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Ch9

 ‘가진 전력들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야.’


술탄이 저런 의견을 냈고, 다른 왕들이 지지했단다.


뻔한 일이었다. 전력과 전력이 충돌한다면 서로의 전력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술집 다툼도 아니고 각국의 기사단이 집결한 나이트마치. 친선전이고 훈련일지라도 그 모든 것에는 국가와 기사단의 명예가 걸려 있다. 숨기려면 숨길 수 있겠지만, 숨긴 만큼 패배하게 되고, 그것은 곧 명예의 실추로 이어진다.


하지만 상대가 몬스터라면 그 문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술탄의 제안은 나이트마치 자체에 내심 불만을 갖고 있던 각국의 지도자들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 제안이었다.


왜 나이트마치가 열렸나?


유폐의 마왕이 세상에 경고를 전했기 때문이다. 300년간 침묵했던 헬무드의 마왕이, 평화를 깨고서 다시금 대륙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경고.


최초에 누가 그 경고를 들었던가? 바로 유진이다. 하지만 라이언하트에게 보고를 받았던 키옐의 황제는, 단 한 번도 유진을 불러내지 않았다.


ㅡ아롯만 해도 그랬다. 유진의 청문회 때, 아롯의 국왕인 다인돌프는 그 자리에 참석하는 대신에 아들인 호네인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 ㅡ유폐의 마왕에게 직접 경고를 들은 자. 아롯의 국왕으로서 유진을 만나고, 대화하고 싶어 할 이유는 차고 넘쳤을 터. 그럼에도 다인돌프는 유진과 만나지 않고,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등신들.’


유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결국 이 나이트마치는 명목만 그럴듯한 회합인 것이다. 각국의 왕들은 유폐의 마왕이 진심으로 평화를 깨트릴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그러고자 한다면, 유폐의 마왕에게는 진즉부터 그럴 기회와 힘이 있었다.


-나는 그 300년 동안 베르무트의 후손들에게 충분한 호의와 존중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내게 호의를 보이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것을 자유라 받아 주었다. 하지만 계속된 호의를 권리라 착각하는 것은 곤란해.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일 뿐. 베르무트의 후손이여. 라이언하트에게, 모두에게 전하거라. 내가 베푸는 호의를 침범하지 말라. 너희가 나를 경외하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너희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사막의 지하에서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경고했다. 아주 노골적인 경고였다. 나이트마치는 마왕의 경고에 대한 무력시위와 다를 바 없지만…… 유진은…… 집결한 대륙의 힘이 헬무드의 마왕을 놀라게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완벽하게 단결되어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다들 제 밥그릇 감추기나 생각하고 있으니.’


유진이 생각하기에, 이 꼴이 된 것은 유폐의 마왕의 경고가 노골적이면서도 느슨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몇 년 안에 대륙을 짓밟아 버리겠다고 경고하든가. 유폐의 마왕은 경고에 상당한 여지를 두었다. 경외하지 않는다면 존중하지 않겠다……. 그 말은 결국, 경외한다면 쭉 존중하겠다는 말 아닌가?


-네 선조는 자유를 대가로 약속을 맺었고, 이제는 그 끝이 다가오고 있다. 멈추었던 수레바퀴가 다시 구를 때가 오게 된다.


-언젠가는 다시 약속을 맺어야겠지. 누가 베르무트를 대신해 약속을 맺고,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을까.


“개새끼.”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조차 애매하기 짝이 없으니, 일국을 이끄는 왕들이 태도를 조심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300년간 지속된 이 평화의 시대, 대체 어느 왕이 진심으로 전쟁을 바라고 대비하고 싶어 할까? 적어도 자기 대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것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나이트마치가 흐지부지 끝난다면, 변하는 것은 있으리라.


우선 헬무드의 변경을 간질이는 항마연합은 병력을 대거 뒤로 물릴 것이다. 그것이 마왕에 대한 ‘경외’며, 전쟁을 피하는 일이라 결정할 것이다. 일찍이 그러지 않고 나이트마치가 지난 후에 그러는 것은, 항마연합이 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함일 거고. 아니, 이 나이트마치 자체가 결국은 대륙 국가들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좀 세게 처맞아봐야 정신이 번쩍 들 텐데 말이야.’


유진은 욕탕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천물이 뜨거워서인지 머리에도 열이 빨리 오르는 것만 같았다. 애당초, 훈련내용에 대해 이제 와서 반발한 것은 나하마의 술탄이다.


나하마는 수백 년에 걸쳐 튜라스를 침략했다. 놈들의 침략을 헬무드가 봐주고 있고, 유폐의 마왕이 종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다.


300년 전부터 그랬지만, 유진은 나하마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국가의 빌어먹을 어쌔신들은 전장에서도 아군의 뒤통수를 쳐대며 제 잇속을 챙기는 것만을 우선하던 십새끼들이었다.


‘십새끼를 부리는 술탄도 당연히 십새끼지. 그 새끼가 투덜투덜 불만을 말하는 것도 어쩌면 유폐의 마왕의 명령인 걸 수도 있잖아.’


……그 유폐의 마왕이? 대체 뭐가 무서워서? 이성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유진은 그 이성을 무시했다. 사실 나이트마치가 어떻게 끝나건 유진이 알 바가 아니기는 했다. 왕들이 밥그릇을 감추고 웅크린들, 유진이 할 일은 명확했다.


아군의 전력이 많아진다면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300년 전의 전쟁을 겪은 유진이 생각하기에, 마왕 같은 존재와의 전투에서 머릿수가 많은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네크로맨서 때문이다. 전투의 규모가 커지면 당연히 시체도 많아지고, 네크로맨서는 그 시체를 모조리 마왕의 군세로 삼는다.


‘대규모 전쟁은 나도 별로긴 해. 내가 능력만 된다면 마왕성에 혼자 쳐들어가서 유폐를 죽여 버릴 텐데.’


[그건 오만한 생각이다, 하멜.]


‘이 새끼. 위니드도 없는데 어떻게 말을 거는 거냐?’


[뭘 새삼스레…… 위니드는 촉매일 뿐, 너는 나 템페스트와 계약했다.]


유진도 그 사실은 알았다. 다만, 위니드를 쥐기 전에는 어지간해서는 말을 걸지 않았던 템페스트가 지금 같은 때에 대뜸 말을 걸어오니 놀랐을 뿐이다.


[하멜. 네가 진심으로 북벌을 꿈꾸고 그에 가까이 왔는데, 그를 열렬히 바라는 내가 어찌 입을 닫고 있겠는가.]


‘그놈의 북벌…….’


[너와 나는 같은 미련을 갖고 있다. 300년 전, 우리는 북쪽의 마경을 정복하지 못했다. 기적처럼 우리는 다시 기회를 얻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북벌을 이루어야 한다.]


‘어.’


[그러나 하멜, 너와 나 둘의 힘으로는 무리다. 기적처럼 아니스가 성녀에게 깃들어 힘이 되어주었으나, 여전히 힘이 부족하다. 300년 전에도 그랬다. 마왕의 목을 베는 주역은 베르무트를 위시한 소수의 토벌대였으나, 너희가 마왕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대륙의 힘이 각지에서 마왕의 군세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유진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고위마족이나 마왕과의 전투에서 대륙의 군대보다는 베르무트와 동료들이 활약한 것은 사실이나, 헬무드 전역에서 벌어졌던 여러 전투에서는 대륙의 군대도 큰 활약을 했었다.


[북벌을 이루기 위해서는 군세가 필요하다, 하멜. 그러니 내가 제안하도록 하마.]


‘뭐. 나보고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되라고? 그럴 필요가 어디 있냐? 이 가문은 베르무트의 후예란 명예가 뼛속까지 박힌 가문이야. 그래야 한다면 가문 전체가 일어서서 전쟁을 준비…….’


[라이언하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멜. 네가 키옐의 황제가 되는 거다.]


“커흡.”


욕탕에 나와서 찬물을 들이키던 유진은 저 갑작스러운 말에 너무 놀라서 물을 토해 버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불가능한 일도 아니잖나. 그 모론조차 일국의 왕이 되었는데, 하멜 네가 왕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아니……. 그건…….’


[키옐의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신성제국 유라스의 성황은 어떠한가. 네가 성황이 되고자 한다면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본다. 오히려 키옐의 황제가 되는 것보다는 쉽겠지. 유진, 네게는 성검이 있다. 그리고 300년 전의 아니스와, 당대의 성녀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너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지.]


‘…….’


[빛나는 성검을 들고, 8장의 날개를 펼친 성녀가 네 뒤를 따르는 것을 상상해 보아라. 네가 성황이 되고자 한다면, 그 광신도의 국가에서 누가 네 정통성을 의심하겠는가?]


그건…… 그럴 것 같았다. 유진은 잠시 교황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새하얀 성직복을 입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성인다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기도를 하는…….


“우욱.”


도저히 상상이 되지가 않았다. 하려 들면 할 수야 있겠지만, 만약 자신이 교황이 되면 유라스의 수많은 신민들을 지옥으로 내리꽂아 버릴 것만 같았다…….


‘안 해. 못 해.’


[어째서!]


‘하려면야 하겠지만…… 나는……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왕의 권력을 바라지 않는 건가?]


‘어, 필요 없어.’


유진은 템페스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서 옷을 입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직 욕탕에 남은 가르기스가 팔근육에 온천수를 끼얹는 모습이 보였다. 유진은 그 의미 모를 기괴한 행동에 혀를 내두르면서 욕탕을 나왔다.


크리스티나와 메르는 아직 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방에라도 올라가서 쉴까 생각했지만, 머리에 오른 열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결국 유진은 망토까지 걸치고서 저택을 나왔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산책하기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온천 덕에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는 좋았다. 유진은 목적 없이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아니, 기사가 많았다. 그들은 요새 안에서까지 갑옷을 입지는 않았다. 각기 다른 제복. 얼마 걷지 않아서, 유진은 이 ‘구역’은 키옐에 배정된 곳임을 깨달았다.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싶던 것인지, 황제는 3개나 되는 기사단의 정예들을 끌고 왔다. 단연 으뜸은 알체스터가 이끄는 백룡 기사단이지만, 흑수리 기사단과 은검 기사단도 크게 처지지는 않는다.


가슴팍에 검은 날개의 문양을 새긴 기사들. 흑수리의 기사들이다. 그들은 호기심과 경계 어린 눈으로 유진을 보았지만, 굳이 다가와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다가갈 이유가 없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빤히 보는 시선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냥 걸어서 지나쳤다. 조금 더 걸으니 기사답지 않은 복색의 사람들이 보였다.


‘용병이군.’


기사단에 준할 만한 세력을 갖춘 용병단도 여럿 레헤인에 왔다고 들었다. 이 근처에 있는 것을 보니, 키옐에서 활동하는 용병단인 것 같았다. 주제 모르고 시비를 걸어오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용병이라고 해서 무식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대형 용병단이라면 어떤 면에서는 기사단 이상으로 철저한 규율을 따른다.


유진은 성을 중심으로 반 바퀴 걸었다.


‘이쪽은…….’


알기 쉬웠다. 성의 높은 곳에 제국의 황제가 머무르듯, 제국민들은 성에서 가까운 구역을 배정받았다. 키옐의 반대편은 유라스의 구역. 살피는 시선에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이유를 알았다. 골목에 숨어서 유진을 지켜보는 이들은, 붉은 망토를 몸에 걸친 말레피카룸의 이단심문관들이었다. 유진은 그 얼굴마저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저런’ 눈으로 자신을 빤히 보는 것으로 저들이 누구인지를 짐작했다.


‘빛의 샘의 생존자인가.’


그때 꽤 많이 죽이기는 했다만, 전부 다 죽이지는 않았다. 운이 좋은 놈은 부상을 입고 살았을 거고, 그보다 더 운이 좋은 놈은 유진과 맞닥트리지 않았을 거다.


“뭘 봐 새끼야.”


이곳까지 오면서 쳐다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유진 쪽에서 먼저 내뱉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먼저 입을 열었다. 유진이 눈을 부릅뜨고서 쏘아붙이니, 이쪽을 살펴보던 이단심문관들이 흠칫 놀라서 골목의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왜 쳐다보고 지랄이야.”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몇 걸음 앞으로 걸었고…… 뒤에서 느껴지는 묘한 존재감에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ㅡ콰당탕!


그런 소리를 들었다. 유진은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진을 쳐다보던 이단심문관 중 하나가, 안면이 통째로 함몰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뭐야?”


유진은 이단심문관이 날아온 골목의 안쪽을 쳐다보았다.


의외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빛의 샘.


그곳에서 팔다리를 잘라주었던 헤모리아가, 어디서 붙였는지 모를 팔로 이단심문관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레헤인


유진은 잠깐 동안 헤모리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헤모리아는 여전히 철로 된 마스크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는데, 그 마스크는 예전에 보았던 것처럼 깔끔하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뜯어낸 것만 같은 철판을 힘으로 구부려서 입을 가린 뒤, 천 조각으로 고정했다.


“어…….”


사실 그것보다 헤모리아를 알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헤모리아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빛의 샘에서, 유진은 덤벼드는 헤모리아의 팔다리를 잘랐다. 목까지 베어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때 헤모리아의 상처는 죽을 것이 당연한 치명상이었다. 그뿐인가? 유진은 팔다리가 잘린 헤모리아를 깊은 구덩이 아래로 걷어차 주었다.


빛의 샘에서의 생존자는 적게나마 있었다. 하지만 그 구덩이에서 생존한 사람은 없었다. 그곳을 살폈던 라파엘로도, 생존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살아 있었냐?”


뒤늦게 알아본 뒤.


유진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헤모리아가 살아 있는 것이 놀랍기는 했지만, 지금 유진이 느끼는 감상은 그것이 전부였다. 운이 굉장히 좋았나 보다. 그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운이 좋아도, 잘린 팔다리가 새로 돋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유진은 헤모리아의 팔다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분명히 잘랐을 팔다리가 달려 있다.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헤모리아의 팔다리는 거무죽죽한 붕대로 빈틈없이 감겨 있었다.


“……후욱.”


철판 너머에서 꽉 눌린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진의 눈동자에는 놀람 외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헤모리아의 눈동자는 그렇지 않았다.


찢어질 듯 부릅뜬 눈동자는 본래부터 붉은색이었지만, 지금은 핏발까지 서서 더욱 붉게 충혈되었다. 힘을 준 목에도 핏대가 꿈틀거렸고, 호흡이 격해짐에 따라 헤모니아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후욱…… 훅.”


예전 같았으면 까득 하고 이빨 가는 소리라도 냈을 텐데. 지금의 헤모리아는 그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꽉 눌린 호흡만 연거푸 토해냈다. 그 숨소리에 유진은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뭘 물고 있는 거야?”


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빛의 샘에서, 유진은 헤모리아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헤모리아가 그것을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이 생각하기에 그때 헤모리아와 했던 것은 싸움도 전투도 아니었다. 그냥, 앞을 가로막는 거슬리는…… 돌멩이나 벌레, 그따위 하찮은 것을 조금 과격하게 치우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원한? 헤모리아 개인에게는 없다. 빛의 샘에서의 유진은 그냥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고, 가로막는 것을 전부 부수거나 죽여 버리기로 작정했었다. 그때 헤모리아의 팔다리를 자른 것에 사적인 감정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 특별히 헤모리아가 싫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빛의 샘에서의 감정이야 그때 다 풀었고…… 지금? 헤모리아가 그때처럼 악을 쓰면서 죽이려 덤비지 않는다면, 굳이 헤모리아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럴 수도 없고.’


상황이 여의치 않기도 했다. 어디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뒤탈 없이 깔끔히 죽여 버렸을 텐데. 나이트마치의 도중이지 않은가.


“이빨 안 갈아?”


유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헤모리아에게 물었다. ……꽈드득! 그 질문에 철판 안쪽에서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빨을 가는 소리는 아니었다.


“으으…….”


헤모리아의 손에 붙들린 이단심문관은 진즉에 정신을 잃었고, 신음이 흘러나온 곳은 골목의 안쪽이었다.


유진은 태연히 걸어서 골목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까지 이동했다. 굳이 직접 볼 필요가 없기는 했다. 아까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피냄새가 지금은 굉장히 짙었기 때문이다.


‘마법으로 감추고 있던 모양이군.’


힐긋거리는 심문관들에게 눈을 부라렸을 때. 골목의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와서 피 냄새를 맡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은ㅡ 마법을 펼쳤던 심문관이 피떡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둘이 아니었다. 골목의 안쪽, 열 명에 달하는 심문관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명확했다. 유진은 피범벅인 헤모리아의 양손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그래도 되는 거냐?”


이죽거리는 질문에 헤모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꽈직! 그녀는 목을 틀어쥐고 있던 심문관은 바닥에 처박은 뒤에, 붉은 눈을 번뜩거리며 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다짜고짜 덤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헤모리아는 그러지 않고, 오히려 유진보고 이리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행동에 유진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서 이상한 팔다리를 달고서 자신감이라도 붙은 건가. 저렇게 와달라고 청하는데 무시하는 것도 불쌍하지 않은가. 유진은 빙긋 웃으며 헤모리아가 부르는 대로 골목으로 발을 뻗었다.


유진이 움직이자, 헤모리아가 뒤로 물러섰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헤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그것조차도 우스웠다.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주변의 눈을 신경 써? 차라리 골목 밖으로 나오는 것이 낫지 않냐?”


유진은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처맞으면 다른 누가 말려줄 수도 있잖아.”


그 뻔한 도발에 헤모리아의 눈이 뒤집혔다.


“으으우우!”


유진이 골목 안으로 들어온 즉시, 철판 아래에서 억눌린 울음이 토해졌다. 헤모리아는 지독한 살의와 증오를 내뿜으며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빛의 샘 때보다는 더 빠른가?


겨우 그 정도.


헤모리아가 유진에게 뭔가를 하기도 전에, 유진의 손이 먼저 뻗어 나갔다. 활짝 펼친 손이 헤모리아의 목젖을 붙잡았다. 그 순간에 헤모리아는 컥 하는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그녀가 내달리던 힘은 허무하게 사라졌지만, 유진이 뻗어낸 힘은 너무나도 쉽게 헤모리아의 몸을 바닥에 처박았다.


“크우우!”


바닥에 깔린 헤모리아가 발버둥 쳤다. 유진은 매섭게 휘두르는 헤모리아의 팔을 낚아챘다. 이대로 뽑아버릴까, 아니면 비틀어 부러트릴까. 일단 꺾고 나서 결정하기로 했다.


“뭐야?”


팔꿈치 관절을 비틀고, 유진의 눈썹이 콱 구겨졌다. 분명히 관절을 부수고 꺾었는데, 뼈를 부러트리는 감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거무죽죽한 붕대가 감싸고 있던 것은 뼈와 피와 살로 이뤄진 팔이 아니라, 팔의 형상으로 뭉친 어둠이었다.


“……이 씨X.”


붕대의 사이로 어둠이 흘러넘쳤다. 유진은 어둠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직감하고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대로 헤모리아의 머리를 으깨 버리려는 순간.


유진은 그대로 멈췄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존재감이 몸을 오싹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우선, 유진은 ‘가늠’해 보았다.


‘해볼 만한데.’


이런 종류의 예감은 변수가 너무 많아서, 진짜로 싸워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2년 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때’는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는데. 2년 만에 해볼 만한 수준까지 온 것이다.


“……내 펫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골목 깊은 곳의 그림자에서 면사로 입을 가린 여인이 걸어 나왔다.


……아멜리아 머윈. 새빨간 로브로 몸을 감싼 그녀는 2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네게 뭔가 무례를 저지른 건가요?”


아멜리아가 후드를 젖히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미소 짓는 것은 입술뿐.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차분했으나, 그 깊은 곳에는 들여본 것만으로 정신을 붕괴시킬 것만 같은 끔찍한 살의가 꿈틀댔다.


“여전히 지저분한 펫을 좋아하는군. ……원래는 다른 펫을 가지고 있었잖아?”


“네가…… 망가트렸던, 펫 말이죠? 그 아이는 잘 있어요. 이곳에는 데리고 오지 않았지만.”


유진은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펫? 헤모리아가? 왜? 유진은 아직까지 바닥에 깔려서 꿈틀대는 헤모리아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유라스의 이단심문관이 언제부터 네 펫이었지?”


“네가 그걸 알아서 뭐 어쩌려고요?”


“궁금해서 그렇지.”


“간단한 이야기에요. 네가 팔다리를 자르고, 구멍 안으로 던져놓았던 그 계집을. 내가 주웠어요.”


아멜리아가 로브의 안쪽에서 산양머리 지팡이를 꺼냈다. 그 지팡이를 살짝 흔들자, 유진의 발밑에서 어둠이 번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움직이지 않고 그 어둠을 주시했다. 간섭해 볼까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멜리아는 적이다. 다른 흑마법사는 몰라도, 유진에게는 반드시 아멜리아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런 확실한 적에게 괜히 패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크륵……!”


발밑에 깔렸던 헤모리아가 발작하듯 몸을 꿈틀거렸다. 한순간이지만, 유진은 헤모리아의 눈동자에서 간절함을 보았다. 물론 유진은 헤모리아의 간절함에 손을 뻗어주지 않았다.


어둠이 헤모리아의 몸을 잡아먹었다. 곧, 아멜리아의 그림자에서 헤모리아의 몸이 치솟았다. 아멜리아는 어둠에 붙들린 헤모리아를 힐긋 보면서 웃었다.


“……그래서. 무례를 저지른 것은 어느 쪽?”


“어느 쪽일까?”


“나는 너랑 농담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널 기억하고 있거든요. 너는 사막에서 내 펫을 죽였어. 잊지 않았겠죠? 그때…… 마왕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너는 나에게 죽었어.”


“잘 알지. 그때 날 죽이지 못한 것은 네게도 불운한 일이야.”


“빌어먹을 도굴꾼이.”


면사 너머에서 아멜리아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드러난 분노에 유진도 마주 웃어주었다.


“누가 누구보고 도굴꾼이라고 하는 거지?”


“너는, 내 소유의 무덤을 도굴했어요.”


“하멜의 동상? 비석? 그게 네게도 꽤 가치 있는 보물이었나 봐?”


“그건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역사. 나만이 알고 소유하던 것이었으니까요.”


“X까는 소리하지 마. 네게는 그것들을 소유할 자격이 없어.”


“그렇다면 넌 소유할 자격이 있다는 건가요? 아하, 자격은 있겠군요. 너는 베르무트의 후손이고, 세냐의 후계자니까요.”


우우우……! 아멜리아의 지팡이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둠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 300년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고 돌보는 사람 없이 버려진 무덤이에요. 그곳을 찾아낸 것은, 바로 나예요. 그러니 그 무덤의 모든 것은 내 거야. 동상도, 비석도, 시체까지도!”


“지저분하게 굴지 말지?”


아멜리아가 힘을 드러내자, 유진도 물러서지 않았다. 백염식에 이끌린 마나가 자색의 불꽃이 되어 유진을 휘감았다. 그 거대한 힘에 아멜리아의 뺨이 움찔거렸다.


‘……저게 가능한 건가?’


고작해야 2년이다. 그때의 유진은, 아멜리아에게 있어서는 별 힘을 들이지 않고 밟아 죽일 수 있는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밟아 죽이지 못한 것은 개 같은 발자크 루드베스의 친서 때문이었고, 아무 짓도 하지 못하고 놓아줘야 했던 것은 유폐의 마왕의 자비 때문이었다.


‘……지금의 준비로는…… 반드시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나.’


아멜리아는 유진의 전력과, 자신의 준비를 가늠했다.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유진을 마주하니 반드시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부족했다. 그리고 정말로 유진을 죽일지라도 뒷일이 문제였다. 아멜리아는 이 장소에서 벗어나기 위한 준비는 갖추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좋아요.”


들끓던 어둠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지만, 아멜리아는 그 마음을 억눌렀다.


뭘, 기회는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유진에게서 드러나는 살의와 증오를 느꼈다. 저 순수한 살의와 증오의 이유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저 감정은 식힐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다.


언젠가 반드시, 유진 라이언하트는 아멜리아 머윈을 죽이러 온다.


‘그때 죽이면 돼.’


아멜리아는 들었던 지팡이를 다시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언제일지 모를 미래를 생각하며, 아멜리아는 몸이 오싹거릴 만큼의 희열을 느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시체는 멋진 펫이 될 것이다…….


아멜리아는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네게 쏟아내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아주 많지만. 이곳에서는 참도록 하죠.”


“참지 않아도 괜찮은데.”


“날 도발하지 마요. 지금 나와 충돌해서 곤란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설마, 라이언하트가 널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나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후후. 이것만큼은 말해주죠. 네가 아무리 강해도, 내가 널 죽이려고 한다면. 누구도 이곳에 간섭하지 못할 거예요. 내가 죽던가, 네가 죽던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라이언하트는, 우리 둘 중 하나의 시체만 보게 될 거예요.”


결계라도 펼친다는 건가. 유진은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의 경고를 떠올렸다. 그가 말하길, 유폐의 삼마 중에서 최강은 바로 아멜리아 머윈이라고 말했다.


즉, 아멜리아 머윈은 현시대 최강의 흑마법사라는 말이다. 대마법사가 작정하고 펼친 결계의 견고함도 상상하기 버거운데, 현시대 최강의 흑마법사가 펼친 결계라면ㅡ 아멜리아가 말한 것처럼, 둘 중 하나가 죽지 않고서는 바깥에서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좋아. 이곳에서는 참지.”


잠시 아멜리아를 노려보던 유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아멜리아 머윈,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뻔한 질문을 하는군요. 나는 나하마의 술탄을 지원하고 있어요. 그의 명령은 받지 않지만, 현자로서 조력해 주고 있죠.”


“네가 나하마 전력의 일부라는 거냐?”


“일부라는 말은 같잖게 들리지만, 그렇다고 해두죠. 왜요?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내가, 헬무드가 아닌 나하마를 지원하는 것이 신기하게 들리나요?”


“유폐의 마왕이 계약한 흑마법사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


“여전히 건방져. 그때도 그랬어요. 무덤에서, 너는, 죽음이 당연하던 순간에도 건방졌어.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면서도 즐거워요.”


“즐거워?”


“네.”


아멜리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언젠가 네가 정말로 죽음에 걸쳐졌을 때. 내가, 그 죽음을 집행하게 된다면. 나는…… 나는, 네가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면서, 어떤 표정으로 죽을지가 궁금해요. 그 순간의 너는 지금처럼 건방질까? 내가 네 혼을 훑는 순간에도, 너는 내게 증오와 살의를 보일까요? 그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날 오싹하게 만들어요.”


“미친년.”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들었다.


“이뤄지지도 않을 헛소리하지 말고, 네 새로운 펫이나 잘 간수해.”


“그것은 꽤 도움이 되는 조언이군요. ‘산책’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잠시 목줄을 풀어줬는데…… 설마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아멜리아는 내리깐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진 이단심문관들을 본 뒤. 아멜리아는 쯧 혀를 찼다.


“충분히 박살 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저 종교에 미련이 있나요? 네 동료였던 이단심문관들이 널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었잖아요. 저들은 너를 더러운 타락자라고 말하며 구속하려 했죠? 그래서 네가 저들을 바닥에 처박은 걸 거고.”


더 이상 아멜리아는 유진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눈동자를 초승달처럼 휘며 헤모리아를 빤히 보았다. 어둠에 붙들린 헤모리아는 그 시선에 흠칫 몸을 떨었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서 아멜리아을 쏘아보았다. 마치 그 시선에 겁을 먹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입에는 왜 그딴 것을 쓰고 있어요?”


아멜리아가 속삭였다. 그녀는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헤모리아의 입가를 가리고 있는 철판을 어루만졌다.


ㅡ쩌억! 그 부드러운 손길은 이윽고 매서운 따귀가 되었다. 헤모리아의 몸이 크게 흔들렸고, 머리는 옆으로 돌아갔다. 입가를 가리고 있던 철판이 아래로 떨어졌다.


헤모리아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단순한 재갈이 아니었다. 개나 물어뜯을 것 같은 뼈다귀가 그녀의 입에 재갈처럼 단단히 묶여 있었다.


헤모리아는 꽉 다문 이빨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아멜리아를 노려보았다.


“아…… 실례. 펫의 훈육은 단둘이서 해야 하는데.”


따귀를 때렸던 손이 헤모리아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아멜리아는 다시 유진을 돌아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는 서로 잘 지내도록 해요. 나는, 이곳에서, 널 보면 웃으며 인사할 거예요. 너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멜리아의 말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헤모리아의 머리채를 손으로 움켜쥐더니, 개의 목줄을 끄는 것처럼 질질 끌고서 골목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꽉 물고 있는 뼈다귀 사이로 헤모리아는 거친 숨소리를 뱉었다. 이윽고 아멜리아와 헤모리아의 모습이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미친년.”


유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멜리아는 헤모리아를 빛의 샘에서 주웠다고 말했다.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정확한 사정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유진은 더 생각하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나이트마치. 의외의 만남이 너무나도 많았다. 설원에서는 누아르 제벨라와 만났고, 레헤인야르에서는 모론을 만났으며, 레헤인에서는 아멜리아 머윈을 만났다.


‘시작부터 꺼림칙한데.’


재수 없고 죽이고 싶은 여자를 만나서인지 입맛이 더러웠다. 유진은 방금 전까지 아멜리아와 헤모리아가 있던 골목을 돌아보며 퉤 침을 뱉었다.


더 산책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도 머리에 올랐던 열은 싸늘하게 식었다.


유진은 구겨진 얼굴로 라이언하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와?”


시엘이 꼬질꼬질한 얼굴로 다가왔다. 저택을 나설 때만 해도 레헤인에 도착하지 않았었는데, 그새 도착한 모양이었다.


“어…… 음…… 산책.”


“산책 다녀왔는데 표정은 왜 그리 썩었어?”


유진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지만, 시엘의 표정은 굉장히 평온했다. 다만, 며칠째 씻지 못해서인지 얼굴은 꼬질꼬질하고 차림새가 더럽기는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진과 함께 다녔을 때에는 마법이 있으니 뜨거운 물이 없어도 씻는 것은 가능했다.


시안과 시엘은 설원의 도중에서 유진과 떨어져 행동했다. 지금 생각해도 갑작스럽고 무모한 짓이었다. 여정에 필요한 대부분의 편의품은 흑암의 망토 안에 있었다. 시안과 시엘도 아공간 배낭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안에 든 것은 며칠 먹을 비상식이 전부였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라도 추위를 아예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혹한의 설원에서 몸이라도 씻었다가는 몸에 병이 든다……. 그래서 열흘이 넘도록 씻지도 못했다. 설원을 헤매며 식량을 구했다. 눈을 녹여 물을 마셨다.


그 험난한 여정을 거쳤음에도 시엘의 얼굴은 태연했다. 사실 마음까지 태연하지는 않았다. 그냥, 참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이랄 것도 없었지만, 유진에게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괜찮냐?”


“뭐가?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니…… 안 괜찮아 보이는데. 살도 더 빠진 것 같고…….”


“무례한 말 하지 마. 나는 원래부터 살 안 쪘어.”


“그건 나도 알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살이 빠졌다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엘의 양 뺨은 전에 보았을 때보다 움푹 들어가 있었다.


“고생해서 그래.”


시엘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거봐. 고생했잖아. 그런데 뭐가 괜찮아?”


“원래 고생은 젊은 나이에 해둬야 하는 거야.”


“얘가 뭐라는 거야……. 시안은 어디 있어?”


“오빠는 도착하자마자 목욕하겠다고 욕탕에 갔어. 미리 말해두는데, 오빠한테 괜한 말은 하지 마.”


“왜?”


“이곳까지 오는데 스칼리아 공주랑 같이 왔는데, 공주한테 엄청 시달렸거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스칼리아 공주 말이야. 성격파탄자야. 그…… 음…… 불면증 때문에 성격이 이상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성격이 이상하다고.”


시엘은 여정 중에 스칼리아가 날뛰었던 것을 떠올리며 눈썹을 콱 구겼다.


“솔직히 말이야, 나는 도중에 몇 번이나 스칼리아 공주를 확, 해버리고 싶었다니까. 나도 그랬으니 오빠도 그랬을 거야.”


“시무인 공주님이랑 약혼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시안이 엄청 좋아했었는데…….”


“실체를 몰랐으니 좋아했던 거고. 오빠가 미치지 않고서는 스칼리아 공주랑은 약혼하지 않을걸?”


“근데 너는 왜 안 씻고 있어?”


그 질문에 시엘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왜 그런 걸 물어봐? 혹시 내 몸에서 냄새난다는 거야?”


“아니아니, 아무 냄새도 안 나. 그냥, 시안은 씻는데 넌 왜 안 씻냐고.”


“나도 씻을 거야. 씻으려고 했어. 그냥, 네가 어디 갔나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할…… 말?”


유진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시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유진을 빤히 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서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대답을 잘해야 할 것 같았다.


“……음……. 고생했어.”


“당연한 말 하지 마.”


“잘했어.”


“그것도 당연한 거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바로 그거야.”


그 말을 듣고서야 시엘은 방긋 웃었다. 별것도 아닌 말인데 몸 안이 후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나 걱정했어?”


“어.”


“나만 걱정하면 안 되지. 오빠는 걱정 안 했어?”


“당연히 둘 다 걱정했지.”


“그래도 말이야, 조금 더 걱정했던 것은 나지? 솔직히 말해봐, 시안 오빠한테는 비밀로 할게.”


“둘 다 똑같이 걱정했는데.”


“이럴 때는 빈말로라도 날 더 걱정했다고 말하는 거야.”


대답이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 대답이 유진답다고 생각했다. 시엘은 킥킥 웃으며 망토 안에 넣었던 손을 꼬물댔다.


“오면서 선물을 챙겼어. 손 내밀어 봐.”


“뭔데?”


유진은 별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시엘은 망토 안에 감추고 있던 눈덩이를 유진의 손에 턱 올려놓았다.


“…….”


“차갑지?”


유진은 축축하고 차가운 눈덩이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리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나가서 눈싸움이라도 했을 텐데 말이야. 그거 알아? 나랑 오빠, 어릴 때 너랑 눈싸움하면서 눈덩이에 돌 넣었어.”


“그걸 모르겠냐?”


“너는 우리가 던지는 눈덩이를 한 번도 안 맞았으니까 모르는 줄 알았지.”


“돌 들어 있는 걸 알아서 안 맞은 거야. ……네가 하고 싶다면 눈싸움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어렸을 때처럼 내가 이기겠지만.”


“안 할 거야. 나도, 오빠도, 너도, 더 이상 애가 아니잖아.”


“야, 나이 먹고 눈싸움해도 재밌어.”


“그렇겠지만 안 해.”


시엘은 혀를 쏙 내밀고서 몸을 돌렸다. 유진은 가벼운 걸음으로 멀어지는 시엘의 등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손바닥 위의 눈덩이는 벌써부터 녹아내리고 있었다. 유진은 그 눈덩이를 뒤로 휙 던졌다.


“꺅!”


유진을 놀래키기 위해 슬금슬금 다가오던 메르가 눈덩이를 맞고서 비명을 질렀다.


레헤인


“……음.”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지금 유진은 레헤인 요새의 성에 와 있었다.


“전하는 탕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곳까지 안내해 준 루하르 하얀송곳니의 기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표정을 펴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야수왕이 이끄는 루하르의 기사단이 밤중에 레헤인에 도착했다.


유진은 성의 층에 관여한 대륙 국가들의 권세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이상,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눈 내리는 창밖. 반대편의 첨탑은 키옐의 황제와 백룡 기사단 중에서도 황제를 밀착 호위하는 친위대가 머무르고 있다. 가까운 첨탑은 유라스의 교황과 호위기사, 대주교들. 저 아래의 궁궐에는 따로 탑에 들지 못한 국가의 왕들과 호위기사단이 머무른다.


루하르는 제국이 아니지만, 이 요새가 루하르의 것이다. 그러니 가장 높은 탑은 야수왕의 숙소가 되었다. 바로 이 탑. 그 최상층. 유진은 혀를 차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뭔 놈의 목욕이야?’


늦은 밤, 야수왕이 대뜸 라이언하트의 저택에 사자를 보내왔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하멜른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계속하고 싶다.


일국의 왕이 그렇게 콕 집어서 지목하니 거절할 수도 없다. 거절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야수왕과의 대담을 바란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만. 유진이 바란 대담은 화려한 식탁에서 서로 고기나 뜯고 술이나 마시면서 하는 것이었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거체와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 이미 낮에 목욕했다고.’


심지어 낮의 목욕도 근육이 우락부락한 가르기스와 둘이서 했다…….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곳입니다.”


대뜸 복도의 문이 열렸다.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 것은 수영복을 입은 여시종이었다. 그 모습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굳어버렸다.


“예?”


“욕탕은 이곳입니다.”


시종이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놀람을 진정시키고서, 시종이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국의 왕이 목욕하는데 목욕시중을 드는 시종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어우.”


그래도 이건 좀 과하다고 생각했다.


문 안쪽의 방은 여자 시종이 가득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색의 수영복을 입고서 유진을 맞이했다. 야수왕의 덩치가 굉장히 크다는 것은 전에 보아 알고 있었지만, 그래 봤자 사람 한 명 목욕하는 것인데 이렇게 많은 시종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뭘 도와줍니까?”


“옷을 벗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옷이야 그냥 내가 벗으면 되는데 도움이 뭐가 필요합니까?”


유진은 구시렁거리면서 망토를 벗었다. ……망토 안에서 메르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다가오는 시종들에게 손사래를 쳤다.


“저는 본가에서도 옷을 혼자 벗고, 목욕 혼자 하고, 옷도 혼자 입었습니다. 여기 와서 하지도 않던 짓을 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거, 계속 보고들 계실 겁니까? 저 남들 보는 앞에서 옷 벗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절 존중하신다면 다들 고개를…… 아니, 몸을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유진 님. 전하께서는 극진히 대접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나 옷 벗고 목욕하는 데 대접은 무슨 대접이야. 전하는 어디 계십니까? 저 앞에 계시죠? 제가 알아서 갈게요. 가운, 가운은 일단 저 줘요.”


유진은 이런 상황에 별로 익숙하지 않았다. 여자에 관한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만, 수영복 차림의 시종을 양옆에 끼고서 목욕하는 경험은 없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유진은 시종이 들고 있던 가운을 빼앗듯이 낚아챈 뒤, 시종들이 몸을 돌리는 것을 끝까지 기다렸다가 후다닥 옷을 벗고 가운을 걸쳤다.


커다란 테라스.


그 전체가 욕탕이었다. 저 아래에서 솟는 온천수를 이 높은 탑의 정상까지 끌어온 뒤, 이 높이에서의 경관을 즐길 수 있게끔 만들어놓은 탁 트인 욕탕. 이 거대한 욕탕은 욕탕이라기보다는 수영장이라 해야 옳았다.


“젊은이가 부끄럼이 많구만!”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난간에 양팔을 걸치고 있던 아만 루하르가 껄껄 웃었다. 그의 등 뒤에는 눈발이 흩날리는 레헤인야르가 펼쳐져 있었다.


“보기와 다르게 사치를 즐기시나 봅니다.”


“고작 목욕인데 사치랄 것이 뭐가 있나?”


“시종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런가? 짐은 잘 모르겠군. 키옐의 황제가 데려온 시종만 하더라도 그 수가 수십 명은 되던데. 그에 비하자면 짐의 시종은 오히려 소박하지 않나? 혹 자네는 짐이 키옐의 황제와 비교하는 것을 불쾌하다 생각하나?”


“그 정도로 황제 폐하께 충성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유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별로 재미나지도 않은 대답이었는데, 아만은 박수를 짝짝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그렇구먼. 헌데 유진, 자네는 언제까지 그곳에 있을 셈인가?”


“이제 와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저는 아까 낮에 온천욕을 했습니다.”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이미 옷을 벗고서 들어와 있는 짐을 무안하게 만들지는 말아주게.”


“어휴.”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가운을 벗었다. 그러고는 첨벙첨벙 온천의 안으로 들어갔다. ……경관이 꽤 좋기는 했다.


“따로 필요한 것은 없나? 음식이나 술. 바란다면 얼마든지 말하도록 하게. 그럴 때 쓰기 위해 시종이 있는 거니까.”


“괜찮습니다.”


“짐이 자네를 왜 불렀는지는 아는가?”


“하멜른에서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고 싶다고 부르신 것 아닙니까.”


유진은 바로 모론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다. 레헤인야르 대망치협곡에 가보라고 권했던 것은 아만이지만, 그곳에 모론이 있다는 것을 아만이 정말로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화도 즐겁기는 하겠지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이 나이트마치 말일세.”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지?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아만을 응시했다. 아만은 그 시선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볍게 묻는 질문일세.”


“왜 그런 질문을 제게 하신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네가 사실상 라이언하트의 실세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부정은 하지 말게. 짐도 눈과 귀가 있어. 자네는 본가의 적자가 아니지만, 차대의 라이언하트는 반드시 자네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그렇기에 짐은, 지금의 자네가 라이언하트의 실세라 판단하고 있네.”


“아직 가주님은 굉장히 정정하십니다. 카르멘 님도, 원로원주님도 그렇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짐은 그것과는 큰 상관이 없다 생각하네, 유진 라이언하트. 자네가 라이언하트의 실세인 이유는, 자네가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젊기 때문이고, 그 젊은 나이에 가문의 어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기 때문일세. 그뿐인가? 자네와 얽힌 인연들도 아주 대단하지.”


아만은 껄껄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진은 온천수를 가로지르며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만을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근육질의 거구가 옷을 입고 다가와도 제법 위압감이 들 텐데…… 아무것도 입지 않고 다가오고 있으니, 생리적으로 물러서고 싶어졌다.


“자네는 하멜 님의 진전을 이었고, 세냐 님의 후계자이기도 하지. 아롯 적색마탑주의 제자이기도 하면서, 아롯의 왕세자가 호의를 갖는 대상이기도 해. 또, 키옐 백룡 기사단의 단장인 알체스터 드라고닉도 자네에게 깊은 호의를 가지고 있지. 그 아들은 자네에게 잠깐이나마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


“신성제국의 유일한 성녀후보도 자네와 친밀한 사이지. 짐이 판단한 그 관계는 친밀함 이상이었지만, 남녀 사이의 문제에 대해 짐이 주절거리는 것도 우스우니 더는 말하지 않겠네.”


“이미 다 말하셨잖습니까.”


“으하하! 그도 그렇군.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짐과 루하르 왕국은 북쪽 끝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짐이 대륙의 정세에 눈과 귀가 어두운 것은 아니야. 자네는 엘프들의 수호자이며, 사마르의 대부족인 조란의 차기 족장과도 인연을 맺었지.”


“제게 어떤 대답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이 나이트마치에 대한 솔직한 감상. 아직 무언가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나이트마치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자네도 들었을 것 아닌가?”


“몬스터를 소환해서 토벌놀이나 하자던데요.”


“그렇지!”


철썩! 아만이 유진의 바로 옆에 앉았다. 그 거구가 힘을 주어 욕탕에 앉으니, 온천수가 크게 출렁거리며 파도를 만들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 나이트마치는 말일세. 꼭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야. 대륙의 내로라하는 기사단과 용병단이 한곳에 모이는 것. 이만한 힘이 집결된 것은 300년 전 이후로 처음이니, 모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네. 하지만! 이만한 전력이 모였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예, 뭐.”


“짐은 전투를 바라네. 힘과 명예, 기사도, 신념! 그 모든 것을 부딪치는 전투. 물론 전투는 상냥할 수 없으니, 죽거나 부상을 입는 사람은 많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커다란 명예를 얻게 될 텐데. 상대보다 약해서 죽고 다치는 것을 걱정한다면 그를 전사라 할 수 있겠는가?”


아만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물론! 짐은 황제와 다른 왕들의 생각도 이해하려 노력했네. 대륙에 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헬무드와 마왕들이지. 그들을 상대하기도 전에 우리끼리 피를 흘리는 것은 우스워. 하지만, 짐은 필요하다면 피를 흘려야 한다고 생각하네.”


“……음…… 나이트마치의 취지는 이해합니다만, 훈련에서 과한 피를 흘리는 것은…….”


“국가 간의 전쟁에서 흘리는 피보다는 압도적으로 적겠지.”


“예?”


“짐의 생각은 이러하네. 이곳에 온 기사단이 일국의 전력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일국의 상징이라고는 할 수 있지. 그를 서로 격돌시킨다면ㅡ 그것은, 작은 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설마.


“짐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헬무드라는 대적에 맞서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ㅡ 단결일세. 대륙은 넓고, 국가는 많아. 왕들도 많지! 그래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서로가 잇속만 챙기려 들어. 어떻게 생각하나?”


“저어…… 왜 자꾸 제 의견을 물으시는 겁니까?”


“젊은이의 의견은 중하다 생각하네.”


“……전하는 단결에 대해 말했는데, 그 말은 어…… 대륙통일이라고 하고 싶은 겁니까?”


“으하하! 진짜 전쟁을 벌이지 않고서 대륙을 통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짐과 루하르가 대륙통일이 가능할 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만은 껄껄 웃으면서 유진의 어깨를 철썩 때렸다.


“하지만. 나이트마치에 동원한 기사단을 제대로 충돌시키고ㅡ 우위를 점한다면, 큰 명예를 얻겠지. 경쟁국의 기사단을 축소시킬 수도 있을 거고. 거기서 조금 더 과격하게 나아가자면, 이곳에 온 왕들을 협박하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그 말은 알몸으로 온천욕이나 하면서 내뱉을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아만을 빤히 보았다. 그가 왜 야수왕이라고 불리는지 이해했다.


“아, 오해하지는 말게. 짐은 어디까지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으음, 강압적인 단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네. 적어도 그렇게 지휘를 통일하고 시작하면, 대적을 맞서는 것에 손발이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겠나?”


“허어…….”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말씀은 너무나도 과격하고 갑작스러워, 제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헌데 전하, 전하는 헬무드를 대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정작 전하께서는 루하르의 문호를 열어, 헬무드 마족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까?”


“대륙 전역에서 헬무드에 문호를 닫고 있던 것은 루하르뿐이었네. 짐은 헬무드를 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쌓아 올린 문명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교류를 위해 루하르의 문을 열었지.”


아만은 씨익 웃으며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설마, 자네는 짐이 헬무드에게 따로 사주를 받아 루하르의 루하르의 문호를 연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항마연합의 가입권유를 쭉 거절하셨잖습니까.”


“항마연합! 으하하! 그 여우도 되지 못할 토끼무리 말인가? 짐이 무어가 부족하고 아쉬워 그들의 무리에 끼어야 하지? 그들은 짐과 연합을 맺은 것이 자랑스러워 어깨를 으쓱대겠지만, 짐은 그 하찮은 토끼들과 연합을 맺은 것에 수치심 말고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용왕의 후예인 내가, 어찌 헬무드와 손을 잡고 토끼들의 대장 노릇을 할 수 있겠나?”


아만은 껄껄 웃으면서 다시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한참 이어지던 웃음이 잦아들었다.


“자네는 신중하군.”


빙그레 미소를 짓던 입술이 열렸다. 아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흩날리는 눈발 너머의 레헤인야르를 보았다.


“자네가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은 아마 다른 것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으니.”


“전하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용왕 폐하를 뵈었나?”


질문은 갑작스러웠다. 입가의 미소처럼 휘어진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레헤인야르, 대망치의 협곡. 자네가 그곳에 갔다는 보고는 들었네. 유진 라이언하트. 자네는 그곳에서 용왕 폐하를 뵈었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짐은 자네가 용왕 폐하를 뵙기를 바랐거든.”


“…….”


“대답을 고민하지 말게.”


“왜 그를 바라신 겁니까?”


“자네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불리지만, 그 위대한 영웅의 얼굴을 빼닮지는 않았지.”


아만은 껄껄 웃으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젊은 라이언하트의 재능을, 용왕 폐하께서는 틀림없이 알아보실 것이라고 생각했네. 그리고 자네의 곁에는 신실한 아니스 님을 빼닮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후보도 있었지. 그 둘이 대망치의 협곡에 간다면, 용왕 폐하는 호기심에라도 나와 보지 않으실까. 그를 기대했어.”


“……나이트마치가 이곳 레헤인에서 열린 것. 속단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나이트마치 자체가 은둔한 용왕 폐하를 불러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이유 중 하나인 것은 맞네.”


“용왕 폐하는 대망치의 협곡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세간의 소문대로일세.”


“그 협곡은 평화로이 은둔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용왕 폐하 말고 다른 것도 보았나 보군.”


“예.”


유진의 대답에 아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난간에 양팔을 걸치고서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곧, 아만은 뜨거운 온천수를 양손으로 퍼 올리더니 제 얼굴에 끼얹었다.


“바야르는 그 괴물을 누르라고 부르지.”


“놈은 대체 뭡니까?”


“그건 짐도 모르네. 누르가 무엇인지.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은 용왕 폐하뿐이지.”


“전하께서는 대망치의 협곡이 왕가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왕가의 후예가 전사로 거듭나는 곳이라고도 말했지. 모두가 사실 아닌가? 대망치의 협곡은 용왕 폐하의 은거지일세. 루하르의 시조께서 그곳에 계시니, 왕가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임은 사실이지. 왕가의 후예가 전사로 거듭난다. 으하하! 그것도 사실일세. 왕위를 잇기 위해서는 그 지랄 맞은 설산은 맨몸으로 올라, 대망치의 협곡에서 용왕 폐하를 뵈어야 하거든.”


아만은 먼 과거를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곳은…… 영웅의 은거지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불길한 존재들이 도사리는 곳이지. 자네도 누르를 보아 느꼈겠지만, 그 괴물이 발하는 불길함은…… 인간이 떨쳐내기 힘든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네. 루하르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 공포를 직면하고, 나아가야 해. 그렇게 절벽을 기어올라, 용왕을 알현해야 하지. 짐도 20년 전에 용왕 폐하를 뵈었네. 그리고 언젠가는 짐의 아들도 용왕 폐하를 알현하러 가겠지.”


아만은 20년 전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젊은 시절. 스스로가 루하르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때. 부왕은 아만에게 레헤인야르를 올라, 대망치의 협곡에 도달해 전사임을 증명하라 말했다.


아무런 준비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기도 쥐지 못했다. 오롯이 맨몸. 그 가혹한 설산을 홀로 올라야 했다.


아만은 그것을 두렵게 여기지 않았다. 레헤인야르에 온갖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알지만, 젊은 아만의 육신에는 진즉부터 오직 완력만으로 몬스터를 때려죽이는 괴력이 깃들어 있었다.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고, 잡아 죽인 몬스터의 생살을 씹으며 설산을 올랐다. 시련 기간 동안에는 그 근처의 레인저들도 모조리 철수한다. 그 누구도 아만에게 대망치의 협곡에 오르는 길을 안내해 주지 않았다.


한참을 설산을 헤매다가.


태어나 처음으로 항거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을 때.


‘누르’는 눈앞에 보이지도 않았음에도 아만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공포에 도망쳐 설산을 내려온다면 시련은 실패다. 공포에 져버리면 루하르의 왕이 될 수 없다. 스스로를 전사라 자처할 수 없다.


아만은 며칠 동안 그 자리에서 공포를 견뎠고, 다시 설산을 올랐다. 그렇게 대망치의 협곡에 도달했다. 누르를…… 보았다.


“자네가 보았던 누르는 어떤 모습이었나.”


“뿔 달린 거대한 원숭이였습니다.”


“내가 보았던 누르는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 자네와 내가 보았던 누르는 생김새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았을 걸세. 그리고 짐은 그 거대한 뱀을 직접 보기도 전에 겁에 질려 자리에 주저앉았어. 사나흘 동안, 그곳에서 공포와 수치심과 분노를 느꼈지.”


“…….”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 짐을 겁에 질리게 했던 누르는…… 그 뱀은 아니었을 거야. 짐을 두렵게 했던 누르는 진즉에 용왕 폐하께 죽었겠지. 짐은 눈앞에 있지도 않고, 진즉에 죽은 누르에게 겁에 질려 며칠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했다는 말일세. 하지만 자네는 도중에 주저앉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예.”


“짐은 자네를 대망치의 협곡에 보내기를 무척 잘했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젊은 시절의 짐보다 용감해. 어쩌면 지금의 짐보다 용감할지도 모르고. ……용왕 폐하가 자네에게 무언가 다른 말을 하지는 않으셨나?”


“내려가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아만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유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은 아까처럼 힘이 과하게 실려 있지는 않았다.


“직접 본 용왕 폐하는 어땠나? 전설과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용감한 대전사, 그 자체이지 않았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으하하! 애매한 말이로군. 허나 용서하겠네. 비록 용왕 폐하가 자네를 물러나게 하였다고 해도, 용왕 폐하가 자네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그분께서도 자네를 인정했다는 것일 테니.”


아만은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군.”


“……나이트마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짐은 실제로 날뛸 생각은 없어. 이곳에서 자네와 나눈 대화는, 짐의 짓궂은 농담이라고 생각해 주게.”


“정말로 그렇습니까?”


“물론.”


아만은 젖은 수염을 손으로 털면서 온천 밖으로 걸어나갔다.


“짐은 먼저 나가도록 하겠네. 자네는 좋을 대로 이 욕탕을 즐기도록 하게.”


“저도 나갈 겁니다.”


“이제 와 말하는데 자네의 몸은 아주 훌륭하군. 나이가 꽤 있기는 하지만, 어떤가? 짐의 친척 중에 아직 혼인하지 않은 여전사가 있는데…….”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유진은 질색하고서 대답했다.


레헤인


요새의 성벽 위에 각국의 기사단이 집결했다. 라이언하트도 그 무리에 섞였다.


집결은 갑작스러웠지만, 모여 있는 그 누구도 집결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


설원의 저편.


검은 안개가 밀려오고 있다. 그 안개는 눈보라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땅거미가 번져오듯이 시야의 끝자락에서부터 설원을 침식했다. 그렇게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분명 해는 하늘 높이 떠오르고 가장 밝은 시간인데, 성벽에서 보는 설원은 점점 어두운 밤이 되어간다.


유진은.


하멜은, 저 검은 안개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저 안개의 선두를 이끄는 기수(旗手)가 누구인지도 알았다.


남자는 어둠처럼 새카만 말을 타고, 시커먼 바탕에 붉은 역오망성의 깃발을 어깨에 걸쳤다. 저 혹한 속에서도 남자는 단정한 검은 제복을 입었으며, 포마드로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카락은 거센 바람 속에서도 일절 흐트러짐이 없었다.


“……유폐의 칼.”


유진의 곁에 선 크리스티나가 중얼거렸다. 저 존재는 적의나 살의를 내비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다가오고 있지만, 그 존재감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집결한 이들 중에 정신을 잃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지라도 유라스의 성직자들은 손을 마주 잡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기도를 읊었다. 그들에게서 발하는 빛은 다가오는 어둠을 밀어내려 들지는 않았다. 이곳에 오려 하는 어둠에 침식당하지 않도록 주변을 밝히는 것에 치중했다.


빛의 중심에는 교황 에우리우스가 있었다. 그는 성흔의 욱신거림을 느끼면서 기적을 주관했다. 혈십자 기사단의 단장, 라파엘로는 자신도 모르게 등에 걸친 클레이모어를 움켜쥐었다.


“가비드 린드먼.”


유진은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누아르 제벨라와 마찬가지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 허나 지금 유진이 느끼는 감각은, 설원에서 누아르 제벨라와 조우했을 때보다 더욱 지독했다.


그때 누아르는 저급 인큐버스의 몸을 그릇으로 삼았을 뿐, 본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다가오는 가비드는 다르다. 저건 분신 따위가 아니다. 300년 전, 유폐의 마왕 휘하 마족 중에서 최강이었던 마족이, 본신으로 이 요새에 다가오고 있다.


“……혼자 온 것도 아니군.”


유진의 근처에 서 있던 길레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비드가 이끌고 오는 안개. 300년 전 전설의 후예.


‘검은 안개.’


그것은 유폐의 마왕성이 있던 영지에 현존하던 악몽이었다. 수많은 기사단이 유폐의 마왕성을 정복했다는 명예를 바라며 영지로 향했지만, 베르무트 일행을 제외한 모두가 유폐의 마왕성에 도달하기는커녕 영지의 외곽에서 전멸했다. 그 학살을 벌였던 것이 저 검은 안개다.


하지만 그 악명 높은 검은 안개는 300년 전에 몰살당했다. 위대한 베르무트와 동료들이 선두에 선 결사대가 이뤄낸 쾌거였다. 유진은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유폐의 영지 판데모니엄. 낮과 밤이 존재하지 않던 붉은 평원에서, 하멜은 베르무트의 곁에서 검을 휘둘렀다. 모론이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길을 열었다. 세냐는 비명을 지르며 마법을 난사했고, 아니스는 피를 토해가며 어둠을 밝혔다.


그 뒤를 수많은 기사들이 따랐다. 각지의 전투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마족에 대한 살의와 증오를 여생의 전부로 품은 기사들이 나부끼는 안개와 뒤섞였다.


전투가 끝났음을 안 것은ㅡ 더 이상 주변이 어둡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악몽 같던 검은 안개는 더 이상 주변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판데모니엄의 악몽으로 불렸던 검은 안개의 전설은 그날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눈에는 그때와 똑같은 검은 안개가 보였다.


‘……대충 100명 정도인가.’


유진은 얇게 뜬 눈으로 안개를 투시했다. 가비드와 같은 검은 제복을 입은, 100명에 달하는 마족들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검은 안개는 전쟁이 끝난 후, 가비드 린드먼이 직접 조련해낸 마족 기사단이다. 약속 이후로 헬무드는 다른 국가를 침략하지 않았고, 자국의 군세가 얼마나 강한지를 과시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검은 안개가 대륙의 기사단과 비교해 얼마나 강한지는 가늠된 적이 없었다.


지금, 대륙의 기사들은 처음으로 검은 안개를 맞닥트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제 검을 저 안개 속의 기사들과 견주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선두에서 안개를 이끄는 가비드 린드먼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적의와 살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존재감을 과시하지도 않고 있다. 그럼에도 요새의 기사들은 가비드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 검은 안개가 전설의 후예라면, 가비드 린드먼은 전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검을 뽑지 않고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나 그는 유폐의 칼이다.


“음.”


안개를 이끌던 말이 멈췄다. 가비드는 그 위에 앉아서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검은 안개는 요새와 멀지 않은 곳까지 와 있었다. 가비드는 잠시 동안 성벽의 기사들을 응시했다. 이윽고 가비드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몇 걸음 앞으로 걸은 뒤, 어깨에 걸치고 있던 깃발을 바닥에 꽂았다.


어둠의 중심에 떠오른 붉은색의 역오망성. 저것은 300년 전부터 유폐의 마왕이 내건 상징이고, 지금은 헬무드 제국의 상징이었다. 가비드는 요새의 모두에게 유폐의 마왕의 깃발을 보인 뒤, 정중히 고개를 낮추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예고도 하지 않고서 이리 방문한 것을 사과드리리다. 허나 너무 노여워들은 말아주시오. 이 행사에 헬무드를 초대하지 않은 것은 그대들이잖소.”


나이트마치의 목적은 헬무드의 마왕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헬무드는 초대하지 않았다. 설마 그 유폐의 칼이, 검은 안개를 이끌고서 무턱대고 레헤인 요새에 처들어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성문을 열어주시겠소?”


가비드는 왕들의 침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건네는 목소리는 요새 전체를 통째로 짓눌러 버릴 것처럼 무거웠다. 성벽의 기사들 중 심약한 이들은 가슴이 제멋대로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열 수 없다.”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유라스의 교황, 에우리우스였다. 그는 주변을 밝히는 빛을 꺼트리지 않고서 가비드를 노려보았다.


“그대 유폐의 칼이여. 헬무드의 공작이여. 그대는 이 연회에 초대되지 않은 손님이다. 이곳을 가호하는 빛은 그대와 저 검은 안개를 거부하고 있다.”


“에우리우스 교황. 안타깝게도 본인은 그대와는 달리 빛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소. 만약 정말로 빛이 본인을 거부하고 있으며, 그 이유가 본인이 마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안개의 어둠 때문이라면. 본인은 얼마든지 안개의 어둠을 걷도록 하겠소.”


“그건…….”


“설마 본인과 등 뒤의 기사들이 마족이라 하여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로군. 빛의 신교가 마족을 무조건 적이라 하며 다투던 것은 300년 전의 일이잖소.”


“초대되지 않은 손님이라고 말했을 텐데.”


새로이 말을 받은 것은 키옐의 황제, 스트라우트 2세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양손으로 성벽의 난간을 짚었다.


“린드먼 공작. 그대의 방문은 갑작스럽고 무례하군. 300년, 아니, 그 이상을 살아온 그대에게는 100년도 채 살지 못한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보이겠지. 그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그대가 섬기는 유폐의 마왕은 과거 이런 말을 하였네. 아득한 세월을 살며 마족의 왕으로 군림하는 자신과, 100년도 채 살지 못하면서 일국을 통치하는 왕은 지도자로서는 동등하다고 말일세.”


“……180년 전, 헬무드의 우방국들에게 보낸 친서. 본인도 그 친서의 내용은 잘 알고 있소. 각국에 전해진 그 친서에는 유폐의 마왕님의 자비와 존중이 가득하였으니.”


“그대가 그를 알고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로군. 린드먼 공작. 초대받지 않은 그대가 성문을 열어달라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혹, 그대가 이곳에 온 것은 유폐의 마왕의 뜻인가?”


“그건 아니오. 본인의 독단이지.”


“……그렇다면…… 그대는 유폐의 마왕과 달리, 키옐의 황제인 짐과 다른 왕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로군?”


“존중이라.”


가비드가 씩 웃었다.


“설마 황제의 입에서 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소. 그래, 황제의 말대로 유폐의 마왕님은 그대들을 존중하시지. 헌데 당신들은 어떻소?”


“…….”


“나는 그대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나이트마치라는 이 행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고 있소. 이 모든 것을 유폐의 마왕님은 ‘문제’로 여기지 않으시겠지만, 마왕님께 충성하는 본인의 생각은 다르오. 이건 문제로 발전할 수 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대륙의 왕들이여. 그대들은 헬무드와 전쟁을 벌이고 싶은 것이오?”


ㅡ쿠웅. 가비드는 바닥에 세웠던 깃발을 다시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 행사 자체가 헬무드를, 유폐의 마왕님을 존중하지 않는 불온한 것이오. 그분의 칼을 자처하는 본인이, 그분에게 향하는 적의를 살피고자 온 것일 뿐. 다른 이유가 필요하오?”


“으하하!”


루하르의 야수왕, 아만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적의라! 우스운 말을 하는군. 이보게, 린드먼 공작. 우리는 오히려 유폐의 마왕과 헬무드의 적의를 걱정하고 있네. 이곳에 모인 것은 두려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야. 헬무드와 전쟁을 벌이고 싶은 것이냐고? 반대로 묻지. 린드먼 공작, 헬무드는 300년 전과 같은 전쟁을 바라는가?”


“본인은 유폐의 마왕님의 의중은 알지 못하오.”


“허면 그대는 어떤가? 그대는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마족의 전쟁을 바라는가?”


“본인의 뜻은 상관이 없소. 본인은 절대적으로 유폐의 마왕님을 따를 뿐. 야수왕, 그대는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군.”


린드먼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본인이 이곳에 온 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그것에 대해서는 자각하고 있소. 유폐의 마왕님은 본인에게 행동을 명령하지도 않으셨소. 이곳에 온 것은 오롯이 본인의 독단이오. 그대들이 헬무드를, 유폐의 마왕님을 존중하지 않는 것? 그대들이 헬무드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가비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성벽을 올려보고 있던 가비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 모든 것은 본인이 관여할 일이 아니오. 그대들이 전쟁을 바란다면, 전쟁을 일으키면 되는 거요. 그러니 ‘오해’라고 말하는 거요. 본인은 유폐의 마왕님을 존중하지 않는 그대들을 칼로서 벌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오.”


“……그게 무슨 말인가?”


“만약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유폐의 마왕님은 300년 전의 약속이 깨진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시겠지. 본인은 유폐의 마왕님의 맹목적인 신하로서, 주군의 슬픔을 바라지 않소. 그러니 감히, 주군의 뜻을 헤아려, 평화의 사절이 되고자 하오. 본인이 이 행사에 참가하고 싶다 피력하며 문을 열어달라는 것은, 헬무드를 대표하는 기사와 검은 안개 기사단의 단장된 자로서 이곳의 영웅들과 인연을 맺고 싶기 때문이오.”


“인연?”


“지금 본인의 앞에 집결한 많은 영웅들. 그 여러 이름을 하나하나 말하며 칭송하고 싶으나, 그대들이 본인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니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소.”


가비드는 빙긋이 웃더니 고개를 까딱 숙이면서 목례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순간.


“난 괜찮으니까 말해줘.”


근처에서 그런 중얼거림이 들렸다.


……카르멘이었다. 그녀는 기대감으로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포마드로 매끈거리는 가비드의 머리를 빤히 보았다.


“라이언하트의 은사자. 카르멘 라이언하트를 칭송해 줘.”


……유진은…… 그 마음이 아주, 아주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았다. 유진이야 가비드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놈에게 죽을 뻔도 했었으니 좋은 생각이라곤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르멘은 다르지 않나. 그녀에게 있어서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은 300년 전부터 살아온 전설이자 강자다. 그러니 저 입으로 직접 평가를 듣고 싶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러 영웅들 중에서도.”


가비드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카르멘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못 들을 것도 없기는 했다. 아직 가비드와 성벽의 거리가 제법 되기는 했지만, 가비드가 듣고자 한다면 성벽을 기어오르는 개미의 발소리까지도 똑바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


카르멘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녀는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면서 반응을 준비했다.


마냥 좋다고 웃을 수 없기는 했다. 카르멘은 가비드 린드먼을 동경하지도 않는다. 다만 저 초월적인 힘은 경외했다. 호승심도 갖고 있다. 적의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저만한 강자에게 인정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 아닌가.


“유진 라이언하트.”


그 이름이 불렸을 때. 카르멘은 기대를 배신당한 얼굴로 유진을 홱 돌아보았다. 설마 싶었는데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고서 가비드를 노려보았다.


“그에 대한 소문은 먼 헬무드에서도 들을 수 있었소. 세상이 이르기를, 저 청년은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 하더군. 또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이기도 하면서.”


유진은 자신에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을 느끼면서, 가비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진은 가비드의 ‘인정’ 따위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다.


“……베르무트 이후로 누구도 인정하지 않은 빛의 성검, 알테어의 주인이지 않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하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지. 베르무트를 잇는 용사.”


“성검의 인정을 받았다고?”


가비드가 말을 마친 순간, 곳곳에서 그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진이 성검의 주인이라는 것은 라이언하트에서도 일부와, 유라스의 교황과 라파엘로 같은 몇몇만이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녀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정말 신기하리만큼 신실한 아니스를 빼닮았군. 그 터무니없는 기적을 일으키던 빛의 성녀의 환생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요.”


가비드의 언급에 크리스티나의 얼굴도 창백히 질렸다. 가비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라스는 아직까지 비밀로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본인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공인할 수밖에 없는 빛의 성녀라는 것을 전신이 오싹거릴 만큼 강렬히 느끼고 있소. 신실한 아니스 이전에도 여러 성녀가 있었지만, 본인은 오직 아니스야말로 성녀라 자칭하기에 합당한 인물이라 생각하오.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을 바꾸어야겠군.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대는 아니스와 같은 성녀가 틀림없소.”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에게서 미리 듣기는 했다. 헬무드의 공작들은 유진이 성검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가비드가 말한 것처럼 그는 아니스와도 직접 마주했던 적이 있고, 신성력에 상극인 마족이라 성녀의 존재감을 강렬히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은 이곳의 여러 영웅들 중에서도 용사와 성녀에게 아주 큰 흥미를 갖고 있소. 다른 오해는 말아주시오. 저 젊은이들이 용사와 성녀라 하여 해코지하려는 것은 아니오. 다만, 300년 전을 추억하며…… 그대들의 선조와 쌓지 못했던 우애를 쌓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궁금할 뿐.”


‘저 개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나불거리기는. 유진은 뿌득 이를 갈고서 가비드를 노려보았다.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아니스도 성녀답지 않은 험한 욕을 내뱉었다.


“그러니 부디, 영웅들이여, 왕들이여. 성문을 열어주시오. 본인이 그대들과 교류하고 인연을 맺을 수 있게끔 기회를 주시오.”


가비드가 한 걸음 걸으며 말했다. 내뱉는 말은 부탁이었지만, 가비드의 등 뒤의 검은 안개는ㅡ 억지로라도 성문을 열고 들어가겠다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왕들은 잠시 동안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의견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시선은 단호했다. 이 나이트마치가 허울만 좋은 행사가 될지라도, 유폐의 칼을 요새 안에 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문은…….”


“열어주어라.”


요새의 주인인 아만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거대한 목소리가 아만의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유진은 흠칫 놀라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성벽의 모두가,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크게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가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놀람을 넘어 경악했다. 목소리가 들려 온 곳ㅡ 눈보라가 몰아치는 레헤인야르. 그곳과 이어지는 설원.


한 남자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남자는 시야의 끝에 잡힐 만큼 멀었다.


거구라 한들 남자는 거인처럼 말도 안 되게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걸음은 마치 거인의 발걸음처럼 빠르게 요새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눈보라 속에서 새카만 난발이 흩날렸다. 남자는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극한의 실현이라 할 만큼 발달된 강인한 육체가 무기이자 갑옷이었다.


“……공포의 모론.”


가비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300년 전 마족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인간 같지 않은 5명. 가비드 린드먼에게 죽음을 실감시켰던 이름들 중 하나.


그 시대에 수많은 마족이 참살당한 전장에서, 언제나 선두에 섰던 이름. 전신이 피범벅이 되고 팔다리가 날아가도 항상 앞장서서 길을 열던 남자. 절대로 이길 수 없던 전장의 중심을 관통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던 남자. 언데드보다 언데드같던, 고통과 공포를 모르며 마족에게 고통과 공포를 박아넣던 장본인.


용감한 모론.


은둔했던 루하르의 시조가 돌아왔다.


레헤인


유진은 입을 크게 벌리고서 다가오는 모론을 쳐다보았다.


그 등신은 며칠 전 대망치의 협곡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도끼는 들고 있지 않았다. 사실 모론이 뭘 들고 있느냐는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저 개…….”


자신도 모르게 내뱉을 뻔한 욕설을 삼켰다.


개새끼. 대신에 마음속으로 욕을 마저 내뱉었다. 사람이 기껏 찾아갔을 때에는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무턱대고 쫓아냈으면서. 분위기란 분위기는 다 잡으면서, 마치 자신은 그 절벽에서 내려올 수 없다는 듯이 굴었으면서.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얼굴로, 300년 만에 만난 친구한테 도끼를 처 휘둘렀으면서. 쌍놈의 새끼. 차라리 그때 자기가 찾아가겠다고 말을 하든가.’


유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설마 모론이 대망치의 협곡에서 내려와, 레헤인 요새에 직접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모론의 후손인 아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기로, 100년 전 돌연 은둔에 들어간 시조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대망치의 협곡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시조의 은둔 이후로 왕가의 후손들은 대망치의 협곡에서 왕위의 자격을 시험받아야 한다는 전통이 새로 만들어졌고, 정작 시조가 왜 은둔하였는지도 루하르 왕가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역시…….”


아만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모론을 보고 있는 유진과 크리스티나에게 향했다. 시조가 갑작스레 하산한 이유로 떠오르는 것은 저 둘밖에 없었다.


“……모론 루하르.”


가비드가 중얼거렸다. 그가 느끼는 긴장을 전해 받은 검은 안개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마족기사들이 혹시 모를 전투를 준비하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가비드는 즉시 손을 들어 안개를 진정시켰다.


“살아 있던 건가?”


“보다시피.”


“재회는 300년 만이로군. 그전에도 만날 기회는 있었겠지만, 그대나 나나 만남을 바라지는 않았었으니.”


“당연한 말을. 가비드 린드먼. 난 300년 전부터 쭉 네가 싫었다. 설마 너는 날 좋아하는 건가.”


“……좋고 싫고로 구분하기보다는, 꺼려지지. 나에게 있어서 그대는 틀림없는 적이었으니까.”


“날 좋아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나는 여전히 네가 싫다.”


“그렇다면 왜 문을 열라고 하는가? 내가 싫다면, 문을 열 필요는 없을 텐데.”


“네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모론이 대답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서, 가비드와 그 등 뒤의 검은 안개를 응시했다.


“만약 요새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너는 순순히 돌아갈 것인가? 그 불길한 안개를 퍼트려, 설원에서의 밤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 맹세할 수 있나?”


“내게 맹세를 강요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유폐의 마왕님뿐이다.”


“그렇겠지. 너는 물러서지 않을 거다.”


“설마 내가 비겁한 야습이라도 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모론 루하르.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아.”


“그건 모르는 일. 너는 맹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네 말은 여전히 속뜻을 헤아리기가 어렵군. 날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왜 나와 검은 안개를 요새 안으로 들이겠다고 말하는 거지?”


“설원은 넓다.”


