다. 오직 라파엘로만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피에트로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왜 죽인? 겁니까?”


유진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더듬더듬 물었다. 그 질문에 라파엘로는 피에트로의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이 정도로 안 죽습니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목을 베었는데 어떻게 안 죽습니까? 세르지오 추기경도 목을 베면 죽었을…….”


“피에트로는 신성마법학부의 총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단심문국 출신의 무투파였던 세르지오와는 다릅니다. 안 그렇습니까?”


퍼억! 라파엘로는 흔들던 머리를 벽에 후려쳤다.


“끄악!”


그러자 피에트로가 입을 열고 비명을 질렀다.


그 광경에 유진은 잠시 어지럼증을 느꼈다. 고위 마족 중에서 목을 베어도 죽지 않았던 놈이 몇 있기는 했는데, 목이 베여도 죽지 않는 인간은 처음 보았다.


“라, 라파, 라파엘로! 네가…… 네가 감히!”


피에트로가 피를 튀기며 외쳤다. 목이 썩둑 잘린 탓인지 목소리에는 쉭쉭거리는 바람 소리가 잔뜩 껴 있었다.


“빨리…… 빨리 목을……! 몸에 붙여야……!”


“한 5분 이렇게 있으면 죽겠지요?”


“네가…… 감히……!”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니 굉장히 끔찍하고 징그럽습니다. 이게 정말 기적이란 말입니까? 제가 보기엔 사악한 흑마법으로 보이는데…….”


“크르륵……!”


“나는 예전부터 한 번쯤 당신의 목을 베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서운하다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시오. 피에트로. 당신은 신군(神軍)에 입대한 신병들 중에서 부모를 여의어 처지가 가여운 병아리들을 꼬드겨, 여러 실험을 해왔잖습니까.”


“네가! 아는 것이, 무조건 옳다 여기지 마라……! 그건, 기적의 발전을 위해…….”


“난 당신과 논쟁이나 하려고 목을 벤 것이 아닙니다.”


라파엘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에트로의 머리를 뒤로 던져 버렸다. 벽에 부딪히고, 바닥으로 떨어진 머리가 데굴데굴 굴렀다.


“끄르르륵!”


대뜸 라파엘로가 추기경 한 명의 목을 따버린 탓에, 유진은 굉장히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슬쩍 쳐다보니 월광검과 성검에 목이 닿고 있는 에우리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유진 라이언하트. 날 죽일 건가?”


“말이 짧다?”


“?”


에우리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황파악이 안 돼? 너도 쟤처럼 머리 잘리면 바로 안 죽고 그러나?”


“…….”


“잘 들어, 나는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고, 너희 교리에 따르면 빛의 화신이야. 그렇지? 그리고 교황은 빛의 대리자지. 당연히 화신이 대리자보다 신에 가깝지 않나?”


“……그건…….”


“왜. 너도 세르지오처럼 내가 타락했다 그 지랄하게?”


에우리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잠시 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알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피에트로의 머리를 수습해 주십시오.”


“왜 그래야 하지?”


“유진 님은 이해하지 않으시겠지만, 피에트로는 수십 년 동안 빛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머리가 잘려도 당장 죽지 않는 것이 그 산물이고?”


“……제 몸에 반복해 기적을 새긴 결과입니다. 라파엘로 경은 피에트로가 어린 신병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신군을 강인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성제국 유라스가 강군을 가져 어디에 쓰겠습니까. 저희는 헬무드를 견제하고자…….”


“나도 그딴 말이나 듣자고 이러는 건 아니야.”


성검에서 빛이 일어났다. 목 옆에서 넘실거리는 빛에 에우리우스의 눈이 얇아졌다.


“……대화를 합시다, 유진 님.”


유진이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구석에 굴러가 있던 피에트로의 머리가 고함을 질렀다.


“대화?! 성하, 저 간악한 타락자의 무리와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시겠다는 겁니까!”


피에트로는 이성을 유지하기가 괴로웠다. 머리가 잘리고서 벌써 1분은 넘게 흘렀을 것이다. 아무리 성흔이 있다고 해도 머리가 잘리고 5분 내에 절단면을 붙이지 않는다면 죽게 된다. 피에트로는 자신의 수명이 앞으로 고작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에 초조함과 분노를 느꼈다.


“당장 성기사와 신병을 부르…….”


“그의 목을 바친다면 저와 대화를 나누시겠습니까?”


에우리우스는 눈짓으로 피에트로를 가리켰다. 그 말에 피가 너무 많이 빠져 허연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우리우스!”


“미안하게 됐네, 피에트로.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아.”


“그, 그 무슨!”


“이 위협을 타개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아무 소란 없이 타개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은가? 어떻게든 소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 소란에 성기사와 신병들이 몰려올 걸세.”


에우리우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 상황을 그들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빛의 화신인 유진 라이언하트가 반역을 일으켰고, 그토록 충성스러웠던 크루세이더 라파엘로 경이 반역에 가담했다고? 크리스티나 성녀후보의 등에 돋은 날개는 무어라 설명해야 하고?”


“그…… 건……!”


“몇 번을 생각해 봤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신교에 있어서 아무런 득이 안 돼.”


“아무리 그렇다고……! 수, 수십 년을 함께 교를 이끌어 온 나를 바치겠다고?!”


“노여움을 가라앉히게, 피에트로. 그대의 목이 베인 것은 결국 그대가 자초한 일 아닌가.”


오가는 대화를 듣던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교황 에우리우스. 그 또한 광신도임은 틀림없겠지만, 수십 년 빛의 신교를 이끌어 온 인물답게 노회한 면이 있었다.


“대화 정도는 얼마든지 나눠줄 수 있지.”


“피에트로의 목은 어쩌시겠습니까?”


“내가 벤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묻나?”


유진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렇게 된 마당에 목숨 하나가 더해진들 덜해진들 별 의미는 없겠지만, 유진은 쓸데없는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로가 그 속내를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라파엘로는 피에트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이끄는 신성마법학부에서 개발한 신성마법들은 기적답지 않은 대가를 요구했는데, 그 대부분은 몸을 망가트리는 것이었다.


라파엘로가 이끄는 혈십자 기사단은 그딴 수상쩍고 조악한 기적에는 의존하지 않았지만, 유라스에는 성기사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 중에는 갓 서임 받은 신임기사들이 더 강하고 찬란한 빛을 바라며 신성마법학부의 문을 두드린다.


“자, 잠깐.”


피에트로가 비명을 질렀다.


라파엘로의 대검에서 빛이 치솟았다. 바로 앞에서 그를 보고 있던 베샤라는 탄식을 흘리며 성호를 그었다.


참격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라파엘로의 대검은 그 크기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여, 피에트로의 몸뚱이를 도륙 냈다.


ㅡ푸확!


흐르듯 이어진 참격이 피에트로의 머리를 훑었다. 이번에도 피에트로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환한 빛이 피에트로의 머리를 삼켰고, 그 속에서 머리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빛.”


베샤라가 중얼거렸다.


“……추기경을 죽이는 검에서 발해지는 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군.”


“그러게 말입니다.”


라파엘로는 대검의 빛을 꺼트리며 웃었다.


“……빛의 샘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피를 줄줄 흘리고 있던 여자를 구했지.”


“……성녀후보를 구하는 과정에서 그 많은 신도를 죽이셨다는 겁니까?”


“성녀후보라서 구한 거 아니야.”


“그럼?”


“계시를 받았거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성검의 인도를 받아 신전의 결계를 돌파했다. 샘의 근원에서 오래 전 샘에 더해진 성녀들을 보았다.


“그런 계시를 보여줘 버리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


“……계시라.”


에우리우스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에 닿아 있던 두 개의 검은 어느새 거두어져 있었다. 에우리우스는 테이블 위에 떨어져 있던 오른팔을 들어 절단면에 가져다 붙였다.


……치이익! 살이 서로 엉겨 붙고 이어졌다.


“계시가 샘을 파괴하라고 하였습니까.”


“아니.”


“샘을 파괴한 것은 유진 님의 뜻이군요.”


“그렇지.”


“……성검이 유진 님의 손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는 것은…… 결국 빛께서는 샘과 의식에 분노하셨다는 겁니까.”


“빛은 모르겠고 나는 분노했지.”


“유진 님.”


에우리우스는 양손을 들어 머리 위의 삼중관을 잡더니, 그를 천천히 벗어 앞에 내려놓았다.


“저희의 신앙은 틀렸던 겁니까?”


그 질문에는 가볍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눈앞에 있는 유라스의 교황을 응시했다. 지금 유진의 앞에 있는 것은 1명의 교황이었지만, 빛이 일렁거리는 눈동자의 안에는 신성제국의 역사가 모조리 담겨 있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서 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신앙의 옳고 그름을 따지겠다는 거창한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다. 유진이 바라는 것은, 그냥, 당장,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유라스에서 했던 모든 일이 문제가 되어 발목을 잡히지 않는 것. 유라스를 적으로 돌리는 귀찮고 거창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것.


“너희의 신앙이 옳고 그른지를 듣고 싶다면, 쟤한테 물어봐.”


유진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보았다.


8장의 날개를 펼친 크리스티나와 눈이 마주쳤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머릿속의 목소리.


그것이 등을 떠민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찌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행하는 것에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은 그리 해야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빛이 깃털이 되어 흩날렸다.


크리스티나는 날개를 활짝 펴고서 에우리우스의 앞까지 날아왔다.


“아아……!”


베샤라는 그 성스런 모습에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에우리우스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서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크리스티나 성녀 후보. 아니, 이제는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티나의 오른손이 에우리우스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ㅡ쩌억! 따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무거운 소리가 알현실에 울렸다.


“일단 한 대 맞으십시오.”


크리스티나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내 존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 이전의 성녀들이 어떤 존재였는지, 그들이 죽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빛의 샘. 그 허영뿐인 이름의 진상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날개를 얻으셨습니다.”


“예, 그렇지요. 하지만 이 날개는 당신들이 설계한 기적과 의식을 통해 제게 깃든 것이 아닙니다. 이 날개는, 당신들이 추구하던 거짓된 기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해온 모든 것이 무의미했던 겁니까.”


에우리우스가 물었다.


“저희의, 아니, 역대 모든 교황과 추기경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던 겁니까.”


“누군가는.”


크리스티나는.


“당신들이 유지해 온 이 나라와, 끝없이 선전해 온 빛과 신앙에 구원받았겠지요.”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아직 세르지오 로게리스의 양녀가 되기 전.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의 수도원에서 살았을 때의 기억.


그 시절조차도 감시받았겠지만, 유년기의 크리스티나에게는 그러한 자각이 없었다. 수도원에서 키워지는 아이들은 모두가 비슷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 평범한 가정을, 가족을 모르는 아이들.


빛의 신교의 수도원은, 그런 고아들을 거두었다.


크리스티나는 수도원에서 자란 모든 고아가 올바르게 자라고, 뒤늦게나마 행복을 얻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크리스티나는ㅡ 수도원에서의 삶을, 버려진 자신에게 다가온 빛의 구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당신들의 갈망에 의해 불행했을 겁니다.”


“빛을 갈망하는 것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아니오,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갈망을 넘어, 그 손으로 직접 빛을 만들고, 빛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당신들은…… 빛을 신이라 섬기면서, 신을 침범했습니다.”


“하하하……!”


에우리우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진짜’ 기적을 받아 그 날개를 펼친 것이라면. 부디 이 질문에 답을 주십시오. 머나먼 옛날. 이 땅에 강림하신 빛의 화신ㅡ 성황은 죽어 이 땅을 떠나시고, 저 성검 알테어를 남겼습니다.”


“예, 그랬지요.”


“하지만 성황 이후로, 빛을 따르던 신도는 그 누구도 성검을 쥐지 못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신도들은 그토록 열렬히 빛을 바랐건만, 저 높은 하늘의 빛은 재림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대신 할 새로운 사도를 내려보낸 적도 없습니다.”


에우리우스의 얼굴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그는 격정 어린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선대들은 빛을 다시금 데려오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것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빛은.”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기억을 보았다. 이제 크리스티나는 빛의 신이 존재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 어떤 추악한 짓을 하였어도, 변함없이 존재하며 빛을 내려주셨습니다.”


인위적으로 성녀를 만들고, 복제하고, 그 유해를 성유물로 삼아 빛의 샘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시대는 평화롭지만, 300년 전만 하더라도 마왕이 주동하는 전란의 시대였다. 그 이전의 시대에서는 국가와 국가가, 신앙과 신앙이 충돌하면 전쟁이 잦았다.


그러한 시대에서, 신성병기로 만들어진 성녀는 훌륭히 활약했다. 성녀가 참가한 전장에서는 우군의 피해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그 대가로 성녀는 단명하였지만, 그 대신에 수많은 병사들이 살 수 있었다.


“……역대 교황과 추기경들이 해온 일은…… 빛께서는 서글피 받아들이셨습니다.”


성녀의 존재가 정말로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성녀를 만들고 이용한 유라스가 잘못되었다면.


빛은 진즉에 그들을 떠났을 것이다.


“빛이 재림하지 않는 것은, 그분께서는 이미 자신을 섬기는 신도들에게 깃들고, 저 높은 하늘에서 신도들을 비추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자비로운 빛께서는 이 나라의 모든 역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배덕을 긍정하지는 않으신 겁니다. 빛께서는 광신이 얼마나 사람을 망가트리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 나라의 신민에게 성검을 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겁니다.”


“어찌…… 어찌 그런!”


“이 나라의 역사를, 당신들이 신앙의 선전으로 무엇을 하였는지를 떠올리십시오. 역대 교황과 추기경들의 성흔. 그것만으로도 교황과 추기경은 특별히 여겨졌고, 수많은 이들이 ‘성흔’이라는 상징에 매료되어 빛의 신도가 되었습니다.”


“……교를 부흥시키기 위해서였…….”


“예, 그들은 직접 새긴 성흔과 직접 만든 성녀로 교를 부흥시켰습니다. 그렇게 유라스는 긴 세월 신성제국으로 군림하였지요. 빛께서 허락하신 배덕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빛께서는 차마 제 살과 피로 직접 빚어낸 성검이, 광신 어린 포교의 상징으로 쓰이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던 겁니다.”


“하하…… 하하하!”


에우리우스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저희가 성검을 쥘 수 없는 것이라면…… 왜…… 위대한 베르무트는 성검을 쥘 수 있었던 겁니까. 왜 그 후손인 유진 라이언하트가 성검을 쥐고 있는 겁니까.”


“용사가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빛께서는 성검이 광신의 상징으로 시대를 이끄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세상을 구하기 위해 쓰이길 바라셨습니다. 그런 자격이 있는 자가 성검을 쥐어, 용사가 되었습니다.”


“……크리스티나 성녀. 당신은…… 유라스가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가 세상을 구하는 용사라고 말하는 겁니까.”


“그를 용사라 선택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빛께서 직접, 유진 라이언하트 님을 선택하신 겁니다.”


“…….”


“저는 성녀로 태어나고, 성녀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 성녀의 삶은 결코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 님은 그런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녀가 아닌, 저라는 인간을 똑바로 보고 손을 뻗어주셨습니다. 에우리우스 교황. 당신은…… ‘성녀후보’를 구원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있을 리가 없었다. 성녀후보란 단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유라스를 위해, 교단을 위해, 세상을 위해 필요한 존재. 성녀 개인의 인격이나 감정보다는 성녀의 사명이 중요하고 앞서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유라스는 괴로움에 곪아가던 여자 한 명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유라스가 어찌 세상을 구하는 용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에우리우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베샤라는 기도문을 반복해 읊조리며 눈물을 흘렸다.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긴 침묵의 끝에서 에우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관여하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


“감히 유진 님을 심판하려 들지 마십시오. 배덕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죄를 거듭하지 마십시오. ……여태까지 희생된 성녀와, 성녀가 되지 못한 후보들을…… 기억하고, 추모비를 세우도록 하십시오.”


“…….”


“앞으로의 시대에 더 이상 성녀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성녀를 만들려 하지 마십시오. 아직 보관하고 있는 성유물이 있다면…… 돌아가야 할 곳에 돌려보내도록 하십시오. 절 성녀라 공인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에게는 저를 인정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희의 신앙은…….”


“순수한 열망으로 빛을 섬기십시오.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빛에 감사하십시오.”


“……예.”


에우리우스는 멍한 눈으로 빛을 보았다.


“……그리 하겠나이다.”


이제 되었다.


크리스티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말을 걸었다.


[크리스티나. 제가 잠시 당신의 몸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시스터. 또 무언가 해야 할 말이 있는 겁니까?’


[이건 제 개인적인 용무입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이니, 잠시 제가 몸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설마 그러지는 않으시리라 믿지만, 제 몸으로 망측한 짓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크리스티나는 괜한 불안을 느끼며 아니스의 혼을 의식했다.


전환(轉換)이 이루어졌다.


아니스는 망자(亡者)인 자신이 크리스티나의 몸을 강탈하거나 독점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배덕이라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순간은 있는 법. 아니스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뻐억!


아까의 따귀보다 더 무거운 소리가 알현실을 진동시켰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처럼 따귀를 날리지 않고, 꽉 말아 쥔 주먹으로 에우리스의 코를 짓뭉개 버렸다.


“컥?!”


설마 이 분위기에서 안면에 주먹이 꽂힐 것이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에우리우스는 의자와 함께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특급유물고의 문을 여십시오.”


“예…… 예?”


“아니, 문을 열라고 할 필요도 없지요? 제가 알아서 열 테니 열쇠를 내놓으십시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아니스는 에우리우스의 오른손을 낚아채더니 검지손가락의 백금 반지를 뽑았다. 내놓으라더니 알아서 뺏어간 것이다.


“당신들이 말만 그리 하고 뒤편으로는 헛짓거리를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직접, 지금 당장 특급유물고에서 가서 남은 성유물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렇게 내 눈으로 보고, 존재해서는 안 된다 판단하는 것은 회수하고 성례(聖禮)를 치러 떠나보내겠습니다.”


“……예에…… 알겠…… 습니다.”


너무한 요구였지만 에우리우스는 그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빛의 성질이 달라진 것만 같았고, 특히 저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도저히 거절을 떠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특급유물고에서 개인적으로 챙겨야 할 것을 챙길 터이니, 그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도록 하십시오.”


“예…….”


주눅 든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아니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뻐근한 손목을 툭툭 털며 몸을 돌리다가, 곁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뭘 보고 그럽니까?”


“어…… 음…… 그래. 너구나.”


“갑시다.”


아니스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서 아래로 내려왔다. 대검을 등에 걸치던 라파엘로는 묘한 위화감과 카리스마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아니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


알현실을 떠나기 전.


한참을 기도하던 베샤라가 울먹거리며 아니스를 불렀다.


“뭡니까?”


“……저희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겁니까? 천국은 실재하는 겁니까?”


그 질문에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날개를 집어넣었다.


“천국은 존재합니다만,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선행을 쌓아야 합니다.”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교황과 추기경이라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아니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닫혀 있던 알현실의 문을 직접 열었다.


“천국에 가고 싶거든, 진짜 선행을 쌓도록 하십시오.”


알현실


의식의 전환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라파엘로 경은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그녀는 당연하단 듯이 앞장서서 특급유물고로 안내하는 라파엘로의 등을 보며 물었다. 그가 등에 걸친 대검에는 한 방울의 피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크리스티나는 불과 방금 전에 저 흉악하고 예리한 칼날이 추기경 피에트로의 목을 베었던 것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라파엘로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투로 되물었다. 크리스티나는 낮게 헛기침을 뱉고서 말을 이어 붙였다.


“어찌 됐건, 라파엘로 경의 검으로 피에트로 추기경을 죽인 것이잖습니까. 저와 유지님의 문제야 교황청의 묵인을 얻었지만, 라파엘로 경은…….”


“아, 그건 성녀님이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라파엘로는 더 이상 크리스티나를 성녀후보라고 부르지 않았다. 눈앞에서 8장의 날개를 펼치는 것을 보았고, 교황에게 따귀와 주먹을 날리는 것도 보았다. 크리스티나 본인이 그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라파엘로는 ‘성녀’ 외에 그녀에게 허락될 지칭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절 면직시키기에는 혈십자 기사단에 저를 대신할 인재가 없습니다. 특히 저들이 성녀님의 꾸중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아주 많은 성유물과 기적 따위를 상실해야 할 텐데…… 그것은 결국 유라스의 전력이 줄어드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더더욱, 교황은 저를 징계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당장 내년에 각국의 기사단이 집결하는 ‘나이트마치’가 예정되어 있는데, 제가 면직당하거나 뜬금없는 병마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은둔하게 된다면, 대체 누가 혈십자 기사단을 이끌어 나이트마치에서 유라스의 성명을 떨칠 수 있겠습니까?”


나이트마치.


키옐의 황제가 의견을 내어 성립된 기사단 간의 단합회. 각국의 전력을 한데 모아놓고 서로 견주고 친목을 도모한다, 라는 명목이긴 하다만. 그 진의는 앞서 세상에 ‘경고’를 전했던 유폐의 마왕과 헬무드의 마족들에게 경고에 대합 화답을 주기 위해서다.


의도대로 경고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단합회ㅡ 나이트마치는 각국의 전력증강에 있어서 커다란 행사가 될 것이다. 전쟁이 한참 동안 없던 평화로운 시대. 최고라 꼽히는 기사단은 많지만, 누가 최고이며 최강인지는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다.


손에 칼이 쥐어져 있고, 그를 휘두르고 견주어 볼 자리가 마련된다면 혈기왕성한 젊은 기사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사들의 호승심에 불이 붙을 것이다. 국가, 아니, 기사단 간의 서열잡이. 물밑에서 이뤄질 헤드헌팅. 그런 것들이 벌어질 것이 뻔하니, 유라스로서는 성국 제일의 기사인 크루세이더를 내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나이트마치의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라파엘로 경은 따로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키옐의 황제는 자국의 영토에서 나이트마치를 개회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유라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파엘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개회지는 유라스로 거의 정해진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교황이 비열한 술수까지 써가며 야수왕을 견제하고 싶었던 겁니다.”


교황청의 특급유물고는 알현실과 마찬가지로 백원궁의 지하에 있다. 다른 유물고는 주교나 대주교도 허락을 받아 출입이 가능하지만, 특급유물고에 출입하는 것은 대대로 교황과 추기경뿐이다.


엄중한 특급유물고의 앞에 도착했지만, 출입을 막아서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 층을 경비하는 성기사들은 라파엘로가 먼저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깊이 고개를 숙이고 알아서 뒤로 물러서 주었다. 고위 신성마법 중 하나인 염화(念話). 인위적으로 새긴 성흔일지라도 교황의 신성력은 독보적이니, 그의 염화는 백원 궁에서 경비 중인 모든 성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리라.


“저는 여기서 물러서도록 하겠습니다.”


라파엘로가 걸음을 멈췄다.


“특급유물고에 무엇이 있을지는 저도 궁금합니다만…… 그렇다고 함께 들어가서 확인해서는 안 될 일이지요. 저는 이대로 혈십자 기사단에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티나가 기도를 맺으며 말하자, 라파엘로는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의 행사에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부디, 성녀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빛께서 임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라파엘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텅 빈 복도.


그 끝에 원형의 새하얀 문이 있다. 크리스티나는 손가락의 백금반지를 어루만지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반지를 가져다 대자, 문에 복잡한 균열이 번졌다. 그리고 소리없이 균열이 갈라지고, 사람이 지나갈 만한 길이 열렸다.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준할 정도의 최상위 보안마법.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따라서 특급유물고의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뭘 찾으려고 여기 온 건데?”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등을 보며 물었다.


“……시스터와 다른 성녀들의 유해가 성유물로 남아 있지 않을까 확인하러 온 것입니다.”


“시스터?”


유진이 의아하단 얼굴로 되묻자, 크리스티나는 흠칫 놀라서 자기 입술을 찰싹 때렸다.


“흠…… 흠흠. 아니스 님은 참으로 짓궂으시군요. 저한테 언질이라도 해주시고 입을 빌리면 좋으련만…….”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저를 변명거리로 삼는 겁니까?]


‘시스터, 제발.’


[크리스티나. 저는 방금 당신의 행동에 커다란 실망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앞으로도 자신의 실수에 저를 변명거리로 삼으면서, 때로는 자신의 음습한 욕망을 실현할 때에 제 거죽을 뒤집어쓰겠지요?]


‘음습한 욕망……? 그게 대체 무슨…….’


[저는 이런 걱정이 듭니다. 크리스티나, 당신이 저인 척하고 하멜에게 입이라도 맞추는 것이 아닐…….]


“크흠! 흠! 크흐흠!”


크리스티나는 사레라도 들린 것처럼 가슴을 쿵쿵 두드리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수십 가지의 기도문을 동시에 떠올렸다. 그렇게까지 하니 아니스도 질려 버려서 더 이상 크리스티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너 괜찮니?”


“예, 괜찮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전대 성녀들의 성유물은 이미 빛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그 외에도 남아서는 안 될 성유물이 있다면 성례를 치르고 빛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들어 특급유물고의 내부를 돌아보았다.


“……아니스 님의 유품. 그 일부가 이곳에 남아 있으니, 그를 회수해야 합니다.”


성유물을 빛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아니스의 유품을 회수하는 것이야말로 특급유물고에 들어 온 진짜 목적이었다.


단순한 유품이 아니다. ‘신실한 아니스’의 유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나 성황의 유해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신에게는 그럴 겁니다.]


아니스가 말을 걸어왔다.


[이곳에 보관 중인 제 유품은…… 300년 전의 마경에서 쭉 사용하던 것이니까요.]


특급유물고에는 다양한 성유물들이 있다. 아니, 있었다. 유물이 안치된 유리장의 내부는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유진은 그 광경을 보면서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펼쳤다. 저 텅 빈 유리장은, 빛의 샘의 근원에서 보았던 여과장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이 흐르지 않는다뿐이지 크게 다르지도 않다. 본래 저 유리장 안에는 전대 성녀들의 성유물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사라지지 않고 남은 것들.


‘뼈’부터 해서 종류가 다양했다. 성녀 외의 성자들의 유골이다. 그 외에 십자가나 묵주, 로자리오 따위의 성물(聖物)부터 단검 따위의 무기도 몇 개 있었다.


“……허.”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따라 걷다가 짧은 감탄성을 흘렸다.


“이게 남아 있어? 되게 반갑네.”


그것은 평범한 유리장이 아닌, 금으로 만든 기둥 위에 세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낡기는 했지만, 검고 불그스름한 색이 은근히 배어든 메이스.


아니스가 300년 전에 쭉 사용하며, 수많은 마족의 대가리를 깨부순 흉악한 무기다.


“……저는…… 메이스를 아니스 님만큼 다룰 자신이 없습니다만…….”


[머리를 떼어서 사슬을 연결하면 플레일로도 쓸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메이스를 움켜쥐었다. ……무겁다. 크리스티나도 어려서부터 플레일을 휘두르며 근력에 자신은 있었지만, 아니스의 메이스는 도저히 한 손으로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이만큼 무겁지 않으면 마족의 대가리를 부술 수 없습니다.]


아니스가 말했다.


[그 비싼 아다만티움을 통째로 깎아 만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준비된 아티펙트입니다. 저와 최초부터 함께 빛의 샘에 들어갔고, 제 성혈과 샘의 빛으로 제련했지요.]


‘…….’


[뿐만 아니라 의식이 없을 때에도 제가 꾸준히 성혈을 스며들게 하고, 기적의 촉매로 삼아왔습니다. 헬무드에서는 수많은 마족의 피를 마시게 하고 혼을 거두었으며, 매일 제 성혈과 빛으로 세례하고 정화해 낸…… 감히 말하건대, 이 시대에서 성검 다음으로 마족을 잘 죽이는 성물이 이 메이스일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양손으로 받쳐 든 메이스를 내려다보며 가슴의 고동을 느꼈다. 유래를 확실히 알게 되니 메이스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스가 말한 대로, 이 메이스는 성검 알테어 다음으로 마족에게 치명적인 성물일 것이다.


“그거 보니까 괜히 내 옆구리가 쑤신다 야.”


“예?”


“언제였지? 보급도 못 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술이 다 떨어졌었는데, 아니스는 자기 할당량의 술을 몇 병 쟁여놨었거든. 그래서 나랑 세냐가 아니스 몰래 술을 훔치려다가…… 도중에 걸렸단 말이지. 세냐는 비겁하게 혼자서 공간마법으로 도망쳐서, 나 혼자 아니스의 메이스에 늑골이 박살 났던 적이 있어.”


유진은 먼 과거를 떠올리며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는 아니스가 너무했단 말이지. 박살 난 늑골이 내 폐를 찢어놔서 숨도 못 쉬겠고, 아프기도 더럽게 아픈데. 아니스는 치료해 주지도 않고 내 다리까지 부러트렸다고.”


[동료 사이에 도둑질을 하다니요? 그건 하멜 저 개자식이 잘못한 겁니다.]


“유진 님이 잘못하신 겁니다.”


“누가 나 잘못 안 했대? 그냥 좀 너무했다는 거지 쩝…….”


다음의 성물도 유진이 잘 아는 것이었다. 아니스가 내내 목에 걸고 다녔던 로자리오.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신성력의 회복을 촉진시키고, 기적의 위력을 증폭시킵니다.]


술을 담는 것이 아닌, ‘진짜’ 성수를 담았던 유리병.


[메이스와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저와 함께 빛의 샘에 들어가며 축복을 스며들게 한 성물입니다. 번거로운 의식과 처리 없이, 물을 담는 것만으로 성수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든 성수는 마기를 흩트리고 마족의 피와 살을 태우지요. 추가적으로 기적을 더한다면, 엘릭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뛰어난 효과를 가진 포션이 되기도 합니다.]


크리스티나는 로자리오를 목에 걸고, 유리병은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메이스는 양손으로 들고서 마지막 성물을 향해 다가갔다.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새하얀 로브. 유진은 그 로브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유진이 기억하는 과거에서, 아니스는 항상 저 로브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등 뒤의 붉은 십자가와 하얀 안감에는 단 한 번도 피가 번진 적은 없었으나, 아니스는 언제나 저 로브에 가려진 등에 피를 흘렸었다.


[편리할 겁니다.]


아니스가 말했다.


[십수 년 헬무드에서 노숙하는 동안 저 로브는 단 한 번도 더럽혀지지 않았습니다. 피가 번진 적도 없습니다. 언제나 십자가는 붉은색으로 또렷하고, 흰 바탕은 잡티 하나 없이 순결하게끔 만들어진…… 과시적인 성녀의 상징입니다.]


‘……제게 어울릴지…….’


[제게도 어울렸으니, 물론 당신에게도 어울릴 겁니다. 로브 자체로도 기적의 증폭효과가 있고, 저는 제 유품을 단 하나도 이곳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크리스티나. 모두 다 당신이 갖도록 하십시오.]


크리스티나는 머뭇거리며 로브를 몸에 둘렀다. 분명 처음 걸치는 것인데, 마치 오랫동안 몸에 둘렀던 것처럼 로브가 몸에 착 감기며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저를 의식하지 마십시오.]


아니스의 로브를 입고, 로자리오를 목에 걸고, 성수병을 품에 두고, 메이스를 들었다.


[당신은 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여정에 도움이 되고자 보태는 것이지, 당신을 저로 탈바꿈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답하지 않고 로자리오를 어루만졌다. 굳이 답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배려심을 느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차림새가 조금 바뀌었다는 것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를 그 이름으로 불러주었던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먼저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어디로?”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크리스티나는 무거운 메이스를 로브 안쪽에 감추며 웃었다.


“어디든 상관없으니, 유레시아의 숙소에서 머물러 주십시오.”


“너는 어쩌려고?”


“저는…… 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았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유물고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의 성유물 중에서 특별히 성례를 치러 빛에 돌려보낼 것은 없어 보입니다. 결국은 유해이지만, 성유물에는 틀림없이 기적이 깃들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곳 말고도 아직 확인하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아마, 이곳보다는 이단심문국이나 신성마법학부에 불온한 성유물이 더 많을 겁니다.”


혈마법 따위의 고대마법과 흑마법의 연구를 병행하던 곳이 이단심문국과 신성마법학부다.


“알았어.”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유진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가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티나는 순수하게, 유진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성녀와 관련된 것들을 마무리 짓고, 잔재들에게 애도를 보내고 싶었다.


“……이틀 뒤에 태양의 광장에서 아니스 님의 축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크리스티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태양이 가장 밝은 정오에, 그곳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태양의 광장


교황청을 나오고 이틀.


교황 에우리우스와 추기경 베샤라는 부디 교황청에서 머물러 달라 간청했지만, 당연히도 유진은 교황청에서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유진은 태양의 광장 근처의 고급 숙소에서 묵었다.


아니스의 축일이 가까운 시즌에는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고 가문이 좋아도 빈방을 구하기 힘들다. 하지만 교황청이 직접 방을 달라 부탁한다면 숙소주인마저도 기꺼이 방을 내주는 법. 유진은 요 이틀 동안 호화로운 숙소에 틀어박혔다.


어차피 나가서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메르는 은근히 도시를 관광하고 싶어 했지만,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거실 한가운데에서 정좌해 앉은 유진을 보고 기대감을 접어버렸다.


라이언하트의 백염식.


이틀 동안, 유진은 6개로 늘어난 별을 관망했다. 백염식을 운용할 때마다 6개의 별은 심장 언저리에서 천천히 돌았다.


5성일 적만 하더라도 코어가 회전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코어가 하나 더 늘어났다고 백염식의 운용방식이 달라진 건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다만, 이틀 내내 코어의 회전을 관망한 결과. 유진은 나름의 추측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냥 나한테 맞춰서 변형된 것 같은데?’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 외에 다른 답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당장 유진이 가진 6개의 별은 환염식을 펼치지 않았는데도 환염식을 펼치는 것처럼 회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환염식을 따로 쓸 수 없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의식한 순간, 완만하던 코어의 회전이 격렬하고 빨라진다. 그렇게 즉각적으로 시작된 환염식은 5성일 적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고출력의 마나를 생성했다. 그 마나의 격류에는 번개불꽃도 완벽하게 녹아들었는데, 5성일 적만 해도 다루는 것이 쉽지 않았던 번개불꽃을 지금은 평범한 마나처럼 쉽게 다뤄졌다.


‘굳이 백염식에서 환염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예열(豫熱)의 과정이 없어졌다는 것. 그리고 코어의 출력과 한계선이 높아졌어.’


정말 단순히 말하자면, 6성의 백염식은 유진이 굳이 운용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코어가 회전하고 있기에, 유진이 바란 순간 고출력의 마나를 뿜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 회전하고 있기에 마나의 양도 계속해서 늘어난다. 마나가 늘어난다는 것은? 근본적인 출력이 꾸준히 높아진다는 말이다.


고출력의 마나는 아무리 육체를 보조한들, 필연적으로 육체에 부담을 준다. 그 부담을 견뎌내기 위해 육체의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그니션의 반동은 그 출력을 견뎌내지 못한 육체가 망가지는 것이고, 이그니션만큼은 아니어도 마나를 극한으로 조작하다 보면 몸이 상하게 된다.


하지만. 육체가 더는 제힘에 망가지지 않게 되는 ‘선’이 있다. 육체가 완전하게 마나와 일체 되는 순간, 마법을 쓰지 않아도 마나를 통해 육체를 재구성하게 된다. 그건 회춘이라기보다는 환골탈태에 가까운데, 그렇게 재구성된 몸은 자신의 마나출력에 망가지지 않을 만큼 강인해진다. 이그니션 같은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설마 이렇게 빨리 그 선에 도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생각했다. 20살의 몸. 굳이 재구성할 필요가 없을 만큼 싱싱한 몸이다. 하지만 늘어난 출력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멋지고 기쁜 일이었다.


‘그래 봤자 이그니션은 못 견디지만…… 뭐 그건 기대도 안 했고. 6성에 이그니션, 거기에 공검까지 쓴다면…….’


유진은 지금의 자신의 극한을 상상했다. 백염식 5성에서 공검을 2중첩했을 때. 그때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출력은, 전생 하멜의 전성기에 간신히 근접해 있었다.


세르지오를 죽였을 때.


유진은 백염식의 6성에서 이그니션을 썼고, 공검의 3중첩을 이루었다. 그 순간의 일검은ㅡ 전성기에서 이그니션을 썼을 때와 같았다.


‘백염식 6성의 이그니션은 전생보다 강해. 거기에 공검까지 최대로 중첩한다면 전성기의 이그니션과 엇비슷하고. ……문제는 역시 지속성인가.’


이그니션은 부담이 너무 많다. 거기에 공검은 아무리 유진이라 해도 3중첩이 한계고, 그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꼭 공검을 쓸 필요는 없어. 나한테는 월광검도 있으니까, 이그니션을 아예 월광검을 받치는 데 사용한다면…….’


유폐의 마왕?


유진은 그렇게까지 오만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문제에서는 스스로에게 가혹하다 싶을 만큼 현실적이고 부정적이었다.


지금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극한까지 운용한들, 유폐의 마왕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사라지지 않을까……. 유폐의 마왕과 직접 싸워본 적은 없어서 상상이 힘들기는 했지만, 아마 그럴 것 같았다.


‘누아르 제벨라나 가비드 린드먼에게도 못 미칠 것 같은데. 그래도 아이리스랑은 어떻게 잘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아예 처음부터 월광검을…… 아니, 그건 안 돼. 월광검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니까, 전투 도중에 빛이 꺼져 버릴 수도 있어. 차라리 전투 내내 숨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유진 님.]


‘백염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6성이되면 원래 이렇게 변형하나?’


6성이 되어 갖는 변화가 코어의 회전인 것 같지는 않았다. 추측하는 대로 정말 백염식 자체가 자신에게 알맞게 변형된 것이라면?


유진은 라이언하트에서 백염식의 6성에 도달한 사람을 떠올렸다. 도이네스 라이언하트는 죽었고…… 현재 라이언하트에서 백염식의 6성을 넘은 것은 3명뿐.


가주인 길레이드.


흑사자 기사단 5번대의 대장이 된 기온.


흑사자 기사단 3번대 대장인 카르멘.


저들 중에서도 카르멘의 백염식은 7성으로,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악명 높은 마의 벽을 뛰어넘은 장본인이다. 본가의 양자가 되고서 백염식을 배우고, 여러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6성이 되었을 때 백염식이 변화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라이언하트에 돌아가면 물어봐야…….’


“유진 님!”


생각이 멈췄다. 망토를 직접 들추고 튀어나온 메르가 유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 화끈한 행동에 유진은 넋이 나가 눈을 끔벅거렸다.


“제가 몇 번을 불렀는지 아세요?”


“……세냐인 줄 알았네…….”


유진은 멱살을 잡고 있는 메르의 손을 떼며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이 너무 깊었다. 그런 와중에 세냐를 쏙 빼닮은 메르가 얼굴을 들이밀면서 세냐처럼 멱살을 틀어쥐니, 순간이나마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흐흐흥.”


유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메르는 으스대는 미소를 띠며 팔꿈치로 유진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화를 내려고 했는데, 용서해 드릴게요. 유진 님은 저를 보고 헷갈릴 만큼 세냐 님의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군요?”


“아니…… 뭐…… 그래.”


“그래도 유진 님, 이건 명심해 주세요. 저는 세냐 님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세냐 님의 딸…… 아니, 아니지, 사역마라구요.”


“그래…….”


“하지만! 화는 내지 않아도 지적은 해드려야겠어요. 왜인지 아시나요? 제가 이러는 것은, 유진 님이 제 부름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진 님이 너무 멋을 부리고 나왔기 때문이에요.”


그 말이야말로 유진을 더욱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멋을 부리고 나왔다고? 그게 대체 무슨 개똥 같은 소리인가.


“왜 이곳에 오는데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신 거죠?”


“그럼 외출하는데 안 씻고 나오니?”


“양치질도 하셨잖아요.”


“양치 안 하면 입에서 냄새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죠? 입 냄새를 느끼지 않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유진 님 설마, 입술이 가까워질 경우를 대비하여 양치를 하신 건가요?”


“얘가 뭐라는 거야…….”


“그리고 옷도 갈아입으셨어요. 왜 갈아입으셨죠? 그냥 전날 입은 옷을 입으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면 제가 고른 옷을 입으시던가요!”


“너는 내 성별을 착각하는 것 같던데.”


“제가 뭘요? 유진 님은 남자잖아요. 그것에 착각의 여지가 어디에 있나요?”


메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유진은 눈썹을 콱 구기면서 메르의 이마를 손끝으로 딱 때려주었다.


“그런데 시X 왜 나한테 치마를, 그것도 강렬한 빨간 치마를 골라준 거냐? 어? 그 촌스러운 망사스타킹은 어디서 난 거고?”


“멜키스 님이 선물해 주신 거예요. 언젠가 제가 멋진 레이디가 되면 입고 싶어질 거라면서요.”


“죽여 버릴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진이 중얼거렸고, 템페스트가 동조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게 정말 중요한 것은, 유진 님이 그 이중인격 성녀와의 데이트에 멋지게 꾸미고 나왔다는 거예요.”


“얘가 자꾸 뭐라는 거야……. 데이트는 뭔 놈의 데이트?”


“진심으로 하시는 말은 아니죠?”


“……데이트는 맞지. 그래. 하지만 특별히 꾸미고 나온 것은 아니야. 그냥 밖에 나가니까 씻고, 그 김에 옷을 갈아입은 거지. 내가 머리에 뭘 바르기를 했니, 향수를 뿌렸니? 아니면 뭐 멋지고 비싼 옷이라도 입었어?”


“유진 님은 얼굴이랑 비율이 잘나서 뭘 입어도 멋있어요.”


“어…… 어어…… 칭찬은 고마운데, 어쨌든 나는 특별히 꾸민 적이 없…….”


“그래서 더 문제라는 거예요. 특별히 꾸미지 않았는데 꾸민 것처럼 보인다고요. 지금의 유진 님의 모습을 보고서 그 음흉한 성녀가 이상한 오해라도 하면 어떡해요? 세냐 님은, 세냐 님은 어떡하고요!”


“무슨 오해 말입니까?”


다행히도 유진이 메르의 칭얼거림에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뒤편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유진에게는 구원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보였다. 교황청의 특급유물고에서 가져온 아니스의 로브다. 크리스티나는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서 유진과 메르를 바라보았다.


“……윽…….”


메르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에 살짝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눈 까십시오.


메르는 아직도 그 목소리와 푸른 눈동자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별로.”


정오, 태양의 광장.


그렇게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아직 정오가 되기에는 시간이 조금 남았겠지만, 하늘 높이 뜬 태양은 따사롭고 밝았다. 그런 태양의 아래에 아니스의 성상이 한 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서 날고 있다.


4월 13일.


오늘은 아니스의 축일이다. 역사만큼 많은 성인과 성녀와 기념일을 가진 유라스지만, 아니스의 축일은 유라스에서도 건국일이나 성황에 관련된 날만큼이나 성대하게 기념한다.


축제는 유라스 곳곳에서 벌어지지만, 역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수도 유레시아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이어지는 축제에서 써니사이드 아니스 트레인은 무료로 늦은 야간까지 운행되며, 시내 마차요금을 비롯해 식당이나 도시 대부분의 가게의 비용에 세금과 십일조가 면제된다. 그 외에도 거리에는 퍼레이드가 시작되며 밤에는 불꽃놀이까지 펑펑 터진다.


ㅡ그 축제의 중심이 바로 이곳, 태양의 광장이다. 지금만 해도 광장에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데, 그들은 하늘에 떠 있는 아니스의 성상을 향해 손을 흔들고,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유진의 주변은 제법 한적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감히 유진의 곁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유진이 일부러 흘려내는 마나와, 복합적인 암시 마법 덕분이었다. 그러니 사람들 대부분이 유진을 인지하면서도, 그 곁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으흠.”


크리스티나는 낮게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아니스의 성상. 태양의 광장의 상징이자, 유라스에 존재하는 수많은 성상과 유적, 종교적 예술품 중에서도 최고라 불린다. 크리스티나도 예전에는 저 성상을 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감격을 느끼며 기도를 올리곤 했었다.


[고증이 엉망입니다. 제 날개는 저렇게 초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성상은 제 얼굴을 마치 아이를 낳은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인자하게 만들어놨는데, 제 얼굴은 저것보다 조금 날카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예전 같은 감격을 느끼지 못하리라. 크리스티나는 머릿속에서 아니스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서 망토 안에 손을 넣었다. 그녀의 눈은 유진의 가슴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메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메르 님.”


“뭐, 뭐, 뭐…… 요.”


대답하는 도중에 눈을 아래로 깔아버렸다. 이 무슨 굴욕일까……!


메르는 오래전에 헤어진 세냐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아래로 쭉 내렸다. 지금만큼이나 주인이자 창조주인 세냐가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거 아십니까? 이 광장은 아주 넓답니다.”


“……그렇겠죠.”


“이 광장에서 외곽으로 나가면 다른 광장과 거리가 나오는데, 그곳부터가 식도락의 거리라고 하지요.”


메르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엄격하게 관리되면서 경쟁에서 살아남은, 노점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미식(美食)…… 특히 이런 축제 때에는 지방과 외국에서도 미리 신청한다면 노점을 허가해 준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모…… 몰라, 요.”


“대륙의 맛을 즐길 수 있는 기회란 것입니다.”


크리스티나가 품 안에서 꺼낸 것은 손목에 거는 묵주 팔찌였다.


“이 묵주는 주교 이상의 고위 신관에게만 발급되는 것입니다. 유라스는 신관들에 대한 복지가 아주 훌륭한 곳이지요. 특히 유레시아에서는, 이 팔찌를 손목에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가게에서든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답니다.”


“…….”


“그건 노점에도 해당됩니다. 줄이 아무리 긴들. 이 팔찌를 보여준다면, 줄을 설 필요 없이 바로 다음 차례로 주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산도 물론 이 팔찌로 대신합니다.”


메르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노점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식당이든, 가게든 팔찌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축제에서 가게 10개를 가는 것도 버겁지만, 이 팔찌를…… 쓴다면 위장이 허락한다는 가정하에 한나절 만에 모든 노점과 가게를 즐길 수 있겠군요.”


위장의 허락? 메르는 굳이 있지도 않은 위장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축제의 노점,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울림이란 말인가?


“……하지만 안타깝군요. 저는 오늘 이 광장에 있을 테지만, 식욕이 동하지 않아 노점상이나 식당은 이용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 그런……!”


“만약 메르 님이 원한다면 이 묵주를 오늘 하루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 말에 메르는 긴 침묵과 고민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메르가 입을 닫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ㅡ데엥, 데엥, 데엥…… 멀리 있지 않은 시계탑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오오오!”


그리고 정오와 축일에 맞춰, 아니스의 성상에 내장된 기믹이 발동했다. 마법공학의 힘을 빌린 정교한 기계장치가 움직여 성상의 자세를 바꾸었다.


지상을 내려다보며 날기만 하던 아니스의 성상이,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의 자세를 취했다. 그 뒤에 활짝 펼쳐진 날개가 한 번 펄럭이자 빛의 깃털이 하늘을 수놓았다.


메르는 말없이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내리쬔 햇살이 성상의 날개와 부딪쳐 아름다운 색채를 자아냈다. 그 광경에 메르는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죄송해요 세냐 님.’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300년 전의 동료의 생일이기도 하니, 그를 기념할 겸…… 결단코 축제의 노점에 눈이 먼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유라스에서 돌아갈 때 기념품을 사다 드리기로 애니실라와 제하르 등에게 약속을 했었다. 메르는 여태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기념품은 꼭 사가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유진 님이 기념품을 사러 갈 리가 없지. 오늘 외에 기회는 없는 거야.’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세냐 님은 은혜를 받으면 꼭 갚아야 한다고 말하셨어.’


즉, 이것은 식도락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세냐 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도중에 배가 고프면 무언가를 먹을 수도 있겠지만, 주된 목적은 기념품을 사는 것이다. 메르는 얌전히 유진의 품에서 떨어져, 망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묵주 팔찌를 메르의 손목에 걸어주었다. 메르는 팔찌를 받고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유진을 한번 쳐다보고.


총총걸음으로 나아가다가,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네, 얼마든지.”


“……지금 당신은…… 크리스티나 님인가요? 아니스 님인가요?”


그 말에 크리스티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어느 쪽일까요?”


……메르는 굳이 생각하고 답을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왕이면 아니스이길 바랐다. 그렇다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메르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몸을 돌렸다.


“……조심해. 이상한 사람 따라가지 말고, 사탕 준다고 해도 무시하고…….”


메르는 대답 대신 묵주 팔찌를 찬 주먹을 번쩍 들어 보였다.


“저희도 갑시다.”


후드를 조금 더 눌러쓴 크리스티나가 다가왔다. 오늘의 광장은 1년 중에서 가장 사람이 많고, 아니스의 성상이 바로 위에 있다. 그러니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와 너무 닮은 얼굴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어디를 갈 건데?”


“따로 정해두지는 않았습니다만…… 기왕 이렇게 나왔으니, 함께 축제를 구경이라도 하는 것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먼저 몇 걸음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하멜. 당신은 제가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너도 날 하멜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냐?”


그 질문에 크리스티나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풋 웃어버렸다.


“연기는 능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스 님의 연기는 잘되지 않는군요.”


“굳이 연기할 필요가 있나?”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들었다. 크리스티나가 왜 후드를 쓰고 있는지는 안다. 이해도 하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랑 불러온 바람이 크리스티나의 후드를 뒤로 젖혔다. 크리스티나는 놀라서 후드를 잡으려고 했지만, 짓궂은 바람은 기어코 후드를 젖히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유진은 그 이름을 똑바로 불러주었다.


“죄지은 것도 아니면서 얼굴을 왜 감춰?”


“……하지만…… 누군가가 저를 알아볼 수도…….”


“뭐 어때? 누가 널 알아보면 귀찮은 일이라도 생겨? 생기겠지. 그래도 감추지 마. 너는 너고, 아니스는 아니스고, 누가 네 얼굴 보고서 들이댄다면 내가 꺼지게 해줄 테니.”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크리스티나를 지나쳤다.


“시간도 정오고 배도 고프니 점심이나 먹으려고 했는데. 그럴 수도 없나? 메르한테 저 팔찌 줘버렸잖아.”


“……푸훗.”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크리스티나는 짧은 웃음을 뱉으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묵주는 하나 더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드러난 얼굴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크리스티나는 괜히 제 뺨을 어루만지며 유진의 뒤를 따랐다.


[크리스티나.]


‘……네, 시스터.’


[제 마음이 이해가 갑니까?]


아니스가 속삭였다.


[저는 하멜의 저런 무심한 배려가 꽤 좋았습니다.]


설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크리스티나는 그것이 두렵고 부끄러워, 제 입술을 찰싹 때렸다.


태양의 광장


‘시스터.’


함께 걷던 중에,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이름을 불렀다. 사실 그렇게 부를 필요도 없었다. 아니스는 이미 크리스티나의 심상을 읽고 있었다.


[싫습니다.]


아니스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대답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대답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단호함을 느꼈다.


[저도 삶에 미련은 꽤 많이 남았습니다. 앞으로 가끔, 당신의 몸을 빌릴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안 됩니다.]


‘어째서입니까?’


[뻔한 것을 왜 물어보십니까? 미련이 욕심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야 참는 것에 익숙합니다만, 만약 제가 참지 못하게 되어버린다면? 저와 당신을 위해서라도 이런 일은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는 행복해 질 자격이 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시스터십니다.’


[……이건…… 행복이 아닙니다. 자칫하다가는 불행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크리스티나. 저는 당신을 아주 좋아합니다. 제가 이런 형태로 이승에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과 사이좋은 자매처럼 지내고 싶습니다.]


아니스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함께 걷는 걸음은 조금 느려졌다. 유진은 입을 닫고 있는 크리스티나를 힐긋 보았지만, 침묵의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미련이 욕심이 되어버리면. 저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시스터가 바라시는 것을 최대한 들어드릴 것입니다.’


[만약 제가 당신의 몸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려 한다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제가 죽은 것을 후회하고, 당신의 몸에 완전히 빙의하는 것으로 삶을 갈구한다면?]


‘시스터가 바라신다면, 저는 기꺼이 제 몸을 양보해 드릴 것입니다. 시스터는 저 이상으로 행복해질 자격이 있으십니다.’


[……정말로 음험한 사람이군요. 제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는 주제에.]


‘제가 시스터를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음험한 일이지요.’


크리스티나의 대답에 아니스는 쿡쿡 웃음소리를 내었다.


[당신이…… 정말로 괜찮으신 것이라면. 알겠습니다, 크리스티나. 당신의 제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대신?’


[해가…… 저물 때까지. 그때까지만 당신의 몸을 사용하도록 하지요. 하늘의 저 찬란한 빛이 지상을 비추어, 제가 감히 죄스러운 욕망을 품지 않도록 말입니다.]


‘예.’


얻어낸 대답에 크리스티나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두 눈을 감았다.


‘시스터.’


[예.]


‘생신 축하드립니다.’


의식이 전환되었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가 남겼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축하한다니. 아니스가 죽은 것도 벌써 200년 전이다.


300년 전의 오늘.


아니스 슬리우드가 세상에 태어났다. 기적적인 탄생이었다. 그녀를 잉태했던 모조화신은 산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고, 결국 아니스는 죽은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아니스는 그 순간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을 낳았던 어머니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름도, 모른다. 다만 이 사실만은 틀림없으리라고 어려서부터 생각해 왔다.


그녀는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니스도 세상에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아니스에게 탄생일은 단 한 번도 기쁜 날이었던 적이 없었다. 3살의 탄생일, 아니스는 처음으로 빛의 샘에 가서 의식을 치렀다. 그를 기점으로 샘에 가는 주기는 계속해서 짧아졌지만, 아무리 주기가 짧아진들 탄생일에는 반드시 샘에서 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생일’이 꽤나 특별한 날이라는 것은, 아니스도 잘 알았다. 다른 아이들은 생일마다 무언가 선물을 받지만, 아니스는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다. 굳이 선물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언제였던가. 아니스의 수발을 들던 수녀 중 한 명이, 아니스에게 작은 봉제인형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초라한 인형보다는, 탄생일마다 깃드는 빛이야말로 성녀님에게는 은혜로운 선물이겠지요.’


표정 없는 어린 소녀에 대한 위로였을까. 아니스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탄생일마다 샘에서 치르는 의식. 몸에 깃드는 빛. 그것들을 선물이라 여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스의 유년기에서 받은 생일선물은 그 봉제인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ㅡ베르무트를 만나서, 유라스를 떠난 후에는.


“아니스.”


유진의 입이 열렸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니스를 빤히 보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밥. 뭐 먹을 거냐?”


여전히 무심한 말. 하지만 아니스는 저 말의 밑바닥에 깔린 배려를 알았다. 아니스는 미소를 짙게 하며 유진을 지나쳤다.


“맥주가 맛있는 곳으로 갑시다.”


보리를 발효시킨 그 황금빛의 술은, 유라스에서 가장 유명한 특산품 중 하나다. 유라스에 존재하는 수많은 수도원들 중에는 맥주를 제조하는 수도원이 여럿 있었고, 그중 특히나 맛이 좋은 맥주들은 수도원의 이름이 적힌 라벨을 붙이고서 외국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아니스는 그중에서도 코르딕트 수도원의 맥주를 굉장히 좋아했다. 헬무드에 있을 적에는 맥주를 거의 마시지 못했지만, 헬무드에서 돌아온 후에는 아예 코르딕트 수도원에서 거주하며 매일매일 맥주를 마셨다.


그런 인연이 있기에, 아니스의 탄신일 축제에는 코르딕트 수도원의 맥주를 가져다가 판매하는 가게가 굉장히 많았다. 아니스는 거리까지 나와서 맥주잔을 권하는 점원들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굳이 받아서 마셔볼 필요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매일 마셔 온 맥주의 향은 영혼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품질이 나쁩니다. 물도 조금 섞은 것 같고. 몇몇 가게에서는 아예 다른 맥주를 코르딕트의 것이라고 속여 팔고 있군요. 마음 같아서는 저들의 머리를 깨부수고 싶습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저들은 모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엄선해서 골라낸 곳은 골목 안쪽의 낡은 간판을 가진 펍이었다. 하지만 내부마저 낡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스는 큼직한 벽난로의 주황불빛과, 펍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맥주 두 잔과 식사를 주문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설마 당신과 단둘이서 이런 가게에서 술을 마시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보다 소란스러운 펍은 꽤 많이 갔었던 것 같은데.”


“하멜. 뻔히 들어놓고 왜 모르는 척을 하는 겁니까? 단둘이,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확실히. 아니스와 둘이서 술을 마시러 가게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 저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과 둘이 오는 것보다…… 예전처럼 여럿이서 오는 것을 더 바랍니다만.”


베르무트와 세냐, 모론.


유진과 아니스는 이곳에 없는 셋을 떠올렸다.


“……세냐와는 언젠가 같이 올 수 있겠지.”


맥주잔이 부딪쳤다.


“모론과도 올 수 있을지도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새끼가 아직 죽었을 것 같지는 않거든.”


“확신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다가 모론이 정말 죽기라도 했다면, 크게 실망해 버릴 것 아닙니까.”


“별로. 죽으면 죽은 거지 뭘. 300년이 긴 시간이라는 것은 나도 알아.”


“……베르무트 님은…… 저로서도 모르겠군요. 이런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니스는 웃으며 맥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잔이었지만, 그 안을 그득 채운 맥주가 단숨에 아니스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크으으!”


아니스는 희열에 몸을 떨며 빈 잔을 내려놓았다.


“당장 중요한 것은 저와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이지요.”


음식이 나오는 동안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진이 숙소에서 백염식을 관망하는 동안, 아니스는ㅡ 아니, 크리스티나는 이단심문국과 신성마법연구학부에 다녀왔다. 유일한 추기경이 된 베샤라와 교황은 크리스티나의 행보를 가로막지 않았으며, 혈십자 기사단장인 라파엘로가 직접 검을 뽑아 들고서 크리스티나와 함께했다.


“둘 다 비슷한 집단이었습니다. 제가 살아 있을 적보다 오히려 발전했더군요. 신성마법학부는 빛과 기적을 지배해 새로운 성역과 성물을 만들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스는 굳이 그 방법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않았다. 아직 식사가 나오지 않기는 했지만, 입에 담아버리면 식욕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단심문국은…… 꽤 예전에 성녀에 대해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오래전부터 시도해 온 것 같기는 합니다만, 한때 이단심문국 소속이었던 세르지오 로게리스도 꾸준히 지원을 해주었던 모양입니다.”


“무슨 말이야?”


“간단히 말해서, 이단심문국은 신성병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성녀처럼 기적과 빛에만 비중을 둔 것이 아니라, 보다 전투에 특화된 생체병기. 뭐, 제 눈에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키메라 둥지처럼 보였습니다만…….”


키메라 둥지.


유진은 그 단어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안다. 키메라는 둥지를 만들지도, 알이나 새끼를 낳지도 않는다. 그것은 몬스터와 몬스터는, 혹은 인간마저 섞어 만든 괴물일 뿐이다.


“미친놈들이네.”


“실제로 그랬습니다. 덕분에 크루세이더가 꽤 많은 사람의 목을 베어버렸지요. 이제야 하는 말입니다만, 저는 그 성기사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너무 미친놈 같던데?”


“하멜. 당신이 누군가를 미친놈이라고 할 만한 입장입니까?”


“내가 뭘? 나도 이제야 하는 말인데, ‘우리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멀쩡했어.”


“미친놈.”


아니스는 몇 잔째인지 모를 맥주잔을 흔들며 웃었다.


“어쨌든, 깔끔하게 죽이고 부수고 불태웠으니, 속이 후련해졌습니다. 사라지지 않은 성유물도 성례를 치러 빛에 돌려보냈고…….”


하얀 로브가 살짝 들춰졌다. 아니스는 허리에 달고 있던 플레일을 보여주며 방긋 웃었다.


“제가 쓰던 메이스도 크리스티나가 쓰기 쉽도록 개조했습니다. 솔직히 실력은 꽤 미숙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후후. 사실은 제 눈이 너무 높은 것이겠죠.”


“그럴 수밖에. 300년 전의 우리는 최고였으니까.”


유진은 똑같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아니스는 맥주잔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깔깔 웃어댔다.


“아하, 아하하하! 아하하! 네, 네 그렇지요. 우리는…… 아하핫! 최고였죠. 하멜 당신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저런, 제가 당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겁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십시오. 저는 첫 만남의 당신을 말하는 겁니다.”


요리가 나왔다. 아니스는 커다란 포크로 소시지를 푹 찌르며 키득거렸다.


“확신하고 말하건대, 우리는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하멜, 당신은 우리와 만났을 때에는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도, 세냐도, 모론도. 베르무트 님이 ‘왜’ 당신을 동료로 받겠다고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난 이해했겠냐?”


유진은 투덜거리며 고기를 썰었다.


그 이야기는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300년 전의 항구에서, 베르무트는 동료들의 이해와 동의를 바라지 않고 독단적으로 하멜을 동료로 삼으려고 했다. 결국은 다른 동료들도 베르무트와의 대결을 통해 하멜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동료로 받아들이기는 했다만, 첫 만남에서의 하멜은 ‘용사의 동료’로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었다.


“……결과적으로는 베르무트 님이 옳았지만 말입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


결정적으로 크리스티나의 몸은 술을 즐겨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취기가 올라오는 것이 빨랐다. 아니스는 이 나른한 취기가 좋았다. 하고자 한다면 먼지 털 듯 가볍게 떨쳐낼 수 있겠지만, 아니스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발그스름한 얼굴을 살짝 기울이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완벽했습니다. 다섯 명이기에 완벽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명의 부재가 치명적이었습니다.”


“너도 내가 먼저 죽어버린 것을 질책하려는 거냐.”


“세냐가 당신을 질책했나 봅니다?”


“걔는 은근히 마음이 약해서 말이야. 질책하지도 못했어. 오히려 그런 투의 이야기를 했다가, 혼자 엉엉 울면서 내게 미안하다 빌었지.”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세냐가 그 심술을 버리지 못하고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겠지요? 네가 멋대로 혼자 죽어버렸다. 그런 요지의.”


“비슷하지.”


“세냐도 여전한 모양입니다. 스스로 견디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하고, 혼자 울어버리다니. 아…… 하멜, 당신은 제가 보여준 꿈을 기억하겠지요? 어땠습니까?”


“뭐가 어때?”


“슬프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아리거나, 그립거나.”


아니스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미소는 전생에 유진과 세냐가 숙덕거리던 ‘뱀’처럼 간사해 보였다.


“……안 그랬겠냐?”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저도, 세냐도, 모론도, 심지어 베르무트 님까지도 눈물을 흘렸는데. 저는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안 보는 게 나아. 난 우는 얼굴이 존나 못생겼거든.”


“아하하! 지금 얼굴로 못생긴 표정을 짓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까?”


“안 될 것은 또 뭐야?”


유진은 투덜거리며 맥주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아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쓰러지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양손으로 유진의 뺨을 붙잡았다. 아니스의 얼굴이 확 가까이 다가왔다.


“……후후.”


입술은 닿지 않았다. 아니스는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발그스름한 얼굴에 미소를 담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참았습니다.”


아니스가 속삭였다. 그녀의 양손이 유진의 뺨을 짓뭉갰다. 유진은 금붕어 같은 얼굴이 되어 괜히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 모습에 아니스는 깔깔 웃으며 유진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또 제가 멋대로 해버렸다가는, 세냐가 정말 미쳐 날뛰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때 제가 남아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약 제가 승천이라도 해버리면…… 불쌍한 크리스티나가 세냐에게 시달리게 될 것 아닙니까?”


“……거참.”


“우둔한 하멜.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는 우둔한 당신도 알아먹을 수 있을 만큼 적극적으로 주장해 주었고, 세냐도 저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당신에게 뜻을 전했을 텐데요?”


“……너처럼은 안 했지. 사실 직접 전하지도 않았어. 세냐는 300년 전이랑 똑같았다고.”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맥주잔을 끌어당겼다.


“솔직히 당황스럽고…… 어…… 놀랍지. 나는 너희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


“고자입니까?”


“커흡!”


유진은 막 목구멍으로 넘어간 맥주를 뿜어버렸다. 아니스는 재빨리 몸을 뒤로 빼내 맥주 세례를 피했다.


“야, 야! 말이 무슨……! 아니 당연하지 않냐? 300년 전에 그딴 생각을 할 틈이 어디 있었다고…….”


“누구는 틈이 있어서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저도, 세냐도, 전쟁이 끝난 다음을 생각했던 겁니다. 애석하게도 전쟁은 그딴 식으로 끝나 버렸고, 당신은 죽어버렸지만.”


아니스는 피식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뭐어…… 당시의 저는 평생 제 마음을 전할 생각이 없기는 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에 환멸해 있었고, 제 존재가 그러한 행복을 추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추구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뿐입니다.”


“……크흠.”


“잘 압니다. 당신은 제게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겠지요. 하멜. 당신이 제게 품었던 마음은 동료로서의 우애와…… 동정심. 그렇지 않습니까?”


“어.”


유진은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불쌍했지. 아프다고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으면서 등을 피로 적시고, 고통을 참기 위해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제 몸은 돌보지 않는 주제에 죽고 싶어 하는 새끼들은 악착같이 살리려는 네가 불쌍했다.”


“저는 당신의 동정심이 좋았습니다.”


아니스는 손으로 턱을 괴며 유진을 응시했다.


“당신이 저를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마냥 다루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멜. 당신은 평소에는 굉장히 거칠고 난폭하게 굴었지만, 제가…… 성흔에서 피를 쏟으며, 당신의 앞에서 등을 보여줄 때만큼은. 수많은 마족을 도륙 내던, 굳은살 가득 박혀 있는 험상궂은 손이…… 아주 부드럽고 여리게 느껴졌습니다.”


“……그럼 상처를 후벼파리?”


“부끄러워하기는. 저는 당신의 그런 면도 좋았습니다. 당신이 절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빛이 보우하셔 저는 이렇게 세상에 남았고, 크리스티나가 저를 배려해 주어 미련의 일말을 거두게 해주었으니.”


“……그 뭐냐……. 난 아직도 잘 모르겠거든. 네가 나를? 그리고 세냐가…… 나를?”


“세냐의 경우는 조금 짐작했던 것 아닙니까?”


“……뭐…… 조금은…….”


“당신도 세냐에게 마음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고. 아마 저보다는 세냐에게 마음이 있었겠지요?”


“……그냥 술이나 마시면 안 되나…….”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겠습니다.”


점원이 새로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아니스가 먼저 맥주잔을 들자, 유진은 그에 호응하여 맥주잔을 위로 들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니스는 의식의 저편에서 듣고 있을 크리스티나를 의식하며 말했다. 서로의 잔이 부딪쳤다. 아니스가 꿀꺽꿀꺽 맥주를 비우는 동안, 유진은 맥주를 마시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세냐를 말하는 거냐?”