모론은 양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네가 이 넓은 설원에 숨어서 더럽고 비겁한 일을 꾸민다면, 나는 그를 간파할 수가 없다. 이 새하얀 설원이 네게 더럽혀진다. 하지만 네가 요새 안으로 들어온다면, 나는 너를 지켜볼 수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요새의 다른 모두가 너를 감시할 것이다.”


“……내가 숨어서…… 더럽고 비겁한 일을 꾸민다라. 하하! 그것참 재미있고도 불쾌한 말이로군.”


가비드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유폐의 칼’이라 불리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300년 전부터 자기 자신의 기사도를 관철해 왔다. 그의 적들이 가비드를 어찌 평가하건, 가비드 본인은 자신을 유폐의 마왕의 유일한 기사라고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가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였다면, 나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모론 루하르, 그 말을 한 것이 너라면…… 용서하지. 마족과 인간이 생각하는 ‘더러운 일’은 아마 다를 테니까.”


“너는 300년 전부터 더럽고 비겁한 일을 자주 꾸몄다. 검은 안개를 판데모니엄 전역에 퍼트려 전사들의 휴식을 방해하고 기습했다. 정찰을 나갔던 하멜과 세냐를 습격했다. 그만한 실력과 힘을 갖추었으면서, 유폐의 마왕성에서는 부하들을 앞세웠고 정작 너 자신은 높은 층에서 기다렸다.”


모론은 두 눈을 번뜩이며 쏘아붙였다. 그 말에 가비드는 순간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렸다.


저게 왜 더럽고 비겁한 일이란 말인가?


“……300년 전. 판데모니엄까지 밀려온 대륙의 군세는 그 수가 상당했다. 유폐의 마왕군은 강했지만, 숫자로는 인간들보다 한참이나 부족했다. 소수의 정예가 대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야습이 바람직했다.”


“정정당당하지 못하다.”


“……하멜과 세냐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그들이 정찰 중이었듯이, 나도 정찰 중이었을 뿐이다.”


“나도 안다.”


그 대답에 가비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비드는 가슴이 꽉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부하를 앞세운 것? 그것이야말로 당황스러운 말이군. 나는 유폐의 칼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유폐의 마왕님의 곁을 지켜야 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너희가 바벨에 침입했을 때, 나는…… 이 평화의 시대에 말하기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일 먼저 너희의 앞을 가로막고, 모조리 도륙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어째서 안 되나?”


“너희가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 순간의 충동과 감정에 휩싸여 너희들의 앞을 먼저 가로막았다면. 분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내가 죽었다면. 누가 유폐의 마왕님의 곁을 지킨단 말인가?”


“마지막에 도망친 것도 그 충성심의 발로인가.”


그 질문에.


가비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핏기없이 새하얀 얼굴로 모론을 노려보았다.


“치욕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군.”


“네가 도망쳤던 것은 사실이다. 어전의 문 앞을 가로막던 너는, 베르무트의 검에 목이 베여야만 했다.”


“마왕님의 뜻이었다. 더 이상 막지 말고 몸을 숨기라는 명령. 감사하고 자비로운 마왕님은 마지막까지 싸우고자 한 기사의 신념보다 목숨의 보전을 우선하라 말씀하셨다.”


“결국 네가 도망쳤던 것은 사실이다. 너는 운이 좋았다. 만약…… 만약 그 자리에 하멜이 있었다면. 네가 도망칠 틈 따위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다.”


“……모론 루하르. 이 대화에 의미는 없다. 네가 날 화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말이다.”


“나와 싸울 건가?”


“싸울 생각이 없기에 경고하는 것이다.”


“나도 너와 싸울 생각은 없다. 네가 더럽고 비겁한 일을 꾸미지 않는다면 말이다.”


모론은 코웃음을 치면서 닫혀 있던 성문을 가리켰다.


“가비드 린드먼. 네가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인지는 모른다. 허나, 네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이 시대의 영웅들과의 인연을 바라는 것이라면. 네 행동으로 그 말을 증명해라.”


“흉계 따위는 꾸미지 않는다.”


가비드는 보란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일렁거리던 안개가 흩어지고, 마족기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내뱉은 말에 거짓은 없다. 나는…… 이 시대의 영웅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특히 베르무트의 후손인, 성검의 인정을 받은 유진 라이언하트. 아니스와 똑같은 모습의 성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 둘에게는 나도 관심이 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지? 모론 루하르. 나는…… 아직 말 한마디 섞어보지는 않았다만.”


가비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성벽에 선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에게서는 베르무트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에게서는 아니스가 느껴지는군.”


“둘의 벗이 아니었던 네가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불쾌하다.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보다 베르무트가 잘생겼고,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보다 아니스가 더 전사다웠다.”


유진은 저 말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베르무트가 잘생긴 것은 인정한다만, 환생한 이 얼굴이 더 잘생기지 않았나?


‘시스터, 전사답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모론이 말하는 전사다움은 메이스로 마족의 대가리를 깨버리는 것일 테니, 저 등신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쿵, 쿵. 모론이 계속해서 걸어왔다. 그는 닫힌 성문의 앞에서 멈춰 섰다.


“가비드 린드먼. 이것 하나만큼은 말해두겠다. 네가 유진 라이언하트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와 대화를 나누고, 인연을 맺고 싶다면. 그보다 먼저 내 허락을 구해야 할 것이다.”


“오랜 벗의 후손들을 아끼고 지켜주고 싶은 건가.”


“네 그 말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켜준다? 무엇으로부터. 너로부터인가. 그렇다면 너는.”


뚜둑.


모론이 주먹을 쥐었다. 고작 그것뿐이다. 하지만 가비드는 지금의 모론을 저 성문보다, 요새보다, 아니, 저 멀리서 보이는 설산 레헤인야르보다 거대하게 느꼈다. 이 정도로 강렬한 위압감을 느끼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오래전부터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런 인간도 300년을 살면 이렇게 되나.’


가비드는 피부가 저리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에게 해코지를 하겠다는 건가.”


그 질문이 입 밖에 나왔을 때. 가비드는 모론을 보다 거대하게 느꼈다. 경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단련되고 완성된 힘. 가비드는 잠시 동안 모론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해코지를 할 생각은 없다. 가비드는 대륙이 전쟁을 일으켜주기를 바란다. 유폐의 마왕의 뜻과는 다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면ㅡ 유폐의 마왕도 더는 대륙에 자비를 베풀 수 없게 되리라.


그 전쟁의 선봉은 용사와 성녀여야 한다. 그 존재가 전쟁의 대의가 될 것이다.


그러니 가비드는 저 둘을 해코지할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의 적을 살펴보고 싶을 뿐. 그 마음은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대륙의 영웅들과 인연을 맺고 싶다는 말 역시 진심이었다.


언젠가의 전쟁에서 즐겁게 죽이기 위해서.


“나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어디까지나…… 인연을 맺고 싶을 뿐. 저들이 나와의 인연을 바라지 않는다면, 멀리서나마 지켜보는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가비드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검은 제복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눈이나 먼지가 달라붙어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가비드는 차분하게 제복의 상의를 털고, 단추가 바르게 채워져 있는지를 점검했다. 그 뒤에야 가비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청했다.


“부디, 요새의 문을 열어주겠나?”


그를 물끄러미 보던 모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뿜던 위압감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사라졌다. 모론은 등을 돌리고 서서 성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 문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만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는 문지기들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살아 있는 전설들의 대화였다. 그러니 아래에서 오가는 대화에는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대화는 끝났다. 아만은 존경해 마다치 않는 루하르의 시조, 용왕이 제 손으로 직접 성문을 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아만.”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나는 내 모든 후손을 기억한다. 날 마지막으로 찾아온 후손의 이름마저 잊었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다.”


모론은 씩 웃으며 아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만도 거구였지만, 모론의 옆에 서 있으니 덩치보다 작게 보였다. 존재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아만은 선망 어린 눈으로 모론을 보다가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제 손으로 직접 요새의 문을 밀었다.


거대하고 무거운 문이지만, 아만은 그 문을 방문처럼 쉽게 밀어젖혔다. 아만은 먼저 들어가지 않고 다시 한번 더 모론에게 고개를 숙였다.


성벽 위에서 경계 중이던 루하르의 기사들이 앞다투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을에서 생활하는 바야르의 부족민들은 이미 성문 앞의 거리까지 와 있었다.


키옐의 황제, 루하르의 교황. 헬무드를 제외하면 대륙에서 2개뿐인 제국의 지도자들. 그들은 서두르지는 않았으나, 감히 성벽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조금 늦게 내려왔고, 휘하 기사단과 함께 돌아온 영웅을 맞이했다. 수많은 기사들이 거리에 서서 모론이 지날 길을 만들었다.


그렇게 행진이 시작되었다. 모론은 왕들의 인사를 웃으며 받아주었다. 기사들의 경의 가득한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으며 걸었다.


“들어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가비드는 아직 성문의 앞에 있었다. 바로 뒤에 있던 검은 안개의 기사가 정중히 물었고, 가비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뒤에 가도록 하지.”


저 길은 가비드와 검은 안개를 위한 길이 아니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존중해 줄 수 있었다.


* * *


모론과 독대할 기회가 없었다.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었다. 100년 전에 은둔했던,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던 루하르의 시조. 용왕, 모론 루하르. 그가 갑작스레 돌아온 것이다.


행진이 끝난 직후 모론은 왕들이 머무르는 요새의 성으로 가버렸다. 아만을 포함한 왕들도, 모론과 함께 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유진이 알 바가 아니었지만, 뻔하지 않은가. 은거의 이유에 대해 묻고, 왜 돌아왔는지를 묻고…… 결국 요새 안으로 들어와 버린 가비드 린드먼과 검은 안개를 어찌할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가비드와 검은 안개는 성벽과 가까운 외곽에 머무르고 있다. 요새 안의 건물에는 여유가 있지만, 가비드는 그를 사양하고서 텅 빈 외곽의 공터를 숙영지로 삼았다.


흥미와 관심이 있다고 말했지만, 가비드는 접촉해 오지 않았다. 성벽에서 몇 번 눈이 마주쳤을 뿐. 모론의 경고를 존중하는 것이리라.


‘그래 주면 좋지.’


유진은 벌써부터 가비드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누아르 제벨라와 마찬가지로, 가비드 또한 지금의 유진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한 존재다. 관심과 흥미, 딱 그 정도. 인연?


‘그건 지랄이고.’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걸었다. 곁에 바짝 붙은 크리스티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히 로브의 자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고, 심호흡을 하고, 표정을 가다듬고.


“괜찮냐?”


“괘, 괜찮습니다. 그냥 당황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은 아니스와 바꾸지 않았다. 그건 아니스의 고집이었다. 육체의 주인은 크리스티나고, 아니스는 깃들어 있을 뿐. 그러니 우선은 크리스티나가 마주하고 인사를 해야 한다. 레헤인야르에서는 인사할 기회가 없었으니 더더욱 그래야 한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그냥…… 음…… 등신이니까.”


“제게는 등…… 으흠, 그렇게 불릴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독대할 기회가 없었지만, 모론이 초대해 주었다. 야수왕 아만이 직접 라이언하트의 저택으로 찾아와, 모론이 만나고자 한다는 뜻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유진과 아니스는 성탑의 최상층에 올라와, 복도를 걷고 있었다. 바로 어제 유진이 걸었던 복도다. 아만은 아래층까지만 안내했을 뿐,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셋이서만 조용히 대화하고 싶다는 것이 모론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최상층의 복도에는 다른 기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대화는 조심해야겠지만, 왕이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인지 이 최상층에 고등급의 방어마법이 걸려 있어서 말을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불릴 분이 아니기는. 아까 가비드 린드먼이랑 대화하는 거 들었잖아.”


“300년 전의 대영웅답게 위엄이 가득하셨습니다.”


“내뱉는 말 자체는 여전히 등신 같았는데…… 나이를 먹어서인지 약간은 조리 있어진 것 같다곤 생각했다만.”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을 보았다.


복도의 끝. 문이 닫힌 방. 유진은 한 번 심호흡을 한 뒤에, 닫힌 문으로 다가갔다.


‘그 등신. 여기까지 불러놓고 또 도끼를 휘두르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러려고.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유진이 문을 열기도 전에,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아니, 문이 경첩째로 뜯겼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유진도 덩달아 문과 함께 공중으로 날았다.


“하멜!”


모론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커다랗게 뜬 눈을 끔벅거리며 앞을 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인사하는 것조차 잊고서 헉하고 숨을 삼켰다.


“하멜은 어디 있지?”


“야 이 등신아.”


유진은 아직까지 문고리를 잡고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콱 구기며 모론의 어깨를 발로 걷어찼다.


“왜 멀쩡한 문을 부수고 지랄…….”


“하멜!”


모론이 다시 외쳤다. 쿵! 문과 유진이 아래로 떨어졌다. 모론은 양팔을 활짝 펼치고서 유진을 끌어안았다.


“다시 보아도 믿기지 않는군. 하멜! 너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숨이 막혔다.


유진은 모론의 단단하고 거대한 가슴근육에 파묻혀서 발버둥 쳤다.


레헤인


죽을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단단하게 부풀고 깊게 갈라진 가슴근육이 절묘하리만큼 유진의 기도를 압박했다. 벗어나려고 한껏 발버둥 쳐보지만, 와락 끌어안은 모론의 완력은 유진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등을 강하게 안겨 있으니, 유진의 몸은 점점 모론의 근육에 파고드는 모양새가 되었다…….


‘주…… 죽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을 떠나서 몸에 가해지는 압박이 너무 강했다…….


유진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끼면서 경련하듯 움찔댔다. 그 순간까지도 모론은 하멜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정수리가 뜨겁고 축축했다. 모론이 흘려대는 굵은 눈물방울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 저대로 가면 하멜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스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가녀린 손으로 저 등신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크리스티나, 당신의 허리에 매단 플레일은 저 등신의 머리를 때려 갈기기에 아주 적합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전력으로 플레일을 휘둘러도 저 돌머리에는 흠집 하나 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시스터, 초면인 모론 님에게 어찌 그런 무례를…….’


[보십시오, 크리스티나. 하멜이 죽으려고 합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크리스티나는 아니스의 말에 결심을 내렸다.


그녀는 과감히 로브의 옆을 젖힌 뒤, 허리와 허벅지에 고정해 놓은 플레일을 뽑았다. 그녀는 사슬 끝의 추를 공중에서 한 바퀴 돌린 뒤에, 모론의 머리로 날려 버렸다.


뻐억!


아다만티움과 인간의 머리가 부딪친 것인데, 도저히 그런 것 같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나는 내심 조마조마했지만, 피 한 방울은커녕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모론의 이마를 보며 경악했다.


“음?”


그래도 일단 한 대 얻어맞았기 때문인지 모론도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물범벅인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오오오!”


그러고는 다시 눈물을 쏟으며 울부짖었다. 모론의 양팔이 활짝 열렸고, 유진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론은 널브러진 유진을 지나쳐서 크리스티나에게 다가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모론 루하르 님. 저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정말로 아니스를 쏙 빼닮았군. 며칠 전에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 인사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예…… 예.”


크리스티나는 활짝 열린 모론의 가슴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꿈틀거리는 근육. 다가오는 발걸음. 방금 유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론은 크리스티나를 꽉 끌어안을 생각이 가득해 보였다.


“야 이 등신아……!”


널브러져 있던 유진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몇 번 기침을 토한 뒤, 마나를 뭉쳐 만들어낸 탄환을 모론의 뒤통수에 던졌다.


쾅! 제법 힘이 담긴 탄환이었는데, 모론의 머리는 앞으로 기울지도 않았다.


“대뜸 끌어안고 지랄이야! 너 때문에 뒤질 뻔했잖아!”


“하멜!”


모론은 크리스티나에게 다가가는 걸음을 멈추고서 벙긋 웃었다. 그는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번갈아 보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너희와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나는 이 만남이 굉장히 즐겁다.”


모론이 울면서 웃으니 유진도 더 이상 불만을 말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아직도 뻐근한 등허리를 두드리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스는 네 안에 있는 건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던 크리스티나에게 모론의 질문이 날아왔다. 크리스티나는 화들짝 놀랐다가, 표정을 가다듬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너와의 만남도 즐겁고 신비하지만, 괜찮다면 아니스와도 인사를 나눌 수 있게끔 허락해 주겠나.”


“물론 그럴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두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크리스티나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300년이나 살면서 조금은 현명해진 겁니까? 아니면 눈치가 늘어난 겁니까.”


“아니스!”


“예,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 아니스 슬리우드입니다. 그런데 모론, 당신은 저를 대체 어떻게 알아본 겁니까? 제가 기억하는 당신은, 절벽 아래에서 펼쳤던 날개만으로 알아볼 만큼 현명하지도, 눈치가 좋지도 않았는데.”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론이 굵은 눈물방울을 훔쳐 닦으며 말했다.


“100년 전부터 내 눈은 아주 밝아졌다. 그래야만 하는 곳에서 살았기에 나타난 변화다. 아니스. 난 그 몸에 2개의 혼이 깃든 것이 보인다. 너희 둘의 혼은 쌍둥이, 아니, 본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똑같이 닮고 이어져 있다. 뚜렷한 형태로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네 혼에 친숙함을 느낀다.”


“……혼을 보게 되었다고? 그 무슨…….”


“그리고 하멜. 네 혼도 마찬가지다. 친숙하고 반가우며 그리운. 육체가 바뀌었어도 너는 틀림없이 하멜이구나.”


눈물을 닦는데도 계속 눈물이 뚝뚝 흘렀다.


유진은 거구에 험상궂은 얼굴을 한 모론이 어린아이처럼 우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사마르 대수림에서 아니스가 보여주었던, 하멜의 무덤에서 모론이 꺼이꺼이 울던 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야, 그만 좀 울어. 이렇게 만났는데 왜 계속 울고 지랄이야?”


“이 눈물은 전사도 흘려야 마땅한 고귀한 눈물이다.”


“내버려 두십시오, 하멜. 당신이 뭐라 한들 모론은 눈물을 그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300년 전에도 모론은 자신의 눈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유폐의 마왕성에서 하멜이 죽었을 때. 그곳에 있던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눈물의 ‘양’만을 따졌을 때, 가장 많이 울었던 것은 모론이었다. 세냐는 통곡했고, 아니스는 사무치는 절망감에 조용히 울었다. 베르무트는 ‘위’로 이어지는 천장을 노려보면서 울었다. 모론은, 주먹으로 바닥을 쾅쾅 찍으며 눈물로 샘을 만들었다…….


“모론이 울 때에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한 시간 정도 울게 두면 뚝 그치…….”


“아니,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아니스, 하멜. 가까이 와라.”


모론은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눈을 부릅뜨고서 양팔을 활짝 열었다. 그 노골적인 모습에 유진과 아니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모론은 개의치 않았다. 가까이 오라고 말한 주제에 모론이 먼저 가까이 다가왔다.


거대하고 굵은 양팔이 유진과 아니스를 함께 끌어안았다. 내키지 않은 표정을 한 주제에, 유진과 아니스는 모론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나인 것처럼 찰싹 붙어서. 모론에게 안겼다. 불만이랄 것은…… 모론이 너무 크다는 것. 그리고 너무 많이 운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축축해…….’


모론이 흘리는 눈물이 유진과 아니스의 정수리를 적셨다.


꽤 오랫동안 안겨 있었다. 그 사이에 별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냥, 서로의 존재를 실감했다.


한 번 죽었다가 환생하기는 했어도, 하멜은 유진이 되어 지금 이곳에 있다. 아니스도 죽었기는 해도, 크리스티나에게 깃드는 형태로 이곳에 있다.


그리고 모론도 이곳에 있다. 셋은 서로의 존재를 실감하고, 만지고, 느꼈다. 단순히 안고, 안겨 있을 뿐이지만 그 시간은 서로에게 귀중하고 값진 것이었다.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유진은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멜의 몸으로는 이렇게 자주 울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없는데.


‘베르무트 때문이야.’


이 몸뚱이의 선조는 베르무트니까, 육체에 못나고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다면 그건 전부 베르무트 때문이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물을 참았다. 힐긋 옆에 있는 아니스는 보니, 그녀는 이미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굳이 눈물을 참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진도 울었다. 모론처럼 엄청 많이 울지는 않고, 아주 조금만. 북받쳐 오른 감정이 진정될 정도로만.


울고, 얼싸안고 있는 시간이 끝났다. 아니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론에게서 벗어나, 방에 딸린 욕실에서 급한 대로 머리만 감았다. 유진도 아니스의 곁에서 함께 머리를 감았다. 모론은 그러지는 않고, 커다란 침대의 이불을 수건 삼아 눈물로 젖은 얼굴과 수염을 문질러 닦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겁니까?”


유진이 불러들인 바람이 젖은 머리를 말렸다. 아니스는 뽀송뽀송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으면서 빈 소파에 앉았다.


“모론. 당신에게 있어서 지금 시대의 우리는 납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너희 둘은 지금 내 앞에 있다. 나도 살아 있다. 지금의 내게는 그것이 가장 기쁘고 중요하다.”


“그렇게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럽습니다. 하지만 모론, 당신은 우리에 어떤 일이 일어나 이곳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도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말해 줄 기분이 들 것 아닙니까.”


모론은 아니스의 말에 두 눈을 끔뻑거렸다. 현명함이 늘지는 않은 건가. 아니스는 작게 혀를 차면서 다리를 꼬았다.


“뭘,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잖습니까. 수백 년 만에 만났으니, 각자의 이야기나 나누며 회포를 풀자는 겁니다. 마침 하멜의 망토 안에는 이야기를 즐기는 데 도움이 될 술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말에 유진의 망토가 저절로 열렸다. 안에 있던 메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왜?”


“……저도 세냐 님의 동료인 모론 님께 인사드리고 싶어요.”


“이럴 수가!”


모론이 큰 소리를 내며 놀랐다. 그는 성큼성큼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거구를 바짝 숙여서 메르와 눈을 맞댔다.


“아, 안녕하세요, 모론 님. 저는 메르 메르데인이라고 해요. 세냐 님이 만든 사역마…….”


“세냐와 똑같이 닮았군!”


“네…… 에…… 저는 세냐 님의 유년기를 재현한 모습이라…….”


“그렇군! 세냐가 만든 조그마한 세냐라, 그렇다면 세냐의 딸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모론은 벙긋 웃으며 그 커다란 손으로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모론 루하르, 세냐의 동료이자 친구다.”


인사를 나눈 뒤, 4명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서 앉았다. 유진은 아니스의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그녀가 미리 챙겨두었던 수많은 술들을 바닥에 깔았다. 잠시 방을 나갔던 모론도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술들을 품에 한 아름 들고 왔다.


“안주는?”


“진정한 애주가는 술을 안주로 삼는 법입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아래층에서 음식을 가져다 나르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한 유진은 술을 잔에라도 따라 마시고 싶었지만, 아니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모론도 병나발을 불었다. 둘이 그렇게 마시기 시작하자, 유진도 왠지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병나발을 불었다.


메르는 그 셋을 실눈으로 쳐다보며 주스를 마셨다. 만들어진 지 어언 200년. 그 세월을 나이로 환산한다면 메르는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었지만, 메르는 자기 자신을 영원한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


마구잡이로 술만 마신 것은 아니었다. 마시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스는 자신이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를 무덤덤하게 말했다.


“모론. 당신에게 보냈던 편지를 기억합니까.”


“평생을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 너무 오래되어 종이가 부서지려 하기에, 씹어서 삼켰다.”


“그 말은 괜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불쾌하군요.”


아니스는 눈썹을 콱 구기며 말했다.


세상은 아니스가 순례를 떠났고,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유라스의 최상층부는 아니스의 최후가 어땠는지를 알고, 300년 동안 쭉 아니스의 유해를 성유물로 활용해 왔다.


모론은 그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니스가 순례를 떠난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막에서 돌아와, 교황청의 알현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아니스가 마지막 소원이라며 모론에게 편지를 적었기 때문이다.


“유서랄 것도 없는, 그냥 편지였습니다. 육체는 한계를 맞이했고, 억지로 연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그냥 죽겠다. 세상에 죽음을 알리지 않을 것이니, 괜히 애도는 표하지 말고 혼자만 알고 있어라. 유라스에 찾아오지도 마라.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잘살고,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아니스는 말을 잠깐 멈추고 독한 술을 입에 부었다. 술병에 가득 담긴 술을 입술도 떼지 않고 모조리 비운 뒤에, 입술에 묻은 술을 훔쳐 닦으며 웃었다.


“그런 편지였습니다. 고맙게도 모론은 제 편지를 이해하고, 따라주었죠.”


아까 펑펑 울었으면서, 모론의 눈시울은 다시 붉게 젖어 있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스, 네가 편지에 적지 않았나. 부디 그렇게 해달라고. 나는 친구의 부탁을 무시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편지를 쓴 겁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아무런 편지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면, 모론, 당신은 무턱대고 유라스에 쳐들어왔을 것 아닙니까.”


“그랬을 거다.”


모론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도 죽었던 자신이 어떻게 환생하였는지를 말했다. 그 이야기에는 자연히 세냐에 관한 이야기도 섞일 수밖에 없었다. 모론은 도중에 이야기를 끊지 않고, 술병을 계속 비우며 유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제법 긴 이야기가 끝나고, 모론이 마시고 있던 술병을 아래에 내려놓았다.


“오래전에 세냐를 찾으려 했던 적이 있다.”


그건 세상에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세냐가 은거한 후. 그녀를 찾아내기 위해 아롯은 대수림과 대륙 각지에 수색대를 보냈다. 루하르도 아롯을 지원했다. 하지만 수색대는 대륙을 오랫동안 헤맸음에도 세냐에 관한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왕위에서 물러선 뒤, 나 자신이 직접 사마르에 간 적도 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세계수와 엘프의 영지는,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모론이라도 세계수에 보호되는 엘프의 영지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전이라면 모를까, 라이자키아의 습격 이후로 세계수는 세냐와 엘프들 전부를 봉인했다. 세계수의 잎사귀를 갖지 않고서는 결계의 존재마저 간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세냐는 강하다. 나도 수백 년을 살았으니, 세냐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세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모습을 감춘 것은, 바람을 이루기 위한 수행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람?”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하멜. 우리 모두가 그랬지만, 세냐는 특히나 네 원수를 갚는 것에 집착했다. 아롯의 마탑주가 된 후로는 그곳에 틀어박혀 마법을 만드는 것에 열중했지.”


모론은 그렇게 말하고서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설마…… 베르무트에게 공격을 받았다니. 그리고 라이자키아에게…… 솔직히 믿기 힘들다. 하지만 너희가 하는 말이니 나는 무조건 믿는다.”


감았던 눈이 뜨였다. 모론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유진과 아니스를 응시했다.


“너희를 믿듯이, 베르무트도 믿는다. 내가 아는 베르무트는 세냐를 공격하지 않는다. 하멜 네 환생을 위해 세냐가 가진 목걸이가 필요했던 것이라면, 베르무트는 세냐와 대화를 나누고자 했을 거다. 세냐가 네 환생을 거절할 이유도 없지 않나.”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암실에서 보았던 베르무트의 환영도, 그렇게 말했다.


-아직은 네 혼이 깃든 목걸이가 세냐에게 있지만, 언젠가 그녀를 납득시켜, 목걸이를 받을 생각이다.


제 입으로 말한 주제에, 베르무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음을 위장한 뒤에, 베르무트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세냐를 불러냈다.


하멜의 무덤에 쳐들어가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세냐의 사역마를 파괴했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봉인해 두었던 하멜의 관을 열어 시체를 밖에 꺼내기도 했다. 그리고 관에 월광검을 봉인했다.


뒤늦게 찾아온 세냐를 공격하고, 그녀의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세냐가 가지고 있던 세계수의 잎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세냐는 그곳에서 베르무트에게 죽었을 거다.


결과적으로 베르무트는 세냐에게 목걸이를 빼앗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하멜을 자기 후손으로 환생하게끔 만들었고, 목걸이는 라이언하트의 보물고에 가져다 두었다.


그 모든 행동은 하나로 잇고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월광검의 봉인. 하멜의 환생. 라이언하트 보물고 깊은 곳에 숨겨둔 목걸이. 그 3개의 행동은 베르무트답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왜 하멜의 시체를 문밖에 두었나? 왜 세냐를 공격해서 목걸이를 빼앗았나? 그 2개의 행동은 절대로 베르무트답지 않았다.


“저희도 베르무트 님을 믿습니다.”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저 행동들로 베르무트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함께 헬무드를 떠돌면서 보았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와의 유대가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이다. 베르무트에게 공격당한 세냐 본인조차도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않고, 믿는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베르무트 님에게 무언가 이변이 생겼던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베르무트 님이 저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폐의 마왕과 베르무트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 평화를 얻어낸 약속에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르지. 만약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에게 협박당한 것이라면, 세냐를 공격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지금도 베르무트의 혼은 유폐의 마왕에게 사로잡혀 있을지도 몰라.”


모론은 잠시 동안 입을 열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스는 다 마신 술병을 뒤로 던지면서 말했다.


“모론. 이제는 당신의 차례입니다. 왜 당신은 100년 전 돌연 은거를 선언한 겁니까. 왜 당신은 대망치의 협곡에 있던 겁니까.”


“왜 며칠 전의 너는 우리를 내쫓은 거냐? 그리고 누르. 그 괴물은 또 뭐야? 나는…… 그때 느꼈던 기운이 착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와 아니스는, 누르에게서 멸망의 마왕과 비슷한 기운을 느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누르에게는 미약하게나마 멸망의 마왕과 같은 불길함이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멸망의 마왕은 300년 동안 헬무드의 라베스타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대륙 최북단인 레헤인야르의 괴물에게서 멸망의 마왕과 같은 기운이 느껴진단 말인가?


“하멜, 아니스.”


짧은 침묵 뒤에, 모론이 입을 열었다.


“300년 전. ‘우리들’ 중에서 베르무트와 가장 처음 만난 것은 바로 나다.”


“그랬지.”


유명한 이야기다. 전생에 모론에게도 수십 번을 들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의 고향은 헬무드에 인접해 있던 아샬 왕국이다. 그 나라에 대륙사에 남을 만한 업적은 하나뿐이다. 아샬 왕국은 300년 전 발호한 헬무드에게 가장 먼저 멸망했다.


왕국의 얼마 안 되는 생존자들은 마족들에게 사로잡혔다. 마족들은 생존자들을 모조리 노예로 삼아 헬무드로 이송했다. 흑마법사의 실험동물, 혹은 마족들의 장난감, 산 제물, 그 시대에서 헬무드에 이송되는 노예들에게 평온한 죽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베르무트도 그런 노예 중 하나로, 마족과 흑마법사들에게 사로잡혀 헬무드로 이송되었다.


살기 위해서.


베르무트는 그렇게 말했었다. 오직 그 생각만으로 마족의 검을 빼앗았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처음 휘두르는 검으로 마족과 흑마법사 수십 명을 죽였다. 그 뒤에는 함께 이송되는 노예들을 이끌고서 헬무드를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수백 마리의 마물을 죽였다. 이송되던 노예들을 구출했다. 그리고 헬무드를 벗어나, 바야르 부족이 영역으로 삼은 설원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모론과 만났다.


“나는 너희들보다 먼저 베르무트와 만났고, 함께 싸웠다. 나는 그때부터 용감한 전사였으나, 베르무트는 그때부터 영웅이었다. 베르무트를 제외한 우리 모두가 처음은 영웅이 아니었다. 베르무트와 함께 하며, 우리는 영웅이 되었다.”


“…….”


“그래. 우리는 분명히 영웅이었다. 만족스럽지는 못한 형태지만 세상을 구했다. 그럼에도 하멜, 아니스. 너희들의 최후는 불행했다. 하멜, 너는 유폐의 지팡이와의 싸움에서 죽었다. 아니스, 너는 편지를 통해 내게 죽음을 알렸다. 세냐는 누구에게도 진실을 알리지 않고 은거했으며, 베르무트는…… 죽었다.”


“죽지 않았어.”


유진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모론은 말없이 술병을 비웠다.


“……진실은 그러하나, 나는 베르무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그 시체를 보았고, 그의 관을 옮겼다. 결국에 나는 혼자 남았다. 혼자서, 오랫동안 살았다. 바로 지금까지.”


텅 빈 술병이 테이블에 똑바로 섰다.


“나는 나 자신을 영웅이며, 전사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영웅이며 전사에 어울리는 결말을 바랐다. 루하르의 왕으로, 모두의 애도를 받으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내 육체는 노쇠하지 않고 힘은 강했다. 100살이 넘어도 쭈욱, 전사로서의 전성기가 계속되었다. 이 힘을 어찌 사용해야 하나. 모두가 나를 영웅이라 말하는데, 나와 같이 영웅이었던 벗들은 이미 세상에 없다.”


모론의 입술이 꿈틀 움직였다. 그는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금 헬무드에 도전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거듭해 생각하되, 하지 않았다. 이 평화는 베르무트가 약속해서 얻어낸 것. 내가 헬무드에 다시 도전했다가는, 평화가 깨진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 혼자서는 절대로, 멸망의 마왕은커녕. 유폐의 마왕조차도 죽일 수가 없다.”


모론의 고독은 길었다. 그가 품은 고민은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내게 새로운 사명을 준 것은, 베르무트다.”


“뭐?”


“아니스도, 세냐도 사라지고. 나만이 살아 있던 150년도 전에. 베르무트가 내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레헤인야르에 올라라.


라구르야란을 보아라.


그곳에서 넘어오는 끝을 경계해라.


“베르무트는.”


모론이 말을 이었다.


“내게 부탁한다고 말했다.”


영웅이며 전사에 어울리는 결말을 바라던 모론에게, 죽었던 베르무트가 직접 꿈에 나타나 부탁을 전했다.


“100년 전. 베르무트가 경고했던 대로, 라구르야란에서 끝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모론이 들려주었던 바야르 부족의 오랜 전설.


레헤인야르의 너머, 그곳에 라구르야란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땅. 넘어가서는 안 될 땅. 세상의 끝.


바야르가 레헤인에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라구르야란으로 건너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라구르야란에서 끝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수호하기 위해서다.


깊은 밤, 라구르야란에서 누르가 몸을 일으킨다. 누르는 드넓은 끝을 걸어, 레헤인야르를 넘어온다. 잠들지 않는 아이는 누르에게 잡아먹힌다.


“나는 베르무트를 믿는다.”


그래서 모론은 베르무트를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다.


레헤인


과거의 모론은 자신의 고민에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웅으로서, 베르무트와 함께 얻어낸 불완전한 평화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먼저 떠난 동료들이 이뤄내지 못했던 사명에 홀로 도전할 것인가.


그러한 고민에 답을 내놓지 못하던 차에, 베르무트가 꿈에 나타난 것이다. 모론이 처했던 현실과, 꿈에 나타난 베르무트의 부탁. 덕분에 모론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백 년이 흘러도 노쇠하지 않던 육체는 베르무트의 부탁을 따르기에 알맞았다.


만약 베르무트의 경고와 부탁대로 라구르야란에서 끝이 넘어오지 않았다면, 모론이 지금만큼 확신에 차서 베르무트를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베르무트의 경고대로 되었다. 150년 전 모론이 꾸었던 꿈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다. 경고는 현실이 되었고, 100년 전부터 라구르야란에서 끝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꿈을 꾼 후로. 나는 레헤인야르에 살았다. 매일 라구르야란을 보았다.”


높고 험한 산이지만 모론에게는 동네 뒷산처럼 친숙하고 낮게 느껴졌다. 해가 저문 매일 레헤인야르에 오르고, 라구르야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산봉우리를 내려왔다.


“바쁘고 충실한 나날이었다. 그때의 나는 루하르의 왕이 아니었다. 내가 레헤인야르에서 살아도 나에게 무어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레헤인야르에만 틀어박힌 것은 아니었다. 가끔, 루하르의 중요한 행사에는 참석했다. 그때는 아직 모론이 ‘은거’하기 전이었다.


“라구르야란은 내가 어릴 적에 보았던 풍경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베르무트를 믿었다. 죽은 베르무트가 내 꿈에 나타나서 경고를 한 것이다. 내가 아는 베르무트는 무의미한 경고와 부탁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부정할 수 없군.”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고, 아니스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납득했다.


그들이 기억하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 같은 것은 잘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베르무트는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해버린다. 베르무트가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다른 누구든 할 수 없는 일이다.


경고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무트는 입 밖으로 경고를 내뱉기 전에, 경고를 해야 할 만한 상황을 최대한 만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베르무트가 경고를 내뱉었다면, 그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 피할 수 없는 것. 반드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베르무트가 경고했던 대로 끝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내 꿈에 나타난 것은 틀림없는 진짜 베르무트였다. 그러니 베르무트의 경고와 부탁, 모두가 진실하고 무겁다.”


“끝이라는 건, 누르를 말하는 거냐?”


유진은 술병을 흔들며 물었다. 머리에 뿔을 달고 있던 거대한 원숭이. 멸망의 마왕과 비슷한, 불길한 기운을 내뿜던 괴물. 야수왕 아만은 자신이 보았던 누르는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설원의 언어로 누르는 끝과 죽음이라는 뜻을 갖는다.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다. 생명의 끝은 죽음이다. 모든 것에게 그렇다.”


“……내가 보았던 누르는 덩치 큰 원숭이일 뿐인데. 끝이고 죽음이라는 거창한 뜻에는 맞지 않았어.”


“하지만 하멜, 너는 누르에게 불길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니스 너도 똑같이 느꼈을 거다.”


모론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흩날리는 눈발 너머로 레헤인야르가 보였다.


“300년 전에, 우리는 어떤 존재를 멀리서 본 것만으로 ‘끝’을 느꼈다. 헬무드에서 보았던 무엇보다, 그 존재가 우리에게 끝을 실감시켰다.”


멸망의 마왕.


“왜 누르에게서 멸망의 마왕과 같은 불길함이 느껴지는지는 나도 모른다. 베르무트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 ‘끝’은 바라지 않음에도 멋대로 밀려온다. 제 마음대로 라구르야란에서 건너와, 레헤인야르를 넘어온다.”


모론이 주먹을 쥐었다.


“그것은 막아야 한다. 넘어와서는 안 된다. 100년 전, 처음 누르를 보았을 때. 나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징조는 없었다.


수십 년을 그랬듯이, 모론은 레헤인야르의 봉우리에 올랐다. 라구르야란을 보았다. 그 행위 자체는 수십 년 동안 해온 것이라 익숙했다.


하지만 그날에는 익숙함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모든 것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러한 기분은 산을 오를수록 강렬해졌다. 멈추는 몸을 억지로 끌고서 레헤인야르의 정상에 올랐다. 라구르야란을 보았다. 여전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무엇도 살 수 없는 땅이었다.


그 땅을 보고,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을 때.


모론의 뒤에 누르가 서 있었다.


“멸망의 마왕을 보았을 때를 기억하나.”


“그걸 어떻게 잊겠냐.”


“몇 번을 죽어도 그때의 충동과 감정은 잊지 못할 겁니다.”


멸망의 마왕은 보는 것만으로도 존재를 절망시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무엇도 관계없이, 당장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맞서 싸우기는커녕, 결코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만한 존재감을 내뿜던 마왕은, 돌연히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우리는 멸망의 마왕이 그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를 안다. 하지만 그만한 존재가 ‘왜’, ‘어떻게’ 그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멸망의 마왕은 그런 존재였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인식을 아득히 벗어난 재앙. 놈의 영지는 라비스타지만, 300년 전의 멸망의 마왕은 헬무드를 제멋대로 떠돌았다.


하지만, 멸망의 마왕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는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놈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다. 나타난 자리에 멸망을 일으킨다.


ㅡ그때도 그랬다. 고개를 들어보니, 산 너머에 멸망의 마왕이 있었다. 놈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모른다. 여러 가지 색이 뒤섞인 것만 같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현상. 색의 덩어리. 그렇게 보였다.


“스스로 말하기는 괴로운 굴욕이지만, 우리는 그때 도망쳤다. 난 용감한 전사지만, 저 존재와는 절대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싸우면 무조건 죽는다. 내, 존재가, 끝난다. 그렇게 느꼈다.”


모론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다. 하멜도 똑같이 느꼈다. 결과적으로 그곳에 있던 모두가 도망쳤다. 그 베르무트가 앞장서서 도망쳐야 한다고 외쳤다.


“멀리 도망쳤지. 하지만, 그 존재는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그랬지.”


도망치던 것을 멈춘 것은. 멸망의 마왕이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멸망의 마왕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누르는 멸망의 마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하다. 하지만 놈들은 멸망의 마왕과 비슷하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꺼림칙한 불길함을 내뿜으며, 그 이름이 갖는 의미대로 끝과 죽음을 퍼트린다.


“누르를 처음 본 날. 나는 누르를 죽였다. 그리고 왕가에 은거를 선언했다.”


전과는 사정이 달랐다. 모론은 은거한 후부터 쭉 레헤인야르를 내려오지 않았다. 누르의 출현에 법칙 같은 것은 없었다. 어느 날에는 낮에, 또 어느 날에는 밤에. 하루에 수십 마리가 나타날 때도 있고, 며칠 동안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첫 번째 날, 나는 다시 베르무트의 꿈을 꾸었다. 꿈속의 베르무트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할 것이 어디에 있나? 오히려 나는 베르무트가 가여웠다. 그의 말이 기쁘면서 슬펐고, 고마웠다. 베르무트는 내게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베르무트 본인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내게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말했다.


“나는 이 산에 계속 남아 누르를 죽일 것이다. 누르가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바라지 않은 끝이 넘어오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고, 나도 바라지 않는다.”


“……베르무트는 네 말에 뭐라고 대답했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베르무트에게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베르무트의 꿈을 꾼 것은 그 날이 마지막이었지만, 나는 베르무트가 내게 건넨 ‘힘’을 느꼈다.”


“힘?”


“내 눈은 굉장히 밝아졌다. 넓은 레헤인야르의 어느 곳에 누르가 나타나건, 나는 바로 누르를 볼 수 있다. 그 꺼림칙한 존재가 어떻게 태어나고, 움직이는지를 안다. 지금 아니스의 안에 있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보인다.”


모론은 창밖에 보이는 레헤인야르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누르는 직접 보지 않아도 사람을 질겁 시키는 불길한 존재다. 그리고 크다. 누르의 시체는 이미 죽었는데도 불길함을 독처럼 내뿜는다. 누르의 피는 눈을 더럽히고 산의 생명을 죽인다.”


100년 동안 모론은 누르를 가로막았다. 그가 얼마나 많은 누르를 죽였는지는 모른다. ……모론이 말한 것처럼 누르가 불길함을 독처럼 내뿜는다면. 그가 100년 동안 죽여온 누르의 ‘독’이 레헤인야르를 뒤덮었을 것이다.


저 산은 눈이 끝없이 내리는 지랄 맞은 산이지만,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강력한 불길함이 독기로 떠돌고 있지는 않다.


유진은 대망치의 협곡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잠깐 사이에 모론은 거대한 누르의 시체와 함께 사라졌다. 절벽을 올라가 확인해 보았지만, 누르가 쏟았던 피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라이언하트의 보물고. 그 지하로 이어지는 암실을 떠올렸다. 마법 같지 않은 마법. 굳이 분류하자면 공간마법이라고 분류할 수 있겠지만, 아카샤를 써도 그 공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베르무트는 내게 그 능력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알았다. 누르를 죽인다. 그 시체를 던져 넣는다. 그렇게 쓰기 아주 좋은 능력이다.”


상상이 어렵지는 않았다.


레헤인야르의 이면. 그 어떤 대마법사도 간파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상. 모론은 그곳에 누르의 시체를 두었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던 설산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시커먼 피를 쏟는 끝과 죽음의 괴물의 시체로 산을 쌓았을 것이다.


“……모론, 너는.”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베르무트의 부탁 때문에 죽지 못하고 있는 거냐.”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라서 죽지 않고 있는 것이다.”


모론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전사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오랜 친구의 부탁을 따르면서, 내가 사랑하는 설산과, 설원과, 내 손으로 일으킨 나라와, 세상을 지키고 있다.”


“……100년 동안이나.”


“말하지 않았나, 하멜. 전사로서 가치 있는 삶이라고. 나는 추하게 늙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전사이고, 영웅답게 죽고 싶었다. 지금 내게 죽음은 머나먼 일이나, 만약 내가 힘에 부쳐 죽게 된다면. 그때까지 내가 쌓았던 누르의 시체가, 전사이자 영웅이었던 내 삶을 증명할 것이다.”


“…….”


“그리고. 내 피를 잇는 후손이, 내 역할을 대신하여 누르를 막을 것이다. 바야르의 전사이자 루하르의 왕이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너는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않는 거냐. 놈은 내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어. 왜 누르가 나타나는지, 왜 자신이 이런 부탁을 해야 하는지.”


“하멜. 너는 그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모론의 질문에 유진의 말문이 막혔다. 그가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모론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베르무트가 부탁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만약 300년 전에 죽은 것이 네가 아니라 나였고, 베르무트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면. 네게도 똑같이 부탁했을 거다. 그러면 하멜, 너는 베르무트의 부탁을 거절했을 건가.”


“……나는…….”


“거절하지 않았을 거다. 나와 너뿐만이 아니다. 세냐와 아니스였어도, 나와 같은 부탁을 받았다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을 거다. 하멜, 아니스. 너희들은 누르를 처음 보고서 무엇을 느꼈나.”


죽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멸망의 마왕과 같은 불길함을 내뿜는 존재. 존재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존재다. 그러니 죽여야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베르무트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누르를 보았다면 누르를 죽였을 거다. 베르무트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레헤인야르에 틀어박혀 누르를 죽이고 가로막는 삶을 사명으로 삼았을 거다.”


“그랬겠죠.”


아니스는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고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핑계는 댔어도, 세상을 구한다는 것에는 결국은 진심이 되었어요. 우리 모두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도, 함께 십수 년을 싸우면서 결국은 진심으로 세상을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웅.


“전쟁은 끝났습니다. 세상은 평화로워졌습니다. 우리는 이 평화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압니다. 비록 이상과는 다른 형태로 평화를 얻었다 한들, 우리는 이 평화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를 위협할 만한 존재가 나타났다면, 우리는 베르무트 님의 부탁과 상관없이 그 존재를 죽였을 겁니다. 그 존재가 계속해서 나타난다면, 당연히 그 존재를 말살하는 것에 남은 평생을 바쳤을 겁니다.”


아니스의 마지막에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앞으로의 세상, 미래 따위 상관하지 않았으면 됐다. 자신의 존재를 구속했던 성국과 신앙 따위, 버렸으면 되었다. 평생을 원망했던 성국을 위하지 않고, 바랐던 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목숨을 끊었으면 되었다.


하지만 아니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멜의 무덤이 있는 사막에서, 변덕을 부렸다. ……자신이 죽은 뒤의 세상을 도저히 저버릴 수가 없었다. 몸이 망가지면서까지 싸웠고, 결국에는 죽어버렸던. 우둔하고 사랑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래서 이 모조화신의 육체를 성국에 주었다. 천국에 갈 수 있었지만 천국에 가지 않고 세상에 남았다. 바친 육체가 성유물이 되고, 후대의 성녀를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녀들이 세상을 구하기를 바랐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감았다.


모론은 등신이다. 그건, 틀림없었다. 모론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등신이다. 바람대로는 아니었어도, 결국은 세상을 구하지 않았나. 이딴 형태라도 평화롭게 되지 않았나.


그렇다면, 고생했던 만큼 행복하게 살았으면 되었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다가, 죽고, 천국에 가면 되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ㅡ하멜도 마찬가지였다. 죽고, 환생했다. 그것이 베르무트의 의도였다 해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멜은 선택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삶, 그냥 속 편히 살 수도 있었다. 애초부터 하멜은 그런 삶은 선택지로 두지 않았다.


당연하단 듯이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명을 이루겠다고 결심했다. 모든 마왕을 죽이겠다는 사명에 삶을 바치기로 했다.


아니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음에 보여줘라.”


유진은 코르크의 마개를 뽑으며 투덜거렸다.


“모론. 네가 1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누르를 죽였는지. 그 누르를 어디에 쌓아놨는지 말이야.”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러고 싶었다면 저번에 보여줬을 거다.”


“왜 싫다는 건데?”


“독기가 너무 짙기 때문이다. 나야 익숙해졌지만, 하멜, 네가 그곳을 봐버리면 머리가 이상해질지도 모른다. 몸이 병에 걸릴 수도 있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던 건가. 유진은 그 등신 같은 상냥함에 코웃음을 쳤다.


“날 무슨 X밥으로 아나. 뒈진 시체가 아무리 많이 쌓였어도 난 이상해지지 않아. 병도 안 걸려.”


질문을 삼켰다.


그때, 모론의 눈. 모론의 분위기. 지금과는 다른, 싸늘하고 감정이 존재하지 않던 눈. 세월에 풍파 된 것만 같은 눈. 암실에서의 베르무트처럼ㅡ 지치고, 탁했던 눈.


“약속해라.”


유진은 모론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이트마치가 끝나고,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가. 네가 100년 동안 무엇을 봤는지를 내게도 보여줘라.”


“저는 두고 갈 생각입니까?”


아니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멜이 간다면 저도 갑니다. 당신들이 선 곳에는 당연히 저도 서야 합니다.”


“……아니스. 나는…….”


“모론. 당신은 거짓말에 재능이 없습니다. 우리를 걱정한다고요? 그 말, 거짓말이지 않습니까. 방금 당신이 말한 진실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뿐입니다.”


아니스는 유진처럼 모론을 배려하지 않았다. 이 뱀 같은 여자는 300년 전부터 상대의 마음을 할퀴는 것에 재주가 넘쳤다.


“당신이 그곳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은 괴물의 시체 따위가 아닐 겁니다.”


“…….”


“그리고 나는, 당신이 보여주기 싫은 것이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보고 싶습니다.”


“……으하하!”


모론은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제 머리를 쿵쿵 두드리면서 계속해서 웃었다.


“너희는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당신은 변했습니까?”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됐습니다. 당신의 사정은 대충 알았으니, 지금부터는 즐겁게 술이나 마십시다.”


아니스가 술병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것만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유진은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메르의 머리를 괜히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입을 열었다.


“야. 그런데 모론. 너, 지금 여기 와 있어도 되는 거냐?”


“아까 말하지 않았나. 난 여기서도 레헤인야르를 볼 수 있다. 아직 누르는 나오지 않았다. 누르가 나온다면, 누르를 죽이러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데도 100년 동안 레헤인야르에 틀어박혀 있었다.


“등신.”


유진은 중얼거리며 모론에게 술병을 기울였다.


“나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너희가 나를 등신이라 부르는 것은 싫어하지 않는다.”


모론도 벙긋 웃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레헤인


마검 글로리.


가비드 린드먼이 유폐의 검이라 불리는 이유이자, 유폐의 마왕에게 직접 하사받은 애검. 베르무트가 사용했던 월광검, 그 끔찍한 빛에 유일하게 저항이 가능했던 검.


300년 전 이후로 뽑아 휘두른 적은 거의 없다. 오랫동안 방치해 둔들 칼날은 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비드는 매일 애검의 칼날을 세우고, 닦아왔다.


오늘 밤은 특히나 그러고 싶었다.


가비드는 몇 시간 전에 보았던 모론과, 그가 내뿜던 투기를 떠올렸다. 다시 상기해 보아도 몸이 오싹하고 즐겁다. 모론과의 만남은 가비드로 하여금 300년 전의 전장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조금은.’


가비드는 칠흑의 검신을 똑바로 세우면서 생각했다.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던 모론의 눈동자.


300년은 마족에게 있어서도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아득하게 길 것이다. 아무리 강하고 뛰어난 인간이라도, 길고 긴 시간에는 마모되어 버린다. 거대한 바위가 오랜 비바람에 풍화되듯이, 인간도 그럴 수밖에 없다.


‘기대해도 되겠다 싶었다만.’


모론 루하르에게는 300년이란 세월을 겪으며 태어난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가비드는 내심 그 광기가 폭력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모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비드에게 모욕을 쏟아내기는 했지만, 옛날처럼 무기를 뽑아 들고 괴성을 질러대며 덤벼들지는 않았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야.”


가비드는 빛을 빨아먹는 마검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모론의 투기에 몸이 달았다. 모론이 덤비는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가비드는 끌려 나온 투기를 진정시키며 검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마검 글로리. 유폐의 마왕에게 하사받은 영광. 날뛰고 싶을 때마다, 가비드는 지금처럼 글로리를 꺼내었다. 칼날을 세우고 닦으면서 날뛰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글로리가 가비드 린드먼의 광기를 진정시키듯.


모론에게도 그런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동질감이라고 말하기는 이를 테지만, 가비드는 그렇게 짐작했다. 설원 저편에서 다가오던 모론의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목줄을 물어뜯을 것만 같은 맹수처럼 난폭했다. 하지만 그 난폭함은 성문의 앞에 도착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피를 이은 후손들이 보고 있어서인가. 아니면…… 아니스 슬리우드와 똑같이 닮은 모조화신을 보았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피를 느꼈기 때문인가.’


유진 라이언하트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와 생김새가 닮지는 않았다.


하지만, 베르무트가 가지고 있던 찬란함은 유진에게도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재능. 그 재능은 언젠가 마왕의 목젖에도 닿을 만한 영웅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 수준에 도달했던 베르무트의 ‘피’는, 유진 라이언하트의 혈관에 흐르고 있었다.


모론도 그 피를 느꼈을 것이다. 베르무트와 함께 싸웠던 전사가 그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어느 쪽이든 가비드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만약, 모론이 광기대로 덤벼왔다면. 가비드도 어쩔 수 없이 모론과 싸워야 할 명분을 갖게 되었을 테니.


“그리 서 있지 말고 들어오게.”


가비드는 마검을 칼집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천막의 문이 저절로 들춰지고, 건너편에 서 있던 아멜리아 머윈이 방긋 웃었다.


“헬무드 공작의 숙소치고는 너무나도 소박하지 않은지.”


“이곳은 내 영지가 아니지 않은가.”


“네가 바란다면 저들은 성을 양보해 줄 거예요. 아니면 내가 널 위한 성을 세워줄까요?”


“무례한 것은 여전하군.”


가비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멜리아 머윈. 저 여자는 상대가 누구건 ‘너’라고 지칭한다. 저 무례한 흑마법사가 너라고 지칭하지 않는 것은 유폐의 마왕뿐이다. 만약 아멜리아가 유폐의 마왕에게마저 무례하게 굴었다면, 가비드는 진즉에 저 목을 베었을 것이다.


“즐겁고 고마운 제안이지만, 거절하겠네. 나는 이 천막에서도 충분히 안락함을 느끼고 있으니.”


아멜리아는 그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발밑의 어둠이 치솟아 의자가 되었다. 아멜리아는 가비드의 앞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취향도 여전히 고약하고 말이야.”


앉은 아멜리아의 등 뒤. 입에 뼈가 물린 헤모리아가 서 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아멜리아의 정수리를 살의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다가, 가비드와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서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여러 가지가 섞여 있군.”


헤모리아의 붉은 눈동자. 뼈를 물고 있는 날카로운 이빨. 그 외에도 가비드는 여러 가지를 느꼈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니다.


“자네는 여전히 저런 존재에 집착하나?”


“내가 그런 질문을 싫어하는 것을 잊었나요?”


“아, 실례했군. 자네와는 너무 오랜만에 만났으니 말이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70년 전이었나?”


“그런 옛날은 잊었어요.”


아멜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등 뒤에 선 헤모리아의 다리를 장난처럼 훑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묻지 않는 건가요?”


“자네와는 200년이나 알고 지냈지. 알고 지낸 세월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자네가 아주 심술궂은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 그를 통해 추측해 보건대, 자네는 나에게 심술궂은 계획에 동참해 달라 묻기 위해 온 것 같은데.”


“합동훈련에 몬스터를 사용한다더군요.”


아멜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주, 아주 많은 몬스터가 소환될 거예요. 아롯의 마법사들, 그리고 나하마의 마법사들. 당연히 저도 그들을 거들어 몬스터를 소환해 주기로 했어요.”


“그런가.”


“만약 네가 약간의 마력을 투자해 준다면, 나는 이곳에서 아주 멋진 소란을 벌일 수 있을 거예요. 어때요? 당신도 그 소란에서 여러 재미를 볼 수 있을 텐데.”


“흥미로운 제안이군.”


가비드는 낮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사양하도록 하겠네. 나 개인적으로는 자네가 벌이려는 소란에 흥미가 있지만, 유폐의 마왕님은 그를 바라지 않으실 테니까.”


“여기까지 왔으면서?”


“나는 자네의 힘이 되고자 이 북쪽에 온 것이 아닐세. 용사와 성녀를 눈으로 한번 봐두고, 가늠하고 싶었을 뿐. 사실 자네도 내가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나?”


아멜리아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가비드가 말한 것처럼, 거절당할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아멜리아 본인이 방금 말한 것에 진심이지도 않았다. 난폭한 몬스터의 대군을 소환한들, 나이트마치에 모인 전력이라면 몬스터의 대군 따위 금세 정리해 낼 것이다.


‘직접 도와주지 않는다면 벌일 필요가 없는 일.’


아멜리아는 깔끔하게 미련을 접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을 묻죠. 너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나는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 있어요. 내가 그 모래 날리는 사막에 처박혀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내가 개입이라도 할까 걱정하는 건가.”


“너 외에 다른 공작은 개입하지 않을 거예요. 누아르 제벨라는 아주 재미있어하며 구경할 거고, 라이자키아, 그 마룡도 그러겠죠. 하지만 너는 유폐의 칼이잖아요? 만약 내가 유폐의 마왕이 바라는 평화를 깨려는 행동을 한다면…….”


“유폐의 마왕님은 종복의 자유를 존중하시지.”


가비드는 아멜리아가 정확히 무엇을 꾸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준비했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그 일에 유폐의 마왕이 아주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멜리아 머윈뿐만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한 삼마. 에드먼드 코드렛과 발자크 루드베스도 마법사다운 숙원을 품고 있다. 그것들은 가비드가 보기에는 아주 건방지고 주제넘은 숙원이지만, 유폐의 마왕은 종복의 숙원을 제한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복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어, 그들이 숙원을 이루게끔 원조해주었다.


“나는 자네가 어떤 일을 벌이려는지 몰라. 유폐의 마왕님은 아시겠지만, 내게 막으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네.”


“기왕이면 확실하게 말해주면 좋겠는데요.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날 죽이러 오지는 않겠다고.”


“그건 내가 결정하는 일이 아닐세. 만약…… 자네가 해버린 짓이 너무나도 과해서, 유폐의 마왕님이 가슴 아파하시며 자네의 목을 가져오라 명하신다면. 나는 무조건 그 명령을 따라야 하니 말이야.”


아멜리아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대답이 유폐의 칼에게 들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라는 것은 납득했다. 그러니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명령은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이 천막에 남을 이유가 없으니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불빛 아래의 그림자에서 돌연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에 대단한 무게나 존재감은 없었다. 그냥, 목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가비드와 아멜리아는 그 목소리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가비드와 아멜리아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두커니 서 있던 헤모리아는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네 노력과 수고를 짓밟고 싶지 않으니.”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뜨였다. 여전히, 존재감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와는 달리, 저 눈동자는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헤모리아의 의식을 끊어버렸다. 헤모리아가 바닥에 쓰러졌지만, 아멜리아는 바로 등 뒤에서 일어난 일에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폐하……! 이 누추하신 곳에 어찌 강림하셨나이까……!”


가비드는 깊이 머리를 조아리며 내뱉었다.


마왕성 바벨의 최상층에서부터 내려오는 목소리는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유폐의 마왕의 존재를 느끼고,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가비드로서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것이 가비드의 몸을 환희로 떨게 만들었다.


“널 꾸짖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


유폐의 마왕이 말했다. 여전히 그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만 드러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렇다면…… 날 꾸짖기 위해 온 것인가요?”


“말했을 텐데. 나는 네 노력과 수고를 짓밟고 싶지 않다.”


“…….”


“네 숙원이 이뤄진다면, 너는 커다란 영광을 얻겠지. 만약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면, 그 대가는 네가 치러야 하는 것이다. 아멜리아 머윈. 너를 포함한 내 종복들은 나와 똑같은 계약을 맺었다. 그를 잊었나.”


“……설마 잊었을까요. 당신은, 내가 바라는 만큼의 마력을 주고 있어요.”


마왕과의 계약은 간단하다. 아멜리아는 바라는 순간에 언제든지 마왕의 마력을 지원받는다. 그것은 거대한 힘이지만, 자유롭게 사용할 수는 없다. 대마왕의 힘은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조차도 부숴 버린다.


하지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 부서지지 않을 만큼 조율하는 것은 가능하다. 아멜리아뿐만이 아니라 유폐의 삼마 모두가 그 정도 재주는 가지고 있다.


마족과의 계약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대가는 바로 영혼. 언젠가 죽으면, 그 혼이 계약한 마족의 소유가 된다. 마왕과의 계약도 마찬가지였다. 아멜리아가 죽으면, 아멜리아의 혼은 유폐의 마왕에게 거두어진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마왕은 경외를 힘으로 삼는다. 숭배와 신앙이 신을 신답게 하듯이, 마왕에 대한 경외가 마왕을 마왕답게 만든다. 그것이 마왕과 마족을 가르는 절대적인 차이였다.


마왕이란 그런 존재다. 다른 존재가 ‘유폐의 마왕’이라는 이름을 경외하는 것. 마왕을 두렵게 생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저 헬무드의 지배자의 격은 높아지고, 마왕의 힘은 강해진다. 마왕에게 있어 공포란 달콤한 경외의 한 종류다.


아멜리아가 제 숙원을 위해 날뛴다면. 세상은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아멜리아 머윈의 이름에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 공포마저 유폐의 마왕의 힘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아멜리아가 죽게 되면. 세상이 두려워했던 끔찍한 흑마법사의 영혼은, 생전의 모든 위업과 쌓아 올린 힘과 세상의 공포와 함께 유폐의 마왕에게 더해질 것이다.


ㅡ아멜리아는 그 결말을 상상하며 몸을 떨었다. 당연히 아멜리아는 그런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마왕과, 아니, 마족과 계약한 모든 흑마법사가 그럴 것이다. 영혼을 대가로 한 계약해서 죽음은 결코 안식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많은 흑마법사들이 자신의 결말을 바꾸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고,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모론이 왔는가.”


유폐의 마왕이 중얼거렸다.


ㅡ꽈아아앙! 말이 끝난 순간, 거대한 힘이 가비드의 천막을 날려 버렸다. 날아간 것은 천막뿐이었다. 힘이 덮쳐 온 순간, 가비드가 즉시 마력을 일으켜 이 공간을 결계로 보호했다.


“감히!”


가비드는 노성을 터트리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유폐의 마왕이 검을 뽑으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만 뽑지 않았을 뿐, 그가 내뿜는 거대한 살의는 결계를 넘어 주변을 뒤덮었다.


어느새 몰려온 검은 안개가 가비드의 뒤에 머물렀다. 안개가 걷히고, 마족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일렁거리는 한 줄기의 어둠. 그 한복판에 뜨인 붉은 눈동자. 검은 안개의 기사들 중에서 유폐의 마왕을 마주한 마족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들의 본능은 저 어둠과 눈동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직감했다.


“모론 루하르.”


눈동자가 데굴 움직였다.


모론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요새의 성 꼭두기에서 곧장 날아왔다. 방금 전까지 유진과 아니스와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지금의 모론에게는 한 점의 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거대한 증오와 살의뿐.


“유폐……!”


모론은 꽉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어, 피를 토하듯이 유폐의 마왕을 불렀다. ㅡ가장 처음 난입한 것은 모론이었지만, 이윽고 다른 사람들이 찾아왔다. 자주색 불꽃을 휘감은 유진이 모론의 곁에 떨어졌고, 빛의 날개를 펼친 아니스가 모론의 등 뒤에 멈춰 섰다.


“소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둠이 꿈틀거리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온 것은 유라스의 혈십자 기사단이었다. 선두에서 뛰어오던 라파엘로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둠, 붉은 눈동자. 그것을 포착한 순간, 라파엘로는 즉시 등의 클레이모어를 뽑고서 땅을 박찼다.


“멈추십시오!”


아니스가 고함을 질렀다. 외침에 실린 거대한 신력이 라파엘로의 몸을 허공에서 우뚝 멎게 만들었다. 라파엘로는 놀란 눈으로 아니스를 올려다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클레이모어를 내려놓았다.


혈십자 기사단이 검은 안개와 대치했다. 이윽고 라이언하트와 키옐의 백룡 기사단이 도착했다. 점점 늘어난 기사들이 검은 안개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포위했다.


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유진은 주먹을 말아 쥐고서 어둠을 노려보았다.


대륙의 왕들이 도착했다.


유라스의 교황은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헐떡거렸다. 기적을 일으킨 것도 아닌데, 몸에 새긴 성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키옐의 황제는 핏발 선 눈으로 어둠을 쳐다보았다. 노려보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위엄을 굽히고 싶지 않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지만, 본능에 충실한 다리는 덜덜 떨렸다.


똑같이 제국의 황제라지만, 아득한 세월을 힘으로 군림해 온 것이 마왕이다. 그리고 저 유폐의 마왕은 여럿 존재했던 마왕들 중에서도 특별히 강했던 대마왕. 황제들의 권력은 유폐의 마왕이 지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오해는 받고 싶지 않다.”


유폐의 마왕이 중얼거렸다. ㅡ어둠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아아아! 가비드는 경외 가득한 목소리를 토하며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멜리아도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오만한 그녀라도 지금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약속을 깨러 온 것이 아니다.”


어둠이 육체가 되고, 옷이 되었다. 그렇게 유폐의 마왕은 육체를 갖고서 오롯이 섰다. 그 육체는 핏기없이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성의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유폐의 마왕은 머리카락 사이에 돋아난 뿔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대들이 내 강림을 오해하고 경계한다면, 부디 그리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네가 세상에 경고했다는 것을 들었다.”


모론은 핏발 선 눈으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저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300년 전. 그 지독하던 유폐의 마왕성. 바벨의 최상층에서, 저 모습의 유폐의 마왕과 만났다.


그리고 절망했다.


“그랬지.”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절그럭.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손목을 옭아 죈 사슬이 쇳소리를 냈다.


“하나 여지는 주었다. 너희가 나를 경외한다면, 나는 너희를 존중할 것이다. 내가 베푸는 호의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평화를 끝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여.”


입을 연 것을 황제도 왕도 아니었다. 라이언하트의 가주, 길레이드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며 유폐의 마왕이 발하는 위압감에 저항했다.


“나는…… 라이언하트의 가주. 길레이드 라이언하트라 하오.”


“네 이름을 안다. 친애하는 베르무트의 후예여, 내게 무엇을 묻고 싶나.”


“경고의…… 말미에 대해 묻고 싶소. 당신은, 내 양아들을 경고의 사절로 삼았소. 당신은, 약속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였소.”


“약속은 영원하지 않았으니.”


유폐의 마왕이 머리를 까딱 기울였다. 그 붉은 눈동자는 길레이드를 넘어, 유진에게 향했다.


“300년 전. 네 선조, 친애하는 베르무트는 나와 약속을 맺었지. 평화를 위한 약속이었다.”


“…….”


“그 약속에 대해서 나는 말하지 않는다. 베르무트가 그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후예여, 약속의 ‘끝’을 오해하지 말라. 약속의 끝은 필연적인 것이다. 너희가 나를 경외하고 존중하고. 내가 너희에게 호의를 베푼들, 언젠가 약속의 끝은 다가온다.”


“그렇다면……! 약속을 다시 맺으면 되는 것 아니오? 필요하다면 내가…….”


“누가 베르무트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온전히 길레이드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장소에서 유폐의 마왕을 보는 모두에게 건네는 말이었으며, 지금 유폐의 마왕은 유진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베르무트를 대신할 수는 없다. 약속이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존재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였기 때문이다.”


유페의 마왕의 목소리가 멈췄다. 그는 유진을 보던 눈을 움직여, 모론을 응시했다.


“만용은 그만두어라, 모론 루하르.”


모론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거친 호흡이 흘러나왔다. 꿈틀거리는 근육이 당장에라도 날뛸 것만 같았다.


“네가 지금 이곳의 나를 죽인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게 가까이 오는 것이 너를 괴롭게 할 것이다.”


“크륵……!”


“네게는 날 죽이는 것 외에 다른 업이 있지 않은가.”


ㅡ꽈득! 모론의 이빨이 박살 났다.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다가, 크게 숨을 삼켰다.


“그렇군.”


모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널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다. 300년 전에 하지 못했던 것을 이루고 싶다.”


“그 베르무트와 세냐, 아니스와 함께 싸웠음에도 이루지 못한 것을 지금의 너 혼자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덤비고,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론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죽을 수 없다. 그러니 덤비지 않겠다.”


그 대답에 유폐의 마왕이 짓는 미소가 살짝 바뀌었다. 그는 웃는 눈으로 모론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네 답을 존중한다.”


유폐의 마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모론 루하르, 너뿐만이 아니다. 대륙의 왕들이여, 그들을 섬기는 기사들이여, 전장을 떠도는 용병들이여, 전사들이여. 나는 너희의 뜻을 존중한다. 나는, 너희가 왜 이곳에 모였는지를 안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속삭여 왔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물러서도록 하마. 너희가 전쟁을 바란다면, 300년 전에 너희 선조들이 그랬듯이 나의 영지, 판데모니엄으로 와라. 나의 마왕성 바벨을 올라, 내게 검을 겨누어라.”


유폐의 마왕의 몸이 어둠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너희가 그러고자 한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서 기다리도록 하겠다. 이 정도면 충분한 유예가 되었나, 유진 라이언하트.”


돌연 유폐의 마왕이 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어둠으로 흩어지면서도 얇게 뜬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성검의 주인. 베르무트의 후예.”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바벨을 오를 텐가?”


암실.


베르무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가 그랬던 것처럼, 유폐의 마왕의 어전에 서서. 놈의 본신을 만나도록 해라. 그 뒤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네가 직접 겪어야 해.


“그래.”


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는 흩어지는 유폐의 마왕을 향해 보란 듯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가도록 하지.”


“네놈!”


설마 유폐의 마왕에게 저런 손동작을 보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가비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가비드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무례하게 굴지 말도록.”


“폐하……!”


“그는 내 손님이다.”


유폐의 마왕이 속삭였다. 가비드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서 고개를 조아렸다.


사라지기 직전, 유폐의 마왕은 웃는 눈으로 유진을 보며 말했다.


“언젠가 네가 바벨에 올 날을 고대하마.”


그 말과 함께, 유폐의 마왕이 사라졌다.


유폐의 마왕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까지 가비드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낮추고 있었다.


……손님. 유폐의 마왕은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고, 가비드는 그 말에 어떠한 불만을 품지 않았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보인 불경은 수백 수천 번 죽여야 마땅하나, 유폐의 마왕은 가비드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말했다.


‘바벨에 올 때까지.’


가비드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기 전.


대뜸 달려든 유진의 검이 가비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레헤인


그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이 제 목에 떨어지는 칼날의 예기를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간파는 일찍이부터 했고, 반응이 늦었을 뿐이다.


‘뭐야?’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왜 자기 목에 검이 떨어지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유폐의 마왕이 서 있었다. 진신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모인 하찮은 인간들을 존중하여 어둠으로나마 육체를 이루어 현현하셨다.


불과 방금 전까지. 이 장소에 유폐의 마왕이 계셨단 말이다.


그리고 가비드 린드먼은 헬무드의 공작이자, 유폐의 검이며, 유폐의 마왕의 유일한 기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가비드는 주군을 위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것에 일절 부끄럼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주군이 이곳을 떠나는 순간까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목에. 마치 죄인을 참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검이 떨어진 것이다.


내리찍은 검신을 휘감은 빛이 어둠을 밝혔다. 그 찬란한 빛의 폭풍은 원했던 것처럼 가비드를 삼키지는 못했다. 멀찍이 물러선 가비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성검, 알테어를 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물러선 가비드를 돌아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기습. 가비드는 당황했고, 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평온한 얼굴을 까딱 기울이며 가비드를 노려보았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가비드 뿐만이 아니었다. 가비드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있던 아멜리아는, 살의와 짜증이 뒤섞인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 신성력은 흑마법에게 상극인 힘이다. 휘말리지 않도록 물러서긴 했다만, 만약 저 빛에 휘말렸다면 굉장히, 굉장히 아팠을 것이다.


“너. 뭐 하는 거예요?”


아멜리아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물었다. 펫인 헤모리아는 아직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아멜리아의 손에 목덜미가 잡혀 있었다. 순종적이지 못한 펫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어이없게 죽게 둘 수는 없었다.


“그건…… 나도…… 굉장히 궁금하군.”


가비드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며 내뱉었다. 부복해 있던 검은 안개의 기사들도 일제히 몸을 일으키고서 가비드의 등 뒤에 섰다. 그들은 아직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이 세운 살의를 하나로 모아 유진에게 쏘아 보냈다.


그것은 거대한 파도가 덮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고작 저런 살의에 위축되기에는 유진이 겪어온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유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손에 쥔 성검을 위로 던졌다.


이번에도 가비드는 유진이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잘 쥐고 있던 성검을 위로 던지는 건가?