“등신 새끼.”


아니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 버렸다. 왜 욕을 먹어야 하지…….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생일 축하한다.”


스스로 뱉기에도 이상한 말이지만,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포장된 상자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유진을 흘겨보던 아니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유진의 얼굴과 식탁의 선물상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오늘 네 생일이잖아.”


“하멜……! 당신이 제 선물을 준비한 겁니까?”


“그 대단한 건 아니고…….”


“잠깐,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스는 급히 선물의 포장지를 뜯어냈다. 혹시 안에 편지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스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고, 의식의 저편에 있는 크리스티나도 기대에 가득 차서 아니스의 눈으로 선물상자의 안을 보았다.


“……쯧.”


편지는 없었다. 섣부른 기대가 배신당한 것에 아니스는 혀를 찼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혀를 차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하멜! 그래서 혀를 찬 것이 아닙니다. 저는 혹시 편지가 함께 있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


아니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선물상자 안에 있는 것은 아름답게 세공된 목걸이였다. 장식은 따로 없는 줄 뿐이었지만, 그래서 아니스는 이 목걸이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 로사리오.”


지금 아니스의 목에는 로사리오가 걸려 있다. 교황청 특급유물고에서 가지고 나온, 전생부터 사용하던 로사리오다. 세공된 십자가는 여전히 아름답게 반짝거리지만, 목걸이의 끈은 가죽으로 된 것이라 낡고 헤져 있다.


“끈이 별로더라.”


“……후후.”


아니스는 웃으며 로사리오를 벗었다. 선물 받은 끈을 바꾸고, 로사리오를 다시 목에 걸기 위해 머리카락을 뒤로 들췄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별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니스의 목에 로사리오를 새로 걸어주었다.


이쪽으로 기운 유진의 얼굴을 보며 아니스는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느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기울여서? 흔히들 처음이 가장 어렵고 두 번째부터는 쉽다는데, 아니스는 이미 처음을 극복하지 않았나?


[시스터……!]


머릿속에서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스가 정 하려 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만, 크리스티나는 이렇게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참겠습니다.’


확, 해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세냐와 크리스티나를 위해서였다.


“……뭘 봐?”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방긋 웃으며 돌아온 대답. 유진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밥도 다 먹었는데. 여기 말고 따로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저는 아직 다 안 먹었습니다. 술을 더 마실 겁니다.”


아니스는 목에 닿는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300년 전. 유라스를 떠나서도 생일을 따로 챙겼던 적은 없었다. 베르무트도, 모론도, 세냐도, 하멜도. 누군가의 생일이라면 축하한다는 말 정도는 해주었지만, 따로 선물을 주었던 적은 없었다.


다들 그런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물 따위를 주고받지 않아도…… 생일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날 하루는 꽤 즐거워졌다. 그 끔찍하던 마경에서도, 누군가의 생일이 찾아오면 일찍부터 야영지를 잡고서 아꼈던 술독을 열곤 했었다.


아니스는 동료들과 함께 여행하는 하루하루를 선물이라고 느꼈었다.


“……조금 더.”


지금 이 순간도.


아니스는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끼며 웃었다.


펍의 왁자지껄한 소리.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


맥주잔이 부딪치는 소리.


눈앞에 앉아 있는 하멜.


그 모든 것이 아니스에게 생을 실감하게 만들어주었다.


“해가 저물 때까지, 당신과 둘이서 이곳에 있고 싶습니다.”


아니스는 맥주잔을 들며 웃었다.


태양의 광장


해가 저물어간다.


아니스는 반쯤 남은 맥주잔을 들며 창밖을 보았다. 골목 깊은 곳에 있는 펍이지만, 이곳에도 노을빛은 엷게나마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그럼.”


술은 실컷 마셨다.


죽고서 수백 년 동안 마시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마셔도, 마셔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많이 마셨다.


선물도 받았다. ……그러니 당장 미련 같은 것이 남을 리가 없었다. 만약 크리스티나의 몸이 특별하지 않고, 아니스에게 앞으로의 사명 따위가 없었다면. 아니스는 오늘 하루 겪은 일만으로도 성불할 자신이 있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


유진은 질렸다는 눈으로 아니스의 주변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마신 맥주잔이 바닥에 그득했고, 아예 커다란 술독까지 곁에 놓여 있다.


평범한…… 아니, 사람이라면 이 짧은 시간 안에 저만큼의 맥주를 마시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오직 많은 술을 마시기 위해 제 몸에 신성마법까지 쓰는 아니스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에 봐.”


조심히 들어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할 뻔했다. 몸은 가만히 있고 정신체만 바뀌는 것인데 조심히 들어가라는 것도 우습지 않나. 잠시 동안 아니스의 몸이 정지했다. 감긴 두눈의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우우욱…….”


크리스티나는 입을 틀어막고 괴로운 신음을 토했다. 그녀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굳이 마셔야 한다면 드라이한 와인을 선호한다. 머리가 울릴 만큼 차가운 맥주? 단 한 번도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맥주를 인간에게 불가능할 만큼 마셨다……. 아니스가 신성마법으로 마신 맥주를 대부분 소멸시키긴 했다만, 크리스티나는 지끈거리는 두통과 호흡할 때마다 느껴지는 술 냄새가 괴로웠다.


“괜찮냐?”


유진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뒷걸음질 쳤다. 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몸이라, 물러서는 다리가 조금 꼬여 버렸다. 그렇게 크리스티나의 몸이 휘청거렸고, 유진은 늦지 않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고 허리를 받쳐주었다.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아, 아, 안 됩니다.”


크리스티나는 취기로 붉은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안 되기는 뭐가 안 된다는 건데?”


“술…… 냄새가 납니다. 그리 좋지 않은 냄새일 텐데…….”


“허 참.”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동료들과 십수 년을 떠돌았는데, 이제 와서 술 냄새가 고약하다고 느낄 리가 없잖은가.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그를 입 밖으로 내뱉어서 크리스티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서 술식을 그려서 마법을 일으켰다.


“……앗…….”


크리스티나는 제 몸을 감싸는 마법을 느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몸에 배었던 술냄새가 깔끔하게 사라졌다.


[쯧.]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혀를 찼다. 취기는 물론이고 두통과 술냄새를 지우는 것은 아니스도 할 수 있다. 굳이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의식이 말똥하지만, 감정이 조금 격해질 만큼의…… 거기에 몸도 조금 휘청거릴 만큼 절묘하게 조절하여 취기를 남겨주었다.


왜 그랬겠는가? 절묘하게 배합한 취기의 덕을 보아 이런저런 재미를 볼 생각이었는데…… 아니스는 유진이 마법을 익힌 것에 진심으로 짜증을 느꼈다.


[답지 않게 마법을 익히다니…… 그냥 전생처럼 몸만 쓰면 될 것을.]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체하고서 황급히 몸을 바로 세웠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헛기침을 뱉었다.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저, 저는 아니스 님과는 달리 술이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 그만…….”


“걔는 술이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괴물이지.”


유진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닫힌 문을 가리켰다.


“어쩔래? 너도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아니면 나갈 건가?”


“나가…… 겠습니다. 네. 너무 많이 먹어서, 조금 걷고 싶습니다.”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크리스티나는 오늘 하루를 통째로 아니스에게 양보하려고 했었다. 해가 저물 때까지로 시간을 제한한 것은 아니스였다.


대부분의 축제는 낮보다 밤이 화려하고 즐겁다.


아니스의 탄신일 축제도 그랬다. 퍼레이드는 낮부터 이어졌지만, 밤의 퍼레이드가 특히나 화려하다. 광대들은 화려한 옷과 장식을 달고서 춤을 추며 행진하고, 악단은 그 뒤를 따르며 경쾌하게 개사한 찬송가를 부른다.


크리스티나는 펍이 위치한 골목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침 밤의 퍼레이드가 저 앞의 대로를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축제로 사람들이 많은데, 저 앞의 거리는 과장 하나 없이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사람이 빼곡했다.


“……돌아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굳이?”


“…….”


“나는 저거 보고 싶은데. 너는 아니야?”


아마 저 말에 속뜻 같은 것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가벼운 질문다운 가벼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질문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파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본 적 있어?”


침묵이라 말할 것도 없을 잠깐. 유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 질문 또한, 크리스티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본 적은 있다.


보고 싶었던 적도…… 있다.


어린 나이에는,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수도원에는 고아들이 참 많았다. 한창 먹어야 할 아이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보관할 식재료가 많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수도원에는 쥐나 잡다한 벌레들이 많았다.


그러한 유해생물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손쓸 도리 없을 만큼 수가 불어나서, 주기적인 방역이 필요하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수도원의 성직자들은 아이들의 입과 코를 천으로 가리고서 운동장에 모아놓았다. 그러고서 성직자들은 뿌연 연기가 뭉게뭉게 나오는 연통을 들고서 시설 안의 방역을 실시했다.


가만히 있으렴. 그런 말은 들었지만,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뭐가 그리 좋고 즐거운지……. 지금 와서는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기 힘들었지만. 어렸을 때의, 양녀가 되기 전의 크리스티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연통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쫓아다녔다.


크리스티나가 가진 퍼레이드의 기억은 그것뿐이었다. 지금 저 앞의 대로에는 많은 아이들이 나와 있다. 아이들은 유라스의 종교가 가진 불쾌한 진실 따위는 알지 못하고, 아이들답게 깔깔 웃으며 퍼레이드의 뒤를 쫓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축제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없다. 수도원에 있을 적에도 밖에 나가본 적은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잘 만들어진 성녀후보, 모조화신을 감시하고 통제하던 것이었다. 크리스티나에게 있어서 축제란 가끔 급식으로 미트파이나 큼직한 고깃덩이가 나오는 날이었고, 퍼레이드는 방역 연통의 연기를 쫓는 것이었다.


세르지오의 양녀가 된 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불행했다. 식사는 수도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 날을 축제라고 느낄 수는 없었다.


세르지오의 저택과 트레치아 대성당에는 크리스티나와 아이들이 웃으며 쫓아다닐 연기 따위는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유년기는 절망과 증오로 뭉개지고 찢긴 뒤에 가식으로 덮였다.


그렇게 유년기가 끝난 후에야 드디어 축제에 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의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성녀후보’로서 트레치아 축제의 선두에 섰지만, 그 축제는 크리스티나에게는 ‘나’라는 인간의 처형대이자 성녀후보의 선전대였다.


“……예.”


“보고 싶지는 않고?”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을 했다.


모르겠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았다. 괜히 봤다가 불행하고 증오하며 가식으로 덮었던 과거의 기억이 겹쳐지지 않을까. 지금의 크리스티나는 이미 충분할 만큼의 구원을 얻었으나, 이미 지나가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소녀가 절망을 충동질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겨우 저따위 퍼레이드를 보고 말고에 그렇게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가?”


유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티나는 대답하지 않고서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대뜸 손을 뻗어, 우두커니 서 있던 크리스티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앗…….”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유진은 크리스티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삶 대부분이 불행했음은 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닥치고 머뭇거리는 것은, 아마 어릴 때의 불행한 기억을 저 앞의 화려하고 즐거운 축제와 겹쳐보았기 때문이리라.


“난 널 구했어.”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손목을 잡아끌고서 성큼성큼 걸었다. 크리스티나는 무어라 말하지도, 저항하지도 못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유진이 잡아끄는 대로 끌려가기만 했다.


“구해줬으니 은혜를 갚으란 말은 안 할 거야. 널 멋대로 구하기로 한 것은 나였고, 그건 내 선택이었지. 그러니 너도 멋대로 선택하면 되는 거다.”


“……무엇을 말입니까?”


“날 따라올지, 말지.”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선택할 필요가 있나? 크리스티나의 뜻은 분명했다. 그녀는 유라스에 남을 생각이 없었다. 유진이 싫다고, 꺼지라고 해도 유진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아니.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그런 이유를 경멸할 것을 잘 알았다.


그냥.


따라가고 싶었다. 유진이 용사고, 사실은 300년 전의 우둔한 하멜이고. 그런 것은 지금의 크리스티나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유진은, 성녀가 아닌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구해주었다.


그러니 크리스티나는 용사도, 하멜도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와 함께 가고 싶을 뿐이었다.


“……따라갈 겁니다.”


“그렇다면 고작 저딴 것을 보는 데에 겁먹고 주저하지 마.”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유진이 걷는 방향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여서 길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를 의식하지도 못했다. 더듬더듬 물러서는 걸음도, 은연중에 떨리는 몸도. 그 모든 것이 본능적으로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유진은 그렇게 길을 만들고, 크리스티나를 잡아끌었다.


“앞으로의 네게 저딴 것은 하찮은 풍경이니까.”


“…….”


“넌 지금 여기 있잖아. 나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의식하고 떠올렸는지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굳이 캐묻지도 않을 거다.”


유진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크리스티나의 손을 놓고서 앞을 가리켰다. 반짝거리고, 화려하고, 즐겁고, 시끄럽고. 크리스티나가 어렸을 때에 상상했던 축제의 퍼레이드가 바로 앞에서 행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봐.”


크리스티나는 우두커니 서서 눈앞을 보았다. 항상 상상만 했던 것은 아니다. 성녀후보가 되고, 실제로 보았던 적도 많다. 그녀가 직접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던 적도 많다. 하지만 감상이 전혀 달랐다.


예전에 느꼈던 괴로움이나 증오와 분노,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성녀후보를 칭송하고 선망하던 이들에 대한 비웃음과 제 자신과 성녀후보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에 대한 자괴감. 그 모든 것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의 말대로였다.


그때의 기억도, 감정도, 저 앞의 풍경도. 하찮게 보였다. 크리스티나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보고 있는 풍경에 커다란 어긋남을 느꼈다. 경쾌한 노래. 화려한 복장과 장식. 아이들의 웃음소리. 구경꾼들의 감탄. 그 모든 것이 조금은 멀게 느껴졌고,


바로 앞에 있는 유진이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봐, 별거 아니잖아.”


유진이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취기는 진즉에 털어냈을 텐데…….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화끈거렸다.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뻐끔거리다 말고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녀는 도망치듯이 뒷걸음질을 쳤으나, 유진은 크리스티나가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냐?”


“다, 다릅니다. 이건…… 정말로 다릅니다. 그냥…….”


이 순간, 크리스티나는 커다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등까지 돌리고 도망치고 싶다. 그건 저 하찮은 광경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단순히 유진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워서였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감정선을 도저히, 절대로 유진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아니스에게 떠넘기고 의식 너머로 숨어버리고 싶었지만, 그 짓궂은 시스터는 지금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조언 한마디 해주지 않고 있다.


만약 도망친다면? 크리스티나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이상, 유진은 무조건 오해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그리 오해하는 것이 죽을 만큼이나 싫었다. 기껏 저런 말까지 해주며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도망쳐 버린다면, 유진이 그 모든 것이 허사라고 느낄 것 아닌가? 크리스티나는 그럴 경우에 유진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그럴 리가 없지만…….’


“너 왜 그래?”


유진이 물었다. 고민에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크리스티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뒤로 물렸던 걸음을 앞으로 성큼 뻗었다.


“따, 따라가도록 하죠.”


“뭐?”


“그…… 퍼, 퍼레이드는 뒤따르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까?”


크리스티나는 서둘러 말하면서 퍼레이드의 행렬에 몸을 밀어 넣었다. 유진은 그런 크리스티나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밤이 밤답기를.


크리스티나는 진심으로 그를 바랐다. 자비로운 빛이시여, 부디 이 밤을 밝히지 말아주소서. 그렇게 기도했지만 무의미했다. 수도 유레시아의 밤은 언제나 은은한 빛으로 밝은 데다, 지금 이 순간은 화려한 퍼레이드로 주변이 너무 밝았다.


크리스티나는 이 밝은 빛이 자신의 얼굴을 너무 선명하게 비추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 발그스름한 얼굴을 유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또, 아니스와 너무나도 닮은 얼굴을 군중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기분 탓일까. 시선들이 얼굴을 핥는 것만 같았다.


‘아.’


크리스티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로브를 입고 있었고, 뒤에는 후드가 젖혀져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급히 후드를 깊이 눌러써서, 제 얼굴을 가렸다.


“뭐하냐?”


“……누군가가 저를 알아볼까 두렵습니다.”


“또 그러는군.”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아까의 광장도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달리 저희는 지금 이 행렬에 함께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을 누가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퍼레이드를 망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흘겨보았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까처럼 억지로 크리스티나의 후드를 벗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함께 걸으면서.


크리스티나는 경쾌한 노랫소리에도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렬과 함께 걸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빛이시여, 제발…….’


후드를 눌러 썼는데도 주변의 너무 밝아, 얼굴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다시 기도했다.


간절한 기도가 닿은 것일까.


퍼레이드를 밝히던 불빛이 한순간에 모두 꺼졌다. 거리를 밝히던 조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거리가 순식간에 밤답게 어두워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어둠에 퍼레이드가 멈췄다. 뒤따르던 행렬이 어두워진 주변을 둘러보며 웅성댔다.


ㅡ퍼어엉!


어둠이 걷혔다. 근처의 높은 시계탑에서 쏘아 올린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불꽃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환성이 되었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꽃을 피우고서 나부끼는 불빛을 보았다.


크리스티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숙였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유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 크리스티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천천히 다가온 손이, 크리스티나의 양손을 덮었다.


“지금 널 보는 것은 나뿐이다.”


굳은살이 가득한 거친 손.


그 손이 크리스티나의 후드를 벗겨냈다.


“……아…….”


하늘 높은 곳에서 터진 불꽃이 흩날렸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진과, 그의 뒤편에서 쏟아지는 불꽃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너도 널 감추지 마.”


크리스티나는 저 말이 성녀가 아닌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날 따라오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나랑 똑같은 걸 봐야 할 것 아냐.”


성녀를 의식하지 않고.


주변의 시선과 웅성거림에 스스로를 감추지 않고.


ㅡ아니.


단순히 하찮고, 멀게 느껴졌다. 아까와 똑같았다. 주변의 모든 것이 하찮고 멀지만, 오직 유진만이 가깝게 느껴졌다. 지금 이 감정은 동경이나 숭배일까. 아니면…… 크리스티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단지 아름답다고 느꼈다. 하늘을 수놓다 쏟아지는 불꽃과, 그 아래에 있는 유진이. 성녀의 운명과 저주와 같은 굴레에서 그녀에게 손을 뻗어 준 유진이. 성녀가 아닌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구한, 용사가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가.


너무나 가까워서, 손을 뻗으면 닿을 기적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눈이 부셨다.


“……네.”


떨리는 호흡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너무 눈이 부셔서, 계속 보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웃어버렸다. 감은 눈을 뜨지 않고, 어떠한 가식도 가면으로 만들어 쓰지 않고, 너무나 가까이 있고 밝으며 아름다운 기적을 느끼면서.


“네, 유진 님.”


웃었다.


바벨


“……음…….”


사흘간 숙박한 숙소를 떠나는 날. 유진은 방문 앞까지 찾아온 크리스티나를 보고 잠시 동안 두 눈을 깜빡거렸다.


예고 없는 방문은 아니었다. 오늘부로 유라스를 떠나서 라이언하트에 돌아가기로 했으니, 정오가 되기 전에 숙소에 찾아와 달라고 미리 말을 해두었다.


“……짐이 좀 과하지 않나?”


유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괜한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크리스티나의 짐은 굉장히 많았다. 그녀의 몸집만큼이나 큰 여행배낭이 하나, 둘, 셋, 넷……. 유진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가?”


“전부 필요한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웃지 않고 대답했다. 유진은 배낭의 열린 틈을 힐긋 보았다. 마구잡이로 쑤셔 넣은 성직복이나 잡다한 물건들이 보였다. 새로 산 것 같지는 않고, 기존에 쓰던 물건을 미리 챙긴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또 언제 다 챙긴 거야?”


“이틀 전에 사람을 고용해서 트레치아 대성당으로 보내, 제 사적인 물건들을 모조리 챙겨 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굳이 거기서 쓰던 물건을 가져갈 필요가 있나? 물건이야 가서 새로 사면 되는…….”


“유진 님께 더 이상의 빚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오늘부로 유라스에서 완벽하게 독립하는 것입니다. 본래 저는 교황청에서 발급된 주교카드와 세르지오 로게리스의 카드를 사용했으나, 앞으로는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어…… 왜?”


“재정적인 면을 의존하는 것은 진정한 독립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저는 이제는 무일푼의 빈털터리라는 것입니다.”


“뭐 그래……. 라이언하트도, 나도 돈은 많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유진 님.”


크리스티나가 두 눈을 얇게 뜨고서 유진을 응시했다.


“방금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더 이상 유진 님께 빚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많은 짐을 굳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럼 라이언하트 저택의 방도 필요 없나?”


“유진 님께서 제가 아침이슬 맺혀 서늘한 정원에서 야영하기를 바라신다면, 저는 기꺼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방은 쓰겠다는 말 아닌가.


“네가 챙겨 온 그 많은 짐들도 결국은 주교 카드와 로게리스의 카드로 구입한 것들 아닌가?”


“엄밀히 말하자면, 이 대부분은 제가 직접 구매했다기보다는 손에 쥐어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과거부터 겪은 일들을 떠올려 보건대, 저는 이것들을 소유하기 충분한 값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래, 그래.”


유진은 대충 흘려들으면서 망토를 열었다. 그 안에 앉아 있던 메르는 크리스티나의 짐들을 보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쩔 수 없다고 납득은 했다. 하지만 저 음흉한 이중인격의 성녀가 라이언하트의 저택에 들어와서, 유진의 곁을 맴돌 것을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시커먼 재가 흩날리는 기분이었다.


“차암, 앞뒤가 맞지 않는 분이시네요. 무일푼으로 저택에 들어와 신세를 질 거면서, 빚을 지고 싶지 않다는 말은 왜 하는 건가요?”


“당장은 수중에 돈이 없습니다만, 제 능력을 사용한다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크리스티나는 웃는 눈을 살짝 뜨고서 메르를 응시했다.


“라이언하트에 성직자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대신 뛰어난 치료사와 다양한 포션 등을 구비하고 계시겠지만, 고위신관의 치유마법은 의학과 마법의 범주를 넘어선 기적이지요.”


“그건…….”


“감히 말하건대, 지금 시대에 저 이상의 치유마법을 쓸 수 있는 성직자는 없을 겁니다. 그런 제가 라이언하트에 의탁하여 기꺼이 능력을 제공해드리겠다고 한다면, 라이언하트의 가주님은 틀림없이 그 값을 치러주실 겁니다.”


“으으…….”


“비록 제가 당장은 무일푼인 것은 맞지만, 누구처럼 자그마한 몸뚱이를 무기 삼아 뻔뻔하게 음식과 단 과자나 탐할 생각은 없습니다.”


“뭐ㅡ 뭐라구욧?”


메르의 눈에서 쌍심지가 켜졌다.


“저,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저도 항상 도움이 되고 있다구요. 크리스티나 님은 저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저는 항상 유진 님의 마법을 보조하고 있…….”


“당신이 뻔뻔하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왜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하십니까?”


“유진 님……! 저는 저 여자가 싫어요!”


메르는 울상을 지으며 유진의 가슴으로 기어 올라왔다. 유진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싸우지 말고…….”


“싸움이라니요. 저는 메르 님의 질문에 대답해 드린 것뿐입니다.”


“저 여자가 저보고 뻔뻔한 식충이라고 말했어요!”


“사이좋게…….”


유진은 메르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크리스티나의 짐을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라파엘로 경은? 배웅하러 오는 것 아냐?”


“그러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벌써부터 괜한 소문이 떠돌아 좋을 것은 없으니까요.”


벌써부터라.


“어차피 소문은 날걸.”


원래는 아니스의 축일에 크리스티나가 성녀후보에서 성녀가 되었다 선언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가 교황청의 인정을 거부했고, 교황과 추기경이 그를 받아들였다. 결국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는 아직까지 세상에는 ‘성녀후보’였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유라스에서 성녀후보는 크리스티나 혼자뿐이다. 정식 성녀가 되었음이 선언되지 않았다고 해도, 유라스의 모든 신민이 크리스티나를 성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크리스티나가 유라스를 떠나서, 외국 키옐의 라이언하트에 의탁하는 것이다. 이건 감추는 것이 불가능한 커다란 소문이 될 것이다.


“……예. 그렇겠지요.”


숙소 밖에는 미리 불러놓은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목적지는 유레시아 외곽의 워프게이트. 늦어도 오늘 저녁쯤에는 라이언하트 저택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명목은 정했습니다.”


“어떤?”


“라이언하트가 보호 중인 엘프들의 치료입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마병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명목일 뿐이다. 엘프의 마병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성녀인 아니스조차도 엘프의 마병을 정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병을 멈추고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세계수의 영기(靈氣)뿐이다.


……이런저런 걱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데려가는 것을 라이언하트에는 아직 알리지 않았다. 뭐라 설명하기도 궁색하고 난감하니, 일단 데려가서 빈방이나 하나 내줄 생각이었다.


‘가주님은 별말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럴듯한 이유도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나하마에서 라만 슐호브를 데리고 왔다.


사마르에서 100명이 넘는 엘프를 데리고 왔다.


아롯에서 메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이제는 유라스에서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가게 되었다……. 길레이드는 별말을 하지 않을지라도, 애니실라는 뒷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아니…… 의외로 별말 없이 넘어갈 수도 있어.’


유진은 애니실라가 의외로 인간적이고 정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마르에서 무턱대고 100명의 엘프들을 데리고 왔을 때. 애니실라는 부채를 으스러트릴 만큼 분노했지만, 결국은 엘프들의 처지를 가여워하여 본가의 숲을 내주었다.


그렇게 몇 달. 유진이 심어놓은 세계수의 묘목 덕에 마병은 악화되기는커녕 차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애니실라는 가끔 산책을 핑계 삼아 엘프들의 마을에 들러서는 시크나드에게 병증에 대해 묻기도 했었다.


‘엘프들을 치료하러 왔다고 하면 뭐…….’


치료도 치료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신성제국의 성녀가 가문에 의탁하여 치유마법을 베풀어준단다.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에 몰두하는 애니실라가 거부할 리가 없지 않은가?


유진은 일단 그렇게 생각했다.


* * *


마경(魔境).


오래전부터 이 땅은 그렇게 불렸다. 지금도 대륙 사람들 대부분은 이 땅을 마경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곳이 마경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의미 그대로 이 땅에는 수많은 마족과 마왕이 존재한다. 다만, 그 의미는 수백 년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마경 헬무드의 인간 시민들에게 있어서, 마족은 친절한 이웃이다. 그들은 옛날이야기처럼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사냥하거나 잡아먹고 영혼에 족쇄를 채우지 않는다.


마왕은 세상을 통째로 짓밟고 대량학살을 일으킨 전쟁범이 아닌, 그 어떤 나라의 왕보다 인자하고 현명한 성군이다. 마왕은 인간의 부탁을 들어주고, 인간을 지켜주며, 인간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해준다.


이곳은 마경이자, 기회의 땅이다. 영주권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 꽤 크기는 하다만, 간절히 바란다면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헬무드의 이민지원시스템은 굉장히 인도적이라, 사후(死後) 노역의 햇수에 따라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북방의 빈국에 사는 사람들은, 헬무드 드림을 꿈꾸며 헬무드 외교부의 문을 두드린다.


ㅡ마천루의 도시.


기회의 땅, 헬무드 제국의 수도.


판데모니엄.


이 도시의 건물은 대륙 어느 도시의 건물보다 ‘높다’. 성탑도 아닌 수십 층의 고층건물, ‘빌딩’이 그득하다. 인간의 힘으로는 올릴 수 없는 이 높다란 마천루야말로 마왕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중, 판데모니엄의 중심에 우뚝 선 매끄러운 검은색의 빌딩이 있다.


바벨.


99층에 달하는 이 빌딩은 판데모니엄뿐만이 아니라 헬무드에서 가장 높다. 무엇을 숨기랴, 이 바벨이야말로 헬무드에 군림하는 유폐의 마왕이 직접 거하는 마왕성인 것이다.


“용마성의 주인은 이번에도 불참인가.”


바벨의 90층.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은 뒷짐을 지고 서서 유리벽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아래, 바벨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고층이라 하기에 충분한 빌딩의 숲이 보였다. 그러한 빌딩의 사이사이를 수십 수백 대에 달하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떠돌고 있다.


에어피쉬.


판데모니엄의 하늘을 바다 삼아 헤엄치는 에어피쉬들은 판데모니엄의 범죄발생률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치안시스템이다. 에어피쉬들은 이 마천루의 도시를 사각 없이 감시하며, 관측한 모든 것을 바벨의 관제국으로 송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층 아래에 있는 관제국에서는, 사후노동을 계약한 영혼 수천과 그를 통제하는 수백 명의 마족들이 에어피쉬의 관측영상을 파악하며 도시의 치안수호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양입니다. 연락이라도 보내주면 좋으련만…….”


널따란 회의실.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던 중년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실크해트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들고 있던 지팡이는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 지팡이는 끈적끈적한 피의 색깔과 같았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막대에는 혈관이 꿈틀거렸다.


‘블러드메리’. 현명한 세냐의 아카샤와 더불어, 대륙에 단 2개뿐인 드래곤하트의 지팡이.


유폐의 삼마(三魔) 중에서 유일하게 헬무드에 머무르며, 백작의 작위를 가진 흑마법사. 에드몬드 코드렛. 그는 콧수염을 어루만지며 빙긋 웃었다.


“이번에도 회의에 참석한 로열티(Loyalty)의 멤버는 저와 공작님 둘뿐인 겁니까? 이래서야 정기회의랄 수도 없겠군요.”


“사실 회의랄 것도 없지 않나. 가볍게 근황이나 나누자는 취지지. 마족과 인간의 시간감각은 굉장히 다르니까, 이런 회의라도 하지 않다간 난 수십 년은 자네를 보려 들지 않을 걸세.”


“수십 년 정도라면 저도 괜찮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긴 시간도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아직도 영생을 바라나? 이미 근접해 있을 텐데.”


“하하…… 제가 도달한 영생이라고 해봐야 인간의 삶을 길게 늘린 것에 지나지 않지요. 참된 영생자인 마족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말이야. 강한 인간이 오래 살 듯, 강한 마족이 오래 사는 것이지.”


가비드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에드몬드는 빙글빙글 웃을 뿐 뭐라 답하지는 않았다.


가비드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유폐의 삼마. 마왕과 직접 계약한 3명의 흑마법사는 모두가 괴짜…… 아니, 인간이면서도 인간답지 않은 광기의 소유자다.


아롯의 흑색마탑주. 발자크 루드베스는 마법의 끝을 보고자 한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끝마저도 아득히 넘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ㅡ 아니, 실제로 존재하는 지도 의문인 마법의 ‘끝’에 집착하고 있다.


블러드메리의 주인, 에드몬드 코드렛은 인간이란 자신의 ‘품종’을 신종(新種)으로 개량하고 싶어 한다. 사고와 행동양식 같은 인간다운 모든 것을 버리고, 마기를 극한으로 정제한 마력을 통해 우화(羽化) 하여 신인류가 되기를 갈망한다.


사막의 던전마스터, 아멜리아 머윈은…….


“……음.”


어지간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가비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저 먼 밤하늘을 헤치고 날아오는 비행물을 응시했다.


……순간, 자신이 보는 것이 맞는지. 꿈이라도 꾸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만큼이나 경악은 300년 전에 우둔한 하멜의 폭주에 밀린 이후로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에드몬드.”


“예, 공작님.”


“이리 와서…… 저걸 보게. 저게 대체 무엇으로 보이나?”


갑작스러운 부름에 에드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가비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유리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서 먼 밤하늘을 보았다.


ㅡ빠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비행물은 이쪽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비행물의 모습이 잘 보인다.


에드몬드는 헉하고 놀란 소리를 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법을 실수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에드몬드는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눈을 부빈 뒤에 다시 창밖을 보았다. 이제는 마법을 쓸 필요가 없을 만큼 가까워져, 비행물이 아주 잘 보였다.


그건…….


거대한 머리였다.


그 외에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오리할콘과 미스릴과 아다만티움 등, 비싸고 귀하기 짝이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낸 마법공학으로 만든 비행선…… 아니, 비행하는 머리. 저 머리 하나면 헬무드의 빌딩 10개는 충분히 구매하고 남으리라.


“……머리…… 로군요.”


에드몬드는 더듬거리며 내뱉었다. 단순한 머리가 아니다. 날개처럼, 촉수처럼 펄럭거리는 구불구불한 머리. 머리 위에 돋아난 붉은 뿔.


머리의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눈동자는 별들을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거린다.


“아하하핫!”


이마가 갈라졌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는 벨벳 의자에서 앉은 채로 양팔을 번쩍 들었다.


“어때요? 이 제벨라페이스!”


“…….”


“원래는 제벨라파크의 완공 기념식에 선보이려고 했는데! 내 예상보다 너무 빨리 완성되었지 뭐예요? 그래서 그냥 먼저 보여주기로 했어요. 멋지죠?”


“…….”


“제벨라페이스는 제벨라파크의 마스코트가 될 거예요! 아침과 낮과 밤과 새벽을 가리지 않고 하늘을 떠다니는 제벨라페이스…… 제벨라파크의 손님들은 이 페이스를 보고서 경외와 사랑을 품겠죠. 저에 대한 정욕에 괴로워하면서 카지노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정기를…….”


“보는 내가 다 부끄럽군.”


가비드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뒤편의 에드몬드도 하고 싶은 말들을 도저히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누아르는 저 건조한 반응들에 상처 따위는 받지 않았다.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니, 금속의 제벨라페이스의 표정이 천천히 바뀌었다.


“…….”


가비드와 에드몬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제벨라페이스가 미소를 짓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비드는 까마득한 아래에 살고 있는 판데모니엄의 시민들이 저 추태를 보고 있지 않을까 두려웠다.


“스마일.”


누아르는 양손의 검지로 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벨벳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조종석의 밖으로 걸어 나왔다. ㅡ촤라락! 바닥의 융단이 길게 뻗어졌다. 누아르는 그 레드카펫을 사뿐사뿐 밟아서 유리창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유리창을 통과하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텅 빈 의자들을 보던 누아르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용마성의 주인은 이번에도 불참이시네?”


“어쩔 수 없지 않소.”


“흐응, 나는 정말 정말 궁금한 걸요. 대체 언제까지 용마성의 문제를 묵인할 셈이죠? 200년이나 봐주었으면 충분하지 않나?”


“……200년은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드래곤에게 있어서는 그리 긴 시간도 아니오. 당장 용마성의 ‘어린 주인’에게는 못해도 100년의 시간은 더 필요할 거요.”


“그걸 왜 더 기다려줘야 하느냔 말이야. 마룡(魔龍)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이봐요 가비드. 300년 전에는 타락한 드래곤이 희소하고 상징으로 삼을 만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지 않아요?”


“어느 시대건 드래곤은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였소. 그런 존재가 타락하고, 유폐의 마왕님에게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로서 포기하기 힘드오.”


“300년 전에야 드래곤이 그런 존재였죠. 지금은? 드래곤이 종적을 감춘 지가 300년이라고요. 현대에 활동하는 드래곤이 있기는 한가? 어쨌든,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드래곤은 머나먼 신화의 존재 같은 것이죠. 그런 상징보다는, 인간이면서도 공작까지 오른 입신적인 상징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에드몬드를 돌아보았다.


“에드몬드. 당신 생각은 어때요? 당신이 바란다면, 내 기꺼이 힘을 빌려드리죠. 무슨 말인지 알아요? 내 손으로 직접 용마성의 어린 드래곤을 찢어발겨 주겠다고요.”


“하하…… 제안은 참 감사합니다만…….”


“에이, 혹했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나는 당신이 또라이라서 아주 마음에 들어요. 만약 용마성의 주인을 폐하고 새로이 공작을 뽑는다면? 분수에도 안 맞는 야심을 꿈꿔대며 견제랍시고 내 근처를 기웃거리는 X밥 후작들보다는, 백작인 당신을 공작으로 올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저를 그렇게 어여삐 여겨주시는지는 몰랐습니다.”


“몰랐다면 오늘부터라도 알고 있도록 해요. 바란다면 내가 직접 유폐의 마왕님께 말씀을 올리도록 할게요. 대신 그 어린 드래곤의 시체는 내가 가질 거예요. 당신은 이미 블러드메리가 있잖아요?”


오가는 이야기를 듣던 가비드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유폐의 마왕님이 허락할 리도 없는 일을 떠들지 마시오. 그리고 누아르. 드래곤의 사체를 가지고서 대체 뭘 하고 싶기에 갖겠다고 말하는 것이오?”


“드래곤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우선 비늘과 가죽, 뼈는 무구로 가공해서 제벨라파크 카지노의 상품으로 걸 생각이에요.”


상상을 초월한 대답이었다. 가비드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누아르를 쳐다보았다. 누아르는 그 경악이 즐거워 방긋 웃었다.


“제벨라파크의 카지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를 통틀어 최고의 카지노가 될 거예요. 세상 어디에도 드래곤을 소재로 한 무구를 카지노 코인의 교환상품으로 건 곳은 없을 테니까.”


“……여러모로 충격적인 시설이 되기는 하겠군.”


“그리고 드래곤하트는 제벨라페이스에 이식할 거예요. 지금 장착한 마력기관도 훌륭하기는 한데, 드래곤하트를 이식하면 더, 더 훌륭해지겠죠?”


에드몬드는 얇게 뜬 눈으로 유리창 밖의 제벨라페이스를 응시했다. 저 자기애가 듬뿍 담긴 비행물은 얼핏 보기에는 우습기 짝이 없었으나, 대마법사인 에드몬드는 저것이 단순히 날아다니기만 하는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비행물의 안구를 마안과 링크시키다니. 마법적으로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떠나, 제벨라 공작의 마력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알겠군.’


시선만으로 발동하는 마안은 마력의 소모가 크다. 그중에서도 누아르 제벨라가 가진 환상의 마안은 세상에 존재하고 존재했던 모든 마안을 통틀어 손에 꼽는 격을 가진 마안이다. 그녀의 마안은 이름 그대로 현실을 환상으로,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저 거대한 제벨라페이스는 그녀의 이름을 딴 제벨라파크의 상공을 떠돌 것이다. 언젠가 완공될 제벨라파크에 들어올 수많은 관광객들. 저만큼이나 기괴한 부유물이 하늘을 떠돈다면 보기 싫어도 한 번은 볼 수밖에 없을 터.


그 순간. 관광객들은 환상의 마안에 포착되고, 누아르 제벨라가 보여주는 환상에 빠지게 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유폐의 마왕님은 용마성의 어린 주인의 작위를 폐하지 않으실 거요.”


“그럼 사냥은? 내가 그 어린 드래곤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바람을 위해 사냥하는 것까지 유폐의 마왕님이 가로막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면, 내가 당신을 막겠지.”


가비드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붉은빛이 일렁거렸다. 아이리스의 암전의 마안, 누아르의 환상의 마안과 동격인 위신(威神)의 마안이 발하는 빛이었다.


“시간이 흐르기는 했나 봐. 학살마라고 불리던 당신이 이제는 어린 드래곤의 보호자 행세를 하다니.”


“용마성의 어린 주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오. 당신을 견제하는 것이지. 다 자라지 않았다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 지금도 충분히 강한 당신이 드래곤하트를 취하게 두고 싶지는 않소.”


가벼운 경고일 뿐이다. 누아르도 말만 거칠게 했을 뿐, 진심으로 용마성의 어린 주인을 사냥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알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 오싹한 시선은 거두어주겠어요?”


누아르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웃었다. 그러자 가비드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위신의 마안을 거두었다. 둘을 지켜보던 에드몬드는 하하 웃으면서 자리에 돌아가서 앉았다.


“두 공작님께서 노여운 척 짓궂은 장난을 치시니, 저로서는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군요. 그러니 부디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뭐 재미난 일이라도 있나?”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에드몬드는 코트 안쪽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이 가볍게 허공을 휘젓자, 두 주먹만 한 크기의 희끄무레한 구체가 나타났다.


인간의 영혼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에드몬드는 혼을 손끝으로 툭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용사와 성녀가 나타난 모양입니다.”


가비드의 두 눈이 얇아졌다.


태양의 광장


용사와 성녀.


에드몬드는 그 두 이름이 갖는 무게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는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괴물 같은 흑마법사였지만, ‘진짜’ 용사와 성녀를 겪어 본 적은 없었다.


“……성녀라.”


하지만.


유폐의 칼과 몽마의 여왕은 진짜 용사와 성녀를 겪어보았다. 300년 전의 세상. 용사와 성녀가 존재하던 시대. 그 이후로 용사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신성제국 유라스는 몇 번이나 ‘성녀’를 내세워 성국의 상징으로 삼았다.


“어쩌면, 이라고는 생각했어요.”


느긋한 걸음걸이로 움직인 누아르는 빈 테이블의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이번 대의 성녀후보. 이름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였죠? 그 여자, 아니스 슬리우드를 쏙 빼닮았잖아요? 그 광신도들. 200년을 들여서 결국에는 아니스 슬리우드를 복제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거죠.”


“아직 성공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단순히 얼굴만 빼닮은 것일지도 모르니. 오히려 그편이 교황청 쪽에서는 다루기가 쉽지 않겠소? 실제로 그들은 아니스 슬리우드를 너무 ‘잘’ 만들어서, 말년에는 통제하지 못했었으니 말이오.”


누아르와 가비드는 아니스 슬리우드의 진실을 안다. 그들은 수백 년이나 살아온 마족이며, 아니스 이전의 성녀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성녀라며 거창하게 불리기는 했지만, 아니스 이전의 성녀들은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건 아니스 이후의 성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라스가 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해 성녀를 만드는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의 성녀제조공법은 불완전하다. 여태까지 수많은 성녀후보와 성녀가 있었으나, 그들 중에서 성녀라 불리기 마땅했던 것은 아니스 하나뿐이었다.


“단순히 얼굴만 닮게 만든 조잡한 인형이라면…… 흐흥. 당신의 말대로 교황청이 써먹기는 쉽겠네요. 아니스를 빼닮았다는 것만으로도 광신의 상징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용사라.”


가비드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는 유리창을 등지고 서서 에드몬드를 응시했다.


“에드몬드 백작. 나도 자네를 꽤 좋아하지만, ‘용사’를 쉽게 담는 것은 농담으로라도 듣고 싶지 않군.”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용사는…… 후후. 그 절망의 베르무트를 떠올리게 만드니까요.”


둘은 300년 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헬무드의 수많은 마족들 중에서도 굴지의 힘을 가진 대마족. 용마성의 라이자키아와 함께 공작 작위를 가진 삼공(三公). 누아르 제벨라와 가비드 린드먼은 전쟁이 끝난 300년 전부터 헬무드의 ‘3번째’ 마왕에 가장 근접한 존재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마족들이 앞다투어 전공(戰功)을 들이밀며 새로이 서열잡이를 시작했지만, 가비드와 누아르는 단 한 번도 다른 마족의 도전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마족으로서의 격이 다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누아르와 아이리스의 영지전도, 아이리스는 필사적이었겠지만 누아르에게는 평화의 지루함을 어루만질 가벼운 유희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 두 괴물이 ‘죽음’을 실감했던 것은.


300년 전의 전장뿐이었다. 위대한…… 아니.


절망의 베르무트.


몰살의 하멜.


재앙의 세냐.


공포의 모론.


지옥의 아니스.


그 인간 같지 않은 5명과의 전투만이, 가비드와 누아르에게 죽음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그 시대에 살았던, 가비드와 누아르와 엇비슷한 격을 가졌던 고위마족들은 모두가 저들에게 죽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는 말 그대로 절망이었다. 월광검. 그 검의 형상을 한 파멸을 꺼낼 것도 없이, 베르무트는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마족을 절망시켰다.


하멜 다이너스. 그는 전투에서 유일하게 베르무트의 곁에 서서 보조를 맞출 수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베르무트 이상으로 마족들을 절망시키는 존재였다. 베르무트의 검이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면, 하멜의 검은 전장에 피와 살을 난무시켰다.


세냐 메르데인. 그녀는 재앙의 화신 그 자체였다. 그녀의 마법은 천재지변을 일으키며 전장을 휩쓸었다. 지금에야 인간의 마법이 굉장히 발전하여 마족과도 견주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300년 전은 그렇지 않았다. 고위마족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마법은 하찮고 나약했다. 하지만 세냐의 마법은, 마족의 이해마저 벗어났다. 당장 지금 시대에 인간의 마법이 마족과 견줄 수 있게 된 것도 세냐가 인간의 마법 체계를 뜯어고쳤기 때문이다.


모론 루하르. 그는 아무리 불리한 전투에서도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언제드보다 언데드 같던 인간…… 전신이 피범벅이 되고 팔다리가 날아가도 항상, 항상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그리고 기어코 전장의 중심을 관통하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잘린 팔을 입에 물고 도끼를 휘두르던 모습에 수많은 마족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곤 했었다.


아니스 슬리우드. 인간들에게는 성녀라 불렸지만, 마족에게 있어서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지옥이었다. 흑마법이 언데들를 일으키듯, 그녀의 기적은 죽어가는 인간을 억지로 일으켰다. 고통과 공포로 전의를 상실했다면 기적으로 그 감정을 말살시키고 억지로 용기를 불어넣어 전진시켰다. 그녀가 펼치는 날개와 쏟아내는 빛은 마력을 정화하고 마족의 혼을 소멸시켰다.


ㅡ가비드와 누아르는 저 끔찍한 인간들과 맞닥트리고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마족들이다.


누아르는 전쟁의 막바지부터 꾸준히 저들의 꿈을 파고들어 정신을 무너트리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오히려 몇 번이나 죽을 뻔했었다.


가비드는 정찰을 나온 하멜과 세냐를 맞닥트려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정작 가비드 본인이 하멜에게 치명적인 검상을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두 분을 언짢게 하고자 이런 말을 꺼내겠습니까.”


에드몬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 위의 혼을 응시했다.


“이것은 유라스 교황청의 신성마법학부에 마법기술자로 초빙되었던 제 휘하 흑마법사의 혼입니다. 두 공작님들도 아시다시피, 신성마법학부는 기적의 재해석과 창조랍시고 고대마법은 물론이고 흑마법까지 건드렸었죠.”


“그랬지. 세상이 참 많이 변하기는 했어. 설마 흑마법사가 교황청에 마법기술자로 초빙되는 세상이 올 줄이야.”


“그만큼 흑마법사의 인권이 높아진 것이죠.”


신성마법학부는 꽤 오래전부터 영혼을 다른 육체로 옮기는 이혼(異魂)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런 분야의 마법은 흑마법에 속한다. 하지만 주교들 자신들은 흑마법에 입문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니, 어쩔 수 없이 외부의 흑마법사를 초빙할 수밖에 없었다.


아롯에도 흑마법사가 많기는 하지만, 그곳의 흑마법사들은 대부분이 흑색마탑 소속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성마법학부의 주교들은 자신들이 흑마법사를 초빙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주교들은 다른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흑마법사를 수소문했고, 헬무드의 수많은 흑마법사들 중 실력과 평이 괜찮은 흑마법사와 비밀유지의 계약을 맺고 신성마법학부에 데리고 왔다.


“제가 잠입시켰나?”


“예. 비밀유지의 계약도 살아 있을 때야 보장되는 것이니.”


사실 그렇지는 않다. 보통은 죽어 영혼으로 거둬져도 생전의 계약에 구애받는다. 하지만 에드몬드급의 흑마법사라면 계약채로 혼을 박살 내고, 생전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다.


“이 녀석을 죽인 것은 혈십자 기사단의 단장인 라파엘로 마르티네스입니다.”


“아하…… 그 꼬마 성기사?”


누아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에드몬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읽어낸 기억에 따르면, 이 녀석뿐만이 아니라 신성마법학부의 금기학부 소속 성직자 대부분이 크루세이더의 검에 목이 날아갔습니다. 그곳에 보관하고 연구 중이던 흑마법도 모조리 말살되었고.”


“그래서?”


“크루세이더는 신성마법학부의 총장인 피에트로의 머리를 던졌습니다. 처형의 죄목은 신성모독. 금기학부의 모든 성직자들이 똑같은 죄목으로 목이 베였지요.”


추기경까지 죽었다는 말에 누아르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가비드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에드몬드를 응시했다.


“공작님들도 아시다시피, 역대 교황과 추기경들은 성흔을 몸에 새기고서 빛의 대행자 흉내를 내왔습니다. 추기경이 ‘신성모독’으로 처형되었음에도 교황청에서는 아무런 발표가 없었지요. 그리고 금기학부의 처형식에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후보가 참관하고 있었습니다. 정황상 피에트로의 처형도 크리스티나 성녀후보가 함께 했겠지요.”


“음…….”


가비드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교황 에우리우스가 처형을 명령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재미난 사실은.”


에드몬드가 빙긋 웃었다.


“그 유진 라이언하트가, 처형이 벌어지기 며칠 전부터 유라스에 입국했다는 겁니다. 그 젊은 사자가 성녀후보와 함께 사마르에 갔던 것은 이미 유명한 일이죠.”


“세냐 메르데인의 탐색.”


누아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탐색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처박혀 있던 성검이 300년 만에 주인을 골랐다……. 아하하! 과연, 정말 재미있네. 그 꼬마가 세냐에게 아카샤를 양도받은 것도 모자라, 성검의 주인이기도 하다는 거잖아?”


“당대에 유라스의 성녀후보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한 명뿐…… 심지어 어제는 아니스 슬리우드의 축일이기도 했었죠. 그런 시기에, 유진 라이언하트가 유라스에 입국한 것. 그리고 피에트로를 시작으로 교황청 내에서 피바람이 분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는데요?”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비드를 돌아보았다.


가비드는 말없이 유리창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누아르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의 희열을 느꼈다. 전쟁이 끝나고서 300년. 유폐의 칼이자 학살마로 불렸던 가비드 린드먼도 굉장히 유해졌다.


하지만.


마족에게 있어서 300년은 절대로 길다고 할 시간은 아니다. 마족의 본성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었고 마왕이 더 이상 전쟁을 바라지 않으니, 평화로운 시대에 걸맞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있을 뿐.


누아르는 오랜 벗이자 전우의 가면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경시할 수 없군.”


뚜둑.


엄지가 검지를 눌러 뼈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유진 라이언하트는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나다던데.”


“정말로 베르무트에 비견되는 재목인지는 모르겠지만…… 후후. 뛰어나기는 하잖아요? 무예는 말할 것도 없지만, 패널티가 있었다고는 해도 8서클의 녹색마탑주와 대결해 승리했으니까.”


“그래서 더욱 경시할 수 없다는 것이지. 성검마저 그 젊은 사자를 인정했다면, 정말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어쩔 건가요? 가비드 공작. 당신이 직접 가서, 이제 막 피어오르는 봉우리를 짓밟을 건가요? 아니면 당신에게 충성하는 검귀들을 보낼 건가요?”


“……굳이?”


가비드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그가 정말로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고…… 제 선조가 그러했듯이 용사다운 일을 해준다면.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겠소?”


“아하하…….”


“물론.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약속과 평화를 위협하는 ‘용사’를 척결하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지. 실제로 그분은 나하마에서 그 젊은 사자와 대륙의 국가들에 약속과 평화를 위협하지 말라 경고하셨고. 그러니 유폐의 마왕님이 평화를 지속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분의 검으로서 기꺼이 젊은 사자의 목을 벨 것이오. 하지만 그분이 침묵하신다면.”


가비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지금 이 회의실의 바벨의 90층에 위치해 있다. 회의실 뿐만 아니라 이 층 전체가 가비드의 집무실이다.


공작인 가비드도 91층부터는 뜻대로 출입이 불가능하다. 91층부터 99층까지는 온전히 유폐의 마왕이 존재하는 공간이며, 오직 유폐의 마왕이 불러냈을 때만 상층에 오르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뜻을 존중할 거요. 누아르 공작. 당신도 그를 바라지 않소?”


“바라다마다.”


누아르가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그 젊은 사자가 나이다운 혈기대로 날뛰기를 바라요. 선조가 다하지 못한 일을 하겠답시고, 성검을 내세우며 전쟁을 일으켰으면 좋겠어요.”


“평화가 깨지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300년 전처럼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거요.”


가비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까딱 기울였다.


“에드몬드.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롯에서 유학 중에 발자크 루드베스와 인연을 맺은 적은 없었나? 그대는 발자크와 절친한 사이이니 따로 들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마법사로서도 천재적인 자질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흑마법사를 병적이다 싶을 만큼 혐오한다더군요.”


“아멜리아에게는?”


“펫을 망가트린, 언젠가 찢어죽일 꼬마라고 하더군요.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가비드는 쥐었던 손을 펴면서 말을 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처우를 결정짓기 전에, 그를 한번 봐둘 필요는 있을 듯싶군.”


“당신이 직접 라이언하트에 찾아갈 생각은 아니겠죠?”


“그러지는 않을 것이오. 듣기를 대륙의 국가들이 단합하여, 내년 루하르의 영토에서 나이트마치라는 축제를 벌인다던데.”


“흐흥…… 그건 아무나 참가할 수 없을 텐데요?”


“인정받는 기사단과 용병단이라면 참가를 막지 않는다 하였소. 물론 그 자격에 해당되는 것은 인간들이 말하는 ‘대륙’의 국가겠지만…… 글쎄. 제국 헬무드의 공작인 내가, 내 기사단을 이끌고서 찾아간다면…… 그들이 나를 쫓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당연히 가비드도 나이트마치가 무엇을 목적으로 기획된 행사인지는 알고 있다. 유폐의 마왕이 유진 라이언하트를 통해 전달한 경고. 오만하고 무례한 인간들은 그 경고를 달게 받고 조심하기는커녕, 각국의 기사단과 용병단을 집결시켜 헬무드의 동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건방지게도.’


가비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용사라…… 후후. 아이리스가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그 멍청한 여자. 제 아비의 원수라고 그토록 원망했던 용사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그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인질극까지 실패한 거잖아요.”


“그녀의 소문은 들었소?”


“당연히 들었죠. 시무인의 영해에서 해적질을 하고 있다던데? 귀 삐죽 나온 검은 해골의 해적기도 매달고, 광란의 해적단이라 자칭하면서 무역선을 털어먹고 있다죠?”


누아르는 자신에게 깔려서 발버둥 치던 아이리스를 떠올리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정말, 죽이지 않기를 잘했다니까? 그 멍청이는 해절질로 자금을 모아서 정말로 자기 세력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름대로 노력은 많이 하시는 모양입니다.”


에드몬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그랬지? 에드몬드. 당신이 사마르의 코칠라 부족과 교류하고 있었죠?”


“그들도 아이리스님의 해적선에 몇 번인가 피해를 입었답니다. 그 과정에서 제물로 운반되던 엘프들까지 빼앗겼다더군요.”


“정말? 아이리스의 해적질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거네? 세계수와 세냐의 탐색은 어때요? 뭐 진전이 있었나요?”


“안타깝게도…… 진전은 없었습니다.”


“하긴. 200년을 탐색했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발견할 리가 없지.”


“탐색에 여러모로 난항을 겪고 있기도 합니다. 조란 부족과 같은 대부족들이 최근 들어서 코칠라를 강하게 견제하는 모양이라.”


“쓸어버리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야. 나하마의 원주민이 얼마나 죽건 대륙의 평화에는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뭐, 아직은 귀찮아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


“흐흥.”


누아르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에드몬드를 응시했다.


“에드몬드. 당신이 무엇을 꾸미는지는 궁금하지만, 캐묻지는 않을게요. 미리 알아버리면 나중에 시작되었을 때 재미가 없을 테니까.”


“숨기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알아, 알아요. 그러니까 더 물어보지 않을 거야.”


누아르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테이블에서 내려왔다.


“그보다 가비드 공작. 이 로열티도 회원을 더 늘릴 필요가 있지 않아요? 용마성의 어린 주인은 올 생각은커녕 올 수도 없는 입장이고. 발자크 루드베스나 아멜리아 머윈은 헬무드에 있지도 않잖아요.”


“따로 추천할 만한 귀족이 있소?”


“용마성 바로 옆인 루올 영지. 그곳의 영주인 카라드 백작. 알고 있어요?”


“실력과 수완이 꽤 괜찮은 젊은 마족이라던데. 종족은 뭐요?”


“거인족의 피가 섞인 자이언트 데몬이에요. 뭐, 덩치조절은 알아서 할 테니 이곳의 천장에 머리를 박는 일은 없겠죠.”


“왜 그 이름을 말하나 했더니…… 카라드 백작이 용마성의 영지 변경을 침범하는 것이 당신의 충동질이었소?”


“설마요? 나름 눈치를 채고서 용마성을 노리는 것이 귀여워서 기억하는 것 뿐이에요.”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가비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니면 야곤은 어때요? 제 아버지인 오보론의 목을 물어뜯고 잡아먹은 패륜아. 품위는 없지만 힘은 확실하잖아요?”


“야곤이라면 회원으로 재고해 볼만도 하군. 예절은 주입해야 하겠지만.”


“가비드 공작님은 눈이 너무 높다니까…… 흐응, 그럼 쟤들은 어때요?”


누아르는 활짝 웃으며 유리창 아래를 가리켰다. 수백 대의 에어피쉬가 떠도는 판데모니엄의 밤하늘. 그보다 조금 낮은 곳에 커다란 홀로그램 화면들이 떠 있다. 그중 누아르가 가리키는 화면에는 깜찍하게 차려입은 서큐버스 아이돌 그룹이 춤을 추고 있었다.


“제벨라 연예 매니지먼트에서 이번에 데뷔시킨 드림걸즈라고 해요. 데뷔 첫 주에 판데모니엄 음반판매 1위를 달성했다구요. 귀엽죠? 쟤들 제가 키운 애들이에요.”


“…….”


“가비드 공작님은 귀여움보다는 섹시함이 좋은가? 쟤들 선배그룹으로 드림로즈라는 그룹도 있어요. 걔들은 무려 판데모니엄이 음반 누적판매 3위의…….”


“그만.”


“서큐버스 말고 인큐버스 쪽이 좋아요? 보이그룹도 있기는 한데…….”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가비드는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붙들고, 홀로그램에서 시선을 때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정면 유리창에는 제벨라페이스가 기계장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음반이나 하나 내볼까 싶네요.”


가비드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암실


시엘 라이언하트는 칙칙한 눈으로 연무장의 구석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며칠 전부터 라이언하트의 손님으로 머무르고 있는 크리스티나 보좌주교가 있었다.


백룡 기사단과의 대항전 이후로 백사자, 흑사자 기사단의 의욕이 높아져, 거의 매일 같이 훈련과 대련을 병행하고 있다. 손속에 너무 사정을 두었다가는 대련의 의미가 덜해지니, 대련은 서로 칼끝이 아슬하게 스칠 정도의 간격을 둔다.


그렇다 보니 훈련이 끝나면 자잘한 부상을 입는 기사들이 여럿 있었다. 피차 실력이 뛰어난 탓에 치명적인 상처까지는 입지 않지만, 칼날이 피부를 얇게 스치는 정도의 경상은 항상 있는 일이었다.


물론 라이언하트는 무가답게 다양한 치료방법을 갖추고 있다. 고위 성직자는 없어도 여러 종류의 포션을 가솔들에게 아낌없이 제공하고, 의술을 학문적으로 익히고 많은 경험을 쌓은 의료진도 갖추고 있다. 위급상황을 대비해 수도에 있는 신전에도 매번 막대한 기부금까지 보내고 있다.


만약 본가에서 신성마법이 필요할 만큼의 사고가 발생한다면, 즉시 수도 신전의 고위 성직자가 본가로 달려올 것이다.


……사실 조금 베인 상처에는 의사나 성직자, 포션도 필요가 없다. 저만한 경지에 오른 기사들은 육체가 강건한 만큼 회복력도 강하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망가진 정도의 상처가 아니라면 하루 이틀이면 말끔하게 낫는다. 기사들 스스로도 제 육체가 강인하다는 것을 알기에, 저 정도의 경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그 기사들이 별것도 아닌 상처를 내세우고서 크리스티나의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시엘도 저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단순한 성직자인 것도 아니잖은가. 신성제국 유라스. 그곳에서도 특별한, 당대에 한 명뿐인 성녀후보.


‘……후보가 한 명뿐이라면 그냥 성녀라고 해도 되는 것 아냐?’


어쨌든. 상대는 평범한 성직자가 아니다. 라이언하트의 기사들 중에서 빛의 신교에서 세례까지 받은 신도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사들이 빛의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빛의 신은 수많은 사람들이 추앙하는 존재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도들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게끔 힘을 내려주는 존재키도 했다.


그러니 한 번쯤은 성녀후보가 일으키는 기적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은 것이다.


“마음에 안 드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시엘이 중얼거렸고,


곁에 있던 메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메르는 아까 애니실라의 방에서 받아 온 막대사탕을 혀로 핥으면서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가?


메르는 크리스티나의 진실을 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시엘은 크리스티나의 진실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미소가 사실은 잘 만들어진 가면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 모든 가식이 불행한 과거에서 비롯된 나름의 처세라는 것도 모른다.


유진이 신성제국에 간 며칠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도 모른다. 빛의 샘에 대해서도 모른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의 안에 300년 전의 영웅인 신실한 아니스의 영혼이 깃들어있다는 것도 모른다.


시엘이 아는 것은.


유진이 편지 한 통을 받은 즉시 유라스로 떠났고.


그곳에서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진이 유라스에 있는 동안 그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축제인 아니스 탄신제가 겹쳐있었으며.


축제의 첫날이 끝난 직후, 유진이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를 데리고 왔다는 것.


이유는? 엘프를 죽이는 불치병인 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시엘도 숲의 엘프들은 좋아했고, 그들 중에서도 마병에 걸려 시한부라는 엘프들은 진심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알카르트 교구의 보좌주교이자 성녀후보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가 엘프들을 치료하기 위해 라이언하트 본가에 머무르기로 한 것은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크리스티나는 저런 식으로 훈련이 끝난 후의 기사들을 치료해주다가, 해가 저물 즈음이면 곧장 숲으로 들어간다. 엘프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런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참 이상하게도.


시엘은 크리스티나가 엘프들과 있는 것보다는, 유진과 함께 있는 것을 더 많이 보았다. 단둘이서 뭔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엘이 훔쳐, 아니, 살펴본바.


유진이 숲 한가운데에서 명상을 하고 있으면.


크리스티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엷게 미소 짓는 얼굴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유진이 명상을 끝내고 직접 몸을 움직여 수행할 때도, 크리스티나는 유진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거리만큼 떨어지고서 미소 짓는 얼굴로 수행을 지켜보았다.


시엘은 얇게 뜬 눈으로 저쪽에 있는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크리스티나는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을 신성마법으로 치료해 주면서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미소와, 숲에서 유진에게 보여주던 미소가 다르다. 유진과 저택 복도에서 마주칠 때와, 대수롭지 않은 안부를 전할 때와, ‘유진 님,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을 때의 미소와, ‘유진 님, 오늘 식사는 함께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권할 때와, ‘유진 님, 안녕히 주무십시오’라고 말할 때와, ‘유진 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아…… 라이언하트의 다른 분들과 가족 식탁에서, 말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다른 식탁에 앉아야겠군요, 다음에는 부디 저와 함께 식사를’이라는 말을 할 때에 짓던 미소와 다르다…….


“시엘 님?”


숲에서의 개인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디자이라가 시엘과 메르를 발견했다. 평소에 별로 사이도 좋아 보이지 않던 둘이 기둥 뒤에 서서 대체 뭘 하는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시엘과 메르의 눈에서 불씨가 튀는 것일까. 디자이라는 순전히 그것이 궁금해서 시엘에게 다가갔다.


“야, 야, 디자이라. 하지 마. 그냥 가……!”


저택의 3층 창가. 그곳에서 몸을 바짝 낮추고 연무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시안이 기겁하며 디자이라를 불렀다. 그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디자이라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디자이라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아니. 듣기는 했지만, 디자이라는 왜 자신이 걸음을 멈춰야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궁금해서 다가가는 것뿐인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시엘 님, 거기서 뭐 하세요? 지금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님을 훔쳐보는 건가요?”


그 직설적인 물음에 시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더 이상 지켜볼 자신이 없어서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쳐버렸다.


“이 돼지 같은 것……!”


시엘의 매도가 시작되었다.


* * *


가주의 집무실.


이 넓은 방에는 4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길레이드 라이언하트.


기온 라이언하트.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


맞은편에 앉은 3명 중, 가장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기온이었다. 그는 휘둥그레 뜬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턱이 뻐근할 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 입을 닫았다.


그 뒤에, 자신이 방금 들었던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잘못 들을 만큼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단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을 뿐이다.


“……하하하!”


그래서 기온은 웃어버렸다. 그는 짧게, 몇 번을 끊어 웃다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초라해지는군.”


기온 라이언하트.


그는 삼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아꼈고, 장남에 걸맞은 성품과 자질을 타고났다.


작은형은 서글서글하고 욕심이 적었다. 큰형과 경쟁할 만큼의 자질은 없었고, 비대한 야욕도 품지 않았다.


막내인 기온은 두 형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졌다. 그는 큰형과 경쟁할 수 있을 만큼의 자질을 타고났으며, 모난 구석 없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면서 작은형처럼 욕심이 적었다.


천재.


길레이드가 그러하듯, 기온도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말은 여러 번 들어왔다. 오만하게 굴었던 적은 없다. 진즉부터 가주를 포기했기에, 기온은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바라던 대로 검을 휘둘렀고,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7살 때 검을 쥐고서 30년을 휘둘렀다.


그러고서야 간신히 백염식의 6성에 도달했다. 그만한 시간을 검에 쏟아부은 것은 길레이드도, 카르멘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부르시기에, 저는 당연히 5번대 대장이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축하할 일이기는 하지만. 기온, 네가 대장이 되는 것은 확실한 일이었지. 놀랄 일도 아니었고 말이야.”


카르멘은 불붙지 않은 시가를 입에 물고서 대답했다. 저 굵은 시가는 카르멘의 입술에 절묘한 각도로 걸쳐져서 아래로 기울지 않았고, 발음이 새지도 않았다. 유진이 보기에는 저것이야말로 놀랄 만한 기예였다.


“하지만 저 녀석이 20살에 백염식의 6성에 올랐다는 것은 놀라기 충분한 일이지.”


“말이 20살이지.”


기온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진. 저 아이는 백염식에 입문한 지 7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은 똑똑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혈계식이 끝나고, 유진이 본가의 양자가 된 후. 기온은 유진을 숲 깊은 곳의 영맥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마나와 감응시키고, 백염식을 인도해 주기 위해서였다.


ㅡ누가 믿을 수 있을까. 13살. 마나를 익히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 아무리 영맥에 마나가 짙다지만, 13살의 유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즉시 마나를 느끼고, 마나를 조작해냈다. 그리고 기온에게 백염식을 전수받자마자 다른 보조 없이 혼자서 백염식을 운용했다.


“저 녀석이 터무니없는 천재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알지 않나?”


카르멘은 코웃음을 치며 물고 있던 시가를 내려놓았다. 그녀와 길레이드는 이미 며칠 전에 유진에게 백염식의 성취를 들었다. 그때 충분히 놀라두었기에, 지금은 놀람 없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잘 알지만, 믿기 힘들군요.”


기온은 놀람을 가다듬고서 헛기침을 뱉었다.


현재 라이언하트에서 백염식의 6성에 오른 사람은 3명뿐이다. 가주 길레이드, 흑사자 기사단 5번대 대장인 기온, 그리고 유진.


그리고 6성을 넘어 7성에 도달한 것은 카르멘 혼자뿐.


백염식 6성의 벽은 높다. 당장 카르멘의 동생이자 원로원주인 클라인의 백염식도 5성에 머물러있다.


“……6성에 올라 맞이하는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겁니까?”


“그래.”


길레이드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ㅡ화륵. 백색 불꽃이 길레이드의 몸을 휘감았다. 그는 백염식을 운용하며 불꽃을 손끝으로 움직였다.


그 모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백염식과는 조금 달랐다. 격렬하게 타오르던 불꽃의 끝이 송곳처럼 뾰족해지고, 이윽고 구부러진 칼날처럼 휘어졌다.


백염식은 6성에 오르면서 커다란 변화를 갖는다. 유진이 짐작했던 것처럼, 여태까지의 수행과 전투로 축적해 낸 경험, 아니, 백염식을 쓰는 ‘나’ 자신이 백염식과 동화된다.


길레이드의 백염식은 불꽃보다는 무수한 칼날을 몸에 두른 것처럼 보인다. 결국은 극한까지 정제해 낸 마나의 불꽃이지만, 길레이드가 바란 순간 저 날카로운 불꽃은 의미 그대로의 ‘칼날’이 되어 백염의 참격을 퍼부을 것이다.


“……이건 온전히 나 자신의 불꽃이지.”


길레이드가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유진은 가주인 길레이드에게 뭔가 거창한 비기나 오의 같은 것을 전수받은 적이 없었다. 시안과 시엘도 마찬가지였다. 카르멘도 항상 시엘을 데리고 다니며 이런저런 훈련을 시키고 수행을 봐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엘에게 뭔가 특별한 기술은 가르치지 않았다.


본가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라이언하트답게’ 가르친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백염식 하나뿐이다. 무기를 쓰는 법, 싸우는 법, 그 외 여러 가지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런 가르침은 꼭 라이언하트가 아니어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당장 유진은 알체스터에게 공검이라는 비기를 전수받았다. 하지만 대륙최고의 무가라는 라이언하트에게는 공검 같은 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거야.”


기온도 한숨을 푹 내쉬며 백염식을 일으켰다.


그의 불꽃은 길레이드와 정반대의 기질을 띄고 있었다. 길레이드의 불꽃이 날카로운 칼날이라면, 기온의 불꽃은 유유히 흐르는 물결처럼 느껴졌다. 기온의 성향과 버릇이 녹아든, 오직 기온에게만 최적화된 불꽃인 것이다.


정말 간단하게 말하자면, 불꽃을 이루는 마나의 성질을 바꾸는 것.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진은 저런 불꽃을 흉내 낼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한 흉내로는 저들의 불꽃이 지닌 가능성마저 모방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라이언하트에는 공검과 같은 특별한 비기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검에는 결국 나 자신이 타고난 본성이 투영되게 마련이지. 백염식은 그 본성을 불꽃에 녹여내고. 6성에 올라 갖게 되는 변화를 미리 알렸다가는, 어려서부터 그를 의식해 버리게 돼.”


“그게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칫하다가는 허상을 좇다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고집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카르멘은 보란 듯이 장갑을 낀 주먹을 뻗었다. 그녀가 일으킨 백염식의 불꽃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불꽃을 구성하는 마나가 빼곡하여 보이는 것 이상의 위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감춘 것이다. 의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무도(武道)를 추구하여 경지에 오르란 뜻이지.”


유진은 3명의 불꽃을 지켜보다가 백염식을 운용했다. 심장의 별이 회전하고, 불꽃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유진이 일으킨 불꽃은 다른 3명보다 훨씬 크고 환했다. 그러면서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 잡아먹히고 타죽을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과연.”


기온은 유진의 불꽃을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화악. 그는 흐르던 불꽃을 꺼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형님이 저까지 불러낸 것인지 알겠습니다.”


“손대중은 불가능해.”


카르멘이 중얼거렸다. 오가는 이야기를 듣던 유진은 불꽃을 꺼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작 저는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요.”


백염식의 6성에 올랐으니 축하파티라도 열겠구나 싶었는데. 어제 처음 이야기를 듣고, 유진의 불꽃을 본 길레이드와 카르멘은ㅡ 마냥 축하하기보다는, 이유 모를 긴장감을 드러냈다.


“……본가의 지하에 대해 알고 있느냐?”


“알고는 있죠. 지하에 식료품 창고가 있잖아요? 본가 시종들의 숙소랑…… 더 아래에는 보물고가 있고.”


“그보다 깊은 곳.”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은 되묻지 않고 잠자코 길레이드를 응시했다.


“……본가의 아득한 지하에는 암실(開室)이라 이름 붙은 방이 있다.”


“암실?”


“숲의 영맥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시조님이 후대를 위해 남긴 유산이다. 본가가 300년 동안 똑같은 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


“간단히 말하자면 이거다.”


카르멘이 길레이드의 말을 끊고 내뱉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예.”


“너는 오늘 하나의 세계를 깨부숴야 한다.”


“예?”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서.”


이 대화를 해야 하나? 유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냥 카르멘 혼자서 멋대로 떠들어댈 뿐 아닌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기온과 길레이드의 표정이 심각하고 진지했다.


“……음…… 제가 거울을 부수거나…… 알을 부숴야 하는 겁니까?”


“……너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지? 지금 상황에서 농담은 그만두도록.”


‘이 씨X…….’


카르멘이 정색하고 핀잔을 주자 유진의 눈썹이 콱 구겨졌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카르멘이 손가락을 들어 유진을 가리켰다.


“너는 암실에 들어가, 너 자신을 돌아보고, 죽이고,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더니…….


유진은 카르멘의 말을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암실


라이언하트 저택의 깊은 지하.


그곳에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는 라이언하트의 정통한 후손들 중에서도 백염식의 6성에 오른 일부에게만 공개되어 있다.


암실(開室).


카르멘은 그 장소를 하나의 세계를 부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죽이고, 새로이 태어나는 장소라고 했다. 유진은 그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길레이드와 기온이 덧붙이는 말을 통해 보다 정확하게 암실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의 환영과 마주하는 곳이란 말입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기온은 턱을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걸 환영…… 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하지?”


“글쎄요.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암실에서 마주하는 환영은, 저보다 앞서 있었으니 말입니다.”


기온과 카르멘, 길레이드의 말은 조금씩 다르기는 했다. 암실에서 무엇을 보느냐는 순전히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모습도…… 달라. 결국은 ‘나’ 자신이 투영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꼭 지금의 나, 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거든.”


“처음에는 미숙하다고 느끼지.”


길레이드가 중얼거렸다.


“처음에만 그럴 뿐. 상대를 이해하고, 검을 맞대어 꺾으려는 수간. 암실이 투영한 미숙한 ‘나’가 바뀐다. 지금의 나와 같게,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낫게.”


“꼭 무인만 그런 것은 아니잖나.”


카르멘은 시가를 손가락에 걸치고서 다리를 꼬았다.


“사람은 아무리 자기객관화를 잘하고 있어도, 누구나 ‘이상적인 나’를 상상한다. 지금의 나보다 조금은 나은.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강한, 내가 당장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나.”


암실은 그런 바람을 투영한다. 나 자신에게 유의미한 변화가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암실이 투영해 낸 ‘나’는, 지금의 나보다 뛰어나다.


“암실은 그러한 환영과 마주 서서 나 자신을 단련하는 곳이다. 그래서 굉장히 가혹한 장소기도 하지.”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카르멘을 돌아보았다.


“……나와 기온은 처음에는 암실의 시련을 극복하지 못했다. 덕분에 카르멘 님과 전대 원로원주에게 큰 폐를 끼쳐 버렸지.”


암실의 환영에게 쓰러져 버리면, 그 환영이 씌어 버린다. 놈에게는 특별한 자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생 환영에게 몸을 빼앗기는 것도 아니다. 전례에 따르면, 환영에 빙의된 시간은 길어야 반나절 정도.


하지만 그 반나절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이미 암실을 극복한 본가의 고수들이 입구에서 대기하는 것이다.


“그때는 꽤 고생했지. 그리고 이번에는 더 고생할 것 같군.”


무슨 말인지 알겠다.


길레이드와 기온, 카르멘은 유진의 실력을 잘 알고 있다. 단순히 백염식의 경지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


카르멘은 아이리스와 싸울 적에 유진이 얼마나 노련하게 싸웠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기온과 길레이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유진을 어려서부터 보아왔고, 유진의 실력이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거기에 백염식이 6성에 올랐으니, 유진이 만약 환영에 몸을 빼앗기기라도 했다가는ㅡ 그를 제압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


“……이상적인 나라.”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뇌까리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암실의 환영은 유진으로서도 골치가 아픈 문제였다.


이상적인 나. 유진은 그것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유진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 환생하고서 힘을 빠르게 쌓아 올리기는 했지만, 마경을 떠돌던 시절의 ‘하멜’을 아직은 따라잡지 못했다.


‘……이길 수 있나?’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


‘이그니션에 공검까지 쓴다면 순간 출력은 비등, 아니, 전생보다 몸뚱이가 잘 따라주니 순간적으로는 압도할 수 있어. 하지만 일검에 끝내지 못한다면 내가 진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무기는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안 돼.”


카르멘이 즉시 대답해 주었다.


“암실에는 맨몸으로 들어간다. 무기를 쥐지 못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환영이 나타난 순간, 네게는 무기가 쥐어져 있을 테니까.”


부족한 부분은 전생에 쓴 적 없던 무기로 충당하려고 했는데, 역시 그런가.


“만약 상상해 낸 자신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강하면 어떡합니까?”


“위대한 시조님은 후손인 우리들이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을 내리셨다.”


카르멘이 대답했다. 그녀는 길레이드와 기온 몰래 유진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도 암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드래곤인 나 자신을 상상했지만, 정말 드래곤인 내 환영과 맞닥트리지는 않았거든. 그때 내가 보았던 환영은…… 그때의 나보다 조금 강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어.”


하긴. 진짜로 상상한 것만큼 강한 환영이 나타난다면, 어지간해서는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유진은 ‘드래곤’이라는 단어에 은근히 힘을 주고서 계속 눈을 찡긋거리는 카르멘을 무시했다.


“그리고 암실에서는 무조건 환영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니란다.”


길레이드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나는 아직 사경을 헤맨 적은 없다만…… 암실에 들어가고, 환영을 만나기까지의 길은 주마등과 닮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주마등…… 말입니까?”


“그래. 나라는 인간이 살아오며 겪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지. 아마 그것도 위대한 시조님의 마법일 것이다. 그렇게 스쳐 보낸 과거에서 환영이 나타나는 것이지.”


위대한 베르무트.


그는 뛰어난 무인이자, 동시에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했다. 놈이 쓰던 마법은 어떤 면에서는 세냐와 대등했고, 세냐 본인도 그 사실을 인정했었다.


“환영을 쓰러트린다면 어떻게 됩니까?”


“……백염식이 변화하지.”


기온이 중얼거렸다.


“지금의 네 백염식도 불완전하지는 않을 테지만, 암실에서 환영을 쓰러트리면…… 네가 괄목할 만한 변화를 체감할 수 있을 거야.”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암실을 극복해 낸 3명도 정확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6성의 백염식은 이전의 백염식과는 다른, 온전히 나 자신에게 맞춰진 불꽃을 만든다. 그 불꽃이 다시금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는 암실을 극복하기 전에는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알겠습니다.”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저는 따로 준비할 것이 없는데. 지금 바로 가도 되지 않습니까?”


“……젊음이 좋기는 좋아.”


기온이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만약 네가 패배한다면 반드시 막아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패배해도 이길 때까지 다시 도전할 수도 있지. 도중에 패배에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면 말이야.”


카르멘은 기온을 힐긋 보며 말했다. 그 말에 기온은 헛기침을 하면서 민망하단 표정을 지었다.


“각오했던 것보다 무력하게 패배해버렸으니 실망할 법도 하지 않습니까.”


“승리에 익숙하고 패배를 모를수록 마음은 쉽게 꺾이지. ……혈사자 유진. 그래서 나는 네가 조금 걱정된다. 너야말로 어려서부터 패배를 모르는 천재였으니까.”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저는 패배보다 카르멘 님이 저를 혈사자라고 부르시는 거에 더, 더 마음이 긁힙니다.”


“어째서 그렇지? 오히려 의욕이 샘솟지 않나? 나는 네 나이 때 혈사자 같은 멋진 별명을 갖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혈사자보다 멋진, 은사자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지만.”


카르멘은 진심으로 그 별명이 자랑스러운 것인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그런 카르멘을 무시하고, 몸에 두르고 있던 흑암의 망토를 벗었다. 메르나 크리스티나에게 말이라도 하고 가는 편이 나을까 싶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암실을 극복하는 것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유진은 자기 자신을 결코 과신하지는 않았다.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무조건 한 번에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것은 좋네.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극복한 뒤에 백염식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만. 그것을 떠나서 유진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이겨낸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암실에서 맞닥트리는 환영은 지금의 나보다 강하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존재는 아니다. 카르멘은 드래곤이 된 자신을 상상했지만,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그런 환영이 아니었다. 유진은 그 환영을 어떠한 가능성의 실현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말하자면 미래의 나, 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이상이 체화된 형태. 허상일지라도 그런 존재를 만나고, 검을 마주 댈 수 있다는 것은 유진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어쩌면…….’


왜 베르무트가 후손을 위해 이런 귀찮은 것을 만들어둔 것일까. 먼 미래의 후손들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괜한 생각은 그만두었다.


길레이드와 기온, 카르멘이 앞장서서 지하의 보물고로 향했다.


유진은 벗은 망토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성검을 뽑은 후로 보물고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보물고 문의 사자 문고리가 길레이드의 피를 받아마시고, 문이 열렸다.


베르무트가 사용하던 무기들은 이제 이곳에는 남아 있지 않다. 성검과 폭풍검, 포식검, 뇌광궁, 용격창은 유진이 갖고 있고, 게돈의 방패는 시안이, 비환검은 시엘이 소유하고 있다.


보물고의 깊은 곳.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커다란 캔버스가 고풍스러운 액자에 들어 있다. 그 캔버스는 사람 한 명만큼이나 컸다. 길레이드의 걸음은 그 앞에서 멈추었다.


“예를 갖추거라.”


길레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가주의 인장을 꺼냈다. 유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르멘과 기온은 한쪽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단 유진도 그들을 따라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길레이드도 무릎을 꿇었다. 그는 손에 든 인장을 양손으로 공손히 받치고서 캔버스에 가까이 가져갔다.


새하얀 캔버스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섬세한 선들이 그어지고, 색이 칠해졌다.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그 모습은 유진에게 굉장히 낯이 익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돌의 저택, 그리고 본가에도 여러 개 존재하는 베르무트의 초상화.


그 원전. 300년 전에 처음 그려진 베르무트의 초상화다. 그림의 색이 바래지 않도록 마법이 걸려 있기는 하지만, 원전에는 똑같이 모방해 그려낸 다른 초상화들과는 다른 기품이 깃들어 있다.


유진은 멍한 눈으로 그 초상화를 응시했다. 어렸을 때부터 몇 번이나 보았던 저 초상화다. 유진이 기억하는 전생의 베르무트와 똑같은, 표정에 감정이 엷은 얼굴. 하지만 유진은 원전이라는 것만으로 초상화에서 전생의 베르무트를 강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암실의 문은 이 초상화와 이어져 있단다.”


길레이드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인장을 초상화에 가져다 대었다. ㅡ화악! 그러자 베르무트의 초상화가 사라지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그림’이 나타났다. 그것을 확인한 뒤, 길레이드는 먼저 몸을 일으켜서 캔버스를 향해 발을 뻗었다.


캔버스에 담겨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림이 아니었다. 길레이드는 캔버스의 계단 그림의 아래로 걸어 내려갔고, 카르멘과 기온도 그 뒤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유진은 뒤늦게 몸을 일으켜서 캔버스의 안으로 들어갔다.


‘……터무니없군.’


괴물 새끼.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벗었던 망토에 손을 넣어 아카샤를 쥐었다. 하지만 이 ‘공간마법’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게 정말 마법이기는 한가? 공간을 격리해 만든 이계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만…….


‘……이게 마법이기는 한가?’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대부분의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지만, 이 어둠은 보이지가 않는다. 아카샤를 손에 쥐고 있는데도 이 공간ㅡ 아니, 이계를 구성하고 있는 마법이 보이지가 않았다.


유진은 아크리온에 있는 공간의 전당의 마도서 대부분을 독파했다. 그곳에 이름을 올린 마법사들은 과거에 공간마법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겠지만, 이 공간은 그 마법서에 적힌 어떤 마법들과도 이어지지 않았다. 격이 다르다? 아니면 이질의 극치일 뿐인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지만, 유진은 이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 어떤 대마법사도 이곳을 마법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진도 마법사다. 아직 대마법사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유진은 자신의 주관대로 감히 이 이계를 정의했다.


이건 마법이 아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구나.”


긴 계단이 끝나고, 밑바닥에 도착했다. 짙은 어둠의 저편에 은은한 빛을 발하는 문이 보였다. 길레이드는 그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문을 열고, 길을 따라 걷도록 해라. 걷다 보면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진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굳이 앉을 필요는 없어. 그곳을 지나가는 순간, 이미 암실이 네게 ‘보여줄’ 테니까.”


기온은 그렇게 말하며 유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패배해도 괜찮아. 오히려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는 것이 이상하니까. 나도…… 솔직히 카르멘 님과 똑같은 생각이야. 너는 패배가 익숙하지 않을…….”


“아뇨.”


유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들고 있던 망토를 아래에 내려놓고서 말했다.


“저는 엄청 많이 패배했었어요. 그래서 패배도 익숙해요.”


“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닌, ‘하멜 다이너스’는 셀 수 없이 많은 패배를 겪었다. 그 패배의 대부분은 베르무트에 의한 것이었다. 패배에 마음이 꺾이는 것? 말해 무엇 하나. 패배한 만큼 꺾였고, 다시 일으켜 세웠을 뿐이다.


그래서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둠을 가로질러 도달한 문은ㅡ 직접 손을 뻗을 것도 없이 스스로 열려 유진을 환영해 주었다.


발을 뻗으니.


세상이 바뀌었다. 문에 들어오기 전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는데, 이곳은 오히려 환하다. 아니, 하얗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백색의 공간. 이 공간은 흑사자성에 있던 베르무트의 영묘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영묘처럼 신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암실이라더니.”


문밖은 암실이라 불릴 만큼이나 어두웠는데, 이곳은 어둡기는커녕 하얗다. 그래서 더욱 위화감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코어의 마나가 유진의 의식과는 다르게 요동친다. 유진은 마나를 진정시키면서 암실을 걸었다.


길레이드가 일러주었던 마법진이 보였다. 기괴한 문양이 바닥에 빼곡하게 새겨진 마법진. 유진은 그곳에 들어가기 전, 잠시 동안 마법진의 문자를 바라보았다.


고대어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해석할 수가 없었다. 읽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너는 이런 마법은 어디서 배워 처먹은 거야?”


유진은 읽는 것을 포기하고서 마법진의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마법진 안으로 들어왔는데, 마법은 펼쳐지지 않았다.


“……뭐야?”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계속해서 걸었다. 멈추지 않는 걸음이 마법진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순간.


가벼운 현기증이 유진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허.”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앞을 보았다.


잘 알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팔다리에 제 몸무게보다 더 나갈 모래주머니를 달고, 무거운 갑옷까지 입고서 커다란 창을 휘둘렀다. 과거의 유진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유진 라이언하트’의 과거가 연이어 나타났다.


위니드를 쥐었다.


몸에 처음으로 마나의 불꽃을 일으켰다.


아롯에서 마법을 공부했다.


사막의 무덤에서, 월광검의 빛을 일으켰다.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서 성검을 뽑았다…….


유진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만큼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청년의, ‘지금의’ 모습이 흩어져 사라졌다.


새로이 나타난 것은ㅡ 전생의 마지막. 하멜의 죽음. 유진은 무덤덤한 얼굴로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죽어가는 ‘하멜’을 쳐다보았다.


마지막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하멜의 삶은 유진보다 길다. 유진은 처음이 있되 아직 끝을 겪지 않았지만, 하멜은 처음과 끝 모두를 겪었다. 죽던 순간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많은 것을 보았다.


결코 돌아갈 수 없어 그리운 전생을.


많은 것을 보았다. 하멜의 전성기. 전성기 전의 미숙하던 시절.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기 전의 용병시절. 그보다 전. 훨씬 더 미숙하고 나약했던.


작은 마을에서 살던 소년이, 모든 것을 잃고 마왕에 대한 증오를 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시대에 넘치던 전쟁고아들이 그랬듯이 숨죽여 살고 싶지 않았다.


거창한 정의감 따위는 없었다. 너희가 나를 X같게 만들었으니, 나도 너희를 X같게 만들어주리라. 오직 그 생각으로 소년은 이빨 빠진 검을 쥐고 용병이 되었다.


그 소년마저 사라진다.


‘……지금부터인가.’


마음속에서 생각하던 이상적인 나.


지금의 나보다 강한 내가, 환영이 되어 나타난다.


유진은 미리 들었던 대로 각오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아직 손에 검은 쥐어져 있지 않다. 환영도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곧 나타날…….


“……뭐야?”


암실 전체가 일그러졌다. 유진은 그렇게 느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백색공간에 다른 무언가가 섞여 들어온다.


피 냄새가 났다.


수백 수천, 아니ㅡ 그보다 훨씬 많은. 시체가 흔한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전장. 그 전장을 비틀거리며 걷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이미 먼 곳을 걷고 있었기에, 유진이 볼 수 있는 것은 절망감에 짓눌려 처진 어깨뿐이었다.


치직.


다시금 바뀐다. 피 냄새는 바뀌지 않았다. 하나 남자는 아까처럼 전장을 비틀비틀 걷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는 수북하게 쌓인 시체의 산 정상에서, 피와 살이 엉겨 붙은 대검을 어깨에 걸치고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유진은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등 돌려 앉은 남자는 어딘지 모를 머나먼 전장을 보고 있었다.


‘……누구지?’


유진은 놀란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시체의 산 위에 앉은 남자와, 그 전에 전장을 비틀거리며 걷던 남자.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동일인인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간다면 얼굴을 볼 수 있겠지.


목걸이가 뜨겁다.


화아아악! 거대한 바람이 그 모든 것을 휩쓸었다. 유진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를 억누르고서 부릅뜬 눈으로 앞을 보았다. 시체 가득한 전장도, 남자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무기가 나타났다. 유진이 전생부터 다뤄온 무기들이 바닥에 꽂혀 있다. 어느새 유진의 손에도 흔하고 길쭉한 검이 한 자루 쥐어져 있었다.


“……뭐야?”


나타난 것은 무기뿐만이 아니었다.


전생의 하멜처럼 얼굴과 몸에 흉터가 가득한.


지금의 유진보다 거친 모습의 ‘유진 라이언하트’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암실


시체 가득한 전장과 남자에 대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사라졌고, 다른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뒤섞였다.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저것은, 300년 전의 하멜이면서도 현대의 유진이었다.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놈을 노려보았다. 과연, 저것은 도저히 환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바짝 날이 선 감각이 놈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낮은 호흡.


서로가 똑같이 호흡하고 있다. 흥분과 긴장에 잡아먹히지 않고, 마치 몇 걸음 떨어져서 상황 전체를 관조하는 것처럼. 피차 검을 쥐고 있기는 하지만 손가락은 느슨하다. 몸 전체가 그렇다. 그냥 서 있을 뿐.


놈에게 자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ㅡ 놈이 정말로 ‘나’를 투영한 것이라면, 유진과 마찬가지로 상대를 살피는 것이리라.


‘……유진 라이언하트에 하멜이 녹아 있나.’


그렇게 보였다.


짧게 자르기는 했다만, 머리카락의 색은 라이언하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잿빛. 그리고 맹수처럼 예리한 금색 눈동자. 체격은…… 저쪽이 조금 더 큰가.


‘설마 이 몸이 더 성장할 것 같지는…… 아니, 아니지. 저건 내 미래가 아니야. 내가 상상하는 이상을 투영한 것뿐.’


이 몸에 불만은 없다. 전생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좋은 몸이다. 하지만 유진으로 살았던 삶보다 하멜로 살았던 삶이 더 길고 격정적이었던 만큼, 유진은 전생의 몸을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유진 라이언하트는 아직 하멜 다이너스를 초월하지 못했다. 여러 조건이 갖춰진다면 순간적인 출력으로 압도할 수 있기는 해도, 전체적인 밸런스로 생각한다면 아직은 하멜이 앞서 있다.


하멜의 키는 유진보다 조금 더 컸다. 간격의 차이가 벌어질 정도는 아니다만…… 유진은 환영의 생김새와, 얼굴에 그어진 흉터를 보며 그리움과 비웃음을 느꼈다.


“그 지저분한 흉터들이 내 이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말이야.”


대화는 가능한가? 그런 의문이 들었는데, 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뭘. 대답을 기대하고 내뱉은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 흉터들은 내 미숙함의 증명이지.”


뚜둑.


손가락이 칼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그렇게 조금 힘을 준 것만으로 유진을 휘감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땅에 꽂힌 무기들을 본다. 모두가 눈에 익었다. 베르무트의 무기들처럼 특별한 능력은 없는, 평범한 무기들. ……가슴은 설렘으로 두근두근 뛰고 있다.


ㅡ파직.


순식간에 운용된 환염식이 번개불꽃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가속한 몸이 공간을 뛰어넘었다. 너무 빠른 움직임은 마치 마법의 블링크처럼 보일 정도였다. 유진은 순식간에 환영과의 거리를 좁히며, 허리춤에 두었던 검을 휘둘렀다.


충돌은 없었다. 얕게 스치지도 않았다. 환영은, 유진 스스로도 감탄을 내뱉을 만큼 깔끔하고 완벽하게 검을 피해냈다. 마치 이쪽이 일부러 검을 빗겨 휘두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환영의 몸이 흔들린다. 대치할 때만 해도 강렬하던 존재감이, 막상 가까이 다가오니 엷다. 그 말은 즉 읽어내기 힘들다는 것. 유진은 섬뜩함을 느끼며 몸을 뒤로 당겼다. 하나 환영의 검은 유진의 회피보다 아주 조금 빨랐다.


직접 베이지는 않았다. 직전에 일으킨 오러실드가 참격을 막았다. 끝이 아니다. 몸뚱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왼팔. 어깨가 들썩거리며 팔이 움직인다. 어느새 환영의 왼손에는 또 다른 검이 쥐어져 있었다.


“허.”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냈다.


공간이 베이고, 베이고 베였다. 환영은 기합 소리 따위는 내지 않았다. 양손에 쥔 검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그렇게 보였다. 간격의 조절,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너무 빠른 공격에 유진의 사고가 잘게 끊어졌다. 참격을 방어하고 흘려내던 유진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유진은 전생부터 대부분의 무기를 쓸 줄 알았다. 아니, 굉장히 잘 다뤘다. 검? 그건 유진이 수많은 무기들 중에서도 특히나 ‘잘’ 다룬다고 자신 있어 하는 무기였다.


하지만.


검 한 자루를 다루는 것과 검 두 자루를 한 번에 다루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유진도 전생부터 쌍검은 곧잘 다뤘고, 흑사자 성의 난동 때에는 헥토르 라이언하트를 쌍검술로 압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유진의 너무 높은 기준에서 ‘쌍검’은 스스로가 정한 기준 미달이었다. 검 하나를 다루는 것보다 잘 다룬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전생에도 쌍검은 잘 쓰지 않았고, 그건 환생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잖아.’


검 한 자루로 도저히 틈을 뚫을 수 없을 정도였다. 똑같이 쌍검을 쓰면? 역량의 차이를 뒤집지 못하고 도륙이 나겠지. ㅡ쩌적! 검강으로 덮고 있기는 하지만, 거듭된 충돌에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진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섰고, 환영이 크게 전진하며 쌍검을 휘둘렀다.


참격이 교차하고,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그 사이에 밀어 넣었다. 금 간 검신을 휘감은 검강을 폭발시키지 않고 오히려 응축시켰다.


ㅡ꽈아앙! 되삼킨 검강이 검을 박살냈다. 수백 조각으로 나뉜 파편이 환영에게 폭사되었다. 유진은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칼자루를 놓고 뒤로 펄쩍 뛰었다.


위치는 미리 봐두었다. 금속의 채찍. 쥐는 순간 불어넣은 마나에 채찍이 춤을 추었다. 백염식의 마나가 깃들자 채찍은 길게 늘어진 불꽃이 되었다.


폭발로 일어났던 흙먼지가 소리 없이 나부꼈다. 그곳을 꿰뚫던 채찍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창이다.


환영은 어느새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는데, 조용힌 내지른 창이 채찍을 실타래처럼 감아버렸다. 불어넣은 마나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유진이 마나를 자유로이 다루듯, 환영 또한 마나를 자유롭게 다루고 있었다.


힘겨루기.


ㅡ쿠우우웅! 서로가 일으킨 마나가 중간에서 충돌하고, 지면이 주저앉았다. 유진은 손의 저릿함을 느끼며 채찍을 홱 하고 당겼다. 단순한 힘겨루기라면, 아마 놈이 이길 것이다. 그건 유진도 알았다. 줄다리기를 하면서 틈을 볼 생각이었는데…….


환영은 마주 당기기는커녕, 유진이 살짝 힘을 준 순간에 호응하여 땅을 박찼다. 찰나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유진은 즉시 채찍을 놓고 뒤로 뛰었지만, 그것보다 창이 땅을 찌르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폭발.


유진의 몸이 도약한 것보다 높게 날아올랐다. 데미지는 없었다. 폭발에 저항하지 않고 함께 밀려났다.


유진은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땅에 커다란 구멍이 만들어졌다. 환영은 창을 손에 놓고서,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칙칙한 금색 눈동자.


얼굴은 전혀 달랐지만, 저 눈동자의 색과 공허함은 베르무트를 연상시켰다.


그걸 인지한 순간. 유진은 등골이 오싹하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섬뜩하고 파괴적인 살의를 느꼈다. 백염식 6성. 6개의 별이 회전했다. 유진이 일으킨 불꽃이 암실의 하늘에 번져갔다.


환영은 요격을 위해 뛰어오르지는 않았다. 지면을 휩쓸었던 폭발, 잔류해 있던 마나가 일제히 환영에게 되돌아갔다. 그렇게 거대하게 넘실거리는 불꽃이 만들어졌다.


유진은 자신이 휘감은 불꽃과, 저 아래에 넘실거리는 불꽃을 견주어 보았다. 그리고 어떠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가.’


검증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유진은 과감하게 확신했고, 그에 일말의 망설임을 갖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유진은 불꽃을 휘감은 채로 곧장 아래로 추락했다.


불꽃이 서로 얽혔다. 아무런 제한 없이 풀어낸 마나가 공간을 침식했다. 이 마법 같지 않은 권능으로 만들어진 ‘암실’은, 내부에서 이만큼 거대한 힘이 만들어지고 충돌하는 것마저 버텨낸다.


ㅡ꽈아앙!


무기는 휘두르지 않았다. 평범하고 단순한 발차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 일격에 터무니없을 만큼 고출력의 마나가 더해지니, 단순한 발차기라도 공간 단위를 으깨 버린다.


유진은 그렇게 뒤로 날아갔다. 방어가 무색할 만큼 공격이 무겁게 처박혔다. 팔은 으스러졌나? 아가로트의 반지라도 끼고 왔다면 자가회복을 시도해 볼 텐데, 지금 유진의 손에는 아가로트의 반지도 없었다.


‘왼팔…….’


으스러지긴 했어도 쓰려 한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유진은 흐느적거리는 팔을 마나로 붙들고서 땅에 떨어졌다. 그렇게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데, 환영은 이미 가까이에 와있었다.


맨손으로 하는 싸움도 자신 있다. 하지만, 환영과의 격투에서 유진은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주먹을 뻗고, 다리를 휘두르고, 붙잡아 넘어트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지만, 모두가 시도단계에서 막히고 흘려졌다.


‘슬슬 알겠네.’


그 과정에서 4번의 반격을 당했다. 덕분에 유진은 다리 하나를 절었고,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 안쪽에서 피가 올라왔으며, 으스러졌던 왼팔은 아예 팔뚝부터 끊어져 버렸다.


‘나한테 맞추고 있어.’


왜 거울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유진은 일부러 맨손으로 싸웠다만, 환영이 맨손으로 싸울 이유는 없다. 하지만 환영은 유진과 마찬가지로 맨손으로 싸워주었다. 처음에도 그랬다. 유진이 손에 쥔 검으로 덤볐을 때, 환영도 똑같이 무기로 받아주었다.


‘차이는…… 조금 더, 정도.’


놈은 지금의 유진보다 조금 더 빠르다. 조금 더 강하다. 마나도 마찬가지다. 놈의 불꽃은 유진보다 조금 더 강해서, 평범하게 싸워서는 도저히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변칙을 섞어 틈을 노려야 하나? 아니. 그것도 잘되지 않는다. 이미 몇 번이나 시도했다만, 그럴 때마다 희롱당했다.


‘그 조금 더, 를 넘기 위해서는.’


암실.


유진은 이 공간을 보다 확실하게 이해했다. 팔을 뜯어낸 것도 그러한 확신이 있어서였다.


마법으로는 승부가 되나? 아니, 안 된다. 유진은 빠르게 인정했다. 저 환영이 정말로 유진보다 ‘조금 더’ 강한 것을 유지한다면 마법도 마찬가지. 그리고 마법에서의 ‘격’은 뒤집기가 힘들다. 마법 자체의 격이 올라버린다면, 유진이 아무리 마법을 잘 써먹어도 승리는 요원하다.


방향성을 정해야 했다. 무기를 다루는 기술? 그 극한을 넘어서는 것에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아니, 기술에서 보다 앞설 필요는 없다. 저 환영은 결국 그런 존재니까, 기술이 보다 완전해지는 것보다 확실하게ㅡ 놈을 쓰러트리기 위한 방법은.


‘지금의 내게 없는 것을 만드는 것.’


무턱대고 나를 넘어서는 것보다, 나에게 무언가를 더하는 것. 이 암실은 그를 목적으로 한 공간이다. 나보다 조금 더 강한 상대. 심지어 그 상대가 나를 투영해 낸 것이라면, 내가 모르는 것을 새로이 더하는 것이 정답이다.


“말이 쉽지.”


유진은 너덜거리는 왼팔을 힐긋 보았다. ……아프다. 이만큼이나 당한 것도 오랜만이다. 하지만 오랜만일지라도 아픔은 익숙했고, 더 아픈 것이 싫어 몸이 굳지도 않았다.


너덜거리는 팔이 방해였다. 유진은 더는 쓸 수 없게 된 왼팔을 제 손으로 뜯어버렸다. 머리가 하얘질 만큼의 고통이 느껴졌지만, 입술을 씹는 것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불꽃을 일으켜, 피를 쏟아내는 상처를 통째로 지워버렸다.


‘필살기라도 만들라는 거냐?’


유진은 입에 고인 피를 퉤 뱉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만.


하멜식을 떠올려 봤다. 내뱉기는 민망하지만, 유진에게 있어서 ‘필살기’에 가까운 것은 역시 하멜식이었다.


‘패링과 라이트닝카운터, 파멸신기는 싸울 때마다 썼고…….’


만뢰와 수라광살, 드래곤버스트, 사이클론도 자주 사용하기는 했지만. 하멜식에서 특히나 강력하고, 유진 스스로도 필살기다운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하멜식 오의, 이그니션.


하멜식 제 7형, 데드엔드.


하멜식 제 9형, 무한연옥.


‘뇌광은 항상 쓰고 있으니 필살기는 아니고…… 지금 와서 추가할 건 공검 정도인가.’


일단 써볼까. 유진은 지금 자신이 흑암의 망토를 걸치지 않고, 나중에 실컷 비웃어댈 메르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다. 빈틈투성이인데, 환영은 덤벼들지 않았다.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빨라졌다.


이그니션이 발동되었다. 얕게 잦아들었던 불꽃이 크게 넘실거렸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발로 차올렸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잡고서, 몸을 낮춰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환영도 검을 쥐었다. 이그니션을 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만, 저것이 의미 그대로의 환영이라면 이그니션까지 따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진은 의식을 집중해서 검강을 응축하고, 코팅을 시작했다.


1중첩.


2중첩.


그리고 3중첩.


지금 유진의 한계는 여기까지다. 흑점이 번져 간 불꽃이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간다. 3중첩의 공검은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그렇기에 유진은 더 이상 유지하려 애쓰지 않고, 걸음을 내디디며 동시에 공검을 휘둘렀다.


검푸른 불꽃이 세상을 가로 그었다. 그 중심에는 유진의 환영이 서 있었다. 놈은 공검의 참격에 휩쓸리기 전에 검을 들었다. 그 움직임은 아주 단순하게 보였다. 실제로 어렵고 난해하지도 않았다.


유진이 공검을 썼듯이, 환영도 공검을 썼다.


검을 높이 들어서.


아래로 내리 베었다.


공검의 참격이 사라진다. 허탈하고 경악스러운 광경이지만, 유진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저 모든 것이 유진에게 암실과 환영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카르멘이나 길레이드, 기온이 왜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는지도 알았다. 미리 알아버리면 그 자체로 마음이 느슨해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서야 시험의 의미가 덜해질 수도 있는 일이니.


‘나는 그렇지도 않은데.’


3중첩의 공검을 휘두른 것만으로도 몸에 부담을 준다. 유진은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환영이 호응하듯 유진에게 몸을 날려 왔다.


바짝 낮춘 검이 지면을 훑듯이 지나간다. 솟구쳐 오르는 과정에 응축된 검강이 참격과 함께 터졌다. 드래곤버스트. 별 재미는 보지 못했다. 검강을 터트리기 전에, 환영이 검을 내리찍어 폭발을 억눌렀다.


유진은 즉시 대응했다. 검이 함께 눌리지 않도록 옆으로 뽑아냈다. 어깨와 팔이 삐걱거리는 수준을 넘어 부서지는 것만 같았지만, 유진의 머릿속에 그렸던 검로가 즉시 현실에서 펼쳐졌다.


수라광살.


참격의 선이 공간을 난도질했다. 환영은? 몇 걸음 뒤로, 난무에 휘말리지 않고 바깥에서부터 참격을 깎는다. 카가가각! 검과 검이 긁히고 검강이 부서졌다. 불씨가 흩날렸다. 그 너머에서 유진의 눈이 번쩍거렸다.


데드엔드.


수라광살이 만들어낸 참격의 선. 그 모두가 얇게 풀어낸 검강이다.


유진이 검을 당기자, 풀어낸 검강의 선이 일제히 움직여 환영을 포박했다. 본래라면 닿는 것만으로도 오러실드와 몸을 고기토막처럼 썰어야 하는데, 환영이 휘감은 오러실드ㅡ 아니, ‘파멸신기’는 유진의 데드엔드를 역으로 잡아먹고 있었다.


그럴지라도.


유진은 연계하는 기술에 망설임을 갖지 않았다. 전생부터 즐겨 쓰던 패턴이다. 수라광살로 몰아붙이고, 데드엔드로 가두고, 그 마지막에는.


걸음과 함께 검을 뒤로 물린다.


다시 한 걸음 내디디며, 검을 찌른다.


단순히 찌르는 것이 아니다. 검의 끝에는 극한까지 응축된 검강이 자그마한 구슬이 되어 맺혀 있다. 찌르는 순간, 응축된 검강이 부풀어 오르고ㅡ 도달점에서 폭발한다.


무한연옥. 이것은 검강을 극한까지 조율하여 만들어내는, 참격의 폭탄이다. 허공을 휘감는 참격이 일점에 모이고, 다시 터지고, 모인다. 흑사자 성에서 제노스에게 보여줬을 때에는 여러모로 눈에 차지 않았지만, 백염식 6성에 이그니션까지 쓴 상태에서 사용한 무한연옥은ㅡ 포착한 공간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그래야 할 텐데.


“하.”


유진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검을 뒤로 물렸다.


환영이 무한연옥을 어떻게 파훼하는지를 보았다. 하멜식의 패링과 라이트닝카운터. 놈은 제한된 공간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참격을 모조리 걷어냈다. 하지만 멀쩡하지는 않았다. 그야, 저만한 참격은 지금의 유진보다 ‘조금 더’ 강하고 빠른 정도로는 완벽하게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됐을지라도, 환영이 유진보다 상황이 훨씬 나았다. 유진은 더 이상 손가락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왼팔은 뜯어냈고, 다리도 절고 있다.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던 폐의 통증은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이제는 숨이 잘 쉬어지지도 않았다.


“좋아.”


유진은 미련 없이 검을 놓았다. 피투성이의 환영이 성큼성큼 유진에게 다가왔다.


“다음에 또 오지.”


환영이 휘두른 검이 유진의 목을 베었다.


암실


“아무리 녀석이 대단하다고 해도, 첫 대면에서 이기고 돌아오지는 않겠지.”


퐁, 퐁. 카르멘은 라이터의 뚜껑을 열고 닫으며 중얼거렸다. 길레이드와 기온은 저 라이터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카르멘에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외모는 카르멘이 가장 어려 보인다고 해도, 길레이드와 기온 형제에게 있어서 카르멘은 고모였다.


“라이언하트 역사에서 암실을 한 번에 돌파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애당초 라이언하트 역사에서 백염식 6성에 오른 사람이 흔하지 않지.”


카르멘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어깨를 으쓱거렸다.


“7성에 오른 사람은 더더욱 흔치 않고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세대는 큰 축복을 받았어. 시조님의 은혜가 내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테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길레이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로 이번 세대는 축복의 세대였다. 백염식 7성에 올랐던 전대 원로원주가 죽기는 했지만 카르멘은 살아 있다. 그리고 6성에 오른 길레이드와 기온도 아직 한창나이의 현역이기에, 언젠가 7성의 벽을 넘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사실 다른 무엇보다, 아직 20살인 유진이 백염식 6성에 올랐다는 것이 가문의 기적이라 할 만했다. 또 시안과 시엘도 백염식의 4성에 도달하였으니, 현재 라이언하트 본가의 전력은 가문의 역사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맹했다.


“……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카르멘이었다. 그녀는 라이터의 뚜껑을 여닫는 것을 그만두고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길레이드와 기온도 느꼈다. 둘은 표정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앞을 보았다.


암실로 통하는 문은 굳게 닫혀 있다. 하지만 셋은 저 닫힌 문 너머에서 다가오는 존재감을 느꼈다. 기온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검을 두고 온 것이 옳은 판단이었을까…….”


길레이드는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카르멘이야 검을 쓰지 않지만, 길레이드와 기온은 검을 쓴다. 그들 정도의 고수라면 검이 손에 없어도 전투에 문제는 없다만, 상황이 상황이고 상대가 상대이니 ‘검’의 부재가 아쉬웠다.


“잘못 휘둘러 팔다리라도 자르거나 죽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어렵다. 특히 지금 같은 경우는 가급적으로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그래서 카르멘과 길레이드, 기온이 함께 있는 것이다.


“녀석 걱정보다는 우리 걱정부터 하는 것이 나을 거다.”


카르멘은 물고 있던 시가를 퉤 뱉었다. 그녀는 유진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를 알고 있다. 이쪽은 유진이 다치지 않게끔 손속에 사정을 두어야 하지만, ‘저쪽’은 손속에 사정 따위는 두지 않고 미쳐 날뛸 것이다.


“……반나절을 버티는 것이 나을지, 빠르게 제압하는 것이 나을지…….”


“어느 쪽이든 해봐야 알겠지.”


카르멘이 장갑을 당겼다. 길레이드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뒤로 묶었다. 기온은 소매의 단추를 풀었다.


암실의 문이 열렸다.


걸어 나온 것은 유진이되 유진이 아니었다. 탁한 눈동자에 자아는 없다. 유진의 의식이 사망하여 끊어진 순간, 환영이 유진의 정신에 똬리를 튼 것이다. 기존의 환영은 암실에 들어온 사자를 시험할 뿐이지만, 저렇게 되어버린 환영은 더 이상 무언가를 시험하려 들지 않고 파괴본능대로 날뛰어 버린다.


“……과연.”


유진이 암실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발밑에서 솟구친 거대한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그 크기와 격렬함에 카르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는 혀를 차면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빠르게 제압하는 것은 힘들겠어.”


* * *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걸까.


유진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제 손으로 끊어냈던 왼팔. 지금은 멀쩡하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몸이 아주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뼈마디와 근육의 욱신거림을 느끼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려 보았다.


‘이그니션의 반동은 아니야.’


멀쩡한 왼팔도 아니스가 새로이 돋아나게 해준 것이 아니다.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암실의 환영. 그것은 강력한 정신마법의 일종이다. 유진이 암실 바닥의 마법진에 진입한 순간, 유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은밀한 마법이 정신을 침식한 것이리라.


‘결국 모든 것이 내 정신세계에서 일어났다는 거지.’


막무가내로 쏟아부어 댄 불꽃이 충돌하는데도 공간의 형태가 무너지지 않았다. 그 싸움에서 환영은 틀림없이 물리력을 행사했다. 그것에 의문을 품고 확신했는데, 역시 틀리지 않았다.


정신마법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진은 그 모든 것이 정신마법이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 누아르 제벨라의 환상의 마안에 시달렸던 전생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유진의 정신력은 대부분의 정신마법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암실의 마법이 정신을 침투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경계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야.’


유진은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렸다. 정신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목이 ‘베였을 때’의 감각은 생생했다. 특히 유진은 전생에 죽던 순간마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환영에게 목이 베여 맞이한 죽음을 보다 현실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화난 건 아니지?”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침대의 옆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다. 그 옆에 크리스티나는 얇게 실눈을 뜨고 유진을 쏘아보고 있다. 시엘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팔짱을 끼고 있다.


……시안과 제하드는 그 사이에 껴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정말 고맙고 슬프게도, 지금 유진에게 ‘분노’하지 않고 순수한 걱정을 보내주는 것은 둘뿐이었다.


“왜 화를 내죠?”


메르가 내뱉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크리스티나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대답했다.


“메르 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가 화를 낼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유진 님이 아무런 말 없이 무언가를 하셔서, 정신을 잃은 것인데 말입니다.”


저런 말을 들으니 시엘도 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호응했다.


“맞아. 우리가 왜 화를 내?”


시안은 동생의 그 말을 차마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그는 낮게 헛기침을 하고서 시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니…… 우리는 화를 내야지. 유진 저 자식에게 휘말려서 어른들이 다치셨잖아.”


“오빠, 아버지랑 삼촌은 유진한테 휘말려서 다친 것이 뭐?”


“화는 내야지…….”


“아니, 나는 화내지 않을 거야. 내야 할 이유가 없거든. 아버지랑 삼촌도 내가 이 문제로 화를 내는 것을 바라지 않으실 거야. 카르멘 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정작 오빠도 지금 화를 내지 않고 있잖아.”


“그건…… 그렇기는 한데…….”


“그분들의 상처도 가볍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지치셨을 뿐 의식은 유지하셨어. 그 상처도 크리스티나 보좌주교가 치료해 주었고. 하지만 유진 저 녀석은? 하룻밤을 꼬박 기절해 있었잖아.”


“어…… 어어…….”


“당장 우리만 해도 지금 여기에 와 있잖아. 어째서? 유진을 걱정해서야. 무슨 말인지 알아? 나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야. 유진을 걱정하는 거야. 걱정해서 화를 내는 거지.”


시안은 정말로, 정말로 동생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빠르게 이어지는 말에 머리가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화를 내지 않는다고 말한 주제에 왜 바로 다음에는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일까? 걱정해서 화를 내는 것과 그냥 화를 내는 것은 다른 것일까?


“몸은 괜찮아?”


방금 전까지 표정을 구기고 있던 주제에, 시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물수건을 잡고 유진의 뺨을 닦아주었다.


“내가 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밤 내내 뒤척거리지도 않고 죽은 듯이 눈만 감고 있어서 말이야.”


“……치료는 제가 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얇게 뜨고 있던 눈을 살짝 뜨고서 시엘을 쏘아보았다. 그 매선 시선에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물수건으로 유진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고마워요, 시스터. 나는 이 녀석이랑 10년 가까이, 같은 집에서, 매일 동안 얼굴을 보아왔기에, 이 녀석이 부상을 입을 때마다 내 몸이 아픈 것 같은 슬픔을 느껴버려요.”


엄밀히 말하자면 시엘과 유진은 10년 동안 같은 집에서 얼굴을 보지는 않았다. 유진은 13살에 라이언하트에 들어와서 17살에 아롯으로 유학을 떠났고, 시엘도 비슷한 시기에 흑사자 성에 가버렸으니 둘이 매일 얼굴을 봐온 시간은 길게 쳐봐야 4년밖에 되지 않았다.


“저와 유진의 관계는 특별하니까요. 피는 한 방울도 이어지지 않았지만 우리의 인연은 형제, 아니, 그 이상으로 짙어요. 내 반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이에요.”


허나 그것은 시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가진 것을 써먹는 것에 능숙했다. 그런 점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라는 관계는 충분히 무기로 써먹을 만했다.


[하찮은 꼬마 같으니.]


시엘의 우쭐거림을 듣고 있던 아니스가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10년을 두고서 인연을 말하는가? 크리스티나도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니스와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피 한 방울 이어지지 않은 형제의 유대보다는, 사람과 사람으로 새로이 맺은 유대가 더욱 짙고 진실 되지 않은가?


“……크흠.”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하드가 헛기침을 뱉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왜, 여기에 이러고 앉아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걱정? 그거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날 선 분위기와 음지에서 오고 가는 언어와 시선의 암투는 제하드가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웠다.


“……아들아.”


“예, 아버지.”


“네 몸에 대한 걱정과 무모함에 대한 꾸짖음은 하지 않으마. 어차피 말해봐야 듣지 않을 테니…….”


“다치고 싶어서 다친 것도 아닌지라…….”


“하지만 나는 지금의 네가 무척이나 뿌듯하고 대견하구나. 어렸을 때엔 네 장성한 모습을 상상하기 두려웠는데…….”


“두려울 건 또 뭡니까?”


“동네 아이들을 죄다 두들겨 패던 아들을 가진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 보거라…….”


제하드 본인이 소탈한 성격이기도 했고, 기돌 촌구석의 아이들은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의 권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유진은 그 개구쟁이들에게 권위란 가문이 아닌 주먹에서 더욱 강하게 우러나온다는 것을 몸소 알려주었었다.


“하지만 너는 무척이나 잘 자랐구나. 내가 아니어도 널 걱정하며 찾아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아버지는 아들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신 겁니까.”


“망나니 비슷한 무언가라고 생각했단다. 어디까지나 네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제하드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널 걱정해 줄 사람이 이리도 많으니,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마. 침대에 누워 계실 가주님도 말동무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저희도 같이 가요.”


유진의 뺨을 두드리던 시엘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크리스티나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며 제하드의 손을 잡았다. 슬쩍 흘린 도발적인 시선 처리에 크리스티나의 눈썹이 씰룩거렷다.


“아, 버, 님.”


“……으, 으응?”


“가요, 아, 버, 님.”


제하드는 시엘에게 아버님이란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 시엘이 제하드를 부르던 말은 제하드 님 하나뿐이었다.


시안은 제하드를 끌고 가는 동생을 힐긋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괜찮아 보이니까, 나도 간다.”


“그냥 가도 되겠어?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는 안 궁금해?”


유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안은 저 미소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눈썹을 콱 구기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궁금한데 안 궁금해. 물어보고 싶은데 안 물어볼 거야. 나도 너처럼 백염식 6성 찍고, 네가 뭘 겪었는지 직접 확인할 거니까.”


“한 40살 먹고 6성 찍으면 무난하지?”


“개새끼. 두고 봐, 30살, 아니! 25살…… 에…… 6성에 오를 거니까.”


“화이팅.”


유진은 보란 듯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고, 시안은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며 화답해 주었다.


그렇게 시안과 시엘, 제하드가 방을 나간 뒤. 메르가 폴짝 뛰어 유진의 침대로 올라왔다.


“왜 저를 두고 가신 거예요?”


“데려가면 안 되는 곳이래.”


“거짓말하는 거 아니시죠?”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니?”


메르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서 유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크리스티나는 그런 메르를 묘한 눈으로 보면서, 시엘이 내려놓았던 물수건을 잡아 등 뒤로 던져 버렸다.


“무슨 일을 겪으신 겁니까?”


“내가 겪은 일보다 다른 분들이 겪은 일이 더 걱정되는데. 그분들은 괜찮으신가?”


“……음…… 제법 괜찮으셨습니다.”


어젯밤.


피투성이의 길레이드와 기온, 카르멘이 크리스티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뼈가 몇 개 부러지고, 살갗이 찢어지고, 내장이 상하고. 하나같이 무시할 수도 없는 상처였다.


“정작 그분들께 업혀 온 유진 님의 상처는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몸이 뻐근한데.”


“마음껏 날뛰셨다니 근육 정도는 상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모두 다 말끔하게 치료해 드리려 했습니다만, 아니스 님이 그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런 자잘한 상처까지 모두 치료해 주면 버릇이 나빠진다더군요.”


버릇은 무슨……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면서 암실에서 겪은 일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결국은, 유진 님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다음에도 또 이번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아닙니까?”


“정말 그래 버리면 애니실라 님이 유진 님을 독살하려 들 거예요.”


메르는 붕대를 칭칭 감은 길레이드를 붙들고서 엉엉 울던 애니실라를 떠올렸다.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고 본의가 아닐지라도, 이 몸으로 카르멘과 기온, 길레이드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들 어디 계시는지 알아?”


“길레이드 님과 기온 님은 방에서 쉬고 계십니다. 카르멘 님은…….”


“정원에서 산책 중이세요.”


“산책?”


뜬금없이 무슨 산책이란 말인가?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고 나서 납득했다. 지금 카르멘은 붕대에 칭칭 감긴 팔을 어깨에 두른 끈으로 고정하고, 반대편 손으로는 목발을 짚었다. 그리고 뺨에는 커다란 반창고까지 붙였다.


그 모습은 뭐라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남자의…… 아니, 15살 청소년의 은밀한 열망을 과시적으로 실현해 놓은 모습이었다.


실제로 카르멘은 목발을 짚어야 할 만큼의 다리부상을 입지 않았고, 붕대에 감아 어깨에 고정할 만큼의 팔부상을 입지 않았으며, 뺨에는 반창고를 붙여야 할 정도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다리가 쓸리고, 손목이 삐고, 뺨이 긁힌 것뿐이었다.


하지만 카르멘은 저 모습을 고집했다. 그러고는 어딘가 반항적이면서도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눈빛을 흘리며 괜히 라이언하트의 정원을 거닐었다.


“깨어났나?”


목발을 짚고 걷던 카르멘이 유진을 돌아보았다. 유진은 차마 무슨 말을 하지 못하고 카르멘을 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음……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지?”


카르멘은 진심으로 그렇게 되물으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네 저항이 거세기는 했다만, 유쾌한 경험이었다. 고약하고 아슬아슬한 전투는 무인으로서의 나를 살아 숨 쉬게 하거든.”


“예…….”


“길레이드와 기온도 최근 몇 년 동안 현역다운 전투를 하지 못했으니, 이번 일은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설마 꼬마, 우리를 다치게 한 것에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나?”


“조금은요.”


“쓸데없는 생각이야. 우리가 부상을 입은 것은 우리가 미숙했기 때문이지. 사실 널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는 부상 따위는 입지 않았겠지만.”


카르멘도 무인다운 자부심은 강했다.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래서 꼬마. 암실을 겪어본 소감은?”


“재밌는 장소더군요.”


“패배에 절망하지 않은 모양이야.”


“재밌는 만큼 최대한 즐기려고 하는데. 제가 즐기는 만큼 카르멘 님이나 다른 분들이 즐겨주실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유진의 생각은 이러했다. 암실이란 공간이 특별하기도 하고, 당장 환영을 돌파할 방법도 또렷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러니 여러 번 들이 박아보면서, 환영과의 전투 자체를 수행으로 삼고 싶다.


하지만 그럴 경우, 유진이 패배할 때마다 지금처럼 환영을 막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당연히 그 역할은 카르멘과 길레이드, 기온이 감당해 주어야 한다.


“만약 카르멘 님이나 다른 분들이 힘들어서 싫다 하신다면, 저는 확신을 갖기 전까지 암실에 들지 않겠습니다.”


유진은 적당히 도발을 섞어주었다.


“라이언하트의 은사자를 무시하지 마라.”


그리고 카르멘은 간단하게 도발에 넘어와 주었다. 아니, 도발에 넘어왔다고 해야 할지……. 카르멘이 가진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에 불이 붙었다 하는 것이 옳으리라.


“네가 몇 번이고 암실에 도전한다면, 그건 나와 길레이드, 기온에게도 흔치 않고 좋은 수행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널 제압하는 것에 셋이 달려들어야 했지만, 우리는 평소 손을 맞춘 적이 없어서 더욱 미숙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충분히 합을 맞춘 뒤 널 막을 테니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겠지. 그것이 익숙해진다면 나 혼자로도 충분할 거고.”


“역시 카르멘 님이십니다.”


유진은 짝짝 박수까지 쳐주면서 크리스티나를 힐긋 보았다. 멀뚱히 서 있던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시선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곧장 이해하지 못해서, 유진을 따라서 함께 박수를 쳤다.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는 왜 박수를 치는 것이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예?”


“아니 그…… 다음에는 너도 같이 기다리고 있다가, 카르멘 님이나 다른 분들에게 신성마법이라도 걸어 보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아, 아아, 앗…… 그렇군요.”


“그래도 되나 싶지만…….”


유진은 카르멘의 표정을 힐긋 살피며 물었다. 카르멘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라이언하트의 암실은 본가 내에서도 극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카르멘은 크리스티나가 특별하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앞에서 암실에 대한 이야기는 주저하지 않았다.


“……유라스의 성녀는 300년 전부터 라이언하트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지. 사실상 성녀는 라이언하트의 일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원까지는 아니지 않나.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본래라면 암실에 외인이 들어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라이언하트는 지긋지긋하고 쓸모없는 전통을 탈피하고 있지. 그러니 사실상 라이언하트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성녀가…….”


“저는 아직 성녀후보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카르멘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성녀후보가 암실에 들어오는 것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를 치료할 일은 앞으로 없겠지만, 내가 손대중을 하지 못해 네가 중상이라도 입으면 큰일이지. 그럴 경우를 대비해, 당장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가능한 성녀후보가 대기하는 것도 가문을 위한 일이다.”


“역시 카르멘 님이십니다.”


“가주와 기온은 내가 설득하도록 하지.”


카르멘은 훗 붕대 감은 손으로 옆머리를 넘겼다.


“……그런데 카르멘 님. 암실에서 환영이 나타나기 전에 보는 주마등 말입니다.”


“그걸 주마등이라고 부르기로 한 건가? 이벤트 호라이즌이라 부르는 것이 멋지지 않나?”


“……거기서 전생도 보이고 그러는 겁니까?”


유진은 카르멘의 말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전생, 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카르멘의 표정이 바뀌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전생을 믿는 건가?”


“뭐 못 믿을 것은 아니라고 생각…….”


“역시 어리군. 나는 전생 따위는 믿지 않아. 나에게 있어서 나는 지금 이곳에 살아 숨 쉬는 나뿐. 나는 오직 나 하나로 존재하고 증명되지.”


저 카르멘의 입에서 전생이 부정되고, 전생을 믿는다는 말에 어리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굉장히 나빠졌다.


“조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너도 아직은 깨치지 않은 소년인가.”


“…….”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암실에서 전생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다. 길레이드와 기온에게도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고, 죽은 도이네스 경한테도 들어본 적이 없다.”


카르멘은 쯧쯧 혀를 차면서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려 주었다.


“그러니 유진. 네가 암실에서 전생을 보지 못한 것에 실망하지 말도록. 네가 믿었던 전생이 부정되었던 마음은 이해하나, 애초에 전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유진은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참았다. 그러면서 암실에서 보았던 ‘전생’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은 하멜의 삶.


그 후에 나타났던.


‘……뭐였지?’


피비린내는 가득했지만, 잘 보이지는 않던 전장.


비틀거리며 걷던 남자.


시체의 산.


그 위에 앉아 있던 남자.


유진은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암실


암실에서 전생 같은 것을 보지 못한 것은 기온과 길레이드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선조들의 경우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전생’을 보는 것 자체가 보통의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란 것은 확실했다.


“환영에 너무 몰두해서 기억에 혼선이 온 것은 아닐까? 나야 네가 어떤 환영을 보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어…… 환영은 지금의 나랑 조금 다르잖아. 그렇지?”


아니, 그렇지 않다.


하멜의 삶이 죽음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간 후. 그 ‘다음’에 보였던 것은 하멜이 아닌 다른 남자였다. 왜 그 남자가 암실에서 투영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게 그런 기억은 없어.’


몇 번이고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유진에게, 하멜에게 그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체가 그득한 전장을 거닐거나, 시체로 산을 쌓았던 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절망감에 어깨를 늘어트리고서 전장을 떠돌았던 적은 없다. 용병일 적의 하멜은 언제나 독기에 차 있었고, 베르무트와 함께했던 전장에서는 절망을 느꼈던 적이 없다.


쌓은 시체의 산 위에 홀로 앉아 있던 적도 없다. 주변 용병 중에는 그런 악취미를 가진 놈이 몇 명 있기는 했다만, 하멜은 굳이 귀찮게 산을 쌓는 것보다는 그냥 모조리 도륙 내고 지나가는 것을 선호했다. 베르무트와 여행 중에는? 그런 짓을 했다간 세냐에게 욕을 처먹고 아니스에게 싸대기를 맞은 뒤에 모론에게도 꾸짖음을 들었을 것이다…….


‘전생의 전생?’


그 생각에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야 전생이 존재하니까 그 전생의 전생이 존재하기는 할 텐데…… ‘왜’ 암실이 전생의 전생까지 비춰냈단 말인가?


“크리스티나.”


방으로 돌아온 뒤.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불렀다.


“잠깐 아니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예, 알겠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의식을 양보해 주었다. 오히려 크리스티나보다 아니스가 거부감을 느꼈다. 그녀는 육체의 주도권을 쥐자마자 대뜸 유진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잘 쉬고 있는 사람을 왜 부르는 겁니까?”


“이유가 있어서 불렀지, 심심해서 불렀겠냐?”


찰싹! 아니스가 다시 한번 유진의 팔뚝을 때렸다.


“그러니까 당신은 한 대 더 처맞아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불러댈 것이면 따로 이유가 없어도 한두 번 부를 것이지. 꼭 이유가 있어야 부르는 것은 또 뭡니까? 정 없게.”


“아니…… 불러내는 것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예, 싫어합니다. 저는 크리스티나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니스는 그렇게 쏘아붙이며 유진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 직후, 아니스는 무언가를 깨닫고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녀는 깔끔하게 정돈된 유진의 방을 둘러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다 큰 여인을 방으로 꾀어내다니. 크리스티나의 정숙함을 너무 맹신한 것 아닙니까? 그 아이의 안에는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도사리고 있답니다.”


“네 얘기냐?”


“흐응, 그건 어떨까요. 하멜,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제가 늑대인 것 같습니까?”


아니스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유진은 그런 아니스를 떨떠름한 눈으로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늑대처럼 봐줄까?”


“늑대가 된 제게 잡아먹히고 싶다는 겁니까? 뻔뻔하고 음흉한 사람. 지금처럼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처럼 굴어 여자를 꾀어내는 것이 당신의 특기인가 봅니다?”


“꾀어내긴 누굴 꾀어내…….”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하멜. 여태까지 이 방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들인 겁니까?”


“이상한 말 좀 하지 마. 여자는 뭔 여자? 내 방에 온 여자는 시엘이나 니나 정도뿐이라고.”


시엘, 니나. 아니스는 그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니나는 이곳 별층을 총괄하는 시종장이다. 보통 시종장은 나이와 경험이 무르익은 시종이 맡는 것이 보통인데, 별층 시종장인 니나의 나이는 23살로 크리스티나와 동갑이었다.


그 이유는, 니나가 유진을 처음부터 전담해 온 전속시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안에서 꾸준히 니나를 의식해 왔다.


“……흐음. 그 시종이라면 문제가 없겠군요.”


“문제가 없을 건 또 뭐야?”


“그녀는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하멜, 당신에게 품은 사적인 감정이라곤 누나다운 애정 정도일 겁니다. 시엘, 그 시건방진 아가씨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크리스티나도 아니스의 안에서 조용히 동의했다. 아까 전, 시엘이 제하드에게 아양을 떨며 함께 나가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아, 버, 님. 크리스티나는 도저히 시엘처럼 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제가 대신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시스터…… 제발……!]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비명을 즐기며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하멜. 당신의 방에서, 크리스티나가 아닌 절 불러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죠? 저는 기대하고 있답니다.”


“전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유진은 곧장 의문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니스는 잠시 동안 유진을 노려보았다. 입으로는 기대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아니스는 일말의 기대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전생의 하멜을 너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입과 행동은 거칠지만 절대로 선은 넘지 않는, 등신에 병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전생에 대해 묻는 것은 우습지 않습니까? 이미 환생까지 한 주제에.”


“나야 특별한 경우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묻는 거야.”


“특별한 것은 저도 마찬가지죠. 저는…… 만들어진 존재니까요. 당신의 의문은 저에 대한 것은 아닐 테니,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목에 건 로사리오를 어루만지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빛의 교리에 따르면, 사자는 생전의 업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립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죄업을 치러낸 자만이 환생하여 다시 지상에서 태어납니다. 즉, 빛의 교리에서 생의 순환은 고통 없는 천국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인 것입니다. 전생, 현생, 미래. 모두가 천국에 들지 못해 발버둥 치는 삶이라는 겁니다.”


“그게 무조건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건 어디까지나 빛의 교리일 뿐입니다. 제가 겪은바, 천국은 실존하지만 무조건 천국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상에 남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지옥은?”


“지옥은…… 글쎄요. 저는 천국은 느꼈습니다만, 지옥을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하멜. 빛의 교리가 무조건 옳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오래된 성경의 가르침이 모두가 허구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성직자가 저런 말을 하였다면 유진도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빛의 신교에서 태어나, 온갖 일을 보고 겪으며 죽어 천사가 된 아니스가 하는 말이었다.