곧, 왜 그랬는지를 이해했다. 성검이 손에서 놓인 순간. 유진은 곧장 망토 안에서 거대한 활을 꺼냈다.


기묘하게 생긴 활이다. 시위는 없다. 활대는 유진의 키만큼 크고, 너무 화려해서 실용성이라곤 없어 보인다.


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가비드는 저 활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뇌광궁 페르노아. 그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가지고 있던,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도 알 수 없던 고대의 무기 중 하나.


“이…… 미친놈……!”


가비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진은 그 표정 변화가 드물던 유폐의 칼이 당황하는 것을 즐기며 손가락을 구부렸다. ㅡ파직! 유진의 마나가 시위가 되었다.


번개불꽃은 뇌광궁과 궁합이 좋다. 본래 뇌광궁은 그 위력만큼 마나를 무식하게 처먹는데, 번개불꽃이 깃든 마나는 큰 소모 없이 뇌광궁의 시위를 만들어낸다.


자전일섬(紫電一閃).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이 썩 마음에 들었지만ㅡ 유진은 차마 그 이름을 입밖에 내뱉을 수가 없었다. 이 이름은 앞으로 평생 머릿속에만 둘 것이다.


자주색 번개가 쏘아졌다. 화살의 출력은 예전에 뇌광궁을 쏘았을 때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유진을 쳐다보고 있던 모두가 화살의 위력에 경악했다. 가비드도 마찬가지였다. 가비드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걸어둔 마검 글로리에 손을 얹었다.


‘무례하게 굴지 말도록.’


‘그는 내 손님이다.’


글로리의 칼자루를 움켜쥐려는 순간. 가비드의 머릿속에 주군의 목소리가 울렸다.


잊을 리가 있나. 불과 방금 전에 유폐의 마왕이 했던 말이다.


주군은, 저 인간이 바벨에 오기를 고대하겠다고 말했다.


주군은, 저 인간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말했다.


주군은, 저 인간을 손님이라고 말했다.


그 모든 것이 가비드의 충동을 억제했다. 유폐의 칼인 그에게 있어, 유폐의 마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었다. 그래서 가비드는 글로리를 붙잡지 않았다.


ㅡ꽈아아앙! 자주색의 번개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가비드는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글로리를 뽑지도 않았다. 오른손을 칼처럼 휘둘러 자전일섬의 궤적을 위로 꺾었다. 고작 그것뿐. 가비드의 육체는 이깟 공격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소매가 찢어졌다. 가비드는 넝마가 된 소매를 노려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러나 불만을 토로할 틈도 없었다. 뇌광궁이 쏘아낸 전류가 채 가시기도 전에, 거대하고 무거운 공격이 가비드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용격창 카르보스. 연발은 안 되지만 이 일격은 무식하고 강하다. 고출력의 마나를 한점으로 모아 쏴대는 공격의 위력은 드래곤의 브레스에 버금간다. 예전에는 마나의 총량이 부족하여 자주 쏘지도 못하고 위력도 시원찮았지만, 지금의 유진은 용격창의 위력을 무리 없이 뽑아낼 수 있었다.


“멀리도 날아가는군.”


유진은 이죽거리면서 용격창을 망토 안에 쑤셔 넣고, 성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마창와 분쇄추, 월광검. 이 3개의 무기는 꺼낼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가비드 린드먼이 유폐의 마왕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지라도, 저 3개의 무기까지 꺼내고서 몰아붙인다면 마검 글로리를 뽑을 것이다.


가비드는 글로리를 뽑지 않는다.


그 꺼림칙한 위신의 마안도 쓰지 않을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 유폐의 마왕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시그니처는 쓰지 않는다. 비장의 한 수는 숨길수록 나중에 꺼낼 때의 가치가 오른다. 그래서 유진은 정직하게 성검만 쥐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저, 저 미친놈을 막아라!”


키옐의 황제, 스트라우트 2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는 지금 유진이 왜 헬무드의 공작을 공격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기껏 유폐의 마왕이 물러서 주었는데, 여기서 가비드 린드먼을 자극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알체스터 경! 지금, 지금 당장…….”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체스터는 얇게 뜬 눈으로 저 앞을 보았다. 그는 유진의 모든 면을 이해한다고 자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재능 넘치는 천재가 아무 이유 없이 가비드를 공격할 리가 없다고는 생각했다.


‘성검의 용사…… 시조의 전설을 잇고 싶다면,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언젠가 용사로서 헬무드에 향할 것이다.’


알체스터는 유진을 아주 고평가하고 있다. 알체스터 가문의 비기인 공검도 전수해 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유진은 알체스터가 공검을 가르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공검의 중첩까지 성공시켰다.


무(武)에 관한 천부적인 자질. 그뿐인가? 마음도 얼마나 넓고 생각이 깊은지, 어린 아들인 리우에게 마나를 다루는 요령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드라고닉 가문에서 보았던 유진은 단 한 번도 건방지고 오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네게 유폐의 칼을 겪어볼 수 있는 지금의 기회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일 터. 거기에 유폐의 마왕 본인이 너를 손님이라 말하며 대우를 약속했으니, 저 충성스러운 마왕의 기사는 너를 함부로 할 수 없을 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유진의 행동은 과감하면서도 영리했다. 그래서 알체스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시에 가슴에 열기가 끓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유진 라이언하트가 용사로 우뚝 서서 마왕을 죽이러 가겠다고 선언한다면.


ㅡ알체스터 드라고닉. 그는 자신의 선조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의 선조인 오릭스 드라고닉은 300년 전에 헬무드에 향하는 대신, 전쟁으로 혼란스럽던 키옐에 남아 제국을 지키는 수호기사로 평생을 살았다.


명예롭고 올바른 일이었다. 하지만 가끔,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그 위대한 베르무트처럼. 우둔한 하멜, 현명한 세냐, 신실한 아니스, 용감한 모론처럼. 선조 리우 드라고닉의 이름이 대영웅들과 함께 역사에 새겨졌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했다.


‘나는 운이 좋구나.’


바로 옆에서 스트라우트 2세가 발광하고 있지만, 알체스터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언젠가, 유진 라이언하트가 성검을 높이 들고서 판데모니엄의 바벨에 함께 도전할 동료를 찾는다면. 알체스터는 키옐의 공작이란 지위와, 드라고닉 가문까지 모두 내려놓고서, 대륙사에 남을 영웅담에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유진은 알체스터가 생각하는 것처럼 언젠가의 미래를 위해 가비드의 실력을 봐두려고 싸움을 건 것은 아니었다.


‘화풀이로 쓰기에는 딱이군.’


그게 전부였다. 가비드가 마음대로 검을 뽑아 휘두르지 못하고 있으니, 전생부터 쌓였던 감정을 쏟아내고 싶을 뿐이었다.


“저 미친놈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니스는 유진이 왜 저러는 것인지를 알았다. 나름대로 신중하게 판단해 덤빈 것이기는 하겠지만, 결국에는 그 하멜의 지랄 맞은 성격이 폭발한 것이다.


“오오오!”


모론은 커다란 고함을 지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앞으로 튀어나가려고 했지만, 아니스는 즉시 모론의 팔에 매달려서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 등신. 당신까지 덤벼서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나는…….”


“대답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목소리는 등신처럼 커서, 아무리 작게 말해도 주변에 들릴 겁니다. 그러니 잘 들으십시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여기 서 계십시오.”


유폐의 마왕이 ‘손님’이라고 말한 것은 유진뿐이다. 만약 모론이나 다른 사람이 가세한다면, 저 섬뜩한 유폐의 칼은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을 것이다.


라이언하트의 가주, 길레이드도 알체스터와 같은 결론에는 도달했다. 실제로 저 유폐의 칼은 검을 뽑지 않고, 유진의 공격을 막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 싸움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겁하며 검을 뽑고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카르멘도 헤븐제노사이드의 회중시계를 품에서 꺼냈다.


“자, 잠깐 기다리십시오.”


모론의 팔에 매달려 있던 아니스가 급히 라이언하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아니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아아!”


아니스는 치욕을 삼키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빛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아무래도 날개 2장으로는 위엄이 부족할 것만 같아서, 2장의 날개를 더 꺼내 도합 4장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빛의 계시가아아!”


[시스터!]


‘가만히 있으십시오. 내가 더 부끄럽습니다.’


머릿속에서 크리스티나도 비명을 질렀다. 아니스는 머리채를 계속 뜯어내며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마치 신내림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아니스가 그렇게 날개를 퍼덕거리고 빛을 뿜어대며 발광하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려던 라이언하트의 기사들도 몸을 멈추고서 아니스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스가 필사적으로 신내림과 계시를 연기하는 동안.


유진은 가비드를 성벽까지 몰아붙였다. 가비드는 여전히 검을 뽑지 않고, 위신의 마안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두 눈에 지독한 살의를 담고서 유진을 노려보기만 했다.


“네 주인의 손님을 그렇게 노려봐도 되나?”


“이…… 개자식이. 내가 반격하지 않을 것을 알고……!”


꽈아앙! 유진의 참격이 가비드의 팔뚝에 가로막혔다.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던 제복도 완전히 넝마가 되었다. 포마드를 써서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카락도 지저분하게 흐트러졌다.


“누가 반격하지 말래?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잖아.”


“감당할 자신은 있는 거냐……! 똑똑히 알아둬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네가 지금 목숨을 부지하며 숨 쉴 수 있는 것은, 유폐의 마왕님이 널 손님이라고 말하셨기 때문이다. 네가 바벨에 오는 것을 고대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말이 나와서 묻는 건데, 내가 바벨에 가면 말이야. 어전까지 오를 수 있도록 길을 비켜줄 거냐?”


“헛소리하지 마라! 유폐의 마왕님은 널 위해 어전의 문을 열어주겠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가비드는 눈을 살의로 번뜩이며 쏘아붙였다.


장장 300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마왕에 도전하겠다는 주제 모르는 마족이 단 한 명도 없었겠는가? 있었다. 제힘을 과신한 젊고 혈기 넘치는 신흥귀족들이 몇 번씩이나 바벨을 힘으로 정복하고자 했다.


판데모니엄의 마왕성 바벨. 99층에 달하는 드높은 빌딩. 평소의 바벨은 판데모니엄의 치안을 관리하는 관제국의 직원들과 사무직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이 층별로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왕위에 도전하는 자가 나타나면. 바벨의 내부는 300년 전의 마왕성으로 변모한다. 어전까지의 길을 가로막는 수많은 함정과 마물과 마족들이 그곳에 도사리며, 어전의 바로 아래에는 유폐의 칼인 가비드 린드먼이 지키고 있다.


여태까지 바벨에 도전한 머저리들 중, 그 위대한 베르무트와 동료들을 제외하고서 가비드의 앞까지 도착한 마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네가 바벨에 온다면, 내가 직접 네 목을 참수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목을 유폐의 마왕님께 직접 바칠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네가 편히 바벨을 오르게 두지 않을 거다. 놈은, 마왕은 그런 존재다.


역시 그런가. 유진은 베르무트의 말을 떠올리며 코웃음 쳤다.


“내가 바벨에 가지 않는다면 네게 죽을 일은 없겠군.”


“……이 개자식……!”


“아니야? 내가 안 가면 네가 직접 죽이러 올 거냐? 그래 버리면 유폐의 마왕의 뜻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가비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00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저 우직하기 짝이 없는 놈은 여전히 주인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다.


“……만약…… 네가 오지 않는다면……! 겁에 질려 라이언하트에 처박힌다면. 내가, 직접 너를 데리러 가마. 유폐의 마왕님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려주실 거다……!”


다시 한번 참격이 부딪쳤다. ㅡ꽈지직! 가비드가 흘려낸 힘이 레헤인 요새의 성벽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었다.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꼭 마왕성에 갈 거거든.”


유진은 너덜거리는 소매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 조롱에 가비드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나를 너무 자극하지 마라, 인간……! 성검의 인정을 받고, 네 몸에 베르무트의 피가 짙게 흐른들……! 너는 베르무트가 아니다. 네가 베르무트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냐?”


“누가 몰라? 나는 유진 라이언하트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아니라고.”


“그 베르무트조차도 너처럼 건방지지 않았단 말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아니니까.”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대체 뭘 믿고 건방을 떠는 것이지?”


그 질문에는 아무렇게나 대답하려고 했다.


“빛의 계시가아아!”


아니스의 비명이 들렸다. 힐긋 저쪽을 보니 아니스가 4장의 날개를 펼치며 발광하고 있었다. 유진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계시.”


“……뭐?”


“못 들었냐? 계시라고. 날 인정한 성검이, 그리고 빛이, 나보고 건방 떨어도 된다더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가비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유진은 그 말을 무시하며 백염식의 힘을 성검에 집중했다.


ㅡ빠지지직! 빛의 샘 때와 똑같았다. 성검은 유진의 마나를 모조리 받아냈다. 신앙심이라고는 쥐뿔도 가지고 있지 않은 유진에게 쥐어져 있는데도, 이곳의 어둠을 모조리 밝힐 것만 같은 빛을 내뿜었다.


성검뿐만이 아니었다. 칼자루를 함께 쥐고 있는 왼손, 약지에서 욱신거림과 뜨거움이 느껴졌다. 레드 드래곤 아리아르텔에게 받은 반지. 고대의 전쟁신, 아가로트의 반지가 유진의 마나와 성검의 빛에 반응했다.


성검의 빛이 더욱 커졌다. 어둠을 밝힐 만큼 찬란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빛처럼 성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불태워 지워 버리는 전쟁의 불꽃처럼 포악했다.


‘계시?’


그 위협적인 빛이 가비드를 굳게 만들었다. 빛이 움직인다. 성검이 공간을 긋는다. 간격은 멀지 않다. 곧 덮쳐온다. 지금까지와는 공격의 격이 다르다.


빛이 덮쳐온 순간.


가비드는 본능적으로 마검 글로리를 뽑았다.


ㅡ꽈아앙!


성벽이 일각이 통째로 무너졌다. 가비드에게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허망한 얼굴로 자신의 오른손이 쥐고 있는 글로리를 쳐다보았다.


뽑아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본능을 거스르지 못했다. 저깟 검, 맨몸으로 막을 만한 격이 아니었다고 해도 맞아버리면 되었는데. 몸이 박살 나도 재생하면 되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왜? 성검의 신성력 때문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가비드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안 뽑을 것처럼 굴더니 결국 뽑았네.”


유진은 빛이 잦아든 성검을 아래로 내리면서 웃었다. 그 웃음에 가비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유진은 성검을 망토 안에 넣고서 몸을 돌렸다.


“어디를 가는 거냐.”


유진이 뒤돌아 걷기 시작하자,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었다.


그는 아직 손에 마검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마검을 뽑게 만든 인간이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등 돌려 걷고 있는 것이다.


“네가 검을 뽑았으니 그만할 거다.”


“……뭐……?”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유진은 끝까지 가비드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비드는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유진의 등을 보았다. 그리고는 아직까지 손에 쥐고 있는 마검을 쳐다보았다. 누더기와 다름없어진 제복이 보였다.


“…….”


가비드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미는 분노를 삼켰다. 당장에라도 저 등을 베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유폐의 마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런데도 글로리를 뽑아버렸다. 그 무엇보다, 유폐의 마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글로리를 뽑았다는 것이 가비드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뿌드득……!”


가비드는 아랫입술을 짓이겨 씹으면서 몸을 돌렸다. 글로리를 칼집에 넣고, 무너진 성벽을 뛰어넘었다.


더 이상 이 요새에 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 유진 라이언하트의 얼굴을 봐버리면 치욕감에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마족기사들이 안개로 제 몸을 덮었다. 검은 안개가 가비드의 뒤를 따라 성벽을 넘고, 요새를 빠져나갔다.


“깜짝 놀랐네.”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왼손을 흔들었다. 그냥 조금만 힘을 주려 했을 뿐인데, 아가로트의 반지가 멋대로 힘을 키워 버렸다. 이 전쟁신의 반지는 다른 때에는 가만히 있는데, 성검을 휘두를 때마다 멋대로 호응하곤 했다.


“유진 라이언하트!”


유진이 터덜터덜 돌아오자, 키옐의 황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헬무드의 공작을 공격하다니!”


“계시가!”


유진은 양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 커다란 외침에 황제의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됐습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이보시오, 에우리우스 성황. 전능하고 찬란하다는 빛의 신을 저렇게 변명거리로 삼아도 되는 거요?”


황제는 눈을 부릅뜨고서 교황을 돌아보았다.


“……성검의 주인은 어쩔 수 없지 않소.”


교황은 교황청 알현실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완고한 광신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으하하하!”


모론 루하르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돌발적인 웃음이었고,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론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환생한 하멜이 300년 전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즐거워, 목청이 터지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하핫!”


아만 루하르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그냥 선조인 모론이 웃으니까 따라 웃었다.


아니스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펼쳤던 날개를 조용히 접고서, 유진을 살의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시스터…….]


‘저 개새끼의 머리에 철퇴를 처박아도 신께서는 용서해 주실 겁니다.’


[저는 아직 박살 난 머리를 치료할 기적을 펼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뼈를 몇 개 부러트리도록 합시다.’


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플레일을 움켜쥐었다.


레헤인


“잘못했어.”


유진은 자기변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듣는 시늉이라도 할 테지만, 저 상태의 아니스에게는 무슨 말을 하건 소용이 없으니 잘못했다는 말이나 빠르게 뱉어두는 것이 옳았다.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는 압니까?”


아니스의 얼굴에는 3개의 곡선이 그려져 있었다.


방긋 웃는 눈. 방긋 웃는 입술. 눈웃음이 짙어 눈동자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유진의 몸을 두려움에 떨리게 만들었다. 저 감긴 눈꺼풀 너머의 눈동자가 얼마나 섬뜩하고 차가울지를 전생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흠…….”


모론이 괜히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는 남자와 전사의 의리로서 유진을 변호하고 아니스의 분노를 누그러트리는 데에 일조하고 싶었다. 그러자 아니스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고서 모론을 쳐다보았다.


“…….”


모론은 숨소리까지 참았다.


그는 전생에서 하멜 이상으로 아니스에게 시달렸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니스가 모론에게 시달렸다 해야 할 것이다. 모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식하게 앞으로 뛰쳐나갈 때마다. 아니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모론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모론이 미친 듯이 도끼와 망치를 휘두르는 것을 지켜보다가, 만약 모론의 몸에 상처라도 생기면 즉시 기적을 일으켜 모론을 치료해야만 했다.


두려워하지 않는 모론의 용기는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전장의 선두에 선 모론이 팔다리가 멀쩡히 달리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스가 모론이 죽거나 병신이 되지 않도록 기적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성흔의 고통과 스트레스와 짜증과 분노가 극에 달할 때. 아니스는 참지 않고 감정을 폭발시켰다. 그 살벌한 감정의 화살은 거의 대부분 모론과 하멜에게 향했었다. 그러니 모론은 아니스의 저런 모습이 익숙하고 반가웠다. 그렇다 해서 눈치 없이 웃어대며 아니스를 얼싸안지는 않았다. 아무리 모론이 등신이라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


모론은 계속 숨소리를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상황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무언의 주장이었다. 유진은 그런 모론에게 작은 배신감을 느꼈다.


‘끼어들지나 말지, 왜 괜히 헛기침 소리나 내면서 아니스를 자극하는 거야? 개 같은 등신.’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유진은 머뭇거리면서 아니스를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지금 셋은 탑의 최상층에 있었다. ……설원의 차가운 바람이 박살 난 창문과 벽에서 휘몰아치고 있다.


모론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이 강림했을 때. 그를 느낀 모론은 말릴 새도 없이 창문과 벽을 박살 내고 날아가 버렸다.


가비드 린드먼을 공격했을 때, 내심 뒷수습을 걱정하기는 했다. 다행히 가비드는 검은 안개를 데리고서 요새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아니스가 최선을 다해 신내림을 연기했고, 유라스의 교황이 성검과 계시를 인정했다. 모론도 유진의 어깨를 쾅쾅 두드리고 끌어안으면서 헬무드의 공작을 공격한 것을 긍정해 주었다.


덕분에 다른 왕들이 유진에게 돌발적인 행동을 따질 수 없게 되었다. 키옐의 황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수호기사인 알체스터 드라고닉마저 은근히 유진을 보호하려 들자 더 이상 유진을 압박하지 못했다.


‘그 새끼 눈깔 뜬 것 보면 언제고 다른 일로 꼬투리를 잡아댈 것 같은데. 뭐 지금은 알 바가 아니고…….’


유진에게 불만을 드러낸 것은 키옐의 황제뿐만이 아니다. 나하마의 술탄도 노골적으로 유진을 노려봤었다.


뭐 놀랄 일도 아니었다. 유폐의 삼마인 아멜리아 머윈은 대놓고 술탄과 결탁하여 힘을 보태고 있지 않은가. 그 외에도 항마연합의 총장과 시무인의 국왕이 유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는 했는데, 그 시선의 이유도 지금의 유진이 알 방법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흡.”


아니스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물었다. 눈웃음으로 감겨 있던 눈이 살짝 뜨여서 유진을 응시했다. 그 눈동자는 유진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싸늘하고 두려웠다……. 유진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하멜. 당신의 무모하고 모자라고 병신 같은 짓에 왜 제가 피해를 입어야 합니까.”


“잘못했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고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겁니까? 하멜, 당신이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과 저는 아주 오랜 인연을 맺은 사이이고,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무엇을 잘못했다는 겁니까?”


“가비드를 공격한 거…….”


“그게 왜 잘못인지 말해보십시오.”


머릿속으로는 공격의 이유가 납득이 되는데, 그것을 입 밖으로 내기에는 굉장히 힘들었다. 유진이 머뭇거리자, 아니스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치며 이죽댔다.


“거 보십시오. 하멜, 당신 스스로도 공격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당신의 공격이 굉장히 감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에게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새끼가 꼴 받게 하잖아…….”


“하멜! 지금 당신의 발언이 저를 꼴 받게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와는 달리 많이 배운 네가 꼴 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나…….”


유진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아니스의 손에 들린 플레일이 쏘아졌다. 쭉 늘어난 쇠사슬의 끝에 달린 아다만티움이 유진의 머리를 깨버릴 듯이 날아왔다. 유진은 기겁하며 머리를 꺾어 플레일을 피했다.


“왜 피하는 겁니까!”


“맞으면 죽어!”


“엄살떨지 마십시오. 그 육체가 전생의 비실비실한 몸보다 건강하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멜은 비실비실하지 않았다.”


“모론, 당신은 그냥 닥치고 계십시오. 그리고 뭐가 비실비실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하멜은 툭하면 피 흘리고 쓰러져서 절 힘들게 했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싸운 하멜은 위대한 전사였다.”


“그냥 닥치라니까요.”


아니스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쏘아붙였고, 모론은 얌전히 입술을 다물었다.


“하멜. 당신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야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넘길 수도 있을 겁니다. 300년 전에는 그래도 되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까놓고도 조금 그렇지 않나…….”


“정말 뒈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제 말을 끊지 마십시오.”


“미안해.”


“어쨌든…… 으흠, 솔직히 말해서. 300년 전에는 당신이 죽어도 베르무트 님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유진의 입꼬리가 쭈욱 내려갔다. 아무리 그래도 저 말을 본인 앞에서 말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베르무트 님이 있었으니까, 당신은 적당히 무모해도 괜찮았습니다. 당신이 무모하게 굴다가 일이 곤란해져도, 베르무트 님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뭐 저도 있고, 세냐도, 모론도 있었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멜,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요? 이 시대에서 당신은 베르무트 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한다 정말.”


“저는 당신의 생각 머리 없는 행동이 더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가비드 린드먼이 유폐의 마왕의 뜻을 어기고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어쩌려고 했던 겁니까?”


“유폐의 칼이자 기사라는 것에 자부심이 넘치는 새끼야. 그런 짓은 절대로 안 해.”


“그건 무조건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가비드를 공격해서 당신은 대체 무엇을 얻은 겁니까?”


붕붕…… 아니스가 플레일을 휘두르며 쏘아붙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매섭게 회전하는 아다만티움이 살벌한 빛을 번뜩였다. 유진은 그 궤적을 놓치지 않으며 꿀꺽 침을 삼켰다.


“여러 확신을 얻었지. 우선, 내가 바벨에 가지 않는 한 가비드와 유폐의 마왕은 내게 간섭하지 않을 거야. 그 유폐의 마왕이 바벨을 나와서 날 조질 일도 없을 거고, 가비드가 날 억지로 바벨로 끌고 갈 일도 없겠지.”


“처음부터 그걸 알아보고자 덤빈 것은 아니잖습니까?”


“아니 글쎄, 아니스, 너도 그 새끼 무릎 꿇고 있는 것 봤잖아. 머리에는 뭘 처발라서 기름이 번들거리고 자로 댄 것처럼 각져 있는데, 보고 있으니 막 걷어차고 싶고…… 아무래도 발로 차는 것보다는 검으로 썩둑 자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결국은 감정적인 이유로! 하멜!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이 개새끼와 다를 것이 뭡니까?”


“이제는 하다 하다 사람을 개새끼 취급하는군…….”


“아닙니다, 하멜. 당신은 개새끼에 가깝지만 아직 개새끼는 아닙니다. 자, 하멜, 기도합시다. 양손을 모으고 뉘우칩시다.”


아니스는 친절하게도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유진이 보는 앞에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쥐고, 경건한 표정을 하고서 두 눈을 감았다.


“제가 원하는 것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는 미래로 전해질 약속입니다. 자, 따라 하십시오. 앞으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사랑하는 아니스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시스터!]


‘원한다면 당신의 이름도 뒤에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저, 저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원하지 않는 겁니까?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빛께서는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쟁이는 천국에 갈 수도 구원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괜찮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크리스티나, 당신의 구원은 하멜과 둘이서 불꽃놀이 하나 보는 것으로 충분할 만큼 자그마합니까? 저는 아닙니다. 저는 욕심이 많으니까, 하멜과 당신이 하지 못한 많은 역사를 만들고 나서야 구원받았다 생각할 것입니다.’


[시스터! 처음과는 말씀이 다르십니다.]


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지만, 아니스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사랑하는’이란 말도 해야 해?”


“당신이 저를 싫어하고 미워한다면 빼도록 하십시오.”


“나도 아니스와 하멜을 사랑한다.”


“한 번만 더 그 주둥이를 멋대로 열었다가는……!”


“아니스 너, 솔직히 내 걱정보다는 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스러운 일을 해서 더 화가 난 거지? 그렇지?”


“알면서 뭘 묻는 겁니까? 하멜, 제 나이가 햇수로만 따지면 300살이 넘습니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까마득한 후손뻘 여럿 앞에서 날개를 펼치고, 몸을 떨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계시를 받았다고 부르짖었습니다. 당신은 가비드와 투닥거리느라 보지 못했겠지만, 제가 그러는 동안 유라스의 성직자들ㅡ 저를! 성인이라 추앙하며 제 모든 행적과 내뱉었던 말을 성경으로 배웠던 꼬마 성직자들이, 저를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 아시기나 합니까?”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스는 기도를 맺고 있던 양손으로 얼굴을 뒤덮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유진도 반발하지 않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아니스에게 너무했다 싶기는 했다. 미리 언질조차 주지 않고 가비드를 공격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앞으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사랑…… 사랑하는 아니스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굳이 두 번 말한 것은 저를 2배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제 안에서 듣고 있는 크리스티나도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말을 더듬은 거야…….”


“하멜, 당신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 같으니, 저도 사랑, 사랑하는 하멜을 용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플레일을 내려놓았다.


“유진 님은 지조 없는 새끼예요.”


메르가 망토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마치 죽어버린 것처럼 칙칙한 눈동자에 유진은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저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언젠가 세냐 님이 봉인에서 풀려나신다면, 저는 세냐 님에게 여태까지 보고 들은 모든 것과 제가 겪은 수모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드릴 거예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세냐도 양심이 있다면 저를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어째서 비난하지 못한다는 거죠?”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냐는 가슴에 구멍이 뚫리기는 해도 죽지 않았습니다. 봉인되었다뿐이지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습니까? 제 뼈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산산조각 나 성유물로 박제되었고, 제 피와 살은 후대 성녀들을 위한 거름이 되었습니다…….”


아니스는 울적한 표정을 하며 제 끔찍한 과거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러자 메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만 뻐끔거렸다.


“비록 지금은 저와 여러 적성이 맞는 크리스티나에게 깃들어 있습니다만, 제 존재가 성불하지 못한 망령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저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존재라 언제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불완전합니다. 또, 만약 크리스티나가 제 존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거부하기라도 한다면…….”


[시스터, 시스터! 저는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디 슬픈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비명이 즐거웠다.


“저는…… 수백 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라던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하고 허무히 사라져 버리겠지요. 설령 그럴지라도 저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도둑고양이 취급하는 메르 메르데인 당신도, 제 행적을 비난할 세냐도, 저를 붙잡지 못한 하멜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흙은 흙으로, 먼지는 먼지로. 그 말대로, 저는 흙과 먼지로 돌아가 하늘에서 제가 사랑했던 이들의 행복과 안식과 성원을 기도할 것입니다.”


아니스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의도적으로 말을 한 번 멈추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제 존재가 망령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저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모론이 굵은 눈물방울을 쏟았다. 메르도 코를 훌쩍거렸다. 유진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아니스에게 다가오더니, 양팔을 벌려 아니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망토 안의 메르도 몸을 삐죽 내밀고서 아니스에게 매달렸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스 님은 심술궂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셔요. 저도 아니스 님을 사랑…… 사랑해요.”


“나도 아니스를 사랑한다.”


모론도 울면서 그 거대한 팔로 아니스와 유진과 메르를 한 번에 끌어안았다.


그 여러 포옹 속에서 아니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


유진은 라이언하트에게 배정된 저택의 방에서 눈을 떴다.


아니스, 아니, 크리스티나와 함께한 모론과의 대화는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지만, 의심은 받지 않았다. 300년 전에 마왕과 맞섰던 대영웅, 용감한 모론이 지금 시대의 용사와 성녀에게 조언을 해주겠다는데 누가 의심하겠는가?


거기에 모론은 잠도 자지 않고, 나이트마치에 참가한 라이언하트 전원을 아침 일찍부터 초대했다. 친구,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들에게도 조언과 덕담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 등신이 괜한 말은 하지 않겠지…….’


새벽부터 모론에게 당부는 해두었다.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으니, 부디부디 말조심을 하라고 말이다.


어젯밤 떠난 가비드 린드먼과 검은안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모론은 내심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성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비드가 이 넓은 설원 어딘가에서 흉계를 꾸미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가비드가 그런 짓은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부심과 충성심으로 가득 찬 놈이다. 치욕 때문에 물러갔다고는 해도, 그를 앙갚음하고자 흉계를 꾸밀 리는 없었다. 만약 가비드가 검은 안개를 몰고서 요새를 덮치기라도 한다면? 유진이 생각하기에 그건 애초에 경계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얼씨구.”


유진은 성벽에 산책을 나왔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유진의 곁에는 크리스티나도 없었다. 일단 크리스티나의 국적은 신성제국이고, 그녀의 직위는 빛의 주교이며, 모든 주교는 유라스의 광명사제단 소속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 크리스티나는 광명사제단 쪽에 가 있었다.


요새의 밖에는 나름대로 각을 잡고 훈련이 진행 중이다. 아롯의 마법병단과 나하마의 던전 계파 마법사들의 합작. 소환마법으로 불러들인 몬스터의 군세가 기사단과 격돌 중이다.


지금 몬스터를 상대 중인 것은 항마연합의 기사들이다. 그리고 그 뒤쪽에는 연합 소속 치유술사들과 유라스의 성직자들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 중이었다.


나름 열심히 하고 있기는 한데, 유진이 보기에는 그리 눈에 차지 않았다. 애당초 마물과 몬스터는 규격부터가 다르다. 그리고 마족이 내뿜는 마기에 홀린 몬스터와의 일반 몬스터의 흉포함은 비교가 되지 않으니, 저 전투 훈련은 보기에만 그럴듯할 뿐이다.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했다. 아만 루하르가 말했던 것처럼, 이 나이트마치는 대륙 대부분의 국가의 대표가 모인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특히 어제는 유폐의 마왕이 직접 왔다 가기도 했으니, 지금 요새의 성에는 왕들이 골머리를 싸매며 앞으로의 정세를 떠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기사들을 방치해 둘 수도 없으니, 일단은 훈련을 시킨다. 시답잖은 훈련이지만 다른 기사단과 전력을 비교하며 우월감은 가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사들의 헤드헌팅도 이뤄질 것이고, 모인 용병단과 전속계약을 맺거나 기사작위를 내리기도 할 것이다.


“재미없는 구경을 하는군.”


기척은 숨지 않고 다가왔다. 유진이 별 반응을 하지 않으니, 목소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멀대처럼 키가 큰 사내가 유진을 빤히 보고 있었다.


시무인 격랑 기사단 단장. 십이걸의 퍼스트.


오르투스 하이만.


레헤인


시무인의 엑시드는 오리하르콘을 통째로 써서 만든 사치스러운 마법갑옷이다. 설원에서 디오르와 스칼리아 공주가 입은 것을 봐두기는 했지만, 과연 기사단장이라고 해야 할까. 오르투스의 엑시드는 둘의 것과는 차이점이 많았다.


흉갑의 중앙에 커다랗게 새겨진 각인. 파도와 소용돌이의 물결을 형상화한 격랑 기사단의 상징. 스칼리아 공주와는 달리 왕가의 상징은 새겨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훨씬 값진 것이 소용돌이의 중앙에 박혀 있다.


엄지손가락만 한 붉은 보석. 유진은 그 보석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눈썰미가 좋아서는 아니었다. 그냥, 오르투스의 갑옷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드래곤하트.


아카샤나 블러드메리처럼 드래곤하트를 통째로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일 뿐이라도 드래곤하트는 드래곤하트. 오르투스의 엑시드는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보물이다.


그렇다 보니 저 엑시드는 오르투스의 소유물은 아니고, 시무인의 국보 중 하나였다. 시무인은 저것 외에도 드래곤하트의 일부를 사용한 여러 무기와 엑시드를 국부로 보유하고 있다.


아득히 옛날부터 시무인을 수호하던 해룡(海龍)의 유품이다.


긴 세월 동안 남해와 시무인을 수호했던 해룡이지만, 그 드래곤도 300년 전에 멸망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그 해룡은 자신이 수호하던 바다로 돌아와서 죽었고, 드래곤하트를 포함한 자신의 유해를 시무인 왕가에게 선물로 주었다.


‘드래곤의 뼈에 비늘, 일부이기는 하지만 드래곤하트까지. 대륙 최고의 갑옷이라더니, 그래 보이기는 하네.’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 유진은 솔직히 감탄을 느꼈다. 어지간한 기사가 저 갑옷을 입는다면 실력이 몇 배는 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르투스가 갑옷에 비해 실력이 떨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정확한 것들은 직접 붙어봐야 알겠지만, 오르투스의 기도는 일국 제일의 기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내 실력을 가늠하고 있는 건가.”


오르투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큰 키에 비해서 체격까지 크지는 않았는데, 그러한 모습이 오히려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어 늘어트린 앞머리와 옆머리, 피부는 창백하고 눈 밑은 다크서클이 짙다.


실력은 둘째치고 인상은 굉장히 우울해 보였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 유명한 오르투스 하이만 경과 이렇게 가까이 서게 되니, 저도 모르게 그만.”


“불쾌하지는 않네. 이름이 너무 알려진 만큼, 실력이 가늠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거든. 그래서 어떤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첫인상으로 느끼는 것보다 검을 대봐야 알게 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발로 들리는군. 아, 불쾌하지는 않네. 어제도 느낀 것이지만, 자네는 그런 성격인 듯하니.”


오르투스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 불쾌하지 않은 건가? 유진은 오르투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아. 내가 갑자기 온 것이 갑작스럽겠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내 아들과…… 스칼리아 공주님이 자네에게 신세를 졌다고 들어서 말일세.”


그 말에, 유진은 시안과 시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스칼리아 공주가 착란을 일으키고 날뛰었던 것은 몽마의 여왕의 장난 때문이지만, 그 사실을 순순히 스칼리아 공주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유진이야 어쩔 수 없다 치고 그 소동을 넘길 수 있지만, 스칼리아는 시무인의 공주다. 그런 그녀가 누아르 제벨라의 장난을 습격이라 말하며 날뛰면 일이 여러 가지로 귀찮아진다.


그래서 시안과 시엘은 스칼리아 공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했지만, 다행히도 둘이 변명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눈을 뜬 스칼리아 공주와 디오르는, 자신들이 블랙독 용병단의 뒤를 쫓고 주살하는 과정에서 독에 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정신의 착란을 일으켜 날뛰게 하는 종류의 독. 어쩌면 마법. 엑시드가 독을 해독하기는 했지만, ‘잠깐’ 착란을 일으켜 날뛰는 중에 유진 일행을 습격했다. 제압당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것 역시 누아르 제벨라의 농간이다. 환상의 마안을 쓰지 않아도 누아르의 최면은 인간의 정신을 간단하게 함락시키고 기억을 개변시킨다. 덕분에 스칼리아 공주와 디오르는 유진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공주님과 아들에게 듣기를, 착란으로 날뛰는 둘을 상처 없이 제압한 것이 자네의 재주라더군.”


“……음…… 착란 때문인지 두 분은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셨…….”


“디오르가 내 아들이라고 해서 체면을 세워 줄 필요는 없네. 나도 어제의 소동을 보았으니 말일세. 디오르가 제정신이고, 전력을 다하고, 10명으로 늘어나도 자네를 당해내지는 못할 걸세.”


오르투스가 빠른 목소리로 내뱉었다. 한순간이었지만, 디오르에 대해 말하는 오르투스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유진은 그 표정이 낯설지가 않았다.


‘극성맞은 부모는 크게 다르지도 않은 모양이군.’


뒈진 이오드에 대해 말하던 테오니스도 저것과 비슷한 표정과 눈동자를 했었다.


유진은 디오르의 사정을 얼추 짐작하면서도 의문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아들인데 저평가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칼리아 공주의 검을 받을 때의 디오르는, 유진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어도 어디서 천재 소리를 듣기에는 충분했었다.


‘아니면 아버지의 눈이 과하게 높은 건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당장 디오르는 유진보다 2살이 많다. 나이가 몇 살 많다고 해서 무조건 강해야 한다는 법도 없지만, 일국을 대표하는 기사쯤 되면 아들에게 과하고 무거운 기대를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못난 아들의 이야기는 그만두지.”


자기가 먼저 꺼낸 주제에.


“설원에서의…… 스칼리아 공주님과 내 아들의 사고 말일세. 그것은 시무인 국왕 전하께는 전하지 않았네. 스칼리아 공주님도 그를 바라지 않으셨네.”


누아르 제벨라의 입으로 스칼리아 공주의 심상을 들었다. 그녀는 격랑 기사단의 부단장이며, 주변에서 공주기사라 불리며 기사왕국 시무인의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작 스칼리아 본인의 실력은 기사왕국의 상징이 될 만큼 뛰어나지 않다. 스칼리아 공주 본인도 그 사실을 일찍이 알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 했다. 잠도 자지 않고, 열심히 수련하고,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으니 마음에 어둠이 깃들고, 누아르 제벨라에게 간단히 희롱당했다.


몽마는 그래서 질이 나쁘다. 마음에 어둠이 있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자연히 꿈에 빠져 버린다. 몽마는 그 꿈을 악의와 탐욕으로 희롱한다.


블랙독 용병단을 주살한 것은 스칼리아 공주의 독단이다. 디오르는 스칼리아의 부관으로서 그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뒤를 따랐다. 잔인한 살해수법은 평소 쌓인 스트레스에 대한 화풀이. 불면증에 잠드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면서 더더욱 스트레스가 쌓였을 테니, 손속이 거칠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


그것뿐이라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대륙 제일의 기사단을 꼽을 때 항상 이름이 오르내리는 격랑 기사단의 부단장이. 그 공주기사가. 고작 용병단을 주살하는 과정에서 독에 당하고, 착란을 일으켜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사실이 알려졌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터. 스칼리아 공주로서는 당연히 은폐하고 싶을 것이고, 그녀의 돌발행동을 허락했던 오르투스도 제 선에서 묻고 싶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르투스 경. 저는 도중에 스칼리아 공주님과 헤어졌습니다만.”


“라이언하트의 쌍둥이에게는 스칼리아 공주님이 먼저 양해를 구했다고 들었네.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다시금 부탁해 두면, 자네가 알아서 쌍둥이에게 이야기를 전해줄 것 아닌가.”


오르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성벽 밖을 힐긋 보았다. 소환한 대형몬스터의 부대가 기사들에게 쓰러지고 있었다. 오르투스는 그 모습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며 혀를 찼다.


“약소국이 모여 봤자 결국은 약소국인가.”


“예?”


“자네도 알지 않나. 저곳에서 싸우는 기사들은 항마연합의 가디언 나이츠일세. 소국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떨치던 기사들을 하나로 모아 만든 기사단이지. 숫자는 그럭저럭 많지만, 실력자는 굉장히 적어.”


오르투스의 손가락이 가디언나이츠를 가리켰다.


“저기 서 있는 사내가 보이나. 가디언나이츠의 단장인 레길라스. 실력이 어때 보이나? 내 장담하는데, 라이언하트의 백사자 기사단 중에서 저 사내가 무조건 압도할 수 있다 자신할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을 걸세.”


“으음…….”


“나로서는 자네가 망설이는 이유를 모르겠군. 백사자 기사단은 대륙 어디에서도 실력은 인정받은 기사들이 입단하기를 바라는 명문 기사단이지 않은가. 반면에 저들은 어떤가? 대단치도 않은 실력. 소국에서나 통할 실력이지. 그런 기사들이 모인 가디언나이츠는 오합지졸인 것이 당연하고.”


오르투스가 내뱉는 말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이 짙게 깔려 있었다. 유진이 뭐라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오르투스는 표정을 가다듬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추태를 보인 것 같군. 이해해 주게. 나는 기사로서 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닐세. 다만, 저들의 추태에 짜증이 나는 것이야.”


“추태라 함은?”


“나이트마치가 열린 이유. 나와 격랑 기사단과 시무인 국왕전하가, 따스한 남쪽에서 이 최북단의 대지에 온 이유가 무언가. 저 항마연합이, 헬무드의 국경선에서 별것도 아닌 힘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과연.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르투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 본인이 그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었다. 다만, 그 책임이 온전히 항마연합에만 있지는 않았다.


항마연합이 그토록 과감하게 행동했던 것은, 유라스의 성 기사단이 가디언나이츠와 함께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헬무드를 토벌하고 마왕을 죽여야 한다며 헬무드의 국경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곳에 주둔해 왔다.


“내가 더욱이 저들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은, 자기들 때문에 이 수고스러운 일을 벌였음에도…… 아무런 사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세. 약하고 뻔뻔하기까지 하니 경멸할 수밖에. 이번 나이트마치가 끝나면, 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국경에 주둔 중인 병력을 뒤로 물릴 걸세. 신성제국의 꽁무니에 숨어서 말이야. 항마연합이 사실상 신성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으니 이해는 한다만, 좋아할 수는 없네.”


“그렇습니까.”


유진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기사왕국 시무인을 대표하는 기사라서인지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이런 새끼는 별로인데.’


전생부터 유진은 기사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놈을 그리 좋아한 적이 없었다.


“강하고 뛰어난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래서 삐딱한 투로 물어보았다. 오르투스는 잠시 유진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제안을 하려고 왔네.”


“제안이라 하심은?”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 이 나이트마치는 본래의 취지 외에 여러 가지 사욕이 더해져 있네. 물론, 본래의 취지를 폄하할 생각은 없네. 유폐의 마왕이 다녀갔고, 대영웅 모론 루하르 경이 현재 이 요새에 와계시지.”


오르투스는 몸을 돌려 요새의 성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모론 경께서 라이언하트의 기사들과 대담을 갖고 계시지만, 나이트마치가 진행되는 동안 각국의 기사들도 모론 경과 대담을 가질 걸세. 대륙의 지도자들도 모론 경과 미래를 논의하실 거고. 저 훈련은 시답잖다고 생각하네만, 유폐의 마왕의 뜻을 알고 모론 경과 대담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이트마치는 가치가 있어.”


오르투스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취지를 벗어난 목적. 솔직히 말하지. 나는 자네가 시무인에 오도록 권하려 했네.”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자네가 성검의 인정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국왕전하의 사절로서 자네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려 했네. 아니, 내가 그럴 것도 없이 국왕전하가 직접 나서셨을 걸세.”


처음인 제안도 아니었다. 아롯에 있을 적에도 궁정마법사단장인 트렘펠 위자도르와 왕세자 호네인 아브람에게 이런 제안을 받았다.


유진은 라이언하트의 양자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명문가에서 양자가 가주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유진은 가주가 되기에 충분하다 못해 과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보니, 유진을 잘 모르는 이들은 가주가 될 수 없다는 형편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짐작한다. 그래서 만족스러운 조건을 제시하며 라이언하트를 버리는 것이 어떻냐고 권하는 것이다.


“성검의 인정을 받은 자네이니, 시무인이 약속할 영예에는 욕심을 갖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 나는 다른 제안을 하려 하네. 아니, 제안이라기보다는 부탁이라 해야겠군.”


“무슨 부탁입니까?”


“나찰공주 아이리스.”


오르투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이름은 자네도 잘 알리라 생각하네.”


당연히 안다. 지금 아이리스는 남해에 내려가서 해적질을 하고 있지만, 남해에 가기 전에는 키옐에서 유진을 인질로 잡고 라이언하트의 엘프들을 빼앗으려 들었다.


“설마. 그때 저와 카르멘 님이 아이리스를 죽이지 못했으니 해적이 된 거라는 소리를 하려는 겁니까?”


유진도 눈썹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지금까지는 오르투스를 적당히 존중해 줄 수 있었지만, 만약 아이리스를 죽이지 못한 책임을 지라는 둥의 개소리를 한다면? 격랑 기사단의 단장이고 퍼스트고 자시고, 오르투스는 존중할 가치가 없는 개새끼일 뿐이다.


“설마 그런 염치없는 말을 하겠나?”


다행히 오르투스는 개새끼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나찰공주가 키옐을 탈출한 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닐세. 그 유폐의 칼이나 몽마의 여왕, 마룡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찰공주도 300년 전의 전쟁에서부터 살아온 괴물 중의 괴물이 아닌가.”


“뭐 그렇죠. 지금은 초라하게 해적질이나 하는 모양이지만.”


“초라…… 하지는 않네.”


오르투스의 눈썹이 한층 더 구겨졌다.


“그녀는 너무 강한 괴물이야. 그리고 바다는 아주 넓고, 해적은 많지. 그녀는 불과 1년 만에 남해의 해적 대부분을 장악했네. 최초에 그녀는 초라한 해적선 하나만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광란의 해적선단이라며 수십 개의 해적단을 산하에 두고 있네.”


그 정도란 말인가? 유진은 눈을 끔벅거리며 오르투스를 쳐다보았다.


“세력이 늘어난 만큼 나찰공주의 노략질은 과감해졌지. 대형상단을 습격하고, 무역선을 점거하고, 아주 골치가 아파. 몇 번인가 토벌함대를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네. 그 괴물의 마안은 도망 하나는 귀신같이 잘 치거든.”


“상대해 본 입장에서 말씀드리는데, 도망칠 필요가 없는데도 도망친 겁니다. 나찰공주가 작정하고 시무인의 토벌함대와 맞섰다면 함대가 통째로 수장됐을걸요.”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해. 아마 나찰공주는 대놓고 시무인의 해상전력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야.”


“상단과 무역선을 습격하고 있으니 이미 척은 진 것 아닙니까?”


“꼭 그렇지는 않네. 그녀는 꽤나…… 융통성이 있거든. 습격하고 점거는 하지만, 모조리 약탈하지는 않아. 과한 통행료를 받고 다시 풀어주지. ……가끔 배에 엘프가 있거나, 노예로…… 이송 중이라면 강탈하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일은 아닐세. 남해에서 활동하던 강대한 해적들은 보통 그렇게 하거든. 일종의 관습이라 해야 하나…….”


“저도 대충 압니다. 통행료를 챙기고, 그 일부를 뇌물로 주고. 아닙니까? 솔직히 시무인 왕가에도 나찰공주의 뇌물이 흘러들어 온 것 같은데.”


유진의 이죽거림에 오르투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잠시 유진을 노려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의 말이 맞네. 나찰공주는 지금만큼 세력이 커지기 전부터 해군의 윗머리들에게 뇌물을 쥐여주었지. 당연히 그보다 많은 뇌물이 왕가에도 흘러들어왔네.”


상단과 무역선에 부과되는 세금 외에도 뇌물까지 받아 챙긴다. 해적에게 털린 상인들로서는 피눈물을 흘릴 일이지만, 뇌물을 받는 자들은 저런 피눈물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꼭 뇌물만을 목적으로 나찰공주를 방치한 것은 아닐세. 그녀는 강해. 시무인의 전력으로 어쩔 수 없을 만큼 말일세. 그리고 바다는 넓고, 해적은 많지. 나찰공주가 그 많은 해적들을 규합한다면, 오히려 해적들을 역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네.”


과연 그것뿐일까? 유진은 순진하게 오르투스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아마, 아니, 틀림없이. 시무인은 나찰공주를 국가의 전력으로 삼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해적질을 허용하면서 뇌물을 주고받고, 서로 원하는 거래를 해가며 교류하다가, 나찰공주를 비대칭전력으로 사용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찰공주, 아이리스 정도면 욕심을 낼 만한 전력이기는 했다. 가뜩이나 아이리스는 누아르 제벨라와의 영지전에 패배해 헬무드를 등졌다. 그러니 나찰공주를 잘 구슬려, 작위는 줄 수 없어도 왕가의 ‘부탁’을 들어줄 만큼의 관계를 쌓고 싶었던 것이리라.


‘잘되지 않은 모양이군. 당연히 그렇겠지. 그 미친년은 다크엘프의 부흥과, 뒈진 광란의 마왕의 부활을 바라고 있으니.’


“그래서. 돈독하게 잘 지내던 나찰공주가 뭐 어쨌다는 겁니까?”


“그 괴물은 이제 너무 과해졌어.”


“뇌물을 덜 주기 시작한 모양이군요.”


“……뇌물의 이야기는 그만하지. 다른 누군가가 들어서 좋을 이야기도 아니니.”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말하지 않았나. 자네에게 부탁을 하고 싶다고.”


유진이 살살 긁어대니 오르투스의 목소리에도 살짝 짜증이 실렸다.


“자네는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고, 나찰공주도 자네의 적이 아닌가? 그러니 나찰공주를 토벌할 때, 자네가 도움을 주었으면 하네.”


“용사는 자원봉사가 아닙니다.”


“……무슨 말이지?”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오르투스 경의 자유입니다만, 제가 정의감을 불태우며 무조건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찰공주는 바다를 헤집으며 악행을 벌이고 있네.”


“그 또라이를 일찍 잡지 않고 마음껏 놀라고 풀어둔 것은 시무인 아닙니까?”


“……우리의 책임이 있다는 것은 나도 아네. 그러니, 나도 나찰공주의 토벌에 참가할 걸세. 국왕 폐하도 격랑 기사단 정예를 참전시킬 뜻을 밝히셨고, 시무인이 자랑하는 해상전력이…….”


“토벌에 대함대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하려고 한다면 쪽배 하나 타고도 바다를 건널 수 있습니다. 힘만 있다면 기사단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도 나찰공주를 죽일 수 있을 거고요.”


유진이 그렇게 대답하자, 오르투스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자네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건가. 나조차도 나찰공주를 대적할 자신이 없는데?”


“꼭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오르투스 경의 이야기는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잘 알겠는데, 그렇다고 제가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용사는 자원봉사가 아니라고요.”


유진은 보란 듯이 가슴 앞에 손가락을 들었다. 검지와 엄지 끝을 붙여서 원을 만들자, 오르투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저 저속하고 세속적인 손동작은 대체 뭐란 말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잘 생각해 보니 유진 라이언하트는 어제 유폐의 마왕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세운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 음…… 구체적으로 얼마를 바라는 건가?”


“손가락으로 동전을 만들기는 했는데, 저도 돈은 많으니 돈은 필요 없습니다. 엑시드 하나 어떻습니까?”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드래곤하트 박힌 걸로. 제가 알기론 시무인의 국보 중에 드래곤하트가 박힌 엑시드가 2개는 더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건!”


오르투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다가 주변의 시선을 떠올리고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건 시무인의 국보일세. 외인에게 줄 수는 없어.”


“그럼 한 50년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싫다 하시면 어쩔 수 없죠. 나중에 나찰공주가 해적대함대를 끌고서 시무인을 침공이라도 하면…… 혹시라도 재수가 없어서 수도와 왕궁이 함락되고, 국고가 열려서, 그 소중한 국보가 나찰공주의 전리품이 되지 않을까……. 그게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뿌득…….”


유진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오르투스는 자신도 모르게 이빨을 갈았다.


이 대화를 듣는 코흘리개조차도 유진의 저 말이 놀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눈썹 사이의 골은 깊어지고, 불끈 쥔 주먹은 바들바들 떨렸다. 내뱉고 싶은 말들은 많았지만, 오르투스는 차마 그 험한 말들을 쏟아낼 수가 없었다.


유진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유진이 성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상대는 그 나찰공주 아이리스. 광란의 마왕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잡종이지만 순혈에 가까운 원초의 다크엘프다. 그런 괴물을 상대하기로 했으니 성검의 도움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거기에 유진을 토벌대에 포섭한다면, 성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도 덩달아 따라올 것 아닌가.


“……자네의 요구는…… 잘 알겠네. 그건, 내가, 국왕전하께 말씀드리고 상의하도록 하지.”


“50년이 너무 길다면 대출혈로 절반, 25년으로 합의할 용의가 있습니다.”


“말씀……! 을, 올리고, 상의가 끝나고, 다시 협상하도록 하지.”


“저는 25년에서 더 물릴 생각이 없으니, 협상은 필요 없습니다.”


오르투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홱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먼저 성벽을 휙 뛰어내렸다.


“어휴 속 시원해.”


유진은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멀어지는 오르투스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용감한 모론


그 후로 나흘이 더 지났지만, 오르투스가 유진을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직 급하지 않은가 봐.’


50년을 25년으로 줄인 것은 파격적인 제안이 아니었던가?


유진도 언젠가는 남해를 떠도는 아이리스를 찾아다 족쳐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우선순위가 많이 떨어지기는 했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헬무드의 용마성에 찾아가는 것. 그곳에 있을 라이자키아의 헤츨링을 찾아서, 가능하다면 죽여 버린다. 물론 그 전에 헤츨링을 통해서 차원 너머의 라이자키아도 찾아내야 한다.


아이리스나 다른 은원은 그다음이다. 오르투스가 부탁이랍시고 하던 말을 보면, 시무인 측에서도 아이리스르 골칫거리라 생각하되 무조건 빨리 토벌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이리스의 토벌에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바다가 너무 넓다는 것이다. 거기에 아이리스의 암전의 마안은 공격에도 큰 힘을 발휘하지만, 도망치는 것에 특화된 능력이기도 했다.


그 넓은 바다 한복판에서 아이리스가 암전의 마안을 써서 도망친다면? 유진뿐만 아니라 세상 어느 마법사도 아이리스의 도주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누아르 제벨라에 비하면 아이리스 정도면 곱게 미친 거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뺨에 달라붙은 눈을 털어냈다.


이틀 전.


모론이 요새를 떠났다. 그 등신은 복도의 벽에 ‘돌아오겠다’라는 말만 대문짝만하게 적어놨을 뿐, 유진과 아니스에게는 따로 말도 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갑자기, 늦은 밤중에 사라져버렸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모론이 갑자기 사라질 이유? 뻔하지 않은가. 레헤인야르, 대망치협곡의 너머에 누르가 나타난 것이다.


“등신.”


유진은 모론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요새에 오고서 모론은 굉장히 바빴다. 첫날밤은 유진과 아니스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유폐의 마왕이 다녀간 후로는 라이언하트를 시작해서 각국의 기사단들과 대담을 갖고, 왕들의 회의에도 참석했다.


잠깐이나마 기사들의 훈련도 참관하여 조언 비슷한 것을 해주었고, 요새에서 생활하는 바야르 부족민들과도 작은 연회를 벌였다. 아만 루하르와 하얀송곳니와도 시간을 보냈다. 이미 대담을 한번 끝냈음에도 라이언하트의 저택에 찾아와서, 라이언하트의 성을 가진 이들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모론은 길레이드와 쌍둥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 얼굴은 그리 닮지 않았지만, 길레이드의 장발이 베르무트를 떠올리게 만든 모양이었다. 쌍둥이는 모론이 어려워 쭈뼛거렸지만, 모론은 어울리지 않게도 자상한 친척 할아버지처럼 굴며 시안과 시엘의 검을 봐주었다.


ㅡ모론은 요새에서 단 한 순간도 잠들지 않았다. 누르 때문이다. 요새에서의 이틀을 바쁘게 지내면서도, 모론은 계속해서 레헤인야르를 의식했다. 언제 누르가 나타날지 모르니 때문이었다.


이틀 전, 기어코 누르가 나타난 모양이다. 그것만큼은 유진과 아니스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아침 바로 돌아왔다면 모론을 찾아가서 욕이라도 해주었을 텐데. 놈은 이틀이 꼬박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요새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유진과 아니스는 모론을 찾아, 레헤인야르를 올랐다. 괜한 걱정을 사지 않기 위해, 가주인 길레이드에게 사정도 대충이나마 설명했다. 레헤인야르에서 용감한 모론에게 시험을 받기로 했다. 급조한 설명이기는 했지만, 대영웅의 시험이라는 것은 다른 이를 납득시키기에는 충분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건 모론이 등신이기 때문이야.”


유진은 손바닥 위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그 새끼가 대담이랍시고 기사들을 모아놓고 등신처럼 굴었으니까, 다들 모론이라면 이런 일을 벌일 법도 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모론에게 말이 너무 심합니다.”


아니스가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쏘아보았다.


“모론이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여전히 등신이기는 했지만, 제 후손과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마저 등신처럼 굴지는 않았잖습니까.”


“쓸데없이 근엄해 보이기는 하더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정말로 그런가 봐.”


“하멜, 당신은 그때 이미 죽어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300년 전의 모론은 꽤 대단했습니다. 모론은 이 개척되지 않은, 북방 끝자락 혹한의 땅을 오직 완력만으로 개척한 장본인입니다. 당시 대륙 사람들은 모론을 북부의 개척왕, 기적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솔직히 모론 혼자의 힘으로 한 것도 아니라던데. 너도 유라스의 교황을 압박해서 루하르의 개국에 도움을 줬다며?”


“그건 세냐도 마찬가지였죠. 베르무트 님도 개척자금의 상당 부분을 지원해 주었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땅을 개척하고 왕국을 세운 것은 모론의 힘과 의지가 올곧았기 때문입니다.”


고평가랄 것도 없는 사실이기는 했다. 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흔들리는 불꽃을 노려보았다.


“어쨌든, 우리 둘이서 모론을 찾으러 가는 것을 납득해 준 것은 모론이라면 뜬금없는 시험을 벌일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 아냐?”


“꽤 그럴듯한 명목이기는 합니다. 100년 만에 돌아온 루하르의 시조, 300년 전의 대영웅. 살아 있는 전설인 그가, 지금 시대의 용사와 성녀를 시험한다……. 전설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사실은 멋대로 사라져버린 모론을 찾으러 가는 것이지만.”


저번처럼 에빌의 안내는 필요가 없었다. 저번에 대망치의 협곡을 떠나면서, 다음에 다시 모론을 찾으러 오기 위해 마법으로 이정표를 남겼기 때문이다. 지금 유진의 손바닥에 올려 둔 불씨가 그 이정표를 탐색하며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동하는 속도가 크게 올랐다. 저번에 왔을 때에는 에빌의 속도에 맞춰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손바닥 위의 불꽃을 꺼트리면서 고개를 높이 들었다.


시야의 끝자락. 대망치의 협곡이 아른거리고 있다. 아직 거리가 꽤 멀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이동한다면 반나절 뒤에는 저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결계인데. 어떡할 겁니까?”


“그걸 생각하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 안 그래? 우리가 이 눈보라를 가로지르는 동안, 길이 엇갈려 버려서 모론이 요새에 돌아왔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만약 그런 것이라면 모론의 턱을 갈겨 버릴 겁니다.”


“너는 턱주가리 갈겨. 나는 뒤통수를 갈길 테니까.”


“좋습니다. 하멜, 저는 잠시 들어가 있을 테니, 크리스티나가 위험하지 않도록 잘 챙겨주십시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의식이 바뀌었다. 크리스티나는 그 자리에 서서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추위에 몸을 바르르 떨면서 눈썹을 왈칵 구겼다.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시스…… 아니스 님 말입니다!”


단둘이서 나누는 대화는 꼬박꼬박 시스터를 붙이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시스터라고 부르는 것은 왠지 부끄러웠다.


[다를 게 무언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수녀들 사이에서 시스터란 호칭이 특별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아니스는 시스터라는 호칭을 ‘언니’로 멋대로 치환해서 듣고 있다. 크리스티나는 그것을 잘 알기에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만 몸을 바꿔달라 하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춥고 불편한 땅을 걷는 대부분은 제게 맡기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스 님은 참으로 심술궂게도 저와 바뀌는 순간에 추위를 막는 기적을 모조리 물려버리십니다.”


[당신이 추위에 화들짝 놀라 떠는 모습이 보기 즐겁습니다. 그리고 이건 크리스티나, 당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체 뭐가 절 위한 것이라는…….”


[갑자기 추위를 느꼈을 때, 당신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하멜을 와락 끌어안아 버리면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불만에 가득 차 육성을 내뱉던 크리스티나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당신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해버리는 것을 기대했습니다만, 제가 이리 말해버렸으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었군요. 기왕 이렇게 된 것, 다음에는 당신이 의식하여 하멜을 끌어안아 보십시오. 춥다고 끌어안으면 하멜도 당황한들 뭐라 거부하지는 않을 겁니다.]


“갑자기 왜 그래? 말을 하다 말고.”


“아…… 악마, 악마가 제 머릿속에 속삭이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서 더듬더듬 말했다.


* * *


해가 저물 시간은 진즉에 지났지만 레헤인야르에는 밤이 없다. 유진은 눈보라로 뿌연 하늘과 먼 태양을, 그 아래에 우뚝 솟은 망치 모양의 절벽을 노려보았다.


저번에 왔을 적에는, 이 근처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진도, 크리스티나도 휴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보는 대망치의 협곡은 저번에 왔을 적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아니, 본래부터 대망치의 협곡은 이런 곳이었다. 그때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던 것은 누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르가 나타났을 때와 같은 기운이 감돌지 않는다. 그 흉측한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멸망의 마왕과 닮은 불길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유진은 혀를 차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뻗었다.


“안고 뛰어야 하나?”


절벽의 아래에서,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크리스티나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망토의 틈 사이로 희번덕거리는 메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시선이 앙큼하고도 얄미워서 안겨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으흠…… 괜찮습니다.”


안기고 난 뒤에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특히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자살하고 싶을 만큼 놀려댈 것이 뻔했는데, 크리스티나는 그 놀림을 감당하고 평정심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뭔 부끄럼이 그리 많은지. 당신이 그렇게 어물쩍거리다가는 제게 많은 것을 빼앗겨 버릴 겁니다.]


‘……빼…… 빼앗기다니요?’


[저는 당신에게 빼앗을 것을 수십 가지도 떠올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제 입으로 읊기에는 너무나도 망측스럽군요.]


또 놀림이었다. 하지만 저런 종류의 놀림은 크리스티나로 하여금 발칙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바람이 쌩쌩 불어 추운데,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끈거렸다. 그녀는 헛기침으로 호흡을 고른 뒤에 빛의 날개를 펼쳤다.


절벽 위는 저번과 똑같았다. 눈만 잔뜩 쌓였을 뿐, 다른 흔적은 없다.


내심 핏자국이라도 기대했던 유진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모론과 도중에 길이 엇갈리기라도 했다면? 열 받는 것은 둘째치고, 그럴 경우에는 모론이 다시 돌아와 유진과 아니스를 찾아낼 것이다.


‘그 등신은 멀리서도 레헤인야르를 볼 수 있다고 했으니.’


유진은 잠시 동안 그 절벽 위를 맴돌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곳, 대망치의 협곡은 ‘경계’다. 누르가 세상에 모습을 보이는 최전방. 모론이 누르의 시체를 쌓는 레이헨야르의 이면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너무 잘 감춰져 있어.’


모든 마법을 이해하는 아카샤는 이미 유진의 손에 쥐어져 있다. 하지만 절벽에 숨은 마법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암실을 떠올렸다. 그곳의 마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암실을 구성하는 마법 술식의 일부는 기억하고 있었다.


“메르.”


[집중하고 있어요.]


망토 안의 메르가 곧장 대답했다.


지금 그녀는 아카샤와 의식을 링크하여, 이 공간 자체를 해석하고 있다. 아무런 단서 없이 공간을 통째로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암실에서 단서로 삼을 만한 일부를 얻어두었기 때문에 실마리가 없지는 않았다.


“깊이도 숨겨놨네.”


[그야 그렇겠죠. 저는 누르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론 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누르는 불길함을 독처럼 내뿜는다. 죽여도, 그 불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평범한 시체조차도 썩으면 시독을 내뿜는데, 불길한 독기의 덩어리인 누르의 시체가 썩는다면…… 그 시체가 100년 동안 쌓였다면. 레헤인야르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으리라.


[공간의 단절. 혹은 격리…… 그런 종류의 마법이 무엇을 최우선해야 하는지, 유진 님도 아시죠?]


‘비밀스러워야 하지.’


[네, 그리고 견고해야 해요. 바깥에서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어야 하고, 바깥에서 절대로 뚫고 들어올 수 없어야 해요. 단서도 있고, 저도 있고, 아카샤도 있으니까…… 찾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뚫고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모르겠네요.]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지.’


[……그 터무니없는 검을 사용하시려고요?]


월광검.


[그 검이라면 이 뭔지 모를…… 마법 같지 않은 마법 결계의 틈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유진 님, 그 뒤에는 어쩌시려고요? 모론 님은 마법사가 아니잖아요. 이 결계가 베르무트 님이 맡긴 힘이라면, 만에 하나지만요. 월광검으로 결계를 부쉈을 때, 그 틈을 수복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몰라요.]


‘부술 생각까지는 없어.’


유진은 망토 안의 월광검을 손으로 쥐면서 대답했다.


‘그냥 문만 두드리려는 거야. 안에 있는 모론이 결계 밖의 이변을 알아차릴 수 있게끔 말이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모론이 안에 없거나. 어쩌면 둔해빠진 등신이거나.’


그도 아니면.


유진은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솔직히 망설여집니다.”


크리스티나는 절벽을 빙빙 도는 유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돌연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유진은 다시 아니스가 육체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도 여러 번 바뀌어댄 탓에,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미묘한 억양 차이를 학습한 것이다.


“뭐가 망설여져?”


“모론은 저희에게 이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독기가 짙어서. 머리가 이상해질 수도 있어서. 병에 걸릴 수도 있어서. 그렇게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그 모론이. 잘하지도 못하는 핑계를 댄 것이다.


“이면에는 모론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 겁니다.”


“그게 뭐 어쨌다고.”


“하멜,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만. 여전히 당신은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군요.”


“아니스. 너도 모론의 눈을 봤었잖아. 이곳에서, 모론을 처음 만났을 때. 모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새 잊은 거냐.”


“그때의 모론은 모론답지 않았지요.”


“맞아, 모론답지 않았어. 험악하게 도끼를 휘둘러대며 우리를 밀어냈지. 그런 주제에, 고작 며칠 지난 후에는 등신처럼 웃으며 우릴 끌어안고, 엉엉 울고.”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300년 동안 모론은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변했지만, 우리 앞에서는 변하지 않은 것이지. 어쩌면 변한 것을 감추고 있거나. 그 이유가 내가 모르는 곳에 있고, 모론이 그걸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면. 나는 개새끼라서 모론을 배려하지 않을 거다. 모론이 왜 그러는지 내 눈으로 보고 알아야겠어.”


“개새끼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저번에 나보고 개새끼라며.”


“개새끼와 다를 것이 없다고 했지, 당신을 개새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멜,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스스로를 개새끼로 격하하는 일이라면. 당신에게 동조하는 저도 개새끼가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그 대답에 유진은 피식 웃어버렸다. 결국 아니스도 말은 저렇게 하지만, 모론을 위하고 배려하겠다며 이면으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입장은 아닌 것이다. 애당초 며칠 전에 아니스가 말하지 않았나.


-당신이 그곳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은 괴물의 시체 따위가 아닐 겁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보여주기 싫은 것이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보고 싶습니다.


아니스 슬리우드. 그녀는 저렇게나 지독한 사람이었다. 사실 아니스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유진도 마찬가지였고, 만약 이곳에 세냐가 있었다면, 세냐도 저렇게 굴었을 것이다.


온갖 일을 함께 겪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을 뻔했다. 그렇게 십수 년을 함께 떠돌았다. 헬무드에서의 여정은 모두의 여러 부분을 바꾸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은 있었다. 모론이 변했다면, 3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그를 변할 수밖에 만들었다면, 누르를 막고 있던 100년의 시간이 모론을 변하게 만들었다면.


하멜과 아니스는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알아야 했다.


“여기군.”


유진의 걸음이 멈췄다. 망토의 안에서는 메르가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과부하에 걸릴 만큼 공간을 해석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유진은 망토 안에 손을 넣어 메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음에, 저를 목마 태워주셔야 해요.]


“목마……?”


[유진 님은 이상하게 목마라는 말에 자주 반응하시네요. 저를 목마 태우는 것이 부끄러우신 건가요?]


“부끄럽지는 않은데…… 뭔가 좀 그러네…….”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메르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월광검을 꺼냈다.


“……월광검…….”


아니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저 검은 300년 전에도 그랬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산산조각이 났고, 칼자루와 파편 하나만 남았지만. 저 검이 발하는 기이한 불길함은 여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검이다. 어느 대장간에 가도 팔 것만 같은 모습의 검. 유진은 그 검의 칼집을 잡고, 천천히 뽑아냈다.


ㅡ화아악……! 창백한 달빛이 검신을 이루었다.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는 빛이었다.


월광검의 빛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멸망의 마왕과는 다른 불길함……. 정제되었지만 난폭하다. 검의 형상을 한 파멸, 그 빛이 유진의 손아귀에서 꿈틀거렸다.


결계를 부술 생각은 없다. 살짝, 두드려 볼 뿐. 그 정도 힘 조절은 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월광검을 들었다.


하지만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월광검이 빛을 뿜고, 움직인 순간. 마치 호응이라도 하듯이 결계가 활짝 열렸다. 실제로 문이 열리듯이 이면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


부유감 따위도 없었다.


마치 세상이 멋대로 바뀐 것처럼, 유진과 아니스는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아냐.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냥 멋대로 결계가…….”


모론이 먼저 느낀 건가? 아니면 베르무트의 결계가, 월광검에 반응하고 문을 연 것인가? 그건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웁…….”


아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끔찍한 것은 300년 전에도 질릴 만큼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그러한 것에 내성을 갖지 않은 크리스티나의 몸이 먼저 거부감을 느꼈다.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고, 주저앉으려는 다리를 붙잡았다.


이곳은 레헤인야르, 대망치의 협곡의 이면이다.


그렇지만 ‘바깥’과 닮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이 쌓여 있지도 않다. 눈이 내리고 있지도 않다. 발을 대고 있는 땅. 눈에 담기는 풍경. 모든 것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 풍경은ㅡ 300년 전의 헬무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던 마경. 인간에게 지옥과 다름없던 흉측하고 기괴하던 대지.


ㅡ쿵, 쿵.


구불구불 뒤틀려 있는 산봉우리가 보였다. 용암이 끓다가 굳은 것처럼 울퉁불퉁한 땅에는 피인지 뭔지 모를 자국들이 가득 번져 있다.


ㅡ쿵, 쿵.


멀지 않은 곳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유진도 아는 시체. 며칠 전에 보았던, 원숭이를 닮은 누르의 시체다. 그 시체는 참혹한 몰골이었다. ……깔끔하게, 목을 베어 죽였던 시체인데. 지금 보이는 누르는 몸 전체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ㅡ쿵, 쿵.


그리고 계속 커다란, 무거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멀고도 높은 곳에서.


용감한 모론


유진과 아니스는 누르의 시체 앞에서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시체가 왜 이런 모습이 되어 있는지. 둘은 머릿속에서 같은 상상을 하였지만,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냥 잠시 동안 감정을 추슬렀다. 쿵, 쿵. 부딪치는 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다.


메르는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 두려워 망토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평소 같았으면 유진은 메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머리라도 쓰다듬거나 손을 잡아주겠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진 본인이 불안하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두커니 서 있던 유진은 작게 혀 차는 소리를 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등신.”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유진은 누르의 시체를 넘었다. 아니스도 작은 한숨을 내쉬며 유진의 뒤를 따랐다.