“지옥의 존재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천국은 실재합니다. 천국에 오르지 않거나,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갖지 못한 혼은 지상에서 환생합니다.”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렇다면 하멜. 지옥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고, 죽어 평온을 얻지 못하고 이 세상에 다시 환생하는 것이야말로 지옥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도저히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잠자코 서서 아니스의 말을 곱씹었다.


천국에 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 유진의 경우가 특별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그들에게도 전생은 있겠지만……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기억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베르무트는 나를 다시 지옥으로 끌고 내려온 것이로군.”


유진은 씁쓸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본래 하멜의 혼은 리치의 저주로 말살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으면서, 하멜의 혼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혼은 이승을 떠나지 않고, 세냐의 마법에 의해 유품인 목걸이에 깃들었다.


“……우리 모두가 당신을 지옥에 끌고 내려온 것입니다.”


아니스가 중얼거렸다. 목걸이에 혼을 깃들게 한 것은 세냐의 독단은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당시의 아니스는 천국의 실재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남은 마왕을 모두 죽인 뒤에 동료들과 함께 천국에 오르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베르무트 님 본인도 지옥을 자처하셨지요.”


“…….”


“저도, 세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론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충분히 천국에 오를 수 있었지만, 이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상에 남았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아니스가 웃었다.


“또 우리를 위해서였지요. 결국 그것이 세상을 위한 것이 되기는 하겠습니다만, 우리는 모든 마왕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베르무트 님이…… 왜 천국에 들지 않고, 죽음을 위장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너는 베르무트의 시체를 봤었지?”


“네.”


200년 전.


라이언하트의 시조이자 세상을 구한 용사. 위대한 베르무트가 죽었다. 키옐 제국은 영웅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고, 대륙 각지에서 영웅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베르무트는 헬무드에서 돌아온 후로 동료들과의 교류를 모조리 끊어버렸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아니스와 세냐, 모론도 참석했다.


하늘마저 대영웅의 죽음에 슬퍼하여 비를 쏟아내려 했지만, 세냐의 마법은 하늘의 눈물을 거두어 먹구름을 개고 맑게 만들었다. 루하르의 국왕인 모론은 왕관을 벗고 직접 베르무트의 관을 옮겼다.


그리고 아니스는, 신성제국의 성녀로서 추모사를 읊었다.


“예, 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유진도 직접 들었다. 그때, 베르무트의 관에는 틀림없이 시체가 있었다. 만약 시체가 가짜였다면, 모론 그 등신은 몰라도 세냐와 아니스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때 베르무트 님은 정말로 죽은 시체셨고, 혼은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연히 베르무트 님이 천국에 오르셨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베르무트의 혼은 천국에 오르지 않았다. 때문에 아니스는 이번 시대에 이르러 크리스티나에게 계시를 내렸고, 흑사자 성에 있는 베르무트의 관을 직접 확인하려 든 것이다.


“어쩌면, 베르무트의 혼은 유폐의 마왕에게 붙잡혀 있을지도 몰라.”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 님의 혼을 대가로 하여 평화를 약속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만약 그런 것이라면, 네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군.”


유진이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지만, 베르무트는 세상을 구했다. 그는 세상 누구보다 천국에 오를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천국에 오르지 못했다. 유진은 아카샤의 용언마법을 통해 베르무트의 행방을 추격하려 했으나, 시뻘건 눈동자와 사슬 끌리는 소리가 유진을 가로막았다.


마족과 마왕은 혼을 대가로 받는다.


헬무드는 인간에게 영혼의 계약을 권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헬무드의 마족과 마왕에게 혼이 묶여 있다. 그들은 천국에 오르지도, 윤회하지도 못한다. 계약의 내용에 따라 지상에 묶여, 마족과 마왕을 위한 노동을 할 뿐이다.


ㅡ윤회를 박탈당한 망령들의 제국.


그것이 헬무드다. 이 세상 자체가 천국에 오르지 못하고 윤회가 반복되는 지옥이라면, 헬무드야말로 지옥이란 말에 어울릴 것이다.


“하멜. 암실이 어떻게, 당신이 모르는 전생을 투영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보통의 사람은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하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특별함이 암실에 영향을 준 것일까. 유진은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끝까지 보지 못했어.”


암실이 투영한 유진의 삶은.


유년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에서 사라졌다.


하멜의 삶은 유폐의 마왕성에서 죽던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남자의 삶은 그 뒤에 비쳤다. 유진은 남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시체 가득한 전장을 절망감에 떠돌다가 쓰러져 죽은 것일까. 시체의 산 위에 앉아 있던 남자와는 같은 인물인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남자의 모습이 투영된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하멜. 당신이 모르는 전생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꽉 쥐어진 주먹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을 살아가는 존재가 전생을 떠올리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합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멜이며 유진이지만, 그를 구분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그냥 나니까.”


“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스티나가 크리스티나이듯, 저는 아니스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나도 그냥 거슬릴 뿐이야.”


유진은 투덜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암실을 만든 것은 베르무트잖아. 대체 언제부터 내 환생을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그 개자식은 아주 치밀하게 날 자기 후손으로 환생시켰단 말이야. 내가 ‘당연히’ 본가에 와서, 보물고에 들어갈 걸 예상하고서 목걸이도 갖다놨고.”


“그것을 예상하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멜, 당신의 성격이라면 틀림없이 본가에 쳐들어와 보물고를 털어먹으려 했을 텐데.”


“……털어먹지는 않았지만, 털어먹을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고 힘을 갖추면 털어먹었겠지.”


유진도 차마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 백염식도 나보고 익히라고 만들어 놓은 것일지는 모르겠…….”


“당신은 반드시 익혔을 겁니다. 전생부터 당신은 베르무트 님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이 상당했잖습니까?”


“열등가아암? 동겨어엉?”


“아닌 척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부정한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대범한 호인이라 당신을 흔쾌히 양자로 받아들였지만. 만약 당신이 양자가 되지 못했다면? 그 베르무트 님의 백염식을 포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유진은 대답 대신에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양자가 되지 못하고, 백염식을 익히지 못했다면…… 처음에는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제하드 가문의 적염식이나, 전생에 익혔던 마나수련법을 익혔을 것이다.


하지만 쭉 그것만 익혔을까? 충분히 힘이 생기면, 궁금하다는 핑계로 본가를 습격해 백염식을 빼앗지 않았을까……. 아니, 그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무식한 방법이었다.


‘네가 너희 시조의 친구랍시고 우기면서 백염식을 익혔을 수는 있겠군.’


아니스는 쿡쿡 웃으며 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겠군요. 베르무트 님이 만든 암실. 그곳에 당신에게 남긴 메시지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겁니까?”


“……이상한 것을 봐버리기도 했으니까.”


“당신의 전생이 베르무트 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까?”


“그건 모르겠고. 암실이 날 위한 선물이라는 건 알겠더라.”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 있는, 전생에 도달해 있던 경지. 암실에서 투영해 낸 환영은 전성기에 미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전성기에 가까이 근접하여, 유진이 생각하는 것처럼 싸워 보였다.


기온은 암실의 환영을 극복해 낼 때, 백염식의 불꽃이 변화한다고 말했다. 정확히 어떻게 변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은 백염식의 변화보다는 환영과의 전투 자체에 초점을 두었다.


암실의 환영은 유진보다 조금 강하고, 조금 빠르다. 암실의 정석적인 공략법은, 지금의 내게 없고 환영이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새로이 더하는 것이리라. 순전히 그것에만 집중한다면, 유진은 늦어도 사나흘 안에 암실을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라이자키아를 잡으려면 못해도 전생의 수준에는 도달해야 돼.”


차원의 틈 어딘가.


라이자키아는 그곳을 떠돌고 있다. 놈을 죽이는 것에 아니스의 도움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아니스가 크리스티나에게 깃들어 있다지만, 아직 크리스티나는 300년 전의 아니스와 같은 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세상이 아닌 차원의 틈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최악의 경우 크리스티나의 몸에서 아니스의 혼이 튕겨 나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유진은 라이자키아 사냥에 아니스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도저히 납득하지 않고 있지만, 유진은 그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하멜을 따라가는 것으론 부족해.’


300년 전의 하멜은 강했다.


하지만. 하멜 혼자서 마왕을 죽이는 것이 가능했나? 가능할 리가 없다. 서열 최하위였던 살육의 마왕조차도 5명이 덤벼 며칠을 싸우고서야 죽일 수 있었다.


마왕까지 갈 것도 없다. 광란의 마왕의 아들이었던 거인족 두령 카마쉬. 놈은 하멜과 베르무트가 함께 싸워 쓰러트렸다. 그리고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은 하멜과 세냐 둘이서 목숨을 걸었음에도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토록 강했던 하멜도, 고위 마족과 마왕을 단독으로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했단 말이다. 유진은 300년 전 하멜의 경지를 냉정하게 판단해 보았다. 아이리스 정도는 혼자서도 도륙을 냈겠지만, 그 위의 마족은 무리다.


라이자키아가 얼마나 강한지는 가늠이 잘되지 않는다. 세냐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라이자키아를 외차원으로 추방했다. 실패하여 차원의 틈에 처박기는 했지만, 그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가 거스를 수 없는 대마법을 펼친 것은 틀림없었다.


300년 전의 세냐에게는 불가능하던 일이다. 이터널홀을 완성했기에? 아니, 그때 아니스가 보여줬던 모습에 따르면ㅡ 라이자키아를 추방한 것은 온전히 세냐의 힘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수백 명의 엘프가 세냐의 몸을 받쳐주었다. 세계수의 뿌리가 세냐와 엘프들을 보호하고, 세냐에게 힘을 전해주었다.


‘일단 난 세냐처럼 못 해.’


300년 전의 하멜은 단독으로 라이자키아를 죽일 수 없다.


그러니 모든 면에서 하멜을 뛰어넘어야 했다.


* * *


이틀 후.


유진은 다시 암실로 내려갔다. 길레이드와 기온, 카르멘도 함께였다.


[마침 잘됐습니다. 기사들의 부상이 워낙 가벼워 치료할 맛이 나지 않았는데, 저들의 몸을 기적의 연습대로 삼도록 합시다.]


크리스티나도 함께 내려왔다. 암실 안으로는 당연히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 입구까지는 갈 수 있었다. 유진이 저번처럼 날뛰고, 카르멘과 길레이드, 기온이 유진을 막아선다면. 크리스티나는 그 셋을 보조하고 치료할 것이다.


‘시스터……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크리스티나. 사실 신성마법의 경지를 빠르기 올리기 위한 장소는 전쟁터가 최적입니다만, 지금 시대에는 전쟁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얼마 없는 치료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잘린 몸을 붙이고 재생하는 기적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령 팔다리를 돋아나게 하지 못할지라도 누가 당신을 원망하겠습니까? 원망은 저들의 팔다리를 잘라낼 하멜이 안고 갈 것입니다.]


물론 유진은 저들의 팔다리를 자를 생각이 없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유진은 암실의 문을 향해 걸어가며 쾌활하게 말했다. 기온은 그런 유진의 등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리 정신세계에서 벌어지는 전투라고 해도, 환영에게 일방적으로 시달리다가 죽는 것은 현실처럼 생생한데. 어떻게 저렇게 웃으며 즐거워할 수 있는 걸까.


“크리스티나 보좌주교의 신성마법도 있으니, 우리도 1명씩 싸워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렇다면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웃으며 즐거워하지는 않았지만, 카르멘과 길레이드도 의욕적이었다.


“……제가 먼저 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제가 나이도 가장 어리…….”


“지금 내 나이가 너보다 많으니 배려해주겠다는 것인가?”


“고모님, 그런 뜻이 아니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르멘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귀엽군요.]


‘예?’


[저들은 제게 있어서 동료의 머나먼 후손이잖습니까? 그 사이의 족보를 일일이 헤아리는 것은 귀찮으니, 대충 베르무트 님의 손자 손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주 귀엽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혹여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경계하며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유진은 새하얀 암실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보였다. 유진은 이번에도 전생이 비춰지는 것이 아닐까 기대하며 마법진 위로 올라갔지만, 저번처럼 전생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바로 환영이 나타났다. 이틀 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유진은 우두커니 서 있는 환영과, 주변 가득 꽂힌 무기와, 제 손에 쥐어진 검을 번갈아 보았다.


“……흠.”


유진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웃었다. 그는 손에 쥔 검을 대충 뒤로 던진 뒤에, 양손으로 주먹을 쥐고서 들어 올렸다.


“‘오늘’은 맨손으로 할까.”


암실


애니실라 카이네스.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명문 라이언하트의 안주인다운 품위를 유지하는 그녀였지만, 결혼까지 하고 사랑하는 남편 앞에서까지 품위를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방금 잠에서 깨어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가는 건가요?”


“그렇게 되었소.”


길레이드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니실라는 축 처진 남편의 어깨에 가슴이 아려왔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조금 홀쭉해진 것 같았다.


저 모든 것이 유진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라이언하트의 비밀스러운 시련에 도전하고서 벌써 반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열흘에 한 번꼴로 도전했는데…… 서서히 그 간격이 줄어들어 버렸다.


문제는 그 시련이 온전히 유진 혼자서 감당하는 종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유진이 시련에 도전할 때면 가주인 길레이드뿐만이 아니라 기온, 카르멘까지 시련을 받는다. 길레이드 본인은 ‘그것’을 시련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애니실라가 느끼기에는 시련과 다름이 없었다.


“저도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이고, 당신이 시련을 받았을 때도 기억하고 있으니 여태까지는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유진, 그 아이는 너무 과하지 않나요?”


“……그런 구석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


길레이드도 그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잿빛 머리카락을 대충 끈으로 묶은 뒤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밴드를 감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열정을 비난할 수가 없소. 나 자신이 그 아이의 열정에 감화되어 버렸으니.”


“……길레이드.”


“부인도 느꼈겠지만, 그 아이가 도전하는 시련은 온전히 그 아이만을 위한 것은 아니오. 나도, 기온도, 그리고 카르멘 님조차도 그 아이의 덕을 보고 있소.”


정말 그런가? 애니실라는 실눈을 뜨고서 남편의 등을 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길레이드의 뒷머리를 다시 묶어 주었다.


“카르멘 님도 이제는 즐길 단계를 넘기신 것 같은데 말이에요. 기온 도련님은 언제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으실 것 같고.”


“그건…… 그렇다고 생각하오. 나도 가주만 아니었으면 한 달 전쯤에 기온과 함께 도망쳤을 거요.”


“역시 유진 그 아이가 이상한 거예요. 아무리 젊다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길레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암실에서의 시련은 정신을 혹사한다. 환영에게 죽는다고 해서 진짜 정신이 죽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강렬하고 현실적인 체험은 정신장애를 일으킬 정도다.


길레이드도 처음 암실에 도전하고서 4번 정도 실패해 죽음을 겪었었다. 목이 베이고 심장이 뚫리고 몸이 썰리는 감각. 그 생생한 기억을 완전히 떨쳐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걸 벌써 수십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너무 잦은 도전이 걱정스러워 상담치료를 받거나 성직자에게 마인드 클리닝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언도 해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차라리 크리스티나 보좌주교가 라이언하트에 없었다면, 육체적 피로 때문에라도 잦은 도전은 할 수가 없었을 텐데. 길레이드가 느끼기에도 크리스티나의 치료마법은 너무나도 훌륭했다…….


“……그럼 다녀오겠소.”


길레이드는 억지로 의욕을 끌어낸 후, 목검을 들고서 방을 나섰다. 당연한 말이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당장 몇 달 전만 해도 빨라야 유진이 시련에 도전하던 것은 일주일에 한 번이었다. 그 주기가 짧아져도 너무 짧아진 것이다.


도중에 간격이랄 것도 없이, 매일 시련에 도전하고 있단 말이다. 카르멘도, 길레이드도, 기온도 수행은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오른 자리가 자리인 만큼 젊을 때만큼이나 격렬히 수행하지도, 열중하지도 못했을 뿐.


백염식 6성.


7성에 오르기 위한 벽은 너무나도 높다. 가주의 자리에 앉았다 하여 무인으로서의 열망을 버렸던 것은 아니다. 길레이드도, 그리고 기온도. 언젠가는 벽을 넘어 7성에 오르기를 갈망하고 있다. 카르멘도 시조 이후로 라이언하트 역사상 최초로 8성에 오르기를 갈망하고 있다.


벽을 넘고 무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고난과 시련이 필요하다면, 환영에 침식된 유진과의 전투는 훌륭한 고난이고 시련이었다. 이쪽이 손속에 사정을 둬야 하는 것과는 달리 환영은 아무런 사정도 두지 않는다. 무조건적으로 상대를 죽이려 든다. 크리스티나의 보조와 치료가 없었다면, 몇 번이나 치명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랬다.


시련이 반복되면서 성취를 얻은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유진을 제압하던 자들도 성취를 얻었다. 정신적으로 피로하고 지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으나, 이제는 커다란 위기와 부상 없이 유진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카르멘이 고집을 부렸던 것처럼 일대일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완전제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잠깐씩은 일대일로 상대하는 것도 가능했다.


‘……어쩌면 나이트마치 전에 7성에 오를지도 모르겠어.’


이른 새벽의 하늘이 검푸르다. 어느덧 가을의 끝이라 새벽녘의 공기가 서늘하다.


나이트마치까지 앞으로 약 반년. 북방의 루하르 왕국은 사시사철 눈이 쏟아지는 곳이기에, 내년 여름에는 무더위를 느끼지 못하리라.


“오셨습니까?”


지하 보물고의 입구. 다른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다. 유진의 두 눈은 의욕적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단련된 육체가 피로를 회복하고, 신성마법으로 정신을 씻어내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의욕이 덜한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당장 이들은 어제도, 그제도, 사흘 전에도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와서, 자정이 다 될 때에 방으로 돌아갔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흘 연속으로 매일, 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카르멘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기온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했다.


“저는 벌써 반년 넘도록 흑사자 성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끄는 기사들은 제노스 경이 담당해주고 계시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대장이 되어 5번대를 이끈 지 한 달 만에 본가에 와서, 반년 동안 돌아가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건 치명적이로군……. 이제 와서 기온, 네가 돌아간들 5번대 기사들은 너보다 제노스 경을 더 대장이라고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문제란 말입니다.”


오가는 대화. 크리스티나는 직접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이 반년 동안 그녀의 신성마법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을 거두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반년이 정말로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에게 충실했는가?


[결국 당신은 하멜과 단둘이서 꽁냥거리거나 그의 상처를 돌보고 핥는 것을 하지 못해 아쉽다는 것 아닙니까?]


‘시스터……! 상처를 핥다니, 그 무슨 망측하고 지저분한 이야기입니까?’


[당신은 비유를 비유로 듣지 못하는군요. 아니면 크리스티나, 제가 당신의 음습한 욕망을 저도 모르게 건드려 버린 겁니까?]


크리스티나는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멈췄다.


“자, 자. 너무들 화내지 마세요.”


잠도 푹 잤고, 밥도 맛있게 먹었다. 유진은 의욕적인 만큼 멀쩡했다. 그는 쾌활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뭐?”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원래는 여러분을 부를 필요도 없지 않나 싶었는데, 저 혼자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잖아요?”


“진짜? 진짜 오늘이 마지막이야?”


기온이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카르멘도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유진은 그들의 반응을 즐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더 이상 암실에서 얻을 것이 없다.


며칠 동안 반복하면서 느꼈다. 일말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기 위해, 죽지 않아도 될 것을 굳이 죽어주면서 반복했다. 그리고 어제야말로 확신했다.


암실은 더 이상 유진에게 시련이 되지 못했다.


유진은 반년 동안 너무 많이 와서 익숙한 길을 걸었다. 보물고 깊은 곳에 있는 베르무트의 초상화.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불가해의 마법. 지하로 내려가고, 문을 열고, 암실로 들어가고, 마법진 위에 서서.


“네가 대화가 가능한 존재였다면 정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어.”


환영을 마주 보았다.


반년.


외모가 변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겠지만, 유진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잿빛에 덥수룩했고, 거듭된 패배와 죽음에도 절망하지 않은 눈은 또렷하고 맑았다. 수염은 듬성듬성 자라는 것을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고, 메르가 죽어도 싫다 하여 기르지 않았다.


하지만 키는 조금 큰 것 같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시선을 위로 들어야 했는데, 이제는 시선을 들 필요가 없었다.


환영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었다. 놈은 여전히 유진에게 하멜을 섞어 놓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고, 손에는 검을 쥐고 있었다.


“흠.”


유진은 손에 든 검을 빙글 돌렸다.


“굳이 휘둘러서 싸울 필요가 있나 싶네.”


환영에게 대답은 없다. 하나 놈은 유진이 발하고 있는 또렷한 살의를 읽었고, 반응을 시작했다.


“너랑은 너무 많이 싸워서.”


가속. 둘 사이의 거리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달려든 환영이 유진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여지를 두지 않는 필살의 검격. 처음 암실에 들어왔을 때에는 저 ‘조금’ 빠른 것에 대응이 힘들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유진은 반걸음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살짝 뒤로 젖혔다. 그것만으로 참격은 아슬아슬하게 목을 비껴 갔다.


일격으로 끝이 아니다. 도중에 궤도를 틀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참격이 유연하게 꺾였다. 단순히 베어오지도 않았다. 칼끝의 흔들림, 세밀한 마나조작. 그것은 코앞에서 무수히 많은 검강을 만들었다.


“싸운 만큼 보이거든.”


그 수많은 검강을 꿰뚫는 데에 많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단 한 번의 찌르기. 굳이 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불꽃에 휘감긴 손이 어지러운 검강을 꿰뚫고, 환영의 검을 움켜잡았다.


“그러니 더 싸울 필요가 없어졌어.”


콰직.


손가락 사이에서 검이 박살 났다. 환영은 즉시 검을 놓고 유진의 몸에 주먹을 꽂으려 했다. 유진은 또다시 반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환영이 주먹을 밀어 넣던 공간에서 수십 개의 선이 그어졌다. 환영은 짙은 색의 불꽃으로 제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유진이 그은 선은 불꽃을 너무나도 쉽게 꿰뚫고 가르면서 주먹과 팔뚝을 수백 개의 고기조각으로 만들었다.


팔 하나를 잃은 환영이 뒤로 훌쩍 뛰어올랐다. 자아는 없지만 전투감각 하나는 탁월한 놈이다. 놈은 방금 간격에서의 전투에서 자신이 절대로 유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놈은 다시 덤비는 대신에, 백염식을 운용하여 불꽃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반년 동안 싸운 덕에 저 환영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놈은 이전 싸움의 기억을 계승하고 있지 않다. 도전이 반복될수록 유진은 환영에게 익숙해지지만, 환영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처음에 아무리 허무하게 패배했어도, 도전을 반복한다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게 된다.


암실은 전투감각과 백염식만 시험하는 곳이 아니다. 싸우고 패배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도 다시 싸울 수밖에 없는 정신력을 단련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정신력은 유진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명문’ 라이언하트에서 태어나고 단련해 온 베르무트의 후손들은 타고나고 단련하지 못한 것이었다. 특히 이 평화의 시대에는 저런 정신력을 단련하기 힘들다.


“화력대결도 좋지.”


유진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환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수준은 이미 오래전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계속, 계속 도전을 반복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이곳이 수련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유진은 강하다. 지금의 유진이 백염식의 출력을 제한하지 않고 풀어낸다면, 그것으로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주변이 초토화될 것이다.


라이언하트 본가에는 훈련을 위한 거의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다. 마나를 수련하는 장소도 따로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수련실은 백염식 5성 이상의 고출력의 마나를 마음 놓고 단련하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했다.


반면에 이 정신세계는 어떤가? 이그니션을 써도 몸에 후유증 따위는 남지 않는다. 아무리 마나를 풀어낸들 주변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몇 달 동안 유진은 암실을 그렇게 사용해 왔다. 덕분에 이른 새벽부터 암실에 들어와서 늦은 밤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고, 죽음으로 탈출하여 다른 사람들을 고생시켰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분명한 소득도 얻었다.


환영이 불꽃을 키운다. 놈의 백염식이 환염식이 되어 회전하고 있다. 부풀던 불꽃이 한순간 흔들렸고,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이그니션까지 쓴 것이다. 유진은 그 모습을 응시하면서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뻗은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하늘로 향했다.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환영의 마나와는 달리, 유진의 마나는 천천히 새어 나왔다. 그의 심장을 휘감은 6개의 별은 맹렬히 회전하고 있다. 회전 속에서 마나가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회전의 안에서 무수히 많은 코어가 생성되었다.


유진은 그 격렬한 마나를 바로 내뿜지 않았다. 압축에 압축을 거치고, 통제가 불가능할 파괴적인 마나를 자그마한 점으로 만들어냈다.


ㅡ화악.


유진의 손바닥 위에서 둥근 구체가 떠올랐다. 그것은 눈이 부실 만큼의 새하얀 태양이었다. 그것이 나타난 순간. 공간이 진동을 시작했다.


이 한정된 세계. 현실이 아닌 정신적 공간. 유진이 ‘구상’하고 발현시킨 저 태양에 부여된 의미와 가능성은 이 공간의 법칙을 무너트리는 수준에 근접해 있었다.


이것은 극한까지 압축한 마나로 만들어낸 태양이다. 하나 그 압축은 어디까지나 환염식으로만 해낸 것. 유진은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태양은 검강의 결정. 유진은 새로이 마나를 끌어내어 태양의 표면을 덮었다. 드라고닉 가문의 비기, 공검이 태양에 응용되었다. 그는 태양에 몇 겹의 마나를 코팅했고, 그 속에서 태양을 구성하고 있던 초고밀도의 마나가 융합과 폭발을 반복했다.


그렇게 점점.


새하얀 태양이 검게 물들어갔다.


환영은 이미 준비를 마쳤다. 그는 최초에 투영되었던 유진 라이언하트가 쓸 수 있던 모든 것을 오리지널보다 조금 더 잘 다룬다. 지금 환영은 이미 이그니션을 사용했고, 손에 쥔 검에는 공검까지 일으켰다.


하지만 덤빌 수가 없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전투감각은 가지고 있다. 덤비면, 무조건 죽는다. 우연으로라도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전략도 통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클립스.”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게 물든 태양을 휙 던졌다. 그러자 환영도 더 이상 우두커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놈은 제 몸에 휘감은, 이그니션으로 폭주시킨 마나를 죄다 공격에 집중하고서 달려들었다.


빛이 터졌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만드는 빛이 시야를 뒤덮는다. 유진은 굳이 눈을 뜨지 않고 감아버렸다. 그렇게 아무것도 보지 않게 되니, 귀에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둘,


셋.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런 식이군.”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환영을 정말로 죽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덕분에 정신세계에 진입하기 전의 자신이 어떤 몰골인지 알 수 있었다.


마법진을 걷는 순간, 쓰러져 버린 것이다. 유진은 바닥에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해서 조심스레 걸음을 뻗어 보았지만, 다시 정신세계로 끌려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통과, 라고 봐도 되겠지?”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반년이나 암실을 드나들면서, 이미 이 암실을 극복했던 길레이드와 기온, 카르멘에게 ‘전투’ 다음에 무엇이 벌어지는지를 들었다.


환영을 쓰러트리고, 앞으로 나아가면…….


불꽃이 나타난다.


그 불꽃이 몸에 깃드는 것으로, 백염식의 6성이 ‘완성’되고, 변화한다.


“……불꽃이라.”


한동안 걸었다. 마법진은 이미 저 뒤까지 멀어졌고, 주변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이클립스의 위력이 너무 강해서, 암실의 구성마법이 망가져 버린 것은 아니겠지?’


설마…… 싶기는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이클립스의 위력은 너무 강했다. 단순한 위력만을 따지면 전생의 몸으로도 그런 위력의 공격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말 망가졌으면 어떡해? 그 불꽃이란 걸 못 만나면, 내 백염식은 계속 불완전한 6성인 거야? 씨X 내가 너무 센 게 죄냔…….”


유진은 얼굴을 콱 구기며 내뱉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느새 유진의 앞에는 무언가가 나타나 있었지만, 그건 길레이드와 기온, 카르멘이 말했던 ‘불꽃’은 아니었다.


검은 의자에 앉은 남자.


“베르무트?”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300년 전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암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바로 앞까지 다가가지 않고, 도중에 걸음을 멈춰 버렸다. 놀란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었고, 머리는 핑 돌았으며, 목구멍 안쪽에서는 어떠한 말이 솟구쳐 올랐다.


“야 이 개새끼야.”


그리고 유진은 그 말을 참지 않았다. 참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진이 생각하기에, 베르무트는 이것보다 더한 쌍욕을 처먹어야 마땅했다. 아니, 욕만 쏴주는 것이 아니라 멱살을 쥐고서 턱주가리를 몇 대 후리거나 귀싸대기를 갈겨도 달게 받아야 했다.


하지만 유진은 지금 베르무트의 멱살까지는 틀어쥐지 못했다. 300년 만의 해후에 마음이 약해져서가 아니라, 단순히 눈앞의 베르무트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환영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베르무트의 입이 열린다. 그건 틀림없는 환영이었지만, 정말로 눈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하지만 진짜 베르무트다운 존재감은 없었다.


저 베르무트는 언제적의 모습일까. 유폐의 마왕성에 돌입했을 적보다는 머리도 정돈되어 있고, 차림새도 깔끔하다. 위대한 베르무트라고 추앙되면서, 키옐의 대공을 지내던 시절일까. 아니면…… 죽음을 위장하고 난 다음인가?


“하멜. 너인가?”


조용한 질문.


유진은 주먹을 꽉 쥐고서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


“아마 그렇겠지. 네가 아니고서야 이 환영이 나타날 일은 없을 테니까. 시간은 얼마나 흘렀지? 그것까지는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아마 300년은 흐르지 않았을까 생각되는군.”


300년 전부터 베르무트는 미소가 드문 놈이었다. 언제나 목석처럼 표정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베르무트는 저런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의자에 앉은 베르무트의 자세는 올곧았고, 표정은 평온해 보이는 무표정이다.


그 모습은 유진의 기억 속에 있는 베르무트와 똑같았다. 그래서 유진은 복잡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300년 전의 초상. 실제로 앞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진은 저 환영에게서 베르무트를 너무나도 짙게 느낄 수 있었다.


“……하멜. 너라면 지금 내게 아주 심한 욕을 하고 있겠지. 나는 네 욕을 듣기 좋거나 즐겁다고 생각한 적은 많지 않으나, 지금은…… 그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어. 네가 나한테 무슨 욕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거든.”


“씨X새끼.”


“이쯤 되었으면 너도 눈치를 챘겠지.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수백 년 전의 나다. 나는 너를 볼 수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어.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할 뿐이지. 그렇다고 너무 화는 내지 마라.”


화를 내지 말라고? 그 말에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화를 낼 상황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지? 이래 봤자 아무 의미는 없겠지만, 유진은 베르무트의 환영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성격 급한 네가 이 대화를 바라지 않고, 멋대로 가버리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두렵군.”


베르무트는 작은 목소리로 뇌까리며 깍지 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게는…… 많은 비밀이 있다, 하멜. 나로서는 그걸 내게 모두 털어놓을 수가 없어. 그럴 마음도 없고, 그래서도 안 돼. 그러니 이 대화가 네 궁금증을 모두 해소시켜 주지는 않을 거야.”


“네가 수상쩍다는 것은 너 말고 다른 모두가 알고 있었어.”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래. 우선 네 환생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 하멜, 네게 있어서 가장 큰 의문은 이것일 테니까.”


“말해봐.”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너는 그곳에서 죽어서는 안 됐다.”


이어지는 대답에 유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치미는 욕설을 누르고 격렬해지려는 감정을 붙들었다.


“하지만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하멜, 너는…… 그곳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야. 실제로 네 몸은 유폐의 마왕성을 오르는 순간순간마다 망가지고 있었으니까. 너는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무모함 때문이라고 생각할 거야.”


“……왜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냐?”


유진은 혀를 쯧 차면서 중얼거렸다.


이미 수십 번은 넘게 생각했지만, 유진의 결론을 바뀌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성. 그곳에서 하멜이 죽었던 것은, 당시의 하멜이 너무 무모하고 약했기 때문이다. 세냐와 아니스는 이그니션의 위험성에 대해 매번 경고했었지만, 그 지옥 같던 유폐의 마왕성은ㅡ 이그니션을 쓰지 않고서는 길을 뚫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너는 이 말을 굉장히 싫어할 거야.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에, 네게 말할 수밖에 없다. 하멜. 내가 널 지키지 못했기에, 네가 죽은 것이다.”


베르무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유진은 그 말을 도저히 듣고 넘길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


“뭐라는 거야 이 개자식이.”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빛의 샘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분노가 유진을 격앙시켰다.


이건, 굴욕감이다.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네가 뭔데, 날 지켜야 했다는 거냐.’


그런 관계가 아니다.


유진은 그런 관계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유진뿐만이 아니다. 300년 전에 베르무트와 함께 싸웠던 모두가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베르무트는 강했다.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했으며,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 베르무트와 함께 싸웠던 4명은, 단 한 번도 베르무트에게 보호를 받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르무트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전장에서 베르무트를 포함한 5명은 동등했다. 모두가 같은 곳에 섰고, 누군가가 앞서 나간다면 다른 누군가는 놈의 뒤와 옆을 지켰다.


“하멜. 너는 화를 내고 있나?”


베르무트가 물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서서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 베르무트는, 놈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저 환영은 오래전에 베르무트가 만들어놓고, 멋대로 떠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베르무트가 고개를 들어, 유진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말을 들은 하멜이, 무조건 분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음을 확신하는 시선이었다.


“그때의 나도 화가 났다.”


베르무트의 입 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자존심 강한 너는, 내가 널 ‘지켜야 했다’라는 것에 화를 내고 있겠지. 그런데 하멜, 너는 어떻게 죽었지? 날 지키기 위해 죽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야.”


“…….”


“그 순간의 너도 알았을 거다. 네가, 날 위해 몸을 던질 필요는 없었다. 하멜. 너는 단지…… 쓰러질 자리를 필요로 했던 것뿐이야. 더 이상 함께 간들 짐짝만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너는 몸을 던졌다. 전혀 위기가 아니었던 날 구하기 위해. 그것이 죽어가던 네게는 만족스러운 이유였나?”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이기적이었다, 하멜. 넌 쓰러질 자리로 나를 이용했다. 그곳에서 너는 날 지킬 필요가 없었다. 네가 지켜야 할 것은 너 자신뿐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어. 죽었지. 그래서 나는 후회할 수밖에 없는 거다. 내가 널 지키지 못한 것을 말이다.”


“……개자식.”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짧은 침묵. 베르무트는 고개를 몇 번 가로젓고서 다시 시선을 내려 정면을 보았다. 그 시선은 유진과 눈높이가 맞지는 않았으나, 유진도 베르무트도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야기를 계속하지, 하멜. 너는 결국 죽었고, 그 시점에서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났다. 지금의 시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 나는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었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약속이 대체 뭐냐.”


“그 전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힘들었지. 이기는 것이 불가능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가 함께 싸웠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까? 너도 알잖아, 그때 나는 제대로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어. 그런 내가 같이 올라가 봤자,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는 큰 도움이 안 됐을 거야.”


“약속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지만, 그때의 내게는 약속을 맺는 것이 최선이었다.”


베르무트는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만약 네가 함께였다면, 마왕성의 정상에 오른 시점에서 유폐의 마왕과 싸울 필요가 없었을 거다.”


“뭐?”


“내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조건은 그것이었다. 유폐의 마왕성, 바벨의 정상에 오르는 것. 그곳에서 유폐의 마왕의 본신(本身)과 직접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어. 그를 해냈다면 약속의 내용도 크게 바뀌었겠지.”


“뭐…… 라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다. 유진은 떨리는 눈으로 베르무트를 바라보았다.


사슬이…… 땅에 끌리는 소리.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새빨간 눈동자. 그것이 유폐의 마왕이다. 전생부터, 유진은 유폐의 마왕을 그런 존재로 알고 있었다.


마왕과 마주친 적?


여러 번 있다. 멸망의 마왕은 평원 저편에서 움직이는 것만으로 모두를 절망시켰다. 그 바로 아래 서열인 유폐의 마왕도, 본 적은 있었다. 놈의 마왕성 바벨에 막 진입했을 때.


요동치는 어둠. 절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 붉은 쌍안. 유폐의 마왕은 성의 침입자들을 직접 마중해 주었다.


‘정상에서 기다리겠다.’


그 상황에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유진은 서열 2위의 대마왕이 전에 죽여 왔던 마왕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란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끔찍하던 대마왕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고? 누구 하나 죽지 않고 5명이서 바벨의 정상에 올라, 유폐의 마왕의 본신과 만났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으로 시간을 벌고, 네 혼을 넘겨받았다. ‘아직은’ 네 혼이 깃든 목걸이가 세냐에게 있지만…… 언젠가 그녀를 납득시켜, 목걸이를 받을 생각이다.”


납득? 멋대로 남의 무덤을 뒤집어엎고ㅡ 놀라서 찾아온 세냐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버렸으면서?


“하멜.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결국 내 바람대로 되었다는 것이겠지. 너는 내 후손으로 태어났고, 백염식을 익혀 이곳에 있을 거야. 너는 기쁘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나는 널 환생시켰다.”


“알아 이 개자식아.”


“널 환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중, 네가 가장 용사답기 때문이다.”


“……뭐라는 거야?”


“나는…… 유폐의 마왕성, 바벨을 오르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너라면 그 이후를 볼 수 있다. 하멜. 너라면,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을 할 수 있다.”


“베르무트 이 개새끼야.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뭐? 네가 아는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용사다워? 이 미친 새끼. 정신이 돌아버린 것 아냐?”


“너는 인정하려 들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아. 지금 네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 내가 생각을 바꾸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니까.”


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던 거다.”


“네가 역부족이라면, 대체 누가……!”


유진은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살육의 마왕과 참혹의 마왕과 광란의 마왕. 3명의 마왕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베르무트가 싸웠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이 약속을 맺으며 물러선 것도, 그곳에 베르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무트는 그런 존재였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기게 만드는 존재. 그저 같은 전장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존재. 찬란히 빛나는 용사. 놈이 성검을 뽑았기에 마왕을 죽일 수 있었다. 놈이 월광검을 휘둘렀기에 마왕을 죽일 수 있었다.


“하멜, 넌 강하다.”


유진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베르무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생에도 강했지만, 지금은 더욱 강하겠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네가 정확히 언제, 어느 가문에서 환생할지는 모른다. 네 환생이 빠르게 발생하기 위해 최대한 후손을 늘렸다. 그렇게 늘린 가문들이 서로 상잔하지 않도록 불가침의 규율을 만들었다.”


“……미친 새끼.”


“네가 긍정하고 말고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멜. 네가 마음대로 굴다가 죽은 것처럼, 나도 마음대로 할 뿐이다. 어쨌든 내 성을 딴 가문은 앞으로 번영할 거고, 내 유산을 남긴 본가는 드높은 곳에서 방계 가문을 내려다볼 거다. 나는 그 모습은 확인할 수 없지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다.”


베르무트의 말이 맞았다. 라이언하트는 그렇게 300년 동안 존재했다. 베르무트가 만든 흑사자라는 번견은 가문이 서로 상잔하지 않게끔 엄격하게 통제했다. 혈계식과 영맥과 백염식은 방계가 본가의 힘을 침범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언젠가, 네가 수많은 라이언하트 중에서 태어난다면. 네가 갖게 될 육체는 전생의 육체와 비교가 되지 않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어. 나는 육체가 철저하게 혼에 맞춰서 구성되게끔 의도했으니까.”


유진 라이언하트.


이 몸은 굉장히 훌륭했다. 마나를 익히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유진의 생각대로 아주 잘 움직여 주었다. 아무리 훈련의 강도를 높여도 망가지는 일이 없었다. 그뿐인가? 유진이 전생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들은 이 육체에서 보다 화려하게 개화했다.


“전생과 지금. 하멜, 네가 가진 조건은 큰 차이가 있다. 너는 혈계식에서 무조건 두각을 보일 거다. 어쩌면 내 후손들이 널 시기할지도 모르지만, 너라면 그런 상황에서 충분히 일어설 수 있을 거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이곳에 있는 걸 테고.”


“…….”


“너는 지금 몇 살이지? 백염식이 익히기 까다로운 것이긴 하지만, 네 재능이라면…… 아무리 많아도 20대 중반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보물고의 무기들은 보았나? 그중 몇 개는 이미 네 손에 쥐어져 있을 거다. 성검은…… 솔직히 모르겠군. 네가 빛의 인정을 받았을까.”


베르무트가 다시 웃었다.


“……보물고에 월광검이 없다는 것에 아쉬워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월광검은 너무 위험해.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하지.”


“그렇긴 해. 무식할 정도로 강하고 끔찍한 검이니까.”


“나는 월광검을 부술 생각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없애 버릴 거다. 하지만, 아마 나는 실패하겠지. 이 검은 부수고 싶어도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만약 내가…… 이 검을 어떻게든 다루고, 널 위한 안배로 남길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하멜 네가 월광검에 미련이 있다면.”


베르무트의 손이 허공을 몇 번 그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빛을 발하는 글자들이 나타났다. 그건 독자적인 마법의 술식이었다.


“나하마 카지탄 사막 지하 어딘가에 네 무덤을 만들어놓았다. 이 술식대로 마법을 쓴다면, 네 무덤을 찾아갈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네가 마법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마법을 배워봐라. 세냐가 아롯에서 마법학을 새로이 정립했거든. 네 재능이라면 익히기 어렵지는 않을 거다.”


“……이미 익혔어.”


“물론 네가 무덤을 찾아가도, 월광검은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너무 아쉽게는 생각하지 마라. 만약 월광검이 있다면…… 내가 월광검이 있다는 것은, 내가 월광검을 부수지 못했다는 것이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네가 통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을 테니, 나를 너무 비웃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베르무트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멜. 내가 널 환생시킨 이유가…… 납득되었을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나는 확신이 있다. 너라면 내가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 이미 시X 환생했는데. 따지고 싶어도 베르무트 넌 여기 없잖아.”


“네가 환생하고서 어떤 삶을 살지는 내가 무어라 강요할 수 없는 일이지. 어쩌면…… 너는 변했을까? 전생처럼 세상을 구하겠다 생각하지 않고, 마왕과 마족에 대한 증오도 식어버렸을까?”


“넌 날 알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멜,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건, 네가 너고, 하멜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이상, 전생에 가진 신념이 달라졌을 리가 없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그래서 넌 날 원망하겠지. 네 입장에서는 내가 배신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그 정도로 속이 좁아터지지는 않았어.”


“하멜 네가 변함없이 모든 마왕과 마족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길 바란다면.”


베르무트가 두 눈을 감았다.


“……멸망의 마왕과는…… 싸우지 마라. 놈에게 가까이 가지 마라. 너도 보아서 알겠지만, 그것은…… 이질적이다. 싸움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멀리서.


멸망의 마왕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똑같았다. 유진은 그때 자신이 보았던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널따란 평원의 건너편에서 움직이던 ‘무언가’.


저것이 멸망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멸망이란 말인가. 저것이 서열 1위의 대마왕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대마왕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그 알 수 없는 존재를 멸망의 마왕이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멸망의 마왕과 싸우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떨리는 몸을 붙잡고 미칠 것 같은 정신을 진정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멸망의 마왕을 죽여야 해.”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베르무트는 그 대답을 듣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멸망의 마왕을 죽여야겠지.”


그러나, 베르무트는 유진과 똑같이 말했다.


“그전에. 바벨의 정상에 오르도록 해라.”


베르무트가 감았던 눈을 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유폐의 마왕의 어전에 서서, 놈의 본신을 만나도록 해라. 유폐의 마왕은 네가 편히 바벨을 오르게 두지 않을 거다. 놈은, 마왕은 그런 존재다.”


“당연히 올라가야지. 난 올라가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 뒤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네가 직접 겪어야 해.”


베르무트는 다시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베르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끝이군.”


베르무트가 앞을 보았다.


유진은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 서 있었다.


“너여야만 한다.”


300년 전.


대뜸 찾아온 베르무트는, 다른 동료들의 의견을 묵살하게 하멜을 동료로 삼았다.


너여야만 한다.


저 말을 내뱉으면서, 하멜에게 손을 뻗었었다. 이번에도 베르무트는 저렇게 말하며, 앞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말도 그립군.”


베르무트는 뻗었던 손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그 손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 유진은 쯧 혀를 차며 손을 들어, 베르무트의 손을 향해 뻗었다.


실체가 없는 환영. 손은 닿는 일 없이 서로 통과했지만, 유진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전히 그건 개소리야.”


유진은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암실


베르무트의 모습이 흔들렸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300년 전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인간의 모습을 한 환영이 흩어졌다. 그렇게 흩날리는 입자 하나하나가 무수히 많은 불티가 되었다.


유진은 뻗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사라지던 베르무트에게 이별의 말 따위는 전하지 않았다. 어차피 닿지 않을 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멜을 두고서 제멋대로라고 말하겠지만, 유진이 느끼기에 그 누구보다 제멋대로인 것은 베르무트였다.


“너랑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네가 마음대로 한 행동은 왠지 모르게 그럴듯하게 포장된다는 거야.”


베르무트가 하는 일이니 이유가 없을 리가 없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항상 베르무트는 그런 소리를 들었었다. 그리고 정작 하멜이 나름대로 치밀한 설계를 갖고서 돌발적인 행동을 하면.


-야 이 미친놈아! 너 또 왜 지랄이야?


-하멜, 당신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겁니까?


-역시 하멜이다.


그런 소리를 듣곤 했다.


유진은 과거를 떠올리며 큭큭 웃으며 흩날리는 불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이번에도 베르무트는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리라. 하지만 베르무트는 이번에도 그 누구에게도 먼저 알리지 않고, 자기 멋대로 일을 벌여버렸으며, 유진은ㅡ 아니, 하멜은 그것에 휘말려 버렸다.


원망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하멜은 베르무트를 믿었다. 놈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놈이 왜, 너여야만 한다는 것인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베르무트가 했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어 번지고 있다. 언어와 감상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혈관에서 헤엄치고, 뇌리에서 번쩍거렸다.


-하멜, 네가 변함없이 모든 마왕과 마족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길 바란다면.


베르무트가 하멜을 환생시킨 이유는, 300년 전에 죽이지 못한 마왕과 마족을 죽이기 위해서다. 300년 전에 모두가 바랐던 것을 지금이라도 이뤄내기 위해서다. 그것만으로 유진은 베르무트가 자신을 환생시킨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방금의 베르무트는…… 세냐의 가슴에 구멍을 뚫기 전의 베르무트야.’


그러니 유진은 방금 보았던 베르무트에게 더더욱 원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 당했던 세냐 본인도 베르무트를 너무 원망하지 말아달라고 하지 않았나.


베르무트는 여전히 비밀이 많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독해 보였다. 놈은 대화 도중에 몇 번 웃었으나, 그 웃음은 기억 속에 있던 모습보다 훨씬 메말라 있었다.


흩날리던 불티가 가라앉는다.


베르무트의 환영이 있던 자리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남아 있었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그 불꽃을 응시했다.


불꽃의 형태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백염식으로 만들어내는 불꽃과 같은 백색.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하리만큼 정련된 마나의 불꽃.


유진은 천천히 불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쪽이 호응하듯이 백염식을 일으켜야 하는 것일까?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유진이 백염식을 일으키기도 전에 불꽃이 먼저 움직였다. 화악, 하고 부푼 불꽃이 유진의 손을 휘감았다.


뜨거울 리가 없는데.


유진은, 손을 휘감아 오르는 불꽃에서 뜨거움을 느꼈다. 불꽃은 옷을 태우지도, 살을 태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스며들 듯이 유진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뜨겁다. 손끝에서부터 스며든 불꽃이, 그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흐르고 뼈를 달구면서 유진의 마나를 끓게 만들었다.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서 즉시 자리에 앉았다. 스며든 불꽃.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심장 쪽에서 맴돌던 6개의 별이 유진의 의지대로 가속했다. 환염식이 마나를 증폭시키고 새어나가지 않도록 붙잡는다.


그렇게 집중하니, 유진의 몸에 깃들어 있던 번개불꽃도 환염식에 호응했다.


유진은 본가에서 지내고, 암실에 도전하면서도 항상 호수 밑바닥에 위치한 세계수의 뿌리동굴에서 백염식을 수련했다. 그때마다 세계수의 정령들이 유진에게 다가왔다. 유진은 그들을 굴복시키려 들지 않고, 화합과 융화를 바랐다.


성과는 있었다. 유진의 마나에 깃든 번개불꽃은 세계수의 정령이 유진의 마나와 만나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원시정령이나 세계수의 정령과 마찬가지로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근본이 정령인 것은 틀림없어서 유진의 의지대로 수련하거나 키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세계수의 뿌리. 그곳에서 백염식을 수련하며, 세계수의 정령들을 번개불꽃에 융화시키는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덩치가 커진 번개불꽃을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빌어먹을 뇌광(雷光)은, 마나와는 궤가 조금 다른 힘이라 유진도 통제가 어렵다.


그래서 유진은 덩치가 커진 번개불꽃을 코어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다. 필요할 때마다 다룰 수 있는 만큼 뽑아내서 쓰긴 했지만,


ㅡ빠지지지직!


번개불꽃이 멋대로 뿜어져 나왔다. 정신이 순간 아찔해졌지만, 유진은 의식을 단단히 붙잡고 마나를 이끌었다. 번개불꽃이 치솟으니 유진의 불꽃이 크게 일렁거렸다. 그리고 유진과 이어져 있는 불꽃도 함께 일렁거렸다. 그것은 본디 유진의 것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마치 유진에게서 태어난 것처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스며들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눈앞을 보는 것에 의미가 없었다. 유진은 두 눈을 감고,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관조했다. 이그니션을 쓴 것도 아닌데 코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회전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가속되고, 그 회전의 안에서 마나가 계속해서 폭발하고 있다. 스며들고 더해지는 불꽃이 코어를 어루만진다. 그렇게 코어에 더해지고, 폭발의 성질이 바뀐다.


죽을 만큼 아팠다.


스며든 불꽃과 폭발이 6개의 코어를 자극했다. 멋대로 튀어나온 번개불꽃은 빠직빠직 시끄런 소리를 내며, 유진이 일으킨 백염식의 불꽃을 침식하려 들고 있다. 지금 이게 제대로 되는 것이 맞기는 한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저 제멋대로 날뛰는 불꽃과 번개에 몸이 망가지는 것은 아닌가?


불안과 의혹은 한순간뿐. 결국 그 모든 것이 유진에게서 벌어지는 것이니, 만약 몸이 망가진다면 나 자신이 무언가를 실패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이 돌발적이면서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부담을 더했다. 그편이 자신에게 편했기 때문이다.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유진은 자기 자신을 믿었다.


뚜둑.


어느 순간, 몸 안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그 낯선 소리를 들었을 때. 오직 집중하고만 있던 의식이 슬며시 깨어났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지?’


부릅뜬 눈으로 불꽃을 보다가, 더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두 눈을 감았다. 몸 안에 스며들고 더해지는 불꽃을 다루다가, 굳이 서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자리에 앉았다.


유진의 사고는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는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집중만. 무엇을 위한? ……불꽃을 통제하려고 했던가? 아니면 연소되지 않도록 버티기 위해서였나?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정확히 어느 만큼인지는 몰라도, 꽤 집중하고 있었다.


그 집중이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뚜둑, 하는. 뼈마디를 비트는 소리…… 아니, 아니다. 그 소리는 무언가가 으스러지고, 부서지는 소리였다.


‘뭐가 부서진 거지?’


코어였다.


심장에서 가속하며 회전하던 6개의 코어가 박살 났다. 코어는 몸 안에서 생성해 낸 마나의 근원이다. 코어가 박살 났다는 것은, 여태까지 쌓아 온 모든 마나를 잃고 다시는 마나를 다룰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마나는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다. 코어는 박살 났다. 그리고 다시 생성되었다. 그건 방금 부서졌던 코어처럼 형태가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마나의 격렬함과 회전에 빠르게 반응하며 빛을 발했다.


라이언하트의 백염식.


이 마나수련법은 불꽃이라는 독특한 발현을 갖는 만큼, 경지를 구분하는 것도 다른 마나수련법과는 다르다. 라이언하트의 백염식은 그 경지를 ‘별(星)’로 구분한다. 심장에 나타난 코어와 점점 분열하는 코어를 별로 세는 것이다.


지금 유진의 심장에는 정말로 6개의 별이 떠올라 있었다. 기존의 코어가 부서지고, 새로이 떠오른 별.


불꽃이 가라앉았다.


“……후우우…….”


유진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유진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온몸이 축축했다. 땀? 아니, 그냥 땀이 아니다. 땀에 뭔가 거무죽죽한 불순물들이 섞여 있다……. 유진은 기겁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 설마 너무 힘들어서 지려 버린 거냐?’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졌다. 그렇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유진의 몸에서는 각질 같은 것이 떨어졌다.


“……어쭈.”


유진은 옷을 벗다 말고, 제 피부를 손으로 쓱쓱 문질러 보았다. 그러자 희멀건 피부가 손으로 미는 대로 허물처럼 벗겨졌다. 새로이 드러난 피부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뽀얗고 생기가 넘쳤다.


“육체의 재구성…… 나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내 나이에 필요하지도 않고. 그런데도 멋대로 되었다는 것은, 육체가 ‘지금’의 나한테는 필요하다고 판단한 건가.”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진은 즐겁게 웃었다.


피부만 깨끗해진 것이 아니다. 전시에서 배출된 불순물. 아무리 유진이 마나를 조작하는 것에 능하다지만, 몸 안 깊은 곳에는 마나로 말끔히 태워내지 못한 불순물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불순물이 가장 묵직하게 쌓이는 것이 바로 코어다.


‘기존의 코어는 모두 박살 났어. 그 과정에서 불순물이 모조리 배출된 건가.’


유진은 그 자리에 서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원래부터 가볍고 힘이 넘치던 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몸이 낯설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 내 몸이 정말로 가벼웠고 힘이 넘쳤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 위화감은 지금의 육체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증명이 되었다.


“……좋네.”


유진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코어를 의식했다. 6성의 백염식. 의식하지 않고 회전하던 변화.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진의 백염식은 여전히 회전하고 있다.


그리고 유진이 바란 순간, 6개의 ‘별’은 찬란히 빛나면서 꼬리를 이었고, 회전의 안에서는 새로이 별들이 폭발하며 성운(星雲)을 만들었다.


번개불꽃이 마나와 함께 일어났다. 따로 겉돌고 있지 않다. 불꽃이 번개를 끌어안고 있다. 유진은 일으킨 불꽃을 응시했다.


백염식.


새하얀 마나의 불꽃을 만들기에 붙은 이름이다. 백염식으로 일으키는 불꽃의 색이 무조건 백색이어야 한다면, 지금 유진이 운용한 것은 백염식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이건 싫은데…….”


유진은 진심을 담아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유진이 일으킨 불꽃은 거무스름한 보라색에 가까웠다. 절대로 흰색은 아니었다…….


사실 유진은 이런 변화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불꽃의 색? 그게 뭔 대수라고. 이전의 백염식보다 강해진 것은 틀림없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나.


문제는.


카르멘 라이언하트다. 그녀는 유진의 불꽃이 이 독특한 보라색이 된 것을 보고서 틀림없이 흥분할 것이다. 어쩌면 이 보라색 불꽃으로 유진에게 끔찍한 별명을 붙이고, 백염식의 이름까지 멋대로 바꾸려 들지도 모른다…….


‘보라색 불꽃이니까 자염식(紫炎式)이라고 바꾸는 거 아냐? 난…… 난 싫어…….’


유진은 몸서리치면서 옷을 마저 벗었다. 그대로 입고 나가기에는 악취가 너무 심하니, 마법으로 옷을 세탁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마법으로 깨끗하게 만든 옷을 걸치고.


유진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불꽃은 모두가 유진에게 깃들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르무트의 환영도 더 보이지는 않았다.


“잘 있어라.”


이별의 말 따위는 할 생각이 없었는데.


유진은 그렇게 내뱉었다. 300년 동안 이곳에서 하멜을 기다렸을, 베르무트의 환영에게 전하는 인사였다. 비록 그 환영은 미리 기록되었던 것이고, 대화도 불가능했지만.


그 메마른 웃음을 떠올렸다. 정작 환영이 사라지던 순간에는 인사 따위는 하지 않았는데. 유진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반년 넘도록 신세 진 곳이기도 하니까.”


마법진을 가로질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문이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다시 그런 생각을 했다. 체감하기는 꽤 길었는데, 뱃속의 공복감으로 판단하건대 대충 하루 정도는 흐른 것 같았다.


‘괜히 미안하네. 다들 내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암실 입구에서 죽치고 있는 거잖아.’


안 그래도 요즘 애니실라의 시선에서 무언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시안에게도 최근 들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앞으로 나이트마치도 반년 남았으니, 가주인 길레이드는 백사자 기사단의 정예를 이끌고서 흑사자 성으로 떠나야 했다. 나이트마치를 위해 흑사자 기사단과 공동훈련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애니실라는 그를 납득하고 있지만, 아내로서 남편과 다시 떨어지는 것을 울적하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직 가문에 있는 동안이라도 남편과 붙어 지내고 싶을 텐데, 유진 때문에 길레이드가 거의 매일같이 암실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너를 독살할지도 몰라.’


물론 유진은 어지간한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이 작정하고 구해낸 독이 어지간한 수준은 아닐 것 아닌가?


‘아예 어디 풍경 좋은 휴양지로 여행이나 보내 드릴까.’


길레이드와 단둘이. 애니실라도 대놓고 기뻐하지는 않겠지만, 선물이라고 여행을 보내준다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것이다. 친아들은 아니기에 부모를 대하는 효심 같은 것은 없었지만, 유진은 길레이드와 애니실라를 가까운 친척 정도로는 여기고 있었다. 유진은 암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니 선물 정도는 해줄 수 있…….’


생각이 이어지는 도중.


무언가가 확 하고 다가왔다. 카르멘 라이언하트였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유진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던졌다.


카르멘뿐만이 아니었다. 좌우로 파고드는 길레이드와 기온이 유진의 행동을 완벽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연계가 능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 3명은 벌써 반년 가까이 환영에 침식된 유진을 제압하고 있었다.


3명이 덤벼온 이유는 단순했다. 유진이 암실에서 너무 오래 있었다. 유진은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암실에 들어간 지는 이미 사흘째였다. 이 사흘 동안, 3명은 암실의 입구를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의 피로. 그건 대수롭지 않았지만, 유진이 사흘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오늘 암실을 극복하겠다고 말한 주제에 사흘이나 나오지 않다니…… 무슨 문제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 생각했지만, 암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1명뿐이라 확인하러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대뜸 문이 열렸다.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보다는 제압부터 하는 것이 낫다. 3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암실에서 사흘 만에 나온 것도 전례가 없던 일이니, 유진의 몸이 좋지 않은 쪽으로 날뛸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진은 그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3명의 연계가 매서웠고, 빠져나갈 틈은 거의 없었으며, 목소리를 내어 막기에는 공격이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유진은 어쩔 수 없이 불꽃을 일으켰다. 그가 발로 땅을 구르자, 보라색 불꽃이 화악 하고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유진의 몸은 뇌광으로 가속되어,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미세한 틈을 관통했다.


“접니다, 저예요. 환영이 아니라 유진…….”


“이 불꽃은……?!”


카르멘의 눈이 번쩍 뜨였고,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암실


흥분해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카르멘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서 불꽃을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유진은 카르멘이 바라는 대로 불꽃을 보여주었다.


“놀랍구나!”


카르멘은 감탄을 터뜨리며 보라색 불꽃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그녀가 슬금슬금 걸음을 좁히고, 손가락을 씰룩거리는 것을 알아보고서 불꽃을 움직여 주었다.


단순히 색깔만 다른 불꽃이 아니다. 백염식으로 일으키는 불꽃은 극도로 정련된 마나의 정수다. 그 불꽃을 정련하는 방법은 백염식의 안쪽에 속한 것이기에 큰 변형을 주기가 힘들다.


그러나 지금 유진의 불꽃은 스스로가 체감하기에도 ‘달랐다’. 코어가 새로이 바뀌고, 백염식 자체가 변화했다. 똑같이 마나를 정련하는 과정에서도 마나는 전혀 다른 색과 위력의 불꽃을 만들었다.


“……아하핫.”


백염식 7성. 현 라이언하트 가문에서 가장 높은 경지를 이룩한 카르멘이 그 변화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녀는 맑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손 위에 올라온 불꽃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유진이 일말의 적의를 품고 있지 않기에, 불꽃은 카르멘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잡아먹히는 것만 같다. 실제로 카르멘은 자신의 백염식을 운용하며 마나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마나가 이 불꽃의 장작이 되어 불살라질 것만 같았다.


“이건 정말 놀랍구나. 선대 중에서도 암실에 드셨던 분은 여럿 있지만, 그분들 중에서 너처럼 백염식의 색이 달라진 분은 없었다.”


길레이드도 감탄하며 말했다. 이만큼이나 커다란 변화를 얻게 되었다면, 사흘 동안 암실에서 나오지 못한 것도 납득이 갈 정도였다.


“무슨 일을 겪은 거야?”


기온은 감탄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꽃의 변화. 그것은 당장 보고 있어서 알았지만, 그 외에도 유진에게서 다른 변화를 느꼈다. 본래부터 유진의 피부는 깔끔하고 생기가 넘쳤지만, 지금은 피부에 광채가 난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 변화를 가장 짙게 느끼고 있는 것은.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잠깐 제게 몸을 넘기십시오.]


2명의 성녀였다.


‘네…… 네?’


[크리스티나! 당신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겁니까? 지금 당장 고개를 들고, 시선을 똑바로 해서 하멜을 보도록 하십시오.]


볼 수가 없었다. 정말 정말 보고 싶은데, 도저히 고개를 들어 유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대체 뭐란 말인가? 뭔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크게 변했다. 눈동자는 왠지 모르게 차분하고 깊은 데다 서늘하게 느껴졌고, 피부는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광채가 나면서 매끈하다. 평소 부스스하던 머리카락도, 지금도 부스스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머릿결에서 윤기가 흘러 섹시하게 보였다.


‘세, 세, 섹…… 시.’


[망측한 사람!]


크리스티나의 두 귀가 뜨겁고 붉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의 아니스도 비명을 질렀다.


[크리스티나아! 부끄러워 하멜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다면, 지금 당장 제게 몸을 양보하십시오. 제가 당신을 대신하여 하멜의 얼굴을 가까이 보고, 저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찬란한 피부를 어루만지도록 하겠습니다.]


‘대,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시스터. 이승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미련이 아닙니다! 저는 하멜의 동료이자 그의 상처를 돌봐 온 성직자로서, 지금 하멜의 몸에 일어난 미지의 사태를 파악하고 대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건…… 그건 제가 대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나! 결국 자신의 추잡한 욕망에 눈이 멀어, 제게 처음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추, 추잡한 욕망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단지, 단지 저는 시스터가 미련에 잠식될까 걱정되어…….’


[정말로 저를 걱정한다면, 지금 당장 하멜을 똑바로 보십시오. 그리고 하멜에게 다가가 저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입술이 닿을 만큼 얼굴을 바짝 들이밀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십시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이것이 제가 양보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어서, 빨리!]


아니스는 진심이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저 피부 결을 느끼고,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하지만 아니스는 바란다면 얼마든지 크리스티나의 감각에 링크할 수 있었기에, 만약 크리스티나가 대신해 준다고 한다면 이 정도쯤은 참을 수 있었다.


결국 크리스티나는 아니스가 시키는 대로 머뭇거리며 유진에게 다가갔다.


카르멘과 기온, 길레이드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 유진은 그들에게 암실에서 겪은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잠깐 고민했다. 당연히, 베르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그냥 말씀들 해주신 것처럼 불꽃이 나타났고, 제게 깃들…… 뭐야?”


유진은 하던 말을 멈추고, 주춤주춤 다가온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니스는 그런 크리스티나가 답답하여, 다시 한번 머릿속에 쏘아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스가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크리스티나가 홱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엷게 홍조 어린 얼굴을 하고서 유진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흐읏…….”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용기 내어 뻗은 손이 유진의 양 뺨을 붙잡았다. 유진은 크리스티나가 대체 무엇을 하는지, 아니, 지금 저 몸을 움직이는 것이 크리스티나인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뭐 하는 거야?”


그렇다고 아니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 유진은 일단 그렇게 물어보았고, 크리스티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얼굴을 유진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양 손바닥에서…… 부들부들한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유진의 변화를 보다 뚜렷이 실감할 수가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유진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일 것만 같은 영롱한 금색 눈동자…….


[머리카락!]


아니스가 소리쳤다. 어쩔 수 없었다. 이것까지는 부끄러워서 도저히 할 수가 없었지만, 시스터의 ‘명령’을 어겨서는 안 된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왼손을 조심스레 움직여서 유진의 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는 유진의 두피를 살살 긁으면서 머리카락을 쓸었다.


“…….”


그 돌발적인 행동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누구보다 커다란 당황을 느끼는 것은 유진이었다. 피부가 오싹거린다. 포식자에게 포착된 사냥감의 기분이 이럴까? 유진은 즉시 뒷걸음질 치며 크리스티나에게 빠져나왔다.


“뭐, 뭐, 뭐야?”


“……으흠…….”


크리스티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몇 번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다행입니다.”


도리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홱 쓸어 넘기며 성녀다운 미소를 지었다.


“저 안에서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계셨으니, 몸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가 방금 확인해 본바, 유진 님의 몸은 아주 멀쩡하셨습니다.”


누구나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했다. 직접 만져서 확인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끈거리는 얼굴이 조금은 식는 것 같았다.


[입술도 만져야 했는데…….]


아니스가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으니, 가까이서 보았던 유진의 입술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벌써 반년이나 지났지만, 뇌리 깊숙이 새겨졌던 입맞춤의 감촉이 다시금 떠올라 크리스티나의 입술을 간질였다…….


“기, 기도합시다.”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서 아예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유진 님이 무사히 생환하신 것과…… 그, 그 험난하다는 암실의 시련을 극복하시도록 이끌어주신 빛께 기도합시다…….”


그 뜬금없는 기도에 호응해 무릎을 꿇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크리스티나는 얼굴의 열기가 식을 때까지 홀로 기도를 올렸다.


* * *


“유진 님!”


라이언하트의 보물고를 나오고, 지하층에서 지상층으로 올라오자마자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베르무트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는 메인홀. 붉은 융단 깔린 계단에서 메르가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유진 님, 유진 님, 유진 님!”


메르는 울상이었다. 이유야 묻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사흘 동안이나 암실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온갖 걱정을 다 한 것이리라. 유진은 성큼성큼 걸어 나오면서 말없이 양팔을 활짝 열어주었다.