흐르던 용암이 굳은 것처럼 울퉁불퉁한 땅은 걷기가 힘들었다. 어디는 단단했고, 어디는 단단하지 않아 발이 푹 들어가기도 했다. 설산, 레헤인야르의 이면인데 눈은 내리지 않고, 쌓여 있지도 않다.


어린아이가 손이 가는 대로 죽죽 그어 만든 그림 같다. 일관성이라곤 없는 기괴한 조형들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유진과 아니스는 이런 세상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이야 헬무드는 제국이라 불리고 대륙 각지에서 이민자들을 받으며 300년 전의 모습은 남지 않았지만, 과거의 헬무드는 지옥이라 불리기 마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유진은 굴곡진 경사면을 오르며 중얼거렸다.


“그 시절이 그립기라도 합니까?”


“솔직히 그립지 않다는 말도 거짓말이지.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던 시절이고, 너도 살아 있던 시절이잖아.”


아니스는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발치에 걸리는 살덩어리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본래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시체, 그 파편. 시야 곳곳에 그런 살점이 흩어져 있다.


시체를 끌고 가다가, 마구잡이로 내려찍고, 악력만으로 뜯어버리고, 집어 던졌다. 시체의 원형은 상상할 수 없지만, 시체가 왜 저런 모습이 되었는지는 상상할 수가 있었다.


유진은 구불구불한 나무 위에 걸린 내장을 쳐다보았다.


저건 썩은 건가?


잘 모르겠다. 냄새도 고약하고 색도 괴상한데, 썩어서 저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누르의 내장이 저런 모습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어가 중요한가 싶기도 했다. 이곳은 무덤이라기보다는 쓰레기장이었고,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와 그 부산물도 무덤에 ‘안치되었다’라는 표현보다는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다’라는 말이 옳았다.


살점과 내장, 피, 뼈, 그런 것들 말고도 다른 흔적은 많았다. 벽면이나 바위 등지에는 손톱으로 긁어낸 자국이 선명했다. 그림인지 글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빼곡하게 적힌 곳도 있었다.


그런 흔적들 중에서 가장 많이 보인 것은.


마구잡이로 때려 부숴댄 폭력의 잔흔이었다. 유진과 아니스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 앞으로, 위로 나아갔다. 그럴수록 흔적은 점점 거칠고 노골적이고 많아졌다. 마치 누구도 올라올 수 없게 만들고 싶은 것처럼. 어쩌면, 저 위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등신.”


이번에 그 말을 중얼거린 것은 유진이 아닌 아니스였다. 그녀는 직접 앞으로 나서서, 플레일을 휘둘러 돌무더기를 무너트렸다. 쿵, 쿵. 소리는 더 이상 멀지 않았다. 유진은 아직까지 손에 들고 있는 월광검을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잠시 망설였다. 뭐라도 새로 꺼내 손에 쥐고 있어야 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고민하지 않았다. 유진은 망토에서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주먹도 쥐지 않았다. 뒤따르던 아니스도 들고 있던 플레일을 다시 허리에 매달았다.


대신, 양손으로 목에 건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기도문을 읊었다. 쿵, 쿵. 소리는 이제 바로 앞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모론의 모습이 보였다.


이면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쿵, 쿵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놈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양손으로 땅을 짚고, 제 머리를 지면에 내리찍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땅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망토의 안에서 메르가 숨을 삼켰다. 유진과 아니스는 당장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아니, 모론이 이곳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할 때부터. 어쩌면 저런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상상했다.


유진과 아니스는 모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300년 전부터 모론은 용감했고, 뒤를 돌아보려 들지 않았고, 전사다웠다. 다른 누군가가 주저앉고 절망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나, 모론이 주저앉고 절망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모론은 언제나 전장의 선두에 섰다. 모론이 그를 자처했고,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모론에게 선봉을 맡겼다.


그래, 그 시절에는 그것이 당연했다. 모론은 용감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전사답고, 강하며, 쓰러지지 않으니까.


“야.”


유진은 조용한 목소리로 모론을 불렀다.


그는 300년이라는 시간을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다. 아니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죽어 천사가 되었지만, 죽은 뒤로 대부분의 시간은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 둘은 300년이라는 시간이 인간에게는 얼마나 길고 끔찍한지를 체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론은 다르다. 그는 300년을 살았다. 자신을 제외한 동료들이 모두 죽고, 사라진 시간을 홀로 견뎌왔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죽을 기회도 선택할 수 있었다.


선택하지 않았다. 모론은 전사답게 죽는 것을 바랐다. 자신이 생각하는, 모두가 그렇다고 여겼던 전사다운 죽음.


베르무트는 고뇌하던 모론에게 사명을 맡겼다.


모론은 그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장장 100년 동안, 정체도 알 수 없는 불길한 괴물들을 혼자 가로막았다. 대망치의 협곡을 누구도 넘지 못하도록 칙명을 내리고, 제 홀로 설산의 꼭대기를 떠돌았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누르를 경계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세상의 끝을 노려보았다. 모론은 강하다. 용감하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절망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는다.


다만 마모되었다. 수백 년의 풍파가 모론의 정신력을 마모시켰다. 그의 육체는 여전히 강건했지만, 이 공간에 잔뜩 쌓인 수백 수천 마리의 시체가. 그 시체가 내뿜는 독기가. 사랑하고 의지하던 동료들과, 후손들을 먼저 떠나보내면서 홀로 남은 현실이 모론을 갉아갔다.


죽었던 동료들이 모론의 앞에 나타났다. 모습은 수백 년 전과 다르지만 모론은 동료들을 알아보았다.


모론 자신이 스스로를 300년 전과 같은, 여전한 ‘용감한 모론’이라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죽었던 동료들과 다시 만났다면. 그들이 자신을 300년 전과 똑같이 불렀다면, 모론은 망가진 모습이 아니라 300년 전의, 모두가 기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진이 기억하는 모론은.


그런 등신이었다. 요령 따위는 부릴 줄 모르고, 무식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등신.


“등신아.”


그래서 유진은 이번에도 모론을 등신이라고 불렀다.


쿵, 쿵 거리는 소리가 뚝 멎었다. 기계처럼 바닥에 머리를 처박던 모론의 모습이 그대로 정지했다.


모론은 깊게 파인 땅에서 고개를 들었다. 바로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놈은 잠시 동안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


모론이 몸을 일으켰다. 등 돌린 모습이다. 유진은 근육이 우락부락한 모론의 등을 쳐다보았다. 흉터 따위는 하나도 없는 등. 크고 넓은 등.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등이 작아 보였다.


“뭐 어쩌라고. 늦고 빠르고의 문제지, 결국은 봐버렸을 텐데. 그새 잊어버린 거냐? 나이트마치가 끝난 뒤에, 이곳을 보여주기로 했잖아.”


“내가 보여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이 장소지, 내 추한 모습은 아니었다.”


“제가 말한 것은 잊었습니까.”


아니스의 목소리는 처음에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감정을 다잡고, 평소와 같은 미소를 억지로 만들어냈다.


“모론. 저는 당신이 보여주기 싫은 것이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소원이라는 것을 이뤄본 적이 많지 않은데, 당신 덕분에 그런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스 또한 모론의 저런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성녀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구원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결국 구원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으며, 최후의 최후에는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마저도 실패했다.


그렇기에 아니스는 사람이 어떻게 망가지고 무너지는지를 잘 알았다. 그녀는 모든 것에 자포자기해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하나 결국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신념, 사명, 그런 것들은 최후의 순간에는 저주처럼 작용해 버린다.


아니스는 자신이 그렇게 죽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야, 그녀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론은 다르다.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못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지도, 구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머리라도…… 깨졌다면, 제가 치료를 해주었을 텐데. 모론, 당신의 머리는 여전히 튼튼해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겠지요. 저야 할 일이 없어서 좋기는 합니다만.”


아니스는 모론을 동정했다. 가슴이 아팠고, 눈물도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감정은 도저히 밖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모론이 그를 바라지 않을 것만 같았고, 아니스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희는.”


모론이 툴툴 웃었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렇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아니스가 말한 대로였다. 땅이, 산이 뒤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머리를 지면에 처박았음에도 모론의 이마에는 피는커녕 작은 생채기 하나 나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얼굴은 사뭇 달랐다. 불과 며칠 전에 보았던 인상은 예전부터 알던 모론이었는데, 지금의 모론은ㅡ 대망치의 협곡에서 재회했을 때와 같았다. 싸늘하고,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눈. 세월에 풍파된 것만 같은 눈. 암실에서의 베르무트처럼ㅡ 지치고, 탁했던 눈.


“너희는…… 변하지 않았구나. 예전과 똑같아.”


모론은 그런 눈을 하고서, 유진과 아니스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 말에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한 번 죽었잖아. 특히 난, 제일 빨리 죽었으니까. 변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삶도 꽤나 비극적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하고 싶은 것 하고 술도 마음껏 마시며 살다가 자살했습니다.”


“나는.”


모론이 웃었다.


“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니까.”


“나도 안다. 300년은 길다. 하지만 나는 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고, 내가 나로서 확실해야만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베르무트의 부탁 때문에 죽지 못하고 있는 거냐.


유진이 그렇게 물었을 때, 모론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바라서 죽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사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오랜 친구의 부탁을 따르면서, 내가 사랑하는 설산과, 설원과, 내 손으로 일으킨 나라와, 세상을 지키고 있다.


-나는 추하게 늙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전사이고, 영웅답게 죽고 싶었다. 지금 내게 죽음은 머나먼 일이나, 만약 내가 힘에 부쳐 죽게 된다면.


“나는 쓰러져선 안 된다.”


-그때까지 내가 쌓았던 누르의 시체가, 전사이자 영웅이었던 내 삶을 증명할 것이다.


“이건 베르무트가 내게 맡긴 사명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에게 맡긴 부탁이다.”


베르무트가 부탁했고, 모론이 선택했다. 모론이 그를 바랐기 때문이다.


모론은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않는다. 베르무트는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누르가 무엇인지, 누르가 왜 나타나는 것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론은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용감한 모론’뿐이란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다.”


모론이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조금 어지러울 뿐이다. 너희도 느꼈겠지만, 누르의 독기는 지독하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특히 나는 놈들을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죽였다. 그래서 가끔 내 안의 여러 가지가 자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제가 되지 않아서, 이런 식으로 풀고 있는 거냐.”


“부끄럽고 추하다. 전사답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수록 나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래서 머리를 박고 있었다.”


“등신. 머리를 박으면 화가 풀리나.”


유진은 손을 쥐었다 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모론은 벙긋 웃기만 했다.


“하멜, 아니스.”


모론의 입이 열렸다. 지친 눈동자처럼 목소리도 그렇게 들렸다.


“이제 충분하지 않나.”


“뭐가.”


“하멜 너는 이곳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니스 너는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너희는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보았다.”


유진은 모론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너희가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나가게 되어도, 다시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말아라. 나는 아직…… 제대로 진정하지 못했다. 더 이상 내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모론은 유진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말아쥐어 감추고, 몸을 돌렸다.


“레헤인 요새로 돌아가 있어라. 어쩌면 또 누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나는…… 나는 이틀 뒤에 돌아가도록 하겠다.”


“그 이틀 동안, 누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까처럼 바닥에 머리를 처박아 댈 거냐.”


“내게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렇겠지. 네 몸뚱이는 쓸데없이 튼튼한 데다, 만에 하나 자해가 너무 과해서 몸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베르무트의 부탁을 따를 수 없게 될 테니.”


“나는 베르무트의 부탁 때문만으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멜. 전에도 말한 것처럼, 우리 중 누구라도 나와 같았을 거다.”


“알아. 누르인지 뭔지 하는 괴물을 내버려 둘 수 없으니, 나였어도 여기서 누르를 죽이며 살았겠지. 그러다가 도중에 못 해먹겠다 여겨서 자살했을걸.”


“그렇지는 않다, 하멜. 너는 그만큼 나약한 전사가 아니었다. 우리 중 누구도 사명을 다하지 않고 자살하려 들지는 않았을 거다.”


“그럼 미치고 망가져 갔겠지.”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모론을 쳐다보았다.


“네가 그런 것처럼.”


“……나는 미치지 않았다. 망가지지도 않았다. 진정이 잘되지 않을 뿐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너야 엄청 오래전으로 여기겠지만, 우리가 싸웠던 전장은…….”


유진은 픽 웃으며 발 앞에 있던 것을 걷어찼다. ㅡ퍼억! 압착되어 있던 누르의 머리가 유진의 발길질에 멀리 날아갔다.


“이딴, 불길하기만 한 괴물보다 더 끔찍한 놈들이 가득했으니. 이런 놈만 백 년 넘게 잡고 있으면, 무식하고 힘 넘치던 네가 만족하지 못할 법도 해. 한번 피가 끓었는데 진정이 안 될 수도 있겠다 싶어.”


“하멜, 모론은…….”


“가만히 있어, 아니스.”


유진은 아니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번득인 시선에 아니스는 한숨을 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등신들.”


아니스가 중얼거렸고,


“난 빼.”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망토 안에 오른손을 쑤셔 넣으며 시선을 높이 들었다. 아직 더 올라갈 수 있는 곳이 남아 있었다.


“야 모론. 나는 이 산의 정상에 가보고 싶은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볼 가치가 없는 곳이다.”


“그건 내가 보고 판단하는 거야.”


“하멜.”


“그러고 보니, 네 후손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라.”


루하르의 수도, 하멜른.


하멜과 모론의 동상 앞에서 난입해 온 아만 루하르는, 유진을 향해 히죽 웃으며 이런 말을 했었다.


“네가 직접 말했다던데. 300년 전에 베르무트 다음으로 힘이 센 것은 너였다고. 그러니까, 네가 나보다, 셌다고.”


“하멜.”


“생각해 보니까 나도 굉장히 궁금하더라고. 나야 베르무트랑 다니면서 몇 번 놈과는 대결했었지만, 너와는 제대로 대결해 본 적이 없었잖아.”


모론이 다시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


“그리고 아니스가 좋은 것을 보여줬었어.”


사마르 대수림에서 성검을 통해 보았던 꿈.


“너. 내 무덤에서 질질 짜면서 말했었잖아. 언젠가 나와 승부를 가리고 싶었다고. 너와 나,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전사였는지 말이야.”


“……나는, 너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하멜. 나는 널 안다. 널 인정한다. 너는 나보다 위대하고, 용감하고, 강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


유진은 고개를 기울이면서 물었다. 모론은 대답하지 않고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유진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눈은 아닌데.”


망토 안의 손이 아카샤를 쥐었다.


“괜한 짓은 하지 마라, 하멜.”


“설마 그 말을 네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유진의 백염식이 자색 불꽃을 일으켰다. 모론은 그 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유진은 모론의 눈동자에 탁하나마 빛이 깃드는 것을 보았다.


“무기는 따로 안 쓸게. 넌 친구니까.”


“하멜!”


“하지만 마법은 쓸 거다. 전생이랑 실력이 똑같지도 않으니, 그때 못 썼던 마법 정도는 써도 되잖아.”


아카샤가 유진의 시그니처를 준비했다.


“등신들.”


이미 멀찍이 물러선 아니스가 고개를 흔들며 푸념했다.


용감한 모론


모론과 싸운다.


싸워서 이긴다.


‘가능할 리가 없지.’


유진은 애초부터 자신이 승리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진 전력을 쏟아부어도 승기가 희박할 텐데, 무기도 쓰지 않고 저 모론과 싸워 승기를 본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오만이다.


‘이그니션은…… 별로 쓰고 싶지는 않은데. 상황을 봐서, 그래.’


싸워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론이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기왕이면 싸워서 이기고 싶다. 전생에, 하멜이었을 적에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300년 전. 모론이 하멜과 싸워보고 싶어 했듯, 하멜도 모론과 싸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와 사정이 너무 달라졌다. 하멜은 유진이 되었고, 모론은 300년을 살았다. 그 시간은 모론의 정신을 마모시켰지만, 놈의 무식하기 짝이 없던 힘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유진은? 무수한 가능성은 갖고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개화하지는 못했다. 유진이 평가하기에, 전력을 다한다면 전생보다 약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것을 따진다면 전생보다도 많다. 하지만 전생보다 무조건 강하다고는 평가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전성기의 하멜은 가진 능력은 다양하지 못했어도 적을 죽이는 것 하나만큼은 귀신같이 잘하던 놈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모론은 전성기의 하멜이 와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멜.”


모론이 입을 열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유진을 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싸워야 하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싸워서 무엇이 변하나?


변하는 것은 없다. 어쩌면, 하멜은 싸워서 이긴 뒤에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겼으니까 내 말을 들어라.


하멜이라면 그런 말과 행동도 굉장히 어울렸다. 하나 그것은 하멜이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 않나. 전력의 차이를 가늠하지 못할 만큼 흥분한 건가?


“이럴 의미가 없다. 나는 너와…….”


유진은 모론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망토의 안에서 아카샤를 꺼냈다. 어차피 무기는 쓰지 않기로 했으니, 망토도 아예 벗어서 뒤로 던져버렸다.


“유, 유진 님!”


이면의 독기에 뒤늦게 적응한 메르가 머리를 쏙 내밀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메르도 마찬가지였다. 메르는 망토의 아래에서 몸을 꼬물대며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두려움이 완전히 가시질 않아 머뭇거렸다.


적응이라고 해봐야 정신을 잃지 않는 정도고, 그마저도 존재의 절반 이상을 흑암의 망토의 아공간에 감추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이대로 밖에 나와 버렸다가,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에 사역마로서의 존재가 망가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등신들은 내버려 두십시오.”


아니스가 망토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망토의 틈 사이에 고개만 쏙 내민 메르를 흘깃 본 후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화아악! 신성력이 빛이 되어 아니스의 몸을 감쌌다. 그제야 메르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가, 감사해요…….”


“그렇게 말할 것은 없습니다. 메르, 당신이나 저나 등신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으니까요.”


“……아니스 님은 유진 님을 말리지 않을 건가요?”


“당신뿐만 아니라 크리스티나도 계속해서 묻고 있습니다. 왜 말리지 않냐고 말입니다. 저 등신들은 말려봤자 듣지 않습니다. 말로 해도 듣지 않으니, 확실히 말리기 위해서는 제가 저 사이에 끼어들어야 할 겁니다. 제가 왜 그런 피곤한 짓을 해야 합니까?”


아니스의 표정이 콱 구겨졌다.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지 않는 등신들은 내버려 둘 겁니다. 등신에게는 등신 나름의 해결법이 있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습니다. 한데 메르, 당신은 저를 누구로 아는 겁니까? 저 둘이 마구잡이로 싸운들, 죽지만 않으면 제가 치료해 줄 수 있습니다. 등신 같은 하멜은 절 믿고서 저러는 것일 테죠. 그래서 저는 아주 아주 짜증이 납니다. 결국 저는 저 등신들을 위해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시스터. 그러고 싶지 않으시다면, 지금이라도 두 분을 중재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크리스티나! 역시 당신은 생각이 깊지 못합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하멜은 반병신이 되어서 제게 기적을 갈구할 겁니다. 당신은 그 약해질 대로 약해진 하멜을 내려다보고 싶지 않은 겁니까? 하멜이 당신이 일으키는 기적 속에서 평온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겁니까?’


성녀가 내뱉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이나 음습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경악하였지만, 아니스가 내뱉는 말에 대하여는 도저히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시스터. 그 순간에는 저와 바꾸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 당신도 명심하십시오. 이런 순간뿐만이 아니라, 함께 즐겨야 할 상황에는 저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유대가 한층 더 깊어졌다.


뒤쪽에서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유진은 아카샤에 내장시킨 시그니처의 발동을 준비했다. 아롯에서 여러 대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창안한 시그니처.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동이 늦는 것은 아니다.


마법사 간의 대결에서는 마법의 규모, 위력, 정교함보다는 속도가 최우선이다. 최속의 시그니처라고 알려진 것은 적탑주 로베리안의 판테온. 유진의 마법스승이다.


그 로베리안의 유진의 시그니처가 가진 ‘속도’를 보증했다. 이건, 느릴 수가 없다.


대마법 특유의 어마어마한 술식은 아카샤에만 내장된 것이 아니다.


유진의 환염식은 단순히 마나의 출력만 폭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냐의 이터널 홀에서 모티브를 얻고, 서클 마법식을 백염식의 별로 대체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환염식은 이터널 홀과 마찬가지로 마법의 술식을 기록하고, 대부분의 마법을 무영창으로 펼칠 수 있게 만든다.


백염식 6성. 이제 유진의 별은 회전이 멈추지 않는다. 환염식은 백염식에 완전히 융화되었고, 진화했다.


심장에 별을 품었다. 아카샤와 별빛이 공명했다. 시그니처의 술식을 아카샤와 환염식에 나눠 담은 이유는, 이 ‘마법’ 자체를 유진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마법에 영창은 필요하지 않다. 아카샤와 환염식을 공명시키는 것만으로 즉시 마법은 펼쳐진다.


화륵!


유진의 왼쪽 어깻죽지에서 자색의 불꽃이 치솟았다. 그건 일렁대는 불길처럼, 불꽃으로 만들어진 날개처럼 보였다. 자색 불꽃의 외날개가 점점 높이 오르고, 활짝 펼쳐졌다.


“하멜. 그건 대체 뭔가?”


모론은 물러서지 않고 유진의 등 뒤에 펼쳐진 불꽃의 외날개를 보았다.


수백 년을 살기는 했지만 모론은 여전히 마법에는 문외한이었다. 하나, 지금 유진이 펼친 마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다. 저것은 얼핏 보기에는 불꽃으로 만들어진 날개였으나, 불꽃처럼 뜨거운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정교한 마나는 느꼈다. 아니, 보였다. 모론의 밝은 눈으로도 마법의 형상까지 읽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저 날개를 구성하는 불꽃이 거대하고 정교한 마나라는 것은 볼 수 있었다.


“프로미넌스.”


내뱉을 생각은 없었는데. 모론이 물어보니 유진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모론은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멋진 이름이다.”


모론은 저 불꽃에서 300년 전의 베르무트를 느꼈다. 그때엔 백염식이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베르무트가 일으키던 새하얀 불꽃도 저만큼 거대하고 밝았다. 모론의 마나도 거대하긴 하였지만, 베르무트의 불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베르무트 외에도 300년 전의 하멜을 느꼈다. 하멜의 마나는 베르무트의 불꽃처럼 거대하고 격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빈틈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만큼 정교하던 마나를, 모론은 흉내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뿌옇던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졌다. 모론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털가죽을 벗었다. 그리고는 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등 뒤로 던져버렸다.


“하멜. 나는 여전히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모론의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뚜둑, 뚜두둑. 펌핑된 것처럼 근육이 부풀고, 가뜩이나 컸던 모론의 덩치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게는 나와 싸워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다.”


용감한 모론.


그는 난발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동자는 이전처럼 탁하고 지쳐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모론의 눈동자에 깃든 선명한 빛을 보았다.


“하멜. 넌 나를 못 이긴다.”


“그건 해봐야 알지.”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등 뒤의 불꽃에서 불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깃털이 하늘을 수놓았다.


“정 이길 자신이 있다면.”


유진은 소매의 단추를 풀었다. 사실 단추 하나 푸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마, 오래지 않아서 옷은 넝마가 되어버릴 거다.


“한 대는 피하지 말고, 막지도 말고 맞아줘라.”


뻔뻔한 말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거절은 상상하지 않았다.


“좋다.”


모론은 그런 놈이다. 모론은 와보란 듯이 양팔을 벌리고 가슴을 활짝 열었다. 유진은 그 얼굴을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자색의 불꽃이 유진의 몸을 뒤덮었다.


내딛는 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모론은 막지도, 피하지도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일격이 유진에게 있어서는 최대이자 최후일지도 모르는 기회란 것이다.


모론을 이긴다. 쓰러트린다. 그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것은 안다. 하지만 유진은, 기왕이면 모론을 쓰러트리고 싶었다.


하멜이 모론보다 강하단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수백 년 동안 살면서 지치고 늙어버린 친구가 떠드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변하지 않으려고 해도 사람은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다. 수백 년을 살았다면, 더더욱 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론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용감한 모론이, 수백 년 동안 망가졌다는 것을 다시 만난 동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유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싫었다. 그래서 모론을 패고 싶다. 베르무트. 그 개새끼가 멋대로 맡긴 부탁을 사명으로 삼아,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뭔지도 모를 괴물들과 싸우던 등신을 패서, 주저앉혀서.


유진의 발이 땅을 박찼다. 그는 전력으로 가속하며,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마나의 불꽃을 주먹에 담았다. 피하지도 막지도 않겠다고 약속한 인간에게 내지르기에는 너무나도 강한 힘이다.


하지만 유진은 주저하지 않았다. 상대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다. 모론 루하르. 저 등신이 얼마나 튼튼하고 강한지를 유진이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격에 끝낼 수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 보았다. 심장? 저 두꺼운 가슴근육을 관통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머리. 턱을 노릴까? 아니면 정직하게 안면 중앙에 꽂아 넣을까.


아니.


그냥 때리고 싶은 곳을 때리기로 했다. 전력으로 휘두른 주먹을 허공에서 꺾어, 모론의 뺨에 처박았다.


사람을 때리는 것 같은 감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을 그대로 밀어 넣었는데, 모론의 고개를 조금도 옆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광대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도 당연히 들리지 않았다. 꽈드득! 소리는 뒤늦게 따라왔다. 모론의 몸을 부수지 못한 불꽃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괴물새끼.’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즉시 마나를 터트렸다. 연달아 터진 폭발이 모론의 몸을 집어삼켰다. 유진은 폭발을 반동 삼아 뒤로 물러섰다.


“한 대라고 했지 않나. 하멜.”


불꽃 속에서 모론은 우뚝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부릅뜬 눈동자에서 빛이 뿜어졌다.


화아악! 모론이 고개를 한 번 흔들자, 그의 몸을 삼키고 있던 불꽃이 모조리 흩어졌다. 쿠웅! 모론이 걷기 시작했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오른팔이 옆으로 들렸다. 굵직한 손가락이 말리며 주먹이 되었다.


그것뿐인데도, 유진의 시야에서 모론은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모론 외에 다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모론이 발하는 존재감은 거대했다.


“너는 피해도 된다.”


모론이 말했다. 평소의 유진이라면, 저런 말을 들어버리면 오히려 피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깟 자존심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막으면 방어한 채로 부서질 거다. 그러니 피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다. 어떻게, 어디로, 어느 순간에?


유진은 그것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모론이 주먹을 던졌다.


직감했던 대로 주먹에 실린 힘은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유진은 정면부터 부숴오는 거대한 힘을 느끼고서 전율했다.


ㅡ콰아아앙!


힘이 지면을 휩쓸었다.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힘이 허공을 꿰뚫고, 그 궤도에 있던 봉우리를 통째로 소멸시켰다. 그 광경을 돌아본 메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런 걸 맞으면 죽을 겁니다……!]


크리스티나도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니스는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모론의 정신이 아주 맛이 간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모론 님은 유진 님을 죽이려고 했어요!”


“죽이려고 했다면 저것보다 세게 주먹을 뻗었을 겁니다. 손대중까지 해준 주먹을 피하지 못한다면 하멜이 등신인 겁니다.”


고작 주먹 한번 뻗어서 산봉우리를 지워 버렸는데, 그게 손대중을 한 것이라고? 메르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사라진 산봉우리를 쳐다보았다.


ㅡ눈을 몇 번 깜박거리자, 틀림없이 사라졌던 산봉우리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베르무트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격리공간이다.


모론은 뻗은 주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은 주먹에 휩쓸리지 않았다.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어떻게 피했는지를 모르겠다. 몸을 움직여서? 그랬다면 모론이 놓쳤을 리가 없다.


마법은…… 쓰겠다고 했다. 모론도 블링크가 어떤 마법인지는 안다. 주먹에 휩쓸리기 직전, 블링크로 벗어났나?


‘이상하군.’


모론은 뻗고 있던 주먹을 접었다.


정면에서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지는 되었다. 이 넓은 공간. 하멜의 기척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 속도는 모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복잡했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은 그 하나하나가 공간좌표를 대체한다.


그렇기에 블링크에 필요한 시야와 좌표는 필요하지 않다. 블링크 순간에 반드시 보일 수밖에 없는 공간의 일그러짐도 깃털을 이루는 마나의 불꽃으로 감춘다.


공간이 넓을수록, 프로미넌스의 도약지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흩날리는 깃털은 계속해서 떠돌기에 상대는 도약지점을 예측할 수가 없다.


프로미넌스는 상대에게 파고들 무한한 길을 만든다.


눈동자가 뻐근하고 머리가 욱신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유진의 정신은 수많은 깃털과 링크되어 있다.


덕분에 유진은 그 어떤 방향에서도 모론을 포착할 수가 있었다. 모론의 등 뒤에서도 모론의 정면을 볼 수 있다. 그건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는 달리, 머릿속에 직접 새겨지는 정보다. 단순히 육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 뿐만 아니라, ‘마나’ 자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하는지가 보인다.


무식하고 거대한 힘이 움직인다. 모론은 유진을 추격하고 예측하는 것을 포기했다. 애당초 그런 것은 모론의 장기도 아니거니와, 선호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에 나타날지 모른다? 언제 덮쳐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부 휩쓸어 버리면 된다.


모론의 양 주먹이 높이 들렸다. 그가 무엇을 할지 이해한 아니스는 표정을 왈칵 구기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눈부신 빛의 결계가 아니스를 수호했다.


모론이 높이 들었던 주먹을 내리찍었다. 그 순간, 유진은 조금 멀리 떨어진 하늘에 있었다. 그곳에 흩날리던 깃털이 유진을 위한 발판이었다.


주먹이 떨어지며, 힘이 폭발을 일으켰다. 지면을 휩쓸었던 힘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렇게 모론은 자신이 감지하는 공간 전체를 힘으로 뒤덮었다.


그 거대한 폭풍 속에서 프로미넌스의 깃털은 당장에라도 휩쓸려 사라질 것처럼 떠돌았다. 하지만 끝내 사라지지는 않았다. 깃털 전부를 지워버리면 된다는 것이 프로미넌스의 뻔한 공략법이니, 구상 단계부터 그것에 대비했다. 힘이 힘이다 보니 오래 버티기는 힘들다.


잠깐이나마 버티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진의 의지에 따라 수많은 깃털들이 움직였다. 하늘까지 치솟은 힘이 유진을 덮치기 직전ㅡ 깃털을 구성하는 불씨가 강렬히 타올랐다. 자색의 불꽃이 서로 달라붙었다.


그렇게 검게 물든 태양이 태어났다.


이클립스.


모론은 이번에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먹을 내리찍고, 폭발이 터지고…… 그것까지는 모론이 주도한 것이었으나, 그 안에서 나타난 흑점(黑點)은 모론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작았다. 아주 작은, 검은 점이었다. 그런데도 이 무슨 위력이란 말인가? 모론은 지금ㅡ 흑점, 이클립스가 터트린 폭발에 휘말려 공중을 날고 있었다.


“……하!”


모론은 거무죽죽한 하늘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허공에 누운 몸을 일으키는 대신, 양팔을 활짝 펼쳤다.


“으하하하!”


불꽃의 깃털이 떠돈다. 번개가 흐른다. 연이은 공간도약에 뇌광의 가속이 더해졌다. 자색의 불꽃과 번개가 하늘을 불태우고 있다.


그 모든 것을 끌고서, 유진은 모론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꽈지지직!


모론의 몸이 지면에 내리꽂혔다.


용감한 모론


이클립스는 마나를 초고밀도로 응축시킨 뒤, 환염식이 그러하듯이 내부에서 무수한 폭발을 유도한다. 그렇게 만든 작은 태양에 공검을 접목시켰다. 표면의 코팅이 중첩될수록, 태양 내부의 폭발은 점점 강해진다.


폭발이 쌓일수록 태양의 형상으로 묶인 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태양에 흑점이 번지며, 점점 검게 물들어간다. 태양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을 때가 이클립스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프로미넌스에서 파생되는 무수한 깃털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가장 중요하고 중심 된 기능은 좌표. 그 좌표는 오직 유진의 마나에만 반응한다.


그렇기에 ‘도약’은 블링크보다 훨씬 빠르다. 외날개 프로미넌스는 사령탑. 흩뿌려 놓은 수많은 깃털들은 프로미넌스의 신호에만 반응한다. 바란 순간, 유진은 뿌려놓은 깃털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


좌표로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깃털은 유진의 또 다른 눈이자 감각이 되어 공간을 관측한다. 눈으로 좇지 못할 만큼 빠른 상대라도, 수십 수백 개의 눈이라면 좇을 수 있다. 상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더라도 프로미넌스를 펼치면 그 모든 숫자를 포착할 수 있다.


프로미넌스에게 여러 가지 기능이 더해진 것은, 이 날개와 깃털과 마법 자체가 철저하게 전투의 보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진이 가진 마나 자체가 보통의 마나와는 현격히 다른 덕이기도 했다.


마나에 녹아든 번개불꽃과 세계수의 정령. 그 모든 것이 유진의 마나를 마치 거대한 유기체처럼 만들었다. 그러한 성질을 갖게 된 마나에 유진의 지배력과 조작력이 더해져 초고속의 도약을 가능하게 만든다.


깃털의 본질은 유진의 마나.


그렇기에 이런 것도 가능하다. 유진은 땅에 처박힌 모론을 내려다보며 양팔을 위로 들었다.


화르륵! 프로미넌스가 흩뿌리는 깃털이 유진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깃털과 깃털이 서로 결합하면서 무수히 많은 별이 만들어졌다.


아니, 그것은 별이 아니라 태양이었다. 유진이 직접 펼치는 이클립스와는 위력의 차이가 크지만, 프로미넌스로 펼치는 이클립스는 약식이면서 빠르다.


수십 개의 흑점이 아래로 쏟아졌다. 땅속 깊이 파묻힌 모론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이었다. 꽈과광! 산이 통째로 흔들렸, 아니,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끝낼 수 있다면.’


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서 마나를 조작했다. 프로미넌스가 펄럭일 때마다 깃털이 흩날리고, 깃털이 뭉쳐 흑점이 되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높이 들어 올린 양 손바닥 사이에서 불꽃이 뭉쳤다. 프로미넌스를 통해 흑점을 폭격하는 대신, 직접 백염식을 주관하여 흑점을 만들려 했다.


태양이 검게 물들기 전. 폭격 불러일으킨 마나의 폭풍이, 물을 끼얹은 것처럼 푹 꺼져 버렸다. 통째로 붕괴한 산과 함께 저 아래로 떨어졌던 모론이 몸을 일으킨 것이다.


“으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유진은 오싹 소름이 돋아 이클립스의 형성을 멈췄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어버리면 저 무식한 등신에게 휘말려 버린다.


“하하, 하하하! 으하하!”


모론은 계속해서 웃었다. 그 거구에는 여전히 상처는 없었지만, 너무 아래로 처박혔던 탓에 흙먼지로 꾀죄죄했다. 다시 뛰어올라 뻗었던 주먹은 유진의 그림자도 붙잡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당했음에도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한 것이 화가 날 법도 한데, 모론은 단지 너무 즐거워서 계속해서 웃어댔다.


“정말 빠르구나! 하멜!”


꽈광! 모론의 코앞에서 흑점이 폭발했다. 하지만 모론은 고개를 뒤로 젖히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폭발에 박치기를 하듯이 머리를 뻗으며 양손을 활짝 펼쳤다.


“지금의 너는 이그니션을 쓴 것도 아닐 테지. 그렇다면 여기서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건가?”


쾅, 쾅, 쾅! 폭발이 연이어 터졌다.


모론은 멈추지 않았다. 프로미넌스가 흩뿌린 수십 수백 개의 깃털이 눈이 되어 모론의 모습을 보았다. 놈의 팔 근육이 부풀고, 혈관이 꿈틀거리고, 저 거체를 안에서부터 찢어발길 것만 같은 힘이 어디를 노리는지. 모론의 두 눈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를 보았다.


“나로서는 널 쫓기 힘들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모론은 어릴 적부터 이 드넓은 산을 오르내리고 저 아래의 설원을 뛰어다녔다. 발이 느리던 시절부터 짐승과 몬스터를 사냥했다. 사냥이란, 추격하고 사로잡는 것이다.


대전사를 자부하던 모론은 바야르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사냥감의 발이 제아무리 빠른들, 모론은 기어코 사냥을 성공시켰다. 그가 하던 사냥은 사냥감의 목숨 따위는 배려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사냥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모론은 깔끔하게 유진을 쫓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니 쫓지 않고 잡겠다.”


모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꿈틀거리던 손가락이 텅 빈 허공을 움켜쥐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다. 모론은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법 같은 것은 쓸 줄 모른다. 이 공간처럼 베르무트가 사명과 함께 쥐여준 특별한 선물 따위도 아니었다.


그냥.


무식하고 말도 안 되는 힘으로 일으킨, 마법에 한없이 가까운 개변이었다. 지금 모론의 손가락은 공간 자체를 움켜쥐었다. 공간에 구멍을 내는 것, 그것은 특별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충분한 힘을 한점에 집중시켜 쏘아낸다면 공간을 관통할 수 있다.


지금 모론이 하는 것은 그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현상이다. 모론의 악력에 공간축이 움직였다. 그는 오직 완력만으로 이 공간을 제 손바닥으로 틀어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어당겼다.


“미친.”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유진은 지금에 알맞은 대처법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유진이 날고 기고 빠르게 움직인들, 그 모든 움직임은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붙들린’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흩날리던 깃털들도 모조리 정지했다.


그리고 끌려간다. 모론의 힘이 하나의 법칙이 되어, 인력이 끌어당기듯이 붙잡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끌어당기고 있다.


처음에는 느리게, 점점 빠르게. 당겨지는 속도는 변하지 않으나,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힘이 강하다는 것은 처음과 똑같았다.


모론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공간을 계속해서 끌어당기며, 보란 듯이 유진에게 주먹을 겨누었다. 유진은, 자신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순간에 저 주먹이 뻗어질 것을 확신했다.


“개새끼.”


유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백염식을 전력으로 운용했다. 그에 호응하듯이 프로미넌스가 빛을 내뿜었다.


ㅡ조금 아쉽기는 했다. 이 공간은 레헤인야르의 이면. 그렇다 보니 대기 중의 마나는 희박하고, 원시정령은 아예 존재하지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최초에 구상했던 대로 프로미넌스의 위력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내게 최적인 조건에서 싸웠어도 승산은 희박했겠지만.’


강구할 수 있는 여러 수단이 봉쇄당한 것을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르게 쓸 수밖에.


유진의 손가락 사이에 불꽃과 번개가 얽혔다.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주 작은 점. 불씨가 산소를 잡아먹고 크기를 키우듯, 전류가 하나로 모여 거대한 번개가 되듯. 유진의 손바닥 사이의 태양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클립스는 암실에서 썼을 때와 격이 다르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만들어낸 흑점이 유진의 주변을 떠돌았다.


“음.”


모론이 그 힘을 가늠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놈의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흔들렸다. 꽉 말아 쥔 주먹에 힘이 깃든다. 아까 유진이 피하는 것 외에 방책이 없다고 판단했던 주먹이 가벼운 인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계속해서 모론과의 간격이 가까워진다. 이제는 언제 주먹이 뻗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먼저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유진은 필사적으로 그 욕망을 억눌렀다.


서로의 거리가 딱 알맞게 좁혀졌을 때.


모론이 웃으며 주먹을 뻗었다. 세상 전체를 뒤덮어 버릴 것처럼 커다랗게 보이는 주먹이 다가왔다. 유진도 오차 없이 이클립스를 완성했다. 유진이 던진 이클립스와 모론의 주먹이 먼저 충돌했다.


찰나의 순간일 테지만, 유진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이클립스를 구성하던 거대한 힘이 폭발로 승화된다. 모론의 주먹이 그 폭발을 통째로 덮친다. 한순간, 모론의 주먹이 뒤로 밀려난다. 그 순간에 유진을 호위하듯 떠다니던 흑점들이 쏘아졌다. 기세를 잡은 순간에 밀어붙여 침몰시킬 생각이었다.


뚜둑.


그런 소리를 들었다. 모론에게서, 손가락 뼈마디에서, 근육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주먹을 뻗던 자세가 살짝 바뀌었다. 무엇이 달라졌나 했더니, 별것도 아닌 변화였다. 발을 조금 더 앞으로, 체중을 싣고, 근육을 당기고. 허접하게 주먹만 뻗는 자세에서, 본격적으로 ‘때리는’ 자세가 된 것뿐이다.


자세를 바꾼 것만으로도 주먹의 무게가 달라진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의 모론이 그냥 주먹을 뻗었다면, 지금은 때리는 자세가 되었다.


이클립스가 터진다. 곧바로 소멸했다. 정교하고 강력히 결속된 마나지만, 모론의 무식하기 짝이 없는 힘에는 버티지 못했다.


죽는다.


ㅡ화아악!


유진이 그 감각을 떠올린 순간. 이 몸을 당연하게 터트려 부술 것만 같던 주먹이 유진의 코앞에서 멈췄다. 그 거대한 힘은 한순간 사라지고, 대신에 바람만이 유진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이제 되었나, 하멜.”


모론은 주먹을 그대로 뻗은 상태로 말했다.


“저 등신.”


멀찍이서 보고 있던 아니스의 얼굴이 참혹히 구겨졌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모론의 주먹과, 그 너머에 보이는 모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심적인 충격, 불어 닥친 바람, 그따위 이유들로 멍하니 벌리고 있는 입술을 닫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는 강하다. 하지만 내가 더 강하다. 나는 300년 전보다 강해졌다. 그러니 너는 날 이길 수가 없다.”


“…….”


“하멜. 네가 왜 나랑 싸우려 드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내가 변해 버렸음에 화가 나는 건가. 너는 예전부터 거칠면서 마음이 착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이러는 것은 날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


“너와 싸우면서, 나는 과거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다. 내게 주어진 사명을 되새겼다. 나의 수백 년은 의미가 있었다. 너와, 아니스와 다시 만났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야.”


뒤늦게야 유진의 입술이 닫혔다. 바람에 곤두섰던 머리카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유진은 울렁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동자가 욱신거렸다.


“너 미쳤냐?”


방금.


모론은 주먹을 아예 멈췄다. 유진을 때리지 않았다. 때리면 죽일 것 같아서? 고마운 배려다만 속이 뒤집혔다. 최소한, ‘죽지 않을 만큼’ 정도로만 힘을 줄였어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거다.


유진이 정말로 정말로 열이 받는 것은, 모론이 아예 주먹의 힘을 거둬 버렸다는 것이다.


유진은 모론보다 약하다. 그것을 실감시키고 싶다면, 방법은 어렵지 않다. 유진이 싸우지 못할 만큼, 더는 덤빌 수 없을 만큼 때려눕히면 되는 것이다.


유진은 모론이라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누구든 동정하지 않는다. 승리와 패배를 분명히 납득시켜야 한다. 모론이 말하는 전사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었다.


“네가 날 봐준 거야?”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격렬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가 모론이라서…….


“나를?”


사실 꼭 모론이라서 분노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성이란 것은 한 번 죽고 환생해도 바뀌지 않는 법이라, 유진은 이런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주먹을 날렸으면 못해도 코피 정도는 쏟게 해야지, 바로 앞에서 멈춰놓고ㅡ 뭐? 이제 되었냐고? 더 할 필요는 없다고? 이길 수 없다고?


“하멜. 뭔가 오해를…….”


오해? 들을 것도 없는 말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유진은 여전히 울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불쾌감과 짜증과 분노로 울렁대던 심장에 거센 고동이 더해졌다.


멀찍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아니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론도 움찔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300년 전부터 하멜과 함께 싸웠던 그 2명이, 지금 유진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를 리가 없었다.


손가락이 심장을 어루만지고, 회전하던 코어가 폭주를 시작했다. 이그니션. 하지만 전과는 다르다. 백염식 6성의 이그니션이 얼마나 폭발적일지, 그건 유진 스스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좋지 않은가. 어지간해서는 전력을 쏟아낼 수가 없는데, 상대가 모론이라면 죽일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자색의 불꽃이 유진을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프로미넌스의 외날개가 더욱 높고 커다래져 솟구쳤다.


모론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격렬히 타오르는 마나의 불꽃. 그보다 훨씬 격렬한 안광을 보았다. 모론은 여전히 앞으로 뻗고 있던 주먹을 뒤늦게 내렸다. 하나 주먹을 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고, 불끈 쥔 주먹을 다시 들어 격투자세를 취했다.


유진은 터져 버릴 것만큼 힘이 넘치는 몸을 앞으로 이끌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잘못됐던 거다. 그 등신 같은 모론을 상대로 프로미넌스의 공간도약이나 흑점폭격 같은 기교 위주의 전투를 벌인다고? 모론은 그런 전투에 능하지도 않은 데다 파고들 틈이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등신이다.


그러니까.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론과의 싸움은 이것이 어울린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일제히 연소되었다. 최속의 뇌광이 유진의 몸을 순식간에 앞으로 밀어냈다. 이클립스만큼 정교하지는 않아도, 검강을 중첩시킨 공검이 유진의 주먹에 깃들었다.


꽈지직! 유진이 날린 주먹이 모론의 뺨에 처박혔다. 아까까지의 공격은 모론을 조금도 움직이게 하지 못했으나, 이그니션을 펼친 덕인지 모론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퉷.”


입안에 상처가 났다. 모론은 반사적으로 피를 뱉고, 잠시 굳었다.


피를 흘린 것이 얼마 만이던가? 그를 생각했을 때, 모론의 머리는 더 이상 뿌옇지 않았다. 그는 300년 전과 같은 기분을 느꼈고, 지쳤던 눈동자에도 젊은 시절과 같은 빛이 켜졌다. 꽈드득! 모론은 피의 맛이 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날렸다.


유진을 때리기 위한 주먹이었다. 놓치지 않았다. 유진은 의식을 극한으로 집중하고서 모론의 주먹을 받아냈다. 정면으로 받아넘길 만한 힘이 아니었다. ‘흘려내는’ 것은 전생부터 잘하던 것이지만, 이 정도의 힘은 아무리 잘 흘려내도 뼈를 울린다.


‘하지만 받아낼 수 있어.’


아까처럼 죽음을 실감할 정도는 아니다. 일격 일격이 몸을 박살 내는 것만 같지만, 직격당하지만 않으면 버틸 수 있다.


난타전이 시작되었다.


이렇게까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얼마 만일까? 수백 년 동안 이렇게 주먹을 휘둘렀던 적은 없었다. 누르는 불길한 존재지만, 결코 모론이 전력을 다할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주먹 한 번, 도끼 한 번, 그 정도면 죽일 수 있다.


욕망이 끓을 때마다 제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바닥을 긁고,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다 허무했다.


지금은?


모론은 지금 휘두르는 주먹에 전력을 싣지 않았음을 안다. 아무리 그래도,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이그니션을 펼친 하멜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모론의 전력을 받아내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거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주먹이 무겁게 느껴졌다. 전력을 쏟지 않았는데 가슴이 답답하지 않았다. 힘 외에 다른 것이 주먹에 담겼기 때문이다. 그건 모론 스스로도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커다란 감정은 알 수 있었다.


아마 그건 고독일 것이다. 수백 년의 고독이, 주먹에 담겨서, 고독하지 않던 시절의 벗에게 향하고 있다.


주먹이 오고 간다. 그것뿐인데도 모론의 가슴은 그 어느 때와 비할 데 없는 충실함을 느꼈다.


“푸핫.”


연거푸 얻어맞은 코에서 피가 뿜어졌다. 모론은 코피도 닦지 않고서 웃었다.


쿠웅! 헐떡이는 호흡이 다가왔다. 유진의 주먹이 모론의 명치에 꽂혔으나, 모론의 몸은 아주 살짝 들썩거리고 말았다.


“왜 그러나! 하멜!”


모론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확히 명치를 노렸는데도 그의 호흡은 멀쩡했다. 하지만 유진의 호흡은 엉망이었다. 처음에 그토록 격렬했던 불꽃도, 어느새 처음만 못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쩌억! 모론이 휘둘러 친 손바닥이 유진의 어깨를 갈겼다. 최대한 힘을 흘려냈다. 불꽃을 방어로 만들었다. 그것이 통째로 박살 났다. 유진의 뼈마디도 박살 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왼팔은 더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봐라, 하멜!”


모론이 껄껄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유진의 머리 위로 주먹이 떨어졌다. 유진은 정신이 아찔했지만 급한 대로 대응했다.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모조리 움직여 유진의 머리 위를 가로막았다. 유진 본인도 오른팔을 들어 주먹을 막을 준비를 했다.


꽈지직! 깃털은 소멸했고, 오른팔은 부러졌다. 채 분산시키지 못한 힘이 유진의 몸에 내리꽂혀,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내가 이겼다!”


모론이 말하는 승리는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진심으로 즐겁게 웃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외쳤다.


유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양팔은 부러졌다. 다리도 맛이 갔다. 그 외에도 자잘한 골절에 내장도 상했다. 그뿐인가? 슬슬 이그니션이 끝나가고 있다.


막무가내의 난타전.


그것에서 유진이 모론을 이기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는 것이다. 전생의 하멜도 모론과 난타전을 했다면 무조건 졌을 거다.


“그래 이 개새끼야.”


유진은 전신의 격통과 울분을 참고서 내뱉었다.


“300살 처먹고 21살 이기니까 좋냐?”


“응?”


“좋냐고 시X.”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멜. 싸움을 건 것은 너였지 않은가.”


“좋냐고!”


유진은 버럭버럭 고함만 질렀다.


용감한 모론


“좋냐니…….”


모론은 두 눈을 끔벅거리면서 머뭇거렸다. 지금 어떠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기는 한데, 그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가 고민되었다.


모론이 그런 고민에 빠진 동안, 아니스는 얇게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쏘아보았다.


“저 얼마나 한심하고 부끄럽고 추한지……!”


메르는 어지간해서는 유진의 편을 들고 싶었지만, 지금 아니스의 말에는 열렬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멋대로 이곳에 쳐들어온 것이 누구였나?


유진이다.


싸우기 싫다는 모론에게 싸우자고 졸라댄 것은?


유진이다.


한번 끝났던 싸움을 잔뜩 흥분하여 다시 시작한 것은?


유진이다.


전부 다 유진이 벌인 일이었다. 이그니션까지 썼고, 졌다. 저렇게까지 완벽하게 졌으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라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지, 대체 뭘 잘했다고 저렇게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대나? 그래서 메르는 아니스에게 동조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리스티나도 조금은 그렇게 느꼈다. 빛의 샘 이후로 유진에게 흠뻑 빠져, 유진이 하는 모든 것을 의미 있고 고결하고 아름답고 멋지게 보는 크리스티나지만, 지금 땅에 무릎 꿇고 코피를 철철 흘리면서, 이기니까 좋냐고 빽빽 외쳐대는 유진은 솔직히 보기 추했다.


“……음…….”


모론은 여전히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슬슬 감정의 실체를 알았다.


좋냐고? 당연히 좋다. 전생과는 다르다고 해도 상대는 바로 하멜이다. 그 하멜과 이렇게 싸워보는 것도 즐겁고, 이그니션까지 썼는데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한 것도 즐겁다.


하지만 모론은 차마 좋다, 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광기가 싹 가신 머리로 생각해 보니, 좋다고 대답해 버리면 이번에는 하멜에게 광기가 깃들 것이 분명했다.


모론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린 순간.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프로미넌스가 불을 뿜었다. 공중에서 마나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팔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근육과 신경이 아닌 마나를 사용하면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가능했다.


당장 낼 수 있는 최속. 유진의 몸이 한줄기 번개가 되었다. 그는 부러진 팔을 들었고, 주먹에 불꽃의 탄두를 실었다. 그렇게 모론의 턱을 노렸지만ㅡ


뻐억!


주먹과 주먹이 교차되었다. 서로의 팔 길이가 엇비슷했다면 마무리로 삼기에 아름다운 크로스카운터가 완성될 수도 있었겠지만, 유진과 모론은 팔길이가 너무나도 심하게 차이가 났다.


유진 혼자 주먹에 얻어맞았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론이 주먹을 때리지 않고 유진의 앞을 가로막기만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유진은 모론의 턱을 노리고 사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어쩔 도리 없는 길이의 차이 때문에 닿지도 못했다.


“……끄륵.”


모론의 주먹은 유진의 머리뼈만큼이나 크다. 그렇다 보니 주먹에 가로막혔다기보다는 커다란 바위에 얼굴부터 처박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맙소사…….”


대답 직전의 기습. 심지어 성공하지도 못했다. 유진의 속도가 오히려 카운터가 되어 안면에 꽂혔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던지라 피하지도 못했다.


유진은 코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뒤로 넘어갔고, 그 처참한 모습에 메르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렇게 추할 수가……!”


다행히 유진은 메르의 탄식은 듣지 못했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아 의식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동안 기절해 있었을까.


유진은 정신을 차렸지만, 바로 눈을 뜨지는 못했다. 기절하기 직전에 있던 일들이 머릿속에 어지러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머리끝까지 피가 올라서 날뛰어 버렸다. 흥분이 싹 가라앉은 지금, 유진은 자신이 얼마나 추했는지를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


눈을 떴을 때 어떤 놀림과 시선이 꽂힐지가 두려웠다. 눈을 뜨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눈꺼풀이 무겁다. 몸에 힘이 없다……. 그리고 아프다! 문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정신 차린 것 다 압니다. 왜 기절한 척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악마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유진은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악마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꾸우욱…… 악마의 손가락이 유진의 가슴근육을 지그시 눌렀다.


“끄으으으……!”


유진은 고통을 참는 것에는 능숙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고통을 참아야 할 상황도 아닌 데다, 파열된 근육의 결을 정확히 짚어서 안쪽까지 후벼대는 손끝이 너무나도 무자비했다.


“눈을 뜨십시오.”


아니스는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내려 보았다.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기고, 꽉 다문 이빨 사이에서 신음을 토해내는 유진을 보고 있으니 짜릿한 희열 같은 것이 느껴졌다.


“너 이…….”


“설마 하멜. 당신이 속 편히 기절해 있는 동안, 제가 당신의 몸을 완벽하게 치료해 놓기를 기대한 겁니까?”


기대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대답해 버리면 아니스에게 혼쭐날 것이 틀림없었다.


“미안해.”


그래서 유진은 이 상황에 해야 할 옳은 말을 내뱉었다.


……본래 아니스의 분노는 사과 한 번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아니스는 그렇게 크게 화가 난 상태가 아니었다. 하멜은 멋대로 날뛴 대가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리고, 하멜의 행동은 모론을 위한 것이었다.


“어딜 먼저 치료해 주었으면 합니까?”


아니스는 그런 하멜의 상냥함을 사랑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짜릿한 희열을 느끼기는 했다만, 그 이상으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아니스는 방긋 웃으며 유진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당시의 입으로 직접 말해주십시오, 하멜.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는 어디입니까? 제가 당신의 어떤 고통을 덜어주기를 바랍니까?”


“……일단 가슴을 찌르고 있는 손가락부터 빼주면 안 될까…….”


까먹고 있었다. 아니스는 재빨리 손가락을 빼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디가 제일 아프냐니. 지금의 유진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었다. 부러진 뼈가 부러지지 않은 뼈보다 많은 것 같다. 근육은 죄다 파열되고 내장도 상했다. 이대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죽지 않은 것은…… 아니스가 유진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명시킬 거면 치료나 해주지. 성격이 지독하다니까…….’


“……몸 안부터 어떻게 해줘.”


“몸…… 안?”


“내장 말이야. 가슴 안이나, 뱃속이나…….”


“그 말은, 하멜, 저에게 당신의 깊디깊은 안을 돌봐달라는 말입니까?”


“어…….”


“파렴치하고 망측한 사람……!”


아니스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유진은 도저히 아니스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스는 양 뺨을 붉게 물들이고서 유진의 몸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지금 육체를 주도하는 것은 아니스가 아니라 크리스티나였다. 아까 크리스티나에게 해주었던 약속을 잊지 않은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빛을 머금은 손끝으로 유진의 가슴근육을 조심스레 훑었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파열된 근섬유가 치료되기 시작했다.


“……으흠…… 다음은…… 어디를 치료하면 되겠습니까?”


“왜 아니스에서 너로 바뀐 거야?”


“예?”


그렇게 말투에서 차이가 난단 말인가? 크리스티나는 화들짝 놀라 유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손길에서 차이가 나.”


“네……?”


“뭐라고 설명하기는 힘든데…… 분위기랑 비슷하지. 네 손길이랑 아니스의 손길은 달라. 몸은 같은데, 손가락을 움직이는 방식이라 해야 하나…….”


사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손길 하나하나를 기억할 만큼 그녀에게 많은 치료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니스의 손길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똑같은 몸에서 정신만 바뀌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유진은 곧장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구분해 낸다.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지만, 저 무심한 말들이 순진한 크리스티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인 자신을, 유진이 확실하게 알아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바꾼 거야? 아니스가 치료하는 것 아니었어?”


“아앗…… 앗…… 그것은…….”


“아…… 네 신성마법을 시험해 보겠다, 뭐 이런 거냐? 아니스도 성격이 고약하다니까. 굳이 이럴 때에 날 시험대상으로 삼아야 하나…….”


“……으흠. 유진 님의 치료를 언제나 아니스 님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지요. 저 또한 아니스 님과 마찬가지인 성녀입니다. 그러니까, 유진 님의 상처를 돌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횡설수설을 해대며 유진의 상처를 치료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망토가 꾸물거리며 다가왔다. 망토가 몸 옆에 찰싹 달라붙었고, 메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유진은 자신을 쳐다보는 메르의 시선이 왜 저리도 싸늘한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당연하다는 듯이 턱을 배 위에 얹어오기에, 파들파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만히 있으십시오. 손의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아니스로 바뀌었다. 빛이 손을 감싸니 부러진 뼈가 달라붙고 근육과 신경이 연결되었다. 유진은 한결 편해진 손으로 메르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모론은 어디에 갔냐?”


뒤늦게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 얼마나 기절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바깥으로 내쫓긴 것도 아니다. 아직 그들은 레헤인야르의 이면에 있었다.


“누르를 잡으러 갔습니다.”


“뭐?”


“당신이 깨어나기 전에, ‘바깥’에서 누르가 나타났던 모양입니다.”


“그러냐.”


유진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아니스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유진을 향해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모론이 걱정되지 않습니까? 그 등신, 누르를 잡고서 또 정신이 이상해져서, 어딘가에서 자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까라면 걱정했겠지. 왜 모론을 혼자 보낸 거냐고, 왜 같이 가지 않았냐고 너한테도 한 소리 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잖아.”


유진은 자신이 내뱉는 말에 일말의 의심이나 걱정을 담지 않았다. 무미건조하게, 지극히도 당연한 것을 읊듯이 말했다. 길지 않았던 난타전. 모론의 무식하기 짝이 없는 힘과 주먹에 휘둘리면서ㅡ 모론을 느꼈다.


ㅡ쿠웅!


지면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모론은 거대한 멧돼지의 시체를 머리 위에 들고 있었다. 이미 뒈진 괴물이지만, 저것이 크기만 한 짐승이나 몬스터나 마물이 아니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히익…….”


메르가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망토 안으로 도망쳤다. 유진은 망토를 몸에 두르고, 바닥에서 고개만 간신히 들어 모론을 쳐다보았다. 저택만 한 크기의 누르를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모론은, 유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건강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멜! 일어났군!”


대망치의 협곡에서 누르의 목을 베었을 때.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던 때와 같은 광기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스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걱정이 들었다. 쓰러진 너는 부상이 너무 심했으니 말이다.”


“너 때문이잖아.”


“나 때문이라니, 그건 틀리다, 하멜. 싸우고 싶지 않던 나를 공격한 것은 너였다.”


반박할 수가 없는 사실이지만…… 어떻게든 반박하고 싶었다. 유진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반박할 말을 궁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신공격 외에 다른 것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멜.”


유진은 쏟아낼 욕설을 성의껏 고르기 시작했지만, 모론은 벙긋 웃으며 유진을 불렀다.


“이 시체. 저 위에 버리러 갈 건데, 함께 갈 텐가?”


“허.”


설마 모론이 먼저 그렇게 말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진은 솔직하게 놀란 소리를 냈다. 그는 잠시 동안 모론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가고 싶은데, 내 몸이 지금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말이야.”


부상은 다 치료했지만, 이그니션의 반동까지는 아니스의 신성마법으로도 치료가 안 된다. 그래서 지금 유진은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론도 당연히 이그니션의 반동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예전처럼 내가 부축을 해줘야겠군.”


모론은 그 거대한 누르를 정상까지 집어 던져 버렸다. 유진은 저 멀리 날아가는 누르의 시체를 보고서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저렇게 던져 버리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들고서, 정상까지 간다는 거냐?”


“별 의미는 없다. 평소에는 정상이 아니더라도 어디든지 버리고 있다. 너무 많다 싶으면 산을 한 번 무너트리기도 한다. 그러면 금세 멀쩡하고 깔끔해지니 말이다.”


모론은 껄껄 웃으며 보란 듯이 주변을 가리켰다. 유진과 모론의 싸움으로 통째로 주저앉았던 산이지만, 지금은 전투의 흔적이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여전히 눈은 없지만, 수백 년 전의 마경을 연상시켰던 기괴한 풍경도 달라져서 제법 평범해 보이는 산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독기에 침식되었던 산이 무너지고, 다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함께 갈까!”


모론은 쾌활한 표정이었다. 가슴의 앙금은 남아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 다시 광기에 침식될지 모르는 일이다. 이미 한번 무너진 것은 언젠가 또다시 무너져 버린다.


적어도 지금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모론은 유진을 일으켜서 부축했다. 그리고 아니스에게도 커다란 팔을 뻗었다. 아니스는 방긋 웃으며 모론의 팔에 매달렸다.


모론이 발이 땅을 박찼다. 한 번의 도약으로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유진과 아니스는 모론의 양팔에 매달려 아래를 보았다.


제한되어 있는 산의 풍경. 레헤인야르의 이면. 방금까지 유진이 있던 산은 붕괴되고 수복되었기에 ‘산’다운 모습이었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경과 비슷한 풍경. 곳곳에 방치된 누르의 시체. 그리고, 모론의 자해흔적.


“저곳이다.”


모론이 속삭였다. 유진과 아니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이미 산의 정상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그 북쪽 너머ㅡ 세상의 끝. 라구르야란이 보였다. 저 풍경은 바깥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이곳에서 보는 라구르야란이 왜 ‘넘어가선 안 될 땅’, ‘세상의 끝’이라는 불리는지를 실감했다.


그곳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회색의 땅, 회색의 하늘, 회색의 공기. 모든 것이 회색이고 공허했다. 다만, 실제로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산의 아래, 라구르야란과 이어지는 대지. 그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누르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옛날에는 누르의 시체를 저 너머로 던졌다.”


쿵.


모론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는 아니스와 유진을 잠시 내려놓고, 아까 던져두었던 누르의 멧돼지를 집어 들었다.


“나는 누르가 어디서 오는지는 모른다. 누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누르가 끝에서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죽인 누르도 끝으로 던져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


누르의 시체가 하늘을 날았다. 그 거대한 시체는 몇 개나 되는 산봉우리를 넘어서, 라구르야란으로 떨어졌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스가 유진을 부축했다. 모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라구르야란을 보고 있었다.


“하멜. 아니스. 나는 정상에 올라오는 것이 싫었다. 언젠가부터, 이곳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 두려웠다. 라구르야란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보는 라구르야란과, 바깥에서 보는 라구르야란은 다르다. 어디든 똑같다. 나는, 라구르야란을, 끝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유진은 아니스의 부축을 받으면서 모론에게 다가갔다.


“베르무트가 말한 끝이 두려웠다. 누르의 존재가 두려웠다. 내가 완전히 미쳐 버렸을 때. 누르를 막지 못하게 될 때, 무엇이 일어날지 두려웠다. 내가 끝을 노려보고 있을 때, 내 정신이 끝에 잡아먹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모론.”


“나는 강하지만 고독했다. 세월은 내 전사로서의 혼을 나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멜, 이제는 괜찮다. 너는 나에게 자세한 이유 따위는 말하지 않았으나, 나는 네 주먹에서 나를 위한…….”


“싸움은 무효다.”


툭 내뱉은 말에 모론의 말이 뚝 멈췄다.


“300년 전을 떠올려 봐라, 모론. 너는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니 주먹질도 잘했지만, 나는 솔직히 주먹질은 잘하지 못했거든. 우리 둘이 전성기였을 때도 주먹만으로 싸웠다면 나는 널 이기지 못했을 거야.”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 유진은 빠르게 말했다. 모론에게 반박할 여지를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내 손에 진짜 무기가 들려 있었으면 어땠을 것 같나? 나는 전생부터 온갖 무기의 전문가였지. 맨손의 나, 무기를 쥔 나, 비교가 안 돼.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바로 무기를 쥐었을 때가 진짜 나라고 할 수 있지. 특히 지금의 나는 성검과 월광검과 마창과 분쇄추도 가지고 있다. 베르무트의 폭풍검과 포식검과 뇌광궁과 용격창도 가지고 있어. 그 모든 걸 전부 사용해야 내 진짜 실력이라고 할 수 있지. 너야 투박한 도끼 한 자루로도 제 실력을 낼 수 있지만, 나는 맞는 무기가 없으면 제 실력을 낼 수가 없단 말이다.”


거짓말은 아니다.


“만약 내 손에 대충 만든 칼 한 자루라도 들려 있었다면 승패는 알 수 없었을 거다. 맨몸으로 네 무식한 주먹을 상대하는 것과 검으로 흘려내는 것은 내게 전해지는 부담이 전혀 다르니 말이지. 내 숙련된 기술이라면 칼날의 이가 상할 새도 없이 네 모든 공격을 흘려내고 결국에는 네 몸을 베었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했겠지? 방금의 싸움은 공평하지 않았다. 나는 네게 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싸움은 무효…….”


“그건 아니다 하멜.”


모론은 드물게도 정색하고 대답했다.


용감한 모론


셋은 한동안 정상에서 라구르야란을 쳐다보았다. 제법 오랫동안 서 있었지만, 유진은 라구르야란에서 넘어온다는 ‘끝’이라는 것을 체감할 수는 없었다. 유진의 눈에 보이는 라구르야란은 칙칙하고 뿌연 안개가 가득할 뿐이었다.


이곳이 아닌, 바깥의 라구르야란. 그곳도 특별하거나 신비로운 장소는 아니다.


날씨가 지랄 맞은 대설원. 가혹한 대지. 지하자원 같은 특별한 가치를 가진 것들이 파묻힌 땅은 아니다. 마나도 굉장히 희박해서 마법을 쓰기도 힘든 땅이다. 살아갈 수 없는 요인만 그득한 곳이라 라구르야란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 땅의 너머에는 드넓은 빙해가 있다. 모든 바다는 결국 이어져 있어서, 라구르야란의 빙해를 가로지르면 머나먼 남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지만, 아무 가치도 없는 일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어쨌든, 유진이 알고 있는 라구르야란은 베르무트가 경고할 만큼 기괴하고 두려운 대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르는 100년 전부터 실제로 나타났다. 모론은 장장 100년 동안 이곳에서 누르를 막고 있다. 라구르야란에서 몰려온 끝이, 레헤인야르를 넘어, 세상을 덮치지 않도록. 온몸으로 막고 있다.


“모론.”


한참을 보고 있어도 라구르야란 저편에서 무언가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레헤인야르가 그러하듯, 이면인 이 세상에서도 해는 뜨지 않는다.


모론이 100년 동안 보아왔던 세상은 이런 곳이다. 부숴도, 부숴도 멀쩡히 돌아온다. 누르의 시체가 그득 쌓이면 풍경은 기괴하게 변한다. 일어나는 변화는 그 두 가지뿐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물어봐야 했다. 모론과의 싸움은, 유진이 생각하기에는 싸움이라고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럽고 추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상대가 모론이었기에, 그렇게 발버둥 친 것이다. 모론이 상대가 아니었다면 그딴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거냐.”


이 질문, 대화, 모두가 발버둥을 쳐서 만들어낸 것이다. 아까의 모론이라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때와 지금은 반나절도 차이가 나지 않겠지만, 유진은 모론의 변화를 확신했다.


“……나는.”


모론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놈의 우묵한 눈은 여전히 라구르야란을, 멀고도 뿌연 세상의 끝을 보고 있었다.


“기다릴 거다.”


대답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아까의 모론에게 물어보았어도, 지금과 똑같은 대답을 했을 거다. 유진도 그 사실은 알았다.


애당초 유진은 모론의 대답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대체 뭘 해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이곳에서의 100년. 베르무트의 부탁. 그 모든 것이 모론에게는 신념이고 사명이었다.


유진은 친구의 신념과 사명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베르무트의 부탁이기 때문은 아니다. 내가, 누르를 보았기 때문이다. 누르가 불길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루하르의 시조이며, 세상을 구한 용감한 모론이다. 그러니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


모론뿐만이 아니다. 유진이 죽지 않고 이곳에 있었다면, 그도 모론과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세냐도, 아니스도,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언제까지.”


유진은 모론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태까지 100년을 기다리고 있었잖아. ……너는 앞으로 몇 년이나 이곳을 지키려는 거냐.”


“내가 죽을 때까지 그래야 하겠지.”


“등신 같은 대답이야.”


유진의 투덜거림에 모론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모론은 라구르야란에서 시선을 떼고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하멜. 너는 나를 걱정해 주는 구나.”


“당연히 걱정하지.”


“그래서 나는 내 약함을 보이기 싫었다.”


“모론. 내 말 잘 들어.”


유진은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여, 주먹을 쥐었다.


“만약, 네가 또 이상해진다면. 내가 너와 싸우러 올 거다.”


모론은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유진을 바라보았다.


“널 패러 올 거다.”


이번에는 부끄럽고 추하게 싸웠고, 엉망으로 져버렸다.


“너와 싸워, 이기러 올 거다.”


다음에도 패배한다면, 그다음에 다시 덤비면 된다. 몇 번을 패배해도 유진은 계속해서 도전할 것이다.


“네가 이상해질 때마다, 괴롭고 미쳐갈 때마다. 나는 널 ‘등신’이라고 부르면서, 널 패러 올 거다.”


누르가 어디서 오는지. 왜 오는지. 그건 알 수 없다. 베르무트는 ‘언제까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약 없이, 100년이 넘도록, 이곳을 지키게 만들었다.


“모론. 너는 고독하지 않아. 약해지지도 않았어. 왜냐고? 내가 너한테 죽도록 처맞았잖아. 그것만으로 네 강함은 증명되는 거야. 넌 여전히 용감하고 강한 전사라고.”


어설프고 서투른 위로였다. 모론조차도 그것을 느꼈다. 내뱉는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진은 이런 위로 말고 다른 위로는 할 줄 몰랐다.


만약 모론과 싸워 이겼다면, 방금의 대사는 조금 바뀌었을 거다.


너는 정말로 약하구나, 등신아. 하지만 상대가 나빴을 뿐이야. 나는 원래 전생부터 너보다 셌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졌다고 해서 네가 약한 것은 아니라는 거지. 내가 너무 셀 뿐. 너무 상심하지 마, 상대가 나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지키고 있어. 너보다 센 내가.


“……이 사명이 언제 끝날지는 너도, 나도 몰라.”


유진은 여전히 쥐고 있는 주먹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그래서 너는 괴롭고 고독했던 거지. 이 빌어먹을 사명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 네 정신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아서. 네가 알던 이들은 수명이 다해 하나둘 죽어가지만, 너만이 그대로 남아서.”


모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유진의 주먹을 쳐다보았다. 그 주먹은 모론의 주먹과 비교하자면 어린아이처럼 작았다. 몇 대를 맞아도 아프지 않은, 가벼운 주먹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있고, 아니스도 있어. 세냐도 있지. ……그러니까 너는 고독하지 않아. 네가 이곳에서 뭘 하는지, 왜 이러는지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 네가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지 몰라서 괴롭다면, 내가 직접 가서 물어보고 오마.”


“……누구에게?”


“등신, 왜 뻔한 것을 묻냐. 네게 이 엿 같은 부탁을 한 놈은 베르무트잖아. 마침 나도 베르무트 그 새끼한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산더미야. 겸사겸사 네 사명에 대해서도 물어봐 줄게.”


모론은 웃지 않았지만 유진은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


유진은 들었던 주먹을 모론에게 내밀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곳을 지켜줘라.”


결국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모론 외에 누가 이곳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누가 100년이 넘도록 그 불길한 괴물들을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인가.


“……하하!”


모론도 웃음을 터트렸다.


“넌 정말 잔인하구나, 하멜.”


모론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베르무트 혼자의 부탁도 날 150년 동안이나 버티게 하였는데. 너의 부탁이 더해져서, 2명의 부탁이 되어 버렸다.”


“왜 저는 무시하는 겁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아니스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멜도 하는 부탁을 제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모론,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살아있었어도, 누군가에게 꼭 부탁을 해야 했다면. 베르무트 님뿐만 아니라, 우리도 당신에게 부탁했을 겁니다.”


“그런가.”


모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하멜, 아니스. 너희 2명이 더해져, 3명의 부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니스, 너는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하멜, 너는 내가 여전히 용감하고 강하다고 말해주었다.”