허우적거리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오던 메르가 펄쩍 도약했다. 그 순간 메르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 있으면서도 또렷한 눈동자는 유진에게 무언의 요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은 메르의 요구를 잘 알았다.


가느다란 바람이 메르의 몸을 감쌌다. 메르의 자그마한 몸은 바람의 보살핌을 받으며 유진에게 날아왔다. 유진이 팔에 안기도 전에, 메르가 알아서 유진의 품 안에 안겨 왔다.


“냄새 안 나냐?”


“유진 님의 냄새가 나요.”


“그거 말고, 구린 냄새 같은 거.”


“안 나요.”


메르는 유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서 웅얼거렸다. 세탁 마법으로 빨아두고 몸도 씻기는 했다만, 아까 불순물 섞인 땀의 악취가 남아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메르의 대답에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유진 님. 조금 변하셨네요? 가슴이 평소보다 말랑해요.”


“뭐?”


“유진 님의 가슴은 항상 근육 때문에 딱딱했는데, 지금은 딱딱하지 않고 말랑해요. 엄청 말랑하지는 않지만, 이건…….”


메르는 가슴에 묻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손가락으로 몇 번씩 유진의 가슴 근육을 찔러보고, 얼굴을 묻어보았다.


“……말랑하다기보다는 탄력…… 중독적이야…….”


그것은 유진도 어느 정도는 체감하고 있었다. 뼈마디는 전보다 훨씬 튼튼해졌고, 그를 감싸는 근육은 유연하고 탄력이 넘쳤다. 이전의 뼈와 근육도 충분히 훌륭했는데, 지금의 육체는 유진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완벽했다.


“…….”


뛰쳐나온 것은 메르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라이언하트의 본가. 당연히 이곳에는 본가의 식구들이 살고 있다.


시안은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등 뒤에는 위대한 시조 베르무트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 시조의 초상화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틀림없겠지만, 시안은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먼저 내려온 시엘의 등에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안은 여동생의 표정을 상상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도 만지고 싶어.’


시엘의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은 간단했다. 다만, 그 생각에서 파생되는 여러 생각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메르 메르데인. 저 괘씸한 사역마. 최근 반년 동안 무척 잘 지내지 않았었나? 그것은 크리스티나 보좌주교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치료마법에 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암실의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시엘과 메르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메르는 자신을 내버려 두고 열중하는 유진과, 현명한 세냐가 직접 만들어낸 자신에게 감히 눈을 깔라고 쏘아붙이던 이중인격 성녀의 험담을 할 상대가 필요했다.


시엘은 유진이 유라스에서 정확히 무엇을 했고, 이상하리만큼 아양을 떨면서 미소를 흘려대는 성녀 후보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물론 그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메르의 험담에 대한 맞장구는 얼마든지 쳐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얄팍하던 관계. 약간의 감정이 더해진 것만으로도 손쉽게 깨져 나간다.


저 봐라. 메르 메르데인. 겉모습만 어린아이인 200년 묵은 사역마. 그 말은 즉, 아이의 거죽을 뒤집어쓴 늙은이라는 말 아닌가?


‘그래서 음흉해.’


메르는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시엘에게는 노골적인 과시이자 자신을 약 올리는 것으로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시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


‘탄력적인 가슴? 중독? 그게 대체 뭔데?’


시엘은 명문 라이언하트가의 영애로서,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을 교육받아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척 지냈던 10대 때라면 모를까. 이미 성인식까지 치르고 난 20살의 자신이 그런 몰상식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심지어 저곳에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삼촌, 존경하는 카르멘 님까지 계시는데?


“……저런, 유진 님.”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는 계단의 도중에서 굳어 있는 시엘을 응시했다. 한 번 보았고,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시엘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살짝 몸을 기울여 유진의 팔을 감싸 쥐었다.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사흘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셨잖습니까?”


평범한 걱정의 말. 비틀거릴까 봐 건네는 부축. 평범한 것들이지만, 시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만 같았다……. 시엘의 눈에 크리스티나는 성녀의 정반대인 악녀로 보였다. 그 악녀가, 유진의 팔을 욕망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잠깐. 사흘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시엘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편히 누워 계십시오. 제가 위장에 부담되지 않을 부드러운 음식을…….”


“아하핫!”


시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 움직였다. 시엘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가, 유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엘 님, 왜 웃으시는 겁니까?”


크리스티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시엘을 보았다.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사흘이나 굶었는데 부드러운 음식을 먹이겠다고?”


“공복이 길었습니다. 부담스러운 음식은 몸에 좋지 않아요.”


“평범한 사람은 그렇겠지. 하지만 쟤는 아닐걸?”


시엘은 훗 웃으면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웃…….’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인 애니실라는 하나뿐인 딸이 흑사자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이제 갓 성인 된 딸의 파릇파릇한 젊음이 고된 훈련으로 소진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값비싸면서 구하기 힘든 화장품 따위를 주기적으로 시엘에게 보내며, 딸의 아름다운 젊음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래서 시엘은 낭랑하며 아름답다. 시엘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녀석, 피부가 이렇게 투명했었나?’


매일 훈련한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탱글탱글한 피부를 가진 시엘이지만, 가까이서 유진의 피부를 보니……위축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해서는 안 된다. 시엘은 평소처럼 샐쭉 웃으며 유진의 손목을 당겼다.


“고…… 고기가 좋잖아, 그렇지? 두껍고 써는 맛이 있는 고기. 마침 이 ‘누나’도 밥을 먹지 않았거든?”


“갑자기 넌 또 왜 누나라는 거야?”


“왜? 어릴 때 생각나고 좋지 않아? 카르멘 님과 아버지, 삼촌도 식사는 아직 하지 않으셨죠?”


“밥은 아까 먹었…….”


기온의 대답이 도중에 멈췄다. 그는 계단 위쪽에서 시안이 열심히 입술을 뻐끔거리는 것을 보았고, 시엘의 눈동자에 스산한 빛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아까 먹었지만, 오늘따라 배가 빨리 꺼져 버렸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기온은 어릴 때의 시엘과 시온을 가르쳤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알았다. 기온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고서 유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다 같이 먹으러 가볼까. 형님…… 아니, 가주님도 괜찮으시겠죠?”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결국 다 같이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라이언하트의 가족 식탁.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외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따라가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안일했군요, 크리스티나.]


아니스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평범한 사람? 유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잘 알았다. 단지 유진과 둘이서 방에 돌아가, 음식을 떠먹이고 싶다는 자그마한 욕심이 앞섰을 뿐이다.


‘내가 이겼어.’


시엘은 앞장서면서 승기에 찬 미소를 지었다. 유진은 그 뒤를 따라가는 대신,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그냥 쟤도 같이 먹으면 안 됩니까?”


“뭐어?”


시엘이 두 눈을 부릅뜨고 유진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안 될 것은 없다만, 오히려 그편이 성녀 후보께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길레이드는 가족이 아니라고 식탁에 앉게 하지 못할 만큼 부조리한 인물이 아니었다. 말한 것처럼, 본가의 인물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크리스티나가 부담과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한 것뿐이었다.


“그럼 쟤한테 물어보죠. 어쩔래?”


“예…… 예?”


설마 이런 권유를 받게 될 줄이야. 크리스티나는 요 반년 동안 라이언하트에서 지내면서, 언제나 응접용으로 마련된 식당에서 식사를 해왔다. 하지만 오늘 선례를 만든다면, 앞으로는 자연스럽게 라이언하트의 식탁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티나!]


아니스가 외쳤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티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시엘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시그니처


마도왕국 아롯, 세냐의 저택.


수백 년 전에 현명한 세냐가 실제로 살았던 이 저택은 아롯에 살고 있는, 또 아롯을 찾아오는 수많은 마법사들에게는 성지(聖地)처럼 취급받고 있다. 저택이 관광지로 개방되는 시간은 정오부터 자정까지의 12시간. 새벽 중에는 저택은 개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저택은 아롯의 수많은 관광명소들 중에서도 매일 관광객이 넘쳐나는 곳이라, 한나절을 꼬박 기다려도 저택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저택을 찾아온 젊은 마법사들은 전날 새벽부터 저택의 앞에서 대기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창밖을 내다보면, 정분 바깥의 널따란 광장에 마법사들의 머리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세냐 이 계집애가 이 정도였습니까?”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발한 것은 아니스였다. 그녀는 살짝 열었던 커튼을 닫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냐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맥주처럼 거품이 많이 껴 있습니다.”


“……거품 아니거든요. 세냐 님은 이만큼 존경받을 만한 위인이세요. 세냐 님이 창조하신 서클 마법식은 마법이란 학문을 500년은 진보시켰다고 평가 받는다구요.”


“사역마 아가씨, 그렇게 웅얼대면 들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저한테 무언가 말을 하고 싶다면 보다 큰 소리로 말하십시오.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입니다.”


아니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면서 메르를 내려다보았다. 그 서늘한 푸른 눈동자에 메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메르는 괜히 다리를 배배 꼬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다가…… 오히려 고개를 조금 더 숙여 버렸다. 아니스는 그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설마 제가 당신을 낳은 어머니를 모욕했다고 느껴서 언짢아하는 겁니까? 세냐가 당신의 어머니인 것은 알겠습니다만, 그전에 저와 세냐는 무척이나 가까운 친구 사이였답니다.”


“……세냐 님은 제 어머니가…… 아니에요…….”


“낳았으면 어머니지 달리 부를 말이 있습니까? 어쨌든, 제가 친구를 무어라 평가하건 제 마음이니 같잖은 반론은 하지 마십시오.”


“으으…….”


메르는 더 말하지 않고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거품. 아니스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늦은 새벽까지 저택 밖에서 대기 중인 마법사들이, 아니스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왈가닥의 세냐에게 맹목적인 존경을 보낸다는 것이 우스워서 내뱉어 본 것이었다.


물론 아니스도 유라스에서는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세냐처럼 후대를 위한 가르침을 남기지는 않았다. 애당초 신성마법이라는 것은 신앙이 가장 중요한 법이라, 마법처럼 후대를 위한 가르침을 남기는 것이 힘들었다. 아니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후대를 위한 성경구절이나 몇 줄 적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연히 아니스는 성경에 남길 구절을 적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의 교황과 추기경이 애걸하여 몇 줄 적어주기는 했지만 아무 뜻도 진심도 없는 애매하고 뜬구름 잡는 글만 몇 줄 적었을 뿐. 아니스가 진심과 진실을 담아 적은 글귀는 성경이 아닌 동화책에 가득했다…….


“이곳에 오는 것은 처음이지만…… 오래전에, 여러 번 와본 것만 같은 그리움이 듭니다.”


“그리움이요?”


“예. 세냐는 마법연구로 바빴고, 저는 술을 마시느라 바빴습니다.”


“……술…….”


“농담입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당시의 저도 여러 가지 감시와, 전후(戰後) 시대에서의 평화와 빛의 상징이 되어야 해서 유라스를 벗어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냐와 직접 만나는 것이 드물어서, 대부분은 마법으로 통신을 나누었지요.”


아롯과 유라스 사이의 거리는 아득하리만큼 멀고, 그 시대는 전쟁이 막 끝나 혼란스러우면서 어색한 평화가 스며들고 있었다. 지금이야 국가와 도시들에 워프게이트가 개설되어 있지만, 그 시대에는 워프게이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서로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세냐는 아니스를 위해 직접 마법을 새겨 넣은 수정구를 선물했다. 마나를 많이 먹는 것이 흠인 물건이었지만, 그런 단점은 세냐와 아니스에게는 무의미했다.


매일까지는 아니지만,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시답잖은 잡담과 푸념. 5명이서 함께 마경을 떠돌던 중에는 나누지 못했던, 나눌 수 없던 이야기들.


-하멜 걔는 진짜 병신이야.


언젠가 세냐가 술에 취해서 통신을 걸었다. 무슨 일인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얼굴은 술기운으로 벌겋게 물들고, 그 와중에도 술은 계속 벌컥벌컥…….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섬뜩하지만, 세냐는 하멜의 혼을 봉인해 놓은 목걸이를 뺨에 비벼대면서 펑펑 울었다.


그때부터 유일하게 죽은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멜은 가족도 없고, 후손도 없었다. 당장은 기억되고 있지만 언젠가는 잊힐 것이 분명했다.


아니스와 세냐는 그것이 싫었다. 그들은 실패자였다. 모든 마왕을 죽이겠다고 결심했지만, 죽이지 못했다. 세냐와 아니스는 지금의 평화가 유폐의 마왕의 변덕과 자비로 얻어낸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은 유폐의 마왕성에서 돌아온 4명을 용사라고 칭송했다. 대체 마경에서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떤 고난과 역경을 넘어 유폐의 마왕성에 올라ㅡ 세상을 구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왔다.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한 적은 없었다. 세상은 그들의 여정과 결말을 영광스러운 위업이라 칭송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여정과 결말은 치욕스러운 실패였기 때문이다.


-……자서전을 쓰는 건 싫어. 거들먹거리면서 포장하는 것 같잖아. 내 실패담을 후대에 남기고 싶지도 않아. 아니스, 넌 어때?


-이번에 빛의 성경을 개간하는데, 그곳에 아니스 복음이라며 제 일대기를 넣고 싶다더군요. 후대를 위한 좋은 말씀까지 잔뜩 넣어서 말입니다.


-한다고 했어?


-미쳤습니까? 제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애걸하기에, 맥주를 끼얹고 귀싸대기를 때려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화책 같은 건 어때?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고, 슬쩍 세상에 내놓는 거야. 우리가 헬무드에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말이야.


-하멜을 위해서입니까?


-……뭐…… 이미 죽은 놈이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닥치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은 하멜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것 아냐. 나는…… 하멜이 망각되는 것이 싫어.


세냐는 그때부터 취미 삼아 동화를 쓰기 시작했고, 자신만만해하면서 아니스에게 검수를 부탁했다. 당연히 아니스는 그냥 읽기만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글을 더 적어 넣었다. 그리고 세냐가 그 원고를 돌려받고, 읽고, 글을 더했다…….


분명 처음의 취지는 하멜이 망각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용사와 동료들이 마경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세상에 나름대로 순화해서 알리기 위해서였다, 만.


도중부터 사심과 잡설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덕분에 우둔한 하멜이라 하여 300년이 흐른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정경. 수백 년 전에 수정구를 통해 보았던, 세냐의 방. 세냐는 밤늦게까지 수정구를 연결해 놓고 마법 연구를 하거나, 동화책을 쓰곤 했다.


그때 세냐가 앉아 있던 자리에.


지금은 유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아카샤를 어깨에 걸치고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라이언하트 본가를 떠나서 아롯에 온 이유는, ‘시그니처’에 관련하여 로베리안과 다른 마탑주들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시그니처는 8서클에 도달한 대마법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마법이다. 대마법사가 스스로 창작해 낸 오리지널. 평생 동안 익히고 추구해 온 마법의 실현. 시그니처는 대마법사 본인이 자부할 수 있을 만한 대마법이며, 가볍게 사용하지는 않지만 사용한다면 반드시 그만한 현상을 일으켜야 한다.


현시대에서 ‘대마법사’의 기준은 8서클이고, 유진은 아직 8서클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위치크래프트의 이터널홀에서 착안한 환염식은, 유진으로 하여금 1서클 높은 위계의 마법을 펼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아카샤. 드래곤하트를 통째로 사용해 만든, 이 사치스러운 지팡이와 메르의 보조까지 받는다면ㅡ 7서클까지의 마법은 이제 아무 부담 없이 쓸 수 있었다.


‘8서클의 마법은 무리지만.’


애당초 8서클의 마법이라는 것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 드높은 경지에 오른 마법사라면 이미 정립되어 있는 마법을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알맞고 즐거운 마법을 창안하는 것을 더 즐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진은 아무리 환염식과 아카샤를 써도, 8서클의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간단한 이유다. 8서클의 마법은 그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가 ‘없다’. 아무리 아카샤로 이해한다고 해도, 몸 안에 존재하는 서클이 마법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으으으음…….”


몇 번째인지 모를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진이 암실을 극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롯에 있던 적색마탑주ㅡ 로베리안에게 편지가 도착했다. 잘 지내고 있느냐는 안부의 편지였고, 유진은 백염식의 6성에 올랐다고 답장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편지가 돌아왔다. 경이적인 성취에 대한 축하로 시작해서, 여유가 된다면 시그니처의 창작 건으로 아롯에 방문해 주지 않겠느냐는 편지였다.


아롯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메르보다 아니스가 더 반가워했다. 세냐의 저택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유진에게는 별로 어려운 요구가 아니었다. 그는 아롯 왕가의 공인을 얻은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였고, 말 한마디 전하는 것으로 저택이 폐장한 새벽 시간에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크리스티나와 메르가 텅 빈 저택을 돌아보며 추억에 잠기는 동안.


유진은 의자에 앉아 시그니처에 대해 생각했다.


‘……시그니처라…….’


여태까지 유진이 사용해 온 마법들은 거의 모두가 아크리온에서 습득한 것들이었고, 유진 본인이 마법을 창작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유진은 자신에게 그런 감각이나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을 빠르게 익힌 것? 그건 유진이 마나에 대한 감응과 장악, 조작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 재능으로 이미 정립되어 있는 마법들을 익히는 것은 쉬웠다만…… 없던 마법을 새로 만드는 것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단 말이지.’


마법에 대한 재능이 없거나, 마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욕심조차 부리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유진은 마법으로 이미 대마법사 바로 아래 위계에 도달해 버렸고, 그렇기에 시그니처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유진이 바라는 것은 대마법사라는 감투는 아니었다.


시그니처가 가진 특별함과 의외성. 유진은 그것에 중점을 두었다. 베르무트의 환영과도 이야기했지만, 유진은 여전히 모든 마왕을 죽이길 바란다.


유폐의 마왕.


놈의 마왕성, 바벨. 그 정상에 올라서 유폐의 어전에 들어가야 한다. 베르무트가 경고했듯이, 유폐의 마왕은 유진이 바벨을 오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


‘바벨을 오르는 것에 가장 큰 난관이 될 것은 역시 유폐의 칼, 그 새끼지.’


전생에 하멜은 유폐의 칼보다 약했다. 그건,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럴듯한 시그니처를 만들어 둔다면 유폐의 칼과의 싸움에서 조커가 될 수도 있다. 아니, 꼭 상대가 유폐 칼일 때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라이자키아. 그 도마뱀 새끼를 잡을 때 요긴하게 쓸 수도 있잖아.’


뒤로 기울였던 의자를 바로 세웠다.


메르가 말하기를, 세냐는 이 저택, 이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위치크래프트와 이터널홀의 기초를 정립했다고 했다.


……미신 같은 것을 믿어본 적은 많지 않지만, 여기 앉아서 깊이 생각해 보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득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야, 아니스.”


“무슨 일입니까?”


유진은 너무 집중하느라 뻐근한 머리를 흔들었다. 가까운 창틀에 앉아 있던 아니스가 유진을 쳐다보았다.


“저기 걸린 세냐 초상화 말이야. 좀 얄밉게 생기지 않았냐.”


건너편 벽에는 커다란 세냐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답지 않게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놓은 초상화다. 시그니처 건으로 머리가 꽉 막혀서인지, 유진은 저 미소가 굉장히 얄밉게 느껴졌다.


“세냐는 원래 얄밉게 생겼습니다.”


“그것도 그런데, 저렇게 웃고 있으니 조금 더 재수 없게 느껴져.”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의자에서 내려왔다. 아니스와 메르도 저택을 다 돌아보았으니, 더 이상 저택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방을 나가기 전.


벽에 걸린 초상화를 힐긋 보았다. 몇 번이고 느꼈던 감상이지만, 초상화가 짓고 있는 저 미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세냐 딴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것일 테지만, 유진은 저 미소에서 세냐답지 않은 처연함과 공허함을 느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쁘다. 하멜로 죽을 때, 죽지 말아달라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세냐의 얼굴이 떠오른다. 세계수의 안에서, 미안할 짓은 하나도 하지 않은 주제에 미안하다며 울던 얼굴과도 닮았다.


“……다음에.”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아카샤를 망토 안에 넣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이 저택에. 봉인에서 풀려난 세냐와 함께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냐는 앞에 세워두고, 저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저 얼빠진 미소를 보라며 놀려주고 싶었다.


“이제는 어디로 갑니까?”


“적색마탑. 네가 같이 갈 이유는 없으니까, 다른 숙소에라도…….”


“굳이 따로 묵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설마 아롯의 마탑은 외부인에게 내줄 방 하나도 없을 만큼 각박한 겁니까?”


“내달라면야 내주겠지만…….”


저택을 나와서 밤거리를 걷는 중이었다. 유진은 투덜거리다 말고 앞을 보았다.


마도왕국이라 불리는 아롯의 수도, 펜타곤. 이곳의 거리는 그 자체로도 관광명소라 불릴 만큼 야경이 아름답지만, 지금은 늦은 새벽이다 보니 거리를 밝히는 불빛이라고는 창백한 가로등 빛뿐이었다.


그 아래. 땅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코트를 걸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나비 모양의 가면으로 눈가를 가렸고, 마스크까지 쓴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여자를 쳐다보았다. 망토 안에 들어가지 않고 곁에 서 있던 메르가 유진의 소매를 당겼다.


“저기서 대체 뭘 하는 걸까요?”


“모르는 척해.”


유진은 즉시 몸을 돌렸다. 적색마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저 여자가 서있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유진은 저 반쯤 미친 여자에게 붙들리느니 귀찮게나마 길을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왜 무시하는 거야?!”


여자의 정체는 백탑주, 멜키스 엘하이어였다. 그녀는 빽 고함을 지르며 가로등 아래에서 뛰쳐나왔다.


“라이언하트 꼬마, 난 말이야. 당연히 네가 놀라지 않을 걸 알고 있었어. 너는 굉장히 예리하니까 내가 무슨 변장을 하건 알아차렸겠지. 하지만 무시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그럼 대체 뭐라고 반응해주길 원한 겁니까?”


“백탑주님, 거기서 대체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렇게라도 물어보면 좀 좋니? 그럼 나도 유쾌하게 웃으면서, 가면을 벗고, 준비해 두었던 농담을 할 수 있었을 거야.”


멜키스는 나비 가면을 살짝 위로 들추고, 유진을 힐긋힐긋 보았다. 그녀는 아직 마스크는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무슨 농담을 준비했는지 궁금하지 않니?”


“안 궁금합니다.”


“궁금하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안 돼?”


“싫습니다.”


유진은 멜키스를 쳐다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 냉담한 반응에 멜키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마법까지 써가며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 예뻐?”


멜키스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 기울이며 마스크를 내렸다. 그녀의 입은 좌우로 찢어져 있었, 아니,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정말 쓸데없이 리얼한 그림이었다.


유진도, 메르도, 아니스도. 멜키스의 얼굴에 반응하지 않았다.


늦은 새벽, 창백한 가로등. 잠자코 기다리기도 심심해서, 을씨년스러운 가을밤의 분위기에 맞춰 준비한 농담인데…… 멜키스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흔드는 것으로 양 뺨의 그림을 지워버렸다.


“나는 백색마탑의 주인, 멜키스 엘하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바꾸었다. 멜키스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크리스티나에게 손을 뻗었다.


“유라스의 성녀후보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 만나서 반가워.”


지금 크리스티나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스였다. 그녀는 미소 한 점 없는 얼굴로 멜키스를 응시했다.


아니스는 방금 전의 멜키스가 시도했던 농담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멜키스의 외모가 꽤 아름답다는 것과, 유진에게 허물없이 다가오며 농담을 시도하려는 것에 작은 경계는 품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경계한다고 해서 바로 그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니스는 그렇게까지 얕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표정하던 얼굴에 방긋 미소를 지으며 멜키스의 인사에 화답해 주었다.


“……왜 여기 계신 겁니까? 그 몰골로 밤 산책을 하고 계신 것 같지는 않은데.”


“왜 뻔한 것을 물어보니?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왜 저를 기다리고 계시냐고요.”


“적탑주한테 얘기를 들었거든. 너, 시그니처를 만들 거라며?”


멜키스는 흐흥 웃으며 유진에게 몸을 기울였다.


“시그니처가 만들어야지 결심하고서 바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 러, 니, 까. 이 대마법사이자 대정령사인 멜키스 누나가 도와주겠…….”


“필요 없습니다.”


“너무 단호하다 얘……. 어른의 도움을 받아서 나쁠 것이 뭐가 있다고 그래?”


“뻔하잖아요. 멜키스 님이 맨입으로 도와주겠다고 할 리도 없고, 저한테 또 뭘 바라는 겁니까?”


“넌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니? 나는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널 도와주고 싶은 거야.”


“거짓말. 저한테 도움을 주었다는 걸 빌미로 해서 나중에 뭔가 요구하려는 거잖아요? 엘프한테 마법 가르친다는 걸 핑계 삼아 본가 숲도 자주 드나드시면서, 또 뭘 바라시는 겁니까?”


유진은 실눈을 뜨고 멜키스를 응시했다.


“아니라니까? 그냥 도와주고 싶은 거야. 나라고 너한테 맨날 뭐 바라기만 하는 줄 아니? 까마득한 선배로서, 후배 마법사를 도와주고 싶은 거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사심을 살짝 말하자면, 네 시그니처를 내 색으로 물들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기는 하지. 그래야 나중에 내가 네 덕을 좀 볼 수 있을 것 아니니? 대마법사 유진 라이언하트의 시그니처에 도움을 준 친절한 마법사 선배로 말이야.”


멜키스는 실실 웃으며 팔꿈치로 유진을 툭툭 쳤다. 성격과 행동거지가 이상할 뿐이지, 근본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행동거지가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미쳐있다. 정령사로서의 자질과는 별개로 멜키스 엘하이어라는 인간은 정령사의 수치다.]


머릿속에서는 템페스트가 으르렁거렸다.


시그니처


마법사의 대부분은 생활패턴이 박살 나고 밤낮이 뒤바뀌어 있다. 그래서 적색마탑을 비롯한 대부분의 마탑에는 통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마탑의 출입에는 엄격한 보안체계가 존재하기는 하다만, 마탑주의 제자인 유진은 그 보안체계에서도 자유로웠다.


“당신은 왜 온 거요?”


적색마탑주, 로베리안 서피스. 그는 제자와의 오랜만의 재회에 반가워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옆에 껴 있는 멜키스를 견제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눈썹을 콱 구기면서 멜키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밤중에 술이 과했던 것이오? 아무리 술을 진탕 마셨어도 적색마탑과 백색마탑을 헷갈리다니…… 내 지금 당장 백색마탑에 연락하여, 당신을 모셔갈 마법사를 부르도록 하겠소.”


“적탑주, 우리 사이에 왜 그래? 설마 지금 나한테 농담을 하는 건가? 미안, 당신이 농담을 하는 것은 드물어서, 내가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


“당신 집으로 돌아가란 말이오.”


“에이…… 또 그런다, 친구 사이에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말자구, 응?”


멜키스는 넉살을 떨면서 로베리안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 윙크에 로베리안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차마 ‘친구 사이’라는 말까지는 부정하지 않은 것이, 로베리안이 마법사 중에서도 흔치 않은 인격자라는 증거였다.


“……아……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적색마탑주를 맡고 있는 로베리안 서피스라고 합니다.”


로베리안은 역겨움으로 일그러졌던 표정을 가다듬고, 크리스티나를 돌아보며 쾌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도 엷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에 화답해 주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라고 합니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제가 알기론 당신은 아직 알카르트 교구의 보좌주교를 맡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보좌주교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성녀후보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조만간 공표될 예정입니다만, 저는 알카르트 교구의 보좌주교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성녀후보라는 호칭은 제게는 과분하게 들립니다.”


“그렇다면 크리스티나 님이라고 불러도 될는지요?”


“아롯의 적색마탑주님께서 그리 불러주신다면 저야 영광이고 감사한 일이지요.”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멜키스가 손사래를 치며 유진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후, 저런 대화 너무 낯간지럽지 않니?”


“멜키스 님이 상대에 대한 존중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닐까요.”


“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야.”


멜키스는 훗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로베리안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얇게 뜬 눈에 노골적인 짜증을 담아서 멜키스를 쏘아보았고, 멜키스는 못 본 체하며 손끝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적탑주, 당신 제자가 슬슬 시그니처의 창작에 들어간다면서? 나도 같은 마법사이자 선배로서 도움을 주려고 하니, 바로 아래로 내려가 보자고.”


“새벽 중에 찾아와서 뭔 소리를 하는 거요.”


“어차피 당장 잠은 안 잘 것 아냐? 늑장 부릴 이유가 어디에 있어? 적색마탑의 지하 연구동이 그렇게 튼튼하다는데,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고.”


멜키스는 의욕적으로 말했지만, 유진은 그녀의 바람에 따라주지 않았다. 하룻밤 걸러봤자 피로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잠을 자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멜키스는 깍깍 비명을 질러댔지만,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각각 방을 배정받고서 늦은 잠을 청했다.


“요즘 젊은것들은, 시간이 아까운 줄 모른다니까. 잘 필요가 없는데 굳이 뭐하러 자는 거야? 시간 아깝게.”


“꼰대처럼 말하시네.”


“꼰……! 나는, 마법사 선배로서 네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는 거야.”


“그렇게 말하니 한층 더 꼰대 같네요.”


유진이 그렇게 놀려대자 멜키스는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입을 다물었다.


‘누가 누구보고 꼰대래…….’


망토 사이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있던 메르는,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내뱉지는 못하고 입술만 삐죽거렸다.


평소 본가에서 시안을 갈구는 유진의 모습은 메르가 본 그 누구보다도 꼰대다웠고, 가끔 크리스티나의 입을 멋대로 사용하는 아니스도 만만치 않았다.


“시그니처에 대해서 구상해 놓은 것은 있습니까?”


로베리안은 지하로 안내하지는 않았다. 적색마탑의 지하연구동은 멜키스가 말한 것처럼 굉장히 튼튼하고, 예전에 유진이 적색마탑에서 지낼 때는 여러 번 신세를 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탑의 지하연구동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유진이 작정하고 마나를 풀어낸다면 굳이 마법을 펼치거나 검강을 일으키지 않아도 파괴되어 버린다.


그 사실은 로베리안도 잘 알고 있었기에, 붕괴의 위험성이 있는 지하연구동이 아닌 적색마탑의 옥상으로 유진을 안내했다. 이 탁 트인 옥상이 로베리안의 실험실이자 연습실이었다.


“솔직히 뭘 어떻게 구상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민은 많이 해보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로베리안은 빙긋 웃으며 로브의 안쪽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그가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투명한 장막 같은 것이 옥상을 에워쌌다. 외부에서 옥상을 관측할 수 없게끔 마법을 펼친 것이다.


“유진 님은 특별하니 더더욱 그럴 겁니다.”


“특별하다고요?”


“예. 대륙의 역사에서 마법을 쓰는 전사는 여러 명 존재했지만, 그들은 대부분이 어정쩡했지요. 전사로서의 실력도, 마법사로서의 실력도. 그 둘을 적절히 섞어 사용하기는 했지만, 빈말로라도 일류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님을 제외하고서 말입니다.”


로베리안의 말이 맞았다. 역사상 존재했던 대마법사들은 우직하리만큼 마법의 외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기사나 전사로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은 전투와 무도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유진 님을 가리켜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고들 하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유진 님은 이 어린 나이에 백염식의 6성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7서클의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경지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네 뭐…….”


“그래서 유진 님은 구상이 더 힘들 겁니다.”


유진은 로베리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에게 마법의 기초와 심화를 가르친 것은 로베리안이다. 그를 세냐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로베리안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런 대마법사가 직접적으로 ‘힘들다’라고 말하니, 도저히 가볍게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힘들다는 겁니까?”


“마법의 근본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겁니다.”


로베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지팡이를 앞으로 뻗자, 지팡이의 끝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사람은 도구를 쓰지 않고서는 손에서 불을 피워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법을 쓴다면 불을 피워낼 수 있죠. 마법이란 결국 그런 겁니다. 사람이, 아니,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기 위한 기술.”


“…….”


“조금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는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법을 쓴다면 하늘을 날 수 있죠. 평범하게 뛴다면 말은커녕 강아지보다도 느리겠지만, 마법을 쓴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멜키스가 킬킬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자, 이것 봐 꼬마. 나는 전사가 아니고, 코어도 없어. 몸에 마나를 두를 수는 있지만, 전사나 기사가 그런 것처럼 검강을 일으킬 수는 없지. 하지만 마법을 쓴다면, 검강과는 조금 다른 원리여도 비슷하게 마나의 칼날을 만들 수 있거든?”


멜키스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마법을 펼치니, 연청색의 마나가 술식에 따라 뭉쳐서 예리한 칼날이 되었다. 확실히 저것은 검강과는 다른, 마법의 칼날이었다.


“이건 검강이 아니야. 하지만 검강만큼 예리하고 튼튼하지. 너한테는 밀리겠지만, 어지간한 기사와 칼싸움의 흉내는 낼 수 있을걸?”


“……아하.”


유진도 둘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이해했다.


유진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다. 예리한 칼날이나 공격기가 필요하다면, 굳이 술식을 짜고 마법을 펼칠 것 없이 그냥 검강을 일으키면 된다. 빠르게 달리고 싶다면 속도에 관한 마법을 쓸 필요 없이, 그냥 백염식을 일으켜서 뛰면 되었다.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보통의 마법사와 다르다.


“그래서 힘들다는 겁니다. 유진 님, 대마법사에게 있어서 시그니처란, 평생 수행하고 연구하며 쌓아 올린 마법의 정수입니다. 보통은 수십 년에 걸쳐 마법을 연구하며, 자기 자신에게 딱 맞게 마법을 가꿔 나가면서…….”


“결론을 말하자면 꼬마, 넌 강한 마법사는 맞지만, 마법사로서는 굉장히 불완전해. 당장 너는 너만의 마법에 대해 제대로 구상해 본 적도 없고,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잖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전생부터 유진은 전사였다. 환생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이 편리하고 강한 것은 알았지만, 유진이 해 온 전투에서 마법은 단 한 번도 주가 된 적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필요한, 새로운 마법을 연구해 본 적이 없었다.


“……뭐 그렇죠. 저는 솔직히 마법을 쓰는 것보다는 몸으로 직접 싸우는 편이 편합니다.”


“하지만 마법을 아주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하늘을 아는 것은 마법을 통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효율이 좋을 겁니다.”


“예…… 그 외에는…… 음…… 원거리의 적을 공격하는 것이나…… 움직임에 블링크를 섞는 것도 자주 쓰긴 합니다. 공간마법으로 변칙을 주는 것도 좋아하고…….”


얘기를 하면 할수록 유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려서부터 많은 편의를 봐주고 제자로 받아 마법을 가르쳤으며, 언제나 자기편을 들어주었던 로베리안의 앞에서 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스승의 속내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스승은 자신의 가르침이 제자에게 가치 있게 쓰이길 바랄 것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유진 님에게 있어서 마법은 전투의 보조일 뿐이라는 것이군요.”


“예…… 죄송합…….”


“왜 사과를 하는 겁니까?”


로베리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로베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그게, 스승님이 기껏 제게 마법을 가르치셨는데. 제가 스승님이 가르치신 마법을 소홀히 하지 않았나…….”


크리스티나의 눈을 통해 지켜보고 있던 아니스는 지금의 상황이 꽤나 즐거웠다.


난폭하고 망나니 같던 하멜이, 저 말끔한 마법사에게 잔뜩 주눅 들어 눈치를 보고 있다. 게다가 스승? 제자가 스승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용병시절의 하멜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


[제가 키운 겁니다.]


아니스는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크리스티나에게 속삭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멜이 동료로 들어온 순간부터, 아니스는 하멜의 행동거지와 정신머리에 대한 교정을 오랫동안 해왔다. 가장 문제였던 지저분한 주둥이는 끝내 교정하지 못했지만, 스승에게 욕은 하지 않고 있으니 교정의 성과라 할 수 있으리라.


“유진 님. 마법사가 마법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온전히 자신의 문제인 겁니다.”


로베리안은 유진의 말뜻을 이해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분명 저는 유진 님에게 마법을 가르쳤지만, 유진 님이 순수한 마법사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저부터가 유진 님이 그런 흔한 마법사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유진 님의 자질은 마법사만 하기는 아까웠으니 말입니다.”


“크흠…….”


“유진 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시그니처는 마법사가 수행하고 연구하며 쌓아 올린 마법의 정수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법사 본인이 ‘어떤’ 마법을 다뤄왔느냐.”


전투의 보조.


“유진 님은 공격에 관하여 마법을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유진 님은 굳이 마법을 쓰는 것보다 더 강한 공격을 할 수 있으실 테니까요. 전투의 보조. 유진 님 본인이 그를 바란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다. 시그니처의 방향성은 그렇게 정하는 겁니다.”


“방향성을 정했으면 술식을 짜고 쌓아 올려야지. 마법은 일어날 리 없는 현상을 일으키는 거야. 폭우 속에서 불꽃을 피우거나, 한여름에 눈보라를 일으키듯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잘 짜 맞춘 술식으로 일으키는 거지.”


멜키스는 킬킬 웃으며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잔뜩 얘기만 들어봤자 이해가 잘 안 될 테니, 이 대마법사이자 대정령사인 멜키스 엘하이어님의 시그니처를 보여주지. 영광으로 알아, 내 시그니처를 본 사람 중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은 드무니까.”


“드물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 다른 마탑주나 트렘펠 공도 당신의 시그니처는 봤잖소.”


“폼 잡고 있을 때 괜한 말로 분위기 망치지 좀 마!”


멜키스는 로베리안을 흘겨보고서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꼬마. 너도 알다시피, 나는 대륙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령사야. 무려 번개의 정령왕과 땅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지. 그런 내 시그니처는, 당연히 정령에 관한 거야. 그 이름하야.”


로베리안은 멜키스의 시그니처를 알고 있기에 훌쩍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유진과 크리스티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해 주었다.


유진은 그 부름대로 뒤로 물러서면서, 탑의 중앙에 우뚝 선 멜키스를 궁금증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령합체, 트리니티 포스.”


멜키스의 두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ㅡ쿠르르릉! 적색마탑의 하늘에 순식간에 시커먼 뇌운이 생성되었다. 가공할 마나가 멜키스의 몸을 휘감았다. 적색마탑 주변의 대지가 통째로 치솟아 올랐다.


멜키스의 몸이 하늘에 우뚝 섰다. 저 아래에서 올라온 대지가 멜키스의 몸을 휘감더니, 어떠한 형상으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ㅡ꽈르릉! 뇌운이 쏟아낸 번개가 흙의 형상을 휘감으면서 전류가 번쩍였다.


유진과 메르, 크리스티나는 할 말을 잃고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멜키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적색마탑 하늘에 나타난 것은ㅡ 흙으로 빚어낸 거대한 멜키스 엘하이어였다. 흙으로 만든 인형…… 굳이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정말로 흙색인 것은 아니었다.


정령합체 트리니티 포스. 그건 그냥, 멜키스가 거인이 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저 몸뚱이가 진짜 멜키스인 것은 아니었다. 멜키스는 저 거대한 흙인형의 중심부에 존재하며, 정신과 흙인형의 몸뚱이를 링크시켜 완벽하게 조종하고 있었다.


“어때?”


허공에 웅크린 트리니티 포스, 거대한 멜키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짓는 미소는 자그마한 인간 멜키스와 똑같았다.


“흙을 빚어내어 만든 이 육감적인 몸뚱이. 완벽하게 내 신체 사이즈와 맞춰낸 거지. 옷차림을 바꾸는 것도 자유야.”


“…….”


“내 시그니처가 대단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지! 이 몸뚱이는 흙의 정령왕의 현신과 다름없기에, 이 상태의 나는 내 의지대로 대지를 마음껏 지배할 수 있어. 그리고 이 거체를 움직이는 모든 에너지는 번개의 정령왕의 힘!”


멜키스가 거대한 손을 활짝 펴 보였다. 그녀가 검지와 엄지를 튕기자, 가공할 번개의 힘이 그녀의 손끝에서 모여들었다.


“후후후! 트리티니 포스의 나라면 손가락 한 번 움직이는 것으로 왕궁 아브람을 수장시킬 수 있을지도……?”


“이 자리에 트렘펠 공이 없어 다행이군.”


“나도 그 왕가에 충성하는 아저씨 앞에서 이런 말은 안 하거든?”


“괜한 소리 말고 내려오시오. 예전에도 말했지만, 백탑주 당신의 시그니처는 뛰어나고 훌륭한 것과는 별개로…… 겉모습이 끔찍하오.”


“내 얼굴이야!”


“굳이 자기 모습 그대로 만들 필요는 없잖소.”


“나는 나를 사랑해.”


거대한 멜키스가 양손으로 꽃받침을 만들고 턱을 괴었다. 로베리안은 질색이란 얼굴을 하고서 하늘에서 시선을 때었다.


“……겉모습은 끔찍하지만, 백탑주의 시그니처는 좋은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쌓아 올린 마법의 정수, 그리고 이상을 실현한 모습이니까요.”


유진도 아카샤를 쥐고서 트리니티 포스를 엿보았고, 로베리안의 말에 공감했다.


정령합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멜키스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사용해서, 땅과 번개의 정령왕의 합체시킨 것이다. 그 실체를 마나로만 구성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우니, 대지의 정령왕의 힘인 흙으로 몸을 빚고, 번개의 정령왕의 힘인 번개로 에너지를 충당했다. 그것으로 멜키스는 두 정령왕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면서, 자신의 마법까지 강화한 것이다.


“나만 보여준 것은 억울한데, 적탑주. 당신은 안 보여줄 거야?”


“재촉하지 않아도 보여줄 겁니다.”


로베리안은 유진에게 충분히 물러선 뒤에, 양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판테온.”


이 시그니처에 긴 영창과 복잡한 술식은 필요하지 않다.


적색마탑주 로베리안의 특기는 소환마법. 그의 시그니처, 만신전 판테온은 다른 대마법사의 시그니처처럼 마법이란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소환물을 소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로베리안의 판테온은 압도적인 속도의 이점을 갖는다. 멜키스의 트리니티 포스는 영창과 발현에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건 다른 대마법사의 시그니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로베리안의 시그니처는, 수인을 맺고서 ‘판테온’이라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이차원에서 ‘문’을 소환한다.


ㅡ쿠웅!


거대한 문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복잡한 음각이 가득한 문. 과거 제네릭과의 결투가 끝나고, 결과에 승복하지 않으려던 제네릭은 로베리안이 판테온과 함께 떨어진 순간 적의를 억눌렀었다.


그만큼 이 판테온은 이질적이며 까다롭다. 압도적인 속도도 강점이만, 판테온이 다른 시그니처들과 비교해서 갖는 또 다른 강점은 변칙과 의외성에 있다.


“이 문 자체가 제가 평생을 들여 만들어 낸 소환물입니다.”


로베리안은 바로 옆에 세운 판테온의 철문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리고 이 문과 연결된 이차원에는, 제가 평생 수집하고 만들어낸 소환물, 소환수들이 들어 있죠.”


지하 깊은 던전에서 웅크리고 있던 고대의 괴물. 몬스터끼리 교배시켜 만들어낸 우성잡종. 키메라. 마도서 따위에 봉인되어 있던 실체 하는 저주 등.


살아 있는 것뿐만이 아니다. 로베리안과 적색마탑의 마법사들이 만든 골렘 따위의 소환물과 스스로 움직이는 살아 있지 않은 괴물들도 판테온의 안에 잠들어 있다.


“이 문에서 어떤 소환수와 소환물이 나올지는 오직 저만이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을 여는 것으로 제 모든 소환수와 소환물을 해방하여 대군을 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그니처라 자부하기 부족하죠.”


로베리안은 빙긋 웃으면서 유진을 돌아보았다.


“저는 문 안의 소환수와 소환물을 조합할 수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문 안에서 키메라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어떤 조합으로 합성하느냐에 따라 써먹을 곳이 달라지고, 소환수의 힘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적탑주의 판테온이 상대하기 힘든 거야. 가뜩이나 문 안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는데, 기존의 소환수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합성수의 힘은 예측이 전혀 안 되거든.”


트리니티 포스가 흩어지고, 멜키스가 하늘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가장 끔찍한 것은, 판테온 안에서 소환수의 조합에는 정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100마리의 소환수와 100개의 소환물을 통째로 섞어서, 오직 장점만을 취한 1개의 무언가를 만들 수도 있다는 거지.”


“해본 적은 없습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야 할 일이 생기기도 바라지 않습니다.”


로베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판테온을 역소환했다.


“보셨다시피, 제 판테온은 소환술사로서의 극을 추구한 겁니다. 제 시그니처가 유진 님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판테온과 트리니티 포스…….”


감탄하고 있던 유진이 중얼거렸다.


“……그…… 시그니처의 이름은 스스로 지어야 하는 겁니까?”


“예?”


“스승님이 지어주시면 안 되나 싶어서…….”


“꼬마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그니처는 마법사의 정수이자 이상을 실현하는 거라고! 당연히 자기가 이름을 지어야지!”


멜키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쏘아붙였다. 그건…… 그건 유진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작명에 별 자신이 없었다.


“이그니션.”


메르가 속삭였다.


“수라광살.”


“뒤진다 너.”


“이클립스.”


유진은 표정을 콱 구기면서 메르의 양 볼을 꼬집었다.


“아파여.”


“거짓말 마. 너 아픔 못 느끼잖아.”


“마음은 아파여.”


그렇게 말하는데 사람으로서 어떻게 계속 꼬집을 수 있겠는가? 유진은 슬며시 메르의 뺨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유진 님, 저는 이클립스라는 이름은 꽤 멋지다고 생각해요. 유진 님도 많은 고민을 하고 지은 이름이잖아요? 실제로 비슷하기도 하고. 일식처럼 태양을 검게 물들이는…….”


유진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메르의 얼굴을 망토 안에 욱여넣었다.


“이클립스가 뭐야?”


멜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유진은 입술을 꾹 닫았다.


‘……그래도 이클립스가 수라광살이나 데드엔드보다는 낫지 않나…….’


내심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시그니처


유진에게 있어서 이 몇 달은 마법에 처음 입문했을 때 이상으로 마법에 충실하고 맹목적인 시간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독파를 끝낸 적색마탑의 마도서를 재독했고, 아크리온을 1층부터 최상층까지 재순회했으며, 멜키스를 꼬드기고 협박하여 백색마탑의 진귀한 마도서까지 빌려냈다.


그렇게까지 열중하니 자연스레 소문이 돌았다. 사실 열중하지 않았어도 소문은 날 수밖에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이 너무 유명했기 때문이다.


라이언하트와 연관 된 것을 제치고서도, 유진은 아카샤의 주인이자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였다. 그런 유진이 벌써부터 시그니처를 연구하며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유진은 아롯의 폭풍의 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아롯의 왕가였다. 과거 아롯에 유학하던 시절부터 유진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왕세자, 호네인 아브람이 궁정마법사단장인 트렘펠 위자도르와 함께 직접 적색마탑을 방문했다. 호네인은 대여라는 명목으로 왕궁의 마법서고의 마도서를 여러 권 빌려주었다.


그다음에 찾아온 것은 청색마탑주인 히리두스 우즐렌. 그는 적색마탑 소속이 아닌 자신이 조언하고 가르침을 주는 것이 실례되는 일이 아닐까 걱정하여, 로베리안에게 먼저 양해를 구한 뒤에야 유진을 찾아왔다. 히리두스는 트렘펠과 마찬가지로 구상 중인 시그니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대마법사의 관점에서 조언을 해주었다.


녹색마탑주, 제네릭 오스먼은 찾아오지 않았다. 저번에 유진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굴욕과 분노를 아직 떨쳐내지 못한 것일까. 얘기를 듣자 하니, 그는 결투가 끝난 날 이후로 녹색마탑의 최상층에 처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별 상관은 없었다. 녹탑주가 어느 관점에서 조언을 해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유진은 이미 마탑주 3명과 궁정마법사단장에게 조언을 들었다.


그리고 녹탑주의 시그니처, 위그드라실은 이미 한번 봐두었고, 그 이전 단계의 마법인 디바인트리는 아카샤로 이해해 두었기에, 유진이 직접 펼치는 것도 가능했다.


“기왕이면 메르데인 광장 쪽에는 가지 마. 시내 가게에서 녹색 글자나 문양이 새겨진 가게도 가지 말고.”


“왜요?”


“몰라서 묻니? 메르데인 광장은 녹색마탑의 앞마당이야. 간판에 녹색 글자나 문양이 새겨진 곳은 녹색마탑을 후원하는 가게고. 당연히 그런 가게에는 녹색마탑의 마법사들이 득실거린다구.”


“제가 뭐가 무서워서 걔들을 피해 다닙니까?”


“나는 널 걱정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괜히 너한테 시비를 걸고 된통 처맞을 녹색마탑의 마법사들을 걱정하는 거야. 탑주가 처맞고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것도 불쌍하고 서러운데, 자기들까지 처맞으면 속 터져서 자살할 수도 있잖아.”


멜키스가 혀를 쯧쯧 차며 건네는 조언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유진은 메르데인 광장에도, 시내의 주점이나 식당, 마법 물품을 파는 상점에 갈 일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함께 온 것은 유진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틈만 나면 시내의 맛집을 가자고 졸라대던 메르를 크리스티나에게 전담시켜 두면, 유진은 쾌적하게 시그니처의 구상에 전념할 수 있었다.


ㅡ흑색마탑주.


발자크 루드베스는 여러 번 적색마탑에, 그리고 유진에게 편지를 보냈다. 대마법사가 될 발판에 올라선 것을 축하드리며, 시그니처의 구상에 조언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하지만. 적색마탑주인 로베리안은 흑마법사를 깊이 혐오하고, 그건 유진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300년 동안 세상이 크게 바뀌고, 흑마법사의 입지가 달라졌다고는 해도 유진에게 있어서 흑마법사는 그냥 흑마법사였다.


물론 최근에 신성제국에 다녀오면서, 어쩌면 요즘 시대의 흑마법사도 사실은 썩 괜찮은 녀석들이 아닐까……. 특히 아롯의 흑색마탑 정도면 굉장히 인도적이고 상식적인 마법연구시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만.


그래도 흑마법사는 흑마법사다. 면전에서 쌍욕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죽이려 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유진이 많이 참고, 이 시대에 나름대로 적응을 맞췄다는 증거였다.


“드디어 시간을 내주셨군요.”


결국은 만났다. 발자크의 열렬한 요청에 먼저 마음이 꺾인 것은, 유진이 아닌 로베리안이었다. 그는 발자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존중은 하고 있다. 흑마법사를 혐오하고 있지만, 발자크 본인과 그가 지배하는 흑색마탑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같은 마탑주. 대륙 역사에 틀림없이 이름을 남길 대마법사가, 며칠에 한 번꼴로 편지를 보내오니 로베리안도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베리안은 유진에게 슬며시 흑탑주를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고, 유진도 못 이기는 척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흑색마탑이 궁금하기도 해서요.”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흑색마탑을 올려다보았다.


수도 펜타곤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이 마탑은, 가진 이름처럼 흑요석을 깎아 만든 것처럼 새카만 색이다. 그리고 마탑 아래의 광장에는 검은 장미가 가득 피어 있어서, 공간 자체의 분위기가 음습하고 칙칙하게 느껴졌다.


“저 장미. 일부러 저렇게 만들어서 심으신 겁니까?”


“예.”


“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미관상으로 그리 보기 좋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그렇게 생각해 달라고 심은 겁니다. 저도 그렇지만 흑색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주변에서 그리 좋은 시선을 받지는 않는 데다가, 그런 눈초리를 해명하느니 아예 무시해 주기를 바랍니다. 저 불길한 빛깔의 장미를 가득 심으면, 기분이 나빠서라도 가까이 안 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발자크는 빙긋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색마탑의 광장은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대부분이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었다. 다양한 색이 어우러진 꽃밭이야 흔하지만, 검은 장미만 가득 찬 꽃밭은 세상에 드물다. 그렇다 보니, 검은 광장은 아롯에 사는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로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예상치 못했습니다만, 나쁘지는 않다 생각합니다. 탑에서 검은 장미밭을 내려다보는 것도 꽤 즐겁거든요.”


과연 예상하지 못했을까. 유진은 발자크의 미소를 힐긋 보고선 다시 흑색마탑을 올려다보았다. 색만 다를 뿐이지, 마탑의 형태는 적색마탑이나 다른 마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흑색마탑의 내부는 적색마탑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사람의 시체 같은 것은 당연히 없고 말입니다.”


“소문에 따르면 흑색마탑이 세워진 토지는 오래전에 공동묘지였다던데요. 지금도 마탑 지하에는 뒷골목에서 죽거나 실종된 신원미상의 시체가 쌓여있고.”


“아롯은 선진국입니다. 치안도 뛰어나고, 생활 대부분을 마법에 기댈 만큼 마법이 생활에 녹아든 나라죠. 이런 나라에서 신원미상의 시체가 나와 봤자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기분 나쁘지는 않으십니까?”


“너무 많이 들은 오해라 괜찮습니다. 오히려 유진 님의 의심은 고전적이라 반갑게 느껴지는군요.”


발자크는 큭큭 웃으며 흑색마탑의 문을 열었다. 유진은 그를 따라 들어가면서 감각을 집중해 보았지만, 기대했던 것 같은 시체 썩는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흑색마탑 내부의 정경은 발자크가 말한 것처럼 적색마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령술이 대표적인 흑마법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사령술이 흑마법의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발자크는 유진이 시체의 냄새를 찾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면서 유진을 안내했다.


“그리고 저는 사령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령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결국 죽은 시체를 일으켜 세우거나 혼을 불러내고 주무르는 것이 고작인데, 그건 마법으로서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도덕적인 이유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군요.”


유진은 발자크의 뒤통수를 빤히 보면서 물었다. 그 질문에 발자크는 잠깐 침묵했으나, 곧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솔직히 말하면 그렇죠. 제가 사령술을 지양하는 이유는, 단지 사령술이라는 뻔한 마법이 마법사로서의 저를 매료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흑마법에 매료된 것은…… 확실하게 존재하는 ‘마왕’에게서 힘을 받아, 보통의 마법으로 이뤄내지 못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점. 신성마법이 그런 것처럼, 마왕에게 기대어 기적과 같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점이었죠.”


흑색마탑에도 마법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있었다. 발자크는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서 최상층의 버튼을 눌렀고, 유진은 한 걸음 늦게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제가 사령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지, 사령술도 대단한 마법이죠. 당장 저와 같은 유폐의 삼마 중 한 명인 아멜리아 머윈, 그녀가 가공할 능력을 가진 사령술사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아멜리아 머윈.


그녀의 이름이 나온 순간,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 이름은 유진의 가슴 밑바닥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었다. 아멜리아는 하멜의 무덤을 더러운 발로 짓밟았고, 하멜의 시체를 데스나이트로 만들었다.


그때의 유진은 아멜리아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지금은?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지하무덤에서 아멜리아가 드러냈던 존재감은 유진으로서도 신중히 경계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강했다.


“흑탑주님과 아멜리아 머윈이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발자크가 먼저 내렸다. 그는 검은 융단이 깔린 복도를 앞서 걸으며 유진을 안내하다가, 대뜸 들려온 질문에 뒤를 돌아보았다.


“뜬금없는 질문을 하시는군요.”


“다들 좋아하면서 궁금해하는 질문 아닙니까?”


“그렇기야 하겠지만, 본인에게 직접 묻지는 않을 겁니다.”


“에이, 누가 저한테 그런 걸 묻는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겁니다.”


“그 답변으로 우위에 설 수 있다면 그렇겠죠. 만약 싸운다면, 제가 아멜리아 머윈에게 질 겁니다.”


발자크는 쓴웃음을 머금고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지는 겁니까? 흑탑주님은 흑탑주고, 8서클의 대마법사잖습니까. 흑마법사가 되기 전에는 차기 청탑주로 낙점된 천재 마법사셨다면서요?”


“천재마법사라. 역대 마탑주 중에서 그렇게 불리지 않았던 마법사가 있을 것 같습니까? 마법사의 세계에서 천재란 수식어는 굉장히 가볍습니다.”


불쾌할 법도 한 질문이고 대화다. 어쩌면 가슴 깊은 곳에서 짜증과 분노를 느낄지도 모를 일이지만, 발자크는 그를 내색하지 않았다.


“제가 천재이듯이 아멜리아 머윈도 천재입니다. 그리고 저와 그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다는 겁니까?”


“저와 에드몬드 코드렛은 원래부터 마법사였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대부분의, 아니, 거의 모든 흑마법사는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원래부터 마법사였다가, 마법사로서 대성하지 못할 것 같아 마족과 계약하거나…… 보통과는 다른 마도를 추구하고자 흑마법사로 눈을 돌립니다.”


흑색마탑의 최상층. 검은 복도의 끝에는 발자크의 집무실이 있다. 그 문은 화려함 따위는 일절 없이 깔끔한 검은색 문이었다. 발자크는 손을 뻗지 않았지만, 문은 스스로 열리며 발자크와 유진을 환영해 주었다.


“예전에 유진 님이 사막에 간다고 하실 때, 제가 아멜리아 머윈에 대해 경고를 해드렸던 적이 있지요.”


-그녀는 특별하죠.


-그녀는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하기 전부터 대단한 흑마법사였습니다.


“아멜리아 머윈. 그녀도 본래부터 마법사였지만, ‘계약’을 맺지 않고 스스로 흑마법사가 된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멜리아 머윈은 인간이면서도 계약 없이, 스스로 마기(魔氣)를 이해하고 마력(魔力)으로 정제해 내어, 흑마법을 펼쳐냈다는 겁니다.”


유진이 그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마기란 본래 마족과 마물에게만 허용된 불길한 힘이다. 인간이 마기를 자유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마족과의 계약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간혹 인간 중에서ㅡ 극소수의 몇몇이 스스로 마기를 지배해내곤 한다. 300년 전에도 그런 인간이 몇 명 있었다.


유진은 그렇게 거듭나 버린 흑마법사가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인간들은 끔찍하고 흉험한 운명의 주인이 된다. 인간이되 인간 같지 않은 짓을 해대고,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본질적으로 마족과 같게 변해 버린다.


“제가 아는 한, 지금 시대의 헬무드에서 아멜리아 머윈처럼 스스로 마기를 지배하고 흑마법에 입문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저와 아멜리아 머윈은 흑마법사로서의 역량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폐의 마왕님이 아멜리아 머윈을 특별히 대하며, 많은 자유를 주고 계시는 겁니다.”


원래부터 거물이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물이란 말이다. 오히려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유진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멜리아 머윈이 그만큼이나 강하고 특별하다면, 서두를 필요 없이 충분히 준비하고 확신을 얻었을 때 죽여 버리면 되는 것이다.


“초라한 방이라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제가 어지럽고 난잡한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라.”


발자크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의 말처럼, 발자크의 집무실은 마탑주의 집무실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초라했다.


아니, 초라하다기보다는 있는 것이 없었다. 커다란 책상과 의자. 응접을 위한 소파…… 이런 방이라면 흔히 있는 책장도 없고, 정체 모를 마법도구 따위의 물건도 존재하지 않았다.


“깔끔해서 좋네요.”


“서 계시지 말고 편히 앉으시죠. 음료는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차면 됩니다. 종류는 상관없고요.”


유진의 대답을 들은 발자크가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소파 아래의 그림자에서 자그마한 인형 같은 것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그림자 인형이 탁자 위로 올라오더니 제 몸 안에서 큼직한 찻주전자와 찻잔을 꺼내 테이블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역마입니다.”


“설마 저 몸 안에서 차를 만든 겁니까?”


“설마요. 흑색마탑의 그림자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래층의 조리실에 요구하면, 그림자를 통해 음식이나 음료가 보내지는 겁니다.”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그림자의 몸 안에서 튀어나온 차를 그다지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진은 찻잔을 앞에 두고서 발자크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시그니처의 구상은 어떻게 돼가고 계십니까?”


노골적인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발자크는 찻잔을 손가락에 걸치고서 여유로이 물어왔다.


“구상은 끝났고, 지금은 술식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기초 술식의 연계는 쉽지 않겠지만, 사실 시그니처의 구상에서 그 단계가 가장 즐겁지요.”


마법의 창작은 답을 미리 정해놓고 공식을 짜는 것과 같다. 다른 마법의 술식을 분해해 끼워 넣건, 아니면 스스로 0부터 술식을 짜 올리건. 어떤 식으로든 처음에 정해놓은 답이 현상으로 발현하면 된다.


시그니처쯤 되는 마법이라면 정해놓은 답이 터무니없고 불가능한 공상이 되게 마련. 어떻게 발현되고, 무엇이 일어나는지는 이미 정해두었다만ㅡ ‘왜’, ‘어떻게’ 그런 마법이 발현되는가를 충족시키도록 술식을 짜는 것은 머리를 터지게 할 만큼 복잡한 일이다.


하지만. 발자크가 말한 것처럼 지금 단계가 가장 즐거운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저런 마법 술식을 쌓아가며, 서로 다른 마법을 연계시킨다. 그렇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법의 술식이 복잡하고 장황해지는데, 어느 정도 형태가 잡히면 깎아내는 작업에 들어간다. 필요 없는 술식을 거르며, 이 부분이 없어도 원했던 현상이 일어나도록 매끄럽게 다듬는 것이다.


“시그니처의 형태와 술식에 대해 묻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니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이름 정도는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름…….”


“왜 그러십니까?”


“아직 안 정했습니다.”


거짓말이다. 정해두긴 했는데,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이름 먼저 말하기가 민망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하다 보면 현실에 타협하여 조금씩 결과물이 바뀌게 마련이다.


유진은 지금 정해놓은 이름은 최초에 구상할 때 발현될 모습을 상정하고 만든 것인데, 만약 도중에 타협해 버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노선을 틀어버리면? 그럼 정해놓은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텐데, 미리 말해 버리면 나중에 굉장히 부끄럽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로베리안과 멜키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메르에게는 의도치 않게 알려 버렸는데, 메르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박수를 짝짝 치며 이렇게 말했다.


-드래곤 버스트보다는 낫네요.


“……흑탑주님의 시그니처는 이름이 뭡니까?”


“블라인드(Blind)입니다.”


심플하고 괜찮게 들렸다.


“눈을 가리는 겁니까?”


“비슷한데,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유진 님이 구상 중인 시그니처에 대해 말해주신다면, 저도 기꺼이 블라인드가 어떤 마법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제 시그니처는 아직 완성도 안 됐는데, 흑탑주님의 블라인드는 이미 완성된 거잖습니까.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에는 흑탑주님이 너무 손해인 것 아닙니까?”


“상관없습니다. 제 시그니처는 뭔지 알고 있어도 대처하기 힘드니까요. 뭐 그건 다른 대마법사의 시그니처도 전부 그럴 테지만 말입니다.”


발자크는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에는 대마법사다운 자부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유진은 저 정도로 자신감을 내비치는 발자크의 시그니처가 궁금했지만,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그에게 아직 완성도 되지 않은 시그니처에 대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우선 이것을.”


발자크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닥에 만들어진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치솟아 올랐다.


유진은 책상에 올려진 낡은 공책과 책들을 빤히 보았다. 모두가 인쇄된 것이 아닌, 손으로 직접 써낸 수기였다.


“이게 뭡니까?”


“제가 흑마법사가 되기 전. 청색마탑에서 차기 마탑주로 거론될 때 구상하던 시그니처의 연구 자료입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 낡은 수기들은 천문학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발자크는 8서클의 대마법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마법사를 목전에 두고 있던 최상위의 마법사가 평생 동안 바친 마법,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 자료인 것이다. 당장 아롯의 암시장에 경매 상품으로 건다면, 터무니없을 만큼의 돈이 움직일 것이 뻔했다.


“이걸 제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제게는 폐기 된 자료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유진 님도 그 자료에서 설계되는 시그니처를 모방할 생각은 없을 것 아닙니까?”


발자크는 웃으면서 유진에게 연구자료를 밀어주었다.


“제가 이 자료를 드리는 것은, 술식을 쌓아 올리고 가다듬고 연마하는 요령을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입니다.”


“너무 좋은 것이라 부담스러운데…… 돈이라도 받으시는 편이?”


“사양하겠습니다. 어차피 저야 제자도 없고, 지금 제 수준에서 과거의 연구 자료를 보아봤자 부끄럽기만 하거든요. 아,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형편없어서 부끄럽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발자크는 쓰고 있던 안경을 올려 쓰며 연구자료를 응시했다. 안경알 너머에서 검푸른 눈동자가 찡그려졌다.


“과욕을 부리며 순수하던 시절을 회고하기 부끄러운 것이죠. 그래서 그 자료를 흑색마탑의 도서관에도 둘 수 없는 겁니다. 이 마탑의 흑마법사들은 저를 존경하고 있으니, 제 부끄러운 시절을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저한테는 괜찮다는 겁니까?”


“유진 님이야 저를 싫어하고 계시잖습니까. 오히려 그 자료를 통해 저를 조금은 다시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흑탑주님이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착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또 확실한 것이 있는데, 흑탑주님은 제가 봤던 흑마법사들 중에서 제게 제일 잘해주십니다.”


이건 사실이었다. 전생에 봤던 흑마법사들은 죄다 하멜을 죽이려 들거나 겁에 질려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였고, 그건 유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발자크는 유진을 죽이려 들지도 않고, 꺼려 하지도 않는다.


재능 있는 후학한테 호의를 보이는 것이야 녹탑주를 제외한 다른 대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만…… 유진은 발자크의 호의가 순수한 것인지, 아니면 흑마법사의 길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인지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게이는 아니라고 했는데…….’


그게 사실은 거짓말이 아닐까. 유진이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할 때쯤, 발자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남을 청한 것은, 유진 님에게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예?”


“여태까지 항상 그랬잖습니까? 제가 아롯을 떠날 때에는 나하마의 아멜리아 머윈에 대한 경고를 해주고, 그녀에게서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친서까지 손에 쥐여주셨죠. 그리고 저번 청문회 때 아롯에 왔을 때에는, 나찰공주가 접촉해 올 것을 경고하셨고.”


유진의 말을 가만히 듣던 발자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사실 저로서는 유진 님과 가볍게 만나고 싶습니다만, 유진 님이 그를 바라지 않으시다 보니…… 항상 만나야 할 때에 만나도록 억지를 부리니, 이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흑탑주님은 결혼 안 하십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발자크가 드물게 정색하고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유진은 더 하고 싶던 말을 삼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게 무언가 경고를 해주시려는 겁니까? 나찰공주가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 답니까?”


“헬무드를 등진 나찰공주의 행동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발자크는 아직 마시지 않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선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저번에 라이언하트의 흑사자 성에서 내란이 있었다 들었는데.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정확히 무엇을 한 겁니까?”


“소문은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내란을 주동하고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은 들었습니다. 사악한 의식을 벌였다던데……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그랬는지가 참 우습더군요. 소문으로는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가주가 되기 위해 반역을 시도했다던데…… 하하!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 뻔한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더군요.”