유진이 그랬듯이, 모론도 주먹을 쥐었다. 그는 꽉 쥔 주먹을 유진의 주먹에 가까이 대었다.


“그렇다면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툭.


서로의 주먹이 가볍게 닿았다.


“하멜.”


모론은 유진을 똑바로 보았다. 육체는 달라졌다. 하지만, 저 안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하멜이었다.


ㅡ나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모론은 빙긋 웃어버렸다. 300년이란 풍파에 마모되었으나, 제아무리 닳아버려도 모론은 모론이다. 그는 여전히 강하고, 용감하다.


“……너는 마왕을 죽이겠다고 하였지.”


“그래.”


“아마…… 나는 너와 함께 마왕을 죽이러 가지는 못할 거다. 내게는 이곳을 막아야 하는 사명이 있으니.”


어쩌면.


모든 마왕을 죽이면, 라구르야란에서 넘어올 끝을 경계할 필요는 없게 될지도 모른다.


“언젠가 네가 모든 것을 끝내고, 내가 사명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라진 베르무트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이곳에 와서 알려다오.”


괜찮다.


“만약, 내가 또 이상해져 있다면. 네 손으로 때려눕히고서, 사명이 끝났다고. 자유로워졌다고 말해다오.”


모론은 오늘 이후, 자신이 미쳐버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멜과 나누었던 주먹과, 대화와, 아니, 이 며칠 동안 하멜과 아니스, 과거의 동료들과 겪은 기억. 그 며칠의 기억은 모론이 이곳을 지켰던 100년보다 무겁고 선명했다.


그럼에도 저렇게 말한 것은ㅡ 언제 올지 모르는 아득한 시간마저 기다릴 수 있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누군가에게 죽지도 않고 이곳을 지키고 있겠다는 결의였다.


“그래.”


유진은 웃으며 주먹을 내렸다.


“그때는 베르무트도 데려올 거야. ……어쩌면 세냐도.”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다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웃음을 삼켰다. 하멜은 상냥한 주제에 서툴고, 표현을 잘 하지 않았다.


‘……그 갭이 좋은 겁니다.’


[예?]


‘유진 님의 평소 언동은 굉장히 거치십니다. 대영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입이 걸고, 욕도 많이 하시지요.’


[저게 그나마 나아진 겁니다, 크리스티나. 처음 하멜은 정말로 입에 걸레를 물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정을 위해 하멜이 욕을 할 때마다 진짜 걸레를 입에 물려주었습니다.]


대체 300년 전 하멜이 처음 파티에 들어왔을 때의 입지는 얼마나 낮았던 걸까? 크리스티나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그토록 거친 유진 님이지만, 가끔 무의식적인 천성을 보이실 때가 있지요. 시스터와 저를 정확히 구분한다거나. 식사를 할 때에 당연하다는 듯이 제 앞에 식기를 먼저 내려놓는다거나, 함께 길을 걸을 때 저를 안쪽에서 걷게 한다거나,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 자연스럽게 한 걸음 나와 제 앞에 서신다거나…….’


[그것들을 전부 다 기억하고 있는 겁니까?]


‘어쨌든…… 어쨌든 시스터. 그렇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거친 말을 쏟아내지만, 본심으로는 전우이자 벗인 모론 님을 걱정하시는…… 자신이 피투성이에 반죽음이 되면서 모론 님이 변하지 않고 강함을 피력하시는……! 마치 저를 구원했을 때와 같은…….’


[과연 크리스티나, 제 영혼의 자매라 그런지 저와 똑같은 점에 매력을 느끼는군요.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하멜은 300년 전부터 저랬습니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안은 촉촉하달까……. 그러한 갭이 저와 세냐를 홀렸지요.]


‘세냐 님도……!’


크리스티나는 아직 세냐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유진과 아니스를 통해 세냐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 친숙했다. 거기에 저런 말까지 들어버리니 아직 만나지도 못한 세냐와 왠지 모를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나 잊지 마십시오, 크리스티나. 결국 세냐 그 새침한 계집애는 저와 당신의 적이 될 겁니다. 메르 메르데인, 저 시건방진 꼬마는 당장은 우리에게 아양을 떨어대지만, 세냐가 봉인에서 풀려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냐의 편에 붙어 그간의 일을 조잘대겠지요.]


‘그러면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시스터, 저희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생각합니다.’


[세냐는 생각보다 말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야만스러운 계집애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세냐는 자신이 기분이 나쁘단 이유만으로 저희 머리 위에 불덩이를 떨어트릴 겁니다. 그에 대항하려면 크리스티나, 신성마법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 둘이 손을 잡고 힘을 합쳐야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시스터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자매애가 돈독해졌다.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할까.”


파앙! 모론의 커다란 손이 유진의 등짝을 후려쳤다. ㅡ라구르야란까지 날아갈 뻔했다. 날아가지 않은 것은, 유진이 급히 마법을 펼쳐 몸에 제동을 건 덕분이었다.


하지만. 날아가지 않았어도 온몸이 박살 날 것처럼 아팠다. 이그니션의 반동을 받는 중에는 전신 감각, 특히 통증이 굉장히 예민해진다. 그 상태에서 모론의 커다란 손에 등짝을 얻어맞은 것이다.


“끄으으……!”


“이 등신. 하멜의 이그니션의 제 몸을 망가트리는 자살기라는 것을 잊은 겁니까?”


“몸이 건강해져서 반동도 덜 아픈 것 아니었나?”


“전생보다 골골대는 날이 줄기는 했지만, 아프기는 한 모양입니다. 전생부터 몇 번이나 위험성을 경고했는데…… 모론과 드잡이 따위에 자살기를 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하멜 당신은 모론보다 등신입니다.”


“그만큼 내가 강하다는 것이다. 하멜은 전력을 다해 나를 이기려 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전력이 아니었다. 무기도 쓰지 않고 기술도 쓰지 않았는데 뭐가 전력이냐……!”


“이그니션은 기술이 아닌가? 그 프로미넌스도…….”


“아니 그건…… 내가 말하는 기술은…… 그…….”


유진은 등짝의 얼얼함에 몸부림치고,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내뱉지 말지를 고민하면서도 몸부림쳤다.


“수라광살! 그렇군. 하멜, 너는 수라광살을 쓰지 않았다. 헌데 이상하군, 수라광살을 쓰지 않았는데도 나와 싸울 때의 너는 수라와 같았는데…… 수라광살의 극의에 이르러 너 자체가 수라가 된 것인가?”


모론에게 악의는 없다. 모론은 전생부터 이런 놈이었다. 그건 알지만, 타인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듣고 있으니 지금 당장에라도 저 아래로 투신하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모론. 이 결계 말이야, 네가 열어준 거냐?”


유진은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네가 열고 들어온 것 아니었나?”


악의 없이 내뱉던 모론은 즉시 유진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역시 월광검이 연 건가.”


자연스러웠다. 화제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쪽을 보는 아니스와, 망토 안의 메르가 비웃는 것만 같았지만. 유진은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월광검은 베르무트의 애검이었다. 라이언하트에도, 역사에도 남기지 않았으니 마지막까지 베르무트가 쥐고 있었겠지. 네 환생조차 계획한 베르무트였고, 내 사명도 베르무트의 부탁에 기인한 것.”


그리고 월광검은 하멜의 무덤에 있었다. 암실에서의 베르무트는 사막에 숨겨진 무덤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결국, 언젠가는 유진에게 월광검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론이 이 결계에 처박혀 있을 것을 대비해서 월광검을 열쇠로 쓰게 한 건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토 안의 월광검을 어루만졌다.


‘……정작 암실의 베르무트는 모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베르무트가 암실에 영상을 남겼을 당시에는, 세냐도 아니스도 멀쩡히 살아있었다. 베르무트가 모론의 꿈에서 부탁을 전한 것은 약 150년 전이다.


베르무트가 죽고서 약 50년 후.


그 50년 동안, 베르무트는 무엇을 겪었던 걸까.


유진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월광검을 놓았다.


용감한 모론


시험을 받겠다며 레헤인야르로 떠난 유진이 꼬박 하루가 지난 뒤에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 돌아왔다.


부상의 치료는 완벽했다. 이그니션의 반동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몸을 가누지 못해 모론과 아니스의 부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꼴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었고, 유진의 그런 모습은 요새의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었다.


현시대에 용사라 인정받은 유진 라이언하트. 그를 만난 수많은 강자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유진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그는 아직 21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어린 나이에 이룩해낸 강함은 시대의 첨단에 선 강자들과 견주기에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300년 전의 대영웅에는 미치지 못했다.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었다. 수백 년 동안 은둔하였다 해도, 모론 루하르는 용감한 모론이었다.


“아무리 너라도 모론 님한테는 어린애 취급을 받나 보지?”


침대 신세를 지게 된 유진에게 여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시안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은근히, 아니 대놓고 약을 올려댔다.


“뭐 어쩔 수 없잖아. 모론 님은 우리 시조님과 함께 싸우셨던 대영웅이고, 너는 뭐…… 대단한 천재인 것은 맞지만, 그 시대에 싸워본 것은 아니잖아?”


싸웠어, 개자식아. 유진은 목젖까지 치솟은 대답을 간신히 삼켜냈다.


“모론 님은 수많은 전장에 선두에 서시고 승리를 거두어 오셨잖아. 그러니까 너무 분해하지는 마. 네가 아무리 잘났어도 모론 님이 보기에는 친구의 까마득한 후손이니까,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야.”


“안 닥칠래?”


“형제에 대한 걱정이 사무치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냐. 그런데 너도 참 대단하다. 그 뭐냐……. 이그니션? 이었나? 또 그 기술을 써서 몸살이 나버린 거잖아. 안 봐도 뻔하지, 어떻게든 모론 님을 쓰러트리려고 고집을 부린 거지? 자존심이 상해서 말이야. 안 그래?”


“꺼져!”


“아니 진짜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마음고생하지 말고, 누워서 푹 쉬고 있…….”


유진은 더 이상 듣지 않고, 침대 옆의 과일 바구니의 사과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시안에게 던져 버릴 생각이었는데, 그 순간에 손아귀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사과가 으깨져서 주스가 되어버렸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객기를 부려보는 것도 꽤 멋지다고 생각해.”


시안은 즉시 말을 바꾸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찾아온 것은 시엘이었다. 그녀는 방금 목욕을 끝낸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유진의 가까이에 앉았다.


“그거 알아? 이곳의 온천은 피로를 풀고 근육의 회복을 돕는대. 네 그 무식한 기술이 심한 근육통과 가까운 것이라면, 온천에 들어가 있으면 회복이 더 빠르지 않을까?”


“몸 가누기도 힘든데 뭔 놈의 온천욕이야.”


“내가 도와줄까?”


“너 미쳤니?”


“설마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지? 가족탕이라는 것도 있잖아. 뭐 발가벗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치료와 회복이 목적인 건데. 나는 아무 상관 없어, 네가 부탁한다면 말이야.”


히죽 웃으며 말했지만, 시엘은 유진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받아들인다면? 굉장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시엘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유진을 흘겨보았다.


“……물론 농담이야. 너도 알지?”


“내가 미쳤다고 그 말을 진담이라고 생각했겠니?”


살짝 떠보려고 물었는데, 곧바로 돌아온 대답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상처가 없어서 감이 잘 안 잡히네. 대체 모론 님한테 얼마나 얻어맞은 거야?”


“별로 안 맞았어.”


“진짜?”


“너도 알잖아. 내가 지금 여기 쓰러져 있는 것은 모론…… 님에게 맞아서가 아니라, 내 기술의 반동 때문이야.”


1년 전. 이오드가 흑사자 성에 날뛰었을 때. 놈의 몸을 숙주로 삼았던 마왕의 잔재와 싸울 때에 이그니션을 썼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며칠 동안 침대 신세를 졌었기에, 시엘도 유진이 쓰러진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네가 그 기술을 썼다면, 쓸 수밖에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거잖아.”


“……별로? 궁지 아니었는데? 그냥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건데?”


시엘은 말없이 실눈을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어 괜스레 딴 곳을 보았다.


“……그래도 뭐, 너만 그런 일을 겪는 건 아니니까.”


“그건 무슨 말이야?”


“만약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대련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찾아오라고, 모론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거든. 오늘만 해도 아버지랑 카르멘 님, 그리고 다른 흑사자 성의 대장님들이 모론 님께 도전하겠다고 했어.”


솔직히 자존심이 상한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모론에게 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유진이 그렇게 납득하는 것과ㅡ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아주 아주 다른 문제 아닌가? 너 모론 님에게 졌다며? 이 말. 유진은 유진이며 하멜이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저런 말을 들어버리면 어쩔 수 없이 발끈해 버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동이 다 끝난 뒤에 돌아오는 건데.’


후회하기에는 늦었다. 바라건대, 모론이 후배랍시고 손대중을 하지 않고 흠씬 두들겨 패주었으면 좋겠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차이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과연 모론 님은 모론 님이셨습니다.”


“그렇지?”


“예. 전력을 다해 덤볐지만, 모론 님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카르멘 경의 실력에는 모론 님도 감탄하셨습니다. 하지만 카르멘 경의 필살 콤비네이션은 모론 님을 몇 걸음 물러서게 했을 뿐, 모론 님에게 상처를 입히진 못하였습니다. 가주님의 검도 마찬가지였지요.”


유진은 멋대로 실룩거리려는 입꼬리를 붙들었다.


제노스 라이언하트. 흑사자 기사단 1번대 대장이자, 베르무트를 통해 전승된 하멜식의 계승자이며, 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라는 진실을 아는 자.


그는 팔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서 유진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 붕대로 끝난 것도 신성마법 덕분이지, 원래는 팔다리가 아작이 났었단다.


“하지만 그 모론도 나보다는 약했다.”


“과연 하멜 님이십니다.”


“지금이야 내 전성에 간신히 근접해 있으니 패배하는 것이 당연…… 아, 오해하지는 말고. 300년 전에 서로가 전성기였을 때는 내가 모론보다 강했지만, 모론은 나와 달리 죽지 않고 수행을 해왔잖아. 그러니 지금 나보다 모론이 강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제 몸으로 모론 님의 범접할 수 없는 강함을 느꼈습니다.”


제노스는 진심으로 하멜을 존경하고 있다.


“모론 님은 강함뿐만 아니라 인품조차도 대영웅에 걸맞으셨습니다. 그분은 팔다리가 부러져 쓰러진 저를 직접 일으켜주시면서…….”


“내 강함과 인품은 대영웅에 걸맞지 않다는 거냐?”


“예?”


“정말 모론이 대영웅에 걸맞은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면 네 팔다리를 부러트리지도 않지 않았을까?”


“예…… 듣고 보니 그렇군요.”


“오히려 널 내 전승자로 인정하면서, 내가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하멜식을 보완해서 알려주고 네 적염식을 하멜식에 맞게 개량해 준 나야말로 대영웅다운 인품의 소유자 아닌가?”


“역시 하멜 님이야말로 대영웅이십니다.”


존경하기에 유진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진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전대 원로원주 도이네스가 사망한 후, 라이언하트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여전히 백염식은 본가만의 것이며, 방계는 적염식을 익히고 있다. 그것은 이 거대한 라이언하트의 균형을 유지하는 근간이니 섣불리 바뀔 수가 없다. 아무리 유진이 막 나간다 해도 방계인 제노스에게 백염식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러니 백염식 말고 다른 여러 가지를 전수해 주었다. 제노스의 가문에 전해져오던 하멜식과 적염식을 융화시켰고, 적염식에서 미흡하던 부분을 보완했다. 그만한 은혜를 내려 주었으니 제노스가 하멜을 더더욱 존경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네 팔다리를 부러트린 모론이 네게 무슨 말을 해주었지?”


“제 투기와 검술을 비롯한 전투법에서 하멜 님을 느꼈다고 하시더군요.”


제노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멜을 존경하는 그에게 있어서 모론의 저런 말은 최고의 칭찬이자 평가였다.


하지만 유진은 미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제노스의 실력이 꽤 뛰어나다는 것은 유진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이런저런 가산점을 줘서 생각해 봐도 제노스에게 하멜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을 입 밖에 내뱉으면 안 된다는 눈치는 있었기에, 유진은 내색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 * *


닷새가 지나고 나서야 몸이 멀쩡해졌다.


혹시라도 아멜리아 머윈이나 헤모리아 같은 것들이 몸이 약해진 틈을 노리고 습격하지 않을까 경계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둘은 유진이 평생 만나 본 또라이들 중에서도 꽤나 상위의 존재들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후손들은 강하더군.”


요새의 탑. 모론은 불어닥치는 바람을 받으면서 입을 열었다.


“베르무트의 후손치고는 약한 거지.”


그 곁에서 망토를 싸맨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라이언하트가 약한 것은 아니다. 대륙 최고의 무가를 자칭해도 충분할 만큼 강하다.


최고배분의 원로인 카르멘은 유진이 보기에는 대륙 제일을 자부해도 되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삼공을 제외한 헬무드의 고위마족과도 단독으로 싸움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본래 고위마족은 인간이 단독으로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가주인 길레이드. 막냇동생인 기온. 둘째인 기온은 진즉부터 검을 놓았기에,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카르멘 다음 배분의 고수는 저 둘을 꼽아야 한다. 냉정히 말하자면 둘의 실력은 카르멘보다 몇 수는 처진다. 하지만, 카르멘과 마찬가지로 성장의 여지는 충분했다.


“내가 기억하는 전성기의 베르무트는 그 셋보다 훨씬 어렸어. 그런데도 말도 안 되게 강했지.”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300년 전부터 마왕을 제외한 마족들 중에서 최강이라 꼽히던 놈들이다. 그 시대에서 저 두 마족과 단독으로 대적이 가능했던 존재는 베르무트뿐이었다.


“베르무트의 후손이라고 해서 무조건 베르무트와 똑같이 강할 필요는 없는 거다. 하멜. 내 후손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덩치 큰 것은 비슷하던데.”


“하지만 힘은 차이가 크다. 아만은 내 피를 짙게 이은 후손이라 생각한다만, 아만의 힘은 네가 알던 내 힘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모론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아만에게는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 내 피를 이은, 아니, 이 시대에 살아가는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베르무트의 라이언하트. 그들은 베르무트와 같은 잿빛 머리와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유일하게 엷어지지 않은 성질이다. 수십 대가 내려오고 피가 섞였는데, 이 잿빛 머리와 눈동자는 그대로 유전되고 있다. 방계의 끝자락에서도 베르무트의 상징과도 같던 금색 눈동자와 잿빛 머리는 태어난다.


……마치 강렬한 의지가 피에 녹아든 것 같다. 제아무리 섞이고 섞여도, 이 피는 라이언하트의, 베르무트의 피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만 같다.


베르무트의 피가 특별해서? 아니면, 베르무트가 제 피가 특별하게 만들었나?


무엇을 위해?


‘…….’


하멜의 환생. 추측뿐이지만, 유진은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너도 있지 않나, 하멜.”


커다란 주먹이 유진에게 다가왔다.


주먹과 주먹을 부딪치는 인사. 모론은 이것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저번에는 아니스의 부축을 받고 있었지만, 지금 유진은 멀쩡하게 두 발로 서 있다. 그래서 당당히 어깨를 펼치고서 모론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너는 베르무트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라이언하트의 일원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국 베르무트의 후손은 베르무트만큼 강하다는 것 아닌가?”


그 말에 유진은 미묘한 기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베르무트의 의도대로 놈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모론이 말한, ‘베르무트만큼 강하다는 것’이 유진의 뺨을 씰룩거리게 만들었다.


저 말은 결국, 모론이 생각하기에 하멜은 베르무트만큼 강했다는 것 아닌가?


“베르무트 님만큼 강해질지도 모른다, 겠지요.”


난간에 앉아서 벌컥벌컥 술을 마시던 아니스가 말했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유진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입술을 삐죽 내민 뚱한 표정. 어쩔 수 없었다.


성녀란 것이 공인되어 버리고, 날개를 퍼덕대며 계시를 받았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 때문에 아니스는 유라스의 성직자들에게 선망 어린 시선을 받게 되어, 기적의 교범을 보이고 예배를 집전하는 등 번잡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아니스가 아닌 크리스티나가 집전했다. 아니스는 의식의 귀퉁이에서 몇 마디 조언을 건네거나 대체 언제 끝나는 것이냐며 투덜대는 역할만 맡았다.


그럴지라도 낮이 워낙 바빠서 유진이나 모론과 어울리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아니스가 심통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바빴던 것은 모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며칠 사이에 요새에 있는 기사들 대부분과 대결을 마쳤고, 기사단의 훈련 상대 역할까지 소화해냈다. 가끔 누르가 나타나면, 재빠르게 레헤인야르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틀 뒤에 나이트마치가 끝난다.


“전 아무렇지 않습니다.”


아니스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모론이 조금 걱정이 됩니다. 지금이야 저희가 이렇게 함께 있고, 모론 당신도 후손이나 다른 기사들과 교류를 나누었지만…… 결국 당신은 레헤인야르로 돌아갈 것 아닙니까.”


“그럴 거다. 이곳에 지내면서 오가는 것은 번잡하고, 오래되면 날 무뎌지게 만들 거다.”


“당신이 또 미쳐 날뛸 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


아니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색하고 싶지는 않다. 가슴 깊이 넣어둔 감정이 멋대로 의식된 것뿐이다. 아니스는 상실(喪失)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모론은 아니스 이상으로 상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홀로 살아남은 것은 모론뿐이니 말이다.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하나.”


모론이 웃으며 물었다. 아니스는, 그 말을 쉽사리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리저리 말을 돌렸지만, 아니스의 본심은 모론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이 만남이 마지막인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다음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아까부터 괜히 짜증이 나고, 마시는 술에 별맛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ㅡ 이별이 아쉽고 두려워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걸 받아들여 버린 순간, 앞으로도 계속 그 감정을 확실히 의식하게 될 것만 같아 두렵고 싫었다.


“그것에 대한 약속은 이미 나누었지 않나.”


“……약속?”


“내가 이상해지면, 하멜이 날 패러 오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


“하멜, 아니스, 너희 둘이 나에게 부탁했다. 조금만 더, 이곳을 지키고 있어달라고. 나는 그 부탁을 평생 잊지 않는다. 너희가 베르무트와, 세냐를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나는 변하지 않고, 이곳을 지키고 있을 거다.”


“이 등신. 뭐가 부탁입니까? 저는 멋대로 지껄인 하멜과 작당하여 적당히 맞장구를 쳤을 뿐입니다.”


아니스는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언제나 강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아니스 슬리우드’는 성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든 약자를 수호하고 치유하는 존재였기에, 정작 자신의 약함은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고, 모론과, 세냐와, 하멜과 만나면서. 성녀는 아니스라는 한 명의 인간이 되었다. 약함을 드러내도 될 동료들을 얻었다. 그렇다 한들 항상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웃음으로 표정을 감추고, 비꼬고, 놀리고.


아주 가끔, 눈물이 조금 날 것만 같을 때에는 솔직히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던 100년보다는 훨씬 짧게 끝날 겁니다.”


많이 울지는 않았다. 눈물 한 줄기만이 또르륵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그 눈물은 유진과 모론을 기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며칠 전에 아니스가 자신의 소멸에 대해 말했던 일이 유진의 기억 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 그때는 당연히 너도 같이 있을 거야, 아니스.”


유진은 펄쩍 뛰어 아니스의 옆에 내려섰다.


“아니스가 없다면 나는 대망치의 협곡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모론도 굵은 양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품 안에 안겨서 마음껏 울라는 뜻이었지만, 아니스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유진과 모론이 갑자기 왜 호들갑을 떠는 것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저 두 등신은 갑자기 왜 저러는 것입니까?’


[시스터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티나는 흐뭇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용감한 모론


나이트마치가 끝났다.


개회식이 없었듯, 폐회식도 없었다. 레헤인 요새의 성문은 새벽부터 활짝 열렸고, 각국의 왕과 기사단이 요새를 떠나기 시작했다.


새벽 중에 가장 먼저 성문을 지난 것은 나하마의 술탄이었다. 그는 나하마의 전사단인 모래전갈과 던전 마법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설원을 떠났다.


‘언젠가.’


그 행렬에는 아멜리아 머윈도 있었다. 그녀는 헤모리아의 목에 건 사슬을 잡아끌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높은 성벽 위에 선 용감한 모론이 보였다.


저 인간 같지 않은 강인한 육체가 아멜리아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만약 저 육체를 시체로 거둘 수 있다면. 요새에서의 열흘 남짓 동안 수십 수백 번 했던 생각이지만, 차마 실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멜리아는 머나먼, 아니, 그리 멀지는 않았으면 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 나이트마치. 그녀의 협력자인 술탄은 용사에 성녀, 거기에 은둔한 모론까지 나타난 것에 여러 가지 불안을 느끼고 있었지만ㅡ 아멜리아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에 반드시 죽이겠다고 다짐했던 유진 라이언하트가 용사라는 것에, 아멜리아는 운명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아무 문제 없다. 용사와 성녀가 전설의 계보를 잇는 존재고, 용감한 모론이 살아 있는 전설이라면.


아멜리아 머윈. 그녀는 이미 죽었지만 사라지지 않은 전설들을 소유하고 있다. 우둔한 하멜의 시체. 그것은 아멜리아가 가진 애장품 중에서도 으뜸이다. 집어넣을 혼이 마땅치 않기는 하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아멜리아가 가진 애장품은 하멜의 시체뿐만이 아니다.


‘용감한 모론에 유진 라이언하트…… 성녀의 시체까지 거둘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그건 힘들겠지.’


아멜리아는 웃음을 감추고서 고개를 돌렸다. 이빨 사이에 뼈다귀가 물린 헤모리아는 더 이상 이빨 가는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지독한 훈육을 당했음에도, 헤모리아는 아멜리아에 대한 적의를 버리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의 헤모리아를 지탱하는 것은 증오뿐이었다. 아멜리아 머윈에 대한 증오.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증오. 그리고 신실했던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 신에 대한 증오.


헤모리아는 칙칙하게 죽은 눈으로 아멜리아의 등을 노려보았다.


나하마 이후로도 행렬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 행렬은 처음에 왔을 때보다 줄었고, 어느 행렬은 늘었다. 따로 도착했던 용병단들 대부분은 국가에게 고용되었다. 기사단 간의 이적은 우선 국가로 돌아가서 신변을 정리한 뒤에 진행될 것이다.


라이언하트는.


용병이나 다른 기사를 거두지는 않았다. 라이언하트는 라이언하트인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이 나이트마치에서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폐의 칼을 보았다.


마왕을 보았다.


그리고 용감한 모론과 겨루었다. 그것만으로도 라이언하트는 강해질 수 있다. 그 이름을 내건 기사들은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다. 라이언하트의 피를 잇지 않는 백사자 기사단의 기사들도 그 이름에서 시작된 전설에 매료되었다.


라이언하트라면, 당연히 그렇다. 전설을 체험하고 싶어 한다. 전설을 잇기를 바란다. 모론은 그 열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유진은 그로 인한 변화를 강렬히 느낄 수 있었다. 가다듬어지지 않은, 오히려 들끓는 것만 같은 수백의 투지. 그리고 갈망. 모론에게 당한 일방적인 패배가 향상심에 거대한 불을 붙인 것이다.


“베르무트의 후예들이여.”


다른 국가들을 배웅할 때, 모론은 성벽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언하트를 배웅할 때에는 성벽에서 내려왔다. 그는 기사들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웃었다.


“너희는 강해질 거다. 베르무트의 동료였던 나 모론이 보증한다.”


어떻게 강해질지, 모론은 그런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확신에 가득 찬 눈동자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내뱉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설원에서 아니스가 말하지 않았나. 의외로 사람은 빠르게 적응하고 변한다.


사소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몇 가지의 계기. 하고자 하는 의지. 모론과의 대결은 그런 계기가 되기 충분했다. 그리고 강해질 것이라 확신해 주는 저 말은 의지를 북돋웠다.


“……유진 라이언하트.”


설마 하멜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다행히 모론은 그 정도로 등신은 아니었지만, 이름을 내뱉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던 것을 보면 등신에 가깝기는 했다.


“나는 약속을 절대 잊지 않는다.”


다른 가솔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두들기지 않았다. 모론은 벙긋 웃으며 유진에게 커다란 주먹을 내밀었다. 유진은 잠시 그 주먹을 보다가, 픽 웃으며 반대편 손을 뻗었다.


“저도 약속은 잊지 않을 겁니다.”


보는 이들이 많았기에 편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유진은 그것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민망함을 느끼며, 뻗었던 손을 활짝 펼쳤다.


“부디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주먹을 내밀고 있던 모론은, 활짝 펼친 유진의 손을 보고 파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거대한 주먹이 활짝 펼쳐졌다.


커다란 손이 유진의 손을 마주 잡았다. 회포는 전날 밤새도록 풀었다. 그렇다고 당장 하고 싶은, 내뱉고 싶은 말이 없지는 않았다.


가령, 모론의 손바닥은 뭐 그리 큰가. 왜 지금 은근히 힘을 주어 악력을 겨루려 드는가. 그따위 하잘것없는 질문. 그런 이야깃거리.


직접 내뱉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다음에 만나서 하면 된다.


“그래.”


모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유진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머리로 하는 생각과 당장 가슴이 바라는 것이 일치되지 않았다. 모론은 양팔을 활짝 펼쳐서 유진을 꽉 끌어안았다.


“다음에 보자.”


……처음에 안겼을 때처럼 질식사의 위기는 겪지 않았다. 유진은 공중에 들린 채로 양발을 버둥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모론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놔 새끼야.”


욕을 처먹고 나서야 모론은 큰 소리로 웃으며 유진을 내려놓았다.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라이언하트의 대열이 성문을 모두 나가고, 설원을 가로질러 갈 때까지 모론은 성문 앞을 지켰다.


요새에 왔을 때와는 달리, 돌아가는 길은 커다란 썰매를 탔다. 말이 썰매지 바퀴 달리지 않은 마차에 가까운 형태였다. 가축화된 몬스터가 눈을 박찰 때마다 썰매가 쭉쭉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유진은 창밖에 고개를 내밀어, 점점 멀어지는 모론을 보았다. 밝은 눈을 가진 모론은, 유진이 고개를 돌린 것을 알아보고서 손을 흔들었다. 유진은 헛웃음을 뱉으며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몇 번 마주 흔들다가, 이만 가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모론 님은 널 되게 좋아하시나 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안이 투덜거렸다.


“모론 님의 감각으로는 우리가 친구의 손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널 더 편애하는 것은, 네가 시조님과 닮아서겠지만.”


“그러는 오빠도 꽤 편애받았잖아. 왜 안 받은 척 굴어? 모론 님 어깨에도 올라탔으면서.”


시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유진의 옆에 앉아 있었다. 동생이 두 눈을 샐쭉 휘면서 놀려대자, 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야, 야! 왜 쓸데없는 말을 해? 그러는 너도 모론 님 어깨에 올라탔잖아……!”


“오빠는 이상한 걸 부끄러워한다니까. 왜?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고, 더는 어린애도 아니니까. 모론 님의 어깨에 올라탄 것이 부끄러운 거야?”


“나는…… 나는 별로 타고 싶지 않았어. 모론 님이 억지로 날 들어 올려서…….”


“뭐 어때? 모론 님께 관심을 안 받는 것보다는 귀여움받는 편이 낫지.”


시엘은 킥킥 웃으면서 유진을 힐긋 보았다.


지금 유진의 옆자리에 앉은 것은 시엘뿐이었다. 그 수상쩍은, 가끔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보좌주교…… 아니, 성녀도 없다. 다른 자리에 앉은 것도 아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원래 그게 당연한 거잖아. 크리스티나 성녀는 유라스 사람이라고.’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는 유라스의 사제단과 함께 돌아갔다. 쫑알쫑알 말이 많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박쥐같은 메르도 웬일인지 유진의 망토 안에 쏙 들어가 있다.


그렇기에 시엘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옆자리를 독차지했다. 물론, 이 마차에 메르와 크리스티나가 있을지라도, 시엘은 자신이 앉고 싶은 곳에 앉을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크리스티나 성녀 말이야. 왜 갑자기 돌아간 거야?”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다. 걱정도 조금은 되었다. 무조건 좋다고 히히덕거릴 만큼 크리스티나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냥, 아주 조금 기분이 좋을 뿐이다.


“할 일이 있대.”


“너도 이유를 모르는 거야?”


“나이트마치의 회의 도중, 유라스 내부에서 결정된 사안이라던데.”


유진은 이상하리만큼 히히 웃어대는 시엘을 힐긋 보며 말했다. 당연히 유진은 크리스티나가 왜 유라스에 돌아갔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유라스의 광명사제단. 그중에서도 특히나 신성력과 기적이 강한 성직자들을 엄선하여, 크리스티나를 중심으로 한 전투신관부대를 조직한단다.


처음 교황에게 저 말을 들었을 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하고 싶지 않다고 격렬히 거부했다. 하지만 교황이 조직한 부대에 대한 전권을 성녀가 갖게 될 것을 맹세하자, 결국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고집을 꺾었다.


아니스는 언젠가를 위한 보험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다.


유라스에서 새로 조직될 전투신관 부대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친위대 개념이다. 신관들이 성녀를 교황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면, 아니스가 알아서 정신머리를 뜯어고칠 것이다. 기왕 조직하기로 한 것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스는 자기 눈으로 직접 엄선해 고르겠다며 유라스의 신관들과 함께 일찍 요새를 떠나버렸다.


라이언하트에 돌아간 후.


유진은 준비를 갖춘 후에, 헬무드에 떠나볼 생각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아니스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유라스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헬무드에서 아니스와 합류하기로 했다.


최종적인 목적지는 당연히 용마성.


그 전에 월광검이 최초로 발견되고 파편이 발굴되었다는 카자드 구릉지에 가볼 생각이다. 아마, 베르무트는 그곳에서 월광검을 파괴했을 것이다.


‘파편을 더 발견한다면 월광검의 힘도 늘겠지.’


헬무드로 가는 것이 위험하지는 않나? 이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해 신중히 행동하려 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유폐의 마왕이 유진을 보호하는 꼴이 되었다.


물론, 모든 마족이 가비드 린드먼처럼 마왕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 건에 대해서는 몇 년 전에 흑탑주 발자크 루드베스도 말한 적이 있다.


마왕이라 해서 모든 마족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대부분의 마족을 방임하고 있다. 수많은 마족들 중에서는 유폐의 뜻을 거스르는 마족도 있다.


그 정도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해서, 헬무드에 갔을 때의 모든 가능성을 염두하고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비드는 날 손대지 않아. 그렇다는 것은 가비드 휘하의 검은 안개도 날 어쩌지 않는다는 거고. 누아르 제벨라는…….’


그 또라이가 걱정이긴 하다만. 확실하지도 않은 걱정들로 할 일을 미루기만 하다가는 끝이 없다.


유진은 세계수의 안에 봉인되어 있던 세냐를 떠올렸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뿌리와 엮여서, 세계수의 힘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얼레리 꼴레리, 라고 놀려대던 세냐의 웃음을 떠올렸다.


ㅡ그 후로 고작 2년이다. 세냐가 그 시간을 긴 기다림이라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은 충분히 길다고 느꼈다.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후후…… 후후후…….]


용마성에 관한 정보는 굉장히 부족하다. 침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용마성은 라이자키아의 영지인 카라블룸의 상공을 계속해서 떠돌아다닌다. 용마성 자체가 어지간한 요새만큼 커다라니 하늘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용마성에 침입할 방법이다.


지독한 인간혐오자인 라이자키아는 영지에 인간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법은 라이자키아가 사라진 수백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지상 영지 카라블룸은 여전히 마족과 아인만 살고 있다.


카라블룸의 영지민만이 부름을 받아 용마성의 출입이 허락된다. 부름을 받기 위해서는 작위를 갖거나, 마족으로서의 격을 높이거나, 많은 재산을 보유하거나……. 즉, 라이자키아의 영지는 자그마한 나라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부름을 받아 용마성에 올라가 사는 이들은 ‘노블레스’라 불리는 귀족층이고, 지상영지 카라블룸에서 사는 영주민들은 평민이다.


‘인간인 내가 카라블룸에 들어가는 것은 힘들어. 용마성에 부름을 받는 것도 불가능하고. 대륙의 국가라면 모르겠지만, 헬무드…… 그것도 인간혐오자의 영지에서 라이온하트의 이름은 팔 수도 없지.’


애당초 유진은 헬무드로 떠나는 것을 가문에 알릴 생각이 없었다.


괜찮다.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는 말을 유진 스스로도 보증할 수 없었거니와, 열심히 설득해도 라이언하트의 어른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만약 유진이 헬무드로 떠난다 말하면, 아버지 제하드는 뒷목을 잡고 기절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디 뒷구멍에 뇌물이라도 찔러주면 길이 트일까…… 아니, 그럴 필요도 없지. 어차피 가서 날뛸 텐데, 그냥 처음부터 침입하는 것이…….’


[후후후…… 후후…….]


용마성에 침입할 방법을 열심히 모색하는데, 머릿속에서 자꾸 웃음소리가 섞였다.


망토 안의 이공간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는 푹신한 의자도 하나 있다. 유진이 꺼내 앉기 위해 넣은 의자가 아니다. 오직 메르의 편의를 위해 넣은 여러 가구 중 하나였다.


메르 메르데인. 그녀는 그 넓고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앉아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세냐 님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시는군요. 드디어 세냐 님이 부활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좋니?’


[당연히 좋죠. 저는 세냐 님과 200년 만에 만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세냐 님이 깨어나 돌아오시면, 제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도 끝이 나겠죠.]


‘네가 언제 모멸과 핍박을 받았다고…….’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메르는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른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며, 망토의 틈 사이로 바깥을 쳐다보았다.


“가문에 돌아가면 뭐 할 거야?”


생글거리며 말을 거는 시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냥 옛날부터 하던 것 하겠지 뭐…….”


헬무드에 다녀올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없으니, 유진은 찔끔하여 대답했다. 무성의한 대답이었지만 시엘과 시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옛날부터 하던 것이라면 수행뿐이니, 유진다운 대답이라고 여긴 것이다.


‘후후…… 진실도 모르고 좋아서 웃기는…… 유진 님은 나랑 세냐 님을 구하러 갈 거라구요.’


메르는 시엘의 샐쭉한 미소를 비웃었다. 그러니 메르는 망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세냐 님이 돌아올 때까지. 그 짧은 시간 정도는 시엘에게 유진의 옆자리를 양보해 줄 수 있다는 자비를 베풀기로 한 것이다.


‘…….’


그렇다고 망토 안에 죽치고 있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몇날 며칠 망토 안에 있어야 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혔다. 결국 메르는 몸을 꼬물거리며 망토 밖으로 나와, 유진의 무릎 위에 앉았다.


“자리에 앉지?”


“싫어요. 저는 유진 님의 옆이 좋아요.”


‘건방진 늙은 꼬마. 옆자리를 빼앗지 못하니까 무릎 위에 앉아? 존재해 온 시간을 생각해야지, 200년을 살아놓고 모습이나 태도나 어린애처럼 굴다니…….’


시엘은 유진의 무릎에 앉은 메르를 흘겨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 정도야 양보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유진의 옆자리에는 시엘이 앉아 있지 않은가.


“…….”


시안은 맞은편의 유진을 쳐다보았다. 옆자리에는 시엘, 무릎 위에는 메르. 어린 소녀를 흘겨보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안에게 그를 지적할 여유는 없었다.


모두가 라이언하트에 돌아가지만, 시안은 바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가주인 길레이드와 함께 하멜른의 왕성으로 가, 아만 루하르의 딸인 11살의 아일라 루하르를 만나야 한다.


바로 혼약을 맺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어쩌면 혼약을 맺게 될지도 모른다…….


‘11살의 공주랑…….’


11살이면 메르의 외형보다 어린 나이 아닌가?


그런 생각과 더불어, 어마어마한 근육질의 거구인 아만과 모론을 떠올렸다. 요새에서 본 바야르 부족민들은 모두가 거구였다. 어쩌면 11살 아일라 공주도…….


‘…….’


그래도 맨정신으로도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은 시무인의 스칼리아 공주보다는 낫지 않은가?


애써 위안했지만, 가슴의 울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카르트


라이언하트의 본가. 이곳은 새벽이 깊어도 불이 모두 꺼지지 않는다. 저택과 정원, 숲, 모든 부지가 기사들에 의해 경비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마법이 저택 내부를 경계하고 있기에, 외지에서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저택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늦은 새벽이건 이른 아침이건, 본가의 사람이라면 저택 부지의 어디든 갈 수 있다.


제하드는 라만과 함께 기돌의 본가에 가있고, 시안과 길레이드는 아직 루하르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카르멘을 필두로 한 흑사자 기사단 3번대는 숲의 안쪽에서 야간훈련 중이다. 훈련에는 예외가 없어서, 시엘도 지금은 숲속에서 모포를 덮고 있을 거다.


유진은 오늘이 저택을 떠나는 적기라고 판단했다.


숲의 안쪽에 있는 라이언하트의 워프게이트는 사용하지 않고, 수도 세이리스의 워프게이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헬무드까지의 이동은 예전에 사마르에서 사용했던 백지신분증을 사용하고, 헬무드에 입국할 때에는 상황에 맞춰 판단하자고 마음먹었다.


라이언하트 측에서 걱정이 과하지 않을까 싶어 편지도 한 장 썼다. 정확한 목적지는 적지 않고, 그냥 세상을 한번 둘러보고 오겠다고만 적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어 몇 줄을 더 덧붙이기도 했다.


[자아를 찾아 떠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유진 딴에는 치밀히 계산해서 덧붙인 글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카르멘이라면 저 글줄을 이해할 것이다.


본가의 누군가가 극성을 부려대며 유진을 찾아야 한다고 호들갑을 떤다면, 카르멘은 절대로 찾아 나서지 못하게끔 막아줄 것이다. 그를 확신할 만큼 유진은 카르멘을 이해했다.


‘…….’


동질감 때문이 아니다. 유진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빼곡히 적은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행의 준비물은 모조리 흑암의 망토 안에 있었기에 몸만 나가면 되었다.


“유진 님? 어디 가세요?”


방을 나오고, 복도를 내려가는 도중에 엘프 시종인 나리사, 레베라와 마주쳤다.


본래 유진의 전속시종이었던 니나는 별채를 총괄하는 시종장이 되어버려서, 현재 유진의 전속시종은 니나와 레베라가 함께 맡고 있다. 라이언하트에서의 시종경력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과거 노예생활을 하던 중에 쌓은 시종경험과 성실함, 유진에 대한 충성심 등이 가산점으로 작용한 덕분이었다.


즉, 특채란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진이야 아무런 의식도 하고 있지 않지만, 본가의 실세는 유진이었다. 나하마에서 데려온 라만 슐호브는 백사자 기사단에 입단하고, 현재는 제하드의 개인호위를 맡고 있다. 하도 라만이 주군, 주군 거리면서 뒤를 따라 다니는 것이 귀찮아 한마디 한 덕분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가서 우리 아버지 호위나 해.


나리사와 레베라가 견습에서 바로 전속 시종이 된 것도, 하도 열성인 둘을 본 유진이 니나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건넸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면 견습 딱지 떼도 되지 않아? 다른 사람 쓰는 것도 불편하니까, 그냥 쟤들보고 내 전속하라고 해.


애당초 니나 본인부터가 견습을 벗어나자마자 유진의 전속이 되고, 몇 년 만에 별채의 시종장까지 오른 장본인이다. 니나는 내심 교육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느꼈지만, 그녀는 유진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을 8년 동안 학습한 상태였다.


그렇기 나리사와 레베라는 유진의 전속시종이 되었다. 지금 그 둘은 큼직한 빨래바구니를 각자 들고서 옮기고 있었다. 전부 다 유진의 수련복과 수건, 속옷이었다.


“산책.”


“그렇다면 제가 시중을 들게요.”


나리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자 레베라는 하나뿐인 눈동자로 나리사를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의족으로 유진 님의 보폭을 맞추기는 힘들지 않을까.”


“나, 나는 의족으로도 빨리 걸을 수 있어서 괜찮아.”


톡, 톡. 나리사는 보란 듯이 의족으로 계단을 오르내렸다. 유진은 자신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저 둘이 왜 기싸움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산책에 시중이 필요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나 혼자 갈게. 세탁물은 아까 내놓은 것이 끝이니까, 나 없는 동안 방에는 들어가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아침식사는 어떻게 하실는지요?”


“배고프면 부를 테니까, 아침에 문 두드리지 마.”


편지는 기왕이면 늦게 발견되는 것이 좋으니까.


유진은 나리사와 레베라를 뒤로하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거기서부터는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다. 저택 부지를 경계하는 기사들의 순찰 경로는 꿰고 있다. 마주쳐도 들키지 않도록 기척을 죽이고, 마법으로 모습도 감추었다.


저택이 멀어진 시점에서는 발걸음을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밤하늘로 날아오르자 망토 안에서 메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라이언하트의 저택을 보면서 히쭉 웃었다.


“다음에 돌아올 때는 세냐 님이랑 같이 돌아오는 거죠?”


“일이 잘 풀린다면 그럴 수 있겠지.”


“당연히 잘 풀릴 거예요. 유진 님 혼자라면 아무래도 불안하지만, 아니스 님도 같이 가는 거잖아요.”


오히려 그편이 더 일을 꼬이게 만들지 않을까. 유진은 내심 그런 걱정을 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유진이 용사고, 아니스가 성녀라는 것이 알려져 버렸다.


헬무드의 입장에서 본다면 언젠가 마왕을 죽이겠다는 역적이 입국하는 것인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입국이 가능할 지부터가 걱정되었다. 일단 백지신분증으로 시도해 보고, 만약 안 된다면 밀입국을…….


“유진 님. 무식한 생각하지 말고, 그냥 크리스티나 님한테 맡기는 것이 어때요?”


“무식해? 내가?”


“유진 님 방금 밀입국에 대해서 생각했잖아요. 그 마경 헬무드가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밀입국이 가능할 리가 있나요?”


“너는 마경 가본 적도 없으면서 어디서 아는 척이야.”


“물론 저는 존재한 시간의 대부분을 아크리온에서 보냈고, 그 외 가본 장소라고는 유진 님과 함께 간 장소들뿐이죠. 하지만 헬무드가 밀입국이 불가능한 나라라는 것은 알아요.”


“난 모르겠니?”


“그럼에도 밀입국을 고민하는 것이 유진 님의 무식함을 증명하는 거죠.”


메르는 깔끔한 논파에 기분이 좋아 가슴을 활짝 폈다. 그 의기양양한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 유진은 메르의 이마 정중앙을 찰싹 때렸다.


“아야!”


한 대 쥐어박기는 했지만, 메르의 말이 옳았다. 헬무드는 밀입국이 불가능하다. 그 마왕의 제국은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법으로 통치된다.


헬무드의 제국민이라면, 매달 정기(精氣)를 납세하는 것만으로 평생 노동할 필요 없이 생계가 보장된다. 납세하는 정기라고 해 봐야 그날 하루 기력이 없는 정도란다. 만약 사후(死後)에 언데드 노동자가 되기로 계약을 맺는다면, 준 귀족이 되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일할 필요 없이 놀고먹을 수 있는 제국. 이민 비용이 꽤 비싸다만, 평생 먹고살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 과한 비용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야 할 돈을 내지 않고 무조건 편하고 즐거운 것만 바라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죽어서도 노동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 그들은 헬무드의 이민지원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영주권도 구입하지 않고서 몰래 헬무드의 국경을 넘어온다.


그리고 죽는다. 헬무드는 마왕이 통치하는 제국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인간에게 인도적이지만, 밀입국자와 불법 체류자에게는 한 치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서큐버스 따위의 몽마는 꿈을 통해서 강제로 정기를 빨아들인다. 그렇다 하여 몽마만 정기를 탐하는 것이 아니다. 정기, 인간의 생명력은 마족을 살찌우는 힘이다.


헬무드의 인간이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귀족 계층의 마족과 정점에 선 마왕에게 정기를 상납하기 때문이다. 정기를 상납하지 않으면서 특혜를 받는 밀입국자와 불법체류자는 법정에 설 기회도 갖지 못하고 사냥마물에게 살해당해 버린다.


“물론 유진 님의 실력이라면 사냥마물을 따돌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건데요? 유진 님은 계속 밀입국자인 거고, 헬무드의 법은 밀입국자를 무조건 살해해 버리잖아요.”


메르가 혀를 쯧쯧 차면서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크리스티나 님을 믿잖아요. 저희가 루트로 잡은 알카르트 교구는 원래 크리스티나 님이 계시던 곳이잖아요?”


반박할 수가 없는 정론이었다. 그래서 유진은 메르의 머리를 한 대 더 쥐어박았다.


마경 헬무드, 알카르트 교구. 그곳은 유라스와 헬무드의 국경이 맞닿은 영지다. 본래 크리스티나는 알카르트 교구의 보좌주교로 지내며, 그 지역에서 머무르는 헬무드의 이민자와 괴짜 마족들에게 신앙을 전파하며 교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유라스와 국경을 맞댄 곳이니만큼, 알카르트 교구를 통해서도 헬무드에 입국이 가능하다. 입국심사는 받아야겠지만, 옛 인맥을 통해 여러 편의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어.”


알카르트 교구장.


유진은 그를 생각하며 인상을 왈칵 구겼다.


* * *


키옐을 떠나는 것에는 백지신분증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유라스에 입국할 때는 발각되어서 사용이 불가능했다.


이 백지신분증을 발급한 곳은 교황청이고, 입국심사관은 교황청 소속의 주교였다. 교황청 발 백지신분증이 악용될 수 있다는 경계는 충분히 하고 있기에, 검문에는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백지신분증이 발각되었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심문실로 끌고 가려 들기에 슬쩍 마법을 풀어 본래 모습을 보여주고,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이 적힌 신분증을 제시했으며, 성검을 보여주었다. 그것만으로 유진은 성국에서 겪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몇 개의 워프게이트를 더 사용했다. 크리스티나와 합류하기로 한 곳은 유라스의 북쪽 끝의 도시, 네란이다.


그곳에서 ‘출국’하여, 평원을 며칠에 걸쳐 가로지르면 알카르트 교구에 도착한다.


“오랜만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이미 전날 네란에 도착해서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유진이 네란의 워프게이트에 도착하고서 바로 크리스티나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이랄 것도 없잖아.”


레헤인의 요새에서 헤어지고서 약 1달하고도 반. 라이언하트 저택을 밤중에 몰래 떠난 것도 벌써 나흘 전이다.


“이번이 2번째 오는 것이지만, 나는 이 나라가 싫어. 도시마다 게이트가 드문드문 있어서 이동도 번잡하고 시간이 걸리…….”


“아니스 님이 말씀하시길, 300년 전에는 워프게이트도 없었는데 그때는 안 답답했냐고 물어보십니다.”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300년 전에는 아예 없었으니 워프게이트가 편리하다는 것도 몰랐었잖아. 하지만 지금은 워프게이트를 써봤으니…….”


“아니스 님이 쫑알거리지 말고 닥치라고 하십니다.”


“너 사실 크리스티나 흉내를 내는 아니스지? 아니면 크리스티나, 네가 아니스인 척하고서 나한테 닥치라고 하는 건가?”


크리스티나는 입가를 가리고서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웃음기를 정리하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교구장님과는 연락을 나누었습니다.”


“나는 솔직히 알카르트 교구장부터 마음에 안 들어.”


“다행히도 교구장님은 협력을 약속하셨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인가?”


“제가 판단하기에는, 예, 진실하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유진과 크리스티나, 아니스.


이 3명 사이에는 어쩔 도리 없는 상식의 차이가 있다.


유진과 아니스는 300년 전의 인물이다. 아니스는 약속 이후 급진적으로 평화로워지는 시대를 산 경험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유진, 하멜은 그런 경험이 없다. 하멜의 상식에서 마족은 무조건 죽여야 하는 적이었다.


그러한 일직선의 증오는 환생하고 유진 라이언하트의 삶을 살면서 아주 조금 순화되었다. 아주 조금. 흑마법사는 당연히 죽여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죽이지 않고 살려두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마족의 경우는ㅡ 솔직히 잘 모르겠다.


몽마의 여왕, 유폐의 칼, 나찰공주. 300년 전의 세상에서 악명을 떨치고 날뛰었던 놈들은 당연히 죽인다.


다른 마족은? 평화로워진 세상에서 태어나고 전쟁을 모르는 마족은? 단지 마족으로 태어났을 뿐, 전쟁을 모르고 전쟁을 바라지 않은 존재마저 적이라 규정하고 무조건 죽여야 하나?


ㅡ모른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죽이고 싶고 죽여야 할 이유가 있다면 죽이면 될 뿐이다. 유진은 성자도 현자도 아니기에, 살의의 기준은 올곧지 않았다.


“인간은 아니잖아.”


마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살의와는 다른 상식의 문제.


마족이 신앙심을 가진다는 것. 마족을 정화하는 빛의 신을 믿고 숭배한다는 것. 세상이 다르니 상식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는 납득한다만, 이것만큼은 납득도 이해도 되지 않았다.


“……반은 인간이십니다.”


크리스티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종족이 다르면, 자식은 태어나지 않는다.


‘절대’ 태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극히 드물게 다른 종족 간에 자식이 태어나곤 한다. 그나마 흔한 것이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엘프. 그 외에도 다른 종족에 속한 아인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난 경우가 몇몇 있기는 하다.


헬무드의 마족과 인간들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의 알카르트 교구. 그곳의 교구장인 에일린 플로르는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족 중에서도 가장 희소한 반인반마다.


세간에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알카르트의 교구장은 언제나 순백의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교구장이 어떤 모습인지는 신도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알카르트의 보좌주교로 지냈던 크리스티나는 교구장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마족과 인간 사이의 혼혈. 그런 특별한 피를 가졌기에, 에일린 교구장의 신앙은 진실되고 절실하며 신실했다.


“……유진 님이 오해하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에일린 교구장님은 올바른 분이십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분의 신앙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동질감이 느껴지는군요. 처한 운명이 구차하고 너덜너덜할수록 신앙에 의지하는 법입니다.]


아니스가 이죽댔다.


“교구장님은 알카르트의 명사이시며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서신 분입니다. 특히, 알카르트의 마족 귀족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친밀한 관계?”


“예. 교구장님이 집전하는 예배를 ‘구경’ 오실 정도로 말입니다.”


일말의 신앙심도 갖지 않고, 단지 친애만으로 예배를 구경할 뿐.


“신분의 위조과 밀입국에는 협력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대기줄을 무시하고 즉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 하셨습니다.”


“……비자?”


유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껌벅거렸다.


“헬무드는 관광국으로도 굉장히 유명합니다. 부유한 자라면 죽기 전에 꼭 한 번 헬무드를 관광하기를 바랄 정도로 말입니다. 유진 님은 헬무드의 데모닉월드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게 뭐지?”


“헬무드의 거대한 놀이공원입니다. 어린아이를 미치게 하는 놀이기구가 가득하다더군요. 그 외에도 헬무드는 수많은 관광시설을 가진 휴양지라,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헬무드에 관광목적으로 찾아옵니다. 하지만 헬무드는 제국의 ‘인간’을 엄격히 관리합니다. 넘치지 않을 만큼, 관리할 수 있을 만큼.”


마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관광국으로 유명하다니…… 유진은 상식의 괴리감을 새삼스레 절감했다.


“비자는 외국인이 갖는 입국허가의 증명입니다. 헬무드의 입국사무국에 신청하고, 관광 비자를 발급받는 것에는…… 교구장님의 전언에 따르면, 현재는 관광객이 너무 많이 밀려서 최소 1년은 기다려야 한다더군요.”


“…….”


“그 관광 비자도 1개월에 한 번씩 거금을 내고 갱신해야 합니다. 영주권을 가진 헬무드의 제국민이라면 금전이 아닌 정기로 세금을 대신하지만, 관광객은 정기를 지불할 수 없으니까요.”


원래도 돈이야 썩어 넘칠 만큼 많았겠지만, 어마어마한 제국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이 어디서 나오나 했더니. 관광사업으로 배가 터질 만큼 벌어먹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일린 교구장님은 저희가 무리 없이 체류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손을 써주겠다 하셨습니다. 몇 년은 족히 밀린 대기줄을 무시하고, 오늘 당장 말입니다.”


“……입국심사 단계에서 거절당하는 것 아니야? 용사와 성녀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


“저도 그 사실을 경계했지만, 에일린 교구장님은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직접 설득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크리스티나는 말끝을 흐리며 대기시켜 놓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대륙 제일의 관광국? 어린아이들을 미치게 하는 데모닉월드? 휴양지?


마왕이 지배하는 악의 제국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유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알카르트


알카르트 성당.


유진과 크리스티나는 그곳의 응접실에 앉아 교구장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유진도 일단 자리에서 일어서기는 했다.


교구장, 에일린 플로르가 응접실에 들어왔다. 알려진 대로 빛의 성직복인 새하얀 로브를 입고, 마찬가지로 새하얀 가면으로 얼굴을 감춘 모습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에일린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에일린 교구장님.”


“평안하셨는지요, 크리스티나 성녀님.”


가벼운 인사를 마친 에일린이 유진을 돌아보았다. 후드 아래의 새하얀 가면에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일린이 쓰고 있는 가면은 눈구멍까지 검은 렌즈를 끼워놓아 눈동자까지 가리는 가면이었다.


‘아하.’


뭐 저리 강박적으로 가리나 했더니. 에일린의 정체를 짐작한 유진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에일린은 그런 유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성검의 주인, 유진 라이언하트 님을 뵙습니다. 저는 알카르트의 교구장을 맡고 있는 에일린 플로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진도 고개를 까딱 숙이며 인사는 받아주었다.


“뱀파이어입니까?”


인사가 끝난 즉시, 유진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무례한 질문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


에일린은 제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 하여 가면을 벗지도 않았다. 유진도 그것까지 강요하지는 않았다.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로브, 얼굴과 눈동자까지 가리는 가면. 하프 뱀파이어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태양은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오랜 천적이다. 저 의상은 태양빛에서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리라.


‘아니면 매료를 감추기 위한 것이던가.’


뱀파이어는 목덜미에 송곳니를 꽂아 피를 빤다. 그런 사냥을 보다 편하게 성공하도록 진화해 왔다. 마안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상대를 유혹하고 매료하는 눈동자는 뱀파이어의 기본 능력 중 하나다.


‘단순히 창백한 혈색을 가리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흉터나 화상, 그런 종류거나.’


하프 뱀파이어가 대주교가 될 정도니 구차한 인생사가 깔려 있겠지만, 유진은 그 사정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뭐냐. 헬무드에 들어가려면 비자? 라는 것을 발급받아야 한다던데…….”


“예.”


“전해 듣기로는 교구장님이 그 비자를 발급받는 것에 도움을 주신다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알카르트 입국관리소장님과 만남을 주선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관리소장이라는 사람…… 사람 맞습니까?”


“마족이십니다.”


“……그 마족이랑 만나서, 여차저차 얘기를 나누고 비자를 발급받으면 된다?”


“예. 저는 알카르트의 교구장일 뿐, 비자를 발급하는 권한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에 유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아직 비자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통행증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에일린에게 통행증 2장을 넘겨받으면 바로 알카르트의 관문을 지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입국관리소장을 해 먹고 있는 마족과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니? 그렇다는 것은, 처음 만나는 마족과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비자가 필요하니 발급 좀 해주쇼라고 직접 ‘부탁’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해야 하니까, 할 수는 있다. 다만 가슴에 뭔가 얹힌 것처럼 불편했다.


“언제쯤 발급받을 수 있는 겁니까?”


말을 내뱉은 후.


유진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흘려낸 예리한 적의가 응접실의 공기를 핥았다. 유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곁에 앉아 있던 크리스티나가 급히 유진의 소매를 잡았다.


“……오우.”


목소리가 들린 곳은 벽이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벽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남자, 라고는 하였지만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눈동자와 팔은 4개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꼬리를 가진 마족이었다.


“과연 라이언하트…… 아니, 용사라 해야 할지. 한순간 풀려나온 적의가 이토록 예리하다니.”


마족은 너스레를 떨며 벽을 통과했다. 4개의 눈동자가 각각 다른 곳을 보았다. 하나는 에일린을, 하나는 유진의 얼굴을, 하나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하나는, 망토 안에서 무기를 쥐고 있는 손을.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합니다. 저는 드루너스 프리드. 헬무드의 자작이며, 알카르트 관문의 입국관리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기괴한 외모이기는 했지만 마족은 유쾌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드루너스 프리드. 그 이름을 들은 즉시, 유진은 기억을 더듬었다.


300년 전을 회상했다. 그때 만났던 마족들. 죽이지 못했던 놈들. 죽이기로 했던 놈들의 이름을 더듬어 올라갔다.


드루너스 프리드? 없다. 죽였던 놈들까지 포함해서, 프리드라는 성을 가졌던 놈이 있나? 없다. 드루너스 프리드. 저 마족은 300년 전에 기억할 만큼의 거물이 아니다. 어쩌면 그 시대에는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뭡니까?”


“그게 참, 저 개인적으로 꼭 만나보고 싶었던 분들이셔서. 그렇다고 여러분을 제 저택이나 일터에 초대하는 것도 공사에 어긋나는 일이라. 제가 직접 찾아뵙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하였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서, 드루너스는 고개를 들어 에일린을 응시했다.


“마담을 곤란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걱정되는군요.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비자 발급의 여러 절차는 재량껏 생략했습니다만, 최종심사는 결국 제가 대면해야 하는지라.”


드루너스는 껄껄 웃으면서 빈자리를 가리켰다.


“괜찮다면 앉아도 되겠습니까?”


“예.”


유진은 적의를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마경 헬무드. 그곳에 들어가기로 한 이상, 앞으로는 좋든 싫든 수많은 마족과 얼굴을 맞대야 한다. 그럴 때마다 이런 불편하고 엿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날뛰고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을 갈무리할 수는 없다. 요는 익숙해져야 한단 말이다. 300년 동안 세상은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많이 바뀌었다.


여태까지 몇 번이고 실감했던 일. 두어 번 심호흡을 하니 빠르게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 비자 말입니다. 제가 빠르게 발급받는 것이 특례라고 들었는데, 돈으로 사는 겁니까?”


고개는 삐딱하게 기울이고 말투도 사납다. 그 정도뿐이었다. 유진은 망토에 넣고 있던 손을 빼고서 손깍지를 꼈다.


‘적의가 짜증으로 바뀌었군. 시조의…… 라이언하트의 천성인가? 아니면 저러한 증오가 있기에 성검의 인정을 받은 건가.’


드루너스는 유진에게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짧은 대화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돈을 드리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하하핫, 제가 받지 않을 테니 무조건 대화를 해야겠죠.”


그 흥미는 드루너스만이 특별히 가진 감정은 아니었다. 마족이라면, 모두가 유진에게 흥미를 갖는다. 유진은 그 드높은 헬무드의 대공, 가비드 린드먼을 골탕 먹였을 뿐만 아니라 바벨의 어전에서 내려오지 않는 유폐의 마왕을 머나먼 극북의 땅에 불러들인 장본인이다.


“유진 님과 크리스티나 님. 두 분은 유폐의 마왕님을 암살하기 위해 입국하시는 겁니까?”


굉장히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당황하여 입술을 반쯤 벌렸고, 유진은 눈썹을 꿈틀댔다.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대답하려 입을 열려는데. 드루너스가 껄껄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 긴장하실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어떤 대답이건 저는 유진 님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제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유진 님이 마왕님을 암살하러 오신 것이었으면 합니다.”


드루너스는 태연스레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두 눈을 깜빡거렸다.


“어째서?”


“그야, 유폐의 마왕님이 그를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마왕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존중합니다.”


드루너스는 품 안에서 큼직한 인장을 꺼냈다.


“그리고 유진 님과 성녀님이 아무리 노력해도 마왕님을 죽일 수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두 분의 노력은 헬무드 역사 300년에서 최고로 꼽힐 해프닝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신분증을 꺼내 주십시오. 드루너스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유진은 드루너스를 고깝다는 얼굴로 쳐다보며 품 안의 신분증을 꺼냈다.


“제가 생각하기에, 벌써 암살하러 오신 것 같지는 않고…… 설마 관광은 아니겠지요? 정찰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하하, 정찰 중에 헬무드의 매력에 흠뻑 빠지셔서, 두 분이 헬무드에 정착해 버리는 것도 아주 즐거울 것 같…….”


ㅡ쿠웅!


신분증을 내려놓은 테이블이 박살 났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일린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크리스티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짜증을 느끼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야.”


툭, 툭. 유진은 테이블의 파편이 달라붙은 신분증을 털며 말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널 죽이고, 내 손으로 직접 신분증에 도장을 찍어버리면. 알카르트의 관문을 지날 수 있냐?”


적의가 완전한 살의가 되었다. 드루너스는 뭐라 답하지 않고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는 잠깐이나마 유진과의 격을 가늠해 보았다.


“제가 큰 무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드루너스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박살 났던 테이블의 파편이 한데 모이더니 조악하나마 테이블의 형태를 이루었다. 유진은 그 위에 신분증을 올려놓고 팔짱을 꼈다.


신분증을 뒷면에 인장을 찍었다. 신분증 자체에 마법을 새기는 것이기에, 그 인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두 분이 헬무드에 얼마나 오래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5년 동안은 비자가 유효합니다.”


5년이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유진은 돌려받은 신분증을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이것은…… 입국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배포하는 헬무드의 여행책자입니다. 헬무드는 여러 가지로 대륙과 다른 곳이니, 한번 읽어두시는 편이 도움이 될 겁니다.”


드루너스는 두툼한 책자를 건네준 뒤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흥미도 있고, 의중도 파악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살짝 건드려보았다만 돌아온 반응이 너무 격렬했다.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살의였다.


‘중급 위계까지는 벌레처럼 짓뭉갤 것 같은 살의…… 실제 전투라면 느끼는 것보다 더 강하겠지.’


드루너스는 더 이상 유진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드루너스가 방을 나가자, 안절부절못하던 에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고개를 꾸벅거렸다.


“드루너스 자작님이 설마 그토록 무례한 언동을 하실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초면에 저한테 껄렁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아, 저분은 사람이 아니라 마족이었죠?”


유진은 너스레를 떨며 여행책자를 펼쳐 보였다. ……권두에는 마왕성 바벨의 정경이 담겨 있었다.


‘이 길쭉하고 높다란 건물이 유폐의 마왕성 바벨이라니…….’


헬무드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면서 듣기는 했다만, 몇 번을 보아도 어이가 없었다. 300년 전에 하멜이 죽었던 유폐의 마왕성은 이름 그대로 ‘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바벨은 ‘빌딩’이다. 대륙 전부를 통틀어 빌딩이라 불리는 건물양식을 가진 것은 헬무드뿐이었다.


같은 시대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문화가 다르다. 헬무드의 마왕과 마족들은 300년 동안 독자적으로 마법공학을 발달시켜, 수도 판데모니엄은 대륙이 따라잡을 수 없는 최첨단의 인프라를 구축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판데모니엄의 중심에 우뚝 선 바벨ㅡ 최정상에서 도시 전체를 관망하는 ‘마왕’의 존재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은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존재 자체가 도시 전체에 무한에 달하는 마력을 공급하고, 바벨은 마왕의 마력을 가공하여 도시 전체의 에너지로 삼는다.


즉, 수도 판데모니엄이 헬무드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살기 좋고 발전된 도시일 수 있는 것은 위대한 마왕 폐하의 은총…….


……라고 적혀 있다.


‘특별할 정도로 발달된 도시는 판데모니엄뿐…… 고위 마족들도 대부분 수도에서 산다고 들었는데.’


그 인명까지는 책자에 적혀 있지 않지만, 조사는 미리 해두었다. 공작 가비드 린드먼은 영지를 따로 두지 않고 바벨에서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유진이 ‘기억’하는 마족들 중에서도 판데모니엄에서 여유롭게 사는 놈들이 제법 많았다.


‘서열 잡이로 뒈진 놈들도 많지만.’


300년이 지났고, 세상이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마족의 본성까지 모두 바뀐 것이 아니라고 느낀 것은, 놈들 사이에 아직까지 ‘서열 잡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작위나 명성 따위로 정리한 마족 간의 서열. 하위 서열은 상위 서열에게 도전할 수 있고, 상위 서열은 도전을 거부할 수 없다.


승패.


보통 패자는 죽는다. 서열의 우위에 관계 없이,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갖는다. 리턴이 큰 만큼 리스크도 크기에,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서열 잡이가 벌어지지 않는다.


헬무드의 인간들. 그들 중에서 사후노동을 위해 영혼을 저당 잡힌 자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계약에서 상위 마족을 스폰서로 두기 때문이다. 어떤 마족을 뒤에 두고 있느냐가 곧 인간의 서열이기도 했다.


그만큼 서열이 마족에게는 중요하기에, 여행책자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 있었다.


[여행객을 위한 마족매칭 서비스도 존재합니다. 여행 도중 갑작스러운 다툼, 불량스러운 자들의 시비. 그런 것이 걱정되시나요? 안심하세요. 각 도시에 위치한 헬무드 관광센터를 방문해 매칭 서비스를 요청하시면, 최소 중급 위계의 마족과 약식 계약을 주선해 드립니다!


*위 계약은 협의한 만큼의 정기만 지불하는 약식 계약이며, 절대로 계약자의 혼을 담보로 잡지 않습니다.*


다만, 매칭해 드린 마족의 서열이 상황에 따라서는 우위에 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피치 못할 상황에는 폭력보다는 먼저 신분증을 제시하시거나, 매칭해 드린 마족의 이름을 밝혀주세요!


“말세로군.”


유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제벨라 연예 매니지먼트, 제벨라 건설회사, 제벨라 패션그룹 등.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사업을 300년 동안 모두 성공시켜 온 불패의 아름다운 사업가. 헬무드의 트렌드를 주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누아르 제벨라 공작…….]


유진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무려 데모닉 월드의 3배 규모를 자랑하는, 테마파크를 초월한 테마시티, 제벨라시티가 드디어 내달부터 오픈을…….]


덕지덕지 붙은 수식이 많은 것을 보니, 누아르 제벨라의 입김이 더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관광객들을 위한 마왕 투어.]


헬무드의 역사를 거슬러, 300년 전의 시대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살육의 마왕성부터 시작하여 참혹의 마왕성, 광란의 마왕성의 유적을 순회합니다.


“허…….”


마왕 투어. 그 단어가 유진을 굉장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책자를 접었다.


알카르트


마법자동차에 대한 개발은 아롯에서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지만, 그 분야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것은 바로 헬무드의 마력(魔力)자동차다.


이 기계장치는 헬무드가 자랑하는 마법공학의 산물인데, 이 또한 유폐의 마왕의 마력을 사용하고 있다. 판데모니엄 중심에 우뚝 선 바벨. 그 99층 빌딩은 유폐의 마왕이 가진 무한한 마력(魔力)을 헬무드 각지에 전달하는 송신탑 역할을 한다.


헬무드 각지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검은 탑은 바벨이 보내는 마력을 받아내어 증폭하고, 땅속에 매설된 마력케이블에 의해 도시 전체로 전해진다.


ㅡ그렇게 만들어진 마력도로는, 이름 그대로 마력이 흐른다. 헬무드가 대륙 모든 국가들을 제치고서 자동차의 상용화에 성공한 것은, 자동차를 움직이는 마법엔진은 마력도로로 완전히 대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마력자동차는 충전도 필요가 없고, 마법이나 마나에 대한 소양이 전혀 없는 인간도 운전할 수 있다.


“헬무드 관광의 필수코스, 여행의 꽃! 마왕 투어에 오신 관광객 여러분, 환영합니다!”


거대한 투어 버스에서는 부유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관광객들이 내렸다. 먼저 내린 깔끔한 옷차림의 마족 가이드는 마이크 따위는 쓰지 않았지만,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는 선명히 관광객들의 귀로 전해졌다.


“지금 도착한 이곳이 바로 살육의 마왕성입니다. 살육의 마왕은 300년 전에 존재했던 5명의 마왕 중에서도 특히나 포악하고 무자비했습니다. 그 마왕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살육을 즐겼습니다…….”


가이드는 손가락을 들어 뒤편의 흉험한 마왕성을 가리켰다.


“300년 전. 대륙의 용사, 위대한 베르무트를 선두로 한 영웅들이 살육의 마왕성에 잠입했습니다. 대륙의 기사들이 살육의 군세를 상대하는 동안, 베르무트와 영웅들은 마왕성 최상층까지 올라 살육의 마왕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무려 사흘 밤낮이나 이어졌던 전투…….”


지금 떠올려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최초로 싸우고, 쓰러트렸던 마왕. 살육의 마왕뿐만이 아니다. 마왕이란 존재는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다. 사흘 동안 수십 번은 넘게 살육의 마왕의 목을 베었으나, 놈은 죽지 않고 몇 번이고 일어서서 베르무트 일행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아니스의 신성마법이 없었다면, 사흘은커녕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거다. 지금의 몸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저 마왕성을 보고 있으니 멀쩡한 왼쪽 어깨가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분쇄추 지골라스에 당했던 상처. 직격당했다면 몸 절반이 사라졌겠지만, 발악하여 흘려내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살짝 스친 것만으로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몸에 남아버렸다.