“제가 말씀드리기 힘든데.”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벌였다는 사악한 의식은 흑마법이겠지요? 그렇다면 제가 흑마법사의 관점으로 보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건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당시 이오드가 벌인 짓은 제법 명확하게 해석되었다. 놈이 과시욕으로 가득 차서 써 갈긴 일기장은 이오드가 무엇을 겪고,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가 속속들이 적혀 있었다.


마창과 분쇄추에 남아 있던 마왕의 잔재. 그 불길한 존재가 어둠의 정령에 깃들고, 본가의 피를 가진 이오드를 꼬드겨 사악한 의식을 벌였다. 의식이 성공했다면 잔재는 육신을 가진 어둠의 정령왕이 되었을 거고, 제때 막지 못한다면 새로운 마왕이 되었을 거다.


ㅡ그것은 적탑주와 백탑주의 관점에서 내놓은 해석이다. 유진은 당신의 마법진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흑탑주가 마법진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조금은 궁금했다.


궁금할 뿐. 알릴 생각은 없었다. 발자크 정도의 흑마법사라면 한 번 알려 준 술식을 완벽하게 재현해 낼지도 모른다.


‘……술식 외에도…….’


헥토르 라이언하트.


신경 써야 할 만큼 강한 놈은 아니다만, 놈이 죽지 않고 그 자리에서 탈출한 방법은 꽤 궁금했다.


“그걸 묻고 싶어서 저와 만나고 싶어 하신 겁니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당연히 연구 자료 얘기는 아닙니다.”


발자크가 안경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헬무드가 유진 님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


“정확히 말하자면, 용마성의 라이자키아 공작을 제외한 다른 공작들.”


유폐의 칼과 몽마의 여왕.


시그니처


그 두 명은 유진에게도 후회를 비롯해 여러 묵은 감정이 얽힌 존재들이다.


물론 후회는 300년 전에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다.


사실 기회가 마땅치 않기도 했었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과 맞닥트렸을 때 하멜은 세냐와 단둘이었다. 그때의 세냐도 대단한 마법사였고, 하멜도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만ㅡ


죽을 뻔했다. 어떻게든 세냐만 탈출시키고자 이그니션까지 썼다. 솔직히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다. 당시 하멜이 생각하기에, 유폐의 마왕성을 목전에 둔 지금 목숨의 값어치를 나눈다면, 당연히 세냐가 살아서 동료들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다행히 가비드가 먼저 물러났지만, 만약 전투가 계속되었다면 하멜은 유폐의 마왕성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도 죽일 기회가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헬무드를 떠돌던 중반부터 누아르는 틈이 보일 때마다 꿈속을 파고들고, 환상의 마안을 사용해 현실을 꿈으로 바꾸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니스와 세냐의 도움으로 꿈속의 꿈과 현실의 꿈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300년 전에도 까다롭고 강력하던 두 마족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 그래서 후회는 어쩔 수 없었다. 만약 300년 전의 하멜이 더 강했다면, 누아르 제벨라와 가비드 린드먼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주목이라.”


ㅡ지금 유진이 느끼는 것은 후회뿐만이 아니었다. 경각심도 느끼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도 들었다.


300년 전에 하멜은 가비드 린드먼보다 약했다. 누아르 제벨라와는 싸움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전성기의 하멜이 그 몽마의 여왕과 단독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그 아이리스도 300년 동안 제 자신을 단련해 강해졌다. 마왕이 다스리는 마족의 제국. 마족이 서열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유진도 잘 알고 있다. 가비드와 누아르는 3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공작 자리에 앉아 수많은 마족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다.


‘아이리스는 누아르와의 영지전에서 패배하고, 헬무드를 떠났다고 했지.’


그렇다고 하여 누아르가 아이리스보다 몇 수 앞선 강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앞선 것은 분명하지만, 누아르와 아이리스 사이의 간극은 아득하리만큼 멀 것이 분명했다.


지금의 유진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단 말이다.


“헬무드의 공작님들은 굉장히 한가하나 봅니다. 먼 타국의 사람도 신경 쓰고.”


“유진 님은 평범하지 않지요. 명문 라이언하트의 후예…… 특히 유진 님은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고까지 불리잖습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소문이야 제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문제는 공작들이 유진 님을 주목하는 것이 온전히 소문 때문은 아니라는 겁니다.”


발자크가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공작들은 유진 님이 성검의 인정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유진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기억을 더듬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성검을 뽑은 적은? 없다. 사마르 대수림에서는 아예 뽑은 적이 없다. 이오드가 흑사자 성에서 의식을 벌였을 때. 그때는 성검을 뽑았다. 그 후에 이단심문관들에게 성검의 주인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빛의 샘.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유진 님이 정말로 성검의 주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그것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유진 님에게 호의를 가진 것은 사실이니…… 경고를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발자크는 침묵하는 유진의 시선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사실 경고라고 말할 수도 없겠습니다. 2명의 공작이 각자 움직이려고 한다면 저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저들이 유진 님과 만나기를 바란다면…… 유진 님은 그들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유폐의 마왕님이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공작인들 유진 님을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만한 존재들에게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정 주목받기를 원치 않았다면 나대지 말고 쥐죽은 듯이 지내야 했을 텐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요.”


늦고 빠르고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성검의 주인이고 용사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저 먼 헬무드에 있는 공작들에게 지금처럼 빨리 주목받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답니까?”


이 질문은 유진이 성검의 주인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이미 주목까지 받는 마당에 뭘 숨기랴. 유진은 당당하게 물어보았다.


“방법까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만, 유폐의 지팡이인 에드먼드 코드렛이 공작들에게 유진 님에 대해 전한 모양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데요.”


“물론 그러시겠죠. 에드먼드는 헬무드를 벗어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에드먼드가 유진 님에 대해 전했고, 그로 인해 공작들이 유진 님을 주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발자크는 그렇게 말하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유폐의 삼마 중 한 명으로서, 헬무드의 삼공과 얽힌 사교회인 로열티에 소속되어 있다. 아롯의 흑탑주가 되면서 로열티의 정기모임에 참석한 적은 없지만, 같은 흑마법사인 에드먼드 코드렛과는 아직도 간간이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발자크가 생각하기에, 그 관계에 벗이라고 할 만큼의 우애는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동업자 간의 동질감…… 혹은 거래관계. 결코 가벼운 관계는 아니며, 무언가를 바란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에드먼드는 발자크에게 유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묻지는 않았다. 이번만 해도 로열티의 정기회의에서 오갔던 유진에 관한 이야기를 사담으로 흘렸으나, 그에 관련하여 다른 무언가는 요구하지 않았다.


발자크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로열티의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에드먼드 쪽에서 먼저 회의의 내용에 대해 알린 이유는, 일찍이 아롯에서 유진과 인연을 맺은 발자크가 무언가를 토해내기를 의도하는 것이다.


“저에 대한 정보를 판 겁니까?”


“팔 수 있는 정보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갖게 된다면?”


“흠. 그건 그때 생각해 봐야 알겠지만…… 저로서는 에드먼드가 지불할 대가에 별 욕심이나 기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유진 님에 대한 흥미와 기대가 크지요.”


“이상한 분이시네.”


“저는 유진 님에게 꽤 많은 호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만, 에드먼드가 요구할 거래에 응하지 않기로 한 것은 순전히 호감과 호기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제 욕심이 섞여 있습니다.”


“욕심?”


“가슴 밑바닥의 욕망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군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여태까지 유진 님에게 경고를 전하고 호의를 보인 것이 호감 때문만은 아니란 겁니다.”


발자크는 웃으며 차를 마셨다. 유진은 그 여유로운 눈동자에 어린 감정마저 읽을 수는 없었지만, 발자크가 헬무드의 중축에서 겉돌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롯까지 와서 흑탑주를 할 이유가 없지.’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발자크가 무언가 목적이 있고, 그로 인해 유진에게 여러 번 위험에 대한 경고를 해주고 있다. 적어도 지금 당장 발자크는 유진의 적이 아니다.


“아까 흑사자 성의 동란에 대해 물으셨지요.”


술식까지 보여주지는 않았다. 대신 이오드가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하였는지는 말해주었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축약해서, 이야기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허.”


이야기 내내 침묵하던 발자크가 감탄을 터뜨렸다.


“혼의 재구성과 육신의 창조라…… 마법학적으로는 금기로 치부되는 것들이지만, 여러 흑마법사들이 추구하는 연구 방향이군요.”


“발자크 님도 그렇습니까?”


“제게는 별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혼의 재구성이라는 것은 결국 내 혼을 다른 무언가로 탈바꿈하는 것이고, 육신의 창조도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깃든 그릇을 바꾸는 것…… 즉, 본질을 바꿔버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마법은 바라지 않습니다.”


발자크는 그렇게 대답하고서는 잠시 침묵했다. 골똘히 집중할수록 발자크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이오드 라이언하트를 충동질하고 조종한 것이 마왕의 잔재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군요. 라이언하트가 가지고 있던 마창과 분쇄추는 마왕의 애병이었으니. 그 잔재가 어둠의 정령으로 화한 것도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원시 정령은 마나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환경에 따라 변모하니 말입니다.”


발자크의 생각도 로베리안이나 멜키스와 같았다. 이오드가 그렸던 술식을 직접 보지 못하고, 유진이 파악한 이야기로만 추론해야 하니 대답이 뻔할 수밖에 없었다.


“헥토르 라이언하트의 도주가 놀랍군요.”


유진이 내심 의도한 덕인지, 발자크도 헥토르의 도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졌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숲을 살펴보았던 로베리안과 멜키스는 헥토르의 도주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추측도 내놓지 못했다. 헥토르가 도주했다는 것을 가장 처음 간파했던 심문관 아타락스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헥토르가 도주한 것은 간파했지만, 그 방법까지는 해석하지 못했다.


“그가 진귀한 아티펙트를 지니고 있었다 말하셨는데, 어떠한 아티펙트였는지 기억하십니까?”


“예.”


17개의 마법이 내장되어 있던 목걸이. 유진은 그 목걸이의 형태까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새겨진 마법이 어떻게 배열되었는지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에 로베리안과 멜키스에게도 아티펙트에 내장된 마법술식의 배열은 재현해 주었던 적이 있다.


하나의 아티펙트, 그것도 별로 크지도 않은 목걸이에 저만큼 많은 마법을 새겨 넣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저러한 세공품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마법을 새길 용량이 달라지기에, 무조건 불가능하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멜키스 엘하이어의 백색마탑에는 뛰어난 연금술사들이 많다. 그래서 멜키스는 유진이 전해 준 아티펙트의 술식 전개도를 연금술사들에게 보여주었지만, 재현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흠…….”


발자크는 턱을 어루만지며 옆을 보았다. 이 넓은 방의 한쪽 벽에는 유진이 허공에 그린 마법술식이 가득했다.


“이 복잡하고 난해하며 장황한 술식이, 목걸이 하나에 담겨 있었다는 겁니까?”


“예. 아카샤로 이해한 것이니 확실합니다.”


“하지만 이 술식에 공간이동에 관련된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군요.”


“그래서 의문인 겁니다. 애당초 블링크도 아닌 초장거리 이동 마법이 인간에게 가능하기는 한 겁니까?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걸 아티펙트에 어떻게 박아 넣었단 말입니까?”


유진이 그것부터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로베리안과 멜키스의 의견도 동일했다. 대마법사라도 장거리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워프게이트를 사용하지, 스스로의 마법을 써서 제 몸을 워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헥토르는 월광검과 마력이 격돌하는 숲에서, 모든 이목을 속이고서 탈출에 성공했다. 놈이 대단한 마법사라면 또 모를 일이나, 유진이 싸워 느껴본바, 헥토르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이거 재미있군요.”


한참 동안 술식을 들여다보고 있던 발자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 유진 님. 대마법사의 관점에서 말씀드리자면,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장거리를 공간이동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워프게이트가 장거리 공간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서로 연결된 게이트가 좌표를 고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직접 펼치는 워프는 그것이 불가능해요. 이 세상에서 그런 공간이동이 가능한 것은 드래곤의 텔레포트뿐입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그러니 헥토르는 공간이동으로 탈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거기 있던 이단심문관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게이트를 거치지 않은 장거리 텔레포트.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단심문관도 헥토르가 탈출하는데 쓴 마법을 해설하지는 못했죠. 그럴 수밖에요. 헥토르가 탈출하는 데 쓰인 것은 공간이동마법은 맞지만, 텔레포트는 아니거든요.”


발자크는 답답해하는 유진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유진이 참다못해 다시 말을 내뱉으려 하자, 발자크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헥토르는 죽은 겁니다.”


“예?”


“그곳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헥토르는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도 헥토르를 보호해주지 못했고 말입니다.”


그쯤 되니 유진도 발자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육체는 죽어 소멸했지만, 혼은 그대로 남습니다. 평범히는 이승을 떠나게 마련이지만, 만약 계약으로 묶여 있다면. 혼의 주권은 자기 자신이 아닌, 계약을 맺은 ‘주인’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


“……마족?”


“혹은 흑마법사.”


발자크가 웃었다.


“어느 쪽이든 헥토르를 사주한 것은 헬무드의 누군가라는 겁니다. 육체가 아닌 영혼이라면. 또 그 영혼을 계약으로 쥐고 있다면. 세상 어디서든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직접 보지 않아서 이 또한 확실하다 말해서는 안 되는데…… 아티펙트의 전개도를 보니 확신이 드는군요.”


“저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유진 님. 헬무드의 마법공학기술은 당신의 상상 이상입니다. 백색마탑 연금술사들이 뛰어난 장인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연금술이 아니라 ‘기술’이라면 헬무드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겁니다.”


“…….”


“용마성 광산지구에서 강제노역하는 드워프들은 안타깝지만, 그들은 라이자키아 공작의 소유물이니 어쩔 수 없고…… 그들을 제외하고서도 헬무드는 대륙에서 가장 많은 드워프들이 사는 국가입니다.”


솜씨 좋은 드워프 장인이 만든 세공품과 헬무드의 기술이라면 저만큼의 전개도를 압축하여 아티펙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예상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헬무드에는 흑마법사도, 마족도 많습니다. 누구인지를 특정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리고…… 헥토르 라이언하트는 이전에 루하르의 왕립기사단, 하얀 송곳니의 명예기사였지 않습니까?”


본래 루하르는 헬무드와 마족의 출입을 엄격히 금했지만, 5년 전부터 문호를 개방하여 수많은 마족들이 루하르에 입국해 버렸다. 그런 마족 중 누군가가 헥토르와 접촉하여 계약을 맺었을 가능성은 차고 넘쳤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헥토르가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그린 술식을 보았다면. 영혼으로 거둬져서 주인에게 술식에 대해 알렸을지도 모릅니다.”


“…….”


“물론 그 술식은 마왕의 잔재와 어둠의 정령을 사용한 것이라 재현은 불가능하겠지만, 술식의 골자를 따면 모방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그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유진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더니 팔짱을 꼈다.


“흑탑주님이 말한 것처럼, 마왕의 잔재가 없고 어둠의 정령이 없는 이상 그 술식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골자를 따서 모방한들 마왕의 잔재가 부활하는 것보다 위험하지는 않을 거고.”


“그러겠지요.”


“헥토르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추측도 안 되는 이상, 놈이 뭘 바라고 얻었는지는 제 알 바가 아닙니다. 그걸로 제 앞을 막거나 귀찮게 한다면 그때 목을 베면 되는 거고.”


“제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으십니까?”


발자크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유진 님이 보셨던 술식을 제게 공유해주신다면, 저는 그 술식이 흑마법에서 어떻게 모방될지도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저는 헬무드에서도 확실한 입지를 가지고 있으니, 헥토르의 주인을 수색하는데도 유진 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꽤 구미가 당기지만, 흑탑주님. 저는 헥토르의 주인으로 유폐의 삼마부터 의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의심에는 흑탑주님도 들어가죠. 지금 저랑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계시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흑탑주님이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민 공작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말입니까?”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저는 흑탑주님이 좋은 흑마법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제법 괜찮은 흑마법사라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흑탑주님을 완전히 신뢰하고서 함께 뭔가를 해볼 생각은 없습니다.”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설마 제가 흑탑주님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이 연구 서적은 가져가지 말라는 좀생이 같은 말을 하시진 않겠죠?”


“가져가십시오.”


“역시. 흑탑주님은 제가 봤던 흑마법사들 중에서 제일 괜찮은 사람이십니다.”


유진은 방긋 웃으며 망토를 열었다. 그렇게 연구 서적들을 알차게 챙긴 뒤에, 발자크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경고해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사실 그 경고를 들어봤자 제가 뭔가 대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의식은 해보겠습니다.”


“하나 더 물어봐도 됩니까?”


발자크는 배웅을 위해 몸을 일으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일 괜찮은 흑마법사, 라는 것과 좋은 흑마법사는 무슨 차이입니까?”


“사람과 시체의 차이죠.”


“예?”


“제 기준에서 좋은 흑마법사는 죽은 흑마법사뿐이거든요. 아, 이 말에서 ‘죽은 흑마법사’에 리치는 제외입니다. 리치는 사지를 찢어 죽여야 할 시X놈이죠.”


전생에 하멜은 리치에게 죽었다. 그래서 유진은 리치가 싫었다. 아니, 언데드 자체가 싫었다. 리치에게 죽은 것도 열 받는데, 하멜의 시체가 데스나이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배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유진은 창가로 성큼성큼 다가가며 말했다. 유진의 말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발자크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창가를 쳐다봤을 때, 유진은 이미 창문을 활짝 열고 창틀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다음 말고 먼 언젠가 다시 봅시다. 아예 안 봐도 괜찮고요.”


받을 것을 다 받고, 경고도 듣고, 헥토르에 대한 의견까지 들어낸 주제에. 유진은 그렇게 내뱉었다.


그리고 발자크의 인사도 듣지 않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허.”


밖에서 장미정원을 구경하던 연인들의 비명이 들렸다. 발자크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소리 없이 바닥에 착지한 유진이 정원을 성큼성큼 가로지르고 있었다. 발자크는 그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재밌는 분이라니까.”


발자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유진과의 대화에서 대부분 진실을 말했지만, 하나의 거짓말을 하기는 했다.


발자크는 헥토르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군.’


결론이 나왔다. 발자크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재고하며 빙긋이 웃었다.


루하르


예상은 했지만, 시그니처의 창작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유진은 아롯에서 21살이 되었다. 익숙하고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는 적색마탑의 연구동에서 살다시피 지냈고, 가끔은 아크리온에 다녀왔다.


여러 도움을 받았다.


스승인 로베리안은 사적인 일들을 모조리 뒤로 제쳐두고서 유진에게 붙어 있었고, 가끔, 아니, 자주 찾아오는 멜키스도 적극적으로 유진의 시그니처를 봐주며 술식의 구성에 대한 조언을 주었다.


유진에게 히리두스와 트렘펠은 술식의 내용에 대한 조언까지는 바랄 수 없었다. 아무리 저 둘이 호의적이라고 해도, 시그니처를 구성하는 술식들은 은밀해야만 했다.


발자크의 연구자료도 도움이 되었다. 자료를 파고들기 전에 먼저 스승인 로베리안에게 보여주어 검증도 받았다. 그 자료는 아무래도 발자크가 대마법사가 되기 전부터 연구하던 것들이고, 발자크 본인의 성격이 마법에 있어는 섬뜩하리만큼 깐깐한지라 읽으며 여러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메르 메르데인.


여태까지는 활약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본래 메르는 아크리온의 세냐의 전당을 총괄하고 있던 사역마다. 그녀 스스로도 다양한 마법을 쓸 수 있지만, 이 경우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술식의 해석과 연계였다.


메르는 술식에서 마법을 일으킬 필요 없이, 연결된 서로 다른 술식들이 어떤 결과의 마법을 도출할지, 어떠한 변수가 마법을 달리하며 술식에 작용될지를 계산해 냈다.


“제가 처음부터 아크리온의 관리역으로 만들어진 줄 아세요? 저는 세냐님의 마법연산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역마라고요.”


메르는 오랜만에 활약할 수 있다는 것에 즐거워하며 우쭐거렸다.


그리고 유진은 아카샤까지 가지고 있다. 이 지팡이는 마법을 ‘이해’하게 도와준다. 아카샤를 처음 쥐었을 때. 유진이 익히고 알고 있던 술식들은 자연스레 아카샤를 거쳐 최적의 형태로 재구성되었었다.


아카샤의 권능은 시그니처를 창작하면서도 써먹을 수가 있었다. 연계되지 않을 술식들도 아카샤로 이리저리 수정하다 보면 매끄럽게 연계되었다. 맞물리지 않는 마법이라도 아카샤를 쓰는 것으로 이어낼 수 있으니, 선택의 폭이 크게 넓어졌다. 그렇게 짜 맞춘 술식은 메르를 통해 재검토했다.


21살의 여름.


불완전하게나마 시그니처를 만들었다. 술식을 끌어내고 현상을 펼치는 것에 문제는 없다. 변수로 인한 실패 가능성도 없다. 다만, 아직 완전하지는 않아 ‘범위’가 최초의 구상보다 작기는 했다.


그래도 써먹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유진은 두 눈을 감고서 뿌듯함을 즐겼다.


“우와…….”


멀리서 보고 있던 메르는 질색이라는 얼굴이었다. 그 곁에 선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메르와 정반대였다. 그녀는 깊은 감동을 느끼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저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인지……!”


[크리스티나,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했지요. 불우한 유년기와 억압된 동심이 지금의 당신에게 좋지 않은 관념을 부여했습니다.]


아니스가 혀를 차며 말했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의 유진은 아름답고 고귀해 보였다.


다른 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베리안은 흐뭇한 얼굴이었다.


처음 시그니처의 구상을 들었을 때에는, 솔직히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유진의 시그니처는 다른 대마법사들의 시그니처와는 다르다. 저것은 마법이지만, 마법을 위한 마법이 아니다. 오직 유진을 보조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마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 시그니처가 마법으로서의 격이 낮지는 않았다. 층층이 쌓아 올린 마법들이 전혀 다른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로베리안 본인도 저 복잡하게 얽힌 술식을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법과는 다르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마법이라고 가르쳤잖소.”


로베리안은 피식 웃으며 멜키스를 쳐다보았다. 멜키스는 눈썹을 잔뜩 구기고서 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시그니처의 구성술식은 멜키스도 얼추 알고 있다. 하지만 중추를 꿰뚫는 오리지널은 모른다. 아니, 알지라도 저 술식들이 어떻게 저런 현상을 일으키는가에 대해서는 도저히 답을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그니처는 대마법사 고유의 능력이 섞여야 하오. 내 판테온은 내가 만들고 수집해 온 소환물이 있기에 시그니처가 되는 것이고, 당신의 트리니티포스는 대지의 정령왕과 번개의 정령왕과의 계약이 필요하지. 그것들은 모방이 불가능한 선행단계고, 우리의 고유한 능력이잖소.”


“……뭐 그렇지.”


“저 시그니처도 마찬가지인 거요. 그래서 상대하기가 난감하지.”


특히 유진의 시그니처가 까다로운 것은, 마법으로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것은 유진 본인을 보조하는 것이다 보니 유진의 역량에 따라 위력이 계속해서 성장한다. 지금 이해하고 있는 것이 다음에도 똑같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카르멘 님이 좋아할 것 같네요.”


자주색 불꽃이 흩날렸다. 이윽고 불이 꺼지듯 잦아들고, 사라졌다. 메르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조용히 해. 내가 하고 싶어서 이렇게 만든 줄 아니? 이게 최적의 형태인 걸 어떡해?”


“정말로 최적일까요? 하려고 든다면 다른 형태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


“넌…… 넌 나에게 이상한 프레임을 씌우고 있어. 이 형태가 특별한 것은 아니잖아. 어? 마법만 하더라도 이런 마법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그렇지만, 유진 님은 전례가 있잖아요.”


“조용히 해, 메르메르.”


“제 이름은 메르메르가 아니에요. 메르 메르데인이란 말이에요. 유진 님은 제 이름을 놀리는 것으로 자신의 해괴한 센스에 대한 주목을 돌리고 싶은 거죠?”


“너 그러다가 진짜 죽어, 메르메르메르메르데인.”


“유치하네요 정말.”


메르는 쯧쯧 혀를 차면서 유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안겨 오는 메르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아 준 뒤, 망토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끔 망토를 열어주었다.


마지막 검증도 끝났다. 아직 불완전하다고 해도 미완성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 모자란 부분은 아롯을 떠나서도 보완이 가능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더 이상 유진에게 여유가 없었다.


루하르 왕국의 영토에서 열리는 나이트마치가 바로 다음 달이다. 나이트마치의 장소는 워프게이트도 없는 루하르 변경 중의 변경이라, 넉넉잡아 이동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오늘이라도 당장 아롯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오늘 떠나기로 했다.


“큰일이야 벌어지지 않겠지만, 언제나 조심하십시오.”


시그니처를 만드는 것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는 이미 어제 인사를 전해두어서, 워프게이트로 배웅을 나와준 것은 로베리안과 멜키스 둘뿐이었다.


아롯의 궁정마법사단장인 트렘펠 위자도르는 왕세자 호네인과 함께 나이트마치에 참가하지만, 마탑주는 아롯의 마법병단 소속이 아니라 나이트마치에 참가하지 않는다.


“조심할 것이 있어? 나이트마치가 벌어지는 곳이 레헤인이라며. 거기 루하르에서도 최고급으로 유명한 온천지역이잖아. 돈 주고도 못 가는 곳!”


“당연히 돈을 주고도 못 가지. 말이 최고급이지, 그곳은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레헤인야르 설산 바로 아래에 있는 곳이잖소.”


“시설이 최고급인 건 맞잖아!”


“그거야…… 레헤인야르에서 경계를 서는 설산의 레인저들과, 주기적으로 훈련을 오는 기사들을 위한 시설이라 그런 것이잖소. 정 레헤인을 즐기고 싶거든, 백탑주 당신도 루하르의 하얀 송곳니에 지원하시오. 아마 그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해 줄 거요.”


“내가 미쳤어? 하얀 송곳니는 무슨…… 으음, 트렘펠 그 아저씨한테 부탁하면 데려가 주지 않을까…….”


“당신이 마법병단으로 이적한다면 기꺼이 데려가 주겠지.”


“그럼 안 갈래. 온천이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즐기면 되잖아. 지하수를 뜨겁게 달구면 그게 온천이지, 안 그래?”


멜키스는 시시덕거리면서 유진에게 다가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어쨌든 축하해, 꼬마야. 네 그 시그니처에는 이 멜키스 엘하이어 님의 도움이 들어갔음을 잊지 말고. 나중에 네가 자서전을 쓰면 내가 얼마나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꼭 적어두도록.”


“자서전은 안 쓰겠지만, 예.”


“그리고 레헤인에서 기념품 좀 사와. 거기 기념품을 팔지는 모르겠는데, 거기 온천에 화정석이라는 돌이 채굴된다는 것은 들었거든? 온천 밑바닥에서 간혹 발견된다니까, 그거나 하나 가지고 와.”


“불꽃이 깃든 돌이잖아요. 멜키스님이 그걸 어디다 씁니까?”


“어디에 쓰기는? 촉매로 삼아서 불꽃의 정령왕을 꼬시는 데 쓰지.”


2명의 정령왕과 계약했으면서도 아직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다. 유진은 깔깔 웃는 멜키스는 뒤로하고, 로베리안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꼭 같이 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크리스티나가 슬며시 견제구를 날렸다. 물론 유진은 그녀의 견제구를 견제구라 생각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떠났다 그러고, 걔들도 이미 기다리고 있다잖아.”


“시안 님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시엘 님은 흑사자 기사단 3번대 소속이잖습니까? 왜 카르멘 님과 동료 기사들과 함께 가지 않고, 유진 님과 함께 가겠다고 기다리는 겁니까?”


“남매잖아.”


“남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번 나이트마치에서 라이언하트는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어. 최근 겪은 일들이 워낙 많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주목은 라이언하트의 차대를 이을 시안과 시엘, 그리고 나에게 향하겠지.”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하면서 워프게이트의 요금을 지불했다.


“루하르의 수도에서 레헤인까지 여정은 쉽지 않을 거야. 넉넉히 한 달은 걸릴 거고, 변경 설원에서는 몬스터도 득실거리지. 기사단 훈련이야 걔들은 항상 해오는 것이지만, 남매끼리 험지를 극복하는 유대감은 쌓을 일이 드물잖아? 특히 나는 걔들이랑 형제면서도 백염식의 경지도 높으니, 함께 설원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내게 긍정적인 자극을 받고 감화되는 것을 의도한 것이겠지.”


그렇게까지 말하니 크리스티나는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유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괜히 모난 생각을 느낀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스스로에 반성을 느끼고, 회개를 위한 기도를 읊조리는 순간.


[긍정적인 자극은 무슨. 시안 그 꼬마도련님은 몰라도, 시엘 그 앙큼한 계집아이는 하멜과 함께 가고 싶다는 사욕 가득 찬 고집을 부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


[크리스티나. 만약 당신이 그 계집아이를 상대하기 버겁다면, 시스터인 제게 맡기도록 하십시오. 다시는 앙큼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버릇을 고쳐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주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만, 아니스에게 그런 부탁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메르가 망토 안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루하르 왕국은 일 년 내내 겨울인 곳이잖아요. 안 그래도 저번에 애니실라 님이 새로운 겨울옷을 보내주셨어요. 유진 님도 보실래요? 전 이미 갈아입었다구요.”


“보기는 뭘 봐. 받자마자 보여주고 어제도 보여줬잖아.”


“솔직히 털 코트를 입은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꽤 귀엽거든요. 몇 번을 봐도 귀엽지 않나요?”


그 말은 부정할 수가 없었지만, 보란 듯이 실실 웃으면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메르의 얼굴이 굉장히 얄미웠다. 유진은 메르의 양 뺨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꼬집지 마세요. 유진 님은 안 갈아입으실 거예요?”


“난 괜찮아. 이 망토가 겨울옷이잖아.”


“크리스티나 님은요?”


“제 로브에도 방한기능은 있습니다.”


“어쩜! 다들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옷을 뭐 춥지 말라고만 입나요? 여태까지와는 다른 새 옷을 입는 재미도 있는 거잖아요!”


“옷은 추울 때 따뜻하고 더울 때 시원하고 움직이기 편하면 되는 거야.”


[저 꼬마 사역마는 헬무드를 떠돌아 본 적이 없어서 배가 불렀군요.]


유진이 투덜거렸고, 아니스가 동조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어느 정도 메르의 말에 동감하여 자그마한 충동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여태까지 수녀복과 사제복 외에 다른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으흠…… 이 로브가 추위는 막아주지만, 휘몰아치는 눈발마저 걷어주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코트 한 벌 정도는 구입해도 괜찮을 것 같군요.”


크리스티나는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워프게이트로 걸어나갔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뒤를 따라가며 모론을 떠올렸다.


북쪽 설원을 처음 가는 것은 아니었다. 헬무드에 진입하려면 설원을 가로질러야만 했다. 그 시대에 북쪽 땅은 대부분이 마족과 마물에게 점령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혹한의 대지는 헬무드만큼은 아니어도 지독하리만큼 마물과 마족이 많았다.


모론은 그러한 설원에 분노했다. 녀석이 나고 자란 바야르 부족과, 그 부족이 터를 잡은 설원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바야르 부족은 자기들을 북쪽의, 설원의 자식들이라고 말한다. 300년 전에 하멜과 함께 횡단했던 설원이 바야르 부족의 영토가 아닐지라도, 그 대지는 눈보라 몰아치는 설원이었다.


모론은 커다란 망치와 도끼를 무기로 사용했다.


모론이 망치를 내리찍으면 눈사태가 일어났고, 놈이 도끼를 휘두르면 눈보라가 갈라졌다.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 마족이나 마물에게 향했을 때. 모론의 적들은 제대로 된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짓이겨지거나 터져서, 설원을 다양한 색깔의 피로 물들였다.


눈발은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펑펑 쏟아진다. 짓이겨진 시체가 가득 널브러지고, 설원 전체가 피로 물들어도. 조금 시간이 지난 것만으로 시체와 피범벅의 대지는 새하얗게 변해 버린다.


모론은 그 설원을 사랑했다.


‘……뜨거운 강.’


바야르 부족의 근처에는 뜨거운 강이 흐른다. 300년 전, 아니스가 처음으로 빛의 샘에 대해 말했을 때. 모론도 뜨거운 강을 말했었다.


당시에 하멜과 세냐는 모론의 말을 믿지 않고 비웃었다. 어떻게 강물이 뜨거울 수가 있단 말인가? 하물며 바야르 부족은 눈이 펑펑 내리는 최북단에 있는데. 차가운 강도 얼어붙어서 흐르지 못할 텐데, 뜨거운 강이 흐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온천이라.’


모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설원 한복판에 세워진 왕국, 루하르 왕국에서 유명한 관광 상품이 바로 온천이다.


-전쟁이 끝나면 모두 같이 가면 된다. 그때는 내가 바야르의 족장일 거다. 내가 친구를 위해 강을 비우라 하면 부족원들은 기꺼이 강을 내어줄 것이다.


그때 모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저 말은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은 만족스럽지 않게 끝났고, 하멜은 죽었다. 그러니 모두 같이 뜨거운 강에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모론은 바야르 부족의 족장이 되었고, 제 이름을 딴 왕국을 일으켰다.


“모론이 제일 성공했군.”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워프게이트를 통과했다.


세냐는 아롯에서 마탑주를 지내며 칭송받았지만, 베르무트의 이유 모를 공격에 치명상을 입었다. 그 후에는 라이자키아의 공격으로 저주를 받아, 세계수에 봉인되었다.


아니스는 순례를 떠나는 것으로 은거하려 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변덕이 일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육체는 안식을 얻지 못하고, 유라스를 위해 차기 성녀후보를 위한 제물로 쓰였다.


베르무트는 키옐에서 대공을 지내고, 굴지의 명문가인 라이언하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베르무트 역시 말년에 안식을 얻지 못하고, 죽음을 위장하고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하지만 모론은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게 알려져 있다.


녀석은 헬무드에게 짓밟혔던 설원에서 루하르 왕국을 세웠다. 나라를 잃은 수많은 피난민들을 규합하여 왕국의 백성으로 삼았다. 루하르 왕국은 개국 300년 만에 북방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으며, 단독으로도 헬무드 인근 중소국가의 연합인 항마연합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루하르 왕국이 그만큼 파격적인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불과 100년 전까지 루하르 왕국의 뒤에 ‘용감한 모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론은 개국 후 50년 정도 국왕을 지내다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은거하지는 않고 선왕으로서 루하르 왕국을 지켰다.


하지만 그 모론도 100년쯤 전에 돌연 은거해 모습을 감춰 버렸다.


‘이 새끼들은 하나같이 그래. 모론도 은거, 세냐도 은거, 아니스는 순례. 다들 제대로 밝히지도 않고 휙 사라져 버렸잖아. 베르무트 그 새끼는 죽은 척했고.’


유진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이미 워프게이트는 통과했지만, 기온이 급격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기가 훈훈했다.


루하르 왕국의 수도.


“하멜론!”


망토 안의 메르가 방긋 웃으며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유진 님도 알고 계시죠? 이 도시가 하멜론인 것은, 초대 국왕인 모론 루하르 님이 죽은 동료를 추모하기 위해서래요.”


“……알지.”


“왕궁 앞의 광장에는 모론 님의 동상과 하멜 님의 동상이 함께 있대요. 당연히 구경하실 거죠?”


“싫어.”


“왜 싫어요? 되게 잘 만들어서 웅장하다는데.”


“보면 기분 이상해질 것 같아.”


“저는 보고 싶습니다만…….”


크리스티나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키득키득 웃었다.


[저는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만, 별로 보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시스터, 어째서입니까?’


[모론은 죽은 동료를 너무 추모했지요. 그곳에 선 하멜의 동상은 뭐랄까…… 하멜의 동상이기는 한데, 하멜처럼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굉장히…… 고귀하게 만들어놨죠. 마치 유라스의 성상들처럼 말입니다.]


‘고귀하다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론은 하멜이 죽는 순간을 동상으로 세워놨습니다. 그 숭고한 희생을 루하르의 백성들이 애도하게끔…… 가슴에 구멍이 뚫린 하멜이 누워 있고, 모론이 그 시체를 안아 드는 모습의 동상입니다. 또렷하게 기억나는군요. 유폐의 마왕에게 하멜의 시체를 돌려받고, 모론이 그 시체를 안아 들고 옮겼을 때의 모습…….]


아니스는 먼 과거를 회상하며 서글픈 웃음소리를 냈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광장의 동상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간단한 이유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울적한 기분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 것 같은데, 그 모습을 아니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유진 님. 한 번은 보고 가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크리스티나는 조심스레 유진에게 권했다. 유진이 대답하려 입을 연 순간.


“유진!”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유진을 불렀다. 유진이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서 달려온 시엘이 기세를 죽이지 않고 유진을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야!”


거의 반년 만에 보는 것이니 오랜만이 맞기는 했다. 시엘은 털이 북슬북슬한 후드모자를 뒤로 젖히며 유진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오늘 도착한다고 말했었잖아. 그러니까 오빠랑 미리 나와 있었지.”


시엘인 방긋방긋 웃으면서 크리스티나에게 힐긋 시선을 주었다.


[크리스티나. 저랑 바꾸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악마처럼 속삭여왔다.


크리스티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루하르


복잡한 감정이었다. 모론이 세워놓았다는 동상. 솔직히 보고 싶기는 한데, 보면 괜히 감정이 북받칠 것 같다. 만약 혼자서 루하르 왕국에 왔다면 슬쩍 가서 보고 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습니까?”


팔꿈치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은근히 고개를 기울이면서 소곤거리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어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유진은 그 표정만으로 지금 크리스티나의 몸을 움직이는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냥, 크리스티나였다. 다만 머릿속의 아니스가 충동질해 대는 것에 제 스스로도 관심과 몰입을 준 모양이었다.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 만들었네.”


솔직한 감상은 그랬다.


여태까지 이런 동상은 꽤 많이 봤다. 당장 지금 라이언하트의 정원에는 유진이 가져다 놓은 하멜의 동상이 있다. 키옐의 수도와 흑사자 성에는 베르무트의 동상이 있고, 아롯의 메르데인 광장에는 세냐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유라스 태양의 광장에는 무려 아니스의 성상이 하늘을 날고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 할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동상이었다. 이전에 유진이 보았던 동상들도 훌륭하기는 했다. 특히 아니스의 성상은 값비싼 보석들로 장식되어 아름다웠다.


“웅장하고.”


지금 앞에 있는 동상은 굉장히 크다. 그런 면에서 모론답다고 느껴졌다. 어지간한 건물보다 커다란 동상. 모론의 우락부락한 근육마저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상처투성이의 모론이, 죽은 하멜을 안아 들고 있다. 다른 동료들까지는 구현되지 않았지만, 동상 주변에는 험난한 전투로 만들어진 폐허가 그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좀 슬프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 많이 울기도 했고, 아니스가 죽이고 싶어 댈 만큼 놀릴 것이 뻔했기에 북받치는 감정을 역으로 억눌렀다.


“훌쩍.”


유진은 참았지만, 메르는 참지 않았다. 메르는 여전히 망토 틈 사이로 얼굴만 쏙 내밀고서 눈물을 훌쩍거렸다. 크리스티나도 아니스를 흉내 내는 것만 같은 짓궂은 미소를 어색하게 짓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물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동화책에 저런 장면이 있던가?”


“동화책은 그냥 동화책이잖아. 누가 쓴 건지도 모르고, 아무래도 각색이 꽤 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나는 우둔한 하멜과 현명한 세냐의 로맨스를 꽤 좋아했는걸.”


동상에 감명받은 것은 시엘과 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시엘은 오빠의 중얼거림에 픽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뭘 모르네. 그 동화책에서 은근히 마음을 울렸던 것은, 우둔한 하멜과 현명한 세냐의 로맨스가 아니야.”


“그럼 뭔데? 동료들의 우애?”


“그것도 훌륭하지만, 나는 신실한 아니스와 우둔한 하멜의 관계가 좋았어.”


“……그 두 분이 왜? 동화책에서 하멜은 세냐를 좋아했잖아.”


“마지막에 그렇게 고백하기는 하지만. 동화책에서 은근히 드러내는 하멜과 아니스의 무드가 아주 흥미롭단 말이야.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할까? 암시되는 장면도 몇 개 있잖아.”


“난 모르겠는데…….”


“세냐와 하멜은 연인이라기보다는 친한 친구 같은 느낌인데, 아니스와 하멜은 서로를 존중하는 그런…… 어휴, 말해 뭐 해?”


시엘은 시안을 비웃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유진은 입은 옷을 죄다 빼앗긴 벌거숭이가 된 것만 같아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저 귀염둥이가 뭘 좀 아는군요.]


‘……그렇습니까?’


[동화책에 제 성흔에 대한 이야기를 적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냐 그 이기적인 계집애는 멋대로 자기 사욕을 풀어내며 추태를 보였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담백하고 순수하게. 저 귀염둥이처럼 무언가를 느껴줄, 훌륭한 감수성을 가진 소수를 위해 저와 하멜의 이야기를 풀어냈지요.]


아니스는 아까만 하더라도 시엘을 앙큼한 계집이라고 불렀지만, 어느새 귀염둥이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래도 결국 하멜 님만 죽어버렸잖아.”


“하멜 님은 약해서 죽은 것이 아니야. 다른 동료들을 위해 용감하고 아름답게 제 목숨을 희생하신 거다.”


시안이 중얼거렸고.


유진이 대답했다.


“하멜 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300년 전의 시조님과 동료들은 유폐의 마왕성을 오를 수 있었던 거지. 비록 그 개 같, 아니, 우스꽝스러운 동화책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은 하멜 님을 두고서 우둔하다고 비웃지만. 동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세상을 위하셨던 하멜 님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지.”


유진의 장황한 이야기에 시엘과 시안이 두 눈을 끔벅거렸다. 감동한 얼굴로 동상을 보고 있던 메르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서 망토 안으로 머리를 감추었다. 크리스티나는 실눈을 뜨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부끄러움도 없는 겁니까?]


아니스의 중얼거림은 유진에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은 아니스가 뭐라고 중얼거렸을지를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하멜 님은 그 뭐냐…… 후대에 있어서 굉장히 저평가를 받은 영웅이라 말이지.”


“어…… 음. 그렇지. 유진. 너는 하멜 님의 무덤을 직접 발견한 장본인이자……. 어…… 그분의 진전을 이은 후계자이기도 하니까. 저 동상에 우리와는 다른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어.”


시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안은 참 상냥하게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가 과하게 몰입한 것을 이해해 주었다.


“우리는 하멜 님이 약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엘은 뒤로 넘겼던 후드를 다시 쓰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멜 님의 강하다는 것을 누가 몰라? 물론 300년 전의 영웅들 중에서 가장 강했던 것은 우리 시조님이시겠지만.”


“당연히 그렇겠지.”


시안도 뿌듯한 얼굴을 하고서 동상을 돌아보았다. 그는 태산처럼 거대한 모론의 동상을 보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론 님은 얼마나 강했을까?”


“응?”


“저 근육 좀 봐. 동상이기는 하지만, 실제보다 우락부락하게 만든 것은 아닐 것 아냐? 모론 님의 품에 안긴 하멜 님이 꼭 어린애처럼 보이는걸.”


300년 전의 영웅들 중에서 누가 가장 강했는가. 그것에 고민의 여지는 없다. 성검의 주인이자 용사였던 위대한 베르무트. 세상 모두가 베르무트를 영웅들 중 정점이라 꼽는다.


나머지 4명. 현명한 세냐와 신실한 아니스는 전사가 아니기에 논외로 치지만, 우둔한 하멜과 용감한 모론은 전사다. 그렇다 보니 둘 중 누가 더 강했는가는 어디서든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논쟁거리였다.


“오빠는 바보야? 근육이 크다고 더 강한 것은 아니잖아. 가르기스 그 돼지만 봐도, 팔뚝도 두껍고 근육도 우락부락한데 유진보다, 아니지. 나보다도 약하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모론 님이 하멜 님보다 세지 않았을까.”


“음…… 그럴지도 모르지. 300년 전에 죽은 것은 하멜 님뿐이었으니까.”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던 크리스티나가 불안한 눈초리로 유진을 힐긋 보았다. 역시, 유진의 눈썹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뭔 개소리야. 하멜 님이 모론 님보다 더 셌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기는! 난…… 하멜 님은…… 얼굴부터가 모론 님보다 세 보이잖아. 저기 저 흉터 안 보여? 물론 하멜 님이 먼저 죽기도 했고, 모론 님보다 체격이 작기는 했지만. 싸움을 시X 덩치로만 하니? 하멜 님은 모론 님보다 잘 싸웠…….”


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꽂히는 시선을 느낀 것이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은 이 광장에서 꽤 멀었지만, 존재감은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왔다.


‘왕궁?’


동상의 뒤, 광장의 너머. 높다란 담벽에 둘러싸인 거대한 성. 루하르의 왕궁이다. 최초에 느꼈던 시선은 눈발 흩날리는 드높은 첨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위. 유진은 반사적으로 크리스티나와 시엘, 시안을 마법으로 끌어당기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다가온 존재감에는 아무런 적의도 없었으며, 이곳에 떨어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지도 않았다.


두꺼운 망토가 휘날렸다.


다들 놀란 눈을 하고서 앞을 보았다. 첨탑에서 날아와, 동상의 앞에 떨어진 것은 거구의 사내였다. 그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눈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털어냈다.


“음!”


중년의 남자. 난발인 머리에 수염은 대충 다듬었고, 피부는 그을린 빛깔이다. 유진은 남자의 머리 위의,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처럼 기울어진 왕관을 주목했다.


“이보게 젊은이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잇몸이 드러날 만큼 씨익 웃으며 양팔을 펼쳤다.


“짐의 난입을 너무 불쾌히 여기지는 말아주게나. 젊은이들의 대화는 참으로 귀엽고 듣기 즐거웠으나, 용왕(勇王)의 후예로서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네.”


용왕은 루하르의 시조인 모론을 칭하는 말이다. 사실 그를 제쳐두고서도, 스스로를 ‘짐’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지 않은가. 시안은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놀라서 즉시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라, 라이언하트의 후예, 시안 라이언하트가 루하르의 국왕전하를 뵈옵니다.”


시엘과 크리스티나도 급히 무릎을 꿇고서 예를 갖추었다. 유진도 일단은 한쪽 무릎을 꿇었으나, 주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루하르의 국왕이 갑작스레 행사한 것인데, 광장의 사람들은 이쪽을 슬쩍 쳐다보기만 할 뿐, 특별히 예는 갖추지 않은 모습이었다.


“으하하! 젊은이들이 짐을 무안하게 만드는군. 대뜸 난입한 것은 짐이니, 그렇게 예를 갖출 필요는 없네. 바닥에 눈이 수북하여 무릎이 젖지 않은가? 정 짐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고 싶거든, 이런 곳에서 하지 말고 짐의 성에 찾아와서들 하게나.”


현 루하르 왕국의 국왕. 야수왕(野獸王) 아만 루하르.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기울어진 왕관을 바로 썼다.


“그리고 짐은 젊은이들의 인사치레나 듣고자 이리 난입한 것이 아니야. 이보게, 라이언하트의 젊은이.”


빙글 웃고 있는 아만의 눈이 유진에게 향했다.


“자네는 하멜 님이 용왕보다 약하다고 말하였지? 나는 그 말을 인정할 수가 없네. 당연히 위대한 베르무트 님이 가장 강하셨겠지만, 그 시대의 영웅들 중에서 베르무트 님 다음으로 강했던 것은 용왕님이지!”


“어…… 음…… 예.”


유진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대답했다. 모두가 아직 한쪽 무릎을 꿇고 있자, 아만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양팔을 잡고서 한 명씩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었다.


“시안 라이언하트! 그 위대한 베르무트 님의 후예. 자네가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라는 것은 짐도 잘 알아.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는 않지만, 짐의 딸이 자네에게 시집을 갈지도 모르겠어.”


“예…… 예에…….”


“사실 짐은 정치적인 이유로 딸의 혼사를 결정하고 싶지 않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짐의 딸이 자네와의 혼인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지! 아아, 물론 아직 딸의 나이가 차지 않았지만 말이야.”


“아일라 공주님의 나이가…… 그…… 11살인 것으로 압니다만…….”


“자네가 딸아이와 혼인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딸아이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할 걸세. 그래, 마침 잘되었으니 비밀을 하나 알려주지. 딸아이, 아일라는 인형이나 꽃다발보다는 희귀한 무기와 갑옷 따위를 좋아한다네. 자네가 아일라에게 호감을 사고 싶거든, 작은 단검이라도 하나 선물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아만은 껄껄 웃으며 시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친근함을 담아 두드리는 것일 테지만, 그 거대한 손이 어깨를 두드릴 때마다 쾅, 쾅 소리가 나며 시안의 몸이 흔들렸다.


“시엘 라이언하트! 자네의 이야기도 들었지. 과연, 눈송이처럼 하얗고 아름답군! 짐이 인정하는 강자이자 여걸인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자네의 스승이라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과분하다? 짐이 자네의 외모를 칭찬한 것을 말하는가? 과분하다니, 하하! 자네의 아름다움에 겸손은 사치일세. 아니, 아니로군. 라이언하트의 후예인 자네에게 외모의 칭찬은 기쁘지 아니한가? 자네의 검이 얼마나 예리할지가 무척이나 궁금하군.”


시엘도 아만의 커다란 손길에서 예외로 취급되지는 못했다. 아만이 지나치고 나서야 시엘은 표정을 구기면서 뻐근한 어깨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자네는…… 오오! 유라스의 성녀후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짐은 빛의 신을 숭배하지는 않으나, 빛의 신도들이 일으키는 기적에는 경외를 갖고 있다네. 그중에서도 자네의 양부인 세르지오 추기경의 기적은 대단하였지.”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양부의 안타까움을 짐이 함부로 떠들어서는 아니 되겠지. 빛이 자네를 가호하기를.”


아만은 크리스티나는 쾅쾅 두들겨대지 않았다. 대신 그 커다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고, 크리스티나는 꾸벅 고개를 조아리며 양손으로 아만의 손을 붙잡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마지막으로 아만은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오더니, 흐뭇한 미소를 걸고서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본가의 양자.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 그것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 먼 거리에서 저희의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훔쳐 들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게. 짐의 귀는 굉장히 밝아서, 듣고자 하지 않아도 들려오거든. 하지만 이것은 사과해야겠군.”


아만은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을 손으로 들추며, 살짝 고개를 낮추었다.


“자네들이 이 광장에 온 순간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네. 라이언하트의 젊은이들이 워프게이트를 통해 루하르에 입국했음은 확인하였으니 말이야.”


“그 사실이 불쾌하지는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시잖습니까.”


“으하하! 왕이라 하여 모든 백성을 관음하고 감시해도 된다는 법은 없지. 적어도 이 나라에는 그런 법이 없어.”


아만의 커다란 손이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쾅, 쾅. 소리는 요란하였지만 유진의 몸은 시안과 시엘처럼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아만의 눈이 빙긋 휘어졌다.


“그래서. 유진 라이언하트, 자네의 의견은 어떠한가?”


“무슨 의견 말입니까?”


“짐이 무엇을 묻는지 정말 모르는 겐가? 자제는 용왕보다 하멜 님이 강하다고 하였지. 하나 짐은 그리 생각하지 않아.”


아만의 몸이 낮춰졌다.


유진은 그가 왜 야수왕이라 불리는지 알았다. 그리고 아만의 선조가 그 모론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유진을 빤히 보는 아만의 눈은, 모론처럼 맑으면서도 모론과 같은 열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론처럼 ‘동료’라는 것만으로 충동하는 욕구를 꺾지는 않았다. 아만의 눈에는 일국의 국왕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야수처럼 거친 호승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네가 하멜 님의 우위를 주장한다면, 짐은 용왕의 후예로서 자네를 납득시키도록 하겠네. 친선을 위해 검을 맞대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나?”


“……제가 어찌 폐하와 검을 맞댈 수 있겠습니까?”


“으하하! 키옐에서는 황제와 검을 나누어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하나 여기서는 상관없네. 누구든, 바란다면 짐과 검을 나눌 수 있어.”


아만은 큰 소리로 웃으며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광장을 둘러보았다. 과연, 광장에 나와 있던 루하르의 백성들은 즐거움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솔직히 모론의 후예와 겨뤄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루하르에 입국한 지 하루 만에, 그것도 보는 눈이 가득한 광장 한복판에서 대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가? 어쩔 수 없지. 날이 오늘뿐인 것은 아니니까.”


유진이 거절하자, 아만도 더 이상 권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유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씩 웃었다.


“나이트마치의 도중이라도 좋으니, 짐과 겨뤄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하게. 이 말은 유진, 자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닐세. 시안 라이언하트, 시엘 라이언하트. 자네들도 바란다면 찾아오게나. 내 즐겁게 자네들에게 용왕으로부터 전해진 무예를 보여주지.”


“……한 가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아만을 올려다보았다.


“모론 님…… 아니, 용왕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자신이 하멜 님보다 강했다고 말입니다.”


“으하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아. 물론 그분은 하멜 님에 대한 언급은 자주 하셨지. 친애하는 동료이자, 벗이라며. 꼭 한번 진심으로 겨뤄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아 겨뤄보지 못했다면서…….”


그렇게 말하던 아만이 히죽 웃었다. 그는 유진에게 살짝 몸을 기울이며 소곤거렸다.


“하지만. 루하르의 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네. 용왕께서 말씀하시길, 300년 전에 위대한 베르무트 다음으로 가장 힘이 센 것은 자기 자신이셨다는군. 그렇다면 당연히 용왕님이 하멜 님보다 강했다는 것 아닌가?”


이건 도발인가?


유진은 간신히 미소를 짓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으하하! 뭐 당연한 것이지. 저 동상만 보아도 용왕님이 하멜 님보다 힘이 센 것을 알 수 있으니. 한데 자네들은 지금부터 어찌할 것인가? 자네들이 라이언하트의 본대와 함께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레헤인으로 향한다는 보고는 전해 들었네만.”


“예. 지금부터 레헤인에 떠나려 합니다.”


“출발이 이르군. 준비가 부족하거나 여정이 불안하다면, 짐과 함께 가는 것이 어떠한가? 왕궁에서 푹 쉬고, 짐과 루하르의 기사단과 함께 레헤인으로 떠나는 걸세.”


“말씀은 감사하나…… 사양하겠습니다. 한데 폐하께서는 아직 떠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직 국무가 마무리되지 않아서 말일세. 짐과 루하르의 기사단은 아마 다음 주는 되어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아만은 잠시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고는 아차, 소리를 내며 이마를 두드렸다.


“짐이 조심스럽지 못하였군. 작년 흑사자 성의 동란에 가담한 헥토르 라이언하트…… 그가 하얀 송곳니의 명예기사였지?”


“그 문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압니다. 헥토르가 하얀 송곳니의 명예기사였다 한들, 놈이 흑사자 성에서 벌인 일은 하얀 송곳니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부도덕한 자를 명예기사로 삼은 것은 짐의 실책이지 않나? 그러니 짐은 자네들의 여정에 무언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 싶어.”


유진은 정말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만은 잠시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벙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예?”


ㅡ콰앙! 아만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는 한 번의 도약으로 아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처음에 날아왔던 왕궁의 첨탑으로 날아가 버렸다.


“……대체 뭐야?”


시안은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아만이 말했듯,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것에는 잠시 정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왕궁에서부터 도약해서 광장에 떨어졌는데, 처음처럼 혼자서 오지는 않았다.


“짐의 애견과 함께 가도록 하게.”


애견이라 할 만큼 귀여운 강아지는 아니었다. 아만도 엄청난 거구이기는 했으나, 그의 어깨에는 제 몸보다 커다란 늑대가 짊어져 있었다.


“이름은 에빌이라고 하네. 오래전부터 바야르 부족이 사육하고 건국 이후로는 왕궁에서 사육한 설원늑대의 후예지. 이 녀석은 거센 눈보라와 사방이 희고 평평한 설원에서도 길을 잃지 않아. 에빌과 함께라면 자네들은 길을 헤매는 일 없이 레헤인에 도착할 수 있을 걸세.”


아만이 내려놓은 설원늑대는 황소만큼이나 컸지만, 결코 둔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만은 에빌의 회색 털을 쓰다듬으며 히죽 웃었다.


“에빌. 이 젊은 사자들을 레헤인의 훈련지로 안내해 주어라.”


“컹!”


“옳지, 착한 녀석.”


에빌이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었다.


“에빌의 식사는 신경 쓸 필요 없네. 이 영리한 녀석은 알아서 사냥해 먹을 테니까. 도중에 다리가 아프거나 하면 에빌의 등에 타도 괜찮네.”


“예…….”


“에빌이 길 안내로 붙으면 설원횡단에 한층 더 여유가 있겠군. 젊은이들, 관광은 좋아하나?”


“관광…… 말입니까?”


“레헤인야르는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곳이지.”


설산의 레인저들과 기사들이 훈련을 위해 드나드는, 루하르에서 가장 위험한 산.


“마음이 동한다면 대망치의 협곡에 한 번 가보게.”


“그건 또 어디입니까?”


“가고자 한다면 에빌이 안내해 줄 걸세. 늑대의 말을 할 필요는 없어, 이 영리한 녀석은…… 자네가 대망치의 협곡에 가고 싶다 말하면 곧장 안내해 줄 테니.”


아만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곳은 왕가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일세.”


“……전설?”


“또, 왕가의 후예가 전사로 거듭나는 곳이기도 하지.”


아만은 거기까지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물론, 가고 말고는 자네들의 선택이지만 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만이 다시 땅을 박찼다. ㅡ꽈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만이 다시 왕궁으로 날아가 버렸다.


“……굉장히…… 자유분방한 국왕님이시네.”


시안은 순식간에 멀어진 아만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루하르


길잡이의 필요성을 느끼기는 했다.


루하르 왕국의 영토 대부분은 눈보라 치는 설원인데, 단순히 땅덩이만으로 생각하면 키옐 제국과 버금갈 만큼 거대하다.


다만 인구는 대부분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어서, 그 넓은 설원은 도시에 섞이지 않은 원주민들의 터전이다. 그들은 사마르 대수림의 원주민들처럼 야만적이지는 않으나,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혹한 설원에서의 생활을 고집하는 만큼 괴팍한 구석이 있다고 들었다.


설원은 대수림 이상으로 가혹한 곳이다. 식량을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고, 멋모르고 걷다가 크레바스에 빠지기라도 하면 허무하게 죽어버릴 수도 있다. 시도 때도 없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산악지대의 눈사태 등. 대수림에서 신경 써야 할 것은 야만스러운 원주민과 몬스터의 습격 정도였지만, 설원에서는 거대한 자연을 더 신경 써야 한다.


거기에 사방이 허연 눈밭이라 방향감각이 망가진다. 지도나 나침반, 혹은 마법이 가미 된 길잡이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설원에서는 길을 잃기가 쉽다. 그렇기에 설원을 횡단하려는 사람들은 그 땅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을 길잡이로 고용하곤 한다.


“멍.”


루하르 국왕의 배려 덕분에 길잡이를 따로 고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망토 밖으로 나온 메르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에빌을 향해 다가갔다.


“멍.”


메르는 다시 한번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냈지만, 에빌은 금색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메르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좀처럼 원했던 반응을 보이질 않자, 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에빌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손.”


메르는 기어코 에빌의 앞까지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과연, 아만이 말한 것처럼 에빌은 영리했다. 메르는 제 조그마한 손 위에 살짝 걸치듯 올린 에빌의 커다란 앞발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얘 등 뒤에 타고 가도 되는 거죠?”


“늑대 등보다 내 망토 안이 더 편하지 않을까…….”


“어느 쪽이든 제 발로 직접 걷는 것보다는 편할 거예요. 그리고 유진 님의 망토 안은 재미도 없고 너무 자주 들어가 있어서 질렸어요.”


메르는 그렇게 말하며 냉큼 에빌의 등 뒤에 올라탔다.


메르는 자그마한 소녀이면서도 사역마인지라 체중이 별로 나가지 않는다. 게다가 에빌의 덩치가 워낙 크고 힘이 좋아서인지, 에빌은 무리 없이 메르를 등에 태우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


재미도 없고 질렸다니. 메르야 별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유진은 조금 뚱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기분을 직시하고 내색하자니 저 똥개한테 패배감을 느껴 버릴 것만 같아, 유진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모론의 후손이라더니 모론과 닮기는 했더군요.”


“모론처럼 등신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 하긴, 등신이었으면 왕은 못 해먹겠지.”


“모론도 등신이지만 국정은 꽤 잘 봤습니다.”


“그거야 모론이 힘이 세서 그런 거지. 300년 전의 그 개판에서 힘만으로 왕국을 세웠다며? 이 눈 펑펑 내리는 극지에서 힘센 놈이 왕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루하르 왕국의 건국에 모론의 힘이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힘만으로 왕국을 세우고 통치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멜, 당신도 알잖습니까? 모론은 등신이지만 착했고, 등신이면서 현명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용왕이라는 거창한 왕호로 불리며 칭송받는 것은, 모론이 당신 생가보다 제대로 된 왕이었다는 겁니다.”


“그래, 모론 잘났다. 나는 못났고. 괜히 먼저 죽어서 시X, 하다 하다 모론보다 약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유진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투덜거리자, 크리스티나의 몸을 빌린 아니스가 비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모론보다 힘이 약했던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모론보다 몸도 약했고 말입니다. 하멜, 다른 사람을 몰라도 제 앞에서 당신이 더 강하고 튼튼했다는 듯이 으스대는 것은…… 후후. 조금 귀엽게 느껴집니다.”


“뭐야?”


“그렇지 않습니까? 전투가 끝날 때마다 당신이 모론보다 더 많이 다쳤지요. 그 상처를 누가 치료해 주었습니까?”


“……세냐.”


“아뇨, 접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면서 귀엽게 굴지 마십시오. 제가 없었다면 하멜, 당신은 진즉에 사지가 잘리고 몸뚱이만 남아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었을 겁니다.”


“크흠…… 팔다리 잘린 것이 어디 나 혼자인감……. 모론도 다리가 잘렸었잖아…….”


“그건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항상 뛰쳐나가는 모론이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하긴,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였군요.”


아니스의 비웃음에 유진은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니스의 기적이 없었다면 팔다리가 죄다 잘리지는 않았어도, 팔 하나 다리 하나쯤은 잃었을 것 같기는 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비밀스레 나누는 거야?”


지금 유진과 아니스의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모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유진이 마법으로 서로의 목소리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 광경이 시엘이 보기에는 아주아주 심기에 거슬렸다. 시엘이 눈을 흘겨 뜨며 다가오자, 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롯에서 만든 시그니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걸 왜 비밀스레 말해? 나도 네 시그니처가 궁금해.”


“음…… 원래 이런 건 갑자기 봐야 충격적이고 멋있잖아.”


“나한테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숨기는 거야?”


“뭐 그렇지.”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저 대답은 마음에 들었다. 시엘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다시 물러섰다.


“레헤인야르. 어떻게 생각해?”


“모론의 후손이 제대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꽤나 노골적으로 가보라 권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하멜, 그가 함정이라도 팠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모론의 후손에게 함정을 팔 만한 잔머리가 있을지…….”


“베르무트의 후손 중에도 병신은 있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모론의 후손이 판 함정에 빠진다면…… 저는 부끄러워서 성불하지 못하고 악령이 되어버릴 겁니다.”


“나도 부끄러워서 접싯물에 코 박고 죽을게.”


일단 경계는 하고 있다만, 야수왕이 함정을 팔 이유가 있나? 유진이 알기론 라이언하트와 루하르의 왕가는 사이가 꽤 원만했다. 300년 전 전쟁이 끝나고서, 베르무트는 이상할 정도로 동료들과 거리를 두었다.


모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놈이 왕위에서 물러서고, 베르무트가 공식적으로 장례식을 치른 뒤. 모론의 뒤를 이은 후왕들은 라이언하트와 밀접하지는 않아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매년 가주의 생신이면 루하르 쪽에서 친서와 선물이 보내지고, 당장 후계자인 시안과 루하르의 공주가 혼담을 나누고 있지 않나.


“어쩌면 모론이 그 대망치협곡이라는 곳에 은거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스도 나이트마치의 장소가 왜 루하르 왕국인지는 알고 있었다. 100년 전에 돌연 은거해 버린 용감한 모론. 그를 꾀어내기 위해서다.


“하멜 당신은…… 후후. 당신은 그렇게 불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일단은 베르무트 님의 재림이라고 불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저와 똑같이 닮은 모습이고 말입니다.”


“…….”


“은거한 모론이 루하르의 왕가와 남몰래 교류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만약 그가 대망치협곡에 은거하고…… 그곳에 도착한 저희를 멀리서나마 발견한다면.”


“그 등신은 깜짝 놀라 하며 달려들겠지.”


모론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 같았다. 유진이 그 모습을 상상하며 피식 웃자, 아니스도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유진처럼 아주 밝지는 않았다.


“모론이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라면 말입니다.”


유진은 그 말에 당장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니스를 응시했다. 그 얼굴은 크리스티나의 것이었지만, 그럴지라도 유진은 아니스의 처연한 우울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등신은 변하지 않았을 거야.”


대답이 늦었다.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유진은 힘을 주어 그렇게 내뱉었다.


루하르의 수도, 하멜론에서 다시 워프게이트를 이용했다. 도착한 곳은 루하르 북쪽 도시인 로스르크. 그곳에서부터는 더 이상 워프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직접 횡단해야만 했다.


“레헤인까지 맨몸으로 가겠다고? 미쳤군.”


여정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며 만난 상인들마다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오지랖을 부리며 말리지는 않았다.


유진과 시엘, 시안의 가슴에 새겨진 라이언하트의 문양 때문이었다.


“얘기는 들었소. 한참 먼 레헤인의 훈련지에서 나이트마치라는 축제가 열린다지?”


“그걸 축제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각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요란하고 떠들썩하게 즐길 테니 축제가 아니면 뭐요? 어쨌든 당신들 덕분에 우리 상인들이야 때아닌 대목을 즐기고 있지.”


“이미 여럿이 지나갔나 봅니다?”


“말도 마시오. 이곳 로스르크에서만 3개 기사단과 4개 용병단이 지나갔다니까.”


레헤인까지 가는 길이 로스르크뿐만 있는 것은 아니니, 다른 도시에서 출발한 병력까지 친다면 레헤인에는 도착할 병단의 수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물건도 많이 사셨으니 공짜로 알려드리지. 기사단 중에서 2개는 저기 저 항마연합의 소국들인데, 남은 1개가 아주 알아주는 곳이었소. 시무인의 격랑 기사단. 라이언하트 도련님이라면 당연히 알겠지?”