“다들 아시겠지만, 저 살육의 마왕성은 300년 전에 완전히 붕괴해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역사를 잊은 마족에게 미래는 없다 말씀하시며,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3개의 마왕성을 재건하셨습니다……. 300년 전, 마족이 일으킨 전쟁. 여러분, 저희 마족이랑 종족은 수백, 수천 년에 걸쳐 갚아야 할 죄를 지었습니다. 재건한 마왕성은 저희 종족이 저지른 죄스러운 전쟁의 상징이며, 저희 종족으로 하여금 오랜 죄를 상기시키는…….”


이야기가 그쪽으로 진행되니, 유진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뿌득 이를 갈면서 머리에 걸치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려썼다.


“죄를 잊지 않기 위해 재건했다면서 관광 상품으로 팔아 처먹는다니.”


“뭘 새삼스레. 그와 비슷한 짓은 대륙 사람들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세냐의 저택의 입장료에 대해 들었을 때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들었습니다. 제 성상을 전시해 놓은 유라스야 원래부터 혐오했고 말입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아니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헬무드 내에서는 마차는 완전히 사장되었고, 마력차는 돈과 면허만 있다면 관광객도 구매가 가능하다.


헬무드에 인접한 알카르트 교구의 보좌주교였던 크리스티나는 놀랍게도 마력차 운전면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샀다. 육중한 오프로드형 마력카. 장거리 이동은 워프게이트를 쓰고, 도시 내에서는 마력차를 썼다.


아니스는 말과는 전혀 다른 그 탈것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해, 도중부터는 크리스티나와 번갈아 운전하면서 이 살육의 마왕성 주차장에 도착했다.


“저 끔찍하던 마왕성이 말끔하게 복원된 것을 보니 속이 쓰리네.”


“마왕성이 복원된 것도 어언 100년 전입니다. 그 당시에는 대륙 각지에서 마왕성 복원 반대 운동이 격렬했다는데, 유폐의 마왕이 앞장서서 대륙을 설득하였습니다. 300년 전의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잊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아니스가 다시 크리스티나가 되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지금 크리스티나는 도저히 성녀나 성직자라고 상상할 수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털이 북슬북슬한 흑암의 망토는 대륙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데, 다른 세상인 것처럼 대륙과 문화가 다른 헬무드에서는 더더욱 눈에 띈다. 그래서 지금 흑암의 망토는 큼직한 코트로 바뀌어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상징이랄 수 있는 잿빛 머리카락도 흑발로 물들였다. 위조 신분증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내가 유진 라이언하트라고 광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왕성과 그 근방 시설은 모두가 관광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만, 카자드 구릉지는 관광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리 조사하여 파악했다. 300년 전, 살육의 마왕과 전투의 여파로 일대의 평원이 붕괴했다. 월광검이 봉인된 유적도 그때 발견했다.


유적을 샅샅이 뒤졌지만, 월광검 하나만 건졌을 뿐 다른 고대의 아티펙트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월광검이나 유적의 기원도 알 수 없었다.


당시에는 그대로 유적을 떠났지만…… 지금 시대에 카자드 구릉지에 고대의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베르무트겠지.’


아롯의 경매장에 나왔던 월광검의 파편. 그것이 발견된 곳은 카자드 구릉지다. 베르무트가 월광검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유적도 소멸하고, 박살 난 파편의 일부가 매몰되었다…….


“……역시 잠입하실 생각입니까?”


크리스티나가 굳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그게 제일 깔끔하잖아.”


카자드 구릉지는 관광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공개된 장소도 아니었다.


수십 년 전부터 카자드 구릉지는 어떤 마족의 사유지다. 그 마족은 구릉 전체에 대공사를 벌여 거대한 광산으로 개발했다.


카자드 광산의 주인. 로디 로닉크. 300년 전에 살육의 마왕 휘하에 있던 마족이다. 유진도 희미하게나마 놈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데몬 계열의 마족으로, 몇 번 전장에서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유진ㅡ 하멜의 솜씨는 도저히 전성기라고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죽여도 잘 죽지 않는 마족과의 전투에 완전히 익숙해지기 전이라, 팔다리를 자르고 심장을 찌르고 목을 자르면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대부분의 마족은 그렇게까지 하면 죽는다. 다만 로디는 아슬아슬하게 대부분이란 규격을 벗어난 마족이어서, 죽지 않았다.


그것뿐이다. 바퀴벌레처럼 질길 뿐, 위협이 되지는 않는 놈이었다. 로디는 300년 전 살육의 마왕성 전투에 참가했지만, 최상층까지는 올라오지도 못하고 지상 전투만 기웃거리다가 살육이 죽은 즉시 도망쳤다.


‘시간이 길긴 길어. 그런 놈이 지금은 이름뿐이나마 사업가를 하고 있다니…….’


카자드 광산. 말이 광산이지, 그곳에서 광물을 캐내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최근 수년 동안 카자드 광산을 산지로 하는 광물이 나온 적은 없다.


그럼에도 카자드 광산에는 마족들이 드나드는데, 광산이 어떤 식으로 쓰이는지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헬무드는 양면적인 곳이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륙에서 가장 발달 된 도시. 마족의 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인간에게 수많은 복지를 약속한 인간친화적인 제국.


그러한 복지는 마족에게도 해당된다. 헬무드의 마족과 인간들은 대륙 그 어느 나라보다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헬무드는 300년 전의 ‘마경’을 완전히 탈피하지 않았다. 맹수가 송곳니와 발톱을 뽑아도 맹수이듯, 마족도 결국은 마족이다. 헬무드에는 아직 마족의 문화가 버젓이 남아 있다.


‘……인간도 별반 다를 것 없나.’


유진은 쯧 혀를 찼다.


광산 깊은 곳. 그곳은 하급 마족들이 참가하는 투기장이다. 마족들은 그곳에서 싸워 상대를 죽여 힘을 키운다. 파이트머니로 정기를 구매한다.


만약 그곳에서 두각을 보인다면, 사업가에 OB라며 거들먹거리는 로디에게 거둬질 수도 있다. 혹은 로디의 소개를 받아 다른 마족의 권속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니, 앞날이 어두운 시궁창 하류층 마족이라면 투기장에 기웃거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투기장이라고 해서 매일매일 열리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투기장이 문을 열지 않는다. 괜히 북적거릴 때 들어간다는 피곤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유진은 오늘 밤 광산에 잠입할 생각이었다.


“설득해 봤자 마음 바꿀 생각은 없어. 헬무드에 들어 온 이상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고.”


월광검의 파편이 더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 만에 하나 파편을 더 발견해 월광검에 더해져도…… 예전과 같은 힘은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월광검의 힘은 너무 매력적이라 포기할 수 없었다.


“들키기라도 하면…….”


“들키면 도망쳐야지.”


그것에 관해서 유진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든 도망칠 자신이 있기도 했고, 만에 하나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면.


유진은 잘 떠올리지 않는 기억을 더듬어 로디 로닉크를 떠올렸다.


……그 전쟁 시대를 살았던 마족들이, 300년 동안 더 강해졌다. 300년이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는 것은 여러 만남에서 체감했다.


등신 모론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가비드 린드먼과 누아르 제벨라. 본래부터 마왕에 근접했던 그 괴물들도 더욱 강해졌다.


그 아이리스조차도 300년 전보다 강해졌다.


“…….”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지금 유진은 아이리스와 싸움이 성립했다. 불과 1년 전에 만났을 때는 싸움이 되지 않을 만큼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백염식 6성에 오르고 시그니처까지 개발해 냈다.


지금 상태에서 만전을 갖추고 전력을 다한다면, 아이리스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봤다. 물론 해 봐야 알 일이지만, 견적을 뽑을 수 있을 만큼 근접했단 말이다.


……그런데 로디? 로디 로닉크? 300년 전, 하멜이 전성기도 아닌 어설프기 짝이 없던 시절에도 목을 날렸던 그 로디?


‘그 허접 새끼가 300년 죽 쒀봐야 얼마나 강해졌으려고.’


아이리스와 비교해서 생각하니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인 크리스티나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위험하지도 않고,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말고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어.”


알카르트 교구장인 에일린은 반인반마라 버틸 수 있었겠지만, 마족은 신성력에 민감하다. 그래서 300년 전부터 잠입이나 정찰 같은 임무는 아니스를 배제하고 하멜과 세냐가 전담하곤 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티나는 사정을 헤아렸지만, 오히려 아니스가 불만을 가졌다.


[난 전생부터 이것 때문에 세냐가 참 얄미웠습니다.]


‘네?’


[모론이야 등신이라 잠입과 정찰 류의 임무가 불가능했고, 베르무트 님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본대에 남아야 했습니다. 신성력을 쓰지 않으면 범인(凡人)과 큰 차이가 없는 저도 당연히 제외되었지요.]


범인과 큰 차이가 없다고? 크리스티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말만큼은 납득이 잘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항상 세냐와 하멜 둘이서 정찰을 다녀오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세냐 그 계집애는 좋아 죽을 것 같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뺨따구에 힘을 주고 입술이 씰룩거리지 않도록 붙잡곤 했습니다. 그 노골적인 얼굴이 절 약 올리는 것 같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던 마음을 얼마나 참았는지…….]


카자드 광산으로의 잠입은 해가 저문 뒤에 시도하기로 했고, 정찰도 끝내두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꽤 남아서, 옛 생각이나 해볼 겸 이곳 살육의 마왕성에 온 것이다.


성벽 내부로 마력차를 타고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니 모든 마력차는 성벽 바깥의 주차장에 세워야 한다.


“이곳이 살육의 마왕성…… 전설이 시작된 곳…….”


메르는 입을 반쯤 벌리고서 살육의 마왕성을 올려다보았다.


가이드를 필두로 한 관광객들은 이미 마왕성문 안으로 들어갔지만, 애당초 유진 일행은 투어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유진과 아니스가 300년 전의 산증인인데, 가이드가 필요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옛날 생각나네.”


유진은 메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서 성문으로 다가갔다. ……관광 상품으로 팔아 처먹는다고 분개했지만, 살육의 마왕성에는 입장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면은 유라스나 아롯보다 낫네.”


유진은 이죽거리면서 앞장서 걸었다. 성벽 안쪽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성벽만큼이나 높고 큰 추모비였다.


“이 추모비는 300년 전, 세상의 평화를 되찾고자 마왕성에 도전하고 쓰러졌던 영웅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곳에 스러진 모든 영웅의 이름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평화를 위해 몸 바친 모든 이들을 기리시겠다는…….”


먼저 들어왔던 가이드가 관광객들 앞에서 추모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혹시라도 유진이 저 말을 듣고 미쳐 날뛰는 것이 아닐까 걱정해서 고개를 돌렸지만, 유진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말 참 X같네.”


그 평온한 얼굴로 욕을 내뱉었다.


유폐의 마왕이 직접 재건했다는 살육의 마왕성. 유진은 300년 전, 이곳을 마지막으로 떠났을 때를 떠올렸다.


마왕을 죽인 다음 날.


모두가 함께 이 성을 붕괴시켰다. 모론은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성벽을 무너트렸고, 하멜은 성탑을 무너트렸다. 세냐도 마법을 난사했고, 그 베르무트도 웃으면서 뇌광궁과 용격창을 쏴댔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이 마왕성에서 싸우고, 살아남았던 모두가 마왕성 붕괴에 동참했다. 저 추모비에 이름을 올린 동료의 시체는 하나도 빠짐없이 밖으로 옮겼다. 모두가 합심하여 성을 진득히 무너트리는 동안, 아니스와 성직자들은 스러진 이들의 혼을 기리며 기도를 읊었다.


[다시 이 성을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에서 아니스가 중얼거렸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크리스티나. 하멜에게는 비밀입니다만, 저는……. 이 성에서 모두 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버렸다. 지금 그들은 마왕성 안으로 들어와, 옥상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편의를 위해 엘리베이터가 존재하지만, 300년 전에는 이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저희는…… 결사대였습니다. 반드시 마왕을 죽여야 하는 결사대. 5명인 저희를 보내기 위해, 저희보다 수백 배는 많은 사람들이 성 바깥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육의 마왕성이 텅 빈 것은 아니었습니다. 친위대 개념의 고위 마족들이 성안을 지키고 있었죠. 그것만으로도 목적은 달성한 것입니다. 대군은 밖으로 보냈으니, 저희는 그 소수의 고위마족들을 쓰러트리고 살육의 마왕과 대면하면 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고위마족들과의 전투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저희는 미숙하였지만, 그럼에도 할 만한 전투였습니다. 살육의 마왕은 서열 5위였으니, 그 권속들도 다른 높은 서열을 가진 마왕의 권속들보다는 약했겠지요.]


‘……시스터.’


[예. 극히 짧은 순간이기는 하였지만, 저는 오만했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충격에 쉽게 절망해 버렸지요. 서열 5위의 마왕. 5명의 마왕 중에서 가장 약한 마왕. 그것이 살육의 마왕입니다. 하지만 그 존재는, 최초로 대면했던 마왕은, 마주한 순간 저에게 죽음의 공포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시스터께서는, 아니, 300년 전의 영웅들은 결국 살육의 마왕을 죽이는 데 성공하였지 않습니까?’


[예. 결국은 죽이는 것에 성공했지요. 사흘 밤낮, 수십 수백 번의 사선을 넘어서 말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간다. 널찍한 엘리베이터의 안에는 유진과 크리스티나, 메르 외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모두가 인간이었다. 그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마왕성의 풍경과 이곳에 어린 전설에 대해 떠들었다.


[여러 기분이 듭니다.]


아니스가 속삭였다.


[우리는 마왕을 죽이고, 마왕성을 무너트렸습니다. 그리고 300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얻은 불완전한 평화는 아직 이어지고 있고, 그 시대에 피와 시체가 쌓였던 마왕성은 재건되어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죽어 혼만 남았고, 하멜은 환생해서…… 이곳에 와 있지요.]


‘……그것이 불쾌하신 겁니까?’


[불쾌하지 않을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이 장소의 존재 자체가 저와 하멜에게는 불쾌합니다. 저희가 싸웠던 이 전장이, 어울리지 않게 취급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감정이 있습니다.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저희가 이곳에서 싸워, 승리했기에.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 말에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녀는 자켓 안에 감춘 로사리오를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와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널찍하고 탁 트인 옥상. 메르는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살육의 마왕성의 명물.


살생부.


300년 전. 모두가 합심해 마왕성을 무너트렸다. 하지만 벽면 하나는 내버려 두었다.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고, 성에서 싸웠던 누군가가 외쳤던 말에 모두가 솔깃해 버린 탓이다.


-이름을 적자.


모론이 말했다. 처음에는 모두의 이름을 적을 생각이었지만, 당시 연합군을 이끌던 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상징이 될 이름이 적을수록 추종이 쉬우니, 마왕을 죽인 5명의 이름을 적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별로 내켜 하지 않던 베르무트의 등을 가장 먼저 떠밀었다. 결국, 베르무트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벽면에 제 이름을 적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하멜 다이너스.


세냐 메르데인.


아니스 슬리우드.


모론 루하르.


그렇게 5명의 이름을 적고.


붉은색으로 마왕들의 이름을 적었다.


멸망의 마왕.


유폐의 마왕.


광란의 마왕.


참혹의 마왕.


살육의 마왕.


가장 아래에 적은 살육의 마왕의 이름에는 엑스선을 그렸다. 그것을 폐허 위에 우뚝 세워놓고, 모두가 보면서 낄낄대며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던 짓이지만, 당시에는 모두가 함께 웃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처음으로 마왕을 쓰러트렸다. 마왕과 군세에게 유린당할 뿐이던 인간들이, 처음으로, 마왕을 죽였단 말이다.


그 순간. 모두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 언젠가 모든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으리란 희망.


유진은 살생석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저 아래에 있던 것을 굳이 옥상까지 올려두다니.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성벽을 돌아보았다.


어렵지 않게 찾았다. 아니스가 바란 것일까. 지금 크리스티나도 유진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ㅡ사흘 밤낮 이어진 전투. 최후에 베르무트의 성검이 마왕의 심장을 꿰뚫었을 때..


그때, 하멜은 베르무트의 바로 옆에 있었다.


하멜은 양손에 쥔 창으로 마왕의 목젖을 꿰뚫었다. 모론은 베르무트를 짓뭉개려던 마왕의 분쇄추를 맨손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세냐는 마법으로 마왕이 움직일 수 없게 붙잡았고, 아니스는 마왕이 몸을 재생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모두가 죽지 않도록 신성력을 유지했다.


사흘 밤낮 동안 그것만 수십 번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 해가 저물어가는 황혼에서야 살육의 마왕을 죽이는 것에 성공했다.


살육의 마왕의 가슴에 처박은 성검을 뽑아낼 때. 그 순간에 베르무트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때 베르무트의 휘광은 여명처럼 찬란했다. 마왕을 쓰러트린 것에 모두가 흥분했지만, 빛을 등지고 선 베르무트의 모습은 모두의 흥분을 잦아들게 할 만큼 경건했다.


베르무트는 웃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그때는, 평소의 베르무트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아무도 죽지 않고, 나와 함께 와주어서…… 고맙다.


유진과 아니스는 그때 베르무트가 서 있던 곳을 보았다.


해는 평범하게 하늘에 떠 있다. 특별히 눈이 부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둘은 그때 보았던 여명을 느꼈다.


“그날, 이곳에서 전설이 시작된 겁니다.”


살생부의 앞에 선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유진은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전설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이곳에서 무언가가 시작된 것은 맞다.


모든 마왕을 죽이겠다는 약속.


세상을 구하겠다는 결의.


그 불가능할 것 같던 일들을 이뤄낼 수 있다는 희망.


그 모든 것이 300년 전의 이곳에서 시작됐다.


알카르트


“…….”


새삼스럽지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참 닮았다. 얼굴 생김새야 처음 봤을 때부터 닮았다고 느꼈지만, 아니스가 깃든 후부터는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분위기도 예전의 아니스와 닮아가고 있다.


특히. 지금처럼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두 눈은 얇게 뜨고, 억지로 짓는 미소에 주체 못 할 감정이 섞여ㅡ 짜증과 분노를 참고 있을 때는. 눈물점만 빼면 아니스와 너무 똑같아서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다.


“…….”


어쩌면 지금 저렇게 앉은 육체에 깃든 것은 아니스일지도 모른다. 유진은 여태까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한 번도 헷갈린 적 없이 구분해 왔지만, 지금은 솔직히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뭐라도 말이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크리스티나, 혹은 아니스는 억지 미소를 유지하고서 유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


사실 지금 앞에 있는 것이 크리스티나건 아니스건 유진은 행동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지금 그는 당당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유진뿐만이 아니다. 바로 옆에는 메르도 입꼬리를 쭉 내리고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왜 그러신 겁니까.”


길고 긴 침묵 끝에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도심지의 호텔, 패밀리 룸. 다른 방을 잡으려고 했지만, 아니스가 이 위험천만한 헬무드에서 각방을 썼다가는 돌발 상황에 대처가 힘들다며 패밀리 룸을 고집했다.


다행히 이 패밀리 룸은 거실만 공유할 뿐 방은 따로 나누어진 구조다. 아니스는 그것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크리스티나가 너무 과열되려 하기에 이 정도로 양보하기로 했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때까지, 아니,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방에 남은 동안, 유진과 메르는 카자드 구릉지ㅡ 아니, 카자드 광산에 갔다. 혹시 모를 월광검의 파편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으음…….”


유진은 침묵이 시작되기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유진 님, 다녀오셨…….


-으흠…….


-……하멜. 제 눈을 똑바로 보십시오.


-크흠…….


-광산에 다녀온 것치고는 지나치게 깔끔하군요. 피부도, 머리카락도, 심지어 걸친 코트마저도 뽀송뽀송합니다. 신발은 석탄재는커녕 흙가루 하나 묻지 않았고…… 당신의 몸에는 갓 씻은 것 같은 상쾌한 향이 납니다.


-그…… 내 체취는 원래 이런…….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십시오. 제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요. 거짓말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 말인즉슨, 제가 친히 당신을 지옥으로 보내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 음…….


-메르 메르데인.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제 눈을 똑바로 보지 않는 겁니까? 저는 당신의 입술에서 단 향을 느낍니다. 아, 변명하지 마십시오. 메르 메르데인. 하멜이 당신의 입에 달콤한 과자를 처넣어 입을 막은 겁니까?


-내가…… 내가 설명할게.


-몇 명이나 죽인 겁니까?


그 시점에서 유진은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딱히 굴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생부터 화가 나면 가장 사람을 잡아대는 것이 아니스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세냐조차도 아니스가 화가 나면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서 무릎을 꿇곤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달까…….”


아니스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아까부터는 크리스티나가 유진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짓고 있다.


유진은 여태까지, 내심 크리스티나는 아니스보다 온순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둘이서 함께 사마르 대수림에 갔을 때, 유진은 몇 번이고 크리스티나를 놀려먹곤 했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 법인가. 눈앞의 크리스티나는 결코 아니스보다 온순해 보이지 않았다…….


“입구의 마법을 간파하고 갱도까지 들어가는 것은 성공했거든? 그때까지는 정말 아무 문제도 없었어.”


입구에 설치된 마법을 아카샤로 간파했다. 마족의 마력은 태생부터가 파괴적이라, 일반 마법과 같은 다양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흑마법은 일반 마법의 틀을 따서, 마나와 마력을 섞어 사용한다.


즉, 흑마법도 결국은 마법이라는 것이다. 일반 마법과 다른 여러 제한이 있고 복잡하기는 하다만, 시전자의 기량에 따라 간섭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기량? 대마법사의 상징이랄 수 있을 시그니처까지 창작해 낸 유진의 기량이 부족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에헴.”


옆에 같이 무릎을 꿇고 있던 메르가 들으란 듯이 소리를 냈다.


“……메르의 도움을 꽤 받기는 했지.”


유진은 그 사실들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메르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신뢰를 쌓은 것과, 아카샤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과, 이 모든 조건에서 훌륭하게 경계마법에 간섭한 것 모두가 유진의 기량인 것이다.


“유진 님은 가끔 되게 구질구질해요.”


“닥쳐.”


“왜 멋대로 사담을 나누시는 겁니까. 지금 유진 님이 해야 할 말은 그런 말이 아닐 텐데요.”


크리스티나가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은근슬쩍 무릎을 옆으로 뉘었던 메르는 그 시선에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문제가 발생해 버린 거지.”


갱도 입구의 마법을 지나쳤다. 이런 종류의 마법은 하나로 끝나지 않고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게 마련이고, 유진은 마법을 배우지도 않은 전생부터 이런 마법이 즐비한 던전을 돌파하는 것에 익숙하고 도가 텄다.


마나를 조작해 극한까지 기척을 죽이고, 거기에 마법까지 섞었다. 유진은 투명인간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갱도로 걸어 들어갔다.


진귀한 보물이 숨겨진 곳도 아니고, 흑마법사의 던전도 아니다. 카자드 광산이 하급마족들이 드나드는 투기장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럴 거면 이름부터 투기장으로 바꾸면 될 텐데 말이야. 크리스티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게 나름의 이유가 다 있었단 말이야.”


“무슨 이유.”


크리스티나의 말이 짧다. 유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어어…… 그러니까…….”


비밀스러운 음지의 장소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가?


처음 광산에 들어갔을 때. 유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광물을 옮기는 광차는 여기저기 찌그러진 것을 떠나 바퀴조차 빠져 있다. 레일은 관리가 되지 않아 녹이 슬고 삐뚤삐뚤했다.


하지만 점점 갱도를 지날수록 여러 가지가 달라지는 것을 체감했다. 이름뿐인 광산이라고 생각했는데, 갱도의 안쪽은 의외로 깔끔하고 제대로 되어 있었다. 도중부터는 흑마법의 경계도 존재하지 않아서,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월광검의 파편과 광산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주력할 수 있었다.


“그 도중에 마족에게 들킨 겁니까?”


“에이, 사람을 뭐로 보고. 마법 배우지도 않은 전생부터 나는 잠입과 정찰의 귀재…….”


“그 잠입과 정찰은 언제나 세냐 님과 둘이서 함께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옛날 유진 님은 마법을 쓸 필요가 없으셨겠죠.”


“커흡.”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반박할 수 없는 팩트가 비수가 되어 유진의 가슴에 쑤셔박혔다.


“들…… 키지는……! 않았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은신한 상태에서 마족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그럼 왜?”


크리스티나가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카자드 광산 지하갱도. 유진은 그 깊숙한 곳에서 월광검을 꺼냈다. 탁색의 칼날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했지만, 그 알 수 없고 불길한 검은 어둠을 넓게 밝혀주지는 않았다.


월광검의 칼자루는 파편과 공명한다. 그것은 이전에 칼자루를 처음 손에 넣었을 때 확인했다. 만약 이 광산 어딘가에 월광검의 파편이 더 남아 있다면, 칼자루를 통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카샤의 용언마법이라면 더 확실하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처음 아카샤에 용언마법을 새겼을 때. 유진은 월광검을 통해 베르무트의 위치를 탐색하려 해 보았다.


실패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길함에 정신에 큰 타격을 입었다. 도중에 유폐의 마왕이 밀어내주지 않았다면, 유진의 정신은 그대로 월광검의 불길한 심연에 침식되어, 붕괴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떠올려 봐도 엿 같은 경험이라, 깔끔하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오직 월광검의 공명을 기대하며 갱도를 내려가던 도중.


월광검의 빛이 흔들렸다. 칼자루가 미세한 진동을 시작했다. 유진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칼끝의 빛이 방향을 가리켰고, 칼자루의 진동이 위치를 가늠하게 도와주었다.


“갱도의 밑바닥에는 콜로세움이 있었지. 소문대로의 그거였어. 하급마족들이 결투를 벌이는 투기장.”


일부러 결투가 없는 날을 골랐기에, 투기장은 조용했다. 관리인과 경비인 마족들만 순찰을 돌 뿐.


“월광검이 투기장 아래를 가리키더라고.”


드러나는 길이나 문은 없었다. 마법을 사용해 다시 확인했다. 숨겨진 장치와 마법이 지하로 이어지는 문을 감추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 수상하잖아? 나도 무턱대고 쳐들어간 것은 아니야. 마법으로 먼저 탐색해 봤지. 지하에는 내가 갱도에서 지나쳤던 마족들보다 더 많은 마족들이 우글대더라고.”


프로미넌스의 깃털이라도 보낼 수 있다면 저 아래의 정황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겠지만, 대마법인 프로미넌스는 마나의 파장이 너무 강했다. 그러니 불확실하나마 들킬 염려가 적은 감지마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숨겨진 문을 뜯어 열고 안으로 내려가 버리면 은밀성은 포기해야 한다.


그게 무슨 대수인가? 저 칼자루와 빛이 저 아래를 가리키고 있는데.


“그래서 아래로 내려갔지. 일단 미리 말해두는데, 험악한 방법으로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기는 했지만, 진입한 즉시 다른 놈을 죽인 것은 아니야. 일단 최속으로, 다른 놈과 맞닥트릴 새도 없이 칼자루의 공명을 따라갔다고.”


도달한 곳은 지하 최하층. 그곳은 위층과는 달리 제대로 된 광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광차에는 흙더미와 이런저런 광물들이 담겨 있고, 레일도 말끔했다.


“외부에 반출해서 팔지만 않을 뿐이지, 지하 깊은 곳에서 뭘 파내고 있기는 했던 거야. 그래서 광산이란 이름을 고수한 거고.”


“무엇을 파내고 있던 겁니까?”


“요명석(窈冥石).”


유진이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크리스티나는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니스는 곧장 유진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이해했다.


[살육의 권속다운 짓을 하는군요.]


‘시스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요명석은 희뿌연 색의 광석입니다. 대륙에서는 발굴되지 않는 광석이고, 마법적인 가치는 없습니다. 헬무드에서도 살육의 영지에서만 발굴되던 광석입니다.]


“300년 전의 일이다. 살육의 마왕의 권속들은 제 부하나 다른 마족의 영혼과 마력을 요명석에 쑤셔 박고, 필요할 때 사용하곤 했지.”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이 가진 위신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에게. 나찰공주 아이리스가 가진 암전의 마안은 광란의 마왕에게 하사받은 권능이다.


마안뿐만이 아니다. 마왕들은 각각 여러 권능을 갖고, 그 권능을 권속에게 베풀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급한 마족들을 갈아서 그 힘과 정수를 요명석에 담는 거야.”


[하지만 그건 살육의 마왕의 권능일 텐데? 살육의 권속들이 사용하던 요명석은 마왕에게 직접 하사받은 것이었습니다.]


아니스가 중얼거렸고, 크리스니티나가 유진에게 대신 전해주었다.


“로디 그 새끼가 마왕의 권능에 도달했을 리가 없지. 그냥 지하에 처박혀서, 요명석을 잔뜩 쌓아두고 헛짓거리를 하고 있던 거야. 투기장에서 패배한 하급마족들을 지하 비밀 광산에서 노역시키면서 요명석을 파내고, 따지는 놈들은 갈아도 보고 빻아도 보면서 뒈진 주인의 권능을 흉내 내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건 유진 님의 추측입니까?”


크리스티나는 실눈을 뜨고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피했다.


크리스티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유진이 시선을 돌린 곳에 멈춰 섰다. 그러자 유진은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크리스티나가 걸음을 옮겨 따라갔다. 유진이 다시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크리스티나는 아예 양손으로 유진의 뺨을 붙잡았다.


“유진 님. 제 눈을 보고 말씀해 주십시오.”


“양다리를 뽑아주니까 울면서 말하더라고…….”


“다리만 뽑은 겁니까?”


“잠깐. 나를 뭐 눈만 마주치면 칼부림을 일으키는 미치광이로 보는 것 같은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어.”


이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그득히 쌓인 요명석. 채굴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시설. 특히 그중 몇 개는 빛의 샘을 연상시키는 것이라, 기분이 굉장히 불쾌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유진은 날뛰지 않았다. 마족 수십 수백이 갈리건 말건 유진이 알 바가 아니다. 그는 목적대로 월광검의 파편을 회수하기 위해 주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주쳐 버리면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지하 밑바닥.


파냈던 토사와 잡다한 광물들은 지하공동에 여러 산을 쌓고, 중앙에는 복잡한 척하는 조악한 마법진이 가득했다.


로디 로닉크. 300년 동안 뭘 했나 싶었는데 뒤늦게 마법을 배우고 싶었던 걸까? 그런 것치고는 수준이 처참했다. 마법에 재능도 없고 수련에 열심이었던 것도 아닌 수준.


실제로 지하에서 본 로디의 힘은 300년 전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전장에서 보았던 것보다 피폐해져 있었다.


“놈은 지하에서 하급 마족 시체에서 피를 쥐어짜고 있었는데…….”


“쥐어짜고 있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유진은 대답 대신 양손을 위로 들어, 걸레 짜듯이 공중을 비틀었다. 크리스티나의 입술이 씰룩거렸지만, 실제로 로디는 걸레 짜듯이 하급마족을 쥐어짜서 요명석 더미에 쏟아붓고 있었다.


월광석의 파편은 쌓인 토사와 광물 틈바구니에 파묻혀 있었다.


베르무트의 월광검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상하리만큼 기록에 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싸움 외에는 사용하지 않은 검이기도 했고, 월광검을 보았던 상대는 대부분 죽었다. 특히 베르무트가 월광검을 손에 넣은 것은 살육의 마왕과 싸운 뒤였으니, 목숨이 아까워 도망쳤던 로디가 월광검에 대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유진은 모습을 드러내고, 월광검의 파편을 회수하려 했다. 마족을 짜고 있던 로디는 당연히 눈앞을 지나가는 유진을 알아보았다.


넌 누구냐? 인간? 인간이 어떻게 여기를…….


헬무드에서 마족이 마족을 죽이는 것은 딱히 위법이라 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로디가 한 짓이 떳떳한 짓인 것도 아니었다.


상투적인 대화가 오간 뒤.


로디는 유진을 죽이는 것으로 입을 막으려고 했다. 헬무드의 법은 인간에게 자비롭지만, 그렇다고 인간만 무조건 편애하고 차별하는 것은 아니다. 관광객 한 명의 실종? 그 정도의 문제, 로디는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그 새끼가 먼저 나 죽이려고 덤빈 거야. 그럼 내가 가만히 있어야 돼? 따지고 보면 정당방위인 거지.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갔으면 좀 좋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어쨌든 먼저 날 죽이려 든 것은 로디였어. 난 죽기 싫으니 저항했고.”


붙잡으려고 손을 뻗길래 우선 손목을 잘라주었다. 로디는 기겁하며 물러섰다. 잘린 손목이 재생을 시작했다. 재생선보다 조금 더 안쪽을 베었다. 그렇게 채썰기를 하듯이 로디의 팔을 수백 번 썰었다.


육체를 재생하는 것에 능한 마족과의 전투에서, 유효하고 효율적인 공격은 정신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무너트리는 데에는 반복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고통이 효과가 좋다.


그래서 계속 썰어주었다. 로디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 재생하는 것보다 빠르게 팔을 채 썰어준 쥐에는 반대편 팔을 썰었다.


마족의 재생도 무한한 것은 아니다. 반복된 고통으로 인해 뒤흔들리는 정신은 재생을 느리게 만든다. 그리고 재생에는 당연히 마력이 소모된다. 마력이 모두 소모되면, 더 이상 재생이 불가능해진다. 반대편 팔을 모조리 썰었을 때, 로디는 더 이상 재생하지 않았다.


나자빠진 로디의 양다리를 뽑았다. 그럴 필요도 없이 도망치지 못할 상태긴 했지만, 그냥 뽑았다. 별 이유 없이 뽑았다는 것은 로디도 깨달았고, 그 후부터는 유진의 질문에 모조리 대답해 주었다.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물어봤는데, 누아르 제벨라한테 복수하기 위해서래.”


“예?”


여기서 몽마의 여왕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똑같이 의문을 느꼈다.


그때 의문을 느꼈던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웬 헛소리인가 싶어 로디의 뺨을 열 대쯤 갈겼다. 그러자 로디는 서러워 눈물을 쏟아대며 복수의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전쟁 이후 300년. 3명의 마왕이 죽었지만, 그들의 권속 중 일부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쇠락했다. 죽은 마왕의 권속들은 긴 시간 동안 향락에 빠져 망가지고 무너졌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의 짓이다. 로디는 위로라고 찾아온 상급 몽마들의 꿈에 빠져 100년을 허무히 보냈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 전성기의 힘 대부분을 소실했다.


그나마 로디가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다른 권속들 중에는 누아르 제벨라에게 강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혼을 담보로 잡힌 이들도 많았다.


힘과 정기 대부분을 빼앗고 나자 몽마들은 로디를 버렸다. 폐인에서 재활을 끝내는 것에 수십 년이 걸렸고, 힘을 다시 쌓는 것에 100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몽마의 여왕을 힘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으니, 죽은 마왕의 권능을 재현하려 해본 것이다.


물론 그것도 실패했다. 대단하지도 않던 권속인 로디가 살육의 마왕이 가진 권능을 재현해 낼 리가 없지 않은가.


“로디는 일단 내버려 두고 파편을 회수했는데…… 어…… 파편이 합쳐지면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서…….”


“예상치 못한 일?”


“광산이 붕괴해 버린 거야.”


이것에 관해서는 유진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그는 광산을 무너트릴 생각은 없었다. 그냥, 로디만 죽여버리고 자연스럽게 탈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파편이 합쳐지면서 한순간 힘이 폭주해 버렸다. 시작된 붕괴는 유진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굳이 막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그냥, 깔끔하게 파묻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월광검을 휘둘러 로디를 소멸시켰다. 갱도가 완전히 파묻히기 전에 바깥으로 탈출했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길래 마법으로 씻었다.


메르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호텔 1층에서 팔던 고급 디저트를 메르가 눈독 들이던 것을 떠올렸다. 입을 막을 겸 디저트를 먹이고, 호텔방에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다.


[……월광검의 파편을 회수했다면 됐습니다.]


‘시스터. 하지만…….’


[위험하고 과격하기는 했지만, 월광검 파편의 회수와 비교하면 ‘고작’의 범주에 드는 일입니다.]


아니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회수에 실패했다면 그녀도 기꺼이 플레일을 들었을 거다. 하지만 회수에 성공했다고 하니, 더 다그칠 마음이 들지 않아 크리스티나에게 몸을 돌려준 것이다.


“……으흠.”


크리스티나도 감정을 가다듬었다.


처음에 그녀는 아니스와 마찬가지로 분노했다. 이곳은 마경 헬무드. 터무니없이 발전한 제국이지만, 유진과 크리스티나에게 있어서는 적국이다. 그러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는데, 유진의 행동이 너무 과격했다.


“……부디.”


크리스티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유진을 일으켰다.


“저를 너무 걱정 끼치지 말아주십시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유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유진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월광검의 파편을 얼마나 회수했는지를 말하려고 했는데, 크리스티나의 돌발행동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맙소사……!]


아니스도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이 오히려 크리스티나의 정신을 깨웠다.


순수한, 순수한 걱정이었다. 어머니가 자식의 외출 때 끌어안듯, 아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전장에 나가는 연인을 걱정하는…….


[파렴치한!]


‘제, 제가 아닙니다. 시, 시, 시스터, 시스터가 제 몸을 마음대로…….’


[크리스티나! 제가 정말로 당신의 몸을 움직이려 했다면, 끌어안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하멜의 입술을 훔쳤을 겁니다.]


‘흐윽…….’


머릿속이 들린 말이 너무나도 발칙해서, 크리스티나는 허둥거리며 유진의 몸을 놓았다. 그 모습을 꼴같잖다는 눈으로 보던 메르는 더 이상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시위하듯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노려보았다.


“꼴값 떨지 말고, 저희 용마성은 언제 가는 거예요?”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은 벌렸던 입술을 닫았고, 크리스티나는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두드리며 몸을 돌렸다.


“용마성 언제 가냐고요!”


메르가 빽 고함을 질렀다.


알카르트


유진 라이언하트가 헬무드에 왔다.


전해들은 이야기에 누아르 제벨라는 방긋 웃어버렸다. 이 정도 사건이라면 로열티의 모임이 열릴 만도 하지만, 정작 바벨은 침묵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레헤인 요새에서 열렸던 나이트마치. 그곳에 용감한 모론이 나타났고, 유폐의 마왕이 강림했다. 대륙의 힘을 가늠해 보겠다며 찾아간 가비드 린드먼은 되려 망신만 당하고 물러나 버렸다.


“손님이라.”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와인잔을 흔들었다. 유폐의 마왕은 용사가 마왕성에 오르기를 고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충성심이 넘치는 가비드는 당장은 유진을 건드릴 수 없다.


가비드뿐만이 아니다. 멸망의 마왕이 영지 라비스타에서 침묵한 지도 어언 수백 년. 침묵하는 멸망을 받드는 권속들과 멸망의 마왕 본인이 건재할지라도, 300년 동안 헬무드를 지배해 온 것은 유폐의 마왕이다.


유폐의 마왕이 헬무드의 황제다. 마족 중에 그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으며, 고위마족 대부분은 유폐의 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권속들이다. 그중 정점이라 할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공작이 침묵하는 이상, 휘하 다른 마족들이 섣불리 나설 일은 없다.


즉, 유진 라이언하트는 의외로 무탈하게 헬무드를 활보할 수 있단 말이다. 그가 ‘안전한’ 도시만 골라 다닌다면, 마족의 난폭함은 유진 라이언하트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실 셈입니까?]


“나라고 해서 무슨 방법이 있겠어? 가비드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가비드와 벗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유폐의 마왕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있지.”


웃으며 한 말에 화면의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내 쪽에서 괜히 자극할 생각은 없어.”


누아르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선 우쭐대듯 가슴을 활짝 폈다. 남자는 미소를 유지하고서 누아르를 응시했다.


마족의 본성을 혼돈이라 한다면, 저 몽마의 여왕은 남자가 아는 마족들 중에서 가장 혼돈스러운 존재였다.


몽마의 여왕은 혼란을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300년 전 악몽과 같은 시대가 재림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먼저 자극할 생각은 없다지만,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설 것이 틀림없었다.


유진을 해치기 위해? 아니. 그건 몽마의 여왕의 천성에 어울리지 않다. 지금의 그녀는 오히려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도움을 베풀려 할 것이다.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예. 그뿐만이 아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천성은 마족을 강렬히 혐오하고 있다. 그라는 인간은 운명적으로 마족의 적이 될 수밖에 없고, 타고난 자질과 배경, 쌓아 올린 힘은 착실히 마왕의 목을 노리고 있다.


그렇기에 몽마의 여왕은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많은 기대를 품고 있다. 그 존재가 300년의 평화를 깰 전쟁의 불씨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또다시 용사와ㅡ 베르무트와 같은 존재와 전쟁을 벌이고, 싸울 수 있다면.


“아핫.”


상상만으로 몸이 오싹했다. 죽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럴까? 그런 상상조차 즐거웠다.


누아르가 가진 환상의 마안은 현실에 꿈을 침식시킨다. 몽마의 여왕이 만들어내는 꿈은 현실과 차이가 없을 만큼 정교하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모든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해 낸다.


하지만 그 누아르 제벨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꿈이 있다. 여태까지 수없이 시도해 보았지만, 누아르는 자신의 ‘죽음’을 꿈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죽음에 이르는 꿈을 보여주는 것은 굉장히 간단했지만, 정작 누아르 본인은 자신의 죽음은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누아르 본인도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깨지 않을 잠? 아니면 영혼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 텅 비어버리는 허무?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다. 이미 죽은 혼들을 불러와 죽음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누아르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꿈에서 그려내는 것에 실패했다.


당연한 일이다. 죽으면 결국 모든 것이 끝이 나버린다. 그런 ‘끝’을 언젠가는 반드시 깰, 심지어 자기 자신이 주관하는 꿈속에서 만드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꿈을 지배하며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환상의 마안을 가진 그녀지만, 자기 자신의 죽음만큼은 결코 꿈꿀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는 미지였다.


“아. 하지만 아주 조금, 실망스러운 점은 있어. 나 말이야, 저번에 직접…… 직접은 아니지만, 설원에서 만났을 때. 꼭 나의 제벨라 시티에 놀러 와달라고 스페셜 코인까지 줬거든?”


[버렸을 겁니다.]


“내 말이! 진짜로 버렸더라고. 심지어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진짜 너무하지 않아? 난 솔직히 한 번쯤 들러주지 않을까 기대했단 말이야.”


[갈 리가 없잖습니까.]


“못 올 것도 없지. 넌 잘 모르겠지만, 나의 제벨라 시티는 오픈 첫날부터 사람이 미어터졌어. 모든 숙박시설의 방이 나갔고, 가장 급 낮은 카지노와 다른 가게만 해도 입장하는데 며칠의 대기줄이 서 있다고. 사람이 너무 몰려서 거리통제까지 하고 있단 말이야.”


[축하드립니다.]


남자는 진심을 담아 말해주었다. 헬무드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 자부했던 제벨라 시티는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연한 성공이기도 했다. 그 도시의 모든 개발을 맡은 장본인은 존재를 홀리는 극한의 재주를 가진 몽마의 여왕이다.


설령 도시의 오락이 기대보다 부족할지라도, 누아르 제벨라에게는 환상의 마안이 있다. 이미 도시에 들어온 그 수많은 사람과 마족들이 누아르 제벨라가 보여주는 ‘꿈’의 포로가 되었으리라.


하루에 벌어들이는 돈만 해도 천문학적이겠지만,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야금야금 빼앗아 축적할 정기다.


“너도 한번 놀러 오지그래? 네가 온다면…… 흐흥, 내가 상대해 주지는 않겠지만, 내가 나타나는 꿈을 꾸게 해줄 수는 있어.”


[사양하겠습니다.]


돌아온 거절에 누아르는 완전히 빈 와인잔을 흔들며 킬킬 웃었다.


“넌 재미있으면서 재미없는 남자야, 발자크 루드베스.”


아롯의 흑색마탑주. 발자크 루드베스는 화면 속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난 그런 너를 꽤 좋아해. 네…… 킥킥, 마법사로서의 이상은 아주 재미있고 매력적이거든. 정작 너라는 남자는 이상에 너무 충실하고 맹목적이라 재미가 없지만.”


[저도 공작님은 제법 좋아합니다. 공작님께서는 매년 흑색마탑에 막대한 거금을 기부해주시죠. 또, 흑색마탑 뿐만이 아니라 저 개인의 후원자로서도 여러 도움을 주셨지요.]


“그렇지? 하지만 난 네게는 꽤 불만이 있어. 왜 유진 라이언하트가 제벨라 시티에 오게끔 꼬시지 않은 거지?”


[저는 그분과 별로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유진 님은 오히려 저를 싫어하십니다.]


“정말이라면 유진 라이언하트는 심보가 아주 못돼먹었네. 발자크 너, 유진 라이언하트한테 여러 가지로 잘해줬잖아? 위험에 대한 경고도 하고, 시그니처의 창작에도 도움을 줬다며? 그런데도 널 싫어해?”


[흑마법사에 대한 혐오와 편견이 크신 분이라, 저도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합니다.]


“흐응…… 나는 아주 오래 살면서 여러 흑마법사를 보았지만, 너만큼 별종의 흑마법사는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토록 미움받을 거면, 처음부터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정보를 팔지 그랬어?”


[팔 만큼 가치 있는 정보를 가진 적도 없습니다.]


“내게도 팔지 않을 건가?”


누아르는 요염하게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예.]


발자크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누아르는 그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너는 진짜 별종이야, 발자크. 마법사라면 그냥 그런 남자였을 텐데, 흑마법사라서 아주 특이하단 말이지. 그래서 재밌어.”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발자크 루드베스, 에드먼드 코드렛, 아멜리아 머윈. 유폐의 삼마라 일컬어지는 3명의 흑마법사. 유폐의 마왕은 저 3명과 똑같은 계약을 맺었지만, 3명의 힘은 동등하지 않다.


단순히 ‘강함’을 따진다면 2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아멜리아 머윈이 정점일 것이다.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따진다면 블러드메리를 하사받은 에드먼드 코드렛이 정점일 것이다.


발자크 루드베스는? ㅡ딱히 장기랄 것은 없다. 한때 청색마탑주 후보로 거론될 만큼, 마법에 있어 ‘천재’라 할 인물이기는 하지만. 아멜리아나 에드먼드와 비교하자면 특별히 우세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 루드베스와 계약을 맺었다. 누아르 제벨라도, 발자크 루드베스를 후원하고 있다. 유폐의 마왕의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누아르는 발자크의 이상에 재미를 느꼈다.


“그러니까, 네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줄게. 에드먼드 코드렛은 열흘 전부터 사마르로 출발했어.”


[역시 그렇군요.]


“너도 알지? 사마르 원주민들 중에서…… 코칠라였나? 사람인 주제에 사람을 잡아먹고, 마족처럼 구는 놈들. 에드먼드가 교류하던 부족. 그것과 관련해서 사마르에 다녀오겠다고 얘기했었는데…….”


누아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두눈을 방긋 휘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주지 않더라구.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말이야. 발자크, 너는 에드먼드가 왜 사마르에 갔는지 알아?”


[짓궂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이미 알고 계시면서 말입니다.]


“나는 막을 생각 없어. 가비드도 마찬가지고, 유폐의 마왕님도 그러실 테지. 에드먼드가 정확히 그곳에서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성공할 거야. 성공할 자신이 없다면 그 신중한 흑마법사는 가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럴 겁니다.]


발자크는 차분히 대답했다.


누아르는 저 차분함의 근거가 궁금했다. 하지만 자세한 것을 캐묻지는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랄 일을 겪는 것이 즐거운 법이다.


“……몸이 간질거리네.”


누아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발가락을 굽혔다. 간질거리는 충동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와 가슴을 두드렸다.


“저기, 발자크. 나는 지금 고민 중이야.”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난 말이야. 몽마의 여왕이잖아? 내 밑에는 아주 많은 몽마가 있어. 또 나는 헬무드의 공작이고, 바니리스의 영주이자 검은 그늘숲의 주인이며, 제벨라 시티의 시장이지.”


[예.]


“그런 내가 엉덩이 가볍게 움직이는 것도 추태잖아? 하지만 나는 평소부터 엉덩이를 무겁게 두지는 않았으니,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움직여도 되는 것 아니야?”


[공작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에 누가 불만을 갖겠습니까.]


“유진 라이언하트 말이야.”


누아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녀는 마치 부끄러워하는 소녀처럼 발자크를 힐긋힐긋 보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불법행위인데. 네게만 몰래 말해줄게. 내가 오늘 유진 라이언하트의 워프게이트 이용내역을 알아봤거든?”


[…….]


“그 침묵은 뭐야? 나는 헬무드의 공작이야. 이 정도 불법행위쯤은 해도 된다구. 어쨌든, 조회를 해봤는데…… 오늘 말레라 영지에 도착했더라구. 거기가 어딘지 알아?”


[말레라 영지라면…… 예, 압니다. 헬무드 남서쪽의.]


“카라블룸 바로 근처야.”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가 다스리는 영지. 용마성이 떠다니는 영지다. 발자크는 잠시 대답을 잊고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로서는 왜 유진 라이언하트가 카라블룸 근처의 말레라 영지에 도착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도 이유는 모르는 모양이지?”


[예.]


“나는 조금 짐작가는 것이 있지만……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직접 듣지는 못했으니까 확신은 안 할래. 그래서 아주 궁금해. 또,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


누아르의 미소가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재미난 장난 거리를 발견한 악동처럼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용마성의 주인은 진즉에 바뀌었지만, 그 사실은 공표되지 않았지. 그렇기에 용마성도, 카라블룸도, 그 지랄 맞은 라이자키아가 정한 법이 그대로 남아 있단 말이야.”


라이자키아는 지독한 인간혐오자였다. 용마성은 물론이고 카라블룸도 인간은 출입할 수 없다.


“만약 유진 라이언하트가 카라블룸에…… 용마성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면? 그것에 관해서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이지. 나라면, 아주 쉽게 유진 라이언하트를 용마성까지 들여보낼 수 있어.”


[……공작님이라면 가능하시겠죠. 하지만 굳이 도움을 주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지금 카라블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데.]


용마성이 있는 카라블룸의 근처에는 말레라 영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루올 영지의 영주, 카라드 백작. 그는 자이언트 데몬 출신의 마족으로, 젊지만 뛰어나고 강한 수완가다. 최근 카라드 백작은 수백 년간 침묵한 용마성에 시비를 걸고 있다.


라이자키아 공작의 이름이 두렵기 때문인지, 직접 서열 잡이나 영지전은 신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라드 백작은 카라블룸의 변경을 지속적으로 침략하고 있다. 지금 같은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언젠가 영지전이 발발할 것이다.


[유진 님이 왜 카라블룸에 들어가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카라블룸에 볼일이 있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말입니다. 하지만, 떠도는 소문들 중에 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저도 조금 압니다.]


“어떤?”


[듣기를, 카라드 백작은 흑룡공(黑龍公) 라이자키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라비스타의 마수(魔獸)를 고용했다더군요.]


“아롯에도 헬무드의 소문은 들리나 봐?”


[저도 헬무드에 눈과 귀를 두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멸망의 영지, 라비스타의 마수.


그 이름이 칭하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300년 전, 다크엘프의 수괴인 나찰공주 아이리스와 함께 ‘광란의 자식들’이라 불렸던 4명의 마족 중 하나. 포식자로 군림하던 맹수 수인족들을 이끌던 패악의 오보론.


그 목을 물어뜯어 죽이고 잡아먹은 패륜아. 오보론의 뒤를 이어 맹수 수인족의 두령에 오른 포식자. 야곤.


“……다른 마족은 확신 없이 라이자키아와 싸우고 싶어 하지 않을 테지만, 야곤, 그 녀석은 이치를 따지지 않는 짐승이니 말이야. 대체 얼마를 주고 고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헬무드에서 돈으로 살 수 있는 전력 중에서는 야곤이 최고일걸.”


[이런 소문도 있더군요. 흑룡공의 신변에 큰 문제가 있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흑룡공이 200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정말로 흑룡공이 죽은 겁니까?]


“죽지는 않았을걸?”


[공작님도 진실은 모른다는 말씀이시군요.]


누아르는 대답하지 않고 방긋 웃었다. 발자크는 그 미소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야곤이 카라드 백작에게 고용되었다면, 유진 님에게 카라블룸은 너무 위험합니다. 야곤이 소문대로의 광인이라면, 위대한 베르무트의 재림이라는 유진 님과 무조건 싸우려 들 테니.]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예?]


“그렇지 않아? 야곤은 오보론의 후예. 그리고 멸망의 권속이지. 유진 라이언하트는 베르무트의 후예이자 용사…….”


누아르는 잠시 그 둘을 머릿속에서 상상해보았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다녀올래. 싫다 그래도 용마성에 들여보내고 말겠어.”


[예?]


“어쩌면 이 기회로 유진 라이언하트와 나 사이에 친애가 싹틀지도 몰라. 내가 도와준 거니까! 그럼 나는 도움의 대가로 여물지 않은 드래곤하트를 요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작은 친애의 싹을 사랑으로 피워내서, 용사와 마족의 금기된 사랑을…… 으흠, 그것도 배덕적이라 좋아.”


[여물지 않은 드래곤하트라니……?]


“아, 이건 비밀이었는데……. 누구한테 말하지 마, 알았지?”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발자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 바로 가시는 겁니까?]


“나중에 갈 이유가 없잖아? 마침 한가하기도 하고. 그럼 안녕, 발자크.”


누아르의 두 눈이 히죽 휘어졌다.


“죽어서건 살아서건, 다음에 또 봐.”


알카르트


말레라 영지는 특별한 관광지랄 것도 없는 한적한 곳이다. 옛날에도 그랬다. 5개나 있던 마왕성과도 동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 시대에는 와본 적도 없었다.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호텔 테라스의 난간에 몸을 기울여서, 멍한 눈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수십 층 아래의 거리가 보였다. 마력케이블이 매설된 시커먼 도로. 저 포장도로조차도 마력의 전도율이 높은 특수한 소재를 사용했단다. 그런 도로의 위에는 다양한 마력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소나기가 내렸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 하늘은 무척이나 맑고 푸를 예정입니다. 낮 동안은 따뜻하겠지만 일교차에 주의해 주세요. 정오를 조금 넘어선 시간이면, 동쪽 하늘을 지나는 용마성의 정경을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실의 스크린에서는 일기예보가 방송 중이다. 그 마도왕국 아롯조차도 헬무드만큼 마법이 일상생활에 녹아들지 않았는데. ……익숙해진 지금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300년 전에는 이 정도 거리를 이동하는 것에 5년은 걸렸을 텐데.’


워프게이트라는 것도 없고, 당연히 마력차도 없었다. 평범한 말들은 마물이 두려워 잘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훈련받은 군마 정도는 되어야 탈것으로 쓸 만했다. 마물이니 마족이니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도 많았다.


지금 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다. 마물? 몇 번 보기는 했다. 드넓은 곡창지대에 거대 마물들이 밭을 갈던 모습…… 마력차와는 다른 이색적인 탈것으로 쓰이던 모습도 봤다. 인적 없는 새벽 거리의 청소조차도 마물이 하고 있었다.


“보이고 있습니까?”


방에서 나온 크리스티나가 테라스로 다가왔다. 정오는 진즉에 지났다.


“아직.”


라이자키아의 용마성.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성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데, 날씨가 좋아 시야가 맑은 날이면 이 도시에서도 용마성을 볼 수가 있었다.


“앗.”


10분 정도 지났을 즈음, 메르가 탄성을 내질렀다. 먼 하늘의 저편에서 다가오는 ‘성’이 보였다.


용마성이다. 그 성은 헬무드의 빌딩과도 다르고, 대륙의 성과도 달랐다.


전쟁이 끝난 후. 과시욕이 강했던 라이자키아는 헬무드의 다른 마족과 차별된 자신만의 특별함을 원했다. 애당초 저 용마성이 굳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라이자키아의 과시욕과 선민사상 때문이다.


라이자키아가 노예로 삼은 드워프들은 주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참 전에 멸망한 고대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 지금 시대의 어느 나라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건축조형을 선택해 성을 지었다.


“어떻게 보이십니까?”


거리는 멀었지만, 유진과 크리스티나의 눈에는 용마성이 가깝게 보였다. 크리스티나는 눈썹을 찡그려서 집중하고 있는 유진을 힐긋 보며 물었다. 지금 유진은 아카샤까지 쥐고서 용마성의 외부마법을 살피고 있었다.


“잠입은 힘들겠어.”


유진은 솔직히 평가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모든 마법을 간파할 수는 없었지만, 이 거리에서도 용마성 전체를 감싸는 결계는 알아볼 수가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결계도 아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용마성은 너무 크고 노골적인 표적이니, 그에 대한 방어가 확실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자키아는 없을 텐데 마법은 지속되고 있다. 대기 중의 마나만으로 결계를 유지하고 보수하기는 부족할 텐데…….’


그렇게 생각했고, 즉시 결론을 냈다. 역시 용마성에는 라이자키아의 헤츨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이는 아직 어릴 테지만 드래곤은 드래곤. 용언과 마법의 수준은 미달이겠지만, 결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드래곤하트의 힘으로 여유롭게 가능할 것이다.


‘역시 잠입은 힘들어.’


유진이 뛰어난 마법사인 것은 사실이지만, 용언으로 구축한 결계를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잠입이 불가능한 것이지, 침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용마성의 결계를 박살 내고서 쳐들어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건 유진 스스로도 너무한 일이라 생각했다. 카자드 광산의 붕괴 건은 유진에게 이목이 쏠리지는 않았다. 그 갱도 지하에서 벌어지는 일이 떳떳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겠지만, 광산의 주인인 로디 로닉크가 속된 말로 퇴물 취급을 받던 마족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투기장은 관광객이나 인간은 아예 발길도 향하지 않던 곳이다. 드나들던 마족들은 하류인생인 최하급 마족들뿐. 광산은 그 마족들을 의미 그대로 쥐어짜는 일이 자행되었다. 그런 광산이 깔끔하게 붕괴하여 모든 것이 묻혀 버렸으니, 조사조차도 시작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용마성에 광산 때와 같은 운이 따라줄 리가 없다. 라이자키아의 신변이 어쨌건, 놈은 헬무드의 삼공 중 하나다. 용마성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공작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니 결코 가볍게 끝날 리가 없었다.


사실 유진의 목적은 어찌 되었건 공작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맞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라이자키아의 자식새끼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용마성에 쳐들어가는 건…….’


유진은 생각이 복잡해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당장 용마성을 노려봤자 답은 없다. 우선 그 아래의 영지인 카라블룸에 잠입을…….


ㅡ따르릉.


유진은 생각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헬무드 마법공학의 산물인 전화기가 울리고 있다. 유진이 직접 가서 받으려고 했지만, 곁에 있던 메르가 후다닥 뛰어가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네, 네……?”


방긋방긋 웃으면서 전화를 받던 메르의 표정이 빠르게 바뀌었다. 메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유진 님. 손님이 도착했다는데요?”


“손님? 나한테 올 손님이 어디 있어? 누구냐고 물어봐.”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이 헬무드에서 유진을 찾아올 손님이 있을 리가 없었다. 메르는 유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전화기를 귓가에 댔다.


“끊어졌어요.”


“뭐 하자는 거야?”


유진은 표정을 찌푸리면서 테라스에서 거실로 들어왔다. 1층의 로비에 전화를 해볼 생각이었는데, 전화기를 잡던 유진의 몸이 멈칫 굳었다. 아직 테라스에 남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굳게 닫혀 있어야 할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 선 누아르 제벨라는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유명인이라서.”


짙은 색의 선글라스 렌즈 너머에서 눈동자가 곡선을 그렸다. 누아르 제벨라는 코까지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벗으며 방긋 웃었다.


“좀 과하게 가렸나 싶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최근 제벨라 시티의 대성공으로 TV나 신문 같은 곳에 너무 자주 나와서, 시골구석 꼬마 아이도 내 얼굴을 알아볼…….”


끝까지 들어줄 이유가 없는 말이었다. 유진은 즉시 망토에서 성검을 꺼내 누아르를 향해 겨누었다. 무턱대고 목을 베어버리는 기습은 하지 않았다. 그런 기습이 통할 상대도 아니거니와, 가비드 린드먼 때와도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아, 멋져.”


누아르는 몽롱한 눈으로 성검을 보았다. 설원에서 마주쳤을 때 유진은 성검을 직접 꺼내지 않았다. 누아르는 300년 만에 보는 성검의 빛에 오싹거림을 느꼈다.


“베르무트의 손에 쥐어져 있을 때도 멋졌지만, 지금의 성검이 더 멋지다고 생각해요. 왜인 줄 알아요? 그때의 베르무트의 살의는 노골적이지 않았거든요. 3명이나 되는 마왕을 죽인 주제에, 베르무트의 살의는 굉장히 희미했단 말이야.”


유진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베르무트는 원래 그런 놈이었다. 살의뿐만이 아니라 감정 표현 자체가 적었던 놈이다.


……살의가 노골적이지 않다고? 저 말은 오히려 베르무트에 대해 잘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야만 할 때에 베르무트의 살의는 일행 중 누구보다 노골적이고 강했다.


“뭐 하자는 거지? 왜 네가 여기 있어?”


“순진한 말 하지 말아요, 나의 유진.”


누아르가 나긋한 목소리를 건넸다. 나의 유진? 그 말이 유진의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미쳐 날뛰는 살의가 누아르를 덮쳤다.


ㅡ화아악! 누아르의 머리카락이 뒤로 나부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전신이 저렸다.


“여기는 헬무드. 마족의 나라라고요. 이 나라에서 내가 가지 못할 장소는 없어요. 설마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은 건가요? 내가,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와 버리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다. 잠입한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허가를 얻어 헬무드에 들어왔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저 정신 나간 마족이라면 별 이유가 없이 접촉을 시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뭐 하러 왔지?”


누아르 제벨라는 제정신이 아니지만, 그래도 대화가 아주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당장의 누아르에게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누아르가 살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유진이 성검을 거둘 이유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누아르는 그 맹목적인 모습에 사랑을 느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면서 칼끝 너머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빤히 노려보는 메르에게 먼저 시선이 갔다.


설원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소문은 들었다. 아롯이 자랑하는 왕립도서관 아크리온. 현명한 세냐가 직접 만들었다는 사역마가 아카샤와 함께 유진 라이언하트의 소유물이 되었다던데.


“세냐 메르데인도 참 알 수 없다니까. 왜 자신을 저렇게까지 똑 닮은 사역마를 만든 걸까요?”


누아르는 메르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식을 낳고 싶었던 걸까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더욱 이해가 안 돼. 굳이 사역마를 만들 필요가 어디 있어요? 세냐의 외모는 훌륭했으니, 원하기만 했다면 얼마든지 남자를…….”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성검이 누아르의 목을 양단했고, 머리가 하늘로 붕 날아올랐다. 뿌득. 오히려 이빨을 가는 소리가 참격보다 늦게 울렸다.


툭.


공중에 치솟았던 머리는 누아르의 양손에 붙잡혔다.


“……아핫.”


누아르는 웃음소리를 한 번 내뱉었지만, 그마저도 잘 이어지지 않았다. 목만 잘린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도 양단된 것이다. 누아르는 맞물리지 않는 머리를 양손으로 고정했다.


‘목을 잘라도 당연하다는 듯이 안 죽는군. 재생도 빨라. 재생하는 속도 이상으로 베는 건…… 안 되겠지.’


심지어 성검으로 베었는데. 유진은 꽉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왜 왔냐고 물었어.”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화내지 마요. 나의 유진, 당신이 세냐 메르데인의 제자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지 뭐예요.”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나의 유진이라는 말이 불쾌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당신을 어떻게 부르는지는 내 마음이에요.”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누아르가 멋대로 열었던 문이 저절로 닫혔다. 당연히 누아르는 문이 닫히게 두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든 손으로 문을 가로막으며, 유진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저번처럼 장난을 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에요. 진짜로요. 나는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 온 거예요.”


“네가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고, 널 죽이러 갈 때까지 내게 접촉하지 않는 것이 날 도와주는 거야.”


“태연한 얼굴로 말도 안 되게 이기적인 말을 하네요. 날 언젠가 죽이러 오겠다고요?”


누아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더 말하지 않고, 직접 문을 닫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ㅡ누아르는, 저 말에 거대한 운명을 느꼈다.


그녀는 발끝을 쑥 내밀어 문 사이에 끼운 뒤,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으려고 했다. 유진은 당연히 누아르에게 잡히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이 잡으려는 순간 유진은 누아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날 죽일 건가요?”


서로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2개의 손만이 빠르게 움직였다. 누아르는 잡으려고 했고, 유진은 잡히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누아르는 지금의 행위에도 가슴 간질거리는 즐거움을 느꼈다.


전쟁이 끝나고 300년. 그녀는 단 한 번도 가지고 싶던 것을 갖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럼. 죽이지 말까?”


“아뇨. 나는 당신이 날 꼭 죽이러 왔으면 좋겠어요. 그때가 되면, 나도 즐겁고 슬프게 당신을 죽이도록 할게요.”


이게 운명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애절한 비극. 누아르는 언젠가 유진이, 용사가 자신을 죽이러 오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호락호락 죽어줄 수는 없다. 솔직히 자신의 패배, 죽음은 상상되지 않았다. 만약 서로 죽이려 한다면, 살아남는 것은 자신일 것이다.


피투성이의 유진을 끌어안고, 혹은 잘린 머리를 양팔로 안아 들고.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아직은 온기가 남은 입술에 입을 맞추면ㅡ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겁다.


“용마성에 들어가고 싶은 거죠?”


손과 손의 술래잡기가 멈췄다. 유진은 손을 뒤로 뺐고, 누아르는 더 이상 유진을 붙잡으려 들지 않았다. 이조차도 나중을 위한 즐거움으로 미뤄 버린 것이다.


“당신이 용마성에 들어가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왜 도와준다는 거지?”


“이유는 여러 가지 있죠. 우선, 저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베르무트의 후예, 성검의 인정을 받은 용사라는 것도 좋지만…… 베르무트와는 전혀 다른 욕망적인 인간이라는 것도 좋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누아르는 코에 걸친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서 유진에게 두 눈을 보여주었다. 무수히 많은 별빛을 담은 눈동자가 유진을 응시했다.


환상의 마안. 그 눈동자에 포착됐지만, 유진은 굳이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 환상의 마안을 경계한다면 애당초 누아르 제벨라의 앞에 서면 안 된다. 그녀의 마력과 저 터무니없는 마안은 선글라스 따위로 가려지는 힘이 아니다.


“당신은 내게 있어서 환상적인 존재라는 거예요. 나의 유진.”


끔찍하고, 구역질 나고,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 이상으로, 용마성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준다는 누아르의 제안에 구미가 당겼다.


“……널 어떻게 믿지?”


“헬무드의 공작. 몽마의 여왕인 나 누아르 제벨라가, 당신에게 겨우 이따위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요?”


누아르는 문틈 사이에 끼워 넣은 신발을 힐긋 보며 웃었다.


“문을 열고, 저를 안으로 초대해 주세요. 저는 차보다는 술을 선호하지만, 당신은 저와 술까지는 마시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으니…… 가볍게 티타임이나 가지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때요?”


퉁. 유진은 발로 문을 가볍게 차고서 몸을 돌렸다. 열리는 문 사이로 누아르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겁먹은 메르와, 이쪽을 노려보는 크리스티나와 눈을 마주치고서 웃었다.


“아, 좋아…….”


그 중얼거림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 밖으로 나왔다.


하멜을 닮은 베르무트의 후예. 아니스를 닮은 지금 시대의 성녀. 세냐를 닮은 사역마…… 성에 차지는 않지만, 지금 이 장소는 누아르로 하여금 300년 전을 떠올렸다.


“침대가 넓네요.”


거실을 걷던 누아르는 커다란 침실을 힐긋 보며 중얼거렸다. 호텔 스위트룸. 체격이 제각각인 마족에게 맞춘 침대는 대부분 큼직하다.


“3명…… 아니, 4명도 뒹굴 수 있겠어. 어때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 좋은 꿈을 한번 꾸고 가는…….”


“꺼져.”


“매몰찬 거절도 섹시하다니까.”


누아르는 킥킥 웃으면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럼, 용마성의 어린 주인…… 용공녀(龍公女)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죠.”


용공녀


“용공녀?”


처음 듣는 별칭에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저 별칭이 누구를 칭하는지는 노골적이었다.


용마성의 어린 주인, 용공녀. 뻔한 사실이기는 했지만, 여태까지 추론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헬무드의 공작인 누아르 제벨라가 직접 언급한 것이다.


‘역시 지금 용마성에 있는 건 라이자키아의 헤츨링인가.’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누아르를 경계하기 때문이었다. 용마성에 들어갈 수 있게끔 도와준다는 말은 굉장히 매력적이었지만, 저 미치광이가 ‘왜’ 도와준다는 것인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용공녀라는 이름은 그녀의 존재를 아는 이들만 부르는 별칭이지만요. 그녀의 진짜 이름이…… 응, 맞아. ‘라이미르아’. 이름부터가 노골적이죠?”


“……용마성의 주인은 헬무드 삼공 중 하나인 블랙드래곤 아니었나?”


“모르는 척하기는, 귀엽게.”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유혹하듯이 다리를 꼬았다. 관능적인 모습이지만 당연히 유진의 감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은 누아르가 저렇게 보란 듯이 주접을 떨 때마다 목을 자르고 심장을 쥐어 터트리고 싶다는 살의를 느꼈다.


“유진 라이언하트. 당신은 용마성에 라이자키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온 거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유진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자 누아르가 킥킥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유진의 맞은편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누아르가, 한순간에 속옷 차림이 되었다.


“개지랄하지 마.”


환상의 마안이다. 저 사기적인 마안을 이따위로 쓰다니…… 경멸감이 들었지만, 모골이 송연해지기도 했다.


누아르 제벨라의 본신. 직접 마주하고 당한 환상의 마안은, 권능의 작용에 대한 예지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찰공주 아이리스가 가진 암전의 마안은, 암흑물질을 생성하는 지점을 봐야 하는 것과, 생성 순간에 마안이 빛을 발한다는 징조가 있다.


하지만 그 징조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아이리스는 마지막 순간에 아무런 징조 없이 암흑물질을 생성해 냈다.


……능숙했더라면 처음부터 그렇게 사용했을 터. 그 전투에서 아이리스의 수준에 대해 파악은 끝냈다. 아무 징조 없이 암흑물질을 생성하는 것은 아이리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누아르 제벨라는 아무렇지 않게 환상의 마안을 징조 없이 사용한다. 그것이야말로 아이리스와 누아르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인 것이다.


“속옷 차림은 취향이 아닌가요? 아니면 결국 환상이라서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가?”


“지랄하지 말라니까.”


“뭐 어때요. 대화 도중에 눈이 심심할까 봐 재미있게 해주려 한 건데. 혹시 원하는 취향이 있다면…… 아, 이건 어때요?”


누아르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그녀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요?”


툭.


누아르의 머리가 어깨에서 데굴 굴러서 다리 위로 떨어졌다. 누아르는 잘린 머리를 허벅지 위에 얹고서 방긋 웃었다.


ㅡ화아악! 누아르의 모습이 다시 바뀌었다. 환상이 끝난 것이다. 현실의 그녀는 속옷 차림도 아니었고, 머리가 잘리지도 않았다. 콧등에 걸친 선글라스를 위로 밀어 올리며 키득키득 웃고만 있었다.


“알았어요. 더 안 할게요. 화내지 마요. 자아, 이야기를 계속하자고요. 유진 라이언하트, 당신은 용마성에 라이자키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온 것 맞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텐데.”


“정말, 계속 모르는 척하려는 것도 귀엽네요. 유진 라이언하트. 당신이 정말로 세냐 메르데인을 만났고, 그녀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그녀에게서 라이자키아에 대해 들었을 텐데요?”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유진을 빤히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유진에게 라이자키아에 대해 알려준 것이 세냐가 맞기는 했다. 하지만 유진은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오히려 대놓고 물어봤다. 그러자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었다.


“말하기 싫은 모양인데, 알았어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냐면, 라이자키아는 맛이 간 드래곤이잖아요? 종족을 배신한 드래곤. 놈이 전 드래곤 로드를 죽이고, 그 심장을 통째로 삼켰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일이죠.”


“그래서?”


“라이자키아는 힘에 대한 집착이 컸어요. 하지만 힘을 키울 방법은 마땅치 않았죠. 타락해 버린 드래곤이라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니까요.”


라이자키아는 드래곤답게 오만하고 고집이 셌다. 격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마족들처럼 계약을 통해 권속을 늘리려 하지도 않았다. 인간을 혐오하기에 인간과도 계약을 맺지 않고, 정기를 거두지도 않았다.


“그럼 결국 라이자키아가 무엇에 집착했겠어요? 바로 드래곤하트예요. 그 오만한 도마뱀은, 존귀한 드래곤인 자신을 살찌울 수 있는 것은 같은 드래곤의 심장뿐이라고 진심으로 떠들곤 다녔죠. 블러드메리의 드래곤하트도 욕심을 냈지만, 당시 블러드메리는 유폐의 마왕님이 관리하고 있었고…… 그 시대에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꼭꼭 숨어서 찾기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라이자키아가 세냐 메르데인의 아카샤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거죠. 라이자키아는 드래곤하트의 에너지 반응을 체크하는 용언마법까지 만들어서, 아카샤를 빼앗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곤 했어요.”


“왜 진즉 세냐 님을 죽여서 빼앗으려 하지 않은 거지?”


“당연히 그럴 수 없었던 거죠. 당시 시대가 얼마나 민감했는지 알아요? 아무리 라이자키아가 제정신이 아니었어도, 평화가 막 태동하던 그 시대에 세냐 메르데인을 치면 안 된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던 거예요.”


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메르를 힐긋 쳐다보았다. 메르는 누아르가 두렵고 싫어서 자리에 앉지도 않고, 크리스티나와 함께 유진의 뒤에 서 있었다.


“자아, 여기서부터는 제 추측이에요. 삼공이라 불리는 저와 가비드, 라이자키아는 계속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어요. 특히 라이자키아는 탐욕스러운 드래곤이라, 언제 미친 짓을 할지 몰라 저와 가비드가 특히나 주목할 수밖에 없었죠.”


유진이 생각하기에 누아르 제벨라도 굉장히 미친 존재였고, 가비드 린드먼도 크게 부족하지는 않을 정도로 미친 존재였다. 라이자키아도 마찬가지다. 그 미친 드래곤은 종족 최초의 배신자다.


“라이자키아가 용마성을 떠난 것. 떠난 이유는 모르지만, 떠난 것은 알았어요. 어머 놀라워라, 세냐 메르데인도 딱 그 시기에 은거했더라고요? 그러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죠. 라이자키아가 아카샤를 빼앗기 위해 세냐 메르데인을 습격했다. 그 전까지는 가만히 있었으면서, 왜? 그때는 세냐 메르데인이 아롯에 있었으니까.”


누아르의 눈동자가 둥그런 곡선을 그렸다.


“사마르 대수림. 그곳은 대륙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죠. 엘프의 숲. 엘프가 아니고서는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은 곳이에요. 라이자키아는 아카샤를 탐색해서, 세냐 메르데인이 엘프의 숲에 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거예요. 사람이 득실거리는 아롯도 아니고, 엘프의 숲이라면 아카샤를 빼앗아볼 만하다 생각했던 거겠죠.”


지금 누아르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추측이다. 하지만 진실에 가까웠다. 라이자키아는 아카샤를 빼앗기 위해 엘프의 숲에 갔다. 세냐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 세냐를 죽이고서 아카샤를 빼앗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라이자키아는 200년 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세냐 메르데인도 마찬가지고. 둘이 싸우고…… 라이자키아가 실패했다.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솔직히 블랙드래곤이 인간마법사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납득이 안가지만, 상대가 그 세냐 메르데인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봐요.”


원래는 세냐 메르데인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카샤가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양도된 것을 보면 세냐 메르데인이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세냐 메르데인을 ‘직접’ 만나서 아카샤를 양도받은 것이라면, 라이자키아에 대해서도 들었겠죠. 계속 모르는 척하는 것은 세냐 메르데인을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그냥 자존심?”


“라이자키아에게 헤츨링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누아르는 으스대듯 말하며 가슴을 활짝 폈지만, 유진은 일절 반응하지 않고 태연한 질문을 건넸다. 누아르는 보란 듯이 양 뺨을 부풀리고서 유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처음 듣겠죠.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니까요.”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혼자서 알을 낳을 수는 없다.


“라이자키아는 처음부터 ‘알’을 가지고서 헬무드에 투신했어요. 이것도 뭐, 당연한 거죠. 세상 어느 드래곤이 종족을 배신한 라이자키아와 뒹굴어 알을 낳아주겠어요?”


드래곤은 수명이 긴 만큼 성장에도 수백 년의 시간이 걸린다. 알에서 태어나는 것만 해도 넉넉잡아 100년의 시간이 필요할 정도다.


종족을 배신하기 전. 이미 고룡에 속했던 라이자키아는 다른 드래곤과 알을 낳았다. 드래곤들이 멸망의 마왕과 유폐의 마왕과 전투를 벌였을 때, 라이자키아의 부인은 멸망에게 죽어 소멸했다. 그리고 라이자키아는 난전 속에서 로드의 심장을 빼앗아 삼키고, 헬무드에 투신했다.


자신의 알과 함께.


“……그 배신자 드래곤도 부성애는 있던 모양이지? 굳이 알까지 가지고서 헬무드에 투신하다니.”


“방금 뭐라고 했어요?”


유진의 중얼거림에 누아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배신자 드래곤도 부성애는…….”


“아하하하!”


기껏 다시 말해주었는데, 누아르는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녀는 배까지 잡고서 시끄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라이자키아가 부성애라니! 아, 아하하! 잘 알았어요, 유진 라이언하트. 당신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는군요. 하지만 아니에요. 라이자키아가 부성애라니…… 다른 드래곤도 아니고, 그 미치광이 블랙 드래곤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럼 뭐야?”


“당연한 거죠. 키워서 잡아먹기 위해 알을 가지고 온 거예요.”


누아르가 부성애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듯, 유진도 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서 누아르를 쳐다보았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키워서, 낳게 하고, 잡아먹을 셈이었던 거예요. 이건 제 추측이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듯이, 라이자키아는 오만하고 과시욕이 대단했거든요. 가끔 판데모니엄에서 만날 때마다, 라이자키아는 자신의 계획을 떠들곤 했죠.”


판데모니엄의 바벨에서 이뤄지는 로열티 모임. 그것은 수백 년 이어지면서 보다 느슨한 친목회가 된 것이지, 처음에는 삼공이 한데 모여 서로를 견제하던 자리였다.


“즐겁게 떠들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라이자키아는 제 헤츨링을 성장시키고서, 알을 계속 낳게 하고, 새로 태어난 헤츨링들을 다시 교배시켜서…… 뭐, 그렇게 후손을 잔뜩 낳을 생각이었어요.”


“…….”


“부족하다 싶은 자식이나 후손은 잡아먹고. 마족 권속 대신에 자신이 낳은 드래곤들을 권속으로 삼을 생각이었던 거죠. 보통 근친교배를 하면 어딘가 맛이 가게 마련인데, 드래곤도 그럴까? 저는 내심 그게 궁금했는데, 라이자키아가 사라져서 확인할 수는 없게 됐네요.”


“미친 새끼.”


설마 저 정도로 미쳤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아니, 애당초 저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불가능할 것은 없죠. 라이자키아는 머리가 돌기는 했어도 능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라이자키아가 사라지기 전.


알에서 헤츨링이 태어났다. 라이자키아는 끝없이 알을 낳아야 할 운명이 예정된 첫 자식의 이마 한가운데에, 자신의 드래곤 하트 일부를 떼어내 박아 넣었다.


헤츨링이 결코 명령을 어길 수 없게끔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라이자키아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때 박아 넣은 드래곤하트 덕에 용공녀가 용마성에 군림하고 있는 거죠.”


라이자키아의 얼마 안 되는 권속들. 그들을 억압하는 계약은 헤츨링의 이마에 박힌 드래곤하트에 연결되어 있다.


“라이자키아가 죽었다면 그것도 소용없었겠지만. 그래서, 나의 유진. 계속 말하지 않을 건가요? 당신은 세냐 메르데인에게 라이자키아에게 들었잖아요. 용마성의 용언마법과 권속의 계약이 건재한 것을 보면 죽은 건 아닐 거 같은데.”


“글쎄 모른다니까.”


“뻔한 거짓말 하기는. 도저히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그럼 다른 것을 묻죠. 나의 유진, 당신은 왜 용마성에 가려는 거죠?”


“드래곤하트가 욕심나서.”


무언가 둘러댈 만한 변명거리가 필요하기는 했다.


“아, 역시. 당신도 그런 거예요? 드래곤하트…… 진귀한 보물이죠. 세상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나도 300년 전에 드래곤이나 몇 마리 죽여서 빼앗아 두는 건데.”


누아르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방금 그 말, 결국 제 말이 맞네요? 당신은 용마성에 라이자키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온 거예요. 용공녀의 존재까지는 확신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헤츨링에 대해 추측은 하고 있었던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


“후후후, 필사적으로 아닌 척 구는 것이 정말 귀엽다니까. 나의 유진, 당신이 드래곤하트를 욕심내는 이유도 짐작이 가요. 초조하기 때문이겠죠? 어떻게든 빠르게 힘을 키우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내가 협력해 줄 수밖에 없죠.”


“……그것부터가 이해가 안 가. 누아르 제벨라, 네가 왜 나에게 협력하는 거지? 나는 네 적인데?”


확실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물어보았지만, 누아르는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제 가슴을 끌어안았다.


“적…… 적이래. 아, 너무 좋아. 왜 협력하냐고요? 나는 당신이 하멜처럼 미쳐 날뛰는 베르무트가 되기를 바라요.”


뭔 개소리일까? 유진은 내심 흠칫했지만 필사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것뿐?”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나 봐요? 그렇다면 다른 이유도 말해줄게요. 나는 라이자키아도, 용마성도 싫어해요. 그래서 예전부터 죽여 버리고 싶었죠.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입장이거든요. 왜? 우리 잘난 유폐의 칼, 가비드 공작님께서 내 독주를 견제하고 계시거든.”


누아르는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삼공이란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리에 있지도 않은 라이자키아가 그 자리를 꿰차는 것보다는, 진심으로 에드먼드나 다른 신흥마족이 공작에 오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즉, 누아르가 바라는 것은 사태의 변화인 것이다. 유진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용사가 용마성을 침몰시킨다. 그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가 기대되고 설레었다.


“우선 카라블룸의 분위기부터 알아야 할 거예요. 지금 카라블룸의 어떤 상태인지는 아나요?”


“……바로 옆인 루올 영지의 영주가 시비를 걸고 있다던데.”


이곳에 와서 매일 듣고 있는 뉴스로 사정은 파악했다.


“여태까지는 단순한 시비였지만, 카라드 백작은 그것보다 더 큰 걸 바라고 있어요. ‘진짜’ 영지전을 준비하고 있다구요.”


“놈은 라이자키아의 상황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닌가?”


“바로 옆 영지기도 하니, 200년이나 침묵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은 눈치챈 모양이죠. 근거가 그것뿐만은 아니고요.”


용마성이 관리하는 카라블룸의 광산지구. 그곳에서 노역 중인 드워프들의 공물이 암시장에 풀리고 있다.


“카라드 백작이 노골적으로 영지전을 준비하는데, 정작 용마성은 아무 대응도 보이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지상 카라블룸에서 사는 영지민들은, 영지의 주인이 카라드 백작으로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죠. 그만큼 여론이 안 좋다는 거예요.”


200년 동안 공식석상에 서지 않은 영주. 영지와 영지민들을 방치하고 있는 영주. 드래곤, 공작이란 이름이 두려워 대놓고 비난하지 못할 뿐이다.


“민심이 흉흉하고 불안할수록 마음의 안식을 찾는 법이죠.”


누아르는 입꼬리를 히죽 올리며 말했다.


“당연히 카라블룸에는 많은 몽마들이 있어요. 우선, 제 아이들을 통해 당신을 카라블룸에 들여보낼 거예요. 그건 아주 쉬운 일이니까요.”


“그다음은?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용마성이야.”


“그것도 뭐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쉬운 것은 제가 직접 마안을 쓰는 것이지만…… 저는 직접 관여할 생각은 없거든요? 나중에 책임지고 싶지 않단 말이야.”


“이미 직접 관여하는 것 아닌가?”


“달라요. 저는 제 아이들을 통해 도와줄 뿐이에요. 그렇게 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때, 제 아이들의 목을 내놓는 것으로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친근하게 ‘아이들’이라고 말하는 주제에. 누아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저렇게 말했다.


“용마성에서 사는 것은 간택받은 귀족층뿐. 라이자키아의 그 쓸데없는 선민사상 때문에, 용마성에는 몽마를 들여보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즐겁고 기분 좋은 꿈을 바라는 것은 평민이나 귀족이나 똑같잖아요? 카라블룸에서 열심히 일하는 제 아이들 중에는, 용마성의 귀족들을 상대하는 상급 몽마들도 있어요. 그 아이들을 연줄로 써도 용마성에 잠입할 수는 있을 거예요.”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인간이잖아.”


“라이자키아가 살아 있다면 당연히 안 되겠죠. 나의 유진,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라이자키아가 사라진 지 200년 동안 그의 영지는 썩어버렸다고요. 아, 물론 당신 혼자서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누아르는 그렇게 강조하며 으스댔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어쩔 수 없어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당신은 카라블룸에 갈 수 없어요. 그 이유는 알죠?”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신성력을 가진 그녀는 마족에게 너무 눈에 띈다.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자, 그럼 예명부터 지어볼까요?”


누아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진과 메르, 크리스티나. 머릿속의 아니스까지 누아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아르는 자신에게 향하는 얼떨떨한 시선들에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그렇게 봐요? 방금 말했잖아요. 나의 유진, 당신은 제가 다스리는 몽마들과 함께 카라블룸에 잠입할 거예요.”


“……어.”


“그럼 당연히 당신도 몽마인 척해야 재미있잖아요? 체격이 너무 크니 여장해서 서큐버스는 좀 그렇…… 아니, 어차피 마족이니까 체격은 별 상관없나? 근육질 취향도 있는 법이고. 몸에 비해 얼굴은 예쁘장한 편이니, 화장을 하고 가발을 씌우면…….”


“지…… 랄하지 마.”


“아, 그럼 역시 인큐버스로 갈까요?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예요.”


몽마인 척해야 재미있잖아요.


누아르는 그렇게 말했다. 즉, 유진이 무조건 몽마인 척 변장해야 할 필요는 없단 말이다. 변장은 저 미치광이의 장난 거리일 뿐이다.


“유진이라는 이름을 댈 수는 없으니 예명이 필요할 거예요. 뭐가 좋을까……. 테리우스는 어때요? 인큐버스들이 즐겨 쓰는 예명인데.”


“나가.”


유진은 정색하고 내뱉었다.


용공녀


대뜸 찾아왔던 누아르 제벨라가 떠나고서 고작 이틀. 그녀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아무 연락도 없이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해졌어요, 나의 유진.”


유진은 다른 무엇보다, 누아르가 자신을 저렇게 부르는 것이 짜증 나고 화가 났다. 애당초 유진은 누아르가 자신에게 ‘왜’ 저딴 호감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해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현재 헬무드에서 누아르 제벨라가 벌여대는 사업에 대해서는 파악했고, 그를 통해 내린 결론은ㅡ 저 서큐버스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미치광이의 정신머리를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당신은 미식(美食)의 진상품이 되어 용마성으로 들어갈 거예요.”


“미식?”


“네!”


누아르는 발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의미 그대로의 말이었다. 용마성의 귀족 중 미식가를 자처하는 어떤 마족이, 인육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어디 가서 큰 소리로 떠들어댈 말도 아니지만, 인간혐오로 유명한 라이자키아의 영지에서는 떠들지 못할 말도 아니었다.


누아르 제벨라의 휘하 몽마 중 그 마족을 고객으로 삼은 몽마가 있다.


“나의 유진. 당신도 알겠지만, 헬무드는 밀입국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아요. 사냥마물에게 잡히는 순간 그 자리에서 잡아먹히죠.”


운이 좋아 사냥마물의 눈을 피하는 것에 성공할지라도 문제가 끝나버리는 것은 아니다. 마족 사냥꾼들은 마물보다 영리하고 지독하다. 그들은 사로잡은 밀입국자의 인권 따위 존중해주지 않는다.


“이것도 대놓고 떠들 이야기는 아니지만, 헬무드가 존중하는 것은 정식으로 입국한 인간뿐이에요. 그리고 헬무드의 법을 어기지 않는 시민뿐이죠. 그 외에는…….”


“이 천하에 나쁜 마족 새끼들. 내 그럴 줄 알았어. 겉으로는 친절한 척 웃으면서 뒤에서는 인간의 정기를 갈취하고 산 채로 잡아먹은 뒤 영혼을 노예로 삼았단 말이지?”


드디어 건수를 잡았다. 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서 누아르를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아무리 아닌 척해봐야 마족은 마족이란 거지. 그러면서 뭐, 인간이 살기 좋은 헬무드? 세 치 혀로 인간을 속이고, 맛있게 살찌워 잡아먹으려는 뻔한 개수작…….”


“저기, 나의 유진, 진정하세요.”


잔뜩 흥분해서 내뱉는 유진을 향해, 누아르가 척 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헬무드가 존중하지 않는 인간은, 헬무르를 존중하지 않은 인간뿐이에요. 밀입국자. 법을 어긴 자. 나의 유진, 당신도 알다시피 헬무드의 법은 인간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죠. 그렇게나 호의적인 만큼, 법을 어긴 자에게는 굉장히 가혹한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잡아먹어? 이 마족 새끼들…….”


“왜 흥분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저희는 결국 종이 다르잖아요? 그리고 나의 유진, 내가 알기로는 라이언하트 가문은 우클라스 산의 수호자 역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맞죠?”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사마르 대수림과 바로 맞닿은 국경이잖아요? 그곳에서 밀입국 시도가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아는데. 국경수호 역을 맡은 흑사자 기사단은 밀입국자에 대한 즉결처형권을 가지고 있죠?”


가지고 있다.


“밀입국자를 처형하는 것이야 어느 나라든 당연한 거잖아요. 마족이 인간을 잡아먹는 것? 저는 별로 즐기지는 않지만, 수많은 마족 중에서는 그런 취향인 마족도 있는 법이죠. 뭘 새삼스레? 인간들에게도 식인 풍습은 남아 있잖아요? 오히려 인간의 식인은 동족포식이니까, 그게 더 문제 아닐까요?”


아니라고 부정하려 했지만, 사마르 대수림의 원주민들이 떠올랐다. 그 야만족들 중에서는 식인 풍습을 간직하고 있는 부족이 꽤 있기는 했다.


“종이 다른 우리는 절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해하려고 노력은 할 수 있겠지만요. 그리고 나의 유진, 지금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마족과 헬무드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누아르는 어느새 쓰고 있던 검은 안경을 손끝으로 올리며 말했다. 그 짧은 사이에, 이지적인 모습을 어필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환상의 마안을 사용한 것이다. 유진이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누아르의 안경도 언제 존재했냐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나의 유진. 당신은 아까 말했던 대로, 용마성 마족의 진상품으로 카라블룸에 들어갈 거예요.”


그것에 관해서 유진이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없었다. 카라블룸의 몽마들은 여왕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성문의 심사관을 맡고 있는 고객의 설득도 끝났다.


용마성의 진상품. 고작해야 인간 한 명. 눈 감고 들여보내 주는 것은 지금의 혼란스러운 카라블룸에서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혼란.


루올 영지의 카라드 백작이 영지전을 준비하고 있다. 직접 선전포고는 아직 하지 않았지만, 그 소문만으로 카라블룸 영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영주인 흑룡공은 200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고, 카라드 백작의 지속적인 시비에도 반응하지 않고 있다. 덕분에 지금 카라블룸 영지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영지를 떠나는 마족들도 많았다.


“아, 물론 나의 유진. 당신은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어요. 요란한 잿빛 머리카락은 당연히 가려야 하고, 성검도 꺼내면 안 돼요. 아무리 단꿈에 맛이 간…… 아니, 친절히 부탁을 들어준 문지기일지라도, 용사를 몰래 들여보내 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용마성에 올라간 뒤에는?”


“그때부터는 당신 자유죠. 나의 유진, 어차피 당신의 목적은 용공녀의 드래곤하트잖아요?”


누아르는 히죽 웃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당신은 운이 좋아요.”


“운이 좋다고?”


“네. 조만간 용마성에서 전쟁이 벌어질 거거든요.”


태연한 얼굴로 전하는 말에 유진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전쟁?”


“네. 빠른 시일 내로 카라드 백작은 선전포고를 하고, 용마성의 과감한 침공을 결행할 거예요. 아마 며칠 내로 그럴걸요?”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꼭 그렇지도 않아요. 카라드 백작은 꽤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했고…… 이 전쟁에서 무조건 이길 수 있다 싶은 카드를 손에 넣었거든요. 아마 당신도 이름은 들어봤을걸요? 라비스타의 마수. 맹수 수인족의 두령, 야곤.”


유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야곤.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야곤을 필두로 한 수인족의 용병단이 루올 영지에 도착했어요. 카라드 백작이 야곤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즉시 침공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 미치광이는 드래곤을 사냥할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루올에 온 거니까요.”


카라드 백작이 저 먼 라비스타에서 야곤을 불러들일 수 있던 것은ㅡ 야곤에게 용마성과의 영지전이라는 명분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이미 갖고 있을 거고, 카라블룸과 용마성에는 민간인도 없으니 침공을 주저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어쩌면 이미 루올을 출발했을지도 모르죠.”


헬무드의 법에서 ‘민간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 마족들 사이에서는 영지전과 서열 잡이 따위의 전쟁이 잦지만, 상대의 영지를 침략할지라도 민간인은 우선해서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전쟁에서 마족이 마족을 죽이는 것에 제재 따위는 없다. 오히려 헬무드의 법은 그렇게 전쟁을 벌여 세력을 키우고 격을 높이는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것마저 제재해 버리면 마족들은 진즉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타이밍’이 중요한 거예요, 유진. 당신도 용공녀를 죽인 뒤, 용마성을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일 것 아니에요?”


확실히 말하자면, 유진의 목적은 용공녀의 드래곤하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용공녀를 사용해서 차원의 틈에 있다는 라이자키아를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직접 만나서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용공녀를 만난 그 자리에서 라이자키아가 처박힌 차원의 틈까지 갈 수 있다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아마 납치하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용공녀를 제압하고서 용마성을 탈출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유진은 표정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누아르가 왜 ‘타이밍’을 말한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카라드 백작과 그의 군세가 용마성을 침공한 순간. 그 순간을 노리면 탈출이 굉장히 쉬워질 것이다.


“침공 과정에서 용마성의 결계는 박살 날 거예요. 그리고 야곤을 필두로 한 맹수들이 용마성으로 쳐들어가겠죠. 나의 유진, 당신은 그 혼란 중에 용마성을 탈출하면 되는 거예요.”


누아르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용공녀의 암살. 200살 남짓인 헤츨링이라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한 비늘과 뼈를 가진 생물이 드래곤이다. 거기에 온갖 마법까지 두른 드래곤을 일검에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운이 좋다면 용공녀를 죽인 뒤, 침공의 혼란 중에 탈출할 수 있겠지만…… 운이 없다면 탈출하기 전에 야곤에게 포착될 거야.’


누아르는 그 광경을 상상하며 히죽 웃었다.


* * *


누아르가 장담했던 대로, 몽마와 함께 성문을 지나는 것에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저희가 가는 곳은 광산마을이에요.”


고급차의 운전석에 앉은 몽마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인간님이 아시는지는 모르지만, 카라블룸의 광산마을은 헬무드에서 가장 많은 드워프들을 보유하고 있죠. 그곳의 드워프들은 달에 한 번씩 자기들이 만든 세공품을 용마성에 진상하거든요.”


몽마가 유진에게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소곤거렸다.


“제 고객이 세공품을 확인하는 감식관이거든요. 인간님은 세공품들과 함께 용마성으로 올라가게 될 거예요. 일단 제가 맡은 역할은 인간님을 세공품들과 함께 보내는 것인데…… 따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없어.”


유진은 몽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답했다. 감식관이라. 유진은 눈썹을 구기며 과거 용마성에 대해 알아보는 중에 파악해 둔 정보를 떠올렸다.


드워프들의 세공품이 빼돌려 지고 있다. 라이자키아에게 구속된 드워프가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다른 누군가가 중간에서 착복하는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중간다리라 할 수 있는 마족감식관의 짓이었던 모양이다.


‘감식관이라는 놈이 세공품을 빼돌리고, 인간혐오자인 라이자키아의 영지에서 인간까지 들여보내다니…… 그만큼 썩었다는 말이지.’


감식관의 과감한 비행은, 용마성의 마족들은 라이자키아가 성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꼴을 보아하니 헤츨링에 대한 충성도 없을 것이 분명했으니, 조만간 있을 전쟁은 전쟁이라 할 수도 없는 허접한 싸움이 될 것이 뻔했다.


용마성이 침공당한 순간. 그곳에 사는 귀족이란 놈들은 대거 항복해버릴 것이다. 용마성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짓밟힐 것이고, 야곤을 필두로 한 짐승들이 용공녀를 찢어 죽이기 위해 용마성에 쳐들어올 것이다.


‘시간 벌이도 안 된다는 건데…….’


용마성이 격렬히 저항해 준다면 그 틈을 봐서 용공녀를 납치하고 편하게 탈출할 수 있을 텐데.


“……용마성에는 어떻게 보내지는 거지? 워프게이트를 쓰나?”


“네. 감식관이 직접 워프게이트를 타고서 광산마을에 내려올 거예요. 인간님은 다른 진상품들과 함께 수레에 실려 있다가, 감식관과 함께 올라가면 되는 거예요.”


“그 마족 새끼가 그 자리에서 날 잡아먹겠다고 하면 어떡해?”


“우후후, 그런 일은 절대 없어요. 여왕님께 듣지 못하신 건가요? 그 마족은 자신을 미식가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운전대를 잡던 몽마가 유진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여왕님께 그 사실을 전해드린 것이 바로 저예요. 부드…… 아, 부드는 그 마족의 이름이에요. 꿈을 꿀 때마다 제게 자꾸 이름을 불러달라고 해서 외워 버렸어요. 어쨌든, 부드는 말이에요. 제가 인간을 선물로 준다고 했을 때, 엄청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인간님을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해서, 친구들과 비밀스러운 만찬회를 열 것이라면서요.”


“…….허.”


유진은 혀를 차며 주먹을 쥐었다.


결정했다. 용마성에 올라간 뒤에 길을 터준 마족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랄 것도 한 적은 없다만, 방금 몽마가 떠든 말로 마음을 정했다.


용마성에 도착한 즉시 목을 뽑아버리기로 했다.


카라블룸은 공작령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작다. 라이자키아 본인이 커다란 영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이자키아는 쓸데없이 크기만 한 땅덩이보다는 헬무드 제일의 보석 광산이 속해있는 카라블룸을 공작령으로 삼았다.


영지의 크기만 따지자면, 카라블룸은 유진의 고향인 기돌보다도 작았다. 덕분에 성문에서부터 5시간 정도 차로 이동하자 변경의 광산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툼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차에서 내려, 광산마을의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이곳은 헬무드 제일의 보석광산이다. 이곳에서 채굴되는 보석은 드워프들의 손길을 거쳐 가공되고, 용마성에 진상된다.


장장 300년 동안. 드워프들은 있지도 않은 라이자키아에게 보석을 바쳐온 것이다.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라이자키아의 구속은 드워프가 죽을 때까지 이곳에 노역하게 만든다. 그 계약은 세대가 바뀌어도 지속된다. 300년 전의 드워프들을 죽었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광산에서 노역 중이다.


“불쌍한 드워프들. 저들은 평생 이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어째서?”


“흑룡공과의 계약 때문이죠. 물론 그 계약은 흑룡공의 협박으로 맺은 것이지만, 저들은 흑룡공이 허락하지 않는 한 이 광산지역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인지, 마을에서 본 드워프들의 눈동자는 칙칙하게 죽어 있었다.


하지만 눈이 죽었을지라도 드워프는 드워프인 법. 워프게이트에 미리 도착해 있던 수레에는 드워프들이 만든 세공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세공품을 보는 눈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유진이 느끼기에도 다들 범상치가 않아 보였다.


그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포악하고 욕심 많은 드래곤에게 바치는 물건이고, 퀄리티가 떨어진다면 드래곤의 분노를 받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부드가 올 거예요.”


유진은 몽마가 시키는 대로 수레에 실려 있던 빈 상자에 들어갔다.


“용마성에 도착할 때까지는 얌전히 있으셔야 해요.”


상자의 뚜껑이 닫혔다. 유진은 상자에 난 열쇠 구멍을 통해 밖을 살펴보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워프게이트가 가동되었다.


“아리스!”


워프게이트에서 걸어 나온 마족은 오크와 돼지를 반쯤 섞은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놈은 불룩 튀어나온 배를 흔들며 몽마에게 다가갔다.


“가게 말고 이곳에서 보는 것도 색다르군. 앞으로는 가게 밖에서도 만날 수 있는 건가?”


부드는 노골적으로 치근대며 수레에서 목걸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슬쩍 살핀 뒤에, 몽마의 가슴골에 목걸이를 찔러 넣었다.


“어머나…….”


“괜찮아, 괜찮아. 오늘 내가 받게 될 선물에 비하자면 이 정도야 뭐…… 그래서 아리스, 저 상자인가?”


부드가 뺨을 실룩거리며 물었다. 몽마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부드는 목젖을 꿀렁거리며 상자로 다가왔다.


퉁.


큼직한 손이 상자를 한 번 두드렸다. 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상자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퉁, 퉁. 몇 번 상자를 더 두드리고서야 부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멋진 선물이군.”


부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레를 워프게이트 위까지 밀고 갔다. 워프게이트가 다시 가동되었다.


지상 카라블룸에서, 높은 하늘을 부유 중인 용마성으로.


짧은 부유감. 열쇠구멍으로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드디어 용마성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다면 더 상자에 있을 필요가 없다. 유진은 즉시 이곳을 박차고 나가, 미리 정해두었던 대로 부드의 목을 뽑아버리려 했다.


“누, 누구냐?!”


하지만 유진이 상자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부드가 화들짝 놀라서 고함을 질렀다. 유진도 덩달아 놀랐다. 워프게이트의 밖,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소녀가 홀로 서 있었다.


“감식관 부드! 네 비행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본녀가 알고 있느니라!”


소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저 외침일 뿐이지만, 부드는 소녀의 외침에 뭐라 반발하지 못했다.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드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버렸다.


“네 죄를 인정하여 무릎을 꿇는 것이냐! 하지만 네 가벼운 무릎으로는 범한 죄를 사할 수 없느니라!”


“누…… 누, 누구십니까?”


부드는 자신이 왜 무릎을 꿇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외쳐대는 소녀의 정체도 알지 못했다. 소녀의 이마에 박힌 붉은 보석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어버린 것이다.


“본녀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암, 그렇겠지! 하나 오늘부로 용마성의 모두가 본녀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니라! 본녀야말로 용마성의 적법한 주인이자, 흑룡공의 유일한 혈육일지니!”


펄럭! 소녀가 널찍한 소매를 크게 흔들고서는 부드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본녀의 이름은 라이미르아! 감히 용마성에 진상될 보물에 손을 댄 악덕한 자여! 용마성의 주인이 명할지니, 당장 자결하…….”


소녀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세공품과 함께 있던 상자의 뚜껑이 박살 나고, 유진이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용공녀


용마성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누군가와 마주친 것부터가 당초의 계획에서는 없던 일이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용마성 잠입 계획은 느슨하고 구멍투성이라, 언제 어느 상황에 돌발적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상황에 따라 즉각적으로 대처할 각오를 하고 왔다. 누군가가 부드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을 때. 유진은 내심 ‘X같다’라고 생각했다. 각오는 했다지만, 설마 용마성에 들어오자마자 문제가 터질 줄이야.


어떡하지? 어떡하기는. 지금 상황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뿐이다. 부드도 죽이고, 저 누군지 모를 마족도 죽인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용마성에 잠입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열쇠구멍을 통해 상대를 보았다.


과시욕이 가득한 본녀라는 자칭. 의식해 내뱉는 우스꽝스러운 말투. 메르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소녀의 모습. 탁 트인 이마. 길쭉하게 솟은 금색 뿔.


이마 중앙의 붉은 보석.


‘설마.’


일단 부정해 볼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에게 듣기를 용공녀의 존재는 200년 동안 드러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순간에? 저런 식으로?


“본녀야말로 용마성의 적법한 주인이자, 흑룡공의 유일한 혈육일지니!”


소녀가 당돌한 목소리로 외치며 부드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을 때. 유진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본녀의 이름은 라이미르아! 감히 용마성에 진상될 보물에 손을 댄 악덕한 자여! 용마성의 주인이 명할지니, 당장 자결하…….”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제 입으로 자신이 흑룡공의 혈육이란다. 용마성의 새로운 주인인 라이미르아란다. 어쩌면, 어쩌면 용공녀를 사칭하는 정신병자일지도 모른다…….


상황이 워낙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 생각도 했다만, 일단 붙잡아보기로 했다.


“뭐, 뭐냐?!”


이 돼지 마족은 상자의 인간에 대한 경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진이 철저하게 마나와 힘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드는 기겁하여 상자를 돌아보았다.


휘둥그레 뜬 눈이 담고 있던 시야가 급격히 위로 치솟았다. 예정과는 크게 달라지긴 했지만, 유진은 부드에 대해 결심했던 것은 고집스레 이행했다.


그는 상자에서 뛰쳐나온 즉시 부드의 머리로 손을 뻗어, 놈의 커다란 머리통을 움켜잡고 목을 뽑아버렸다.


“꺄아악?!”


머리와 척추가 함께 뽑히는 모습에 라이미르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꽤 마력을 쌓은 것인지 부드는 그 순간에도 죽지 않았다. 대신, 입을 쩍 벌리고서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질렀다.


“뀌이이리리릭!”


길게 이어지던 비명이 단말마가 되었다. 유진이 손끝에서 터트린 불꽃이 부드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건 단순한 마나의 불꽃이 아니었다. 날카롭게 뽑아낸 검강들이 서로 엮이면서 둥그런 구체가 되었다. 그 중심에 삼켜진 부드의 몸은 회오리치는 검강에 무한히 난도질당했다.


무한연옥! 부드의 육체는 죽음을 거부하며 재생을 시도했지만, 끝없이 참격이 몰아치는 무한연옥 안에서는 재생하는 족족 몸이 분쇄될 뿐이었다. 전생부터 무한연옥은 재생력이 강한 마족을 죽이기에 제격인 기술이었다.


결국 부드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한연옥 속에서 난도질당했다. 당장은 어찌 숨이 붙어 있지만 조만간 재생력도 다해 죽어버릴 것이다.


유진은 부드를 내버려 두고 앞을 보았다.


“히익……!”


라이미르아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뒷걸음질을 쳤다. 크게 뜬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다. 유진은 주변에 다른 마족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라이미르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라이자키아와 생김새가 닮지는 않았다. 사실 그게 당연했다. 저 인간을 본뜬 모습은 드래곤의 권능 중 하나인 폴리모프로 구현한 모습이니 말이다.


하지만 닮은 특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보통 드래곤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폴리모프를 한 상태여도 머리색과 눈동자 정도는 본신의 색에 맞추곤 한다.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저것은 라이자키아, 아니, 블랙드래곤의 특징이었다.


“네ㅡ 네놈! 네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더냐?”


침입자! 라이미르아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강렬히 새겨졌다.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침입자의 뒤에서는 감식관 부드가 다짐육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에 사용되는 정교하고 강력한 마나의 흐름이 라이미르아의 표정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솔직히 무섭다. 하지만 라이미르아는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한 마음과는 달리 라이미르아의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지만, 라이미르아는 너무 긴장하고 겁을 먹어서 그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감히…… 감히! 용마성의 주인인 본녀 앞에서 성의 가신을 해하다니! 그 죄, 열 번 백 번 죽어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니라!”


버럭 지르는 외침. 헤츨링이기는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인지라, 라이미르아의 외침에 드래곤피어가 함께 실렸다. 다만, 그 드래곤피어는 아리아르텔이 내뿜던 드래곤피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나약했다.


[쟤 뭐예요?]


오죽하면 메르조차도 별 위협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 정도의 위력이었기에, 라이미르아의 드래곤피어는 유진의 몸과 마나를 묶지 못했다.


그래서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라이미르아를 향해 뛰어들었다. 공격! 라이미르아는 화들짝 놀라서 뻗고 있던 손을 홱 하고 휘둘렀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손에 따라붙는 힘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순순히 맞아줄 생각 따위는 없었기에, 유진은 망토의 안에서 폭풍검 위니드를 뽑았다.


[바람의 정령왕! 나 템페스트가 헬무드에 왔노라!]


최근의 전투에서 성검의 비중이 워낙 높아져서, 위니드는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헬무드에 오고서 위니드를 뽑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템페스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함을 내질렀다. 사실 위니드는 최초에 촉매로 썼을 뿐, 템페스트와 직접 계약을 맺었기에 언제든지 이쪽에 말을 걸 수 있는데…… 위니드를 직접 쥘 때마다 존재감을 내비치는 것은 템페스트 나름의 고집이었다.


‘조용히 해.’


[하멜! 어차피 내 외침은 네 머릿속에밖에 들리지 않는다.]


‘알아, 아는데 그냥 조용히 하라고.’


냉정한 대답에 템페스트의 바람이 약간 느슨해졌다.


지금 토라졌다고 어필하는 건가? 물론 모든 바람이 느슨해진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유진의 주변에 부는 바람만 느슨해졌을 뿐이다. 라이미르아의 공격과 맞닿는 바람은 맹렬한 폭풍 자체였다.


ㅡ꽈아앙! 커다란 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멀리 퍼지지는 않았다. 마치 깊은 동굴의 안쪽처럼 소리가 메아리쳤다. 유진의 방음마법이 이 공간의 소리를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라이미르아가 냉정하고 이성적인 상태였다면, 이 공간에 작용한 마법을 알아차리고 디스펠을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라이미르아는 냉정하고 이성적이지 못했다.


“무, 무, 무엇이냐?!”


라이미르아가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하얗게 질린 얼굴, 뺨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네, 네 이놈! 침입자 녀석! 가, 가가, 감히 본녀를 공격하는 것이냐?! 지금이라도 멈춘다면…… 그, 그래! 멈춘다면 용서해 줄 것이니…….”


라이미르아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부었다.


직접적인 충돌. 유진은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고 잠시 멈췄다. 충돌 전에도 느끼긴 했다만, 직접 부딪쳐 보니 확실히 알았다.


‘마력(魔力)이 아니야.’


마왕과 마족 같은 마(魔)의 족속이 사용하는 힘이 바로 마기(魔氣). 그것은 마를 녹여낸 마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기를 정제한 것이 바로 마력이다. 300년 전, 타락한 블랙드래곤인 라이자키아는 드래곤하트가 뿜어대는 끝없는 마나를 모조리 마력으로 바꾸어서 휘둘렀었다.


하지만, 그 혈육인 라이미르아는 마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외혈 방금의 충돌에서 느낀 라이미르아의 마나는 드래곤답게 굉장히 정순했다.


[하멜. 그녀는…….]


‘알아.’


유진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템페스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안다. 직접 충돌한 유진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지금 상황에서 라이미르아 본인에 대해서는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라이미르아가 드래곤인 것은 확실하지 않은가.


“끼약!”


비록 라이미르아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는 듯이 허둥대며, 드래곤다운 위엄이라곤 없는 비명을 질러댈지라도. 유진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꺄아아아…….”


성격과 말투와 비명과는 별개로, 방심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유진의 목적은 당장 라이미르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제압하고, 아카샤의 용언마법을 써서 라이자키아를 탐색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 보니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그 전력의 기준은, 참격 한 번에 너무 힘이 과해 라이미르아를 통째로 날려 버리지 않는 정도. 베는 부위만 썰려 나가는 정도다. 즉,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팔다리를 잘라놓을 생각이었다.


“아아아……?”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라이미르아의 몸을 스쳤지만, 살벌한 불꽃의 검강이 베어낸 것은 라이미르아의 옷자락뿐이었다. 분명 피부에 검강과 칼날이 스쳤는데, 베이기는커녕 긁힌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라이자키아도 그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생채기 하나 없는 뽀얀 살결을 쳐다보았다.


“아…… 아하하! 아하하핫! 보아라! 하등한 인간 침입자야! 네 나약한 칼날로는 본녀의 몸에 피 한 방울 흐르게 할 수 없느니라!”


라이미르아는 즉시 태도를 바꾸며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소매를 크게 펄럭거리며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목숨을 구걸하여라! 자, 자, 자비로운 본녀는 네가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면…… 네 용서를 재고해 보도록 하겠느니라!”


“음.”


당연히 저 말은 귓등으로도 들을 필요가 없는 헛소리였다.


유진은 찡그린 눈으로 위니드와 검강을 쳐다보았다. 그 탐탁잖은 시선에 위니드의 바람이 더욱 강렬해졌다. 템페스트가 자존심이 상했음을 어필하는 것이다.


“죽일 작정이 아니면 안 돼.”


유진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죽일 작정. 그 말에 라이미르아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다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주…… 죽일 작정? 네, 네, 네놈은 본녀를 암살하러 온 것이구나……! 본녀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 암살을…….”


더듬거리며 떠드는 말에 답해주지 않았다. 유진은 위니드를 망토 안에 밀어 넣고서 손가락을 관절을 꺾었다. 뚜둑, 하는 소리가 라이미르아의 피부에 오싹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등을 돌리고 후다닥 도망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라이미르아를 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는 하지만, 라이미르아가 가진 드래곤의 자존심이 인간 침입자의 앞에서 등 돌려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유진은 그녀의 갈등을 짐작해 주지 않고 무릎을 낮췄다.


뇌광. 번쩍 터진 자주색 번개가 라이미르아의 시야를 덮었다. 잔뜩 긴장하고 겁먹은 정신이 대응을 늦췄다.


“크엑!”


숨이 턱 막혔다. 정면에서의 돌진. 복잡한 기교 없이 속도에 모든 것을 쏟았다. 긴장하고 겁을 먹지 않았더라도 대응하지 못했을 거다. 일직선으로 돌진해 온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명치를 어깨로 짓누르고,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유진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거대한 마나가 공중에 뜬 몸을 통제했다. 꽈드드득! 라이미르아의 등을 지면에 처박고, 그대로 밀고 갔다.


이전까지의 공격으로 파악했다. 폴리모프 한 상태라도 드래곤은 드래곤. 검강으로 상처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단순하고 거대한 힘으로 자유를 빼앗는 것은 가능했다. 실제로 라이미르아는 유진에게 깔려서 꽥꽥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꺅! 놔, 놔놔! 놔라! 내 위에서 비, 비비, 비키니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에 이렇게 압박이 가해지는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유진은 비키니라가 대체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제대로 배워 처먹지 못한 말투인 것은 분명했다.


ㅡ콰득, 콰드드득! 유진의 등 뒤에서 형상을 갖춘 마나가 라이미르아의 팔다리를 보다 강하게 짓눌렀다.


“네, 네, 네놈! 본녀는…… 흑룡공의 친혈육이다! 보, 본녀의 몸에 손끝이라도 댔다간……. 본녀를 다치게 하였다간! 흑룡공이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니라. 드, 드래곤의 브레스가 네 몸을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것이니라……! 그그, 그리고 네 혼은 영원토록 고통받…….”


“조용히 좀 해라.”


뻐억! 유진의 주먹이 라이미르아의 뺨을 갈겼다. 이번에도 고통은 없다. 하지만 우악스러운 주먹질이 라이미르아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리니, 라이미르아의 비명이 뚝 멈춰 버렸다.


“……때…….”


잠깐의 침묵. 라이미르아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다시 원위치시키지 못하고, 시선만 간신히 돌려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보…… 본녀를, 본녀를 때렸어……? 본녀의…… 옥체를……!”


유진이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라이미르아는 히익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꽉 감은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방금처럼 뺨을 주먹으로 때리지는 않았다. 대신, 유진은 활짝 핀 손으로 라이미르아의 양 뺨을 움켜잡았다.


“우곡…….”


양 뺨을 손가락으로 잡으니 라이미르아의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유진은 그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무심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라이미르아의 눈에는 유진의 황금색 눈동자가 맹수의 것처럼 두렵게 보였다.


유진은 반대편 손이 라이미르아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덜덜 떠는 라이미르아의 눈동자가 손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집게 모양이 된 엄지와 검지가 라이미르아의 이마로 다가갔다.


“그, 그건 안 돼! 멈추어라!”


라이미르아는 황급히 외쳤지만, 뺨이 짓눌리고 입술이 튀어나온 상태라 뜻대로 발음이 되지는 않았다. 유진의 귀에는 ‘우거거걱’ 정도로 들렸을 뿐이다.


ㅡ빠직! 유진의 손가락이 이마 중앙의 보석과 가까워지자, 검은색 번개가 튀어 올랐다.


“끼이이이이긱!”


라이미르아가 비명을 질렀다. 여태까지의 비명은 고통 없이 그냥 내뱉을 뿐이었지만, 지금의 비명은 확실하게 고통이 담긴 비명이었다.


‘뽑으면 안 되겠군.’


손끝에 전해지는 저항감이 심상치 않았다. 유진은 보석을 뽑는 대신, 손끝을 튕겨 보석을 한 대 때려보았다.


“끼야아가각!”


라이미르아의 두 눈이 뒤집혔다. 그녀는 더 비명을 지르는 대신에 거품을 물고 실신해 버렸다. 오히려 그것이 유진에게는 편한 일이었다.


유진은 흰자를 보이며 기절한 라이미르아의 몸에서 일어나, 망토 안에서 아카샤를 꺼냈다.


“운이 좋군.”


설마 용마성에 들어오자마자 용공녀와 만나게 될 줄이야. 유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카샤의 드래곤하트를 라이미르아의 이마에 겨누었다.


용언마법이 펼쳐졌다.


용공녀


아카샤의 드래곤하트에서 투명한 마법의 실이 풀려나왔다. 라이미르아의 이마 한복판에 박힌 드래곤하트와 마법의 실이 만났다.


유진은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조건의 충족은 차고 넘쳤다. 친혈육인 라이미르아의 피만으로도 차원의 틈 어딘가에 있을 라이자키아는 무리 없이 추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드래곤인 아리아르텔이 보장했었다. 혈연은 존재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라이자키아 본인의 드래곤하트. 그 일부까지 있다. 이 조건으로 라이자키아를 탐색하지 못할 리가 없다.


ㅡ화아아악! 눈 감아 보이는 어둠이 흔들린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용언마법을 쓰는 것이 처음도 아니고, 추적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


무언가 다르다는 것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용언마법의 시험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위니드와 목걸이, 그리고 월광검. 모두가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금 용언마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라이미르아라는 존재. 그리고 드래곤하트다. 덕분에 용언마법이 보여주는 것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다.


넓은 방ㅡ 아니, 별궁(別宮)이라 해야 하리라. 이 별궁은 넓었지만 삭막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있었지만 그것들에 온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소통, 그마저도 오늘과 내일의 식사에 관한 것이 대부분.


무언가 필요한 것은 없으신지, 바라는 것은 없으신지에 대한 질문. 무어라 대답한들 진정 바라는 것에 대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거절이 반복된다. 유진의 것이 아닌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퍼져갔다.


더 앞으로.


유진은 눈을 감은 채로 의식했다. 용언마법이 그 바람에 호응해 주었다. ‘기억’을 거슬러 오른다. 침식해 오던 감정도 희미해져 사라진다. 이윽고 다른 기억이 유진의 눈앞에 나타났다.


매끄러운 검은 장발. 새빨간 눈동자. 일그러진 미소. 고풍스럽고 화려한 장포를 걸친 남자가 손을 뻗어 온다. 손끝에 떠 있는 자그마한 붉은 보석이 요사스러운 빛을 발했다.


“네 존재는 날 위한 것이다.”


섬뜩한 목소리가 유진의 머릿속에 울렸다.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놈은 전생부터 즐겨 갖추었던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갓 태어난 혈육의 이마에 드래곤을 박아넣었다. 그러고는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저렇게 속삭였다.


‘더.’


유진은 다시금 의식했다. 그가 추적하고 싶은 것은 라이미르아의 기억과 기원이 아니다. 이 드래곤하트와, 피와 연결된 라이자키아 본인이다. 그것을 강하게 바라니, 지금 유진의 머릿속에 펼쳐진 광경들이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쓰기 위해 극대화시킨 추적마법이 공간을 넘어 차원의 영역까지 도달했다. 차원과 차원, 존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지만, 라이자키아에게 비롯된 피와 드래곤하트는 주인에게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


‘더.’


유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 문제 없이 잘된다면, 도달한 순간에 라이자키아와 연결된 차원 문이 열린다. 그 뒤에는ㅡ 유진이 차원문을 넘어가, 라이자키아를 죽여 버리면 된다. 그것에 성공하면 세계수에 봉인된 세냐를 구해낼 수 있다.


차원의 틈.


그곳은 높디높은 밤하늘처럼 느껴졌다. 불 꺼진 방이나 깊은 동굴, 혹은 지하의 안쪽, 짙어진 그림자. 그런 곳에 존재하는 어둠과는 다르다. 차원의 틈을 메운 어둠은 계속해서 흐르며, 별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들이 함께 뒤섞여 있다.


유진의 의식은 용언마법을 따라 그 머나먼 너머를 관측했다. 얼마나 멀리 왔을까. 꽉 감고 있던 유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길게 뻗은 목을 꺾고, 꼬리로 몸을 휘감고, 커다란 날개로 제 몸을 덮고서 웅크린 모습.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놈이었다. 놈의 비늘은 풍파에 마모된 것처럼 헤졌고, 날개의 피막은 너덜거렸다.


‘찾았다.’


몸이 오싹하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희열이 올라왔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라이자키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ㅡ우우우우! 라이자키아는 두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지만, 놈이 휘감은 강력한 결계가 유진과 용언마법의 간섭을 밀어냈다.


‘억지로 뚫는 것은 불가능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진은 사고를 활짝 열고서 아카샤와 전면으로 공명했다. 뇌가 타버리는 것만 같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히 라이자키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다.


찾아내는 것은 성공했다. 지금 놈이 두르고 있는 결계와도 닿았다.


무엇을 위한 결계지? 아카샤가 결계의 성질을 간파했다. 라이자키아는 마왕이 아니다. 직접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드래곤 수준의 마법이라면 아카샤로 간파가 가능하다.


간파하고, 이해하는 것에 맞춰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유진은 더 이상 머나먼 차원의 틈을 떠돌지 않았다. 눈감고 잠든 라이자키아의 모습이 다시 멀어진다. 직접 가운뎃손가락을 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새삼 아쉬웠다.


어느덧 유진의 정신은 차원의 틈을 떠나, 지상 어딘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ㅡ어딘지 안다. 알아보지 못할 만큼 특색 없는 장소도 아니거니와, 대륙 전체에서 저런 장소는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마르 대수림.


유진의 정신은 높디높은 하늘에서 사마르 대수림을 내려다보았다. 라이자키아의 결계는 대수림 전역, 정확히 말하자면 저 토지 자체에 새겨져 있다.


이해했다. 세냐는 라이자키아를 외차원으로 추방하려고 했다. 만전의 상태로도 불가능한 대마법이지만, 당시 세냐와 엘프를 보호하던 세계수가 힘을 보태주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라이자키아는 세냐가 바란 대로 아예 다른 차원으로 추방되지 않고, 이 세상과 걸쳐진 차원의 틈에 떨어져 버렸다. 세냐의 상태가 위중하던 탓이기도 했지만, 라이자키아가 전력으로 발악한 탓이기도 했다.


라이자키아가 두르고 있던 결계. 외차원으로 아예 추방당하지 않도록 놈의 존재를 대수림의 토지와 묶어 버렸다. 위대한 종족이라는 드래곤의 존엄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박령과 다름없는 존재로 영락했다. 그렇게나마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200년 동안 건재한 마법.’


라이자키아의 존재를 통째로 관통하고 있는 마법이다.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 꼽혔던 것이 라이자키아다.


그런 라이자키아가 제 보위를 위해 남긴 마법을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당초 저 마법을 어찌하기 위해서는 대수림ㅡ 아니, 그 토지 자체를 흙 하나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지워 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수림의 토지에서 라이미르아와 드래곤하트를 열쇠로 사용해, 틈새로 이어지는 차원문을 여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최초의 계획을 시도할 수 있다.


차원의 틈에서 라이자키아를 죽인다. 제국보다 커다란 대수림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보다는 라이자키아를 어떻게 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대수림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세냐가 봉인된 엘프의 영지까지 지워 버려야 한다는 것이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씨X 도마뱀 새끼.”


유진은 아카샤를 거두며 투덜거렸다. 월광검을 대상으로 삼았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너무 먼 곳까지 관측해 버린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진은 두통을 달래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시선을 내렸다.


라이미르아는 아직까지 기절한 상태였다. 혹시 기절한 척이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발로 툭툭 쳐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그편이 나았다. 유진은 우선 라이미르아를 어깨에 들쳐멨다. 용마성에 오기 전부터 라이자키아를 바로 잡으러 간다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아서, 실망감은 크지 않았다. 어쨌든 관측은 했고, 방법은 알았다.


열쇠도 손에 넣었다. 용공녀 라이미르아. 용마성 내에서 소동을 벌인다면 탈출이 곤란했겠지만, 다행히 아직은 소동을 벌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이 꼬맹이를 데리고 가면 되는 거잖아.’


유진은 히죽 웃으며 워프게이트로 다가갔다.


아직 워프게이트는 가동 중이다. 이대로 저 아래의 광산마을까지 워프하고, 그 뒤에 어떤 식으로든 카라블룸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뭐야?”


라이미르아를 짊어진 상태로 워프게이트에 올라간 순간. 방금 전까지 이어져 있던 연결이 뚝 끊어져 버렸다.


유진은 즉시 아카샤를 통해 게이트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곧, 유진은 무언가를 깨닫고서 눈가를 찡그렸다.


“썩을.”


워프게이트에서 내려와, 라이미르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직까지 기절한 라이미르아의 뺨을 가볍게 몇 대 때려보았다. 하지만 라이미르아는 깨어나지 않았다.


“유진 님. 딱밤을 때려보세요.”


망토 속에 있던 메르가 꾸물꾸물 고개를 내밀었다. 메르는 동그란 두 눈을 호기심과 장난기로 반짝반짝 빛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꽤 훌륭한 의견이어서, 유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따악! 튕긴 손가락이 라이미르아의 이마 중앙을 때렸다. 엄지손톱만한 드래곤하트가 충격에 찌르르 울리고, 축 처져 있던 라이미르아의 몸이 경련했다.


“끼야악!”


라이미르아가 비명을 질렀다. 유진은 발작하는 라이미르아의 몸을 붙잡아 억누르면서, 보란 듯이 젖힌 손가락을 라이미르아의 눈동자 앞에 가져갔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라.”


“너, 너너, 넌! 침입자! 대체 본녀에게 무엇을…….”


따악!


“햐아악!”


너무 세게 때리지는 않았다. 반복해서 기절해 버리면 귀찮기 때문이다. 위력을 줄여서인지 아까보다 비명의 날카로움은 덜했지만, 여전히 아픈 모양이라 라이미르아가 몸을 들썩거렸다.


“널 데리고 워프게이트를 타는 건 아예 불가능한 거냐?”


“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니냐?”


여전히 알 수 없는 말투였고, 유진이 원하는 대답도 아니었다.


따악! 라이미르아는 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크게 벌렸다. 대신 크게 뜬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워프게이트 말고 다른 방법으로 나갈 수도 없는 거냐?”


“보…… 본녀…… 흑…… 본녀를 더는 모욕하지 마니라……. 본녀는 흑룡공의 혈육…… 용마성의 적…… 적법한 주인…….”


딱! 살살 때렸는데, 라이미르아가 엉엉 눈물을 쏟았다. 드래곤다운 위엄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서러운 눈물이었다.


본래 유진은 상대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 철혈의 사나이다. 하지만 메르와 별로 차이 나 보이지도 않는 소녀가 저토록 서럽게 울어대니 아주 조금 마음이 약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신 차리세요, 유진 님. 이 마빡이는 겉모습만 어려 보이지 200년은 살았다구요.”


“너랑 비슷하니까 더 껄끄러운 거야.”


“저랑은 달라요.”


“다를 게 뭔데?”


뻔뻔한 녀석. 유진이 눈을 흘겼고, 메르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그것뿐이었다. 메르도 차마 자신이 존재한 세월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라이미르아를 껄끄럽게 여긴 이유는 메르를 의식해서만은 아니었다. 부친인 라이자키아와는 달리 라이미르아는 마기에 타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용언마법을 쓰면서, 라이미르아의 과거를 잠깐이나마 보았다. 그녀의 과거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론을 연상시켰고, 유진은 그것에 대해 아주 무감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신경 쓰고 챙겨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천천히 손가락에 힘을 주어 라이미르아의 이마로 가져갔다. 꿈틀거리는 핏줄, 한계까지 굽혀진 손가락…….


“보, 보보, 본녀는 용마성을 떠날 수 없는 몸이다.”


라이미르아가 다급히 내뱉었다.


“본녀의 심장과 이마의 홍옥(紅玉)은 용마성의 중심핵과 연결되어 있느니라……. 본녀의 존재가 용마성을 유지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보보, 본녀는 결코 용마성을 떠날 수 없느니라.”


역시. 유진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생각했다.


라이자키아가 없는 200년 동안, 이 거대한 용마성은 단 한 번도 추락하지 않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뿐인가? 외부의 공격을 깔끔하게 차단하는 결계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헤츨링인 라이미르아가 존재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때문에 라이미르아는 결코 용마성을 벗어날 수 없다.


라이미르아는 아직 충분히 여물지 못했지만, 그녀의 이마에 박힌 저 홍옥은 라이자키아의 드래곤하트다. 저 자그마한 보석과 용마성의 중심핵이 공명하여,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법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꿀꺽…….


라이미르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유진을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지금 유진은 머릿속의 생각에 집중하느라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라이미르아는 그 표정이 굉장히 두려웠다. 홍옥을 몇 번이나 얻어맞지 않았는가! 너무너무 아프고 깜짝 놀랄 일이라, 라이미르아는 자신이 대체 몇 대를 맞았는지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후, 라이미르아를 이렇게 대한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마음이 아닌 육체의 고통은 바로 오늘 겪은 것이 처음이었단 말이다.


‘인간이 맞기는 한 것인가?’


찌푸린 눈. 분노와 짜증의 감정이 읽혔다. 라이미르아는 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드러난 감정을 보는 것뿐인데도 오싹한 두려움이 몸을 떨게 만들었다…….


“너. 왜 이곳에 있는 거냐?”


불쑥 유진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날아온 질문에 라이미르아는 화들짝 놀라서 발가락을 구부렸다.


“무, 무어라고?”


“왜 이곳에 있느냐고.”


용언마법으로 보았던 라이미르아의 기억은 뚜렷하지는 않다. 유진이 굳이 세세히 보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고, 용언마법 자체가 상대의 기억을 읽는 마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이미르아가 용마성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어렴풋이 보았다.


흑룡공 라이자키아의 딸. 블랙드래곤의 헤츨링. 용공녀. 세간에는 그녀의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다. 같은 삼공인 누아르 제벨라 정도만이 라이미르아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마성의 가신들은 라이미르아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았다. 라이자키아가 용마성에 없는 동안, 라이미르아는 성내의 가장 깊은 별궁에 갇혀 지냈다. 별궁에 딸린 정원까지가 라이미르아에게 허락된 세상이었다. 용언마법을 통해 덩달아 느껴 버린, 고독과 설움 따위의 감정.


하지만 유진은 심드렁한 눈으로 라이미르아를 노려보았다. 라이미르아는 그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을 꼬물거렸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본녀는 용마성의 적법한 주인…… 이 성이 본녀의 것이니, 본녀는 어디에든 갈 수 있느니라. 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이 뭐 어쨌다느아아아 하, 하하, 하지 말거라!”


라이미르아는 다시 한번 자존심과 드래곤다운 존엄을 세우려 했지만, 유진이 손가락을 굽혀 이마에 가까이 가져가니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몸을 뒤로 바짝 당겼다.


“개소릴랑 하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 용공녀 라이미르아. 나는 네가 용마성의 별궁에 갇혀 지냈다는 것을 안다.”


“무…… 무엇이라? 네가 어찌 그 사실을 아느…… 으…… 아하핫! 거짓부렁으로 본녀를 우롱하려는 구나. 본녀의 존재는 용마성의 가신, 그중에서도 흑룡공이 총애하고 충성을 맹세 받은 사신장(四神將) 외에는 아무도 모르니라!”


“내가 알잖아 빌어먹을 것아. 뒈지기 싫으면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홍옥을 때리는 대신에 진심으로 살기를 내비쳐 주었다. 그러자 라이미르아가 히끅히끅 딸꾹질을 터트렸다.


“보, 보보, 히끅, 본녀는 용마성의 미래를 위해 별궁 바바, 밖으로 나온 것이다. 사사, 사신장들도 본녀가 새로이 용마성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느니라. 그그, 그래서…… 그런 것이다. 본녀는 흑룡공의 뒤를 이어, 용마성의 주인이 되어서…… 그…… 그게…….”


“어떻게 나왔냐고.”


“……사신장이 별궁의 문을 열어주었다. 보, 보본녀는 여태까지 나갈 수 없었는데…… 사신장이…… 이제는 나서셔야 할 때가 되었다며…….”


유진은 내막을 짐작하고서 코웃음을 쳤다.


그 사신장이라는 놈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다만, 라이미르아가 말한 것처럼 라이자키아에게 충성하는 마족들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아니, 한때는 충성했겠지만. 2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절해 버렸으리라.


‘당장 드워프의 세공품을 빼돌리는 것도 놈들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말단인 감식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면 나중에 둘러대기도 편할 테니.’


그리고. 지금 같은 시기에 200년 동안 가둬둔 라이미르아를 내보낸 것도 의중이 불쾌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조만간 옆 영지의 카라드 백작이 전쟁을 선포할 거다. 사신장이라는 놈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라이미르아의 존재를 내세워 흑룡공이 부재중인 것을 피력하고, 라이미르아가 패배를 인정하게 하여 최대한 전쟁을 무마하고 싶은 것이리라.


‘만약 카라드 백작이 영주의 목을 원한다면, 영주대리로 추대한 라이미르아의 목을 바치면 되니까.’


왜 라이미르아가 이곳에 왔는지도 짐작이 간다.


-본녀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암, 그렇겠지! 허나 오늘부로 용마성의 모두가 본녀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니라! 본녀야말로 용마성의 적법한 주인이자, 흑룡공의 유일한 혈육일지니!


라이미르아가 처음부터 외쳐대던 말이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숨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사신장은 라이미르아가 자신의 존재를 한껏 과시하기를 바라고 있다.


“치…… 침입자 인간이여. 언제까지 본녀를 잡고 있을 셈이느냐? 지금이라도 보…… 본녀를 놓아주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면, 자비로운 본녀는 널 용서할 것이니라…….”


부패한 감식관을 처벌해야 한다는 떠밀림이 있었을 것이고, 저 멍청한 꼬마는 자신이 용마성의 새로운 주인임을 과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 그래.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본녀가 보건대, 침입자여, 네 실력은 아주 훌륭하니라. 무용(武勇)이 사신장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느니라. 그러니 본녀가 널 친히 거두어, 본녀의 곁을 지키는 호위기사로 삼아줄 수도 있느니라. 지금 당장에라도 기사서임을 해줄 수 있…….”


“불쌍한 것.”


유진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내뱉은 말이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섞여 있기는 했다.


“부, 부, 불쌍? 침입자여! 인간인 네가, 드래곤인 본녀에게! 불쌍하다는 말을 한 것이냐? 본녀는 그 모욕을 결코 감내할 수 없느니라!”


라이미르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우렁찬 외침과는 별개로, 라이미르아는 여전히 유진의 제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침입자여! 본녀는 불쌍하지 않다! 당장 그 말을 취소…….”


“불쌍하긴 뭐가 안 불쌍하니?”


“불쌍하지 않다니까!”


“너는 앞으로 며칠 뒤에 죽을 거야.”


유진은 끌끌 혀를 차며 말해주었다.


라이미르아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용공녀


저 인간,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라이미르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오늘은 그녀에게 있어서 특별하고 기쁘고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그녀를 수백 년간 가두었던 별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가끔 찾아오기만 할 뿐, 대문 바깥에서 라이미르아를 감시하던 사신장들이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앞으로는 별궁 안에서 외로이 지내지 않아도 된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긴 수면기를 갖지 않아도 된다.


흑룡공이 대체 어디에 갔는지는 모른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만, 흑룡공이 돌아올 때까지 용마성의 왕좌는 바로 라이미르아의 것이었다. 사신장도 그렇게 말했다. 성주님이 긴 시간 자리를 비우고 계시니, 혈육인 공녀님께서 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뭔가. 사신장에게 용마성의 자그마한 비리에 대한 고발을 들었다. 말단 감식관 따위가 성주에게 진상되어야 할 보물을 빼돌리고 있다니!


좋다. 성주대리가 된 기념이자, 용마성의 모든 가신과 백성들에게 ‘라이미르아’라는 이름을 떨치기 위해. 라이미르아는 제 손으로 직접 비리를 뜯어고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 침입자와 맞닥트렸다. 옴짝달싹할 수 없이 제압당하고, 바닥에 처박혀서 홍옥을 얻어맞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데, 대뜸 불쌍하단다.


며칠 뒤에 죽을 거란다.


“……본녀가 제대로 듣지 못했느니라. 방금 무어라고 한 것이냐?”


“너 며칠 뒤에 죽을 거라고.”


“마…… 말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뜬금없이 왜, 본녀가 죽는다는 것이냐?”


“아마 머리가 싹둑 잘려서 용마성의 성문에 걸릴걸. 아니면 가랑이부터 꿰뚫린 꼬치구이 신세가 되어 성문 앞에 꽂히든가. 사지가 뽑힐 수도 있고…….”


“무무무무, 무슨 말을…….”


“이건 개 같은 다크엘프의 처형법이긴 한데, 무릎을 꿇려놓고 산 채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는 방식도 있긴 해.”


“네 이놈! 두, 두려운 이야기로 본녀를 동요시키려는 심산이렷다! 보, 본녀는 네 허튼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아아, 아무렇지 않느니라!”


“내가 언급한 처형법의 공통점이 뭔지 아냐?”


유진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라이미르아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처형이라고는 별궁에서 예전에 보았던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마저도 독약을 먹거나 칼에 찔리는 죽음이 고작이었다.


“상징으로 쓰기 위한 처형이라는 거다.”


“사…… 상징?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곧 용마성에서 전쟁이 벌어질 거다. 엄청 빠르면 고작 몇 시간 뒤에 공습을 받게 될 수도 있고. 늦어봤자 사나흘 내로 적이 쳐들어오겠지.”


처음 듣는 이야기다. 라이미르아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유진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유진은 혀를 쯧쯧 차면서 현재 용마성을 겨냥하고 있는 전운(戰雲)에 대해 알려주었다.


라이미르아가 그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가 지내던 별궁에는 기나긴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다양한 오락거리가 존재했다. 동화책, 소설책, 역사책 따위의 서적은 물론이고 그림뿐인 만화책도 있었다. 헬무드 전역에 검은 탑이 세워지고 TV 문화가 발전한 후부터는 드라마나 영화 등의 영상매체도 탐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라이미르아가 접할 수 있는 매체에 뉴스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때문에 라이미르아에게 있어서 용마성 바깥의 정세 따위는 완전한 미지로 남아 있었다.


“전…… 쟁? 아하하하! 너는 과연 하등하고 멍청한 인간 침입자로구나! 이곳은 흑룡공이 다스리는 용마성이니라! 본녀는 루올 영지의 카라드 백작이란 자는 모르지만, 고작 백작이 어찌 흑룡공의 공작령을 침공할 수 있겠느냐?”


“그럼 작위도 없는 나는 뭐 하는 새끼라서 이곳에 침입했겠니?”


“그건…… 그건 네가 무례하고……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이니라.”


라이미르아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한껏 비웃음을 흘리기는 했지만, 그녀가 정말로 생각 없이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언가 짚이는 것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용마성의 성내는 무척이나 부산스러웠다. 별궁의 문을 연 사신장들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뿐인가? 화려하고 시끌벅적할 것이라 기대했던 거리는 침울하고 우중충한데다 왠지는 몰라도 이삿짐을 꾸린 자들이 많았다…….


“……만약 네 말이…… 그…… 사실일지라도 말이다. 왜 본녀가 죽는다는 것이냐?”


“그야, 용마성의 가신들은 전쟁을 할 마음이 없으니까. 네 말마따나 라이자키아가 건재했다면 감히 전쟁이 벌어지지도 않았겠지만, 라이자키아는 지금 없잖아.”


“대신! 대신에 본녀가 있다. 본녀는 흑룡공의 유일한 혈육이니라!”


“그러니까 네 목을 바쳐서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은 거다. 너, 설마 용마성을 침공해 올 카라드 백작이 네 낯짝을 보고 물러서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라이미르아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짐작 가는 일도 있었던 탓에 라이미르아는 어느덧 유진의 말에 완전히 설득되어 버렸다. 그녀는 불안함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입술을 열었다.


“……꼭…… 꼭 본녀를 죽일 것이란 보장은 없지 않느냐?”


“그치, 보장은 없지. 안 죽일 보장도 없고.”


“왜…… 왜 그런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느냐……. 애, 애당초 네놈은 대체 뭐 하는 자이냐? 대체 왜 용마성에 침입해서, 본녀를 괴롭히고 무섭게 하는 것이느냐?”


“널 죽이러 왔는데.”


툭 던진 대답에 라이미르아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확인해 보니 꼭 죽일 필요는 없다 싶어서.”


라이미르아를 죽여도 되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 마빡의 홍옥은 라이미르아를 죽여도 형태가 유지될까? 그녀의 드래곤하트와 피로 라이자키아와 연결 된 차원문을 열 수 있을까? 그것들은 해보지 않아 알 수 없는 일인데, 괜히 확실치도 않은 짓을 벌였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래서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외에도 자잘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모론이나 메르처럼 한 곳에 처박혀 있는 라이미르아가 솔직히 좀 불쌍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라이미르아가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라이자키아의 친혈육이지만 타락하지 않은 그냥 드래곤이다. 더 많은 알을 낳게 하기 위해, 그리고 또 언젠가 잡아먹기 위해 낳은 딸.


아니스와 이전의 성녀들과 같은.


‘내가 X같아 했던 점들은 다 가지고 있군.’


다시금 의식해버리니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정작 라이미르아는 유진의 동정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겁에 질려 이빨만 따닥따닥 부딪쳤다.


“마……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이구나. 참으로 훌륭하도다. 보보, 본녀는 흑룡공의 혈육이자 드래곤이니, 쉬이 죽여서는 안 될 존재이니라.”


“네 그 병신같은 말투는 어디서 배워 처먹은 것이니?”


“책과 TV를 보고 배웠느니라.”


이야기를 나눌수록 죽일 마음이 가시고 있다…….


“……침입자여. 너는 본녀를 죽이지 않겠다 마음을 바꾸었다 하였는데, 그럼 이만 본녀를 놓아주어도 되지 않느냐……?”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 놔주겠다고는 안 했다.”


“참으로 어렵구나. 그럼 대체 본녀를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널 용마성 밖으로 데리고 나갈 건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 중이다.”


그 대답에 라이미르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본녀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였느냐?”


“어.”


“본녀를 납치하여, 용마성에 몸값을 요구할 셈이더냐?”


라이미르아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 질문이 아주 예리한 한 수라고 생각했지만, 유진에게는 답할 가치도 없는 등신 같은 질문일 뿐이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냐?”


그래서 유진은 두 눈을 얇게 뜨고 라이미르아를 응시했다.


“내가 한 말은 모두가 진실이다. 무턱대고 거짓이라 더 우겨대지 않는 것을 보면, 너도 전쟁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거겠지.”


“무…… 물론이다. 본녀는 드래곤이니라. 드래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종족이니라.”


“그래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냐고.”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죽고 싶냐는 질문이었다면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라이미르아는 죽고 싶지 않다. 200년 만에 별궁에서 나왔는데, 죽고 싶을 리가 없지 않은가.


“도망치지 않으면 죽을 거다.”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속마음을 읽을 재주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답이 너무 늦어 건넨 재촉이었을 뿐이다. 그 말이 라이미르아가 입을 열게 만들었다.


“보, 본녀는 죽고 싶지 않느니라. 하지만 본녀는 흑룡공의 혈육…… 용마성의 주인이 되어야 할 자. 어찌 성주가 성을 버리고 떠날 수 있단 말…….”


“네게 여기 새끼들을 살릴 의리가 있냐?”


유진은 눈썹을 구기면서 물었다. 라이미르아는 말문이 막혀 입술을 뻐끔거렸다.


의리? 200년을 알고 지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세월만큼의 정이 쌓이지는 않았다.


용마성에서 라이미르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사신장뿐. 그들은 라이자키아가 없는 동안 라이미르아를 별궁에 가둬놓았다.


라이자키아와 직접 계약을 맺은 그들은 라이미르아의 홍옥으로도 명령을 강제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라이미르아에게 친애를 건넨 적이 없었다.


살릴 의리? 없다. 라이미르아는 자신을 섬기지 않은 사신장이 죽건 말건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라이미르아는 자신의 권속도 아닌 데다 자신에게 깊은 호의를 보이지도 않던 사신장이 죽건 말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용마성을…….”


지금 라이미르아를 주박하고 있는 것은 용마성과, 그녀의 아버지인 라이자키아의 존재 자체다. 그녀의 이마에 박아넣은 홍옥이야말로 라이자키아가 품은 광기와 망집의 증거다.