알다마다. 대륙 제일의 기사단을 꼽을 때마다 항상 언급되는 곳. 시무인은 ‘기사의 나라’를 자처하는 국가라, 왕가에 충성하는 기사단만 해도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사들로 엄선된 정예가 바로 격랑 기사단. 그곳의 기사단장은 시무인 최강의 기사인 십이걸의 퍼스트. 격랑기사단과 마찬가지로, 대륙 제일의 기사를 꼽을 때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다.


“퍼스트는 뭐랄까……. 귀기(鬼氣)가 느껴질 만큼 날카로운 사내였지. 그래서 더욱 공주기사와 대조적으로 보였어. 그분은 청초하고 맑으셔서 한 송이의 꽃처럼 보였거든…….”


상인의 중얼거림에 시안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시무인의 공주기사. 시무인 국왕의 자식들 중에서도 특별할 만큼 검에 재능을 타고난 스칼리아 공주.


“엉큼한 새끼.”


“뭐, 뭐.”


스칼리아 공주는 루하르의 아일라 공주와 함께 시안의 약혼녀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용병단도 뭐…… 대형 용병단이기는 했는데…… 아. 혹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싶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경고는 해드려야겠군.”


“경고?”


“며칠 전에 로스르크를 거친 용병단 중에 블랙독 용병단이라는 놈들이 있소. 말이 용병단이지, 다른 설원에서 상단을 호위랍시고 끌고 다니며 갈취하는 놈들이야. 용병단의 탈을 쓴 강도란 말이지.”


300년 전에 용병 출신이었던 유진에게는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상단은 용병단의 흔한 고객이었고, 양심이 없고 능력만 된다면 상단이 고용한 호위무사를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든 뒤, 앞으로 호위해 주겠다며 강압적으로 굴어 의뢰를 체결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맺은 계약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 끌려다니는 시간만큼 추가요금을 지불하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블랙독 녀석들이 설마 그 라이언하트의 도련님들을 상대로 수작을 부리진 않겠지만…… 설원은 넓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상책은 엮이지 않는 것이지. 멀리서 검은 개의 깃발을 본다면, 괜히 상대하려 들지 말고 갈 길을 가도록 하게.”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늑대를 더 빌릴 생각은 없나? 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5명 정도라면 늑대썰매를 쓰는 것이 좋을 텐데…….”


“괜찮습니다.”


썰매를 타는 것도 생각은 해보았지만, 여러 번 재고한 끝에 굳이 쓸 필요가 없다 싶었다.


“……마법을 쓰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너희는 편하겠지.”


눈밭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하는 마법은 그리 고등한 마법도 아니고, 오래 지속한들 마나의 소모도 크지 않다. 하지만 유진은 그렇게 편의를 위한 마법을 써줄 생각이 없었다.


“너희 둘. 아직 백염식 4성이잖아.”


“……우리 나이에 4성이면 높은 거야.”


“너희랑 동갑인 난 6성인데?”


“그건 네가 괴물인 거고 이 자식아.”


시안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썹을 콱 찡그리며 대꾸했다.


“마음 편히 몸 편히 가려고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잖아, 그렇지?”


시안은 자신이 유진보다 못나다는 것을 안다. 아마 평생토록 유진을 넘지 못할 것이다. 시안은 일찍부터 그것을 자각했고, 아무리 질투하고 시기해 봤자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았다.


애니실라는 시안이 어렸을 때부터 형제인 유진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가르쳤다.


질투는 하되 시기하지는 말 것. 뛰어넘지 못할지라도 뛰어넘기를 바랄 것. 비록 친형제는 아닐지라도, 친형제처럼 대하며 의지할 존재로 삼을 것. 배신하지도, 배신당할 일도 없도록 우애를 쌓을 것.


“……이게 도움이 될까?”


“내가 너한테 도움 안 될 일을 시킨 적이 있냐?”


유진은 히죽 웃으며 시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기는 했다. 그의 백염식이 벌써부터 4성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백염식의 수련에 관해 유진에게 여러 조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언은 시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좋아.”


시안은 각오를 다지고서 대뜸 신발을 벗었다. 그렇게 맨발로 눈 위에 서니, 섬뜩한 추위에 등골이 오싹거렸다. 시안은 정교하게 백염식을 운용하며, 최소한의 마나로 몸을 데웠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발을 뻗어가며 걷기 시작했다.


눈을 파고들지 않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발자국 자체가 남지 않아야 한다. 그건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세심하고 지속적인 마나의 조작이 필요했다.


출력이 과해서야 의미가 없다. 유진이 시엘과 시안에게 요구하는 것은, 백염식의 불꽃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마나로 눈 위를 걷는 것이다.


“윽…….”


시엘은 질색하면서도 유진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벗은 부츠를 소중히 끌어안고서 살금살금 눈 위를 걸었다. 유진이 대수롭지 않게 다가가서 부츠를 건네받으려 들자, 시엘은 기겁하며 펄쩍 뛰어서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아니…… 신발 안고 가는 것이 처량 맞아 보여서…… 망토 안에 넣어주려고 했지.”


“싫어, 진짜 싫어. 내가 알아서 들고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냄새날까 봐 그래?”


유진의 질문에 시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너는 어릴 때부터 그러더라. 난 네 몸에서 뭐 이상한 냄새 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너 몇 년 전에는 땀 냄새 풍기는 것이 싫다며 밖에서 수련도 안 했잖아.”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얏!”


“별로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한 4년 됐나……. 어쨌든 너한테 이상한 냄새 안 나니까, 괜히 들고 있지 말고 신발 내놔.”


“……너는…… 너는 개자식이야. 배려심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내가 뭐, 내 몸에서 진짜 냄새나서 그러는 줄 알아? 그냥 부끄럽고 민망한 거야! 저리 꺼져!”


시엘은 부츠를 붕붕 휘두르며 비명처럼 외쳤다. 그 거센 저항에 유진도 더 이상 권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유진 님이 잘못하신 겁니다.”


두꺼운 털코트 차림의 크리스티나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유진은 억울하여 눈을 치켜떴다.


“내가 뭘 잘못해?”


“소녀의 마음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하십니다.”


크리스티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메르도 실눈으로 유진을 쳐다보며 함께 혀를 찼다. 메르는 에빌의 등이 꽤 마음에 든 것인지, 안장까지 얹혀두고서 그 위에 앉아 있었다.


폭신해 보이는 털모자를 쓴 소녀는 황소만큼 커다란 늑대의 등에 앉아 있다. 그 늑대가 선두에서 방향을 정하고 안내한다. 쌍둥이 남매가 맨발로 뒤따르고, 큼직한 망토를 입은 사내가 엄한 눈으로 남매를 감시한다. 코트 차림의 여인이 사내의 바로 옆을 지키고 있다.


로스르크의 성문을 나서는 일행은 여럿 있었지만, 유진 일행만큼 독특한 일행은 없었다. 구경거리를 보듯이 꽂히는 시선에 시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살금살금 걸어서 언제 도착할래? 뛰어!”


“이럇!”


유진이 외쳤고, 메르가 에빌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외쳤다. 에빌이 설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시안과 시엘도 맨발로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렇게 뛸 필요는 없잖아!”


“뛰어야 빨리 도착하지.”


“사마르에서는 안 뛰었을 것 아냐!”


시엘은 설움이 북받쳐서 그렇게 외쳤다.


라이언하트 본대와 떨어져서 유진을 기다린 이유? 크리스티나와 유진이 둘이서, 사이좋게, 사마르에서처럼! 노닥거리며 여행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트마치를 앞두고 훈련이 많아져서 아롯까지는 따라가지 못했다만, 이번만큼은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커다란 썰매를 빌려 타고, 마법으로 따뜻한 공기를 감돌게 해서…… 서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별이라도 보면서 추억을 쌓고 싶었는데! 왜 지금 맨발로, 저 커다란 늑대새끼의 엉덩이나 쫓고 있는 건가?


“사마르에서 안 뛰었나?”


“유진 님은 뛰셨고, 저는 날았습니다.”


유진은 시엘의 외침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보란 듯이 날개를 펼쳤다.


물론, 그녀는 8장의 날개를 전부 펼치지는 않았다. 사마르를 이동할 적에 애용했던 신성마법, 빛의 날개. 지금의 크리스티나라면 몇 날 며칠 빛의 날개를 써서 비행해도 신성력이 부족하지 않았다.


“시엘 님, 뭔가 착각하신 모양입니다만. 사마르에서 저와 유진 님은 그곳에 온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매일 바삐 움직이고, 습격에 대비하였지요. 오히려 그때에 비해서는 지금이 여유로운 편이랍니다.”


크리스티나는 낮게 비행하며 시엘의 곁에 다가가 속삭였다.


하지만 시엘은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느긋하게 걸었다면 문제없었겠지만, 백염식의 출력을 제한하고, 발이 동상에 걸리지 않게끔 보호하고, 눈을 파고들지 않게끔 마나를 조작하며 달리고 있다. 시엘은 호흡조차 의식하고 조절하며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물론 크리스티나는 시엘처럼 힘들고 바쁘지 않았다. 그녀는 보란 듯이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에 몸을 뉘었다. 바람과 함께 날아와 부딪치는 눈발이 거슬려서, 느긋이 손을 흔드는 것으로 눈을 가로막았다.


“시엘 님은 그리 여유로워 보이지 않지만요.”


시엘은 치미는 욕설을 꾹 삼키고서 앞을 노려보았다.


늑대의 등에 앉아, 깔깔 웃는 메르의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 * *


로스르크의 상공.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미남자가 코트자락을 여몄다. 그는 어느새 멀어진 유진 일행의 등을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여왕이시여.”


그 소곤거림은 이곳이 아닌, 아득히 멀리 떨어진 여왕의 영지에 향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이곳을 떠났습니다.”


마경 헬무드.


검은그늘숲.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나찰공주의 영지로, 그녀를 따르는 다크엘프의 터전이었다. 원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거대한 수림.


하나, 지금의 검은그늘숲에는 그때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무는 떼거리로 베어졌고, 다져진 흙 위에는 말끔한 도로가 깔렸다. 드리밍 건설기업에 고용된 언데드와 인간과 하급마물 노동자들에 의해, 수도 판데모니엄과 같은 건물들도 하나둘 올라오고 있다.


그 한복판.


고혹적인 자태로 완성된 누아르 제벨라의 동상.


“아핫.”


거대한 동상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누아르 제벨라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스칼리아


로스르크의 이름 모를 상인은, 검은 개의 깃발을 보면 괜히 상대하지 말라고 조언했었다.


어쩌면 상인 딴에는 경고라고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대륙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용병단도 아니고 루하르 변경에서 유명한 정도의 용병단은 유진이 경계할 대상이 아니었다.


만약 여정 도중에, 멀리서 그 깃발을 본다면? 굳이 피할 생각도 없기는 했다. 조언을 무시하는 꼴이기는 하지만,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상대를 뭐 하러 피해가나.


“흠.”


블랙독 용병단.


그 깃발을 만나기는 했다. 다만, 놈들의 상징인 검은 개의 깃발은 바람에 펄럭거리지 않고 눈밭에 처박혀 있었다. 깃발뿐만이 아니다. 놈들의 것이었을 수레와 썰매 등도 처참하게 박살 나 있었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체가 눈에 파묻혀 있었다.


시체들을 살펴보았다. 수레와 썰매를 끌었을 설원늑대나 순록, 말 따위, 가축화된 몬스터들. 그리고 용병들의 시체.


“몬스터의 습격은 아니네.”


유진의 곁에서 함께 시체를 살피던 시안이 입을 열었다. 로스르크를 출발한 지 어느덧 일주일이 넘었고, 시안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눈밭 위에 맨발로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바람이 몰아치고 있는데, 그 눈은 시안의 몸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가시화되지 않을 만큼 미약한 마나를 정밀하게 조작하여, 눈이 달라붙지 않도록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장난처럼 죽여놨어.”


이런 흔적을 살피는 것에는 시안보다 시엘이 익숙했다. 흑사자 기사단은 라이언하트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도맡는다. 그 모든 일들이 음지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체를 살피고 다루는 재주는 흑사자의 기본 소양이었다.


“1명…… 인 것 같아.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 용병들을 죽인 것은 1명이야.”


시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확신했다. 태연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시엘은 조심스레 시체를 이리저리 들추고 상처를 살폈다.


유진도 시엘의 의견에 동감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이곳에서 용병들을 죽인 것은 누군지 모를 1명이다.


하지만 혼자는 아니다. 눈이 내려 대부분의 흔적이 사라졌지만, 쓰러진 시체들과 박살 난 수레, 마차 따위로 최초의 진형과 전투의 양상은 대강이나마 추측이 가능했다.


“봐주는 사람이 최소 1명은 있었어.”


유진은 바로 앞의 시체를 발로 뒤집으며 말했다. 장난처럼 죽여놨다. 그 말이 맞았다.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른 것이 아니다.


그냥, 검을 휘둘러 사람을 베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한.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이 아니고, 베고 싶어서 베어낸 검. 그러한 검은 대게 난잡하고 얕다. 아프게 하고, 도망치게 하고, 그렇게 두었다가…… 뒤에서 베었다. 이 탁 트인 설원, 작정하고 도망치려 한다면 어디로든지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죽은 용병들이 도망치려 한 방향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검을 휘두른 놈 외에 다른 놈이 퇴로를 막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누군지 모를 놈은 퇴로를 막는 것에만 충실하고, 검은 휘두르지 않았다.


“누굴까?”


시안이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용병단의 내분이라고 생각했다. 질이 나쁜 놈들이라 했으니, 한번 내분이 일어난다면 즉시 칼부림으로 이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흔적으로 보건대, 이곳에서 벌어진 것은 내분으로 인한 전투도, 용병들끼리의 처형도 아니었다. 장난처럼 벌인 학살과 처형의 놀이였다.


“여기저기서 미움 살 짓을 한 놈들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이건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잖아.”


블랙독 용병단은 나이트마치에 참가하기 위해 레헤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도중에, 누군지 모를 쾌락살인마에게 걸려서 도륙이 나버렸다.


게다가 이 시체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차갑게 얼어붙어 버려서 죽은 시간까지 파악하기는 힘들었지만, 이 설원은 매일같이 눈이 내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이 내리고 있고, 아까도, 아침에도, 새벽에도, 밤에도 눈이 내렸다.


그런데도 시체와 여러 잔해들이 완전히 파묻히지 않았다.


“어쩌시겠습니까?”


죽은 이들에 대한 기도를 마친 크리스티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걱정 어린 눈으로 유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습격자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가 나이트마치에 참가하는 이들을 노리는 것이라면…… 저희를 습격해 올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럼 직접 물어보지 뭐.”


유진은 그렇게 되물으며 에빌에게 손짓했다. 에빌의 등에 타고 있는 메르는 콧잔등을 콱 구기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사탕과 시체를 번갈아 보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탕도 빨갛고 피도 빨개서 먹기 싫어졌어요.”


“그럼 먹지 마. 이빨 썩는다.”


“저는 사탕을 아무리 먹어도 이빨이 썩지 않아요. 그리고 유진 님이 먹지 말라고 하니까 다시 먹고 싶어졌어요.”


메르는 사탕 덕분에 빨갛게 변한 혀를 삐죽 내밀었다. 유진은 메르를 한번 흘겨봐 준 뒤, 다가온 에빌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냄새 맡고 찾아가.”


“굳이?”


“누군지도 모를 미치광이 살인마를 경계하는 것보다는 먼저 찾아가는 것이 낫잖아.”


“어쩌면 그 자식이 엄청 센 놈일지도 모르잖아.”


“칼질한 것 보면 별로 안 세. 봐주던 놈은 좀 셀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먼저 파악해 놔야지.”


설원늑대의 후각은 굉장히 뛰어나다. 이 늑대과 몬스터는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한 번 점찍은 사냥감을 반드시 찾아낸다. 그리고 야수왕이 장담했던 것만큼 에빌은 아주 영리해서, 유진이 대충 말을 해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크릉…….”


시체 사이를 걸으며 코를 킁킁대던 에빌이 낮은 울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 메르의 눈치를 보았다. 일주일 사이에 에빌과의 교감을 끝낸 메르는 방긋 웃으며 에빌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에빌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익숙해진 시엘과 시안이 에빌의 뒤를 따랐고, 크리스티나도 빛의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유진은 만약을 생각해 일행의 맨 뒤에 섰다. 넓게 펼쳐둔 감각으로 주변 일대를 살폈고, 만약 앞에서 이변이 벌어진다면 즉시 개입할 수 있게끔 태세를 갖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시체와 만났다. 블랙독의 용병들이었다.


도망친 시체…… 아니, 도망치게 둔 시체. 마치 술래잡기라고 하는 것처럼, 따라가서 죽여 버린 시체. 한둘이 아니었다. 최초에 보았던 시체만 해도 수십 명이었는데, 만나는 시체들마다 그 수가 대여섯은 되었다.


시체와 만날수록 에빌이 쫓는 냄새는 진해진다. 시체와 만나는 간격은 점점 멀어졌지만, 그만큼 에빌의 발걸음에는 확신이 더해져 달리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목표를 포착해낸 설원늑대의 질주는 어지간한 기사도 쫓기 힘들 만큼 빠르다. 하지만 시엘과 시안은 유진이 첫날에 시킨 것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에빌의 질주를 따라갔다.


유진은 둘의 성장에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전생의 하멜은 후계를 두지 않았다. 사실 시엘과 시안도 하멜의 진전을 이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르친 대로 잘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보기 즐거웠다. 저렇게 마나를 조작하는 습관이 당장 백염식 5성으로 올려주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5성에 오를 초석이 될 것은 틀림없었다.


유진에 의해 성장의 기회를 잡은 것은 저 쌍둥이뿐만이 아니었다. 암실을 드나들던 유진에게 시달린 길레이드와 기온은 어느덧 백염식 6성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다. 카르멘도 7성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성취를 거두었다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혈사자, 네 덕분에 데스티니브레이커 외에 새로운 오의를 만들 수 있었다. 이름하야 궁니르. 네 오의, 이클립스와 좋은 승부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한번 겨뤄보지 않겠나.


-카르멘 님이 이클립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안 겁니까?


-메르가 알려주었다. 이클립스…… 멋진 이름이더군. 혈사자, 너는 어떻게 태양을 검게 물들여 일식을 만드는 것이지?


저 깜찍한 사역마는 유진이 이클립스를 개발하는 중에 멋대로 심상에 공명하여, 이클립스에 대해 파악한 것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스럽고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을 이름을 멋대로 카르멘에게 떠들어버렸다…….


유진은 그때의 대화에서 느낀 분노와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되새기며 몸을 떨었다. 그때 충분하리만큼 메르의 머리를 쥐어박긴 했지만, 다시 한번 떠올리니 지금 당장 앞으로 뛰쳐나가 메르의 머리를 한 번 더 쥐어박고 싶었다.


메르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잠깐.”


유진은 그렇게 내뱉었다. 그 작은 목소리는 선두까지 전해졌고, 메르가 무어라 명령하기도 전에 에빌이 알아서 뛰던 발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제동이었지만 시엘과 시안은 눈 위에 발이 끌리지도 않고, 누가 뒤에서 붙잡기라도 한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깔끔하게 자리에서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내심 흡족해하는 유진에게 크리스티나가 먼저 다가왔다.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에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 맺는 수인. 그것을 본 크리스티나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에빌의 등에 타고 있던 메르도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화륵.


수인을 맺은 오른손 앞에 자그마한 불씨가 나타났다. 유진의 백염식으로 만들어낸 자주색의 불꽃. 유진이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니, 불꽃이 스스로 움직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금 뭘 한 거야?”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메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후후 웃음소리를 흘렸다.


“저게 뭐냐면요, 유진 님이 아롯에서 열심히 만든 시그니처의…….”


“메르메르, 조용히 해.”


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메르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메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제는 메르데인을 붙이지도 않는 건가요?”


무시했다. 굳이 두 눈을 감을 필요는 없었다. 유진이 바란 대로 멀리 날아간 불꽃이 유진의 시각과 연결되었다.


인간이 마나를 써서 감지할 수 있는 반경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마나를 사용해 마법을 일으킨다면, 마법사의 수준에 따라서 감지할 수 있는 거리는 크게 늘어난다.


이 불꽃 자체는 유진의 시그니처가 아니다. 녹탑주 제네릭 오스먼이 위그드라실이라는 시그니처를 만들기 위해, 디바인트리를 비롯해 여러 단계를 거쳤듯. 이 불꽃은 유진의 시그니처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에 포함된 마법이다.


감각에 거슬렸던 것.


그것을 불꽃을 통해 확실히 보았다. 꽤 멀리 떨어진 앞. 사람들이 있다. 서 있는 것은 2명. 이미 시체가 되어 널브러진 것이 3명. 아직 시체가 되지 않은 1명이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데, 검이 놈의 목을 톱날처럼 썰고 있다.


“미쳤네.”


유진은 불꽃을 꺼트리면서 투덜거렸다. 습격자의 정체를 제대로 상상하지는 않았다만, 방금 보았던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솔직히 더 나아가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꽃을 꺼트리기 전, 눈이 마주쳤다. 놈이 이쪽을 파악하고 접근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유진이 느끼기에, 놈은 아직까지 그 장소에 있었다. 저쪽이 감지를 못했다면 굳이 조우할 필요는 없겠지만, 저쪽이 감지하고 경계하며 제 미친 짓을 대상을 바꿔 계속하려 든다면. 섣부른 검이 날아오기 전에, 일단 조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럴 만한 지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동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메르와 에길도 뒤로 물렸다. 전력의 비교를 떠나, 저쪽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다가올까? 아니면 관심을 주지 않고 떠나 버릴까. 후자는 가능성이 없고, 보인 행적을 보면 전자가 맞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습격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2명은, 유진이 보았던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윽…….”


시엘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곳은 눈이 거의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바닥에는 선명한 붉은 얼룩이 가득했다. 막 쏟아낸 피다운 뜨거움은 이미 식었으나, 갓 죽은 시체 특유의 비린내와 쏟아낸 오물의 냄새는 강렬했다. 단순한 시체보다 피가 많이 흐르고, 많은 악취가 나는 것은 그렇게 되도록 죽였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말없이 망토를 열었다. 메르는 저 참상이 끔찍하다 생각하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스르지 않고, 유진이 열어준 망토의 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티나는 작은 탄식을 흘리며 시체들을 위한 기도를 읊조렸다.


“……설마.”


경계를 위해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고 있던 시안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스칼리아 아니머스 공주님?”


저 앞에 서 있는 2명.


둘은 옅은 보랏빛이 감도는 갑옷을 입었다. 이 혹한의 땅에 알맞은 방한복은 따로 입지 않았다. 저 갑옷은 금속처럼 보이지만, 추위에 의해 살에 달라붙지는 않는다. 자체적으로 마나를 품은 금속으로는 미스릴이 유명하지만, 그보다 진귀한 오리할콘을 통째로 써서 만든 갑옷이다. 저 갑옷은 따로 마법을 새겨 넣지 않아도, 주인의 몸을 온갖 위해에서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다.


엑시드라고 불리는 시무인의 갑옷으로, 오리할콘을 통째로 써서 만든 엑시드는 왕가직속 격랑 기사단의 상징이다.


피범벅의 검을 들고 있던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나자빠진 시체의 목을 톱처럼 썰던 기사였다. 엑시드 때문에 가슴의 굴곡 따위는 보이지 않았으나, 남자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키가 작고 체형이 얇았다.


그리고 가슴팍의 문장. 파도와 소용돌이의 물결을 형상화한 문양은 격랑 기사단의 상징이고, 그 위를 노니는 독수리는 왕가의 상징이다.


철컥.


머리를 감싸고 있던 투구가 열린다. 투구가 후드처럼 뒤로 젖혀지니, 그 안에 눌려 있던 붉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무엄하도다.”


‘공주기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시무인의 공주. 격랑 기사단의 부단장인 스칼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허리를 낮추지 않으며, 무릎을 꿇지 아니하는가?”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에서 주황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동자에는 초점이 흐릿하고 눈 밑은 검은 그늘이 짙었다.


“그대들의 무례함은 나를 모독하는 것이다. 혹 그대들은 방금 징벌한 무뢰한의 동료나 가족인가? 모조리 징벌했다 생각하였거늘, 아직도 질척한 오물이 남아 있던 것인가?”


“예?”


“닥쳐라, 천한 것아. 나는, 본 공주는 너희 오물이 입을 열 것을 허락하지 않았노라.”


시안이 당황하여 내뱉었지만, 스칼리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렇게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아직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크게 휘둘러 피를 떨쳐냈다.


“충분히 죽였다 생각하였거늘 이 순백의 땅에는 오물이 아직도 가득하구나. 좋다. 본 공주가 루하르의 야만왕을 대신하여, 부도덕한 이들의 도달점은 고통스러운 지옥일 뿐이라는 것을 친히 육식에 새겨주도록 하마.”


“잠깐, 스칼리아 공주님……!”


“그 더럽고 천한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말지어다, 오물아! 네 주둥이에서 전해지는 악취에 구역질이 나는구나!”


스칼리아가 고함을 질렀고, 시안은 화들짝 놀라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악취? 그럴 리가 없는데…… 시안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동안, 스칼리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 야…… 어떡해?”


시엘도 당황하여 유진을 돌아보았다.


상대는 시무인의 공주. 험한 소리를 퍼붓는다 하여 똑같은 험한 말로 대꾸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의 스칼리아는 굉장히 이상했다. 유진은 물론이고, 시엘과 시안은 라이언하트의 문양이 새겨진 제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도 스칼리아 공주는 라이언하트의 문양을 알아보기는커녕, 죽은 용병들의 동료나 가족이냐며 분노와 혐오를 드러내고 있었다.


“……공주님.”


성큼성큼 걷던 스칼리아를 보던 다른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 또한 엑시드를 입고,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한숨이 가득 섞인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저들은 공주님께서 징벌하신 용병들의 동료도, 가족도 아닙니다.”


“하면 어찌하여 본 공주에게 저리도 무례하게 구는 것인가? 왜 저들은 아직도 본 공주에게 경의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인가?”


“이곳은 시무인이 아니며, 저들의 신분은 공주님께 무조건적인 경의로 무릎을 낮출 만큼 낮지 않습니다.”


“디오르! 본 공주는 그대의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본 공주는, 나는…… 머리가 어지럽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 저들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들은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 라이언하트의 젊은 사자들입니다.”


“무어라?”


스칼리아는 화들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손에 든 검과 앞을 번갈아 쳐다본 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리가. 나는, 저들이 라이언하트의 사자들로 보이지 않는다…….”


“너무 피로하신 탓입니다. 공주님, 부디 제 말을 들어주십…….”


“그만! 듣지 않겠다. 어찌……! 각국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이 스칼리아 아니머스가 참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스칼리아는 그렇게 외치더니 그 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피로 때문이라면 당장 휴식하면 된다. 디오르, 당장 휴식의 준비를 하도록.”


“예.”


남자, 디오르는 여전히 투구를 벗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숙였던 고개가 다시 들렸을 때, 투구 너머의 시선이 잠시 유진에게 머물렀다.


“그대들은 이리 와서 앉도록 하라.”


스칼리아가 내뱉었다.


“와서, 이야기를 하라. 왜 그대들은 설원을 떠돌고 있는가? 그리고 왜 본 공주의 앞을 가로막았는가?”


“라이언하트의 일원으로 나이트마치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시안이 입을 가리고서 대답했다. 그러자 스칼리아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천한 것. 만약 그대들이 정말로 라이언하트의 일원이라면, 왜 그들의 행색은 그리도 초라하단 말인가? 용맹하다는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건…….”


“그대의 거짓말이 들통났구나! 감히 본 공주를 속이고 우롱하려 들다니. 당장 목을 베어…….”


“그러는 공주님은 왜 기사 1명만 대동하고 설원을 떠돌고 계시는 겁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공주님이 죽인 이들을 봤습니다. 블랙독 용병단. 질이 나쁘다고는 들었는데, 그들의 처형방법은 죄질에 비해 아주 과했…….”


“그 죄질을 감히 네가 판단하려 드는가? 네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그런 공주님에겐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본 공주는 그들을 벌해달라는 민초들의 울음에 화답한 것이다. 어이하여 1명의 기사만 대동하고 설원을 떠돌고 있느냐고? 일주일 전이다. 본 공주와 격랑 기사단은 설원을 횡단하는 중, 원주민들의 마을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자 하였다. 한데 그 마을은 당장의 혹한을 이겨내기도 버거울 만큼 약탈당한 상태였지!”


스칼리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백랑 기사단보다 먼저 마을에 들렀던 그, 쓰레기보다 못한 용병들이 벌인 약탈이었다. 본 공주는! 마을의 사람들이 가여워, 격랑 기사단의 물자를 풀어 마을에 나눠주었다. 내 손으로 직접 그들을 벌하고자 하였지.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작 용병단 하나를 벌하는 데 격랑 기사단 전원을 이끄는 것도 과한 일.”


스칼리아가 떠드는 동안, 디오르는 휴식의 준비를 마쳤다. 그는 눈바람을 막을 천막을 치고, 눈 위에 널따란 천막을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자그마한 구체를 굴리니, 구체가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밝은 빛과 열기를 뿜어냈다.


“그래서 본 공주 혼자 그들을 추격해 벌하고자 하니, 왕가에 충성하는 격랑 기사단의 단장은 본 공주의 정의로운 뜻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본 공주는 종자인 디오르와 함께 쓰레기들을 주살하고자 설원을 떠돌고 있던 것이다. 그대, 본 공주의 처형방법이 과했다 하였는가? 그들은 고통스럽게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그들에게 약탈당한 마을 주민들은, 본 공주가 보살피지 않았다면 혹한 속에서 굶주림에 고통받다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자초해낸 죄인들도 고통받아 죽어야 하는 것이 마땅히 옳지 않은가?”


스칼리아는 그렇게 떠들면서 디오르가 깐 천막 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녀는 엑시드를 벗지 않고, 양손으로 구체를 잡아들고 끌어안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을…….”


“공주님.”


“아니, 아니야. 디오르. 나는 괜찮다……. 휴식은 필요 없어.”


피로에 짓눌린 눈이 감기려 들었다. 스칼리아는 잠시 그러고 있다가, 이를 뿌득 갈며 안고 있던 구체를 천막 바깥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필요 없다. 이런 것은 필요 없어. 검을…… 아니…… 아니로군. 조금 쉬어야 해…….”


휴식하겠다고 말한 주제에 휴식이 필요 없다 말하고, 다시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칼리아의 상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상했다.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디오르가 입을 열었다.


스칼리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웅크린 무릎을 끌어안았다.


스칼리아


“소개가 늦어 죄송합니다.”


유진 일행이 천막 아래로 들어와서 앉자, 디오르가 한숨을 푹 내쉬며 투구를 열었다. 그렇게 내보인 얼굴은 목소리만큼이나 젊어 보이는 미남자였다.


“디오르 하이만이라고 합니다. 백랑 기사단 소속이며, 스칼리아 공주님의 부관을 맡고 있습니다.”


“하이만?”


그 이름에 시안이 먼저 반응했다. 시안은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디오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혹시 오르투스 노이만 경의…….”


“아들입니다.”


오르투스 노이만. 격랑 기사단의 단장이자, 시무인 십이걸의 정점인 퍼스트의 이름이다.


디오르의 소개에 유진도 기억을 더듬었다.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교육을 받던 중에 들은 적이 있었다. 기억대로라면 디오르는 유진과 본가의 쌍둥이들보다 2살 나이가 많은, 죽은 이오드와 동갑이었다.


노이만 가문은 시무인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기사 가문이고, 아버지는 시무인 제일을 넘어 대륙 제일을 논할 때에 항상 거론되는 퍼스트. 덕분에 본가의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여러 번 디오르의 이름을 들으며 경계하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었다.


‘어릴 때부터 두각을 보였다고 들었는데.’


시안이 그러하듯, 시엘과 유진도 디오르를 살펴보았다.


나이치고 뛰어나다는 것은 알겠다. 사실 그것도 유진의 눈이 너무 높아서 그렇게만 보이는 것이지, 디오르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격랑 기사단의 일원이 되기에는 충분할 만큼 뛰어나기는 했다.


하지만 시무인의 퍼스트인 아버지를 생각하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당장 알체스터의 아들인 리오는 유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적 자질의 소유자고, 시안과 시엘도 비교대상이 유진이라서 그렇지 라이언하트의 가계에서 충분히 두각을 보일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디오르는? 뛰어나고 강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놀라울 만큼의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뭐, 당장 보이는 것만큼 뻔한 녀석은 아닐 테지.’


불꽃으로 살펴보았을 때.


스칼리아는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디오르는 알아차렸다. 그렇게 눈이 마주쳤었다. 그래서 유진은 디오르의 실력을 섣불리 판가름하지 않았다.


“스칼리아 공주님의 태도가 좋지 않았던 점은 양해해 주십시오.”


스칼리아 본인은 왕족다운 권위로 난폭하게 굴었지만, 그녀의 부관인 디오르는 그 권위를 대신 주장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칼리아를 아주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디오르는 힐끔 고개를 돌려 스칼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아까 대화를 할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스칼리아의 상태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손가락에 감은 머리카락을 당겨대고 있었다. 디오르는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공주님.”


“그만, 디오르,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그러니 굳이 내뱉지 말거라. 나는, 본 공주는 네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 공주님, 병증이 심각하다는 것은 공주님께서도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병증? 잠이 부족해 피로가 쌓였을 뿐, 이것을 어찌 병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칼리아는 충혈된 눈을 찡그리며 디오르를 노려보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이 땅이 시무인과는 풍토가 워낙에 달라 아직 적응하지 못했을 뿐. 늦어도 며칠이면 푹 자고 멀쩡해진다. 그러니 디오르, 그대는 본 공주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더 이상 내뱉지 말라.”


“…….”


“본 공주는 잠시 주변을 걷도록 하겠다. 그대, 라이언하트의 사자들이여. 만약 그대들이 본 공주와 함께 가고 싶어 한다면 남아도 좋으나, 본 공주의 방해를 할 것이라면 어서 자리를 떠나도록 하라.”


스칼리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뒤로 넘겼던 투구가 다시 스칼리아의 얼굴을 감쌌다. 디오르는 급히 몸을 일으켜 스칼리아를 따르려 하였으나, 스칼리아는 투구 안쪽에서 안광을 번뜩이며 디오르를 쏘아보았다.


“따라오지 말라. 본 공주는 멀리 가지 않는다. 머릿속이 산만하고 어지러워, 혼자서 주변을 좀 걷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대의 걱정은 알지만, 본 공주는 그대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스칼리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뱉고서 홱 몸을 돌려 버렸다. 디오르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걱정 가득한 눈으로 스칼리아의 등을 보았다.


“많이…… 예민하신가 봅니다.”


시안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열심히 표정을 관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안의 여린 마음에는 이미 큼직한 상처가 그어져 있었다. 스칼리아 공주와 혼담이 오간 것이 1년은 훌쩍 넘었는데, 공주에게 살가운 인사를 받기는커녕 더럽고 천한, 오물, 악취, 구역질, 이런 말만 들어버렸지 않은가.


‘그래도 루하르의 국왕은 날 알아보고 어깨도 두드려 줬는데…….’


정식으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실연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곱씹을수록 마음이 아려와, 시안의 어깨가 축 처졌다.


“……본래 공주님께서는 시무인에서도 가벼운 불면증을 겪고 계셨습니다.”


디오르는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종류의 병이 그러하듯, 공주님의 불면증은 마음의 병이지요. 그래도 시무인에 있을 적에는 얕게나마 잠드시곤 하였는데, 이 설원에 오고서는 거의 잠들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건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소개가 늦어 죄송합니다. 루하르의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라고 합니다.”


“아…… 성녀후보님이신?”


“예.”


“도와드릴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뜻입니까?”


“제가 다루는 신성마법 중에는 불안정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들지 못하는 정신을 평온한 잠으로 이끄는 마법도 있습니다. 디오르 경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부분의 불면증은 치료하기 힘든 마음의 병이지만, 제 신성마법이라면 공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보살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를 행하여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압적인 교육을 받았을지언정 크리스티나는 신관이며, 신관의 본분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평화로운 빛으로 이끄는 것이다. 당장 그녀와 육체를 공유하는 아니스도, 성녀라 믿기지 않을 만큼 불량했으나 구제를 위해서는 제 몸을 돌보지 않았었다.


“불면증 때문은 아닌 것 같던데.”


유진이 입을 열었다.


“방금만 해도 그랬잖아. 공주님은 잠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잠들 수 있었어.”


휴식하겠다고 말한 것은 스칼리아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에 앉고 나른함을 느낀 즉시 그를 떨쳐냈다. 입술을 씹고, 머리카락을 뜯고, 감기려 하는 눈을 부릅뜨고. 그리고 지금은 주변을 거닐겠다고 나갔는데, 유진은 그것조차도 잠을 떨쳐내기 위한 행동이라 느꼈다.


“제가 감히 공주님의 사정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디오르는 난감하단 표정을 지으며 천막 밖을 보았다. 눈과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스칼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무인의 공주기사. 그 별명은 기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시무인과 그 왕가를 대표하는 상징과 같다. 스칼리아가 백랑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에 오른 것이 그러한 특수성이 더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의 실력이 백랑 기사단 내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강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북방에서도 가장 위험하다는 레헤인야르의 깊은 곳이라면 모를까, 이 설원에서 스칼리아를 위협할 만한 몬스터는 없다.


“……공주님을 찾아야겠습니다.”


스칼리아의 실력은 디오르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최근의 스칼리아는 이상하다. 디오르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유진도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뜸 그렇게 말하니, 디오르를 제외한 모두가 놀란 눈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예, 레헤인에서의 만남을 기대하겠습니다.”


정작 디오르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디오르는 펼쳤던 천막을 정리하지 않고 먼저 밖으로 나가버렸고, 놀란 눈을 끔벅거리던 시안이 유진을 쳐다보았다.


“간다고? 왜?”


“왜는 무슨, 나야말로 왜다 이 자식아. 그럼 안 가고 뭐 하게?”


“아니…… 디오르 경을 보니까 조금 난감해하는 것 같던데. 까짓거 도와줄 수도 있…….”


“뭘 도와줘? 스칼리아 공주가 애도 아니고, 잠깐 산책하러 나간 것이라는데 우리가 왜 관련도 없는 스칼리아 공주를 같이 찾아줘야 하는데.”


“그건 그런데…….”


“스칼리아 공주가 제 도움을 바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시안은 여전히 축 늘어진 어깨로 중얼거렸고, 크리스티나가 다른 질문을 건네 왔다.


“아까도 말했잖아. 스칼리아 공주의 불면증은 잠이 안 오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잠을 안 자는 거야. 이유는 나도 모르지만, 스칼리아 공주는 정상이 아니야.”


“유진의 말이 맞아.”


시엘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감했다.


“스칼리아 공주는 정상이 아니야. 당장 우리만 해도 공주에게 공격당할 뻔했잖아? 바로 눈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정신이 흐려져 있다고. 짜증 나는 건, 그녀가 시무인의 공주라는 거야. 아무리 우리가 라이언하트라고 해도 공주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잖아.”


둘이 그렇게 말하니 크리스티나와 시안도 더 이상 반론하지는 않았다.


[이제 나가도 되나요?]


망토 안에 들어가 있던 메르가 물었다. 하지만 유진은 망토를 열어주지 않고, 오히려 단단히 틀어쥐었다. 심술 따위가 아니었다. 메르는 유진의 마음을 읽었고, 작게나마 놀란 소리를 내었다.


“……아.”


크리스티나도 자그맣게 놀란 소리를 냈다. 그녀는 유진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무언가 이야기를 건넸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굳은 표정으로 허리에 매어 둔 플레일을 어루만졌다.


천막을 나오니 그새 눈보라가 거세져 있었다. 다시 에빌이 앞장섰고, 일행은 눈보라를 가로질러 이동을 시작했다.


“멀리 떨어지지 마.”


눈보라를 헤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시안과 시엘은 이례적으로 경고를 들었다. 이유에 대해서 따로 묻지는 않았다. 휘몰아치는 눈만큼이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침묵이 긴장을 고조시켰다.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시안은 등에 걸치고 있던 게돈의 방패를 왼쪽 팔뚝에 장착했다. 시엘도 망토 안쪽에 숨기고 있던 비환검 자벨의 칼자루를 붙잡았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당연히 유진이었다. 그는 직접 입을 여는 대신에 백염식을 끌어냈다. 갑작스레 발해진 마나에 시엘과 시안의 걸음이 멈췄다.


ㅡ화아악! 크리스티나가 일으킨 빛이 눈보라를 밀어냈다. 활짝 펼친 빛의 날개가 주변을 감쌌고, 그녀의 발밑에 커다란 십자가의 성진이 나타났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눈보라는 성진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 바깥,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센 눈보라의 저편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까 헤어졌던 스칼리아 공주였다.


“……뭔가…….”


시안이 중얼거렸다. 그는 게돈의 방패를 들고서 스칼리아를 노려보았다. 눈보라가 거세어졌지만, 시야를 집중하니 그녀의 얼굴은 살필 수 있었다.


이상하다.


아까도 느꼈던 것이지만, 지금 스칼리아의 얼굴은 더더욱 이상했다.


초점이 흐렸던 눈, 이제는 아예 초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눈꺼풀은 들려 있지만, 스칼리아의 눈동자는 뜨여 있지 않았다. 빛 한 점 없이 푹 꺼진 눈동자는 죽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디오르 경은 어디에 갔…….”


“죽음으로 죄를 갚거라!”


시안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스칼리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활짝 열린 투구가 얼굴을 감쌌고, 짙은 푸른색의 마나가 폭발하듯 치솟아 스칼리아의 몸을 휘감았다.


ㅡ꽈앙! 그녀가 밟고 있던 눈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증발했다. 스칼리아는 눈보라를 관통하며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공주님!”


이쪽이 먼저 대응하기도 전에, 눈보라의 저편에서 질주하던 디오르가 스칼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당황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며 스칼리아의 앞에서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 그만두십시오! 저들은 라이언하트의…….”


“감히 본 공주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네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스칼리아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디오르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찍었다. 위협하기 위한 검이 아니었다. 일격에 몸을 양단할 만큼의 힘이 검에 가득 실려 있었다. 그러니 디오르도 기겁하여 허리에 검을 뽑았다.


쩌엉! 출수는 디오르 쪽이 한참 늦었으나, 그의 검은 무리 없이 스칼리아의 검을 받아냈다. 아래에서 받아내는 것인데도 디오르의 몸은 조금도 굽혀지지 않았다.


“이……!”


놀란 시안이 돕기 위해 나서려 했지만, 유진은 팔을 옆으로 들어 시안이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그러자 시안이 당황해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뭐야? 왜?!”


“있어봐.”


유진은 정확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ㅡ꽈앙! 앞에서 다시 충돌음이 들렸다. 스칼리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검을 도끼처럼 내리찍었고, 디오르는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스칼리아의 검을 받아냈다.


실력이 꽤 제법이었다. 아까 드러났던 것 이상의 실력을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짐작했지만, 스칼리아의 맹렬한 공세를 받아내는 디오르의 실력은 시무인 퍼스트의 아들다운, 아니, 그 이상이었다. 마나의 출력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검기(劍技)만으로는 격랑 기사단의 부단장인 스칼리아보다 우위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지금의 스칼리아는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검마저 정신의 영향으로 무뎌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스칼리아는 제정신이 아니기에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디오르를 물리치지 못했다.


“으음……!”


급히 개입해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디오르는 진심으로 난감함을 느꼈다. 스칼리아 공주가 왜 미쳐 날뛰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지금 스칼리아 공주는 라이언하트의 자제들은 물론이고 디오르조차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더러운, 쓰레기 같은 해적 놈들. 바다를 떠나 이 새하얀 대지까지 본 공주를 죽이러 온 것이냐? 너, 너는 아까 내가 죽인 용병이 아니냐. 어째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지? 오호라, 그렇구나! 너는 사악한 마족에게 영혼을 팔았구나!”


스칼리아의 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난감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디오르는, 자신을 라이언하트의 자제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미쳐 날뛰는 스칼리아 공주의 검이 라이언하트의 자제에게 향하게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우선 제압을…….’


방어에 전념하고는 있는데, 이래서는 끝이 없다. 디오르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하여 스칼리아를 제대로 제압하고자 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시선에 호소하고자 스칼리아와 눈을 마주했다. 투구의 눈구멍 너머로 칙칙한 눈동자가 보였다.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눈…….


“스칼리아 공…….”


디오르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선이 맞닿는 충분한 거리. 그것이 갑작스레 좁혀진 것만 같았다. 간극이 좁혀졌나? 아니, 다가온 것은 시선뿐.


‘눈동자’.


디오르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는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제 몸을 통제할 수도 없었다.


“몸이 너무 약한걸.”


투구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스칼리아의 것이었지만, 내뱉은 것은 스칼리아 공주가 아니었다.


“아니면 그릇이 너무 하찮은가? 저급 인큐버스는 어쩔 수 없다니까.”


엑시드의 투구가 활짝 열렸다. 쏟아지는 붉은 머리카락 속에서 스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빛 한 점 없던 눈동자에서 무수히 많은 별빛이 차올랐다.


강제수면술, 몽중몽(夢中夢).


징조는 없다. 마나도 흔들리지 않는다. 시야에 포착하고, 바란 순간, 상대를 강제로 잠들게 만든다. 이것은 고위 몽마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권능이며, 그녀의 경우에는 그 어떤 몽마보다 강력하고 강제적으로 상대를 잠들게 할 수 있다.


잠이 든 순간. 다른 것을 할 필요는 없다. 몽중몽. 그 이름처럼, 잠이 든 순간 거듭되고 무한한 꿈의 세계로 끌고 간다.


“……어머나.”


스칼리아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


모두 다 잠들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잠든 것은 2명뿐. 몽중몽은 발현되지도 못하고 가로막혔다. 무릎 꿇은 저 2명은 단순히 잠이 들었을 뿐이다.


“신성결계…… 대단하기는 하지만, 약식으로 펼친 결계로 막힐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는데?”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스칼리아의 얼굴에 웃음을 그려내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여유 가득 웃기는 하였지만, 누아르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누아르의 본신은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헬무드의 검은그늘숲에 있다. 그녀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로스르크에서 활동하는 권속ㅡ 저급 인큐버스의 몸을 그릇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의 누아르는 본신의 강력한 힘도, 환상의 마안도 쓸 수가 없었다. 필요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스칼리아를 꿈속에서 괴롭히며 가지고 놀던 것은 짓궂은 장난일 뿐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스칼리아를 잠들게 하여 몽유 상태로 만들어 육체를 장악했다.


‘꿈속으로 이끌고 핥아 볼 생각이었는데…….’


누아르는 보다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네.”


지금 이 순간도 누아르는 계속해서 강제수면술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잠들지 않았다.


“너희 대체 뭐니?”


누아르는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물었다.


스칼리아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유진은 뜨고 있는 눈에 힘을 주고,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몽마의 권능, 강제수면. 시야에 포착된 대상을 강제로 잠들게 하는 저 권능은, 마법과는 조금 다른 강렬한 암시 쪽에 가까우며, 몽마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능이다.


권능의 강함은 몽마의 격을 따른다.


저급한 몽마라면 한참 동안 눈을 들여보고 암시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볼레로 거리의 저급한 서큐버스들이 그런 것처럼 술과 마약을 함께 쓴다.


중급 이상의 몽마라면 그런 잡다한 도움 없이, 시선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강제수면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몽마는 종족의 이름처럼 꿈속을 파고들기에, 사냥감을 언제 어느 순간에 잠들게 할 수 있는지가 격의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동자에 담은 즉시 강제수면을 걸 정도의 강한 권능. 심지어 한 명에게만 강제수면을 건 것도 아니다.


눈이 마주친 순간은 찰나. 심지어 거리도 꽤 있어서, 제대로 시선이 맞닿은 것도 아니었다. 이쪽의 대응도 부족하지는 않았다. 아니스가 깃들면서 크리스티나의 신성력은 폭발적으로 늘었고, 펼칠 수 있는 신성마법의 종류와 수준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강제수면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크리스티나의 신성마법이 아직 전성기의 아니스에 미치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지금 스칼리아의 몸을 지배하는 존재가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300년 전보다 더…….’


힘을 주어 말아 쥔 주먹의 안쪽이 욱신거린다. 너무 강하게 쥔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를 내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집중하고 의식을 깨우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300년 전의 누아르의 강제수면은 이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그녀가 단신으로 펼친 강제수면으로 아니스의 결계를 뚫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과거의 누아르는 여러 방법을 시도하며 하멜과 동료들을 괴롭혔었다.


가장 흔했던 것이 기습. 가끔은 몽마의 머릿수로 밀어붙이기도 했다. 환상의 마안을 노골적으로 써가며 현실과 꿈을 뒤바꾸기도 했었다.


지금은? 유진은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스칼리아를, 아니,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빛을 담은 눈동자. 누아르의 상징과 같은 눈이지만, 저 눈은 환상의 마안이 아니다. 하찮은 그릇, 저급 인큐버스. 투덜거렸던 말을 상기해 보면, 지금 스칼리아의 몸을 장악한 것은 누아르의 본신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만큼이나 강력한 강제수면…… 답은 뻔했다. 300년은 길었고, 그 시간 동안 누아르는 놀지 않았다. 누아르 제벨라. 지금 시대의 그녀는 ‘몽마의 여왕’을 넘어, 마왕에 준하는 격에 도달해 있었다.


‘300년 전에 죽여야 했는데.’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고.


[300년 전에 죽여야 했는데.]


아니스도 똑같이 생각했다. 300년 전에도 지고의 격에 올라 있던 마족이다. 그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격에 도달할 줄이야. 죽일 기회가 마땅치 않기도 했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죽여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경계하고 있군요? 귀엽게.”


여전히 머리를 기울이고 있던 누아르가 활짝 웃었다. 그녀는 스칼리아의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요. 방금 그건…… 음, 가벼운 장난이었거든요. 당신들은 인간 중에서도 젊은 나이에 속하죠?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까마득한 애기라구요, 애기.”


누아르가 웃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 동안,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침묵으로 시선을 나누었다.


눈앞에 저것은 누아르의 본신이 아니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이곳에 누아르의 본신이 직접 왔다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싸움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능성을 되짚어 봐도, 지금 경지로는 누아르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장 300년 전의 하멜도 그때의 누아르를 단독으로 죽이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그때보다 강해진 누아르를 죽이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본신이 아니라면 죽일 수야 있겠지만…… 본신을 죽이지 못해서야 무슨 의미야?’


냉정히 생각했고, 살의를 억눌렀다.


[날개는 펼치지 마십시오.]


아니스도 유진과 똑같이 생각했다.


다행인 것은 강제수면이나 몽중몽처럼 ‘꿈’을 꾸게 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크리스티나에게는 아니스가 깃들어 있었다. 누아르의 습격에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하다. 아니스 본인이 평범한 존재가 아닌 만큼, 그녀의 정신력은 인간을 아득하게 상회하고 있다.


그건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기에, 아무리 누아르라고 해도 크리스티나의 꿈을 파고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300년 전의 용사 일행이 누아르에게 침몰하지 않았던 것은 성녀의 존재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누아르의 침입을 허용한다면, 그녀는 크리스티나에게 아니스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니스의 바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니스는 날개를 펼치지 말라고 속삭인 것이다. 8장의 날개를 펼친다면 누아르의 과한 주목을 받게 된다.


“겁먹은 것이 아니군요.”


누아르가 명랑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애기들은 굉장히 용감한 걸요. 나에게 겁을 먹기는커녕, 분노와 살의를 느끼다니. 심지어 애기답게 그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열심히 참고 있잖아요?”


“……그럼.”


유진이 입을 열었다.


“대뜸 검을 뽑고 덤벼들었는데, 아무 감정도 느끼지 말아야 하나?”


“에이. 그건 가벼운 장난이라니까요? 이건 뭐랄까, 문화의 차이라는 거예요. 마족과 인간의 차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게다가 내가 진짜로 당신들을 죽이려 한 것도 아니잖아요.”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눈 위에 엎어진 디오르를 가리켰다.


“이 젊은 기사만 해도 그렇죠? 내 서프라이즈를 가로막았을 때, 나는 이 기사를 죽일 수 있었어요. 지금도 그렇고 말이에요. 지금 세상모르고 쿨쿨 자고 있으니, 여기서 내가 이 검으로 확!”


누아르는 대뜸 목소리를 높이며 검을 휘둘렀다.


“……죽여 버릴 수도 있지만! 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장난이라는 거예요, 장난. 인간에게는 조금 과격한? 하지만 내게는 악의 한 점 없는 장난이란 말이죠.”


휘두른 검은 디오르의 목 바로 앞에 멈춰 있었다. 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쥐고 있던 검을 뒤로 던져 버렸다.


“기분 상했어요?”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은 여전히 정신을 집중하고서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누아르는 짧은 침묵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거 참. 요즘 애들은 유머가 너무 부족하다니까. 이 평화의 시대에, 내가 라이언하트의 자제들을 습격해 죽이려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면 큰일 나요.”


“시무인의 공주는 괜찮고?”


“그래서 안 죽였잖아요. 이 공주님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잠도 자지 않고 열심히 수련하지만, 실력은 솔직히 그냥 그래요. 나쁘다고 할 수준은 아닌데, 공주기사라며 떠받들어질 만큼 뛰어나지도 않아.”


흐느적거리며 들린 손이 뺨을 어루만졌다.


“외모와 젊음이 아깝다니까. 검을 파고들 것 없이 적당히 즐기며 살면 좋으련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겠어요? 저는 이 공주님을 습격한 것이 아니라, 도와준 거예요. 천성이야 어쩔 수 없지만…… 잠도 못 자는 것은 불쌍하잖아요?”


“못 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싫어하던데.”


“겁이 많아서 그래요. 아니, 내 장난이 과했나? 몇 번 꿈을 보여주니까 기겁해서 자기 싫어하던걸. 별로 심각한 악몽을 보여준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심보가 고약하네.”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려 웃었다.


“스칼리아 공주의 꿈을 파고들어서 장악한 것은, 우리가 시무인의 공주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잖아.”


“원래 장난은 심보가 고약해야 재밌는 거죠. 만약 당신의 검으로 이 예쁜 공주님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아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요.”


누아르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요?”


“몽마의 여왕.”


“어떻게 알았어요? 재미없게! 잔뜩 무게 잡고 근엄한 표정까지 해가면서 소개하려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됐잖아요.”


“……스칼리아 공주가 잠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대충 짐작은 했어. 설마 몽마의 여왕에게 노려졌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감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역시 라이언하트라고 해야 하나?”


누아르는 두 눈을 반짝이며 유진을 응시했다.


“맞아요. 난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예요. 그 이름과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요?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스칼리아 공주를 노린 것? 단순한 장난이죠. 당신들을 공격한 것? 이것도 장난이에요. 내게 있어서는 공격이랄 것도 아니죠. 당신들의 꿈에 직접 파고들지 않은 것?”


누아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바다 저편에 있는 시무인 따위의 나라보다, 라이언하트가 더욱 존중할 만하니까요. 라이언하트의 시조,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내게 있어서는 끔찍한 사내였지만, 경외할 만한 존재기는 했어요. 그러니 나는 그 베르무트의 후손인 라이언하트를 존중해요. 마찬가지로, 아니스 슬리우드의…… 후후, ‘성녀’의 계보를 있는 당신도 존중하죠.”


표정은 사라졌지만 누아르의 두 눈은 여전히 별 하늘을 박아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그 시선이 크리스티나에게 향했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의 플레일을 움켜쥐었다.


“뭐,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장난과 인사일 뿐이라는 거예요. 스칼리아 공주를 노린 것은? 안타깝게도 내 본신은 헬무드에 있거든요. 당장은 저급 인큐버스의 몸을 써서 이곳에 있기는 한데…… 그 격 낮은 몰골을 보여주는 것은 민망하잖아요? 그래서 공주의 꿈을 파고든 거예요. 여왕과 공주. 내 쪽에서 한참 굽혀준다면 격도 얼추 맞지 않아요?”


“인사?”


유진이 삐걱 머리를 기울이며 묻자, 누아르는 다시 활짝 웃으면서 짝짝 박수를 쳤다.


“맞아요, 인사! 왜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의도가 어쨌건. 네가 우리를 강제로 재우고, 꿈속에서 희롱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잖아.”


“어머, 희롱이라뇨? 주변을 봐요. 어딜 봐도 눈뿐, 바람도 쌩쌩 불잖아요. 이런 곳보다는 꿈속에서 만든 멋진 장소에서 즐겁게 노는 편이 즐겁지 않아요? 나는 그러고 싶었단 말이에요.”


“넌 시무인의 공주와, 라이언하트와, 유라스의 성녀후보를 공격했어.”


“아하, 정치적인 문제로 삼으시겠다? 너무 깐깐하게 굴지 마요. 고작 이런 문제로 헬무드의 공작인 나를 위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을 텐데.”


누아르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득이 없다. 사실이었다. 유진은 ‘아직까지’는 누아르 제벨라아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크리스티나를 통해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맞아.”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만 같고, 칼날을 삼키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정했다.


“나는 이 일을 정치적인 문제로 삼을 생각이 없어. 시무인의 공주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아하핫,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공주님도, 저 기사도, 모든 것을 꿈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당신이 저 뒤에 잠든 귀여운 애기들을 잘 납득시킨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 자꾸 날 서운하게 할 건가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정말 모르는 거예요? 당신의 무뚝뚝함이 내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알아요?”


누아르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진심으로 슬픔을 느끼는 것처럼 누아르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몇 번 눈동자를 깜빡거리니, 스칼리아의 양 뺨에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왜 당신은 내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거죠?”


“…….”


“아, 물론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하지만 이미 알고 있어도 당신에게 직접 듣고 싶은걸요. 나도 당신에게 이름을 알려줬잖아요?”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망토에 넣은 손을 살짝 움직였다. 그것뿐, 망토에 넣은 손을 뽑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흑암의 망토가 가진 큰 이점 중 하나였다. 망토에서 손을 뽑지 않는 이상, 몽마의 여왕일지라도 유진이 어떤 무기를 꺼낼지 알 수가 없다.


“알테어를 뽑으려고요?”


누아르는 어림짐작하고서 물었다.


“숨길 생각하지 마요. 나는 당신이 알테어, 성검의 인정을 받은 주인이라는 걸 알아요. 그게 내가 이 추운 땅까지 온 이유 중 하나죠.”


“그래서? 더 이상 나와 대화를 할 이유가 있나?”


“진짜 무뚝뚝하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라서 그런가? 무뚝뚝한 점이 닮기는 했네요. 대화를 나눌 필요? 물론 있죠! 난 아직 당신의 입으로 이름을 듣지 못…….”


“유진 라이언하트.”


누아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진이 대뜸 내뱉었다. 누아르는 바로 반응하지 않고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높은 목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내가 싫어요? 나는 당신에게 미움받을 짓은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은데…… 후후, 오히려 그 단호한 혐오가 날 자극하는 거 알아요?”


누아르가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유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난 예전부터 의지가 강하고, 일관적으로 날 혐오하는 인간한테 끌리곤 했어요. 꿈을 파고들어 밑바닥을 보고 싶어. 현실이 아닌 곳에서 나만이 줄 수 있는 쾌락에 취하고 미치게 만들고 싶어. 물론 현실에서도 그렇게 해줄 수 있지만, 나는 몽마니까요.”


“역겨운 소리 마.”


“아하하, 좋네요, 그런 반응. 풋풋하고 귀여운 맛이 있어. 베르무트의 재림이라더니…… 날 이만큼이나 혐오하는 남자는 베르무트보다는 하멜 쪽이었는데 말이야. 아, 당신도 알죠? 우둔한 하멜.”


모를 리가 없지. 유진은 조용히 백염식을 운용했다. 자색의 불꽃이 피어오르자, 누아르의 걸음이 멈췄다.


“……흠, 과연, 상상했던 것 이상인데요? 이 저급한 몸뚱이와 그릇으로는 재미있게 놀지도 못할 것 같아.”


“난 너랑 놀 생각 없어.”


“귀엽기는.”


눈동자의 빛이 푹 꺼졌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흔들리다 감기고, 스칼리아의 몸이 그대로 눈 위에 엎어졌다. 유진은 쓰러지는 스칼리아를 보지 않았다. ㅡ파스스…… 스칼리아의 몸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안개가 하나로 뭉치고, 스칼리아를 침식했던 몽마가 몸을 일으켰다.


그 얼굴은 유진이 기억하는 3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 머리 위에 돋아난 붉은 뿔. 별 하늘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


“마음에 들어요.”


누아르가 웃으며 손가락을 위로 들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 로브를 입고 그 로사리오를 목에 걸고 있으니, 정말로 300년 전의 아니스 슬리우드를 보는 것만 같아.”


“……당신에게 그런 평가를 듣는다는 것은 제게는 기쁜 일이지요.”


“그쵸? 제 평가는 확실한 보증수표라 할 수 있죠. 나는 300년 전의 아니스를 아니까요. 영광으로 알고 기뻐하도록 해요.”


손가락이 빙글 움직여 자그마한 원을 만들었다. 그러자 검은 마력이 뭉치더니, 2개의 동전이 만들어졌다.


“선물이에요.”


동전이 유진과 크리스티나의 앞으로 날아왔다. 당연히 둘은 동전에 손을 뻗지 않았다.


“곧 있으면 헬무드에서 제벨라파크가 완공될 거예요. 그 코인만 있으면…….”


“필요 없어.”


“에이, 너무 그러지 말고. 한 번은 와서 놀아 봐요, 엄청 재미있을걸? 아니, 아니다. 너무 졸라대는 것도 자존심 상해. 흥, 오기 싫으면 오지 마요.”


공중에 떠 있던 코인이 눈 위에 떨어졌다.


“나 이제 정말로 갈 건데, 마지막 기회를 줄게요. 가지 말라고 붙잡아주면…….”


“가.”


“그래요, 갈게요. 진짜 갈 거야. 가려고 했는데 조금 아쉽네. 나랑 잠깐 자볼래요?”


돌연 내뱉은 말에 유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크리스티나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누아르를 노려보았다.


[저 미친년이.]


아니스도 분노를 숨기지 않고 험한 말을 쏟았다. 누아르는 송곳처럼 쑤셔오는 매서운 시선과 살의에도 태연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이지 마요. 지극히 사무적이고 몽마로서 권하는 말이거든요. 당신이 바라는 꿈을 보여주겠다는 말이라고요.”


“꺼져.”


“알았어요, 알았어. 진짜 갈게요. 아, 그래도…… 내 장난과 인사가 불쾌했던 모양이니, 나름의 사죄는 하고 갈게요.”


손톱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길쭉이 늘어났다.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그 손톱을 제 목에 가져다 댔다.


“이 목이 충분한 사죄는 되지 않겠지만, 사죄라는 것은 본래 성의가 중요한 법이잖아요?”


가볍게 휘저은 손끝이 목을 베었다. ㅡ푸확! 시뻘건 피가 뿜어지고, 목이 반쯤 베인 머리가 옆으로 기울었다.


누아르는 입술 사이로 피를 줄줄 쏟으면서도 웃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손으로 머리를 잡고, 확 꺾어버렸다.


“언젠가 헬무드에서 만나기를.”


머리가 완전히 뜯기는 순간, 누아르는 그렇게 속삭였다. 머리를 잃은 몸이 땅에 엎어졌다. 이윽고 ‘시체’의 모습이 변화했다. 누아르가 떠나가면서, 시체가 본래의 모습인 인큐버스로 돌아온 것이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그 시체를 노려보았다. 잠시 뒤, 인큐버스의 시체가 안개로 흩어져 사라졌다. 침묵 속에서 크리스티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환한 빛이 주변을 한 번 휩쓸었다.


“……떠났습니다.”


이 공간에 누아르의 기척은 남아 있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터질 듯이 빨리 뛰고 있었다. 채 이겨내지 못한 공포가 뒤늦게 몸을 떨게 만들었다.


“……잘 참았습니다.”


잠깐의 침묵. 아니스가 크리스티나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진의 등을 보았다.


“누아르 제벨라가 본신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모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시대의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렇지.”


“내심 조마조마했습니다. 당신이 광분해서 누아르 제벨라에게 덤비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나도 그래야 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는 구분해. 300년 전에도 구분했어.”


“처음에는 안 그랬습니다. 하멜, 당신이 그런 자제심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제 교육 때문입니다.”


“조금은 인정할게.”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아래를 보았다. 눈밭에 파묻힌, 검은색의 카지노코인이 보였다. 그 자그마한 코인의 중앙에는 활짝 웃고 있는 누아르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네 말이 맞아, 아니스. 누아르 제벨라와의 간격을 잴 수 있던 것은 행운이야.”


유진은 코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을 떠난 백염식의 불꽃이 코인을 흔적도 없이 불태워버렸다.


결국 늦고 빠르고의 차이다.


언젠가 누아르 제벨라는 유진에게 죽는다.


“그거면 돼.”


유진은 손바닥에 고인 피를 털어내며 웃었다.


스칼리아


시엘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유진의 얼굴이었다. 얼핏 무심해 보이지만 은근한 걱정이 담긴 눈동자를 보고서, 시엘은 잠시 동안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방해가 된 거야?”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왜, 방금 전까지 잠이 들어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이상한 곳에서 끊어져 있다. 스칼리아 공주가 광분해서 덤벼들고, 부관인 디오르가 그 앞을 가로막고……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칼부림이 오간 뒤에.


디오르가 쓰러졌다. 왜 쓰러졌는지는 모른다. 검에 베인 것도 아닌데 대뜸 쓰러졌고, 그 뒤에. 스칼리아 공주가 고개를 들어서…….


그다음의 기억이 없다. 떠올리기 위해 노력은 해보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아냐.”


유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거짓말.”


시엘도 바로 대답했다. 고개를 돌리니, 조금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안이 보였다. 머나먼 설원의 저편을 노려보는 시안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이를 너무 세게 악물어 턱과 목의 근육이 일그러져 있었다.


시엘은 자신의 오빠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감정에 공감했다. 둘은 쌍둥이였고, 태어난 곳은 하필 무가로 이름 높은 라이언하트의 본가였다. 비교대상이 나빴을 뿐, 둘의 자질은 제법 훌륭했다. 그 자질대로 평범하게, 너무 서두르려 하지 않게 자라났다면. 돌발적이고 감당하기 버거운 사건들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배려해 줄 필요 없어.”


시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비환검 자벨은, 어느새 얌전히 칼집에 들어가서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그 광경에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런 배려가 더 아프단 말이야. 괜찮아, 네가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거든.”


고집을 부려서 유진과 함께 설원을 지나고자 했다.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작해야 몬스터의 습격 정도? 그 정도야 뭐, 위험이랄 것도 없지 않은가. 시엘과 시안의 백염식은 4성. 라이언하트 역사에서도 21살의 나이에 4성에 오른 이들은 많지 않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경지란 말이다.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아무리 괴물이어도, 이 여정은 위험하지 않다.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유진 대신에 검을 휘둘러 정리하고, ‘실력이 많이 늘었네?’ 같은, 그런 뻔한 말을 듣고 싶었다.