그건, 라이미르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인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의 기억을 모조리 가지고 있다.


알을 깨고 나왔을 때. 아버지가. 흑룡공 라이자키아가 대체 어떤 눈을 하고 있었는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네 존재는 날 위한 것이다. 그녀는 라이자키아가 ‘왜’ 자신을 낳고, 키우며, 어떤 미래를 그렸는지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가 아버지인 흑룡공을 위한 것임은 안다.


그래서 라이미르아는 용마성을 벗어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당장 성주에 오를지라도 그것이 임시적인 자리라는 것도 납득하고 있다.


라이자키아가 없는 잠깐 동안 용마성에 군림할 수는 있겠지만, 언젠가 흑룡공이 돌아온다면. 라이미르아는 일말의 미련과 반항 없이, 앉은 자리와 모든 권세를 흑룡공에게 양보할 것이다.


결국 라이미르아가 거절하는 것은, ‘도망친다’는 것이 아니라 라이자키아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룡공에게 있어 정녕 중요한 것은, 용마성의 건재가 아니라 본녀의 존재 자체가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백 년 건재한 용마성이라지만 흑룡공의 힘이라면 이런 성 따위 수십 채는 만들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용마성에 살아가는 마족의 모든 목숨을 합하여도, 드래곤 하나의 목숨보다는 값어치가 떨어질 것이다.


라이미르아는 죽고 싶지 않다.


‘본녀는 이렇게 빨리, 이런 식으로 죽어서는 안 될 몸이다. 본녀의 존재는 흑룡공을 위한 것. 흑룡공의 허락 없이는 죽을 수 없는 몸인 것이니라.’


라이미르아는 주먹을 꾹 쥐어서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


“으흠…… 침입자여. 네 뜻은 잘 알겠느니라. 네가 정 이 용공녀를 데리고 나가고 싶어 하니, 네게 특별히 본녀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느니라.”


[그냥 죽여 버리는 것이 어때요? 유진 님.]


망토 안에서 메르가 유진의 옆구리를 꼬집어대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본녀는 이 용마성과 묶여 있는 몸. 용마성의 중심핵이 건재한 이상, 본녀는 용마성을 탈출할 수 없느니라.”


“그럼 그 중심핵을 부숴 버리면 되겠군.”


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감한 대답에 라이미르아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중심핵을 부숴 버리면 용마성이 추락해 버릴 거다……!”


“당연히 추락하겠지.”


라이미르아가 중심핵에 묶인 이상, 그녀를 데리고 몰래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아예 무식하게 저질러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은가? 어차피 며칠 내로 카라드 백작이 용마성을 침공해 올 것이다. 애비를 물어 죽인 야곤을 앞장세워서 말이다.


어떤 식으로 침공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에 용마성의 혼란은 극에 달할 것이다. 어차피 전장이 될 텐데, 그 순간에 중심핵이 파괴되어 용마성이 추락한들 누가 크게 신경이나 쓰겠는가?


[아니, 유진 님. 당연히 신경 쓰겠죠. 이 거대한 성이 추락하는 데 누가 신경을 안 써요?]


‘전쟁에선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게 마련이야.’


[솔직히 말해보세요. 그냥 용마성이 마음에 안 드니까 부수고 싶은 거잖아요.]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거대한 성을 처박아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라이미르아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유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꿈이 아닐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홍옥을 얻어맞을 때의 고통이 너무나도 섬뜩했고, 아직도 그 근처가 얼얼한 것을 보니 꿈은 아닌 듯싶었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라이미르아는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용마성을. 흑룡공의 용마성을 추락시킨다? 주박과도 같은 용마성을, 그 중심핵을 박살 내버린다?


그것은 라이미르아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악랄한 짓이었다. 설렘에 목이 타 라이미르아는 꿀꺽 침을 삼켰다.


“으…… 흠. 그럴 수밖에 없다면, 할 수밖에 없겠구나. 지금 당장 중심핵을 부수러 가는 것이느냐?”


“어디 있는지는 알고?”


“성궁의 지하에 있느니라. 네가…… 네가 당장 부수러 가겠다고 한다면, 본녀가 친히 안내를 해줄 수 있느니라. 본궁은 너같은 천민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기 때문에, 본녀의 안내가 없다면 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니아아악!”


뭣도 없으면서 으스대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홍옥을 손가락으로 때렸다. 라이미르아는 허리를 휘어대며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 쳤다.


“당장은 안 부숴.”


지금이라도 할 수는 있겠지만, 너무 눈에 띈다. 돌아온 대답에 라이미르아는 지르던 비명을 멈추고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대체 언제까지 본녀를 데리고 있을 셈이냐? 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신장이 추격대를 풀 것이니라.”


“뭐 그렇겠지.”


사신장의 입장에서도 라이미르아는 전쟁까지 확보하고 있어야 할 존재. 하지만 이미 접촉까지 해버렸는데 라이미르아를 그냥 용마성에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


“나랑 약속 몇 개 하면 돌려보내 주마.”


“무어라?”


“약속하지 않는다면 네 마빡을 계속 때릴 거다.”


드래곤은 용언의 약속을 어길 수 없다.


마빡을 계속 때린다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라이미르아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끔찍한 협박이었다.


용공녀


침입자와 용마성 탈출에 관한 계획을 다른 누구에게 말하지 않을 것. 그 외에 여러 가지 약속을 용언으로 내뱉고 나서야, 라이미르아는 용마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활짝 열린 성문에는 사신장 전원이 나와 있었다. 300년 전부터 흑룡공의 권속이었던 그들은, 용마성의 여러 가신들 중에서도 성골 중의 성골이다.


흑룡공이 성에서 사라진 지 어언 200년. 사신장 4명은 성주대리를 맡으며 지금까지 용마성을 이끌어왔다.


“이게 무슨 일인 게냐?”


복잡한 생각을 안고 돌아온 라이미르아는, 활짝 열린 성문 안쪽부터 줄을 선 가신들을 쳐다보았다. 이 넓은 성에서 살아가는 모든 가신들이 성까지 이어지는 길에 줄을 선 것이다. 하지만 저 많은 가신들 중에서 라이미르아가 아는 자들은 4명의 사신장이 고작이었다.


“용공녀님께서 드디어 새로이 성주로 군림하게 되셨으니, 성의 모든 가신들에게 그 존귀한 옥체와 존재를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손이 몸을 낮추며 말을 올린 것은 거구의 마족이다. 사신장 중에서도 무력으로 으뜸이던 성의 대장군이나, 200년의 평화는 그의 복부에 출렁거리는 뱃살을 축적시켰다.


“가신들뿐만이 아닙니다. 도시에 사는 모두가 용공녀님이 새로이 성주가 되었음을 알게 될 겁니다.”


“오늘을 위한 준비는 모두 해놓았습니다. 화려한 가마를 준비하였으니, 용마성의 모두가 용공녀님의 자태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몇 시간 뒤의 라이미르아였다면 사신장의 말에 큰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조금 기쁘긴 했다. 용언의 약속을 맺고 돌아오기는 했다만, 그녀는 아직까지 침입자가 내뱉었던 말을 무조건 신뢰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용마성에 전운이 다가오고 있다 들었노라. 본녀가 새로이 성주가 되는 것은 역시 전란을 대비하기 위함인가?”


그래서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과감한 행동은 아니었다. 성 밖 도시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던 데다, 사신장이 정말로 라이미르아에게 전쟁에 대해 숨기고 싶었다면 그녀를 굳이 성 밖에 내보내지도 않았을 테니.


“도시를 직접 감찰하고 오신 겁니까! 과연 용공녀님이십니다.”


“왜 본녀에게 전쟁에 대해 이르지 않은 것이냐? 본녀는…… 본녀는 이 상황을 잘 알 수 없느니라.”


“용공녀님. 이 성의 주인은 300년 전부터 흑룡공이었고, 저희와 성의 모두가 흑룡공의 가신입니다. 하지만 흑룡공이 돌연 종적을 감추고서 무려 200년이 흘렀습니다…….”


“그 200년 동안, 저희 사신장은 흑룡공을 기다리며 용마성을 이끌어왔습니다. 하지만 적법한 자격을 갖지 못한 저희가 할 수 있던 것은 용마성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지요.”


“용공녀님의 아버지신 흑룡공은 위대하고 강한 마족이셨습니다. 지금까지의 200년은 흑룡공의 위명만으로 용마성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만…….”


“200년은 마족에게도 짧지 않은 시간이라, 다른 영지의 마족들이 흑룡공의 부재를 눈치채 버린 것입니다.”


사신장은 라이미르아를 에워싸고서 쉼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들은 라이미르아가 생각하고,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용공녀님이 보신대로, 지금 용마성에는 전운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자는 용마성과 인접한 루올 영지의 카라드 백작입니다. 그는 선인(先人)에 대한 존중과 예우를 할 줄 모르는 무례한 자로, 흑룡공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옹알이나 겨우 하던 어린놈입니다.”


“카라드 백작은 흑룡공께서 성에 없다는 것을 알고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지만 용공녀님이 새로이 성주에 오른다면, 카라드 백작은 굳이 전쟁을 벌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공녀님께서는 흑룡공의 유일한 혈육. 이 헬무드 제국에서도 둘밖에 존재하지 않은 드래곤이시자, 흑룡공이 시작한 마룡(魔龍)의 계보를 잇는 분이십니다. 전쟁광인 카라드 백작이라도, 용공녀님이 새로이 성주가 되신다면 감히 전쟁을 벌이지 못할 겁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말들이 잠시 멈췄다. 그제야 라이미르아는 꼴깍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다.


“다시 용마성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판데모니엄에 계신 유폐의 마왕님께서 직접 용공녀님께 작위를 내려주실 겁니다.”


“어쩌면 흑룡공의 뒤를 이어 공작위를 받으실 수도 있겠군요.”


이리저리 기울고 흔들리던 라이미르아의 마음이 간신히 멈췄다. 잘 들어보니 사신장의 말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사실 사신장의 말이 옳은 것 아닌가? 라이미르아는 전쟁에 대해 잘 모르기는 했지만, 전쟁이 그리 쉽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흐흥. 과연, 그대들의 말이 옳구나. 본녀는 카라드 백작이란 자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흑룡공의 혈육인 본녀의 존재를 알면 감히 전쟁을 벌이지 못하리라.”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자아, 용공녀님. 어서 궁으로 드시지요. 오늘 밤은 용공녀님을 위한 화려한 연회와 행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라이미르아는 가슴을 활짝 펴고서 용마성으로 들어갔다. 그 무서운 침입자. 어차피 용언의 약속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너는 만약을 위한 보험으로 남겨두도록 하마.’


무례하고 난폭한 침입자였지만, 지금 당장 주살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전쟁이 확실히 벌어지지 않을 때에 놈을 찾아 죄를 물으면 된다. 만에 하나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그 이름도 듣지 못한 침입자의 도움으로 용마성을 탈출하면 되는 것이다.


“본녀는 역시 영리하구나.”


라이미르아는 자신의 악마적인 처세술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의 헤츨링이 임시로나마 용마성의 성주에 올랐다. 그 소식은 새벽부터 용마석 바깥까지 퍼져 나갔다.


용마성의 상황을 살피던 카라드 백작도 당연히 그 소문을 들었다. 그는 먼 하늘을 떠다니는 용마성을 얇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카라드 백작은 마족 중에서도 거인족과 데몬 사이의 혼혈인 자이언트 데몬이다. 본신으로 활동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아 지금은 2미터 정도의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그 전설적인 거인족 두령 카마쉬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카라드 백작의 진신도 5미터는 훌쩍 넘는다.


그의 곁에 선 사내는.


거인족도, 자이언트 데몬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내는 카라드 백작보다 덩치가 컸는데, 전신을 뒤덮은 회갈색의 털은, 털이라기보다는 삐죽삐죽한 철침처럼 여겨질 만큼 굵고 날카로웠다.


전신이 털에 뒤덮여 있는데도 근육의 윤곽이 선명하다. 양팔과 다리는 오랜 시간 살아온 고목처럼 굵고 울퉁불퉁하고, 특히 양손은 자이언트 데몬인 카라드 백작의 머리를 한 손에 잡아 뭉갤 수 있을 만큼 컸다.


남자에게는 오래되어 고여 버린 피 냄새가 맴돌았다. 매일같이 다른 누군가를 죽이고, 잡아먹는 것이 일상임을 주장하는 악취. 실제로 남자는 포식자였고, 불과 몇 시간 전에 4마리의 마물과 2명의 마족을 잡아먹었다.


라비스타의 마수. 야곤.


카라드 백작은 솔직히 그가 껄끄럽고 두려웠다.


용마성과의 전쟁에 많은 것을 걸었다. 영지의 명운, 그리고 자신의 목숨. 그래서 억만금을 들여 야곤과 그 휘하 맹수 수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야곤에게 매일 영지의 마족들을 식사 거리로 바치면서 이곳까지 데리고 왔다.


돈으로 고용했지만, 이 관계에서 카라드 백작은 고용주다운 갑의 위치에 설 수가 없었다.


야곤에게 작위는 없다. 하지만 야곤은 그 끔찍한 멸망의 마왕의 권속이며, 아비를 잡아먹은 패륜아다. 지금 이렇게 함께 서 있기는 하지만, 야곤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먹는다면 저 거대한 손이 카라드 백작을 해체해 버릴 것이다.


‘……위험하지만…… 그만큼 날카롭지.’


카라드 백작은 야곤의 눈치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 전쟁에 있어서, 용마성 측의 변수라 할 것은 바로 흑룡공. 카라드 백작은 흑룡공이 오래전부터 성을 비웠으리라 추측해 왔다. 오늘로서 흑룡공의 부재를 확신하게 됐다.


대체 흑룡공의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지금 용마성에 군림하는 것은 흑룡공 라이자키아가 아닌, 200년 남짓 살아온 헤츨링이다.


“……다름이 아니라, 야곤, 용마성에서 편지가 도착했네.”


야곤은 아까부터 이곳에 서서, 용마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카라드 백작이 바로 옆까지 다가왔는데도 야곤은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카라드 백작은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용마성에는 사신장이라는 늙은 마족 4명이 있네. 300년 전에는 꽤 이름을 떨쳤던 마족들이지만, 흑룡공에게 사육당하고 평화와 안락함에 찌들어, 돼지처럼 변해 버린 늙은이들이지. 그들이 전하기를, 이 전쟁에서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더군.”


“…….”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것일세. 그 증거로서 성주대리에 오른 흑룡공의 딸…… 라이미르아를 바치겠다는 군. 그렇게까지 굴복한다면, 나는 괜찮은 제안이라 생각하네. 꼭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나는 전쟁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야곤이 입을 열었다. 삐걱거리며 돌아간 머리가 카라드 백작을 쳐다보았다.


인간과 곰을 뒤섞은 것만 같은 얼굴. 감정이랄 것이 전혀 읽히지 않는 시커먼 눈동자가 카라드 백작을 응시했다.


“네가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전쟁을 할 수밖에.”


“잠깐, 잠깐! 진정하게, 야곤. 나와 전쟁이라니…….”


“저 떠다니는 성에서 살아가는 머릿수만큼, 네 영지민을 죽이겠다.”


미친놈……!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을 생각하면서 카라드 백작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진정하게, 야곤. 나는…… 괜찮은 제안이라고만 말했을 뿐, 그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네. 이 전쟁은, 내게 편지를 보낸 용마성의 늙은 돼지들을 쓸어버리기 위함이기도 하니까.”


단순히 야곤을 달래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카라드 백작에게는 나름의 야망과 신념이 있다. 지금의 헬무드에서 그는 젊은 나이에 속하는 마족이며, 300년 전의 전쟁에는 참여하지도 못했다.


그 전쟁. 어마어마한 규모의, 끔찍한 전쟁이었다고는 들었다. 작금의 헬무드에서 고위계층에 속하는 마족들은 거의 모두가 전쟁에서 활약했던 마족들이며, 300년 동안 자리를 지켜 온 삼공도 전쟁시대의 영웅들이다.


ㅡ전쟁시대를 겪고, 살아남은 모든 마족이 적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헬무드의 고위층에는 수백 년의 평화에 썩어버린 마족들도 많다. 자격도 권위도 없으면서 존중과 대우만을 강요하는 OB들.


용마성이야말로 저러한 적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저 과시 가득한 모습을 보라. 저 부유성에 사는 영지민들은 노블레스라 불리는 특권층이다. 특권층이 되지 못한 영지민들은 지상 영지인 카라블룸에서 특권층을 위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한 구조에서 용마성의 꼭대기는 완전히 썩어버렸다. 흑룡공이 사라진지 아마 100년은 훌쩍 넘을 텐데, 성주의 부재중에 영지를 관리해야 할 사신장은 대체 무엇을 했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가 되었다. 용마성과의 전쟁은 카라드 백작의 야망을 위한 커다란 도약판이 될 것이다.


흑룡공이 없으니 작위를 빼앗을 수는 없겠지만, 이 전쟁을 통해 용마성을 추락시킨다면. 헬무드의 모든 관심이 카라드 백작에게 집중될 것이다.


‘더 높은 서열과 작위를 받을 수 있겠지.’


야망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아직 헬무드의 ‘중앙’과는 먼 변경에 있지만, 용마성과의 전쟁을 통해 중앙 진출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수도 판데모니엄. 그곳에 우뚝 서서 언젠가는 삼공과도…….


“처음의 말과는 다르군.”


야곤이 중얼거렸다. 그 낮은 목소리에 카라드 백작의 생각이 뚝 멎었다.


“백작. 너는 내게 드래곤과의 전쟁을 약속했다.”


“……용공녀 라이미르아. 그녀도 드래곤인 것은 맞…….”


“내가 원한 드래곤은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 전쟁시대의 마룡이다.”


“드래곤이라도…… 부성애는 있을 걸세. 그렇지 않은가? 그 흑룡공이 자식을 두었음을 누가 상상했겠는가? 심지어 그 하나뿐인 혈육을 외적의 눈길이 닿지 않는 성안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지.”


카라드 백작은 야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용공녀를 죽이고, 그를 전 세상에 알린다면…… 모습을 감추고 있는 흑룡공이 뛰쳐나올 걸세. 그리고 여물지 않은 헤츨링이라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지 않은가. 자네의 놀이 상대로는 부족하겠지만, 자네의 혀에 진귀한 맛을 체험시켜 줄 걸세.”


“내일.”


야곤이 입을 열었다.


“내일 용마성을 친다.”


카라드 백작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물리적인 거리가 그리 먼 것도 아니니, 하고자 한다면 내일 당장 용마성을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순서랄 것이 있지 않은가. 사신장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과 조롱도 해야 하고, 판데모니엄의 바벨에 영지전에 대해 보고도 해야 한다. 그 외에도 전쟁 전에 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습이 빠르고 좋다.”


하지만 야곤은 카라드 백작의 의견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마경에서도 진짜 마경이라 불리는 멸망의 영지, 라비스타. 그곳에는 유폐의 마왕이 다스리는 헬무드의 법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열잡이나 영지전 같은 어설픈 명분을 따를 필요도 없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먹고 싶으면 먹는다.


“선전포고를 하고 시간을 줘버리면 용마성의 먹잇감들이 도망쳐 버린다. 백작. 너는 전쟁을 하겠다며 나와 수하들을 고용했다. 승리의 명예는 네가 갖겠지만, 전쟁은 내가 갖는다.”


야곤이 고개를 기울였다. 고인 피비린내가 훅하고 다가왔다.


“내일. 나와 용병단은 용마성을 친다. 저 높은 하늘까지 도약해서 결계를 박살 낼 거다. 도망칠 시간을 주지 않고 성의 모든 놈을 죽이고 잡아먹겠다.”


“그건…….”


“용공녀의 피와 살과 심장은 계약대로 내가 먹는다. 모두를 죽인 뒤에 성을 무너트리고, 백작, 네 가문의 깃발을 걸겠다. 그것으로 너와 나의 계약은 끝이 난다.”


설득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이렇게 가까이서 야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카라드 백작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알았네. 다만, 정 침공을 하겠다면 나도 함께 가겠네. 이 전쟁은 내가 시작한 것이고, 내게 있어서 역사적인 순간이 될 걸세. 그러니 나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해.”


“내 앞을 막지 않는다면.”


야곤이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용마성을 쳐다보았다.


저 거대한 부유성이 야곤에게는 뚜껑이 닫힌 접시처럼 보였다.


야곤


라이미르아를 돌려보낸 후, 유진은 용마성의 그늘에 숨어들었다. 숙박시설 따위를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몸을 감추고 노숙이나 하면서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동시에 정찰의 목적도 있었다. 용마성에 대해서는 이미 할 수 있는 조사를 끝내 두었다. 이곳은 300년 전부터, 지상 영지 카라블룸에서 선별 된 특권층이 머무르고 있다.


유진의 인식에서 선별될 정도의 특권층이라면, 마족으로서의 격이 높은 놈들이어야 했다. 게다가 라이자키아, 그 도마뱀은 누구보다도 오만하고 특권의식에 찌들어 있었으니, 놈이 선별해 성에 오르게 한 노블레스라면 그래야 마땅했다.


‘허.’


실제로 보니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감식관이라던 부드와 마찬가지다. 너무 평화롭고, 적이 없고, 막강한 통제수단이자 공포여야 할 라이자키아의 부재. 그것이 수백 년 동안 이어지면서 용마성의 마족들은 부패하고 살이 쪘다.


이곳의 마족들의 삶에 불편함이나 투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노동은 지상영지 카라블룸의 마족들이 대신해 주고 있다. 그들은 라이자키아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여 감히 반기도 들지 못한다.


특히나 부패할 수밖에 없던 큰 요인은, 이곳이 공작령이기 때문이다. 라이자키아는 영지민에 인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용마성은 인간의 정기를 세금으로 거둬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라이자키아가 삼공의 하나. 판데모니엄의 바벨은 넘칠 정도로 많은 정기를 용마성에 보내주고 있다.


라이자키아는 인간을 싫어했지만, 인간을 잡아먹고 죽이는 것마저 싫어하지는 않았다. 놈은 마족으로서, 마룡으로서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기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제 딴에는 자존심과 미학에 타협하여, 영지에 인간을 두지 않고 헤츨링을 교배시키며 격을 높이는 미래를 그린 것이다.


그 미치광이 블랙드래곤은 사라졌지만, 바벨에서는 계속해서 정기를 보내고 있다. 그 정기가 용마성 마족들을 뒤룩뒤룩 살찌웠다.


‘마력은 강하지만 그것뿐……. 말 그대로 살찐 돼지새끼들이로군.’


부드도 그랬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약한 주제에 재생력 하나만은 꽤 대단해서, 무한연옥 속에서 제법 오랫동안 죽지 않고 버텼다.


그만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재생력으로밖에 써먹지 못했단 말이다.


마력의 강함이 마족의 강함을 나타내는 무조건적인 척도가 아니다. 결국 마력도 얼마나 잘 다뤄내고 응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마성의 마족들은, 라이자키아의 이름만 없었다면 다른 마족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너무 좋은 조건들만 갖춘 돼지들이었다.


“본녀가 바로 흑룡공의 유일한 혈육! 용공녀 라이미르아라고 하니라! 용마성의 미천하고 허접한 마족들이여! 본녀를 경배하고 찬양하거라!”


활짝 열린 성문에서부터 시작된 행진. 라이미르아가 화려한 가마 위에 우뚝 서서 넓은 소매를 떨치고 있다. 거리로 나온 마족들은 라이미르아를 향해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


건물의 옥상에 선 유진은 그 광경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며칠 뒤에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저 병신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라이미르아, 저 정신머리 나간 계집애는 아까는 진지하게 알아먹은 것 같더니, 왜 지금은 저 위에서 개지랄을 하고 있는 건가?


“그냥 죽이고 데려가자고 했잖아요.”


망토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던 메르가 입술을 삐죽대며 투덜거렸다. 메르는 이상하게도 라이미르아가 신경 쓰이고 얄미웠다.


사랑하는 세냐님을 죽이려 한 블랙드래곤의 딸이라? 그 이유도 없지는 않았다. 아비의 죄를 딸에게 묻는 연좌제는 그리 옳다 생각하지 않다만, 마음이라는 것이 꼭 이성적일 수는 없는 법.


……사실 이유가 저것뿐만은 아니었다. 메르는 자신이 존재해 온 시간과 라이미르아의 나이가 비슷하다는 것과, 서로 똑같이 어린아이의 외형이라는 것을 의식했다. 메르가 아크리온에 갇혀 지냈듯이 라이미르아는 용마성의 별궁에 갇혀 지냈다…….


메르가 여태까지 겪은 유진은 성격이 심술궂고 양아치 같고 입도 걸어 욕을 많이 하지만, 사실 인성 자체가 아주 못돼먹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굳이 라이미르아를 죽이지 않고 데려가려는 것이다.


‘적’.


함께 다니게 될 때. 메르는 라이미르아가 자신의 라이벌이자 적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메르 너, 내가 자꾸 나쁜 말 하지 말랬지?”


“유진 님은 남보고 새끼니 시X이니 지랄이니 하면서 왜 저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언제 나쁜 말을 했나요?”


“누군가를 죽이자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나쁜 말이야.”


“유진 님도 그런 말 자주 하잖아욧.”


“나는 원래 나쁜 놈이라서 그런 말을 해도 괜찮아.”


“유진 님이 나쁜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애 상대로 한 마디도 지고 싶어 하지 않으려는 부끄럼 모르고 뻔뻔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어요.”


유진은 저 말에 대한 반박을 일백 개는 넘게 떠올릴 수 있었으나,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뭐라고 반박한들 메르가 말한 대로, 어린애 상대로 한 마디도 지고 싶어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될 테니까.


그래도 이것만큼은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 나보다 나이 많잖아.”


이번에는 반대로 메르가 입을 다물었다. 결국 둘은 사이좋게 침묵하고서, 거리의 요란스러운 행진을 쳐다보았다.


몇 시간이 지나고 새벽이 돼서야 행진은 끝이 났다. 꽃가마 위에서 신나게 난리법석을 부리던 라이미르아가 용마성으로 돌아가자, 활짝 열렸던 성문이 닫혔다.


용공녀 라이미르아를 연호하던 마족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을 휘젓고 감격 어린 외침을 지르던 마족들인데, 성문이 닫히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침묵했다. 그들은 지극히 사무적인 얼굴이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유진은 옥상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마족들 중 대다수가 떠날, 아니,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유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행진 때는 용마성 전체가 라이미르아의 존재 하나로 단결하여 앞으로의 미래를 대비하는 것만 같았는데. 결국 그 모든 것이 라이미르아 한 명에 대한 선동이었던 것이다.


“좀 불쌍하긴 하네요.”


라이미르아를 탐탁잖게 여기던 메르도 급변한 용마성의 거리를 보면서 웅얼거렸다.


유진은 말없이 메르의 머리를 양손으로 헤집고서 몸을 돌렸다.


“저희 잠은 어디서 자나요?”


“뒷골목.”


“사실 저는 어디든 상관이 없어요. 맨땅에서 자는 것은 결국 유진 님이지, 저는 유진 님의 품 안에서 편하게 잘 거니까요.”


“내 품이 아니라 망토 안의 침대겠지.”


“사실 그래요.”


메르는 히히 웃으면서 망토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유진은 인적 없는 골목 깊은 곳에 앉았다. 들킬 염려는 없겠지만, 만약을 위한 방비는 확실히 한 뒤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마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 유진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300년 만의 헬무드는 유진이 기억하던 끔찍한 지옥과는 너무 크게 달라져 있었다……. 특히 이 용마성은 긴장감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돼지우리 그 자체였다.


‘이 정도면 전쟁 중을 노릴 것 없이, 그냥 성안에 침입해서 중심핵을 박살 내도 되지 않나……. 이대로 라이미르아를 납치해도 큰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오죽하면 진심으로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바로 실행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오늘 하루 정도 상황을 살피면서 용마성에 잠입할 틈을 살펴보기로 했다.


‘잠입이 가능할 것 같으면? 일단 한번 시도해 보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잠입하면 뭐…… 일단 중심핵부터 찾아봐야 하나? 지하에 있다고 했는데. 아니면 곧바로 사신장이란 새끼들을 조지고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전날 다 끝내지 못했던 용마성의 탐색을 다시 진행했다.


그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오를 넘어, 해가 점점 움직이고, 해가 저물기는 아직 꽤 시간이 남았을 무렵에.


“…….”


마음이 느슨하지도, 긴장을 푼 것도 아니었다. 이 돼지우리에서는 그 누구도 유진을 위협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풀고 방심하기에는 유진이 전생부터 겪어 온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유진은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강렬하고 거대한 살의를 느꼈다.


그것은 적의가 아닌 무조건적인 살의였다.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난잡한 살의. 날카롭지는 않으나, 너무나 거대하여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릴 살의. 원한이나 다른 이유는 없이, 그냥 죽이고 싶은 갈망에서 비롯된 순수한 살의.


그러한 살의는 유진에게도 낯설었다. 적어도 ‘유진 라이언하트’의 삶에서 이런 무조건적이고 강하며 커다란 살의를 느껴본 적은 없었다.


살의를 알아차린 순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용마성에서 보는 하늘은, 결계의 안쪽에서 보는 것이지만 뿌옇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곳에 결계는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 결계는 용마성을 불가침의 철옹성으로 만들고, 기후와 기온마저 통제하여 용마성을 쾌적하게 만든다.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가 직접 구축한 용언의 결계. 저 결계는 대기 중의 마나와 용마성의 중심핵, 그리고 라이미르아의 홍옥과 드래곤하트로 유지된다. 그뿐만 아니라 용마성 마족들에게도 약간의 마력을 지원받고 있어서, 유진이 여태껏 보았던 결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손꼽을 수 있는 결계였다.


그런 결계의 안쪽에서도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유진은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살의의 근원을 직시했다. 지금 유진이 서 있는 곳에서는 거리가 상당했지만, 시야를 집중하니 빠르게 날아오는 ‘놈’을 포착할 수 있었다.


처음 본다.


하지만 놈이 누구인지는 포착한 순간, 아니, 살의를 처음 느꼈을 때부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같은 때에 용마성을 습격할 존재는 한 명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난잡한 살의에서 야만스러운 짐승의 기질을 느꼈다.


야곤.


그는 머나먼 지상에서부터 도약했다. 중간에 도움닫기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았고, 하늘을 날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 움직임은 단순한 도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뛰어오른 것이 전부였다.


야곤은 용마성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아뮈 돼지처럼 살이 찌고 정신이 느슨해졌어도, 이 정도까지 살의가 가까워지면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낄 수밖에 없다. 용마성의 수많은 마족들은 놀란 얼굴을 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야곤의 시커먼 눈동자가 저 셀 수 없이 많은 음식들을 보았다. 허나 그를 즐겁게 하는 강렬한 육향과 피 냄새는 나지 않아 아쉬웠다. 허나 마음은 지금부터 벌일 살육과 식사와 전쟁으로 즐거웠다.


이제는 접시를 열어야 할 때다. 높은 하늘에서 야곤이 온몸을 뒤로 젖혔다.


ㅡ뿌드드득! 야곤의 양팔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래 봤자 야곤은 용마성의 크기와 비교하면 작았다. 하지만 야곤을 올려다보는 마족들의 눈에는 야곤이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야곤이 용마성 전체를 한입에 삼킬 것처럼 커 보였다.


야곤이 양 주먹을 결계로 내리찍었다.


ㅡ꽈아아아앙! 충돌한 즉시 용마성 전체가 뒤흔들렸다. 이 강력한 결계는 야곤의 일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투명하던 결계가 탁한 유백색으로 변했고, 야곤의 주먹과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균열이 번져갔다.


“흐.”


야곤은 입술을 씰룩대며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양팔을 치켜들었다.


결계는 이미 박살 났으니, 방금 전처럼 힘을 집중할 필요는 없었다. 이대로 두어도 결계는 무너질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내리찍는 것은, 야곤이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꽈르르릉!


두 주먹이 결계를 무너트렸다. 묵직한 일격이 용마성의 고도를 아래로 낮추었다. 하지만 추락하지는 않는다. 결계는 박살 났어도, 용마성의 중심핵은 아직 건재하기 때문이다.


“미친놈.”


무식하게 쳐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유진이 용마성에 침입한 지 하루 만에 쳐들어올 줄이야. 유진은 경악스럽고 어이가 없었지만, 야곤의 살의와 존재감에 압도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야곤이 저렇게 무식하게 쳐들어와 준 것이 유진이 바라던 일이었다.


ㅡ용마성 전체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떨어져 내린 것은 야곤이었지만, 그렇다고 야곤 혼자서 쳐들어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놈을 따르는 맹수 수인족 용병들과, 카라드 백작의 사병이 용마성의 상공에 나타났다. 그들은 야곤처럼 맨몸으로 이 높이까지 도약할 수 없었기에, 모두가 비행마물을 타고 있었다.


그 마물 중에는 유진이 낯에 익은 마물들도 꽤 많았다. 카라드 백작처럼 보이는 거구의 마족이 손을 번쩍 들었다. 울퉁불퉁한 살덩이를 엉겨 붙인 것만 같은 비행마물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콰르르르! 마물들의 입에서 거멀건 광선이 쏘아졌다. 노리는 지점은 정확했다. 굳게 닫힌 용마성의 성문이 마물들의 포격에 무너져 내렸다.


마물들이 도시로 하강했다. 두령을 닮아 성질머리가 급한 맹수 수인들은 마물의 뒤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이 짧은 사이에 야곤은 도시의 건물 몇 개를 붕괴시켰다. 도망치는, 혹은 덤벼오는, 한심하게도 주저앉아서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그냥, 눈에 보이는 마족들을 전부 찢어발기고 그 살점과 피와 뼈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유진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용마성의 마족이 죄다 죽건 말건 유진이 알 바가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야곤을 막아서거나 죽이기 위해 싸울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당장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용공녀 라이미르아를 확보하는 것이다.


[네, 네네, 네놈!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 용마성…… 나의 성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니냐?]


품 안에서 라이미르아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만약의 사태에 쓰기 위해, 어제 라이미르아에게 쥐여준 통신기에서 전해지는 소리였다.


유진은 통신기를 귀에 끼우고서 내뱉었다.


“어디 있냐?”


[뭐, 뭐…… 뭐라고?]


“어디 있냐고.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라.”


유진의 등 뒤에서 불꽃의 외날개가 치솟았다. 최속으로 가기 위해 프로미넌스까지 펼친 것이다.


[본녀는…… 지금 용마성의 성좌에 있느니라. 이곳이 어디냐면…….]


‘가장 높고 화려한 곳이겠지.’


[우…… 우으으…….]


라이미르아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 우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통신기를 꺼버렸다.


자색 번개가 폐허가 된 성문을 뛰어넘었다.


아곤


라이미르아에게 있어서 오늘은, 완벽하고 아름다우며 역사적인 하루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어젯밤, 라이미르아는 축제를 연상시킬 정도의 화려한 행진으로 용마성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고귀한 자태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오늘은 성주대리로서의 첫 하루를 시작했다. 용마성의 중심, 최상층의 옥좌에 앉아 가신들의 문안 인사를 받았다.


용마성의 업무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사실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무지한 상태로도 저 보고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의례적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라이미르아가 옥좌에 앉아 하는 일이라고는 고개만 끄덕거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도 라이미르아는 즐거움과 뿌듯함을 느꼈다. 사신장 외에 누구도 오지 않던 별궁에서 나와, 성주실의 옥좌에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안 인사를 받고, 보고를 듣고, 식사를 하고, 성내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어제와 같이 꽃가마에 타고 행진을 나갈 예정이었다. 어제도 화려한 행진을 해두기는 했지만, 어쩌면 어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행진을 보지 못한 백성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성주대리. 용공녀 라이미르아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은 앞으로의 용마성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어제보다 더욱 화려하고 요란한 행진을 통해 라이미르아의 이름을 알려야만 했다.


ㅡ그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용마성의 결계가 박살 난 것이다. 카라드 백작이 이끄는 비행마물 부대가 용마성의 성문을 박살 냈고, 야곤을 필두로 한 수인 용병들이 도시에서 날뛰고 있다.


“어, 어, 어찌해야 하는 것이냐?”


라이미르아는 옥좌의 팔걸이를 손으로 꽉 잡고서 어깨를 움츠렸다. 상석에 앉은 그녀에 눈에는 가신들의 혼란과 동요 어린 표정들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이럴 리가……. 이, 이래서는 아니 되는데…….”


사신장 중 외교대신(外交大臣)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 그가 허공에 손을 휘저으니, 용마성과 연동된 시스템이 거리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수많은 건물이 무너졌고, 거리는 엉망이 되었다. 그러한 거리에서 제대로 된 시체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드문드문 뿌려진 피와, 씹다 뱉은 뼛조각 등을 통해 도시의 마족 백성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가 있었다.


“겨, 결계는 어찌 된 것인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재, 재가동까지는 못해도 1시간이 필요하온데…….”


“악적들이 이미 침입하였거늘 재가동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요, 요격 시스템은 없는 것인가?”


“그러한 마법은 존재하지 않사옵니다…….”


“무훈대신! 용마성의 수호는 그대의 역할이잖소? 병사와 마물을 이끌고서 적과 맞서 싸우지 않고 지금 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게요!”


버럭 지르는 일갈이 무훈대신에게 향했다. 같은 사신장이고 그간의 의리가 적잖게 있기는 하였지만,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의리를 지키는 것이 아닌 책임지고 앞장서서 먼저 죽을 누군가였다.


당연히 무훈대신의 얼굴은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300년 전의 그는 사신장 중에서 제일 강했지만, 전장에 나서지 않고 경쟁도 하지 않으며 평화에 찌들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예전의 자신이 대체 어떻게 싸웠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건…… 너무 돌발적인 기습이오. 군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소. 그러니 일단은 성주이신 용공녀님께서 직접 나서셔서 적장을 설득하시는 것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저들은 이미 결계를 박살 내고, 도시에서 학살을 일으키고 있으며, 성문을 무너트렸소!”


너무 몰입하는 것 아닌가? 무훈대신은 어이가 없어 보좌대신을 쳐다보았다.


당초에 합의했던 계획이 저 용공녀와 용마성의 모든 제물을 카리드 백작에게 바치는 것이다. 사신장은 가진 재산을 보장받고서 카리드 백작의 암묵적인 비호를 받으며 헬무드의 휴양지로 떠나기로 했었다.


“재정장관. 이게 대체 어찌 된 거요? 카리드 백작에게는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 하지 않았소?”


“그게…… 나도 잘 모르겠소. 이런 기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하였는데…….”


“우리 목숨이 보장된 것은 확실한 거요?”


외교대신과 재정대신이 작게 낮춘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보다 아랫자리에 앉은 가신들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몸만 덜덜 떨었다.


라이미르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정체 모를 인간 침입자의 말이 모두가 사실이 되어버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침입자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만 했다. 방금 전에도 듣지 않았나.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니…… 대체 언제까지? 무엇을 믿고?


라이미르아는 겁에 질린 눈으로 시스템이 비추는 거리의 풍경을 보았다. 적들은 도시를 무너트리면서 점점 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카리드 백작의 병력도 여전히 비행마물에 타고서 도시에 공중포격을 가하고 있다.


“용공녀님.”


“지금이야말로 성주다운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흑룡공의 혈육답게 명예로운 결단을 내려주소서.”


명예로운 결단? 지금 상황에서 대체 뭐가 명예로운 결단이란 말인가? 너는 앞으로 며칠 뒤에 죽을 거야. 며칠 뒤는 무슨, 그 말을 듣고서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머리가 싹둑 잘려서 용마성의 성문에 걸릴걸. 그 성문은 아까의 포격으로 무너져버렸지만, 라이미르아는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어쩌면 가랑이부터 꿰뚫린 꼬치구이 신세가 되어 성문 앞에 꽂히던가. 그런…… 그런 끔찍한 죽음이 세상에 가능이나 한 것인가? 라이미르아는 괜히 다리를 오므리며 입술을 씹었다.


사지가 뽑힐 수도 있고. 이빨이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다크엘프의 처형법이긴 한데, 무릎을 꿇려놓고 산 채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는…….


“우으…….”


뱃속이 찌르르 울리고 아파왔다. 라이미르아는 씹어대던 입술을 틀어막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드래곤다운 위엄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신장을 비롯한 가신들이 라이미르아를 쳐다보았다.


“보…… 본녀는 용마성의 성주이니라. 그, 그러니 마땅한 책무를 따르도록…… 따를 것이니라.”


라이미르아는 시선들을 의식하고서 급히 표정을 가다듬고 내뱉었다. 물론 그녀는 성주다운 책무를 따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목적은 라이미르아를 데리고 용마성을 탈출, 사마르 대수림까지 데려가는 것이지, 성주의 책무 같은 뭣 같은 일에 뒈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난입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프로미넌스까지 발동하고서 펼친 뇌광은, 이그니션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속이다.


성의 가신들 전원이 유진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어느새 유진은 그들의 시야 속, 라이미르아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앗.”


라이미르아도 유진이 바로 눈앞에 오고서야 그 존재를 알아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감과 공포를 느끼며 훌쩍거렸지만, 라이미르아의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전되었다. 그녀는 옥좌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멍한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가신들을 향해 소매를 떨치며 손바닥을 활짝 폈다.


“아하핫! 용마성의 허접 가신들이여! 본녀는 너희 돼지들과 함께 죽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느니라! 당연! 본녀의 존귀한 목숨을 너희 허접 쪼다들을 위해 내놓지도 않을 것이니라!”


“서, 성주님?”


“본녀를 구속하던 저주받은 성이여! 본녀를 이용하던, 사신장이라 자처하던 버러지 돼지들이여! 함께 추락해 토양의 일부나 되거라! 아하하! 아하하핫!”


라이미르아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폴짝 뛰어 유진의 팔에 매달렸다. 유진은 갑자기 친한 척 매달리는 라이미르아가 어이가 없어서, 그녀가 매달렸던 팔을 크게 흔들어 아래로 떨어트려 버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라이미르아는 초점이 뒤흔들리는 눈동자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그새 마음이 바뀌어 버린 것인가? 그냥 죽게 내버려 두고 혼자 가버릴 셈인 건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라이미르아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과 절망이 교차했다.


“일어나.”


그 눈동자에 안쓰러움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냥 팔에 매달고서 가기 싫었을 뿐.


유진은 라이미르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만으로도 라이미르아의 눈동자에는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진의 손을 붙잡았다.


“서, 성주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신장들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유진과 라이미르아에게 달려들었다.


ㅡ화악! 프로미넌스가 유진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사신장들은 유진이 그린 원을 돌파하지 못했다. 강렬한 마나가 만들어낸 불꽃과 열풍이 사신장을 뒤로 밀어냈다. 그 틈에 유진은 라이미르아를 잡아끌었다.


용마성의 가신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옥좌를 쳐다보았다. 열풍은 아직 잔류했으나 침입자와 용공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추격을…….”


“잠깐, 잠깐! 둘은 내버려 두고, 우리는 카라드 백작에게 가도록 합시다.”


외교대신이 양팔을 번쩍 들며 말했다.


방금 침입자의 솜씨를 보건대, 늙고 살찐 자신들이 덤벼봐야 용공녀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 괜한 짓은 하지 말고, 차라리 카라드 백작에게 용공녀의 납치를 알리고 권익을 보호해 달라 청하는 것이 낫다 싶었다.


“과연 그것참 명안이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열렬히 용공녀에게 충성하는 척했던 보좌대신마저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뭐들 그리 보는가? 자네들도 살고 싶다면 당장 도망치는 것이 좋을 걸세!”


다른 가신들이 원망 어린 눈으로 쳐다보자, 무훈대신은 얼굴도 붉히지 않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들 사신장에게 있어서 다른 가신들과 백성들의 목숨은 알 바가 아니었다.


“꺄ㅡ”


몸이 홱, 당겨졌다. 인간이라면 버티지 못할 가속이다. 사실 인간이 아니어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헤츨링인 라이미르아조차도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플 정도였다.


“악…….”


입 열고 내뱉던 짧은 비명이 끝났을 때. 라이미르아와 유진은 이미 성주실에서 한참 떨어진 복도에 있었다. 라이미르아는 벌렸던 입술을 닫고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어어…….”


“지하로 간다.”


유진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앞장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떨어져 있었다. 라이미르아는 너무 강하게 당겨져 뻐근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유진의 뒤를 따라갔다.


“네…… 네놈, 왜 이리도 늦게 온 것이냐? 조금만 더 늦었다면 본녀는, 저 돼지들에게 떠밀려 제물이 되었을 것이니라.”


대답할 가치도 없는 칭얼거림. 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라이미르아는 유진의 뒤를 졸졸 따르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대책 없고 무신경한 행동에 본녀가 겁을…… 겁을 먹어버렸단 말이니라! 용공녀인, 드래곤인 본녀가 말이니라. 이 무슨 수치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네, 네놈! 당장 본녀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노려본 시선에 라이미르아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한 줄기 식은땀을 흘리면서 비굴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었다.


“……중심핵은 용마성의 밑바닥에 있느니라. 본녀가 직접 안내를 해주겠노라.”


“그럴 필요 없으니까 따라나 와.”


최고속으로 날아오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성내에 진입한 순간부터 유진은 프로미넌스의 깃털을 곳곳에 뿌려놓았다. 용마성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지만, 떠도는 깃털 덕에 평생을 이 성에 산 것처럼 길이 익숙했다.


유진 혼자라면 깃털의 위치로 도약할 수도 있겠지만, 라이미르아를 데리고서 도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진은 직접 움직이며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용마성의 중심핵은 특별히 숨겨져 있지는 않다. 용마성의 시스템과 직접 연결된 것이니 만약의 사태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를 체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거대한 성ㅡ 땅덩어리를 지탱하는 것이라서인지 굉장히 깊은 곳에 있었다. 평범히 걸어 내려왔다면 오랫동안 계단을 내려와야 했을 것이다.


유진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대뜸 라이미르아의 손목을 붙들더니, 까마득한 계단의 아래로 냅다 뛰어버렸다.


“아아아아악!”


유진은 가속했고, 라이미르아의 몸은 허공에서 위아래로 흔들렸다.


꽈당탕! 지하 밑바닥에 도착했을 때. 유진은 무자비하게도 라이미르아의 손목을 놓아버렸다. 라이미르아의 몸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팔! 본녀의 팔이!”


부러지지도, 뽑히지도, 끊어지지도 않았다. 폴리모프한 몸이라고 해도 그녀의 피부와 살과 근육과 뼈는 드래곤의 것이다. 다만, 부러지고 뽑히고 끊어진 것이 상상될 만큼 아팠다.


“내가 이런 말은 진짜 안 하려고 했는데, 꼬맹아. 너 진짜 드래곤 맞냐?”


“본녀의 피를 의심하는 것이니냐? 본녀는 흑룡공의 유일한 혈육인 용공녀…….”


“그러니까, 그 잘난 드래곤이 왜 그따구냐고. 위엄도 없고 엄살도 심하고…….”


유진의 투덜거림에 라이미르아의 입꼬리가 아래로 쭈욱 내려갔다. 그녀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욱신거리는 손목만 말없이 주물렀다.


“유진 님이 너무하셨어요.”


슬쩍 고개를 내민 메르가 재잘거렸다.


“내가 뭘 너무해?”


“쟤는 저와 달리 창조주의 사랑도 교육도 받은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렇게 멍청하고 품위가 없는 거예요. 엄살도 심한 거구요.”


“이 생쥐처럼 조그마한 것아, 지금 너 따위가 흑룡공의 혈육이자 마법의 조종인 본녀를 희롱하는 것이냐?”


“흑룡공의 혈육이 뭐가 자랑이라고. 그 정신머리 나간 블랙드래곤의 딸이라서 차암 좋겠어요. 씨암탉 노릇을 하다가 잡아먹히는 게 뭐 그리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니냐?”


라이미르아가 메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치한 말싸움이라 무시하려 했지만, 유진은 굳이 고개를 돌려 메르를 흘겨보았다.


“죄송해요.”


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유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눈앞에 있는 용마성의 중심핵을 응시했다.


그것은 거대한 황금의 구체였다. 불순물이 거의 없는 순도 높은 황금. 그러한 황금으로 이뤄진, 저택만큼 커다라면서 매끄러운 구체.


“미친놈.”


황금은 마나의 전도율이 높은 금속이지만, 오리할콘이나 미스릴에 비하면 효율이 그리 좋지 않은 데다 무기나 방어구에 써먹기엔 너무 무르다.


하지만 라이자키아에게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예부터 드래곤은 누렇고 번쩍이는 황금을 좋아했고, 라시자키아는 특히나 과시욕이 강하던 드래곤이다.


그리고 놈의 휘하에는 일개 부족에 달하는 드워프가 있다. 유진은 눈앞의 매끄러운 구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라이자키아는 드워프 몇을 본보기로 잡아먹었을 것이고, 드워프들은 죽고 싶지 않아 요구를 들었을 것이다. 라이자키아의 마법을 훌륭하게 담아낼, 모난 곳 하나 없이 완벽한 황금의 구체. 그것에 라이자키아가 짜낸 술식을 촘촘히 새겼다.


유진은 중심핵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한 명의 마법사로서 경외마저 드는 마법체. 그대로 아롯에 들고 간다면 아크리온의 높은 층에 안치할 수 있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저기이…….”


어느새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말다툼은 끝났다. 라이미르아는 머뭇거리며 유진의 등에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것이니냐?”


쿵…… 쿵. 까마득하게 높은 지상에서의 진동이 지하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먼 도시에서의 전투가 점점 용마성까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중심핵을 부수지 않는 한 본녀는 용마성에서 나갈 수가 없느니라……. 다, 당장에라도 중심핵을 부수고 용마성에서 탈출해야 하느니라.”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중심핵을 빤히 쳐다보았다.


쿠우웅……! 묵직한 진동에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우우우우……! 몸속의, 혈관의 피가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라이미르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떨었다.


“저기…… 이름 모를 침입자여. 보, 본녀는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느니라. 왜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이니냐……? 서, 설마……. 중심핵을 부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니냐? 그래서 보보보, 본녀를 버리고 너 혼자 도망치려는 것이니냐?”


부술 수 없냐고? 아니, 부술 수 있다.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마법체지만, 월광검으로 부수지 못할 것은 아니다.


당장 부수지 않고 있는 것은, 유진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진 님.”


유진의 마음을 읽은 메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중에 혼날 것은 둘째 치고서, 그래도 되는 거예요?”


“누아르 제벨라는 날 당장 죽이지 않을 거다. 오히려 내가 누군지 알면 죽을 만큼 좋아하면서, 나중을 위해 당장의 편의를 봐주려 들 거다.”


말투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메르는 지금의 유진이 ‘유진 라이언하트’보다는 ‘하멜 다이너스’, ‘우둔한 하멜’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았다.


메르에게 지금의 유진을 설득할 재주는 없었다.


“잠깐 봤을 뿐이지만 야곤은 꽤 위험한 새끼더라.”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ㅡ화아아악! 은밀히 감추었던 마나가 자색의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그러니 오늘 죽이고 간다.”


아곤


용마성에서 껄끄러운 기운을 감지했다. 흥미가 조금 돋았지만, 당장 뛰어가지는 않았다. 야곤은 그 기운이 헤츨링일 것이라 생각했다.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드래곤은 ‘피어’라는 독특하면서 위압적인 기운을 내뿜는다고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저 껄끄러운 기운이 드래곤 피어가 아닐까. 야곤은 지레짐작하면서도, 당장 용마성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곳까지 가는 길에도 여러 즐거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발악하거나 도망치거나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거나 하는 사냥감들을 죽이고서 나아가는 것. 야곤은 그들을 하나하나 의식해 주면서 살육을 즐겼다. 죽인 마족이 모두 다 다르듯,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맛도 달랐다. 야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고,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말랐다.


도망치지만 않으면.


아니, 도망치는 것을 쫓는 것도 각별한 재미라고 생각했다.


용공녀 라이미르아. 블랙드래곤 라이자키아의 혈육. 200년 남짓한 헤츨링이라니 싸움의 즐거움은 느끼지 못할 터. 그렇다면 사냥의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차라리 도망치게 두는 것이 사냥의 즐거움을 배가시키지 않을까 싶었다.


느긋하게 걷던 걸음이 우뚝 멎은 것은.


용마성에서 발해지던 기운이 돌변했기 때문이다. 엷게나마 느꼈을 때는 드래곤피어겠지 싶었는데, 강렬해지니 그런 생각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건 드래곤피어 같은 것이 아니다. 보다 순수하고 단순한 살의와 투기. 대체 누가? 200살 남짓의 헤츨링. 심지어 그 시간 동안 외부에 노출된 적 없이, 성에 갇혀 지낸 헤츨링이 이만큼이나 제련된 살의와 투기를 내뿜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흑룡공의 최측근이었다는 사신장? 200년 지속된 평화에서 살만 뒤룩뒤룩 찐 돼지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과거 전쟁시대에 이름을 떨치던 관록이 아주 무뎌지지는 않았다는 걸까.


‘아니.’


야곤은 성큼성큼 용마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럴 때마다 야곤의 몸은 앞으로 쭉쭉 나아갔고, 발걸음은 대지에 지진을 일으켰다.


‘마족이 아니다.’


상대가 마족이라면, 내비치는 살의와 투기에 특유의 마력과 기질이 섞일 수밖에 없다. 마족들은 그런 식으로 서로의 격을 주장하며, 직접 부딪치기 전에 상대를 굴복시킨다. 야곤을 이만큼이나 흥분시키는 살의와 투기라면, 그만한 격의 마력이 함께 실렸어야 한다.


하지만 야곤은 이 강렬한 살의와 투기에게서 조금의 마력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야곤에게는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토록 거대하고 강하면서, 이만큼이나 순수할 수 있단 말인가? 마족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상대는 마족이 아니라는.


“머, 멈추시오!”


야곤의 즐거운 고민이 뚝 멎어버렸다. 진즉에 무너진 성문 너머. 성으로 통하는 길에 가신들이 직접 나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성에는 새하얀 깃발들이 올라가고 있다.


상층의 난간에 나온 4명의 마족이 보였다.


“요, 용마성은 이번 침공에 대해 무조건 항복하도록 하겠소. 그 말인즉슨, 용마성의 모든 것이 승자인 카라드 백작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오.”


재정대신은 ‘소유물’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마족 간의 결투에서 승자는 패자의 것을 빼앗는다. 이 결투는 일대일로 서로의 서열을 내건 서열잡이가 아니다. 영지와 영지를 충돌시키는 영지전이다.


무조건 항복은 선언했다.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피력하면서, 성의 모든 것이 카라드 백작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강조했다. 저 수인은 카라드 백작 본인도 아니고, 휘하의 사병도 아닌 것 같다. 즉, 포로이자 소유물이 된 용마성 마족의 처우를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입장이란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의 내용과 결말에 대해 일찍이 카라드 백작과 논의를 나누었소. 그…… 리고…… 지금 그대가 정말 급하게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소.”


“성주대리…… 용공녀가 성에서 도주하였소. 그, 그 일은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불상사요. 간사한 용공녀는 우리 가신들 몰래 외부의 협력자를 구해, 탈출을 준비하고 실행한 것이오.”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요. 그러니 지금 당장…….”


앞다투어 떠드는 목소리. 야곤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는 더 듣지 않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ㅡ뻐어엉! 앞으로 뛰쳐나갔을 뿐이다. 그것뿐인데도 야곤에게서 발해진 충격파는, 무릎 꿇고 있던 가신들을 물풍선처럼 펑 터트렸다.


“자, 잠깐…….”


기겁한 사신장이 뒤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치겠다고 판단한 것보다, 야곤이 그들을 죽여 버리겠다 마음먹은 것이 훨씬 더 빨랐다.


결국 사신장은 야곤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 그들은 먼저 죽은 가신들과 마찬가지로, 변변찮은 저항이나 비명도 내뱉지 못하고 온몸이 터져서 죽었다.


쿠르르릉!


야곤이 난간을 지나 지붕 위에 오르니, 커다랗던 성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야곤의 몸은 삐걱거리고 흔들리는 지붕 위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점점 낮아지는 지붕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건물 뒤편의 후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을까.


한 남자가 야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야곤은 그것이 위장임을 간파했다.


유진도 여기까지 와서 더 이상 이런 마법은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오늘 여기서 유진을 본 놈은 모두 다 죽을 것이다.


툭, 툭. 손으로 머리카락을 몇 번 털자, 검은 머리카락이 본래의 색깔인 잿빛으로 돌아왔다. 유진은 금색으로 변한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야곤을 보았다.


오보론의 아들.


멀리서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닮은 점이 많기는 했다. 곰과 인간이 뒤섞인 모습이나, 철침처럼 뻣뻣하고 날카로운 회갈색의 털.


모습만 닮았다고 생각했다. 오보론도 이름의 앞에 패악(悖惡)이란 단어가 붙을 만큼 난폭한 놈이었지만, 지금 야곤이 내뿜는 살의와 비교하자면 오보론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녀석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야곤이 고개를 삐걱,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잿빛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 300년을 이어온 혈통에서 결코 변하지 않은 특징. 대륙에는 수많은 가문이 존재하지만, 저토록 강렬한 특징을 가진 가문은 하나밖에 없다. 끝자락의 방계일지라도 잿빛 머리와 금색 눈동자를 타고날 정도다.


키옐의 라이언하트.


“바랑이 누군지 아냐?”


라이미르아는 중심핵이 있는 지하에 내버려 두었고, 미리 뿌려놓은 프로미넌스의 깃털로 도약했다.


지금 유진은 혼자였다.


“몇 년 만에 듣는 이름이군.”


야곤이 중얼거렸다. 몇 년 전에 소식이 끊겼다. 야곤이 바랑이라는 이름에서 떠올리는 것은 그게 전부. 다른 감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새끼가 네가 자기랑 의형제라더라.”


“그랬지.”


야곤에게 있어서 의형제는 소중하다 할 인연이 아니다. 친부를 직접 물어 죽였는데,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의형제 관계가 소중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에게 있어서 의형제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자에 대한 나름의 인정일 뿐이었다.


“바랑이 그를 자랑스러워했나?”


언젠가부터 야곤은 다른 이들을 형제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버지로 여겨지지 않던 때와 비슷하게, 야곤은 의형제라는 감각을 저버렸다. 아버지. 광란의 자식이라 일컬어지던 패악의 오보론.


한때는 존경했다. 허나 야곤에게 있어서 존경은 자신보다 강한 자에 대한 예우였을 뿐이다.


오보론은 늙고, 야곤은 젊었다. 제 이빨과 발톱이 아버지의 목덜미에 닿겠다 싶었을 때, 야곤은 더 이상 아버지를 존경해 주지 않았다.


의형제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손톱과 발톱이 생각했던 것만큼 날카롭게 자라지 않으니, 관심조차 가지 않게 되었다.


바랑? 그래, 그는 한때 야곤의 의형제였다. 점점 떠오르는 것들이 늘었다. 바랑은 형제들 중에서 제일 오래 살았고, 곁에 서겠다며 발악하곤 했다.


그것뿐이었다.


“별로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지. 어쨌든, 실제로 너와 의형제가 맞았다니 신기하네.”


“무엇이?”


“나는 그 새끼가 뒈지기 싫어서 네 이름을 판 줄 알았거든.”


유진은 씩 웃으며 말했지만, 야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유진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끝났나.”


“말은 끝났지.”


짧은 대화가 오갔다. 툭. 유진은 코트자락을 한번 털었다.


그간 억지로 입고 다녔지만, 별로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의 모습으로 바꿨다. 깔끔한 검은 코트가 어깨에 풍성한 털을 단 흑암의 망토로 바뀌었다.


코트가 망토로 바뀌는 것은 찰나(刹那).


그 순간에 야곤은 이미 유진의 머리에 손을 내리찍고 있었다.


야곤은 사냥에서 사냥감에 대한 배려 따위는 하지 않는다. 본래는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주었다. 배려 삼아 기다려주었다. 짧게나마 대화도 나누어주었다. 이번 사냥ㅡ 아니, 전투가 즐거울 것을 직감했다. 그러니 할 필요 없던 것들마저 기꺼이 해줄 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다. 용공녀의 협력자가 유진 라이언하트인가? 데리고 갔다는 용공녀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런 의문은 카라드 백작이 가져야 할 일이다. 야곤은 그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야곤이 가질 의문은.


유진 라이언하트가 방금 어떻게 벗어난 것인가.


분명히 아래에 있었다. 손바닥을 내리찍을 때까지만 해도 유진 라이언하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벗어날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오만은 주장하지 않는다.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움직임이 이상했다. 야곤은 ‘어떻게’ 자신의 등 뒤에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꽈아앙!


손끝에서 터트린 흑점이 야곤을 집어삼켰다. 번쩍 터진 빛이 시야를 하얗게 불태웠다. 그리고 일점으로 모여 검게 깜빡였다. 유진은 거대한 마나의 폭풍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야곤의 털은 그슬린 자국조차 없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300년 전의 오보론. 지금의 모론만큼은 아니지만, 과거의 모론만큼은 단단하던 놈이다. 당연히 야곤도 그 정도로 단단할 것이다.


프로미넌스가 위로 치솟았다.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 무수히 많은 깃털이 탄생했다. 화아악! 날개 아래에서 터진 불빛이 유진의 몸을 가속시켰다.


야곤이 손을 뻗었다. 우락부락한 손에서 구부러진 손톱이 튀어나왔다. 그 손톱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망토의 안쪽에서 무기를 뽑았다. 즐겨 쓰던 검은 뽑지 않았다.


분쇄추 지골라스. 흑사자성에서 손에 넣은 살육의 마왕의 무구. 이것 또한 마창처럼 유진의 키보다 큰 무구다. 인간보다 덩치가 크던 마족, 마왕의 무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분쇄추를 한 손으로 잡았다. 무겁기는 하지만 유진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있다. 그럼 아무래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지만, 분쇄추는 굳이 양손으로 잡아 더 세게 휘두르는 무구가 아니다.


공간좌표에 창날을 찔러넣던 마창에 비하자면 분쇄추의 권능은 굉장히 간단하다.


망치로 때린 것을 부순다.


망치로 때린 것을 폭발시킨다.


꽝!


야곤의 팔이 뒤로 날아갔다. 날아간 것은 팔뿐이다. 야곤은 오히려 발을 뻗고 몸을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반대편 손을 뻗어 유진을 붙잡으려 했다.


잡히려는 순간. 유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또다. 하지만 뻗었던 손이 허무해지지는 않았다. 유진은 사라졌지만, 그가 있던 자리에 막 부풀기 시작한 흑점은 남았다.


Comments

Popular posts from this blog

ACER ASPIRE 3 Laptop GTA V Game Test

Acer Aspire 3  Grand Theft Auto V   game test and Review My Acer Aspire 3 Laptop Specification RAM :-   4gb ddr4 usable ram 3.5gb CPU:-     Ryzen 5 2500u mobile GPU:-  Radeon Vega 8 mobile 512 Mb OS:-      Window 10 Usable ram   (1.2-1.5)GB around 2gb take window from ram  Grand Theft Auto v system requirements Minimum RAM:- 4gb ddr4 CPU:- Intel Core 2 Quad CPU Q6600 @ 2.40GHz (4 CPUs) / AMD Phenom 9850 Quad-Core Processor (4 CPUs) @ 2.5GHz GPU:-   NVIDIA 9800 GT 1GB / AMD HD 4870 1GB  OS:-     window 8/8.1/7 64 bit Recommended  RAM: =   8gb ddr4 CPU:=  Intel Core i5 3470 @ 3.2GHZ (4 CPUs) / AMD X8 FX-8350 @ 4GHZ (8 CPUs)  GPU:= NVIDIA GTX 660 2GB / AMD HD7870 2GBon  OS:=   window 8/8.1/7/10 64 bit   Review:- I played Grand Theft Auto V game on my laptop, I found this game, you will know by this post my laptop model no. Acer Aspire 3 A315-41-R95S First of a...
    chapter 237 Lee Mer stood up calmly and brushed the dust off his clothes. kneeling down on one of his knees, he hit the ground with his fist and bowed his head. "Gwangpung Danju, I obey the lord's order." it is unimaginable that he was beaten while playing a prank.   The wave formed concentric circles and covered reality. There was a seriousness in the green eyes, were always playful, but Glenn and Do-goe were not at all surprised. As if he was originally such a person, he accepted it naturally,  "The mission hasn't been finalized yet." "Hey, you should have said that sooner! I don't want to strain my     eyes!"  Lee Mer sighed heavily and stood up he mumbled that it was a loss and scratched her head. "um......." Glenn frowned and flicked his fingers holding the armrest. He seemed to be wondering whether or not to strike a thunderbolt.  ...

Ch2

 살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진이 17살이란 나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숙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나이다운 어설픔은 있는 것 같다.  “...유진님. 무도에 쓰이는 마나운용과 마법의 마나운용은 그 궤가 달라요. 저는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을 모르지만, 혹시 그 마나운용법에 영창과 술식이란 개념이 있나요?” “없어요.” “그렇다면 라이언하트의 마나운용법으로 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해요. 마법을 일으킬 마나는 끌어낼 수 있겠지만, 술식으로 마법의 형태를 잡고 영창으로 구동하지 않는다면 마법은 현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험해 보려고요.” 유진은 헤라의 조언을 달게 받았다.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말 될까? 할 수 있을까. 그를 파악하기 위해 도서관의 입문 마도서를 죄다 읽은 것이다.  “별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으음... 일단은 해보세요. 다만, 마나의 흐름이 위험하다면 즉시 개입할 겁니다. 유진님이 부상이라도 입으시면 저는 물론이고 탑주님의 입장도 난처해질 거예요.” “네.”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문 앞에 섰다. 마탑의 깊은 지하에는 수많은 연구동들이 있다. 유진은 한 달 동안 사용해 온 연구동의 문을 열었다. 안은 제법 넓다. 지하에 이 정도 크기의 연구동이 수십 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고등한 공간왜곡 마법 덕분이다. 놀람은 첫날에 많이 느꼈으니, 유진은 태연히 연구동의 중앙에 섰다.  “할게요.” “네.” 헤라는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슬며시 자기 지팡이를 소환해 양손으로 쥐었다. 만약의 사태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유진은 평온했다.  ‘백염식과 비슷해.’ 세냐의 마법이라기에 유진도 당연히 관심을 가졌다. 서클. 방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백염식은 심장의 별로 마나를 다스린다.  서클은 고리로 마나를 다스린다.  백염식은 경지가 오를 때마다 별이 분열한다. 서클은 경지에...

Ch20

  더는, 유진 일행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유폐의 마왕이 ‘다음’을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세상에 희망을 걸 때. “……하하.” 드디어 뜻대로 웃음이 나왔다. 유폐의 마왕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에 대한 시험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유진과 동료들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비록 이렇게 된 것이 유폐의 마왕이 상정하지 못한 변수, 발자크 루드베스의 배신과…… 누아르 제벨라의 잔재의 도움이 있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변수를 사랑한다. 그가 보내온 억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변수를. 멸망으로 수렴할 뿐인 운명을 흔드는 변수를 사랑한다. 변수는 유폐의 마왕에게 치명적일수록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지금의 시대는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마왕에 맞서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충천해 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절망하지 않고, 반항 의지를 박탈할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꿋꿋이 나아갔다. 몇 번이나 권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힘을 보여주며 절망을 강요했다. 포기할 것을,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 영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도 말해주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죽음이 두려워 망설이거나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다. 바라던 절망을 줄 수 없다. 힘을 확인했다. 저들은 기어코 베르무트마저 구하고 말겠다는 욕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끝을 내도 좋지 않은가. “폐하!” 엎드린 유폐의 마왕에게 마족들이 다가왔다. 판데모니엄에 잔류한 마군의 후발대다. 그 목소리와 발걸음에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유폐의 마왕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전쟁 승리 후 대륙을 무차별로 폭격하기 위해 개조한 전투 요새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유폐의 마왕을 추락시킨 공격이 판데모니엄을 휩쓸어버리기도 ...

Ch11

 “헛소리 말고 가서 자라.” “이익…… 본녀가 친히 널 걱정해주는 것인데……!” “네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잖아.” “보, 본녀가 왜 무서워한다는 거냐? 본녀가 흑룡공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다. 구, 굳이 무서운 것을 꼽자면…… 그…… 흑룡공이 널 한입에 잡아먹는 것이 무섭구나.” 악몽에 대한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산 채로 무언가에게 삼켜지는 악몽. 라이미르아는 떨리는 몸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음…… 만약…… 만약에 말이니라. 흑룡공이 널 꿀꺽 삼키려 한다면, 본녀가 용기를 내서…… 음…… 흑룡공에게 널 삼키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겠노라.” “이상한 말 하네 또.” “계속 들어라……! 그러니까, 음, 흑룡공을 죽이려 드는 네가 죽지 않게끔, 이 용공녀가 직접 간청하겠단 말이니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너를 본녀의 시종으로나마 목숨을 부지하게끔 해줄 것이니라.” 평소라면 라이미르아의 헛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고 홍옥을 한 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라이미르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과,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만약에 말이니라. 보, 본녀가…… 무언가에게 삼켜지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널 그 무언가의 아가리에서 끄집어 내주마.”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로서는 그 무언가가 대체 무언지를 모르겠지만.” “보…… 본녀도 그런 것은 모른다.” “네가 와작와작 씹혀서 죽으면 어떡하고?” “끔찍한 말은 하지 말거라!” 라이미르아가 빽 고함을 질렀다. “어쨌든, 이건 너와 본녀의 약속이니라. 알겠느냐?” “그래, 그래.” 별것 아닌 대답이지만 라이미르아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라이미르아가 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자, 유진의 망토 틈 사이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메르와 눈이 마주쳤다. “흠. 저렇게 부르니 거절할 수가 없느니라.” 라이미르아는 총총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망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악!” 들어간 즉시 망토 사이에서 라이미르아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 건방진 애새끼. 네가...

Ch1

 프롤로그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쪽팔려 미칠 것 같은 일이지만. 나는 정말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그렇게 착각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남들보다 실력이 느는 것도 빨랐다. 하지만 쉬운 것은 처음까지. 처음에는 남들보다 빠르게 늘었어도, 도중부터는 남들처럼 늘어져 버린다.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럴 수도 있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잖아.  나는 할 수 있어. 천재니까. 결국에는 알고 싶지 않던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철부지의 우스운 착각을 깨부숴준 것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천재와 만난 덕분이었다. 자기 자신이 천재라고 착각하던 우물 안 개구리. 내가 나의 작은 우물 안에서 우월감에 취했을 때. 진짜 천재는 이미 넓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천재가 싫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남도 당연히 할 수 있단 듯이 지껄이는 얘기를 듣다보면 살의가 치솟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건, 지보다 못난 놈을 무시하려 뻗대는 것이건.  여하튼, 들으면 좆같은 기분이 든다. ‘질투하는 건가?’ 질투는 씨발아. 네가 말을 좆같이 했잖아. 그래서 나도 좆같이 굴었는데 뭔 놈의 질투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냥... 네가 안타까워서.’ 안타까워? 뭐가?  ‘조금 더 노력하면...’ 네가 뭘 안다고 노력 운운하는 거냐.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야, 나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네 기준이 존나게 높은 거야. 어떻게 모든 사람이 너처럼 할 수 있겠냐? 네가 천재라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너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알겠냐?  난 너처럼은 못해. * “꺼져.”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가슴에 뚫린 구멍. 그 귀한 엘릭서를 들이 ...

Ch13

 오르투스의 위치를 특정했다. 거기서부터는 모든 것이 간단했다. 일행은 관측병과 경계병의 눈을 속이고서 오르투스가 있는 방의 문 앞에 도착했다. 셋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문을 열었다. 오르투스 하이만. 그는 집무용 책상 너머에 앉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손에 쥔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적고 있던 모양이다. “음?” 예고 없이 문이 열린 것이다. 오르투스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3명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3명. 누구인지는 안다. 카르멘 라이언하트. 다른 배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이곳에? 아니, 무언가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예고는커녕 노크조차 하지 않고 들어온 이유는 대체? 문을 닫는 남자…… 도 알고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 잠깐, 유진 라이언하트? 키옐에 있다던 그가 왜 이곳에, 카르멘과 함께 있는 것인가? 사흘 전에 승선한 라이언하트는 3명뿐.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 그 외에 3명의 몸종이 더 있기는 했지만 그중에 남자는 없었다. 그리고…… 저 여자는 누구지? 평범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보라색 머리카락. 방긋방긋 웃고 있는 녹색 눈동자. 손에 든 마법지팡이…… 마법사? 현명한 세냐? “대체 무슨……?” 여전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키옐에 있을 유진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가 이곳에 있는 것. 그리고 카르멘이 저들을 데리고서, 이 늦은 밤에 말도 없이 찾아온 것. ㅡ잠깐. 말도 없이 찾아왔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이 배, 라베르시아는 마법결계가 씌워져 있다. 결계에 누군가가 접촉한다면, 무조건 오르투스와 마이스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다.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결계가 돌파되었다. 그로도 모자라서, 방문 앞에 올 때까지. 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저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었다 한들, 저만한 존재감을 ...