“잠깐만.”


싫은 기분이 들었다. 시엘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았지만, 이제 곧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은 익숙하지 않았고,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시엘은 홱 몸을 돌려 유진을 등졌다.


‘한심해.’


돌발적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시엘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너무 빨리 쓰러져서 유진의 방해가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자존심 강한 라이언하트의 아가씨는, 당연히 그 사실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굴욕감이 느껴졌다.


유진, 저 녀석보다 잘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단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방해는 되고 싶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설 수는 없어도, 놓치지 않을 만큼 뒤따라가는 것을 바랐다.


그런데 이게 뭔가. 따라가기는커녕 방해가 되어버렸는데.


시엘은 그런 자기 자신이 못나고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엘.”


유진이 시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제멋대로 씰룩대는 입술에 힘을 주느라 필사적이어서, 도저히 입술을 열어 유진의 부름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간신히 뜨고 있는 눈앞이 먹먹히 흔들리고, 코끝은 찡했다.


“……보지 마. 가까이 오지도 마.”


시엘은 훌쩍거림을 숨기고서 간신히 내뱉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 자신이 못나고 한심하고 우스웠다. 그녀의 삶에서 이만큼이나 비참함을 느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엘은 어깨의 떨림을 감추고서 시안의 옆에 다가갔다. 그녀보다 조금 먼저 눈을 뜬 시안은 이미 굴욕을 절감하는 단계를 지나, 제 자신의 약함에 분노하는 중이었다. 설원의 저편을 노려보던 시안은, 입술을 꾹 다물고서 눈물만 뚝뚝 흘리는 시엘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오빠로서 무언가 멋진 말이나, 가슴 깊이 스며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데…… 마음만 그럴 뿐, 시안도 입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은 똑같았다. 입을 열면 울분에 차서 악악 고함이나 지르게 될 것만 같았다.


결국, 시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동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여동생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엘은 우는 소리를 내지 않고서 잠시 동안 울었고, 시안도 이를 꽉 다물고 울분을 삭였다.


유진은 그 둘에게 무어라 말을 걸지 않았다.


발목을 잡았다?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상대가 상대였지 않은가.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애당초 전투가 성립하는 존재가 아니고, 유진 본인도 누아르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었다면. 유진은 시엘과 시안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유진도 부정하지 않았다. 피는 섞이지 않았을지라도, 10년 가까이 알고 지낸 남매이잖은가.


둘의 감정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몽마의 여왕’에 대해 들은 둘은 입을 크게 벌리고서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그…… 헬무드의, 누아르 제벨라 공작이. 인사를 하겠답시고, 스칼리아 공주의 몸을 빼앗았던 거라고?”


“어.”


“그게 전부 장난이고?”


“그렇대. 굉장히…… 음…… 엿 같은 일이지만, 결국 아무도 죽지 않았잖아? 그 미친 여자한테는 짓궂은 축에 들지도 않는 장난이었다는 거야.”


유진은 누아르 제벨라를 변호할 마음도, 그래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이 저러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불쾌하고 이해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 습격은ㅡ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장난스러운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제 딴에는 우리가 꽤 궁금했던 모양이야. 그 왜, 시조님은 몽마의 여왕과 직접 싸우기도 했던 분이고…… 너희는 라이언하트의 적자에, 차기 가주가 될 몸이잖아.”


“그딴 말로 내 기분을 생각해 줄 필요는 없어. 몽마의 여왕은 널 보러 온 거잖아.”


시안은 코웃음을 치며 내뱉었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 세상이 유진을 어찌 부르는지를 시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시안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래서.”


시안은 치미는 분을 다시 한번 삭였다.


“제벨라 공작은, 널 보고 만족했냐?”


“뭐?”


“널 보고 만족했냐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유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의 깊은 밑바닥에는 어린 나이다운 치기와 무시당한 것에 대한 굴욕, 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울분이 뒤섞여 있었다. 하나 눈동자의 표면에 떠오른 의연함이 꿈틀거리는 감정들을 수면 아래로 감추고 있었다.


“……만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음에 든다던데.”


“그럼 됐어.”


시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위대한 시조님의 적이었던 자에게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인정을 얻는 편이 낫잖아.”


“기특한 말을 하네.”


“내가 뭐 이상한 말 했어?”


“아니, 이상한 말은 안 했지. 어쨌든, 이번 일은…… 음…… 다른 사람한테 알리지 마. 다친 사람도 없고, 괜히 일을 키울 필요는 없잖아.”


시안과 시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누아르 제벨라가 보통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광인이라는 것을 납득했다.


“스칼리아 공주는 어떡해?”


시엘이 입을 열었다. 눈 위에 엎어졌던 스칼리아 공주와 디오르는 일단 옆에 옮겨놓았는데, 둘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잖아. 내버려 두면 얼어 죽을걸.”


“그럼 데리고서 같이 이동할 거야?”


“굳이? 저 둘은 알아서 레헤인까지 가라고 하고, 우리는 우리끼리…….”


“아냐.”


시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랑 오빠는 스칼리아 공주와 함께 갈게.”


“뭐?”


“너는 레헤인야르의 대망치의 협곡에 갈 거잖아.”


시엘의 눈시울은 아직 붉었다. 하지만 목소리마저 먹먹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씩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애당초 아만 폐하가 대망치의 협곡에 가보라고 권했던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너였어. 솔직히, 나는 이미 이 설원이 지긋지긋해. 괜히 산을 더 오르고 싶지도 않고, 대망치니 뭐니 하는 협곡에도 가고 싶지 않아. 너랑 이동 중에 하는 수련도…….”


차마 그것까지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짧게 웃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건 아주 나쁘지는 않았어. 하지만 기왕이면 몸도, 마음도 편하게. 썰매나 마차나…… 그런 곳에 앉아서, 너랑 따뜻한 핫초코나 커피 따위를 마시며 이동하고 싶었거든? 이제 와서는 그런 생각도 안 들어. 그냥, 빨리 레헤인에 가서 그 유명하다는 온천에나 들어가 보고 싶어.”


“야, 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야. 오빠도 그럴 거고. 그냥, 그러라고 말해. 아, 설마 우리 걱정하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스칼리아 공주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디오르 경은 멀쩡했었잖아? 레헤인까지 가는 방법은 알고서 설원을 떠돌던 것이겠지.”


“…….”


“그리고 말이야.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설원이 아니라 레헤인야르를 오르면서 생길걸? 난 또다시 이런 일에 휘말리기 싫어. 네게 방해가 되는 것도 싫고.”


“바보 같은 말 하지 마.”


“바보가 아니니까 주제 파악을 하고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왜?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불쌍하단 생각이 들고 그래? 만약 그런 거라면 진짜 싫어. 난 네게 동정 따위 받고 싶지 않아.”


시엘은 코웃음을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아직까지 엎어져 있는 스칼리아 공주와 디오르에게 다가갔다.


“대체 언제까지 자빠져 자려는 거야? 이 정도 기다려줬으면 알아서 일어서야 되는 것 아냐?”


“업고 가자.”


시안도 시엘을 따라서 일어섰다. 유진이 말릴 새도 없이, 시안이 디오르의 몸을 어깨에 짊어졌다. 그렇게 되니 시엘도 자연스럽게 스칼리아를 등 뒤에 업었다.


“가다 보면 언젠가 눈을 뜨겠지.”


“야, 너희 뭘 그리 서둘러? 그냥 깰 때까지 기다리면…….”


“부끄럽고 민망해서 더 이상 너랑 같이 있기 싫어.”


“난 네 얼굴 보고 있으면 속에 열불이 끓어서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릴 것 같아.”


시엘이 먼저 말했고, 시안이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평생 동안 미워할 거야.”


시엘이 빨갛게 충혈된 눈에 잔뜩 힘을 주고서 쏘아붙였다. 그 말이 유진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레헤인에서 보자.”


시안이 발걸음을 뗐다. 결국 둘은 디오르와 스칼리아를 데리고서 이곳을 떠나버렸다. 유진은 한동안 제 자리에 앉아서 시안과 시엘의 등을 쳐다보았다.


“걱정됩니까?”


은근히 놀리는 것만 같은 어조였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얇은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과 입술. 아니스였다.


“당연히 걱정되지.”


“환생하고 유년기를 겪었기 때문일까요? 하멜, 당신은 전생보다 인간미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난 전생부터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어.”


“뭐,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군요.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저 쌍둥이는…… 하멜을 미워하지 않는군요. 질투는 하지만, 시기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하멜 당신을 위하면서,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도 알아. 그 모습이 귀엽고 기특해서, 답지 않게 이것저것 가르치기도 했어. 하지만 시안과 시엘은 너무 어려.”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300년 전의 우리 모두도 어렸지요.”


아니스는 엷은 미소를 짓고서 성호를 그었다.


“……물론, 저 쌍둥이는 우리와는 다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리지만, 우리와는 타고난 것도, 겪은 것도 다릅니다. 하지만 하멜. 의외로 사람이란, 빠르게 적응하고 변한답니다. 사소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몇 가지의 계기. 하고자 하는 의지. 그것들이 갖춰지면…… 인간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어요.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


“하멜. 당신은 저 쌍둥이와 어린 시절을 보냈죠. 전생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당신은, 쌍둥이와 같은 어린 나이임에도 같은 감각을 공유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쭉 저들을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있어요.”


“맞잖아.”


“아닙니다. 저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스스로 서고 싶어 하고, 의지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합니다. 저 쌍둥이에게는 그러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저 쌍둥이는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분해했습니다. 나약한 자신을 경멸했습니다. 오늘 저들이 겪은 일. 여태까지 겪은 일. 그럴 때마다 느낀 감정. 그 모든 것이 변화의 계기가 되겠지요.”


그 말은 이곳을 떠난 시엘과 시안에 대한 말만이 아니었다. 의식의 저편에서 조용히 듣고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약함을 절감하고, 그를 딛고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사선(死線)을 넘어간다면.”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을 고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죽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치고, 다른 놈을 죽일 각오를 쌓고,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그래. 사람은 강해질 수밖에 없지. 아니스. 너랑 나는 그걸 너무나도 잘 알아. 우리는 그런 시대에서 살았으니까.”


“예.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평화로워. 나는…… 기왕이면 말이야. 결국 네 말이 맞아, 나는 시안과 시엘을 아직 어린애 취급하고 있어. 기왕이면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대에서, 사선 따위 넘을 일 없이 잘 살면 좋겠다고.”


“그건 당신의 이기적인 바람입니다.”


아니스는 이런 면에서는 단호했다.


“시대는 우리의 바람대로 흐르지 않습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나약하고 가벼워, 어쩔 도리 없는 거대한 흐름에 휘말릴 수밖에 없지요. 특히나 저 쌍둥이는 베르무트 님의 후예. 그들의 이름이 라이언하트인 이상, 시대의 격동의 최전선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


“그래야 할 때에 사선에 스스로 걸어갈지. 아니면……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칠지. 그것은 하멜,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운명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것이어야 합니다.”


“……가고 싶지 않다 울부짖다가, 바라지 않음에도 휘말리게 될 수도 있지.”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면 도망치면 되는 일입니다. 어쭙잖게 타협하고 고집을 부리다가 휘말리게 되어버리는 것 역시,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네 말은 자학처럼 들려.”


“그렇게 들었다면 바로 들었습니다. 300년 전에, 제 운명을 저 자신의 것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가고 싶어 하지도 않았지요. 저는 멍청했고, 빛의 뜻이라 포장된 성국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멍청했던 저는 수많은 죽음을 보고, 제 나약함과 시대의 끔찍함을 절감했으며, 도망치지 않은 저 자신을 경멸하였습니다.”


아니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직 앉아 있는 하멜을 내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하지만 결국, 최후에 결정을 내린 것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제 의지로 베르무트 님을 따랐습니다. 제 의지로 베르무트 님과, 하멜 당신과, 세냐와, 모론과 마경을 가로질렀습니다. 그리고 제 의지로, 최후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후후. 사소하지 않은 계기들. 하고자 하는 의지.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선을 넘기도 했고.”


“네, 맞습니다. 어쨌든, 제가 당신께 하고 싶어 하는 말은 간단한 겁니다. 정말로 당신의 형제들을 위한다면, 그들을 어린아이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의지를 존중해 주십시오.”


“네 훈계는 오랜만이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더 이상 시안과 시엘의 등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스. 무수한 사선을 넘다 보면, 사람은 이상하게 되어 버려. 망가진다고.”


“그럴 때에는, 당신이 저들을 사랑하는 만큼 보듬어주면 되는 겁니다. 300년 전에 우리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기억납니까? 하멜. 우리가 함께 바다를 건너고, 마물과 마족의 일개 군단을 토벌하였을 때. 당신은…… 너무 많은 시체와 피의 냄새에 밤잠을 설쳤지요.”


“나만 그랬냐? 그때는 우리 모두 그랬어. 베르무트 그 새끼 빼고.”


“베르무트 님이 의연하였기에 우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누군가가 망가지지 않도록 붙들었습니다. 하멜.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아니스의 미소가 살짝 바뀌었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보더니 히죽 웃었다.


“당신이 쌍둥이들에게 베르무트 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주면 되는 겁니다.”


“시X, 역겨운 소리 하지 마.”


“부끄러워하기는. 당신은 내심 베르무트 님을 동경하였잖습니까?”


“내가 언제!”


“이제 와서 부정하지 마십시오.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때는 당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베르무트 님을 동경하였습니다.”


“난, 난 아니야. 나는 그 새끼를 동경한 적 없어. 나한테 베르무트는…….”


“꼭 넘고 싶은 라이벌?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 아닐지.”


“부끄럽지 않아. 내게 있어서 베르무트는…… 그…… 나보다 잘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그래서…… 분해서…… 언젠가 반드시 쓰러트리고 싶은…….”


“그만, 그만! 듣는 제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것만 같습니다. 어떻게 술도 취하지 않은 맨정신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까?”


“닥쳐…… 난…… 부끄럽지 않아.”


거짓말이다. 독한 술을 무식하게 마셔댄 것처럼 뱃속도 얼굴도 화끈거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멋대로 내뱉어버린 주둥이를 쥐어뜯고 싶었다.


“정말로 부끄럽지 않다는 겁니까? 흠,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아니스는 빙긋 웃으며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유진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저는 제 의지로 베르무트 님을 따랐습니다. 제 의지로 베르무트 님과, 하멜 당신과, 세냐와, 모론과 마경을 가로질렀습니다. 제 의지로, 최후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뭐 하는 거야? 아까 한 말을 똑같이…….”


“그리고 제 의지로, 하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너무 뜨거워진 얼굴이 쾅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유진은 기겁하며 뒤로 펄쩍 물러섰다. 아니스는 빨갛게 달아오른 유진의 얼굴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시, 시, 시스터!]


‘뭐 어떻습니까? 이건 제 의지로 하는 말입니다. 아니면 크리스티나, 당신도 이 분위기에 용기를 내어 입을 열어보겠습니까?’


[저는…… 저는 아닙니다…….]


‘아니기는.’


아니스는 크리스티나를 놀리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저도 제 의지로 유진 님을 좋아해요.”


흑암의 망토가 열렸다. 메르가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세냐 님은 사랑해요. 그리고 세냐 님은 유진 님을…….”


“그만, 사역마 아가씨. 그런 말은 당신이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세냐가 직접 해야 하멜의 반응이 보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닥쳐.”


유진은 대뜸 손을 들더니, 화끈거리는 제 뺨을 후려쳐 버렸다. 그 광경에 메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치신 거예요?”


“에빌!”


“컹!”


유진은 뺨의 얼얼한 통증을 무시하고서 냅다 앞으로 뛰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에빌도 힘차게 외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대망치의 협곡으로 가자!”


뒤에서 아니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협곡


레헤인야르에 진입하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선, 날씨가 지랄 맞았다. 설원에서는 그래도 가끔씩 눈이 내리지 않을 때도 있었고, 가끔은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레헤인야르에서는 해를 보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분명 해는 저 높은 하늘 어딘가에 떠 있겠지만, 미치광이처럼 몰아치는 눈보라가 하늘의 빛깔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쉬지 않고 눈이 내려대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저 희멀겋고 차가운 것이 쓰레기랑 다를 게 무언가 생각될 정도였다.


눈만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아니, 꽤 자주. 돌멩이보다는 크고 바위보다는 작은 우박이 우수수 쏟아지기도 했다. 그 우박은 어지간한 사람의 머리를 일격에 깨트릴 만큼 단단했다.


“뭔 놈의 산이 시X 세냐가 마법을 쓴 것 같네.”


유진은 휘날리는 눈과 우박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세냐는 무식하기 짝이 없어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될 때면 항상 마법으로 천재지변을 일으키곤 했었다. 그중에서도 광범위에 살인적인 눈보라와 우박을 쏟아내는 블리자드는 세냐가 즐겨 쓰는 마법이었다.


물론 이곳의 눈보라와 우박은 세냐의 블리자드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유진이 이깟 우박을 몇 날 며칠 맞아도 머리가 깨지거나 뼈가 으스러질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얻어맞고 싶지는 않아서, 주변에 마법을 펼쳐 눈과 우박을 차단했다.


하지만 아프지 않아도 두들겨 맞다 보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끼잉.”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에빌도 울음소리를 냈다. 레헤인야르에 진입하면서 에빌은 부쩍 유진을 따르게 되었다. 유진이 눈과 우박에서 자신을 보호해 준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힘겨워지는군요.”


참을성이 많은 크리스티나도 이 산에는 질릴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 제벨라의 습격, 아니, 짓궂은 인사를 제외하고서는 설원에서 문제랄 것은 겪지 않았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유진의 존재감에 겁을 집어먹어 다가오지도 않았고, 눈보라도 견딜 만했다.


하지만 레헤인야르는 달랐다. 이 산은 결국 설원에서 이어진 곳인데, 아예 다른 지역에 존재하는 험지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비하자면 사마르 대수림은 산책하기 좋은 오솔길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이 산의 몬스터들은 겁 없고 사나워서, 유진이 존재감을 숨기지 않아도 송곳니와 발톱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이곳은 대륙의 최북단이니 말입니다.]


북방 루하르 왕국, 그곳에서도 북쪽의 끝에서 광활히 펼쳐진 설원이다. 그리고 레헤인야르는 설원의 최북단에 솟아난 설산이다. 이곳은 루하르의 끝이다.


-바야르 부족은 대륙의 끝을 수호한다.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모론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마경의 마물과 몬스터도 사납지만, 우리 부족이 수호하는 대륙의 끝에 사는 몬스터들도 사납다. 어릴 때부터 그놈들을 사냥해 온 내게 있어서, 마물과 몬스터들은 순한 양처럼 느껴진다.


-구라치고 있네. 너 저번에 마물한테 포위당해서 죽을 뻔했잖아.


-순한 양들이라도 수십 수백 마리가 모여 포위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애당초 순한 양이 사람을 왜 죽이려 드냐?


그렇게 물어보니, 모론은 몇 시간 동안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바야르 부족이 지키는 땅의 이름이 바로 레헤인이다. 지독하지만 그리운 나의 고향. 그 레헤인에서 더 북쪽으로 오르다 보면,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눈과 얼음의 산맥이 있다. 레헤인야르. 레헤인은 설원의 언어로 북쪽을 뜻하며, 야르는 산을 뜻한다. 즉, 레헤인야르는 북쪽 산이라는 뜻이다.


-음…… 그 이름을 설명하는 데 으스댈 이유가 있나…….


-바야르는 설원의 언어로 용맹하다는 뜻이다. 바야르의 전사는 용맹한 전사라는 뜻이다. 난 바야르의 모론, 용맹한 모론이다.


-그래…….


-하지만 정말 세상의 끝이라 할 것은 레헤인도, 레헤인야르도 아니다. 레헤인야르의 너머. 그곳에 라구르야란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땅. 넘어가서는 안 될 땅. 세상의 끝. 바야르가 레헤인과 레헤인야르에서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라구르야란으로 건너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라구르야란이 끝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수호하기 위해서다.


-대체 무슨 말이야?


-바야르의 오랜 전설. 혹은 어린아이를 겁주기 위한 이야기. 나도 어릴 적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깊은 밤, 라구르야란에서 누르가 몸을 일으킨다. 누르는 드넓은 끝을 걸어, 레헤인야르를 넘어온다. 잠들지 않은 아이는 누르에게 잡아먹힌다…….


-누르가 뭔데?


-그냥 괴물. 말했지 않나, 오랜 전설이고, 어린아이를 겁주기 위한 이야기라고. 나는 진즉에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바야르의 전사로 아주 용감하였지. 그래서 나는 내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혼자서 레헤인야르를 넘은 적이 있다.


-그래서, 라구르야란을 봤냐?


-넓은 땅이었다. 하늘이 굉장히 화를 내는 땅이었다. 태양도 달도 별도 떠 있지 않다. 흙발로 짓밟힌 눈처럼 지저분한 뿌연 색의 하늘이 저 끝까지 펼쳐져 있다. 레헤인야르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서서 보면, 라구르야란의 끝에서 넓은 바다가 보였다. 얼어붙은 바다. 누르는 없었다. 그 땅에는 누구도 살지 않고, 누구도 살지 못한다.


300년 전에,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야르와 설원에 대해 말할 때, 모론의 두 눈은 어린아이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맑은 눈동자는 모론의 덩치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당시의 하멜은 그를 놀려대지 않고 모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 이렇게 듣는 것보다, 언젠가 네가 데려가 주면 되는 거잖아.


-나와 함께 설원에 갈 건가?


-이 빌어먹을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전쟁이 끝나면 뭐…… 여러 가지로 심심해지고 여유로워질 테니. 가보지 않은 곳을 떠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하멜, 네가 만약 나와 함께 설원에 간다면. 우리 부족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여전사와 맺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이 등신이 뭐라고 하는 거야?


-세냐, 걱정하지 마라. 네가 바란다면, 우리 부족에서 두 번째로 용감한 전사와 네가 맺어질 수 있도록…….


-개소리하지 마.


-그런데 왜 두 번째야?


-당연한 것을 묻는군. 그야, 바야르 부족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는 바로 나다. 세냐는 나와 결혼하고 싶은 건가?


-뒤져.


-싫어할 줄 알았다. 우리 부족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전사는 가장 용감한 전사인 나와 맺어져야 한다. 그러니 하멜, 네게는 두 번째로 아름다운 여전사를…….


-뒤지라고!


유진은 그때 빽 고함을 지르던 세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까마득하리만큼 높은 설산을 올려다보았다.


라구르야란을 가로막고 있는 레헤인야르, 이 산맥은 높고 컸다. 앞장선 에빌의 안내를 받아 산을 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 언제까지 올라야 대망치 협곡에 도착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크릉.”


안내하던 에빌이 멈췄다. 녀석은 코를 킁킁거리다가 귀를 쫑긋 세우며 눈보라의 저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몬스터를 발견했을 때처럼 눈동자를 사납게 뜨지도,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흘리지도 않았다.


유진은 에빌을 지나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가까이서 따르던 크리스티나도 자리에 멈추고 나서야, 눈보라의 너머에서 선명한 주황색의 불빛이 켜졌다.


레헤인야르의 레인저들이었다. 그들은 두툼한 방한복을 입고, 각자 손에는 주황색으로 빛나는 마법의 불을 들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눈치챘지만, 가까이 다가오니 레인저들의 덩치가 얼마나 큰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충분한 거리에서 멈춘 3명의 레인저는 각자 키가 2미터는 훌쩍 넘어 있었다.


“에빌.”


두꺼운 고글 너머에서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선두에 선 레인저가 에빌을 알아본 것이다. 레인저는 꼬리를 흔드는 에빌과 유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라이언하트?”


“유진 라이언하트입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입니다.”


“당신들이 어째서 에빌과 함께 있는 겁니까.”


레인저의 목소리는 걸걸하고 어눌했다. 공용어를 듣고 말하는 것에는 능한 모양이지만, 발음까지 정확하지는 않았다. 방한복과 모자, 고글 때문에 얼굴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유진은 저들이 바야르의 후예라고 짐작했다.


“루하르의 국왕 폐하께서 에빌을 빌려주셨습니다. 레헤인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줄 것이라며 말입니다.”


“나이트마치가 열리는 곳은 이 산이 아닙니다. 내려가십시오.”


“레헤인야르의 대망치 협곡. 그곳에 가보라고 권한 것도 국왕폐하십니다. 저는 폐하의 바람대로 에빌을 따라 이곳에 온 것인데, 정말로 다시 내려가야 합니까?”


유진이 그렇게 대답하자, 레인저들은 바로 답하지 않고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다면 비켜드리겠습니다만, 두 분이서는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이곳까지 두 명이서 왔는데, 위험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대망치 협곡은 레헤인야르의 경계선입니다. 가까이 갈수록 위험해집니다.”


“뭐, 몬스터가 더 많이 나오고 흉포해지기라도 합니까? 아니면 날씨가 더 고약해집니까?”


“아니오. 대망치 협곡에는 누르가 나옵니다.”


누르. 300년 전에 모론이 말했던 괴물.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인저가 말을 이었다.


“누르는 몬스터이면서 몬스터와는 다릅니다. 마물인 것도 아닙니다. 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제 입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설명하기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르가 두렵지 않으시다면, 에빌을 따라 계속해서 산을 오르십시오. 폐하의 허락을 받으신 두 분이서 대망치 협곡에 가겠다고 하신다면, 레인저들은 막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인저들은 두 분을 안내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위험이 싫으시다면 이대로 돌아가 주십시오.”


국왕의 허락을 앞세운 덕인지, 레인저들은 유진을 적극적으로 가로막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쉽고 간단하게 길을 비켜주지도 않았다. 유진의 성이 라이언하트고, 성국의 성녀후보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이기 때문이다. 그 둘이 루하르 국왕의 권유를 따라 대망치 협곡에 왔기 때문이다.


만약 둘이 대망치 협곡으로 가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루하르의 국왕이 짊어져야 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유진은 피식 웃으며 발을 앞으로 뻗었다.


정치적인 문제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올라가고, 내려오면 되는 것 아닌가. 루하르의 국왕, 야수왕 아만 루하르. 그는 대망치의 협곡에 왕가의 전설이 내려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왕가의 후예가 전사로 거듭나는 곳이라고 말했다.


누르.


300년 전에, 모론은 레헤인야르와 라구르야란에 누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야수왕이 말한 왕가의 전설은 누르를 말하는 건가? 루하르 왕가, 그 시조가 바로 모론인데. 그렇다면 대망치 협곡의 전설도 결국은 모론의 입에서 구전되었다는 것 아닌가?


“부디 조심하십시오.”


유진이 걸음을 멈추지 않자, 레인저들은 더 이상 길을 가로막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 주었다.


“누르?”


“이 산에 사는 괴물이래. 300년 전에 모론이 말해줬어.”


“아니스 님이 말씀하시길,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야 그렇겠지. 모론이 누르에 대해 말해주었을 때, 아니스는 재미없다면서 구석에서 혼자 미친놈처럼 술을 마셔댔거든.”


[재미없던 걸 어떡합니까.]


아니스의 투덜거림에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레인저들과의 조우 후, 꼬박 이틀 동안 레헤인야르를 올랐다. 중간에 처지지도 않았고, 필요 외의 휴식으로 늑장을 부리지도 않았다. 단지 이 산이 지랄 맞고, 너무 높고, 에빌의 속도에도 한계가 있었다.


설원을 안내할 때의 에빌은 굉장히 빠르게 달렸지만, 레헤인야르에 들어오고 산을 오르는 동안 에빌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녀석은 계속해서 코를 킁킁대며 주변을 경계하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대며 길을 찾았다.


레헤인야르는 흑사자 성이 있는 우클라스 산맥만큼이나 크다. 그 산에서, 대망치 협곡을 정확히 찾아가는 것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레인저들은 대망치 협곡이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이틀의 등반 동안 유진은 그 경고의 이유를 체감할 수는 없었다. 몬스터의 흉포함과 숫자와 습격의 빈도가 늘기는 했다만, 경고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틀째의 밤. 눈보라를 막는 결계를 펼치고, 설원에서 쭉 사용한 커다란 텐트를 세웠다. 사마르에서 그랬듯이, 불침번은 유진과 크리스티나가 번갈아서 섰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잠을 자지 않는 메르와 아니스의 존재 덕분에 불침번을 서는 시간이 마냥 지루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유진이 불침번을 서는 동안에는 메르가 어리광을 부려왔고, 크리스티나가 불침번을 서는 동안에는 아니스가 300년 전의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레헤인의 온천 말이에요. 저는 유진 님과 함께 들어가는 건가요?”


“미쳤니?”


“저는 수영복 가지고 왔어요. 유진 님은 수영복 없으세요?”


“내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럽다는 건가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는 사역마잖아요.”


“헛소리 말고 크리스티나랑 들어가. 아니면 시엘이랑 들어가든가.”


“유진 님이 절 보고 싶어 할 수도 있잖아요.”


“안 보고 싶어.”


“그럼 세냐 님은 어때요? 세냐 님과의…… 호호, 혼욕이나, 수영복을 입은…….”


유진은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세냐와 혼욕. 수영복을 입은 세냐. 둘 모두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머릿속에서 상상되었다…….


[크리스티나, 들었습니까? 저 고약한 사역마가 하멜을 꼬시고 있습니다.]


‘시스터……! 저는 잠을 자야 합니다.’


[당신은 어쩜 그리도 거짓말쟁이인 것입니까? 크리스티나, 저는 당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지옥의 화염처럼 뜨겁고 사악한 불꽃이 끓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시스터! 여러 일을 겪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저는 빛을 신앙하는 성직자입니다. 그런 제 가슴 깊은 곳에 지옥의 화염이 있다니, 아무리 시스터일지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어머…… 저는 빛의 성녀가 아닌,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에게 하는 말입니다. 왜 자꾸 숨기려는 겁니까,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지금 당신을 보는 것은…… 흐흐, 저뿐입니다.]


‘우웃…….’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을 감추지 마십…… 흐후후…….]


“꺄아악!”


불꽃놀이 때의 기억을 떠올린 크리스티나가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된 꿈결처럼 아름답고 달콤하던 기적의 순간. 평생을 소중히 안고 싶었던 추억이, 아니스의 심술궂은 놀림에 먹칠 되고 있었다…….


“깜짝이야.”


“왜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그러세요?”


갑자기 터져 나온 비명에 유진과 메르가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벌떡 일어선 크리스티나는 잠시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화끈거리는 뺨을 양손으로 철썩 두드렸다.


“아…… 악몽을 꾸었습니다.”


“악몽?”


“예. 불길하고 사악한 악마가, 제 꿈속에 나타나 사특한 속삭임을 전했습니다.”


“설마…… 누아르 제벨라냐? 그 추잡한 탕부가 네 꿈을 파고든 거야?”


“예…… 예? 아, 아닙니다. 몽마의 여왕이 아닙니다. 그냥, 예, 악마…… 악마입니다.”


[유라스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빛의 성녀였던 저를 악마라고 말하다니…… 이건 신성모독입니다.]


아니스가 투덜거렸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말을 상대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텐트의 바깥을 보았다. 밤과 새벽 중에 다가온 몬스터들의 시체가 주변에 그득히 널브러져 있었다. 절반은 크리스티나의 플레일에 얻어맞아 머리가 박살 난 시체였고, 남은 절반은 유진의 마법에 난도질당한 시체였다.


“……차라리 지금부터 이동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잠이 부족하지 않아?”


“악마의 속삭임이 제 피로를 모두 날려 버렸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텐트의 문을 열었다.


안쪽은 잠을 편히 잘 수 있게끔 어두웠지만, 텐트의 밖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거센 눈보라 덕에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지만, 높은 하늘에는 해가 저물지 않고 떠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레헤인야르부터는 신기하게도 해가 저물지 않았다.


“네가 괜찮다면야.”


텐트의 밖에서 웅크리고 있던 에빌도 몸을 일으켰다. 유진은 꼬리를 살랑거리는 에빌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뒤, 펼쳐놓은 텐트를 정리했다.


이제는 더 서두를 필요가 없기는 했다. 눈보라의 저편. 높고 투박한 절벽이 아른거리고 있다. 이만큼 멀리서 보면, 저 치솟은 절벽은 거대한 망치의 머리처럼 보였다.


대망치 협곡.


지금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협곡의 절벽으로 통하는 골짜기까지 와있었다. 이곳에서 밤을 새우기로 하지 않았다면, 이미 어제 대망치 협곡에 도착했을 것이다. 레인저들에게 경고를 듣기도 했고, 괜히 무리할 필요도 서두를 필요도 없겠다 싶어서 우선 밤을 지내고 이동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동하는 건 좋은데, 아침은 먹고 가지? 오늘 당번은 너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아니라 아니스 님이십니다.”


“나는 아니스의 돼지죽 같은 밥은 먹기 싫으니까 네가 하면 안 될까…….”


“아니스 님께서 말하시길, 배부른 소리 말라고 하십니다. 아니스 님의 죽은 효율적인 흡수와 스테미너의 충전에 집중한 완전식이랍니다. 그리고 전생에 아니스 님의 요리를 잘 드셨으면서 왜 이제 와서 먹기 싫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때는…… 그때는 그거라도 먹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아니스보다 끔찍한 요리실력을 가진 세냐가 있었…….”


“세냐 님의 요리는 훌륭하세요.”


“제대로 먹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유진 님도 방금 말했잖아요. 그때는 그거라도 먹어야 할 만큼 보급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처참한 식재료나마 먹을 수 있게끔 요리하신 것이 세냐 님이잖아요. 그렇다는 것은! 세냐 님의 요리 실력은 사실 나쁘지 않은 것 아닐까요?”


“응 아니야. 세냐는 우리 중에서 요리를 제일 못했어. 그다음이 아니스였지. 모론이 그 둘보다 먹을 만한 밥을 했다고. 가장 잘한 것은 베르무트였지만.”


“아니스 님이 말하시길, 베르무트 님은 뭐든지 하멜 님보다 잘했다고 하십니다.”


“당장 아니스랑 바꿔. 그리고 내가 아니스를 한 대 때릴 건데, 그래도 될까?”


“안 됩니다. 이건 제 몸입니다.”


크리스티나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결국 아침식사의 준비가 시작되었는데, 사실 아니스가 직접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스는 머릿속에서 지시만 내릴 뿐, 손을 움직이는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와인을 넣읍시다.]


‘예?’


[모르는 겁니까? 와인은 고기의 잡내를 잡아주며 요리의 풍미를 높여줍니다.]


‘하지만 이건 죽인데…….’


[붉은 와인을 넣으면 죽의 색깔도 영롱해지지요.]


유진이 미리 넉넉히 챙겨준 덕에 식재료는 부족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가 시키는 대로 팔팔 끓는 냄비에 와인을 부었다.


흉측한 아침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유진은 주변의 시체들을 정리했다.


밤새 눈이 잔뜩 내렸지만, 습격해 온 몬스터들이 워낙에 많고 덩치가 커서 완전히 파묻히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몬스터의 시체를 보면서 먹고 싶지는 않았다……. 300년 전에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런 시대도 아닌데 굳이 과거를 따를 필요가 어디에 있나.


“…….”


대충 손을 휘둘러 몬스터의 시체를 던지던 유진의 몸이 굳었다.


시키는 대로 와인 한 병을 모조리 붓고, 팔팔 끓는 와인이 식재료에 색을 입히는 것을 보던 크리스티나도 굳었다. 그 곁을 맴돌던 에빌은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였다.


메르는 굳은 정도가 아니라,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사역마인 메르는 마나의 변화에 굉장히 민감하다. 유진은 즉시 메르를 끌어안고서 망토 안쪽으로 인도했다.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망토의 안쪽은 별개의 공간이니 괜찮다. 망토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메르가 막힌 숨을 토했다.


[유, 유, 유진 님.]


[하멜.]


메르가 기겁하며 유진을 불렀고, 침묵하던 위니드에서도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크리스티나가 곁에 와 있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하멜.”


창백하게 질린 것은 크리스티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메르와 마찬가지로 짧게 의식을 잃었고, 그사이에 아니스가 육체를 넘겨받았다.


“어.”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ㅡ화악! 아니스의 등에서 8장의 날개가 치솟았다. 유진도 백염식을 운용해 전신에 자색 불꽃을 둘렀다. 둘은 주저하지 않고 결계를 뛰쳐나갔다.


어느새 눈보라는 멈춰 있었다. 자연스레, 멈춘 것은 아니었다. 마치 도중에 뚝 끊어진 것처럼. 하늘에서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눈보라가 몰아칠 때처럼 여전히 뿌옇게 보였다.


뛰고, 날고 있다.


그런데도 서로의 거리는 떨어지지 않고, 저곳과의 거리도 좁혀지는 것 같지가 않았다.


대망치 협곡. 유진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낯설었다. 혐오와 공포…… 그런 종류의 감정이 뒤섞여서,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다가가고 싶지 않은, 무조건 멀어지고 싶은 기분. 하나 낯설되 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300년 전에 한 번.


‘왜?’


유진과 아니스는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항거할 수 없는 공포…… 보고 있음에도 이해되지 않는. 이질적인.


그럼에도 죽여야 하는.


‘왜 여기에서?’


멸망의 마왕.


그 알 수 없는 존재는, 300년 전에…… 헬무드에 있었다. 다른 마왕들이 그러하듯, 멸망의 마왕도 헬무드를 떠난 적이 없다.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 존재가 처음으로 목격된 것은, 드래곤의 대부분이 몰살당한 라베스타. 헬무드의 수도인 판데모니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멸망의 마왕의 영지.


그 후로 멸망의 마왕은ㅡ 마치 천재지변처럼 헬무드를 떠돌았다. 운 없이 멸망과 맞닥트린 군대는 모조리 몰살당했다. 300년 전에 하멜 일행이 멀리서나마 멸망의 마왕을 보았을 때. 그곳에 주둔 중이던 나하마의 군대 5만 명이 시체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멸망의 마왕과는 싸우지 마라.


베르무트가 경고했듯이, 멸망의 마왕은 그런 존재였다. 싸움이 불가능한 존재. 모든 마왕이 천재지변과 같았지만, 멸망의 마왕은 그 이름처럼 살아 움직이는 멸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멸망의 마왕은 더 이상 헬무드를 떠돌지 않고, 드래곤을 몰살시키면서 처음으로 발호했던 라베스타로 돌아가 수백 년 동안 침묵 중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곳은 헬무드가 아니다. 레헤인야르, 세상의 끝이라는 라구르야란을 가로막은 산이다. 수백 년 동안 침묵하던 멸망의 마왕이, 제 영지인 라베스타를 떠나 이곳에 올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달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아직 멸망의 마왕을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다. 단지, 그때 보았을 때와 같은, 아니,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뿐.


‘똑같지 않아. 지금 나만 해도 그래. 느끼고 있지만, 도망치지 않고 저쪽으로 가고 있잖아. 저 앞에 있는 것은 멸망의 마왕이 아니다.’


그럼 뭐지? ……오보론. 광란의 자식 중 하나였던 그놈이 떠올랐다.


광란의 마왕이 죽은 후, 놈은 멸망의 마왕에게 의탁했다. 놈은 결국 제 아들에게 죽었지만, 오보론을 죽인 야곤은 여전히 멸망의 마왕의 영지인 라비스타에 머무르고 있다.


‘멸망의 권속? 그래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가? 멸망의 마왕은 아니지만, 그 힘을 받은…….’


모르겠다.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일단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판단한 것은 아니스도 똑같았다. 유진과 아니스는 300년 전처럼 무조건 도망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망치의 협곡.


그 절벽 위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야곤…….”


유진은 걸음을 멈췄다. 도저히 가까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유진과 아니스는 절벽의 아래까지 와 있었다.


“……은…… 아닌 것 같은데.”


야곤의 아버지, 패악의 오보론은 곰이었다. 그 아들인 야곤도 곰일 것이다.


하지만 절벽 위에 선 것은 곰이 아니었다. 거인만큼이나 큰…… 원숭이? 고릴라? 머리에 흉악한 뿔이 달리기는 했지만, 생김새는 원숭이를 닮았다. 새하얀 털을 두른 거대한 몸. 두 발로 서고, 양팔을 가진 몬스터. 아니…… 마물인가? 놈에게서 발해지는 불길함은 마물과 비슷했는데, 아주 똑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이 꺼림칙한 기운부터가 마물과는 결정적으로 달랐다.


-누르는 몬스터이면서 몬스터와는 다릅니다. 마물인 것도 아닙니다. 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제 입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틀 전 레인저가 전했던 경고.


“누르?”


유진은 절벽 위에 선 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흉흉한 눈동자가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놈의 입이 쩍 벌어졌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서 길쭉한 혀가 튀어나왔다. 독액처럼 보이는 시커먼 침이 혀에서 뚝뚝 떨어졌다.


“크륵.”


괴물이 몸을 낮췄다. 당장에라도 절벽에서 뛰어내려 덤빌 것만 같았다. 유진은 망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무기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ㅡ푸확.


유진이 무기를 꺼내기도 전에.


괴물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멈췄던 눈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도끼가 거구의 어깨에 걸쳐졌다.


유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잘린 머리 위에 누군가가 발을 걸치고 서 있었다.


“……모론.”


유진은 300년 전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협곡


거구의 남자. 야수왕 아만 루하르나 레헤인야르의 레인저들도 키가 2미터는 넘을 거구였지만, 절벽 위에 선 남자는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 보였다.


짐승인지 몬스터인지 모를 털가죽을 망토처럼 어깨에 걸치고 있다. 왼팔은 재질을 알 수 없는 갑옷으로 감쌌는데, 남자가 입은 갑옷은 그게 전부였다. 남자는 이 혹한의 날씨에도 두툼한 방한복 따위는 입지 않아서, 우락부락한 팔과 가슴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두껍고 커다란 근육이, 가뜩이나 키가 큰 남자의 덩치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어깨에 걸친 도끼. 그 투박한 생김새는 나무꾼이 휘두르는 도끼를 닮았는데, 거목을 일격에 베어낼 수 있을 만큼 컸다. 실제로 남자는 저 거대한 누르의 목을 일격에 양단했고, 그렇게 휘둘렀음에도 도끼에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나부끼는 난발 속에서 남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모론 루하르.


유진과 아니스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300년 전과는 달리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기는 하다만, 모론이 수염을 길러봤자 결국은 모론이다.


그럴 텐데.


유진과 아니스는 잠시 동안 자리에 서서 굳어 있었다. 모론, 이라고 이름을 부르기는 했지만. 그에 이어서 다른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300년 전보다 키가 더 커서? 그때보다 덩치가 더 커서. 뭔지 모를 갑옷으로 왼팔을 감싸고 있어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그래 봤자 모론은 모론이다.


눈동자.


유진과 아니스는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동자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모론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싸늘했고,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론’이라고 이름을 부른 것을 듣지 못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름을 부를 때, 유진은 너무 놀라서 큰 소리로 내뱉지 못했다.


지금 모론이 풍기는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 온 것이 유진 혼자뿐이라면, 모론이 정체 모를 외부인을 경계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지금 유진의 곁에는 아니스와 똑같이 생긴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환생한 유진의 모습은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크리스티나ㅡ 아니스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지금 아니스는 8장의 날개를 모두 펼치고 있었다.


“……야, 모론.”


유진은 감정을 진정시키면서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불렀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저 괴물이 바야르의 오랜 전설에 등장하고, 레인저들이 경고했던 ‘누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유진과 아니스는 저 괴물에게서 멸망의 마왕에게 느꼈던 꺼림칙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건 착각이라 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곤두서게 만드는 그 불길함은, 헬무드에서 보았던 마족과 마왕들 중에서도 오직 멸망의 마왕만이 지니고 있던 불길함이었다. 물론 멸망의 마왕에 비하자면 턱없이 옅기는 하여도, 저 괴물은 옅은 존재감만으로 300년 전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저러한 괴물이 왜 이 산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100년 전에 왕성을 떠나 은둔에 들어갔다는 모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 등신아.”


사실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300년 전의 동료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저 위에 선 모론은 굉장히 멀쩡해 보였다. 베르무트처럼 죽음을 위장하지도, 세냐처럼 가슴에 구멍이 뚫려 봉인된 것도, 아니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유진은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절벽은 높았지만 유진은 도약 한 번으로 절벽의 끝까지 도달했다. 내려다보던 모론의 시선이 위로 들렸다. 유진과 모론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싸늘한 눈동자. 유진이 기억하는 모론의 눈동자는 저렇지가 않았다. 300년의 세월을 그대로 받아내고 풍파된 것처럼 칙칙하고 탁하다. ㅡ암실에서, 의자에 앉아 있던 베르무트처럼 지쳐 보였다.


유진은 그대로 절벽 위로 떨어지려고 했다. 그 순간, 모론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유진이 절벽에 떨어지기도 전에 모론이 손을 휘저었다. 가벼운 손길이었지만 뒤따르는 바람은 폭풍처럼 거대했다. 절벽을 뒤덮고 있던 눈이 거대한 풍압에 치솟아 흩날렸다.


부딪쳐 온 바람이 유진의 몸을 뒤로 날려 버렸다. 설마 모론이 자신을 밀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유진은 바람에 실려 순식간에 저 멀리까지 날아가 버렸다.


“야!”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고함을 질렀다. 그는 즉시 바람의 정령들을 통제해 바람을 멈췄다. 그리고 더 강한 바람으로 제 몸을 밀어내며, 밀려난 속도보다 더 빠르게 다시 절벽에 가까이 왔다.


“내려가라.”


덥수룩한 수염 사이의 입술이 열렸다. 모론은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하멜.”


등신이라고 불렀기 때문일까. 전생과는 전혀 다른 얼굴인데, 모론은 유진을 그 이름으로 불렀다.


……내려가라고? 유진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이 지랄 맞은 산을 올라와서, 300년 만에 모론과 만났다. 모론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데 내려가라고?


“X까.”


유진은 그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절벽까지 돌아온 유진이 다시 아래로 떨어지자, 모론이 수염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끼가 위로 들렸다. 모론은 그 거대한 도끼를 한 손으로 쥐고,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그 일격에 적의 따위는 조금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면에서 결코 거스를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힘이 실려 있었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망토에서 위니드를 뽑고, 템페스트의 바람을 불러왔다.


ㅡ콰아아아아아!


위니드를 휘두른 궤적에 폭풍이 따랐다. 도끼와 검은 직접 맞닿지는 않았으나, 서로의 힘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갑작스레 무기를 휘두른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일 텐데, 유진의 힘의 차이를 강렬하게 절감했다. 모론의 완력은 300년 전에도 무식하리만큼 강했었다. 눈동자와 외모는 세월에 직격당했지만, 저 우락부락한 육체에 깃든 힘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300년 전보다 더…….’


폭풍이 부서지고, 유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이대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어디까지 날아가 버릴지 알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그래서 유진은 다시 한번 바람을 불러와 몸에 제동을 걸었다.


그렇게 몸을 멈추고, 아래로 내려왔다.


“저 등신이.”


유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눈보라를 가로질렀다. 절벽 아래로 돌아오니 우두커니 서 있는 아니스의 등이 보였다. 아까만 해도 8장의 날개를 모두 다 펼치고 있던 아니스는, 어느새 날개를 집어넣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스. 넌 괜찮냐?”


“괜찮습니다.”


아니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절벽을 올려보는 시선을 따라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덩달아 유진도 다시 절벽 위를 보았다.


“……그 등신 어디 갔어?”


날아가기 전만 해도 보였던 모론과, 누르인지 뭔지 모를 괴물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유진이 표정을 콱 구기며 묻자, 아니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모르겠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 무식할 정도로 큰 시체랑, 무식한 등신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뭐 저 시체 끌고서 펄쩍 뛰어가기라도 했나?”


“아닙니다. 저는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모론과 시체는 마법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직접 보지.”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아니스에게 다가갔다.


“저는 이미 날개를 집어넣었습니다만.”


“다시 꺼내면 되잖아. 그리고 네가 언제 날개를 꺼내야만 날아다녔냐? 그냥 날 수도 있으면서…… 아니면 너도 그냥 점프해. 저 정도는 올라갈 수 있잖아.”


“크리스티나는 육체의 단련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날개를 꺼내야 천사처럼 신성해 보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아닌데 뭐…….”


“아, 그렇지요. 지금 이곳에는 하멜과 저, 둘뿐이군요.”


아니스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크리스티나가 깨어 있다면 머릿속에서 부끄러움 가득한 비명을 질렀겠지만, 안타깝게도 크리스티나는 아직까지 기절 상태였다.


내심 유진이 부끄럼에 얼굴을 붉히는 것을 기대했지만,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애당초 유진 본인이 불꽃놀이에서 한 말에 일말의 부끄럼을 느끼지 않고 있는데 부끄럼을 느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유진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대뜸 아니스의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 적극적인 행동에 아니스의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유진은 빳빳하게 굳어버린 아니스를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얌전히 있어.”


유진 딴에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지금 절벽에 모론이 없기는 하다만, 또다시 절벽 위로 올라갔을 때 숨어 있던 모론이 아까처럼 도끼를 휘두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물론 아니스야 제 한 몸 지킬 능력이 충분하지만, 유진은 그냥 자신이 안고 날아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고, 고, 공주님 안기…….’


사실 아니스도 이렇게 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니스가 기대했던 것은, 자신이 은근히 안아 들 것을 권할 때 유진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머뭇거리는 것이었지, 이렇게 유진이 먼저 안아 드는 것이 아니었다. 즉, 아니스는 이렇게 안기는 것에 대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니스는 유진을 놀리지도 못하고, 품 안에 얌전히 안기고만 있었다. 이대로 오랫동안 안겨 있었다면 충분히 즐기고서 놀릴 수 있었을 텐데…… 저 높은 절벽은 유진의 도약력에는 너무나도 낮아서, 순식간에 절벽 위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없네.”


유진은 절벽에 올라오자마자 투덜거리면서 아니스를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으려고 했다.


아니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양팔을 유진의 목에 단단히 감았다. 유진은 이미 양손을 놓았음에도 아니스는 팔에 힘을 주어 유진의 품 안에서 버텼다. 전해지는 완력은…… 단련이 부족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강건했다.


“뭐 하니?”


“……으흠.”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아니스는 헛기침을 뱉으며 슬며시 팔에 힘을 풀어,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깨끗하군요.”


“그러게.”


누르는 거인만큼이나 커다란 괴물이었다. 놈의 시체에서 쏟아진 검은 피만 해도 절벽의 눈을 모조리 피로 물들여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절벽의 눈은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얗고, 시체가 끌려간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네 말이 맞네. 마법 같아.”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모론이 300년 동안 마법이라도 익힌 건가? 배우려 했다면 배우지 못할 것도 없기는 하다만. 유진은 고개를 돌려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아니스는, 모론과 시체가 사라진 것이 ‘마법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확실히 아니스는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아니스 본인이 마법을 쓸 줄 모른다는 것이지, 그녀의 눈이 마법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어둡다는 것은 아니다.


이 현상은 마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마법과 같은 무언가. 유진은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망토 안에서 아카샤를 쥐고 있지만, 모론이 어떤 방법으로 시체와 함께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모론이 네게 무슨 말은 하지 않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멜,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절 잠깐 쳐다봤을 뿐입니다.”


“모론이 어떻게 사라졌지?”


“갑자기. 마법처럼.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라고 말하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정말로 눈을 감은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빠르고 갑자기 사라졌다는 겁니다. 눈보라 속에서……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네 말과 이곳의 흔적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인데.”


“결계.”


아니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했다. 이 절벽 자체가 결계에 걸쳐진 경계. 모론과 누르의 시체는 결계와 연결되는 ‘다른’ 절벽에 있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결계에는 그를 유지하게 하는 토템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카샤를 사용해 봐도 결계를 간파할 수가 없고, 무턱대고 토템을 찾아 헤매보자니 이 절벽과 그 너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경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내려가자.”


유진은 눈썹을 콱 구기며 말했다.


“모론도 말했잖아. 내려가라고 말이야.”


“언제부터 당신이 모론의 말을 그렇게 잘 들었습니까?”


“모론이 나보다 형이잖아.”


“300년 전부터 모론은 당신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모론이 나보다 3살인가 4살 많았지.”


“5살입니다.”


“그 시대에는 5살이면 그냥 친구였다고. 그렇게 따지면 아니스 너도 나보다 2살 많았잖아.”


“3살입니다.”


“……그때 우리는 나이와 태어난 날은 달라도 동등했지. 그런데 300년이 지나 버렸고, 모론 그 새끼는 나이를 300살 그대로 먹어버렸잖아. 놈도 내가 싫어서 꺼지라고 한 건 아닐 테니, 일단 내려가서 좀 알아보자고.”


“귀엽군요.”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론의 뜻을 존중하는 것 아닙니까. 하멜, 당신이 고집을 부려 이곳을 찾아 헤매다가…… 모론에게 또다시 밀어내질까 두려운 겁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모론은 살아 있고, 놈에게도 사정이 있을 테니까…….”


“그걸 존중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스는 쿡쿡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입술을 뻐끔거리면서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참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절벽을 훌쩍 뛰어내렸다.


“앗.”


땅에 내려오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했다. 너무 높으니까 내려달라고 할걸. 만약 그랬다면 다시 한번 공주님처럼 안길 수 있었을 텐데……!


아니스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급히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내려오지 않은 유진이 실눈을 뜨고서 이쪽을 내려보고 있었다.


“……으흠.”


아니스는 아쉬움을 달래며 헛기침을 했다.


텐트로 돌아가니 귀를 축 늘어트린 에빌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르인지 뭔지 모를 괴물이 죽으면서, 멸망의 마왕을 연상시켰던 불길함은 사라졌다. 그 때문에 에빌도 아까처럼 겁에 질려 웅크려 있지는 않았다.


조금 지나니 메르도 슬며시 망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크리스티나도 정신을 차렸다. 크리스티나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실신해 버린 자기 자신에 부끄럼을 느끼고 자책했다.


[기절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크리스티나. 당신은 저런 존재에 대한 내성이 없지 않습니까?]


“300년 전에 별의별 일을 다 겪은 우리도 저런 놈한테 기절할 뻔했었어.”


“……저 존재가 멸망의 마왕은 아니었잖습니까.”


“하지만 비슷했지. 경중으로 따지지 마, 이건 본능적인 공포 같은 거니까, 경험 없이는 거스르기 힘들어.”


그렇게 달래주며 하지 못했던 식사를 마저 했다. 이미 식었던 죽을 다시 끓여 먹었는데, 맛은 평소보다 최악이었다.


이틀 후.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레헤인야르의 영역을 벗어나, 레헤인의 훈련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드높은 성벽이 에워싸고 있는 요새였는데, 요새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이 딸린 영지처럼 마을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이곳을 주로 이용하는 것은 루하르의 왕국 기사단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설원을 떠나지 않은 바야르 부족이다. 그들은 이곳에 요새가 지어진 순간부터 쭉 요새를 관리하며, 마을에서 살고 있다.


레헤인야르의 레인저들 대부분은 이 마을에서 태어난 바야르의 원주민들이며, 젊은 전사들은 언젠가 수도 하멜론에 가서 국왕에게 간택받아 기사가 되는 것을 꿈으로 삼는다.


“크군.”


요새 안으로 들어온 유진은 그런 감상을 중얼거렸다.


크다는 것은 요새뿐만이 아니었다. 마을에 사는 바야르의 원주민들. 모론과 루하르의 국왕, 그리고 설산의 레인저들이 그랬듯이 원주민들은 죄다 키와 덩치가 컸다. 유진도 키가 꽤 큰 편인데, 요새의 원주민 남자들 중에서 유진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원주민들을 제외하고도, 요새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크기는 했다.


나이트마치를 위해서였다. 야수왕은 나이트마치의 장소가 루하르로 확정된 즉시 레헤인의 요새를 대대적으로 증축했다. 유진은 이 나이트마치에 대체 얼마나 많은 기사단과 용병단이 오는 지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증축된 요새의 규모는 방문자 모두를 수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불타는 강…….”


뜨거운 증기를 뿜어내는 강이 마을의 외곽을 흐르고 있다. 그 덕분인지, 눈이 꽤 많이 내림에도 요새는 그리 춥지가 않았다.


“씻지 않고, 수영복 외의 옷을 입고 들어가는 것은 안 됩니다.”


“안 들어갑니다.”


“본래 외지인이 오는 곳이 아닙니다만, 이번에 온 외지인들은 많이들 착각하고 계시더군요. 이곳은 북방 설원의 끝. 바야르는 이곳을 떠나지 않은 원주민. 그래서 무식하고, 야만적인 줄 압니다.”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안내하던 마을주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또한 유진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만큼 무식하지도, 야만적이지도 않습니다. 저 불타는 강…… 눈이 내릴 때 저곳에 들어가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씻지도 않고 저곳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 그러고 싶다면 집의 개인온천에. 저 강은 마을의 것이니, 이웃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까.”


“라이언하트는 시조 용왕의 벗. 300년이 지났지만, 라이언하트는 루하르 왕가의 친구입니다. 유진 라이언하트님이 당장 저 강에 뛰어들고 싶어 하신다면…….”


“누가 이미 뛰어든 겁니까?”


“뛰어들지는 않았습니다. 신기하다며 온천 위를 걸었습니다. 신발도 벗지 않고.”


“카르멘 님이겠군…….”


“어떻게 알았습니까.”


“라이언하트에서 그런 기행을 즐기는 분은 카르멘 님뿐입니다. 가문의 일원으로서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는 이미 충분히 들었습니다.”


라이언하트는 유진보다 며칠은 먼저 출발했고, 이동만 우선한 덕에 이미 레헤인에 도착해 있다. 하지만 시안과 시엘, 디오르, 스칼리아 공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유진은 내심 그들이 걱정되었지만, 아니스가 한 말도 있어서 무턱대고 그들을 찾아 나서지는 않았다.


“라이언하트 분들은 이 저택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마을주민이 안내한 곳은 성과 가까운 대저택이었다.


“성과 마을의 공중목욕탕을 제외하고, 가장 큰 온천탕이 딸린 저택입니다.”


성에는 각국의 왕과 근위기사단이 지낸다. 나이트마치의 시작까지 앞으로 나흘. 정작 루하르의 국왕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저 성에는 이미 각국의 왕들이 도착해 있다.


신성제국의 교황, 에우리우스.


키옐제국의 황제, 스트라우트 2세.


나하마의 술탄, 알라부르.


아롯의 국왕, 다인돌프.


시무인의 국왕, 갤러버트.


제국과 그에 준하는 굵직한 대국의 왕들은 물론이고, 항마연합의 국장인 플레버 왕국의 리고스 국왕과 그 외 연합 소속의 국왕들. 지금 이 요새에는 헬무드를 제외한 대륙의 지배자들 대부분이 와 있었다.


“그럼, 편안히 지내주십시오.”


마을사람은 안내를 마치고서 돌아갔다. 유진은 잠시 동안 가까운 곳에 있는 성을 올려다보았다.


저곳에서부터 몇 개의 시선이 느껴졌다. 숨길 생각도, 그럴 이유도 느끼지 못해 하는 오만한 시선들. 시선이 시작된 ‘높이’가 다르다.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이라고 해서 다 똑같지가 않다. 제국이라면 왕국보다 우월하고, 왕국이라 해도 대국과 소국으로 갈린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


차기 가주는 아닐지라도, 차대를 이끌 것이 분명할 라이언하트의 젊은 사자.


왕권을 쥔 지배자들이 유진을 주목하고 있었다.


“……유진 님.”


“무례한 짓은 안 해. 쳐다보는 것뿐인데 뭘.”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높기만 한 곳에서 열심히들 보시라지.”


유진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저택으로 들어갔다.


레헤인


나이트마치에서 라이언하트가 동원한 전력은 본가 가족을 제외한 기사 100명. 백사자 40명에 흑사자 60명이다.


본가를 수호하는 백사자 기사단이야 본래부터 그 수가 많아 40명이 빠져도 큰 문제는 없다만, 흑사자 기사단은 그렇지가 않다.


흑사자 성이 있는 곳은 키옐의 변경인 우클라스 산. 그 너머에는 사마르 대수림이 있다. 틈만 나면 산을 넘어 키옐에 밀입국하려는 대수림의 원주민, 그리고 처벌을 피해 국경을 넘으려는 키옐과 각국의 범죄자. 흑사자의 본분은 가헌의 수호지만, 우클라스 산의 국경을 지키는 것으로 키옐에서 여러 편의와 힘을 인정받고 있다.


1년 전 이오드가 주동한 동란 이후, 흑사자 기사단의 전력은 크게 증원되었다. 하지만 그때 증원된 기사들이라고 해 봐야 방계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라, 나이트마치에 본래의 정예들을 동원해 버리면 성에는 신입기사들만 남게 되어버린다.


부대장과 기존의 정예들 반은 성에 남았다. 그렇다 보니 저택의 흑사자들은 유진이 모르는 신입들이 꽤 많았다.


“…….”


아주 모르는 얼굴뿐인 것도 아니었다. 유진은 과시하듯이 이쪽을 향해 가슴을 내밀고 있는 가르기스를 쳐다보았다. 디자이라가 흑사자 기사단에 입단한 것처럼 가르기스도 흑사자 기사단에 입단했다.


“…….”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가르기스의 옆에는 대장인 제노스가 서 있었다. 본래 그가 담당하는 부대는 2번대였지만, 도미닉이 죽은 후 제노스의 2번대가 1번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음.”


유진은 이쪽을 향하는 시선에 낮게 헛기침을 뱉었다. 제노스나 가르기스와 만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유진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제노스의 눈동자에 난감함을 느꼈다.


‘대단한 성취시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1년 전의 흑사자 성. 그때의 유진도 믿기지 않을 만큼 강했고,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 후 1년. 유진의 성취는 제노스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제노스는 느끼는 경악을 온전히 경악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내심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제노스는 유진이 300년 전의 영웅인 하멜이라는 것을 안다. 비록 육신이 21살의 것일지라도 깃든 영혼이 21살의 청년이 아니니, 저 폭발적인 성장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전생의 하멜은 라이언하트의 ‘백염식’을 익히지 않았잖은가. 전생과 전혀 다른 수련법을 익히고, 마법까지 익혔다. 그렇게 라이언하트의 역사에서 최초로, 21살의 나이에 백염식 6성에 올랐다.


제노스는 지금 곁에 다른 라이언하트들이 있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제노스는 하멜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을 것이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굴뚝같다만. 제노스는 슬쩍 시선을 돌려 옆을 보았다. 23살이라고 믿을 수 없는…… 가르기스의 얼굴이 보였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우선, 유진은 제노스를 힐긋 보면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가르기스가 옆에 있으니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음…… 오느라 고생 많았네.”


“가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원로원주님과 함께, 이곳에서의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서 성에 가셨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가르기스를 쳐다보았다. 가르기스는 아직도 활짝 편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너는 왜 그러고 있냐?”


“목욕하러 가자.”


뜬금없는 소리라는 생각은 했다만,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힐긋 뒤를 보니 크리스티나도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혼욕을 기대해 눈을 빛내는 것은 아니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설원을 이동했다. 마법으로 몸의 청결은 유지했지만,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은 마법으로 달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가르기스를 따라 욕탕으로 향했다. 이 저택에 딸린 욕탕은 뒤뜰 전체를 사용하는 노천탕이었다.


“저도 같이 들어가나요?”


“헛소리하지 말고 크리스티나랑 같이 가.”


입술을 삐죽 내미는 메르를 크리스티나에게 넘겨주고, 가르기스와 함께 남탕에 들어갔다.


“바야르의 주민들을 보았나.”


“봤지.”


“다들 근육이 훌륭하더군. 이곳의 온천은 근육의 성장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러냐…….”


“백염식의 6성에 오른 것을 축하한다.”


“고맙다.”


“내게는 축하의 말을 건네지 않는 건가.”


“어…… 음…… 흑사자가 된 것을 축하…….”


“그런 축하를 듣고 싶어서 너와 목욕하러 온 것이 아니다.”


온천은 훌륭했다. 모론이 고향의 ‘뜨거운 강’에 대해 늘어놓던 말이 떠올랐다. 베르무트도 이 온천에 대해 몇 마디 말을 했었다. 몸만 담그고 있어도 피로가 상당히 풀린다고 했던가. 실제로 그랬다.


-피로뿐만이 아니다. 그 뜨거운 강은 병과 상처를 돌보는 약수가 흘러서, 몸을 담근 것만으로도 병이 낫고 상처가 치유된다. 특히 피부에도 좋아서 여자들이 좋아했다.


과연. 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 몸을 담근 온천물을 살펴보았다. 물에는 마나가 짙게 녹아 있었다.


……물이 찰랑거렸다. 뭔가 싶어서 옆을 보니, 가르기스가 제 몸의 근육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몸이…… 음…… 더 좋아졌구나.”


무언의 압박.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서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제야 가르기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동훈련에 관해 이런저런 논쟁이 많은 모양이다.”


“위험성 때문인가?”


“그렇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눈먼 칼은 얼마든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니까. 단일집단이라면 모를까, 레헤인에 모인 기사단은 모두가 소속이 다르다. 그것에 정치적인 이유가 섞이면, 의도적으로 칼날을 세울 수도 있지.”


나이트마치의 취지는 대륙의 국가와 기사단의 단합이다. 어린아이의 전쟁놀이에도 부상을 입고 재수가 없다면 죽어버리는데, 기사들의 훈련에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이트마치의 훈련은 기사단 간의 친선전. 그리고 야전에서의 점령전으로 정해진 것 아니었나.”


“그렇게 결정했지만, 나하마의 술탄이 이제 와서 불만을 제기하는 모양이다. 이 설원은 사막과는 풍토가 전혀 다르니, 사막의 전사와 어쌔신들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뭐 어쩌고 싶다는데?”


“레헤인야르에 몬스터를 대거 소환해서 토벌전을 하자는 군. 갑작스러운 제안이기는 하지만, 여러 국가들의 술탄의 의견을 지지하고 있다.”


“얼씨구.”


유진은 술탄이 왜 그런 제안을 하였는지를 알았다.


예부터 나하마의 사막은 마법사의 던전이 많았다. 사막이란 풍토가 지하 던전을 만들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아롯에 마탑으로 구분되는 계파가 있다면, 사막에는 던전으로 구분되는 계파가 있다.


나하마의 모래술사들도 던전 계파에 속한 마법사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던전과 마탑이 동등한 것은 아니다. 정말로 둘이 동등했다면, 아롯이 마도왕국이라는 이름을 독점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법사의 질과 숫자와는 별개로, 나하마와 아롯이 다른 점. 아롯의 왕가는 마탑을 복종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나하마의 술탄은 사막의 던전을 복종시킨다. 나하마의 술탄이 몬스터를 ‘소환’하자고 의견을 냈다면, 그런 종류의 마법을 전문으로 하는 던전의 마법사들을 끌고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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